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적의 역사

조선에 전깃불이 처음 켜진 날

 전기를 처음 발견한 이는 기원전 600년 쯤 고대 그리스 시대 철학자인 탈레스였다고 한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호박을 장식품으로 애용하고 있았다. 호박은 나무에서 흘러나온 액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보석인데 문지를수록 아름다운 광택을 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닦으면 닦을수록 작은 종잇자국이나 나뭇잎 부스러기 들이 호박에 달라붙는다는 것이었다. 탈레스는 “마치 자석이 쇳가루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마찰한 호박은 가벼운 먼지와 깃털을 끌어당기는 성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이상한 돌(호박)은 그리스어로 eleckton이라 하는데 오늘 날 전기를 electricity하는 것은 바로 이 호박의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하지만 탈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사람들은 왜 이와같은 정전기가 발생하는지 알지 못했다.

 

1887년 경복궁 건청궁 내에서 열린 점등식을 그린 그림. 이 도깨비불을 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한다.|한전 전기박물관 제공

 ■1%의 영감과 99%의 노력
 그로부터 약 2500년이 흐른 1879년 10월 미국의 토마스 에디슨이 인류 역사상 위대한 발명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바로 백열전구였다. 사실 전구를 처음 발명한 이는 에디슨이 아니라 험프리 데이비였다고 한다. 그는 1802년 아크 방전을 이용해 만든 램프를 만들었지만 촛불 4000개에 해당되는 엄청난 밝기 때문에 가정용으로 쓰이지 못했다.
 이후 수많은 이들이 전구의 대중화 작업에 힘을 쏟아왔는데, 결국 에디슨이 최종승자가 됐다. 그는 탄소 필라멘트를 사용, 시간도 길고 밝기도 적당한 백열전구를 만든다. 당시 가정용 전구를 만들려던 과학자들은 전류를 통과시켜 빛을 발생시키는 필라멘트의 소재를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에디슨도 최적의 필라멘트를 찾아내려 실험을 거듭했다. 아마존에서 일본의 숲까지, 백금에서 사람의 머리카락과 수염에 이르기까지 찾아낸 6000가지의 재료를 검토한 끝에 1200번의 실패를 맛봤다고 한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뤄진다”는 에디슨의 명언은 이렇게 탄생했다.
 “난 1200번 실패한 게 아니다. 1200가지 안되는 방법을 발견한 것 뿐이다.”
 에디슨은 100종이 넘는 발명품을 선보였지만 전기를 대중화와 실용화한 것이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으로 꼽힌다.

 

 ■도깨비불보다 더 환한 불이…
 그 후 1887년 1~3월 사이 어느 날 밤이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인 조선에서 사상 처음으로 전깃불이 켜졌다. 그것도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안쪽 가장 깊숙한 건청궁이 환한 빛을 밝힌 것이다. 건청궁 뜨락은 당시 칠흑의 어둠을 밝힐 초유의 구경거리를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그럴만도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경복궁의 주요 전각에서는 주로 오지등(五枝燈) 또는 칠지등(七枝燈)과 같은 촛대에 밀초를 사용했다. 그 밖의 부속건물에서는 쇠기름으로 만든 초를 썼다. 그러나 밝기도 약했고 그을음과 냄새가 심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건청궁 앞 향원지(연못) 앞에 이상한 쇳덩이가 설치되고 파란 눈의 서양인이 쇳덩이를 조작하자 벼락치는 듯한 소리가 난 뒤에 궁궐 처마 밑에 도깨비불보다 더 환한 불이 켜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 모습을 숨어서 지켜봤다는 안상궁의 회고담(1936년)을 풀어보자.
 “서양인의 손으로 기계가 움직였는데 연못의 물을 빨아올려 물이 끓는 소리와 우뢰소리 같은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얼마 뒤 궁전 내의 가지 모양의 유리에 휘황찬란한 불빛이 대낮같이 점화됐다.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 표현대로라면 그야말로 ‘듣보’(듣지도 보지도 못한 물건)였던 것이다. 안상궁의 회고가 계속된다.
 “그 때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어서 그저 불가사의한 것이라 여기곤 공포감마저 들었다. 바깥 궁에서도 온갖 구실을 붙여 이 신기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사상 처음으로 조선에 전기불이 밝혀진 날의 광경이다. 지금부터 불과 128년 전의 일이다. 상상이나 하겠는가.

조선에서 에디슨의 전등 및 전화독점권 신청을 제의한 전문.|전기박물관 제공

 ■고종은 동양의 얼리어댑터
 그런데 그 때가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해로부터 불과 7년 5개월 만의 일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날의 궁궐내 점등은 베이징의 자금성은 물론, 일본의 궁성보다 약 2년 앞지른 선구적인 사업이었다는 점이다.
 에디슨램프사의 총지배인이었던 프란시스 업튼이 1887년 4월18일자로 사장인 에디슨에게 보낸 업무연락서를 보자. 업튼은 “경복궁 전등시설에 총 1만 5500달러가 들었다”면서 이 설비가 동양최초의 설비임을 강조하고 있다.
 “경복궁의 전등시설은 동양에서 에디슨 제품의 판촉을 위해 모델 플렌트로 시공됐으며, 앞으로 일본 궁성에 설비될 시설과 함께 동양에서는 유일한 일류시설이다.”
 이 자료는 미국 국립 에디슨유적지 기념관에 보관된 것이다.  
 그러고보면 고종은 전기에 관한한 동양최초의 얼리어댑터였던 셈이다. 게다가 전등을 발명한 에디슨은 조선을 동양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업튼이 전등설비 비용을 1만5500달러라 했지만 조선 조정이 지불한 총투자액은 2만4525달러에 이르렀다. 전등사업 업무를 대행한 타운젠트 회사의 중간이익과 수송비를 뺀 액수가 1만5500달러였던 것이다. 이 비용은 사실 조정에 엄청난 부담이 됐다. 전 교리 임원상이 왕실의 낭비를 질타하며 올린 상소문을 보라.
 “사치와 사치스런 기풍이 일단 제거되면, 경비를 애써 절약하지 않아도 자연히 절약될 것이니 토목공사와 전등설치비용, 기도에 드는 비용을 깨끗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외국에서 사온 물건을 보배롭게 여기지 말고 오직 어진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십시요. 그러면 다른 나라에서 조선이 그런 물건을 썩은 흙처럼 여긴다는 것을 알고는 응당 스스로 물러가서 우리를 본받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고종실록> 1889년 음력 10월7일)

 

 ■고종이 밤새 불을 밝히고 싶은 사연
 그렇다면 고종이 이런 엄청난 거금을 들여 ‘동양 최초로’ 전등을 도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황현의 <매천야록> 1888년조를 보라.
 “임금은 임오군란 및 갑신정변 이래 가까이서 몰래 병란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 하여 미리 피란할 계책을 세우고 있었다. 가마꾼 20명을 배불리 먹여 궁성 북문에 대기시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하게 했다. 또 밤을 이용해 소요가 많이 발생하므로 궁궐 내에 전등을 많이 켜서 새벽까지 훤하게 밝히도록 명했다.”
 그러면서 황현은 “전등 한 개를 하룻밤 밝히는데 천민(千緡)의 비용이 든다”고 꼬집었다. ‘민’은 돈꿰미를 뜻하므로 천민은 곧 엽전 천 꿰미를 가리킨다. 황현의 표현은 과장이었지만 고종의 전등설비를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당대의 평판을 반영하고 있다.
 그랬다. 고종은 야밤에 일어나는 변란이 두려워 전전긍긍했으며, 그 때문에 훤하게 불을 밝히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어떻게 발명왕 에디슨과 연결되었을까. 그것도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한 지 불과 7년5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말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1887년보다 3년 먼저 경복궁에 불이 켜질 뻔했다는 사실이다.

에디슨 회사의 총지배인인 프란시스 업튼이 에디슨에게 보낸 조선 전기에 관한 보고서 내용. 경복궁의 전등시설은 동양에서 에디슨 제품의 판촉을 위한 모델 프렌트로 제공되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전기박물관 제공

 ■보빙사가 보았던 뉴욕의 밤거리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미국과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한 것은 1882년 5월22일이었다. 서구열강 가운데 최초의 국교수립이었다.
 그런데 1883년 초대 공사로 조선에 파견된 루시우스 푸트(조선명 복덕·福德)가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만약 조선정부가 수교에 대한 보답으로 사절단(報聘使)를 미국에 파견한다면 미국정부가 크게 환영할 것이라 한 것이다. 이에따라 조선은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홍영식을 부대신으로, 서광범을 종사관으로 임명하는 등 사절단을 구성한다. 유길준·최경석·변수·고영철·현흥택 등이 수행원으로 결정됐다.
 보빙사 일행(11명)은 1883년 9월8일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한 뒤 워싱턴(9월15일)을 거쳐 뉴욕(18일)에서 미국의 체스터 아서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달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전등을 발명한 에디슨이 뉴욕의 펄 가에서 에디슨 전등회사를 설립한 상태였다. 에디슨은 이 펄 가에 8만피트의 지중배전선을 설치하고 인근 주택에 역사상 처음으로 전등을 점화했다. 그 때가 1882년 9월4일이었다. 조선의 사절단인 보빙사가 미국에 도착하기 불과 1년 전의 일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전등은 뉴욕의 중심지역에만 보급됐고 그 밖의 지역은 소규모 자가발전 설비로 전등을 점화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보빙사 일행은 바로 이 전등설비를 보게 된 것이다.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한 지 불과 4년만에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발명품, 그것도 대중화·실용화한 신문물을 목격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악마의 불이 아니라 인간의 불이었다’
 보빙사 일행이 보스턴에 체류하는 동안 머물렀던 벤담호텔에서는 이미 백열전등을 사용하고 있었다.
 뉴욕에서는 해군함정인 트렌트호를 타고 발전소도 시찰했다.(1883년 9월24일) 또 같은 날에는 에퀴타블 빌딩을 방문, 발전기에서 발전되어 전등에 전기불이 켜지는 모습을 보았다. 보빙사의 일원이었던 유길준은 깜짝 놀랐다.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악마의 힘으로 불이 켜진다고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그 사용방법을 알게 됐다. 뿐만 아니라 안전하게 조작되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유길준은 그러면서 “이 전기를 조선에 들여오고 싶다”는 열망을 피력한다.
 “조선에도 전기를 사용하고 싶다. 미국은 전기가 가스나 석유등보다 값싸고 훨씬 편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더 이상 실험해볼 필요도 없다고 본다.”

 

 ■고종이 전등을 설치한 까닭은 ‘밤이 무서워서’ 였다
 이같은 열망에 불을 지핀 것은 동양무역에 종사하던 에버트 프레이저였다.
 프레이저는 보빙사 일행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민영익 전권대신은 그를 아예 뉴욕주재 조선명예총영사로 임명했다. 명예총영사가 된 프레이저가 첫번째로 한 일이 바로 전등설비 도입건이었다.
 그는 1884년 4월16일 조선주재 미국공사인 푸트에게 ‘에디슨의 전등 및 전화의 독점권 신청제의’를 알리고 조선정부와의 교섭을 요청했다. 그 결과 경복궁에 가설될 전등설비가 에디슨에게 발주됐다.(1884년 9월4일)
 하지만 이 계획은 갑신정변 발발(12월4일)로 차질을 빚는다. 조선정부는 “정변 때문에 (전등설비를) 조속히 조치하기 어려우니 차차 논의하자”는 전문을 프레이저에게 보낸 것이다.
 그 후 민심이 점차 안정됐다는 판단을 한 조선정부는 1885년부터 전등설치사업을 재개했다.
 급기야 1886년 12월 전등설비와 운영을 맡을 이른바 전등교사로 윌리엄 매케이(조선명 맥계·麥溪)를 파견하면서 경복궁 설비는 급진전을 이룬다.
 이렇듯 전등의 설비는 때마침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보빙사의 전언에 귀가 솔깃했던 고종이 도입을 적극 추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임오군란(1882년)에 이어 갑신정변까지 일어나자 고종은 전등설비 도입사업에 박차를 가했음을 알 수 있다. 황현의 말처럼 고종은 밤이 무서워 불을 환하게 밝히고 싶었던 것일까.

최근 발굴된 경복궁내 전기발상지인 전기등소터. 128년만에 정확한 위치가 알려졌다. 당시 발전규모는 16촉광의 백열등 750개를 점등할 수 있는 설비였다고 한다.|문화재

 ■건달불, 증어망국…
 이런 우여곡절 끝에 경복궁에 불이 켜졌지만 여론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 때 설치된 발전기가 증기동력이었기 때문에 증기기관의 냉각용수가 열탕이 되었다. 때문에 경복궁 향원정의 연못에 뜨거운 증기수가 역류됐다. 연못의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했다. ‘증어망국(烝魚亡國)’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던 것이다. 전등을 두고 별의별 별명이 붙었다. 물을 이용해서 불을 켠다고 해서 ‘물불’이라 했고, 전기불이 묘하다고 해서 묘화(妙火), 괴상하다 해서 괴화(怪火)라 했다. 심지어는 전깃불등이 건들거리면서 자주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한다 해서 '건달불(乾達火)'이라고까지 했다.
 설상가상으로 전기의 운영과 설비·관리를 책임지는 미국인 매케이의 어이없는 죽음이 파국을 불렀다.
 매케이는 날마다 저녁 때면 기계를 운전해서 불을 켰는데, 항상 6연발 권총을 휴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1887년 3월8일 매케이의 호위를 맡던 조선인 기수 백모가 매케이의 권총을 잘못 만지다가 오발사고를 낸 것이다.  

토머스 에디슨이 1879년 최초로 발명한 백열전구. 뉴저지의 에디슨박물관에 전시돼있다.

 ■외국인 전기기사의 오발사고 사망사건
 총탄은 운없게도 매케이를 관통했다. 중상을 입은 매케이는 끝내 사망하고 만다. 매케이는 스코틀랜드 출신 미국인으로 당시 23살에 불과했다. 그는 조선에 아내와 어린 자녀까지 데리고 와서 살고 있었다.
 매케이는 숨을 거두기 직전, “조선인 기수는 고의적으로 쏜 것이 아니니 처벌 받아서는 안된다”는 유언을 남겼다.
 조선인 기수 백모는 심한 태형을 맞고 사형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매케이의 유언과 매케이 부인의 사면 노력, 여기에 미국공사관까지 적극적으로 나섰다. 오발사고를 낸 조선인 백모는 결국 사면되었다.
 고종은 매케이 부부의 사연을 듣고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장례비용과 함께 500달러의 위로금을 매케이 부인이게 하사했다. 그러면서 “만약 매케이 가족이 조선에 남기를 원한다면 주택은 물론 자녀의 교육비까지 제공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자 경복궁 전등소의 운영은 중단되고 말았다.
 동양 최초의 전등은 이렇게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경복궁에 다시 불이 켜진 것은 매케이가 사망한 지 6개월 뒤인 9월1일이었다. 조선 정부가 새로운 전등교사로 영국인 퍼비가와 포사이스를 초청함으로써 재개됐다.
 그러고보면 이 파란만장한 전등의 역사는 매우 상징적이지 않은가. 꺼져가는 왕국의 불을 되살리려던 고종은 에디슨의 전설적인 발명품인 전등까지 도입했다. 그래서 궁궐의 불은 훤히 밝혔다. 하지만 헛된 꿈이 아니었던가. 끝내 조선 왕국의 불은 꺼지고 말았으니 말이다. 동양 최초로 전깃불을 밝힌지 불과 23년 만인 1910년에….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