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여 년의 야욕'…일본인들은 조선의 국보 석탑을 통째로 뜯어갔다.
원주-서울(명동)-서울(남창동)-오사카-서울(경복궁)-대전(국립문화재연구원)-원주.
무려 1975㎞를 떠돌다가 ‘112년 만의 귀향’을 이룬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강원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인데요.
예전엔 ‘미인박명’ 소리를 들었던 문화유산입니다. 탑이 지극히 아름다워 ‘미인’이라 했습니다.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시대에 활약한 왕사인 지광(해린·984~1070)의 사리와 유골을 봉안한 승탑인데요. 독특한 구조와 화려한 조각, 뛰어난 장엄장식 등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죠. 그러나 이 탑은 ‘박명’ 소리도 들었습니다.
일본인에 의해 오사카로 밀반출된 이후 이리저리 떠도는 신세가 된 것은 물론이고요. 한국전쟁 때는 미군의 폭격으로 무려 1만2000조각으로 박살나는 비운을 맞거든요. 그래서 ‘미인박명’이라 했던 겁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등이 10여차례에 걸친 보존처리 및 복원 작업을 마무리 짓고 이번에 원래 자리인 강원 원주 부론면 법천사터로 옮긴 겁니다.
■미인박명의 지광국사탑
그런데 이런 파란만장한 역정을 겪은 국보 석탑이 지광국사탑 1기만이 아닙니다. 생각할수록 속터지는 경천사 10층석탑은 물론이고요. 기막힌 산청 범학리 3층 석탑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먼저 지광국사탑 이야기를 잠깐 해보죠. 빼는 바야흐로 1911년 9월이었습니다.
강원 원주 부론면 법천사터에 한 일본인(모리무라 타로·森村太郞)이 찾아옵니다.
모리무라는 땅주인(정주섭)과 흥정을 벌여 이곳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지광국사탑을 사들이는데요.
이 탑은 곧 해체되어 서울의 일본인 사업가(와다 쓰네이치·和田常市)에게 팔리고요. 와다는 이 탑을 명동 무라카미(村上) 병원을 거쳐 자신의 집(남창동) 정원으로 옮겨두었는데요.
다시 이 탑은 일본 오사카(大阪)에 거주하는 남작 후지타 헤이타로(藤田平太郞)에게 3만1500원이라는 거액에 팔립니다. 결국 1912년 5월31일 오사카로 반출되는데요.
그런데 그해 10월쯤이었습니다. 탑의 일본 본토 반출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재임 1910~1916)가 앙앙불락합니다. 데라우치는 “폐사지는 원래 국유지로 봐야하고 그 폐사지에 있는 탑 역시 국유물”이라면서 모리무라와 와다 등을 구류에 처하고 소환 하는 등 수사에 나섰습니다.
모리무라에게서 탑을 사서 일본의 후지타에게 되판 와다는 데라우치 총독의 서슬에 전전긍긍하죠. 결국 와다는 일본의 후지다에게 팔았던 탑을 되사서 총독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사건을 일단락 시키는데요. 이때가 1912년 12월6일 쯤입니다.
이 탑은 1915년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의 전시장(경복궁)을 꾸미는 장식물로 활용되었는데요.
공진회가 끝난 뒤에도 지광국사탑 등은 그대로 경복궁 안에 놓여있었고요. 그러다가 한국전쟁의 와중(1950)에 폭격(유탄)을 맞아 1만2000개로 산산조각 난 겁니다. 이후 10여차례 정밀복원 끝에 원 모습을 찾게된 거고요.
■가토 기요마사가 군침 흘린 걸작탑
그런데 지광국사탑 스토리는 1907년 일어난 경천사지 10층석탑 강탈사건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입니다.
그 강탈의 역사 또한 엄청 뿌리가 깊습니다. 경천사탑 사건이 국내외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던 1907년 4월23일 <대한매일신문>은 일본의 <오사카 아사히신문(大阪 朝日新聞)>의 보도를 인용했는데요. 이런 내용입니다.
“예부터 조선에 유명한 탑이 둘 있었다. 하나는 서울 종로의 원각사 터에, 나머지 하나는 개성 풍덕군의 경천사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가 그 탑들을 일본에 가져오고 싶었다’는 설이 다나카 궁내대신에게 들어가…. 그 중 하나를 일본으로 옮겨오면 비할 데 없는 진귀품이 될 것으로 여겨….”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임진왜란과 가토 기요마사까지 소환되고, 궁내부대신(장관) 다나카가 등장하네요.
이게 무슨 사건인지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예부터 개성에서 서남쪽으로 약 50리 쯤 떨어진 부소산 기슭의 옛 절터(경천사터)에는 특이한 탑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그것이 대리석으로 조성된 경천사 10층석탑입니다. 1층 옥개석 밑에 새겨진 발원문에는 “(원나라 간섭기인) 1348년 원나라 황실을 위해 조성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때문에 ‘원나라풍’이 경천사탑에 반영돼있습니다.
탑의 기단부에는 사자 같은 동물과 꽃, 현장법사와 손오공이 등장하는 서유기의 내용, 나한상을 조각했고요. 탑신부 1~4층엔 각종 불회도와 여래상, 호법신을 가득 채웠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인물이 살아있는 듯하고 정교하게 만든 것이 천하에 둘도 없다”고 기록했어요.
1902년 일본 도쿄대(東京大) 교수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1867~1935)가 조선 전역을 답사하며 문화유산 전반을 조사했습니다. 세키노는 그 결과물을 토대로 1904년 <조선건축조사보고서>(동경제대 공대 학술보고 6호)로 펴냈는데요.
그런데 이 보고서는 당시 한국 문화재에 눈독을 들이는 자들에게 아주 유용한 정보제공서가 되었습니다.
■궁내부대신의 경천사탑 강탈사건
바로 세키노의 보고서를 보고 “이거다!”하며 군침을 흘린 자가 있었는데요. 그 자가 바로 일본의 궁내부 대신(장관)인 다나카 미쓰야키(田中光顯·1843~1939)였습니다. 다나카는 300년전 가토 기요마사가 눈독을 들였다는 ‘전설적인 탑’ 두 기(경천사탑과 원각사탑)를 보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마침 다나카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907년 1월 순종 황제의 결혼 가례에 일본 정부의 특사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할 기회를 얻은 겁니다. 다나카가 지목한 약탈대상은 경천사탑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서울 시내 한복판에 서있는 원각사 탑보다는 지방의 폐사지에 덩그러니 놓인 경천사탑이 ‘쉬운 목표’였겠죠.
서울을 방문한 다나카는 골동품상을 운영하던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에게 경천사탑의 무단반출을 지시했습니다.
그 때가 1907년 2월 4일이었습니다. 곤도가 고용한 일본인들과 인부들은 다짜고짜로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면서 탑을 140조각으로 해체했습니다. 그런 뒤 10여 대의 달구지로 실어갔습니다. 그 커다란 탑을 해치우는데 하루 낮 밤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코 베어 가는 식으로 엄청난 경천사탑을 약탈당한 겁니다.
이 경천사탑 약탈 사건은 바람 앞 등불 같은 대한제국의 운명을 상징해주는 사건이었죠.
눈 앞에서 멀쩡히 서있는 나라의 보물(탑)을 빼앗기고도 속수무책 바라만 봐야 했으니까요.
■강탈사건을 고발한 두 외국인
그러나 그런 꼴을 도저히 볼 수 없다는 듯 분연히 일어난 두 분이 있었습니다. 두분 다 외국인인데요.
그 분들이 영국인 어네스트 베델(한국명 배설·1872~1909)과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였습니다.
헐버트는 1886년 왕립영어학교(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된 이후 한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 바친 인물입니다.
천인공노할 경천사탑 강탈 소식을 전해들은 헐버트는 현장으로 달려가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진까지 찍었습니다.
헐버트는 자신의 취재내용을 <대한매일신보>에 제보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 언론인인 베델이 창간한 신문이죠. <대한매일신보>는 3월7일 이 충격적인 뉴스를 특종 보도합니다.
“일본의 특사 다나카 자작(궁내대신)의 흉계로 무기를 가진 일본인들이 경천사탑을 급습하여 탑을 해체한 뒤 실어갔다.”
<대한매일신보>는 정말 집요했습니다. 6월까지 3개월 동안 경천사탑 약탈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습니다.
“고종 황제의 허락을 얻었다는 것은 거짓”(4월13일) “석탑을 빨리 되돌려보내 잘못을 사죄하라…일본으로선 역사의 무한한 수치가 될 것…”(6월5일)이라는 등 끈질기에 파고 들었습니다. 헐버트 또한 적극 나섰습니다. 자신이 발행하는 <코리아 리뷰>는 물론이고, 일본 고베(神戶)의 <저팬 크로니클> 1907년 4월 4일자에 경천사탑 탈취 사실을 기고했습니다.
뉴욕포스트 등에 이 천인공노할 사건의 전말을 기고하여 미국내 여론을 환기시켰고요. 이 문제를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까지 끌고 갔습니다. 고종의 밀사로 파견된 헐버트는 1907년 7월 헤이그 평화클럽 연설에서 일본의 야만성을 폭로하면서 경천사탑 약탈사건을 거론했습니다.
■데라우치가 조선 문화재를 사랑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일본내 여론도 다나카에게 등을 돌렸고요. 마지막 통감 및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916~1919)도 다나카를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경천사탑은 급기야 1918년 11월 15일 무자비하게 해체되어 포장된 바로 그 상태 그대로 반환됩니다. 11년 9개월만에 서울에 도착한 탑재의 포장을 뜯어본 이들은 참담한 몰골에 고개를 돌려야 했습니다.
해체된 탑부재는 당대의 기술로는 복원조립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가 심했습니다.
결국 경천사탑의 부재는 경복궁 회랑에서 40여 년 간 방치될 수밖에 없었고요. 급기야 1960년 이후 2차례 수리 및 재수리를 거쳐 복원되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경천사탑과 지광국사탑의 일본반출 및 귀환 스토리를 할 때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우선 한가지 궁금증이 들죠. 일본인들은 왜 그토록 부피가 크고 무겁고, 옮기기에도 번거로운 조선의 탑을 뜯어갔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정원 꾸미기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조선의 폐사지에 서있는 탑과 불상에 군침을 흘렸습니다.
그러자 보다못한 조선총독부가 나섰습니다. 총독부는 ‘경천사탑(1907년 2월)’ 및 ‘지광국사탑(1911년 9월)’의 일본 반출 사건이 잇달아 터지자 각 지방에 다음과 같은 ‘관통첩(행정지침서)’을 내립니다.(1911년 11월29일)
‘폐사지 및 빈터에 놓여져 있는 석탑과 불상, 비석 등은 국유물이므로 매매 및 반출 등을 금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한가지 고개를 갸웃거릴 이야기가 있죠.
아시다시피 1·2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와 하세가와는 1910년대 무단통치의 원흉으로 꼽히는 자들이죠.
그런데 그런 자들이 왜 경천사탑과 지광국사탑의 귀환에 적극 나섰을까요. 뭐 그 자들의 행태를 그렇게 가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 데라우치나 하세가와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영영 남을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겠죠.
그러니 굳이 ‘식민지 조선’의 문화유산이 일본 본토에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한국의 문화유산은 본인이 총독으로 다스리는 ‘식민지 조선’에 있어야 했던 겁니다. 그래야 식민지 통치의 정당성도 확보하고, 한국인들의 불만도 무마할 수 있었으니까요.
■100엔에 바꾼 국보탑
지금 국립진주박물관 경내에 서있는 경남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은 어떨까요.
통일 신라 양식을 계승한 범학리 석탑은 정교한 부조상이 새겨져서 국보로 지정(1962)된 걸작입니다.
섬장암(閃長岩·반짝이는 장석으로 된 암석)을 다듬어 만든 유일한 석탑이기도 하죠.
그러나 이렇게 희귀암석으로 만든 범학리 삼층석탑의 역정 또한 파란만장했습니다.
1940년 11월 무렵이었는데요. 경남 진주에 살던 정정도라는 인물이 범학리를 찾아 땅주인과 마을 주민들을 꼬드겼습니다.
무너져 방치된 석탑 1기를 지목하며 “석탑을 팔라”고 요구한 겁니다. 그러나 아까 언급했듯이 폐사지나 공터의 탑비 및 불상을 매매하는 것은 불법에 속했습니다. 주민들이 주저하자 정정도는 마을회관 건립비로 100원(엔)을 제시했습니다.
“매각에 동의하지 않아도 좋다. 석탑의 반출을 묵인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꾀었습니다. 주민들은 솔깃했습니다.
‘정식매매는 꺼림칙하지만 회관 건립비라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었겠죠.
결국 범학리탑은 마을주민의 방조 묵인 아래 이듬해인 1941년 1월 진주를 거쳐 대구로 반출됩니다. 석탑은 대구의 골동품상인 오쿠 지스케(奧治助)에 매각됐는데요.
경북지사가 조선총독부에 보낸 보고서는 ‘석탑의 평가액=1만원’이라 했는데요.
오쿠-정정도 같은 거간꾼은 평가액의 100분의 1 가격으로 ‘후려쳐’ 국보급 석탑을 수중에 넣은 셈입니다.
이렇게 오쿠의 수중에 들어간 범학리 삼층석탑은 대구 동운정(동인동) 이소가이(磯貝) 제면공장 구내 공터에 해체된 채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4개월 뒤(1941년 5월) 석탑의 불법 반출 사실이 적발되었고요. 석탑 부재들도 회수되었습니다.
■일본 반출미수사건
연구자들은 정정도-오쿠 같은 거간꾼 위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고 입을 모으는데요. 오쿠를 사주한 자로 지목된 인물은 바로 그 악명높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입니다. 오구라는 대구에서 부동산 투기로 떼돈을 번 뒤 전기사업에 뛰어든 재력가인데요. 가격불문, 장르불문으로 닥치는대로 한국문화재를 사들인 큰 손으로도 악명높았죠.
그가 수집한 유물 중 금동관모와 새날개모양관식, 금동신발 등 8건은 일본 중요문화재로, 견갑형 동기와 고운무늬거울(정문경) 등 31건은 일본 중요미술품으로 각각 지정됐답니다. 국립도쿄(東京)박물관은 오구라가 기증한 한국문화재 1030점 등이 이른바 ‘오구라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물이니만큼 범학리 석탑의 반출을 사주한 유력한 용의자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렇든 저렇든 만약 범학리 석탑의 반출이 조기에 적발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오구라든 누구든 그 탑을 일본으로 가져가 제 집 정원을 꾸미는데 장식용으로 사용했을 겁니다.
어쨌든 대구 제면공장 공터에서 극적으로 회수된 석탑은 서울 경복궁내(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옮겼고요.
해방후인 1946년 재건해서 국보로 지정되었다가(1962) 1994년 경복궁 복원정비 때 다시 17개 부재로 해체되어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는 신세가 됐죠. 그러다 2018년 국립진주박물관 경내에 옮겨 지금 이 순간 전시되고 있습니다.
물론 원위치(산청 범학리) 이전이 이상적이었겠죠. 그러나 범학리 현장은 밭농사를 짓는 개인소유의 땅이고, 물이 차는 지형이랍니다. 때문에 박물관 야외전시장이 차선책이었답니다.
이렇게 국보 석탑 3기가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문자 그대로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었습니다.
그 3기 중 두 기(경천사탑·범학리탑)는 이런저런 이유로 박물관 홀 안(경천사탑)과 야외(범학리석탑)에 복원·전시되고 있는데요. 완전한 귀향은 아니었죠. 이번에 보존처리 및 복원작업이 끝난 지광국사탑은 원위치(원주)로 옮겨갔네요.
명실상부한 112년만의 귀향이죠. 아직 어떻게, 어느 위치에 전시할지는 결정되지 않았다는데요. 마무리까지 모두에게 축복받는 이전이 되기를 바랍니다.(이 기사를 위해 장상훈 국립진주박물관장과 이태종 국립문화재연구원 학예연구원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보존·복원Ⅲ>, 2021
국립진주박물관, <산청 범학리 3층석탑>,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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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 김동진 옮김,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헐버트 내한 130주년 기념 ‘헐버트 글 모음’>, 참좋은친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