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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고지쟁탈전에 흘린 젊은 넋들의 피

 “정말 저기가 비무장지대가 맞나.”
 강원 철원 홍원리 평화전망대에 오를 때마다 색다른 느낌을 갖는다. 비무장지대란 높고 깊은 산악지대, 즉 사람들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게 일반상식인데…. 그러나 철원은 해발 220~330미터 위 용암대지에 펼쳐진 드넓은 평원이다. 당장이라도 논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평야를 품에 안고 있는 저편 고지와 능선의 이름, 그리고 사연을 알게 되면 나른한 평온이 깨진다.
 전망대에서 맨 왼쪽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백마고지다. 이곳에서는 1952년 10월6일부터 백마고지를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수 만 명의 인명피해를 주고받은 뒤 마침내 한국군 9사단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백마고지는 지금 민간인들은 갈 수 없는 남방한계선 북쪽에 있다. 주변의 산인 고암산(780미터)은 일명 김일성 고지이며, 곁의 능선 별칭은 피의 500능선이다. 또 이어 낙타고지…. 그리고 또 하나, 철의 삼각지대 맨 위 꼭지점인 평강(지금은 북한)이 있다.
 그 유명한 백마고지를 지근거리에서 보려면 평화전망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백마고지 전적지와 기념관이 있는 철원읍 산명리 삼봉산 기슭으로 가야 한다,
 전적기념관 앞에 서면 백마고지가 지호지간이다. 이곳에서 잠시 묵념을 올린다. 폭 2킬로미터, 길이 3킬로미터에 불과한 저 작디작은 야산에서 죽어갔을 1만8000여 젊은 넋을 기리며 말이다.  




 

 ■백마고지 전투가 무엇이기에
 백마고지 전투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수많은 젊은 넋이 스러져 갔을까.
 이 전투는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진 1952년 10월초 중국군의 공세로 시작된 52년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다. 52년 10월6~15일까지 고지를 지키던 국군 9사단이 중국군 38군의 공격을 받아 10일간 혈전을 벌였다. 이곳은 철원평야를 지키기 위해서는 잃을 수 없는 요처였기 때문이다.
 강원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 있는 이 야트막한 야산은 철원읍 서북방 12㎞ 지점에 있다. 효성산 남쪽 끝자락이다. 원래는 평범한 야산이었지만 휴전회담 이후 군사접촉이 계속되자 일약 핵심지역으로 부상했다.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대 중 서남쪽 철원 꼭짓점의 어깨를 구성하는 요충지였다. 철원평야가 한 눈에 보였고, 만약 이곳을 잃을 경우 아군부대의 병참선인 3번 도로(경원선)를 비롯한 통로를 사용할 수 없었다.
 1952년 10월6일부터 15일까지 10일간의 전투에서 7차례나 고지의 주인공이 바뀌었으며, 밤낮으로 12차례나 쟁탈전이 반복되었다.
 우리 측 자료에 따르면 공산군의 인적손실은 전사자 8234명을 포함, 추정 살상자 6098명과 포로 57명 등 모두 1만4389명에 이르렀고, 아군의 사상자도 3416명에 달했다. 작전기간 중 공산측은 5만5000발, 아군은 21만9954발 등 모두 27만4954발의 포탄이 집중됐다.




 처절한 전투가 벌어진 베티고지(왼쪽 야트막한 고지)와 임진강 곡류부분 안쪽에 반달모양으로 서있는 노리고지. 임진강 따라 북쪽으로 가면 북한이 조성한 임진강댐이 보인다. 베티고지와 노리고지 사이, 임진강변에 왠지 적석총 같은 모양의 봉긋한 지형이 보인다. 

 유엔군 항공기는 754회나 출격, 이 작은 고지에 융탄폭격을 퍼부었고, 정상부엔 그야말로 풀 한포기 남아있지 않았다. 원래 이 고지는 전투가 개시되었던 10월10일까지도 그저 395고지로 일컬어졌다. 그런데 전투가 한창이던 11일 갑자기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설이 난무한다. 포격으로 고지의 나무와 수풀이 모두 쓰러진 뒤 산의 형태가 마치 백마처럼 보였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고, 조명탄 투하로 산이 하얀 낙하산 천에 뒤덮인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외신기자들이 붙였다고도 한다.
 이밖에도 어느 참전 연대장이 외신기자의 질문에 ‘White horse hill’이라고 대답한 것이 보도됐다는 등 갖가지 설이 난무한다.
 어쨌든 한국군 9사단은 이 전투의 승리로 철의 삼각지대 상당부분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철원평야와 주요 도로(3번, 463번, 464번), 즉 전선후방의 철원~김화~화천에 이르는 측방도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 전쟁의 고지 쟁탈전에서도 대표적인 승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1만8000여 젊은 넋의 희생을 대가로 차지한 이 백마고지를 지금 밟을 수 없다. 비무장지대 안으로 편입되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핏물이 능선을 타고 계곡으로 흘렀다고 해서피의 능선이라 했다. 얼마나 포탄세례를 받았는지 민둥산이 되었다. 

 ■베티고지 전투의 영웅
 고개를 갸웃거리며 임진강 곡류가 급한 물살을 이루며 흐르는 이른바 ‘베티고지’로 가본다.
 경기 연천 서쪽 15킬로미터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이른바 베티(Betty)고지 역시 지금은 갈 수 없는 비무장지대 안에 있다.
 태풍 전망대에서 손을 뻗어 볼 뿐이다. 최전방 지역을 답사하다보면 전쟁과 분단, 냉전이 주는 팽팽한 긴장감을 일순 잊게 된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그 절경에 취하게 되니까…. 
 천혜의 비경을 뽐내며 흐르는 임진강의 곡류. 그 사이에 펼쳐지는 짙푸른 산과 들판. 갈 수 없어 더 가고 싶고, 품에 안을 수 없어 더 안고 싶은 저 강, 저 들판이 아니던가. 그런데 심한 곡류를 강 너머 왼쪽에 아주 작은 봉우리가 있다.
 눈을 의심하게 된다. 높은 지형에서 내려다보아서 그런가. ‘고지’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옹색한 구릉이 아닌가. 하기야 해발 120~150미터 정도의 구릉 3곳을 일컫는 말이니 그런 표현도 틀리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니 그곳에서 휴전협정을 목전에 두고 있던 1953년 7월13~16일 그야말로 피어린 사투가 벌어졌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을 수밖에….
 임박한 휴전협정에 유리한 입지에 서기 위해 최후 공세를 벌이던 중국군은 임진강변 요충지인 이 작디작은 고지에 군침을 흘린다. 한국군 제1사단 제11연대 제2대대 전초기지였던 베티고지를 점령하면 주 저항선에서 남쪽으로 2킬로미터 이상 전진하기 때문이었다.
 7월13일부터 중국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고, 한국군은 사흘간 3개 소대를 투입했지만 하룻밤만 자고나면 반 수 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손실을 입었다.
 이 때 특무상사였던 김만술 소위가 15일 소위로 임관하자마자 제6중대 제2소대장으로 베티고지 사수에 투입됐다. 김만술 소위는 이날 오후 2시 아직 얼굴도 익히지 않은 소대원 34명을 독려, 베티고지 군인 중앙봉과 동봉(東峰)을 점령한 뒤 중국군이 점령하고 있던 서봉 공격에 나섰다. 김만술 소위는 중국군 1대 대대와 맞서 13시간 동안 서봉을 19번이나 뺏고 빼앗기는 접전을 펼친 끝에 기어코 서봉을 확보했다.
 16일 날이 밝은 뒤 김만술 소위와 생존 소대원들은 중국군 시체 사이에 쓰러진 전우들을 보며 절규했다고 한다. 확인된 중국군의 시체만 350여구였고, 한국군은 23명이 전사했다. 이 전투는 한국전쟁에서 가장 극적이고 용감한 승리로 평가된다.
 김만술 소위는 미국최고훈장인 십장훈장과 우리 정부가 주는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1956년에는 이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격퇴’)가 개봉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만술 소위 부대원들이 사수했던 이 베티고지 역시 불과 11일 뒤인 53년 7월27일 체결된 휴전협정에서는 군사분계선 북쪽에 포함됐다.
 그리고 1952년 12월11~13일 사이 중국군 2700여명을 사살함으로써 고지가 5미터나 낮아지고 임진강물이 핏빛으로 물들었다는 노리(Nori)고지 역시 군사분계선 이북으로 편입됐다. 노리고지와 베티고지 사이에는 북한의 집단농장이 보이고….

 


 가슴이 찢어질 듯한 전투가 벌어졌다 해서단장의 능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화채그릇에서의 혈투
 다시 발길을 돌려 강원 양구 해안분지에 닿는다. 화채그릇 닮았다 해서 ‘펀치볼’이라고 일컫는 바로 그곳이다.
 을지전망대(해발 1049미터)에 오르면 마치 무릉도원에 온 듯 평화롭고 신비로운 해안분지가 보인다. 또 맑은 날이면 금강산 비로봉, 월출봉, 차일봉, 일출봉이 또렷하게 보이는 이곳. 하지만 인간이 일으킨 전쟁은 12만 년 전부터 선사인들이 무릉도원으로 꼽았을 법한 이곳을 피로 물들였음을…. 
 다시 말하면 해안분지는 북쪽의 1026 고지(모택동 고지), 924고지(김일성 고지), 서쪽의 가칠봉(1242미터), 대우산(1178미터), 남쪽의 도솔산(1148미터), 918고지, 동쪽의 달산령, 795, 908고지 등으로 둘러싸인 곳.
 그런데 1951년 6월4일부터 19일까지 한국군 해병 제1연대가 양구 북동방 25킬로미터 떨어진 대암산과 도솔산, 대우산을 연결하는 1000미터 이상의 고지군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전략적인 요충지인 해안분지(펀치볼)를 고수하기 위해서였다. 한국군 해병대는 작전개시 17일 만에 해안분지를 남쪽에서 감제할 수 있는 도솔산 일대의 고지군을 확보하였다.
 이 전투에서 3,307명(사살 3,263명, 포로 44명)의 공산군이 피해를 입었고 아군은 618명(전사 123명, 부상 484명, 실종 11명)의 인명이 손실됐다.
 이 전투를 통칭해서 ‘도솔산(兜率山)전투’라 일컬어졌다. 이 전투는 한국 해병대 5대작전 중 하나로 꼽힐 만큼 해병의 자랑이 된 전투였으며, 당시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무적해병’이라는 휘호를 하사받았다. ‘도솔(兜率)’이 무슨 뜻인가. 불교에서 미륵보살이 사는 곳이며, 미륵보살의 정토(내원)이면서 천계 대중이 환락하는 장소(외원)라 한다. 그렇게 심오한 뜻을 지닌 도솔이 중생들의 싸움터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주요 고지

■그 고약한 이름,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
 이 뿐이랴. 양구 북방 문등리와 사태리 계곡의 절경을 가로지르는 능선엔 ‘피의 능선’이니 ‘단장(斷腸)의 능선’이니 하는 고약한 이름이 붙었다.
 그저 731-983(수리봉)-940-773고지로 일컬어지던 능선은 마치 바나나처럼 능선이 퍼졌다 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 제9연대 장병들에 의해「바나나 능선」으로 일컬어졌다. 하지만 이곳에서 1951년 8월~10월 혈전이 벌어져 2만 명에 가까운 인명피해(한국군 및 유엔군 4400여 명, 북한군 1만5000여 명)가 발생하고 능선이 피로 물들었다. 그런데 이 격전의 소식을 타전한 ‘성조지(Stars and Stripes)’ 기자들이 983고지 일대를 피로 물들인 능선이라 해서 ‘피의 능선(Bloody Ridge Line)’이라고 명명했다. 이 전투를 초기에 지휘한 제5사단 36연대장 황엽 대령은 “북한군이 설치해놓은 지뢰 때문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계곡은 피로 물들였다.”고 회고한바 있다.
 결국 북한군은 9월5일 이 ‘피의 능선’을 포기하고 북쪽에 남북으로 뻗은 능선(894-931-850-851고지)으로 철수했다. 983고지에서 벌어진 ‘피의 능선’전투는 2004년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관객 1000만 명을 동원한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후반부에 등장한다. 북한군 깃발부대와 한국군 간의 격전장이다.  
 그러자 미군은 다음 능선을 점령하도록 명령했는데, 10월5일까지 ‘단장의 능선’가운데 철옹성 같았던 931-851고지를 잇달아 점령했다.

을지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양구 펀치볼(해안분지). 잔뜩 찌푸린 구름마저 펀치볼을 피했다. 구름 사이로 화사한 햇빛이 신묘한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연합통신 특파원이었던 스탠 카터가 전방대대 구호소를 방문했을 때 부상병이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고 부르짖자 이 고지를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이라 명명했다. 이 전투에서 피아간 2만7000여 명(아군 3745명, 북한군 2만4000여명)의 인명손실을 기록했다. 미군은 비록 이 두 전투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뒀다고는 하지만 전투 초반에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고, 언론에서조차 “가슴이 찢어질 듯한 전투”였다고 대서특필 했기 때문에 불명예스러운 전투로 여겨지기도 했다.
 백마고지 전투와 함께 최고의 혈전을 벌인 것으로 여겨지는 저격능선ㆍ삼각고지 전투(중국은 두 전투를 묶어 상감령 전역이라 한다)와 불모(不毛)고지, 수도고지ㆍ지형능선(指形稜線), 351고지, 금성지구, 켈리고지, 포크찹 고지 등에서 수많은 고지전이 벌어진다. 그런데 이 전투의 결과와 전사(戰史)의 기록을 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고 하면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한 가지.
 “한국전쟁 사상 ‘지상전의 꽃’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지만, 작은 고지 하나를 두고 그 많은 인명과 물자를 투입해가면 혈전을 벌여야 할 가치가 있는가.(중략) 손실에 비해 전술적 가치가 너무 적다고 회의적인 견해를 보이는 이도 있다.”(<한국전쟁전투사-7. 백마고지 전투>, 국방부 전사편찬위, 1984년)
 이는 한국전쟁사에 길이 빛날 백마고지 전투를 평가한 대목이다.
 유엔군이 사실상 패배했다는 평을 받는 ‘저격능선’ 전투를 두고도 “저격능선이라는 적의 전초 하나를 탈취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인명손실을 입으면서까지 장기간 작전을 펼쳐야 했는지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는 평가(<한국전쟁전투사-14.저격능선전투>, 국방부전사편찬위, 1988)도 있다.
 엄청난 희생에도 나름대로의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했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려고 피아간 수천 수만명의 피를 뿌렸다면 과연 어떨까.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