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월드컵 로맨스와 출산율

이기환기자 2017. 10. 11. 15:08

“25~26일 사이 병원 분만실에서 기록적인 수의 경막외 마취제가 사용됐다.”

 

지난 3월말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의 란드스피탈리 대학병원의 마취과 의사인 아스게이르 페투르 토르발드손이 자신의 트위트 계정에 올린 이 글이 세계적인 화제를 뿌렸다.

출산 때 임산부들이 사용하는 경막외 마취제의 수가 급증했다는 것은 곧 출산율이 치솟았음을 의미한다.

 

3월 말은 인구 30여만명에 불과한 아이슬란드가 지난해 6월 27일 열린 유로 2016년 16강전에서 잉글랜드를 2-1로 꺾은지 딱 9개월이 지난 때였다.

 

‘맞아. 축구종가 잉글랜드를 꺾고 흥분한 아이슬란드인들이 사랑을 나눈 결과야.’ ‘출산율을 높이려면 역시 월드컵이야.’

 

영국의 BBC, 인디펜던트에서부터 러시아의 뉴스채널 RT, 미국의 뉴스위크에 이르기까지 앞다퉈 이 소식을 전했다.

심지어 어떤 스페인 언론은 ‘아이슬란드인들이 축구 오르가즘을 느꼈다’ ‘섹스! 스캔들! 노르딕 문화! 아기!’라는 선정적인 내용의 기사를 실어댔다.

 

곧 “마취과 의사가 침소봉대했다”는 아이슬란드 RUV 방송의 반박보도가 이어졌지만 때는 늦었다. 이미 진짜뉴스로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엊그제 아이슬란드가 아일랜드를 꺾고 월드컵 본선진출권을 딴 뒤에도 아이슬란드 축구와 출산율 기사가 진짜뉴스처럼 재유통되었다.

이런 과장뉴스가 지금도 통용될만큼 스포츠와 출산율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2004년 미국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가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즈를 꺾고 86년만에 우승을 차지한 지 9개월되는 시점에 보스턴의 신생아 수가 급증했다는 기사(보스턴글로브)가 등장한다.

 

월드컵과 출산율의 관계는 더욱 깊다.

굳이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도 없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9개월이 지난 2003년 봄의 신생아 출산수가 10%나 급증했다는 통계가 있다.

덕택에 줄곧 하락세를 면치못했던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수 있는 자녀수)도 2002년 1.17명에서 2003년 1.18명으로 반짝 상승했다.

이후 다시 하락세를 거듭하던 출산율은 2005년 사상 최저(1.08명)를 찍었다가 2006년 독일 월드컵 다음해인 2007년(1.26명)에는 비약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이듬해인 2011년도 전년(1.23명)에 비해 늘어난 1.24명이었다.

그러니 출산율을 높이는 만능통치약이 바로 월드컵 본선티켓이라는 말이 나올법 하다.

그러나 그것도 대표팀의 성적이 좋거나, 최소한 선전하는 모습을 보여야 가능한 얘기다.

 

대표팀이 울화 치미는 전력을 보이는데, 무슨 기분으로 ‘월드컵 로맨스’를 즐기겠는가. 요즘같은 축구대표팀의 경기력이라면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베이비붐을 기대하기는 연목구어일듯 싶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