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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정혼녀를 아시나요

  이번 주 팟 케스트 30회는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정혼녀를 아시나요’입니다.
 최근 문화재청이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부부를 모신 영원(英園·경기 남양주 홍유릉 경내)을 공개했답니다. 영친왕이 1970년 세상을 떠났다니까 45년 만이겠지요. 사실 영친왕이나 부인인 이방자(일본명 마사코)나 정략결혼의 희생양이라는 점에서 한많은 삶을 살았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그나마 두 사람의 혼백 만큼은 함께 묻혀 있지 않습니까. 그 결혼 때문에 평생 수절하며 살았던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가 영친왕의 정혼녀 민갑완 규수입니다.
 10살 때 딱 한 번 본 남편감 때문에 61년 간이나 독신으로 살아야 했던 여인. 황실과 가문을 위해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살았던 그녀의 삶을 이번 주 팟캐스트에서 들어보십시요. 블로그를 참고해서 들으시면 더 좋습니다. (경향신문 이기환 논설위원)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영원(英園·경기 남양주 홍유릉 경내)이 45년 만에 일반에 공개됐다.
 영원은 대한제국 시기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과 일본 왕족 출신의 부인인 이방자(마사코) 여사를 함께 모신 무덤이다. 임금이 아닌 태자의 무덤이므로 능(陵)이 아니라 원(園)이라 일컬어졌다.
 영친왕(1897~1970)이 누구인가. 고종의 7번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이다. 생모인 엄상궁은 영친왕을 낳은 뒤 후궁이 됐고, 대한제국의 황귀비 자리에 올랐다. 영친왕은 10살 때인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됐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일본유학을 떠났다. 영친왕은 도쿄에서 일본왕족이던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와 정략결혼 했다.
 이 때부터 마사코는 이방자 여사로 일컬어진다.

영친왕의 정혼녀 민갑완의 상하이 망명시절 모습. 어릴 적부터 영특해서 10살 때인 1907년 150대 1의 경쟁을 뚫고 영친왕의 악혼녀가 됐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영친왕은 금수와 같은 자다”
 그 때가 1920년 4월 28일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결혼 당일 신문 3면에 ‘세자 금일(오늘) 가례’라는 제목으로 영친왕·이방자 부부의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신문은 ‘오늘 가례를 거행하시는 왕세자 전하의 갸륵하신 일’이라는 부제로 영친왕의 삶을 소개했다. 
 결혼식은 일본과 조선을 통틀어 매우 삼엄한 삼엄한 경계 속에서 거행됐다. 결혼식 전날 서울(경성) 시내 경찰서장들이 비상소집되기도 했다.
 “가례당일 경성시내의 공기는 매우 불온했다. 신경과민한 경관들이 큰길거리마다 5~6명씩 늘어서 있었고, 기마 순사도 떼를 지어 다녔다. 자동차 경관대까지 붕붕거리고 돌아다녀서 무슨 일이 금시라도 생기는 듯 했지만 다행히 정온했다.”(4월29일)
 도쿄에서는 이방자 여사가 혼례식을 위해 탄 가마에 도쿄 유학생 서상일이 사제폭탄을 던졌지만 불발로 끝나는 일도 벌어졌다. 일본인과 결혼한 영친왕 이은(李垠)은 민족의 역적으로 몰렸다.
 “영친왕 이은은 무부무국(無父無國), 즉 아비도 없고 나라도 없는 금수(禽獸)이며 적자(賊子)다.…이조는 이제 영원한 정죄와 저주를 받을 것이다.”(독립신문 1920년 5월8일)
     
 ■영친왕에게 정혼녀가 있었다
 그런데 결혼 당일인 4월28일자 동아일보를 읽다보니 바로 밑에 흥미로운 기사 한 편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세자 전하와 혼의(婚議)가 있었던 상중(喪中)의 민규수(閔閨秀)’
 ‘기념의 금지환(금반지)은 도로 바치고 부친의 상중에 한없는 눈물만’ 
 이 무슨 기사인가. 오늘 일본황족 여인과 정략결혼을 하는 영친왕에게 혼인을 약속한 정혼녀가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민씨 성을 가진 규수는 왕가로부터 약혼반지까지 받았다가 되돌려주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동아일보 기자는 황태자의 약혼녀였지만, 일본 황족의 여인에게 남편을 빼앗긴 민 규수의 집 분위기를 자못 비감한 어조로 스케치했다.
 “창경원 뒤 담 아래 배꽃과 복사꽃이 난만히 피어 무정한 동풍에 하염없이 우수수 내려앉는 민씨의 댁에는 주인은 이미 작고하여 다른 세상 사람이 되었으니 문패는 여전히 3년 상중임을 말한다. 규수는 외로운 어머니를 위로하며 철모르는 어린 동생들을 거두어 가며 풀없는 삶을 시름없이 하여….”
 그렇다면 영친왕의 정혼녀였던 민 규수는 과연 누구인가. 정혼녀로 간택된 이후 61년 간이나 수절해야 했던 비운의 여인은 누구인가. 그 이야기를 풀어가보자.

영친왕의 생모인 엄귀비. 명성황후 이후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150대 1의 경쟁
 민 규수는 민영돈(1863~1918)의 딸인 민갑완(1897~1968)을 일컫는다.
 아버지 민영돈은 명성황후 민씨의 먼 조카뻘이었고 동래부사와 미국·영국·벨기에 공사를 거친 인물이었다.
 민갑완은 1906~1907년 사이 영친왕(1897~1970)의 신붓감으로 간택된다.
 민갑완의 회고록과 동아일보 등을 통해 민갑완이 간택되던 날의 이야기를 풀어보자.
 “사인교(4명이 드는 가마) 위에 올라 수표동에서 대한문까지 갔다. 150여 명의 처자들이 행렬을 지어가자 골목마다 구경꾼들이 즐비했다.”
 대궐 안에 들어간 150명의 어린 규수들은 태황제 부자(고종과 순종)와 엄귀비(영친왕 생모), 윤비(순종의 부인) 등의 선택을 기다렸다. 이들은 석 줄로 앉았지만 줄에도 차별이 있었다. 중신들의 자녀들은 맨 앞줄에, 품계가 낮은 벼슬아치의 자녀는 가운뎃줄에, 시골에서 올라온 처자들은 뒷줄에 앉았다.
 민영돈의 딸이라고 쓴 명패를 달았던 민갑완은 맨 앞줄 한 가운데 앉았다. 당시 아버지 민영돈은 승후관 직책을 갖고 있었다. 승후관은 종친이나 임금의 외척 중에서 임명될만큼 임금의 신임을 받던 자리였다. 그런만큼 민갑완 처자는 처음부터 영친왕의 배우자로 낙점될 가능성이 컸다.

 

이토 히로부미(왼쪽의 손에 이끌려 일본유학을 떠난 영친왕(오른쪽). 

 ■키 작은 신랑감
 영친왕의 생모인 엄귀비가 민갑완의 손목을 붙잡고 소파 앞으로 갔다. 그 곳에는 민갑완과 나이는 물론 생일까지 똑같은(음력 9월25일) 영친왕이 뛰어놀고 있었다. 엄귀비는 영친왕과 민갑완을 두 손으로 잡고 내전으로 데려갔다.
 ‘그 곳에서 그 분(영친왕)과 등을 대고 키를 재보았다. 내가 그 분보다 한치 정도나 더 커서 실망스러웠다. 남자분이 왜 여자보다 작을까.’
 어린 마음에도 남편감을 자로 쟀던 것이다. 그것도 잠시. 어린 민갑완은 고종을 비롯한 왕가의 구술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가문의 내력이며, 어른들의 생신날과 연세, 또는 제삿날까지 물었다. 어린 민갑완은 한치의 흐트러짐없이 대답했다고 한다. 그 결과 민갑완은 재간택 대상자 3명 가운데 수망(首望·1등)으로 꼽혔다.
 나랏법 때문에 3명을 뽑은 것이지만 1순위 후보자는 이변이 없는 한 재간택-삼간택을 거쳐 정식으로 가례를 올리게 됐다. 민갑완은 이 때부터 왕가의 일원이 되기 위한 신부 수업에 전념했다.
 하지만 당시 대한제국은 격동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1907년 6월 고종이 이상설·이위종·이준 등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했지만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한국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은 “대한문(덕수궁)을 포격할 수도 있다”며 고종을 겁박했다. 결국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하고(8월2일), 영친왕이 순종의 뒤를 이을 황태자로 책봉된다.

 

 ■궁에서 보내온 약혼반지
 이 때부터 영친왕과 민갑완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한다,
 영친왕의 신분이 일개 황자에서 황태자로 바뀌었고, 그 와중에서 재간택-삼간택의 과정도 무기연기됐다. 더욱이 이토 히로부미는 황태자가 된 영친왕의 일본유학을 추진하면서 아예 영친왕과 일본여인의 혼인까지 획책한다.
 “일국의 황태자가 어찌 나라 안에서만 세월을 보내는가. 일본제국으로 보내 문명을 배워야 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구라파에서처럼 일·한의 황실에서 혼인의 의를 맺어 친밀한 관계를 맺자”고까지 했다.
 그러나 대한제국 황실은 일본 여인과의 결혼만큼은 ‘절대 불가’의 방침을 세워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대한제국 황실은 음력 9월 20일(양력 10월 26일)을 재간택일로 정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밀려 재간택행사는 열리지 못했다. 
 그 사이 영친왕이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1907년 12월) 그러나 대한제국 황실은 민갑완 처자와의 혼인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12월 말 민갑완의 집에 순종의 보모인 문 상궁이 찾아왔다.
 “시국이 혼란스러워 예법을 지킬 수 없다. 그냥 택일해서 신물(약혼선물)을 전달하고자 한다. 그리 알고 받으라.”
 약혼예물로 보낸 것은 금지환(金指環), 즉 금반지였다. 먹글씨로 ‘약혼지환’, 즉 약혼반지라 써 있었다.
 어린 민갑완이었지만 그 약혼반지를 받고서는 이제 왕가의 사람이 다 된 것이라 여겼다.
 약혼반지를 받음으로써 재간택까지 마친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민 규수(閨秀), 즉 민갑완 소녀는 영친왕과의 혼인을 치르는 날만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영친왕과 마사코(이방자)의 결혼식을 알린 동아일보 1920년 4월28일 신문.

 ■노골적인 정략결혼 추진
 하지만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영친왕의 일본유학을 관철시킨 이토 히로부미가 양국 황족 간의 결혼을 강행시킨 것이다.
 그 때가 1909년 1월이었다. 대한매일신보 1월 8일자를 보라.
 “한국 황태자비 간택을 한국 황제 폐하께서 이토 통감에게 일임하셨으므로 일본의 모 고귀 영양(令孃)을 후보자로 택정한 뒤 태황제(고종)와 대황제(순종)의 윤허를 얻었는데….”
 이때 벌써 영친왕의 일본인 신부가 결정됐다? 이 기사가 단순 오보인지, 혹은 일본 측이 어떤 의도를 갖고 넌즈시 흘린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일제는 영친왕과 일본 황족 여성의 결혼을 매우 적극적으로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됨으로써 결혼 이야기는 수면 밑으로 들어갔다. 이렇듯 민갑완 소녀의 운명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없이 정치적인 이유로 온탕과 냉탕을 오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방자 여사의 가문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16년 8월3일 조선와 일본의 신문들이 일제히 깜짝 놀랄만한 기사를 내보낸다.
 “조선의 이 왕세자(영친왕)와 (일본의)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여왕이 약혼했다”는 기사였다. 영친왕의 새로운 약혼녀가 된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즉 이방자는 누구인가.
 당시 일본황실에는 천황의 가족 외에 ‘9궁가’라 해서 친왕이나 왕의 칭호와 신분을 가진 9개 황족 가문이 있었다. 나시모토미야는 그 중 하나였다. 특히 마사코의 외가 가문인 나베시마(과도·鍋島)는 임진왜란 때부터 조선과 관련이 있는 가문이었다.
 규슈 지방의 번(藩)인 나베시마 번의 초대번주였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따라 참전한 인물이었다. 마사코의 어머니는 바로 그런 나베시마 가문의 마지막 번주인 나베시마 나오마사(鍋島直正)의 딸인 나베시마 이즈코(鍋島伊都子)였던 것이다.
 조선과의 인연인 때문인지 마사코(방자)는 영친왕의 신부 후보 3인 가운데 으뜸으로 꼽혔다. 사실상 내정된 것이다. 두 사람의 약혼-결혼의 과정은 마치 생중계하듯 보도됐다. 양가의 혼수품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팔뚝시계는 스위스제 둥근 금시계로 옆에 무수한 금강석과 홍보석과 백보석을 박고…. 보옥 찬란한 예관에 머리는 순금 바탕에 금강보석과 진주를 무수히 박고….”(매일신보 1918년 11월 21일)

영친왕과 마사코. 마사코 즉 이방자여사는 일본 황족 가운데 조선과 유독 관련이 깊었던 가문의 후예였다.  

 

 ■흉몽을 꾼 서울의 정혼녀
 그 세월동안 서울의 민갑완은 이제나 저제나 약혼남 영친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갑완의 회고록을 보자.
 “여자의 운명이란 이런 것인가. 10여 년 전에 정해놓은 그 분을 위해 문밖도 마음대로 못나가고, 사람도 친척 외에는 피하면서 살자니 정말 고통스러운 생활이었다. 난 독수리가 수탉을 물고 동쪽 하늘로 휙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수탉은 피를 철철 흐리고, 나는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구르고…. 흉몽이었다.”
 운명의 1918년 1월30일 오후, 궁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창덕궁 제조상궁인 김상궁과 홍상궁이었다.
 “황공하지만 신물(약혼반지)를 환수하러 나왔습니다.”
 집안이 초상집으로 변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펄펄 뛰었지만 상궁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총독부의 지령이니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있소? 나는 못하겠소.”
 부모가 이렇게 버티기에 나서자 상궁들이 뻔질나게 민갑완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렇게 4일이 흐른 뒤 궁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전갈을 보냈다.
 “영친왕께서는 일본 황족 공주와 결혼하게 됐습니다. 대감댁도 어서 다른 가문을 택해 혼인준비를 하세요.”
 “파혼을 하면 했지. 그 무슨 말입니까.”

 

 ■‘열녀는 불경이부(不更二夫)라’
 옥신각신 하는 사이 1918년 2월13일이 됐다. 21살, 어엿한 처녀가 된 민갑완이 스스로 나섰다. 초주검이 된 부모님 대신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갑완 처녀는 상궁들을 불러 다짐했다.
 “정혼을 한지 10여 년 간 미우나 고우나 낭군으로 여겼는데…. 할 수 없지요. 신표(금반지)는 있으나 없으나 모든 것은 마음 한가운데 있는 것이니 반환하겠습니다. 대신….”
 민갑완은 한가지 조건을 걸었다. “아무런 이유없이 신물을 반환한다는 영수증을 쓰고 도장까지 찍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궁들이 무슨 권한이 있었겠는가. 민갑완이 끝끝내 버티자 상궁들은 대궐의 정감(문서를 전달하는 관리)을 시켜 도장을 받았다. 그런 다음 하얀 종이 위에 글을 썼다.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요, 열녀(烈女)는 불경이부(不庚二夫)이다.’
 민갑완은 “영수증과 함께 이 글씨를 양전마마(순종과 순종비)께 꼭 전해달라”고 상궁들에게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상궁 가운데 홍상궁이라는 여인이 온 집안이 울고 불고 하는 경황없는 틈을 타 힘들게 받은 영수중을 훔쳐가버리고 말았다. 다음 날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아버지(민영돈)이 대궐로 불려 들어가 ‘신의 여식을 금년(1918년) 내로 다른 가문에 시집 보내지 않으면 중죄를 받아도 좋다’는 서약서를 썼다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민갑완의 집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다가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영친왕-마사코의 결혼식날 민갑완의 눈물겨운 삶을 스케치한 동아일보 1920년 4월28일자 신문 

 ■풍비박산 난 민씨 가문
 일제는 영친왕과 마사코의 결혼날짜를 1919년 1월로 잡았다. 그 이유가 있었다.
 때마침 프랑스 파리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열리는 파리 강화회의에 신혼부부를 파견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유는 뻔했다. 강화회의에서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할 예정이었다. 일제로서는 영친왕-마사코(방자) 부부를 신혼여행차 강화회의에 파견함으로써 일본과 한국이 동화되었음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이 정략결혼 계획은 고종이 1월21일 붕어함으로써 실행되지 못했다.
 결국 영친왕과 마사코의 결혼식은 1년 3개월 뒤인 1920년 4월28일 거행됐다.
 민갑완이 초간택의 절차를 통과하고 약혼반지를 받은 것이 1907년이었으니까 13년 만에 완전히 남남이 된 것이다.
 4월28일 민갑완의 집을 찾아간 동아일보 기자는 외숙인 이기현으로부터 민갑완 일가의 근황을 전해듣는다.
 “아버지(민영돈)가 본래 청렴한 분이었기 때문에 생전엔 남겨둔 재산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작고한 후에는 살던 집까지 팔아버리고 작년에 내(이기현) 집으로 와서….”
 그러니까 민갑완 집안은 파혼 이후에 아버지까지 작고하는 바람에 풍비박산 났으며, 겨우 외숙의 집으로 옮겼다는 것이었다.

민갑완 일가의 사진. 60여 년 간 수절한 민갑완은 동생 집에서 평생 살았.

 ■상하이 망명을 떠나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아버지 생전에 “빨리 다른 가문 남자와 혼인하지 않으면 어떤 중죄라도 받겠다”는 서약서를 써주지 않았던가. 게다가 3만원에 일본 황족 아들과 결혼시키라느니, 일본 후작과 혼담을 넣겠다느니 하는 해괴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심지어는 누구인지 모를 남자가 연애 편지까지 보내기도 했다.
 민갑완은 결국 상하이 망명의 길을 택한다. 영친왕이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한 지 50여 일 만이었다.(1920년 6월7일) 외삼촌과 동생(민천식)이 동행했다. 딱 한 번 얼굴을 보고 키를 재봤던 남편 때문에 망명을 하게 된 것이다.
 상하이에서 우사 김규식 박사가 민갑완을 찾아와 독립운동을 권유했다.         
 “민 소저(아가씨), 소저의 원수는 저희가 갚아드리겠습니다. 소저는 용기를 내어 독립운동을 해봅시다. 제 아무리 일국의 천황이고 황태자라도 민족을 잊은 행동을 한 자는 죽어 마땅합니다.”
 민갑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10여 년 동안 국모(國母)의 자격으로 신부수업을 받았던 당대 조선의 전형적인 여인이었던 것이다. 
 “아닙니다. 누구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남을 해치면서까지 팔자에 없는 행운을 찾고 싶지 않습니다.”

 

 ■‘절대 원망하지 않는다.’
 민갑완의 이같은 태도는 1927년 5월 일어난 이른바 영친왕 납치미수사건에서도 드러난다.
 사실 영친왕과 이방자가 결혼한 것은 1920년이었지만 신혼여행을 떠난 것은 7년이 지난 1927년 5월 23일이었다. 당시 영친왕 부부는 일본 각지를 돌아 상하이를 거쳐 유럽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이 때 상하이 임시정부는 이 틈에 영친왕을 납치 감금하여 설득한 뒤 독립운동으로 이끈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납치계획은 친일 스파이의 밀고로 좌절됐고, 영친왕 부부는 상하이를 거치지 않고 지나쳤다. 이 계획에 민갑완의 외삼촌이 연루돼 있었다.
 민갑완에게 말도 하지 않고, 민갑완의 사진을 찍어서 임시정부에 전달한 것이었다. 아마도 영친왕을 납치, 설득할 때 민갑완의 사진을 내밀려고 했던 것 같다. 민갑완은 훗날 이 때를 회고하면서 “영친왕의 납치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무척 다행이었다”고 했다.
 “민족정신을 깨우기 위한 정부요인들의 노력과 외삼촌의 정성은 아까운 일이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내 핏속에도 역대 왕조의 아녀자처럼 질투와 시기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악평을 받지 않게 된 것이 무한히 기뻤다.”
 나라 잃은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의 한 방편을 역대 왕조 아녀자의 시기 질투라고 여긴 민갑완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하지만 어쨌든 조선 왕가의 간택을 받은 마지막 황태자의 정혼녀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좀 이해할 수도 있는 처신이 아닐까. 

민갑완은 영친왕을 결코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황태자 정혼녀의 마지막 자존심
 민갑완은 상하이 망명 시절 몇몇 남자의 유혹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가문을 생각했단다.
 ‘참아라. 너 하나로 가문을 더럽히고 만다면 그 누명은 자손만대까지 지속될 것이다. 청춘의 고뇌를 참아라.’
 젊고 여린 여성이 가문은 물론 대한제국 황실의 명예까지도 생각하느라 평생 수절의 길을 택한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됐지만 민갑완은 귀국할 생각이 없었다.
 그 땅을 디딘다면 슬프고 가슴 아팠던 과거가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동생의 간청과 김구·이시영 선생의 권유로 귀국을 단행한다.(1946년)
 하지만 귀국한 그녀를 돌볼 형편이 되는 일가 친척들은 없었다. 여관을 전전하고 친척집에서 동가숙서가식 했다.
 그러다 고종의 5번째 아들인 의친왕(이강·1877~1955)의 처소였던 의친왕궁(종로 관훈동 의친왕의 사저)에 머무르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민갑완과 남동생 민천식씨 가족은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다.
 남동생 집에서 근근히 생활하던 민갑완의 수절소식이 전해진 것은 1958년 6월이었다. 동아일보 이강현 특파원이 그녀를 찾아 미주알고주알 그동안의 삶을 잔뜩 취재해갔다. 6월29일 동아일보에 그 사연이 실렸다. 

상하이 시절의 민갑완 여사. 몇차례 청혼을 받기도 했지만 가문과 황실을 위해 평생 수절을 택했다.|민갑완의 '영친왕의 정혼녀' 지식공작소, 2014에서) 

 

 ■조선의 마지막 절개
 ‘500년 이조왕실 최후의 계승자 이은(영친왕) 세자와 약혼했던 규수’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사회면 중 3분의 2정도를 할애한 특종기사의 부제는 ‘살아있는 한국여성의 절개’였다. 기사는 ‘일제의 탄압으로 파혼 당했으며, 약혼예물을 빼앗겼고 50여 년 간 망명과 빈곤의 삶을 눈물로 감내하며 살았다’고 했다.
 이 보도 이후 민갑완을 돕겠다는 독지가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1년도 가지 못했다. 당시 어떤 교수가 나서 민갑완의 평생 숙원이던 교육사업을 함께 하겠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조차 1년 여 만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녀는 구황실 재산관리국의 호의로 해운대의 채석장을 임대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현장책임자들의 사기에 넘어가 거액의 빚을 졌다. 1963년 그의 삶을 그린 영화 <백년한>의 대본료 45만원을 제때 받지 못했다.
 양가의 규수로 태어나 평생 수절했던 한 여인이 감내하기엔 세상인심이 너무도 각박했던 것이다.
 고혈압과 기관지염, 심장병 등 갖가지 지병에도 생활고 때문에 약값도 제대로 대지 못했다는 아픈 사연도 전해진다. 만년에는 후두암까지 겹쳐 고생하다가 1968년 만 70살의 나이로 한많은 세상을 떠난다.

 

 ■그래도 기다렸던 약혼남
 그보다 5년 전인 1963년 12월 한때의 약혼자였던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가 귀국했다.
 영친왕은 고혈압과 뇌일혈로 혼수상태에 빠진 채 돌아온 것이다. 민갑완은 “그 분이나 나나 이조말엽의 인간제물이 아니었냐”고 반문하면서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산의 허름한 집을 수리했단다. 60여 년 기다림의 실마리가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또 죽는 그 날까지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하늘을 두고 맹세해도 난 두렵지 않을 정도로 그 분(영친왕)을 저주하거나 미워한 적이 없었다. 운명은 어디까지나 국운과 정략이 깃들어있기 때문에….”
 민갑완 규수는 이방자 여사의 처지도 이해했단다.
 “방자 여사도 불행했으리라 생각한다.… 원수처럼 첩첩이 쌓인 양국 간 감정의 틈바구니 속에 끼여 있는 심정 얼마나 괴로울까 생각하면 인간적인 면에서 동정도 간다.”

만년을 불우하게 보낸 민갑완 여사. 병마와 싸우면서도 빈한한 형편을 면치 못했다.   

 ■또한 사람의 슬픈 운명, 이방자
 이방자 여사 역시 민갑완 규수의 처지를 이해했다. 그 역시 정략결혼의 희생양이었으니까….
 “(조)선·일(본) 융화의 대역이라니…. 불안과 두려움 속에…아무도 모르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죽어버렸으면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초상집 같은 슬픔과 우울에 쌓여있을 집안을 생각하면….”(이방자의 <나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
 이방자 여사는 생전에 민갑완 규수를 꼭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회고했다.
 “나는 민규수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그 분의 슬픈 운명이 마치 내 죄인 듯하고 언젠가 기회가 오면 꼭 민규수를 만나 손을 잡고 위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경향신문 1984년 5월1일)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의 정혼녀 민갑완 규수가 생전에 이런 유언들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처녀인만큼 절대 남의 집에서 죽게 하지 말고 수의는 옛날 선비처럼 남복을 입혀주세요.” “운명은 고독해도 나는 싫네. 남북을 입혀 화장하고….”
 마지막까지 가문과 황실을 지키고자 했던 여인의 유언이었다. 그의 유해는 부산 실로암공원 납골묘에서 안치돼 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민갑완, <영친왕의 마지막 정혼녀>, 지식공작소, 2014
 송우혜, <이은의 정략결혼 연구-언론보도를 중심으로>, 이화여대 석사논문, 2006
 강용자,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 김정희 엮음, 지식공작소, 2013
 김을한,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페이퍼로드,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