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즉흥곡의 달인’…’헐버트·나운규·BTS가 일깨운 ‘아리랑 DNA’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그룹 방탄소년단 BTS의 해외공연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떼창곡’이 있다. BTS의 새 앨범 제목인 한국의 대표 민요 ‘아리랑’(ARIRANG)이다.
해외 공연장에 모인 글로벌 관객들이 ‘Body to Body’에 삽입된 ‘아리랑’을 합창하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소름이 돋는다.
특히 ‘아리랑~’ 구절 앞에 등장하는 우리말 가사가 심금을 울린다. ‘~두 눈을 감지 않을 이 밤, 솟구치는 겨레의 마음~’
맞다. ‘아리랑’이야말로 ‘솟구치는 겨레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곡조이다.

■131년전 아리랑을 소개한 서양인
그런데 130년 전 한국인의 밑바닥 정서가 담긴 이 아리랑을 글로벌 무대에 알린 서양인이 있다.
그때까지 ‘아리랑’ 중 한 편을 서양 악보로 채보했다. 처음이었다. 그 이가 바로 미국인인 호머 헐버트(1863~1949)이다.
그렇다면 한국과 한국문화에 잘 모르는 서양인이 ‘아리랑’을 평가할 자격이 있을까. 헐버트 박사는 절대 간단한 인물이 아니다.
당대 뛰어난 한국사학자이자 교육자이며, 국어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평생을 한국의 독립운동에 투신한 독립투사이기도 하다.
헐버트는 1886년(고종 23) 9월 고종이 설립한 왕립 영어교육기관(육영공원) 교수로 초빙된 인물이다.
입국 후 ‘한글’의 매력에 푹 빠져 한글로 읽을 수 있는 세계지리서(<사민필지>·1891년 무렵)를 펴냈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서양의 보편적인 지식을 전하려 했던 것이다. 한글 전도사를 자처하기도 했다. 1889년(고종 26) <뉴욕트리뷴>에 한글의 매력을 소개했다.

그는 “조선에는 각 소리를 고유의 글자로 표기할 수 있는 진정한 소리글자(true alphabet)가 존재한다”면서 “모음은 하나 빼고 모두 짧은 수평, 수직의 선 또는 둘의 결합으로 만든 한글 조합의 과학성은 환상적”이라고 극찬했다. 신문에는 헐버트가 그려준 모음(‘ㅏ ㅗ ㅣ ㅜ’)이 그대로 실렸다. 1903년에는 ‘훈민정음 서문’을 영어로 옮기기도 했다. 1893년 시카고 국제설화 학술대회에서는 단군신화 등을 소개했다. 또 ‘한국의 속담’과 ‘한국의 시’ 등을 발표(<더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 1896·97)하면서 “세상 어느 민족도 봄의 풋풋함을 한국인보다 더 만끽하지 못한다”고 찬탄했다. 독립투사로 더욱 큰 족적을 남겼다. 세 번이나 고종의 비밀특사를 맡아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1905년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재임 1901~1909)에게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으려는 일본의 간계를 고발하는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는 특명을 맡았다. 또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일제의 참략주의를 고발하는 밀명을 받았다. 1909년 상해(上海) 덕화은행에 예치한 고종의 내탕금을 찾아오라는 특명도 맡았다. 그래서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을 사랑한 서양인’이라는 찬사를 듣는 분이다.

■시조-응접실-하치
그런 헐버트 박사는 ‘아리랑’을 어떻게 소개했을까.
헐버트가 <더 코리안 리포지터리·1896년 2월호)에 기고한 ‘한국의 성악(Korean Vocal Music)’ 글을 보자.
헐버트는 먼저 “한국 음악을 모르면 이러쿵 저러쿵 평가하지 마라”고 하면서 “한국 노래가 박자에 맞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시가 은율에 맞지 않는다고 혹평하는 것과 같다”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헐버트는 ‘한국의 성악’을 세가지로 분류한다.
그는 “고전 형식인 ‘시조(Si-Jo)’와 대중 형식인 ‘하치(Ha-Chi)’, 중간 형식인 ‘응접실 형식(the drawing-room style)’이 있다. 실제로 응접실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언급한다. 여기서 ‘시조’는 ‘시조창’을 일컫는다. ‘응접실 스타일’은 당시 서구 중간 계급의 주된 생활공간인 응접실을 무대로 펼쳐진 ‘응접실 희극’을 가리키는 듯 하다. 이 ‘응접실 희극’의 예시로 꼽은 작품이 ‘군밤타령’이다.
흥미로운 용어가 대중이 애호했던 ‘하치’이다. ‘하치’는 ‘아래 하(下)’에 사람이나 사물을 낮잡아 지칭하는 의존명사 ‘~치’를 붙인 어휘이다. ‘하치’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편찬한 <한불자전>(1880)에 등장할 정도로 당시 민중 사이에 널리 쓰였다. 헐버트는 ‘하치’와 함께 ‘대중의 영역(the precincts of the popular)’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했다. 헐버트는 ‘하치’를 대중 음악의 장르로 오인했던 것 같다.

■아리랑은 ‘하치’ 문화의 대표
그런 헐버트가 ‘하치’ 음악의 예로 꼽은 곡이 바로 ‘아리랑’이다. 헐버트는 “‘대중 영역’(하치)은 모든 어휘가 두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비오는 날 진흙탕에 빠지지않게 나막신을 신고 한국인들처럼…”이라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아리랑’을 거론한다.
“첫번째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782절(verse) 내외로 이뤄진 소곡이다. 그 작품은 ‘아르랑(A-ra-rung)’이라는 듣기 좋은 제목을 지니고 있다. 보통의 한국인들에게 이 곡은 ‘쌀(밥)’과 같고, 그 나머지 노래는 모두 ‘반찬’ 정도에 불과하다.”
이 대목에서 헐버트의 남다른 통찰력을 읽을 수 있다. 헐버트는 정교하지도, 특별히 기교가 필요하지도 않은 ‘아리랑’ 같은 ‘하치’(민요)에서 민중의 ‘삶의 깊이’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섣불리 해석하려 했다가는 진흙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헐버트는 여러 민요 가운데 ‘아리랑’은 마치 ‘한국인의 쌀’과 같은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여겼다. 헐버트의 설명이 이어진다.
“아리랑은 ‘타라라 붐디아이’(189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던 연회곡) 같은 반향이 한국인들에게 불러 일으키고 있다”면서 “그러나 아리랑은 ‘타라라~’에 비해 열광적이지도 않으면서도 더 오래 유행되었다”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이 작품은 3520여 일 밤 동안 유행해왔고, 대중적인 인기를 끈 것은 1883년 무렵…앞서 782절이라는 것도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무한정하다.”

■즉흥곡의 달인
아리랑의 버전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일러주었다. 이 대목에서 헐버트는 “곡조는 즉흥적인 연행에 걸맞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한국인이야말로 즉흥곡의 달인”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러면서도 “아리랑의 후렴구는 늘 고정되어 있다”고 소개한다.
“아르랑 아르랑 아라/아르랑 얼사배씌어라. 다만 마지막 단어를 ‘다 나가간다’나 그에 상당하는 함축구로 바꾸는 파격은 용인된다.”
반면 이렇게 고정화(관습화)한 후창(후렴구)와 달리 선창은 그 어떤 내용도 담을 수 있다고 했다.
즉 “후창과 연계되어 불리는 구절은 전설, 민간전승, 자장가, 술노래, 가정생활, 여행, 사랑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한국인에게 이 노래는 서정, 교술(敎述·사실을 그대로 전달), 서사 이면서 이들을 하나로 녹여낸 것”이라 했다.

■한국의 바이런·워즈워스
그러면서 또 한 번 주목할만한 비유법을 꺼낸다.
“그것은 동시에 구스 엄마이면서 바이런이기도 하고, 레무스 아저씨이면서 워즈워스이기도 하다.”
‘구스 엄마’는 영국 동요에 등장하는 우스꽝스러운 여인 이름이다. ‘레무스 아저씨’는 흑인 노예들의 노래와 우화, 민담을 수록한 작품의 주인공이다. 조지 바이런(1788~1824)과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는 당대 영국의 대문호이다. 헐버트는 아리랑이 대중의 경험과 정서(‘구스 엄마’나 ‘레무스 아저씨’)에서부터 대시인의 통찰과 기교(바이런과 워즈워스)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다고 본 것이다.

■서양악보로 아리랑 채보
‘아리랑’을 향해 찬사를 연발한 헐버트는 급기야 그때까지 구전되어 온 ‘아리랑’ 중 한 곡의 선율을 직접 오선 악보에 옮겼다.
입에서 입으로, 전국 각지에서 전해진 아리랑 중 한 곡을 서양악보로 채보한 것이다.
‘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오/아르랑 얼사배씌어라/문경세재 박달나무/홍독괴(홍두깨) 방망이 다 나간다.’
헐버트가 채보한 이 아리랑을 두고 ‘경기 자진 아리랑’ 계열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문경세재’와 ‘박달나무’가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문경 아리랑’이 이 곡의 연원일 수 있다는 견해가 나왔다.

■아리랑=아련랑(我戀郞)?
아리랑과 그 악보를 해외에 처음 소개한 헐버트에게 난처한 순간이 있었다. ‘아리랑’ 후렴구가 무슨 뜻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였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1891년 12월~1893년 9월) 아리랑의 후창 부분을 풀이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그저 ‘헤이 디들 디들(의미를 알 수 없는 영국 자장가) 같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헐버트는 한국에 돌아와 한국인들에게 물었더니 그 누구도 딱 부러진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가짜뉴스에 가까운 얘기만 귀띔했다.
“어떤 이가 바짝 다가와 ‘러시아(아라사)’를 뜻하는 ‘아라’가 장차 한국에 끼칠 영향력을 예언한 말이라 속삭였다. 어떤 이는 ‘나는 낭군을 사랑해요’라는 말을 가리키는 한자(아련랑·我戀郞)의 음역’이라고 했다….”
그 당시 한국인 누구도 아리랑의 역사나 유래에 대해 딱 부러진 해답을 내놓은 이가 없었다는 얘기다.

■아리랑과 경복궁 중건
그런데 헐버트는 왜 “아리랑은 3520여 밤 동안 유행했고, 대중적인 인기를 끈 것은 1883년 무렵”이라고 콕 찍었을까.
조선일보 1929년 11월26일자(‘토월회의 아리랑 고개를 보고’)가 아리랑의 유래를 그럴듯하게 전한다.
“경복궁을 이룩할 때(1865~1867) 인민을 강제로 부역 시켜서 사랑하는 사람을 여의고 정든 고향을 떠나서 채찍 밑에서 고역을 할 때에 그들의 입에서 아리랑이라는 민요가 시작…이것이 여러 곳으로 퍼져 각기 지방색을 띠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헐버트가 채보한 ‘아리랑’ 중에 ‘문경세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 다나간다’는 구절이 떠오른다. 헐버트는 가사에 등장하는 ‘홍두깨’에 주목하여 ‘주인의 옷을 다듬이질 하는 하인 여인들의 고통과 한을 뜻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이것을 경복궁 중건에 대입해보면 완전히 달리 해석된다. ‘경복궁 중건에 쓰이는 도끼자루를 만드느라 문경의 박달나무를 모두 베어낸다’는 비판으로 풀이 될 수 있다.
만약 ‘아리랑’이 경복궁 중건 때(1865년 무렵) 퍼지기 시작했다면 어떨까. 전국에서 동원된 백성들과, 이들의 노동을 위로하는 연희패들이 어우러져 불렀던 노래 중 ‘메가 히트곡’이 바로 ‘아리랑’이었을 것이다. 공사 후 고향으로 돌아간 백성들이 나름의 가사와 곡조로 바꿔 불렀고….

■명성왕후가 무릎을 친 이유
사실 ‘아리랑’이 문헌기록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헐버트 기고문 보다 2년 앞선 1894년 1월이었다.
“동궁을 개수하느라… 공사 강행…고종은 밤만 되면 전등을 켜놓고 광대를 불러 새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아리랑 타령’이었다. ‘타령’은 곡조를 길게 빼는 것을 세속에서 일컫는 말이다.”(<매천야록> ‘궁중의 아리랑타령’)
<매천야록>은 이어 “원임대신 민영주(1846~?)는 그 광대들을 거느리고 오직 아리랑 타령만 전담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또 <매천야록> ‘1894년 이전’ 기사는 ‘고종의 밤나들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담았다.

“밤에 불빛이 훤한 궁궐 전각에서 양전(고종과 명성왕후 부부)이 평복 차림으로 앉아있었다. 뜨락 밑에서는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팔뚝을 걷어붙인 수십 명이 노래를 부르며 북을 치고 있었다. 그중 ‘오는 길 가는 길 만난 정 깊이 들어 죽으면 죽었지 헤어지기 어렵다’는 노래가 있었다.”
<매천야록>은 “음탕하고 비루한 가사를 들은 사람들은 얼굴을 돌렸지만 명성왕후는 무릎을 치며 ‘그렇지, 그렇지’ 하고 좋아했다”고 전했다.
이 기사에 ‘아리랑’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오는 길 가는 길 만난 정 깊이 들어, 죽으면 죽었지 헤어지기 어렵다.(來路去路逢情歡 死則死兮難舍㫋)’ 구절이 ‘안성아리랑’의 가사에 등장한다. 다양한 형태로 민간에 퍼진 아리랑이 궁궐까지 들어와 고종과 명성왕후까지 사랑한 문화코드가 된 것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상징한….

■“왜인 등쌀에 난 못살아”
아리랑이 일본어로 소개된 케이스가 있다. ‘유빈호치신문(郵便報知新聞)’ 1894년 5월31일자(‘조선의 유행요·朝鮮の流行謠)’이다.
이 기사에는 인천에서 유행한 아리랑의 가사와 해설이 일본어로 실려 있다.
“(1절) 인천제물포 살기는 좋아도 왜인 등쌀에 나는 못살아 흥 (후렴) 아라랑 아라랑 아라리요 아라랑 얼쑤 아라리-야…”
그리고 해설에는 “이 노래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에는 나라에서 입에 담지 못하게 했으나 지금은 산간벽지나 포구의 아이들까지 입에 담고 있다”면서 아리랑의 대유행을 증거하고 있다. 또 개항 이후 물밀 듯이 들어와 인천 상권을 잠식하는 일본인에 대한 반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일본인도 좋아한 아리랑
그런데 이 아리랑은 당시 일본인들까지도 좋아한 노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1883년 인천 이사청(영사관) 이사관이었던 시노부 준페이(信夫淳平)는 “아리랑의 음조는 슬픈 가락으로 되어 있어 망국가적(亡國歌的)인 느낌이 든다”고 전제했다. 식민사관’이 짙게 배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시노부는 “나는 이 노래를 특히 좋아한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은 소리 뿐이지 무엇을 뜻하는 가사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리랑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 깊은 곳에서 한시 한 수가 용솟음친다”(<시노부의 <한반도>·1901)고까지 했다.
이렇게 대유행하고 있던 아리랑 중 한 수가 서울의 왕립 육영학교 교수로 근무하던 헐버트의 귀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것을 서양 악보로 옮겼고…. 1901년 ‘아리랑’ 관련 글을 쓴 시노부는 ‘아리랑 악보’를 싣고 “헐버트가 채보한 악보를 인용했다”고 전한 바 있다.

■헐버트-나운규-BTS
한국 민요 아리랑의 음악사와 문화사적인 의미를 해석하고 이를 서구에까지 소개해준 헐버트의 공로는 필설로 다할 수 없다.
헐버트의 기록을 바탕으로 1926년 나운규(1902~1937)의 영화 ‘아리랑’의 출현과 성공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아리랑의 대표격인 ‘본조 아리랑’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나네~’로 이어진다. 결국 귀중한 기록을 남긴 헐버트와 영화 ‘아리랑’을 제작한 나운규가 ‘아리랑의 역사’를 이어간 것이다.
이제 그 바통을 그룹 방탄소년단 BTS가 이어받은 것 같다. 그들은 ‘즉흥곡의 달인’ DNA를 바탕으로 ‘한국인의 쌀’인 아리랑을 세계인이 사랑하는 ‘K팝’ 장르로 키웠다. 새삼 BTS의 ‘Body to Body’ 가사의 의미를 살펴본다.
‘공연장 모두 뛰어.(I need the whole stadium to jump), 휴대폰 내려놔.(Put your phone down), 이 순간 즐겨(let‘s get all the fun)…’
볼수록 ‘즉흥곡의 명수’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리랑’ 이 곡으로 ‘아리랑 고개’라는 경계를 넘어 ‘너와 내’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연대와 공감을 이뤄가자는 뜻이 아닌가.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김승우, '호머 헐버트의 아리랑 논의에 대한 분석적 고찰', <Comparative Korean Studies> 20권 2호, 국제비교한국학회, 2012
국립민속박물관, <아리랑>(아리랑 특별전 도록), 2012
김동진, <(파란눈의 한국혼)헐버트>, 참좋은친구, 2010
김권정, <헐버트,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 역사공간, 2015
김연갑, '아리랑의 성격변화와 정체성 확립과정 고찰', <지역문화연구> , 세명대 지역문화연구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