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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인공지능과 바둑을 둬서는 절대 안되는 이유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뜨거웠던 5번기가 끝난 지금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대체 인간은 왜 바둑을 두는 것일까. 정답은 바둑의 역사에 오롯이 담겨있다. 우선 바둑을 두고, 바둑을 보는 첫번째 이유는 ‘들고 있던 도끼자루(柯)가 썩어도(爛) 모를 정도로’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둑을 다른 말로 난가(爛柯)라 하는 것이다.
더 근원적인 해답이 있다. 4300년 전 요 임금이 바둑을 만든 이유는 딱 한가지였다. ‘부덕하고 싸움만 좋아하는 맏아들 단주(丹朱)를 가르치기 위해서’(<박물지> 등)였다.

하지만 불초한 단주는 끝내 바둑의 진리를 깨우치지 못했다. 요임금은 결국 단주 대신 덕으로 가득찬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요임금은 ‘한사람(단주)만을 위한 천하가 되서는 안된다. 만백성을 위한 군주(순임금)가 필요하다’고 했다.(<사기> ‘오제본기’)

임금이 그처럼 아들에게 가르치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첫번째가 소통이었을 것이다. 흔히 바둑을 ‘수담(手談)’이라 한다.

바둑은 남성과 여성, 할아버지와 손주, 부자와 가난한 자가 동등한 처지에서 소통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매개체다. 게다가 요지경 같은 인간 만사가 저 바둑판에 투영되어 있다. 바둑의 ‘경우의 수’가 10의 170제곱 가지라지만 우리네 인간사의 ‘경우의 수’ 역시 만만치 않으니 말이다. 
감히 바둑의 맛을 하나 더 보태자면 바로 낭만이‘었’다. 얼마전까지 자기만의 개성으로 무장한 낭만파들이 바둑계를 지배했다.

중앙에 원대한 세력을 펼친 다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의 ‘우주류’는 어떤가. 우주류는 필자 같은 생판 아마추어라도 폼잡는답시고 흉내내곤 했던 가슴벅찬 전략이었다.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지하철), 가토 마사오(加藤正夫·대마킬러),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면도날), 린하이펑(林海峰·이중허리) 등…. 바둑의 아름다움을 중시한 오다케 히데오(大竹英雄)의 별명은 ‘미학자’였다.

조남철 선생은 “바둑은 모냥(모양)”이라고 했다. ‘폭파전문가’ 조치훈, ‘제비’ 조훈현, ‘된장바둑’ 서봉수, ‘일지매’ 유창혁, ‘손오공’ 서능욱…. 1990년대 ‘돌부처, 삼중허리, 신산(神算)’의 다양한 수식어를 달았던 이창호의 시대까지 숱한 개성파, 낭만파가 등장해서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필자가 “낭만이‘었’다”는 과거형을 쓴 이유가 있다. 최근 프로바둑에서 사치로 전락한 게 낭만이란 두 글자다. 요즘 정상급 기사들에게는 ‘완벽한 바둑이다!’라는 감탄사가 터질만큼 단점을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게 다다. 팬들의 심금을 울리는 ‘스토리’는 별로 나오지 않는다. 개개인의 기풍이 사라졌으며, 철저한 계산으로 이기는 작전을 펴기 일쑤다.

승패를 위한 바둑이지, 재미와 멋, 낭만, 인생의 바둑이 사라져버린 시대인 것이다. 하기야 ‘이기는 자가 강한 자’가 되버린 지금의 바둑에서 혼자만 재미와 멋을 찾고, 낭만을 찾고, 인생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웃음거리로 전락할 뿐이겠지. 그렇더라도 이 대목에서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장면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솔직히 아무런 감정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상대와 싸우느라 머리를 쥐어짜던 이9단의 모습에 당혹감을 느꼈다. 알파고의 신수를 보고, ‘헛수’라고 비웃다가 큰코를 다친 입신(入神)의 사범들은 또 어떤가. 무려 몇십수 앞을 내다보면서 곧잘 ‘반집 차이’까지 판별했던 사람들….

래서 팬들의 경외심을 한몸에 받았던 이들이 홀연히 나타난 ‘알사범’에게 쩔쩔매던 모습도 안쓰러웠다.

무엇보다 사람 특유의 감과 맛, 두터움까지 일일이 집으로 계산하는 ‘알부처’를 앞으로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물론 단 5판의 대국결과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최소한 100판은 둬야 제대로 승패를 가릴 수 있으니 인간 대 기계의 싸움은 이제부터라는 것이다. 기계 대 기계, 심지어는 기계와 인간이 팀을 이뤄 겨루는 혼합매치 같은 다양한 이벤트가 열릴 지도 모르겠다.

냉혹하고 완벽한 기계에 도전하는 인간…. 그 또한 초미의 관심을 끌 수도 있다. 어차피 거스를 수 없는 인공지능의 시대가 아닌가. 그 조류에 보조를 맞춘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겠다. 한·중·일 위주의 바둑이 알파고 대국을 계기로 세계화를 모색할 수도 있다. 다 일리있는 말이다.

그러나 필자의 눈엔 기계와 맞서 도전한다는 인간의 모습이 아무래도 어색하기만 하다. 바둑이란 본디 사람 간의 소통, 즉 수담(手談)이라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 시점에서 바둑의 본질을 묻는 이유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바둑의 가치만큼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너무 시대착오적인 바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