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이 사라졌다'… 정전협정 첨부 지도 '빗금, 점선, 각주'의 정체
시원하게 뚫린 자유로를 달리다보면 임진강과 한강의 합수부에 파주 통일전망대가 서있죠.
그 쯤에서 한 5㎞ 정도 더 달리면 임진강변을 따라 설치되어 있던 철책이 갑자기 강 건너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누가 “저 철책이 뭐냐”고 물으면 전 “아마 군사분계선(휴전선)의 남방한계선(휴전선에서 2㎞ 남쪽선)을 표시한 철책일 걸?”하고 대답합니다. 100% 이런 질문이 돌아옵니다.
“그럼 통일전망대에서 여기까지 오는 자유로의 맞은 편 지역은 뭐냐. 북한땅이냐”고요. 묻는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포털사이트의 지식백과를 검색해보세요.
‘군사분계선(휴전선)=서해안 강화 북방(예성강 및 교동도)~동해안 간성 사이 155마일(250㎞)’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군사분계선이 임진강 하구에서 제법 떨어진 내륙에서부터 설치되었다니…. 상식을 거르스냐고 따질 만하죠.
■휴전선을 둘러싼 심각한 오해
거두절미하고 1953년 7월27일 체결된 정전협정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비무장지대를 전문적으로 촬영해온 박종우 사진작가가 그동안 찍은 사진과 함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사이트를 통해 입수한 정전협정문 원문(북한판) 및 첨부지도를 보내 주었거든요.
협정문 내용이야 워낙 잘 알려져 있지만 ‘첨부지도’ 원문은 제가 처음 봅니다.
우선 정전협정 제1조1항은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각기 2㎞ 후퇴함으로써…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고 했죠.
여기서 협정문에 첨부된 ‘지도 1’을 볼까요. 과연 파주 통일전망대에서 임진강변을 따라 제법 내륙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군사분계선과 남북방한계선이 표시되어 있죠. 군사분계선이 표시된 곳은 임진강 이북의 장단 정동리고요.
그곳에서 동해안의 강원 고성 강정리까지 1292개의 말뚝을 세워놓은 것이 바로 군사분계선(휴전선)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한 질문이 나오겠죠. 그렇다면 군사분계선 표시가 끝난 부분(임진강 하구)에서 서해 5도 해역까지는 뭐냐, 그 구간에는 군사분계선이 없다는 거냐, 뭐 이런 궁금증이 생기겠네요.
그렇습니다. 1953년 7월27일 체결된 정전협정문에 따르면 ‘임진강 하구~한강하구~서해 5도’ 사이에는 군사분계선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군사분계선(휴전선)은 육상에만 존재하지, 해상에서는 실체가 없다”는 점을 못박은 겁니다.
■해상에서는 휴전선이 없다
조목조목 따져볼까요. 우선 임진강 하구부터 서해 5도에 이르기까지의 해상군사분계선은 없다고 했죠.
그럼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해서 넓은 강이 되고, 그것이 강화도의 북변을 흘러 황해도 예성강과 만나 서해로 빠져나가는 수역은 어떻게 규정되어 있을까요. 정전협정에서는 이 수역을 ‘한강(하)구’라 칭하고 ‘첨부지도2’에서 수역의 구획과 성격을 분명히 밝힙니다. ‘첨부지도2’를 보면서 정전협정(제1조5항)을 읽어봅시다.
“한강 하구의 수역으로서 그 한쪽 강안(강기슭)이 다른 일방의 통제하에 있는 곳은 쌍방의 민간선박의 항해에 이를 개방한다. 한강하구의 항행수칙은 군사정전위가 규정한다. 쌍방 민간선박이 항해함에 있어 자기 측의 군사통제하에 있는 육지에 배를 대는 것은 제한받지 아니한다.”(정전협정 제1조5항)
좀 복잡하죠. 간단히 말한다면 정전협정은 “임진강·한강 합수부에서 서해로 빠져나가는 한강수역에는 분계선도 없을 뿐 아니라 민간선박의 자유항행을 허용한다”고 규정했습니다. 게다가 자기측 육지라면 배의 정박까지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 군사분계선(휴전선)을 설명해놓은 ‘지식백과’가 오류라는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정전협정문에 따르면 오류가 분명합니다.
■“한강하구는 국제수로”
흥미로운 착안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간과하는 동안 이런 정전협정 조항이 빛을 발한 때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1990년 11월 한강하구 수역에 남측의 준설선이 통과했는데요. 그 해 엄청난 수해로 한강하류와 임진강변의 제방이 유실됨에 따라 복구가 절실했죠. 육로로 복구자재와 장비를 운반할 수도 있었으나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거든요.
이때 당시 유엔사 정전위 수석대표의 특별고문이었던 이문항씨가 나섰습니다. 이씨는 북한측 군정위 고위간부들과 비공식모임을 통해 준설선 및 예인선이 인천~교동도~한강하구를 거슬러 올라가는 계획을 설명했습니다.
물론 정전협정(1조5항)에 따르면 한강하구 수역은 민간선박에 개방된 수역입니다. 따라서 북한측과 접촉할 필요도 없었죠. 그러나 불필요한 갈등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연락을 취했는데요.
북한측도 이문항씨의 제의를 수락했답니다. 이로써 정전협정문에 따라 한강하구에서 민간선박이 통행한 첫번째 사례로 남게 되었습니다. 또 있습니다. 1996년 집중호우 속에 유도에 표류한 두살바기 송아지를 구한 적도 있었습니다.
1999년 납섬에 표류한 염소 10마리를 회수한 적도 있었고요. 누누이 강조하지만 정전협정에 따르면 유도와 납섬 등 한강하구 섬들은 ‘중립섬’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인 리영희 교수(1929~2010)는 “한강하구는 일종의 국제수로(International water passage)이며 남북한의 민간선박이 자유로이 드나드는 ‘자유통행권’을 갖는 수역”이라 해석했습니다.
이는 ‘정전위의 특정한 허가없이 어떠한 군인이나 민간인의 출입을 불허한다’고 규정한 육상 비무장지대와 관련된 ‘정전협정 조항(1조8항)’과는 사뭇 다릅니다.
■함박도가 북한 땅인 이유
지금 이 순간에도 갈등의 화약고가 되고 있는 ‘서해 5도’는 어떨까요.
‘분쟁의 원죄’가 바로 이 정전협정문에 있습니다. 즉 정전협정 2조13항ㄴ조를 볼까요.
“황해도(가)와 경기도(나)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서쪽과 북쪽의 모든 섬은 공산측의 통제에 두지만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 등 5개 섬은 유엔군의 관할 하에 둔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황해도(가)와 경기도(나)의 도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서쪽의 섬들은 북한의 통제에 두되, 백령도 등 5개 섬은 유엔군의 통제 아래 둔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도에는 이런 내용을 적시한 뒤 굉장히 엄격한 각주(1·2)를 달아놓았습니다.
먼저 ‘각주1’은 “가(황해도)~나(경기도)은 그저 서해 섬들의 통제를 표시한 것일뿐 아무런 의의가 없으며, 다른 의의를 첨부하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도에 표시한 ‘가~나’ 선은 그냥 황해도와 경기도를 가르는 도경계선이라는 겁니다. 즉 서해 연안의 많은 섬들의 통제권(유엔측이냐 공산측이냐)을 명시하는 선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 선을 연장하거나 접속시켜서 다른 ‘선’이나 ‘구역’의 일부로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 못박은 겁니다. 한마디로 이 ‘가~나’선은 군사분계선(휴전선)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4년 전(2019년)인가요. 때아닌 영토 관할권 논쟁에 휘말렸던 섬이 있었죠. 함박도인데요. 한국 정부가 이 섬을 ‘인천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 산97’라는 주소를 부여해 행정적으로 관리해온 것이 알려지면서 정치 쟁점이 됐던 곳인데요.
그러나 정전협정의 지도에 따르면 함박도는 도경계선(가~나) 위, 즉 북한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점’만 찍어둔 서해 5도
나아가 ‘각주2’를 볼까요. 더욱 엄격합니다. 정전협정 ‘첨부지도3’를 보십시요.
유엔군 통제하에 둔 백령도 등 서해5도 둘레에 사각형 형태의 점선을 그렸습니다.
그런게 ‘각주2’는 이 점선의 의미를 엄격하게 규정해놓았습니다. “이 장방형의 구획(점선)은 유엔군 통제 하에 두는 각 도서군(섬)을 의미하며, 아무런 다른 의의가 없다…”고 못박아둔 겁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요. 장방형의 구획은 섬의 위치를 표시하는 점선일 뿐, 그 사각형 안의 공간은 어떤 수역이나 구역, 구획과 같은 공간의 면적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더구나 그 점선 사각형을 서로 연결해서 어떤 목적의 선을 긋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기막힌 조항이죠. 백령도 등 5개 섬은 유엔군 통제 아래 두었지만 ‘면’(수역 혹은 구획)이 아니라 ‘점’(섬)에 둔 형국이 된 겁니다. 리영희 교수는 이에 기하학의 초보적 공리를 인용했는데요.
“기하학의 초보적인 공리의 하나인 점(點)은 ‘위치는 있으니 크기는 없다’는 것이다. 이 공리가 서해5도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어떨까요. <정전협정>에 따르면 한강하구~서해5도를 잇는 어떤 선도 불법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자연히 한국측이 설정한 북방한계선(NLL)과 북한이 선포한 50마일 군사경계수역 등은 일방적인 선언 및 주장일 뿐이라는 겁니다.
■해상봉쇄는 할 수 없었기에…
선뜻 이해할 수 없는 협정문입니다. 그런데 왜 백령도 등 서해 5도를 제외한 나머지 섬에서 철수해야 했을까요.
이 또한 정전협정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정전협정 2조15항을 볼까요.
“정전협정은…한국(북한)에 대해서는 어떤 종류의 해상봉쇄(naval blockade)도 하지 못한다.”
쉽게 풀이하면 북한을 해상봉쇄할 수 없다는 겁니다. 만약 해상에 군사분계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결국 북한의 황해도 연안을 모두 해상봉쇄하는 셈이 되니까요.
사실 유엔군은 압도적인 제공·제해권을 토대로 서해안의 섬들을 장악하고 있었죠. 유엔군은 교착상태에 빠진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황해도 연안을 봉쇄하게 됩니다.
이것이 1952년 9월27~53년 8월27일까지 설치된 ‘클라크 라인’입니다. 당시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의 이름을 땄죠.
미국은 이 ‘클라크 라인’ 등 중국 및 북한해상봉쇄안을 유엔총회에 올렸습니다. 그러나 끝내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엔군은 서해5도를 제외한 나머지 도경계선의 서북쪽 연해의 섬지역을 공산측에 ‘양보’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정전협정에 해상봉쇄 불가조항을 삽입하는 것에 동의하고 말았습니다. 정전협정 제2조 15항에 따라 유엔군측이 설정한 해상봉쇄선인 ‘클라크 라인’도 철폐되고 맙니다. 그 때가 정전협정 발효 한 달 후인 1953년 8월27일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와의 협상? “하지마세요!”
올해로 정전협정을 체결한지 꼭 7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무려 3년1개월3일간 펼쳐진 전쟁을 끝내고 겨우 체결한 정전협정이었는데요.
그럼에도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동안 잘 알지 못했거나 혹은 간과하고 넘어간 조항들이 많네요.
정전협정이 시작된 것은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1951년 7월8일부터였는데요.
이후 2년 19일간의 회담은 그야말로 악전고투였죠.
오죽하면 후반기 휴전회담을 이끈 윌리엄 해리슨 유엔군 수석대표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래 흔들며 말했답니다.
“(공산주의자와의 협상은) 하지 마세요.(Don’t)”
협상과정에서 코미디 같은 에피소드를 여러편 남겼습니다.
■2시간 11분간의 눈싸움
‘승리자가 패자를, 황제가 제후를 맞이한다’면서 ‘남면(南面·남쪽을 향함)’하는 테이블을 선점하려고 아우성 친 일이라든가, 상대방에 내놓은 다과를 두고 ‘승자가 패자에게 내리는 하사품’이라며 거절한 일화는 애교로 봐줄만합니다.
공산군측은 미군에게서 노획한 피묻은 지프에 백기를 달고 유엔군 대표단을 태운채 개성 시내를 퍼레이드 했습니다. 지프 뒤에 깔끔하게 차려입은 공산군 병사들이 만세 몸짓을 하고, 이 모습을 공산군측 카메라맨이 연신 셔터를 누르고….
유엔군 대표들을 포로 취급한 겁니다. 키가 큰 유엔군 대표들의 의자를 4인치(10㎝)나 잘라 패배자를 깔보며 내려보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죠. 심지어는 협상테이블에 더 큰 깃발을 두려고 상대방측 깃발을 밀어넣고 다시 채우는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유치함의 백미는 역시 2시간 11분간 벌인 치열한 눈싸움이었습니다.
1951년 8월10일 조이 터너 유엔군측 수석대표(중장)가 “앞으로 공산측의 의도에 끌려가지 않겠다. 현재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두는 문제만 협의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공산군측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공산군측 수석대표인 남일 중장이 입술을 꽉 깨물고 팔짱을 끼고 앉아있었습니다. 다른 공산측 대표들도 일제히 부동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동안 핵심사안을 두고 지긋지긋한 장광설로 유엔군측을 자극했던 공산측이 이번에는 ‘침묵’ 작전을 선택한 겁니다. 공산군 측은 일제히 유엔군측 대표들을 쏘아보기 시작했고요. 잠시 당황하던 유엔군 측도 이에 질세라 공산측과 눈싸움을 벌였습니다. 회담장엔 살벌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조이 중장은 훗날 “장광설을 좋아하는 그들이 설마 그런 태도(눈싸움)로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면서 “우리에게 상눈을 부릅뜨고 상대 얼굴만 지켜보며 여러 시간을 즐기는 풍습은 없다”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렇게 2시간 11분의 시간이 흘렀고, 결국 항복을 선언한 것은 유엔군 측이었습니다.
협상은 결국 파국을 맞게 됩니다. 물론 유엔군측도 때로는 비슷한(유치한) 방법으로 대응하며 지루한 회담을 이끌어갔습니다. 그렇게 2년 19일에 걸친 협상이 마무리된 겁니다.
■기약없이 결렬된 정치회담
불완전한 정전협정이었다고 했죠. 그래도 전쟁 후 유종의 미를 거둘 기회는 있었습니다.
정전협정 4조60항은 “휴전협정 조인 후3개월 이내에 관계국 간 정치회담에서 외국 군대 철수 및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를 협의한다”고 했거든요. 이에따라 1954년 4월2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교전당사국인 남북한과 남아공을 제외한 유엔참전국 15개국, 그리고 중국과 소련 등 19개국이 참석한 정치회담이 열렸는데요. 하지만 정치회담은 쌍방의 의제와 주장이 평행선을 달린채 극심한 비방전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6월15일 다시 만난다는 기약도 없이 결렬되고 말았죠.
이로써 한국통일을 위한 평화적인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 남북간 반목과 갈등의 평행선을 달리는 신세가 되었죠.
■한강하구에서 찾아야 할 실마리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까요. 저는 정전협정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해결의 실마리’를 이 대목에서 찾습니다.
그것이 정전협정 제1조 5항입니다. 다시 읽어봅니다.
“한강 하구의 수역으로서 그 한쪽 강안(강기슭)이 다른 일방의 통제하에 있는 곳은 쌍방 민간선박의 항해에 이를 개방한다. 한강하구의 항행수칙은 군사정전위가 규정한다. 쌍방 민간선박이 항해함에 있어 자기 측의 군사통제하에 있는 육지에 배를 대는 것은 제한받지 아니한다.”
그렇다면 어떨까요. 남북한 민간선박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는 곳, 정전협정 체결 꼭 70년이 흘렀는데, 남북한이 바로 이곳, 한강하구에서 화해의 이벤트를 벌어봄이…. 지금의 남북관계라면 몽상가의 실현불가능한 꿈이라고 손가락질 하겠죠.
그러나 언젠가는 현실로 다가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이 기사를 위해 박종우 사진작가가 도움말과 함께 각종 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국방부전사편찬위, <한국전쟁 휴전사>, 1989
박종우, <비무장DMZ>(사진 박종우, 글 정근식·박종우 등), 고은문화재단, 2020
리영희, <북방한계선은 합법적 군사분계선인가>, ‘통일시론’ 여름호, 1999
이기환, ‘판문점에서는 블랙코미디 설전, 전선에서는 건곤일척의 혈전’, <전쟁과 박물관> 3호, 전쟁기념관, 2023
이문항, <JSA-판문점(1953~1994)>, 소화, 2001
찰스 터니 조이, 김홍열 옮김,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03
척 다운스, 송승종 옮김, <북한의 협상전략>, 한울,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