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훨훨 나는 꾀꼬리/암수 서로 정답구나/외로운 이 내 몸은/누구랑 돌아갈까.(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삼국사기> ‘고구려본기·유리왕조’) 

이 ‘황조가’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 사연을 상기해보자.
기원전 17년, 고구려 유리왕은 두 여인을 처로 삼았다. 한 사람은 고구려 여인인 화희였고, 다른 여인은 한나라 출신 치희였다. 임금의 사랑을 받으려는 두 여인의 투기는 지독했다. 언젠가 유리왕이 일주일간 사냥하러 궁을 비웠다. 그때 사단이 일어났다. 두 여인이 심하게 다툰 것이다. 고구려 여인 화희가 해서는 안될 말을 했다.

“한나라 출신의 천첩인 니가 그렇게 무례할 수 있느냐?”

모욕감을 느낀 치희는 그 길로 친정(한나라)으로 돌아갔다. 뒤늦게 급보를 들은 유리왕이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갔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유리왕이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꾀꼬리가 모여드는 모습을 보았다. 문득 치희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부른 노래가 ‘황조(黃鳥·꾀꼬리)가’이다. 이 황조가는 그래도 떠나간 님을 그린 애절한 사랑가로 간직됐다.

 

<사진1>경주 안압지에서 수습된 신라시대 토우. 부부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흙으로 빚어낸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

 

■‘긴 생머리, 관능미 넘치는 관나부인의 최후’

그러나 투기를 일삼았던 화희와 치희는 정말 운이 좋았다.

“남녀가 음탕하거나, 부인이 투기를 하면 죽인다. 특히 투기를 미워해서, 이미 죽은 (부인의) 시체를 남쪽 산 위에 버리고 썩게 놔둔다.”

끔찍한 이야기이다. 남의 역사가 아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나온 2000년 전 부여의 습속이다. 아니 부인이 샘 좀 부린다고 해서 죽이는 것도 모자라, 시신까지 버리고 방치한다니 말이다. 방치된 시신을 수습하려면 ‘여자의 친정에서 소나 말을 바쳐야 했다.’(<삼국지>) 여인네의 신세가 곱씹을수록 비참한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중천왕(재위 248~270) 때인 251년의 일이다. 중천왕은 관나부인을 총애했다. 얼굴도 예쁘고, 긴 생머리가 아홉자나 되는 관능미 만점의 여인이었다. 임금은 그녀를 ‘소후(小后)’로 삼으려 했다. 왕후 연씨의 눈에서 가시가 돋았다. 두 여인도 유리왕의 두 여인처럼 치열한 사랑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중천왕이 사냥을 한 뒤 돌아오자, 관나부인이 가죽주머니를 들고 울고 있었다.

“왕후(연씨)가 저를 이 속에 담아 바다에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대왕께서는 차라리 저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난리가 났다. 하지만 관나부인의 말이 거짓임이었다. 왕후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꿰차겠다는 모함이었던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중천왕은 관나부인에게 소리쳤다.

“그래? 네가 꼭 바다 속으로 들어가야 하겠느냐?”

임금은 사람을 시켜 관나부인을 자루에 넣고 바닷속으로 던져버렸다. 물론 두 여인을 둘러싸고 어떤 정치적인 음모가 진행됐는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때는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 또는 자신을 그토록 사랑한 죄밖에 없는 여인을 그렇게 비정하게 죽여야 했을까. 안타까운 일이다.

 

 

■첫사랑 택한 ‘신라 최고의 로맨티스트’ 

비참한 이야기는 말고, 이제부터는 부부의 갖가지 사연이 담긴 신라시대로 가보자.
우선 신라의 대문장가인 강수(?~692)의 이야기로 풀어가자. 강수는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힌다. 그의 신분은 성골·진골이 아닌 육두품이었다. 누구보다도 신분상승의 야망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강수는 일찍이 대장장이 딸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서로 죽고 못사는 사이가 됐다. 10대 중반의 일이었다. 20살이 되자 부모가 강수의 결혼을 서둘렀다. 이미 강수의 학문은 모든 사람이 다 알 정도였다.
태종무열왕 즉위년에 당나라 사신의 조서를 막힘없이 해석한 일로 유명해졌다. 이미 20살에 신라의 ‘천재’소리를 들으며, 전국구 스타가 되었던 것이다. 부모가 맞이하려 했던 배필은 강수의 연인인 대장장이 딸이 아니었다. 지역에서도 알아주는 유지의 딸이었다. 하지만 강수는 “다른 여자와는 절대 안된다”고 나자빠졌다.

“너(강수)는 이미 이름난 사람이 됐다. 그런데도 그 미천한 대장장이 딸을 배필로 삼는 것은 수치스럽지 않느냐?”(부모)

강수가 두 번 절을 하고 말하였다. 

“무슨 말씀입니까.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도를 배우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조강지처는 뜰 아래로 내려오지 않게 해야 한다(糟糠之妻 不下堂)’고 했습니다. ~천한 아내를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

강수는 이렇게 출세보다는 첫사랑을 택했다. 신라시대 최고의 로맨티스트였던 것이다.
부인도 강수 못지 않았다. 훗날 강수가 죽자 조정에서는 장례비용 일체와 각종 옷가지, 그리고 물품을 대주었다. 하지만 부인은 이것을 사사로이 쓰지 않고, 모두 불사에 바쳤다. 남편의 극락왕생을 빈 것이다. 
강수의 부인은 점점 궁핍해져 식량을 걱정할 처지가 됐다. 할 수 없이 친정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이 조 100섬을 주었다. 하지만 부인은 극구 사양했다.

“전 천한 사람입니다. 입고 먹는 것은 남편을 따랐고, 나라의 은혜가 많았습니다. 이제 제가 홀로 되었는데, 어찌 감히 후한 하사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신라의 대표 ‘잉꼬 부부’ 

<화랑세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부부 두 쌍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선 8대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인 문노·윤궁 부부이다. 사실 문노(536~606)의 어머니는 가야왕의 딸(왜국왕의 공녀라는 말도 있다)인 문화공주였다. ‘망한 나라 공주의 아들’ 혹은 ‘왜국 공녀의 아들’이었으니 신분은 높지 않았다. 
반면 윤궁은 이미 동륜태자(진흥왕의 맏아들)와 결혼해서 딸을 낳았던 경력이 있다. 동륜태자가 죽은 뒤 과부가 됐다. 유명한 거칠부 장군(?~579)의 딸이었다. 신라조정을 좌지우지했던 미실궁주와는 종형제였다. 골품제도가 확실한 신라사회에서 문노는 윤궁 보다 낮은 지위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노는 워낙 출중한 능력을 갖춘 남성이었다. 
‘화랑정신의 표상’, ‘사기(士氣)의 종주(宗主)’로 추앙받았다. 훗날 김유신은 문노를 일컬어 ‘통일대업의 공이 문노공으로부터 나왔다’고 했을 정도였다. ‘골(품)’이 낮은 신분이었던 게 걸렸지만, 윤궁 측에서 욕심을 낼 만 했다. 윤궁은 “어울리기는 한데 지위가 낮은 게 흠”이라는 미실 궁주의 걱정에 이렇게 답한다.

 “사람이 좋다면 어찌 위품을 논하겠습니까.”

윤궁은 또 ‘맞선자리’에서 문노를 보자 이렇게 말했다.

“내가 군(君·문노)을 그리워한 지 오래되어 창자가 이미 끊어졌습니다.(腸已斷矣)”

급기야 문노는 ‘진지왕의 폐위(579)’에 참여한 공로로 풍월주가 됐다. 관위도 아찬(신라 시대의 17관등 중의 6번째)으로 승격됐다. 비로소 골품을 얻은 것이다. 사실혼 관계에 머물렀던 둘은 그때서야 진흥왕이 허락을 얻어 정식부부가 되었다. 둘이 혼인했을 때 진평왕이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했다.  

 

<사진2>문노와 윤궁의 혼인식이 열렸을 때 진평왕이 행차했던 포석사. 포석사는 왕이 술판을 벌인 연회장이라기 보다는 나라의 안녕을 빌고, 귀족이 길례를 행했던 사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재청

 

 

■부인 잘둬 얻은 ‘대표화랑’ 칭호

윤궁은 5살 연하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받들었다. 문노가 종양을 앓았을 때는 고름을 직접 입으로 빨아서 낫게 했다.
문노도 ‘청교도적인 삶’을 살았다. 당시에는 유화(遊花·풍월주에게 색을 제공하는 여인들)를 건드리는 일이 없었다. 술도 먹지 않았다. 늘 집에 있었고, 마음은 화락했으며, 마치 물수리와 원앙 같았다.
부부는 풍월주 자리를 내놓고(582) 늘 수레를 함께 타고 야외에서 노닐다 돌아왔다. 지금으로 치면 은퇴부부가 손잡고 드라이브하며 즐긴 것이다. 윤궁은 한술 더 떴다.

“영웅은 주색을 좋아한다는데…. 낭군님은 술도, 색도 절제하니 오히려 제가 부끄럽습니다.”(윤궁)

“하하. 색을 좋아하면 그대가 질투할 것 아닙니까? 또 술을 좋아하면 그대가 할 일이 많아질 것 아닙니까?”(문노)

“장부는 마땅히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잠자리를 모시는 첩이 있으면 제 일을 대신하게 됩니다. 제겐 기쁜 일이지 투기할 일이 아닙니다. 침첩을 두시지요.”(윤공)

아내의 강권에 문노는 술을 조금 마시고, 색(色)을 담당할 침첩도 하나 두었다. 하지만 난잡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 지금 같으면, 아니 보통의 아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편에게 “둘째마누라를 두라”고 권하고 있으니 말이다.
원래 문노의 성격은 칼 같았다. 시시비비를 가리는데 추상 같았다. 하지만 부인을 잘 둔 덕분에 화목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부인이 남자를 이렇게 변화시켰다(皆以爲婦人之化男子若是)”고 했다. 신라 사람들 모두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지아비를 택할 때는 반드시 문노를, 부인을 얻을 때는 반드시 윤궁과 같아야 한다.”

 

<사진3>1999년 발굴결과 포석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기와가 포석정 동남쪽에서 나왔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공경은 무슨 얼어죽을 공경이냐”

신라의 대표 연상연하 커플이 있었으니 바로 ‘양도공·보량’ 부부였다.
양도공은 22대 풍월주(재임 637~640)였다. 부인 보량은 아버지는 다르지만 어머니(양명공주)가 같은 남매 사이였다. 원래 진평왕의 후궁이었던 보량은 임금의 총애를 받다가 승만후의 질투로 물러나야 했던 ‘돌싱’이었다.
그때 보량의 눈에 든 남자가 양도공이었다. 그런데 보량이 5살 연상이었다. 더 큰 문제는 양도공이 남매 간에 혼인하는 풍습을 매우 싫어했다는 것이었다. 보량은 목석같은 남자 때문에 상사병이 날 정도였다. 그러자 양도공은 마지못해 말했다.

“제가 누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중국의 예를 따르지 않고, 오랑캐의 습속(남매간의 혼인)을 따르겠습니다.” 

남매의 혼인을 통해 귀한 혈통을 이어가고자 했던 어머니 양명공주가 아들을 끌어안았다.

“잘했다. 넌 내 아들이다. 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남매가 혼인하는 것)가 있다. 어찌 중국의 예로 하겠느냐?”

하지만 양도공은 누나를 아내로 대우하지 않고 깍듯이 섬겼다. 문제는 깍듯해도 너무 깍듯했다는 것이다. 남매간에 부부의 정이 있었을 리가 만무했으니까…. 참다참다 못한 보량이 폭발했다.

“넌 내가 나이가 많다고 사랑하지 않는 거냐? 너와 내가 같이 산 지가 어언 3년이나 됐는데…. 내가 널 잠시라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넌 나를 누나로 섬기고 존경한다. 내가 쇠로 만든 여자도 아니고, 신상(神像)도 아닌데…. 공경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공경이냐? 넌 듣지 못했느냐. 백 말의 공경이 한 되의 사랑만 못하다는 것을….(百斗敬不如一升愛)”

그야말로 폭포수 같았다. 보통의 남편들 같으면 당황해서 더듬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도공은 노련했다. 아내를 감싸고 한마디 날렸다.

“그대를 큰 누나로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은 신(神)처럼 공경하고, 작은 사랑은 옥(玉)과 같이 회롱한다’(大愛敬之如神 小愛弄之如玉)고 했습니다. 전 큰 사랑으로 그대와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다른 여자를 소개한 부인

그럴 듯 하다. 양도공의 진심이 묻어난 것 같다. 한데 듣기에 따라서는 그런 궤변도 어디 있는가. 아내를 사랑하는데 무슨 큰 사랑이며, 작은 사랑인가. 어쨌든 양도공의 솜사탕 같은 ‘세치 혀’가 통했다. 하늘 끝까지 쌓였던 보량의 원망은 남편의 이 한마디로 스스로 허물어졌다. 그 때부터 아내는 남편을 임금 섬기듯 했다. 
어딜 가든 “나의 지아비는 천하의 휼륭한 사람”이며 “이런 사람 섬기다 죽으면 더 큰 영광이 없겠다”고 했다. 한겨울이든 한여름이든 반드시 음식을 직접 조리해서 남편의 입맛에 맞췄다. 심지어는 ‘작은 칼’을 지니고 다니면서 남편을 따라 죽을 뜻을 품었다. 보량은 남편이 풍월주가 되자(637) 슬쩍 운을 뗐다.

“제가 색(色)이 쇠하였습니다. 다른 여자를 화주(풍월주의 처)로 추천하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보량 자신의 수발을 들던 여인 한사람을 추천했다. 이찌보면 남편을 시험한 것일 수도 있는 대목이다.
출세한 남편이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지 한번 운을 떼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남편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대, 보량이 아니면 어느 누가 풍월주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이때 양도공의 나이 28살, 보량의 나이 33살이었다. 만약 양도공이 ‘얼씨구나’ 하면서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면 어찌 됐을까. 보량의 제안이 진심이었을 수도 있지만…. 혹시 예전의 투기심이 되살아나 울고불고 하면서 죽니사니 했을 수도 있다.  

 

 

 ■남편을 철퇴로 두들겨 팬 아내

이번에는 남편을 철기로 상습구타한 ‘무서운 연상녀’ 한 사람을 추가로 꼽아보자.
도두(都頭·낭두의 우두머리 계급)인 세기(世己)의 부인인 도리(道里)이다. 어려서부터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던 도리는 17세 풍월주인 염장공의 두 아들을 낳은 뒤 세기의 아내가 됐다. 풍월주의 아들을 둘이나 낳았던 이력 때문에 낭두인 남편(세기)을 우습게 알았다. 게다가 남편보다 무려 12살이나 연상이었다. 더 큰 문제는 도리가 ‘무자비한 폭력아내’였다는 것이다.
남편을 마치 노비처럼 취급해서 자기 성질에 맞지 않으면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팼다. 남편 세기도 어지간헸다. 그렇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첩을 3명이나 두었으니 말이다. 만약 남편의 첩이 아들을 낳기만 하면, 그날은 제삿날이었다.
철기로 남편을 난타했다. 남편은 몸져 누워 출근을 할 수 없었다. 이때 풍월주인 양도공(22세)이 이 사실을 알고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도리를 잡아다가 볼기를 내려치려는 순간, 도리가 고함을 질렀다.

“저의 죄가 중하다고 하지만. 선종(仙種·염장공의 아들)을 낳은 여자가 볼기를 내놓고 매를 맞는다는 법도는 없습니다.”

양도공은 고민 끝에 대안을 찾았다. 도리의 볼기를 치는 대신 아내를 통제하지 못한 남편을 파면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때서야 도리는 “잘못했다”고 울며 빌었다. 남편이 파면되면 가정이 파탄날까봐 두려워 굴복한 것이다.
그러고보면 ‘부부’란 예로부터 알다가도 모를 사이인 것은 분명하다.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철천지 원수가 되고, 아니면 문노·윤궁 부부처럼 물수리와 원앙이 되기도 하고…. 5월 가정의 달. 한번 곱씹어보자. 우리 부부는 어떠한가.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참고자료>
<삼국사기>
<대역 화랑세기>, 김대문,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2005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 이종욱, 김영사, 2000
<강수와 그의 사상>, 이기백, ‘문화비평 1,3’, 아한학회,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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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