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치혀를 조심하라’…구설수에 세상이 바뀌고, 사람이 죽었다
‘세치혀’는 참으로 절묘한 표현이다. 3치는 약 9.09㎝(1치=3.03㎝) 정도인데, 본래 인간의 혀가 약 10㎝라니 아귀가 맞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 ‘세치혀’는 단순히 혀의 길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즉 겨우 3치 정도 밖에 안되지만, 그렇게 짧은 혀에서 나오는 한마디가 사람을 살렸다 죽였다 한다, 즉 그렇게 파급력이 강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로 쓰인다.

■“혀는 있구려!”
‘혀’와 관련된 가장 웃기는 인물로는 전국시대 유세가인 장의(?~기원전 390)를 꼽을 수 있다. 진나라 재상이 된 장의는 ‘세치혀’ 하나로 연·조·한·위·제·초의 연합(합종책)을 깨고 6국가와 1대1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연횡책) 진나라 천하통일의 기틀을 다지게 만든 외교관이다,
젊은 날 장의의 ‘혀’ 일화가 재미있다. 어느 날 장의는 초나라 재상 집에서 사라진 옥(玉)을 훔쳤다는 누명을 뒤집어 쓴다. 장의는 변명할 틈도 없이 몽둥이 세례를 받는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돌아온 남편을 보고 부인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러자 장의가 한마디 했다.
“내 혀가 아직 있는지 봐 주구려.(視吾舌尙在不)” 부인은 기가 막힌 듯 웃으며 장의가 내민 혀를 바라보고 말했다.
“혀는 있구려!(舌在也)” 그러자 장의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대꾸했다. “그럼 됐소!(足矣)”(<사기> ‘장의열전’)
이때 장의의 세치혀가 무사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6국 연합국이 진나라의 천하통일을 막거나 지연시켰겠고, 중국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혀는 몸을 베는 칼
장의의 ‘세치혀’가 세상을 바꾸었듯 말 한마디의 무게는 필설로 다할 수 없이 무겁다.
<사기>는 “뭇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무쇠도 녹일 수 있고, 폄훼가 쌓이면 뼈를 녹일 수도 있다.(衆口삭金 積毁銷骨)”(‘장의열전’)라 했다,
이 말은 가까스로 ‘세치혀’를 보전한 장의가 위나라 왕을 설득하며 했던 말이다. 여기에서 유명한 ‘중구삭금’과 ‘적훼쇄골’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또 효자의 대명사인 증삼(증자·기원전 505?~435?)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리에 퍼졌다. 이를 들은 증삼의 어머니는 “내 아들이 그럴 리 없다”고 태연히 베틀에서 베를 짰다. 그러나 두번째, 세번째로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을 계속 전하자 어머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담을 넘어 달려나갔다.

증삼의 어머니 조차도 세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하면 그토록 인자하고 효심이 깊은 아들을 불신하게 된다는 뜻이다.(<전국책> ‘진책2’)
이와 비슷한 성어로 심지어 저잣거리에서도 세사람이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믿게 된다는 ‘삼인성호(三人成虎)’가 있다.(<전국책> ‘위책2’)
더욱 재치있는 성어가 있다. “말(舌)은 네 마리의 말(馬)이 끈 마차(駟)보다 빠르다”는 뜻인 ‘사불설급(駟不及舌)’이다,(<논어> ‘안연’편)
그 뿐인가. 당나라 말기 정치가인 풍도(882~954)는 다름아닌 ‘혀’를 주제로 한 시를 썼다. 이름하여 ‘설시(舌詩)’이다.
그 시는 “입은 재앙이 부르는 문이고 혀는 몸을 베는 칼(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전당서>)로 시작한다.
그 시에서 ‘구화지문(口禍之門)’ ‘설참신도(舌斬身刀)’라는 성어가 나왔다.

■공자의 썰렁개그
오죽하면 공자까지도 ‘농담’으로 한마디 했다가 제자의 ‘정색’으로 찔끔했을까. .
즉 공자가 어느날 제자 자유가 다스리고 있던 고을(무성·武城)에 갔다. 마침 고을 곳곳에서 비파를 타며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요순시대의 ‘고복격양가(鼓腹擊壤歌)’와 같은 태평성대의 노래소리였다. 공자가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농을 던졌다.
“어째 닭 잡는데 소잡는 칼을 쓰는 것 같구나.(割鷄 焉用牛刀)”
‘야유’가 분명했다. 견문발검(見蚊拔劍), 즉 모기를 잡으려고 칼을 빼든다는 고사가 있지 않은가.

이 정도 작은 고을을 다스리면서 뭐 그리 거창한 ‘예악(禮樂)’을 펼치냐는 힐난 같았다. 자유가 이 대목에서 낯빛을 바꾸며 발끈한다.
“선생님께서는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아낀다(君子學道則愛人)’고 하지 않으셨나요.”
자유는 빈정이 상했다. 고을 사람들에게 음악과 예의를 가르침으로써 선생의 높은 뜻을 실천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스승이 야유를 날리다니…. 제자의 바뀐 얼굴을 본 공자가 ‘급당황’하며 서둘러 변명했다. “얘야. 앞의 말은 농담이었다.(前言戱之耳)”(<논어> ‘양화17’)
이것은 ‘엄근진’의 대명사인 ‘공자의 유일한 농담’으로 회자된다. 그러나 농담도 아무나 하는게 아니어서 주변은 ‘갑분싸’가 되었다.

■농담으로 세운 나라
공자의 일화는 새발의 피다. 소꿉놀이 말 한마디에 건국된 나라가 있으니 말이다.
주나라 두번째 왕인 성왕(재위 기원전 1042~1021)이 그 주인공이다. 성왕은 13살의 어린 나이에 주나라 2대왕이 되었다.(기원전 1042)
나이가 너무 어려 삼촌인 주공(周公·기원전 1100?~?)이 7년간 섭정했다. 어느 날 성왕이 역시 코흘리개 동생인 우(虞)와 소꿉장난 하고 있었다. 이때 성왕은 오동나무로 규(珪·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사용하던 신표)를 만들어 우(虞)에게 주며 말했다. “네 너를 당(唐)지역에 봉하노라.”
마침 삼촌(주공)이 ‘당’을 주나라 땅으로 편입시킨 직후였다. 그런데 이 소꿉놀이가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졌다.

곁에서 천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던 사일(史佚·사관)이 득달같이 나서 고했다.
“빨리 책봉의 날을 고르십시오. 우(虞·성왕의 동생)를 당나라에 봉해야 합니다.”
깜짝 놀란 어린 성왕은 “그저 농담으로 한 말(吾與之희耳)”이라 주워 담으려 했다. 그러나 사관의 반응은 단호했다.
“천자에게 농담은 금물입니다.(天子無희言) 천자가 말씀하시면 사관은 곧 그것을 기록하고….(言則史書之)”
성왕은 꼼짝없이 동생을 ‘당’ 땅에 봉해야 했다. ‘당’은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서남부 100리나 되는 넓은 곳이었다. 성왕의 동생인 우가 세운 나라가 바로 춘추시대 진(晋)나라였다. 진나라를 일컬어 ‘중원’이라 했다. 중국의 중심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던 춘추시대의 최강국이었다.
훗날(기원전 453) 조·한·위나라 등 삼진(三晋)으로 갈라지면서 중국은 전국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철부지 천자의 ‘혀’가 중국 역사를 만들었다.

■취중 인사
이런 주 성왕을 벤치마킹한 조선의 군주가 있었으니 바로 연산군(재위 1494~1506)이다.
1503년(연산군 9) 11월21일 밤 연산군은 대소신료들과 함께 질탕한 술판을 벌인다. 임금과 신하 모두 인사불성이 되었다.
이때 연산군은 술김에 참의 한형윤(1470~1532)에게 신발까지 벗어주면서 “너를 이조참판으로 삼는다”고 약속했다. 또 김감(1466~1509)에게도 “너에게 지성균관사(성균관 정2품)를 시켜준다”고 했다. 다음날(11월22일) 아침 술에 깬 연산군은 “어제 김감과 한형윤의 벼슬을 올린다고 했지. 내 아무리 취중 약속이었다 해도 빈말이 되게 할 수 없다.”면서 임명장을 주었다. 그러면서 “옛날 나뭇잎(오동나무 잎)을 오려 글을 써서 벼슬을 준 자(주 성왕)가 있다”면서 주 성왕과 동생(우)의 ‘동엽작희(桐葉作희)’ 고사를 인용했다.

■농담의 대가
피바람을 부른 한고조 유방(기원전 202~195)의 ‘입’도 도마 위에 오른다. 고조의 조강지처이자 정부인은 여태후(기원전 241~180)였다. 그런데 고조에게는 따로 총애하는 후궁(척부인)이 있었다. 고조는 척부인이 낳은 아들 여의를 더 예뻐했다.
고조는 이미 태자로 책봉된 효혜제(여태후의 아들)를 폐위시키고 척부인의 소생으로 바꾸려 했다. 급기야 기원전 198년 태자태부인(태자의 스승) 숙손통에게 농담을 칭하면서 태자 교체의 뜻을 넌즈시 전했다. 그러자 숙손통은 그게 농담거리가 되냐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께서는 조강지처를 버리시렵니까. 새 태자를 세우시려면 저의 목을 쳐 그 피로 이 땅을 더럽히세요.”
숙손통의 거친 반발에 고조는 “경은 그만하라! 난 단지 농담한 것 뿐이다.”라며 쩔쩔 맸다. 숙손통은 “어찌 천하를 가지고 농담할 수 있냐. 천하의 근본인 태자가 흔들리면 천하가 진동한다”고 반발했다. 결국 고조의 ‘농담을 빙자한’ 태자 교체의 속내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고조의 ‘헛된 농담’은 훗날 무시무시한 피바람을 불렀다. 이 사건으로 앙심을 품은 여태후는 고조가 죽은 뒤 척부인과 여의에게 잔인하게 복수한다. 여의를 독살한 뒤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눈알을 뽑고 귀를 태운 뒤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였다. 그런 뒤 돼지우리에 던져넣고는 사람들에게 ‘사람돼지(인체·人체)’라 부르도록 했다. ‘한마디 말’의 결과는 이처럼 참담했다.

■‘아비의 욕정’의 산물
한마디 말이 빌미가 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고초를 겪게 된 사례도 많다. 공자의 20대손인 공융(152~208)이 대표적이다.
당시 정권을 잡아 유가적 가치를 앞세운 조조는 이 공융에게 높은 벼슬을 주고 우대했다. 하지만 공융은 지속적으로 조조의 심기를 건드리는 언행을 일삼았다. 조조는 그런 공융을 꼴보기 싫어했다. 결국 조조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208년 8월 공융을 공격하는 상소문이 올라왔다.
“공융이 (평민 출신의) 예형과 이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아비가 자식에게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따지고보면 (아버지의) 욕정이 결과로 나타났을 뿐 아닌가. 자식 또한 어미에게 또한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마치 병 속에 있던 물건을 꺼낸 것’과 같지 않은가.”
이게 무슨 망발인가. 자식이란 아버지의 욕정에서 낳은 결과물이고, 어머니는 그저 뱃속(병)에서 아이를 꺼낸 존재일 뿐이라는 발언이었다.
유교의 기본 덕목인 ‘삼강오륜’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대화가 아닌가. 그러자 평소 ‘두고 보자’로 호시탐탐 노리던 조조는 ‘패륜아’의 죄목을 뒤집어 씌었다. 결국 공융은 참형에 당하고 말았다.(<후한서> ‘공융전’, <삼국지> ‘위서·공융전’)

■김처선의 잘린 혀
공융의 죽음과는 결이 다른 조선조 내관 김처선(?~1505)의 ‘잘린 혀’도 빼놓을 수 없다.
김처선은 성종의 총애를 받아 정2품(판서급) 자헌대부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러나 김처선의 운명은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급전직하한다.
<연산군일기>는 “연산군이 궁중에서 술에 몹시 취해서 임금을 꾸짖은 환관 김처선을 죽였다”(1505년 4월1일)고 했다. <소문쇄록>은 그날의 일을 자세히 기록했다. “김처선은 어둡고 음란한 연산군에게 매번 정성을 다해 간언했다. 연산군은 노여움을 속에 쌓아두고 있었다. 급기야 임금이 궁중에서 처용놀이를 했는데 음란함이 지나쳤다.”
그 날(1505년 4월1일) 역시 거나한 술자리가 벌어졌고, 작심한 김처선이 독설을 퍼부었다.
“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지만, 고금에 전하와 같은 짓을 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연산군이 크게 성을 내며 화살을 쏘았고, 그 화살이 김처선의 가슴을 맞혔다. 그러나 김처선은 그치지 않았다.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연산군이 화살을 더 쏘아 땅에 넘어뜨리고, 그 다리를 끊고서 “일어나 다니라”고 명했다.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 있습니까.”(김처선) 이때 연산군은 김처선의 혀를 잘랐다. 그런 뒤 김처선의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냈다. 이날 김처선의 잘린 혀는 천고에 빛날 무거운 무게를 감당해내고 있다.

■머리핀으로 콕콕
‘잘린 혀’하면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웅변가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기원전 106~43)가 떠오른다.
키케로는 원로원 의원-집정관을 역임한, 로마 공화정의 대표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키케로는 생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기원전 83~30)를 맹비난하는 연설문(<필리피카>)을 쓰면서 안토니우스의 아내인 풀비아(기원전 83~40)까지 격렬하게 인신공격했다. “풀비아와 결혼하는 남편마다 비명횡사 한다”는 것이었다.
명백한 ‘가짜뉴스’였다. 풀비아의 전 남편 둘은 정적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풀비아는 이를 갈았다.
마침내 기원전 43년 안토니우스에게 죽임을 당한 키케로의 머리와 두 손이 잘려 로마 광장에 걸렸다. 이때 풀비아는 키케로의 머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혀를 뽑아낸 뒤 자신의 머리핀으로 그 혀를 여러 번 찔렀다.(카시우스 디오의 <로마사>)
말 그대로 ‘키케로가 놀린 세치혀’에 무자비한 복수극을 가한 것이다.

■요사스런 자식
도를 지나친 ‘디스’의 예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일 것이다.
김정희는 “서화를 감상하는 데는 금강안(金剛眼) 혹리수(酷吏手) 같아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즉 사찰을 수호하는 금강 역사의 눈처럼 무섭게, 그리고 세금을 거두는 혹독한 세무관리의 손끝처럼 치밀하게 서화를 감상해야 진가를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워낙 다재다능한 김정희였기에 그럴 자격이 있다는 평도 나온다. 그러나 정도가 심했다. 당대의 명필로 꼽히는 원교 이광사(1705~1777)를 두고 “붓 잡는 법(용필·用筆)과 먹 쓰는 법(용묵·用墨)도 모른다”고 ‘디스’했다. 서예의 대가인 원교 이광사에게 기본이 안됐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유배길에서 만난 전주의 명필 이삼만(1770~1847)의 글씨를 보고는 “노인장은 이 고장에서는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라 했다. 세상에 이런 수모가 어디 있을까. 나이도 16살 위인 분(이삼만)에게 이런 무례가 어디 있을까. 또 그림의 대가인 우봉 조희룡(1789~1866)의 그림을 두고는 “조희룡 같은 무리(輩)는…가슴 속에 문자기(文字氣)가 없다”고 디스했다.
조희룡의 작품에서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 즉 ‘문자의 향기와 책의 기운’이 배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정희의 혹평 때문에 이 세 사람은 16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어떠했겠는가. 1830년 부사과 김우명이 올린 상소문을 보라. 김정희에 대한 적나라한 평가가 나와있다.
“김노경(추사의 부친)의 요사스런 자식(김정희)은 항상 반론을 가지고 교활하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륜이 허물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순조실록> 1830년 8월27일)
오죽했으면 ‘요사스럽고 교활하다’는 악담을 들었을까. 그나마 벼루 100개의 밑창이 빠지고, 붓 1000자루가 몽땅붓이 되도록 글씨를 썼다고 자부한 김정희였기에 그 못말리는 잘난 척이 지금 이 순간까지 통하고 있다.

■발설지옥
김처선 처럼 진짜배기 혀를 쓸 때 말고는 섣불리 혀끝을 놀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새삼 양대 종교의 금언을 떠올린다. 우선 <성경> ‘잠언 14장’을 보자.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3절)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15절)
불교에서는 ‘발설지옥(拔舌地獄)’이 있다. 생전에 남을 모함하고, 거짓말 하고, 독설로 남에게 상처를 준 죄인이 가는 지옥을 가리킨다.

“발설지옥에서는…옥졸과 야차(귀신)가 쇠쟁기로 죄인의 혀를 갈기갈기…죄인의 혀를 뽑아…쇠쟁기로 갈고…쇠도끼로 죄인의 혀를 쪼갰는데….”
그러다면 어떤 죄인이 이 발설지옥으로 떨어지는가.
“남을 험담하고 미워하며 비방하였고, 선량한 사람을 헐뜯고 헛말을 전파하여 사실인 양 하였으며 갖가지로 저주한 죄인들이다. 이런 인연으로 이 지옥에 떨어졌으며 천만 겁을 지나도 벗어날 기약이 없다.”(<불설불명경> 8권)
섬뜩하지 않은가. 옥졸들이 집게로 죄인의 혀를 길게 뽑아내어 그것으로 밭을 갈 정도로 넓게 펼쳐 고통을 준다는 것이다. 세치혀, 제대로 놀려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말씀이다. ‘말 발’로 시쳇말로 ‘관종’이 되고 싶은가. 혹시 이른바 ‘해석 권력’을 무기로 온 세상을 쥐락펴락하려 하십니까. 제발 그 혀를 조심하라.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