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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개고기 주사. 더덕정승, 잡채 판서, 참기름 연구원

 조선조 중종 때 이팽수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의 별명은 ‘가장주서(家獐注書)’였다.
 가장은 개고기를, 주서는 정7품의 벼슬이었다. ‘개고기 주사’라. 왜 그런 부끄러운 별명이 붙었을까. 1534년(중종 29년) 중종이 그를 승정원 주서로 임명하자 실록을 쓴 사관이 이런 논평을 했다.

 

 ■개고기 주사
 “이팽수는 승정원 내부의 천거도 없었는데 김안로가 마음대로 천거했다. 김안로는 개고기를 무척 좋아했다. 이팽수가 봉상시 참봉으로 있을 때부터, 크고 살찐 개를 골라 사다가 먹여 늘 김안로의 구미를 맞추었다. 김안로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어느 날 이팽수가 청요직에 오르자 올랐다. 사람들은 이팽수를 ‘가장주서’라 했다.”
 그러니까 봉상시 참봉(지금의 9급)이던 이팽수가 당대의 권신 김안로(金安老·1481~1537)에게 개고기요리를 뇌물로 바쳐 청요직인 승정원(국왕비서실)에 입성했음을 꼬집었다. 그런데 웃기는 일은 또 있다,
 이팽수가 개고기 뇌물로 출세했다는 소식에 부화노동한 자가 있었으니 바로 진복창이었다. 그 역시 ‘개고기 구이’로 김안로에게 접근했다.(1536년)
 하지만 진복창은 이팽수처럼 발탁되지 못했다. 개고기 요리 실력이 이팽수보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진복창은 김안로가 좋아하는 ‘개고기 구이(견적·犬炙)’을 바쳤지만 크게 발탁되지 못했다. 김안로로부터 ‘요리 실력이 이팽수보다 못하다’는 질책을 받았다.”(<중종실록>)

 

 ■더덕정승과 잡채판서
 ‘산삼(더덕)정승’과 ‘잡채판서’도 있었다.
 광해군 대에 좌의정까지 오른 한효순이 바로 ‘산삼정승’이었고, 호조판서가 된 이충이 바로 ‘잡채판서’였다.
 그들은 왜 그런 불명예스런 별명을 얻었을까. 역시 1619년(광해군 11년) 3월5일의 실록(<광해군일기>)에 등장하는 이충의 졸기를 보라.
 “이충은 진기한 음식을 만들어 사사로이 궁중에 바쳤다. 왕(광해군)은 식사 때마다 이충의 집에서 만들어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곤 했다.”
 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당대에 시중에 떠도는 시를 그대로 인용했다.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조롱했다. ‘사삼(沙蔘)정승의 권세가 처음에는 중하더니, 잡채상서의 세력은 당할 자가 없구나.(沙參閣老權初重, 雜菜尙書勢莫當)’ 사삼정승은 한효순을, 잡채판서는 이충을 지칭한 것이다.”
 실록을 쓴 사관은 “한효순의 집에서는 사삼으로 밀병을 만들었고, 이충은 채소에 다른 맛을 가미했는데 그 맛이 희한했다”고 첨언했다. 특기할만한 것은 이충이 죽자마자 광해군이 이틀동안 조회를 중단하고 관곽과 부의금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추증의 형태가 아니라 우의정 벼슬을 죽은 이충에게 내려주기도 했단다. 임금이 “국가를 위해 원망을 받으면서도 맡은 일에 마음을 다했다.’는 전교를 내리면서 슬퍼했다니…. 그가 바친 잡채맛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연려실기술>은 <일사기문>을 인용해서, 한효순·이충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충은 잡채를 바쳐 호조판서에, 한효순은 산삼(山蔘·실록에서는 사삼, 즉 더덕으로 표현)을 바쳐 일약 정승에 올랐다”고 기록했다.

 

 ■‘참기름연구원’ 등장
 ‘개고기 주서’와 ‘더덕(산삼) 정승’, ‘잡채 판서’에 비견되어 두고두고 청사에 기록될 만한 용어가 등장했다.
 이름하여 ‘바이오 참기름 연구원’이다. 전남도 산하 출연기관인 전남생물산업진흥원 나노바이오연구원이 25억원짜리 초고가 장비에서 짜낸 참기름을 명절용 선물로 도내 유력인사 300~500명에게 바쳤단다.
 나노바이오연구원은 뭐하는 곳인가. 지역에서 생산된 친환경 특산생물자원을 이용해서 의약품·식품 등을 개발하고 지원하려고 설립된 곳이다. 이 연구개발에 쓰여야 할 25억원짜리 ‘초임계 추출기’로 고작 선물용 참기름을 짜냈다니 기가 막힌다. 특히 이 기계는 불순물을 포함하지 않은 천연요소와 단일성분을 선택적으로 추출할 수 있는 기계란다. 쉽게말해 진액만을 짜낼 수 있는 기계다. 그랬으니 볶은 뒤 물리적인 힘을 가해 기름을 짜내는 동네 방앗간의 기름맛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고소하다는 것이다. 이런 기막힌 뇌물 참기름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참기름을 짜는내 필요한 참깨를 상납받고, 서류조작까지 하는 한편 기자재 독점 남품을 대가로 업자들로부터 뇌물까지 챙겼다. 연구원 25명 가운데 13명이나 연루됐다니….

 

 ■인정과 뇌물 사이
 우리가 ‘사람의 정’을 말할 때 흔히 인정(人情)이라고 한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인정’은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감정이나 심정, 혹은 남을 동정하는 따뜻한 마음’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네번째 뜻을 보면 반전이다. ‘예전에, 벼슬아치들에게 몰래 주던 선물’이라 돼있다. ‘몰래 바치는 선물’이란 뭔가. 뇌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표준대사전의 낱말 풀이 가운데 중요한 전제가 있다. ‘예전에’라는 전제이다.
 그랬다. 조선시대 여진족 오랑캐들이 조선 조정에 공물을 올릴 때 변방의 고을 수령에게 바치는 뇌물이 있었다. 그것을 칭하여 ‘상납 인정(上納人情)’이라 했다. 공물이 서울에 오게 되면 해당 관청과 관청의 하급관리에게 ‘인정물(人情物)’이라 해서 뇌물을 바쳤다. 조선중기 이기(1522~1600)가 쓴 <송와잡설>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1577년(선조 10년) 조정에 진상품을 올린 뒤 돌아가는 야인이 투덜거렸다. ‘우리가 진상한 담비가죽이 매우 좋아서 내심으로는 관직을 얻을 수 있을 까 기대했는데, 인정을 쓴 것이 모자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다 인정을 베풀었는데 도승지에게 주지 못해 관직을 얻지 못한 것이다.’ 야인들의 말이 무슨 이야기인가. 아! 조선의 ‘인정’ 쓰는 폐단이 야인에게 미쳐 그 욕된 말이 조정대신들에게 까지 미치는구나. 애닯구나!”
 이기는 조선의 뇌물 풍습이 얼마나 악명을 떨쳤으면 오랑캐 야인들까지 인정, 즉 뇌물이 통한다고 여겨 함부로 투덜거리는 것이냐고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이기의 한탄은 5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귓전을 때린다.

조선시대 개장수에게 끌려가는 강아지 모습. 19세기 화가 김준곤의 <기산풍속화>에 나온다.

 

 ■역사기록을 부끄러워한다
 1421년(세종 3년) 전 평안도관찰사 김점이 부정부패사건에 연루됐다. 관찰사를 지낸 뒤 돌아올 때 김점의 짐이 150바리나 됐다는 것이었다. 김점은 상왕(태종)이 통애한 후궁 숙공궁주 김씨의 아버지였다. 그랬으니 처벌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조사 끝에 장물이 1000관이나 나왔다. 당시 상왕인 태종은 부정부패의 증거물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사형위기에 몰려맀던 김점은 겨우 풀려났지만 다음과 같이 말하며 후회했다고 한다.. 
 “나의 악명(惡名)은 반드시 사책(史冊)에 씌어져 훗날까지 전해질 것이다.”
 그렇다. 처벌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이런 부끄러운 짓이 후대에까지 영원토록 전해지는 것을 두려워 해야 한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