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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빨간 마후라' 해인사 폭격을 거부하다

이런 말 들어봤는지요. 해인사와 해인사 안에 있는 고려대장경판이 한국전쟁 때 잿더미로 사라질 뻔했다가 겨우 모면했다는 소리 말입니다. 어렴풋 접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공군 조종사를 우리가 ‘빨간마후라’로 일컫고 있는데, 그 유래가 어떠했는지 들어보셨는지요. 저는 두가지 사례를 공부하면서 역사를 제대로 쓰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번 잘못 알려진 것을 올바로 고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첫번째 해인사와 고려대장경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지킨 주인공임을 자처하는 일대기가 등장하고, 정부기관인 문화재청은 그 일대기를 아무런 거름장치없이 받아들여 곧이곧대로 기술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진실과 다르다는 것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증언으로 드러났습니다. 그 내막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또한 ‘빨간 마후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역시 다른 진실이 숨어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런 자런 자료와 당대를 살았던 이들의 증언이 맞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런 오류를 고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10회는 ‘빨간마후라와 해인사 폭격 명령 거부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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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량, 인민군 몇 명 잡자고 해인사를…”(2008년 6월 초판)
“김영환 대령, 명령불복종으로 고려대장경판을 지키다.”(2009년 11월 개정판)

문화재청이 펴낸 <수난의 문화재-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의 2008년 초판과 2009년 개정판의 일부분이다.
같은 쪽(205쪽)에 있고, 또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전쟁의 참화에서 지켜낸 인물을 소개하는데 이상하다.

초판과 개정판의 주인공이 완전히 다르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전쟁의 참화에서 막아낸 주인공으로 알려진 김영환 장군

■뒤바뀐 주인공
이해를 돕기 위해 초판과 개정판의 상반된 내용을 좀더 검토해보자.

우선 사건의 배경은 다르지 않다. 즉 고려대장경판이 보관된 해인사가 한국전쟁 당시 한줌의 재로 변할 뻔했다는 것이다.

1951년 여름, 한국전쟁 당시 미처 퇴각하지 못한채 낙오한 북한군이 숨어들면서 해인사는 풍전등화의 상황에 빠졌다는 것.

당시 해인사 일대에도 900여 명의 북한군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에따라 북한군 패잔병들을 소탕하기 위한 공군의 작전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해인사 일대에 여러 차례 전투기 폭격작전이 집중됐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해인사와 고려대장경만큼은 폭격을 피해갔다. 그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귀중한 문화재인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보전하려는 ‘참군인’ 덕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참군인, 즉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폭격으로부터 막아낸 주인공이 초판과 개정판에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초판의 주인공
먼저 초판을 보자.
“장지량(당시 중령)은 1951년 제1전투 비행단 작전참모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비행고문단으로부터 해인사 폭격명령을 받았습니다. 장지량은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초판에 따르면 장지량은 이렇게 생각했단다.
‘500~600명으로 추산되는 인민군 1개 대대는 해인사를 점령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식량탈취가 목적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2~3일 후면 해인사를 떠날 것이다. 그 후에 폭격한다면 적도 소탕하고 해인사도 지킬 것이다.’

장지량은 파리를 지키기 위해 독일군에 무조건 항복한 프랑스 장군을 떠올리면서 ‘팔만대장경(고려대장경)이 어떤 문화재인데 인민군 몇 명 잡겠다고 해인사를 폭격하겠는가’라고 고민했단다.

 

그는 결국 팔만대장경을 지키려고 폭격 명령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단다. 초판은 그 후의 이야기도 아주 실감나게 풀어나간다. 장지량이 명령 거부의 결심을 미 6146 고문단 작전장교에게 설명하자, 미군 장교는 “왜 작전을 따르지 않느냐”고 불만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상호간 언쟁이 오가며 출격이 지연되자 상부에서는 전투기를 계속 출격시키라는 독촉명령이 계속 하달되었습니다. 그러나 장지량은 시간을 계속 끌었고 결국 날이 어두워지면서 자연스레 출격이 중단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려대장경은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초판에 따르면 이 일(명령거부) 때문에 장지량은 목숨을 잃을 뻔했단다. 노발대발한 미군측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장지량이 명령을 거부한 일을 항의했고, 대통령이 격노해서 그를 붙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김정렬 당시 공군참모총장이 장지량의 해명을 듣고 대통령에게 사정을 설명해줘서 극형을 면했습니다.”

초판은 “장경판전과 고려대장경판을 지킨 장지량의 굳은 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면서 이렇게 매듭짓는다.

“장지량도 전쟁 후 고려대장경판을 직접 보고는 자신의 결정이 현명한 판단이었음을 새삼 느꼈다. 만약 그가 상부의 명령대로 해인사를 폭격했다면 소중한 문화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테고 후대에 씻을 수 없는 죄가 되었을 것입니다.”

초판에 따르면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전쟁의 참화에서 구해낸 주인공은 ‘장지량’이었던 것이다. 

해인사 경내에 조성된 김영환 장군 해인사 고려개장경 수호비 

 

■개정판의 주인공
하지만 초판 발행 후 1년 5개월 뒤 간행된 개정판에는 주인공이 바뀐다.

“낙오된 북한군 900여 명이 해인사로 몰려들었습니다. 1951년 9월 18일 오전 8시30분 제1전투비행단 참모장이자 제10전투비행전대장인 김영환 대령은 경찰전투부대의 긴급항공지원 요청에 따라 하천 상공에서 정찰기를 만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주인공이 작전참모인 장지량 중령에서 전대장인 김영환 대령으로 바뀐 것이다. 작전명령의 주체도 미비행고문단에서 우리측 경찰전투부대로 바뀐다.

 

개정판을 더 보자.

“정찰기가 백색연막탄을 터뜨려 제시한 공격목표는 바로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이었습니다.”

개정판에 따르면 당시 김영환을 편대장으로 한 제10전투비행전대의 폭격기 4대는 기관총 뿐 아니라 폭탄과 로켓탄을 장착하고 있었다. 특히 김영환의 폭격기에는 ‘네이팜탄’도 적재돼 있었다. 해인사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을 발사해서 북한군을 쓸어버릴 작전이었다. 그러나 김영환은 그럴 수 없었다.

“폭탄을 투하했다면 해인사나 장경판전, 고려대장경판이 무사했을까요. 김영환은 자신의 지시없이는 절대로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말도록 했습니다.”

정찰기가 “편대장은 무엇하는가. 빨리 폭탄을 투하하라”는 날카로운 명을 내렸다.

 

편대 기장들도 김영환에게 폭격명령을 기다렸지만 김영환은 “공격하지 마라”는 단호한 명을 내렸다. 개정판은 “김영환 편대는 사찰 상공을 몇차례 선회한 다음 해인사 뒷산 너머로 폭탄과 로켓탄을 투하하고 귀대했다”고 기록했다.

“김영환이 귀대하자 심한 추궁을 받았습니다. ‘김 대령은 국가보다도 사찰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사찰이 국가보다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공비보다는 사찰이 더 중요합니다.’

 

김영환은 사찰을 파괴하는 데는 하루면 족하지만 해인사 같은 사찰을 세우는 데는 천년의 세월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개정판은 “참으로 긴급한 순간, 탁월한 판단이었다”면서 “명령 불복종이었지만 해인사는 잿더미가 될 위기를 벗어났다”고 기록했다. 개정판은 이어 2002년 해인사 들목에 고려대장경을 지켜낸 김영환의 공적을 기리는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가 건립됐음을 분명히 밝혀두었다.

 

■해프닝의 진실
어떻게 이런 해프닝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문화재청이 펴낸 <수난의 문화재-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 초판(2008년)이 장지량의 회고록(<빨간마후라 하늘에 등불을 켜고>(2006년)를 참고해서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장지량 장군의 회고록에 대한 논란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곳도 아닌 문화재청이 그 회고록 내용을 요약하는 수준의 책을 펴냈다는 것이었다.   

문화재청 책이 인용한 장지량의 회고록을 보면 해인사 지켜낸 이야기가 너무도 생생하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나(장지량)는 출격대기중인 김영환 전대장에게 달려갔다. ‘전대장님 내 판단으로는 인민군 놈들이 불공을 드리러 절에 들어왔을 리 없습니다. 단순한 식량확보차원 같습니다. 따라서 해인사 폭격은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머리가 좋은 김영환 전대장도 이 말 뜻을 알아듣고 물었다. ‘그 말 맞아, 어찌하면 좋겠나.’”

“(미 공군의 해인사 폭격명령을 지체시키자 미 고문단 윌슨 대위와 영어로 말다툼했다.) 이 때 김영환 전대장이 달려왔다. ‘왜 그러냐’. 나는 해인사 폭격의 부적절성을 지적하려고 파리와 교토 폭격을 제외한 사실을 설명하려는데 의사소통이 안된다고 했다. 김영환 전대장이 내 말을 받아 윌슨 대위에게….”

장지량 회고록을 보면 ‘해인사와 고려대장경 수호’ 드라마의 주연(장지량)과 조연(김영환)은 분명하다. 

참군인의 순간판단력으로 폭격을 면한 것으로 알려진 고려대장경 

■회고록의 함정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개인의 회고록이니 일대기는 자신의 입장에서 쓰는 글이다. 사실관계가 다르거나 과장·축소·왜곡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의도와 상관없는 착각이 개입될 수도 있다.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당대의 시대 상황을 설명해주는 소중한 틈새자료일 수는 있지만, 그 기록을 맹신해서 마치 정사인양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 안된다. 장삼이사의 일대기라면 사실관계가 다른 들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지만 소중한 문화유산인 해인사와 고려대장경판을 전쟁의 참화에서 구해낸 주인공이라면 매우 중요한 역사인물로 기록돼야 한다.

 

그런데 개인의 일대기를 사실관계 확인이나 검증없이, 그것도 문화재청 책자에 고스란히 인용해서 마치 사실처럼 기술한다면 그것은 씻을 수 없는 역사왜곡을 인정해주는 셈이 된다.

아닌게 아니라 장지량의 회고록과 문화재청의 책자는 출간되자마자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아무래도 ‘해인사와 고려대장경판을 지킨 장지량 장군’의 이야기는 인구에 회자될 만 했으니까…. 게다가 개인의 회고록을 정부(문화재청)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해준 꼴이 아니던가.  

 

■종합검증팀 가동
하지만 곳곳에서 반론이 제기됐다.

이미(2007년) 공군작전사령관을 지낸 윤응렬 예비역 장군이 <장지량 장군 회고록의 고찰과 소견>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문제를 제기했다.

 

2008년에는 김영환 장군의 조카인 김태자씨 역시 언론 인터뷰를 자청해 ‘김영환 장군의 명예를 되찾겠다’고 나섰다. 결국 2009년 공군 차원의 역사자료발굴위원회가 긴급하게 구성됐다.

위원회는 한국전쟁 때 100회 이상 출격한 조종사 등 14명으로 구성돼 장지량 회고록인 <빨간 마후라…>와 문화재청의 <수난의 문화재…> 등 두 권의 내용을 4개월간 검증한 뒤 <종합보고서>를 펴냈다.

위원회는 일단 보고서 작성의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면서 “두 책에 게재된 오기(誤記)와 근거없는 날조(捏造) 사례는 적지에 출격해서 전공을 세운 선배 조종사 등 공군 전체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라 못박았다.

 

위원회는 ‘해인사와 고려대장경판’ 건 말고도, 장지량 회고록에 등장하는 ‘빨간 마후라의 유래’ 등 몇가지 논란을 검증했다.

 

■뒤바뀐 주·조연
4개월 동안 검증한 내용을 기록한 보고서를 보자.

먼저 ‘해인사와 고려대장경’ 논란…. 위원회의 검증 결과 ‘미 공군이 해인사 공습을 명했다’는 장지량 회고록의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판단했다. 당시 해인사 지역에 대한 한국 공군의 항공지원작전은 미 공군과는 전혀 관계없는 한국 공군 단독작전이었다는 것이다.

 

즉 미 공군의 어떠한 형태의 지시나 관여없는 제10전투비행전대장인 김영환 대령의 지휘 아래 수행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지량 회고록에 등장하는 미공군 고문관(월슨)과의 언쟁은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보고서는 따라서 윌슨과 마찰이 있었고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포살(捕殺)당할 뻔했다’는 회고록 내용도 근거없는 주장이라고 결론 지었다. 물론 위원회는 단서를 하나 달았다.

‘만약 작전참모였던 장지량 중령이 비행전대장인 김영환 대령에게 해인사 폭격의 부적절성을 설명하고 폭격임무 유보를 건의했다면 참모로서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렇지만 위원회는 “임무 당시 공격진입 및 이탈, 주표적을 포함한 목표전환 등 실제 폭격 수행방침은 임무지휘관의 고유권한”이라고 못박았다. 무슨 뜻이냐. 당시 해인사 지역에 대한 항공지원 자전의 출격여부는 전적으로 지휘관인 김영환 제10전투비행단장의 권한과 책임이라는 것.

즉 만에 하나 폭격 브리핑에 앞서 작전참모가 해인사 경내 폭격유보를 건의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참모의 건의일 뿐 결정사항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해인사 폭격 유보’의 공적은 어떤 경우든 지휘책임자인 김영환 당시 전대장의 몫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원회는 이같은 공적 덕분에 해인사 경내에 ‘김영환 장군의 공적비’가 건립됐음을 강조했다.(2002년) 

1964년 개봉되어 공전의 히트를 뿌렸던 영화 '빨간 마후라'. 빨간 마후라를 맨 처음 목에 두른 이는 김영환 장군이었고, 공군의 상징으로 확정지은 것은 바로 이 영화였다고 한다. 

■해인사·고려대장경 수호의 야사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수호한 이 작전이 공군사나 출격기록과 같은 공식 기록에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군을 미화하려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닐까.

 

윤응렬 예비역 장군은 이에 대해 “공군사나 출격기록에는 출격작전의 세부 사항까지는 기술하지 않은 것이 정상”이라 밝혔다.

‘해인사 일대 폭격작전(정식 작전명은 지리산지구 공비소탕작전)’의 경우도 출격명령에 공격목표를 명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한번 출격한 편대는 단일 목표가 아니라 지상의 경찰 토벌대가 제시하는 목표를 그 때 그 때 확인·공격한다는 것이다.

 

그 날도 김영환 대령이 이끄는 폭격기 편대는 공비가 집결된 해인사를 공격하라는 등 특정 목표를 공격하라는 지정을 받고 출격한 게 아니라는 것. 경찰토벌대가 “공비가 집결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공격목표를 제시받았지만, 김영환 편대장이 해인사를 폭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윤응렬 예비역 장군의 주장이었다.

어쨌든 명확하고 객관적인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김영환 장군 주변 사람들과 해인사 스님들의 증언을 통해 김영환 편대장은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지킨 위대한 군인’으로 알려져왔다.

예를 들어 ‘역사자료 발굴 위원회’에 참석한 김영환 장군의 동료들은 해인사 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당시 김영환 전대장이 ‘잘못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 해인사를 공격할 뻔했어.’라 했다. 당시엔 무슨 이야기인 줄 몰랐는데 지금에 와서야 그 말을 이해할 것 같다.”(박재호 예비역 장군)

“사천기지에 근무했을 때 김영환 전대장으로부터 ‘야, 오늘 내가 절을 공격할 뻔 했어, 큰 일 날 뻔 했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생생하다.”(배상호 예비역 장군)    

“해인사 스님들도 해인사가 온전한 것은 모두 공군의 덕이라 했다. 평소 불교에 대한 애착이 있는 김영환 장군이 무의식적으로 행동으로 옮겨 대장경판을 보호했을 것이다.”(최원문 예비역 대령)

결국 이같은 증언들이 모여 움직일 수 없는 ‘해인사와 고려대장경 보전’의 야사(野史)가 된 것이다.  

 

■‘빨간 마후라’를 둘러싼 원조논쟁
또 하나, 장지량 회고록 내용을 둘러싼 흥미로운 논란거리가 있었다. 바로 ‘빨간 마후라’ 논쟁이다.

장지량 회고록을 보면 “내 아이디어로 한국전쟁 당시 공군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맨 처음 고안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적진에서 격추된 조종사를 식별하려고 빨간마후라를 고안했다는 것이다. 회고록을 보면 아주 구체적이다.

김영환 전대장에게 유색천의 사용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김영환 전대장은 처음에 “빨간 색은 중공군이 좋아하던 색깔이 아니냐”고 반대했지만 결국 자신의 권유로 마음을 바꿨다는 것이다.

“다음 날 강릉 시내로 나가 붉은 인조견사를 두 필 사와 마후라 100여 장을 만들었다. 조종사들이 출격할 때마다 목에 두르고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회고록은 “빨간 마후라 덕분에 구조된 조종사가 생겨났으며 빨간마후라를 부적처럼 목에 두르고 출격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공군 하면 빨간마후라를 연상하는 것이 바로 내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장지량 회고록 및 문화재청 책 검증을 위한 공군발굴위원회는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는 결론을 내린다. ‘빨간 마후라를 고안한 이 역시 김영환 장군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김영환 전대장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붉은 색으로 도색한 전투기를 타고 80여 대의 연합군 항공기를 격추한 독일 공군의 에이스 만프레도 폰 리히토벤을 흠모했다는 것.

그러던 그가 강릉기지 사령관 시절인 1951년 11월 공군본부로 출장하던 길에 친형(김정렬 초대 공군참모총장) 집에 잠시 들렀다. 그 때 형수가 입고 있던 자주색 치마를 보고 말했다는 것이다.

“형수님, 마후라 하나 만들어주세요.”

그 때 형수가 남아있던 치맛감을 찾아 자주색 마후라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김영환 장군의 빨간 마후라 이야기는 공군사의 전설처럼 전해졌다. 1973년 발간된 <공군 보라매> 제29호와 2006년 발간된 <공군> 10월호에도 분명하게 나온다.

위원회는 “빨간 마후라를 처음 착용한 이는 김영환 당시 대령”이라 못박았다. 또한 “1964년 전투조종사를 소재로 한 ‘빨간 마후라’ 영화가 상영됨으로서 영화주제곡이 큰 호응을 얻음으로써 빨간 마후라가 공군조종사를 지칭하는 상징이 된 것”이라 부연 설명했다. 그 때부터 사천기지에서 비행교육과정을 수료한 조종사들에게 조종 흉장과 함께 참모총장이 직접 빨간마후라를 수여하는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회고록 역사의 교훈
사실 ‘해인사·고려대장경’ 논쟁과 ‘빨간 마후라’ 논쟁은 공군 차원에서 이뤄진 역사자료 발굴 위원회의 검증으로 끝났다고 봐야 한다.

물론 당사자들이 고인이 된만큼 진실은 무엇인지는 사실 누구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는 상식과 보편의 기록이어야 한다. 일방적이고 주관적인 주장은 역사로서 객관성을 얻기 힘들다.

개인의 회고록이나 일대기, 자서전 등은 그저 참고용으로 써야지 금과옥조가 되어서는 안된다.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장지량 예비역 장군이 별세했을때 상당수 부음기사가 ‘해안사와 고려대장경을 지킨 빨간 마후라의 원조’라며 기렸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주관적인 개인의 자료를 무의식으로, 무비판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혹여 잘못된 정보가 시간이 흘러 마치 사실로 둔갑해서 결국 움직일 수 없는 정사로 후세에 남겨질 수도 있다는 노파심이 든다.

 

그것도 아무런 비판 없이 흘러흘러 어느새 정사로 변해버린다면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새삼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회고록)의 위험성을 다시 생각해본다. 또 그것을 종종 비판없이 믿어버렸던 필자 스스로도 반성해본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문화재청 엮음,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이야기> 2008년 초판, 2009년 개정판

 공군, <공군 역사자료발굴위원회 종합보고서>, 공군역사자료발굴위원회, 2009년

 장지량 구술, 이계홍 정리, <빨간 마후라 하늘에 등불을 켜고>, 이미지북, 2006년

 윤응렬, <장지량 장군 회고록의 고찰과 소견>, 200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