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청와대터는 임금 측근들의 충성서약을 받은 회맹터였다

이기환기자 2021. 1. 22. 09:50

‘회맹(會盟)의식’이 있었다. 중국 춘추시대(기원전 770~403)의 산물이었다.

천자국인 주나라가 힘을 잃은 뒤부터 시작됐다. 강대한 제후국 군주는 이름 뿐인 주나라왕을 대신하여 천하를 주물렀다. ‘회(會)’는 일정한 의제와 장소, 시간을 정해 다른 제후국 군주들이 모이는 것을 이른다. ‘맹(盟)’은 회맹에 참여한 제후들이 차례로 제물의 피를 입술에 바르는 의식을 말한다. 이를 ‘삽혈(삽血)’이라 한다. 

국보로 승격되는 ‘보물 제1513호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 숙종 때까지 20여차례에 걸쳐 공신이 된 인물들의 후손이 모여 충성서약을 맺은 결과물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입술에 피 바르는 의식

회맹을 주도한 제후가 가장 먼저 삽혈했다. 이 제후는 다른 제후들에 의해 패자(覇者)로 추대됐다. 의제 합의가 이뤄졌을 때는 맹서문을 작성했다. 맹주(패자)는 제물인 소의 왼쪽 귀를 절단해서 그 피로 조약문을 작성했다. 조약문은 ‘배신하는 자는 공동토벌로 응징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 다음 이들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교서를 두루마리(軸)로 만들어 내려주었다. 이것을 공신축이라 한다.

조선 개국후에도 여러차례 임금이 신하들의 충성을 다짐받는 회맹식을 열었다. 나라를 여는데, 전쟁을 극복하는데, 변란을 진압하거나 반정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공을 세운 공신들의 회맹식이 그것이다.

문화재청은 최근 회맹식 후 임금이 내린 교서축 중 실물과 관련 기록이 완전히 남아 있고 25m에 달하는 큰 규모를 갖춘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보물 제1513호)를 국보로 승격지정 예고했다. 

이번에 국보로 승격지정될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2007년 4월20일 보물 지정)는 1680년(숙종 6년) 8월30일 열린 왕실 의식인 ‘회맹제’를 기념하기 위해 1694년(숙종 20년) 녹훈도감에서 제작한 왕실 문서다. 

이 의식에는 왕실에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이름인 ‘공신(功臣)’ 중 개국공신(開國功臣)부터 보사공신(保社功臣)에 이르는 역대 20종의 공신이 된 인물들과 그 자손들이 참석해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중 보사공신들은 서훈-박탈-회복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사람들이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되찾은 서인세력에게 내린 보사공신 등 역대 20종의 공신과 그 후손 400여명이 회맹식에 참석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그것이 회맹제가 거행된 시기(1680년)와 이 회맹축을 조성한 시기(1694년)가 14년 정도의 차이가 나는 이유이다. 숙종 재위 기간(1674~1720년) 중 일어난 3차례의 친위쿠데타 때문이었다. 당시 남인과 더불어 정치 중심세력중 하나였던 서인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집권한 뒤 공신이 됐다. 그러나 9년 만인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공신 지위가 박탈됐다. 그러나 서인이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재집권하자 공신 지위를 회복했다. 1등~3등까지 총 6명(김만기, 김석주, 이입신, 남두북, 정원로, 박빈)에게 ‘보사공신’ 칭호가 내려졌다. ‘보사공신’은 ‘사직(社)을 지킨(保) 공신’이라는 뜻이다.

이번에 국보로 지정 예고된 회맹축은 숙종 연간 보사공신이 있기까지 공신으로 지위 부여(녹훈·錄勳)와 박탈(삭훈·削勳), 회복(복훈·復勳)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물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평가받았다. 1680년 회맹식에 참여한 20공신은 개국공신(1392), 정사공신(1398·1차 왕자의 난), 좌명공신(1401·2차 왕자의 난), 정난공신(1453·계유정난) 등 20차례의 전쟁·정난·반란 등에서 공을 세운 이들이다.

1770년 쯤 제작된 한양도성도. 경복궁 북문(신무문) 밖으로 회맹단(점선 안)과 육상궁, 연호궁 등이 보인다. 회맹단은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충성을 서약하는 자리다. 육상궁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박씨의 사당이다. 연호궁은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왕 진종(영조의 첫째 아들)의 생모인 정빈 이씨의 사당이다.


■공신과 그 후손 500명에 충성맹세한 자리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는 1680년 회맹제 거행 당시 회맹문(종묘사직에 고하는 제문), 보사공신을 비롯한 역대 공신들과 그 후손들을 포함해 총 489명의 명단을 기록한 회맹록, 종묘에 올리는 축문(祝文·제사 때 신에게 축원하는 글)과 제문으로 구성됐다. 

축의 말미에 제작 사유와 제작 연대를 적었고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국새를 마지막으로 찍어 왕실 문서로서 완전한 형식을 갖추었다.

1680년 열린 회맹연에는 참석대상 총 489명 중 412명이 참석했다.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은 연로하거나 상(喪)을 당한 사람, 귀향 등으로 인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회맹축의 제목은 ‘20공신회맹축’이다. 조밀하게 짠 옅은 황비단 위에 붉은 선을 가로 세로로 치고 그 안에 단정한 글씨로 써내려갔다. 가로 약 25m에 달하는 긴 문서의 양 끝은 붉은색과 파란색 비단을 덧댔다. 위 아래를 옥(玉)으로 장식한 축으로 마무리해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어람용(御覽用) 문서답게 매우 화려하면서도 정갈한 인상을 준다. 

특히 이 회맹축의 경우 어람용 회맹축의 제작 과정을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는 관련 기록인 <녹훈도감의궤>가 함께 전해진다. 예컨대 긴 두루마리의 글씨는 서사관(書寫官·왕실의 특정 행사를 위해 차출되어 글씨 쓰는 업무를 담당한 관리)으로 발탁된 문신 이익신(1631~?)이 썼고, 화원 한후방(韓後邦)이 붉은 선을 그린 사실, 평안도에서 생산한 옥이나 상아, 비단과 같은 최고급 재료를 사용한 사실, 숙련된 기량을 지닌 장인을 차출하기 위한 논의과정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공신회맹제가 있을 때마다 어람용 회맹축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910년까지 문헌을 통해 전래가 확인된 회맹축은 3건에 불과하다. 1646년(인조 24년)과 1694년(숙종 20년) 제작된 회맹축, 1728년(영조 4년) 분무공신 녹훈 때의 회맹축이 그것이다.

이중 영조 때 만들어진 ‘20공신회맹축’의 실물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고, 1646년에 제작된 보물 제1512호 ‘20공신회맹축-영국공신녹훈후’에는 국새가 날인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어람용이자 형식상, 그리고 내용상 완전한 형태로 전래된 회맹축은 이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가 유일하다.

박수희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연구관은 “이 회맹축은 17세기 후반 숙종 대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을 거치면서 서인과 남인의 정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당시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사료”라고 평가했다.

멀리서 바라본 북악산- 청와대-경복궁. 북악산은 예부터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고 해서 면악으로도 일컬어졌다. 지금의 청와대 자리는 고려시대 3경의 하나인 남경의 궁궐터가 존재했던 곳이다. 북악산의 뒤쪽에 삼각산 보현봉이 보인다. 풍수산 규봉, 즉 숨어서 엿보는 형국이라 해서 흉조라 했다. 게다가 북악산은 청와대와 경복궁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외면하는 형국이다. |연합뉴스


■청와대터의 비밀

한가지 언급할 것이 있다. 이렇게 공신과 그 후손들의 충성맹세를 받던 곳이 지금의 청와대터라는 것이다. 회맹단은 경복궁의 북문, 즉 신무문 너머 지금의 청와대 본관 자리에 해당된다. 1604년(선조 37년) 10월28일 임진왜란 이후 호성공신, 선무공신, 청난공신 등의 작위를 받은 109명 등이 모여 "신무문 밖 회맹단에서 회맹의식을 치렀다"(<선조실록>)고 했다. 

1·2차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틀어쥔 태종도 이곳에서 여러차례 공신회맹을 통해 충성서약을 받았다. 개국공신(1392)은 물론 1·2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운 정사공신(1398)과 좌명공신(1401)들이 5차례나 모여 충성을 다짐했다.

공신들의 도움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진 태종으로서는 그럴만도 했다. 따지고보면 언제 배신할 줄 모르는 안개정국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그들의 충성서약을 받음으로써 극도의 불안감을 해소시키고자 한 것이다.

1417년(태종 17년) 청와대터에서 거행한 회맹은 특별했다. 개국·정사·좌명공신들은 물론 그들의 적장자(아들)들까지 죄다 모여 충성서 다짐했다.

“만약 맹세를 바꾼다면 귀신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 자신 뿐 아니라 반드시 후손에게도 미칠 것이니….”

따지고 보면 혁명과 반란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바늘을 훔친 이는 주살되지만,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 제후의 문에 인의가 있다(竊鉤者誅 竊國者侯 侯之門仁義存).”(<사기> ‘유협전’)는 말이 있지 않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정권만 잡으면 인의(仁義)는 절로 따라온다는 것이다.

정변을 성공으로 이끈 이들이 모여 축배를 들고 주군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의식을 치른 곳…. 심지어 대를 이어 충성서약했던 저 회맹단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청와대 터였다. 모골이 송연하다.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신무문 밖으로 회맹단이 있었다.


■연산군도 범하지 못한 청와대터

임금과 신하의 ‘성스런 의식(충성맹세)’이 열리던 청와대터는 신성시됐다.

심지어 황음무도한 연산군조차 회맹단을 후원의 놀이터로 만들지 않았다. 1680년(숙종 6년) 회맹단터를 찾은 숙종에게 김수항이 아뢴 말에서 더듬어볼 수 있다.

“경복궁의 북문 밖은 회맹단입니다. 그곳은 삼청동과 가까워 수석이 아름다운데도 주색과 유람에 빠진 연산군 조차도 감히 후원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숙종실록>)

풍수상으로 봐도 청와대를 품에 안은 북악산(면악·백악) 일대는 인간이 절대 건드려서는 안되는 공간이었다. 풍수상 주산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조 세종·성종·문종·중종·선조는 한결같이 “백악(북악)에서는 돌도 캐지 마라”고 당부했다. 예컨대 세종은 1428년(세종 10년) 경복궁의 주산과 왼쪽 산맥에 소나무를 심고 근방의 인사를 모두 옮기라는 명을 내렸다. 성종 때 좌의정을 지낸 윤필상의 상소에도 나온다.(1481년)

“경복궁 주산에서 무식한 무리들이 집을 짓거나~ 나무를 베고 밭을 개간하고 우물을 파서 산의 맥을 손상시키니 마땅히 그 죄를 묻게 하소서.”(<성종실록>)

윤필상의 상소가 지목하고 있는 곳은 바로 청와대였던 것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