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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신안 보물선 800만개 동전의 비밀

지금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전시회를 열고 있습니다. 바로 '신안 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을 주제로 한 특별전입니다. 신안 해저선이란 어떤 배일까요. 1975년 한 어부가 전남 신안군 증도 앞바다에서 중국제 청자와 백자 6점을 인양했습니다. 그물에 우연히 걸린 거지요. 바로 신안 해저선, 혹은 신안 보물선, 혹은 그냥 신안선이라 일컬어지는 14세기 중국의 무역선에서 인양된 것이었습니다. 1984년까지 9차례 수중발굴결과는 경이적이었습니다. 도자기 2만여점과 자단목 1000여본, 그밖에 진귀한 생활용품들이 줄줄이 인양되었습니다. 이 배는 1323년 엄청난 상품을 싣고 중국 닝보를 떠나 일본 하카다항으로 가는 국제무역선이었습니다. 특히 이 배의 밑바닥에는 무려 800만개에 달하는 동전들을 싣고 있었습니다. 무게로 따지니까 28톤에 이르렀습니다. 가히 신안보물선이라 해도 되겠지요. 그렇다면 궁금증이 생깁니다. 이 어마어마한 800만개의 동전이 왜 배에 실렸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95회는 바로 '신안선 동전 800만개의 비밀'을 조명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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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목포에서 서북쪽으로 40㎞ 거리에 증도라는 섬이 있다.
증도 서쪽에서 북으로 임자도와 지도 사이에 물골이 있는데, 그 골을 따라 바닷물이 하루 4번 오르내린다. 이곳에서 북으로 영광 낙월도까지는 지호지간이다.

바닷물은 증도에서 임자도와 지도 사이에 있는 수도(水島)를 따라 오르내린다. 그래서 임자도에서 증도 서편으로 흐르는 갯골을 수도수도(水島 水道), 즉 수도를 가운데 두고 바닷물이 흐르는 물길이라는 소리다. 이 물길은 영광-고창으로 이어지는 뱃길로 예전부터 매우 중요한 조운로이자 조기의 이동로였다.

그런데 이 증 서편 방축리 앞바다엔 오래 전부터 심상치않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신안선에서 쏟아져나온 동전들. 28톤 800만개의 동전이 나왔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전설의 보물선
“언젠가 이곳에 큰 배가 가라앉았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른바 구전이었다. 그러던 1975년 8월 20일이었다. 어부 최평호씨(당시 35살)가 ‘언젠가 큰 배가 가라앉았다’던 그 지점에서 그물을 걷어올렸다.
“아니 이게 뭐야.”

그릇이 6점 걸려나온 것이다. 청자화병(꽃병)을 비롯한 중국제 청자와 백자였다. 그러나 최평호씨는 그 그릇의 가치를 몰라보고 그냥 집 마루 밑에 보관해두었다. 값어치를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아까웠으므로….

해가 바뀐 1976년 1월 초등학교 교사였던 최씨의 동생이 형 집을 찾아와 마루밑 그릇의 존재를 듣게 됐다.
“이 물건은 심상치 않은 것 같아요. 신고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대번에 심상치않은 물건임을 알아차린 동생은 신안군청에 중국제 청백자의 인양사실을 알렸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신안선의 존재가 비로소 알려진 것이다.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의 전신)은 이 중국제 청·백자가 중국 송~원나라 시대의 것임을 확인했다. 그렇게 인양사실이 알려지자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며칠후 어부 그물에 중국청자가 무더기로 인양됐다는 이야기가 삽시간에 퍼졌다. 그 해 9월엔 도굴꾼인 이모씨가 잠수부를 고용해서 청자화병 등 122점을 인양해서 몰래 팔아넘기다 검거됐다. 조모씨 역시 이곳에서 도굴한 문화재를 밀매하다가 구속됐다.

동전은 배 밑바닥에 자단목과 함께 꾸러미째 쌓여있었다.

당시는 기본측량장비나 GPS같은 첨단장비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도굴꾼들은 잠수부를 태운 배를 몰고 단숨에 신안선이 난파된 지점을 목측으로 찾아냈다. 불법인양한 도자기의 양이 엄청났으니 그야말로 신출귀몰의 눈썰미를 자랑한 것이다.

■신품 도자기가 2만여점 세트로 
이렇게 3차례에 걸쳐 엄청난 규모의 유물이 확인되자 문화재관리국은 조바심을 냈다.

상상 이상의 유물들이 해저에 있는 것은 확실한데, 수중발굴경험이 있는 전문가가 단 한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냥 둘 수 없었다. 결국 유물인양작업은 해군의 전문잠수사에게 맡겼다.

1976년 10월 말 늦가을의 차디찬 바닷물을 헤치고 1차긴급발굴을 마쳤는데, 청자 52점을 포함해서 112점의 도자기를 건져올렸다.

본격발굴작업 끝에 해저 20m에 가라앉은 난파선은 길이 34m, 폭 11m로 측정됐다. 1977년부터 2척의 해군함정(장병 240명)과 해난구조대 요원(심해잠수사 60여 명)이 발굴을 담당했다. 1984년까지 9년 동안 11차례의 인양 결과는 경이로웠다.

유물은 총 2만3502점에 달했고, 동전 800만개(28톤), 자단목(아열대산 최고급 가구 목재) 1017개, 선체조각 445개가 나왔다. 260톤의 선적량을 갖고 있던 배는 모두 140톤의 물품을 적재했다.

그 많은 화물 중에 가장 큰 부피와 양을 차지한 것은 도자기와 동전, 자단목 원목이었다. 난파선에서 인양된 도자기는 무려 2만661점이었다. 청자가 1만2359점, 청백자·백자는 5303점에 달했다.

인양된 도자기의 모습은 흥미로웠다.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완형의 신품들이었다. 같은 종류의 그릇을 10개나 20개씩 포개 끈으로 묶은 다음 나무상자에 넣어 포장한 것이었다. 이 무슨 뜻인가. 이 배가 상품을 싣고 가던 대형 무역선이라는 얘기다. 

동전과 함께 배 밑바닥에서 쌓여있던 자단목. 1000여 본이 있었다. 아마도 일본의 대형 사찰을 조성하는데 필요한 자재였을 것이다.


■무역선의 국적은? 
그렇다면 이 배는 대체 언제 어디서 출항했으며, 어디로 가는 무역선이었을까.
수수께끼는 인양된 목간의 글씨에서 풀렸다. 당시 선적한 물품에는 상품의 종류와 수량, 선적일자, 수령인의 이름과 주소를 적은 나무 패(목간)가 364점 달려 있었다.

나무패는 결국 오늘날의 택배 송장 같은 것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신안선이 사찰의 건축이나 복구비용을 조달하려고 일본이 파견한 무역선이 아닐까 추정한다.

즉 도후쿠사가 사원의 재건자금을 마련하려고 가마쿠라 막부(鎌倉·1192~1333)의 허가를 받아 원에 파견된 무역선이라는 것이다. 신안선에서 확인된 목간 364점 가운데 ‘도후쿠사(東福寺)’라고 적힌 것이 무려 41점이나 되는 것을 근거로 삼는다. 도후쿠사 뿐 아니라 ‘조자쿠암(釣寂巖)’, ‘하코자키궁(거崎宮)’은 일본의 대형사찰들의 이름이 보인다.

경원로라는 글자를 새긴 청동추. 물건을 선적한 곳이 중국 경원 즉 지금의 저장성 닝보였음을 알려주는 단서다.

그러나 그럴까. 물론 송·원시대에 일본에서 사찰이나 신사를 건축하는데 드는 비용을 조달하려고 선박을 중국에 보냈다는 기록은 있다. 그런데 물건을 실어나른 기록인 목간 가운데는 지치 3년, 즉 1323년의 나무패가 특히 눈에 띈다.

그러나 정작 1323년 무렵 일본이 중국에 무역선을 파견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목간의 명문을 보면 한결같이 ‘지치(至治)’라는 중국연호를 사용했다.

지치는 1321~1323년까지 중국과 고려에서 사용한 원나라의 연호이다. 당시 가마쿠라(鎌倉) 시대(1185~1333)였던 일본은 ‘원형(元亨)’이란 연호를 독자 사용하고 있었다. 일본배라면 일본연호를 썼을 것 아닌가. 따라서 일본배가 아니라 중국 선박이거나, 원과 고려의 상인들이 고려와 일본선원을 고용해서 공동으로 운영한 국제무역선이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유력하다.

목간을 읽어 복원하면 난파선은 1323년(고려 충숙왕 10년) 4월22~24일과 5월11일, 6월1~3일 세 차례에 걸쳐 하물을 선적한 뒤 경원(지금의 저장성 닝보·浙江省 寧波)을 떠나 고려를 거쳐 일본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경원로(慶元路)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추가 인양된 것이 바로 그 출발점의 단서이다.

도착지는 하카다(博多·후쿠오카)였을 것이다. 목간 중에는 ‘하코자키궁(거崎宮)’ ‘조자쿠암(釣寂巖)’ 등 하카다(후쿠오카)에 있는 신사와 사찰 이름이 보이는데, 14세기 일본의 주요출항지가 바로 이 항구였다.  

지치 3년, 즉 1323년에 선적했음을 알려주는 물건 꼬리표.

■그 무서운 침몰의 순간
배에서 인양한 생활용품들로 당시의 선상생활을 가늠할 수 있다.
즉 선박 안에는 선원, 상인, 승려 및 사찰 관계자, 화주 등이 삼삼오오 모여 국수, 튀김, 야채, 고기요리를 해먹었다.

후추와 생강, 정향을 사용해서 청동제 솥과 냄비, 깔때기, 도마에서 요리했으며, 식사는 낡은 백자사발과 접시를 사용했다. 간식으로는 여지, 복숭아, 은행, 잣, 밤을 먹었다. 배 안의 승려들은 무사항해를 기원하며 불상과 각종 공양구를 동원해서 예불을 올렸다. 탑승자들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고 바둑과 장기, 주사위 놀이도 했다. 그렇다면 이 배는 왜 침몰의 순간을 맞이했을까.

나무패에 기록된 마지막 선적일자, 즉 6월3일이라는 날짜가 마음에 걸린다. 물론 ‘음력’임을 감안해야 한다. 원래 고려·조선시대 조운의 원칙은 4월쯤 배를 띄우고 5월 안에 한강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태풍이 불기 시작하는 음력 6월부터는 항해에 각별히 조심해야 하며 7월~8월 사이엔 특별한 경우가 아닌한 배를 띄울 수 없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 줄은 모르지만 배는 음력 칠월 보름 이전에 일본 후쿠오카 하카다(博多) 항에 도착하려 했다. 배는 6월3일 중국 닝보에서 마지막 선적을 마치고 고려의 연안을 따라 신안 앞바다를 통과할 때 태풍을 만난 것은 아닐까.

해저 속의 난파선 모양을 통해 침몰 당시의 상황을 복원할 수 있다. 즉 먼저 배의 우현 뱃머리 근처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깨어진 틈으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중에도 배는 쏜살같이 미끄러지듯 물위를 내달았다. 신안선은 배 밑바닥이 칼날처럼 생긴 첨저선이다. 첨저선은 높이 3m의 파도에도 끄덕없다.

바람이나 파도에 밀려도 배의 방향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거센 바람에도 선체의 상하 및 좌우 흔들림이 심하지 않다. 속도 역시 조파저항(배가 파도를 일으키며 달림으로써 생기는 저항)이 적어서 저항성능이 매우 우수하다. 그러니까 먼 바다를 항해하는데 적합한 이 200톤 급의 배가 표류해서 결국 난파됐다면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것일까. 이미 돛을 내렸거나 파손되어 제 기능을 잃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즉 갯바위나 암초에 충돌하면서 뱃머리 우현에 틈이 벌어졌고 그곳으로 걷잡을 수 없이 물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배는 서서히 물이 차면서 선수 우측부터 가라앉으며 갑판으로 물이 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무사귀환을 원한 승려의 기도와 막대한 이문을 기대했던 상인의 꿈 역시 속절없이 수장되고 말았다.

신안선에서 발견된 7점의 고려청자.

■고려청자는 왜?
앞서 잠깐 일별했지만 신안선에서 확인된 유물가운데 가장 눈에 띈 것은 역시 2만점이 넘는 도자기였다. 이중 중국 저장성(浙江省) 용천요(龍泉窯) 생산품이 60%인 1만2000점에 달했다.

용천요 가마에서 생산된 도자기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음을 알 수 있다. 7점의 고려청자가 확인된 것도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매병(입이 작고 어깨선이 풍만하며 몸체가 서서히 좁아지는 병)과 상형 연적(코끼리 형태의 벼루 먹 그릇), 완(주발), 베개, 뚜껑, 잔받침 등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적은 수의 고려청자가 무역선에 선적됐을까. 고려청자 가운데 매병은 당시 중국에서 대대로 전해진 골동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작시기가 침몰당시 보다 100년 이상 앞선 13세기 전후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말이다. 다른 고려청자 6점은 13세기 후반~14세기 전반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매병과 달리 6점의 청자는 세월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신형이다. 그러나 고려청자의 수량이 너무 적으니 주된 무역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서긍의 고려 기행문인 <고려도경>은 “고려의 비색청자는 천하제일”이라 호평했다. 그랬으니 고려청자가 중국인들의 애호품으로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애호가들이 소장했던 고려청자 7점이 왜 신안선에 실렸는지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잇펜(一遍·1239~1289) 스님의 생애를 두루마리에 그린 ‘잇펜쇼닌에덴(一遍上人繪傳)'. 사람들이 저잣거리에서 동전으로 물건을 구입하거나, 땅에 묻는 장면이 묘사돼있다.

■배 밑에 자단목을 깐 이유
출토품 가운데 가장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배 밑바닥에서 잔뜩 쌓인채 발견된 자단목 1017본과 동전 28톤이었다.

우선 자단목을 보자. 자단목은 단향(檀香)으로 일컬어진다. 인도나 동남아, 중국 남부가 원산지인데, 불상이나 고급 가구, 공예품의 원자재다. 신안선 밑바닥에 가장 먼저 적재한 자단목은 길이 2m 내외였다.

직경은 10~15㎝ 짜리가 가장 많았지만 40㎝가 넘는 것도 심심치않게 보였다. 표면에는 한자 부호나 숫자, 혹은 아라비아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지중해 지역과 서남아시아에서 온 상인들이 원산지를 드나들며 남긴 흔적일 것이다.

왜 자단목을 배의 맨 밑바닥에 실었을까. 배의 무게중심, 즉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랬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렇다해도 배의 균형만 맞추려고 실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일본의 후쿠오카나 교토의 사찰에 대불을 건축하려 했던 승려와 상인들이 이 자단목을 사용하려 했을 것이다. 자단목은 특히 불가에서 소중하게 여겼던 목재다.

특히 기원전 5세기 전후부터 불교와 힌두교에서 사랑받았으며, 조각품이나 장식품, 고급가구 등에 사용됐다. 따라서 신안선이 실린 자단목 역시 일본의 승려들이 소형불상이나 목탁을 만드는데 필요했을 것이다. 사찰과 귀족들의 가구에도 활용했을 것이다.

신안선을 축소 복원한 모습. 밑바닥에 뾰족한 첨저선이다.

■동전은 희대의 수수께끼
화려한 도자기에 가려서 그렇지 신안선에서 확인된 엄청난 양의 동전은 희대의 수수께끼였다.

처음엔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7차 발굴 때까지는 약 3t에 그쳤다. 그런데 1983년 9월30일까지 진행된 8차 발굴에서 동전이 터졌다. 침몰선 내부를 가득 채운 토사를 빨아들이려고 흡인호스를 들이댔는데, 거기서 동전노다지가 끌려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1984년 10~11차 발굴까지 그렇게 빨아들인 동전은 무려 2만8018㎏, 즉 28t이 넘었고 수량으로는 800만개에 이르렀다.

이 어마어마한 동전은 배 밑바닥에 쌓아둔 자단목 위에 실려 있었다. 동전은 대부분 끈에 꿴 채였다. 끈은 비록 썩었지만 그 흔적은 남아있었다. 인양 과정에서 동전의 소유주마다 달아둔 목패가 나왔다. 주인들이 자신의 동전에 주인표시를 내놓은 것이다. 인양된 동전을 검토하니 놀라웠다. 신안선은 가히 동전박물관이었던 것이다.

배에서 확인된 동전은 66종에 이르렀다. 신(기원후 8~23년)에서 제작된 화천(14년) 및 후한의 오수전(25~219년)부터 원나라 지대통보(1310년)까지 1300년 동안 중국에서 제작·유통된 동전이 하염없이 쏟아진 것이다.

신-후한-당-북송-남송-요-금-원 및 서하시대까지…. 심지어 안남(베트남)에서 만든 동전(천복통보·天福通寶)까지 나왔다. 이 발굴로 우리나라는 중국 동전 세계 최다 보유국이 되었다. 

신안선이 발견된 신안 앞바다. 평균 수심 20미터 내외이며 바닥이 진흙으로 이뤄져있다. 조류가 세차고 복잡하며, 물이 흐리기로 유명한 곳이다.|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도록

■동전 800만개의 의미
그렇다면 신안선에 실린 어마어마한 동전의 실체는 무엇일까. 왜 상인들은 동전을 닥치는대로 실었을까.
동전은 우선 자단목과 함께 밸러스트(ballast·배의 무게중심을 잡으려고 바닥에 놓는 물건)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고작 배의 균형이나 잡으려고 그 엄청난 동전을 실었을 리는 만무하다.

지금까지 연구로는 대략 두가지 견해로 해석된다. 즉 중국 동전을 수입해서 그대로 일본에서 사용하려 했다는 설과, 청동대불을 조성하기 위한 재료로 수입하려 했다는 설 등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당시 중국본토를 지배했던 원나라가 동전의 유통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나라의 주요 화폐는 지폐(교초와 보초)였다. 원나라 때 정식으로 주조된 동전은 딱 두 차례에 불과했다. 그것이 1310년 발행된 지대통보와 대원통보였다.

이 두 동전은 신안선에서 확인되어 신안선의 침몰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그런데 원나라 조정은 그마저 딱 1년 만에 사용금지 시킨다. 원나라 황제 인종은 “새 동전이 시장의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옛 동전을 혼용할 수밖에 없으니 수많은 불편을 야기시킨다”(<원사>)면서 폐기를 지시했다. 인종은 그러면서 “다시 지폐인 교초와 보초를 사용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니까 원나라에서 동전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것이다. 다만 원나라는 동전을 해외무역 때 금 은 및 상품으로 교환하는 것은 허락했다. 결국 신안선에 실린 28t의 동전은 일본과의 교역품으로 중국에서 반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통용된 중국동전?
이렇게 실려가던 28t의 동전은 어떻게 사용될 운명이었을까. 여기서 제기된 첫번째 설이 바로 이 중국 동전을 수입해서 그대로 일본에서 유통시키려 했다는 주장이다.

실제 12~15세기 일본에는 북송의 동전을 위주로 한 수많은 중국 동전이 시중에 유통됐다는 방증자료가 있다. 즉 동전을 사용하거나 보관하는 모습은 승려 잇펜(一遍·1239~1289)의 생애를 두루마리로 그린 ‘잇펜쇼닌에덴(一遍上人繪傳·잇펜 스님의 생애를 그린 두루마리)’에서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저잣거리에서 동전으로 물건을 구입하거나, 땅에 묻는 장면이 묘사돼있다. 또 수입한 중국 동전을 사용한 1187년의 토지매매기록도 있다. 실제 일본에서는 동전을 수만개, 수십만개씩 꾸러미 채로 옹기에 넣어 매장한 사례도 있다.

일본에도 동전은 있었다. 708~958년 사이 12종류의 동전(황조십이전)이 주조된 바 있다. 그러나 새로운 화폐가 주조될 때마다 기존의 동전은 10분의 1로 평가절하됐다. 애써 돈을 모아도 신화폐가 발행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통화정책의 실패였다. 백성들은 새 동전이 발행될 때마다 옛 동전을 녹여 돈으로 바꿔 썼다. 국가가 발행하는 화폐는 점차 신용을 잃게 됐다. 그래도 경제활동에서 화폐가 없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래서 중국의 동전이 대량으로 수입·유통됐다는 것이다.   

비단 일본 뿐이 아니다. 요(907~1125)·서하(1038~1227)·금(1115~1234)은 물론 베트남에서도 중국 동전이 통화로 사용됐다. <고려도경>도 고려에서도 중국동전이 화폐로 사용된 사례를 전한다.

그러나 고개를 내젓는 전문가들도 있다. 즉 화폐라는 것은 단위와 통일성이 중요하다. 그러나 신안선에서 발견된 동전은 무려 66종에 이른다. 과연 화폐로서의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복잡한 종류의 동전을 주고받느니 차라리 현물교환이 낫지 않을까. 화폐로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황금과 맞바꾼 동전
사실 상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 동전의 일본 수출이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장사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주조국이나 시대에 관계없이 1-1의 가치를 고스란히 인정했다. 즉 동 10g의 동전이라면 동 10g의 가치를 인정해준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는 은과 동에 비해 금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따라서 중국 상인들은 일본에서 은과 동을 주고 금을 값싸게 살 수 있었다. 그 금을 중국으로 가지고 돌아가 팔면 큰 밑천없이 막대한 돈벌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남송 말년 일본의 황금 1냥의 가격은 630문이었는데, 당시 남송의 황금가격은 4만문 정도였다. 그러니 일본에서 금을 사서 중국에서 팔면 무려 63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원나라 시대에 들어서도 대도(베이징)의 금값은 일본 교토의 3배였다고 한다.

그러니 동전이 필요했던 일본의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값싼 황금으로 동전을 맞바꿔 엄청난 이윤을 챙겼다. 반대로 황금이 필요했던 중국의 입장에서는 쓸모없게 된 동전을 일본으로 가져가 황금과 맞바꿈으로써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원사>는 이를 두고 “1277년 일본 상인이 황금을 가져와 동전과 바꿨다”(持金來易銅錢)’고 기록했다. 중국과 일본 상인은 서로 ‘윈윈’하면서 큰 힘들이지 않고 떼돈을 벌었던 것이다.

■동전을 녹여 불상을 만들었다?
신안선의 동전이 ‘청동대불 조성용’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즉 일본학자인 이누마 겐지(飯沼賢司)에 따르면 일본은 헤이안 시대(794~1185)부터 동 생산량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10세기 중반 최대 광산지인 나가노보리 동산(長登 銅山)이 폐광했다.

이에따라 동의 생산량은 계속 낮아졌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동 수요량은 늘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불교가 민중 속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즉 불교의 극락세계로 왕생한다는 말법사상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에따라 경통(經筒·경서와 경문을 넣는 통)과 청동대불의 주조가 대거 이뤄졌다.

그런데 일본의 3대 대불이라는 아스카 대불(飛鳥大佛· 193~710), 나라 대불(奈郞大佛·710~794), 가마쿠라 대불(鎌倉大佛·1185~1392)의 금속을 분석하자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아스카 대불(2.96%)과 나라 대불(0.55%)에 비해 가마쿠라 대불(19.57%)의 납성분이 엄청 높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분석이다. 신안선에서 인양된 북송 시기의 동전 5개를 분석한 결과 납성분이 21.13~45.40%였던 것이다.

무슨 의미냐. 신안선에서 출토된 북송시기의 동전과 가마쿠라 불상의 성분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마쿠라 대불이 바로 북송에서 수입한 동전을 녹여 조성한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결국 수입한 동전을 녹여 대불을 만들었기 때문에 납 성분이 많고 주조 기술에서도 많은 문제점이 있어 불순물이 검출됐다는 것이다. 경통의 경우도 비슷했다. 이누마 겐지의 연구에 따르면 12세기 후반기에 주조된 일본 경통의 납 함유량이 유독 높았다.

하지만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 동전들은 과연 어떤 용도였을까. 현금이었을까, 청동대불 조성용이었을까. 아니면 둘 다 였을까.

하기야 신안선, 아니 신안 보물선에 650년 동안 묻혀있던 역사가 어디 그리 쉽게 시원한 답을 내어 줄리 있는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서동인·김병근, <신안보물선의 마지막 대항해>, 주류성, 2014
랜달 사사키, 홍성민 옮김, 문환석 감수, <해저보물선에 숨겨진 놀라운 세계사>, 공명, 2014
김병근, <수중고고학에 의한 동아시아 무역관계 연구-신안해저유물을 중심으로>, 건국대 박사논문, 2004
사쿠라키 신이치(櫻木晋一), <신안선 출토 동전의 용도와 성격>, ‘신안선 출토 금속 유물과 14세기 동아시아의 금속공예’ 국제학술대회, 국립해양유물전시관, 2007
문화재청·국립해양유물전시관, <신안선>, 2006
국립중앙박물관,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발굴 40주년 기념특별전 도록>,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