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m '세한도'엔 중국 한국 문사 20명 댓글 달려있었네…여백 5m는 무엇?
“절개가 견고하다가 급한 순간에 변하는 이도 있다…군자가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를 배우는 이유를 알 수 있다고 했다…세상을 떠나 있으니 걱정이 없다는 심정으로 추사옹의 마음을 엿보다.”(장악진)
1845년(헌종 11년) 청나라 명사 장악진(생몰년 미상)이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본 뒤 남긴 감상평이다. 장악진 뿐이 아니다. 청나라 문사 16명과 조선의 오세창(1864~1953)·이시영(1869~1953)·정인보(1893~1950) 선생 등 4명까지 모두 20명이 ‘세한도’에 줄줄이 시쳇말로 ‘긴 댓글’을 달았다. 물론 20개의 댓글이 모두 ‘선플’로 도배했으니 ‘세한도’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만 하다.
애초에 세로 23.9㎝, 가로 70.4㎝ 정도였던 ‘세한도’는 추사와 청나라·조선 문인 20명의 ‘댓글’ 등이 이어지면서 15m에 육박하는 두루마리 장권(전체 크기 33.5×1469.5㎝)이 되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70.4㎝, 세로 23.9㎝의 크기이지만 중국(16명)과 한국(4명)의 문인 문사들의 감상평까지 치면 전체길이가 15m에 달한다. 이번 특별전에서 다 펼쳐보인다. 이 기사에 길게 펼치지 못해 6조각으로 잘라 붙였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세한-평안 특별전
국립중앙박물관은 24일부터 내년 1월31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歲寒·평안平安’ 특별전에서 15m에 달하는 ‘세한도’의 전모를 공개한다.
오다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지난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추사 서거 150주년 특별전(‘추사 김정희-학예 일치의 경지’) 이후 14년 만의 전모 공개”라고 전했다. 특히 지난 10월 소장가인 손창근(1929년생)씨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직후에 열리는 첫번째 공개회라는 점에서 뜻깊은 특별전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세한도’는 그림으로만 치면 결코 잘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없다. 아닌게 아니라 창 문 하나만 나있는 허름한 집 한채에 나무 네 그루, 그리고 ‘세한도’라는 그림 제목과 제자 이상적에게 준다는 글씨 몇 자, 그리고 인장 몇 방, 그것이 전부다. “도대체 나무를 감상하라는 건지, 집을 구경하라는 건지 난감하다”는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장의 표현이 딱 맞다. 일찍이 추사와 관련한 책을 여러 권 쓴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아예 “실경신수화로 치면 ‘세한도’는 0점짜리”라 했다.
김정희의 그림 및 글에 중국 한국문사 20명의 감상댓글까지 붙여놓은 '세한도'. 전체길이가 15m에 육박한다.|권호욱 선임기자
■‘세한도’ 감상법
하지만 연구자들은 ‘세한도’의 보이지 않는 곳을 감상해야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세한도’가 어떤 그림인가. 제주도로 유배된 추사를 잊지않고 북경(北京·베이징)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이상적·1804~1865)의 인품을 <논어> ‘자한편’의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에 비유하며 그려준 그림이다.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겠구나(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그대(이상적)이야 말로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않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아니겠는가.’
여기서 ‘세한도’의 정수가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추사는 전문화가의 기예는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사물의 형상보다는 인간의 마음을 묘사한 이른바 문인화가의 절제미를 풍기고 있다.
그러고보면 추사는 늘 “글씨나 그림을 그릴 때 반드시 문자향(文字香·문자의 향기)과 서권기(書卷氣·책의 기운)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연구자들은 바로 이 ‘세한도’에 추사의 ‘문자향 서권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입을 모은다. 사람의 눈이 간사해서 연구자들의 설명을 듣고 ‘세한도’를 보면 느낌이 달라진다.
가만보면 ‘세한도’는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주위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하여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주고 있다. 거친 붓질로 한 채의 집과 고목이 풍기는 겨울철 스산한 분위기를 맑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 마른 붓질과 묵의 농담, 간결한 구성 등이 문인화가의 내면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제주도 유배로 ‘끈이 떨어진’ 스승을 잊지않은 이상적의 절개를 표현하면서 유배생활(1840~1848)에 지친 추사 자신의 몰골까지 이 ‘세한도’에 담은 듯 하다.
‘세한도’에는 오세창·이시영 선생의 감상글 뒤에 191㎝ 정도의 여백이, 또 맨 마지막 정인보 선생의 글 다음에 304㎝의 공백이 남아있다. 오세창·이시영 선생과 정인보 선생 사이의 공백(191㎝)은 당대의 문사들에게 글을 받으려 했다가 미완성인 채로 남겼을 가능성이 짙다. 마지막 정인보 선생의 뒤 여백(304㎝)은 후대 문사들을 위해 남겨놓은 ‘댓글 공간’일 것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청나라 문사들이 줄줄이 단 감상평
그렇지않아도 국보 중 국보로 손꼽히는 이 ‘세한도’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요소가 둘이나 더 있다. 그중 하나는 앞서 밝힌 바 있는 중국(16명)과 한국(4명)의 문사 20명의 감상평, 즉 긴 댓글이다.
문인·서예가이자 추사의 제자이기도 한 이상적은 스승이 그려준 이 ‘세한도’를 청나라 지인들에게 보여주고 자랑하고 싶어 안달했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감상평을 받아 함께 장황(표구)한 뒤 스승(추사)에게 보여줄 꿈에 부풀었다. 이상적은 마침내 1844년(헌종 10년) 가을 동지사(주로 동지 무렵에 보낸 사절단) 이정응(1814~1848) 일행을 수행하여 연경(燕京·베이징)에 갈 때 이 그림을 가져갔다. 이듬해(1845년) 1월 13일 이상적은 중국인 벗인 오찬(1785~1849)의 초대연에서 이 그림을 중국 문인·학자들에게 보여주었다.
문인화가 추사 김정희의 ‘문자향(문자의 향기) 서권기(책의 기운)’를 대표적으로 나타내준다는 ‘세한도’. 제주도 유배생활 중인 스승을 위해 변함없이 서적을 보내준 제자 이상적의 절개를 칭송하며 그려준 그림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추사 연구자인 박철상 소장은 “연회에 참석한 오찬, 장요손(1808~1863), 장악진(생몰년 불명), 조진조(1805~1860), 반증위(1818~1886), 풍계분(1809~1874), 조무견(1786~1853) 등 13명과, 나중에 댓글 대열에 합류한 3명 등 모두 16명이 시와 문으로 감상글을 남겼다”고 설명했다. 이것이 ‘세한도’에 붙어있는 ‘청유 십육가’의 제찬이다.
“절개는 숲속 나무 같아서 오랜 시간 지나야 완성되지만 소나무와 잣나무의 본성 속에는 그 절개가 들어있다네. 군자는 힘들수록 단단해지니 받아주지 않는다고 무얼 탓하리. ‘세한도’에 시 지어올리니…”(오찬)
“김군(김정희)의 바다 밖의 뛰어난 영재, 일찍부터 그 명성 자자했네. 명성은 훼손되어 갈 곳도 없고 세상의 그물 속에 걸려버렸네 도도하게 흘러가는 세속을 보니 선비의 맑은 정신 누가 알리오?”(반증위)
추사 김정희가 유배중에도 잊지않고 책을 보내준 이상적의 절개를 고마워하면서 이 '세한도'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린 글. 겨울철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이상적의 절개에 비유했다.|권호욱 선임기자
“김군(김정희)은 이름 떨친 기특한 선비, 푸른 구름 닿을 듯 우뚝 서서 고상한 사람만 친구 삼으니 모두가 같은 기질 품고 있다네. 바람서리 한바탕 몰아친 뒤에 푸르름이 무리 중에 돋보인다네.”(풍계분)
“추사라는 그 이름 들은지 오래 얼굴 한 번 보지 못해 안타까웠네. 학문은 산학에 정통한데다 경사 또한 훤하게 꿰뚫고 있어 중국의 가의(기원전 200~168·한나라 시대 문인)와 동중서(한나라 시대 유학자) 인양 참으로 저 나라의 선비로구나.”(조무견)
“8년 전 아쉬운 이별 가물가물 아득한데 뜻밖의 만남이라 반갑기 그지없네. 조각구름 외딴섬은 한낮에도 어두운데 나그네는 시름잠겨 귀밑머리 새었겠네.”(장요손)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상적은 추사에게 청나라 문사들의 댓글을 보여주었다. 머나먼 제주땅에서 유배중이던 추사로서는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랐다. 얼굴도 모르는 청나라 문사들이 머나먼 이역에서 자신을 알아주고 응원을 보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가야 할 목표가 생겼을 것이다.
추사로부터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은 중국의 지인들에게 보여주고 감상댓글을 받아왔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세한도의 ‘5m 여백’이 남긴 의미
비단 청나라 문사들 뿐이 아니다. ‘세한도’는 이상적→김병선(이상적의 제자·1830~?)→김준학(김병선의 아들·1859~?)로 소유자가 바뀌었는데, 세번째 소유자가 된 김준학이 1914년 앞부분과 청나라 문인의 글(시)의 중간중간에 글과 시 등을 써놓았다. 이후 1949년 소유자가 된 손재형(1902~1981)이 정인보와 이시영, 그리고 오세창의 발문(댓글)을 받았다.
현재의 ‘세한도’에는 오세창·이시영·정인보 선생 등의 글이 차례로 실려있다. 흥미로운 것은 오세창·이시영 선생의 글과 정인보 선생의 글 사이에 191㎝의 공백이 있고, 맨 마지막인 정인보 선생의 글 뒤에는 304㎝의 여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총 1469.5cm의 작품에 남은 495㎝의 공백이다.
‘세한도’를 마지막으로 수집한 고 손세기 선생(왼쪽 사진). 그의 아들인 손창근씨가(오른쪽 사진 오른쪽) ‘세한도’ 등 추사 작품의 기증에 서명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오다연 학예연구사는 “아마도 1949년 소장가(손재형 선생)가 쓰고자 했던 발문을 완성하지 못했거나 혹은 당대 및 후대 문사들의 감상평을 위해 남겨놓은 공백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오세창·이시영 선생과 정인보 선생 사이의 공백(191㎝)은 당대의 문사들에게 글을 받으려 했다가 미완성인 채로 남겼을 가능성이 짙다. 그렇다면 마지막 정인보 선생의 뒤 여백(304㎝)은 무엇일까.
아마도 후대 문사들을 위해 남겨놓은 ‘댓글 공간’이었을 것이다. ‘세한도’를 감상하는 또 하나의 포인트가 바로 이 여백이 아닐까. 앞으로 어느 누가 후대를 위해 남겨놓은 이 열린 공간에 추사를 위한 감상글, 즉 댓글을 채워놓을 수 있을까.
추사 김정희의 초상화(왼쪽 사진)와 ‘불이선란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불에 탈 뻔한 ‘세한도’
‘세한도’의 파란만장 우여곡절 역시 그 가치를 높여주는 요소가 된다. 이상적의 제자인 김병선과 그의 아들인 김준학에게 넘어갔던 ‘세한도’는 휘문고 설립자인 민영휘(1852~1935) 등을 거쳐 일본인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1879~1948)의 손에 넘어갔다. 이때 저명한 서예가이자 서화수집가인 손재형이 공습이 한창이던 일본 도쿄(東京)의 후지츠카 자택을 찾아갔다. 병석에 누워있던 후지츠카는 “원하는대로 다 드리겠다”는 손재형의 제의를 단칼에 거절했다. 손재형은 포기하지 않고 두 달 동안이나 문안인사를 드리며 “제발 ‘세한도’를 넘겨달라”고 호소했다. 결국 후지츠카는 손재형의 끈질긴 간청에 감복하여 단 한 푼도 받지 않고, 그저 ‘잘 보존만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세한도’를 넘겨줬다.
그런데 손재형이 ‘세한도’를 가져온 뒤 석달 만인 1945년 3월 후지츠카의 서재가 공습을 맞아 소실됐다.
손재형이 아니었다면 서재에 관리되었던 ‘세한도’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이번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서는 ‘세한도’ 그 자체와, 그림에 붙은 문인 20명의 감상글 등을 전면 공개하는 한편 ‘세한도’를 초고화질 디지털 스캐너로 스캔하여 그림 세부를 자세히 보여주는 영상을 제공한다.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번 특별전에서는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김정희의 치밀한 필력을 확인할 수 있다”면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군자의 곧은 지조를 지키는 행동의 가치를 되새겨보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번 특별전에는 ‘세한도’ 뿐 아니라 ‘불이선란도’와 ‘김정희 초상화’ 등 15점을 전시한다.
‘불이선란도’ 역시 손세기(1903~1983)-손창근 부자(92세)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유물이다.
특별전에서 ’세한도’와 함께 전시될 ‘평안감사향연도’ 3점. 조선 관리들이 선망했던 평안감사로 부임한 영예로운 순간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잔치 장면을 그린 그림들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평안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속담은
이번에 ‘세한도’와 함께 함께 특별전의 주제로 선택된 유물은 ‘평안감사향연도’이다. 한겨울 추위를 가리키며 인생의 시련과 고난을 상징하는 ‘세한’을 함께 견디면 따뜻한 봄날 같은 ‘평안’을 되찾게 될 거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의미이다.
양승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평안감사향연도’는 조선 관리들이 선망했던 평안감사로 부임한 영예로운 순간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잔치 장면을 그린 그림”이라면서 “두 작품은 삶의 고락이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겨내고 기뻐할 수 있다는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되새기게 해준다”고 밝혔다.
‘평안감사향연도’는 평안감사의 소임이 임금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고 그 사람들과 즐거움을 나눈다는 여민동락(與民同樂)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평안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평안감사는 조선의 관리라면 누구나 선망했던 명예로운 자리였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평안감사향연도’ 3점을 전시하고 평안감사로 부임하여 부벽루, 연광정, 대동강에서 열린 세 번의 잔치를 다양한 영상으로 보여준다. ‘평안감사향연도’는 평안감사가 주인공인 지방 연회의 기록화이자 조선 후기 평양 사람들의 일상과 풍류를 풍부하게 담아낸 풍속화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