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1년(영조 7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은 경악할만한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동래성 수축을 위해 땅을 파다가 임진왜란 때 묻힌 것으로 보이는 백골들을 다수 발견한 것이다. 숫자는 최소 12명이었다. 포환(砲丸)과 화살촉들이 백골의 사이에 띠를 이뤘다. 당시 정언섭이 건립한 ‘임진망전유해지총(壬辰亡戰遺骸之塚)’의 비문을 보라.
 “전후에 발굴된 유골 수는 대개 열둘이지만 이는 특별히 그 형체와 해골이 완연한 것이고, 그 잔해의 조각조각이 떨어져 부스러진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에 숙연해진 정언섭은 백골들을 수습한 뒤 비문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제전(祭田)을 설치했다. 정언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향교에 넘겨 해마다 유생들에게 그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여지집성(輿地集成)>)  

동래성에서 확인된 20대 여성의 두개골. 왜병은 이 힘없는 여인을 예리한 칼로 두 번이나 베었다. 여인은 처형을 당했을 것이다.|경남문화재연구원

■끔찍한 발굴
 그로부터 꼭 274년 뒤인 2005년, 바로 그 언저리에서 끔찍한 발굴이 이뤄진다.
 부산 지하철 3호선 수안동 전철역사 예정지를 조사중이던 발굴단(경남문화재연구원)이 바로 그 동래읍성의 해자(垓子·적의 공격 막기위해 성 주변에 파놓은 도랑)를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엄청난 유물들이 쏟아졌다.
 나무말뚝이 해자 바닥에 깔려있고 그 사이에서 인골과 찰갑(札甲·철판을 이어만든 갑옷)과 첨주투구(투구의 일종), 환도(環刀)와 깍지(궁수의 엄지손가락에 끼우는 가락지), 창, 화살촉 등 정신없이 나은 것이다. 그런데 발굴단의 눈을 경악하게 만든 것은 죽은 뒤에 바로 이 해자에 유기된 발굴 인골들의 형태였다.
 즉 출토인골들은 하지골이나 상지골~슬관절이나 주관절이 연결됐다던가, 두개골과 경추가 함께 확인됐다던가 했다. 이는 인대와 근육이 붙어있는 단계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것, 즉 죽은 뒤에 해자로 유기된 것이었더,
 그런데 북서쪽에서 확인된 20~40대 성인남자의 인골은 머리 뒤쪽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무언가에 머리를 찔렸거나 베임을 당해 죽은 것이었다. 전투를 벌이다 적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 분병했다. 발굴단은 곧 임진왜란 때 비명에 간 이들의 넋을 달래는 진혼제를 지냈다. 아마, 1731년, 같은 장소에서 인골들을 발견했던 동래부사 정언섭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왜군의 조총 유탄 등에 머리를 맞아 사망한 어린아이의 유골.아기는 영문도 모른채 화를 입었다.

 ■유아인골의 머리에 난 총상
 인골들을 분석한 결과 더 참혹한 결과가 나왔다.
 분석결과 인골이 최소 81개체에서 최대 114개체까지 보이는데, 모두 해자의 바닥에서 집중적으로 검출됐다는 것. 이 인골들은 인위적으로 해체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는 곧 같은 시기에 해자에 시신들이 방치됐다는 얘기였다.
 3차에 걸쳐 검출한 인골을 분류하면 남성이 59개체, 여성이 21개체에 이르렀다. 성별은 10대 후반에서 4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충격적인 인골은 어린아이의 것이 분명한 유아인골이었다. 당시 고인골 전문가 김재현 교수(동아대)의 분석결과 만 5세 미만의 유아가 분명했다.
 그런데 이 유아의 두개골에는 전두골의 우측에 총이나 활로 맞은 사창(射創) 혹은 칼·창 등으로 찔린 자창(刺創)의 흔적이 보인다.
 김재현 교수는 당시 “일본군의 조총에 맞은 흔적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조총의 총알이 부정형인데, 상처도 원형이 아니라 부정형의 둘쭉날쭉한 형태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특히 상흔의 깨진 정도와 경사각도를 보면 이 유아는 전쟁통에 왜군이 쏜 조총에 비껴 맞았거나, 유탄에 의해 희생되었을 게 분명했다.
 아마도 이 유아는 엄마와 함께 있다가 왜병의 총탄에 맞아 숨졌을 것이다. 지금도 그 모습을 보고 절규했을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유아는 왜병에 의해 해자로 던져졌겠지. 그 엄마도 어린아이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크다.

 

 ■처형당한 여인의 머리
 다른 유골들의 두개골에서 확인된 상흔을 나눠보면 칼로 베인 절창(切創·모두 4개체로 남성 3개체와 여성 1개체), 총과 활에 의한 사창 또는 자창(2개체), 둔기에 의한 두개골 함몰(2개체) 등이었다. 이 가운데 20대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은 더욱 더 비참했다.
 왜병들은 이 여성의 머리를 두 번이나 칼로 벤 것이다. 특히 여성의 전두골을 보면 단 한 번의 칼놀림으로 예리하게 잘려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힘없이 스러져가는 여인의 두정골도 칼로 베고…. 왜병은 이 여성을 두번이나 무참하게 칼로 벤 것이다.
 더욱 눈을 의심하게 만든 것은 상흔의 부위였다. 칼로 벤 상흔의 위치가 이상했던 것이다.
 보통 전쟁통에 백병전을 벌일 때 칼을 휘두르면 각도상으로 얼굴의 양쪽 옆을 베기 마련이라는 것. 그런데 이 여인의 상흔을 보면 왼쪽에 선 왜병이 꿇어 앉았거나 고개를 숙인 여인을 내리쳤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곧 처형이 아닌가. 왜병들은 아무 죄없는 여성을 꿇어 앉혀놓고 이렇듯 두번이나 칼로 내리쳐서 처형시킨 것이 아닐까. 이 뿐이 아니었다. 남성의 두개골 분석에서도 뒤에서 혹은 앞에서 칼로 벤 흔적이 남아있다.
 또한 칼로 베인 것 같기는 한데 그 상처구멍의 단면이 반듯하지 않은 인골들이 있었다. 이는 칼이 아니라 다른 무기로 베였다는 소립니다.
 두개골이 함몰된 인골이 남녀 1개체씩 확인됐다. 무자비한 학살의 현장이 분명했다. 

 

동래부사순절도를 통해 본 동래성 전투

즉시 길을 비키라는 왜군의 회유에 맞서 싸워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假道難)”는 내용을 쓴 목패를 던지는 송상현 부사.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경상좌병사 이각. 왜병에 의해 성이 함락되는 모습. 송상현 부사의 순절 직전 모습. 조복을 입고 임금을 향해 절을 올린 뒤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동래부민 김상과 아낙 2명이 왜병에게 기와를 던지며 싸우고 있다. 적이 떠난 뒤 죽은 김상과 아낙 둘, 그리고 왜병 3. 송상현의 애첩 김섬이 자리를 피하다 잡혔지만 사흘 동안 왜병을 꾸짖고 욕하다가 역시 살해됐다. | ‘동래부사순절도는 동래성 전투의 모습을 시간대별로 묘사하고 있다. 점선원안은 동래성 해자 발굴지점.

 ■그 참혹했던 1592년 4월 15일
 과연 1592년 이곳에서는 어떤 참혹한 일들이 벌어졌을까. 기록을 통해 알아보자.
 1592년 1월, 일본 전역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출병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린다. 왜병의 총병력은 30만 명이었다.
 마침내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총사령으로 한 선봉군 2만 여 명은 700척의 전함에 분승,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왜병은 부산진을 함락하고 동래성으로 밀어닥쳤다. 그때가 14일 오전 10시 쯤이었다.
 왜군은 선발대 100명을 보내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즉시 길을 비켜라”라고 항복을 종용한다. 당시 동래부사는 송상현(宋象賢·1551~1592년)이었다. 송부사는 “싸워 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고 일축한다.
 15일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전면 공세가 시작된다. 궁시(弓矢) 위주의 방어로는 왜군의 신무기인 조총(鳥銃)의 화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송상현 부사는 부산성이 왜군의 맹렬한 조총 공격에 녹아난 것을 알고는, 통나무 방패로 방어책을 세웠지만 별무신통이었다.
 조총의 위력은 엄청났다. <무기요람(武器要覽)>은 “숲에서 나는 새도 모두 떨어뜨릴 수 있으니 그래서 이름을 조총(鳥銃)이라 했다(卽飛鳥之在林 階可射落 因是得名)”고 했으니…. 조총의 유효사거리는 100~200m였고, 명중거리 50m, 분당 사격은 4발이었다.
 오죽했으면 선조는 ‘조총은 천하의 신기(鳥銃者 天下之神器也)’라고 감탄까지 했다.

 

발굴지점에서 인골과 찰갑 등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송상현의 의로운 죽음
 각설하고, 겹겹이 에워싼 왜군의 총공세가 이어지고, 동래성은 뚫리기 시작한다.
 “총성이 울리고 그 검광은 백일을 무색하게 했다. 적군이 성중에 들어와 사람으로 메우다시피했다. 성은 협소하고 사람은 많은 데다 적병 수만이 일시에 성으로 들어왔다. 성중은 메워져 움직일 수 없었다.”(<임진동래유사>)
 송상현 부사도 위기에 처했다. 왜적 가운데는 통신사로 조선을 드나들던 평조익(平調益)이라는 이가 있었다.
 통신사 시절 송상현의 후대(厚待)를 받은 경험이 있는 평조익이 급히 나서 송상현에게 “빨리 피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송상현이 꿈쩍도 하지 않자 평조익은 부사의 옷을 잡아당겨 성벽의 빈터를 가리켰다. 하지만 송 부사는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임금이 있는 북쪽으로 4번 절하며 담담하게 죽을 준비를 했다. 그런 뒤 태연히 붓을 들어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외로운 성에는 달무리가 지고 다른 군진에는 기척도 없군요.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정은 가볍습니다.(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양산군수 조영규도 송상현 부사와 함께 죽었고, 송부사의 겸인(집사) 신여로, 비장(裨將) 송봉수·김희수, 향리(鄕吏) 송백 등 송부사의 핵심 측근들도 모두 살해됐다. 동래향교 노개방과 유생 문덕겸·양조한 등도 함께 순절했다. 왜장도 송상현 부사의 순절에 감동해서 장례를 돕고 제사를 지냈으며, 심지어는 송상현을 죽인 자를 끌어다 죽였다고 한다.
 “갑오년(1594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송상현의) 집안사람으로 하여금 시체를 거두어 고향으로 반장(返葬)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경내에서 벗어날 때까지 호위해주었다. 적진에 남겨진 유민들이 울며 송상현의 시신을 전송했다.”(<선조수정실록>)

 

 ■잊어서는 안될 백성들의 넋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될 사람들이 있다. 바로 죄 없는 백성들다.
 이들은 조국을 위해 칼과 낫, 곡괭이, 심지어는 맨손으로 적과 싸웠고, 그 과정에서 힘 없는 여성과 어린아이까지 속절없이 적병의 창칼에 스러졌다.
 <임진유문(壬辰遺聞)>을 보라. 동래부민 김상(金祥)은 동네 아낙 두 사람이 깨 준 기와로 적병을 내리쳤다. 적이 떠난 뒤 김상의 어머니가 보니 김상과 두 아낙이, 적병 세 사람과 함께 죽어 있었다. 또 한 사람 비극의 주인공은 송상현 부사의 애첩인 김섬(金蟾)이다.
 “송상현의 애첩 김섬은 함흥의 기녀였다. 송상현의 순절 즈음에 적에게 붙잡혔다. 그녀는 사흘 동안이나 적을 꾸짖고 욕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적도 이를 의롭게 여겨 관구를 갖추어 송상현의 곁에 장사를 지냈다.”
 동래성 전투로 왜군은 참수 3000여명, 포로 500여명의 전과를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서정일기(西征日記)>) 당시 일본에서 예수회 선교사로 활동했던 루이스 프로이스(Lois Frois)는 조선군 전사자가 약 5000명이라고 했다. 물론 민간인 희생자를 포함한 수치일 것이다.
 “양산군수 조영규의 아들 조정로가 아버지의 유해를 찾으러 동래성에 갔는데, 성 안이 온통 시체로 덮여있어 유골을 수습하지 못했다.”(<충렬사지> ‘조공유사기·趙公遺事記’)
 임진왜란 후 17년 뒤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李安訥)의 글을 보라.
 “4월15일 청명에 집집마다 곡소리가 일어나 ~ 늙은 아전에게 물으니 이날이 (동래)성이 함락된 날이라 했다. 송상현 부사를 좇아 모인 성안 백성들은 피바다로 변하고 쌓인 시체 밑에 투신하여 천 명 중 한 두 명이 생명을 보전할 정도였고, 조손·부모·부부·자매 중에 살아남은 자는 죽은 친족을 제사지내며 통곡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내(이안눌)가 눈물을 흘리자 늙은 아전은 ‘곡해줄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적의 칼날에 온 가족이 죽어 곡해 줄 사람조차 남지 못한 집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이안눌의 <맹하유감사(孟夏有感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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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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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신 정몽주가…정권을 잡고서 전하(태조 이성계)를 도모하려 하다가 (1392년) 4월 4일 참형을 당했는데….”(<태조실록> 1392년 12월 16일조)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이 올린 상소문이다. 조준은 포은 정몽주를 ‘간신’이라 일컫고 있다. 당연했으리라. 정몽주야말로 역성혁명의 최대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정몽주는 조준의 언급대로 태조 이성계를 죽이려고까지 했으니까….

 

 개성 선죽동 정몽주의 집터에 있는 숭양서원, 1573년(선조 6) 개성유수 남응운이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 서경덕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개성 선죽교 위쪽 정몽주의 집터에 서원을 세우고 문충당(文忠堂)이라 했다.

■이성계에겐 '양정(兩鄭)'이 있었다
 원래 정몽주와 이성계의 관계는 도타웠다. 1364년 2월 정몽주는 이성계를 처음 만났다.
 정몽주는 자신을 과거시험에서 선발해준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 정벌에 참전하고 있었다. 그 때 이성계가 원병을 이끌고 한방신을 도우러 왔는데, 거기서 운명적으로 조우한 것이다. 이후 정몽주는 두차례나 조전원수(助戰元帥·장수를 보좌하는 일종의 참모)로 이성계를 보좌했다.
 훗날 정몽주 참살의 장본인인 태종 이방원은 즉위 후(1403년·태종 3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부왕(태조 이성계) 때 양정(兩鄭)이라 했는데, 하나는 정몽주요, 하나는 정도전이다. 정몽주는 왕씨의 말년 시중이 되어 충성을 다했고, 정도전은 부왕의 은혜에 감격하여 힘을 다했으니 두 사람의 도리는 모두 옳은 것이다.”(<태종실록>) 
 태조 이성계가 그토록 아꼈던 사람이 바로 정몽주와 정도전이었다는 것이다.
 정몽주 역시 왜구를 섬멸하는 이성계를 유비의 책사인 제갈량과, 유방의 책사인 장량 등에 빗대 문무를 겸비한 보기 드문 인물(盖如公者幾希)”이라고 극찬하는 시(<포은집> 권3 ‘송헌이시중화상찬·松軒李侍中畵像讚’)를 남긴다.
 정몽주는 이성계·정도전 등과 함께 쓰러져가는 고려를 일으키고자 했다. 당시 이인임으로 대표되는 권문세족의 횡포로 문란해진 고려의 정치·사회를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정몽주는 1389년 11월 창왕 폐위와 공양왕 옹립을 주도한 이성계 세력의 이른바 ‘흥국사 모임’에 가담,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이성계·정도전·정몽주 등이 흥국사에서 모여 의논했다. 우왕과 창왕은 본디 왕씨가 아니다.(신돈의 후손들이다.) 마땅히 거짓 임금을 폐하고 참 임금을 세워야 한다.”(<태조실록> 총서)
 이로써 고려 신종(재위 1197~1204)의 7대손인 정창군 왕요(王瑤)가 왕위에 올랐는데, 이 사람이 공양왕이다. 이 사건으로 정몽주는 성균관에서 교류하며 노선을 함께 했던 이색·길재·권근 등과 갈라서는 아픔을 맛본다. 하지만 정몽주와 이성계·정도전의 밀월관계는 ‘거기까지’ 였다. 이성계 세력의 최종 목표는 정몽주가 생각한 고려의 개혁이 아니라 역성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이성계를 도모할 것이다.’ 
 이성계와 정몽주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바 ‘윤이·이초 사건’이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을 재촉한 이 사건은 1390년 5월 일어났다. 즉 파평군 윤이(尹이)와 중랑장 이초(李初) 등 두 사람이 명나라 황제(주원장)를 찾아가 “이성계가 자신의 사돈인 요(공양왕)를 새 임금으로 세운 뒤 곧 명나라를 칠 것”이라고 호소했다는 것이다.
 윤이와 이초는 더 나아가 “이성계 측이 명나라 정벌에 반대하는 재상 이색과 조민수·우현보·이숭인·권근·변안열 등을 죽이려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고려사절요> 등) 이 소식이 고려에 전해지자 발칵 뒤집혀졌다. 이성계 세력은 이를 빌미로 이색 등 19명을 축출했다.
 이 때부터 역성혁명의 길로 본격 접어든 이성계의 혁명세력과 정몽주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정몽주는 고려 태조의 정통성을 계승한 공양왕을 받들어 쓰러져가는 500년 사직을 부여잡으려 했기 때문이다.
 정몽주는 이색과 권근 등의 사면을 건의하면서 구 세력과 결합을 모색했다. 이 때부터 고려 사직을 지키려는 정몽주 세력과 신왕조 개창에 박차를 가하는 이성계 세력의 반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정몽주의 공격은 만만치 않았다. <태조실록> 등을 통해 정몽주의 반격과 피살 등 숨막히는 순간을 리뷰해보자.
 1392년 3월, 이성계가 사냥 도중 말이 진창에 빠지는 바람에 낙마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실록>은 이 때 “정몽주가 기쁜 기색을 내비치며 이 기회에 태조(이성계)를 제거하고자 했다”고 기록했다.
 “정몽주는 대간들을 사주하면서 ‘먼저 이성계의 보좌역인 조준 등을 먼저 제거한 뒤 이성계를 도모할 것’이라 했다.”
 ‘정몽주의 사주를 받은’ 대간이 조준·정도전·남은·윤소종·남재·조박 등을 탄핵했다. 탄핵을 받은 6인은 결국 외지로 귀양을 가야 했다. 정몽주는 이에 그치지 않고 6인방의 참형을 촉구했다. 혁명세력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이 때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 등이 아버지를 급히 찾아갔다.
 “정몽주를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아버님! 정도전을 국문하면서 우리 집안까지 연루시키고 있습니다. 형세가 매우 급합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고개를 내저었다. “정몽주를 죽일 수는 없다”면서 거절한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정몽주가 피를 뿌리고 순절한 개성 선죽교. 원래 선지교였지만 정몽주 순절 후돌틈 사이로 절개를 뜻하는 대나무 꽃이 피어났다 해서 선죽교라 일컬어졌단다.  

■1392년 4월 4일, 그 참극의 순간
 아버지의 고집을 꺾지 못한 이방원은 결국 측근인 조영규를 불렀다.
 “정몽주를 내가 죽여야겠다. 내가 그 허물을 뒤집어 쓰련다. 휘하 사람들 중에 누가 이씨를 위해 힘을 쓸 사람이 있는가.”
 조영규가 “제가 하겠다”고 손을 들고 나섰다. 조영규와 함께 조영무·고여·이부 등이 나섰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아차린 변중량(1345~1398)이 정몽주에게 “공이 위험하다”고 누설했다. 정몽주는 사태의 추이를 보려고 이성계를 병문안 했다. 이것이 천려일실이었다. 
 이성계는 본디 정몽주를 죽일 생각이 없었기에 전과 똑같이 대접했기 때문이다.
 의심을 걷어낸 정몽주는 마침 상(喪)을 당한 전 판개성부사 유원을 조문한 뒤 귀가하고 있었다.
 <태조실록>은 1392년 4월 4일 벌어진 참극의 순간을 생생한 필치로 전한다.
 “조영규 등이 달려가 정몽주를 쳤으나 맞지 않았다. 정몽주가 조영규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났다. 조영규가 급히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을 넘어뜨렸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났다. 이 때 고여(高呂) 등이 쫓아가서 죽였다.”(<태조실록> 총서)
 비보를 들은 이성계는 불같이 화를 냈다.
 “우리 집안은 충효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나라 사람들이 뭐라 하겠는가.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이방원도 물러서지 않았다.
 “정몽주 등이 우리 집을 모함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정몽주를 살해한 것이) 곧 효도입니다.”
 이것이 <태조실록>이 전한 ‘간신’이자 ‘역신’인 정몽주 피살 사건의 전모이다. 

경기 용인 모현면에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 포은은 조선개국의 걸림돌로 역적으로 처단됐지만 9년만에 만고의 충신으로 거듭난다.

■9년 만에 간신에서 충신으로
 그런데 불과 9년 만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1401년(태종 1년) 1월14일 참찬문하부사 권근이 태종에게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 즉 ‘치도(治道) 6조목’을 권고했다. 그 가운데 5번째 조항을 보면….
 “임금이 의(義)를 받들어 창업할 때 따르는 자는 상을 주고, 불복하는 이는 벌을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창업을 이루고 수성(守成)할 때는 반드시 전대에 절의를 다한 신하에게 상을 주어야 합니다. 만세의 강상(綱常)을 굳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다음 권근은 정몽주 등의 이름을 거론했다.
 “정몽주는 본래 한미한 선비로 태상왕(태조 이성계)의 천거로 출세했으니 어찌 그 은혜를 갚으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또 어찌 천명과 인심이 태상왕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몰랐겠습니까. 그렇지만 자기 몸이 보전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섬기던 곳’(고려)에 마음을 주고 그 절조를 변하지 않아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대절(大節·죽음을 각오한 절개)을 빼앗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권근은 정몽주를 남송의 문천상(文天祥·1236~1282)에 비유했다. 문천상은 남송이 원나라에 항복하자 저항하다가 체포됐다. 쿠빌라이(원 세조)는 그런 문천상의 재능을 아껴 전향을 권유했다. 그러나 문천상은 끝내 죽음을 택했다. 원나라는 문천상의 절개를 기려 추증했다. 권근은 “바로 문천상을 추증한 원나라처럼 정몽주를 절개의 상징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권근의 상언 가운데 ‘수성할 때는 절의있는 자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중요하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기반을 잡은 만큼 이제는 그 조선을 지키는 절의있는 신하가 절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태종은 권근의 상소를 받아들여 정몽주에게 ‘문충(文忠)’의 시호와 ‘영의정 부사’의 직함을 추증했다. 정몽주가 ‘간신’에서 ‘만고의 충신’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길재는 모가 났지만 정몽주는 순실하다’
 이후 조선의 역대 임금과 신하들은 입을 모아 정몽주 찬양대열에 합류한다.
 우선 정몽주 척살의 장본인인 태종 이방원을 다시 보라. 1402년(태종 2년) 4월 3일, 태종이 과거 합격자들을 언급하면서 갑자기 정몽주를 칭찬했다.
 “정몽주가 향생(鄕生·시골 출신)으로 장원의 영예를 얻었는데 그 호방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대언(왕명을 출납하는 정3품) 이응은 태종의 평가에 화답했다.
 “정몽주 같은 분은 중국에서도 드뭅니다.”
 얼마 전까지 대역죄인이었던 정몽주가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충신’으로 칭송받고 있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은 또 어떤가. 1431년(세종 13년) 3월 8일, 대신들과 고려 말의 ‘3은(隱)’을 거론하며 일일이 인물평을 하고 있다.
 “고려 말에는 충신(忠臣)과 의사(義士)가 매우 적었다. 목은 이색 같은 사람도 절의를 다하지 못했고, 유독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가 능히 옛 임금을 위해 절개를 굳게 지켰기 때문에 뒤에 벼슬을 추증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종의 다음 말이 흥미롭다.
 “정몽주는 순실(淳實)하지만, 길재는 규각(圭角)이 났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길재는 정몽주에 비해서는 약간의 간격이 있을 것이다.”
 ‘순실’은 ‘순하고 참됨’을, ‘규각’은 ‘사람됨에 모가 났음’을 각각 뜻한다. 세종은 고려를 위해 절개를 지켰다는 ‘3은(隱)’ 가운데 정몽주를 ‘으뜸’으로 꼽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12월 3일에는 정윤정에게 관직을 제수했다. 정몽주의 증손이라는 점이 감안됐다.
 그런데 19년 뒤인 1479년(성종 10년) 7월 16일, 정윤정이 성종의 후궁선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성종 임금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저렇게 망발을 내뱉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배후가 있을 것이니 엄벌에 처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 대목을 기록한 <실록>의 기자는 매우 흥미로운 평을 달아놓았다.
 “정윤정은 정몽주의 증손이다. 그의 상소가 비록 황당무계했다지만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의 말에서 증조부(정몽주)의 풍모가 보인다. 그냥 그의 말이 옳다면 받아들이고, 옳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될 일인데….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의리, 으리, 기리(ぎり)
 정몽주를 살피다보면 매우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요즘 한창 유행 중인 ‘의리’이다.
 한마디로 ‘정몽주=의리의 종결자’라는 것이다. 시쳇말로 ‘정몽주으리’라는 것인가. 먼저 서애 류성룡이 내린 ‘포은 정몽주 평’을 보자.
 “포은 선생은 ‘의리지학(義理之學)’으로 모든 유생을 위해 제창하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대종(大宗)으로 삼았다. 국가가 존재하면 함께 존재하고 국가가 망하면 함께 죽었으니…. 고려 500년 강상의 중함을 자임했고 조선 억만년의 절의의 가르침을 열어놓았으니 선생의 공은 위대하다.”(<포은집> ‘포은집발·圃隱集跋’)
 그러니까 요즘으로 치면 포은 정몽주가 의리 하나로 모든 유생들의 ‘형님’이 되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여기서 오해가 있을 수 있겠다. 정몽주의 ‘의리’와, 요즘 잘못 생각하기 쉬운 ‘의리’가 다르다는 점이다.
 즉 일상적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끝까지 추종하거나, 친구 간 맹목적인 친분을 과시하거나, 심지어는 불량배나 범죄집단이 자신의 조직을 배반하지 않는 행위를 ‘의리’라 일컫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같은 의리는 유교적 전통의 의리가 아니라 일제(日帝)의 영향 속에서 변질된 ‘의리’일 가능성이 짙다.
 즉 일본의 윤리 전통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덕목이 바로 ‘기리(義理·ぎり)’라는 것. 일본에서의 ‘기리’는 전통적으로 가족 간이나 친지 간, 혹은 영주와 농노 간과 같은 구체적인 인간관계 안에서 요구된 덕목이다. 이런 일본의 ‘기리’가 일제 시대부터 파고 들어와 ‘의리’의 개념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규모 집단 내에서의 맹목직인 의리는 자칫하면 집단이기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는 얘기다. 

정몽주가 흘렸다는 핏자국의 흔적이 보인다.

 ■의리지학과 정몽주
 의리(義理)의 의미를 풀자면 ‘의(義)’는 도덕성과 올바름이고, ‘리(理)’는 이치 혹은 도리이다.
 그러니까 ‘의리’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람으로 마땅히 해야 할 올바른 도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것은 서애가 언급했고 <실록>에서도 여러차례 등장하는 ‘의리지학’은 사실 ‘성리학’을 뜻한다. 한마디로 ‘올바름(義)의 이치(理)’를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성리학인 것이다.
 그러니 작은 이해관계에 빠질 수 없고, 불의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불의와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 의리지학, 즉 성리학의 정신인 것이다.
 이제 ‘으리’가 아닌 ‘정몽주의 의리’를 좀더 살펴보자.
 사실 포은 정몽주는 동방이학, 즉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추앙 받았다. 한마디로 ‘의리지학’의 으뜸이었다는 소리다. 
 <고려사> 권117 ‘열전·정몽주’를 보자.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서로는 <주자집주> 뿐이었다. 그런데 포은의 강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을 정도로 빼어났다. 그렇기에 듣는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했다. 하지만 후에 호병문의 <사서통(四書通)>을 보게 되니 포은의 강설과 내용이 꼭 맞았다. 여러 선비들이 탄복했다.”
 포은이 주자학(성리학)에 얼마나 정통했는 지를 알려주는 기록이다. 포은의 주자학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포은의 실력을 매우 의심했다는 것.
 하지만 훗날 호병문의 <사서통>의 내용과 다를 바가 없어서 포은의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는 것. 언급된 호병문(1250~1333)은 원나라 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다. 그가 54명 학자들의 주석을 정밀분석해서 펴낸 <사서통>은 주자학 연구자들의 필수 교과서가 됐다. 
 그런데 1326년 출간된 <사서통>을 뒤늦게 받아본 고려인들이 정몽주의 주자학 강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감탄사를 연발했다는 것이다.
 이색은 “포은의 논리는 이렇게 저렇게 말해도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면서 “동방 이학(성리학·주자학)의 비조로 추대할만 하다.”고 칭찬했다.
 삼봉 정도전은 포은이 <대학>과 <중용>, <논어>, <맹자> 뿐 아니라 <주역>과 <시경>, <서경>, <춘추>까지 정통했음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감탄했다.
 ”우리나라 500년 동안 이런 정도의 이치에 도달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유생들이 자기 학식을 고집하고 사람들마다 이설을 제기했지만 포은은 그 물음에 따라 명확히 분석하고 설명하여 약간의 착오도 없었다,”(<삼봉집> 권 3 ‘포은봉사고서·圃隱奉事槁序’)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의견을 내면서 쟁론을 벌이기도 했지만 한치의 흩어짐이 없는 정몽주의 논리에 일패도지하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 경북 영천 임고면 양항리의 임고서원, 포은 선생은 이른바 ‘의리지학’의 최고봉이었다는 평을 들었다.

■'정몽주으리'
 중요한 것은 포은의 ‘실천적 의리정신’이다,
 “유학자의 도는 모두 일상의 일로 음식과 남녀는 모든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니 지극한 이치는 그 가운데 존재하는 것입니다.”(<포은집> 권 4 ‘본전·本傳’)
 그러니까 올바른 행동과 바름을 지키는 ‘일상의 도리’의 ‘일상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운행은 하루에 구만리를 달리네. 잠시라도 쉼이 있다면 만물은 곧 자라지 못하리…. 생각에 병통이 생기면 혈맥이 가운데서 막히네. 군자는 이것을 두려워 하여 저녁까지 두려운 듯 힘쓰고 힘쓰리. 극진한 노력을 쌓으면 하늘의 존재와 마주 대하리라.”
 포은의 시(‘척약재명·척若齋銘’) 내용이다. 시의 제목에 나오는 ‘척약’은 <주역> ‘건괘·구삼·효사’에 나오는 말이다.
 “군자가 종일토록 굳세고 굳세어 저녁까지 여전히 두려운 듯 행동하면 비록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을 것이다.(君子終日乾乾 夕척若 려无咎)”
 여기서 ‘척(척)’은 ‘두려워 삼가는 것’을 뜻하며, ‘구삼효(九三爻)’는 전체의 괘(卦)에서 상괘와 하괘가 교체하는 중간에 자리잡은 위태로운 자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 <주역>의 내용은 평소 마음가짐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그리고 시종일관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주자학에서 ‘일상의 도리’는 공자의 정명론(正名論)과 통한다.
 즉 공자는 제나라 경공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묻자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 했다. 즉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의 정명론은 결국 ‘자신의 분수와 명분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며, 특히 명분이 바로 서지 못하면 말이 올바르지 못하고, 말이 올바르지 못하면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리는 일상의 도리

 정몽주가 ‘일상의 도리’를 실천한 대표적인 예를 찾아보자.
 1384년(우왕 10년)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명나라는 고려가 임금(공민왕)을 시해했을 뿐 아니라 약속한 공물을 보내지 않았다고 해서 고려가 보낸 사신들에게 곤장형을 내리고 줄줄이 유배시켰다. 때문에 명나라 사신으로 떠나라고 하면 모두들 두려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우왕은 명나라로 보낼 성절사(명 황제 생일에 갈 특사)로 밀직 진평중(陳平中)을 임명했다. 그러나 진평중은 당대의 권신인 임견미에게 노비 수십명을 뇌물로 써서 빠져 나갔다. 임견미는 대신 정몽주를 추천하고 말았다. 우왕이 정몽주와 불러 넌지시 의향을 묻자 정몽주는 쾌도난마식으로 대답했다.
 “군주의 명령은 물불이라도 피하지 않는 법입니다. 어찌 피하겠습니까. 다만 남경(명나라 수도)과의 거리가 8000리입니다. 부지런히 간다해도 90일 여정인데, 이제 겨우 60일 남았습니다. 그것이 신의 걱정입니다.”
 정몽주는 우왕의 명을 받자마자 일각의 주저없이 그 자리에서 곧바로 떠났다. 정몽주는 불철주야 재촉한 끝에 천신만고 끝에 황제의 생일날에 맞춰 남경에 도착했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그 같은 사정을 알고서 정몽주를 특별히 치하했다.
 “고려의 배신들이 서로 오지 않으려 하다가 날짜가 임박하니 너를 보낸 것이로구나.”
 명 황제는 억류 중이던 김유와 홍상재 등을 풀어주었고. 고려와 외교관계 회복을 허락해주었다.(<고려사절요>)

 

 ■“죽어도 의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명분에 맞는 올바른 도리를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정몽주의 삶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그랬으니 국가존망이나 왕위찬탈의 위기에 빠졌을 때, 즉 불의에 닥쳤을 때 타협을 거부하고 목숨을 바쳐 싸우는 것이야 말로 정몽주의 의리정신이었던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노수신(1515~1590)은 포은의 의리를 소개했다.
 “고려 쇠퇴기를 맞아 어쩔 수 없게 되자 포은은 사람들에게 ‘남의 신하가 되어 어찌 감히 두 마음을 품겠는가. 이미 나의 처할 바가 되었다’고 했다. 큰 절개에 임해 뜻을 빼앗을 수 없는 군자인 것이다. 평소 깊은 수양이 없었다면 어찌 이렇게 확고할 수 있겠는가.”(<포은집> ‘포은선생시집서’)
 정몽주의 의리는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됐다. 예컨대 1476년(성종 7년) 8월13일 도승지 현석규는 이렇게 말했다.
 “정몽주는 태조(이성계)에게 간택되어 지위가 정승에 올랐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만약 한번만 마음을 바꾼다면 개국의 원훈(元勳)이 될 것이니 누가 그를 앞서겠는가’라 했습니다. 그런데도 정몽주는 끝내 고려 신하의 절개를 지켜, 죽어도 의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존숭의 대상이된 포은의 의리정신
 포은의 의리정신은 후대 유학자들의 ‘존숭의 대상’이 됐다.
 유학자들은 정몽주의 학문이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정몽주를 한국 도학(道學·주자학)의 시조로 꼽고 있다.
 기대승(1527~1572)은 “정몽주는 동방이학의 조종이 됐는데 불행히도 고려가 망하는 바람에 살신성인했다”고 평했다.
 이황은 “신돈이 조정을 저지르고, 최영이 중국을 더럽힐 때 군자라는 정몽주는 무엇을 했느냐”는 일각의 회의론에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허물이 없는 데 허물을 찾아서는 안된다. 정몽주의 정충대절(精忠大節)은 가히 천지의 경위(經緯·씨줄과 날줄)가 되고 우주의 동량이 될만 하다.”
 그러면서 이황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정몽주의 거센 바람 우리나라에 떨치니(圃翁風烈振吾東), 사당과 학궁도 우람하고 그윽하네.(作廟渠渠壯學宮) 공부하는 모든 선비들에게 말하노니(奇語藏修諸士子) 연원과 정의 둘다 으뜸(조종)이라네.(淵源節義兩堪宗)”(<퇴계전서> 권 4 ‘임고서원·臨皐書院’)
 송시열의 평가는 어땠을까.
 “기자(箕子)가 태어난 것은 은(상)의 행운이 아니라 조선의 행운이며(殷師之生 非殷之幸 而我東之幸也), 포은 선생이 출생하심은 고려조의 행운이 아니라 조선의 행운이다.(先生之生 非麗氏之幸 而我朝之幸也)”(<포은집> ‘중간서·重刊序’)
 기자가 누구인가. 이른바 세상을 다스리는 9가지 정치이념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남겼다는 은(상)시대(기원전 1600~1046)의 성인이다. 송시열은 포은 정몽주를 만고의 성인으로 존숭되는 기자의 반열에 놓고 있다. 더할 수 없는 극찬이다.
 1478년(성종 9년) 6월 3일, 동부승지 김계창이 소식(소동파)의 말을 인용하면서 임금에게 올린 상언이 심금을 울린다.
 “임금은 평소에 절의있는 선비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옛날 송나라 임금이 소동파에게 ‘절의있는 선비는 어찌 알겠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동파는 ‘평시에 할 말 다하고 극간을 하는 자는 절의있는 선비이고, 아부하며 순종하는 자는 간신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고려왕조 500년 동안 정몽주와 길재 두 사람뿐입니다.”
 진정한 의리는 불의를 용납치 않고, 어떤 순간에도 할 말을 다하는 것이요, 맹목적으로 순종하고 아부하는 자는 간신의 오명을 뒤집어 쓴다는 것이다,
 새삼, ‘의리의 표상’인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를 읊어본다.
 ‘이 몸이 죽고 죽어(此身死了死了) 일 백 번 고쳐 죽어(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되어(白骨爲塵土) 넋이라도 있고 없고(魂魄有也無),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向主一片丹心) 가실 줄이 있으랴(寧有改理也歟)’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참고문헌>
 정병석, <포은 정몽주의 의리정신과 순절의 의미>, ‘민족문화논총’ 제50집,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2012
 정성식, <정몽주-한국도학의 단서를 열다>, 성균관대 출판부, 2008
 금장태, <한국유학의 탐구>, 서울대 출판부, 1999
 김영진, <철학적 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 철학과 현실사, 2004
 이승환, <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 고려대 출판부, 1998
 엄연석, <포은 정몽주의 유가적 의리실천과 역사철학적 인식>, ‘한국인물사연구’ 제11호, 한국인물사연구소, 2009
 강문식, <포은 정몽주의 교유관계>, ‘한국인물사연구’ 제11호, 한국인물사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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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금이 기거하는 침실의 동쪽과 서쪽 벽에는 재해를 입은 각 도를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거기에 고을과 수령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그런다음 세금을 감면하거나 구휼하는 조항을 행할 때마다 그 위에 친히 기록했다.”
 조선의 증흥군주라는 정조 임금의 이야기다. 무슨 말이냐면 1783년 경기·호남·동북 지역에 기근이 들자 정조 임금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급기야 정조는 자신의 침실 벽에 각 고을과 수령의 이름을 적어놓고, 세금 감면과 구휼 품목 전달을 위한 ‘상황판’을 걸어놓았다는 것이다.

 

 ■침실에 상황판까지
 국가적인 재난이 일어났을 때 임금이 침실에 까지 상황판을 걸어놓는 등 재해대책을 진두지휘했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국왕의 침실이 재난의 콘트롤타워였던 셈이다. 정조 임금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했다.
 “아!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고 백성은 나라에 의지한다. 백성이 있은 뒤에야 나라가 있다.”
 경연할 때 신하들을 돌아보며 다시 한 번 재해 때 구휼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자신이 직접 침실에 상황판을 걸어놓은 이유를 설파하고 있다.
 “백성이 굶주리면 곧 나도 배고프고 백성이 배불리 먹으면 나도 배부르다. 흉년의 재해를 구제하는 것은 빨리 서둘러야 할 일인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는 백성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것이다. 잠시라도 중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정조는 그러면서 “오늘 한 가지 정사를 행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행하여 곤경에 처한 나의 백성들을 편안한 자리로 옮겨 오도록 한 뒤에야 나의 마음이 바야흐로 편안할 것”이라 강조했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정조의 마음씨를 또 보라.
 “예전에 한 가지 일이라도 잘못 결정하면 종일토록 즐거워하지 않는 임금이 있었다. 나도 매번 밤기운이 청명(淸明)한 때에 하루 종일 한 일을 점검하여 잘 처리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일찍이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밤만 되면 하루의 정사를 돌아보며 반성하고 만약 잘못 결정한 일이 있었다면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자책했다는 얘기다.
 오로지 백성! 백성! 백성!만을 생각할 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정조는 해마다 새해 첫날이면 한해 농사를 장려하는 ‘윤음(綸音·국왕이 국민에게 내리는 훈유의 문서. 여기서는 일종의 연두교서를 의미)’을 내렸다. 한데 1784년 새해에는 윤음을 내리지 않기로 작정했다.  

 정조가 내린 윤음. 정조가 1788년 가뭄이 든 함경도 지역의 백성들을 위해 관세탕감 등을 골자로 하는 구제대책을 적어 내린 지침서이다. |국립 고궁박물관

 

 "해마다 윤음을 내렸지만 기근이 계속됐다. 그래서 나는 ‘윤음이란 모두 형식일 뿐’이라고 마음을 먹게 됐다. 차라리 밭갈고 김매는 시기를 잘 선택하는 것이 농사에는 더 좋다고 여겼다. 그러나 어느 날 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과연 정조 임금 답다. 해매다 내리던 윤음을 내리지 않으려 하니까 왠지 찜찜했던 것이다. 정조는 밤새도록 뒤척이다가 벌떡 일어나 윤음을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인간사, 정성을 바쳤는데 감동하지 않는 법이 없지 않은가. 정성껏 윤음을 내리는데 (하늘이) 응답을 해주지 않을까. 나는 내 정성만 다하면 된다.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이렇게 불러 쓰노니 관찰사와 수령들은 명심하기 바란다.”(1784년 농사권장 교서)

 

 "■‘보고서 읽기가 취미라네’
 그렇게 밤을 꼴딱골딱 세우니 신하들의 걱정이 하늘을 찔렀다.
 예컨대 1784년(정조 8년) 도제조 서명선이 정조 임금에게 “제발 건강 좀 챙기시라”고 걱정했다. 몸이 편치 않았던 정조가 아직 회복하지 않았는 데도 8도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친히 살펴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정조의 대꾸가 걸작이었다.
 “국사가 많이 지체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보는 것이네. 그리고 나는 원체 업무 보고서 읽는 것을 좋아하네. 그러면 아픈 것도 잊을 수 있지.”
 업무 보고서를 좋아하고, 그것을 읽으면 아픈 것도 잊는다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오죽했으면 1781년(정조 5년), 임금의 ‘워커홀릭’이 너무 심하다는 상소가 올라왔을까. 즉 규장각 제학 김종수가 정조 임금에게 6가지 지적질을 한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정조의 ‘워커홀릭’ 지적이다. 
 “‘작은 일에 너무 신경쓰시면 큰 일에 소홀하기 쉽습니다. 크고 실한 것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고 눈 앞의 일만 신경쓰면 겉치레의 말단입니다. 전하께서는….”    
 그러나 정조 임금은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듯 대꾸한다.
 “작은 것을 통해야만 큰 것으로 나갈 수 있고 겉치레를 통해야만 실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네.”
 정조는 “작은 것을 거쳐 큰 것으로 나가는 법”이라면서 “그 때문에 내가 작은 것이나 살핀다는 지적을 받으면서도 눈 앞에 닥친 일부터 해나가려는 이유”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김종수의 지적처럼 정조의 지나친 일중독증도 만기친람이라는 지적을 받을 만 하다.
 그러나 오로지 백성만을 생각하며 밤잡을 지새운 임금의 마음이야말로 높이 평가해줘야 하지 않을까.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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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다외교가 재개됐다?’
 최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을 국빈 방문하면서 판다 한 쌍을 도입하기로 햇다.
 지난해 6월 중국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 때 체결한 양해각서에 따라 기증된 따오기에 이어 두번째 동물외교이다.
 중국이 이른바 ‘판다외교’를 펼친 예는 많다.
 1941년 12월 중국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이 미국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에 한쌍을 기증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반일전선 구축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보낸 미국 정부를 향한 감사의 표시였다. 이후 국민당 정부가 무너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륙을 석구너한 이후에도 판다는 외교사절의 역할을 톡톡해 해냈다. 예컨대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방문 때였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는 연회장 플래카드 위에 걸린 한 점의 그림을 가리키면서 닉슨 대통령에게 말을 건냈다고 한다. 대나무 잎을 뜯어먹고 있는 판다 그림이었다.

 1994년 한중 수교 2주년을 기념해 중국측이 임대해준 판다 밍밍과 리리 부부. 1998년 외환위기 때 다시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선물이 아니라 임대
 “저 두 마리를 당신에게 선물로 보내겠습니다.”
 총리의 약속대로 판다 암컷 링링(娘娘)과 수컷 싱싱(星星)은 ‘중미 수교의 특사’로 미국 워싱턴 국립동물원에 보내졌다. 링링과 싱싱은 역사적인 중미 수교의 상징으로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링링과 싱싱은 그다지 행복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후세를 남기지도 못했고, 부인 링링은 1992년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혼자 남은 싱싱 마저 1999년 11월 고령에 따른 심장질환 합병증으로 안락사되고 말았다. 판다의 평균수명(15살)보다 13년 정도 더 장수한 것을 위안으로 삼았을 뿐이다. 대나무 죽순만 먹고 사는 판다는 중국의 고지대에서만 1500~1600마리 정도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진 멸종 위기 희귀종이다.
 1983년부터는 판다외교의 형태가 바뀌었다. 워싱컨 조약 발효로 희귀동물을 다른 나라에 팔거나 기증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돈을 받고 장기임대하는 형식으로 판다외교가 변화한 것이다. 그렇기에 중국의 ‘판다외교’는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누누이 강조하듯 아무런 조건없는 ‘선물’이 아니라 ‘유상 임대’ 형식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금까지 판다 50여 마리를 미국·일본·벨기에 등에 임대형태로 선물한 바 있다.      
 사실 한국을 향한 판다외교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4년 중국이 한·중 수교 2주년을 기념, ‘밍밍(明明)’과 ‘리리(莉莉)’를 임대 형태로 선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판다를 임대하고 관리하는 문제는 보통 일이 아니다. 판다 전용 축사를 세우고, 중국인 전용 사육사를 둬야 한다. 초기비용만 100억원이 훨씬 더 든다는 것이다. 게다가 판다 한 쌍을 들어오는데 필요한 공식 임대료만 1년에 100만 달러씩 꼬박꼬박 내야 한다. 이 비용은 ‘판다 연구비’라는 이름으로 중국 정부 산하 야생동물보호 관련 협회에 지급돼 멸종 위기의 희귀동물인 판다의 번식을 연구하는 데 쓰인다.
 당시 에버랜드로 임대된 ‘밍밍과 리리’는 1998년 불어닥친 외환위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중국에 반환되고 말았다.

 

 ■코끼리 유배사건
 동물 외교의 예는 옛 문헌에도 심심찮게 나온다. 예컨대 1413년(태종 13년), 진풍경이 일어난다. 
 “(코끼리가) 사람을 해쳤습니다. 사람이라면 사형죄에 해당되지만…. 전라도의 해도(海島)로 보내야 합니다.”
 병조판서 유정현이 이른바 ‘코끼리의 유배’를 진언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인 원의지(源義智·아시카가 요시모치)가 ‘동물외교’의 일환으로 바친 코끼리였다. 그런데 코끼리가 공조판서를 지낸 이우(李玗)를 밟아죽인 참극을 벌인 것이다. 이우가 “뭐 저런 추한 몰골이 있냐”며 비웃고 침을 뱉자, 자극을 받은 코끼리가 그만 사고를 친 것이다. 가뜩이나 ‘관리 비용’ 때문에 미운털이 박혔던 코끼리였더, 1년에 콩 수백석을 먹어댔기 때문에 골치를 앓았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해진 코끼리의 유배지는 전라도 장도(獐島)였다. 그런데 6개월 후 전라 관찰사가 눈물겨운 상소문을 올린다.
 “(코끼리가) 좀처럼 먹지않습니다. 그러기에 날로 수척해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상소문을 받아본 태종 임금조차 ‘울컥’했다.
 “불쌍하구나. 코끼리를 풀어주어라.”
 임금의 명에 따라 코끼리는 유배지에서 풀려 육지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 코끼리의 운명은 기구했다.
 한번도 너무 많이 먹어치우는 바람에 관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에컨대 6년 뒤인 1420년(세종 2년) 전라도 관찰사는 “너무 많은 먹이를 축내 백성들이 괴롭다”면서 이른바 ‘순번 사육’을 제안한다. 전라도 뿐 아니라 충청도와 경상도도 문제의 코끼리를 교대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상왕(태종)은 잔라관찰사의 상소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코끼리는 전라도~충청도~경상도를 떠돌며 사육 당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떠돌이’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을까. 스트레스를 받은 코끼리가 또 사고를 쳤다. 1421년(세종 3년), 충청도 공주에서 코끼리를 기르던 사육사가 그만 코끼리에 채여 사망하고 만 것이다. 충청도 관찰사가 폭발했다.
 “코끼리는 나라에 유익한 동물이 아닙니다. 먹이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열 갑절은 됩니다. 하루에 쌀 2말, 콩 1말 씩 먹는데, 1년으로 치면 쌀 48섬, 콩 24섬입니다. 게다가 화가 나면 사람을 해치니, 도리어 해만 끼칠 뿐입니다. 다시 바다 섬 가운데 목장으로 보내소서.”
 상소를 들은 세종은 “물과 풀이 좋은 곳으로 코끼리를 두라”고 명한 뒤 신신당부한다.
 “제발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

1972년 중 미 수교 때 화합의상징으로 보냈던 판다 한 쌍. 그 중 암컷인 링링은 1992년 죽었고 수컷 싱싱만이 살았지만 1999년 심장합병증으로 안락사했다.  

 ■공작새 유배사건의 전말
 코끼리 뿐이랴. 외교선물로 바친 공작새가 유배를 떠나야 했던 사연도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선조 22년)의 일이었다. “조선을 복속시키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밀명에 따라 조선을 방문하고 있던 종의지(宗義智·소 요시토시)가 공작 1쌍과 조총, 그리고 창과 칼 몇 점을 바쳤다. 조선 조정은 생전 처음보는 조총은 환영했지만, 공작새 선물은 ‘계륵’이었다. 조정은 공작의 처리를 두고 골머리를 앓았다. 허성 같은 이는 ‘공작은 돌려보냄이 옳다’면서 나름의 묘책을 냈다.
 “일본 사신에게 말씀하십시오. (성의는 가상하지만) 내(선조)가 원래 진금(珍禽)을 좋아하지도 않고 조선의 풍토에도 맞지 않으니 되돌려 보낸다’고…. 그러면 외교적인 결례는 범하지 않을 것인데….”
 선조는 “그 말이 맞지만, 저들이 공연한 의심을 하면 안될 것”이라고 고개를 내젓고 고심을 거듭한 끝에 궁여지책을 내놓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자. 일본 사신(종의지) 일행이 떠난 뒤를 기다렸다가 공작을 제주도로 보내라.”
 그러나 예조는 “공작을 제주까지 수송하기는 어렵다”는 간했다. 그러자 선조는 “그렇다면 공작을 ‘수목이 울창한 남양(고흥)의 외딴 섬’으로 옮기라”는 명을 내렸다. 이것이 ‘공작새 유배사건’이다.

 

 ■동물외교를 마냥 환대할 수 없는 이유
 옛날 군주들이 외국의 ‘동물사절’을 마냥 환영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토종이 아닌 해외의 진귀한 짐승에 빠지면 뜻을 상하게 되고 나라마저 위태롭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는 옛날 주나라 무왕의 고사에서 비롯된 관념이다. 은(상)을 멸하고 새왕조(주나라)를 창조한 무왕에게 각국의 외교사절이 선물을 바쳤다. 그 가운데 서방의 소국인 서려(西旅)가 오(獒)라는 명견(名犬)을 바쳤다. 하지만 태보인 소공 석은 “절대 받아서는 안된다”는 글을 지어 바친다.
 “개와 말은 토종이 아니면 기르지 말고, 진귀한 새와 짐승은 나라에서 기르지 마소서. 잘못하면 큰 덕에 누를 끼칩니다. 아홉 길의 산을 만드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서 공(功)이 이지러집니다.”(<서경> ‘여오(旅獒)’)
 진기한 동물, 특히 토종이 아닌 외국산에 빠져 백성을 돌보는 데 소홀히 하면 창업의 공든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간언에 따라 무왕도 일절 진상동물을 받지 않았다. 조선의 임금들도 외국에서 보내온 진금기수(珍禽奇獸)를 100% 환영할 수 없었다.

 

 ■연산군의 반전매력
 예컨대 성종 임금은 왜인에게 원숭이를 받은 것을 후회하면서 “내가 바로 뉘우치고 예조에 명해 다시는 바치지 못하게 했다”고 전했다.(1478년·성종 9년)
 연산군도 그랬다. 1502년(연산군 8년) 일본이 암원숭이를 바쳤다. 그 때 연산군은 ‘주 무왕의 일화’를 자세히 인용하면서 “받지말라”는 명을 내린다.
 “일본이 예전에(세조 때의 뜻함) 앵무새를 바쳤는데 이 앵무새는 값만 비싸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한다. 지금 또 암원숭이를 바치고자 하는데 도로 돌려주고 받지 않겠다는 뜻으로 점잖게 타이르라.”
 세조 때 일본이 바친 앵무새는 무려 명주 1000필의 값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받은 앵무새의 가격이 비싼만큼 조선도 일본에 그만큼의 하사품을 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연산군은 그걸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신들은 “외교 결례이며 자칫하면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우려하면서 “암원숭이를 받아야 한다”고 간한다.
 “진상품을 받지 않으면 대국(조선)으로서 먼나라(일본) 사람들을 대우하는 도리에 어긋납니다.”(성준) “요즘 대마도 왜인들의 원망이 많은데 만약 원한을 품고 돌아간다면….”(이극균) 
 백성들의 삶에 되레 해를 끼칠 뿐이라는 임금과, 외교적인 결례로 자칫 분쟁의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간언하는 신하들…. 과연 폭군이라는 연산군 시대, 그것도 말년의 일화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만부교 상상도.

  ■지금도 미스터리인 만부교사건
 ‘동물외교’는 그리 간단한 외교문제가 아니었다. ‘동물외교’에 잘못 대웅해서 온 나라가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진 예도 있으니까…. 
 고려 태조 왕건 시기에 일어난 ‘만부교 사건’이 그것이다. 942년 10월, 신흥강국 거란이 태조 왕건에게 30명으로 구성된 사절단과 함께 낙타 50필을 보냈다.
 그러나 태조가 충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거란의 사절단 30명을 모두 절도에 귀양보내는 한편, 낙타 50필을 송도 만부교 밑에 매어놓아 굶어죽게 만든 것이다. 태조는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거란은 예전부터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 갑자기 옛 맹약을 돌보지 않고 하루 아침에 멸망시켰다. (거란의) 무도함이 심하다. 그러니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으면 안된다.”(<고려사절요>)    
 만부교 사건으로 거란과 고려는 단교했으며, 고려는 결국 3차례에 걸친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이 만부교 사건은 당대는 물론 지금 이 순간까지도 논란을 불어일으키는, ‘의아한’ 외교분쟁이다. 만부교 사건 후 360여 년이 지난 뒤 충선왕(재위 1308~1313)도 이제현(1287~1367)에게 궁금해 죽겠다는 듯 물었다.  “임금이 낙타를 수십마리 정도 키운다고 해서 그 피해가 과연 백성들에게 이를까. 그저 낙타를 돌려보내면 될 일을 태조께서는 왜 굶어죽였는지 모르겠구나.”
 당연히 생기는 궁금증이었으라. 이제현도 충선왕의 송곳질문을 듣고 대답이 매우 궁했던 것 같다.
 “후세 사람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반드시 숨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현의 말마따나 태조 왕건의 ‘숨은 뜻’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사실 하나. 외교사절 자격으로 온 낙타 50마리를 굶어죽임으로써 나라와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사회에티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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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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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탈 많은 짐승외교 – 시진핑이 주(?)겠다는 팬더를 받지 말아야!

    Tracked from 깨몽 누리방(우리말 누리방) 2014/07/08 20:23  삭제

    어찌도 세상은 이리 바뀌지 않고 돌고 도는지&#8230; ㅡ.ㅡ 이번에 시진핑(习近平;습근평)이 들어오면서 서로 친해보자며 판다(팬더?)를 주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이게 그냥 주는 게 아니고 &#8216..

 “당세의 가호(歌豪) 이세춘은 10년간 한양 사람들을 열광시켰지.(當世歌豪李世春 十年傾倒漢陽人) 기방을 드나드는 왈자들도 애창하며 넋이 나갔지.(靑樓俠少能傳唱 白首江湖解動神)
 18세기 사람인 신광수(1712~1775)가 남긴 <석북집>의 ‘증가자이응태(贈歌者李應泰)’라는 시의 구절이다.
 무슨 내용인가. 신광수는 호걸가수 이세춘의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거듭했으며, 10년간이나 유흥업소에서 애창됐음을 전하고 있다. 신광수가 이 시를 지은 것이 1761~63년 사이였다. 따라서 이세춘은 1750~60년 사이 조선의 가왕(歌王)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평양감사향연도> 가운데 ‘월야선유도’. 달밤에 대동강변에서 벌어지는 선상연회의 장면이다. 이세춘 그룹의 게릴라콘서트도 이같은 분위기에서 펼쳐졌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세춘 그룹의 결성
 이세춘은 특히 지금까지 통용되는 용어인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시조’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새 장르의 노래를 뜻하는 ‘시조’는 기존의 노래를 뜻하는 고조(古調·엣날 노래)와 구별되는 개념이었다. 한마디로 이세춘은 기존의 노래법과 전혀 다른 레파토리를 구사한 가수였던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세춘이 ‘솔로’라기보다는 ‘밴드’였다는 것이다. 18세기 조선을 풍미한 ‘이세춘 밴드’라. 다음 문헌을 보라.
 (1)“어느 날 심공(沈公)이 남자가객 이세춘과 기생 추월·매월·계섬 등 여성가객, 그리고 금객(琴客) 김철석이 초당에 앉아 거문고와 노래로 밤이 이슥해 갔다.”
 (2)“이 판서 댁에서 피리와 노래 소리가 요란했다. 이 판서와 인사를 나눈 후 노래를 불렀다. 금객 김철석, 가객 이세춘, 기생 계섬·매월 등이 함께 했다.”
 찬찬히 뜯어보자. 당대 연예계에서는 남성보컬인 이세춘을 중심으로, 거문고 주자인 김철석, 그리고 여성보컬인 추월·매월·계섬 등이 그룹으로 활동했다는 기사내용이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이세춘 그룹’이라 일컫는다. 물론 당대에는 유명한 김천택이나 김수장 같은 가수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중인계층이었다.
 반면 이세춘은 물론 이세춘과 이따끔씩 프로젝트 그룹을 구성하기도 한 송실솔 등은 노래로 생계를 꾸려가는 전문가수들이었다.
 

'월야선유도'의 전체그림. 대동강변에는 이세춘 그룹 같은 당대 최고의 가객들이 펼치는 공연배틀을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이세춘 그룹의 평양공연 때는 연주소리가 연광정까지 들렸다고 한다. 

 

 ■18세기 연예기획사 ‘SY’
 그런데 이세춘과 송실솔의 뒤를 봐주는 사람들, 즉 일종의 후원자들이 존재했다는 것이 또한 흥미롭다. 
 예컨대 (1)에 등장하는 심공(沈公)이라는 사람은 이세춘 그룹을 후원했던 문사 심용(1711~1788)를 일컫는다. 시쳇말로 패트론(patron·후원자), 혹은 스폰서라 할 수도 있겠고, 혹은 일종의 연예기획사 사장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요즘 이름을 지었다면 심용이 차린 기획사의 이름은 ‘SY’가 아니었을까.
 (1)(2)에서 나오는 이세춘 밴드의 멤버인 계섬과 추월 등도 만만한 가수가 아니었다. 당대의 가요계를 쥐락펴락한 스타였다.
 계섬(桂纖)이라는 여가수를 보자. 그는 황해도 송화현의 계집종이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시랑 원의손(1726~81)의 수하에 있다가 대제학을 지낸 이정보(1693~1766)의 문하에 들어갔다.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말 한마디에 마음이 상해 결별했다”고 한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이정보는 은퇴 후 많은 가수(명창)들을 문하에 두었는데, 계섬은 그 가운데서도 수제자였다.
 계섬의 이야기를 담담히 써내려간 심노숭(1762)의 시문집인 <효전산고> 중 ‘계섬전’은 이 대목에서 재미있는 강조점을 담는다.
 “이정보는 문하의 명창들 가운데 계섬을 가장 사랑해서 늘 곁에 두었다. 이정보는 계섬의 재능을 기특하게 여긴 것이지, 사사롭게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대제학을 지낸 이정보가 계섬의 노래실력을 아낀 것이지, ‘여자로서’ 좋아하지는 않았음을 굳이 변명해주고 있다.
 계섬은 이정보의 문하에서 악보를 보고 여러 해의 과정을 거쳐 노래연습에 전념했다. 일종의 연습생 신분이었던 것이다.  

<평양감사 향연도> 가운데 '부벽루 연회도'.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춤과 노래가 어우러지고 있다.

 ■조선 최고의 보컬트레이너
 그의 노래는 일취월장했다. 노래를 할 때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어 소리가 짜랑짜랑, 집안에 울려퍼졌다. 계섬의 노래는 조선 전역에 떨쳤다. 지방의 기생들이 서울에 와서 노래를 배울 때는 모두 계섬에게 몰려들었다.
 학사와 대부들이 너도나도 노래와 시로 계섬을 칭찬했다. 훗날이지만 계섬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초대받아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노래’를 부르는 영예를 안았다. 옛 주인인 원의손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새 주인인 이정보를 찾아와 “계섬을 다시 돌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원의손과 좋지않은 상태로 결별한 계섬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한다. 이를테면 옛 기획사 복귀를 거부한 것이다.
 계섬은 자신을 그토록 아끼던 이정보가 죽자, 마치 부친상을 당한 것처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이후 이정보를 잊지못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이후 기생의 신분에서 벗어난 계섬의 마지막 주인은 심용이었다. 평소 풍류를 좋아한 심용은 계섬의 노래를 워낙 좋아해서, 그녀를 문하에 두었다.
 아마 그 때 심용의 ‘기획사’에서 이세춘과 인연을 맺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계섬은 요즘으로 치면 첫번째 기획자인 원의손과 결별한 뒤 두번째 기획사인 이정보를 거쳐 세번째인 심용 기획사에서 만개한 것이다.      
 이세춘 그룹의 또 다른 멤버인 추월은 가무(歌舞)와 자색(姿色)으로 유명한 ‘얼짱 댄스가수’였다. 공주 기생 출신이었다.
 궁중의 상방(尙方·임금의 의상을 책임지던 관청)에 들어갔는데 풍류객들 사이에서 수십년간 큰 인기를 끌었다.
 제3의 멤버 매월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매월은 원래 종친인 이익정(1699~1782)의 ‘가희(歌姬)’였다가 이세춘 그룹의 일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멤버 김철석(1724~76)은 일명 철돌(鐵突)이라 일컬어지며 당대 거문고의 명수로 명성이 자자했다. 

 

 ■게릴라 콘서트 혹은 히든싱어
 이세춘 밴드의 흥미진진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기획사 사장격인 심용이 이세춘 그룹에 넌지시 제안했다.
 “너희들. 평양 한번 가보지 않겠는고?”(심용)
 “가보고는 싶지만 아직….”(이세춘 그룹)
 “평양감사가 대동강 위에서 잔치를 벌인다는구나. 평안도 모든 수령들과, 이름난 기생들, 그리고 명가수들이 다 모인다는구나. 육산주해(肉山酒海)를 이룬다고 하는데…. 우리 한번 가볼까. 한번 걸음에 심회(心懷)를 크게 발산할 수 있고, 전두(纏頭·공연후 받는 사례금품)로 비단과 돈을 많이 받을 것이니….”(심용)
 “(모두들 손뼉을 치며) 그거 좋습니다.”(이세춘 그룹 일동)
 무슨 말인가. 쉽게 말하면 ‘기획사 사장’인 심용이 이세춘 그룹에게 ‘평양감사의 회갑연’에서 공연 한 번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이다. 그러자 이세춘 그룹이 모두 손뼉을 치면서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찬성하고 나선 것이고….
 심용이 말하는 평양감사는 아마도 신회(1706년~?)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일화는 아마도 신회가 평양감사로 재직하던 1765~66년 사이에 있었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세춘 그룹의 평양공연은 깜짝쇼였다. 초대받지 않은 공연이었다는 것이다.
 심용과 이세춘 그룹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금강산 유람’을 다녀온다고 소문낸 뒤 종적을 감췄다. 그리고는 몰래 평양 성내로 잠입한 뒤 모처에 숙소를 잡았다.
 평양감사의 잔치가 열린 다음 날, 심용은 작은 배 한 척을 빌려 차양막을 치고, 좌우에 주렴을 드리웠다. 이세춘 그룹 멤버들은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배는 능라도와 부벽정 사이에 숨겨두었다.
 이윽고 풍악이 울리고 돛배가 강물을 뒤덮었다. 평양감사는 층배에 높이 앉았고 여러 수령들과 함께 잔치를 벌였다. 맑은 노래와 기묘한 춤에 그림자는 물결 위에서 너울거리고 성머리와 강둑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 때 심용이 노를 저어 나갔다. 평양감사의 층배가 보이는 곳에 배를 멈췄다. 그리곤 저쪽 배에서 검무를 추면 이쪽에서도 검무를 추고, 저쪽 배에서 노래를 부르면 이쪽 배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마치 흉내내는 것이었다.”
 어떤가. 마치 ‘히든싱어’를 보는 듯 하지 않는가. 잔치에 모인 평양감사 등이 이상하게 여겼다.
 “저 배를 바라보니 검광이 번쩍이고 춤과 노랫소리가 구름을 가로막는구나. 범상치않은 사람들이겠다. 저 배를 끌고 오라.”
 끌려온 심용이 평양감사의 층배 머리에 이르자 주렴을 걷고 껄껄 웃었다. 사실 심용과 평양감사는 친분이 깊던 사이였다. 심용이 이끄는 이세춘 그룹의 깜짝공연이었던 것이다. 평양감사 역시 넘어질듯 놀라며 반가워했다.

 

<평양감사 향연도> 가운데 연광정에서의 연회도.

 ■깜짝 공연의 개런티
 사실 평양감사의 회갑연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서울출신이었다. 그러니 서울에서 온 이세춘 그룹의 공연을 대하고 한결같이 기뻐했다. 이세춘 그룹 멤버와 현지의 평안도 그룹은 평생의 재주를 모두 발휘해서 온종일 공연했다. 이를테면 ‘공연배틀’을 벌인 셈이다. 배틀의 승자는 물론 이세춘 그룹이었다.
 “그런데 서도의 가무(歌舞)와 분대(粉黛·화장법)는 아주 무색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이세춘과 김철석, 그리고 기생 추월·매월·계섬 등 서울 그룹의 춤솜씨 및 화장법과, 서도(평안도) 그룹과 수준차가 났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초대받지 않은 깜짝 공연이었음에도 심용과 이세춘 그룹은 엄청난 개런티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세춘 그룹의 공연에 감명을 받은) 평양감사가 서울 기생에게 1000금을 주었다. 다른 벼슬아치들도 각자의 위치에 따라 상금을 내놓았다. 거의 1만금에 가까운 돈이 들어왔다,”
 결국 심용과 이세춘 그룹은 10일 넘게 평양여행을 즐긴 뒤 돌아왔다. 낭만은 낭만대로 즐기고 개런티는 개런티대로 받고…. 여기에 평양 사람들도 조선 최고의 인기밴드가 펼치는 깜짝 공연을 마음껏 즐겼고….
 사실 이세춘 그룹의 공연은 당대 평양사람들에게는 문화적인 충격으로 다가갔던 것 같다. 신광수의 <석북집> 가운데 평양의 풍속을 다룬 ‘관서악부’를 보자.
 “처음 부르는 창을 듣자니 모두 양귀비의 노래일세.~ (이 노래를) 일반 시조로 장단에 맞춰 부르는 이는 장안에서 온 이세춘일세.(初唱聞皆說太眞~一般時調排長短 來自長安李世春)”
 무슨 말인가 하면 당대 평양의 가객들은 공연을 펼칠 때마다 모두 양귀비(태진)의 사연을 담은 노래를 선창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세춘은 이 양귀비 노래를 평양에 소개하면서 서울에서 유행중이던 새로운 스타일(일반 시조)로 장단을 배열했다는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불규칙장단
 이세춘은 이 새로운 장단으로 평양시민들을 열광시켰을 것이다.

 

 ■억지 공연의 대가
 이렇게 신명나는 공연이 있었지만, 그 반대의 공연도 있었다.
 예컨대 이세춘 그룹은 앞서 인용한 (2)의 사례, 즉 이 판서 댁의 공연을 즐겁게 마쳤다. 그런데 이판서 댁 공연에서 보았던 다른 대감이 며칠 뒤 이세춘 그룹을 초청했다. “자기 집에서도 공연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감의 태도는 영 불손했다. 명령조로 “노래 부르라”고 명했다. 기분을 잡친 이세춘 그룹이 마지못해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는데,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판서 댁에서는 노래가 시원했는데 지금은 소리가 낮고 느즈러졌다. 내가 음악을 무른다고 무시하는 것이냐. 싫어하는 것이냐.”
 이 때 추월이 눈치를 채고 대감을 진정시켰다.
 “처음이라 그렇사옵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면 구름을 뚫고 들보를 흔드는 소리로 금방 울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멤버들과 눈짓을 나눈 뒤 대뜸 우조(羽調)로 잡사(雜詞)를 시작했다. 무조건 큰 소리로 잡스러운 가사를 질러댄 것이다. 음악을 들을 줄 몰랐던 대감은 부채로 책상을 치며 “맞아! 노래는 이렇게 부르는 거야”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세춘 그룹을 대접하는 대감의 무례가 지나쳤다. 시원찮은 술대접에 마른 포만이 안주로 나왔으니까….

 

 ■이세춘 그룹의 노래
 이세춘 그룹의 작품으로 남아있는 곡은 단 2곡 뿐이다. 아마도 창작보다는 가창에 전념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무척 흥미로운 한 곡을 보자.
 “화당 빈객 만좌중에 줄 고르는 왕상점(王上點)아. 너희 집 출두천(出頭天)이 좌칠월(左七月)가 산상산(山上山)가 진실로 산상산이면 여아동침(與我同寢)하리라.”
(청구영언)
 가사 가운데 왕상점(王上點)은 왕(王) 위에 점(點)을 찍었다는 뜻이다. 주(主)자를 뜻한다. ‘출두천(出頭天)’은 머리를 내민 천(天)이니 부(夫)자를 의미한다. 또 ‘산상산(山上山)’은 산(山)자 위에 산(山)이 있다는 말이니, 출(出)자를 뜻한다. 또 좌칠월(左七月)은 유(有)자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 내용은 기생집에서 기생을 유혹하면서 ‘한번 동침하면 어떠냐’고 은근들썩 눙치는 노래이다. 말장난으로 가득찬 노래가 아닌가. 그랬으니 10년간이나 서울의 유흥가를 휩쓸었을 것이다.    

 

 ■서평군-송실솔 콤비
 심용-이세춘 콤비와 쌍벽을 이루는 사람들이 서평군(이요)-송실솔 콤비였다.
 송실솔의 후원자는 왕족인 서평군 이요였다. 부자였고, 협객이었던 서평군은 음악을 유독 좋아했는데, 송실솔의 노래에 흠뻑 빠졌다. 서평군은 송실솔을 데리고 다녔다. 송실솔이 노래할 때마다 서평군은 반드시 스스로 거문고를 연주했다. 언젠가 서평군이 송실솔에게 “내 거문고가 너의 노래를 따라가지 못하도록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일종의 배틀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자 송실솔은 늦게, 빠르게 자유자재로 노래를 불러 서평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서평군은 송실솔의 노래에 따라 궁성을 뜯다가 각성을 울다가 정신없이 여음(餘音)을 고르다 하며 따라가기 급급했다. 서평군은 결국 송실솔의 노래에 맞추려다 자신도 모르게 술대를 떨어뜨렸다. 서평군은 “정말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감탄했다.
 서평군-송실솔 콤비는 어찌보면 심용-이세춘 콤비와 쌍벽을 이뤘다. 그러나 음악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친분을 쌓았다. 송실솔은 특히 이세춘과 일종의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할 정도였다. 한번은 이세춘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송실솔이 조문을 했는데, 문에 들어서면서 상주(이세춘)의 곡소리를 듣고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이건 계면조일세. 평우조로 받는 것이 마땅하지.”
 상주가 계면조로 곡을 하니, 문상객은 평우조로 받아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송실솔은 영전에 나가 슬픈 곡조(계면조)가 아니라 일반 노래(평우조) 같은 곡을 했다. 이 일화가 호사가들의 입방앗거리가 되어 널리 퍼졌고, 듣는 이들마다 모두 웃었다.(이옥의 <문무자문초> 중 ‘가장 송실솔전’)
 송실솔은 어릴적 노래를 배울 때 폭포수 밑에서 날마다 노래연습을 했다. 1년을 그렇게 하자 노랫소리만 남고 폭포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또 북악산 꼭대기에 가서 까마득히 높은 곳에 기대어 또 1년간 노래를 부르자 회오리 바람도 그의 소리를 흐트러뜨리지 못했다.
 이 때부터 그의 노래는 구슬처럼 맑았으며, 연기를 날리듯 가냘프고 구름이 가로걸리듯 머물렀으며, 철맞은 꾀꼬리 같이 자지러졌다가 용이 울듯 떨쳤다고 한다.
 송실솔의 ‘실솔(실솔)’은 귀뚜라미와 같은 소리를 낸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     

 

 ■얼굴없는 가수
 이밖에도 조선을 주름잡은 가수와 댄서들이 많았다.
 외모는 추악했지만 애절하고 원망하는 듯 처절한 목소리로 구름을 멈추게 한 금향선은 또 어떤가. 금향선의 외모를 보고 비웃었던 당대의 문사들은 그의 노래를 듣고는 “끓어오르는 춘정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한다.(안민영의 <금옥총부>) 한마디로 섹시한 목소리가 금향선의 장점이었던 것이다.
 판소리 8명창 가운데 한사람인 모흥갑(1822~1890)도 유명하다. 절대고음을 자랑한 그는 후세사람들로부터 ‘설상(雪上)에 진저리치듯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소리는 고동상성(鼓動上聲)이라 했다. 그가 평양감사로 초청받아 평양 연광정에서 소리를 할 때 10리까지 들렸다고 한다.
 남학이라는 가수의 노래는 벽을 사이에 두고 들어야 했다. 왜냐면 생김새가 추한 가수였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치면 ‘얼굴없는 가수’를 컨셉트로 삼았다고 할까. 얼굴은 방상(方相·귀신)같고 눈은 난쟁이 같았으며, 코는 사자같고, 수염은 늙은 양 같았다. 눈은 미친개 같고 손은 엎드려 있는 닭발 같았다니…. 그러나 그의 노래는 아주 맑도 곱고 부드러웠다. 타고난 미성으로 여자 목소리를 잘 내는 것이 특기였다.       
 그러니 벽너머에서 들으면 여인들의 혼이 흔들리고, 마음이 격동했다. 그러나 얼굴이 드러나기만 하면 기생들이 멍하니 앉아있기도 하고, 때로는 깜짝 놀라 울기도 하고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이옥의 <청남학가소기>)
 그 뿐인가. 세종시대의 구종직(1404~77)은 문과에 급제해서 교서관에 배치됐다. 하루는 몰래 편복 차림으로 경회루 구경을 나왔다가 임금(성종)과 마주쳤다.
 구종직은 임금의 명으로 구성진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는데, 그 소리가 들보를 흔들었다. 그는 임금의 명령으로 다시 <춘추> 한 권을 다 외었다.
 그러자 성종은 그에게 술을 하사했으며, 다음날 대사간으로 임명해버렸다. 구종직은 결국 노래를 잘 불러 국왕의 과실을 지적하는 대사간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차천로의 <오산설림초고>)

 ■K팝의 조상들
 그러고보면 노래와 춤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는 민족이 아닌가.
 “연일 음식과 가무를 즐겼다(連日飮食歌舞). 밤낮으로 길을 가다가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하루종일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는다”(<삼국지> ‘위서·동이전 부여조’)
 “(5월이면) 파종을 마치고 신령께 굿을 올린 뒤 무리가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시는데 밤낮으로 쉼이 없다.”(<삼국지> ‘위지·동이전 마한조’)
 이런 기록도 있다.
 “동이는 모든 토착민을 인솔하여 즐겁게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그릇은 조두(俎豆·제기)를 쓴다. 중국에서 예를 잃어버리면 사이(四夷)에서 구한다는 것은 믿을 만 한 일이다. (중국) 천자가 본보기를 잃으니 이것을 사이에서 구했다.”(<후한서> 동이전 등>
 하기야 동이족인 공자도 ‘만능 뮤지션’이었다. 평소 거문고를 뜯고, 경(磬·돌 혹은 옥으로 만든 타악기)을 치고 노래를 불렀다니 말이다.
 지금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K팝의 전통은 이렇게 뿌리가 깊은 것이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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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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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저기가 비무장지대가 맞나.”
 강원 철원 홍원리 평화전망대에 오를 때마다 색다른 느낌을 갖는다. 비무장지대란 높고 깊은 산악지대, 즉 사람들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게 일반상식인데…. 그러나 철원은 해발 220~330미터 위 용암대지에 펼쳐진 드넓은 평원이다. 당장이라도 논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평야를 품에 안고 있는 저편 고지와 능선의 이름, 그리고 사연을 알게 되면 나른한 평온이 깨진다.
 전망대에서 맨 왼쪽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백마고지다. 이곳에서는 1952년 10월6일부터 백마고지를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수 만 명의 인명피해를 주고받은 뒤 마침내 한국군 9사단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백마고지는 지금 민간인들은 갈 수 없는 남방한계선 북쪽에 있다. 주변의 산인 고암산(780미터)은 일명 김일성 고지이며, 곁의 능선 별칭은 피의 500능선이다. 또 이어 낙타고지…. 그리고 또 하나, 철의 삼각지대 맨 위 꼭지점인 평강(지금은 북한)이 있다.
 그 유명한 백마고지를 지근거리에서 보려면 평화전망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백마고지 전적지와 기념관이 있는 철원읍 산명리 삼봉산 기슭으로 가야 한다,
 전적기념관 앞에 서면 백마고지가 지호지간이다. 이곳에서 잠시 묵념을 올린다. 폭 2킬로미터, 길이 3킬로미터에 불과한 저 작디작은 야산에서 죽어갔을 1만8000여 젊은 넋을 기리며 말이다.  




 

 ■백마고지 전투가 무엇이기에
 백마고지 전투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수많은 젊은 넋이 스러져 갔을까.
 이 전투는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진 1952년 10월초 중국군의 공세로 시작된 52년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다. 52년 10월6~15일까지 고지를 지키던 국군 9사단이 중국군 38군의 공격을 받아 10일간 혈전을 벌였다. 이곳은 철원평야를 지키기 위해서는 잃을 수 없는 요처였기 때문이다.
 강원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 있는 이 야트막한 야산은 철원읍 서북방 12㎞ 지점에 있다. 효성산 남쪽 끝자락이다. 원래는 평범한 야산이었지만 휴전회담 이후 군사접촉이 계속되자 일약 핵심지역으로 부상했다.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대 중 서남쪽 철원 꼭짓점의 어깨를 구성하는 요충지였다. 철원평야가 한 눈에 보였고, 만약 이곳을 잃을 경우 아군부대의 병참선인 3번 도로(경원선)를 비롯한 통로를 사용할 수 없었다.
 1952년 10월6일부터 15일까지 10일간의 전투에서 7차례나 고지의 주인공이 바뀌었으며, 밤낮으로 12차례나 쟁탈전이 반복되었다.
 우리 측 자료에 따르면 공산군의 인적손실은 전사자 8234명을 포함, 추정 살상자 6098명과 포로 57명 등 모두 1만4389명에 이르렀고, 아군의 사상자도 3416명에 달했다. 작전기간 중 공산측은 5만5000발, 아군은 21만9954발 등 모두 27만4954발의 포탄이 집중됐다.




 처절한 전투가 벌어진 베티고지(왼쪽 야트막한 고지)와 임진강 곡류부분 안쪽에 반달모양으로 서있는 노리고지. 임진강 따라 북쪽으로 가면 북한이 조성한 임진강댐이 보인다. 베티고지와 노리고지 사이, 임진강변에 왠지 적석총 같은 모양의 봉긋한 지형이 보인다. 

 유엔군 항공기는 754회나 출격, 이 작은 고지에 융탄폭격을 퍼부었고, 정상부엔 그야말로 풀 한포기 남아있지 않았다. 원래 이 고지는 전투가 개시되었던 10월10일까지도 그저 395고지로 일컬어졌다. 그런데 전투가 한창이던 11일 갑자기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설이 난무한다. 포격으로 고지의 나무와 수풀이 모두 쓰러진 뒤 산의 형태가 마치 백마처럼 보였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고, 조명탄 투하로 산이 하얀 낙하산 천에 뒤덮인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외신기자들이 붙였다고도 한다.
 이밖에도 어느 참전 연대장이 외신기자의 질문에 ‘White horse hill’이라고 대답한 것이 보도됐다는 등 갖가지 설이 난무한다.
 어쨌든 한국군 9사단은 이 전투의 승리로 철의 삼각지대 상당부분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철원평야와 주요 도로(3번, 463번, 464번), 즉 전선후방의 철원~김화~화천에 이르는 측방도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 전쟁의 고지 쟁탈전에서도 대표적인 승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1만8000여 젊은 넋의 희생을 대가로 차지한 이 백마고지를 지금 밟을 수 없다. 비무장지대 안으로 편입되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핏물이 능선을 타고 계곡으로 흘렀다고 해서피의 능선이라 했다. 얼마나 포탄세례를 받았는지 민둥산이 되었다. 

 ■베티고지 전투의 영웅
 고개를 갸웃거리며 임진강 곡류가 급한 물살을 이루며 흐르는 이른바 ‘베티고지’로 가본다.
 경기 연천 서쪽 15킬로미터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이른바 베티(Betty)고지 역시 지금은 갈 수 없는 비무장지대 안에 있다.
 태풍 전망대에서 손을 뻗어 볼 뿐이다. 최전방 지역을 답사하다보면 전쟁과 분단, 냉전이 주는 팽팽한 긴장감을 일순 잊게 된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그 절경에 취하게 되니까…. 
 천혜의 비경을 뽐내며 흐르는 임진강의 곡류. 그 사이에 펼쳐지는 짙푸른 산과 들판. 갈 수 없어 더 가고 싶고, 품에 안을 수 없어 더 안고 싶은 저 강, 저 들판이 아니던가. 그런데 심한 곡류를 강 너머 왼쪽에 아주 작은 봉우리가 있다.
 눈을 의심하게 된다. 높은 지형에서 내려다보아서 그런가. ‘고지’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옹색한 구릉이 아닌가. 하기야 해발 120~150미터 정도의 구릉 3곳을 일컫는 말이니 그런 표현도 틀리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니 그곳에서 휴전협정을 목전에 두고 있던 1953년 7월13~16일 그야말로 피어린 사투가 벌어졌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을 수밖에….
 임박한 휴전협정에 유리한 입지에 서기 위해 최후 공세를 벌이던 중국군은 임진강변 요충지인 이 작디작은 고지에 군침을 흘린다. 한국군 제1사단 제11연대 제2대대 전초기지였던 베티고지를 점령하면 주 저항선에서 남쪽으로 2킬로미터 이상 전진하기 때문이었다.
 7월13일부터 중국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고, 한국군은 사흘간 3개 소대를 투입했지만 하룻밤만 자고나면 반 수 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손실을 입었다.
 이 때 특무상사였던 김만술 소위가 15일 소위로 임관하자마자 제6중대 제2소대장으로 베티고지 사수에 투입됐다. 김만술 소위는 이날 오후 2시 아직 얼굴도 익히지 않은 소대원 34명을 독려, 베티고지 군인 중앙봉과 동봉(東峰)을 점령한 뒤 중국군이 점령하고 있던 서봉 공격에 나섰다. 김만술 소위는 중국군 1대 대대와 맞서 13시간 동안 서봉을 19번이나 뺏고 빼앗기는 접전을 펼친 끝에 기어코 서봉을 확보했다.
 16일 날이 밝은 뒤 김만술 소위와 생존 소대원들은 중국군 시체 사이에 쓰러진 전우들을 보며 절규했다고 한다. 확인된 중국군의 시체만 350여구였고, 한국군은 23명이 전사했다. 이 전투는 한국전쟁에서 가장 극적이고 용감한 승리로 평가된다.
 김만술 소위는 미국최고훈장인 십장훈장과 우리 정부가 주는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1956년에는 이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격퇴’)가 개봉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만술 소위 부대원들이 사수했던 이 베티고지 역시 불과 11일 뒤인 53년 7월27일 체결된 휴전협정에서는 군사분계선 북쪽에 포함됐다.
 그리고 1952년 12월11~13일 사이 중국군 2700여명을 사살함으로써 고지가 5미터나 낮아지고 임진강물이 핏빛으로 물들었다는 노리(Nori)고지 역시 군사분계선 이북으로 편입됐다. 노리고지와 베티고지 사이에는 북한의 집단농장이 보이고….

 


 가슴이 찢어질 듯한 전투가 벌어졌다 해서단장의 능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화채그릇에서의 혈투
 다시 발길을 돌려 강원 양구 해안분지에 닿는다. 화채그릇 닮았다 해서 ‘펀치볼’이라고 일컫는 바로 그곳이다.
 을지전망대(해발 1049미터)에 오르면 마치 무릉도원에 온 듯 평화롭고 신비로운 해안분지가 보인다. 또 맑은 날이면 금강산 비로봉, 월출봉, 차일봉, 일출봉이 또렷하게 보이는 이곳. 하지만 인간이 일으킨 전쟁은 12만 년 전부터 선사인들이 무릉도원으로 꼽았을 법한 이곳을 피로 물들였음을…. 
 다시 말하면 해안분지는 북쪽의 1026 고지(모택동 고지), 924고지(김일성 고지), 서쪽의 가칠봉(1242미터), 대우산(1178미터), 남쪽의 도솔산(1148미터), 918고지, 동쪽의 달산령, 795, 908고지 등으로 둘러싸인 곳.
 그런데 1951년 6월4일부터 19일까지 한국군 해병 제1연대가 양구 북동방 25킬로미터 떨어진 대암산과 도솔산, 대우산을 연결하는 1000미터 이상의 고지군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전략적인 요충지인 해안분지(펀치볼)를 고수하기 위해서였다. 한국군 해병대는 작전개시 17일 만에 해안분지를 남쪽에서 감제할 수 있는 도솔산 일대의 고지군을 확보하였다.
 이 전투에서 3,307명(사살 3,263명, 포로 44명)의 공산군이 피해를 입었고 아군은 618명(전사 123명, 부상 484명, 실종 11명)의 인명이 손실됐다.
 이 전투를 통칭해서 ‘도솔산(兜率山)전투’라 일컬어졌다. 이 전투는 한국 해병대 5대작전 중 하나로 꼽힐 만큼 해병의 자랑이 된 전투였으며, 당시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무적해병’이라는 휘호를 하사받았다. ‘도솔(兜率)’이 무슨 뜻인가. 불교에서 미륵보살이 사는 곳이며, 미륵보살의 정토(내원)이면서 천계 대중이 환락하는 장소(외원)라 한다. 그렇게 심오한 뜻을 지닌 도솔이 중생들의 싸움터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주요 고지

■그 고약한 이름,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
 이 뿐이랴. 양구 북방 문등리와 사태리 계곡의 절경을 가로지르는 능선엔 ‘피의 능선’이니 ‘단장(斷腸)의 능선’이니 하는 고약한 이름이 붙었다.
 그저 731-983(수리봉)-940-773고지로 일컬어지던 능선은 마치 바나나처럼 능선이 퍼졌다 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 제9연대 장병들에 의해「바나나 능선」으로 일컬어졌다. 하지만 이곳에서 1951년 8월~10월 혈전이 벌어져 2만 명에 가까운 인명피해(한국군 및 유엔군 4400여 명, 북한군 1만5000여 명)가 발생하고 능선이 피로 물들었다. 그런데 이 격전의 소식을 타전한 ‘성조지(Stars and Stripes)’ 기자들이 983고지 일대를 피로 물들인 능선이라 해서 ‘피의 능선(Bloody Ridge Line)’이라고 명명했다. 이 전투를 초기에 지휘한 제5사단 36연대장 황엽 대령은 “북한군이 설치해놓은 지뢰 때문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계곡은 피로 물들였다.”고 회고한바 있다.
 결국 북한군은 9월5일 이 ‘피의 능선’을 포기하고 북쪽에 남북으로 뻗은 능선(894-931-850-851고지)으로 철수했다. 983고지에서 벌어진 ‘피의 능선’전투는 2004년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관객 1000만 명을 동원한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후반부에 등장한다. 북한군 깃발부대와 한국군 간의 격전장이다.  
 그러자 미군은 다음 능선을 점령하도록 명령했는데, 10월5일까지 ‘단장의 능선’가운데 철옹성 같았던 931-851고지를 잇달아 점령했다.

을지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양구 펀치볼(해안분지). 잔뜩 찌푸린 구름마저 펀치볼을 피했다. 구름 사이로 화사한 햇빛이 신묘한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연합통신 특파원이었던 스탠 카터가 전방대대 구호소를 방문했을 때 부상병이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고 부르짖자 이 고지를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이라 명명했다. 이 전투에서 피아간 2만7000여 명(아군 3745명, 북한군 2만4000여명)의 인명손실을 기록했다. 미군은 비록 이 두 전투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뒀다고는 하지만 전투 초반에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고, 언론에서조차 “가슴이 찢어질 듯한 전투”였다고 대서특필 했기 때문에 불명예스러운 전투로 여겨지기도 했다.
 백마고지 전투와 함께 최고의 혈전을 벌인 것으로 여겨지는 저격능선ㆍ삼각고지 전투(중국은 두 전투를 묶어 상감령 전역이라 한다)와 불모(不毛)고지, 수도고지ㆍ지형능선(指形稜線), 351고지, 금성지구, 켈리고지, 포크찹 고지 등에서 수많은 고지전이 벌어진다. 그런데 이 전투의 결과와 전사(戰史)의 기록을 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고 하면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한 가지.
 “한국전쟁 사상 ‘지상전의 꽃’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지만, 작은 고지 하나를 두고 그 많은 인명과 물자를 투입해가면 혈전을 벌여야 할 가치가 있는가.(중략) 손실에 비해 전술적 가치가 너무 적다고 회의적인 견해를 보이는 이도 있다.”(<한국전쟁전투사-7. 백마고지 전투>, 국방부 전사편찬위, 1984년)
 이는 한국전쟁사에 길이 빛날 백마고지 전투를 평가한 대목이다.
 유엔군이 사실상 패배했다는 평을 받는 ‘저격능선’ 전투를 두고도 “저격능선이라는 적의 전초 하나를 탈취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인명손실을 입으면서까지 장기간 작전을 펼쳐야 했는지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는 평가(<한국전쟁전투사-14.저격능선전투>, 국방부전사편찬위, 1988)도 있다.
 엄청난 희생에도 나름대로의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했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려고 피아간 수천 수만명의 피를 뿌렸다면 과연 어떨까.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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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격전이 한창일 때 F-80 제트전투 폭격기 편대가 나타나 공산군 진지에 네이팜탄을 쏟아부었다. 활활 타오느는 화염, 그리고 푸른 하늘 높이 뭉클 솟아오르는 소형 원자운 같은 버섯형 흑연. 유엔군은 공산군 진지 아래 병사들이 전부 불타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자 전멸했어야 할 공산군 진지에서 박격포가 날아왔다.”
 1952년 불모고지 전투를 취재한 일본기자가 본국에 타전한 기사내용이다. 일본기자는 미군 장교의 말을 인용하면서 “산의 정상에서 20미터 쯤 내려온 공산군의 지하진지를 네이팜 탄이 완전히 불태울 수 없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대체 공산군 진지에 어떤 장치가 있었기에 이토록 철옹성이었을까. 아니면 이 지역에 만리장성이라도 구축했단 말인가.
 그랬다. 정말로 중국군은 이른바 ‘지하만리장성’을 구축해놓고 있었다. 그 역사를 살펴보자.    

오성산 상감령 전투에서 지하갱도, 즉 지하만리장성에 의존해 유엔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잇는 중국군.|눈빛출판사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전쟁
 전쟁이 교착전 양상으로 전개되던 1951년 8월쯤부터였다. 이때부터 중국은 방어진지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2차대전의 마지노선이나 독일의 서부방벽을 능가하는 견고한 진지였다.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려 고지의 후사면을 이용, 땅굴과 참호를 파고 전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지하요새를 구축한 것이다. 이는 쌍방이 협상을 통해 전쟁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면서 전선이 교착화 한 데 따른 것이다.
 중공 중앙은 이미 1951년 “현재의 전선을 고수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종식시켜야 한다.”고 지시했다.
 당시 중국, 즉 중화인민공화국은 신생국이었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치르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출범시켰으니까…. 중국으로선 경제발전과 한국전쟁을 동시에 치를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중국으로서는 전쟁을 확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으로선 1952년이 경제건설준비공작을 진행하는 마지막 해였다. 그 때문에 경제건설에 더욱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1951년 중국의 재정예산은 50년에 비해 60%나 증가됐으나 총예산의 32%를 한국전쟁에 투입해야 했다. 중공 중앙은 51년 10월 전국적인 증산 절약운동을 펼쳐 부대를 재편하고, 지출 절약운동을 펼쳤다. 이른바 ‘항미 원조 전쟁’을 지원하면서도 경제건설이라는 두 가지 모순된 정책을 실현해야 했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바로 확전 대신 지금의 전선을 유지하는 국지전의 전략이었다. 중공 중앙은 “조선 전장에서 지원군은 병력과 물자를 절약하여 지속적으로 적극방어작전의 방침을 적용해서 현재의 전선을 견고하게 방어하고 적군을 대량으로 소모시켜 전쟁의 최후승리를 쟁취하여야 한다.”고 지시했다.
 특히나 4개월 동안 끌어온 휴전협상에서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이 “쌍방이 대치 중인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한다”고 합의함으로써 전선이 고착화한다.
 쌍방은 문산 서측 11킬로미터 떨어진 임진강 어귀에서 판문점 서방~삭녕 북방~철원 서북방~김화 북방~금성 남방~어운리~문등리~고성 동남방 6킬로미터 지점에 이르는 전장 237㎞의 전선에서 대치했다.
 유엔군은 우세한 화력과 포병 탱크 등을 내세워 1개진지에 수 만 발의 포탄을 쏟아 부었다. 장비가 낙후돼있는 상황에서 전선수호는 중국군의 최고덕목이 되었다.

 

 ■동굴작전의 전개
 1951년 6월 중순 중국군 제47군단 제140사단은 유엔군의 맹포격을 방어할 ‘고양이 귀’ 모양의 동굴을 대량으로 만든다.
 즉 교통호 내부에 각기 한 명 당 두개씩 0.8~1m 넓이 지상에서의 깊이 2~3미터의 동굴을 만든 것이다. 1개 중대 혹은 1대 대대의 진지는 유엔군 1000~2000발 포탄포격과 미군기 10대의 소형폭탄의 폭격을 견딜 수 있게 되었다.
 동굴의 효용성이 알려지자 중국군 사령부는 “거점은 반드시 갱도식으로 확보라고 적의 유탄포와 포탄의 공격을 견디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동굴 전법은 연천 마량산과 216.8고지에서 빛났다. 51년 10월 4일~7일 사이 영연방 사단은 매일 1만~2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지만 진지는 흔들림이 없었다. 영국군 21차례 공격을 모두 격퇴하고 모두 700여명의 적을 살상했으며….”
 고무된 중국군은 51년 10월 21일 “주요진지는 반드시 갱도식으로 하되 깊이는 5미터 이상으로 하라”고 지시한다. 이로써 서부전선 예성강 하구에서 북한강 동쪽의 양구 문등리까지 전 전선에 걸쳐 8개 중국군 군단과 북한군 3개 군단을 투입, 이른바 갱도식 방어진지 구축작전을 펼친다.
 “석탄이 없으면 나무를 땠고, 흙을 운반할 도구가 없으면 손수레를 만들었다. 비밀유지를 위해 낮에는 흙을 동굴입구 운반했고, 야간에 산기슭으로 옮겨 동이 틀 때까지 위장하면서 공사를 계속했다. 쇠로 된 통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타는 숯을 넣은 탄등(炭燈)까지 만들었다.”
 공산군은 1952년 말까지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250㎞ 길이의 모든 전선에 종으로 20~30킬로미터의 두꺼운 방어선을 갖추고 땅굴을 거점으로 한 거점식 진지방어체계, 즉 지하갱도가 구축됐다.

 

 

저격당하기 십상이라고 해서 이름붙은 저격능선. 유엔군은 저격능선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땅굴의 원조
 그들의 표현대로 ‘난공불락의 지하만리장성’이 건설된 것이다.
 250㎞의 전선에 중국군이 판 갱도는 7789통로, 길이 198.7㎞, 엄체호 75만2900개, 노천 및 엄폐식 참호길이 3420㎞, 북한군이 판 갱도는 1,730통로, 길이 88.3㎞, 각종 엄체호 3만1700개, 참호길이 263㎞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군과 북한군이 구축한 지하만리장성의 제원을 계산하면 총 갱도수 9519개, 갱도길이 287㎞, 엄체호 78만4600개, 엄체호 총 길이 3683㎞, 그리고 각종 시설물 10만1500개. 지하장성의 총연장만 해도 4000㎞에 육박하는 철옹성인 것이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가 구축한 마지노선이나 독일의 서부방벽을 능가할 만큼의 진지를 지상이 아닌 지하에 건설한 셈이 된다. 공산군의 방어진지는 공중 및 야포공격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매우 견고하게 설계되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어떤 사단도 3개월의 식량을 보관할 지하창고가 있었으며, 강당도 있어 생활은 대단히 좋았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공산군이 구축한 지하요새는 고지 정상으로부터 깊이가 2m나 되는 여러 갈래의 교통호가 반사면을 따라 보급소나 취사장으로 보이는 동굴로 통하고 있었다.
 공중에서 보면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전 전선에 걸쳐 폭 20~30㎞의 커다란 개미집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오성산 인근의 각종 고지들. 42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유엔군은 저격능선 일부지역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마오쩌둥은 1952년 8월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해결되었다. 해답은 굴을 파는 것이다, 2층으로 굴을 파면 상대가 공격해올 경우 우린 1층으로 지하도로 들어간다. 상대가 위층을 점령해도 아래층은 우리에게 속해있다”고 자랑했다.
 예컨대 국군 5사단이 가칠봉을 점령했을 때는 공산군이 진지 내에서 1개 소대가 동시에 집결하여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식당까지 마련돼 있었다.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이 갱도공사가 마무리됨으로써 거점방어체계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중국군이 수행한 이 지하만리장성의 개념은 전쟁 후 북한군에게 고스란히 전수됐고, 이후 북한군 전투교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북한군 역시 이 갱도작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남한을 공포로 몰아넣은 땅굴 작전 역시 이 갱도작전의 하나라는 것이다.

지하갱도에서 손풍금을 연주하는 중국군들. 지하갱도엔 1개 소대 이상이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까지 조성됐다고 한다.   

■상감령 전투의 승패
 중국은 이 지하만리장성이 가장 위력을 발휘한 전투가 바로 ‘상감령 전역(戰役ㆍ삼각고지+저격능선 전투)’였다.
 유엔군은 중국군의 갱도작전 와해를 위해 갱도 위쪽에 구멍을 파고 폭약을 이용, 폭파를 시도했다. 갱도입구에 폭탄, 폭약통, 수류탄, 유황탄, 가스탄을 투척하거나 화염발사기를 사용했다. 갱도 내부의 공기가 극도로 오염됐으며, 초연, 독가스, 피비린내, 대소변 냄새, 땀 냄새 등이 가득해 호흡이 극도로 곤란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군의 갱도작전은 지독했다.
 중국군 전사는 “갱도를 핵심으로 견고한 방어 전략을 펼쳐 1만1000여명의 희생으로 유엔군 2만5000여명을 살상시켰고, 항공기 274대를 격추시켰다”고 자화자찬했다. 마오쩌둥은 정전 직후인 1953년 9월 “아군의 사상자 수는 지하호를 파고 나서 줄었다. 금년 여름에는 이미 21킬로미터에 걸친 적의 정면 진지를 1시간 안에 쳐부술 수 있었고, 수 십 만 발의 포탄을 발사할 수 있어 18m나 들어갈 수 있었다”고 자랑했다.
 이른바 ‘상감령 전역’의 전황은 종군기자들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중국 대륙에 전해졌다. 중국인들은 ‘지원군의 승전소식’에 열광했다.
 중국 위문단은 상감령 전역의 갱도를 찾아 대륙에서 보낸 대량의 위문품과 위문편지를 중국군에게 전달했다.
 또한 중국대륙엔 1950년대엔 바로 이 ‘상감령 정신’이 대륙을 풍미했다고 한다. ‘상감령 정신’이란 곧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국과 인민의 승리를 위해 봉헌하는 불요불굴의 의지, 그리고 일치단결로 용감하고 완강하게 전투에 임해 끝까지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정신을 뜻했다. 

중국 파병군을 위문하는 중국 연예인들. 1950년대엔 이른바 '상감령 정신'이 중국대륙을 풍미햇으며, 상감령 전투를 그린 노래 '나의 조국'이 제2의 국가 대우를 받고 있다. 

 ■‘나의 조국’이 풍미한 중국대륙

 1956년에는 영화 ‘상감령’이 중국 내에서 개봉됐으며,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노래 ‘나의 조국(我的祖國)’은 중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리허설 때 가장 먼저 울려 퍼진 곡이 바로 상감령의 주제가인 ‘나의 조국’이었다고 한다.
 2011년 1월 19일 백악관에서 미국을 방문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 주석을 위한 국빈 만찬이 열렸다. 이 때 중국의 천재 피아니스트 랑랑(郞朗·28)의 손끝에서 웅장한 서사시가 연주됐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하지만 이 곡의 정체를 알았다면 만찬장 분위기는 싸늘했을 것이다. 1956년 중국에서 개봉된 영화 <상감령(上甘嶺)>의 주제가인 ‘나의 조국(我的祖國)’이었으니 말이다.
 ‘승냥이와 이리가 침략해오면(若是那豺狼來了),엽총으로 맞이할 것이네(迎接的有獵槍).’
 영화 <상감령>은 바로 한국전쟁 당시 오성산 일대에서 벌어진 상감령 전투에서 중국군의 승리를 그린 영화이다. 가사에 나오는 ‘승냥이와 이리(豺狼)’는 곧 미군을 지칭하는 것이다. 미국은 과연 랑랑의 연주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았을까.
 중요한 것은 지금도 비무장지대 일대에는 중국군 등이 구축한 지하만리장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상감령 전투가 벌어졌던 오상산 일대에는 6만명의 병력이 숨을 수 있는 지하만리장성이 있다고 한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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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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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5년(태종 15년) 7월 26일 사헌부가 헌납(사헌부 5품 관리)으로 임명된 장진의 서경(暑經)을 끝내 거부했다. 무슨 말인가.
 서경이란 임금이 관리를 임명할 때 대간(사헌부·사간원)들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 제도를 말한다. 임금이 관리를 임명할 때 50일 이내에 대간이 임명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해당 관리는 취임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인사적부심’ 제도라 할까. 대간들은 서경권을 행사할 때 비공개로 3번이나 모여 철저히 심사한 뒤 임금에게 동의여부를 임금에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이 제도를 완의(完議) 혹은 원의(圓議)라 했다. 지금으로 치면 인사청문회와 같은 제도라 할 수 있다.
 대간들은 해당관리의 인사자료를 바탕으로 문벌과 품행, 경력을 철저히 검증한 뒤 국왕의 임명장에 서명할 지를 판단했다.
 만약 ‘부적격자’라는 결정을 내리면 ‘작불납(作不納)’이라고 써서 이조에 돌려보냈다. 또 하자는 있지만 불가피하게 서명을 해야 할 대상자에게는 ‘정조외(正曹外)’라는 세글자를 썼다.
 ‘정조외’는 의정부·사헌부·사간원·홍문관·예문관 등 청요직에 진출할 수는 없지만 그 외의 관직은 괜찮다는 일종의 ‘조건부 승인’이었다. 이밖에 ‘한품(限品)’이라는 서명도 있었다. 역시 일정한 품계 이상으로는 올라갈 수 없다는 조건부 서명이었다.
 대단한 제도다. 서명거부도 모자라 평생 주홍글씨로 남을 수 있는 ‘정조외’와 ‘한품’의 낙인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오죽했으면 1408년(태종 8년) 2월 4일의 실록을 보면 “‘작불납’보다 더 심한 경우가 ‘정조외’”라 했다.  

선조 때 청난 및 호성공신이 된 신경행(1559~1623년)은 사후 200여 년 뒤 ‘충익공’으로 추증됐다. 사진은 신경행의 시호를 ‘충익’으로 정한다는 순조의 명을 두고 사헌부가 서경권을 발동, ‘임명동의’를 해준  <시호서경>(보물 1380호)이다.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작불납’, ‘정조외’, ‘한품’
 그렇다면 태종 연간에 사헌부가 주목한 장진의 흠결은 무엇인가.
 “장진은 가난을 싫어하고 부를 좇아 조강지처를 버리고 부자집의, 그것도 병든 딸에게 다시 장가를 들었으니 마음과 행실이 청렴하지 못하다” (<태종실록>)
 사실 태종이 장진을 헌납으로 임명한 것은 1415년 4월 중순쯤이었다. 그러나 대간들은 서명마감일인 50일이 지나도록 동의해주지 않았다. 태종은 이것을 문제삼았다.
 “50일이 지났는데 장진의 임명은 어찌된 것이냐. 안되겠다. 앞으로 고신(告身·임명장) 심사는 원의(圓議·비공개 인사청문회) 1회만 거치고 보고하도록 바꿔라.”(1415년 6월 2일)
 그러나 이조판서 황희는 “원의는 최소한 세 번은 거쳐야 한다”고 고집했다. 태종 임금은 “백성을 다스리는 재주가 없다면 문벌(門閥)이 무슨 상관이냐”고 투덜거렸다.
 태종의 언급을 보면 이 때만 해도 대간들이 문제 삼은 장진의 흠결이 ‘문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태종은 “능력이 중요하지 집안이 무슨 문제냐”고 힐난하면서 “앞으로 3회인 원외를 1회로 축소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물론 황회의 반대로 가납되지 않았지만….   
 그런데 사헌부는 50여 일을 더 버틴 뒤 장진의 임명을 끝내 거부해버렸다. ‘돈에 눈이 멀어 조강지처를 버리고 부자집 딸, 그것도 병든 여자에게 새 장가 들었다’는 새로운 흠결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던 태종은 장진의 사헌부 헌납 임명을 철회하고 말았다.

 ■“대간들은 대체 뭐하는 자들이냐.”
 어디 장진을 둘러싼 인사파동 뿐이랴.
 인사권을 행사하려는 임금과, 철저한 검증을 통해 번번이 거부권을 던졌던 대간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기 일쑤였다. 
 조선개국 후 3개월 남짓 흐른 1392년(태조 1년) 10월 6일부터 첫번째 갈등이 빚어진다.
 고비고비 마다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군관들을 1계급 특진시키자 대간들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화가 난 태조는 개국공신 조준·남은을 불러 “대체 대간들은 무엇을 하는 자들이냐”는 요지로 언성을 높였다. 태조는 결국 서경권의 범위를 ‘5품 이하의 관리 임명’으로 축소시켰다. 4품 이상의 관리는 임금이 직접 임명했다.(1392년 12월 22일) 그러자 사간원이 불만을 표시하면서 재고를 요청했다.
 “대간이 서경권을 행사하는 이유는 전하의 명을 거역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임금의 직무에 혹 있을 지도 모를 결점을 보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태조실록>)
 그러나 이미 결심을 굳힌 태조는 사간원의 상소를 가납하지 않았다. 
 태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종은 1408년 2월 4일 홍귀해라는 인물을 공조서령(供造署令·정 6품)에 임명했다.
 홍귀해는 부왕(태조 이성계)가 총애하는 후궁(화의옹주)의 사위였다.
 화의옹주는 원래 경상도 김해의 관기인 칠점선이라는 여인이었는데, 태조 이성계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됐다. 태조와의 사이에 낳은 딸(덕숙옹주)이 홍귀해와 혼인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대간들이 홍귀해의 임명장에 ‘사인’을 하는 대신 ‘작불납’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임금에게 올렸다. 태종은 부왕이 총애하는 후궁의 사위를 출사시킴으로써 부왕을 기쁘게 해줄 참이었다. 그랬으니 대간들의 거부권 행사에 ‘버럭’할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다음과 같은 엄명을 내렸다.
 “‘작불납’ 세글자를 삭제하고 고쳐 임명장을 내주어라. 내가 이 임명장을 덕수궁(태조 이성계가 거처했던 궁)에 갖다 드리겠다.” 

조선 후기 문신 정덕필(1725∼1800)을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한다는 임금의 교지. 

■“대간들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가.”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도 예외가 아니었다.
 1425년(세종 7년) 4월 19일 세종 임금이 맹효증을 전구녹사(典廐錄事)로 임명했다. 그러나 사간원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세종이 사간원 좌정언 조수량을 불러 속히 맹효증의 임명장에 서명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러나 사간원은 3일 뒤인 4월 22일 임금의 교지마저 “감히 받들 수 없다”고 거부했다.
 사간원이 거부권을 행사한 이유는 맹효증이 죄인 이무의 외손자라는 것이었다. 우의정을 지낸 이무는 1409년 태종의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형제의 옥사에 연루돼 사형을 당한 바 있다.
 사간원은 임금의 교지를 토대로 재심을 벌인 끝에 “죄인의 외손에게 벼슬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최종결론을 내린 것이다. 임금의 교지마저 통하지 않은 것이다. 세종은 역정을 냈다.
 “선(善)은 길게, 악(惡)은 짧게 해야 하는 접인데, 이무의 죄가 어찌 그 외손에게까지 미치겠느냐. 이는 법률 조문에도 없는 것이다. 빨리 서경해주어라.”
 1435년(세종 17년) 7월 18일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사간원이 함길도 도절제사의 도사(都事·종 7품)로 임명된 박욱의 서경을 거부한 것이다.
 “박욱은 예전에 경상도 영해(영덕) 교수관 시절 영덕현수 이사청과 반목해서 서로 예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영덕 사람이 나서 ‘박욱이 금척녀(가야금 악공)의 손자인데, 감히 수령을 욕보였다’고 고했습니다. 그 일로 박욱은 파면당했는데, 지금까지도 해명하지 않고 있으니 그의 임명장에 서명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가야금 악공의 아들인 천한 신분 주제에 현령을 모욕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박욱이 그 문제를 두고 적극 해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종은 “그의 임명장에 빨리 서명해주라”는 엄명을 내린다. 그러면서 거부권을 행사한 대간들을 질타한다.
 “요즘들어 고신(임명장)의 서경에 문제가 있다. (능력보다) 애증 관계에 좌우된다. 게다가 서겨의 권한이 아래사람에게 있으니 폐단도 적잖다. 대간들이 흠결이 있다느니, 의혹이 있다느니 하면서 50일이 지나도록 임명장을 내보내지 않는다. 대간 마음 내키는대로 하니 실로 불편한 일이다.”(<세종실록> 1435년 7월 29일)

 ■“청문회 내용을 보고하라”
 제 아무리 만고의 성군이라도 대간들이 모여 비공개 청문회를 통해 서경권을 행사하는 것을 두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신하들이 아래에서 관리들의 하자를 의논하고 있는데도 임금만 홀로 이를 알지 못한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인가.”(1435년 8월 19일)
 그러자 도승지 신인손 등은 “아니되옵니다”를 외친다.    
 “원의(비공개 청문회)의 일을 주상께 고주알미주알 보고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원의에서 마음대로 발언하기 어렵습니다. 누가 감히 마음대로 남의 잘못을 말하겠습니까.”
 “과인이 당사자의 하자 사유를 죄다 듣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의논한 사항을 압축해서 간략하게만 보고해 달라는 것이다.”
 “아니되옵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추가해서 고치기 힘들 것입니다.”
 “어째서냐. 아니되겠다. 앞으로 ‘작불납’, ‘정조외’, ‘한품’이라는 결론을 내리면, 그 때의 원의(청문회) 내용을 이조와 병조가 발췌해서 올리거라.”

 ■사헌부 관리들의 출근저지 투쟁
 서경 거부의 가장 극적인 예 역시 세종 연간에 있었다.
 1420년(세종 3년) 3월 16일 세종은 이발이라는 인물을 대사헌으로 임명한다.
 그런데 이발은 태종 때인 1417년(태종 17년), 그러니까 3년 전에도 인사파동을 겪었던 인물이었다.
 즉 그 해 5월 3일 태종은 이발을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 인사는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한 이발이 대량의 포물을 사사로이 싣고 가 현지에서 팔았던 게 물의를 빚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명나라 조정에서도 화제를 뿌렸다. 명나라 예부상서는 이발에게 “가져온 포물은 좀 팔았냐”고 비아냥댈 정도였다.
 사절단은 웃음거리가 됐고, 이 사건은 외교문제로 비화됐다. 조선 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외교스캔들로 번졌다.
 그런데도 태종이 지탄의 대상이 된 이발을 사정기관 수장인 대사헌에 임명한 것이다. 사헌부 관리들이 가만 있지 않았다.
 “이발이 대사헌이 되어 출근하던 날 사헌부가 거부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헌부가 상언했다. ‘이발은 비웃음을 사고 왕명을 욕되게 했습니다. 마음 씀이 간사하고 탐욕이 있으니, 사헌부 수장으로서 불가합니다.’”(<태종실록>)
 한마디로 출근저지 투쟁이었다. 태종은 어쩔 수 없이 이발의 임명을 취소하고 말았다.
 그런데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이 이 문제적 인물인 이발을 다시 대사헌에 임명한 것이다.    
 사헌부가 다시 한 번 벌떼처럼 일어난다. 원래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이 출근하면 모든 사헌부 관리들이 청사의 뜰 아래 도열해서 정중히 영접하는 것이 법도였다.
 신임 대사헌이 첫 출근한 3월22일, 아무도 영접하지 않았다. 세종이 “빨리 이발을 마중하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사헌부 장령(4품)인 송인산이 딱 잘라 거부한다.
 “하교를 받들지 못하겠나이다. 이발은 욕심을 품어 왕명을 욕되게 한 자입니다. 사헌부의 장관이 될 수는 없사옵니다.”
 지금으로 치면 4급 관리가 직속상관의 출근을 저지한 것이다. 그것도 국왕의 명을 단칼에 거부하고….
 세종은 결국 13일 만에 이발의 대사헌 임명을 취소하고 만다,

 ■‘불통의 인사권’을 발휘한 세종
 그런데 세종의 오기(傲氣)도 어지간하다. 6년 만인 1426년 3월 15일 문제의 이발을 슬그머니 병조판서(정 2품)에 임명해버린 것이다. 전형적인 ‘불통의 인사’이자 ‘오기의 인사’가 아닌가.
 당연히 대간들도 아우성쳤다. 좌사간 허성은 “이발은 염치 없는 인물”이라고 맹비난한다. 사간원은 이발이 저지른 예전의 허물에다 “이발은 태종의 승하를 중국에 알리는 사신으로 갈 때 육포(마른고기)를 싸가지고 가면서 조금도 슬픈 표정도 없었다”고 탄핵했다. 곱씹어보면 그야말로 유치한 탄핵이 아닐 수 없다. 육포를 싸가지고 간 것까지 비난받은 것이다. 슬픈 표정을 짓지 않았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 사간원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아예 서경권을 발동해서 이발의 임명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여기서 잠깐…. 대간의 서경권은 5품 이하의 관리임명에만 해당되는 것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정 2품인 병조판서의 임명은 서경권과는 관련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었다, 세종은 바로 그 해(1426년) 1월 26일 좌사간 허성의 상소를 받아들여 서경의 범위를 1~9품, 즉 전체 품계로 확대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다.
 그런데 두 달도 되지 않아 이발의 병조판서 임명건이 일어난 것이다. 세종으로서는 제 발등을 찍었다고 할까. 
 어쨌든 세종은 대간들의 인사청문회에서 이발의 임명이 거부되자 특유의 인물론을 내세웠다.
 “이발이 꼭 필요한 인물이니 빨리 임명장에 서경하라.”
 그러나 사간원은 “법에 따른 정당한 거부권 행사”라고 버텼다. 세종은 1년도 못돼 대간들의 서경권을 다시 5품 이하로 축소시키고 말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서경은 결국 성종 대에 완성된 <경국대전>에 ‘5품 이하’로 한정되었다.

 ■인사검증이 중요한 까닭
 흔히 왕조시대를 일컬을 때 절대군주가 휘두르는 절대권력을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실록>을 일별하면 조선이 얼마나 건강한 시스템을 갖추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423년(세종 5년) 5월 17일, 사헌부가 서경권을 5품 이하에서 1품까지 확대하자고 주장하면서 그 필요성을 밝힌다.
 “군주가 사람을 쓴다는 것은 목수가 나무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천하에 버릴 재목은 없습니다. ~그러나 군주의 자리에 앉아 어찌 수많은 인재를 다 살펴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의 자리에 앉아 모든 재목을 알 수 없으니 대간의 서경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대간이 임금의 귀와 눈을 대신하여 임명자들의 충(忠)과 사(邪), 직(直)과 곡(曲)을 숨김없이 밝혀야 합니다. 이것이 서경입니다. 그래야 군자의 도는 길어지고 소인의 도는 사라질 것이며, 나라의 운명도 영원할 것입니다.”
 혹독한 인사검증의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이미 700년 전 선현이 알려주고 있다. (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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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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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2월 30일 오전 11시.
 기관사 한준기씨가 수색 차량기지를 출발했다. 개성역까지 가서 군수물자가 실린 화차를 달고 오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그러나 개성역에 도착하자 다른 명령이 떨어졌다. 북한 기관차를 인계받고는 다시 평양까지 올라가라는 지시였다.
 하지만 31일 오전 1시. 열차가 황해도 평산 한포역에 도착하자 다시 급박한 소식이 들렸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후퇴가 불가피해지자 “다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한준기 기관사는 후진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후진으로 개성역에서 간 한씨는 다시 화차 25량을 끌고 파주 장단역에 닿았다. 31일 밤 10시쯤이었다.
 “기차를 멈추고, 기관차 승무원은 기차에서 내려 대기하라.” 

남과 북이 시차를 두고 건설한 승일교. 북의 김일성이 시작하고 남의 이승만이 완공했다 해서 승일교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임진각 주변의 근대유산
 미군의 지시였다. 한씨가 내리자 미군 20여 명이 기차에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당시엔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나중에 보니까 기차가 인민군 손에 들어갈 것을 우려해서 내린 조치였다.
 기관총과 소총세례를 받은 열차는 그대로 멈춰 섰다. 한준기씨가 회고했다.
 “총 세례를 받았을 때는 그래도 열차가 레일 위에 있었는데, 나중에 가보니 궤도를 이탈해 있었습니다. 북한이 열차를 끌어가지 못하도록 폭파시킨 것이겠지. 그리고 당시에는 기관차와 탄수차(석탄과 물을 실은 화차), 그리고 화물차 20량이 있었는데 궤도를 이탈한 기관차 말고는 북한이 모두 끌어간 것 같아요.”
 총탄세례에다 폭파까지 당해 탈선한 기관차는 파주 장단면 동장리 현장에 그대로 멈춰 섰다. 이 기관차를 모델로 한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구호는 전쟁ㆍ분단의 아픔은 물론 교류와 통일의 염원까지를 담아낸 걸작으로 평가된다.
 이 기관차는 선로사정이 좋지 않은 산악지대에서도 운행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거리 화물용 증기기관차였다. 해방 전 북한지방에서 주로 운행됐다.
 기관차(등록문화재 78호)는 2004년 2월 6일, 파주 구 장단면사무소(제76호)ㆍ장단역 터(제77호ㆍ이상 장단면 동장리)ㆍ죽음의 다리(제79호ㆍ장단면 도라산리) 등과 함께 등록문화재가 됐다. 녹이 심하게 슨 증기기관차는 2006년 11월부터 보존처리가 이뤄져 2009년 6월25일부터 말끔히 복원된 모습으로 임진각 주변, 독개다리 초입 부근에 이전 전시되고 있다.
 등록문화재 79호로 등록된 ‘죽음의 다리’(장단면 도라산리)는 현재 ‘희망의 다리’, ‘생명의 다리’라는 아주 상반된 이름으로도 일컬어진다. 다리 주변에서 미군들이 북한군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해서 ‘죽음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경의선 복구 관계자들이 ‘죽음’대신 ‘생명’ 혹은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출렁교. 보초 서는 군인들이 남대천을 건너기 위해 만든 다리. 지금은 종잇조각처럼 아슬아슬 걸려있다.

■끊겨진 금강산 철도
 ‘철의 삼각지대’로 발길을 돌려본다.
 철원 근북면 유곡리와 김화읍 도창리에 걸쳐 있는 ‘금강산 전기철도교량’(등록문화재 제112호)이 눈에 밟힌다.
 민통선을 지나 민북 마을인 정연리를 거쳐 가는 길. 드넓은 철원평야 사이로 쭉 뻗은 이 464번 도로엔 이 따끔 등장하는 군부대 차량 이외엔 오가는 차량을 볼 수 없다. 세상의 온갖 시름을 훌훌 던져버리고, 뻥 뚫린 도로를 달리다 보면 뼛속까지 상쾌해진다.
 이 철도는 원래 일제가 강원도 창도에서 생산되는 유화철(硫化鐵)을 함경도 흥남 제련소를 경유,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부설했다.(1926년) 금강산 관광객들도 이용했는데, 철원역~내금강까지 116.6킬로미터를 하루 8회 운행했으며 4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요금은 당시 쌀 한가마니 값인 7원56원이었고, 1936년 한해에 15만4천명이 이용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북한이 남침 준비를 위한 군수물자 수송에 활용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거의 폐허화 했고, 일부는 현재 농로로 이용되고 있다.
 필자가 처음 이 교량을 찾은 것은 2007년 여름이었다. 당시 교량은 녹이 심하게 슨 철제 난간에, 바닥엔 철로가 사라지고 없고, 빛바랜 침목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갈 수 없는 다리 입구는 철조망이 막고 있었다.
 철조망을 바로 앞에 두고 길게 뻗어간 다리를 바라보면 과연 일제의 수탈과, 전쟁, 그리고 분단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절절이 가슴 속으로 파고 든다. 여기에 다리 밑에 내려가면 언제 보아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한탄강 수직단애가 고색창연한 교각 사이로 펼쳐져 있었으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린 지 1년 후인 2008년. 그 때의 그 기분을 상상하며 다시 찾아왔지만…. 눈을 의심했다.
 처음 보았던 철조망과 빛바랜 침목열은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다리는 새빨간 철제 난간에, 바닥은 정교하게 다듬은 새 나무를 깔아놓았다. 갈 수 없는 다리가 갈 수 있는 새로운 다리로 탈바꿈 한 것이다. 옛 것을 복원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옛 것에 담겨 있는 역사적 상징성이라는 무형의 가치까지 없애가며 하는 복원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정월대보름 답교놀이로 유명했던 김화 암정교. 저격능선 전투 땐 생과 사를 넘나든 피란민들로 가득찼다고 한다.

■암정교 답교놀이
 찜찜한 기분으로 발길을 돌려 한탄강 지류인 남대천 줄기에 놓여있는 ‘암정교’를 찾아본다.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백골부대의 관할 민통선 이북에 놓인 암정교는 1930년대 건립됐다. 평강과 김화를 연결해준 다리다. 
 폭 4미터 높이 7미터의 다리인데 한국전쟁 때 포탄세례를 맞아서인지 다리 곳곳에 녹슨 철골이 드러난 앙상한 모습이다.  
 일제시대 때만 해도 정월대보름 답교놀이가 행해지기도 했단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가장 치열했던 저격능선 전투가 벌어졌을 때 생과 사를 넘나드는 처절한 다리가 됐다. 피아간 후퇴와 진격을 거듭하는 다리였던 것이다.
 피란민들이 남부여대하면서 건너던 다리이기도 하다. 암정교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만국기가 강풍에 흩날리듯 아슬아슬 걸려있는 다리가 보인다. ‘출렁다리’라고 일컫는 이 다리는 보초를 서기 위해 남대천을 건너는 군인들을 위해 만든 다리였다.
 이제는 효용가치를 잃고 이리저리 찢긴 채 종이조각처럼 위태롭게 걸려있는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다.
 철원읍 월정리에는 월정리역이 으로 가본다. 경원선(서울~원산)이 쉬어가던 월정리역은 남방한계선 철책 바로 앞에 있는 최북단 종착역이다.
 역내에는 한국전쟁 당시 마지막 여객열차의 잔해와 유엔군 폭격으로 부숴 진 북한군 화물열차가 앙상한 골격을 드러낸 채 전시되고 있다.     

 

 ■급수탑에 담긴 슬픈 사연
 이밖에도 ‘철의 삼각지대’엔 숱한 한국전쟁과 분단의 유산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유명한 ‘노동당사’(제22호ㆍ철원읍 관전리)는 이른바 안보유적지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1946년 북한은 주민들로부터 1개 리(里)에 백미 200가마씩을 성금명목으로 거둬들여 연건평 570여 평(지상 3층)의 공산당사를 지었다. 북한은 내부공사 때는 보안을 위해 열성당원 이외에는 일반인들의 작업을 철저히 금지했다고 한다. 북한은 이 당사에서 중앙당으로부터 내려오는 극비사업과 철원ㆍ김화ㆍ평강ㆍ포천ㆍ연천지역 주민들의 동향을 파악했고, 대남공작을 주도했다고 한다.
 철원읍 율이리에 있는 ‘수도국지내 급수탑’(제160호)은 가슴 아픈 사연을 담고 있다.
 이 급수탑은 철원읍 주민들의 식수 공급을 위해 1936년 건립됐다. 한국전쟁이 벌어졌을 때 북한은 노동당사와 내무서 등에 감금된 반공인사들을 분류하여 이곳에 이송했다. 그런데 1950년 10월 유엔군이 북진하자 다급해진 북한은 이곳에 감금돼있던 300여 명을 총살하거나 물탱크 속에 생매장 하고 후퇴했단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의 주인공인 장단역 증기기관차. 최근 말끔히 복원돼 임진각 독개다리 옆에 전시되었다

 

■이승만과 김일성의 만남
 동송읍 장흥리~갈말읍 문혜리를 잇는 ‘승일교’(제26호)의 사연도 복잡하고도 재미있다.
 훗날 한국판 ‘콰이강의 다리’라는 별명이 붙은 이 다리의 공사는 1948년 8월부터 철원 및 김화 지역 주민들이 5일 교대제의 노력공작대라는 명목아래 총동원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공사는 다리의 북쪽 부분만 완성한 것으로 중단됐다. 전쟁 후 적치하였던 철원지역을 확보한 한국정부가 공사를 재개해 1958년 완성했다. 다리는 커다란 두 개의 아치 위의 상판을 받치는 작은 아치의 모습이 다른데 이것은 바로 남북이 시차를 두고 각기 다른 공법으로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남북합작의 구조물’인 것이다. 문제는 ‘승일교’라는 명칭과 관련된 논란이다. 김일성(金日成) 시절에 착공해서 이승만(李承晩) 시절에 완성했다고 해서 이승만의 ‘승(承)’자와 김일성의 ‘일(日)’자를 따서 지었다는 설과, 한국전쟁 때 한탄강을 건너 북진하던 중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박승일(朴昇日) 대령의 이름을 땄다는 설 등이 팽팽하게 맞섰다.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이 휴전회담 조인 이후 철조망을 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다리 곁에 조성된 공식 안내표지에는 전자의 설을 따르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전쟁 때 기독교반공청년들의 활동장소였다는 ‘감리교회’(제23호ㆍ철원읍 관전리),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뼈대만 남은 ‘얼음창고’(제24호ㆍ철원읍 외촌리), 공산치하의 검찰청이었던 농산물검사소(제25호ㆍ철원읍 외촌리), 전쟁으로 사라진 도시(철원)의 모습을 증언해주는 ‘구 철원 제2금융조합건물지’(제137호ㆍ외촌리) 등도 문화재의 반열에 오른 철원의 전쟁유산들이다.
 화천 상서면 다목리에는 ‘인민군 사령부 막사’(제27호)가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현재 우리 군 부대 안에 있는 모습이 이채로운데, 당시 북한군의 내무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국제적인 전쟁유산으로 각광받을 수 있는 근대문화유산은 파주 적성 마지리에 있는 ‘영국군 설마리 전투비’(제408호)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 전투비는 1951년 적성 칠중성(캐슬고지)과 이곳 설마리에서 중국군 3개 사단과 싸웠던 영국군을 기리는 참전기념비이다. 
 비록 영국군은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궤멸 당했지만, 만 3일을 이곳에서 버틴 덕분에 서울의 재함락을 막았다. 특히 이 전투비는 훗날 세계적인 건축가가 된 아널드 슈워츠만이 설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남북분단으로 끊겨진 금강산철도. 지금은 말끔하게 정비됐다.

■분단-전쟁-냉전의 흔적들
 전쟁유산에 대한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앞서 언급한 전쟁과 분단의 흔적들이 문화재의 반열에 올랐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비무장지대 일원에는 지구상 ‘최후의 화약고’라는 오명에 걸맞게 분단-전쟁-냉전을 상징하는 각종 흔적들이 집중돼있다.
 한국전쟁을 종식시킨 정전협정에 따라 한반도 중부는 임진강 변에서 동해안까지 248킬로미터에 걸쳐 이른바 군사분계선이 그어졌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군사분계선은 용어대로 선(線)이 아니다.
 임진강변에 세워진 군사분계선(MDL) 표지물 제0001호부터 동해안의 제1292호까지 모두 1292개의 표지물이 200미터 간격으로 세워진 점(點)의 개념이다. 표지판 가운데 696개는 유엔군의 관리책임이고, 596개는 북한과 중국의 관리책임이다.
 최전방에 가서 그 군사분계선을 관측하려 한다면 그것은 낭패다. 정전 이후 60년이 지금 군사분계선 표지물은 대부분 녹슬었거나 비바람 등으로 크게 훼손됐기 때문이다. 비록 이렇게 녹슬고, 훼손되었다지만 동서냉전의 상징이자, 민족의 분단을 규정한 군사분계선 1292개 자체가 ‘전쟁 및 분단 유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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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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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화간(和姦)은 장 80대, 남편이 있으면 장 90대이다. 조간(勺姦·여자를 유괴한 뒤 간음)은 장 100대이고, 강간한 자는 교수형(絞刑)에 처한다. 강간미수죄는 장 100대에 유배(流) 3000리에 처한다.”(<대명률>·‘형률·범간조(犯奸條)’)

1637년 명나라가 제정한 <대명률>이다. 조선도 이 <대명률>에 따라 성범죄나 성희롱을 엄단했다. 보기에도 무시무시하다. 강간범은 교수형에 처하고 미수범이라도 장 100대에 유배 3000리의 처벌을 받았다니…. 욕정을 함부로 발산했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성범죄는 끊이지 않았다.

1404년(태종 4년) 사노(私奴) 실구지 형제와 그들의 처남인 박질이 능지처사의 혹독한 처벌을 받는다. 주인집 딸을 집단 성폭행한 죄였다. 피해자(내은이)는 손발이 묶인 채 밤새도록 반항했으나 그만 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또 있다.

“11살 어린 아이를 강간한 사노 잉읍금을 교수형에 처했다.”(<태조실록>1389년 윤 5월16일)

“철원 사람 정경이 처녀 연이를 강간하려 밤새도록 때렸으나 연이가 완강히 항거하다 죽었습니다. 청컨대 정경은 교수형에 처하고, 연이는 정문(旌門)을 세워 그 정절(貞節)을 표창하게 하소서.”(<세종실록> 1429년 11월 27일)  

 

조선시대에는 강간 미수범에게도 장 100대에 유배형 3000리의 중형이 내려졌다.

■성희롱으로 인정되어도 장 80대

이런 일도 있었다.

1438년(세종 20년) 생원 최한경이 장 80대의 엄벌을 받는다. 죄는 지금으로 치면 성희롱죄였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성균관 옆 냇가에서 옷을 홀랑 벗고 목욕을 하다가 여종 2명을 데리고 지나가던 앳된 부인을 갑자기 끌어안았다. 부인과 여종들이 완강히 반항했다.

최한경 등 3명은 여종들을 때려 쫒아낸 뒤 완력으로 여인을 눌러 옷을 벗기고 욕을 보이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부인의 입자(笠子)를 빼앗아 도망쳤다. 큰일을 당할 뻔했던 여인은 사헌부에 최한경 일당 ‘강간미수죄’로 처벌해달라고 고소했다. 유생들은 단지 “희롱을 했을 뿐 강간하려는 마음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세종은 사헌부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은 뒤 최한경에게 장 80대의 처벌을 내렸다.

만약 강간미수죄가 인정됐다면 <대명률>에 따라 장 100대와 유배 1000리라는 처벌을 받아야 했다. 누가 봐도 강간미수죄였지만 최한경은 강간미수와 성희롱의 경계선에서 장 80대로 마무리 지었다고 볼 수 있다.

사족(士族)의 부녀를 강간하려 한 전직 공무원은 ‘강간미수’임에도 노비로 전락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군수를 지낸 황우형이 그 오명의 주인공이다.

황우형은 한밤중에 사족의 부녀인 반씨의 방에 들어가 강간을 하려다가 반씨의 어머니와 종이 막아서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성종은 ‘죄질이 좋지 않다’는 사헌부의 주청에 따라 ‘황우형의 적첩을 거두고 영원히 등용하지 않으며, 유배 3000리의 처벌을 내린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이 처벌 또한 부족했던 것일까. 황우형은 변방 중의 변방인 회령의 관노(官奴)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성종실록> 1472년 4월13일)) 

 

■사면령에도 빠진 강간죄

강간은 모반과 같은 대역죄와 존속살인 등과 맞먹는 중죄로 취급됐다.

국가의 경사 때 종종 행했던 대사면령에도 강간죄는 해당되지 않았다. 예컨대 성종임금은 1471년 1월24일 20살의 나이에 요절한 아버지를 의경왕으로 추서하면서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사면령에서 제외되는 중죄를 나열했다.

“24일 새벽녘 이전에서부터 모반(謀反)·대역 모반(大逆謀叛)한 것, 조부모나 부모를 살해하거나 때린 것, 처첩으로서 지아비를, 노비로서 주인을 모살한 것, 고의살인과 독살, 염매(염魅)한 것과, 강간·강도 등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았거나 다 용서하여 면제한다.”

 

강간범은 교수형의 극형이 내려졌다.

■아들을 고발한 선조임금

임금의 아들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1600년(선조 33년) 7월 16일 선조 임금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지엄한 명령을 내린다. 자신의 아들인 순화군 이보(1580~1607)를 법에 따라 처단하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었을까.

 “이보의 소행은 차마 형언할 수 없다. 여러 차례 살인을 했고~오직 마음을 태우고 부끄러워 할 뿐이었다.~오늘 빈전의 곁 여막(무덤을 지키려고 옆에 지어놓은 초가)에서 제 어미의 배비(陪婢)를 겁간했으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 국가의 치욕과 내 마음의 침통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자식을 둔 것은 곧 나의 죄로서 대신들을 볼 면목이 없다. 다만 내가 차마 직접 정죄(定罪)할 수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법에 의해 처단하게 하라.”(<선조실록>)

 신하들이 “골육 사이의 정이 있으니 화를 참으시라”고 말렸지만 선조는 단호했다.

 “상중의 백주대낮에 궁인(宮人)을 겁간한 자식을 용서할 수는 없다.”

 결국 아버지 선조임금은 아들 순화군 이보를 유배형에 처함과 동시에 녹안(錄案)의 결정까지 내린다.(7월20일) 유배형은 강간죄, 녹안은 <경국대전> ‘금제조’의 조항, 즉 “사인(士人)으로서 패륜행위를 한 자는 녹안한다.”는 각각 따른 것이다. 녹안은 범죄사실을 기록하는 처벌이다. 한마디로 전과기록이므로 순화군으로서는 치욕적인 처벌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의 죄에 가중처벌을 내린 것이다.

 

 ■욕을 본 여성이 자살하면 ‘열녀’ 대접

 그런데 조선시대 강간사건을 살펴보면 간과해서는 안 될 내용이 있다.

 강간을 당하거나 성희롱을 당한 여인이 자살할 경우 ‘열녀’라고 칭송한다는 점이다.

1737년(영조 13년) 창녕에 살던 17살 소녀 문옥이가 팔촌인 문중갑과 나무를 함께 하다가 성희롱을 당했다.

 문옥이가 “같은 성씨끼리 무슨 짓이냐”며 꾸짖고 옷소매를 떨치고 돌아왔다. 하염없이 울던 문옥이는 몰래 독약을 구해 마시고 죽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은 소녀에게 “정절을 지켰다”는 이유로 정려문을 세워주었다.(<영조실록> 1737년 9월23일)

 1787년(정조 11년) 시냇가에서 쑥을 캐던 유학자의 아내에게 이웃집 남자가 달려들었다.최진경게 에 살던 권만세라는 자가 갑자기 달려들어 손을 잡고 강간하려 했다. 이씨는 죽기를 각오하고 반항했다. 권만세는 도망가고 말았다.

치욕을 당했다고 여긴 이씨는 손도끼로 오른팔을 자르고 목을 베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이 가까스로 이씨를 막았다. 이 사실은 암행어사의 서계로 조정에 알려졌다. 이씨는 ‘열녀’의 이름을 얻었고, 정려문이 세워졌다.(<정조실록> 1787년 4월 2일)

 정절을 지키려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끊으려 했던 여인에게 상을 내린다? 일견 좋은 일이라고 여길지 몰라도 좀 씁쓸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조정이 나서 자살을 독려하는 꼴이 아닌가?

 

 ■세종대왕은 과연 성군인가?

 이쯤해서 세종의 잘못된 판결 하나를 소개한다. 억울한 여인을 죽음으로 몰고간 세종의 잘못…. 장탄식이 절로 나온다..

 1436년(세종 18년) 임복비라는 여인의 기구한 사연을 들어보자.

 복비는 일찍 이버지를 여의고 아버지의 첩인 소근의 집에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소근의 아들, 그러니까 서형(庶兄)인 어연이 짜고 복비를 강간했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덜컥 임신까지 하게 된 것이다. 복비의 숙부는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었으나 나몰라라 했다. 숙부는 복비의 임신사실을 알고도, 복비를 지서산군사(知瑞山郡事) 박아생이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기로 했다. 복비로서는 뱃속의 아이가 큰일이었다.

숙부에게 “나중에 시집을 가겠다.”고 말했지만 혼인은 일사천리로 성사됐다. 혼인을 마친 복비는 신랑 박아생을 따라 길을 떠났다. 아이를 낳을 날짜가 임박한 복비로서는 결단이 필요했다. 거짓으로 신랑에게 말했다.

 “몸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숙부의 집으로 돌아가서 치료한 뒤에 시집으로 가겠습니다.” “병이 심하다”는 신부의 말에 신랑은 “좋다”고 했지만, 숙부는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소리냐. 죽이 되 든 밥이 되 든 시댁에서 치료해라.”

 더 이상 묘책을 찾을 수 없던 복비는 도망가고 말았다. 그것도 자신을 강간해서 아이를 임신시킨 어연과 함께…. 두 남녀는 곧 체포됐다. 복비는 신랑을 버리고 내연남과 도망갔다는 죄로 교수형의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복비의 종이 글을 올려 어연이 복비를 강간했다는 사실을 남김없이 고했다. 조정은 복비의 일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임금과 황희 정승 등은 “나중에 둘이 도망을 갔지만 처음엔 복비가 거절했으니 사형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세종 임금은 “복비를 변방의 관비로 보내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하지만 형조판서 정연 등은 “복비가 절개를 지키지 않았으니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완강히 주장했다. 결국 세종도 그의 말에 따랐다. 이로써 복비를 교수형에, 강간범인 어연은 참형에 각각 처했다. 그리고 어연의 어미도 강간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교수형에 처했다.(<세종실록> 1436년 8월22일) 조카딸의 사정을 알면서도 나 몰라라 하고, 시집까지 보내려 한 숙부는 변방의 군인으로 삼아 내쫒았다.

 이 사건을 보면 분노가 치솟는다. 강간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임신까지 당하고, 거기에 억지결혼, 그리고 퇴로 없는 도피행각…. 그녀가 자신을 임신시킨 남자와 도피를 벌인 게 크나큰 죄라고? 그렇다면 그 아이까지 밴 그 기구한 여인이 대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여인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극형을 결정한 세종대왕은 과연 만고의 성군이 맞는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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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어는 ‘天’을 그냥 ‘천(天·톈)’이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굳이 ‘하늘 천’이라 한다. 이 무슨 장벽이란 말인가.”
 북학파 박제가(1750~1805년)는 독설가였다. 무지몽매한 조선을 일깨우기 위해 “제발 중국(청나라)을 배우라”고 닦달했다. 심지어 당대 조선의 근간이 되었던 선비들 더러 ‘나라의 좀벌레’이자 반드시 도태되어야 할 부류라 ‘디스’ 했다. 박제가 ‘디스’의 끝은 ‘한자 공용론’이라 할 수 있다.
 같은 북학파인 이희경(1745~?)의 <설수외사(雪岫外史)>를 보면 박제가의 주장을 뒤받침하는 내용이 나온다.
 “글자는 말의 근본이다. 한데 조선은 글자를 말로 쓰지 않고 따로 말을 만들었다. 예컨대 ‘天’을 그냥 ‘천’이라 하지 않고 굳이 ‘하늘 천’이라 한 것이다. 다른 글자도 마찬가지다.(故乎天 不曰天 而曰寒乙天)”

 

 청나라 화가 나빙이 1790년 북경을 방문한 박제가를 위해 그려준 초상화와 매화묵죽도. 박제가는 세차례 북경을 방문, 중국의 신문물을 배웠다. 조선도 중국처럼 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티엔과 하늘 천’
 즉 중국처럼 ‘天’, 즉 ‘톈’이라 말하면 될 것을 ‘하늘 천’이라 음과 뜻으로 나눠 겹겹이 부른다는 것이다. 박제가는 “이 때문에 사물의 이름을 분간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희경 역시 “한 글자에서 소리와 뜻이 전혀 달라서 말은 말대로, 글자는 글자대로 각각 사용하고 있다”고 불편함을 토로했다. 박제가의 주장은 브레이크가 없었다.
 “우리는 중국과 접경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본래 사용하는 말을 버린다 해도 안될 이치가 없다. 그래야 오랑캐의 글자라는 모욕을 피할 수 있다. 이로써 조선은 저절로 주·한·당·송의 풍속과 기운을 뒤찾을 수 있다.”(<북학의>)
 박제가의 주장을 한마디로 한다면, “오랑캐 소리를 듣지 않고 중화(주·한·당·송)에 속하려면 한글을 버리고 ‘한자를 공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중국어찬양론을 더 살펴보면 기가 막힌다.
 “중국어는 사물의 이름을 분간하기가 특히 쉽다. 글 모르는 부인이나 어린아이도 일상으로 쓰는 말이 모두 제대로 문구를 이룬다. 경전이나 역사, 제자서, 문집의 글월이 입에서 줄줄 쏟아져 나온다. 중국은 말로 인하여 문자가 생성됐다. 문자를 탐구해서 그 말을 풀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 외의) 외국(조선과 같은)이 제 아무리 문학을 숭상하고 독서를 좋아해서 그 수준이 거의 중국에 가깝다고 해도 결국에는 중국과 차별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한글을 버리고 말과 뜻이 같은 중국어를 공용어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제가는 특히 우리 땅에서 중국어가 사라진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발해 멸망 때문인가”
 “옛날 기자가 5000명을 이끌고 평양으로 와서 기자조선을 열었다. 그 때 (이 땅의 백성들이) 기자의 중국말을 배웠을 것이다. 조선이 한사군의 영역을 편입된 이후 상용되었을 중국말이 전해지지 않는다. 왜일까. 발해가 멸망한 이후 한사군 백성들이 중국으로 들어가고 조선으로 귀속하지 않은 결과는 아닐까.”
 박제가는 중국의 현인 기자(箕子)가 은(상)나라 멸망(기원전 1046년 무렵) 이후 조선 땅에 와서 ‘기자조선’을 세웠음을 강조했다. 또 기원전 108년 중국이 한반도에 한사군을 세웠음을 떠올렸다. 그 때 중국말이 이 땅의 공용어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게 박제가의 주장이다. 그러나 발해 멸망(926년) 이후 옛 땅이 중국에 편입되면서 중국어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박제가는 이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박제가는 더 나아가 “역대 임금들이 중국어를 익히도록 명을 내렸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사실 박제가의 말은 일리가 있다. 조선은 외국어에 능통한 자들이 없어 대대로 곤욕을 치렀다. 특히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1597년, 선조는 도원수인 권율 장군을 맞아 적의 형세에 관해 논의하면서 땅이 꺼져라 한탄한다. 
 “정탐의 중요성을 더 말해 무엇하랴. 심지어 중국 장수를 접견할 때에 통역(通譯)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래서 언제나 혼선을 일으키는데 이러고서야 무슨 일을 하겠는가.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다.”
 세종 시대인 1442년(세종 24년), 사역원 제조인 신개의 읍소를 보자.
 “중국말을 10년이나 배워도 중국 현지에 두어 달 다녀온 사람 만도 못합니다. 앞으로 사역원 내에서 공사를 의논하거나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할 때 무조건 중국어를 쓰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이를 어기는 생도는 그 때마다 매질을 가하도록 하소서.”
 사역원 내에서는 중국어로만 말하고 쓰되 우리 말을 사용하면 엄벌에 처한다는 것이 아닌가. 박제가 시대에는 더 심각했다. 청나라가 흥기한 이래 중국을 부끄럽게 여긴 사대부가 중국어를 일절 배우지 않았다니 말이다.
 “사대부는 중국을 오랑캐로 여겼다. 억지로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가지만 일체의 행사나 문서의 대화는 통역관들에게 맡겼다. 통역관의 농간 때문에 부정부패가 심했다. 이 때문인지 지금 역학이 쇠퇴해서 훌륭한 통역자가 10명도 안된다.”(<북학의>)
 하루빨리 중국을 배워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박제가로서는 조바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박제가가 ‘중국어 공용론’을 펼친 이유이다. 박제가는 “오호라! 지금 중국어를 오랑캐가 지껄이는 조잡한 언어로 여기지 않은 자가 없다”고 안타깝게 여겼다.

 ■박제가의 주장은 웃기는 말
 그러나 박제가의 주장은 강력한 반발에 부딪힌다. 논리도 정연하다.
 “중국은 말이 문자와 동일하다고? 그렇다면 말이 변하면 문자의 소리도 변하지 않은가. 우리 말은 말은 말대로, 글은 글대로 사용하지 않나. 우리는 맨처음 받아들여 배운 한자의 소리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은가.”
 유득공의 <고운당필기>는 “동방의 소리가 중국의 소리보다 낫다(東音勝華音)”면서 “특히 동방에는 고음이 있다(東方有古音)”고까지 했다.
 물론 박제가는 이런 주장에 대해 “문자와 말은 하나로 통일하고 옛 한자의 소리가 바뀐 것은 학자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재반박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한자공용론’을 제기한 이유를 “중국과 대등해지기 위해”라고 못박는다.
 사실 박제가의 ‘한자공용론’을 접하면 당혹스럽다. ‘한글이 모욕적인 오랑캐 글’이며, ‘중국과 대등해지기 위해’ 한글을 버리고 한자를 공용화해야 한다? 박제가의 주장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오죽했으면 1955년 북한학자 홍희유·강석준 등이 <북학의> 번역본을 냈을 때 ‘중국어공용론’ 부분을 빼버렸을까.
 박제가의 순수성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는 <북학의>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고, 천지를 그리워하며 수심에 잠긴다. 천 개의 글자로 가슴 속 생각을 풀어내려니, 어느 겨를에 내 한 몸 위해 고민하리오.”(<정유각시집> 제2권)
 일신을 초개처럼 버리고 백성을 끔찍이 여기던 박제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중국어 공용론’ 만큼은 어떨까.
 망국의 조선을 일으켜 세우려는 조급함 때문에 빚어진 박제가의 ‘오버’라 치부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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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석굴암이 위험하다는 기사가 나왔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있다. 석굴암은 창건 당시부터 세조각으로 갈라져 있었다는 것이다.  
 “천개석(덮개돌)을 만들려고 돌을 다듬는데 갑자기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분통을 터뜨리던 김대성이 깜빡 조는 사이, 천신(天神)이 내려와 다 만들어놓고 돌아갔다.”
 <삼국유사> ‘효선·대성효이세부모’조에 나온 석굴암 창건 설화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석굴암 본존불 보호를 위해 원형돔을 쌓은 뒤 맨 꼭대기에 얹은 덮개돌을 다듬다가 세 동강 났다는 것이다. 분하게 여긴 김대성이 졸다가 천신(天神)의 도움으로 공사를 끝냈다? 이것은 비겁한 변명이다.
 요컨대 공사책임자인 김대성이 덮개돌이 3등분이 됐는 데도 모른 체하고 공사를 마무리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190442대 통감이 된 소네 아라스케는 그 해 가을 경주를 방문했다. 그의 경주 방문 기간 중 석굴암 5층소탑 등이 사라졌다.

그 때 세 조각 난 부실공사의 흔적이 13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역력하니 어찌할 것인가. 미술사학자 고유섭는 ‘영국에 세익스피어가 있듯 우리에게는 석굴암이 있다’고 했는데, 너무 어처구니없는 부실공사가 아닌가. 지금 같으면 김대성은 부실공사의 원흉으로 처벌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1300년 후에도 석굴암은 끄떡도 없다는 것이다. 이 무슨 조화인가. 창건 당시부터 갈라진 석굴암 천장이 지금도 창건 때와 똑같은 상황으로 버티고 있다니, 더 신기할 따름이다.

 

 ■감쪽같이 사라진
 도리어 석굴암보다는 그 주변의 부속문화재가 더 문제다.
 석굴암은 갈라진 채 1300년 동안 끄덕도 없이 남아있지만, 석굴암의 5층 소탑과 감불(龕佛·불상을 모시는 불감 안에 모신 불상) 2점이 감쪽 같이 사라진 것이다.
 벌써 100여 년 전 흔적도 없이 사라져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하건만 이것에 신경을 쓰는 이들은 별로 없다.
 먼저 석굴암 본존불 바로 뒤의 11면 관음상 부조 앞에 안치돼있던 대리석 5층 소탑이 사라진 연유를 알아보자.
 1930년대 경주박물관장을 지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의 회고를 보자.
 “지금 석굴암 9면(11면의 잘못) 관음 앞에 남아있는 대석 위의 불사리가 봉납됐다고 추정되는 소형의 훌륭한 대리석탑이 있었는데…. 1909년 존귀한 모 고관이 순시하고 난 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경주의 신라유적에 대하여>)
 여기서 말하는 ‘모 고관’은 누군가. 야나가 무네요시는 “오층석탑은 ‘소네 통감’이 가져갔다고 하는데….”(<석불사의 조각에 대하여>, 1919년)고 했다.
 ‘소네’는 1909~1910년 사이 한국 통감을 지낸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를 지칭한다. 이토 히로부미에 이어 2대 통감이 된 소네는 1909년 가을, 경주 지역을 초도 순시했는데, 그 과정에서 오층소탑이 증발된 것이었다. 소네는 한국통감으로 재직한 1년 남짓 동안 수많은 고서들을 수집, 일본 왕실에 헌상한 인물이었다.
 “소내 통감이 부임한 이래 아국(我國·조선)의 고서를 수집함에 열중햇음은 일반 공지하는 바인데, 그 수가 2000여권에 달하고….”(<황성신문> 1910년 5월8일)
 그가 한국 내 옛 집과 서원, 사찰 등에서 닥치는대로 수집한 서적 가운데 일부는 궁내청 서고에 ‘소네 아라스케 헌상본’이라는 이름으로 소장돼있었다. 그러다 1965년 한·일 국교수립 이후 반환문화재로 돌아와 현재는 국립중앙도서관에 들어가 있다.
 그러나 소네가 가져간 것이 확실한 석굴암 내 오층소탑은 아직 행방이 묘연하다. 해방 이후 국내 전문가들이 백방으로 행선지를 추적했지만…. 이 때문에 석굴암은 제대로 된 탑상(塔像)을 구비하지 못한채 불상만이 있는 석굴이 되고 말았다. 

1912년 촬영된 석굴암. 전실이 굴절형이었음을 알리는 자료다.

■범인은 일본 퉁감
 또 있다. 오층소탑이 증발하던 무렵의 일이었다. 석굴암 내 주벽 위쪽에 배치된 10개의 감실(龕室)에 하나씩 안치돼있던 작은 불상 가운데 2점 등이 사라진 것이다. 일본인으로서 대한제국 정부의 주석서기로 일했던 기무라 시즈오(木村靜雄)의 회고를 보자.
 “나의 부임 전후에 도아(盜兒·도둑놈)들에 의해 환금(돈주고 빼앗음)되어 내지로 반출되어 있는 석굴암 불상 2구(軀·감불)와 다보탑 사자 일대(3구)와 기타의 등롱(燈寵·사리탑) 등 귀중물이 반환되어 존보상의 완전을 얻는 것은 나의 종생의 소망이다.”(<조선에서 늙으며>, 1924년)
 무슨 말인가. 기무라는 당시 절(불국사)을 지키던 스님 몇 명에게 돈 몇 푼 쥐어주며 반강제로 석조물들을 약탈해간 일본인들을 ‘도아(盜兒)’ 즉 ‘도적놈’이라 지칭한 것이다. 특히 지키는 사람이 없었던 석굴암에서는 석굴 본존의 뒤편 둔부를 무자비하게 때려 파괴했다. 그 곳에 혹 들어있을 복장유물을 꺼내기 위한 만행이었다. 불국사 다보탑에서는 상층기단 네 귀퉁이에 있던 돌사자상 4개 가운데 상태가 좋은 3개를 언제인지도 모르게 약탈해갔다. 또 대웅전 뒤에 있던 섬세한 조각 장식의 석조사리탑 역시 약탈당했다.
 이 중 석조사리탑(1906년 반출 추정)은 몇 번의 전매 끝에 와카모토 제약회사 사장이던 나가오 긴야(長尾欽彌)의 소유로 돼있다가 조선총독부로 반환됐다. 그 때가 1934년의 일이다. 극적으로 귀환한 석조사리탑은 현재 보물 61호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석굴암 감불 2점과, 다보탑 돌사자 3점은 기왕에 언급한 석굴암 5층소탑은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석굴암을 전체 이전하라?
 가슴 철렁한 순간도 있었다. 앞서 인용한 기무라의 회고록을 보자. ‘마치 자신의 공인양 자랑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즉 한일합방 직전, 소네 통감이 관찰사(경북도지사)를 통해 불국사의 주조불과 석굴암 전부를 경성으로 운송할 것을 엄명하고, 운반 비용의 견적서를 올려보내라고 지시했다는 것. 그러나 ‘경주의 고적을 아끼는 그(기무라)의 마음에서 그같은 폭명(暴命)에 맹종할 수 없다고 버티는 사이 한일합방이 추진되면서 유야무야 됐다는 것.
 그런데 <동아일보>(1961년 11월2일)를 보면 석굴암의 전체 이전은 합방 이후에도 추진됐다는 내용이 나온다.
 “곧 합방이 되었는데, 데라우치 총독이 ‘이런 보물을 산중에 방치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다. 이것을 전부 뜯어 서울로 운반하라’고 지시했다. 업자들이 경주로 내려왔으나 모두들 데라우치를 두고 ‘미친 사람’이라고 욕하고 돌아갔다. 이리하여 석굴암은 (현장에서) 수리공사를 착공하게 된 것이다.”
 통감부 시절이든, 총독부 시절이든 불국사 철불과 석굴암 불상 전부를 뜯어 서울로 운반하라는 기상천외한 지시를 내렸다니…. 그러나 지역민심이 얼마나 사나왔는지, 업자들조차 데라우치를 ‘미친 놈’이라 욕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당시 일제의 계획으로는 석굴암 불상들과 불국사 철불을 모두 해체한 뒤 토함산에서 40리 내려온 동해안 감포를 통해 선박으로 인천까지 운반하는 것이었다. 역사학자 이홍직 박사는 “석굴암 석조물을 반출한 이력이 있는 통감(소네를 지칭)은 불국사와 석굴암의 보물마저 송두리째 일본으로 옮겨 가려고 했을 것”이라 확신했다. 사실이라면 지금 생각해봐도 모골이 송연하지 않은가. (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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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한의 입장에서 보면 백제의 창시자인 온조는 굴러온 돌이자, 배은망덕한 사람이다.
 온조가 누구인가. 비류와 함께 고구려 추모왕(주몽)의 서자가 아니던가. 무슨 사연인가. 북부여의 주몽은 북부여 태자인 주몽이 북부여 태자 대소에게 쫓겨 졸본부여로 망명한다.
 주몽은 졸본부여의 재력가(연타발)의 딸로서 아들을 둘(비류와 온조) 둔 미망인(소서노)과 결혼한다. 소서노는 가산을 털어 재혼한 남편(주몽)의 창업(고구려)을 도왔다.
 주몽은 비류와 온조를 자기 아들로 여겼다. 비류와 온조 중 한사람이 다음 왕위를 이어갈 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꿈에도 생각못한 것이 있었다. 북부여에 주몽의 친아들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공주 수촌리에서 확인된 금동관모(왼쪽)과 이번에 경기 화성에서 발견된 금동관모의 흔적. 백제가 마한을 정복한 뒤 마한의 지방세력들을 위무하면서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환도대도 등의 위세품을 주고 간접통치 했을 가능성이 짙다.|충남역사문화연구원, 한국문화유산연구원 제공

■마한을 야금야금 집어삼킨 온조
 주몽은 북부여 시절 예(禮)씨라는 여인과 혼인했는데, 주몽이 탈출할 당시 부인 예씨의 뱃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아이가 바로 유리이다.
 우여곡절 끝에 유리가 찾아오자 주몽의 마음이 바뀌었다. “아들이 찾아오자 추모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삼국사기>)니….
 졸지에 천덕꾸러기가 된 비류와 온조는 땅을 쳤다.
 “어머니가 가산을 털어 대왕의 건국을 도왔는데…. 아아! 이제 나라가 유리에 속했으니 우린 혹(贅·군더더기) 같은 존재가 됐구나.”(<삼국사기>)
 비류와 온조는 결국 어머니(소서노)와 수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온다. 형 비류는 미추홀(인천)에, 동생 온조는 한강변 위례성(풍납토성)에 자리를 잡는다.(기원전 18년) 그러나 비류는 바닷가가 좋다면서 미추홀(인천)을 선택한다. 비류는 결국 미추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다 하여 동생을 찾아온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그런데 온조 세력이 새로운 터전을 잡은 지역은 바로 마한 54개국이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
 굴러온 돌’인 백제 온조왕은 차츰 남쪽으로 영역을 넓히더니 BC 6년 강역을 획정했다. 북으로는 패하(浿河·예성강), 남으로는 웅천(熊川), 즉 금강까지였다. 10년이 흐른 AD 5년에는 급기야 웅천책(熊川柵), 즉 금강에 목책을 세우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자 마한왕은 참다못해 사신을 보내 질책한다.
 “왕(온조)이 처음 왔을 때 발 디딜 곳이 없어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내주었는데…. 이제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 없다’고 생각해…. 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이 어찌 의리라 하겠는가.” 

화성에서 환두대도가 출토되는 순간. 환두대도는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등과 함께 대표적인 백제 중앙정부의 하사품이었다.

■마한의 끈질긴 항거
 마한왕의 질책에 백제 온조왕은 부끄럽게 여기고 그 목책을 헐었다. 하지만 불과 2년 뒤인 AD 7년 강성해진 온조왕의 야욕은 끝내 발톱을 드러낸다.
 “마한은 어차피 망해가는 나라다. 우리가 아닌 다른 나라가 병합하면 순망치한 격이니 우리가 먼저 치는 편이 낫다.”
 온조왕은 사냥을 빙자하여 군대를 일으켰으며, 이듬해(AD 8년) 마침내 마한을 멸망시킨다.
 삼국사기에 나온 백제의 흥기와 마한의 쇠망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나 백제는 마한과 마한인의 전통까지 깡그리 삽시간에 없애지는 못했을 것이다. 백제는 만만치않은 마한의 토착세력을 위무시키는 정책을 썼을 것이다.
 실제로 마한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삼국사기>에 나와있다.
 “백제가 마한을 병합한 뒤 7년이 지난 기원후 16년,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에서 반역하였다. 온조왕이 몸소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이를 치니 주근은 스스로 목을 매고….”
 배은망덕, 은혜를 모르는 온조에게 나라를 빼앗겼으니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
 이복형(유리)에게 쫓겨 내려와 ‘집도 절도 없던’ 온조에게 땅까지 주며 거둬주었는데, 배신했으니…. 그러니 주근과 같은 마한 잔여세력의 반항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백제로서는 이들에 대한 위무정책을 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백제가 마한정벌 후 직접 통치 대신 간접 통치의 형식을 취했을 수 있다.
 그 지역의 토착세력, 즉 마한 수장급의 후예들로 하여금 해당지역을 통치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높다. 

 

 

수촌리에서 확인된 금동신발. 수촌리 가문은 기원전 4세기 청동기 시대부터 이 지역에 터전을 잡고 살아온 토착세력이었다.

■공주와 화성 세력
 지난 2003년부터 공주 수촌리에서 드라마틱한 유적이 잇달아 발견됐다.
 기원전 4세기 시대의 유물인 청동기가 발견된 곳의 인근 지역에서 토광목곽묘(기원후 380~390년 무렵)→횡구식석곽묘(기원후 400~410년)→횡혈식석실분(기원후 420~440년)이 차례로 확인된 곳이다. 무슨 뜻인가. 토광묘는 마한의 묘제이고, 돌무덤(석곽·석실묘)은 백제의 선진 묘제이다.
 아마도 이곳은 청동기 시대부터 터전을 잡고 살았던 지역 토착세력의 가족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들은 마한 시대(토광묘 시대)를 거쳐 백제의 지배를 받은 뒤 돌무덤(석곽·석실)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증조 할아버지 때까지는 마한의 전통을 살렸지만 할아버지, 아버지 대에는 선진 묘제인 돌무덤을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 지체높은 유물들이 대거 쏟아졌다는 것이다.

수촌리 가문이 살아온 세월을 유적, 유물을 토대로 복원해보았다. 청동기 시대~마한을 거쳐 백제의 지방 귀족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가문이었을까.
 마한 54개국 가운데 공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소국인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이 있다. 그렇다면 수촌리 고분의 주인공은 바로 옛 감해비리국의 수장 출신으로 백제의 중앙귀족으로 편입된 가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추정이다.
 그러니까 마한을 야금야금 정복한 백제는 직접지배의 형식을 취하기보다는 그 지역이 토착세력, 즉 마한의 수장급 후예들로 하여금 통치하도록 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간접지배라는 소리다.
 그러면서 백제 중앙정부는 지배자의 상징인 ‘금동신발과 금동관, 그리고 환두대도’ 등을 예기(위세품)으로 하사했을 것이다.
 특히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침하는 4세기 말의 상황을 고려해보자. 백제는 고구려의 남침에 대항하려고 내부결속을 다지려고 지방세력에게 금동관 등의 하사품을 내렸을 가능성이 짙다. 
 최근 경기 화성에서도 의미심장한 발굴결과가 나왔다.
 공주 수촌리 발굴 양상과 매우 흡사한 한성백제 시대의 금동관모, 금동신발, 금제귀고리, 환두대도 등이 쏟아진 것이다.
 발굴단(한국문화유산연구원)은 마한을 차례로 병합해나간 백제의 4~6세기 지방통치시스템을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라고 평가했다. 
 중국 문헌인 <송서>와 <남제사> 백제전을 보면 “백제는 국가에 일정한 공로를 세운 자를 예우하기 위해 왕(王)·후(侯)제를 두었다”고 한다. 이른바 ‘작호제(爵號制)’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공주 수촌리 가문과 화성 가문이 바로 백제 중앙정부가 작호를 수여한 마한출신 지방귀족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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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심을 버리고 의견을 물은지 한 달이 지났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도 진언하는 자가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역린(逆鱗)을 건드릴까 두려워하는 것인가.”
 1491년(성종 22년) 1월 6일, 성종이 답답하다는 듯 화를 냈다. 재변이 잇달아 “내가 부덕한 탓이니 어느 누구라도 나서 무슨 말이라도 직언을 해달라”고 했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종은 “대체 내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임금으로 생각하느냐”고 다그쳤다.
 “다시 한번 고한다. 재앙을 만나서 나의 부덕함과 부족함을 듣고자 하니 기탄없이 직언해주기 바란다.”
 그 후 4년 뒤인 1495년(연산군 1년), 대간이 간언(바른 말)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자 사헌부와 사간원 등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대간이 잘못을 논한 것은 바로 공론입니다. 대간의 말을 듣지 않고 죄를 범한다면 누가 ‘용의 비늘을 거슬리는’(역린) 화를 자초하려 하겠습니까.”
 그러면서 “선왕(성종)은 언로를 열어 직언하는 자를 포상함에 따라 곧은 말을 과감히 전하는 자가 많이 나왔다”고 연산군을 다그쳤다.
 당초 ‘대간을 가둔 것은 그가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이라고 국문을 고집했던 연산군도 대신들이 ‘부왕의 예’를 들며 앙앙불락하자 할 수 없이 처벌의 뜻을 접었다.     

 

'역린’을 잘못 건드리면 죽을 수도 있음을 경고한 <사기> ‘노자한비열전’의 대목. 군주의 총애를 받으면 모든 것이 용서되지만 총애를 잃으면 같은 말을 해도 주륙 당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임금에게 날린 직격탄
 확실히 성종의 치세에 바른말을 하는 신하들이 많았던 것 같다.
 1477년(성종 8년) 대사간 최한정 등의 상소를 보자.
 “신이 듣건대 <효경>에 ‘천자에게 간쟁하는 신하 7명이 있으면 도가 없더라고 천하를 잃지 않고 제후에게 간쟁하는 신하 5명만 있으면 도가 없더라고 나라를 잃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충언이 덕행에 이롭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허물을 듣기 싫어한다면 어느 누가 역린을 건드려 스스로 화를 받겠습니까.”
 최한정은 “최근 훈구대신의 잘못을 탄핵한 대간의 직언을 따르지 않는다”면서 “간언을 따르는 도량이 처음과 같지 않다”고 임금에게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1482년(성종 13년)에도 홍문과 부제학 유윤겸 등이 올린 상언에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있다.
 “신하로서 임금에게 말씀을 올릴 때는 철칙이 있습니다. 임금이 얼굴빛을 부드럽게 해서 신하의 간언을 받아들인다 해도 신하는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는 바를 모두 말씀 드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임금이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위엄을 떨치시면 누가 감히 역린에 맞서 화를 자초하겠나이까.”
 무슨 말인가. 서슬퍼런 임금 앞에서 직언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지를 유윤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역린을 건드려라
 여기서 공통의 표현이 있다. ‘역린(逆鱗)’이다. 모든 신하들은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있는 것이다.
 역린이 과연 무엇이기에 그토록 두려워 하는 것일까. <사기> ‘노자 한비열전’에 나오는 고사이다.
 중국의 전국시대는 한마디로 유세가들이 천하를 쥐락펴락한 시대였다. 소진과 장의와 같은 이들은 ‘세치의 혀’로 천하를 붙였다 뗐다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세치의 혀가 상황에 따라서는 복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었다. 이 때 법가사상의 대가인 한비자는 ‘세난(說難)’을 통해 세치의 혀로 군주의 마음을 얻고, 천하를 쥐락펴락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설파하고 있다.
 “유세의 어려움은 군주의 마음을 잘 알아 나의 마음을 거기에 알맞게 하는 데 있다. 예컨대 용이란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 수도 있다. 그러나 목줄기 아래에 한 자 길이의 거꾸로 난 비늘이 있는데 그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용은 그 사람을 죽여버린다. 따라서 간언하는 유세자는 군주의 애증을 살펴보고 난 후에 유세해야 한다.”(<사기> ‘노자한비열전’)
 한비자는 그 예로 전국시대 위나라 때의 총신 미자하를 예로 든다.
 즉 미자하는 위나라 영공이 총애했던 신하였다. 당시 위나라 국법에는 군주의 수레를 훔쳐 타는 자는 발뒤꿈치를 잘리는 월형(월刑)에 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자하의 모친이 병이 나자 미자하는 군령을 사칭해서 군주(영공)의 수레를 타고 갔다. 영공이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의 효성이 지극하지 않은가. 어머니를 위해 월형을 당할 위기를 감수하다니…. 대단하구나.”
 또 어느 날 영공을 수행해서 과수원에 놀러간 미자하는 복숭아를 먹어보고는 먹던 복숭아를 덜컥 영공에게 바쳤다. 그러자 영공이 미자하의 충심을 칭찬했다.
 “과인을 이토록 끔찍히 위해주다니…. 자기가 먹고 있던 일도 잊어버리고 나를 생각하는구나.” 
 그러다 미자하의 미색이 쇠해지고 군주의 총애를 차츰 잃어갔다. 그 무렵 마자하가 죄를 지었다. 그러자 위 영공은 미자하를 맹비난했다.
 “고얀 놈이로고…. 이 자(미자하)는 예전에 군명을 사칭하여 내 수레를 탔고. 먹다 남은 복숭아를 나에게 먹인 자로다.”
 사실 미자하의 행위는 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총애를 받을 때는 ‘현명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총애를 잃자 ‘군주를 욕보인 죄’로 처벌을 받았던 것이다.
 한비자는 이렇게 미자하의 예를 들어가며 “유세가는 군주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아야 성공적인 유세를 할 수 있다”고 토로했다. 

영화 <역린>의 한 장면. 조선조 성종은 '역린을 건드릴 것을 두려워해서 직언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직언을 장려했다.  

■한비자와 세난
 한비자는 결국 군주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직언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유세의 어려움을 전했던 한비자가 군주의 마음을 휘어잡지 못한채 자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한비자의 저서를 읽은 진나라 군주(훗날 시황제)는 “한비자를 만나보고 죽는 게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한비자는 같은 제후국인 한나라의 공자였다. 진나라는 한비자를 얻으려고 한나라를 공격했다. 막강한 진나라의 공격을 받은 한나라를 상황이 급박해지자 한비자를 진나라 사신으로 보냈다.
 그러나 한비자의 명성을 시기한 진나라 승상 이사가 모함했다.
 “한비자는 결국 한나라의 공자일 뿐입니다. 결국 한나라를 위해 일할 것입니다. 그를 기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의 과오를 들춰내 법대로 처형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진나라 군주는 그 말을 믿고 한비자를 옥에 가뒀다. 승상 이사는 한비자에게 사약을 보내 자살을 강요했다. 진나라 왕(시황제)이 자신의 일을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 사면하려 했지만, 한비자는 이미 죽은 후였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한비자는 ‘세난’편을 저술하고도 스스로 화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슬플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그렇다. 군주를 향해 유세하고 직언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비자를 비롯한 선현들이 말했듯 군주의 역린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역린을 건드리면 끝장이니 제대로 바른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좋은 사회를 만나들려면 역시 목숨을 건 직언으로 군주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가야 한다. 직언을 마다하지 않고 직언을 장려하면서 상급까지 내린 성종을 한번 닮아보라.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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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기에 ‘선덕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축조했다(別記云是王代鍊石築瞻星臺)’는 기록이 있다.”(<삼국유사> ‘선덕여왕 지기삼사’)
 <삼국유사>에 기록된 633년(선덕여왕 2년)의 첨성대 축조기사이다.
 참으로 소락(疏略)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첨성대’가 ‘별(星)을 관찰하는(瞻) 건축물(臺)’이라는 이름이므로 천문대였음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후대의 기록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등을 보자.
 “첨성대는 선덕여왕이 쌓았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방형(方形)이고, 아래는 원형이다. 높이가 19척5촌, 둘레가 21척6촌, 아래의 둘레가 35척 7촌이다. 가운데를 통하게 하여 사람이 가운데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첨성대는 833년(선덕여왕 2년) 별(星)을 관측하는(瞻) 건축물(臺)의 이름으로 축조됐다. 첨성대는 현재 북쪽으로 200~204㎜, 서쪽으로 7㎜ 기울어져 있다. 하부구조의 불규칙 침할 인해 구조물이 균열 혹은 탈락되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첨성대는 천문대다’
 조선 후기 문기인 이유원이 엮은 <임하필기>는 전후사정이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돼있다.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첨성대를 만들었다. 효소왕(692~702) 때는 승려 도증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천문도를 올렸고, 성덕왕(702~737) 때는 처음으로 누각(漏刻·물시계의 일종)을 만들었다.”(‘문헌지장·관측기구편’)
 첨성대를 만든 이후 신라의 천문기상학이 장족의 발전을 이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닌게 아니라 신라의 992년 역사 가운데 천문관측 기록회수는 141회인데, 이 가운데 65%에 해당되는 91회가 첨성대 축조 이후 288년 동안 이뤄졌다는 연구가 있었다.   
 1909년 일본의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는 ‘천문대설’을 재확인했다.
 즉 계단을 통해 창구까지 오른 뒤 나무 사다리를 이용, 꼭대기로 오르는 구조로 돼있다는 것. 또한 첨성대 위를 반쯤 덮고 있는 판석에 관측기구를 올려놓고 천문을 관측했으며, 그 위에는 눈비를 막기 위한 작은 목조건물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 미국의 천문학자인 윌 칼 루퍼스와 영국의 과학사가인 제임스 니덤 등도 와다의 학설을 맏아들여 첨성대를 천문대로 세계에 소개했다.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이 천문대설에 반기를 드는 주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유가 있었다. 첨성대를 보면 오르기가 힘들고 꼭대기 공간이 너무 좁아서 천문을 관측하기에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천문대라면 그 위에서 매일 관측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좁아터져서야 어찌 일을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맨 위 정자석 안의 가로·세로 2.2m에 깊이 0.64m 의 공간은 온전하지 않다.
 또 첨성대 꼭대기 일부는 길이 178㎝, 너비 57㎝, 두께 20㎝의 판석으로 막혀있고 일부는 열려 있다. 이곳으로 올라가려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다가 판석을 짚고 몸을 일으켜 판석 위로 올라서야 한다. 게다가 과측기구까지 둔다면 한 명이 오르내리기도 불편하다.
 거기에 수평 잡힌 평탄한 공간은 판석이 깔린 0.3평 뿐이고 옆에 깐 판목까지 합한다 해도 1평도 안된다. 그 위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별을 바라보는 일 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규표설, 주비산경설
 이런 의문점에 대해 1964년, 전상운은 이른바 ‘규표설(圭表說)’을 제기했다. ‘규표’란 지상에 수직으로 세운 막대를 뜻한다.
 ‘규’는 ‘표’의 아래 끝에 붙어서 수평으로 북(北)을 향해 누인 자를 말한다. 즉 ‘규’는 정오 때 ‘표’의 그림자를 정확하게 측정하여 정확한 절기(節氣)와 1년의 길이를 결정하는데 쓰였다. 결국 첨성대는 4계절과 24절기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세운 규표라는 것. 또한 첨성대는 어느 방향에서 보나 똑같은 모양에서 보이므로 계절과 태양의 위치와 관계없이 그림자를 측정해서 시간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1974년에는 수학자 김용운이 이른바 주비산경설(周비算經說)을, 역사학자 이용범이 수미산설(須彌山說)을 각각 제기함으로써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김용운의 주비산경설은 무엇인가. 첨성대에는 고대 중국의 천문수학서인 ‘주비산경’의 수학적 원리와 함께 천문현상에 관한 상징숫자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첨성대에는 1:3의 원주율, 3:4:5의 구고법(句股法·피타고라스 정리)이 상징적으로 숨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첨성대 몸통의 윗지름이 창구 한 변 길이의 약 3배로서 원주율 3.14에 해당된다는 것. 또 몸통 밑지름과 정자석 한 변의 길이는 약 5:3이고 몸통부의 높이와 기단석의 대각선 길이는 약 5:4라는 것. 이는 주비산경에 나오는 직각삼각형의 32+42+52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피사의 사탑 기울기의 역사. 탑은 완공당시부터 2.8도 기울어졌으며. 최종적으로는 5.6도(10% 이상)나 기울어졌다. 건축학적으로 기울기가 10%가 넘으면 붕괴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피사의 사탑은 물리학의 법칙을 부정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자료

수미산설·우물설
 역사학자 이용범의 ‘수미산설’도 흥미로운 주장이었다.
 이용범은 첨성대가 병 모양이라는 것에 착안, 수미산 모양을 본떠 만든 제단이라는 설을 제기했다. 수미산은 고대 인도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이다. 불교의 우주관에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첨성대를 보고 수미산을 떠올리기 쉽다고 한다. 따라서 이용범의 ‘수미산설’은 상당수 연구자들의 공감을 얻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우물설도 제기된다. 원통형 몸체에 우물 정(井)자 모양의 정자석 2단을 올린 모양은 우물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하기야 우물은 신라의 개국신화와 연관성이 있다. 시조 박혁거세가 나정(蘿井)이라는 우물에서 탄생했다는 신화가 있지 않은가.
 “양산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도록 비치고 있다.~거기에는 알 한 개가 있었다. 알을 깨고 사내아이를 얻으니~그 아이를 혁거세왕이라 이름했다.”(<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
 그러니까 첨성대의 상단부를 우물 형태로 만든 것은 하늘과의 소통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 모든 다른 주장들에게는 결정적인 흠이 있다. <삼국유사>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보이는 “‘첨성대’, 즉 별을 관측하는 구조물”이라는 기록을 뒤집을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전히 첨성대는 선덕여왕 때인 633년, 신라인들이 만든 천문대일 수밖에 없다.

 

 ■기울어진 첨성대
 최근 첨성대가 다시금 부각되고 있다. 첨성대가 해마다 1㎜ 기울고 있다는 감사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9~2010년 사이 첨성대를 안전점검한 뒤 그 보고서를 낸 바가 있었다.(국립문화재연구소의 <석조문화재안전관리방안 연구보고서-첨성대를 중심으로>, 2011년)
 보고서를 보면 2009년 현재 첨성대는 기단중심과 정상부에 있는 정자석 중심을 비교하면 북쪽으로 200㎜, 서쪽으로 7㎜ 정도 기울어져 있다.
 이것을 입면상의 각도로 본다면 약 1도19분이 기울어져 있다는 뜻이다.
 재미있는 것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첨성대의 기울기를 연구검토하면서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을 비교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최근 흙추출법을 활용해서 기울어지지 않은 쪽은 북쪽의 지하 흙을 36미터 가량 파내어 균형을 맞추는 방법으로 기울기를 보정했다. 이로써 피사의 사탑은 1700년대 수준인 5미터 기울기로 수정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자료

■피사 사탑의 재앙
 피사의 사탑은 1173년 8월9일 착공됐다. 그런데 위치가 문제였다. 당시 피사 지역은 매우 넓은 개펄의 중앙에 있는 섬으로 이뤄져 있었다. 강이 만나는 곳에 진흙이 쌓여 있었고, 이 축축하고 부드러운 토양 위에 피사 탑이 건립됐다. 토양이 부드러운 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다만 피사의 영광을 기리는 기념물을 건설할 피사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완벽한 장소로 여겨졌다.
 탑은 건축가 보나노 피사노가 설계·감독했다. 그런데 4층까지 쌓아 올렸을 때 문제가 생겼다. 북쪽 방향으로 탑이 기우뚱한 것이다.
 공사는 5년 만인 1178년 중단됐다. 이후 94년만인 1272년 공사가 재개됐지만 다시 6년 만인 1278년 또 다시 중단됐다.
 탑이 북쪽으로 약 7인치 기울어지고 탑이 계속 올라가자 반대방향인 남쪽 방향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석공들이 수직으로 모양을 바로 잡으려 안간힘을 쓰자 탑은 바나나 같은 형태로 변했다. 착공(1173년)-중단(1178년)-재개(1272년)-재중단(1278년)의 우여곡절을 겪은 것이다.
 피사탑은 1360년 건축가 토마소 안드레아 디 피사가 꼭대기 종루를 세우며 마지막 고비를 넘긴 뒤 10년 뒤인 1370년 비로소 완공됐다.
 전문가들은 꼭대기에 세운 작은 종류가 탑을 안정시킬 것이라 여겼다.
 남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북쪽을 더 높게 했고, 더 큰 종을 북쪽에 달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생각은 틀렸다.
 기울어짐이 가속화한 것이다. 건물을 계속 침하했고, 19세기에 들자 1층의 일부분이 땅 속으로 10피트나 푹 들어가고 말았다.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피사의 사탑
 1838년 이탈리아 건축가인 알레산드로 게라데스카가 탑의 기초부를 파보았다.
 재앙이었다. 물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피사의 탑은 물 위에 건설한 셈이었던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피사의 탑은 약과였다. 1902년 이탈리아에서 비극이 일어났다.
 1000년 이상 서 있었던 베니스의 성 마르코 광장의 종탑이 스르르 붕괴된 것이었다. 이틀 간의 붕괴로 1만8000t의 먼지와 조각더미가 쌓였다.
 이탈리아 정부는 베니스의 재앙을 거울삼아 피사의 사탑 붕괴를 염려하는 위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는 못했다.
 1933년 뭇솔리니가 피사의 사탑에 관심을 갖고 대책을 마련했다. 땅속이 아닌 탑의 기초 속으로 시멘트를 주입하고자 한 것이다.
 당시 건축학자들은 탑 아래엣 솟구치는 물이 기초를 약하게 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스며나오는 물을 차단하기 위해 콘크리트로 탑의 기초를 밀폐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361개의 구멍을 탑 기초 속으로 뚫고 80여 t의 콘크리트를 주입했다.
 그러나 이 또한 독이 됐다. 탑의 균형이 깨지고 더욱 급격하게 남쪽으로 3.5인치 기울어진 것이다. 탑은 그야말로 건드리면 무너질 듯 위험해졌다. 그러나 때마침 발생한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 그 사이 탑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첨성대는 위험한 피사의 사탑과 견줄 수는 없다. 다만 첨성대의 하부구조(왼쪽)가 피사의 사탑 하부구조(오른쪽)와 달리 불규칙적으로 침하하고 있는 것이 불안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자료

물리학의 법칙을 거부한 사탑
 이탈리아 정부는 그렇게 서서히 기울어져 가는 탑을 방치하고 있다가 1990년에 들어서야 대책을 마련했다. ‘피사의 사탑’의 문을 닫고 기술위원회를 구성한 것이다.
 사실 파사의 사탑은 1370년 완공됐을 때 이미 2m(약 2.8도) 이상 기울어져 있었다. 1990년 보수공사를 결정했을 때는 이미 5.5m(약 5.6도) 가량 기우뚱한 상태였다. 탑의 높이가 약 50m인데, 5.5m 이상 기울어져 있다는 것은 탑 높이의 10% 이상 기울어졌다는 뜻이다.
 기울기 5.6도 이상 발생했다는 것은 물리학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다. 실제로 컴퓨터를 통해 피사사탑의 기울기를 시뮬레이션하면 5.44도 이상을 기울이면 피사의 사탑을 세울 수가 없었다. 서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피사의 탑’ 세우기에 나선 이탈리아 정부는 갖가지 긴급조치를 단행했다.
 붕괴가능성이 가장 큰 2층 둘레에 강철케이블을 벨트처럼 감았고, 총 900t의 납웨이트를 북쪽 기초부분에 쌓아올렸다. 그러자 800년 만에 처음으로 기울어진 방향의 반대 방향(북쪽방향)으로 약 1인치 이동했다. 납 웨이트 공법은 성공적이었지만 미관상의 문제가 지적되었다.
 결국 납 웨이트를 제거하고 탑의 기초 아래 콘크리트 링을 만들어 지하 50m까지 박혀있는 10개의 케이블로 탑을 그 자리에 단단히 고정하는 작업에 나섰다.
 지표 면 아래 물이 용솟음 칠 것이 두려웠지만 땅속에 액체질소를 주입함으로써 얼리는 방법을 취했다. 땅 속의 물이 콘크리트 링을 세울 얕은 구덩이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흙 속의 수분이 얼 때 부피가 팽창되는 바람에 탑이 기울어진 반대방향으로 16분의 1인치 움직인 것이다. 

 ■5m 기울기로 보정된 사탑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좋은 것이 아닌가. 기울어진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다면….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얼어서 팽창된 흙이 해동되면 탑이 다시 남쪽으로 더 기울어질 것이 우려됐다. 엔지니어들은 재빨리 250t의 납웨이트를 추가했다.
 잘하려다가 더 어려움에 빠진 격이 됐다. 탑이 멈췄지만 기존의 납 웨이트보다 훨씬 많은 납웨이트가 쌓이게 된 것이다. 혹 떼려다가 혹 붙인 셈이 됐다. 
 잘못된 처방으로 탑의 상태는 더욱 악화됐다. 모든 작업이 중단됐다.
 이같은 시행착오 끝에 이탈리아 정부는 피사의 사탑 허리에 길이 340피트, 두께 2인치의 케이블을 설치했다. 케이블은 100아드 바깥의 지면에 단단히 설치됐다.
 또한 흙추출법도 적용됐다. 즉 탑의 북쪽 밑에서 흙 추출관을 이용하여 흙을 빨아들여 제거했다. 이를 통해 제거된 흙이 있던 빈공간이 탑의 무게에 의해 눌려지게 되어 빈공간만큼 기울기가 교정되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총 36m3의 흙을 빼내 탑은 5m의 기울기로 떨어졌다. 이것은 1700년대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첨성대는 피사의 사탑인가
 물론 첨성대는 피사의 사탑처럼 붕괴 위험에 처한 구조물은 아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측도 “‘피사의 사탑’과 비교할 때 첨성대 지반침하로 생기는 기울기는 매우 작으며 따라서 구조적 문제가 발생할 것 같지 않다”고 보았다.
 하지만 연구소 측이 ‘문제’라고 여기는 대목이 있다. 첨성대 하부구조가 불규칙적으로 침하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연구소는 2010년 첨성대 안전점검을 실시한 결과 기초석 북쪽 중앙부가 기준점에 비해 최대 161㎜의 침하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또 하나, 2009년에 비해 북서측 기초부에 20㎜의 처짐이 추가로 발생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반면 피사의 사탑은 규칙적으로, 즉 선형적으로 침하해왔다. 따라서 피사의 사탑을 구성하는 석재의 상태는 매우 건전하며 상부구조물 자체에는 문제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첨성대의 경우 하부구조가 불규칙적으로 침하되다 보니 상부구조물 부재 간 벌어짐이나 균열 등 구조적인 문제들이 발생했다.
 최근 감사원의 지적사항 가운데 재미있는 대목이 바로 ‘첨성대가 해마다 1㎜ 기운다’는 발표였다.
 2014년 1월 감사 도중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함께 첨성대 기울기를 측정한 결과 2009년(200㎜) 보다 4㎜ 더 기울어진 204㎜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4㎜ 차이가 과연 그렇게 의미심장한 것일까. 측정오차를 고려한다면 200㎜나, 204㎜나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측정기구에 따라 혹은 시시 때때마다 달라지는 측정오차가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감사원의 감사결과는 지나친 호들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호들갑이든 침소봉대든, 이번 감사결과로 첨성대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감사원의 공이 아닐 수 없다.
 점점 시들어가는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높여주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첨성대는 북쪽으로 200~204㎜, 서쪽으로 7㎜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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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 4년(1393), 진안대군 이방우는 술을 좋아하는 성질 때문에 날마다 술을 마셔댔다. 마침내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죽었다.”(<태조실록>)
 태조 이성계의 맏아들인 이방우가 ‘술병’으로 죽었다는 <실록>의 기사다. 맏아들의 부음소식을 들은 태조는 3일 간이나 조회를 정지하라는 영을 내리고 근신했다.   태조는 이방우에게는 ‘경효(敬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역사를 쓰면서 ‘만약’이라는 가정법을 써야 아무 쓸모 없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의 장남인 이방우를 보면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게 된다,
 ‘만약’ 이방우가 태조 이성계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했다면 어땠을까. ‘제1,2차 왕자의 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정종-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역사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조선의 설계자라는 정도전도 비명횡사 하지 않았을 것이고….

  개국 조선의 ‘장자’였던 이방우는 과연 누구였고, 왜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술병에 빠져 죽었을까. 

이방우가 소주를 마시고 죽었다는 기사가 실린 <태조실록>의 이방우 졸기. 이방우는 아버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뒤 철원 땅으로 은거했다. 고려의 충신으로 남기를 원했다는 증거이다.

■이성계 맏아들의 행적
 여기서 잠깐 이방우가 죽은 뒤의 이야기를 해보자.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나 동생인 태종 이방원이나 맏아들(혹은 큰 형)의 죽음을 애닮아 하면서 이방우의 가족들을 돌봤다.
 예를 들어 2년 뒤인 1395년 태조는 진안대군 이방우의 아들인 이복근을 ‘진안군’으로 습봉(襲封·세습해서 봉함)했다. 동생인 태종은 1412년(태종 12년) 진안대군의 부인(태종의 형수)인 지씨에게 쌀·콩 15석과 술, 과자 등을 하사했다. 2년 뒤에는 이방우의 사위인 이숙묘에게 쌀·콩 20석과 종이 150권을 하사했다.
 이방우의 부인인 지씨의 실록기사는 남편이 죽은 지 47년이 지난 1440년(세종 22년)에도 등장한다.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 심씨가 양로연을 베풀었는데, 이방우의 부인인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지씨 등이 참석했다. 이날 최고 웃어른인 지씨에게 옥잔(玉盞)과 금배(金盃)를 올렸다.
 그러나 이후에는 이방우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라진 이방우의 무덤이 현현하다
 그러다 그의 사후 396년이 지난 1789년(정조 13년), 충주사람 이국주의 상언으로 진안대군 이방우의 무덤을 수축하고 어제비를 세웠다는 기사가 나온다.
 대관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사연인즉은 이렇다.
 1789년 2월, 정조가 원릉(영조의 능·경기 구리)에 행차한 뒤 돌아오고 있는데, 어떤 유학(幼學·벼슬하지 않은 유생)이 어가를 가로막고 무릎을 꿇었다.
 “신은 진안대군(이방우)의 15대 손입니다. 듣기로 대군의 묘를 함흥에서 풍덕(개풍)으로 이장했다는데…. 병란 때문에 모든 문헌이 사라지고, 후손들 또한 먹고 살기가 힘들어 무덤을 돌보지 못한지 100년이 지났습니다. 이후 봉분을 찾을 수 없어….”
 정리하자면 진안대군 이방우가 죽자 함흥에 장사를 지냈다가 풍덕(개풍)으로 무덤을 옮겼다는 것. 그런데 병자호란(1637년) 때문에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무덤의 소재를 뒷받침할만한 문헌 또한 사라져 버렸다는 것. 따라서 이후 100년도 훨씬 넘게 조상의 무덤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국주의 상언이 계속된다.
 “그런데 1787년(정조 11년), 풍덕 지방에 홍수가 났을 때 묘갈(묘소 앞의 비석)이 드러났는데…. 묘갈의 내용을 보니 ‘진안대군의 부인인 지씨의 묘’(鎭安大君妻三韓國夫人池氏之墓)와 그 옆에 ‘대군묘대좌(大君墓在左)’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앞에는 석인(石人) 한 쌍이 쓰러진 소나무와 가시덤불 속에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그러니까 실전된 조상(이방우 부부)의 무덤 봉분이 홍수 때문에 드러났다는 것. 그러나 이방우의 후손들은 쉽게 그 무덤을 보수할 수 없었다.
 “노출된 묘역 둘레를 백성들의 무덤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신(이국주)이 감히 백성들의 무덤을 깔아뭉개고 새로운 무덤을 조성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무례함을 무릅쓰고 아뢰는 것입니다.”
 이국주의 상언을 들은 정조 임금은 가슴을 쳤다.
 “아! 그 분은 우리 집안의 오태백(吳太柏)이신데…. 그 묘가 실전되어 안타까웠는데 이제 떨어져 나간 비문 조각과 갂여나간 글자를 이끼에 묻히고 돌이 부서진 뒤끝에서 비로소 찾아냈으니….”
 정조는 이렇게 한탄하면서 경기관찰사에게 추상같은 명을 내렸다.
 “돈과 곡식을 넉넉히 주어 무덤을 봉축하고 제청(祭廳)을 지어라. 따로 무덤 지키는 민호(民戶)를 두어 백성들이 장사지내거나 나무하고 꼴베는 것을 금하게 하라. 무덤조성이 끝나면 해당지역 수령이 돌봐라.”(<정조실록>) 

정조의 시문집인 <홍재전서>. 실전된 진안대군 이방우의 무덤을 찾고 개보수한 뒤 임금이 어제시를 남겼다.

■조선의 오태백
 정조 임금은 묘소가 다 정비되고, 비석을 세우는 날 직접 비문을 지었다.(<홍재전서>)
 “공은 태조의 장남으로 (太祖長胤)~가정에 있어서는 효성스러웠고(在家而孝) 신하가 되어서는 미더웠네.(爲臣也藎) 의로운 군대가 서쪽으로 돌아오자(義旅西回) 필마로 동쪽으로 떠나가니(匹馬東조) 북산의 옛 마을로(北山故里), 곧 오태백(吳泰伯)이시었네(卽泰伯吳)”
 정조 임금의 이 어제시는 태조 이성계의 장남 이방우의 생애를 일목요연하게 알려준다.
 정조 임금의 어제시가 표현했듯 이방우를 지칭할 때 꼭 나오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조선의 ‘오태백(吳太伯)’이라는 별명이다. 과연 오태백이 누구이기에 이방우를 조선의 오태백이라 지칭했을까.
 오태백은 중국 춘추시대 ‘춘추5패’ 중 하나였던 오나라의 시조였다.
 그는 본래 주나라 태왕의 장남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인 태왕은 왕위를 막내아들인 계력에게 물려줄 뜻을 품고 있었다. 태왕의 숨은 뜻은 원대했다.
 막내아들인 계력도 현명했지만 계력의 아들인 희창이 더 현명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태왕은 막내아들인 계력을 차기 국왕으로 선택함으로써 그 다음 보위를 막내아들의 아들인 희창에게 넘긴다는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의도를 눈치 챈 태백은 둘째 동생인 중옹과 함께 오랑캐 땅인 형만(장수성 쑤저우 지방)으로 피했다. 거기서 태백은 몸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카락을 잘라 절대 왕위를 이을 뜻이 없음을 전했다. 덕분에 막내아들인 계력은 왕위에 올랐고, 계력의 다음 왕위는 훗날 주나라 문왕이 되는 희창에게 전해졌다.
 이로써 주나라는 주 문왕 때 반석 위에 올랐고, 그의 아들인 주 무왕 때 은(상)을 멸하고 중원의 천자로 우뚝 섰다. 
 후세 사람들은 막내동생에게 ‘쿨’하게 왕위를 양보하고 오랑캐의 땅에 묻힌 태백을 칭송했다. 태백은 형만 사람들의 추앙을 받아 오나라 시조로 옹립됐다.
 훗날 공자는 그런 태백을 두고 “태백은 지극한 덕이라고 말할 만하다. 세 번 천하를 양보했으나 백성들이 일컬을 것이 없다.(泰伯 其可謂至德也已矣 三以天下讓 民無得而稱焉)”(<논어> ‘태백’)고 했다.
 그런데 정조를 비롯한 조선사람들은 태조 이성계의 장남인 이방우를 ‘조선의 오태백’이라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이방우는 고려의 충신
 과연 이방우는 ‘쿨’한 마음으로 동생들(방과와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초야에 묻힌 오태백 같은 존재였을까.
 과연 그랬을까. 따져보자. 태조 이성계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와 6남2녀를,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와 2남1녀를 각각 두었다. 한씨와의 사이에서 이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 강씨와 사이에서 방번·방석 등의 아들을 낳았다.
 이성계의 맏아들인 이방우는 어렸을 때부터 효자였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했다고 한다.
 “조금 자라서는 시서(詩書)에 몰두하고 몸소 검약을 실천하였으며 일체의 부귀 영화에는 전혀 뜻이 없었다. 고려조에 벼슬해서 벼슬이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1388년(고려 우왕) 아버지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면서 운명이 갈린다.
 이방우의 무덤을 수축하면서 그의 삶을 기록한 <정조실록>을 더듬어보자.
 “태조대왕(이성계)이 위화도 회군을 하고 명나라를 받들자 대군(이방우)은 가족을 이끌고 철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은거한 것이다.  
 이 <실록>의 기사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아버지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역성혁명의 뜻을 구체화하자 철원으로 은거했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결국 이방우는 아버지의 혁명을 반대했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기를 원했다는 것이 아닌가. <정조실록>은 이후 이방우의 행적을 이렇게 소개한다.
 “1392년, 태조께서 조선을 개국하고 왕위에 오르자 대군은 마음 속으로 두 동생(정종과 태종)이 모두 성덕이 있음을 인정하고 고향(함흥)으로 낙향했다. 태조께서도 대군의 뜻을 대략 아시고 땅과 집을 하사했다. 장남의 뜻을 꺾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고, 그 자취를 묻어버리고 싶어했던 것이다.” 
 마지막 대목, 즉 이방우의 자취를 묻고 싶어했다는 대목도 흥미롭다. 이방우에게서 고려 충신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대목이 아닌가.
 결국 이성계의 역성혁명은 맏아들 이방우에게 용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성계의 맏아들은 결국 고려의 충신으로 남았던 것이다.
 그런 그가 고려의 망국을 슬퍼하면서 소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결국 술병에 걸려 죽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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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의 권리가 너무 세서 집안의 법도가 서지 못한다.(女權太重 家道不成)”(이익의 <성호사설> ‘인사문’)
 “아침에 마신 술은 하루의 근심이요, 맞지 않는 가죽신은 1년의 근심이요, 성질 나쁜 아내는 평생의 근심이다.(一日之患卯時酒 一年之患狹窄靴 一生之患性惡妻)”(성현의 <용재총화>)
 ‘엄처시하(嚴妻侍下)’의 두려움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역사를 빛낸 위인들마저 부인의 말 한마디에 꼼짝도 못했으니 말이다.
 어디 이익이나 성현 뿐이랴. 초정 박제가 역시 “요즘 사람 중에 자기 집안을 대장부 답게 다스리는 자가 어디 있느냐”고 한탄했으니 말이다. 오죽했으면 ‘삼재(三災)’란 ‘수재(水災)와 화재(火災), 악처재(惡妻災)를 가르키는 말’이라 하지 않던가.         

남성의 권리가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진 고려 조선시대지만 한눈을 잘 못 팔았던 남편들은 부인들의 사자후에 꼼짝도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영웅호걸도 부인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
 제 아무리 세상을 호령한 영웅호걸이라도 부인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였다.
 오죽했으면 명나라의 전설적인 명장인 척계광(1528~1588)은 이렇게 말했다지 않은가.
 “만 명의 원수(怨讐·적군)는 무섭지 않다. 그러나 집안에 있는 단 한 명의 원수(元帥·아내)는 무서워 한다.”
 불멸의 양명학을 창시한 성리학자 왕양명(1472~1529)은 또 어떤가.
 제자들에게 ‘인간의 도리와 사물의 이치’를 가르친 만고의 철학자였지만 집에서는 한낱 공처가였을 뿐이다. 왕양명이 첩을 들이기라도 하면 왕양명의 부인은 남편을 질질 끌고 나와 ‘반성하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존경받는 성리학자가 아내의 ‘사자후’에 놀라 손을 들고 싹싹 비는 꼴이라니….
 당나라 시대 계양현 현령을 지낸 완숭(阮嵩)이라는 인사를 보라. 어느 날 완숭이 연회를 베풀다 흥에 겨워 계집종들을 불러 노래를 시켰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아내 염씨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에 팔을 걷어붙인 뒤 칼을 들고 달려온 것이다. 남편은 상 밑으로 숨고, 손님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고…. 결국 완숭은 ‘아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죄’ 때문에 ‘인사고과’에서 최하등급을 받고 파직됐다.  

 

  ■‘공처가가 나 뿐이 아니로구나!’
 비단 중국 뿐일까.
 서거정의 <해동잡록>에 소개된 ‘공처가’ 이야기를 보라.
 즉 지독한 공처가였던 어떤 장군이 교외에다 붉은 기와 푸른 기를 세워놓고 명령했다.
 “공처가는 붉은 기 쪽으로, 공처가가 아니면 푸른 기 쪽으로 가라.”
 그러자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붉은 기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모두들 ‘공처가’임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단 한사람 만이 푸른 기 쪽으로 섰다. 장군이 부러워 했다.
 “대단한 사람이야. 난 백만대군을 이끌고 적과 맞섰지만 한번도 항복하지 않았지만, 집에서는 꼼짝도 못하는데…. 자네는 무슨 비결이 있기에….”
 그러자 푸른 기로 달려간 사나이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제 아내가 늘 ‘말씀’하셨습니다. ‘남자들이 모이면 반드시 여색을 밝힐 것이다. 그러니 남자들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마라.’고…. 그래서 저 혼자 푸른 기 쪽으로 간 것입니다.”
 그제서야 장군은 맞장구를 치며 기뻐했다.
 “야! 이 사람이야말로 공처가구나. 그러고보니 공처가가 나 뿐이 아니로구나.” 

김홍도의 모당 홍이상의 평생도 가운데 결혼그림. 옛 문헌을 보면 공처가로 부인의 폭력에 시달린 이들이 의외로 많았다.

■지팡이로 맞은 임금님
 공처가의 대명사가 우리 역사에도 있다. 바로 고려 충렬왕(재위 1274~1308)이었다.
 충렬왕은 39살 때 무려 23살 연하인 제국대장공주(16살)와 혼례식을 치렀다. 제국대장공주가 누구인가. 바로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세조)의 막내딸이었다.
 그랬으니 얼마나 기세가 등등했을까. 충렬왕에게는 원래 조강지처가 있었다. 24살 때 혼인한 정화궁주였다. 하지만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와의 혼인 후 본부인(정화궁주)을 별궁에 유폐시킬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충렬왕이 새 부인(제국대장공주)과 천효사라는 절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문제가 생겼다. 왕이 먼저 절에 도착한 것이다.
 뒤늦게 도착한 공주가 충렬왕에게 화를 벌컥 냈다.
 “날 따르는 수행원이 왜 이리 적은 겁니까. 나 돌아가겠습니다.”
 부인이 변덕을 부리며 행차를 되돌리자 당황한 남편이 부인을 따라 말머리를 돌렸다. 공주는 그런 남편을 맞아 지팡이로 때렸다.(公主以仗迎擊之)
 이 때의 장면을 기록한 <고려사>를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공주가 지팡이로 왕을 때리자) 충렬왕은 사모를 벗어던지며 그 분풀이로 공주의 시종(홀라대)를 쫓아가 꾸짖었다. ‘다 네 놈 때문이야. 널 반드시 처벌할거야.’ 그 사이 공주의 노여움이 풀렸다. 다시 절로 돌아갔다. 그러다 이번에는 남편이 자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들어갔다고 욕하고 때렸다.”(<고려사> ‘제국대장공주’)
 이 목불인견의 장면을 목격한 고려인들의 가슴은 찢어졌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문신이자 일관(日官) 문창유(?~1285)는 장탄식했다. ‘이보다 큰 모욕이 어디 있겠느냐.’”(<고려사> ‘제국대장공주’)         
 일국의 왕이 부인에게 매를 맞고, 부인의 시종에게 분풀이 하는 꼴이라니…. 그것도 23살이나 연하인 부인에게…. <고려사>를 다시 보면 점입가경이다.
 “공주가 흥왕사의 황금탑을 파괴하여 금을 쓰려고 하자 왕이 ‘안된다’며 금했다. 공주는 왕의 말을 듣지 않았다. 충렬왕은 그저 울기만 했다.(王禁之不得 但涕泣而已)”
 딸 뻘인 아내에게 혼이 나서 그저 울기만 했다는 것이다.

 

 ■공처가 열전
 일국의 임금이 그랬으니 일반 백성들은 어땠으랴.
 여말선초 때 왜구섬멸의 큰 공을 세운 최운해(1347~1404)의 아내 권씨는 성품이 질투가 심하고 사나왔다고 한다.
 “걸핏하면 남편 얼굴에 상처를 내고 옷을 찢었다. 심지어는 말(馬)의 목을 자르고, 개(犬)를 쳐서 죽였다.”(<고려사> ‘열전·최운해’)     
 이 뿐이 아니었다. 권씨는 도망가는 남편 최운해를 쫓아가 칼로 내리치려 했다. 아내가 휘두르는 칼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꼴을 상상해보라.
 조선조 중종 시대인 1517년(중종 12년), “못생긴 남편과는 동침도 안한다”고 남편을 구박한 여인이 있었다. 판관 홍태손의 부인(신씨)이다.
 천성이 사납고 완악했던 부인 신씨는 결혼 후 6~7년간이나 남편과 동침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너는 추한 얼굴에 나이도 늙고 기력도 없는데, 무엇을 믿고 혼인해서 나를 초라하게 만드느냐”며 “빨리 죽어라”고 다그쳤다.
 1522년(중종 17년) 남편을 상습적으로 구타해온 아내 이야기가 장안에 화제를 뿌렸다. 결국 사헌부가 나서 사건을 조사한 뒤 임금에게 고했다.
 “허지의 아내 유씨는 투기가 너무 심해 남편을 ‘상습구타(毆辱)’해왔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볏짚을 사람처럼 만들고 사지와 몸통을 절단하면서 ‘이것이 허지(남편)다’라고 계집종들로 하여금 축하하도록 했습니다.”
 남편을 얼마나 증오했는지, 담장을 넘어온 이웃집 수탉의 날개를 뽑고 사지를 찢어죽이며 말했다.
 “니네 집에도 암탉이 있는데 남의 집 암탉을 쫒는 이유가 뭐냐. 꼭 허지(남편)같은 류의 짐승이로구나!”
 유씨의 악행은 “소문이 퍼진 뒤이므로 조정 안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남편의 급소를 잡아 살해한 아내
 1427년(세종 9년) 태조 이성계의 사촌동생인 이지가 79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그런데 사인이 묘했다, 연말연시를 맞아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내(후처인 김씨)와 함께 찾았던 절(향림사)에서 죽은 것이다. <태종실록>에 나타난 그의 졸기를 보면 “떠도는 이야기”라며 소개하는 심상찮은 사족이 보인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지의 부인(김씨)이 향림사 스님과 정을 통했는데, 남편(이지)이 간통 현장을 목격했다. 남편이 내연남과 김씨를 붙잡고 마구 때렸다. 그 때 김씨가 남편의 고환(불알)을 끌여당겨 죽였다.(金拉枝腎囊而殺之).”
 바람을 피우다 현장에서 적발됐으면서도 남편의 급소를 잡아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김씨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 비록 죽을 죄를 지었으되 종친(이지)의 아내라는 점이 감안됐다. 하기야 뭐 좋은 일이라고 동네방네 소문내며 처벌을 하겠는가. 그러고보면 급소를 잡혀 죽임을 당한 남편만 불쌍할 따름이다.
 이런 말이 있다.
 당나라 초기 어사대부를 지낸 배담의 ‘공처가론’이다. 이른바 ‘아내가 무서운 세가지 이유’이다.
 “첫째, 젊고 예쁠 때는 보살 같아서 무섭다. 둘째, 세월이 지나 집안에 자식이 많아지면 구자마모(九子魔母·동자를 잡아먹는 불경의 여신)처럼 변하니 무섭다. 셋째, 60대가 지나면 검은 얼굴에 온통 분을 발라 마치 ‘구반도(鳩盤茶·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 불경 속 귀신)처럼 변한다. 어찌 무섭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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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56년(효종 7년) 8월27일, 전라도 해안에서 엄청난 사고가 일어났다.
 전라도 해안에서 실시한 대규모 군사훈련에 참가한 전함들이 거센 비바람에 휘말려 떠내려 가거나 침몰한 것이다. 금성·영암·무장·함평·강진·부안·진도 등에서 출동한 배들이었다. 문제는 이 사고로 죽은 병사들이 1000여 명이나 됐다는 것이다. 진도군수 이태형도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사고는 전남 우수사 이익달이 저지른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즉 이익달이 “풍랑 때문에 바다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경험많은 부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훈련을 강행했다가 참변을 부른 것이다.
 효종은 “보고를 듣고 서글퍼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다”며 “이익달 등 관련자들을 엄중 문초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시대 조운선을 복원한 모양. <각선도본>을 근거로 만들었다. 태종 때 이 조운선이 침몰하면서 1000여명이 떼죽음을 당하고 쌀 1만석이 수장됐다. 사고원인은 거센 풍랑 때인데도 운항을 강행했고, 화물 또한 과적 상태였던 것이었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무리한 운항이 참사의 원인
 이보다 240여 년 전인 1414년(태종 14년), 전라도 운반선 66척이 태풍으로 침몰·파손돼 200여 명이 익사하고, 침수한 쌀·콩 5800석이 수장됐다.
 “7월에는 웬만하면 배를 띄우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호조가 공문을 전라수군절제사에 보내 ‘7월 그믐에 조운을 실어 8월 초에 올려보내라’고 지시했다. 문제는 수군 절제사 정간이다. 정간은 이 호조의 공문대로 배를 무리하게 띄우다 참사를 빚었다.”(<태종실록>)
 무슨 말인가. 원래 태풍이 불어닥치는 7월에는 배를 띄우지 않는 게 상식이다. 보통은 4월 쯤에 실어 배를 띄우고 5월 안에 한강에 도착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호조가 그같은 절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7월 말~8월 초에 현물세금을 실러 올려보내라는 공문을 보냈다는 것. 또 다른 문제는 기상상태를 파악해야 할 전라수군절제사가 호조의 지시대로 배를 띄웠다가 참변을 불었다는 것이다.

 

 ■재변은 사람이 부르는 것
 비슷한 참사가 1620년(광해군 12년) 8월6일 또 일어났다. 
 이날 사간원은 해운판관(충청·전라의 조운업무 담당 정5품 관직) 조길 등의 파직을 요구했다.
 “‘4월 출항, 5월 한강도착’이 조운의 관행입니다. 그런데 해운판관 조길은 사사로운 청탁을 받고 거센 풍랑이 이는 7월 출항을 강행했습니다. 정식 조운선을 버리고, 개인 배에 사사롭게 모은 베(布)를 가득 싣고 강화도에 이르러 1만석을 실은 배가 침몰했습니다. 이 사고로 80여 명이 빠져죽었습니다. 이 자를 파직하시고….” 
 이밖에도 <실록>을 비롯한 옛 문헌에는 선박사고의 기사가 적짆이 보인다.
 그런데 사고의 원인은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 인재(人災)인 것을 알 수 있다.
 1633년(인조 11년), 임금의 하교가 귓전을 때린다.
 “재변이란 까닭없이 생기지 않고, 사람이 부르는 것이다.(災不虛生 由人所召) 어떻게 구제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 하늘이 높고 높아 위에 있지만 감동이 있으면 통한다. 관리들은 고식적인 것을 따르지 말고 각각 자신의 직무에 근실하여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라.”(<인조실록>) 

조선시대 조운선 그림. 19세기 화기 유운홍의 작품이다. 조운선 운행과정에서 과적과 무리한 운항 때문에 대형참사가 잇달아 발생했다. 조선시대 임금들과 신하들은 모든 침몰사고의 책임을 임금에게 돌렸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모든 사고의 책임은 군주에게 있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기사가 있다.
 “모든 사고의 책임은 내게 있다(責乃在予)”고 자탄한 태종 임금이다.(<태종실록>)
 1403년(태종 3년) 5월5일, 큰 재난이 일어났다. 경상도의 조운선(각 지방에서 거둔 세금 현물을 운반하는 배) 34척이 배가 한가운데서 침몰한 것이다,
 참변을 보고받은 임금은 죽은 이가 몇 명이고, 잃은 쌀은 또 얼마인 지를 물었다. 하지만 정확한 피해상황도 파악할 수 없는 상태였다. 신하들이 대답하지 못하자 “대강이라도 말해보라”고 채근했다. 그러자….
 “예. 쌀은 1만 여석 되는 것 같고, 사람은 1000여 명 쯤 됩니다.”
 태종은 “이 모든 책임은 과인에게 있다”고 장탄식했다.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었구나. 출항날(5월5일)은 수사일(受死日·대흉일)이고, 풍랑마저 거센 날이어서 배를 띄우면 안되었는데….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것은 백성을 몰아서 사지로 나가게 만든 것이다.”
 태종은 그러면서 “사람들이 죽은 것이 너무도 불쌍하다”고 애통해 했다.
 “쌀은 비록 많더라고 아까울 것이 없지만, 사람 죽은 것이 대단히 불쌍하구나. 그 부모와 처자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그런데 이 참사의 원인을 보면 기막힌다. 사고발생 후 3개월 후인 8월, 사간원이 올린 상소를 보자.
 “올해 조운선을 올릴 때 풍랑을 잘 파악하고, 화물적재의 중량을 제대로 감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일을 용렬하고 간사한 무리에게 맡겨 수군 수백명을 수장시키고, 적재한 쌀 1만 여 석을 모두 물에 빠뜨렸습니다. 이로써 부모 처자가 하늘을 부르며 통곡했습니다.”
 상소문을 살펴보면 이 배는 자질이 부족한 선장이 날씨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채 운항을 강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과적이 사고의 큰 원인이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럼에도 태종은 부하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깨알지시를 내리는 대신 ‘내탓이오’를 외치고 있다.
 
 ■군주를 추궁한 신하들
 신하들도 만만치 않았다. 재변이 일어나면 ‘재변의 책임은 군왕이므로 스스로 반성하고 경계하라’고 다그쳤다. 왕조시대인 데도 군주의 눈치를 보지 않고 바른 소리를 한 것이다. 1632~33년 사이에 잇달아 재변이 일어났다. 심지어는 ‘흰 무지개가 해를 뚫는 변고’까지 발생했다.
 1632년(인조 10년) 3월5일, 국왕의 자문기관인 홍문관이 올린 상소문을 보라.
 “재앙은 괜히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재앙을 초래하는 원인이 있습니다.(災不虛生 必有所召) 예부터 명철한 임금은 하늘의 경고를 맞아 경계하고 덕을 닦는 도리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홍문관이 내민 비판의 칼날은 다소 지나칠 정도로 임금을 겨눈다.
 “지금 위로는 하늘의 노여움을 사고 아래로는 민심을 잃어서 심한 재이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반드시 연유가 있을 것입니다. 초심이 위축된 것입니까. 예전의 폐단에 사로잡힌 것입니까. 혹 편파적인 사사로운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신상필벌에 미진한 것은 아닙니까.”
 대단한 상소문이다. 이토록 임금을 다그친단 말인가. 그런데 이 홍문관의 상소문은 약과였다. 

<각선도본>(조선 후기 조운선과 군선을 그린 도본)에 나타난 조운선. 선수(뱃머리)가 선미보다 넓고 깊이가 깊다. 세금으로 거둔 곡식의 적재량을 늘리기 위해 배의 구조를 바꾼 것이다. 이 때문에 선박사고의 위험성도 커졌으리라.|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임금이 부덕한 탓”
 1633년(인조 11년) 대사헌 강석기는 인조 임금에게 직격탄을 날린다.     
 “최근의 재앙은 진실로 전에 없는 변고입니다. 무엇이 하늘의 마음을 거슬렀는지…. 삼가 전하의 덕과 정치가 부족하고 잘못된 그런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 10년동안 불행히도 위기가 계속되어 경악할만한 변고가 다달이 생기더니 급기야….”
 강석기의 상소는 더욱 거침이 없었다.
 “지금 정책의 일관성도 없어 정책의 80~90%가 시행과 중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법도가 없어지고, 백성의 원망을 사는 일이 많습니다. 인사도 마찬가집니다. 아래에는 백성을 구제해 갈 사람이 없고 위에는 마음을 다해 믿고 맡기는 실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럭저럭 시간만 보내며 앉아서 그 망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꼴입니다. 인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백성의 원망을 격발하고 하늘의 노여움을 초래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강석기는 한없이 임금을 질타하면서도 마지막으로는 임금의 할 일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 재변은 도리어 전하에게는 기회입니다. 하늘이 전하를 완전히 끊어버리셨다면 절대 이런 경고를 내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하늘에 응답하는 방도는 ‘수성(修省)’입니다. 마음을 바르게 하시고, 몸을 닦아 풍화를 돈독히 하는 근본으로 삼으십시요. 그러면 재앙을 상서로 만들 수 있으며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재변은 임금이 부덕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게 강석기의 주장이다. 그러니 임금이 반성하고 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여에서는 국왕을 죽였다
 1563년(명종 18년) 경상도 산음현 북리에 운석이 떨어지자 <명종실록>의 기자가 쓴 논평을 보자.
 “운석이 떨어지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재변이다. 정사가 해이해지고 쇠퇴하는 날에 운석이 떨어지고, 혹은 국가가 쇠잔하고 혼란할 때도 떨어졌으니…. 그러니 군주가 허물을 반성하여 재앙을 그치게 할 때가 아닌가.”(<명종실록>)
 1657년(효종 8년), 기상이변이 이어지자 찬선 송준길이 한 말도 비슷하다.
 “모든 재변은 반드시 인사의 잘못입니다. 재변을 막는 것도 인사에 달려있습니다. 전하가 공구수성(恐懼修省·두려워하여 수양하고 반성함)하지 않으면 재변을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이 모든 자료를 종합해보면 이렇다.
 ‘재변(災變)이라는 것이 애시당초 인재(人災)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재변의 책임은 군왕에게 있다고 여긴 것이다.
 오죽했으면 “부여에서 기상이변으로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국왕을 바꾸거나 죽인다”고 했을까.(<삼국지> ‘위서·동이전’)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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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일반적으로 남한산성은 ‘치욕의 성’으로 각인돼 있다.
 조선조 인조가 청나라 대군에 쫓겨 피란했다가 결국 무릎을 끓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기록을 보면 그야말로 목불인견이다.

 

 ■“임금이시여, 백성을 버리시나이까.
 “상(인조)이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三拜九叩頭)를 행했다.”
 때는 바야흐로 1637년 1월30일이었다.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치욕적인 날이다. 사실 이 뿐이 아니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눈 앞에 둔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참화 속에서도 결코 함락되지 않았던 철옹성이었다.

원래 청나라는 조선에 삼배구고두보다 더 지독한 의식을 요구했던 것 같다. 항복군주인 인조가 두 손을 묶고, 구슬을 입에 문채 빈 관을 싣고 나가 항복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날 잡아잡수’하는 굴욕적인 항복의 의미가 아닌가. 그나마 청 태종의 ‘배려’로 그 지경까지는 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할까. 
 항복일을 이틀 남긴 28일 청 장군 용골대는 청 태종의 친서를 전하면서 “몸을 결박하고 관(棺)을 끌고 나오는 등의 조건은 철회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인조의 항복은 치욕 그 자체였다.
 입고 있던 용포(龍袍)를 벗고 청의(靑衣)로 갈아 입었다. ‘청의’는 신분이 낮은 사람‘을 뜻한다. 5호16국의 하나인 한나라 황제에 오른 유총(劉聰·?~318)이 진(晋) 회제(287~313)에게 청의를 입히고 술잔을 돌리게 했다는 이른바 ‘청의행주(靑衣行酒)’의 고사에서 유래됐다.
 이어 백마를 타고 남한산성의 정문이 아닌 서문으로 나와 삼전도에서 무릎을 끓었다. 그러니까 신하인 주제에 임금을 상징하는 용포를 입을 수 없었고, 죄를 지은 주제에 정문으로 나올 수 없다는 청나라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물론 백마는 항복을 뜻하는 것이었다. 항복조인식이 끝난 뒤 술자리가 벌어졌을 때 또다른 굴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조가 술잔을 돌린 뒤 술상을 물리려 했는데, 청나라 인 두 사람이 두 마리의 개를 끌고 들어왔다. 그러자 청태종은 상에 차려진 고기를 베어 개에게 던져 주었다. 마치 항복한 조선(개)에게 은전(고기)을 베푸는, 그런 꼴이 아니던가.
 이런 치욕의 의식을 끝내고 송파진을 통해 한강을 건널 때였다. 배가 딱 두 척만 남아 있었다. 임금이 배를 타려 하자 소동이 일어났다. 대신들이 서로 배를 타려고 다툰 것이다. 심지어 인조 임금의 어의를 잡아 당기기까지 했다. 임금이고 뭐고 그저 저만 살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사로잡힌 백성들은 임금이 강을 건너는 것을 보고는 울부짖었다.
 “임금이시어, 임금이시어. 어찌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吾君 吾君 捨我以去乎)” 

남한산성 행궁. 병자호란 때 인조가 임시로 거처하면서 45일 간 버텼다. 청나라는 강화조약 때 "절대 남한산성을 수축하지 말라"는 내용의 조건을 달았다. 

 ■“절대 남한산성을 수축하지 마라”
 이 지경이었으니 어느 누가 기억하고 싶은 역사이며, 장소이겠는가.
 하지만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 있다. 1637년 1월 28일, 청나라가 조선에 내민 12개 조항의 항복조건 가운데 미묘한 내용이다.
 “용골대가 청 태종의 칙서를 가지고 왔다. 명나라와 국교를 끊고, 그들의 연호를 버려라.~ 또 있다. 성벽(城壁)을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바로 이 성을 새로 쌓거나, 기존의 성을 보수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특별히 강화의 조건에 넣어 강조한 것이다.
 물론 조선측은 이 조건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청나라는 이 합의 내용의 이행을 감시할 사절을 해마다 보낸다.
 조선이 성을 새로 쌓았는지, 기존의 성을 개축하는지 끊임없이 감시하고 참견한 것이다.   
 예컨대 전쟁이 끝난 지 2년 8개월이 지난 1639년(인조 17년),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 칙사 마부달의 행보를 보자.
 마부달 등은 삼전도비를 보고는 사냥을 핑계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성첩(城堞·성 위에 쌓은 담장)을 살펴본 뒤 앙앙불락했다. 병자호란 뒤 조선은 왜적을 막는다는 구실로 남한산성을 보수했기 때문이었다. 이 보수사실을 청나라 사신이 현장답사 후 알아차린 것이다.
 “도대체 이 무슨 짓인가. 당초 양국 간의 합의를 보면 남한산성과 해도(강화도)를 다시 수축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오늘 산성을 두루 살펴보니 산성 안에 네 곳이나 곡식을 쌓아 두었고 성기(城基)를 물려 쌓고 포루(砲樓)도 개설했구나. 너희 나라가 어떤 간계(奸計)를 가지고 있기에 감히 이런 짓을 하는가.”
 그러면서 청 사신은 “빨리 허물지 않으면 청나라 군사들을 데리고 와서 조선 각 도의 성(城)들을 살펴볼 것”이라고 협박했다.  
 조선은 화가 난 청 사신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 양국의 신경전이 계속됐다.
 “왜구 방비 때문이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의주나 부산과 같은 변방의 성은 괜찮다. 다만 남한산성만은 안된다.
 “대국의 명을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다만 헐어버리는 것도 수축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우니…. 새로 설치한 포루(砲樓)만 헐도록 해주시면….” 
 남한산성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됐다.
 1년 뒤인 1640년(인조 18년), 청나라는 조선에 칙서를 보내 또 남한산성 수축문제를 거론했다.
 “지금 또 한번 지시를 어기고 남한산성과 평양성을 마음대로 수축했다니 이 무슨 심사인가. 다시 전쟁의 실마리를 일으키려고 하는가.”

 

 ■난공불락의 요새
 그럴 만도 했다.
 고조선·고구려의 전통을 이은 청야술은 유명했다.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군사력이 부족했던 조선으로서는 병력과 주민들을 보호하면서 적군의 보급로를 도모하는 산성 위주의 전술이 효과적이라고 본 것이다. 이 산성전술은 정묘호란 때 약간의 효과를 보았다. 당시 후금이 평안도의 산성을 공략하느라 어느 정도 애를 먹었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는 달랐다. 최강의 기마군이라는 평을 듣는 청나라의 팔기군(八旗軍)은 조선의 청야술을 피해 속전속결 전략을 폈다.
 6000명의 선봉부대는 곧바로 한양을 직공했다. 대신 일부 병력들은 조선병력을 산성에 묶어두는 전략을 폈다. 대로변에서 30~40리 떨어진 산성은 청군의 한양직공 전략에 속수무책이었다. 청의 선봉은 압록강 도하 불과 6일 만에 한양 도성에 근접했다. 서울~신의주 간 거리가 500㎞ 쯤 되니까 하루 80㎞ 이상씩 말을 달려온 것이다. 그러나 인조 임금이 급히 피한 남한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한없이 밀리기만 했던 조선이었지만 무려 45일을 남한산성에서 버텼다. 그러니 청나라군으로서는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랬으니 강화조약의 중요한 조건 하나가 “절대 성을 새로 쌓거나 기존 성이라도 보수하지 말라”고 강조한 것이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라는 치욕의 항복을 해야 했다.  

■남한산성의 정신
 사실 남한산성은 백제가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정한 후 성산(聖山)의 개념과 진산(鎭山)의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남한산성 터에서 발굴된 초기백제의 유물들이 그것을 입증해준다. 통일신라 때는 주장성으로 일컬어졌다. 
 그후 임진왜란 이후 조선 조정은 서울로 쳐들어오는 외적으로부터 종묘사직을 막으려고 남한산성을 다시 쌓기로 했던 것이다. 인조는 1624년부터 2년반 동안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했다. 성내에 임금이 유사시 거처할 궁궐인 행궁(行宮)을 만들었고 선조(先祖)들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宗廟), 나라의 상징인 사직(社稷) 등을 옮길 수 있도록 했다. 국가 비상시에 대비하게 했던 것이다.
 이때 조성된 산성의 규모는 총길이 11.755㎞이고 성벽의 높이는 3~7m 정도였다. 본성의 내부면적은 총 64만2천여 평에 달한다.
 봉암성과 한봉성 등 두 곳의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설로는 네 곳의 장대(將臺)와 4대문(大門), 다섯 곳의 옹성(甕城), 두 곳의 돈대(墩臺), 29여곳의 포루(砲壘), 16곳의 암문(暗門)이 마련돼 있다. 80여곳의 우물과 45곳의 연못이 있어 물도 풍부했다. 그리고 조선시대 행궁과 함께 광주부의 읍치를 산성 안으로 옮겨 유사시 명실상부한 보장처(保障處)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인조가 병자호란이 끝난 지 2년 뒤 직산(稷山)에 있던 백제시조 온조대왕의 사당(祠堂)을 남한산성으로 옮겨 모셨다는 것이다.
 지금 남한산성 내에 있는 숭열전(崇烈殿)이 바로 그 사당이다. 비록 한때나마 굴욕을 당했지만 정신만은 빼앗기지 않으려는 조선의 의지가 담겨있다.

 

 ■이제는 세계유산으로
 최근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가능성이 커졌다고 한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평가결과 보고서에서 남한산성을 ‘등재권고’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남한산성이 동아시아 도시계획과 축성술이 상호교류한 증거로서의 군가유산이라는 점과 지형을 이용한 축성술과 벙어전술의 시대별 층위가 결집된 초대형 유적지‘라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문화유산의 등재기준 4가지 가운데 2가지, 즉 (ii)과 (iv) 요건을 충족한다.
 즉 (ii)특정 기간과 문화권 내 건축이나 기술발전, 도시계획에 있어 인류 가치의 중요한 교류의 증거와, (iv) 인류 역사의 중요한 발달 단계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지형을 이용한 축성술과 방어전술의 시대별 층위가 결집한 초대형 포곡식 산성)라는 것이다.  
 세계유산위원회의 심사·자문기구인 ICOMOS의 등재권고를 받은 이상 6월15~25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제28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가능성이 높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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