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되겠소. 좀 계셔야겠습니다.”
 조국이 해방된 1945년 9월, 초대 국립박물관장으로 부임한 김재원에게 소망 하나가 있었다.
 ‘우리 손으로 제대로 된 발굴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이제 박물관이 조선인의 수중에 들어왔으니 우리 손을 거친 발굴유물의 수집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자연스레 터져나왔다.
 경주시내에 있는 가장 큰 신라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 봉황대를 발굴하자는 얘기도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만한 이유도 있었다. 일제시대에 벌써 경주의 신라무덤에서 순금제의 신라금관이 3개나 출토된 예가 있었다. 그런 만큼 우리도 훌륭한 신라유물을 발굴해 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열악했다. 우리에게 고고학적인 발굴경험이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에 실시된 일본인들의 발굴조사에 조선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잡일이나 날품팔이로 동원됐을 뿐이었다. 여기에 해방(일본인 입장에서는 패망)이 되었으니 국내의 일본인들도 모두 철수해야 했다.

호우총에서 확인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흔적. 서체가 광개토대왕비문의 글씨와 매우 흡사하다. 호우총은 해방 이후 우리 손으로 조사된 첫번째 발굴이었다.

 ■김재원과 아리미쓰
 이 때 김재원 관장의 눈에 띈 이가 바로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라는 일본인이었다.
 아리미쓰는 일본이 패망했으나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우리나라 사람에게 인계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박물관 책임자였다.
 이제 박물관이 우리 손으로 개관되었으므로 아리미쓰 역시 귀국선을 타야했다.
 김재원은 아리미쓰의 경험을 통해 경주의 무덤을 하나 발굴 조사하기로 마음먹고 그의 귀국을 막았다.
 일단 아리미쓰를 귀국하지 못하도록 미 군정청의 양해를 얻었고, 박물관에서 함께 근무하면서 발굴조사 계획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적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는 그 대상이 정해지면 첫째, 조사를 맡아 할 능력이 있는 고고학자가 있어야 하고 둘째, 발굴비용이 마련되어야 하며 셋째, 당국의 허가가 필요하다.
 이 가운데 한 가지라도 해결되지 않으면 발굴조사는 불가능하다.
 김재원은 독일 뮌헨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와 경성대학(현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고 있었다. 광복이 되자 그는 바로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했고, 박물관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시급히 고고학적인 발굴조사가 활성화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유적의 발굴조사를 서둘렀던 것이다.
 그런데 아리미쓰라는 발굴전문가는 확보했지만 발굴허가가 문제였다. 당시 발굴은 미 군정청의 본부가 있는 동경 맥아더 사령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 모든 난관을 김재원이 해결하고 이듬해인 1946년 5월 드디어 경주의 신라무덤 1기를 발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광복 후 우리 손으로 최초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대상이 바로 이 호우총(壺우塚)이었던 것이다. 왜 하필 호우총이었을까.

 

 ■최초의 발굴보고서
 호우총은 해방 2년 전인 1943년 4월3일, 노출된 유적이었다. 당시 경주 노서리에 살던 주민이 호박을 심다가 우연히 장신구 10여 점을 발견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 때 총독부 박물관은 발굴전문가로 아리미쓰를 급파했다. 아리미쓰의 조사결과 순금제 목걸이 33개와 곡옥·관옥·환옥 달린 목걸이, 순금제 귀고리 등 수십 여 개의 유물을 수습했다.
 그 인연 덕분에 이 고분이 해방 조선의 첫 번째 발굴조사 후보로 꼽힌 것이다.
 그런데 발굴 12일이 지난 1946년 5월 14일. 엄청난 유물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호우총과 은령총 발굴조사보고서>가 전하는 그 날짜 발굴 일지를 보라.
 “(1946년) 5월14일 날씨 청명. 인부 주간 12인, 야간 3인. 곽내의 토기와는 완전히 위치를 달리하는 청동제 용기를 채취(採取)하였다. 이 용기는 최초부터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었던 것이다. 기저에 명문이 나타나 큰 ‘쎈세이순’을 일으키게 하였다. 명(銘)은 양각으로 4행 합(合) 16자로서 16자 외에도 무슨 기호 같은 것이 있다.”
 이 보고서는 조선인의 손으로 작성한 최초의 발굴보고서로도 유명하다. 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서 제1책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보고서는 1948년 4월 10일 을유문화사 간으로 나왔으며, 가격 1,200원(圓)에 500부 한정판이고 저자는 김재원이라고 돼있다.
 “김재원이가 경주에 체류하면서 최순봉이의 안내로…” 하듯 존칭 없이 ‘OOO 이가’하는 표현이 흥미롭다.

동아일보 1946년 5월25일 기사. 호우총 발굴소식을 전하고 있다.

 ■신라 무덤에서 확인된 광개토대왕의 자취
 그런데 그 명문내용은 더욱 엄청났다.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
 이 무슨 조화인가. 경주의 신라무덤인 호우총에서 고구려 유물, 그것도 고구려 정복왕이었던 광개토대왕의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신라 수도 경주에 고구려 무덤이 존재했단 말이 아닌가. 사실 명문유물 발굴은 발굴자에게는 더할 수 없는 행운이다. 새겨진 문자를 통해 엄청난 역사·고고학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복 후 국립박물관 주관의 최초 유적발굴조사에서 그런 행운을 잡게 될 줄이야.
 당시의 발굴보고서도 “이 청동기는 이번 경주발굴에서 가장 중대한 발견품이며 고적발굴사상 특필(特筆)할 만하다”고 흥분했을 정도였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청동항아리 명문의 글씨체는 1883년 중국의 지안(集安)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의 비문과 너무도 흡사했다는 것이다. 마치 동일인의 필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발굴보고서는 이로 보아 그 청동기가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신라에 운반된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궁금증이 양산됐다. 명문 가운데 제일 먼저 쓰여져 있는 을묘년(乙卯年)이 어느 해에 해당되는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에 쓰여진 호우십(壺우十)의 ‘十’자는 무엇을 뜻하는가. 
 더구나 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관련 유물이 신라무덤에 함께 묻혀있는가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재위 391~412년)이 서기 412년에 죽고 난 지 3년 후가 되는 해이다. 서기 415년에 해당되고 그래서 이 청동항아리가 415년에 만들어 진 것은 분명했다.
 문제는 누가 신라에 가져와 묻히게 되었는지는 수수께끼였다.

호우총 발굴모습.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지칭하는 명문이 나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복호’가 유력한 용의자?
 우선 <삼국사기> 기록을 보라. ‘복호’라는 인물이 ‘유력한 용의자’로 거론될 수 있겠다.
 “2년(418년) 왕의 동생 복호가 고구려에서 제상 나마와 함께 돌아왔다.(王弟卜好 自高句麗 與堤上奈麻還來)”(<삼국사기> ‘신라본기·눌지왕조’)
 신라 제 17대 내물왕의 왕자였던 복호(卜好)가 412년 인질의 신분으로 고구려에 가 있다가 7년 만인 418년에 신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복호와 이 호우총 유물이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일까.
 고구려의 장례풍속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3년째 되는 해에 상복을 벗는다고 되어있다. 이 청동항아리 역시 광개토대왕이 죽은 후 3년이 된 415년, 즉 탈상하는 해에 광개토대왕을 기리는 제사용 술을 담는 용기로 제작된 게 아닐까. 그래서 마침 인질로 와 있는 복호에게 기념으로 주었던 것으로 보면 어떨까.
 그 항아리를 복호가 신라로 돌아올 때 가져왔으며, 훗날 그가 죽자 함께 묻어 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 무덤은 복호의 무덤이 되는 것이다.
 호우총이 발굴되고 난 후 무덤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을 통해 연구된 결과는 무덤이 마련된 시기를 6세기 전반 경으로 보고 있다.
 이 청동 항아리가 만들어진 시기와는 1세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렇게 되면 복호가 100살이 넘도록 살다 죽었다고 봐야 하는데 이 또한 믿기 어렵다. 
 문제는 복호가 죽은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 현재로서는 사망 날짜를 알 길이 없다.
 다만 복호의 형인 눌지왕이 서기 458년에 죽었기 때문에 동생인 복호 역시 이를 전후한 시기에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보는 게 타당성이 있다.
 만약 이 호우총을 신라왕자 복호의 무덤으로 본다면, 여기에 함께 묻힌 신라유물의 연대 또한 6세기 전반이 아니라 5세기 후반으로 시기를 앞당겨야 할 것이다. 그래야 1세기의 격차를 줄일 수 있는 해석이 될 것이다.

 

 ■암호인가 부호인가
 또 한 가지 궁금증이 있다. ‘호우십(壺우十)’의 의미가 무엇인가. 호우란 술을 담는 용기로 보면 되겠지만 ‘十’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발굴보고서는 “해석이 곤란한 자인데 이 경우 우리는 이 十자를 다만 여백을 채우는 十자형으로 보아야 할 줄 안다”고 얼버무려 놓았다.
 그러나 이 十자가 수량의 표시인지 어떤 부호를 의미하는 것인지 의문이지만 숫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해 기념으로 10개를 만들었던 것일까. 그 중 하나가 신라에 들어왔다는 얘기인가.
 ‘우물 井’자 혹은 ‘#문양’ 또한 지금껏 숱한 논란을 일으킨 부호이다.
 당시의 발굴보고서는 “井(#)자형은 이 보이는데 이 역시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고 여백을 메우는 한 장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이 수수께끼를 제대로 풀어낸 연구는 거의 없다.
 다만 소설가 최인호는 <왕도의 비밀>에서 이 ‘#’자는 고구려의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을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학자들의 반응은 “제대로 된 논문조차 거의 없다”면서 섣부른 추정을 삼가고 있다. 문제는 ‘#’가 새겨진 유물은이 1997년 풍납토성에서도 발굴됐고, 구의동 아차산 4보루에서도 발견되는 등 끊이지 않고 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욱 답답할 노릇이다. 일각에서는 고구려 토기에서는 井, 小, X, 工, 大, 卍자 모양이 새겨진 경우가 많은데, 제작지와 제작자, 혹은 주문처를 표시한 것이거나 벽사(피邪·귀신을 쫓는 것)의 의미일 수 있다는 해석도 한다. 특히 ‘井(#)’자 문양토기는 일본에서도 묵서(墨書)로 쓴 예도 있는데 이 역시 벽사의 의미라는 것이다(平川南·1996년·古代人の死と墨書土器·국립역사민속박물관 연구보고 제68집)
 더욱 심오한 해석도 있다. <주역>을 보면 “井의 중심은 공(空), 즉 무극이태극(无極而太極)이요, 十은 음양이며 口자에 十을 넣어 田이 되니 이것이 사상이 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는 것. 결국 주역풀이에 따르면 井은 하늘이고 十은 땅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우물은 아무리 길어 마셔도 없어지지 않고, 놔둔다고 해서 철철 넘치지도 않는데(无喪无得), 물이 나오는 원천을 못 고치는 것과 같이 모든 제도나 법령 등도 백성의 민생안정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不改井)는 것이다.(김석진의 <대산 주역강의>에서)
 한국 주역학의 대가로 꼽히는 야산 이달(1889~1958년)은 학역자(學易者) 대부분이 간과한 井괘를 연구했는데, 공자(孔子)도 ‘井은 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우총 항아리 명문에 나오는 ‘井’과 ‘十’은 혹 주역의 내용을 표현하는 것일까.   

호우총에서 확인된 청동용기들.

 ■광개토대왕 비문과 똑같은 서체
 놀라운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호우총 발굴 용기의 명문은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
 그런데 지안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 비문은 ‘지(地)’ 대신 ‘경(境)’을 써서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로 돼있다.
 참고로 중국 지안 모두루 무덤의 묘지(墓誌)에 새겨진 관련 명문은 ‘國岡上廣(혹은 大)開土地好太聖王’이다.
 따라서 당시 발굴보고서는 시호(諡號)가 적힌 ‘광개토대왕 비문’의 글자가 가장 정당하지만 때에 따라 다소 다르게 부를 수도 있었던 것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호우총 명문 16자의 서체가 희한하게도 지안의 광개토대왕 비문 서체와 똑같다는 점도 주목거리이다. 가히 같은 사람의 서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니 신비롭기만 하다.
 또 하나. 발굴자들을 평생 가위 눌리게 한 유물이 출토됐다.
 나무로 만든 위에 옻칠을 했는데 눈알은 유리이고 그 홍채에 해당하는 부분은 푸른빛이었으니 발굴자들이 소름끼칠 만 했다.
 김재원은 “방상씨면은 태피(態皮)를 쓰고, 황금 눈 넷을 단 면을 쓰며 무기를 들고 역귀를 몰아내는 존재”라는 <주례(周禮)>를 인용, 이 유물을 방상씨면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런 유물이 훗날 백제·가야지역에서 종종 발견되는 화살통이라는 사실을 당시 발굴자들이 알 턱이 없었다.
 발굴단은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없었으므로 새겨져 있는 글자 가운데 ‘호우’라는 글자를 기념해서 호우총으로 이름 붙였다.
 이 호우총의 발굴은 광복 후 최초의 고고학적인 학술발굴이란 점 외에도, 발굴주관은 우리나라, 발굴지도는 일본인, 발굴 장비와 발굴비용은 미국이 각각 담당한 최초의 국제발굴이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발굴이 끝난 뒤 김재원은 일본인 학자 아리미쓰를 지프에 태워 부산 부두까지 태워주었다.
 아리미쓰는 그 이후에도 교토대 고고학과 주임교수 등을 역임하는 등 요직을 거쳤다. 특히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의 환대를 받는 몇 안되는 일본인이었는데, 1967년 방한 때에는 때마침 회갑(11월10일)을 맞아 우리 측이 회갑연을 베풀어 주었다. 이때 참석한 이가 이병도, 이희승 등 20여 명이었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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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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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조선인들은 큰소리만 치고 있다. 반드시 그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1621년, 광해군이 장탄식한다. 국제정세는 급박했다. 명나라는 요동 전투에서 신흥강국 후금에 의해 줄줄이 패해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공론은 후금을 오랑캐 나라로 폄훼하면서 다쓰러져 가는 명나라 편이었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절묘한 등거리 외교로 균형을 잡아온 광해군으로서는 이같은 공론이 한심했다.
 “명나라 장수들이 줄줄이 적(후금)에게 항복하고 있다. 심지어 요동사람들이 명나라 장수를 포박해서 후금군에 넘겼다고 한다. 중국의 형세가 이처럼 급급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인심은 큰소리만 치고….” 

화가 김윤겸이 그린 청나라 병사 그림인 '호병도'. 광해군은 다 쓰러져가던 명나라를 맹목적으로 섬기던 조정의 의론을 안타까워 했다.|국립중앙박물관  

그러면서 광해군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제발 고려(의 외교)를 배우라”고….
 “이럴 때(명청교체기), 고려처럼 안으로 스스로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쓴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한심하다. 무장들 모두 겉으로는 결전을 벌이자고 하면서 막상 서쪽 변경에 가라면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 두려워 한다. 이 또한 고려와 견주면 너무도 미치지 못한다.”(<광해군일기>)
 광해군은 ‘고려처럼’만 하면 강대국끼리 충돌하는 격동기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광해군은 ‘고려의 외교’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랬다. 세치 혀로 강동 6주를 획득한 서희의 후예들이 고려 아니던가. 잠깐 광해군이 ‘제발 좀 닮으라’고 한 고려외교의 요체는 무엇인가.

 

 ■서희가 샇은 고려의 외교
 993년(고려 성종 12년)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의 대군이 고려를 침공하자 조정은 멘붕에 빠진다.
 “항복하는 수밖에는 없다”는 무조건 ‘항복파’와, “서경 이북(평양)을 거란에 떼주자”는 ‘할지파(割地派)’로 나뉘었다. 하지만 서희는 “고구려 옛 땅을 내줘서는 절대 안된다”고 나섰다.
 섣부른 항복이나 할지(割地) 대신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면서 협상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란의 소손녕과 협상에 나선 서희는 ‘당근과 채찍 전략’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했다. “너희가 대국의 사신에게 먼저 인사해야 한다”는 소손녕의 도발에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두 나라 사신은 대등한 자리에서 회담에 임했다.
 소손녕이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지금 고구려 땅은 거란이 소유하고 있다”면서 “빨리 땅을 떼어주고 조공을 바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희는 “고려는 옛 고구려를 계승했기에 나라 이름도 고려라 했다”고 버텼다. 그러면서 “우리가 거란에 조공하고 싶어도 중간에 여진족이 있기 때문에 조공할 수 없는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서희는 “우리가 거란에 조공을 바치려면 여진을 쫓아내고 그 땅을 고려에 돌려주면 된다”면서 “그 땅에 성을 쌓고 도로를 내어 거란과 직접 통하게 되면 자연스레 조공을 바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한다. 한마디로 궤변이었다. 하지만 거란의 소손녕은 서희의 외교술에 말려 거짓말처럼 강동 6주를 꼼짝없이 돌려주었다.   

 

 ■거란·몽골을 주무른 고려의 외교
 이렇듯 서희가 반석 위에 올려놓은 고려의 외교전략은 더욱 빛났다.
 거란의 대군을 물리치고 강동 6주라는 망외의 소득을 올린 고려가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 있었다, 바로 송나라였다.
 고려는 994년 사신을 송나라에 보내 “송나라와 합동으로 거란을 정벌하자”고 제안한다. 물론 고도의 전략이었다. 고려는 쇠퇴한 송나라가 대국으로 성장한 거란을 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연 송나라는 고려와의 합동작전을 거절했고, 고려는 이것을 핑계로 삼아 송나라와 국교를 단절했다. 과연 치밀한 외교가 아닌가. 고려는 송나라와의 외교관계 단절이라는 명분과 격식을 갖추면서 거란 사대에 따른 외교절차를 마무리한 것이다. 밀사를 파견해서 송나라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한 제안을 함으로써 국교단절의 책임을 송나라에 돌리는 외교술을 펼친 것이다. 고려의 외교는 훗날 세계최강 몽골제국의 애간장을 녹였다.
 1231~1259년까지 고려는 막강한 몽골군의 침입에 시달렸지만. 항쟁과 교섭이라는 앙면의 칼로 몽골을 능수능란하게 다뤘다.
 예컨대 몽골이 고려의 강화도 천도를 질책하자(1231년) 고려 고종은 이렇게 몽골군을 다독거렸다.
 “전쟁으로 국고가 텅텅 비었습니다. 남은 백성들이라도 강화도에 들어가 변변치 않은 토산물이나마 상국(몽골)에 바쳐야 하지 않겠습까.”
 항쟁 때문이 아니라 상국(몽골)을 더 잘 모시려고 강화도로 천도한 것이라 하는데 어쩌겠는가.
 그로부터 22년 뒤(1253년) “빨리 육지로 나오라”는 몽골군의 독촉에는 “동북방면에 있는 포달인(수달 사냥꾼)들이 많은데, 그들이 두렵다”고 변명한다. 아니 수달사냥꾼이 무서워 육지천도를 하지 못하겠다니…. 1256년(고종 43년) 9월, 고려 사신 김수강이 몽골 황제(헌종)에게 몽골군의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는 “개경에 환도해야 철수하겠다”고 거절했다. 그 때 김수강의 화술이 백미다.
 “짐승이 사냥꾼을 피해 굴 속으로 숨었는데, 그 구멍 앞에 활과 화살을 가지고 기다린다면 피곤한 짐승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몽골황제는 김수강의 세치 혀에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군사를 철수시켰다.  

원 세조 쿠빌라이를 그린 삽화. 원 세조는 골치아프게 굴던 고려가 화의를 청하자 기쁜 나머지 "고려만큼은 그들의 풍속을 유지하게 한다'는 칙서를 발표했다. 고려는 원나라가 고려의 흡수통합을 꾀할 때 '세조의 유훈'을 들춰내어 좌절시켰다.    

 ■‘세조의 유훈을 따르세요’
 결국 고려는 3년 뒤인 1259년 화의를 결정한다.
 그러자 몽골의 세조(쿠빌라이)는 기쁜 나머지 “고려 만큼은 의관을 본국(고려)의 풍속을 좇아 상하 모두 고치지 마라”는 등의 조서를 발표한다.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 존중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한마디로 ‘세조(쿠발리아)의 유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는 원나라(몽골)의 내정간섭이 있을 때마다 이 ‘세조의 유훈’을 외교카드로 활용했다. 예컨대 1323년(층숙왕 10년) 원나라가 정동행성을 설립, 고려를 흡수통합하겠다는 야심을 노골화했다. 그러자 당시 원나라에 파견돼있던 토참의사사 이제현은 그 ‘세조의 유훈’을 인용하면서 ‘불가’를 외쳤다.
 “세조황제의 조서 덕택에 고려의 옛 풍속이 유지되고, 종묘사직이 보전됐습니다. 이제 고려에 행성을 설립한다고 합니다. 원나라는 세조의 조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당시 원나라 황제였던 영종(재위 1320~1323)은 “세조(쿠빌라이)의 정치를 본받고 회복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제현은 바로 이 점을 겨냥해서 원 조정을 협박한 것이다. ‘세조의 유훈을 따르라’고…. 원나라는 결국 정동행성의 설치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살얼음판 걷던 세자
 광해군은 신하들에게 바로 그 고려의 외교전략과 전술을 닮으라고 신신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광해군으로서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사실 세자 시절부터 광해군의 스트레스는 엄청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아버지(선조)는 전쟁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세자(광해군)가 인심을 잃은 임금(선조)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더욱 골치아픈 것은 명나라의 반응이었다. 1593년(선조 26년) 명나라 사신은 선조에게 “세자에게 양위하라”는 주제넘은 소리를 해댄다.
 “세자(광해군)를 보니 용안이 특이하였고, 온 백성이 추대한답니다. 당나라 현종(재위 712~756)이 안록산의 난을 맞아 아들인 숙종(756~762)에게 군권을 맡겼더니 숙종이 장안과 낙양을 수복했습니다. 세자의 현명함이 당 숙종보다 더하니 국왕은 반드시 전위하시는 편이….”(<선조실록>)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못난 임금이니 당 현종의 예에 따라 속히 현명한 세자(광해군)에게 물려주라는 소리가 아닌가.
 대신들은 물론, 상국인 명나라로부터도 버림을 받고 쫓겨나는 임금이라면…. 당시 선조가 느끼는 위기감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문제는 선조의 위기감이 고스란히 광해군에게 전달됐다는 것이었다. 세자 입장에서 광해군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추호라도 잘못된 언행을 했다가는 역린을 건드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지만 이번에는 떠오르는 강국인 후금(청나라)과 썩어도 준치인 명나라 사이에서 외줄타기 외교를 펼쳐야 했다.  

비운의 임금 광해군. 명청교체기에 살얼음판 등거리 외교를 펴다가 그만 인조반정으로 쫓겨났다. 광해군이 쫓겨난 지 불과 4년만에 정묘호란이 일어나 형제의 맹약을 맺는 굴욕을 당한다.

 ■명나라와의 의리가 밥먹여주냐
 앞서 인용한대로 당시 조정의 의론은 한심했다. 우물앞 개구리처럼 명나라에 대한 짝사랑이 조정의 공론이었다.
 “난 고질병인 화병 때문에 요즘 겨우 버티고 있다. 이럴 땐 급하지 않은 업무는 좀 보류해도 좋으련만…. 너무도 일의 경중을 모르고 있구나.”(<광해군일기> 1620년 10월 18일)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맹목으로 섬기려는 대신들의 ‘몽니’는 광해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예컨대 1619년(광해군 11년), 당시 욱일승천의 기세로 요동을 차지한 후금이 편지를 보냈다.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우리(후금)와 맹약을 맺자”는 편지였다. 광해군은 ‘지는’ 명나라와 ‘뜨는’ 후금 사이에서 적절한 등거리 외교를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달랐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웠다. 이들은 3개월이나 ‘몽니’를 부리며 차일피일 미뤘다.
 “호서(胡書·후금의 편지)를 처리하라고 했거늘…. 명색이 국방을 담당하는 비변사가 미적미적 대고 있으니…. 1~2일 안에 처리하도록 하라.”(<광해군일기> 1619년 7월 16일)
 그러나 대신들은 “명나라의 문책이 두렵다”며 선뜻 나서지 않았다. 광해군은 ‘명나라와의 의리가 밥 먹여주냐’며 호통친다.
 “이번 호서의 처리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다. 그런데도 경들이 명분론만 내세우고 있다. 종묘와 사직이 위험에 빠진다면 어찌할 것인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다.”(<광해군일기> 1619년 7월 22일)
 광해군은 실리외교를 주장한 것이다. 그럼에도 대신들이 미적거리자 우의정 조정(1551~1629)에게 “당신이 한번 처리해보라”고 명했다.
 그러나 조정은 “제가 왜 책임지냐”면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회피했다.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 일을 혼자 담당한다는 말입니까. 성상께서는 다른 대신들과 함께 상의하여 처리하소서.”(<광해군일기> 1619년 7월 27일)
 그러자 광해군이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당신도 ‘맡지 않겠다’며 이토록 번거롭게 하는데…. 어느 대신이 맡겠는가. 나 혼자 고민하다가 병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나랏일이 한심하구나.”

 

 ■전쟁이 재발되면 가슴이 섬뜩하다
 아닌게 아니라 당시 광해군은 깊은 병에 걸려 있었다. 후금의 편지에 답하는 기한(8월5일)이 훌쩍 지났지만 어느 누구도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자 광해군은 병든 몸을 이끌고 나와 대신들에게 애원조로 호소한다.
 “내가 병이 심하고 졍신이 혼미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 데도 종묘사직이 위태로운 꼴을 차마 볼 수 없어 나왔다. 이미 답서의 기한(8월 5일)이 지났지만 8월 안으로 보낸다면 혹시 목전에 닥친 전란은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경들은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광해군일기> 1619년 8월 14일)
 광해군은 “만약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섬뜩하다.(思之膽寒)”고 걱정했다.
 그랬다. 홀로 노심초사하던 광해군은 전쟁의 재발을 걱정한 지 4년 만에, 제발 고려의 외교를 배우라고 호소한지 2년 만에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1623년) 그런 다음 불과 4년 뒤 정묘호란(1627년)이 일어나 오랑캐와 ‘형제의 맹약’을 맺었고, 다시 9년 뒤 병자호란(1636년)으로 ‘군신의 맹약’을 맺는 신세가 된다. 그 사이 죄없는 백성들만 도탄에 빠진다. 지금도 광해군의 절규가 귓전을 때린다.
 “큰소리만 치는구나 나랏일이 한심하다. 제발 제발 고려의 외교 좀 닮아라.”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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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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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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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암초 때문에 격렬한 파도와 세찬 여울이 휘몰아친다. 안흥정 아래 물길이 열 물과 충돌하고, 암초 때문에 위험하므로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다.”(<고려도경>)
 송나라 서긍은 충남 태안 마도 인근 해역의 험난한 물길을 두고 “매우 기괴한 모습이라 뭐라 표현할 수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이 뿐인가. 
 “옛날엔 난행량(難行梁)이라 했다. 바닷물이 험해 조운선이 누차 침몰했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싫어해서 안흥량(安興梁)으로 고쳤다.”(<신증동국여지승람>)
 얼마나 험했으면, 배가 지나기(行) 어려운(難) 해역이라 ‘난행량’이라 했다가 편(安)하고 흥(興)하라는 염원을 담아 ‘안흥량’으로 고쳤다는 것인가.

안흥량의 암초지대. 나라곳간을 채울 조운선은 반드시 태안반도 인근 해역인 안흥량을 통과해야 했지만 배가 침몰되는 해난사고가 잇따랐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난행량이 안흥량으로 바뀐 까닭 
 그럴 만도 하다. 안흥량 일대는 인당수(황해도)·손돌목(강화도)·울둘목(전남) 등과 함께 ‘4대 험로’로 꼽히는 곳이다.
 해안선의 출입이 가장 심하고 다수의 섬이 분포돼있는 데다 수중암초가 곳곳에 있어서 조류의 변화가 심하다. 억센 조류가 해저 암각이나 섬에 부딪쳐 소용돌이 치고,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가 물살을 더욱 빠르게 만든다. 그러니 간조(썰물) 때나 계절적으로 풍랑이 거셀 때 안흥량을 통과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했다.
 예컨대 6~8월 사이와 10월 상순 이후에는 기본적으로 항행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흥량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전라도를 비롯한 3남 지역의 세곡(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서울(개경·한양)로 운반하는 조운선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해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도 컸다. 구체적인 기록이 나와있는 조선시대 해난사고만 일별해보자.
 1395년(태조 4년) 5월 경상도 세곡을 싣고 안흥량을 통과하던 조운선 16척이 침몰했다.
 1403년(태종 3년)과 1414년(태종 14년)의 침몰사고는 대형참사였다. 즉 1403년 사고로 조운선 34척이 침몰, 선원 1000여 명과 쌀 1만 여 석이 수장됐다. 1414년 사고 때는 66척이 침몰, 미곡 5000석이 가라앉았다. 1455년(세조 1년) 안흥량에서 일어난 해난사고로 조운선 54척이 가라앉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니까 1395~1455년 사이 66년간 안흥량에서 발생한 해난사고의 통계를 보면 파선 및 침몰된 선박이 200여척, 인명피해 1200명, 미곡손실 1만5800석 이상이었다.
 또 다른 통계를 들어보자. <경국대전>이 반포된 성종 때의 조운선의 수가 총 155척이었다. 그렇다면 태종 때 66척과 세조 때 54척이 침몰한 배의 수는 각각 전라도 조운선의 3분의 1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다. 

안흥량(마도) 해역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선박. 잘 포장된 고려자기가 켜켜이 쌓여있다. 강진에서 올라온 조운선이 수장된 것이다.

 ■최초의 운하공사  
 조운선이 번번이 침몰함으로써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함은 물론 국가재정 또한 고갈되는 이중고를 겪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고려와 조선 조정은 나라곳간을 채우기 위한, 국운을 건 대책을 세웠다. 그것은 바로 ‘운하(運河)공사’였다.
 1134년(인종 12년)의 <고려사> ‘세가·인종’를 보면 다음과 같은 상소문이 올라온다.
 “안흥정 아래의 바닷길은 파도가 격랑하고, 바위가 험준해서 이따끔 배가 뒤집힙니다. 운하를 뚫어야 합니다.”
 상소문은 이어 “소태현(蘇泰縣·태안)’의 경계를 시작으로 해서 운하를 판다면 배의 운행이 매우 빨라 이로울 것”이라고 했다.
 인종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습명(鄭襲明·포은 정몽주의 10대조 할아버지)을 운하 공사의 책임자로 보냈다.
 운하공사의 계획은 천수만~가로림만 연결하자는 것이었다. 현 태안군 태안읍(인평리·도내리)~서산시 팔봉면(어송리·봉담리) 사이에 물길을 낸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해난사고가 빈발하는 안흥량을 경유하지 않고 천수만~가로림만을 통과하는 항로를 개척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사>는 “군사 수천명을 총동원한 이 대역사는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고 기록했다.

조운선이 태안 해역에서 조난당하는 일이 빈발하자 고려와 조선조는 공히 태안 일대에 대대적인 운하공사를 벌였다. 조선판 4대강 공사라 일컬을만 했다. 하지만 지반이 암반층인데다 급격한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에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부실 날림공사라는 지적이 잇따르자 급기야 운하공사는 무산되고 말았다.|박지선 기자 그래픽 

 ■화강암 때문에 막힌 운하
 그럼에도 운하는 고려조의 숙원사업이었다. 1154년(의종 8년)에도 “소태현(태안)에 운하공사를 재개했지만 뚫지 못했다”는 <고려사> 기록이 이를 웅변해준다.
 그로부터 240여 년이 지난 1391년(공양왕 3년) 운하의 필요성이 다시 부각된다. 공민왕 이후 왜구가 빈번하게 출몰, 조운선을 약탈함으로써 국가재정이 더욱 곤궁해진 것이다.
 이 때 왕강(王康·?~1394)이 의논을 일으킨다.
 “태안에 예부터 물길을 냈던 곳이 있습니다. 깊이 판 것이 10여 리이고 파지 못한 것은 불과 7리입니다. 지금 공사를 재개하면 조운이 안흥량 400리의 험로를 건너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까 이 때의 공사는 기존 두 차례의 공사(1134·1154년) 끝에 남겨진 7리를 마무리짓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간다.
 “인력을 징발해서 운하를 팠다. 그러나 돌이 밑바닥에 깔려있고 조수가 들락날락 하는 바람에 파는 대로 다시 매워졌다. 공사는 두 달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고려사> ‘열전·왕강’ <고려사절요> ‘공양왕’ 등)
 매우 의미심장한 언급이다. 고려왕조가 그토록 국가사업으로 추진했던 운하공사가 왜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는 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즉 공사구간이 화강암 암반층이어서 파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겨우겨우 판다 해도 족족 다시 메어지는 난공사였던 것이다.

 

조선조 태종의 책사인 하륜은 태안(굴포) 운하를 뚫는 방법으로 갑문식 공법을 제시했다. 천수만~가로림만 사이에 5개의 저수지를 만들어 놓고 각 저수지마다 소선(작은 배)를 띄워 전달되는 세곡을 차례차례 실어나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거센 파도와 암초 때문에 조운선이 첫번째 포구에 닿을 수도 없었기에 처음부터 탁상공론의 계획이었다.|곽호제의 논문 ‘고려~조선시대 태안반도 조운의 실태와 운하굴착’ 중에서

 ■기발한 것 같았던 하륜의 비책
 막 개국한 조선 역시 운하공사에 사활을 걸었다. 안흥량 수로를 피하는 게 개국한 조선의 첫번째 과제였다.
 태조 이성계는 1395~97년 사이 최유경과 남은을 잇달아 태안 현지로 파견한다. “운하를 팔 곳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보고는 똑같았다. “땅이 높고 굳은 돌이 있어 팔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태종 때는 운하공사를 향한 염원은 ‘숙원(宿願)’을 넘어서 ‘비원(悲願)’의 단계로 번졌다.
 즉위 3년이 지난 1403년 조운선 34척과 미곡 1만석, 그리고 선원 1000여 명이 수장된 대형참사를 겪었기 때문이다.
 “1412년(태종 12년), 태종이 안흥량 수로에 배가 통행할 방법을 의논하라고 명했다.”
 이 때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던 하륜이 나름대로의 비책을 꺼냈다. 다음은 ‘태종의 장자방’으로 일컬어졌던 하륜의 계책이다.
 “고려 때 왕강이 뚫던 곳에 지형이 높고 낮음을 따라 제방을 쌓고, 물을 가둡니다. 그리고 제방마다 소선(小船·작은 배)을 둡니다. 둑 아래를 파서 조운선이 포구에 닿으면 그 소선에 옮겨 싣고, 두번째 저수지를 건너 다시 세번째 둑 안에 있는 소선에 옮겨 싣게 합니다. 이렇게 차례차례 운반하면 근심을 면할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륜은 무작정 물길을 뚫어 바닷길을 통하게 하는 관류식 공법이 아니라 일종의 갑문식 공법을 쓰겠다는 것이다.
 즉 일단은 기존에 천수만~가로림만 사이에 뚫어놓은 운하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것. 그러면서 그 사이 높낮이에 따라 5개의 저수지를 만들고 저수지마다 소선, 즉 작은 배를 둔 뒤 포구에 도착한 조운선의 짐을 차례로 옮겨 싣는 방법을 쓴다는 것이었다.

지금 태안반도에는 고려 인종~조선 세조까지 수차례 뚫었던 운하의 흔적이 남아있다. 천수만 쪽인 태안군 태안읍(인평리·도내리)과 가로림만 쪽인 서산시 팔봉면(어송리·봉담리) 사이에 물길을 낸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17일 만에 끝낸 부실·날림공사
 ‘태종의 꾀주머니’라는 별명에 걸맞은 하륜의 비책이었다. 태종은 참찬의정부사 김승주에게 특명을 내린다.
 “1413년(태종 12년) 11월 16일 임금이 김승주에게 명했다. ‘화공(畵工)과 함께 현장에 가서 지세를 살피고 지도를 그려 바쳐라. 그 후에 판단하겠다.’”
 태안을 둘러보고 돌아온 김승주는 현장 지도를 올리면서 하륜의 비책에 찬물을 끼얹는 소견서를 첨부한다.
 “(고려 때) 왕강이 뚫었던 곳은 모두가 단단한 돌로 되어 있습니다. 난공사가 예상됩니다. 쉽게 공효를 거두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자 태종은 “그것은 과인도 알고 있지만 과인 독단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므로 의정부에서 여럿이 의논해서 시행토록 하라”는 의견을 낸다. 그럼에도 공사는 강행됐다.
 “1413년(태종 13년) 병조참의 우박과 의정부 지인 김지순이 태안의 운하공사를 감독했다. 5000명의 주민이 동원된 운하공사는 1월 29일 시작되어 2월 10일 마무리됐다.” (<태종실록> 1413년 2월 10일)
 하지만 뒷담화가 터져 나왔다.
 “공사를 마쳤지만 비평하는 자들이 말했다. ‘헛되이 백성의 힘(民力)만을 썼지, 반드시 이용되지 못할 것이다. 조운(漕運)은 결국 통하지 못할 것이다.’”(<태종실록>)
 화강암 암반이라 엄청난 난공사였는데, 불과 17일 만에 후다닥 끝냈으니 그야말로 전형적인 부실·날림공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무엇에 쫓기듯 총력전을 벌이며 야간 밤샘작업까지 벌였던 4대강 사업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그랬으니 당대 여론이 들끓었던 것이다. <실록>을 보면 비평가들의 말이 맞았던 것 같다. 공사 완공 후 불과 19일 후인 2월 29일 <실록>을 보라.
 “사람을 순제(태안)에 보내 제방 안에 있는 암석을 제거하도록 했다.”
 골치거리였던 바닥 암반층이 두고두고 문제였던 것이다. 공사 후에 다시 공사를 해야할만큼….

태안(굴포) 운하가 좌절되자 중종은 의항운하를 뚫는 공사를 시작했으나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럼에도 공사책임자에게 상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한심한 자들이구나!”
 결과적으로 하륜의 비책은 ‘탁상공론’이었음이 드러났다.
 천수만~가로림만 사이에 5곳의 저수지를 만들고 소선으로 세곡을 차례차례 운반하는 책략은 나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세곡을 첫번째 저수지에 옮겨 실으려면 대선(大船)이 우선 정박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안흥량의 바람이 워낙 세고 암초가 험한 데다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세곡을 잔뜩 실은 대선이 정박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어떻게 저수지까지 짐을 옮겨 싣는다는 말인가.
 공사가 끝난지 한달 후인 1413년 3월 12일, 충청도 관찰사 이안우는 “워낙 바람이 세고 돌이 험해서 대선이 정박하기 어렵다”는 상소문을 올린다.
 이 무슨 말인가. 세곡을 실은 큰 배(대선), 즉 모선(母船)이 정박할 수 없는 데도 공사가 강행됐다는 어이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난 태종이 길길이 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무슨 공사를 했다는 거냐. 현장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공사계획을 수정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필이면 농삿달에 백성을 쓸데없는 공사에 동원한 셈이 아니냐.”
 태종은 그러면서 “태안 현장에 가본 자들이 한 둘이 아닐텐데 어찌 그렇게 의견이 분분하냐”면서 현장에서 공사를 책임진 우희열과 우박 등을 소환한다.
 “백성을 동원해서 둑을 쌓고 저수지를 만드는 일은 끝났다 치자. 그러나 대선이 정박할 곳에 바람이 거세고 암초가 많다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경들은 왕명을 받고 공사를 책임진 자들이 아니냐. 문제가 있다면 보고했어야지…. 어찌 아뢰지 않았는가.”

최근 태안 인근 해역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선박. 고려와 조선 때 수차례에 걸쳐 운하사업이 이어졌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탁상공론과 함께 부실 날림공사가 두고두고 문제가 됐다.

 ■“도대체 현장 가서 무얼 했느냐” 
 그러자 우희열과 우박이 변명한다는 말이 기막히다.
 “저희는 의정부의 명에 따라 저수지를 만들고 운하를 뚫는 공사를 시행했을 뿐입니다. 대선(大船) 문제는 의정부의 명령이 아니었기에 저희가 살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수지 축조와 운하공사는 책임질 수 있지만, 대선 문제는 책임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책임회피용 발언이었다.
 태종이 그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꾸짖었다.
 “배가 다니고 통하는 여부를 어찌하여 듣지 못했다고 하는가. 살피지 못하였다고 대답하다니…. 참 망령된 말이구나.”
 태종이 다시 윤향과 탁신 등을 태안 현장에 보내 상황을 살피도록 했다. 이들이 돌아와 올린 보고를 보라.
 “1만 명의 인부를 동원해서 3삭(朔) 동안 공사를 깅행한다면 조운(漕運)이 통할 만합니다.”
 임금의 호통을 듣고 현장을 다녀온 관리들까지 여전히 큰소리 뻥뻥 치면서 ‘공사강행’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대 조운선에서 확인된 청자사자향로뚜껑.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말 끝마다 탁상공론 
 태안의 운하공사는 이후에도 두고두고 논란을 야기시켰다. 저마다 백가쟁명의 방안을 내놓았던 것이다.
 5개월이 지난 1413년 8월14일. 충청관찰사 이안우가 ‘비분강개’의 어조로 다시 올린 상소문을 보라.
 “태안 현장을 본 관리들마다 일시적인 모책(謀策)만 쓰고, 백성들을 위한 계책은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분강개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상소문을 올립니다.”
 중앙 관리들이 현장을 둘러보고 간 뒤에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계책만 내놓는다는 것. 이안우는 관리들의 공론(空論), 즉 헛소리들을 하나하나 거론한다.
 “어떤 관리는 암초의 풀이 있는 곳에 푯말을 세워 표시하면 어떠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요. 밀물 때이면서 순풍을 만나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지만, 썰물 때 갑자기 폭풍이라도 만나면 어쩝니까. 배들이 밀려 암초의 풀에 걸리면 전복될 것입니다.”
 이안우는 태종의 책사로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하륜의 계책도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라 비판한다.
 하륜의 계책, 즉 저수지 5곳을 만들어 각각의 저수지에 소선, 즉 작은 배로 세곡을 차례차례 실어나른다는 계획은 전형적인 탁상공론이라는 것이다.
 “전라도 조운선이 1년에 실어나르는 세곡은 9만석이 넘습니다. 그런데 한 척의 소선(작은 배)에 싣는 세곡은 150석이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작은 배가 각 저수지를 따라 7차례 세곡을 옮겨 싣는다고 계산해보십시요. 9만석의 세곡을 반년이 걸려도 다 운반하지 못할 것이 아닙니까.”
 그랬다. 운하공사를 끝낸 곳은 기껏해야 세곡 150석을 실을 수 있는 소선 1척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게다가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에 실제 배가 운항할 수 있는 일수는 한 달에 10일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에 1년에 9만석 이상의 세곡을 실어날라야 했으니….
 이안우는 “이런 상황에서 백성의 노고가 얼마나 심하겠느냐”고 정곡을 찔렀다. 이안우는 특히 “백성들이 쓸데없는 운하를 파느라 농사 지을 때를 놓쳤다”고 한탄했다.

청자철화퇴화문 두꺼비 모양의 벼루..

 ■실력자에 아부한 공사강행파
 이 때의 <태종실록>은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을 기록해두고 있다.
 “(태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던) 하륜이 운하공사의 필요성을 주장하자 아부하는 자들이 많았다.”  
 국가적인 사업을 추진하는데 세도가의 눈치를 보며 공사를 강행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공사를 재개하는 문제는 태종 임금이 직접 태안 현장을 둘러보고 최종 결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태종은 1413년 9월 11일부터 태안 방문을 최종 목적지로 하는 순행(巡行)에 나섰다. 그런데 17일간 남부지방을 실컷 돌다가 막상 최종목적지인 태안 방문을 앞두고 돌연 마음을 바꾼다.
 “태안을 두루 돌아보는 것이 처음의 뜻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과 말이 모두 피곤하니, 곧은 길을 따라서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 태안 방문은 내년 봄(1414년)을 기다려도 좋을 것 같다. 운하공사는 포기하라.”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운하공사는 결국 왕명으로 최종 포기됐다. 이후에도 태안의 운하공사 재개를 둘러싼 논란은 기회있을 때마다 일어났다.
 특히 세조 때 그 논의가 극심했다. 세조는 1461~64년 사이 임영대군 등 4명의 대군과 신숙주·홍윤성 등 재상들을 태안 현장으로 총출동시켜 재개여부를 타진했다.
 그러나 현장을 다녀온 임영대군(이구)과 신숙주 등은 “공사재개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안됩니다. (기존 운하의) 물길이 똑바르지 않고 진흙이 물러서 파는대로 무너지니 운하를 더이상 뚫을 수 없습니다.”(<세조실록> 1464년 3월 13일)

 

 ■둑이 무너졌는데도 상을 주다
 고려 인종~조선 세조까지 4차례의 운하계획이 무산되자 궁여지책의 대안이 마련되기도 했다.
 그것이 1521년(중종 16년) 태안군 소원면 송현리~의항리를 연결하는 이른바 ‘의항운하 계획’이었다.
 1537년(중종 32년) 2월부터 15~50세 사이의 승려 5000명을 동원한 의항운하 공사는 6개월 만에 완료됐다.
 중종은 “어려운 공사를 끝냈다”면서 공사책임자인 박수량과 이현에게 잘 단련된 말 1필씩을 상급으로 내려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운하의 효용성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표된 섣부른 ‘상잔치’였다. 의항운하 역시 거센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에 공사 직후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상급을 받았던 이현은 불과 2년 뒤 삭탈관직됐다.
 의항 공사 때 많은 뇌물을 받고 공사에 동원되지도 않은 승려들에게 호패를 발급해준 데다, 공사에 쓴 기물들을 집으로 옮겨가 사사로이 간척지를 메우는데 쓴 혐의를 받았다.(<중종실록> 1539년 6월 10일) 결국 의항운하 역시 졸속, 날림 및 비리 등 갖가지 구설수 속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렇게 고려·조선의 운하공사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문제는 ‘사람’이다
 이쯤해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안행량에서의 잦은 해난사고가 단순히 ‘거센 바람과 암초,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1473년(성종 4년) 4월 20일 성종이 전라도 관찰사 김지경 등에게 내린 명령을 한번 보자.   
 “조운의 실패는 물길이 멀고 험해서가 아니다. 담당 관리들이 출항날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운선이 출발할 때 해당 관리들은 출항지에서 모두 모여 기후와 바람과 물때를 살펴 하나하나 헤아리고 점검해야 한다. 배가 기항하는 곳에서도 출발 때처럼 하면 거의 실패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성종은 한가지 단서가 될만한 한말씀을 남긴다. 
 “안흥량이 험악하다고? 물론 예로부터 근심이 된 곳이다. 그러나 잘 봐라. 개인의 배, 즉 사선(私船)의 파선은 적고, 조운선과 같은 공선(公船)의 파선은 많지 않은가. 무엇을 말해주는가. 험악한 지형 때문만이 아니라 항행에 조심하지 않아서 사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제 법에 따라 해당 관리들을 제대로 발령하고, 이들을 제대로 지휘·고찰한다면 조운선의 파선을 면할 수 있다.”

 

 ■지독한 인재(人災)
 무슨 말인가. 결국 ‘사람’이 문제인 ‘인재(人災)’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1403년(태종 3년) 5월 5일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침몰, 1000명의 선원과 미곡 1만석이 수장됐다. 그 때 태종 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책임은 과인에게 있다. 출항일은 풍랑이 거센 날이어서 배를 띄울 수 없었는데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 출발시켰으니…. 과인이 백성을 사지(死地)로 몬 것이다.”
 3개월 후인 8월 21일 사간원이 올린 상소를 보면 그 날의 참사가 움직일 수 없는 인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조운선을 띄울 때는 풍랑을 잘 파악하고 화물적재 중량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일을 용렬하고 간사한 무리에게 맡겨….”
 결국 풍랑을 파악하지 않고 과적을 일삼은 무리 때문에 일어난 사고였던 것이다. 
 1414년(태종 14년) 8월 8일 전라도 운반선 66척이 태풍을 만나 침몰·파손돼 200여 명이 익사하고 쌀·콩 5800석이 수장된 사건은 어땠으랴.
 “7월에는 조운선을 띄우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호조가 전라수군절제사에게 공문을 보내 ‘7월에 세곡을 실어 8월초에 배를 띄우라’고 지시했다. 전라수군절제사도 문제있는 인물이다. 호조의 공문대로 배를 무리하게 띄우는 바람에….”
 조운의 원칙은 4월 쯤 배를 띄우고 5월 안에 한강에 도착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호조가 가장 위험한 시기인 7월 말~8월 초에 조운선을 띄우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전라수군절제사 역시 무리한 명령인줄 뻔히 알면서도 배를 출항시켜 참변을 불렀다는 것이다. 지독한 인재(人災)가 아닐 수 없다.
 이쯤해서 다산 정약용의 언급이 떠오른다.
 “뱃길 가운데 위험한 곳 중 하나가 안흥량이다. 파선(破船)되는 배가 해마다 10여척 나온다. 그 원인으로 첫째 배를 만드는 제도가 좋지 못했고, 둘째 수령들이 가외의 짐을 실은 때문이며, 셋째 뱃사람들이 일부러 파선시키기 때문이다. 파선 시키는 것이 10척 가운데 7~8척이나 된다.”(<경세유표> 제1권 ‘지관·호조’)

 

 ■불현듯 떠오르는 4대강 악령
 필자의 뇌리에 불현듯 4대강 공사의 망령이 떠오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속도전을 방불케하는 공사강행에 따른 부실·날림공사…. 현장여건을 무시한채 실권자의 공사강행 주장에 아부하며 추종했던 무리들…. 잘 마무리되지도 않은 공사의 책임자에게 훈장을 내리고…. 훈장 받은 인물은 비리혐의로 적발되고…. 결국 천문학적인 공사비만 낭비하고, 백성들의 헛심만 쓰게 되는 후유증을 낳았으니….
 그래도 높이 평가할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안흥량의 험로를 피해 조운선을 운반하는 것은 분명 국운을 건 숙원의 국책사업이었다.
 왕조시대였던만큼 임금이 나서 어떤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공사를 강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정 내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고, 임금(태종·세조)은 끝까지 그들의 논쟁을 들었으며, 결국은 임금 스스로가 공사중단이라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최소한 불통의 리더십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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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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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garth Brooks 2014 concert sched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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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1993년 10월 26일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색다른 행사가 열렸다.
 일본 규슈지방의 미야자키현 난가손(南鄕村) 사람들이 백제왕을 상징하는 신체를 모셔와 제사를 지낸 것이다.
 일본인들이 왜 백제왕의 신체를 모셔온 것일까. 사연은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3년 뒤 백제 부흥군과 왜 연합군이 나·당연합군과 백강(금강)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1000척에 분승한 2만7000여 백제 부흥군·왜 연합군은 4차례 접전 끝에 완패하고 만다. 백제부흥군은 완전히 멸망한다.
 이 전투 후 백제왕·귀족들 가운데 상당수가 일본 나라를 거쳐 규슈로 망명한다. 이 망명 대열에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의 서(庶) 왕자 41명 가운데 한사람인 정가왕 일족이 포함돼 있었다. 정가왕 일가가 바로 규슈 남쪽 산골지방인 난고손 마을에 정착한 것이다.    이 난가손 마을 사람들이 망명한 백제왕자인 정가왕의 고국이자 선대왕들의 무덤인 능산리 고분을 찾은 것이다.
  실로 1,330년 만에 이뤄진 고향 방문이었다. 난가손 마을 사람들은 선대왕들을 위한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신체는 세습신관과 그 아들 외에는 절대 열어볼 수 없었다. 협의를 통해 이 신성한 신체는 김포공항 검색대 마저 통과하지 않는 특전을 누렸다.
 망명 백제왕자의 귀향 행사가 열리던 바로 그 날, 그 곁에서 또 다른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다. 이른바 능산리 절터발굴을 알리는 ‘개토제’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1993년 물구덩이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 660년 백제멸망 때 스님들이 급히 목제수조에 향로를 은닉해놓고 몸을 피한 것 같다.

   ■깨어난 백제왕자의 혼
 그런데 ‘망국의 한’을 담은 백제왕자의 혼이 깨어난 것일까.
 고유제와 개토제가 동시에 열린 지 17일 만인 12월12일, 1,300년 이상 잠자고 있던 백제의 정신이 홀연히 기지개를 켤 줄이야.
 사실 이 발굴은 그야말로 악조건의 연속이었다. 원래 이 이름 없는 절터의 발굴은 92년 12월 당시 충남대 박물관(관장 윤무병)의 시굴조사 때 유구·유물들이 발견됨으로써 시작됐다.
 절터는 능산리 고분군(사적 14호)과 부여나성(夫餘羅城·사적 58호) 사이의 작은 계곡에 위치하고 있었다. 원래 계단식 논이었다.
 인근에는 능산리 고분군과 함께 백제고분모형이 전시돼 있었다. 부여군은 이 절터 부근에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을 마련할 작정이었다. 주변이 문화재 지역이었기에 공사에 앞서 유구·유물 확인을 위한 사전시굴조사를 진행해야 했다. 그러나 별다른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자칫했으면 “유물이 확인되지 않았으니 공사를 강행한다”며 중장비로 밀어버린 뒤 공사를 강행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발굴단의 입장에서 묘했다. 뭔가 유구와 유물이 보일 예감이 있는데, 확실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그렇다고 양심상 “아무 것도 없으니 그냥 공사하라”고 할 수도 없고….
 이렇게 지체하는 사이, 10개월이 흘렀다. 급기야 1993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본격발굴이 시작됐지만, 현장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발굴 구덩이가 여름을 지나면서 물구덩이로 변했기 때문이다. 발굴지역이 계곡부인 데다 습기가 질척질척댄 데다 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발굴단은 추위와 싸우면서, 발굴 구덩이에 물이 고이는 것을 막기 위해 주변으로 물이 흐르도록 임시방편으로 고랑을 마련하는 등 이중고에 시달렸다. 그래도 조사지역은 여전히 물로 질퍽거려 악조건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12월 12일 오후 4시30분. 발굴을 담당하던 김종만(당시 부여박물관 학예사)은 발굴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월척’을 낚는다. 

백제금속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백제금동대향로.

 

 ■물구덩이에서 낚은 ‘유물 월척’
 물구덩이나 다름없는 현장에서 뭔가 이상한 물체가 드러난 것이다. 이상한 뚜껑 같은 것이었다. 그게 향로인 줄은 상상도 못했다. 처음엔 광배 편 같은 유물인 줄 알았다.
 꽃삽으로 천천히 노출시켜 나가는데 뭔가 예사롭지 않은 유물임이 분명하다는 것만 느꼈다.
 발굴단은 즉각 작업을 중단했다. 느낌상 아무래도 뭔가 안전장치를 해놓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인부들이 보았으니 보안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밤사이에 도굴 등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에 야간작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뭔지도 밝혀지지 않은 유물에 대한 입소문이라도 나면 작업에 지장을 초래할 소지가 다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인부들은 일절 참여 못하게 귀가 조치시켰어요. 학예연구직들만 모두 모여 오후 5시쯤 작업에 들어가 전등을 밝혀 놓고 8시 30분쯤에 완벽하게 향로를 발굴했지요.“
 한없이 쏟아지는 물을 스펀지로 적셔내면서 120㎝ 가량의 타원형 물구덩이를 손으로 더듬거리며 뻘 같은 흙을 걷어냈다. 추운 날씨에 손이 틀 듯 시리고 아팠지만 그야말로 미친 듯 땅을 팠다.
 그 때였다. “아!”
 발굴단은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감동의 물결이었다. 비록 뚜껑과 몸통이 분리된 채로 수습됐지만…. 아마도 평생 볼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유물이 현현한 것이다.
 발굴단을 지휘했던 당시 신광섭 부여박물관장의 말.
 “향로를 들어낸 뒤에도 감상할 엄두도 못 냈습니다. 엄청난 물건을 내 손으로 발굴해 냈다는 뿌듯한 자부심. 작업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바라본 겨울 하늘, 총총한 별들…. 가슴이 얼마나 벅찬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향로가 출토된 타원형 구덩이는 원래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던 구유형 목제 수조가 놓였던 곳임을 알았다.
 향로는 칠기에 넣어서 묻었던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얼마나 넋이 나간 상태에서 발굴한 것인지…. 

능산리 절터에서 확인된 석조사리감. 백제 위덕왕의 누이동생이 공양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찬란한 백제유물의 백미
 수습을 끝내고 사진촬영 등 연장 작업을 마무리한 발굴단은 이 유물을 곱게 싸서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그제서야 유물의 올바른 모습이 드러났다. 발굴단의 탄성이 터졌다.
 미지근한 물에 담근 ‘면봉(귀이개)’으로 향로에 묻은 이물질을 닦아냈다. 그들은 하나하나 그 자태를 드러내는 향로의 참 얼굴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신선이 있는가 하면, 코끼리가 있고, 동자상이 있는가 하면 도요새와 호랑이가 있는 등 숱한 진금이수(珍禽異獸)의 모습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향로는 크게 뚜껑과 몸체 두 부분으로 구분돼 있었다. 세분하면 뚜껑장식인 꼭지와 뚜껑, 몸체와 받침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뚜껑 꼭지는 봉황 한 마리가 턱 밑에 여의주를 안고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모습. 봉황의 목과 가슴에는 향을 피울 때 연기가 나가는 구멍, 즉 배연공(排煙孔) 3개가 마련돼 있다.
 뚜껑 정상부에는 5명의 악사가 각각 금(琴), 완함(阮咸·당나라 때의 현악기로 비파의 일종), 동고(銅鼓·꽹과리), 종적(縱笛·관악기), 소(簫·피리의 일종) 등 5가지의 악기를 실감나게 연주하고 있다. 뚜껑 전체는 4∼5단의 삼신산의 형태였다. 신선들만 살고 있다는 전설의 중국 봉래산을 연상케 한다. 이는 첩첩산중의 심산유곡을 이룬 자연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그 곳에는 온갖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즉 74개의 산과 봉우리, 6그루의 나무와 12곳의 바위, 산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을 비롯해 잔잔한 물결이 있는 물가의 풍경이다.
 곳곳에는 상상의 동물 뿐 아니라 현실 세계의 호랑이·사슴·코끼리·원숭이 등 39마리의 동물과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지닌 16명의 인물상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인물·동물상은 오른쪽∼왼쪽으로 진행하는 고대 스토리 전개의 구성원리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몸체는 연꽃잎 8개씩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꽃잎의 중앙과 연꽃잎 사이사이에는 24마리의 동물과 2구의 인물상이 묘사돼 있다. 각각의 연판 안으로는 물고기·신조(神鳥)·신수(神獸) 등을 한 마리씩 도드라지게 부조했다.
 각 연판의 끝단이 살짝 반전돼 있는 게 얼마나 절묘한지. 하부 맨 아래 받침대 부분은 마치 용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받들고 하늘을 오르는 모습이다. 특히 승천하는 듯, 몸을 빳빳이 세운, 격동적인 자세의 용은 백제의 힘찬 기상을 보여주는 백미이다.

 

 ■물구덩이 속에 숨긴 이유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왜 찬란한 백제금동대향로가 왜 사찰의 공방지 바닥에 있는 나무물통에 은닉된 채 발견됐을까.
 발굴을 총지휘했던 당시 신광섭 부여박물관장의 추측을 토대로 660년의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660년 무렵 백제 최후의 순간, 나·당 연합군의 약탈·유린이 시작된다. 그러자 스님들은 창졸간에 임금의 분신과도 같은 향로를 감춘다.
 그들은 조국이 멸망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저 며칠만 숨겨 두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황급히 향로를 공방터 물통 속에 은닉하고는 도망친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조국 백제의 사직은 그것으로 종막을 고한다. 나·당 연합군은 백제 임금들의 제사를 지낸 절을 철저히 유린한다.
 절이 전소되고 공방터 지붕도 무너진다. 백제의 혼을 담은 ‘대향로’도 그대로 감춰진채 깊이 잠든다.
 그럴듯한 추론이 아닌가. 이렇게 보는 근거가 있을까.
 물론이다. 향로가 발견된 지 2년 만인 1995년, 이 절터 목탑지 밑에서 또 하나의 깜짝 놀랄 유물이 발견된다.
 ‘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조사리감’이다. ‘창(昌)’은 누구인가. 27대 위덕왕(재위 554∼598)의 본명이다.
 명문을 풀면 ‘위덕왕 13년(정해년·567년) 누이동생, 즉 성왕의 딸이 사리를 공양한다’는 내용이다.
 명문 중 ‘형공주(兄公主)’는 맏공주를 의미하는 ‘상공주(上公主)’ 혹은 ‘장공주(長公主)’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성왕의 맏딸, 즉 위덕왕의 맏누이동생이 사리를 공양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위덕왕의 아버지 성왕(재위 523∼554)은 한성백제 몰락과 공주 시대의 정치적인 위기를 극복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맡는다.  

멸망한 백제 의자왕의 왕자인 정가왕이 일본 규슈 난고손 마을까지 망명, 정착해서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 마을 사람들은 정가왕과 정가왕의 아들인 복지왕의 신주를 모시고 살명서 해마다 만남의 의식을 벌인다.  

 

 

 ■창졸간에 멸망당한 백제
 성왕은 불교를 백제중흥의 기반으로 삼는다. 그러나 성왕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뒤를 이은 위덕왕은 그처럼 비명에 간 아버지를 기리며 국가적 추복불사(追福佛事)의 일환으로 이 목탑을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기단만 남아있는 이 목탑지를 발굴하다보니 이상한 현상이 목격됐다. 목탑의 심주(心柱)가 도끼로 처참하게 잘려 있었고, ‘창왕’ 명문 사리감도 비스듬히 넘어져 있었다.
 이는 절을 유린한 적군들이 목탑의 사리장치를 수습하려 마구 파헤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다.
 스님들은 조국이 멸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터. 그만큼 백제가 강대국이었다. 642년 7월, 의자왕은 신라 미후성을 비롯, 40여개 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8월에는 유능한 윤충(允忠)장군이 신라 낙동강 전선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던 대야성(합천)을 함락시켜 신라를 누란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오죽했으면 651년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그만 괴롭히고) 빼앗은 신라의 성을 마땅히 돌려주라”고 의자왕에게 국서를 내렸을까. 당 고종은 국서에서 “만약 백제가 빼앗은 성을 신라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법민(法敏·훗날 신라 문무왕)의 요청대로 왕(의자왕)과 결전을 벌일 것이며 고구려와 약속하여 구원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의자왕은 이듬해(652년) 당에 조공을 보낸 것을 빼고는 그 뒤부터 사실상 당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한 상태로 운명의 660년을 맞이한 것이다.
 해동증자(海東曾子)로 일컬어질 만큼 지극한 효자였던 의자왕. 그는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는 등 강국의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어느덧 자만심과 타성에 젖어 독재자로 변질됐으며 요녀로 악명 높았던 군대부인(君大夫人)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충신들을 쫓아냈다. 충신인 성충(成忠)이 옥사하고 흥수(興首)가 귀양 갔으며, 그 빈자리를 신라의 간첩망에 포섭된 좌평 임자(任子) 같은 인물로 채웠다.
 무엇보다도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지 못해 나당연합군 결성을 수수방관한 점은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결국 막강한 백제는 외교실패와 내부갈등으로 속절없이 멸망한 것이다. 나무물통 속 금동대향로는 바로 그 비운의 왕국 백제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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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금동대향로에 숨겨진 백제 멸망의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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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이건 제가 한번 해볼게요.”
 1962년 3월 하순, 충북 제천 황석리 고인돌(기원전 6세기) 발굴현장. 28살 신참 고고학자였던 이난영(국립박물관 학예연구사)은 선배인 김정기 학예연구관을 졸랐다.
 그 때까지 계획된 12기를 모두 발굴한 상황. 단 하나 남은 게 바로 상석부분이 파괴된 채 흙에 파묻혀있던 고인돌 1기(13호)였다. 너무도 빈약한 고인돌이었기에 신참 고고학자가 한번 욕심을 내본 것이었다. “깨진 것 같은데 한번 해보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흙을 파던 신참 고고학자의 손 끝에 뭔가가 걸렸다.
 석관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석관을 파헤치자 놀랄 만한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기골이 장대한 사람의 뼈였다. 오른팔은 배에, 왼팔은 가슴에 대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필름도 없었다. 그는 제천 청풍읍으로 달려가 재생필름을 1통 산 뒤 현장으로 달려와 정신없이 유골사진을 찍었다.
 밤늦게까지 인골을 수습한 발굴단은 서울대 의대 해부학과 나세진·장신요 박사팀에게 조사를 의뢰했다.

1962년 충북 제천 황석리에서 확인된 기원전 6세기 무렵의 청동기 시대 인골. 분석결과 이 인골은 키 174센티미터의 장신인데다 두개골의 모습을 비춰볼 때 북구유럽형 인골인 것으로 판정돼 화제를 뿌렸다.

 

 ■서양인이 살았다.
 그런데 놀랄만한 분석결과가 나왔다.     
 “인골의 신장은 174㎝ 정도, 두개골과 쇄골·상완골 등 모든 부위에서 현대 한국인보다 크다.”
 분석팀은 “두개장폭(頭蓋長幅)지수가 66.3”이라면서 “현대 한국인이 단두형(短頭型)인데 반해 이 인골은 장두형인 점이 흥미롭다”는 결과를 내놨다. 
 이 무슨 말인가.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고려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두개장폭지수라는 것은 이마·뒤통수의 길이와 귀와 귀 사이의 길이 비율을 나타내는 겁니다. 한국인의 경우 100대 80∼82인데 반해 서양인은 100대 70∼73 사이인데….”
 김 교수의 해석은 놀랍다. “황석리 인골의 지수(66.3)로 보아 이 인골은 한반도로 이주한 초장두형 북유럽인”이라는 것이다.
 즉 기원전 1700년 쯤 유럽의 아리아인들이 인도·이란 등으로 내려왔으며 이들이 기원전 1000년부터 벼농사 전래경로를 통해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로 이주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흥미로운 것은 ‘얼굴 복원 전문가’인 조용진(한남대 객원교수)이 인골의 두개골을 복원한 결과 ‘서양인’의 얼굴형과 거의 똑같다는 사실이다.
 즉 인골의 왼쪽 이마가 볼록하고 코가 높으며 얼굴이 좁고 길며, 눈 구멍 모양이 서양인 두개골의 눈구멍 모양과 비슷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인골은 큰 북방계통의 사람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한 이빨이 크고, 광대뼈는 큰 데 뒤로 물러나 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얼굴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같은 인골의 특징은 현재 제천의 산간지역 사람들에게도 나타난다는 것. 이 지역 사람들의 특징은 피부가 희고, 털이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결론적으로 알타이 지방에서 내려온, 서양인의 형질을 포함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게 조용진 교수의 설명이었다.

조용진 교수가 복원한 황석리 인골의 얼굴. 서양인의 모습을 쏙 빼닮았다.

 ■정선 아우라지의 비밀
 제천 황석리 인골 발굴 후 42년이 지난 2005년이었다.
 강원 정선 북면 아우라지 유적에서 의미심장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한국의 선사고고학 역사를 뒤흔들만한 핵폭탄과 같은 것이었다.
 먼저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나온 이른바 덧띠새김무늬토기(각목돌대문토기·刻目突帶文土器·눈금 같은 무늬를 새긴 덧띠를 두른 토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덧띠새김무늬토기는 바로 조기(早期) 청동기시대, 즉 가장 이른 시기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에 속한다. 기원전 15~13세기 정도?
 이전까지 청동기시대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한반도의 경우 기원전 10세기쯤, 만주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선 기원전 15~13세기쯤’이었다.
 그러니까 정선 아우라지에서 기원전 15~13세기를 대표하는 덧띠새김무늬 토기가 나옴으로써 한반도 청동기 시대 연대가 최대 500년 이상 올라간 것이었다.
 사실 정선 아우라지 뿐 아니라 그동안 경주 충효동, 진주 남강, 산청 소남리 등에서 숱하게 확인된 바 있었다. 그런 가운데 남한강 최상류인 아우라지에서 조기 청동기시대 유물이 나옴으로써 청동기 연대를 안정적으로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청동기 문화를 한반도에 국한시킬 필요가 있울까. 사실 덧띠새김무늬 토기는 중국 동북방인 발해 연안에서부터 한반도까지 꾸준히 출토돼왔다.
 즉 발해연안인 다쭈이쯔(大嘴子), 상마스(上馬石)유적에서부터 한반도 신의주 신암리-평북 세죽리-평남 공귀리-강화 황석리·오상리-서울 미사리-여주 흔암리-진주 남강 상촌·옥방까지….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는 “이 모두가 기원전 15~13세기 유적들”이라면서 “그것이 남한강 최상류(아우라지)까지 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온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말한다.
 “비단 남한강뿐이 아니다. 북한강 수계인 최근 홍천 외삼포리 같은 곳에서는 AMS(질량가속분석기) 측정결과 기원전 14~13세기로 편년되는 유적에서 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왔다.
 모두 한강수계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결국 정선 아우라지 유적은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의 전개과정을 알려주는 지표유적이라 할 만하다.

2005년 강원 정선 아우라지 유적에서 발굴된 고인돌과 인골. 인골에 대한 DNA분석 결과 현재의 영국인과 비슷한 염기서열인 것으로 잠정 추정된 바 있다.  

 ■영국인의 인골이…
 그런데 이 뿐이 아니었다. 아우라지에서 또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유물이 나왔으니까.
 2005년 7월14일 오후. 당시 조사단(강원문화재연구소) 현장책임자였던 윤석인은 아우라지 유적 한쪽에 서 있던 고인돌을 노출시켰다.
 “고인돌 4기 가운데 한 기에서 사람의 두개골과 대퇴부뼈가 나왔습니다. 서울대 해부학교실에 분석을 의뢰했는데, 뜻밖에 서양인의 염기서열과 비슷하다는 결과를 구두로 통보받았습니다. 키 170㎝ 정도의 남성인데, 현재의 영국인과 비슷한 DNA 염기서열이라는….”(윤석인)
 물론 이 인골의 연대는 기원전 8~7세기로 측정되었으므로, 덧띠새김무늬토기(중심연대가 기원전 15~13세기)가 나온 곳과는 시간차가 있다. 어쨌거나 만약 2800년 전 서양인의 염기서열을 지닌 사람이 한반도에서도 두메산골인 정선에서 살았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또한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46년 전인 1962년 제천 황석리 고인돌에서도 수수께끼 같은 인골이 확인된 적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아우라지 유적이 존재하는 정선과 제천 황석리는 같은 남한강 수계가 아닌가. 김병모 교수는 아우라지에서 서양인의 염기서열을 가진 인골이 나왔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한반도에서 서양인의 염기서열이 나왔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기원전 18~17세기 무렵 히타이트족의 정복으로 흑해지역에 살고 있던 아리아족이 인도 쪽으로 이민했어요. 그 중 인도에서 살던 사람들 가운데는 벼농사 전래경로를 따라 동남아시아~한반도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이들의 경로는 고인돌 문화의 전파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아우라지 유적에서 확인된 덧띠 새김무늬 토기 등 청동기 조기 유물들. 한반도 청동기 시대를 500년 올리 놓은 대표적인 유룰이다.

 물론 아직은 서양인의 유전자와 관련해서는 퍽이나 조심스럽기도 하고, 민감하기도 한 주제이기도 하다.
 제천 황석리나 정선 아우라지나 모두 고인돌에서 나온 인골이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서양인이 청동기시대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것인가. 또 그렇다면 한국인이 서양인의 후손이라는 것인가. 하지만 굳이 그렇게 생각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 김병모 교수의 말이다.
 “현대의 한국인이 하나의 유전자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갖가지 교류를 통해 여러 인자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 제천이나 정선에서 출토된 인골이 서양인이라고 100% 확정짓는 것도 조심스럽다.
 같은 인종에서도 빈부나 계급의 격차에 따라 골격이 다를 수 있으니까. 특히나 특수층 계층인 고인돌에서 나온 인골들은 대체로 충분한 영양공급을 받는 경우가 많다니까….
 어쨌든 정선 아우라지 인골이 발굴된지 9년이 흘렀지만 서울대 해부학실은 최종적인 분석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다는 소식이다.
 9년 전의 발굴 담당자들이 서울대 해부학교실 측에 여러 번 최종결과를 발표해달라고 요청했단다. 그러나 아직 최종결과가 발표됐다는 소식은 없다.
 대체 어떤 최종결과가 나왔기에 발표를 하지 않는 것일까.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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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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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special info

    Tracked from special info 2014/11/15 04:22  삭제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2. Subject: how to hack a twitter account

    Tracked from how to hack a twitter account 2014/11/15 18:12  삭제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장0자(18) 속히 돌아오라. 모든 것 해결됐다. 그이와 언니는 너를 찾아 헤매고 있다.’
 경향신문 1964년 11월 7일에 ‘한 줄 광고’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개구쟁이 시절 이런 광고를 패러디 해서 “000야, 빨리 돌아오라. 아버지 바지(혹은 빤쓰) 줄여놨다”는 등의 농지거리를 나누며 실없이 낄낄 댔던 기억이 새롭다. 돌이켜보면 유치찬란한 농담인데, 무엇이 그렇게 우스웠는지 참….
 ‘한 줄 광고’를 더 살펴보니 30대 여인의 구혼광고가 눈에 띈다. ‘재혼, 가옥 고급 둘, 건실 남 원함.’

1964년 11월 6일 경향신문에 게재된  마릴린 몬로 주연의 영화 '나이아가라' 영화광고. "바스-룸 속에서의 몬로-염자(艶姿)!', 즉 목욕탕 속에서 빛나는 몬로의 농염한 자태를 선전하고 있다. '미성년자 절대관람불가!' 안내문구와 함께 대학생 특별할인으로 전회 55원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재혼을 원하는 이 30대 여인은 ‘고급주택이 2채나 있으며, 건실한 남자를 원한다’는 구혼광고를 낸 것이다. 아마도 숱한 남성들이 이 광고를 보고 도전하지 않았을까. ‘미망인 및 불구자도 가 양복업 박’이라는 알듯 모를 듯한 남성의 구혼광고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만성 임질을 특수 치료한다는 광고와, 요도염 정확치료 광고 등도 보인다. 그러고보니 60~70년대 전봇대에 ‘임질·단소·조루…’와 같은 질병을 치료해준다는 알쏭달쏭한 쪽지광고가 왜 그리 붙어있었는지 모르겠다.
 결혼 답례 찰떡을 대할인해준다는 광고도 흥미롭다. 광고는 ‘청첩장과 택시 한 대를 무료제공한다’는 내용과 함께 ‘찰떡 12개 60원’을 50원에, ‘케키 40원’을 50원에 각각 할인준단다.

 

 ■‘뻐스 차장(車掌)’ 모집
 우연히 들여다본 김에 6~7일 경향신문 광고를 쭉 훑어보았다. 당대의 광고를 보면 그 시대의 사회·생활사를 일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제품 광고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제조업이 발달하지 않은 탓이리라. 금성이 신발매한다는 ‘고성능 골드표 건전지’가 겨우 눈에 띌 뿐이다. 골드표의 특장은 ‘국내 유일의 충격압출가공에 의한 아연관 사용으로 누액이 완전방지되고 방전이 절대 안되며 라디오용으로 특수배합하여 장시간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1964년 당시 TV수상기 대수는 전국적으로 불과 5만대였다. 절대 다수 사람들은 라디오로 세상과 소통했다. 라디오와 전축을 월부판매한다는 광고가 나올 정도였다. 따라서 라디오에 부착하는 건전지는 필수품이었고, 그래서 그나마 건전지 광고가 게재됐던 것 같다. 라디오에 붙은 건전지에서 흘러나와 늘어붙은 누액을 없애는 것이 최신 기술이었으리라.
 광고 가운데 ‘관인 전국자동차차장 양성소’의 ‘합승뻐스 여차장 모집’ 광고를 보라.
 ‘한달교육 수시입학 입학금 없음, 기숙사 완비, 국졸 이상 16~22살까지의 여자, 신체결함 무 한자, 졸업후 자격증, 전원 취직 책임 알선’
 사실 여차장은 배고픈 시절, 동생들은 물론 온 식구들을 먹여살린 ‘우리 누나’였고, ‘언니’였다. 경향신문 1962년 12월 7일자는 ‘인권의 벽지(僻地)를 살핀다’는 제목아래 ‘과로, 천대, 적은 보수에 시달리는 직업’을 소개하면서 ‘뻐스 차장(車掌)’를 으뜸으로 꼽고 있다.
 “서울 시내에 하루 760여 대의 뻐스와 2000여 명의 뻐스 차장이 300만 시민의 다리가 되어주고…. 그러나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하루 16~18시간 근무하는 차장의 나이는 16~20세의 소녀들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성으로서 완성할 시기에 있는 시기에~만원 손님들 속에 붐비며 너무나 값싼 보수를 받으면서….”
 신문은 “이들의 봉급은 월 800~1000원에 불과하다”면서 인권침해 사례의 으뜸 사례로 ‘뻐스차장’을 꼽고 있는 것이다.

한줄짜리 광고. 사람을 찾는 광고에서부터 구혼광고, 가정교사 광고, 성병치료 광고 등 미주알고주알 생활광고가 실렸다. 

 ■무서운 병 결핵을 퇴치하라!
 당시 신문 광고의 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의약품 광고 및 유흥업소 광고와 영화광고였다.
 그 가운데 특히 결핵치료광고가 눈에 띈다. 1964년 4월 8일 경향신문 사설을 보면 결핵은 세계 1위의 으뜸 전염병이었다.
 당시 전세계적으로 1500만명이 결핵으로 신음하고 있고, 해마다 300만 명이 결핵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특히 한국과 같은 후진국의 발병률은 심했다. 우리나라 인구 중 70%가 이미 결핵에 감염됐고, 결핵환자는 그 중 80만명 이상이었으며 사망자도 1년에 4만명에 달했다. 질병별 사망순위에서 단연 1위를 차지했다.
 1964년 11월 6~7일 경향신문 사회면을 보자. 당시 결핵협회 주관으로 40일 동안 극장표에서 1원(이류 이하의 극장)~5원(일류 극장)의 결핵모금기금을 따로 뗐다.
 그런데 아세아·화양·동원·남도·천호 등 30개 극장들이 기금 일부를 가로챘다가 적발됐다. 환자들을 위한 기금을 떼어 먹은 극장들의 ‘만행’도 천인공노할 만하지만 결핵이 얼마나 심각한 질병이었는 지를 웅변해주는 기사이기도 하다. 11월 6~7일자를 보면 결핵약 광고가 눈에 띈다. 

1964년 11월 7일 광고지면. 신파조의 영화광고문구가 이채롭다. 당시 사망률 1위였던 결핵을 퇴치하고자 하는 치료약 광고도 심심찮게 보인다.   

예컨대 결핵약 ‘에속실’ 광고는 ‘결핵약의 카다란 맹점이요, 또한 숙제로 남아있던 내성(耐性)과 독성 문제를 해결했다’고 선전한다. 광고는 ‘에속실이 항균력과 침투력이 뚜렷하기 때문에 치료기간이 훨씬 단축된다’고 했다. ‘메단짓드’라는 결핵약은 ‘다량투여로 치료기간을 단축시켜키면셔 특히 노쇠약자와 소유아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
 당시 어린이에게 가장 큰 고민은 회충·요충·촌충·십이이지장충의 퇴치였다. 신학기만 되면 자기 용변을 학교로 가져가서 검사받아야 했던 고역을 치른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회충이 없는 건강한 어린이’라는 광고문구로 시작되는 ‘아스카린’ 광고는 어린이 5명의 얼굴사진을 배경으로 삼아 다음과 같이 선전한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자꾸 마르는 어린이나 안색이 창백하고 자주 병에 걸리는 허약한 어린이는 회충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스카라는 회충·요충·편충을 동시에 없애주는 구충약입니다.” 

1964년 11월 7~9일 성남극장에서 열리는 '새나라쑈'를 안내하는 광고. 양훈-양석천, 송해-박시명, 김영운-고춘자 콤비와 이미자, 박재란, 최숙자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총출동했다.

 

 
 ■송해·박시명, 양훈·양석천, 김영운·고춘자 콤비에 이미자·박재란….
 11월 6일자 신문에 게재된 ‘새나라쑈’ 광고가 흥미롭다.
 ‘성남극장에서 3일간 열리는 ‘만추(晩秋) 특송(特送) 레파토리’라는 문구가 보인다.
 ‘일류 코메디언 송해, 박시명, 양훈, 양석천, 박재란, 이미자, 최숙자, 김영운, 고춘자…. 여기에 인기절정의 가수 금호동, 천재소녀 (한국측) 박활란·(대만측) 손미령, 김세열 캄보밴드, 박태준과 아리랑 보이스, 銀방울자매….’
 이름만 봐도 눈부신 당대 최고 스타들이 ‘새나라쑈’에 총출동하고 있다. 지금도 현역에서 불꽃을 사르고 있는 송해 MC의 30대 팔팔한 시절이다. 만담가인 김영운·고춘자 콤비, 양훈·양석천 콤비는 물론 이미자·박재란, 은방울 자매 등의 이름도 보이고…. 
 캬바레 광고는 또 왜 그리 많았는지…. 서울역전에서 개관할 예정인 ‘궁원(宮苑) 캬바레’의 개업광고를 보라.
 ‘11월7일 개관, 영업시간 하오 6시부터, 기발행한 초대권 유효. 국내 최초의 완전 분리된 이중무대. 한국 트롬펫왕 이상우와 그 악단, 국내 미희(美姬) 총동원(15인조), 개업축하 특별초빙가수 윤일로. 동반대환영. 땐서 모집.’
 광고 중 지금은 표현할 수 없는 ‘미희’라는 표현이 실소를 자아낸다. 그런 미희가 15인조나 총출동한다니….

'합승버스 여차장'을 모집하는 광고와 복권광고, 국민학교생을 모집하는 광고 등이 실렸다. 고속버스 여차장은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입석버스 여차장은 과로, 천대, 저임금에 시달리는 대표적인 인권침해 직종으로 꼽혔다. 

   ■신파로 일관된 영화광고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의 사랑을 흠뻑 받는 게 바로 영화인 것 같다.
 요즘 1000만 관객을 자랑하는 영화들이 심심찮게 등장하지만,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마땅치 않았던 50~70년대에도 영화는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당시의 영화광고를 보면 마치 변사가 이야기를 풀듯 신파조 일색이다. 60년 전인 1954년 11월 6일 경향신문 영화광고를 보자.
 ‘푸른 베일-넘쳐흐르는 아름다운 청년을 희생하며 애정과 감동의 눈물로 一生을 보내온 一여인의 눈물의 주옥편, 여성 대망의 名篇-수도극장’
 ‘창공에 사랑을 싣고-청춘의 달콤한 낭만을 마음껏 즐기는 앵두색 사랑을 창공에 싣고-동도극장’
 10년 뒤인 1964년 11월 6~7일 영화광고도 변함이 없다. 국제극장에서 상영중이었던 ‘벽오동 심은 뜻은’이라는 영화 광고를 보라.  
 ‘날이 갈수록 인기 충천 백만독자를 울린 연재소설의 감격을 또 한번 스크린을 통하여 양반제도가 빚어낸 비극 ! 그 곳에 꽃핀 淸純하고 哀絶한 사랑! 운명이라고 하기엔 너무 기구한 사연! 激情과 感淚를 금치못할 이조사극의 결정판. 고교생 이상 입장환영. 신영균·최은희·도금봉·허장강·박암·이예춘.’
 명보극장의 ‘아내는 고백한다’라는 영화는 어땠을까.
 ‘냉혹한 남편과 따뜻한 애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인의 종말은?’
 그러면서 광고는 차범석·조경희·하유상 등 전문가들의 평을 구구절절 달아놓고 있다. 여류수필가 조경희씨는 “우리네 결혼생활에 경종을 울려준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는 평을 단다. 대체 어떤 영화이기에 그런 평을 가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출연배우는 김혜정·김석훈·태현실·김동원·감승호·박암 등이었다,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의 문제를 다룬 ‘여러분의 국도극장’에서 상영된 ‘수색대’ 영화광고를 보라.
 ‘전 극장가의 인기는 이 한편에 초집중. 울어야 합니까? 웃어야 합니까? 남북이란 비극 속에 우리의 아들과 형제 그리고 남편들은 이렇게 싸우고 쓰러졌다.’

1954년 11월 6일 광고 지면. 캬라멜 광고와 함께 역시 신파조로 일관된 영화광고가 눈에 띈다.  

 ■‘바스-룸에서의 마릴린 몬로의 농염한 자태’
 외화 역시 다르지 않았다.
 마릴린 몬로가 주연으로 출연한 ‘나이아가라’ 영화(을지극장)의 광고카피를 보라.
 ‘바스-룸 속에서의 몬로의 염자(艶恣), 나이아가라 폭포의 장엄한 경관, 하사웨이 감독 특유의 써스펜스.’
 영화는 그러면서 ‘미성년자 관람 절대불가!’를 외치고 있다. 섹스심볼 마릴린 몬로의 ‘목욕탕(바스-룸) 속에서의 농염한 자태’가 어떻다는 이야기인가. ‘미성년자 절대 관람불가’라는 경고문까지 있으니 더욱 호기심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대학생은 특별할인에 전회 55원이라니….
 을지극장의 ‘흑선(黑船)’은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각계의 찬사 신랄하고도 대담한 연출. 무지와 봉건적인 누습이 인간에게 얼마나 불행하고 인간의 진화를 저해하는 가를 죤 휴스톤 감독이 강조하고 있다, 과연 원제 그래도 일본 막부의 야만적인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묘파한 그의 수법은 신랄하고 대담하다. 일반 70원 조조 대학생 55원.’

1964년 11월의 광고.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고 안색이 창백한 어린이는 회충이 있다는 증거였다. 회충 촌충 편충약 광고와 함께 댄서(땐사)를 모집하는 동시에 개관안내를 알리는 클럽 광고가 이채롭다. 

 ■만 여성이여! 함께 울어다오!
 단성사의 ‘스팔타카스’는 ‘300만의 명화. 국향(菊香), 한상(寒霜)을 꿰뚫고 충천(沖天)하는 화제, 인기! 간장을 애이는 감동의 휴메니티! 당당(堂堂) 구주(九週)도 초성황, 만 여성이여! 함께 울어다오!’라는 카피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 일반 100원, 대학생 사병 80원이란다. 출연배우는 ‘카크 다그라스와 로렌스 오리뷔에, 진 시몬스’라면서….
 그러니까 영화는 늦가을의 국화향기와 서릿발 속에서도 300만 서울 시민 사이에 화제를 뿌리고 있다는 것이다.
 당당 9주이나 초성황을 이루고 있으면서…. 간장을 저미는 감동의 휴머니티를 선사했다니 얼마나 재미있는 영화였을까.
 눈에 띄는 영화는 대한극장의 ‘벤허’다. 광고는 ‘고별 로드쇼!’라는 제목아래 아카데미 11개 부문에서 수상했고, 대형 70미리 영화라는 점을 강조한다. 초중고 45원, 대학생·사병 55원이며. 일반은 70원이라 한다.
 또 하나의 영화는 중앙극장에서 상영된 ‘폴 뉴만’ 주연의 ‘헏(Hud)’이다.
 ‘헏은 패륜아? 현대란 새물결 앞에서 낡은 서부를 부수는 사나이! 불효, 불법, 불륜 일삼는 성난 헏 때문에 파트리시아 닐은 64년도 오스카 여수상을 타고…. 노도같은 인파 밀려 흥행 1위.’ 이런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의 문구를 보면 누구든 영화관으로 직행할 생각이 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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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송시열이 언급한 이 ‘3자’의 속뜻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궤장연 이후 5개월이 지난 1669년(현종 10년) 4월, 그 내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 때 병이 든 현종 임금은 온천으로 요양을 떠나 있었다. 이경석이 이 때 짧은 상소문을 올린다.
 “임금이 병이 나 요양하고 있으면 신하된 도리로서 찾아뵈야 하는데…. 이는 나라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된 일입니다.”(<백헌집>)

이경석이 현종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는 절차를 회첩에 옮기고 당대 석학들이 지어보낸 축하문을 담은 '사궤장연회도첩'(보물 제930호).

 이 때 송시열은 이경석이 '오래 살고 편안했다(壽而康)'는 알쏭달쏭한 3단어를 넣어 축하문을 써주었다. 그러나 이 세단어는 훗날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다. |경기도박물관

   ■'수이강'의 속뜻

 이경석은 임금이 아픈 데도 찾아뵙지 않은 몇몇 신하들을 염두에 두고 상소문을 올린 것이었다. 문제는 판부사였던 송시열도 공교롭게 신병 때문에 시골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송시열은 이경석의 상소가 자신을 거론하는 줄 알고 발끈해서 반박상소를 올렸다.
 “(이경석의 상소가) 곧바로 신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어찌 다른 사람을 지적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신이 삼가 생각해보니 옛날 송나라 손종신(孫從臣) 같은 이는 ‘오래 살고 편안해서(壽而康)’ 한 때 존숭을 받았지만 의리를 알고 기강을 진작시켰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송시열은 그러면서 “바로 제가 그런 사람에게 비난을 받았으니 얼마나 비웃음을 받겠느냐”고 반문했다.(<현종실록> 1669년 4월 14일자) 
 드디어 송시열이 언급한 ‘3자의 은유’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송시열이 언급한 ‘손종신’은 송나라 한림학사 손적(1081~1169)을 가리킨다. 손적은 송나라(북송)가 금나라에게 멸망한 뒤 송나라 황제를 대신해 항복문서를 지어 금나라에 바친 인물이다.
 그런데 항복 문서의 내용이 너무 송나라의 위신을 깎고 오랑캐에 아첨했다고 해서 손가락질의 대상이 됐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손적 그대는 오랑캐 진영에서 너무 아첨했으니 오래 살고 편안했구나(壽而康)”라고 비웃었단다.
 그랬다. 송시열은 바로 이 손적의 고사에서 어떤 이가 말했다는 ‘수이강’의 은유를 끌어 이경석을 비난한 것이다. 이경석이 불가피하게 삼전도비문을 쓴 것은 좋았지만 너무 청나라에게 아첨하는 글이었음을 강력하게 비난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경석이란 인물은 오랑캐에게 아첨한 대가로 ‘오래도록 편히 산(수이강)’ 조선판 손적이 아니냐는 것이다. 

송시열 영정.(국보 239호) 송시열은 이경석이 제아무리 임금의 명에 따라 할 수 없이 삼전도 비문을 지었다고 하지만 지나치게 오랑캐에 아부하는 글을 남긴 것이라 공격했다. 시대가 바뀌어 존명반청의 정책에 따라 북벌론을 계획하던 효종 이래의 시대상황을 반영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송시열이 너무 했다.”
 송시열의 사나운 공격은 당대 사대부 사회에서 엄청난 파장을 불렀다.
 사실 당시 송시열의 지위는 대단했다. 북벌론자인 효종의 신임을 받아 산림과 정계의 영수로서 정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때문에 누구도 쉽게 송시열을 두고 왈가왈부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대체적인 여론은 “송시열이 너무 심했다”는 것이었다. 송시열의 둘도 없는 ‘절친’인 송준길과, 송시열을 스승처럼 섬긴 이단상(1628~1669)조차도 “송시열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송시열은 강경했다. 그는 판서 송규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온 세상이 나를 원수보듯 한다. 심지어 송준길까지 놀랍고 한탄스럽다고 하니 다른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느냐.”
 송시열은 그러면서 이경석을 다시 한 번 후련하게 비난한다.
 “대체로 그 사람(경석)은 향원(鄕愿)의 마음가짐으로 청인(淸人·청나라 사람)의 세력을 끼고서 일생을 행세한다. 만일 경인년의 일이 아니라면 개도 그 똥을 먹지 않을 것이다.”
 ‘향원’이란 별 능력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관리를 뜻한다. ‘경인년’의 일이란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홀로 책임을 지고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된 효종 즉위년(1650년)의 일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능력도 없는 관리(이경석)가 외세(청나라)에 빌붙어 평생 호의호식했다는 것. 그나마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된 일이 없었다면 ‘개도 그의 똥을 먹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러나 이경석은 송시열의 사나운 비난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신의 상소가 송시열을 지목한 것도 아닌데 큰 오해를 한 모양”이라며 “그럼에도 공격을 받은 것은 제가 명확하게 상소내용을 밝히지 못한 탓”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것으로 ‘수이강’ 사건은 봉합되는 듯 했다. 그로부터 32년 뒤(1701년) 이경석은 세상을 떠났고, 송시열은 그 사이 명실상부한 서인의 영수로서 지위를 완전히 굳혔다.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 수락산 자락에 있는 박세당의 고택. 박세당은 이경석의 신도비를 쓰면서 이경석을 '봉황', 송시열을 '올빼미'로 비유함으로써 파문을 일으켰다. |경향신문 자료

 ■이경석은 봉황, 송시열은 올빼미
 그런데 1703년(숙종 29년) 4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또 벌어진다.  
 김창흡(김상헌의 손자)을 시작으로 관학유생 홍계적 등 180명이 소론의 박세당을 공격하는 연명소를 올린 것이다.
 이들은 “박세당이 고 이경석의 신도비문을 찬술하면서 송시열을 ‘올빼미(梟)’로 폄훼하고 이경석을 ‘봉황(鳳)’으로 치켜세웠다”면서 “이는 성인과 정인(송시열)을 엽신여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무슨 말인가. 박세당이 지은 이경석의 신도비문은 송시열을 겨냥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박세당은 우선 <서경>의 “노성(老成)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마라”는 구절과. <맹자>의 “상서(祥瑞)롭지 못한 보복은 어진 사람을 가리는(蔽賢) 것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그러니까 이경석을 ‘노성인(老成人)’으로, 송시열을 그런 노성인을 업신여기고 보복하는 ‘불상인(不祥人)’으로 폄훼한 것이다.
 박세당은 이경석의 인물과 생애를 총괄하는 비명(碑銘)을 이렇게 짓는다.
 “~함부로 거짓말을 하고 멋대로 속이는 것은(恣僞肆誕)/어느 세상에나 이름난 사람이 있는 법(世有聞人)/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梟鳳殊性)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네.(載怒載嗔)/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不善者惡)/군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君子何病).”
 제멋대로 성내고 꾸짖는 것은 올빼미, 즉 송시열이요. 착한 군자는 봉황, 즉 이경석이라는 소리였다.

이경석이 현종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궤장. 일흔살 이상의 명망 높은 노신에게 내리는 최고의 상급이다. |경기도박물관

 ■박세당이 지적하는 속좁은 송시열
 박세당은 송시열이 소인배임을 세가지 사례를 들어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먼저 송시열은 효종이 승하한 뒤 현종의 명으로 영릉(효종능)의 지문(誌文·죽은 자의 행적 등과 무덤의 위치 등을 적은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이 때 송시열은 <시경> ‘비풍(匪風)·하천(下泉)’의 내용을 포함시켰다. ‘비풍·하천’은 예전 주나라(중국)의 태평상대를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송시열은 청나라를 미워하고 옛 종주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에서 이 문구를 포함시킨 것이다. 그런데 현종은 송시열이 완성한 초고를 이경석에서 보이고 자문을 의뢰했다.
 그러자 이경석은 이 ‘비풍·하천’의 내용이 공연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현종도 이 대목에 고개를 끄덕이고, 송시열에게 삭제를 청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그러려면 전체 내용을 다 다시 쓰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현종은 송시열이 하도 고집을 피우자 “그러면 그냥 두라”고 포기해버렸다.
 이 때문에 송시열이 이경석에게 앙심을 품었다는 것이다.
 “공(이경석)이 송준길의 말을 듣고 송시열의 정적인 윤선도의 위리안치를 풀어준 것도 꼽을 수 있다. 또 송시열이 공(이경석)의 집안과 혼사를 청했지만 성사되지 못한 것 등도 있다. 이 때문에 송시열의 노여움과 의심이 쌓인 것이다.”(박세당의 <서계집>)   

   

 ■“송시열은 춘추대의에 따른 것일 뿐”
 송시열의 추종자들은 앙앙불락했다.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은 총공세에 나섰다. 홍계적 등 180명의 연명소에서 “송시열이 이경석을 풍자한 것은 주자와 춘추대의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청나라 오랑캐가 우리를 속국으로 만들었는데, 이경석은 뜻을 다해 찬양했습니다. 반면 송시열은 <춘추>의 대의에 따라 효종대왕(의 북벌론)에게 몸을 바쳤습니다. 주자의 의리를 인용하여 경계(警戒)를 남긴 것입니다.”(<숙종실록> 1703년 4월 17일)
 물론 박세당의 소론 측과 이경석의 손자인 이하성 등도 가만 있지는 않았다.
 이들은 “현종 임금도 이경석을 두고 백관의 모범으로서 상서로운 봉황과 기린이라 칭했다”면서 “이경석을 봉황으로 우러른 이는 박세당이 먼저가 아니라 현종 임금이 먼저”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이 사태는 집권당으로 공론을 주도하던 노론의 완승으로 끝났다. 
 숙종은 결국 노론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숙종은 “박세당이 작성한 이경석 신도문은 물론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까지 수거해서 조목조목 뜯어본 뒤 이를 반박하는 변파문(辨破文)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런 다음 “문제의 저작들을 모두 불구덩이에 쳐넣으라”는 특명까지 내린다. 조선판 분서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신이 이경석이었다면…
 이쯤해서 헛된 질문을 해본다.
 이경석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것인가. 1703년(숙종 29년) 이경석의 손자 이하성이 할아버지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자 실록을 쓴 사관은 이렇게 논평했다.
 “이경석이 비문을 지은 것은 마지못해 한 일이다. 그러나 뜻을 다해 포장해서 오랑캐의 공덕을 칭송하고…. 어찌 만세의 청의(請議·깨끗한 언론)에 죄를 얻지 않겠는가. 이것은 이경석에게 일생의 오점이 되었다.”(<숙종실록> 1703년 5월 21일)
 나라를 위해 억지로 햇다지만 너무 청나라에 과공비례(過恭非禮)했다는 것이다. 좀 적당히 하지 그랬냐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경석의 한탄이 들리는 듯 하다. “그런 어쩌란 말이냐”는…. 임금이 ‘나라의 존망이 그대에게 달려 있다’고 신신당부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경석은 누구처럼 칭병을 해서라도, 또 누구처럼 일부러 엉망으로 글을 지어서라도 피했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지금 이 순간까지 따라붙고 있는 삼전도비문의 저자라는 오명에서 자유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다. 이경석이 아니더라도 어느 누가 악역을 담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 또한 이경석처럼 오점을 남겼을 터이고….
 그러다면 이경석을 죽일 듯 비난한 송시열은 승자인가. 아니었다. 그에게 쏠리는 시선도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송시열이 이경석을 비난하는 기사를 기록할 때마다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싫으면 쓰지 않으면 될 것을 굳이 쓰면서 손적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이름도 쓰지 않고 ‘수이강’이라고만 써서 기롱 폄하했으니…. 이 또한 정인길사(正人吉士·마음이 바르고 올곶은 선비)의 마음 씀씀이겠는가.”(<현종실록> 1668년 11월 27일)      
 “송시열이 너무 각박하게 (이경석을) 배척하니 논자들이 병처럼 여겼다.”(<현종실록> 1669년 4월14일)
 결과적으로 ‘삼전도 비문’을 둘러싼 논쟁은 모두가 패배자인 상처 뿐인 전쟁으로 끝난 것이다. 일부 후세의 학자들은 이렇게 포장한다.
 삼전도비문을 둘러싼 시비를 매우 심오하게 보는 측면도 있다는 것. 즉 개인적인 싸움이라기 보다는 병자호란 이후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사회질서를 반영하는 이념투쟁이라는 것.
 굴욕적인 강화를 맺어야 했던 인조 시대를 지나, 존명반청 정책에 북벌론까지 대두되는 효종 시대를 지나면서 사회분위기가 매우 바뀌었다는 것.
 삼전도 비문 논쟁은 그 와중에서 벌어진 정론대립이었다는 것. 따라서 이경석과 송시열, 두 사람 모두 탓할 수 없다는 것. 뭐 이런 평가다. 과연 그런 심오한 뜻이 있었던 것인가.

 (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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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용단(항복 결정)을 내렸다니 다행이구나.”(청 태종)
 “천은이 망극하옵니다.”(인조)
 1637년(인조 15년) 1월 30일이었다.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의식이 삼전도에서 펼쳐졌다. ‘청나라 오랑캐’ 앞에 임금이라는 사람이 치러야 했던 항복의식이었다.
 이날의 굴욕을 전하는 <인조실록> <연려실기술> 등을 보라. 문자 그대로 목불인견이다.
 “왕(인조)은 용포를 벗어 청색옷(靑衣)으로 갈아입고 백마를 탄 뒤 남한산성 서문으로 나왔다. 왕세자가 따랐다. 성 안에서 통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의’는 신분이 낮은 사람을 뜻한다. 5호16국의 하나인 한나라 황제에 오른 유총(劉聰·?~318)이 진(晋) 회제(287~313)에게 청의를 입히고 술잔을 돌리게 했다는 이른바 ‘청의행주(靑衣行酒)’의 고사에서 유래됐다. 그랬다. 인조도 이제 청태종의 포로가 되었으니 용포를 벗고 청의를 입어야 했고, 죄를 지었으니 청색 옷을 입고 정문(남문)으로 나올 수 없었으며, 항복을 뜻하는 백마를 타야 했던 것이다. 굴욕은 시작에 불과했다.

병자호란 패배의 치욕은 '삼전도의 굴욕' 으로 끝나지 않았다. 청나라는 '청태종 승첩비'를 삼전도에 세우라고 조선을 핍박했다. |경향신문 자료  

■“임금님!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황제(청 태종)은 남면(南面·황제는 남쪽을 향해 앉았다) 했다. 상(인조)은 단(壇) 아래 북쪽을 향해 자리를 잡은 뒤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했다.”
 이것이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라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항복의식이었다. 오랑캐 나라의 추장에 ‘불과하다’는 자에게 이 무슨 굴욕이라는 말인가. 사실 청나라는 삼배구고두보다 더 지독한 의식을 요구했던 것 같다. 항복하기 이틀 전인 1637년 1월 28일 청나라 장군 용골대가 전한 청 태종의 천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몸을 결박하고 관(棺)을 끌고 나오는 등의 허다한 절목은 지금 모두 없애겠소.”
 예전에 진(秦)나라의 마지막 황제(자영·子영)가 노끈을 목에 걸고 백마가 끄는 흰 수레를 탄채 유방(한 고조)에게 항복한 적이 있다. 곧 패자이니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는 항복의 예였다. 청나라는 마지막 순간에 더 지독한 항복의식을 감해주었던 것이다. 
 굴욕은 이어졌다. 항복의식이 끝나고 술잔을 돌린 청태종은 고기를 베어 개(犬)에게 던져주었다. 마치 항복한 조선(개)에게 은전(고기)을 베푸는 꼴이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진다.
 항복의식을 끝낸 끝나고 인조가 소파진에서 한강을 건너려 할 때였다. 진을 지키던 군졸들은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 남아 있었다. <인조실록>을 보라.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 당겼다. 임금이 겨우 배를 타고 건넜다. 그러자 청나라군에게 인질로 잡혀 갈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울부짖었다. ‘우리 임금이시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吾君吾君 捨我以去乎)’”
 <인조실록>은 덧붙였다. “그렇게 길을 끼고 울부짖는 자가 1만명을 헤아렸다”고….

청나라 병사들을 그린 <호병도(胡兵圖)>. 조선후기 화가 김윤겸이 그렸다.|국립중앙박물관 

 ■광해군의 절규
 신하라는 자들은 제 한 목숨 구하려 어의까지 잡아당기고, 임금이라는 사람은 백성을 버리고, 버림받은 백성들은 ‘임금님! 임금님! 어찌 우리를 버리시느냐’고 울부짖고….  
 후대의 사가들은 그 때의 항복의식을 두고 ‘삼전도의 굴욕사건’이라 표현했다.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은 치욕의 그 날을….
 하지만 달리보자. 임금이 오랑캐에게 당했다는 그 굴욕이라는 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임금이라는 사람이 자기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버린 그 형언할 수 없는 무능을 탓해야지…. 새삼 광해군의 한탄(1621년)이 떠오른다.
 “요즘 조선의 인심을 살펴보면 밖으로 큰소리만 일삼고 있다. 우린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당시 광해군은 신흥강국 후금(훗날 청나라)을 무시하고 다 쓰러져가던 명나라 편에 서서 ‘대의명분’ 운운하며 큰소리치던 조정의 공론에 ‘한심하다’는 듯 장탄식했다.
 광해군은 “제발 (서희가 이룩한) 고려의 외교를 닮으라”고 했다.
 “이럴 때(명청 교체기), 고려처럼 안으로 힘을 쌓고,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쓴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한심하다. 겉으로는 결전을 벌이자면서 막상 서쪽 변경에 가라면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 두려워 한다. 이 또한 고려와 견주면 너무도 미치지 못한다.”(<광해군일기>)
 그러나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 절묘한 등거리 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은 불과 2년 뒤 쫓겨나고 말았다. 그 후 정묘호란(1627년) 때 맺은 ‘형제의 맹약’도 모자라, 병자호란(1636년)으로 ‘군신의 맹약’을 맺고 죄없는 백성들만 도탄에 빠진다.

 

 ■“청태종 승첩비를 빨리 세우라!” 
 이제와서 지나간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는가. 다만 못난 임금, 못난 신하들을 둔 백성들만 불쌍한 것이다.
 그 날(1637년 1월 30일) 이후 청나라로 끌려간 인질은 60만 명에 달한다는 통계가 있다.(정약용의 <비어고(備禦考)>) 그 안에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훗날 효종) 부부도 있었다. 
 “오랑캐의 포로가 된 자가 반이 넘고 각 진영 안에는 여자들이 무수했다. 이들이 발버둥치며 울부짖으니 청나라군이 채찍으로 휘두르며 몰아갔다.”(<연려실기술>)
 “사대부의 아내나 첩, 처녀들은 차마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람을 보면 더러 옷으로 머리를 덮었다.”(<비어고>)
 비참한 일이었다. 문제는 한번 무릎을 꿇었으니 그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군신(君臣)의 맹약’을 맺었으니 ‘군(君)’인 청나라가 ‘신(臣)’인 조선을 계속 핍박한 것이다.
 그러던 1637년(인조 15년) 6월 26일, 청나라는 “인조가 삼배구고두의 예를 치른 삼전도의 단(壇)을 단장하라”고 요구한다.
 다시 그 후 5개월이 지난 11월, “조선은 삼전도의 단에 그 날(1637년 1월30일)을 기리는 승첩비를 세우라”고 강권한다. 그런데 문제는 비석에 새길 비문이었다. 청나라가 “빨리 비문을 지어 보내라”고 앙앙불락했다. <인조실록>과 <연려실기술> 등을 토대로 당시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청나라의 재촉이 심해지자 마음이 다급해진 인조가 몇 명의 대신들을 급히 부른다. 신풍부원군 장유(張維)와 제학 이경석(李景奭 1595~1671), 전 부사 조희일(趙希逸)과 이경전(李慶全) 등이었다.
 “여러분들이 수고 좀 해야겠네. 매우 급하네. 하룻밤 사이에 비문을 완성해야겠네.”

삼전도 비 옆에 새겨놓은 인조의 항복장면. 인조는 청태종 앞에서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겪었다.

 ■“나는 적임자가 아니옵니다.”
 불려온 사람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곤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장유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상소를 올려 사양했다. 임금이 ‘당신들이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서겠느냐’고 했다. 할 수 없이 병에 걸렸다는 이경전을 제외한 세 사람이 글을 바쳤다.”(<인조실록> 1637년 11월 25일)
 한번 비문에 글을 새기면 그것은 청사에 길이 남을 오점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경전은 ‘칭병(稱病)’으로 위기를 넘긴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비문을 써낸 세 사람 가운데서도 조희일은 꾀를 부렸다. 일부러 글을 거칠게 써서 올린 것이다. 인조는 이경석과 장유 등 두 사람의 비문을 청나라에 보냈다.
 명나라 관리 출신으로 청나라에 투항한 범문정(范文程)이 두 사람의 비문을 검토했다. 범문정은 우선 장유의 글에서 트집을 잡았다.
 즉 장유의 글 가운데 ‘정백(鄭伯)이 양(羊)을 몰고 초나라 왕을 맞이했다’는 대목을 문제삼은 것이다. 
 ‘정백의 고사’가 무엇인가.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군주가 정나라를 정벌했을 때 정백이 항복했는데, 그 때 죄인의 차림으로 양을 몰고 초나라 왕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장유는 인조(정백)가 청태종(초왕)에게 항복한 사실을 ‘정백의 고사’로 표현한 것이다. 범문정은 바로 이 대목을 문제 삼았다.
 “초나라 왕도 제후이고 정나라 왕도 제후다. 초나라왕이 천자국(춘추전국시대 때 주나라)이 아니지 않느냐. 천자국인 청나라가 제후국인 조선을 정벌했는데, 어찌 제후국끼리의 고사를 인용했는가.”
 이경석의 비문도 100점짜리는 아니었다. 범문정은 “(이경석의 글이) 매우 소략하고 전혀 포장하지 않았다”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는 “이경석의 비문을 조선 조정이 알아서 고쳐서 채택하라”는 이른바 ‘조건부 합격’의 처분을 내린다.
 
 ■“지금은 청나라 뜻대로 할 때….”
 “조선이 알아서 고치라”는 청나라의 지시는 다시 인조를 ‘멘붕’으로 빠뜨렸다. 청나라가 고쳐오면 쉬울 일인데, ‘알아서 기어라’라고 하니 더 헷갈린 것이다.
 사실 이경석이 어쩔 수 없이 비문을 쓰게 된 이유가 있었다. 삼전도 비문 같은 나라의 운명과 관계된 중차대한 문장이라면 당연히 ‘예문관 대제학(정 2품)’이 맡아야 했다.
 예문관이라는 관청이 국왕의 명이나 말을 대신 글로 짓는 일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대제학 자리가 공석이었다. 이경석은 마침 예문관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제학(종 2품)이었다. 운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총대를 맬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인조는 이경석을 따로 불러 신신당부했다. 훗날(1703년·숙종 9년) 이경석의 손자인 이하성이 할아버지의 과거행적을 변호하려고 올린 상소문을 토대로 당시의 상황을 복기해보자.
 “저(청나라 사람)들이 비문으로 조선을 시험하려 드네. 나라의 존망이 달려있네. 월나라 구천(句踐)이 회계산의 치욕을 겪었지만 결국 오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았던가. 지금은 후일을 도모할 때…. 오늘은 저들의 말대로 하세.”(인조)
 인조가 언급한 구천은 오나라 부차와 함께 ‘오월동주’와 ‘와신상담’ 등의 고사로 유명한 춘추시대 월나라 군주이다. 오나라 부차의 반격에 완패한 구천은 회계산에서 군신의 예를 치르는 굴욕을 감내한 뒤 스스로 힘을 키워 마침내 오나라를 멸했다. 인조는 “지금은 구천이 그랬듯 조선이 힘을 키울 때이니 청나라의 말대로 하자”는 것이었다.
 이경석도 임금이 그렇게까지 부탁하는 데야 어쩔 수 없었다.
 “군주의 욕됨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이 한 몸 돌아볼 수 없습니다. 꾹 참고 명을 받들겠나이다.”

중국 선양에 있는 청 태종의 무덤. 청태종은 조선의 전통적인 방어전술인 청야술을 피해 쏜살같이 한양을 직공했다. 인조 임금은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했다.

 

 ■“황제의 음덕으로 조선이 살았습니다.”
 삼전도의 비문은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 완성됐다.
 글씨는 서예로 명성을 얻고 있던 오준이, 전자(篆字)로 된 제액(‘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은 여이징이 썼다. 특이한 것은 비석 왼쪽에 몽골 문자, 오른쪽에 만주 문자를 새겨넣었다는 것이다. 3개 국어로? 이경석으로서는 빼도박도 못하는 ‘확인사살’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경석이 완성한 1009자 비문의 대강을 보자.
 “우리나라가 상국(청나라)에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됐다.~그런데 우리나라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몰랐다.~ 온 국토가 다 망했다가 다시 보존되었고, 종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 동토 수천 리가 모두 다시 살려주는 은택을 받게 됐다. 이는 옛 책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바이니, 아 성대하도다!”
 비문의 끝에는 4구자 46구절의 명(銘)으로 이뤄져있다.
 “처음에 (조선이) 미욱하여 스스로 재앙을 불러 왔는데~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귀순하니~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했다. 황제께서 온화한 낯으로 웃으면서 창과 방패를 거두셨다.~모든 사람들이 노래하고 칭송했다. 우리 임금이 돌아오게 된 것은 황제의 은혜 덕분이며, 황제께서는 우리 백성을 살리시려고 군사를 돌리셨다.”
 비명은 이어 “(황제 덕분에) 국토가 예전처럼 다시 보전됐다”면서 “만년토록 황제의 덕이 조선에 빛날 것”이라 치켜세웠다.
 청나라는 이경석이 고쳐 올린 비문에 ‘합격판정’을 내렸다.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 사신 마부대는 전체비문에 주홍색 칠을, ‘황제’ 등 특별한 글씨에는 금칠을 하도록 했다.
 비석은 1638년 12월 8일 인부 500명이 동원된 가운데 정식으로 건립됐다. 이경석은 비문을 고친 뒤 “문자를 배운 것을 후회한다”고 한탄했다고 한다.(박세당의 <서계집>)

 

 ■“글 배운게 한탄스럽습니다.”
 ‘굴욕의 이벤트’는 이경석 등이 희생양이 되어 이렇게 종지부를 찍는 듯 했다.
 그 후 이경석은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척화파 인물들의 구명운동을 벌이는 등 나름대로 분주히 움직였다. 1650년(효종 1년), 주목할만한 사건이 터졌다.
 청나라가 막 즉위한 효종의 북벌 계획을 눈치챈 것이다. “새 임금(효종)이 옛 신하들을 내치고 군사를 일으켜 오랑캐를 치려 한다”는 소문이 청나라에 퍼졌다.
 이 소문을 들은 청나라가 앙앙불락하며 신속하게 움직였다. “진상 파악을 해야한다”며 사신 6명을 잇달아 파견했다.
 효종과 조선 조정은 패닉에 빠졌다. 온갖 흉흉한 소문이 퍼졌다. “만약 청나라가 다시 군사를 일으키면 임금(효종)은 머리가 깎이는 치욕을 면키 어렵다”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이 소문을 들은 효종은 사시나무 떨 듯 하면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 영의정 이경석이 나섰다. 과연 효종을 겨냥한 청나라 사신들의 추궁은 집요하고 매서웠다.
 그러나 이경석은 “모두 나의 과실이고 우리 임금님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다른 신하에게 불똥이 떨어질 때도 “내가 수상이니 미진한 것은 모두 나의 책임이다”라고 둘러댔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청나라 사신은 “영상(이경석) 만 남고 다 물러가라”고 호통친 뒤 “네가 지금 대국을 속이고 있으니 죄를 어찌할 것이냐”며 이경석을 추궁했다.
 밖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곧 큰 일을 당하겠다”고 걱정하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이경석의 집안 식구들도 흉구(凶具·죽은 사람을 초상 치르는 기구)를 가져와 대기시킬 정도였으니…. 그러나 이경석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모두 내 책임”이라고 일일이 응대했다.
 그러자 청나라 사신들도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서로 “동국(조선)에는 오직 이 정승 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며 감탄했다.(박세당의 <서계집>)
 결국 이경석은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 그는 백마산성(평북 의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유배 중에 가시 울타리 안에 가두는 형벌)됐다. 그는 다시 영불서용(永不敍用), 즉 ‘영원히 관직에 나가지 못한다’는 중벌까지 받는다. 이경석은 3년 뒤인 1653년(효종 4년)이 돼서야 사면을 받아 영중추부사로 임명된다.
 삼전도 비문을 쓰고 “글을 배운게 한탄스럽다”고 괴로움을 토로했던 이경석…. 그러나 이후의 ‘강직·소신 행보’로 어쩔 수 없이 묻혀야 했던 오점을 벗는 듯했다.

 

 ■3단어 속에 숨겨진 무시무시한 가시
 그런데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668년(현종 9년), 현종은 74살이 된 이경석에게 궤장(궤仗)을 하사했다.
 궤장이란 임금이 나라에 공이 많은 70세 이상의 늙은 대신에게 하사하던 궤(궤·몸 받침대)와 지팡이(仗)를 이르는 말이다. 이경석으로서는 선조 때의 명상인 이원익에 이어 실로 반세기 만에 궤장을 받은 것이니 가문의 영광이었다.(<현종실록> 1668년 11월 27일)
 이경석은 이같은 영예를 나누기 위해 조정의 모든 공경대부를 초청, 이른바 궤장연을 베풀었다. 궤장연에는 서로 시문(詩文)으로 수상자의 공적을 기리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유림의 영수로 명망을 얻고 있던 송시열도 궤장연의 서문을 지어 이경석의 행적을 기렸다.
 “나라의 존망이 판가름 났을 때(병자호란) 영리한 자들은 팔짱을 끼고 물러섰지만~오직 공(이경석)만은 홀로 생사를 돌보지 않고~ 나라가 무사하게 되었다.~ 공은 하늘의 보우를 받아 ‘오래 살고 편안했다.(壽而康)’”
 송시열은 이경석의 공적을 극찬함으로써 궤장을 하사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주례사 풍의 논평’이었다.
 이경석도 송시열의 '수이강(壽而康)'이라는 ‘3자의 은유’가 무슨 뜻인지 알 턱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송시열을 임금에게 여러 차례 천거한 이가 바로 이경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경석은 인조 때부터 효종·현종·숙종 연간에 송시열을 비롯해 송준길과 김집 등을 천거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경석은 특히 효종이 즉위하자 “송시열을 불러 나랏일을 맡겨야 한다”고 청했고, 송시열이 혹 사퇴한다고 하면 “반드시 만류해야 한다”고 간청했다고 한다.(<연려실기술> ‘현종조고사본말’)
 그런 탓일까. 송시열과 송준길은 서울에 올라올 때면 베옷과 짚신의 초라한 차림으로 이경석의 집을 찾아왔다고 한다.(<연려실기술> 등)
 그랬으니 이경석이 송시열의 글을 의심할 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송시열이 마지막에 표현한 ‘수이강’, 즉 ‘오래 살고 편안했다’는 세 단어에 무시무시한 가시가 돋혀있을 줄이야.(계속)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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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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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1921년 9월, 경주 봉황대 바로 아래서 운영하던 박문환의 주막집은 장사가 무척 잘됐다.
 사세확장’을 해야 했다. 그는 주막을 늘리기로 하고 뒤뜰의 조그마한 언덕을 파기 시작했다. 그런데 9월 23일 이상한 유물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소문이 삽시간에 경주 전역에 퍼졌다. 당시 경찰서 순경(미야케 요산·三宅與三)이 이 풍문을 듣고 곧바로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나섰다.
 노서리 일대를 순시 중이던 미야케의 눈에 심상찮은 장면이 목격됐다.
 어린아이 3~4명이 매립된 흙 속을 열시히 찾고 있는 것이었다. 가까이 가보니 아이들의 손에 청색 유리옥들이 들려 있었다.   

1926년 10월10일 서봉총 발굴 현장에 온 구스타프 스웨덴 황태자 부처가 노출된 황금유물들을 쳐다보고 있다. 황태자는 이날 황금허리띠와 황금관을 수습했다. 

 ■“임금님의 무덤을 파다니…”
 미야케는 곧 주막집 뒷마당으로 뛰어들어갔다. 현장은 어수선했다. 미야케는 경주경찰서장(이와미 하시미쓰·岩見久光)에게 “심상치않다”면서 “빨리 전문가들을 보내달라”고 긴급 보고했다. 이미 공사현장에서 청동 및 금제품과 유리옥 등 유물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미야케의 보고는 경주에 있던 총독부박물관 촉탁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를 통해 본부(총독부박물관)에 긴급보고했다. ‘고적전문가’를 긴급파견해달라는 보고였다. 하지만 전문가 파견이 늦어졌다.
 세키노 다다시(關野貞)·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등 당대의 전문가들 모두 가야 패총의 시굴조사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문가를 기다리는 동안 현장은 물론 경주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인부가 유리옥을 양동이에 가득 담아 운반하다가 적발됐고, 순사들은 멋대로 토기를 발굴하고….
 “황금이 나왔다”는 인부의 고함에 현장에 모여들던 구경꾼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또한 ‘일본인들이 신라왕릉을 판다’는 소문이 인근마을까지 삽시간에 퍼졌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모로가 히데오 등 현장 실무자들이 긴급유물수습에 나섰다. 전문가를 마냥 기다릴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경주의 분위기는 흉흉해졌다.
 때 마침 경주 날씨가 황사 때문에 침침해졌는데, “일본인들이 국왕의 무덤을 파서 하늘이 어두워졌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들려왔다.
 “금관총 유물 발굴 3일째. 황사 때문에 자욱하듯이 날씨는 매일 침침했다. 유언비어가 나왔다. ‘저것은 국왕의 묘다. 그것을 일본인이 팠기에 하늘이 어두워졌다!’ 시중에는 뭔지 모르는 일종의 살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때 현곡면에 사는 70대 노파가 발굴장 한복판까지 들어와 털썩 주저앉아 절규했다. ‘임금님의 무덤을 파는 것이 웬말이냐!’”(오사카 로쿠손의 <취미의 경주>, 1939년)

 

 

금관총과 서봉총이 확인된 경주 노서동 노동동 일대. 일본학계는 금관총에서 황금유물들이 쏟아지자 '우리 영토(일본) 안에서 이같은 찬란한 유물이 나왔다'고 자랑했다.   

 ■“일본 영토에서 발견된 금관?”
 그렇게 4일 만에 수습발굴이 끝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유구와 유물의 출토상태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다. 고고학 발굴사에서 천추의 한을 남긴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수습된 유물들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신라금관이 사상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팔찌와 관모, 귀고리,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 등 온갖 황금제품들이 그득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사상 처음으로 금관이 나온 이 무덤을 ‘금관총’이라 이름 붙였다.
 일제는 “금관총 유물은 ‘일본 영토’ 안에서 처음 발견된 자랑스러운 발굴유물”이라 떠들었다.(<경주 금관총 보고서>)
 조선을 ‘우리(일본) 영토’라 한 것이다. 속이 쓰리지만 어쩌랴. 당시 일제강점기였는데…. 

9개월만에 폭로된 '금관의 파문'사건(1936년 6월29일 부산일보). 당시 고이즈미 평앙박물관장이 서봉총 황금유물 특별전이 끝난 뒤 개최한 연회에서 평양 기생 차릉파에게 신라금관을 씌우고 희롱하는 희대의 사건이 9개말만에 폭로됐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부터 금관의 출토가 이어졌다.
 금관총 발굴 후 3년 뒤인 1924년, 역시 봉황대 아래의 민가 사이에 있는 무덤을 조사해 두 번째의 신라금관이 발견됐다.
 이것이 바로 금령총(金鈴塚) 금관이다. 이 무덤 역시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금관에 매달려있는 독특한 한 쌍의 금방울을 보고 이름을 금령총이라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2년 뒤 봉황대 서편으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무덤에서 세번째 금관이 확인됐다. 이 고분의 발굴사는 두고두고 화제를 뿌렸다.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 부부가 직접 발굴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웨덴의 한문명칭(서전·瑞典)의 서(瑞)와 봉황의 봉(鳳)을 따서 ‘서봉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연인즉은 이렇다. 1926년 5월 대구~경주~울산을 경유, 부산에 이르는 협궤철로를 광궤철로로 개수할 예정이었다.
 경주역에는 기관차 차고를 함께 짓기로 했다. 총독부는 바로 이 고추밭의 흙을 파내 기관차 차고를 짓는데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공사 도중에 신라고분이 발견됐다. 그러자 총독부 촉탁으로 근무 중이던 문제의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현지로 급파됐다.

 

 ■스웨덴 황태자의 발굴 이벤트
 발굴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10월, 마침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재위 1950~73) 부부가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이 때 일본은 황태자가 고고학자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마침 조선반도의 경주라는 곳에서 한창 발굴중인데 한번 가보심이 어떠신지요.”
 44살의 고고학자 황태자는 반색했다. “빨리 가보자”고 했다.
 드디어 1926년 10월 10일, 구스타프 황태자를 위한 발굴 이벤트가 펼쳐졌다.
 사실 이미 발굴단에서는 황금유물을 확인하고는 반쯤 노출시켜 놓은 상태였다. 황금관 수습의 영광을 스웨덴의 황태자에게 선물하고자 한 것이다.
 황태자가 능수능란, 발굴현장에 뛰어 들었다. 탄성이 터졌다.
 관 안에 흩어져있던 금관과 금장신구, 각종 구슬류가 햇빛의 직사광선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 것이다. 황태자 부처는 한쪽 무릎을 꿇고 피장자의 혼령에게 정중한 서양풍의 경의를 표했다.
 “전하, 이 요패(腰牌·황금 허리띠)만큼은 전하께서 발굴하시도록 남겨놓았습니다.”
 발굴자의 말이 떨어지자 고고학자의 끼가 발동한 황태자는 즉시 상의를 벗고 발굴에 나섰다. 고고학자다운 신중한 발굴은 1시간이나 걸렸다.
 “오! 얼마나 경이로운가!”
 금제곡옥이 달린 요패가 모습을 드러내자 황태자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다음 황태자를 감동시킨 마지막 한마디….
 “전하께서 이 금관을 수습해주시옵소서.”
 황금관까지? 황태자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금관을 들어올린 뒤 나무상자에 넣었다. 1500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신라금관은 이렇게 북유럽 황태자의 손으로 부활된 것이다. 

 금관총 유물전시관 전경. 금관 등 금제유물의 가치가 워낙 높았던 터라 금관의 복제품이 도난되고 금제유물 진품이 사라지는 등 수난을 겪었다.    

 ■개 목걸이도 황금이었던 신라
 이후 금관의 출토는 계속 이어졌다.
 금관총·금령총·서봉총에 이어 천마총·황남대총 북분 등 출토지과 확실한 금관 5점이 확인된 것이다. 그 뿐이 아니라 출토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경주 교동에서 도굴되어 압수된 교동금관, 가야금관으로 알려진 호암 미술관 소장 금관, 그리고 도쿄미술관에 소장된 도굴품(오쿠라 컬렉션) 등 3점을 포함하면 모두 8점이 남아있다.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금관은 모두 합해 10여 점인데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이 8할이나 되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본의 진(津)을 향하고 있는 나라(신라)가 있으니 눈부신 금은채색이 그 나라에 많다.”(일본서기 권8 중애기·仲哀紀)
 12세기 때 아랍의 알 이드리시가 쓴 <천애횡단갈망자(天涯橫斷渴望者)의 산책>이란 책의 내용이다.
 8~9세기 견문록을 모아놓은 이 책에는 “신라에는 금이 너무 흔해서 개(犬)의 목걸이도 금”이라고 표현돼 있다.
 개목걸이도 금이었으니 신라는 가히 ‘황금의 나라’였던 것이다. 신라인들의 금사랑은 이토록 유별났던 것 같다. 금귀고리 하나만 보더라도 고구려의 경우 지금까지 불과 20여점, 백제는 40여점이 각각 출토됐을 뿐인데 신라는 무려 700여 점에 달할 정도다.
 특히나 금관은 우리나라 고대 유물 가운데 단연 눈을 끄는 유물로 꼽힌다. 세계에 내놓아도 아무런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게 만드는, 독특한 형태의 금관이기 때문이다. 출토된 신라 금관은 특히 마립간 시대, 즉 눌지마립간~지증마립간(417~503년)에 집중 출토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서봉총 유물을 수습하고 있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 고고학자였던 구스타프는 일본 방문 중 서봉총의 발굴소식을 듣고 서봉총 발굴에 참여했다. 일제는 황태자의 불굴을 위해 이미 노출돼있던 황금유물을 그대로 둔채 황태자를 기다렸다.

 ■감쪽같이 사라진 금관총 유물들
 그런데 홍안박명(紅顔薄命)’이라 했던가.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금관의 팔자는 유난히 셌다.
 사상 최초로 확인된 금관총 금관을 보라. 1927년 12월 10일 밤, 경주박물관에 진열돼있던 금관총 유물들이 사라져버렸다.
 범인은 진열실의 자물쇠를 부수고 금제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 귀고리, 반지 등 90여점의 황금유물들을 털었다. 다행히 유리를 깨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상하개쇄식 진열장에 놓여있던 금관은 손대지 못했다. 소식을 들은 경주시민들은 경악했다. 시민들은 도난품의 발견을 기원하며 눈물어린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범인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경주 읍내에서 조곰이라도 정당히 보이지 안는 사람은 거의 전부를 모조리 한번식 취됴(취조)하여 오히려 수색이 턱업시 가혹한데, 일반의 비난까지 바다가며(받아가며) 계속하야 왔으나 도적의 그림자조차 구경하지 못하야….”(<동아일보> 1928년 1월 19일)
 경찰은 ‘가혹수사’라는 비난을 들어가며 경주읍내를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경찰과 박물관 측은 궁여지책의 선전전을 펼쳤다.
 즉 ‘천년이 넘는 금세공품은 요즘의 금과 성분이 달라 녹이면 금방 눈치챈다’는 둥, ‘무덤에서 나온 물건을 갖고 있으면 집안에 변고가 생긴다’는 둥…. 범인찾기에 현상금 1000원이 걸렸다. 범인의 행방은 그래도 묘연했다. 그렇게 6개월이 훌쩍 지난 1928년 5월21일 꿈 같은 반전이 벌어졌다.
 인분을 처리하던 노인이 경주경찰서장의 관사를 지나다가 갱지에 싸인 물체를 발견했는데, 그 안에 도난 당한 금제품들이 들어있었다.
 순금제 반지와 순금 장식 몇 점을 빼고는 모두 회수된 것이다. 물론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경찰과 박물관측의 선전전 때문에 두려워한 범인이 순금 제품을 어찌 처리할 줄 모르다가 그냥 돌려준 것이 분명했다. 
 금관총의 수난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1956년 3월7일, 경주박물관에 진열중이던 금관총 금관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박물관 수위가 금관고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외출한 사이 금관을 들고 유유히 사라진 것이다.
 엄청난 사건이었다. 1927년 도난 때는 그래도 금관 만은 훔치지 못했는데…. 그러나 진열중인 금관이 모조품이었던 것이 불행중 다행이었다.
 ‘도난금관은 모조품’이라는 기사를 접한 범인으로서는 청천벽력이었으리라. 범인은 경주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언론보도에 보고 발길을 돌렸다.
 그는 경주 시외의 서천(西川) 모래 밭을 깊숙히 판 뒤 모조금관을 파묻고 말았다. 훗날 범거된 범인의 진술에 따라 경찰은 서천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모조금관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신라 금관중 가장 먼저 확인된 금관총 금관. 전세계적으로 현존하는 금관은 10여 점인데 우리나라에만 8점이 있다. 그 가운데 5~6점은 신라금관이다. 신라는 예로부터 황금의 나라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금관을 기생의 머리 위에
 그러나 지금까지 가장 인구에 회자되는 수난사는 따로 있다.
 1936년 6월29일자 부산일보 기사를 보라. 기사 사진을 보면 신라왕관(서봉총 왕관)을 쓴 여인이 등장한다. 기사 제목을 보면 소스라치게 놀란다.
 ‘금관의 파문, 박물관의 실태(失態)? 국보를 기생의 완롱(玩弄)물로’.
 무슨 사건인가.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은 1935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평양박물관은 제1회 고적애호일을 기념하는 특별전을 열었다.
 경성박물관로부터 대여받은 금관은 물론 금제귀고리와 허리띠, 목걸이 등 서봉총 출토 금제유물들을 전시했다.
 당시 평양박물관장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였다. 서봉총 발굴에서 참여한 인물이었다. 보물급 유물이었으므로 전시는 삼엄한 경계 속에 이뤄졌다.
 그런데 사건은 전시회를 끝내고 예정된 유물반환일을 하루 앞둔 9월10일 터졌다. 박물관측은 성공적인 전시회를 자축한다는 명목으로 축하연회를 열었다. 평양의 각급 기관장들이 다 모인 자리에 유명한 기생들도 총출동했다. 기생들과의 술자리가 질펀해지고 취흥(醉興)이 도도(滔滔)해졌다. 술기운에 이성을 잃어갔다. 그 때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탈행위가 벌어졌다.
 그만 차릉파(車綾波)라는 기생의 머리에 금관을 씌운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금제 허리띠와 금귀고리, 금목걸이까지 차릉파의 몸에 휘감았다. 그러면서 금관을 쓴 차릉파의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신라 56대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친 것이 935년이니까…. 그리고 평양기생 차릉파가 금관을 쓴 것이 1935년이니까…. 꼭 1000년만에?
 신라는 꼭 1000년만에 ‘제57대 여왕 차릉파’를 내세워 부활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부활한 신라의 여왕은 평양 출신 기생이었던 것이다.
 요즘 같으면 이 천인공노할 장면이 SNS를 통해 퍼졌을 텐데…. 그 때만 해도 한 순간의 일탈로 끝날 뻔했다. 아마도 참석자들은 술이 깬 뒤 입단속을 하면서 사건을 덮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입소문이 퍼졌다. 특히나 금관을 쓴 차릉파의 사진이 평양시내에서 나돌기 시작했다. 결국 사건은 9개월만에 언론에 보도되고 말았다. 금관을 쓴 차릉파 기생의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실린채…. 이 사건은 식민지 백성들의 공분(公憤)을 샀다. 연회참석자들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으니까….
 그들이 신라금관을 쓴 기생을 마음껏 농락했다는 것 때문에, 또 ‘신라여왕’을 끼고 술판을 벌였다는 점 때문에….
 하지만 국보를 ‘기생의 악세사리’로 전락시킨 고이즈미는 보도 후 총독부로부터 견책을 받고 시말서까지 썼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평양박물관직에서 물러나지는 않았다고 한다. 금관의 수난사를 보면 꼭 파란만장한 우리 역사의 수난사를 보는 듯 하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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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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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오는 31일부터 11월2일까지 경기 연천 전곡리에서 뜻깊은 축제가 열린다.
 이름하여 연천 전곡리 구석기 축제이다. 올해로 22회를 맞았으니 제법 청년의 냄새가 물씬 나는 프로그램임을 알 수 있다.
 ‘전곡리인들의 귀환’을 주제로 펼쳐지는 축제는 구석기 문화와 선사문화를 교육 놀이 체험 등을 통해 배우고 즐기는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형 축제라 한다.
 행사의 내용은 다채롭다. 세계구석기체험마을과 구석기인들의 삶을 1박 2일로 체험해보는 구석기 힐링캠프, 구석기 시대를 리얼하게 재연한 구석기 퍼포먼스와 구석기 바베큐, 농경생활 체험 등 가족참여형 축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구석기축제 추진위원회가 말하는 ‘전곡리인’은 과연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
 이곳에서 확인된 전곡리인들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필자는 이곳 경기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와 선사박물관을 답사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37년 전 우연히 발견된 돌멩이 하나가 27만 년 전의 세계를 창조했다. 그 27만 년 전에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전곡리인’들이다.
 그래! 전곡리 축제를 계기로 27만 년 전 전곡리인의 세계로 빠져보자. 

구석기인이 출몰했다? 해마다 연천 전곡에서 열리는 구석기 축제에서는 27만 년 전 구석기인으로 분장한 사람들이 당시의 생활상을 재연한다. 

■미군 병사의 발견
 “이 돌 좀 이상한 것 같지 않네요.”
 1977년 4월 어느 날 여자 친구와 연천 전곡리 한탄강변 유원지를 찾았던 미 공군 기후예보대 소속 병사 그렉 보웬의 눈이 반짝거렸다.
 얼핏 보면 자연석 같기도 하지만 누군가 인공적으로 깎은 흔적이 잇는 차돌 하나를 주운 것이다.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보웬은 그것이 심상치 않은 차돌임을 직감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당시 김원룡 서울대 박물관장에게 이 차돌을 보냈다. 그랬다. 보웬이 주운 이 차돌은 세계고고학계를 놀라게 한 이른바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였던 것이다.
 아슐리안(Acheulean) 주먹도끼(찍고 자르는 기능을 겸비한 도끼)는 프랑스의 생 아슐(St. Acheul) 유적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붙여진 이름이다. 약 150만 년 전 아프리카 직립원인에 의해 처음 사용되어 장구한 전기 구석기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구석기 시대란 무엇인가.
 인류가 도구를 처음 사용한 250만 년 전부터 마지막 간빙기가 시작되는 1만 년 전까지를 일컫는 기간을 말한다. 석기를 다듬는 수법에 따라 전기(2백50만년~10만 년 전)·중기(10만년~4만 년 전)·후기(4만년~1만 년 전)로 나눈다.
 그런데 그 때까지만 해도 유럽·아프리카와는 달리 이런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문화가 없다는 것이 세계 고고학계의 정설이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지금의 맥가이버 칼과 같은 찍고 자르는 기능을 겸비한 최첨단 도구인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문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찍개문화만이 있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모비우스의 가설’이라 한다.
 그런데 한반도 전곡리에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됨으로써 이 모비우스의 가설은 전면 수정된 것이다. 1978년 이같은 사실이 보고디자 세계 구석기 학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국내 언론도 난리를 떨었다. 당시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이 현장에 뛰어와 발굴단에 격려금을 주었다. 대통령 지시로 직접 발굴조사 지원비까지 내려 보낸 것이다. 발굴단은 그 돈으로 현장에 컨테이너를 제작, 발굴조사 사무실로 이용했다.

1977년 4월 미공군 예후대 소속 병사였던 그렉 보웬이한탄강 유원지에 놀러왔다가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를 발견해 서울대 박물관에 보고했다. 보웬은 그 후 전곡리를 방문,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다.|연합뉴스 

 ■세계적인 구석기학자의 판정
 학계는 전곡리에 대한 본격 발굴조사에 돌입했다.
 김원룡 교수를 발굴단장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국립중앙박물관 등 6개 기관 합동으로 학술발굴조사를 벌였다.
 이선근 정신문화연구원장, 최순우 국립박물관장, 최영희 국사편찬위원장, 김정기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김원룡 서울대 박물관장, 황수영 동국대 교수, 김철준 서울대 교수, 정영화 영남대 교수, 김봉균 서울대 지질학과 교수, 윤무병 충남대 교수 등 당대 내로라하는 관련학자들 20여 명이 총출동했다.
 문제는 연대측정이었다. 이 유적의 연대가 전기 구석기에 해당되는 20만~30만 년 전이라는 걸 믿을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자들 사이에 백가쟁명의 논쟁이 쉴 사이 없이 이뤄졌다. 공동 발굴 참가 대학박물관의 교수들은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른바 전문가들이었다. 그런데 같은 유적을 공동으로 조사하면서 각자의 주장이 엇갈렸으니….
 전곡리 논쟁의 경우 가장 핵심은 전기냐 후기냐로 압축됐는데, 20만~30만 년 전과 4만~5만 년 전의 주장으로 엇갈렸던 것이다. 이것은 실로 수 십 만 년이 왔다 갔다 하는 연대관의 천양지차라 자칫 국제적인 망신을 당할 소지가 다분했다. 결론이 나지 않자 세계적인 권위자의 판정을 기대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초청한 이가 미국 버틀리대의 세계적인 구석기학자인 존 데스몬드 클라크 교수였다. 클라크 교수는 1982년 8월 국립문화재연구소 초청으로 전곡리를 방문했다.
 영국 출신인 클라크는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37년부터 24년간 아프리카 잠비아의 로우즈리빙스 박물관장을 지낸 뒤 61년부터 미 버클리 대 교수로 있었다.
 특히 81년 이디오피아 아와시 계곡에서 자신이 발견한 가장 오래된 인류 화석을 ‘400만 년 전의 인류화석’이라고 발표한 구석기 고고학의 최고권위자였다.
 그가 화석인골편을 발견했을 때 라디오를 켜놓고 있었는데, 그 때 흘러나온 팝송의 제목을 따서 ‘루시종’으로 명명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82년 전곡리를 방문한 존 데스몬드 클라크 교수가 김원룡 당시 서울대교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클라크 교수는 전곡리의 연대를 27만년전으로 판정했다. 

■27만 년의 세계  
 그런데 클라크 교수는 전곡리 주먹도끼 등을 관찰한 후 “이 주먹도끼는 전기 구석기 시대 가운데서도 후기인 27만~26만년 전일 가능성이 많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반면 공주 석장리 유적은 “후기 구석기(약 4만 년 전)에 해당될 가능성이 높다”는 소감을 내놓기도 했다. 그렇게 되니 석장리를 발굴한 전문가들이 크게 반발했다.
 국내에서는 해묵은 논쟁이 재연됐지만, 전곡리 유적은 세계적인 전문가의 판정에 따라 ‘27만~26만 년 전의 구석기 유적’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클라크의 방한을 계기로 영국에서 발간되고 있는 세계 고고학지도에 남북한을 통틀어 제일 먼저 등재되었다.
 전곡리 유적인 전곡리 유적은 최초 발견으로부터 20년을 넘기는 동안 10여 차례에 걸친 지속적인 발굴조사와, 심층적인 연구를 통해 세계적인 전기 구석기 유적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지난 2001년에는 정밀가공으로 좌우대칭의 완벽한 타원형을 이루고, 두께도 얇은 주먹도끼가 4점이나 확인됐어요. 이 도끼들은 30만~20만 년 전 아슐리안 형태의 전형적인 석기들이었습니다."(배기동 한양대교수·전곡선사박물관장)
 1977년 처음 발견된 주먹도끼보다 훨씬 정교하며 지금까지 동아시아에서 나온 아슐리안 형태의 석기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것이다.
 특히 이 지역 24만평 전체에서 구석기 유물이 고루 출토되고 있다는 점은 이곳이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집단 주거지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일본의 지질학자인 단하라 토루(일본 교토 피션트랙사)는 전곡리 현무암 지대와 화산재를 정밀조사한 결과 50만 년 전으로 측정됐다.
 이후 한탄강과 임진강 유역의 현무암대지에서는 발굴 때마다 주먹도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전곡 선사박물관의 이한용 학예실장이 구석기를 만드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선사박물관 제공

 ■서울대의 명예회복
 전곡리 주먹도끼 발견은 웃지 못할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우선 서울대가 자존심을 회복했다는 것이 첫번째 화제거리였다. 사실 해방 이후 남한지역에서 최초로 발굴된 구석기유적은 64년 연세대박물관이 실시한 공주 석장리 유적발굴이다.
 이 유적은 62년 모아와 샘플이라는 두 외국인 유학생에 의해 눈에 띄었다. 두 연구자는 연세대박물관에 연구실을 얻어 우리나라 선사시대를 연구하고 있었는데, 대학원생들과 답사여행을 다니면서 이 유적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니 사실 서울대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1961년 김원룡에 의해 고고인류학과가 개설됐으나 아직 1회 졸업생을 배출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정식학과가 개설된 서울대가 고고학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구석기 유적발굴을 정식학과도 없는 연세대에 빼앗긴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 석장리 발굴 때문에 ‘구석기 발굴=연세대’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그렇게 쓰라린 상황을 겪은지 무려 16년이 지났을 때 그렉 보웬이라는 미군 병사가 서울대에 엄청난 기화(奇貨)를 선사한 것이다.
 
 ■초조한 일본학계
 또 하나, 전곡리 발견이 학계를 깜짝 놀라게 한 지 22년이 지난 2000년 11월 초, 일본열도가 충격에 빠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每日新聞)이 보도한 이른바 ‘구석기 유적 조작’ 사건이다.
 신문은 미야기현(宮城縣) 쓰기다테초(築館町)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발굴 현장에서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가 가짜 석기를 파묻는 장면을 찍은, 이른바 몰래카메라를 폭로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후지무라가 발굴한 구석기 유적이 몽땅 조작이었음이 들통 나고 말았다.
 이로써 잇단 발굴을 통해 70만 년 전까지 올라갔던 일본의 구석기 연대는 모두 가짜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일본 고고학계는 구석기 유적 노이로제에 걸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후지무라가 자작극을 연출한 이면에는 바로 한국의 구석기 유적발굴이 있었다. 즉 한반도에서 27만 년 전의 구석기 유적이 나왔는데…. 일본학자들은 전곡리와 같은 전기 구석기문화가 열도에서 없을 리가 없다는 초조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때부터 구석기 유적 찾기에 혈안이 됐고, 그 와중에 후지무라 조작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후지무라는 2004년 1월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몇 차례 새 유적을 발굴한 뒤에는 주변 사람들이나 언론에서 ‘더 옛날 것은 없느냐’는 주문이 쇄도해서 점차 정신적인 압박이 고조돼 20만 년, 30만 년 전의 것을 만들어냈다”고 털어놓았다. 한반도 중부지방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적 연대가 전기 구석기까지 올라가자, 일본학계가 얼마나 초조감을 드러냈는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인 것이다.

 

 ■후지무라 조작사건의 발발
 후지무라는 1981년 일본 미야기현(宮城縣) 자자리기(座散亂木) 유적에서 약 4만 년 전의 구석기를 발굴했다. 이것은 일본 최초의 구석기 유적이 되었다.
 당연히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당시의 발굴자인 문제의 후지무라였다. 그는 당시 도호쿠(東北) 구석기문화연구소 부이사장이었다. 그 후 20만 년 전~40만 년 전~50만 년 전~70만 년 전의 구석기 유적 발굴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렇게 되자 그는 일본에서 ‘신의 손’으로 일컬어졌다. 알려질 정도로 구석기 유적 발굴을 주도해왔다.
 이러한 구석기의 발굴은 일본 구석기가 중국과 한국의 역사에 뒤질 수 없다는 그릇된 사관에 젖은 일본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 일본국민들 역시 세계 역사상 일본의 우월성을 내세울 수 있었기에 열렬히 환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영광이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던 후지무라의 자작극으로 드러난 것이다. 후지무라는 훗날 “원시인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환청·환각이었는데 날조사건이 드러난 뒤 의사의 진찰을 받고서야 처음으로 병인 줄 알았다”고 털어놨다.
 결국 일본고고학회는 2003년 5월 후지무라가 관여했던 구석기 유적 162곳 모두가 날조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후지무라에 의해 70만 년 전까지 올라갔던 일본의 구석기 역사는 한순간에 7만 년 전(가네도리 유적)으로 뚝 떨어졌다. 더욱 큰 문제는 국가적인 신인도를 완전히 잃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학자들이 유적을 발굴해도 쉽사리 자신의 의견을 내지 못낸다는 것이다.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할까. 전곡리 구석기 유적의 발굴은 일본 스스로 무덤을 파는 자작극을 연출하게 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또한 일본 교과서 왜곡의 근간에 흐르고 있는 우월주의적 황국사관이 낳은 결과라는 것도 증명하고 있다.
 사실 지난 80년대에도 일본의 구석기 학자들 가운데는 후지무라의 잇단 발굴성과를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런 오래된 유적이 일본열도에 있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전문가들이었다. 그러나 군국주의가 창궐하는 학계분위기에서 ‘아니다’라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으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마이니치 신문의 유적조작 폭로가 없었다면 일본의 잇단 구석기 발굴소식은 영원한 진실로 믿게 되었을 것이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이렇듯 확실한 증거가 필요한 고고학계에서 ‘백주대낮’에 자행된 것이다. 그러니 보이지 않은 책상머리에서는 얼마나 많은 왜곡과 조작이 자행되고 있을까.
 37년 전 전곡리에서 우연히 발견된 주먹도끼 한 점은 이렇게 숱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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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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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뿐이 아니었다. 더욱 구체적인 증거가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경종실록> 1722년 4월 20일자를 보라. 조흡이라는 인물의 진술인데, 상당히 구체적이다. 
(왕세자의 처조카인) 서덕수가 동궁(왕세제의 처소)의 별실에서 궁녀를 상대로 독약을 시험했는데, 그 궁녀가 죽어나갔다는 것이다. 서덕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대들은 궁녀가 죽어나간 소문을 듣지 못했는가.” 

 '영조왕세제수책시 책례도감의궤'. 우여곡절 끝에 왕세제에 오른 연잉군과 부인인 달성군 서씨의 책봉과정을 적은 의궤이다.|서울대 규장각 소장

  ■시험삼아 궁녀와 종5품 내명부 여인을 독살시키다
 그러면서 서덕수가 “이 약이 신통한 효험이 있으니 다른 곳에 쓰려고 한다”면서 “그 약을 구하려면 천 여 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10여 일 후인 5월 3일의 <실록>을 보면 왕세제의 여종이자 백망(왕세제의 최측근)의 첩인 이영(二英)이라는 여인이 “백망이 잠을 잘 때 밀봉한 황색 환약을 이부자리 밑에 두고 보지 못하도록 했다”고 진술했다. 또한 백망이 준 2320냥의 은(銀)을 궁녀들에게 바치고 궁녀가 독약을 쓰도록 했다고 자백하기도 했다.
 그런데 독약 시험에는 이름모를 궁녀 한 사람만 희생된 것이 아니다. 이미 1721년 11월 무렵, 동궁(왕세제의 처소)에 속한 소훈(昭訓) 이씨를 상대로 독약을 시험했는데, 소훈 이씨의 숨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이 때 왕세제의 환관인 장세상이 “이 약을 더 얻는다면 쓸모가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소훈’이 어떤 지위인가. 세자궁(세제궁)에 딸린 종 5품 내명부 여인이다. 이름없는 궁녀는 물론 종 5품의 내명부 여인까지 독살의 희생양이 된 것이니 그 참담함이란….

 

 ■대질심문에 말문이 막힌 연루자들
 어떻든 이런 모든 자백으로 미루어보면 왕세제(영조)의 책임론이 거론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목호룡의 고변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정확했는지 그와 대질심문한 연루자들은 말문이 막혀 쩔쩔맸다.
 “국청에서 의논하여 아룄다. 목호룡의 말은 사리가 분명하여 근거가 있으나, 정인중은 하나도 변파(辨破)하는 단서가 없었습니다. 다만 ‘근거가 없다.’ ‘허언(虛言)이다.’ ‘없다.’ ‘아니다.’라는 등의 말로만 하고….”(<경종실록> 1722년 4월12일)
 “심상길도 목호룡과 대질심문하자 말문이 막히었고….”(<경종실록> 4월 14일)
 그러니까 목호룡이 노론와 왕세제 측의 경종독살음모를 너무나 구체적으로 고변하는 바람에 연루자들이 할말을 잃었다는 것이다.  
 결국 목호룡 고변으로 촉발된 ‘옥사’의 기록을 담은 ‘임인옥안’은 왕세제(영조)를 역적의 수괴라는 내용을 담게 되었다.

 경종의 국장(國葬) 때 장례를 마치고 종묘(宗廟)에 입향할 때까지 신위를 모시는 '혼전'의 설치에 대해 기록한 혼전도감의궤. 경종은 세제(영조)와 노론측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서울대 규장각 소장

 ■수사를 미루는 이해할 수 없는 이복형
 이제 김씨 성을 가진 궁녀의 신원만 파악하면 전모가 드러날 판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경종이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계속 내린 것이다.
 자신을 독살하려 했던 이복동생(영조) 측의 혐의가 짙은 데도 “김씨성을 가진 궁녀가 너무 많다”며 번번이 ‘수사중단’의 전교를 잇달아 내린 것이다.
 “1722년(경종 2년) 국청에서 김씨 성의 궁인을 조사하자고 하니 ‘김씨 성의 나인은 원래 없었다’는 비답이 나왔다. 재차 조사해야 한다고 하자 임금은 ‘원래 없었다’면서 굳이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나인을 조사하는 일은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노론을 타도하려는 계책은 근거가 없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다시 조사하라는 말을 하지 마라.’”
 경종은 자신을 죽이려던 노론과 동생(세제)을 비호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고 있는 것이다. <경종실록>은 바로 이 대목에서 “임금의 답이 뜻밖에 나왔으므로 많은 사람이 의혹을 갖게 되었다”고 전했다. 그 후에도 김일경 같은 소론 강경파가 ‘김씨 성의 궁인을 조사하라’는 주청을 끈질기게 올렸다. 그러나 경종은  “너무 바빠서 잊고 있었다”(1722년 8월 18일)느니, “김씨 성의 궁인 가운데 누구인지를 지적하지 못했으니 조사할 수 없다”(10월19일)느니, “수많은 김씨 가운데 어떻게 범인을 찾겠느냐”느니 하면서 차일피일 미뤘다.

 

 ■게장과 생감을 올린 이유는
 경종이 그렇게 미온적인 대처로 시간을 질질 끌고 있을 때 파국이 다가온다.
 가뜩이나 약골인 경종의 몸에서 심각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경종실록> 1724년 8월2일 기사를 보라.
 “경종의 병환이 여러 날 동안이나 회복되지 않아 수라를 올리는 것조차 싫어했다. 이 때에 이르러는 한열의 징후까지 있었다. 임금(경종)이 세자 시절부터 걱정과 두려움이 쌓여 고질병을 얻었고, 더운 열기가 위로 올라와 혼미한 증상이 있었다.”
 약방에서는 이미 1년 전부터 갖가지 약을 100여 첩이나 처방했지만 별무신통이었다. 8월 20일부터 파국이 시작된다.
 “경종이 가슴과 배가 조이듯 아파서 의관을 불러 입진토록 했다.”
 임금의 몸은 급속도로 악화된 것이다. 그런데 이튿 날인 21일부터 두고두고 논란을 일으킬 급박한 사건들이 연속으로 일어난다.
 “여러 의원들이 ‘임금에게 어제 게장(蟹醬)과 생감(生枾)을 함께 올린 것은 의가(醫家)에서 매우 꺼려하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의원들은 두시탕(豆시湯)과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올리도록 청했다.”(<경종실록> 1724년 8월 21일)
 이 무슨 내용인가. 전날인 20일 수라를 들지 못할 정도로 맥이 빠져있던 경종 임금이 게장과 생감을 모처럼 맛있게 먹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게장과 생감은 의학계에서 매우 꺼리는 상극의 음식이라 어의들이 극구 만류했다는 것이다.

 훗날 영조는 “이 게장과 생감은 대비(인원왕후)가 보낸 것도 아니고, 수랏간에서 올린 것이므로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해명했다.(<영조실록> 1755년 10월9일) 하지만 당시 왕세제가 어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절대 올려서는 안될 게장과 생감을 지나치게 많이 권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어쨌든 경종의 상태는 더욱 악화됐다. 복통과 설사가 더욱 심해졌고, 급히 황금탕을 지었지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영조의 치세는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갖가지 설에 시달려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 이인좌의 난과 나주벽서 사건 등 역모가 줄을 이었다. 영조는 자신을 둘러싼 갖가지 소문들을 잠재우려고 세제책봉이 정당했음을 알리는 <천의소감>을 편찬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삼과 부자를 같이 쓰면 큰일 납니다”
 3일 뒤인 8월 24일 두고두고 논란을 낳은 경종 독살설의 2막이 시작된다.
 이날 경종 임금의 환후가 위중해져서 맥이 낮아지고 음성이 점점 미약해진 것이다. 약방 도제조 이광좌 등이 물러나와 여러 의원들과 격론을 벌였다.
 이 때 어의 이공윤이 공언했다. ‘  
 “삼다(蔘茶)를 써서는 안된다. 계지마황탕(桂枝麻黃湯) 2첩만 진어하면 설사는 금방 그치게 할 수 있다.”
 이공윤의 처방에 따라 계지마황탕(발열·오한 때문에 맥박이 약해지고 몸이 가려운 것을 치료하는 처방)을 올렸다. 그러나 경종의 환후는 더욱 위급해졌다.
 모든 신하들이 임금에게 달려갔다. 경종 임금이 내시(內侍)를 의지하고 앉아 눈을 부릅뜬 형국으로 바라보았다. 약방도제조 이광좌가 문후를 올리자 임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때 왕세제(영조)가 울면서 말했다.
 “인삼과 부자(附子)를 급히 쓰도록 하라.”
 그러자 이광좌가 삼다(參茶)를 올려 임금이 두 번 복용하였다. 이 때 어의 이공윤이 이광좌에게 “삼다를 쓰지 마라”고 급히 경고했다.
 “삼다를 많이 쓰지 마라. 내가 처방한 약을 진어하고 다시 삼다를 올리게 되면 기(氣)를 능히 움직여 돌리지 못할 것이다.” 

 

  ■“네가 뭔데 인삼약제를 쓰지 말라고 하느냐”
 그러자 왕세제가 이공윤을 꾸짖었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꼭 자기의 의견을 세우려고 인삼 약제를 쓰지 못하도록 하는가.”
 인삼의 처방으로 임금의 눈이 다소 안정되고 콧등이 다시 따뜻하진 것 같았다. 왕세제가 ‘그것 보라’는 듯이 한마디 더했다.
 “내가 의약(醫藥)의 이치를 알지 못한다. 그래도 인삼과 부자가 양기(陽氣)를 능히 회복시키는 것만은 안다.”
 하지만 이내 경종의 용태는 수습할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되었다. 임금의 기(氣)와 호흡이 미약해졌다. 이광좌가 다시 삼다(參茶)를 올렸지만 임금은 스스로 마시지 못했다. 의관은 삼다를 숟가락으로 떠서 넣었다. 왕세제는 “성상(경종)이 정(情)으로는 형제지만 의(義)로는 부자의 관계나 다름없다. 빨리 종묘와 사직에 (회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자”고 했다.
 그러나 경종 임금은 끝내 회복하지 못한채 이튿날 승하하고 말았다. 
 사실 인삼과 부자는 한방에서는 그야말로 극약처방이다. 가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일 때 강한 독성의 부자가 몸의 독기를 제거하고, 인삼이 원기를 회복시키는 치료이다. 의사가 아니고서는 절대 처방할 수 없는 약제인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밝혔듯 ‘의약의 이치를 모르는’ 왕세제가 어의의 반대를 부릅쓰고 인삼과 부자의 처방을 고집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신은 게장을 먹지 않습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이어지고, 급기야 경종이 승하하자 민심은 새롭게 등극한 영조의 품을 완전히 떠났다.
 그런 영조가 택한 것은 피의 숙청이었다. 즉위하자마자 자신을 역적의 수괴로 만든 목호룡과 김일경 등 반대파들을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민심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랬으니 한낱 군졸에 불과한 이천해 같은 이가 지존인 임금을 향햐 악담을 퍼붓고, 총 20만명이 가담한 이인좌의 난(1728년)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어디 그것으로 끝났을까. 영조가 즉위한 지 31년이나 지난 1755년(영조 31년)에도 엄청난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났다. 
 그해 2월 일어난 나주 벽서(흉서)사건과, 5월 일어난 과거시험 답안지 사건이 그것이다. 앞서 인용했듯이 2월의 나주 벽서 사건으로 윤지 등 22명이 고문을 받다가 죽었고, 참형·효시·교형 등으로 죽어나간 이가 7명이었다. 모두 65명이 형을 받았다. 
 특히 이 사건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던 신치운의 진술은 영조의 가슴을 후벼팠다.
 “신은 자복합니다. 신은 갑진년(1724년) 이후 게장을 먹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입니다.”
 이는 곧 영조 당신이 이복형의 경종의 수라에 상극의 음식인 게장과 생감을 넣은 장본인이 아니냐고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영조는 길길이 뛰었다. 
 <영조실록>은 “이 때 영조는 분통해서 눈물을 흘렀고, 곁에 있던 장사들도 모두 부들부들 떨었다”고 전하고 있다.(1755년 5월 20일)   

 

 ■미친듯 죄인의 수급을 돌린 영조 
 그 해 5월 2일이었다. 나주 벽서사건을 토벌한 기념으로 과거시험이 열리고 있었다.
 이 때 이인좌의 난 때 사형 당한 심성연의 동생인 심정연이 답안지를 작성하다가 파리머리만한 글씨로 이른바 ‘난언패설(亂言悖說)’을 가득 쓴 것이 적발됐다.
 또 제출한 답안지를 정리하면서, 과제(科題)를 쓰지 않은 종이를 발견했는데, 이름을 밝히지 않은 ‘상변서(上變書)’였다.
 그 내용을 훑어본 영조는 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렸다.
 “종이 가득히 음참(陰慘)한 내용이 가득하구나. 차마 볼 수가 없다. 마음이 땅에 떨어지는 듯하다. 방자하게 휘(諱)를 쓰기까지 했으니, 어찌 족히 말하겠는가.”
 아마도 심정연은 금기로 되어 있는 임금의 이름(금·昑)까지 들먹거리면서 욕했음이 분명했다. 글씨체가 심정연의 답안지와 같았으므로 이 상변서를 작성한 이 또한 심정연이었음이 분명했다. 영조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1755년(영조 31년) 5월 6일 영조는 직접 갑주를 입고 이른바 역적들의 사형집행을 친히 주관했다. 사형집행장엔 취타(吹打)가 울려퍼졌다.
 판부사 이종성이 “어찌 지존께서 형을 직접 주관 하느냐”고 걱정했다. 그러자 영조는 화를 벌컥 내고 상을 치면서 “저 자를 충주목으로 유배시키라”고 곧바로 명했다.
 분기탱천한 영조는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죄인 윤혜의 수급을 깃대 끝에 매달게 했다. 그런 뒤 백관에게 여러 차례 내보이도록 하고 명했다.
 “자 어떠냐. 이제 김일경과 목호룡의 생각을 품은 자는 나와서 엎드리라.”
 광란의 칼춤을 춘 영조는 소차(小次·행차 도중 임금이 잠시 쉬려고 만든 장막)에서 술에 취해 드러누웠다. 그 사이 취타(吹打·연회 때 울린 연주악)는 계속 울러퍼졌다.
 영조는 날이 샐 무렵에야 잠이 깨어 갑주를 입은채 환궁했다. 영조의 시대는 칼부림이 춤춘 광란의 시대였다.

사도세자의 어린 시절 글씨 ‘효봉(孝奉·효로 부모를 봉양한다)’.

 아버지 영조를 향한 효심을 알 수 있다. 사도세자는 15살 때인 1749년부터 13년간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한다. 세자는 소론을 절멸시키라는 노론의 끈질긴 상소를 번번이 기각시켰다. 아버지와 노론세력은 큰 불만을 품었고, 급기야 1752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사도세자, “모두 따르지 않겠다.”
 영조는 나주 벽서와 과거시험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소론 소탕령을 내렸다.
 이로써 처형된 소론 강경파는 500여 명에 이르렀다. 소론 온건파도 몰아냈으므로 바야흐로 노론일당독재 체제로 변혔다.
 영조는 세제(영조)의 대리청정을 이끈 노론 4대신과 목호룡의 고변으로 사형당한 김용택 등을 충신으로 추켜세웠다.
 또 게장은 왕세제(영조)가 아닌 수라간에서 올린 것이라는 인원왕후의 변명이 실린 <천의소감>을 발간했다. 또 노론의 정신적인 지주 송시열과 송준길을 문묘에 종사했다. 이제 소론과 남인은 명맥만 유지됐다. 자신이 역적의 수괴로 등재된 이른바 ‘임인옥안’도 말끔히 수정됐다.
 영조는 그러면서 세자(사도세자)에게 신신당부했다.
 영조는 나주 벽서 사건의 국문현장에서 사도세자에게 “앞으로는 너에게 달려있다. 흔들림없이 역적의 무리를 소탕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당시 대리청정 하고 있던 세자는 아버지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노론이 소론의 절멸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릴 때마다 “모두 따르지 않겠다”고 번번이 거부했다.
 급기야 1756년(영조 32년) 1월17일 사도세자가 “노론의 정신적인 지주 송시열과 송준길 등을 문묘에 종사하고 노론 4대신(김창집·이이명·조태채·이건명)을 정려하자”는 상소를 거부하고 만다. 무소불위의 일당독재를 이룬 노론은 사도세자의 태도에서 불길한 느낌을 감지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762년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광란의 시대에 걸맞은 결말이 아닌가.(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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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김일경은 자기 자신을 일컬을 때마다 ‘저(矣身)’라 하지 않고 ‘나(吾)’라 했다.”  
 1724년(영조 즉위년) 12월 8일이었다. 영조는 즉위하자 마자 소론의 핵심인물 김일경을 국문장으로 끌어냈다.
 그러나 마땅히 고개를 숙여야 할 ‘죄인’ 김일경은 고개를 뻣뻣히 세우고 임금이 당도해 있는 친국장에 들어섰다. 영조가 소리쳤다.
 “보기싫다. 저 자의 머리를 덮어 씌우라.”
 김일경은 대단했다. 피와 살이 튀는 고문에도 ‘말할 때마다 반드시 선왕(경종)의 충신’이라 했다. 더구나 자신을 일컬을 때 “반드시 나(吾)’라고 했으며 ‘저(矣身)’라고 하지 않았다.
 그 스스로 경종의 신하이지, 영조의 신하가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영조가 “네가 부도(不道)했음을 자백하라”고 추궁했다. 그러자 김일경이 일축했다.

연잉군 시절의 영조. 숙종과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영조는 평생 콤플렉스를 겪으며 살았다. 심지어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소문에도 휩싸였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난(吾) 경종의 신하요. 시원하게 죽이시오.”
 “난 성품이 원래 충직해서 부도한 일을 알지 못합니다.”
 김일경은 영조의 폐부를 깊숙히 찌른다. 
 “지금 즉시 죽는 것이 소원입니다. 선대왕(先大王·경종)의 빈전(殯殿)이 여기에 있으니, 여기서 죽는다면 마음에 달갑게 여기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해보라.”
 “이미 충곡(衷曲·간절한 마음)한 말을 다했으니, 달리 진달할 바가 없습니다.”
 김일경은 더욱이 “나의 한평생 독서는 옛 군자(君子)를 배우려는 것이었다”면서 “어찌 자신이 사지에 빠졌다 하여 한평생 지키던 바를 잃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또 “내 스스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自視靑天白日)”면서 “시원하게 죽여달라”고 공언했다.
 결코 선왕(경종)을 향한 지조를 버릴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자 영조가 펄펄 뛰며 분한 마음에 눈물까지 흘렸다.
 영조는 그 말에 기막힌 듯 “저 자를 죽인들 과인의 마음이 시원하겠느냐”면서 “지극히 음흉하고 참혹한 자가 아니냐”고 가슴을 쳤다.
 이날 역시 국문장에 끌려온 41살의 목호룡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지독한 형신에 시달렸지만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온 나라 사람들은 모두 저를 도마 위의 고깃덩이로 생각하며 죽을 운명이라 합니다. 고(告)한 자는 죽는 법이라니, 장차 고한 자로서 죽을 겁니다. 그러나 흉심(凶心)은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종사(宗社)를 위했던 죄가 있을 뿐이고 다른 죄는 없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영조가 기막힌듯 “네가 종사를 위했다는 죄는 내(영조)가 역적을 비호했다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목호룡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저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부지(扶持)하고 전하(영조)의 심사를 만세에 밝혔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선대왕(경종 때) 임금을 독살하려 한 역모를 고한 공로로 공신이 된 자신을 이렇게 혹독하게 죽이려는 이유가 뭐냐고 항변한다.
 “회맹단의 삽혈(삽血·공신이 된 후의 서약식에서 바르는 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어찌 이런 일이 있습니까.”

영조의 이복형인 경종도 불행한 삶을 살았다. 희빈 장씨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동생과 노론측의 살해위엽 속에 살다가 결국 재위 4년만에 승하했다. 

 ■군졸 이천해의 막말, “국가가 무도합니다.”
 그로부터 한 달 여가 지난 1725년(영조 1년) 1월 16일, 영조의 어가가 이교(종로 5가에 있던 다리)를 지날 때였다.
 웬 군졸(軍士) 한 사람이 가로막고 임금에게 갖은 ‘흉언’을 퍼부었다. <영조실록>을 보자.
 “형조 참의 박성로가 상언했다. ‘이천해의 말은 오늘의 신하된 자가 들을 수 없는 바이기 때문에 차마 붓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非今日臣子所可聞 故不忍자筆)’”
 한낱 군졸의 신분으로 지존인 임금에게 무슨 막말을 퍼부었기에 ‘붓으로 차마 쓸 수 없을 정도’였을까.
 화가 난 영조가 신하들과 나눈 격정토로에서 ‘이천해 흉언’의 ‘대강’이 나온다. 영조는 이천해가 ‘고자(告者·남의 잘못을 고하는 사람)’이라고 자칭한 것에 열을 받았다.
 “그 자가 실성했다지만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 그 자가 자칭 ‘고자’라 하는 말을 도승지도 들었지 않은가.”
 영조는 이천해가 뱉은 또 하나의 흉언을 언급했다. 이천해가 “국가가 이토록 무도할 수 있느냐”고 지껄였다는 것이다.
 영조는 기가 막혔다. 그는 “죄인의 흉악한 말은 문서에 쓰지 마라”고 명했다. 사관(史官)에게도 “음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으니 역사서에 쓰지 마라”고 엄명을 내렸다. 중요한 것은 한낱 군졸의 신분인 이천해가 극심한 고문에도 ‘잘못을 시인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천해에게 24번이나 압슬(壓膝)을 가했다. 그럼에도 이천해는 불복(不服)하였고, 심지어 아프다는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영조는 ‘이처럼 흉악하고 사나우니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며 혀를 내둘렀다.”(<영조실록>)
 압슬형이 무엇인가. 죄인의 무릎 아래 사금파리 등을 깐 뒤 무릎 위에 압슬기를 놓고 누르거나 무거운 돌을 얹어 고통을 주는 고문기법이다.
 이천해는 그런 지독한 고문을 24차례나 참아내면서도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 지독한 모습을 지켜본 영조가 이천해 사건을 계기로 ‘압슬형’을 폐지했다니….
 “이천해가 흉악하고 사나와서 견뎠겠지만 다른 사람이야 어찌 견디겠느냐. 과인이 보기에도 참혹했다. 이후에는 압슬형을 없애라.”(<영조실록> 1725년 1월 28일)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무덤인 소령원을 회화식으로 그린 소령원도. 숙빈 최씨의 묘소는 경기 파주 광탄면 영장리에 있다. 

 ■20만명의 봉기, ‘조정에 간신이 가득합니다.’
 어디 이뿐이랴. 1728년(영조 4년) 그 유명한 이인좌의 난으로 영조는 큰 위기에 빠졌다. 영남에서만 7만명, 전국적으로 20만명이 가담했다.
 이것은 임금을 겨냥한 민심의 배반을 뜻했다. 이 때 난을 이끈 이인좌가 “(반란군의) 군중에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조석으로 곡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당의통략>)  
 그로부터 27년이나 흐른 1755년(영조 31년)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가 급히 장계를 올렸다.
 나주 객사에 이른바 ‘흉서(凶書)’가 걸렸다는 것이었다. 대대적인 범인 색출에 나섰다. 가뜩이나 하수상한 시절이었다.
 “신축년(1721년·노론 4대신 등 노론이 쫓겨난 사건)과 임인년(1722년·목호룡 고변사건) 때의 잔당과 무신년(1728년·이인좌의 난)의 잔적들로서 번성한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이 나라를 원망함이 심각하고 근거없는 말이 날마다 일어났는데, 이 때 흉서가 걸렸다.”
 흉서의 내용은 그야말로 흉(凶)했다. 워낙 참담한 표현이어서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장계를 받아본 영조는 기막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황건적 같은 무리로구나. 틀림없이 무신년(이인좌의 난)의 잔당이다. 그러나 과인은 무신년 때도 동요되지 않았다.”
 이같은 일이 다반사이니 걱정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어찌보면 의연하게 대처하려는 영조의 여유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혼란한 시대였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어쨌든 대대적인 수사 끝에 괘서(흉서)를 내건 일당이 붙잡혔다. 주범은 윤지라는 인물이었다.  
 윤지는 영조의 즉위년인 1724년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 윤취상의 아들이었다. 윤지는 무신년의 난(이인좌의 난) 때 제주도를 거쳐 나주로 유배됐다가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다.     윤지는 고문을 받다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영조는 분을 참지 못하고 대역죄의 형벌로 그의 목을 베고 그의 집을 헐어 그 자리에 연못을 파는 형벌을 받고 말았다.

 

 ■“당신은 이복형을 죽였어!”
 영조로서는 지긋지긋한 일이었다.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도저히 풀려날 수 없는 과거의 족쇄에 얽혀있었으니 말이다.
 김일경이나 목호룡이 “영조 당신은 나의 임금이 아니니 빨리 죽여달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인좌는 선왕(경종)의 위패를 모시고 반란을 일으켰고. 그 반란에 20만명이나 되는 민초들이 가담했을까. 또한 한낱 군졸의 신분이었던 이천해는 왜 지존인 임금을 향해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흉언을 퍼부었을까.
 모두 “영조 당신은 이복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자야!”라고 외쳤던 것이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 모든 사건은 이미 아버지인 숙종 때부터 잉태되고 있었다.
 숙종은 재위 46년 동안 3번의 환국(換局·정권교체)으로 정국을 요리했다. 말이 정권교체를 의미하는 환국이지 피바람을 몰고온 친위쿠데타였다.
 이 와중에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등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들을 핍박해 죽이거나 죽도록 만들었고, 수많은 대신들을 살해했다.
 임금이라는 사람이 정쟁놀이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을 때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3년 내내 대기근에 발생,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고,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숙종실록> 1697년 4월22일)고 한다.

숙종이 연회에 연잉군을 참석하라고 알린 초청장. 연잉군은 노론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반면 세자(경종)은 소론을 등에 업고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잇단 환국…천신만고 끝에 보위에 오른 경종 
 숙종이 남인을 서인 정권으로 복귀시킨 이른바 경신환국을 단행한 것이 1680년이었다.
 이 때 축출된 남인의 처리를 놓고 강경파인 송시열의 노론과, 온건파인 윤증의 소론으로 나뉜다.
 그러나 서인의 정권도 10년을 채우지 못했다. 숙종은 희빈 장씨를 앞세운 남인 세력에게 정권을 다시 넘긴다. 이것이 1689년(숙종 15년) 일어난 기사환국이다.
 기사환국으로 송시열 등 서인 100여 명이 사형·유배·삭탈관직 등의 정치보복을 당한다. 
 하지만 숙종의 변덕으로 남인정권은 5년을 넘기지 못한다. 1894년(숙종 20년) 다시 인현왕후와 숙빈 최씨를 앞세운 서인에게 넘긴다. 이것이 갑술환국이다. 
 갑술환국 이후 남인은 완전히 몰락했지만, 이제는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본격화한다.
 절대 다수를 차지한 노론은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영조)을, 소론은 희빈 장씨의 아들이자 숙종의 맏아들인 세자(경종)를 각각 지지했다.
 노론으로서는 절박했다. 세자가 등극할 경우 어미(장씨)의 한풀이를 한다며 정치보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산군의 예가 있지 않은가. 노론은 연잉군을 절대 지지할 수밖애 없었다.
 그러나 노론의 음모는 실패했다. 숙종이 64세의 나이로 승하하자(1720년) 세자가 보위를 이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집권당인 노론은 임금이 된 경종을 무자비하게 핍박했다.
 1721년(경종 1년) 8월20일 정언 이정소가 “임금이 춘추 왕성한데 (생식기능이 없어) 후사가 없다”며 “빨리 나라의 대본(후사)을 생각해야 한다”고 감히 상소를 올린 것이다.
 당시 경종의 나이 33살이었고, 부인 선의왕후는 춘추 16살이었다. 이정소의 말마따나 임금의 춘추가 왕성한데 무슨 세자를 논하는가. 이것은 명백한 반역이었다.

 

 ■경종, 친정체제 구축하다
 노론측이 전전반측한 까닭이 있었다. 경종이 마침 양자를 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경우 새로 들일 양자가 경종의 뒤를 이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노론이 행동에 나선 것이다. 노론측은 “선왕(숙종)의 골육은 금상(경종)과 연잉군(영조)인데 어찌 다른 사람이겠느냐”는 대비(인원왕후)의 한글교서를 내보였다.
 결국 연잉군은 왕세제로 책봉됐다. 노론 측은 이에 그치지 않고 경종을 더욱 압박했다. 왕세제(연잉군, 곧 영조)의 대리청정을 촉구한 것이다. 사실상 양위선언을 촉구한 것이다. 이 때부터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다.

 경종 역시 세제의 대리청정 요구를 받아들였다가 철회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갈짓자 행보를 보였다. 이 과정에서 노론의 4대신이라 일컬어지는 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채 등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촉구하는 데 선봉에 섰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왕세제의 대리청정은 경종의 최종 판단에 따라 ‘없던 일’로 결정됐다. 경종 역시 이복동생(연잉군)에게 사실상의 양위를 뜻하는 대리청정을 명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승기를 잡은 소론 가운데서도 강경파는 ‘이 참에 노론을 쓸어버리자’면서 대대적인 노론잡기에 나선다.
 1721년(경종 1년) 12월 6일 김일경 등 소론 측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요구한 ‘노론 4흉(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채)’은 삼강오륜과 군신유의를 저버린 적신(賊臣)”이라며 그들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노론의 핵심인물들을 ‘4흉(凶)’, 즉 역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경종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경종은 “상소의 내용을 가납한다”고 하면서 상소를 올린 김일경 등을 이조참판으로 전격 제수했다. 또 노론 측 고위인사들을 줄줄이 경질시켰다. 그런 뒤 소론 최석항과 이광좌, 이조, 김연을 병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 호조판서로 차례로 임명했다.
 우유부단하는 듯 했던 경종이 마침내 친정체제를 구축하려 한 것이다. 역사는 신축년에 벌어진 이 날의 환국을 ‘신축환국’이라 일컫는다.

 

 ■“연잉군 당신이 성상(경종)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722년(경종 2년) 3월 27일 정국을 피바람으로 몰고온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다.
 이름하여 목호룡의 고변사건이다. 이 고변사건으로 노론 세력이 초토화된다. 이를 임인옥사라 한다.
 목호룡이 누구인가. 그는 종친 청릉군의 노비였지만 연잉군(영조) 인척의 장지를 정해준 대가로 평민이 된 ‘풍수가’였다. 원래 연잉군 편이었지만 신축환국(1721년)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소론 쪽으로 돌아선 인물이었다. 그는 둔갑술을 가르쳐준다면서 연잉군의 측근 및 노론의 젊은 세력들에게 접근했다. 그는 이들과 내밀한 관계를 맺는다. 그런만큼 그의 고변은 끔찍했다.
 “성상(경종)을 시해하려는 자들이 있어, 혹은 칼로, 혹은 독약으로, 혹은 폐출로 모의한다고 합니다. 이는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입니다.”
 목호룡은 그러면서 “역적 중에는 동궁(왕세제 영조)을 팔아 씻기 어려운 오욕을 끼치려 한 자가 있다”면서 “동궁은 빨리 누명을 씻어 국본을 안정시키라”고까지 했다.
 겉으로는 동궁(영조)에게 '빨리 누명을 벗으라'고 촉구한 것이지만, 결국 역모의 수괴는 바로 왕세제, 바로 당신이라고 지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목호룡은 역적 일당의 이름들을 줄줄이 대면서 그들의 역할까지 아주 자세히 고했다. 지목된 인사들은 이른바 노론 4대신의 자제들을 포함한 노론 세력들이었다.

 

 ■경종 시해 3단계 방법
 왕세제의 최측근인 백망과, 왕세제의 처조카인 서덕수 등도 핵심인물로 등장했다. 목호룡은 경종 시해의 3단계를 ‘3수(三手)’라 칭했다.
 “칼로 시해한다는 것은 선왕(숙종)의 장례식 때 궁궐로 넘어가 대급수(大急手)를 행하는 것이고, 약으로 시해하는 것은 상궁을 시켜 음식에 독약을 타서 시해하는 소급수(小急手)이며, 폐출을 모의하는 평지수(平地手)는 숙종의 국상 때 언문으로 세자(경종)을 무고하고 헐뜯는 가사를 지어 궁중에 유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평지수’의 방안으로 ‘세자(경종) 모(某)를 폐위시켜 덕양군으로 삼는다(廢世子某爲德讓君)’는 거짓교서까지 꾸밀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더욱 기절초풍하게 만든 것은 경종 즉위년(1720년) 실제로 경종 독살이 시도됐다는 것이었다. 즉 “경종 즉위년(1720년)에 실제로 반년간이나 경영된 것”이라 폭로한 것이다.  
 실제 경종 독살사건이 시도됐다는 자백이 나왔다. 1722년 8월 노론 김창집의 친족인 김성절이 3번의 형문 끝에 쏟아낸 자백을 보라. 
 “예. 장씨라는 역관이 독약을 사서 가져왔으며 김씨 성을 가진 궁인이 성궁(聖躬·경종)에게 시험삼아 약을 썼습니다.”
 그러나 독약이 약해 제대로 듣지 않고 임금이 토하는 것으로 끝나자 노론 이기지 등은 “이 약은 맹독이 아니다. 은화를 모아 더 강한 독약을 사와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자백에 따라 경종 즉위년(1720년)의 <약방일기>를 모두 찾아보았다. 과연 1720년 12월 14일 경종이 ‘거의 반 대야에 이르는 엄청난 양의 담수(淡水)를 토했음이 확인됐다. 그 색깔 또한 좋지 않았다고 <약방일기>에 기록돼 있었다. 이 일기를 토대로 약방제조 한배야가 경종에게 물어보았다.
 “(문제의 그 날) 수라를 드신 뒤 즉시 구토하셨습니까.”
 “그렇다.”(임금)
 “그렇다면 그 날짜 당일의 수라간 나인 가운데 김씨 성을 가진 자를 조사한다면 독약을 올린 범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야흐로 범인 색출은 시간문제였다. (계속|하편은 23일 목요일에 게재)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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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수능 세계지리 8번 문제 파동을 보면 역사는 돌고 돈다는 이야기가 새삼 떠오른다.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으로 돌아가니 말이다. 
 때는 바야흐로 1964년 12월 7일 서울시 전기중학 입시가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도 수능일이면 전국이 들썩거리지만 그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험 치른 다음날, 각 신문에는 전날 치른 문제가 이른바 ‘가리방으로 긁은 글씨체’ 그대로 전제되었다.
 당시만 해도 코흘리개 국민학생(초등학생)들까지 입시지옥을 겪었으니 아찔한 생각이 든다. 각설하고, 큰 사단이 일어났다.. 

 

1964년 12월 7일 벌어진 전기중학 입시 자연문제 17번과 18번 문제, 엿을 만들 때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재료를 고르는 문제이다. 전기중학 시험문제는 도하 각 신문에도 그대로 전제됐다. |경향신문 자료   

자연 과목 18번 문제가 이상했다.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다음은 엿을 만드는 순서를 차례로 적어 놓은 것이다.
 1.찹쌀 1kg 가량을 물에 담갔다가
 2.이것을 쪄서 밥을 만든다.
 3.이 밥을 물 3ℓ와 엿기름 160g을 넣고 잘 섞은 다음에 60도의 온도로 5~6시간 둔다.
 4.이것을 엉성한 삼베 주머니로 짠다.
 5.짜 낸 국물을 조린다.
 (문제 18) 위 3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
 ①디아스타제 ②무우즙 3)4)….

 

 ■디아스타제와 무즙
 요컨대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이었다. 원래 질문이 요구한 정답은 ①디아스타제였다.
 디아스타제는 녹말을 분해해서 포도당으로 바꾸는 이른바 당화효소다. 동물의 침과 간에도 포함돼있다. 파란은 여기서 일어났다. ②무즙(무우즙)도 정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에도 디아스타제가 함유돼있다는 것이다.
 논란을 증폭시킨 것은 국민학교 ‘자연교과서 6-2’에 “침이나 무즙에도 디아스타제 성분이 들어있다”는 내용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말썽이 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엿을 만드는데 누가 무즙을 넣겠는가. 문제의 의도는 만약 엿기름이 없을 때는 시중에 판매되는 상품인 ‘디아스타제’를 구입해서 쓸 수 있다는 것이었으리라. 그렇지만 어린 국민학생들이 시판 디아스타제 추출물을 알기나 했을까.
 그러니 엿기름 대용으로 엿기름 속 효소인 디아스타제를 고른 학생도, 디아스타제 성분을 함유한 무즙을 선택한 학생도 맞았다고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무즙으로 엿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며 무즙으로 만들었다는 엿단지를 들고 서울시 교육위에 나타난 학부모들. 당시 신문들은 각 중학교 입시에서 수석을 차지한 학생의 이름과 성적까지 기사로 게재했다.

이튿날 난리가 났다.
 문교부가 ‘디아스타제’만 정답으로 발표하자, ‘무즙’을 정답으로 쓴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무즙파’ 학부모들은 사생결단이었다.
 일류중 진학을 일류고-일류대 진학의 지름길로 여겼기에 죽기실기로 대들었다.
 무즙파’ 학부모들은 “수험생의 70%가 무즙을 정답으로 써서 1점을 잃게 됨으로써 불합격했다”며 서울시교육위원회로 달려가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무기가 있었다. 직접 무즙으로 만든 엿을 솥에 담아와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무즙으로 만든 엿 좀 먹어보라’는 신문기사 제목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사태는 법정소송으로 번졌다. 이른바 ‘무즙파’ 학부모들 일부가 ‘입학시험 합격자 청구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이른바 희대의 ‘무즙재판’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서울 고법특별부는 원고들이 내놓은 ‘무즙으로 만든 엿’, 즉 무즙엿이 실제로 가능한 지 학술원 등 전문기관에 실험을 의뢰했다. 그 결과 ‘무즙으로는 엿을 고을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는 무즙파 학부모들의 주장이 기각된 것이다.
 하지만 교육당국은 교과서에 수록된 ‘엿’의 정의가 모호하고 일부 수련장 등에도 ‘무즙’으로 혼동될 수 있는 내용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무즙파’ 학부모들도 ‘무즙엿’을 국회의장 집에까지 들고 가 시위를 벌였다.
 결국 1965년 3월30일, 서울고법은 ‘무즙도 정답으로 봐야한다’며 원고승소판결을 내림으로써 ‘무즙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고법은 판결문에서 “18번 문제를 객관적으로 볼 때 엿을 만드는 당화작용에 대한 문제로 해석된다.”며 “따라서 디아스타제가 포함된 무즙도 정답이 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즉 교사용 교과내용으로 보면 엿을 만드는 방법으로는 1)엿기름, 2)상품화된 디아스타제, 3)산(酸)으로 만들어 중화시키는 방법 등인데, 2)디아스타제가 포함된 ‘무즙’도 당연히 정답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판결로 승소한 38명의 ‘무즙파’ 학생들에게 구제의 길이 열렸다. 승소한 학생 가운데 경기중에 30명, 서울중에 4명, 경복중에 3명, 경기여중에 1명 등이 추가입학하게 됐다.   

 

특수층 자제들이 무즙 파동을 틈타 일류중학교에 덤으로 입학한 것이 드러나 큰 파란을 일으켰다.    

 ■그 틈을 탄 부정입학
 그런데 그 어수선한 틈을 타 못말리는 사건이 또 발생한다.
 ‘무즙파’ 학생들이 ‘사고처리’의 형식으로 전입학하는 어수선한 과정을 틈타 경기중 6명, 경복중 15명 등 모두 21명의 특권층 자녀들이 ‘덤’으로 부정입학 해버린 것이다.
 “이번 뒷문 입학의 근원은…지난 봄 새학년이 시작되자 일류중에 못들어간 학부형들이 아우성치자 문교당국이 이들을 조금이라도 구제해주기 위해서인지(?) 교육법 시행령을 뜯어고쳐 학급당 60명 정원을 64명으로 늘릴 수 있는 법적 조치를 취한 것…. 그러나 경복·경기 등 몇 개 학교는 일부러 64명 모두를 채우지 않고 있다가….”(경향신문 1965년 5월27일)
 이들 학교는 새학기부터 늘어난 정원을 일부러 채우지 않고 있다가 ‘무즙파’의 구제라는 어수선한 상황을 틈타 일부 특권층의 뒷문입학을 슬그머니 감행한 것이다.
 또 한 번 소용돌이에 빠졌다. 특히 ‘덤입학’ ‘뒷문입학’한 특권층 가운데 청와대 비서관과 국회관계자, 재벌, 또는 국영기업체 임원의 자제들이 포함돼 있어 공분을 샀다.
 이 와중에 경기고에서도 부유층 자제 3명이 부정입학한 것이 추가로 드러남으로써 사태가 더욱 확산됐다.  

1965년 12월 실시된 66학년도 중학입시험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국민학생들이 풀기엔 너무 어려운 문제들이라는 학계 비판도 있었다.

■‘늘어놓기’ 문제와 ‘이히’ 문제
 어디 이뿐인가. ‘일류’를 향한 욕망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것도 무즙 파동이 일어난지 불과 1년 만에…. 1965년 12월이었다.
 경기중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학부모 30여 명이 다시 시교위 사무실로 뛰어갔다.
 이번에는 국어 (1) ‘늘어놓기’ 문제와 (5)의 ‘이히’ 문제였다.       
 (문제 1) 느낌이 약한 것부터 늘어 놓여진 것은 어느 것인가.
 ①퍼렇다-시퍼렇다-파랗다-새파랗다, ②파랗다-퍼렇다-시파랗다-시퍼렇다 ③파랗다-새파랗다-퍼렇다-시퍼렇다 ④)퍼렇다-시퍼렇다-파랗다-새파랗다
 (문제 5)‘즐겁다’는 ‘즐거이’, ‘간단하다’는 ‘간단히’로 소리 난다. ‘이’나 ‘히’를 붙일 때 앞의 말에 ‘ㅂ’을 붙일 수 있으면 ‘이’를, 앞의 말에 ‘하다’를 붙여보아서 말이 어울리면 ‘히’로 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다. 이래 여러 말 중 위의 설명에 들어맞지 않은 말은 몇가지나 되는가. (솔직이, 간간이, 굉장이, 열심히, 헛되이, 가까이, 반듯이)
 ①3가지, ②4가지 ③5가지 ④7가지
 (문제 1)의 정답은 처음에는 ②번이었다. 그러나 당시 경기중 교장이 ②③을 모두 맞는 것으로 복수정답 처리를 했다. 이 교장은 또 ②로 채점했던 (문제 5)의 정답을 ①로 변경했다. 그러자 정답변경으로 손해를 봤다는 학부모들이 또 다시 머리띠를 두른 것이다. 경기중 교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문제 1)의 경우 ‘가장 알맞는’이라는 조건이 없다면 한 개와 정답 외에도 차선의 답도 맞는다고 봐야한다”며 “②와③을 복수정답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또 (문제 5)의 경우도 “국정교과서와 국문학자의 학설이 뒤집히지 않는 한 정답은 ①일 수밖에 없다”이라고 단언했다. 그러자 불합격자 110여 명은 ‘불합격취소’ 행정소송을 법원에 제출했다. 1년전 무즙파 학부모들처럼….
 하지만 이 소송은 결국 학부모들의 패소로 끝났다. 서울 고법특별부는 “(1번)과 (5번) 문제를 둘러싼 학자들의 의견이 구구하기 때문에 획일적인 기준이 없다”며 “따라서 재판에 의해 좌우될 문제가 아니며 학교당국의 주관에 따라 정답이 결정될 문제”라고 판시했다.(1966년 3월31일) 학교장의 재량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앞의 두 문제가 과연 12살짜리 국민학생이 풀 수 있는 수준인가. 당시 일선교사들은 “권위있는 학자들에게나 물어봐야 정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를 12살짜리 아동에게 냈다”며 “건전하지 못한 질 나쁜 문제였다”고 꼬집었다.(<경향신문> 65년 12월28일)
 

1968학년도 중학입시에서 또 한 번 말썽을 부린 입시문제. 경기중 교장이 복수정답을 인정하는 바람에 한바탕 파란을 일으켰다. 

■계속 터져나오는 잘못된 문제
 1967년 12월 6일자 신문은 우울했다.
 동베를린공작단(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정하룡·조영수·윤이상·최경희·최정길’ 등 6명에게 사형이 구형되는 등 충격적인 기사가 실린 것이다.
 그런데 신문 사회면 한편에는 그날의 사회분위기와 전혀 맞지않은 코미디 같은 기사가 실린다. 
 바로 4일 전(12월 2일) 치러진 중학교 입시의 미술문제가 잘못됐으니 시정하라는 ‘이틀째 농성’의 기사였다. 그렇다면 논란이 된 미술문제의 13번과 19번은 무엇이었는가.
 “(문제 13) 목판화를 새길 때 다음 중 창 칼 쓰는 법이 바른 것은?
 (문제 19) 우리가 조형작품을 만드는데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①꾸미기 ②만들기 ③스케치 ④협동제작
 출제자인 서울시교육위원회가 제시한 정답표의 정답은 (문제13)의 경우 ‘②앞으로 당기기’, (문제 19)의 경우 ‘③스케치’였다.
 그러나 채점이 한창이던 2일 밤 11시쯤 반전이 일어났다. 경기중학교 교장이 논란많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두 문제의 정답이 애매하다면서 복수정답을 제시한 것이다.
 경기중 교장은 (문제 13)의 경우 정답은 ②앞으로 당기기 뿐 아니라 ③뒤로 당기기도 정답이며, 문제 19의 경우 ①꾸미기 ②만들기 ③스케치 등 3답이 모두 맞는다고 했다.
 그러자 시교위의 정답표대로 답을 적어낸 수험생 학부형들이 들고 일어났다. 경기중 강당을 점령, 철야농성을 벌인 것이다.
 “시험당일인 2일 오후에 10여 대의 지프가 학교를 방문한 뒤에 정답이 바뀌었다. 특권층의 압력이 있었던 게 아니냐. 두 문제에서 정답이 한 개씩으로 채점이 되면 160점 만점에 156.7점 이상이면 합격되는데, 2~3개의 복수정답을 인정하면 커트라인이 158.6으로 높아진다. 그럴 경우 300여 명의 순위가 뒤바뀐다.”  

 

  ■행정소송의 승패는
 흉흉한 소문이 퍼졌다. 집권당(공화당) 의원의 자제가 끼어있다는 둥, 농성 학부모 중 국회의원의 사모가 있다는 둥….
 어쨌든 이 사건 역시 행정소송으로 비화됐다. 서울고법은 “특히 (문제 19)는 위법이 아니지만, (문제 13)은 도안으로 된 답을 선택하는 것인데 복수정답을 채택한 것은 교장의 재량권 남용”이라고 원고승소판결을 내렸다. (13번)만 인정해준 것이다.
 이 판결로 158.4점이던 경기중의 합격선은 158점으로 낮아졌고, 19명의 낙방생이 구제되는 길을 열었다. 하지만 1968년 10월28일 대법원은 경기중학교 교장의 정답 복수처리는 교장의 재량권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해당 코흘리개 학생들의 동심만 멍든 것이다.
 이런 불미스런 사건이 이어지자 1968년 7월15일 정부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중학교 무시험제도를 발표한 것이다.
 문교부는 일류병의 ‘악의 축’으로 지목된 경기·서울·경복·경기여·이화·경동·용산·서울사대부중·창덕여·수도여·중앙·보성·숙명·진명 등 14개 중학교를 단계적으로 없앴다고 발표했다.
 그 때부터 코흘리개 국민학생들의 입시지옥은 사라졌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을 보면 어떤가. 입학시험을 보진 않지만 초당학교 4학년이면 대학이 결정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아닌가.
 또 하나 40년 전에는 중학교 입시 때 벌어졌던 잘못된 시험문제가 대학입시에 버젓이 등장하고 있으니…. 세월이 흘러도 좋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되는 입시지옥의 현실이 아닌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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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견씨(견훤)이 왔을 때는 승냥이나 범을 보는 것 같더니 지금 왕공(왕건)이 이르러서는 마치 부모를 보는 듯 하구나.”(<삼국사기> ‘신라본기·경순왕조’
 931년 3월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이 경주를 방문하자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감읍한다. <삼국사기>는 이어 “왕건의 부하 군병들은 엄숙하고 조용했으며 어떤 조그만 물건에도 손대지 않았다”고 부연했다. 그렇다면 경순왕이 ‘승냥이나 범’으로 치부한 견훤 때는 어땠는가.
 “견훤이 927년 겨울 11월에 경주에 들이닥쳤다. 견훤은 후궁에 숨어있던 경애왕을 핍박하여 자결케 하고 왕비를 강음(强淫)했다. 부하들은 경애왕의 비첩들을 난통(亂通)했으며 공사의 재물을 노략질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경애왕조’)

경주 포석정. 경애왕이 견훤이 침략하는 사실도 모르고 술판을 벌이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

 ■견훤·경애왕·왕건·경순왕의 운명
 <삼국사기>는 한 술 더 뜬다.
 “왕(경애왕)은 왕비와 궁녀 및 왕실의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적의 군사가 쳐들어오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다.”
 ‘놀자판’ 경애왕과 ‘인간말종’ 견훤, 그리고 ‘하늘이 내린 명군’ 왕건, 그리고 그 왕건의 은혜에 감읍하며 천년 사직을 바친 경순왕….
 <삼국사기>의 기록은 절묘한 시나리오를 이루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견훤과 경애왕은 망하거나(견훤) 죽을 수 밖에(경애왕) 없었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초한전쟁을 벌인 2200년 전 유방과 항우를 보라.   
 우여곡절 끝에 진(秦)나라 수도 함양을 점령한 유방은 가혹한 진나라의 법령을 모두 폐지한 채 이른바 ‘3장(章)의 법’만을 약정한다. ‘3장의 법’이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죽이거나 남의 재물을 훔치는 자만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진나라의 가혹한 법령은 모두 폐지했으며, 유방의 군대는 함양의 재물을 절대 탐내지 않았다.
 그러나 뒤늦게 함양에 들이닥친 항우는 진나라 궁실을 3개월 간이나 불태웠고 재화와 보물·아녀자들을 약탈했다.
 또 아버지(진시황)가 세운 강대국 진나라를 즉위 3년 만에 잃은 ‘진 2세 호해’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남겼다. 백성을 핍박하는 아방궁 축조를 말리는 대신들에게 “황제가 귀한 것은 하고 싶은 일을 내 맘대로 하는 것 때문인데 무슨 소리냐”고 호통 쳤다. 사마천은 그런 호해를 두고 “마치 사람의 얼굴로 짐승의 소리를 내는 꼴(人頭畜鳴)”이라고 한탄했다. 

1934년 일제는 남대문과 동대문을 보물 1,2호로 등록하고. 고적 1호로는 경주 포석정을 지정했다. 신라의 망국을 조선의 망국으로 연결짓고,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인식을 불어넣었을 가능성이 크다.  

 ■백성의 마음을 잡는 자가 천하를 잡는다
 그 예는 최근에도 있었다. 1921년 불과 50여 명의 당원으로 출발한 중국 공산당이 28년 만에 그 막강한 국민당 정부를 물리치고 중국대륙을 통일했다.
 그런데 이 극적인 성공의 이유가 있었다. 중국 공산당의 홍군이 추구한 ‘백성 속으로’ 방침이었다. 그러면서 채택한 홍군의 ‘3대 규율’과 ‘8대 사항’은 중국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3대 규율’이란 ①모든 행동은 지휘에 따르며 ②노동자·농민의 것은 무엇 하나 가질 수 없고 ③토호들로부터 빼앗은 것은 공동 소유한다는 것이다.
 ‘8대 사항’은 ①인가를 떠날 때 잠자느라 사용한 문짝을 제자리에 걸어 놓는다 ②잠잘 때 사용한 짚단은 묶어서 제자리에 놓는다 ③인민에게 예의바르고 정중하게 대하며 가능한 한 무슨 일이고 도와준다 ④빌어 쓴 물건은 되돌려 준다 ⑤파손된 물건은 모두 바꾸어 준다 ⑥농민과의 거래는 정직하게 한다 ⑦구매한 모든 물건은 값을 지불한다 ⑧위생에 신경 쓰고 변소는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운다는 등의 내용이다.
 사실 얼마나 사소한 규칙인가.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백성을 불편하게 하면 안된다는 것이니 말이다.
 “천자의 마음에 들면 제후 노릇밖에 못하지만 백성의 마음을 잡으면 천자가 된다”는 옛말은 전적으로 옳다.

 

 ■경애왕은 한겨울에 놀자판을 벌였나
 그러나 하나 더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경애왕과 견훤은 패배자였고 왕건은 승리자였단 말이다. 만약 왕건이 패했다면 역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왕건을 ‘인간말종’으로 몰아붙였을 터이다.
 ‘역사=승자의 기록’임을 감안하고 하나 돌이켜보자. 과연 경애왕은 나라가 망하는 줄도 모르고 흥청망청 연회를 즐기다가 견훤의 침략을 맞아 속수무책으로 능욕을 당했을까.
 포석정은 과연 연회장이었을까. 또 하나의 궁금증이 생긴다. ‘놀자판’을 벌였던 포석정이 무슨 자랑거리라고 ‘사적 1호’의 이름을 붙였을까.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한가지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다.
 “경애왕이 927년 11월(음력)에 견훤이 쳐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였다”는 바로 그 대목이다.
 이미 두 달 전인 음력 9월에 이미 견훤이 경주 인근인 영주까지 쳐들어오자 왕건에게 급히 원군을 청했던 터였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점. 아무리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경애왕이 몰상식한 술판을 벌였을까. 게다가 한겨울(음력 11월)인데 노천에서 여흥을 즐겼을까. 

 

 ■포석정은 놀이터인가
 사실 포석정은 지금까지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유배거유적(流盃渠遺蹟)이라고 해석돼왔다.
 유상곡수연의 원류는 중국에 있다.
 353년 3월3일 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현의 후이치(會稽)산 북쪽에 난정(蘭亭)이란 정자에 당대 명필로 유명한 왕희지(王羲之) 등 명사 41인이 모였다.
 그들은 개울물에 몸을 깨끗이 목욕하고 모임의 뜻을 하늘에 알리는 의식을 행하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잔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읊는 놀이를 했다.
 이 놀이를 유상곡수연이라 하였고, 이때 읊은 시를 모아 서문을 왕희지가 썼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난정회기(蘭亭會記)> ‘난정집서(蘭亭集序)’이다. 이후 중국에서는 왕궁에 유배거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바로 잔을 띄우면 흘러 돌아오도록 한 시설을 말한다.
 경주의 포석정 포석이 바로 왕희지 등의 유상곡수연과 중국 왕궁의 유배거 시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창조해낸 신라 특유의 독특한 시설이라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결국 이러한 시설은 왕족이나 귀족층의 놀이 시설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돼왔다. 이렇다보니 결국 놀이만 즐기다가 나라가 망한 꼴이었다는 결론이 가능했던 것이다.

 

 ■경애왕이 포석정에 간 진짜 이유
 포석정은 과연 왕실의 놀이터였을까.
 <화랑세기>를 보면 포석사(鮑石祠), 또는 줄여서 말하는 포사(鮑祠)라는 대목이 나온다. 과연 포석정과 포석사(혹은 포사)는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포석사는 신주를 모시는 사당(祠堂) 또는 묘(廟)라는 것이다.
 <화랑세기>에는 이 포석사에 삼한을 통합한 후 사기(士氣)의 종주로 받들어진 문노(文弩)의 초상화를 모셨다고 한다. 화랑 중의 화랑으로 추앙받는 문노는 제8대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재임 579~582)였다. 그런 문노의 화상이 포석사에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또한 문노와 그 부인이 된 윤공이 그 포석사에서 결혼했다. 당시의 임금인 진평왕이 그 혼례식에 참석했다. 태종무열왕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동생 문희의 혼인식이 열린 곳도 포석사였다. 포석정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나아가 귀족들의 혼례를 거행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주장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안고 있다.
 포석정이 자리 잡고 있는 경주 배동 주변에 박혁거세의 탄생설화와 관계있는 나정(蘿井)과 천관사(天官寺)·천은사(天恩寺) 등의 유적이름에서 확인되듯 무언가 신성한 공간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다.  신궁이 설치된 장소도 월성(月城)의 남쪽으로 기록돼 있는데, 도당산(都堂山)을 거점으로 한 그 주변일 가능성이 크다. <삼국유사>를 보면 박혁거세가 최초로 궁실을 조영한 장소도 이 일대였다. 박씨의 능이 모두 이 일대에 집중돼있다는 점은 박씨가 이곳을 신성한 공간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경애왕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술판을 벌이려, 그것도 한겨울에 노천인 포석정으로 간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누란에 빠진 나라의 안녕을 간절히 빌기 위해 왕실과 귀족들을 동원해서 포석사로 간 것이었다. 거기서 간절히 1000년 사직의 유지를 빌다가 그만 후백제군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해석해야 자연스럽게 풀린다.

 

 ■포석정 사적 1호가 되다
 여기서 일제가 왜 포석정을 사적 1호로 지정했는 지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찾아보자.
 일제는 1934년 8월27일 <관보>를 통해 조선의 보물 문화재를 지정한다. 국보라 하지 않았다. 내지(일본 본토)가 아닌 식민지의 문화재였기에 보물이라 한 것이다. 내선일체를 부르짖었기에 일본의 국보는 식민지 조선의 국보라는 것이었다. 국권을 상실한 조선의 국보는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보물 1호 남대문, 2호 동대문, 사적 1호 포석정 등이 등록됐다. 왜 남대문 동대문 포석정이 우선순위로 꼽혔을까.
 분명했다. 남대문(숭례문)은 임진왜란 때 왜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빠져나온 문이었다. 동대문 역시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입성한 문이었다. 그러니까 남대문과 동대문은 조선의 기념물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일본의 전승기념물로 문화재 등록이 된 것이었다.
 포석정 역시 ‘신라의 망국=조선의 망국’으로 여기려는 일제의 숨은 의도가 담겨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적이 쳐들어왔는 데도 흥청망청 놀았던 신라망국의 상징’을 사적 1호로 삼은 것…. 그러니까 ‘너희들은 결국 식민지로 살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식의 패배주의를 심어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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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지난 몇해동안 우리나라 TV 수상기 보급 증가율은 파천황적이다.”
 경향신문 1974년 10월 12일자는 ‘부쩍 는 TV수상기 보급-전국 150만대 돌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TV수상기 증가율을 ‘파천황적(破天荒的)’이라는 표현을 쓰며 놀라워했다.
 파천황은 혼돈의 상태(天荒)을 깨뜨리는(破) 천지개벽의 상황을 일컫는다. 기사는 “KBS에 등록된 TV 수상기 대수가 150만대를 돌파했다”면서 “등록되지 않은 음성대수를 포함하면 200만대가 보급됐을 것”이라 전하고 있다. 당시 기사는 “TV 보급률이 가장 높은 나라는 모나코(1위)이며. 미국(2위), 캐나다(3위), 쉬든(스웨덴·4위)이 뒤를 잇고 있다”면서 “우리나라는 대략 25위로 추산된다”고 추정했다. 기사를 보면 ‘파천황’이 그렇게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1970년 33만5000대에 불과하던 TV 수상기 보급대수가 단 4년 만에 5배로 급증했다니까…. 1974년 당시 전국의 가구수가 550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평균 4가구 당 1대꼴이 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4년 10월10일 경향신문 기사. 당시 최고 CF스타는 최불암이라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그 뒤를 신일룡-양정화-전양자-태현실-김옥진-염복순이 따랐다고 전한다. 최불암의 모델료는 단발에 98만원이었다고 한다

 ■1974년 최고 인기스타는
 이런 분위기는 이미 한 달 전인 74년 9월 18일 기사에서 흘러나왔다. 경향신문은 “TV 세트의 보급이 늘어남에 따라 안방극장 스타 탤런트들의 주가가 날로 높아진다”면서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영화스타의 인기를 못따르던 그들이 이제는 완전히 스크린 스타와 치환의 전환점을 이르렀다”고 전했다.
 그러니까 1974년 무렵에 TV 탤런트의 인기가 영화배우의 그것을 능가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한 것이다. 신문은 이어 “TV 탤런트 지망생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면서 ‘좁은 문’을 뚫고 공채로 들어간 3TV(KBS MBC TBC) 탤런트들의 동향과 저간의 사정을 전하고 있다.
 기사를 보면 해마다 봄철에 뽑는 MBC의 경우 2500여 명이 응모해서 30명 안팎의 합격자를 추렸다. 합격된 탤런트들은 6개월의 교육을 거쳐 ‘0기생(期生)’이라는 이름의 탤런트 병아리가 된다는 것. 신문은 “병아리 시절의 출연료는 20분물 드라마 1회당 600원인데, 이는 그야말로 교통비 밖에 안된다”고 전했다. 관록이 쌓여 5년이 지나야 비로소 5000원선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탈락자가 생겨 5년이 지나면 4분의 1정도가 중도탈락한다는 것이다.
 신문은 1970년 초봄과 가을에 뽑은 2·3 탤런트들 가운데 양정화·박원숙·김민정·문관호(이상 2기), 김영애·염복순·김수미·국정환(이상 3기) 등이 한창 인기를 얻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KBS의 경우 딱 한 번 공모를 통해 탤런트를 선발했는데, ‘흑진주’에 출연 중인 김금자가 각광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KBS는 향후 공모절차 없이 매주 일요일에 방송되는 ‘신인탄생’이라는 신인등용문 프로그램에서 기말결선을 거친 탤런트들을 훈련시켜 데뷔시킬 작정이라고 소개했다.

 

 

1974년 9월18일자 '경향신문'. TV스타가 영화배우의 인기를 능가하기 시작했음을 알리고 있다. 당시 햇병아리 MBC 탤런트의 개런티는 교통비 정도인 600원이었음을 전하고 있다. 5년이 지나야 6000원의 출연료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최고 CF 스타는 최불암
 현재 공모중이라는 TBC의 응모자격은 ‘고졸 이상에 연령제한은 없고, 여고 3학년 재학생도 포함된다’는 것이었다
 TBC의 경우 공모 외에도 스카웃 제도를 병행하고 있는데 누구든 직원 눈에 들어 추천되는 신인은 심사위원회 심사를 통해 특채가 결정된다고 했다. 직원 눈에 들면 특채의 길이 열린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선발방식이다. 그런데 이런 스카우트의 방식으로 특채된 탤런트 가운데 ‘어머니’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맡은 안옥희가 있다고 전했다.
 이밖에 “TBC에서 큰 역을 맡고 있는 탤런트 가운데는 오세나와 연운경·김효원 등이 있다”고 했다.

1974년 10월10일 방송프로그램. 지금 봐도 기억나는 레전드 프로그램이 많다. '꽃피는 팔도강산, '딱다구리', '여보 정선달' 등이다. 

 

 1974년 당시 광고 모델 중에서 ‘넘버 1’도 탤런트인 최불암이었다. 10월11일자를 보면 최불암은 보험회사 CF에 1번 출연하고 98만원 받았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단발’ 모델료로는 최고액이었다고 전했다. 최불암의 뒤를 잇는 인기모델로는 신일룡-양정화-전양자-태현실-김옥진-염복순의 차례라 했다.
 참고로 1974년 10월 10일자에 실린 TV라디어 프로그램을 보면 지금도 기억나는 레전드급 프로그램이 보인다. KBS의 가족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과 TBC의 ‘딱따구리’ 등이다. ‘꽃피는 팔도강산’은 김희갑·황정순 부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자식들을 찾아가는 가족드라마였다. ‘딱따구리’는 ‘에헤헤헤헤~’라는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어린이 외화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밖에 그 해 8월15일에 일어난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을 다룬 드라마 ‘조총련’(KBS)과 ‘올 겨울 연탄사정은 어떨까’를 전망하는 ‘경제기상도’(TBC), 백설희의 데뷔시절 에피소드를 곁들여 구성된 ‘스타쇼-백설희 아워’(KBS) 등도 눈에 띈다.

 

 ■TV가 라디오를 앞선 그 순간
 사실 TV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조짐은 이미 2년 전에 나타났다.
 경향신문 1972년 10월과 11월 사이에 실린 방송(TV·라디오) 프로그램을 비교해보면 간파할 수 있다.
 즉 10월 31일자 게재된 각 방송국별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라디오와 TV가 같은 비중으로 나란히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11월 1일자를 보면 확 달라진다. 각 사의 TV프로그램이 AFKN과 함께 상단부에 오르고, 라디오 프로그램이 하단부로 깔린 것이다.
 라디오의 아성을 뚫고 TV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1972년 11월 1일자 TV프로그램을 보자. TV 방영시간은 ‘오후 5시~밤 11시 이후까지’이며, 아침은 ‘7시~11시까지’다.
 먼저 당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TV시대 개막을 재촉한 KBS ‘여로’가 오후 7시30분부터 20분간 방영된다.
 다른 KBS 드라마는 ‘이춘풍전’, ‘신부들’ 등이 잇달아 편성됐다. MBC는 ‘임꺽정’, ‘아다다’, ‘선생님’ 등이, TBC는 ‘사모곡’, ‘생명’, ‘여보 정선달’, ‘비밀’ 등이 연속 편성됐다.
 가히 드라마 천국이라 할 수 있다. 영화로는 ‘보난자’, ‘타이거마스크’, ‘달려라 꾀돌이’ 등이 방영된다.

1972년10월31일 방송프로그램. 라디오와 TV가 같은 비중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래도 라디오였다
 라디오 편성을 보면 정겨운 프로그램들이 눈에 띈다.
 ‘우리의 국군’, ‘젊은이의 행진’(이상 KBS 710㎑), ‘이종환쇼’, ‘전설따라 3천리’, ‘한 밤의 음악편지’, ‘푸른 신호등’(이상 MBC 900㎑), ‘소년극장-손오공’, ‘드라마 일제 36년사’, ‘밤을 잊은 그대에게’, ‘가로수를 누비며’, ‘유쾌한 샐러리맨’(이상 TBC 640㎑), ‘특별수사본부’, ‘밤의 플랫폼’(이상 DBS 790㎑), ‘마음의 문’, ‘꿈과 음악사이’, ‘척척박사’(CBS 840㎑) 등….
 ‘우랑버리 바나라부릉….’하는 주문과 함께 요술을 부리는 손오공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을 때리고. 숨죽이며 들었던 ‘전설따라 3천리’의 기억도 새롭다.
 지금도 눈먼 시어머니에게 지렁이를 먹이던 며느리의 악행을 담은 이야기가 어제의 이야기처럼 생생하다.
 또한 달콤한 ‘밤의 플랫폼’,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오프닝 음악이 지금 들리는 듯 하다. 아침에는 ‘푸른 신호등’과 ‘가로수를 누비며’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던 기억도 새롭고…. 
 그러고보니 72년 당시 TV가 없었던 필자로서는 TV가 있는 친구집을 찾아 친구의 텃세를 감수하고 ‘여로’를 숨죽이며 보았던 추억도 떠오른다.
 그런 상황이니 여전히 보기 어려웠던 TV보다는 벽돌 모양의 라디오를 노상 틀어놓고 끼고 살았던 기억이 더 생생할 수밖에 없다.

 

 ■10월 유신 홍보프로그램
 각설하고 다시 방송프로그램을 살펴보니 각 방송국별로 흥미로운 프로그램들이 집중 편성됐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10월 유신’을 홍보하는 프로그램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KBS의 경우 ‘유신헌법 해설’이 15분간(10시 20분부터) 편성돼있고, 곧이어 ‘통일주체의 형성’을 제목으로 한 보도특집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MBC는 ‘유쾌한 청백전’, 드라마 ‘새엄마’에 이어 ‘새질서의 태동’이라는 특집 프로그램이 방영된다.(밤 9시 20분) 10시 30분엔 ‘오늘의 좌표’(새 체제와 한국경제)가 편성됐다.
 TBC는 밤 10시 30분부터 ‘유신헌법과 민족의지’를 주제로 특집좌담회를 연다.
 10월 유신이란 무엇인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헌법 일부조항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4개항의 비상조치를 포함한 특별선언과 함께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즉 ‘①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 의 일부 조항의 기능 정지, ②효력이 정지된 일부 헌법조항의 비상국무회의에 의한 수행, ③비상국무회의에 의한 헌법개정안의 마련, ④비상국무회의가 마련한 유신헌법안은 11월 21일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 등이 주요 골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내건 명분은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헌정중단을 통한 장기집권을 노린 이른바 유신체제의 출범이었다.

 

 1972년 11월1일자부터 TV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치고 상단에 자세히 소개된다. TV시대의 개막을 상징하는 것이다. 당시 TV에는 10월유신을 홍보하는 특집프로그램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공전의 흐트를 기록한 '여로'도 방영되고 있다.

 ■TV프로그램의 민낯
 갑작스런 헌정 중단으로 어리둥절한 사람들에게 ‘학습’이 필요했다. 따라서 10월 17일 이후 각 매체를 동원. ‘유신헌법’과 ‘유신체제’를 홍보하는데 혈안이 된다,
 지금도 ‘10월 유신체제의 길로 접어들면 번영국가. 다른 길로 들어서면 해골이 우글거리는 낭떠러지’임을 강조하는 홍보 팜플렛이 필자의 뇌리 속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물론 이같은 지속적이고 강압적인 선전홍보전 때문이었을까.. 유신헌법은 국민투표에서 92.9%의 투표율에 91.5%의 찬성률로 통과됐다.
 두 달 뒤인 12월 23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놀라운 투표결과가 벌어졌다. 박정희는 이날 총 2359명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전원이 참석, 무효 2표를 제외한 2357명의 찬성표로 제8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기네스북에 나올만한 투표율에, 기네스북에 나올만한 찬성표를 얻어 당선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견고할 것 같았던 유신체제는 9년 만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으니…. 무리하고 강압적인 체제는 그만큼 사상누각이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옛날 신문을 뜯어보고 있노라면 신문이 아주 훌륭한 역사책임을 절감할 수 있다.
 어느 순간의 TV프로그램 하나만 곰곰히 들춰봐도 그 시대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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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는 조기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정권입니다.”
 중국 지안(集安)의 광개토태왕릉 위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면 누구든 감상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그야말로 절대 넘을 수 없는 군사분계선 철책을 돌고 돌아 중국대륙으로 우회해서 온 길이 아닌가. 압록강엔 철책이 없다. 북한 땅, 북한 사람들이 손에 닿을듯, 마음에 닿을 듯 가깝다. 그러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왕릉을 내려와, 그 거대한 광개토대왕비를 바라보면 또 한 번 상념에 젖을 수밖에 없다. 7m에 가까운 비석에 새겨넣은 1800자에 이르는 명문….
 명문에 표현된 대로 비문의 주인공은 바로 ‘광활한 영토를 개척한’(廣開土) ‘왕중의 왕’(太王)이 아닌가. 압록강 이남 한반도로 쪼그라들고, 그 조차 군사분계선으로 양분된 영토를 지하에서 바라보는 광개토태왕의 심정은 어떨까. 이곳을 찾는 답사객들은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애국자가 되어 고구려의 옛 영화를 떠올리며 비감(悲感)에 빠지게 된다.
 그것을 지나친 국수주의라 폄훼되어 손가락질 받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9월 24일, 이곳에 선 필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 9월24일 장군총(장수왕릉)이 자리잡고 있는 중국 지안(集安)의 이른바 고구려 28대왕 박람관 앞에 서있는 한글 안내판. 고구려가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며. 당나라와의 내전 끝에 철저히 소멸됐다는 내용이 쓰여있다. |필자촬영

 ■고구려는 ‘철저히 사라졌다’
 왠지 ‘센치’ 해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장군총(장수왕릉)까지 친견하고 내려오면 ‘비감’은 ‘비분강개’로 변한다.
 앞서 인용한 대로 ‘고구려 제28대왕 박람관’을 소개하는 안내문의 내용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가슴에 대못을 박듯이 ‘고구려는 역대로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었다’는 문구가 선명하니…. ‘2012년 6월28일 지안(集安) 고구려 민속문화연구 발전센터’ 명의로 된 안내판은 중국어와, 그 중국어를 번역한 ‘한글판’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14줄에 불과한 한글 안내문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면 흥미로운 점을 간파할 수 있다.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정리한 ‘고구려사 인식’이 함축돼있으니 말이다. 우선 ‘고구려=조기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정권’이라는 인식은 동북공정이 낳은 핵심 인식이다.
 그 뿐이 아니다. 안내문을 보면 ‘고구려 정권은 705년 동안 동북아 문명사의 눈부신 자태를 자랑했다’고 상찬했다. 그러나 다음 문장을 보라.
 “기원 668년 당나라에서 일어난 국내전쟁으로 고구려 정권은 철저히 소멸됐다”고 했다.
 그러니까 중국 동북의 소수 민족 정권인 고구려는 중앙의 당나라 정부와 내전을 벌였으며, 그 내전에서 패하는 바람에 ‘철저히’ 사라졌음을 강조하고 있다.
 안내문은 그것도 모자라 “고구려 정권의 발생이 필연적이지만, 그의 소망(消亡·소멸해서 멸망함)도 필연적이었다”고 못박고 있다.
 한마디로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정권인 고구려는 중앙정부(당나라)에게 감히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철저히 멸망해서 사라졌는데, 그 멸망 또한 필연적인 수순이라고 강조점을 찍은 것이다.

광개토태왕릉 정상에서 바라본 압록강 너머 북한 땅. 손에 닿을 듯 지호지간이다.|필자촬영

 ■동북공정의 결과물
 그러니까 안내판이 주는 시사점은 대략 3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1)고구려=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라는 점. 2)소수민족의 지방정권에 불과한 고구려가 중앙정부(당나라)와의 내전을 통해 완전히 멸망해서 소멸됐다는 점, 3)고구려의 멸망은 필연적인 역사의 순리라는 점 등이다. 여기서 중국이 2002년부터 추진했던 동북공정이 과연 무슨 프로젝트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동북공정을 한마디로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과제(공정)’이다.
 현재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여러 연구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즉 중국과 국경을 맞닿은 20여 개 소수민족의 통합을 겨냥한 정치공작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20여 개 민족은 조선족, 베트남족, 위구르족, 러시아족 같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를 가지고 있는 중국 내 소수민족을 뜻한다. 중국은 계층간·지역간·민족간 격차 등 갖가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이런 공작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동북공정은 티벳을 겨냥한 서남공정, 위구르족을 겨냥한 서북공정과 함께 중국의 3대 공정 중 하나로 꼽힌다. 이밖에 미얀마·태국·라오스·베트남 국경을 겨냥한 ‘남방공정’, 몽골을 겨냥한 ‘북방공정’, 타이완·하이난(해남도)·오키나와·필리핀 등을 겨냥한 ‘해양변강공정’ 등 다양한 공정(프로젝트)의 이름들이 운위되고 추진됐다.
 이것은 “중국 내 56개 민족 간 분쟁이 일어나면 나라가 망한다”(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언급)는 초조감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동북공정은 중국의 핵심지역으로 떠오른 동북 3성 지역의 역사, 그러니까 고구려·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특히 중국은 2001년 한국이 제중동포의 법적지위에 대한 특별법을 국회에 상정하고, 북한이 고구려 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신청하자 동북공정을 서두른 것으로 보인다. 만약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받으면 중국은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인정할 명분을 잃게 된다. 중국으로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 멀게는 한반도 통일 이후 일어날 수도 있는 영토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뜻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한 이유가 된다. 

광개토태왕릉 원경. 영토를 개척한(광개토) 왕중의 왕(태왕)의 능이지만 국경선(압록강)에 막혀있는 형국이다.|필자촬영 

 

■고이족=고구려족
 이 공정은 학술적인 프로젝트가 아니라 정부기관이 앞장서 추진하는 정치적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우려를 샀다.
 그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고구려와 발해가 어느 새 중국 지방정권의 역사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분야는 고구려사 연구였다.
 고구려를 한국·북한의 역사에서 단절시키고 중국의 소수정권으로 편입시켜야 그 뒤의 이야기가 술술 풀리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고구려의 기원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이전까지 중국의 고구려 기원연구는 예맥기원설과 부여기원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고이족(高夷族) 기원설과 상(商)족 기원설, 염제족 기원설, 다민족 기원설 등이 새롭게 개진됐지만 단편적인 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갑자기 힘을 얻기 시작한 고이족 기원설은 동북공정 추진과 함께 더욱 활발하게 논의됐다.
 고이족 기원설이 무엇인가. 이 설은 4세기 진(晉)나라 공조(孔晁)가 <일주서(逸周書)> ‘왕회해(王會解)’에 보이는 고이(高夷)를 두고 주석을 단 것에 주목한 설이다.
 그렇다면 <일주서>란 어떤 책인가. 중국 주나라의 역사서가 <주서(周書)>인데, 원본은 유실되고(逸) 남은 편들로만 구성돼있다고 해서 <일주서>라 한다.
 <일주서> 가운데 ‘왕회해’는 고대소수민족의 분포도와 그들 민족과의 관계 등을 서술해놓았다.
 4세기 진나라 시대의 공조라는 인물이 고이족을 설명하면서 “고이는 동북이인 고구려다.(高夷東北夷高句麗)”라는 주석을 달아놓은 것이다.

 

 ■고구려는 중화민족의 한갈래
 이것이 단서가 된 것 같다.
 어떻게든 ‘중국=고구려’의 상관관계를 찾던 중국학계는 (고구려의 선조인) 고이족의 선대를 전설적인 인물인 전욱 고양씨와 연결시킨다.
 바로 고이족의 기원을 전욱 고양씨로 확정하고자 한 것이다. 전욱 고양씨가 누구인가. 그는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기는 황제(黃帝)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 물론 전설상의 인물이다. 중국학계는 ‘난생족 신화, 조우삽관(鳥羽揷冠)의 풍습 및 귀신숭배사상 등이 양국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다’면서 고구려를 전욱 고양씨의 후손이라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학계가 인용하는 또 하나의 증거로 <진서> ‘모용운재기(慕容雲載記)’가 있다. 즉 모용운(?~409)의 할아버지인 모용화가 고구려의 한 지파여서 스스로 고양씨의 후예를 자처하며 고(高)를 자신의 성(姓)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용운의 원래 이름은 고운이었지만 전연으로 끌려간 뒤 훗날 후연 왕을 죽이고 대연(大燕)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어떻든 중국학계 일각에서는 이같은 사례들을 묶어 ‘전욱고양씨→고이족→고구려족’이라는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결국 고구려의 조상은 고이이며, 고이는 중화민족의 한 갈래인 전욱 고양씨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도 지안의 고구려 유적 안내판에 버젓이 나와있는 대로….

복원해놓은 지안 시내 한복판의 국내성. 그러나 아침이 되자 성 밖은 시장바닥으로 변해있었다.

 ■중국사라면서 왜 동이열전에 넣었는가
 하지만 이같은 중국학계의 주장은 너무도 많은 허점이 있다.
 우선 고이족설에 힘을 실은 <일주서>가 믿을만한 역사서이며, 공조의 주석도 가치가 있다는 점을 전제로 깔고 있다.
 하지만 주변 소수민족의 이야기를 담은 <일주서> ‘왕회해’이 서주시대의 사실을 전하는 지는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예컨대 劉起오는 <일주서> ‘왕회해’는 전국~한나라 시대에 이르러서야 성립됐다고 했다. 또 호념이(胡念貽)도 “왕회해편이 허구적인 내용이 많아 주 성왕 시대의 역사를 고증할 수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무엇보다 고이족과 고구려 사이에는 1000년 가까운 시차가 존재하는데다 고양씨의 고(高)로 고양씨·고이, 그리고 고구려를 연결시키는 것인 억측이 아닌가.
 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있다.
 중국 위·촉·오의 역사를 다룬 <삼국지>를 보라. 그 가운데 위나라 역사를 다룬 ‘위서·오환선비동이전’에서 부여·고구려·동옥저·예·마한·진변·왜의 역사는 ‘동이전’에 포함돼 있다.
 무슨 뜻인가. 부여·고구려·동옥저·예·마한·변진·왜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 동이의 역사라는 분명한 뜻이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233~297)는 오환·선비·동이의 역사를 중국사가 아닌 다른 계통의 역사로 인식한 것이다.
 그 뿐인가. 당나라 때 지은 <주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이역열전(異域列傳)’에 기록했다. 이박에 <후한서>와 <수서>, <남사>, <북사> 등 중국의 정사(24사)를 보더라도 예외없이 ‘동이(열)전’에 고구려 등의 역사가 포함돼 있다. 부여·고구려·백제·신라 등이 중국 역사라면 왜 중국의 정사가 그 역사를 이민족의 역사로 표현했을까.
 이밖에 최광식 교수(고려대)는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등장하는 부여·고구려·예·삼한의 제천대회를 주목하고 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삼한의 계절제는 모두 제천의례라는 것.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제천의례는 이 나라들이 제후국이 아니라 독자적인 정치체제였음을 웅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부식마저도…
 최교수는 <광개토대왕비문>의 ‘천제지자(天帝之子)’나, <모두루묘지명>의 ‘일월지자(日月之子)’ 등의 표현은 모두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라는 것.
 고구려는 또 신라를 동이(東夷)라 부르는 등(중원고구려비문), 신라와 백제를 제후로 삼고 천자의 역할을 했다는 점도 심상치않다. 이외에도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은 영락(永樂)과 연가(延嘉)의 독자연호를 사용했다. 이 모두 고구려가 절대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 아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뿐인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은 뒤 올린 이른바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를 보라.
 “오로지 해동의 삼국이 지나온 세월이 장구하니~ 신라·고구려·백제는 나라를 세워 솥발처럼 맞서서 능히 예로써 중국과 상통하였습니다. 범엽(范曄)의 <후한서>나 송기(宋祁)의 <당서>에 모두 (고구려 등을 다룬) 열전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국내의 일은 자상하게 다루고 국외의 일은 허술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갖추어 싣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에~”(<동문선> 제44권 ‘표전’)
 김부식이라면 사대주의 사관에 젖었다는 악평을 듣는 이가 아닌다.
 그런 김부식도 고구려·신라·백제를 ‘삼국’이라 하면서 “<후한서>나 <당서> 등 중국의 사서에서 소홀히 다룰 수밖에 없었던 외국(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온전히 다루려고 <삼국사기>를 편찬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장군총의 원경. 그런대로 정비된 모습이다.|필자촬영

 ■대조영은 말갈인?
 또 다른 한가지…. 고구려 유적의 안내판에 나오는대로 ‘고구려의 역사는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철저히 소멸됐고, 그것은 필연의 역사’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니 고구려에 이어 발해까지 ‘당나라의 지방정권인 (속말) 말갈의 정권이며, 당나라의 문물과 정체제도를 받아들여 해동성국이 됐다’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학계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은 일찍이 고구려의 통치에 예속됐던 속말말갈인 출신이라는 것. <구당서>는 “대조영은 고구려의 별종”(<구당서>)이라 했고, <신당서>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부속된 자이며 성이 대씨”라 한 내용을 풀이한 것이다. 물론 중국학계는 발해의 주민 대다수가 말갈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오랫동안 고구려에 부속됐던 속말말갈인이 민족융합을 통해 새로운 족, 즉 발해족을 형성하여 고구려족과는 다른 구성원이 됐음을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발해족에는 속말말갈인과 고구려인 뿐아니라 한족까지 유입된, 이른바 ‘한화(漢化)된 말갈족’으로 규정하는 이들도 있다.
 이 ‘한화된 말갈족’ 즉 고구려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은 ‘발해족’이 차츰 한족에 흡수·소멸됐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흔적인 역사와 함께 철저히 소멸됐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최치원과 서희의 활약
 과연 그럴까. 
 해동성국인 발해가 존재했을 때의 인물인 신라 최치원의 글을 보면 적나라하게 나온다. 872년 최치원이 당나라 예부상서에게 발해를 욕하면서 보낸 상소문의 내용이다. 
 “고구려의 미친 바람이 잠잠해진 뒤 잔여세력이 나타나 남은 찌꺼기를 거두어 모아~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로 바뀌었습니다.”(<고운집> ‘여예부배상서찬장·與禮部裴尙書瓚狀’)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로 바뀌었다는 이 표현…. 당대의 말인 이 최치원의 표현을 뒤집을 수 있는 다른 증거들이 있는가.
 온통 발해를 욕하는 내용이지만 발해가 고구려를 이어받았음을 적나라하게 기록해 둔 것이다. 당대의 기록이므로 후대에 쓴 역사책 보다 훨씬 신뢰할만하다.
 또 하나, 중국학계는 고구려와 고려는 전혀 상관없는 나라라고 강변한다. 고(高)씨의 고구려와 왕(王)씨의 고려가 무슨 친연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기록을 보라.
 993년,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이 고려를 침공하면서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있다.
 “대조(大朝·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이제 너희 나라가 강토의 경계를 침탈하니 이 때문에 정토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희대의 외교관인 서희가 나서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 무슨 소리인가.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다. 나라 이름을 봐라. 고구려를 계승했다 해서 고려라 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평양에 도읍을 둔 까닭이다. 또 고려가 거란의 영토를 침식하고 있다고? 아니다. 그 사이 여진이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그 때문에 고려가 거란을 찾아 조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손녕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서희의 논리에 막혀 꼼짝도 못하고 이른바 강동 6주까지 내주고 만다.(<고려사절요>)
 지금와서 고구려와 고려는 전혀 관계없는 나라라고 강변한 중국의 논리라면 매우 중요한 모순을 낳는다.
 중국의 왕조는 한족과 북방민족이 교대로 번갈아가며 중원을 차지하면서 이어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송나라와 그 뒤를 이은 금나라, 명나라와 그 뒤를 이은 청나라는 과연 어떤 친연관계가 있고, 어떤 계승성이 있는 것인가.

중국은 예로부터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이북은 오랑캐 땅,이남은 중국 중원이라 했다. 그러나 만리장성 이북에서 황허문명을 능가할 신석기 문명(훙산문화) 등이 등장한데다 동북공정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만리장성의 길이를 늘리는 방법으로 대처했다.

 ■질질 늘인 만리장성
 중국의 역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아서는 안될 착안점이 있다.
 바로 만리장성이다. 중국은 왜 춘추전국시대부터 만리장성을 쌓는데 골몰했을까.
 그것은 만리장성을 사이에 두고 그 이북은 오랑캐의 땅, 그 이남은 한족(漢族)의 땅이라 분명히 선을 그은 것이다. 
 한족의 역사는 이 만리장성을 사이에 두고 이민족과 벌인 처절한 혈투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고구려는 비슷한 의미로 천리장성을 쌓아 고구려와 당나라의 경계로 삼고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했다.
 그런 마당에 장성 이북의 역사를 모두 중국의 역사라고 끌어들이니 무리한 왜곡과 과장의 역사가 남발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그 만리장성의 길이를 만리장성 길이를 8800여㎞(약 2만2400리)로 늘렸다.(2009년) 고구려성이 분명한 박작성(泊灼城·압록강 하구에 있는 성)을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2012년에는 더 화끈한 일을 저질렀다. 중국 국가문물국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하미(哈密)~헤이룽장성 무단장(牧丹江)까지 만리장성의 길이가 2만1196㎞라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부여나 발해, 혹은 금나라 때 쌓은 성까지 모두 장성이라고 한 것이다. 만리장성이 아니라 ‘사만리장성’, 아니 정확한 거리로 치면 ‘오만육천리장성’이라고 할 만 하다.

 

 ■저우언라이, ‘중국역사는 왜곡됐습니다.’
 이 대목에서 영원한 중국의 총리인 저우언라이(周恩來)의 통찰력있는 역사인식을 상기해보자. 
 1962년 북한이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겠다”면서 “중국 동북방에서 고고학과 발굴조사를 펼치겠다”고 제의했다. 남의 나라에서 자국의 원류를 찾겠다는 것이 아닌가. 외교적인 결례였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통큰 결단을 내린다. 조·중 합동발굴대의 구성을 허락한 것이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저우언라이는 1963년 6월 28일 북한의 조선과학원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매우 중요한 발언록을 남긴다.(‘외사공작통보’)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그는 ‘조선’을 서술한 역사책과 역사관이 대중화(大中華)의 관점에서 왜곡되고 과장 혹은 축소됐음을 인정한 것이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에 살아왔다. 랴오허(遼河), 쑹화강(松花江) 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저우언라이는 그 증거까지 내민다.
 “랴오허와 쑹화강, 두만강 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고,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징보호(鏡泊湖) 부근에 대진(발해)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진의 수도(상경 용천부)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조선의 지파였다는 사실이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의 잦은 침략과 역사왜곡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중국은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 모욕하면서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진·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복했는데, 분명한 침략이다.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지만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진(발해)이 일어났다.”

 

 ■저우언라이, “두만강·압록강 서쪽은 중국땅이 아닙니다.”
 흥미로운 점은 저우언라이가 랴오허 유역을 중국의 ‘침략의 대상’, 즉 조선·고구려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붙여 작게 하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는 더 나아가 “두만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땅이었다든가, 심지어는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라고 했다. 만주 일대와 랴오허 유역은 결코 한족의 땅이 아니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역사학자들의 붓 끝에서 나온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한다”면서 “조·중 관계사를 공동으로 연구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의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공동조사를 끝낸 막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모든 학술조사는 중단됐으며 수정주의자, 주자파로 낙인 찍힌 지식분자들은 줄줄이 숙청됐다. 안타까운 일이다. 여기서 궁금한 대목 하나.
 저우언라이는 사해동포주의자인가. 아니었다. 그처럼 중국과 중국인을 사랑한 중화주의자도 없었다. 이런 일화가 있다.
 국공내전 때 어느 기자가 그에게 “중국인과 공산당원이라는 신분 가운데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저우언라이는 한치의 망설임없이 “중국인이라는 신분이 더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는 맹목적인 한족 중심의 대국주의와, 그를 위한 역사왜곡을 배격했다. 그것이 저우언라이가 중국을 사랑한 방식이었다. 

 (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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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재위 906~926)이 흰옷을 입고 양을 끌고 신하 300여 명과 함께 항복했다.”
 요나라의 역사를 다룬 <요사>가 전하는 발해 최후의 모습이다. 15대 229년 만에 멸망하는 바로 그 순간….
 그런데 이 역사의 순간을 반추할 때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해동성국의 명예를 얻었던 발해의 최후가 너무도 허망했다는 것이다. 역사를 곱씹어보자.
 “(거란이) 발해의 ‘민심이 멀어진’(離心) 틈을 타(乘) 군사를 움직여 싸우지 않고 이겼다.(不戰而克)”(<요사> ‘야율우지전’)
 무슨 말인가. 925년 12월 말, 거란군이 출병한다. 발해의 부여성을 포위한 뒤 단 3일 만에(926년 1월3일) 성을 함락시킨다.
 거란군의 선봉은 도중에 발해 노상의 3만 대군을 격파하고, 단숨에 상경(발해 수도)의 홀한성을 포위한다.(1월 9일) 그러자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이 단 3일 만에(12일) 항복을 청한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거란이 부여성을 함락시키고 수도인 상경 용천부 홀한성을 포위하는데 걸리는 기간은 불과 6일이었다.
 부여성~상경 용천부의 거리는 약 400㎞. 중간에 험준한 산악지대가 있고, 발해 노상의 3만 군대까지 만났는데…. 발해는 거란의 공격을 받고 불과 보름도 안돼 멸망의 나락에 빠진 것이다.

지난 9월 말 백두산 장백폭포 밑에서 찍은 노천온천수의 모습. 전문가들은 지금 백두산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입을 모은다.|필자 촬영

 ■발해 최후의 순간
 역사를 더 들춰봐도 수수께끼 같은 일이 속출한다.
 발해가 멸망하기 직전인 925년 발해인들이 대규모로 고려에 투항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 태조 8년(925년) 9월, 발해장군 신덕 등 500명이 내투하다. 발해 예부경 대화균 등이 100호의 균노 사정 대원균, 공부경 대복모, 좌우위장군 대심리 등 100호의 백성을 이끌고 내부하다. 12월에는 좌수위소장 모두간, 검교개국남 박어 등이 1000호의 백성을 이끌고 투항하다.”
 그러니까 발해의 왕·귀족과 장관들이 멸망(926년) 하기 몇 달 전부터 대규모 ‘엑소더스’에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거란이 밝힌 발해의 멸망 이유, 즉 민심의 이반(離心)을 뜻하는 것일까. 학자들은 이 민심의 이반, 즉 이심(離心)의 실체를 찾으려 애를 썼다.
 예컨대 지배세력인 고구려인과 피지배세력인 말갈인 사이의 모순, 귀족들의 사치생활, 그리고 통치계급 내부의 모순 등….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발해 사회 내부의 모순을 가리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발해 최후의 왕인 대인선이 흔히 말하는 망국의 군주였다는 증거도 없다. 대인선은 903년 이후 20여 년 간 거란의 랴오둥(遼東) 공세에 잘 대처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남쪽의 후삼국과 중국의 5대, 일본은 물론 거란과도 교섭하면서 외교관계를 맺었다. 특히 신라와도 동맹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런데도 대인선은 거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항서를 써버린 것이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이 있다. 내분 때문에 왕·귀족이나 장군들이 망명했다면 극소수만이 탈출했을 터인데, 적게는 500명, 많게는 1000여명 씩이나 백성들을 인솔하고 망명하고 있다. 과연 발해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올 9월 말의 천지 모습. 백두산이 폭발하면 20억톤에 이르는 천지물이 범람하게 된다.

 ■엑소더스
 발해 멸망 이후에도 엑소더스 행렬은 상상을 초월한다.
 먼저 발해 멸망 직후와, 동란국 천도와 함께 강제이주 당한 발해인은 9만4000여호(<요사>)에 이른다. 1호당 가족이 5명이라면 47만명, 즉 50만명에 가까운 숫자다.
 흥미로운 것은 거란이 발해인을 강제 이주시킨 뒤 많은 마을(현)을 폐쇄했다는 것이다. 이를 폐현(廢縣)이라 한다. <요사>를 보면 거란이 퍠쇄시킨 마을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 두망강, 쑹화강 유역과 동해안의 읍락 및 연해주 지역이다.
 고려 망명 행렬도 만만치 않았다. <고려사> 등을 종합하면 50년간 고려행을 택한 이른바 ‘탈발자(脫渤者)’는 10만 여 명으로 집계된다.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유민을 포함하면 20만~30만명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이 가운데 934년에 있었던 발해세자 대광현의 고려망명은 유독 눈에 띈다.
 “발해세자 대광현이 수만명의 무리를 이끌고 내투했다. 그에게 왕계(王繼)라는 성명을 내리고…. 발해왕실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고려사>) 
 8년 전 망한 나라의 세자인 대광현은 대체 무엇 때문에 망명한 것일까.

 

 ■백두산 화산폭발과 발해
 그래서 조심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백두산 폭발설이다.
 10세기 어느 날 백두산이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는 것은 사실이다.
 과학자들은 10세기 백두산의 ‘화산폭발지수(VEI·Volcanic explosivity index)’가 7급이라고 계산하고 있다. 백두산 화산이 뿜어낸 화산쇄설물(테프라·Tephra)의 용적은 83~117㎦(최대 150~170㎦)로 추정된다. 이것은 역사시대, 즉 지난 2000년 전 지구상에서 일어난 화산폭발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얼마나 큰 규모인가. 남한 면적이 약 10만㎢이고, 이것을 ㎡ 단위로 환산하면 1019㎡이 된다. 그런데 테프라 용적 100㎦=1019㎥이다. 따라서 10세기 백두산은 단 한 번의 분출로 남한 전체를 1m 높이로 퇴적시킬 수 있는 화산물을 쏟아낸 것이다. 얼마나 엄청난 위력인지 다른 분석을 보자.
 일본 군마대팀이 개발한 독자적인 화산폭발 규모를 보면 10세기 백두산 화산폭발 규모는 M=7.4였다. 그 뒤를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폭발(7.1)이 이었다. 화산 폭발로 해발 3800m의 산은 1400m나 낮아졌다. 사망자는 10만명에 이르렀다. 지구의 기온은 급강하했으며, 1816년은 여름이 없는 해가 되는 등 이후 15년간 이상기후에 시달렸다.
 기원후 61년 폼페이를 두께 6m로 순식간에 매몰시킨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규모는 어떤가. 그야말로 새발의 피다.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규모는 M 5.8이었다. 화산재의 용량은 2㎦였다. 백두산 화산의 규모는 M 7.4, 100㎦였으니 베수비오 화산 50개가 터진 것과 같은 규모이다.
 1991년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폭발규모(체적 5㎦)도 백두산의 1/20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화산재는 새계를 일주했다. 지난 2010년 봄 아이슬란드 에이야프얄라요 화산에서 분화된 화산분출물의 양은 0.1㎦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세계경제는 휘청거렸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 모습. 거란은 불과 보름만에 해동성국인 발해를 멸망시켰다. <요사>는 '민심의 이반 때문에 싸우지 않고도 멸망시킬 수 있었'고 기술했다. 그러나 화산폭발 때문에 갑자기 망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몇가지 착안점
 1980년대 일본 도립대의 화산학자 마치다 히로시 교수는 흥미로운 가설 하나를 제기했다. 10세기 백두산 대폭발과 발해멸망의 연관성이다.
 반면 역사학자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926년을 전후해 백두산 분화에 대한 문헌기록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어떻게 믿겠냐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백두산에서 날라온 화산재의 퇴적층과 함께 화산폭발에 이은 화쇄류로 묻혀버린 탄화목에 대한 연대를 측정했다. 그 결과 10세기 백두산 대폭발의 연대는 934년 전후와 937년 전후, 그리고 946년 전후로 좁혀졌다.
 그러니까 어찌됐든 연대측정결과로는 발해의 별망(926년)과 백두산 폭발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궁금증들이 남아있다.
 몇가지 착안점은 있다. 백두산 화산재가 쌓인 일본 아오모리 현 오기와라 호의 퇴적물을 조사한 결과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됐다. 923~925년 사이의 퇴적층에서 매우 한랭한 지역에서 사는 규조류가 확인된 것이다. 이는 그 3년 동안 발해가 급격한 기후강하로 인한 매우 심각한 냉해를 겪었다는 증거이다. 거란과의 한판 승부를 앞둔 중차대한 시기가 아닌가. 또 멸망 전인 925년 가을부터 발해장군과 왕·귀족이 잇달아 고려로 내투하는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10세기  백두산 폭발로 퍼져나간 화산재 분포도. 일본열도까지 쌓였다. 숫자는 화산재 단층의 두께를 나타낸다. 

 ■백두산 흑룡과 불기둥
 백두산 대폭발은 역사시대를 통틀어 최대 규모의 화산폭발이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화산폭발을 앞두고 심상치않은 전조현상이 있었을 것이다.
 혹 대폭발을 앞두고 수증기·마그마폭발과 같은 소규모 폭발이 일정기간 일어나지 않았을까. 마그마가 직접분출되지는 않았겠지만 마그마가 천지의 물과 만나 수증기가 폭발하는?
 백두산은 발해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던 영산이었다. 지금도 백두산 주변의 한민족을 중심으로 백두산 화산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진다. 이 전설에는 백장군과 흑룡이 등장한다.
 어느 날 천지에 살던 흑룡이 날뛰기 시작하자 백장군이 이를 물리치러 천지에 내려와 처절한 전투를 벌인다. 싸움에 지친 둘은 100일간 휴식을 취한다. 흑룡이 불의 칼을 북쪽언덕에 던지자 이곳에 출구가 만들어져 물은 북쪽으로 흐른다. 불의 칼을 읽은 흑룡은 동해로 도망간다.
 비록 전설에 불과하다. 하지만 흑룡이 화산폭발 때 나타난 분연주(불기둥)를 나타낸다면 어떨까. 100일간의 휴식기는 백두산이 최소한 두 번의 클라이맥스가 있었고, 북쪽언덕의 출구는 장백폭포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또 흑룡이 동해로 사라진 것은 화산재가 서풍을 타고 동해로 날아간 것을 뜻하는 것은?
 어떻든 백두산이 대폭발을 앞두고 시차를 두고 몇 차례 소규모로 요동치자 이를 두려워 한 사람들이 대규모 엑소서드에 나선 것은 아닐까. 그것이 <고려사> 등에 나오는 내투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요사>가 말하는 민심의 이반, 즉 이심(離心)은 아니었을까.

 ■진상은 아무도 모른다
 거란이 발해를 멸한 뒤 “압록강, 두만강, 쑹화강 일대와 연해주·동해안 읍락을 폐현(廢縣)시켰다”는 <요사>의 기록 시사점이 많다. 이 지역들은 대홍수의 흔적이 발견된 곳들이다. 백두산 대폭발로 화산류(화산분출물+물)의 해일이 일어난 범람의 흔적인 것이다. 화산폭발로 몰살당한 비극적인 마을의 흔적이 아닐까.
 어떻든 이 10세기 백두산 대폭발로 발해의 흔적, 즉 문화와 역사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드넓은 발해의 고토는 사막이 됐고, 그곳에 여진사람들이 다시 금나라를 세울 때까지(1115년) 200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200년은 화산 사막이 풍화해서 토양이 되고 표토에 식물이 뿌리를 내려 번성하는 최소한의 기간이다.
 그렇다면 왜 역사는 이 비극적인 상황을 기록하지 못했을까. 아직 수수께끼이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이 대폭발을 직접 본 사람들은 단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폼페이의 비극을 전한 플리니우스(61~112)는 40㎞ 밖에서 베수비오 화산폭발을 지켜봤다. 그러나 만약 그가 백두산 밖 40㎞ 거리에서 폭발을 보았다면? 그는 곧바로 화쇄류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화산폭발의 기록은 왜 없었던 것일까. 당시 동북아는 극심한 혼란기를 걷고 있었다. 당나라(618~907)가 멸망하고 5대10국의 지방정권이 난립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쇠퇴하고 후삼국이 각축을 벌이다가 고려로 통합되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발해는 거란군의 침략에 직면하고 있었다. 백두산의 대분화를 기록할 여력이 없었고, 또 있었다 하더라도 남아있을 수 없던 시기가 아닌가. 물론 진상은 아무도 모른다.

 

 ■지금 백두산은 괜찮나
 한가지 더. 지금 이 순간 백두산은 괜찮은 것일까.
 기자는 최근 백두산을 찾아 팔팔 끓어오르는 온천수를 바라보고는 갖가지 상념에 잠겼다.
 최근들어 백두산에서 화산폭발의 전조 증상이 빈번해졌다는 연구자들의 발표를 상기한 것이다. 지표면의 팽창이 10㎝ 이상 감지되고, 화산가스에서 펠륨의 농도가 증가하고 있다. 또 화산가스 방출로 삼림이 말라죽고, 산사태와 암석균열이 일어나는 현상이 발생하고….
 필자는 정상에 올라 깔대기 모양의 짙푸른 천지를 바라보았다. 저 깔대기에 20억t의 물이 담겨 있다지 않은가.
 만약 이 물이 1000도 이상의 마그마와 만난다면…. 폭발적인 수증기·마그마 분화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10세기 백두산 분화와 비슷한 폭발이 일어난다면?
 금세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영산(靈山)이라는 백두산 정상에서 천지를 바라보고는 이 무슨 망측스런 상상을 한단 말인가. (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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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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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선생님 이게 뭔가요. 목간 같은데요.”
 1974년 11월 어느 날, 경주 안압지 바닥을 조사중이던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속 여성조사원이 윤근일 조사팀장에게 달려갔다. 뻘 속에 막 찾아낸 유물을 갖다준 것이다.
 문제의 유물을 본 윤근일은 깜짝 놀랐다. 유물이 양물(陽物), 즉 목제 남근이었으니까…. 윤근일은 아무 소리하지 않고 여성조사원을 현장으로 돌려 보낸 뒤 깨끗이 세척했다.
 맞았다. 1300여 년 동안 안압지 바닥의 뻘 속에 묻혀있던 남근 목제품이 현현한 것이다. 이 목제품의 길이는 17.5㎝에 달했다. 유물을 본 여성조사원들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안압지가 어떤 곳인가. 통일신라시대인 7세기 후반 문무왕 때 조성된 연못이다.(<삼국사기> ‘신라본기·문무왕조’)
 “674년(문무왕 14년) 궁성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기르고 진금이수(珍禽異獸)를 길렀다.”
 그러니까 1000년 왕국 신라의 궁원지로 각종 호화로운 연회가 펼쳐진 곳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왜 이곳 연못 안에 실물 크기의 남근 목제품이 남아있었을까. 이 남근의 쓰임새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남녀의 사랑 장면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신라시대 토우(흙으로 만든 인형).

 ■가장 큰 남자
 이쯤해서 ‘남근’과 관련된 흥미로운 역사이야기를 풀어보자. 신라의 역대임금 가운데 음경이 가장 컸던 이는 누구였을까.
 “왕은 음경의 길이가 한 자 다섯치가 되었다. 그래서 배필을 얻기 힘들었다.”
 <삼국유사>에 나온 엄연한 역사기록인데, 기사의 주인공은 지증왕(지철로왕)이었다. 1자5치면 40㎝가 넘는다는 것이 아닌가.
 기사는 왕의 ‘물건’이 너무 커서 배필을 구하기 힘들었던 사연을 전하고 있다.  
 “배필을 구하려 전국에 사자(使者)를 보냈다. 사자가 모량부 동노수 밑에 이르니 개 두마리가 북(鼓)만큼 큰 똥덩리의 양쪽 끝을 물고 싸우고 있었다. 사자가 ‘누구의 똥이냐’고 묻자 ‘모량부 상공의 딸이 빨래 하다가 숲 속에 숨어서 눈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집을 찾으니 여자의 키가 7척 5촌이나 됐다. 이 사실을 들은 지증왕은 수레를 보내 여자를 맞아 황후로 봉했다.”
 지증왕도 지증왕이지만 북만한 똥을 누었던 황후도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증왕만큼은 아니지만 경덕왕의 옥경(玉莖·임금의 음경)도 만만치 않았다. 길이가 8치(약 20㎝)나 되었다니까…. 이 역시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니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고보면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의 크기는 랭킹 3위가 되는 것인가. 흥미로운 것은 문제의 목제남근이 처음 출토된 후 형태는 똑같지 않지만 유사한 형태의 남근이 2점 더 출토되었다. 

경주 계림 30호분에서 출토된 항아리 겉면에 표현된 성교장면. 신라 사람들의 성문화는 이처럼 노골적이고 개방적이었다.  

 ■남근신앙의 시초
 남근 신앙의 기원은 선사시대라 할 수 있겠다. 다신신앙시대(多神信仰時代)였던 신석기 시대 때 남근신앙은 많은 신격 중의 하나인 성신신앙(性神信仰)이었을 것이다.
 울산의 반구대 바위를 보라. 그 바위에 새긴 암각화 가운데 커다란 남근을 노출시킨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요즘 같으면 변태성욕자로 지탄받을 남근노출증의 전형이다.
 새겨진 위치가 가장 높은 위치이고 뭔가 주문(呪文)을 하는 모습에 고래·거북 등의 동물들이 줄줄이 모여드는 형상이다. 이것으로 신석기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변태성욕자가 아닐 것이다. 어디까지나 생식본능에 따른 자손번영과 인간의 심볼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남근숭배 신앙의 예는 고구려에서도 보인다. 즉 10월이 되면 나무로 다듬은 남근을 두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 때 이 남근을 신좌(神坐)위에 놓는다고 했다.
 남근신앙의 형태는 요즘까지도 면면이 이어진다. 삼척 해신당(海神堂)에는 마을 제사를 지내면서 만드는 사람이 자신의 실물크기 남근을 깎아 모신다. 이것은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영혼인 해신을 위로하고 풍어와 다산을 염원하는 행사이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동양에서 숭배한 것은 언제나 자연계의 보편적인 생명력”이라면서 “자연계의 보편적인 생식력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암수 생식기의 형상으로 표현하고 숭배한 것”이라고 말했다. 남녀의 생식기를 성스럽게 여긴 것은 고대 세계, 특히 동양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남근의 상징물은 새(鳥)라든가 뱀, 거북, 조롱박, 도마뱀, 호랑이, 들소, 산이었으며, 여성 생식기의 상징은 물고기, 개구리, 꽃무늬였다.
 특히 새와 물고기는 남녀생식기의 대표격이었다. 중국의 시인이자 사학자인 곽말약(郭沫若·1892~1978년)은 “봉황이든 제비든 간에 이런 전설이 생식기를 상징한다고 믿는다. 새는 오늘날까지 생식기의 다른 이름이고, 알은 고환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곽말약의 말은 ‘현조(玄鳥)가 상나라를 낳았다(玄鳥生商)‘는 신화를 해석한 것이다.

성기를 강조한 신라시대 토우. 예로부터 남근은 생명력의 상징이었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안다면 “난 완전히 새됐어”하는 가요의 가사는 “난 완전히 X됐어”하는 큰일 날 욕이 되는 것이다. 남근의 상징성은 고대 중국의 5대 형벌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즉 묵형(墨刑), 의(의), 비(비), 궁(宮), 대벽(大피) 등이 5대 형벌이다. ‘묵’은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것, ‘의’는 코를 베는 것, ‘비’는 정강이뼈를 자르는 것, ‘궁’은 생식기를 자르는 것, ‘대벽’은 목을 자르는 것이다. 대벽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니 두말 할 것 없는 최악의 형벌이지만 남성의 생식기를 자르고, 여성의 성기를 막는 궁형은 치욕의 극치였다.
 <한서(漢書)> ‘형법지’는 “주나라에는 궁형에 해당되는 죄목이 500가지”라고 했다.
 한나라 시대 흉노에 항복한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궁형의 치욕을 받은 사마천의 회고를 들어보자.
 “마음의 상처보다 더 아픈 고통은 없으며,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추한 행실은 없고, 궁형보다 더 치욕스런 것은 없습니다.”(사마천의 <보임안서(報任安書)>)
 부모가 준 신체의 일부를 잘리는 아픔, 또한 자손번식 능력에다 성생활의 즐거움마저 영영 잃어버린 사마천은 “하루에도 내장이 아홉 번이나 뒤틀리는 아픔을 느끼고 이 수치심을 떠올릴 때마다 등골에 땀이 배어 옷을 적신다”고 피눈물을 흘렸다. 한나라 말기의 환관 진림(陳琳)은 “군더더기 살이 잘렸으니 대대로 욕보이는 구나”라고 한탄했다. 심볼이 잘리는 것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후손대대의 치욕으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신라의 개방적인 성문화 

성기를 도드라지게 표현한 토우. 성개방을 상징하는  신라시대 유물들이 많다.

이야기를 좁혀 신라로 돌아가자.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기록을 보자.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4일 동안 울어댄 일이 있었다. 왕은 급히 정병 2,000명을 뽑아 속히 서교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찾아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해서 모두 죽이라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으니 과연 여근곡이 있고 백제군사 500명이 와서 숨어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이 때 신하들이 “백제가 여근곡에 있는지 어찌 알았냐”고 묻자 선덕여왕이 대답했다.
 “개구리가 성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군사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여자의 음부가 아닙니까. 여자는 음이요, 그 빛은 흰빛이니 흰빛은 곧 서쪽 방위입니다. 이로 인해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남자의 생식기가 여자의 생식기에 들어가면 곧 죽는 것이니 적병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하여간 대단한 여왕님이시다. 아닌게 아니라 남근 목제품을 비롯한 각종 유물과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성에 관한한 신라인들의 사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개방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고(古)신라시대인 4~5세기대의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토우(土偶)들을 보라. 남녀의 성기가 과장되게 표현되거나 다양한 형태의 성행위를 하고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대체로 2~3㎝정도이고, 커보았자 10㎝ 미만인데 토기항아리나 고배 뚜껑에 장식처럼 붙어있다. 이러한 토우가 장식된 유물이 함께 묻힌 무덤의 주인공 역시 보통사람들의 무덤이 결코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지위가 높은 분이거나 신분이 있는 사람의 무덤임이 분명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신라 시대 상류층의 성문화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고신라에서는 왕족의 근친혼도 행해졌고 부인이 외간남자와 잠자리하다 발각되어도 관대했던 것이 처용설화에서 보인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보면 성 개방의 결과라 생각된다.

 

 ■유난히 많은 성 관련 유물들
 681~687년 사이에 김대문이 썼다는 <화랑세기>를 보라. <화랑세기>는 화랑 가운데 우두머리였던 풍월주 32명의 전기(540~681년)인데, 신라인들의 문란한 성생활이 적나라하게 표현돼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도 신라인들의 심상찮은 성문화를 살짝 언급해놓았다.
 예컨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내물왕 즉위조’를 쓰면서 다음과 같은 사론을 펼쳐놓았다.
 “아내를 맞이함에 있어 같은 성씨를 취하지 않는 것은 분별을 두터이 하기 때문이다. 신라의 경우엔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이할 뿐 아니라 형제의 자식이나 고종·이종 자매까지를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은 각기 그 습속이 다르다고 하나 중국의 예속을 따진다면 도리에 크게 어긋난다고 하겠다. 흉노에서 그 어머니와 아들이 상간하는 경우는 이보다 더욱 심하다.”(<삼국사기> ‘내물왕 즉위조’)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에도 야릇한 대목이 보인다. 즉 문무왕은 배다른 동생 차득공을 일종의 암행어사로 파견했다. 관리들의 청렴도를 잘 따져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차득공이 승복(僧服)을 입고, 무진주에 이르렀다. 무진주 관리 안길이 차득공을 보고는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안길은 밤에 처첩 3명을 불러 말했다.
 “오늘 밤 저 거사(居士) 손님을 모시고자 하는 자는 내가 죽는 날까지 함께 살 것이오.”
 그러나 두 아내는 “차라리 함께 살지 못할지언정 어떻게 남과 함께 잔단 말이냐”고 거절했다. 그러나 다른 아내 한 사람은 “그대가 몸을 마치도록 나와 함께 살겠다면 명령을 받들겠다”고 허락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신라의 근친혼을 보여주는 가 하면, 출세를 위해 아내까지 바치는 신라인들의 사통·통정 관계를 잘 나타내주는 사례들이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근친혼, 처첩관계, 통정·사통의 기록을 지금의 유교적인 관점,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절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화랑세기>는 특히 신라를 신국(神國)이라 했고, 신국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다고 기록했다.
 예컨대 진평왕과 보명 사이에 출생한 양명공주가 아비가 다른 자신의 아들 양도와 딸 보량을 혼인시킬 때 “신국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 어찌 중국의 도로 하겠느냐”(<화랑세기> ‘22세 양도공조’)고 한 말은 김부식의 사론과 일맥상통한다.  

안압지 준설과정에서 확인된 목제 남근

 ■신라 최고의 요부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신라 최고의 요부가 있다. 바로 미실이다.
 그녀는 신라왕 3명(진흥·진지·진평)과 태자(동륜),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4명(사다함·세종·설화랑·미생랑) 등 무려 8명을 노리개로 삼으면서 왕실을 좌지우지했던 여인이었다.
 <화랑세기>는 “백가지 꽃의 영겁이 뭉쳐있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할 수 있다”는 기록으로 미실(549∼606)의 용모를 극찬했다.
 대원신통(왕에게 색을 제공하는 전문 여성 집단)인 미실은 할머니 옥진으로부터 ‘남자를 죽이는’ 방사(房事)술을 배웠다. <화랑세기> ‘11세 풍월주 하종조’를 보자.
 “(미실은)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를 닮았으며, 아름다움은 오도를 닮았다. (할머니) 옥진이 ‘나의 아이는 오도를 부흥 시킬 만 하다’고 하고 좌우에서 떠나지 않으며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가르쳤다.”
 미실의 정식 남편은 6세 풍월주인 세종이었다. 어찌나 천부적인 방사술로 세종을 혼내놨는지 <화랑세기>는 ‘세종이 깊이 빠져들어 기동을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미실은 태후의 명에 의해 쫓겨난다. 지소태후의 성난 한마디를 들어보라.
 “너로 하여 전군을 받들게 한 것은 옷을 드리고 음식을 받드는 것인데 감히 사사로운 색사(色事)로 전군을 어지럽혔으니 용서할 수 없다.”
 쫓겨난 미실은 사다함(5세 풍월주)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 둘은 원래부터 사랑했으나 지소태후의 명으로 미실이 세종공에게 시집감으로써 헤어진 사이. 진정한 사랑도 잠깐. 사다함은 가야정벌에 나선다. 둘은 또 헤어진다. 
 미실은 다시 전남편인 세종의 품으로 돌아간다. 세종이 상사병에 걸리자 지소태후가 다시 미실을 부른 것이다. 세종은 기뻐 날뛰었다. 세종에게는 원래 융명이라는 정부인이 있었다.

 

 ■정절을 지킨 남자들
 하지만 세종의 첩이 된 미실은 ‘원비의 첩’이 된 것을 부끄러이 여겨 색공에 응하지 않았다. 애가 단 세종은 태후에게 애원하여 미실을 부인으로, 본처인 융명을 차비로 삼았으며 결국 본처를 내쫓았다. 세종은 평생 미실에게 정조를 지킨다.
 “세종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청렴결백한 절조를 지켰다. 크게 체모를 잃는 일이 있으면 즉시 미실에게 간언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참된 마음을 보였다. 세종공은 황후의 아들로 미실에게 정절을 바쳤다.”
 여인의 정조가 아니라 남자의 정조라니…. 그러나 왕실 여인들의 세력다툼에 밀린 미실은 궁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런데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사다함은 미실이 떠난 것을 알고는 상심한 나머지 그만 상사병에 걸린다. 사다함은 결국 죽고 만다.
 미실은 이때부터 진흥왕(재위 540∼576년)의 아들인 동륜태자를 꾀어 아이를 임신했으며 진흥왕 마저 사랑의 노예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동생인 미생랑(10세 풍월주)과 설화랑(7세 풍월주)마저 성의 노리개로 만들었다. 미실이 설화랑과의 사이에서 낳은 보종은 16세 풍월주였다.
 미실은 개(犬)에게 물려 죽은 동륜태자의 뒤를 이어 태자가 된 금륜(훗날 진지왕·재위 576∼578년)과 정을 통했으며 진지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진평왕(재위 578∼632년)에게도 이른바 신국의 도, 즉 성교육을 시켰다. ‘신라 여인천하의 상징’인 미실은 수기 700편을 남길 정도로 탁월한 문장가였다. 전장으로 떠나는 애인 사다함을 위한 향가 ‘풍랑가(송출정가)’를 짓기도 했다.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전장에서 돌아온 사다함은 이미 다른 이(세종)의 아내가 된 미실을 기리며 청조가(靑鳥歌)를 짓는다.
 결국 미실은 왕(진흥왕)이 문서를 참결할 때 반드시 곁에 둘 정도로 조야의 권세가 옥진궁에 모였다는 말을 들었다. 10세 풍월주 미생대에 나뉘었던 화랑도의 다섯 파벌 중 대원신통을 받드는 파를 만든 중심인물이기도 했다. 미실이야말로 1,000년 전통의 신라역사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여걸이었다면 지나친 말일까.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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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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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teds woodworking plans

    Tracked from teds woodworking plans 2014/11/03 17:31  삭제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2. Subject: find best marketing companies

    Tracked from find best marketing companies 2014/11/14 23:51  삭제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남초(南草·담배)는 남쪽 오랑캐 나라에서 유래해서 일본에서 번성했다. 무오 연간(1618년)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장유가 가장 먼저 피웠다.”(<대동기년>, <오주연문장전산고> 등)
 우리나라 담배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계곡 장유(張維·1587~1638)이다. 장유가 누구인가. 그의 선조는 1275년 충렬왕비인 원나라 제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귀화한 위구르족 출신인 장순룡이었다. 장순룡은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됐는데, 12대 손인 장유는 조선 중엽의 4대 문장가(이정구·신흠·이식·장유)로 명성을 얻었다.
 바로 그 장유가 담배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우선 <대동기년>이 언급하고 있듯 장유는 조선에서 가장 먼저 담배를 피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신윤복의 '청금상련'. 사대부가 기생과 의녀를 연꽃감상을 하며 놀고 있다. 사대부는 물론 의녀까지 맞담배를 피우고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폐를 상하게 하는 풀인데…’
 그는 <계곡만필>에서 조선에서 담배가 전래되고 퍼진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남령초(담배)는 20년 전 조선에 들어왔다. 위로는 고관대작들과 아래로는 가마꾼과 초동목수들까지 피우지 않은 자가 백 사람, 아니 천 사람 가운데 겨우 하나 있을까 말까 하다. <본초강목>에도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효능은 알 수 없다. 다만 담배맛을 보니 매우면서도 독기가 있다. 많이 들이마시면 어지럼증이 생기지만 오래 피운 사람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장유는 덧붙여 절강성 출신인 중국사람 주좌(朱佐)와 나눈 대화를 소개하고 있다.
 “담배는 적비(赤鼻·코가 붉은 증세)를 치료하는데 특효라고 합니다.”(주좌)
 “담배는 성질이 건조하고 열이 있어서 필시 폐(肺)를 상하게 할 것인데…. 어떻게 코 병을 치료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장유)
 “꽉 막힌 기운을 뚫어서 풀어주기 때문입니다.”(주좌)
 장유는 이 대목에서 “주좌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계곡만필> 제1권 ‘남령초 흡연’)
 이 일화를 보면 장유 역시 담배가 ‘폐를 상하게 할 수 있는 풀’이라는 점을 벌써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담배를 워낙 사랑한 장유는 주좌의 ‘막힌 기운을 뚫어준다’는 말에 동조하고 있다. 그는 이미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골초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 최초의 애연가가 된 장유의 담배를 둘러싼 ‘무용담’은 끝이 없었다.  

김홍도의 ‘주막집’. 담배예절이 있을 턱이 없었던 초창기에는 어전에서도 담뱃대를 빨기도 했다. 주막집에서 어린아이와 부녀자가 있는 데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떠거머리 청년워도 하나도 이상하렉 없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담배를 위한 변명
 먼저 그가 말년에 병이 들어 김제에서 요양할 때 흥에 겨워 읊었다는 시(‘남령초·담배)’를 보면….
 “가느다란 줄기 하나 성긴 꽃 무성한 입(疎花농葉擢纖莖)/~ 누가 이 담배를 동방에 전했을꼬.(誰遣孤根來日域)/~구절초처럼 기이한 향기 물씬 풍기는구나.(九節何奇漫自馨)/약효 제대로 내려면 불기에 바싹 말려야지.(功用會須煩火候)/한 번만 써 보면 신약(神藥)인 줄 당장 알리라.(藥欄眞覺有神靈)”(<계곡집>)
 장유는 담배를 신령한 약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뿐이랴. 장유는 <계곡만필>에서 ‘담배의 효능을 칭송하는(稱頌南草之效能)’ 글을 남겼다.
 “남방인들은 빈랑(檳랑)을 중요하게 여겨 ‘술에 취하면 깨게 하고 술이 깨면 취하게 하며 배고프면 배부르게 하고 배부르면 배고프게 한다’고 했다. 지금 애연가들도 담배를 피우면서 비슷하게 말한다. ‘배고플 땐 배부르게 하고 배부를 땐 배고프게 하며, 추울 땐 따뜻하게 하고 더울 땐 서늘하게 한다’고…. 남초를 극찬한 말이 빈랑의 경우와 흡사히니 이 또한 웃을 만 하다.”
 장유가 언급한 ‘빈랑’은 인도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인들이 식사 후에 즐겨 씹던 야자 비슷한 나무열매이다. 소화제와 구충제 등 한약재로 사랑받았다.
 장유는 ‘담배 피우기’를 ‘빈랑 씹기’에 견주면서 ‘담배는 빈랑과 똑같은 기호품이자 약제품’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면서 ‘담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世之攻南草者)들을 겨냥한 발언을 쏟아낸다.(<계곡만필>)
 “세상에서는 담배가 만이(蠻夷·오랑캐)에서 나왔고, <본초> 같은 의서에도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담배가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초> 같은 의서에 등재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담배가 사람에게 이익을 줄 것인지는 나 자신(장유)도 모른다. 그러나 효능이 분명 있다면 굳이 어디에서 들여왔는지를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딴은 그렇기도 하다. <본초>는 송나라 휘종(재위 1100~1125)에 찬집된 의서이니, 아직 도입되지도 않은 담배가 등재될 리는 만무했던 것이기는 하다.
 여하간 장유의 ‘담배를 위한 변명’은 지독하다. 

유숙의 ‘수계도권’(개인소장). 1853년 작이다. 시회에 참석한 인물들이 모여 앉아있다. 그 가운데 담뱃대를 물고 있는 인물들이 보인다. 당대에는 4~5살이 되면 모두 담배를 피운다고 할만큼 대유행했다.

 ■담배 짝사랑
 장유의 담배 짝사랑을 둘러싼, 그야말로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많다.
 문헌에 나오는 이야기에 살이 왕창 붙인 그런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설로 전해진 것이다. 예컨대 몇가지 문헌을 살펴보자.
 “담파고(담배)는 광해군 때 들어왔는데. 장유가 흡입하기를 가장 즐겼다. 그의 장인 김상용이 임금에 건의해서 ‘요망한 풀’을 금하도록 청했다.”(<임하필기> ‘문헌지장편·담파고’)
 “일찍이 사위(장유)가 연석(筵席·임금과 신하가 모여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담배를 피웠는데, 장인(김상용)이 그 자리에서 잘못을 지적하여 핀잔을 주었다고 합니다.”(<승정원일기> 1637년 11월 2일조)
 탑전(榻前·임금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위를 꾸짖었으니 ‘탑전 힐난(榻前詰難)’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사위(장유)와 장인(김상용)의 일화는 구전설화를 통해 확대재생산된다. 즉 장유가 담배를 피울 무렵엔 당연히 담배예절이 있을 수 없었다는 것. 따라서 장유는 ‘감히’ 어전(임금의 면전)에서 담뱃대를 빡빡 빨았다는 것. 이 꼴을 보다못한 장인이 핀잔을 주었다는 것.
 “사부빈객(세자의 스승)인 자네가 어찌 어전에서 남초(담배)를 피우시는가.” 
 장인의 꾸지람을 들은 장유가 재빨리 담배를 끄지 김상용이 더 쏘아붙였단다.
 “구용정(口容正)하게.”
 담뱃대를 빨 때 입모양을 비죽대며 빡빡 소리를 내니 입모양(口容)을 바르게(正) 하라는 꾸지람이었다.
 하기야 초창기에 담배예절이 있을 수 없었던게 당연하다. 예를 들어 임금이 궁중에 숙직하던 문관들이 모여 멋대로 흡연하는 꼴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마디 했단다.
 “구불미(口不美·입 모양이 아름답지 않다는 뜻) 하구나!”
 임금 앞에서 담배연기를 피우는 것도 불손한 일이거니와, 거기에 장죽(긴 담뱃대)를 뻗치고 ‘체신없이’ 입모양을 빡빡 거리니 ‘구불미하니 구용정하게’라는 말이 나오는게 당연했으리라.
 이후 궁중에서 담배예절이 생겼다는 것이다. 

윤복의 ‘연소답청’.  양반집 체면에 기생들의 포로가 되어 담배를 붙여 대령하는 딱한 사내들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구불미네, 구용정하게"
 그럼에도 장유는 훗날 ‘애연가의 상징’으로 추앙(?)되기도 했다.
 단적으로 정조 임금을 보라. 정조 임금은 담배를 ‘치국의 도’로 삼아야 하고. 조선을 흡연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힌 끔찍한 애연가있다.
 그런 그가 흡연과 담배재배의 폐해를 논하는 상소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담배를 피우고 재배하는 일은 마치 술을 빚는 것을 금지하는 것 같다. 이해가 상반되므로 가볍게 논할 수 없다. 신풍군 장공(장유)의 말이 근거로 삼을만 하다.”(<홍재전서> 46권 ‘비답’)
 정조 임금은 “담배가 가래를 없애주고 술기운을 깨게 하며. 100년 후에는 차(茶)를 마시고 재배하는 것과 이익을 다툰다”며 담배예찬론을 설파한 장유를 굳이 떠올리고 있다.
 정조는 담배예찬론을 펼치면서 또 장유를 인용하고 있다.(<홍재전서> 권 178 ‘일득록’)
 “담배는 더위를 씻어주고 기(氣)를 평안히 하며 추위를 막아주고 음식을 소화시키며 변을 볼 때 악취를 쫓아낸다. 잠을 청할 때나 시를 짓고 문장을 엮을 때 피워도 좋다.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은 점이 없다. 옛 사람으로는 오로지 장유 만이 이런 담배맛을 조금 알았다.”
 담배의 장점을 있는 대로 나열하면서 옛 사람 가운데 장유만이 담배의 참맛을 알 수 있는 인물로 인정한 것이다.

 

 ■애연가 사위와 혐연가 장인
 그런 사위(장유)의 담배 피우는 모습을 그렇게 꼴보기 싫어했던 장인(김상용)이 훗날 담배불 때문에 자폭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대체 무슨 일인가. 지독한 혐연가인 김상용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큰 혼란에 빠졌다. 청나라군의 진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기 때문이다.
 김상용은 원임대신(퇴직한 대신)으로서 강화도로 피신했다. 그러나 적병이 곧 강화도를 함락시키려 했다.(1637년 1월 22일)
 김상용은 “구차하게 사느니 죽음을 택한다”고 하면서 남문의 문루에 나가 화약상자에 걸터 앉았다.
 “가슴이 답답하다, 담배를 피우고 싶구나. 가서 불을 가져오너라.”
 명령을 받은 시종은 공(김상용)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알았기에 명을 받들지 않았다. 그러나 김상용은 끝내 불을 재촉해서 가져와서는 폭약상자에 붙이고 말았다.
 김상용의 13살짜리 손자와, 그를 따르던 측근들, 그리고 시종까지 모두 피하지 않고 자폭의 길을 택했다.(<연려실기술> ‘인조조고사본말·강화도 함락’)
 그런데 이 김상용의 ‘순절(殉節)’은 훗날 무수한 억측을 낳았던 것 같다. 김상용이 담배를 피우다 담뱃불을 실수로 떨어뜨려 폭사한 것이 아니냐는 뒷담화가 퍼졌던 것이다.
 인조 임금도 그 소문을 듣고 ‘혹’ 했던 모양이다. 8개월 뒤인 1637년 10월 28일 예조가 김상용의 순절을 기려 제사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김상용을 위한 제문을 바쳤다.
 수찬 조중려가 바친 제문은 “(김상용이) 태산처럼 의리를 무겁게 했고, 홍모(鴻毛·깃털)처럼 목숨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조 임금은 “사실과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는 쪽지를 붙여 내렸다. 반려한 것이다. 제문을 지은 조중려가 “김상용은 화약에 불을 떨어뜨려 살신성인을 이룬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진실을 가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윤복의 ‘소년전홍’. 장죽을 문 앳된 청년이 여인의 팔을 붙들며 유혹하고 있다.|간송미술관 소장

 ■장유가 환생한다면
 그러자 김상용의 순절을 주장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특히 김상용의 아들인 김광환·광현 형제가 올린 피눈물 나는 상소가 심금을 울린다.
 “신의 아비는 평생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신의 아비가 어전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위 장유를 면전에서 질책했지 않았습니까. 이는 성상의 총명한 기억 속에서도 있지 않습니까. 신의 아비가 어찌 죽을 때에 평생에 싫어하던 담배를 피웠겠습니까.”
 김광환·광현 형제는 그러면서 “평소 피웠다 해도 죽을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화약 옆에서 불을 잡고 담배를 피웠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인조는 “김상용의 일은 워낙 목격한 사람들이 많아 과인이 의심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이라 해명했다. 그리고는 “담당부서에게 진상을 파악해서 결론을 내릴 것”이라 전했다.(<승정원일기> 1637년 11월 2일)
 급기야 인조는 한달 반 뒤인 12월 8일 “김상용은 의리를 택해 죽음을 택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인조실록>)
 자칫했으면 담뱃불 실화로 인한 어이없는 폭사로 손가락질 받을 뻔했던 순절의 명예회복이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담배는 <인조실록>의 표현처럼 ‘요망한 풀’, 즉 요초(妖草)였던 것은 맞다.
 신대륙에서 유럽에 들어온 지(16세기 초) 불과 100년 만에, 유럽에서 본격 재배된 지(1560년 무렵) 60년 만에 조선 전역에 퍼졌으니 말이다.
 “담배는 1616~17년 사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5년 만인 1621~22년 사이 조선 전역에 퍼졌다. 손님을 대하면 차와 술 대신 담배를 권할 정도였다. 유해무익한 물건임을 알고 끊으려 해도 끊지 못하니 세상에서 요망한 풀이라 했다.”(<인조실록>) 1638년 8월 4일조)
 지금 이 순간 최초의 흡연자인 장유가 환생한다면 무슨 말을 할까. 어전에서 담배를 꼬나물던 그가 저 우중충한 건물 뒷편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마치 죄를 진듯 담배를 빨고 있는 애연가 후예들을 만난다면….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참고문헌>
 문일평, <호암사론사화선집>, 정해렴 편역, 현대실학사, 1996
 박희진, <흡연예절의 형성과정 1600~1930>, ‘역사민속학’ 제44호, 민속원, 2014
 제홍규, <한국연초사화>, 도서과 연구보고서, 국립중앙도서관, 1975 

   이언 게이틀리, <담배아 문명>, 정성묵·이종찬 옮김, 몸과 마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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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boom beach hack

    Tracked from boom beach hack 2014/10/31 00:07  삭제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1560년쯤 유럽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담배는 그야말로 요원의 들불처럼 전세계로 퍼진다.
 결국 60년도 안되어 극동지역으로 몰려온다. 이른바 ‘담뱃길’은 여러 곳으로 추정된다. 
 우선 청나라 초기 사람인 왕포가 쓴 <인암쇄어(蚓菴쇄語)>를 보면 담배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 연간(1628~1644)에 중국으로 전해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담뱃잎이 여송(필리핀 루손섬)에서 전래됐다는 것이다. 담배의 전래를 연구한 중국의 사상가 우한(오함)은 담뱃길을 대략 3가지로 요약한다.
 즉 일본→조선→랴오둥(요동)이 한 갈래이고, 필리핀(루손)→푸젠(복건)→광둥(광동)이 또 다른 갈래, 그리고 남양(남태평양)군도→광둥(광동)→중국 북방 등이 또 하나의 갈래였다는 것이다. 중국 광저우(廣州)→조선→일본으로 거쳤다는 ‘역 담뱃길’의 주장도 있지만, 근거가 없다는 게 우한의 주장이다. 이 우한의 주장이 중국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신윤복의 <연소답청>. 조선에 담배가 들어온 지 불과 5년 만에 담배선풍이 불었다. 4~5살 짜리 어린아이도 담배를 물고 있었다고 한다. 기생들의 놀이에 담배 시주을 자처하는 이른바 양반 사내들의 모습이 우습기만 하다.|간송미술관

중국에 담배가 들어왔을 때 중국 조정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인암쇄어>를 보라.
 “숭정 계미년(1643년) 명령을 내려 흡연을 금했다. 민간에서 담배를 재배하는 자는 도형(노역형)에 처했다. 그러나 담배를 재배하는 이익이 엄청나고, 처벌은 너무 가벼워 백성들은 금령을 무릅쓰고 재배했다. 그러자 다시 명을 내려 법을 어기는 자는 모두 참형에 처한다는 명을 내렸다. 그렇지만 군대에서 한질(감기)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지 못하자 마침내 금법(禁法)을 완화했다. 이후 삼척동자조차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풍속이 갑자기 바뀌었다.”
 담배가 도입된 이후의 중국사회에 급변했음을 알 수 있다. 금연령에 따른 노역형도 모자라 참형이라는 극형에 처했지만 결국 막지 못했다는 것. 결국 금연령이 완화되고, 삼척동자까지도 담배를 피워대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담배는 1616~1617년 조선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조선에는 언제, 어떤 경로로 들어왔을까.
 이 또한 온갖 설이 끓고 있다. 야사를 모아놓은 <야사총서>는 선조 때의 학자 윤격의 언급을 전제하면서 “담배는 명종 말엽과 선조 초년에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기록했다.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한 때는 1567년이었다. 유럽에서 담배가 처음 재배된 것이 1550~60년대 초반이었다. 그러니 윤격의 ‘명종 말엽 선조 초년(1567년 무렵)’ 주장은 좀 빠른 느낌이 있다. 통설은 <대동기년> 등 관련 문헌에 나와있는 ‘1618년(광해군 10년)설’이다.
 예컨대 <대동기년>은 “남초(담배)는 남쪽 오랑캐 나라에서 유래하여 일본에서 성했고 무오 연간(1618년) 우리나라에 들어와 장유가 먼저 맛을 봤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거론된 장유(1587~1638)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다.
 어쨌든 이런 기록들 때문에 ‘1618년 설’이 유력해진 것이다. <대동기년>는 조선 말기 윤기진이라는 인물이 정리했으므로 당대의 역사서가 아니다.
 여기서 정사인 <인조실록>의 기록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당대의 사관들이 꼼꼼히 적은 사초를 토대로 편찬된 기록이니까….
 <인조실록> 1638년 조를 보면 “남초(南草·담배)는 1616~17년 사이에 조선에 들어왔다.”고 분명하게 기술돼있다.
 그러면서 “조선에 들어온지 5년 만에(1621년)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퍼졌고,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을 정도가 됐다”고 기록했다.
 그러니까 16세기 중반에 유럽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담배가 불과 60년도 채 되지 않아 조선땅에 상륙했고, 또 불과 5년 만에 조선 전역에 삽시간에 퍼졌다는 것이다.  

김홍도의 <담배썰기>. 담배는 조선에서도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져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4~5살만 되면 피었다.
 담배가 유럽을 매혹시켰듯 조선 역시 담배의 연기 속으로 흠뻑 빠져들었다.
 <대동기년>에서 조선에서 담배를 처음 피웠다는 장유는 <대동기년>에서 담배예찬론을 절절이 편다.
 “남들이 그런다. ‘담배를 즐기면 배가 고픈 사람은 배를 부르게 하고 배부른 사람은 배가 꺼지게 만든다. 추운 사람은 따뜻하게 만들고, 더운 사람은 서늘하게 만든다’고….”
 담배를 피우면 배고픈 사람도 배를 부르게 만든다니….
 이규경 역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담배가 추위를 막고 습기를 물리치며 기를 빠르게 소통시키고 골수에까지 퍼지게 한다는 점에서는 틀리지 않다”고 찬양론을 개진했다.
 담배는 이렇게 조선을 열광시켰다.
 “위로는 공경대신으로부터, 아래로 하인·종·나무꾼에 이르기까지 피우지 않는 자는 없다. 천이나 백에 한 명 밖에 없을 것이다.”(장유의 <계곡만필>)
 또 하멜의 표류기 부록(조선국기)은 다음과 같이 썼다.
 “조선의 아이들은 4, 5세만 되면 담배를 피운다. 남녀노소 가운데 담배를 피우지 않은 사람이 없다.”

 

 ■담배의 마력
 <순조실록> 1808년 조를 보라. 순조 임금은 고질병이 된 담배의 폐해를 걱정하고 있다.
 “담배는 위(胃)를 조양(調養)하는 데 이롭다고 하고 혹은 담(痰)을 치료하는 데 긴요한다고 한다. 과연 그런지 모르겠다. 근래 속습(俗習)이 고질이 되어 남녀 노소를 논할 것 없이 즐기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겨우 젖먹이를 면하면 으레 횡죽(橫竹)으로 피우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팔진미(八珍味)는 폐지할 수 있어도 남초는 폐지할 수 없다.’고 한다.”
 산해진미도 담배를 넘어설 수 없으며. 젖먹이만 지나면 앞다퉈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담배에 매혹된 사람 가운데 손꼽히는 이가 바로 조선 후기 문인인 이옥(1760~1815)이다. 이옥은 끔찍한 애연가로 담배의 경전을 뜻하는 <연경>을 지었을 정도였으니까….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1795년 9월 어느 날 이옥이 전북 완주의 송광사 법당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 그러자 스님이 법당 안에서 담배 피우면 안된다고 했다. 이 때 이옥의 대꾸가 걸작이었다.
 “부처님 앞에 있는 향로의 연기도 연기고, 담배연기도 연기가 아닙니까. 사물이 변해서 연기가 되고 연기가 바뀌어 무가 되는 것은 똑같지 않습니까.’
 그러자 스님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쨌든 담배가 이렇게 대유행했으니 너도나도 경작에 나서 농사지을 땅이 모자랄 정도가 되었다. 심각했던 모양이다.
 1789년(정조 22년), 무려 27명이 나서 “배의 경작을 법으로 제한해달라”는 상소문에 서명했다.
 “기름진 땅은 모두 담배와 차를 심는 밭이 되었나이다. 곡식을 생산하는 토지가 줄고 백성들의 어려움이 극에 달하고 있사옵니다. 담배의 해로움이 극심한 바….”(<정조실록>)
 전국 방방곡곡에 담배재배 선풍이 불자 신하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그것은 전적으로 각 지방의 감사에게 달려있는 일”이라고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혜원 신윤복의 <연못가의 여인>. 무료한 여인이 생황을 불었다 담뱃대를 물었다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을 흡연의 나라로 만들겠다
 정조는 과연 왜 그렇게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을까.
 그 역시 역사에 길이 남을 골초였기 때문이다. 골초도 그런 골초가 없었다.
 아예 “조선을 흡연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선포할 정도였으니까…. 거짓이 아니다. 정조의 시문집인 <홍재전서> 등에 다 나오는 이야기니까….
 1796년 11월 정조가 했다는 말을 들어보자.
 “담배처럼 유익한 것이 없다. 담배가 아니면 답답한 속을 풀지 못하고 꽉 막힌 심정을 뚫어주지 못한다. 담배를 백성에게 베풀어줌으로써 그 혜택을 함께 하고자 한다.”
 무슨 말인가. 담배예찬론을 설파하는 것도 모자라 온 백성을 흡연가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닌가.
 정조는 예서 그치지않고 책문의 시제로 ‘남령초(담배)’를 내걸었다. 책문은 정치의 대책을 물어 답하게 하는 과거시험의 일종이다. 세상에! 과거시험의 주제가 ‘담배의 유용성을 논하라’는 것이었으니….
 정조의 책문을 뜯어보면 깜짝 놀란다. ‘실사구시’의 예로 담배를 꼽고 있으니 말이다.
 “담배를 이롭게 사용하고 생활에 윤택하기만 하면 된다. 유독 담배만 천하게 여길 까닭이 무엇인가.”
 그러니까 백성에게 이익이 되고 삶의 질을 높일 수만 있다면 ‘장땡’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조는 한술 더 뜬다.
 “담배 만한 약이 없다. 담배를 피우니 내 답답하게 꽉 막힌 가슴이 절로 사라졌다. 담배가 이 시대에 출현한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천지의 마음에서 비롯됐다.”
 그러면서 “온 백성이 담배를 피우도록 해서 그 효과를 확산시켜 담배를 베풀어 준 천지의 마음에 보답하자”고 역설한다. 참으로 대단한 골초가 아닌가.

 

 ■‘정승 짓 못해먹겠습니다’
 임금이 이랬으니 담배예절이 있을 리 만무했다.
 예컨대 조선역사를 통틀어 명재상으로 꼽히는 채체공의 일화는 유명하다.
 무슨 이야기인가. 1790년(정조 14년) 좌의정 채제공이 정조 임금에게 “(더러워서) 정승 짓 못해먹겠다”면서 돌연 사의를 표명한다.
 정조가 화들짝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채제공의 자초지종을 들어보자.
 채제공이 어느 날 권두(수행비서격)와 함께 서대문을 지나가는데 웃옷도 걸치지 않은 새파란 청년 두 명이 담배를 꼬나물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보다못한 권두가 “어이! 담뱃대 좀 빼지!”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두 청년이 고희를 넘긴 채제공의 이름을 부르더니 고함쳤다.
 “내가 무엇 때문에 저 자를 보고 담뱃대를 빼겠나.”
 안하무인 그 자체였다. 체재공은 두 청년을 잡아다 옥에 가뒀다. 그런데 한밤중이 되자 두 청년이 속한 학당의 학생들이 몰려와 옥문을 부술 기세로 철야농성을 벌였다.
 “채제공이 유생들을 욕보였다. 유생들을 차라리 죽일 지언정 욕을 보일 수는 없다. 석방하지 않으면 옥문을 부숴버리겠다.”
 채제공을 욕하는 상소문이 잇달아 올라왔다, 그러자 채제공이 장탄식하며 사직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제 대낮 큰 길가에서 홀옷 차림에고 담뱃대를 피워물고 대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어찌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선비라는 이름으로 온갖 패악질을 벌여도 처벌할 수 없는 세상이 되도 가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정조는 노 재상의 사직상소를 물리느라 진땀을 뺐다. 결국 주동자에게는 ‘종신과거응시금지령’을, 가담자 4명에게는 ‘10년간 과거응시금지령’을 각각 내리는 것으로 일단락지었다.
 채제공의 일화를 보면 어쩌면 그렇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상황인지 무릎을 치게 된다.

 

 ■세상을 망가뜨리는 주범
 채제공의 일화에서 보듯 담배예절도 두고두고 이야깃거리를 낳았다.
 이옥은 자신이 지은 담배의 경전인 <연경>에서 담배를 피워서는 절대 안되는 ‘몇가지 경우’를 나열했다. 이른바 담배예절의 지침이다.
 “1)어른 앞에서, 2) 아들이나 손자가 아버지나 할아버지 앞에서, 3)제자가 스승 앞에서, 4)천한 자가 귀한 자 앞에서, 5)제사를 지낼 때, 6)대중이 모일 때 혼자, 7)다급할 때, 8)곽란이 들어서 신 것을 삼킬 때, 9)몹시 덥고 가물 때, 10)큰 바람이 불 때, 11)말 위에서, 12)이불 위에서, 13)화약이나 화총가에서, 14)기침병을 앓는 병자 앞에서는 절대 피워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예절을 차려야 하는 경우와, 화재가 일어날 위험이 있는 장소와, 연기 피우 것을 꺼리는 곳에서는 피우지 말라는 것이다,
 <연경>은 또 “입술을 풀무질해서 열었다 닫았다를 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고 있다. 이른바 ‘뻐끔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것이다.
 박지원의 풍자소설인 <양반전>을 보면 “양반은 볼이 움푹 패도록 담배를 빨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나저나 이젠 담배예절이고 뭐고 담배를 피운다는 자체가 ‘범죄’로 인식되는 세상이 되었다.  
 하기야 이미 200년 전의 인물인 윤기(1741~1826)은 ‘담배가 조선 사회를 병들게 하는 범죄’라고 규정한 바 있다.
 “아들과 아우가 아버지와 형 앞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세상이 됐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세상의 도리가 망가지게 된 것이 이 보잘 것 없는 풀 하나로 말미암을 줄이야.”
 세상을 망가뜨리는 주범으로 꼽힌 것이다. 그보다는 건강을 위해서는 다시금 끊어야 하지 않을까.
 250년 전의 금연운동가인 이덕리(1728~?)의 말을 귀담아 들어보자.
 “엄청난 돈이 담배연기로 다 허공으로 날라간다. 무엇보다 담배를 피우면 진기가 모두 소모되고 눈이 침침햐진다. 옷가지와 서책이 더러워지고 불씨 때문에 불이 난다. 치아가 더러워지고 예법이 없어진다.”

 (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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