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천재' 최남선에게 '요즘 젊은애들은 한자를 몰라'고 혀를 찬 '전설'
“오등(吾等) 玆(자)에 我(아) 선조(鮮朝)의 독립국 임과 조선인의 자주민 임을 선언 하노라….” 1919년 3월1일 민족대표 33인이 선언한 독립선언서의 도입부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3·1 독립선언서 2부가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다.
좀 이상하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조선의 독립국 임과~’가 ‘선조의 독립국 임과~’로 둔갑해있다.
왜 ‘조선’을 ‘선조’라 거꾸로 썼을까. 무슨 심오한 의미가 있을까. 허무개그 같지만 아니다.
■‘조선’과 ‘선조’, ‘박탈(剝奪)’과 ‘박상(剝喪)’
그저 단순한 오자였을 따름이다. 독립선언서의 인쇄 과정을 두고 학계 논쟁이 정리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가 있다.(조선일보 1986년 3월1일)
당대 최고의 서화가이자 3·1 독립선언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위창 오세창(1864~1953)이 ‘전설의 주인공’이다.
즉 ‘조선’이 ‘선조’로 잘못 조판된 독립선언서가 그대로 인쇄됐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 잘못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해외에 발송된 뒤였다. 늦었지만 ‘나라 이름이 틀린’ 선언서를 그냥 둘 수 없었다.
오류를 확인한 위창 등은 서둘러 ‘조선’으로 고친 선언서를 재배포했다.
그런데 ‘선조-조선’ 해프닝 외에도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일화가 전해진다.
즉 육당 최남선(1890~1957)이 3·1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위창에게 ‘감수’를 부탁했다.
그런데 육당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본 위창이 눈쌀을 찌푸리며 혀를 끌끌 찼단다.
“요즘 젊은 애들은 한문을 잘 몰라 큰 일이야.”
육당이 누구였던가. 춘원 이광수(1892~1950)·벽초 홍명희(1888~1968)와 함께 당대 조선의 3대 천재로 통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심혈을 기울여 3·1 독립선언서를 쓴 육당에게 ‘한자를 모르는 젊은 애’라고 핀잔을 해댄 것이다.
위창이 지적한 대목이 무엇일까. 선언서 중 ‘아(我) 생존권이 박탈(剝奪)됨이 무릇 기하(幾何·얼마)이며…’라는 구절에서 혀를 찬 것이다. 이 대목에서 두가지 버전의 이야기가 있다. 우선 “‘박탈(남의 것을 빼앗음)’이라는 낱말은 능동태이므로 피동태를 쓸 때는 ‘박상(剝喪·벗겨져 없어짐)’이라고 해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유홍준, <완당평전>, 학고재, 2002)
다른 버전이 조선일보(1986년 3월1일)에 소개된다. 당시 독립선언서 인쇄를 도운 이병헌(1896~1976)이 위창에게 물었다.
“선생님, ‘박탈’과 ‘박상’의 차이가 뭡니까.”(이병헌)
“‘박탈’은 일부분을 빼앗겼다는 뜻이고, ‘박상’은 전체를 빼앗겼다는 뜻일세.”(위창 오세창)
■문사철, 시서화, 유불선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위창의 서거 70주년을 맞아 ‘근대 문예인’ 전시회를 마련했다.
필자는 이 전시회를 계기로 위창의 삶과 문예를 짚어 볼 마음을 품었다. 하지만 곧 벽에 부딪혔다.
필자의 그릇에 위창이라는 인물을 일목요연하게, 그것도 대중의 눈높이에서 담아낼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박사라고 해봐야 송곳도 채 들어가지 않을 좁은 분야만 파고 든다.
예전 분들은 ‘그저 웃지요’ 할 것이다. ‘문사철(문학·사학·철학)’과 ‘시서화(시·서예·그림)’, ‘유불선(유교·불교·도교)’ 등 세 분야를 나름 논할 줄 알아야 ‘공부 좀 했네’ 소리를 들었으니까….
그 중 위창은 당대 인물 중 군계일학이었다. 역관(통역 담당 관리)으로 출발해서 언론인으로서 계몽운동을 펼치고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서 옥고(2년8개월)를 치른 독립운동가였다. 또 서예·전각가로서, 그리고 고화서를 수집하고, 그 계보를 좇아 정리한 서화사연구자로 이름을 떨쳤다. 독보적인 감식안으로 간송 전형필(1906~1962)의 문화재 수집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그래서 위창을 간송 컬렉션의 ‘눈과 귀’라 한다.
■개화사상가를 과외선생으로
위창은 ‘중인’에 속한 역관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유대치(1831~?)·박규수(1807~1876) 등과 개화사상의 ‘3대 비조(鼻祖)’로 통하는 역매 오경석(1831~1879)이다. 역매는 고서화와 금석문을 수집·연구한 서화가이자 금석학자이기도 했다.
우선 이상적(1804~1865)은 “역매(오경석)가 중국을 오가며 부친으로부터 받은 재산 200석을 서화·금석유물을 모으는데 소비해서 가산이 기울어질 정도였다”(<은송당집> 등)고 전했다.
오경석 본인도 “중국에서 원·명 이후의 서화 100여점, 하·상·주 삼대와 진(秦)·한의 금석문, 진(晋)·당의 비석판 등 수백점을 사들였다”(<천축재차록>)고 밝혔다. 이 컬렉션이 훗날 아들(위창 오세창)의 삶에도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위창은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태어났다. 아버지(오경석)는 불과 8세가 된 위창에게 놀라운 인물을 ‘과외선생’으로 붙여주었다. 동갑내기 벗이자 당대의 선각자·개화사상가였던 유대치(1831~?)였다. 유대치는 당시 개화당 인사들(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에게 개혁사상을 심어준 재야의 지도자였다. 그래서 ‘백의정승(재야의 재상)’으로 통했다.
■최초의 신소설 소개하다
그런 대단한 인물의 지도를 받은 덕분일까. 위창은 17세의 나이로 역과에 당당히 합격했다.(1880)
1886년(고종 23) 박문국(인쇄출판기관)에서 간행한 한성주보 기자로 발령받았다. 언론인으로서의 첫출발이었다.
기자로서 위창의 직분은 중국 신문을 번역·게재하는 것이었다. 당대 영국·미국·프랑스·러시아 신문의 기사라도, 그네들 언어를 조선어로 번역할 자원이 없었다. 따라서 해외 소식을 실은 중국 신문 기사를 이중번역하는 것이 위창의 주 업무였다.
이후 위창은 1902년 개화당 역모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1906년 귀국한 위창은 일본 망명 중에 친분을 쌓은 천도교주 손병희(1861~1922)의 후원으로 신문을 창간한다.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맞서기 위해 세운 <만세보>다. 위창은 <만세보> 사장으로서 한국언론사에서 ‘기억에 남을 두가지 족적’을 남긴다. 하나는 ‘루비활자(ruby type·한자 옆에 음을 붙인 작은 활자)’를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신문은 해득하기 어려운 국한문 혼용체를 쓰고 있었다. 따라서 독자층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위창은 한자 옆에 작은(루비) 한글활자로 음을 달아 독자들의 읽는 편의를 도운 것이다.
또 하나는 최초의 신문 연재 소설이자 신소설로 평가받는 이인직(1862~1916)의 ‘혈의 누’를 실었다는 것이다.
1907년 7월22일 실린 ‘혈의 누-1회’는 “일·청 전쟁의 총소리는 평양 일경(一境)에 떠나가는 듯 하더니…‘로 시작된다.
그러나 재정난에 빠진 <만세보>는 1년 여 만인 1907년 6월29일 폐간된다.
■윳놀이로 풍자한 ‘이■’(이토 히로부미)
그해 말(11월) 위창은 권동진(1861~1947)·남궁억(1863~1939) 등과 함께 애국계몽단체인 ‘대한협회’를 창립한다.
위창 등 대한협회 멤버들은 계몽사상을 알릴 일간신문을 창간한다.(1909년 6월2일)
그것이 <대한민보>이다. 역시 위창이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 <대한민보> 역시 한·일 강제병합 직후(1910년 8월31일) 폐간됨으로써 겨우 1년여 발행되는데 그쳤다. 그러나 한국언론사에 또하나의 뚜렷한 업적을 남긴다.
한국신문사상 처음으로 세태를 풍자하는 만평을 게재한 것이다.
‘삽화’라는 제목으로 만평을 그린 이는 당시 25살의 동양화가 이도영(1884~1934)이었다. 위창이 주제와 제목을 알려주면 이도영이 그림을 그렸다. 창간일(1909년 6월2일)에 실린 만평에 대한민보의 정신을 표현했다.
양복 입은 남자가 ‘정세를 저울질하고(大局의 우衡), 한국의 혼을 하나로 묶으며(韓魂의 團聚), 백성의 소리를 듣는 기관이 되고(民聲의 機關), 남다른 보도를 추구(報道의 異彩)한다’고 외치고 있다.
맨 앞자만 따면 ‘대, 한, 민, 보’, 즉 ‘대한민보’가 된다. 마치 5행시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게재된 삽화 중 압권은 1910년 2월15일자에 실린 ‘척사일국(擲四一局)’이다. 윷놀이(척사)로 시국을 풍자한 것이다.
즉 ‘李■를 잡고 趙개를 구어라. 高(乞·걸)을 쳐서 모(모)로 박아도 윷에는 죽는다’는 풍자글이 있다.
그런데 유독 ‘이■’ 부분만 검정색으로 삭제됐다.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이도’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만평이 게재된 시기가 1910년 2월15일자이다. 안중근 의사의 사형언도일(14일)에 맞춰 나왔다.
그러니 ‘이도’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일제가 삭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이도’에 중의적인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매국노 이완용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이도’와 함께 ‘조개=조중응(1860~1919) 혹은 조민희(1859~1931)’, ‘고걸=고영희(1849~?)’, ‘모로 박아도=박제순(1858~1916) 혹은 박중양(1874~1959)’ 등 친일매국노가 등장한다. 이런 자들을 윷으로 한꺼번에 쓸어버린다는 뜻이 아닐까.
■뻐꾹뻐꾹=복국복국
1909년 7월25일자 만평은 더 지독했다. 도끼로 나무를 내리치는 남자와 함께 ‘임이완용(任爾頑傭) 자부상피(自斧傷皮)’, 즉 ‘솜씨없는 일꾼에게 도끼질을 맡기니 제 살에 상처낸다’는 글을 남겼다. 한자의 음을 읽으면 이완용이 첫째 며느리(子婦)인 임(任)씨와 근친상간(相避)했다는 뜻이다.
그 무렵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은 “이완용은 아들이 일본유학을 떠난 사이에 며느리와 간통했다”는 소문을 풍자했다. 만평은 당대에 파다했던 소문, 즉 이완용과 며느리의 부적절한 관계설을 노골적으로 전한 것이다.
판소리 ‘사랑가’에 나오는 ‘뻐꾹 뻐꾹’을 ‘복국(復國) 복국’이라 풍자한 만평(1910년 4월10일)도 비감하다. ‘기울어진 나라를 되돌리자’(복국·復國)는 외침이었다. 이밖에 ‘금수재판’이라는 풍자소설을 연재해서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이와같은 위창의 촌철살인 풍자는 일제에게는 눈엣가시였다.
<대한민보>는 한일 강제 병합(1910년 8월29일) 이틀 뒤인 31일 폐간되었다.
이렇듯 일제에 의해 언론인의 길을 강제로 접게 된 위창의 다음 수순은 당연히 항일독립운동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1919년 3·1 독립운동에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 참여함으로써 2년8개월동안 옥고를 치렀다.
■3일만에야 겨우 다 본 소장품
위창 오세창의 언론을 통한 사회 및 독립운동은 대한민보 폐간과 3·1운동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위창의 춘추는 이미 56세에 이르고 있었다. 이때부터 위창은 금석학자이자 서화가, 미술사학자로서 제2의 삶을 살게 된다.
부친(역매 오경식)이 수집한 각종 고서화와 금석문 등을 밑천으로 심화작업에 나선 것이다.
위창의 집에 얼마나 많은 작품이 남아있는 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만해 한용운(1879~1944)이 무려 3일에 걸쳐 위창이 소장한 고서화와 금석문을 친견한 것이다. 만해는 <대한매일신보> 1916년 12월7일부터 5회에 걸쳐 ‘고서화의 3일’이라는 제목으로 ‘위창 자택 방문기’를 기고한다.
“나는 위창 오세창 선생의 돈의문 집을 찾아…가져온 그림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화가의 이름을 짚어나가기 바빴다…모두 191인의 역대화가가 그린 250점을 5시간이나 걸려 보았다. 시간이 오래 걸려 다음날로 미루고….”
만해는 이튿날 가서도 다 보지 못했고, 결국 3일째 방문날이 되어서야 1291인의 그림 및 글씨를 일람할 수 있었다.
“1200년 작품을 수집한 위창의 노고를 위로하기 보다는 그 행복을 축하하겠다. 문화유산은 그 나라 정신적 생명의 양식이다. 위창의 고서화를 볼 때 대웅변의 연설을 듣는 것보다 대문화의 소설을 읽는 것보다 더 큰 자극을 받았노라….”
■나라를 팔고 살 수 있던 도장
단순히 모으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중국 고대의 갑골과 청동솥(鼎), 청동종에 새겨진 옛 글씨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했다. 흔히 ‘도장 파는 직업’ 정도로 폄훼됐던 ‘전각’에도 몰두했다. 따지고 보면 전각은 모든 예술의 기본이다.
생각해보라. 까마득한 날에 인간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바가 있으면 칼 같은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서 돌이나 나무에 새겼다. 그것이 그림이 되었고, 문자가 되었다. 붓의 발명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연필-(볼)펜의 시대를 지나 요즘엔 키보드의 시대로 바뀌었을 뿐이다.
‘도장 파는 일’도 절대 폄훼할 수 없다. 도장이 무엇인가. 거래와 신용의 상징이다.
도장 하나면 나라도 사고 팔 수도 있지 않은가. 위창은 그러한 도장 안에 새기는 글자를 귀히 여긴 것이다.
그런 위창이 일제에 빼앗긴 옥새를 해방 후 회수한 임무를 맡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1117인의 서화가를 한눈에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문화예술 분야에서 위창의 독보적인 업적이 따로 있다.
그것은 한국의 역대 서화가 1117명의 사적과 평전을 수록한 <근역서화징>의 편찬(1928)이다.
원래는 <근역서화사>라 이름붙이려 했다. 그러나 기록자의 생각(평론)이 담긴 것이 아니어서 ‘사(史)’라 할 수 없고, 각종 문헌에서 발췌 인용한 것이므로 ‘징(徵·모으다 혹은 소집하다)’라 했다. 스스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것이다.
1915년 1월13일 <대한매일신보> 기자가 위창의 돈의문 자택을 찾아 인터뷰한 기사(‘별견서화총’)를 보라.
“오세창씨가…수집한 것이 1275점에 달했는데…세종·선조·숙종·영조·정조 시대의 것이 많고 신라·고려 것도 적잖다…서화수집 땐 필자와 별호·연대·이력 등까지 상세히 조사했는데…그 목록만 해도….”
기자가 “이것을 사진판으로 출판하면 어떠냐”고 묻자 위창은 “그렇지않아도 그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라 답했다.
이미 1910년대부터 역대서화가 사전의 출간을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랜 준비를 거쳐 편찬된 <근역서화징>은 신라·고려·조선을 상·중·하로 나눠 1책으로 엮었다. 서화가들을 일일이 분류하고 그들의 예술 세계에 대한 모든 기록과 논평을 실었다. 수록된 화가는 392명, 서가는 576명, 서화가는 149명이다.
<근역서화징>이 출간되자 육당 최남선은 동아일보에 3일 연속으로 “암흑한 운중의 전광”(깜깜한 구름 사이에 비친 번개 빛)이며, “참으로 일대 경이에 속하는 업적”(1928년 12월17~19일)이라 극찬했다.
“…신라 이후 솔거 이하 1000여명의 사실을 기록하니 실로 희대의 진서(진귀한 책)이자 보기드문 명저라 할 것이다.”
이 <근역서화징>은 지금 이 순간까지 서화사 연구의 고전이자 바이블로 통하는 불후의 명작이다. 만약 이 책이 없었다면 한국의 서화사 연구는 태반이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필자는 이렇게 위창 오세창 선생의 삶을 요약해보았는데, 어땠는지 모르겠다.
필자의 깜냥에 중국어 통번역가이자 개화사상가이자 항일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이자 금석학자이자 서화연구가이자 서예가이자 전각가인 위창 선생을 제대로 짚었을까. 선생이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르겠다. “요즘 젊은애들은 글을 너무 못써.”
(이 글을 위해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박지훈, ‘대한협회의 대한민보(1909~1910) 발간과 시사만화 연재의 성격’, <역사민속학>44호, 한국역사민속학회, 2014
박찬승, ‘3·1독립선언서 인쇄과정과 판본의 검토’, <Journal of East Aisan Cultures> 80권 80호,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2020
유홍준, <완당평전>, 학고재, 2002
이구열·정옥자·홍선표·유홍준·이이화·정진석·김양동·이완우, <위창 오세창>(한국서예사 특별전 도록 20), 예술의전당, 2001
이동국, ‘위창의 학예 연원과 서화사 연구’, <위창 오세창>(예술의 전당 기획 한국서화사 특별전 도록 16), 예술의전당, 1996
이승연, ‘위창 오세창의 실학적 예술관 연구’, 원광대 박사논문, 2003
정충권, ‘우화소설의 지식 담론 활용과 그 후대적 변용’, <고전문학과 교육> 47권 47호, 한국고전문학교육학회, 2021
국가보훈처, <3·1운동 독립선언서와 격문>,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