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각, 이상룡, 그리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경북 안동 낙동강 상류에 자리잡고 있는 임청각은 1515년(중종 10년) 지어진 가장 오래된 민가이다.
어느 방에서나 아침 저녁으로 햇빛이 들도록 채광효과를 높인 배산임수의 99칸 저택이다. 영남
제일의 형승이라는 극찬과 함께 지금은 보물 제182호로 지정돼있다. 그러나 임청각의 가치는 건축사적인 의미에만 있지 않다.
대대로 이어진 임청각에는 주인(고성 이씨 가문)의 올곶은 마음이 담겨있다.
뭐니뭐니해도 일제의 참탈에 맞선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을 빼놓을 수 없다.
선생은 국권이 침탈되자 53살의 나이에 중대결심을 한다.
1911년 1월 5일 가문이 부리던 노비들을 해방시킨 선생은 가족 50여 명과 제자 200명 등을 데리고 서간도 망명을 단행한다.
“공자 맹자는 시렁(물건을 얹어놓는 도구) 위에 얹어두자.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는 한마디와 함께 망명길에 읊었다는 ‘거국음(去國吟·조국을 떠나며 읊는다)’이 심금을 울린다.
“이미 내 밭과 집을 빼앗겼는데, (일제가) 다시 내 처자를 노리고 있구나. 차라리 이 머리를 잘라도, 이 무릎은 결코 꿇지 않으리라.”
이상룡 선생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국가원수)을 지내는등 평생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선생은 1932년 지린성(吉林省)에서 숨을 거두자 “해방이 될 때까지는 절대 내 해골을 운반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선생 뿐 아니라 아들(준형)과 손자(병화) 등 독립투사 9명이 이 가문에서 배출됐다.
특히 아들인 이준형 선생도 1942년 “변절하라”는 일제의 요구에 “일제 치하에서는 하루하루 수치만 보탤 뿐”이라며 자결 순국했다.
임청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반토막나는 수모를 겪었다.
1942년 일제가 행랑채와 부속채 50여 간을 헐어버리고 중앙선 철도를 떡하니 뚫어버렸다.(사진) 철로와 임청각은 불과 7m 떨어져 있다.
독립운동의 정기를 끊어놓자는 심산이 분명했다.
1973년 이상룡 선생의 증손인 이범증씨가 고려대 중앙도서관에 임청각 서적 395종(1309책)을 기증했다. 김상협 고려대 총장이 4000만원을 보상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범증씨는 단칸방에 사는 어려운 경제형편 속에서도 “받을 수 없다”면서 한마디 했다.
“조상의 정신적인 유산을 팔아먹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 언급한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말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