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잰내비, 주걱턱, 악녀…막말외교의 뿌리

 ‘정치 무능아’, ‘못난이 하는 짓마다 사달’, ‘돌부처도 낯을 붉힐 노릇’, ‘역사의 시궁창에 처박힌 산송장’…. 
 북한의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과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이 회고록을 출간한 이명박 전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난한 표현들이다. 하지만 이는 애교에 불과하다. 지난해 말 ‘김정은 암살’을 소재로 한 영화 ‘인터뷰’의 미국상영을 계기로 오바마 미 대통령을 겨냥한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의 발표문을 보라.

 “아프리카 원시림 속의 잰내비 상통(원숭이 얼굴) 그대로다. 인류가 진화되어 수백만년 흐르도록 잰내비 모양이다.” 

발해인들을 무식한 놈들이라 욕한 최치원. 발해가 욱일승천의 기세로 전성기를 이루자 저주를 퍼부었던 것이다.


 ■'잰내비, 주걱턱, 살인마 악녀…

   그 때 뿐이 아니다. “혈통마저 분명치 않은 인간 오작품”이라며 “아프리카 자연동물원의 원숭이 무리에서 빵부스러기나 햝으며 지내는 것이 좋을 듯 하다”(지난해 5월)는 등 그야말로 인종차별적인 막말을 퍼부었다. 지난해 8월 한미 군사훈련을 앞두고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을 겨냥해서는 “주걱턱에 움푹꺼진 눈확(눈구멍), 푸시시한 잿빛 머리털에 이르기까지 승냥이 상통인데다…”라 표현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두고는 ‘시집못간 노처녀의 술주정’ ‘유신군사깡패의 더러운 핏줄’, ‘살인마 악녀’, ‘방구석 아낙네의 근성’, ‘못돼먹은 철부지 계집’ 등의 막말을 기회있을 때마다 쏟아냈다.

 흔히 운위되는 ‘외교적 수사(diplomatic rhetoric)’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아무리 ‘인종차별’이자 ‘성차별’이고, ‘인신공격’이라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막말외교의 원조

   하기야 막말외교의 뿌리는 깊다. 474년 백제 개로왕이 중국 북위 황제에게 보낸 외교문서는 고구려를 ‘시랑(豺狼·승냥이와 이리)’이자 ‘장사(長蛇·큰 뱀)’라 표현했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니 이리와 승냥이 같은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으니…. 지금 연(璉·장수왕)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남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고, 대신과 호족들의 살육 행위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넘쳐나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서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개로왕은 장수왕을 두고 “‘소수(小竪·더벅머리 어린애)’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니 “북위와 백제와 손을 잡고 ‘추류(醜類·추악한 무리)’ 즉 고구려를 멸망시키자”고 제안한 것이다. 하기야 <광개토대왕 비문>을 보면 고구려도 백제를 두고 백잔(百殘)이라 공공연히 폄훼했음을 알 수 있다.

 

  ■최치원의 막말

   불후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의 ‘막말 외교’도 정평이 나있다.
 ‘토황소격문’을 지어 중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던 최치원은 그답지 않게 왜 그런 흉한 말을 뱉었을까.  
 바야흐로 발해의 국력이 ‘해동성국’이라 일컬을만큼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던 때였다.
 897년 7월 당나라에 파견된 발해 왕자 대봉예가 당나라 황실에 민감한 문제를 꺼낸다.
 “이제부터는 발해가 신라보다 윗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이것을 역사는 ‘쟁장(爭長)사건’이라 일컫는다. 역사서 <동사강목>은 이를 두고 “발해가 스스로 강대국을 자처했다(時渤海國 自謂國大兵强)”고 했다. 그렇지만 당나라는 발해의 요청을 거절했다.
 당나라가 발해의 요청을 거부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국명의 선후를 어찌 ‘강약(强弱)’으로 따질 수 있겠는가. 조제(朝制)의 순서도 ‘성쇠(盛衰)’를 근거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관례 대로 하라.”(<고운집>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신라는 당나라의 조치에 반색했다. 최치원은 당나라의 조치에 감읍한 나머지 ‘사불허북국거상표’를 올렸다. 즉 북국(발해)이 신라 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한 당나라에 감사하는 표문이다.

 

 ■"발해는 무식한 놈들"

   하지만 이 ‘사불허북국거상표’를 뜯어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당나라도 당시 발해가 강(强)하고 성(盛)하며, 신라는 약(弱)하고 쇠(衰)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당시 신라는 효공왕 즉위년을 맞이하고 있었다. 원종·애노의 난(889)으로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한반도 남부는 후삼국으로 분열되고 있었다. 반면 발해는 ‘해동성국’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때문에 발해로서는 당나라에 자리변경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가 거절했으니 말이지 신라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이 때 발해를 향해 저주에 가까운 욕설을 퍼붓는다.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에는 보잘 것 없는 부락에 불과했습니다. ~백산(백두산)에서 악명을 떨치며 떼강도짓을 했습니다. 추장 대조영은 신라로부터 제5품의 대아찬의 벼슬을 처음 받았습니다.”
 최치원은 대조영이 신라로부터 진골(대아찬)의 벼슬을 받은 신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사실인 지는 확인할 길은 없다.  
 “요즘 그들은 차츰차츰 우리의 은혜를 저버리고 갑자기 신의 나라와 대등한 예를 취하겠다는 소문이 들려옵나이다.~ 신의 나라가~ 무식한 놈들과 함께 서있다는 것 자체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저 발해야말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갈과 모래 같고~ 삼가 제 본분을 지킬 줄을 모르고 오로지 웃사람들에게 대들기만을 꾀했습니다.”

아차산 4보루에서 바라본 풍납토성. 개로왕의 막말외교가 실패로 끝난 뒤 고구려는 결국 개로왕의 한성백제를 멸망시킨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들" 

   욕설은 끊이지 않는다.
 “발해는 소의 엉덩이(牛後)가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엉큼하게도 용의 머리(龍頭)가 되고자 켸켸묵은 말을 지껄였습니다. 저 오랑캐의 매는 배가 부르면 높이 날아가고, 쥐는 몸집이 있으면 방자해지고 탐욕스럽게 됩니다.(察彼虜之鷹飽腹而高양鼠有體而恣貪) 다시는 위아래가 뒤집히지 않도록 하게 하시옵소서.(不令倒置冠구)”
 최치원은 발해를 욕하면서 ‘축로(丑虜·추악한 오랑캐), 피로(彼虜·저 오랑캐), 피번(彼蕃·저 오랑캐), 우췌부락(우贅部落·군더더기 같은 부락으로나 번역됨)’이라 했다. 심지어는 ‘작얼(作孼·훼방), 제악(濟惡·악행을 일삼음), 흉잔(凶殘), 훤장(喧張), 고은(辜恩) 등 다양한 욕설을 해댔다.
 그러고보면 막말 외교의 뿌리는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개로왕이나 최치원이 막말 외교를 펼쳤다고 해서 지금도 통용될 수 있을까. 그것은 1200~1600년 전에나 통했던 외교가 아닌가. 이기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