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경주 계림로에서 발굴된 무덤(계림로 14호분)은 희한했습니다. 적석목곽분치고는 상당히 작았는데, 그 안에 성인 남자 두 명이 누워있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오른쪽 남자는 대도를 찬 흔적이 있었는데, 왼쪽 남자가 달고 있던 유물이 군계일학이었습니다. 길이 36㎝에 불과했지만 눈부신 황금보검이었습니다. 분명 신라 고유의 제품은 아니었습니다. 1928년 옛 소련 카자흐스탄 보로보에에서 확인된 검의 파편과 비슷했습니다. 이밖에도 비슷한 양식의 벽화 그림들이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깁니다. 무덤의 주인공은 왜 외국산 황금보검을 차고 있었을까요. 서역인이 이역만리 신라의 수도 경주에 묻힌 것일까요. 아니면 신라인일까요. 신라인이라면 당시로서는 해외명품이었던 황금보검을 찰만큼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일까요. 또하나, 나란히 누워있는 대도를 찬 남성은 과연 누구일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99회는 ‘황금보검 주인공은 금수저가 아니었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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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경주는 관광개발사업이 한창이었다. 5월부터 미추왕릉 지구(현 대릉원) 정화사업에 따라 옛 시청 앞에서 계림에 이르는 도로공사가 벌어졌다.

 

막 시멘트 배수관을 설치하려고 도로의 양쪽을 깊이 파내자 엄청난 무덤들이 노출됐다. 새롭게 확인된 무덤은 55기나 됐다. 이들 무덤에 1~55호까지 번호를 붙였다. 그 가운데 14호 무덤의 흔적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봉분은 이미 깎여 있었고, 그 위에 민가가 있었지만 파보니 돌무더기가 보였다.

 

계림로 14호묘에서 확인된 황금보검. 신라산이 아니었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돌을 깐 이유
돌무더기가 확인됐다는 것은 이른바 적석목곽분이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4~6세기 반짝 유행했다가 사라진 신라의 수수께끼 같은 묘제, 즉 적석목곽묘의 발견은 늘 짜릿함을 안겨준다.

 

나무곽을 만들고 그 위를 돌 무더기로 쌓아올리니 도굴꾼이 침입할 수 없는 구조다. 함부로 침입했다가는 돌에 깔려 죽을테니까. 그러니 적석목곽분에는 금관총이나 천마총, 금령총, 황남대총처럼 금관을 비롯한 엄청난 유물이 온전히 보전될 수 있다.

 

‘계림로 14호묘’라 이름 붙은 이 적석목곽묘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동서 3.5m, 남북 1.2m 정도의 소형 무덤에 속한다. 황남대총이나 천마총 같은 왕릉급 무덤은 아니었던지라 엄청난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6월9~15일 사이 이어진 발굴결과는 뜻밖이었다.


찬란한 색깔의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된 성시구(화살통)과 금과 은으로 용무늬를 입사(入絲·금속기의 표면에 홈을 파고 다른 금속을 두드려 박는 기법)한 말안장, 유리로 장식한 행엽·운주 등 말꾸미개 등 295점이 확인됐다.

 

■군계일학 유물
발굴 막바지였던 13일 오후(혹은 14일)에 노출된 유물이 그 중에서도 군계일학이었다. 그것은 바로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끌었던 황금 보검이다.

 

황금보검의 크기는 36㎝에 불과했다. 칼의 몸집은 대부분 부식됐으며 칼집과 손잡이가 화려한 황금이었다. 표면에 S자형·네모형·사다리꼴·나뭇잎·바람개비 등 윤곽을 만들고 그 속에 맑고 검붉은 석류석과 유리질을 녹여 넣어 장식했다. 장식의 중간과 외곽에는 금 알갱이를 붙여 놓어 화려함을 가미했다.


칼집 손잡이의 끝은 반원형이며, 손잡이 장식은 세로로 가늘면서 길쭉하다. 칼집 끝은 사다리꼴이다. 측면에는 허리띠에 걸 수 있도록 2개의 골무 모양 돌출부를 만들었다.

 

위쪽의 장식은 P자형이고, 아래쪽의 장식은 반원형이다. 석류석은 둥근 것과 나뭇잎 모양, 콤마 모양 혹은 인동무늬 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면서 끼워져 있다.

 

■신라제품은 분명 아니다.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무덤의 내부를 자세히 관찰하니 1500년 전 시신 안장 때의 모습을 웬만큼 복원할 수 있었다. 

 

무덤의 양상. 두명의 남자가 누운 흔적이 있었다. 인쪽 피장자는 황금보검을, 오른쪽 피장자는 대도를 차고 있는 모습이었다. 위에는 다양한 부장품들이 놓여있었다.

인골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치아와 가는 귀고리 한 쌍 씩’ 나란히 놓여있었다. 즉 두 구의 시신이 나란히 묻혔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순장이나 부부합장묘라는 추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순장의 경우 그렇게 묘의 주인공과 나란히 안장되는 경우는 없다. 신분상, 남녀간 차이가 있는데 나란히 묻어두겠는가.

 

그렇다면 부부합장묘인가. 아니었다. 신라 무덤의 경우 ‘가는 귀고리’ 즉 세환이식은 남성, ‘굵은 귀고리’ 즉 태환이식은 여성의 무덤에서 주로 보인다는 게 연구자들의 지배적인 견해다. 계림로 14호묘의 경우 나란히 누운 두사람의 귀고리는 둘 다 가는 귀고리였다. 다만 낙엽형이냐 펜촉형이냐는 차이는 있지만….

 

따라서 이 무덤에는 남성 두 사람이 나란히 묻혔다고 봐야 한다.

약간 차이는 있다. 왼쪽 피장자의 허리 쯤에는 황금보검이, 오른쪽 피장자의 허리쯤엔 큰 칼(대도)이 각각 놓여있었다. 왼쪽 피장자의 경우 허리띠도 보였다.

 

그렇다면 치아와 귀고리, 허리띠, 보검 등이 놓여있는 상태로 왼쪽 피장자의 신장을 짐작할 수 있다. 약 150~160㎝ 가량 됐다. 오른쪽 피장자의 치아와 대도 등을 미뤄보면 왼쪽 피장자의 신장과 큰 차이가 없었다. 치아를 분석해보니 20~39살 사이의 건장한 성인이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피장자 두 사람의 신분은 무엇일까.
일단 무덤규모가 소규모(3.5mx1.2m)였으므로 왕족은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피장자가 차고 있던 황금보검과 대도의 뒷면에 묻은 직물의 흔적을 분석해보니 무늬가 있는 비단(紋綾)이었다.

 

게다가 무덤에는 비단벌레 날개를 장식한 최고급 화살통과 등자와 안교, 행엽 등 말장식 및 말갖춤새 등이 들어있었다. 특이 용 문양을 한 안교가 눈에 띈다. 용은 임금을 상징하는데, 임금이 하사한 물품은 아니었을까.

다만 두 사람의 신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오른쪽 피장자(대도)보다 황금보검을 지닌 왼쪽 피장자의 신분이 더 높았을 가능성이다.

정리하자면 무덤이 소규모인 것으로 보아 피장자들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엄격한 신분의 차이가 적용되는 장례의식에서 작은 규모의 무덤을 쓰는데 그쳤을 것이다.

 

다만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훗날 혁혁한 공훈을 세워 임금의 하사품을 받고 황금보검 같은 해외 명품을 갖게 되는 영예를 누렸을 것이다. 혹 전쟁에서 엄청난 공을 세운 형제의 무덤은 아니었을까. 혹은 전우였을까.

 

계림로 황금보검과 카자흐스탄에서 발굴된 보로보에 검(오른쪽)의 비교.

■서역인이 묻혔나
그런데 아무리 봐도 수수께끼같은 유물이 있었으니 바로 황금보검이었다.


신라에서는 볼 수 없는 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랬으니 무덤의 주인공, 특히 황금보검을 차고 있는 이가 서역인이 아니었을까 보는 견해도 있었다.

 

물론 그 시대에 살아보지 않았으니 알 수는 없다. 황금보검 외에도 유리장식 등 서역과 관련된 유물들이 계림로 14호묘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타고난 신분과 부여된 신분의 차이가 있다는 것도 외국인설을 뒤받침 해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외국인, 즉 서역인이라고 할만한 증거가 너무 빈약하다.

 

서역인의 증거라는 유리장식 유물들 대부분은 신라 양식에 유리를 첨가해서 장식한 것이다. 게다가 장식품에 사용된 유리는 모두 감색이다. 이것은 초기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생산됐던 유리구슬에서 흔히 보이는 색깔이다. 신라인들이 원래부터 좋아했던 색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서아시아 수입품이 아니라는 뜻이다. 윤상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는 “오히려 신라에서 유리를 다룰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신라인의 묘제인 적석목곽묘를 쓰고 머리를 동쪽으로 두는 등 신라의 장례제도를 따르고 있다. 서역인보다는 신라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황금보검의 칼자루 끝장식. 붉은 석류석이 감장돼 있다.

 

■구리 성분의 비밀 
그렇다면 황금보검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분명 신라의 것은 아니었다. 우선 이 황금보검의 금속성분을 보면 구리의 비율이 3.0~3.3%에 달했다.
비슷한 시기 신라의 다른 무덤에 출토된 황금 제품의 구리 성분과 달랐다.

 

즉 천마총·금관총·교동 출토 금관과, 수식, 관모, 관식 등 신라의 금제품 7점 중 6점의 구리 비율은 1% 미만이었다. 금관총 출토 관식 한 점만 1.26%였지만 그 역시 금보검의 구리 비율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

 

반면 최근 보고된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와 헝가리 출토 금제품의 구리 성분은 높다.
예컨대 영국 브리티시 박물관이 소장한 2~7세기 크림 반도 출토 금제품의 구리성분은 1~5% 사이다. 이 가운데 황금보검과 비슷한 사례가 3건(구리비율 3%)이었다. 또 430년 쯤의 훈족 유적으로 추정되는 헝가리 나직수우스 유적 출토 금제품(162점)도 분석대상이 됐다.

 

그 가운데는 구리비율이 1.6% 짜리도 있었지만 상당수가 2.8~4.8%다. 무슨 뜻인가. 윤상덕씨는 “이것은 계림로 14호묘에서 출토된 황금보검의 제작지가 적어도 신라는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준다”고 밝혔다.

 

장식보검의 세부. 금알갱이를 박아 넣었다.

■중앙아시아산과 비슷한 보검
이 황금보검과 매우 유사한 칼의 일부가 러시아 에르미타 주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928년 옛 소련인 카자흐스탄 보로보에에서 우연히 발견된 검의 파편이다.

 

실물은 아니지만 신장 위구르 자치구 쿠차 지역의 석굴벽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벽화와 펜지켄드 벽화, 그리고 이란 사산조 페르시아의 은제잔에서도 확인된다.

 

 밖에도 키르기스스탄, 알타이, 튜바, 신장 위그르 자치구의 석인상에서도 비슷한 검이 보인다. 이탈리아 북동부의 랑고바르도 F묘에서도 확인됐다.

 

이 중 계림로 황금보검과 거의 일치하는 것은 두 개 정도다. 보로보에 출토품과 키질 69호 석굴벽화 입구 천장에 묘사된 공양인 상의 허리춤에 달린 보검 그림이다.

 

물론 다른 벽화 그림이나 출토품에 묘사된 검도 비슷하다. 특히 계림로 황금보검처럼 패용구(허리에 찰 수 있는 장치)가 두 개(P자형과 반원형)인 공통점이 있다.

 

만 이탈리아 랑고바르드 출토품의 제작시기는 7세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신라 계림로 황금보검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황금 보검의 출처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신장, 알타이, 투바 등 중앙아시아 지역일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3.5m×1.2m에 불과한 소규모 무덤이었는데도 왕릉급이 부럽지않은 유물들이 쏟아졌다.|

■황금보검은 해외명품이었다.
황금보검이 해외명품이라는 증거는 또 있다. 사실 경주 고분 출토품 가운데는 외국산이 더러 보인다.


예컨대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금제 감옥 팔찌 1점이 대표적이다. 이 팔찌는 단면이 판상을 띠고 표면에 터키석 등 보석을 감장(嵌裝)한 것이다. 감장이란 금판 위에 청옥 등을 박은 알집을 또 다른 금판으로 만들어 붙여서 장식하는 기법이다. 알물림라고도 한다.


이 팔찌는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장식품 가운데 으뜸이다.
금알갱이와 보석을 끼운 금판의 뒤쪽에 무늬없는 금판을 1개 덧대고 위와 아래를 둥글게 감쌌다.

 

이렇게 금속판을 덧대어 장식하는 기법은 흑해 연안 노보체르카스크 시의 호흐라치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이나 이란 등 서역의 팔찌에서 확인되는 기법이다. 이 고분은 사르마트 족 여사제의 무덤이다. 사르마트 문화는 기원전 5세기∼기원후 4세기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전개된 유목민의 문화이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이처럼 금판을 덧대어 못을 박아 고정하는 기법은 신라시대 금공품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면서 “따라서 이 팔찌는 신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미추왕릉 지구에서 출토된 상감 유리옥과 로만글라스로 일컬어지는 유리용기 또한 서역산일 가능성이 짙다.

 

■동로마제국에서 기원한 제작기법
그렇다면 언제 만들어진 것인가.
일단 계림로 14호묘의 축조연대를 살펴봐야 한다. 연구자들은 이곳에서 나온 토기와 허리띠 장식, 귀고리 등을 검토한 결과 6세기 초로 추정했다.

특히 허리띠 장식과 귀고리를 보면 백제 무령왕릉 출토품보다 빠른 형태로 보인다. 따라서 무령왕릉의 연대(525년)보다는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 

황금보검의 연대는 그보다도 더 일렀을 것이다. 보검의 제작지가 중앙아시아나 유럽이라면 신라와 상당히 떨어졌기 때문에 얼마나 이른 시기에 제작됐는지는 모른다. 다만 제작부터 매장까지 100년이 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황금보검의 제작연대는 5세기 초로 추정할 수 있겠다.

황금보검과 제작 기법이 비슷한 각종 유물들이 유럽 전역에서 고르게 확인된다. 특히 흑해 부근에 집중돼있다.

러시아 아나파 인근의 미카엘스프에르드 무덤에서 타원형 문양대와 누금 기법이 확인된다. 계림로 황금보검 태극문양에서 보이는 세밀한 물결무늬도 보인다.

이곳에서 출토된 목걸이에는 6세기초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유스타니우스 1세의 금화가 걸려있다.

이 뿐이 아니라 흑해 인근 여러 곳에서 석류석과 유리를 넣은 유물들이 다수 확인된다. 특히 이른바 클로와조네 기법이 주목된다. 이 기법은 금속으로 벽을 세우고 여기에 투명한 물질(보석이나 유리)을 넣는 방법이다. 클로와조네 기법은 고대 이집트 지방에서 처음 발달해서 주변으로 퍼졌다.

특히 황금과 붉은색 석류석을 사용한 것은 동로마제국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 기법은 훈족의 발흥과 유럽 침략에 따른 민족 대이동 시대에 유럽전역으로 퍼졌다. 즉 황금보검의 제작 기법은 동로마제국 또는 동로마제국의 영향을 받은 유럽의 여러 이민족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황남대총 북분에서 확인된 감옥팔찌.

금알갱이와 보석을 끼운 금판의 뒤쪽에 무늬없는 금판을 1개 덧대고 위와 아래를 둥글게 감쌌다.  

■사치품, 해외명품으로 치장경쟁한 신라인들
황금보검은 어떻게 이역만리 신라에까지 왔을까.

중국이나 고구려를 통한 수입이거나, 혹은 중앙 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한 소그드·박트리아·에프탈 상인들의 거래한 해외명품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신라의 어떤 계층이 이 해외 명품을 수입했을까.

 

앞서 밝혔지만 신라의 장례문화는 독특했다. 특히 4세기부터 6세기까지는 가히 무덤경쟁이 벌어졌다.
왕과 왕족들은 자신의 배타적인 지위를 과시하려고 무덤을 대형화하고 장례도 성대하게 치렀다.

 

현세의 삶이 내세까지 이어진다고 굳게 믿었다. 때문에 사후의 안식처인 무덤에 자신의 권세와 부를 그대로 옮기려고 했다. 생전에 모아둔 고급 사치품으로 무덤을 가득 채웠다. 그것도 모자라 온 몸을 황금으로 치장했다.

 

여기에 해외에서 사들인 온갖 명품들도 무덤을 꾸몄다. 앞서 밝혔듯이 대표적인 외래품은 계림로 황금보검을 비롯해 은제타출문 그릇과 식리총 출토 신발, 감옥 팔찌, 그리고 25점의 유리그릇 등이다.

 

유리그릇은 왕릉급 무덤인 황남대총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금령총 등에서 출토됐다. 결국 해외 명품은 신라 고위층의 전유물이었다는 것이다. 경쟁적으로 명품을 사들였을 것이다.

 

그랬으니 도굴이 무서웠을 것이다. 나무곽을 만들어 시신을 안장하고 그 위에 엄청난 돌 무더기를 쌓았다.

황남대총 남분에 쌓은 돌의 경우 2.5t 트럭으로 758대분이었으니 무슨 할 말이 있으랴. 물론 그 덕분에 1500년 후의 후손들은 그들이 남긴 찬란한 황금유산을 고스란히 이어 받았지만….

그러나 황금보검은 발굴이 끝난지 43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이처럼 귀한 고고학 자료로 나와도 정확한 해석은커녕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지기 일쑤다. 섣부른 발굴도 금물이고, 섣부른 해석이나 주장을 펼치는 것도 가소로운 일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윤상덕, ‘계림로 14호묘의 축조연대와 피장자의 성격’, 고고학지, 국립중앙박물관, 2011
 윤상덕, ‘경주 계림로 보검으로 본 고대문물교류의 단면’, 특별전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 도록, 2015
 이한상, ‘신라묘제 속 서역계문물의 현황과 해석’, 한국고대사연구 45, 한국고대사학회, 2007
 이종호, <한국 7대 불가사의>, 역사의 아침, 2007
 이송란, ‘신라 계림로 14호분 금제장감보검의 제작지와 수용경로’, 미술사학(고 고고미술), 한국미술사학회, 2008
 요시미즈 츠네오, <로마문화 왕국, 신라>, 씨앗을뿌리는사람, 2002
 김병모, <금관의 비밀>, 고려문화재연구원, 2012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계림로 14호묘 발굴조사보고서>, 국립경주박물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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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