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르르 멸망한 발해'…"백두산 화산폭발이 방아쇠 당겼다"
“오시(낮 12시쯤) 함경도 부령부와 경성부에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때때로 황적색의 불꽃 연기와 같으면서 비린내가 가득…마치 화로 가운데 있는 듯 뜨거워 견딜 수 없었다. 4경(다음날 새벽 3시 무렵) 후에야 사라졌다.”
<숙종실록> 1702년 5월20일자가 전한 6일전(14일) 백두산 화산 분화 소식입니다.
“아침이 되니 (화산)재가 눈처럼 흩어져 내려 1치(3㎝) 정도 쌓였는데…강변의 여러 고을도 모두 그러했다….”
이 <숙종실록> 기록을 토대로 ‘1702년 백두산 분화의 강도와 화산재의 규모’를 검토한 논문(윤성효·이정현, ‘백두산 화산의 1702년 강하화산재 기록에 대한 화산학적 해석’, 2011)이 있는데요.
부령부와 경성부는 백두산에서 각각 똑같이 139㎞ 떨어진 곳(부령부는 동쪽, 경성부는 동남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백두산 분화로 생긴 뜨거운 화산재 구름이 140㎞ 가량 떨어진 부령부와 경성부까지 몰려 왔다는 뜻입니다.
그 열기가 15시간(오시~4경) 이상 지속되고, 눈처럼 내린 화산재가 3㎝ 가량 쌓였고요.
연구자들이 백두산~부령·경성의 거리와, 화산재 두께(3㎝) 등을 고려해서 계산해봤는데요. 그 결과 1702년 백두산 화산 분화로 생긴 ‘화산분출물의 용량=최소 1.2㎦ 정도’라는 결론을 얻어냈습니다.
‘화산폭발지수(VEI) 5’에 해당되는 ‘대분화’에 속합니다. 기원후 79년 폼페이를 순식간에 매몰시킨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지수(5) 및 화산쇄설물 용량(2㎦)에 버금가는 규모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용의 비늘, 숯비가 내립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백두산 분화 관련 기록들이 줄을 잇습니다.
1014~1019년(현종 연간)과 1199~1201년(신종 연간) 사이 화산분화 관련 기사가 잇따르고 있고요.
<고려사> ‘세가·공민왕’조는 “1373년(공민왕 22) 밤하늘에 2촌 혹은 3~4촌 되는, 흡사 용의 비늘이 백마의 털처럼 휘날리듯 안개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고 표현했습니다. 길이가 2촌(6㎝) 혹은 3~4촌(9~12㎝) 되는 길고 납작한 돌조각이 포함된 화산재가 개경의 하늘에까지 날아왔다는 얘기입니다.
백두산 분화는 조선 개국 후에도 그치지 않습니다. “함경도 단주(단천)에 연기도, 안개도 아닌 것이 하늘을 뒤덮었고, 숯비(炭雨)가 내렸다”(<태종실록> 1401년 윤3월25일)는 기사가 보입니다. 화산재 구름에서 떨어진 검은 돌조각(부석)을 ‘숯비’로 표현한 겁니다. 1403~1406년 사이 <태종실록>은 함경도 지방에 떨어진 화산재 기사를 숨가쁘게 전합니다.
1597년(선조 30) 8월26~28일 함경도 삼수 일대의 지진 및 화산분화 보고 또한 심상치 않습니다.
“8월26~28일 사이 함경도 삼수를 중심으로 곳곳에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갑자기 포를 쏘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크기가 몇 아름씩 되는 바위가 터져나와 큰 산을 넘어갔습니다…”(<선조실록> 1597년 10월2일)
1654년(효종5) 10월21일에는 전 판서 조경(1586~1669)이 ‘직접 목격했다’는 천문현상을 알립니다.
“비도, 연기도 아닌 것이 북쪽에서 옵니다. 소리는 바람이 몰아치듯, 냄새는 비린내 같기도 한데…가까이는 경기 적성·장단 사이와 멀리는 함경도의 남쪽 경계까지 일어났습니다”(<효종실록>)
윤성효 부산대 교수(지구과학교육과·화산특화연구센터)는 화산재가 경기 장단·적성까지 500㎞ 가까이 날아온 것을 감안하면 이때의 화산분화로 생긴 분연주의 높이는 최소 10㎞ 이상, ‘화산폭발지수=4’이상의 분화였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차바퀴만한 불덩이가…”
1668년(현종9) 4월23일에도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납니다.
함경도에 화산재가 쏟아졌다는데 ‘하늘 주위가 20여곳이 터졌다’는 보고가 올라온겁니다. 이때 좌의정 허적(1610~1680)은 “동쪽 하늘이 갈라졌는데 빛이 화경(火鏡·볼록렌즈)과 같았다”고 보고합니다.(<현종실록> 1668년 4월26일)
“붉은 말이 서로 싸우는 듯한 모양이었는데…다음날 북쪽에 붉은 기운이, 또 다음날엔 흰기운이 있었습니다.”
그후 30여년 뒤인 1702년 ‘화산폭발지수=5’의 대분화가 일어난 겁니다.
1702년 이후에도 백두산 화산 분화 기록은 끊이지 않습니다.
청나라 관리인 유건봉(1865~1952)의 <장백산강지략>에는 1903년 백두산 화산분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천지에서…별안간 폭발소리가 나자 차바퀴만한 큰 불덩이가 떨어지고 수면 위에 수많은 불꽃이 낮처럼 환히 보였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생한 화산분화의 생생한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차바퀴 만한 불덩이는 화산탄에 해당됩니다. 다행히 대규모 분화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 분화를 본 사람들이 살아남지 못했겠죠.
■베수비오 화산의 100배 폭발
어째 좀 이상하죠. 과거의 백두산 분화를 언급하면서 고갱이는 빼먹고 전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백두산 분화하면 10세기 중반에 있었던 초대형 분화를 당연히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때 일어난 백두산 화산폭발 지수(VEI·Volcanic explosivity index)’는 무려 7로 추정됩니다. 백두산 화산이 뿜어낸 화산분출물의 용적은 83~117㎦(최대 150~170㎦)로 추산되고요.
기원후부터 지금까지 발생한 것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화산 분화가 바로 이 10세기 중반 백두산 분화였습니다.
그때 분출한 화산재는 대기 위로 25㎞ 이상 솟구쳐 올라갔고요. 겨울철 편서풍과 제트기류를 타고 함경도~동해안을 거쳐 일본열도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지금도 홋카이도(北海道)와 혼슈(本州) 북부에는 그때 비처럼 쏟아져내린 화산재가 5㎝ 이상 쌓인 곳이 관찰된답니다. 단골로 비교되는 베수비오 화산의 분화는 새발의 피입니다.
베수비오 화산 분화 규모는 ‘화산지수=5, 화산분출물 용량=2㎦’인데요. 백두산 화산의 규모(‘화산지수=7, 화산분출물 용량=100㎦’)와는 비교해볼 때 100분의 1정도 랍니다. 베수비오 화산 50개가 터진 것에 비유할 수 있고요.
그렇다면 백두산 화산분화는 왜 이렇게 충격적인 재앙을 안겼을까요. 백두산 천지에 20억t의 물이 있습니다.
이게 결정적이랍니다. 만약 마그마가 천지 내부로 올라오면 20억t의 물과 만나게 되겠죠.
“마치 달궈진 기름이 든 후라이팬에 찬물을 부으면 어찌 됩니까. 물이 폭발하면서 수증기로 바뀌죠. 1000도의 마그마는 급속히 냉각되면서 잘게 조각나 마치 팝콘을 튀기듯 부석이나 화산재로 바뀝니다. 그러면서 부피가 커지고 폭발하면서 수증기와 함께 대기 상층으로 화산재기둥(분연주)을 만들며 상승합니다.”(윤성효 교수)
■“하늘에서 북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렇게 무시무시한 화산 분화였다면 당대 사관이 응당 역사서에 기록했겠네요. 물론 기록은 있습니다.
<고려사> ‘세가·정종 원년(946년)’조는 “이 해에 하늘에서 고동(북) 소리가 들려 죄인들을 사면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고려사> 기록은 이게 끝입니다. 이상하죠. 다른 백두산 분화기록은 상세하게 전하면서 정작 가장 충격적인 재앙 소식은 그렇게 소략하게 전했을까요. 따져볼까요.
당대 고려는 백두산까지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서쪽으로는 의주, 동쪽으로는 원산 이남이였죠.
그러니 갈 수 없는 지역의 화산분화를 자세하게 기술하는데 한계가 있었겠죠.
또하나 그 해의 백두산 분화는 겨울철에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화산재가 겨울철 편서풍과 제트기류를 타고 동쪽으로 흘러가 일본열도로 넘어간거죠. 그러니 백두산으로부터 465㎞ 떨어진 서남쪽의 개경에서는 ‘하늘에서 치는 북소리’처럼 들렸을 겁니다.
■“폭발은 본 사람은 다 죽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 같아요. 윤성효 교수가 납득할만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즉 10세기 중반 ‘화산폭발지수 7’ 이상의 대규모 분화가 일어났다면 어떨까요. 고온의 화쇄류(화산분출물과 뜨거운 가스 혼합체)가 초속 약 10~300m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는데요. 백두산의 경우 10세기 초중반의 화산분화로 인한 화쇄류가 반경 60㎞까지 퇴적되어 있고요. 적어도 80~90㎞까지는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분석인데요.
그렇다면 어떨까요. 반경 60㎞ 내에서 화산 분화를 목격한 사람은 생존할 가망성이 ‘0’에 가깝다는 겁니다. 80~90㎞ 거리 안에 있던 사람도 생존가능성이 희박하구요. 그러니 목격한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기록할 수가 있냐, 뭐 그런 말이죠.
폼페이의 비극을 전한 플리니우스(61~112)는 40㎞ 밖에서 베수비오 화산분화를 지켜봤습니다. 그러나 그가 백두산 밖 40㎞ 거리에서 분화를 보았다면 화쇄류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카더라’ 통신으로나마 멀리서 기록할 수는 없었을까요. 그러나 당시 동북아는 극심한 혼란기를 겪고 있었답니다. 당나라(618~907) 멸망 후 5대10국의 지방정권이 난립하고 있었죠. 한반도에서는 후삼국이 각축을 벌이다가 고려로 통합되는 와중이었고요. 기록자가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갑자기 붕괴한 해동성국
이 대목에서 곱씹어와야 할 게 있습니다. 바로 발해의 멸망 미스터리입니다.
발해가 어떤 나라입니까. 698년 건국 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서 마침내 해동성국의 기치를 세웠던 왕조가 아닙니까
그런데 멸망의 순간(926년 1월)은 너무도 허망했습니다.
거란이 출병한 것이 925년 12월 말인데요. 이 대목이 불가사의합니다. 거란이 변변한 저항없이 보름도 안되어 발해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요사>가 전하는 발해 멸망의 이유를 한번 볼까요.
“(거란이) 발해의 ‘민심이 멀어진’(離心) 틈을 타 군사를 움직여 싸우지 않고 이겼다.”(<요사> ‘야율우지전’)
해동성국을 구가했던 발해가 이럴 수 있습니까. <고려사>에도 수수께끼 같은 기록이 속출합니다.
“고려 태조 8년(925) 9월, 발해장군 신덕 등 500명이 내투. 발해 예부경 대화균 등이 100호의 백성을 이끌고 내부. 12월 좌수위소장 모두간 등이 1000호의 백성을 이끌고 투항.”
그러니까 발해의 왕·귀족과 장관들이 멸망(926년) 하기 몇 달 전부터 대규모 ‘엑소더스’에 나선 겁니다.
역사학자들은 거란이 밝힌 ‘민심의 이반(離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지배세력인 고구려인과 피지배세력인 말갈인 사이의 모순, 귀족들의 사치생활, 그리고 통치계급 내부의 모순을 꼽은거죠. 그러나 각종 역사서를 들춰봐도 발해 사회 내부의 모순을 가리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 엑소더스 행렬이 발해 멸망(926년 1월) 이후에도 이어진다는 겁니다.
먼저 발해 멸망 직후 거란(요)에 의해 강제이주 당한 발해인은 9만4000여호(<요사>)에 이릅니다.
고려 망명 행렬도 이어졌습니다. <고려사> 등을 종합하면 50년간 고려에 망명한 ‘탈발자(脫渤者)’는 10만여명으로 집계됩니다. 이 중 핵심은 발해세자 대광현의 망명사건(934)이죠. <고려사>는 “발해세자 대광현이 수만명의 무리를 이끌고 망명했다…발해왕실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발해멸망=백두산 분화 때문?
그래서 ‘발해멸망=백두산 분화’로 연결짓는 연구가 있습니다.
백두산에서 날아온 화산재의 퇴적층과 함께 화산분화에 이은 화쇄류로 묻혀버린 탄화목 연대를 측정한 결과를 토대로 한 연구인데요. 즉 10세기 백두산 화산은 926년 무렵, 934년 전후, 937~938년의 소·중규모 분화를 거쳐 946년 무렵의 대분화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즉 대분화를 앞두고 소·중규모 분화와 같은 심각한 전조 화산활동이 이어졌을 거라는 겁니다.
발해장군과 왕·귀족이 잇달아 고려로 망명했던 바로 그 시기와 맞아 떨어지죠.
이 무렵 백두산 대분화의 전조현상이 나타나자 이를 두려워한 사람들이 대규모 엑소더스에 나선 것은 아닐까요.
그것이 <요사>가 말하는 민심의 이반, 즉 이심(離心)은 아니었을까요.
또 <요사>에는 거란이 발해를 멸한 뒤 “압록강, 두만강, 쑹화강 일대와 연해주·동해안의 마을을 폐현(廢縣)시켰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이게 심상치 않습니다. 이들 지역에는 백두산 대분화로 인한 화산이류(화산분출물+물)의 해일이 일어난 흔적이 역력한데요. 이것이 화산분화로 사라져버린 마을의 흔적이 아닐까요.
■반경 82~87㎞ 내는 절멸
이 대목에서 거론하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 있죠. 백두산 대분화는 또다시 일어날까요. 일각의 우려처럼 임박했나요.
한때 불안했습니다. 2002~2005년 사이 이상한 전조증상이 빈번했거든요. 그러나 최근 화산가스 성분이나 온천수 온도 측면에서 별다른 이상이 관측되지 않고 있답니다. 그래서 지금 화산 분화가 임박하였다는 것은 억측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두산은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위험한 화산이 분명합니다. 화산연구자인 소원주 박사는 “영국 연구진이 백두산 지하 6㎞에서 액체 상태 마그마방의 존재를 확인했다”면서 “언제 분화의 방아쇠를 당길지 장담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마침 2014년 백두산 화산 분화 때 화쇄류의 영향 범위를 고찰한 논문이 있는데요.
만약 화산지수 7의 규모로 폭발한다면 어떨까요. 분연주의 높이가 20~30㎞ 정도이고, 화쇄류는 무려 82~87㎞나 흐를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북한의 혜산시와 삼지연시 등은 물론 중국의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 등 북한·중국민 수백만명이 위험한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화쇄류의 직접 영향권을 피한다 해도 그 피해는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
백두산은 편서풍 지대에 속합니다. 따라서 백두산 분화가 발생하면 보통은 편서풍과 제트기류를 타고 동쪽으로 흐릅니다. 때문에 북한의 양강도와 함경도 지역에 화산재가 비처럼 내리게 됩니다. 일본열도도 일정한 피해가 예상됩니다. 인명피해는 물론 도로와 댐, 전기, 광산 등이 마비될 겁니다. 생태계 변란과 토양침식, 식수오염, 냉해 등이 악순환이 초래될 거구요.
■순망치한
남한 쪽은 어떨까요. 백두산이 편서풍지대에 속하므로 아무 문제가 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봄철이나 이른 여름철에 백두산 지역에 북동기류가 유입되면 화산재가 남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 등에 화산재가 개경이나 적성·장단까지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지않습니까.
직접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해서 팔짱을 끼고 있으면 안됩니다. 화산재 때문에 항공기가 결항돼 25억 달러 이상의 피해가 예상된다는 연구도 있거든요. 그리고 돈이 문제겠습니까. ‘순망치한’이라는 고사가 있죠. 발해 백성들이 어떻게 됐습니까. 남으로 남으로 엑소더스 대열에 나섰잖습니까. 남의 일이 아니라 남과 북이 적극적으로 협력해서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이 기사를 위해 윤성효 부산대 지구과학교육과 및 화산특화연구센터 교수와 소원주 박사, 송기호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윤성효, ‘백두산의 역사시대 분화 기록에 대한 화산학적 해석’, <한국지구과학회지> 34권6호, 한국지구과학회, 2013
윤성효, ‘백두산 화산폭발 가능성 및 대응방안’,<백두산 화산폭발 가능성에 대한 과학적 검토 및 대응방안 토론회>, 국회환경포럼, 2011
윤성효·장철우·김선경, ‘백두산 화산에서 수치모형 분석에 의한 화쇄류의 영향 범위’, <암석학회지>23권4호, 2014
윤성효·이정현, ‘백두산 화산의 1702년 강하화산재 기록에 대한 화산학적 해석’, <암석학회지>20권4호, 한국암석학회, 2011
윤성효, ‘백두산 화산의 1654년 10월 21일 화산재구름 이동 기록에 대한 화산학적 고찰’, <암석학회지>27권1호, 한국암석학회, 2018
소원주,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 소원주, 사이언스 북스, 2010
송기호, <발해정치사연구>, 송기호, 일조각,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