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카와 축! 사망', 상하이 시내에 축포 터졌다"…윤봉길 의거 '그 후'
1932년 4월29일 중국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 공원은 일본인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1~2월 이어진 ‘상하이 사변’에서 중국군을 몰아낸 일본군이 시내를 장악하고 있었죠.
일본군은 승전 기념을 겸해 천장절(일왕 생일) 경축식을 훙커우 공원에서 열고자 했습니다. 행사장에는 일본군 1만여명을 포함, 상하이 거류민까지 모두 3만명의 일본인이 자리를 메웠습니다.
■일본군 장교를 도륙하겠다
오전 7시45분 어깨에 물통을 메고 도시락을 든채 일반관람객 속에 자리를 잡은 인물이 있었습니다.
24살 청년 윤봉길(1908~1932)이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3일전(26일) “나는 적성(赤誠·참된 정성)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한다”고 선서한 한인애국단원이었습니다.
윤 의사의 도륙 대상인 ‘일본군 장교’는 상하이 주둔군 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1869~1932) 대장이었습니다. 시라카와는 시베리아 파견군 사령관, 육군성 차관, 관동군 사령관 등을 거쳐 육군 대신을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1928년 퇴직했지만 1932년 1월 29일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자 다시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 복직됐습니다.
오전 9시가 되자 시라카와를 필두로 내·외빈이 줄줄이 입장했습니다.
단상에는 시라카와와 함께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1877~1964) 중장, 제9사단장인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1875~1962) 중장 등 군 수뇌부가 자리를 잡았고요.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쿠라마쓰(村井倉松·1888~1953),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1887~1957), 일 거류민 단장 가와바타 사다지(河端貞次·1874~1932), 거류민단 서기장인 도모노 모리(友野盛) 등도 도열했습니다. 이제 중국신문 등 당대 언론의 보도를 통해 그 날의 ‘의거’를 복기해보겠습니다.
■아수라장이 된 단상
천장절 공식 행사와 열병식이 끝나고 관민결합대회가 이어지던 11시45~50분 정도 되었을 겁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사가 단상(사령대) 쪽으로 물통 폭탄을 던졌습니다.
잠시 뒤 폭탄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폭발했습니다. 단상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가와바타는 내장이 쏟아진채 꿇어앉아 ‘사람살리라’고 소리 질렀다. 시라카와는 왼뺨에 파편이 박혔다. 시게미쓰는 오른쪽 다리에 부상을 입고 졸도했고, 노무라는 왼쪽 눈알이 튀어나왔다.”(<시사신보> 4월29일 <신보> 4월30일)
중국신문인 <신보>는 “알루미늄제 군용보온병으로 위장된 특수폭탄이었다…단상 왼쪽 앞에는 직경이 1m 가까운 구멍이 뚫렸다. 화약을 담은 알루미늄통은 폭발과 함께 엄청난 파편이 되어 가공할 살상력을 보여주었다”고 전했습니다.
윤의사는 거사 후 곧 체포됐습니다. <대만보> 등은 “윤봉길 의사는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구타당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냉소가 흘러나왔고, 전혀 긴장하거나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태연자약했다”(4월30일)고 덧붙였습니다.
■다리절단에 눈알이 빠지고…
폭탄세례를 받은 단상 위 일본인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일본인 거류민단장인 가와바타는 곧 사망했습니다.
“내장이 쏟아져 나온 가와바타는 새벽에 두 차례나 피를 토하고 거품을 뿜으며 기침을 그치지 않다가 결국 새벽 3시10분 사망했다.”(<대만보> 4월30일)
일본공사 시게미쓰는 64곳이나 파편이 박힌채 혼수상태로 이송됐고요. 일주일만에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수술용 톱으로 다리를 잘라낼 때 선혈이 사방으로 튀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잘라낸 다리 부위의 살과 근육이 한동안 꿈틀대는 모습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시보> <시사신보> 5월6일)
폭발 직후 눈알이 빠진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결국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제9사단장인 우에다 중장은 발가락 4개가 완전히 부러지는 상처를 입었고요. 상하이 총영사인 무라이와 거류민단 서기장인 도모노는 경상을 입었습니다.
■일왕이 술까지 하사했지만…
그렇다면 윤봉길 의사의 주 타격목표였던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어찌 되었을까요
시라카와는 왼쪽 뺨 7~8곳에 파편을 맞았고, 어깨와 복부 및 다리 등 30여곳을 다쳤는데요.
그러나 초기 상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일본 육군병원 측도 “출혈이 심하지 않아 4주 정도면 완치할 수 있을 것”이라 낙관했고요.(<시보> 5월1일) <시사신보>는 “평소 술을 좋아한 시라카와가 브랜디를 찾고 있으며 문병 온 지인들과도 환담을 나눴다”(5월4일)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5월21일이 되자 상황이 급변합니다. 시라카와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됩니다.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았던 시라카와가 장출혈로 인한 혈변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시사신보> 5월21일)
23일 새벽 시라카와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일본 본토의 일왕까지 나서 난리를 피웠습니다. 일왕 히로히토(裕仁)는 시라카와에게 ‘사주(賜酒·임금이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리는 술)’와 함께 욱일 대훈장과 남작의 작위까지 주었습니다. 5월24일 혼수상태에 빠진 시라카와의 병상에서 기묘한 의식까지 펼쳤습니다.
‘일왕의 칙어’를 읽고 남작의 작위를 수여했으며, 사주(백포도주)를 시라카와의 입술에 적셔주었습니다. 그러나 별무신통이었습니다. 시라카와는 마지막으로 위장과 대장을 절제하는 대수술을 감행했지만 5월26일 오전 사망했습니다.
■“시라카와가 죽었다!”
시라카와의 용태는 중국 내에서도 시시각각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중국인들은 시라카와가 사경을 헤맬 때부터 ‘이미 사망했다’는 소문까지 퍼져 축포를 터뜨리며 환호했습니다.
“일본은 이번 전쟁을 승전이라 큰소리치고 있지만…전쟁통에 노무라와 우에다가 다치고 시라카와의 사망소식이 들려오자 상하이의 모든 시민은 폭죽을 터뜨리며 환호했다.”(<상해보> 1932년 5월25일)
일본은 윤봉길 의사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상하이 파견 일본군 고등군법회의는 시라카와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무렵인 5월25일 윤 의사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1월8일 일왕을 저격한 이봉창 의사가 9차례나 심문을 받고 9월30일 사형선고를 받은 것에 비하면 너무도 전격적인 재판이었죠.
이를 두고 <상해보>는 “일본은 시라카와의 무덤에 윤봉길 의사를 순장시키려고 한다”(5월31일)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일본은 그해 12월19일 가나자와(金澤) 교외인 육군작업장에서 윤의사의 무릎을 꿇리고 십자가 형틀에 묶은채 총살형을 집행했습니다. 누가봐도 보복적인 사형집행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윤의사는 순국하는 그 순간까지도 추호의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한국인은 일본에 동화되지 않았다”
윤 의사의 쾌거는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의거를 강대국 일본편에 서서 제국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해외언론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의거의 대대적인 보도 자체가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리는 선전 효과를 얻었습니다.
예컨대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폭탄투척자는…1910년 일본의 조선합병후 조선독립운동에 가담해 테러행위에 적극 참가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 가운데 한 명”(4월30일)이라고 전했습니다.
이 와중에 동정적인 여론도 꿈틀거렸습니다. 상하이에서 창간된 미국 주간지인 <밀러드 리뷰>를 볼까요.
“훙커우 사건 희생자는 일본 정부와 관련된 요인들뿐이다…(반면)일본이 중국에 선전포고도 없이 습격한 포악한 행동(상하이 사변)은 암살이나 다름 없다…이번 사건은 한인들이 일본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저항한 행동이다.”(5월7일)
영국 신문인 <맨체스터 가디언>은 “한국의 반일감정이 수세기 동안 존재했으며 일본은 조선을 통치하면서 경제적 행정적 혜택을 주지 않았다”(4월30일)고 분석했습니다. 미국의 <뉴욕이브닝포스트>는 “한국민이 일본통치에 반대하고 있고, 한국인이 일본에 동화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밀러드 리뷰> 5월7일자에 전재)고 해석했습니다.
영국의 노동당기관지 <데일리 헤럴드>는 “이 사건은 일본을 감정적으로 격앙시킬 것이지만 더이상의 유혈사태가 상하이에서 일어나는 구실이 되서는 안된다”고 일본군의 상하이 철수를 촉구했습니다.
■‘꿍시 꿍시(恭禧 恭禧·축하합니다)’
사실 당시 중국내 한국독립운동의 입지는 매우 좁았습니다.
1931년 7월 일제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현(長春縣) 만보산 지역에 이주한 한인과 현지 중국인과의 갈등을 유발하는 술책을 썼습니다. 일본 경찰이 개입된 유혈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상하이 길거리에서도 중국인과 한인 노동자간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이 와중에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 사변과, 1932년 1월 상하이 사변을 잇달아 일으켰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 사정도 악화일로에 접어들었습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됐고, 1920년대 후반에는 해외동포들의 모금도 거의 중단됐고요. 급기야 소수의 임시정부 고수파만이 외롭게 간판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단번에 역전시킨 사건이 바로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였습니다.
당시 만주지역에서 교사로 일하던 독립투사 이강훈(1903~2003)의 증언이 흥미롭습니다.
“중국학교 교사가 웃는 낯으로 신문 한장을 들고와 나에게 ‘꿍시 꿍시(恭禧 恭禧·축하합니다)’했다. 만보산 사건 이후 그렇게 냉담했던 중국인 친구였는데…그가 가지고 온 신문 1면에서…‘한국인 윤봉길, 폭살 왜장 시라카와’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얼마나 놀랍고 통쾌한 순간이었던가.”
당시 상하이에서 활약한 독립투사 한형석(1910~1996)도 “만보산 사건 이후 한국인을 무시하던 중국인 친구들이 나를 초대해 마치 내가 윤의사 인양 끌어안고 추켜세우며 밤새워 술잔치를 베풀어주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중국의 윤봉길은 어디 있는가”
중국인들이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는 사실은 <상해일보> 5월1일자에도 적시됐습니다.
“…중국 민중을 도살하고, 중국인의 가옥을 불살랐으며, 중국 토지를 점령한 일본인들을 당연히 증오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이 참혹한 꼴을 당했다는 소식은 시민을 기쁘게 했다.”
그러면서 “폭탄을 투척한 이는 망국민인 한국인이다…동아의 평화를 파괴하는 인간 말종들을 깨끗이 청소하고 조선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의연히 일어선 것…”이라 했습니다.
‘망국민인 한국인’(윤봉길)이 ‘인간말종들’(일본)을 처단한 독립투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신문은 중국인들의 궐기를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조선인이 던진 폭탄 하나만도 못하다는 것인가.”
또 세평의 필명을 쓴 중국인은 “중국의 윤봉길들은 어디에 있느냐. 국난이 심해지는데 언제까지 지켜볼 것이냐”(<공군> 제5기·1932)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윤봉길 의거=이순신의 명량대첩’
1932년 백범 김구가 펴낸 <도왜실기>의 윤의사 사진에는 한 중국인의 시가 붙어있는데요. ‘국기 아래의 윤봉길 의사’ 라는 제목의 한시는 “한국에는 군자가 많이 3000만인데…거대한 폭탄으로 적을 섬멸했으니 4억 중국인을 부끄럽게 했다”고 추앙했습니다. 난징(南京)의 <대정보>는 윤봉길을 ‘흉수(兇手·악인)’로 폄훼한 일부 신문의 논조를 비판하면서 “윤봉길은 열사이자 협객”이라고 치켜세웠습니다. 윤의사의 사형소식이 알려진 9월 중국인들의 추모열기는 대단했습니다.
또 대만독립혁명당 지도자로 1939년 대만의용대를 창설한 이우방은 “당신(윤봉길)의 언행일치 혁명정신! 자네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네!”라는 애도시를 보냈고요.
심지어 프랑스 파리에서 간행된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구국시보> 1936년 1월 29일자는 윤봉길을 ‘중국의 민족영웅’이라 칭하고 상하이 사변의 ‘순국열사’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주석(1887~1975)은 훗날 “윤봉길 의사는 중국에도 공이 큰 분”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결국 이 의거 덕분에 중국과의 반일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 중대 계기가 마련됐습니다.
이후 중국 군관학교에 100여명의 한인 청년들이 군사훈련을 받았고요.
이들은 조선 의용대 및 한국광복군의 근간이 되었답니다. 임시정부 또한 침체기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 국내외 동포의 재정적, 정신적인 지원까지 재개되면서 임시정부는 부흥의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로 하여금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시킨 공적 또한 무시할 수 없고요.
윤봉길 의거를 한마디로 정리한 표현이 있더군요. 미주에서 활약한 독립투사 홍언(1880~1951)의 언급인데요.
“이번 의거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과 같으니 몽매지간에 생각해도 장절쾌절을 부르지 않을 수 없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아!“
국립중앙박물관이 며칠전 78주년 광복절을 맞아 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유품 등을 특별공개했습니다.
공개된 유품 중 특히 눈에 띈 것은 윤봉길 의사의 자필 이력서 및 유서인데요. 이중에서도 윤봉길 의사가 어린 두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 심금을 울립니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흐르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마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생각할수록 억장이 무너집니다. 얼마나 못난 나라였으면 24살 앞길이 창창한 젊은 가장을 사지로 몰아넣었을까요.
그것도 부족해 그 젊은 가장은 젖먹이 두 아기에게까지 ‘조국을 위한 용감한 투사라 되라’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윤봉길 의사를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유품이 또 있습니다.
윤의사가 거삿날 아침 훙커우 공원으로 떠나면서 금방 산 ‘신상’ 회중시계를 백범의 손때 묻은 시계와 바꿨다죠.
“선생님, 저는 이제 새 시계가 필요없습니다. 선생님이 쓰세요.”
또 택시를 타던 윤의사가 호주머니 속에 남은 돈을 털어 백범에게 주면서 또 말했답니다,
“전 이 돈이 필요없습니다. 선생님.”
달리기 시작하는 자동차를 따라 쫓아가던 백범이 했다는 말도 어떤가.
“윤군! 윤동지! 지하에서 봅시다.”
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를 다룬 논문을 읽을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무미건조하고 딱딱하게 쓴 논문을 읽고 감정이 북받쳐 오르다니….(이 기사는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의 사진자료와 발간자료를 중심으로 작성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매헌 윤봉길 전집>(1~9권), 매헌윤봉길의사전집편찬위, 2012
김상기, ‘윤봉길 상해사변에 대한 일본언론의 보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2권 32호,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김상기, ‘윤봉길 상해의거의 국내외적 영향과 의의’,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1권 61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8
한시준,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 대한 중국신문의 보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2권 32호,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김광재, ‘윤봉길의 상해의거와 중국측 역할’, <한국민족운동사 연구> 제33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2
김구,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돌베개, 2011
김광, <나의 친구 윤봉길>, 이민원·양수지 역주, 선인, 2017
임중빈, <윤봉길 의사 일대기>, 범우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