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문관 관리에서 홍어장수까지…조선판 '하멜표류기' 남긴 사람들
지난 2월초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의 특별전(‘ㄱ의 순간’)을 보던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림이 한 점 있었다. ‘조선인일본표착서화’(배가 조난당해 일본에 표착한 조선인을 그린 그림과 글씨)’라는 그림이었다. 일본 후쿠오카(福岡)의 개인사업가가 소장한 작품이 대여전시된 것이다.
이 작품이 특별전에 출품된 사연이 있다. 대학(평택대)의 일본어과에 재학중이던 학생(장윤화씨)이 일본에 머물던 친구에게서 작품의 존재를 알고서 서예박물관에 연락했다. 마침 특별전을 준비중이던 서예박물관측이 수소문 끝에 후쿠오카(福岡)의 개인사업가가 소장한 작품의 대여전시를 성사시켰다.
■표류민 초상화에 쓰여진 한글 흘림체
이 그림은 1819년(순조 19년) 1월7일 강원도 평해(지금 경북 울진)에서 멸치와 담배를 싣고 출항했다가 조난당해 일본 돗토리번(鳥取藩)에서 표착한 뒤 9개월만에 귀국한 조선 표류민 12명을 그린 초상화이다.
일본인(토시·土市)의 작품인데, 선장인듯한 안의기(安義基·53)를 중심으로 표류민 전원의 이름과 나이가 쓰여져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가치를 높이는 요소는 따로 있다. 그림 윗부분에 대문짝만 하게 흘림체로 쓴 한글글씨이다. 이걸 전문용어로 진흘림체라 한다. 처음엔 무슨 글씨인지 해독에 실패했다.
그러나 한글 편지 연구자인 이종덕 박사가 문제를 풀었다. 이 글은 당나라 초기의 시인인 노선(?~708)의 한시(‘남망루·南望樓’)를 한글로 옮겨 쓴 것이었다.
“거국삼파원(去國三巴遠·고향을 떠나 멀리 삼파까지 와서) 등루만리춘(登樓萬里春·누각에 올라서니 온 천지가 봄이구나.) 상심강상객(傷心江上客·상심한 강가의 나그네) 부시고향인(不是故鄕人·고향사람은 아무도 없네)”.
한시 원문을 한자가 아니라 한글로 그대로 휘갈겨 썼으니 판독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한시를 줄줄 외워 쓸 정도면 당대 기준으로 좀 ‘폼나게’ 한자로 써서, 같은 한자권인 일본인들도 알아보기 쉽게 쓸 일이지 왜 굳이 한글로 옮겼을까.
이동국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는 “이 글의 작자가 분명한 안의기라는 인물이 비록 배가 난파되어 일본땅에 표류하는 신세가 됐지만 ‘어디까지나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한글로 증거해냈다”고 말했다. 더욱이 신명나서 단숨에 20글자를 한획으로, 이렇게 대자로 휘갈겨 쓴 한글 글씨가 전해진 바가 없다는 것이다.
조선인의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그릇인 한글이 왜 조선인의 얼이고 정체성의 핵인지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이 작품이 그림은 일본인, 글씨는 조선인이 쓴 ‘최초의 한일합작품’라는 점에서도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림을 보면 안의기 일행은 일본 화가의 모델이 되기를 자처한듯 표정이 한결같이 밝다.
■친형제처럼 대해준 돗토리번 사람들
대체 어떤 대접을 받았기에 이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손승철 강원대 명예교수(사학과)의 논문(‘조선후기 강원도 표류민 발생과 송환-1819년 안의기 일행 표류를 중심으로’)에 따르면 안의기 일행은 제법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즉 당시에도 조선-중국-일본 등의 경우 상호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표류민의 송환절차는 외교적인 절차에 따라 규정대로 진행됐다. 표류민을 발견한 지역관리(일본은 번)는 통역·필담·몸짓언어 등으로 표류 경위와 출신지를 조사하여 중앙정부(일본은 막부)에 보고했다. 이후 중앙정부(막부)의 지시에 따라 비용을 직접 부담하고 인도자와 함께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조선은 한양 또는 부산, 중국은 북경(北京) 혹은 복주(福州), 일본은 나가사키(長崎)와 쓰시마(對馬島) 등을 거쳐 송환됐다.
안의기 일행의 경우 가마를 타고 돗토리번까지 이동했는데 의사와 가마꾼, 지역 관리 등 일행을 수행하는 자가 60명에 이르렀다. 안의기 일행이 돗토리번 중심지에 도착하자 도로변 상가들이 장막과 금병풍을 치고, 기둥을 양탄자나 명주실로 감는 등 환영 이벤트를 열었다.
조선인들은 방 두 칸을 배정받아 머물렀고, 쌀밥에 고기와 생선 등 5~6가지 반찬을 곁들인 식사를 삼시세끼 먹었다. 돗토리정(町)에서는 조선인의 신변보호를 위해 여러 마을이 번갈아가며 주야로 경비하도록 조치했다. 안의기 일행은 귀환 직전 돗토리번 관리(오카긴에몬·岡金右衛門)에게 “친형제와 같이 도움을 주어 고맙다”는 감사편지를 써주었고, 기꺼이 초상화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손승철 교수는 “초상화의 모델이 되어주고, ‘친형제’ 운운하는 감사장을 써주었다는 것은 그저 의례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정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황제의 알현 때도 상복을 고집한 조선관리 최부
표류의 역사를 말할 때 흔히 네덜란드인인 박연(얀 야너스 벨테브레이·1595~미상)과 헨드릭 하멜(1630~1692)를 떠올리며, ‘표류기’ 하면 하멜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3면이 바다인 지리적인 여건 아래 조선인의 표류도 자주 일어났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조선후기(1599~1888년)에 안의기 일행처럼 조선인이 일본에 표착한 것만 해도 1120건(1만769명)에 이른다. 연중 대륙에서 동쪽으로 부는 계절풍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대부분은 일본 연안으로 표류했다. 그러나 중국이나 류큐(琉球·현 오키나와·沖繩), 멀리 홋카이도(北海道)나 여송(필리핀), 안남(베트남)까지 표류하는 조선인도 생겼다. 그 가운데는 안의기 일행처럼 한일합작의 서화를 남긴 것을 비롯해 이런저런 형식으로 기록을 남긴 경우도 적지 않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이가 최부(1454~1504)이다.
홍문관 교리였던 최부는 1487년(성종 18년) 제주 등 3읍의 추쇄경차관(달아난 노비 등을 찾는 임무를 띠고 파견된 관리)으로 임명돼 제주로 건너간다.
그러나 이듬해 초 부친상의 기별을 받고 고향(나주)로 급히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난다. 최부를 포함한 43명이 탄 배는 14일간이나 표류하며 해적을 만나는 등 고초를 겪다가 겨우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에 표착했다. 한때 왜구로 오인받아 몰살 당할 뻔했지만 의연한 언행으로 자신이 조선의 관원이라는 사실을 납득시켰다. 마침내 최부 일행은 항주에서 운하를 통해 북경-요동을 지나 표류 6개월만에 귀국한다. 최부는 성종의 지시에 따라 8일만에 표류 보고서를 올렸는데, 그것이 최부의 <표해록>이다.
표류기에 따르면 최부는 해적과 만났을 때나 황제를 알현할 때, 조선 사대부의 체통을 버리지 않았다. 해적들이 최부의 옷을 벗겨 거꾸로 묶고 무수히 구타했지만 “몸이 문드러지고 뼈가 가루가 될지언정 금은이 나오겠느냐”고 버텼다. 해적들은 남은 양식과 의복을 빼앗은 뒤 닻과 노를 바다에 던지고 달아났다.
황제의 알현 때 상복을 벗지않겠다고 고집 피운 일화가 눈에 띈다. 즉 베이징에서 명나라 황제(홍치제·재위 1487~1405)의 하사품(의복)을 받은 최부는 황제를 알현하여 감사의 예를 올려야 했다.
명나라 예조는 “황제 앞에서는 당연히 상복을 벗고 길복으로 갈아입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최부는 “부친상 중이므로 절대 상복은 벗을 수 없다”고 버텼고, 급기야 명나라 예부 소속 홍려시 주부(이상)의 집에까지 찾아가 “제발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이상은 “형수가 물에 빠지면 손을 잡아 꺼내는 것이 법도 아니냐”면서 “아무리 상중이라지만 황제 알현 때는 길복을 입어야 한다”고 일축했다. 이상은 끝끝내 상복을 입고 대궐문 앞에 나타난 최부의 상관(喪冠·상중에 쓰는 마로 만든 관)을 벗기고 사모를 씌우며 혀를 찼다.
“아니 황제를 알현할 때만 잠깐 길복으로 갈아입고 나와서 다시 상복으로 바꿔 입으면 되는데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습니까.”
최부는 할 수 없이 길복으로 갈아입고 황제를 알현한 뒤 다시 상복으로 바꿔 입었다.
조선의 역사에 대한 최부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중국 관원이 “고구려는 무슨 장기(長技)가 있어서 수당(隋唐)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느냐”고 묻자 최부의 답변은 명쾌했다.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 있는 장수가 있었고 병졸은 모두가 윗사람을 위해 죽었소. 그런 까닭에 고구려는 100만 군사를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오.”
어느날 요동 사람들의 인사를 받은 최부는 “요동은 곧 옛 고구려의 도읍이었다”면서 “고구려가 지금 조선이니 땅의 연혁은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실상은 한나라와 같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조선이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뜻이었다.
■하멜 못지않은 표류기 남긴 최부
최부의 <표해록>은 조선시대 누구도 가보지 못한 강남(강소성·절강성) 지방과 산동성, 그리고 요동까지 중국을 종단하고 돌아와 쓴 값진 기행문이다.
명나라 건국(1368년)과 함께 실시된 해금(海禁)정책으로 감히 그 지역을 여행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송환도중 만난 중국인은 “조선에서 견문이 넓은 자라 해도 그대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성절사로 중국을 방문한 채수(1449~1515)는 최부에게 “장강(양자강) 이남을 본 조선인이 근자에 없었는데 그대만이 두루 관람했으니 어찌 행운이 아니겠냐”고 부러워했다.
20여년 뒤인 1511년(중종 6년) 3월14일 참찬관 이세진은 “최부의 <표해록>은 금릉(지금의 남경)에서 북경까지 산천·풍속·습속을 다 갖춰 기록했으니 조선사람들이 비록 중국을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이것으로 하여 알 수 있다”면서 책의 출판을 촉구했다. 최부의 <표해록>은 일본은 물론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다. 여러 판본과 사본이 통용됐으며, <당토행정기>(1769년)라는 이름의 일본어 번역본까지 나왔다.
그렇게 견문을 넓힌 최부가 돌아왔다면 마땅히 중히 발탁해서 활용했어야 했다. 최부는 귀국하자마자 성종임금의 명에 따라 8일만에 <표해록>을 써서 제출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됐다. 조정신료들은 “아무리 왕명을 받았다지만 부친상중에 뭐하는 짓이냐”고 탄핵했다. 성종이 “내가 시킨 것”이라도 두둔했지만 신료들은 “부친상을 다 치르고 (표류기를) 썼어도 늦지 않을 것인데 여러 날 서울에 머물렀다”고 비판했다.
겨우 성종의 비호로 대제학의 길목이라는 예문관 응교에 발탁됐다. 하지만 연산군(재위 1494~1506)의 등극 이후 벌어진 두차례 사화(무오·갑자사화)에 휘말려 결국 참형을 당한다.(1504년)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1431~1492)의 문인이라는 이유였다.
■실학자들을 깨운 홍어장수 문순득의 필리핀, 마카오 표류기
18~19세기 우이도 홍어장수 문순득(1777~1847)의 아시아 표류기인 <표해시말> 또한 드라마틱하다. 이 표류기는 당시 흑산도에서 유배중이던 정약전(1758~1816)이 문순득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고, 그것이 정약용의 제자인 이강회(1789~?)의 문집(<유암총서>)에 실려 전해졌다.
이 표류기는 1802년 1월18일 전라도 우이도 홍어장수 문순득의 배가 갑작스런 풍랑에 몰려 표류하면서 유구(류큐·오키나와)-여송(필리핀)-오문(마카오)와 중국을 거쳐 1805년 송환되는 장장 3년2개월의 표류일정을 일기체로 서술했다. 또 조선어와 유구어·여송어 등을 비교한 112개의 단어가 서술되어 있다. 여송, 즉 필리핀에서 10개월간 머무른 문순득은 1803년 9월9일 포르투갈 거류지인 마카오(오문·澳門)를 방문한다. 문순득은 마카오에 마련된 객사에서 성대한 대접을 받으며 3개월간 머물렀다. 문순득은 특히 여송과 마카오에서 동서양 건축이 어우러진 아시아 속 유럽을 경험한 첫번째 조선인이기도 했다.
■“부끄러워 땀이 솟을 지경”
문순득의 표류경험은 표류기를 대신 써준 정약전과 정약용(1762~1836) 형제, 그리고 이강회와 같은 조선시대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흑산도와 우이도를 오가며 유배생활을 한 정약전은 진귀한 세상을 체험한 문순득에게 호(천초)를, 정약용은 문순득 아들의 이름(여환)을 각각 지어주었다.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문순득이 마카오에서 경험한 화폐유통을 인용하면서 조선의 화폐제도 개혁을 주창했다.
“흑산도 사람 문순득이…(마카오에서) 여러나라 큰 장사치들을 많이 보았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돈이….”
<표해시말>은 “우리와 달리 중국·안남·여송 사람들은 서로 같이 살며 짝을 지어 장사하는 것이 한나라와 다름이 없다”고 부러워했다. 문순득의 경험은 또 이강회의 이용후생 실학정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이강회는 문순득의 표류경험을 담은 <표해시말>을 자신의 <유암총서>에 남겨 후세에 전해지도록 했다. 그뿐이 아니다. 이강회의 <운곡선설>은 문순득이 마카오로 이동할 때 탑승한 외국 선박의 구조와 항해체험을 바탕으로 조선선박을 비교한 글이다. 또하나 잊어서는 안되는 일이 있다.
1801년(순조 1년) 8월 조선에 외국인 5명이 표착했는데, 어느 나라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8년이 넘도록 송환하지 못하고 있었다. 표류인에게 “나라 이름을 써보라”고 하면 ‘막가외(莫可外)’라고만 했다. 할 수 없이 국적 불명의 표류민들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중에 2명이 사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문순득이 표현한 필리핀인의 용모를 보니 얼추 비슷한 것 같았다. 또 문순득이 적어온 필리핀 방언으로 문답을 하자 구구절절이 들어맞았다.
“(필리핀 방언을 들은) 그들은 미친듯이 울부짖어서 매우 딱하고 측은했다. 그들이 표류되어 온 지 9년 만에야 비로소 여송국(필리핀) 사람임을 알게 됐다.”(<순조실록> 1809년 6월 26일)
문순득은 길길이 뛰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정말 부끄러워서 땀이 솟을 지경”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나는 나그네로 떠돌기 3년만에 여러나라의 은혜를 입어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이 사람은 아직도 제주에 있으니…. 여송인은 조선인을 어떻게 보겠느냐.”
■연암 박지원의 반성문이 된 이방익의 <표해가>
이들 외에도 1542(중종 37년)~1546년(명종 1년) 제주사람 박손의 4년 유구(류큐) 체류기인 유대용의 <유구풍토기>가 있다. 제주인 고상영의 안남(베트남) 표류기(1687~1688년)는 역관 이제담의 구술정리 내용을 그대로 실은 정동유(1744~1808)의 문집(<주영편>)에 수록돼있다. 이지항은 하급무관(수어청군관·6품) 신분임에도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표류경험(1756~57)을 기록(<표주록>)을 남겼다.
또 이방익이라는 인물은 1796~97년 사이 제주 앞바다에서 뱃놀이 도중 대만-복건-소주·양주 등을 거쳐 북경을 통해 귀국했다. 그런데 이방익의 표류기인 <표해가>를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쓰게 된 동기가 흥미롭다. 즉 1792년(정조 16년) ‘타락한 문체를 바라잡겠다’는 이른바 문체반정을 외치면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지목해서 문책한 바 있었다. 그런 정조가 이방익 표류사건이 일어나자 박지원에게 “내가 전에 문체를 바꾸라고 타일었는데 과연 바꿨냐”고 물으며 ‘이방익 사건’을 기록해보라고 지시했다. 정조가 박지원에게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려고 이방익 사건의 문자화를 지시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방익의 <표해가>는 박지원이 정조에게 바치는 반성문이었던 것이다.
따지고보면 표류민들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시꺼먼 바다 속에서 정처없이 헤매면서 무수히 많은 고초를 겪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달리보면 한반도에 갇힌 당대 조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넓은 세상을 맛본 행운아들이기도 하다. 1만명이 넘는 표류인 중 극히 일부지만 어떤 이는 한글 대자의 진흘림체를 남겼고, 또 어떤 이들은 신세계의 경험을 생생한 필치로 남겼다. 혹은 실록의 기자인 사관의 붓끝을 통해, 혹은 그들이 목격한 신천지에 눈과 귀를 기울인 대필작가의 손에 의해 기록으로 전해졌다.
다만 그들의 경험한 새로운 세상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이 그 시대의 한계이기도 했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중국 강남을 경험한 최부를 보라. 최부가 탄핵당한 이유가 지금 잣대로는 기가 막히지 않은가. “아무리 임금의 명이라 해도 부모님 상 다 치른 뒤에 써도 될 일인데 한가롭게 기행문이나 썼다”는 것이었으니….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예술의 전당·조선일보, <ㄱ의 순간>(조선일보 100주년 한글특별전), 2021
손승철, ‘조선후기 강원도의 표류민 발생과 송환-1819년 안의기 일행 표류를 중심으로’, <인문과학연구> 45권 45호, 강원대인문과학연구소, 2015
최성환, ‘조선후기 문순득의 표류노정과 송환체제’, <한국민족문화> 43권 43호, 부산대민족문화연구소, 2012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홍어장수 문순득 아시아를 눈에 담다>, 예맥출판사, 2012
박원호, <최부 표해록 연구>, 고려대출판부, 2006
최부, <표해록>, 서인범·주성지 옮김, 한길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