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지렁이도 밟으면…홧김에 태종 임금을 때린 궁녀의 운명은?

이기환기자 2021. 1. 6. 11:22

태종 이방원(재위 1400~1418)이 어떤 사람인지 다들 아시죠.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죽이고 조선을 개국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죠. 그 뿐인가요. 

개국 후에도 1,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이복동생 둘(방석·방번)과 정도전·남은 같은 개국공신을 무참히 죽였으며(1398년 1차), 동복 형(방간)까지 쫓아낸(1400년 2차) 무시무시한 임금이죠. 게다가 외척의 발호가 염려된다면서 처남 4형제(민무구·민무질·민무회·민무휼)를 모조리 죽이고, 아들(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가문을 멸문의 지경까지 빠뜨린,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 군주죠.

1902년(순조 2년) 순조와 순원왕후의 혼인식을 기록한 의궤인 ‘순조순원왕후 가례도감’에 등장하는 내시, 별감, 궁녀를 재구성했다. 내시, 별감, 궁녀는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을 지근거리에서 모신 최측근들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너무 꾸짖으시니 화가 나서 그만… 

그런데요. 그런 태종 임금을 두들겨 팬 궁녀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야사로 전해지는 말을 하는 거 아니냐구요. 아닙니다. 1420년(세종 2년) 10월 11일자 <세종실록>에 분명히 적혀있으니 엄연한 정사입니다. 이때는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나 있었던 때였는데요. 갑자기 2년 전(1418년)의 일을 꺼냅니다.

“쉰이 넘어가면서부터 불면증에 시달렸느니라. 어느 날도 밤잠이 오지않아 시녀 장미를 시켜서 무릎을 두드리게 했는데, 영 시원하지가 않아서 조금 꾸짖어 주고는 깜빡 잠이 들었느니라. 그런데….”

갑자기 무릎이 아파서 놀라 깼는데, 이건 주무르는게 아니라 두들겨 패는 정도였다는 겁니다. 생각할수록 괘씸해서 대비(원경왕후 민씨·1365~1420)에게 넘겼는데 시원스럽게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태종이 ‘고얀 것’하면서 직접 불러 추궁하니 “너무 심하게 꾸짖어서 화가 나는 바람에 그만 조심성없이 두드렸다”고 실토했답니다. 태종으로서는 참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만 어찌보면 창피하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아 내가 집안을 잘못 다스린 것이 아닌가’하고 자책하고는 궐밖으로 쫓아내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는 겁니다.

순원왕후의 빨간 가마 주위에 상궁과 시녀(나인)들이 말을 타고 가고 있다. 중앙에 별감들이 차례로 서고 좌우에 보행내관 10인이 나뉘어 열지어 가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임금에게 화풀이한 죄

그렇다면 궁금증이 생깁니다. 태종은 왜 2년이나 지난, 본인 입으로 ‘부끄럽다’고 여겨 덮어둔 사건을 재론한 걸까요. 이유가 있었답니다. 이후 궁궐 내 기강이 말도 안되게 무너졌다는 겁니다. 1420년 7월 승하한 부인(원경왕후 민씨)의 신주를 모셔 싣고 돌아오는 빈수레에 올라앉은 무례한 내시들이 적발됐답니다. 

또 창덕궁 광연루의 난간을 자(尺)로 잘못 잰 내시를 꾸짖었더니 아 글쎄 그 내시가 분함을 감추지 않고 문제의 ‘자(尺)’를 도랑에 내동댕이 쳤다는 겁니다. 태종에게 당한 화를 그렇게 푼거죠.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뿐이 아니라 태종이 강원도에 거둥했을 때 수라를 담당한 궁노비(여성)가 반감(궐내 반찬 담당 잡직)인 매룡이라는 자에게 “고기 좀 내달라”고 하자 벌렁 누운채로 “지금 고기가 없으니 내 세(勢·불알)나 베어가라”고 희롱했답니다. 

얼마 전에는 대전(세종) 소속 궁녀인 소비에게 세종이 어떤 업무를 시켰다가 곧 다른 일을 맡겼더니 소헌왕후(세종 정부인)의 지시인 줄 잘못 알고 ‘내가 주상께서 시킨 일을 하고 있는데 중전께서 다른 쓸데없는 업무를 시켰다’고 툴툴대며 성을 냈답니다. 그것으로 끝낸 게 아니라 앙심을 품은 소비가 소헌왕후가 맡긴 옷을 찢어버렸다가 적발당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궁궐 내 기강이 땅바닥으로 추락했다고 여긴 상왕(태종)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고 나선 겁니다. 그 결과 거론된 매룡 등 내시와 궁궐 내 잡직 서리 등 4명은 모두 참형을 당했답니다.(<세종실록> 1420년 9월28~29일) 

그렇다면 상왕을 때린 장미와 소헌왕후의 옷을 찢은 소비 등 궁녀 두 여인은 어찌 되었을까요. 

<세종실록>을 보면 “대소신료들이 장미와 소비 등도 반역죄로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고 세종은 “둘 다 부끄러운 사건인데…영의정이 도제조가 되었으니, 괴로움을 잊고서 친히 국문하여 진술을 받으라”고 지시한 내용만 나옵니다. 두 여인의 극형이 확정되었는지는 <실록>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세종실록>에는 장미라는 궁녀가 또 등장하여 궁궐 안팎에서 갖가지 사고를 친 뒤 결국 참형을 당하는 것으로 나와있더군요. 그러나 태종을 때린 장미와 세종 때까지 사고를 친 장미는 동명이인일 수도 있답니다. 

실록을 보면 장미라는 이름이 꽤나 많이 등장하거둔요. 세종 때 사고친 장미의 죄를 거론할 때 당연히 언급되어야 할 ‘태종을 때린 어마어마한 사건’이 보이지 않으니 동일인물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장미와 소비가 처음 사건을 처벌할 때 무사히 넘어가지 않았을 것 같아요.

궁녀 내시 별감 등은 왕과 왕족의 명령 전달, 알현 안내, 문방구 등을 관장하던 부서인 액정서에 소속되어 있었다. 왕과 왕족의 수발을 함께 들었으니 접촉도 많았다.|EBS 역사채널 캡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

지금까지 거론한 내시 궁녀들의 에피소드를 보면 ‘저게 진짜 야?’ 하실 겁니다. 시쳇말로 ‘죽으려고 환장한 것도 아니고’…. 지존인 임금 앞에서, 그것도 이복동생과 처남들까지 모조리 죽여버린 태종 임금을 홧김에 두들기고, 분이 못이겨 ‘자(尺)’를 내동댕이 치고, 그것도 모자라 승하한 원경왕후의 신주를 모신 수레를 타고 왕후의 옷을 찢어버리고…. 

감히 내시 궁녀 따위가 벌일 수 있는 행동이었을까요. 그들도 결코 임금의 역린을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겠죠. 

그러나 신분이 아무리 낮은 사람들이라도 성격이 있고, 감정이 있는 거겠죠. 그러나 그들도 사람이었습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대잖습니까. 순간적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드러낸 거죠. 

예컨대 태종이 총애한 환관 노희봉은 1411년(태종 11년) 1월5일 임금의 말을 잘못 전했다는 이유로 호된 꾸지람을 받았답니다. 심지어 태종은 중관에게 명해 노희봉의 머리채를 잡고 중문밖으로 내동댕이 쳤답니다. 그 날짜 <태종실록>을 보면 노희봉의 순간 감정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킵니다. 

“중관 김화상이 중문에 이르러 벗겨진 사모(紗帽)를 노희봉에게 씌워 주었다. 그러자 노희봉은 손으로 벗어서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막 섬돌 한 계단을 내려설 때 땅바닥에 떨어져 다친 데가 몹시 아팠다.”

아무리 임금의 명이라지만 모자를 확 던져버릴 정도로 화가 난 겁니다. 1405년(태종 5년) 10월21일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은 세자(양녕대군)가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자궁의 환관(내시) 노분의 볼기를 때렸습니다. 주인 잘못 만난 죄로 곤욕을 치른 노분은 세자에게 “이것이 어찌 소인의 죄냐”고 항의했답니다. <태종실록>은 그 말을 들은 세자가 “싫은 기색을 보였다”고 했는데요. 얼마나 화가 났으면 주인에게 화풀이 했을까요. 

1453년(단종 1년) 심부름 담당 궁녀인 중비가 액정서 경비를 담당하는 별감 부귀를 연모했다. 중비는 “붓 좀 빌려달라”고 말을 건 뒤에 “보고 싶다”는 연애편지를 보냈다. 중비와 부귀는 15~16살 꽃다운 청춘이었다.|EBS 역사채널 캡처

■사랑도 죄인가요

감정은 ‘화’ 뿐이 아니죠. 누군가를 연모하는 것 또한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비극적인 사례가 있답니다. 

1453년(단종 1년) 4월14일 벌어진 사건인데요. 심부름을 담당한 궁녀인 중비가 별감 부귀를 연모했답니다. 궁녀, 내시, 별감은 액정서(왕과 왕족의 명령 전달, 알현 안내, 문방구 등을 관장하던 부서)에서 근무하는 직책이었습니다. 그 중 별감은 천민신분이지만 액정서의 경비를 맡은 젊은 남성들이었는데요. 궁녀와 허구헌날 근무하다보면 정분이 날 수도 있었겠죠. 

궁녀 중비와 별감 부귀는 피끓는 15~16살 가량의 소년 소녀였답니다. 중비가 먼저 부귀에게 다가가 “붓 좀 빌려달라”고 부탁했다네요. 당황한 부귀가 “다음에 갖다주겠다”고 하고 돌아갔고, 중비는 “보내주기로 한 붓은 어찌 됐느냐. 넓고 적막한 대궐인데 서로 만나보면 어떠냐”는 연애편지를 보냈답니다. 

이 연애편지를 계기로 어린 궁녀 3명(중비·자금·가지)과 어린 별감 3명(부귀·수부이·함로)이 단체미팅을 했답니다. 그러나 이 3대3 풋사랑은 곧 적발되었고, 이들에게 ‘부대시(不待時) 참형’이라는 극형을 내립니다. 조선의 법전인 <속대전>에 따르면 ‘궁녀가 밖의 사람과 간통하면 남녀는 부대시(본래의 사형 집행 시기인 가을철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참수한다’고 했거든요. 

하지만 <단종실록>을 보면 문제의 어린 궁녀·별감들은 ‘3대3 만남’만 했을 뿐 실제로 정을 통했다는 증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종 임금은 참형이라는 극형만은 면해주었는데요. 별감 3명은 함경도 부령 관노로, 궁녀 3명은 평안도 강계의 관비로 쫓아냈습니다. 하지만 젊은 청춘 간의 풋사랑 치고는 너무도 서슬퍼런 처벌이라 할 수 있겠죠.(<단종실록> 1453년 5월 8일)

궁녀와 내시의 ‘슬픈 언약식’도 있었어요. 1425년(세종 7년) 12월10일 궁녀 내은이가 임금이 쓰던 ‘푸른 옥관자(망건에 다는 작은 옥고리)’를 훔쳐서 환관 손생에게 주고 서로 언약을 했다는 사건이 적발됐는데요. 임금의 여자가 바람을, 그것도 환관과 피웠고, 게다가 임금의 물건을 훔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며 둘다 참수형을 당합니다. 

1667년(현종 8년) 5월 20일 왕대비전의 궁녀 귀열은 자신의 형부와 간통했다가 적발되었답니다. 덜컥 임신까지 한 귀열은 아이를 낳기까지 기다렸다가 참형을 받습니다. 형조에서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아뢰자 현종이 “무슨 소리야”면서 “참형에 처하고, 즉각 집행하라”는 추상같은 명을 내렸습니다. 귀열은 형부를 사랑한 죄로 참형을 당한 겁니다.

태종의 무릎을 주무르던 궁녀 장미가 꾸지람을 받은 앙갚음으로 무릎을 세게 두들기는 불충을 저질렀다는 기록이 실린 <태종실록>

■가슴이 뜨거웠던 덕중 여인

궁녀 덕중의 이야기도 안타깝습니다. 덕중은 세조의 수양대군 시절 대군의 아이까지 낳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세조가 등극하자 소용(정3품의 후궁 품계)에 올랐을만큼 나름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조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죽었습니다. 아이를 잃은 슬픔에다 세조의 발길마저 뜸해지자 덕중은 환관 송중에게 한눈을 팔았습니다. 그 일이 세조에게 발각됐지만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았습니다.

덕중은 가슴이 뜨거운 여인이었나 봅니다. 이번에는 세종대왕의 4남인 임영대군(1420~1469)의 아들인 귀성군 이준(1441~1479)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귀성군은 18살에 병조판서, 28살에 영의정에 오를 정도도 장래가 촉망되는 종친이었습니다. 덕중은 짝사랑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두 번이나 “보고싶다”는 연애편지를 두 번이나 보냅니다. 임금의 아이를 낳은 후궁에게서 연애편지를 받은 귀성군 역시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두 번 다 아버지(임영대군)을 통해 세조에게 편지 받은 사실을 즉보했습니다. 

세조는 처음에는 덕중의 지위를 ‘소용’에서 ‘방자(심부름꾼 궁녀)’로 격하시키는 것으로 끝냈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편지가 보고되자 세조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덕중을 교수형에 처하고, 편지를 귀성군에게 배달한 내시 두 명은 대궐 밖으로 끌어내어 때려죽였습니다.(<세조실록> 1465년 9월4~5일) 

태종 시대에 임금의 수라를 준비하려고 “고기좀 내어 달라”고 요청한 궁노비(여성)에게 반찬 담당 잡직인 매룡이 “고기가 없으니 내 세(음낭)나 베어가라”고 희롱했다는 내용이 담긴 <태종실록>. 관련자들은 모두 참형이라는 극형을 받았다. 오른쪽 그림은 ‘선묘조제재경수연도’(1605년·고려대박물관 소장)의 조찬소 장면. 1605년(선조 38) 4월 삼청동의 관아에서 13명의 재신(宰臣)들이 그들의 노모를 위해 개최한 경수연(慶壽宴)을 그린 것이다. 화면을 대각선의 담장으로 가로막아 담장 밖에서 음식을 만드는 조찬소의 경관이다.

■세종에게 유감있다

솔직히 궁녀들의 꿈은 뭐겠습니까. 임금이나 세자의 승은을 입는 것이었습니다.

궁궐에 230명(인조 때)~600명(영조 때)의 궁녀가 있었고 연산군 때는 1000명이나 됐답니다. 그 사이에서 임금의 사랑을 차지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그 사이 궁궐 내 젊은 사내들과 얼마든지 눈이 맞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들 역시 감정에 충실했을 뿐이죠. 아무리 처벌이 혹독해도 저 남자, 저 여자가 죽도록 좋은데 어쩌겠습니까. 

그러나 가슴은 아픕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대가로 목숨을 그토록 무참하게 빼앗았으니 말입니다. 전 개인적으로 세종대왕이 자신의 옥관자를 훔쳐 사랑하던 남자와 언약식을 맺은 궁녀에게 교수형에 처한 판결이 안타깝더라구요. 뭐 다른 분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만고의 성군이라면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씨를 베풀 수도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