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국가(rogue state)’, ‘악의 축(axis of evil)’.
 모두 이란을 지목하는 표현입니다. 미국은 소련의 붕괴로 동서냉전 체제가 무너지자 이란을 새로운 적을 규정했죠.

   “대량파괴무기를 생산하고, 테러를 지원하는 몹쓸 나라”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미국은 그들이 짠 새로운 국제질서를 거부한 이란과 같은 나라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은 겁니다.

  최근 미국-이란 간 핵협상이 사실상 타결됐지만 이란에 대한 이같은 좋지않은 인식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습니다.  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이란은 ‘불량국가’도 아니요, 더군다나 ‘악의 축’도 아닙니다. 물론 지금 우리 사회에 미국이 끼친 영향이 절대적입니다. 하지만 한국-이란의 관계는 1400년 동안 질기디 질긴 인연의 끈을 부여잡고 있습니다. 지난 주 대강의 내용을 소개했지만, 최근 이란에서 발굴된 대서사시 <쿠쉬나메>는 1400 년 전 신라-페르시아의 혈맹관계를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사산조 페르시아 왕족의 후예가 신라로 망명한 뒤 신라 공주와 혼인하고, 그 아들이 이란으로 귀국하여 아랍의 폭정자인 자하크를 타도하고 이란의 영웅이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의문점이 생깁니다. 이란에서 구전으로 전해졌다는 이 <쿠쉬나메> 이야기는 마냥 허황된 신화나 전설이었을까요.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의 단군신화도 역시 신화입니다.

   하지만 신화는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만큼이나 엄청난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게다가 신화를 입증할만한 고고학 자료들도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쿠쉬나메> 이야기는 어떨까요.

   지금부터 <쿠쉬나메>의 내용을 문헌기록과 고고학 유물로 비교 검토해보겠습니다.

   아래의 블로그 내용을 보면서 팟캐스트를 듣는다면 더욱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흔적의 역사>는 조선시대 부분만 일단 추려서 단행본으로도 출간됐습니다. 그 역시 사랑해주세요. (경향신문 이기환 논설위원)


 사실 <쿠쉬나메> 이전부터 신라-이란간 국제교류가 활발했다는 단서는 많다. 이희수 교수(한양대 문화인류학과)는 먼저 5~6세기 신라고분에서 출토되는 여러 점의 페르시아계 유리제품을 꼽는다.
 “로마형·페르시아형 유리제품들이 주종을 이룹니다, 화려한 색깔과 아름다운 자태의 이 유리제품들은 지금 쓴다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주로 로만글래스(비잔틴)들인데 흑해~남러시아~사산조 페르시아~중국을 거쳐 신라로 유입됐다고 봅니다.”
 특히 페르시아 지방의 기법으로 제작된 ‘커트 글라스(Cut Glass·무늬를 새긴 유리)’도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진 황남대총 북묘에서 출토됐다. 커트 글라스는 ’쿠쉬나메‘의 주인공인 아비틴의 본향, 즉 사산조 페르시아 계통이다. 7세기 초 경북 칠곡군 송림사 5층 전탑에서 나온 금동제 사리그릇도 페르시아 계이다. 탑의 중앙에 금동제 사리함이 있고 그 속에 높이 7㎝ 정도의 녹색유리방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다.
 유리잔 표면에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에 유행했던 고리무늬가 장식돼있는 것이다. 신라-페르시아 간 끈끈한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이밖에 ‘입수쌍조문석조(立樹雙鳥文石造)’와 화수대금문금구(花樹對禽文金具)‘도 전형적인 사산조 페르시아계 유물이다. 두 유물 모두 평면이 원형이고, 가운데 나무를 배치하고 좌우에 날짐승을 대칭시키며 원 박에 옥을 두른 연주대가 있다. 이는 신라로 망명했다는 아비틴의 나라인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왔거나, 혹은 영향을 받은 유물들이다.    

황남대총 은잔에 새겨진 여인상. 이란의 전설적인 여신인 아나히타상을 연상시킨다는 게 학계의 분석이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페르시아의 왕족인) 아비틴과 신라공주 프라랑은 마침내 혼인을 치른다.”(<쿠쉬나메>)
 또 하나, 흥미로운 유물은 황남대총 북묘에서 확인된 은제 잔이다. 그릇처럼 생긴 이 잔은 5~6세기 것으로 확인됐는데, 여인 한 사람이 조각돼 있다. 이희수 교수는 “이란의 아나히타(Anahita) 여신상과 흡사하다”고 말한다. 실제 이란 국립박물관 등에 있는 같은 시대 은제제품이 양각된 아나히타 여신상과 매우 유사하다. 아나히타는 고대 이란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여신이다. 풍요와 전쟁, 농경을 관장하는 신이다.
 “지금도 이란에서는 사산초 페르시아 시대에 축조된 아나히타 신전이 산재해 있을 정도로 고대신상의 중심인물입니다.”
 이교수가 주목하는 것은 이 대목이다. 국가의 정신적인 통합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신이 그릇이나 도구에 조각돼 있다면 그것은 일반교역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최고위층의 신앙의례나 국가적인 통치의 상징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그렇다면 신라왕실과 사산조 페르시아 왕실사이에 고도의 교류행위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쿠쉬나메>에서 등장하는 페르시아 왕족의 후예인 아비틴이 신라왕(타이후르)에 귀순한 뒤 신라 공주(프라랑)과 혼인했다는 이야기와 같은….
 또 있다. 843년 신라 흥덕왕은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즐기며 해외명품만 선호한다”고 한탄하면서 몇몇 해외명품들을 국법으로 금했다.
 이 때 흥덕왕이 금지한 갖가지 해외명품 목록에 ‘슬슬전(瑟瑟鈿)’과 ‘구수’, ‘탑등’ 등 페르시아계 물건이 포함돼있다.
 ‘슬슬’이라는 단어는 이란어계인 ‘세세(Se-se)’이며 청색의 영롱한 에메랄드를 일컫는다. <신당서> ‘고선지전’은 “고선지 장군이 석국(石國·타슈겐트)에서 슬슬 10여석을 획득했다”고 기록했다. ‘전(鈿)’은 꽃 모양의 금이나 광채나는 자개 조각을 박아서 장식하는 것이다.
 결국 ‘슬슬전’은 수많은 에메랄드를 알알이 상감해서 장식한 명품이었다. 또 구수와 탑등은 양모를 주성분으로 잡모를 섞어짠 페르시아(波斯)산 직물이다.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평상·榻)에 깐다. 구수 보다는 탑등이 좀더 섬세한 것이 특징이다. 신라의 일반 백성들이 ‘페르시아 카펫(구수와 탑등)’을 깐 걸상까지 수입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은잔.

  ■“아비틴은 신라왕(타이후르)과 폴로(격구)를 즐긴다.”(<쿠쉬나메>)     
 신라와 이란인들이 신라 수도 경주에서 폴로, 즉 격구를 즐겼다는 <쿠쉬나메>의 내용이다. 물론 단서가 있다.
 신라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궤릉과 흥덕왕릉을 지키고 있는 무인석상은 전형적인 서역인의 모습이다. 경주 구정동 방형무덤의 네 모서리에 부조된 무인상도 눈이 깊고 코가 큰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서역인상은 상의 왼쪽 옷깃만을 바깥으로 접은 절금을 착용하고 가죽장화를 신었는데, 페르시아 스포츠인 폴로(격구)용 스틱 같은 것을 두 손에 잡고 있다.
 폴로(격구)는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유래됐고, 중앙아시아에서 크게 유행한 유목민족의 스포츠이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이희수 교수는 “바로 <쿠쉬나메>에 페르시아 이주민과 신라 귀족들이 폴로경기를 벌였다는 대목이 나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폴로 뿐이 아니다. <쿠쉬나메>의 묘사에서 의미심장한 내용들이 만만치 않게 들어있다. <쿠쉬나메>를 보면 신라왕은 왕자 2명을 항구로 보내 페르시아인들을 이끌고 망명해오는 아비틴을 영접한다. 그리곤 서울로 모신 뒤 갖가지 연회를 베풀며 환대한다. 마침내 공주와 아비틴의 혼인을 허락한다. 이 이야기의 구조를 보면 인도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의 가락국 도착을 다룬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흡사하다.
 가락국의 김수로왕은 기원후 48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수행원 20여 명을 이끌고 김해 포구에 도착하자 직접 마중을 나온다. 왕은 허황옥 일행을 서울로 극진하게 모신다.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한다.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도 내준다. 수로왕과 허황옥은 마침내 혼인해서 왕자(거등왕)을 낳는다.
 그러고 보면 가락국 김수로왕이나 <쿠쉬나메>에 등장하는 신라왕 타이후르는 해외 망명객들을 ‘쿨’하게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국빈으로 대접한 것도 모라자 급기야는 혼인동맹까지 맺은 세계화·국제화의 기수였음을 알 수 있다.  

 

경주 구정동 고분의 네 모서리에 부조된 무인상. 눈이 깊고 코가 큰 서역인의 모입이다. 페르시아 스포츠인 폴로경기용 스틱을 두 손에 쥐고 있다. 최근 발굴된 <쿠쉬나메>에서 페르시아 망명집단과 신라 간 폴로경기를 벌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한상 교수 제공



 ■“신라왕은  아비틴과 황금왕좌에 앉는다.”(쿠쉬나메)
 신라왕과 망명한 아비틴이 “황금왕좌”에 앉아 친밀한 대화를 나눴다?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신라=황금나라’였기 때문이다.
 “신라의 전성기에는 경중(京中)에 17만8936호가 있고, ~35개(실제는 39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다.”
 <삼국유사> ‘진한조’의 내용이다. 경주의 인구가 17만호를 넘어섰으며, 얼마나 황금을 사랑했는지, 서울(서라벌)에 황금을 입힌 집이 35채(실제는 39채)나 있었다는 것이다. 
 중세 아랍문헌은 ‘황금나라 신라’를 ‘동방의 이상향’으로 앞다퉈 극찬하고 있다.
 “신라를 방문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시 그 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곳의 금은 너무도 흔하다. 심지어는 개 목걸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황금으로 만들었다.”
 중세 아랍 지리학의 거장인 알 이드리시는 그 유명한 <천애횡단갈망자의 산책>(1154)에서 신라를 이렇게 표현했다. 개목걸이도 황금이었다니….
 그런데 당대 지리학의 거장인 알 이드리시의 <천애횡단갈망자의 산책>은 허투루 만든 책이 아니다. 1138년 시칠리 왕국의 로저 2세왕의 위촉에 따라 지리학자·천문학자·화가들을 총동원, 15년에 걸친 편찬작업 끝에 완성한 역작이었다. 그러니 신빙성이 높을 수밖에 없는 자료이다. 알 이드리시 뿐이 아니었다.
 사학자이며 지리학자인 알 마크디시는 966년 “신라인들은 가옥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식사 때는 금으로 된 그릇을 사용한다”고 했다.(<창세와 역사서>)
 6세기 신라 적석총에서 출토되는 금관을 비롯한 온갖 황금유물들이 이같은 아랍인들의 언급이 거짓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아나히타 여신상을  부조한 이란의 항아리


■“신라는 낙원이다. 여성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쿠쉬나메>)  
 쿠쉬나메를 보면 중국의 변방국왕인 마친은 아비틴에게 신라를 망명지로 추천하면서 ‘신라=낙원의 나라’로 지칭한다. 또한 신라로 망명한 페르시아 왕족 아비틴은 신라 여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치켜세운다. 그 말이 맞다.
 신라를 명시한 최초의 아랍어 언급은 이븐 쿠르다드비의 <도로와 왕국총람>(846~847년 사이에 최초 필사)에서 나왔다.
 “신라에는 금이 풍부하다. 그곳에 가는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료되어 영구 정착해 버린다.”  
 또 지리학자 알 카즈위니(1203~1280)는 ‘알라의 은혜’로 “신라는 병을 치유하는 나라”라는 찬사를 보냈다.
 “공기가 깨끗하고 물이 맑으며, 토질이 비옥해서 불구자가 없다.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사향에 버금가는 향료)이 풍긴다고 한다. 진염병이나 질병도 드물며 피리도 없고 갈증도 없다. 다른 곳에서 질병이 걸린 사람이 이곳에 오면 곧 완치된다. 신라로 들어간 사람들은 정착해서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두 알라의 은혜 덕분이다.”(<여러 나라의 유적과 인류소식>)    
 아니 얼마나 신라에 감명을 받았으면 집에서 용연향이 풍기고, 불구자도 없으며, 어떤 질병에 걸린 사람도 신라에만 오면 완치된다고 했을까.
 알 카즈위니는 심지어 “신라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런데 알 카즈위니는 50명에 달하는 선현들의 지리서적을 참고해서 <여러 나라의 유적과 인류소식>이라는 책을 찬술했다고 서문에 명시했다. 그만큼 신빙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쿠쉬나메>의 아비틴이 신라에 정착하기를 원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신라에만 오면 환자도 말끔히 치유가 되고, 전염병도 없고, 집에 물을 뿌리면 향기가 물씬 풍기며, 온통 금으로 도배했다니 누가 떠나고 싶었겠는가. 게다가 신라인들의 외모마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다니….       

입수쌍조문 석조유물의 세부문양. 원형 평면의 가운데 나무를 배치하고 좌우에 날짐승을 대칭시켜 원밖에 옥을 두른 연주대가 있다, 사산조 페르시아계 무늬이다. |이한상 교수 제공

  ■“중국왕은 신라왕을 협박하는 편지를 보낸다. 신라왕은 모욕감에 몸을 떤다.”(<쿠쉬나메>) 
 <쿠쉬나메>를 보면 중국왕이 신라왕을 모욕하는 편지를 쓰고, 신라의 해상을 봉쇄한 뒤 침공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그 침공은 대실패로 끝나고 쫒겨난다.
 이쯤해서 <삼국사기> 문무왕조를 보자. 671년 신라는 가림성을 공격해서 백성(부여 임천)에서 당나라군 5300명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당나라 총관 설인귀가 신라 문무왕에게 모욕의 편지 한 통을 보낸다.
 “지금 문무왕은 음흉한 생각을 품고~ 천자의 명을 어기고, 이웃 나라의 우호를 속이고 있구나. 전에는 충성스럽고 의롭더니 지금은 역적의 신하가 되었구나!”
 그러면서 협박한다.
 “겸손한 뜻으로 돌아가 도를 따르는 마음을 갖는다면 제사를 제 때에 받을 것이요. 사직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을 듣지 않으면 나라가 망해 제사가 끊어질 것이니 조심하라는 협박이었다. 하지만 신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정당방위’였다.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했지만, 당나라가 한반도 점령의 야욕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백제의 고토에 5도독부를 설치한 당나라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은밀하게 지원했다, 배신감을 느낀 신라는 669년부터 백제의 고토를 점령하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지원했다. 그러자 당나라가 신라를 협박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는 <쿠쉬나메>에서 중국왕이 신라왕을 모욕하는 대목과 흡사하다.

 

7세기초 조성된 경북 찰곡의 송림사 전탑에서 나온 사리기 유리잔. 사산조 페르시아 시애데 유행한 고리무늬가 장식됐다. <쿠쉬나메> 시대와 거의 동시대이다. |이한상 교수 제공 

 ■“중국은 신라를 침공하지만 신라·이란 연합군에 밀려 대륙으로 쫓겨간다. ”(<쿠쉬나메>)
 당나라는 실제 675년 20만 대군을 동원, 매소성에서 신라군과 맞섰다. 하지만 신라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고 한반도에서 완전히 쫓겨간다. 그 때가 676년이었다.
 <쿠쉬나메>에서 중국군이 신라를 공격했지만 완패당한 뒤 중국으로 쫓겨간 상황과 흡사하다. <쿠쉬나메>에서는 신라 단독군이 아니라 신라-이란 연합군으로 표현돼 있지만….
 물론 <쿠쉬나메> 속 이야기가 실제 역사냐 하고 따져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페르시아 왕족이 신라공주와 혼인했고, 그 후손이 이란의 영웅이 됐다는 이야기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니까. 그런 증거들을 찾고 해석하는 일은 학자들의 몫일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있다. 적어도 남의 장단에 맞춰 이란을 ‘불량국가’, 혹은 ‘악의 축’으로 폄훼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혹 흐르고 있을 인연의 피를 감안해서라도….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이희수, <이슬람과 한국문화>, 창아출판사, 2012
         <중동지역 한국학 관련 고문헌 및 역사 어문자료 기초조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세계지역종합연구 협동연구총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11
         <고대 페르시아 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h)의 발굴과 신라관련 내용>, 한국연구재단 인문한국지원사업 지원연구소, 2009
 이한상. <황금나라 신라>, 김영사, 2004
 정수일, <한국 속의 세계 상>, 창비, 2005

   민병훈, <실크로드와 경주>, 통천문화사, 2015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49 관련글 쓰기

 “신립은 원래 날쌔어 당시에 이름을 얻었지만 전투의 계책에는 부족한 인물이다.”(류성룡)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신립 장군을 무능한 장수로 폄훼했다. 류성룡은 더 나아가 옛 고사를 인용,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그 나라를 적군에게 넘겨주는 것”이라 했다. 신립과 같은 무능한 장수로 인해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명나라 지원군 사령관인 이여송도 조령을 지나며 혀를 끌끌 찼단다.
 “이런 천혜의 요새지를 두고 지킬 줄 몰랐다니 신립은 지모가 부족한 장수였구나!”(이여송)
 신립 장군이 천혜의 요충지였던 조령(충북 괴산군의 연풍면과 문경시 문경읍의 경계에 있는 해발 642m 고개) 대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쳐서 대패한 것을 두고 손가락질 한 것이다. 조선의 종묘사직이 급속도로 기운 책임이 전적으로 신립에게 있다고 여긴 것이다. 패장 신립에게 무자비한 십자포화가 집중됐다.

충추 탄금대에서 바라본 남한강. 신립 장군이 조령을 포기하고 충주에 배수진을 친 이유는 왜군이 지날 수밖에 없는 요로에 군대를 배치, 옥쇄작전을 펼침으로써 왜군의 서울 진격을 조금이라도 막으려고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신립은 어리석은 멍청이’ 
 신립이 밤낮으로 잠을 잤다느니, 군율이 해이했니, 장수와 병사간 불통이었느니, 술에 취해있었느니, 포악한 성격에다 왜군을 업신여겼느니…. 장수로서 기본자질까지 의심하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801년(순조 원년) 다산 정약용은 유배길에 탄금대를 지나면서 이렇게 읊었다.
 “강 복판에 불쑥 탄금대가 튀어나왔네.(江心湧出彈琴臺) 신립을 일으켜서 얘기나 좀 해봤으면(欲起申砬與論事) 어찌하여 문을 열고 적을 받아들였는지(啓門納寇奚爲哉)….”(<다산시문집> ‘탄금대를 지나며’)
 다산은 험준한 문(조령)을 두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신립을 깨워서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라고 답답해했던 것이다. 그 뿐인가. 다산은 신립을 두고 “뱃전에 표시를 해두었다가 칼을 찾으러 간 멍청이”라고 까지 표현했다. 다산이 표현한 ‘~멍청이’는 각주구검(刻舟求劍)의 고사를 빗댄 것이다. 즉 배를 타고 가던 중국 초나라 사람이 칼을 빠뜨렸는데, 칼이 빠진 지점의 뱃전에 표시를 해두었다는 것. 그는 배가 나루에 닿자 표시를 해둔 뱃전의 밑 물 속에 들어가 칼을 찾았다. 이 꼴을 지켜본 주변 사람들은 “저렇게 ‘각주구검’하는 멍청한 사람도 있네!”하며 비웃었다.(<여씨춘추> ‘찰금’) 다산은 신립을 ‘전략·전술에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한 어리석은 멍청이’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거의 모든 평가가 신립 장군을 ‘임진왜란 패배의 상징’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물론 신립 장군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신립 장군에게만 모든 화살을 돌릴 수 있을까. 그를 위한 변명 한마디 쯤은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몇가지 논문과 저작물을 검토하며 신립 이야기를 한번 해보련다.(이헌종의 <신립에 대한 수정적 비판-탄금대 전투를 중심으로>, 동의대학원 석사논문, 1991)(이상훈의 <신립의 작전지역 선정과 탄금대 전투>, ‘군사’ 제87호, 2013)(이희진의 <징비록의 그림자>, 동아시아, 2015 등)

국보 132호 <징비록>. 서애 류성룡이 기록한 생생한 국난의 역사이다.  그렇지만 신립 장군을 두고는 시종일관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한국국학진흥원

 ■오랑캐 무찌른 임금의 장인
 신립(1546~1592)은 그렇게 녹록한 장수는 아니었다.
 22살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한 신립은 온성(함북)부사 시절이던 1583년(선조 16년) 굉장한 무공을 세운다.
 평소에 훈련시킨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방을 어지럽히던 여진족 무리를 섬멸한 것이다.
 “이탕개(尼湯介) 등이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쳐들어와서 종성(함북)을 이틀째 포위했다. 온성부사 신립이 기병들을 이끌고 구원하자 적이 허둥지둥 도망갔다. 강까지 추격하고 돌아왔다.”(<선조수정실록>)
 신립의 무용담은 계속된다. “한 오랑캐가 백마를 타고 의기양양 휘젓자 신립은 단 한 발의 화살로 거꾸러쓰렸고, 이후 적의 기세는 바람에 휩쓸리는 갈대처럼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다. 또 조선군을 포위하면서 기세등등했던 오랑캐들은 신립의 얼굴을 알아차리고 “온성 영공(令公)이 왔다”면서 줄행랑 쳤다고 한다.(<목민심서> ‘병전 6조’)
 선조 임금은 그런 신립을 무척 아꼈다. 선조는 신립의 장녀를 자신이 가장 애지중지했던 신성군의 부인으로 맞이했다. 신립은 임금의 사돈이 된 것이다. 선조의 넷째아들인 신성군은 임금이 끔찍하게 총애했던 인빈 김씨의 소생이었다. 선조는 어린 신성군(1579~1592)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갖은 수를 썼을 정도였다.

 

 ■신립을 징비한 ‘징비록’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신립을 매우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징비록>이 무슨 책인가. 류성룡이 자서(自序)에서 썼듯 ‘징비(懲毖)’는 “내가 지난 날의 잘못을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시경>의 구절(‘소비·小毖’)에서 따왔다. 류성룡은 “바로 이것이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라 했다. 그런데 류성룡은 탄금대 전투에서 패한 신립의 ‘장수로서의 됨됨이’를 폄훼하면서 이렇게 표현한다.
 “지금에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만 그래도 훗날의 경계가 되겠기에 상세히 기록해둔다.”
 이 대목에 관한 한 류성룡은 신립을 ‘징비’하고 있는 것이다.
 <징비록>을 보면 신립은 성질이 급하고 사나운, 그러니까 상당히 용렬한 장수로 표현된다.
 예컨대 류성룡은 임진년(1592년) 봄에 신립과 이일을 지방의 군비를 순찰하도록 했다. 그 때의 <징비록>을 보자.
 “신립은 성질이 잔인하고 사납다는 평판이 있었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죽여 자신의 위엄을 세웠다. 그를 두려워 한 수령들이 백성들을 동원해 길을 닦았고, 지나칠 정도로 대접했다. 대신들의 행차라도 이것만 못했다.”
 “신립이 찾아왔기에 왜적의 형세를 물어봤다. 신립은 ‘걱정없다’고 가벼이 여겼다.…신립은 ‘비록 왜적에게 조총이 있다지만 어찌 쏠 때마다 다 맞겠냐’고 했다. 신립은 도무지 반성하거나 깨닫지 않고 가버렸다.”
 류성룡은 오랑캐를 섬멸함으로써 승승장구하던 신립의 ‘의기가 날카로워져 왜적을 업신여길까 견식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걱정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립을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 장수인 조괄에 견줬다. 조괄(?~기원전 260)은 진나라를 업신여기다가 40만 대군을 몰살시킨 패장이다. 조나라는 참패의 후유증에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류성룡은 조선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린 인물로 신립을 꼽고 있는 것이다. 

문경에서 바라본 조령. 조령은 천혜의 요새였지만 신립 장군이 진격했을 때는 왜군이 이미 목전에 진격하고 있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신립은 용렬한 장수다
 신립에 대한 류성룡의 부정적인 평가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더욱 심해진다.
 4월14일 부산진을 공격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올라오자 조정은 큰 혼란에 빠진다. 대간들이 “대신을 체찰사(전쟁 총지휘관)로 삼을 것”을 상소했고, 류성룡이 체찰사로 지명된다. 이 대목에서 <징비록>을 보자.
 “이산해의 추천으로 내(류성룡)가 체찰사가 됐다. 나는 병조판서 김응남을 부체찰사로 삼았다.”
 전쟁에 총지휘할 체찰사와 부체찰사가 모두 문관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신립은 류성룡에게 “전장에서 싸우는 장수가 먼저 내려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전황은 급박했다. 왜병의 선봉이 이미 밀양·대구를 지나 조령 아래까지 다가온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신립은 왜군을 막으려 내려간 이일(1538~1601)을 도우려면 문신이 아니라 무신, 즉 장수인 자신이 출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징비록>은 이 대목에서 “내(류성룡)가 신립의 말을 임금에게 아뢰었고, 임금께서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았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 대목을 보라.
 “신립이 대궐 문밖에 나가 직접 무사를 모집했지만 따라가려는 사람들이 없었다. 신립은 내(류성룡)가 모아놓은 군사들이 많은 것을 보고는 얼굴에 노한 빛을 띠었다. 신립은 김응남을 가리키면서 나(류성룡)에게 ‘이런 분을 대감(류성룡)이 데려가서 무슨 일에 쓰겠느냐’며 ‘소인(신립)이 부사(부체찰사)로 가겠다’고 했다.”

 

 ■화를 벌컥 낸 신립
 <징비록>의 다음 표현이 재미있다.
 “나(류성룡)는 무사들이 신립을 따라가지 않아 신립이 노여워 하는 것을 알고 웃으면서 ‘다 같은 나라 일인데 어찌 이것저것 구별하겠는가. 공이 급히 가야한다니 내가 모아둔 군관을 먼저 데리고 떠나시오.’라 했다.…사람들은 실의에 가득찬 기색으로 신립을 따라갔다.” 
 <징비록>의 뉘앙스는 참 묘하다. 신립은 매우 용렬한 장수다. 사람들을 모집했지만 아무도 따르지 않았고, 결국 류성룡이 모아둔 군관들을 데리고 출전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화를 벌컥 내면서….
 하지만 가만히 보자. 신립의 언행이 그렇게 잘못된 것일까.
 전쟁통인데 체찰사 뿐 아니라 부사(부체찰사)까지 문관으로 채워야 했을까. 오랑캐 섬멸의 혁혁한 공로가 있는 장수(신립)는 처음부터 배제된 것이 아닌가. 무장인 신립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그랬으니 신립으로서는 ‘전쟁을 하는 데는 무장이 나가야 한다’고 손들고 나섰던 것이 아닐까.
 실전경험이 없는 문관들이 병력을 지휘한다면 어찌 되는 것인가. 그러니까 “(문신인) 김응남 보다는 차라리 나를 부사로 데려가라”고 한 것이 아닐까. 신립이 ‘내가 가겠다’고 하자 류성룡이 군말없이 병력을 인계했다는 것도 재미있는 착안점이다. 결국 체찰사인 류성룡도, 부체찰사인 김응남도 전선에 나서지 않았다. 어떤 연구자는 이 대목을 두고 류성룡이 출전하지도 않을 거면서 굳이 가겠다고 나선 것은 일종의 ‘쇼’로 읽힐 수 있다고 했다.   

 

 ■송시열의 한마디
 어쨌든 그렇게 출전한 신립의 조선군은 대부분 오합지졸들인 8000명에 불과했다.
 “신립은 도성의 무사·재관(材官)·서류(庶流·서자들)·한량인 등 활 잘쏘는 자들 수천명이었다. 인근 고을에서 군사를 거뒀다.”(<선조수정실록>)
 실록에 나왔듯이 인력은 물론 장비도 변변치 않았다.
 “임진왜란 직전에 군기시 창고에 화약 2만7000근이나 비축돼 있었다. 천·지·현·황자 대포와 영·측자 소포, 그리고 대·중·소 등 3가지 양식의 총과 비격진천뢰 등의 포도 있었다.”(<서애집> ‘잡저’ 등)
 그런데 신립의 조선군이 총포로 무장해서 화약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없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대목이다. 무장인 신립으로서는 화나는 일이 아니었을까. 훗날 신립의 묘갈명을 쓴 송시열은 재상, 즉 류성룡의 비협조를 겨냥하고 있다.
 “장수와 재상이 서로 맞지 않고서 성공을 이루었던 적은 예부터 없었습니다.(將相不相應 而能成功者 自古無之)”
 “당시 재상(류성룡)은 평소에 공(신립)을 좋지 않게 여겨 그것을 막고자 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지금이 어찌 재상께서 구원을 앙갚음할 때입니까’라고 말했다.(時相素不悅公 格之 公曰此豈相公修隙時)”(<송자대전>)

조령을 넘나드는 관리들이 묵었던 조령원터.

 ■뿔뿔이 흩어진 군사들
 그런데 아무리 변호를 해준들 신립을 향한 비판의 시선은 여기서 거둘 수는 없다.
 신립은 왜 천혜의 요새라는 조령을 버리고, 사지(死地)인 탄금대에서, 그것도 배수진을 쳐서 전멸했는가. 그런 의문을 풀어야 한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될 점들이 너무도 많다.
 당시 조선의 군사제도인 ‘제승방략’ 체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작동되지 않았다.
 ‘제승방략’은 유사시에 여러 지역의 군사들을 특정장소에 집결시켜 대처하는 체제를 말한다. 이 때 조정은 제승방략의 군사 지도자를 중앙에서 파견한다. 그런데 이런 방어체제는 신속한 대규모의 침공을 받으면 무용지물로 전락한다. 류성룡이 일찍이 간파했다.
 “제승방략 체제 아래서는 전쟁이 나면 모든 군사가 모여 조정이 보내는 지휘관만을 기다리는 형편이 됩니다. 장수가 오지 않고 적의 공격을 받으면 군대는 흩어지고 결국 패하게 됩니다.”(<징비록>)
 임진왜란 때 그 병폐가 드러났다. 병란이 일어나자 경상감사 김수가 제승방략에 따라 각 수령에게 소속병력을 이끌고 대구로 집결하라는 명을 내린다. 하지만 왜병의 진격속도가 너무 빨랐다. 조정이 파견한 순변사(제승방략의 지휘관)가 도착하기도 전에 왜병이 접근한 것이다. 대구에 집결했던 병력은 겁을 집어먹고 뿔뿔이 흩어졌다.
 순변사 이일이 늦은 이유가 있었다. 출전을 위해 정예병 300명을 차출하려 했지만 싸울 군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이일은 3일이나 지체했다. 겨우 군관 60여 명만 이끌고 남하했다. 이일이 조령을 넘어 4월20일 문경에 접어들었지만 고을엔 한사람도 없었다. 겨우 이곳저곳에서 6000명을 모았지만 군대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결국 이일이 이끄는 조선군은 상주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병에 대패하고 만다.(4월25일) 신립이 8000명을 이끌고 도착한 것은 하루 뒤인 4월26일이었다. 이미 때가 늦은 것이다.

 

 ■조령을 버리고 탄금대를 택한 이유
 사실 왜병을 맞는 조선의 전략은 나름 있었다. 이미 출전한 이일이 제승방략의 시행으로 대구에 집결한 군사들을 지휘해서 왜병의 북진을 막는다. 그러면 신립이 조령을 중심으로 죽령과 추풍령의 방어선을 연결해서 방어선을 구축한다. 뭐 그런 작전이었다. 하지만 이일이 이끄는 조선군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바람에 처음부터 방어작전에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4월26일 충주 남쪽 10리 지점인 단월역에 주둔한 신립은 조령을 정찰한다.
 잠시 뒤 상주 전투에서 참패한 이일이 신립을 찾아와 “죽여달라”고 청한다. “훈련받지 못한 백성들이 대항할 수 없었다”고 고하면서…. 이 때 종사관 김여물은 신립에게 “중과부적이니 험준한 조령에서 방어하는 것이 좋다”고 청한다.
 이 때가 신립을 두고두고 욕먹이는 순간이었다. 신립은 “조령에서는 기마병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싸우는게 적합하다”고 반대한 것이다. <선조수정실록>은 “이 때 김여물이 패할 것을 알고 아들 김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고 한다.
 “남아(男兒)가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웅대한 뜻이 재가 될 뿐이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할 뿐이다.”

 

 ■옥쇄한 조선군
 신립은 군사를 인솔,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쳤다. <선조수정실록>은 이 대목에서 “앞에 논이 많아 기병들이 말 달리기에는 불편했다”고 지적했다. 4월27일 왜군이 조령을 넘어 단월역에 도착했다. 목사 이종장과 이일이 척후로 전방에 있었지만 왜병에 의해 차단 당했다. 28일 새벽 왜병이 삼군으로 나누어 쳐들어왔다.
 주력군은 충주성으로 들어가고 좌군은 달천 강변을 따라 내려오고 우군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상류를 따라 강을 건넜다. 실록은 “병기가 햇빛에 번쩍이고 포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고 전했다.
 신립은 곧장 말을 달려 주성(州城)으로 행해 나갔다. 군사들은 대열을 이루지 못한채 숨어버렸다.
 성중의 적이 호각 소리를 세 번 발하자 일시에 나와서 공격하자 신립의 군사들이 크게 패했다. 적이 벌써 사면으로 포위해서 신립이 도로 진을 친 곳으로 달려갔지만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졌다.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뒤덮었다.
 신립은 김여물과 함께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적 수십명을 죽인 뒤 모두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신립에게는 그의 뒤를 따라온 누이의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도망가려 하자 “네가 어찌 살려고 하느냐”며 머리를 붙잡고 함께 빠져 죽었다. 충주목사 이종장과 조방장 변기도 전사했다. 빠져나온 장수는 두서너 명에 불과했다.

 

 ■왜군은 조령을 고집했을까
 신립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장이다.
 적의 군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왜군에 포위됐다. 또 자신의 장기인 기병 중심의 돌격감행으로 스스로 진영을 무너뜨렸다. 또 배수진을 쳐서 퇴각로를 스스로 없앴고, 그 때문에 이후 부대를 수습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초기의 패전 책임을 신립에게만 돌릴 수 있을까. 더듬어보자. 
 신립이 병력을 이끌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세가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져 있었다. 이일이 패함에 따라 조령은 더 이상 지키기 어려웠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오합지졸의 조선군이 막을 수 있었을까.
 게다가 조령에는 관문인 새재 뿐 아니라 몇 개의 통로가 더 있었다. 만약 적이 조선군을 공격하는 채 하면서 다른 통로로 주력을 통과시킨다면 어땠을까. 자칫하면 도성의 임금과 조정은 아무 것도 모른채 적의 기습을 받을 수도 있는 끔찍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지 않을까. 조선의 종묘사직이 창졸간에 무너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신립은 승산없는 조령보다는 적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곳에 자리를 잡고 배수진을 친 것이 아닐까. 충주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충주를 장악해야 보급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왜군은 이곳에 주둔한 조선군을 우회하고 북상했다가는 보급로가 끊길 수도 있었다. 게다가 마침 음력 4월은 조선군에 유리한 서풍이 충주지역에서 불 때여서 조선군에 유리한 상황이었다는 연구도 있다.
 그렇다면 신립의 의도는 분명하지 않았을까. 그 잘난 임금을 위해, 종묘사직을 위해 시간을 벌게 하려던 것이 아닐까. 정규훈련을 받지 않은 오합지졸이 정규전을 제대로 수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옥쇄를 각오하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것이 아닐까. 실제로 신립 장군의 군대는 처절한 전투 끝에 산화의 길을 택했다. 빠져나온 장수는 두서너 명에 불과했다니까…. 지리멸렬했던 다른 군대와 달리 투혼을 발휘했던 것이다.
 
 ■꺼림찍한 징비록
 이런 분석도 있다.
 혹시 임진왜란 당시 조정을 이끈 동인 정권과 동인의 영수 류성룡이 신립에게 초전 연패와 서울 함락의 지휘책임을 신립에게 뒤집어씌운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다. <선조수정실록>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조헌은 왜적이 반드시 침략할 것(倭必來)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내침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싸잡아 ‘모두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교란시키는 것’이라 구별지어 배척했다.(區別麾斥) 그 때문에 조정에서는 감히 말도 꺼내지 못했다.”(1591년 3월1일)
 그러니까 일본의 ‘내침설’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인심을 교란시키는 서인 무리’라 몰아붙였다는 것이다. 그 ‘서인몰이’ 때문에 조정에서의 공론은 아예 싹이 잘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의 최종책임은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선조와, 그 시대 정사와 공론을 이끌어간 동인정권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화살을 탄금대 전투에서 패한 신립에게 오롯이 쏘아댄 것인 아닐까. 신립을 초지일관 용렬한 인물로 몰아붙인 <징비록>의 내용이 아무래도 꺼림칙하다.

 

 ■‘죄없는 자가 신립에게 돌을 던져라.’
 물론 서애 류성룡의 공적인 필설로 다할 수 없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특히 이순신 장군을 추천한 것은 만고의 업적이다. 성호 이익은 류성룡을 두고 이런 평가를 내렸다.
 “흔히들 류성룡 선생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활약을 펼쳤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작은 일이다. 나라를 잃지 않은 것은 오로지 이충무공 한사람이 있었던 덕분이다. 만약 류 선생의 추천이 없었던들 이충무공은 단지 일반병사들과 함께 싸우다 이름없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성호전집>)
 또한 <징비록>의 저술 또한 혁혁한 공이다.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회고하고 반성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경계한 생생한 기록물이니까….   그러나 <징비록>은 어디까지나 서애의 개인 시각에서 쓴 기록물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실록과 같은 정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포폄 역시 서애 류성룡의 시각이다. 맹신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쯤해서 신립을 위한 변명 한마디…. “누구든 죄없는 자가 신립에게 돌을 던져라.”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이헌종, <신립에 대한 수정적 비판-탄금대 전투를 중심으로>, 동의대학원 석사논문, 1991
 이상훈, <신립의 작전지역 선정과 탄금대 전투>, ‘군사’ 제87호, 2013
 이희진, <징비록의 그림자>, 동아시아, 2015
 장호식, <신립장군 전설연구>, 세명대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6
 강성문, <임진왜란 초기육전과 방어전술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 2006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48 관련글 쓰기

 주나라 시대에 계인(鷄人)이라는 벼슬아치가 있었다. 닭을 관장하면서 새벽을 알리는 관리였다.(<주례> 춘관) 이렇듯 ‘하늘을 공경하여 백성에게 때를 알려주는(欽若昊天 敬授人時)’(<서경>) 직책은 매우 중요했다. 만약 농사철 때 ‘때(인시·人時)’를 잘못 일러주면 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여기는 백성들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세종 임금이 자격루의 제작을 명한 이유가 될 것이다.(<세종실록>)   

지난 2007년 각계 전문가 30여명이 모여 23년만에 겨우 복원한 자격루.  

“시각을 잘못 알리면 중벌을 받았다. 장영실에게 명해 시각을 알릴 목각인형을 만들었다. 사람의 힘이 들지 않았다.”(<세종실록>)
 장영실의 자격루(自擊漏)는 물시계와 자동시보장치를 겸비한 조선의 표준시계다. 물시계(아날로그)의 물 흐름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다시 일정한 시차로 구슬과 인형을 건드려 자격장치(디지털)를 작동하도록 설계됐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변환기로 접속되는 디지털 시계가 이미 581년 전에 제작된 것이다. 하늘을 존중하는 마음씨로, 백성의 노고 없이 자동으로 작동되는 시계를 기어코 만든 것이다. 대단한 세종의 경천애민 정신이다.
 장영실의 신분은 노비였다. 아비는 원나라 소·항주 출신의 귀화인이었지만 어미 신분(기생)을 좇아 천민(노비)이 됐다. 세종은 스스로의 표현처럼 ‘솜씨는 물론 성질 또한 빼어난’ 장영실을 과감하게 발탁한 것이다. 세종은 “원나라 때도 절로 작동하는 물시계가 있었지만 정교함에서는 장영실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 칭찬했다. 당대 사람들 역시 “장영실은 세종대왕을 위해 태어난 인물”이라고 치켜세웠다.(<필원잡기>)
 자격루의 정교함은 6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혀를 내두를 만큼 대단하다. 내로라하는 과학자 30여 명과 최첨단 장비까지 총동원되고도 23년 만에 겨우 복원됐다.(2007년) 쇠구슬의 크기가 1㎜만 달라도 제대로 시간을 측정할 수 없다니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지난 12일 대구 세계물포럼 개막식 행사에서 퍼포먼스를 벌이다가 자격루 모형이 넘어지는 불상사가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국가정상급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니 그 민망함이란…. 그저 해프닝이었으리라. 다만 세종 임금이 자격루를 만들 때의 마음씨를 한번 되새겨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47 관련글 쓰기

 1941년 8월 24일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가 BBC 생방송 연설에서 나치독일의 만행을 규탄했다. 그는 나치의 민간인 대량 학살을 두고 “우리는 ‘이름없는 범죄(a crime without a name)’에 직면해 있다”고 표현했다.
 “이처럼 조직적이고 잔혹한 살육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독일의 살인특무무대가 빨치산 소탕을 명목으로 소련땅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을 지칭한 것이었다. 나치독일의 만행은 300만 명의 유대인이 한 줌의 재로 변할 때까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사분란하게 이어졌다. 뭐라 딱히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군대간 전쟁이 아니라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전쟁(war against peoples)’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2004년은 나치 독일의 유태인 집시 학살 60주년을 맞은 해였다. 유럽 각지에서 수천명의 집시들이 학살 현장인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 수용소 부지에 모였다. 

1944년 폴란드 출신의 유대한 법학자 라파엘 렘킨이 ‘이름없는 전쟁’에 ‘제노사이드(genocide)’란 이름을 붙였다. 종족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genos)와 살인의 라틴어(cide)를 결합시켰다. 제노사이드는 반드시 한 집단의 ‘즉각적인 파괴’ 만을 뜻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어떤 집단의 절멸을 위해 자행되는 다양한 행위를 지칭했다. 집단의 존재기반을 서서히 와해시키는 ‘부드러운 절멸’도 포함시켰다. 창씨개명(정치), 모국어사용 금지 및 우민화정책(문화) 등도 역시 제노사이드라는 것이다. 제노사이드를 국제법상의 범죄로 만들려고 동분서주한 렘킨의 노력은 1948년 유엔총회에서 제노사이드 협약을 맺음으로써 결실을 얻었다. 제노사이드 범죄는 ‘국민·인종·민족·종교집단 전체 또는 부분을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실행된 행위’로 규정됐다.(협약 제2조) 그렇지만 ‘~파괴할 의도’ 문구가 두고두고 문제가 됐다. 아무리 끔찍한 제노사이드 가해자라도 ‘의도 없는 우발적 사건’이라 우기면 소모적인 논쟁으로 변질되기 일쑤였으니까 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1차대전 도중 오스만제국(터키)이 자행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제노사이드라고 규탄하자, 터키가 ‘내전의 일부였다’고 반발했단다. 익숙한 변명이다. 지난 100년간 제노사이드로 희생된 민간인 수가 1억750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아무리 봐도 제노사이드의 기질은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46 관련글 쓰기

   이번 주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주제는 ‘신라공주와 페르시아 왕자의 사랑’이야기 입니다.
 아니 머나먼 나라의 왕자 공주가, 그것도 1500년 전에 사랑을 나눴고, 혼인까지 했다는 거냐. 그걸 믿으라는 거냐 하고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란판 단군신화라 할 수 있는 ‘쿠쉬나메’라는 서사시에 나오는 내용이라니 어쩝니까. 그 서사시에 따르면 멸망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가 중국을 거쳐 신라로 망명합니다.
 이란 왕자는 엄청 환대를 받습니다. 양국 선수들끼리 선수를 섞어 이란의 전통 스포츠인 폴로경기까지 벌였답니다.
 그리고 이란왕자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신라 공주와 혼인을 하게 됩니다. 양국은 신라-페르시아 연합군을 결성해서 때마침 침략해온 중국군대를 대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중국대륙까지 진출합니다.
 왕자와 공주 부부는 아이를 임신합니다. 그 와중에 망국의 페르시아 왕자의 꿈에 ‘빨리 조국에 가서 아랍 정복자들을 무찌르고 나라를 바로 세우라’는 계시가 나타납니다. 부부는 아이를 임신한 채로 이란으로 달려갑니다.
 왕자는 독립투쟁의 와중에 죽습니다. 그러나 부부사이에는 영웅이 태어납니다. 이란-신라 혼혈의 아이가 자라 결국 아랍폭정자를 무찌릅니다. 이것이 ‘쿠쉬나메’의 내용입니다.
 저는 이 쿠쉬나메 서사시를 보면서 무릎을 쳤습니다. 지난 2008년 이란 답사여행 중 품었던 궁금증의 하나가 풀린 느낌이랄까. 당시 이란에서 방영됐던 사극 ‘대장금’은 85%가 넘는 엄청난 시청률를 기록했습니다. 저는 그 때 의문이 생겼습니다. 이역만리 이란에서 ‘대장금’이 이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뭘까. 뭐 그런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다 ‘쿠쉬나메’를 보고서야 양국 백성들 사이에 흐르는 뭔가 친연의 DNA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쿠쉬나메의 내용을 한번 살펴보고, 과연 우리와 이란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친연의 DNA가 무엇인지를 검토해보겠습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를 기대해 주십시오.   

 

   “양금이, 양금이(Janggumi).”
 2008년 초, 테헤란 등 이란 답사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필자는 아주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일단의 이란 젊은이들이 필자와 함께 답사단의 일원이었던 한국 여성을 보고 반색하면서 몰려든 것이다.
 이란 남성들이 한국 여성만 보면 ‘양금이 양금이’하고 외쳤던 것이다. ‘양금이’는 한국 드라마 <대장금>의 주인공인 ‘장금이’의 이란식 발음이다. 2006~2007년 사이 이란 국영 채널 2에서 방영된 <대장금>(이란에서는 ‘Jewel in the palace’)은 평균 시청률 85~90%에 달할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대장금>의 주인공역을 맡은 이영애는 ‘살아있는 인형’ 대접을 받았다. 지금도 한국 드라마, 특히 사극의 인기는 대단하단다. <대장금>의 후속작인 <주몽>과 <동이>도 60%의 시청률을 상회했다니까. 

페르시아 왕자 아비틴과 신라공주 프라랑의 혼인을 묘사한 쿠쉬나메 내용.|이희수 교수 제공

 ■양금이 장금이
 왜 이란에서 한국 사극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을까. 전문가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우선 <대장금>을 비롯한 한국 사극의 흐름이 이란 역사와 비슷하다는 것을 꼽았다.
 이란은 인류 이동 및 동서문명의 교차로로 끊임없이 외부세력과 충돌을 빚었다. 지금도 15개국과 국경 및 바다를 접하고 있다. 또한 이슬람에서도 다수파인 수니파의 협공 속에 외로이 시아파의 전통을 이어가느라 고난의 역사를 걸었다.

 그런 만큼 역경을 딛고 일어서 마침내 꿈을 이루는 대장금과 주몽, 동이가 파란만장한 이란인들의 역사와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 한국 사극에서 보이는 여인들의 의상이 헤자브를 쓰고 몸 전체를 가리는 이란 여성과 닮았다는 점도 친근감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럴 듯 하지만 딱부러진 해석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부족했다.

 사실 사극 뿐이 아니다. 한국인에게 이란은 ‘열사의 나라’로 상징되는 아랍세계의 일원이며, 축출해야 할 ‘악의 축’ 국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란은 결코 아랍의 일원도, 열사의 나라도 아니다. 더군다나 ‘악의 축’도 아니다. 한국과 이란간 교역 규모는 174억 달러(2011년)에 이른다. 서방의 경제제제가 무색하게 교역은 되레 급증한 것이다.
 한국은 아랍에미리트·중국에 이어 이란의 3대 수입국으로 도약했다. 또 이란은 한국 원유의 4대 수입원이다. 이란의 태권도 인구는 종주국인 한국에 이어 세계 두번째로 많은 120만 명이다.
 최근 일부 초등학교에서는 태권도를 정식교육 과목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대체 한국과 이란 사이엔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 끈끈한 ‘친연의 DNA’를 서로 이어왔을까. 서방과 서방언론이 끊임없이 뿌리는 이간계의 술책에도…. 

이란 남성들이 이란 유적을 답사하던 한국여성에게 ‘양금이’하면서 다가와 사진을 함께 찍고 있다.

 

 ■Shilla의 현현
 2010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중동 전문가인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과)에게 흥미로운 연락이 왔다.
 “이 교수가 확인해야 할 것 같네요. 신라와 관련된 내용인 것 같은데….”
 이란 국립박물관의 동아시아 담당 큐레이터이자 아자드대 교수인 다르유시 아크바르자데 교수였다. 고대 페르시아어 전공자인 다르유시 교수의 연락내용은 흥미진진했다.
 즉 1998년 이란 학자 잘랄 마티니 교수가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온 서사시를 모아 책으로 펴냈다는 것. ‘쿠쉬나메(Kush-name)’라고 하는 이 서사시의 원 편찬자는 300~400년 간 구전된 서사시를 모은 11세기 대학자인 이란샤 이븐 압달 하이르였다. 그런데 다르유시 교수는 이 책 내용에 ‘shilla(실라)’, 즉 신라와 관련된 내용이 엄청난 분량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이희수 교수에게 알려준 것이다.
 “2005년부터 한양대 문화재연구소는 이른바 ‘악의 축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가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30 여 년 간 경제제재에 나선 것에 일종의 오기를 부렸다고 할까요. 어쨌든 다르유시 교수가 사장되다시피 한 ‘쿠쉬나메’를 보고, 그 속에 신라를 다룬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의미는 큽니다. 한양대 연구소와 이란 측의 공동연구 결실이라 할까요.”
 무슨 말이냐. 1998년 잘랄 마티니 교수가 ‘쿠쉬나메’를 정리해서 책을 펴냈다지만, 그 속에 포함된 의미는 사장되다시피 했다. 이란 학자들이 대부분 ‘쿠쉬나메’ 속에 있는 ‘신라’를 ‘일본’으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신라’라는 고대국가를 아는 학자들은 드물었다. 하기야 최근까지도 한국인이라 하면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보는 게 다반사였지 않은가.
 그런데 한국-이란의 공동연구 과정에서 새삼스럽게 ‘신라’의 존재를 인식하고 주목했다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의미있는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14세기 세밀화.  신라를 섬으로 표시했다. 페르시아의 왕자와 신라 공주, 그리고 궁녀들이 묘사돼있다. <쿠쉬나메>는 신라인과 신라여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며, 신라에서는 용연향이 풍긴다고 묘사했다.|이희수교수 제공

 

 ■쿠쉬나메, 파천황의 자료
 곧바로 이란으로 건너가 자료를 확인한 이희수 교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페르시아와 신라가 혈맹관계’ 였음을 알리는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멸망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족이 신라의 공주와 혼인해서 왕자를 생산하고, 그 왕자가 이라크로 귀국해서 폭정자를 물리친다는 것이었다. 총 800여 쪽 가운데 신라 관련 부분만 400쪽이 넘어설 정도였다. 이후 이희수 교수를 비롯한 한국·이란 관련학자들이 번역작업에 매달렸다.
 쿠쉬나메는 총 1만129 쿠플레(대구·對句)가 넘는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이란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구전 서사시이다. 그 가운데 신라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구절은 1만219절 중에서 2011~5925절 사이를 구성한다. 역사기록으로 살펴볼 때 사산조 페르시아는 637년 카디시야 전투에서 아랍군에게 패배한 뒤 모술·니하반도·하마드한·라이·이스파한 등 주요도시들을 잇달아 잃으면서 멸망한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황제 아즈데기르드의 왕자 피루즈는 끝까지 저항했으며,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이란인 잔존세력과 공동체를 이뤘다.
 대서사시인 ‘쿠쉬나메’의 역사적인 배경은 바로 이 무렵(7세기 중반), 마지막 왕자 피루즈가 중국으로 망명한 뒤 사망한 시점인 것으로 보인다. ‘쿠쉬나메’에서 ‘쿠쉬’는 실존인물이라기 보다는 구전상의 영웅이다. ‘나메’는 ‘서(書)’이다. 말하자면 ‘쿠쉬나메’는 ‘쿠쉬서(書)’인 것이다.
    
 ■신라로 망명한 페르시아 왕족
  다시 쿠쉬나메의 세계로 돌아가자.
  중국으로 망명한 마지막 왕자 피루즈는 ‘쿠쉬나메’에서 아비틴(Abtin)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중국에서 이란 공동체를 이끌던 아비틴은 중국내 정치 격변기를 맞아 제3국으로 재망명을 결심한다.

   이 때 주변국인 마친(Machin)의 국왕이 추천한 나라가 바로 신라였다. 마친왕은 “지상 낙원인 신라는 침략이 불가능한 안전한 나라”라고 치켜세웠다.
 과연 신라왕(테후르)은 망명객인 아비틴 일행을 환대한다. 서사시는 ‘바실라(Bashilla·신라)’를 “달처럼 아름다운 인형 같은 선녀들이 가득찬 향기로운 낙원”이라고 표현했다.
 “낙원처럼 꾸며진 궁 내부는 진정으로 군주의 처소 같았다. 궁 전체가 하늘색 배경에 금으로 장식돼 있었고, 모든 의자에 사파이어와 루비가 세공돼 있었다. 궁녀들은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신라왕은 아비틴을 황금옥좌에 앉히고, 진귀한 선물을 건낸다. 연일 연회를 연다.
 “맛있는 음식냄새가 가득한 가운데 요리사들이 음식을 나르고 술을 가져왔다 아비틴은 그런 음식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100가지 이상의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다.”   

<쿠쉬나메> 인쇄물. 사시의 원 편찬자는 11세기 대학자인 이란샤 이븐 압달 하이르였다. |한양대 문화재연구소 제공

 ■신라 vs 이란의 폴로경기
 신라왕의 환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아비틴은 신라왕의 다짐을 받아야 했다. 정치적 흥정에 따라 망명한 이란인들을 중국에 넘길 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저희 망명객들은 신라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제발 저희들을 정중하게 대해주십시요.”
 신라왕 테후르는 “걱정하지 마라”며 안심시킨다. 
 “아무도 여러분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 적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오. 우리의 역사는 천년 이상입니다. 명심하세요. 어느 누구도 신라를 공격한 자가 없소이다.”
 신라왕은 30명의 궁녀들을 아비틴 앞에 대령했다. 아비틴 일행은 궁녀들이 춤추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궁녀들의 얼굴은 자볼(이란 서남쪽 도시)의 꽃처럼 아름다웠고 얼굴은 선홍색 꽃 같았다. 여인들은 달처럼 아름다워 그들이 눈을 뜨면 남자들은 넋을 잃었다. 세상에는 이만큼 좋은 곳이 없으며 이들의 정원만큼 매혹적인 곳도 없다고 한다.”
 신라왕과 아비틴은 페르시아 스포츠인 폴로(격구)를 즐긴다. 원래는 ‘신라 vs 이란’의 국가대항전을 생각했다. 그러나 아비틴은 경기가 자칫 과열양상으로 치닫을 것을 우려했다. 결국 6명씩 멤버를 섞어 친선경기의 형태로 치른다. 그럼에도 아비틴 팀이 2연승을 거둔다. 아비틴은 신라에서 엄청난 인기를 끈다. 아비틴을 흠모한 나머지 이혼을 결심한 여인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아비틴 팀이 테후르 팀을 두번이나 이겼다. 아비틴은 엄청난 속도로 공을 쳤다. 공이 달까지 날아가는 것 같았다. 모든 기수들이 입을 모았다. ‘그 누구도 아티빈과 대적할 수 없도다.’ 태후르 왕은 아비틴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그의 폴로 실력에 감탄했다.”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사랑과 결혼
 한편 중국 황제는 이란인들이 신라로 망명했다는 소식에 분노한다. 중국은 신라를 총공격한다.
 그러나 신라-페르시아 연합군이 대승을 거둔다. 중국이 아비틴의 신라 망명을 주선한 마친왕을 핍박하자 신라-이란 연합군은 중국 원정길에 오른다. 연합군을 지휘한 아비틴은 중국의 심장부를 점령한 뒤 획득한 전리품의 반과 점령한 도시들을 신라에 내준다.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아비틴은 다시 신라왕 테후르의 환대를 받는다.
 아비틴은 테후르의 딸인 신라공주 프라랑(Frarang)과 혼인할 마음을 갖는다. 파르(Far)라는 통역이 “신라 소녀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덕까지 갖췄다”며 “그 가운데 신라왕의 딸이 최고”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아비틴은 타이후르를 만나 조심스럽게 “따님과 혼인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신라왕은 주저한다.
 “신라법에 이방인에게 딸을 내주지 않아요. 내가 딸을 내준다면 귀족들이 우습게 볼 겁니다.”
 아바틴은 자신이 이란의 전설적인 왕인 잠쉬드(Jamshid)의 후예임을 강조하면서 “절대 우스운 혼인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고민하던 테후르는 마침내 혼인을 승락한다.
 “그래요. 아비틴에게 전하시오. 이 혼인 허락하겠소.”
 하지만 조건을 단다. 아비틴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공주 프라랑을 10명의 처녀들 틈에 섞어 놓고는 “찾아보라”고 시험한 것이다. 아비틴은 좌절한다. 하지만 프라랑을 미리 본 동료들은 프라랑의 인상착의를 몰래 일러준다. 아비틴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공주를 찍는다. 우여곡절 끝에 혼인이 성사됐다. 마침내 성대한 혼인식을 치른 아비틴-프라랑 커플은 아이를 임신한다.

 

   ■이란판 단군신화
 그런데 아비틴의 꿈에 “장차 태어날 왕자가 바그다드의 자하크(아랍의 폭정자)를 물리치고 이란인의 복수를 해줄 것”이라는 계시가 나타난다.
 신라왕은 낙담했지만 부부를 이란으로 떠나 보낼 수밖에 없었다. 프라랑은 왕자를 생산했는데, 왕자의 이름은 페리둔이었다.
 이란에 도착한 아비틴은 자하크의 맹공세에 그만 전사하고 만다. 너무 어렸던 페리둔은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채 신하들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페르시아-신라’ 혼혈왕자인 페리둔은 훗날 페르시아의 적인 자하크를 물리치고 이란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이란의 신라공주(프라랑)는 신라에 있는 아버지(테후르)에게 편지를 보낸다.
 “아버지, 제 아들 페리둔이 자하크의 군대를 모두 죽였습니다.”
 손자의 승전 소식에 신라왕은 성대한 연회를 연다. 피를 나눈 사이가 된 신라-페르시아 양국은 이후 교류와 협력관계를 이어간다. 이것이 한·이란 학자들이 달려들어 해석한 이란의 서사시 ‘쿠쉬나메’의 내용이다.

 물론 서사시인만큼 역사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기는 쉽지않다. 하지만 ‘쿠쉬나메’는 그리스 로마신화나 단군신화가 그렇듯 페르시아 문화와 역사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쿠쉬나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음역이 당시 신라사회의 지명이나 인명과 일치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신라 왕실이나 사회를 정확하게 묘사한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이희수 교수)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신화나 서사시, 전설은 그 민족의 문화원형이자 역사원형이다. 그리스 로마신화가 서구문화의 원형이 됐고, 단군신화가 한민족 역사의 원형이 됐듯, 쿠쉬나메는 페르시아 문화와 역사의 원형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희수 교수는 “기존 학계의 고고학, 민속학, 역사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용한 해석의 길잡이임에는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쿠쉬나메는 새빨간 거짓의 기록인가, 아니면 뭔가 흥미롭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가. 이제 <쿠쉬나메>에 숨겨진 비밀의 단서를 하나하나 살펴보자.(계속)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45 관련글 쓰기

 1930년대 말 ‘임나일본부’를 강의하던 스에마쓰 야스까즈(末松保和) 교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학생이 있었다. 경성제대생 김석형(金錫亨)이었다. 해방 후 월북한 그는 1963년 스에마쓰의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는 논문(‘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진출’)을 발표한다. 일본학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논문을 소개한 하타다 다카시(旗田巍)는 “자는 사람 귀에 물을 붓는 것 같은 기상천외한 견해”라 했다.  

북한의 김석형은 1963년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에 맞서 이른바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진출' 논문을 발표했다.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본열도로 건너간 삼한 삼국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이른바 분국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가야인들이 오사카 지역에 세운 분국이 바로 임나라는 것이었다.

 사진은 1972년 일본 다카마쓰 무덤 학술대회에 참석한 김석형(오른쪽)이 남한학자 김재원 박사를 만나 악수하는 모습. 

스에마쓰 등이 체계화한 일본 고대사의 통설은 ‘왜가 4세기 중엽부터 약 200년 간 한반도 남부를 군사적으로 정벌,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경영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학계가 노렸던 ‘타율성·정체성의 식민사관’을 뒷받침했다. 즉 ‘한사군이 313년까지 한반도 서북부를, 4세기부터는 왜가 한반도 남부를 차례로 점령했으니 제대로 된 조선의 고대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석형은 철옹성처럼 굳어진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뿌리째 흔들어놓았다.
 임나일본부는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일본 열도에 존재했다는 것이었다. 일본열도에 이주한 삼한·삼국의 주민들이 각각의 고국을 상징하는 분국을 세웠고, 그 중 가야인의 분국이 바로 임나국이었다는 것이다.
 김석형의 ‘분국론’은 그렇게 한일학계에 충격파를 던졌다. 그것을 계기로 정설로 굳어졌던 임나일본부설이 본격적인 논쟁의 장으로 나왔다. 이후 가야지역에 존재했던 일본 거주민들을 통제한 행정기관설, 백제가 가야에 파견한 백제군사령부설, 왜가 가야에 파견한 외교사절설 등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두고 갖가지 주장들이 나왔다.
 지난 2010년 한·일 학자들의 모임인 한일역사공동연구회는 “왜가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을 수 있지만 임나일본부를 두고 지배했다고 볼 수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자 ‘일본이 드디어 임나일본부설을 폐기했다’는 보도가 잇달았다. 과연 그럴까. 우선 ‘왜가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을 수 있지만’이라는 단서가 걸린다. 또 당시 일본학자들의 의견이 일본 정부나 학계의 공식 견해도 아니었다. 김현구 고려대 명예교수는 “그저 일부 학자들의 개인견해였을 뿐”이라 전했다. 임나일본부의 한반도 남부 경영설은 여전히 일본학계에서 통용되는 학설이며, 따라서 거의 모든 일본 역사교과서에 기술된 ‘임나일본부’는 일본의 역사인식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44 관련글 쓰기

 “신라의 경우 같은 성씨는 물론 형제의 자식이나 고종·이종 자매까지 아내로 삼았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중국의 예속을 따진다면 도리에 크게 어긋난다”면서 신라의 풍습을 평했다.
 신라의 자유분방한 성풍속을 웅변하는 고고학·역사학 자료는 많다. 예컨대 보량이라는 여인은 제22대 풍월주(화랑도의 수장·재임 637~640)인 양도공을 사랑했다.

  그러나 둘은 어버지는 다르지만 어머니(양명공주)가 같은 남매사이였다. 양도공이 남매간의 혼인을 ‘오랑캐의 풍습’이라며 꺼렸다. 그러자 어머니가 아들을 껴앉고 말했다.  
 “신국(神國·신라)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다. 어찌 중국의 예로 하겠느냐.”(<화랑세기>)

 

경주 미추 왕릉 지구 계림로 30호분에서 출토된 토우장식 장경호. 다양한 성풍속이 보인다. 

 신라의 자유로운 성풍습을 ‘신국의 도’라 한 것이다. 특히 성에 관한 한 여성 상위였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미실은 임금 3명(진흥·진지·진평)과 태자 1명(동륜), 풍월주 4명(사다함·세종·설화랑·미생랑) 등을 성의 노리개를 삼은 여인이었다.

 정식 남편인 세종은 죽을 때까지 정절을 지켰고, 사다함은 지독한 상사병에 시달린다. 미실은 ‘남자를 녹이는’ 방사술을 배웠고, 진평왕에게는 ‘신국의 도(성교육)’를 가르쳤다.
 <삼국유사> ‘김현감조’는 “탑돌이 하던 김현이 여자와 눈을 맞춘 후 구석진 곳에서 통정했다”고 기록했다. “다리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이냐”고 한 처용가와,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고 한 서동요 역시 당대의 성풍속도를 웅변해준다. ‘돌기 달린 목제 남근’(안압지)과 ‘성 묘사 토우들’(미추왕릉·계림로 30호 고분군 등)도 ‘남녀상열지사’의 유물들이다. 엉덩이를 치켜든 여인, 그리고 과장된 남근을 들이미는 남자, 그리고 그 남성을 돌아보며 희죽 웃는 여인….

경주 황남동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남녀 인골. 30대 귀족여성과 20대 남성의 인골이 포개진채 확인됐다. 

 

최근 경주 황남동 적석목곽분(5세기)에서 30대 귀족여성과 20대 남성의 인골이 완전히 포개진채로 발견됐다. 금은 장신구·말갖춤새 등을 갖춘 여성과 달리 남성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몸종 혹은 마부였을까. 그러나 여성 주인공 바로 옆에 남성을 순장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저 남자는 저 지체높은 여성의 애인이었을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43 관련글 쓰기

 흔적의 역사 24회는 ‘가정법’입니다. 제목은 ‘만약 이성계의 장남이 살아있었다면…’입니다.
 오늘은 ‘만약’이라는 가정법을 해보려 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가정법을 써보지 않습니까.
 만약 한국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중국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조선이 임진왜란 때 완전히 쫄딱 망했었더라면…. 세종대왕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총에 서거하지 않았다면….
 뭐 이런 가정법 말입니다. 물론 역사를 읽는데 무슨 가정법이냐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씩은 가정법을 던져놓고 상상해보는 편도 흥미로울 것 같지 않습니까.
 오늘은 이런 가정법입니다. ‘만약 태조 이성계의 장남인 이방우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개국 조선의 2대왕이 되었다면 어찌 됐을까’하는…. 또 아버지의 뜻에 반해 은거의 길을 택한 이방우가 술병으로 일찍 죽지 않았다면 또 어찌 됐을까…. 뭐 이런 가정법들입니다.
 그랬다면 조선의 그림은 달라졌을 겁니다. 형제들끼리의 유혈참극을 빚은 1,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개국초부터 정통성 시비에 휘말리지는 않았겠지요. 그리고 정종과 태종은 물론이고 세종, 성종 뭐 이런 분들까지 등장하지 않았겠네요.
 그랬을 경우 조선은 어찌 됐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 이순간의 역사가 어찌 뒤바뀌어 졌을지 모르겠네요.
 흔적의 역사 24회는 태조 이성계의 장남인 이방우를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알아보고, 헛된 가정법을 풀어가려 합니다.

 

  “태조 4년(1393), 진안대군 이방우는 술을 좋아하는 성질 때문에 날마다 술을 마셔댔다. 마침내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죽었다.”(<태조실록>)
 태조 이성계의 맏아들인 이방우가 ‘술병’으로 죽었다는 <실록>의 기사다. 맏아들의 부음소식을 들은 태조는 3일 간이나 조회를 정지하라는 영을 내리고 근신했다.   태조는 이방우에게는 ‘경효(敬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역사를 쓰면서 ‘만약’이라는 가정법을 써야 아무 쓸모 없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의 장남인 이방우를 보면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게 된다,
 ‘만약’ 이방우가 태조 이성계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했다면 어땠을까. ‘제1,2차 왕자의 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정종-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역사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조선의 설계자라는 정도전도 비명횡사 하지 않았을 것이고….
 개국 조선의 ‘장자’였던 이방우는 과연 누구였고, 왜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술병에 빠져 죽었을까. 

태조 이성계의 맏아들 이방우를 모시려고 1831년(순조 31년) 조성한 사당.(청덕사) 충북 괴산군 불정면 목도리에 있다.

 ■이성계 맏아들의 행적
 여기서 잠깐 이방우가 죽은 뒤의 이야기를 해보자.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나 동생인 태종 이방원이나 맏아들(혹은 큰 형)의 죽음을 애닮아 하면서 이방우의 가족들을 돌봤다.
 예를 들어 2년 뒤인 1395년 태조는 진안대군 이방우의 아들인 이복근을 ‘진안군’으로 습봉(襲封·세습해서 봉함)했다. 동생인 태종은 1412년(태종 12년) 진안대군의 부인(태종의 형수)인 지씨에게 쌀·콩 15석과 술, 과자 등을 하사했다. 2년 뒤에는 이방우의 사위인 이숙묘에게 쌀·콩 20석과 종이 150권을 하사했다.
 이방우의 부인인 지씨의 실록기사는 남편이 죽은 지 47년이 지난 1440년(세종 22년)에도 등장한다.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 심씨가 양로연을 베풀었는데, 이방우의 부인인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지씨 등이 참석했다. 이날 최고 웃어른인 지씨에게 옥잔(玉盞)과 금배(金盃)를 올렸다.
 그러나 이후에는 이방우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라진 이방우의 무덤이 현현하다
 그러다 그의 사후 396년이 지난 1789년(정조 13년), 충주사람 이국주의 상언으로 진안대군 이방우의 무덤을 수축하고 어제비를 세웠다는 기사가 나온다.
 대관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사연인즉은 이렇다.
 1789년 2월, 정조가 원릉(영조의 능·경기 구리)에 행차한 뒤 돌아오고 있는데, 어떤 유학(幼學·벼슬하지 않은 유생)이 어가를 가로막고 무릎을 꿇었다.
 “신은 진안대군(이방우)의 15대 손입니다. 듣기로 대군의 묘를 함흥에서 풍덕(개풍)으로 이장했다는데…. 병란 때문에 모든 문헌이 사라지고, 후손들 또한 먹고 살기가 힘들어 무덤을 돌보지 못한지 100년이 지났습니다. 이후 봉분을 찾을 수 없어….”
 정리하자면 진안대군 이방우가 죽자 함흥에 장사를 지냈다가 풍덕(개풍)으로 무덤을 옮겼다는 것. 그런데 병자호란(1637년) 때문에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무덤의 소재를 뒷받침할만한 문헌 또한 사라져 버렸다는 것. 따라서 이후 100년도 훨씬 넘게 조상의 무덤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조선개국 후 조선의 첫번째 세자로 책봉된 이방석의 무덤. 그러나 이방석은 1398년 1차 왕자의 난 때 피살됐다. 

이국주의 상언이 계속된다.
 “그런데 1787년(정조 11년), 풍덕 지방에 홍수가 났을 때 묘갈(묘소 앞의 비석)이 드러났는데…. 묘갈의 내용을 보니 ‘진안대군의 부인인 지씨의 묘’(鎭安大君妻三韓國夫人池氏之墓)와 그 옆에 ‘대군묘대좌(大君墓在左)’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앞에는 석인(石人) 한 쌍이 쓰러진 소나무와 가시덤불 속에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그러니까 실전된 조상(이방우 부부)의 무덤 봉분이 홍수 때문에 드러났다는 것. 그러나 이방우의 후손들은 쉽게 그 무덤을 보수할 수 없었다.
 “노출된 묘역 둘레를 백성들의 무덤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신(이국주)이 감히 백성들의 무덤을 깔아뭉개고 새로운 무덤을 조성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무례함을 무릅쓰고 아뢰는 것입니다.”
 이국주의 상언을 들은 정조 임금은 가슴을 쳤다.
 “아! 그 분은 우리 집안의 오태백(吳太柏)이신데…. 그 묘가 실전되어 안타까웠는데 이제 떨어져 나간 비문 조각과 갂여나간 글자를 이끼에 묻히고 돌이 부서진 뒤끝에서 비로소 찾아냈으니….”
 정조는 이렇게 한탄하면서 경기관찰사에게 추상같은 명을 내렸다.
 “돈과 곡식을 넉넉히 주어 무덤을 봉축하고 제청(祭廳)을 지어라. 따로 무덤 지키는 민호(民戶)를 두어 백성들이 장사지내거나 나무하고 꼴베는 것을 금하게 하라. 무덤조성이 끝나면 해당지역 수령이 돌봐라.”(<정조실록>) 

태조 이성계의 어진. 이성계는 신의왕후 한씨에게서 6남 2녀, 신덕왕후 강씨에게서 2남1녀를 두었다. 이성계는 장남인 이방우는 위화도 회군이후 고향 땅으로 은거하고, 결국 술병으로 죽었다. 이성계는 결국 장성한 정비의 아들들을 제치고 계비의 아들, 그것도 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함으로써 형제들끼리 골육상쟁을 불렀다.

 ■조선의 오태백
 정조 임금은 묘소가 다 정비되고, 비석을 세우는 날 직접 비문을 지었다.(<홍재전서>)
 “공은 태조의 장남으로 (太祖長胤)~가정에 있어서는 효성스러웠고(在家而孝) 신하가 되어서는 미더웠네.(爲臣也藎) 의로운 군대가 서쪽으로 돌아오자(義旅西回) 필마로 동쪽으로 떠나가니(匹馬東조) 북산의 옛 마을로(北山故里), 곧 오태백(吳泰伯)이시었네(卽泰伯吳)”
 정조 임금의 이 어제시는 태조 이성계의 장남 이방우의 생애를 일목요연하게 알려준다.
 정조 임금의 어제시가 표현했듯 이방우를 지칭할 때 꼭 나오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조선의 ‘오태백(吳太伯)’이라는 별명이다. 과연 오태백이 누구이기에 이방우를 조선의 오태백이라 지칭했을까.
 오태백은 중국 춘추시대 ‘춘추5패’ 중 하나였던 오나라의 시조였다.
 그는 본래 주나라 태왕의 장남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인 태왕은 왕위를 막내아들인 계력에게 물려줄 뜻을 품고 있었다. 태왕의 숨은 뜻은 원대했다.
 막내아들인 계력도 현명했지만 계력의 아들인 희창이 더 현명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태왕은 막내아들인 계력을 차기 국왕으로 선택함으로써 그 다음 보위를 막내아들의 아들인 희창에게 넘긴다는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의도를 눈치 챈 태백은 둘째 동생인 중옹과 함께 오랑캐 땅인 형만(장수성 쑤저우 지방)으로 피했다. 거기서 태백은 몸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카락을 잘라 절대 왕위를 이을 뜻이 없음을 전했다. 덕분에 막내아들인 계력은 왕위에 올랐고, 계력의 다음 왕위는 훗날 주나라 문왕이 되는 희창에게 전해졌다.
 이로써 주나라는 주 문왕 때 반석 위에 올랐고, 그의 아들인 주 무왕 때 은(상)을 멸하고 중원의 천자로 우뚝 섰다. 
 후세 사람들은 막내동생에게 ‘쿨’하게 왕위를 양보하고 오랑캐의 땅에 묻힌 태백을 칭송했다. 태백은 형만 사람들의 추앙을 받아 오나라 시조로 옹립됐다.
 훗날 공자는 그런 태백을 두고 “태백은 지극한 덕이라고 말할 만하다. 세 번 천하를 양보했으나 백성들이 일컬을 것이 없다.(泰伯 其可謂至德也已矣 三以天下讓 民無得而稱焉)”(<논어> ‘태백’)고 했다.
 그런데 정조를 비롯한 조선사람들은 태조 이성계의 장남인 이방우를 ‘조선의 오태백’이라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묘. 배극렴, 조준 등 개국공신들이 태조 이성계에게 '세자는 적장자이거나 공이 많은 사람이 돼야 한다'고 간언하는 소리를 듣고 목놓아 울어서 국면을 반전시켰다고 한다. 

 ■이방우는 고려의 충신
 과연 이방우는 ‘쿨’한 마음으로 동생들(방과와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초야에 묻힌 오태백 같은 존재였을까.
 과연 그랬을까. 따져보자. 태조 이성계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와 6남2녀를,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와 2남1녀를 각각 두었다. 한씨와의 사이에서 이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 강씨와 사이에서 방번·방석 등의 아들을 낳았다.
 이성계의 맏아들인 이방우는 어렸을 때부터 효자였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했다고 한다.
 “조금 자라서는 시서(詩書)에 몰두하고 몸소 검약을 실천하였으며 일체의 부귀 영화에는 전혀 뜻이 없었다. 고려조에 벼슬해서 벼슬이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1388년(고려 우왕) 아버지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면서 운명이 갈린다.
 이방우의 무덤을 수축하면서 그의 삶을 기록한 <정조실록>을 더듬어보자.
 “태조대왕(이성계)이 위화도 회군을 하고 명나라를 받들자 대군(이방우)은 가족을 이끌고 철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은거한 것이다.  
 이 <실록>의 기사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아버지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역성혁명의 뜻을 구체화하자 철원으로 은거했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결국 이방우는 아버지의 혁명을 반대했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기를 원했다는 것이 아닌가. <정조실록>은 이후 이방우의 행적을 이렇게 소개한다.
 “1392년, 태조께서 조선을 개국하고 왕위에 오르자 대군은 마음 속으로 두 동생(정종과 태종)이 모두 성덕이 있음을 인정하고 고향(함흥)으로 낙향했다. 태조께서도 대군의 뜻을 대략 아시고 땅과 집을 하사했다. 장남의 뜻을 꺾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고, 그 자취를 묻어버리고 싶어했던 것이다.” 
 마지막 대목, 즉 이방우의 자취를 묻고 싶어했다는 대목도 흥미롭다. 이방우에게서 고려 충신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대목이 아닌가. 결국 이성계의 역성혁명은 맏아들 이방우에게 용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성계의 맏아들은 결국 고려의 충신으로 남았던 것이다. 그런 그가 고려의 망국을 슬퍼하면서 소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결국 술병에 걸려 죽고 만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42 관련글 쓰기

  최근 오랜만에 낭보가 들렸다.
 문화재청이 미국 시애틀박물관이 소장중이던 ‘덕종어보’를 기증받았다는 소식이었다.
 덕종어보는 종묘 영녕전 덕종실에 있다가 1943년 이후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해외로 유출됐다.
 그러다 1962년 문화재 애호가인 토마스 스팀슨이 구매해서 시애틀박물관에 기증한 바 있다. 그런 덕종어보가 53년 만에 귀향한 셈이다. 이번 기증식에는 고인이 된 토마스 스팀슨의 외손자인 프랭크 베일리가 참석했단다.
 그런데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해볼 수 있겠다. 덕종은 과연 누구인가.

추존왕인 덕종의 능. 덕종은 성종의 친아버지이며, 20살에 요절했다. 성종은 아버지를 추존왕으로 모셨다.

 ■최초의 추존왕
 중고등학교 시절 역사를 배운 사람들이라면 줄기차게 외었을 ‘태정태세 문단세’가 아닌가. 그런데 아무리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등 27명의 조선 임금을 꼽아보라. ‘덕종’의 이름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덕종은 이른바 ‘추존왕(追尊王)’이었으니까…. 추존왕은 본래는 왕이 아닌 사람인데, 사후에 그 사람을 높여 부른 특별 호칭이다. ‘추숭왕이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실제 왕위에 올라 백성을 다스린 임금은 아니라 죽은 뒤에 임금이라고 부른 이른바 ’임금 대우’ 국왕인 셈이다. 추존왕은 1800년 전 신라에도 있었다.
 <삼국사기> ‘첨해 이사금조’를 보면 첨해왕(247~261)은 자신의 친아버지인 골정을  일종의 추존왕인 갈문왕으로 추승했다. 태종무열왕(재위 654~661)도 자신의 친아버지인 용춘을 문흥대왕으로, 친어머니인 지도부인 박씨를 문정태후로 추존했다. 고려 현종(재위 1009~1031)도 친아버지를 안종으로 추증했다.

 

 ■왕이 아닌 왕
 조선의 추존왕은 덕종을 비롯해 9명이나 된다. 그러나 그 중 4명은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고조(목조·이안사), 증조(익조·이행리), 조부(도조·이춘), 부(환조·이자춘) 등이다. 비단 이성계 뿐 아니라 중국의 왕조 창업주들은 자신의 선조들을 앞다퉈 추존했다. 예컨대 후한의 광무제와 송태조 역시 4대조를 추존했으니까….
 새 왕조를 세운 창업주가 왕권을 강화하겠다고 추존한다고 하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조선의 창업주 태조 이성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덕종과 원종, 진종, 장조, 익종 등 남은 4명의 추존왕은 어떨까. 이 가운데 원종은 반정으로 임금이 된 인조의 친아버지인 정원군이다. 즉 선조에게는 적자인 영창대군 외에는 광해군을 포함, 서자만 13명 있었다. 정원군은 선조의 서(庶) 5남이었고, 인조는 그런 정원군의 장남이었다. 달리 말하면 인조는 선조의 서손(庶孫)이었다. 1623년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는 친아버지인 정원군을 추존해서 원종의 묘호를 올린 것이다. 그렇다면 진종은 누구인가. 아버지의 미움을 사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장헌세자)는 죽은(1762년) 뒤에도 죄인이었다.
 그랬으므로 어린 세손(정조)도 죄인의 아들이라는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때 할아버지인 영조는  세손을 일찌감치 죽은(1728년) 큰 아버지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다.(1764년) 어린 세손에게 죄인의 아들이라는 오명을 벗기고, 즉위의 하자를 없애고자 한 것이다. 그런 효장세자는 정조의 아버지 신분으로 진종의 묘호를 받았다. 그러면서 영조는 세손에게 단단히 다짐을 한다. 

현릉. 문종과 현덕왕비를 모신 능이다.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원래 무덤인 소릉은 세조에 의해 파헤쳐졌다. 현덕왕후의 혼령이 저주를 퍼부어 세조의 아들인 의경세자를 죽였다는 소리에 파헤쳐졌다는 것이다.

“친부(사도세자)는 절대 추존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효자였던 정조는 할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 없었다.
 그러나 1899년(고종 36년) 사도세자는 사후 137년 만에 장조의 묘호를 받게 된다. 무슨 일이 벌어졌나.
 1863년 즉위한 고종은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증손이었다. 고종은 즉위하자 마자 정조의 손자인 익종(추존왕)의 양자로 들어갔다. 정조의 직계임을 강조한 것이다.  고종은 그러면서 ‘정조의 뜻을 살려’ 장헌세자(사도세자)에게 장종이라는 묘호를 내렸다. 고종은  결국 장종(사도세자)-정조-순조-익종의 정통을 밟았음을 천명한 것이다. 장종은 1899년 고종이 황제국으로 선포한 이후 황제로 추존돼 장조가 됐다.
 또 한 사람의 추존왕인 익종은 순조의 아들(효명세자)이다. 효명세자는 22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러자 효명세자의 아들이 즉위했는데 그 사람이 헌종이다. 헌종 죽위 후 수렴청정을 한 순원왕후(순조비)는 곧바로 임금의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추존해서 익종의 묘호를 올렸다.

                            <조선시대 추존왕> 

임금

선왕

친아버지

추존왕의 묘호

성종

예종(작은 아버지)

의경세자

덕종

인조

선조(할아버지)

정원군

원종

정조

영조(할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

장종(고종이 4대조인 정조의 친아버지 장헌세자를 추존)

정조는 세자 시절 효장세자에 입양됨

진종(정조가 효장세자를 추존)

헌종

순조(할아버지)

효명세자

익종

 ■20살 요절한 덕종의 씨앗
 그렇다면 오늘의 주인공인 덕종(1438~1457)은 누구인가.
 사실 덕종은 불과 스무해를 살다 요절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씨앗은 엄청났다.
 우선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이라는 성종을 낳았고, 지금까지 사극의 주인공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여걸(인수대비 혹은 소혜왕후)의 남편이었다.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은 그의 친손자였다. 그러고보니 조선 전기의 숱한 역사가 덕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또 있다. 잇단 정변으로 등극한 아버지의 죄 때문인가. 그의 삶과 죽음  또한 숱한 이야깃거리를 남겼으며, 사후에 혹독한 후유증까지 낳았다. 덕종은 1438년 수양대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계유정난(1453년)을 일으키고 단종을 몰아낸 뒤(1455년) 임금자리에 오르자  세자(의경세자)가 됐다. 의경세자는 “체격이 준수하고 숙성했으며 용모 또한 단정하고 고아했다”고 한다.(<삼탄집> ‘의경세자 묘지문’) 오죽했으면 할아버지인 세종이 그의 이름을 현동(賢同)이라 짓고는 “친히 안고 데리고 다니면서 끊임없는 사랑을 쏟았다”고 한다.
 그러나 1457년(세조 3년) 7월 의경세자가 감기에 걸린 뒤 이상하게도 낫지 않고 시름시름 했다.
 아버지(세조)는 임금이 되기 전의 집, 즉 사가에 세자를 보내 치료하도록 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임금 스스로도 거처를 옮겨 의약품을 챙기는 등 친히 병구완을 했다.  세조가 얼마나 세자를 끔찍히 아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0여 일 뒤 병세에 잠깐 차도를 보이자 세조는 세자를 돌본 측근들에게 후한 상급까지 내렸다. 하지만 세자의 병세는 다시 악화됐다.
 “1457년 9월2일 의경세자의 병세가 심해지니 세조가 울었다. 신숙주가 들어가보니 세자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숨이 끊어졌다.”  
 그토록 믿었던 아들이 죽자 세조는 “길고 짧음은 운명이지만 세자의 아들들이 모두 어리니 얼굴을 그려서 남기라”고 명했다. 세자의 죽음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신하와 백성들의 복이 없는 것”이라 여겼다. 

덕종이 추존왕이 된 뒤 어보가 새겨져 종묘에 봉안됐다. 이 어보가 미국 시애틀 박물관에 있다가 최근 반환됐다.  

 

 ■파헤쳐진 왕후의 무덤
 그런데 당시의 야사를 보면 매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낮잠을 자고 있던 세조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가 나타나 세조를 혼냈다는 것이다.
 “네가 죄없는 내 아들(단종)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음애일기>)
 세조가 깜짝 놀라 꿈에서 깨자 곧바로 의경세자의 죽음 소식이 들렸고, 이에 격분한 세조가 “소릉(현덕왕후릉)을 파헤치라”고 명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무수한 뒷야기들이 나온다.
 “소릉을 파헤치려고 무덤의 석실을 부수고 관을 끌어내렸지만 무거워서 들 수가 없었다. 소릉이 있던 경기 안산의 백성들이 놀라 괴이하게 여겼다. 제사를 지낸 뒤에야 관이 나왔다.”(<음애일기>)
 <음애일기>는 “파헤쳐진 능은 3~4일이나 노천에 방치됐다가 평민의 예로 장사를 지내라는 명에 따라 겨우 물가에 옮겨 묻었다”고 기록했다. 사실 안산에서는 현덕왕후의 능이 파헤쳐지기 전부터 부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내 집을 부수려 하니 난 장차 어디 가서 의탁할꼬.”
 그 소리가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었다고 한다. 얼마 후 임금의 명을 받은 사신이 능을 파헤쳤다. 며칠 뒤 시신을 옮겨 묻었지만 예전의 능에 있던 나무나 돌을 만지면 갑자기 하늘이 깜깜해지고 비비람이 불어닥쳤다고 한다.
 당시의 여론이 심상치 않았음을 웅변해주고 있는 대목이다.

 

   ■단종 어머니의 비극
 현덕왕후는 문종의 세번째 부인이었다. 문종은 세자시절 두 번이나 이혼한 이력이 있다.
 첫번째 부인인 휘빈 김씨는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 압승술(壓勝術)을 썼다는 단서가 발각됨으로써 폐출됐다. 압승술은 남자의 사랑을 받는 술법, 즉 ‘사랑의 묘약’을 쓰는 것을 뜻한다. 휘빈 김씨는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 허리에 차는 방사술’을 썼다가 ‘부덕을 행했다’는 죄목으로 폐출됐다. 두번째 부인인 순빈 봉씨 역시 남편의 사랑을 받지못해 전전긍긍하다가 그만 동성연애에 빠지고 말았다. 이것이 그만 시아버지인 세종에게 걸려 역시 폐출되고 말았다.
 문종이 3번째 부인으로 맞이한 이가 바로 현덕왕후 권씨였다. 권씨는 앞서의 두 여인과 달리 덕과 위엄을 겸비해서 시아버지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러나 25살 때인 1441년 단종을 낳은 뒤 불과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난산의 후유증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요절한 현덕왕후는 죽은 뒤에도 수난을 당한다.
 어렵게 낳은 아들이 임금이 된 것이 오히려 불행이었다. 만 11살의 나이로 등극한 단종이 작은 아버지인 수양대군에 의해 쫓겨난 것이다.(1455년) 1년 뒤(1456년) 더 큰 사건이 터졌다. 현덕왕후의 아우인 권자신이 성삼문·이개·박팽년 등과 함께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의 복위를 노리다 실패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권자신은 물론 현덕왕후의 어머니(아기·阿只)까지 처형됐다.
 정사인 <세조실록>을 보면 의경세자의 죽음 직후 현덕왕후의 ‘사후 신변’에 뭔가 이상이 생겼음을 알려주고 있다.
 “1457년(세조 3년) 9월7일 현덕왕후 권씨의 신주와 의물(儀物)을 일찍이 철거했으니 왕후임을 인준한 고명(誥命)과 책보(冊寶·인장), 장신구를 해당관사로 수장하게 하소서.”
 현덕왕후가 폐위되어 왕후로서의 모든 지위가 박탈됐다는 뜻이다. 의경세자가 죽은 뒤 불과 5일 뒤의 일이다. 현덕왕후의 능이 이 때 훼손되었을 수 있다. 물론 <세조실록>을 보면 의경세자(덕종·1457년 9월 2일)는 단종(10월 21일)보다 더 먼저 죽었다. 따라서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내 아들 니 아들’하면서 저주를 퍼부었다는 것은 팩트가 아닐 지 모른다. 하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저주의 내용이 약간 윤색됐을 수도 있고, 야사를 기록할 때 착오가 생겨 시간의 오차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세조가 현덕왕후의 망령에 시달린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선화 문화재청장이 시애틀박물관에서 열린 반환식에서 덕종어보를 받고 있다. 

 ■또라이 취급받은 남효온
 현덕왕후는 그렇게 의경세자의 죽음과 함께 능욕을 당했다.
 맨처음 현덕왕후의 복위를 거론한 이는 추강 남효온이었다. 남효온은 불과 18살인 1471년(성종 2년) 과감한 상소문을 올린다. 요컨대 “현덕왕후가 폐위당함에 따라 남편인 문종의 영혼이 홀로 외롭게 지낸다”는 것이었다.
 “소릉(현덕왕후의 원래 능이름)의 폐위는 인심에도, 천심에도 부합되지 않습니다.”
 남효온은 세조의 말까지 인용하면서 복위의 정당성을 논했다.
 “세조는 예종(의경세자의 동생)에게 ‘나는 어려운 때를 만났지만 너(예종)는 태평한 때를 만났다. 내 행적을 따르지 말고 네 뜻대로 정치를 펼쳐라.’라고 훈계하셨습니다.”
 요컨대 세조는 왕권 확립을 위해 현덕왕후를 폐했지만, 태평성대를 맞은 예종·성종 때는 마땅히 복위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남효온의 상소는 도승지 임사홍, 영의정 정창손 등에 의해 일축됐다.
 당시 사람들은 남효온을 당나라 시대 인물인 손창윤에 견주며 ‘미친 서생’이라 손가락질했다. 손창윤이 누구인가, 당나라 인물인 손창윤은 당시 금지된 아들의 관례를 치른 뒤 이튿날 조정에 와서 “내 아들 관례를 마쳤다”고 자랑했다는 인물이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라고 짜증냈다는 것이다.
 남효온도 훗날 이런 시를 지었다.
 ‘북쪽 대궐에 일찍이 글 올리니 (北闕曾上書) 여론이 자못 어지럽게 들끓었네.(物論頗紛방) 공연히 손창윤이란 이름만 얻어(만得孫子號) 도롱이 걸치고 추강에 돌아왔네.(短蓑來秋江)’(<추강집> )
 한마디로 입바른 소리 했다가 손창윤처럼 ‘또라이’ 취급만 당하고 낙향했다는 자조섞인 시를 남긴 것이다.

 

 ■종지부 찍은 악연
 그러나 이후 서슬 퍼런 연산군 시절에도 김일손 등이 현덕왕후의 복위를 청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드디어 1512년(중종 6년) 검토관 소세양이 다시 현덕왕후의 복위를 거론하면서 거센 논쟁이 벌어졌다.
 대신들은 두 패로 나뉘어 열띤 토론을 벌였다. 1512년 11월부터 시작된 논쟁은 이듬해 3월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대간들이 하루에 4~5차례나  대궐 밖에 자리를 깔고 앉아 상소하는 이른바 복합(伏閤)을 펼쳤다. 홍문관도 날마다 상소문을 올렸다. 결국 ‘복위 불가론’을 고집하던 영의정 유순정이 죽은 뒤에야 ‘복위 찬성’ 쪽으로 물꼬가 터졌다.
 마침내 결국 현덕왕후를 복위시킨 중종은 1513년 4월 왕후의 무덤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에전에 옮긴 무덤을 깊이 팠지만 관이 보이지 않았다. 일꾼들이 어쩔 줄 몰랐다. 그런데 현장 감독관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났다.
 ‘너희들, 수고하는구나.’
 잠이 깬 감역관이 두어 자 더 땅을 파자 손바닥 넓이만한 관의 칠편(漆片)이 삽날에 찍혀 나왔다.(<용천담적기>)
 의경세자의 죽음과 현덕왕후의 폐위를 둘러싼 악연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친아버지를 향한 숭모
 그렇다면 의경세자는 어떻게 덕종으로 추존됐을까.
 의경세자가 죽자 둘째인 예종이 부왕(세조)의 뒤를 이었다. 하지만 예종(재위 1468년 9월~1469년 11월)의 재위는 너무 짧았다.
 당연히 후계자는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1466~1525년)이어야 했다. 하지만 제안대군은 3살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1454~1488)이 다음 순위였지만 병이 많다는 것이 걸림돌로 제기됐다. 결국 왕위는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자을산군(성종·당시 만 13살)으로 이어졌다.
 성종은 종법상 예종(작은 아버지)의 뒤를 이은 국왕이 되어 예종을 아버지로, 친아버지인 의경세자를 큰아버지(백부)로 모시게 됐다. 그러나 성종으로서는 친아버지를 그냥 둘 수 없었다.
 성종은 1471년(성종 2년) 친아버지인 의경세자를 ‘온문의경왕’으로 추존했다. 그러나  이 때는 종(宗)으로는 일컫지 않았다. 종법상으로는 예종의 아들이었으므로, 친아버지는 백부를 뜻하는 ‘황백고(皇伯考)’라 했다.
 성종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 해 사신으로 명나라를 방문한 성절사 한치의가 성종의 귀를 번뜩 뜨게 하는 말을 전한 것이다.
 “명나라 태감 김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례가 없지만 명나라 황제의 허가를 받으면 전례가 되는 것’이라고…. 명 황제의 재가만 받으시면….”
 이에 고무된 성종은 명나라 황제의 고명을 받으려고 조정의 공론에 부친다. 대신들은 설왕설래했다.      
 결국 신숙주·한명회 등은 임금의 뜻이 워낙 확고하니 어쩔 수 없다고 꼬리를 내린다. 하지만 정인지·정창손 등은 여전히 “아니된다”고 반대한다. 
 “대통을 이어 국왕이 됐으므로 사친(私親)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예(禮)입니다. 명나라에 주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명나라 예조는 조선을 가리켜 ‘예를 모르는 나라’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종은 끝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1475년) 명황제의 고명을 받아온다. 명나라 황제는 의경세자에게  내린 시호는 ‘회간선숙공현온문의경왕(懷簡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이었다. 이로써 성종은 친아버지인 의경세자의 묘호를 덕종(德宗)이라 올리고 종묘에 부묘한 것이다.
 그렇다. 이번에 반환된 어보는 바로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종묘에 봉안된 ‘덕종어보’인 것이다.
 무게 4.45㎏의 어보에 담긴 파란만장한 역사를 알면 더더욱 반환된 보물의 가치가 돋보이지 않을까.
 역사란 이렇게 흥미진진한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41 관련글 쓰기

  잘 알다시피 백제는 기원전 18~기원후 660년까지 678년을 이어온 고대국가였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백제는 아무래도 웅진(475~538)~사비 시기(538~660)의 백제일 것이다.
 물론 이 185년의 백제 역사도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백제가 또 있다. 기원전 18~기원후 475년 사이에 한성을 도읍으로 삼은 백제이다. 놀라지마라. 이 한성백제는 전체 678년의 백제역사 가운데 4분의 3에 해당되는 492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31명의 백제 임금 가운데 3분의 2가 넘는 21명이 한성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풍납토성 복원도. 온조왕이 처음 쌓을 때는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즉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게' 궁실을 짓는다는 것이 목표였다.

고구려를 탈출한 온조 세력은 강과 바다(서해), 산과 들이 어울린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했다. 온조의 형인 비류는 처음부터 바닷가인 미추홀(인천)에 자리를 잡은 후 동생(온조)세력에 합류했다.
 고이왕(재위 234~286) 때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았고, 근초고왕 때는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였다.(372년)
 백제가 한강 유역과 서해를 차지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당대의 중국 사서(<송서> <남사> <양사>)는 “백제가 중국 동북부 요서(遼西)지방까지 진출했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이른바 ‘백제의 요서경략설’이다. 물론 우리측 사료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는 없는 기록이라 ‘믿을 수 없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삼국사기> ‘열전·최치원전’에 의미심장한 내용이 나온다.
 “고구려와 백제는 백만강병으로 남으로 오·월을 침해하고 북으로 연·제·노를 위협해서 중국의 두통거리가 되었다.”
 물론 최치원은 백제의 요서경략을 지칭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양국가’인 백제가 고구려와 경쟁하며 앞다퉈 대륙에 진출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과문한 필자가 요서경략설의 진위를 함부로 논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다. ‘한성기’ 백제가 백제의 절정기였음을 ‘분명한 팩트’임을 강조한 것 뿐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한성백제’를 떠올리면 왠지 애잔한 느낌이 드니 말이다.
 아무래도 475년 9월에 있었던 ‘한성백제의 최후’가 너무도 비참했기 때문이리라. 한성은 7일 밤낮에 걸친 3만 고구려군의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개로왕은 백제 망명객 출신의 고구려 장수들(걸루·만년)에 붙들려 한껏 욕보임을 당한 뒤 참수됐다. 개로왕의 아들(혹은 동생)인 문주가 신라로부터 1만 군대를 지원받아 달려왔지만 때는 늦었다. 한성은 이미 폐허가 된 것이다. 문주는 피눈물을 흘리며 웅진으로 천도한다. 한성백제는 이후 ‘잊혀진 왕국’으로, 도읍지 한성은 ‘버려진 땅’으로 치부됐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폐허가 된 망국의 도읍지를 보고 읊었다는 은나라 성인 기자(箕子)의 ‘맥수지탄(麥秀之嘆)’이 떠올린다.

풍납토성에서 확인된 주거지. 한성백제 관료들의 주거지로 추정된다.

 “(파괴된 궁실터에서) 보리가 잘 자랐고, 벼와 기장도 파릇하구나. 어리석은 애(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 내 말을 좀 들었더라면….(麥秀漸漸兮 禾黍油油兮 彼狡童兮 不與我好兮)”(<사기> ‘송미자세가’)
 한성백제는 그 은나라처럼 ‘잊혀진 왕국’으로, 도읍지 한성은 은허(殷墟)처럼 ‘버려진 땅’으로 치부된 것이다.
 그렇게 잊혀졌던 한성백제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 1997년 1월이었다. 한 고고학자(이형구 당시 선문대교수)가 공사 중이던 풍납토성 내부의 아파트 터파기 건설현장을 잠입해서, 무수히 박힌 한성백제 문화층을 발견한 것이다. 대규모 개발로 흔적조차 영영 사라질뻔한 한성백제가 1522년 만에 현현한 것이다. 발굴 결과 풍납토성은 연인원 138만명을 투입, 아파트 5층 높이로 구축한 어마어마한 성이었음이 확인됐다. 학자들은 이제 왕·귀족 및 도성민의 거주성(풍납토성)과 배후성(몽촌토성), 무덤(석촌동 고분) 등을 세트로 묶어 ‘한성백제의 도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풍납토성에서 확인된 우물터. 당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구이다.

 그렇다면 서울은 ‘정도(定都) 600년’이 아니라 ‘정도 2000년’이 되는 것이다.
 오는 6월 필자의 시선을 붙잡는 이벤트가 독일 본에서 열린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총회이다. 여기서 ‘공주·부여·익산의 백제역사지구’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환영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백제 역사의 4분의 3를 차지하는 ‘한성백제’가 빠졌다. 뒤늦게 서울시가 ‘확장(extention)’ 방식으로 ‘한성백제 지구’를 등재할 계획이라고 한다. 일단 공주·부여·익산 지구의 등재가 마무리되면 백제역사라는 큰 틀에서 한성백제를 ‘확장 등재’하겠다는 것이다. 당연한 계획이다. 유네스코가 제시한 세계유산의 등재조건은 ‘진정성(authenticity)’과 ‘완전성(integrity)’이다.
 ‘한성’은 어떨까. 우선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판단하는 ‘진정성’에서는 당연히 합격점을 받을 수 있다. 결국 유산의 본모습, 즉 본연성을 찾는 노력을 판정하는 ‘완전성’이 등재여부의 관건이 될 것이다. 이것이 절대 규제완화의 단견으로, 시간에 쫓겨 섣부른 대책을 세워서는 안된다는 점을 웅변해준다. 물론 세계유산 등재가 ‘절대선’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난 ‘한성백제 492년의 역사’, 그 희대의 선물을 발로 차버리는 죄인이 될 수는 없지 않는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40 관련글 쓰기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23회 주제는 ‘백성 버린 선조의 피란길, 그 참담한 징비록’입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1592년(선조 25년) 4월 30일 선조 임금이 피란길에 오릅니다.
 임진왜란 발발로 왜군이 쳐들어오자 ‘무조건 피란’을 결정한 것입니다. <징비록>, <선조수정실록> 등을 보면 목불인견입니다. 선조가 벽제~혜음령을 지나자 밭을 갈던 백성이 대성 통곡합니다.
 “나랏님이 백성을 버리면 누굴 믿고 살라는 것입니까.”
 선조 일행이 임진나루에 닿았을 때 칠흑 같은 밤이었습니다. 임진강변의 승정(丞亭·나루터 관리 청사) 건물을 헐어 불을 피웠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임진나루 건너의 동파역에 도착하자 파주 목사와 장단 부사가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자 임금이고 뭐고 없었습니다. 하루종일 굶었던 호위병들이 임금에게 바칠 수라를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네요. 한심 스토리는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임금의 총애를 받던 사관 4인방(조존세·김선여·임취정·박정현)은 사초책을 불구덩이에 넣은 뒤 도망쳤답니다. 이것이 ‘사초 폐기’ 사건입니다. 임금의 피란길을 끝까지 수행한 자는 어의 허준을 비롯해 17명에 불과했습니다. 하기야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갔는데 어떤 신하가 임금을 지키겠습니까.
 이후 임진나루까지 진격한 왜군은 짐짓 후퇴한 척 조선군을 유인했습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던 야전사령관(도원수) 김명원이 도강을 주저했습니다. 임시 조정은 “왜 빨리 진격하지 않느냐”면서 문신인 한응인을 급파합니다.
 김명원으로부터 지휘권을 빼앗은 한응인은 단숨에 임진나루를 건넜습니다. 그러나 왜군의 유인책에 말린 조선군은 추풍낙엽처럼 패합니다. <징비록>은 5월17일의 ‘임진나루 전투’를 두고 “봄날 꽃놀이 하듯 군대를 다뤘으니 대패한 것이 당연하다”고 한탄했답니다.
 임진나루는 이렇듯 왜란의 수치와, 위기에 처한 인간 군상들의 온갖 행태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서울~파주~개성~평양~의주를 잇는 유서깊은 ‘1번 국도’의 관문이기도 했습니다.
 오는 5월부터 군 보안 문제로 출입이 제한됐던 임진나루 구간(1.2㎞)이 단장돼 44년만에 개방된다고 합니다. 제가 군 부대의 허락을 얻어 답사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모쪼록 탐방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일을 반성하고 경계하는 ‘징비(懲毖)’의 현장으로 삼아야겠습니다. 늘 강조하지만 역사는 배우는 자의 몫이니까요.(다음은 관련기사입니다. 팟캐스트를 들으며 읽으시면 도움이 됩니다)

 

  임진나루는 파주~개성~평양~의주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1번 국도의 효시인 셈이다.
 그런데 이 임진진은 200년 태평성대, 전쟁을 모르고 살았던 조선의 수치스러운 패배 사연을 담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누란의 위기에 빠진 상황을 접한 온갖 군상(群像)들의 행태를 낱낱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1592년 4월30일 새벽. 선조가 피란길에 오른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한양 근처까지 밀고 올라오자 조정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조정은 피란을 결정한다. <선조수정실록>과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 등 사료를 보면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다.
 “나라님이 백성을 버리시면 누굴 믿고 살란 말입니까?”
 피란길에 오른 선조임금이 벽제~혜음령을 거쳐 마산역을 지날 무렵. 비는 억수같이 내리고…. 밭을 매던 백성들이 통곡했으나 소나기에 파묻혀버릴 뿐이었다.
 임진나루를 건널 때는 이미 밤이 되었다. 날은 어두운 데다 비까지 내리자 앞길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왕 일행은 임진강 남쪽 언덕에 있는 승정(丞亭ㆍ나루터를 관리하던 청사) 건물을 헐어 불을 피웠다. 동파역(파주 진동면 동파리)에 닿은 것은 밤 8시였다.
 파주 목사 허진과 장단 부사 구효연이 왕을 위해 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자 왕이고 뭐고 없었다. 하루 종일 굶었던 호위병들이 주방에 들어가 음식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운 것이다. 급기야 임금이 먹을 음식마저 없어지자 문책이 두려워진 허진과 구효연의 선택은? 삼십육계 줄행랑이었다.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꼬리 무는 도주 행렬
 하기야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14일조’의 피눈물 나는 후회.
 “태평을 누린 이래로 내병(內兵) 없애기에 힘썼다. 때문에 위태로운 시기에 임하여 흩어지는 것이 적을 본 군사들보다 심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 피눈물 나는 치욕의 역사를 서술해야 할 사관(史官)들도 도망쳤다.
 “사관 조존세, 김선여, 임취정, 박정현 등은… 상(임금)이 자식처럼 대우했다. 그런데 왕이 요동으로 건너갈 것을 결정하자 도망칠 것을 몰래 도모했다. 먼저 사초책(史草冊)을 불구덩이에 넣고 불을 지른 뒤.…”(<선조수정실록> ‘1592년6월1일조’)
 그렇다면 명망 대신들은 임금을 따랐을까. 천만의 말씀.
 “임금이 경성을 떠날 때 국가가 틀림없이 망할 것이라는 요사스러운 말이 퍼져(중략)명망 진신(縉臣)들이 보신책을 품었다. 경성~의주에 이르기까지 문·무관은 겨우 17인이었으며….”
 시골 백성들은 도리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임금이 때때로 굶는 상황이 연출되자 ‘껍질만 벗긴 현미로 밥을 지어 바치기도’했다. 언제 봐도 착하디착한 우리 백성들이다.
 이제 ‘한심사건 Ⅱ’편을 보자. 무주공산인 한양을 점령한 왜군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5월10일 파주~임진진에 도달한다. 하지만 배는 이미 임진강 북쪽으로 모두 끌어다 놓은 상태였다. 왜군은 물살이 세서 쉽게 건널 수 없었다. 선조도 경기도와 황해도 군사들을 모아 임진강 사수에 전력을 기울이라고 명령해놓은 상태였다. 10일이 넘도록 임진진을 두고 대치하는 상황에 이르자 적이 꾀를 낸다. 우선 강화를 권하는 사신을 우리 측에 보낸다.
 “우리가 물러나게(退) 하게 된 것은 강화를 위한 것이다. …전하(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귀국에 길을 빌려(假道), 명나라에 원한을 갚은 의향뿐이온데.…” 

 ■두 명의 지휘관
 그러면서 왜군은 임진진 남쪽 강가에 세운 막사를 불태운다. 소수의 척후부대만을 남긴 채 나머지 병력을 파주까지 후퇴시키는 등 술수를 부린다. 하지만 평양의 임시조정은 엄청난 오판을 내린다.
 가뜩이나 적이 임진강을 쉽게 건너오지 못하자 낙관론에 젖어있던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왜군이 강화를 요청하고, 군대를 임진강에서 철수하자 잔뜩 고무된 것이다. 13일 경기감사 권징이 장계를 올린다.
 “적군의 세가 고립무원입니다. (중략)기운이 피로하여 급격히 꺾여 막사를 불태우고 도망치려는 징조가 있으니 추격하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임진강 전투의 책임자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었다. 조정은 “왜 빨리 진격하지 않느냐.”고 교지를 내렸지만 김명원은 주저했다.
 그러자 평양의 조정은 “전세가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데도 반격하지 않는다.”고 의심한다. 그러면서 문신인 한응인(韓應寅ㆍ도순찰사)을 불러 이해 못할 지시를 내린다.
 “경은 이명원의 절제(지시)를 받지 말고 기회를 놓치지 마라.”
 세상에! 전투 현장에 가서 야전사령관의 지휘를 받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다니…. 

선조가 피눈물을 흘리며 건넜던 임진나루. 1번 국도의 관문이었다.


 ■군대 다루기를 봄날 놀이하듯 하다.
 선조는 한응인에게 정예병 3000명을 준다. 이들은 모두 강변 출신 사병들로 오랑캐와의 싸움에서 잔뼈가 굵은 최정예병이었다. 한응인은 쏜살같이 임진진으로 달려간다. 그런데…. 제 아무리 정예병인들 얼마간의 짬이 필요했다. 하지만 한응인의 마음은 급했다.
 “빨리 강을 건너 진격하라!”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병사들 가운데 반론의 목소리가 터졌다.
 “멀리 오느라 피곤한데 내일 적정(敵情)을 제대로 살핀 뒤에 진격하는 게 옳을 줄 압니다.”
 백번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문신인 한응인은 “빨리 진격하라.”는 왕명을 받았던 터라 마음이 급했다. 불평불만 분자 몇 명을 끌어내 목을 베어버린다. 하늘처럼 여기라는 백성들의 목숨을 개·돼지 취급한 것이다.
 야전사령관 김명원은 그 모습을 보고는 눈과 귀를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한응인이 전략 전술을 모르는 문신이지만 임금이 친히 “김명원의 지시를 받지 말라.”는 특명을 내렸으니 참우리 측 진영에서는 이긴 줄 알고 환호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방의 적 7~8명이 윗옷을 벗은 채 대검을 휘두르면서 뛰쳐나오자 아군은 추풍낙엽처럼 무너졌다. 강안까지 밀린 군사들은 강물에 투신하지 않으면 적의 칼에 찔려죽었다. 단 한 명도 왜군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1592년 5월17일 이곳 임진진에서 펼쳐진 임진강 전투의 ‘한심 스토리’다. 무기력한 조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군대 다루기를 봄날 놀이하듯 하니 어찌 패하지 않겠는가?”
 서애(西厓) 유성룡의 한탄이 하늘을 찌른다. 서애의 반성을 더 들어보자.
 “순찰사들은 모두 문인 출신이었다. 병무에 익숙하지 않았고, …요지(要地)를 지키지도 못했으며….”
 한때는 철옹성(산성)을 쌓고, 필살의 청야전법을 쓰면서 수와 당나라 같은 제국을 망하게 하거나 번번이 골탕 먹인 게 우리 민족인데…. 그러나 농업 국가이자 유교국가인 조선의 방어체제는 어설펐다.     

선조 임금이 망명길에 넘었던 혜음령. 선조가 고양과 파주 광탄을 잇는 이 고개를 넘자 백성들은 통곡했다고 한다


 ■태평성대의 그늘
 세조(1417~1468년) 때부터 조선의 방위개념은 진관(鎭管) 체제와 그 뒤를 이은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였다. 진관 체제는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유사시에는 군사 체제로 전환하는 향토단위의 방어전략이었다. 강성문 교수(육사 명예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농업사회였으니 예전처럼 청야전술을 펴고, 산성에 틀어박혀 적군을 막는 일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평지에 읍성을 쌓고 농민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정기적으로 군사훈련을 받는 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하지만 군사에는 문외한인 수령이나, 백성들의 입장에서 정기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천재지변을 이유로 정기적인 군사훈련을 기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농사일이 바쁜데 무슨 군사훈련? 뭐 이런 식이었다.
 개국(1392년) 이후 200년간이나 평화를 유지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양반관료층의 토지 집적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자영농이 소작농으로 전락함에 따라 병농일치, 양인개병의 원칙이 무너졌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제승방략체제였다.
 제승방략은 유사시에 여러 지역의 군사들을 특정장소에 집결시켜 대처하는 체제. 이때 조정은 제승방략의 군사 지도자를 파견하게 된다. 이런 방어체제는 신속하지만, 대규모의 침공을 받으면 무용지물로 전락한다.
 “제승방략 체제 아래서는 전쟁이 나면 모든 군사가 모여 조정이 보내는 지휘관만을 기다리는 형편이 됩니다. 장수가 오지 않고 적의 공격을 받으면 군대는 흩어지고 결국 패하게 됩니다.” 

선조임금이 묵었던 동파역. 임금을 따랐던 하급관리들이 임금의 수라를 먹어치운뒤 도망갔다.


 ■장수는 오지 않고 왜군은 턱밑까지 쫓아오고…
 역시 <징비록>의 고발이다. 임진왜란 때도 문경의 수령들이 제승방략에 따라 한 곳에 모여 조정이 파견하는 지휘관을 기다렸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지휘관(순변사)은 도착하지 않았고, 도리어 왜군의 진격이 더 빠르자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순변사 이일이 문경에 도착했을 때는 고을에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다시 그런 맥락에서 임진강 전투의 ‘한심 스토리’를 더듬어보자. 임진강 전투는 도원수(야전사령관)의 지휘 아래 진행됐다. 하지만 임진강 도하에 어려움을 겪은 왜군이 화해를 청하는 서신을 보내면서 짐짓 군대를 후퇴시키는 등 술수를 부리자 그만 속아 넘어가고 만다. 평양의 망명정부는『적군이 고립 무원하여 피곤하니 쳐야 한다.』는 경기감사의 낙관론에 빠진다. 그러면서 임진강 도강에 소극적인 야전사령관(김명원)을 의심하여 또 다른 지휘관, 그것도 문신(한응인)을 파견한다.
 그러면서 “너는 도원수(야전사령관)의 지시에 따르지 마라.”는 명령을 내린다.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둘인 말이 앞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나폴레옹은 “작전을 펼 때에는 현명한 장수 두 사람보다 용렬한 장수 한 사람이 더 낫다.”고 했다. 정 야전사령관의 작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면 될 일 아닌가. 
 임진강 전투에 투입된 인원은 1만5000명이었고, 왜군은 1만2000명이었다. 병력, 숫자나 지형지물의 측면에서 유리했음에도, 한심한 위와 아래가 연출한 엇나간 이중주로 참패의 고배를 든 것이다.
 <징비록>을 비롯한 각종 사료는 임진강 패전 이후 인간 군상들의 행태를 소설처럼 묘사한다.
 “임진강 도강공격은 절대 안 된다.”고 섣부른 공격을 극구 반대했던 노병 유극량(劉克良). 그는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비록 뜻은 같지 않지만 어찌 가만있으리오.”하면서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다.
 이때 ‘쌍두마차’김명원(도원수)과 한응인(도순찰사), 그리고 박창간(朴忠侃ㆍ검찰사) 등은 모두 청단의(파란 색의 비단 옷)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박충간이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를 도원수(김명원)라고 오해한 병사들이 “원수(元帥)가 도망간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강을 지키던 병사들이 모두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대패한 김명원과 한응인은 평양으로 돌아왔지만 특별한 문책은 없었다. 김명원은 훗날 좌의정을 지냈다.
 패전의 책임을 진 한응인에게는 공을 세워 보답하라는 뜻에서 강동지구(江東地區) 방수(防守)직이 내려졌다. 한응인은 나중에 우의정에 올랐다. “왜군은 고립무원이니 빨리 쳐야한다.”고 잘못된 정보를 올렸던 경기감사 권징(權徵)은 가평으로 피했다.  

겸재 정선의임진적벽도.수려한 절경을 자랑하지만, 임금이 도망가고, 유극량 장군이 헛된 죽음을 당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이화여대박물관 소장  

 ■억울한 죽음
 왜군은 임진강 전투에서 크게 이겼음에도 쉽게 임진강을 건너지 못했다. 열흘 후에야 임진강 상류로 올라가 조그만 배를 타고 몰래 아군의 상황을 살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이곳을 지키던 부원수 이빈이 화살 하나 쏘지 않고 도망친 게 아닌가. 모든 군사가 흩어졌다. 이로써 임진강·한탄강 방어선이 무너져 조선은 누란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산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았으나 억울하게 죽은 이도 많았다. 이전에 김명원과 함께 한강 사수에 나섰던 부원수 신각은 김명원의 곁을 떠나 양주 산골짜기에 들어가 적 60명의 머리를 베었다. 하지만 김명원은 신각(申恪)이 주장(主將)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보고했다.
 조정은 5월18일 선전관을 시켜 전투에 참전하러 연천(한탄강)에 와 있던 신각의 사형을 집행하게 했다.
 그런데 선전관이 연천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각이 양주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이 평양조정에 알려졌다. 이에 조정은 사형집행을 중지시키기 위해 급히 다른 선전관을 보냈다. 하지만 이 선전관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신각의 목이 나뭇가지에 효수된 뒤였다. 억울한 신각에게는 구십 살의 노모가 홀로 계셨으니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조금만 쉰 후에 적정을 살핀 뒤 공격하자.”고 건의한 죄로 한응인에게 죽임을 당한 이름 모를 장병들의 넋은 누가 달래줄 것인가.
 그리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스러져간 백성들은 어떻고…. 역사를 읽으면 역시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전쟁의 결과가 어떻든 관계없다. 전쟁은 무고한 백성들의 억울한 떼죽음만을 낳는다. 반면 살 수 있는 지위의 사람들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살아남아 떵떵거린다.
 임진나루는 임진왜란 때의 뼈아픈 패배를 거울삼아 숙종과 영조 때 군사요새로서 격을 갖추었다. 서울~평양~의주를 잇는 1번 국도의 관문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일제강점 초기 일본군에 의해 이웃한 장산진과 함께 모두 헐려나갔다. 문루와 성벽, 부속건물 등은 겸재 정선의 그림에서나 남아있다.
 선조가 피란길에 머물렀고, 말발굽 소리로 분주했던 왕년의 역터인 동파역(진동면 동파리)은 어떤가. 초여름 수풀 속에 표지석 하나 없는 그 슬픔의 현장에는 군 훈련장이 서있다. 바로 곁에는 해마루촌 60여 가구가 들어서 있다. 민통선 이북의 전원주택촌인데, 고즈넉한 풍취를 자아낸다. 치욕의 역사를 담고 있는 현장이어서인가. 어느 곳에서도 아픈 역사를 떠올릴만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니….
 임진나루는 이렇듯 왜란의 수치와, 위기에 닥친 인간 군상들의 온갖 행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그동안 군 보안 문제로 출입이 제한됐던 임진나루 구간(1.2㎞)이 단장돼 44년만에 개방된다고 한다.
 앞서 살펴봤듯이 필자가 군부대의 허락을 얻어 답사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모쪼록 탐방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일을 반성하고 경계하는 ‘징비(懲毖)’의 현장으로 삼아도 좋겠다.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39 관련글 쓰기

 이번 주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22회의 주제는 ‘광해군이 부러워한 고려외교’입니다.
 조선의 광해군은 조정의 공론을 한심스러워하면서 “제발 고려의 외교 좀 배우라”고 했답니다.
 세상 돌아가는 형세도 모르면서 말로만 ‘숭명배청’이니 ‘재조지은’이니 떠들면서 주야장천 다쓰러져가던 명나라만 섬기려하는 대신들을 ‘한심한 인사들’이라 했다는 겁니다.
 그런게 광해군은 왜 ‘고려의 외교를 배우라’고 했던 걸까요. 고려는 비록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피곤한 줄다리기 외교를 펼쳤답니다. 하지만 거란은 물론 세계를 제패했던 몽골(원)의 애간장을 녹일만큼 능수능란한 곡예외교를 펼쳤습니다. 오죽했으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거란이 서희의 ‘세치혀’에 말려 280리나 되는 땅(강동 6주)을 떼주었겠습니까. 서희로 대표되는 고려의 외교관들은 강대국 황제들을 쥐략펴락하면서 어지간히 괴롭혔답니다.
 심지어 세계제국 원나라는 고려의 애간장 외교를 견디다 못해 재침공의 계획까지 세웠지만 끝내 포기했다네요.
 “지금 고려가 원나라를 섬기고 있지만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만약 저들이 험준한 산에 기댄다면 100만 대군을 동원해도 함락시킬 수 없다”는 불가론 때문이라네요.
 과연 고려의 외교가 어땠기에 송나라, 거란은 물론 원나라까지 벌벌 떨었을까요. 고려의 균형 외교가 주는 교훈, 그리고 그것을 부러워한 광해군의 장탄식…. 미국과 중국은 물론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눈터지는 균형외교를 펼쳐야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되돌아봐야 할 주제입니다.

 다음 관련기사를 보면서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에서 들어보십시오.

 

  “요즘 우리나라 인심을 살펴보면 밖으로 큰소리만 일삼고 있다. 우린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1621년, 광해군이 하늘이 꺼질 듯 장탄식한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급박했다. 명나라는 요동 전투에서 신흥강국 후금에 의해 줄줄이 패해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공론은 여전히 다쓰러져 가는 명나라 편이었다. 후금을 오랑캐의 나라로 폄훼하면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절묘한 등거리 외교로 균형을 잡아온 광해군으로서는 이같은 공론이 한심했다.
 “명나라 장수들이 차례로 적(후금)에게 항복하고 있다. 심지어 요동사람들이 명나라 장수를 포박해서 후금군에 넘겼다고 한다. 중국의 형세가 이처럼 급급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인심은 큰소리만 치고….” 
 .

 그러면서 광해군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제발 고려(의 외교)를 배우라”고….
 “이럴 때(명청교체기), 고려처럼 안으로 스스로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쓴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한심하다. 무장들 모두 겉으로는 결전을 벌이자고 하면서 막상 서쪽 변경에 가라면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 두려워 한다. 이 또한 고려와 견주면 너무도 미치지 못한다.”(<광해군일기>)
 광해군은 ‘고려처럼’만 하면 강대국끼리 충돌하는 격동기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광해군은 ‘고려의 외교’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 외교의 전통을 쌓은 서희의 묘. 서희는 세치혀로 거란80만대군을 물리쳤고, 강동 6주까지 덤으로 얻는 외교사상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다

 ■멘붕에 빠진 고려조정
 그랬다. 고려의 외교술은 대단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외교관’이라는 서희의 후예들이 아닌가.
 고려의 외교에 주춧돌을 놓은 서희의 외교술을 되돌아보자. 993년(고려 성종 12년) 10월,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의 대군이 고려를 침공한다.
 고려군도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 문하시랑 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방어군을 편성했다. 거란의 선봉은 파죽지세로 고려 서북방 봉산군(황해도 북서)을 점령했다. 서희가 봉산군을 구원하려 나설 즈음, 거란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한 이유를 퍼뜨리고, 몇 차례에 걸쳐 고려에 문서를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거란이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다. 그런데 고려가 거란 강토의 경계를 침탈하기 때문에 정벌하는 것이다. 80만 대군이 짓밟을테니 속히 항복할지어다.”
 그러자 고려 조정은 ‘멘붕’에 빠졌다. “빨리 군신을 이끌고 항복하자”고 아우성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서경 이북(평양)을 거란에 떼주고 황해도 황주~절령까지를 국경으로 삼자”는 자들도 있었다. 다급해진 성종(고려)은 땅을 떼어주자는 이른바 ‘할지론(割地論)’을 채택하려 했다.
 “서경 땅을 떼어주려던 임금은 서경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었다. 그럼에도 곡식이 많이 남자 적군의 수중에 들어갈까 두려워한 나머지 대동강에 던져 버리도록 명했다.”(<고려사절요>)

 

 ■“거란의 엄포는 공갈”
 이 때 서희가 손사래를 치고 “절대 아니되옵니다”라고 소리치며 급히 나섰다.
 “먹을 것은 백성의 생명인데, 어찌 쌀을 버리십니까. 차라리 적에게 이용되는 편이 낫지, 강물에 던지는 것은 하늘의 뜻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 서희는 냉정한 시각으로 상황을 판단·정리해서 성종에게 간했다. 서희는 처음부터 거란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바 있다.
 거란군이 진군하지 않고 자꾸 항복만 강요하며 변죽만 올리는 것이 수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거란의 항복 권유문서와 그 간의 행동을 보니 협상할 수 있을 것도 같다”고 누누이 간언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성종이 끝내 ‘할지’를 결정하자 목숨을 건 간쟁에 나선 것이다.   
 “(발해가 망한 뒤) 북쪽의 땅 수백리는 생여진(生女眞)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광종 임금(재위 949~975)이 되찾아 가주와 송성(이상 평안도)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침공한 이유는 바로 이 두 성만 빼앗는데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서희는 “거란이 고구려 옛 땅 운운하며 큰 소리치는 것은 공갈에 불과하다(其聲言取高句麗舊地者 實恐我也)”고 단언했다.
 즉 거란이 가주와 송성 등 두 개 성만 원하는데 서경 이북까지 내주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게 서희의 주장이었다. 서희는 또 “삼각산 이북은 고구려의 옛 땅이니 절대 내줄 수 없다”면서 “한번 땅을 떼어주면 그들의 끊임없는 요구에 시달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땅을 떼어주면 영원토록 수치가 될 것입니다. 원컨대 임금께서는 도성에서 기다리면서 신들이 한 번 싸움을 한 연후에 의논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요컨대 서희는 섣부른 ‘할지’를 채택하는 대신,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면서 협상에 임할 것을 주청한 것이다.  

 

 ■“장기전과 협상을 겸비하자”
 서희가 나름 자신감을 보인 까닭이 있었다. 바로 만만치 않는 고려의 국방력이었다.
 고려는 태조 왕건 이래 서경(평양)을 북방기지로 삼아 주변에 여러 성책을 쌓아 방비를 단단히 해놓은 바 있다. 이후 정종-광종-경종 시대에 걸쳐 꾸준히 영토를 넓히는 등 북방정책을 이어갔다. 특히 정종 시대에는 거란에 붙들려 있던 최광윤의 보고에 따라 거란의 침략의도를 간파하고 군사 30만을 편성하기도 했다.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군비를 정비해서 좌우군을 설치하고 평북의 서북계와 함남의 동북계에 각각 병마사를 보내 방비를 튼튼히 했다. 전쟁 3년 전인 990년에는 평양부와 안성 등 11역에 쌀 9375석을 하사하기도 했다. 고려는 결국 북방의 지세에 맞는 축성과 여진족 축출의 경험을 살려 만만치 않은 전쟁억지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전쟁을 일으킨 거란으로서도 쉽사리 공격작전을 펼치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장기전’과 ‘협상’을 겸하자는 서희의 주장은 맞았다.
 거란의 소손녕은 고려의 묵묵부답이 계속되자 안융진(청천강 연안인 평안도 안주 입석면)을 공격했다. 그러나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격파됐다. 다시 기가 꺾인 소손녕은 감히 전진할 생각을 못한채 재차 항복만 권유했다.

서희가 거란 소손녕과의 회담에서 얻어낸 강동 6주. 고려는 영토를 넓혔을 뿐 아니라 고구려의 적자임을 만방에 알리는 망외의 소득을 올렸다.(‘장철균의 <서희의 외교담판>, 살림, 2013’)

 ■“누가 세치혀로 공을 세우겠는냐”
 그러자 고려 성종이 신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누가 능히 거란 진영에서 말로써 군사를 물리치고(以口舌却兵) 역사에 길이 남을 공을 세우겠느냐.”
 누구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서희가 손을 들었다.
 “신이 비록 부족하지만 한번 나서보겠나이다.”
 고려와 거란의 명예를 건 불꽃 튀기는 외교전쟁이 벌어졌다. 소손녕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소손녕은 거란 경종(969~982)의 사위이자 중국 송나라를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회담이 진행되기 전부터 양측의 심리전은 대단했다.
 적진(거란진영)에 들어간 서희는 일단 통역을 시켜 회견 때의 예절을 물었다. 준비 없이 회담에 임했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었기에 먼저 탐색전을 벌인 것이다.
 소손녕은 “나는 대조(大朝·거란)의 귀인이니 마땅히 고려사신(서희)이 뜰 아래서 (당 위에 있는) 나에게 절해야 한다”고 먼저 도발했다.
 서희 역시 결코 꿀리지 않았다.
 “무슨 소리? 뜰 아래에서 절을 한다는 것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예의가 아닌가. 두 나라 대신이 서로 마주 보는데 무슨 가당찮은 이야기인가.”
 소손녕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두 사신은 2~4차례나 신경전을 벌였지만 좀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화가 난 서희는 그냥 객사로 돌아와 누운채 일어나지 않았다. 소손녕은 이 소식을 듣고서야 뜰이 아닌 당(堂) 위에서 예를 차리도록 허락했다. 서희는 그제서야 소손녕과 대등한 자리에 앉아 본격적인 회담에 나섰다. 

 
 ■서희와 소손녕의 피말리는 외교전
 회담 역시 팽팽한 접전으로 이어졌다. 소손녕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거란의 소유인데, 고려가 이를 야금야금 침식하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니 대국(거란)이 이를 토벌하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땅을 떼어 바치고 조회한다면 봐줄 것이다.”
 그러니까 신라 땅에서 일어나 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왜 지금은 거란의 영역이 된 고구려의 고토를 야금야금 침범하느냐는 것이었다.
 서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응수했다. 
 “그 무슨 소리인가.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다. 나라 이름을 봐라. 고구려를 계승했다 해서 고려라 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평양에 도읍을 둔 까닭이다. 또 고려가 거란의 영토를 침식하고 있다고? 아니다. 그 사이 여진이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그 때문에 고려가 거란을 찾아 조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서희는 한술 더 뜬다.
 “고려가 거란에 조회하고 조공을 바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주면 된다. 그 곳에 성을 쌓고 도로를 내면 고려와 거란이 직접 통할 수 있지 않느냐. 그렇게 되면 고려는 거란에 조빙(朝聘·알현하고 조공을 바침)을 할 것이다.”
 서희는 마지막으로 “장군(소손녕)이 거란 황제에게 고려의 제안을 알린다면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느냐”고 쐐기를 박았다.
 할 말을 잃은 소손녕은 거란 황제(성종·982~1031)에게 사실을 고하며 혀를 내둘렀다.
 “고려에서 화친을 칭했나이다. 마땅히 전쟁을 중지하심에 옳을 줄 아옵니다.”

 

 ■명분(거란)과 실리(고려)의 성과
 이것이 바로 서희가 ‘세치의 혀(三寸舌)’로 얻은, 압록강 이동 지역인 ‘강동 280리’에 건설했다는, ‘강동 6주’이다.
 고려로서는 상상도 못할 망외의 외교적 성과였다. “당신 나라에 직접 조공을 바치려면 양국 국경이 맞닿아야 하고, 따라서 가운데 양국 관계를 방해하는 여진 땅을 고려에 넘겨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니….
 무엇보다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여서 국호를 고려라 했고, 그 때문에 평양을 도읍(서경)했다고 주장함으로써 협상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한 것이다. 사실 욱일승천한 거란의 국력을 볼 때 도리어 거란이 강동 6주를 할양하겠다고 주장해도 고려로서는 쉽게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되레 세치의 혀를 놀려 궤변일 수도 있는 주장을 현실로 만들어 성사시켰으니…. 서희 외교는 전쟁에서 가장 바람직한, 싸우지 않고 승리한 외교전의 대표사례라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서희는 거란에 ‘사대(事大)’라는 명분을 내주는 대가로 군사요충지이자 고구려의 고토인 강동 6주라는 실리를 챙긴 것이다.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 서희의 가장 의미심장한 승리는 고려가 고구려의 적자임을 공식확인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의 역사는 공식적이고 객관적으로 고려의 역사로 편입된 것이다.   

강화도에 있는 고려 고종의 홍릉. 강화도 정부를 이끌었던 고종도 끈적끈적한 외교로 세계최강 몽골을 골치아프게 했다.

 

■송나라를 꿈쩍 못하게 한 외교
 서희-소손녕 회담 이후에도 고려의 후속외교는 더욱 빛났다.
 “994년, 거란의 연호를 시행했다. 6월, 고려는 원욱을 송나라에 보내 ‘송나라와 합동작전으로 거란을 정벌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이제 겨우 북쪽 변방이 안정됐는데, 경솔하게 군사를 움직일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고려는 송나라와 국교를 끊었다.”(<고려사절요>)
 참으로 치밀하고 노련한 외교술이 아닌가. 이미 거란과의 전쟁에서 국고가 바닥나 있었던 송나라는 고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니까 고려는 송나라와의 외교관계 단절이라는 명분과 격식을 갖추면서 거란 사대에 따른 외교절차를 마무리한 것이다. 밀사를 파견해서 송나라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한 제안을 함으로써 국교단절의 책임을 송나라에 돌리는 외교술을 펼친 것이다.
 
 ■세계최강 몽골의 애간장 녹은 외교술
 서희의 명성을 이어받은 고려의 외교는 세계최강 몽골제국을 쥐락펴락, 애간장을 녹일 수준이었다.
 1231~1259년까지 고려는 막강한 몽골군의 침입에 시달렸다. 그러나 고려는 강화도 천도 이후 상황에 따라 몽골의 요구를 따르기도 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었다. 항쟁과 교섭의 이중주 외교가 빛을 낸 것이다.
 예컨대 1231년 11월, 몽골은 고려의 강화도 천도를 매우 질책했다. 그러자 고려 고종은 다음과 같은 말로 몽골을 녹인다.
 “아니, 전쟁으로 유민들이 모두 흩어지면 나라의 근본이 텅텅 비게 되고, 나라의 근본이 비게 되면 장차 누구와 함께 공물을 마련해서 상국(몽골)을 섬기겠습니까? 차라리 남은 백성들을 수습해서 섬(강화도)으로 들어가 있으면서 변변치 않은 토산물이나마 상국에 바침으로써 변방 신하의 명분을 잃지 않는 것이….”       
 고종은 더 나아가 “어디에 있든지 정성을 바치는 것이 중요하지 않느냐”면서 “우리가 천도한 이유는 바로 상국을 잘 모시기 위한 것일뿐”이라고 주장했다.
 1238년(고종 25년)에도 고려는 장군 김보정과 어사 송언기를 통해 몽골에 표문을 보낸다.
 “무력정복한다는 위협말고, 조상의 유업을 보존하게 한다면 변변치 않은 토산물이나마 해를 거르지 않고 바치겠습니다.”
 항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국(몽골)을 더 잘 모시려 천도한 것이라는데 무엇이라 하겠는가. 

고려말 대학자 이제현도 ‘세조(쿠빌라이)의 유훈’을 들먹거리며 원나라의 고려흡수 계획을 무산시켰다. 

 

 ■고려의 핑계외교
 고려의 ‘핑계외교’는 그야말로 혀를 내두르게 한다. 1253년(고종 40년), 고려는 대장군 고열을 보내, 몽골장군 예쿠(也窟)에게 보내 육지로 환도할 수 없는 이유를 밝힌다. 그런데 그 이유를 들으면 실소를 터진다.
 “황제(몽골)의 성지를 받들려 승천부(경기 개풍) 백마산 아래 성곽과 궁실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동북 방면에 포달인(抱獺人), 즉 수달을 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서 뭍으로 나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몽골의 대군이 들어왔습니다.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시면 내년에는 고려 국왕이 신료들을 인솔하고 뭍으로 나가렵니다. 제발 군사를 돌리심이….”(<고려사절요>)
 아니 수달사냥꾼이 무서워 육지천도를 하지 못하겠다니…. 그것도 모자라 군사를 철수시키면 뭍으로 나가겠다니….
 고려는 몽골이 “왜 강화도에 성을 쌓느냐”고 질책할 때마다 “송나라 공격에 대비하려 한 것”이라든지, “해적들의 노략질 때문”이라든지, 갖가지 토를 달았다.   
 몽골로서는 지긋지긋한 고려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있다. 1256년(고종 43년) 9월, 고려 사신 김수강이 몽골 황제(헌종)에게 몽골 군대의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는 “개경에 환도해야 철수하겠다”고 거절했다. 그 때 김수강의 화술이 백미다.
 “짐승이 사냥꾼을 피해 굴 속으로 숨었는데, 그 구멍 앞에 활과 화살을 가지고 기다린다면 피곤한 짐승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김수강의 ‘절묘한 외교술’에 감탄한 몽골 황제는 무릎을 치며 군사를 철수시켰다.
 “그래, 네가 바로 참 사신이다. 마땅히 두 나라는 화친을 맺어야 한다.”(<고려사절요>)
 
 ■애자(愛子)와 진자(眞子)의 차이
 혀를 내두를 고려의 외교술은 감탄을 자아낸다.
 1241년(고종 28년), 고려는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몽골의 협박 때문에 종친인 영녕공 준을 몽골로 보냈다. 그러면서 영녕공을 고종의 아들이라 거짓으로 고했다. 훗날 이 말이 거짓으로 판명됐다.(1254년) 고려 출신인 민칭이라는 자가 고자질한 것이다. 황제가 마침 몽골에 머물던 고려사신 최린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위기에 빠진 최린의 임기응변을 보라.
 “영녕공 준은 왕의 애자(愛子)입니다. 진자(眞子·참아들)는 아닙니다. 전에 올린 표문(외교문서)를 보면 다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애자는 무엇이고, 진자는 무엇이냐. 다르냐?”
 “그럼요. 애자라는 것은 남의 자식을 길러 자기 자식으로 삼은 것입니다. 만일 소생의 자식이라면 어찌 다시 ‘애(愛)’자를 쓰겠습니까.”
 황제가 새삼스레 고려가 올린 표문을 보니 모두 ‘애자’라 돼있었다. 황제는 더 이상 고려를 문책할 수 없었다. 애자와 진자….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말장난에, 궤변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외교관 최린은 기막힌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긴 것이다.(<고려사절요>) 
 아니 어찌보면 거짓아들인 영녕공을 보내면서 고려가 만일을 위해 마련해놓은 장치였을 지도 모른다. 아들 자(子) 앞에 애(愛)자를 수식해놓은 치밀함이라고 할까.

 

    ■몽골 쿠빌라이가 반색한 이유
 그러나 고려는 28년 간의 줄다리기 끝에 화의를 결정한다.(1259년)
 고려 태자(원종)가 위독한 부왕(고종)을 대신해 뭍으로 나가 몽골로 향한 것이다. 그런데 몽골로 가던 길에 황제 헌종(몽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고려 태자는 이 와중에 훗날 원나라 세조가 되는 쿠빌라이(忽必烈)를 만나게 된다. 쿠빌라이는 반색하며 고려 태자를 맞는다.
 “고려는 만리 밖의 나라이다. 당 태종도 친히 정벌했는데 항복시키지 못한 나라가 아닌가. 이제 세자가 스스로 왔으니 하늘이 뜻이 아닌가.”
 마침 또 하나의 뜻밖 소식이 들렸다. 고려 고종이 승하했다는 것이었다. 몽골의 비서감 조양필은 무릎을 치면서 “때마침 찾아온 고려 세자를 고려왕으로 세워 귀국시키면 군사를 동원하지도 않고 한 나라를 얻는 것”이라고 쿠빌라이에게 고한다. 쿠빌라이가 벅찬 심정으로 되돌아본다.
 “넓은 하늘 아래 복종하지 않은 나라는 고려와 송나라 뿐이었는데…. 이제 송나라도 솥 속의 고기이자 장막 위 제비집 같이 멸망 직전이다. 이젠 고려도 이제 제국의 품에 들어와 조회하는구나.”(<고려사절요>) 
 쿠빌라이는 더 나아가 선심공세를 편다.
 “좋다. 고려 만큼은 의관을 본국(고려)의 풍속을 좇아 상하 모두 고치지 마라. 개경 환도는 속도조절을 해서 알아서 하라. 설치된 다루가치(총독)는 귀환시켜라.”(<원고려기사>)
 쿠빌라이는 “원나라에 조회한 나라가 80여 개국인데 고려처럼 예(禮)로 대접하는 것을 보았느냐”고 공치사했다.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 존중하겠다는 약속…. 이것을 ‘불개토풍(不改土風)’ 혹은 ‘세조구제(世祖舊制)’라 한다. 시쳇말로 하면 ‘세조(쿠빌라이)의 유훈’이라 말할 수 있다.

 

 ■“세조의 유훈을 잊지 마세요.”
 그런데 고려는 이 ‘세조의 유훈’을 두고두고 써먹었다. 몽골이 노골적인 내정간섭에 나설 때마다 이 유훈을 들먹였다.
 예컨대 세조의 유훈이 발표된 지 60여 년이 지난 1323년(충숙왕 10년), 원나라가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립, 흡수통합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러자 당시 원나라에 있던 도참의사사 이제현은 예의 그 ‘세조의 유훈’을 인용하면서 ‘불가’를 외쳤다.
 “세조황제의 조서 덕택에 고려의 옛 풍속이 유지되고, 종묘와 사직이 보전됐습니다. 다 세조 황제의 덕입니다. 이제 고려에 행성을 설립한다고 합니다. 좋습니다. 다른 것은 다 논하지 않더라도 세조의 조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이제현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당시 원나라 황제였던 영종(재위 1320~1323)은 “세조(쿠빌라이)의 정치를 본받고 회복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제현은 바로 이 점을 겨냥해서 원 조정을 협박한 것이다. ‘세조의 유훈을 지키지 않으려는 것이냐’고…. 원나라는 결국 정동행성의 설치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황제와 맞장 뜬 고려 외교관
 다시 1260년대로 돌아오자.
 1268년(원종 9년), 문하시중 이장용이 몽골에 갔을 때였다. 쿠빌라이가 “고려군사의 수를 정확하게 알리지 않으면 고려를 정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려 군사의 수를 정확히 파악해서 남송과 일본원정에 동원하려던 것이었다.
 “고려군사의 수가 5만명은 된다고 한다. 그 중 4만명은 송나라와 일본 정벌에 보내라.”(황제)
 “5만 군사는 없습니다. 예전에 4만 군사가 있었지만 30년간의 전쟁과 전염병 때문에 다 죽었습니다.”(이장용)
 “아무렴, 산 사람이 없겠느냐. 너희 나라에도 여자들이 있다면 어찌 태어나는 자식들이 없겠느냐. 함부로 말하지 마라.”(황제)
 “고려가 황은(皇恩·몽골 황제의 은혜)을 입어 군대를 파한 이래로 이후에 성장한 자들이 겨우 9~10살입니다.”(이장용)
 국익을 위해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말은 했던 고려 외교관의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려는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고려는 몽골과의 화의(1259년) 이후에도 어지간히 몽골의 애를 먹였다. 11년 후인 1270년이 돼서야 개경으로 환도했으니까.
 견디다못한 몽골 조정은 고려를 재침공할 것을 타진하게 된다.(1269년)  
 하지만 마형과 마희기 등 조정대신들이 입을 모아 ‘불가론’을 외쳤다.
 “고려가 지금 원나라에 내조(來朝)하기는 하지만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만약 정벌이 실패할 경우 국위가 손상되고…. 저들이 험준한 강산에 기대고, 섬에 식량을 쌓아 지키면 100만 군대라도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습니다.”(<원사> <원고려기사> 등)  
 유라시아 대륙을 벌벌 떨게 한 공포의 제국 몽골도 고려의 외교전에 두손 두발 다 들었던 것이다.
 어떤가. 서희와 고려의 외교정책을 닮으라고 가슴을 치고 한탄하는 광해군의 외침이 동감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외교는 또 어떤가. 다 같은 서희의 후예들인데….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37 관련글 쓰기

 “이름없는 자가 당대의 정치를 비방하는 글을 지어 조정의 길목에 내걸었다.”
 888년(진성여왕 2년) 신라의 도읍지 서라벌에서 당시의 정치를 비난하는 벽보(榜·대자보)가 붙었다.
 그것도 조정의 길목, 번화가에 붙은 비방문이었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나라 사람들이 비방문을 길 위에 던졌다(書投路上)”고 했다. <삼국사기>는 “벽보(혹은 대자보)를 붙였다”고 했지만, <삼국유사>는 “전단을 뿌렸다”고 한 것이다. 어찌됐든 글 내용은 알쏭달송했다. 다라니(밀어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비밀로 하려는 주문 같은 것)의 은어로 쓰여 있었다.
 “나무망국찰니나제(南無亡國刹尼那帝) 판니판니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 우우삼아간(于于三阿干) 부윤사바아(鳧伊娑婆訶)”(<삼국유사> ‘기이편·진성여왕 거타지조’)
 진성여왕(재위 887∼897년)은 “당장 비방문을 써서 내다 건(뿌린) 자를 잡으라”는 엄명을 내렸지만, 수사는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 때 어떤 자가 “범인은 분명 기용되지 못한 문인일 것”이라면서 대야주(합천)에서 은둔 중인 왕거인이라는 자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왕의 특명에 따라 긴급체포된 왕거인은 처형당하기 일보직전이 됐다.

진성여왕 때 서라벌 조정의 길목에 등장한 대자보(혹은 전단)의 내용을 소개한 <삼국유사>. ‘진성여왕과 신라는 망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라는 이 때 소판 위홍 등 3~4명의 총신과 여왕의 유모인 부호 부인 등이 정치를 농단하고 있었다.

 ■서라벌 대자보 사건
 그러자 무죄를 주장하던 왕거인은 “분하고 원통하다”면서 감옥의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연단(燕丹)의 피어린 눈물 무지개가 해를 뚫었고, 추연(鄒衍)의 품은 슬픔 여름에도 서리 내리네. 지금 나의 불우함 그들과 같으니, 황천(皇天)은 어이해서 아무런 상서로움도 없는가.”
 연단은 전국시대 연나라 마지막 태자인 단(丹)을 가리킨다.
 자객 형가를 시켜 진왕(진시황)을 죽이려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앙앙불락한 진나라가 연나라를 침공하자 연나라 왕은 태자 단을 죽여 진나라에 바쳤다. 또 전국시대 음양오행가인 추연(기원전 305~240)은 주변의 모함으로 옥에 갇혔다. 억울했던 그가 하늘을 우러러 곡을 하자 초여름인 5월에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왕거인은 결국 연나라 태자 단과 추연처럼 억울한 지경에 빠졌음을 읊은 것이다.
 왕거인이 감옥에서 벽서를 걸자 그날 저녁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벼락이 내리치면서 우박이 쏟아졌다. 진성여왕은 이 기이한 현상을 두려워한 나머지 왕거인을 석방해줬다.

 

 ■“신라여 망하라! 여왕이야 망하라!”
 그렇다면 서라벌 조정의 길목에 붙었다(혹은 뿌려졌다)는 수수께끼 같은 벽보(혹은 전단)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찰니나제는 진성여왕을 가리킨 것이요,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소판(관작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우삼아간은 진성여왕의 측근에 있는 3~4명의 총신이고, 부이는 부호를 가리킨다.”(<삼국유사>) 
 ‘나무(南無)’는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으로 절대적인 믿음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나무망국’은 나라가 망하기를 절대적으로 바란다는 뜻이다. 맨 마지막의 ‘사바하(娑婆訶)’는 앞의 주문내용이 반드시 이뤄지기를 바란다는 불교용어이다. ‘소판’은 진성여왕의 숙부이자 정부(혹은 남편)인 위홍의 관작(신라 17관등 중 세번째)이다. ‘부이’는 진성여왕의 유모를 가리킨다. <삼국유사>의 표현대로 당대 신라는 유모인 부호부인과 애인 위홍 등 3~4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농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자보(혹은 전단)는 ‘신라여! 여왕이여! 위홍과 부호 등 때문에 망하리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대자보에 담긴 망조의 기운 
 진성여왕 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천년사직에 접어들던 신라는 진성여왕대부터 망조가 든다. 극심한 왕위쟁탈전과 경제혼란으로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삼국유사>의 표현처럼 몇몇 총신들이 권력을 잡았고, 지방에서는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889년(진성여왕 3년) 원종과 애노의 반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조정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은 이른바 시무 10여조를 제시했지만(894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진성여왕은 귀족들의 변화를 이끌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라는 이후 급속도로 망국의 길로 빠진다. 905년(효공왕 9년) 궁예가 신라를 침범했으나 방어할 힘이 없어 성만 지키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도선 선사는 공공연하게 “신라의 운수는 이제 끝”이라고 주장했다. 궁예는 미륵이 나타나 새 세상을 열 것이라는 미륵사상을 퍼뜨렸다.
 결국 서라벌 조정의 길목에 걸린(혹은 뿌려진) 대자보(혹은 전단)는 신라 망국의 신호탄 같은 것이었다. 대자보(전단) 이후 47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으니까….

 

 ■“여주(女主·문정왕후)가 정치를 농단하고 있다!”
 1547년(명종 2년) 9월18일에 일어난 양재역 벽서사건은 어떤가.
 이 때 붙은 벽보의 글씨는 매우 선동적인 붉은 글씨였다.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女主執政于上)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다.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됐다. 어찌 한심하지 않는가. 중추월 그믐날.” 
 이 무슨 벽보인가. 여기서 ‘여주’는 다름아닌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를 일컫는다.
 문정왕후는 오빠인 윤원형(즉 명종의 외숙)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1545년) 윤임(죽은 인종의 외숙) 일파를 숙청했다. 벽서에 언급된 이기는 당시 병조판서로서 윤원형과 손잡고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괘서는 바로 이 어수선한 정치상황을 꼬집은 것이다. 그런데 이 벽서는 오히려 윤원형 일파에게 ‘정적 몰이’의 명분을 주었다.
 “괘서(대자보)가 나도는 것은 여전히 불온한 생각을 갖고 있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이로써 윤원형 일파는 을사사화 때 쫓아내거나 죽이지 못한 반대파들을 모조리 색출해서 피바람을 일으킨다. 이것을 정미사화, 혹은 벽서의 옥이라 한다. 하지만 이 때의 벽서 역시 그냥 붙은 게 아니었다. 

중국 문화대혁명 때 대자보를 붙이고 있는 중국 홍위병들. 마오쩌둥은 대자보의 기원을 춘추시대 정나라 때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정자산(鄭子産) 때부터 시작됐다고 했다. 

   ■임꺽정이 출현한 까닭
 벽서가 붙은 지 12년이 지난 1559~62년, 즉 3년 동안 임꺽정이 황해도 일대를 휩쓸었다.
 1559년 3월27일 다름아닌 중추부 영사 윤원형 등 당대의 실권자가 모여 도적떼를 없앨 계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요원의 들불처럼 퍼지는 도적을 막지 못했다. <명종실록>을 쓴 사관이 핵심을 찔렀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요즘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다.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사관은 “중앙 조정과 지방 수령이 깨끗하면 칼을 잡은 도적이 송아지를 사서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 덧붙였다.
 결국 큰 도적은 임꺽정이나 그를 따르는 백성들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외면한채 조정에 피바람을 일으키는데만 골몰한 ‘여주(女主) 세력’, 즉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였던 것이다. 12년 전 대자보가 붙은 이유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호미로 막을 일이었던 것이다.

 ■대자보 베껴가는 백성들
 조선 중·후기로 넘어가는 숙종 때는 어떤 일이 있었나.
 “1684년 이후 무뢰배가 서로 모여 계를 만들었다. ~살주계가 있었는데 그 계의 책자에 ‘양반을 살육할 것, 부녀자를 겁탈할 것, 재물을 약탈할 것’이라는 약조가 있었다. 어떤 검계는 ‘장차 난리가 나면 양반을 아내로 삼을 수 있다’고 공언하기도 했다.”(<연려실기술> ‘숙종조 고사본말’)
 숙종의 46년 재위동안 잦은 환국정치와 노·소론의 갈등 등이 염증을 불렀다.
 백성들 사이에서 바야흐로 천민층을 중심으로 비밀결사조직이 결성되는 시기였다. 신분제가 동요되던 시기였던 것이다. 결코 태평한 시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익명의 대자보가 6번이나 붙었다. 1679년(숙종 5년) 우의정 오시수의 상언이 당대의 상황을 일러준다.
 “인심이 깨끗하지 못해 차마 듣지도 못할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말로 여러 신하의 죄목을 꾸미고 익명서를 만들어 민가나 관아의 담장에 붙이거나 널리 퍼뜨리고, 백성들이 일시에 몰려들어 다투어 적는 것이 마치 과거장의 문제를 베끼듯 합니다.”(<비변사등록>)

 

 ■대자보 붙이면 교수형이다
 그러자 아주 촘촘한 처벌규정을 만들었다. 그것이 이른바 ‘익명서정죄사목’이다.(<비변사등록>)
 우선 익명서를 투서한 자는 ‘대명률’(명나라 형법서)에 따라 교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만약 방을 붙인 것이 대로변이면 부근에 사는 사람이, 관청이면 수직자가, 개인집이면 집주인이 즉시 불살라야 했다. 만약 그렇게 처리하지 않은 자는 유배 3000리와 전가족 변방 부처의 처분을 받았다.
 그렇지만 대자보와 전단은 줄지 않았다. 숙종 때는 1675~1720년 사이에 6차례나 익명의 대자보가 붙었다.
 1679년(숙종 5년)에는 “누구 누구가 나라에 원한을 갖고 날짜를 정해 난을 일으킨다”는 익명서까지 대궐문에 붙었다. 1711년(숙종 37년)에는 대청외교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숭명배청의 의리를 내세워 빨리 청나라를 공격하라는 내용의 대자보가 영은문에 걸렸다. 대자보는 명나라 태조 때 편찬된 <홍무정운>의 자체를 그대로 따랐다. 범인을 중국인으로 위장한 것이 틀림없었다.
 조정은 대대적인 범인색출에 나섰지만 오리무중이었다.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죄로 포도대장 유취상과 종사관을 투옥시키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범인을 무리하게 색출하는 과정에서 무고사건이 잇따르는 등 후유증까지 낳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끝내 범인을 잡지못한채 종결되고 말았다. 1714년(숙종 40년)에도 “도둑이 숭례문에 익명서를 건 사건이 있는데 말이 지극히 부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른바 숭례문 괘서사건이다.

지난 2014년 2월 성균관대에서 열린 ‘대자보 백일장’의 모습. 역사적으로 대자보와 같은 벽서는 언로가 불통일 때, 정치가 어지러울 때 죽음을 무릅 쓴 백성들이 내걸었다.

 ■대자보가 동시다발적으로 걸린 까닭
 영조는 손자인 정조와 함께 조선의 중흥기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52년 간의 장기집권이었던 탓도 있지만,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설 때문에 민심의 이반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경종독살설은 결국 1728년 무신난(이인좌의 난)으로 비화했다.
 그 해(1728년) 1월 서소문에 괘서(掛書)가 붙었다. 지경연사 김동필이 영조에게 고하는 장면을 보라.
 “1월 11일 서소문에 괘서가 붙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전주의 괘서와 같다고 합니다. 전주 괘서는 호남 사람들이 다 목격했답니다. 그런데 남원 시장에도 흉서가 걸렸는데 서소문에도 걸렸으니….”
 그러자 영조는 “전주와 남원에 이어 서소문 괘서는 모두 한사람의 소행인듯 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실 이 시기에 한성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도적이 쳐들어 온다는 소문과 함께 창의문 밖에 적병이 출몰했다는 유언비어까지…. 이 때문에 한성 인근의 백성들은 물론 남산 아래 사대부들까지 가족을 이끌고 피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때문에 나루터 길이 막히고 경기도 일대 안성과 용인 등은 마을이 텅 빌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영조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면서 4개 읍의 수령을 급히 무신으로 교체했을까. 그러나 영조는 전주와 남원에 이어 서울 서소문에까지 걸린 괘서의 범인 색출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인다.
 “선왕(숙종) 때 연은문에 흉서가 걸렸는데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다. 혹시 사소한 원한을 갚으려고 무고하는 경우도 있고 죄없는 사람이 걸려들기도 하니….”(<영조실록>)
 영조는 이른바 비공개수사를 통해 범인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20여 일이 지난 뒤 다시 한성부의 종가에서 또 한차례의 대자보가 걸렸다. 이때부터 공개수사로 바꿨다.
 “어떤 요망한 사람이 이 윤기(倫紀)없는 요악한 말을 지어내어 민중을 미혹시킬 계획을 하는데 부도(不道)할 뿐 아니라 곧 난민(亂民)이니….”(<영조실록> 1728년 2월 19일)
 이 대자보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경종 독살설과 관련, 당시 파다하게 퍼졌던 소문을 담았을 것이다. 그런데 영조가 공개수사를 통해 범인색출작전을 펼친 지 불과 25일 뒤(3월15일)에 무신난이 발생했다.
    
 ■차마 표현할 수 없었던 ‘부도지언(不道之言)’
 무신란이 무엇인가.
 경종 독살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 탄(坦)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한 거병이었다. 무신난에는 영남에서만 7만명, 전국적으로는 20만명이 가세하는 등 엄청난 기세를 탔다.
 이 때 난을 이끈 이인좌가 “(반란군의) 군중에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조석으로 곡을 했다”(<당의통략>)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3월26일 체포된 이인좌 등의 진술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거병에 앞서 서소문·종가·남원· 전주에 대자보를 붙임으로써 조정을 혼란에 빠뜨리고자 했던 것이다. 난이 일어났을 때 진압군에게 혼선을 빚게 하려고 전국 각지에 대자보를 붙인 것이다.
 과연 대자보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얼마나 망측했기에 영조 시대의 각 문헌은 그저 ‘부도지언(不道之言)’이라는 표현만 썼을까. 심지어 영조는 사관에게 특별히 “괘서의 내용을 절대 기록하지 말라”는 엄명까지 내린다.
 아마도 ‘영조 당신은 이복형(경종)을 독살하고 임금이 된 자야!’라고 외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다!”
 그로부터 27년이나 흐른 1755년(영조 31년)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가 급히 장계를 올렸다.
 나주 객사에 대자보가 붙은 것이다. <영조실록>은 그것을 ‘흉서(凶書)’라 했다. 대대적인 범인 색출에 나섰다. 가뜩이나 하수상한 시절이었다.
 “신축년(1721년·노론 4대신 등 노론이 쫓겨난 사건)과 임인년(1722년·목호룡 고변사건) 때의 잔당과 무신년(1728년·이인좌의 난)의 잔적들로서 번성한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이 나라를 원망함이 심각하고 근거없는 말이 날마다 일어났는데, 이 때 흉서가 걸렸다.”
 흉서의 내용은 그야말로 흉(凶)했다. 역시 워낙 참담한 표현이어서 자세히 쓸 수는 없다고 했다.
 내용 가운데는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有奸臣滿朝 民陷塗炭)”는 구절이 들어있었다.
 장계를 받아본 영조는 기막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황건적 같은 무리구나. 틀림없이 무신년(이인좌의 난)의 잔당이다. 그러나 과인은 무신년 때도 동요되지 않았다.”
 이같은 일이 다반사이니 걱정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어찌보면 의연하게 대처하려는 영조의 여유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혼란한 시대였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어쨌든 대대적인 수사 끝에 흉서를 내건 일당이 붙잡혔다. 주범은 윤지라는 인물이었다.  
 윤지는 무신난(이인좌의 난) 때 제주도를 거쳐 나주로 유배됐다가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다. 윤지는 고문을 받다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영조는 분을 참지 못하고 대역죄의 형벌로 그의 목을 베고 그의 집을 헐어 그 자리에 연못을 파는 형벌을 받고 말았다.
 이 나주괘서 사건으로 죽은 이가 41명, 유배 20명 등 모두 65명이 엄벌을 받았다. 
 이렇듯 나름 치세에 선전했다는 평을 듣는 영조지만 이복형 독살설 때문에 재위내내 골머리를 앓았다. 역시 당대의 민심은 분명했던 것 같다. ‘당신은 이복형을 죽이고 임금이 된 사람이야’라는 손가락질이 받았던 것이다. 재위기간 내내 무려 15번이나 흉악한 대자보가 붙을만큼….
   
 ■“나의 거병을 따르라!”
 1801년(순조 1년) 경상도 하동·의령·창원에서 민란을 선동하는 대자보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문장력이나 무예, 힘이 있으면서 하는 일이 없고 실농한 사람들은 나의 거병을 따르라. 재상이 될만한 자는 재상을 시키고 장수가 될만한 자는 장수를 시키며 지혜로운 자는 부림을 얻을 것이요, 꾀 있는 자는 가까이 할 것이다. 가난한 자는 풍요로움을 얻을 것이며, 두려워하는 자는 숨겨줄 것이다.”(<승정원일기> 1801년 12월 26일)
 하안 무명에 한자로 쓴 대자보의 밑에는 ‘十爭一口(십쟁일구)’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사람들은 이 수수께끼 같은 ‘십쟁일구’의 뜻이 무엇인지 설왕설래했다. 수사 과정에서 실마리가 잡혔다.
 ‘십쟁일구(十爭一口)’에서 ‘爭’의 윗부분에 있는 ‘爪(조)’는 글씨를 보면 ‘月(월)’자와 비슷하고, 밑의 ‘尹(윤)’은 ‘甲(갑)’으로 보인다는 것. 또 ‘一’은 ‘口’와 합치면 ‘日(일)’이 된다는 것. 따라서 ‘시월갑일(十月甲日)에 세상이 뒤집힌다’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10월 갑자일인 21일에 변란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또 대자보 가운데는 ‘일인지구(一人之口) 이과지비(二戈之卑) 사두지자(四頭之字) 일자지열(一目之烈) 인물사원(人勿思遠) 삼칠가려(三七可慮)’라는 파자와 함께 ‘힘있는 자는 뒤를 따르고 힘없는 자는 산속으로 들어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잇달아 대자보를 내건 이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거나 유랑하던 지식인들이었다.

 

 ■대자보(전단)의 본질
 ‘진선(進善)의 정(旌)’이라는 고사가 있다.
 중국 요 임금이 길가에 기(旗)를 세워놓고, 임금에게 교훈이 될만한 말(선언·善言)을 드릴 자가 있으면 그 깃발 아래 서게 하였다는 것이다.
 반면 옛날 주나라 여왕은 비방하는 자를 감시했고, 그들이 입을 놀리면 죽였다.
 그러자 점차 비방하는 사람들이 드물어졌다. 백성들은 감히 말하지 못하고 길에서 만나면 눈짓으로 뜻을 나눴다. 그러자 여왕은 재상 소공을 불러 자랑했다.
 “그것보시오. 내가 비방을 없애버리니 아무도 감히 말하지 않게 되었소. 어떻소.”
 그러자 소공은 손사래를 쳤디.
 “아닙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을 막는 것보다 심각합니다. 물이 막혔다가 터지면 어떻습니까. 둑이 터지는 것 처럼 엄청난 피해자가 나올 것입니다. 물을 다스리는 자는 수로를 열어 물이 흐르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백성들이 말하게 해야 합니다.”
 소공은 “정치를 잘하고 못함이 다 백성들의 말에 반영된다”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무릇 백성은 속으로 많은 생각을 하는 존재이며, 그들이 입으로 말하는 것은 속으로 많이 생각한 연후에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왕은 소공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3년 뒤 백성들이 연합해서 난을 일으켰고 여왕은 왕위를 빼앗겼다.(기원전 841년) 이후 두 재상인 소공과 주공이 14년간이나 정무를 공동으로 맡았다. 그것을 역사는 ‘공화(共和)의 시초’라 일컫는다. 앞서 거론한 대자보 사건을 관통하는 공통의 시사점은 무엇인가.
 바로 대자보(혹은 전단)는 민심이 이반되고, 정치가 어지러울 때 혹은 망조가 들 때 어김없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자보의 출발은 ‘백성과의 불통’이다. 백성이 목숨을 걸고 익명서를 걸거나 뿌릴 때의 시대는 혼란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 언제나 상기해야 할 금과옥조는 이것이다.
 ‘백성은 물이고, 임금은 배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전복시킬 수도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순자> ‘왕제’)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36 관련글 쓰기

<흔적의 역사> 팟 캐스트 21회는 좀 색다른 주제입니다.

백두산 폭발과 발해멸망의 수수께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100년 전 백두산에서는 역사시대, 2000년이라는 시간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화산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기원후 79년 폼페이 최후의 날로 악명높은 이탈리아 베수비오 화산폭발보다 무려 50배나 큰 화산폭발이었습니다.

물론 화산폭발이 과연 어제 정확하게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첨단과학의 힘을 빌자면 아마도 930~940년 사이가 아닐까 추정됩니다.

문제는 발해가 926년에 멸망했다는 것입니다. 발해의 멸망소식을 전한 요나라(거란) 역사서인 <요사>발해는 민심의 이반 때문에 별다른 저항없이 멸망했다고 전합니다.

이상한 일 아닙니까. 해동성국으로 일컬어졌고, 고구려의 고토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발해가 왜 이렇듯 속절없이 무너졌을까요.

일부 전문가들이 화산폭발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이번 주 팟캐스트는 백두산 화산폭발, 그것이 발해멸망의 도화산이 되었을까 라는 궁금증을 던져봅니다.

 

 “발해의 ‘민심이 멀어진’(離心) 틈을 타 싸우지 않고 이겼다.(離心乘 흔而動故不戰而克)”(<요사> ‘야율우지전’)

925년 12월,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발해정복을 위해 출병한다. 발해의 부여성을 포위한 뒤 단 3일만에(926년 1월3일) 성을 함락시킨다. 거란의 선봉은 발해의 수도 상경의 홀한성을 향해 질주한다. 도중에 발해의 노상이 이끄는 3만대군을 격파하고 단숨에 홀한성을 포위한다.(9일) 발해의 마지막 왕은 대인선(재위 906~926)이었다. 대인선은 단 3일만인 12일 항복을 청한다.

<요사>가 전하는 항복의 순간은 치욕적이다. 항복의사를 전한 지 이틀 뒤인 14일 대인선은 ‘흰옷을 입고 양을 끌고 또 신하 300여 명과 함께(素服탁索牽羊 率僚屬三百人)’ 항복한다. 이로써 발해(698~926년)는 15대 229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백두산 천지. 10세기 화산폭발은 인류가 역사시대에 겪은 화산폭발 가운데 가장 엄청난 규모였다.

 ■너무도 허망한 멸망

그런데 말이다. 좀 이상하다. 해동성국이라는 명성을 얻으며 승승장구했던 발해로서는 너무도 허망한 멸망이다. 고구려의 광활한 고토를 거의 대부분 차지했던 발해제국이 보름도 되지 않아 속절없이 무너진 것이다.  
그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역사학자들은 특히 멸망하기 직전인 925년 발해인들이 대규모로 고려로 내투(內投·투항)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태조 8년(925년) 9월, 발해장군 신덕 등 500명이 내투하다. 발해 예부경 대화균 등이 100호의 균노 사정 대원균, 공부경 대복모, 좌우위장군 대심리 등 100호의 백성을 이끌고 내부하다. 12월에는 좌수위소장 모두간, 검교개국남 박어 등이 1000호의 백성을 이끌고 내부하다.”

심상치 않은 일이다. 발해의 장군과 왕·귀족이 멸망(926년) 하기 몇 달 전부터 대규모 ‘엑소더스’에 나선 것이다. 9월엔 500명에서 석달도 채 안된 12월엔 1000호로 급증하고 있다. 왜 일까. 발해멸망 후 거란이 세운 동란국(東丹國)의 재상을 지낸 야울우지는 분명 발해의 ‘이심(離心)’을 틈타 제대로 된 싸움없이 승리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대규모 엑소더스의 실체는

역사학자들은 이런 기록들을 토대로 발해의 멸망을 다각도도 분석했다. 지배세력인 고구려인과 피지배세력인 말갈인 사이의 모순, 귀족들의 사치생활, 그리고 통치계급 내부의 모순 등….
그러나 문제는 발해 사회내부에 어떤 특정한 권력투쟁이 실재했다는 기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것이다. <요사>의 기록에 따라 ‘발해가 멸망했다’는 926년 이후에도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계속 발생한다.

“926년 4월, 발해국 대인선이 대진림 등 116명을 사신으로 보내 조공했다.”(<책부원귀> 등) 

발해가 분명히 926년 1월 멸망했다면서 그 후에도 버젓이 ‘발해사(渤海使)’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중국(후당)에 보낸 것이다. 그 후 935년까지 8차례나 발해가 사신을 파견했다. 이는 무슨 이야기인가.
사실 거란은 발해정복 후 발해의 고토에 동란국(東丹國)을 세운다. 하지만 이 동란국은 2년 뒤 랴오양(遼陽)으로 천도한다. 그러니까 거란은 발해를 정복한 뒤 곧바로 통치를 포기한 것이다. <요사>는 “발해땅이 중국 동북부의 오지여서 통치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따라서 거란이 떠난 후 발해의 고토에는 여전히 발해의 이름을 사용한 나라가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또 하나 이 격동의 시기에 발해인들의 대규모 엑소더스도 상상을 초월할만큼 이어진다.
먼저 발해멸망 직후와, 동란국 천도와 함께 강제이주 당한 발해인은 9만4000여호(<요사>)에 이른다. 1호당 가족이 5명이라면 47만명, 즉 50만명에 가까운 숫자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거란이 발해인을 강제 이주시킨 뒤 많은 마을(현)을 폐쇄했다는 것이다. 이를 폐현(廢縣)이라 한다. <요사>를 보면 거란이 폐쇄시킨 마을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 두만강, 쑹화강 유역과 동해안의 읍락 및 연해주 지역이다.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 거란은 발해의 민심이반 덕분에 싸우지도 않고 멸방시켰다고 한다.

■발해세자 대광현이 망명한 까닭은

고려로 투항하는 행렬도 만만치 않았다. 927년(고려 태조 10년)과 928년, 929년, 934년, 938년, 979년에 걸쳐 많게는 수만명씩 고려행을 택했다. <고려사> 등 역사서 기록을 종합하면 50년간 고려행을 택한 ‘발해유민’은 10만여명으로 집계된다.
그러니까 발해멸망 뒤 거란에 의한 강제이주자와 고려로 들어온 유민을 합하면 60만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전성기 발해의 인구는 10여만호, 군사는 정예병 수만명”이라 했다. 그렇다면 발해라는 나라와 백성이 사라진, 사상 유례없는 민족의 대이동이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땅을 정복한 거란인도, 그 터전에서 살아가던 발해인들도 모두 떠나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 가운데 934년에 있었던 발해세자 대광현의 고려망명은 유독 눈에 띈다.

“발해세자 대광현이 수만명의 무리를 이끌고 내투했다. 그에게 왕계(王繼)라는 성명을 내리고…. 특별히 원보(元甫)라는 관직을 내렸으며, 발해왕실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고려사>)  

이미 8년 전 망한 나라의 세자라? 발해세자 대광현은 대체 무엇 때문에 고향땅을 떠나 고려로 내려온 것일까. 

화산폭발로 인한 화산재는 일본열도 홋카이도와 아오모리까지 퍼졌다. 

■백두산, 광란의 폭발 

이젠 과학의 영역으로 가보자.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사이언스 북스, 2010)의 저자 소원주 박사가 제시한 10세기 백두산 대폭발의 재구성이다.

“10세기 어느 무렵 겨울날이었다. 백두산이 화산폭발의 순간을 맞이한다. 두터운 지각을 꿰뚫고 천지 칼데라 위로 엄청난 분연주(화산가스와 화산재의 불기둥)가 상공 25㎞까지 치솟는다.

성층권까지 올라간 불기둥은 중력을 이기지 못한채 무너진다. 불기둥이 붕괴되면서 발생한 거대한 화쇄류가 시뻘건 혀를 낼름거리며 광란의 춤을 춘다. 그 화쇄류의 온도는 700~800도에 이른다. 시속 150㎞의 맹렬한 속도로 계곡과 산등성이를 질주한다. 식물과 동물 생태계는 한꺼번에 절멸하고 만다. 화쇄류는 100㎞ 이상 먼 곳까지 도달한다.

화쇄류는 발해5경에 속한 중경과 동경, 남경을 집어 삼켰을 것이다. 화산폭발로 한겨울 백두산 정상에 쌓인 눈이 녹는다. 이 눈은 칼데라 벽을 넘쳐 흐른 뜨거운 천지의 물과 합쳐져 거대한 해일로 변한다.

산사면을 돌진한 물줄기는 시멘트와 같은 화산이류(泥流)가 되어 삼림을 집어 삼킨다. 갑작스런 범람에 홍수에 강유역에 자리잡고 있던 마을들이 도미노처럼 사라진다. 거대 화쇄류의 상공에 머물던 화산재의 열운은 겨울철 강한 편서풍에 밀려 동쪽으로 확산된다. 화산재 구름은 초속 120m의 속도로 동해로 확산된다. 화산재는 3~4시간 뒤 일본 홋카이도와 아오모리 지방까지 널리 퍼진다.”


 ■폼페이 묻은 화산폭발의 50배

과학자들은 10세기 백두산의 ‘화산폭발지수(VEI·Volcanic explosivity index)’가 7급이라고 계산하고 있다. 백두산 화산이 뿜어낸 화산쇄설물(테프라·Tephra)의 용적은 83~117㎦(최대 150~170㎦)로 추정된다. 이것은 역사시대, 즉 지난 2000년 전 지구상에서 일어난 화산폭발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소원주 박사는 “백두산 테프라의 평균용적을 100㎦로 계산하면 10세기 백두산은 단 한 번의 분출로 남한 전체를 1m 높이로 퇴적시킬 수 있는 화산물을 쏟아냈을 것”이라고 밝혔다. 

기원후 61년 폼페이를 최대두께 6m로 순식간에 매몰시킨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규모는 어떤가. 그야말로 새발의 피다.베수비오 화산이 품어낸 화산재의 용량은 2㎦였다. 백두산 화산의 규모는 M 7.4, 100㎦였으니 베수비오 화산 50개가 터진 것과 같은 규모이다. 1991년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폭발규모(체적 5㎦)도 백두산의 1/20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화산재는 새계를 일주했다. 지난 2010년 봄 아이슬란드 에이야프얄라요 화산에서 분화된 화산분출물의 양은 0.1㎦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세계경제는 휘청거렸다.

 

역대 지구상에서 일어난 주요 화산폭발. 백두산 폭발은 그 중에서도 최악의 폭발로 기록되고 있다.   

■심상찮은 멸망의 징조들

자, 이제 수수께끼의 퍼즐을 맞춰보자. 1980년대 일본 도립대의 화산학자 마치다 히로시 교수는 흥미로운 가설 하나를 제기했다. 10세기 백두산 대폭발과 발해멸망의 연관성이었다. 역사학자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926년을 전후해 백두산 분화에 대한 문헌기록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어떻게 믿겠냐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백두산에서 날라온 화산재의 퇴적층과 함께 화산폭발에 이은 화쇄류로 묻혀버린 탄화목에 대한 연대를 측정했다. 그 결과 10세기 백두산 대폭발의 연대는 934년 전후와 937년 전후, 그리고 946년 전후로 좁혀졌다. 소원주 박사는 “최근 탄화목의 현미경 분석결과 930년까지 연대가 나온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어찌됐든 연대측정결과로는 발해의 별망(926년)과 백두산 폭발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궁금증들이 남아있다. 몇가지 착안점은 있다. 백두산 화산재가 쌓인 일본 아오모리 현 오기와라 호의 퇴적물을 조사한 결과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됐다. 923~925년 사이의 퇴적층에서 매우 한랭한 지역에서 사는 규조류가 확인된 것이다. 이는 그 3년 동안 발해가 급격한 기후강하로 인한 매우 심각한 냉해를 겪었다는 증거이다. 거란과의 한판 승부를 앞둔 중차대한 시기가 아닌가. 또 멸망 전인 925년 가을부터 발해장군과 왕·귀족이 잇달아 고려로 내투하는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화산폭발로 쏟아져내린 화산쇄설물과 화산이류로 순식간에 뒤덮인 불에 탄 나무. 이 탄화목에 대한 연대측정결과 백두산 대폭발은 930~945년 사이에 일어났다고 한다.   

■창졸간에 사라진 발해문명

또 하나 가설을 세워보자. 역시 소원주 박사의 가설이다.
백두산 탄화목 나이테의 중심연대는 933~934년 사이이다. 그렇다면 발해 세자 대광현이 수만의 유민들 이끌고 고려로 내투했다는 934년은 어떤가. 926년, 즉 발해멸망연도는 <요사>에 나온 기록이다. 하지만 <요사>는 발해멸망 이후 400년이나 지난 1344년 원나라 시대에 편찬한 기록이다. 누락되거나 잘못된 기록이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926년 이후, 백두산 주변에는 아직도 발해의 세력들이 발해국를 자처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다 대폭발이 일어나 마지막 남은 발해세자 대광현 세력까지 고려로 귀부한 것은 아닐까.

 그럴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다양한 연대측정결과 백두산 대폭발과 발해멸망은 직접 연관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백두산 대폭발은 역사시대를 통틀어 인류가 경험한 것 중 최대규모의 화산폭발이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화산폭발을 앞두고 심상치않은 전조현상이 있었을 것이다. 혹 대폭발을 앞두고 수증기·마그마폭발과 같은 소규모 폭발이 일정기간 일어나지 않았을까. 마그마가 직접 분출되지는 않았겠지만 마그마가 천지의 물과 만나 수증기가 폭발하는?

이렇게 백두산이 대폭발을 앞두고 시차를 두고 몇 차례 소규모로 요동치자 이를 두려워 한 사람들이 대규모 엑소서드에 나선 것은 아닐까. 그것이 <고려사> 등에 나오는 내투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요사>가 말하는 민심의 이반, 즉 이심(離心)은 아니었을까.

거란이 발해를 멸한 뒤 “압록강, 두만강, 쑹화강 일대와 연해주·동해안 읍락을 폐현(廢縣)시켰다”는 <요사>의 기록은 시사점이 많다. 이 지역들은 대홍수의 흔적이 발견된 곳들이다. 백두산 대폭발로 화산류(화산분출물+물)의 해일이 일어난 범람의 흔적인 것이다. 화산폭발로 몰살당한 비극적인 마을의 흔적인 것이다.

어떻든 이 10세기 백두산 대폭발로 발해의 흔적, 즉 문화와 역사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드넓은 발해의 고토는 사막이 됐고, 그곳에 여진사람들이 다시 금나라를 세울 때까지(1115년) 200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200년은 화산 사막이 풍화해서 토양이 되고 표토에 식물이 뿌리를 내려 번성하는 최소한의 기간이다.

 

■백두산, 재폭발 하면?

최근 다시 백두산 폭발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고 있다. 예컨대 다니구치 히로마쓰(谷口宏充) 도호쿠(東北)대학 명예교수(화산학)는 20년 이내에 백두산 화산폭발이 일어날 확률이 99%에 이른다고 예측했다. 지난해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의 플레이트 운동 영향 때문이라고 부연설명했다.

확률은 좀 다르지만 국내외 학자들도 백두산의 재폭발에 관심을 쏟고 있다. 윤성효 교수는 2002년부터 백두산에서 화산폭발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이른바 전조현상들이 빈번해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화산성 지진활동이 빈발하고 지진규모도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표면의 팽창이 10㎝ 이상 감지되고, 화산가스에서 펠륨의 농도가 증가하고 있다. 또 화산가스 방출로 삼림이 말라죽고, 산사태와 암석균열이 일어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윤교수는 천지에 20억t의 물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물이 1000도 이상의 마그마와 만날 때 폭발적인 수증기·마그마 분화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10세기 백두산 분화와 비슷한 폭발이 일어난다면?
백두산을 중심으로 북한과 중국이 직접적인 타격을 입는다. 인명피해는 물론 도로와 댐, 전기, 광산 등이 마비될 것이다. 또 생태계 변란과 토양침식, 식수오염, 냉해 등이 악순환이 초래될 것이다.

남한은 직접적인 피해는 입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수방관 할 수 없다. 남한도 피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화산재 때문에 항공기가 결항돼 25억 달러 이상의 피해가 예상된다. 아니 돈이 문제는 아니다. 순망치한이라는 고사가 있지 않은가. 백두산 폭발의 여파는 또 한 번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존권을 위협할 것이다. 1000년 전 발해 백성들이 속절없이 당했듯…. 그래서 앞다퉈 남으로 남으로 엑소더스 대열에 나섰듯….  이기환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35 관련글 쓰기

 ‘중국문명의 시원(始原)을 랴오허문명[발해연안문명]으로 간주하는 선양[심양ㆍ瀋陽] 랴오닝성박물관 첫 번째 전시실에는 “도전하와학설(挑戰夏娃學說)”이라는 흥미로운 글이 내걸려 있다. 그렇다면 “도전 하와학설”이란 무엇인가? 우선 중국인들의 호기 있는 도전에 관해 들여다보기 전에 우선 “하와학설”에 관해 알아보자. 

흑인 아담과 이브의 출현을 그린 <뉴스위크>의 표지

■이브 학설

  “하와(夏娃)”는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이브(Eve)”와 같은 인물로서, “하와학설”은 미토콘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서구 학계의 “이브학설(The Eve of Theory)”을 말한다.
1987년 버클리의 유전학자 앨런 윌슨과 레베카 칸, 마크 스톤킹은 전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연구결과를 발표한다. 지구촌에 살고 있는 60억 인류의 조상은 지금부터 약 15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았던 어느 여성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그 결과 과학자들은 현생인류의 조상을 “15만 년 전(처음에는 20만 년 전이었으나 나중에 교정되었다.) 아프리카에 살던 자매인 두 여성”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런데 이 여인의 후손 가운데 일부가 약 10만 년 전 아프리카를 벗어나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이것이 바로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학설이다. 이 연구결과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학계를 비롯해 지식인층에서는 대체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흑인 이브가 흑인 아담에게 사과를 주는 다소 냉소적인 그림을 싣기도 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 상황은 변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학설’을 뒷받침하는 결과가 계속 나오면서 현생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은 정설로 굳어졌다. 이 때문에 아프리카인은 원시 호모사피엔스(아프리카)에서, 아시아인은 호모에렉투스(아시아)에서, 유럽인은 네안데르탈인(유럽)에서 진화했다는 “다지역기원론(多地域起源論)”은 힘을 잃어갔다. 하지만 중화주의를 신주 모시듯 하는 중국으로서는 “하와학설”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국학계에서는 1923년 베이징 남쪽 저우커우뎬[주구점ㆍ周口店]에서 발견된 베이징원인[북경원인 . 北京原人] 즉, 50만 년 전의 호모에렉투스가 중국인의 조상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중국학계의 주장이 힘을 잃어갈 즈음에 랴오둥반도에서 진뉴산인[금우산인ㆍ金牛山人]이 혜성처럼 등장한다. 진뉴산은 1984년 랴오닝성 잉커우셴[영구현ㆍ營口縣] 서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발해만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섬 같은 산(해발 69.3미터)이다. 

 28만 년 전 젊은 여성의 인골이 확인된 랴오닝성 잉커우셴 진뉴산 유적 현장. 

원래 이 동굴은 1940년대에 일본인 학자 시카마 도키오(鹿間時夫)가 처음 조사했고 1974년부터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와 베이징대 고고학계, 그리고 랴오닝성박물관 등이 지속적으로 발굴에 나섰다.

  그러던 1984년 진뉴산 동굴 A지점(높이 13.21미터, 폭 8.8미터)을 발굴하던 베이징대 발굴단이 8번째 층에서 동물화석편과 구석기시대 유물을 비롯해 완전한 형태의 인골화석을 발굴한다. 학자들은 이 인골을 분석한 끝에 28만 년 전에 살았던 20~22세의 젊은 여인이라고 추정했다. 이 진뉴산인이 살았던 시기는 베이징원인시기의 저우커우뎬 제1지점문화와 비슷하다.

 
   ■진뉴산인의 출현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난 1993년부터 1994년 사이에 진뉴산에서는 중국학계를 더욱 흥분시키는 발굴결과가 나왔다. 원시적 형태의 아궁이와 그 주변에서 불에 탄 것으로 보이는 동물뼈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공기가 잘 통해야 불이 잘 일어나잖아요. 공기가 잘 통하도록 돌을 이용해 아궁이를 만든 것 같고 동물을 불에 익혀 먹은 흔적이 보입니다.”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 
   궈다순 랴오닝성문물고고연구소 연구원은 진뉴산인의 두개골과 상지골, 그리고 불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 등을 종합해 진뉴산인이 같은 시기의 베이징원인보다 발달한 인류였다고 보았다. 중국학계는 더 나아가 진뉴산인의 존재를 인류 진화의 큰 과정으로 설명했다. 진뉴산인을 호모에렉투스와 호모사피엔스의 사이 즉, 초기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하는 과도기적 단계를 이끈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중국학계가 “도전 하와학설”이라는 문구를 걸어 놓고 “미토콘드리아 이브”라는 세계학계의 정설에 도전한 이유는 명확하다. 중국문명의 원류는 발해만에서 탄생한 랴오허문명[발해연안문명]이며, 그 랴오허문명의 기원은 28만 년 전 아시아 동북지역에 살았던 진뉴산인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진뉴산인 복원화석이 전시된 랴오닝성 박물관

 중국의 저명한 고인류학자인 자란포[가란파ㆍ賈蘭坡]는 “베이징원인이 살고 있을 당시에 베이징원인보다 진보적인 특징을 가진, 즉 원시 부엌까지 갖춘 진뉴산인이 있었다.”고 하면서 “진뉴산인을 호모에렉투스(直立人ㆍ200만 년 전)와 호모사피엔스(智人ㆍ20만~5만 년 전)의 사이, 즉 초기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하는 과도기적 단계를 이끌었다.”고 평가해 놓고 있다
   한마디로 ‘중화민족’의 원류를 28만 년 전 발해만에서 찾은 것이다.
 「랴오허 문명전」은 또한 약 25만 년 전 인류화석인 먀오허우산인(묘후산인ㆍ廟後山人)에도 주목하고 있다. 먀오허우산은 랴오둥 산간지역인 번시스(본계시ㆍ本溪市)에 있다.  

 

한반도 구석기 유적과 비슷한 것으로 알려진 먀오허우산 유적

  ■진뉴산인의 후예들 
  먀오허우산에서는 직립원인 단계인 견치 화석과 이보다 한 단계 뒤인 고인류의 어금니 화석 등이 확인됐다.
  특히 전시실 설명서에는 먀오허우산인이 화베이(화북ㆍ華北)지구의 커허(암하ㆍ암河)-딩춘(정촌ㆍ丁村) 대석기(大石器) 문화는 물론,「한반도의 구석기 문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해놓고 있다. 한반도와 인접한 랴오둥 반도에서 나온 것이어서 그런 해석을 했다.    또한 랴오시 카줘셴(객좌현ㆍ喀左縣) 다링허(대릉하ㆍ大凌河) 유역에서 확인된 7만 년 전의 거쯔둥(합자동ㆍ합子洞) 유적과, 랴오둥에서 발견된 4만~1만8000년 전의 샤오구산(소고산ㆍ小孤山) 유적도 소개했다. 특히나 샤오구산 유적은 고인류가 아닌 현생인류의 유적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을 끈다. 랴오닝성 박물관은 이렇게 진뉴산인(28만 년 전)과 먀오허우산인(25만 년 전), 거쯔둥인(7만 년 전), 샤오구산인(4만 년 전) 등을 이른바「랴오허 문명전」의 첫번째 전시실로 꾸몄다.
  궈다순은 랴오시 구릉과 랴오둥 산간지역에서 구석기시대 전기ㆍ중기ㆍ후기 유적이 두루 출토되고 있으므로 고인류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발굴자료를 근거로 “아웃 오브 아프리카”학설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10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탈출했다는 현생인류가 아닌, 28만 년 전 고인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만약 중국인들이 진뉴산인을 중국민족의 원류로 본다면 그것은 지나친 민족주의적 시각이며 지나친 중화주의입니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검토하면 고인류와 현생인류 간에는 어떤 유전자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배기동 한양대교수) 

발해연안문명권 주요구석기유적본포도.  

  ■고인류와 현생인류

  고인류는 요즘 사람들의 조상이 될 수 없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진뉴산인이나 먀오허우산인 같은 전기 구석기시대 사람들을 ‘민족의 원류이거나 뿌리’라고 여기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훗날 문명의 젖줄이 된 발해만 유역에서 잇달아 확인되는 구석기시대 유적들에 대해서는 우리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배기동 교수는 “국경이 없던 시절이던 구석기시대인 만큼 발해만을 비롯해 한반도와 만주까지 같은 구석기시대 문화영역이었다.”고 하면서 “우리 학계의 연구도 한반도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발해연안까지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랴오허문명전’ 전시실이 랴오둥 산간지역인 번시스에서 발굴된 직립원인 단계의 먀오허우산인을 설명하면서 “조선반도(한반도)의 구석기시대 문화와 관련성이 있다.”고 구체적으로 표기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먀오허우산 유적의 보고자는 “라오둥 반도와 한반도는 산수(山水)가 연결되었으며, 초기인류문화의 교류 또한 매우 밀접했을 것이므로 지대한 관심을 불어 모으고 있다”고 기록해놓았다. 이 유적에서 나온 석기들이 한반도 임진강변에서 확인된 전곡리 유적에서 발굴된 석기의 제작수법과 같은 계통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전곡리 유적을 전기구석기 시대(약 27만 년 전)로 판정한 데스몬드 클라크 교수. 그 옆은 고(故) 김원룡 교수.  

 

 ■전곡리인의 출생 

 사실 베이징원인과 진뉴산인이 살았을 무렵, 한반도 전곡리전곡리 현무암지대와, 퇴적층에서 확인된 일본 기카이 투주라 화산에서 분출된 화산재에 대한 연대측정 결과 전곡리 유적이 처음 생성된 것은 35만 년 전으로 드러났다.
  같은 곳에서도 고인류는 살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평양 검은모루동굴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의 인류화석(룡곡인)이 나온 것을 비롯해, 이미 70곳이 넘는 구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됐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봤듯이 발해만 유역을 비롯한 만주 일대에서도 10곳이 넘는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형구 교수는 “예컨대 룡곡 1호 동굴유적의 경우 구석기시대는 물론 신석기시대 인류화석도 나왔다.”고 하면서 “이것은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까지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살았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1만년 전쯤까지 한반도에 살다가 물러나고 북방에서 내려온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른바 ‘북방전래설’ 같은 학설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3편에서 계속)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34 관련글 쓰기

 올빼미란 새가 있다.

   너무 귀해서 천연기념물(제324-1호)로 대접받고 있는 야행성 맹금류다.
 그렇지만 고금을 통틀어 올빼미는 ‘불인(不仁)과 악인(惡人)’의 상징으로 치부돼왔다. 예로부터 어미를 잡아먹는 흉악한 새로 악명을 떨쳤다. 그 연원은 3000년 전으로 올라간다. 기원전 1043년 무렵, 주나라 창업공신인 주공(周公)은 어린 조카인 성왕을 도와 섭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공의 형제들인 관숙과 채숙이 가만있지 않았다. 주공의 독주를 질시한 것이다. 그들은 “삼촌(주공)이 조카(성왕)의 나라를 집어 삼킬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어린 성왕도 유언비어를 믿었다.
 그러자 주공은 성왕에게 왕실의 위기를 경고하는 시를 전했다.
 “올빼미야! 올빼미야! 이미 내 자식을 잡아먹었으니 내 집까지 헐지마라.(치梟치梟 旣取我子 無毁我室)”(<시경> ‘반풍·치효’)  
 이후 올빼미는 아비를 잡아먹는다는 맹수(경)과 함께 ‘효경’이라는 고사로 ‘아비 어미를 잡아먹는 아주 불경스런’ 동물로 즐겨 인용됐다.(<한서> ‘교사지상·주’)  

예로부터 올빼미는 어미 잡아먹는 아주 나쁜 새로 인식돼왔다. 야밤에 아이울음 같은 소리를 내서 그런지 흉조 중 흉조로 인식됐던 것 같다. 

 

 ■올빼미 혐오증
 올빼미 혐오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한나라 조정은 해마다 5월5일이 되면 ‘올빼미국(梟羹)’을 끓여 백관(百官)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악조(惡鳥)인 올빼미를 먹어서라도 깡그리 없애야 한다는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고금사문류취전집> 권9) 오죽했으면 올빼미와 비슷한 ‘수리부엉이(복鳥)’까지도 재수없는 새로 인식됐을까.
 예를 들어 한나라 문제 때 문인인 가의는 모함을 받고 장사왕 태부로 좌천돼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집에 올빼미 한마리가 날아오는 게 아닌가. 가의(賈誼·기원전 200~168)는 그 모습을 보고 절망에 빠졌다. 가뜩이나 장사 지방에 습도가 높아 수명이 길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려했던 터였다. 그런 마당에 ‘죽음의 상징’인 올빼미가 자신이 앉았던 의자로 날아온 것이다. 죽음을 직감한 가의는 ‘복조부(복鳥賦)’를 지었다.
 “복조(올빼미의 한 종류)가 내 집에 모였다. 들새가 왔으니 주인이 장차 떠나려 하는구나.(복集余舍 野鳥入室 主人將去)”
 과연 가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사기> ‘가생열전’)
 또 토란을 일컫는 별명으로 ‘준치(준치)’가 있다. 그 모양이 마치 올빼미가 웅크리고 앉은 것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신라 문장가 최치원은 중앙의 감시를 받을 수 없는 먼 변방에서 몰래 부를 축적하는 무리들을 두고 마치 웅크리고 앉은 올빼미처럼 치부한다고 해서 준치라는 비유를 쓰기도 했다.(<계원필경>)  

 

 ■황소·견훤·허균의 공통점은 ‘올빼미’

 올빼미는 나라의 망조를 알릴 때 인용됐다. 예컨대 고려의 망국이 눈앞에 있던 1389년(공양왕 원년) <고려사절요>를 보면 “공민왕에 이르러 아들이 없어 고려의 국운이 중간에 뚝 끊겼다”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우왕이 제사를 지닐 때 올빼미가 태실(太室· 종묘에 태조의 신주를 모신 방)에서 우니 천지가 진동했다.”
 곧 고려의 종묘사직이 망한다는 뜻이었다.
 ‘올빼미’는 이처럼 단순한 흉조가 아니었다. 흔히 부모를 해치고 반역을 도모한 강상죄인을 ‘올빼미’라 욕했으니까.
 예컨대 최치원은 881년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으면서 반란을 일으킨 황소를 이렇게 표현했다.
 “너는 독을 품고 올빼미 소리를 거두지 않은 채, 걸핏하면 사람을 물어뜯고 오직 주인에게 대들며 짖어 대는 일만 계속하였다. 그러고는 끝내 임금을 배반하는 몸이 되어….”(<계원필경> 제11권 ‘격서’)
 고려의 창업주 왕건은 견훤에게 같은 표현을 썼다.(928년)
 “족하(견훤)는 임금(신라 경애왕)을 죽이고…. 그 불인(不仁)함이 올빼미 보다 심했소.”(<고려사절요>)
 또 광해군은 허균을 역모죄로 능지처참한 뒤 허균을 “성질이 올빼미와 승냥이 같고 행동이 개와 돼지 같았다”고 극언했다.(<광해조일기>)

 

 ■올빼미는 소인배, 봉황은 군자
 올빼미와 반대의 의미를 가진 새는 봉황이었다. 올빼미는 소인배, 봉황은 군자를 의미했다. 예컨대 이미 언급한 한나라의 가의는 난새(鸞鳥·상상의 길조)와 봉황을 선인과 군자로, 치효(치梟·올빼미)를 소인과 악인로 각각 비유했다. 가의는 전국시대 초나라 애국시인인 굴원을 애도하는 글(‘弔屈原文’)을 지었다.
 “난봉이 숨었으며, 치효가 높이 날도다.(鸞鳳伏竄兮 치梟고翔)”
 군자는 쫓겨나고 소인배가 득세한 초나라의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봉황론, 올빼미론’이 가장 뜨겁게 부딪친 사례가 있다. 서계 박세당이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올빼미’라 하고, 백헌 이경석을 ‘봉황’이라 칭했을 때였다. 박세당은 이경석의 신도비문을 찬술하면서 이렇게 쓴다.
 “함부로 거짓말을 하고 멋대로 속이는 것은(恣僞肆誕) 어느 세상에나 이름난 사람이 있는 법(世有聞人)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梟鳳殊性)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했네.(載怒載嗔)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不善者惡) 군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君子何病)” 

서계 박세당의 고택. 박세당은 송시열을 올빼미라 칭함으로써 엄청난 논쟁에 휩싸인다. 

이 무슨 뜻인가. 송시열은 병자호란 직후 삼전도비문을 쓴 이경석을 비난한 적이 있다.(1668년) ‘오랑캐에 아부해서 한평생 오래 살았다’는 뜻의 ‘수이강(壽而康)’이라고 표현한 것이다.(1668년)
 박세당은 바로 그 송시열의 비난을 두고 ‘군자(봉황·이경석)를 비난하는 소인배(올빼미)의 짓’이라 폄훼한 것이다. 그러니까 박세당은 이경석을 ‘노성인(老成人)’으로, 송시열을 그런 노성인을 업신여기고 보복하는 ‘불상인(不祥人)’으로 치부한 것이다. 이 사건은 무시무시한 파국으로 끝난다.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의 파상공세에 박세당의 소론측은 완패를 당했다. 박세당이 사서삼경을 주석한 <사변록>은 사문난적으로 지목됐다. 그의 저작물은 모두 불구덩이에 던져진다. 함부로 ‘올빼미’라는 표현을 쓰면 안되겠다.

   홍용표 통일부장관이 그제 ‘대북 매파냐’ ‘비둘기파냐’는 질문에 ‘올빼미 정도로 생각해달라’고 한 모양이다.
 ‘비둘기나 매’와 같은 극단보다는 균형감각을 갖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고금을 통틀어 온갖 흉악한 이야기를 담아온 ‘올빼미’가 아닌가. 아무리봐도 ‘올빼미와 균형감각’은 맞지않은 비유인 것 같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33 관련글 쓰기

 “간디씨를 보니 놀랍고, 역겹다. 탁발승 모습으로 총독 관저의 계단 위를 반나체로 올라가는 꼴이라니….”
 윈스턴 처칠은 1930년대 초 비폭력 자치·독립 운동을 펼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를 입버릇처럼 ‘반나체의 거렁뱅이’로 표현하며 증오했다. 그는 ‘불멸의 대영제국’을 외쳤던 제국주의자로서 ‘영국의 나치’로까지 일컬어지던 극우파였다. 이 때문에 영국이 유럽보다도 큰 대륙의 3억 인구를 통치해온 그 엄청난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처칠은 당시 영국 내의 ‘인도 자치’ 움직임에 분노했고,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이고 있던 간디에게 극도의 분노감을 표한 것이다. 심지어 단식투쟁을 펼치던 간디를 향해 “굶어죽었으면 좋겠다”는 악담을 퍼부었단다. 처칠에게 간디는 ‘악의 축’이었던 것이다. 당시 인도 총독이었던 에드워드 어윈 경은 “처칠의 태도는 시대착오적이다. 영국 식민지 사람들이 상실감 속에서 살아가는 시대는 지났다”고 꼬집었다. 처칠의 지독한 백인우월주의는 악명이 높았다. 예컨대 그는 “앵글로 색슨족이 우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면서 “(식민차관 시절) 인도인이 백인과 동등하게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처칠의 악담에 간디는 “나의 육체를 깔아뭉갤 수는 있지만 영혼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의연한 반응을 보였다. 죽기 전에도 간디는 “나를 험담한 사람에게 결코 분노심을 갖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기도 했다.
 지난 14일 영국 런던 템스 강변의 의회 광장에서 마하트마 간디의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생전에 그토록 간디와 인도의 독립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던 처칠의 동상도 그 광장 한편에 서있다고 한다. “간디에게 ‘런던의 영원한 집’을 선물한다”고 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의 축사가 심금을 울린다. ‘인도의 기업을 끌어들이려는 정치적 의도’라며 의미를 축소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 해도 침략의 역사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일본을 생각해보라.
 일본 땅에 ‘유관순 동상’이 서는 날…. 그런 날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너 자신부터 변하라’는 간디의 가르침을 일본인들에게 바꿔 전하고 싶다. ‘역사를 바꾸고 싶다면 일본 스스로 변하라’고….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32 관련글 쓰기

 ‘홍재(弘齋)’ ‘탕탕평평평평탕탕(蕩蕩平平平平蕩蕩)’ ‘만기(萬機)’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정조가 자신의 저작물에 찍은 장서인(인장) 71종을 분석한 논문을 보라.(김영진·박철상·백승호의 ‘정조의 장서인’, <규장각> 45집,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백성을 대하는 임금의 자세가 절절이 묻어난다.

정조가 즐겨 사용한 장서인 가운데 '만기' 인장이 눈에 띈다. 정조의 만기친람은 유명했다. 심지어 "'깨알지시'를 내리지 말아달라" "건강 좀 챙기라"는 대신들의 부르짖음에 정조는 "보고서 보는게 취미인데 어떡하냐"고 반문하기도 했다.|김영진 외의 '정조의 장서인', <규장각> 45집에서 

   ■침실 이름이 '탕탕평평실'

 우선 ‘홍재’는 “뜻을 크게(弘) 가져라”는 증자의 가르침을 새긴 것이다. 

   "증자는 말했다. ‘선비는 뜻이 크고 굳세지 않으면 안된다. 임무가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정(仁政)의 실현을 임무로 여기고 있으니 얼마나 무겁고, 죽은 뒤에야 그만 둘 수 있으니 얼마나 먼 길이겠는가."(<논어> ‘태백’)  
   백성을 보살펴야 하는 임금은 세상을 크고 넓게 바라봐야 한다는 뜻에서 ‘홍재’ 인장을 애용한 것이다.

  ‘만천명월주인옹’은 무슨 뜻인가.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물(만천)이 있지만 달(군주)은 그 형태에 따라 똑같이 비춘다는 것이다. 즉 세상의 주인인 군주는 백성의 다양한 능력을 골고루 활용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또 자신의 침전 이름을 ‘탕탕평평실’로까지 지은 정조였다. 그랬으니 ‘탕탕평평평평탕탕’ 인장도 즐겨 사용했으리라.
 ‘탕탕평평’은 “붕당과 편파가 없으면 왕도(王道)가 탕탕하고, 평평하다”(<서경> ‘주서·홍범’)는 옛말에서 나왔다.
 정조는 ‘정구팔황 호월일가(庭衢八荒 胡越一家)’라는 글자까지 침전 벽에 걸었다. ‘변방도, 오랑캐도 앞뜨락이나 한 집안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지역이나 당색에 따른 차별은 절대 없음을 잠자리에서까지 되새긴 것이다.  

정조의 장서인 가운데 '탕탕평평평평탕탕' 인장도 눈에 띈다. 정조는 '탕탕평평', '정구팔황' 등

인재를 골고루 등용한다는 방침을 새긴 글귀를 금과옥조로 삼았다. 

   ■만기친람의 주인공

  정조의 애용 장서인 가운데 ‘만기’ 인장이 눈에 띈다. ‘만기’란 무엇인가. 예로부터 “천자(군주)는 하루에 만가지 일을 처리한다”고 해서 ‘일일만기(一日萬機)’라 했다.(<서경> ‘고요모’) 만기친람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그런데 아무리 천명을 받은 몸이기로소니 하루에 만가지 일을 어떻게 하는가. 정조가 바로 만기친람의 주인공이었고, 시쳇말로 일중독증환자(워커홀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컨대 1781년(정조 5년) 규장각 제학 김종수는 정조에게 “작은 일까지 너무 세세하게 챙기시며 정작 큰 일을 소홀하기 쉽다”고 꼬집는다. 정조의 만기친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동의하지 않는다.
 “작은 것을 거쳐 큰 것으로 나가는 법이다. 그것이 과인이 작은 것이나 살핀다는 지적을 받으면서도 눈 앞에 닥친 일부터 해나가려는 이유인 것이다.”
 정사를 처리하고 책을 읽느라 밤을 꼴딱 지새우기 일쑤였다. 정조와 심환지가 나눈 편지를 보라.
 “(바빠서) 눈코 뜰새 없으니 괴롭고 괴로운 일이라.”(眼鼻莫開 苦事苦事·1797년 12월26일)
 “백성과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도느라 날마다 늙고 지쳐간다.(而民憂薰心 朝家關念 夜夜繞榻 日覺衰憊·1799년 1월20일)
 1784년(정조 8년) 도제조 서명선이 “제발 건강 좀 챙기시라”고 걱정하자 정조의 대꾸가 걸작이었다.
 “정신 좀 차리고 보니 국사가 많이 지체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보는 것이네.(不得不親覽矣) 그리고 나는 원체 업무 보고서 읽는 것을 좋아하네. 그러면 아픈 것도 잊을 수 있지.” 

 ‘만천명월주인옹’ 장서인.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물(만천)이 있지만 달(군주)은 그 형태에 따라 똑같이 비춘다는 것이다. 즉 세상의 주인인 군주는 백성의 다양한 능력을 골고루 활용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불멸의 뉴스메이커

   업무 보고서를 좋아하고, 그것을 읽으면 아픈 것도 잊는다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랬으니 ‘만기친람은 임금의 숙명’이라고 여겨 ‘만기’ 혹은 ‘일일이일만기’ 등의 인장을 즐겨 사용했을 것이다.
 정조의 장서인 가운데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이른바 ‘독서유삼도안도구도심도(讀書有三到 心到眼到口到)’라는 긴 단어의 인장이다. 무슨 뜻인가. 독서를 함에 있어 삼도(三到)가 있는데, 눈과 입과 마음을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는 소리다. 이것은 주자가 말한 ‘독서법’에 나오는 말이다.(<주자독서법> 권 1 ‘강령’)
 “내(주자)가 일찍이 독서에 삼도(三到·세가지 도달하는 법)가 있다고 했다. 심도(心到), 안도(眼到), 구도(口到)가 그것이다. 마음이 가지 않으면 눈으로 봐도 이해하기 어렵고, 마음과 눈을 집중하지 않으면 소리를 내어 읽어도 기억하기 어렵다. 세가지 가운데 ‘심도’가 가장 중요하다. 마음이 도달하면 눈과 입은 자연스레 도달하게 된다.

   그러고보니 정조는 그가 사용한 도장까지 화제가 될만큼 불멸의 뉴스메이커인 것 같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31 관련글 쓰기

 이번 주 ‘흔적의 역사’ 팟 캐스트의 주제는 ‘고려·조선을 뒤흔든 사교육 열풍’입니다.
 지난 주 살펴봤듯 이 나라 사람들의 교육열은 지독합니다. 이미 1200년 전에 남의 나라(당나라) 땅에서 신라와 발해인들이 내가 잘났니, 네가 잘났니 하는 등 서로의 우열을 다투는 볼썽 사나운 작태까지 연출하지 않았습니까. 역사에 길이 남을 문장가라는 최치원까지 가세했다니 말입니다.
 고려 조선에 들어와서도 더했으면 했지, 덜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고려시대 때는 12개 명문사학들이 과거시험에 자기 학생들을 합격시키느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답니다. 최충의 문헌공도 등은 해마다 여름철이 되면 유명한 사찰을 빌려 학생들을 50일 간이나 합숙시켰답니다. 그래놓고는 졸업생 가운데 뛰어난 선배들을 특별 강사로 초청해서 이른바 족집게 과외를 시키고, 과거시험대비용 모의고사를 치렀답니다.  
 그것도 모자라 사교육 열풍에도 빠졌습니다. 명문 중 명문인 문헌공도 학생이었던 이규보는 개인과외선생까지 모셔 과거를 준비했답니다. 고려말 충렬왕 때 지금의 사설학원과 같은 서당을 차렸던 강경룡은 고려·조선을 통틀어 최고의 스타강사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충렬왕 때 치른 과거시험에서 그 학원 출신 10명이 한꺼번에 합격했다니 말입니다.
 강경룡은 이 덕분에 국왕으로부터 상급을 받았고, 그의 명성은 조선조 세종 임금대까지 이어집니다.
 강경룡 뿐 아니라 고려와 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이름을 날린 강사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부터 고려와 조선을 뒤흔든 사교육 열풍과, 그 열풍 속에서 명멸한 스타강사 이야기를 합니다.(다음은 관련기사입니다.)
 

  “이 노인은 비록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을 가르치는데 게을리하지 않아 제자들을 성공으로 이끌었구나. 어찌 공이 적다 하겠는가.”(<고려사절요>)
 1305년(고려 충렬왕 31년)의 일이다. 충렬왕이 유생 강경룡을 치하하고 곡식을 하사했다. 대체 벼슬도 하지 않은 강경룡이 무슨 공을 세웠다는 걸까.
 <고려사절요>와 <역옹패설>은 물론 조선의 정사인 <세종실록> 등에도 그 연유가 나온다.
 “강경룡이 집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그 해(1305년) 실시된 국자감시(생원·진사시)에서 강경룡의 제자 10명이 모두 합격했다. 스승(강경룡)의 집에 합격한 제자들이 몰려가 스승을 뵈었는데, 그 떠들썩한 소리가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다. 마침 강경룡의 동네에 익양후 왕분(종친·고려 신종의 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단원 김홍도의 <평생도병> 중 ‘삼일유가’ 장면.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이가 어사화를 꽂은채 3일간 거리를 돌아다니며 축하행사를 치르는 모습을 담았다. |국립중앙박물관

 

 .
 ■‘강경룡 과거학원’
 요컨대 강경룡이라는 사람의 사립학교(혹은 사설학원)에서 공부한 10명이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는 소리다. 그래서 합격자들이 스승에게 몰려가 온 동네가 밤새도록 들썩거렸다는 이야기다.
 강경룡과 같은 동네에 살던 익양후가 그 소리를 듣고 다음 날 충렬왕에게 전하자 충렬왕이 칙명을 내려 치하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왕조가 바뀌었는데도, 강경룡은 ‘모범사례’로 칭송의 대상이 됐다는 사실이다.
 “1436년(세종 18년), 지성균판사 허조가 임금에게 아룄다. 고려 충렬왕이~강경룡을 포창한 일이 있사온데…. 지금은 유생 유사덕과 박호생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 서재를 차려놓고 수십명의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들을 <육전(六典)>에 따라 특별히 포상하신다면….”
 허조는 “서재(書齋)를 설치, 학생들을 가르친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이 법전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했다.
 “고려 시대부터 한량·유사들이 사사로이 서재를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조(조선)에 와서도 서울엔 국학(성균관 및 4부학당), 지방엔 향교를 각각 두었지만 사사로운 서재를 만드는 법을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허조는 국가의 힘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립학교를 장려하자는 취지의 상소를 올린 것이다. 세종도 허조의 말을 좇아 유사덕과 박호생 등이 세운 ‘모범 사학(혹은 학원)’을 표창했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께서 ‘사교육’을 장려하고 있다니….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예나 지금이나 공교육의 한계와 붕괴를 웅변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사교육의 시조는 경당
 돌이켜보면 우리 사(학)교육의 시조는 고구려 경당(경堂)이 아니었나 싶다.
 “가난한 마을 미천한 집안까지도 힘써 배우기를 좋아해 길거리마다 큼직한 집을 지어 경당이라 했다. 결혼하지 않은 자제들을 이곳에 보내 글을 외우게 하고 활쏘기를 익히게 했다.”(<신당서> ‘고구려전’>)
 또 원효대사의 아들인 신라의 설총(617~686)도 “‘구경(九經·유교 9가지 경전)’을 이두로 풀어 제자들을 가르쳤으므로 지금까지 학자들이 종주로 삼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풍조는 고려에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는 마을마다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2~3곳이 있고, 미혼의 자제들이 무리를 지어 경서를 배웠다.”(<고려도경>)
 ‘마을의 경관과 서사’란 사학 혹은 학원의 형태로 운영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와 조선, 양대에 걸쳐 ‘명문의 사표’로 추앙받은 강경룡의 ‘개인학교’는 과연 고려조정의 정식인가를 받은 ‘사립학교’였을까, 아니면 그냥 ‘사설학원’이었을까.
 <고려사절요> 등의 기록을 보면 제도적으로 인정받은 정식사학이라기 보다는 ‘사설학원’ 쪽이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설령 사립학교였다 해도, 지금의 대안학교 쯤 됐을까.  
 사실 고려의 대표적인 국립학교는 992년(성종 11년) 창설된 국자감이었다. 국자감은 인종 때 국자학·태학·사문학·율학·서학·산학 등 경학(京師·6학)으로 정비됐다.
 그런데 국자학은 3품 이상, 태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의 관리 자제들에게만 입학이 허용됐다. 그러니 지위는 좀 낮지만 머리가 좋은 가문의 자제들은 사학의 문을 두드렸다. 그 뿐이 아니라 엘리트 졸업생의 족집게 과외를 받는 사학의 과거합격률이 좋았기 때문에 명문사학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름을 잘라낸 뒤 채점한 조선시대 과거답안지. 과거 합격만이 출세의 유일한 길이었던 고려 조선시대 선비들의 고투가 담겨있다.

 ■고려의 12대 명문사학
 고려 전통의 명문사학은 아마도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이후 개경에 존재했던 ‘십이공도(十二公徒)’일 것이다. 지금의 특목고라 할 수 있는 사학 12학교는 다음과 같다.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 정배걸의 홍문공도(弘文公徒), 노단의 광헌공도(匡憲公徒), 김상빈의 남산공도(南山公徒), 김무체의 서원도(西園徒), 은정의 문충공도(文忠公徒), 김의진의 양신공도(良愼公徒), 황영의 정경공도(貞敬公徒), 유감의 충평공도(忠平公徒), 문정의 정헌공도(貞憲公徒), 서석의 서시랑도(徐侍郞徒), 실명씨(失名氏)의 귀산도(龜山徒)….”(<고려사> ‘선거지·사학’)
 그 가운데서도 명문 중의 명문은 해동공자 최충의 ‘문헌공도’였다.
 “문종 때 태자 중서령 최충이 후진을 모아 가르쳤는데, 양반의 자제들이 최충의 집에 문전성시를 이뤘다. 배우려는 제자들이 차고 넘쳐 9재로 나눴다. 낙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덕(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 등이다. 이를 ‘시중 최공도’라 했다. 양반자제 가운데 무릇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는 반드시 이 공도에 속해 공부했다.”(<고려사> ‘선거지·사학’)
 오죽 줄을 섰으면 9반으로 분반해서 학생들을 모집했을까. 다른 ‘11공도’는 모두 최충의 문헌공도를 ‘벤치마킹’해서 설립한 사학들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를 보려는 학생은 반드시 최충의 학교에 입학해야 했다”는 것이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려면 명문 ‘문헌공도’에 입학해야 했으니…. 예나 지금이나 못말리는 ‘일류병’은 어찌 그렇게 똑같은지….
 하기야 과거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사람구실을 하지 못하는 세상이었으니 무슨 할 말이 있을까. 1481년(성종 12년) 성균관 진사 이적의 한마디가 폐부를 찌른다.
 “어진 이를 구하는 방법으로 오로지 과거에만 의존합니다. 과거로 출세하지 아니하면 비재(非才)라고 일컬어 지목하고 으레 속리(俗吏)로서 대우합니다.”(<성종실록>) 


  ■문헌공도의 족집게 과외
 과거시험을 위한 ‘문헌공도’의 집중교육은 극성맞았다. <고려사> ‘열전·최충전’에 기록된 문헌공도의 ‘특별과외’를 한번 들춰보자.
 “해마다 여름철엔 귀법사의 승방을 빌려 (50일 동안) 하과(夏課), 즉 ‘여름철 특별과외’에 임했다. 졸업생 가운데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했지만 아직 벼슬하지 않은 자를 교도(敎導·강사)로 삼아 구경(九經·9개 유교경전)과 삼사(三史·사기, 한서, 후한서)를 가르쳤다. 간혹 촛불에 금을 그어 시간을 정하고 시를 짓게 하여 글의 등급에 따라 등수를 정했다. 그런 다음 작은 술자리를 베풀어 하루종일 술잔을 돌렸다. 이를 두고 아름답게 여기고 찬탄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 무슨 말인가. 여름철마다 개경 송악산 아래의 국찰 귀법사에 ‘특별과외장’을 마련했다는 것. 그런 다음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모교 졸업생을 특별강사로 초빙해 후배들에게 ‘특별과외’를 시켰다는 것.
 “하과는 과거에 대비하여 시와 부를 익히는 공부”(<동국이상국집> ‘후집 권 7 고율시’)였다는 이규보의 언급처럼 ‘하과’는 과거시험 대비용 ‘족집게 과외’였던 것이다.
 ‘족집게 과외’의 백미는 ‘각촉부시(刻燭賦詩)’, 즉 ‘촛불에 눈금을 그어놓고 그곳까지 타들어갈 때까지 시를 짓는 시험’이었다. 이를 ‘급작(急作)’이라 했는데, 이 급작의 성적에 따라 차례로 술잔을 돌렸다는 것이다. 이 ‘급작’이야말로 지금으로 치면 ‘수능대비 족집게 모의고사’였던 셈이 아닐까. 갓 급제한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출제경향과 예상문제, 그리고 답안지 작성요령을 전수해준 것이다.

 

 ■국립학교에까지 퍼진 과외열풍
 이렇듯 최충의 ‘문헌공도’에서 시작된 ‘하과’, 즉 명문사학들의 여름철 특별과외는 ‘유별한 교육붐’을 타고 요원의 불길처럼 퍼졌다.
 “12공도의 관동들이 해마다 여름철이면 산림에 모여 학업을 입히다가 가을이 되면 파했다. 용흥사와 귀법사 두 절에 많이 머물렀다.”(<보한집>) 
 “12도마다 재를 설치하고 문도가 많건 적건 상관없이 늘 여름철에 한차례씩 과업을 익혔고, 그것을 ‘하천도회’라 했다.”(<동국이상국집> ‘후집 권7 고율시’)
 공교육의 장인 국립학교에도 ‘하과’가 퍼졌다. 예컨대 고려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은 16~17살 때 국자감이 실시한 두 번의 구재도회(九齋都會)에서 무려 24~25회의 장원을 차지했다.(<목은집>)
 <제왕운기>를 쓴 이승휴도 1240년(고종 27년) 중원(충주)의 서기였던 원부가 120여 명의 유생들을 모아 실시한 하과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의 나이 17살 때였다.
 ‘하과’는 그나마 사학이든 관학이든 학교의 테두리 안에서 실시한 공식 과외수업이라 할 수 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고려의 최고명문 사학인 문헌공도 출신인 이규보는 과거를 앞두고 개인과외수업까지 받았음을 기록했다. 그는 아들에게까지 유명과외선생을 붙였음을 밝히고 있다. 

 ■특별과외에 개인교습까지
 지금 이 순간도 골칫거리라 할 수 있는 ‘개인과외’가 고려~조선을 통틀어 유행했다.
 14살 때 최고명문 사학인 문헌공도에 입학한 이규보의 경우를 보자. 아버지(이윤수)의 교육열은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문헌공도의 성명재에 입학시킨 지 2년만인 1183년 봄, 수주(수원) 수령으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규보를 개경에 남겨놓고 임지로 나섰다. 5월 실시될 예정인 국자감시(생원·진사시) 때문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아들의 합격을 위해 개인과외 선생까지 붙였다. 이규보가 ‘이 이부라는 이에게 드린다’는 고율시를 보자.
 “공(이 이부)이 집에서 매양 관동(冠童·어른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쳤는데, 나도 어릴 때 참여했다. 그 때 선생의 지위로 모셨고….”(<동국이상국집> ‘전집 권 8 고율시’)
 이규보가 ‘1183년 과거’에 대비, 이 아무개라는 사람에게 개인과외를 받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규보 가문의 ‘사교육’이 이규보의 셋째아들(이징)에게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규보의 고율시(‘신 대장에게 내 아들 징을 가르치는 데 사례함’)을 보자.
 “내 자식 우둔함을 혐의치 않고, 갈고 다듬어 옥 만들기를 기약하는데 그대의 후의를 무엇으로 갚을까.”

 

 ■유명학원강사를 찾는 풍토
 이규보는 이 시를 쓰면서 “신 대장은 나이 80여 살인데 항상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는 각주를 달았다. “셋째 아들 징이 썩은 나무 같아 새길 수 없다”면서 신 아무개라는 과외선생에게 아들을 맡긴 것이다.
 “동몽(어린 학생들)이 배우기를 청하면 거절하지 않으니 학생들이 모여 글방(서숙·書塾)을 이뤘네.”
 이규보의 시를 보면 신 대장이라는 사람은 여든살이 넘도록 글방을 차려놓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전문학원 강사였음을 알 수 있다.
 당대 최고의 유명 강사가 또 있었다. 진(晉) 수재(秀才·생원)라는 사람이었다.
 “눈빛 같은 창문에 아침해 비치니/온갖 서적 차례로 다 읽을 수 있지/모든 선비 물고기 떼처럼 모여들어/공부에 뜻을 품고 이곳을 서숙으로 삼는구나.”(이규보의 ‘진 수재(晉秀才)의 별장에 써서 붙이다’)
 이규보는 역시 제목 아래 ‘진 아무개 생원(수재)이 학생들을 모아 학업을 가르쳤다’는 주를 달았다. 이 진 수재야말로 고려시대를 주름잡은 유명강사였던 것이다.
 사실 그 때나 지금이나 공교육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분명 비정상적이었다.
 1389년(공양왕 1년) 조준은 “공교육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요지의 상소문을 올린다.(<고려사절요>)
 “학교는 교화와 풍속의 근원인데…. 요사이 군역을 피하려는 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모아 ‘하과’를 핑계로 당·송의 절구를 50일 간이나 읽고 있는데, 수령들도 이를 보고 전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근실하고 학식이 넓은 사람을 교수관으로 삼아 파견하고, 마필과 접대를 모두 향교에 맡기고 유학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고을의 교수로 삼고….” 

고종이 과거급제자에게 내린 교지와 어사화.

 ■고려·조선의 공교육 붕괴 
 하지만 붕괴된 공교육은 왕조가 바뀌어도 회복되기 어려웠다.
 조선 초부터 ‘열공’하는 학생들의 글읽는 소리로 시끄러워야 할 성균관이 텅텅 비었다니 유구무언이지 않은가.
 1417년(태종 17년), <태종실록>은 예조가 마련한 과거시험 규정을 열거하면서 성균관의 열악한 환경을 지적했다.
 “서울의 호세 자제(豪勢子弟)들이 생원시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있은 지 얼마 안되어 그 거처(居處)와 음식이 제 뜻에 적합하지 못함을 꺼려 했다.…왕왕 풍습병(風濕病)을 얻게 되는 까닭에 사람들이 싫어했다. 성균관에 거처하며 공부하는 자는 늘 30~40명 미만이었다.”
 태종은 온돌방을 재(齋·기숙사) 한 모퉁이에 지어, 병자들의 휴양소로 활용하고 의원 두 명을 상주시켰다. 그러나 “갈 곳 없는 늙고 병든 사람들을 성균관 교관(선생)으로 발령내는 형국”(중종의 언급)이었으니 오죽했으랴. 1429년(세종 11년) 사간 유맹문의 상소를 보면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세종실록>)
 “학교의 흥폐는 사도의 명암에 달려있는데…. 나이 많은 유생들을 교도(선생)로 삼으니…. 심지어는 ‘해(亥)와 시(豕)’, ‘노(魯)와 어(魚)’의 글자를 구별할 줄 모르는 자들이 선생이라 합니다.”
 그야말로 무식하고 늙은 사람들이 선생이라 칭하니 한심하다는 것이었다. 
 1527년(중종 22년) 지사 김극핍의 상소도 의미심장하다. 관학(성균관) 교수들이 너무 자주 바뀌는 폐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유생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선생 한사람의 기르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학부형들은 관학에서는 공부가 안된다고 해서 여염의 잘 가르치는 개인선생에게 과외수업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래서야….”(<중종실록>)
 한마디로 공교육은 선생들은 믿을 수 없으니 실력있는 과외선생을 찾는 것이 당대의 유행이라 하지 않은가. 골백번 세월이 지나도 다를 바 없는 교육부재의 현장이 아닌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30 관련글 쓰기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
 얼마 전 서울고법 형사 6부 김상환 부장판사가 국정원의 대선개입의혹 사건 항소심에서 매우 흥미로운 판결문을 썼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실형을 선고하면서 유명한 ‘자왈(子曰·공자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즉 <논어> ‘위정’에 나오는 ‘공호이단 사해야이’, 즉 ‘나와 다른 쪽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배척한다면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꼬집은 것이다. 김 판사는 이어 “이단(異端)에 대한 공격과 강요가 결국 심각한 갈등과 분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라고 했다.

세상을 등진채 밭을 갈고 있는 은자에게 길을 묻는 공자와 제자들을 그린 그림. 공자는 끊임없이 세상에서 쓰임받기를 원했다. 도가는 그런 공자에게 세상의 미련을 끊으리고 했다.

 ■어느 판결
 그런데 말이다.
 김상환 판사가 인용한 ‘공자님 말씀’은 시대 상황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견강부회되었던 논쟁의 ‘자왈(子曰)’이다.
 아주 단순하게 보자면 ‘공(攻)’자를 공격이나 비판의 의미로 해석하느냐, 아니면 전공하고 힘쓴다는 뜻으로 쓰느냐에 따라 완전히 상반되는 의미를 전하기 때문이다. 또 ‘이(已)’자를 ‘…일 뿐이다’의 의미로 볼 지, 아니면 ‘그치다(已)’의 뜻으로 볼 지도 논쟁적이다.  
 그러니 ‘공호이단 사해야이’의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먼저 김상환 판사의 인용대로 ‘이단을 공격하면(攻) 해로울 뿐(已)’이라는 해석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해석에 따라서는 ‘이단을 공격하면(攻) 해로움이 그친다(已)’고도 할 수 있으며, ‘이단을 전공(攻)하면 해로울 뿐(已)’이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같은 공자님의 말씀을 두고 이 무슨 헷갈리는 해석이란 말인가.

 

 ■攻은 공격인가, 전공인가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김상환 판사가 인용한 ‘공자님 말씀’의 해석은 고금의 역사에서는 ‘소수 의견’이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다수 의견’은 ‘이단을 전공하면 해로울 뿐’이라는 주자의 주석(주자의 <논어집주>)을 따른다.
 중국 송대의 유학자이자 주자학을 집대성란 주자(1130~1200)의 주석이다. 그러니 어느 누가 쉽게 토를 달을 수 있었을까. 주자는 우선 북송의 학자 범조우(1041~1098)의 ‘공(攻)은 전공한다는 뜻’이라는 해석이 맞다고 찬성했다.
 즉 <주례> ‘고공기’에 “나무 다루기를 전공하는 공인과 쇠다루기를 전공하는 공인이 있다.(有攻木之工 攻金之工)”는 구절이 있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공(攻)이 바로 ‘전공’, 혹은 ‘전념’의 뜻이라는 것이다.
 주자는 이어 “이단(異端)은 성인의 도(道)가 아닌 양주와 묵적 같은 것”이라 했다. 양주(기원전 395~335)와 묵적(기원전 480~390)이 누구인가. 양주는 개인주의(이기주의), 묵적은 겸애주의(이타주의)를 주장한 제자백가였다.
 맹자는 이를 두고 “양주는 부모를 업신여기고(無夫), 묵적은 임금을 도외시한다(無君)”면서 “양주·묵적을 배격해야 성인이 되는 것”이라 한 바 있다.

송시열, ‘주자명언(朱子名言)’,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것은 오직 일직(一直)이란 글자일 따름이다’이라는 내용이다. |셩균관대 박물관 소장

 ■이단의 실체는
 주자는 바로 “이렇게 무부·무군의 지경에 이르게 한 양주·묵적을 ‘전적으로 연구하고 정밀히 알고자’(攻)하는 것은 극심한 해(害)가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주자는 이어 정자(程子)의 ‘불교는 양주·묵적보다 더 이치에 가깝기 때문에 그 해가 더욱 극심하다’고 주장도 받아들였다. 즉 도교는 물론이고, 이치와 더욱 가까워 세상을 미혹시키는 불교 등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극력 배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주자의 주장은 맹자를 존숭하고 도·불교를 배척한 당나라 시대 유학자인 한유(韓愈·768~824)의 입장과 궤를 함께 한다.
 한유은 당나라 말기에 불교와 도교의 폐단이 극에 달하자 불·도교를 이단으로 규정, 맹비난한 유학자이다.
 “노(자)·불(교)을 막지 못하면 유가의 도가 전해지지도, 행해지지도 못한다. 그들의 거처를 민간의 집으로 만들고, 노·불의 책은 불태워 없애야 한다.”

 

 ■시험 예상문제
 하지만 이 ‘공자님의 말씀’을 두고 고금을 통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꽤나 있었다. 수군거림도 많았다.
 공자가 ‘전공하면~’이라는 단서를 단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속출한 것이다.
 ‘이단을 전공하면(攻) 해로울 뿐(已)’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전공하지 않고 그냥 대충 공부하면 괜찮다는 것이 아닐까. 이 대목은 유학자들도 쉽게 풀 수 없는 의문점이었던 같다.
 예를들어 조선 후기의 문인인 윤기(1741~1826)는 임금 주관으로 치를 예정인 ‘문신정시(文臣庭試)’에 대비하려고 3가지 예상문제를 준비했다. 그런데 예상문제 가운데 공자님의 ‘공호이단 사해야이’가 있었다.    
 “주자는 왜 ‘이단을 전공하면 안될 뿐’이라 해석해놓고는, 다시 ‘전공해서도 안되고, 대충 알아도 안된다’고 했을까. 왜 말이 다를까.”(윤기의 <무명자집>) 
 윤기는 주자가 <논어집주>에서는 ‘이단을 전공하면 해로울 뿐’이라고 해놓고, <주자어류>에서는 “이단을 전공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대략 이해하는 것도 안 된다.(不惟說不可專治 便略去理會他)고 달리 말한 것에 의문을 품은 것이다. 윤기는 이런 문제가 만약 출제되면 어떤 논리로 답안을 작성해야 할까 고민했던 것이다.  
 윤기 같은 유학자도 그 심오한 뜻을 알기 어려웠던 알쏭달쏭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단은 멀리해야 한다
 한말 유학자 유중교(1832~1893)는 나름 이렇게 풀이했다.(<성재집> ‘왕복잡고(往復雜稿)’)
 즉 공자가 ‘이단’을 외친 춘추시대에는 이단이 막 시작할 때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익을 좇아 해로운 줄 모르고 전공한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이익을 바라고 이단을 전공하지만 결과적으로 무익하고, 해가 될 뿐”이라는 의미에서 ‘공호이단 사해야이’를 외쳤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공자께서 “전공한 후에야 해가 된다고 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랬다가 훗날 불가와 도가의 폐해가 극심해지자 정자와 주자 등이 적극 나서서 이단척결을 외쳤다는 것이다.
 정자(程子·정호·1032~1085)는 “마땅히 음란한 음악이나 아름다운 여자처럼 멀리해야 한다.”라고 했다. 오죽했으면 정자의 경우 평생 <장자(莊子)>와 <열자(列子)>를 아예 보지 않았을까.
 이에 주자는 더 나아가 ‘이단은 전공해서도 대략 이해만 해서도 절대 안된다’고 못박아버린 것이다.
 공자 말씀에 절대 움직일 수 없는 토를 단 것이다.

우암 송시열 영정. 주자학의 입장에서 이단을 백안시하고 척결하고자 했다.|청주박물관 소장

 ■이단은 초전박살내야 한다
 조선 주자학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을 보라.
 그는 종질(5촌)이 윤휴(1617~1680)의 주석서인 ‘중용주’를 책상에 둔 것을 보고 앙앙불락했다고 한다.
 “그 따위 윤휴가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이냐. 너는 이전부터 내가 윤휴를 배척하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 어찌 감히 이런 글을 책상 위에 두느냐.”(<송자대전> 권84)
 그러면서 우암은 윤휴의 책을 땅에 던지고 꾸짖으며 눈앞에 스치지도 못하게 했단다.
 왜 그랬을까. 윤휴는 “천하의 학설은 한사람의 것이 아니며 주자의 학설이 아니라 오직 진리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학자다. 주자학을 벗어나 독자 학문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한 인물이다. 송시열은 바로 주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였다. 윤휴는 결국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사사된다.(1680·숙종 6년)
 송시열은 바로 그런 윤휴의 주석(‘중용주’)을 책상에 둔 것만으로도 ‘불경죄’를 저지른 것으로 백안시한 것이다.
 결국 공자의 ‘공호이단 사해야이’라는 뜻을 ‘전공한 후에야 해가 된다’고 해석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대략이나마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어도 크게 해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단은 초전박살돼야 하며, 소통도 필요없고 논란 및 논쟁도 필요없다는 것이다. 씨를 말려야 한다는 소리다. 무시무시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양주·묵적·노장·불가에 천주교까지
 어디 송시열 뿐인가. 1489년(성종 20년) 성종 임금이 화를 벌컥 냈다. 
 어느 과거응시생이 향시(鄕試)에서 ‘부처에게 제사를 지내 화(禍)를 물리칠 것’을 건의하는 답안지를 작성한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성종 임금은 예의 공자의 ‘공호이단 사해야이’를 인용하면서 “그 자를 추국해서 변방으로 내쫓으라”는 명을 내린다.
 “부처의 해를 알지 못하느냐. 유생이라는 자가 요·순의 도를 올리지 않고 불가의 법을 올리니 이 무슨 망발이냐.”(<성종일록> 성종행장)
 또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윤기(1741∼1826)의 시문집인 <무명자집>을 보라. ‘이단’, 즉 천주교를 반박하는 대목이 있다. 먼저 윤기는 공자의 ‘공호이단 사해야이’를 인용하면서 역대의 이단을 줄줄이 뀄다.
 “이단의 설은 많았다. 양주는 의(義), 묵적은 인(仁)에 가까웠다. 노장은 청정(淸淨)·무위(無爲), 불가는 적멸(寂滅)·돈오(頓悟)를 주장했다. 특히 불교는 천하의 도리에 더 가까웠다. 때문에 한·당 이래로 재주 많고 지혜 명민한 사람들이 대부분 빠져들었다. 이 때문에 정자와 주자가 불가를 극력 논파해서 유가를 세운 것이다.”
 윤기는 이 대목에서 “(부모형제를 무시하고) 오로지 천주만을 섬기는 천주교는 이단 중에서도 이치에 어긋나기 짝이 없는 이단”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천주학 책을 태워 버리고 천주학에 쏠린 마음을 씻어내야 하며 서양 오랑캐의 사설(邪說)에 현혹되어 유도(儒道)의 죄인이 되지 말라’고 촉구했다.
 이렇게 주자를 중심으로 후대 유학자들의 해석에 따라 ‘공자님의 말씀’은 ‘이단 공격’을 위한 경전 말씀이 되었다.

 

 ■이단은 농사와 병법 같은 것
 하지만 ‘공호이단 사해야이’를 둘러싼 해석이 이같은 ‘이단 척결 몰이’라는 외곬수 논법만 있지 않았다.
 예컨대 다산 정약용의 유연한 해석을 보라.(다산의 <논어고금주>)  
 다산은 공자(기원전 551~479)의 시대에는 노자와 장자, 그리고 양자와 묵자의 문호가 아직 수립되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즉 당시에는 오로지 공자의 가르침만이 일가를 이루기 시작했을 뿐, 유·불·선의 삼교가 정립됐던 시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산은 따라서 “공자가 이단을 전공하면 다만 해로울 뿐이라고 한 것은 가볍게 금한 것이지 큰 소리와 성난 말로 금한 것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한마디로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이단은 요즘(조선 시대)처럼 죽기살기로 타도해야 할 이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번지(공자의 제자)가 농사법을 배우기를 청하자 공자는 소인이라 여겼다. 위나라 영공이 공자에게 군사의 진법에 대해 묻자 ‘군사의 일은 아직 배운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사실 농사와 병법의 학문도 세상을 경영하는 데는 필요하지만 이 일만 전공해서는 신심과 성명의 학문에 ‘다소’ 해가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공자가 그 폐단을 말한 것이다.”
 즉 다산은 공자가 말하는 ‘이단이란 병법과 농사 같은 것’이라 해석했다.
 일상생활에도 필요한 것이라 군자가 몰라서는 안된다는 것. 하지만 너무 그것에만 힘써 전공한다면 몸과 마음에도 좋지 않고 ‘천성과 천명’(유학)의 학문에도 ‘약간’ 해가 있을 것이라는 게 다산의 풀이였다.
 다산은 “이른바 ‘이단’이라는 것은 이와같은 것이 불과하다”고 했다.  

박세당의 짧은 편지. 박세당은 공자의 ‘공호이단 사해야이’ 구절을 ‘이단을 공격하면 해로울 뿐’이라 해석했다. 박세당은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이단은 타도대상이 아니다
 다산은 ‘이단’을 타도해야 할 원수로 보지 않은 것이다. 다산은 그러면서 주자의 일관되지 못한 설명을 지적했다.
 즉 주자가 왕상서(1119~1176)에게 답한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는 것이다.
 “주자는 편지에 ‘지금 사설(邪說)의 해악을 미워해서 이것을 바르게 하려고 공격하면 스스로를 패배하게 만들 뿐’이라 썼다. 그런데 주자는 <논어집주>에서 ‘공호이단’의 공(攻)을 ‘전공한다’고 해석했다. 그런데 이 편지글에서는 공을 ‘공격’이라 했다. 두 설은 다르다.”
 무슨 말인가. 주자는 <논어집주>에서는 공(攻)을 ‘전공한다’고 해석해놓고는 왕상서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공격’의 의미로 썼다는 것이다.
 다산은 이 대목에서 청나라 초기의 문인인 모기령(1623~1716)이 가졌던 의문점을 주석해놓았다.
 “공(攻)은 본래 공격한다고 할 때의 공인데, 주자가 <논어집주>를 내면서 어찌하여 전공한다는 의미의 ‘전치(專治)’로 해석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다산은 공(攻)은 원래 ‘공격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독법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단 때문에 백성이 곤궁하다고?
 실학자 이익(1681~1763) 역시 유연한 주장을 편다.
 “이단 때문에 백성이 곤궁하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스럽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공자가 이단을 전공하면 해로울 뿐이라고는 했지만 엄중히 배척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소도(적은 도)라도 볼만한 것이 있다고 했다.”(<성호사설> 14권 ‘인사문’)
 그는 “성군이 나오지 않고 승평한 정치가 이룩되지 못해 백성의 곤궁이 극도로 달했으니 그 원인을 보면 이단의 폐단만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세상이 말세가 되어 정사가 어지러운 데도 놀고 먹는 자가 있고 위력으로 토색질하는 자가 있어서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한데 이것이 노자와 불가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냐”고 꼬집었다. 

 

 ■사문난적으로 파문당한 박세당
 그런데 다산 정약용(1762~1836)보다 140년 전의 인물인 서계 박세당(1629~1703)은 주자의 설을 더더욱 의심했다. 그는 사서삼경을 주해한 <사변록>에서 ‘공호이단 사해야이’를 이렇게 풀이했다.
 해석 가운데는 ‘이단을 공격(伐)하면 해가 그친다(已)’는 뜻도 있고, 주자의 말처럼 ‘이단을 전공(攻)하면 해가 될 뿐(已)’이라는 뜻도 있다. 그런데 이단을 공격하면 해가 그친다는 말이나, 이단을 전공하면 해가 된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 아닌가. 어리석은 사람도 다 알 일이다. 그런 말을 성인인 공자님께서 하셨겠는가.”
 서계는 이어 “또 이단인줄 알면서 전공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다른 해석을 가한다.
 “공자께서 일찍이 ‘사람이 어질지 못한 자를 너무 미워하면 어지럽다’고 하셨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 공자님의 말씀이 맞는 듯 하다. 비록 이단이라도 너무 지나치게 공격하면 도리어 해가 되는 수도 있는 것이다.”
 서계는 뒤가 캥겼는지 이 말미에 “그러나 감히 반드시 그렇다고 자신할 수 없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다.
 그렇지만 서계는 결국 ‘사문난적’의 죄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그의 <사변록>은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 예컨대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1641-1721)는 아우 권상유(1656~1724)에게 이렇게 말한다.(<한수재 선생문집> ‘제20권)
 “주자가 ‘공호이단 사해야이’의 ‘공’을 해석하면서 전공의 뜻을 취하고 공격의 뜻으로 보는 설들은 모두 버렸다. 그런데 박세당이 되레 그것을 ‘공격’의 뜻으로 보는 설을 탈취해서 자기 견해로 삼았다. 한번 웃을 일도 못된다.”
 권상하는 “만약 이단을 공격하는 것이 해가 된다면 맹자가 양주와 묵적을 거절한 것도 도에 해가 된다는 말이냐”며 서계 박세당을 조롱하고 있다. 

주자학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경전을 해석하고자 했던 윤휴. 그러나 그는 사문난적의 죄를 뒤집어 썼다.    

 ■공자의 참뜻은
 이 대목에서 이런 생각은 든다.
 2500년 전의 시대를 산 공자가 아무렴 ‘이단을 전공하면 해로울 뿐’이라는 반목과 불통의 메시지를 전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춘추시대를 살아간 공자는 아마도 소통과 화합의 메시지를 전했을 것이다. 그러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는 어찌됐을까.
 후대의 유학자들이 시대상황을 반영한 스스로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공자님 말씀에 저마다의 해석을 붙이게 된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후대의 관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자왈, 공호이단 사해야이’의 메시지는 전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의 몫이 되는 것이다.
 <중용> ‘서문’에 ‘택선고집(擇善固執)’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선(善)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이를 가려서 그것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선을 택해 그것을 고집하라’는 뜻에서 유교의 이단관을 반영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다산 정약용이 정산 김기서에게 보낸 편지(<다산시문집> 제19권)을 보라.
 “군자의 학문에 ‘택선고집(擇善固執·선한 것을 골라 굳게 지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래 정(精)한 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른 것을 선택했는데도 이를 굳게 지키는 것을 덕으로 여긴다면…. 이런 문제는 번개나 바람처럼 빨리 고치지 못할까 두려워 해야 합니다.”
 또 하나, 선(善)을 택한다는 것은 바로 극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중용을 택한다는 것이다. 또 ‘굳게 지킨다’는 것은 ‘잘 받들어 가슴 속에 두어 잃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조선 후기 문인 위백규의 독후감인 <독서차의> ‘중용편’이다. 염두에 둬야 할 대목이다.
 그나저나 하나 두려운 것이 있다. 혹여 어떤 판사가 나타나 공자의 ‘공호이단 사해야이’를 인용, 다른 견해와 사상을 이단으로 몰고 갈 수도 있지 않을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29 관련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