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권세를 가진 첫번째는 태감 위충현이고, 둘째는 객씨이고, 셋째가 황상(황제)이다.’라고…”
1624년(인조 2년)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홍익한의 사행일기(<조천항해록>)는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명나라 백성들이 환관 위충현과 그의 내연녀(객씨)의 위세가 황제(명 희종)을 능가했음을 수근거렸다는 것이다.
과연 그랬다. 위충현(?~1627)은 희종의 유모였던 객(客)씨와 사통한 뒤 명나라 국정을 쥐락펴락했단다.
■구천구백세!
어떻게 환관이 남성을 회복했느냐고? 위충현은 어린 아이의 뇌(腦)를 생으로 씹어먹고는 양도(陽道)를 회복했다고 한다.
위충현은 안팎의 대전을 손아귀에 넣고 자신을 호위하는 환관 3000명을 두어 궁중에서 훈련시켰다고 한다. 심지어는 황제 앞에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니….
그랬으니 황제가 명나라 권력서열 3위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것이다. 위충현이 외출할 때 연도의 백성들은 그에게 ‘구천세(九千歲)’고 모자라 ‘구천구백세’를 연호했다고 한다.(<명사> ‘열전·위충현전’ 등) 원래 황제에게는 ‘만세’를, 제후국 임금에게는 ‘천세’를 연호하는 게 법도인데, 위충현에게 황제와 거의 맞먹는 ‘구천세’ 혹은 ‘구천구백세’까지 연호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공덕을 기리는 사대부만 해도 40만 명이 넘었단다. 심지어 국자감 학생 육만령은 위충현을 공자에 비유하면서 ‘살아있는 위충현’의 사당을 국학 옆에 세울 것을 청했단다.
살아있는 위충현을 모신 ‘생 사당’에는 침향(열대지방에서 나는 향나무)으로 만든 위충현의 목상(木像)을 조성했다. 눈ㆍ귀ㆍ입ㆍ코ㆍ손ㆍ발이 산 사람과 똑 같았다고 한다.
그 뿐인가. 뱃속의 창자와 폐는 모두 금옥과 주보(珠寶)로 만들고, 상식(上食)과 향사(饗祀)도 왕공과 똑같이 했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아침이슬처럼 덧없었다. 희종 다음에 등극한 의종이 그를 봉양에 귀양 보내고 그 집을 적몰시킨 것이다. 위충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자 황제는 그의 몸을 천갈래 만갈래 찢어버리는 극형(천참만륙·千斬萬戮)을 내렸다.(<성호사설> ‘구외이문·위충현’, ‘경사문·위충현 사’)
■3357번의 칼질형
위충현보다 100여년 앞선 지독한 환관의 대표주자가 있었으니 바로 유근(1451~1510)이었다.
유근의 ‘주인’인 명나라 무종은 웃기는 기인이었다.
정무는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음주가무에 심취했고, 그것도 모자라 궐밖의 유곽(遊廓)으로 놀러 다녔다. 심지어는 활쏘기에 능한 환관들을 집결시켜놓고는 하루종일 전쟁놀이를 벌였다고 한다. 함성을 지르면서 쫓고 쫓기는 환관들의 전쟁놀이에 북경시내 진동했단다.
유근은 다른 사악한 환관 7명과 한 패를 이뤄, 무종의 타락을 더욱 부추겼다. 역사는 유근을 포함한 8명의 환관을 팔호(八虎)라 일컫는다.
또 황제의 결제를 자기 맘대로 뜯어고쳐 노신들을 모두 쫓아냈다. 실제로 대신들이 말을 듣지않자 찌는 듯한 더위에 조정백관들을 광장에 모아놓고 하루종일 엎드려 있게 했단다. 말하자면 단체기합을 준 것이다.
그는 환관들의 비밀경찰조직인 동창과 서창을 총동원, 대신들을 탄압했으며, 모든 업무는 뇌물 액수로 결정했다. 유근에게 뇌물을 주면 유근 등이 종잇조각에 “어떤 관직을 준다”고 기입하면 병부(국방부)가 그대로 발령냈다고 한다. 그랬으니 훗날 몽골족과 여진족(후금)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유근의 말로도 비참했다. 1510년, 모반죄의 혐의를 뒤집어쓴 유근은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의 혹독한 형을 받았다. 그 능지처참이란 눈뜨고 볼 수 없었다. 무려 3357회의 절개형을 받았다. 그야말로 뼈만 남기고 살점을 발라냈던 것이다. 그가 권세를 잡으면서 축적한 황금이 24만 덩이(5만7800냥)이었단다.
■‘군주는 가만 있어야 합니다.’
흔히들 나라를 말아먹은 환관의 간판주자로 조고(진나라)와 ‘십상시’(후한)를 꼽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조고가 누구인가. 진시황이 순행 중 급서하자 황제의 칙서를 위조해서 어리석은 막내 호해(진이세)를 황제로 옹립한 인물이 아닌가.
그는 어린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폐하는 어립니다. 조정에서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면 폐하의 단점만 보일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폐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결국 황제와 대신들과의 소통을 완전히 막은 것이다. 진 2세는 늘 구중궁궐에 처박혀 있었고, 모든 국사는 환관 조고의 수중에 떨어졌다.
당나라 숙종~대종 때 최초의 환관 재상이 된 이보국의 한마디가 오버랩된다.
“주인님(대종)은 가만히 계세요. 바깥 일은 늙은이의 처분에 맡겨주세요.”
어찌 그렇게 시공을 초월한 말이 똑같단 말인가.
12명의 환관부처 우두머리를 뜻하는 십상시 또한 다르지 않았다. 환관의 손아귀에서 등극한 후한의 마지막 황제(영제)를 보라.
그는 십상시 가운데서도 유력자인 장양(張讓)과 조충(趙忠)을 가리켜 입버릇처럼 ‘장상시는 나의 아버지’, ‘조상시는 나의 어머니’라 일컬었단다.
장양과 조충은 바로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십상시(十常侍)’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다. 십상시 때문에 후한의 멸망은 가속화했다.
십상시는 진나라 환관 조고처럼 12살에 등극한 황제를 주색에 빠뜨리면서 마음껏 국정을 주물렀다.
■‘환관의 나라’ 명왕조
그러나 아예 ‘환관의 나라’로 칭할 만한 왕조가 있었으니 바로 명왕조였다.
유근과 위충현은 바로 그 명나라가 배출한 ‘극강’의 환관들이다.
사실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주원장은 황제의 독재권을 확립한 인물이었다. 환관도 혐오의 대상이었다. 역대왕조가 환관정치의 폐해 때문에 쇠락 멸망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뒤를 이은 2대 황제 혜종(주원장의 장손·재위 1398~1402)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환관들을 가혹하게 배척했다.
하지만 북경의 제후인 연왕(성조·영락제)이 3년 간의 내전을 통해 황위를 찬탈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중앙무대에 연고가 없던 성조가 측근세력으로 환관을 키운 것이다. 게다가 중앙의 유가들이 성조에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성조는 이때 돌아올 수 없는 측근정치의 조직을 심어놓았다. 환관을 중심으로 한 비밀경찰조직을 세운 것이다. 이것을 동창(東廠)이라 했다. 조직은 무시무시했다.
중죄인을 수용하는 감옥이 있었다. 황제의 명에 따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체포, 투옥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동창의 장관은 환관 중 최고 관직 가운데 두번째인 병필태감이 맡았다.
성조는 경찰권 뿐 아니라 감찰권까지 환관들에게 내렸다. 북쪽으로 몽골, 남쪽으로 안남까지 수차례 원정군을 보냈다. 그 때마다 환관을 원정군 장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감찰관으로 파견했다. 변방 원정이 아닌 해외원정에는 아예 환관들을 책임자로 보냈다. 25년간 7번이나 원정단을 이끈 환관 정화와, 후현(티벳), 그리고 이시하(만주) 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환관학교에서 일어난 일
성조 이후 환관들의 입지는 더욱 넓어졌다.
명군(名君)이 반열에 오른다는 5대 선종 때는 아예 환관학교(내서당)까지 세웠다.
환관학교에서는 10세 이하 어린이 200~300명이 혹독한 교육을 받았다. 훗날 명말 청초의 사상가 고염무는 환관학교를 이렇게 비난했다.
“내서당이 설치되면서 붓을 잡는 환관들이 과대평가됐고, 대권은 결국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일지록>)
선종은 왜 환관들에게 글을 가르친 것일까.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송나라 때부터 이어진 재상정치를 폐지했다. 그러면서 재상이 대행하던 사무를 황제가 모조리 회수해버렸다.
원칙적으로 모든 상주문은 황제가 직접 붓으로 사인(이를 비답이라 한다)해서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황제가 전국에서 올라오는 상주문을 다 검토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황제의 공식 비서 조직인 내각이 먼저 상주문을 검토했다. 그런 다음 뒤 그 수장인 내각대학사가 가장 적절한 조치라고 여기는 내용을 ‘비답의 원안’으로 적어 올렸다. 이 비답의 원안을 표의(票擬)라 했다.
■비선조직…. 그림자 내각의 음모
그런데….
이 비답이 황제에게 올라가기 위한 또 하나의 과정이 있었다. 환관 12감의 우두머리인 사례감 태감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황제의 비답을 담당하는 병필태감이 의미심장한 키를 쥐고 있었다.
병필태감의 직무는 대각대학사가 상주문을 검토한 뒤 기입한 표의(비답의 원안)을 깨끗하게 정리하여 황제에게 올리는 것이었다.
그 중 아주 중요한 몇 편의 상주문만 황제가 직접 비답하는 형식을 갖추었다.
문제는 병필태감이 일종의 비밀경찰 조직인 동창의 장관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병필태감은 이미 내각대학사가 사인한 상주문(표의)에 다른 의견을 첨부해서 황제에게 제출했다.
이것을 탑표(搭票)라 한다. 천하의 비밀정보가 동창의 장관인 병필태감의 손에 좌우됐기 때문이었다. 결국 황제에게는 내각대학사와 다른 의견이 올라갔고, 환관들의 손아귀에서 정무가 장악된 것이다. 정식의 조직을 거치지 않은 측근정치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환관의 전권이 막강했을 때는 내각의 표의조차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림자 내각, 혹은 비선의 정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황제와의 거리가 권력을 좌우한다
더 중요한 것은 공간의 거리였다.
자금성의 구조를 보면 내정과 외정을 구분 짓는 담벽의 중앙에 운태문이 있고, 그 좌우에 평대라 일컫는 문 2개가 있다. 그런데 내각대학사들이 호출을 받으면 이 평대로 달려와 황제의 뜻을 전해들었다. 더 이상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내정 안의 환관들은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모셨다. 담벼락 하나를 두고 내신(환관)과 외신(관료)의 차이가 현격했던 것이다.
정보를 독점하고, 24시간 황제의 눈과 귀가 막아 국정을 농단했으니 그 폐해가 어땠을 지 짐작이 간다.
예컨대 ‘9900세’의 장본인인 위충현은 황제의 어좌가 있는 건청궁에 앉아 상주문을 멋대로 결제했다고 한다. 그랬으니 명나라의 ‘넘버 1’이자 ‘배후의 황제’로 일컬어진 것이다. 그 때 희종(천계제)은 무엇을 했냐면 궁정 안에 파묻혀 대패와 톱으로 세공품 만들기에 열중했단다.
이쯤해서 당 문종 연간(재위 826~840)에 국정을 농단했던 구사량이란 후배 환관들에게 가르친 ‘군주 조정법’이 떠오른다.
“천자를 한가롭게 해서는 안된다. 언제나 호화생활에 몰두하게 하라. 그 눈과 귀를 즐겁게 하라. 절대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줘서는 안된다. 그래야 환관 일족의 뜻을 달성할 수 있다.”
구사량은 “군주에게 독서를 즐기게 하거나 유가(儒家)를 가깝게 해서는 안된다”며 “만약 군주가 전대의 흥망을 안다면 환관을 멀리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어쨌든 진나라가 조고 때문에, 후한이 십상시 때문에 멸망을 자초했다면 당나라도, 후량의 태조 주전충이 환관 수백명을 살해하면서 끝장나고 말았다.
‘환관의 나라’였다는 명나라 역시 비밀경찰 조직까지 휘어잡은 환관의 측근정치 때문에 멸망이 가속화된 것이다.
■‘국권이 모두 고자에 있구나!’
그럼 우리 역사속의 환관은 어떤가.
다행히도 우리 역사에는 나라를 들어먹은 환관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다.
먼저 우리 역사에서 궁형의 혹형이 없었고, 환관이 되기 위해 스스로 거세하는 이른바 자궁(自宮)의 제도가 없었다는 점은 특기할만 하다.
예컨대 <고려사> ‘환자(宦者)’편을 보면 “환관이 된 자들은 어렸을 때 개에 물린 자들”이라고 했다. 꼭 개에 물리지 않았더라도 어떤 사고에 의해 남성을 잃은 자들이 환관이 됐다는 뜻이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은 도둑이 창궐함에 따라 궁형과 같은 극형의 카드를 만지막 거렸지만 “너무 비인간적이나 안된다”고 결론을 내린 일이 있었다.
각설하고 역사서에 환관의 나쁜 예는 고려 의종 대의 정함일 것이다.
천민 출신이었던 정함은 ‘어릴 때 개에 물려 고자가 된’ 이후 궁에 들어가 환관이 되었다. 의종은 왕위에 오르자 정사는 뒷전이었고, 태껸 구경과 사냥, 유람을 일삼았다.
신료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주변을 지킨 측근은 정함이었다. 정함은 대궐 30보 안에 2000칸이 넘는 집을 짓고 누각을 마련하는 등 호화생활을 즐겼다.
문신 김존중 등과 결탁해서 매관매직을 일삼고 아부하는 자를 등용했다. 1156년(의종 10년) 정함이 등창을 앓고 눕자 그를 문병하러온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수근댔단다.
“국권이 환관에게 돌아갔구나!”(<고려사절요> 1156년조)
<고려사>를 쓴 사관은 "정함과 같은 환관의 농단 때문에 결국 정중부의 난을 초래했다"고 안타까워했다.(<고려사절요> 1157년조)
■“나 꼭 죽을 것이야!”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아간 환관이 있다. 연산군 대의 환관인 김처선이다.
김처선은 성종 임금의 사랑을 받아 정2품 자헌대부에 올랐던 총신이었다. 원래 환관에게는 아무리 높아봐야 종2품까지만 오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성종은 김처선에게 판서와 같은 반열인 자헌대부에 올린 것이다. 그의 운명은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반전한다.
성종의 대를 이은 연산군이 무오사화(1498년)와 갑자사화(1504년)를 잇달아 일으키면서 대대적인 살육에 나섰다. 당대의 역관인 조신이 쓴 <소문쇄록>과, <연산군일기> 등 문헌을 보라.
“이 때 김처선은 어둡고 음란한 연산군에게 매번 정성을 다해 간언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노여움을 속에 쌓아둔 채 ‘꿍’하고 있었다. 급기야 임금은 궁중에서 처용놀이를 했는데 음란함이 지나쳤다. 이때….”
바로 그 날(1504년 4월 1일), 김처선은 집안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나는 반드시 죽을 거야.”
김처선은 각오를 다지고 궁궐로 들어갔다. 마침 연산군이 술 한잔을 따라주었다. 벌컥벌컥 술잔을 비운 김처선은 술김을 빌려 임금을 향해 독설을 던졌다.
“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지만, 고금에 전하와 같은 짓을 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연산군이 크게 성을 내며 쏜 화살이 갈빗대에 맞혔지만 김처선은 그치지 않았다.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연산군이 화살을 더 쏘아 땅에 넘어뜨리고, 그 다리를 끊고서 “일어나 다니라”고 명했다.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 있습니까.”(김처선)
한마디도 지지않고 대들자 연산군은 김처선의 혀를 자르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냈다. 김처선은 죽을 때까지 말을 그치지 아니했다.
■처(處)자는 보기도 싫다.
연산군은 김처선의 시체를 범에게 주었다. 김처선의 극언이 얼마나 뼈저렸는지 연산군은 이성을 잃은 후속조치를 남발했다.
“간사한 내시 김처선이 임금을 꾸짖었으니 이런 죄는 개벽 이래 없었다. 어찌 천지 사이에 용납돼랴!”(<연산군일기> 1504년 4월 4일)
우선 조정과 민간에서 처(處)자는 입밖에 내지도 말라는 명을 내렸다. 예컨대 그 해 과거시험 답안지에 ‘처(處)’ 자를 썼던 유생 권벌의 합격이 취소되기도 했다.
권벌은 3년 후에 다시 과거를 치러 합격했다고 한다. 연산군은 또 김처선의 집을 헐고, 연못을 파도록 했으며, 그의 죄명을 돌에 새겨 묻으라는 명까지 내렸다.
심지어 처(處)자는 듣기도 싫다면서 내외 대신과 군사들 중에 김처선의 이름을 가진 자는 모두 개명하라는 명까지 내린다. 이밖에 김처선의 양자이자 환관인 이공신도 죽였고, 김처선의 7촌까지 모두 죄인이 됐으며, 그 부모의 무덤도 뭉개졌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뒤 김처선을 선양하자는 논의가 있었다.(1512년 12월4일)
그러나 중종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김처선은 술에 취하여 망령된 말을 해 스스로 실수했다. 바른 말 하는 데 뜻을 두었던 것이 아니니….”
중종은 아무리 바른말이었다 해도 환관이 주제넘게 나서 임금에게 대들었음을 책망한 것이다. 환관의 발호를 염려한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바로 환관의 한계가 아니었을까. 종묘와 사직을 위한 죽음을 무릅쓴 충간이었는데 ‘술에 취한 망령된 말’이라 폄훼됐으니 말이다.
그로부터 250년이 흐른 1751년(영조 27년)이 돼서야 왕명으로 김처선을 기리는 위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충성한 사람을 위해 정려문을 세우는 적은 세상을 권면하는 큰 정사다. 사람이 비록 미천하다 하더라도 없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아침이슬과 같은 운명
그러고보니 중국이나 조선이나 환관들의 운명은 롤러코스터였음을 알 수 있다. 아침이슬과 같은 운명이라고 할까.
자식이 없었으므로 부와 명예가 세습되기 어려웠다. 황제의 총애가 식거나, 혹은 그토록 총애했던 황제가 쫓겨나가거나 죽기라도 하면 환관의 운명 또한 장담할 수 없었다.
중국을 보라. 위충현과 유근이 이른바 천참만륙,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극형을 받았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후한 명말 당시에는 원소가 궁정에 난입했을 때 환관 2000명이 몰살당했다니…. 그 가운데는 눈썹이나 수염이 없어서 환관으로 오인돼 죽은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단다.
그 뿐인가. 당나라 때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국정을 주물렀던 환관 고력사와 이보국도 결국 일장춘몽의 짧은 전성기를 누렸을 뿐이다.
조선시대는 뭐 다른가. 중국의 내로라하는 환관들같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일부 환관들도 공신의 반열에 드는 등 군주의 총애를 받았다.
예컨대 조선 태조 대의 환관 김사행은 조선 건국의 기틀을 잡고 궁궐 내의 법도를 마련했다는 이유로 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또 내로라하는 조선의 개국공신들인 조준과 정도전, 남은 등은 환관 조순을 초청, 잔치까지 베풀고 말 1필까지 선물로 전달하기까지 했다.(1398년 7월 8일)
연회 때 술에 취해 태조 임금 앞에서 칼을 빼든 신귀생을 말린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모자를 던져버린 환관
하지만 그들의 운명도 덧없었다. 김사행은 1398년 8월 25일,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어린 세자(이방석)의 비호세력으로 분류돼 참수됐다. 조순도 마찬가지로 참형을 받았다. 신료들로부터 잔칫상을 받은지 한 달여 만에 목이 잘리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물론 그들은 뇌물과 청탁을 받았다는 탄핵을 여러차례 받았던 최측근 환관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참형을 받을만한 죄는 아니었다.
모두 태조 임금의 최측근 세력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던 환관들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좀 재미있는 장면이 <태종실록>에 나온다. 태종은 환관에게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태종이 총애했던 환관 노희봉은 변덕이 죽 끓듯 했던 임금 때문에 감옥에 쳐박히기 일쑤였다. 말실수 했다고 옥에 갇히고, 임금의 말을 잘못 전달했다고 또 감옥살이하고….
1411년(태종 11년) 1월5일, 그 날도 노희봉은 임금의 말을 잘못 전했다는 이유로 호된 꾸지람을 받았다. 심지어는 중관에게 명해 노희봉의 머리채를 잡고 중문으로 쫓아내게 했다.
그 날 노희봉의 기분을 적나라헤게 묘사한 <태종실록>을 보라.
“중관 김화상이 중문에 이르러 벗겨진 사모(紗帽)를 노희봉에게 씌워 주었다. 그러자 노희봉은 손으로 벗어서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막 섬돌 한 계단을 내려설 때 땅바닥에 떨어져 다친 데가 몹시 아팠다.”
아무리 임금의 명이라지만 모자를 확 던져버릴 정도로 화가 난 것이다.
■‘원죄는 군주에게 있다’
그러고보면 군주에게 환관은 필요악이었을 것이다.
10세기 쯤 광동성의 환관 왕국의 형태를 갖춘 남한의 군주는 이렇게 말했단다.
“모든 신하들에게는 가정이 있다. 때문에 만사를 다 제쳐놓고 군주를 위해 일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밤낮으로 함께 사는 환관들이야말로 군주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1471년(성종 2년) 6월 8일에는 대사헌 한치형이 언급한 환관의 폐해를 보라.
“환관은 임금과 조석(朝夕)으로 함께 거처합니다. 그러나 여러 대신들은 출퇴근합니다. 어두운 곳에서 몰래 사라지고 몰래 빼앗는 것을 대신들이 대명천지에 따지고 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군주들은 환관의 폐해를 알면서도 기댈 수밖에 없었다. 마약처럼…. 특히나 왕권강화를 꾀했던 군주들은 신료 중심의 정치를 깨뜨리려고 환관정치에 재미를 붙였다.
하지만 너무 과하면 군주를 욕보이고, 종묘사직을 어지럽게 했다. 환관의 존재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였던 것이다.
예컨대 1392년(태조 1년) 7월 20일 사헌부는 새왕조를 위한 10개 조목을 발표했는데, 8번째 조목이 환관혁파였다.
“환관의 사람됨은 대개 의식이 영리하고 말을 잘하며, 안색(顔色)을 잘 살피고 뜻을 잘 맞춥니다. 그 때문에 군왕은 왕왕 그 꾀임에 빠져서 깨닫지 못해 환란이 일어납니다. 앞으로 그 노련한 간물(奸物·환관)들을 내쳐야만….”
이쯤해서 난세의 간웅이라는 조조의 한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후한 말엽 대장군이던 하진이 환관들을 절멸시킬 계획을 세우자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환관은 고금부터 있어왔다. 다만 군주의 총애를 빌려 일이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
조조는 모든 악의 근원은 환관이 아니라 환관에게 힘을 준 군주에게 있음을 갈파한 것이다. (끝) 경향신문 사회에티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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