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 개그의 달인’ 세조의 두 얼굴…‘임금의 팔’ 꺾은 신숙주의 운명
“왕의 몸을 씻었다고 발설하지 마.”(세조) “대왕이나 문수보살 봤다고 말하지 마세요.”(문수동자)
강원도 평창 오대산 상원사(월정사의 말사)엔 범상치 않은 인물의 범상치않은 설화가 전해진다.
바로 조선조 세조(이유·1417~1468, 재위 1455~1468) 이야기다. 상원사에 들어가는 입구에 서있는 석물부터가 심상찮다.
1466년 상원사를 찾은 세조가 벗은 의관을 걸어둔 ‘관대걸이’라 전해진다. 여기서부터 드라마틱한 설화가 이어진다.
어느날 세조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나타나 세조에게 침을 뱉었다. 이후 뱉은 침자리마다 피부병이 생겼다.

그런 세조가 상원사 낙성식에 참석하러 가던 중 주위를 물리치고 깨끗한 계곡물에 목욕을 즐겼다. 그 때 동자승이 나타났다.
세조는 “등 좀 밀어달라”고 부탁하면서 “누구한테도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마라”고 당부했다. 그러자 동자승도 “대왕도 어디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마시라.”고 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자 온몸의 피부병이 씻은 듯 나았다.
상원사엔 지금도 세조가 보았다는 문수동자상을 모시고 있다.
세조가 이듬해 다시 상원사를 찾아 법당에 들어섰다. 어디선가 고양이가 나타나 세조의 곤룡포 자락을 물고 잡아당겼다.
과연 불상을 모신 탁자 밑에 세 명의 자객이 칼을 들고 숨어 있었다. 세조는 고양이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지금도 상원사 청량 선원의 입구 계단 좌우에 고양이 석상이 두 구 서있다.

■피고름 적삼의 주인공
팩트체크 해보자. 먼저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침을 뱉었다”는 문헌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문수동자’와 ‘고양이’ 이야기는 이능화(1869~1943)의 <한국불교통사>(1918)에 실려있다.
그러나 실록 등 문헌 사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1984년 7월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은 상원사 문수동자상 복장을 조사하다가 얼룩 진 속적삼 1벌을 수습했다.
그런데 이 속적삼의 옆구리와 목깃, 소매 부분에 남아있는 얼룩은 피고름의 흔적 같았다. 맞다면 ‘피고름 적삼’의 주인공은 세조가 아닐까. 심상치않는 자료가 있기는 하다. 1464년 상원사 중창 때 세조가 중창불사에 필요한 물자 등의 시주를 권하는 내용을 담은 ‘상원사 중창 권선문’(국보)에 이런 내용이 있다. “양전(세조와 정희왕후)이…(상원사에) 어의를 몇 벌 내시었다(出御衣若干)…”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원사 중창 불사 때 세조가 ‘문수동자 덕분에 피부병이 나은 것을 기념하여 평소 입었던 피고름 어의(적삼)’를 하사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단언할 수는 없다. 아직까지 이 속적삼을 제대로 분석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평성대의 노래
지금 월정사 및 상원사 인근에 있는 조선왕조실록 박물관에서 세조 관련 특별전(~9월27일)이 열리고 있다.
이름하여 ‘1466, 강원도로 떠난 왕의 순행’ 전시회다. 세조는 상원사의 중창을 기념하려고 행차하는 김에 강원 일대를 순행하고 민심을 살피는 기회를 마련했다. 무려 39일간의 행차였다. 이 행차에는 왕비(정희왕후·1418~1468)·세자(예종·1450~1469·재위 1468~1469)·효령대군(1396~1486) 등 왕족과, 영의정 신숙주(1417~1475)·상당군 한명회(1415~1487)·좌의정 구치관(1406~1470) 등 조정의 핵심관료가 총출동했다. 가히 조정이 움직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행차의 주목적은 역시 ‘상원사 중창 낙성식 참석’이었다. 이상하다. 성리학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 왕조가 아닌가.
왜 조정 전체를 일개 불교 사찰의 낙성식으로 옮겨올 정도로 중시했을까. 따져보자.

세조의 재위기간은 13년2개월(1455년 8월3~1468년10월2일)이었다. 조선왕 27명의 평균 재위기간(19.2년)보다도 6년 이상 짧다.
생각보다 단출한 재위기간이었다. 그러나 업적도 만만치 않았다. <경국대전> 편찬을 추진하여 조선 통치 법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 진관체제(지방관이 군대 거느림)와 오위제(중앙군사조직)를 정비하여 군사조직을 강화했다. 야인을 정벌함으로써 변경의 안정도 꾀했다. 직전법(현직 관료에게만 토지 세금을 거둘 수 있게 만든 제도)을 시행하여 재정기반을 정비했다.

이어 <동국통감>과 <국조오례의> 편찬을 통해 역사와 국가의례를 체계화 했다. 그 덕분일까. <세조실록>에 ‘태평한 시대’라는 당대의 찬사가 터져나온다.
즉 1457년(세조3) 4월22일 사헌부 장령 김명중이 “남녀 7~8명이 술에 취해 거문고를 타고 노래 부르며 서로 희롱하고 춤추면서 대궐문을 지나는 것을 붙잡았다”면서 “이들을 국문해야 한다”고 아뢴다. 실록은 이어 당대의 도성 분위기를 전한다.
“도성 남녀가 떼지어 술을 마셨다…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길거리에서 ‘태평 시대의 즐거운 일’(太平樂事)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이에 세조는 “근심·걱정 없는 백성들이 즐거워하는데 뭐가 문제냐”고 되레 야단친다.

■“나는 호불의 군주다.”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세조는 어떤 인물인가. 쿠데타(계유정란)로 정권을 탈취한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이 아닌가.
안평대군(1418~1453)과 금성대군(1426~1457) 등 두 동생과, 어린 조카(단종·1453~1455)까지 비명횡사하게 만든 ‘피의 군주’가 아닌가. 그러나 세조라는 인물을 뜯어보면 그렇게 단칼에 평가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우선 ‘피의 군주’ 답지않게 ‘호불(好佛)의 군주’를 자처했다는 것이 이채롭다. 앞서 언급한 상원사의 예가 대표적이다.
사실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부터 불교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부왕(세종)의 명으로 <석보상절>을 지으면서부터 ‘친불파’의 길에 접어 들었다.

예컨대 세조는 1448년(세종 30) 12월5일 “석씨(부처)의 도와 공자의 도는 하늘과 땅 차이”(<세종실록>)라고 단언했다. 왕위에 오른 세조로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세조는 “나는 호불의 군주다”(予好佛之主·1457년 4월9일·1459년 2월8일)라고 소신을 밝혔다. 오죽하면 이런 가짜뉴스까지 퍼졌다. 즉 “1464년 금강산 단발령에 이른 세조가 머리를 깎으려 했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그만 두었다”(<지봉유설>)는 것이었다.
이 가짜뉴스는 100년 이상 전해졌던 것 같다. 박순(1523~1589)은 “세상의 말 중에 ‘가짜 뉴스’도 많구나.(俗語空多誤) (세조께서) 이곳에 오신 것은 지방을 살피려는 것이었다(東巡是省方)”고 바로 잡는 시를 남겼다.

■교수형 당한 성균관대사성
이쯤되면 궁금증이 생길만 하다. 세조의 ‘친불’ 행보에 대소신료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절대 다수는 ‘지당하시다’는 반응이었다.
세종·문종 연간에 하찮은 불사를 벌일 때에도 “아니되옵니다”를 외치던 유자·관리들의 기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왜 이들은 ‘찍’ 소리도 못했을까. 자칫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가는 경을 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예가 있다. 당시 임금과의 술자리에 참석한 성균관 대사성 서강(?~1461)은 만취 상태에서 ‘세조의 친불 행보’를 비판했다.(<세조실록> 1461년 1월21~28일)
서강은 “전하께서 찌꺼기(불교)에 마음을 쏟지만 그 찌꺼기는 상도(常道·유교의 참된 도리)에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세조가 “취했냐”고 묻자 서강은 성난 목소리로 “신은 집에서도 불경을 읽는다. 불교를 잘 안다”고 따박따박 대꾸했다.
서강은 유학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수장(대사성)으로서 세조의 ‘친불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겼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술기운을 빌려 쓴소리를 해댄 것이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서강은 극형(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러니 누가 감히 입을 함부로 놀리겠는가.

■여색 멀리하고 짚신 신은 국왕
세조는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의 소유자였다.
언제는 만고의 성군처럼, 혹은 장난기 넘치는 군주처럼 신하들을 대했다. 하지만 순간 낯빛을 바꾸면 사람이 달라졌다.
희대의 폭군으로 변했다. 전국시대 한비자(기원전 280?~233?)의 ‘역린’ 고사가 딱 어울린다.(<한비자> ‘세난’)
“용은 성질이 유순하다. 길들이면 탈 수 있다. 그러나 용의 목에 ‘거꾸로 솟은 비늘’(역린·逆鱗)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를 죽인다.”
세조는 근본적으로 여색을 멀리하고 천성이 검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동야언>은 “세조는 보랏빛 무명옷을 입고 푸른 짚신을 신으며, 갓끈은 순목(純木)으로 달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고 전했다. 또한 세조는 부인 4명(정희왕후, 근빈 박씨, 숙원 신씨, 소용 박씨)만 두었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단 한 명의 후궁도 들이지 않았다.

■먹물 떨어뜨려 벼슬 낙점
이 바탕 위에 ‘평소의 세조’가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이런 일화가 있다. 즉 세조가 일찍부터 탐탁치않게 여긴 말단 관리가 있었다.
세조는 굳이 그 관리를 승진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뒤 내전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못마땅하게 여긴 관리가 금띠를 차고 자리에 앉아있지 않은가. 매우 의아스럽게 여긴 세조는 잔치 후 이조 관리에게 “그 자가 어떻게 저런 귀한 벼슬에 올랐는지 알아오라”는 명을 내렸다. 결과가 재미있었다. 그 관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청반(청요직)을 거쳐 그 자리까지 오른 것이었다.
세조는 무릎을 치며 “그래. 사람의 귀천은 운명에 있는 것이야. 임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소문쇄록>)라 했다.
세조는 ‘골때리는’ 인사권도 발휘했다. 원래 특정 벼슬을 내릴 때는 조정에서 올린 3명의 후보 가운데 한 명을 임금이 낙점하게 된다. 그러나 세조는 때로 많은 먹물을 붓에 묻혀 3명의 이름 위에 뿌려서 먹물이 떨어지는 곳에 낙점했다. 때로는 글을 모르는 궁인에게 “니가 한번 점을 찍으라”고 해서 궁인이 찍어준 인물을 뽑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것도 그 사람의 운명”이라 했다.(<연려실기술>)

■‘신정승, 구정승’ 아재개그
장난기 넘치는 ‘썰렁개그’ ‘아재개그’로도 유명했다. 단적인 예로 신숙주가 영의정일 때 구치관이 새로 우의정이 됐다.
그러자 두 정승을 급히 내전으로 불러 “경들에게 묻겠다. 잘 대답하면 괜찮지만 대답하지 못하면 벌주를 내릴 것”이라고 내기를 청했다. 그러면서 세조는 갑자기 “신정승”하고 불렀다. 신숙주가 “예”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세조가 “당신이 아니야. 난 새로 정승이 된 사람, 즉 신정승 ‘구치관’을 부른 것이네.”라 했다. 세조는 두 사람에게 벌주를 내렸다. 그런 다음 세조는 “구정승”을 불렀다.
우의정 구치관이 “예”하고 대답하자 세조는 또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잘못이네, 난 예전에 정승이 된 ‘구 정승’(신숙주)을 부른 거지 구치관 우의정을 부른 것이 아니네.”
임금은 또 두 사람에게 벌주를 내렸다. 임금이 다시 “구정승”을 하고 불렀다. 이번에는 영의정 신숙주가 이제는 속지 않겠다는 듯 “예”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세조는 “아니네, 난 ‘구치관 정승’을 부른거야”라 했다. 또 벌주가 내려졌다.
임금은 또 ‘신정승’ ‘구정승’라고 번갈아 가며 불렀는데 두 정승은 두 번 다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세조는 “임금이 불러도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절이 아니다.”라며 또 벌주를 내렸다.
하루종일 벌주를 마셔댄 두 정승은 만취했다.(<필원잡기>)

■술김에 건드린 역린
그러나 그런 ‘아재개그’의 달인 군주였지만 역린을 건드리면 어찌 되었을까. 계유정난으로 2등공신이 된 양정(?~1466)이 그랬다.
1466년 6월8일 도성으로 돌아온 평안도절제사 양정을 위해 세조가 술자리를 베풀었다. 양정은 변경 지역을 전전하는 처지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양정인 세조에게 “이제 그만 쉴 때가 되었다”면서 “(세자에게) 양위하시라”고 몇 번 씩이나 권했다. 그러자 세조는 “그래, 양위하겠다”면서 “옥새를 세자에게 넘기라”고 명했다. 이날의 술자리는 결국 양정이 참수형을 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임금의 팔 꺾은 신숙주
오싹한 이야기가 또 있다. 세조가 평소 ‘나의 위징’으로 평가한 신숙주의 예를 들어보자.
위징(683~643)은 만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당 태종(626~649)에게 직간을 서슴치않은 명재상이었다.
세조는 그런 위징을 신숙주의 수식어로 삼을만큼 아꼈다. 게다가 두사람은 1417년 닭띠 동갑내기로 흉허물이 없었다.
어느 날 세조와 신숙주 모두 술에 엄청 취했다. 이때 세조가 신숙주의 팔을 꺾으며 “아프냐. 그대도 내 팔을 꺾으라”고 했다. 역시 만취한 신숙주가 임금의 팔을 꽉 잡았다. 세조가 “아프다”고 살짝 비명을 질렀다. 이때 마침 곁에 있던 세자(예종)의 낯빛이 변했다.
세조는 정색한 세자 “나는 괜찮은데 너는 괜찮지 않구나”라 했다. 이후에도 즐겁게 술을 마신뒤 자리를 파했다. 신숙주도 집에 돌아갔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명회(1415~1487)가 문지기한테 일렀다.

“빨리 신숙주의 집에 가봐라. 신숙주는 아무리 술에 취해도 등불을 켜고 책을 읽고 자는 습성이 있다. 오늘은 절대 그렇게 하면 절대 안된다. 빨리 가서 그냥 인사불성인 것처럼 뻗어 자라고 일러라.”
문지기가 가보니 과연 신숙주가 등불을 켜고 책을 읽고 있었다. 문지기는 한명회의 말을 전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세조가 한밤중에 내시를 보내 “신숙주가 뭐하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한 것이다. 내시가 가보니 신숙주는 잠자고 있었다.
만약 신숙주가 평소 습관대로 불을 켜고 책을 읽고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정신이 있는데도 임금의 팔을 꺾은 불충죄를 저지른 격이 되는 것이다. 내시를 시켜 신숙주가 정말 술에 취했는지 알아보았던 세조도 참 대단한 인물이다.

■“넌 불교 안 믿어도 돼!”
물론 세조는 친동생과 조카 등을 무자비하게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세조실록>은 “세조가 현호색을 가미한 칠기탕을 먹고 가슴과 배의 아픈 증세가 완화됐다”(1466년 10월2일)고 했다. ‘현호색’은 주로 가슴이나 배에 있는 어혈을 없애 통증을 진정시킬 때 쓰는 약재다.
또한 <동의보감>에 따르면 칠기탕은 근심하고 놀라고 무서워하는 등 신경정신과적 원인으로 생긴 가슴과 배의 통증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 세조의 마음병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불교에 천착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대를 이은 불교 숭상’은 원치 않았다. 세자(예종)에게는 또 이런 말씀을 전한다.(<세조실록> 1463년 10월11일)
“나는 부처를 숭상하여 사찰을 여럿 조성했다. 그러니 이것은 쓸데없는 일이다…너는 네 아비가 부처를 숭상한 것을 본받을 필요가 없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인물이 세조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세조의 손에 죽은 단종과 사육신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세조의 ‘여러 얼굴’을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세조 연간에 백성들이 길거리에서 떠나갈 듯 ‘태평성대의 노래’를 불렀다지 않은가.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국립조선왕실록박물관, <1466, 강원도로 떠난 왕의 순행>(특별전 도록), 2026
한강지, '오대산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동국대 석사논문, 2006
이정주, '세조 후반기 순행과 불교' <사총> 105집, 고려대 역사연구소, 2022
이병련, '조선조 세조의 불교진흥책에 대한 일고찰', 동국대석사논문, 1986
김종명, '세조의 불교관과 치국책', <한국불교학> 통권 58호, 한국불교학회, 2010
문화재관리국,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조사보고서>, 1984
박윤미, '오대산 상원사 불복장 저고리에 관한 고찰', <불교문예연구> 20집, 동방문화 대학원대 불교문예연구소, 2022
염중섭, ' 세조의 금강산과 상원사 거둥에서의 신이영응 설화에 대한 검토-상원사중창과 강원도 거둥을 중심으로', <불교학연구> 51호, 불교학연구회,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