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교과서와 공문서에서 ‘국보 1호’ 꼬리 60년만에 뗀다
국보 1호 숭례문, 보물 1호 흥인지문, 사적 1호 포석정…. 문화재의 서열화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은 문화재 지정번호 제도가 60년 만에 개선된다. 기존의 지정번호는 ‘내부관리용’으로만 활용된다. 이에따라 각종 고문서와 교과서 등에서 ‘국보 1호 숭례문’은 ‘국보 숭례문’으로, 보물 1호 흥인지문은 ‘보물 흥인지문’으로, 사적 1호 포석정은 ‘사적 포석정’으로 표현이 바뀐다.
문화재청은 최근 문화재 지정번호의 개선을 골자로 한 올해 주요업무계획을 발표했다. 김현모 문화재청장은 “문화재 지정번호로 문화재가 서열화되고 있는 일부 인식을 개선하고자 관리번호로 운영하고, 비지정문화재까지 포함한 보호체계를 새롭게 마련할 방침”이라고 배경을 밝혔다. 개선안에 따르면 문화재 지정번호는 완전 폐지되지는 않는다. 문화재의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 내부 관리용으로 남겨두겠다는 것이다.
다만 ‘보도자료 등 공문서나 홈페이지 등에서 지정번호의 사용을 제한하고, 교과서와 도로표지판, 안내판 등에서는 사용을 중지할 방침이다. 정성조 문화재청 기획재정담당관실 과장은 “개선안을 토대로 여론의 동향도 보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개선안을 최종 확정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현행 문화재지정번호 제도는 공식적으로는 1962년 문화재보호법 시행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실제로 지정문화재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 8월 24일이었다. 이 날짜 관보를 보면 조선총독부가 중요도에 따른 등급이 아니라, 지정 순으로 번호를 매겼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당시 조선총독부 관보(제2290호)를 보면 ‘보물 1·2호는 남대문과 동대문, 4·5호는 원각사 다층석탑과 원각사비, 6·7호는 중초사 당간지주와 중초사 삼층석탑, 9·10·11호는 개성 첨성대·개성 남대문·개성 연복사 등’으로 붙였다. 비슷한 장소에 있는 문화재들을 묶어 ‘편의상’ 관리번호를 붙였다는 인상이 짙다.
하지만 미심쩍은 부분도 있다. 원래 남대문(숭례문)을 비롯한 서울의 관문은 모두 철거대상이었다.
일제는 40~50만명을 수용할 용산 신도시 건설을 포함한 대대적인 도시개조계획을 세웠다. 이때 남·동·서대문 등 조선의 상징물은 모두 파괴 대상이 됐다. 심지어 대포로 포격해서 파괴시키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하지만 일본거류민단장이던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 등의 반대논리는 명쾌했다.
“남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입성한 문입니다. 파괴하는 것은 아깝습니다.”
이 때문인지 남대문은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흥인지문(동대문) 역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입성했다”는 사연 때문에 보전됐다. 1927년 일제가 펴낸 조선여행안내서(<趣味の朝鮮の旅>) 역시 “가토 기요마사가 남대문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대문에서 경성으로 쳐들어갔다고 한다.”고 소개했다.
반면 일본의 임진왜란 전승기념물이 아닌 서대문(돈의문) 등은 속절없이 철거됐다.(1915년)
총독부가 경주 포석정을 ‘고적 1호’로 정한 까닭도 심상찮다. <삼국사기>를 보면 927년 경애왕이 견훤이 쳐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포석정에서 술판을 벌이다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가 포석정을 신라 망국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총독부는 포석정을 굳이 정비하고, 고적 1호로 내세웠다. 또 일제가 ‘국보 없이 보물로만’ 조선의 문화재를 지정한 까닭이 있다. 내선일체라는 것이었다. 국권을 잃은 조선에는 국보가 없으며, 따라서 일본의 국보가 바로 조선의 국보라는 것이었다.
그랬으니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를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때 아무런 검토없이 국보와 보물로 나누어 그대로 답습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