사라진 송산리 29호분, 일인 교사 '도굴’ 88년 만에 발굴하는 이유
왜 하필 29호분일까.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웅진 백제 시기(475~538년) 왕릉의 구조와 상장례를 규명한다면서 첫번째로 지목해서 발굴 조사하는 고분이 바로 송산리 29호분이다.
송산리 고분군(사적 13호)은 웅진백제 시기 조성된 왕릉묘역이다. 그때의 임금이라면 문주왕(재위 475~477)-삼근왕(477~479)-동성왕(479~501)-무령왕(501~523)-성왕(523~554, 538년 사비로 천도) 등 5명이다. 일제강점기 자료를 종합하면 송산리에 29기 이상의 고분이 존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29호분의 정체
2019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표조사와 지하물리탐사 등의 첨단기법으로 분석해보니 자그만치 40여기의 백제고분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결과를 얻어냈다.
현재는 주인공이 밝혀진 무령왕릉을 포함해서 7기가 정비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발굴했다는 기록이 분명 있는 데도 정비되지 않고, 심지어 20여년전까지도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지도 못했던 고분이 1기 있다. 그것이 바로 29호분이다.
1933년 이 고분을 정식으로 조사했던 당시 조선총독부 고적조사 촉탁이던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1911~2011)가 2002년 발굴 69년 만에 보고서를 펴내면서 비로소 정확한 위치를 표시했다.
그 전까지도 연구자들도 29호분이 송산리 고분 중에서도 핵심인 무령왕릉과 5·6호분과 인접한 곳에 존재하겠거니 하는 ‘대략 추정’만 했을 뿐이었다. 이 고분이 학술적으로 중요한 이유가 있다.
■‘갱위강국’의 증거
일제강점기(1933년)와 1971년 조사된 6호분과 무령왕릉은 중국 양나라의 축조방식을 응용한 ‘벽돌무덤’이고, 5호분은 백제식의 전형적인 ‘돌방무덤’이다. 그런데 29호분의 경우 벽은 사암과 화강암을 벽돌 형태로 깎아 쌓아올렸고, 바닥은 전돌(벽돌)로 빽빽하게 깔아놓았다.
이른바 벽돌무덤(전축분)과 돌방무덤(석실분)을 절충한 일종의 ‘하이브리드 고분’이다. 특히 돌로 두른 벽도 벽돌 형태로 깎아 쌓았다는 것 또한 이채롭다. 어떤 해석이 가능한가.
475년 웅진 천도 후 완전한 중국식 벽돌 무덤으로 치장한(523년) 무령왕 이전의 임금과 관련된 고분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무덤 전체를 벽돌로 쌓기 전의 단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황토가 많은 중국의 경우 벽돌을 다량 제작할 수 있지만 한반도에서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성이든, 무덤이든 돌로 쌓는 전통이 이어졌다. 고조선 때부터 석성은 난공불락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고분의 경우도 돌무지 무덤(적석총)의 전통을 이어받은 돌방무덤(석실분) 등을 기본컨셉트로 삼았다.
그런데 475년(개로왕 21년) 고구려의 침략으로 한성을 잃고 웅진(공주)로 천도하면서 급락했던 국력을 다시 가다듬은 백제는 521년(무령왕 21년)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가 고구려를 격파하고 다시 강국이 됐다(累破高句麗 更爲强國)”(<수서>)을 선언한다. 2년 뒤인 523년 무령왕이 서거하자 국교를 수립한 양나라의 무덤조성양식인 벽돌무덤(전축분)을 조성하여 ‘다시 강국이 되었다’는 ‘갱위강국(更爲强國)’의 위세를 과시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5호(돌방)와 29호분(돌방+벽돌), 6호(벽돌)·무령왕릉(벽돌) 등의 주인공은 무령왕과 그 앞 뒤의 임금일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웅진백제 시기 왕릉의 구조와 상장례를 규명하는데 첫손으로 꼽은 것이다.
■공주고보 교사가 활개친 공주 일대 고분
그렇게 의미심장한 송산리 29분이 왜 70년 가까이 잊혀진 존재였을까.
국립중앙박물관에 일부 등록되어 있는 29호분 유물카드를 보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예컨대 ‘소화8년(1933년) 공주 송산리 철정’ 유물카드에 ‘경부자은(輕部慈恩) 등 1의 사굴(私掘)’이라고 적혀있다.
‘경부지은’은 일제강점기 공주고보 일본어 교사였던 가루베 지온(1897~1970)을 지칭한다. ‘사굴’은 말 그대로 ‘개인(私)이 당국의 허락없이 고분 등을 팠다(掘)’는 뜻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고등학교 교사인 가루베 지온이 송산리 29호분을 무단으로 파헤쳤다’는 것이다. ‘도굴’이나 다름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1927년 공주고보 교사로 부임한 가루베는 공주 일대의 백제 유적을 미친듯이 답사했다. 부여와 함께 백제의 도읍지였던 공주는 그때만 해도 일제의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가루베가 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웅진백제는 아마추어인 가루베의 ‘블루오션’이었던 것이다.
가루베는 “1927~32년 사이 내가 실견한 백제고분이 1000기에 이르며 그 중 송산리 고분을 비롯한 중요 자료 100여기(182기)는 실측조사했다”고 떠벌렸다. 가루베가 천정의 구조에 주목해서 분류한 백제고분은 무려 738기에 이른다고 했다. 이를 두고 조선총독부 소속 전문학자들조차 “연구 목적의 미명 아래 저지른 유례없는 사굴(私掘) 행위”라고 비판했다. 고고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는 훗날 “5년간 738기라면 1년에 150기 가까운 고분을 조사한 셈인데 학술조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숫자”라 비판했다.
■당국에 보고없이 무단발굴
대표적인 예가 바로 송산리 6호분과 29호분의 ‘사굴’ 행위였다.
1931년 가루베는 6호분 인근을 배회하면서 백제 문양전(문양 있는 벽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고분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1년 뒤인 1932년 10월 유람도로 진입로를 조성하는 공사가 벌이던 중 5~8호분이 차례로 노출되기 시작됐다. 이 와중에 10월26일 벽돌로 조성한 6호분의 배수구 일부가 발견됐다.
이미 1년 전부터 이곳에 무덤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 가루베는 안달하기 시작했다. 결국 8개월 후인 1933년 7월 29일부터 가루베는 무단발굴을 자행하고 만다.
당시 모든 고분은 1916년 조선총독부령으로 제정된 ‘조선보물고적보존령’의 보존규칙 제3조(고적 또는 유물을 발견하는 자는 멋대로 현상을 변경해서는 안된다)에 따라 절대 무단으로 손을 대서는 안됐다. 발굴조사가 필요했다면 당연히 조선총독부 조사단이 담당해야 했다.
가루베의 발굴은 ‘사굴(私堀· 사사로운 발굴)’일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가루베는 현장을 보존하지 않은 만행을 저질렀다. 뒤늦게 고분을 조사한 조선총독부 촉탁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는 “현장의 6호분 현실(무덤방) 내부는 도굴분이라 하지만 너무도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면서 “유물이라고는 토기조각 하나
남아 있지 않았고…발자국만 어지러이 남아있을 뿐”이었다고 비판했다.
가루베의 무단 발굴은 당대에 큰 물의를 빚은 사건이었다. 총독부 조사단의 일원으로 참여한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가 가루베를 사실상 공개적으로 질책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온후한 후지타 위원의 질책은…아무런 내색없이 설명진에 참가하고 있는 특정인물(가루베를 지칭)을 향한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후지타 위원은 경찰서장과 군 면의 수뇌자를 모아 ‘비록 도굴분이라 해도 법에 따라 절대 개인이 발굴하도록 해서는 안되며 앞으로는 법규에 따라 엄중 단속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후지타는 6호분 정식 발굴장에 무슨 조사단의 일원처럼 참여하는 가루베를 겨냥해서 공주경찰서장과 지역관리들에게 “다시는 불법적인 발굴행위가 없도록 하라”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이것은 총독부의 문화재 관련 법규를 상습적으로 무시해온 가루베를 향한 경고였다.
아니 혹시 가루베 이전에 이미 도굴된 상태는 아니었을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가루베가 도굴범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단적인 예로 6호분을 정식발굴한 고이즈미가 “어떻게 된 거냐. 유물은 없었느냐”고 묻자 가루베는 “원래부터 이 상태였고 아무 것도 없었다”고 딱 잡아뗐다.
그러나 가루베는 훗날 “6호분 안에 상당수의 유물이 있었다”면서 “무덤안은 상상 이상으로 완전히 보존되어 벽화, 불감, 관대 등이 있었고 도굴됐지만 유물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었다”고 회고했다. 가루베는 “호박의 굽은옥 1점, 둥근옥 80여점, 순금제 귀고리, 허리띠장식, 큰칼(대도), 칼(도자), 금동제 달개(영락) 등 많은 것이 나왔다”면서 “지금까지 빈약했던 웅진성 시대의 확실한 유물 중 단연 빛난다”고 자랑했다.
■일인 연구자조차 ‘도굴’ 비판
그런데 이 6호분을 발견한 직후인 1933년 8월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진다.
왕릉관람로에서 6호분을 향하는 분기로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가루베가 또 하나의 돌방무덤(석실분)을 찾아낸 것이다. 가루베는 역시 무단으로 커다란 석재의 일부를 파냈는데, 그것이 바로 29호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가루베는 즉각 발견사실을 보고하지 않고 미적거린다.
역시 뒤늦게 29호분 정식발굴에 참여한 아리미쓰는 2002년 뒤늦게 펴낸 29호분 발굴보고서에서 ‘가루베가 정식보고 없이 사전에 도굴했음’을 암시하는 글을 남긴다.
즉 아리미쓰는 가루베의 29호분 발견 통보를 받고 일주일만인 1933년 11월 15일 현장으로 내려간다. 아리미쓰는 내려가기 직전 후지타로부터 “도굴당한 것 같다”는 귀띔을 들었다. 현장으로 내려간 아리미쓰는 1~5호분을 관리하는 묘지기 두 사람(조중헌·이칠찬)의 증언을 듣는다. 묘지기 두사람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8월 여름 (29호분의 존재를 알고 무덤의 천정석인 석재를 들어내고 석실을 파냈고) 지역의 유지 2~3인(가루베 등을 지칭)이 금제장신구와 철정, 칠기편 등을 가져갔다”는 증언이었다. 아리미쓰는 “이 과정에서 금제화판형식금구라든가, 영락(달개)이 달린 금제원궁형금구, 은제소옥 등을 가져갔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아리미쓰의 다음 보고가 의미심장하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가루베 등의 사굴(私掘)로 윗부분의 토사는 모조리 깎여나갔고, 천정석은 죄다 반출된 상태였으며…남쪽은 무덤방의 바닥까지 노출되어…”
아리미쓰는 특히 “돌방의 내부에는 유물을 뒤진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었고, 관대에는 벽돌을 뜯어내어 마치 울타리처럼 돌려놓았다”고 지적했다.
이라미쓰의 보고는 심상치 않다. 우선 아리미쓰가 신고자라는 가루베의 증언 대신 묘지기의 증언을 들은 이유가 무엇일까. 게다가 아리미쓰는 가루베의 사굴행위를 지적하면서 무덤 방을 완전히 노출시켜 내부의 유물을 뒤진 흔적과 실제로 몇몇 유물을 가져간 것을 적시했다.
이것은 아리미쓰가 사실상 가루베의 도굴행위를 지적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면서 아리미쓰는 “잔존유물을 수습했지만 이미 도굴에 의해 출토지점이 불분명했기 때문에 학술적인 가치를 잃었다”고 아쉬워했다. 6호분에 이어 29호분의 ‘도굴 행위’가 적발된 탓에 가루베는 29호분의 정식발굴에서는 완전히 ‘아웃’된다.
■무단반출품을 대학은사에 선물
그렇다면 가루베가 사굴 혹은 도굴로 공주 일대에서 ‘사굴’로 거둬들인 유물들은 해방 후 어찌 됐을까.
가루베 본인은 1965년 니혼대(日本大) 미시마 분교(三島分校)가 발간한 교지에 “1945년 패전 직후 알몸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일본 패망 직후 가루베가 트럭을 대절해서 부산으로 도망쳤다는 증언도 나온다. 실제로 가루베가 상당수의 백제유물을 일본으로 반출해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가루베는 자신의 소장품에 ‘가루베 소장품(輕部所藏品)’이라는 딱지를 붙여놓았다. 여기에 번호와 품명, 발굴지, 시일까지 적어놓았다. 이것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됐다. 가루베는 1932년 도쿄제실박물관(현 국립도교박물관)에 18점의 유물을 일괄로 팔아넘겼다. 이외에도 ‘조선 공주에서 발견한 석촉 3건’까지 기증했다. 팔아넘긴 유물 중에는 조선 공주 발견품(토기병 3점, 금제귀고리 2점)이 6점에 이른다.
이 유물에는 ‘품명=백제토기, 발굴지=공주 부근, 시일=소화 6년 10월(1931년 10월)’이라 적혀 있었다. 가루베는 또 백제 토기와 함께 팔아넘긴 금제귀고리와 관련된 논문을 쓰면서 “소화 5년(1930년) 가을 공주 주미리 5호분에서 옥잔과 함께 출토된 것”이라 밝혔다. 가루베가 1930년대 초부터 야금야금 소장유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했음이 틀림없다.
도쿄제실박물관뿐이 아니다. 가루베가 대학 은사인 아이즈 야이치(會津八一)에게 개인적으로 선물한 백제유물 몇 점이 와세다대(早稻田大) 아이즈야이치기념박물관에 소장돼있다. 이중 ‘목짧은 작은 항아리’(단경소호)는 ‘1932년 8월 공주 지역 고분을 무단발굴할 때 수습한 토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에 ‘소화7년 8월(1932년 8월)’이라는 딱지가 엄연히 붙어있다. 또 ‘작은 항아리(소호)’에는 ‘소화 5년 5월(1930년 5월)’이라는 딱지가, ‘세발달린 잔’(삼족배)에는 ‘소화 6년(1931년)’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모두 6호분과 29호분 등 가루베가 송산리 고분 등을 헤집고 다니면서 도굴 혹은 수집한 유물들이다. 이런 유물들을 자신의 모교에 자랑스레 기증한 것이다.
■가루베가 무령왕릉을 인식했다면?
한가지 송산리 고분군을 둘러싸고 소름이 돋는 에피소드가 있다.
1971년 6호분 배수로 공사 도중 발견된 그 유명한 무령왕릉 이야기다. 6호분이라면 1931~33년 사이에 가루베가 무단으로 파낸 벽화 벽돌분이다. 그런데 가루베는 이 6호분을 무령왕릉으로 오인하고 6호분 뒤에 조성된 구릉(실제로는 무령왕릉)을 6호분의 수호신(현무)으로 여겨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무당’ 가루베의 오인 덕분에 무단발굴을 피해서 천만다행이지 만약 가루베가 손을 댔다면 어쩔뻔 했을까.
지난번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하탐사 등을 통해 백제 고분 40여기를 확인했다지만 일제강점기에 보도된 29기와 중복됐는지도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가루베 등이 송산리고분군을 얼마나 분탕질했는지,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뒷정리가 얼마나 허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때문에 이번 송산리 29호분 발굴은 일제강점기에 아마추어의 손에 마구 파헤쳐지고 훼손된 웅진백제 시대의 역사를 복원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물론 무령왕릉처럼 확실한 명문자료가 나오면 몰라도 도굴이 된 고분을 조사하는 거니까 어떨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남은 흔적 중에 어떤 단서가 나올지도 모른다. 또한 무덤의 조성양식 등을 통해 웅진 천도 후의 왕실계보, 즉 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성왕의 역사를 엮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이 기사를 쓰는데는 기자의 끈질긴 취재에 귀찮아 하지 않고 기탄없이 자료를 제공한 정상기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과 윤용혁 공주대 교수, 이한상 대전대 교수, 이성준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의 도움이 컸습니다. 최장열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도 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 담당자인 김환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와 김대영 학예연구사도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윤용혁, ‘가루베 지온의 백제연구’, <공주대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연구총서> 제6집, 서경문화사, 2010
‘輕部慈恩(가루베 지온)의 백제고분 조사와 유물’, <한국사학보> 제25호, 고려사학회, 2006
정상기, ‘일제 강점기 공주 송산리 고분의 조사. <중앙고고연구> 통권 제10호, 중앙문화재연구원, 2012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으로 본 백제의 고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5집), 2015
국립공주박물관, <송산리 4~8, 29호분 재보고서>(일제강점기 자료조사보고 17집), 2015
김대영·김환희, ‘공주 송산리고분군 현황조사 최신성과’, <사비백제고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19
아리미쓰 교이치 외, ‘조선고적연구회 유고2’, 유네스코동아시아문화연구센터 재단법인,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