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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건국의 100대 영웅 정율성은 한중우호의 상징? 경계인? 빨갱이?

이기환기자 2023. 11. 8. 12:55

중국의 3대 음악가로 꼽히는 정율성. 전라도 광주 출신인 그는 중국의 대표군가인 ‘중국인민해방군군가’를 작곡했다. |정찬구 정율성 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광주문화재재단 제공

‘정율성(1914~1976)’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원래 이름은 ‘부은’이었는데요.

‘선율로 성취하겠다’는 뜻을 담아 ‘율성(律成)’으로 바꾸었답니다. 음악가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죠.

그런데 이 ‘정율성’이 요즘 ‘색깔론’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국가보훈부가 광주광역시가 추진중인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사업’에 제동을 건겁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정율성이 6·25전쟁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의 사기를 북돋운 ‘팔로군 행진곡’과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 군가를 작곡했고, 직접 남침에 참여해 대한민국 체제를 위협하는데 앞장선 인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에 ‘정율성 기념사업’을 즉각 중단하고, 이미 설치된 흉상 등 기념물도 철거할 것을 권고했는데요.

물론 광주시는 즉각 반대했고요. 강기정 광주시장은 “기념사업이 20년 가까이 진행되는 동안 별다른 논쟁이 없었다”면서 “정율성을 한·중 우호 교류의 상징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많았던 까닭”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강시장은 “노태우 정권부터 시작되었고, 이명박·박근혜 등 보수정권 시절에서조차 국비를 대준 사업에 제동을 거는 이유가 뭐냐”고 지적했습니다.

중국 인민해방군가(팔로군행진곡)을 작곡한 정율성은 중국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을 지은 녜얼(섭耳·1912~1935), ‘황하대합창’의 시싱하이(洗星海·1905~1945)와 함께 중국의 현대 3대 작곡가로 꼽힌다.

■‘간담상조’의 상징인물

이 참에 정율성이 어떤 인물인지, 왜 논란의 소용돌이에 빠졌는지 최대한 객관적으로 살펴보도록 합니다.

먼저 2014년 7월의 일이 떠오르네요. 박근혜 정부 때인데요. 당시 한국을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한·중 친선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인용한 허균(1569~1618년)의 시가 인상깊습니다.

“한국의 고대시인 허균의 시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속마음을 매번 밝게 비추고(肝膽每相照), 티없이 깨끗한 마음을 시린 달이 내려 비추네.(氷壺映寒月)’”

시주석은 “간담상조, 즉 ‘속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바로 중국과 한국의 친선과 우의를 상징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 시는 허균이 정유재란 즈음(1597~98) 조선에 파견되었다가 돌아간 명나라 사신 오명제에게 보낸 ‘송별시’의 한 구절입니다. 오명제는 조선 체류기간 중 이덕형(1561~1613)·윤근수(1537~1616)·허균 등과 교유하며 신라~조선에 이르는 100여명의 문집을 수집해서 중국에 소개했는데요. 그중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1563~1589)의 시 200편도 포함되어 있어요.

덕분에 허난설헌의 시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될”(<열조시집>) 정도로 중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죠. 시주석이 언급한 한·중 우호 인물 중에 최치원(857~?)과 김구(1876~1949)는 당연히 포함됐구요.

이순신 장군(1545~1498)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명 장수 등자룡(1531~1598)도 언급했습니다. 명나라 수군도독인 진린(1543~1607) 역시 이순신 장군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였답니다.

이순신 장군이 적탄을 맞고 쓰러지자 진린은 배에서 세 번이나 넘어지면서 울부짖었답니다.

“함께 싸울 이가 없구나! 나는 노야(老爺·이순신을 지칭)가 살아와서 구원할 것으로 여겼는데…어찌하여 죽었는가?”

진린이 통곡하자 명나라 군사들도 이순신 장군의 관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답니다.

정율성은 1938년 옌안 시절 항일군정대 여학생 대장이던 딩쉐쑹에게 매혹됐다. 들꽃을 꺾어 몰래 주고, <안나 까레리나>와 <동백꽃 처녀> 등의 소설책을 건네며 연애 편지를 살짝 꽂아넣곤 했다. 두 사람은 1941년 결혼했다.|정율성 선생기념사업회·광주문화재재단 제공

■신중국 건국의 100대 인물

시진핑 주석이 언급한 또 한 인물이 있는데요. 그 이가 바로 정율성입니다.

정율성이 누구이기에 최치원·허균·이순신·김구 등 쟁쟁한 분들과 함께 한·중 우호의 상징인물로 언급되었을까요.

그럴만 합니다. 국내에서는 생소할지 몰라도 현대 중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2009년 중국에서는 건국 60주년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렸는데요. 이때 정율성은 ‘신중국 건국에 공헌한 영웅 100인’으로 선정되었답니다. 시 주석은 정율성을 거명하면서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한국인 출신”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정율성은 ‘의용군행진곡’(중국 국가)의 녜얼(섭耳·1912~1935), ‘황하대합창’의 ‘시싱하이(洗星海·1905~1945)’ 등과 함께 중국의 현대 3대 작곡자로 꼽힙니다. 정율성은 시주석의 언급대로 ‘한국인’이며, 전라도 광주 출신입니다.

정율성은 1933년 5월 중국 난징(南京)으로 떠납니다. 이미 큰 형(정효룡)과 둘째형(정인제), 셋째형(정의은) 등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뒤였고요. 중국에 도착한 정율성은 유대진이라는 가명으로 의열단이 설립한 조선혁명간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이 학교 2기생 명단에 ‘유대진=가명 정부은’이라는 이름이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정율성이 1939년 옌안에서 작곡한 ‘팔로군행진곡’. 처음의 가사 중에는 ‘전진(向前)! 전진(向前)! 전진(向前)!’ 부분이 없었다. 그러나 정율성이 “노래 시작 부분이 어딘가 기백이 부족하다”면서 ‘전진!’을 세 번 넣었더니 노래가 살아났단다. ‘팔로군행진곡’은 1988년 7월 25일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로 공식 지정됐다. |김성준의 논문에서

정율성의 부인 딩쉐쑹(丁雪松·1918~2011)은 “정율성이 의열단 소속으로 난징의 전화국에 침투하여 전화를 도청하며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비밀공작 활동을 했다”(<작곡가 정율성>)고 했는데요.

하지만 정율성은 의열단원으로서 뚜렷한 임무를 받아 활동했다는 공식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물론 임무 자체가 비밀공작이었다면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을 수도 있겠죠.

어떤 연구자는 정율성이 아예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교하거나 의열단에 가입할 계획이 없었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합니다.

정율성이 “항일 구국운동에 종사하고 음악을 배우기 위해 난징에 왔다”고 밝혔다는 겁니다.

‘음악=항일구국운동’으로 여겼다는 겁니다. 정율성은 어려서부터 둘째형이 남겨놓은 만돌린을 켜면서 온종일 노래를 불렀고요. 그중에는 ‘인터내셔널가’와 ‘라 마르세이유’, ‘적기가’ 같은 혁명가도 즐겨 부르고 연주했답니다. 이 무렵 부친(정해업)은 어린 정율성에게 “전쟁에서 군대가 진군할 때 사기를 돋구는 우렁찬 군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는군요.

정율성이 작곡한 서정가요인 ‘옌안송(연안송)’과 ‘옌수이야오(연수요)’. 옌안송은 한국 민요 ‘낙화암’ 음조의 기초로 한 중국 최초의 서정송가로 꼽힌다. 이곡을 듣는 젊은이들이 항일투쟁 대열에 합류했다고 한다. ‘옌수아야오’는 항일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군대에 가는 정든 임을 배웅하는 애정을 표현한 곡이다.

■동방의 ‘카루소’

정율성은 난징 시절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구 소련 출신인 크리노와(Krenowa) 상하이 국립음악전과학교 교수로부터 성악을 배운 겁니다. 이름을 ‘율성’으로 바꾼 것이 이때입니다. 크라스노와는 정율성을 이탈리아 출신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1873~1921)’에 견주며 극찬했답니다. 정율성은 1936년 5월 음악가로 첫발을 내딛었는데요.

항일 청년들이 참여한 ‘오월문예사’ 창립 대회에서 만돌린을 직접 연주하며 자작곡 ‘오월의 노래’를 발표했습니다.

녜얼의 ‘의용군행진곡(훗날 중국 국가)’과 한국 민요 ‘아리랑’까지 불렀고요. 음악으로 한·중 청년들의 통로 역할을 자임한거죠. 정율성은 이때부터 음악을 통한 항일운동에 투신하는데요.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정율성은 홍군(중국공산당군)의 근거지인 옌안(延安)행을 결행합니다.

1938년 4월 혁명의 열기로 가득찬 옌안의 모습을 노래로 표현했는데요. 그것이 ‘옌안송(延安頌)’입니다.

이 곡은 한국 민요 ‘낙화암’ 음조의 기초로 한 중국 최초의 서정송가로 꼽힙니다. 1938년 황혼 석양에 비친 연안성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면서 항일전쟁의 승리를 다짐한 곡입니다.

‘산 봉우리에 노을 불타고 강 물결 위에 달빛 흐르네. 봄바람 들판으로 솔솔 불어치고 산과 산 철벽 이뤘네. 아! 연안 장엄하고 웅위한 도시 항전의 노래 곳곳에 울린다. 아! 연안 장엄하고 웅장한 도시….‘

이 노래는 요원의 불길처럼 다른 해방구는 물론 국민당 통치구역에까지 전파됐고요. 노래를 듣고 옌안으로 발길을 돌리는 젊은이들이 많았답니다. 가수 멍위(孟于·1922~)는 “여고생 때인 1938년 이 노래를 칭따오(청도)에서 들었는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혁명을 하려면 옌안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탈영하던 병사의 마음을 바꾼 것도 바로 ‘옌안송’이었답니다. 중국인들이 화교를 통해 모금운동을 펼칠 때 즐겨 불렀던 노래이기도 했다네요. ‘옌안송’에 이어 발표한 ‘옌수이야오(延水謠·연수요)’ 역시 서정성 깊은 ‘항일 연가(戀歌)’입니다.

‘연하수 맑게 흐르는데 정든 임 입대한다네…임이여! 전방에서 싸울 때 나는 베를 짜고 밭을 갈고….’

1942년 5월 옌안 문예 좌담회를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한 모습. 정율성은 그곳에서 ‘팔로군행진곡’과 ‘옌안송’, ‘엔수이야오’ 등 항일 운동을 대표하는 곡들을 발표했다.|(출처:바이두 사진을 토대로 이종한의 <정율성 평전>에서 정율성의 얼굴 표시)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한국인

정율성은 1939년 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는데요. 그런 정율성을 논할 때 ‘팔로군행진곡’(1939)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시진핑 주석의 언급대로 ‘중국인민해방군가’로 지정된 곡입니다. 중국공산당군은 원래 ‘홍군’이었죠.

그러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2차 국공합작이 이뤄진 후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됐습니다. ‘팔로군’은 이때부터 중국공산당군을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됐어요. 이 무렵 정율성은 ‘팔로군행진곡’을 작곡합니다.

‘전진! 전진!전진! 우리 대오 태양 따라 나간다. 조국의 대지 밟으며, 민족의 희망을 안은…우리는 인민의 군대. 두려워 않고, 굴복 않고, 용감히 싸우네…’

처음 시인 궁무(公木·1910~1998)의 작사 중에는 ‘전진(向前)! 전진(向前)! 전진(向前)!’ 부분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가사를 받아본 정율성이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노래 시작 부분이 어딘가 기세가 부족했다는 겁니다. 생각하다 못해 첫부분을 고쳤더니 기백이 살아나고 노래가 살아났답니다.

‘팔로군행진곡’은 1949년 신중국 건국 후 ‘인민해방군군가’로 사용됐고요. 1988년 7월 25일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 군사위원회 주석의 서명으로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로 공식 지정됐는데요.

우리가 귀담아듣지 않아서 그렇지 각종 공식행사 때 여러번 연주되었던 곡입니다. 1990년 베이징(北京) 아시안 게임 때 개막식 첫 프로그램으로 연주되기도 했고요. 2015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참석한 중국 전승절 70주년 열병식 행사에서도 울려퍼졌습니다. 정율성은 훗날 “‘팔로군행진곡’은 항일의 주역인 팔로군을 생각할 때 감정이 끓어올라 쓰게 된 것”이라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항일의 정신을 담은 군가라는 얘기죠.

정율성은 중국 건국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정율성을 기리는 각종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기념일마다 그가 지은 중국인민해방군가(팔로군행진곡)이 울려퍼진다.|출처: 바이두

■중국 군가의 아버지

정율성의 부인은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의 양딸이자 훗날 중국 최초의 여자대사(덴마크·네덜란드)를 지낸 딩쉐쑹입니다. 정율성은 1938년 옌안 시절 항일군정대 여학생 대장이던 딩쉐쑹에게 매혹됐답니다. 들꽃을 꺾어 몰래 주고, <안나 까레리나>와 <동백꽃 처녀> 등의 소설책을 건네며 편지를 살짝 꽂아넣곤 했다죠. 두 사람은 1941년 결혼했습니다.

1950년 중국 국적을 취득한 정율성은 문화대혁명 기간(1966~1976) 중 간첩죄명으로 감금되고 창작활동이 박탈되는 등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1976년 4인방이 몰락하자 저우언라이 총리를 노래하는 연가와 건군 50주년을 위한 대형창작을 서두릅니다. 하지만 그 해 12월 뇌일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사후 후야오방(胡耀邦) 전 공산당 총서기는 “정율성의 노래는 연안 시기에 큰 봉우리를 이뤘고, 중국 인민의 해방사업과 혁명투쟁에 크나 큰 기여를 했다”고 애도했습니다. 정율성은 바바오산(八寶山) 혁명 열사릉에 묻혔는데요.

그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정율성 동지는 생명을 중국 인민 혁명사업에 바친 혁명가이다. 인민은 영생불멸한다. 그의 노래도 영생불멸할 것이다.”

정율성은 ‘팔로군행진곡(중국 인민해방군군가)’와 ‘옌안송(연안송)’, ‘옌수이야오(연수요)’만 작곡한 게 아닙니다.

독창·제창·합창·대합창·동요·뮤지컬·오페라·영화음악 등 360여곡을 창작한 중국을 대표하는 음악가입니다.

‘팔로군행진곡’ ‘연안송’ ‘연수요’ 등은 모두 항일 의식을 고취시킨 대표곡들입니다.

1945년 9월 옌안 나지핑(羅家坪). 1945년 9월 정율성과 항일운동 단체인 조선독립동맹의용대, 조선군정간부 300~400명이 북한으로 떠나갈 때의 모습.|정율성 선생기념사업회·광주문화재재단 제공

■‘조선 인민군 행진곡’ 작곡자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하지만 정율성에게는 아마 영원히 지울 수 없을 것 같은 흠결이 있습니다.

북한군의 이른바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지은 작곡가라는 족쇄입니다.

정율성은 해방(1945년)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부인 및 딸과 함께 북한에 가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해 12월 평양에 도착한 정율성은 곧바로 황해도당위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일했습니다.

정율성은 이 때부터 ‘해방행진곡’,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중우의’ 등의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1948년에는 한 최고 영예인 ‘모범근로자’의 칭호를 받기도 했고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정율성은 ‘조선인민유격대 전가’와 ‘공화국 기치를 날린다’, ‘우리는 탱크부대’ 등의 작품도 씁니다. 정율성은 이후 1950년 10월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 국적과 당적을 회복했고, 다시 북한에 파견됐다가 1952년 4월 중국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작곡한 ‘조선인민군 행진곡’의 가사를 봅시다.

‘우린 강철 같은 조선인민군…불의의 원쑤들을 다 물리치고 조국의 완전독립 쟁취하리라…승리의 민주대열 조선의 인민군, 나가자 용감하게 싸워 이기네.’

이 행진곡은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이 부른 군가입니다. 월북 시인 박세영(1902~1989)의 가사에 붙인 곡입니다.

어찌보면 정율성은 중국군과 북한군의 대표 군가를 창작한 전무후무한 인물이 되는 셈입니다.

그런 이력의 인물이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전쟁을 겪은 세대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상황에서 ‘원쑤’와 ‘용감히 싸우는 인민군’이라는 내용의 군가를 창작한 인물을 쉽게 용인할 수 없었겠죠. 지금도 마찬가지일거구요.

정율성은 2009년 중국의 건국 60주년 행사에서 ‘신중국 건국에 공헌한 영웅 100인’으로 선정되었다.(출처:바이두)

■정율성 격하운동의 허와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한번 쯤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어요.

그동안 정부가 정율성 관련 행사에 국비를 대주면서 지원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외교 관계에서 한·중 간 우호의 상징 인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죠.

그랬으니 진보는 물론이고 보수 정권 시절에도 정율성 관련 행사에 국비를 대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했겠죠.

혹여 ‘정율성이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했다는 사실을 그동안은 몰랐었다’는 과거형의 말은 하지 맙시다. 정부가 얼마나 무능하면 그런 초보적인 팩트도 체크하지 못했단 말입니까. 그게 아니겠죠.

그런 흠결을 알고 있었지만 ‘한·중 관계의 아이콘’으로 등장한 정율성의 존재를 부각시켰겠죠.

반면 요즘 진행되고 있는 ‘정율성 격하 운동’은 어떨까. 악화된 한·중 관계를 반영하는 거울이 아닐까요. 중국을 견제하는 한·미·일 공조 분위기와도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 나오더군요.

한국과 중국에서 개봉된 정율성 관련 영화. 중국에서는 2002년 ’팔로군행진곡’의 가사를 딴 ‘태양을 향해 전진’(走向太陽)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는 2021년 ‘경계인’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됐다.

홍범도 장군 건도 그렇고, 지금의 사안도 그렇고…. 왜 국가보훈부가 앞장서서 편을 가르고 갈등을 유발하는 지 모르겠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아요. 법과 규정대로 한다고 하는데, 국익이 왔다 갔다 하는 외교 문제에 무슨 법이 소용됩니까.

정율성과 관련해서 다른 견해가 있고, 주장이 있다면 차분하게 그야말로 국민적 공감을 얻는 과정을 거친 후에 재평가하면 되는 거죠. 20년 이상 진행해온, 그것도 지자체 사업을 두고 감놔라 배놔라 한다는 것은 좀…. 그것도 일방의 주장만 듣고요. 외교란 살아있는 생물 같다는데 한·중 관계 좋아져서 정율성이 다시 부각되면 어쩌려구요.

물론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지난 7월24일 국가보훈부가 백선엽의 국립현충원 홈페이지 안장자 정보 비고란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문구를 삭제했다고 해서 비판을 받았는데요.

정율성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율성이 한·중 우호의 상징인물인 것과는 별도로 그가 6·25전쟁 때 인민군의 사기를 북돋은 인민군행진곡을 만들었다는 분명한 팩트는 애써 축소하거나 외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바탕 푸닥거리한 판인데 이참에 분명히 ‘공과 과’를 더불어 기록해야 합니다. 균형잡힌 시각이 필요하죠.(이 기사를 위해 정찬구 정율성선생기념사횝회이사장과 이리라 광주문화재단 대리가 사진 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김성준, <정율성의 음악활동에 관한 연구>, 명지대 석사논문,1997

노기욱, <정율성 음악의 사상적 지향>, ‘역사학연구’ 제37집, 호남사학회, 2009

상진, ‘정율성과 한유한의 작품을 통해서 본 항일가요의 민족주의적 특징 연구’, 단국대 박사논문, 2023

송서평, <정율성의 음악창작 탐구>, ‘남북문화예술연구’ 통권 제 5호, 남북문화예술학회. 2009

신정호, ‘정율성 예술정신과 한·중 문화교류론 재검토’, <중국과 중국학>(제38호), 영남대 중국연구센터, 2019

이미화, <정율성의 성악작품에 관한 연구: ‘연안송’ ‘연수요’ ‘팔로군행진곡’을 중심으로>, 건국대 석사논문, 2009년

이종한, <항일전사 정율성 평전(음악이 나의 무기다)>, 지식산업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