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기근이 겹쳐 도적이 흥행하고 분쟁이 더욱 성하여 사형수가 예전보다 배나 된다. 내가 부끄럽게 여겨 깊이 반성한다.”
 1439년(세종 21년), 세종 임금이 치세에 사형수가 많다는 것은 부덕의 소치라고 반성한다. 그는 의정부에 “고의 살인이 아닌 과실치사와 전과 3범의 절도 등은 형량을 좀 감해주면 안되겠냐”고 하문한다. 미집행 사형수가 자신의 치세에서 190명에 이르자 특별사면령을 고려한 것이다.
 하지만 영의정인 황희를 비롯한 대신들은 격론 끝에 ‘불가하다’는 의견을 모은다. 

구한말 태형을 가하는 모습.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의 시대에 사형수가 190명에 달했고, 능지처사를 당한 이도 60명에 이르렀다. 

■사형수가 190명이나 되다
 “전하, 송나라 주희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벼운 형벌을 미덕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형벌이 가벼울수록 패역하여 작난(作亂)의 마음만 자라게 됩니다.’라고…. 결국 이들이 살아나면 모두 범죄를 가볍게 여겨 범법행위가 날로 늘어날 것입니다.”
 결국 세종의 사면령은 대신들의 반대로 공포되지 못했다. 이 대목은 매우 흥미롭다.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의 시대에 사형수가 감옥에 넘쳐나 190명이나 됐다니 참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 뿐이 아니다. 이상한 대목은 또 있다. 세종 시대에 도적이 창궐했다는 것이다.
 “한양 한복판에서 도둑이 끊이지 않습니다. 근심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거리 위에 들립니다. 내탕(內帑)의 금작(金爵)과 봉상시의 은찬(銀瓚)까지도 털립니다.”(<세종실록> 1436년)
 사간원의 상소문을 보면 매우 심각하다. 문제는 “이들을 잡아도 곤장 몇 대와 자자형(얼굴에 죄명을 새기는 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벌을 받은 그 날부터 다시 백성들을 해치는 일이 일어납니다. 온 백성들이 이를 원망하며 그 고기를 씹고자 해고 어쩔 줄 모르고….”
 얼마나 도적이 창궐했으면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탕고에서 금으로 만든 술잔(금작)이 털리고, 제사를 관장하는 봉상시에서 제기(은찬)까지 도둑맞았을까.
 “대명률에 따르면 ‘절도 3범의 경우 교수형에 처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국가의 경사나 수재, 혹은 한재 등의 이유로 대사면령이 내려집니다. 전과가 말소되면 그 날로 다시 도둑으로 되돌아가, 10여 범에 이르러도 형벌을 받지 않는 자가 수두룩합니다.”

 

 ■‘도적의 발뒤꿈치를 잘라라’
 대신들의 아우성은 대단했다. 결국 세종은 대신들이 내민 계책을 받아들이고 만다.
 “범죄를 저지르는 자에게 한쪽 발의 힘줄을 끊는 단근형(斷筋刑)의 벌을 내리면 좋습니다. 팔다리를 끊는 것이 아니라, 그 억세고 날랜 힘만 꺾을 뿐입니다. 그러니 생업에는 방해되지 않습니다.”(1436년)
 요컨대 다시는 도적질을 못하게 발뒤꿈치 힘줄을 끊어버리는 단근형을 시행하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범죄가 줄어들었을까. 
 아니었다. 중형을 가했지만 범죄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자 형조는 더욱 강력한 처벌책을 마련했다.
 단근형을 당한 뒤에도 절도하는 자는 다리 양쪽의 힘줄을 모두 끊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세종은 결국 다시 이 안을 추인했다.(1437년)
 그래도 도적질이 근절되지 않자 양발의 발뒤꿈치 힘줄은 물론, 왼발의 전근(前筋)까지 끊는 형벌을 마련했다. 세종은 또 한번 의정부의 상소를 따랐다.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중국으로 망명한 뒤 자객에 의해 피살된 김옥균. 그는 대역죄인의 죄명으로 사후에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60명에 이른 능지처사자 
 단근형은 그래도 약과였다. 놀라지 마라.
 “사노 매읍동이 본주인을 때려 죽였으므로 능지처사 시켰다.”(1418년)
 “간부(姦夫)와 짜고 본남편과 시어미, 그리고 딸을 살해한 북청 여인 금슬을 능지처사했다.”(1439년)
 무슨 이야기인가. 해동의 요순이며, 그 누구보다 백성을 긍휼히 여겼다는 세종대왕 때 능지처참의 극형을 받은 자가 60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기자가 <세종실록>에서 ‘능지처사’, ‘능지처참’, ‘거열’ 등의 단어로 검색해보니 능지처사 51명, 능지처참 7명, 거열 2명이 검색됐다.
 이들 가운데 절대다수(58명)는 주인과 부모, 남편을 살해한 이른바 강상죄인들이었다. 모반이나 대역 죄인은 2명에 불과했다. 물론 신분과 효를 최고가치로 여기는 유교국가에서 패륜의 범죄인 강상죄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래도 능지처사는 심하지 않을까.
 1424년(세종 6년), 임금은 “백성이 법을 어기더라도 형벌은 조심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그런데 바로 이날 임금은 병든 남편을 죽이고. 주인의 아들을 살해한 범인 2명을 능지처사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너무나 다른 얼굴이 아닐 수 없다.
 또 있다. 세종은 장인을 독살한 사위와, 그 독살 사실을 알고도 방관한 피살자의 딸, 그리고 후처를 능지처사시킨다. 그러나 장인을 죽인 사위가 능지처사 당하는 것을 그렇다치지만 살해를 방관했다는 죄목으로 딸과 후처까지 능지처사라는 극형을 내린 것은 너무 심한 판결이 아닌가.  

 

 ■고문에 허위자백까지 받아낸 세종
 심지어 1430년(세종 12년), 내연남과 공모해서 본남편을 살해한 원비라는 여인이 능지처사를 당했다.
 그런데 그 사건을 기록한 <세종실록>을 보면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국문 때 원비에게 매질을 17차례, 압슬(壓膝)을 5차례나 했다. 그런데도 원비는 자백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은 나중에는 장형도 실시하지 않았는데도 자백했다. 사람들은 허위 자백이 아닌가 의심했다.”
 결국 이 원비라는 여인은 무진 고문 끝에 허위자백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압슬은 무릎에 자갈을 깔고 널판을 올려놓은 뒤 사람이 올라가 짓밟는 고문이다.
 여인에게 능지처사의 극형을 선고하고, 내연남에게는 그보다 한 단계 밑인 참수형에 처한 것도 실은 옳은 판단이라 할 수 있을까.
 이쯤해서 사마천의 <사기> ‘혹리열전’을 떠올려본다. “법망이 촘촘할수록 백성의 간교함은 도리어 악랄해졌다”는 대목 말이다.
 “법령은 다스림의 도구일 뿐이다. 진나라 때 법망이 치밀했지만 간사함과 거짓은 싹이 움트듯 일어났다.”
 사마천은 이 대목에서 진나라의 가혹한 법령을 두고 “불은 그대로 둔채 끓는 물만 식히려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법망은 배를 집어삼킬만한 큰 고기도 빠져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너그러워야 한다.”
 사마천은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마디 더한다.
 “법으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릴 때 백성들을 무슨 일을 저질러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오로지 도덕으로 이끌고 예로 다스릴 때 백성들은 비로소 그 부끄러움을 알고 바른 길을 간다.”(<사기> ‘혹리열전’)

 

 ■불은 두고 꿇는 물만 식히려 한 세종
 물론 공자는 “형벌 대신 도덕으로 다스리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한비자>가 “옛날 상나라의 법도엔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았을 때는 그 손을 잘랐다(棄灰于公道者 斷其手)”고 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단다.
 “이것이 치국의 도리(此治道也)이니라.”
 세종 시대에 사형수가 190명, 능지처참을 당한 이가 60명에 이른다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게다가 한쪽 발 뒤꿈치 힘줄을 자르는 단근형도 모자라, 양쪽 뒤발꿈치, 아니 더나아가 왼발 앞쪽의 힘줄까지 자르게 된 상황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세종은 결국 사마천이 말한 대로 ‘불은 그대로 두고 끓는 물만 식히려 한(救火揚沸)’ 법집행에 머문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해동의 요순’답지않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대증 요법으로 창궐한 도적떼들을 없애려 한 것은 아닐까.
 이 시간, 그 옛날 순임금이 관리들에게 입버릇처럼 했다는 말을 떠올린다.
 “신중하라. 신중하라. 오로지 형벌은 신중히 해야 하느니라.(欽哉 欽哉 惟刑之靜哉)”(<사기> ‘오제본기’)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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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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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행어사가 평생 다녔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야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 살 수 있을 것 아니오.”
 1822년(순조 22년), 평안도 지방을 돌던 암행어사 박래겸이 어느 마을을 지날 때였다. 길가 집에서 “젖 달라”고 우는 갓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박래겸은 귀를 쫑긋 세웠다. 아이를 달래던 할머니가 “울지마라 암행어사 오신다”고 하지 않은가. 넌즈시 할머니에게 물었다.
 “아이가 어찌 암행어사가 무서운 줄 안단 말이오?”
 “말도 마시오, 요즘, 이 고을에 암행어사가 출두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 소문 때문에 관리들과 토호들이 벌벌 떨고 있다오.”(박래겸의 <사수일기>) 

 암행어사에 임명된 추사 김정희가 1826년 활동내용을 정리해 조정에 제출한 보고서. |경향신문 자료

■암행어사의 장탄식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평생토록 암행어사가 마을을 다녔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전했다.
 또 하나의 사례. 암행어사(박래겸)가 평안도 지방을 휘젓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지자 어이없는 사건이 터졌다. 관서 지방의 토호인 황명조라는 인물이 사촌형을 찔러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었다. 사건의 전말인 즉은 황명조가 사촌형(황겸조)의 밀고로 암행어사의 내사를 받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홧김에 이같은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암행어사 박래겸은 황명조를 내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발이 저렸던 지방의 토호가 지레 끔찍한 살인-자살사건을 저지른 것이다. 이처럼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메시아’로 비쳤지만,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들에게는 ‘지옥의 사자’였다.
 암행어사 박래겸이 전한 18세기 백성들의 삶은 고단했다. 예를 들어 그가 목격한 백성들의 얼굴은 굶주림에 누렇게 떠있었고, 구걸하는 나그네들이 많았다.
 곳곳에서 암행어사가 온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러나 길가던 백성들은 “암행어사가 돈다는 소문이 들리지만 아마 관가와 아전들은 서울과 내통해서 이미 암행어사 출두소식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냉소를 퍼부었다. 불신의 끝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함종(평남 강서군)에서의 일화가 가슴을 때린다.
 “곡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러나 곡식의 질이 형편없었다. 백성들이 ‘암행어사가 온다는데 이렇게 장난을 치느냐’고 항의했다. 그러나 아전들인 콧방귀를 뀌면서 ‘어찌 이렇게 시끄러우냐’고 도리어 호통을 쳤다. 백성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흩어졌다.”
 박래겸은 바로 ‘환곡의 폐해’를 목격한 것이다. 환곡은 원래 춘궁기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고 가을 추수 때 받는 진휼제도였다.
 하지만 당시 지방 수령들은 빌려줄 때는 거친 곡식을 주고, 가을에 좋은 곡식을 돌려받는 등의 수법으로 백성을 수탈했다. 그는 일기에 “심하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하소연할 때가 없구나!”라고 장탄식했다.

 

 ■“남대문 밖에서 뜯어봐라”
 사실 조선시대에는 왕권을 대행해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행위는 지방수령들에게 전적으로 일임했다. 관찰사는 그런 수령들을 규찰하고 통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사헌부가 각 지방에 감찰을 파견하거나 지방에 분대를 설치하기도 했다. 중종 이후에는 사헌부 감찰이 파견되지 않고 어사가 지방 관리들을 규찰했다. 그런데 효과적인 규찰을 위해 명종 때부터 암행규찰이 허용됐고, 이후 암행규찰을 원칙으로 하는 암행어사가 파견된 것이다.
 이후 선조 때부터 19세기 말까지 3세가 동안은 암행어사가 지방감찰의 유일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임금은 암행어사에게 봉서(封書)와 사목(事目), 마패(馬牌)와 유척(鍮尺) 등을 직접 하사했다.
 봉서(封書)의 겉봉에는 ‘도남대문외개절(到南大門外開切)’, ‘입도개견(入到開見)’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말 그대로 남대문 혹은 동대문 밖에서, 혹은 임지에 도달해서 봉투를 열어야 했다. 당연히 집에도 알리지 않고 즉시 떠나야 했다. 이유가 있다. 암행어사 임명 사실을 알고, 임지까지 밝혀질 경우 그 소문과 정보가 해당지역에 삽시간에 퍼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암행어사를 방해하라
 암행어사는 박래겸이 그랬듯이 헤진 옷과 부서진 갓을 쓴 추레한 선비 모습으로 떠나야 했다.
 과거에 낙방하고 산수를 돌아다니는 선비행색을 하면서 각 지방을 규찰했다. 때에 따라서는 신분이 노출되는 위기도 겪곤 했다. 박래겸의 경우도 가짜 암행어사로 몰려 포박당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할 수 없이 마패를 꺼내 암행어사임을 알렸다. 그를 쫓던 시람들이 흙빛으로 변해 마치 혼비백산 흩어졌다.”(<서수일기>)
 심지어는 암행어사를 사칭하고 아전과 백성들을 공갈 협박하는 무리도 생겼다.
 어사의 규찰활동을 고의로 방해하는 사례도 심심치 않았다.
 예컨대 1525년(중종 20년), 황해도 암행어사 조종경이 강령현(황해도)에 갔을 때 그 지방 수령이 성문을 닫아걸고 말았다. 조종경은 할 수 없이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 샅샅히 수사해서 많은 불법문서들을 찾아냈다.
 1539년(중종 34년)에는 암행어사가 압수한 불법문서를 지역 수령이 다시 훔쳐간 황당한 케이스도 있었다.
 “강원도 어사 송기수가 아룄다. ‘강릉에서 압수한 문서 3건을 책상 위에 봉해서 올려놓았는데 누가 다른 봉서로 바꿔치기 해놓았습니다. 다른 향교를 압수수사했는데 다른 봉서마저 도둑맞았습니다.”

 

 ■토호, 지방관리의 반격
 암행어사 출도의 위력은 대단했다. 박래겸이 순안현에서 ‘암행어사 출도’를 외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바람처럼 날고 우박처럼 흩어졌다”고 한다. “문루에 오르니 온 성의 등불이 켜졌을 정도”였고, “각 관청은 텅 비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관리들과 토호들의 반격도 만만치는 않았다.
 암행어사에게 부조리를 고발한 자가 보복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예컨대 1516년(중종 11년), 평안도 선천의 한 백성이 평안도 어사 홍언필에게 수령의 비행 사실을 고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홍언필이 막상 선천에 도착해 보니 고한 사람은 옥에 갇혀있었고, 다른 백성들은 이미 도피해서 만날 수가 없었다. 홍언필의 보고를 받은 중종은 “보복이 두려우니 백성들이 도망한 것”이라고 앙앙발락하면서 선천군수 우행언을 잡아 추고했다.
 또 인조 때 전라도 암행어사 이계는 염찰결과 나주목사 구봉서의 불법을 적발, 처벌을 건의했다.
 문제는 훗날 이계가 선천부사로, 구봉서가 평안감사로 각각 임명됐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구봉서가 이계의 직속상관이 된 것이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격이 됐다. 이것이 비극을 불렀다. 구봉서가 “이계가 청나라 장수 용골대 진영에서 국익에 반하는 발언을 했다”고 고변한 것이다. 이 때문에 역적죄로 몰린 이계는 아버지·아들과 함께 3대가 처형 당했다. 훗날 이계의 손자 이선이 “구봉서의 모함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상소문을 올렸다. 하지만 3대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었다.     

 

 ■성접대까지도 자행
 피감기관들은 온갖 수단을 다해 암행어사를 타락의 유혹으로 빠뜨리고자 했다. 공공연한 성접대까지 자행했다.
 박래겸의 예가 대표적이다. 평안도 용강현에서 암행어사 출도를 외친 1822년 5월, 박래겸은 용강현 수령이 보낸 향염이라는 기생과 하룻밤 동침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박래겸은 성천군의 부용과 경란, 평양의 만홍 등 무려 4명의 기생과 동침하고 잔치까지 벌이는 일탈행위를 벌였다.
 심지어 그해 6월20~21일에는 서울에서도 유명했던 부용을 불러, 고을 수령이 제공한 유람선까지 타면서 시와 노래를 읊고 불렀다.
 피감기관장이 제공한 성접대에 흠뻑 빠졌다면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감사기간 중) 기생과 잤다”고 공공연히 말할만큼 허용된 관행이었던 것 같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서도 박래겸은 평안남도 수령(48명) 가운데 4분의 1에 달하는 12명을 적발했다. 그 중에는 그와 친분이 있던 순안 현령 이문용은 봉고(封庫·부정부패를 저지른 관청의 창고를 관고를 잠그는 것)의 처벌을 내렸다. 그러면서 “못할 짓이지만 (그의 탐학이 심해) 어쩔 수 없었다”(5월16일)고 괴로움을 토로했다. 나름 흐트러짐없는 공정한 감사를 진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암행어사까지 뇌물 받았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갈수록 암행어사 파견의 효과는 반감됐다.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갈수록 심해졌고, 암행어사들마저 뇌물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 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박래겸이 적발한 안주 목사 서준보는 불과 5개월 뒤인 1822년 12월, 버젓이 재기용됐다. 순조는 이를 두고 “지난번 처분은 암행어사의 서계에 서론됐기 때문이지 참으로 죄가 있어 법을 적용한 것은 아니다”라고 변명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약시 순조 때의 일인데, 사간 윤석영이 암행어사들의 불법행위를 보고하면서 처벌을 건의했다.(1833년)
 “경기도 암행어사 이시원이 경기도 37고을 가운데 20여 곳이나 암행어사 출도를 외쳤는데…. 그러나 이시원을 접대를 받고 역마를 바꿔 타는 데서 끼친 폐단은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잠행(潛行)의 의(義)를 크게 어겼습니다. 성묘한다면서 위세를 부리고, 제물을 마련했으며, 벌초할 때에는 역군을 징발했고….”
 그러나 순조가 무엇이라 했냐면….
 “남을 너무 심하게 논박하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그대의 말이 또 이에 가깝지 않겠는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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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우리나라 인심을 살펴보면 밖으로 큰소리만 일삼고 있다. 우린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1621년, 광해군이 하늘이 꺼질 듯 장탄식한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급박했다. 명나라는 요동 전투에서 신흥강국 후금에 의해 줄줄이 패해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공론은 여전히 다쓰러져 가는 명나라 편이었다. 후금을 오랑캐의 나라로 폄훼하면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절묘한 등거리 외교로 균형을 잡아온 광해군으로서는 이같은 공론이 한심했다.
 “명나라 장수들이 차례로 적(후금)에게 항복하고 있다. 심지어 요동사람들이 명나라 장수를 포박해서 후금군에 넘겼다고 한다. 중국의 형세가 이처럼 급급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인심은 큰소리만 치고….” 

고려 외교의 전통을 쌓은 서희의 묘. 서희는 세치혀로 거란80만대군을 물리쳤고, 강동 6주까지 덤으로 얻는 외교사상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면서 광해군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제발 고려(의 외교)를 배우라”고….
 “이럴 때(명청교체기), 고려처럼 안으로 스스로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쓴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한심하다. 무장들 모두 겉으로는 결전을 벌이자고 하면서 막상 서쪽 변경에 가라면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 두려워 한다. 이 또한 고려와 견주면 너무도 미치지 못한다.”(<광해군일기>)
 광해군은 ‘고려처럼’만 하면 강대국끼리 충돌하는 격동기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광해군은 ‘고려의 외교’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멘붕에 빠진 고려조정
 그랬다. 고려의 외교술은 대단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외교관’이라는 서희의 후예들이 아닌가.
 고려의 외교에 주춧돌을 놓은 서희의 외교술을 되돌아보자. 993년(고려 성종 12년) 10월,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의 대군이 고려를 침공한다.
 고려군도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 문하시랑 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방어군을 편성했다. 거란의 선봉은 파죽지세로 고려 서북방 봉산군(황해도 북서)을 점령했다. 서희가 봉산군을 구원하려 나설 즈음, 거란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한 이유를 퍼뜨리고, 몇 차례에 걸쳐 고려에 문서를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거란이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다. 그런데 고려가 거란 강토의 경계를 침탈하기 때문에 정벌하는 것이다. 80만 대군이 짓밟을테니 속히 항복할지어다.”
 그러자 고려 조정은 ‘멘붕’에 빠졌다. “빨리 군신을 이끌고 항복하자”고 아우성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서경 이북(평양)을 거란에 떼주고 황해도 황주~절령까지를 국경으로 삼자”는 자들도 있었다. 다급해진 성종(고려)은 땅을 떼어주자는 이른바 ‘할지론(割地論)’을 채택하려 했다.
 “서경 땅을 떼어주려던 임금은 서경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었다. 그럼에도 곡식이 많이 남자 적군의 수중에 들어갈까 두려워한 나머지 대동강에 던져 버리도록 명했다.”(<고려사절요>)

 

 ■“거란의 엄포는 공갈”
 이 때 서희가 손사래를 치고 “절대 아니되옵니다”라고 소리치며 급히 나섰다.
 “먹을 것은 백성의 생명인데, 어찌 쌀을 버리십니까. 차라리 적에게 이용되는 편이 낫지, 강물에 던지는 것은 하늘의 뜻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 서희는 냉정한 시각으로 상황을 판단·정리해서 성종에게 간했다. 서희는 처음부터 거란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바 있다.
 거란군이 진군하지 않고 자꾸 항복만 강요하며 변죽만 올리는 것이 수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거란의 항복 권유문서와 그 간의 행동을 보니 협상할 수 있을 것도 같다”고 누누이 간언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성종이 끝내 ‘할지’를 결정하자 목숨을 건 간쟁에 나선 것이다.   
 “(발해가 망한 뒤) 북쪽의 땅 수백리는 생여진(生女眞)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광종 임금(재위 949~975)이 되찾아 가주와 송성(이상 평안도)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침공한 이유는 바로 이 두 성만 빼앗는데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서희는 “거란이 고구려 옛 땅 운운하며 큰 소리치는 것은 공갈에 불과하다(其聲言取高句麗舊地者 實恐我也)”고 단언했다.
 즉 거란이 가주와 송성 등 두 개 성만 원하는데 서경 이북까지 내주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게 서희의 주장이었다. 서희는 또 “삼각산 이북은 고구려의 옛 땅이니 절대 내줄 수 없다”면서 “한번 땅을 떼어주면 그들의 끊임없는 요구에 시달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땅을 떼어주면 영원토록 수치가 될 것입니다. 원컨대 임금께서는 도성에서 기다리면서 신들이 한 번 싸움을 한 연후에 의논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요컨대 서희는 섣부른 ‘할지’를 채택하는 대신,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면서 협상에 임할 것을 주청한 것이다.  

서희가 거란 소손녕과의 회담에서 얻어낸 강동 6주. 고려는 영토를 넓혔을 뿐 아니라 고구려의 적자임을 만방에 알리는 망외의 소득을 올렸다.(그림은 '장철균의 <서희의 외교담판>, 살림, 2013'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임) 

“장기전과 협상을 겸비하자”
 서희가 나름 자신감을 보인 까닭이 있었다. 바로 만만치 않는 고려의 국방력이었다.
 고려는 태조 왕건 이래 서경(평양)을 북방기지로 삼아 주변에 여러 성책을 쌓아 방비를 단단히 해놓은 바 있다. 이후 정종-광종-경종 시대에 걸쳐 꾸준히 영토를 넓히는 등 북방정책을 이어갔다. 특히 정종 시대에는 거란에 붙들려 있던 최광윤의 보고에 따라 거란의 침략의도를 간파하고 군사 30만을 편성하기도 했다.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군비를 정비해서 좌우군을 설치하고 평북의 서북계와 함남의 동북계에 각각 병마사를 보내 방비를 튼튼히 했다. 전쟁 3년 전인 990년에는 평양부와 안성 등 11역에 쌀 9375석을 하사하기도 했다. 고려는 결국 북방의 지세에 맞는 축성과 여진족 축출의 경험을 살려 만만치 않은 전쟁억지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전쟁을 일으킨 거란으로서도 쉽사리 공격작전을 펼치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장기전’과 ‘협상’을 겸하자는 서희의 주장은 맞았다.
 거란의 소손녕은 고려의 묵묵부답이 계속되자 안융진(청천강 연안인 평안도 안주 입석면)을 공격했다. 그러나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격파됐다. 다시 기가 꺾인 소손녕은 감히 전진할 생각을 못한채 재차 항복만 권유했다.

 

 ■“누가 세치혀로 공을 세우겠는냐”
 그러자 고려 성종이 신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누가 능히 거란 진영에서 말로써 군사를 물리치고(以口舌却兵) 역사에 길이 남을 공을 세우겠느냐.”
 누구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서희가 손을 들었다.
 “신이 비록 부족하지만 한번 나서보겠나이다.”
 고려와 거란의 명예를 건 불꽃 튀기는 외교전쟁이 벌어졌다. 소손녕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소손녕은 거란 경종(969~982)의 사위이자 중국 송나라를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회담이 진행되기 전부터 양측의 심리전은 대단했다.
 적진(거란진영)에 들어간 서희는 일단 통역을 시켜 회견 때의 예절을 물었다. 준비 없이 회담에 임했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었기에 먼저 탐색전을 벌인 것이다.
 소손녕은 “나는 대조(大朝·거란)의 귀인이니 마땅히 고려사신(서희)이 뜰 아래서 (당 위에 있는) 나에게 절해야 한다”고 먼저 도발했다.
 서희 역시 결코 꿀리지 않았다.
 “무슨 소리? 뜰 아래에서 절을 한다는 것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예의가 아닌가. 두 나라 대신이 서로 마주 보는데 무슨 가당찮은 이야기인가.”
 소손녕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두 사신은 2~4차례나 신경전을 벌였지만 좀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화가 난 서희는 그냥 객사로 돌아와 누운채 일어나지 않았다. 소손녕은 이 소식을 듣고서야 뜰이 아닌 당(堂) 위에서 예를 차리도록 허락했다. 서희는 그제서야 소손녕과 대등한 자리에 앉아 본격적인 회담에 나섰다. 

강화도에 있는 고려 고종의 홍릉. 강화도 정부를 이끌었던 고종도 끈적끈적한 외교로 세계최강 몽골을 골치아프게 했다. 

■서희와 소손녕의 피말리는 외교전
 회담 역시 팽팽한 접전으로 이어졌다. 소손녕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거란의 소유인데, 고려가 이를 야금야금 침식하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니 대국(거란)이 이를 토벌하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땅을 떼어 바치고 조회한다면 봐줄 것이다.”
 그러니까 신라 땅에서 일어나 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왜 지금은 거란의 영역이 된 고구려의 고토를 야금야금 침범하느냐는 것이었다.
 서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응수했다. 
 “그 무슨 소리인가.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다. 나라 이름을 봐라. 고구려를 계승했다 해서 고려라 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평양에 도읍을 둔 까닭이다. 또 고려가 거란의 영토를 침식하고 있다고? 아니다. 그 사이 여진이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그 때문에 고려가 거란을 찾아 조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서희는 한술 더 뜬다.
 “고려가 거란에 조회하고 조공을 바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주면 된다. 그 곳에 성을 쌓고 도로를 내면 고려와 거란이 직접 통할 수 있지 않느냐. 그렇게 되면 고려는 거란에 조빙(朝聘·알현하고 조공을 바침)을 할 것이다.”
 서희는 마지막으로 “장군(소손녕)이 거란 황제에게 고려의 제안을 알린다면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느냐”고 쐐기를 박았다.
 할 말을 잃은 소손녕은 거란 황제(성종·982~1031)에게 사실을 고하며 혀를 내둘렀다.
 “고려에서 화친을 칭했나이다. 마땅히 전쟁을 중지하심에 옳을 줄 아옵니다.”

 

 ■명분(거란)과 실리(고려)의 성과
 이것이 바로 서희가 ‘세치의 혀(三寸舌)’로 얻은, 압록강 이동 지역인 ‘강동 280리’에 건설했다는, ‘강동 6주’이다.
 고려로서는 상상도 못할 망외의 외교적 성과였다. “당신 나라에 직접 조공을 바치려면 양국 국경이 맞닿아야 하고, 따라서 가운데 양국 관계를 방해하는 여진 땅을 고려에 넘겨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니….
 무엇보다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여서 국호를 고려라 했고, 그 때문에 평양을 도읍(서경)했다고 주장함으로써 협상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한 것이다. 사실 욱일승천한 거란의 국력을 볼 때 도리어 거란이 강동 6주를 할양하겠다고 주장해도 고려로서는 쉽게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되레 세치의 혀를 놀려 궤변일 수도 있는 주장을 현실로 만들어 성사시켰으니…. 서희 외교는 전쟁에서 가장 바람직한, 싸우지 않고 승리한 외교전의 대표사례라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서희는 거란에 ‘사대(事大)’라는 명분을 내주는 대가로 군사요충지이자 고구려의 고토인 강동 6주라는 실리를 챙긴 것이다.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 서희의 가장 의미심장한 승리는 고려가 고구려의 적자임을 공식확인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의 역사는 공식적이고 객관적으로 고려의 역사로 편입된 것이다.  

고려말 대학자 이제현도 '세조(쿠빌라이)의 유훈'을 들먹거리며 원나라의 고려흡수 계획을 무산시켰다.   

■송나라를 꿈짝못하게 한 외교
 서희-소손녕 회담 이후에도 고려의 후속외교는 더욱 빛났다.
 “994년, 거란의 연호를 시행했다. 6월, 고려는 원욱을 송나라에 보내 ‘송나라와 합동작전으로 거란을 정벌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이제 겨우 북쪽 변방이 안정됐는데, 경솔하게 군사를 움직일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고려는 송나라와 국교를 끊었다.”(<고려사절요>)
 참으로 치밀하고 노련한 외교술이 아닌가. 이미 거란과의 전쟁에서 국고가 바닥나 있었던 송나라는 고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니까 고려는 송나라와의 외교관계 단절이라는 명분과 격식을 갖추면서 거란 사대에 따른 외교절차를 마무리한 것이다. 밀사를 파견해서 송나라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한 제안을 함으로써 국교단절의 책임을 송나라에 돌리는 외교술을 펼친 것이다.
 
 ■세계최강 몽골의 애간장 녹은 외교술
 서희의 명성을 이어받은 고려의 외교는 세계최강 몽골제국을 쥐락펴락, 애간장을 녹일 수준이었다.
 1231~1259년까지 고려는 막강한 몽골군의 침입에 시달렸다. 그러나 고려는 강화도 천도 이후 상황에 따라 몽골의 요구를 따르기도 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었다. 항쟁과 교섭의 이중주 외교가 빛을 낸 것이다.
 예컨대 1231년 11월, 몽골은 고려의 강화도 천도를 매우 질책했다. 그러자 고려 고종은 다음과 같은 말로 몽골을 녹인다.
 “아니, 전쟁으로 유민들이 모두 흩어지면 나라의 근본이 텅텅 비게 되고, 나라의 근본이 비게 되면 장차 누구와 함께 공물을 마련해서 상국(몽골)을 섬기겠습니까? 차라리 남은 백성들을 수습해서 섬(강화도)으로 들어가 있으면서 변변치 않은 토산물이나마 상국에 바침으로써 변방 신하의 명분을 잃지 않는 것이….”       
 고종은 더 나아가 “어디에 있든지 정성을 바치는 것이 중요하지 않느냐”면서 “우리가 천도한 이유는 바로 상국을 잘 모시기 위한 것일뿐”이라고 주장했다.
 1238년(고종 25년)에도 고려는 장군 김보정과 어사 송언기를 통해 몽골에 표문을 보낸다.
 “무력정복한다는 위협말고, 조상의 유업을 보존하게 한다면 변변치 않은 토산물이나마 해를 거르지 않고 바치겠습니다.”
 항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국(몽골)을 더 잘 모시려 천도한 것이라는데 무엇이라 하겠는가.
 
 ■고려의 핑계외교
 고려의 ‘핑계외교’는 그야말로 혀를 내두르게 한다. 1253년(고종 40년), 고려는 대장군 고열을 보내, 몽골장군 예쿠(也窟)에게 보내 육지로 환도할 수 없는 이유를 밝힌다. 그런데 그 이유를 들으면 실소를 터진다.
 “황제(몽골)의 성지를 받들려 승천부(경기 개풍) 백마산 아래 성곽과 궁실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동북 방면에 포달인(抱獺人), 즉 수달을 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서 뭍으로 나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몽골의 대군이 들어왔습니다.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시면 내년에는 고려 국왕이 신료들을 인솔하고 뭍으로 나가렵니다. 제발 군사를 돌리심이….”(<고려사절요>)
 아니 수달사냥꾼이 무서워 육지천도를 하지 못하겠다니…. 그것도 모자라 군사를 철수시키면 뭍으로 나가겠다니….
 고려는 몽골이 “왜 강화도에 성을 쌓느냐”고 질책할 때마다 “송나라 공격에 대비하려 한 것”이라든지, “해적들의 노략질 때문”이라든지, 갖가지 토를 달았다.   
 몽골로서는 지긋지긋한 고려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있다. 1256년(고종 43년) 9월, 고려 사신 김수강이 몽골 황제(헌종)에게 몽골 군대의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는 “개경에 환도해야 철수하겠다”고 거절했다. 그 때 김수강의 화술이 백미다.
 “짐승이 사냥꾼을 피해 굴 속으로 숨었는데, 그 구멍 앞에 활과 화살을 가지고 기다린다면 피곤한 짐승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김수강의 ‘절묘한 외교술’에 감탄한 몽골 황제는 무릎을 치며 군사를 철수시켰다.
 “그래, 네가 바로 참 사신이다. 마땅히 두 나라는 화친을 맺어야 한다.”(<고려사절요>)
 
 ■애자(愛子)와 진자(眞子)의 차이
 혀를 내두를 고려의 외교술은 감탄을 자아낸다.
 1241년(고종 28년), 고려는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몽골의 협박 때문에 종친인 영녕공 준을 몽골로 보냈다. 그러면서 영녕공을 고종의 아들이라 거짓으로 고했다. 훗날 이 말이 거짓으로 판명됐다.(1254년) 고려 출신인 민칭이라는 자가 고자질한 것이다. 황제가 마침 몽골에 머물던 고려사신 최린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위기에 빠진 최린의 임기응변을 보라.
 “영녕공 준은 왕의 애자(愛子)입니다. 진자(眞子·참아들)는 아닙니다. 전에 올린 표문(외교문서)를 보면 다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애자는 무엇이고, 진자는 무엇이냐. 다르냐?”
 “그럼요. 애자라는 것은 남의 자식을 길러 자기 자식으로 삼은 것입니다. 만일 소생의 자식이라면 어찌 다시 ‘애(愛)’자를 쓰겠습니까.”
 황제가 새삼스레 고려가 올린 표문을 보니 모두 ‘애자’라 돼있었다. 황제는 더 이상 고려를 문책할 수 없었다. 애자와 진자….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말장난에, 궤변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외교관 최린은 기막힌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긴 것이다.(<고려사절요>) 
 아니 어찌보면 거짓아들인 영녕공을 보내면서 고려가 만일을 위해 마련해놓은 장치였을 지도 모른다. 아들 자(子) 앞에 애(愛)자를 수식해놓은 치밀함이라고 할까.

 

 ■몽골 쿠빌라이가 반색한 이유
 그러나 고려는 28년 간의 줄다리기 끝에 화의를 결정한다.(1259년)
 고려 태자(원종)가 위독한 부왕(고종)을 대신해 뭍으로 나가 몽골로 향한 것이다. 그런데 몽골로 가던 길에 황제 헌종(몽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고려 태자는 이 와중에 훗날 원나라 세조가 되는 쿠빌라이(忽必烈)를 만나게 된다. 쿠빌라이는 반색하며 고려 태자를 맞는다.
 “고려는 만리 밖의 나라이다. 당 태종도 친히 정벌했는데 항복시키지 못한 나라가 아닌가. 이제 세자가 스스로 왔으니 하늘이 뜻이 아닌가.”
 마침 또 하나의 뜻밖 소식이 들렸다. 고려 고종이 승하했다는 것이었다. 몽골의 비서감 조양필은 무릎을 치면서 “때마침 찾아온 고려 세자를 고려왕으로 세워 귀국시키면 군사를 동원하지도 않고 한 나라를 얻는 것”이라고 쿠빌라이에게 고한다. 쿠빌라이가 벅찬 심정으로 되돌아본다.
 “넓은 하늘 아래 복종하지 않은 나라는 고려와 송나라 뿐이었는데…. 이제 송나라도 솥 속의 고기이자 장막 위 제비집 같이 멸망 직전이다. 이젠 고려도 이제 제국의 품에 들어와 조회하는구나.”(<고려사절요>) 
 쿠빌라이는 더 나아가 선심공세를 편다.
 “좋다. 고려 만큼은 의관을 본국(고려)의 풍속을 좇아 상하 모두 고치지 마라. 개경 환도는 속도조절을 해서 알아서 하라. 설치된 다루가치(총독)는 귀환시켜라.”(<원고려기사>)
 쿠빌라이는 “원나라에 조회한 나라가 80여 개국인데 고려처럼 예(禮)로 대접하는 것을 보았느냐”고 공치사했다.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 존중하겠다는 약속…. 이것을 ‘불개토풍(不改土風)’ 혹은 ‘세조구제(世祖舊制)’라 한다. 시쳇말로 하면 ‘세조(쿠빌라이)의 유훈’이라 말할 수 있다.

 

 ■“세조의 유훈을 잊지 마세요.”
 그런데 고려는 이 ‘세조의 유훈’을 두고두고 써먹었다. 몽골이 노골적인 내정간섭에 나설 때마다 이 유훈을 들먹였다.
 예컨대 세조의 유훈이 발표된 지 60여 년이 지난 1323년(충숙왕 10년), 원나라가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립, 흡수통합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러자 당시 원나라에 있던 도참의사사 이제현은 예의 그 ‘세조의 유훈’을 인용하면서 ‘불가’를 외쳤다.
 “세조황제의 조서 덕택에 고려의 옛 풍속이 유지되고, 종묘와 사직이 보전됐습니다. 다 세조 황제의 덕입니다. 이제 고려에 행성을 설립한다고 합니다. 좋습니다. 다른 것은 다 논하지 않더라도 세조의 조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이제현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당시 원나라 황제였던 영종(재위 1320~1323)은 “세조(쿠빌라이)의 정치를 본받고 회복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제현은 바로 이 점을 겨냥해서 원 조정을 협박한 것이다. ‘세조의 유훈을 지키지 않으려는 것이냐’고…. 원나라는 결국 정동행성의 설치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황제와 맞장 뜬 고려 외교관
 다시 1260년대로 돌아오자.
 1268년(원종 9년), 문하시중 이장용이 몽골에 갔을 때였다. 쿠빌라이가 “고려군사의 수를 정확하게 알리지 않으면 고려를 정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려 군사의 수를 정확히 파악해서 남송과 일본원정에 동원하려던 것이었다.
 “고려군사의 수가 5만명은 된다고 한다. 그 중 4만명은 송나라와 일본 정벌에 보내라.”(황제)
 “5만 군사는 없습니다. 예전에 4만 군사가 있었지만 30년간의 전쟁과 전염병 때문에 다 죽었습니다.”(이장용)
 “아무렴, 산 사람이 없겠느냐. 너희 나라에도 여자들이 있다면 어찌 태어나는 자식들이 없겠느냐. 함부로 말하지 마라.”(황제)
 “고려가 황은(皇恩·몽골 황제의 은혜)을 입어 군대를 파한 이래로 이후에 성장한 자들이 겨우 9~10살입니다.”(이장용)
 국익을 위해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말은 했던 고려 외교관의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려는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고려는 몽골과의 화의(1259년) 이후에도 어지간히 몽골의 애를 먹였다. 11년 후인 1270년이 돼서야 개경으로 환도했으니까.
 견디다못한 몽골 조정은 고려를 재침공할 것을 타진하게 된다.(1269년)  
 하지만 마형과 마희기 등 조정대신들이 입을 모아 ‘불가론’을 외쳤다.
 “고려가 지금 원나라에 내조(來朝)하기는 하지만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만약 정벌이 실패할 경우 국위가 손상되고…. 저들이 험준한 강산에 기대고, 섬에 식량을 쌓아 지키면 100만 군대라도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습니다.”(<원사> <원고려기사> 등)  
 유라시아 대륙을 벌벌 떨게 한 공포의 제국 몽골도 고려의 외교전에 두손 두발 다 들었던 것이다.
 어떤가. 서희와 고려의 외교정책을 닮으라고 가슴을 치고 한탄하는 광해군의 외침이 동감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외교는 또 어떤가. 다 같은 서희의 후예들인데….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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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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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을 방문한 조선사절단 가운데 ‘계미사행단’이 있다.
 계미년인 1763년(영조 39년)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사절단을 일컫는 말이다.
 이 계미사행단은 사절단장(정사)인 조엄(1719~1777)이 대마도에 들러 고구마 종자를 들여온 것으로 유명하다. 고구마는 대표적인 구황작물이다. 좋지않은 기상조건에서도 수확할 수 있기 때문에 굶주린 백성들의 배를 채울 신기한 작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엄이 이끈 계미사행의 으뜸인 공이 고구마 최초도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계미사행단의 일본방문은 우여곡절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여정이었으니…. 무엇보다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조선외교관이 일본인에게 피살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외교관 살인사건의 내막을 한번 풀어보자. 

 1763년 에도 막부를 방문한 계미사행단의 행렬도. 조선통신사의 규모는 5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사신단이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공식방문 중 피살된 외교관
 사행단이 일본방문을 마치고 귀국길 오사카에 머물던 1764년 4월7일 새벽, 사행단의 숙소에서 단발마의 비명이 들렸다. 사람들이 놀라 달려갔다. 사절단의 일원인 최천종이 목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최천종은 손으로 목을 매만지며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비교적 분명하게 사건 당시를 전했다.
 “보고서를 쓰고 막 잠들려 하는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서 놀라 깨보니 어떤 시람이 가슴을 타고 앉아 칼날로 목을 찔렀습니다. 그래서 급히 소리치며 서둘러 칼날을 뽑고 잡으려 했는데…. 그 자가 창을 밀치고 허둥지둥 달아났는데…. 불빛에 비친 그 자는 분명 왜인이었습다.”
 최천종의 숨막히는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주변을 살펴보았다. 흉기가 보였다. 짧은 자루에 창날이 달려있고 마치 창포검(칼 혹은 창으로 사용하는 도검) 같았다. 날 밑에 ‘어영(魚永)’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고, 날자루와 날집은 모두 칠하지 않은 나무로 만들어졌다. 일본칼이 분명했다. 칼은 목편 숨통 근처를 찔렀다. 치명상이었다. 
 “난 이번 길에 왜인과 다퉜거나 원망을 맺을 꼬투리가 없는데, 왜인이 왜 날 죽이려 했는지 알 수가 없소이다. 내가 나랏일로 죽거나 사신의 직무를 다하다가 죽는다면 한이 없겠지만 공연히 왜인에게 찔려 죽게 되니 너무나 원통합니다.”
 최천종은 결국 고비를 넘기지 못한채 아침 무렵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최천종은 “약을 먹을 때 술을 타게 되면 기(氣)가 쉽게 돈다”는 주변의 권유에도 “조선은 지금 금주령을 내렸는데, 어찌 내가 술을 마시겠냐”고 거절했단다.
 아무튼 생각할수록 중대한 사건이었다. 외교사절이 공식방문 중에 피살됐으니 외교분쟁으로 비화할 수 있었다. 

 <조선통신사래조도>. 계미사행단의 환영열기를 그렸다. |고베시립박물관 소장

■이 핑계 저 핑계 대는 일본
 그러나 일본은 처음부터 사건 해결에 미온적이었다. 검시에 재검시까지 약속해놓고 이 핑계 저핑계 대면서 차일피일했다. 장례를 치러야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일본인의 칼에 맞은 것이 분명하니 저들의 재검을 기다릴 필요없이 염습(시체를 씻긴 다음, 옷을 입히고 묶는 일)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교활한 왜인들이 ‘염습을 했으니 재검할 필요가 없다’는 등의 핑계를 댈 수도 있지 않은가.”(조엄의 <해사일기>)
 조엄은 “움직일 수 없는 살인인데, 이 핑계 저핑계 대고 있으니 아무리 무식한 오랑캐라 해도 너무 하지 않느냐”고 울분을 터뜨리고 있다.
 부사 이인배는 “너무 분해서 등창이 나려 한다”고 했고, 종사관 김상익은 “일본인들은 뱀처럼 악독한 족속”이라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일본측은 “우리가 해결할테니 일정대로 귀국하라”고 권유했다. 일본측은 더욱이 사건현장에서 범죄 때 사용한 칼날과 사건 당시 입직한 왜인들의 명단을 적어가면서 조선측 인사들의 출입을 엄중히 막았다.  
 “최천종 피살 이후 대마도 사람의 짓이 분명한데, 모른체 하고 떠날 것을 권유했다. 조선-일본 교류 역사에 전례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사인 조엄은 정색하고 소리높여 쐐기를 박았다. ‘내 뜻이 결정됐으니 동요하지 마라. 오사카에서 한 발도 움직일 수 없다.”(<해사일기>)
 오사카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사절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무슨 변고가 생길 지 몰라 밤을 지세웠고, 바람소리에 장막이라도 움직이면 자객이 침입한게 아니냐고 부들부들 떨었다. 성대중 같은 이는 오사카에 머물던 한달동안 “너무 두려워 병풍으로 사방을 에워싸고 그 안에서 잠을 자면서, 밥 때가 돼서야 잠깐 나오는 일을 반복했다”고 한다.(성대중의 <청성잡기>)

 

 ■단독범행으로 서둘러 마무리한 사건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사건발생 열흘만인 4월17일, 범인 스즈키 덴죠(鈴木傳藏)가 검거됐다.
 범행 직후 이리저리 피해 다니던 범인은 온천 놀이에 따라간다는 핑계를 대고 길을 지나다가 나졸의 눈에 띄어 붙잡혔다고 한다.
 그런데 덴죠는 곤장을 한 대 치기도 전에 범행일체를 자백했다.
 “최천종이 거울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저를 의심했습니다. 최천종은 ‘일본인들은 도둑질을 잘 한다’고 욕했고, 저는 ‘되레 조선인이 도둑질을 할 한다’고 응수했습니다. 그러자 최천종이 벌칵 화를 내면서 말채찍으로 때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앙심을 품고 그만….”
 일본 측은 스즈키 덴죠의 자백에 따라 스즈키의 단독범행으로 사건을 종결하려 했다. 자백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더 이상의 조사도 벌이지 않았다. 
 어쨌든 스즈키는 ‘참수형’의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다. 조선측은 사형집행 현장을 참관하겠다고 주장했고, 일본측은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조선측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조선측은 즉각 서신을 보냈다.
 “스즈키 덴죠는 양국간 외교문제가 걸려있는 죄인입니다. 반드시 양국 관계자가 집행장면을 참관하는 게 맞습니다. 참관하지 못하면 우리(조선사절)가 어찌 귀국해서 보고할 수 있겠소.”     
 조선측은 이런 천신만고의 과정 끝에 5월2일 집행된 ‘참수형’ 장면을 참관할 수 있었다. 사실 사건의 정확한 진상은 아무도 모른다. 일본 정부가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범인 스즈키가 자백한대로 최천종이 말다툼을 벌인 스즈키를 말채찍으로 때렸다고 치자.
 그런 소동이 벌어졌는데 아무도 몰랐을까. 조엄은 귀국 후 영조에게 올린 장계에서 그같은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다.  

계미사행단이 귀국 직전 한달간이나 머물러야 했던 오사카. 일본인에 의해 조선 외교관이 피살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릉송백의 치욕을 잊지마라"
 이 계미사행은 외교관 살인사건이라는 미증유의 외교분쟁 말고도 갖가지 좋지않은 이야깃거리를 양산했다.
 사실 영조 임금은 일본으로 떠나는 사행단을 직접 불러 신신당부했다.
 “여러분, ‘이릉송백(二陵松柏)의 치욕’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릉송백’이라는 글귀를 외우는 순간 영조는 목이 메고 눈물을 머금은 듯 했다. 그러면서 친히 ‘호왕호래(好往好來)’, 즉 ‘잘 다녀오라’는 네 글자를 직접 써서 사신들에게 나눠주었다.(조엄의 <해사일기>)
 영조는 또, 사신들에게 “그대들의 시 짓는 능력을 보고 싶으니 차례로 제출하라”고 주문했다.(원중거의 <승사록>)
 영조는 잊지말라고 한 ‘이릉송백’의 고사는 무엇인가.
 ‘이릉’이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도굴된 선릉(성종)과 정릉(중종)을 뜻한다. 이 도굴 때문에 두 왕의 유골이 훼손되었다.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임진왜란 직후 사절로 일본을 방문한 윤안성(1542~1615)은 회한에 가득찬 시를 지었다고 한다,
 “금일의 교린을 나는 모르겠구나. 어디 한강에 가서 강가에서 보라. 이릉의 송백은 가지가 자라지 않는 것을….(今日交隣我不知 試到漢江江上望 二陵松柏不生)”
 영조는 곧 ‘150년 전의 치욕’을 결코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영조는 또 시(詩)를 통해 조선의 우월성을 일본인들에게 한껏 과시하라고 주문했다.
 “‘정주(程朱·정자와 주자의 성리학)의 존재를 모르는 오랑캐(일본인)들에게 충신독경(忠信篤敬)을 가르쳐야 하느니라.”
 사신단의 서기로 참여한 원중거가 다음과 같은 각오를 다졌다.
 “예의의 나라인 조선 사신인만큼 관복을 단정하게 하고 행동과 위엄있는 법칙을 잃지 않겠습니다. ‘정주’가 아니면 말하지 않고, 경서(經書)가 아니면 인용하지 않겠습니다.”(<승사록>)

 

 ■18세기 한류의 현장
 사행단은 임금의 신신당부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1년이나 이어진 사행 내내 결벽증에 걸렸다고 할만큼 경건했고, 깨끗했다. 통신사 일행은 일본 현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절단이 큰 마을에 도착하면 인산인해를 이뤘다. 시를 가져와 필담을 나누려는 자, 사절단을 구경하러 온 자 등 수백명이 몰려들었다.”
 18세기 한류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조선사신들의 글을 받기 위해 ‘새치기’하는 자들도 나왔다. 사절단은 그 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타일렀다.
 “부끄러워하는 덕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덕으로 나가는 기본입니다.”
 일본인들이 건네는 선물도 일절 받지 않았다. 원중거의 회고를 보면 “(하도 선물을 받지않으니) 몇몇 일본인이 벼루 두 개씩 선물하면서 ‘이는 손님을 위한 정이니 받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원중거는 또다기 정중하게 거절했다.
 “군자는 사람을 덕으로 아낍니다. 우리가 돌아갈 때 짐이 깨끗하면 여러분들의 마음 또한 깨끗하지 않겠습니까.’”(<승사록>)

 

 ■굴욕당한 조선사절단
 그러나 일본 정부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조선을 깔보려는 속셈을 노골화 했기 때문이다. 사행단이 두 개의 판자 문짝인 상근관(箱根關)을 넘을 때 말에서 내려 걷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옛 관례보다 한 문씩 더 물러나 말에서 내리게 한 것이었다. 더구나 사행단이 내린 땅은 진창이었다. 신발이 젖고 옷이 더러워졌다. 수행원들이 사절단의 담뱃대를 들어주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두고 볼 수 없었다. 사행단은 ‘전명연(傳命宴)’에서 폭발하고 만다. 사행단이 막부의 관백(關白)’, 즉 ‘막부의 최고지도자에게 무릎을 꿇고 4번이나 절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각 태수들도 관백을 맞을 때 두 번 절하는데 유독 조선 통신사만 4번이나 절을 올린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전에는 조선 국왕에게 황제폐하로 불렀던 자들이었는데…. 남옥은 당시의 치욕을 부고 온몸을 부들부들 떤다.(<일관기>)
 “이른바 위제(僞帝·가짜 황제)라는 자가 있는 데도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한 추장(관백)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 치욕스러움을 어찌 말하랴.”

 

 ■인내심을 시험하는 일본
 변함없는 일본의 역사왜곡도 사행단을 열받게 했다. 
 “사행단을 방문한 시방언(柴邦彦)이라는 자가 180구로 된 오언고시와 율시 절구를 바쳤다. 그런데 그가 인용한 두 나라의 역사가 ‘극히 놀랍고도 망령된 것’이어서 보낸 그대로 봉해서 돌려주었다.”(남옥의 <일관기>, 원중거의 <승사록>)
 얼마나 ‘놀랍고 망령된’ 역사왜곡이었던지 시문의 문답행사와 필담이 중단되는 심각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조선측은 아예 시방언이라는 자가 보낸 시를 다시 밀봉해서 되돌려주었다니…. 무슨 내용인가. 일본은 당시 중국 진시황 때의 방사 서불(徐市)의 일본도래설과, 임나일본부설의 기초가 된 진구(신공) 황후의 삼한정벌 등을 사실(史實)로 왜곡하고 있었다. 조선으로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역사왜곡이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골백번 세월이 바뀐다 해도 상대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일본과 일본인이 아닌가.
 계미사행 당시 제술관으로 수행한 남옥은 일본의 무례를 경험하고는 “얼마나 원통한지 곧장 머리카락이 갓을 뚫고 나오려 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요즘의 일본인과 일본의 외교를 보더라도 250년 전 남옥의 심정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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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 보는 사람들이다.(民惟邦本 食爲民天)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굷주림을 면치 못한다니…. 너무도 가련하고 민망했다.”
 1419년(세종 1년), 세종 임금이 ‘억장이 무너진다’면서 “부덕한 과인 때문에 한많은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이라고 한탄한다. 그러면서 추상같은 명령을 내린다.
 “만일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굶어죽는 자가 있다면 감사나 수령에게 그 죄를 물을 것이다. 과인이 장차 관원을 파견, 감사에 나설 것인즉….”<세종실록>)
 과연 최고의 성군(聖君)다운 조치라고 여길 지 모르겠다. 그러나 세종 뿐이 아니었다. 조선을 46년 간이나 다스린 숙종은 어땠을까. 1698년(숙종 24년) 1월, 굶주림에 얼어죽은 시신이 40~50구가 쌓였다는 소식을 들은 임금이 장탄식하면서 내린 비망기를 보자.  

충남 부여 쌍북리에서 확인된 백제 시대 목간. 구황기에 식량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음을 기록한 백제시대판 ‘환곡(還穀) 문서’였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임금들
 “임금은 만백성의 부모다, 한사람이 굶주려도 마치 자기가 굶주리는 것 같고…. 하물며 굶어죽는 시신이 날마다 거리에 쌓이는데 구제하지 못하니…. 그 뼈아픈 심정이야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실록>을 보면 숙종 재위 시대에 잇단 재해에 인심이 흉흉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695~1703년 사이에 지독한 흉년과 전염병 창궐, 그리고 엄청난 대홍수가 잇따랐다.(<숙종실록>) 그러자 숙종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뇌하고 있다.
 “아! 우리 백성들의 목숨이 다 끊어지게 되었다. 밤을 지새우며 노심초사하지만 뾰족한 계책이 없구나. 개탄스럽다.”
 숙종은 1696년, 노숙자 무료급식소와 비슷한 설죽소(設粥所·빈민들을 위한 관립 무료 급식소)에 비밀리에 별감을 수시로 보내 배급상황을 점검하고 개탄했다.
 “과인이 설죽소에 별감을 몰래 보내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죽을 가져오게 했는데…. 첫번째 보냈을 때는 제법 죽의 양이 넉넉하고 쌀알도 많았다네. 평소에도 그런가 하고 다시 가져오게 했네. 그랬더니 양이나 질 모두 형편 없었네. 이래 가지고서야 굶주린 백성들이 살 수가 있겠는가.”
 이 뿐인가. 1714년(숙종 40년), 숙종은 진휼미를 실은 선박이 무사히 제주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기쁜 나머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1000리 남녘 바다 잘 건너기 어렵고, 거센 바람 곡식 운반 또한 쉽지 않도다. 선박 모두 무사함을 알려왔으니, 하늘도 환과(鰥寡·과부와 홀아비, 여기서는 불쌍한 백성들을 뜻함)를 구제하는 하늘의 뜻이 분명하도다.”
 이런 숙종을 두고 국학자 최익한(1897~?)은 “백성을 구휼하는 선정이 두드러졌으며, 화평하고 풍요로운 시대를 구가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밖에도 임금의 구휼활동은 가없었다.
 개인금고인 내탕고의 은(銀)과 쌀을 하사해서 구휼비용에 보충하고(선조·숙종), 제문을 지어 굶어죽은 백성을 제사 지내도록 하고(숙종), 걸식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죽을 나눠주고(영조), 쌀을 내려주고(정조)….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조정에 제출한 보고서 친필본. 보고서 2책에 토지·군·환곡 제도의 문란을 지적하고 개선책을 거론했다.

■구휼은 백성의 생명을 구하는 것
 ‘기근(饑饉)’이란 무엇인가. <이아(爾雅·중국에서 가장 오랜 자서)>는 “곡물이 익지않음을 ‘기(飢)’, 채소가 익지 않음을 ‘근(饉)’”이라 했다.
 동양의 지도자는 바로 ‘백성들이 먹고 살 곡식과 채소’가 없으면 스스로의 책임이라 여기고 자책했다. 즉 가뭄이나 홍수 등 흉황(凶荒)을 잘 다스리면 인정(仁政)이 되고 성군 혹은 현군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폭정이 되고, 폭군 혹은 혼군(昏君)이 된 것이다.
 그랬으니 백성의 생명을 구하는 구휼은 하루빨리 시행해야 할 급선무였다.
 예컨대 태종은 “백성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구휼이니, 왕명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처리한 뒤에 나중에 보고하라”고 당부했다.(<태종실록> 1416년)
 즉 ‘선지원 후보고’의 복지정책이다. 이 ‘선조치 후보고’의 모범사례로는 전한시대의 급암(汲암)과 후한시대 한소(韓韶)를 들 수 있다.
 급암은 하내(河內·황허 이북 땅)에서 화재가 발생, 1000가구가 피해를 입자 황명을 받고 급파됐다. 화재는 단순 실화(失火)로 판명됐다.
 급암은 무리없이 사태를 수습했다. 문제는 급암이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때 생겼다. 하남(河南)을 지나칠 때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한 것이었다.
 “하남의 빈민들 가운데 1만여 가구가 수해와 한해를 당했습니다. 심지어 부자 간에도 식량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급암은 무제가 준 부절(符節·황제가 사신 혹은 파견관리에게 주는 신표)을 보여 하남의 곡창을 열어 빈민들을 구제했다. 황명으로 하남의 곡창(곡식창고)를 연 것이었다. 사실 급암의 행위는 황명을 사칭한 대역죄였다. 급암의 임무는 화재로 발생한 이재민을 구휼하는 것이지,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빈민을 구제하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급암은 돌아와 황제를 알현하면서 무릎을 꿇고 죄를 청했다.
 “신은 칙령을 변조했습니다. 신을 처벌해주십시요.”
 그러나 무제는 백성을 먼저 구한 것을 “매우 현명한 처사”라며 용서해준 뒤 되레 영전시켰다.(<사기> ‘급정열전’)
 또 한사람의 ‘선지원 후보고’의 사례가 한소였다. 한소는 영(영)이라는 고을의 장으로 일할 때 흉년을 만났다.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 그러자 한소는 상관의 허락을 받지도 않은채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만일 이것으로 죄를 받는다 해도 괜찮다. 내 한 몸을 죽여 만 사람을 살린다면 웃음을 머금고 땅속에 들어가겠노라.(含笑入地)”(<후한서> ‘한소열전’)

 

 ■선지원 후보고
 조선 시대의 ‘급암’ 혹은 ‘한소’로 일컬어진 이가 바로 세종 연간의 인물인 ‘김숙자’이다.
 김숙자는 흉년으로 백성들이 고생하자 왕명도 받들지 않고 군수물자(군량미)를 풀어 구휼에 나섰다. 이 역시 급암·한소의 예처럼 대역죄가 될 수도 있었다.
 백성들이 굶주림에 쓰러져도 문책이 두려워 왕명을 기다리던 다른 고을 수령이라면 더욱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김숙자는 “백성에 마음을 두었는데, 어찌 법에 저촉될 것을 두려워 하겠느냐”며 예의 급암과 한소의 예를 들었다.
 “급암과 한소처럼 나도 만백성에게 마음을 둘 뿐이다. 어찌 법을 무서워하리오.”
 그런 뒤 군사까지 징발해서 빈민구제에 나서자 백성들이 감읍했다. 백성들은 추수 때가 되자 관의 독촉을 기다리지 않고 자진해서 빌린 곡식을 앞다퉈 갚았다고 한다.(<해동잡록>)

 

 ■구휼제도의 비조
 사실 구휼제도의 비조(鼻祖)는 고구려 고국천왕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국천왕조’를 보자. 
 “194년(고국천왕 16년), 임금이 사냥 나갔다가 길가에 주저앉아 우는 백성을 보고 연유를 물었다. 그 사람이 대답했다. ‘날품팔이로 어머니를 공양해왔는데, 올해 흉년이 드니 먹고 살 길이 막막합니다.’ 임금이 한탄했다. “이것은 나의 죄가 아닌가. 백성들을 이렇게 굶기다니….”
 고국천왕은 백성에게 옷과 음식을 주었다. 그러나 만약 측은지심으로 끝났다면 그것은 임시방편의 빈민구제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국천왕은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담당관청에 일러 홀아비와 과부, 고아, 독거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구휼하라고 지시했다.
 “해마다 3월부터 7월에 이르기까지 관의 곡식을 내어주어라. 백성의 가구수에 따라 ‘차등있게 진휼대여’(賑貸有差)하라. 그리고 겨울 10월에 갚도록 하는 것을 정례(恒例)로 삼아라.”   
 이것이 바로 제도적인 빈민구제정책의 효시가 된 ‘진대법’이었다. 1회용 대책이 아닌…. 신라 문무왕의 빈민대책도 유명하다.
 “668년 고구려를 멸한 뒤 가난해서 남의 미곡을 빌린 자는 풍년 때 상환하도록(대곡환상·貸穀還償) 했다. 그러나 흉년피해가 심한 자는 이자와 원금을 모두 면제(자모구면법·子母俱免法)시켰다.”(<증보문헌비고>)
 고국천왕의 ‘진대법’과 문무왕의 ‘대곡환상 및 자모구면법’은 ‘사회복지정책의 신기원’이 됐다. 이후 고려와 조선은 ‘진대법’을 발전시킨 의창(義倉)·환곡(還穀)·사창(社倉)제도를 시행하는 등 빈민구제정책을 국정의 핵심 사안으로 삼았다. 그럴 만도 했다.

 

 ■백성을 깔본 죄
 군주의 복지마인드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었다. 백제 동성왕 이야기다.
 “499년(동성왕 21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는 비극이 생겼다. 도적이 들끓었다. 신하들이 창고를 풀어 규제하자고 했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구려로 도망가는 자가 2000명이 됐다.”(<삼국사기> ‘동성왕조’)
 복지마인드 부재가 백성들의 망명을 부추긴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인 501년, 동성왕은 신하 백가가 보낸 자객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백성들을 팽개친 벌을 받은 것일까.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고려 국왕들의 대책도 만만치 않았다.
 1006년(목종 9년), 가을에 곡식이 익지않아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러자 목종은 3년 전부터 미납된 공물과 세금을 모두 면제해주고 백성들에게 창고를 열어 진휼해주었다. 흉년이 극심했던 1298년(충렬왕 24년), 왕은 반찬을 줄이고 도토리를 먹었다. <동사강목>은 “충렬왕이 여러 도의 안렴사(지방순회장관)들을 불러 백성의 구휼문제를 거론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음식을 먹여 보냈다”고 기록했다.
 1348년(충목왕 4년), 서해 2도와 전라도 백성들이 굶주리자 왕은 진제도감을 설치했다. 충목왕은 특히 음식 가짓수를 줄여 비용을 보충하고, 1만3000석을 백성들에게 풀었다.

 

 ■가렴주구의 온상 된 환곡제도
 그러나 고국천왕 때부터 구축한 복지시스템은 조선 후대에 들어오면서 되레 가렴주구의 온상이 되고 말았다.
 고구려의 진대법을 계승한 조선 환곡제도의 원칙은 ‘봄에 빌려주고 가을에 걷고(春貸秋斂)’, ‘절반은 창고에 남겨두는(折半留庫)’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위한 구제책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각 창고에 둔 곡식을 새 것으로 교체하는 대책도 됐다.
 그러나 이 좋은 뜻이 크게 변질됐다. 가을에 10분의 1일 더 걷는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황당하다. 창고에서 ‘쥐와 참새’ 때문에 줄어든 양을 10분의 1로 임의 계산해서 그것까지 백성들에게 내라고 한 것이다. 그런 계산이 해마다 이어지면 백성들의 이자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또 필요하지도 않는 곡식을 강제로 백성들에게 빌려준다는 것도 문제가 됐다. ‘절반은 창고에 남겨둔다’는 규정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니 이자 부담은 늘고, 봄에 묵은 쌀을 받아 가을에 새 쌀로 갚아야 하는 이중삼중의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그러니 ‘가을에 환곡을 거둬들이면 마을이 텅 빌 정도’(<성호사설>)였다. 영조 연간(1779년)에 환곡제의 폐단을 생생한 필치로 전한 병조참지 박효삼는 ‘환곡이 백성들을 죽인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환곡을 설치한 까닭은 빈민구제와 군량저축인데…. 곡식 환모(이자로 받는 곡식)이 점점 불어나니 백성들이 대부분 도망해 달아납니다. 그 때는 이웃사람과 친족들에게 강제로 징수하게 되는데…. 고을을 두루 수색하여 항아리에 간직한 곡식도 바닥내 버립니다. 그러니 굶주린 백성들이 ‘환곡이 우리를 죽이는구나’하고 울부짖습니다.”
 제아무리 좋은 복지시스템을 갖췄다 해도, 결국 그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이 문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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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2년(성종 23년), 경상도 관찰사 이극돈이 “운석이 떨어졌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극돈은 매우 신기한듯 운석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빛깔은 뇌설(겉이 검고 속이 흰 버섯의 일종) 같고, 모양은 복령(주름이 많은 공모양의 흑갈색 버섯) 같은데…. 손톱으로 긁으니 가루가 떨어졌습니다.”
 요즘 같은 첨단의 세상에서도 운석이 떨어지니 한바탕 난리굿을 떠는데 하물며 예전에는 어땠으랴.  

 2013년 2월 러이사 우랄산맥 인근 첼랴빈스크주 체바르쿨 호숫가에 떨어진 운석. 운석은 세 조각으로 부서졌으며, 전체 무게가 600㎏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운석이 비처럼 쏟아졌다.’
 “104년(신라 파사왕 25년) 운석이 비처럼 쏟아졌다.”(<삼국사기>)
 “1057년(문종 11년) 황주에 운석이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고려사>)
 “1533년(중종 28년) 유성과 비성(飛星·혜성)이 사방에 비오듯 했고 나왔다 사라지는 길을 다 측후할 수 없었다. 운석도 비처럼 쏟아졌다.”(<중종실록>)
 “1563년(명종 18년) 하늘에 떨어지는 형상이 나는 제비 같았다. 땅에 떨어질 때 소리가 나고 연기가 생겼다. 두꺼운 땅에 떨어진 것은 땅속에 10척 쯤 들어갔는데 모양은 돌과 같았다. 큰 것은 주먹만 하거나 바리만 했고….”(<명종실록>)  
 “1672년(현종 13년) 영천군에 돌덩어리가 갑자기 떨어졌다. 하늘에서 대포소리가 났고…. 돌의 크기는 말(斗)과 같고, 무게는 36근이었다, 형체는 거북이 엎드린 것 같고 그 위에 짐승 발자국 흔적이….”(<현종실록>)
 “1714년(숙종 40년) 안성에 운석이 떨어졌다. 북치고 쇠방울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밭 한 가운데 갑자기 검은 돌이 떨어져 세조각 났다.”(<숙종실록>)
 각 문헌마다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런데 예전과 지금의 호들갑은 좀 다르다. 지금이야 운석의 가격이 어떻게 과학적인 가치가 어떻고 하는 차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예전에는 운석을 상서롭거나 아니면 요사스러운 조짐, 즉 하늘의 계시로 여겼다. 

첼랴빈스크에 떨어진 운석으로 만든 2014 소치 동계올림픽 금메달. 단 7개 만들었으며 그램당 232만원의 고가였다. 러시아의 빅토르 안이 행운의 운석금메달 주인공이 됐다. 

■진시황과 운석
 예컨대 <사기> ‘진시황본기’를 보자.
 “운성(隕星)이 떨어졌는데 땅에 닿자 돌이 되었다. 누군가 그 돌에 ‘진시황이 죽어 땅이 나뉜다’고 새겼다. 진시황이 그 돌 가까이 거주하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돌을 불태워버렸다. 진시황이 기분이 언짢아져~천하를 순행했다.~이듬해 7월 진시황이 서거했다.”
 그러니까 누군가 하늘에서 떨어진 신성한 운석의 기운을 이용해서 진시황을 저주하는 글귀를 새겼고, 그 글귀대로 진시황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운석 사건에 대해 반고는 “돌은 음류(陰流)이니 신하가 군주를 위태롭게 하게 된다”고 평가했다. 진나라가 결국 진시황의 뒤를 이은 진2세(호해) 시절, 신하(지록위마의 장본인인 조고를 가리킴)에 의해 위태로워졌고,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로 양분된 것을 의미한다. 결국 진나라의 망조는 결국 누군가 운석의 조짐을 빌려 만천하에 알려주었다는 소리가 된다. 

 

 ■하늘이 돌을 떨어뜨렸다
 운석이 떨어지면 곧잘 인용했던 중국의 고사가 바로 <춘추> 희공 16년의 기록이다.
 “기원전 644년, 송나라에 ‘돌이 5개가 떨어졌다.’(隕石于宋五)”
 두 말 할 것 없이 ‘운석’의 기록이다. <춘추>의 해설서인 <좌전>은 이 대목에서 “하늘에서 돌멩이가 떨어졌는데(隕石) 이는 하늘 위의 별들이 쏟아져 내린 것(隕星)”이라 했다. 그런데 <춘추>는 ‘돌이 떨어졌다’는 의미의 ‘석운(石隕)’이라 하지 않고, ‘돌을 떨어뜨렸다’는 뜻의 ‘운석(隕石)’이라 거꾸로 표현했다. 이것이 두고두고 궁금증을 낳았던 것 같다. 이를 두고 송나라 유학자인 정자(程子)는 흥미롭게 풀이했다.
 즉 <춘추>에서 ‘돌이 떨어졌다(石隕)’고 하지 않고 ‘돌을 떨어뜨렸다(隕石)’고 한 까닭이 ‘운석’을 ‘사람(人事)의 잘못’으로 돌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늘이 사람의 잘못을 책망하려고, ‘돌을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송나라에 운석이 떨어진지 5년 뒤 나라에 변고가 생겼다. 송나라 양공이 초나라 성왕에게 사로잡혀 모욕을 당했고(기원전 639년), 그 이듬해에는 홍수(泓水·허난성을 흐르는 강이름)에서 다시 초 성왕에게 대패 당했다.(기원전 638년) 송 양공은 그 후유증으로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기원전 637년)
 ‘쓸데없는 양보로 대세를 그르쳤다’는 ‘송양지인(宋襄之仁)’의 고사를 낳은 어이없는 패배였다. <춘추>의 해석자들은 결국 송나라 패배의 조짐은 결국 5년 전의 운석에서 비롯됐다고 본 것이다. 

일제 강점기인 1943년 11월 23일 전남 고흥군 두원면 성두리 야산에 떨어진 운석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지금은 한국 지질자원연구소에 보관돼 있다.

■해괴제를 지낸 까닭
 그랬으니 옛 사람들은 석운, 아니 운석 현상이 나타나면 ‘하늘의 심판’ 혹은 ‘하늘의 조짐’이라며 심상찮게 여겼다.
 “14년(신라 남해왕), 왜인이 병선 100여 척을 보내 해변을 노략질했다. 신라가 6부 군사들을 보내 막았는데, 낙랑이 이 틈을 타 텅빈 금성(경주)를 공격했다. 밤에 유성(별똥별)이 나타나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무리들이 두려워 물러가다가….”(<삼국사기> ‘신라본기’)
 “645년(고구려 보장왕), 별똥별이 고구려 진영에 떨어졌다. 당 장수 설인귀가 기이한 복장을 하고 공격해서 고구려군 3만명을 죽였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602년(선조 35년), 경주에 운석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들렸다. 하늘이 내린 재앙의 경계가 아닐까.”(<고대일록>)
 군주는 운석이 떨어지면 전전긍긍,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며 몸과 마음을 닦아야 했다.
 세종과 문종은 황해도와 함길도에 운석이 떨어지자(1423년과 1452년) 해괴제(解怪祭)를 지냈다. 해괴제란 나라에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이를 풀기 위해 지내는 제사를 뜻한다. 함길도 운석사건의 경우 불덩이(不塊)가 땅에 떨어져 주변의 31척 5촌(10m) 가량의 땅이 꺼졌으므로 문종이 사자를 보내 해괴제를 지냈다고 한다.

 

 ■석운과 운석의 고사
 1563년(명종 18년) 경상도 산음현 북리에 운석이 떨어진 것을 두고 <명종실록>을 쓴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운석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재변이다. 정사가 해이해지고 쇠퇴하는 날에 운석이 떨어지고, 혹은 국가가 쇠잔하고 혼란할 때도 떨어졌으니…. 그러니 군주가 허물을 반성하여 재앙을 그치게 할 때가 아닌가.”(<명종실록>)
 1657년(효종 8년)의 일이다. 기상이변이 몇년간 이어지고, 태백성(금성)이 대낮에 나타나는 일까지 생겼다. 그런데도 임금이 효릉(인종의 능)에 능행할 것을 결정했다. 이 때 찬선(정 3품) 송준길이 “아니되옵니다”를 외친다. 송준길이 예로 든 것이 바로 그 ‘석운과 운석’의 고사였다.
 “<춘추>가 ‘석운’ 대신 ‘운석’, 즉 ‘하늘이 돌을 떨어뜨린다’는 표현을 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정자께서 ‘운석의 재변을 인사(人事), 즉 인재로 돌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재변은 반드시 인사의 잘못입니다. 재변을 막는 것도 인사에 달려있습니다.”
 송준길은 그러면서 “전하가 공구수성(恐懼修省·두려워하여 수양하고 반성함)하지 않으면 재변을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효릉(경기 고양군)까지 30리길을 산넘고 물건너 말 달리며 갈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한 1억5000만 년 전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떨어진 운석. 대형운석은 6500만년 전의 공룡 멸종을 불러왔다고 한다. 

■‘일·월식은 비정상적인 남녀관계 때문’
 어디 운석 뿐인가.
 옛 사람들은 모든 이변(異變)이 하늘이 사람에게 보여주는 조짐이라고 여겼다.
 미수 허목(1595~1682)의 시문집인 <기언(記言)> ‘요상(妖祥)’ 편을 보자. 이 책은 천지와 일월성신 등 자연과 그 현상들, 그리고 인간이 지켜야 할 질서와 도리를 쓴 책이다. ‘요상’은 ‘요망한 기운이나 조짐’을 뜻한다. ‘요상’ 편은 옛 문헌에 나오는 갖가지 자연현상과 인간의 관계를 총정리 해놓았다.
 예컨대 일식과 월식을 보는 옛 사람들의 해석은 더욱 흥미롭다.
 즉 “해는 모든 양(陽)의 으뜸이고 군주의 표상인데 일식 때문에 가리고 먹혔으니 재앙의 조짐”이라는 것이다.(<춘추호씨전>)
 “여자가 남편을 타고 올라서고 신하가 군주를 등지며 권력이 신하에게 있고 오랑캐가 중국을 침범하는 것은 모두 양기가 미약하고 음기가 성한 증거이다.”
 이를 두고 <예기>는 “남자를 가르치지 않아서 양사(陽事·남녀의 육체관계)가 알맞지 않으면 하늘이 꾸짖어서 일식이 있게 된다”고 해석했다. 이 때 “천자(황제)는 소복을 입고 육관(六官)의 직책을 정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식은 여자가 남자를 올라타는 격이며. 남녀의 비정상적인 육체관계를 상징해서 하늘이 견책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현상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렇다면 월식은 어떤가. <예기>는 “부인의 유순한 덕이 갖춰지지 않아 음사(陰事·남녀간 잠자리)가 알맞지 않을 때 월식이 생긴다”고 했다.
 이 때 “황후는 소복을 입고 육궁(六宮)의 직책을 정비한다”고 했다. 정리하자면 일식과 월식은 음기와 양기가 서로 다투고 비정상적으로 합쳐질 때 오는 변고(變故)라고 해석한 것이다. 이 경우 황제와 황후는 소복을 입고 대대적인 인사개편을 통한 쇄신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사와 우박, 흙비의 의미는
 요즘처럼 황사가 나타나면 어떨까.
 한나라 경방이 쓴 <역전(易傳)>은 351년 양주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황무(黃霧)가 낀 것을 이렇게 해석했다.
 “누렇다는 것은 누렇고 탁한 기운이 천하에 가득하다는 것이다. 훌륭한 사람의 진출을 가로막고 도를 끊었기 때문에 후사를 잇지 못하는 재앙이 생긴다.”
 말하자면 <역전>은 황사가 훌륭한 사람의 기용을 막아 결과적으로 세대간 단절이 일어나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혜성이 출현하면 어떨까.
 “요성(妖星·불길한 별)은 21개인데 그 첫번째가 혜성”이라 했다.(<진서> ‘천문지’) 혜성 중에서도 패성(패星·꼬리없는 혜성)은 나쁜 기(氣)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며 어둡고 혼란스러운 별이라는 관념이 짙었다.(<춘추호씨전>)
 서리와 눈, 우박과 흙비는 무엇인가. <춘추>에는 “노나라 희공 29년(기원전 631년) 가을에 많은 우박에 내렸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를 두고 <춘추호씨전>은 “음양이 조화를 이뤄 흩어지면 서리와 눈이 되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나쁜 기운이 되어 흙비와 우박이 온다”고 했다. 특히 우박은 “음기가 양기를 위협하고 신하가 군주를 침범하는 기상”이라 해석했다. <춘추호씨전>은 당시 노나라의 정권이 군주(희공)가 아니라 대부인 계(季)씨에게 넘어가 있음을 꼬집은 것이다. 

최근 경남 진주에 떨어진 운석. 예로부터 운석이 떨어지면 하늘의 징조, 하늘의 계시라고 여겨 지도자들이 몸을 닦고 정사를 반성했다.

■소인배를 등용하면 산이 무너진다
 만약 2011년 발생한 우면산 붕괴를 옛 사람들은 어떻게 봤을까.
 <역전>은 “소인이 득세하면 그 요망한 기운이 산이 무너지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즉 “음(陰)이 양(陽) 위에 올라가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면산 붕괴는 소인들의 득세 때문에 발생한 ‘인재(人災)’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홍수도 마찬가지다. “정사를 멋대로 농단하는 자의 재앙은 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물은 곧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역전>)
 이밖에도 <진서>를 보면 “조상을 공경하지 않고 정치와 법령이 적절치 않으면 폭우가 쏟아져 강물이 범람하고 성읍을 무너뜨리며 사람들이 빠져죽는다”고 했다.
 유학의 국교화를 이룬 한나라 동중서는 더 나아가 “백성이 근심하고 원망하면 큰 물이 진다”고까지 했다. 부역이 많고 세금이 무거운 경우에도 그 견책으로 강과 바다가 범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지진은 어떤가. <역전>은 “땅이 갈라지는 것은 신하의 마음이 이반되어 윗사람을 따르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고 했다. “음이 양 위에 올라서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이변은 군주의 탓
 이 모든 자연현상과 인간(군주)의 관계를 다룬 허목의 <기언>을 읽으면 군주라는 직분은 정말 못해먹을 짓거리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모든 기상이변과 천재지변의 책임이 모두 백성을 잘못 다스린 군주에게 있다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익의 <성호사설> ‘천지문·재이편’의 언급처럼 “임금은 지극히 높지만 임금 위에 하늘이 있다”니까….
 “임금이 하늘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마치 백성이 임금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인가. <춘추>이후 불길한 징조가 나타날 때마다 반드시 인간과의 관계를 결부시켰다.”
 이익의 마무리 말이 멋있다.
 “이변이 생길 때 임금이 두려워하고, 이변이 없을 때도 두려워 하면 이변이 변하여 상서(祥瑞)가 될 수 있다.”
 임금이 늘 겸손하고 늘 스스로를 닦으면 나쁜 조짐조차 상서롭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운석이 떨어질 때 지도자가 할 일
 숭례문 보수공사가 결정된 1478년(성종 9년) 4월1일 하늘에서 흙비가 내렸다. 그런데도 대신들이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성종 임금이 화를 벌컥 냈다.
 “흙비가 내렸는데, 혹시 숭례문 보수공사 때문이 아닌가. 하늘이 꾸짖어 훈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경들은 왜 한마디 말도 없는가.”
 그러자 대신들은 “매우 훌륭하신 말씀”이라면서 “임금이 재이(災異)를 만나 두려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1524년(중종 19년), 흙비와 우박·서리·지진 뿐 아니라 강릉에서 화재까지 발생했다. 이 때 시강관 임추가 아룄다.
 “흙비는 백성이 고단하다는 것을, 서리는 음기가 극진하다는 것을, 우박은 음기가 양기를 협박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또 원래 고요한 땅이 지진 때문에 움직였고, 음기가 극진하여 양기인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재변은 괜히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중종이 화답했다.
 “반드시 재변이 일어나는 뜻이 있을 것이다. 과인을 비롯한 상하가 두려워 하고 서로 심신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요즘들어서도 재변은 이어지고 있다. 일·월식은 물론 황사(흙비)에, 지진에, 홍수에, 우박에…. 최근에는 때아닌 운석까지 떨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하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송준길의 말처럼 ‘공구수성(恐懼修省)’ 하겠다고 나서는 지도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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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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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더러워 입에도 댈 수 없는 음식이 바로 장(醬)이다. 콩을 씻지도 않아 좀이 슬고 모래가 섞여 있다. 마치 마시는 우물물에 똥을 던지는 행위가 같다.”
 북학파로 유명한 초정 박제가(1750~1805)가 던진 ‘돌직구’다. 그 뿐인가.
 “삶은 콩을 맨발로 밟아대는데 온몸의 땀이 발 밑으로 떨어진다. 장에서 종종 손톱이나 몸의 털이 발견된다. 구역질이 난다.”
 사실 당대 ‘중국의 옷과 일본의 주택, 그리고 조선의 장’을 두고 ‘삼절(三絶)’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박제가는 “대체 무엇이 중국보다 낫다는 것이냐”면서 조선의 자랑인 장(醬)을 ‘똥’ 취급하면서 “구역질 날 정도”라고 폄훼하고 있는 것이다. 또 있다.
 “한양에서는 날마다 뜰 한귀퉁이나 길거리에 똥·오줌을 쏟아버린다. 그래서 우물물이 모두 짜다. 시냇가 다리나 돌로 쌓은 제방에는 인분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디스’로 이런 ‘디스’가 없다. 그런데 과장이 아니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당대 조선의 현실을 ‘직설어법’으로 폄훼한다.   

 천공개물. 명 말에서 청 초의 송응성이 지은 산업 기술 서적이다. 박제가가 <북학의>를 쓰면서 영향받은 책이다. 

■까칠한 박제가의 직설화법
 까칠한 그의 성격 탓도 물론 있다. 후배이자 동료인 성해응(1760~1839)의 표현을 빌리자면….
 “박제가는 뛰어난 재능을 자부했다. 말을 꺼내면 바람이 일었다. 자신을 힐난하는 자를 만나면 기어코 꺾으려 했다. 그런 탓에 쌓인 비방이 크고 요란했다.”
 하기야 박제가 스스로도 “날 믿지 못하는 자들과 여러번 논쟁했는데 날 비방하는 자가 많았다”고 토로했으니까….
 그런 직설적인 박제가가 바라본 18세기 조선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한심한 나라였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쳤다.   
 <북학의>(돌베개)를 완역한 안대회 교수(성균관대)에 따르면 그 ‘중국에서 배우자(學中國)’이라는 말이 20번 쯤 나온단다. 
 에를 들어 박제가는 “중국은 똥을 황금으로 여겨 모두 거름으로 만든다”고 했다. 그러니 ‘중국에서 배우라’는 것이다. “100만섬의 분뇨를 버리는 것은 곡식 100만섬을 버리는 것과 같다”면서…. 그 뿐인가.

 

 ■‘중국처럼’ 타령
 “중국 백성들은 비단옷에 담요에서 잠을 잔다. 우리 시골 농부들은 무명옷 한벌도 얻어입지 못한다. 남자나 여자나 멍석깔고 잔다.”
 그는 “조선사람들은 10살이 넘도록 벌거숭이로 다니고 도시여자들마저 맨발로 다닌다”면서 “중국 사람을 보라”고 한다.
 “중국은 변방 여성들까지 분단장하고 수놓은 가죽신을 신는다.”
 박제가의 ‘중국처럼’ 타령은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중국처럼 수레를 만들어야 한다. 수레가 없으니 주택가격은 물론 나막신가 짚신값도 오르는 것이다.”
 “중국처럼 벽돌로 성(城)을 쌓아야 한다. 무한정으로 벽돌을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운반하기도 가공도 어려운 돌성(석성)은 버려야 한다.”
 박제가는 이어 “쓸수록 뾰족해지는 중국붓과 쓸수록 보물이 되는 중국 먹, 그리고 두가닥 실이면 충분한 중국 서책을 본받아야 한다고 목청을 돋웠다.
 심지어는 조선의 도자기 기술까지 형편없는 것으로 깎아내렸다. “(3000년 전 시대인) 중국의 하·상·주 시대에도 팔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조잡하다”면서…. 또 ‘중국처럼’ 도랑과 하천을 준설하고, ‘중국처럼’ 가축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하며, 특히나 ‘중국처럼’ 소도살을 금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박제가가 그린 <목우도>

■나라의 좀벌레들
 박제가는 왜 이렇게 ‘중국에서 배우자’고 타령했을까. 박제가가 바라본 조선은 곧 망할 수밖에 없는 가난하고 폐쇄적인 나라였다.
 답답한 나머지 다소간 험악한 표현으로 당대의 조선을 ‘디스’한 것이다. 철저한 자기부정으로 조선의 허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중국을 상징으로 하는 선진문물의 도입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조선의 버팀목이라는 사대부(선비 혹은 유생)는 ‘우물안 개구리’이자 ‘나라의 좀벌레’이며, 반드시 ‘도태시켜야 할 부류’였다. 그는 ‘지금 당장’ 이 자들을 확 바꾸지 않으면 조선이라는 나라와 백성은 무너지고 만다고 보았다.
 “국가의 퍠단은 가난인데, ‘나라의 좀벌레들’인 사대부만 번성하고 놀고먹는 자들만 늘고 있다. 이들이 천하를 야만족이라 무시하면서 자신들만 중화(中華)라고 떠들고 있다.”
 박제가는 이런 자들보다는 차라리 서양인들을 기용하라는 혁명적인 주장을 하게 된다. 즉 “기하학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기술에 능한 서양인들을 관상감에 ‘영입’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관상감은 천문·지리·책력·측후 등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푸른 눈의 서양인을 관리로 채용한다? 지금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급진적이고, 개혁적인 사고임을 알 수 있다.

 

 ■우물론
 그는 이어 뱃길을 열어 통상하고 천하의 도서(책)들이 들어오면 고루하기 짝이 없는 선비들의 좁디좁은 사고가 절로 무너진다고 생각했다. ‘우물론’을 제기하면서 ‘소비의 미덕’을 강조하기도 했다.
 “재물은 우물이다. 우물에서 물을 퍼내면 물이 가득 차지만 길어내지 않으면 물이 말라버린다.”
 소비의 미덕을 이토록 간결한 비유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의 우물론은 계속된다.
 “비단옷을 입지 않으니 비단짜는 사람이 없고, 졍교한 도자기를 숭상하지 않으니 나라에 공장과 도공, 풀무쟁이의 할 일이 없어졌다. 농업이 황혜하니 농사방법이 형편 없고, 상업을 박대하니 상업 자체도 실종됐다. 사농공상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곤궁하게 살기 때문에….”
 박제가가 주장한 요체는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영위하는 ‘이용(利用)’과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후생(厚生)’이었다.     

이용후생을 주장한 박제가는 "중국처럼 수레를 만들어야 한다. 수레가 없으니 주택가격은 물론 나막신가 짚신값도 오르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조선의 왕안석
 박제가의 사상은 당대 조선사회에 큰 충격파를 안겼다. 박제가의 <북학의>는 조선의 부국강병과 선진문물의 수용, 이용후생, 기술문명의 향상을 강조하는 사히사상의 모델이 됐다. 예를 들어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이용후생을 담당할 이용감을 설치하자’고 주장했다. 박제가의 제안을 정부기구 설립 제안으로 구체화 한 것이다.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1789~?)는 “초정 박제가의 <북학의>를 헐뜯을 수 없다”고 동조했고, 서유구와 이규경 등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당대 조선은 아직 박제가의 개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박제가 스스로도, 또한 그를 무진장 아꼈던 정조 임금도 그것을 알았다. 그랬으니 정조는 초정을 ‘왕안석(王安石)’에 비유했다. 왕안석이 누구인가.
 왕안석은 소나라 시절 과감한 개혁을 꾀하다가 보수파의 반발로 끝내 실패하고 말았던 미완의 개혁가다.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혁사상가였지만 보수파에 의해 소인배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정조 임금 조차 박제가의 개혁론이 왕안석의 그것에 견줄만큼 위대했으나 너무 급진적이어서 당시로서는 좌절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거짓말 쟁이 된 박제가
 사실 그가 연행 후 귀국하자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그를 찾아왔던 것 같다.
 “북경에서 돌아왔더니 나라 안 인사들이 문이 닳도록 찾아와 ‘저들(중국)의 풍속을 알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말하자 모두들 망연자실했다. 내가 오랑캐 편을 든다는 눈치였다.”
 이 대목에서 박제가의 장탄식이 하늘에 닿는다.
 “아. 저들이 우리나라 학문을 이끌고 백성을 다스릴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완고하니 문화가 크게 발전하지 않는 오늘날의 현실이 이상할 것이 없구나.”
 아마도 걸핏하면 “중국을 배우라”고 떠드는 박제가를 꼴사납게 여기는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스스로도 그걸 알았다. 사대부의 눈에는 박제가가 보았던 중국은 청나라 오랑캐일 뿐이었으니까…. 그들은 명실상부한 중화(中華)는 조선이라고 여겼으니까….   
 “날 존경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들도 나를 비방하는 자의 말을 믿는다. 내가 ‘중국의 풍속이 이러저러 해서 너무나 좋다’고 하면 그들이 기대했던 말이 아니라 매우 실망한다. 나를 믿지 않는다.”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조차 역관의 말을 믿고, 정작 박제가의 말은 믿지 않았단다. “하도 진짜냐. 거짓이 아니냐”고 묻기에 답답한 나머지 이렇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단다.
 “그래요. 내가 내가 거짓말을 했구려.” 

초정 박제가를 그린 초상화. 남과의 토론에서 절대 지지않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박제가의 오버, ‘중국어공용론’
 이랬으니 가뜩이나 직선적인 성격의 박제가가 얼마나 조바심을 냈을까. 그런 탓인지 <북학의>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논란을 일으킬만한 대목이 있다.
 바로 박제가가 주장한 이른바 ‘중국어공용론’이다. 오죽했으면 1955년 북한학자 홍희유·강석준이 번역본을 펴낼 때 이 ‘중국어’조를 제외시켰을까.
 사실 박제가의 ‘중국어공용론’을 읽으면 좀 당혹스럽다. 초정은 ‘중국어는 문자의 근본’이라고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중국어로 천(天)은 그냥 천(天·티엔)이라 한다. 우리처럼 ‘하늘 천’이라 하는 겹겹의 장벽이 전혀 없다. 따라서 사물의 이름을 분간하기가 특히 쉽다.”
 무슨 말인가. 초정과 같은 북학파인 이희경(1745~?)의 <설수외사(雪岫外史)>를 보면 박제가의 주장과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글자는 말의 근본인데 우리나라는 글자를 말로 쓰지 않고 따로 말을 만들었다. 예컨대 조선에서는 천(天)을 그대로 ‘천(天)’이라 부르지 않고 ‘하늘 천(天)’이라 한다는 것이다.(故乎天 不曰天 而曰寒乙天) 이는 한 글자에서 소리와 뜻이 전혀 달라 말은 말대로, 글자는 글자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중국에서는 ‘天’을 그대로 ‘티엔’으로 발음하는데, 조선에서는 굳이 ‘하늘 천’이라 한다는 것이다.  
 박제가는 “따라서 우리는 중국과 가깝게 접경하고 있고 글자의 소리가 중국 글자와 대략 같다”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온 나라 사람들이 본래 사용하는 말을 버린다 해도 안될 이치가 없다. 그래야 오랑캐라는 모욕적인 글자로 불리는 신세를 면할 수 있고, 수천리 동국(조선)에 저절로 주·한·당·송의 풍속과 기운이 나타날 것이다.”
 오랑캐 소리를 듣지 않고, 중화에 속하려면 한글을 버리고 ‘중국어를 공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반대파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중국은 말이 문자와 동일하다. 따라서 말이 변하면 문자의 소리도 그에 따라 변한다. 우리는 말은 말대로, 글은 글대로 사용한다. 따라서 맨 처음 받아들여 배운  한자의 소리를 그대로 유지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박제가는 “문자와 말은 하나로 통일하고 옛 한자의 소리가 바뀐 것은 학자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재반박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한자공용론’을 제기한 이유를 “중국과 대등해지기 위해”라고 못박는다.
 ‘한글이 모욕적인 오랑캐 글이며, ‘중국과 대등해지려고’ 한글을 버리고 한자를 공용화해야 한다? 제 아무리 망국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긴급구책이라 해도 박제가의 ‘중국어공용론’ 주장은 선뜻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저 과감하고 급진적인 개혁책을 내놓던 박제가의 ‘오버’라 할 수 있겠다.

 

 ■박제가의 진심
 그러나 박제가의 진심을 모르는 이는 없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일신을 초개처럼 버리고 백성을 끔찍이 여겼으니까….
 그는 <북학의>를 쓰는 심정을 읊은 시를 보라.
 “긴 여행을 마치고 초가에 앉아, 저서의 근심을 오래도록 품고 있다.~ 일신의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고, 아득히 천지를 그리워하며 수심에 잠긴다. 천 개의 글자로 가슴 속 생각을 풀어내려니, 어느 겨를에 내 한 몸 위해 고민하리오.”(<정유각시집> 제2권)
 만약 박제가가 요즘의 학자였다면 어땠을까. 거침없는 성격에 거친 표현도 서슴치 않은 박제가의 글은 인터넷 공간을 뜨겁게 달구며 극심한 논쟁을 일으킬 것이다. 아마도 ‘골수 보수파’들은 과격한 진보논객인 그에게 십자포화를 쏟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경고메시지는 지금도 심금을 울린다.
 “(지금 아시아에) 전쟁 먼지가 일지 않은 지 거의 200년이 되었습니다. 천재일우의 기회에 온 힘을 다해 국력을 닦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에 변고가 발생할 때 더불어 우환이 발생할 것입니다.”
 박제가의 경고메시지 이후 수십년이 지난 고종 시대에 일본과 서구세력의 압력에 의한 강제적인 개혁개방이 이뤄졌다. 남의 손에 의한 타율·강제개방으로 빗장이 풀린 조선은 결국 망국의 길로 급속도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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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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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1383년)정도전이 이성계를 따라 동북면을 방문했다. (이성계) 정예부대의 호령과 군령이 자못 엄숙한 것을 보고 이성계에게 비밀리에 말했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美哉此軍 何事不可濟)’ 이성계가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정도전이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동남쪽 왜구를 칠 때를 이르는 말입니다.”
 ②“조선이 개국할 즈음, 정도전은 왕왕 취중에 슬며시 말했다. ‘한 고조가 장자방(장량)을 쓴 것이 아니네. 장자방이 곧 고조를 쓴 것 뿐이라네.(不是漢高用子房 子房乃用漢高)’라고…. 무릇 임금(태조 이성계)을 위해 모든 일을 도모했으니 마침내 큰 공업을 이뤘다. 참으로 상등의 공훈을 이뤘다.(凡可以贊襄者 靡不謀之 卒成大業 誠爲上功)” 

 삼봉 정도전은 이인임 일파의 미움을 받아 전라도 나주 거평부곡에 유배를 떠났다.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비참한 백성들의 현실을 깨달았다.

■정도전의 부음기사에 담긴 것은  
 ①②, 두 인용문 모두 <태조실록> 1398년 8월26일자에 기록된 삼봉 정도전의 졸기(卒記), 즉 부음기사(Obituary)이다.
 이날 새벽 정도전을 비롯, 남은·심효생·박위·유만수 등은 정안군(이방원)을 포함, 여러 정실 왕자들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죄로 참형을 당했다. 태조 이성계에 의해 세자로 옹립됐던 이방석과 방번 등도 피살됐다. 이를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정도전 일파는 ‘왕자들을 살해하려 한’ 죄로 참형을 당했으니 대역죄인에 해당된다. 대역죄인의 졸기인만큼 그의 죄상을 낱낱이 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이상하다. <실록>의 이 ‘천인공노할 대역죄인의 부음기사’는 비교적 객관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
 물론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보복하기를 좋아했고, 이색을 스승으로 삼고, 정몽주·이숭인 등과 친구가 됐으나 조준 등과 친하려고 세 사람을 참소했다”는 부정적인 내용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면 애교가 아닐까. 대역죄인의 부음기사치고는 매우 관대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부음기사는 되레 정도전에게 매우 긍정적인 단서를 남긴다. 즉 정도전의 사후, 최초의 기록인 이 ‘졸기’는 정도전과 정도전의 생애를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장자방(장량)이 한 고조(유방)를 기용한 것 뿐”
 우선 ①의 기사를 보자. 정도전이 조선개국 전, 동북면을 지키던 이성계를 방문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새 왕조를 개창할 그릇이 되는 지를 탐색하려 한 것이 아닌가. 그 자리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군대의 엄정한 군기와 군세를 보고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냐”고 운을 뗐다. ‘역성혁명을 할 만한 기세’라고 만족감을 드러낸 것이다. 이성계는 이 질문에 ‘무슨 말이냐’고 되묻고, 정도전도 딴청을 피웠다. 그러나 ①의 실록 기사는 두 사람이 새 왕조 개국을 위한 운명적인 만남을 생생한 필치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②는 더욱 흥미로운 기록이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뒤 술자리 때마다 취중진담의 형식을 빌어 ‘한고조(유방)와 장자방(장량)’의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도전이 언급한 장자방, 즉 장량이 누구인가. 장량은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개창한 한 고조 유방의 둘도 없는 책사였다.
 지금 이 순간도 ‘책사의 전범’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한고조는 훗날 “군영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일만큼은 나(유방)도 장량만 못하다”(<사기> ‘유후세가’)고 인정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도전은 술자리에서 큰 일 날 소리를 해대고 있다. ‘한 고조 유방이 장자방을 기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유방을 이용해서 제국(한나라)을 개창했다’는 것이 아닌가. 두 말 할 것 없이 한고조는 태조 이성계, 장자방은 정도전 자신이다.
 그러니까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는 새 왕조를 개창하려고, 이성계를 기용했다는 이야기를 술자리 때마다 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춘추대의’에 반하는, 즉 역심을 한껏 드러낸 대역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실록>은 정도전이 취중에 말했다는 ‘한고조와 장자방’ 이야기를 아주 담담하게 팩트만 담아 전하고 있다.
 정도전 일파를 죽인 태종이 <태조실록>을 편찬했는데, 정도전의 역심을 이토록 담담한 필치로 쓸 수 있을까. <실록>은 더 나아가 “태조(이성계)와 함께 조선개국에 모든 힘을 쏟은 정도전이야말로 ‘참으로(誠)’ 상등의 공훈을 세웠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참으로(誠)’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면, ‘진심’이 듬뿍 담겨있는 평가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정도전의 목을 벤 태종마저도 그를 ‘조선의 개창자였음’을 솔직하게 인정했다는 이야기다.    

 정도전 유배지임을 알리는 표석. 정도전은 원래 ‘백성은 풀잎같아서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쓰러지는’는 나약한 존재이며, 따라서 가르쳐야 할 존재라고 여겼지만 유배생활을 통해 민초의 만만치 않은 힘을 깨달았다.

■군주가 아니라 한낱 사내를 죽인 것이다.
 사실 삼봉 정도전의 젊은 날은 당대의 여느 사대부와 다르지 않았다.
 백성을 군자가 가르쳐야 할 어리석인 대상으로 여겼으니까. 정도전이 다섯살 연상의 정몽주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백성들은 어리석어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모릅니다. 백성들은 뛰어난 자를 믿고 복종할 줄 알았지, 도가 바르고 나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도전은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라면서 “따라서 바람이 불면 풀이 반드시 눕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정도전의 삶은 부친·모친상으로 인한 3년 여의 낙향(1366~69)과, 부원파 이인임의 미움으로 인한 9년 여의 긴 유배 및 유랑(1375~84)으로 완전히 바뀐다.
 먼저 ‘절친’이었던 포은 정몽주가 건네준 <맹자>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정도전은 <맹자>를 하루에 한 장 혹은 반 장씩 차근차근 정독했다. 아마도 맹자를 읽음으로써 역성혁명의 꿈을 키웠을 것이다.
 정도전이 ‘꽂힌’ 맹자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맹자> ‘양혜왕 하’일 것이다. 무엇이냐.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탕왕(상나라 성군)이 하나라 걸왕을 내쫓고, 주 무왕이 상나라 주왕을 죽였는데 그렇습니까.”(제 선왕)
 “기록에 있습니다.”(맹자)
 “신하가 군주를 죽여도 됩니까.”(제 선왕)
 “어짊과 올바름을 해치는 자는 ‘사내’에 불과합니다. 주 무왕이 ‘한낱 사내’(상 주왕을 뜻함)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맹자)     
 그러니까 주나라 창업주인 무왕(기원전 1046~1043년)은 ‘어짊과 올바름을 해친 한낱 사내’인 상(은)의 폭군인 주왕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는 곧 역성혁명을 옹호하는 무시무시한 ‘맹자의 말씀’이다. 또 <맹자> ‘이루’는 “걸주(桀紂·폭군의 상징인 하 걸왕과 상 주왕을 뜻함)가 천하를 잃은 것은 백성을 잃은 것”이라 했다.
 “백성을 잃은 것은 그 마음을 잃은 것과 같다. 백성을 얻으면 천하를 얻은 것이다. 그 백성을 얻는 데도 도가 있으니 그 마음을 얻으면 백성을 얻은 것이다.”
 그는 조선개국 후 펴낸 <조선경국전>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임금의 지위는 존귀한 것이다. 하지만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은 복종한다. 하나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은 임금을 버린다.”(<조선경국전> ‘정보위·正寶位’)

 

 ■질타당한 선비의식
 9년 간의 유배 및 유랑생활에서 마주친 백성들의 비참한 삶도 정도전의 혁명의식을 깨웠다.
 바야흐로 홍건적의 난과 왜구의 침입 등의 외우와 권문세족의 토지겸병 등 내환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던 시기였다.
 “물푸레 나무(水靑木)로 만든 회초리로 농민을 압박, 토지를 빼앗기에 혈안이 돼 토지 하나에 주인만 7~8명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반면 방방곡곡이 홍건적의 난과 왜구 침략으로 싸움터가 됐다.”(<고려사절요> 등)
 유배지(나주 회진현 거평부곡)에서 만난 백성들은 ‘교화해야 할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었다. 농사를 짓고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것을 천직으로 여긴, 가난하지만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질곡의 하루하루를 보내던 백성들은 정도전에게 ‘탁상공론하는 유학자들의 허위의식’을 사정없이 일깨워주었다.
 정도전의 <금남야인>이란 글을 보자. 어떤 야인(野人)이 “선비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선비의 몸종이 선비를 위해 대신 대답한다.
 “우리 선비님은 천문·지리·음양·복서에도 능통하고 오륜 윤리에 통달하고 역사와 성리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분입니다. 후진을 가르치고 책을 쓰고 의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진정한 유학자임을 자부하는 선비입니다.”
 그러자 야인은 슬쩍 비웃으면서 단칼로 정리한다.
 “그 말은 사치입니다. 너무 과장이 아닙니까. 실상도 없으면서 허울만 있으면 귀신도 미워할 겁니다. 선생은 위태롭군요. 화가 나에게까지 미칠까 두렵네요.”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 선비의 허위의식을 사납게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이숭인과 정몽주 등이 유배 중이나 유배가 풀렸을 때 임금을 향한 ‘연군시(戀君詩)’를 남겼지만, 정도전은 일절 쓰지 않았다. 백성에게 배웠는데 왜 임금에게 고마워한다는 말인가.  

통치규범을 육전으로 나누었는데, 국가형성의 기본을 논한 규범체계서였다. <조선경국전>은 막 개국한 조선왕조의 헌법이었으며, 훗날 <경국대전> 편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성계를 만난 날
 정도전은 맨처음 인용한 대로 유랑 중 도지휘사로 동북지방 국토방위 책임자였던 이성계를 만나 혁명의 감(感)을 잡았다.
 이 때가 1383년(우왕 9년)이었다. 정도전의 나이 42살이었고 이성계의 나이 49살이었다. 정도전은 이듬해(1384년) 여름 함주(함흥)를 찾았다. 아마도 이때는 ‘이성계의 장자방’으로서 본격적인 혁명모의를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1392년 7월 17일, 드디어 조선이 개국되자 정도전은 새왕조의 실질적인 설계자가 됐다. 그의 직책은 어마어마 했다.
 1품인 숭록대부에다 봉화백이라는 작위는 덤이었다.
 문하시랑찬성사(시중 다음 직책), 동판도평의사사사(최고정책결정기구 수장), 판호조사(국가경제 총괄), 판상서사사(인사행정 총괄), 보문각대학사(문한의 총책임자), 지경연예문춘추관사(역사편찬과 국왕 교육책임), 의흥친군위 절제사(태조 이성계의 친병 두번째 책임자)….
 그러니까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인사행정을 도맡으며, 국가재정·군사지휘권·왕의 교육과 교서작성·역사편찬 등 전 분야를 총괄하는 직분을 감당해낸 것이다.

 

 ■혁명공약 쓴 정도전
 그의 지위는 7월28일 발표한 이른바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이 발표됨으로써 구체화했다. 이것은 일종의 혁명정부의 공약같은 것이었다.
 정도전의 연구자인 한영우 교수(서울대)는 이 편민사목 편찬을 두고 “정도전이 조선왕조의 설계자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종묘사직의 제도. 왕씨 처리 문제, 과거제도 정비. 국가재정의 수입과 지출, 군대진휼, 과전법의 준수, 공물 감면 등 혁명개혁공약을 만천하에 공포했다.  
 특히 정도전은 이색·이숭인·우현보·설장수 등 56명을 반혁명 세력으로 간주하고 엄중한 처벌을 언급했다. 물론 이들은 태조의 감면으로 극형을 면했다. 그러나 이색의 아들 이종학과 우현보의 세 아들 우홍수·홍득·홍명 등 8명은 유배 도중 곤장 70대를 맞고 사망했다.
 <태조실록>은 우현보 세아들의 죽음을 특별히 언급하면서 “이는 정도전과 우현보 가문의 오랜 원한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라고 언급했다. 무슨 말인가.
 여기에는 정도전을 둘러싼 출생의 비밀이 담겨있다. 즉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문제’였다. 정도전의 외할머니는 김진이라는 승려가 자신의 종의 아내와 사통해서 낳은 아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진이라는 승려는 우현보의 자손과 인척관계였다. 따라서 우현보의 자손들은 정도전의 ‘천한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도전의 ‘출생의 비밀’
 그런데 정도전이 과거에 급제,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를 때 대간(사간원)에서 고신(신분증)을 선뜻 내주지 않았다. 이 때 정도전은 우현보의 자손들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퍼뜨려 그렇게 됐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도전이 훗날 우현보의 세 아들을 모함해서 개인감정으로 ‘치사하게’ 복수했다는 것이다.
 사실 정도전으로서는 ‘천출(賤出)’이라는 것 때문에 무진 구설수에 시달려왔다.
 예컨대 고려 공양왕 말기인 1392년 4월, 간관 김진양 등은 정도전을 탄핵하면서 다음과 같이 폄훼했다.
 “정도전은 미천한 신분으로서 몸을 일으켜 당사(堂司)에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때문에 그 미천한 근본을 덮고자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하는데, 홀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참소로 죄를 얽어 만들어 많은 사람을 연좌시켰습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2년조)
 여기서 말하는 ‘본주’, 즉 본주인은 우현보 가문을 일컫는다. 정도전의 ‘출생 컴플렉스’가 대단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거꾸로 이같은 출생의 한계 때문에 명문가 출신인 정몽주 등과 달리 세상을 완전히 갈아엎는 혁명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정도전의 만기친람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정도전은 17킬로미터에 이르는 한양도성을 설계했고, 한양을 구획하고 거리와 마을의 이름까지 지었다.

■정도전의 예능감
 어쨌든 정도전은 그야말로 새 왕조 설계를 위해 ‘만기친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한 일을 일별만 하더라도 과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려사>를 편찬했으며, 사은사로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동북면 도안무사가 되어 함길도를 안정시키고 돌아왔다. 여진족을 회유하고 행정구역을 정리하려던 것이었다. 태조는 그런 정도전을 두고 “경(정도전)의 공이 (고려 때 동북 9성을 경영한) 윤관보다 낫다”고 치하했다.(<태조실록> 1398년 3월30일)
 그 뿐인가. 악곡까지 만들었다. 즉 문덕곡(文德曲·이성계의 문덕을 찬양), 몽금척(夢金尺·신으로부터 금척을 받았음을 찬양), 수보록(受寶錄·태조 즉위전에 받았다는 참서), 납씨곡(納氏曲·몽고의 나하추를 격퇴한 것을 찬양), 궁수분곡(窮獸奔曲·왜구 격파의 공로를 찬양), 정동방곡(靖東方曲·위화도 회군을 찬양) 등 6개 악사를 지어 왕에게 바친 것이다. 정도전이 작사·작곡·편곡한 이 6곡은 춤으로 형상화됐다. 종묘와 조정의 각종 행사 때 연주돼 궁중무용으로 자리잡았다.
 참 재주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은 정도전에게 음악가의 재능까지 선사한 것이다.
 그는 또 한의학에도 천착, <진맥도지(診脈圖誌)>까지 펴냈다. 의사는 맥을 짚는데 착오가 없어야 한다면서 여러 학자들의 설을 참고해서 그림을 곁들여 요점을 정리한 것이다. 대체 정도전의 ‘능력의 끝’은 어디까지였을까.  

 

 ■병법에 군사훈련까지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오행진출기도>와 <강무도>,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 등 병서를 지어 태조에게 바쳤다는 점이다.
 이것은 요동정벌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정도전은 각 절제사들이 보유하고 있던 군인 가운데 무략이 뛰어난 자들을 골라 ‘진도(陣圖)’를 가르쳤다. 자신이 제작한 ‘진도’를 펴놓고 일종의 제식훈련을 펼친 것이다. 이것은 사병 성격의 군대를 정도전 자신이 직접 장악, 장차 요동정벌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1394년, 정도전은 중앙군 최고책임자인 판의홍삼군부사가 됐다. 사실상 군통수권자가 된 것이다. 이성계의 친병인 의흥친군위도 이 기구에 통합됐다.
 그러나 정도전의 병권장악은 순조롭지 않았다. 정안군(태종) 등 여러 왕자와 종친, 그리고 절제사들이 저마다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과 절제사들이 철갑을 입고 군대깃발에 제사를 지내는 제독 행사를 치렀다. 이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절제사들의 수하들에게 태형이 집행됐다.”(<태조실록> 1394년 1월28일)
 “절제사와 군사들에게 진도를 익히도록 강요하고 사졸들을 매질하니 이를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태조실록> 1398년 윤5월29일) 
 정도전은 특히 1394년 2월29일 왕자들과 종친들, 그리고 공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사병들을 혁파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군제개혁안을 관철시켰다.
 사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모든 군통수권이 국왕 한사람에게 모여야 하는게 옳았다. 때문에 정도전의 군제개혁안은 당연한 과업이었다.

 

 ■요동정벌의 야망
 또 누누이 강조하지만 이 군제개혁안이야말로 정도전이 외쳐온 ‘요동정벌’을 위한 선행조건이었다.
 예컨대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하고자 한 고려 태조의 정책을 웅장하고 원대한 계략(宏規遠略)”이라고 칭송했다. 더불어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의 유민을 포섭한 태조의 조처를 ‘매우 어질고 은혜로운(沈仁厚澤) 정책이었다’고 숭상했다.(<삼봉집> 중 ‘경제문감별집’ ‘군도君道·고려국 태조 高麗國太祖)
 정도전의 요동정벌 의지는 확고했다. 예컨대 1397년(태조 6년) 정도전은 측근인 남은과 결탁해서 태조 임금에게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동명왕의 옛 강토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태종실록> 1405년 6월27일)
 남은의 상소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태조는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이냐”고 정도전에게 물었다. 그 때 정도전은 “예전에도 외이(外夷)가 중원에서 임금이 된 적이 있지 않느냐”고 요동정벌을 촉구했다. 정도전은 요나라와 금나라, 원나라 등 이른바 이민족의 나라가 중국 중원을 점령한 일을 거론하면서 요동정벌의 정당성을 말한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의 군제개혁안과 요동정벌 계획은 극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예컨대 정도전의 편에 선 대사헌 성석용이 정도전의 <진도>를 익히지 않은 모든 지휘관의 처벌을 강력히 주청한 일이 일어났다.(1398년 8월9일)
 당시 절제사를 비롯한 군부 지도자들의 면면을 보면 정안군(태종)을 비롯한 여러 왕자들과 종친들, 그리고 개국공신들이었다. 그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그러자 태조는 “정안군(태종) 등 왕자 및 종친들과 이지란 등 개국공신들은 사면하라”는 명을 내림으로써 이들의 반발을 무마했다.
 여기에 병상에 누워있던 개국공신 조준은 태조 임금을 알현하고 ‘요동정벌 불가론’을 조목조목 따졌다. “(고려말 조선초의) 잦은 부역으로 백성들이 지쳤고, 신생 명나라의 국력이 틈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인데 군사를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정도전의 야망은 전방위적인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고 만다. 

 정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몸통없이 목만 남은 유골이 발굴됐다. 재상의 나라를 꿈꾸던 정도전은 태종 이방원에 의해 참수되는 비운을 겪었다.

■도성설계에, 동네이름까지
 이밖에도 새 왕조의 기틀을 잡기 위한 정도전의 ‘만기친람’은 혀를 찰만 했다.
 1394년 <조선경국전>의 편찬은 그의 혁혁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통치규범을 육전으로 나누었는데, 국가형성의 기본을 논한 규범체계서였다. <조선경국전>은 막 개국한 조선왕조의 헌법이었으며, 훗날 <경국대전> 편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역대부병시위지제>라는 군제개혁안을 그래픽을 곁들여 편찬, 임금에게 바쳤다.
 얼마나 병법에 해박했으면 그림까지 그려 설명할 정도였을까.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이 뿐인가. 정도전은 한양 신도읍지 건설사업의 총책임자가 되어 도성건설의 청사진을 설계한다. 한양의 종묘·사직·궁궐·관아·시전·도로의 터를 정하고 그 도면까지 그려 태조 임금에게 바쳤다. 새 도읍의 토목공사가 시작되자 <신도가>라는 노래까지 지어 공역자들의 피로를 덜어주고 흥을 돋우어 주었다.
 “~앞은 한강수여, 뒤는 삼각산이여, 덕중하신 강산 좋으매 만세 누리소서.”
 경복궁과 근정전, 사정전, 교태전,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등 궁궐 및 전각의 이름과 융문루·영추문·건춘문·신무문 등 궐문의 이름을 지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지금도 상당 부분 남아있는 한양도성을 쌓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그는 직접 백악산(북악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낙타산(낙산)에 올라 거리를 실축하고 17㎞가 넘는 도성을 설계했다. 오행의 예에 따라 숭례문·흥인지문, 돈의문, 소지문(숙정문) 등 4대문과 소의문, 창의문, 혜화문·광희문 등 4소문의 이름도 지었다.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종로의 종각은 오행의 신(信)에 해당됐다. 한양은 이로/써 인의예지신 등 오덕을 갖춘 도시의 상징을 띠게 됐다. 신도시 한양의 행정구획을 정리하고 구역의 이름을 짓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한양을  동·서·남·북·중 5부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수십개의 방(坊)으로 구획하고 이름을 정했다. 예컨대 연희·덕성·인창·광통·낙선·적선·가회·안국·명통·장통·서린 등의 이름이 정도전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냥 지은 게 아니었다.
 인의예지신와 덕(德)·선(善) 등 유교의 덕목을 담은 명칭이었다. 정도전은 완성된 한양의 모습을 찬미하는 6언절구의 <신도팔경시>를 지었다.(1398년 4월 26일)

 

 ■최고의 불교비판서
 새왕조 개창을 향한 그의 정력은 <불씨잡변> 저술에서도 엿볼 수 있다.
 1398년(윤 5월16일) 개국공신 권근이 쓴 <불씨잡변> 서문을 보자.
 “무인년(1398년) 여름(4~5월) 선생(정도전)은 병 때문에 며칠 쉬고 있는 사이 이 글을 만들어 나(권근)에게 보이며 말했다. ‘불씨(부처)의 해독은 사람을 금수로 만들어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니~울분을 억제할 수 없이 이 글을 짓는 것입니다.’라고….”
 정도전은 더 나아가 “불교를 깨뜨릴 수 있다면 죽더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이 <불씨잡변>은 동양 역사에서 가장 수준높은 불교비판서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성리학을 조선왕조의 국교로 정착시킨 저술로 인정받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몸이 아파 쉬고 있는 사이에도 나라를 위한 정도전의 노심초사를 읽을 수 있다. 그보다 이 짧은 기간동안 이렇게 깊이 있는 저술을 완성할 수 있었다니…. 그의 내공에 감탄사가 절로 나올 뿐이다.

 

 ■군주의 권한은 딱 두가지 뿐
 그러나 정도전의 사상 가운데 으뜸은 역시 ‘재상 중심’의 신권(臣權) 정치였다.
 1394년 <조선경국전>을, 1395년엔 그것을 보완한 <경제문감>을 지었다. 여기서 정도전 정치사상의 핵심인 ‘재상중심의 권력구조’ 의견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너무 혁명적이다.
 “인주(人主·군주)의 실제 권한은 딱 두가지다. 하나는 재상을 선택·임명하는 권한이다.(人主之職 在擇一相) 다른 하나의 권한은 한 사람의 재상과 정사를 의논하는 것이다.(人主之職 在論一相)”(<조선경국전> ‘상·치전·재상연표’ <경제문감> ‘상·재상’)
 여기서도 주안점이 있다. 군주는 국사에 관계된 큰 문제만 협의할 뿐, 그밖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재상이 모두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사의 주도권은 군주가 아니라 재상에게 있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왜 재상에게 사실상의 권한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왕의 자질은 어둡고 현명하고 강하고 약함이 한결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아름다운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 왕이 대중의 영역에 들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상(相·재상)이라 합니다. 도와서 바로잡는다는 것입니다.”(<조선경국전> ‘상·치전총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군주의 실권은 원래 미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왕위는 세습된다 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즉 왕이 현명하면 물론 좋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더라도 재상만 훌륭하다면 괜찮다는 것이다.(<조선경국전> ‘상·치전·재상연표’)

 

 ■군주는 사유재산도 없어야 한다
 정도전은 이와함께 군주는 사유재산을 가져서도 안된다고 단언했다. 군주의 사유재산권은 측근들을 먹여살리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 경우 왕의 측근세력은 권세와 농간을 부려 만사의 폐단이 이로 말미암아 야기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군주는 관념상으로 가장 많은 부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국가의 경비지출에 의해 생계를 지탱해야 하는 일종의 월급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재상은 군주가 필요로 하는 일체의 경비를 장악해서 군주가 사치와 낭비가 없도록 엄격히 통제해야 하는 존재다.(<조선경국전> ‘상·치전·재상연표’)
 그래서인가. <경제문감>은 “천하의 교령(敎令)과 정화(政化)는 모두 재상의 직책에서 나온다”(재상지직·宰相之職)고 했다.
 따라서 군주는 재상을 대할 때 반드시 ‘예모(禮貌)’ 즉 ‘예를 갖춘 얼굴’로 대해야 하며 함부로 언동해서도 안된다.
 그러니까 재상은 인사권과 군사권, 재정관할권, 작상(爵賞)형벌권 등 움켜쥔다는 것이다.(<경제문감> ‘상 재상지직’)

 

 ■정도전이 꿈꾼 세상
 정도전이 재상정치를 논하면서 전범으로 삼는 ‘재상’들이 있다.
 상나라 탕왕과 주나라 성왕을 도와 왕조를 반석 위에 세운 이윤(요리사 출신의 재상)과, 주공(성왕의 삼촌이자 섭정 재상)이다.
 물론 한나라의 소하·조참·주발·진평과 당나라의 방현령·두여회·요숭 등도 명재상이긴 하다. 하지만 정도전은 자기 몸을 수양하고 임금을 바로 잡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는 것이다.(<경제문감> ‘상·재상 상업’)
 정리해보면 미련하고 똑똑한 군주가 둘쭉날쭉할 수밖에 없는 세습군주로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천하만민 가운데 뽑은 선비로 현인집단을 형성하고, 그 현인집단 가운데 선발된 관료를 중심으로한 관료정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료정치를 이끌어가는 구심점은 천하만민의 영재 가운데 선택된 재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도전의 천려일실
 1398년 8월26일, 정도전은 자신의 집(종로구청 자리)과 가까운 남은의 첩 집(송현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불의의 습격을 받아 참수 당한다.
 당시의 <실록>은 정도전은 죽기 전, “예전에 공(정안군)이 나를 살렸는데, 이번에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한영우 교수는 정도전이 죽기 전에 읊었다는 ‘자조(自嘲)’의 시를 보면 혁명가의 기개가 엿보인다고 주장한다.
 “조심하고 조심하여 공력을 다해 살면서(操存省察兩加功) 책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不負聖賢黃卷中), 삼십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三十年來勤苦業)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松亭一醉竟成空)”(<삼봉집>)
 새왕조 건설을 위해 눈코뜰새없이 움직이던중 그만 순간 방심해서 술 한잔 마시다가 천려일실, 변을 당했음을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현방은 바로 남은의 첩 집을 가리킨다.

 

 ■목만 발굴된 유골의 정체
 지난 1989년 3월, 서울 서초동 우면산 자락에서 삼봉 정도전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발굴됐다.
 발굴 묘는 <동국여지지> ‘과천현’편과 봉화정씨족보에서 정도전 선생의 묘로 추정한 바로 그 곳이었다. 봉화 정씨 종택이 그동안 이 묘소를 관리해왔다. 그런데 발굴결과 몸통은 없고, 머리만 남은 피장자의 유해가 발견됐다. 이와함께 상당히 정제된 조선초기의 백자가 함께 수습됐다.
 무덤을 발굴한 한양대박물관은 “무덤의 지체로 보아 상당한 신분의 피장자였음이 분명하다”면서 “삼봉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특히 정도전이 “정안군이 정도전의 참수를 명했다(令斬之)”는 실록의 기사(1398년 8월26일)가 눈에 띄는 대목이다. 아마도 어떤 뜻깊은 이가 그의 잘린 목을 수습해서 정성스럽게 묻어두었을 것이다.
 조선을 설계한 위대한 혁명가이자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정도전의 최후는 이렇게 비참했다.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이 있다.

 

 ■장자방과 다른 점
 정도전은 ‘조선을 개국한 장자방’을 자처했지만, 끝까지 장자방의 길을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자방의 경우를 보자. 한 고조(유방)가 한나라를 개국한 뒤 정부인(여후)의 아들(태자)을 폐하고 총애하던 후궁(척부인)의 아들을 새 태자로 옹립하려 했다.
 그 때 장자방은 정부인을 위해 선묘한 계책을 내어 장자(여후의 아들)의 계승원칙을 지켜냈다.
 반면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가 정실이 아닌 후실(신덕왕후 강씨)의 어린 아들(방석)을 세자로 세우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도리어 세자(방석)의 스승이 되어 미움을 자초했다.
 또 하나, 장자방은 한나라가 개국되자 “이제 세속의 일은 떨쳐버리고자 한다”고 선언한 뒤 적송자(전설상의 신인)의 삶을 좇아 유유자적했다.
 이 또한 정도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조선 개국 후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만기친람’하며 초인의 능력을 발휘했던 정도전과는….
 
 ■‘그 분과 견줄수 있는 영웅호걸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정도전이 있었기에 역사는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그가 뿌린 씨앗은 조선왕조 500년은 물론, 지금 이 순간까지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1465년(세조 11년), 영의정 신숙주는 정도전의 손자 정문형의 부탁을 받아 <삼봉집>의 후서를 써주면서 이렇게 평했다.
 “개국 초 나라의 큰 규모는 모두 선생이 만들었으며, 당시 영웅호걸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지만 그 분(정도전)과 비교할 만한 이가 없었다.”
 태조 이성계는 1395년 10월29일 낙성된 경복궁에서 연회를 베풀며 삼봉 정도전에게 네 글자를 대서특필해 선물했다.
 ‘유종공종(儒宗功宗)’. 즉 ‘유학도 으뜸이요, 나라를 세운 공도 으뜸’이라는 글자였다. 핵심을 찌르는 당대의 평가다.
 물론 삼봉의 속내는 달랐을 것이다. 이성계(한고조 유방)가 정도전(장자방)을 기용한 것이 아니라 정도전이 이성계를 기용한 것이라고….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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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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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발을 맞이하라.”(세종)
 “싫사옵니다.”(송인산)
 “명을 거역하겠다는 거냐.”(세종)
 “이발은 욕심을 품어 어명을 욕되게 한 자입니다. 사헌부의 장관이 될 수 없습니다.”(송인산)
 “(이발이) 고의로 범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어서 마중하도록 하라.”(세종)
 “하교를 받들지 못하겠나이다.”(송인산)
 사헌부 장령(정 4품)에 불과한 송인산이 지존인 임금의 명을 거역했다는 말이다. 이 무슨 하극상이란 말인가.
 그러나 세종은 두 손을 들고 만다. 이발의 대사헌 임명을 취소하고 형조참판으로 바꿔 제수한 것이다. 1420년 3월, 세종시대에 일어난 초유의 항명파동이었다. 

사간원 관리들의 친목모임을 그린 <미원계회도>(보물868호). 1540년 열린 이 계모임에는 이황, 유인숙, 이명기, 나세찬, 이영현 등이 참석했고 성세창의 시문이 적혀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항명파동
 무슨 일인가. 내막은 이렇다, 세종은 3월16일, 이발을 대사헌으로 임명한다.
 그런데 이발의 대사헌 임명은 처음부터 무리수였다. 이발은 3년 전인 1417년(태종 17년), 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 금릉(남경)을 방문한 뒤 거센 탄핵을 받은 바 있다. 대량의 포물(布物)을 사사로이 가져가 중국 현지에서 팔았다는 비난을 받은 것이다. 이 사건은 중국에서도 큰 물의를 빚었다. 명 조정에 진상할 물건은 별로 없는데, 개인적으로 가져온 물건이 한가득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죽했으면 중국 명나라 조정의 예부가 나서 백성들에게 “명조정에 진상할 물건은 조선인들과 매매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엄포를 놨을까.
 심지어는 명 예부상서는 이발을 만나 비아냥 거렸다고 한다.
 “어째, 포물은 좀 팔았습니까.”
 사절단 전체가 웃음거리가 됐다. 낯뜨거운 외교적인 망신이었다. 이 스캔들은 조선에도 금세 퍼졌다.
 문제는 태종 임금이 이발을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에 임명했다는 것이다. 사헌부는 지금으로 치면 감사원이나 검찰 정도되는 사정기관이다.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단속하는 기관의 수장에 비리인사를 임명하다니….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이 출근하면 모든 사헌부 관리들이 청사의 뜰 아래 도열해서 정중히 영접하는 것이 법도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사헌부 관리들이 신임 대사헌인 이발의 첫 출근을 저지하고 나선 것이다. 사헌부 관리들의 입장은 분명했다.
 “마음 씀이 간사하고 탐욕이 있는 인물이 풍헌(風憲·사헌부)의 수장으로 자격이 없습니다.”
 사헌부 관리들이 완강하게 나서자 태종도 어쩔 수 없었다. 태종은 이발의 임명을 취소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문제의 인물을 세종시대에 들어서도 또 다시 대사헌에 임명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역시 사헌부 관리들이 나선 것이다. 1420년 3월22일, 이발이 다시 첫출근에 나섰으나 사헌부 관리들은 아무도 영접하지 않았다. 세종이 송인산에게 “이발을 마중하도록 하라”고 직접 명했으나 송인산 등은 죽기를 각오하고 항명파동을 일으킨 것이다. 세종 시대의 항명파동은 결국 13일만에 사헌부 관리들의 승리로 끝났다.
 당대의 사정기관 공무원들은 태종과 세종이라는 큰 임금 앞에서도 당당히 할말을 하면서 사정기관의 자존심을 무너뜨리지 않은 것이다.

  

   ■“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말만 들어도 지독한 사정기관 공무원이 있다. 그것도 폭군의 시대라는 연산군 치하의 공무원이다. 
 “그의 살코기를 씹어먹고 싶습니다.(欲食其肉)”
 1497년(연산군 3년)이었다. 사간원 정언(정 6품) 조순이 ‘막말’에 가까운 독설을 퍼붓는다. 갓 서른이 된 사무관(조순)이 칠순을 넘긴 재상 ‘노사신’을 겨냥,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그것도 임금 앞에서…. 무슨 사연일까.
 연산군이 노사신의 최측근인 ‘체윤공’이라는 인물을 신임 고양군수로 임명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임금의 잘못을 간언하고(사간원) 관료들의 비행을 적발하는(사헌부) 대·간관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들의 주장은 한결 같았다.
 “글도 모르는 채윤공이 어찌 고을을 다스리겠습니까. 절대 아니되옵니다.”
 그러자 노사신이 채윤공을 비호했다.
 “아니 대간들이 무슨 공자님입니까. 남의 벼슬길까지 막습니까. 그리고 대간이라는 자들은 남을 고자질해서 명성을 얻는 자들이 아닙니까.”
 노사신이 거품을 물고 대·간관들을 원색 비난했다. 그러자 조순은 노사신을 ‘간신’이라 비난하면서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은 인물”로 비난해버린 것이다.
 임금 앞에서 너무 심한 표현이었다. 연산군이 발끈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임금의 면전에서…. 살코기 운운은 너무 심한 표현 아니냐. 저 자(조순)는 임금이라도 공경하지 않을 인물일거야. 저 자를 국문하라.” 

세조의 최측근이었던 양성지의 글씨. 그는 대사헌 재직시절 이른바 '풍문탄핵'의 희생양이 되어 곤욕을 치렀다. 

■“아니되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금으로 치면 개통령 비서실 격인 승정원까지 나서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대·간관을 국문한다는 것은 아니될 말씁이십니다.”
 그러자 연산군이 비아냥 댔다.
 “승정원도 대간을 퍽이나 두려워하는구나!”
 임금의 자문기관인 홍문관 관리들까지 벌떼처럼 나서 상소를 올렸다.
 “노사신의 죄가 많습니다. 바른 말을 한 조순을 풀어주십시오.”
 그러자 연산군은 또 한마디 더한다.
 “너희는 앞다퉈 조순을 위해 나서는구나. 과연 임금에게 일이 생겨도 이렇게 달려와 구하겠느냐.”
 천하의 연산군 조차 대·간관들의 끈질김에 혀를 내두르며 “너희는 내게 일이 있어도 나를 위해 이렇게 상소를 올리겠느냐”고 한 것이다.  
 
 ■연산군마저 굴복시킨…
 연산군은 3사(홍문관·사헌부·사간원)에다 승정원까지 나서자 타협책을 제시한다.
 문제의 채윤공을 직접 불러 몇가지 대면시험을 본 것이다. 채윤공은 결국 고양군수직에서 해임됐다. 부임하지도 못하고 좌절된 것이다.
 “대간들이 하도 탄핵하기에 채윤공을 불러 시험했다. 그랬더니 과연 <맹자>도 못 읽고, <경국대전>도 이해하지 못했다. 또 칠사(七事·수령의 7가지 덕목)도 알지 못했다. 할 수 없이 해임시켜야겠다.”(<연산군일기>)
 대·간관이 아우성친다고 그냥 해임시킨다는 것은 임금 체면에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연산군은 대면시험이라는 과정을 통해 문제인사를 해임시킨 것이다.
 연산군은 그러면서도 “아무리 그래도 원로대신에게 막말을 퍼부은 조순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며 조순의 파직결정은 고수했다. 연산군으로서는 절묘한 타협책을 마련한 것이었다. 

 

 ■한치의 흠결도 허락치 않은…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던 태종과 세종, 그리고 연산군까지…. 그들 앞에서 당당히 나가 직언을 해대고, 임금을 다그쳤던 사람들이 바도 대·간관의 참모습이었다. 대·간관이란 무엇인가. 앞서도 언급했듯이 관리들의 비행을 규탄하고 풍속을 바로잡고(사헌부), 임금의 잘못을 따지는(사간원) 역할을 담당했다.
 서거정은 대·간관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군왕의 실책에는 거침없이 역린을 건드리고…. 임금의 노여움에 저항하며 중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장상대신에게 과오가 있으면 규탄하고 종친 및 외척과 세도가, 그리고 임금의 측근신하 등에게 횡포가 있어도 탄핵하고….”
 또 있었다.
 “소인이 조정에 있으면 반드시 내보내고. 탐관이 벼슬에 있으면 기어이 내쫓아야 하고 곧은 자를 천거하고 굽은 자를 버리며 탁한 것을 배격하고 맑은 것을 찬양해서 얼굴색을 바로 하고 조정에 서면 백관이 떨고 두려워 하는 바이다.”(<연려실기술> ‘관직서고·사헌부’)
 그랬으니 대·간관은 한치의 흠결도 허락되지 않았다.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사표였던만큼 한 치의 흠결도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송영이 무슨 배우인가. 왜 이리 시끄럽냐”
 또 하나의 예를 들자. 성종 임금의 예이다.
 성종은 1481~82년 사이 송영이라는 인물을 사헌부 장령과 지평에 고집스럽게 임명했다. 대간들이 아우성 친 이유가 있었다.
 송영은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의 조카였기 때문이었다. 송현수는 단종의 복위에 연루되어 교수형을 받았다. 따라서 송현수의 조카인 송영 역시 난신에 연좌된 자라는 것이다. 그런 송영을 성종은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했다가 대간들의 반발로 끝내 철회했는데(1481년), 1년 뒤 다시 사헌부 지평으로 재임명한 것이다.
 성종으로서는 ‘송영 카드’를 버릴 수 없었다. 송영의 숙모가 세종대왕의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대·간관들이 아우성치자 성종 임금이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아니 송영이 무슨 배우냐, 도적이냐? 왜 이리 난리를 떠는가.”
 그래도 대간들의 아우성이 그치지 않자 성종 임금은 더욱 까칠하게 반응했다.
 “내 (임명)교지가 대간의 탄핵보다 못하다는 거냐. 너희들이 난리를 피우는 것은 너희들 마음대로 조정의 기강을 잡으려는 게 아니냐.”
 성종은 “임금의 교지까지 받들지 않은 대간관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논쟁이 이어졌다. 결국 조정의 중론은 “송영과 대간들 가운데 어느 한 편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종은 타협책을 제시했다. “대간을 자르면 임금이 간언을 거절해서 갈았다 할 것이고, 송영을 자르면 훗날 대간들이 또다시 아우성을 칠 테니 둘 다 교체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나름의 타협책을 제시한 것이었다.     

 정덕필을 사헌부 장령에 임명한다는 영조 임금의 교지(1788년)

■‘카더라 통신’으로도 탄핵됐다 
 사정기관의 수장인 대사헌이 되려면 이른바 ‘풍문탄핵’도 감당해야 했다.
 ‘풍문탄핵’이 무엇인가. 증권가 찌라시에 나오는 ‘카더라 통신’으로 고위공직자들을 탄핵했다는 뜻이다.
 1477년(성종 8년), 사헌부 장령(4급 공무원)이 직속상관으로 임명된 대사헌을 ‘풍문탄핵’한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즉 사헌부 장령 김제신이 수장인 대사헌 양성지를 공격한 내용이다.
 “양성지는 본래 재화만을 탐하여…. 일찍이 이조판서 시절, 문전성시를 이뤄 자못 ‘보궤불식(보궤不飾)’이라는 비난과 함께 ‘오마판서(五馬判書)’라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더러운 소문이 있는데….”
 그러면서 김제신은 기막힌 말을 뱉는다.
 “비록 그가 한 짓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어도 사람들의 입에 퍼진 소문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니 빨리 파면하심이 옳은 줄 아옵니다.”
 여기서 ‘보궤불식’이란 ‘청렴하지 못한 대신이 나라의 제사그릇을 더럽한다’는 말이고, ‘오마판서’는 ‘수레를 끄는 4마리 말 외에 부정축재용 말 한마리를 더 데리고 다닌다’는 말이다. 부정축재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문제는 ‘비록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소문에….’라는 것이었다.

 

 ■‘풍문탄핵’의 여파…
 양성지는 “억울해 미치겠다”는 상소문을 잇달아 올린다.
 “14년 전 길거리에서 들은 애매한 이야기로 노신에게 뒤집어 씌우고…. ~신은 논두렁에서 목을 매어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양성지는 “구천에서도 원통함을 달랠 길이 없을 것”이라면서 “당사자(김제신)과 대질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이 사건은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성종 임금은 ‘카더라 통신’으로 직속상관을 탄핵한 김제신을 불러 소문의 ‘진위’여부를 깨물었다.
 그런데 김제신의 답변이 기막힌다.
 “예전에 들었지만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어찌 지어낸 말이겠습니까.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소문이 그러니 사헌부 수장으로는 마땅치 않습니다.”
 사헌부도 김제신의 주장에 동조했다. “대간이 사책(史冊)에 쓰여진 것만으로 말한다면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창손 등 고위관리들은 “말도 안되는 풍문탄핵의 죄를 물어야 한다”며 “이것은 국가의 체모에 관계된 일”이라고 김제신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문제를 두고 모든 대신들이 총동원된 ‘대토론회’를 열었다.
 결국 성종은 솔로몬의 판결을 내렸다.
 “대간의 말을 두고 ‘소종래(所從來·말의 출처)’를 가린다면 대간이 어찌 말하겠는가. 양성지도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충분히 소명한 만큼 혐의가 없어지지 않았느냐. 둘다 죄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생각할수록 대단한 사정기관에, 대단한 임금이지 않은가. 이렇게 건강한 정부를 또 찾아볼 수 있을까.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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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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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의 흥폐가 스승의 도(道)에 있는데…. 심지어 ‘해(亥)와 시(豕)’, ‘노(魯)와 어(魚)’의 글자를 구별할 줄 모르는 자들이 선생이라 합니다.”
 1429년(세종 11년) 사간 유맹문의 상소를 보면 성균관과 향교 선생들의 질이 형편없음을 고발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갈 곳 없는 늙고 병든 사람들을 성균관 교관(선생)으로 발령내는 일이 다반사이며, 그마저 자주 바뀌는 형국”(중종의 언급)이니 그럴 만도 했으리라. 1527년(중종 22년) 지사 김극핍의 상소가 사태의 심각성을 전한다.
 “유생들이 선생 한사람의 기르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학부형들은 ‘관학(성균관) 공부가 안된다’며 유명 과외선생에게 수업을 받는다고 합니다.”(<중종실록>)
 공교육의 선생들은 믿을 수 없으니 실력있는 과외선생을 찾는 것이 당대의 유행이라지 않은가.  

조선시대 과거합격자 명단. 고려 조선시대 땐 과거에 합격하지 않으면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다.  

■‘낙지’가 ‘입지’가 된 사연
 김극핍의 상소야말로 무너진 공교육과 창궐하는 사교육의 현실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하기야 “유생이 독서하는 이유는 과거합격을 위한 것이 아니냐”던 성종 임금의 말대로 옛 선조들은 오로지 과거 합격에 목을 매지 않았던가.
 “유생은 경서를 연구하더라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시골에 폐기되어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한평생을 마치게 됩니다.”
 1479년(성종 10년), 서거정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는 유생들은 결국 폐인이 되고 만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합격에 목을 매는 것은 당연했다. 
 오죽했으면 영남의 유생들은 추풍령은 거치지 않고 문경새재나 궤방령으로 넘었다지 않은가. 하기야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추풍령보다는 경사스런(慶) 소식을 듣는다(聞)는 뜻의 ‘문경(聞慶)새재’나, 합격방이 붙는다는 뜻을 지닌 ‘괘방령(掛榜嶺)’을 통해 한양으로 갔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떨어질 낙(落)’자는 절대 써서는 안될 금기어였다. 그러니 어떤 유생이 낙지를 구워 다른 유생에게 전해주면서 “‘입지’ 구운 것 좀 드시오”라고 했단다. ‘떨어질 낙(落)’ 발음이 아니라 ‘설 립(立)’자를 써서 ‘낙지’를 ‘입지’라 한 것이다. 입지(立志), 즉 뜻을 세운다는 뜻이니 얼마나 합격이 간절했으면 낙지를 입지라 했을까. 이 뿐인가. 어떤 유생은 시험 때마다 고양이가 지나가면 합격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고양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밤에 병든 고양이가 점포 문밖에 쪼그리고 앉아있자 부채를 휘둘러 자기 앞을 가로질러 가게 했다. 유생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쉰 뒤 숙소로 돌아갔다.
 신숙은 마침내 1568년(선조 2년) 별시에 급제하는 영예를 안았다. 결과적으로 고양이 덕을 본 것이다.  

 

 ■사교육의 원조는 경당
 ‘과거=출세’의 등식이었으니 유생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과거에 합격해야 했다.
 그러니 잘 가르친다는 사교육 선생들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못말리는 교육열이었니 만큼 사교육의 뿌리 또한 깊다. 고구려 때 유행한 ‘경당’까지 이어지니 말이다.  “고구려에서는 문지기·말먹이의 집에 이르기까지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경堂)이라 하며 자제가 결혼하기 전에는 밤낮으로 이곳에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였다.”(<구당서> <신당서> ‘고구려전’)
 신라에도 개인교사가 있었다.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617~686)이 대표적이다.
 “설총은 구경(九經·유교 9가지 경전)’을 이두로 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지금까지 학자들이 설총을 종주로 삼고 있다.”
 이같은 사설학원 혹은 학교는 고려에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는 마을마다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2~3곳이 있고, 미혼의 자제들이 무리를 지어 경서를 배웠다.”(<고려도경>)
 ‘마을의 경관과 서사’란 사학 혹은 학원의 형태로 운영됐을 것이다.  

송나라 때 황제가 직접 관정했던 '전시'를 그린 그림. 황제가 직접 뽑은 사대부는 황제의 든든한 정치적 후원군이 됐다.

■이규보·이승휴·이색·이제현은 사교육 추종자
 그 덕분에 고려의 내로라하는 학자·문인들과 그의 제자들이 모두 사교육의 도움을 받았다.
 사교육의 으뜸되는 장소는 역시 사찰이었다.
 예컨대 <제왕운기>를 슨 이승휴는 12살의 나이였던 1235년(고종 22년), 원정국사의 처소에서 공부했다. 이 때 원정국사는 싹수사 푸릇푸릇한 이승휴에게 특별히 신서라는 독선생을 붙여 <주역>과 <좌전>을 가르쳤다. 또 목은 이색의 아들 이종선은 용두사에서. 손자는 진관사에서 각각 공부했다. 익재 이제현의 손자는 이색이 아들을 가르친 혜구 스님에게 교육을 받았다.
 사교육의 ‘종결자’는 뭐니뭐니해도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가 아닐까.   
 이규보가 14살 때 당대 최고명문 사학인 문헌공도에 입학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이규보의 아버지(이윤수)의 교육열은 만만치 않았다.
 1183년 봄, 이규보의 아버지는 수원 수령으로 발령받았지만, 아들은 개경에 남겨두었다. 5월로 예정된 국자감시(생원·진사시)에 대비하고자 한 것이다.
 아들을 지금으로 치면 ‘특목고’인 문헌공도에 보내놓고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과거시험에 대비, 고액 족집게 과외를 시키게 된다.
 이규보가 ‘이 이부라는 이에게 드린다’는 고율시를 보자.
 “공(이 이부)이 집에서 매양 관동(冠童·어른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쳤는데, 나도 어릴 때 참여했다. 그 때 선생의 지위로 모셨고….”(<동국이상국집> ‘전집 권 8 고율시’)
 이규보의 과외교사는 ‘이 아무개’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규보는 고액과외를 받았음에도 그 해(1183년) 국자감시에서 보기좋게 낙방하고 만다. 그 해 뿐 아니라 이규보는 3번이나 낙방의 고배를 마신 뒤 4수 만에 합격한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어렸을 적 영재였던 이규보는 지금으로 치면 급작(수능모의고사)에서 수석을 두번이나 차지했지만 정작 과거(국자감시)에서는 3수 끝에 합격했다.

■수능모의고사 수석 이규보의 좌절
 사실 이규보는 문헌공도가 여름철에 마련한 ‘특별과외’에서 수석을 차지한 영재였다.
 무슨 말이야. 문헌공도는 해마다 귀법사의 승방을 빌려 50일간 하과(夏課)라 해서 일종의 여름철 특별과외를 펼쳤다.
 강사는 졸업생 가운데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했지만 아직 관직 발령을 받지 못한 이들이 맡았다.
 “이들을 교도(敎導·강사)로 삼아 구경(九經·9개 유교경전)과 삼사(三史·사기, 한서, 후한서)를 가르쳤다. 간혹 촛불에 금을 그어 시간을 정하고 시를 짓게 하여 글의 등급에 따라 등수를 정했다.”((<동국이상국집>)
 ‘촛불에 금 그어놓고 펼치는 시험’을 ‘각촉부시(刻燭賦詩)’라 했다. 이를 다른 말로 ‘급작(急作)’이라 했는데, 일종의 수능 모의고사였던 셈이다.
 이규보는 이 급작을 두고 “하과는 과거에 대비하여 시와 부를 익히는 공부”(<동국이상국집> ‘후집 권 7 고율시’)라고 말했다. ‘하과’는 과거시험 대비용 ‘족집게 과외’였던 것이다. 갓 급제한 졸업생 선배들이 후배들을 사찰에 모아놓고 혹독한 합숙과외를 펼치면서 출제경향과 예상문제, 그리고 답안지 작성요령을 가르쳐 준 것이다. 이규보는 이 하과에서 두 차례나 수석을 차지했다. 수능모의고사에서 전국 1등을 차지했다고 할까. 그런데 정작 과거시험에서는 3번이나 떨어졌던 것이다.

 

 ■80대 전문강사
 재미있는 것은 이규보가 셋째아들인 이징에게까지 개인과외수업을 시켰다는 것이다.
 “내 셋째아들 징은 썩은 나무 강 새길 수 없네. 장성한 나이인데 글을 알지 못하니 밥주머니 되어 곡식만 축내누나. ~그대는 늙을수록 학문 더욱 정심하여~내 자식 우둔함을 혐의치 않고 갈고 다듬어 옥만들기를 기약하누나. 그대의 후의를 무엇으로 갚을까.”(<동국이상국집> ‘신대장에게 내 아들 징을 가르치는 것을 사례함’)
 이규보가 신대장(申大丈)이라는 과외선생을 위해 지은 시이다. 아들이 어리석고 글을 읽지 못헤서 어쩔 수 없이 과외선생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 신대장이라는 사람은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집에 개인교습소를 차려 학생들을 가르친 전문학원강사였는데, 학생수가 엄청났다고 한다.
 “(신대장은) 동몽들이 배우기를 청하면 거절하지 않으니 학생들이 모여들어 서숙을 이뤘네.”(<동국이상국집>)    
 말하자면 고려시대 스타강사였던 셈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어사화를 꽂고 마을을 돌던 모습을 그린 평생도의 한 장면. 과거급제를 위해 못말리는 사교육열풍이 벌어지기도 했다. 

■인기를 끌었던 고려시대 과외교사
 그런데 이규보가 언급한 신대장과 같은 과외선생이 고려 시대에 많았나 보다. <고려사> ‘열전’을 보면 예종 대에 급제한 김수자라는 인물은 금양현위-국학학유 등을 지낸 뒤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는 손수 재배한 채소를 팔고, 날마다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또 나홍유라는 인물은 경서와 사서를 두루 섭렵하고 과거에 여러차례 응시했으나 낙방한 뒤 글방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진사가 된 구사평은 아예 발벗고 번듯한 학원을 차린 것 같다. 이색의 <목은시고>에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구사평은 내(이색)가 젊었을 적에 교분을 쌓았던 인물인데, 그 후 만나지 못해 생사조차 모르게 된 지 오래다. 나중에 들으니 선주(善州·선산) 지방에 집을 번듯하게 지어놓고 서재를 두어 생도 30여명을 가르쳤다. 또한 빈객대접도 풍성하게 했다.”
 또 진수재(晉秀才) 같은 이도 스타강사였던 것 같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을 보면 “진수재라는 인물이 용산의 별장에 학생들을 모아 학업을 익히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규보는 이 별장에 학생들이 ‘마치 물고기떼처럼 모여들었다’고 표현했다.
 “모든 선비들 마치 물고기 떼처럼 모여들어(白面學子魚聚族), 공부에 뜻을 갖고 여기를 서숙으로 삼는구나.”
 물반 고기반일 정도로 수강생들이 몰려들었다는 뜻이 아닌가.

 

 ■전설의 스타강사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고려의 전설적인 스타강사는 역시 고려 충렬왕대의 인물인 강경룡일 것이다.
 그 전설의 이름은 왕조가 바뀐 조선 초기까지 ‘사교육의 신’으로 추앙됐으니 말이다.  
 1305년(고려 충렬왕 31년)의 일이다. 충렬왕이 유생 강경룡을 치하하고 곡식을 하사했다. <고려사절요>는 이 이유를 설명한다.
 “선비 강경룡이 집에서 글을 가르쳤다. 그의 제자 10명이 성균시에 모두 합격했다. 합격자들이 스승 강경룡을 찾아 인사를 드리느라 떠들썩한 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강경룡의 동네에 살고 있던 익양후 왕분(신종의 아들)이 그 소식을 듣고….”
 얼마 후 익양후 왕분이 충렬왕을 알현했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강경룡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충렬왕이 강경룡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뒤 하사품을 내렸다.
 “이 노인(강경룡)은 비록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구나. 그의 공이 얼마나 큰가.”        
 요즘으로 치면 강경룡이 가르친 제자 10명이 모두 서울대나 고시에 합격했다는 소리니 얼마나 대단한 강사인가.  
 그런데 이 일이 있은지 131년이 지난 1436년(세종 18년), 강경룡의 이름이 다시 출현한다.
 지성균관사 허조가 세종대왕에게 아뢸 말씀이 있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고려 충렬왕 때 강경룡이라는 사람이 가르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포상을 받았습니다. 지금 유생 유사덕은 집에 서재를 마련, 어린아이 수십명을 가르치고 있고, 경상도 용궁사람 박호생도 10여 년 동안이나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원컨대 (강경룡의 예로) 이 사람들을 포상하신다면….”(<세종실록>)
 세종은 허조의 상언을 좇아 유사덕과 박호생을 포상했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이 결과적으로 사교육을 부추겼다는 이야기다.
 천고의 세월이 지나도 못말리는 사교육 붐이 아닌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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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일만기(一日萬機)’
 예로부터 천자(군주)는 하루 동안 만가지 일을 처리한다 해서 ‘일일만기’ 혹은 ‘일리만기(日理萬機)’라 했다.(<상서> ‘고요모’)
 ‘만기친람(萬機親覽)’이란 말도 거기서 나온 말이리라. 아무리 천명을 받은 몸이라지만 어찌 하루에 만가지 일을 하겠는가.
 그러나 말 그대로 ‘일일만기’를 감당할만큼 ‘일중독’에 빠진 지도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개혁군주로 알려진 정조 임금이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 정조는 일중독에 걸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밤을 재세워가며 정사를 봤다. 

 

 ■오지랖 넓다고 지적받은 정조
 1781년(정조 5년), 규장각 제학 김종수가 ‘임금의 태도를 지적한 6개항’을 상소문으로 올렸다.
 “‘작은 일에 너무 신경쓰시면 큰 일에 소홀하기 쉽습니다. 크고 실한 것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고 눈 앞의 일만 신경쓰면 겉치레의 말단입니다. 전하께서는….”    
 그러자 정조 임금은 “작은 것을 통해야만 큰 것으로 나갈 수 있고 겉치레를 통해야만 실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 응수했다.
 과연 무슨 대화였던가. 김종수는 ‘지도자라는 사람(정조)이 너무 세세한 것까지 챙기는 바람에 정작 큰 일에 소홀히 하고 있다’고 감히 ‘지적질’ 하고 있는 것이다. 임금이라는 사람이 큰 그림을 그려야지, 사사건건 ‘디테일’에만 신경쓴다는 것…. 한마디로 정조의 만기친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홍재전서> <정조실록>) 
 그러자 정조는 “작은 것을 거쳐 큰 것으로 나가는 법”이라면서 “그것이 과인이 작은 것이나 살핀다는 지적을 받으면서도 눈 앞에 닥친 일부터 해나가려는 이유”라고 당당히 말하고 있다. 정조의 통치 스타일을 보면 ‘임금의 오지랖’을 지적한 김종수의 상소가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정조의 ‘일중독’은 청사에 길이 남을 만큰 지독했으니까….

 

   ■침실에 재해대책본부 설치한 정조
 예컨대 1783년, 재해가 나자 정조는 자신의 침실에 ‘상황판’을 걸어놓았다.
 “침실의 동·서벽에 재해를 입은 여러 도를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그곳에 고을 및 수령 이름과, 세금경감과 구휼 조목 등을 죽 써놓고, 한가지 일을 처리할 때마다 기록했다.”(<홍재전서> ‘일득록·정사 1’)
 한마디로 재해대책본부를 침실에 차린 것이다. 정조는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이 백성을 위한 것”이라 했다.
 “백성이 배고프면 내가 배고프고, 백성이 배부르면 나도 배부르다. 재해를 구하고 피해를 입은 백성을 돌보는 것은 특히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서둘러야 한다. 백성의 목숨이 달려있는 사안이므로 중단할 수 없지 않은가.”
 이런 일도 있었다.
 정조는 해마다 새해 첫날이면 한해 농사를 장려하는 ‘윤음’을 내렸다.
 그런데 1784년 새해에는 윤음을 내리지 않기로 작정했다. 해마다 윤음을 내렸지만 기근이 계속됐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속으로 ‘윤음이란 모두 형식일 뿐’이라고 마음을 먹게 됐다. 차라리 밭갈고 김매는 시기를 잘 선택하는 것이 농사에는 더 좋다고 여겼다. 그러나 어느 날 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정조는 밤새도록 뒤척이다가 벌떡 일어났다.
 “인간사, 정성을 바쳤는데 감동하지 않는 법이 없지 않은가. 정성껏 윤음을 내리는데 (하늘이) 응답을 해주지 않을까. 나는 내 정성만 다하면 된다.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이렇게 불러 쓰노니 관찰사와 수령들은 명심하기 바란다.”(1784년 농사권장 교서)
 누웠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정사를 처리했다니….  

정조가 내린 어제 윤음. 1776년(정조 1) 홍인한·정후겸 등 벽파를 성토하여 죄를 주고, 그 사실을 국내에 널리 알린 윤음이다. 정조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윤음을 쓸 정도로 일중독에 걸렸다.

■보고서 보는게 취미였던 정조
 1784년(정조 8년) 도제조 서명선이 정조 임금에게 “제발 건강 좀 챙기시라”고 걱정했다. 몸이 편치 않았던 정조가 아직 회복하지 않았는 데도 8도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친히 살펴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정조의 대꾸가 걸작이었다.
 “정신 좀 차리고 보니 국사가 많이 지체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보는 것이네.(不得不親覽矣) 그리고 나는 원체 업무 보고서 읽는 것을 좋아하네. 그러면 아픈 것도 잊을 수 있지.”
 업무 보고서를 좋아하고, 그것을 읽으면 아픈 것도 잊는다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는 ‘바쁘다 바빠!’를 연발하면서도 ‘일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다. 근년에 공개된 정조와 심환지 등이 나눈 편지를 보자.
 “(바빠서) 눈코 뜰새 없으니 괴롭고 괴로운 일이라.”(眼鼻莫開 苦事苦事·1797년 12월26일)
 “백성과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도느라 날마다 늙고 지쳐간다.(而民憂薰心 朝家關念 夜夜繞榻 日覺衰憊·1799년 1월20일)
 “바빠서 틈내기 어렵다, 닭우는 소리 들으며 잠들었다가~비로소 밥 먹으니, 피로해진 정력이 갈수록 소모될 뿐….(疲鈍之精力 日益銷耗而已·1798년 10월7일)
 정조는 공무 외에도 윤음(綸音·국왕이 백성에게 훈유문서)과 편지를 직접 쓰고, 독서에 매진하느라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바쁜 틈에 윤음을 짓느라 며칠 째 밤을 새고, 닭울음을 듣는구나. 괴롭다‘!”(1798년 11월30일)
 “책을 읽으면서 비점(批點·시문 등을 평론하며 찍는 붉은 점)과 권점(圈點·문장의 중요한 곳을 찍는 점) 등을 찍느라 밤잠을 못이루고, 온갖 문서를 보느라 심혈이 모두 메말랐구나.”(1799년 7월7일)

 

 ■비밀편지 정치에 몰입한 정조
 정조의 ‘비밀편지 정치’는 지독했다. 그는 ‘비밀편지’에서 육두문자에 가까운 거친 언사로 대신들을 힐책했다.     
 예컨대 당시 46살인 정조가 67세의 재상 심환지를 두고 ‘생각없는 늙은이(無算之수)’라 욕하는 내용이 보인다.
 “나는 경(심환지)을 이처럼 격의없이 여기는데 경은 갈수록 입조심 하지 않는다. ‘이 떡이나 먹고 말 좀 전하지 마라’는 속담을 명심하라. 매양 입조심 하지 않으니 경은 생각없는 늙은이(無算之수)라 하겠다. 너무도 답답하다.”(1797년 4월10일)
 이밖에 “황인기와 김이수가 과연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乃敢鼓吻耶)” “이 사람은 참으로 호로자식이라 하겠으니 안타까운 일이다.(可謂眞胡種子)”는 등의 욕설이 난무하고 있다.   

정조와 쏙 빼닮은 청나라 옹정제. 정조와 마찬가지로 비밀편지로 지방관들과 소통하는 등 만기친람하기로 유명했다. 청나라 융숭의 기반을 닦았다는 평을 듣는다. 

■일중독. 스트레스가 승하의 원인? 
 이렇게 ‘일일만기’를 처리하고, 독서에 편지쓰기까지 밤을 꼴딱꼴딱 세웠으니 건강이 좋을 리 있었겠는가.
 “열기가 치솟고 등은 뜸 뜨는 듯 하고 눈은 횃불 같아 헐떡일 뿐이다. 현기증이 심해서 독서에 전념할 수도 없다. 괴롭기만 하다.”(1799년 7월7일) 
 “요즘 시사(時事)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구나. 마음 속에 불길만 치솟을 뿐…. 이 때문에 안화(眼花·눈이 어른거림)가 나을 기미가 없구나”(1798년 7월8일)
 “뱃속의 화기가 내려가지 않는구나.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 장판에 등을 붙인채 뒤척이는 일이 모두 답답하다.”(1800년 6월15일)
 정조는 등창이 난지 20여 일 만인 1800년 6월, 승하했다. 재위 24년(1776~1800)만에, 그것도 나이 48살의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마도 지독한 일중독증에 따른 스트레스가 간접 사인이 아니었을까.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씨
 정조의 편지(어찰)와 <정조실록>, <홍재전서> 등에 보이는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씨는 끔찍하다.
 따뜻한 겨울이 계속돼 얼음이 얼지 않자 “과인이 모두 부덕한 탓이고, 죽고 싶은 심정”(<정조실록>이라고 토로한다. 또 “제주 백성들의 전복 채취하는 힘겨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전복 바치기를 전면 금한다.(<비변사등록>)
 서북지방에 든 기근 때문에 유랑민 수백명이 서울로 몰려오자 친히 종로거리로 나가 이들을 접견했다. 그러면서….
 “누더기 옷과 깡마른 얼굴을 보니 참담하구나. 비단옷과 보료를 준들 편안하겠는가. 세금을 면제하고 곡식과 옷가지를 줄테니 각자의 집으로 가라.”
 정조는 명령만 내리고 가지 않았다. 하루종일 자리를 지키고 앉아 곡식과 옷이 제대로 분배되는 지를 감독했다.(<홍재전서> ‘일득록·정사’)  

 

 ■만기친람의 후유증
 너무 만기를 친람하다보니 어이없는 일도 있었다. 1796년, 정조가 ‘담배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따져 조선을 흡연의 나라로 만드는 법’을 묻는 책문을 내린 것이다.
 책문은 신료들에게 국정 현안의 자문을 구하는 제도였다.  
 “담배가 출현한 것을 보니 천지의 마음을 읽기에 충분하다. 우리 강토의 백성들에게 (담배를) 베풀어 그 혜택을 나눠 주고 그 효과를 확산시켜 천지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한다.”(1796년 11월28일)
 정조는 지독한 골초였다. “임금은 하늘을 도와 정치하는 사람이므로 하늘이 내린 담배의 혜택을 백성들에게 줘야할 의무가 있다”고 강변한 것이다.
 조선을 흡연의 나라로 만든다고 했다니 참….    
 1790년 8월, 정조는 또 한 번 ‘만기친람’의 기질을 발휘한다. 살인사건의 판결문을 직접 쓴 것이다.
 즉 전라도 장흥사람 신여척(申汝倜)이 이웃집 형제 간의 싸움을 보다 의분을 참지못하고 형제 중 한 사람을 발로 차 죽였다.
 형조는 “고의성은 없지만 살인한 것은 사실이니 살인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다. 그러나 정조는 “형제간 싸움은 윤리의 변괴이며, 그런 형제들을 처단한 신여척은 기개있고 녹록치 않은 자”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정조는 특히 “신여척이라는 이름이 헛되지 않았다”고 칭찬했다. 즉 신여척의 한자 이름, 즉 너 여(汝)와 기개있을 척(倜)을 떠올리며, ‘너는 기개있는 사람’이라 칭찬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흠흠신서>에 정조의 이 판결을 “의로운 판결”이라 찬동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살인은 살인이 아닌가. 어찌됐든 사람을 때려죽인 살인범에게 ‘의롭고 기개있다’며 무죄로 방면시킨 것은 좀…. 
 정조는 심지어 “장악원에서 연주되는 음악이 갈수록 번잡하고 빠르다”고 지적하면서 “하루빨리 고아한 음악을 되찾으라”는 명을 내리기도 한다.
 “줄을 번잡하게 튕기고 곡조를 빠르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외떨어진 작은 나라의 소리다. 서로 화답하여 넉넉하게 여유로운 소리를 내는 음악이라야 잘 다스려진 세상의 모습이다.”(<홍재전서> ‘일득록·정사’)
 임금이 백성에게 담배를 적극 권장하고, 살인사건의 판결까지 손수 내리고, 심지어는 유행음악이 빠르다고 빨리 바꾸라고 지적하는 일…. 오지랖이 넓다는 소리를 들을만 하다. 

중국 시안 명마용에서 발견된 청동마차. 만기친람의 원조격인 진시황은 전국을 순회하는 순행정치로 만천하를 다스리렸다.

■옹정제의 만기친람
 그런데 흥미로운 것이 있다. 정조가 자신보다 2세대 정도 앞선 인물인 청나라 옹정제(재위 1722~1735)의 ‘만기친람’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강희제의 35명 황자 가운데 4번째인 옹정제는 45살의 나이에 황제가 됐다. 그는 “정치는 천명을 받은 내게 모두 맡기라”고 선언했다. 
 그의 ‘밀정정치’는 유명했다. 전국 각지의 관리들 인물됨됨이를 파악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했다.
 에컨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지방관이 북경에서 임지로 떠나면서 하인을 한사람 데려갔다. 3년 뒤 하인은 지방관에게 “휴가를 얻고자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인님은 아마 성공할 겁니다. 천자(옹정제)께서 포상할 겁니다.”
 하인 주제에 무슨 말? 지방관은 신경쓰지 않았다. 한데 옹정제를 알현한 지방관은 뜻밖에 천자로부터 치하의 말을 들었다. “자네가 그렇게 고을을 잘 다스린다지?”
 감읍해하던 지방관이 돌아나서는데 시위장이 문앞에 서 있었다. 그가 바로 황제가 지방관의 됨됨이를 파악하려 파견한 밀정이었던 것이다.
 또 있다. 한번은 관리들이 옹정제가 그토록 싫어했던 마작을 몰래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마작패 하나를 잃어버렸다.
 다음 날 옹정제가 관리들이 모인 자리에서 물었다.
 “어젯밤 무엇을 했나?”
 정곡을 찔린 관리들이 “마작을 했다”고 순순히 고했다.
 “뭔가 이상한 일은 없었는고?”
 “예. 그렇지 않아도 마작패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그러자 옹정제가 소매에서 마작패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이것 말인가.”
 관리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솔직하게 어젯밤의 일을 이실직고 했으니 망정이지, 거짓을 고했다면 목이 달아날뻔 했으니까….

 

 ■주접으로 소통한 옹정제
 정조가 비밀편지로 관리들과 소통했다면, 옹정제는 이른바 ‘주접(奏摺)’을 통해 중앙관리 및 지방관들과 소통했다. 주접은 공식절차가 아니라 황제와 일선 관리가 직접 주고받는 비밀문서(친필편지)를 말한다. 옹정제는 “사소한 정보까지 모든 사항을 빠짐없이 보고하라”고 명했다. 
 “정치가 잘 운영되는지, 관리가 근면한지, 태만한지, 윗사람은 공평한지, 누가 모자란지, 군대의 구율은 어떤지…. 무슨 일이든 좋다. 증거가 없어도 좋으니 빠뜨리지 마라. 단 증거와 풍문은 구분해서 보내고….” 
 중요한 것은 비밀이었다. 정조가 편지내용을 발설한 심환지를 두고 ‘입조심을 하지 않은 생각없는 늙은이’라 욕했다지만, 옹정제 또한 다르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은 관리들에게 마구 욕을 해댔다.
 “바보는 고칠 수 없다(下愚不侈)는 말은 바로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금수라도 너보다는 낫겠다.” “양심을 뭉개버리고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은 소인배.” “잘못 둔갑한 늙은 너구리.”

 

 ■“보고서 읽는 것이 너무 즐겁다”는 옹정제
 ‘일일만기’ 한다는 말은 정조 뿐 아니라 옹정제도 마찬가지였다.
 옹정제는 새벽 4시 이전에 일어나 역사실록과 제왕의 명령 및 가르침을 모은 조칙집, 그리고 보훈(寶訓)을 한권씩 읽으면서 일과를 시작했다. 관리들은 새벽 6시까지 입궐해야 했다. 하루종일 정무에 돌본 뒤 밤 7~8시면 일과가 끝났다. 그러나 옹정제의 하루는 이제부터가 또다른 시작이었다.  
 지방관들이 보낸 주접을 꺼내 읽고, 답장을 쓰느라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많을 때는 50~60통을 읽은 뒤 답장을 썼다니….
 “웬일인지 짐은 어릴 적부터 밤만 되면 정신이 집중된다. 보고서가 아무리 길어도, 심지어 수천자가 넘어도 끝까지 다 읽는다. 유익한 보고서라면 읽는 것이 너무도 즐겁다.”
 옹정제는 또한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너무도 중대해서 이 한몸 아까워 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거실액자에 ‘위군난(爲君難)’, 즉 ‘군주가 되는 길은 어려운 것’이라는 세 글자를 써놓았다. 그리곤 양쪽 기둥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이다. 이 한 몸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으리.(原以一人治天下 不以天下奉一人)”

 

 ■워커홀릭 황제
 옹정제와 정조가 흡사한 대목이 또 있다.
 옹정제는 “주접에 짐을 두고 성인이니 뭐니 하면서 의례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가장 싫으니 쓸데없는 편지는 쓰지 마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황제에게 입에 발린 칭찬이나 한가득 쓰는 자들의 주접을 읽기가 매우 낯간지럽고 괴롭다는 뜻이다.
 정조 역시 “장계에 임금을 찬양하는 습관을 고치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실제 정조는 임금찬양에 도에 지나쳤던 경상감사 이태영에게 감봉처분을 내렸다. 또 장계의 주제에 맞지 않은 ‘입에 발린 찬양’을 주절주절 늘어놓은 전라감사 이득신을 추고(推考)하기도 했다.(1797년)
 옹정제로 돌아가자면 160만 백성이 홍수에 휩쓸렸다는 소식을 듣자 “모든 책임은 짐에게 있다”고 자책했다. “모든 재해의 책임이 임금에 있다”는 정조의 한탄과 판에 박힌 듯 똑같다. 옹정제는 또 “바빠서 미치겠다”고 푸념하는 지방관에게 “웃기는 소리 마라”고 일갈한다.
 “짐은 수천리 떨어진 지방 총독과 순무(巡撫·지방 파견 관리)의 사무를 도와주는데 소비하는 시간이 80~90%가 된다.”
 일에 빠져 살았던 탓일까. 옹정제는 북경 근처의 ‘서산(西山) 별장’에 가끔씩 갔을 뿐 그 이상은 한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강희제(1661~1721)나 건륭제(1735~1795)가 이따끔씩 강남 유람에 나섰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일까. 옹정제의 치세는 13년에 그쳤다. 그 사이 황제는 자신을 위해서는 궁궐의 방한칸도 늘리지 않았다. 일중독에 빠진 ‘워커홀릭’ 황제는 차세대(건륭제)의 청왕조 전성기를 이루는데 밑바탕을 마련해주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만기친람의 원조는 따로있다.
 사실 ‘일중독’의 원조라면 진시황(기원전 246~210)이 아닐까.
 진시황 시대의 방술사인 후생은 노생과 대화를 나누며 진시황을 이렇게 비난했다.
 “진시황은 예부터 자기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천하의 크고 작은 일이 모두 황제에 의해 결정됩니다.(天下之事 無小大皆決於上)”
 노생은 특히 “진시황은 하루에 읽어야 할 결재문서의 중량을 저울질해서 처리하고 있다(上至以衡石量書)”고 고발한다.
 “(진시황은) 처리해야 할 문서 정량(120석 분량이라 함)에 도달하지 못하면 전혀 쉬지를 않소. 권세를 탐하는 것이 이 정도인데….”
 노생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신들은 황제가 결정한 일만을 명령받고 있소이다. 모든 일은 황제에 의해서만 결정·처리되고 있다는 겁니다. 황제는 자신의 허물을 듣지 않고 날마다 교만해지며 아랫사람은 황제의 비위만 맞추고 있소. 황제의 허물을 직언하지 못하고….”(<사기> ‘진시황본기’)
 흥미롭다. 같은 ‘일중독’이라도 정조·옹정제와 진시황은 왜 그리 상반된 평가를 받았을까. 결국 핵심은 백성이 아닐까.
 백성을 위한 ‘일중독’이냐, 아니면 독재를 위한 ‘일중독’이냐. 노생의 주장처럼 권세를 탐하는 일중독은 결국 진시황의 전철을 밟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제갈공명의 오지랖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제 아무리 백성을 위한 일이라도 도에 지나치면 안된다는 것이다.
 정조 임금 같은 이도 그런 지적을 받았듯 지도자가 좁쌀영감처럼 온갖 세세한 것까지 참견하면 ‘만기친람’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의 ‘만기친람’은 우리 말로 ‘오지랖 넓다’는 표현으로 대치할 수 있겠다. 이 대목에서 흔히 인용되는 것이 바로 제갈공명의 고사이다.     
 즉 제갈공명과 사마의가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사마의(위나라)는 제갈공명이 보낸 사신에게 “공명은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내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제갈공명의 사신은 “음식은 지나치게 적게 먹고, 공무는 새벽부터 밤중까지 손수 다 처리한다”고 답했다. 곤장 20대 이상의 형벌까지 직접 집행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사마의는 사신의 말을 듣고 농반진반으로 응수했다.
 “식소사번(食少事煩)이라. 공명은 오래 살지 못하겠구먼.”
 사마의의 말을 전해들은 제갈공명은 울면서 말했다.
 “사마의의 말이 맞다. 난 아무래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
 제갈공명은 결국 54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또 있다. 제갈공명이 직접 장부를 조사하자(親校簿書) 주부 양과가 고했다.
 “통치에는 체통이 있습니다. 상하가 영역을 침범하면 안됩니다. 닭은 새벽을 알리고 개는 도적을 지킵니다. 주인 혼자 하려 하면 심신이 피곤해서 아무 것도 못합니다. 어찌 이리 하십니까.”
 사실 제갈공명으로서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 선제, 즉 유비의 유언을 지켜야 했던 제갈공명으로서는 말그대로 ‘만기친람’ 할 수밖에 없었다.
 어리석은 2대 군주(유선)을 대신한 승상으로서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놔야 했기 때문이다. 제갈공명의 한탄이 귓전을 때린다.
 “내가 두려운 것은 오로지 하나. 촉을 지켜달라는 선제의 유언을 제대로 받들지 못했다는 비난이다.”
 그래, 듣고보니 제갈공명의 만기친람은 이해할 수도 있겠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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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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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계령 이혜가 술주정을 하다가 사람을 죽였다. 종부시(宗簿寺)에서 그 죄를 청했다. 세종이 명하여 직첩을 거두어 고성현에 안치했다. 그에게 사냥하는 것을 금하고, 또 바깥 사람과 통하지 못하게 했다. 이혜는 양녕 대군 이제의 아들이다.”
 1447년(세종 29년)의 <세종실록>이다. 양녕대군의 아들(이혜)이 술주정을 하다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기록이다. 그 때문에 서산군(瑞山君)이었던 이혜는 황계령(黃溪令)으로 작위가 깎였으며 경남 고성현으로 유배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혜의 술주정은 아버지(양녕대군)를 닮았음이 틀림없다. 양녕대군도 고을 백성에게 소주를 강제로 먹여 사망에 이르게 한 적이 있으니까….
 “(1422~23년, 대사헌과 문무의 2품 관리들이 대대적인 탄핵에 나섰다.) 양녕대군 이제는 고을 백성 한사람에게 소주를 마구 먹여 죽였습니다. 특히나 양녕은 태종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재궁(梓宮·임금의 관)이 빈소에 있는 데도….”
 부왕의 상중에, 그것도 임금의 관이 아직도 빈소에 있는데 술판을 벌여 무고한 백성을 죽였다니…. 그러니 탄핵을 받아도 싼 것이다. 바로 그 양녕대군의 아들 역시 술주정으로 신세를 망친 것이다. 부전자전이다. 왕족이었으니 망정이지, 술주정에 생사람을 죽인 행위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닌가.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양녕대군 이제의 묘역. 양녕대군과 그의 아들 이혜는 지나친 술주정으로 사람을 죽여 극심한 탄핵을 받았다.  

■다산이 말하는 ‘술의 미학’
 “참다운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데 있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말하는 ‘술의 미학’이다. 다산은 ‘둘째아들(학유)에게 쓴 편지’(<다산시문집> 제21권 ‘서·유아’)에서 “소가 물마시듯 목구멍으로 들이부으면 안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물 마시는 소처럼 마시는 저들은 뭐냐. 입술이나 혀를 적시지 않고 곧바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무슨 맛이 있겠느냐.”
 지금 다산은 절대 해서는 안될 술버릇을 ‘원샷’이라고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산은 “난 이날 이 때까지 술을 크게 마신 적이 없어 주량을 알지 못한다”며 은근히 자신의 주량을 과시했다.
 “상감(정조)께서 삼중소주(三重燒酒)를 옥필통(玉筆筒)에 가득히 부어 하사하신 일이 있었다. ‘오늘 죽었구나’ 하고 할 수 없이 마셨는데 취하지 않았다. 한번은 술을 큰 사발로 받았는데 다른 학사들은 모두 인사불성이 됐다. 어떤 이는 남쪽으로 향해 절을 올리고, 또 어떤 이는 그 자리에서 누워버리고…. 그러나 난 시권(試券·과거답안지)을 다 읽고, 착오없이 등수도 정했다. 약간 취했을 뿐이었다.”
 다산은 그러면서도 “너는 내가 술을 반 잔 이상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고 한껏 자랑했다. 주량은 엄청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한 잔 이상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산은 아들에게 ‘술의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술주정을 경계한 공자
 다산은 또 술주정을 ‘귀신’이라 하면서 무척 경계했다.
 “얼굴빛이 주귀(朱鬼) 같고, 구토를 해대고 골아 떨어지는 자들이야 무슨 정취가 있겠느냐. 술을 좋아하는 자들은 대부분 폭사(暴死)하게 된다. 술독이 오장육부에 스며들어 썩기 시작하면 온 몸이 무너진다.”
 다산은 “무릇 나라를 망하게 하고 가정을 파탄내는 흉패(兇悖)한 행동은 모두 술로 말미암아 비롯된다”고까지 했다. 공자의 유명한 화두를 ‘절주’와도 연결시켜 해석했다.
 공자의 화두는 ‘고불고 고재고재(고不고고哉고哉·모난 술잔이 모가 없으면 모난 술잔이겠는가. 모난 술잔이겠는가)’이다.(<논어> ‘옹야 23장’)
 다산은 공자의 선문답을 “고라는 술잔을 사용하면서도 주량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어찌 고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해석했다.
 술그릇 이름인 ‘고(고)’는 ‘두 되 정도 담을 적은 양의 술잔’을 뜻한다. 예전엔 주량을 5되는 과하고, 2되는 적고, 3되면 적당하다고 했다는 것. 그러나 공자 시대에 과음 풍조가 만연하자, 공자가 “고를 어찌 고라고 했겠는가”라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불고’는 ‘술주정을 경계한 것’이라 풀이할 수 있다.  

혜원 신윤복의 <유곽쟁웅>. 유흥업소 기생을 차지하기 위한 남성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갓과 양태가 벗어지도록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가운데 웃통 벗고 있는 수염난 이가 승리자이다. 싸움에서 진 이가 씩씩 거리고 있다.|간송미술관

■어전 술주정 사건 
 <실록>에는 술주정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 심심찮게 기록돼 있다. 예나 지금이나 술은 숱한 이야깃거리를 남기는 모양이다.
 예컨대 어전(御前)에서 술주정을 부렸다고 해서 바로 처벌하기란 쉽지 않았다. 술 때문에 강상이나 대역의 죄를 범했다면 몰라도 그렇지않은 경우 ‘속좁은 임금’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1440년(세종 22년), 판중추원사 이순몽의 주사는 악명이 높았다. 걸핏하면 욕을 해대는 주정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대마도 정벌에 공을 세운 그를 쉽사리 벌할 수 없었다.
 세종은 대신 말로 단단히 훈계했다.
 “경도 이제 늙었는데, 어찌하여 광패(狂悖)한 성질이 고치지 않는가. 지금부터는 좀 근신해서 광패하고 망령된 짓은 하지 말아라.”
 나잇값 좀 하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임금의 이야기도 통하지 않았다. <세종실록>의 기자는 “임금이 용서하고 죄를 주지 않아 그의 술주정과 광패함이 더욱 심해졌다”고 꼬집고 있다.
 또 하나의 사례. 1456년 1월 세조는 사정전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그런데 동부승지 이휘와 좌헌납 구종직이 큰소리로 ‘살인사건의 진범’ 운운하며 술맛 떨어지는 소리를 해댔다. 술자리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술판의 분위기가 깨질 것 같자 세조 임금은 무던히도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만취한 구종직 등이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는 등 횡설수설했다. 결국 술자리 직언은 지루한 주사가 되어버렸고, 세조는 파평군 윤암에게 “끌어내라”고 명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구종직은 하늘이 노랬다. 단숨에 임금에게 달려가 엎드려 고했다.
 “전하, 소신이 어제 그만 술에 취해서…. 청컨대 대죄하게 하소서.”
 하지만 뜻밖이었다. 세조는 “네가 연로했음을 불쌍히 여기니 어서 본연의 직무에 나서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 뿐 아니라 임금은 구종직에게 관작 1계급를 올려주었다.(<세조실록>)   

 전국시대 중산국의 왕릉에서 발견된 2300년 전의 술병과 술. 동이의 후손으로 알려진 중산국의 술은 전국시대에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불알차여 죽은 술꾼
 정조 시대의 각종 살인사건 판례집인 <심리록>에는 이른바 ‘주폭’으로 인한 살인사건의 전모도 심심찮게 보인다.
 1784년(정조 8년)의 일이다. 친구들끼리 “청주를 시키느냐 탁주를 시키느냐”를 놓고 헛된 말다툼을 벌이다가 칼부림이 벌어졌다.
 문제는 그 중 한사람이 사타구니와 넓적다리를 찔려 사망했다는 것이다. 형조의 공초내용을 보고받은 정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초 칼부림이 일어난 것은 장난이 아니면 술주정이고, 술주정이 아니면 실수임을 알 수 있다. 살인의 원인은 바로 술이요, 싸움이요, 실수이다. 이 중 하나만 해당되어도 살려 줄 수 있는데, 더구나 셋을 겸하였음에랴.”
 정조는 피살자의 상처가 급소에 있지 않음을 중시하면서 “용의자가 애당초 살해할 마음이 없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판결했다. 용의자는 정조 임금의 관대한 처벌 덕분에 ‘과실치사죄’로 사형을 면했다.
 술자리 다툼 과정에서 발로 동무의 불알을 마구 차서 죽인 사건도 일어났다. 1783년(정조 7년)의 일이다. 충청도 아산의 광대 박삼징이 친구(황성재)와 함께 마을 모임에 갔다가 술에 취해 벌인 다툼 끝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심리록>의 내용을 보자.
 “(상처)음낭이 약간 붉은색으로 변하고, 불알이 오그라붙었으며, 척추가 붉은색으로 변하여 약간 단단하였다. (판결)죽음을 재촉하는 급소를 쳤고, 목을 잡다 던진 사실이 인정된다. 용의자가 늙었지만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형에 처할 뿐이다.”

 

 ■상관마저 문책시킨 공무원 주폭들
 공연히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이른바 공무원 ‘주폭’도 여러 명이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무예별감 하경연이라는 자가 정동 근처의 길가에서 술주정을 부리며 발악하며 말리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때리다가 적발돼 곤장 100대의 중형을 받았다.  
 또 1780년(정조 4년) 별감 이경주라는 자가 술만 마시면 상습적으로 술주정을 부리다 적발됐다. 당시 형조의 심문내용이 재미있다.
 “이 놈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제명한 적도 있었고, 형조에서 처벌한 적도 있었고, 노비로 강등시킨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개전의 정이 없으니…. 일단 곤장 10대를 치고 공초를 받아….” 
 이경주는 결국 구류 처분을 받았고, 부하의 상습 술주정을 막지못한 상관(행수별감) 마저 문책을 당했다.
 그러나 아무리 술과 술주정을 경계하고 처벌한다 해도 사라질 행태인가.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술이 술을 마시게 되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되는데….
 목은 이색의 시를 보면 이런 시귀가 나온다.
 “태백이 부른 노래가 천고를 비추고 있지만(太白歌行映千古)/천재가 아닌데 흉내 내면 술주정만 부리리다(徒能使酒非天才)/객 떠나고 술동이 빈 때 홀로 노래를 뽑으니(客去樽空時獨唱)/광활한 천지 사이에서 풍뢰가 호응하오그려(天地闊遠呼風雷)”(<목은시집> 제34권)
 이태백처럼 천재도 아니면서 이태백의 풍류를 따라하면 그저 술주정을 부리는 격이 될 뿐이니 차나 한잔 하라는 것이다. 견디지도 못할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부리지 말라는 것이다.  

 상나라 시대 무덤인 부호묘에서 발견된 고. 고는 원래 술 2잔 정도를 담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술잔이다. 술을 적당히 마시라는 뜻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남효온의 은근슬쩍 다짐
 조선조 남효온의 시문집(<추강집>)에는 남효온이 김시습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려있다.
 “술이 중도를 잃으면 머리를 풀고 노래하며 어지럽게 춤추고, 시끄럽게 부르짖고, 넘어지고 자빠져서 예의를 무너뜨리고 의리를 없애며 소동을 일으킵니다. 마음을 풀어놓고 눈을 부라리다가 싸움이 일어나서 작게는 몸을 죽이고, 더 나아가서는 집안과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경우가….”
 그는 “맛있는 술맛이 사람을 변하게 하여 점점 술주정에까지 이르게 되지만, 주정하는 줄조차 모르게 되는 것은 이치상 필연적인 것”이라고 경계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는 술을 끊겠다”고 다짐한다.
 “저는 젊었을 때부터 술을 몹시 좋아하여 비난을 받았고, 방자하게 주광(酒狂)이 되었습니다. ~점점 부덕해져서 집안에서 방자하게 주정을 부리다가 어머님께 크게 수치를 끼쳤습니다. 술의 죄가 3000가지 중의 으뜸에 해당되니, 무슨 마음으로 다시 술잔을 들겠습니까. 어머니께 ‘지금 이후로는 임금의 명령이 아니면 감히 마시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답니다.”
 술을 즐기고, 주사를 부리다가 어머니로부터 ‘술을 끊으라’는 걱정을 듣자 금주선언을 한 것이다. 그런데 남효온은 김시습에게 다짐의 사연을 보내면서 한가지 토를 달았다.
 “그러나 제사 지낸 뒤 음복한다거나 축수(祝壽)를 올리고 술잔을 되돌려 받는 경우에는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또 술이 뱃속을 적셔도 어지럽지 않은 경우는 또 어쩌겠습니까.”
 어머니 앞에서 금주선언을 한 남효온이었지만, ‘어쩔 수 없을 때, 그리고 술이 달 때는 어쩌겠냐’고 입맛을 다시며 하소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역성 좀 들어달라’는 말이었다.

 

 ■역성 들어준 김시습의 맞장구
 그러자 김시습은 남효온의 편지가 무슨 뜻인 줄 알고 박자를 맞춰주었다. ‘술을 완전히 끊기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라고 답한 것이다.
 “옛사람이 술을 베풀었던 까닭은 선조에게 제사 지내고 손님을 대접하고 노인을 봉양하고 병을 다스리고 복을 빌고 기쁨을 나누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살피지 않고 그저 술이 재앙을 낳는다고 여겨서 곧바로 완전히 끊고자 하니…. 이는 마치 밥을 짓다가 불똥이 튈까 염려하여 일생 동안 익힌 밥을 차리지 않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김시습은 술을 마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면서 적당히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기고 주정을 부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술에 일정한 양이 없었으나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위 무공(재위 기원전 812~758년) ‘세 잔에도 기억하지 못하거니 하물며 감히 또 더 마신단 말인가’라고 했습니다. 위 무공 또한 완전히 끊은 것이 아니라 술을 경계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공자는 주량을 알 수 없었지만 정신이 늘 멀쩡할 정도로만 술을 마셨음을 알 수 있다. 또 위 무공의 경우 스스로 석 잔 술에 필름이 끊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자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시습은 마지막으로 “선생(남효온)이 멀리 혼자 살 것 같으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종신토록 끊는다는 약속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시습의 맞장구야말로 남효온이 바라던 답장이 아니었을까.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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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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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무구·민무질 형제는 주상(태종)께서 세자(양녕)에게 선위할 뜻을 바치자 ‘얼굴에 기쁜 빛(喜形于色)’을 나타냈습니다. 다시 전하께서 복위하신 뜻을 밝히자 도리어 슬픈 빛을 보였습니다. 역심(逆心)을 품었음이 분명합니다.”
 1407년(태종 7년) 7월, 영의정 이화 등이 ‘피바람을 몰고온 탄핵 상소’를 올린다. 민무구·민무질 형제는 그야말로 끈질긴 탄핵을 받고 끝내 ‘자진’의 명을 받는다. 이후 남은 동생들인 민무회·민무휼 형제도 똑같은 과정을 거쳐 역시 자진하고 만다.(1416년 1월) 민씨 4형제는 이화의 첫 상소문 이후 무려 8년7개월 간의 지긋지긋한 탄핵을 받고 모두 불귀의 객이 된다. 태종 이방원의 처남 가문인 민씨는 ‘멸문의 화’를 입고 만다. 그런데 ‘멸문지화’의 죄목치고는 어처구니없다. ‘얼굴에 웃는 빛을 비쳤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성계의 이복동생이자 태종의 작은아버지격인 종친 이화의 개국공신녹권(공신임명증서). 이화는 태종 즉위 이후 날로 기세가 등등해진 민씨 형제들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려 '피바람'의 서곡을 올렸다.

■종친 이화가 던진 돌팔매
 멸문의 도화선을 당긴 이화는 과연 누구인가. 태조 이성계의 이복동생이자 개국공신이었다. 그러니까 태종 이방원의 작은 아버지이자 종친이었다. 종친이 앞장 서 민무구 형제의 탄핵에 나 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민무구 형제는 누구이고, 선위와 ‘기쁜 빛’은 무엇이며, 복위와 ‘슬픈 뜻’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민무구·무질 형제는 태종비인 원경왕후의 남동생이었다. 태종과 처남인 민무구 형제는 ‘피를 나눈 동지’였다. 민무구 형제는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세력을 제거할 때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정도전 등은 당시 이방원 등 왕자들이 거느리던 사병들을 혁파했는데, 민무구 형제가 이방원의 사병들을 집에 몰래 숨겼다가 거사 직전에 이방원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태종 등극 이후 민무구·민무질 형제는 중군총제·좌우군총제 등을 두루 역임했다. 매형이 등극하자 병권을 휘두르는 막강실세가 된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태종 등극 후 후궁을 10명이나 두자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 냉기류가 생겼다. 태종의 바람기와 원경왕후의 질투는 용호상박이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태종은 1402년(태종 2년) 원경왕후의 여종과 바람을 피워 임신시켰다. 바람을 피우다 피우다 못해 부인의 여종까지 건드린 것이다. 여하튼 여종은 출산을 위해 궁밖에 기거하게 됐다.

 

 ■질투의 화신 된 원경왕후
 원경왕후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누구 덕에 왕이 되었는데…. 원경왕후는 질투의 화신이 됐다. <태종실록>을 보자.
 “여종이 한 겨울(12월) 산통을 시작했다. 민씨(원경왕후)가 여종을 문바깥 다듬잇돌 옆에 내다두었다. 죽이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한 승려(화상·和尙)가 측은하게 여겨 담에 서까래를 걸치고 거적을 덮어 겨우 죽음을 모면하게 했다. 여종이 아들을 낳았다.”
 원경왕후의 질투는 계속됐다. 
 “민씨는 다른 종들을 시켜 갓 태어난 아기를 허름한 토담집에 옮겨두고 화상이 가져온 금침과 요자리를 빼앗았다. 그때 한상좌라는 이가 마의(馬衣)를 아기에게 덮어줘 7일이 지나도 죽지 않았다. 민씨는 이에 그치지 않고 강추위 속에 모자를 소(牛)에 실어 교하(파주)의 집으로 보냈는데….”
 이 사건은 그대로 묻혀버렸다. 하지만 3년 뒤인 1415년, 태종은 새삼스럽게 이 사건을 들춰내면서 원경왕후와 민씨 가문을 맹비난하는 ‘증거자료’로 삼는다.
 “핏덩이를 불쌍히 여기는 게 인지상정인데…. 민씨가의 음참하고 교활해서 여러 방법으로 꾀를 내어 임금의 자녀들을 끊으려 한 것이다. 음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드시 역사에 남겨야 할 것이다.”   

태종과 원경왕후가 함께 묻혀있는 헌릉. 원경왕후 집안은 즉위 때까지 태종의 혁명동지 가문이었지만 결국 멸문에 가까운 화를 당했다.

■‘선위 소동’ 더듬수 둔 태종
 한때는 조선개국의 공신가문이었고, 태종의 혁명동지이기도 했던 민씨 가문이 몰락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태종으로서는 ‘차세대’가 큰 걱정거리였다. 세자(양녕)는 어릴 적부터 외가에서 자랐다. 그런 세자(양녕)가 보위에 오른다면 누구의 나라가 되는가. 가뜩이나 기세가 등등한 원경왕후와 민무구 형제의 가문, 즉 민씨의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닌가. 태종은 함정을 만든다. 그것이 1406년(태종 6년) 8월 18일에 벌어진 ‘선위 소동’이다.
 “이상한 일이 자주 생긴다. 한번은 잠결에 들으니 어디선가 곡소리가 구슬프게 났다. 왕위를 물려주라는 계시 같구나. 세자 이제(양녕)에게 전하려 하니….”
 핵폭탄 급 발언이었다. 어떻게 오른 임금의 자리인데 6년 만에 물려준다니…. 게다가 세자는 겨우 13살이 아닌가. 당연히 온 조정이 한 목소리로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세자는 부왕이 건네준 옥새를 보고 깜짝 놀라 울면서 정전(正殿)으로 달려온다.
 “신(세자)은 나이 어리고 아는 것이 없으므로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태종은 다시 옥새를 세자에게 되돌릴 것을 고집했다. 임금은 옥새를 내리고, 세자는 울면서 ‘아니되옵니다’를 외치며 되돌리고, 대신들은 “천하에 이런 일은 없다”고 반대하고….  
 태종 각본·연출·주인공의 이 코미디 같은 ‘선위 드라마’는 8일만에 끝난다. 그 명분도 웃긴다. 태종은 선위의 명을 번복하기 전에 측근인 이숙번을 비밀리에 부른다.
 “밤마다 어머니가 나타나는데 우시면서 나에게 고하시더구나. ‘너는 나를 굶기려고 하느냐?’고…. 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어린 세자에게 선위하시면 종사가 보전되지 못해 어머니께서 굶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어머니께서 ‘선위는 불가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가.” 
 태종은 할 수 없다는 듯 옥새를 다시 받았다.

 

 ■올가미 걸려든 대통령의 처남들
 그런데 이 올가미에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걸려든 것이다.
 모든 대소신료들이 “선위는 안된다”고 머리를 찧으며 울고 불고 할 때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기쁜 낯’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또한 임금이 복위를 결정하자 도리어 ‘슬픈 낯’을 비쳤다는 것이다.
 이화 등이 벌떼처럼 민무구 형제의 처단을 촉구하자, 태종은 민무구를 불러 다그쳤다.
 “내가 선위하려다가 복위하자 너희들이 기뻐하고(선위 때), 근심하는(복위 때) 빛을 번갈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느냐.”
 민무구가 답답하다는 듯 대답했다.
 “신은 신의 얼굴빛이 어떤 지 모르겠는데 전하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들은 바 없고 네가 한 말이 없다니…. 네가 물러나 네 집에 돌아가 분향(焚香)하고 잘 생각해보라. 네 마음이 바르고 바르지 않은 것을 알 것이다.”(임금)
 <실록>을 아무리 읽어봐도 태종의 질책은 ‘억지’라는 생각이 든다.  

세자였던 양녕대군 이제의 묘역. 어릴 적 외갓집(민씨)에서 자랐다. 민씨형제는 세자인 양녕을 믿고 세도를 부리다 멸문의 화를 당했다. 결국 민씨의 남은 형제은 민무휼 민무회 형제는 세자의 고자질로 탄핵됐다

■세자 외에는 다 죽인다?
 한번 탄핵의 대상이 되자 온갖 혐의가 눈덩이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먼저 1405년(태종 5년) 창덕궁에서의 일이 거론됐다. 창덕궁이 건설되자 태종은 건설감독관을 치하하는 작은 술자리를 베풀었다.
 태종은 당시 9살이던 충녕(훗날 세종)이 쓴 ‘글씨(墨戱)’를 여러 신료들에게 자랑삼아 보여주었다. 이 때 사단이 생겼다. 민무구가 취산군 신극례에게 글씨를 건네자 신극례가 술기운을 빙자해서 찢어버린 것이다. 왜 그랬을까. 민무구 형제는 평소 태종에게 “세자 외에 왕자 가운데는 영기(英氣·빼어난 기상) 있는 자가 많으면 반드시 난을 일으킨다”고 누누이 말해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탄핵대상이 됐다. “(민씨 가문에서 자란) 세자 외의 모든 왕자를 제거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트집 잡힌 일이 또 있었다.
 민무질이 우정승이었던 이무와 호조참의 구종지 등에게 “주상이 우리(민무구·민무질 형제)들을 의심하고 꺼린다”는 둥 “전하께서 나를 보전하지 않을 것이니 장차 어찌할 것이냐”는 둥 하며 걱정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불손한 역심을 품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 신료들의 비난이었다.
 심지어 태종이 ‘선위 쇼’를 벌일 때 민씨 형제가 은밀히 ‘내재추’라 해서 일종의 ‘그림자 내각’을 구성했다는 주장까지 올라왔다.

 

 ■‘난신의 목을 베야 합니다.’
 이 민무구·무질 형제의 탄핵은 만 2년 8개월(햇수로 4년)이나 계속됐다.
 민씨 형제는 처음엔 황해 옹진(민무구)과 경기 장단(민무질)로 자원부처됐다가, 여흥(민무구)과 대구(민무질)로 다시 쫓겨갔다. 민씨 형제는 급기야 제주도까지 밀려났다가, 그곳에서 자진의 명을 받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옹진·장단→여흥·대구→제주→자진(自盡)’으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거론된 죄목 외에, 특기할만한 여죄(餘罪)들이 탄핵과정에서 우후죽순처럼 제기됐다. 태종이 처남들의 ‘10대 죄상’을 거론하면서 언급한 여죄를 보자.
 “과인(태종)이 등에 매우 큰 종기(腫瘡)가 났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민무구·민무질 형제는 가만히 내 병세를 엿보고 치료할 뜻이 없이 사사로이 모여 9살 된 자식(양녕)을 끼고 나라 권세를 쥐려고 획책했다. 또 민씨 형제는 양인(良人) 수백명을 핍박하여 자신의 종으로 만들었다. 그 때문에 종이 된 사람들이 신문고(鼓)를 쳐 억울함을 호소했다. 또 과인(태종)이 세자 시절 입었던 관대를 지금의 세자(양녕)에게 전하려 할 때 민무구는 제 마음대로 이 관대를 착용하고 교만 방자하게 굴었다.”
 대사헌 박은 등은 민무구 형제를 두고 “고기를 회쳐먹어도 시원치 않을 대역죄인들”이여 “난신의 목을 베는 것이 <춘추>의 의리”라고 앙앙불락했다.

 

 ■신료들의 ‘무력시위’
 쉬이 끝날 싸움이 아니었다. 민씨 형제의 목숨이 끊어져야 끝날 싸움이었다. 세자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살아있다면 언제든 세력을 회복해서 피의 보복을 하지 않겠는가.
 꼬투리는 계속 잡혔다. 귀양지에서 민무구 형제들에게 아부를 떨며 친분을 맺은 사람들이 포착됐다. 덧붙여 형제를 둘러싼 동정론이 비등해진 것도 민씨 형제의 명을 재촉했다.
 예컨대 이지성은 세자(양녕)의 명나라 조현 행차(1407년)에 따라나서 남몰래 “민무구 형제는 죄없이 쫓겨났다”고 귓속말한 것이 탄로났다. 또 우정승이자 개국공신인 이무와, 원평군 윤목·한성소윤 정안지 등은 “민무구 형제가 불쌍하다”는 둥, “민무구 형제가 귀양 중이지만 잘 대접하라”는 둥의 큰일 날 소리를 발설함으로써 명을 재촉했다.
 1410년(태종 10년) 3월18일, 성석린·김한로·설미수 등 원로대신들은 제사를 지내러 궁을 나와있던 태종에게 달려갔다.
 “대간들의 상소가 벌써 (햇수로) 4년이나 되었습니다. 수적(首賊·민무구 형제)를 베지 않고서는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뭐 그리 바쁘냐. 내일 제사를 지낸 뒤 결정하면 안되겠느냐.”(임금)
 “아니되옵니다.”
 태종의 고민은 2경(밤 9~11시 사이)이 되도록 계속됐다. 대신들은 혹은 서서, 혹은 앉아 임금의 결단을 기다렸다. 일종의 무력시위였다. 견디다못한 태종은 의정부·백관·대간의 상소에 답하는 영을 내렸다.
 “민무구·민무질에게 자진하도록 해라.”

 

 ■태종의 이중플레이
 그것으로 끝이었을까. 아니었다. 민씨 가문에는 살아있는 아들들이 또 있었으니까….
 3·4남인 민무휼·민무회 형제였다. 1407년 11월, 형들인 민무구·무질 형제가 한창 탄핵받고 있을 때였다. 태종은 근신 중이던 민무휼·무회 형제를 특별히 불러 위로했다.
 “요사이 처남들은 왜 출사하지 않는고?”
 “(무구·무질 형제와) 같은 민씨이니 감히 문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임금이 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 무슨 말인고? 너희는 불충한 형들을 사랑하고 나를 버리는가? 옛날 주공(周公)이 불충한 형을 베고 주나라 왕실에 충성을 다한 것을 어찌 모르는고?”
 주공(周公)은 누구이고, 주공이 벴다는 형은 누구인가. 주나라를 창업한(기원전 1046년) 무왕이 죽자(기원전 1043년) 강포에 싸인 어린 왕(성왕)이 등극했다. 이때 섭정에 나선 이가 바로 무왕의 둘째동생 주공이었다. 그러자 첫째동생인 관숙과 셋째동생인 채숙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은 반란군을 진압한 뒤 형인 관숙을 주살했다. 태종은 바로 이 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즉 너희(민무휼·무회)는 형들(무구·무질)의 죄를 딛고 일어나라는 것이었다. 대단한 격려가 아닐 수 없었다.
 태종은 아버지(민제)의 장례를 끝낸 민무휼·무회 형제를 위해 잔치까지 베풀어주었다.(1411년 6월)  
 “오늘 여러 민씨들을 위로하고자 한다. 민씨의 마음에 대해 미안하게 여긴다.”
 그러면서 태종은 민무휼·무회 형제에게 “중전(원경왕후)을 위해 잔을 올려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다. 처남들을 죽인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믿었던 세자의 고자질
 하지만…. 민씨 가문은 또 한 번의 피바람에 몸서리를 떨었다.
 이 피바람은 엉뚱하게도 민씨 가문에서 어린 시절을 자란 세자(양녕대군)의 ‘고자질’에서 비롯됐으니….  
 1415년(태종 13년) 6월6일 아침이었다. 태종 임금이 세자 및 효령·충녕대군 등과 함께 편전에 나와 있었을 때…. 세자가 뜬금없이 2년 전의 일을 들춰내며 외숙인 민무휼·민무회 형제를 탄핵했다.
 “1413년, 중궁(원경왕후)이 편찮아서 병문안을 가서 두 아저씨들(민무휼과 민무회)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때 민무회가 ‘민씨 가문이 망하고 두 형이 죽은 연유’를 언급했다는 것이다. 그 때 세자가 “외숙의 가문이 교만방자하여 불법을 자행했으니 화를 입음이 당연하다”고 책망했다는 것.
 그런데 이때 민무회의 대꾸가 결정적인 한마디가 됐단다.
 “세자는 민씨 가문에서 자라지 않았습니까.”
 어릴 적 키워준 공을 모르고 외가를 욕보이는 말을 하느냐는 원망이 분명했다. 세자도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분위기가 냉랭해지자 민무휼이 세자를 따라와 “동생이 실언한 것이니 궤념치 말라”고 해서 겨우 무마됐다. 그런데 세자는 2년이 지난 뒤에 이 때의 일을 부왕에게 ‘고자질’한 것이다. 세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 때는 그냥 넘어갔지만 지금까지도 개전의 정이 없고, 여전히 원망하는 말이 나오므로 아뢰는 것입니다.”
 중전(원경왕후)을 비롯한 민씨 일가로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한(恨)이었으리라.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임금은 물론 외가를 욕한 세자에까지 그 원망을 드러냈을 것이다.
 세자도 그런 외가의 분위기가 무척 부담스러웠을 것이고…. 어쨌든 세자의 ‘고자질’로 피바람의 서막이 올랐다.

 

 ■술취한 세자 ‘외삼촌들을 죽이소서’
 민무휼·무회 형제는 형들과 똑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수렁에 빠졌다. 처음에는 민무휼을 원주에, 민무회를 청주에 귀양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세자가 앞장 섰다. 그것이 민무구·무질 형제 때와 달랐다. 1416년(태종 16년), 임금이 제례를 마치고, 광연루에서 술자리를 베풀었을 때였다. 세자(앙녕대군)가 한껏 술에 취해 부왕에게 나서 아룄다. 
 “종사는 오로지 전하의 종사만이 아닙니다. 죄인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무휼·무회 형제를 법대로 처치함이 옳습니다.”
 태종은 세자의 이 말에 귀를 쫑긋하면서 최한에게 일렀다. 
 “경은 세자의 이 말을 자세하게 들어두라.”
 결국 민무휼·민무회 형제는 “임금와 세자를 원망하면서 역심을 품었다”는 죄목으로 귀양지에서 자진(自盡)해야 했다.(1416년) 태종이 내린 명은 이랬다. 
 “그들을 굳게 지켜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그러나 만약 자진하고자 하거든 막지는 말아라.”
 웃긴다. 즉시 자진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이로써 임금의 처남 가문이자 세자의 외숙으로 권력을 휘들렀던 4형제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와 함께 민씨 가문도 멸문의 화를 입었다.

 

 ■세종 장인의 말로
 어디 그들 뿐인가.
 양녕대군 대신 세자가 되어 보위를 물려받은 세종의 외척은 어땠는가. 세종의 장인인 심온 역시 자살했다.(1418년) 어떤 연고였을까.
 “1418년(세종 즉위년), 심온이 명나라 사은사로 떠났다. 임금의 장인으로 나이 50이 못되어 수상의 지위에 오르니 영광과 세도가 혁혁했다. 이날 전송나온 사람으로 장안(서울)이 텅텅 비었다.”
 이 때는 상왕(태종)이 아직 군권을 틀어쥐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런데 외척으로서의 위세가 ‘장안이 텅텅 빌 정도였다’니 태종이 어찌 생각했겠는가. 이미 외척발호를 염려해서 처남 가문을 멸족시킨 이력이 있는데 심온 정도야…. 게다가 심온이 했다는 말 한마디가 상왕(태종)의 심기를 결정적으로 건드렸다.
 즉, “군령이 두 곳에서 나오는데 군사는 한 곳에 모여야 하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군권을 휘어잡고 있던 태종을 겨냥한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심온을 위기에 빠뜨리려는 모함이었다. 결국 심온 역시 자살을 강요받고 말았다.

 

 ■역린을 건드리면…
 한비자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용이란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줄기 아래에 한 자 길이의 거꾸로 난 비늘’이 있는데 사람이 이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 사람을 죽여버린다.”
 ‘목줄기에 거꾸로 난 비늘’이 바로 ‘역린(逆鱗)’이다. ‘역린을 건드린다는 것’은 아무리 임금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신하라도 도가 지나쳐 임금의 심기를 건드리면 죽임을 당한다는 뜻이다.
 한비자는 단적인 예를 든다. 바로 위나라 군주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위자하라는 인물이었다. 어느 날 미자하의 모친이 병이 나자 위자하는 멋대로 군주의 마차를 타고 갔다. 위나라 법에 군주의 마차를 훔쳐 타는 자는 월형(월刑·발뒤꿈치를 자르는 병)에 처하도록 했다. 그러나 위나라 군주는 ‘미자하의 효성’을 칭찬했다. 또 어느 날 위자하가 “복숭아를 맛있다”며 먹던 복숭아를 위나라 군주에게 건넸다.
 위나라 군주는 “나를 위해 이렇게 단 복숭아를 주다니!”하고 칭찬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군주의 총애를 잃었다. 어느 날 미자하가 죄를 짓자 군주는 이렇게 말했다.
 “저 자는 예전에 군주를 사칭해서 내 마차를 탔고, 도 먹다만 복숭아를 나에게 먹인 자다”라며 미자하를 처벌했다. 미자하의 행위는 다를 바 없었지만 상황에 따라 180도 바뀐 것이다.
 사실 민씨 형제와 심온이 무슨 죄가 있었겠는가. 또 ‘기쁜 얼굴빛’은 무엇이고, ‘건성건성 박수’는 또 무엇인가. 다 군주의 역린을 건드린 죄였을 뿐이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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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위 이후 일기사초(日記史草)에 직언이 담겨 있으면 모두 도려내고~임금의 과실을 기록하지 못하게 했으며….”
 연산군 이야기다. 중종반정 직후인 1506년(중종 1년) 사관은 연산군의 죄상 가운데 으뜸을 ‘역사를 농단한 것’이라 꼽는다.
 사관은 그러면서 “예로부터 난폭한 임금이 많았다지만 연산처럼 심한 자는 없었다”고 못박는다.
 그런 소리를 들어도 싸다. 절대 보아서는 안될 사초를 열람했을 뿐 아니라 사관의 지적대로 ‘임금의 일’을 기록조차 하지 말라는 엄명까지 내렸으니까…. 연산군 시대에 과연 어떤 기막힌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구한말의 세검정 모습. 실록 작성용으로 활용된 사초를 세척한 곳이었다. 

■“역사 아예 없는 것이 낫다”
 1506년(연산군 12년) 연산군이 내린 해괴망측한 전교를 보자.
 “임금은 사서를 두려워하는 법이다 <춘추>에 이르기를 ‘어버이를 위하는 자는 은휘(숨긴다는 뜻)한다(爲親者諱)’고 했다. 사관은 시정(時政·당대의 정책)만을 기록해야지 ‘임금의 일’을 기록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그러면서 연산군은 “근래 사관이라는 자는 임금의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기록하면서 아랫사람의 일은 쓰지 않으니 죄 또한 크다.”고 꾸짖었다. 연산군은 한술 더 떴다.
 “이제 사관에게 임금의 일을 더 이상 쓰지 못하게 했는데. 아예 역사가 없는 것이 더욱 낫다. ”
 그러면서 기껏 ‘롤모델’로 삼은 이가 통일 진나라를 망친 진 2세(胡亥)였으니….
 “진 2세는 말했다. ‘(황제란) 눈과 귀, 그리고 마음과 뜻이 가는대로 할 수 있다는 사람이다.’라고…. 나도 (호해처럼) 멋대로 하려고 임금이 되었는데 무슨 잔소리가 많다는 말인가.’
 호해가 누구인가. 호해는 아버지 진시황이 죽은 뒤 아방궁 건축을 강행하고. 중원의 병졸들을 징발하는 등 휴식을 취해야할 백성들을 끊임없기 괴롭힌 2세 황제였다.
 대신들이 아방궁 건축을 만류하자 이렇게 큰소리쳤단다.
 “짐이 천하를 얻은 까닭은 내 맘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맘대로 하겠다는 데 무슨 헛소리냐.”(<사기> ‘진시황본기’)
 사가들은 그런 말을 내뱉은 호해를 두고 인두축명(人頭畜鳴), 즉 “사람의 머리를 하고 짐승의 소리를 내뱉는다”고 장탄식했다.
 닮을 사람을 닮는다고 해야지 아버지가 천신만고 끝에 쌓은 통일제국을 불과 15년 만에 들어먹은 호해를 닮는다는 말인가.
 하기야 연산군의 시대도 만 10년을 넘기지 못했으니….

 

 ■발췌본만 열람한 연산군
 뭐니뭐니 해도 연산군이 지탄받은 사건 가운데 으뜸은 바로 ‘무오사화’일 것이다. 다른 사화(士禍)와 달리 실록편찬 과정에서 화를 입었다 해서 사화(史禍)로도 일컬어지는 사건이다.  
 때는 바야흐로 1498년 <성종실록> 편찬과정에서 사관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스승(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파문을 일으켰다. ‘조의제문’이 무엇인가.
 바로 초한전쟁 때 항우가 초나라 의제를 죽인 것을 추모함으로써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진노한 연산군은 “당장 김일손의 사초를 모조리 거둬들이라”는 엄명을 내린다.
 이때 실록청 당상(국사편찬위원장) 이극돈을 비롯해 유순, 윤효손, 안침 등이 극력 반대한다.
 “임금은 예로부터 사초(史草)를 보지 않습니다. 임금이 보게 되면 후세에 직필(直筆)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앙앙불락했다. 사관들은 재차 만류한다.
 “여러 사관들이 사초를 다 보아 그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신(이극돈) 등도 나이가 들어 조종조의 옛 일을 다 알고 있고, 김일손의 사초를 <실록>에 싣지 않았는데 지금 들이라고 명령하시면 안됩니다.”
 그러나 연산군의 서슬퍼런 명령이 계속되자 사관들은 절충안을 마련한다.
 “그렇다면 살펴볼 곳만 ‘절취’하여 올리겠습니다. 그러면 그런 일(조의제문 부분)은 볼 수 있고 임금이 사초를 보지 않았다는 의(義)에도 합당할 것입니다.”
 그러자 연산군은 “알았다”는 전교를 내렸다. 실록청은 그에 따라 김일손의 사초에서 6개 조목을 ‘절취해서 봉해’ 올렸다.
 이로써 이미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조의제문을 실록에 실으려 했던 김일손 등 사림파는 대거 숙청당했다.
 연산군은 절대 들춰봐서는 안될 사초를 열람함으로써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지만 한가지 연산군을 위한 변명을 하자.
 연산군은 사초를 전부 본 것이 아니라 이른바 ‘발췌본’을 열람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임금은 역사를 두려워 하는 법”이라는 생각을 했던 연산군으로서는 “임금이 사초를 보지 않았다는 ‘명분’을 얻기 위한 고육책으로 ‘발췌본’ 만을 열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고보니 ‘임금의 일은 역사서에 절대 기록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 것 자체가 역사를 두려워한 연산군의 빗나간 결정이 아니었을까.
 이쯤해서 태조 이성계 때의 일을 상고해보자. 왜냐.
 연산군은 태조 이성계와 견줘볼 때 상대적으로 순진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 하니까…. 또 하나, 역사는 연산군 시대의 사관들을 ‘임금에게 사초를 내준 자들’이라고 욕하지만 태조 이성계 시대의 개국공신 조준과 견준다면 그 또한 억울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연산군 보다 더 지독한 역사파괴자가 태조 이성계와 조준이었으니 말이다.

 1393년(태조 2년), 개국공신 조준이 고려왕조의 사초를 읽어보다가 깜짝 놀랐다. 고려 공양왕 때의 사관(예문춘추관 학사)이던 이행의 사초였다.
 “(고려의) 우왕과 창왕을 죽인 자는 바로 이성계다.”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조준은 잽싸게 태조에게 고했다. 역시 태조 이성계가 펄펄 뛰었다.
 “(우왕과 창왕이 죽은) 1388년 이후의 사초를 모조리 바쳐라.”
 일사천리로 사초가 열람됐다. 태조로서는 놀라 자빠질 내용이 들어있었다. 1388년, 고려 우왕과 창왕 부자, 그리고 변안열이 죽은 일을 두고 ‘이성계의 손에 죄도 없이 살해당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지안의 통구(퉁거우) 사신총에 그려진 글을 쓰는 선인, 당시 이들을 사(史)라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우왕과 창왕을 죽인 이는 이성계다’
 그러나 <태조실록>은 이행의 사초를 깡그리 무시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행이 이색과 정몽주 등에 아첨하여 주상(태조)께서 신우(우왕), 신창(창왕)과 변안렬을 죽였다고 거짓으로 꾸민 것이다.”
 이행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된 상황에서도 아무 수정없이 당당히 사초를 제출한 것이다. 참으로 목숨을 건 사관의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이행의 사초를 본 태조는 이 사초가 거짓임을 구구절절 변명하고 있다.
 “나(태조)는 처음부터 살해할 마음이 없었는데…. 백관과 백성들이 합심해서 목 베기를 청했기 때문에…. 변안렬도 대관들과 중서문하성에서 죄주기를 청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여론에 이끌려 할 수 없이 우왕과 창왕, 변안렬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군색한 변명이 아닌가.
 <태조실록>은 이쯤해서 묘한 기록을 던진다.
 “공민왕이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신돈의 간사한 계책에 의혹되어 신돈의 아들 우(禑)를 궁녀 한씨가 낳았다고 일컫고, 나이 9살 때 강녕대군으로 책봉됐다가 후에 군주(우왕)로 삼았다.”
 그러니까 우왕과 그의 아들 창은 요승 신돈의 자손이라는 내용을 은근슬쩍 사실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자칫하면 국왕을 2명이나 시해한 역적으로 남을 수도 있었기에 태조 이성계로서는 모골이 송연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고려의 대쪽 사관인 이행 덕분에 고려의 망국 및 조선의 개국 비화를 더듬어볼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사초 모조리 바쳐라!”
 이 때의 트라우마 때문일까. 태조는 ‘사초’를 보고 싶은 욕망을 참지 못했다.
 “왕위에 오른 때부터 이후의 사초를 모조리 바쳐라. 명색이 왕인데 사초를 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냐.”(1398년)
 승지 이문화가 맞섰다.
 “만약 군주가 스스로 보게 되면 사관이 숨기고 꺼려서 사실대로 바로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본다는데 신하된 자가 거역한다면 어찌 신하의 의리가 되는가. 당장 사고(史庫)를 열어 모조리 사초를 바치라.”(태조)
 그러나 조준 등은 결국 태조의 명에 따라 즉위년(1392년) 이후 모든 사초를 거둬 바치려 했다. 이 때 사관 신개가 다시 맞섰다.
 “예전에 당 태종은 명재상 방현령의 반대를 무릅쓰고 <실록>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편찬된 <실록>을 황제에게 순서대로 올렸나이다. 그러자 <실록>의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은근히 숨기는 일이 많아졌던 것입니다. 태종도 성군이었습니다. 바른대로 쓰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명재상인 방현령조차 사실을 숨기고 바른대로 쓰지 못했던 것입니다.”
 신개의 직언이 계속된다.  
 “창업군주는 모범이 돼야 합니다. 만약 주상께서 당대의 역사를 열람하시면 후대의 임금들이 어떻겠습니까. 저마다 ‘우리 선왕도 그랬는데…’ 하면서 사초를 보고 고치는 일이 습관화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사관이 붓을 잡겠습니까.”
 그렇지만 태조는 ‘이행의 사초’를 들며 완강하게 반응했다.
 “내가 왕위에 오를 때 임금과 신하가 몰래 한 이야기를 어찌 사관이 안다는 말인가. 이행의 기록도 잘못되지 않았느냐. 고려 공민왕 이후 이미 편수한 역사와 즉위년 이후의 사초는 모조리 가려내어 바치라.” 

조 이성계가 “사초를 모두 바치라”고 하교한 내용을 기록한 <태조실록>

■사초를 불태운 영조
 또 한사람, 영조의 예를 더 들어보자.
 아예 사초를 불태워버린 군주이니 말이다.
 1735년(영조 11년) 2월10일, 영조는 새벽까지 대신들과 함께 과거의 일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매우 심각했다.
 영조는 선왕이자 이복형인 경종을 둘러싼 독살설과 끊임없이 제기되는 연루설, 그리고 계속되는 노·소론의 당쟁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격정을 토로했다.
 “당시에 유언비어가 있지 않았느냐. 연잉군(세자 시절의 영조)이 정궁을 박대하고 주색에 빠져 있는데 만약 그(영조)를 책립하면 반드시 ‘기사년의 일’(1689년의 기사환국 때 장희빈의 무고로 인현왕후가 폐위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별의별 유언비어 말이다.”
 신하들이 어쩔 줄 몰라했다.
 “전하! 어찌 차마 듣지 못할 말씀을 하십니까.”
 “경들도 알고 나도, 모든 사람도 아는 말을 왜 못하는가.”
 이 때 호조판서 이정제가 나서 “이것은 도저히 역사에 쓸 수 없는 망측한 이야기”라면서 “사초의 책자를 불태우자”고 제안했다.
 영조가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영조는 새벽 3시가 넘어 신하들이 모두 물러나자 “사초의 책자를 모두 가져와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시황의 분서와 다를 바 없는 사상초유의 ‘사초폐기’ 사건이었다. 사초가 한줌의 재로 사라지자 극심한 부작용이 생겼다.
 임금과 신하가 나눴던 ‘심야대화’가 무수한 억측을 낳은 것이다. 신하들은 “내전(중전)까지 언급된 대화의 깊은 뜻이 무엇이냐”고 설왕설래하며 두려워하는 등 파문이 일었다.
 하지만 사초가 이미 불태워졌기 때문에 여러 설만 떠돌 뿐이었다. 훗날 사관들은 당시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서 들은 말을 참고해서 추후에 사초를 기록했다.
 이 얼마나 참담한 ‘사초폐기’ 사건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연산군은 폭군이라는 오명 때문에 십자포화를 맞은 것은 아닐까. 연산군은 그래도 이극돈 등 사관들의 반대에 ‘발췌본’ 일부를 보는 것으로 그쳤다.
 그렇다면 사초를 모조리 열람하고 전체적으로 역사를 뜯어고친 태조 이성계와 임금에게 ‘문제의’ 사초를 보여주고, 심지어는 모든 사초를 바친 조준의 죄는 어떻게 가릴 수 있을까.
 또 단칼에 사초를 불태워 역사를 지우려 했던 영조와 이정제의 죄는 어떻게 물을 것인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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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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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옹이 나를 먹어치우는 바람에 온몸에 피가 흐르는군요.”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사람을 먹어치우는 것은 무엇이요. 그 때문에 온몸에 피가 흐른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인가. 중국 남송 시대 인물인 유옹의 엽기 행각을 일컫는 일화다.
 유옹에게 한 가지 엽기스러운 버릇, 즉 기벽(奇癖)이 있었다. 바로 ‘부스럼딱지 먹기’였다, 역사서는 유옹의 이 괴팍스런 버릇을 ‘창가벽(瘡痂癖)’이라 했다.  

원나라 화가 예찬(운림)의 ‘결벽’을 그린 오원 장승업의 ‘고사세동도’. 예찬은 손님이 돌아가자 오동나무에 침이 뭍었다 해서 어린 종을 시켜 오동나무를 닦도록 했다는 고사는 유명하다. |삼성미술관 리움

상처가 아무는 사람의 소식만 들으면 쳐들어가 상처부위에 떨어진 부스럼 딱지를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니…. 어느 날 유옹은 자창(炙瘡 화상)에 걸린 맹영휴라는 인물을 찾아갔다.
 유옹이 맹영휴의 상처 부위에서 떨어진 부스럼 딱지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기가 딱 막힌 맹영휴는 아직 떨어지지도 않은 딱지까지 떼어 먹였다.
 희한한 경험을 한 맹영휴는 훗날 지인에게 쓴 편지에서 “유옹이 날 먹어치워 온몸에 피가 흐른다.”고 농 섞인 뒷담화를 해댄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부스럼 딱지의 맛이 복어와 비슷했다니 참…. 유옹은 이런 엽기행각을 비웃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단다.
 “그것은 ‘벽기가(癖嗜痂)’란 말이야.”
 ‘기호의 차이일 뿐’인데 왜 다른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하느냐는 것이다.(<송서> ‘유목지전’)

 

 ■‘전벽(錢癖)’, ‘지벽(地癖)’, ‘창가벽(瘡痂癖)’…
 유옹의 이 ‘기호의 차이’일 뿐이라는 말은 옳은 것 같다.
 별 희한한 버릇들이 많으니까…. 진나라 사람인 화교(和嶠)는 엄청난 재산을 모았지만 쉼 없이 돈을 세는 버릇이 있었다. 돈을 쓸 줄도 몰랐다.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전벽(錢癖)’이라 비웃었다, 돈에 미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아우들이 화교가 외출한 틈을 타 화교의 집 정원에 몰래 들어가 맛있는 자두를 따먹었다. 그러나 이중에 이 사실을 알아차린 화교는 아우들이 먹은 자두값을 물론 뱉어버린 자두씨 값까지 일일이 계산해서 받아냈다.(<계핵열전(計核列傳)>)
 화교와 동시대 사람인 노포는 화교와 같은 배금주의에 빠진 세상을 풍자해서 ‘전신론(錢神論)’을 지었다. 그 ‘전신론’에 따르면 당시 돈벌이에 탐익한 세상사람들은 돈을 ‘전형(錢兄)’, 즉 형님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돈을 형님이라 했다니 참….
 돈만 죽도록 밝히는 ‘전벽(錢癖)’ 가운데는 중국 남조 양나라 때 인물인 소굉(473~526년)도 있다. 소굉은 양 무제의 동생이기도 했다.
 그런 그는 집안 창고 100여 칸에 무려 3억전(錢)을 모았다고 한다. 황제의 동생이라는 점을 이용, 매관매직에 앞장서서 엄청난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소굉은 부정축재로 쓸어모은 돈을 남이 훔쳐가지 못하도록 희한한 장치를 개발했다. 즉 돈을 쌓아둔 창고문이 닫히자마자 잠기는 특수장치를 설치해놓다는 것이다. 소굉은 한때 형인 무제의 의심을 사는 바람에 역모죄로 사형당할 뻔했다. 
 집안에 엄청난 무기를 숨겨두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쌓아놓은 것이 무기가 아니라 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일절 동생을 ‘터치’하지 않았다.
 무제의 아들인 예장왕 소종은 돈에 집착하는 삼촌 소굉의 어리석음을 빗댄 <전우론(錢愚論)>을 지어 삼촌을 비웃었다.
 부동산 투기꾼은 예로부터 ‘지벽(地癖)’이라 일컬었다.
 당나라 시대 ‘부동산 투기의 귀재’, 즉 ‘지벽’의 달인은 이징이라는 인물이었다. 이징은 각종 부동산과 전답, 산림 등을 닥치는대로 사들이는데 병적으로 집착했다.
 이징의 활약상은 700년이 지난 뒤, 그것도 이웃나라 조선에까지 널리 퍼졌다. 오죽했으면 조선의 <동문선>에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려있을까.
 “아아. 세상이 말세가 되어 순후한 사람이 없으니(噫世及衰微 人無純) 이징의 땅 모으는 욕심을 어찌 만족시키랴.(如李登之地癖兮 何厭之有) 소굉의 전우는 못내 추하도다(若蕭宏之錢愚兮 亦孔之醜).”

 

 ■단벽(鍛癖), ‘다벽(茶癖)’, ‘석벽(石癖)’, ‘주벽(酒癖)’, ‘결벽(潔癖)’…
 이 뿐인가. 예로부터 갖가지 벽(癖)의 소유자가 많았다.
 예컨대 죽림칠현 중 한사람인 혜강(232~262년)은 ‘단벽(鍛癖)’으로 유명했다. 벼슬에 구애받지 않고 초야에서 쇠를 두들기는(鍛) 대장간을 운영하며 청렴하게 살았다. 풀무질을 유독 좋아해서 벗인 향수와 마주앉아 풀무질 하며 방약무인했다고 한다. 또 당나라 때의 선비 육우(陸羽·733~804년)는 ‘다벽(茶癖)’으로 유명했다. 오죽했으면 차 상인들로부터 ‘다신(茶神)’의 칭호를 얻었을까. 
 북송의 서·화가인 미전(1051~1107년)은 ‘석벽(石癖)’, 즉 돌에 미친 사람이었다. 얼마나 돌을 애호했던지 기석(奇石)을 보면 그 돌을 향해 절(拜)하면서 ‘형(兄)’이라 불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원나라 화가인 예찬(倪瓚·1301년~1374년)의 ‘결벽(潔癖)’은 청사에 길이 빛났다. 먼지를 극도로 싫어한 예찬은 틈나는대로 손을 씻었는데, 물과 수건을 든 시녀가 늘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심지어는 정원의 오동나무도 깨끗이 씻었다고 한다. 오동나무까지 씻을 정도의 결벽을 바탕으로 한 ‘세동고사(洗桐故事)’는 명나라 시대 이후 수많은 화가들의 그림소재가 되었다.
 이밖에 역시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210~263년)은 ‘가슴의 불덩어리를 진정시키려고 술을 부어야 한다’는 ‘주벽(酒癖)’으로 이름을 떨쳤다. 

추사 김정희의 벽은 금석벽이었다. 그는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판독한 뒤 그 소감을 쓴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다.

꽃뱀까지 동원한 ‘지벽’, 상소 남발 ‘소벽’
 어디 중국인들 뿐인가. 조선의 <명종실록>을 보자.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저택을 10여 채나 이어 짓고…. 해변의 간척지와 내륙의 기름진 전답을 모두 사사로이 점유하니~어찌 지벽(地癖)이 아니겠습니까.”
 1565년(명종 20년) 대사헌 이탁 등이 전 영의정 윤원형의 ‘지벽’, 즉 부동산투기벽을 맹비난하는 상소를 올린다. 닥치는대로 땅을 사 모으고, 마구잡이로 저택을 짓는 행태를 탄핵한 것이다.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숙종실록>은 1688년(숙종 14년)조에서 천안 출신 이상(李翔)의 탐욕을 전하고 있다. 특히 땅을 향한 욕심은 대단했다.
 “이상은 시골에 살면서 세력으로 억압해서 남의 비옥한 토지를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반드시 빼앗았다.”
 그는 꽃뱀까지 등장시켜 남의 토지를 빼앗은 악질이었다. 즉 빼앗을 토지를 눈여겨 본 뒤 젊은 여종을 ‘꽃뱀’으로 등장시켜 범행대상인 집주인과 정을 통하게 했다. 그런 다음 “사통한 사실을 폭로·고발하겠다”고 협박했다. 겁에 질린 땅주인은 처벌을 피하려 문서를 넘겼다. 그런 식으로 빼앗은 토지가 한 둘이 아니었다. <숙종실록>은 그런 이상을 두고 ‘전지벽(田地癖)을 가진 자’로 폄훼했다.
 상소를 일삼는 상소꾼도 있었다. 지금도 고소·고발을 남발하는 소송꾼이 있다지만 예전에 상소를 남발하는 사람을 상소꾼, 즉 ‘소벽(疏癖)’이라 했다.
 1598년(선조 31년) 이귀(1557~1633년)가 상소를 올리자 <선조실록>의 기자는 ‘사론’을 붙여 ‘이귀=상소꾼’이라 폄훼했다.
 “이귀는 상소를 좋아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즉시 소매를 걷어붙이고 상소했다. 사람들이 이를 두고 ‘상소 잘하는 벽이 있다’하여 비웃었다.(人嘗笑其有疏癖)”

 

 ■벽(癖)을 자랑한 사람들
 ‘벽(癖)’의 사전적인 의미는 ‘무엇을 치우치게 즐기는 성벽(性癖)’이며, ‘고치기 어렵게 굳어버린 버릇’을 일컫는다.
 요즘 좋은 말로 ‘마니아’라 할 수 있고, ‘괴짜’라 할 수도 있으며, 속된 말로는 ‘똘아이’라 할 수도 있겠다.
 갑골문자의 ‘질(疾)’은 ‘침상에 누운 환자가 땀을 흘리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땀 흘리는 병자의 모습을 담은 ‘벽(癖)’도 일종의 ‘병’, 혹은 ‘병폐’로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옛 사람들은 ‘벽’을 질병이나 병폐로만 여기지 않았다. 되레 자신의 벽을 자랑하는 이들도 많았다.
 특히 책을 좋아하고 시 읊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서음(書淫), 혹은 전벽(傳癖), 시마(詩魔) 등으로 칭하며 은근히 자랑했다.
 진나라 두예(杜預·222~284)는 <춘추좌전>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느 날 진 무제가 “경은 무슨 버릇(癖)이 있냐”고 묻자 두예는 “저는 좌전벽(左傳癖)이 있습니다.”라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좌전(左傳)’는 공자의 <춘추>를 해설한 <춘추좌전>을 일컫는다. 두예는 이 <좌전>에 빠져 <좌전집해>라는 주석서를 저술했다. 이것이 가장 이른 시기의 <좌전> 주해이다. 두예의 <좌전벽>은 글깨나 읽는다는 이들이 가장 많이 인용한 ‘벽’의 모범사례이다.
 또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772 ~ 846년)는 술과 거문고. 시를 ‘세 친구(三友)’로 삼았다. 그는 <취음(吹吟)>에서 술과 시에 빠진 ‘성벽(性癖)’을 읊었다.
 “취한 술기운이 또 시마(詩魔)를 일으켜 정오부터 슬피 읊은 것이 저녁에 이르렀다.(酒狂又引詩魔發 日午悲吟到日西)”
 두보(杜甫·712~770년)는 ‘가구(佳句·좋은 싯구)를 탐하는 벽(癖)’을 앓았다.
 “좋은 싯구를 몹시 탐내어 시어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 두지 않겠노라.(爲人性癖耽佳句 語不驚人死不休)”(<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권10)
 ‘죽을 때까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싯구를 지어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뜻이니 얼마나 지독한 시벽(詩癖)인가. 

실학자 박제가의 초상화. '책에 미친 바보'를 뜻하는 '간서치'라는 별명을 자랑해던 박제가는 ‘벽(癖)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자’라고 말했다.

■책 읽다 요절한 책벌레,
 우리 지식인들도 ‘책벌레’임을 자처했다.
 책에 빠졌음을 뜻하는 ‘서음(書淫)’의 종결자는 성간(成侃·1427∼1456년)을 꼽을 수 있다. 책을 읽다가 요절했다니 말이다. 서거정(1420~1488년)의 <필원잡기> 등에는 성간의 일화가 남아있다.
 “성간은 유경은 물론 제자백가와 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도경(道經)·불경(佛經)·산법(算法)·역어(譯語)의 모든 법을 두루 섭렵했다. 또 누구네 집에 희귀본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반드시 구해보았다.”
 하루는 서거정이 집현전에 있을 때 성간이 찾아와 “장서각에 있는 비장본을 보고싶다.”고 청했다. 그러나 서거정은 난색을 표했다. 궁중 비장본은 함부로 외부인에게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간은 집요했다. 숙직하고 있는 서거정을 찾아와 “책 좀 보여달라”고 애원했다. 마음이 약해진 서거정은 “그럼 한번 보라”고 허락했다.
 그러나 성간은 등불을 켜고 뜬눈으로 밤을 새워 책을 탐독했다. 훗날 장서각 속의 서적 체제와 권질(卷帙)을 말하는 데도 조금의 착오도 없었다. 서거정의 찬사가 계속된다.
 “그후 10년 후 성간이 과거에 올라 집현전에 들어왔는데 늘 장서각에 파묻혀 책을 밤낮으로 열람하니 동료들이 ‘서음(書淫)’, 혹은 ‘전벽(傳癖)’이라 놀렸다.”
 성간은 스스로 “난 서른살만 살면 족하다”고 말했는데, 과연 지나친 독서 때문에 건강을 잃은 탓에 30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희대의 풍운아 허균은 자신의 책읽는 버릇을 이렇게 자랑했다.
 “평생에 서음으로 이름났으니(平生坐書淫) 오거서는 언제고 따라다녀라.(五車行輒隨) 상자 열어 서가에 가득 꽂으니(發輒揷滿架) 펴 읽으며 스스로 기뻐한다오.(披讀以自嬉)”(<성소부부고>)
 그는 “보지 못했던 책을 읽을 때에는 마치 좋은 친구를 얻은 것 같고, 이미 읽은 책을 볼 때에는 마치 옛친구를 만난 것 같다”고  했다.
 조선 인조대의 문신 이식(1584~1647년)의 문집인 <택당집>에는 시골생활을 하던 중 즉흥적으로 지은 시가 있는데, 예의 ‘그 놈의 문자벽’을 은근히 자랑하는 대목이 나온다.
 “농사로 먹고 사는 일 어쩌면 그리 졸렬한지(耕鑿治生拙) 재미 느끼며 잘하는 건 그저 독서뿐(詩書得趣長) 아이 때부터 몸에 밴 이놈의 문자벽을(兒時文字癖) 늦은 나이 되도록 아직도 잊지 못하다니(歲晩未能忘)”
 다산 정약용도 척주 도호부사 이광도의 시에 답장을 보내면서 “난 촌에 처박힌 불우한 늙은이이며, 뜻이 있다면 서책만을 치우치게 좋아하는 것(有志簡編지是癖)”이라 했다.

 

 ■“죽어야 고칠 수 있는 시벽”
 고려의 문호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시벽’은 놀라울 지경이다. <동국이상국후집>에는 스스로 고질화해서 고칠 수 없는 ‘시벽 ’을 주제로 한 시가 여러 편 실려 있다. 
 “나이 칠십 넘어(年已涉縱心)~이제는 문장을 버릴 만도 하건만(始可放雕篆) 어찌하여 그만두지 못하는가(胡爲不能辭)~떼어버릴 수 없는 시마가 있어(無奈有魔者)~날 이 지경에 만들었네.(使我至於斯)”
 그는 이어 “매일같이 심장과 간을 깎아서 몇 편의 시를 짜내니 기름기와 진액이 다시는 몸에 남아있지 않다(不復留膚肌)”고 읊었다. 그러니 “살거나 죽거나 오직 시를 짓는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려울 것(此病醫難醫)”이라 했다. 그러면서 “나의 시벽과 주벽(酒癖)은 죽은 뒤에야 없어질 것(方死始可息)”이라 했다.
 아닌게 아니라 이규보의 집착은 대단했다. 남이 보내온 시 한 편에 화답할 때마다 10편은 기본이고, 많을 때는 30여 편까지 보내야 직성이 풀렸다. 지인들이 “너무 (집착이) 심하다”고 충고하면 “노환(老患)과 시병(詩病)이 함께 들었으니 나도 답답할 따름”이라고 한탄했다.(<동국이상국집>)
 그러면서도 “지금의 고질병은 죽지만 않으면 낫겠지만 시벽은 멈출래야 멈출 수 없다”고 했다. 죽어야만 그치는 것이 시벽이라는 것이다. 

 

 ■못말리는 추사의 ‘금석벽’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금석벽(金石癖)’은 또 어떤가.
 “나는 본디 금석에 벽이 깊은데(我本癖金石) 그대는 시 노래를 절로 잘했네.(君自善歌詩)~”(<완당전집> 9권)
 가히 최고의 금석학자이자 고고학자 다운 자랑이다. 추사는 함경도 유배 생활(1851~1852) 중 고대의 석기를 연구했다. 그때까지 귀신의 조화 쯤으로 치부하던 돌도끼와 돌화살촉이 선사시대의 생활도구이자 무기임을 밝혀낸다. 또한 1816년 가을 북한산 승가사 곁의 비봉에 서있던 비가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혀낸다. 그 때까지는 무학대사의 비문으로 잘못 알려진 것을 바로 잡은 것이다. 그 때의 감격을 추사는 이렇게 전한다.(<완당전집> 1권)
 “이끼 가득찬 글자의 획을 따라 여러 차례 탁본한 결과~ 제1행 ‘진흥(眞興)’의 ‘진(眞)’자가 분명했다.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니 무학비(無學碑)라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벽이 없는 자와는 사귀지 마라”
 살펴보면 ‘벽’도 ‘벽’ 나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축재자를 뜻하는 ‘전벽(錢癖)’이나, 부동산투기꾼을 뜻하는 ‘지벽(地癖)’ 혹은 ‘전지벽(田地癖)’, 그리고 괴상망측한 ‘창가벽’ 같은 것은 말고….
 초당 박제가는 “벽(癖)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소품문의 대가인 장대(張垈·1597~1676년)는 아예 “벽이 없는 자와는 사귀지도 마라”고 했다. 그는 그 이유를 “벽이 없으면 깊은 정도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허균(1569~1618년)도 “세상에 그 말이 맛없고 면목이 가증스러운 사람은 다 벽(癖)이 없는 무리들”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진정 벽이 없다면 거기에 빠지고 도취되어 생사조차 돌아보지 않을 것인데 어느 겨를에 돈과 벼슬의 노예노릇을 할 것인가.”(<한정록>)  
 실학자 이덕무(1741~1793년)은 스스로를 ‘책만 읽는 바보’, 즉 ‘간서치(看書癡)’라 이름붙이면서 벽의 기운을 옹호했다. 그러면서….
 “기이하고 빼어난 기상이 없으면 어떤 사물이든지 모두 속됨에 빠진다. 산에 이 기운이 없으면 기와조각이요, 물에 이 기운이 없다면 썩은 오줌이다.”
 그러고 보면 틀에 짜인 ‘루틴한 삶’에 재미를 돋구는 이는 ‘벽(癖)’을 가진 자의 몫일 터….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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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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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동파의 문장은 금은보화가 창고에 가득찬 부잣집 같다. 도둑이 훔쳐가도 줄지 않으니 표절한들 어찌 해롭겠는가.”
 고려의 대문인 이규보(1168~1241)는 송나라 대문호 소동파(소식·1036~1101)을 향한 ‘무한사랑’을 구구절절 표현했다. 어디 이규보 뿐인가. 
 “‘입시(과거)’에 매달리던 사람들이 과거 합격 후 비로소 시를 배운다. 그 때 소동파의 시를 즐겨 읽는다. 그러므로 과거합격자 방이 나붙으면 사람들이 ‘올해도 소동파가 33명 나왔다’고 이구동성 하는 것이다.”(<동국이상국집>)
 과거에만 전념하느라 다른 공부를 하지못한 입시생들이 합격하기만 하면 모조리 소동파의 시를 읽는다는 것이다. 당대 고려에 불어닥친 ‘소동파 열풍’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스촨성 메이산현에 있던 소동파의 석조좌상. 고려문인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소동파는 실은 극도로 고려를 미워한 '혐한파'였다. |경향신문 자료 

■소동파 ‘사생팬’들
 그랬다. 고려인들은 ‘소동파의 사생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컨대 당대 한림학사 권적(1094~1147)이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에게 준 시를 보자.
 “소동파 문장은 해외에 알려졌지만 송 황제는 그의 글을 불태웠네. 문장은 불에 태워 재로 만들 수 있지만 천고의 꽃다운 명망은 불태울 수 없네.”
 조선의 서거정은 이 권적의 시를 소개하면서 “고려의 문사들이 소동파의 문장을 숭상했음을 알 수 있다”고 토를 달았다.
 고려 대학자 이색도 만만찮은 ‘소동파 광팬’이었다.
 “큰 소나무 그늘 속에서 동파의 시를 읽었더니 머문 물 같은 고담은 마치 황하를 터뜨린 듯 하였다.(長松影裏讀東坡 定水高談似決河)”(<목은시고> ‘삼각산을 지나며’)
 “(소)동파 노인은 뜻이 커서 만장이나 되는 불꽃처럼 세차네.(落落東坡翁 光焰萬丈强)”(<목은시고>)
 이색은 소동파의 시와 뜻이 ‘황하를 터뜨린 듯’하고 ‘만장의 불꽃처럼 세차다’고 극찬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고려의 대학자 이제현은 송나라의 ‘삼소(三蘇)’, 즉 소식(蘇軾·소동파)·소철(蘇轍) 형제와 아버지 소순(蘇洵)을 극찬하는 시를 짓는다.
 “훌륭한 ‘삼소’가 시운을 타서 태어났으니 한 집안 빼어난 기상 활짝 열렸네. 어른은 천리마처럼 독보적이고, 두 아들은 봉황처럼 쌍으로 날았네. 200년 내려오도록 높은 이름 해와 달과 빛을 다투네.”
 아버지 소순은 천리마 같고, 두 아들(소동파와 소철)은 쌍으로 나는 봉황 같다고 추앙한 것이다.

 

 ■“소동파의 남는 향기까지 흠모”
 이 뿐이랴. 임춘은 소동파를 두고 “제자백가를 통합, 저작의 근원까지 파고 든 진정한 명유(名儒)”(<서하선생집>)라 했다. 이인로는 “고사를 많이 사용했지만 흠을 찾아볼 수 없는 청출어람”(<파한집>)이라 했다. 최자는 이규보를 평하면서 “그 호매한 기세와 넉넉한 체모가 소동파와 비슷하다”(<보한집>)고 했다. 이규보에게 주는 최상의 칭송이었던 것이다.
 고려인들이 얼마나 소동파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몽골군의 대대적인 침입(제3차)으로 전 국토가 전화에 휩싸인 와중에서 소동파의 문집(‘동파문집’)이 발간된 것이다.
 이 동파문집을 발간한 이는 전주목 완산태수 최군지였고, 이규보가 문집의 발문을 썼다. 이규보의 발문을 보자.
 “바야흐로 오랑캐의 말(馬)이 불의에 왕래하여 사세가 위급한 때였다. 그러나 완산태수 최군지는 ‘옛 사람도 전쟁에 임하여 노래를 부르고 창을 던지고 문학을 강론한 일이 있었다. 문(文)을 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저 시시한 오랑캐 때문에 (문집 발간을) 미룬다면 (어찌되겠는가.)’라고 했다. 임금도 역시 문학을 좋아해서 흔쾌히 윤허했다.”
 그러니까 몽골의 선봉부대가 전주목에 도착하는 화급한 때인 데도 ‘문(文)을 폐할 수 없다’며 동파문집 간행을 강행한 것이다. 이규보의 발문을 곱씹어보면 당시 소동파의 인기가 어땠는 지를 짐작할 수 있다.
 “고금을 통해 소동파처럼 인기있는 이도 없었다. 문장이 부섬(富贍·지식의 밑천이 넉넉함)하고, 용사(用事·사실이나 전고를 인용하는 한시의 작법)가 해박해서 그 영양분이 사람들에게 두루 미쳤기 때문이리라. 사대부부터 신진 후학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동파의 시를 손에서 떼지 않고 그 남은 향기를 되씹어 보았다.”
 고려인들은 ‘전쟁 중에도 소동파의 남는 향기까지 맡을 정도’로 열광했던 것이다.

 

 ■이름까지 바꾼 김부식 형제
 아마도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아버지 김근(金覲)은 ‘소동파 사생팬’의 종결자일 것이다.
 얼마나 소동파를 존경했던지, 셋째와 넷째 아들의 이름까지 ‘소동파 형제’의 이름으로 개명했으니 말이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자.
 “일찍이 그 형제(김부식 형제)의 이름 지은 뜻을 몰래 물어보았다. 대개 사모하는 바가 있었다고 했다.”(<고려도경> ‘인물·김부식조’)
 대체 누구를 사모해서 형제의 이름을 지었다는 것인가. 청나라 시인 왕사정(1634~1711)의 <향조필기>를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즉, 왕사정은 <고려사>를 읽다가 김부식의 문장을 좋아하게 됐다. 그 때 형제 한 사람의 이름이 ‘부식(富軾)’이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이 ‘부철(富轍)’이라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소식(蘇軾·소동파)·소철(蘇轍) 형제’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왕사정)는 김부식(1075~1151)과 소동파(1036~1101)의 시대와 멀지 않은데, 어떻게 이름을 넌지시 취했는지 궁금했다. <환유기문(宦遊紀聞)>을 읽어보았다. 그런데 서긍이 고려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 기록돼 있었다. 서긍이 김부식에게 묻자 ‘소식·소철 형제’를 사모해서 형제 이름을 ‘부식·부철’로 지었다고 했단다.”
 아마도 소동파를 흠모한 김근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1080년(문종 34년) 직전에 개명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김부식은 1075년생, 김부철은 1079년생이다. 

소식(소동파), 소철 형제와 아버지 소순을 모신 사당인 삼소사. 고려의 김근도 아들인 김부식, 김부철 형제의 이름을 소식, 소철 형제의 이름을 본따 개명했다.

■“고려는 상종 못할 오랑캐”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고려인들은 소동파를 그토록 추종했는데, 소동파는 그런 고려인들을 그토록 싫어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소동파는 ‘혐한파’ 였으며, 고려는 그런 소동파를 짝사랑했다는 이야기다. 소동파가 지독한 ‘혐한파’였다고?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기에 그토록 고려를 싫어했을까.
 아닌게 아니라 소동파는 무려 7차례에 걸쳐 “‘고려 오랑캐’와는 절대 상종하지 말라”는 요지의 상소문을 올린다. 집요하기 이를 데 없다.
 특히 1089년 11월 3일부터 12월 3일까지 연속 3번 올린 소동파의 상소문을 보자.
 “고려가 16~17년 간 (송나라에) 조공을 바쳐왔습니다. 그런데 고려 사신들을 접대하고 답례품을 하사하는 비용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성을 쌓고 배를 만들고 관사를 짓느라 각 지방의 백성들이 동원되고 있습니다.”(1089년 11월 3일의 ‘고려의 진상에 대해 논하는 상소문’)
 소동파는 특히 “고려 사신들이 중국의 산천을 그리고, 서적을 구매하는데 이 모든 정보와 하사품들이 대부분 거란으로 흘러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고려 사신의 접대 때문에 백성들이 피곤하다”고 혐오감을 드러낸 소동파는 고려사신을 ‘거란의 앞잡이’로까지 폄훼한 것이다.
 “하물며 해외의 오랑캐요, 거란의 심복이겠습니까. 고려는 명분상 의리를 흠모하여 입공한다고 표방하지만 사실은 이익을 위함입니다. 그러나 만약 보답하지 않으면 오랑캐는 천성이 탐욕스러워 혹시 원망이 생길 지 모릅니다.”(11월3일)
 그는 “고려 사신을 접대하는 비용이 10만 관도 넘는다”면서 ‘고려와 절대 상종할 수 없는’ 5가지 이유를 조목조목 밝혔다. 이것이 소동파의 ‘오해론(五害論)’이다.
 “첫째 고려가 바치는 공물은 모두 노리개처럼 허접한 물건인데 반해 송나라가 지출하는 경비는 모두 백성들의 고혈(膏血)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고려 사신들이 닿은 곳마다 백성들과 말, 기물 등을 징발하고 영빈관을 수리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고려가 송나라로부터 받은 하사품을 분명 거란에 넘겨줄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도적에게 무기를 빌려주고 식량을 대주는 것입니다.”(1093년의 ‘고려의 서적수매에 따른 이익과 손해에 대한 상소문’)
 소동파는 이어 “고려사신이 수집한 송나라의 모든 정보가 거란으로 흘러들어 갈 것이 뻔하며”(네번째), “훗날 거란이 송나라와 고려의 교섭을 트집 잡는다면 걷잡을 수 없게 될 것”(다섯째)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고려의 국모(國母)가 송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선물(금탑 2개)마저 “절대 받지 말라”고 사생결단하고 가로막았다. 그는 3번이나 상소문을 내서 “선물을 가져온 고려 사신들을 빨리 추방시키라”고 앙앙불락한다. 한 번도 아닌 3번이나 상소를 올려 고려 사신들을 내쫓으려 한 것이다. 얼마나 원한이 깊었기에 그렇게 안달복달 했을까.

 

 ■“오랑캐에만 이익을 준다”
 사실 이해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소동파는 일련의 상소문에서 ‘고려사신을 맞이하느라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고려 사신 대접에 쓰이는 돈(10만관)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휼한다면 최소한 몇 만 명은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1089년 12월 3일의 상소문)
 그는 “(고려사신의 방문은) 송나라 조정에는 추호의 이익도 없고, 오랑캐(고려)에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익을 남긴다”고 주장했다.
 소동파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소동파는 1089~1092년 사이 항저우·잉저우·양저우 지주(知主·도지사)로 근무하면서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목도했다.
 흉년이 들어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쇠비름과 겨를 넣어 먹는 사람들, 산더미 같은 빚에 허덕여 결국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본 것이다.
 소동파는 특히 1085년 덩저우(登州) 지주로 부임하던 중 하이저우(海州)에 우뚝 선 고려 사신의 숙소(고려정)을 보고 다음과 같이 읊었다.
 “처마와 기둥이 춤을 추며 담장 밖으로 날아오르고, 뽕나무는 도끼를 맞아 쓸쓸하게 서있네. 오랑캐에게 다 주어 노비가 되게 했으니 이들에게 보상해줄 길이 있을 지 모르겠네.(첨楹飛舞垣牆外 桑자蕭條斤斧餘盡賜昆邪作奴婢 不知償得此人無)”(<소식시집>)
 소동파는 이 시를 지은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1084년 고려사신 숙소인 고려정을 지으라는 황명을 내리자 하이저우 등 두 고을에는 심한 동요가 일었다. 백성들 가운데는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듬해(1085년) 내가 그곳을 지나다 고려정의 장려함에 탄복해서 시 1수를 남긴다.”(<소식시집>)  
 소동파는 고려 사신들을 위한 ‘호화 영빈관’을 짓기 위해 고통받고 있던 송나라 백성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소동파가 즐겨먹었다는 동파육. 소동파가 즐겨먹었다 해서 동파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외교는 국익이다.
 하지만 백번 양보하더라도 고려를 향한 소동파의 적개심은 좀 지나친 감이 있다.
 특히 고려를 ‘거란의 앞잡이’로 보고 있다는 점은 그야말로 ‘국제정세의 오판’이라 할 수 있다.
 993년 10월 거란(요나라)이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거란의 눈치를 보느라 응하지 않았다.
 이 때 고려의 서희가 나서 “고려가 거란에 조견하고, 거란의 연호를 쓴다”는 조건으로 화약을 맺었다. 고려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후 고려는 끊임없이 거란과 샅바싸움을 벌이면서 송나라와의 동맹을 타진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거란의 눈치를 보느라 고려의 요청을 거부했다.
 사실 외교라는 것이 무엇인가. 소동파도 ‘고려가 송나라에 조공하는 것은 결국 고려의 이익을 위한 것’(1089년 11월3일 상소문)이라 언급하지 않았던가. 외교의 요체는 결국 국익이 아닌가.
 만약 송나라가 고려의 제안을 받아들여 연합해서 거란과 맞섰다면 거란의 국력은 크게 약화됐을 가능성이 있다. 푸단대 왕수이자오(王水照) 교수의 견해가 흥미롭다.
 “고려는 진정으로 송나라와의 연합을 통해 거란의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따라서 소동파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다.”

 

 ■소동파가 고려를 싫어한 이유
 또 하나 지적할 사항은 소동파의 고질적인 중화사상이다.
 소동파는 고려를 두고 ‘해외의 오랑캐’로 폄훼하고, “만약 따뜻하게 대해주면 다시 탐욕스런 마음을 발공하여 우환거리가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여기서 소동파와 동시대인인 범조우(范祖禹·1041~1098)의 언급과 비교해보자.
 “저들이 비록 이적(夷敵)이지만 역시 중국의 백성과 같다. 오랑캐는 이익을 좇고 손해를 피하며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싫어하니 보통 사람과 다름이 없다.”(범조우의 <당감·唐鑑> 권3)
 “오랑캐는 중국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다스릴 수 없다. 금수와 같아서 너무 잘 다스려지기 바라면 커다란 혼란에 빠지고 만다.”(소동파 전집>)
 얼마나 대조적인 가치관인가. “오랑캐도 중국 사람과 같은 똑같은 사람”이라는 범조우와, “금수와 같으니 금수처럼 다스려야 한다”는 소동파….
 소동파는 왜 고런 보수적인 이적관과 철저한 중화사상에 젖어야만 했을까. 류종목 교수(서울대)는 ‘소동파의 열등의식’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
 “송나라는 다른 이전의 중국 왕조에 견주면 문약(文弱)하기 짝이 없었다. 늘 요나라(거란)과 서하(西夏)의 침략을 받고 있었다. 누구보다 강한 애국심을 가진 지식인이었던 소동파는 송나라의 ‘대외적 열등감’을 해소하고 싶은 복합심리에서 지나칠 정도의 문화적 우월감에 빠진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궁금한 것이 있다. 그런 소동파를 ‘진정한 명유(名儒)’, ‘청출어람’, ‘시의 영웅’, ‘신선의 풍모’라고 떠받들며 맹목적인 ‘사생팬’이 된 고려 문인들은 또 어떤 사람들인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참고자료>
 류종목, <소식과 고려>, 서울대, 2001년
 류종목, <소식평전-팔방미인 소동파>, 신서원, 2005년
 조규백, <고려시대 문인의 소동파 시문 수용 및 그 의의>, 제주관광대.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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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수는 적임이 아닐 듯 하옵니다. (귀가 어두워) 돌발발언이 튀어나오면 어쩝니까.”
 1738년(영조 14년), 영조 임금은 청나라로 파견할 외교사절(동지정사)로 도승지 이덕수를 임명했다. 그러자 사헌부는 반대의 뜻을 전했다.
 이덕수의 문학과 지조는 견줄 자가 없지만, 외교사절로서는 적임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덕수는 귀가 들리지 않은 증세, 즉 ‘중청(重聽)’을 앓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사직상소를 여러번 올렸지만 번번이 반려됐다. 대신 영조는 옆사람을 시켜 큰소리로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게 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는 눈웃음(目笑)을 지었다고 한다.(<영조실록>)
 그런 이덕수를 청나라 외교사절 단장으로 보낸다니…. 아닌게 아니라 걱정스러울 법도 했다. 하지만 영조 임금의 대꾸가 걸작이었다.  
 “중국어에 대해서는 모두 귀머거리 아닌가. 어찌 이것이 병폐가 될 것인가?”
 누구든지 중국어는 까막눈일텐데 이덕수의 귀가 어둡기로서니 무슨 상관이냐는 말이다. 물론 사헌부의 지적을 받은 이덕수 본인이 고사해서 외교사절 임명은 불발로 끝났다. 하지만 청각장애인을 외교사절로 임명할 정도로 어떤 선입견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한쪽 다리르 잃어 '일각정승'이라는 별명을 얻은 윤지완의 편지.스스로 여러해 동안 폐질(장애)을 앓았음을 전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장애인 재상
 지병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윤지완(1635~1718년)의 일화도 재미있다.
 <숙종실록>은 “윤지완이 정승이 된지 오래되지 않아 이상한 병을 얻어 한쪽다리가 떨어져 나갔다”고 기록했다. 그를 두고 ‘다리가 하나 뿐인 정승’이라 해서 ‘일각정승(一脚政丞)’이라 했다.
 사실 윤지완의 인물평은 좋은 편이 못된다. 그는 인현왕후의 복위(1694년)를 계기로 재등용된 ‘소론’이었다. 그러나 중전에서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를 두고 “장씨가 세자(경종)의 모후이므로 특별대우해야 한다”는 등의 상소를 올려 갑술환국으로 재집권한 노론의 미움을 샀다. 그런 탓에 <숙종실록>은 “윤지완이 사람됨이 굳세고 사나우며 배운 것이 없어 식견이 없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흥미로운 대목도 보인다. 다리를 잃은 윤지완이 끈질지게 사직서를 내면, 임금(숙종)이 역시 끈질기게 반려하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다리 병이 심해서 대궐의 섬돌을 오르내릴 수 없습니다. 면직시켜 주소서.”(윤지완)

 “무슨 소린가. 특별히 출입 때 부축을 받아도 좋다고 허락했거늘 어찌 사양하는가?”(숙종)
 윤지완은 무려 79차례나 사의를 표명한 끝에 겨우 면직을 허락받았다. ‘사의표명-반려’의 과정이 무려 79차례라니…. 더 대단한 일이 있다.
 면직 이듬해인 1695년 <실록>을 보면 숙종은 도승지를 보내 다시 한 번 “복직하라”고 청한 것이다. 윤지완은 이 때도 역시 병을 칭하며 ‘고사’했다. 참으로 ‘찡한’ 군신관계가 아닐 수 없다.

 

 ■“이 사람은 주석지신입니다.”
 태조·정종·태종·세종 등 네 임금이나 ‘모시며’ 법전을 편수하고 예악을 정비한 문경공 허조(1369~1439년)는 또 어떤가. 
 허조는 ‘어깨와 등이 구부러진(肩背구루)’ 척추장애인이었다.(서거정의 <필원잡기> ‘대동야승 1’)
 태조 이성계는 그런 허조를 등용, 조선의 예법을 만들고 석전의식을 개정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잡았다. 태종의 일화가 유명하다. 
 ‘이조정랑’ 인선을 두고 고심을 거듭하던 태종이 관원의 명부에서 허조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무릎을 쳤다는…. 태종은 세종에게 선위하면서 허조를 특별히 지칭하면서 “이 사람이 진실로 재상”라고 칭찬했단다. 또 축하연회를 끝낸 태종이 허조를 앞으로 나오게 해서 손으로 어깨를 짚은 뒤 세종을 돌아보며 말했단다.
 “이 사람이 나의 주석(柱石)입니다. 주상!”
 ‘주석’은 ‘주석지신(柱石之臣)’의 준말로, ’나라를 받치는 중추적인 신하’를 뜻한다.
 허조는 형인 허주를 아버지처럼 모셨다. 매일 새벽 닭이 울면 반드시 형을 찾아 문안인사를 올렸을 정도였다. 형의 집을 찾을 땐 반드시 동구 밖에서 시종들을 물리치고 수레에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니….
 <세종실록>의 허조 졸기(卒記·부음기사)를 보면 흥미로운 대목을 읽을 수 있다.(1439년)
 허조의 ‘대쪽 성품과 공평무사’ 등을 칭송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는 반면, 허조의 장애를 염두에 둔 내용은 단 한줄도 없다. 임금이나 동료들이 허조의 장애를 전혀 편견없이 대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밖에도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낸 심희수(1548~1522년)는 건습병(蹇濕病·일종의 고관절염)으로 인한 앉은뱅이 증세로 고생했다. 광해군은 중관(中官·내시)들에게 “심희수를 부축해서 오르내리게 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또 중종 때 우의정을 지낸 권균(1464~1526년)은 간질 증세로 임금에게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중종은 “말미를 줄테니 사직은 불허한다는 답서(不允批答)를 내리라”는 영을 내린다.  

어린아이의 안내를 받아 길을 가고 있는 시각장애인.시각장애인용 장죽을 잡았다. (김준근의 <풍속도>에서) |숭실대박물관

■복지정책의 원조
 돌이켜보면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복지정책의 뿌리는 깊다.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역사 속 복지정책의 원조는 신라 3대왕인 유리왕(이사금)일 것이다. 서기 28년 11월(음력), 유리왕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할머니가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백성을 이 지경에 이르게 했다니…. 이것은 곧 나의 죄다.”
 유리왕은 옷을 벗어 덮어주고 먹을거리를 준 뒤 다음과 같이 명했다. 
 “환(鰥·홀아비), 과(寡·홀어미), 고(孤·고아), 독(獨·홀몸노인) 등과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위문하고 양식을 나누어 부양하게 하라.”(<삼국사기> ’신라본기·유리 이사금조’)
 유리왕의 복지정책에 감화된 이웃나라 백성들이 신라로 몰려왔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표현했다.
 “(유리왕의 복지정책 덕분에) 신라의 풍속은 즐겁고 편안했다. 가악(歌樂)의 시초인 ‘도솔가(兜率歌)’가 퍼졌다.”
 ‘도솔가’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요순시대의 ‘고복격양가(鼓腹擊壤歌)’를 연상시켰으리라. 모두가 꿈꾸는 이상사회가 복지정책의 덕분에 이뤄진 것이다.
 고려 때 들어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복지정책은 더욱 발전한다. <고려사> ’지(志)’의 ‘식화·진휼조’를 보자.
 “1308년(충렬왕 34년) 임금이 하교했다. 여든 살 이상인 자 가운데 독질(篤疾·난치병 환자)과 폐질(廢疾·장애인)로 자존 능력이 없는 자들의 가족 중 한사람의 부역을 면한다. 만약 부양할 자가 없으면 마땅히 동·서 대비원(大悲院·국립의료원)에서 요양시킨다. 모든 식량은 국가가 담당하고 관리를 파견한다.”(<고려사> ’지(志)· 식화·진휼조’)
 찬찬히 뜯어보면 매우 선진적인 복지시스템임을 알 수 있다. 가족이나 혹은 사회복지사가 총출동하는 ‘그물망식 무한돌봄 시스템’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전하 배고파서 살 수가 없습니다.”
 조선조 세종 시대에 들어와 더욱 적극적인 복지정책이 시행된다.
 “환과고독과 잔질(殘疾·장애인)은 왕자(王者)의 정치에서 마땅히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들에게 환곡(식량을 빌려줌)을 우선 베풀고, 거처할 집을 잃게 해서는 안된다.”(세종 즉위년·1418년)
 막 즉위한 세종의 소외계층을 위한 정책이다. 3년 뒤인 1421년 2월, 잇단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장애인과 병자들을 우선적으로 돌보라”는 명을 내린다. 그것도 못미더웠던지 “과인의 명대로 하지 않은 수령은 중죄로 처단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과인이 장차 감찰관을 파견해서 반드시 확인할 것이다. 만약 여염 가운데 한 백성이라도 굶어 죽은 자가 있었다면 중죄로 처단할 것이다.”
 1419년(세종 1년), 사냥을 참관한 뒤 발길을 돌린 세종 임금의 어가가 개성의 영빈관에 이르렀다. 개성유후 한옹이 지역 유지들과 회회인(이슬람계 백성)들을 인솔하고 국왕을 영접하러 나왔다.
 그 틈에 소동이 일어났다. 맹인(盲人·시각장애인) 114명이 어가 앞을 막아선 것이다. <세종실록>은 “맹인들이 어가 앞에서 궁핍함을 호소했다(告窮乏于駕前)”고 기록했다.
 “전하, 배고파 도저히 살 수가 없사옵나이다.”
 지금 같으면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대통령의 전용차를 막고 불법으로 집단행동을 벌인 꼴이니 말이다. 하지만 <실록>의 표현은 담담하기만 하다.
 “상(임금)은 그들의 호소를 듣고 유후사에 명하여 쌀 40석을 주었다.”
 만고의 성군다운 ‘쿨한’ 임금님이 아닐 수 없다. 

점복을 주업으로 삼았던 조선시대 장애인들. 시각장애인 판수(判數)가 제삿상에서 오른손으로 북을 두드리고 왼손으로 바닥에 잇는 꽹과리를 쳐 가면서 경(經)을 읊고 있다.|숭실대 박물관

■“서울시가 부양하라!”
 조선의 장애인 정책은 갈수록 구체적인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시각장애인들을 구휼하기 위한 국가기관인 ‘명통시(明通寺)’를 설립했다. 시각장애인들의 먹고 살 길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마련해준 것이다. 명통시 소속 시각장애인들은 독경이나 점복으로 살았고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제를 관장하기도 했다. 조정은 정기적으로 쌀과 콩을 하사했으며, 때때로 노비는 물론 건물까지 내려주는 특전을 베풀었다.
 시각장애인들 뿐 아니라 지체장애인들을 위한 관심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457년(세조 3년) 임금은 각종 장애인 대책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신신당부한다.
 “잔질(장애인)과 독질(난치병 환자)로서 의지할 곳 없는 자와 맹인들을 위해서는 이미 명통사를 설립했지 않은가. 농아(聾啞)와 건벽(지체장애인)들은 한성부(서울시)가 돌봐줄 ‘도우미(保授)’를 널리 찾고, 동서 활인원이 맡아 후하게 구휼해야 한다. 또한 계절마다 부양한 결과를 계문(보고)해야 한다.”
 분기마다 농아와 지체장애인들의 구휼 결과를 보고하라는 것이다.

 

 ■“세상에 버릴 사람 없습니다.”
 언급했듯이 <실록>에서 장애인 관료들의 신체결함과 업무능력을 언급하는 내용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지금보아도 선진적인 사고로 장애인을 비롯한 소외계층을 바라본 이들이 많다.
 “시각장애인은 가르칠 수 있다. 눈동자로 보는 것은 막혔지만 신기(神氣)로 보는 것이 있어서 빛깔에 대해 밝게 듣는다. 남의 언어를 잘 들어 생각함이 상당히 넓고 사물의 형체로 상상한다.”(<인정(人政)> 제8권 ‘교인문’)
 조선 후기 철학자 최한기(1803~1877년)의 말이다. 그는 “(시각장애인은) 때론 눈은 있지만 마음이 어두운 사람보다 더 나은 경우가 있다”고 주장했다.
 1431년, 조선의 궁중음악을 정비한 박연(1378~1458년)이 세종대왕에게 간한다. “당시 관습도감(궁중음악을 담당하는 관청)에 시각장애인들을 발탁해야 한다”며 시각장애인들의 장점을 주장한다.
 “그들은 눈이 없어도 소리를 살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버릴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以其無目而審於音 且以天下無棄人也)”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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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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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릉’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2009년 조선을 다스린 왕과 왕비 등 44기 가운데 40기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빠진 4기는 폐위된 연산군(10대)·광해군(15대)묘와 북한에 있는 제릉(태조 이성계의 정비 신의왕후릉)과 후릉(2대 정종과 정안왕후) 등이다. 그러니까 조선을 다스린 27대 왕 가운데는 폐위된 연산군·광해군 등 두 사람을 빼고 2대 정종(부인인 정안왕후까지) 만이 세계유산에서 제외된 것이다.
 물론 ‘북한 땅에 묻혀있기에 빠졌다는 것’이니 설득력이 있겠다. 하지만 역사를 들춰보면 ‘왕따’의 짙은 향기를 느낄 수 있으니 어쩌랴. 한마디로 조선의 2대 국왕인 정종이 ‘왕따’를 당했다는 얘기다.
 ‘왕따’ 당한 정종의 그 구슬프고도 딱한 사연을 한번 들어보자.  

조선의 임금 가운데 유일하게 개성에 떨어져있는 정종과 그 부인 정안왕후릉인 후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서도 빠져있다.

■정종 후손의 피맺힌 상소
 “청컨대 공정왕의 묘호를 추상하게 하소서.”
 1481년(성종 12년), 신종군 이효백이 한맺힌 상소를 올린다. 이효백은 공정왕의 10번째 아들인 덕천군의 장남이었다. 공정왕의 손자였던 이효백이 올린 상소의 내용은 무엇인가.
 ‘공정왕’은 조선의 2대 왕인 ‘정종(定宗·재위 1398~1400년)’을 말한다. 하지만 1417년(세종 원년) 승하한 후 무려 164년 동안 묘호(죽은 뒤에 나라가 내리는 이름)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1681년(숙종 7년)이 돼서야 겨우 ‘정종’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지 못한 채 명나라가 내린 사시(賜諡), 즉 공정왕(恭靖王)이라는 이름만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명나라가 인정하는 ‘대외직함(공정)’만 부를 뿐, 조선 내부에서는 정식 임금의 대접을 받지 못한 ‘임금 대우’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이었을까. 차근차근 살펴보자.

 

 ■비극의 씨앗
 비극은 조선 개국부터 싹 텄다고 할 수 있다.
 이성계의 차남이던 공정왕(이방과)은 고려 말에 왜구 토벌에 나름의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조선 왕조 창업에는 참여하지 않아 태조 이성계의 꾸지람을 들었다. 정몽주를 죽이고 창업의 디듬돌을 놓은 다섯째 이방원과 사뭇 다른 행보였다. 사실 차남이었기에 왕위와도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애주가였던 장남(이방우)이 소주를 지나치게 마시는 바람에 술병으로 죽고 말았다. 원래부터 왕위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맏이가 된 것이다.
 1398년(태조 7년) 정안군 이방원(태종)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 때는 황급하게 성을 넘어 독음 마을에 숨어버렸다고 한다. 난이 수습되고, 세자 책봉문제가 불거지자 이방과는 “조선왕조가 개국하기 까지는 모두 정안군(5남 이방원)의 공이 크며 나는 세자가 될 수 없다”고 버텼다. 하지만 이방원이 굳이 사양하자 어쩔 수 없이 세자가 됐다.
 결국 태조 이성계의 양위로 임금이 됐지만(1398년), 진정한 지존의 위엄을 누릴 수 없었다. 어린 이복형제인 방석(세자)와 방번을 무참하게 살해한 동생이 아니던가.
 게다가 즉위 직후 남재가 감히 대궐 뜰에 나타나 큰소리로 “속히 정안군을 세자로 정해야 한다”고 겁박하는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임금을 우습게 보는 작태가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1400년(정종 2년), 남재가 대궐 뜰에서 큰소리쳤다. ‘지금 마땅히 정안공(이방원)을 세자로 삼아야 합니다.’ 정안공이 듣고 크게 노해 꾸짖었다. 그러나 임금(공정왕)이 적자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마음 속으로 정안공이 세자가 되리라 생각하였다.” 

1681년(숙종 7년) 262년만에 정종의 묘호를 받은 정종의 가상시호 단자. 당시 수종은 "위대한 공과 성대한 공이 있는 공정왕의 묘호가 빠진 것은 국가의 큰 잘못"이라며 묘호를 올렸다.

■“빨리 옥좌를 내놓으소서”
 게다가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직후 정안공의 책사인 하륜 또한 “빨리 후사를 정안공으로 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륜이 임금에게 청했다. ‘정안공이 없었다면 정몽주의 난과 정도전의 난을 어찌 막았겠습니까. 또 어제의 일(2차 왕자의 난·1400년 1월27~28일)을 보더라도 하늘의 뜻과 백성의 뜻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속히 정안공을 태자로 세우소서.’”
 이복동생 둘에 이어 넷째 형(방간)까지 제거한 동생이 아닌가. 게다가 이제는 동생의 심복들까지 ‘천심과 민심이 모두 정안공에게 돌아갔으니 빨리 옥좌를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으니….
 가뜩이나 후궁과의 사이에서 낳은 왕자 15명을 모두 출가시키면서까지 ‘아무런 욕심이 없음’을 선언했고…. 동생인 정안군과 마주 앉으면 차마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공정왕이었는데….
 보다못한 부인(정안왕후)이 안타까움에 이렇게 절규했다지 않은가.
 “전하께서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십니까. 하루빨리 양위하시어 마음 편히 살도록 하세요.”
 또 하나 쟁점이 있었다. 동생을 후사로 옹립하는 것이니, 왕세제가 옳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1400년 2월4일, 정종이 정안군을 ‘왕세자’로 삼자 일부 대신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예부터 제왕이 친형제를 세울 때는 모두 황태제로 봉했고, 세자를 삼은 일은 없었습니다. 청컨대 왕세제로 삼으소서.”(<태종실록>)
 그러나 정종은 “지금 이 순간 과인은 이 아우를 아들로 삼겠다”고 선언하고 ‘왕세자’로 책립했다,
 정종으로서는 동생을 세제가 아닌 세자로 삼아, 즉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한 것이다. 아마도 정안군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정안군으로서는 두 차례의 골육상쟁에 이어 형의 왕위까지 찬탈했다는 혐의를 받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따라서 정안군은 태조로부터 직접 왕통을 승계한 것으로 종통을 꾸몄던 것이다.

  

 ■세종 임금의 속마음
 결국 공정왕은 그 해 11월(1400년) 동생 정안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상왕으로서의 삶은 외려 행복했다. 격구와 사냥, 온천, 연회 등을 즐기면서 19년 간이나 살다가 1419년(세종 1년) 승하했다.
 그 때 미묘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세종의 말을 들어보자.
 “과인의 생각으로는 사시(賜諡·명나라가 내려주는 묘호)만이 허락될 뿐, 사시(私諡·조선 조정이 올리는 묘호)는 올릴 수 없을 것 같다.”
 그 때문에 ‘대행상왕(죽은 직후 아직 묘호와 시호 등이 결정되지 않은 상왕·정종을 뜻함)’은 묘호를 받지 못했다. 대신 명나라가 내려준 사시(賜諡)인 ‘공정왕’이라는 이름만 인정됐다.
 세종의 ‘말씀’은 과연 무슨 뜻인가. 한마디로 큰아버지인 정종을 조선의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세종의 속내는 어머니(태종의 정비·원경왕후 민씨)가 승하한 직후 능의 조성을 두고 논의를 벌이면서 드러난다.
 “1420년(세종 2년) 임금이 말하기를 부왕(태종)의 만세 후에는 마땅히 태종이 되실 것인즉….”
 무슨 말이냐면 세종은 만약 부왕이 돌아가시면 그 묘호를 ‘태종’으로 정하겠다는 뜻을 확고하게 밝힌 것이다. 사실 이 대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예로부터 창업군주에게는 ‘태조’의 묘호를 붙였고, ‘태조’를 계승한 이는 ‘태종’이라 했다. 중국 송나라-요나라-금나라-원나라가 줄줄이 2대 황제를 태종이라 했다. ‘태종’은 태조의 적통인 제1대 종자(宗子)에게 올리는 묘호였던 것이다. 그런 예법이라면 태조 이성계의 뒤를 이은 2대 국왕은 당연히 ‘태종’이어야 했다. 하지만 이방과는 ‘태종’은 커녕 묘호 조차 받지 못한채 ‘공정왕’의 이름을 얻는데 그쳤다. 세종의 발언은 곧 “조선의 적통은 ‘태조-정종-태종’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태조-태종’으로 곧장 이어진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신숙주·정인지의 반론  
 그 후 50년이 흐른 1469년(예종 1년), 억울한 정종을 위해 나선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예종이었다.
 예종은 종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쓴 축문에 공정왕(정종)의 묘호만 없음을 깨달아 대신들에게 물었다.
 “공정대왕은 대통(大統)을 이은 임금인데, 까닭없이 묘호가 없구나. 이제는 칭종(稱宗)하는 것이 어떠냐.”
 그러자 신숙주와 정인지 등이 나서 의미심장한 반론을 제기한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의심하자면 태종께서는 선위(禪位)를 받고도, 세종께서는 예가 갖춰졌는데도 공정왕의 묘호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신 등은 그 까닭을 모르겠지만, 당시에 반론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드시 뜻이 있을 겁니다.”
 예종은 대신들의 신중론에도 공정왕에게 ‘희종(熙宗)’의 묘호를 내리도록 결정했다.(1469년) 그러나 예종이 급서하는 바람에 시행되지 못했다.

 

   ■“반드시 깊은 뜻이 있었을 겁니다.”
 다시 세월이 흘러 1481년(성종 12년), 이 문제가 또 불거졌다.
 앞어 언급했듯 신종군 이효백이 “공정왕의 묘호를 추상하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효백인 공정왕의 11번째 아들인 덕천군의 장남이었다. 그러자 대신들은 태종과 세종이 공정왕의 묘호를 올리지 않은 것에는 “반드시 그 깊은 뜻이 있었을 것(此必有深意)”이라고 입을 모아 신중론을 제기했다. 이 자리에서 이파와 어세겸 등은 태종과 세종의 ‘깊은 뜻(深意)’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왕자의 난 이후) 나라는 태종의 소유였는데, 다만 형제의 차례 때문에 공정왕에게 양보했습니다. 공정은 즉위 3년 만에 태종에게 도로 양위했는데….”
 원래 태종의 나라였는데, 나이 때문에 잠시 형(공정)에게 맡겼을 뿐이고, 그 맡긴 나라를 3년만에 되찾았을 뿐이라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공정왕의 나라는 원래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이파와 어세겸의 말이 이어진다.
 “원래 태종은 그 아들·딸들에게는 대군(大君) 혹은 군(君), 공주 혹은 옹주라 칭하고, 사위에게 모두 봉군(封君)했습니다. 그러나 공정왕의 아들들에게는 정윤(正尹)·원윤(元尹)이라 칭하고, 딸에게는 칭호가 없었으며, 사위에게는 군직(軍職)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태종은 처음부터 형을 ‘적통으로서의 임금’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파 등은 이어 “(그것이 바로) 태종은 물론 세종-문종-세조에 이르기까지 공정왕의 묘호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된다”고 못박았다.

 

   ■제사 때도 무시당한 정종
 어디 이 뿐인가.
 공정왕은 살아서는 물론이요, 죽은 뒤에도 대대로 온갖 홀대받은 불행한 임금이었다.
 명나라 때 손능부가 지은 ‘시법찬(諡法纂)’을 보면 조선 태조 이하의 임금들에게 ‘조선국왕(朝鮮國王) 성(姓) 휘(諱)’라 기록했지만, 유독 공정왕에게만 ‘조선국 권서국사(權署國事) 성 휘’라고 했다.
 ‘권서국사’는 명나라의 고명(誥命·중국 황제의 임명장)을 받기 전에 국사를 대신해서 처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까 공정왕은 정식국왕이 아닌 권서국사로 재위한 ‘허울좋은 임금’이었던 것이다. 

정종의 신위는 제사 때도 철저히 무시됐다. 정종의 신위는 성종 때 강녕전의 협실로 쫓겨났다. 

그러니 제사 때도 무시 당했다.
 예컨대 1475년(성종 6년) 회간왕의 부묘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공정왕이 종묘의 정실에서 협실로 쫓겨나는 일이 벌어진다.
 성종의 아버지이자 인수대비의 남편인 회간왕은 20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회간왕이 덕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그 신위가 종묘로 옮겨 봉안하게 됐는데, 그 때 공정왕이 우선순위에서 밀려 협실로 쫓겨난 것이다. 정식군주였는데도 추존왕에게 밀린 셈이니 얼마나 원통했겠는가.
 또 있다. 1495년(연산군 1년) 승하한 성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려 할 때도 문제가 생겼다.
 성종의 신주를 종묘에 들이기 위해서는 조천(조遷), 즉 4대가 지난 신주를 종묘 내의 다른 사당인 영녕전 옮겨야 했다. 그런데 종묘 내에는 신실, 즉 신주를 모시는 방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러자 예조판서 성현 등이 나서 또 공정왕을 들먹거렸다.
 “태조·태종·세종·세조는 모두 백세토록 옮기지 않은 신위입니다. 그러나 공정왕은 묘호도 올리지 않았고…. 협실로 옮길 때도 ‘임시로 협실에 갔다가 친진(제사를 지내는 4대가 다 됨) 때는 그친다’고 했으니…. 이제 공정왕의 신위를 처리하기도 어려우니 신주를 후릉(공정왕과 정안왕후의 능)을 옮겨 매장하면 어떤지….”
 헌납 김일소 등의 반대로 신주가 후릉에 매장되는 주장만은 수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지긋지긋한 홀대와 설움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정종의 뜻을 받들었다?
 공정왕의 한은 승하한 지 162년이 지난 숙종 7년(1681년)이 돼서야 풀렸다.
 1681년(숙종 7년), 선원계보(왕실족보) 교정청이 어첩을 수정하던 중 열성조의 묘호 가운데 공정왕의 묘호가 빠진 것을 발견하고 숙종에게 보고한 것이다.
 숙종은 사관과 예관들을 영의정 김수항, 영부사 송시열과 박세채 등에게 보내 자문을 받았다. 4개월 간의 긴 숙의였다.
 결론은 공정왕의 묘호가 궐전(闕典), 즉 빠졌음을 인정하고 반드시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영중추부사 송시열의 상언이 재미있다.
 “태종대왕은 조용한 곳에서 한적하게 즐기려는 공정대왕의 뜻을 이루도록 했습니다. 승하한 뒤에는 평소 공정대왕의 겸손하고 절제하는 마음을 가슴 깊이 되새겨 스스로를 높이는 묘호를 억지로 더할 수 없었습니다. 세종대왕 이후 열성조들도 태종대왕의 마음을 받들어 번거로운 의식을 추가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태종대왕이 정종대왕과 함께 종묘에 함께 오르시고도 혼자서만 아름다운 묘호를 차지하셨을 때 틀림없이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태종은 평소 조용히 살고자 하는 공정왕의 뜻을 받들어 묘호를 올리지 않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이 아닌가.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것 같다.
 어쨌든 숙종은 “위대한 공과 성대한 덕이 있는 공정왕의 묘호가 빠진 것은 국가의 큰 잘못”이라고 반성하고 “당장 묘호를 올리라”는 명을 내린다.
 숙종의 결심이 나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불과 4일 후인 9월18일 2품 이상의 관각당상(홍문·예문관)들은 공정대왕의 묘호를 ‘정종(定宗)’으로 정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염려했다’는 뜻이었다.
 길어야 4개월, 짧게는 4일이면 될 일인데, 무려 262년의 긴 세월을 돌고 돌아 온 것이었다.
 하지만 비운의 국왕인 정종과 정안왕후의 ‘완전복권’은 과연 이뤄진 것일까. 모두에 인용했듯이 정종과 정안왕후의 무덤(후릉)은 지금 북한의 개성에 뚝 떨어져 있고…. 또 폐위된 연산군묘(10대), 광해군묘(15대)와 함께 세계유산으로도 등재되지 못했으니…. 정종의 한탄이 들리는 듯 하다. 누가 왕 노릇 한다고 했나.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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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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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괴이한 일이 있다. 말하기도 수치스럽지만…. 글쎄 세자빈(봉씨)이 궁궐의 여종(소쌍)과 잠자리를 같이 한다는구나.”
 1436년(세종 18년), 세종 임금이 사정전에서 주변을 물리친 뒤 도승지 신인손과 동부승지 권채를 은밀히 불러 하소연한다. 무슨 해괴한 말인가. 세종은 며느리의 동성애 스캔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소쌍이라는 아이가 잠자리를 거부하면 세자빈이 마구 윽박지른다는구나. 그래 마지못해 옷을 반 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가면 세자빈이 나머지 반을 강제로 벗기고 눕게 한 뒤 남자와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한다는구나.”(<세종실록>)  

당나라 시대 궁녀들. 맨 오른쪽에 남장여인이 있다. 외롭게 살아야 했던 궁녀들 가운데 동성애자가 많았다.

■‘세자빈’의 금지된 사랑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임금 체면에, 그것도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께서’ 며느리, 즉 세자(문종)의 2번째 정부인인 세자빈 봉씨의 추행을 미주알고주알 밝히고 있으니….
 아닌게 아니라 세종은 세자빈과 관계를 맺었다는 여종 소쌍에게 직접 진술을 듣고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여자끼리 남자와의 성교합 형상으로 희롱했다니….
 이어지는 소쌍의 진술은 세종 임금을 절망시켰다. 세자빈은 소쌍이 다른 여종(단지)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미행을 붙여 감시까지 하면서 “서로 만나지 마라”고 협박했다는 것이다. 또 만약 소쌍이 자신을 만나주지 않으면 대놓고 원망의 말을 쏟아냈단다.   
 “나는 너를 좋아하는데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구나.”
 소쌍은 지나친 세자빈의 집착에 질력 주변사람들에게 넋두리했단다.
 “세자빈께저 나를 사랑하는데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무서워 죽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조선판 스토커’가 아닌가. 세종은 결국 봉씨를 세자빈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말았다. 세종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당대의 기준으로 볼 때 절대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문제적 여인’
 봉씨는 ‘문제적 여인’이었다.
 전형적인 조선의 여인이 아니었다. 우선 성격이 과격했다. 봉씨가 세자빈이 되자 시아버지인 세종은 <열녀전>을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봉씨는 며칠 만에 “이따위 책을 배워서 뭘하느냐”며 집어던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말술을 즐겼고, 주사 또한 대단했다. 세종의 넋두리 속에 봉씨의 주사가 생생하게 표현된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것이다.
 “세자빈은 방 속에 술을 준비해두고는 큰 그릇으로 연거푸 술을 마셔댔다는구나. 술에 잔뜩 취해 어떤 때는 시중드는 여종으로 하여금 뜰 안에서 업고 다니도록 했고…. 술이 모자라면 사가에서 가져와 마시고…. 이 어찌 세자빈이 할 노릇이냐.”
 하지만….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대체 누가 봉씨에게 돌팔매질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랬다. 봉씨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무엇보다 남편, 즉 세자(문종)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봉씨는 두번째 세자빈이었다. 세자(문종)는 원래 김씨 여인를 세자빈으로 삼았다. 하지만 김씨는 압승술(壓勝術)을 썼다는 단서가 발각됨으로써 폐출됐다. 압승술은 남자의 사랑을 받는 술법, 즉 ‘사랑의 묘약’을 쓰는 것을 뜻한다. 이 술법 가운데는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의 신발을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든 뒤 술에 타 남자에게 먹이는 방법’이 있었다. 또 있다.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 허리에 차는 방법’이었다. 이 경우 남편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씨가 썼던 이 해괴한 방술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부덕을 행했다’는 죄목으로 폐출된 것이다. 

춘화를 함께 보고 있는 양반가 여인들을 그린 그림. 사방지는 여인차림으로 과부 이씨와 10년 이상 사귀었다

■좌절감의 다른 표현
 김씨의 뒤를 이어 두번째로 세자빈이 된 이가 바로 봉씨였다.
 그러나 그녀 역시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여기에 세자의 첩인 권씨가 세자의 아들을 낳자 봉씨의 좌절감은 극에 달했다.
 봉씨는 가만 있지 않았다. ‘거짓임신’을 고해 한달간이나 남편을 중궁전에 붙잡아 두었다. 또 남편을 사랑하는 내용의 노래를 지어 여종들로 하여금 부르게 했다. 빈궁을 지키던 늙은 여종에게는 “세자를 불러오라”고 채근했다. 남편은 그런 봉씨의 마음을 너무도 몰라줬다. “제발 빈궁의 처소에 가보라”는 아버지(세종)의 꾸지람이 있어야 겨우 세자빈의 처소를 찾았다.
 그 조차 며칠 왕래하다가 발길을 끊기 일쑤였다. 어떤 날은 봉씨의 처소 근처에 어슬렁거리다가 그냥 돌아가기도 했다. 세자빈의 애간장이 녹을 수밖에 없었다. 세자빈은 지게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이렇게 넋두리했단다.
 “저 분은 왜 안방에는 들어오지 않고 공연히 밖에서만 맴돌고 있는 것인가.”
 세종도 그런 무심한 아들을 어지간히 닦달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세종의 한탄이 하늘을 찌른다.
 “금슬이 저리 좋지 않으니…. 아무리 부모라 해도 침실의 일까지야 어찌 자식에게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초지종을 보면 잇달아 폐출된 김씨나 봉씨의 분투가 가여울 뿐이다. 남편의 사랑을 받고 싶을 뿐이었는데…. 한번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폐출의 이유 중 하나였던 ‘거짓임신’을 달리 볼 필요가 없을까. 혹시 봉씨가 남편의 아이를 갖겠다는 집착이 낳은 상상임신은 아니었을까. 또 첫번째 세자빈이었던 김씨는 오죽했으면 사랑의 술법까지 써서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 했을까. 봉씨의 동성애 소동 역시 남편의 사랑을 얻을 수 없었던 좌절감의 다른 표현이었을 지도 모른다.

 

 ■동성애의 원조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난 첫번째 성소수자는 신라 혜공왕(재위 765~780)일 것이다.
 “왕은 원래 여자였는데 남자가 되었다. 첫 돌 때부터 왕위에 오르는 날까지 늘 여자놀이를 하고 자랐다.”(<삼국유사>)
 혜공왕의 아버지인 경덕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근심하던 왕은 표훈 선사를 통해 “천제에게 청하여 아들을 얻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상제(上帝)를 만나고 내려온 표훈은 고개를 가로질렀다. “경덕왕의 팔자에 딸은 있지만 아들은 없다”는 것이었다. 단서가 있었다. “딸을 아들로 바꿀 수는 있지만,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이었다.
 대를 이을 아들이 급했던 경덕왕은 “아들을 낳을 수만 있다면 족하다”고 응했다. 경덕왕은 소원대로 아들을 낳았다. 바로 혜공왕이다.
 혜공왕은 아버지 경덕왕이 죽자 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원래 딸이었던 혜공왕의 여성취향은 더욱 심해졌다.
 “왕은 늘 비단주머니를 차고 다녔고, 미소년들로 구성된 도류(道流)를 희롱하며 놀았다. 그 때문에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마침내 피살됐다. 표훈 대사의 말이 맞은 것이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혼란에 빠진 원인을 혜공왕의 ‘동성애 취향 탓’으로 모든 책임을 돌리고 있는 것 같다. 남자의 몸으로 태어난 여자이기에 동성애를 즐겼고, 그 때문에 나라가 위태로워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비겁한 변명’이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면 신라가 혼란에 빠진 진짜 이유를 따로 설명해놓다. 
 “(혜공)왕이 너무 이른 나이에 왕위에 올라 태후(만월부인)이 섭정을 했는데, 정사가 잘 다스려지지 않았다.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혜공왕 대신 정사를 주무른 태후의 책임이 훨씬 크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빚은 신라시대 토우. 신라 혜공왕은 원래 여자였는데 남자로 태어났다고 한다.

■몸도, 나라도 망친 동성애?
 고려의 목종(재위 997~1009년)과 공민왕(재위 1351~1374)도 동성애 때문에 정사를 망치고, 몸도 망쳤다는 오명을 썼다. 목종이 사랑한 동성애자는 유행간과 유충정이었다.
 이 가운데 유행간은 “용모가 미려하여 목종의 사랑을 받은 동성애의 대상(姿美麗穆宗嬖愛有龍陽之寵)”(<고려사> ‘열전·패행1’)이었다. 유행간을 향한 목종의 사랑은 끔찍했다.
 “신하들에게 지시할 사항이 있으면, 먼저 유행간에게 물어본 뒤 명령했다. 유행간은 왕의 총애를 믿고 오만했으며, 문무백관들을 경멸하고 턱과 낯빛으로 명령을 내렸다.”
 그 지경이었으니 대신들은 유행간을 왕처럼 모셨다. 발해 출신인 유충정도 ‘별다른 재능 없이도’ 왕의 총애를 받았다. 두 사람은 궁중을 출입할 때 자신들이 마치 국왕인양 의장을 차리고 다녔다.
 그러나 목종과 유행간, 그리고 유충정 모두 ‘강조의 난’(1009년) 때 피살되고 만다. 개혁군주였던 공민왕도 마찬가지 길을 걸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노국공주가 죽고, 신돈을 통한 개혁정치가 물거품이 되자 동성애에 빠진다. 총신 김흥경과 사랑에 빠졌으며, 그를 통해 자제위라는 기관을 두어 미남자들을 선발했다.
 결국 공민왕은 공민왕은 결국 자신이 선발한 자제위 홍륜 일파에게 피살되고 만다.(1374년) 역사는 이것을 동성애가 낳은 비극이라 폄훼했다.

 

 ■“사방지는 남성의 형상이 많은 양성입니다.”
 조선을 들끓게 한 동성애 사건이 또 있었으니 바로 ‘사방지(舍方知)’ 사건이었다.
 사방지가 누구인가. 세종의 사위인 안맹담(1415~1462)의 노비였다. 태어날 때부터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모두 지니고 태어난 성소수자였던 것 같다.
 그의 어미는 사방지에게 여자 아이의 옷을 입히고 연지와 분을 발라주며 바느질을 가르쳤다. 사방지는 빼어난 바느질 솜씨로 벼슬한 선비들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 와중에 과부 이씨와 인연을 맺는다. 이씨의 아버지는 세종을 보필하면서 과학기술 정책을 다졌던 천문학자 이순지(1406~1465년)였고, 아들은 하동부원군 정인지의 사위였다.
 엄청난 가문의 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분의 차이가 무슨 문제가 되는가. 과부 이씨와 사방지는 죽고 못사는 사이가 된다.    
 “둘은 사랑하게 됐다. 늘 좌우에 함께 있으면서 음식도, 그릇도 같이 쓰고 앉고 눕는 것도 함께 했다. 심지어는 의복도 같은 빛깔로 하니 사치스럽고 화려하기에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과부 이씨와 ‘양성’의 사방지는 의상까지 ‘커플룩’으로 맞춰 입을 정도로 사랑에 빠진 것이다. 10년 가까이 지속돼 갈수록 대담해진 ‘금지된 사랑’은 결국 꼬리가 잡혔다.
 1462년(세조 8년) 감사원격인 사헌부가 직접 수사에 나선 것이다. 사방지의 몸을 직접 살펴본 사헌부 관리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사방지는 ‘이의(二儀)’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남성의 형상이 더욱 많습니다.”
 ‘이의’라는 말은 ‘남성기와 여성기를 둘 다 갖춘 양성(兩性)의 소유자’라는 말이다. 그런 탓일까. 수사결과 사방지가 이씨 부인 말고도 여러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내시의 아내와 여러 차례 정을 통했고, 여승(女僧)들과 사통해서 파계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여승 중비가 임신을 걱정하자 사방지는 과거의 이력을 자랑하며 큰소리쳤다.
 “이거봐. 내가 내시 김연의 처와 간통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야. 그래도 임신은 시키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
 <실록>은 사방지를 둘러싼 갖가지 망측스런 기사를 싣고 있다.
 “사방지가 평소 정을 통했던 여승은 ‘사방지의 양도(陽道·생식기)가 매우 장대하다’고 증언했다. 이에 여자아이 반덕에게 만져보게 했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세조 임금의 명을 받고 사방지의 성기를 확인한 정현조 역시 ‘어쩌면 그리 장대하냐’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세종이 측근들에게 세자빈 봉씨의 동성애 스캔들을 알리고 폐출의 당위성을 강조한 내용을 담은 <세종실록>.

■“사방지는 병자이니라”
 그러나 사건을 보고받은 세조 임금은 씩 웃으면서 특명을 내렸다.
 “특별히 추국해서 중벌에는 처하지 마라.”(<세조실록>)
 사헌부를 비롯한 신료들의 반발이 빗발쳤다. 하지만 세조는 되레 사방지 사건을 문제삼아 내사를 벌인 사헌부 관리를 파직시켜 버렸다. 초강수였다.
 “간통 현장을 적발한 것도 아닌데 재상집(이순지) 일을 경솔하게 의논·내사하여 임금에게 올린 것은 불가한 일이다. 사헌부 관리를 파직토록 하라.”(<세조실록>)  
 세조는 명백한 증거없이 ‘대부(大夫)의 가문’을 욕되게 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명백한 현장을 잡지 못하면 간통죄는 성립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신료들은 집요했다. “사방지와 과부 이씨는 물론, 이씨의 아버지인 이순지까지도 처벌하라”고 끈질기게 요구했다. 세조는 다른 논리로 사방지를 변호했다. “사방지는 (양성기를 가진) 병자(病者)이므로 추국하지 마라”는 엄명을 내렸다. 하지만 신료들은 집요했다. “해괴한 짓을 저지른 사방지와 이씨는 물론, 이씨의 아버지인 이순지까지도 처벌하라”고 끈질기게 요구했다.
 세조는 단호했다. “(양성기를 가진) 사방지는 병자(病者)이므로 추국하지 마라”고 엄명을 내린 것이다. 세조는 결국 사방지의 처리를 과부 이씨의 아버지인 이순지에게 맡겼다. 이순지는 곤장 10여 대를 친 뒤 기내(畿內·수도권) 지역에 살고 있는 머슴의 집에 보냈다. 솜방망이 처벌이었다.
 과부가 된 딸의 외로움을 달래준 사방지를 배려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사방지를 잊을 수 없었던 과부 이씨는 그의 행방을 수소문해서 찾아낸 뒤 몰래 불러 올렸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 이순지가 죽자(1465년) 두 사람의 사이에는 걸림돌이 없어졌다. 둘의 관계는 수습할 수 없을 어려운 지경으로 치닫는다. 조정의 공론이 다시 일자 세조 임금은 더는 관용을 베풀지 못하고 유배형에 처한 것이다.

 

 ■3대에 걸친 ‘금지된 사랑’의 여파
 둘의 ‘금지된 사랑’이 남긴 여파는 컸다. 특히 과부 이씨의 전력은 아들은 물론 외손자의 전정에까지 결림돌로 작용했다. 
 예컨대 1473년(성종 4년), 성종이 과부 이씨의 아들인 김유악을 경상도 도사(都事·행정부지사)에 임명했다. 그러자 사헌부가 ‘사방지 추문’을 거론하며 반대했다.
 ‘도사’는 관찰사(도지사)를 보좌하며 각 도의 행정은 물론 감찰업무까지 담당했던 중요한 직책이었다. 사헌부는 그런 중차대한 자리에 가문을 더럽힌 여자의 아들을 앉힐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허물이 있는 자가 경상도 업무를 맡는다면 누가 복종하겠습니까.”(사헌부 지평 김윤종)
 성종은 결국 ‘임명취소’ 결정을 내린다. 말하자면 김유악은 어머니의 추문 때문에 인사검증 과정에서 결국 낙마하고 만 것이다.
 주홍글씨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1500년(연산군 6년), 연산군은 부마(駙馬·임금의 사위)를 선택할 때 “김유악의 아들(김씨의 외손자)은 입궐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연산군일기>는 “사방지가 김유악의 어미집에 출입하며 추문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부연설명했다. 3대에 걸친 혹독한 징벌이었던 것이다.

 

 ■“성소수자는 비인류다”
 “하늘에 달려있는 도리는 음(陰)과 양(陽)이고, 사람에게 달려있는 도리는 남자와 여자입니다.(在人之道曰男與女) 이 사람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니(此人非男非女)…. 죽여야….”(서거정)
 “이 사람은 인류가 아니다.(此人非人類) 병자다. 함께 살 수 없으니 외방의 노비로 영원히 삼는 것이 옳다.”(세조)
 “(양성애자는) 괴이한 물건이긴 하지만…. 그저 외진 곳에 두어 인류와 섞이지 않게 하라. 굳이 중전(重典·엄한 법률)을 쓸 것까지는 없다.”(명종)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조선 사람들의 인식은 비슷한 것 같다. 남자도, 여자도, 아니 인류도 아닌, ‘격리시켜야 할 낯선 비인류’라는 인식….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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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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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 낙타를 수입한다고 하셨나요? 흑마포 60필이나 주고? 절대 안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말씀드리겠습니다.”
 1486년(성종 17년) 대사헌 이경동이 성종에게 맹렬한 기세로 ‘아니되옵니다’를 외친다. 성종의 ‘낙타 수입’ 결정 소식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이경동은 주나라를 창업한 무왕과 창업공신 소공 석의 일화를 인용한다. 무왕이 상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차지하자(기원전 1046년) 사방의 오랑캐들이 앞다퉈 진상품을 올렸다. 그 가운데는 서방의 오랑캐인 서려(西黎)가 공물로 바친 오(獒·키가 4척이나 되는 개)라는 사냥개가 있었다. 여든살이 넘은 무왕은 이 개를 말년의 애완동물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소공 석은 “절대 받으면 안된다”는 글을 올렸다. 

동이족의 나라로 알려진 전국시대 중산국 왕릉에서 1974년 출토된 개(犬)의 유골. 금은으로 만든 목걸이가 눈에 띈다.

■‘성종의 동물사랑’
 “기이한 물건을 귀하게 여기고, 소용되는 물건을 천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이 넉넉합니다. 개와 말은 토종이 아니면 기르지 말고, 진귀한 새와 짐승은 나라에서 기르지 마소서. 작은 행위를 삼가지 않으면 큰 덕에 누를 끼칩니다. 아홉 길의 산을 만드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서 공(功)이 이지러집니다.”(<서경> ‘여오(旅獒)’)
 애완동물에 빠져 백성을 소홀히 대한다면 창업의 공든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이경동은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이경동은 또 거란이 보낸 낙타를 굶어죽인 고려 태조를 떠올린다.
 “문인 이제현이 고려 태조의 행동을 두고 ‘융인(戎人·거란)의 간사한 계책을 꺾고, 후세의 사치한 마음을 막으려 한 것’이라 해석했습니다.”
 즉 고려 태조 왕건이 거란의 ‘낙타 외교’를 매몰차게 거절한 것을 두고 ‘후세의 사치’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경동은 또 낙타의 수입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것을 지적했다. 가뜩이나 가뭄 때문에 백성들이 어려움에 빠져있는데, 낙타 수입가인 흑마포 60필은 너무 비싸다는 것. 검은 빛깔의 삼베인 흑마포는 명나라 황제도차 귀하게 여겼던 진귀한 공물이었다.
 “흑마포 60필이면 정포(농부가 세금으로 내는 베)로 따지면 600필이요, 콩으로 치면 6000두이고, 석으로 치면 400석입니다. 이 쓸데없는 짐승을 사려고….”
 ‘백성’ 운운하는 데야 성종 임금도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 과인이 애초부터 이 짐승을 귀하게 여긴 것은 아니네. 중국에서는 출정(出征)할 때 낙타를 쓴다고 하기에 나도 한 번 시험해보려 했던 것 뿐이었네. 없었던 것으로 함세.”(<성종실록>)  
 
 ■애완동물은 반란의 조짐
 ‘낙타수입’은 좌절됐지만, 성종의 동물 사랑은 그치지 않았다. 송골매 또한 성종이 좋아했던 짐승이었다.
 그러자 매를 관리하는 응사(鷹師)들도 활개를 쳤다. 송골매를 놓치면 한밤중에도 궁문을 열고 금군(禁軍·국왕 경호원)들을 풀어 찾아다니게 했다. 매를 관리하는 금군들의 군량미를 궁궐 창고에서 충당하게 했다. 보다 못한 정언 이거가 성종 임금에게 직언했다.(1486년) 이거는 “한 마리의 송골매를 잃은 것이 나라의 품위에 손상이 가는 것이냐”고 반문하고 “애완동물에 한눈을 팔면 본심을 잃게 된다”고 주장한다.
 지평 반우형도 ‘방탕하게 놀지 말고 지나치게 즐기지 말라’는 순 임금의 말을 이용하면서 송골매에 탐익하는 임금을 비판했다. 헌납 이승건은 “송골매를 다루는 응사들이 매 훈련을 한다는 명목으로 도성 안에서 말을 마구 달리고 대간이 지나가는 데도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도성 안을 폭주하는 응사들이 임금의 잘잘못을 가리고 간언하는 대간이 지나가는 데도 무시하고 말을 달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종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응사들이 말에서 내리지 않은 것은 매를 놀라게 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송골매는 일반 매처럼 쉽게 얻을 수도, 조련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을 잃어버려 찾는다는데 무엇이 잘못됐다는 말이냐.”
 성종은 대신들의 격렬한 반발에 응방을 철폐했다가 되살리고, 매를 놓아주었다가 끌어모으는 일을 반복했다. 신종호가 다소 과격한 예를 들어 성종을 비판했다.  
 “전하께서 송골매를 기르십니다. 당나라 덕종은 초년에 길든 코끼리를 놓아 보내고 닭싸움을 폐하고 정치에 뜻을 기울였습니다. 그러자 산동(山東)의 교만하고 거센 병졸이 순종을 다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5방(坊)을 설립하여 사냥을 일삼았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건중의 난’(783년 장안에서 발생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전하께서도 그 조짐을 경계해야 합니다.”
 실로 무시무시한 말이다. 애완동물을 키웠다고 ‘반란의 조짐’과 연결시켰으니…. 그러나 성종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만 했을 뿐 쉽게 굽히지 않았다. 

 영조 때 궁중화원인 김두량이 그린 ‘짖는 개’. 옛 사람들은 지도자의 지나친 애완물 사랑을 매우 경계했다. 지도자는 모름지기 어느 순간에서도 한눈 팔지 말고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숭이에게 집과 옷을 주어라!’
 성종의 동물사랑은 원숭이로까지 이어진다.
 1477년(성종 8년) 사복시(司僕寺·왕이 사용하는 수레와 말의 사육을 맡은 관청)가 성종에게 귓속말 한다.
 “원숭이를 사육할 흙집(土宇)를 지어야 합니다. 또 원숭이가 입을 옷을 만들어 주면 어떻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좌부승시 손비장이 득갈같이 달려와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아니 무슨 말씀입니까. 원숭이는 상서롭지 못한 짐승인데, 사람의 옷을 입힐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한 벌의 옷이라면 한 사람의 백성이 추위에 얼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성종실록>)
 손비장은 이 대목에서 “더구나 이 일을 사관이 역사책에 쓴다면 성상께서 애완동물이나 좋아하는 임금으로 길이 기록되지 않겠느냐”고 아우성쳤다. 역사를 두려워하라는 이야기다.
 백성에, 역사까지 들먹이자 성종은 꼬리를 내리며 “내가 애완동물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극구 변명했다.
 “동물을 추위에 얼어 죽게 하는 것은 불가(不可)한게 아니냐. 사복시가 청한 것은 옷이 아니었다. 다만 사슴가죽(鹿皮)를 입혀야 한다고 청했을 뿐이다. 경이 잘못 들은 것이다.”

 

 ■사냥개가 떼지어 놀던 궁궐
 아버지를 닮았을까. 성종의 아들 연산군도 애완동물을 끔찍하게 사랑했다.
 궁궐 안에 매와 개(犬)를 모아 태창(太倉·관리의 녹봉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의 쌀을 풀어 사육토록 했다.
 이 때문에 매가 대궐 안 동산에서 떼지어 날고, 사냥개가 궁궐 뜰에 무리를 지어 짖는 일이 발생했다.
 보다못한 대사헌 성현은 예의 그 ‘주 무왕과 소공 석’의 일화를 줄기차게 인용했다. “제발 학문과 정사에 심혈을 기울여 달라”면서….
 “쓸데 없는 물건을 좋아하면 뜻이 거칠어지고, 뜻이 거칠어지면 정사에 게을러진다고 합니다. (궁궐 안에 매와 개가 날뛰는 것은) 남이 보기에도 아름답지 않습니다. 또 이것들을 길러 어디에 쓰겠습니까. 뜻이 거칠어지는 조짐이 애완동물에게 있으니 제발 금수를 기르지 말고 마음을 바르게 하십시요.”(<연산군일기>)

 

 ■“중국말 수입합시다”
 1547년(명종 2년), 사복시정 김천우가 만 12살의 어린 임금을 혹하게 할 감언을 올린다.
 “임금이 탈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요동의 중국말을 수입해오면 어떻습니까.”
 <명종실록>의 기자는 김천우의 상언을 두고 “정말 무식한 발언”이라고 맹비난한다.
 “무식한 발언이다. 어린 나이(11살)에 등극한 임금의 ‘애완물 사랑’을 우려해야 하는데, (이천우는) 한갓 직무의 말단에만 구구하였으므로 듣는 자들이 모두 기롱하였다.”
 참찬관 주세붕도 “왕위 초반에 애완물을 탐익하는 것이 군덕(君德)을 해치는 일”이라면서 어린 임금 명종을 타일렀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559년, 임금의 어마(御馬)가 놀라 날뛰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자 동지경연사 윤춘년은 다시 한 번 중국 말을 수입하자고 건의한다. 임금이 탈 ‘잘 훈련된’ 말을 구하자는 것이었다. 다른 신하들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명종실록>을 쓴 사가는 임금과 대신들을 싸잡아 비판한다.
 “모두 임금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고 (애완동물로 인한) 재앙을 두려워한 언급이 없었다. (임금과 신하가 정사를 논하는) 경연이 어찌 이토록 그 직분을 잃었는가.”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 홍건적을 토벌할 때 탔던 말인 유린청,  전투 도중에 화살을 3발이나 맞았음에도 31살까지 살았다. 태조는 유린청이 죽자 석조에 넣어 장사를 지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동물사랑의 지존’
 동물 사랑의 지존은 아마도 태조 이성계일 것이다.
 가장 아끼는 말이 죽자 석조(石槽), 즉 돌로 만든 관에 말의 시신을 안장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무슨 사연인가.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에게는 유명한 ‘팔준마(八駿馬)’가 있었다. 이성계의 애마 8필, 즉 횡운골(橫雲골)·유린청(遊麟靑)·추풍오(追風烏)·발전자(發電자)·용등자(龍騰紫)·응상백(凝霜白)·사자황(獅子黃)·현표(玄豹) 등을 일컫는다. 왜의 장수 아기발도를 죽일 때 탔던 사자황과, 위화도 회군 때 탔던 응상백, 그리고 태조가 홍건적을 토벌할 때 탔던 유린청이 유명하다. 그 가운데 이성계가 가장 사랑했던 말은 아마도 유린청이었을 것이다. 유린청은 홍건적과의 전투 도중에 화살을 3발이나 맞았음에도 31살까지 살았다. 태조는 유린청이 죽자 석조(石槽)에 넣은 뒤 장사를 지낼 정도로 애닲아 했다.(<연려실기술> ‘태조조 고사본말·잠룡 때의 일’)
 한낱 짐승이 죽었다고 석조에 안장시켰다고? 그러나 주인과 함께 전장을 누빈, 창업의 동반자였던 유린청의 장례식을 그토록 지극정성으로 치렀다고 해서 돌을 던질 사람이 있을까. 

 

 ■‘대부의 예로 장사를 지내라!’
 ‘말사랑의 종결자’는 춘추 5패의 한 사람인 초 장왕(재위 기원전 614~591년)일 것이다.
 장왕의 말사랑은 끔찍했다. 말에게 수 놓은 옷을 입히고, 화려한 집에서 기르면서, 침대에 눕게 하고, 대추와 마른 고기를 먹였다.
 어느 날, 그렇게 끔찍하게 사랑했던 말이 죽고 말았다. 어이없게도 ‘너무 많이 먹인 탓에 살이 쪄서’ 죽은 것이다. 장왕이 슬픔에 빠져 신하들에게 명한다.
 “말의 장례는 ‘대부(大夫·재상 바로 밑의 고관대작)의 예’로 지낸다. 속널과 바깥 널을 구비한 관곽에 안장하고 장례를 지내라. 그리고 대신들은 모두 상복을 입어라.”
 어이없는 일이었다. 대신들은 “아니 말 한마리 죽었을 뿐인데, 무슨 대부의 예냐”고 반발했다. 그러자 왕은 “누구든 반대하는 신하는 죽여버린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때 나타난 이가 우맹이었다. 음악가였던 우맹은 말주변이 좋아 언제나 웃으며 세상을 풍자하고 간언했던 사람이었다.
 우맹은 궁궐에 들어서자 마자 하늘을 우러러 통곡했다. 장왕이 깜짝 놀랐다.
 “아니 왜 그리 우느냐.”(장왕)
 “임금님이 그렇게 끔찍하게 좋아한 말이 돌아가셨다는데…. 대부의 예로 장사를 지내다니오. 박정하고 부족합니다. 마땅히 임금의 예로 장사지내야 합니다.”
 장왕이 솔깃했다.
 “어떻게 장사 지내란 말인가?”

 

 ■‘육축의 예로 지내십시다’
 “옥으로 관을 짜십시오. 그런 다음 무늬있는 가래나무로 바깥널을, 느릅나무·단풍나무·녹나무로 횡대(관을 묻은 뒤에 구덩이 위에 덮는 널조각)를 만들어야 합니다. 병사들을 동원해서 무덤을 파고, 노약자에게 흙을 나르게 하십시오. 제나라와 조나라·한나라·위나라 사신은 열지어 호위하게 하며 사당을 세워 태뢰(太牢·나라의 큰 제사)를 드리게 하소서. 그런 다음 1만 호의 집이 제사를 받들게 하소서.”
 장왕의 머리가 띵했다, 그러자 우맹이 쐐기를 박는다.
 “그렇게 하신다면 제후들이 ‘대왕(장왕)은 말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을 천하게 여긴다’고 할 것입니다.”
 우맹은 한낱 말(馬)의 장례를 ‘대부의 예로 지내라’는 국왕의 명령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지를 비판한 것이다. 장왕은 비로소 우맹의 뜻을 알아차리고 잘못을 인정했다.
 “과인이 잘못했소.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우맹이 그제서야 간언했다.
 “간단합니다. 육축(개·소·말·양·돼지·닭)의 예로 장사지내십시오.”
 우맹이 말한 육축, 즉 가축의 예란 무엇인가. 우맹의 말이 계속된다.
 “부뚜막으로 바깥널을 삼고, 구리솥으로 속널을 삼으며, 생강과 대추를 섞고, 목란(木蘭)나무로 불을 때십시오. 그런 다음 볏짚으로 제사지내고 타오르는 불빛으로 옷을 입혀, 사람의 창자 속에 장사지내십시오.(葬之於人腹腸)”
 ‘사람의 뱃속에 장사를 지내라?’ 삶아 먹으라는 얘기가 아닌가. 이 얼마나 통쾌한 풍자인가. 장왕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목숨을 건 우맹의 풍자를 알아듣고는 곧바로 말(馬)의 시신을 태관(太官)에게 넘겼다. 태관은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그러자 국왕을 비판하는 잡소리가 뚝 끊어졌다.(<사기> ‘골계열전’)

 

 ■애완동물을 반대한 이유
 돌이켜보면 ‘임금 노릇’도 못해먹을 짓이었다. 독재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애완동물 한마리 키워보겠다는데…. 걸핏하면 ‘주 문왕과 소공 석’의 고사를 떠올리며 “아니되옵니다”를 연발하니….
 심지어는 임금의 애완동물 사랑을 두고 ‘반란의 조짐’을 부른다고까지 했으니 얼마나 살벌한가.
 하지만 ‘아니되옵니다’를 연발하는 대신들의 주장에는 일관성이 있다. 그것은 지나치지 말라는 것과, 백성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과, 역사를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소공은 ‘물건을 애완하면 뜻이 상한다(玩物喪志)’고 했습니다. 맹자는 양혜왕에게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한다(率獸食人)’고 했습니다. 또 ‘마굿간에는 살찐 말이 있는데 백성은 굶주린 기색이 있다(廐有肥馬 民有飢色)’고 했습니다.”
 누구의 말인가. 1594년(선조 27년), 사간 최관이 간한 내용이다. 임진왜란이 한창인 때에 임금이 거처하는 곳에서 말을 키우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과연 사실이었다.
 임금이 암말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임금에게 일침을 가한 것이다.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전란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는데 임금이라는 작자는 말사랑에 여념이 없었다니…. 그러고보니 최관의 말이 맞는 말이다. 잘못된 짐승사랑은 맹자님 말씀대로 ‘솔수식인’, 즉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한다’는 것이 아닌가. 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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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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