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1년(세종23) 음력 7월23일 경복궁 동궁 자선당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터졌다. 세종(재위 1418~1450)이 그토록 기다렸던 원손(단종·1441~1457·재위 1453~1455)이 탄생한 것이다. “세자(문종)의 연령이 장년(당시 27살)이 되었는데 후사(자녀)가 없어서 내가 염려했다. 이제 적손이 생겼으니 내 마음 기쁘기가 한이 없다.” 사실 세종은 평소 ‘사면은 소인배(죄인)에게는 다행이고, 군자(죄를 짓지 않은 이)에게는 불행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오늘 같은 날 대사면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런데 단종의 탄생을 전한 <세종실록>(1441년 7월23일)은 세종이 대사면 포고령의 교지를 읽는 장면을 전하면서 기사 말미에 꺼림칙한 사족을 단다. “세종이 교지를 다 읽기도 전에 용상에 설치되어 있던 대형촛대가 갑자기 땅에 떨어졌다. 세종이 빨리 철거하도록 명했다.” 불길했다. 이날 대형촛대가 떨어진 이 장면은 어쩌면 단종의 운명을 알려주는 예고편 같았다. 하루 뒤인 24일 실록은 “원손을 낳은 세자빈 권씨(현덕왕후·1418~1441)가 산후병 때문에 손 쓸 틈도 없이 서거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서막에 불과했다. 세종도 이 아이의 운명을 감지했을까.
단종의 죽음과 관련, <세조실록>은 "(반역을 일으켰다는 혐의를 받은) 금성대군이 사약을 받았다는 속식을 들은 노산군(단종)이 스스로 목을 맸다"고 기록했다.
■“이 아이를 돌봐달라.” 어느 날 어린 세손(단종)을 품에 안고 예뻐하던 세종은 성삼문(1418~1456) 등 집현전 학사들에게 “이 아이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세종께서 원손(단종)을 안고 뜰을 거닐면서 ‘내가 죽은 뒤 너희(집현전 학사들)는 이 아이(단종)를 잘 생각하라’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남았는데….”(<연려실기술> ‘단종조 고사본말’) 세종의 노심초사였다. 그것은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1414~1452)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문종의 재위 기간이 너무 짧았다. 1450년 세종의 승하로 왕위를 이은 문종은 재위 2년 만인 1452년(문종2) 5월14일 서거했다. 향년 39살이었다. 문종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재상인 황보인(영의정·1387~1453)·김종서(우의정·1383~1453) 등의 손을 잡고 신신당부했다. “과인의 유명(遺命·임종 때의 명령)을 받들어 어린 임금(단종)을 보필해 주세요.” 이렇게 임금의 유언으로 나라의 뒷일을 부탁받은 신하를 고명대신(顧命大臣)이라 한다. 그때 세자(단종)의 춘추는 한국 나이로 겨우 12살이었다.
그러나 어린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놓은 이들은 따로 있었다. 즉 종친의 큰 어른들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그리고 대신들의 우두머리 격인 영의정 정인지와 좌찬성 신숙주 등이었다. 이들은 노산군(단종)과 금성대군을 죽여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했다.
■무섭도록 똑똑한 삼촌들 그렇다면 세종과 문종은 왜 그렇게 단종의 앞날을 걱정했던 것일까. 이유가 있었다. 세종·소헌왕후(1395~1446) 부부가 낳은 왕자 8남 모두가 왕의 자질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 중 왕위에 오른 맏아들 문종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문제는 둘째인 수양대군(세조·1417~1468·재위 1455~1468)과 셋째인 안평대군(1418~1453)의 정치적인 야심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세종과 문종은 세손(세자·단종)이 과연 서슬이 퍼런 두 삼촌 사이에서 무사히 왕 노릇을 할 지 염려했다. 특히 단종이 즉위했을 때 두 삼촌은 30대 중반(수양대군 36살·안평대군 35살)에 이르렀다. 이정형(1549~1607)의 야사집인 <동각잡기>는 “계유년(1453년) 당시 임금(단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었고 대군 8명(문종을 빼면 7명)은 강성하니 인심이 위태로워하고 근심했다”고 당시의 불안했던 여론을 전했다.
단종이 죽자 세간에서는 단종을 죽인 원흉으로 '정인지와 신숙주'를 꼽았다. 야사는 '간흉의 우두머리'를 꼽자면 정인지가 으뜸, 신숙주가 버금이라고 평했다.
과연 할아버지(세종)와 아버지(문종)의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1453년(단종1) 10월10일 수양대군은 권람(1416~1465·홍윤성(1425~1475)·한명회(1415~1487)·신숙주(1417~1475) 등과 손잡고 고명대신인 황보인·김종서 등을 죽였다. 더불어 자신의 경쟁자로 치부된 손아랫동생인 안평대군까지 사사했다.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이 황보인·김종서 등과 결탁해 단종을 몰아내려 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것이 계유정난이다. 수양대군과 정난 세력의 목표는 ‘대권’이었다. 그들은 대권 가도에 방해되는 걸림돌을 치워버렸다. 한명회·권람 등 정난세력과 대신 정인지 등이 이 참에 선위를 관철시키자고 논의했다.(<추강냉화>) 그때가 1455년 윤6월11일이었다. 정난 세력은 “수양대군의 친동생 금성대군(1426~1457) 등이 어려서 단종을 키웠던 혜빈 양씨(세종의 후궁·?~1455) 등과 결탁하여 난역을 일으키려 했으니 처벌해야 한다”고 어린 임금(단종)을 겁박했다. 어찌할 바를 몰랐던 어린 단종은 결국 금성대군 등을 유배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원톱은 종친의 큰 어른인 양녕대군이었다. 이미 외숙(민무휼 민무회 형제)에 이어 조카(안평대군)을 처단하라고 주장한 바 있던 양녕대군은 조카손주인 노산군(단종)과 조카인 금성대군까지 "죽여야 한다"고 다그쳤다.
■악어의 눈물 무시무시한 압박감에 어린 단종은 두 손 들고 말았다. “나이 어린 내가 나랏일을 모르는 까닭에…난을 도모하는 싹이 나오니 대임(왕위)을 삼촌(수양대군)에게 넘기려 한다.” 이에 수양대군은 “명을 거둬달라”며 눈물을 흘리며 완강히 사양했다. 그러나 그것은 ‘악어의 눈물’이었다. 당대의 인물이자 생육신 중 한 사람인 남효온(1454~1492)은 선위 당시의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왕(단종)의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전하던 성삼문이 대성통곡했다. 그러자 그 때까지 머리를 숙이고 양위를 사양하던 수양대군이 고개를 들어 성삼문을 한참 동안 째려보았다.”(<추강집>) 수양대군은 그런 ‘양위 쇼’ 끝에 즉위하여 ‘세조’가 되었다. 단종은 ‘상왕(上王)’ 타이틀을 받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5살에 ‘상왕’이라니…. 세조는 또 ‘생쇼’를 벌인다. 선위 한달만인 7월11일 단종을 공의 온문 상태왕으로, 단종비(정순왕후 송씨·1440~1521)를 의덕 왕대비로 추존했다. 그러면서 세조는 “앞으로 달마다 3번(2·12·22일) 상왕에게 친히 문안을 올리겠다. 그 날 갈 수 없다면 그 다음 날 가겠다”(1455년 윤6월26일)고 선언했다. 실제로 세조는 몇차례(윤 6월22일·9월3·11월21일) “상왕께 문안을 드린다”면서 창덕궁에 행차했다. 그러나 단종의 처지에서 한번 생각해보라. 38살 숙부가 15살 조카를 상왕으로 모시고 문안을 올린다? 어린 단종은 좌불안석이었을 것이다.
비운의 임금인 단종은 출생 때부터 불길한 조짐을 보였다. <세종실록>은 1441년 7월23일 "원손(단종)이 태어나자 할아버지 세종이 뛸 듯이 기뻐하며 대사면령을 내렸다"고 전했다. 그런데 실록은 "세종이 사면령의 교지를 읽을 때 용상에 설치되었던 대형 촛대가 떨어져 세종이 급히 치우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복위운동의 살풍경 그렇게 1년 여가 흐른 1456년 6월 1~2일 급기야 비극이 벌어졌다.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박팽년(1417~1456)·하위지(1412~1456)·이개(1417~1456)·유성원(?~1456) 등과 무신인 유응부(?~1456) 등이 모의한 이른바 단종복위운동이 미수에 그친 것이다. 성삼문 등 주동자들은 군기감 앞에서 극형(능지처사형)을 받았다.(6월8일) 그러나 이들은 역사서에 ‘만고의 충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그들이 복위시키려 했던 단종은 어떠했을까.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결정적인 단서가 포착되었다. 성삼문 등이 거사를 앞두고 단종과 접촉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단종 복위 미수 사건(1일)이 일어난지 6일 뒤인 7일이었다. 성삼문이 “상왕(단종)도 역모 사건에 참여했느냐”고 문초에 “알고 있었다”고 깜짝 진술한 것이다. “권자신(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의 동생·?~1456)이 그 어미에게 고(告)하여 상왕께 알렸다…거사 예정일(6월1일) 아침에도 권자신이 먼저 창덕궁에 나아가니, 상왕께서 대도자(大刀子)를 내려 주셨다.” 권자신도 같은 진술을 했다. 단종(노산군)이 복위 운동을 승인했다는 것이다.
단종이 태어난지 하루 만인 1441년 7월24일 단종의 어머니인 세자빈 권씨(현덕왕후)가 산후병으로 갑자기 서거했다.
■“단종도 알았다” 정국이 격랑 속으로 빠졌다. 종친과 백관들이 “상왕을 궁궐은 물론이고 서울에 두어서는 안된다”고 지속적으로 다그쳤다. 특히 종친의 큰어른인 양녕대군(1394~1462)과 관료들의 수상인 정인지(1397~1478)가 특히 모질었다. 1457년(세조3) 1월29일 두 사람은 종친과 육조 참판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세조를 찾아와 “상왕의 거처를 궁밖으로 옮기라”고 압박했다. 그러나 세조는 “(유배중인) 금성대군의 집을 수리하여 상왕을 모신 뒤 군사들로 하여금 그 주변 경계를 확실히 하라”는 명을 내린다. 단종은 사실상 연금되었다. 그러나 단종 복위를 꾀하는 무리가 계속 생겨났다. 1457년(세조3) 6월21일 단종의 장인(단종비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송현수(?~1457) 등의 상왕 복위 혐의가 발각됐다. 그러자 단종을 금성대군 집에 묶어두었던 세조도 더는 버티지 못했다. 결국 세조는 “인심이 불안하고 난을 선동하는 무리가 그치지 않는다”면서 상왕(단종)을 ‘노산군’으로 격하하고 강원도 영월로 내쳤다. 노산군은 유배길에 나서면서 “성삼문의 모의를 내가 알고도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나의 죄”라고 한탄했다.(<세조실록> 1457년 6월22일)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노산군을 영월 서강 청령포에 모신 금부도사는 밤에 곡탄의 언덕 위에서 슬퍼하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맘 같도다. 울어 밤길 예도다(가는구나).”(<병자록>) 이 뿐인가. 노산군이 매죽루 아래에서 읊었다는 글귀가 심금을 울린다. “달 밝은 밤에 두견새 울면(月白夜蜀魂추) 시름 못잊어 다락에 기대었네.(含愁情依樓頭) 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爾啼悲我聞苦)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 없을 것을(無爾聲無我愁)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보내 권하노니(寄語世上苦榮人)…” 이 시를 듣고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또 한 편의 시 또한 눈물을 떨구게 한다.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중에서 나온 뒤로(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 그림자 푸른 산을 헤맨다.(孤身隻影碧山中) 밤마다 잠 청하나 잠들 길 바이 없고(假眠夜夜眠無假) 해마다 한을 끝내려 애를 써도 끝없는 한이로세.(窮恨年年恨不窮)…”(<병자록> <전화적책> <추강냉화> <송와잡기> 등)
소년 군주 단종은 끊임없이 역모사건에 소환됐다. 계유정난과 금성대군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결국 세조에게 양위했다. 단종은 이후에도 사육신의 복위운동, 송현수 등의 복위 계획이 터지면서 결국 영월로 유배를 떠아냐 했다. 그러나 영월에서도 금성대군의 복위거사가 발각됨으로써 파국을 맞게 되었다.
■명을 재촉한 또 다른 삼촌의 거사 그렇게만 살았다면 나름 행복한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은 17세 노산군을 그렇게 살라고 가만 두지 않았다. 그 무렵 순흥으로 유배지를 옮긴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모의했다. 즉 노산군을 순흥에 옮겨 모시고 영남의 도내 사족에 격문을 돌려 군사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이 거사는 고변으로 좌절됐다. 금성대군 등에 대한 처벌은 불가피했고, 그 불똥이 노산군, 즉 단종에게 튀었다. 이번에는 그 불똥은 파국으로 이어졌다.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있던 노산군을 낭떠러지로 밀어넣은 이들이 누구였을까. 역시 정인지·신숙주(1417~1475) 등 원로 고관과 앙녕대군·효령대군(1396~1486) 등 종친의 큰어른들이었다. 1457년(세조3) 9월10일 좌찬성 신숙주·영의정 정인지 등은 “지난번 이개(사육신) 등에 이어 이번에는 금성대군(이유)도 노산군을 끼고 난역을 일으키려 했다”면서 “이제 노산군 역시 편히 살게 할 수 없다”고 다그쳤다. 이에 세조는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다.
단종도 일부 복위 운동에 발을 담그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예컨대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운동 과정에서 단종은 거사 사실을 보고받고 있었고, 거사 당일에는 '장도자'까지 하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래서 단종은 영월 유배 도중 "성삼문의 모의를 알고도 알리지 않은 것은 나의 죄"라고 자탄했다.
한 달 여 뒤인 10월21일 이번에는 양녕대군이 앞장서고 정인지가 맞장구 쳤다. 양녕대군은 “노산군은 간흉의 변란에 참여하여 종사에 죄를 지었고, 금성대군은 일당과 짜고 모반을 꾀했다”면서 “국법을 문란하게 만든 든만두 사람을 처단하여 화근을 끊으시라”고 직격탄을 날렸다.(1457년 10월21일) 여기에 정인지가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노산군과 금성대군의…죄는 천지 사이에 용납되지 않는 것…대소 신료가 분통함과 억울함을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조실록>은 이때 세조가 “‘금성대군을 사사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전했다. 이에 금성대군은 “우리 임금은 영월에 계시다”면서 영월(북쪽)을 향해 통곡하며 절을 올린 뒤 사약을 들이켰다.(<연려실기술>) 또 <세조실록>은 노산군, 즉 단종과 관련된 처벌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세조실록>은 “노산군(단종)이 금성대군 등의 사사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목매어 졸(卒)했다”(10월21일)고 마무리 지었다.
노산군이 유배지인 영월 매죽루(자규루) 아래에서 읊었다는 글귀가 심금을 울린다.
■단종을 죽인 원흉 이와 관련해서 노산군, 즉 단종을 죽음으로 이끈 원흉으로 정인지와 신숙주가 꼽혔다. <대동운옥>은 “수상 정인지가 백관을 거느리고 노산군을 제거하자고 청했는데 사람들이 지금까지 분하게 여긴다”고 했다. <죽창한화>는 “죄를 논하자면 정인지가 으뜸이고, 신숙주가 다음”이라 했다. <축수록>은 “정인지가 ‘노산군을 죽여 후환을 막자’고 하고 결국 처형 당하게 하니 참으로 간흉의 우두머리”라 평가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보다 더한 원흉이 있다. 바로 양녕대군이다. 말로는 사직의 안정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세자 시절이던 1416년(태종 6) 1월10일 연회 자리에서 술에 잔뜩 취해 “임금 지위를 위협하는 민무휼·민무질(세자의 외숙) 형제를 죽이라”고 했던 이였다. 그런 양녕대군은 1453년 계유정난 때도 조카인 안평대군을 죽이라 했다. 그런 양녕대군이 이번에는 “(조카의 아들인) 노산군과 (조카인) 금성대군을 죽이라”고 앞장 선 것이다.
<세조실록>은 노산군(단종)이 삼촌 금성대군의 부고를 듣고 스스로 목을 맸다고 했다. 그러나 야사는 어명을 받든 금부도사가 사약을 갖고 왔고, 노산군을 유배지에서 모시던 통인이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 창문으로 끈을 잡아당겼다고 했다. 이에 노산군은 질식사했다. 야사는 노산군이 죽자 노산군을 모시던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동강에 몸을 던졌다고 전했다.
■죽음의 진실 또 <실록>은 세조가 어떤 처벌을 내리지 않았는데 노산군이 지레 스스로 목을 맸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야사는 다르게 기록한다. <병자록>을 보자.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로 이르렀다. 주저하던 왕방연이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렸다. 그러자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다. 왕방연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에 노산군을 모시고 있던 통인(通引·수령의 잔심부름을 하던 구실아치)이 “내가 하겠다”고 자청했다. 그는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노산군의 아홉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했다. 이에 노산군을 모시던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동강에 몸을 던졌다. 이들이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했다.
실록과 야사에는 단종의 시신을 처리해준 마을 호장 엄흥도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단종이 죽자 “호장 엄흥도가 관을 갖추어 아전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군 북쪽 5리에 무덤을 만들어서 장사지냈다.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해(害)는 내가 달게 받을 것이다.”라 했다.
■엄흥도의 등장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 등장하는 엄흥도(생몰년 미상)이다. “호장(향리 우두머리) 엄흥도가 옥거리(獄街)에 왕래하며 통곡하면서 관(棺)을 갖추어 이튿날 아전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군 북쪽 5리 되는 동을지(冬乙旨)에 무덤을 만들어서 장사지냈다.”(<영남야어> <병자록>) 이에 엄흥도의 문중이 “자칫 화를 입을까 두렵다”고 말렸다. 그러나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니, 해(害)는 내가 달게 받을 것”이라 했다. 당대의 문신·학자인 이자(1480~1533)가 1509~1516년 사이 조정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한 <음애일기>는 특히 “노산군이 자진했다”는 <세조실록> 기록을 두고 ‘여우나 쥐 같은 놈들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붓장난’이라고 비판했다. “이것은 후일에 실록을 편수한 자들이 모두 당시에 세조를 따랐던 자들이다. <세조실록>에는 대개 이러한 내용이 많다.”
<음애일기>는 특히 “노산군이 자진했다”고 기록한 <세조실록>을 두고 ‘여우나 쥐 같은 놈들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붓장난’이라고 비판했다.
<음애일기>는 또한 “다만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애통하게 여겨 제물을 베풀어서 제사지낸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지역 부녀자들도 ‘정인지 같은 간적 놈들에게 핍박받아 우리 임금이 제 명에 묵지 못했다’고 비난했다”고 당대의 여론을 전했다. 또 가슴 아픈 야사가 전해진다. 노산군의 시신이 강물에 던져졌는데 옥체(노산군의 몸)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노산군의 가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 이름 모를 아전이 집에 노모를 위하여 만들어 두었던 관이 있어서 옥체를 거두어 염하여 장사지냈다….”(<아성잡설> <축수록>) 노산군의 시신 처리와 관련해서는 여러 설이 떠돈다. ‘노산군의 시신을 거적으로 덮어두었는데 젊은 승려가 나타나 그 시신을 지고 도망갔다’는 설, ‘산골에서 불태웠다’는 설, ‘강에 던졌다’는 설, ‘지금의 무덤은 빈 탕이요 가묘’라는 설 등이 난무했다.(<송와잡기>)
<음애일기>는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애통하게 여겨 제물을 베풀어서 제사지낸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지역 부녀자들도 ‘정인지 같은 간적 놈들에게 핍박받아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제 명에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고 비난했다”고 당대의 여론을 전했다. 또 노산군의 시신이 강물에 던져졌는데 옥체(노산군의 몸)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야사도 있다.
■17살에 죽은 남편, 82살까지 산 부인 단종은 불과 17살(만16년 3개월)에 서거했다. 너무도 짧은 삶이었다. 왕의 적장자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릴 적부터 감당할 수 없는 휘둘림 속에서 너무도 피곤한 삶을 살았다. 반면 그의 부인(정순왕후 송씨·1440~1521)은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 1454년 2월19일 왕비가 된 후 남편이 폐위된 1455년 6월24일까지 불과 1년4개월동안 왕후로 지냈다. 이후 남편의 선위 이후 왕대비가 되었고, 남편이 노산군으로 강등된 1457년 7월12일부터는 군부인으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1살 연하의 남편은 불과 17년을 살고 비명 횡사했지만 정순왕후는 무려 여든두해(82세)를 산 뒤 1621년(중종 16) 노환으로 서거했다.
단종은 17살 어린 나이에 죽었지만 부인 정순왕후 송씨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무려 82살까지 살았다. 세종 때인 1440년 태어난 송씨는 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등 임금 8명의 치세를 살았다.
아이러니 아닌가. 남편은 조선 임금 27명 가운데 가장 단명한 국왕인데 말이다. 아마도 부인이 남편의 못다한 생애를 대신 살아준 셈이 되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성삼문이든, 금성대군이든, 송현수든 어린 단종을 그냥 놔두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무시무시한 작은 아버지의 존재를 피해 그 부담스러운 왕위를 내놓고 천하를 주유하라고 놔두었으면 어떠했을까. 새삼 왕위를 셋째(충녕대군·세종)에게 내준(?) 효령대군(1396~1586)이 무려 91살까지 살았다는 것에 시선이 꽂힌다. 그보다 더한 인물이 있다.
어린 단종을 죽인 원형 가운데 으뜸이라면 양녕대군을 꼽을 수 있다. 양녕대군은 세자위에서 쫓겨난 뒤에도 동생 세종의 인내력 깊은 보살핌 끝에 69살까지 살았다. 그런 분이 어찌 그렇게 조카손주에게 그렇게 모질게 했는지 모르겠다.
외삼촌은 물론이고 조카들도 모자라 조카의 아들까지 죽이라고 앙앙불락하던 양녕대군이다. 양녕대군은 세자위에서 쫓겨난 뒤에도 동생 세종의 인내력 깊은 보살핌 끝에 69살까지 살았다.
세자위에서 폐위된 뒤에도 숱한 난행을 저질러 여러차례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동생 세종의 비호 덕분에 호의호식했다. 그런 분이 어찌 그렇게 '조카의 아들(단종)'까지 모질게 대했는지 모르겠다.
1000만 관객을 훌쩍 넘긴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상영을 계기로 단종의 생애를 살펴보았다. 순전히 실록과, <연려실기술>에 담겨있는 야사를 토대로 쓴 기사다. 영화와 같은 점, 다른 점을 비교하며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