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래자 思來者

궁예가 휴전선에 누워있다…풍운의 군주가 꿈꾼 ‘영원한 평등·평화 세계’

이기환기자 2026. 6. 22. 17:20

얼마 전 필자가 한국전쟁 때 미국이 ‘핵무기 투하’를 구상했고, 그 핵심지역으로 ‘철의 삼각지대’(철원-평강-김화)을 꼽았다는 기사를 썼다. 미국은 왜 이 ‘철의 삼각지대’에, 한때 6~10발이나 되는 핵무기를 투하할 생각을 했을까.

‘철의 삼각지대’는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전방지역 고지가 아니다. 삼각형의 북쪽 꼭짓점인 평강 오리산(해발 453m)에서 10여 차례 분출한 용암이 흘러나와 평강(해발 330m)과 철원·김화(해발 220m)에 2억평이 넘는 드넓은 평원을 이룬 곳이다.

그러니 그 평원을 둘러싸고 있는 오성산(1062m)·고암산(780m·김일성고지) 등과, 백마고지·피의500능선·낙타고지 등은 빼앗고 빼앗기는 혈투의 장이 되었다. 그 결과는 무승부였다. 혈투 끝에 ‘철의 삼각지대’는 남(철원·김화)과 북(평강)이 대략 반가량 씩 나눠 가졌다.

일제강점기에 찍은 궁예의 철원 철원성 보물 석등.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찍었다. 멀리 철원 금학산(947m)과 연천 고대산(831m)이 보인다. 그 쪽은 밝고, 이 쪽(도성 쪽)은 어두컴컴하다. 폐허에 덩그러니 석등 하나만 우뚝 솟은 그런 느낌이 든다.

■군사분계선을 반으로 가르는 도성
이 ‘철의 삼각지대’엔 한국전쟁 만큼이나 극적인 스토리가 하나 더 숨어 있다.
1100여 년 전 비운의 군주 궁예왕(재위 901~918)이 이곳(철원 풍천원)에 도성(태봉국 철원성)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옛 지도에 현재의 군사분계선을 표시해보면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군사분계선이 궁예의 태봉국 철원성을 딱 반으로 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지적도에 따르면 도성의 외곽성은 12.5㎞, 내곽성은 7.7㎞에 이른다. 백제의 풍납토성(3.5㎞), 신라 월성(1.8㎞), 고구려 국내성(2.7㎞)에 비할 바가 아니고, 발해 상경성(16.3㎞), 한양도성(18.6㎞)에 버금가는 규모이다. 
일제강점기에 찍은 유리건판 사진에는 도성의 외성에서 큼지막한 귀부(비석받침돌)가 확인되고, 성벽의 흔적이 곳곳에서 보인다.

그 때의 사진 가운데 필자의 시선을 붙잡는 사진 2종이 있다,

'철의 삼각지대' 한복판에 남아있는 궁예의 태봉국 철원성. 군사분계선을 정확하게 반으로 가르고 있다. 1100년전 궁예의 야망과 좌절을 웅변하는 듯 하다. 성은 외성 12.5km, 내성 7.7km 정도로 추정되며, 궁성은 북방한계선 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디.


■폐허 속 보물 석등
하나는 철원성 폐사지(봉선사터)에서 확인된 ‘석등’이고, 또 하나는 철원성 왕궁 앞 내원(사찰)에 우뚝 서있는 것으로 보이는 ‘보물 석등’이다. 봉선사터에서 확인된 석등은 ‘풍천원 보물 석등’의 반 정도 크기임을 알 수 있다.

도성 내에 최소한 두 곳(내원과 봉선사)의 사찰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특히 잔존 높이 3.5m(11.5척)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보물 석등’과, 그 사진이 필자의 심금을 울린다. 이 석등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 8월27일 처음으로 조선의 보물·고적·천연기념물을 지정할 때 보물 118호로 등재했다.

이 보물 석등을 가깝게 찍은 사진을 보라. 크기를 가늠하려고 한 사람을 곁에 세우고 활영했다. 석등의 키는 이 남자를 두 명 세운 것보다 훨씬 크다. 이 석등을 아주 멀리서 찍은 사진은 절로 필자의 감성을 흔들어 놓는다. 아마도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찍은 것 같다. 저 멀리 철원 금학산(947m·왼쪽)과 연천 고대산(831m·오른쪽)이 배경으로 서있는데 그 쪽은 밝고, 이 쪽(도성 쪽) 주변은 어두컴컴 휑하다. 폐허의 느낌을 준다. 남쪽→북쪽을 향해 찍은 사진도 남아있다. 북쪽 배경에 평강 고원의 넓은 지평선이 보인다. 두 사진으로 보물 석등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궁예가 태봉국 철원성을 건설한 풍천원 벌판, 군사분계선을 반으로 가르고 있다. 지금은 갈 수 없는 땅이다.


■4m에 육박한 석등
이 사진을 보고 필자는 조선전기 학자·시인인 서거정(1420~1488)의 시(‘철원’)를 떠올렸다. 
“나라가 부서져 한 고을이 되었구나. 태봉의 자취에 사람은 수심에 가득 차네. 지금은 미록(麋鹿ㆍ고라니와 사슴)이 노는 곳…가소롭다 궁예왕은 멋대로 놀기만 일삼았구나.…”(<사가시집보유> 제3권·시류)
이 시처럼 ‘폐허에 덩그러니 서있는 보물 석등’은 대동방국의 기치를 들었던 궁예의 야망과 좌절을 상징한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재산대장에 따르면 ‘보물 석등’의 잔존높이는 11.5척(3.5m)에 이른다. 없어진 상륜부(석등·불탑의 꼭대기에 붙는 쇠붙이 장식)까지 치면 3m80~3m90에 이를 것으로 짐작된다. 전통적인 국내 석등은 커봐야 대개 3m 안팎이다. 불국사 석등의 높이는 2.1m다. 그에 비하면 4m에 육박하는 철원성 석등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석등은 기둥(간주석)이 8각이 아니라 원통형에 중앙 마디가 도드라진 이른바 장구형(고복형)이라는 특징이 있다. 
풍천원 보물 석등은 ‘눌린 원통형’(편구형)인 기둥(간주석)을 제외한 전 부재가 평면 팔각형을 이루고 있다. 크기도 크지만 간주석과 하·상대석 등에 아름다운 장식조각이 돋보인다. 아마도 석조 미술품의 제작 전통에 정통한 전문 장인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철원성 궁성 앞 사찰(내원)에 서있었던 보물 석등. 1934년 8월27일 보물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명주(강릉) 출신
주로 경주나 5소경(통일신라시대 지방행정단위) 중심으로 활동했거나 큰 규모의 사찰 등에 소속된 장인들일 것이다.   
그 중 ‘보물 석등’은 5소경 중 북소경(명주·강릉) 출신 장인의 작품을 가능성이 짙다는 분석이 있다. 즉 이 석등은 886년(신라 정강왕 원년) 무렵 조성된 양양 선림원지 석등과 기법이나 문양이 흡사하다. 강릉 굴산사지 부도(889~890)와도 제작기법이 닮았다. 
명주, 즉 강릉은 궁예가 기훤(891)-양길(892)의 휘하에서 벗어나 600명을 이끌고 와서 처음으로 자립한 곳이다. 
궁예는 이곳에서 군사 3500명을 14개 부대로 나뉘어 주변 고을을 평정했다.(894) 이듬해(895)에는 부약(김화)·철원 등 10여 개 군현을 깨뜨렸다. <삼국사기>는 “궁예가 사졸과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사사로움없이 상벌에도 공평했다”면서 “백성들은 궁예를 장군으로 삼았다”고 전했다. ‘보물 석등’은 아마도 궁예를 따르던 명주 출신 인물들이 제작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철원성 외성 밖 봉선사터에 서있는 석등. 일제강점기에 찍은 유리건판 사진이다.

그 중에서도 <고려사>에 등장하는 명주 출신으로 승려가 된 허월이 눈에 띈다. 894~895년 사이 궁예를 따라 철원에 온 것으로 보이는 허월은 승려가 되어 궁궐 내 왕실 사찰인 내원에 머물고 있었다. 이 풍천원 보물 석등 역시 허월의 지휘 아래 같은 명주 출신 장인들이 힘을 모아 제작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고려사>는 허월의 특별한 이야기를 전한다. 즉 허월은 궁예를 따라왔지만 왕건의 쿠데타-즉위 이후에도 내원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왕건에게 고민이 있었다. 허월의 아들인 김순식이 여전히 명주(강릉)에서 항복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민이 컸던 태조 왕건은 당시 내원의 주지였던 허월을 명주로 보내 아들의 귀순을 종용했다. 마침내 허월의 아들 김순식은 고려에 귀부하게 된다. 태조 왕건은 이 가문에 왕씨 성을 하사한다. 

일제강점기 사진에 따르면 태봉국 도읍(철원성)에는 최소한 두 곳의 사찰이 존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곳은 궁성 앞 내원(왕실사찰)과 외성 남대문 빆에 조성되었던 봉선사이다.


■대동방국의 기치
그렇다면 이 쯤에서 한가지 궁금증을 풀고 가야 한다. 궁예는 국호를 고려(고구려·901)-마진(904)-태봉(911) 등으로 계속 바꾸었다. 그 와중에 도읍도 철원(896)-송악(개경·898)-철원(905) 등으로 계속 옮겼다. 대체 왜 그랬을까.
우선 철원(현 동송읍 추정)에 첫번째 도읍을 정한 궁예는 곧 송악(개경)으로 천도한다. 왕건 집안을 비롯한 패서(평안-황해-경기서북) 세력을 포섭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옛 고구려의 부흥을 꾀하던 세력이었다. 그 때문에 궁예는 901년 스스로 왕으로 칭한 뒤 “평양의 옛 도읍에 잡초만 무성하니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하고 ‘국호=고려’라 했다. 

‘보물 석등’의 규모는 엄청난다. 잔존높이는 11.5척(3.5m) 정도인데, 없어진 상륜부(꼭대기 쇠붙이 장식)까지 친다면 3m80~3m90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궁예는 호족세력의 텃밭인 송악에 계속 머물 수 없었다. 그들에게 휘둘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궁예는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인 철원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삼국사기>는 “903년 재천도를 목표로 철원-부양(평강)의 산수를 둘러본 궁예는 904년 청주민 1000가구를 철원성에 이주시키고 그곳을 서울(京)로 삼았다”고 전했다. 
그렇게 ‘고구려 이미지’를 털어버린 궁예는 더 큰 세상을 꿈꾼다. 국호를 ‘마진(摩震·904)’으로, ‘태봉(泰封·911)’으로 계속 고친다. 
여기에 깊은 뜻이 숨어있었다. ‘마진’은 ‘마하진단(摩訶震檀)’의 줄임말이다. ‘마하’는 범어(梵語)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동방을 가리킨다. ‘대동방국’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다시 ‘태봉’으로 바꾼다. <주역>에서 ‘태(泰)’는 ‘천지가 어물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고 했다. ‘봉(封)’은 ‘봉토’를 가리킨다. 궁예는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를 추구하는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철원성에 둥지를 튼 궁예는 국호를 ‘마진(摩震·904)’으로, ‘태봉(泰封·911)’으로 계속 고친다. '마진'은 ‘마하진단(摩訶震檀)’의 줄임말이다. ‘마하’는 범어(梵語)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동방을 가리킨다. ‘대동방국’이라는 뜻이다. 그랬다가 다시 ‘태봉’으로 바꾼다. <주역>에서 ‘태(泰)’는 ‘천지가 어물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고 했다. ‘봉(封)’은 ‘봉토’를 가리킨다. 궁예는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를 추구하는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풍천원 들판에 세운 미륵세상 
그렇다면 궁예가 꿈꾸는 영원한 평등세계와 철원 풍천원 들판은 대체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걸까. 
무엇보다 당대 어지러운 후삼국 시대에 왜 방어하기도 어려운 평원 지역에 자리를 잡았을까. 굳이…. 이것이 수수께끼였다
그와 관련해서 주목할만한 연구가 발표됐다. 연구는 <삼국사기> ‘열전·궁예’에서 그 단서를 찾는다.    
“궁예는 미륵불(미래에 출현해 중생을 구제할 부처)을 자처…스스로 경전 20여권을 지었는데…때로는 정좌(正坐)하여 강설(講說)했는데….”
그런데 불경에 궁예가 풍천원 들판에 화려한 도성을 쌓은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불미륵내시경>(미륵보살이 인간세에 와서 설법하는 내용을 기록한 경전)의 내용이 핵심이다. 
즉 “미륵불이 나오려 할 때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가 없어 땅의 판판함이 마치 숫돌과 같다”고 했다. 
이제야 궁예가 태봉국 철원성을 2억평에 달하는 ‘철의 삼각지대’ 한복판인 철원 풍천원 들판에 세웠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지러운 후삼국시대에 궁예는 왜 평지인 철원 풍천원 들판에 도성을 마련했을까. 불경에 그 단서가 있다. <불설미륵내시경>은 “미륵불이 나오려 할 때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가 없어 땅의 판판함이 마치 숫돌과 같다.”고 설명했다.


■금·은·수정으로 장식된 성 
그 뿐이 아니다. <미륵내시경>에는 장차 미륵이 태어날 성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계두발성은 왕이 국력으로써 성을 만든만큼 성의 둘레가 480리이고 흙으로 성을 쌓고 그 위에 판자를 붙이고 금·은·수정 등 값진 보물로 장식하였느니라. 사방 각각 12개의 문이 있어 문마다 조각하고 다시 금·은·유리·수정 등 값진 보물로 장식했느니라.”
미륵이 태어나고 머물 장소는 흙성, 즉 토성임을 알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태봉국 철원성의 경우 왕궁성 일부가 돌로 담장을 만들었거나 석성일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토축을 기본으로 한 토성이다.
또 다른 불경인 <불설관 미륵보살 상생 도솔천경>도 주목거리다. 이 경전에는 도솔천에 화려한 궁전을 짓는 내용이 나온다. 

<미륵내시경>은 또 장차 미륵이 태어날 성을 자세히 묘사했다. 즉 “왕이 국력으로써 성을 만든만큼 성의 둘레가 480리이고 흙으로 성을 쌓고 그 위에 판자를 붙이고 금·은·수정 등 값진 보물로 장식하였느니라. 사방 각각 12개의 문이 있어 문마다 조각하고 다시 각종 보물로 장식했다"고 했다.

“이 궁전은 모든 담이 7가지 보배로 이뤄져있다. 이 7가지 보배에서는 500억가지 광명이 흘러나오고 광명 속에는 500억 연꽃이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궁예는 미륵을 자처했다. 그런데 미륵이 사는 곳은 미륵 정토이며, 그것은 바로 도솔천(미륵보살이 머무는 내원과 천인들이 즐거움을 누리는 외원으로 구성된 천상의 정토를 가리키는 이상세계)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궁예는 철원성을 조성하면서 ‘미륵보살(궁예)’이 다스리는 이상세계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 도성은 궁예가 청주민 1000가구를 이주시키고 서울(京)로 삼은 뒤 실제로 도읍을 다시 옮긴 904~905년 사이에 축조되었을 것이다. 높이 4m에 육박하는 궁성 앞 보물 석등 역시 그 무렵 조성되었을 것이다. 

<미륵내시경>이 철원성 축조에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철원성의 경우 왕궁성 일부가 돌로 담장을 만들었거나 석성일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토축을 기본으로 한 토성이다.


■궁예의 관심법
하지만 궁예는 역사의 패자였다. 궁예가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세계’를 꿈꾸며 조성한 도성은 ‘사치의 대명사’로 낙인찍혔다.
특히 궁예가 철원으로 재천도하자 그동안 궁예를 도왔던 송악의 왕건 세력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여기에 도읍지 건설에 엄청난 공력을 쏟았고, 때마침 흉년이 들면서 민심이 돌아섰다. 기득권 세력은 이 약점을 파고 들었다.
“905년에 궁예가 새 서울(철원)에 들어가 대궐과 누대(樓臺)를 수리하였는데 극히 사치로웠다.”(<삼국사기> ‘열전·궁예’)
“궁예는 혹독한 혹정으로 백성을 다스리며~국토는 황폐해졌는데 오히려 궁궐만은 크게 지어~원망과 비난이 일어나….”(<고려사> ‘세가·태조’)

태봉국 철원성을 복원한 모습. 후삼국의 어지러운 시대에 광활한 평지에 도성을 건설했다. 영원한 평화가 깃드는 평등세계를 추구하는 궁예의 바람이 담겨있다.❘정성권 단국대 초빙교수 제공

특히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하면서 비판의 도가 심해졌다.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하고…직접 불경 20여 권을 지었으며 이를 비난한 석총 스님을 철퇴로 때려죽였다.”(<삼국사기> ‘열전·궁예’)
이 쯤에서 악명높은 ‘관심법’이 등장한다. <고려사>는 “914년 궁예가 반역죄를 터무니없이 얽어 하루에도 100여 명을 죽이니 장수나 재상 가운데 해를 입는 자가 열에 여덟아홉이었다”면서 궁예의 무지막지한 관심법을 설명한다.
“궁예는 ‘나는 미륵관심법을 체득하여 부녀자들이 몰래 간통을 한 것도 알 수 있다. 내 관심법에 걸리는 자가 있으면 곧 엄벌에 처할 것’이라 했다. 드디어 3척의 쇠절구공이를 만들어…그것을 불에 달구어 음부에 찔러 넣어…죽이니…아녀자들이 벌벌 떨었으며….”
대표적인 희생자가 바로 궁예의 부인 강씨였다. <삼국사기>는 “915년 궁예의 무도함을 보다 못한 부인 강씨가 간하자 궁예는 강씨가 다른 사람과 간통했다고 몰아붙였다. 강씨가 부인하자 ‘내가 신통력(관심법)으로 보았다’면서 강씨의 음부에 달군 쇠방망이를 쳐넣어 죽였다”고 했다. 왕건마저 ‘궁예의 관심법’으로 반역죄를 뒤집어 쓰고 죽임을 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고려사> ‘세가·태조’)

고려 건국 직후의 금석문인 ‘무의사 선각대사 탑비’(946·보물)에도 잔인한 궁예가 등장한다. 비문은 “의심 많은 궁예가 무고한 사람을 마구 죽였고, 유죄로 몰린 선각대사(형미·864~917) 또한 혐의를 부인했지만 한마디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도룩당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궁예는 '역사의 패배자' 낙인이 찍힌다. <고려사>는 “914년 궁예가 반역죄를 터무니없이 얽어 하루에도 100여 명을 죽였다"면서 특히 "나의 관심법에 걸리는 자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라 했다. 궁예는 특히 부인인 강씨에게 "네가 다른 자와 간통했다는 사실을 관심법으로 알아냈다"면서 강씨의 음부에 달군 쇠방망이를 쳐넣어 죽였다.


■비참한 최후 vs 철원의 독존신
결국 궁예는 918년 왕건을 비롯한 보수 호족들에 의해 축출된다.(918) 그의 최후는 너무도 비참하다.
“암곡(巖谷)으로 도망간 궁예가…굶주림이 심하여 보리이삭을 몰래 끓여 먹다가 부양(평강)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려사>)
그러나 역사서 든, 금석문 자료 든 궁예에 대한 평가는 어디까지나 승자의 것이다.
반면 1000년 이상 전승된 구비전설은 궁예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이다. 최남선이 궁예왕 묘가 있는 삼방협(三防陜ㆍ평강~안변 사이의 협곡)에서 채록하여 쓴 <풍악기유>의 한토막을 보자.

<고려사>는" 918년 궁예는 결국 왕건 등 호족세력에 일으킨 쿠데타로 미복차람으로 도망가 산골에 숨었다가 보리이삭을 몰래 끓여먹다가 부양(평강) 주민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고 전했다.

“구레왕(궁예왕)이 재도(再圖)할 땅을 둘러보는 데 어떤 중이…‘이 병목 같은 곳에 들어와 살 길을 찾는 것이 어리석다’ 하자…(궁예가) 아아 천지망아(天之忘我)로다 하고 심연을 향해 몸을 던지니~우뚝 선 채로 운명했다.”(시대일보 1924년 10월16일)
<풍악기유>는 이어 “(궁예왕은 이후) 이 지방의 독존신(獨存神)이 되었다”고 전했다. 또한 구비 및 지명전설에는 궁예왕이 추종세력과 함께 보개산성(포천 관인), 명성산성(철원 갈말), 운악산성(포천 화현) 등에서 치열한 항전을 벌인다. 

이밖에도 철원 중어성은 궁예가 군마(軍馬)를 조련한 ‘마성(馬城)’이라는 구비전설이 전승되어 왔다. 실제로 국가유산청 조사단은 2008년과 2019년 성벽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는 석렬(정렬된 돌무더기)을 관측했다. 

중어성은 태봉국 철원성에서 서쪽으로 12㎞ 떨어진 곳에 있다. 역시 비무장지대 이북인 경기 연천 신서면의 성산(해발 290m)에 쌓은 승양산성 역시 궁예 이야기가 구전되는 산성이다.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통치할 때 축조했다는 구전이 있다. 

그러나 1000년 이상 전승된 전설은 궁예왕에게 비교적 호의적이다. 1924년 육당 최남선이 궁예왕이 묻힌 곳으오 알려진 삼방협(안변~퍙강 사이 계곡)에서 전해지는전설을 채록했는데, "궁예왕이 깊은 연못에 스스로 몸을 던져 우뚝 선 채로 죽었으며, 주민들이 그렇게 그대로 금관을 씌우고 돌로 밀봉하여 묻었다고 기록했다. 최남선은 이 지방에서 궁예는 '독존신이 되었다'고 전했다.


■요원해진 공동발굴
지금 군사분계선을 딱 반으로 가르고 있는, 그래서 더욱 갈 수 없는 궁예왕의 태봉국 철원성…. 
그저 폐허의 한 가운데에 우뚝 서있는 보물 석등의 사진으로만 가늠할 수 있다. 지금 이 석등이 제대로 서있는지, 아니면 이마저 넘어져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아무리 구글 어스를 통해 바라본 위성 실시간 사진을 눈이 빠지도록 확대해봐도 구분되지 않는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지난 2018년 9월19일 남북한 정부가 교환한 이른바 ‘9·19 군사분야 남북합의서’를 떠올린다.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해 마련한 합의서의 2조 4항을 보자. ‘남북한 쌍방이 비무장지대 안의 역사유적에 대한 공동조사 및 발굴과 관련한 군사적 보장대책을 계속 협의하기로 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합의서에 따라 ‘남북한 공동발굴의 0순위’로 꼽힌 곳이 바로 태봉국 철원성이었다. 남북한 발굴팀이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공동 조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것만큼 확실한 평화의 메시지는 없을 듯 싶다. 하지만 이후 남북관계가 급냉되면서 다시 요원한 과제로 남게 되었다. 언제까지 먼발치에서만 바라보고 있어야 할까.   
필자는 여말선초의 문인 강회백(1357~1402) 역시 비감 넘치는 시(‘궁왕고도유감·弓王故都有感’)가 떠오른다.
“황폐하고 외로운 성이 성긴 숲 가운데, 꺾인 비석도 불에 탄지 오래되었구나. 고각소리 높은데 바람이 휘몰아치고, 해도 넘어가려는데 깃발만 펄렁펄렁, 산은 고국의 천년 한 머금었고….”(<동문선> ‘제17권 칠언율시’)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정성권, '태봉국 도성(궁예도성) 내 풍천원 석등',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탐구> 7,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1

정성권, '태봉의 불교조각과 철원 동송읍 마애불', <문화사학>, 제56호, 한국문화사학회, 2021

이재범, '후삼국시대 궁예정권의 연구', 성균관대 박사논문, 1992

이재,  '궁예도성의 현 실태와 남북공동조사의 필요성', <DMZ 평화적 이용과 남북 역사문화교류-철원 궁예도성 남북 공동조사 필요성>, 2015

하일식, '남북한 역사 서술에서 태봉의 위상-태봉도성 남북공동조사의 학술적 의의'(국회정책자료집),  <DMZ 평화적 이용과 남북 역사문화교류-철원 궁예도성 남북 공동조사 필요성>, 2015

유인순, '궁예왕 전설과 역사소설', <강원문화연구> 21권, 강원대 강원문화연구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