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경은 자기 자신을 일컬을 때마다 ‘저(矣身)’라 하지 않고 ‘나(吾)’라 했다.”  
 1724년(영조 즉위년) 12월 8일이었다. 영조는 즉위하자 마자 소론의 핵심인물 김일경을 국문장으로 끌어냈다.
 그러나 마땅히 고개를 숙여야 할 ‘죄인’ 김일경은 고개를 뻣뻣히 세우고 임금이 당도해 있는 친국장에 들어섰다. 영조가 소리쳤다.
 “보기싫다. 저 자의 머리를 덮어 씌우라.”
 김일경은 대단했다. 피와 살이 튀는 고문에도 ‘말할 때마다 반드시 선왕(경종)의 충신’이라 했다. 더구나 자신을 일컬을 때 “반드시 나(吾)’라고 했으며 ‘저(矣身)’라고 하지 않았다.
 그 스스로 경종의 신하이지, 영조의 신하가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영조가 “네가 부도(不道)했음을 자백하라”고 추궁했다. 그러자 김일경이 일축했다.

연잉군 시절의 영조. 숙종과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영조는 평생 콤플렉스를 겪으며 살았다. 심지어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소문에도 휩싸였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난(吾) 경종의 신하요. 시원하게 죽이시오.”
 “난 성품이 원래 충직해서 부도한 일을 알지 못합니다.”
 김일경은 영조의 폐부를 깊숙히 찌른다. 
 “지금 즉시 죽는 것이 소원입니다. 선대왕(先大王·경종)의 빈전(殯殿)이 여기에 있으니, 여기서 죽는다면 마음에 달갑게 여기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해보라.”
 “이미 충곡(衷曲·간절한 마음)한 말을 다했으니, 달리 진달할 바가 없습니다.”
 김일경은 더욱이 “나의 한평생 독서는 옛 군자(君子)를 배우려는 것이었다”면서 “어찌 자신이 사지에 빠졌다 하여 한평생 지키던 바를 잃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또 “내 스스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自視靑天白日)”면서 “시원하게 죽여달라”고 공언했다.
 결코 선왕(경종)을 향한 지조를 버릴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자 영조가 펄펄 뛰며 분한 마음에 눈물까지 흘렸다.
 영조는 그 말에 기막힌 듯 “저 자를 죽인들 과인의 마음이 시원하겠느냐”면서 “지극히 음흉하고 참혹한 자가 아니냐”고 가슴을 쳤다.
 이날 역시 국문장에 끌려온 41살의 목호룡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지독한 형신에 시달렸지만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온 나라 사람들은 모두 저를 도마 위의 고깃덩이로 생각하며 죽을 운명이라 합니다. 고(告)한 자는 죽는 법이라니, 장차 고한 자로서 죽을 겁니다. 그러나 흉심(凶心)은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종사(宗社)를 위했던 죄가 있을 뿐이고 다른 죄는 없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영조가 기막힌듯 “네가 종사를 위했다는 죄는 내(영조)가 역적을 비호했다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목호룡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저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부지(扶持)하고 전하(영조)의 심사를 만세에 밝혔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선대왕(경종 때) 임금을 독살하려 한 역모를 고한 공로로 공신이 된 자신을 이렇게 혹독하게 죽이려는 이유가 뭐냐고 항변한다.
 “회맹단의 삽혈(삽血·공신이 된 후의 서약식에서 바르는 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어찌 이런 일이 있습니까.”

영조의 이복형인 경종도 불행한 삶을 살았다. 희빈 장씨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동생과 노론측의 살해위엽 속에 살다가 결국 재위 4년만에 승하했다. 

 ■군졸 이천해의 막말, “국가가 무도합니다.”
 그로부터 한 달 여가 지난 1725년(영조 1년) 1월 16일, 영조의 어가가 이교(종로 5가에 있던 다리)를 지날 때였다.
 웬 군졸(軍士) 한 사람이 가로막고 임금에게 갖은 ‘흉언’을 퍼부었다. <영조실록>을 보자.
 “형조 참의 박성로가 상언했다. ‘이천해의 말은 오늘의 신하된 자가 들을 수 없는 바이기 때문에 차마 붓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非今日臣子所可聞 故不忍자筆)’”
 한낱 군졸의 신분으로 지존인 임금에게 무슨 막말을 퍼부었기에 ‘붓으로 차마 쓸 수 없을 정도’였을까.
 화가 난 영조가 신하들과 나눈 격정토로에서 ‘이천해 흉언’의 ‘대강’이 나온다. 영조는 이천해가 ‘고자(告者·남의 잘못을 고하는 사람)’이라고 자칭한 것에 열을 받았다.
 “그 자가 실성했다지만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 그 자가 자칭 ‘고자’라 하는 말을 도승지도 들었지 않은가.”
 영조는 이천해가 뱉은 또 하나의 흉언을 언급했다. 이천해가 “국가가 이토록 무도할 수 있느냐”고 지껄였다는 것이다.
 영조는 기가 막혔다. 그는 “죄인의 흉악한 말은 문서에 쓰지 마라”고 명했다. 사관(史官)에게도 “음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으니 역사서에 쓰지 마라”고 엄명을 내렸다. 중요한 것은 한낱 군졸의 신분인 이천해가 극심한 고문에도 ‘잘못을 시인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천해에게 24번이나 압슬(壓膝)을 가했다. 그럼에도 이천해는 불복(不服)하였고, 심지어 아프다는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영조는 ‘이처럼 흉악하고 사나우니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며 혀를 내둘렀다.”(<영조실록>)
 압슬형이 무엇인가. 죄인의 무릎 아래 사금파리 등을 깐 뒤 무릎 위에 압슬기를 놓고 누르거나 무거운 돌을 얹어 고통을 주는 고문기법이다.
 이천해는 그런 지독한 고문을 24차례나 참아내면서도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 지독한 모습을 지켜본 영조가 이천해 사건을 계기로 ‘압슬형’을 폐지했다니….
 “이천해가 흉악하고 사나와서 견뎠겠지만 다른 사람이야 어찌 견디겠느냐. 과인이 보기에도 참혹했다. 이후에는 압슬형을 없애라.”(<영조실록> 1725년 1월 28일)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무덤인 소령원을 회화식으로 그린 소령원도. 숙빈 최씨의 묘소는 경기 파주 광탄면 영장리에 있다. 

 ■20만명의 봉기, ‘조정에 간신이 가득합니다.’
 어디 이뿐이랴. 1728년(영조 4년) 그 유명한 이인좌의 난으로 영조는 큰 위기에 빠졌다. 영남에서만 7만명, 전국적으로 20만명이 가담했다.
 이것은 임금을 겨냥한 민심의 배반을 뜻했다. 이 때 난을 이끈 이인좌가 “(반란군의) 군중에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조석으로 곡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당의통략>)  
 그로부터 27년이나 흐른 1755년(영조 31년)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가 급히 장계를 올렸다.
 나주 객사에 이른바 ‘흉서(凶書)’가 걸렸다는 것이었다. 대대적인 범인 색출에 나섰다. 가뜩이나 하수상한 시절이었다.
 “신축년(1721년·노론 4대신 등 노론이 쫓겨난 사건)과 임인년(1722년·목호룡 고변사건) 때의 잔당과 무신년(1728년·이인좌의 난)의 잔적들로서 번성한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이 나라를 원망함이 심각하고 근거없는 말이 날마다 일어났는데, 이 때 흉서가 걸렸다.”
 흉서의 내용은 그야말로 흉(凶)했다. 워낙 참담한 표현이어서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장계를 받아본 영조는 기막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황건적 같은 무리로구나. 틀림없이 무신년(이인좌의 난)의 잔당이다. 그러나 과인은 무신년 때도 동요되지 않았다.”
 이같은 일이 다반사이니 걱정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어찌보면 의연하게 대처하려는 영조의 여유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혼란한 시대였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어쨌든 대대적인 수사 끝에 괘서(흉서)를 내건 일당이 붙잡혔다. 주범은 윤지라는 인물이었다.  
 윤지는 영조의 즉위년인 1724년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 윤취상의 아들이었다. 윤지는 무신년의 난(이인좌의 난) 때 제주도를 거쳐 나주로 유배됐다가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다.     윤지는 고문을 받다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영조는 분을 참지 못하고 대역죄의 형벌로 그의 목을 베고 그의 집을 헐어 그 자리에 연못을 파는 형벌을 받고 말았다.

 

 ■“당신은 이복형을 죽였어!”
 영조로서는 지긋지긋한 일이었다.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도저히 풀려날 수 없는 과거의 족쇄에 얽혀있었으니 말이다.
 김일경이나 목호룡이 “영조 당신은 나의 임금이 아니니 빨리 죽여달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인좌는 선왕(경종)의 위패를 모시고 반란을 일으켰고. 그 반란에 20만명이나 되는 민초들이 가담했을까. 또한 한낱 군졸의 신분이었던 이천해는 왜 지존인 임금을 향해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흉언을 퍼부었을까.
 모두 “영조 당신은 이복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자야!”라고 외쳤던 것이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 모든 사건은 이미 아버지인 숙종 때부터 잉태되고 있었다.
 숙종은 재위 46년 동안 3번의 환국(換局·정권교체)으로 정국을 요리했다. 말이 정권교체를 의미하는 환국이지 피바람을 몰고온 친위쿠데타였다.
 이 와중에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등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들을 핍박해 죽이거나 죽도록 만들었고, 수많은 대신들을 살해했다.
 임금이라는 사람이 정쟁놀이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을 때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3년 내내 대기근에 발생,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고,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숙종실록> 1697년 4월22일)고 한다.

숙종이 연회에 연잉군을 참석하라고 알린 초청장. 연잉군은 노론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반면 세자(경종)은 소론을 등에 업고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잇단 환국…천신만고 끝에 보위에 오른 경종 
 숙종이 남인을 서인 정권으로 복귀시킨 이른바 경신환국을 단행한 것이 1680년이었다.
 이 때 축출된 남인의 처리를 놓고 강경파인 송시열의 노론과, 온건파인 윤증의 소론으로 나뉜다.
 그러나 서인의 정권도 10년을 채우지 못했다. 숙종은 희빈 장씨를 앞세운 남인 세력에게 정권을 다시 넘긴다. 이것이 1689년(숙종 15년) 일어난 기사환국이다.
 기사환국으로 송시열 등 서인 100여 명이 사형·유배·삭탈관직 등의 정치보복을 당한다. 
 하지만 숙종의 변덕으로 남인정권은 5년을 넘기지 못한다. 1894년(숙종 20년) 다시 인현왕후와 숙빈 최씨를 앞세운 서인에게 넘긴다. 이것이 갑술환국이다. 
 갑술환국 이후 남인은 완전히 몰락했지만, 이제는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본격화한다.
 절대 다수를 차지한 노론은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영조)을, 소론은 희빈 장씨의 아들이자 숙종의 맏아들인 세자(경종)를 각각 지지했다.
 노론으로서는 절박했다. 세자가 등극할 경우 어미(장씨)의 한풀이를 한다며 정치보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산군의 예가 있지 않은가. 노론은 연잉군을 절대 지지할 수밖애 없었다.
 그러나 노론의 음모는 실패했다. 숙종이 64세의 나이로 승하하자(1720년) 세자가 보위를 이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집권당인 노론은 임금이 된 경종을 무자비하게 핍박했다.
 1721년(경종 1년) 8월20일 정언 이정소가 “임금이 춘추 왕성한데 (생식기능이 없어) 후사가 없다”며 “빨리 나라의 대본(후사)을 생각해야 한다”고 감히 상소를 올린 것이다.
 당시 경종의 나이 33살이었고, 부인 선의왕후는 춘추 16살이었다. 이정소의 말마따나 임금의 춘추가 왕성한데 무슨 세자를 논하는가. 이것은 명백한 반역이었다.

 

 ■경종, 친정체제 구축하다
 노론측이 전전반측한 까닭이 있었다. 경종이 마침 양자를 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경우 새로 들일 양자가 경종의 뒤를 이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노론이 행동에 나선 것이다. 노론측은 “선왕(숙종)의 골육은 금상(경종)과 연잉군(영조)인데 어찌 다른 사람이겠느냐”는 대비(인원왕후)의 한글교서를 내보였다.
 결국 연잉군은 왕세제로 책봉됐다. 노론 측은 이에 그치지 않고 경종을 더욱 압박했다. 왕세제(연잉군, 곧 영조)의 대리청정을 촉구한 것이다. 사실상 양위선언을 촉구한 것이다. 이 때부터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다.

 경종 역시 세제의 대리청정 요구를 받아들였다가 철회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갈짓자 행보를 보였다. 이 과정에서 노론의 4대신이라 일컬어지는 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채 등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촉구하는 데 선봉에 섰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왕세제의 대리청정은 경종의 최종 판단에 따라 ‘없던 일’로 결정됐다. 경종 역시 이복동생(연잉군)에게 사실상의 양위를 뜻하는 대리청정을 명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승기를 잡은 소론 가운데서도 강경파는 ‘이 참에 노론을 쓸어버리자’면서 대대적인 노론잡기에 나선다.
 1721년(경종 1년) 12월 6일 김일경 등 소론 측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요구한 ‘노론 4흉(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채)’은 삼강오륜과 군신유의를 저버린 적신(賊臣)”이라며 그들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노론의 핵심인물들을 ‘4흉(凶)’, 즉 역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경종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경종은 “상소의 내용을 가납한다”고 하면서 상소를 올린 김일경 등을 이조참판으로 전격 제수했다. 또 노론 측 고위인사들을 줄줄이 경질시켰다. 그런 뒤 소론 최석항과 이광좌, 이조, 김연을 병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 호조판서로 차례로 임명했다.
 우유부단하는 듯 했던 경종이 마침내 친정체제를 구축하려 한 것이다. 역사는 신축년에 벌어진 이 날의 환국을 ‘신축환국’이라 일컫는다.

 

 ■“연잉군 당신이 성상(경종)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722년(경종 2년) 3월 27일 정국을 피바람으로 몰고온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다.
 이름하여 목호룡의 고변사건이다. 이 고변사건으로 노론 세력이 초토화된다. 이를 임인옥사라 한다.
 목호룡이 누구인가. 그는 종친 청릉군의 노비였지만 연잉군(영조) 인척의 장지를 정해준 대가로 평민이 된 ‘풍수가’였다. 원래 연잉군 편이었지만 신축환국(1721년)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소론 쪽으로 돌아선 인물이었다. 그는 둔갑술을 가르쳐준다면서 연잉군의 측근 및 노론의 젊은 세력들에게 접근했다. 그는 이들과 내밀한 관계를 맺는다. 그런만큼 그의 고변은 끔찍했다.
 “성상(경종)을 시해하려는 자들이 있어, 혹은 칼로, 혹은 독약으로, 혹은 폐출로 모의한다고 합니다. 이는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입니다.”
 목호룡은 그러면서 “역적 중에는 동궁(왕세제 영조)을 팔아 씻기 어려운 오욕을 끼치려 한 자가 있다”면서 “동궁은 빨리 누명을 씻어 국본을 안정시키라”고까지 했다.
 겉으로는 동궁(영조)에게 '빨리 누명을 벗으라'고 촉구한 것이지만, 결국 역모의 수괴는 바로 왕세제, 바로 당신이라고 지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목호룡은 역적 일당의 이름들을 줄줄이 대면서 그들의 역할까지 아주 자세히 고했다. 지목된 인사들은 이른바 노론 4대신의 자제들을 포함한 노론 세력들이었다.

 

 ■경종 시해 3단계 방법
 왕세제의 최측근인 백망과, 왕세제의 처조카인 서덕수 등도 핵심인물로 등장했다. 목호룡은 경종 시해의 3단계를 ‘3수(三手)’라 칭했다.
 “칼로 시해한다는 것은 선왕(숙종)의 장례식 때 궁궐로 넘어가 대급수(大急手)를 행하는 것이고, 약으로 시해하는 것은 상궁을 시켜 음식에 독약을 타서 시해하는 소급수(小急手)이며, 폐출을 모의하는 평지수(平地手)는 숙종의 국상 때 언문으로 세자(경종)을 무고하고 헐뜯는 가사를 지어 궁중에 유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평지수’의 방안으로 ‘세자(경종) 모(某)를 폐위시켜 덕양군으로 삼는다(廢世子某爲德讓君)’는 거짓교서까지 꾸밀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더욱 기절초풍하게 만든 것은 경종 즉위년(1720년) 실제로 경종 독살이 시도됐다는 것이었다. 즉 “경종 즉위년(1720년)에 실제로 반년간이나 경영된 것”이라 폭로한 것이다.  
 실제 경종 독살사건이 시도됐다는 자백이 나왔다. 1722년 8월 노론 김창집의 친족인 김성절이 3번의 형문 끝에 쏟아낸 자백을 보라. 
 “예. 장씨라는 역관이 독약을 사서 가져왔으며 김씨 성을 가진 궁인이 성궁(聖躬·경종)에게 시험삼아 약을 썼습니다.”
 그러나 독약이 약해 제대로 듣지 않고 임금이 토하는 것으로 끝나자 노론 이기지 등은 “이 약은 맹독이 아니다. 은화를 모아 더 강한 독약을 사와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자백에 따라 경종 즉위년(1720년)의 <약방일기>를 모두 찾아보았다. 과연 1720년 12월 14일 경종이 ‘거의 반 대야에 이르는 엄청난 양의 담수(淡水)를 토했음이 확인됐다. 그 색깔 또한 좋지 않았다고 <약방일기>에 기록돼 있었다. 이 일기를 토대로 약방제조 한배야가 경종에게 물어보았다.
 “(문제의 그 날) 수라를 드신 뒤 즉시 구토하셨습니까.”
 “그렇다.”(임금)
 “그렇다면 그 날짜 당일의 수라간 나인 가운데 김씨 성을 가진 자를 조사한다면 독약을 올린 범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야흐로 범인 색출은 시간문제였다. (계속|하편은 23일 목요일에 게재)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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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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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cosmetic surgery bay area

    Tracked from cosmetic surgery bay area 2014/10/22 00:24  삭제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최근 수능 세계지리 8번 문제 파동을 보면 역사는 돌고 돈다는 이야기가 새삼 떠오른다.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으로 돌아가니 말이다. 
 때는 바야흐로 1964년 12월 7일 서울시 전기중학 입시가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도 수능일이면 전국이 들썩거리지만 그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험 치른 다음날, 각 신문에는 전날 치른 문제가 이른바 ‘가리방으로 긁은 글씨체’ 그대로 전제되었다.
 당시만 해도 코흘리개 국민학생(초등학생)들까지 입시지옥을 겪었으니 아찔한 생각이 든다. 각설하고, 큰 사단이 일어났다.. 

 

1964년 12월 7일 벌어진 전기중학 입시 자연문제 17번과 18번 문제, 엿을 만들 때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재료를 고르는 문제이다. 전기중학 시험문제는 도하 각 신문에도 그대로 전제됐다. |경향신문 자료   

자연 과목 18번 문제가 이상했다.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다음은 엿을 만드는 순서를 차례로 적어 놓은 것이다.
 1.찹쌀 1kg 가량을 물에 담갔다가
 2.이것을 쪄서 밥을 만든다.
 3.이 밥을 물 3ℓ와 엿기름 160g을 넣고 잘 섞은 다음에 60도의 온도로 5~6시간 둔다.
 4.이것을 엉성한 삼베 주머니로 짠다.
 5.짜 낸 국물을 조린다.
 (문제 18) 위 3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
 ①디아스타제 ②무우즙 3)4)….

 

 ■디아스타제와 무즙
 요컨대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이었다. 원래 질문이 요구한 정답은 ①디아스타제였다.
 디아스타제는 녹말을 분해해서 포도당으로 바꾸는 이른바 당화효소다. 동물의 침과 간에도 포함돼있다. 파란은 여기서 일어났다. ②무즙(무우즙)도 정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에도 디아스타제가 함유돼있다는 것이다.
 논란을 증폭시킨 것은 국민학교 ‘자연교과서 6-2’에 “침이나 무즙에도 디아스타제 성분이 들어있다”는 내용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말썽이 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엿을 만드는데 누가 무즙을 넣겠는가. 문제의 의도는 만약 엿기름이 없을 때는 시중에 판매되는 상품인 ‘디아스타제’를 구입해서 쓸 수 있다는 것이었으리라. 그렇지만 어린 국민학생들이 시판 디아스타제 추출물을 알기나 했을까.
 그러니 엿기름 대용으로 엿기름 속 효소인 디아스타제를 고른 학생도, 디아스타제 성분을 함유한 무즙을 선택한 학생도 맞았다고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무즙으로 엿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며 무즙으로 만들었다는 엿단지를 들고 서울시 교육위에 나타난 학부모들. 당시 신문들은 각 중학교 입시에서 수석을 차지한 학생의 이름과 성적까지 기사로 게재했다.

이튿날 난리가 났다.
 문교부가 ‘디아스타제’만 정답으로 발표하자, ‘무즙’을 정답으로 쓴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무즙파’ 학부모들은 사생결단이었다.
 일류중 진학을 일류고-일류대 진학의 지름길로 여겼기에 죽기실기로 대들었다.
 무즙파’ 학부모들은 “수험생의 70%가 무즙을 정답으로 써서 1점을 잃게 됨으로써 불합격했다”며 서울시교육위원회로 달려가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무기가 있었다. 직접 무즙으로 만든 엿을 솥에 담아와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무즙으로 만든 엿 좀 먹어보라’는 신문기사 제목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사태는 법정소송으로 번졌다. 이른바 ‘무즙파’ 학부모들 일부가 ‘입학시험 합격자 청구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이른바 희대의 ‘무즙재판’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서울 고법특별부는 원고들이 내놓은 ‘무즙으로 만든 엿’, 즉 무즙엿이 실제로 가능한 지 학술원 등 전문기관에 실험을 의뢰했다. 그 결과 ‘무즙으로는 엿을 고을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는 무즙파 학부모들의 주장이 기각된 것이다.
 하지만 교육당국은 교과서에 수록된 ‘엿’의 정의가 모호하고 일부 수련장 등에도 ‘무즙’으로 혼동될 수 있는 내용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무즙파’ 학부모들도 ‘무즙엿’을 국회의장 집에까지 들고 가 시위를 벌였다.
 결국 1965년 3월30일, 서울고법은 ‘무즙도 정답으로 봐야한다’며 원고승소판결을 내림으로써 ‘무즙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고법은 판결문에서 “18번 문제를 객관적으로 볼 때 엿을 만드는 당화작용에 대한 문제로 해석된다.”며 “따라서 디아스타제가 포함된 무즙도 정답이 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즉 교사용 교과내용으로 보면 엿을 만드는 방법으로는 1)엿기름, 2)상품화된 디아스타제, 3)산(酸)으로 만들어 중화시키는 방법 등인데, 2)디아스타제가 포함된 ‘무즙’도 당연히 정답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판결로 승소한 38명의 ‘무즙파’ 학생들에게 구제의 길이 열렸다. 승소한 학생 가운데 경기중에 30명, 서울중에 4명, 경복중에 3명, 경기여중에 1명 등이 추가입학하게 됐다.   

 

특수층 자제들이 무즙 파동을 틈타 일류중학교에 덤으로 입학한 것이 드러나 큰 파란을 일으켰다.    

 ■그 틈을 탄 부정입학
 그런데 그 어수선한 틈을 타 못말리는 사건이 또 발생한다.
 ‘무즙파’ 학생들이 ‘사고처리’의 형식으로 전입학하는 어수선한 과정을 틈타 경기중 6명, 경복중 15명 등 모두 21명의 특권층 자녀들이 ‘덤’으로 부정입학 해버린 것이다.
 “이번 뒷문 입학의 근원은…지난 봄 새학년이 시작되자 일류중에 못들어간 학부형들이 아우성치자 문교당국이 이들을 조금이라도 구제해주기 위해서인지(?) 교육법 시행령을 뜯어고쳐 학급당 60명 정원을 64명으로 늘릴 수 있는 법적 조치를 취한 것…. 그러나 경복·경기 등 몇 개 학교는 일부러 64명 모두를 채우지 않고 있다가….”(경향신문 1965년 5월27일)
 이들 학교는 새학기부터 늘어난 정원을 일부러 채우지 않고 있다가 ‘무즙파’의 구제라는 어수선한 상황을 틈타 일부 특권층의 뒷문입학을 슬그머니 감행한 것이다.
 또 한 번 소용돌이에 빠졌다. 특히 ‘덤입학’ ‘뒷문입학’한 특권층 가운데 청와대 비서관과 국회관계자, 재벌, 또는 국영기업체 임원의 자제들이 포함돼 있어 공분을 샀다.
 이 와중에 경기고에서도 부유층 자제 3명이 부정입학한 것이 추가로 드러남으로써 사태가 더욱 확산됐다.  

1965년 12월 실시된 66학년도 중학입시험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국민학생들이 풀기엔 너무 어려운 문제들이라는 학계 비판도 있었다.

■‘늘어놓기’ 문제와 ‘이히’ 문제
 어디 이뿐인가. ‘일류’를 향한 욕망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것도 무즙 파동이 일어난지 불과 1년 만에…. 1965년 12월이었다.
 경기중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학부모 30여 명이 다시 시교위 사무실로 뛰어갔다.
 이번에는 국어 (1) ‘늘어놓기’ 문제와 (5)의 ‘이히’ 문제였다.       
 (문제 1) 느낌이 약한 것부터 늘어 놓여진 것은 어느 것인가.
 ①퍼렇다-시퍼렇다-파랗다-새파랗다, ②파랗다-퍼렇다-시파랗다-시퍼렇다 ③파랗다-새파랗다-퍼렇다-시퍼렇다 ④)퍼렇다-시퍼렇다-파랗다-새파랗다
 (문제 5)‘즐겁다’는 ‘즐거이’, ‘간단하다’는 ‘간단히’로 소리 난다. ‘이’나 ‘히’를 붙일 때 앞의 말에 ‘ㅂ’을 붙일 수 있으면 ‘이’를, 앞의 말에 ‘하다’를 붙여보아서 말이 어울리면 ‘히’로 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다. 이래 여러 말 중 위의 설명에 들어맞지 않은 말은 몇가지나 되는가. (솔직이, 간간이, 굉장이, 열심히, 헛되이, 가까이, 반듯이)
 ①3가지, ②4가지 ③5가지 ④7가지
 (문제 1)의 정답은 처음에는 ②번이었다. 그러나 당시 경기중 교장이 ②③을 모두 맞는 것으로 복수정답 처리를 했다. 이 교장은 또 ②로 채점했던 (문제 5)의 정답을 ①로 변경했다. 그러자 정답변경으로 손해를 봤다는 학부모들이 또 다시 머리띠를 두른 것이다. 경기중 교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문제 1)의 경우 ‘가장 알맞는’이라는 조건이 없다면 한 개와 정답 외에도 차선의 답도 맞는다고 봐야한다”며 “②와③을 복수정답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또 (문제 5)의 경우도 “국정교과서와 국문학자의 학설이 뒤집히지 않는 한 정답은 ①일 수밖에 없다”이라고 단언했다. 그러자 불합격자 110여 명은 ‘불합격취소’ 행정소송을 법원에 제출했다. 1년전 무즙파 학부모들처럼….
 하지만 이 소송은 결국 학부모들의 패소로 끝났다. 서울 고법특별부는 “(1번)과 (5번) 문제를 둘러싼 학자들의 의견이 구구하기 때문에 획일적인 기준이 없다”며 “따라서 재판에 의해 좌우될 문제가 아니며 학교당국의 주관에 따라 정답이 결정될 문제”라고 판시했다.(1966년 3월31일) 학교장의 재량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앞의 두 문제가 과연 12살짜리 국민학생이 풀 수 있는 수준인가. 당시 일선교사들은 “권위있는 학자들에게나 물어봐야 정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를 12살짜리 아동에게 냈다”며 “건전하지 못한 질 나쁜 문제였다”고 꼬집었다.(<경향신문> 65년 12월28일)
 

1968학년도 중학입시에서 또 한 번 말썽을 부린 입시문제. 경기중 교장이 복수정답을 인정하는 바람에 한바탕 파란을 일으켰다. 

■계속 터져나오는 잘못된 문제
 1967년 12월 6일자 신문은 우울했다.
 동베를린공작단(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정하룡·조영수·윤이상·최경희·최정길’ 등 6명에게 사형이 구형되는 등 충격적인 기사가 실린 것이다.
 그런데 신문 사회면 한편에는 그날의 사회분위기와 전혀 맞지않은 코미디 같은 기사가 실린다. 
 바로 4일 전(12월 2일) 치러진 중학교 입시의 미술문제가 잘못됐으니 시정하라는 ‘이틀째 농성’의 기사였다. 그렇다면 논란이 된 미술문제의 13번과 19번은 무엇이었는가.
 “(문제 13) 목판화를 새길 때 다음 중 창 칼 쓰는 법이 바른 것은?
 (문제 19) 우리가 조형작품을 만드는데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①꾸미기 ②만들기 ③스케치 ④협동제작
 출제자인 서울시교육위원회가 제시한 정답표의 정답은 (문제13)의 경우 ‘②앞으로 당기기’, (문제 19)의 경우 ‘③스케치’였다.
 그러나 채점이 한창이던 2일 밤 11시쯤 반전이 일어났다. 경기중학교 교장이 논란많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두 문제의 정답이 애매하다면서 복수정답을 제시한 것이다.
 경기중 교장은 (문제 13)의 경우 정답은 ②앞으로 당기기 뿐 아니라 ③뒤로 당기기도 정답이며, 문제 19의 경우 ①꾸미기 ②만들기 ③스케치 등 3답이 모두 맞는다고 했다.
 그러자 시교위의 정답표대로 답을 적어낸 수험생 학부형들이 들고 일어났다. 경기중 강당을 점령, 철야농성을 벌인 것이다.
 “시험당일인 2일 오후에 10여 대의 지프가 학교를 방문한 뒤에 정답이 바뀌었다. 특권층의 압력이 있었던 게 아니냐. 두 문제에서 정답이 한 개씩으로 채점이 되면 160점 만점에 156.7점 이상이면 합격되는데, 2~3개의 복수정답을 인정하면 커트라인이 158.6으로 높아진다. 그럴 경우 300여 명의 순위가 뒤바뀐다.”  

 

  ■행정소송의 승패는
 흉흉한 소문이 퍼졌다. 집권당(공화당) 의원의 자제가 끼어있다는 둥, 농성 학부모 중 국회의원의 사모가 있다는 둥….
 어쨌든 이 사건 역시 행정소송으로 비화됐다. 서울고법은 “특히 (문제 19)는 위법이 아니지만, (문제 13)은 도안으로 된 답을 선택하는 것인데 복수정답을 채택한 것은 교장의 재량권 남용”이라고 원고승소판결을 내렸다. (13번)만 인정해준 것이다.
 이 판결로 158.4점이던 경기중의 합격선은 158점으로 낮아졌고, 19명의 낙방생이 구제되는 길을 열었다. 하지만 1968년 10월28일 대법원은 경기중학교 교장의 정답 복수처리는 교장의 재량권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해당 코흘리개 학생들의 동심만 멍든 것이다.
 이런 불미스런 사건이 이어지자 1968년 7월15일 정부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중학교 무시험제도를 발표한 것이다.
 문교부는 일류병의 ‘악의 축’으로 지목된 경기·서울·경복·경기여·이화·경동·용산·서울사대부중·창덕여·수도여·중앙·보성·숙명·진명 등 14개 중학교를 단계적으로 없앴다고 발표했다.
 그 때부터 코흘리개 국민학생들의 입시지옥은 사라졌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을 보면 어떤가. 입학시험을 보진 않지만 초당학교 4학년이면 대학이 결정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아닌가.
 또 하나 40년 전에는 중학교 입시 때 벌어졌던 잘못된 시험문제가 대학입시에 버젓이 등장하고 있으니…. 세월이 흘러도 좋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되는 입시지옥의 현실이 아닌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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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cked from minecraft pocket edition cheats and mods 2014/10/22 04:08  삭제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옛날 견씨(견훤)이 왔을 때는 승냥이나 범을 보는 것 같더니 지금 왕공(왕건)이 이르러서는 마치 부모를 보는 듯 하구나.”(<삼국사기> ‘신라본기·경순왕조’
 931년 3월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이 경주를 방문하자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감읍한다. <삼국사기>는 이어 “왕건의 부하 군병들은 엄숙하고 조용했으며 어떤 조그만 물건에도 손대지 않았다”고 부연했다. 그렇다면 경순왕이 ‘승냥이나 범’으로 치부한 견훤 때는 어땠는가.
 “견훤이 927년 겨울 11월에 경주에 들이닥쳤다. 견훤은 후궁에 숨어있던 경애왕을 핍박하여 자결케 하고 왕비를 강음(强淫)했다. 부하들은 경애왕의 비첩들을 난통(亂通)했으며 공사의 재물을 노략질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경애왕조’)

경주 포석정. 경애왕이 견훤이 침략하는 사실도 모르고 술판을 벌이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

 ■견훤·경애왕·왕건·경순왕의 운명
 <삼국사기>는 한 술 더 뜬다.
 “왕(경애왕)은 왕비와 궁녀 및 왕실의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적의 군사가 쳐들어오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다.”
 ‘놀자판’ 경애왕과 ‘인간말종’ 견훤, 그리고 ‘하늘이 내린 명군’ 왕건, 그리고 그 왕건의 은혜에 감읍하며 천년 사직을 바친 경순왕….
 <삼국사기>의 기록은 절묘한 시나리오를 이루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견훤과 경애왕은 망하거나(견훤) 죽을 수 밖에(경애왕) 없었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초한전쟁을 벌인 2200년 전 유방과 항우를 보라.   
 우여곡절 끝에 진(秦)나라 수도 함양을 점령한 유방은 가혹한 진나라의 법령을 모두 폐지한 채 이른바 ‘3장(章)의 법’만을 약정한다. ‘3장의 법’이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죽이거나 남의 재물을 훔치는 자만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진나라의 가혹한 법령은 모두 폐지했으며, 유방의 군대는 함양의 재물을 절대 탐내지 않았다.
 그러나 뒤늦게 함양에 들이닥친 항우는 진나라 궁실을 3개월 간이나 불태웠고 재화와 보물·아녀자들을 약탈했다.
 또 아버지(진시황)가 세운 강대국 진나라를 즉위 3년 만에 잃은 ‘진 2세 호해’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남겼다. 백성을 핍박하는 아방궁 축조를 말리는 대신들에게 “황제가 귀한 것은 하고 싶은 일을 내 맘대로 하는 것 때문인데 무슨 소리냐”고 호통 쳤다. 사마천은 그런 호해를 두고 “마치 사람의 얼굴로 짐승의 소리를 내는 꼴(人頭畜鳴)”이라고 한탄했다. 

1934년 일제는 남대문과 동대문을 보물 1,2호로 등록하고. 고적 1호로는 경주 포석정을 지정했다. 신라의 망국을 조선의 망국으로 연결짓고,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인식을 불어넣었을 가능성이 크다.  

 ■백성의 마음을 잡는 자가 천하를 잡는다
 그 예는 최근에도 있었다. 1921년 불과 50여 명의 당원으로 출발한 중국 공산당이 28년 만에 그 막강한 국민당 정부를 물리치고 중국대륙을 통일했다.
 그런데 이 극적인 성공의 이유가 있었다. 중국 공산당의 홍군이 추구한 ‘백성 속으로’ 방침이었다. 그러면서 채택한 홍군의 ‘3대 규율’과 ‘8대 사항’은 중국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3대 규율’이란 ①모든 행동은 지휘에 따르며 ②노동자·농민의 것은 무엇 하나 가질 수 없고 ③토호들로부터 빼앗은 것은 공동 소유한다는 것이다.
 ‘8대 사항’은 ①인가를 떠날 때 잠자느라 사용한 문짝을 제자리에 걸어 놓는다 ②잠잘 때 사용한 짚단은 묶어서 제자리에 놓는다 ③인민에게 예의바르고 정중하게 대하며 가능한 한 무슨 일이고 도와준다 ④빌어 쓴 물건은 되돌려 준다 ⑤파손된 물건은 모두 바꾸어 준다 ⑥농민과의 거래는 정직하게 한다 ⑦구매한 모든 물건은 값을 지불한다 ⑧위생에 신경 쓰고 변소는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운다는 등의 내용이다.
 사실 얼마나 사소한 규칙인가.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백성을 불편하게 하면 안된다는 것이니 말이다.
 “천자의 마음에 들면 제후 노릇밖에 못하지만 백성의 마음을 잡으면 천자가 된다”는 옛말은 전적으로 옳다.

 

 ■경애왕은 한겨울에 놀자판을 벌였나
 그러나 하나 더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경애왕과 견훤은 패배자였고 왕건은 승리자였단 말이다. 만약 왕건이 패했다면 역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왕건을 ‘인간말종’으로 몰아붙였을 터이다.
 ‘역사=승자의 기록’임을 감안하고 하나 돌이켜보자. 과연 경애왕은 나라가 망하는 줄도 모르고 흥청망청 연회를 즐기다가 견훤의 침략을 맞아 속수무책으로 능욕을 당했을까.
 포석정은 과연 연회장이었을까. 또 하나의 궁금증이 생긴다. ‘놀자판’을 벌였던 포석정이 무슨 자랑거리라고 ‘사적 1호’의 이름을 붙였을까.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한가지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다.
 “경애왕이 927년 11월(음력)에 견훤이 쳐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였다”는 바로 그 대목이다.
 이미 두 달 전인 음력 9월에 이미 견훤이 경주 인근인 영주까지 쳐들어오자 왕건에게 급히 원군을 청했던 터였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점. 아무리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경애왕이 몰상식한 술판을 벌였을까. 게다가 한겨울(음력 11월)인데 노천에서 여흥을 즐겼을까. 

 

 ■포석정은 놀이터인가
 사실 포석정은 지금까지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유배거유적(流盃渠遺蹟)이라고 해석돼왔다.
 유상곡수연의 원류는 중국에 있다.
 353년 3월3일 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현의 후이치(會稽)산 북쪽에 난정(蘭亭)이란 정자에 당대 명필로 유명한 왕희지(王羲之) 등 명사 41인이 모였다.
 그들은 개울물에 몸을 깨끗이 목욕하고 모임의 뜻을 하늘에 알리는 의식을 행하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잔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읊는 놀이를 했다.
 이 놀이를 유상곡수연이라 하였고, 이때 읊은 시를 모아 서문을 왕희지가 썼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난정회기(蘭亭會記)> ‘난정집서(蘭亭集序)’이다. 이후 중국에서는 왕궁에 유배거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바로 잔을 띄우면 흘러 돌아오도록 한 시설을 말한다.
 경주의 포석정 포석이 바로 왕희지 등의 유상곡수연과 중국 왕궁의 유배거 시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창조해낸 신라 특유의 독특한 시설이라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결국 이러한 시설은 왕족이나 귀족층의 놀이 시설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돼왔다. 이렇다보니 결국 놀이만 즐기다가 나라가 망한 꼴이었다는 결론이 가능했던 것이다.

 

 ■경애왕이 포석정에 간 진짜 이유
 포석정은 과연 왕실의 놀이터였을까.
 <화랑세기>를 보면 포석사(鮑石祠), 또는 줄여서 말하는 포사(鮑祠)라는 대목이 나온다. 과연 포석정과 포석사(혹은 포사)는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포석사는 신주를 모시는 사당(祠堂) 또는 묘(廟)라는 것이다.
 <화랑세기>에는 이 포석사에 삼한을 통합한 후 사기(士氣)의 종주로 받들어진 문노(文弩)의 초상화를 모셨다고 한다. 화랑 중의 화랑으로 추앙받는 문노는 제8대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재임 579~582)였다. 그런 문노의 화상이 포석사에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또한 문노와 그 부인이 된 윤공이 그 포석사에서 결혼했다. 당시의 임금인 진평왕이 그 혼례식에 참석했다. 태종무열왕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동생 문희의 혼인식이 열린 곳도 포석사였다. 포석정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나아가 귀족들의 혼례를 거행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주장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안고 있다.
 포석정이 자리 잡고 있는 경주 배동 주변에 박혁거세의 탄생설화와 관계있는 나정(蘿井)과 천관사(天官寺)·천은사(天恩寺) 등의 유적이름에서 확인되듯 무언가 신성한 공간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다.  신궁이 설치된 장소도 월성(月城)의 남쪽으로 기록돼 있는데, 도당산(都堂山)을 거점으로 한 그 주변일 가능성이 크다. <삼국유사>를 보면 박혁거세가 최초로 궁실을 조영한 장소도 이 일대였다. 박씨의 능이 모두 이 일대에 집중돼있다는 점은 박씨가 이곳을 신성한 공간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경애왕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술판을 벌이려, 그것도 한겨울에 노천인 포석정으로 간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누란에 빠진 나라의 안녕을 간절히 빌기 위해 왕실과 귀족들을 동원해서 포석사로 간 것이었다. 거기서 간절히 1000년 사직의 유지를 빌다가 그만 후백제군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해석해야 자연스럽게 풀린다.

 

 ■포석정 사적 1호가 되다
 여기서 일제가 왜 포석정을 사적 1호로 지정했는 지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찾아보자.
 일제는 1934년 8월27일 <관보>를 통해 조선의 보물 문화재를 지정한다. 국보라 하지 않았다. 내지(일본 본토)가 아닌 식민지의 문화재였기에 보물이라 한 것이다. 내선일체를 부르짖었기에 일본의 국보는 식민지 조선의 국보라는 것이었다. 국권을 상실한 조선의 국보는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보물 1호 남대문, 2호 동대문, 사적 1호 포석정 등이 등록됐다. 왜 남대문 동대문 포석정이 우선순위로 꼽혔을까.
 분명했다. 남대문(숭례문)은 임진왜란 때 왜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빠져나온 문이었다. 동대문 역시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입성한 문이었다. 그러니까 남대문과 동대문은 조선의 기념물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일본의 전승기념물로 문화재 등록이 된 것이었다.
 포석정 역시 ‘신라의 망국=조선의 망국’으로 여기려는 일제의 숨은 의도가 담겨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적이 쳐들어왔는 데도 흥청망청 놀았던 신라망국의 상징’을 사적 1호로 삼은 것…. 그러니까 ‘너희들은 결국 식민지로 살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식의 패배주의를 심어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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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stanseoservic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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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지난 몇해동안 우리나라 TV 수상기 보급 증가율은 파천황적이다.”
 경향신문 1974년 10월 12일자는 ‘부쩍 는 TV수상기 보급-전국 150만대 돌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TV수상기 증가율을 ‘파천황적(破天荒的)’이라는 표현을 쓰며 놀라워했다.
 파천황은 혼돈의 상태(天荒)을 깨뜨리는(破) 천지개벽의 상황을 일컫는다. 기사는 “KBS에 등록된 TV 수상기 대수가 150만대를 돌파했다”면서 “등록되지 않은 음성대수를 포함하면 200만대가 보급됐을 것”이라 전하고 있다. 당시 기사는 “TV 보급률이 가장 높은 나라는 모나코(1위)이며. 미국(2위), 캐나다(3위), 쉬든(스웨덴·4위)이 뒤를 잇고 있다”면서 “우리나라는 대략 25위로 추산된다”고 추정했다. 기사를 보면 ‘파천황’이 그렇게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1970년 33만5000대에 불과하던 TV 수상기 보급대수가 단 4년 만에 5배로 급증했다니까…. 1974년 당시 전국의 가구수가 550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평균 4가구 당 1대꼴이 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4년 10월10일 경향신문 기사. 당시 최고 CF스타는 최불암이라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그 뒤를 신일룡-양정화-전양자-태현실-김옥진-염복순이 따랐다고 전한다. 최불암의 모델료는 단발에 98만원이었다고 한다

 ■1974년 최고 인기스타는
 이런 분위기는 이미 한 달 전인 74년 9월 18일 기사에서 흘러나왔다. 경향신문은 “TV 세트의 보급이 늘어남에 따라 안방극장 스타 탤런트들의 주가가 날로 높아진다”면서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영화스타의 인기를 못따르던 그들이 이제는 완전히 스크린 스타와 치환의 전환점을 이르렀다”고 전했다.
 그러니까 1974년 무렵에 TV 탤런트의 인기가 영화배우의 그것을 능가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한 것이다. 신문은 이어 “TV 탤런트 지망생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면서 ‘좁은 문’을 뚫고 공채로 들어간 3TV(KBS MBC TBC) 탤런트들의 동향과 저간의 사정을 전하고 있다.
 기사를 보면 해마다 봄철에 뽑는 MBC의 경우 2500여 명이 응모해서 30명 안팎의 합격자를 추렸다. 합격된 탤런트들은 6개월의 교육을 거쳐 ‘0기생(期生)’이라는 이름의 탤런트 병아리가 된다는 것. 신문은 “병아리 시절의 출연료는 20분물 드라마 1회당 600원인데, 이는 그야말로 교통비 밖에 안된다”고 전했다. 관록이 쌓여 5년이 지나야 비로소 5000원선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탈락자가 생겨 5년이 지나면 4분의 1정도가 중도탈락한다는 것이다.
 신문은 1970년 초봄과 가을에 뽑은 2·3 탤런트들 가운데 양정화·박원숙·김민정·문관호(이상 2기), 김영애·염복순·김수미·국정환(이상 3기) 등이 한창 인기를 얻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KBS의 경우 딱 한 번 공모를 통해 탤런트를 선발했는데, ‘흑진주’에 출연 중인 김금자가 각광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KBS는 향후 공모절차 없이 매주 일요일에 방송되는 ‘신인탄생’이라는 신인등용문 프로그램에서 기말결선을 거친 탤런트들을 훈련시켜 데뷔시킬 작정이라고 소개했다.

 

 

1974년 9월18일자 '경향신문'. TV스타가 영화배우의 인기를 능가하기 시작했음을 알리고 있다. 당시 햇병아리 MBC 탤런트의 개런티는 교통비 정도인 600원이었음을 전하고 있다. 5년이 지나야 6000원의 출연료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최고 CF 스타는 최불암
 현재 공모중이라는 TBC의 응모자격은 ‘고졸 이상에 연령제한은 없고, 여고 3학년 재학생도 포함된다’는 것이었다
 TBC의 경우 공모 외에도 스카웃 제도를 병행하고 있는데 누구든 직원 눈에 들어 추천되는 신인은 심사위원회 심사를 통해 특채가 결정된다고 했다. 직원 눈에 들면 특채의 길이 열린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선발방식이다. 그런데 이런 스카우트의 방식으로 특채된 탤런트 가운데 ‘어머니’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맡은 안옥희가 있다고 전했다.
 이밖에 “TBC에서 큰 역을 맡고 있는 탤런트 가운데는 오세나와 연운경·김효원 등이 있다”고 했다.

1974년 10월10일 방송프로그램. 지금 봐도 기억나는 레전드 프로그램이 많다. '꽃피는 팔도강산, '딱다구리', '여보 정선달' 등이다. 

 

 1974년 당시 광고 모델 중에서 ‘넘버 1’도 탤런트인 최불암이었다. 10월11일자를 보면 최불암은 보험회사 CF에 1번 출연하고 98만원 받았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단발’ 모델료로는 최고액이었다고 전했다. 최불암의 뒤를 잇는 인기모델로는 신일룡-양정화-전양자-태현실-김옥진-염복순의 차례라 했다.
 참고로 1974년 10월 10일자에 실린 TV라디어 프로그램을 보면 지금도 기억나는 레전드급 프로그램이 보인다. KBS의 가족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과 TBC의 ‘딱따구리’ 등이다. ‘꽃피는 팔도강산’은 김희갑·황정순 부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자식들을 찾아가는 가족드라마였다. ‘딱따구리’는 ‘에헤헤헤헤~’라는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어린이 외화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밖에 그 해 8월15일에 일어난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을 다룬 드라마 ‘조총련’(KBS)과 ‘올 겨울 연탄사정은 어떨까’를 전망하는 ‘경제기상도’(TBC), 백설희의 데뷔시절 에피소드를 곁들여 구성된 ‘스타쇼-백설희 아워’(KBS) 등도 눈에 띈다.

 

 ■TV가 라디오를 앞선 그 순간
 사실 TV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조짐은 이미 2년 전에 나타났다.
 경향신문 1972년 10월과 11월 사이에 실린 방송(TV·라디오) 프로그램을 비교해보면 간파할 수 있다.
 즉 10월 31일자 게재된 각 방송국별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라디오와 TV가 같은 비중으로 나란히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11월 1일자를 보면 확 달라진다. 각 사의 TV프로그램이 AFKN과 함께 상단부에 오르고, 라디오 프로그램이 하단부로 깔린 것이다.
 라디오의 아성을 뚫고 TV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1972년 11월 1일자 TV프로그램을 보자. TV 방영시간은 ‘오후 5시~밤 11시 이후까지’이며, 아침은 ‘7시~11시까지’다.
 먼저 당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TV시대 개막을 재촉한 KBS ‘여로’가 오후 7시30분부터 20분간 방영된다.
 다른 KBS 드라마는 ‘이춘풍전’, ‘신부들’ 등이 잇달아 편성됐다. MBC는 ‘임꺽정’, ‘아다다’, ‘선생님’ 등이, TBC는 ‘사모곡’, ‘생명’, ‘여보 정선달’, ‘비밀’ 등이 연속 편성됐다.
 가히 드라마 천국이라 할 수 있다. 영화로는 ‘보난자’, ‘타이거마스크’, ‘달려라 꾀돌이’ 등이 방영된다.

1972년10월31일 방송프로그램. 라디오와 TV가 같은 비중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래도 라디오였다
 라디오 편성을 보면 정겨운 프로그램들이 눈에 띈다.
 ‘우리의 국군’, ‘젊은이의 행진’(이상 KBS 710㎑), ‘이종환쇼’, ‘전설따라 3천리’, ‘한 밤의 음악편지’, ‘푸른 신호등’(이상 MBC 900㎑), ‘소년극장-손오공’, ‘드라마 일제 36년사’, ‘밤을 잊은 그대에게’, ‘가로수를 누비며’, ‘유쾌한 샐러리맨’(이상 TBC 640㎑), ‘특별수사본부’, ‘밤의 플랫폼’(이상 DBS 790㎑), ‘마음의 문’, ‘꿈과 음악사이’, ‘척척박사’(CBS 840㎑) 등….
 ‘우랑버리 바나라부릉….’하는 주문과 함께 요술을 부리는 손오공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을 때리고. 숨죽이며 들었던 ‘전설따라 3천리’의 기억도 새롭다.
 지금도 눈먼 시어머니에게 지렁이를 먹이던 며느리의 악행을 담은 이야기가 어제의 이야기처럼 생생하다.
 또한 달콤한 ‘밤의 플랫폼’,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오프닝 음악이 지금 들리는 듯 하다. 아침에는 ‘푸른 신호등’과 ‘가로수를 누비며’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던 기억도 새롭고…. 
 그러고보니 72년 당시 TV가 없었던 필자로서는 TV가 있는 친구집을 찾아 친구의 텃세를 감수하고 ‘여로’를 숨죽이며 보았던 추억도 떠오른다.
 그런 상황이니 여전히 보기 어려웠던 TV보다는 벽돌 모양의 라디오를 노상 틀어놓고 끼고 살았던 기억이 더 생생할 수밖에 없다.

 

 ■10월 유신 홍보프로그램
 각설하고 다시 방송프로그램을 살펴보니 각 방송국별로 흥미로운 프로그램들이 집중 편성됐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10월 유신’을 홍보하는 프로그램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KBS의 경우 ‘유신헌법 해설’이 15분간(10시 20분부터) 편성돼있고, 곧이어 ‘통일주체의 형성’을 제목으로 한 보도특집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MBC는 ‘유쾌한 청백전’, 드라마 ‘새엄마’에 이어 ‘새질서의 태동’이라는 특집 프로그램이 방영된다.(밤 9시 20분) 10시 30분엔 ‘오늘의 좌표’(새 체제와 한국경제)가 편성됐다.
 TBC는 밤 10시 30분부터 ‘유신헌법과 민족의지’를 주제로 특집좌담회를 연다.
 10월 유신이란 무엇인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헌법 일부조항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4개항의 비상조치를 포함한 특별선언과 함께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즉 ‘①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 의 일부 조항의 기능 정지, ②효력이 정지된 일부 헌법조항의 비상국무회의에 의한 수행, ③비상국무회의에 의한 헌법개정안의 마련, ④비상국무회의가 마련한 유신헌법안은 11월 21일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 등이 주요 골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내건 명분은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헌정중단을 통한 장기집권을 노린 이른바 유신체제의 출범이었다.

 

 1972년 11월1일자부터 TV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치고 상단에 자세히 소개된다. TV시대의 개막을 상징하는 것이다. 당시 TV에는 10월유신을 홍보하는 특집프로그램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공전의 흐트를 기록한 '여로'도 방영되고 있다.

 ■TV프로그램의 민낯
 갑작스런 헌정 중단으로 어리둥절한 사람들에게 ‘학습’이 필요했다. 따라서 10월 17일 이후 각 매체를 동원. ‘유신헌법’과 ‘유신체제’를 홍보하는데 혈안이 된다,
 지금도 ‘10월 유신체제의 길로 접어들면 번영국가. 다른 길로 들어서면 해골이 우글거리는 낭떠러지’임을 강조하는 홍보 팜플렛이 필자의 뇌리 속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물론 이같은 지속적이고 강압적인 선전홍보전 때문이었을까.. 유신헌법은 국민투표에서 92.9%의 투표율에 91.5%의 찬성률로 통과됐다.
 두 달 뒤인 12월 23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놀라운 투표결과가 벌어졌다. 박정희는 이날 총 2359명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전원이 참석, 무효 2표를 제외한 2357명의 찬성표로 제8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기네스북에 나올만한 투표율에, 기네스북에 나올만한 찬성표를 얻어 당선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견고할 것 같았던 유신체제는 9년 만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으니…. 무리하고 강압적인 체제는 그만큼 사상누각이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옛날 신문을 뜯어보고 있노라면 신문이 아주 훌륭한 역사책임을 절감할 수 있다.
 어느 순간의 TV프로그램 하나만 곰곰히 들춰봐도 그 시대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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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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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stanseoservic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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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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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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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고구려는 조기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정권입니다.”
 중국 지안(集安)의 광개토태왕릉 위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면 누구든 감상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그야말로 절대 넘을 수 없는 군사분계선 철책을 돌고 돌아 중국대륙으로 우회해서 온 길이 아닌가. 압록강엔 철책이 없다. 북한 땅, 북한 사람들이 손에 닿을듯, 마음에 닿을 듯 가깝다. 그러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왕릉을 내려와, 그 거대한 광개토대왕비를 바라보면 또 한 번 상념에 젖을 수밖에 없다. 7m에 가까운 비석에 새겨넣은 1800자에 이르는 명문….
 명문에 표현된 대로 비문의 주인공은 바로 ‘광활한 영토를 개척한’(廣開土) ‘왕중의 왕’(太王)이 아닌가. 압록강 이남 한반도로 쪼그라들고, 그 조차 군사분계선으로 양분된 영토를 지하에서 바라보는 광개토태왕의 심정은 어떨까. 이곳을 찾는 답사객들은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애국자가 되어 고구려의 옛 영화를 떠올리며 비감(悲感)에 빠지게 된다.
 그것을 지나친 국수주의라 폄훼되어 손가락질 받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9월 24일, 이곳에 선 필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 9월24일 장군총(장수왕릉)이 자리잡고 있는 중국 지안(集安)의 이른바 고구려 28대왕 박람관 앞에 서있는 한글 안내판. 고구려가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며. 당나라와의 내전 끝에 철저히 소멸됐다는 내용이 쓰여있다. |필자촬영

 ■고구려는 ‘철저히 사라졌다’
 왠지 ‘센치’ 해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장군총(장수왕릉)까지 친견하고 내려오면 ‘비감’은 ‘비분강개’로 변한다.
 앞서 인용한 대로 ‘고구려 제28대왕 박람관’을 소개하는 안내문의 내용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가슴에 대못을 박듯이 ‘고구려는 역대로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었다’는 문구가 선명하니…. ‘2012년 6월28일 지안(集安) 고구려 민속문화연구 발전센터’ 명의로 된 안내판은 중국어와, 그 중국어를 번역한 ‘한글판’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14줄에 불과한 한글 안내문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면 흥미로운 점을 간파할 수 있다.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정리한 ‘고구려사 인식’이 함축돼있으니 말이다. 우선 ‘고구려=조기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정권’이라는 인식은 동북공정이 낳은 핵심 인식이다.
 그 뿐이 아니다. 안내문을 보면 ‘고구려 정권은 705년 동안 동북아 문명사의 눈부신 자태를 자랑했다’고 상찬했다. 그러나 다음 문장을 보라.
 “기원 668년 당나라에서 일어난 국내전쟁으로 고구려 정권은 철저히 소멸됐다”고 했다.
 그러니까 중국 동북의 소수 민족 정권인 고구려는 중앙의 당나라 정부와 내전을 벌였으며, 그 내전에서 패하는 바람에 ‘철저히’ 사라졌음을 강조하고 있다.
 안내문은 그것도 모자라 “고구려 정권의 발생이 필연적이지만, 그의 소망(消亡·소멸해서 멸망함)도 필연적이었다”고 못박고 있다.
 한마디로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정권인 고구려는 중앙정부(당나라)에게 감히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철저히 멸망해서 사라졌는데, 그 멸망 또한 필연적인 수순이라고 강조점을 찍은 것이다.

광개토태왕릉 정상에서 바라본 압록강 너머 북한 땅. 손에 닿을 듯 지호지간이다.|필자촬영

 ■동북공정의 결과물
 그러니까 안내판이 주는 시사점은 대략 3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1)고구려=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라는 점. 2)소수민족의 지방정권에 불과한 고구려가 중앙정부(당나라)와의 내전을 통해 완전히 멸망해서 소멸됐다는 점, 3)고구려의 멸망은 필연적인 역사의 순리라는 점 등이다. 여기서 중국이 2002년부터 추진했던 동북공정이 과연 무슨 프로젝트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동북공정을 한마디로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과제(공정)’이다.
 현재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여러 연구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즉 중국과 국경을 맞닿은 20여 개 소수민족의 통합을 겨냥한 정치공작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20여 개 민족은 조선족, 베트남족, 위구르족, 러시아족 같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를 가지고 있는 중국 내 소수민족을 뜻한다. 중국은 계층간·지역간·민족간 격차 등 갖가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이런 공작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동북공정은 티벳을 겨냥한 서남공정, 위구르족을 겨냥한 서북공정과 함께 중국의 3대 공정 중 하나로 꼽힌다. 이밖에 미얀마·태국·라오스·베트남 국경을 겨냥한 ‘남방공정’, 몽골을 겨냥한 ‘북방공정’, 타이완·하이난(해남도)·오키나와·필리핀 등을 겨냥한 ‘해양변강공정’ 등 다양한 공정(프로젝트)의 이름들이 운위되고 추진됐다.
 이것은 “중국 내 56개 민족 간 분쟁이 일어나면 나라가 망한다”(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언급)는 초조감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동북공정은 중국의 핵심지역으로 떠오른 동북 3성 지역의 역사, 그러니까 고구려·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특히 중국은 2001년 한국이 제중동포의 법적지위에 대한 특별법을 국회에 상정하고, 북한이 고구려 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신청하자 동북공정을 서두른 것으로 보인다. 만약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받으면 중국은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인정할 명분을 잃게 된다. 중국으로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 멀게는 한반도 통일 이후 일어날 수도 있는 영토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뜻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한 이유가 된다. 

광개토태왕릉 원경. 영토를 개척한(광개토) 왕중의 왕(태왕)의 능이지만 국경선(압록강)에 막혀있는 형국이다.|필자촬영 

 

■고이족=고구려족
 이 공정은 학술적인 프로젝트가 아니라 정부기관이 앞장서 추진하는 정치적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우려를 샀다.
 그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고구려와 발해가 어느 새 중국 지방정권의 역사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분야는 고구려사 연구였다.
 고구려를 한국·북한의 역사에서 단절시키고 중국의 소수정권으로 편입시켜야 그 뒤의 이야기가 술술 풀리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고구려의 기원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이전까지 중국의 고구려 기원연구는 예맥기원설과 부여기원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고이족(高夷族) 기원설과 상(商)족 기원설, 염제족 기원설, 다민족 기원설 등이 새롭게 개진됐지만 단편적인 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갑자기 힘을 얻기 시작한 고이족 기원설은 동북공정 추진과 함께 더욱 활발하게 논의됐다.
 고이족 기원설이 무엇인가. 이 설은 4세기 진(晉)나라 공조(孔晁)가 <일주서(逸周書)> ‘왕회해(王會解)’에 보이는 고이(高夷)를 두고 주석을 단 것에 주목한 설이다.
 그렇다면 <일주서>란 어떤 책인가. 중국 주나라의 역사서가 <주서(周書)>인데, 원본은 유실되고(逸) 남은 편들로만 구성돼있다고 해서 <일주서>라 한다.
 <일주서> 가운데 ‘왕회해’는 고대소수민족의 분포도와 그들 민족과의 관계 등을 서술해놓았다.
 4세기 진나라 시대의 공조라는 인물이 고이족을 설명하면서 “고이는 동북이인 고구려다.(高夷東北夷高句麗)”라는 주석을 달아놓은 것이다.

 

 ■고구려는 중화민족의 한갈래
 이것이 단서가 된 것 같다.
 어떻게든 ‘중국=고구려’의 상관관계를 찾던 중국학계는 (고구려의 선조인) 고이족의 선대를 전설적인 인물인 전욱 고양씨와 연결시킨다.
 바로 고이족의 기원을 전욱 고양씨로 확정하고자 한 것이다. 전욱 고양씨가 누구인가. 그는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기는 황제(黃帝)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 물론 전설상의 인물이다. 중국학계는 ‘난생족 신화, 조우삽관(鳥羽揷冠)의 풍습 및 귀신숭배사상 등이 양국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다’면서 고구려를 전욱 고양씨의 후손이라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학계가 인용하는 또 하나의 증거로 <진서> ‘모용운재기(慕容雲載記)’가 있다. 즉 모용운(?~409)의 할아버지인 모용화가 고구려의 한 지파여서 스스로 고양씨의 후예를 자처하며 고(高)를 자신의 성(姓)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용운의 원래 이름은 고운이었지만 전연으로 끌려간 뒤 훗날 후연 왕을 죽이고 대연(大燕)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어떻든 중국학계 일각에서는 이같은 사례들을 묶어 ‘전욱고양씨→고이족→고구려족’이라는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결국 고구려의 조상은 고이이며, 고이는 중화민족의 한 갈래인 전욱 고양씨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도 지안의 고구려 유적 안내판에 버젓이 나와있는 대로….

복원해놓은 지안 시내 한복판의 국내성. 그러나 아침이 되자 성 밖은 시장바닥으로 변해있었다.

 ■중국사라면서 왜 동이열전에 넣었는가
 하지만 이같은 중국학계의 주장은 너무도 많은 허점이 있다.
 우선 고이족설에 힘을 실은 <일주서>가 믿을만한 역사서이며, 공조의 주석도 가치가 있다는 점을 전제로 깔고 있다.
 하지만 주변 소수민족의 이야기를 담은 <일주서> ‘왕회해’이 서주시대의 사실을 전하는 지는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예컨대 劉起오는 <일주서> ‘왕회해’는 전국~한나라 시대에 이르러서야 성립됐다고 했다. 또 호념이(胡念貽)도 “왕회해편이 허구적인 내용이 많아 주 성왕 시대의 역사를 고증할 수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무엇보다 고이족과 고구려 사이에는 1000년 가까운 시차가 존재하는데다 고양씨의 고(高)로 고양씨·고이, 그리고 고구려를 연결시키는 것인 억측이 아닌가.
 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있다.
 중국 위·촉·오의 역사를 다룬 <삼국지>를 보라. 그 가운데 위나라 역사를 다룬 ‘위서·오환선비동이전’에서 부여·고구려·동옥저·예·마한·진변·왜의 역사는 ‘동이전’에 포함돼 있다.
 무슨 뜻인가. 부여·고구려·동옥저·예·마한·변진·왜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 동이의 역사라는 분명한 뜻이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233~297)는 오환·선비·동이의 역사를 중국사가 아닌 다른 계통의 역사로 인식한 것이다.
 그 뿐인가. 당나라 때 지은 <주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이역열전(異域列傳)’에 기록했다. 이박에 <후한서>와 <수서>, <남사>, <북사> 등 중국의 정사(24사)를 보더라도 예외없이 ‘동이(열)전’에 고구려 등의 역사가 포함돼 있다. 부여·고구려·백제·신라 등이 중국 역사라면 왜 중국의 정사가 그 역사를 이민족의 역사로 표현했을까.
 이밖에 최광식 교수(고려대)는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등장하는 부여·고구려·예·삼한의 제천대회를 주목하고 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삼한의 계절제는 모두 제천의례라는 것.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제천의례는 이 나라들이 제후국이 아니라 독자적인 정치체제였음을 웅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부식마저도…
 최교수는 <광개토대왕비문>의 ‘천제지자(天帝之子)’나, <모두루묘지명>의 ‘일월지자(日月之子)’ 등의 표현은 모두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라는 것.
 고구려는 또 신라를 동이(東夷)라 부르는 등(중원고구려비문), 신라와 백제를 제후로 삼고 천자의 역할을 했다는 점도 심상치않다. 이외에도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은 영락(永樂)과 연가(延嘉)의 독자연호를 사용했다. 이 모두 고구려가 절대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 아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뿐인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은 뒤 올린 이른바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를 보라.
 “오로지 해동의 삼국이 지나온 세월이 장구하니~ 신라·고구려·백제는 나라를 세워 솥발처럼 맞서서 능히 예로써 중국과 상통하였습니다. 범엽(范曄)의 <후한서>나 송기(宋祁)의 <당서>에 모두 (고구려 등을 다룬) 열전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국내의 일은 자상하게 다루고 국외의 일은 허술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갖추어 싣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에~”(<동문선> 제44권 ‘표전’)
 김부식이라면 사대주의 사관에 젖었다는 악평을 듣는 이가 아닌다.
 그런 김부식도 고구려·신라·백제를 ‘삼국’이라 하면서 “<후한서>나 <당서> 등 중국의 사서에서 소홀히 다룰 수밖에 없었던 외국(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온전히 다루려고 <삼국사기>를 편찬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장군총의 원경. 그런대로 정비된 모습이다.|필자촬영

 ■대조영은 말갈인?
 또 다른 한가지…. 고구려 유적의 안내판에 나오는대로 ‘고구려의 역사는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철저히 소멸됐고, 그것은 필연의 역사’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니 고구려에 이어 발해까지 ‘당나라의 지방정권인 (속말) 말갈의 정권이며, 당나라의 문물과 정체제도를 받아들여 해동성국이 됐다’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학계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은 일찍이 고구려의 통치에 예속됐던 속말말갈인 출신이라는 것. <구당서>는 “대조영은 고구려의 별종”(<구당서>)이라 했고, <신당서>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부속된 자이며 성이 대씨”라 한 내용을 풀이한 것이다. 물론 중국학계는 발해의 주민 대다수가 말갈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오랫동안 고구려에 부속됐던 속말말갈인이 민족융합을 통해 새로운 족, 즉 발해족을 형성하여 고구려족과는 다른 구성원이 됐음을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발해족에는 속말말갈인과 고구려인 뿐아니라 한족까지 유입된, 이른바 ‘한화(漢化)된 말갈족’으로 규정하는 이들도 있다.
 이 ‘한화된 말갈족’ 즉 고구려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은 ‘발해족’이 차츰 한족에 흡수·소멸됐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흔적인 역사와 함께 철저히 소멸됐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최치원과 서희의 활약
 과연 그럴까. 
 해동성국인 발해가 존재했을 때의 인물인 신라 최치원의 글을 보면 적나라하게 나온다. 872년 최치원이 당나라 예부상서에게 발해를 욕하면서 보낸 상소문의 내용이다. 
 “고구려의 미친 바람이 잠잠해진 뒤 잔여세력이 나타나 남은 찌꺼기를 거두어 모아~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로 바뀌었습니다.”(<고운집> ‘여예부배상서찬장·與禮部裴尙書瓚狀’)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로 바뀌었다는 이 표현…. 당대의 말인 이 최치원의 표현을 뒤집을 수 있는 다른 증거들이 있는가.
 온통 발해를 욕하는 내용이지만 발해가 고구려를 이어받았음을 적나라하게 기록해 둔 것이다. 당대의 기록이므로 후대에 쓴 역사책 보다 훨씬 신뢰할만하다.
 또 하나, 중국학계는 고구려와 고려는 전혀 상관없는 나라라고 강변한다. 고(高)씨의 고구려와 왕(王)씨의 고려가 무슨 친연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기록을 보라.
 993년,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이 고려를 침공하면서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있다.
 “대조(大朝·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이제 너희 나라가 강토의 경계를 침탈하니 이 때문에 정토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희대의 외교관인 서희가 나서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 무슨 소리인가.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다. 나라 이름을 봐라. 고구려를 계승했다 해서 고려라 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평양에 도읍을 둔 까닭이다. 또 고려가 거란의 영토를 침식하고 있다고? 아니다. 그 사이 여진이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그 때문에 고려가 거란을 찾아 조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손녕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서희의 논리에 막혀 꼼짝도 못하고 이른바 강동 6주까지 내주고 만다.(<고려사절요>)
 지금와서 고구려와 고려는 전혀 관계없는 나라라고 강변한 중국의 논리라면 매우 중요한 모순을 낳는다.
 중국의 왕조는 한족과 북방민족이 교대로 번갈아가며 중원을 차지하면서 이어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송나라와 그 뒤를 이은 금나라, 명나라와 그 뒤를 이은 청나라는 과연 어떤 친연관계가 있고, 어떤 계승성이 있는 것인가.

중국은 예로부터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이북은 오랑캐 땅,이남은 중국 중원이라 했다. 그러나 만리장성 이북에서 황허문명을 능가할 신석기 문명(훙산문화) 등이 등장한데다 동북공정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만리장성의 길이를 늘리는 방법으로 대처했다.

 ■질질 늘인 만리장성
 중국의 역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아서는 안될 착안점이 있다.
 바로 만리장성이다. 중국은 왜 춘추전국시대부터 만리장성을 쌓는데 골몰했을까.
 그것은 만리장성을 사이에 두고 그 이북은 오랑캐의 땅, 그 이남은 한족(漢族)의 땅이라 분명히 선을 그은 것이다. 
 한족의 역사는 이 만리장성을 사이에 두고 이민족과 벌인 처절한 혈투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고구려는 비슷한 의미로 천리장성을 쌓아 고구려와 당나라의 경계로 삼고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했다.
 그런 마당에 장성 이북의 역사를 모두 중국의 역사라고 끌어들이니 무리한 왜곡과 과장의 역사가 남발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그 만리장성의 길이를 만리장성 길이를 8800여㎞(약 2만2400리)로 늘렸다.(2009년) 고구려성이 분명한 박작성(泊灼城·압록강 하구에 있는 성)을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2012년에는 더 화끈한 일을 저질렀다. 중국 국가문물국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하미(哈密)~헤이룽장성 무단장(牧丹江)까지 만리장성의 길이가 2만1196㎞라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부여나 발해, 혹은 금나라 때 쌓은 성까지 모두 장성이라고 한 것이다. 만리장성이 아니라 ‘사만리장성’, 아니 정확한 거리로 치면 ‘오만육천리장성’이라고 할 만 하다.

 

 ■저우언라이, ‘중국역사는 왜곡됐습니다.’
 이 대목에서 영원한 중국의 총리인 저우언라이(周恩來)의 통찰력있는 역사인식을 상기해보자. 
 1962년 북한이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겠다”면서 “중국 동북방에서 고고학과 발굴조사를 펼치겠다”고 제의했다. 남의 나라에서 자국의 원류를 찾겠다는 것이 아닌가. 외교적인 결례였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통큰 결단을 내린다. 조·중 합동발굴대의 구성을 허락한 것이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저우언라이는 1963년 6월 28일 북한의 조선과학원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매우 중요한 발언록을 남긴다.(‘외사공작통보’)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그는 ‘조선’을 서술한 역사책과 역사관이 대중화(大中華)의 관점에서 왜곡되고 과장 혹은 축소됐음을 인정한 것이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에 살아왔다. 랴오허(遼河), 쑹화강(松花江) 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저우언라이는 그 증거까지 내민다.
 “랴오허와 쑹화강, 두만강 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고,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징보호(鏡泊湖) 부근에 대진(발해)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진의 수도(상경 용천부)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조선의 지파였다는 사실이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의 잦은 침략과 역사왜곡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중국은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 모욕하면서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진·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복했는데, 분명한 침략이다.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지만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진(발해)이 일어났다.”

 

 ■저우언라이, “두만강·압록강 서쪽은 중국땅이 아닙니다.”
 흥미로운 점은 저우언라이가 랴오허 유역을 중국의 ‘침략의 대상’, 즉 조선·고구려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붙여 작게 하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는 더 나아가 “두만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땅이었다든가, 심지어는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라고 했다. 만주 일대와 랴오허 유역은 결코 한족의 땅이 아니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역사학자들의 붓 끝에서 나온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한다”면서 “조·중 관계사를 공동으로 연구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의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공동조사를 끝낸 막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모든 학술조사는 중단됐으며 수정주의자, 주자파로 낙인 찍힌 지식분자들은 줄줄이 숙청됐다. 안타까운 일이다. 여기서 궁금한 대목 하나.
 저우언라이는 사해동포주의자인가. 아니었다. 그처럼 중국과 중국인을 사랑한 중화주의자도 없었다. 이런 일화가 있다.
 국공내전 때 어느 기자가 그에게 “중국인과 공산당원이라는 신분 가운데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저우언라이는 한치의 망설임없이 “중국인이라는 신분이 더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는 맹목적인 한족 중심의 대국주의와, 그를 위한 역사왜곡을 배격했다. 그것이 저우언라이가 중국을 사랑한 방식이었다. 

 (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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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재위 906~926)이 흰옷을 입고 양을 끌고 신하 300여 명과 함께 항복했다.”
 요나라의 역사를 다룬 <요사>가 전하는 발해 최후의 모습이다. 15대 229년 만에 멸망하는 바로 그 순간….
 그런데 이 역사의 순간을 반추할 때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해동성국의 명예를 얻었던 발해의 최후가 너무도 허망했다는 것이다. 역사를 곱씹어보자.
 “(거란이) 발해의 ‘민심이 멀어진’(離心) 틈을 타(乘) 군사를 움직여 싸우지 않고 이겼다.(不戰而克)”(<요사> ‘야율우지전’)
 무슨 말인가. 925년 12월 말, 거란군이 출병한다. 발해의 부여성을 포위한 뒤 단 3일 만에(926년 1월3일) 성을 함락시킨다.
 거란군의 선봉은 도중에 발해 노상의 3만 대군을 격파하고, 단숨에 상경(발해 수도)의 홀한성을 포위한다.(1월 9일) 그러자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이 단 3일 만에(12일) 항복을 청한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거란이 부여성을 함락시키고 수도인 상경 용천부 홀한성을 포위하는데 걸리는 기간은 불과 6일이었다.
 부여성~상경 용천부의 거리는 약 400㎞. 중간에 험준한 산악지대가 있고, 발해 노상의 3만 군대까지 만났는데…. 발해는 거란의 공격을 받고 불과 보름도 안돼 멸망의 나락에 빠진 것이다.

지난 9월 말 백두산 장백폭포 밑에서 찍은 노천온천수의 모습. 전문가들은 지금 백두산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입을 모은다.|필자 촬영

 ■발해 최후의 순간
 역사를 더 들춰봐도 수수께끼 같은 일이 속출한다.
 발해가 멸망하기 직전인 925년 발해인들이 대규모로 고려에 투항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 태조 8년(925년) 9월, 발해장군 신덕 등 500명이 내투하다. 발해 예부경 대화균 등이 100호의 균노 사정 대원균, 공부경 대복모, 좌우위장군 대심리 등 100호의 백성을 이끌고 내부하다. 12월에는 좌수위소장 모두간, 검교개국남 박어 등이 1000호의 백성을 이끌고 투항하다.”
 그러니까 발해의 왕·귀족과 장관들이 멸망(926년) 하기 몇 달 전부터 대규모 ‘엑소더스’에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거란이 밝힌 발해의 멸망 이유, 즉 민심의 이반(離心)을 뜻하는 것일까. 학자들은 이 민심의 이반, 즉 이심(離心)의 실체를 찾으려 애를 썼다.
 예컨대 지배세력인 고구려인과 피지배세력인 말갈인 사이의 모순, 귀족들의 사치생활, 그리고 통치계급 내부의 모순 등….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발해 사회 내부의 모순을 가리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발해 최후의 왕인 대인선이 흔히 말하는 망국의 군주였다는 증거도 없다. 대인선은 903년 이후 20여 년 간 거란의 랴오둥(遼東) 공세에 잘 대처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남쪽의 후삼국과 중국의 5대, 일본은 물론 거란과도 교섭하면서 외교관계를 맺었다. 특히 신라와도 동맹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런데도 대인선은 거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항서를 써버린 것이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이 있다. 내분 때문에 왕·귀족이나 장군들이 망명했다면 극소수만이 탈출했을 터인데, 적게는 500명, 많게는 1000여명 씩이나 백성들을 인솔하고 망명하고 있다. 과연 발해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올 9월 말의 천지 모습. 백두산이 폭발하면 20억톤에 이르는 천지물이 범람하게 된다.

 ■엑소더스
 발해 멸망 이후에도 엑소더스 행렬은 상상을 초월한다.
 먼저 발해 멸망 직후와, 동란국 천도와 함께 강제이주 당한 발해인은 9만4000여호(<요사>)에 이른다. 1호당 가족이 5명이라면 47만명, 즉 50만명에 가까운 숫자다.
 흥미로운 것은 거란이 발해인을 강제 이주시킨 뒤 많은 마을(현)을 폐쇄했다는 것이다. 이를 폐현(廢縣)이라 한다. <요사>를 보면 거란이 퍠쇄시킨 마을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 두망강, 쑹화강 유역과 동해안의 읍락 및 연해주 지역이다.
 고려 망명 행렬도 만만치 않았다. <고려사> 등을 종합하면 50년간 고려행을 택한 이른바 ‘탈발자(脫渤者)’는 10만 여 명으로 집계된다.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유민을 포함하면 20만~30만명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이 가운데 934년에 있었던 발해세자 대광현의 고려망명은 유독 눈에 띈다.
 “발해세자 대광현이 수만명의 무리를 이끌고 내투했다. 그에게 왕계(王繼)라는 성명을 내리고…. 발해왕실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고려사>) 
 8년 전 망한 나라의 세자인 대광현은 대체 무엇 때문에 망명한 것일까.

 

 ■백두산 화산폭발과 발해
 그래서 조심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백두산 폭발설이다.
 10세기 어느 날 백두산이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는 것은 사실이다.
 과학자들은 10세기 백두산의 ‘화산폭발지수(VEI·Volcanic explosivity index)’가 7급이라고 계산하고 있다. 백두산 화산이 뿜어낸 화산쇄설물(테프라·Tephra)의 용적은 83~117㎦(최대 150~170㎦)로 추정된다. 이것은 역사시대, 즉 지난 2000년 전 지구상에서 일어난 화산폭발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얼마나 큰 규모인가. 남한 면적이 약 10만㎢이고, 이것을 ㎡ 단위로 환산하면 1019㎡이 된다. 그런데 테프라 용적 100㎦=1019㎥이다. 따라서 10세기 백두산은 단 한 번의 분출로 남한 전체를 1m 높이로 퇴적시킬 수 있는 화산물을 쏟아낸 것이다. 얼마나 엄청난 위력인지 다른 분석을 보자.
 일본 군마대팀이 개발한 독자적인 화산폭발 규모를 보면 10세기 백두산 화산폭발 규모는 M=7.4였다. 그 뒤를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폭발(7.1)이 이었다. 화산 폭발로 해발 3800m의 산은 1400m나 낮아졌다. 사망자는 10만명에 이르렀다. 지구의 기온은 급강하했으며, 1816년은 여름이 없는 해가 되는 등 이후 15년간 이상기후에 시달렸다.
 기원후 61년 폼페이를 두께 6m로 순식간에 매몰시킨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규모는 어떤가. 그야말로 새발의 피다.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규모는 M 5.8이었다. 화산재의 용량은 2㎦였다. 백두산 화산의 규모는 M 7.4, 100㎦였으니 베수비오 화산 50개가 터진 것과 같은 규모이다.
 1991년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폭발규모(체적 5㎦)도 백두산의 1/20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화산재는 새계를 일주했다. 지난 2010년 봄 아이슬란드 에이야프얄라요 화산에서 분화된 화산분출물의 양은 0.1㎦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세계경제는 휘청거렸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 모습. 거란은 불과 보름만에 해동성국인 발해를 멸망시켰다. <요사>는 '민심의 이반 때문에 싸우지 않고도 멸망시킬 수 있었'고 기술했다. 그러나 화산폭발 때문에 갑자기 망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몇가지 착안점
 1980년대 일본 도립대의 화산학자 마치다 히로시 교수는 흥미로운 가설 하나를 제기했다. 10세기 백두산 대폭발과 발해멸망의 연관성이다.
 반면 역사학자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926년을 전후해 백두산 분화에 대한 문헌기록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어떻게 믿겠냐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백두산에서 날라온 화산재의 퇴적층과 함께 화산폭발에 이은 화쇄류로 묻혀버린 탄화목에 대한 연대를 측정했다. 그 결과 10세기 백두산 대폭발의 연대는 934년 전후와 937년 전후, 그리고 946년 전후로 좁혀졌다.
 그러니까 어찌됐든 연대측정결과로는 발해의 별망(926년)과 백두산 폭발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궁금증들이 남아있다.
 몇가지 착안점은 있다. 백두산 화산재가 쌓인 일본 아오모리 현 오기와라 호의 퇴적물을 조사한 결과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됐다. 923~925년 사이의 퇴적층에서 매우 한랭한 지역에서 사는 규조류가 확인된 것이다. 이는 그 3년 동안 발해가 급격한 기후강하로 인한 매우 심각한 냉해를 겪었다는 증거이다. 거란과의 한판 승부를 앞둔 중차대한 시기가 아닌가. 또 멸망 전인 925년 가을부터 발해장군과 왕·귀족이 잇달아 고려로 내투하는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10세기  백두산 폭발로 퍼져나간 화산재 분포도. 일본열도까지 쌓였다. 숫자는 화산재 단층의 두께를 나타낸다. 

 ■백두산 흑룡과 불기둥
 백두산 대폭발은 역사시대를 통틀어 최대 규모의 화산폭발이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화산폭발을 앞두고 심상치않은 전조현상이 있었을 것이다.
 혹 대폭발을 앞두고 수증기·마그마폭발과 같은 소규모 폭발이 일정기간 일어나지 않았을까. 마그마가 직접분출되지는 않았겠지만 마그마가 천지의 물과 만나 수증기가 폭발하는?
 백두산은 발해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던 영산이었다. 지금도 백두산 주변의 한민족을 중심으로 백두산 화산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진다. 이 전설에는 백장군과 흑룡이 등장한다.
 어느 날 천지에 살던 흑룡이 날뛰기 시작하자 백장군이 이를 물리치러 천지에 내려와 처절한 전투를 벌인다. 싸움에 지친 둘은 100일간 휴식을 취한다. 흑룡이 불의 칼을 북쪽언덕에 던지자 이곳에 출구가 만들어져 물은 북쪽으로 흐른다. 불의 칼을 읽은 흑룡은 동해로 도망간다.
 비록 전설에 불과하다. 하지만 흑룡이 화산폭발 때 나타난 분연주(불기둥)를 나타낸다면 어떨까. 100일간의 휴식기는 백두산이 최소한 두 번의 클라이맥스가 있었고, 북쪽언덕의 출구는 장백폭포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또 흑룡이 동해로 사라진 것은 화산재가 서풍을 타고 동해로 날아간 것을 뜻하는 것은?
 어떻든 백두산이 대폭발을 앞두고 시차를 두고 몇 차례 소규모로 요동치자 이를 두려워 한 사람들이 대규모 엑소서드에 나선 것은 아닐까. 그것이 <고려사> 등에 나오는 내투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요사>가 말하는 민심의 이반, 즉 이심(離心)은 아니었을까.

 ■진상은 아무도 모른다
 거란이 발해를 멸한 뒤 “압록강, 두만강, 쑹화강 일대와 연해주·동해안 읍락을 폐현(廢縣)시켰다”는 <요사>의 기록 시사점이 많다. 이 지역들은 대홍수의 흔적이 발견된 곳들이다. 백두산 대폭발로 화산류(화산분출물+물)의 해일이 일어난 범람의 흔적인 것이다. 화산폭발로 몰살당한 비극적인 마을의 흔적이 아닐까.
 어떻든 이 10세기 백두산 대폭발로 발해의 흔적, 즉 문화와 역사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드넓은 발해의 고토는 사막이 됐고, 그곳에 여진사람들이 다시 금나라를 세울 때까지(1115년) 200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200년은 화산 사막이 풍화해서 토양이 되고 표토에 식물이 뿌리를 내려 번성하는 최소한의 기간이다.
 그렇다면 왜 역사는 이 비극적인 상황을 기록하지 못했을까. 아직 수수께끼이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이 대폭발을 직접 본 사람들은 단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폼페이의 비극을 전한 플리니우스(61~112)는 40㎞ 밖에서 베수비오 화산폭발을 지켜봤다. 그러나 만약 그가 백두산 밖 40㎞ 거리에서 폭발을 보았다면? 그는 곧바로 화쇄류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화산폭발의 기록은 왜 없었던 것일까. 당시 동북아는 극심한 혼란기를 걷고 있었다. 당나라(618~907)가 멸망하고 5대10국의 지방정권이 난립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쇠퇴하고 후삼국이 각축을 벌이다가 고려로 통합되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발해는 거란군의 침략에 직면하고 있었다. 백두산의 대분화를 기록할 여력이 없었고, 또 있었다 하더라도 남아있을 수 없던 시기가 아닌가. 물론 진상은 아무도 모른다.

 

 ■지금 백두산은 괜찮나
 한가지 더. 지금 이 순간 백두산은 괜찮은 것일까.
 기자는 최근 백두산을 찾아 팔팔 끓어오르는 온천수를 바라보고는 갖가지 상념에 잠겼다.
 최근들어 백두산에서 화산폭발의 전조 증상이 빈번해졌다는 연구자들의 발표를 상기한 것이다. 지표면의 팽창이 10㎝ 이상 감지되고, 화산가스에서 펠륨의 농도가 증가하고 있다. 또 화산가스 방출로 삼림이 말라죽고, 산사태와 암석균열이 일어나는 현상이 발생하고….
 필자는 정상에 올라 깔대기 모양의 짙푸른 천지를 바라보았다. 저 깔대기에 20억t의 물이 담겨 있다지 않은가.
 만약 이 물이 1000도 이상의 마그마와 만난다면…. 폭발적인 수증기·마그마 분화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10세기 백두산 분화와 비슷한 폭발이 일어난다면?
 금세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영산(靈山)이라는 백두산 정상에서 천지를 바라보고는 이 무슨 망측스런 상상을 한단 말인가. (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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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선생님 이게 뭔가요. 목간 같은데요.”
 1974년 11월 어느 날, 경주 안압지 바닥을 조사중이던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속 여성조사원이 윤근일 조사팀장에게 달려갔다. 뻘 속에 막 찾아낸 유물을 갖다준 것이다.
 문제의 유물을 본 윤근일은 깜짝 놀랐다. 유물이 양물(陽物), 즉 목제 남근이었으니까…. 윤근일은 아무 소리하지 않고 여성조사원을 현장으로 돌려 보낸 뒤 깨끗이 세척했다.
 맞았다. 1300여 년 동안 안압지 바닥의 뻘 속에 묻혀있던 남근 목제품이 현현한 것이다. 이 목제품의 길이는 17.5㎝에 달했다. 유물을 본 여성조사원들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안압지가 어떤 곳인가. 통일신라시대인 7세기 후반 문무왕 때 조성된 연못이다.(<삼국사기> ‘신라본기·문무왕조’)
 “674년(문무왕 14년) 궁성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기르고 진금이수(珍禽異獸)를 길렀다.”
 그러니까 1000년 왕국 신라의 궁원지로 각종 호화로운 연회가 펼쳐진 곳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왜 이곳 연못 안에 실물 크기의 남근 목제품이 남아있었을까. 이 남근의 쓰임새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남녀의 사랑 장면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신라시대 토우(흙으로 만든 인형).

 ■가장 큰 남자
 이쯤해서 ‘남근’과 관련된 흥미로운 역사이야기를 풀어보자. 신라의 역대임금 가운데 음경이 가장 컸던 이는 누구였을까.
 “왕은 음경의 길이가 한 자 다섯치가 되었다. 그래서 배필을 얻기 힘들었다.”
 <삼국유사>에 나온 엄연한 역사기록인데, 기사의 주인공은 지증왕(지철로왕)이었다. 1자5치면 40㎝가 넘는다는 것이 아닌가.
 기사는 왕의 ‘물건’이 너무 커서 배필을 구하기 힘들었던 사연을 전하고 있다.  
 “배필을 구하려 전국에 사자(使者)를 보냈다. 사자가 모량부 동노수 밑에 이르니 개 두마리가 북(鼓)만큼 큰 똥덩리의 양쪽 끝을 물고 싸우고 있었다. 사자가 ‘누구의 똥이냐’고 묻자 ‘모량부 상공의 딸이 빨래 하다가 숲 속에 숨어서 눈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집을 찾으니 여자의 키가 7척 5촌이나 됐다. 이 사실을 들은 지증왕은 수레를 보내 여자를 맞아 황후로 봉했다.”
 지증왕도 지증왕이지만 북만한 똥을 누었던 황후도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증왕만큼은 아니지만 경덕왕의 옥경(玉莖·임금의 음경)도 만만치 않았다. 길이가 8치(약 20㎝)나 되었다니까…. 이 역시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니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고보면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의 크기는 랭킹 3위가 되는 것인가. 흥미로운 것은 문제의 목제남근이 처음 출토된 후 형태는 똑같지 않지만 유사한 형태의 남근이 2점 더 출토되었다. 

경주 계림 30호분에서 출토된 항아리 겉면에 표현된 성교장면. 신라 사람들의 성문화는 이처럼 노골적이고 개방적이었다.  

 ■남근신앙의 시초
 남근 신앙의 기원은 선사시대라 할 수 있겠다. 다신신앙시대(多神信仰時代)였던 신석기 시대 때 남근신앙은 많은 신격 중의 하나인 성신신앙(性神信仰)이었을 것이다.
 울산의 반구대 바위를 보라. 그 바위에 새긴 암각화 가운데 커다란 남근을 노출시킨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요즘 같으면 변태성욕자로 지탄받을 남근노출증의 전형이다.
 새겨진 위치가 가장 높은 위치이고 뭔가 주문(呪文)을 하는 모습에 고래·거북 등의 동물들이 줄줄이 모여드는 형상이다. 이것으로 신석기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변태성욕자가 아닐 것이다. 어디까지나 생식본능에 따른 자손번영과 인간의 심볼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남근숭배 신앙의 예는 고구려에서도 보인다. 즉 10월이 되면 나무로 다듬은 남근을 두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 때 이 남근을 신좌(神坐)위에 놓는다고 했다.
 남근신앙의 형태는 요즘까지도 면면이 이어진다. 삼척 해신당(海神堂)에는 마을 제사를 지내면서 만드는 사람이 자신의 실물크기 남근을 깎아 모신다. 이것은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영혼인 해신을 위로하고 풍어와 다산을 염원하는 행사이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동양에서 숭배한 것은 언제나 자연계의 보편적인 생명력”이라면서 “자연계의 보편적인 생식력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암수 생식기의 형상으로 표현하고 숭배한 것”이라고 말했다. 남녀의 생식기를 성스럽게 여긴 것은 고대 세계, 특히 동양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남근의 상징물은 새(鳥)라든가 뱀, 거북, 조롱박, 도마뱀, 호랑이, 들소, 산이었으며, 여성 생식기의 상징은 물고기, 개구리, 꽃무늬였다.
 특히 새와 물고기는 남녀생식기의 대표격이었다. 중국의 시인이자 사학자인 곽말약(郭沫若·1892~1978년)은 “봉황이든 제비든 간에 이런 전설이 생식기를 상징한다고 믿는다. 새는 오늘날까지 생식기의 다른 이름이고, 알은 고환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곽말약의 말은 ‘현조(玄鳥)가 상나라를 낳았다(玄鳥生商)‘는 신화를 해석한 것이다.

성기를 강조한 신라시대 토우. 예로부터 남근은 생명력의 상징이었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안다면 “난 완전히 새됐어”하는 가요의 가사는 “난 완전히 X됐어”하는 큰일 날 욕이 되는 것이다. 남근의 상징성은 고대 중국의 5대 형벌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즉 묵형(墨刑), 의(의), 비(비), 궁(宮), 대벽(大피) 등이 5대 형벌이다. ‘묵’은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것, ‘의’는 코를 베는 것, ‘비’는 정강이뼈를 자르는 것, ‘궁’은 생식기를 자르는 것, ‘대벽’은 목을 자르는 것이다. 대벽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니 두말 할 것 없는 최악의 형벌이지만 남성의 생식기를 자르고, 여성의 성기를 막는 궁형은 치욕의 극치였다.
 <한서(漢書)> ‘형법지’는 “주나라에는 궁형에 해당되는 죄목이 500가지”라고 했다.
 한나라 시대 흉노에 항복한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궁형의 치욕을 받은 사마천의 회고를 들어보자.
 “마음의 상처보다 더 아픈 고통은 없으며,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추한 행실은 없고, 궁형보다 더 치욕스런 것은 없습니다.”(사마천의 <보임안서(報任安書)>)
 부모가 준 신체의 일부를 잘리는 아픔, 또한 자손번식 능력에다 성생활의 즐거움마저 영영 잃어버린 사마천은 “하루에도 내장이 아홉 번이나 뒤틀리는 아픔을 느끼고 이 수치심을 떠올릴 때마다 등골에 땀이 배어 옷을 적신다”고 피눈물을 흘렸다. 한나라 말기의 환관 진림(陳琳)은 “군더더기 살이 잘렸으니 대대로 욕보이는 구나”라고 한탄했다. 심볼이 잘리는 것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후손대대의 치욕으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신라의 개방적인 성문화 

성기를 도드라지게 표현한 토우. 성개방을 상징하는  신라시대 유물들이 많다.

이야기를 좁혀 신라로 돌아가자.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기록을 보자.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4일 동안 울어댄 일이 있었다. 왕은 급히 정병 2,000명을 뽑아 속히 서교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찾아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해서 모두 죽이라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으니 과연 여근곡이 있고 백제군사 500명이 와서 숨어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이 때 신하들이 “백제가 여근곡에 있는지 어찌 알았냐”고 묻자 선덕여왕이 대답했다.
 “개구리가 성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군사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여자의 음부가 아닙니까. 여자는 음이요, 그 빛은 흰빛이니 흰빛은 곧 서쪽 방위입니다. 이로 인해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남자의 생식기가 여자의 생식기에 들어가면 곧 죽는 것이니 적병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하여간 대단한 여왕님이시다. 아닌게 아니라 남근 목제품을 비롯한 각종 유물과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성에 관한한 신라인들의 사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개방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고(古)신라시대인 4~5세기대의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토우(土偶)들을 보라. 남녀의 성기가 과장되게 표현되거나 다양한 형태의 성행위를 하고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대체로 2~3㎝정도이고, 커보았자 10㎝ 미만인데 토기항아리나 고배 뚜껑에 장식처럼 붙어있다. 이러한 토우가 장식된 유물이 함께 묻힌 무덤의 주인공 역시 보통사람들의 무덤이 결코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지위가 높은 분이거나 신분이 있는 사람의 무덤임이 분명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신라 시대 상류층의 성문화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고신라에서는 왕족의 근친혼도 행해졌고 부인이 외간남자와 잠자리하다 발각되어도 관대했던 것이 처용설화에서 보인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보면 성 개방의 결과라 생각된다.

 

 ■유난히 많은 성 관련 유물들
 681~687년 사이에 김대문이 썼다는 <화랑세기>를 보라. <화랑세기>는 화랑 가운데 우두머리였던 풍월주 32명의 전기(540~681년)인데, 신라인들의 문란한 성생활이 적나라하게 표현돼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도 신라인들의 심상찮은 성문화를 살짝 언급해놓았다.
 예컨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내물왕 즉위조’를 쓰면서 다음과 같은 사론을 펼쳐놓았다.
 “아내를 맞이함에 있어 같은 성씨를 취하지 않는 것은 분별을 두터이 하기 때문이다. 신라의 경우엔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이할 뿐 아니라 형제의 자식이나 고종·이종 자매까지를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은 각기 그 습속이 다르다고 하나 중국의 예속을 따진다면 도리에 크게 어긋난다고 하겠다. 흉노에서 그 어머니와 아들이 상간하는 경우는 이보다 더욱 심하다.”(<삼국사기> ‘내물왕 즉위조’)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에도 야릇한 대목이 보인다. 즉 문무왕은 배다른 동생 차득공을 일종의 암행어사로 파견했다. 관리들의 청렴도를 잘 따져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차득공이 승복(僧服)을 입고, 무진주에 이르렀다. 무진주 관리 안길이 차득공을 보고는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안길은 밤에 처첩 3명을 불러 말했다.
 “오늘 밤 저 거사(居士) 손님을 모시고자 하는 자는 내가 죽는 날까지 함께 살 것이오.”
 그러나 두 아내는 “차라리 함께 살지 못할지언정 어떻게 남과 함께 잔단 말이냐”고 거절했다. 그러나 다른 아내 한 사람은 “그대가 몸을 마치도록 나와 함께 살겠다면 명령을 받들겠다”고 허락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신라의 근친혼을 보여주는 가 하면, 출세를 위해 아내까지 바치는 신라인들의 사통·통정 관계를 잘 나타내주는 사례들이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근친혼, 처첩관계, 통정·사통의 기록을 지금의 유교적인 관점,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절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화랑세기>는 특히 신라를 신국(神國)이라 했고, 신국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다고 기록했다.
 예컨대 진평왕과 보명 사이에 출생한 양명공주가 아비가 다른 자신의 아들 양도와 딸 보량을 혼인시킬 때 “신국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 어찌 중국의 도로 하겠느냐”(<화랑세기> ‘22세 양도공조’)고 한 말은 김부식의 사론과 일맥상통한다.  

안압지 준설과정에서 확인된 목제 남근

 ■신라 최고의 요부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신라 최고의 요부가 있다. 바로 미실이다.
 그녀는 신라왕 3명(진흥·진지·진평)과 태자(동륜),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4명(사다함·세종·설화랑·미생랑) 등 무려 8명을 노리개로 삼으면서 왕실을 좌지우지했던 여인이었다.
 <화랑세기>는 “백가지 꽃의 영겁이 뭉쳐있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할 수 있다”는 기록으로 미실(549∼606)의 용모를 극찬했다.
 대원신통(왕에게 색을 제공하는 전문 여성 집단)인 미실은 할머니 옥진으로부터 ‘남자를 죽이는’ 방사(房事)술을 배웠다. <화랑세기> ‘11세 풍월주 하종조’를 보자.
 “(미실은)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를 닮았으며, 아름다움은 오도를 닮았다. (할머니) 옥진이 ‘나의 아이는 오도를 부흥 시킬 만 하다’고 하고 좌우에서 떠나지 않으며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가르쳤다.”
 미실의 정식 남편은 6세 풍월주인 세종이었다. 어찌나 천부적인 방사술로 세종을 혼내놨는지 <화랑세기>는 ‘세종이 깊이 빠져들어 기동을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미실은 태후의 명에 의해 쫓겨난다. 지소태후의 성난 한마디를 들어보라.
 “너로 하여 전군을 받들게 한 것은 옷을 드리고 음식을 받드는 것인데 감히 사사로운 색사(色事)로 전군을 어지럽혔으니 용서할 수 없다.”
 쫓겨난 미실은 사다함(5세 풍월주)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 둘은 원래부터 사랑했으나 지소태후의 명으로 미실이 세종공에게 시집감으로써 헤어진 사이. 진정한 사랑도 잠깐. 사다함은 가야정벌에 나선다. 둘은 또 헤어진다. 
 미실은 다시 전남편인 세종의 품으로 돌아간다. 세종이 상사병에 걸리자 지소태후가 다시 미실을 부른 것이다. 세종은 기뻐 날뛰었다. 세종에게는 원래 융명이라는 정부인이 있었다.

 

 ■정절을 지킨 남자들
 하지만 세종의 첩이 된 미실은 ‘원비의 첩’이 된 것을 부끄러이 여겨 색공에 응하지 않았다. 애가 단 세종은 태후에게 애원하여 미실을 부인으로, 본처인 융명을 차비로 삼았으며 결국 본처를 내쫓았다. 세종은 평생 미실에게 정조를 지킨다.
 “세종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청렴결백한 절조를 지켰다. 크게 체모를 잃는 일이 있으면 즉시 미실에게 간언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참된 마음을 보였다. 세종공은 황후의 아들로 미실에게 정절을 바쳤다.”
 여인의 정조가 아니라 남자의 정조라니…. 그러나 왕실 여인들의 세력다툼에 밀린 미실은 궁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런데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사다함은 미실이 떠난 것을 알고는 상심한 나머지 그만 상사병에 걸린다. 사다함은 결국 죽고 만다.
 미실은 이때부터 진흥왕(재위 540∼576년)의 아들인 동륜태자를 꾀어 아이를 임신했으며 진흥왕 마저 사랑의 노예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동생인 미생랑(10세 풍월주)과 설화랑(7세 풍월주)마저 성의 노리개로 만들었다. 미실이 설화랑과의 사이에서 낳은 보종은 16세 풍월주였다.
 미실은 개(犬)에게 물려 죽은 동륜태자의 뒤를 이어 태자가 된 금륜(훗날 진지왕·재위 576∼578년)과 정을 통했으며 진지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진평왕(재위 578∼632년)에게도 이른바 신국의 도, 즉 성교육을 시켰다. ‘신라 여인천하의 상징’인 미실은 수기 700편을 남길 정도로 탁월한 문장가였다. 전장으로 떠나는 애인 사다함을 위한 향가 ‘풍랑가(송출정가)’를 짓기도 했다.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전장에서 돌아온 사다함은 이미 다른 이(세종)의 아내가 된 미실을 기리며 청조가(靑鳥歌)를 짓는다.
 결국 미실은 왕(진흥왕)이 문서를 참결할 때 반드시 곁에 둘 정도로 조야의 권세가 옥진궁에 모였다는 말을 들었다. 10세 풍월주 미생대에 나뉘었던 화랑도의 다섯 파벌 중 대원신통을 받드는 파를 만든 중심인물이기도 했다. 미실이야말로 1,000년 전통의 신라역사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여걸이었다면 지나친 말일까.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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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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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초(南草·담배)는 남쪽 오랑캐 나라에서 유래해서 일본에서 번성했다. 무오 연간(1618년)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장유가 가장 먼저 피웠다.”(<대동기년>, <오주연문장전산고> 등)
 우리나라 담배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계곡 장유(張維·1587~1638)이다. 장유가 누구인가. 그의 선조는 1275년 충렬왕비인 원나라 제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귀화한 위구르족 출신인 장순룡이었다. 장순룡은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됐는데, 12대 손인 장유는 조선 중엽의 4대 문장가(이정구·신흠·이식·장유)로 명성을 얻었다.
 바로 그 장유가 담배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우선 <대동기년>이 언급하고 있듯 장유는 조선에서 가장 먼저 담배를 피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신윤복의 '청금상련'. 사대부가 기생과 의녀를 연꽃감상을 하며 놀고 있다. 사대부는 물론 의녀까지 맞담배를 피우고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폐를 상하게 하는 풀인데…’
 그는 <계곡만필>에서 조선에서 담배가 전래되고 퍼진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남령초(담배)는 20년 전 조선에 들어왔다. 위로는 고관대작들과 아래로는 가마꾼과 초동목수들까지 피우지 않은 자가 백 사람, 아니 천 사람 가운데 겨우 하나 있을까 말까 하다. <본초강목>에도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효능은 알 수 없다. 다만 담배맛을 보니 매우면서도 독기가 있다. 많이 들이마시면 어지럼증이 생기지만 오래 피운 사람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장유는 덧붙여 절강성 출신인 중국사람 주좌(朱佐)와 나눈 대화를 소개하고 있다.
 “담배는 적비(赤鼻·코가 붉은 증세)를 치료하는데 특효라고 합니다.”(주좌)
 “담배는 성질이 건조하고 열이 있어서 필시 폐(肺)를 상하게 할 것인데…. 어떻게 코 병을 치료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장유)
 “꽉 막힌 기운을 뚫어서 풀어주기 때문입니다.”(주좌)
 장유는 이 대목에서 “주좌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계곡만필> 제1권 ‘남령초 흡연’)
 이 일화를 보면 장유 역시 담배가 ‘폐를 상하게 할 수 있는 풀’이라는 점을 벌써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담배를 워낙 사랑한 장유는 주좌의 ‘막힌 기운을 뚫어준다’는 말에 동조하고 있다. 그는 이미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골초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 최초의 애연가가 된 장유의 담배를 둘러싼 ‘무용담’은 끝이 없었다.  

김홍도의 ‘주막집’. 담배예절이 있을 턱이 없었던 초창기에는 어전에서도 담뱃대를 빨기도 했다. 주막집에서 어린아이와 부녀자가 있는 데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떠거머리 청년워도 하나도 이상하렉 없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담배를 위한 변명
 먼저 그가 말년에 병이 들어 김제에서 요양할 때 흥에 겨워 읊었다는 시(‘남령초·담배)’를 보면….
 “가느다란 줄기 하나 성긴 꽃 무성한 입(疎花농葉擢纖莖)/~ 누가 이 담배를 동방에 전했을꼬.(誰遣孤根來日域)/~구절초처럼 기이한 향기 물씬 풍기는구나.(九節何奇漫自馨)/약효 제대로 내려면 불기에 바싹 말려야지.(功用會須煩火候)/한 번만 써 보면 신약(神藥)인 줄 당장 알리라.(藥欄眞覺有神靈)”(<계곡집>)
 장유는 담배를 신령한 약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뿐이랴. 장유는 <계곡만필>에서 ‘담배의 효능을 칭송하는(稱頌南草之效能)’ 글을 남겼다.
 “남방인들은 빈랑(檳랑)을 중요하게 여겨 ‘술에 취하면 깨게 하고 술이 깨면 취하게 하며 배고프면 배부르게 하고 배부르면 배고프게 한다’고 했다. 지금 애연가들도 담배를 피우면서 비슷하게 말한다. ‘배고플 땐 배부르게 하고 배부를 땐 배고프게 하며, 추울 땐 따뜻하게 하고 더울 땐 서늘하게 한다’고…. 남초를 극찬한 말이 빈랑의 경우와 흡사히니 이 또한 웃을 만 하다.”
 장유가 언급한 ‘빈랑’은 인도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인들이 식사 후에 즐겨 씹던 야자 비슷한 나무열매이다. 소화제와 구충제 등 한약재로 사랑받았다.
 장유는 ‘담배 피우기’를 ‘빈랑 씹기’에 견주면서 ‘담배는 빈랑과 똑같은 기호품이자 약제품’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면서 ‘담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世之攻南草者)들을 겨냥한 발언을 쏟아낸다.(<계곡만필>)
 “세상에서는 담배가 만이(蠻夷·오랑캐)에서 나왔고, <본초> 같은 의서에도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담배가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초> 같은 의서에 등재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담배가 사람에게 이익을 줄 것인지는 나 자신(장유)도 모른다. 그러나 효능이 분명 있다면 굳이 어디에서 들여왔는지를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딴은 그렇기도 하다. <본초>는 송나라 휘종(재위 1100~1125)에 찬집된 의서이니, 아직 도입되지도 않은 담배가 등재될 리는 만무했던 것이기는 하다.
 여하간 장유의 ‘담배를 위한 변명’은 지독하다. 

유숙의 ‘수계도권’(개인소장). 1853년 작이다. 시회에 참석한 인물들이 모여 앉아있다. 그 가운데 담뱃대를 물고 있는 인물들이 보인다. 당대에는 4~5살이 되면 모두 담배를 피운다고 할만큼 대유행했다.

 ■담배 짝사랑
 장유의 담배 짝사랑을 둘러싼, 그야말로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많다.
 문헌에 나오는 이야기에 살이 왕창 붙인 그런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설로 전해진 것이다. 예컨대 몇가지 문헌을 살펴보자.
 “담파고(담배)는 광해군 때 들어왔는데. 장유가 흡입하기를 가장 즐겼다. 그의 장인 김상용이 임금에 건의해서 ‘요망한 풀’을 금하도록 청했다.”(<임하필기> ‘문헌지장편·담파고’)
 “일찍이 사위(장유)가 연석(筵席·임금과 신하가 모여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담배를 피웠는데, 장인(김상용)이 그 자리에서 잘못을 지적하여 핀잔을 주었다고 합니다.”(<승정원일기> 1637년 11월 2일조)
 탑전(榻前·임금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위를 꾸짖었으니 ‘탑전 힐난(榻前詰難)’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사위(장유)와 장인(김상용)의 일화는 구전설화를 통해 확대재생산된다. 즉 장유가 담배를 피울 무렵엔 당연히 담배예절이 있을 수 없었다는 것. 따라서 장유는 ‘감히’ 어전(임금의 면전)에서 담뱃대를 빡빡 빨았다는 것. 이 꼴을 보다못한 장인이 핀잔을 주었다는 것.
 “사부빈객(세자의 스승)인 자네가 어찌 어전에서 남초(담배)를 피우시는가.” 
 장인의 꾸지람을 들은 장유가 재빨리 담배를 끄지 김상용이 더 쏘아붙였단다.
 “구용정(口容正)하게.”
 담뱃대를 빨 때 입모양을 비죽대며 빡빡 소리를 내니 입모양(口容)을 바르게(正) 하라는 꾸지람이었다.
 하기야 초창기에 담배예절이 있을 수 없었던게 당연하다. 예를 들어 임금이 궁중에 숙직하던 문관들이 모여 멋대로 흡연하는 꼴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마디 했단다.
 “구불미(口不美·입 모양이 아름답지 않다는 뜻) 하구나!”
 임금 앞에서 담배연기를 피우는 것도 불손한 일이거니와, 거기에 장죽(긴 담뱃대)를 뻗치고 ‘체신없이’ 입모양을 빡빡 거리니 ‘구불미하니 구용정하게’라는 말이 나오는게 당연했으리라.
 이후 궁중에서 담배예절이 생겼다는 것이다. 

윤복의 ‘연소답청’.  양반집 체면에 기생들의 포로가 되어 담배를 붙여 대령하는 딱한 사내들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구불미네, 구용정하게"
 그럼에도 장유는 훗날 ‘애연가의 상징’으로 추앙(?)되기도 했다.
 단적으로 정조 임금을 보라. 정조 임금은 담배를 ‘치국의 도’로 삼아야 하고. 조선을 흡연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힌 끔찍한 애연가있다.
 그런 그가 흡연과 담배재배의 폐해를 논하는 상소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담배를 피우고 재배하는 일은 마치 술을 빚는 것을 금지하는 것 같다. 이해가 상반되므로 가볍게 논할 수 없다. 신풍군 장공(장유)의 말이 근거로 삼을만 하다.”(<홍재전서> 46권 ‘비답’)
 정조 임금은 “담배가 가래를 없애주고 술기운을 깨게 하며. 100년 후에는 차(茶)를 마시고 재배하는 것과 이익을 다툰다”며 담배예찬론을 설파한 장유를 굳이 떠올리고 있다.
 정조는 담배예찬론을 펼치면서 또 장유를 인용하고 있다.(<홍재전서> 권 178 ‘일득록’)
 “담배는 더위를 씻어주고 기(氣)를 평안히 하며 추위를 막아주고 음식을 소화시키며 변을 볼 때 악취를 쫓아낸다. 잠을 청할 때나 시를 짓고 문장을 엮을 때 피워도 좋다.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은 점이 없다. 옛 사람으로는 오로지 장유 만이 이런 담배맛을 조금 알았다.”
 담배의 장점을 있는 대로 나열하면서 옛 사람 가운데 장유만이 담배의 참맛을 알 수 있는 인물로 인정한 것이다.

 

 ■애연가 사위와 혐연가 장인
 그런 사위(장유)의 담배 피우는 모습을 그렇게 꼴보기 싫어했던 장인(김상용)이 훗날 담배불 때문에 자폭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대체 무슨 일인가. 지독한 혐연가인 김상용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큰 혼란에 빠졌다. 청나라군의 진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기 때문이다.
 김상용은 원임대신(퇴직한 대신)으로서 강화도로 피신했다. 그러나 적병이 곧 강화도를 함락시키려 했다.(1637년 1월 22일)
 김상용은 “구차하게 사느니 죽음을 택한다”고 하면서 남문의 문루에 나가 화약상자에 걸터 앉았다.
 “가슴이 답답하다, 담배를 피우고 싶구나. 가서 불을 가져오너라.”
 명령을 받은 시종은 공(김상용)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알았기에 명을 받들지 않았다. 그러나 김상용은 끝내 불을 재촉해서 가져와서는 폭약상자에 붙이고 말았다.
 김상용의 13살짜리 손자와, 그를 따르던 측근들, 그리고 시종까지 모두 피하지 않고 자폭의 길을 택했다.(<연려실기술> ‘인조조고사본말·강화도 함락’)
 그런데 이 김상용의 ‘순절(殉節)’은 훗날 무수한 억측을 낳았던 것 같다. 김상용이 담배를 피우다 담뱃불을 실수로 떨어뜨려 폭사한 것이 아니냐는 뒷담화가 퍼졌던 것이다.
 인조 임금도 그 소문을 듣고 ‘혹’ 했던 모양이다. 8개월 뒤인 1637년 10월 28일 예조가 김상용의 순절을 기려 제사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김상용을 위한 제문을 바쳤다.
 수찬 조중려가 바친 제문은 “(김상용이) 태산처럼 의리를 무겁게 했고, 홍모(鴻毛·깃털)처럼 목숨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조 임금은 “사실과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는 쪽지를 붙여 내렸다. 반려한 것이다. 제문을 지은 조중려가 “김상용은 화약에 불을 떨어뜨려 살신성인을 이룬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진실을 가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윤복의 ‘소년전홍’. 장죽을 문 앳된 청년이 여인의 팔을 붙들며 유혹하고 있다.|간송미술관 소장

 ■장유가 환생한다면
 그러자 김상용의 순절을 주장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특히 김상용의 아들인 김광환·광현 형제가 올린 피눈물 나는 상소가 심금을 울린다.
 “신의 아비는 평생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신의 아비가 어전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위 장유를 면전에서 질책했지 않았습니까. 이는 성상의 총명한 기억 속에서도 있지 않습니까. 신의 아비가 어찌 죽을 때에 평생에 싫어하던 담배를 피웠겠습니까.”
 김광환·광현 형제는 그러면서 “평소 피웠다 해도 죽을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화약 옆에서 불을 잡고 담배를 피웠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인조는 “김상용의 일은 워낙 목격한 사람들이 많아 과인이 의심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이라 해명했다. 그리고는 “담당부서에게 진상을 파악해서 결론을 내릴 것”이라 전했다.(<승정원일기> 1637년 11월 2일)
 급기야 인조는 한달 반 뒤인 12월 8일 “김상용은 의리를 택해 죽음을 택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인조실록>)
 자칫했으면 담뱃불 실화로 인한 어이없는 폭사로 손가락질 받을 뻔했던 순절의 명예회복이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담배는 <인조실록>의 표현처럼 ‘요망한 풀’, 즉 요초(妖草)였던 것은 맞다.
 신대륙에서 유럽에 들어온 지(16세기 초) 불과 100년 만에, 유럽에서 본격 재배된 지(1560년 무렵) 60년 만에 조선 전역에 퍼졌으니 말이다.
 “담배는 1616~17년 사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5년 만인 1621~22년 사이 조선 전역에 퍼졌다. 손님을 대하면 차와 술 대신 담배를 권할 정도였다. 유해무익한 물건임을 알고 끊으려 해도 끊지 못하니 세상에서 요망한 풀이라 했다.”(<인조실록>) 1638년 8월 4일조)
 지금 이 순간 최초의 흡연자인 장유가 환생한다면 무슨 말을 할까. 어전에서 담배를 꼬나물던 그가 저 우중충한 건물 뒷편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마치 죄를 진듯 담배를 빨고 있는 애연가 후예들을 만난다면….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참고문헌>
 문일평, <호암사론사화선집>, 정해렴 편역, 현대실학사, 1996
 박희진, <흡연예절의 형성과정 1600~1930>, ‘역사민속학’ 제44호, 민속원, 2014
 제홍규, <한국연초사화>, 도서과 연구보고서, 국립중앙도서관, 1975 

   이언 게이틀리, <담배아 문명>, 정성묵·이종찬 옮김, 몸과 마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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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0년쯤 유럽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담배는 그야말로 요원의 들불처럼 전세계로 퍼진다.
 결국 60년도 안되어 극동지역으로 몰려온다. 이른바 ‘담뱃길’은 여러 곳으로 추정된다. 
 우선 청나라 초기 사람인 왕포가 쓴 <인암쇄어(蚓菴쇄語)>를 보면 담배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 연간(1628~1644)에 중국으로 전해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담뱃잎이 여송(필리핀 루손섬)에서 전래됐다는 것이다. 담배의 전래를 연구한 중국의 사상가 우한(오함)은 담뱃길을 대략 3가지로 요약한다.
 즉 일본→조선→랴오둥(요동)이 한 갈래이고, 필리핀(루손)→푸젠(복건)→광둥(광동)이 또 다른 갈래, 그리고 남양(남태평양)군도→광둥(광동)→중국 북방 등이 또 하나의 갈래였다는 것이다. 중국 광저우(廣州)→조선→일본으로 거쳤다는 ‘역 담뱃길’의 주장도 있지만, 근거가 없다는 게 우한의 주장이다. 이 우한의 주장이 중국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신윤복의 <연소답청>. 조선에 담배가 들어온 지 불과 5년 만에 담배선풍이 불었다. 4~5살 짜리 어린아이도 담배를 물고 있었다고 한다. 기생들의 놀이에 담배 시주을 자처하는 이른바 양반 사내들의 모습이 우습기만 하다.|간송미술관

중국에 담배가 들어왔을 때 중국 조정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인암쇄어>를 보라.
 “숭정 계미년(1643년) 명령을 내려 흡연을 금했다. 민간에서 담배를 재배하는 자는 도형(노역형)에 처했다. 그러나 담배를 재배하는 이익이 엄청나고, 처벌은 너무 가벼워 백성들은 금령을 무릅쓰고 재배했다. 그러자 다시 명을 내려 법을 어기는 자는 모두 참형에 처한다는 명을 내렸다. 그렇지만 군대에서 한질(감기)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지 못하자 마침내 금법(禁法)을 완화했다. 이후 삼척동자조차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풍속이 갑자기 바뀌었다.”
 담배가 도입된 이후의 중국사회에 급변했음을 알 수 있다. 금연령에 따른 노역형도 모자라 참형이라는 극형에 처했지만 결국 막지 못했다는 것. 결국 금연령이 완화되고, 삼척동자까지도 담배를 피워대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담배는 1616~1617년 조선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조선에는 언제, 어떤 경로로 들어왔을까.
 이 또한 온갖 설이 끓고 있다. 야사를 모아놓은 <야사총서>는 선조 때의 학자 윤격의 언급을 전제하면서 “담배는 명종 말엽과 선조 초년에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기록했다.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한 때는 1567년이었다. 유럽에서 담배가 처음 재배된 것이 1550~60년대 초반이었다. 그러니 윤격의 ‘명종 말엽 선조 초년(1567년 무렵)’ 주장은 좀 빠른 느낌이 있다. 통설은 <대동기년> 등 관련 문헌에 나와있는 ‘1618년(광해군 10년)설’이다.
 예컨대 <대동기년>은 “남초(담배)는 남쪽 오랑캐 나라에서 유래하여 일본에서 성했고 무오 연간(1618년) 우리나라에 들어와 장유가 먼저 맛을 봤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거론된 장유(1587~1638)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다.
 어쨌든 이런 기록들 때문에 ‘1618년 설’이 유력해진 것이다. <대동기년>는 조선 말기 윤기진이라는 인물이 정리했으므로 당대의 역사서가 아니다.
 여기서 정사인 <인조실록>의 기록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당대의 사관들이 꼼꼼히 적은 사초를 토대로 편찬된 기록이니까….
 <인조실록> 1638년 조를 보면 “남초(南草·담배)는 1616~17년 사이에 조선에 들어왔다.”고 분명하게 기술돼있다.
 그러면서 “조선에 들어온지 5년 만에(1621년)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퍼졌고,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을 정도가 됐다”고 기록했다.
 그러니까 16세기 중반에 유럽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담배가 불과 60년도 채 되지 않아 조선땅에 상륙했고, 또 불과 5년 만에 조선 전역에 삽시간에 퍼졌다는 것이다.  

김홍도의 <담배썰기>. 담배는 조선에서도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져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4~5살만 되면 피었다.
 담배가 유럽을 매혹시켰듯 조선 역시 담배의 연기 속으로 흠뻑 빠져들었다.
 <대동기년>에서 조선에서 담배를 처음 피웠다는 장유는 <대동기년>에서 담배예찬론을 절절이 편다.
 “남들이 그런다. ‘담배를 즐기면 배가 고픈 사람은 배를 부르게 하고 배부른 사람은 배가 꺼지게 만든다. 추운 사람은 따뜻하게 만들고, 더운 사람은 서늘하게 만든다’고….”
 담배를 피우면 배고픈 사람도 배를 부르게 만든다니….
 이규경 역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담배가 추위를 막고 습기를 물리치며 기를 빠르게 소통시키고 골수에까지 퍼지게 한다는 점에서는 틀리지 않다”고 찬양론을 개진했다.
 담배는 이렇게 조선을 열광시켰다.
 “위로는 공경대신으로부터, 아래로 하인·종·나무꾼에 이르기까지 피우지 않는 자는 없다. 천이나 백에 한 명 밖에 없을 것이다.”(장유의 <계곡만필>)
 또 하멜의 표류기 부록(조선국기)은 다음과 같이 썼다.
 “조선의 아이들은 4, 5세만 되면 담배를 피운다. 남녀노소 가운데 담배를 피우지 않은 사람이 없다.”

 

 ■담배의 마력
 <순조실록> 1808년 조를 보라. 순조 임금은 고질병이 된 담배의 폐해를 걱정하고 있다.
 “담배는 위(胃)를 조양(調養)하는 데 이롭다고 하고 혹은 담(痰)을 치료하는 데 긴요한다고 한다. 과연 그런지 모르겠다. 근래 속습(俗習)이 고질이 되어 남녀 노소를 논할 것 없이 즐기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겨우 젖먹이를 면하면 으레 횡죽(橫竹)으로 피우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팔진미(八珍味)는 폐지할 수 있어도 남초는 폐지할 수 없다.’고 한다.”
 산해진미도 담배를 넘어설 수 없으며. 젖먹이만 지나면 앞다퉈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담배에 매혹된 사람 가운데 손꼽히는 이가 바로 조선 후기 문인인 이옥(1760~1815)이다. 이옥은 끔찍한 애연가로 담배의 경전을 뜻하는 <연경>을 지었을 정도였으니까….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1795년 9월 어느 날 이옥이 전북 완주의 송광사 법당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 그러자 스님이 법당 안에서 담배 피우면 안된다고 했다. 이 때 이옥의 대꾸가 걸작이었다.
 “부처님 앞에 있는 향로의 연기도 연기고, 담배연기도 연기가 아닙니까. 사물이 변해서 연기가 되고 연기가 바뀌어 무가 되는 것은 똑같지 않습니까.’
 그러자 스님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쨌든 담배가 이렇게 대유행했으니 너도나도 경작에 나서 농사지을 땅이 모자랄 정도가 되었다. 심각했던 모양이다.
 1789년(정조 22년), 무려 27명이 나서 “배의 경작을 법으로 제한해달라”는 상소문에 서명했다.
 “기름진 땅은 모두 담배와 차를 심는 밭이 되었나이다. 곡식을 생산하는 토지가 줄고 백성들의 어려움이 극에 달하고 있사옵니다. 담배의 해로움이 극심한 바….”(<정조실록>)
 전국 방방곡곡에 담배재배 선풍이 불자 신하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그것은 전적으로 각 지방의 감사에게 달려있는 일”이라고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혜원 신윤복의 <연못가의 여인>. 무료한 여인이 생황을 불었다 담뱃대를 물었다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을 흡연의 나라로 만들겠다
 정조는 과연 왜 그렇게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을까.
 그 역시 역사에 길이 남을 골초였기 때문이다. 골초도 그런 골초가 없었다.
 아예 “조선을 흡연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선포할 정도였으니까…. 거짓이 아니다. 정조의 시문집인 <홍재전서> 등에 다 나오는 이야기니까….
 1796년 11월 정조가 했다는 말을 들어보자.
 “담배처럼 유익한 것이 없다. 담배가 아니면 답답한 속을 풀지 못하고 꽉 막힌 심정을 뚫어주지 못한다. 담배를 백성에게 베풀어줌으로써 그 혜택을 함께 하고자 한다.”
 무슨 말인가. 담배예찬론을 설파하는 것도 모자라 온 백성을 흡연가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닌가.
 정조는 예서 그치지않고 책문의 시제로 ‘남령초(담배)’를 내걸었다. 책문은 정치의 대책을 물어 답하게 하는 과거시험의 일종이다. 세상에! 과거시험의 주제가 ‘담배의 유용성을 논하라’는 것이었으니….
 정조의 책문을 뜯어보면 깜짝 놀란다. ‘실사구시’의 예로 담배를 꼽고 있으니 말이다.
 “담배를 이롭게 사용하고 생활에 윤택하기만 하면 된다. 유독 담배만 천하게 여길 까닭이 무엇인가.”
 그러니까 백성에게 이익이 되고 삶의 질을 높일 수만 있다면 ‘장땡’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조는 한술 더 뜬다.
 “담배 만한 약이 없다. 담배를 피우니 내 답답하게 꽉 막힌 가슴이 절로 사라졌다. 담배가 이 시대에 출현한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천지의 마음에서 비롯됐다.”
 그러면서 “온 백성이 담배를 피우도록 해서 그 효과를 확산시켜 담배를 베풀어 준 천지의 마음에 보답하자”고 역설한다. 참으로 대단한 골초가 아닌가.

 

 ■‘정승 짓 못해먹겠습니다’
 임금이 이랬으니 담배예절이 있을 리 만무했다.
 예컨대 조선역사를 통틀어 명재상으로 꼽히는 채체공의 일화는 유명하다.
 무슨 이야기인가. 1790년(정조 14년) 좌의정 채제공이 정조 임금에게 “(더러워서) 정승 짓 못해먹겠다”면서 돌연 사의를 표명한다.
 정조가 화들짝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채제공의 자초지종을 들어보자.
 채제공이 어느 날 권두(수행비서격)와 함께 서대문을 지나가는데 웃옷도 걸치지 않은 새파란 청년 두 명이 담배를 꼬나물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보다못한 권두가 “어이! 담뱃대 좀 빼지!”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두 청년이 고희를 넘긴 채제공의 이름을 부르더니 고함쳤다.
 “내가 무엇 때문에 저 자를 보고 담뱃대를 빼겠나.”
 안하무인 그 자체였다. 체재공은 두 청년을 잡아다 옥에 가뒀다. 그런데 한밤중이 되자 두 청년이 속한 학당의 학생들이 몰려와 옥문을 부술 기세로 철야농성을 벌였다.
 “채제공이 유생들을 욕보였다. 유생들을 차라리 죽일 지언정 욕을 보일 수는 없다. 석방하지 않으면 옥문을 부숴버리겠다.”
 채제공을 욕하는 상소문이 잇달아 올라왔다, 그러자 채제공이 장탄식하며 사직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제 대낮 큰 길가에서 홀옷 차림에고 담뱃대를 피워물고 대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어찌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선비라는 이름으로 온갖 패악질을 벌여도 처벌할 수 없는 세상이 되도 가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정조는 노 재상의 사직상소를 물리느라 진땀을 뺐다. 결국 주동자에게는 ‘종신과거응시금지령’을, 가담자 4명에게는 ‘10년간 과거응시금지령’을 각각 내리는 것으로 일단락지었다.
 채제공의 일화를 보면 어쩌면 그렇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상황인지 무릎을 치게 된다.

 

 ■세상을 망가뜨리는 주범
 채제공의 일화에서 보듯 담배예절도 두고두고 이야깃거리를 낳았다.
 이옥은 자신이 지은 담배의 경전인 <연경>에서 담배를 피워서는 절대 안되는 ‘몇가지 경우’를 나열했다. 이른바 담배예절의 지침이다.
 “1)어른 앞에서, 2) 아들이나 손자가 아버지나 할아버지 앞에서, 3)제자가 스승 앞에서, 4)천한 자가 귀한 자 앞에서, 5)제사를 지낼 때, 6)대중이 모일 때 혼자, 7)다급할 때, 8)곽란이 들어서 신 것을 삼킬 때, 9)몹시 덥고 가물 때, 10)큰 바람이 불 때, 11)말 위에서, 12)이불 위에서, 13)화약이나 화총가에서, 14)기침병을 앓는 병자 앞에서는 절대 피워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예절을 차려야 하는 경우와, 화재가 일어날 위험이 있는 장소와, 연기 피우 것을 꺼리는 곳에서는 피우지 말라는 것이다,
 <연경>은 또 “입술을 풀무질해서 열었다 닫았다를 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고 있다. 이른바 ‘뻐끔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것이다.
 박지원의 풍자소설인 <양반전>을 보면 “양반은 볼이 움푹 패도록 담배를 빨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나저나 이젠 담배예절이고 뭐고 담배를 피운다는 자체가 ‘범죄’로 인식되는 세상이 되었다.  
 하기야 이미 200년 전의 인물인 윤기(1741~1826)은 ‘담배가 조선 사회를 병들게 하는 범죄’라고 규정한 바 있다.
 “아들과 아우가 아버지와 형 앞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세상이 됐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세상의 도리가 망가지게 된 것이 이 보잘 것 없는 풀 하나로 말미암을 줄이야.”
 세상을 망가뜨리는 주범으로 꼽힌 것이다. 그보다는 건강을 위해서는 다시금 끊어야 하지 않을까.
 250년 전의 금연운동가인 이덕리(1728~?)의 말을 귀담아 들어보자.
 “엄청난 돈이 담배연기로 다 허공으로 날라간다. 무엇보다 담배를 피우면 진기가 모두 소모되고 눈이 침침햐진다. 옷가지와 서책이 더러워지고 불씨 때문에 불이 난다. 치아가 더러워지고 예법이 없어진다.”

 (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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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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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frozen fron hack for android

    Tracked from frozen fron hack for android 2014/10/22 09:50  삭제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남초(南草·담배)는 1616~17년 사이에 조선에 들어왔다. 5년 만에 조선에서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다. 해롭다는 것을 알고 끊으려 해도 끝내 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담배를 요초(妖草), 즉 요망한 풀이라 했다.”
 1638년(인조 16년)의 <인조실록> 기록이다. 이 기사처럼 담배의 모든 것을 요약해주는 대목을 찾기 힘들다. 중독성이 얼마나 강했으면 단 5년 만에 조선 전역에 대유행했을까. 벌써 그 당시 해롭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도무지 끊을 수가 없어서 요망한 풀이라 일컬었다니….  

빈센트 반 고흐가 1885년 그린 <불붙은 담배를 문 해골>. 고흐는 장난스럽게 그렸지만 결과적으로 담배의 해악을 소름 끼치도록 표현했다.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부터 피웠던 담배

  하기야 그럴 만도 했으리라.
  유럽에 전해진 담배가 본격 재배된 것이 1558년 쯤이라 하니까 불과 60년 만에 조선에 전해졌고, 그 후 5년 만에 머나먼 극동의 조선 전역까지 퍼졌다니…. 그 파급 속도는 어마어마한 것이다. 사실 인류가 담배를 처음 피우기 시작한 것은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인 기원전 5000~3000년이라는 게 정설이란다. 연초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남미 안데스 산맥에서 찾아낸 야생담배를 두고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현재의 담배와 비슷한 성분을 찾아냈다.
 고고학적인 증거도 있다. 예컨대 멕시코 마야 유적의 신전 벽면에 제사장이 담배 파이프를 손에 들고 있는 장면이 있다. 이 그림의 연대가 서기 432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1600년 된 담배의 흔적이다. 또 6세기 북미 애리조나의 인디언이 남긴 파이프에서도 니코틴 성분이 검출됐다. 이는 신대륙 발견 이전부터 흡연의 풍습이 널리 퍼졌음을 알려준다.
 하기야 흡연이 꽤 오래된 풍습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청동기 시절의 임금은 제사장을 겸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의를 지냄으로써 하늘과 인간을 소통시켰는데, 새(鳥)와 같은 존재는 바로 하늘과 땅, 하늘과 인간을 소통시켜주는 메신저였다. 담배와 같은 풀을 피워 연기를 내는 행위도 비슷한 개념이었을 것이다. 공기 중에 피어오르는 연기는 왠지 하늘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영적인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담배를 피우는 행위는 곧 제정일치의 존재(임금이면서 제사장을 겸한 사람)가 치르는 제사 및 주술·치료의 의식이었을 것이다.
 담배 연기는 곧 제사장(임금)의 몸에 들어온 영혼들의 양식으로도 여겨졌다. 심지어 16세기 멕시코의 아스텍 사람들은 담배를 여신의 화신이라 여겼다. 제사장(임금)은 담배를 피움으로써 불의 정기를 마시고, 내뿜는 담배연기가 악마를 쫓아내거나 환자를 치료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다.
 
 ■콜럼버스는 범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요초, 즉 요망한 풀은 과연 언제쯤 유럽에 발을 디뎠을까.
 사람들은 콜럼버스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다. 신대륙에서 그 망할 놈의 ‘담배와 매독’을 전파시킨 흉악한 장본인으로 꼽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다. 콜럼버스의 변명을 한번 들어보자.
 그랬다. 신대륙 탐험에 나선 콜럼버스 원정대는 1492년 10월 12일 바하마 제도의 조그만 섬에 도착했다. 원정대는 그 섬 이름을 산살바도르라 지었다.
 원주민들은 그들을 찾아온 손님에게 아주 귀한 선물을 전달했다. 그 날짜 일기를 보라.
 “원주민들이 과일 나무로 만든 창과 특이한 냄새가 나는 말린 잎사귀를 가져왔다.”
 이 ‘특이한 냄새가 나는 말린 잎사귀’가 바로 담배였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잎사귀가 100년도 안돼 유럽 전역에 대유행하게 될 ‘신비의 풀’(물론 처음엔 요망한 풀이라는 인식은 없었다)이라는 것을…. 황금을 좇아 신대륙을 탐했던 콜럼버스는 이 풀을 바다에 물고기밥으로 던져 버렸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된 11월 6일, 콜럼버스 원정대의 선원인 루이스 데 토레스와 로드리고 데 헤레스가 쿠바에 파견됐다. 그 때 둘은 어떤 식물로 만든 작은 막대기에 불을 붙여 그 향기를 들이 마시는 원주민들을 발견했다. 둘은 원주민이 준 잎을 피웠다. 담배를 피운 최초의 유럽인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콜럼버스는 담배를 처음 본 유럽인이었고, 그의 선원들은 담배를 처음 피운 유럽인들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들은 ‘냄새나는 하찮은 입사귀’를 굳이 유럽에 가져올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다만 콜럼버스가 어떻든 담뱃길을 여는데 선구자였던 것은 틀림없다. 뒤따라 들어온 스페인·포르투갈인들이 앞다퉈 원주민들이 생산한 입담배를 유럽으로 도입했기 때문이다.  

브라질 원주민 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장면. 담배는 남미 안데스 산맥이 그 고향이라고 알려져 있다. 

   ■담배에 맥주를 끼얹은 사연

 담배는 단박에 유럽인들을 매혹시켰다.
 해프닝도 있었다. 영국의 초기 애연가였던 월터 롤리경이 한번은 파이프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이를 본 하인이 얼굴에 불이 붙은 줄 알고 다급한 나머지 맥주를 끼얹어 껐다는 일화이 유럽전역에 파졌다. 담배를 사랑한 롤리는 엘리바제스 여왕과 담배연기의 무게를 재는 내기를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즉 담배의 무게를 잰 뒤 태운 다음의 꽁초와 담배재의 무게를 뺀 것을 담배연기의 무게라고 우긴 것이다.
 사실 롤리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에 쳐녀여왕, 즉 버진 퀸(Virgin Queen)이라 일컬어졌던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의 총신이었다.
 롤리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도와 북미 식민지 개척에 앞장 선 인물인데, 신대륙 첫번째 식민지 이름을 ‘버진 퀸’ 엘리자베스 여왕의 별명을 따서 ‘버지니아’로 명명하기도 한 인물이다. 지독한 골초인 롤리는 영국 궁정에 흡연풍속을 전파시킨 장본인인데, 제임스 1세(1603~1625)이 등극하자 몰락하고 만다.
 그는 1618년 참수당하고 마는데, 처형 직전에 담배 한 대를 청해 피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한다. 최근까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버티다가 체념하고 진술하려 할 때나 사형 직전에 담배 한 대를 청하는 장면이 나오곤 했는데, 바로 그 장면의 효시가 롤리 경이 아니었을까.

 

   ■장 니코 대사와 니코틴

 담배종자의 재배기술은 1550년대 후반에 유럽에 도입됐다. 이 부분에 관한한 장 니코라는 이를 빼놓을 수 없다.
 니코는 포르투갈 리스본에 주재하는 프랑스 대사였는데, 포르투갈인으로부터 담배종자를 받아 담배를 재배했다. 그는 재배한 담배를 프랑스 왕비에게 헌상했다. 담배의 학명 가운데 속명을 니코티아나라 하고, 담배의 대표적인 성분을 니코틴이라 하는 것도 바로 니코 대사의 이름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하여간 담배는 요원의 들불처럼 유럽 전역에 퍼진다.
 1565년 영국·독일 상륙, 1600년에 이태리·노르웨이·스웨덴·터키·시리아·페르시아를 거쳐 인도와 인도네시아는 물론 중국과 일본까지…. 조선에도 1616~18 쯤 상륙했다니…. 지금처럼 통신망이 발전한 것도 아닌데…. 그 파급속도는 그야말로 LTE급이라 할 수 있다.
 하기애 비슷한 시기에 신대륙에서 전파된 감자가 유럽인들의 식탁에 오를 때까지 200년이 걸렸다는데…. 담배는 불과 50~60년 만에 전세계로 퍼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빨랐을까.
 그럴만도 했다. 담배를 피우는데 뭐 그렇게 준비할 게 없었으니까. 그저 흡입만 하면 일정양의 니코틴과 다른 화학성분이 곧바로 혈액에 침투하는 것이니까…. 게다가 담배는 처음에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 있었다.
 에컨대 세비아의 의사인 니콜라스 모나르데스는 “담배가 고통을 씻어버렸다”고 예찬론을 펼쳤다. 담배를 신앙처럼 떠받다는 이들이 유럽에 넘쳐났다.
 사람들은 “담배 덕택에 우리는 신의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찬탄했다. 담배란 몸을 덥게 하고 말려서 원기왕성한 상태에 이르게 하고 모든 병을 퇴치하는 것으로 이해된 것이다. 의사인 토비아스 베너는 1621년 “뇌와 근육에 불필요한 사기(사악한 기운)을 녹이고 소모. 냉기를 없애는데다 위장 유방 폐의 모든 냉증과 습증에 매우 이롭다”고 했다. 특히 매독에 특효라는 소문이 돌았다.
 게다가 담배 피우는 것은 상류층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상류층이라면 이 새로운 유행에 한번 몸을 던져야 멋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간첩죄로 붙잡혀 사형된 언론인 정국은. 1954년 총살형으로 처형되기 직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장면이 포착됐다. '처형 직전의 담배 한 대'는 1618년 제임스 1세에 의해 참수된 월터 롤리 경이 효시였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담배는 미국독립전쟁의 원인이었다.

 담배는 당시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던 영국인들의 신대륙 정착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또한 미국 독립전쟁의 원인 가운데 담배가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예컨대 1610년 영국의 존 롤프라는 이가 신대륙에 나타나 담배를 재배했다. 그는 원주민의 담배가 너무 독한 것을 알고 스페인 이주민들이 재배하던 순한 담배종자를 몰래 도입해서 영국으로 수출한다. 이것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담배값이 금값이 됐다. 식민지의 제임스타운은 담배타운으로 바뀌었다.
 오죽했으면 제임스타운 총독은 “2에이커(2400여 평)의 땅에 옥수수를 심지않으면 담배재배를 할 수 없게 한다”는 명령까지 내렸을까.

 어떻든 담배는 식민지 미국에서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노동력 확보가 골치거리로 다가왔다. 담배는 노동집약적 작물이다. 많은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처음엔 영국본토에서 식민지 개척을 위해 이민선을 탔던 영국인들이 담배농장에서 일했다. 그러나 이들의 계약기간은 주로 1년이었다. 1년의 노동을 마치면 자유인이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때문에 담배농장에서는 지속가능한 인력, 즉 흑인 노예를 선호하게 됐다. 흑인 노예는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고 독립 무렵에는 남부 전체인구의 40%를 차지할 정도했다.
 미국독립전쟁의 원인으로는 흔히 두가지가 꼽힌다. 식민지 수탈을 위한 인지조례와 이로 인한 영국제품 불매운동, 그리고 보스턴 차사건 등이다.
 알다시피 영국은 1765년 식민지의 증권·증서 등과 신문 잡지 광고물 등 모든 인쇄물에 영국이 발행하는 인지를 사서 붙이도록 하는 이른바 인지조례를 발효했다. 당연히 식민지 사람들의 반발을 불렀다.
 또 하나의 핵폭탄인 보스턴 차사건은 1773년 터졌다. 영국은 미국 식민지의 상인에 의한 차의 밀무역을 금지시키고 이를 동인도회사에게 독점권을 부여하는 관세법을 성립시켰다. 그러자 보스턴 시민들이 항구 안에 정박한 동인도 회사 선박 2척을 습격, 차상자 342개를 깨뜨리고 차를 바다에 던졌다. 이 두 사건이 독립전쟁의 직접 도화선이 되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또 하나의 원인이 있었으니 바로 담배이다. 담배를 빼놓고는 독립전쟁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 하나. 초대대통령인 조지 위싱턴과 2대 대통령이자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은 대규모 담배농장을 경영하던 담배 귀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지 워싱턴은 23살에 버지니아 주 총사령관으로 프랑스와의 전투에 참전했다. 그 후 버지니아 최고재산가인 미망인 마르타 커스티스와 결혼한 뒤 대농장주로 변신해서 담배농사에 전념했다고 한다.

 담배가 식민지에서 엄청난 호황을 이루자 영국 본토가 가만 있을 리 없었다. 수탈이 본격화했다.
 영국 국왕과 영주들은 식민지 담배농장 토지를 독점하고, 갖가지 세금을 부과하는 등 횡포를 벌였다.
 식민지 농장주들은 소작농의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영국은 또 항해조례까지 제정했다. 교역하는 모든 담배는 반드시 영국배에 실어 영국의 항구에 도착시키도록 한 것이다. 다른 나라로 수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담배경작자는 높은 세금을 물고, 마음대로 팔 수도 없었으며, 생필품도 비싼 값으로 영국에서만 사야 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독립전쟁 직전 13개 식민지에서 본국상인에게 진 빚이 500만 파운드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 가운데 5/6가 남부지방에서 진 빚이었는데, 토머스 제퍼슨도 런던 상인에게 1만 파운드의 빚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식민지 담배업자들은 영국의 착취에 맞서 독립전쟁에 적극 참여한 것이다.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처럼….(계속)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참고자료>

 김정화, <담배이야기>, 지호, 2000

 샌더 L 길먼, 저우 쉰 외 지음, <흡연의 문화사>, 이수영 옮김, 이마고, 2006

 이옥, <연경, 담배의 모든 것>, 안대회 옮김, 휴머니스트, 2008

 이안 게이틀리, <담배와 문명>, 정성묵 이종찬 옮김, 몸과 마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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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당 태종은 황충(蝗蟲·메뚜기 혹은 풀무치)를 삼킨 일이 있다. 아무리 어질고 의로운 군주라 해도 정성이 없었다면 어찌 황충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는가. 그것은 결국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었다.”(<영조실록> 1765년 6월 3일조)
 1765~68년 사이 전국에 황충 떼를 비롯한 해충이 기세를 부리고, 가뭄까지 겹치자 영조 임금이 깊은 시름에 잠겼다.
 영조는 ‘당 태종의 고사’를 예로 들면서 “과인이 태종처럼 할 수 있을 지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영조가 언급한 ‘당태종의 고사’란 무엇인가.
 당 태종의 치도를 논한 <정관정요(貞觀政要)> ‘무농(務農)’에 나와있는 일화를 일컫는다. 

스페인령 카나라이 제도에 날라든 메뚜기 떼. 1억 마리의 메뚜기가 서아프리카 대륙에서 넘어왔단다. 오자 비상 경계령을 발동했다.  

  ■메뚜기를 삼킨 당 태종

 당 태종의 이른바 정관지치(貞觀之治)가 돋보였던 628년(정관 2년) 가뭄과 함께 메뚜기 떼(황충)가 당나라 수도 장안을 뒤덮었다.
 가뭄에 황충떼가 곡식을 사정없이 훑어버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이란 말이 딱 맞았다. 백성들은 가뭄의 와중에 그나마 맺힌 곡식을 갉아먹고 있는 황충떼를 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시름에 빠진 태종이 황급히 들에 나가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고는 안타까운 나머지 황충 떼를 향해 외쳤다.
 “사람은 곡식으로 살아간다. 너희가 먹어대면 백성에게 해가 된다. 백성에게 허물이 있다면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너희가 신령스럽다면 차라리 내 심장을 갉아 먹어라. 백성에게는 해가 없도록 해라.”
 그러면서 태종은 돌발행동을 벌였다. 누가 말릴 틈도 없이 황충 두 마리를 잡아 삼키려 한 것이다. 좌우의 대신들이 화들짝 놀라 황급히 태종을 말렸다.
 “폐하. 제발 삼키지 마소서. 병이 될까 걱정됩니다.”
 태종은 “황충의 재해가 짐에게 옮겨지기를 바라는데 어찌 병을 피하겠느냐”고 하면서 꿀꺽 삼키고(呑蝗) 말았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황충의 재해(災害)가 뚝 끊긴 것이다.
 영조는 당 태종의 고사를 떠올리면서 “그 것(황충을 삼키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며 부러워 한 것이다.    
 “당 태종은 그 정성 덕분에 효험을 봤다지만 과인이 부덕하고 노쇠한 탓인지 가뭄과 해충이 이어지는구나. 이는 누구의 허물인가. 아! 어찌하여 이 벌레는 내 살을 빨아먹지 않고 백성의 곡식을 먹는가.”
 1768년(영조 44년), 당시 74살인 영조가 내뱉은 한탄이다. 영조는 “벌레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정성이 없는 한 사람(영조 자신)이 초래한 것”이라고 자책했다.
 그러면서 각 지방의 책임자(유수·도신·수령)들은 임금의 부덕함을 논하지 말고 정성을 다해 해충을 막아줄 것을 신신당부한다.

 

  ■황충 떼의 습격
 얼마나 황충의 피해가 엄청났으면 천하의 주인이라는 황제가 그것을 삼키면서까지 박멸운동을 벌였을까.
 “남쪽 하늘에 검은 구름처럼 지평선 위에 걸쳤더니 이윽고 부채꼴로 퍼지면서 하늘을 뒤덮었다. 세상이 밤처럼 깜깜해지고 메뚜기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그들이 내려앉은 곳은 졸지에 잎사귀를 볼 수 없는 황무지로 돌변했다. 아낙들은 모두 손을 높이 쳐들고 하늘에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올렸고, 남정네들은 밭에 불을 지르고 장대를 휘두르며 메뚜기 떼와 싸웠다.”
 펄벅의 <대지>에 등장하는 황충(풀무치) 떼의 습격 장면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광경이 아닌가. 1447년(세종 29년), 세종 임금이 황충의 재앙을 언급하면서 중국의 예를 들고 있다.
 “옛날 중국 위나라 산동 땅에 황충이 있었는데 이를 소홀히 여겨 박멸하지 않았다. 그러자 기근이 들어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기에 이르렀다. 또 중국 진(秦)나라에 황충이 날아들자 초목이 다 사라지고, 소와 말이 서로 털을 뜯어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황충이 더욱 번져 창궐하게 되면 백성들이 흩어져 떠돌아다니니 나라의 안위가 걱정되는 것이다.”
 황충이 창궐하면 수확할 곡식이 사라지고 굶주림에 빠진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빠진다니….
 꼭 중국의 예만 들출 필요는 없다.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면 황충의 피해가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황충의 습격으로 곡식이 상하고, 백성이 굶주렸으며 도적 떼가 창궐했다”는 기록이 다수 등장한다.
 <삼국사기> ‘열전·김유신’은 “패강(예성강 지역)에 황충 떼가 생겨 꿈지럭거리며 들판을 덮어 백성들이 두려워 했다”고 기록했다. 이 때 산꼭대기에 올라 향을 사르며 기도한 후에야 비바람이 불어 황충 떼가 다 죽었다는 것이다.
 백제 무령왕 때인 521년 가을에는 황충 떼가 곡식을 온통 갉아먹자 백성 900호가 신라로 도망가기도 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무령왕조’)

최근 전남 해남에 메뚜기떼가 출몰했다고 한다. 왕조시대엔 메뚜기(황충) 떼가 습격하면  ‘임금의 부덕’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굶어죽은 시체가 도랑을 메우고
 조선시대에도 황충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1473년(성종 4년) 동지사 홍응은 황충 떼의 무서움을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황충이 모(苗)를 먹어치우는 것이 매우 빠릅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논밭을 먹어치웠습니다.”(<성종실록>)
 이밖에도 황충의 폐해로 인한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생생한 필치로 고발한 실록기사가 넘쳐난다.
 “1468년, 경상도에 황충이 일었는데 그 모양이 매미 같고, 또는 모기와 같기도 했다. 떼를 지어 날아와 들을 덮고 벼이삭을 빨아 먹어 모두 말라죽게 만든다. 벼이삭이 까맣게 됐는데 연해 지방이 더욱 심했다.”(<세조실록>)
 “1470년, 황해도 전역에 황충이 청·황·흑색의 삼색 황충이 곡식을 마구 훼손시켰다.”(<성종실록>)
 “1402년, 황충이 순을 잘라먹는 바람에 이삭이 전혀 패지않은 고을이 39곳이나 됐고, 잎사귀를 잘라먹은 고을이 28곳이었다”(<태종실록>)
 “1432년, 함길도에 황충이 창궐했다. 백성들이 농사철을 잃어 모두 구휼미에 의존해 살고 있다.”(<세종실록>)
 “1532년, 연이은 흉년으로 굶어죽은 시체가 도랑과 골짜기를 메우고 있는데…. 여기에 황충까지 들판에 가득하여 냇물이 말라붙고 농사를 다 망치게 되었다.”(<중종실록>)

심사정(1707~69)의 ‘꽃과 나비·풀벌레 화첩’(화접초충화첩)에 나타난 메뚜기. 평소엔 친근한 메뚜기지만 떼로 몰려올 경우 큰 환란이 되었다. 당 태종은 메뚜기 떼가 출몰하자 ‘백성을 괴롭히느니, 차라리 내 심장을 갉아먹으라’면서 살아있는 메뚜기를 삼켰다.  

 ■황무지로 변한 들판
 1547년(명종 2년)의 실록을 보면 굶주린 백성들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8월 황충이 들에 가득했는데, 머리는 붉고 몸은 흰색이었습니다. 8~9일 동안 곡식은 물론 온갖 풀을 다 갉아먹어 황충이 지나간 자리는 삽시간에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비바람이 내려 황충들이 모두 죽었는데, 들판의 물이 황충의 시체로 온통 붉을 색으로 변할 정도였습니다.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이 풀과 겨로 허리를 채우고 얼굴이 누렇게 떴으니….”
 심지어 임금이 백성들에게 권농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임금이 직접 농사를 짓는 동적전이 황충 떼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일도 있었다.
 1522년(종중 17년) 때의 일인데, 영사 정광필이 “매우 민망한 일”이라며 보고한다.
 “(동대문 밖 전농동에 있는) 동적전(東籍田·임금이 친히 경작하는 논)에 황충 떼가 습격해서 곡식의 뿌리와 잎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모맥(牟麥·밀과 보리)이 없어져 버려 종묘의 제사에 쓸 곡식이 없어졌습니다.”
 정광필의 보고대로 매우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황충의 창궐 때문에 종묘 제사에 쓸 양식마저 사라져 버렸다니 얼마나 면목없는 일인가.    
 1719년(숙종 45년) 평안도에는 크기가 두 번 잠을 잔 누에만한 황충 떼 때문에 백성들이 극심한 타격을 입기도 했다.
 “익어가는 보리와 밀, 그리고 자라는 기장과 피, 그리고 볏모(稻苗) 등을 다 먹어치워 평안도 전체가 초목이 없는 황무지로 변했다. 백성들은 모여서 울부짖고 있었다.”

 ■백성의 ‘밥그릇’이 비면
 사태가 이렇게 심각하니 군주가 가만 있을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순자> ‘왕제(王制)’는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水則載舟 水則覆舟)”고 했다.
 순자가 말한 물(水)은 백성, 즉 민심을 말하고, 배(舟)는 군주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민심을 잃은 군주는 언제든 민심에 의해 뒤집힌다는 무시무시한 뜻이다.
 민심을 달래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 즉 ‘밥’이었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의 말을 인용해보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먹는 것을 하늘처럼 우러러 보는 사람들(民惟邦本 食爲民天)이다. 만약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굶어죽는 자가 있다면….”(<세종실록> 1419년)
 그랬으니 백성이 굶주린다는 것은 곧 군주의 책임이니 백성을 굶주리게 만든 군주는 용서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책의 끝판왕
 중국사를 들춰보면 황충을 삼킨 당 태종과 견줄 수 있는 ‘자책의 끝판왕’이 여럿 있다.
 재변을 군주, 즉 자신의 부덕과 관련짓는 지도자들이다. 그 비조(鼻祖)는 지금으로부터 3600년 전 인물인 상나라 창업주 탕왕(成湯)이다.
 <십팔사략> <제왕세기> <사문유취(事文類聚)> 등 문헌에 나오는 탕왕의 일화를 검토해보자.
 기원전 1600년 전 무렵 탕왕이 하나라 마지막 군주 걸왕을 정벌한 뒤 상나라를 창업했다. 그러나 곧 고비를 맞았다. 7년 간의 지루한 가뭄이 이어진 것이다.
 이에 나라의 장래를 두고 점을 치는 태사(太史)가 “사람을 희생양으로 제단에 바치면 된다”고 했다. 그러자 탕왕은 “내가 희생양이 되겠다”고 자청한 뒤 목욕재계하고 모발과 손톱을 자른 뒤 소박한 수레에 백마를 탔다. 그는 자신의 몸을 흰띠풀(白茅)로 싸서 희생의 모양을 갖추고 상림(桑林·뽕나무밭)에 들어가 기도를 올렸다.
 탕왕은 이 때 ‘6가지의 일(六事)’로 자책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가 정사를 펼치는 데 절제가 없어 문란해진 것입니까.(政不節) 백성이 직업을 잃어 곤궁에 빠졌습니까.(民失職歟) 궁궐이 너무 화려합니까.(宮室崇歟). 궁궐 여인들의 청탁에 빠졌습니까.(女謁盛歟) 뇌물이 성해서 정도를 해치고 있습니까.(苞저行歟) 아니면 아첨하는 무리의 말을 듣고 어진 이를 배척하고 있습니까.(讒夫倡歟)”
 탕왕이 간절한 자책의 기도를 올리자 금방 천 리에 구름이 몰려들어 배를 뿌린 덕에 수 천 리의 땅을 적셨다.
 이 고사가 바로 상나라 탕왕이 재변을 맞아 상림에서 스스로 6가지를 자책했다고 해서 ‘상림육책(桑林六責)’이라 하기도 하고, 그냥 ‘육사(六事)의 자책’라고도 한다.
 또 있다. 송나라 태종이다. <송감(宋鑑·송나라 사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송 태종(재위 977~997) 때 황충 떼가 하늘을 뒤덮었다. 그러자 태종은 하늘의 노여움을 산 것은 곧 짐(태종)의 책임이라고 자책하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면서….
 “짐이 내 몸을 태워 하늘의 견책에 응답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몸을 태우려 하자 하늘이 응답했다. 곧 비가 내리고 황충의 떼가 즉시 죽은 것이다.

 

 ■상나라 탕왕의 6가지 자책
 후세의 군주들은 탕왕과 당태종, 송태종의 고사를 교훈으로 삼아 그들을 닮으려 애썼다.
 당 태종을 본받아야 하는데, 너무 노쇠해서 아마도 따라 하기 힘들 것 같다고 자책한 영조 임금처럼….
 조선의 중종 때인 1511년(중종 6년) 시강관 구자신은 송 태종의 일화를 전하면서 “임금이 몸과 마음을 닦고 공경하고 삼간다면 하늘도 감읍할 것”이라고 임금의 공구수성을 촉구했다.
 1522년(중종 17년) 황충을 비롯, 우박과 한발이 기승을 부리자 중종은 대역죄와 강상죄의 중죄를 제외한 대사면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황충의 내습 등 재변이 끊이지 않자 시강관 강현은 상나라 탕왕의 ‘육사’를 예로 들면서 임금의 반성을 촉구했다.
 “가뜩이나 가뭄 때문에 곡식이 말라 비틀어졌는데, 밭두둑과 길바닥까지 황충 떼가 뒤덮었습니다. 농사를 망치게 되면 어쩝니까.”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충 떼의 출현 등 재변이 일어나면 군주의 반성을 촉구하기 일쑤였다.
 예컨대 1527년(중종 22년) 극심한 가뭄에다 황충까지 습격하고, 눈과 우박까지 계절을 어기면서 쏟아졌다. 홍문관(임금의 자문기관)이 나서 중종 임금을 다그쳤다.
 “아! 임금이 두려워하는 것은 하늘이요, 하늘이 사랑하는 것은 임금입니다. 잦은 괴변이 일어나고 있는데, 하늘을 두려워해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총명을 넓히고, 그동안의 과실을 거울삼아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소서. 정실인사를 삼가시고, 스스로 반성하여 집을 다스리고 나라를 미덥게 하소서. 그러면 천지가 제자리를 지키고 음양이 화합할 것입니다.”(<중종실록>)
 심지어 조선의 2대왕인 정종은 황충 떼의 출현을 선위의 이유로 내세우기도 했다.
 1400년(정종 2년) 정종은 동생이자 왕세자였던 이방원에게 임금의 위를 내주는 이른바 선위교서를 내주고 물러났다. 그 교서의 내용을 보라.
 “나라를 다스린지 3년이 됐지만 하늘 뜻이 허락치 않고 민심이 믿지 않아 황충과 가뭄이 귀신의 재앙으로 변하고 있다. 이에 왕위를….”

 

 ■‘화와 복은 사람이 부릅니다.’
 효종은 1650년(효종 1년) 황충 피해가 극에 달하자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며 “기탄없는 직언으로 과인을 꾸짖어 달라”는 내용의 교지를 내리기도 했다. 
 1492년(성종 23년) 성종은 지방 수령으로 부임하는 사람들을 인견하고 다음과 같이 신신당부한다.
 “수령이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를 하면 다스린 성과가 있을 것이다. 그 경우 ‘황충 떼도 그 지방에 출몰하지 않고 호랑이가 강을 건넌다’는 고사가 있다. 그대들은 가서 잘 다스려라.”
 성종이 인용한 고사는 무엇인가. 후한(기원후 25~220) 때 노공이라는 사람이 중모(中牟)의 수령이 되어 덕(德)으로 다스리자 황충 떼가 감히 그 지방에 날아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호랑이 도하’ 건은 역시 후한 때 유곤이라는 사람이 홍농의 태수가 되어 인(仁)으로 다스리자 호랑이가 새끼를 데리고 강을 건너갔다는 내용이다.
 결국 덕(德)과 인(仁)의 정치를 하면 황충 떼와 같은 재변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천하의 폭군이라는 연산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1497년 예조참판 김제신이 “요사이 천변(天變)이 괴상한데, 이럴 때는 임금의 반성이 필요하다”면서 임금의 공구수성(恐懼修省·몹시 두려워하며 반성함)을 촉구했다.
 “화(禍)와 복(福)은 문(門)으로 들어오지 않고 사람이 부르는 겁니다. <서경>은 ‘오로지 덕이 하늘을 감동시킨다’고 했습니다. 옛날 송나라 진종이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궁궐 신축을 중지하자 습격하던 황충 떼가 바다로 몰려가 죽는 바람에 해안 수백리에 황충의 시체가 쌓였다는 고사가 있습니다. 바라건대 헛된 겉치레를 물리치시고, 참된 덕을 행하시면….”(<연산군일기>
 연산군은 김제신의 충언에 감탄사를 연발하고는 “그냥 듣고 넘길 말이 아니다. 아뢴 내용을 한 통으로 정서(淨書)해서 올리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어떤가. 폭군인 줄만 알았던 연산군의 ‘반전 매력’이 아닌가.
 올해들어 갖가지 재변이 일어나고 있다. 세월호 침몰 등 갖가지 참사가 줄을 잇는 가하면 땅이 꺼지고, 운석이 떨어지고, 황충의 떼(풀무치)가 출몰하고….
 새삼 3600년 전 상나라 탕왕의 ‘육사의 자책’과, 메뚜기를 삼킨 당태종의 이른바 ‘탄황(呑蝗)’의 고사가 떠오르는 까닭은 무엇인가.(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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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당 태종이 메뚜기를 꿀꺽 삼킨 이유는

  82. Subject: fish oil suppl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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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 Subject: radiomusik24.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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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 Subject: wiki.cottagecemeter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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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 Subject: omega 3 fish o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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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Subject: candy crush saga cheats ya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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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 Subject: fish oil e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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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 Subject: best psychic read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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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 Subject: visit this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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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 Subject: hack castle C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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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 Subject: kneesocks.ldblog.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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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 Subject: http://www.academia.edu/8471993/The_Venus_Factor_Review_-_Is_Venus_Factor_Really_Worth_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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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 Subject: social anxiety cau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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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 Subject: visit the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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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 Subject: kia motors fin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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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 Subject: Mode & Fash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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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 Subject: mouse click the up coming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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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 Subject: check this site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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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 Subject: Tischfuss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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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 Subject: people buy 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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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 Subject: Download fifa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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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 Subject: Fitness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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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5. Subject: http://ltur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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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 Subject: plague inc. cheats c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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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 Subject: breaking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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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 Subject: 10 Yard 32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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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 Subject: visit this website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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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 Subject: high school story hack password gener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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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 Subject: dawn of the dragons h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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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 Subject: clash of clans free ge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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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 Subject: www.docs.google.com/document/d/1wV6JotglEajERfmTOsxh5FLp3WttVXxATSQhfs2HyOI/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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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5. Subject: www.zaker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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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8. Subject: radiomusik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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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9. Subject: megapolis hack android a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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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 Subject: http://www.Buaga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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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 Subject: gatheringarticl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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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 Subject: che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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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 Subject: Full Gu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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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 Subject: visit my home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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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 Subject: personal finance lo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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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 Subject: Read the Full Pos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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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 Subject: internetprofitsltd.zendes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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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 Subject: just click www.shapingourfuture.fluid.net.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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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 Subject: home workout rout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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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3. Subject: visit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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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4. Subject: you can try these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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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 Subject: venus fa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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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7. Subject: soul crash cheats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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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 Subject: visit this back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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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 Subject: oscarmurph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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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 Subject: unique diamond 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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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 Subject: get paid for online surve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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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 Subject: heroes of dragon age hack android a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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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 Subject: mortal kombat pc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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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4. Subject: qu'est-ce qu'on a fait au bon dieu strea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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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 Subject: injury law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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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6. Subject: haley joel osment car accident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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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7. Subject: car accident n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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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 Subject: Recommended Internet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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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 Subject: click through the following web 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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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2. Subject: Dumpster Rental 74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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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3. Subject: ильком.xn--p1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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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 Subject: hill climb racing hack by cheat eng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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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 Subject: best steroids for Park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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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 Subject: home std test kit for 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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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 Subject: quality fish o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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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 Subject: which fish oil is 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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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 Subject: japan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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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 Subject: Brave Trials H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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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3. Subject: trainstation ch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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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5. Subject: std test k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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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 Subject: home test for s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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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 Subject: best anabolic steroid pi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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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 Subject: freefungames.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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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 Subject: boom beach che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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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 Subject: 72.29.7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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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 Subject: updated blog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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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 Subject: 180.241.97.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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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 Subject: dragon pals cheats c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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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 Subject: fun88 po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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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 Subject: http://www.pseudoclopedia.org/wiki/index.php/User:KelseyMcKelv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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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8. Subject: uberstrike hack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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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8. Subject: take surveys for mo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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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1. Subject: reinventfutu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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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 Subject: psychics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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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3. Subject: article 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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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4. Subject: http://old.shiatv.net/uprofile.php?u=TZ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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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5. Subject: chaturbate token h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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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7. Subject: accurate psychic predi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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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8. Subject: click the up coming internet 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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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9. Subject: cougar s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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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 Subject: Como Se Lavan Los Ten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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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 Subject: just click the following web 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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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5. Subject: Pagerank Doma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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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8. Subject: fish oil for do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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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0. Subject: gamenator.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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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1. Subject: hair loss in child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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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5. Subject: battle camp cheats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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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6. Subject: http://www.terradaamare.it/terra/members/lynnelinville/activity/276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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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0. Subject: Eternity Warriors 3 h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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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1. Subject: recipe for A Happy Marri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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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2. Subject: ru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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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2. Subject: Suggested Web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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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당 태종이 메뚜기를 꿀꺽 삼킨 이유는

 “근자에 병역에 해당된 자들 가운데 선현의 자손이라고 거짓말을 고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안(安)씨는 모두 안유(安裕·안향)의 후손이라 하고, 한(韓)씨는 모두 기자(箕子)의 후손이라 합니다.”
 1682년(숙종 8년) 지사 김석주가 “큰 일 났다”면서 “상당수가 병역기피를 위해 거짓으로 선현의 후손을 칭하고 있다”고 상언했다.
 무슨 말인가. 조선시대 때 병역의 의무를 져야 하는 나이는 16~60세였다. 이들은 1년에 2~6개월씩 교대하는 방식으로 병역의 의무를 져야 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병역면제의 헤택을 받는 ‘신의 자식들’이 있었다.  

 완문(完文). 1830년 충훈부가 신우태에게 발급한 문서. 공신 신숙주의 후손인 신우태의 잡역을 면제하는 내용이다.|국립중앙박물관

■3학사의 후손에게 병역면제혜택을 줘라
 예컨대 1681년, 안유(안향)의 먼 후손이 병역면제의 혜택을 달라고 상소문을 올렸다.
 이에 병조가 “문제의 후손이라는 자는 그 집안의 대를 잇는 자가 아니니 병역혜택을 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이 상소문을 읽은 숙종 임금은 “유학자들을 숭상하고 사도(斯道), 즉 유학의 도리를 소중히 여긴다는 취지로 이 안유의 후손에게 병역면제 혜택을 줘라”고 특별명령을 내린다. 숙종은 주자학을 도입한 안유를 국가유공자로 여겨 그 후손에게 대대로 병역면제 혜택을 준 것이다. 비단 안유의 후손 뿐이 아니었다.
 숙종은 같은 해(1681년) 병자호란 때(1636~37) 척화를 주장하다가 죽임을 당한 오달제·윤집·홍익한 등 3학사의 후손들에게도 병역면제의 지시를 내렸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가 ‘척화를 주장한 자들을 인질로 보내라’ 해서 삼학사를 부득이 보냈다. 인조 임금은 그들이 반드시 죽을 줄 알았기에 술을 내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반드시 그대들의 부모와 처자는 과인이 거둬두겠다’고 하셨다.”
 말하자면 3학사의 후손들을 거두라는 것은 인조의 유시였다는 것. 그러나 “이후 3학사 집안의 자제들이 모두 요절하고 가문이 몰락해서 빈궁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려운 상황에 빠진 3학사의 후손들에게 병역면제와 같은 갖가지 혜택을 주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숙종은 이외에도 1644년 오랑캐(청나라)의 명나라 정벌에 어쩔 수 없이 참전했지만 명나라군을 향해 포를 쏘지 않았던 이사룡에게도 같은 혜택을 주었다. 그의 공로를 보라.
 “이사룡은 포에 탄환을 넣지 않은 채 헛방을 쏘면서 ‘비록 우리가 죽는다 해도 어찌 중국인들에게 포를 쏘겠느냐’고 했다. 결국 그러다 청나라군에게 발각돼 피살됐다.”(<숙종실록>)

1860(철종 11) 예조에서 공재동 등에게 발급한 내용. 공재동 등 공씨들은 공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잡역을 면제하라는 내용이다.

 ■기자, 안향, 문익점, 경순왕, 왕건의 후손까지…
 그러나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고…. 혜택의 폭이 커지면서 너도나도 유공자 가문의 후예임을 내세우는 등 갖가지 부작용이 나타난 것 같다.
 앞서 인용한 김석주의 상언이 바로 그 부작용이 만만치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숙종은 결국 “기자의 후손 가운데는 선우씨만, 그리고 안유의 후손 가운데는 직접 제사를 받들고 무덤을 지키는 자들만 병역에서 제외시키라”는 명을 내리기에 이른다. 하지만 병역기피의 유혹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1710년(숙종 36년) 기사를 보면 상황이 더 나아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승지 이제가 올린 상언이다.
 “기자(箕子)와 문성공 안유는 물론 문익점의 자손까지 대대로 병역을 면제한 규정을 빙자해서 그 후손들이 갖가지 계책으로 부역을 면하려 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라 경순왕의 자손은 병조의 하급관리와 짜고 임금이 내린 문서를 입수, 지방 사령들을 속여 병역을 면제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기자는 누구인가. 유학의 성인으로 알려진 기자는 은(상)의 왕족이었다. 나라가 망하자 주나라 무왕에게 치도의 9가지 도리인 홍범구주를 전했다는 인물이다.
 그는 조선으로 와서 기자조선을 세웠는데, 한(韓)씨와 선우(鮮于)씨가 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손들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병역을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목화씨를 몰래 들여온 문익점의 후손은 물론 경순왕의 자손까지도 “우리도 유공자”라며 손을 들고 나섰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숙종은 그저 ‘단단히 타일러 경계를 삼도록 하라’는 명만 내릴 뿐이었다.
 고려 임금의 혈통인 왕씨들도 혜택을 받았다. 1660년(현종 1년) 왕흡 등 왕씨 12명이 “원래 고려 왕조의 후손인 왕씨들에게는 병역 등 부역의 의무는 없었다”고 진언했다.
 “저희 왕씨들이 고려 태조를 비롯 7명의 고려왕을 모시는 숭의전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조종조부터 저희는 병역의 의무란 없었사온데 세월이 흘러 법령이 해이해지고….”
 그러자 현종 임금은 “예전의 관례대로 왕씨의 병역은 면제시키는게 좋을 것 같다”고 허락해주었다.

 

 ■귀화인은 3대까지
 그렇다면 귀화자들의 병역은 어떻게 해결됐을까. 
 성종은 1487년 귀화자 병역혜택의 범위를 다음과 같이 정한다.
 “귀화한 왜인, 야인(두만강 이북에 살던 종족)의 경우 증손자부터 병역을 감당하게 하라.”
 귀화해서 곧바로 정착해서 살아갈 방도가 없으니 최소한 3대(손자대)까지는 병역의 의무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쪽으로 정리된 것이다.
 1493년(성종 24년)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
 개성에 사는 명귀석이 상소를 올렸는데, 상소의 골자가 흥미로웠다.
 즉 명귀석의 고조 할아버지인 명옥진은 귀화인이었다. 그런데 고조할아버지의 신분은 놀라웠다. 원나라 말 대하국(大夏國·1362~1371)의 황제(재위 1362~1366)를 자칭했던 인물이었으니까.
 대하국(쓰촨성·四川省을 기반으로 선 소국)은 1371년 명나라에 의해 멸망됐다. 명나라는 대하국의 2대 황제인 명승(재위 1366~1371)과 그의 어머니인 팽씨를 포로로 잡은 뒤 “조선에서 살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면서 명 황제는 조선에 “명씨의 후손을 군인(軍)으로도 만들지 말고, 백성(民)으로도 만들지 말라”는 조칙을 내린다. 그 때가 고려 공민왕 때인 1372년의 일이었다. 왕조가 바뀌었지만 명나라를 섬겼던 조선도 이 조칙에 따라 명씨의 후손들을 병역에서 제외시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121년 만인 1493년 어쩐 일인지 명씨의 후손인 명귀석이 병역에 포함돼 꼼짝없이 군대에 끌려가게 생긴 것이다. 그래서 “억울하다”며 상소를 올린 것이다.
 “명황제의 조칙에 의하면 우리 집안은 조선의 군인도, 백성도 아니니 병역을 감당할 이유가 없사옵니다.”.
 이 명귀석의 상소를 둘러싸고 조정은 작은 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 명귀석이 이겼다. 명나라 황제의 칙서가 있다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하국 황제의 후예는?
 그로부터 162년이 지난 1655년(효종 6년), 또 문제가 생긴다. 명씨의 후손들이 또 한 번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급히 피란을 갔다가 그만 명나라 황제의 조칙문서와 명씨의 시조인 명옥진(대하 황제)의 초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신분을 확인할 길이 없어 꼼짝없이 병역을 치르게 됐습니다. 종전처럼 면제시켜 주소서.”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조정은 논의 끝에 “인정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우선 명씨 일가가 바로 293년 전 명 태조 주원장의 명령으로 조선에 의탁한 대하국 황제의 후손임은 인정됐다. 하지만 병역만큼은 더는 면제해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명씨가 그 간 조선에 무슨 공덕을 쌓았는가. 다만 명 황제의 조칙에 따라 병역을 정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제 귀화한지 300년이나 지났으니…. 백성들과 똑같이 정역을 정하라.”       
 명씨로서는 통탄할 노릇이다. 잃어버릴 게 따로 있지, 대대로 간직해온 가보(병역면제 서류)를 잃어버린 대가가 너무 컸던 것이다. 

1404(태종 4) 개국·정사·좌명공신 등 3공신들이 모여 태종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작성한 회맹문이다. 공신의 후예도 5~9대까지 군부의 핵심이자 꽃보직이라 할 수 있는 충의위에 속하도록 혜택을 주었다. |국립중앙박물관
■결국 불평등이 문제다
 면제의 폭은 넓었다.
 1610년(광해군 2년)에는 자기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물론 선조비(의인왕후)와 선조 임금의 상에도 3~6년간씩 모두 15년간이나 상복을 입은 익산사람 정팽수에게 병역면제의 특전을 내렸다.
 대표적인 충효의 모범사례라는 것이다.
 이밖에도 지체장애인과 현직 관료, 그리고 학생(성균관 유생, 사학 유생, 향교생도)과 2품 이상의 전직 관료 등은 병역 면제 혜택을 받았다.
 또한 70세 이상의 부모를 모신 경우는 아들 한 명, 90세 이상의 부모를 모신 경우는 아들 모두를 면제시키는 등의 규정도 있었다. 국가 유공자의 자손은 3대까지 병역면제의 혜택을 받았다. 도첩(승려자격증)을 받은 스님(僧)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저런 류의 병역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피의 방법을 찾느라 혈안이 됐다.
 “백성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병역의 의무’을 모면하려 합니다. 그러니 10호 가운데 겨우 1~2명 만이 병역을 담당하고 나머지는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빠졌습니다.”
 1636년 8월 20일 대사간 윤황이 병역의 고통을 고한 내용이다.
 그는 그러면서 “백성들이 마치 구덩이 속에 파묻혀 죽는 것처럼 여긴다”고 한탄한다.
 “심지어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중이 되는 양민들이 10명 중 7~8명에 이릅니다.”
 그의 이어지는 상소는 소름이 끼칠 정도다.
 “전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만일 이 도적을 막아내지 못하면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다. 경대부(고위관리)는 물론 백성(사서인·士庶人)들도 가문을 지키기 못하고 몸을 보전할 수 없다. 똑같이 죽고 망할 뿐이다.’라고….”
 그런데 윤황의 상소 이후 딱 4개월 만인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한다. 윤황의 피를 토하는 상소는 결국 병란의 예고탄이 된 셈이다.
 이쯤해서 1659년(효종 10년) 병조참지 유계와. 1798년(정조 22년) 비변사의 상소는 입을 맞춘듯 공자의 쓴소리를 인용한다.
 “지금 놀기만 하고 게으른 자가 10명 가운데 8~9명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간신히 남아 있는 선량한 백성에게만 유독 병역을 부담시키고 있습니다. 공자님은 ‘평등하면 가난하지 않고, 화합하면 부족함을 걱정하지 않으며 편안하면 나라가 위태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지금 병역의 불평등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유계의 상소)
 “시골에서 빈둥거리며 병역을 회피하는 자들이 갖가지 속임수를 쓰고 있습니다. 공자님은 ‘불평등한 것이 걱정일 뿐 적은 것을 걱정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비변사의 상소) (끝)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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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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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website design search engine optim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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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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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해발 360m인 강원 철원 평야에 서있는 동주산성에서 북쪽을 바라보라.
 물론 북한 땅 평강이다. 지평선을 마치 담벼락처럼 가로막고 있는 것과 같은 평강고원이 어렴풋 시야에 들어온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야트막한 봉우리가 보인다. 그곳이 낙타고지(432m)다. 이름에서 보듯 한국전쟁 때 피아간 피를 흘린 곳이며, 낙타처럼 생겼다 해서 이름 붙었다.
 그 뒤, 더 멀리 한탄강의 발원지라는 장암산(1052m)가 보인다. 그런데 낙타고지의 바로 곁에 아주 얕은 구릉 같은 산을 지나치면 안된다
 그것이 바로 오리산(鴨山)이라 한다. 오리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었다. 해발 453m이니, 서울의 북악산(342m)보다 더 높은 산이다. 하지만 군사분계선 너머 저 멀리 보이니만큼 그저 봉긋한 구릉처럼 보일 뿐이다. 그렇다고 무시하면 큰일난다,
 이 야트막한 오리산이 바로 한반도 문명을 낳은 ‘한반도의 배꼽’이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산이기 때문이다. 오리산은 화산이다.
 그 너머에는 또 다른 화산의 흔적인 검불랑(680고지라고 함)은 보이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 오리산과 검불랑이 단순한 휴화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철원 동주산성에서 바라본 오리산과 평강고원. 오리산 등에서 분출한 용암이 흘러내려 한탄강과 임진강이 됐고, 철원평야를 만들었다. 한탄강 임진강 유역엔 30만년전부터 인류가 터전을 잡고 살았다.  

■가장 민감한 곳
 한반도 고인류와 구석기문화, 그리고 지금과 같이 빼어난 절경을 탄생시킨 어머니 산이다. 물론 지금은 갈 수 없는 이북 땅에 자리 잡고 있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대체 무슨 근거로 ‘한반도의 배꼽’이나 ‘문명의 어머니’니 하는 것일까.
 우선 한탄강, 임진강 유역의 특징을 살펴보자. 우리가 학창시절 배웠듯이 이곳이 포함된 이른바 추가령 구조대는 제주도, 울릉도, 백두산 등과 함께 가장 젊은 지층이다.
 가장 역동적이고 민감한 지층이기도 하다. 한반도는 원래 하나의 땅덩어리가 아니었다. 2억3000만 년 전 북중국지판과 남중국지판이 충돌해서 합쳐져 만들어졌다.
 중국의 충돌대가 한반도로 이어지는 곳이 바로 평남분지와 경기육괴가 만나는 임진강대, 그리고 영남육괴를 가르는 옥천대이다.
 대륙충돌을 뒷받침하는 고압성 광물인 각섬암이 발견되는 곳이 있다. 바로 임진강 유역인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와 한탄강 부근 도로변인 포천군 관인면 중리이다.
 포천군 삼율리의 고남산(644미터) 자철광도 마찬가지다. 남북의 서로 다른 습곡대 충돌의 중심부가 임진강, 한탄강이었으니 ‘민감한 곳’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지역 땅 밑 깊숙한 곳이 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 지역은 용암의 분출구가 된다. 중생대 백악기(1억3500만 년 전~6500만 년 전) 때 대규모 화산폭발이 일어나 지금의 보개산군을 탄생시킨 것은 너무 먼 옛이야기다. 4기 홍적세는 20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를 일컫는다. 인류가 등장했던 시기다.
 이때 한반도 내륙, 즉 평강 오리산과 검불랑에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한 번이 아니었다. 최소한 10번 이상 뜨거운 마그마를 분출시켰다.
 오리산과 검불랑의 화산 분출은 우리가 생각하는 거대한 폭발, 즉 증기와 용암이 폭발하는 스타일(중심 분출이라 한다)이 아니다. 벌어진 지각 틈에서 마그마가 꿀렁꿀렁 흘러나오는 ‘열하(熱하)분출’이었다. 이 경우 주로 점성이 약한 현무암질 마그마가 흘러나오게 된다. 때문에 백두선과 한라산 같은 거대한 규모의 화산체는 형성되지 않는다. 다만 흐르는 용암이 엄청난 평원을 이루게 된다.

오리산과 검불랑의 분출도. 임진강 한탄강 유역은 한반도에서 가장 뜨겁고 민감한 지역이다.

 ■용암의 바다
 명색이 화산이라는 오리산의 정상이 주변보다 ‘불과’ 140m 밖에 높지 않은 분화구를 갖고 있는 이유가 된다. 그러니까 대체 구릉인지, 화산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오리산·검불랑의 화산분출 모습을 재현해보자.
 평강읍에서 5㎞ 떨어진 오리산에서 용암이 꾸역꾸역 분출한다. 용암은 추가령과 전곡 도감포 사이의 낮은 골짜기를 메우기 시작한다.
 용암은 무려 97㎞를 흘러 경기 파주 화석정에 도달해서는 그 긴 여행을 끝낸다. 한편 평강·철원 일대를 뒤덮은 용암이 식으면서 광활한 현무암 대지가 형성된다.
 지금의 철원과 평강, 이천, 김화, 회양 등 무려 2억 평(650㎢)에 달하는 지역이 용암의 바다로 변한다. 낮은 곳을 찾은 용암은 포천~연천을 지나 검불랑에서 흘러온 용암과 합류한다.
 용암이 흘러간 포천-연천-파주 지역에도 역시 좁은 용암대지가 생긴다.
 그런데 빙하기를 겪으면서 평강·철원 지역에 두꺼운 빙하가 덮이게 되는데 간빙기가 되자 빙하가 녹기 시작한다. 진원지 오리산이 있는 평강의 현무암층이 가장 두꺼운 것은 당연한 일. 평강~철원~포천~연천~파주로 이어지면서 용암 두께가 얇아졌을 것이다.
 지금 보면 평강은 해발 330m, 철원은 220m 정도 된다. 그러니 지금 동주산성에서 보면 철원 쪽보다 더 높은 평강고원이 거대한 둑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오리산에서 분출된 용암이 빚어낸 절경.

포천군 영북면 대회산리에 자리잡고 있는 비둘기낭이다. 절경 덕분에 드라마 '신돈'과 '선덕여왕', '추노' 등의 단골촬영지로 각광받고 있다.  최근에는 '괜찮아 사랑이야', '늑대소년' 등에서도 나온 바 있다. 

 ■용암의 조화
 어쨌든 고도가 높은 평강·철원에서 녹기 시작한 빙하가 흐르기 시작했다. 흐를 곳을 찾은 물은 당연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렀다.
 액체 상태 마그마가 고체 상태의 현무암으로 식자 수축작용이 일어났다. 그러자 흐르는 용암과 맞닿았던 원래의 지형과 수축해버린 현무암 대지 사이에 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오리산 쪽에서 흐른 물은 한탄강이 되었고, 검불랑 쪽에서 내려온 역곡천과 평안천은 다시 임진강과 합쳤다. 그곳이 바로 경기 전곡 도감포다.
 물이 흐르면서 온갖 조화를 부렸다. 용암과 현무암 대지, 그리고 물이 연출하는 절경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한탄강과 임진강 유역에서 한반도의 선사시대가 열린다.
 고인류는 물을 마시기 위해 강으로 내려오는 동물을 사냥했다. 산과 들, 강가에서 자라는 식물과 그 열매를 채집했을 것이다. 겨울엔 추위를 막기 위해 움막을 지었을 것이다. 두 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주먹도끼와 찍개, 주먹대패, 긁개, 밀개 등이 바로 그 흔적이다.
 오리산과 그 산이 낳은 임진강과 한탄강은 한반도에서 가장 젊고 뜨거웠으며, 민감한 곳이었다. 삼국시대 땐 백제-고구려-신라간 쟁탈의 요소였다. 신라-당나라가 동북아 패권을 놓고 접전을 벌이기도 했다. 대동방국의 기치를 든 궁예(재위 901~918년)는 용암의 바다였던, 그래서 에너지가 충만했던 철원 풍천원 들판에 도읍을 정했다.
 현대에는 한국전쟁의 접전지였으며, 분단과 냉전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이 지역은 남북세력이 늘 충돌했던 곳이다.
 2억3000만 년 전 서로 다른 대륙이 대충돌했던 지점이라 그런가. 오리산이 낳은 것은 인간의 역사 뿐이 아니다.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절경까지 탄생시켰다. 불(용암)과 물이 오묘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 바로 끊임없이 펼쳐지는 병풍의 수직단애, 즉 적벽이다.
 수직단애는 왜 생겼을까. 설명을 위해 다시 오리산 용암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오리산에서 분출하여 흘러가는 액체상태의 용암은 식어 굳을 때까지 낮은 곳을 메운다.
 섭씨 900~1200도에 이르는 용암은 공기 중에 노출되고, 다른 물질과 접촉하면서 급속하게 식는다. 그동안 용암 내부에 있던 기체는 빠져 나가는데,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기체는 암석 속에 기포로 남게 된다. 철원·연천·포천·파주 등에서 구멍이 송송 뚫린 현무암이 지천에 깔려있는 이유다. 그런데 용암은 급속하게 식는 과정에서 다양하고 아름다운 결정체를 이루게 된다.

경기 포천 창수면 운산리 도리못 주상절리. 한탄강 유역은 용암이 빚어낸 절경의 주상절리가 띠처럼 이어져 있다.

 ■용암과 물과 바람과 날씨
 또한 현무암 내부의 절리현상은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수직단애 풍광을 빚어냈다.
 현무암이 물에 의해 침식될 때 바위가 절리면을 따라 덩어리째 떨어져 나간다. 원래 약한 현무암지대이므로 침식이 시작되면 대단히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침식원인이 있는 취약한 곳부터 빠르게 무너지는데 특히 수직절리현상이 있는 곳은 거의 직각에 가까운 절벽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오늘날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유명한 적벽(赤璧)이다. 특히 임진강·한탄강 유역은 기온의 연교차가 상당히 크다. 겨울 혹한이 길고, 지표에 서리가 앉는 날이 많다.
 하절기엔 덥고 집중호우가 많다. 풍화와 침식 작용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조건인 것이다. 냉탕 온탕의 조건에 거센 강물의 침식에 노출된 적벽의 하부는 계속 깎인다. 반면 물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상부는 그대로 남아 있다보니 이렇게 수직절리 현상이 생긴 것이다.
 지금도 임진강·한탄강의 단애면 침식은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다. 단애 아래 절리면을 따라 떨어져 나온 현무암괴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어쨌든 오리산이 품어낸 용암과 물, 바람, 날씨의 자연이 빚어낸 절경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탄강 변에는 30만 년 전부터 고인류가 터전을 잡고 살았다. 경기 연천 전곡리 유적에서는 해마다 구석기 축제가 열리고 있다.     

 ■왠지 ‘센치’해지는 이유는
 한반도의 배꼽(오리산)이며, 문명의 젖줄(임진강·한탄강)이자, 어머니의 품 안(철원평야)이라서 그런가.
 철원을 가면 왠지 푸근한 어머니 품 같다. 세상의 모든 시름을 다 풀어헤치며 응석을 부릴 수 있을 것 같은…. 어머니(오리산)의 자궁 같은 그런 2억 평에 이르는 드넓은 땅과 탯줄과 같은 그런 강이 있어서인가. 1100년 전 궁예도 그랬을까.
 그랬을 지도 모른다. 젖먹이 때부터 ‘나라를 해롭게 할 아이’라며 버림을 받고 한쪽 눈까지 잃었던 그 비운의 영웅이었기에….
 훗날 왕건에게 쫓기면서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궁예의 흥망성쇠가 바로 저 오리산과 오리산이 낳은 철원·평강에 간직돼있다. 
 철원을 노래한 문인들도 한결같이 궁예의 흥망을 애수(哀愁)에 가득 찬 시구로 노래했다.
 아마도 풍천원 벌판에 방치된 궁전의 흔적을 보고는 폐허가 된 은허(殷墟)의 모습에 슬피 울었다는 은(상)나라 성인인 기자(箕子)의 ‘맥수지탄(麥秀之嘆)’을 떠올렸을 것이다.
 태봉국 궁예와 은(상) 주(紂)왕의 난행과 망국, 그리고 폐허로 변한 도읍지의 황량한 모습을…. 그러고 보니 은의 인쉬(은허ㆍ殷墟)와 태봉국의 철원은 닮은꼴이 아닌가.
 “나라가 깨져 한 고을이 되었구나. 태봉의 자취에 사람은 수심에 가득 차네. 지금은 미록(미鹿ㆍ고라니와 사슴)이 노는 곳. 가소롭다 궁예왕은 멋대로 놀기만 일삼았으니.…”(서거정의 시)
 “(파괴된 궁실 자리에서) 보리는 잘 자랐고, 벼와 기장은 싹이 올라 파릇하구나. 개구쟁이 어린애(주왕)야! 나하고 사이좋게 지냈더라면….”(기자ㆍ箕子의 ‘맥수지가’)
 저 멀리 오리산과, 오리산의 땅을 보면 왠지 ‘센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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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download cheat clumsy nin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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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2. Subject: summoners war sky xgenstudios stick arena che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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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1999년 8월 풍납토성 성벽을 발굴 중이던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단은 뜻밖의 흔적을 발견했다.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누군가 뻘층에 남긴 발자국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양생 중인 콘크리트에 실수로 찍힌 발자국이었다.
 이 발자국의 연대는 기원후 200년 쯤으로 추정됐다. 백제는 최소한 2차례 이상에 걸쳐 풍납토성을 완성했는데, 발자국이 찍힌 곳의 연대측정 결과 기원후 200년 쯤으로 측정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발자국은 최소한 1800년 전 백제인의 발자국인 셈이다.
 발자국의 크기는 폭 12㎝, 길이 36㎝ 정도됐다. 주인공의 발자국은 뻘을 밟으면서 약간 밀려 실제의 발 크기보다 크게 나온 것이리라.  

한성백제의 도성으로 지목된 풍납토성의 성벽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백제인의 발자국. 1800년 전 쯤 성을 쌓았거나 증축할 때 관여한 백제 토목기사나 인부의 것으로 추정된다.|국립문화재연구소

 ■콘트리트에 찍힌 발자국?
 그렇다면 이 발자국의 주인공은 대체 누구였을까.
 풍납토성은 한성백제(기원전 18~기원후 475년)의 왕성으로 지목된 곳이다. 백제 시조 온조왕은 기원전 6년 이곳 풍납동에 도읍을 정했다. 그런 뒤 궁궐을 짓고 성을 쌓았다.
 최소한 2차례에 걸쳐 쌓은 성의 규모(길이 3.5㎞, 폭 43m, 높이 11m)는 엄청났다. 고고학자들은 흙을 운반하고 성을 쌓은 인원이 연 450만명 정도 됐을 것이라고 추산한다.
 흙의 양(226만t)과 <통전(通典)> ‘수거법(守拒法)’ 등에 나온 척(尺) 등을 종합해서 계산한 것이다. 송곳으로 찔러도 끄떡없는 판축토성이었다.
 나무판을 하나하나 세워 틀을 만든 뒤 그 안에 진흙과 모래를 다져 쌓았다. 기술자들은 목봉으로 일일이 흙을 다져댔다. 10겹 이상 나뭇잎과 나뭇껍질을 뻘흙과 함께 다진 곳도 보였다.
 바로 이곳이 발자국이 확인된 뻘흙층이다. 나뭇껍질과 낙엽 등을 뻘흙과 함께 다진 이 부엽공법(敷葉工法)은 김제 벽골제와 부여 나성 축조에도 활용된 선진공법이었다. 또 400년 뒤 쌓은 일본 규수와 오사카의 제방에서도 확인됐다. 그렇다면 발자국의 주인공은 최신 기술을 가진 당대 최고의 토목기술자가 남긴 것일까.
 아니 이 분은 그저 나라의 명에 끌려온 힘없는 노역자일 수도 있다. 고고학의 즐거움은 상상력이다. 우리는 1800년 만에 현현한 발자국 하나로 소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풍납토성 성벽. 판을 만들어 그 안에  낙엽과 나뭇잎을 흙과 다져넣은 공법, 즉 부엽공법으로 단단히 쌓았다. 풍납토성 신축과 증 개축에 연인원 450만명이 투입돼을 것이라는 연구가 있다.   

 ■“국상은 백성을 위해 죽으려 하는가?”
 한가지 떠오르는 생각…. 되지 못한 지도자가 왕위에 오르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똥폼’을 잡는 것이다. 예를 한가지 들어보자.
 진시황에 이어 황위에 오른 진 2세(재위 기원전 210~207)는 70만 명을 동원, 아방궁과 만리장성을 쌓았다. 신하들이 “제발 그만하라”고 상주하자 진2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은 내 맘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맘대로 하겠다는 데 무슨 헛소리냐.”(<사기> ‘진시황본기’)
 사마천(司馬遷)은 진2세를 두고 “사람의 머리를 하고 짐승의 소리를 내뱉는다(人頭畜鳴)”고 장탄식 한다. 결국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한 지 불과 15년만에 몰락하고 만다.
 굳이 중국의 예를 들을 것도 없다.
 고구려 봉상왕(재위 292~300)도 진2세를 쏙 빼닮았다. 기원후 300년 봉상왕이 나이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모두 징발, 대대적인 궁실수리를 명령했다. 노역과 굶주림에 시달린 백성들은 유리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국상 창조리(倉助利)가 ‘공사중단’을 간언하고 나섰다. 봉상왕은 화를 벌컥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임금은 백성이 우러러 보는 존재이다. 궁실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내보일 수 없다. 지금 국상이 나를 비방하는 까닭이 뭔가. 백성들에게 칭찬을 얻기 위한 것이냐.”
 신하가 백성의 민심을 얻는다? 이것은 임금이 되고자 하는 것이냐는 무시무시한 추궁이었다. 창조리는 손사래를 치며 해명했다.
 “임금이 백성을 근심하지 않으면 어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하지 않으면 충성스럽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전 이미 부족한 재주에도 불구하고 국상의 자리에 있으니….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어찌 명예를 얻고자 하겠습니까.”
 왕이 빙긋 웃으며 뼈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무서운 경고발언이었다.
 “국상은 백성을 위해 죽고자 하는가? 더이상 뒷이야기가 없기를 바란다.”  

풍납토성 내부에서 확인된 백제시대 주거지.

 ■개로왕의 실착과 문무왕의 판단
 391년(진사왕 7년), 백제 진사왕은 궁실을 중수했다. 단순한 중수가 아니었다. 대대적인 토목공사였다.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진귀한 새를 기르고 기이한 화초를 가꾸었다. 화려하고 뛰어난 조경기술을 과시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호사스러운 궁궐 중수에는 많은 비용이 투입됐다. 그러나 당시에는 고구려와의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조달이 가능했다는 분석이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혹은 호화로운 궁궐수축 때문에 민심이 이반된 결과일까. <삼국사기>를 보면 진사왕이 궁궐을 수축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말갈이 백제의 변경을 침략, 적현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불과 1년 뒤인 392년(광개토대왕비문의 기록은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4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 석현 등 10개성을 함락시켰다.
 백제는 요처인 관미성까지 잃었다. <광개토대왕비문>은 이 때(396년) 백제는 58성 700촌을 빼앗겼다고 기록했다. 더불어 백제는 이 때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무릎을 꿇었다. 백제는 이 결정적인 패배로 고구려와의 건곤일척 싸움에서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고구려는 위축된 백제의 숨통을 완전히 끊으려는 계책을 마련한다. 당대의 바둑 고수이자 승려인 도림을 스파이로 삼은 것이다. 마침 백제의 개로왕은 바둑광이었다.
 백제땅으로 흘러 들어간 도림은 개로왕에게 “바둑을 지도하겠다”고 접근한다. 과연 도림은 국수(國手)였다. 개로왕은 도림을 상객으로 모셨다. 개로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도림은 마각을 드러냈다.
 “백제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한데 성곽과 궁궐이 수축·수리 되지 않았습니다. 그 뿐이 아니라 백성들의 집들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집니다.” 
 개로왕은 그만 “알겠다”고 허락한다. 개로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풍납토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 누각, 사대를 지었다. 웅장하고 화려했다.
 <삼국사기>는 “이 때문에 국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 나라가 누란의 위기를 맞았다”고 기록했다. 목적을 달성한 도림은 잽싸게 고구려로 달려가 장수왕에게 고했다.
 장수왕은 ‘옳다구나’ 하고 대대적인 침략전쟁을 벌인다. 475년 9월 고구려의 침략에 개로왕은 땅이 꺼지도록 후회한다. 

풍납토성 안에서 확인된 백제시대 우물. 우물 안에는 제의 행위 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토기들이 쌓였다. 

“어리석었구나. 간사한 자의 말을 믿다니….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다. 위급해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삼국사기> ‘백제본기·개로왕조)
 한성백제의 최후는 이렇게 허망했다.
 이렇듯 대형 토목공사는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기 일쑤다.
 반면 신라 미추왕과 문무왕이다. 276년(미추왕 15년) 봄 신료들이 대궐을 수축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미추왕은 단호했다.
 “그것은 임금이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입니다. 따르지 않겠습니다.”
 문무왕은 또 어땠는가. 681년(문무왕 21년), 임금이 왕경에 성을 새로 쌓으려 의상대사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의상대사의 간언은 단호했다.
 “들판의 띠집에 살아도 바른 도를 행하면 곧 복된 왕업은 영원히 계속될 겁니다. 사람을 힘들게 해서 성을 만들면 이익되는 바가 없습니다.”
 문무왕은 의상대사의 이 한마디에 궁궐 신축의 유혹을 뿌리쳤다.

 

 ■성(城)은 높지만 민심이 더 높다
 조선시대의 예를 들자.
 1446년(세종 28년) 양계(兩界·평안·함경도)에 성을 쌓는 대역사가 펼쳐지자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이 상소문을 올렸다.
 “변방에 성을 쌓는 일은 나라의 큰 역사인데…. 고아와 과부가 울면서 변방의 성(城)을 바라볼테니 그 원통하고 원망스러움을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을 쌓는 일이 만세의 이익이라 하지만, 또한 만세의 폐단이 있습니다. 축성(築城)은 성인(聖人)이라도 반드시 삼가는데 하물며….” 
 이계전은 “기상이변이 잇달아 일어나 수해와 한발이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그 까닭이 있다”며 이같은 상소를 올린 것이다. 세종 임금도 이계전의 뜻을 알아차리고 다음과 같이 답한다.
 “그래. 근래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백성이 삶을 유지하지 못하니, 사람의 일이 다하지 못함이 있는가 두렵도다. 어찌 백성들의 원망과 탄식이 없겠는가. 일의 완급을 조절해서 백성들의 원망을 사지 말자. 좋은 대책을 마련하라.”
 또 있다. 1745년(영조 21년) 사간원 정언 이훈이 강화도 축성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성이 높아서 100척이나 되고 견고하기가 철벽같다 해도 여러 사람의 마음으로 이룬 성만 못할 것입니다.(雖使城高百尺 堅如鐵壁 不如衆心之城也)”(영조실록)
 숙종 때(숙종 29년·1703년) 북한산성의 축조를 반대한 행사직 이인엽의 상소를 보자.
 “비록 높은 성벽이 솟아있다 한들 백성이 진심으로 좇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습니까.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방법은 군주의 덕에 있지, 지세의 험준함에 있지 않습니다.”(<숙종실록>) 

 북한산성 동장대. 백운대와 만경봉 등 깎아지른 듯한 북한산의 위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숙종과 영조, 정조가 올라와 감탄했던 곳이다. 숙종이 북한산성을 축조하려 하자 힘든 노역에 백성드의 민심이 동요된다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    

 ■발자국의 주인공이 남긴 메시지
 그런 생각이 든다. 만약 백제 진사왕이나 개로왕이 창업주인 온조왕의 신신당부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 온조왕은 기원전 4년(온조왕 15년), 위례성을 쌓으면서 후대에 길이 빛날 특명을 내렸다.
 “도성은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게 쌓아라.(儉而不陋 華而不侈)”(<삼국사기>)
 아마도 진사왕이나 개로왕이나 뒤늦게 온조대왕의 유훈을 깨닫고 땅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으니….
 그랬든 저랬든 한가지 더 드는 생각.
 주야장천 간단없는 노역에 시달려온 백성은 상관없다. 검소했든 화려했든 어떻든 간에 고단한 노역이었을테니까….
 발자국의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성을 쌓은 지 30년도 안된 기원후 23년(온조왕 41년) 15살 이상인 한강의 동북 쪽 백성들이 징발됐다.
 농사철을 앞둔 2월(음력)에 성을 고쳐 쌓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풍납토성에 남긴 발자국의 주인공은 혹 이 분들 가운데 있지 않았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뻘흙을 다지는 작업을 벌이다가 아차 실수로 발도장을 찍어놓고는 남이 볼세라 살짝 덮어버린….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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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이다.’
 1650년 무렵, 영국 국교회의 제임스 어셔 대주교는 아주 흥미로운 계산을 해낸다. 성경의 인물들을 토대로 천지창조일을 역산한 결과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날짜를 지목한 것이다. 유럽인들은 이후 이 날짜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날’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로부터 꼭 206년이 지난 1856년, 독일 뒤셀도르프 인근의 네안더 골짜기 석회암 동굴에서 이상한 화석이 발견됐다. 채석공들의 삽에서 골반뼈와 눈 위 부분이 뚜렷하게 튀어나온 머리뼈를 비롯, 상당량의 뼈들이 걸려나온 것이다. 사람 같지만, 오늘날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돌출이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상상할 수 없었다.(네안더 골짜기에서 확인된 고인류라는 뜻에서 네안데르탈인이라 명명됐다.) 다시 그 후 3년 뒤인 1859년,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진화론을 개진한다. 이는 ‘창조론’을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 우스터 교구의 주교 부인은 “맙소사! 우리가 원숭이의 후손이었다는 말이냐.”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사실이 퍼져나가지 않도록 하자”며 “두 손 모아 기도하자”고 촉구했다.  

 1929년 12월 2일 페이원중이 발굴한 베이징 원인의 두개골. 페이원중은 겹겹이 포장한 이 두개골을 우여곡절 끝에 베이징으로 옮겼다.|도서출판 인간사랑 제공

1891년 네덜란드 해부학자 외젠 뒤부아(1858~1940)는 자바섬 솔로강변 트리닐 섬에서 흥미로운 뼈무더기를 발견한다.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 정도 쯤 되는 동물의 두개골과 아래턱뼈, 이빨 3개, 대퇴골 하나를 찾아낸 것이다. 이 세 화석을 조립한 결과 두 발로 서서 걸었음이 확실해졌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 과정 중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 즉 원숭이~인간을 이어주는 고리를 찾은 것이다. 뒤부아는 ‘직립(直立·곧추 선) 원인(猿人·원숭이와 인간의 중간)’이라면서 ‘자바원인(Pithecanthropus erectus)’이라 이름붙였다. 뒤부아의 주장은 유럽에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뒤부아의 화석은 ‘소두증에 걸린 기형아의 뼈일 뿐’이라 폄훼했다. 뒤부아는 결국 여론의 십자포화에 밀려 자바인의 유골을 두고 ‘넓은 어깨 원숭이의 유골’이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서
 자바인이 발견된 후 30년이 지난 1921년 어느 날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생물학자 오토 즈단스키는 중국 베이징에서 50㎞ 떨어진 저우커우뎬(주구점·周口店) 유적을 발굴하다가 심상찮은 치아(이빨) 한개를 발견했다.
 즈단스키는 스웨덴의 지질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요한 군나르 안데르손이 주도한 저우커우뎬 유적 발굴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때 즈단스키가 발견한 치아는 놀랍게도 인간의 치아였다. 그러나 즈단스키는 유인원의 치아로 잘못 해석하고 말았다. 1923년 그가 발표한 <중국지질조사보고서>에 이 의미심장한 치아를 보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3년 뒤인 1926년, 저우커우뎬 유적에서 발굴한 화석표본들을 정리하던 즈단스키의 눈이 번뜩였다.
 인간의 치아로 보이는 화석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아뿔사! 1921년 즈단스키 스스로가 발굴했다가 치워버린 화석과 같은 것이었다. 새삼스럽게 정밀조사해보니 손상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아관(牙冠·잇몸 위로 노출된 이빨)이 마모된 부분이 전혀 없는 온전한 이빨이었다. 흥분한 즈단스키는 그 치아를 현생인류의 것과 비교 분석했고, 그 결과 인간의 것임을 확인했다.
 저우커우뎬 발굴의 책임자인 안데르손의 발표는 학계를 놀라게 했다.
 “저우커우뎬 유적지의 지층은 아마도 신생대(200만 년 전~)일 가능성이 많다. 중요한 것은 오랜 인류의 화석이 아시아 동부에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자바에서는 자바원인이 있었고….”
 아시아 대륙에서는 오래된 인류의 화석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전문가들은 경악했다. 안데르손의 발표에 미국의 고생물학자 아마데우스 그레이보(1870~1946)은 즉석에서 치아의 주인공에게 ‘베이징 원인(北京猿人)’이라 명명했다. 하지만 안데르손의 발표는 여전히 ‘믿기 어려운 학설’에 불과했다. 

50만 년 전의 고인류인 베이징원인의 두개골 모형. 유인원과 현생인류의 고리를 이어주는 인류의 유산이다. 그러나 베이징 원인의 진짜 화석들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베이징원인의 흔적
 ‘베이징 원인’의 존재를 확증할 증거가 필요했다.
 미국 록펠러 재단의 재정지원 아래 본격적인 저우커우뎬 발굴에 돌입했다. 캐나다 출신의 미국 인류학자인 데이비슨 블랙이 선봉에 섰다.
 이후 베이징인의 부분체가 잇달아 확인됐다. 1927년 10월 발굴팀의 일원인 안데르스 비르거 볼린(스웨덴 고생물학자)이 즈단스키가 고인류의 치아를 발견한(1921년) 바로 그 지점에서 오른쪽 아래 어금니를 발굴했다. 이 치아 화석은 보전상태가 전혀 훼손된 곳 없이 완벽했다. 어금니 발견소식을 접한 블랙은 어쩔줄 몰라했다.
 “우린 지금 아주 멋진 인간의 치아를 발견했군!”
 블랙은 원숭이와 현대인의 중간에 속하는 이 고인류에게 ‘북경원인 북경종(Sinanthropus pekinesis)’이란 새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그레이보가 이미 붙여준 이름인 ‘베이징 원인(Homo erectus pekininesis)이 더 널리 쓰이고 있다. 연구결과 볼린이 발견한 치아는 성인의 왼쪽 첫번째 어금니였으며 즈단스키가 발견한 어금니와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이후 저우커우뎬에서는 다양한 ‘베이징 원인들’이 현현했다. 소녀의 아래턱뼈(28년 봄)와 성인남자의 아래턱뼈(28년 11월)가 잇달아 나왔던 것이다. 특히 성인남자의 아래턱뼈에서는 완벽한 형태의 어금니 3개가 붙어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1929년이 다가왔을 때 저우커우뎬의 발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때까지 발굴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하나 둘씩 현장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발굴단은 1928년의 조사에서 저우커우덴 현장에서도 가장 단단한 지층(제5층)까지 도달한 바 있다. 이 지층 아래에서는 어떤 동물의 화석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발굴단은 “아마 이 단단한 암반층이 베이징 원인이 살았던 최후의 지층이 아니겠느냐”고 판단하고 있었다. 발굴에 참여했던 볼린 등 전문가들은 “이제 현장을 마무리하라”는 메시지를 남기며 속속 현장을 떠났다.
 하지만 “저우커우뎬의 화석분포는 매우 복잡하므로 화석이 없을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발굴 강행을 주장한 이가 있었다.
 중국지질조사소의 신참 연구원이었던 페이원중(裴文中)이었다. 그는 1927년 대학(베이징대 지질학과)를 졸업하고, 저우커우뎬 발굴에 참여한 25살의 젊은 고고학도였다.
 페이원중은 물론 풋나기였지만, 미친듯 고고학 공부에 빠졌다. 고생물학 영어 원서를 밤세워 읽다가 깜박 잠이 드는 바람에 촛불이 책과 이불에 옮겨붙어 큰 일 날 뻔 한 적도 있었다.
 1928년의 발굴에서 수습조사원으로 참여했지만 단 1년 만에 능숙한 발굴 전문가로 변모했다. 그가 저우커우뎬 발굴의 강행을 주장하고 나서자, “그럼 한번 네가 해보라”는 명령을 받게 된 것이다. 졸지에 발굴책임자를 맡게 된 페이원중의 회고.
 “모두들 ‘이제 그만 끝내’라는 지시만 내리고 떠난 후였다. 산 속은 정적 만이 감돌고, 외로운 생활이 시작됐다. 매우 단단한 암반층(제5층)을 폭파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마치 ‘닭쫓던 개’의 신세가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제5층을 폭파시키고, 제6·7·8층에 이어 제9층까지 파내자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났다. 사슴의 턱뼈 145개 등이 확인됐고, 제8~9층에서는 베이징인의 이빨이 몇 개 나왔다.
 발굴층의 깊이는 더해갔고. 퇴적물의 범위 또한 좁아졌다. 마침내 깔대기 모양의 발굴 구덩이 맨 밑바닥에 도달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겨울철인 11월 말에 이른 것이다.
 얼어버린 땅에서 발굴은 불가능하다. 지금이야 거액을 들여 비닐하우스를 치고 발굴작업에 나설 수 있지만, 얼마 전까지는 겨울이 다가오면 그 해의 발굴을 끝내야 했다.
 역시 베이징에서 “겨울이 됐으니 올해의 작업은 끝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페이원중은 갈등했다. 마지막 남은 깔대기 모양의 좁디좁은 맨 밑바닥 퇴적층….
 ‘저기에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여기서 중단해야 한다는 건가.’
 베이징에서 온 전보를 만지작거리던 페이원중은 장고 끝에 ‘발굴 강행’을 결정했다.
 ‘그래 단 며칠만이라도 더 해보자.’  

페이원중이 발굴중인 저우커우뎬 유적. 50만 년 전 직립원인이 확인됐다. 

■“틀림없는 사람 머리야!”
 1929년 12월 2일, 날씨는 매우 추웠다. 발굴자들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북풍 한기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서산으로 해가 저물기 시작한 오후 4시였다. 겨우 몇 사람이 쭈그려 앉을 수 있는 깔대기 모양의 퇴적층을 파고 있던 바로 그 때…. 망치와 정이 돌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아주 자그마한 틈새가 벌어졌다. 그 틈새를 벌리니 작은 동굴이 노출됐다. 페이원중은 전율에 휩싸였다. 즉시 밧줄로 허리를 묶고 동굴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한 5~6m쯤 나아갔을까. 잠시 발길을 멈추고 쭈그리고 앉아 주변을 살피던 그의 눈에 놀라운 광경이 잡혔다. 동굴 밑바닥에 흰 뼈가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페이원중은 자신이 아주 작은 동굴에 앉아있다는 사실도 잊고 벌떡 일어나다가 동굴 천장에 머리를 세게 부딪쳐 기절할 뻔했다. 그러나 아픔을 느낄 정신이 없었다.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동굴 밖으로 빠져 나오던 페이원중의 말이 떨렸다.
 “내가 사람(원인·猿人)을 찾았어. 난 난…. 뭔가가 더 안에 있는 것 같아.”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페이원중은 발굴단원 3명과 함께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페이를 비롯한 4명은 아무 말없이 한 손엔 촛불을 다른 한 손엔 망치와 삽으로 흙을 파냈다.
 “여기 보세요.”
 작업자 가운데 누군가 소리쳤다. 페이원중이 용수철 튀기듯 달려갔다.
 “이건 사람 머리 같은데…. 틀림없는 사람머리야.”
 두개골은 절반 정도는 단단한 모래 흙에 묻혀 있었고, 나머지는 노출돼 있었다. 페이원중은 지렛대를 이용해서 땅 속에 반 쯤 파묻혀있는 두개골을 수습했다.
 지렛대 과정에서 두개골의 밑바닥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떨어진 파편을 살펴보니 ‘베이징 원인’의 두개골이 현대인의 두개골 보다 훨씬 두껍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우커우뎬의 빌굴 현장. 이곳에서는 1921년부터 유인원과 현생인류의 중간 쯤 되는 흥미로운 화석 조각들이 잇달아 확인된 바 있다. 급기야 1929년 온전한 형태의 두개골이 나왔다. 과학계는 50만 년 전에 살았던 고인류에게 '베이징원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차라리 날 체포해라!”
 이미 발견된 이빨과 아래턱뼈 등으로 베이징인의 연대가 50만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었던 때였다. 페이원중은 놀라운 발견 소식을 베이징에 타전했다.
 완벽한 ‘베이징원인’의 두개골이 확인됐다? 그야말로 두 눈과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다. 게다가 25살의 풋나기가 그런 위대한 발견을 했다고? 상당수의 전문가들이 반신반의했다. 위대한 발굴이 있은지 4일 뒤인 12월 6일, 페이원중은 겹겹이 포장한 ‘베이징인’ 화석을 들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베이징 성 입구에서 경찰의 검문을 받은 것이다. 검문은 삼엄하고 집요했다. 모든 짐을 풀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페이원중이 ‘중요한 화석이니 포장을 열면 큰 일 난다’고 애원했다. 그럼에도 경찰은 요지부동이었다. 겉을 발라놓은 마대와 종이를 떼어내고 두개골의 표면을 벗겨내려 했다.
 머리가 하얗게 변한 페이원중은 경찰의 손을 밀어내고 외쳤다.
 “멈춰. 포장을 걷어내려면 차라리 날 체포해!”
 나이 지긋한 경관이 개입한 뒤에야 소란이 그쳤다. 경관의 무지한 손에 의해 훼손될 수 있었던 50만 년 전의 고인류가 가까스로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50만 년 전의 인류
 두개골은 천신만고 끝에 화석 전문가인 데이비슨 블랙에게 전달됐다.
 “맞아요. 정말 사람이군요. 사람!”
 얼마나 손이 떨렸던지 하마터면 두개골을 떨어뜨릴 뻔했다. 블랙은 왜 ‘베이징원인’을 보고 몸을 떨었을까.
 사실 진화론에 입각하면 원숭이~현생인류 사이에 세 단계를 거친다. 첫째는 300만년~100만 년 전인 고원류(古猿類)의 단계이고, 셋째 단계는 20만 년 전~1만 년 전에 존재한 지인(智人·호모 사피언스)이다. 그런데 첫번째와 세번째 단계의 고리를 이어주는 것이 바로 ‘직립인(直立人·호모에렉투스)’ 단계이다.
 이미 1891년 자바섬에서 확인된 자바인이 바로 이 단계의 고인류였지만, 그 때까지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때에 그것도 다름아닌 아시아 대륙의 동쪽, 베이징에서 ‘직립인’이 확인됐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를 최소한 20만 년 전으로 올린 희소식이었다.
 1929년 12월 29일자 <신보>는 베이징인의 출현소식을 대서특필했다.
 “국내외 학자들이 참석한 중국 지질학회 특별회의가 열렸다. 전문가들은 저우커우뎬에서 확인된 두개골 화석의 연대를 50만 년 전이라 했다. 전문가들은 베이징인은 바자에서 확인된 ‘자바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풋나기 고고학자인 페이원중은 현장 고고학을 통해 다윈이 제기한 진화론에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한 인물로 평가됐다. 

베이징 원인의 두개골을 토대로 만든 두상. 중국인들은 지금도 저우커우뎬에서 발굴된 실물 두개골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 

 ■불과 도구 사용의 증거
 페이원중의 관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21년부터 시작된 저우커우덴 유적 발굴 때마다 상당량의 석영조각들이 확인된 바 있다.
 그동안의 발굴에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페이원중은 1931년 저우커우뎬의 거쯔탕 동굴에서 확인된 석영 조각편에서 사람의 채취를 맡았다.
 석회암 지대인 동굴 지역에서는 석영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곳에는 왜 이렇게 많은 석영조각들이 있단 말인가. 페이원중은 멀리 내다보이는 강변을 주목했다. 석영편에서는 사람의 손으로 가공한 흔적들이 완연하게 보였다. 이 뿐이 아니었다. 거쯔탕 동굴에서 확인된 진흙층은 다름아닌 타고 남은 재였다. 거쯔탕 뿐 아니라 베이징원인의 흔적이 보인 동굴에서도 불에 탄 흙이 보였다. 재가 쌓인 흙에는 불에 타서 남은 돌과 뼛조각이 보였다. 이것은 베이징인이 도구를 사용했고, 채집·사냥한 먹이를 불에 태워 조리했음을 알려주었다.
 인류가 도구와 불을 사용한 역사가 몇 십 만 년 앞당겨진 것이다.
 한번 완전한 형태로 선을 보인 베이징인은 또 한 번 그 자태를 드러냈다.
 1936년 11월 15일, 페이원중에 이어 저우커우뎬 발굴에 나선 자란포(賈蘭坡)가 또 한 명의 ‘베이징인’을 찾아낸 것이다,
 차례로 나타나는 뼛조각을 짜맞추자 하나의 완전한 두개골이 완성됐다. 흥분도 잠시, 한 명, 또 한 명의 베이징인들이 줄줄이 나왔다. 이 때(36년) 발굴에서 11일 사이에 확인된 3개의 두개골은 성인 남자 2명과 여성 한 명이었다. 성인의 뇌용량은 1015~1225㏄ 정도였는데, 이는 현대인(1400㏄)보다는 적지만 원숭이의 평균 뇌용량보다는 훨씬 많았다.

 

 ■실패한 베이징인 피난작전
 그런데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의 루거우차오(蘆溝橋) 도발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저우커우뎬 발굴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 때까지 발굴된 베이징 원인의 화석들은 모두 베이징 협화의학원 B동 연구실 금고에 안치돼 있었다. 협화의학원은 1917년 미국 록펠러 재단이 설립한 의과대학이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그러나 1941년 들어 미·일 관계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자 베이징 원인의 안녕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당시 협화의학원 신생대연구실을 책임지고 있던 페이원중은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다. ‘베이징 원인들’을 뉴욕 자연사박물관으로 피신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페이원중은 중칭(重慶) 국민당 정부의 허락을 얻고자 했다. ‘베이징 원인들의 미국 피신’을 허락해달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하지만 답신은 없었다. 그 사이(4월) 불안감에 휩싸인 연구소측은 베이징 원인들의 두개골 모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모형제작이 얼마나 중요한 결정이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중칭 정부의 답신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1월 말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그 사이 일본인들은 끊임없이 연구실 금고에 있던 베이징 원인의 화석을 노렸다.
 동경국제대학 교수인 하세베 고톤도(長谷部言人)가 연구실을 찾아와 베이징 원인의 공동연구를 제의했다. 물론 페이원중은 하세베의 제의를 단칼에 잘랐다. 급기야 일제에게 매수당한 청소부가 ‘베이징인’을 보관해놓은 금고를 뒤지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중칭으로부터 답신은 오지 않고…. 일제의 집요한 노림수는 계속되고….
 11월말 쯤 애타게 기다리던 중칭 정부의 답신이 도착했다. 연구실 직원인 후청즈(胡承志)가 베이징인들을 포장했다. 얇은 면포와 부드러운 종이, 의학용 솜, 반투명 종이, 의학용 세마포로 귀중한 인류화석을 겹겹이 쌌다. 화석은 두 개의 상자로 나뉘어 포장됐다. 베이징 원인들을 실은 트럭이 미국 공사관을 향해 출발했다. 트럭은 다시 베이징에 주둔한 미 해병대 막사로 갔다.
 다시 12월 5일 미 해병대 전용열차가 발해 연안의 친황다오(秦皇島)로 향해 달렸다. 미 해병대가 ‘베이징인’ 화석을 담은 나무상자를 미국 상선 프레지던트 해리슨호에 옮겨 싣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이 불바다가 되면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됐다. 중국 대륙의 일본군은 베이징, 톈진, 친황다오로 일제히 진격했다.
 하루 뒤인 12월 8일 일본군은 모든 미국의 기관을 신속하게 점령했다. 미 해병 전용열차도 친황다오에서 일본군에 의해 역류됐다. 베이징인들을 태울 계획이었던 프레지던트 해리슨호는 친황다오로 가던 중 징발됐다. 이 선박은 앙쯔강(揚子江) 부근에서 가라앉았다.
 그와 함께 ‘베이징 원인의 행방’도 묘연해졌다.   

베이징 원인을 발굴한 페이원중. 그는 25살의 젊은 나이에 세계 고고학사에 남는 위대한 발굴의 주인공이 됐다.

 ■일본 첩자의 할복
 일제는 협화의학원 신생대연구실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찾는 물건(베이징 원인 화석)은 없었다.
 그후 1년 반 후(1942년 말~43년 초) 일본인 첩자인 조사 시게하루(錠者繁晴)가 연구실을 찾아와 페이원중 등 관계자들을 모두 잡아 현병대로 끌고 갔다. 관계자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뚜렷한 단서는 얻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난 뒤 갑자기 베이징 원인을 톈진에서 찾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때 이후 일본인들의 수색이 거짓말처럼 종료됐다. 일본인들이 정말로 베이징 원인을 찾았는 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아니면 베이징 원인의 화석 일부라도 찾았을까. 
 알 수 없는 것은 일본인 첩자 조사 시게하루가 ‘임무 실패’의 책임을 지고 할복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과연 무슨 일 때문이었을까.
 이후에도 사라진 베이징 원인의 행방은 미·중·일 3국 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베이징 원인을 찾았다는 소식이 간헐적으로 들렸다. 그러나 문제가 된 화석들은 가짜이거나 석고 모형들이었다.
 예컨대 1951년 3월, 베이징 원인이 뉴욕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돼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미국을 주적으로 여겼던 중국은 미국의 문물 약탈행위를 맹비난했다. 그러자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도 맞대응했다. 이것은 오해에서 비롯됐다. 영국의 저명한 생물학자가 자연사박물관을 방문했다가 베이징 원인의 ‘두개골 모형’을 보고 진품으로 오인한 것이다.   
 그 밖에도 베이징 원인을 둘러싼 수많은 에피소드가 양산됐다.
 돌이켜보면 베이징 원인의 실종은 조상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을 중국인들에게 안겨주었다. 그러나 ‘베이징 원인’은 전 인류의 유산이지 중국의 유산만은 아니다.
 지난 1998년 베이징 원인을 발굴한 주인공인 자란포 등 14명의 중국과학원 원로들이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이 해 여름 베이징 TV에서 베이징 원인을 찾기 위한 ‘세기말 최후의 추적’을 방영했을 때 90살의 고령이 된 자란포 등이 노구를 이끌고 나선 것이다.
 “비록 베이징 원인의 화석이 전란 속에 훼손됐다 해도 정확한 행방을 찾아야 한다. 전 인류가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우리가 후손들을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인류의 조상은 어딘가에 있다.
 여기서 헛된 상상 하나.
 베이징 원인은 분명 있을까. 모두가 정신없던 전쟁통에 운송 도중에 완전히 훼손되거나 아니면 수장된 것은 아닐까.
 아니 누군가 숨겨놓았다면…. 지금도 중국인들은 여전히 희망의 끈을 잡고 있다.
 우선 미국인이나 일본인이 이 귀중한 유산을 훼손시키지 않았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또한 다른 일반 포장 물품보다 확연히 다른 상자가 아닌가.
 일본은 어떨까. 일본은 일왕의 명령으로 헌병들과 정보원까지 총동원, 샅샅이 뒤졌다. 관련자들을 고문까지 하면서 자백을 받아냈다. 따라서 베이징 원인의 운반경로와 이동방향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톈진에서 베이징 원인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들렸고, 베이징 원인 수색에 선도를 섰던 하세베 등이 종적을 감춘 까닭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베이징 원인은 결국 일본의 손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그러나 ‘임무실패’의 책임을 절감한다며 할복자살을 기도한 첩자 조사 시게하루는 또 무엇인가.
 아니면 혹 중국인의 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인가. 미국인이나 일본인이 경황이 없는 틈에 중국인에게 주었거나 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중국인의 수중에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하기야 신중국 건국 이후 좀 사건이 많았는가. 반우파 투쟁에, 대약진운동에, 문화대혁명에, 개혁개방까지…. 엄청난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칫 정치적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 베이징인의 존재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미국인의 품에 있는 것은 아닐까. 베이징인의 운반에 관여한 인물들이나 미해병대원들은 어떨까. 그 또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어떤 이들은 베이징 원인 발굴작업에 참여한 프랑스인 신부를 용의자로 보기도 한다.
 모든 게 온통 수수께끼이다. 50만년 만에 현현한 베이징인들은 그렇게 태평양 전쟁의 개막과 함께 기억 저편으로 또한번 사라지고 말았다.
 미국인들은 1941년 12월 7일을 진주만이 피격되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날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전 인류는 그 날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50만년 전의 고인류가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전쟁이라는 괴물 때문에 사라진 날을…. 지금도 중국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베이징인들 애타게 찾고 있다.
 “조상들이여! 어디 계십니까.”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참고문헌>
 장자성, <근세 백년 중국 문물 유실사>, 박종일 옮김, 인간사랑, 2014
 웨난·리밍셩, <주구점의 북경인>, 심규호·유소영 옮김, 일빛,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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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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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 공간에서 소개한 <흔적의 역사>가 조선시대 관련 이야기만 추려 단행본으로 출간됐습니다. 단행본을 내게 된 까닭을 서문으로 정리했습니다. 차후에 제2권 제3권이 나올 예정이니 기대해 주세요.

 

  지난 날을 서술하여 미래를 생각하고자 한 것입니다.(述往事 思來者)”(<사기> ‘태사공자서’ <한서> ‘사마천전·보임안서’)

 사마천이 불후의 역사서인 <사기>를 쓴 까닭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E) 핼릿(H) (18921982) 역시 <역사란 무엇인가>(1961)에서 유명한 말을 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다.(History i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그러고 보면 사마천이나 E H 카나, 두 사람의 뜻은 2000년의 시공을 초월했어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즉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거울이며, 과거(역사)를 배우는 것은 바로 현재와 미래에 대비하기 위함이라는 것. 이는 역사는 한낱 과거사일 뿐인데 과거에 집착할 필요가 있느냐는 야유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굳이 사마천이나 E H 카의 언급까지 들춰낼 필요도 없다 

김홍도의 <궁중의 여인>. 1781년 쯤 그린 것으로 보인다. 현대적인 미인상과 가깝다.|국립중앙박물관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거울

 필자는 역사칼럼(<흔적의 역사>)을 쓰려고 <사기><조선왕조실록> 등 다양한 문헌을 들춰볼 때마다 무릎을 친다. 과거의 이야기가 어쩌면 그렇게 오늘의 이야기를 빼닮았는지.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 때 찾아본 <태종실록>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침몰. 1000여 명이 수장됐다.

 사고원인은 인재(人災)였다. 선장의 무리한 운항과 화물과적 때문이었으니까. 실무자들에게 책임을 돌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임금(태종)모든 사고의 책임은 내게 있다(責乃在予)”하게 인정했다.

 필자가 총리 및 각료들의 인선과 인사검증과 관련해서 <실록>을 검토하자 만만치 않은 조선의 검증시스템이 포착됐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이 문제적 인물을 고집스럽게 임명하는 불통·오기의 인사를 단행하고, 대간관들은 서경권을 발동, 철저한 검증을 통해 거부권을 행사하고. 심지어 대간관들은 출근저지투쟁까지 벌인 끝에 문제적 인물을 기어코 낙마시켰다. 요즘 무슨 성인군자를 뽑는 것도 아닌데, 인사검증이 너무 혹독하다는 비판이 고개를 들고 있다. 하지만 조선 사회와 견주면 새발의 피라 할 수 있다. 칠순의 재상을 겨냥, “그의 살코기를 씹어먹고 싶다며 칠순의 재상을 욕한 이른바 막말 탄핵, 14년 전의 소문 만으로 사정기관의 수장(대사헌)을 공격한 이른바 풍문 탄핵마저도 허용된 사회였으니 말이다.

그 시대 임금들은 애완동물조차 맘껏 키울 수 없었다. “애완물에 빠지면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흐트러질 수 있다고 제동을 거는 신하들 때문에.

 길에서 담배를 꼬나문 성균관 유생들을 훈계했다가 봉변을 당한 재상 채제공의 이야기는 어떤가. ‘당신이나 잘하라는 소리를 듣고 유생들을 옥사에 가둔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야밤에 성균관 유생들이 옥사 앞까지 몰려와 풀어 달라면서 농성을 벌였단다. 채제공은 임금(정조)을 찾아가 정승 노릇 못해먹겠다고 하소연하고.

 군대 문제는 또 어떤가. <조선왕조실록>에는 4000건이 넘는 군대 관련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고전종합DB’에서는 무려 7544건이 검색된다. 군대는 고금을 막론하고 뭇 남성들의 평생 이야깃거리인 것은 틀림없다. 이 중 1659(효종 10) 병조참지 유계가 올린 상소문이 귓전을 때린다.

 조선의 남성 가운데 놀기만 하고 게으른 자가 10명 가운데 8~9명이 차지하고 간신히 남아 있는 선량한 백성에게만 병역을 부담시키고 있습니다.”

 유계는 이 대목에서 균등하면 가난하지 않고, 화합하면 부족함을 걱정하지 않으며 편안하면 나라가 위태롭지 않다.”는 공자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병역의 불평등이 이 지경이니, 무슨 방법으로 민중의 마음을 화합시켜 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순신 가문의 지독한 중국어 교육법을 보라. 이순신 장군의 5대조 할아버지인 이변은 중국어 마니아였다. 과거급제 이후 중국어를 배웠는데, 책상머리에 반드시 공효(功效·공을 들인 보람)를 이루고야 말리라는 다짐구호를 써 붙이고 밤을 세워 공부했다. 중국어에 능통하다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 배웠으며, 식구들이나 친구들을 만나도 반드시 중국어로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참으로 지독한 외국어 공부가 아닌가.

날밤을 지새우기 일쑤였고, 침실에 재해대책본부까지 설치했던 정조의 만기친람을 비난한 신하의 상소를 보라. “임금이 작은 일에 너무 신경 쓰시면 큰일에 소홀하기 쉽습니다.”

19세기 화가 유운홍이 그린 조선시대 조운선. 조운선 운행과정에서 과적과 무리한 운항 때문에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심심찮게 일어났다. 예컨대 태종은 조운선 34척이 침몰하고 사망 실종자가 1000명이 넘는 대형참사가 일어나자 '모든 책임은 네게 있다'고 자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정조도 작은 것을 거쳐 큰 것으로 나가는 법이라고 맞받아쳤으니 워커홀릭의 본능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임금은 허수아비 노릇만 하면 되고, 모든 국사는 똑똑한 재상이 처리하면 된다는 이른바 조선판 책임총리론을 강조한 정도전의 꿈과 야망은 또 어땠는가.

세월호 참사와 같은 대형사건 뒤에 참담한 유언비어가 떠돌곤 했는데, 명종 대의 인물인 상진의 간언을 상기하면 좋다.

유언비어는 참형으로 다스리라 했습니다. 이는 군주가 사람의 입을 막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진 이를 방해하고, 국가를 병들게 하는 말을 금지하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사초를 폐기하고 임금 곁을 떠난 참담한 사관 4인방은 또 어떤가. 이들은 전쟁이 끝나자 줄기차게 관직을 탐했다.

또한 다 쓰러져 가는 명나라를 맹목적으로 섬기려는 자들에게 고려의 실리외교를 배우라고 한 광해군의 한탄은 어떤가.

제발 고려의 외교 좀 배워라. 우리는 큰소리만 치고 있다. 그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또 하나 필자가 주목한 것은 과음으로 죽은 태조 이성계의 맏아들(이방우)이다. 이방우는 아버지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새 왕조 개창을 노골화하자 은둔했으며.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죽은 것이다. 이방우는 고려의 충신이었던 것이다.

나라를 잘못 만나 청나라까지 끌려갔다가 돌아온 환향녀들에게 찍힌 낙인은 화냥년이었단다. 임금 잘못 만나 곤욕을 치렀고, 귀국해서는 가문에서까지 버림받은 부녀자들의 피를 토하는 사연을 들어보라.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의 수많은 계층,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수많은 사건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임금이면서도 임금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정종, 만고의 성군이라면서 능지처참이라는 혹독한 형벌을 남발했던 세종, 연산군보다 더 악질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려 했던 태조와 영조, 인현왕후와 장희빈 등 두 여인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못된 남자 숙종, 지독한 골초로 조선을 흡연의 나라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정조.

또한 율곡 이이와 다산 정약용도 속절없이 당했던 신입생환영회, “소가 물마시듯 하며 술을 마시는 저 사람들은 뭐냐.”원샷풍조를 한탄한 다산, 직접 현장을 적발하지 않으면 간통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선언한 성종 임금, 국가적인 차원에서 노처녀 노총각들의 혼인을 주선한 조선판 솔로대첩’, 개미허리와 긴 생머리를 탐한 그 시대의 패셔니스타들.

이 책을 통해 볼 수 있는 조선의 민낯이다.

 

전 신윤복의 <봄날이여 영원하라>. 남녀간 의 사랑을 담은 풍속화다. 닫힌 방문 앞에 놓여있는 신발 두 켤레가 유난히 눈에 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사기벽에 걸린 이유

 필자가 일찍이 사기벽(史記癖)’에 걸린 이유가 또 있다. 사기가 백성들의 삶을 생생한 구어체로 묘사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陛下欲廢太子 臣期期知其不可”(<사기> ‘장승상 열전’)

 한나라 고조(유방)가 정부인(여태후)가 낳은 태자를 폐하고, 총애하던 후궁(척부인)의 아들을 세우려 했다. 그러자 평소 말을 심하게 더듬었던 주창이라는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언한다.

 폐하가 태자를 폐하시려는데 신은 결~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사마천은 ()()’를 연발함으로써 말을 더듬는주창을 묘사한 것이다. 이로써 말더듬이 주창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 얼마나 생생한 인물묘사인가.

 장의는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유세가였다. 그의 무기는 세치 혀였다. 어느 날 장의는 구슬을 훔쳤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수백대의 매질을 당했다, 그의 아내는 겨우 집에 돌아온 남편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장의와 부인의 대화가 이어진다.

 내 혓바닥이 아직 있는지 보구려.(視吾舌尙在不)”

 혀는 있구려!(舌在也)”

 그럼 됐소!(足矣)”(<사기> ‘장의열전’)

 <사기>는 장의가 빼어난 유세가라는 사실을 하나의 사례를 들어 내러티브로 구성하고 있다.

 이것이 무려 2000년 전에 쓴 역사서이다. 지루하지 않고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역사서. 사마천이야말로 20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도 범접하기 어려운 천재 스토리텔러라 할 수 있다.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사마천과 <사기>를 마냥 부러워할 필요는 없겠다.

 <사기>처럼 백성의 역사라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에게도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살아 숨 쉬는 역사, 그런 역사를 쓴 사관들이 있었으니까.

 중종 연간에 동지사 김안국이 여자 사관(史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왕과 왕비 등의 사생활까지 기록한다는 것이니 중종이 내심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밝힐 수는 없는 일. 중종이 고심 끝에 했다는 말은 마음이 올바른 여자라야 여자사관이 될 수 있다.(必正之女 然後可而)”는 것이었다. ‘마음이 고와야여자 사관을 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또 성종이 1481~83년 사이, 송영이라는 사람을 사헌부 장령과 지평에 임명하자 대간들이 아우성쳤다. 그러자 성종이 버럭했다.

 아니 송영이 무슨 배우냐, 도적이냐.(瑛俳優歟 盜賊歟) 왜 이리 난리를 떠는가.”

 서슬퍼런 연산군 시절, 사정기관(사헌부) 하위 공무원(6품 정언)인 조순이 칠순의 재상 노사신에게 했다는 막말 탄핵그의 살코기를 씹어 먹고 싶습니다.(欲食其肉)”였단다.

 오죽했으면 다름아닌 연산군마저도 “(그 같은 막말을 한 위인이라면) 임금이라고 공경하겠느냐(予雖服袞冕 其有恭敬之心乎)”고 비아냥대면서 문제의 조순을 처벌하려 했다. 이번에는 승정원까지 나서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그러자 연산군은 이렇게 야유를 보냈단다. “승정원도 대간들을 퍽이나 두려워하는구나.(承政院多畏臺諫)”

 1744(영조 20)의 일이다. 50살이 된 영조 임금은 10년 전, 그러니까 40살에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가져와 신하들와 품평회를 열었다. 이 장면을 묘사한 <승정원일기>를 보라.

 지금의 용안은 옛날 모습과 다릅니다.(比今天顔 有非昔時矣)”(장득만)

 현저히 다른가?(顯異乎)”(영조)

 크게 다릅니다.(大異也) 수염과 머리카락도, 성상의 안색도 (10년 전) 어진과 다릅니다.(不但鬚髮之異昔 玉色亦異於此眞矣)”(이종성)

 “(웃으며) 경들은 평소에 날 보고 하나도 늙지 않았다고 하더니. 지금은 무슨 말인가.(上笑曰 卿等每以予爲不老矣 今何其如此耶)”(영조)

 모두들 임금의 면전에서 폭삭 늙으셨다며 눈치없이 돌직구를 던지자 영조 임금이 투덜거린다.

 저기(10년 전 초상화)에도 흰수염은 있구먼 뭐.(彼猶有鬚白處矣)”

 어떤가. 270년 전의 어전회의를 생중계로 보고 있는 느낌이 들지 않은가. 이 모든 멘트는 누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임금과 신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은 역사 기록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참전한 명나라군의 철수를 기념해서 그린 <천조장사전별도>. 포르투갈 흑인용병 4명이 참전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몸집에 너무 커서 말에 타지 못하고 수레에 탔다는 기록에도 부합된다. |한국국학진흥원  

 ■위대한 기록

 <흔적의 역사>를 쓰면서 새삼 기록의 위대함을 느낀다.

 예를 들어 영조가 대신들과의 밀담을 사초에서 지웠을 때 전직 사관들이 한탄했다고 한다.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어도 사필은 굽힐 수 없습니다.(頭可斷 筆不可斷). 앞으로 엄청난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 태종이 노루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지자 급히 일어서며 한다는 말은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勿令史官知之)’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말이 <태종실록>에 기록된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당대의 사관이 사관이 모르게 하라는 임금의 명령까지 역사에 기록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태종이 편전까지 사관이 입시할 필요가 없다는 명을 내리자 당대의 사관은 묵직한 돌직구를 던졌다고 한다.

 사관의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上有皇天)”

 하기야 천하의 폭군이라는 연산군 마저 임금이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서 뿐(人君所畏者 史而已)’이라고 했다니까.

 <흔적의 역사> 칼럼은 20118월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처음에는 6장 내외의 신문용 원고분량에 맞추다가 조금 뒤부터 집필의 시스템을 바꿨다. 옛 자료를 찾을 때마다 끊임없이 엮여 나오는 무궁무진한 역사의 팩트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했듯이 저렇게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담겨있는데 어찌 앙상한 뼈대만 추려 정리한다는 말인가. 결국 아이템별로 30~60장 분량으로 양껏 풀어놓은 뒤 신문용으로는 사정없이 줄여 게재하는 방법을 써왔다. 신문용이 아니라 블로그용, 인터넷 용으로만 쓴 꼭지도 다수 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축적한 130여 회 꼭지 가운데 조선시대부분만 뽑은 것이다.

 필자는 역사학자는 아니다. 천생 기자다. ‘기자는 이야기꾼이어야 한다고 여기는 기자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옛 사람들의 이야기에, 발자취에, 흔적에 흠뻑 빠져 살고 있는 이유이다.

 물론 하루하루 새로움과 깊이를 좇는 일간 신문에서 서슴없이 소중한 지면을 내어준 회사야 말로 필자의 가장 든든한 밑천이고.

 경향신문 이기환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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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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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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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중국말을 10년 배워도 중국현지에 두어 달 다녀온 사람만도 못합니다. 사역원에서는 마지못해 한어(중국말)을 한다해도 평상시에는 늘 우리 말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세종실록>)    

   1442년(세종 24년) 사역원 제조 신개가 답답하다는 듯 아뢴다. 요컨대 중국어 교육이 잘못 되었으니 교육방식을 파격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역원 내에서는 공사를 의논하거나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할 때 무조건 중국어를 쓰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이를 어기는 생도는 그 때마다 매질을 가하도록 하소서.”
 신개는 그러면서 “만약 이를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는 무거운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간언한다.

 

명나라 사신인 예겸(倪謙)과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1418~1456), 신숙주(1417~1475), 정인지(1396~1478) 사이에 나눈 창화시(倡和詩·시를 읊으면 다른 사람이 받아 노래하는 화답시)를 모은 시권이다. 예겸은 1450(세종 32)20일 동안 조선을 방문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영어마을식 중국어 교육
 “초범은 부과(附過·잘못한 일을 적어두는 처벌), 재범은 차지(次知·주인을 대신해 처벌받는 하인) 1명…, 5범 이상은 형조에 이첩…. 하도록 하소서.”
 신개가 제안한 교육방법은 바로 요즘의 영어마을식 외국어 교육이었다. 아니 더 무시무시했다. 외국어를 쓰지 않으면 처벌을 내리고 가차없이 매질을 가했다니….  
 그러나 예나지금이나 외국어 교육은 쉽지 않은 것 같다. 가장 좋은 외국어 교육은 역시 중국 유학이었다.
 1460년(세조 6년) 임금은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의 자제들을 명나라에 유학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는 단칼에 조선의 요청을 거절했다. 명 황제의 칙서는 다음과 같았다.
 “지금까지 통사(통역)들이 그럭저럭 잘 통역해왔고,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꼭 (중국으로) 유학 와야 할 이유가 없다.”
 명나라가 우려한 것은 조선 유학생들을 통한 국가 기밀의 유출이었다. 명나라 유학을 일거에 거절 당했지만 현지 교육의 필요성은 끈질기게 제기됐다.
 현지 유학이 불가능해지자 차선책으로 등장한 것은 통역이나 학생들을 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자주 보내는 것이었다. 중종 31년(1536). 통역관 주양우가 중국을 너무 자주 드나든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러자 좌의정 김안로 등이 반론을 제기한다.
 “한어를 아무리 능숙하게 구사해도 중국 현지에서 중국 사람과 대화할 적에는 틀리고 빗나가 서로 통하지 못합니다. 중국을 자주 드나들며 몸으로 부딪혀봐야 통할 수 있습니다.”
 중종은 “(주양우를) 가끔씩 보내면 중국어 학습이 늦어질 것”이라는 의견에 따라 주양우의 빈번한 중국방문을 허락했다.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5대조 할아버지와 증조 할아버지는 중국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대쪽같은 성품으로도 유명했다.  

 ■어학공부의 전범
 그런데 조선의 통역 가운데 특기할만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이변(李邊·1391~1473)이었다. 이변은 이순신 장군의 현조(玄祖·5대 조 할아버지)이다.
 이변은 조선 초기 아주 유명한 사대부 출신 통역이었다. <세종실록>은 그가 얼마나 어학공부에 빠졌고, 또 소질이 있었으며, 조·명 외교에서 얼마나 활약을 했는 지를 알 수 있다. 먼저 1434년(세종 16년)의 기록을 보면 첫번째 문장이 재미있다. “그 사람됨이 둔했고, 서른이 너머 문과에 급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 이야기를 보면 달라진다. 어학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중국어 마니아’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서른이 넘어 발견한 재능이었던 것이다.
 “문과에 급제한 뒤 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한어(중국어)를 배웠다. ‘공효(功效·공을 들인 보람)를 반드시 이루고야 말리라’라는 다짐구호를 써붙인 다음 밤을 새워 가며 강독(講讀)했다. 또 한어를 잘한다는 자가 있다는 말만 들으면 반드시 그를 찾아 질문하여 바로잡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집안 사람들과 서로 말할 때에도 언제나 한어를 썼다. 친구를 만나도 반드시 먼저 한어로 말을 한 다음에  우리 말로 했다. 덕분에 한어에 능통해졌다. 가히 지독한 어학공부였다. 1429년(세종 11년)의 기록을 더 보자. 예조판서 신상이 임금에게 고했다.
 “이변은 문과에 급제했지만 오히려 중국어를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습니다. 사역원의 학생들 모두 그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합니다. 마땅히 이변을 통역의 선생(訓導)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변을 ‘어학 공부의 전범’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이변이 1434년(세종 16년) 외교관으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성격이 강직합니다.’
 이조정랑 김하(金何)와 함께 요동으로 건너가 명나라 학자들에게 <소학직해언어>(소학을 한어로 직해한 책)를 보여주고 그 가치를 인정받고 돌아온 것이다. 이때 요동의 명망 있는 명나라 학자인 허복과 유진, 오망 등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문장은 천하의 공기(公器)다. 수레의 궤도가 같고 글월의 글자가 같아서 천하 만국이 모두 한 집안과 다름없다. 이 글은 요동에서만 편벽되게 쓸 것이 아니다.”
 그 가운데 명나라 학자 오망은 이변에게 전한 시의 서문에 이렇게 칭찬했다.
 “이변의 사람됨이 순순(恂恂·진실)하고 유아하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하였도다. 남에게 의심되는 것을 질의하여 잘 깨닫고 이해하되, 요령을 잡아 가슴에 품어 두어 온공하게 조심조심 받들어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참으로 훌륭한 선비요, 뒷날 성취함이 있을 것을 헤아릴 만하도다. ”
 이변은 또 대쪽 같은 성품으로도 유명했다.
 “이변의 성질이 굳세고 곧아서 비록 편협한 데가 있지만, 의롭지 않은 일은 털끝 만치도 안한다. 사람들이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세종실록>)
 <세조실록> 1465년(세조 11년) 10월 16일 조를 보면 이변의 성격을 한번 더 짐작할 수 있다. 
 “이변은 나이가 늙어 머리와 수염이 하얗고 성품이 강직하여 남의 과실을 용납하지 못했다. 술을 마시지 않고 밥을 잘 먹어서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세조)이 항상 원로로 우대했다.”
 <성종실록> 1489년 11월29일 조를 보면 이변이 후진양성에 얼마나 애를 썼는지도 알 수 있다.
 당시 대사간 이평과 영사 홍응은 임사홍 등을 탄핵하면서 이렇게 이변을 칭찬했다.
 “신이 듣기에 이변이 사역원 제조(司譯院提調)가 됐을 때 가르치기를 매우 부지런히 했고,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었느데도 여름철의 장맛비 속이나 겨울철의 큰 추위 속에도 한결같이 쉼없이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학습효과가 자못 많았습니다.”
 과연 대쪽 같은 성품이 이순신 가문의 할아버지 답다. 

   그는 1473년(성종 4년) 83살로 죽을 때까지 50여 년 간 6명의 임금을 모시면서 외교전문관료로 주요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신숙주와 함께 고금의 명현과 절부의 사실을 모아 <훈세평화>를 엮기도 했다.

 

   ■대를 이은 중국어 실력

   이순신 가문의 중국어 실력은 대를 이었다. 이순신의 중조부인 이거(?~1502)를 보라.
 이거는 1480년(성종 11년) 식년시에서 급제한 뒤 홍문관 박사와 사간원 정언(정 6품)과 사헌부 장령(정 4품) 등을 거쳤다.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임금의 잘못을 질책하는 자리에 있었다.

   ‘호랑이 장령(장령)’이라는 뜻의 ‘호장령(虎掌令)’의 별명을 얻고 있었다. 그런 그 역시 증조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중국어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이 이채롭다.
 1491년(성종 22년) 성종 임금은 이거에게 중국에서 온 외교문서를 번역하게끔 하는 지시를 내린다. 
 “이거가 이문(吏文·독특한 한문체로 된 중국과 주고 받는 외교문서)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오늘 이거가 출근할 터이니 그로 하여금 번역하도록 하라.”
 이거는 그 어렵다는 외교문서를 번역해서 임금에게 올렸다.
 과연 대쪽 같은 성품이 이순신 가문의 할아버지 답다.
 이순신 장군은 문신 가문의 전통에 따라 문과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장군의 조카인 이분(李芬)의 언급을 보자.
 “처음에 큰 형님과 둘째 형님 두 분을 좇아 유학을 수업했다. 재기(才氣)가 있어서 가히 성공할 듯 했다. 그러나 항상 붓을 던질 뜻을 품고 있었다.”(<이충무공전서> 권 9 ‘부록1·행록’)
 그러니까 이순신 역시 문과를 준비했고, 급제의 가능성도 짙었지만 뜻한 바 때문에 무과로 방향을 틀었다는 뜻이다.
 만약 장군이 문과에 급제했다면 5대조, 증조 할아버지처럼 중국어에 능통한 외교관이 될 수도 있었을까. 아니다. 바꿔말할 수 있겠다. 5대조, 증조 할아버지의 탁월한 외교감각과 대쪽성품의 피를 타고 났고. 여기에 문과를 준비하면서 자연스레 문부를 겸비할 수 있었기에 역사에 길이남을 성웅(聖雄)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 지 모른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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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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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epoxy

    Tracked from epoxy 2014/10/18 23:45  삭제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2. Subject: dragon city cheats how to get gems

    Tracked from dragon city cheats how to get gems 2014/10/22 09:01  삭제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마음의 병이 있습니다. 재앙이 오겠습니까.(有疾心 唯有害)”
 은(상)나라 반경~무정 시대(기원전 1300~1192년)의 갑골문에 나오는 흥미로운 내용이다.
 갑골문은 은(상)의 임금이 정사를 펼칠 때 미리 점을 친 뒤 그 내용을 거북껍질이나 소 어깨뼈에 새겨넣은 것이다. 이 갑골문에 표현된 ‘심질(心疾)’은 ‘지나치게 마음을 쓰거나 괴로움을 당해 생긴 질환(思慮煩多 心勞生疾)’(<좌전> ‘소공’ 조)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이 갑골문은 이미 3000년 전 표현된 ‘마음의 병’ 혹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호소한 기록인 것이다.
 다른 갑골문에는 “대왕의 마음이 화평할까요?(王心若)”라고 묻는 내용도 있다. 대체 군주의 자리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점까지 쳐서 ‘마음의 병’ 혹은 ‘스트레스’를 다스리려고 했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럴 만도 하다. 예로부터 천자(군주)의 정사를 ‘일일만기(一日萬機)’ 혹은 ‘일리만기(日理萬機)’라 했다.(<상서> ‘고요모’)
 군주(혹은 천자)가 하루동안 처리해야 할 일이 1만 가지나 된다고 일컬어진 이름이다. ‘만기친람’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상나라 말기 갑골문에 등장하는 심질(心疾·마음의 병). 왕이 심질 때문에 고생하는데, 그것 때문에 나라의 장래에 영향을 끼칠 지를 묻고 있다.

 ■임금 노릇 하려다 수염이 하얗게 셌구나!
 “과인은 세자 시절부터 화증(火症)이 있었는데, (즉위 후) 만기(萬機·정사)를 주관하게 되면서 노심초사하는 바람에 수염이 다 세였다. 거기에 성미가 느긋하지 못해 처리해야 할 정사가 있으면 그냥 버려두지 못하느니라. 또 식사도 거르는 바람에 너무 지나치게 노췌(몸이 고달파서 파리함)해졌다. 요즘 현기증이 발작하면….”(<숙종실록> 1699년 10월 4일)
 조선조 숙종의 이야기다. 숙종은 “이런 심화증(心火症)은 30년 동안이나 쌓인 지병”이라고 하소연하고 있다. 정사를 돌보느라 얼마나 가슴이 답답하고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수염이 하얗게 셀 정도가 되었을까.
 숙종만 그랬을까. 군주는 피곤한 자리였음이 분명하다.
 만백성과 사직을 간수해야 하는 막중한 자리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예컨대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과 중흥군주라는 정조를 보라. 그들은 공부벌레인 동시에 일벌레였다. 
 “세종은 반드시 100번씩 글을 읽었고, <좌전(左傳)>과 <초사>는 200번 읽었다. 병이 깊어졌는 데도 글읽기를 멈추지 않자 아버지(태종)는 내시를 시켜 (세종의) 책을 모두 거둬들였다. <구소수간(歐蘇手簡·구양수와 소동파의 편지모음집)> 한 권만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다. 그것을 임금(세종)은 1100번 읽었다.”(<연려실기술> ‘세종조고사본말’)
 세종이 훙(薨·임금의 죽음)한 뒤의 <세종실록> 1450년 2월 17일조를 보라.
 “임금은 매일 사경(四更·새벽 1~3시)에 일어나 날이 하얗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돌봤다. 그 후에는 신하들을 차례로 접견하는 윤대(輪對)를 행했고, 다음엔 경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해동의 요순’이라 일컬었다.”   
 정조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가 신하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라.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니 괴롭고 괴로운 일이라.”(1797년 12월26일)
 “백성과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돈다. 날마다 늙고 지쳐간다.(1799년 1월20일)
 “바빠서 틈내기 어렵다. 닭우는 소리 들으며 잠들었다가~비로소 밥 먹으니, 피로해진 정력이 갈수록 소모될 뿐….(1798년 10월7일)
 “바쁜 틈에 윤음을 짓느라 며칠 째 밤을 새고, 닭울음을 듣는구나. 괴롭다!”(1798년 11월30일)
 “책을 읽고, 온갖 문서를 보느라 심혈이 모두 메말랐구나.”(1799년 7월7일)
 정조는 이처럼 정사를 처리하고, 편지를 직접 쓰면서, 틈나는 대로 독서에 매진하느라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승하 직전(1800년), 번열, 즉 횡격막에 열이 생기는 증세를 호소했던 정조의 편지글. 그는 열을 떨어뜨리는 약을 썼지만 실패했다고 토로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당뇨병 환자 세종의 걱정은
 그랬으니 몸과 마음이 정상일 리 없었다. 공부벌레·일벌레의 대명사였던 세종을 보라.
 세종은 게다가 고기가 아니면 수라를 들지 않을 정도로 육식을 좋아했다. 오죽했으면 1418년(세종 즉위년) 10월 9일, 상왕(태종)이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도 않고, 몸도 뚱뚱하시니 건강을 좀 챙겨야 한다”고 걱정했을까.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고, 운동을 하지 않은 데다 과도한 업무에 따른 스트레스가 세종의 몸을 갉아먹었던 것 같다.
 1425년(세종 7년) 세종은 두통과 이질 등 중병에 걸렸음에도 이를 참고 명나라 사신단을 맞이하기도 했다. 이 때 임금의 얼굴빛이 눈에 띄게 파리하고 검게 된 것을 백관이 보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세종실록>을 보면 “얼마나 임금의 병세가 위중했는지 임금의 관곽을 이미 짜놓는 등 흉사에 대비했다”고 한다.(<세종실록> 1449년 11월15일)
 이 때 사신단을 수행한 명나라 의원 하양은 세종을 진맥하고는 “전하의 병환이 상부는 성하고, 하부는 허(虛)한데, 이것은 정신적인 과로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렸다.(<세종실록> 1425년 윤 7월 25일조) 업무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각했기에 이렇듯 ‘관을 미리 짜놓을 정도’로 위독한 지경에 빠졌을까. 그럼에도 세종은 위중한 병세를 참고 명 황제의 부고를 받들고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을 만나 곡례(哭禮)까지 무사히 마쳤다. 외교적인 결례를 범하지 않으려 투혼을 발휘한 것이다.
 세종은 평생 다양한 병을 달고 살았다.
 1431년(세종 13년) 8월 18일 풍질(風疾) 때문에 “두 어깨 사이가 찌르는 듯 아픈 증세가 고질병이 되었다.”고 괴로워했다. 또 ‘하루에 물 한동이 이상을 마셔야 하는’ 당뇨(소갈증)와, 당뇨 합병증의 하나인 망막변성(안질)에 시달렸다. 
 “소갈병 때문에 하루에 마시는 물이 어찌 한동이 뿐이겠는가.”(1439년 7월 4일) “왼쪽 눈이 아파 안막(眼膜)을 가렸고, 오른쪽 눈도 어두워 한 걸음 사이의 사람도 분간할 수가 없다.”(1439년 6월 21일, 1441년 2월 20일)
 그밖에도 다리부종과 임질(淋疾), 수전증 등을 앓았다. 참으로 화려한 병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세종은 병치레 때문에 정사를 잘 돌보지 못하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온갖 병 때문에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했다. 모든 일에 본보기를 보여야 하는데…. 게으른 버릇이 나로부터 시작될까 두렵다. 정사가 해이해진 것이 아닐까.”
 그야말로 백성과 사직을 생각하는 성군의 투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879년(고종 16년) 왕세자 순종의 천연두 완치를 축하하기 위해 재작한 병풍. |국립고궁박물관 

 ■정조의 못말리는 일중독
 정조는 또 어떤가. 정무처리에, 독서에, 편지쓰기까지 밤을 꼴딱꼴딱 세운 정조였으므로 그 역시 건강할 리 없었다.
 1784년(정조 8년) 도제조 서명선이 “제발 건강 좀 챙기시라”고 걱정했다. 그러자 정조의 대답이 걸작이다.
 “정신 좀 차리고 보니 국사가 많이 지체되었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보는 것이네.(不得不親覽矣) 나는 원래 보고서 읽는 것을 좋아하네. 아픈 것도 잊을 수 있지.”
 보고서 읽는 것이 취미라는 데야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가 신하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병세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요즘 열기가 치솟고 등은 뜸 뜨는 듯 하고 눈은 횃불 같아 헐떡일 뿐이다. 현기증이 심해서 독서에 전념할 수도 없다. 괴롭기만 하다.”(1799년 7월7일) 
 “뱃속의 화기가 내려가지 않는구나.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 장판에 등을 붙인채 뒤척이는 일이 모두 답답하다.”(1800년 6월15일)
 정조는 등창이 난 지 20여 일 만인 1800년 6월, 승하했다. 재위 24년(1776~1800)만에, 그것도 나이 48살의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지독한 일중독증에 따른 스트레스가 간접 사인이었을 것이다.

 

 ■‘심열이 끓어 오른다’
 명종 역시 ‘심열’증세를 호소했다.
 “가슴이 답답하다. 잠자리가 늘 편안하지 않다. 심열(心熱)이 위로 치솟으면 입이 말라 물을 끌어다가 마시기 일쑤이다.”
 명종은 “만기(萬機), 즉 정사만 생각하다 보니 심열이 생기는 것 같다”면서 “나이 30이 넘었는 데도 아직 국가에 경사가 없다”고 노심초사했다. 지존의 자리가 편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경사가 없음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1567년(명종 22년) 6월 24일,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명종은 조선을 방문하는 명나라 사신을 어떻게 접대할 것인지 노심초사하고 있다.
 “사신 접대 때 몸이 좋지 않아 오래 서있지 못할까 두렵다. 술은 나눌 때 예의를 잃어버리지나 않을지…. 병중에 쓴 외교문서가 잘못되지나 않을른지…. 요즘 열이 올라 간혹 귀가 어두울 적도 있는데 혹 예를 잃을 수도 있는데…. 이 또한 사신에게 전하라.”
 명종의 노심초사에서 지도자의 자리가 얼마나 힘든 지 잘 나타나 있다.

고종의 승하일기를 기록한 태의원일기.고종은 졸중픙으로 갑자기 승하했다고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효종의 죽음엔 뭔가 있다.
 효종은 의료사고 때문에 급서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임금의 얼굴에 종기의 독이 퍼졌다. 의원 신가귀의 처방에 따라 임금이 침을 맞았는데 피가 그치지 않고 솟아나왔다. 침이 혈락을 범했기 때문이다. 임금이 그만 승하하고 말았다.”
 1659년(효종 10년) 5월 4일, 효종의 급서(急逝)를 알리는 <실록>의 내용이다. 의원 신가귀의 침이 그만 임금의 혈맥을 찌르는 바람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의료사고가 분명했다. 신가귀는 이 의료사고 때문에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실록>을 가만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임금은 머리 위에 작은 종기를 앓고 있었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마침 중병에 걸려있던 세자를 돌보느라 자신의 종기에는 무관심했다. 또 때마침 전국에 비가 오지 않아 자신의 건강을 돌볼 틈이 없었다. 그는 대궐의 뜰에 나가 직접 기우제를 주관하고 있었다. 그러다 종기의 독이 얼굴까지 퍼지는 등 위독해졌다.”(<효종실록> 1659년 4월 27~28일)
 의료사고만이 사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효종은 사직(후대를 이을 왕세자의 병)과 백성(기우제)을 걱정하느라 몸을 돌보지 못했고, 그 때문에 병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는 것이다.

 

 ■정신착란에 시달린 선조
 선조는 극심한 정신병 증세에 시달렸다.
 그는 백성을 전란(임진왜란)의 소용돌이에 빠뜨렸다는 비난을 받았던 임금이다. 그도 인간이고, 한 나라를 책임진 지도자인지라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책임을 절감했을 것이다.
 게다가 일부 신하들은 물론 명나라까지도 세자(광해군)에게 양위하는 것이 어떠냐고 군불을 땠으니 그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것이다.
 <연려실기술> ‘선조조고사본말’을 보라.
 “1592년 10월, 김적이라는 사람이 ‘전하는 인심을 많이 잃어 오늘날의 사태를 불렀습니다. 어찌 세자(광해군)에게 전위하지 않으십니까.’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1593년(선조 26년) 윤 11월14일, 명나라 사신은 선조 임금에게 아주 희한한 말을 건넨다.
 “어제 영윤(세자) 광해군을 보니 용안이 특이하였고, 또 신민이 다 추대한다 합니다. 당나라 현종(재위 712~756)이 안록산의 난을 맞아 아들인 숙종(756~762)에게 군권을 맡겼더니 숙종이 장안과 낙양을 수복했습니다. 영윤(광해군)의 현명함이 당 숙종보다 더하니 국왕은 반드시 전위하시어….”(<선조실록>)
 이 무슨 주제넘고 해괴한 소린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못난 임금이니 당 현종의 예에 따라 속히 현명한 세자(광해군)에게 물려주라는 소리가 아닌가.
 대신들은 물론, 상국인 명나라로부터도 버림을 받고 쫓겨나는 임금이라면…. 당시 선조가 느끼는 위기감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관찬의서이자 국내 유일본인 <의방유취>(보물 1234호). 1477년(성종 8년)본이다. |한독의약박물관

 ■“임금 노릇 안할게. 나 좀 살려주라”
 선조는 원래 원기가 허약한 체질이었다. 비위도 약했다.
 본래 심열(心熱·화기가 뻗치는 병)증세가 있었다. 임진왜란 발발 4년 전인 1588~89년(선조 21·22년) 사이 반복적으로 심질의 증세를 말하며 물러날 뜻을 밝힌다.
 “나는 반평생 신병을 지니고 있었는데, 심질이 더욱 심하기 때문에…. 반드시 광질이 발작할 것이다. 여러분들이 임금을 사랑한다면…. 물러나 쉬게 하라. 더는 번거롭게 하지 마라.”(1588년 윤 6월 1일) “심질 때문에 정신이 혼미하고 기분도 좋지 않다. 대신들은 날 가엾게 여겨달라.”(1589년 12월 21일)
 선조의 심질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책임론이 비등해지면서 더욱 악화됐다. 여러차례 ‘선위’ 혹은 ‘섭정’의 뜻을 전하면서 “제발 내 말 좀 들어달라”고 애원한다.
 “심질이 고질이 됐다. 불을 대하고도 춥고, 눈(雪)을 씹어도 되레 열이 생긴다. 때로는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 달린다. 동서를 구별하지 못한다. 유독 경들만 모르고 있다.… 내가 하루를 더 왕위에 있으면 백성들이 하루를 더 걱정하게 된다.”(1592년 11월 21일)
 선조는 이후에도 ‘병 때문에 죽을 지경’임을 호소하면서 섭정 혹은 선위를 줄기차게 요구한다.
 “양쪽 귀가 완전히 먹었다. 심병(心病)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쓰러지기를 반복한다. 가슴 속 답답한 기운은 없어지지 않는다. 하루가 1년 같고, 밤낮으로 눈물만 흘린다. 병이 갈수록 더해가는데 몸은 매여 있고….”(<선조실록> 1596년 8월 27일)
 “가슴 통증 때문에 아파서 울부짖느라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도 처리해야 할 업무가 밀려드는구나. 참 난감하구나. 경들도 내가 먼저 죽으면 후회하지 않겠는가. 어찌 내 고민과 병을 풀어 줄 생각은 안하는가.”(<선조실록> 1597년 1월 6일)
 1598년(선조 31년) 2월 25일 선조가 “전광증(顚狂症·정신착란)으로 크게 울부짖으며 인사불성이 된다”고 호소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선조 자신) 좀 살려주라. 그러면 나랏일에도 다행이 아닌가.”

 

 ■“철없는 소리 작작 하세요.”
 그러나 대신들은 선조의 선위 발언을 ‘정치쇼’라면서 번번이 일축했다. 영의정 류성룡과 우의정 이원익 등 정승들의 말본새를 보라.
 “아니 지금이 어떤 때이고, 이 일(선위의 일)이 어떤 일이기에 번번이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말 민망하고 답답한 심정 금치 못하겠습니다.”
 지존인 임금이 ‘정신병 때문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통사정하는데, 대신들은 ‘철없는 소리 좀 작작하라’고 일축하는 상황이 되풀이 된 것이다.
 하기야 임금의 자리가 어디 그만 두고 싶으면 그만 둘 수 있는 자리인가. 대신들의 입장에서도 ‘그리 하시라’고 쉽게 찬성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찍이 태종이 선위 파동을 일으켰을 때(1406년) ‘단지 기쁜 얼굴빛을 내비쳤다’는 어처구니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주륙당한 임금의 처남들(민씨 형제)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임금의 선위 발언에 쉽게 동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록>을 살펴보면 선조의 정신병은 심각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는 결국 백약이 무효인 실어증까지 걸렸고(1605년), 새벽에 기급하여 쓰러지기도 하는(1607년) 일을 반복하다가 향년 57세(1608년) 승하했다
 선조는 죽기 직전까지 “내가 많은 병에 걸렸지만 여러 병 가운데 심병(心病)이 가장 극심하다”고 괴로워했다.(<선조실록> 1607년 10월 11일)
 선조는 백성과 사직을 도탄에 빠뜨린 임금이라 손가락질 받는다. 하지만 평생 정신병에 괴로워하면서도 임금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 없었던 신세를 생각한다면 딱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침이나 뜸을 놓는 자리인 경혈을 표시한 청동상. 머리에 작은 종기를 앓았던 효종은 기우제를 지내고, 왕세자의 병에 신경 쓰느라 초기에 치료릃 하지 못했다. 왕은 결국 침을 잘못 맞아 과다출혈 때문에 급서했다.|국립고궁박물관

 ■“명나라와 의리가 밥먹여주냐”
 광해군의 스트레스는 부왕인 선조와는 좀 차원이 달랐다.
 세자 시절부터 부왕(선조)이 걸핏하면 ‘선위 운운’하지 않았던가. 세자로서는 추호라도 잘못된 언행을 했다가는 역린을 건드릴 수 있었다. 조심 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선위 운운할 때마다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앉았으리라. 세자로서 임진왜란을 치렀고, 재위 시절 떠오르는 강국인 후금(청나라)과 썩어도 준치인 명나라 사이에서 외줄타기 외교를 펼쳐야 했다.
 그 어려운 정세를 맞아 신하들은 아주 세세한 사항까지 임금에게 보고했다. 전형적인 책임회피였다.
 “난 고질병인 화병 때문에 요즘 겨우 버티고 있다. 이럴 땐 급하지 않은 업무는 좀 보류해도 좋으련만…. 너무도 일의 경중을 모르고 있구나.”(<광해군일기> 1620년 10월 18일)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맹목으로 섬기려는 대신들의 ‘몽니’는 광해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예컨대 1619년(광해군 11년), 당시 욱일승천의 기세로 요동을 차지한 후금이 편지를 보냈다.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우리(후금)와 맹약을 맺자”는 편지였다. 광해군은 ‘지는’ 명나라와 ‘뜨는’ 후금 사이에서 적절한 등거리 외교를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달랐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웠다. 이들은 3개월이나 ‘몽니’를 부리며 차일피일 미뤘다.
 “호서(胡書·후금의 편지)를 처리하라고 했거늘…. 명색이 국방을 담당하는 비변사가 미적미적 대고 있으니…. 1~2일 안에 처리하도록 하라.”(<광해군일기> 1619년 7월 16일)
 그러나 대신들은 “명나라의 문책이 두렵다”며 선뜻 나서지 않았다. 광해군은 ‘명나라와의 의리가 밥 먹여주냐’며 호통친다.
 “이번 호서의 처리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다. 그런데도 경들이 명분론만 내세우고 있다. 종묘와 사직이 위험에 빠진다면 어찌할 것인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다.”(<광해군일기> 1619년 7월 22일)

 

 ■“다른 사람에게 시키든가요.”
 광해군은 실리외교를 주장한 것이다. 그럼에도 대신들이 미적거리자 우의정 조정(1551~1629)에게 “당신이 한번 처리해보라”고 명했다.
 그러나 조정은 ‘제가 왜 책임지냐’면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회피했다.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 일을 혼자 담당한다는 말입니까. 성상께서는 다른 대신들과 함께 상의하여 처리하소서.”(<광해군일기> 1619년 7월 27일)
 그러자 광해군이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당신도 ‘맡지 않겠다’며 이토록 번거롭게 하는데…. 어느 대신이 맡겠는가. 나 혼자 고민하다가 병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나랏일이 한심하구나.”
 아닌게 아니라 당시 광해군은 깊은 병에 걸려 있었다. 후금의 편지에 답하는 기한(8월5일)이 훌쩍 지났지만 어느 누구도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자 광해군은 병든 몸을 이끌고 나와 대신들에게 애원조로 호소한다.
 “내가 병이 심하고 졍신이 혼미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 데도 종묘사직이 위태로운 꼴을 차마 볼 수 없어 나왔다. 이미 답서의 기한(8월 5일)이 지났지만 8월 안으로 보낸다면 혹시 목전에 닥친 전란은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경들은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광해군일기> 1619년 8월 14일)
 광해군은 “만약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섬짓하다.(思之膽寒)”고 걱정했다. 그러니 병이 쉽게 나을 리가 있었겠는가.

 

 ■‘난 임금이 싫어!“
 조선의 2대왕인 정종은 어떤가. 애초부터 임금이 될 생각이 없었던 정종 역시 마음의 병 때문에 내내 불면증에 시달렸다.
 “밤마다 마음 속으로 번민하여 자지 못하고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근일에 다시 병이 생겨 마음과 기운이 어둡고 나른해서 피부가 날로 여위어진다.”(<정종실록> 1399년 3월 13일)
 하기야 정종은 임금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동생인 정안군(태종 이방원)을 그렇게 무서워했다지 않은가. 오죽했으면 부인(정안왕후)이 동생 앞에서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남편에게 “빨리 양위하라”고 애원했을까.(<연려실기술> ’정종조고사본말’) 하루라도 임금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었던 정종은 ‘격구’로 시간을 때우고 건강을 되찾으려 했다고 한다.
 정종에게는 임금의 자리 그 자체가 스트레스 였던 것이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가슴과 배의 통증을 호소했다. 세조는 특히 “어렸을 때는 방장한 혈기로 병을 이겼는데 몇해 전부터 질병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왕위에 오른 지 9년 뒤인 1463년 9월 27일의 기록(<세조실록>)이다. 조카를 죽이면서까지 차지한 지존의 자리였건만 주단이 깔린 행복한 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가슴통증에 사딜리던 세조는 1466년(세조 12년) 꿈에 나타난 처방대로 현호색(玄胡索·양꽃 주머니과의 다년생 풀)을 넣은 칠기탕을 복용하고 차도를 보였다. 칠기탕(七氣湯)은 정신적인 스트레스 질환에 사용되는 처방이다. 세조 역시 임금으로서의 스트레스로 고생했던 것이다. 

 

 ■만기(萬機) 처리에 만병(萬病) 생긴다.
 반정으로 임금 위에 오른 중종 역시 마음병으로 고생했다. 
 <중종실록> 1544년 11월 14일조를 보면 “임금이 번민이 심한데도 약을 들기 싫어하므로 야인건수(똥물)에 청심환을 타 올렸다”고 했다. 야인건수(野人乾水)는 인분을 물에 탄 것을 일컫는다. 극심한 열기를 다스리는 데 쓰인다. 가슴앓이를 다스리기 위해 인분 탄 물을 약으로 마셨다는 것이다.
 1544년(중종 39년) 11월 14일 중병에 걸린 중종은 선위의 뜻을 밝히는데, <실록>을 쓴 사관이 사족을 붙여놓는다..
 “임금이 즉위한 이래 권간(權奸)이 출몰, 조정을 제멋대로 어지럽혀서 골육에까지 화가 미쳤다. 임금의 심려가 병이 된 것은 당연하다. 간흉(奸兇)에게 권력을 맡겼고, 임금의 대권을 행사하지도 못하고 억지로 따르다가 이것이 쌓여서 뼈속까지 병이 들어 끝내 구제할 수 없는 슬픔에 이르게 되었으니, 아! 슬프다.”
 기묘사화(1519년) 이후 김안로와 윤원로 형제 등의 득세로 임금의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마음의 병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도자라는 자리…. 결국 ‘만기(萬機’)를 처리하느라 ‘만병(萬病)’에 걸릴 수 있는 자리였던 것이다.
 하기야 한나라 시대 유학자인 동중서는 왕(王)의 자리를 이렇게 해석했다.
 “문자를 만드는 사람이 3번 획을 긋고 그 가운데를 이어 왕(王)이라 했다. 3개의 획은 하늘, 땅, 사람을 의미하며 이 세 가지를 관통하는 것이 왕(王)이라 했다.”(<설문해자>) 

   때마침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조선왕실의 생로병사-질병에 맞서다'를 주제로 한 특별전이 열린다. 9월14일까지 열리니만큼 틈이 난다면 한번 가볼 것을 권한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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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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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영화 <명량>이 요즘 히트를 치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해전사에 빛나는 명량대첩을 옛 문헌들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영화 명량을 보기 전에, 혹은 본 후에 <선조실록>, <승정원일기>, <연려실기술>, <난중일기>, <백사집>, <난중잡록>, <재조번방지>, <백호전서> 등에 나타난 명량해전의 기록들을 읽어보자. 간단히 말하자면 명량해전은 1597년(선조 30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10여 척의 전선으로 적함대 133척을 맞아 거둔 대첩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일본인 간첩 요시라의 이간질에 녹아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경질하고 원균을 기용한다. 그러나 원균은 왜적의 전술에 말려 대패하고 만다,
 조선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 강토는 또한번 왜적의 침략에 분탕질되고 만다. 1597년 8월 조선 조정은 권율 도원수 밑에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시킨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 13척의 배로 131척에 이르는 왜적선을 상대한 이순신 장군은 "왕명을 맏은 우리는 의리에 죽고 살아야 한다"고 결사항전을 외쳤다.

그런데 <임진잡록>은 이 대목에서 ‘누가 원균에게 돌을 던지겠느냐’고 변호한다.
 “원균보다 충의를 다한 자와 원균보다 뛰어난 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었는고? 만약 원균을 불충하다면 저 목숨을 보전하려고 도망다닌 자에게는 무슨 죄를 줘야 할꼬?”
 어쨌든 복귀한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비장한 각오를 내비쳤다고 한다.
 “임진년부터 지금까지 5~6년 동안 적이 감히 충청, 전라도를 곧장 돌진해 오지 못했던 것은 우리 수군이 길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게 전선이 아직도 12척이나 남아 있습니다. 죽을 힘을 내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권13, 부록5 행록1)
 그에게 남은 배는 단 10여 척 뿐이었다. 중과부적을 절감한 이순신 장군은 물살이 빠른 명량구에 진을 쳤다. 그는 휘하장수들과 함께 “우리는 함께 왕명을 받았다. 의리상 생사를 같이해야 한다. 국사(國事)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한 번 죽음을 아끼겠는가. 오직 충의에 죽는다면 죽어도 영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굳게 결의했다.
 그가 마련한 필살기가 있었다. 단 10여척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 그는 백성들의 피란선 100여척을 이용하기로 한다. 전선 10여척을 앞에 두고 그 뒤에 피란선을 죽 늘어놓아 마치 100여척의 전선이 있는 것처럼 거짓으로 허장성세를 펼친 것이다.
 마침내 전투가 벌어지자 장군은 두려움에 떨고 소극전을 펼치려는 휘하장수들을 독려, 마침내 적선 31척을 깨뜨리는 전과를 세운다. 이 와중에서 적장인 구루지마 미치후사(來島通總)의 목을 잘라 효수한다. 구루지마는 각종 문헌에서 ‘내도수(來島守)’, ‘마다시(馬多時)’,  ‘뇌도수’ 등으로 표기돼있다.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단 1척의 피해도 입지 않았고, 전사자 2명과 부상자 2명이 있었을 뿐이다. 이 전투를 멀리서 지켜보던 백성들은 적선의 기세가 워낙 등등하자 극도의 불안감에 빠져 통곡하다가 하루종일의 혈전 끝에 아군이 승리하자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명량대첩의 낭보가 조정에 올라가자 선조 임금이 이순신에게 숭품(崇品), 즉 종1품에 올리려고 했다. 그러자 어떤 자가 “이순신의 작질(爵秩)이 이미 높다”고 질투했다. 때문에 선조는 제장(諸將) 이하에게만 포상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임금과 신하들이다.
 지금 이 순간, 필자는 명량해전을 기록한 옛문헌들을 되도록 가감없이 인용하고자 한다. 객관적인 자료를 주기 위해서….

 

 ■<선조실록>
 1597년(선조 30년) 11월 10일조에 나오는 ‘제독 총병부에 적군의 동태와 대비책, 우리 장수의 전과를 알리다’ 라는 기사를 보자.
 조선 조정이 제독총병부, 즉 명나라 지원군 사령부에 왜적의 동태과 그동안의 전과를 알리면서 1597년 9월16일에 있었던 명량대첩의 전과를 설명하고 있다.
 “근래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치계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병선과 병기가 거의 다 유실되었습니다. 신이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 해로의 요구(要口)를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적의 전선 130여 척이 이진포(梨津浦) 앞바다로 들어오기에 신(이순신)이 수사 김억추, 조방장 배흥립, 거제 현령 안위(安衛) 등과 함께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 벽파정(碧波亭) 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웠습니다.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뜨리니 사살이 매우 많아 적들이 모두 바다속으로 가라 앉았으며, 머리를 벤 것도 8급이나 되었습니다. 적선 중 큰 배 한 척이 여러 적선을 지휘하여 우리 전선을 에워싸는 것을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宗)·영등 만호 정응두(丁應斗)가 잇따라 와서 힘껏 싸워 또 적선 11척을 깨뜨리자 적이 크게 꺾였고 나머지 적들도 멀리 물러갔습니다. 이 때 진중(陣中)에 투항해온 왜적이 홍기의 적선을 가리켜 안골포(安骨浦)의 적장 마다시(馬多時)라고 하였습니다. 한산도(칠천량)가 무너진 이후부터 남쪽의 수로(水路)에 적선이 종횡하여 충돌이 우려되었으나 현재 소방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봉(賊鋒)이 조금 좌절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명량대첩(오류리) 해역 수중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발굴 유물들. 임진왜란 당시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돌 폭탄인 석환(石丸) 등 500여 점에 달하는 다양한 유물을 발굴됐다.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1636년(인조 14년) 8월 5일조에 기록한 명량해전의 ‘단편’을 보자.
 “지난 정유년(1597년·선조 30년)에 전선(戰船) 300척을 거느리고 원균(元均)이 원수가 되었을 때 한산도(閑山島)에서 패망하여 10척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李舜臣)이 통솔하여 명량(鳴梁)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는 신들이 직접 눈으로 본 것이니, 지난 일을 통해 분명히 징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신들이 8가지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명량대첩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이라 표현하고 있다.

 

 ■<난중잡록>
 <난중잡록>은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1582~1610년까지 쓴 야사이다.
 1597년(선조 30년) 1월, 일본의 요시라(要時羅)가 이순신을 모함했다. 
 요시라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에서 조선·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통역이었다. 그가 조정과 이순신 장군 사이를 이간질 시킨 것이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가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 땅을 건너오다가 바람을 만나 며칠동안이나 작은 섬에 정박했다고 분명히 이순신 장군에게 통지했는데…. 통제사가 의심하고 두려워 하여 오지 않아 일을 그르쳤습니다.”

 ▶간첩의 이간질에 이순신 경질
 조정은 요시라의 이간질에 속아 “이순신이 헛되게 큰소리 쳐서 임금을 속였다”고 허물하여 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다 문초하게 했다. 그런 뒤 전라 병사 원균(元均)을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고, 나주 목사 이복남(李福男)으로 전라 병사를 삼았다.
 “남도 백성들은 한산도를 요새로 삼고, 이순신을 간성(干城)으로 믿었다가, 그가 파면되었음을 듣고는 크게 낙담했다. 그들은 더이상 기댈 데가 없어서 짐을 꾸렸다.”
 <난중잡록>은 이 대목에서 “요시라는 모두 일본을 위해 조선에 거짓으로 속였는데 우리만 몰랐으니 통탄할만 하다”고 안타까워 했다.
 “요시라 놈이 간첩이 되어 조선을 그르친 게 한가지가 아니다. 이를테면 강화를 약속한 것이라든지, 이순신을 모함한 것이라든지. 더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이토록 농락을 당하고도 멋대로 왕래하도록 했으니…. 아! 이 나라에 사람이 없구나!”
 요시라에 깜박 속은 선조는 결국 이순신을 문책했다.
 “4월 13일 임금은 ‘이순신의 공과 허물이 똑같으니 죄를 주지는 마라’고 한 뒤 권율 장군의 원수부에 백의종군하도록 했다.”
 이순신 장군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권율 장군의 문책을 받고 곤장을 맞는 처지에 빠진다. 적을 두려워 하여 싸움을 이리저리 피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권율은 곤장을 치면서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라 했다고 한다. 곤장을 맞은 원균은 분을 품고 남은 군사를 있는 대로 이끌고 부산에 이르렀다.
 “왜선 1000여 척이 나왔다, 원균이 노젓기를 재촉하여 배를 전진시키니, 적병이 물결처럼 흩어졌다. 짐짓 우리를 대적하지 못할 것 같이 보였다. 원균이 이 틈을 타고 전진하여 그칠 줄을 모르니, 뱃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배가 국경을 넘어 대마도가 장차 임박하였으니, 뱃길을 잘못 들어 우리는 살아날 도리가 없게 되었다. 스스로 죽을 땅에 들었으니,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질 것인가.’ 했다.” 

2008년 전남도가 재현한 명량해전의 전투장면. 조선 수군이 탔던 판옥선과 안택선으로 왜적선을 함포사격하는 장면이다.

▶죄없는 자가 원균에게 돌을 던져라

  이 말을 들은 원균이 후퇴를 명령했다. 밤낮으로 사력을 다해 배를 몰아 가덕도~영등포~온라도로 계속 후퇴했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적병은 조선의 기세라 꺾인 줄 알고 500여척을 동원, 맹추격했다. ~포 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바다를 진동하여 복병이 사면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베고 찍었다.”
 원균은 여러 장수를 모아 놓고는 “적세가 이 모양이니 아무래도 지탱할 수 없다.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으니 어찌하랴. 오늘의 일은 일심으로 순국할 따름이다.”라 순국을 결심한다.
 이 때 배설이 원균의 옥쇄를 반대하고 나서며 큰소리쳤다.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에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요긴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 바다에서 기세를 잃어 군사들이 놀라 소란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여 용맹은 쓸 수 없으니 겁내는 것을 써야겠습니다.”
 원균은 벌컥 화를 내면서 “죽고나면 그만이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고 했다. 결국 원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과 함께 옥쇄했다. 배설은 싸움이 한창일 때 자신의 소속으로 된 배 12척을 이끌고 달아났다. 아이로닉하게도 배설이 이끌고 도망한 배 12척이 명량대첩의 밑천이 될 줄이야.
 이 패배로 원균은 여론의 십자포화를 당했다. 당시 원균은 체구가 비대하고 건장하여 한 끼에 밥 한 말, 생선 50마리, 닭과 꿩 3ㆍ4마리를 먹었다. 평상시에도 배가 무거워 제대로 걷지 못했는데, 마지막 순간에도 앉은 채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원균은 이 죽음으로 웃음거리가 됐다. 당시 곡성에 사는 생원 오천뢰(吳天賚)가 이런 시를 지었다고 한다.
 “한산도는 나라의 남문인데(閑山一島國南門)/무슨 일로 조정에서 장수를 자주 바꾸었나.(底事朝廷易將頻)/처음부터 원균이 나라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不是元均初負國)/원균의 배가 원균을 저버렸네.(元均之腹負元均)”
 원균의 ‘배(腹)’가 원균을 죽게 만들었다는 비웃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난중잡록>은 ‘누구든지 죄가 없는 자가 원균에게 돌을 던지라’고 변호한다.
 “원균보다 충의를 다한 자와 원균보다 뛰어난 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었는고? 만약 원균을 불충하다면 저 목숨을 보전하려고 도망다닌 자에게는 무슨 죄를 줘야 할꼬?”

 ▶명량해전의 전과
 어쨌든 이 패배로 조선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미처 도피하지 못한 남녀들은 모두 살육을 당하였다. 왜적은 전공을 헤아린다는 이유로 산 사람들의 코를 모조리 베어 가기도 했다. 이로써 그 뒤 수십 연간에 조선의 길에서 코 없는 사람을 매우 많이 볼 수 있었다.”
 원균이 죽은 뒤 권율 도원수의 휘하에 있던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왜적들은 다시 조선 땅을 분탕질 했다. 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도원수의 진중(陣中)으로부터 출발하여 진주의 서로를 거쳐 구례로 향하다가 적선이 이미 나루터에 정박해 있는 것을 보고는 곡성을 거쳐 서해로 향해 갔다. 이때 배설이 배 12척으로 퇴각하여 진도의 벽파정 밑에 있었는데, 이순신이 그리로 달려갔다.
 배설은 교만하고 패악하여 군율을 어겨 이순신에게 죄를 얻자, 자기 마음대로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여 성주(星州)의 본집으로 돌아가니, 이순신이 즉시 죄목을 갖추어 아뢰었다. 배설은 도망하였다가 그 뒤에 체포되어 주벌을 받았다.
 1597년 9월 이순신은 잔병을 거느리고 진도의 명량구에서 머무르며 사태의 추이를 기다렸다. <난중잡록>이 전하는 명량대첩의 상황을 보자.
 “왜적의 괴수인 내도수(來島守·구루지마 미치후사)는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서해로 향하여 진도(珍島)의 벽파정(碧波亭) 밑에 이르렀다. 이 때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명량(鳴梁)에 유진하고 피란한 배 백여 척이 뒤에서 성원하였다.”
 이순신은 왜적의 침입소식을 듣고 여러 장수에게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경솔히 대적하지 말고 기회를 따라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니,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일일이 작전을 지시했다.
 “왜적은 우리 군대가 외롭고 힘이 약함을 보자 집어 삼킬 듯 쇄도했다. 서로 다투어 먼저 올라와 사면을 포위하고 엄습하여 왔다. 아군은 싸울 뜻이 없는 양 보이며 거짓으로 적의 포위 속으로 들어가니, 왜적은 아군의 두려워하고 겁냄을 기뻐하였다.”
 싸움을 육박전의 양상으로 전개됐다.
 “난전이 되자 홀연히 장수 배에서 주라(朱喇·소라껍데기로 만든 나팔)을 번갈아 불어대고, 지휘기가 일제히 흔들리고 북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가운데 불이 적의 배에서 일어나 여러 배가 연소됐다. 불길은 하늘을 뒤덮었고, 화살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고 창검이 어울려서 찌르니, 죽는 자는 삼대가 쓰러지듯 하였고, 불에 타 죽고 빠져 죽는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이 때 이순신은 구루지마 마치후사(來島守)를 베어 머리를 돛대 꼭대기에 매달았다. 조선군대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장수와 사병이 용맹을 떨쳐 달아나는 놈을 추격하고 패배하여 가는 놈을 따라가 목 베어 죽인 것이 수백여급이 되었다. 왜적선 가운데 도망하여 탈출한 것은 겨우 10여 척 뿐이었고 아군의 병선은 모두 무사했다.
 왜적들의 입장에서 얼마나 뼈아픈 패배였는지 “왜병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전쟁담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명량의 싸움을 말하였다”고 한다.

 

 ■<백사집>
 <백사집> 3~4 ‘비명·통제사 이공의 노량비명’ ‘고 통제사 이공의 유사’를 보자.
 <백사집>은 당대 병조판서를 지낸 이항복의 시문집이다. 이항복은 <백사집>에서 이렇게 이충무공을 평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병풍(병풍처럼 감싸 안음)은 한산(閑山)이고, 그 경계는 노량(露梁)이며, 그 요충지는 명량(鳴梁)이었다. 만일 한산을 잃고 노량을 지키지 못하여 곧바로 명량을 축박해 온다면 경기(京畿) 일대가 마음을 동요하게 될 지경이었다. 이때 공을 이뤄 삼도(三道)의 적을 막아낸 이가 바로 원후(元侯) 통제(統制) 이공(李公)이었다.”

 ▶“의리상 생사를 함께 한다.”
 <백사집>이 전하는 명량해전은 어땠을까.
 “원균 사후 다시 통제사가 된 이순신 공은 단기(單騎)로 군졸들을 불러모아서 명량(鳴梁)으로 나가 진을 쳤다. 갑자기 밤중의 습격을 받아서 소수의 군졸로 필사전을 벌인 결과, 새로 모은 13척의 전함으로 바다를 가득 메운 수많은 적을 상대하여 30척의 적선을 파패시키고 용맹을 다하여 전진하니, 적들이 마침내 퇴각하여 도망쳤다.”
 <백사집>은 이순신 장군이 배설로부터 배를 얻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공(이순신 장군)이 통제사로 복귀했을 때 조선 수군이 막 패한 뒤여서 주선과 기계가 남아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공은 단기(單騎)로 달려 경상우수사 배설을 만났는데, 이때 배설이 거느린 전선은 겨우 8척이었고, 또 녹도에서 전함 1척을 얻었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이 배설에게 앞으로의 계책을 물었다. 그러자 배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육군에 의탁해서 싸우는 게 낫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이 “그 계책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자 배설은 배를 버리고 달아났다. 배설은 이 때의 죄 때문에 훗날 사형 당하고 만다. 
 배설이 자취를 감추자 이순신 장군은 전라우수사 김억추 등을 불러 다짐한다.
 “우리는 함께 왕명을 받았다. 의리상 생사를 같이해야 한다. 국사(國事)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한 번 죽음을 아끼겠는가. 오직 충의에 죽는다면 죽어도 영화가 있을 것이다.”
 장수들이 모두 감격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이윽고 명량해전이 발발하던 1597년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이 군중에 갑작스레 명을 내렸다.
 “오늘 밤, 적이 반드시 습격할 것이다. 경계를 엄중히 하라.”

 ▶이순신의 기묘한 작전
 과연 적병이 야밤에 기습해왔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큰 소리로 “동요하지 마라”고 호통을 쳤다. 장군의 독려로 적은 포위망을 풀고 철군했다.
 이순신 장군은 회군(回軍)하여 명량 앞바다로 와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적선 500~600척이 바다를 온통 뒤덮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의 기묘한 전략·전술이 빛났다.
 “이 때 배를 타고 피란 나온 호남의 백성들이 장군의 진영 아래 모여 있었다. 장군은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으로 인해 먼저 백성들의 피란선(避亂船)들로 하여금 차례로 물러가 배열하여 진을 치게 했다. 적군에게 피란선을 전선(戰船)이라 거짓으로 알게 만든 것이다. 장군은 피란선을 의병(疑兵)으로 삼은채 자신은 전함을 거느리고 맨 앞에 나가 있었다.”
 장군의 작전에 현혹된 왜적들은 일제히 노를 재촉하여 명량 바다를 뒤덮었다.
 “이 때 아침 조수가 막 밀려나가서 항구의 여울물이 매우 급했다. 거제 현령 안위가 조수를 따라 내려가다가 빠른 바람세를 타고 배가 쏜살같이 달려 곧장 적진 앞에 돌진했다. 적이 사면에서 포위했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돌전(突戰)했다.”
 장군은 병사들을 재촉하여 안위를 엄호하도록 하면서 적선 31척을 격파했다. 적이 주춤하면서 약간 후퇴하자 장군은 노를 치면서 기세를 몰아 진격을 명령하니 승승장구했다.
 “적들은 죽을 듯이 소리만 외칠뿐 감히 대적하지 못했다. 적은 군대를 죄다 거느리고 도망쳤다. 장군은 보화도(고하도·고화도)로 옮겨 진을 쳤다.”
 이것이 <백사집>에 실린 명량대첩의 전말이다.

 

   ■<백호전서>
 <백호전서>는 조선 중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윤휴(1617~1680)의 문집이다.
 <백호전서 23집 ‘사실(事實)’에 실린 ‘통제사 이 충무공의 유사(遺事)’를 더듬어 보자.
 “1597년 8월 이순신 장군이 다시 통제사가 되자 놀라며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성한 사람들은 일제히 자기 집에 이렇게 고했다.
 “공(公)이 왔으니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공을 따르겠다.”
 장군이 보성에 이르자 따라붙은 장사가 100여 명이었다. 장군은 명령을 따르지 않은 수군절도사 배설의 남은 배 10여 척을 접수했다. 장군은 훗날 명령에 따르지 않고 도망친 배설을 참수했다. 장군은 수백여척의 피란민 배를 허장성세로 늘어서게 한 다음 전함 10여 척을 그 앞에 배치했다. 이렇게 적을 속인 장군은 진도의 벽파정 아래서 적을 맞아 싸웠다.

 ▶백성들의 피란선을 전선으로 위장
 중과부적으로 넓은 바다에서 교전하기 어려웠기에 벽파정 아래 좁은 목을 지키면서 형세를 이용한 것이다.
 이 때 적선 300 여 척이 명량을 경유, 곧장 아군 진영으로 진격한다는 첩보가 있자 장군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방어했다,
 중과부적으로 장수들이 모두 퇴각하려 했을 때 장군이 바다 한복판에 배를 머물러두고 꼼짝하지 않았다. 적들이 그것이 대장선(大將船)임을 알고는 마침내 수백 척의 배를 가지고 차츰 죄어 들어왔다. 형세가 더욱 긴박해지자 장군이 대장기로 지휘하면서 나가 싸울 것을 독려했다.
 “이 때 거제 현령 안위(安衛)가 싸움을 버티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장군은 뱃머리에 서서 크게 고함을 질러 ‘안위의 머리를 잘라오라’고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안위가 이 말을 듣고 심기일전하여 적진에 돌입했다. 안위가 적과 교전하다가 배가 곧 함몰되려 할 즈음, 장군이 또 배를 돌려 그를 구해주었다.”
 안위는 역시 사력을 다해 싸웠고, 포시(대포와 화살)를 사방에서 발사하여 적병이 즐비하게 쓰러져 마침내 적을 크게 패배시켰다. 이 때 적의 맹장 마다시(馬多時·구루지마)를 사로잡아 참수하였고, 적선 30여 척을 부쉈다. 죽은 적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나머지 백성들은 포위를 풀고 도주함으로써 우리 군성(軍聲)이 다시 크게 떨쳤다.

 ▶‘환호성 터진 백성들의 전투구경’
 멀리서 이 전투를 지켜보던 수 만의 백성들은 처음에는 극도의 불안감에 빠져있었다
 “적들이 아군을 사방에서 포위하여 포성이 바다를 진동하고 검광(劍光)이 햇볕을 요동시키는 듯했다. 싸움을 구경하던 수만 명이 아군을 바라보고 통곡했다. 적들은 교대로 나가고 물러가고 하면서 온종일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적은 군대로 많은 적병을 상대하여 끝내 큰 승첩을 거두었다. 날이 저물고 전쟁이 끝난 뒤 적병들이 모조리 섬멸되고 아군의 배만 우뚝 서있어 망루(望樓)도 파손되지 않았음을 보고는, 이날 관전했던 사람들이 몹시 감탄하여 진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명량대첩의 낭보가 조정에 올라가자 선조 임금이 이순신에게 숭품(崇品)에 올리려고 했다. 그러자 어떤 자가 “이순신의 작질(爵秩)이 이미 높다”고 질투했다. 때문에 선조는 제장(諸將) 이하에게만 포상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임금과 신하들이다.

 

   ■<연려실기술>
 <연려실기술>은 실학자 이긍익(1736~1806)이 약 30년 동안 400여 가지에 달하는 야사에서 자료를 수집·분류하고 원문을 그대로 기록한 역사서이다.
 <연려실기술> ‘선조조고사본말·이순신 진도에서 이기다’의 명량대첩 기록을 살펴보자.
 “원균 부대가 패전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조정과 민간이 크게 놀랐다. 선조가 대책이 뭐냐고 물었지만 모두들 두려워 하여 어쩔줄 몰라했다. 이 때 경림군 원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이 입을 뗐다.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를 시키는 방법 외에는 다른 수가 없습니다.'”
 선조는 할 수 없이 이순신에게 삼도 수군통제사의 벼슬을 회복시켜 주었다. 이순신은 배설(1551~1599)이 12척의 병선을 거느리고 후퇴했다는 진도 벽파정으로 달려갔다.
 “1597년 9월 뇌도수(구루지마)가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진도에 도착하였는데, 이순신은 명량(鳴梁)에 머물며 진을 치고 피난선 백 여 척을 모아서 가짜로 성세를 이루었다. 적이 이르니 순신은 거짓으로 싸우지 않는 것처럼 하였다. 적은 우리 군사의 형세가 약한 것을 보고 다투어 와서 덮쳐 둘러싸고 바싹 가까이 와서 싸웠다.”
 이 때 갑자기 장군의 배에서 태평소를 불고 깃발이 일제히 일어나며, 바람을 따라 불을 놓으니 불이 적의 여러 배에 옮겨 붙었다. 순신은 드디어 이긴 기세를 타고 공격하니 죽는 자가 삼대 쓰러지듯 하였다. 장군은 먼저 뇌도수의 머리를 베어서 돛대 위에 걸어 놓으니 장졸들은 용기를 뽐내고 의기가 백배나 되어 달아나는 자를 쫓아서 수백여 명을 베어 죽였다.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셀 수없이 많았다. 적군은 겨우 십여 척으로 도망갔고 우리 배는 모두 탈이 없었다. 그 뒤에 적이 싸움을 말할 때마다 반드시 명량(울돌목) 전투를 말하였다. <일월록>과 <조야기문>에는 적장을 마다시(馬多時)라고 기록했다.

 

   ■<재조번방지>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는 조선 중기의 학자 신경(申炅·1613~1653)이 임진왜란 전후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 등을 정리한 책이다.
 이순신은 홀로 쇠잔한 군사로 13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벽파정(碧波亭) 앞 바다에 주둔하고 있었다. 보는 사람이 위태롭게 여겼지만 밤낮으로 엄히 경계하여 갑옷을 벗은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밤 장군이 갑옷 입은 채로 북을 베고 누웠다가 문득 일어나 앉아서 소주를 한 잔을 마시고 모든 장수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오늘밤 달빛이 매우 밝다. 왜적의 꾀가 간사스러움이 많아서 달이 없을 때라면 본래 우리를 습격하겠지만 달이 밝아도 또한 와서 습격할 듯하니, 경비를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호각을 불어 모든 배에 닻을 올리게 하고 또 모든 배에 전령하여 척후를 세우고 변을 기다리게 하였다. 얼마 후에 초탐선(哨探船)이 왜적이 온다고 급히 보고하니 이순신이 호령하여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게 하였다. 이때에 달이 서산에 걸려 산그림자가 바다에 기울어 반쪽은 어두컴컴한데, 무수한 적석이 컴컴한 곳을 따라와서 우리 배에 접근하려 하였다. 
 이에 중군(中軍)이 화포를 놓고 고함을 지르자 모든 배가 호응하니 적이 방비가 있음을 알고 일시에 조총을 쏘아대어 소리가 바다를 진동하였다. 이순신이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적이 드디어 감히 범하지 못하고 물러 달아나니 여러 장수가 모두 탄복하여 귀신같이 여겼고 이순신 또한 우수영(右水營) 명량(鳴梁) 바다 가운데로 회군하였다.
 “날이 밝아서 바라보니 적선 500~600척이 바다를 덮어 올라왔다. 그 장수 마다시(馬多時·구루지마)는 원래 수전(水戰)을 잘한다고 일컫는 자여서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순신은 적은 수효가 많고 우리는 적어서 힘으로 싸워 이기기는 어려우므로 꾀로써 격파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일찍이 배를 타고 피난하던 호남 지방 사람들이 모두 순신에게 의지하여 목숨을 보전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 피란온 배로들을 이용했다. 차례차례로 물러가서 늘어세워 포진하게 하여 의병(疑兵)을 만들어 바다 가운데를 왔다 갔다 하게 했다. 장군은 스스로 전함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바로 나왔다.
 적은 이순신이 배를 정비하여 나오는 것을 보고, 각자 노를 저으며 북을 울리고 소라를 불면서 용기를 내어 곧장 나오는데 깃발과 망대(望臺)가 바다 가운데 가득하니, 우리 군사가 보고 실색하였다.
 “아침 조수가 바야흐로 물러갈 때여서 항구에 물살이 거세었다.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가 조수를 따라 내려가는데 바람이 빨라 배가 쏜살같이 달려 곧바로 적의 앞을 충돌하니, 적이 사면으로 에워싸므로 안위가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하였으나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이순신이 모든 배를 독려하여 잇달아 진격하여 먼저 적선 31척을 격파하니 적이 조금 퇴각하였다. 이순신이 돛대를 치면서 여러 사람에게 맹세하고 이긴 기세를 타서 진격하니 적이 감히 당해내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도망하므로 이순신 또한 진을 보화도(寶花島)로 옮겼다. 이 때에 이순신이 이미 전사(戰士) 1000명을 얻었다.

 

  ■난중일기
  ▶1597년 신유일 8월 3일
 맑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그것이 곧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서장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하동읍 두곡리)로 가는 길로 곧바로 갔다.
 초저녁에 행보역(하동군 횡천면 여의리)에 이르러 말을 쉬고, 한밤 자정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 했다.
 남해현령 박대남은 길을 잘못 들어 강정(하동읍 서해량 홍수통제소 서쪽 섬진강가)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기다렸다가 불러와서 쌍계동(화개면 탑리)에 이르니,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 있고 비가 와 물이 넘쳐 흘러 간신히 건넜다.
 석주관(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니, 이원춘과 유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를 보고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했다.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구례읍 북봉리) 밖에 전날의 주인집으로 가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갔다고 했다.
 손인필ㆍ손응남이 와서 보고, 올감[早枾]을 가져왔다.
 
 ▶1597년 병자일 8월 18일
 맑다.
 회령포(대덕읍 회진리)에 갔더니 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삼고서 와 보지도 않았다.
 관사에서 잤다. 전선은 단 열 척 뿐. 전라우수사 김억추를 불러 병선(兵船)을 모으게 했다. 또 여러 장수들에게 “전선을 거북배로 꾸며서 군세를 돋구도록 하라”고 명했다. 또 “우리들이 임금의 명령을 같이 받들었으니 의리상 같이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한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아까울 것이냐!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굳게 약속했다.
 
 ▶1597년 을유일 8월 27일
 맑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다.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다.
 나는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고 말했다.
 
 ▶1597년 병술일 8월 28일 
 맑다.
 예상밖에 적선 여덟 척이 들어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었다. 경상수사는 도망하려 했다.
 나는 꼼짝도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따라잡도록 명령했다. 적선이 물러갔다.
 추격하여 갈두(해남군 송지면 갈두)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진을 장도(노루섬)로 옮겼다.
 
 ▶1597년 경인일 9월 2일
 맑다.
 오늘 새벽,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갔다.
 
 ▶1597년 을미일 9월 7일
 바람이 그쳤다.
 탐망군관 임중형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도착했다. 우리 수군을 도모하려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각 배들에게 엄중히 경계하도록 했다.
 오후 4시쯤 적선 13척이 곧바로 우리 배로 향해 왔다. 우리 배들도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 맞서 공격했다. 그러자 적들이 배를 돌려 달아나 버렸다. 뒤쫓아 먼 바다까지 갔지만, 바람과 조수가 모두 거슬러 흐르므로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오늘 밤 적의 야습이 있을 것 같았다. 각 배에 경계태세를 갖추라고 하였다.  역시 밤 10시 쯤에 적선이 포를 쏘며 공격해왔다.
 우리 배들이 겁을 먹는 것 같아 다시금 엄명을 내린 뒤 내가 탄 배가 곧장 적선 앞으로 가서 포를 쏘았다. 그랬더니 적이 자정에 물러갔다.
 
 ▶1597년 임인일 9월 14일
 맑다.
   “적선 200 여 척 가운데 쉰다섯 척이 미미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는 정탐이 있었다.
 또 “적에게 사로잡혔던 김중걸이 전하는데 김중걸이, 이달 6일 달마산으로 피난갔다가 왜놈에게 붙잡혀 묶여서는 왜선에 실렸습니다. 김해에 사는 이름 모르는 한 사람이 왜장에게 빌어서 묶인 것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날 밤 김해 사람이 김중걸의 귀에다 대고 하는 말이, ‘조선 수군 10여 척이 왜선을 추격하여 사살하고 불태웠으므로 할 수 없이 보복해야겠다. 그리하여 여러 배들을 모아 조선 수군들을 모두 몰살한 뒤에 한강으로 올라가겠다’고 하였습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비록 모두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수도 없지 않으므로,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보내어 피난민들을 타일러 곧 뭍으로 올라가라고 하였다.
 
 ▶1597년 계묘일 9월 15일
 맑다.
 중과부적의 군대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다.
 그래서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고 했으며,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라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너희 여러 장수들이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지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고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신인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일러 주었다.
 
 ▶1597년 갑진일 9월 16일 
 맑다.
 아침에 별망군이 와서 “적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곧장 우리 배를 향하여 옵니다”라고 보고했다.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330여 척이 우리 배들을 에워쌌다.
 우리 장수들이 중과부적임을 알고 후퇴해서 피할 궁리만 했다. 우수사 김억추는 물러나 아득히 먼곳에 있었다. 나는 노를 급히 저어 앞으로 돌진하면서 지자포ㆍ현자포 등 각종 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댔다. 마치 나가는 게 바람과 우뢰 같았다. 군관들이 배 위에 빽빽이 서서 빗발치듯이 쏘아대니, 적들이 감히 대들지 못하고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앞으로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잃었다. 나는 침착하게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우리 배에게는 맞서 싸우지 못할 것이다. 일체 마음을 동요치 말고 힘을 다하여 적선을 쏘아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먼 바다로 물러나 있으면서 관망만 할 뿐이었다.
  나는 배를 돌려 바로 중군장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그 목을 베어 효시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배가 뱃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차로 멀리 물러날 것이요, 적선이 점점 육박해 오면 일은 아주 낭패가 아닌가. 곧 호각을 불어서 명령 깃발을 내리고 초요기를 올렸다. 그러자 중군장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차로 내 배에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왔다.
  내가 배 위에 서서 몸소 안위를 불러 명령을 내렸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

   그러자 안위가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다시 김응함을 불러 일렀다.

   “너는 중군장의 신분으로 멀리 피해 있으면서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지만 적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려 한다."

  그러자 두 배가 곧장 쳐들어가 싸우려 했다. 그 때 적장이 배 3척을 지휘하여 한꺼번에 안위의 배로 매달려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다투었다.
 안위와 그 배에 탔던 군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어지러이 싸우다가 탈진에 이르렀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댔다. 그러자 적선 3척이 모조리 다 전복됐다. 녹도만호 송여종,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합세해서 적을 쏘았다.
 항복해온 왜적 준사란 놈은 안골포의 적진에서 투항한 자인데, 내 배 위에서 내려다보며,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놈이 적장 마다시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김돌손으로 하여금 갈구리를 던져 이물(뱃머리)로 끌어 올렸다. 준사는 펄쩍 뛰며 “이게 마다시다.”라고 하였다. 나는 곧 명령을 내려 토막으로 자르게 하니 적세가 일시에 크게 꺾여 버린다.
 이때 우리 배들이 일제히 북을 치며 진격하면서 지자포ㆍ현자포 등을 쏘고, 또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그 소리가 바다와 산을 뒤흔들었다. 적선 30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물러나 달아나 버렸다. 적은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실로 천행이다.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도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무안군 암태면)로 진을 옮겼다

 ▶1597년 을사일 9월 17일
 맑다.
 전투 후 어외도(무안군 지도면)에 이르니 피난선이 300여 척이 먼저 와 있었다.
 수군이 대첩을 거둔 것을 알고 서로 다투어 치하하고, 또 많은 양식을 가져 와 군사들에게 주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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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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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한국의 고대시인 허균의 시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속마음을 매번 밝게 비추고(肝膽每相照), 티없이 깨끗한 마음을 시린 달이 내려 비추네.(氷壺映寒月)’.”
 7월 초, 한국을 국빈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서울대 강연에서 한·중 친선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허균(1569~1618년)의 시를 인용했다.
 시 주석은 그러면서 “이 시구는 바로 중국과 한국의 친선과 우의를 상징하는 것”이라 했다. 이 시는 허균이 정유재란 때 명나라 지원군의 일원으로 파견됐다가(1597년) 귀국하던 오명제에게 보낸 ‘송별시’이다. 허균의 송별시, 즉 ‘참군 오자어(오명제의 호) 대형이 중국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送吳參軍子魚大兄還天朝)’를 더 보자.

중국의 3대 음악가로 꼽히는 정율성. 전라도 광주 출신인 그는 중국의 대표군가인 ‘중국인민해방군군가’를 작곡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간담상조, 빙호옥호
 “나라는 중외의 구별 있다지만(國有中外殊) 사람은 구별이 없는 법이네.(人無夷夏別) 태어난 곳 달라도 모두 형제니(落地皆弟兄) 초 땅, 월 땅 나눌 필요가 어찌 있으리.(何必分楚越) 간담을 매번 서로 밝게 비추고(肝膽每相照) 빙호를 찬 달이 내려 비추네(氷壺映寒月) 옥을 보고 나의 추함 알아차렸고(依玉覺我穢) 타주는 그대를 따를 수가 없었네.(唾珠復君絶)”(<해동역사> ‘예문지’ 7)
 명나라 파병군의 빈객으로 조선에 온 오명제는 조선의 명사들과 교분을 맺었다. 오명제는 서울에서 허균의 집에 머물면서 소중한 기회를 잡는다.
 “허씨 형제 세사람은 허봉·허성·허균인데 모두 문장으로 해동(조선)에 이름이 났다. 허균은 기억력이 뛰어나 해동의 시 수백편을 외었다. 또 허균의 동생(허난설헌)에게서 시 200편을 얻었다.”(오명제의 <조선시선> ‘자서’)
 허씨 형제 뿐이 아니었다. 오명제는 판서 윤근수로부터 조선의 시 수백편을 책상자로 얻었다.
 1599년(선조 32년) 다시 조선을 방문했을 때는 ‘시문에 능한’ 정승 이덕형의 집에 머물러 상당수의 시문집을 구했다.
 “정승 이덕형에게 여러 명사들의 시문집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이덕형이 신라~조선에 이르는 모두 100여 명의 문집을 구해주었다.”
 오명제는 이렇게 모은 조선의 책들을 두 달간 펼쳐보고는 좋은 시들을 뽑아 중국에 소개했는데, 이것이 <조선시선> 이다.(<해동역사> ‘예문지 4·경적 4’)
 오명제는 <조선시선>의 서문(자서)을 한음 이덕형의 집에서 썼으며, 본문 뒤에는 허균이 지은 <조선시선 후서>를 실었다. 허균이 오명제에게 전한 송별시는 이 후서에 실려 있다. 
 시진핑 주석의 언급대로 550년 전 조선인 허균·이덕형 등과 중국인 오명제 등의 끈끈한 교류는 뿌리깊은 한·중 관계의 상징일 수 있겠다.
 허균의 시처럼 티없이 깨끗한 마음으로(빙심옥호·氷心玉壺),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간담상조·肝膽相照)라는 것이니….
 

허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 허균은 정유재란 때 명나라 파견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명나라 오명제와 친분을 쌓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7월초 서울대 강연에서 허균의 시를 인용, 중국과 한국이 '속마음을 터놓는 사이('간담상조')라는 점을 강조했다.   

 ■사선을 넘나든 전우
 시진핑 주석의 서울대 강연에서 언급된 인물 가운데 몇사람만 꼽아보자. 최치원과 김구 선생 등 장 알려진 인물들을 빼고….
 “400년 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환난상조(患難相助)의 차원에서 양국의 군민이 함께 싸웠습니다. 이때 명나라 등자룡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둘 다 전사했습니다. 또 명나라 군 통수인 진린의 후예가 조선에서 뿌리를 내렸습니다.”(시진핑 주석)
 등자룡(登子龍)과 진린(陳璘)은 과연 누구인가. 시 주석의 말마따나 등자룡과 진린은 이순신 장군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였다.
 진린은 명나라 파병군의 수군도독이었다. 1598년(선조 31년) 1월 절강성 소속의 전함 500척을 거느리고 조선에 진주했다.
 이순신 장군은 진린의 중국군을 환대했다. 진린은 선조 임금에게 글을 올려 이순신 장군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통제사는 천지를 다스릴 만한 재주를 지녔고,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킬 만한 큰 공이 있습니다.(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
 진린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이 고금도에서 적선 50여 척을 불사르고 적병 100여명의 수급을 베는 장면을 지켜보고는 감사를 연발했다.
 “역시 통제사는 임금의 주석(柱石)이 도리만한 신하야. 옛날의 명장인들 어찌 이보다 나을까.”(<일월록>)  
 ‘주석지신(柱石之臣)’은 ‘나라의 기둥이 될만한 신하’를 뜻한다.

전남 강진에 있는 탄보묘. 정유재란 때 명나라 수군을 이끌고 온 진린 제독이 관우의 힘을 빌리기위해 지은 사당이다. 훗날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부총사 등자룡 등을 함께 모셨다. 

 ■“통제사가 죽었구나! 함께 싸울 이가 없구나
 마침내 7년 가까이 질질 끈 전쟁을 마무리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1598년 11월 19일의 이른바 ‘노량해전’이었다.
 <선조실록>, <연려실기술>, <징비록>, <난중일기> 등에 기록된 그 날의 현장을 복기해보자. 이날 이순신의 조선군과 진린의 명나라 군이 연합작전을 펼쳤다.
 “이순신 장군이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베었다. 적은 배를 모두 끌고 와서 관음포에서 싸웠다.”
 이 때 진린 도독은 사천의 적을 무찔렀다. 적이 이순신의 배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자 진린은 조선 배로 바꿔 타고 포위망을 뚫고 이순신 장군을 구원하려 했다.
 그러나 적병이 진린의 배를 포위했다. 적의 칼날이 거의 진린에게 닿을 정도였다. 진린의 아들(구경)이 몸으로 막다가 찔려 피가 뚝뚝 떨어졌는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적들이 한꺼번에 칼을 빼들고 배 위로 몰려오자 명나라군이 장창으로 낮은 자세에서 찔러댄 물에 떨어져 죽은 왜적이 숫자가 1000명을 헤아렸다. 육박전은 계속됐다.
 이순신은 진린이 포위당하는 것을 멀리서 보고 포위망을 뚫고 전진했다. 멀리 붉은 휘장을 친 적선 한 척 황금 갑옷을 입은 세 명의 적장이 전투를 독려하고 있었다.
 “이 때 이순신은 군사를 집결시켜 붉은 휘장을 친 적선을 맹공, 황금갑옷을 입은 적장 한 사람을 쓰러뜨렸다. 그러자 적선들은 진린 도독을 놔두고 그 배를 구원하러 갔다. 도독의 군사는 이 때문에 빠져 나왔다. 이순신 장군은 적의 지휘선을 다시 맹공해 산산조각냈다. 그러자 나머지 적들이 혼비백산했다.”
 이 과정에서 그만 큰 사고가 터진다. 날아오는 화살과 돌을 개의치 않고 직접 손으로 북을 치다가 그만 적탄에 맞은 것이다.
 알다시피 이순신 장군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며 비밀에 붙였다. 그러나 진린 도독이 멀리서 보고 장군의 죽음을 알았다고 한다.
 배 위에서 조선 군사들이 적의 머리를 베려고 공을 다투는 모습을 보고 “통제사가 죽었구나!” 하고 간파했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그걸 어찌 아느냐”고 묻자 진린 도독은 “통제사의 군대는 군율이 매우 셌는데 이제 그 배에서 공을 다투느라 어지러운 것을 보니 이것은 장군의 명령이 없기 때문”이라 답했단다.(<자해필담>)       
 이순신의 서거 소식에 진린은 배에서 넘어지기를 세 번이나 하면서 울부짖었다.
 “함께 싸울 이가 없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