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960년 사위청문회 통과한 응렴(경문왕)…'엄청 예쁜' 둘째공주 점찍었지만

이기환기자 2020. 10. 9. 10:03

‘경문대왕님(景文大王主), 문의황후님(文懿皇后主), 대랑님(大娘主)이 석등을 세웠다’. 전남 담양군 남면 학선리의 개선사터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통일신라시대 석등(보물 제111호 개선사석등)이 서있다. 

높이가 약 3.5m나 되는 석등의 8각 기둥에는 해서체로 쓴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 미뤄볼 때 석등건립연대는 868년(경문왕 8년)이 분명하고, 명문은 891년(진성여왕 5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남 담양 개선사터에 있는 석등의 1933년 모습. 석등의 8각기둥에 해서체로 쓴명문이 새겨져 있다. 신라 경문왕와 부인인 문의황후, 그리고 대랑(대낭)이 석등을 조성했다는 내용이다.|김창겸 교수 제공 

그렇다면 ‘경문왕과 부인인 문의황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대랑’은 누구일까. 왕와 왕후와 같은 반열에 있었다면 대단한 신분일 터이고, 여자 ‘낭(娘)’자를 써서 ‘대랑’이라 했다면 여성이 확실하지 않은가. 

그래서 지금까지는 ‘대랑’(대낭)이 경문왕의 장녀인 진성여왕(재위 887~897)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즉 일본학자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1864~1946)은 “일본어로 딸은 ‘무스메(むすめ·娘)’이며, 대랑(大娘·おおいらつめ)은 귀인의 맏딸을 공경하여 부르는 말”(<잡고>·1934년)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석등 명문에 등장하는 ‘대랑’은 경문왕의 맏딸인 진성여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 국내 연구자들은 ‘대랑’을 일본어식으로 해석한 아유카이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왔다. 


■진성여왕이냐 경문왕의 두번째 부인이냐 

그런데 최근 개선사 석등기에 등장하는 ‘대랑’이 진성여왕이 아니라 경문왕의 두번째 부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신라사 전공인 김창겸 김천대 교수는 신라사학회가 발행하는 학술지 <신라사학보> 49호에 발표한 논문 ‘신라 개선사 석등의 건립과 대랑주의 정체’에서 ‘대랑=경문왕의 차비(次妃)’임을 논증했다.

전남 담양 개선사지 석등. 안내판에 ‘대랑’을 ‘진성여왕’이라고 표기해놓았다.|문화재청·김창겸 교수 제공  

김창겸 교수는 우선 ‘낭(娘)’을 일본어로 딸, 즉 ‘무스메(むすめ)’로 읽은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예부터 신라시대의 ‘낭’은 왕과 왕족, 귀족의 부인이나 어머니를 지칭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미추왕(262~283)의 부인(왕비)은 광명랑(光明娘)이고, 명랑법사의 어머니는 법승랑이다. “642년(선덕여왕 11년) 김춘추(태종무열왕·654~661)의 딸인 고타소랑이 남편(품석)을 따라 죽었다”(<삼국사기>)는 기록도 있다. ‘낭’이 왕비이거나 왕족인 성인 부인이었다는 얘기다. 

게다가 경문왕에게 자식이 진성여왕만 있는게 아니었다. 태자 정(헌강왕·875~886)과 둘째 황(정강왕·886~887) 등 진성여왕의 오빠가 둘이나 있다. 그렇다면 왜 개선사 석등을 건립하는데 태자를 비롯한 오빠 둘을 제치고 셋째인 만(曼·진성여왕)의 이름만 넣었을까.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또 석등기를 쓴 891년이면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른지 5년이나 지났을 때였다. 재위 중인 임금(진성여왕)이 왜 굳이 석등기를 쓰면서 ‘대랑’이라 표기했을까. 재위중인 임금이라면 마땅히 ‘금상(今上)’이나 진성여왕의 생전 이름(만·曼)을 따서 ‘만왕(曼王)’이라고 해야 옳다. 비근한 예가 있다. 863년(경문왕 3년) 경문왕이 건립한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출토 사리함기에는 ‘국왕(國王)’과 ‘금상’으로, 871년(경문왕 11년) 중수한 황룡사 9층 목탑 찰주본기에는 ‘금상’으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개선사 석등기에 등장하는 ‘대랑’은 당시 재위중이던 진성여왕이 아니라 경문대왕의 두번째 부인, 즉 ‘차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게 김창겸 교수의 견해다.

863년 경문왕이 건립한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출토 사리함기에는 ‘국왕(國王)’과 ‘금상(今上)’으로, 870년 경문왕이 세운 보림사 북탑지에는 자신의 다른 이름인 ‘의왕(疑王)’으로, 역시 경문왕이 871년 중수한 황룡사 9층 목탑 찰주본기에는 ‘금상(今上)’으로 표기했다. 만약 개선사 석등을 당시 재위중인 진성여왕이 조성했다면 ‘대랑’이 아니라 금상, 혹은 국왕, 혹은 만왕(진성여왕의 본 이름) 등으로  표기했을 것이다. |둥국대박물관·국립경주박물관·보림사 소장 및 소재

■860년 9월의 사위 겸 후계자 청문회

그렇다면 경문왕과 정부인 문의황후, 그리고 두번째 부인인 ‘차비’의 사연을 더듬어보자.

860년(헌안왕 4년) 9월 경주 안압지 서쪽 임해전에서 자못 흥미로운 행사가 열렸다. 왕·귀족과 대소신료 전체를 모은 헌안왕이 국선(화랑 중 우두머리)인 ‘응렴’을 두고 ‘사위이자 후계자 청문회’를 치르고 있었다. <삼국사기>는 응렴이 15살, <삼국유사>는 18살에 국선(화랑)이 된 20살 청년이라고 다르게 기술했다.

“그대는 나라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지? 그래 만나본 사람 중 배울만한 사람을 만났더냐”(헌안왕) 

“예. 신은 세사람을 보았는데 자못 착한 행실이 있었사옵나이다.”(응렴)

“그래. 세사람이나? 어디 한번 말해보라.”(헌안왕)

“한 사람은 고귀한 가문의 자제였는데 다른 사람과 사귀면서 자기를 먼저 내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늘 남의 아래에 자리했습니다.”(응렴)

“그래 다른 두사람은?”(헌안왕)

“또 한사람은 부잣집 자제였는데, 사치 하지 않고 늘 삼베옷만 입으면서도 스스로 즐거워했습니다. 마지막 사람은 권세와 영화를 누리면서도 권세로 사람을 억누르는 일이 없었습니다.”(응렴)

그러자 헌안왕은 부인(왕후)에게 귓속말로 칭찬했다.

“내가 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저런(응렴) 청년이 없었습니다.”

헌안왕은 “내게 올해 20살, 19살짜리 두 딸이 있다. 그대 마음에 드는 대로 장가를 들라”고 합격점을 내렸다. 응렴은 감사의 절을 올린 뒤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알렸다. 응렴의 집에서 긴급 가족 회의가 열렸다. “맏공주는 ‘매우 못났고(寒寢)’ 둘째 공주는 ‘엄청 예쁘니(甚美)’ 둘째 공주에게 장가가는 게 좋겠다.”

706년(성덕왕 5년) 지은 황복사 금동사리함기에는 ‘융기 대왕’, 844년(문성왕 6년) 지은 염거화상탑지에는 ‘경응 대왕’ 등 재위중인 왕(성덕왕과 문성왕)의 생전 이름이 등장한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화랑들이 ‘엄청 예쁜 둘째공주’와 혼인 막은 이유

가족회의 결과 ‘엄청 예쁜’ 둘째공주를 낙점했지만 응렴은 쉽게 결정하지는 못했다. 왕실 혼사가 아닌가.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저하던 응렴은 흥륜사의 스님에게 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언니에게 장가들면 세가지 이로움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삼국사기>는 이 ‘세가지’가 무엇인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삼국유사> 기록이 구체적이다. 흥륜사의 스님이란 바로 낭도의 우두머리인 범교사였다는 것이다. 즉 범교사는 응렴이 외모가 뛰어난 둘째공주로 혼처를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낭(응렴)께서 둘째공주를 마음에 두셨다면서요. 절대 안됩니다. 만약 둘째공주에게 장가 간다면 내(범교사)가 낭(응렴)의 면전에서 죽어버릴 겁니다.”

이런 협박이 어디 있는가. “둘째 공주를 택하면 내가 당신 앞에서 죽을 것”이라니…. 아마도 범교사가 화랑도의 뜻을 모아 ‘반드시 맏공주와 혼인해야 한다’고 촉구하려고 달려온 것이리라. 화랑도는 국선 응렴이 맏공주의 남자가 되어야 후계자의 자리에 오른다고 판단한 것 같다. 결국 응렴은 범교사의 협박성 권유에 마음을 돌린 뒤 헌안왕에게 ‘맏공주를 택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헌안왕은 응렴을 사윗감으로 결정한 뒤 4개월여 만에 승하한다. 헌안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둘 있었다. 

지금부터 1160년전인 860년(헌안왕 4년) 사위 후보청문회가 열린 임해전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는 경주 월지와 동궁.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렇다면 두 딸 중 한 사람은 선덕여왕(재위 632~647)과 진덕여왕(647~654)의 뒤를 이어 세번째 여왕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헌안왕은 두 딸을 외면했다. 

861년(헌안왕 5년) 1월29일 병석에 누워 위독해진 헌안왕이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과인은 불행히도 아들은 없고 딸만 두었다. 물론 예전에 선덕·진덕여왕이 있었지만 그것은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격이니 본받을 수 없다. 사위 응렴은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삼국사기> ‘신라본기·헌안왕조’)

헌안왕은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준 역사상 유일한 군주가 됐다. 물론 한가지 놓쳐서는 안될 포인트가 있다. 바로 경문왕과 장인 헌안왕의 사이이다. 즉 경문왕은 헌안왕의 사위이기도 하지만 헌안왕의 재종손(6촌 손자뻘)인 셈이다. 헌안왕의 두 딸은 경문왕의 7촌 고모가 된다. 한마디로 경문왕은 7촌 고모들과 혼인한 셈이다. 알다시피 신라왕실에서 근친결혼은 다반사였다.

신라 원성왕 이후의 왕실계보도. 근친혼인이 다반사였던 신라에서는 하대에 들어 김씨 간 치열한 왕권다툼이 벌어졌다. 경문왕은 헌안왕의 사위이기도 하지만 헌안왕의 제종손(6촌 손자뻘)이다. 헌안왕의 두 딸은 경문왕의 7촌 고모가 된다. 한마디로 경문왕은 7촌 고모들과 혼인한 셈이다. (그래픽:김덕기 기자) 

■맏공주, 둘째공주를 모두 부인으로 얻었다

그런데 궁금증이 생긴다. 범교사가 언급한 ‘세가지’란 무엇인가. 헌안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오른 경문왕(응렴)에게 범교사가 ‘세가지’를 설명한다.

“맏공주를 택함으로써 장인(헌안왕)과 장모(왕비)에게 기쁨을 주었고, 총애도 깊어졌으니 그것이 첫번째이고, 덕분에 왕위에 올랐으니 그것이 두번째이며, 왕위에 올라서 처음부터 마음에 두었던 작은 딸마저 부인으로 맞았으니 이것이 세번째 이로움 아니겠습니까.”(<삼국사기> <삼국유사>)

경문왕의 입이 귀에 걸렸다. 경문왕은 범교사에게 대덕이라는 벼슬과 황금 130냥을 하사했다. 

<삼국사기>는 실제로 “경문왕이 (재위 3년 만인) 863년 왕비(정부인)의 동생을 둘째부인, 즉 차비(次妃)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언니인 정부인(왕비)는 당나라의 정식책봉으로 ‘문의왕후’가 되었다(866년).

하지만 동생인 경문왕의 둘째부인은 아무런 책봉도 받지못해 역사서에 그저 ‘차비’로만 기록됐다. 

이외에도 경문왕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유독 많다. “임금의 침전에 늘 뱀이 몰려 들었는데, 경문왕은 언제나 (뱀처럼) 혀를 내밀며 잤다”(<삼국유사>)는 뱀 설화가 전한다. 또 “임금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길어져서 그 비밀을 혼자 알고 있던 복두장(임금의 관모를 만드는 장인)이 아무도 없는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라고 외쳤다”(<삼국유사>)는 ‘당나귀귀 설화’의 주인공도 경문왕이다.

이렇듯 두 공주를 둘러싼 경문왕의 혼인과 즉위 과정, 그리고 그를 둘러싼 갖가지 이적(異蹟) 등은 어찌 보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스토리라 할 수 있다. 또한 경문왕이 ‘엄청 예쁜’ 둘째 공주를 잊지못해 결국 두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지만 정부인을 내치거나 홀대하지 않았다. 정부인과의 사이에 2남1녀를 낳았고, 그 셋 모두 임금(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이 되었으니 말이다.

1160년전 사위면접시험이 벌어졌던 임해전의 현재모습. 이 시험에서 합격한 경문왕은 화랑들에 의해 ‘엄청 예쁜’ 둘째 공주 대신 맏공주를 배필로  맞이해야 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임해전 청문회의 이면

그러나 반전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860년 9월 임해전에서 열린 사위 면접 및 후계자 지명 청문회가 매우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것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최치원(857~?)이 지었다는 ‘숭복사비문’에 수상한 내용이 담겨있다.

“왕이 승하한 뒤 왕위 각축전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까마귀처럼 모이는 무리는 있었다. 그러나 어짊와 유순함, 어른스러움, 인자로움 덕분에 백성들이 추대했으니….”

역사에서 ‘백성이나 국인(國人)에 의해 추대됐다’는 기록은 비정상적인 왕위계승을 가리킨다. 즉 헌안왕이 죽자 피비린내 나는 왕권다툼은 벌이지 않았지만 뭔가 정치세력간 대립은 존재했고, 결국 백성들이 경문왕을 추대했다는 것이다. 860년 9월의 임해전 청문회도 그렇고, 4개월 뒤 헌안왕 사후의 상황도 그렇고 경문왕의 후계자 결정과 왕위등극이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다는 뜻이다.  


■김씨끼리 죽고죽인 왕위쟁탈전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사실 신라, 특히 하대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복잡함에 포기하고픈 생각이 절로 든다. 부계, 모계, 비계가 모두 근친혼으로 맺어졌고, 게다가 형제간, 사촌간, 혹은 소수의 진골귀족이 뒤엉켜 죽고 죽이는 왕권다툼을 벌였으니 말이다. 촌수를 가늠하기도, 누가 누구의 편인지, 적인지 헤아리기도 어렵다. 36대 혜공왕(765~780)이 살해되고 선덕왕(780~785)이 즉위할 때부터 46대 문성왕(839~857)까지 60여 년 동안 무려 11명의 왕이 교체됐다. 

그 중심에 원성왕(785~798)이 있었다. 원성왕(김경신)은 경쟁자인 무열왕계의 김주원(생몰년 미상)을 몰아내고 즉위했다. 이로써 원성왕계 왕통이 성립됐다. 이쯤에서 왕실 계보도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처음에는 원성왕의 장남인 김인겸(?~791)의 후손들이 차례로 왕위를 이었다. 그들이 ‘인겸계’인 소성왕(39대·799~800)-애장왕(40대·800~809)-헌덕왕(41대·809~826)-흥덕왕(42대·826~836)이다.

하지만 흥덕왕이 후사없이 승하하면서 혼란이 생긴다. 원성왕의 셋째인 김예영(생몰년 미상)의 둘째 아들인 김균정과, 손자인 김계륭이 각축을 벌인다. 김계륭은 김예영의 첫째아들인 김헌정(생몰년 미상)의 아들이다. 삼촌(김균정)과 조카(김계륭)가 왕권다툼을 벌인 것이다. 

같은 ‘예영계’에서 ‘균정계’와 ‘헌정계’(김계륭)로 분화한 것이다. 이 싸움에서 조카 김계륭이 승리를 거뒀다. 김계륭은 신라의 43대 희강왕(836~838)으로 등극한다. 

그러나 희강왕은 3년을 버티지 못한다. 흥덕왕 이후 왕권에서 밀려난 원성왕의 첫째 아들 김인겸의 손자인 김명(44대 민애왕·838~839)에게 피살된다. 왕위는 잠시 ‘인겸계’로 넘어간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예전에 조카인 희강왕(김계륭)에게 피살된 삼촌(김균정)의 아들인 김우징이 청해진 대사 장보고(?~846)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김명)을 죽인다. 이로써 이른바 ‘균정파’인 김우징은 왕위(신무왕·재위 839년)에 오른다. 

하지만 신무왕은 1년을 버티지 못했고, 그 아들인 문성왕(45대·재위 839~857)이 뒤를 잇는다. 문성왕은 죽기 전에 “숙부인 의정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유언을 남긴다. 

그 유언에 따라 등극한 이가 문성왕의 숙부이자 경문왕의 장인인 헌안왕(45대·재위 857~861)이다. 

그러니까 원성왕 이후 왕실계보를 정리하면 이렇다. 원성왕의 첫째인 ‘인겸계’(소성왕·애장왕·헌덕왕·흥덕왕)로 이어가다가 셋째인 ‘예영계’에서 분화된 ‘헌정계’(희강왕)를 거쳐 잠깐 ‘인겸계’(민애왕)로 복귀했다. 그런 뒤 다시 ‘예영계’ 가운데 ‘균정계’(신무왕·문성왕·헌안왕)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경문왕은 누구인가. ‘헌정계’인 희강왕의 손자였다. 그렇다면 희강왕에게 피살된 김균정의 후손인 헌안왕으로서는 경문왕이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존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헌안왕은 경문왕을 사위로 맞이하고, 그 사위에게 왕위까지 물려주었다. 문성왕 시대부터 모색되었던 인겸계와 예영계, 그리고 예영계 내에서도 다시 골육상쟁을 벌인 헌정계와 균정계 사이의 화합을 완성한 것이다. 

그 와중에서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겠는가. 860년 9월의 임해전 청문회와 861년 1월의 헌안왕 유언 기록은 장편 사극의 소재로 사용할 수 있을만큼 흥미진진하다. 

황룡사터. 경문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871년에는 황룡사9층목탑을 개조했고, 월상루까지 중수했다. 신라는 경문왕과 헌강왕 시절인 20여년간 반짝했다는 평도 받는다.|경향신문 자료사진 

■경문왕을 향한 두개의 시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경문왕의 치적과 관련해서는 호불호의 평가가 있는 것 같다.

경문왕은 문한(문서 문장 작성관리)과 근시(近侍·승정원 사관 등 임금 보좌 기구) 등을 확장하여 개혁정치를 단행했다는 평을 받는다. 혼란했던 신라 하대가 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 등 경문왕의 세 자녀로 이어졌다. 경문왕과 헌강왕 재위기간(20여년)이 신라의 ‘소강기(小康期)’였다는 평도 있다. 880년(헌강왕 6년) 경문왕의 아들인 헌강왕이 월상루에 올라 경주 시내를 바라보며 이렇게 자화자찬했다지 않은가. 

“백성들이 초가가 아닌 기와집을 짓고 나무 대신 숯으로 밥을 짓는다는게 사실이냐.”

그러자 대신들은 “백성들의 삶이 풍족해진 것은 모두 전하 덕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삼국사기>는 “경주~동해까지 집과 담장이 죽 이어졌으며 초가가 하나도 없었고, 풍악과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다른 평가도 있다. 헌안왕의 사위로 왕위에 오른 경문왕은 범원성왕계의 단합을 위해 불사를 일으킨다.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를 중창하고(861년) 동화사 비로암에 민애왕(인겸계)의 원탑을 건립했다.(863년) 또 867년에는 자신의 ‘청문회’가 열린 임해전을 중수했고, 870년에는 장인인 헌안왕을 위해 보림사 쌍탑을 건립했으며, 871년에는 황룡사 9층 목탑을 개조했고, 월상루까지 중수했다. 담양 개선사 석등도 868년 2월 설립한 것이다.

그러나 대규모 토목공사는 백성들을 피곤하게 했다. 이를 빌미로 반대세력들의 모반 또한 이어졌다.

이찬 윤흥 형제(866년)와, 김현·김예 형제(868년), 근종(874년)의 모반사건이 줄을 이었다. 근종 모반 사건 때는 대궐까지 침범할 정도로 위기일발이었다. 신라는 경문왕이 승하한 뒤(875년) 60년 만에 멸망했다. 경문왕과 헌강왕 시대 경주 시내에 울려퍼진 풍악소리는 신라 천년 사직의 종말을 예고하는 조짐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개선사 석등에 새겨진 ‘대랑’ 명문을 공부하다보니 그 복잡한 신라 하대의 왕실계보도와 멸망요인까지 더듬어보았다. 괜한 오지랖일 터이니 읽기 힘든 독자 여러분은 860년 9월의 임해전 청문회 정도까지만 흥미있게 읽어주시기 바란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김창겸, ‘신라 개석사석등의 건립과 대낭주의 정체’, <신라사학보> 49호, 신라사학회, 2020 

김창겸, <신라 하대 국왕과 정치사>, 온샘, 2018

조범환, ‘신라 하대 경문왕의 불교정책’, <신라문화> 16,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1999

장일규, ‘응렴의 결혼과 그 정치적 의미’, <신라사학보> 22, 신라사학회, 2011

국립중앙박물관, <문자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2011

국립경주박물관, <문자로 본 신라-신라인의 기록과 필적>,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