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아주 싼값에 구입한 청동유물의 녹을 닦았더니 흥미로운 문양이 나타났습니다.
한면에는 나뭇가지에 새가 앉아있었고, 다른 면에는 사람 3명이 각기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와 나뭇가지는 ‘솟대’를 연상시켰습니다. 문제는 다른 면에 새겨진 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두 사람은 해석가능했습니다. 토기항아리에 곡식을 저장하는 이는 여인 같아보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괭이를 들고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남자가 이상했습니다. 남성기를 자랑스레 노출한채 따비(쟁기)를 움직이면서 천연덕스럽게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이 남성은 왜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채 이렇게 ‘알몸 밭갈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을까요. 지금 같으면 영락없는 노출증 환자로 지탄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중기의 학자인 유희춘의 <미암집>에 단서가 있었습니다. 해마다 입춘날 벌거벗고 맡을 가는 세시풍습이 함경도 지방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기원전 4~3세기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중기까지 장장 2000년 동안 이 해괴망측한 퍼포먼스가 벌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37회 ‘청동기 노출남, 그는 왜 나체쇼를 벌였을까’입니다.

“뭐 그냥 방패형 청동기 같네.”

1970년 말 국립중앙박물관에 골동품상이 찾아와 녹슨 청동제품 한 점을 내밀었다. 박물관측은 이 유물을 이모저모 검토한 끝에 비교적 싼 가격으로 구입했다.

때마침 청동유물은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1967년 대전 괴정동 유적에서 대나무 및 방패 모양의 청동기 등 수준높은 청동유물 17점이 세트로 발굴됐다.

또 비슷한 시기에 김양선 숭실대 교수는 청동잔무늬거울(다뉴세문경·국보 141호)과 석제청동기거푸집(제작용범·국보 231호) 등 청동유물을 숭실대박물관에 기증했다.

농경문 청동기의 일부분. 한 남자가 나체차림으로 따비를 들고 밭을 갈고 있다.

■금석병용기의 폐기

또한 1971년에는 전남 화순 대곡리 마을주민은 배수로 공사를 벌이다가 11점의 청동유물 세트를 수습했다.

청동잔무늬거울 2점, 팔주령 2점, 쌍두령 2점, 한국형 세형동검 3자루, 청동도끼와 새기개 등 총 11점 모두 국보(143호)로 지정됐다.

이처럼 1960~1970년대는 갑작스레 청동유물이 붐을 이루기 시작한 시기였다.

청동기 유물의 잇단 출현은 한국고고학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던졌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이 주장한 이른바 ‘금석병용기 시대’의 개념을 폐기시켰기 때문이다.

일본학자들은 한반도에는 청동기 시대가 없었고, 석기와 철기가 공존한 금석병용기만 있었다고 강변해왔다. 1907~1934년 사이 일본학자들이 발굴한 김해패총에서 석기와 철기가 함께 출토되자 ‘금석병용기’라는 학설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던 차에 1960년대부터 청동기 유물들이 잇달아 모습을 드러내자 국내고고학계가 반색했던 것이다.

■어느날 입수된 농경문청동기
그 즈음은 1970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구입한 녹슨 청동유물은 고고학적인 의미에서 큰 하자가 있었다. 출토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출토지가 확실하지 않으면 출토상황도 분명하지 않기에 고고학적인 의미에서는 가치가 확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골동품상의 말로는 문제의 유물이 대전의 모처에서 출토됐다는 것이었다.

현지의 상인이 고물상으로부터 유물을 구입했고, 이를 서울의 골동품상이 다시 산 연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넘긴 것이다.

청동기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외양은 괴정동에서 출토된 방패형 청동기와 유사했다. 그러나 밑부분이 부러져 나간 상태였고, 그나마 남아있는 윗부분마저 둘로 절단돼있었다. 녹까지 슬어있어서 전체 문양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아! 괴정동에서 나온 방패형 청동기와 똑같은 자료가 하나 더 나왔구나’ 하는 기분이었다.”(당시 한병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따비로 밭을 갈고 있는 나체 남자. 보란듯이 성기를 내보이고 있다. 민속학자들은 대지의 여신과 성관계를 암시하는 주술행위라고 믿고 있다. 대지의 풍요를 기원하는 퍼포먼스라는 것이다.    

■솟대의 원형이 나타났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났다. 청동기 표면의 녹을 제거하는 순간 깜짝 놀랄만한 문양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쪽면에는 Y자 형의 무늬 끝에 몸에 반점이 찍힌 두마리의 새가 각각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표현한 것이 틀림없었다. 어떤 새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꼬리와 발이 비교적 길었다.”(당시 한병삼 학예연구관)

이것도 놀랄만한 그림이었다. 지금도 히말라야 산맥 주변인 네팔이나 티벳 등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조장(鳥葬)을 한다.

즉 시신을 뜯어먹은 새가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계로 운반하는 장례식이다. 새는 예부터 지상계와 천상계를 왕래하는 동물로 여겨졌다. 하늘의 의지를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의 희망을 하늘에 알려주는 영물로 인식되었다. 한병삼 연구관은 ‘솟대’를 떠올렸다. 솟대는 20~30척의 장대 위에 가로목을 걸치고 그 위에 나무새 혹은 돌새를 1~3마리 올려놓은 신간(神竿)이다.

<삼국지> ‘위서·한전’을 보면 심상치않은 대목이 등장한다.

“귀신을 믿었다. 국읍에서 한 사람을 뽑아 천신을 위한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 이 사람을 천군(天君)이라 했다. 이들 나라에는 각각 소도(蘇塗)라는 별읍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큰 나무를 세운 뒤’(立大木)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그렇다면 이 청동기의 나무와 새는 천계와 현세를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제사 때마다 등장한 솟대의 원조가 아닐까. 혹은 인간에게 풍요를 안겨주는 곡령신(穀靈神)을 나르는 매개자인가.

하늘신·조상신의 가호 아래 풍년과 다복·다산의 꿈을 펼치려던 청동기인들의 소박한 꿈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라 해석할 수 있다.

■청동기에 새겨진 3명의 인물상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해할만 했다. 뒷면에서 더욱 흥미로운 그림이 보였다. 사람이 3명이나 보였다.

한쪽 면의 왼쪽에는 아가리가 좁은 토기 항아리에 추수한 곡물을 담고 있는 인물(여성?)이 표현됐다.

그 면의 오른쪽 아래는 상반신만 남은 인물이 괭이를 치켜들고 있었다. 그러나 한병삼 연구관의 시선을 끈 것은 오른쪽 위에 새겨진 인물이었다.

“어떤 사람이 두 손으로 삽자루를 잡고 한쪽 발은 삽을 밟고 있었다. 삽날이 길고 끝이 둘로 갈라져 있다. 이것은 ‘따비’(사람의 힘을 이용해서 논이나 발을 갈 때 쓰는 쟁기)이다. 그 사람의 뒷머리에 달린 것이 아주 길다. 끝에 가서는 둘로 갈라졌다. 아! 그런데….”

그랬다. 그 인물의 두 다리 사이에 힘이 넘치는 듯한 남근이 삼각형 형태로 새겨져 있었다.

농경문 청동기의 다른 면, 솟대처럼 보이는 가지에 새가 마주보고 앉아있다.

■청동기 시대 ‘변태’가 나타났다?
이 무슨 해괴한 그림인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발가벗은 몸으로 따비질(쟁기질)을 한다?

요즘이라면 변태 소리 듣기 딱 좋은 행태가 아닌가.

그러나 당시 한병삼 학예연구관은 이 남성이 왜 성기를 자랑스레 노출한채 농사를 짓고 있는지 검토하지 않았다. 대신….

“이 농기구가 제주도 민속조사에서 발견된 따비와 꼭 같다. ‘따비’를 든 사람 밑에 보이는 다른 한 사람은 괭이를 들고 있고, 왼쪽 위에 있는 사람은 여자인듯 한데 무언가를 항아리에 담고 있다. 추수한 곡식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오른쪽 두사람은 봄날 밭을 가는 춘경(春耕)을, 왼쪽 여자는 수확한 곡식을 저장하는 추수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 다른 면에 나타난 일종의 ‘솟대’ 그림과 연결시켜 보면 어떨까.”

한병삼 연구관은 이 대목에서 <삼국지> ‘동이전·한조’에 등장하는 ‘소도’ 이야기와 함께 5월·10월 제사를 더불어 인용한다.

“해마다 5월 파종을 마친 뒤와 10월 농사일을 끝낸 뒤 귀신에 제사를 지낸다. 함께 모여 밤새도록 노래 부르고, 춤 추며, 술을 마신다. 춤은 수십명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고 땅을 밟고 몸을 굽혔다가 치켜들었다가 한다. 손과 발의 동작이 서로 조응한다.”

그러니까 이 청동기에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추수하는 농경생활을 상징하고 파종 후와 수확 후에 하늘신과 조상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새겨넣은 것은 아닐까.

한병삼 연구관은 “농경문 청동기는 바로 이런 제사를 지낼 때 큰 나무를 세우고 이 나무에 내걸었던 의기였을 가능성이 짙다”는 잠정결론을 내렸다. 

조선중기 문인 학자 유희춘의 <미암집>. 유희춘은 함경도 유배중 보았던 '나경'의 풍습을 맹비난하는 글을 남겼다.

■발가벗은 농부의 정체는
얼핏 ‘변태’ 같아 보이는 남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1992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주최한 ‘한국의 청동기 문화’ 특별전 도록에도 이른바 농경문청동기는 “기원전 3~4세기 생산의 풍요를 비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는 의기(儀器)로 판단된다”고만 해석했다.

한마디로 제사용품이라고만 했을 뿐 정확한 의미를 밝히지는 못했다.

그런데 실은 민속학적인 측면에서 ‘농사짓는 벌거벗은 남자의 예’가 보였다.

한반도 관동·관북지방에 있었다는 나경(裸耕)의 풍습이다.

즉 정월대보름날 숫총각이면서 성기가 큰 남자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의 몸으로 나무소(木牛)나 흙소(土牛)를 몰고 밭을 갈며 풍년을 비는 민속이 있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풍습은 전라도 지역에도 있었다.

전남 진도에서는 추석 전 어린이들이 발가벗고 나이 수 대로 밭고랑을 가는 풍습이다. 또 일본의 간사이(關西) 지방이나 인도네시아에서도 농부가 밭을 갈 때는 발가벗은 상태로 괭이질을 하거나 씨앗을 뿌린 후 부부가 성관계를 갖는 풍습도 있었다.

■미암 유희춘이 본 해괴한 풍습

2005년 무렵 청동기 전공자인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미암집>에서 아주 구체적인 ‘나경’의 습속을 읽었다.

<미암집>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유희춘(1513~1577)의 문집이다. 저명한 의사 허준을 발탁한 매우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희춘은 1547년 이른바 양재역 벽서사건(윤원형 일파가 정적을 모함하려고 양재역에 내건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됐다.

유희춘은 19년간이나 국경 지방에 머물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이때 유희춘은 “참으로 해괴한 풍습이 국경 주변에 퍼져있다”면서 ‘벌거벗고 밭을 가는’ 세시풍습을 개탄하고 있다.

“새해에 옷을 벗고 밭갈이 하는 짓이 가장 해괴한 풍습이다. 해마다 입춘이면 도할사(함경도·평안도의 종 6품 지역관리)들이 관청의 문 길가에서 사람을 시켜 나무로 만든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며 농사 짓는 형상을 짓게 한다. 이것은 한 해의 농사를 점치고 풍작을 기원하는 행사이다. 그런데….”

유희춘의 다음 언급이 중요하다.

“그런데 밭 갈고 씨 뿌린 사람은 반드시 나체여야 한다. 부들부들 추위를 무릅쓰게 하니 이 무슨 해괴한 작태인가.”

왜 해마다 벌거벗고 밭을 가는 세시풍속을 해왔는가. 유희춘은 ‘옛 노인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추위를 견디는 씩씩함을 보여주고 그 해 따뜻한 상서로움을 이루기 위해” 옷을 벗고 밭을 가는 행사를 거르지 않는다고 전했다.

■입춘 추위에 웬 알몸 농사 퍼포먼스?
그러나 유희춘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풍습이라고 비판한다. 

“천지의 조화를 아이들의 장난으로 빼앗을 수 있겠는가. 얼고 추운 곳에서 손발을 드러내면 금방 얼어 터진다. 하물며 알몸으로 길거리에 서 있다면 오죽하겠는가. 바람과 서리가 뼈를 쑤시고 몸이 벌벌 떨려서 기침과 고질적인 냉병을 고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런 풍습을 딱하게 여긴 유희춘이 “벌거벗고 발발 떠는 아이들이 가련하지도 않냐”고 물으면 현지 관원들과 백성들은 ‘핑퐁게임’으로 책임을 전가했다.

“이곳 백성들의 풍속입니다.”(관원들)
“아닙니다. 우린 그저 관원들이 시켜서 하는 것입니다.”(백성들)

유희춘은 이 대목에서 혀를 끌끌 찬다.

“백성들이 사리를 깨닫지 못한 데에서 생긴 나쁜 습속이다. 이 지방에는 어찌 서문표와 같은 용기있는 사람이 없는 것인가. 묵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무지한 백성들의 풍속인데….”

유희춘이 언급한 ‘서문표’는 누구인가.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사람이다.

어느 고을의 수령이 되었는데, 그 고을 사람들은 허무맹랑한 무속을 좋아했다. 해마다 한사람씩 처녀를 강물의 신, 즉 하백의 아내로 바치는 천인공노할 행사를 벌였다.

“이런 못된 풍속은 반드시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 서문표는 이 무지막지한 행사를 주최하는 무당과 고을 원로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그런 뒤 “내가 하백의 아내가 얼마나 예쁜지 좀 보고 싶다. 가서 데리고 오라”면서 고을 원로들을 한사람씩 강물에 던졌다. 마지막에는 늙은 무당을 밀어넣었다.

서문표는 남은 고을의 어른들에게 “이번엔 당신 차례야. 하백의 아내 좀 데려 올래”하고 쳐다봤다. 고을 사람들은 “제발 살려달라”고 싹싹 빌었다. 이 무지막지한 처녀제사는 서문표 덕분에 일소됐다.(<사기> ‘골계열전’)

유희춘은 북쪽의 국경에서, 그것도 입춘일 추운날, 벌거벗고 밭갈이 하는 풍습을 ‘서문표가 일소한 처녀제사처럼 하루빨리 없애버려야 할 악습’으로 여긴 것이다.  

농경문 청동기의 발견과. 유희춘의 생생증언을 토대로 이러한 나경의 풍속이 기원전 4~3세기부터 조선 중기까지 끈질기게 남아있던 풍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나체남성상. 성기를 보란듯 그렸다. 고래잡이의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장의 모습이라는 해석이 있다.

■밭갈이 나체쇼의 비밀
원래 풍요와 다산의 상징유물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 많았다.

3만5000~2만5000년 사이의 유물인 홀레펠스 비너스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등이 대표적인 예다.

발가벗은 풍만한 여성의 몸을 상징했으니 ‘비너스’라 이름붙였다. 그런데 이것이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남성으로 바뀐다.

지모신을 숭상하던 모권사회에서 부권사회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착해서 농사를 짓고 가정을 꾸리고, 마을을 지키는, 그야말로 공동체의 수호자로서 남성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남(男)자를 보면 밭 전(田) 자 밑에 힘 력(力)가 있는데, 이것은 남자가 밭에서 따비질이나 쟁기질 하는 형상을 표현한 것입니다.”(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그렇다면 의문점이 생긴다. 왜 추운 입춘날 ‘밭갈이 나체쇼’를 벌여야 했을까.

민속학의 의미에서 ‘풍년과 다산’을 기원한 성신앙이라는 해석이 있다. 시골에서는 ‘좆심이 땅심’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농경문청동기에 표현된 그 나체남성은 생산에 활력을 준다는 남근을 통해 공동체 문화의 성 의례 풍속, 성 장식의 체취를 물씬 풍기는 젊은 지도자가 아닐까. 

■대지의 여신에게 정액을 뿌린다?
민속학자 김열규(1932~2013)는 더욱 흥미로운 주장을 편다.
“(농경문 청동기에서) 성기를 노출한 사내를 보라. 성기가 따비와 나란히 아래를 향해 뻗어 있다. 따비는 모양이 창을 닮았다. 땅을 후벼 팔 수 있도록 날카롭고 뾰족하게 생긴 쇠붙이가 긴 자루 끝에 붙어있다. 결국 성기와 따비는 닮은 꼴이다. 그렇다면….”

김열규가 덧붙인다.

“그것은 따비가 밭에서 하는 작용이나 역할을 사내의 성기가 나눠 갖고 있음을 암시한다. 따비가 밭갈이하듯 사내의 성기 또한 일종의 밭갈이를 하고 있다.”

이 무슨 말인가. 나경, 즉 발가벗고 농사짓기, 혹은 알몸갈이는 신화가 서려있는 주술이라는 것이다.

땅에 박히는 따비를 따라서 사내의 성기, 즉 양물이 땅에 영향을 끼친다. 즉 여성으로 간주된 땅(대지), 혹은 대지의 여신에게 사내의 성기가 영향을 끼친다.

이것은 대낮에 사내가 머리 깃털 장식을 뽐내면서 일종의 유사 성행위로 밭갈이 하고 있다. 결국 나경은 대지의 여신과의 성관계를 의미한다.

김열규는 이것을 “대지의 여신에게 정액을 뿌리는 (유사성) 행위”로 표현했다.

“이 결과 대지는 더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대지는 그 생산성을 더 푸르게 드높게 이룩해낼 것이다.”
최근 문화재청은 입수된지 47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 농경문청동기를 보물(제1823호)로 지정했다. 왜 이제서야 보물지정이냐는 궁금증이 든다.

수십년간 박물관 수장고에 잘 있었으니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는 답이 돌아온다. 어쨌든 이 참에 농경문청동기에 새겨진 그림을 꼼꼼히 살펴보게 된다.

마침 국립중앙박물관이 문화재청과 공동으로 최근에 농경문청동기와 함께 국보·보물로 지정된 유물 50건을 특별전시(‘선인들의 마음 보물이 되다’ 특별전·5월13~7월9일·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한다니 꼭 한번 가봐야겠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한병삼, ‘선사시대 농경문청동기에 대하여’, <미술사학연구> 112호, 한국미술사학회, 1971
김열규, <한국신화, 그 매혹의 스토리텔링>, 한울, 2012
이건무, <청동기문화>, 대원사, 2000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2003
이종철, <한국의 성 숭배문화>, 민속원, 2003
고광민, ‘제주도 따비로 본 농경문청동기 해석’, <한국상고사학보> 제15호, 한국상고사학회, 1994
조현종, ‘한국초기도작문화 연구’, 전남대박사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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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