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역사

잃어버린 신라 왕성 ‘금성’ 미스터리…박혁거세가 찜한 ‘원픽’ 장소는?

이기환기자 2024. 11. 12. 14:24

얼마전 고색창연한 나라 이름이 소환됐다. ‘사로국’이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가 신라의 궁성인 월성 발굴 조사에서 ‘사로국 시기 취락(마을)의 흔적’을 처음으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대체 ‘사로국’이 왜 튀어나왔을까. 사로국은 <삼국지> 등에 등장하는 진한 12국 중 경주를 중심으로 성장한 초기 국가 단계, 즉 신라의 모태를 일컫는다.

잃어버린 왕궁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는 신라 천년 고도의 첫번째 왕성인 금성 기사가 쏟아진다. 그러나 위치는 불분명하다. <삼국사기>는 “금성은 101년 쌓은 월성의 서북쪽에 있다”고 기록했다. 반면 <삼국유사>는 “(금성의) 궁실을 남산 서쪽 기슭(창림사터)에 지었다”(‘혁거세조’)고 다르게 썼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사진을 토대로 재가공

■사로=서울의 원형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보통명사인 ‘서울’이 바로 이 ‘사로’에서 비롯됐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을 종합하면 “건국 후…사라·사로·신라·서라벌·서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이제(503년·지증왕4)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신(新)과 사방을 망라한다는 ‘라(羅)’를 합친 신라(新羅)를 정식 국호로 삼는다”고 전했다. ‘서울’은 바로 사로·사라·서벌·서라벌 등에 뿌리를 둔 단어이다. <삼국유사>도 “지금 경(京)자의 뜻을 우리말로 ‘서벌’이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각주를 달았다. 그러니 경주의 입장에서 보면 ‘서울(경주)’을 지금의 ‘서울’에 빼앗긴 셈이다.

봇물 전투기록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37년(혁거세왕 21) 수도에 성을 쌓고 그 이름을 금성이라 했다고 기록했다. 이후 금성을 중심으로 한 전쟁 기사가 봇물을 이룬다.

■개(犬) 희생양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가 최근 월성 발굴 조사에서 확인한 것이 3세기대 사로국 시기 마을의 흔적이다. 발굴지역은 월성의 남쪽을 흐르는 개천(남천)에 접해있는 연약지반(모래층 퇴적 지형)이다.

이번 발굴결과 1700~1800년전 사로국인들은 이런 연약한 땅에 마을을 조성하려고 1.5m에 달하는 성토(흙 쌓아 다져올림) 작업을 벌인 것으로 확인됐다. 쌓은 흙에는 벼의 겉껍질과 식물 씨앗, 조개껍질 등 유기물을 층마다 사용됐다.

마을 입구에서 눈길을 끄는 의례 유구가 보였다. 나무 기둥을 세워 만든 원형구덩이(지름 6m)가 불에 타 폐기된 채 확인됐다. 안에서 종류별로 2~3점씩 짝을 맞춘 도기 15점이 출토되었다. 황색 안료가 발린 마직물이 도기 위를 감싸고 있었다. 개(犬)를 의례의 제물로 바친 정황도 발견됐다. 비슷한 시기에 유례가 없는 ‘개=의례 희생양’의 모습이다.

위기일발

444년(눌지왕 28) 금성을 포위했던 왜병이 물러가자 눌지왕이 추격했다가 오히려 죽을 지경에 빠졌다가 탈출한 기록도 보인다.

■사람 희생양

희생양이 된 개의 모습이 시각적으로 매우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 외에 다른 발굴 성과가 뭐 그리 중요하다는 건가.

우선 발굴 중인 월성이 어떤 성인지 알아야 한다. <삼국사기>는 “101년(파사왕 22)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둘레 1023보)이라 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니까 월성은 축성(101)부터 망국(935)까지 834년간 신라 천년사직을 지킨 궁성이다.

금성 우물에 나타난 용 두마리

기원후 3년(혁거세왕 60) “금성의 우물 안에서 용 두마리가 나타났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보인다. 혁거세왕과 부인 알영(기원전 53~기원후 4)의 죽음(기원후 4)을 예고하는 기사다.

하지만 1979년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벌여온 발굴조사 결과가 당혹스러웠다. 4세기 이전에는 이 월성에 성벽과 같은 거대한 구조물을 쌓은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2015년 이후 성벽 조사 결과 4세기 중엽 성벽을 쌓기 위한 다짐층을 조성한 뒤 본격적인 축성공사가 이뤄졌을 것(4세기 후엽)이라는 자료가 나왔다. 축성공사 때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은 인신공희(사람제사)가 벌어졌다는 증거까지 확보했다. 3세기에는 개(犬)가, 4세기에는 사람이 희생양이 된 셈이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4세기 중·후엽이면 신라가 김씨의 독점적인 왕위 세습을 시작하고 고대국가 체계를 갖춰가던 내물왕(356~402) 시대였다.

금성에서 일어난 일

<삼국사기>에는 금성을 둘러싼 갖가지 재이가 발생했다는 기사를 전하고 있다.

■3세기 경주의 마을

그럼 <삼국사기>의 101년 축성기록은 무엇인가. 문헌(삼국사기)과 고고학 자료 사이에 200~300년 가량 차이가 나지 않은가.

혹자는 이를 두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100% 믿을 수 없는 이유의 근거로 삼았다. 그런 와중에 이뤄진 이번 발굴이 유의미하다는 것이 발굴단의 설명이다. 언급했듯이 흙으로 쌓은 성벽의 축조는 4세기 중·후엽 시작됐다는 것이 고고학적 발굴결과였다.

그런데 이번에 3세기 중엽에 흙을 1.5m나 쌓고 다질 정도로 막대한 인력과 물자가 동원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월성의 비밀

최근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가 발굴한 월성 내부에서 3세기 사로국 시기 마을(취락) 유구의 흔적이 확인됐다. 월성 남쪽을 흐르는 남천 때문에 생긴 연약지반을 1.5m가량 성토한 뒤 마을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국립경주문화유산 연구소 제공

3세기 중엽이면 성벽 축조 100여 년 전이다. 이른바 사로국 단계의 신라가 이 무렵이면 대규모 성(월성)을 쌓기 위한 기반을 다져놓았다는 뜻이다. ‘사로국=신라’를 띄엄띄엄 보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그 무렵 대대적인 공력이 투입되어 조성된 마을의 위상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월성 주변에서 확인된 중대형 무덤(목곽묘)들이 주목된다. 인왕동과 월성로 등지에서 3세기대의 중형급 이상 고분이 그것이다. 이번에 공개된 마을 유적과 관계가 깊은 고분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확인된 성토 및 마을 유적의 흔적은 ‘월성벽 축조의 100년 전 사로국 시기 신라 도심의 모습’을 일러주는 길잡이가 될 수도 있다.

제사흔적

마을 입구에서 의례용 공간이 보였다. 불에 탄 공간에서는 2~3점씩 짝을 맞춘 도기 15점이 보였다. 황색 안료가 발린 마직물이 도기 위를 감싸고 있었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잃어버린 왕성, 잊혀진 금성

그런데 이번 발굴 성과가 나온 이 순간까지 콕 찝어 논의하기 버거운 주제가 있다.

그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월성에 앞서, 혹은 월성과 같은 시대에 꾸준히 등장하는 ‘또다른 왕성’, 즉 ‘금성(金城)’의 존재다.

‘금성’이 처음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은 시조 박혁거세 치세(기원전 57~기원후 4)이다.

박혁거세 이전에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망명해와 산골짜기에 살면서 6촌을 이루고 살았다. 그것이 사로6촌(진한6부)이다. 그 중에는 알천 양산촌(경주 탑동 오릉 일원 추정)과 돌산 고허촌(경주 남산 서쪽 추정) 등이 포함되어 있다.

<삼국사기>는 월성의 축조 시기를 101년이라 했지만 1979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발굴에서는 초축시기가 4세기 중엽을 넘기지 못하는 결과를 얻었다.

어느 날 양산(남산)의 기슭에 있던 나정(경주 탑동) 옆 숲 속에서 울부짖는 말 옆에 고이 놓인 큰 알이 발견되었다.

그 알에서 태어난 이는 성인의 모습을 갖추며 쑥쑥 컸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사로 6촌(부) 사람들은 13살이 된 아이를 임금으로 세웠다.(기원전 57) 그 이가 사로국, 즉 신라의 초대국왕인 박혁거세왕(기원전 57~기원후4) 이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기원전 37년(혁거세왕 21) 수도에 성을 쌓았으니 그것을 금성이라 했다.

5년 뒤인 기원전 32년 금성에 궁실(궁전의 전각)을 지었고, 기원후 138년(일성왕 5)에는 금성에 정사당(군신이 정사를 논의한 공간)을 설치했다. 어엿한 왕궁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개 제물, 사람 제물

월성 벽내부의 마을(3세기 중후엽) 조성 과정에서 개(犬)를 제물로 바친 흔적이 보였지만, 100여년 뒤 월성의 초축 공사 때 땅을 다지고 사람제사를 지낸 양상이 보였다. 개 제물이 사람 제물로 변한 것이다.|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치열한 금성 전투

금성 관련 기록은 <삼국사기> 등에 꾸준히, 아주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외적과의 전투 기사가 흥미롭다.

“기원후 4년(남해왕 원년) 낙랑이 금성을 여러 겹 포위했다…곧 적이 물러갔다.”

“기원후 14년(남해왕 11) 왜의 침략을 막는 사이 낙랑이 금성을 공격해왔다…6부 병사 1000명이 그들을 추격하여….”

“232년(조분왕 3) 왜인이 갑자기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경기병(輕騎兵)이 도망가는 왜병 1000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1700여 년 전 경주 시내 모습

2~3세기 월성 주변에서 확인된 사로국 시기 고분. 262년(미추왕 원년) 금성 서문에서 일어난 화재 때문에 민가 300여채가 소실됐다. 262년이면 최근 발굴에서 확인된 대규모 성토가 이뤄진 마을 유구의 연대(3세기 중후엽)와 일치한다. 당시 경주 시내가 한번의 화재로 300여 가구가 전소될 정도로 경주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249년(첨해왕 3) 궁궐(금성 추정)에 남당을 설치….”

“297년(유례왕 14) 이서국(경북 청도 일대의 소국)이 금성을 공격…우리 군사가 고전했는데…적을 결국 물리쳤다.”

“346년(흘해왕 37) 왜병이…금성을 포위…성문을 굳게 닫고…식량이 떨어진 적이 퇴각하자 정예 기병이 추격….”

“393년(내물왕 38) 왜병이 5일간 금성을 포위…성문을 걸어잠궈…적이 퇴각하자 보·기병 1200명이 협공하여 왜병 대파.”

1000년 고도의 도시계획

사로국, 즉 신라의 첫번째 왕성은 금성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발굴결과 금성의 실체를 짐작할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첫번째 이유는 천년왕국인 신라는 고구려·백제와 달리 도읍을 옮기지 않았다. 1000년 가까이 도심을 개발·재개발하고 도시계획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앞선 문화층이 훼손·파괴되었을 것이다.|장기명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학예연구사 제공

■금성은 철옹성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즉 444년(눌지왕 28) 왜병이 금성을 10일간 포위한 뒤 군량이 떨어지자 퇴각했다.

이때 눌지왕은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왜병을 추격했다가 반격을 받아 오히려 겹겹이 포위 당했다가 천신만고 끝에 탈출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금성일 가능성이 높은 ‘신라성’이 보인다.

“400년(내물왕 45)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파견한 보·기병 5만명이 신라성 안에 가득 차있던 왜병을 몰아냈다…왜구가 무너뜨린 신라성 내부의 90% 정도를 수리하고 신라 병사를 배치….”(여호규 한국외대 교수 판독)

415년(실성왕 14) 왕이 금성의 남문에서 활쏘기를 관람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삼국사기>는 금성이 낙랑이나 왜, 이서고국 등의 5~10일간의 끈질긴 포위 공격에도 끝내 함락되지 않을 정도로 견고했음을 일관되게 전하고 있다.

금성=남산 서북쪽?

금성의 위치를 두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다른 내용을 전한다. <삼국유사>를 신뢰하는 쪽은 경주 남산 인근의 탑동 목관묘와 나정을 주목한다.|장기명 학예연구사 제공

■민가 300여채 전소

신라의 국운과 관련된 갖가지 재이(災異)가 일어난 곳이 금성이기도 했다. 기원후 3년(혁거세왕 60) “금성의 우물 안에서 용 두마리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보인다. 혁거세왕과 부인 알영(기원전 53~기원후 4)의 죽음(기원후 4)을 예고하는 기사다. 또 기원후 56년(유리왕 33) 나타난 ‘우물 속 용’도 유리왕의 서거를 가리켰다.

<삼국사기>에는 “강풍으로 동문이 무너지고(80), 남문 앞 큰 나무가 뽑혔다(96)”, “금성 동쪽 민가가 함몰하여 생긴 연못에서 연꽃이 피었다”(123), “궁궐과 동문에 벼락이 친 뒤 벌휴왕이 서거했다”(196), “금성의 뜰에서 여우가 울었다”(205), “금성 남쪽에 쓰러져 있던 버드나무가 다시 일어섰다”(253), “지진으로 금성의 남문이 무너졌다”(458)는 등 심상치 않은 기사가 이어졌다.

이중 “262년(미추왕 원년) 금성 서문에서 일어난 화재로 민가 300여채가 불탔다”는 기사가 눈길을 붙잡는다. 262년이면 최근 발굴에서 확인된 대규모 성토가 이뤄진 마을 유구의 연대(3세기 중후엽)와 일치한다. 이 무렵 이미 한번의 화재로 300여 가구가 전소될 정도로 경주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다는 방증자료가 된다.

사로국 수장 무덤?

경주 남산 서북쪽인 탑동에서 확인된 목관묘. 기원전1~기원후 2세기로 편년되는 중국 전한시대 청동거울 등 최상급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오리무중에 빠진 금성

이런 사료가 속출하니 사로국, 즉 신라의 첫번째 왕성은 금성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어느 누구도 금성이 언제, 어느 곳에 존재했는지 지금 이 순간까지 단언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우선 천년왕국인 신라는 고구려(국내성-평양)·백제(한성-웅진-사비)와 달리 도읍을 옮기지 않았다. 그러니 1000년 가까이 도심을 개발·재개발하고 도시계획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앞선 문화층이 훼손·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최초의 도성인 금성의 흔적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사료에 등장하는 금성의 위치도 헷갈린다.

8각 건물의 수수께끼

탑동 목관묘 근처에서는 나정(8각 건물터)에서는 제사용 유구(우물터)와 유물이 확인됐다.|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삼국사기> ‘지리지’는 “기원전 37년 쌓은 금성의 동남쪽에 파사왕이 101년 월성을 축조했다”고 밝혔다. 거꾸로 표현하면 금성이 월성의 서북쪽(대릉원~첨성대 사이)에 존재했다는 얘기가 된다.

반면 <삼국유사>는 “(금성의) 궁실을 남산 서쪽 기슭(창림사터)에 지었다”(‘혁거세조’)고 다르게 기록했다.

문제는 경주의 어느 곳을 파도 금성이나, 금성과 관련된 직접적인 유구가 확인된 바 없다는 것이다.

즉 사료에 등장하는 금성의 실체가 고고학적 발굴 결과로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그런 탓인가.

어느 순간부터 ‘금성=월성’으로 보거나, ‘금성=왕성의 대명사’, ‘금성=철옹성’으로 해석하여 아예 금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26차례나, 그것도 ‘구체적으로’ 기록된 금성의 존재를 무시할 수 있을까.

혁거세 탄강신화의 성소

<삼국사기>의 박혁거세 탄강신화는 “양산(남산)의 기슭에 있던 우물(나정) 옆에서 혁거세가 알의 모습으로 탄강했다”고 했다. 사로국(신라)의 초대 임금인 혁거세왕이 건설한 금성의 위치도 이 부근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나왔다.

■남산 쪽? 첨성대 주변?

<삼국유사>를 신뢰하는 쪽은 남산 인근의 탑동 목관묘와 나정(제의 공간)을 주목한다.

탑동 목관묘(기원전 1~기원후 2세기 중반)는 중국제 청동거울(전한시대) 등을 껴묻이한 최상층 지도자급 고분으로 추정된다. 또 근처에서 확인된 나정(8각 건물터)에서는 제사용 유구(우물터)와 유물이 확인됐다. “양산(남산)의 기슭에 있던 우물(나정) 옆에서 혁거세가 알의 모습으로 탄강했다”는 <삼국사기> 혁거세 탄강신화가 눈에 띈다. 그러니 사로국(신라)의 초대 임금인 혁거세왕이 건설한 금성의 위치도 이 부근일 것이라는 견해가 나왔다.

반면 <삼국사기> 기록(금성=월성 서북쪽)을 신뢰하는 연구자들은 대릉원~첨성대 일대를 유력한 ‘금성’ 후보지로 꼽는다. 그 중 최근 일부 연구자가 지목하는 금성의 후보지가 두 곳 있다.

사실 형산강(서천)과 북천(알천), 남천으로 둘러싸인 경주 분지는 선상지(삼각주) 지형이다. 그래서 연약 지반이 많고, 곳곳에서 용천수가 솟아나온다.

또다른 금성 후보지

‘금성=월성의 서북쪽’이라는 <삼국사기> 기록을 신뢰하는 쪽은 대릉원~첨성대 일대를 유력한 ‘금성’ 후보지로 꼽는다. 그 중 현재 확인되는 유적은 경주 시내,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용천수 혹은 연약지반을 피했거나, 땅을 성토했거나 혹은 주변보다 ‘약간 높은 지형’에 조성되어 있다. 현재 ‘월성의 서북쪽’에서 이런 조건을 충족한 곳은 현재 첨성대 주변과, 황남동~사정동 일대를 꼽을 수 있다. |여호규 한국외대교수 설명(그림은 심현철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특별연구원 제공)

그러니 왕성이든, 마을이든, 고분이든 땅을 성토하거나, 주변보다 ‘약간 높은 지형’을 골라 사용해야 한다. ‘월성의 서북쪽’ 중에 이런 조건을 충족한 곳은 현재 첨성대 주변과, 황남동~사정동 일대를 꼽을 수 있다.

그 중 첨성대 주변에 관심이 쏠린다. 첨성대 주변은 경주시가 관리하는 꽃단지 등이 조성된 곳이다.

이곳은 평탄지형 중에서도 약간 지대가 높은 지형이고 북쪽에는 1m 내외의 비정상적인 단이 활모양을 그리며 돌아가고 있다.

또 월성 주변의 고지형 분석에서 이 곳의 남쪽으로 폭 30m 가량의 미미한 인공 토루(흙으로 만든 보루)의 흔적이 보고되었다. 이 일대가 ‘금성벽의 흔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첨성대 부근에 700~1000m 둘레의 소형 성곽이 존재할 가능성을 제기하는 연구자도 있다. 따라서 이 부근을 발굴해보면 혹시 사라진 금성의 모습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게 일각의 주장이다.

첨성대 주변은?

그중 첨성대 주변이 주목된다. 주변보다 약간 지대가 높고 북쪽에는 비정상적인 단이 활모양을 그리며 돌아가고 있다. 또 월성 주변의 고지형 분석에서 이 곳의 남쪽으로 폭 30m 가량의 인공 토루의 흔적이 보고되었다. 이 일대가 ‘금성벽의 흔적’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조성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선임연구원 제공

■공존한 금성·월성

또 하나 쟁점은 금성과 월성의 성격 규정이다. <삼국사기>는 “기원전 37년 축조된 금성의 동남쪽에 월성을 쌓았고(기원후 101), 시조(박혁거세) 이래 금성에 거처하다가 나중에 월성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궁성을 월성으로 옮긴 이후에도 금성 기사는 500년까지 계속 이어진다. “500년(소지왕 22) 금성의 우물에 용이 나타났다”는 <삼국사기> 기사가 마지막이다.

물론 101년(파사왕 22) 축조된 월성 관련 기사도 더러 보인다. “459년(자비왕 2) 월성을 포위한 왜병을 막아냈다”(<삼국사기>)는 등의 기사가 그것이다. 이 중 “475년(자비왕 18) (고구려의 백제 한성 침략 및 함락 등으로 두려움을 느낀) 자비왕이 명활성으로 거처를 옮겼고, 13년 뒤인 488년(소지왕 10) 월성을 수리한 소지왕이 이주했다”는 기사도 눈에 띈다.

그러니까 문헌사료로 따지면 금성과 월성은 101년(월성 축조) 이후 소지왕이 월성을 수리하고 정착한 488년 무렵(최대 500년)까지 400년 가까이 공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금성은 작은 왕성?

첨성대 주변의 금성 후보지. 700~1km 정도의 소형 성곽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여호규 교수 제공

■금성(북성)-월성(남성)?

고고학 자료를 검토한다면 어떨까. 월성벽의 초축은 4세기 중·후엽 이상을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발굴 결과이다.

그렇다면 축성의 개념을 달리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즉 파사왕이 101년 쌓았다는 성은 토성이 아니라 목책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삼국지> ‘위지·동이전·한조’는 “진한에서는 성책(성을 둘러싼 목책)이 있다”고 했다. 나무를 엮어 만든 성이었다면 고고학 조사로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월성벽의 초축을 4세기 중·후엽으로 인정하고, 금성의 축조연대도 2~3세기 정도로 내려본다 해도 100~200년 정도는 금성·월성이 공존하는 셈이 된다.

공존한 금성-월성

기원전 37년 세워진 금성은 기원후 101년 월성이 축조되고 왕이 이주한 뒤에도 계속 궁성의 기능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금성 기사는 500년까지 계속 이어진다. 물론 월성 기사도 더러 보인다. “459년(자비왕 2) 월성을 포위한 왜병을 막아냈다”(<삼국사기>)는 등의 기사가 그것이다.

이를 두고 5세기 후반 백제의 왕경(한성)에서 700m 사이를 두고 운용된 북성(풍납토성)·남성(몽촌토성)의 경우를 떠올리는 연구자가 있다. 사로국(신라) 또한 금성과 월성을 백제의 남·북성처럼 동시에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금성 서문의 화재로 인가 300여채가 소실되었다는 262년(미추왕 원년) 기사가 눈에 밟힌다. 금성이 왕궁 뿐 아니라 도성민의 거주 구역으로 기능했을 수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금성은 국왕이 평상시에 거주한 정궁으로, 구릉지대에 조성된 월성은 군사방어성이거나 혹은 6부가 모여 정사를 펼치는 정치공간으로 동시에 운용했을 수도 있다.

400년의 공존

<삼국사기>는 “475년 자비왕이 명활성으로 거처를 옮겼고, 12년 뒤인 487년 소지왕이 월성을 수리하고 이듬해 1월 이주했다”고 했다. 문헌사료로 따지면 금성과 월성은 101년(월성 축조) 이후 소지왕이 월성을 수리하고 정착한 488년 무렵(최대 500년)까지 400년 가까이 공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금성의 실체를 가늠할만한 어떤 고고학적인 실마리가 나오지 않는 한 어떤 견해도 공허한 주장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 월성 내부에서 확인된 3세기 중후엽의 이른바 사로국 마을 유적은 어떤 의미를 던져줄까.

‘잃어버린 사로국(신라)의 왕성’이었던 금성의 실체에 다가가는 첫발이 될까. 아니면 오히려 금성보다는 월성의 위상을 다지는 디딤돌이 될까. 어떤 경우든 잊혀진, 아니 잃어버린 신라의 첫번째 왕성, 즉 금성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

지금 경주 시내 어디엔가 신라의 첫번째 왕성인 금성의 흔적이 남아있을테니까….

(이 기사를 위해 여호규 한국외대 교수, 장기명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학예연구사, 심현철 국립경주문화유산 연구소 특별연구원, 박대재 고려대 교수, 김대환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조성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선임연구원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여호규, ‘신라 상고기 도성구조와 금성·월성의 성격, <신라문화> 58,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21

여호규, ‘광개토왕릉비 영락10년조에 나타난 고구려의 군사 활동과 외교관계’, <목간과 문자> 30호, 한국목간학회. 2023

장기명, ‘사로국 시기 월성 취락이 제기하는 쟁점’, <월성 이전 사로국 시기 취락 전문가 포럼 발표자료>,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2024

장기명, ‘신라 궁성의 건립과 확장을 둘러싼 논의와 새로운 모색’, <한국고대사연구> 108, 한국고대사학회, 2022

조성윤, ‘고고자료로 본 신라 금성의 위치 시론’, <신라문화유산연구>6, 신라문화유산연구원, 2022

주보돈, ‘신라 왕경과 왕궁, 그리고 발천’, <신라왕경의 옛물길-발천>(경주 동부사적지대 발천 복원·정비 학술대회), 경주시 등,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