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연세요(貪戀細腰)’라는 말이 있다. “가느다란 허리를 탐했다”는 고사이다.(<묵자> ‘겸애중(兼愛中)’)
 춘추시대 초나라 영왕(재위 541~529) 때의 일이다. 임금이 바로 이 ‘가는 허리’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러자 벌어진 현상은?
 기막히게도 궁중의 모든 남녀가 다이어트에 나섰다는 것이다. 모두들 하루 한끼씩 먹고 버텼다. 임금의 눈에 들려고 모두들 가슴으로 깊게 숨을 들이킨 다음 허리띠를 졸라맸다. 당연히 부작용이 생겼다. 허리를 너무 졸라매고 다닌 나머지 모두들 담벼락에 의지해야 겨우 걸을 수 있었다. 

1960~70년대 경찰이 미니스커트를 단속하고 있다. 그러나 시대를 풍미하는 유행의 물꼬를 공권력 차원에서 틀어막기란 어렵다. |경향신문 자료

■춘추시대 다이어트 열풍
 1년 뒤 궁중의 모든 남녀는 바라는 대로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마른 얼굴에 개미허리를 얻은 것은 좋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지나친 다이어트 후유증에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후세 사람들은 “초왕의 별난 취향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굶어죽었다”고 수근댔다.
 이후 ‘버들가지처럼 가는 허리에, 눈꽃같이 새햐안 피부’를 뜻하는 ‘세요설부(細腰雪膚)’는 미인의 상징이 됐다.
 놀라지마라. 한나라 성제(기원전 33~7년)의 후궁인 조비연은 손바닥 위에서도 능히 춤을 추었다고 할만큼 허리 몸매가 갸날팠다.
 또 있다. 남조시대 양나라 양간(羊侃·495~549년)의 가기인 장정완 역시 “허리가 1척6촌이며, 손바닥에서 춤을 출 수 있었다”고 한다. 1척6촌이면 지금 단위로 계산하면 40㎝(15인치 정도)도 안된다. 그야말로 ‘개미허리 여인’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가는 허리’ 이야기는 수많은 시인들의 단골메뉴가 됐다. 고려 이규보는 친구 오천유가 보낸 기생과 술, 그리고 안주거리(산꿩)을 즐기며 다음과 같이 읊었다.
 “내 주량은 비록 그대에 못미친다. 하나 술 즐기며 속소의 가는 허리를 탐하네.(嗜酒仍貪束素腰)”(<동국이상국전집>)
 여기서 ‘속소의 가는 허리(束素腰)’는 ‘한 묶음의 비단 같은 허리’를 뜻한다. 아마도 오천유가 보낸 기생의 허리가 하늘하늘한 개미허리였나 보다.
 또 “젊은 시절 청루(기생집)에서 의기가 호탕하여/초궁의 섬세한 허리를 손바닥에 놀렸네.(掌中纖細楚宮腰)”(<사가시집>)라 읊은 시를 보자. ‘초궁의 섬세한 허리’를 ‘손바닥에서 놀렸다’는 말은 초 영왕과 조비연·장정완 등의 고사를 일컫는 말이다.

 

 ■춘추시대 패셔니스타
 사실 군주의 괴상한 취향은 초 영왕의 예처럼 상상못할 후유증을 낳는다.
 제나라 환공(재위 기원전 685~643년)은 ‘자줏빛 옷의 마니아’였다, 군주가 자주색을 밝히자 온나라에 자주색 열풍이 불어닥쳤다.
 나중에는 흰색 비단 5필을 주고도 자주색 비단 1필을 살 수 없을 정도였다. 자주색 품귀현상을 빚은 것이다.
 환공이 크게 걱정하자 명재상인 관중이 대책을 내놓는다.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측근들을 불러 말하세요. ‘난 자주색 옷 냄새가 아주 싫다’고…. 그러면 모든게 해결됩니다.”(관중)
 “알겠네.”(환공)
 다음 날부터 환공은 자주색 옷을 입은 신하들을 볼 때마다 “난 그 옷 냄새 때문에 살 수가 없다”고 짜증을 부렸다.  
 그러자 신하들은 하나둘씩 자주색 옷을 벗었다. 자주색 유행은 급격하게 시들해졌다.
 사실 초영왕이나 제환공은 좋게말해 시대를 뛰어넘는 ‘패셔니스타’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임금의 괴상한 취향이 나라전체를 떠들거리게 했다는 점에서는 결코 정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초나라 영왕과 탐연세요의 고사를 그린 그림.

당대 초나라는 국왕의 이상한 취향 때문에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고 한다.

■긴 생머리 신라·고구려 여인들
 가는허리 만큼이나 긴머리 또한 시공을 초월해서 모든 남녀의 로망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나 신라·고구려 여인들의 생머리는 당나라에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중국측 사료인 <태평어람>은 “신라에는 1척이나 되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의 여인들이 많았다”고 기록했다. 또 <구당서>도 “신라 부인들은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머리에 두르고 비단과 주옥으로 장식했다”고 했다. <구당서>는 “631년 신라가 바친 여악(女樂) 두 명의 검은 머리카락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특기했다.
 신라 뿐일까. 고구려 동천왕의 후궁인 관나부인의 머리카락은 아홉자나 됐다고 한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동천왕조’)
 그런데 이 대목에서 <삼국사기>는 더욱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동천왕의 정실부인인 연씨가 후궁인 관나부인을 질투해서 왕에게 고자질하고 있다.
 “중국 위나라에서는 긴 머리카락을 천금을 주고 산답니다. 그들이 원하는대로 ‘긴 머리 미녀’(관나부인)를 보내면 위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을 겁니다.”
 아마 정실부인 연씨는 후궁인 관나부인이 관능적인 긴 머리카락으로 국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또 하나, 이 기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당대 중국 사람들이 긴 생머리를 한 고구려·신라여인들에게 얼마나 열광했는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다리를 얹고 있는 미인이다. 개미 허리와 긴 머리는 예부터 모든 남녀의 로망이었다. |간송미술관 소장

■신라는 가발 수출국
 중국인들이 얼마나 신라 여인들의 긴생머리를 애호했는 지 알 수 있는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즉 신라가 723년(성덕왕 22년)과 730년(성덕왕 29년) 당나라에 보낸 공물 가운데 ‘아름다운 가발’ 혹은 ‘머리카락’이 빠짐없이 포함됐다.
 869년(경문왕 9년)에는 넉자 다섯치의 두발 150냥과 석자 다섯치의 두발 300냥을 당나라에 바쳤다. 즉 신라 백성들은 머리카락을 수출해서 호구지책도 마련했으며, 그 덕에 당나라에 보낼 공물도 구했음을 알 수 있다. <신당서> ‘동이전·신라전’을 보면 “신라부인들은 미발을 머리에 두르고 구슬과 채색비단으로 꾸몄으며. 남자들은 머리를 깎아 다리로 팔고, 흑건을 뒤집어 썼다”고 했다. 그러니까 신라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팔아 먹을거리를 마련한 뒤 머리가 다시 자라 상투를 틀 때까지 흑두건을 뒤집어 썼음을 알 수 있다.

 

 ■귀고리는 오랑캐의 풍습
 민간의 유행을 막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1572년(선조 5년), 선조 임금이 벌컥 화를 내면서 비망기를 내린다. 비망기는 임금이 손수 작성해서 내리는 특별지시를 뜻한다. 지금으로치면 대통령의 담화문 같은 것이다. 얼마나 비상한 상황이면 직접 비망기를 내렸을까.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거늘…. 훼손시키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효(孝)의 시초이다. 그런데 요즘 크고 작은 사내 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니….”
 선조는 “이런 부끄러운 유행은 오랑캐의 풍습이라는 것을 널리 알려 앞으로는 엄금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 뿐이 아니다. 선조는 “이달 말까지 기한을 두는데, 만역 이를 어길 경우엔 사헌부가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 귀고리 풍습이 퍼진 것은 선조 때만의 유행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중종 때 왕족인 양평군은 불과 9살 때 귀를 뚫고 진주귀고리를 달고 다녔다고 한다.(<중종실록> 1513년 1월7일자)

 

  ■목뼈 부러진 13살 신부
 그 뿐이랴. 영·정조 때는 일종의 가발인 ‘다리’를 올리는 풍습이 사회문제로 비화했다.  
 예를 들어 실학자인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무거운 다리 때문에 목뼈가 부러져 죽은 어린 신부의 예를 들며 혀를 끌끌 찬다.
 “머리 치장에만 7~8만냥이 든다. 다리를 널찍하게 서리고 비스듬히 빙빙 돌려서 마치 말이 떨어지는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다양한 장식(웅황판, 범랑잠, 진주수)로 꾸민다. 그 무게를 지탱할 수도 없다. 오죽했으면 13살 짜리 어느 집 며느리가 다리 무게 목뼈가 부러져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을까. 사치가 사람을 죽였으니 아 슬프도다!”
 영조와 정조 모두 다리유행을 금하는 법령을 만들었지만 별무신통이었다. 예를 들어 홍인한(1722~76)은 “어찌 궁중의 모양(宮樣)’을 막겠느냐”면서 임금이 만든 법령을 끝내 저지했다. 한마디로 궁중의 유행, 즉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다. 훗날 정조가 1788년, 다리, 즉 가발을 금하는 법령을 회복시키면서 한다는 말….
 “법령이 공포될 때마다 ‘어디 오래 가겠어?’하면서 비아냥댄다. 그러나 이 법은 금석은 부서져도 금령은 페지되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라. 법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그 가장들까지 연좌시켜 처벌할 것이다.”
 역시 왕조 시대의 임금마저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 패션이자 유행인 것 같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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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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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래 기근이 겹쳐 도적이 흥행하고 분쟁이 더욱 성하여 사형수가 예전보다 배나 된다. 내가 부끄럽게 여겨 깊이 반성한다.”
 1439년(세종 21년), 세종 임금이 치세에 사형수가 많다는 것은 부덕의 소치라고 반성한다. 그는 의정부에 “고의 살인이 아닌 과실치사와 전과 3범의 절도 등은 형량을 좀 감해주면 안되겠냐”고 하문한다. 미집행 사형수가 자신의 치세에서 190명에 이르자 특별사면령을 고려한 것이다.
 하지만 영의정인 황희를 비롯한 대신들은 격론 끝에 ‘불가하다’는 의견을 모은다. 

구한말 태형을 가하는 모습.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의 시대에 사형수가 190명에 달했고, 능지처사를 당한 이도 60명에 이르렀다. 

■사형수가 190명이나 되다
 “전하, 송나라 주희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벼운 형벌을 미덕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형벌이 가벼울수록 패역하여 작난(作亂)의 마음만 자라게 됩니다.’라고…. 결국 이들이 살아나면 모두 범죄를 가볍게 여겨 범법행위가 날로 늘어날 것입니다.”
 결국 세종의 사면령은 대신들의 반대로 공포되지 못했다. 이 대목은 매우 흥미롭다.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의 시대에 사형수가 감옥에 넘쳐나 190명이나 됐다니 참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 뿐이 아니다. 이상한 대목은 또 있다. 세종 시대에 도적이 창궐했다는 것이다.
 “한양 한복판에서 도둑이 끊이지 않습니다. 근심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거리 위에 들립니다. 내탕(內帑)의 금작(金爵)과 봉상시의 은찬(銀瓚)까지도 털립니다.”(<세종실록> 1436년)
 사간원의 상소문을 보면 매우 심각하다. 문제는 “이들을 잡아도 곤장 몇 대와 자자형(얼굴에 죄명을 새기는 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벌을 받은 그 날부터 다시 백성들을 해치는 일이 일어납니다. 온 백성들이 이를 원망하며 그 고기를 씹고자 해고 어쩔 줄 모르고….”
 얼마나 도적이 창궐했으면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탕고에서 금으로 만든 술잔(금작)이 털리고, 제사를 관장하는 봉상시에서 제기(은찬)까지 도둑맞았을까.
 “대명률에 따르면 ‘절도 3범의 경우 교수형에 처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국가의 경사나 수재, 혹은 한재 등의 이유로 대사면령이 내려집니다. 전과가 말소되면 그 날로 다시 도둑으로 되돌아가, 10여 범에 이르러도 형벌을 받지 않는 자가 수두룩합니다.”

 

 ■‘도적의 발뒤꿈치를 잘라라’
 대신들의 아우성은 대단했다. 결국 세종은 대신들이 내민 계책을 받아들이고 만다.
 “범죄를 저지르는 자에게 한쪽 발의 힘줄을 끊는 단근형(斷筋刑)의 벌을 내리면 좋습니다. 팔다리를 끊는 것이 아니라, 그 억세고 날랜 힘만 꺾을 뿐입니다. 그러니 생업에는 방해되지 않습니다.”(1436년)
 요컨대 다시는 도적질을 못하게 발뒤꿈치 힘줄을 끊어버리는 단근형을 시행하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범죄가 줄어들었을까. 
 아니었다. 중형을 가했지만 범죄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자 형조는 더욱 강력한 처벌책을 마련했다.
 단근형을 당한 뒤에도 절도하는 자는 다리 양쪽의 힘줄을 모두 끊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세종은 결국 다시 이 안을 추인했다.(1437년)
 그래도 도적질이 근절되지 않자 양발의 발뒤꿈치 힘줄은 물론, 왼발의 전근(前筋)까지 끊는 형벌을 마련했다. 세종은 또 한번 의정부의 상소를 따랐다.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중국으로 망명한 뒤 자객에 의해 피살된 김옥균. 그는 대역죄인의 죄명으로 사후에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60명에 이른 능지처사자 
 단근형은 그래도 약과였다. 놀라지 마라.
 “사노 매읍동이 본주인을 때려 죽였으므로 능지처사 시켰다.”(1418년)
 “간부(姦夫)와 짜고 본남편과 시어미, 그리고 딸을 살해한 북청 여인 금슬을 능지처사했다.”(1439년)
 무슨 이야기인가. 해동의 요순이며, 그 누구보다 백성을 긍휼히 여겼다는 세종대왕 때 능지처참의 극형을 받은 자가 60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기자가 <세종실록>에서 ‘능지처사’, ‘능지처참’, ‘거열’ 등의 단어로 검색해보니 능지처사 51명, 능지처참 7명, 거열 2명이 검색됐다.
 이들 가운데 절대다수(58명)는 주인과 부모, 남편을 살해한 이른바 강상죄인들이었다. 모반이나 대역 죄인은 2명에 불과했다. 물론 신분과 효를 최고가치로 여기는 유교국가에서 패륜의 범죄인 강상죄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래도 능지처사는 심하지 않을까.
 1424년(세종 6년), 임금은 “백성이 법을 어기더라도 형벌은 조심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그런데 바로 이날 임금은 병든 남편을 죽이고. 주인의 아들을 살해한 범인 2명을 능지처사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너무나 다른 얼굴이 아닐 수 없다.
 또 있다. 세종은 장인을 독살한 사위와, 그 독살 사실을 알고도 방관한 피살자의 딸, 그리고 후처를 능지처사시킨다. 그러나 장인을 죽인 사위가 능지처사 당하는 것을 그렇다치지만 살해를 방관했다는 죄목으로 딸과 후처까지 능지처사라는 극형을 내린 것은 너무 심한 판결이 아닌가.  

 

 ■고문에 허위자백까지 받아낸 세종
 심지어 1430년(세종 12년), 내연남과 공모해서 본남편을 살해한 원비라는 여인이 능지처사를 당했다.
 그런데 그 사건을 기록한 <세종실록>을 보면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국문 때 원비에게 매질을 17차례, 압슬(壓膝)을 5차례나 했다. 그런데도 원비는 자백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은 나중에는 장형도 실시하지 않았는데도 자백했다. 사람들은 허위 자백이 아닌가 의심했다.”
 결국 이 원비라는 여인은 무진 고문 끝에 허위자백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압슬은 무릎에 자갈을 깔고 널판을 올려놓은 뒤 사람이 올라가 짓밟는 고문이다.
 여인에게 능지처사의 극형을 선고하고, 내연남에게는 그보다 한 단계 밑인 참수형에 처한 것도 실은 옳은 판단이라 할 수 있을까.
 이쯤해서 사마천의 <사기> ‘혹리열전’을 떠올려본다. “법망이 촘촘할수록 백성의 간교함은 도리어 악랄해졌다”는 대목 말이다.
 “법령은 다스림의 도구일 뿐이다. 진나라 때 법망이 치밀했지만 간사함과 거짓은 싹이 움트듯 일어났다.”
 사마천은 이 대목에서 진나라의 가혹한 법령을 두고 “불은 그대로 둔채 끓는 물만 식히려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법망은 배를 집어삼킬만한 큰 고기도 빠져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너그러워야 한다.”
 사마천은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마디 더한다.
 “법으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릴 때 백성들을 무슨 일을 저질러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오로지 도덕으로 이끌고 예로 다스릴 때 백성들은 비로소 그 부끄러움을 알고 바른 길을 간다.”(<사기> ‘혹리열전’)

 

 ■불은 두고 꿇는 물만 식히려 한 세종
 물론 공자는 “형벌 대신 도덕으로 다스리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한비자>가 “옛날 상나라의 법도엔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았을 때는 그 손을 잘랐다(棄灰于公道者 斷其手)”고 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단다.
 “이것이 치국의 도리(此治道也)이니라.”
 세종 시대에 사형수가 190명, 능지처참을 당한 이가 60명에 이른다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게다가 한쪽 발 뒤꿈치 힘줄을 자르는 단근형도 모자라, 양쪽 뒤발꿈치, 아니 더나아가 왼발 앞쪽의 힘줄까지 자르게 된 상황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세종은 결국 사마천이 말한 대로 ‘불은 그대로 두고 끓는 물만 식히려 한(救火揚沸)’ 법집행에 머문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해동의 요순’답지않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대증 요법으로 창궐한 도적떼들을 없애려 한 것은 아닐까.
 이 시간, 그 옛날 순임금이 관리들에게 입버릇처럼 했다는 말을 떠올린다.
 “신중하라. 신중하라. 오로지 형벌은 신중히 해야 하느니라.(欽哉 欽哉 惟刑之靜哉)”(<사기> ‘오제본기’)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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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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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행어사가 평생 다녔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야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 살 수 있을 것 아니오.”
 1822년(순조 22년), 평안도 지방을 돌던 암행어사 박래겸이 어느 마을을 지날 때였다. 길가 집에서 “젖 달라”고 우는 갓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박래겸은 귀를 쫑긋 세웠다. 아이를 달래던 할머니가 “울지마라 암행어사 오신다”고 하지 않은가. 넌즈시 할머니에게 물었다.
 “아이가 어찌 암행어사가 무서운 줄 안단 말이오?”
 “말도 마시오, 요즘, 이 고을에 암행어사가 출두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 소문 때문에 관리들과 토호들이 벌벌 떨고 있다오.”(박래겸의 <사수일기>) 

 암행어사에 임명된 추사 김정희가 1826년 활동내용을 정리해 조정에 제출한 보고서. |경향신문 자료

■암행어사의 장탄식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평생토록 암행어사가 마을을 다녔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전했다.
 또 하나의 사례. 암행어사(박래겸)가 평안도 지방을 휘젓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지자 어이없는 사건이 터졌다. 관서 지방의 토호인 황명조라는 인물이 사촌형을 찔러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었다. 사건의 전말인 즉은 황명조가 사촌형(황겸조)의 밀고로 암행어사의 내사를 받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홧김에 이같은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암행어사 박래겸은 황명조를 내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발이 저렸던 지방의 토호가 지레 끔찍한 살인-자살사건을 저지른 것이다. 이처럼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메시아’로 비쳤지만,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들에게는 ‘지옥의 사자’였다.
 암행어사 박래겸이 전한 18세기 백성들의 삶은 고단했다. 예를 들어 그가 목격한 백성들의 얼굴은 굶주림에 누렇게 떠있었고, 구걸하는 나그네들이 많았다.
 곳곳에서 암행어사가 온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러나 길가던 백성들은 “암행어사가 돈다는 소문이 들리지만 아마 관가와 아전들은 서울과 내통해서 이미 암행어사 출두소식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냉소를 퍼부었다. 불신의 끝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함종(평남 강서군)에서의 일화가 가슴을 때린다.
 “곡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러나 곡식의 질이 형편없었다. 백성들이 ‘암행어사가 온다는데 이렇게 장난을 치느냐’고 항의했다. 그러나 아전들인 콧방귀를 뀌면서 ‘어찌 이렇게 시끄러우냐’고 도리어 호통을 쳤다. 백성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흩어졌다.”
 박래겸은 바로 ‘환곡의 폐해’를 목격한 것이다. 환곡은 원래 춘궁기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고 가을 추수 때 받는 진휼제도였다.
 하지만 당시 지방 수령들은 빌려줄 때는 거친 곡식을 주고, 가을에 좋은 곡식을 돌려받는 등의 수법으로 백성을 수탈했다. 그는 일기에 “심하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하소연할 때가 없구나!”라고 장탄식했다.

 

 ■“남대문 밖에서 뜯어봐라”
 사실 조선시대에는 왕권을 대행해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행위는 지방수령들에게 전적으로 일임했다. 관찰사는 그런 수령들을 규찰하고 통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사헌부가 각 지방에 감찰을 파견하거나 지방에 분대를 설치하기도 했다. 중종 이후에는 사헌부 감찰이 파견되지 않고 어사가 지방 관리들을 규찰했다. 그런데 효과적인 규찰을 위해 명종 때부터 암행규찰이 허용됐고, 이후 암행규찰을 원칙으로 하는 암행어사가 파견된 것이다.
 이후 선조 때부터 19세기 말까지 3세가 동안은 암행어사가 지방감찰의 유일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임금은 암행어사에게 봉서(封書)와 사목(事目), 마패(馬牌)와 유척(鍮尺) 등을 직접 하사했다.
 봉서(封書)의 겉봉에는 ‘도남대문외개절(到南大門外開切)’, ‘입도개견(入到開見)’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말 그대로 남대문 혹은 동대문 밖에서, 혹은 임지에 도달해서 봉투를 열어야 했다. 당연히 집에도 알리지 않고 즉시 떠나야 했다. 이유가 있다. 암행어사 임명 사실을 알고, 임지까지 밝혀질 경우 그 소문과 정보가 해당지역에 삽시간에 퍼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암행어사를 방해하라
 암행어사는 박래겸이 그랬듯이 헤진 옷과 부서진 갓을 쓴 추레한 선비 모습으로 떠나야 했다.
 과거에 낙방하고 산수를 돌아다니는 선비행색을 하면서 각 지방을 규찰했다. 때에 따라서는 신분이 노출되는 위기도 겪곤 했다. 박래겸의 경우도 가짜 암행어사로 몰려 포박당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할 수 없이 마패를 꺼내 암행어사임을 알렸다. 그를 쫓던 시람들이 흙빛으로 변해 마치 혼비백산 흩어졌다.”(<서수일기>)
 심지어는 암행어사를 사칭하고 아전과 백성들을 공갈 협박하는 무리도 생겼다.
 어사의 규찰활동을 고의로 방해하는 사례도 심심치 않았다.
 예컨대 1525년(중종 20년), 황해도 암행어사 조종경이 강령현(황해도)에 갔을 때 그 지방 수령이 성문을 닫아걸고 말았다. 조종경은 할 수 없이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 샅샅히 수사해서 많은 불법문서들을 찾아냈다.
 1539년(중종 34년)에는 암행어사가 압수한 불법문서를 지역 수령이 다시 훔쳐간 황당한 케이스도 있었다.
 “강원도 어사 송기수가 아룄다. ‘강릉에서 압수한 문서 3건을 책상 위에 봉해서 올려놓았는데 누가 다른 봉서로 바꿔치기 해놓았습니다. 다른 향교를 압수수사했는데 다른 봉서마저 도둑맞았습니다.”

 

 ■토호, 지방관리의 반격
 암행어사 출도의 위력은 대단했다. 박래겸이 순안현에서 ‘암행어사 출도’를 외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바람처럼 날고 우박처럼 흩어졌다”고 한다. “문루에 오르니 온 성의 등불이 켜졌을 정도”였고, “각 관청은 텅 비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관리들과 토호들의 반격도 만만치는 않았다.
 암행어사에게 부조리를 고발한 자가 보복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예컨대 1516년(중종 11년), 평안도 선천의 한 백성이 평안도 어사 홍언필에게 수령의 비행 사실을 고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홍언필이 막상 선천에 도착해 보니 고한 사람은 옥에 갇혀있었고, 다른 백성들은 이미 도피해서 만날 수가 없었다. 홍언필의 보고를 받은 중종은 “보복이 두려우니 백성들이 도망한 것”이라고 앙앙발락하면서 선천군수 우행언을 잡아 추고했다.
 또 인조 때 전라도 암행어사 이계는 염찰결과 나주목사 구봉서의 불법을 적발, 처벌을 건의했다.
 문제는 훗날 이계가 선천부사로, 구봉서가 평안감사로 각각 임명됐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구봉서가 이계의 직속상관이 된 것이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격이 됐다. 이것이 비극을 불렀다. 구봉서가 “이계가 청나라 장수 용골대 진영에서 국익에 반하는 발언을 했다”고 고변한 것이다. 이 때문에 역적죄로 몰린 이계는 아버지·아들과 함께 3대가 처형 당했다. 훗날 이계의 손자 이선이 “구봉서의 모함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상소문을 올렸다. 하지만 3대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었다.     

 

 ■성접대까지도 자행
 피감기관들은 온갖 수단을 다해 암행어사를 타락의 유혹으로 빠뜨리고자 했다. 공공연한 성접대까지 자행했다.
 박래겸의 예가 대표적이다. 평안도 용강현에서 암행어사 출도를 외친 1822년 5월, 박래겸은 용강현 수령이 보낸 향염이라는 기생과 하룻밤 동침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박래겸은 성천군의 부용과 경란, 평양의 만홍 등 무려 4명의 기생과 동침하고 잔치까지 벌이는 일탈행위를 벌였다.
 심지어 그해 6월20~21일에는 서울에서도 유명했던 부용을 불러, 고을 수령이 제공한 유람선까지 타면서 시와 노래를 읊고 불렀다.
 피감기관장이 제공한 성접대에 흠뻑 빠졌다면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감사기간 중) 기생과 잤다”고 공공연히 말할만큼 허용된 관행이었던 것 같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서도 박래겸은 평안남도 수령(48명) 가운데 4분의 1에 달하는 12명을 적발했다. 그 중에는 그와 친분이 있던 순안 현령 이문용은 봉고(封庫·부정부패를 저지른 관청의 창고를 관고를 잠그는 것)의 처벌을 내렸다. 그러면서 “못할 짓이지만 (그의 탐학이 심해) 어쩔 수 없었다”(5월16일)고 괴로움을 토로했다. 나름 흐트러짐없는 공정한 감사를 진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암행어사까지 뇌물 받았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갈수록 암행어사 파견의 효과는 반감됐다.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갈수록 심해졌고, 암행어사들마저 뇌물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 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박래겸이 적발한 안주 목사 서준보는 불과 5개월 뒤인 1822년 12월, 버젓이 재기용됐다. 순조는 이를 두고 “지난번 처분은 암행어사의 서계에 서론됐기 때문이지 참으로 죄가 있어 법을 적용한 것은 아니다”라고 변명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약시 순조 때의 일인데, 사간 윤석영이 암행어사들의 불법행위를 보고하면서 처벌을 건의했다.(1833년)
 “경기도 암행어사 이시원이 경기도 37고을 가운데 20여 곳이나 암행어사 출도를 외쳤는데…. 그러나 이시원을 접대를 받고 역마를 바꿔 타는 데서 끼친 폐단은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잠행(潛行)의 의(義)를 크게 어겼습니다. 성묘한다면서 위세를 부리고, 제물을 마련했으며, 벌초할 때에는 역군을 징발했고….”
 그러나 순조가 무엇이라 했냐면….
 “남을 너무 심하게 논박하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그대의 말이 또 이에 가깝지 않겠는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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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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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우리나라 인심을 살펴보면 밖으로 큰소리만 일삼고 있다. 우린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1621년, 광해군이 하늘이 꺼질 듯 장탄식한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급박했다. 명나라는 요동 전투에서 신흥강국 후금에 의해 줄줄이 패해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공론은 여전히 다쓰러져 가는 명나라 편이었다. 후금을 오랑캐의 나라로 폄훼하면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절묘한 등거리 외교로 균형을 잡아온 광해군으로서는 이같은 공론이 한심했다.
 “명나라 장수들이 차례로 적(후금)에게 항복하고 있다. 심지어 요동사람들이 명나라 장수를 포박해서 후금군에 넘겼다고 한다. 중국의 형세가 이처럼 급급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인심은 큰소리만 치고….” 

고려 외교의 전통을 쌓은 서희의 묘. 서희는 세치혀로 거란80만대군을 물리쳤고, 강동 6주까지 덤으로 얻는 외교사상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면서 광해군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제발 고려(의 외교)를 배우라”고….
 “이럴 때(명청교체기), 고려처럼 안으로 스스로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쓴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한심하다. 무장들 모두 겉으로는 결전을 벌이자고 하면서 막상 서쪽 변경에 가라면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 두려워 한다. 이 또한 고려와 견주면 너무도 미치지 못한다.”(<광해군일기>)
 광해군은 ‘고려처럼’만 하면 강대국끼리 충돌하는 격동기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광해군은 ‘고려의 외교’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멘붕에 빠진 고려조정
 그랬다. 고려의 외교술은 대단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외교관’이라는 서희의 후예들이 아닌가.
 고려의 외교에 주춧돌을 놓은 서희의 외교술을 되돌아보자. 993년(고려 성종 12년) 10월,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의 대군이 고려를 침공한다.
 고려군도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 문하시랑 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방어군을 편성했다. 거란의 선봉은 파죽지세로 고려 서북방 봉산군(황해도 북서)을 점령했다. 서희가 봉산군을 구원하려 나설 즈음, 거란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한 이유를 퍼뜨리고, 몇 차례에 걸쳐 고려에 문서를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거란이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다. 그런데 고려가 거란 강토의 경계를 침탈하기 때문에 정벌하는 것이다. 80만 대군이 짓밟을테니 속히 항복할지어다.”
 그러자 고려 조정은 ‘멘붕’에 빠졌다. “빨리 군신을 이끌고 항복하자”고 아우성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서경 이북(평양)을 거란에 떼주고 황해도 황주~절령까지를 국경으로 삼자”는 자들도 있었다. 다급해진 성종(고려)은 땅을 떼어주자는 이른바 ‘할지론(割地論)’을 채택하려 했다.
 “서경 땅을 떼어주려던 임금은 서경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었다. 그럼에도 곡식이 많이 남자 적군의 수중에 들어갈까 두려워한 나머지 대동강에 던져 버리도록 명했다.”(<고려사절요>)

 

 ■“거란의 엄포는 공갈”
 이 때 서희가 손사래를 치고 “절대 아니되옵니다”라고 소리치며 급히 나섰다.
 “먹을 것은 백성의 생명인데, 어찌 쌀을 버리십니까. 차라리 적에게 이용되는 편이 낫지, 강물에 던지는 것은 하늘의 뜻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 서희는 냉정한 시각으로 상황을 판단·정리해서 성종에게 간했다. 서희는 처음부터 거란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바 있다.
 거란군이 진군하지 않고 자꾸 항복만 강요하며 변죽만 올리는 것이 수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거란의 항복 권유문서와 그 간의 행동을 보니 협상할 수 있을 것도 같다”고 누누이 간언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성종이 끝내 ‘할지’를 결정하자 목숨을 건 간쟁에 나선 것이다.   
 “(발해가 망한 뒤) 북쪽의 땅 수백리는 생여진(生女眞)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광종 임금(재위 949~975)이 되찾아 가주와 송성(이상 평안도)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침공한 이유는 바로 이 두 성만 빼앗는데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서희는 “거란이 고구려 옛 땅 운운하며 큰 소리치는 것은 공갈에 불과하다(其聲言取高句麗舊地者 實恐我也)”고 단언했다.
 즉 거란이 가주와 송성 등 두 개 성만 원하는데 서경 이북까지 내주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게 서희의 주장이었다. 서희는 또 “삼각산 이북은 고구려의 옛 땅이니 절대 내줄 수 없다”면서 “한번 땅을 떼어주면 그들의 끊임없는 요구에 시달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땅을 떼어주면 영원토록 수치가 될 것입니다. 원컨대 임금께서는 도성에서 기다리면서 신들이 한 번 싸움을 한 연후에 의논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요컨대 서희는 섣부른 ‘할지’를 채택하는 대신,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면서 협상에 임할 것을 주청한 것이다.  

서희가 거란 소손녕과의 회담에서 얻어낸 강동 6주. 고려는 영토를 넓혔을 뿐 아니라 고구려의 적자임을 만방에 알리는 망외의 소득을 올렸다.(그림은 '장철균의 <서희의 외교담판>, 살림, 2013'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임) 

“장기전과 협상을 겸비하자”
 서희가 나름 자신감을 보인 까닭이 있었다. 바로 만만치 않는 고려의 국방력이었다.
 고려는 태조 왕건 이래 서경(평양)을 북방기지로 삼아 주변에 여러 성책을 쌓아 방비를 단단히 해놓은 바 있다. 이후 정종-광종-경종 시대에 걸쳐 꾸준히 영토를 넓히는 등 북방정책을 이어갔다. 특히 정종 시대에는 거란에 붙들려 있던 최광윤의 보고에 따라 거란의 침략의도를 간파하고 군사 30만을 편성하기도 했다.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군비를 정비해서 좌우군을 설치하고 평북의 서북계와 함남의 동북계에 각각 병마사를 보내 방비를 튼튼히 했다. 전쟁 3년 전인 990년에는 평양부와 안성 등 11역에 쌀 9375석을 하사하기도 했다. 고려는 결국 북방의 지세에 맞는 축성과 여진족 축출의 경험을 살려 만만치 않은 전쟁억지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전쟁을 일으킨 거란으로서도 쉽사리 공격작전을 펼치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장기전’과 ‘협상’을 겸하자는 서희의 주장은 맞았다.
 거란의 소손녕은 고려의 묵묵부답이 계속되자 안융진(청천강 연안인 평안도 안주 입석면)을 공격했다. 그러나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격파됐다. 다시 기가 꺾인 소손녕은 감히 전진할 생각을 못한채 재차 항복만 권유했다.

 

 ■“누가 세치혀로 공을 세우겠는냐”
 그러자 고려 성종이 신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누가 능히 거란 진영에서 말로써 군사를 물리치고(以口舌却兵) 역사에 길이 남을 공을 세우겠느냐.”
 누구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서희가 손을 들었다.
 “신이 비록 부족하지만 한번 나서보겠나이다.”
 고려와 거란의 명예를 건 불꽃 튀기는 외교전쟁이 벌어졌다. 소손녕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소손녕은 거란 경종(969~982)의 사위이자 중국 송나라를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회담이 진행되기 전부터 양측의 심리전은 대단했다.
 적진(거란진영)에 들어간 서희는 일단 통역을 시켜 회견 때의 예절을 물었다. 준비 없이 회담에 임했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었기에 먼저 탐색전을 벌인 것이다.
 소손녕은 “나는 대조(大朝·거란)의 귀인이니 마땅히 고려사신(서희)이 뜰 아래서 (당 위에 있는) 나에게 절해야 한다”고 먼저 도발했다.
 서희 역시 결코 꿀리지 않았다.
 “무슨 소리? 뜰 아래에서 절을 한다는 것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예의가 아닌가. 두 나라 대신이 서로 마주 보는데 무슨 가당찮은 이야기인가.”
 소손녕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두 사신은 2~4차례나 신경전을 벌였지만 좀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화가 난 서희는 그냥 객사로 돌아와 누운채 일어나지 않았다. 소손녕은 이 소식을 듣고서야 뜰이 아닌 당(堂) 위에서 예를 차리도록 허락했다. 서희는 그제서야 소손녕과 대등한 자리에 앉아 본격적인 회담에 나섰다. 

강화도에 있는 고려 고종의 홍릉. 강화도 정부를 이끌었던 고종도 끈적끈적한 외교로 세계최강 몽골을 골치아프게 했다. 

■서희와 소손녕의 피말리는 외교전
 회담 역시 팽팽한 접전으로 이어졌다. 소손녕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거란의 소유인데, 고려가 이를 야금야금 침식하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니 대국(거란)이 이를 토벌하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땅을 떼어 바치고 조회한다면 봐줄 것이다.”
 그러니까 신라 땅에서 일어나 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왜 지금은 거란의 영역이 된 고구려의 고토를 야금야금 침범하느냐는 것이었다.
 서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응수했다. 
 “그 무슨 소리인가.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다. 나라 이름을 봐라. 고구려를 계승했다 해서 고려라 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평양에 도읍을 둔 까닭이다. 또 고려가 거란의 영토를 침식하고 있다고? 아니다. 그 사이 여진이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그 때문에 고려가 거란을 찾아 조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서희는 한술 더 뜬다.
 “고려가 거란에 조회하고 조공을 바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주면 된다. 그 곳에 성을 쌓고 도로를 내면 고려와 거란이 직접 통할 수 있지 않느냐. 그렇게 되면 고려는 거란에 조빙(朝聘·알현하고 조공을 바침)을 할 것이다.”
 서희는 마지막으로 “장군(소손녕)이 거란 황제에게 고려의 제안을 알린다면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느냐”고 쐐기를 박았다.
 할 말을 잃은 소손녕은 거란 황제(성종·982~1031)에게 사실을 고하며 혀를 내둘렀다.
 “고려에서 화친을 칭했나이다. 마땅히 전쟁을 중지하심에 옳을 줄 아옵니다.”

 

 ■명분(거란)과 실리(고려)의 성과
 이것이 바로 서희가 ‘세치의 혀(三寸舌)’로 얻은, 압록강 이동 지역인 ‘강동 280리’에 건설했다는, ‘강동 6주’이다.
 고려로서는 상상도 못할 망외의 외교적 성과였다. “당신 나라에 직접 조공을 바치려면 양국 국경이 맞닿아야 하고, 따라서 가운데 양국 관계를 방해하는 여진 땅을 고려에 넘겨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니….
 무엇보다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여서 국호를 고려라 했고, 그 때문에 평양을 도읍(서경)했다고 주장함으로써 협상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한 것이다. 사실 욱일승천한 거란의 국력을 볼 때 도리어 거란이 강동 6주를 할양하겠다고 주장해도 고려로서는 쉽게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되레 세치의 혀를 놀려 궤변일 수도 있는 주장을 현실로 만들어 성사시켰으니…. 서희 외교는 전쟁에서 가장 바람직한, 싸우지 않고 승리한 외교전의 대표사례라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서희는 거란에 ‘사대(事大)’라는 명분을 내주는 대가로 군사요충지이자 고구려의 고토인 강동 6주라는 실리를 챙긴 것이다.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 서희의 가장 의미심장한 승리는 고려가 고구려의 적자임을 공식확인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의 역사는 공식적이고 객관적으로 고려의 역사로 편입된 것이다.  

고려말 대학자 이제현도 '세조(쿠빌라이)의 유훈'을 들먹거리며 원나라의 고려흡수 계획을 무산시켰다.   

■송나라를 꿈짝못하게 한 외교
 서희-소손녕 회담 이후에도 고려의 후속외교는 더욱 빛났다.
 “994년, 거란의 연호를 시행했다. 6월, 고려는 원욱을 송나라에 보내 ‘송나라와 합동작전으로 거란을 정벌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이제 겨우 북쪽 변방이 안정됐는데, 경솔하게 군사를 움직일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고려는 송나라와 국교를 끊었다.”(<고려사절요>)
 참으로 치밀하고 노련한 외교술이 아닌가. 이미 거란과의 전쟁에서 국고가 바닥나 있었던 송나라는 고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니까 고려는 송나라와의 외교관계 단절이라는 명분과 격식을 갖추면서 거란 사대에 따른 외교절차를 마무리한 것이다. 밀사를 파견해서 송나라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한 제안을 함으로써 국교단절의 책임을 송나라에 돌리는 외교술을 펼친 것이다.
 
 ■세계최강 몽골의 애간장 녹은 외교술
 서희의 명성을 이어받은 고려의 외교는 세계최강 몽골제국을 쥐락펴락, 애간장을 녹일 수준이었다.
 1231~1259년까지 고려는 막강한 몽골군의 침입에 시달렸다. 그러나 고려는 강화도 천도 이후 상황에 따라 몽골의 요구를 따르기도 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었다. 항쟁과 교섭의 이중주 외교가 빛을 낸 것이다.
 예컨대 1231년 11월, 몽골은 고려의 강화도 천도를 매우 질책했다. 그러자 고려 고종은 다음과 같은 말로 몽골을 녹인다.
 “아니, 전쟁으로 유민들이 모두 흩어지면 나라의 근본이 텅텅 비게 되고, 나라의 근본이 비게 되면 장차 누구와 함께 공물을 마련해서 상국(몽골)을 섬기겠습니까? 차라리 남은 백성들을 수습해서 섬(강화도)으로 들어가 있으면서 변변치 않은 토산물이나마 상국에 바침으로써 변방 신하의 명분을 잃지 않는 것이….”       
 고종은 더 나아가 “어디에 있든지 정성을 바치는 것이 중요하지 않느냐”면서 “우리가 천도한 이유는 바로 상국을 잘 모시기 위한 것일뿐”이라고 주장했다.
 1238년(고종 25년)에도 고려는 장군 김보정과 어사 송언기를 통해 몽골에 표문을 보낸다.
 “무력정복한다는 위협말고, 조상의 유업을 보존하게 한다면 변변치 않은 토산물이나마 해를 거르지 않고 바치겠습니다.”
 항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국(몽골)을 더 잘 모시려 천도한 것이라는데 무엇이라 하겠는가.
 
 ■고려의 핑계외교
 고려의 ‘핑계외교’는 그야말로 혀를 내두르게 한다. 1253년(고종 40년), 고려는 대장군 고열을 보내, 몽골장군 예쿠(也窟)에게 보내 육지로 환도할 수 없는 이유를 밝힌다. 그런데 그 이유를 들으면 실소를 터진다.
 “황제(몽골)의 성지를 받들려 승천부(경기 개풍) 백마산 아래 성곽과 궁실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동북 방면에 포달인(抱獺人), 즉 수달을 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서 뭍으로 나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몽골의 대군이 들어왔습니다.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시면 내년에는 고려 국왕이 신료들을 인솔하고 뭍으로 나가렵니다. 제발 군사를 돌리심이….”(<고려사절요>)
 아니 수달사냥꾼이 무서워 육지천도를 하지 못하겠다니…. 그것도 모자라 군사를 철수시키면 뭍으로 나가겠다니….
 고려는 몽골이 “왜 강화도에 성을 쌓느냐”고 질책할 때마다 “송나라 공격에 대비하려 한 것”이라든지, “해적들의 노략질 때문”이라든지, 갖가지 토를 달았다.   
 몽골로서는 지긋지긋한 고려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있다. 1256년(고종 43년) 9월, 고려 사신 김수강이 몽골 황제(헌종)에게 몽골 군대의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는 “개경에 환도해야 철수하겠다”고 거절했다. 그 때 김수강의 화술이 백미다.
 “짐승이 사냥꾼을 피해 굴 속으로 숨었는데, 그 구멍 앞에 활과 화살을 가지고 기다린다면 피곤한 짐승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김수강의 ‘절묘한 외교술’에 감탄한 몽골 황제는 무릎을 치며 군사를 철수시켰다.
 “그래, 네가 바로 참 사신이다. 마땅히 두 나라는 화친을 맺어야 한다.”(<고려사절요>)
 
 ■애자(愛子)와 진자(眞子)의 차이
 혀를 내두를 고려의 외교술은 감탄을 자아낸다.
 1241년(고종 28년), 고려는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몽골의 협박 때문에 종친인 영녕공 준을 몽골로 보냈다. 그러면서 영녕공을 고종의 아들이라 거짓으로 고했다. 훗날 이 말이 거짓으로 판명됐다.(1254년) 고려 출신인 민칭이라는 자가 고자질한 것이다. 황제가 마침 몽골에 머물던 고려사신 최린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위기에 빠진 최린의 임기응변을 보라.
 “영녕공 준은 왕의 애자(愛子)입니다. 진자(眞子·참아들)는 아닙니다. 전에 올린 표문(외교문서)를 보면 다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애자는 무엇이고, 진자는 무엇이냐. 다르냐?”
 “그럼요. 애자라는 것은 남의 자식을 길러 자기 자식으로 삼은 것입니다. 만일 소생의 자식이라면 어찌 다시 ‘애(愛)’자를 쓰겠습니까.”
 황제가 새삼스레 고려가 올린 표문을 보니 모두 ‘애자’라 돼있었다. 황제는 더 이상 고려를 문책할 수 없었다. 애자와 진자….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말장난에, 궤변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외교관 최린은 기막힌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긴 것이다.(<고려사절요>) 
 아니 어찌보면 거짓아들인 영녕공을 보내면서 고려가 만일을 위해 마련해놓은 장치였을 지도 모른다. 아들 자(子) 앞에 애(愛)자를 수식해놓은 치밀함이라고 할까.

 

 ■몽골 쿠빌라이가 반색한 이유
 그러나 고려는 28년 간의 줄다리기 끝에 화의를 결정한다.(1259년)
 고려 태자(원종)가 위독한 부왕(고종)을 대신해 뭍으로 나가 몽골로 향한 것이다. 그런데 몽골로 가던 길에 황제 헌종(몽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고려 태자는 이 와중에 훗날 원나라 세조가 되는 쿠빌라이(忽必烈)를 만나게 된다. 쿠빌라이는 반색하며 고려 태자를 맞는다.
 “고려는 만리 밖의 나라이다. 당 태종도 친히 정벌했는데 항복시키지 못한 나라가 아닌가. 이제 세자가 스스로 왔으니 하늘이 뜻이 아닌가.”
 마침 또 하나의 뜻밖 소식이 들렸다. 고려 고종이 승하했다는 것이었다. 몽골의 비서감 조양필은 무릎을 치면서 “때마침 찾아온 고려 세자를 고려왕으로 세워 귀국시키면 군사를 동원하지도 않고 한 나라를 얻는 것”이라고 쿠빌라이에게 고한다. 쿠빌라이가 벅찬 심정으로 되돌아본다.
 “넓은 하늘 아래 복종하지 않은 나라는 고려와 송나라 뿐이었는데…. 이제 송나라도 솥 속의 고기이자 장막 위 제비집 같이 멸망 직전이다. 이젠 고려도 이제 제국의 품에 들어와 조회하는구나.”(<고려사절요>) 
 쿠빌라이는 더 나아가 선심공세를 편다.
 “좋다. 고려 만큼은 의관을 본국(고려)의 풍속을 좇아 상하 모두 고치지 마라. 개경 환도는 속도조절을 해서 알아서 하라. 설치된 다루가치(총독)는 귀환시켜라.”(<원고려기사>)
 쿠빌라이는 “원나라에 조회한 나라가 80여 개국인데 고려처럼 예(禮)로 대접하는 것을 보았느냐”고 공치사했다.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 존중하겠다는 약속…. 이것을 ‘불개토풍(不改土風)’ 혹은 ‘세조구제(世祖舊制)’라 한다. 시쳇말로 하면 ‘세조(쿠빌라이)의 유훈’이라 말할 수 있다.

 

 ■“세조의 유훈을 잊지 마세요.”
 그런데 고려는 이 ‘세조의 유훈’을 두고두고 써먹었다. 몽골이 노골적인 내정간섭에 나설 때마다 이 유훈을 들먹였다.
 예컨대 세조의 유훈이 발표된 지 60여 년이 지난 1323년(충숙왕 10년), 원나라가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립, 흡수통합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러자 당시 원나라에 있던 도참의사사 이제현은 예의 그 ‘세조의 유훈’을 인용하면서 ‘불가’를 외쳤다.
 “세조황제의 조서 덕택에 고려의 옛 풍속이 유지되고, 종묘와 사직이 보전됐습니다. 다 세조 황제의 덕입니다. 이제 고려에 행성을 설립한다고 합니다. 좋습니다. 다른 것은 다 논하지 않더라도 세조의 조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이제현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당시 원나라 황제였던 영종(재위 1320~1323)은 “세조(쿠빌라이)의 정치를 본받고 회복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제현은 바로 이 점을 겨냥해서 원 조정을 협박한 것이다. ‘세조의 유훈을 지키지 않으려는 것이냐’고…. 원나라는 결국 정동행성의 설치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황제와 맞장 뜬 고려 외교관
 다시 1260년대로 돌아오자.
 1268년(원종 9년), 문하시중 이장용이 몽골에 갔을 때였다. 쿠빌라이가 “고려군사의 수를 정확하게 알리지 않으면 고려를 정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려 군사의 수를 정확히 파악해서 남송과 일본원정에 동원하려던 것이었다.
 “고려군사의 수가 5만명은 된다고 한다. 그 중 4만명은 송나라와 일본 정벌에 보내라.”(황제)
 “5만 군사는 없습니다. 예전에 4만 군사가 있었지만 30년간의 전쟁과 전염병 때문에 다 죽었습니다.”(이장용)
 “아무렴, 산 사람이 없겠느냐. 너희 나라에도 여자들이 있다면 어찌 태어나는 자식들이 없겠느냐. 함부로 말하지 마라.”(황제)
 “고려가 황은(皇恩·몽골 황제의 은혜)을 입어 군대를 파한 이래로 이후에 성장한 자들이 겨우 9~10살입니다.”(이장용)
 국익을 위해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말은 했던 고려 외교관의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려는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고려는 몽골과의 화의(1259년) 이후에도 어지간히 몽골의 애를 먹였다. 11년 후인 1270년이 돼서야 개경으로 환도했으니까.
 견디다못한 몽골 조정은 고려를 재침공할 것을 타진하게 된다.(1269년)  
 하지만 마형과 마희기 등 조정대신들이 입을 모아 ‘불가론’을 외쳤다.
 “고려가 지금 원나라에 내조(來朝)하기는 하지만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만약 정벌이 실패할 경우 국위가 손상되고…. 저들이 험준한 강산에 기대고, 섬에 식량을 쌓아 지키면 100만 군대라도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습니다.”(<원사> <원고려기사> 등)  
 유라시아 대륙을 벌벌 떨게 한 공포의 제국 몽골도 고려의 외교전에 두손 두발 다 들었던 것이다.
 어떤가. 서희와 고려의 외교정책을 닮으라고 가슴을 치고 한탄하는 광해군의 외침이 동감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외교는 또 어떤가. 다 같은 서희의 후예들인데….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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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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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을 방문한 조선사절단 가운데 ‘계미사행단’이 있다.
 계미년인 1763년(영조 39년)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사절단을 일컫는 말이다.
 이 계미사행단은 사절단장(정사)인 조엄(1719~1777)이 대마도에 들러 고구마 종자를 들여온 것으로 유명하다. 고구마는 대표적인 구황작물이다. 좋지않은 기상조건에서도 수확할 수 있기 때문에 굶주린 백성들의 배를 채울 신기한 작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엄이 이끈 계미사행의 으뜸인 공이 고구마 최초도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계미사행단의 일본방문은 우여곡절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여정이었으니…. 무엇보다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조선외교관이 일본인에게 피살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외교관 살인사건의 내막을 한번 풀어보자. 

 1763년 에도 막부를 방문한 계미사행단의 행렬도. 조선통신사의 규모는 5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사신단이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공식방문 중 피살된 외교관
 사행단이 일본방문을 마치고 귀국길 오사카에 머물던 1764년 4월7일 새벽, 사행단의 숙소에서 단발마의 비명이 들렸다. 사람들이 놀라 달려갔다. 사절단의 일원인 최천종이 목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최천종은 손으로 목을 매만지며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비교적 분명하게 사건 당시를 전했다.
 “보고서를 쓰고 막 잠들려 하는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서 놀라 깨보니 어떤 시람이 가슴을 타고 앉아 칼날로 목을 찔렀습니다. 그래서 급히 소리치며 서둘러 칼날을 뽑고 잡으려 했는데…. 그 자가 창을 밀치고 허둥지둥 달아났는데…. 불빛에 비친 그 자는 분명 왜인이었습다.”
 최천종의 숨막히는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주변을 살펴보았다. 흉기가 보였다. 짧은 자루에 창날이 달려있고 마치 창포검(칼 혹은 창으로 사용하는 도검) 같았다. 날 밑에 ‘어영(魚永)’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고, 날자루와 날집은 모두 칠하지 않은 나무로 만들어졌다. 일본칼이 분명했다. 칼은 목편 숨통 근처를 찔렀다. 치명상이었다. 
 “난 이번 길에 왜인과 다퉜거나 원망을 맺을 꼬투리가 없는데, 왜인이 왜 날 죽이려 했는지 알 수가 없소이다. 내가 나랏일로 죽거나 사신의 직무를 다하다가 죽는다면 한이 없겠지만 공연히 왜인에게 찔려 죽게 되니 너무나 원통합니다.”
 최천종은 결국 고비를 넘기지 못한채 아침 무렵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최천종은 “약을 먹을 때 술을 타게 되면 기(氣)가 쉽게 돈다”는 주변의 권유에도 “조선은 지금 금주령을 내렸는데, 어찌 내가 술을 마시겠냐”고 거절했단다.
 아무튼 생각할수록 중대한 사건이었다. 외교사절이 공식방문 중에 피살됐으니 외교분쟁으로 비화할 수 있었다. 

 <조선통신사래조도>. 계미사행단의 환영열기를 그렸다. |고베시립박물관 소장

■이 핑계 저 핑계 대는 일본
 그러나 일본은 처음부터 사건 해결에 미온적이었다. 검시에 재검시까지 약속해놓고 이 핑계 저핑계 대면서 차일피일했다. 장례를 치러야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일본인의 칼에 맞은 것이 분명하니 저들의 재검을 기다릴 필요없이 염습(시체를 씻긴 다음, 옷을 입히고 묶는 일)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교활한 왜인들이 ‘염습을 했으니 재검할 필요가 없다’는 등의 핑계를 댈 수도 있지 않은가.”(조엄의 <해사일기>)
 조엄은 “움직일 수 없는 살인인데, 이 핑계 저핑계 대고 있으니 아무리 무식한 오랑캐라 해도 너무 하지 않느냐”고 울분을 터뜨리고 있다.
 부사 이인배는 “너무 분해서 등창이 나려 한다”고 했고, 종사관 김상익은 “일본인들은 뱀처럼 악독한 족속”이라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일본측은 “우리가 해결할테니 일정대로 귀국하라”고 권유했다. 일본측은 더욱이 사건현장에서 범죄 때 사용한 칼날과 사건 당시 입직한 왜인들의 명단을 적어가면서 조선측 인사들의 출입을 엄중히 막았다.  
 “최천종 피살 이후 대마도 사람의 짓이 분명한데, 모른체 하고 떠날 것을 권유했다. 조선-일본 교류 역사에 전례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사인 조엄은 정색하고 소리높여 쐐기를 박았다. ‘내 뜻이 결정됐으니 동요하지 마라. 오사카에서 한 발도 움직일 수 없다.”(<해사일기>)
 오사카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사절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무슨 변고가 생길 지 몰라 밤을 지세웠고, 바람소리에 장막이라도 움직이면 자객이 침입한게 아니냐고 부들부들 떨었다. 성대중 같은 이는 오사카에 머물던 한달동안 “너무 두려워 병풍으로 사방을 에워싸고 그 안에서 잠을 자면서, 밥 때가 돼서야 잠깐 나오는 일을 반복했다”고 한다.(성대중의 <청성잡기>)

 

 ■단독범행으로 서둘러 마무리한 사건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사건발생 열흘만인 4월17일, 범인 스즈키 덴죠(鈴木傳藏)가 검거됐다.
 범행 직후 이리저리 피해 다니던 범인은 온천 놀이에 따라간다는 핑계를 대고 길을 지나다가 나졸의 눈에 띄어 붙잡혔다고 한다.
 그런데 덴죠는 곤장을 한 대 치기도 전에 범행일체를 자백했다.
 “최천종이 거울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저를 의심했습니다. 최천종은 ‘일본인들은 도둑질을 잘 한다’고 욕했고, 저는 ‘되레 조선인이 도둑질을 할 한다’고 응수했습니다. 그러자 최천종이 벌칵 화를 내면서 말채찍으로 때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앙심을 품고 그만….”
 일본 측은 스즈키 덴죠의 자백에 따라 스즈키의 단독범행으로 사건을 종결하려 했다. 자백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더 이상의 조사도 벌이지 않았다. 
 어쨌든 스즈키는 ‘참수형’의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다. 조선측은 사형집행 현장을 참관하겠다고 주장했고, 일본측은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조선측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조선측은 즉각 서신을 보냈다.
 “스즈키 덴죠는 양국간 외교문제가 걸려있는 죄인입니다. 반드시 양국 관계자가 집행장면을 참관하는 게 맞습니다. 참관하지 못하면 우리(조선사절)가 어찌 귀국해서 보고할 수 있겠소.”     
 조선측은 이런 천신만고의 과정 끝에 5월2일 집행된 ‘참수형’ 장면을 참관할 수 있었다. 사실 사건의 정확한 진상은 아무도 모른다. 일본 정부가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범인 스즈키가 자백한대로 최천종이 말다툼을 벌인 스즈키를 말채찍으로 때렸다고 치자.
 그런 소동이 벌어졌는데 아무도 몰랐을까. 조엄은 귀국 후 영조에게 올린 장계에서 그같은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다.  

계미사행단이 귀국 직전 한달간이나 머물러야 했던 오사카. 일본인에 의해 조선 외교관이 피살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릉송백의 치욕을 잊지마라"
 이 계미사행은 외교관 살인사건이라는 미증유의 외교분쟁 말고도 갖가지 좋지않은 이야깃거리를 양산했다.
 사실 영조 임금은 일본으로 떠나는 사행단을 직접 불러 신신당부했다.
 “여러분, ‘이릉송백(二陵松柏)의 치욕’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릉송백’이라는 글귀를 외우는 순간 영조는 목이 메고 눈물을 머금은 듯 했다. 그러면서 친히 ‘호왕호래(好往好來)’, 즉 ‘잘 다녀오라’는 네 글자를 직접 써서 사신들에게 나눠주었다.(조엄의 <해사일기>)
 영조는 또, 사신들에게 “그대들의 시 짓는 능력을 보고 싶으니 차례로 제출하라”고 주문했다.(원중거의 <승사록>)
 영조는 잊지말라고 한 ‘이릉송백’의 고사는 무엇인가.
 ‘이릉’이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도굴된 선릉(성종)과 정릉(중종)을 뜻한다. 이 도굴 때문에 두 왕의 유골이 훼손되었다.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임진왜란 직후 사절로 일본을 방문한 윤안성(1542~1615)은 회한에 가득찬 시를 지었다고 한다,
 “금일의 교린을 나는 모르겠구나. 어디 한강에 가서 강가에서 보라. 이릉의 송백은 가지가 자라지 않는 것을….(今日交隣我不知 試到漢江江上望 二陵松柏不生)”
 영조는 곧 ‘150년 전의 치욕’을 결코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영조는 또 시(詩)를 통해 조선의 우월성을 일본인들에게 한껏 과시하라고 주문했다.
 “‘정주(程朱·정자와 주자의 성리학)의 존재를 모르는 오랑캐(일본인)들에게 충신독경(忠信篤敬)을 가르쳐야 하느니라.”
 사신단의 서기로 참여한 원중거가 다음과 같은 각오를 다졌다.
 “예의의 나라인 조선 사신인만큼 관복을 단정하게 하고 행동과 위엄있는 법칙을 잃지 않겠습니다. ‘정주’가 아니면 말하지 않고, 경서(經書)가 아니면 인용하지 않겠습니다.”(<승사록>)

 

 ■18세기 한류의 현장
 사행단은 임금의 신신당부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1년이나 이어진 사행 내내 결벽증에 걸렸다고 할만큼 경건했고, 깨끗했다. 통신사 일행은 일본 현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절단이 큰 마을에 도착하면 인산인해를 이뤘다. 시를 가져와 필담을 나누려는 자, 사절단을 구경하러 온 자 등 수백명이 몰려들었다.”
 18세기 한류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조선사신들의 글을 받기 위해 ‘새치기’하는 자들도 나왔다. 사절단은 그 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타일렀다.
 “부끄러워하는 덕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덕으로 나가는 기본입니다.”
 일본인들이 건네는 선물도 일절 받지 않았다. 원중거의 회고를 보면 “(하도 선물을 받지않으니) 몇몇 일본인이 벼루 두 개씩 선물하면서 ‘이는 손님을 위한 정이니 받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원중거는 또다기 정중하게 거절했다.
 “군자는 사람을 덕으로 아낍니다. 우리가 돌아갈 때 짐이 깨끗하면 여러분들의 마음 또한 깨끗하지 않겠습니까.’”(<승사록>)

 

 ■굴욕당한 조선사절단
 그러나 일본 정부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조선을 깔보려는 속셈을 노골화 했기 때문이다. 사행단이 두 개의 판자 문짝인 상근관(箱根關)을 넘을 때 말에서 내려 걷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옛 관례보다 한 문씩 더 물러나 말에서 내리게 한 것이었다. 더구나 사행단이 내린 땅은 진창이었다. 신발이 젖고 옷이 더러워졌다. 수행원들이 사절단의 담뱃대를 들어주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두고 볼 수 없었다. 사행단은 ‘전명연(傳命宴)’에서 폭발하고 만다. 사행단이 막부의 관백(關白)’, 즉 ‘막부의 최고지도자에게 무릎을 꿇고 4번이나 절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각 태수들도 관백을 맞을 때 두 번 절하는데 유독 조선 통신사만 4번이나 절을 올린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전에는 조선 국왕에게 황제폐하로 불렀던 자들이었는데…. 남옥은 당시의 치욕을 부고 온몸을 부들부들 떤다.(<일관기>)
 “이른바 위제(僞帝·가짜 황제)라는 자가 있는 데도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한 추장(관백)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 치욕스러움을 어찌 말하랴.”

 

 ■인내심을 시험하는 일본
 변함없는 일본의 역사왜곡도 사행단을 열받게 했다. 
 “사행단을 방문한 시방언(柴邦彦)이라는 자가 180구로 된 오언고시와 율시 절구를 바쳤다. 그런데 그가 인용한 두 나라의 역사가 ‘극히 놀랍고도 망령된 것’이어서 보낸 그대로 봉해서 돌려주었다.”(남옥의 <일관기>, 원중거의 <승사록>)
 얼마나 ‘놀랍고 망령된’ 역사왜곡이었던지 시문의 문답행사와 필담이 중단되는 심각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조선측은 아예 시방언이라는 자가 보낸 시를 다시 밀봉해서 되돌려주었다니…. 무슨 내용인가. 일본은 당시 중국 진시황 때의 방사 서불(徐市)의 일본도래설과, 임나일본부설의 기초가 된 진구(신공) 황후의 삼한정벌 등을 사실(史實)로 왜곡하고 있었다. 조선으로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역사왜곡이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골백번 세월이 바뀐다 해도 상대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일본과 일본인이 아닌가.
 계미사행 당시 제술관으로 수행한 남옥은 일본의 무례를 경험하고는 “얼마나 원통한지 곧장 머리카락이 갓을 뚫고 나오려 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요즘의 일본인과 일본의 외교를 보더라도 250년 전 남옥의 심정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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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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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 보는 사람들이다.(民惟邦本 食爲民天)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굷주림을 면치 못한다니…. 너무도 가련하고 민망했다.”
 1419년(세종 1년), 세종 임금이 ‘억장이 무너진다’면서 “부덕한 과인 때문에 한많은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이라고 한탄한다. 그러면서 추상같은 명령을 내린다.
 “만일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굶어죽는 자가 있다면 감사나 수령에게 그 죄를 물을 것이다. 과인이 장차 관원을 파견, 감사에 나설 것인즉….”<세종실록>)
 과연 최고의 성군(聖君)다운 조치라고 여길 지 모르겠다. 그러나 세종 뿐이 아니었다. 조선을 46년 간이나 다스린 숙종은 어땠을까. 1698년(숙종 24년) 1월, 굶주림에 얼어죽은 시신이 40~50구가 쌓였다는 소식을 들은 임금이 장탄식하면서 내린 비망기를 보자.  

충남 부여 쌍북리에서 확인된 백제 시대 목간. 구황기에 식량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음을 기록한 백제시대판 ‘환곡(還穀) 문서’였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임금들
 “임금은 만백성의 부모다, 한사람이 굶주려도 마치 자기가 굶주리는 것 같고…. 하물며 굶어죽는 시신이 날마다 거리에 쌓이는데 구제하지 못하니…. 그 뼈아픈 심정이야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실록>을 보면 숙종 재위 시대에 잇단 재해에 인심이 흉흉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695~1703년 사이에 지독한 흉년과 전염병 창궐, 그리고 엄청난 대홍수가 잇따랐다.(<숙종실록>) 그러자 숙종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뇌하고 있다.
 “아! 우리 백성들의 목숨이 다 끊어지게 되었다. 밤을 지새우며 노심초사하지만 뾰족한 계책이 없구나. 개탄스럽다.”
 숙종은 1696년, 노숙자 무료급식소와 비슷한 설죽소(設粥所·빈민들을 위한 관립 무료 급식소)에 비밀리에 별감을 수시로 보내 배급상황을 점검하고 개탄했다.
 “과인이 설죽소에 별감을 몰래 보내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죽을 가져오게 했는데…. 첫번째 보냈을 때는 제법 죽의 양이 넉넉하고 쌀알도 많았다네. 평소에도 그런가 하고 다시 가져오게 했네. 그랬더니 양이나 질 모두 형편 없었네. 이래 가지고서야 굶주린 백성들이 살 수가 있겠는가.”
 이 뿐인가. 1714년(숙종 40년), 숙종은 진휼미를 실은 선박이 무사히 제주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기쁜 나머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1000리 남녘 바다 잘 건너기 어렵고, 거센 바람 곡식 운반 또한 쉽지 않도다. 선박 모두 무사함을 알려왔으니, 하늘도 환과(鰥寡·과부와 홀아비, 여기서는 불쌍한 백성들을 뜻함)를 구제하는 하늘의 뜻이 분명하도다.”
 이런 숙종을 두고 국학자 최익한(1897~?)은 “백성을 구휼하는 선정이 두드러졌으며, 화평하고 풍요로운 시대를 구가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밖에도 임금의 구휼활동은 가없었다.
 개인금고인 내탕고의 은(銀)과 쌀을 하사해서 구휼비용에 보충하고(선조·숙종), 제문을 지어 굶어죽은 백성을 제사 지내도록 하고(숙종), 걸식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죽을 나눠주고(영조), 쌀을 내려주고(정조)….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조정에 제출한 보고서 친필본. 보고서 2책에 토지·군·환곡 제도의 문란을 지적하고 개선책을 거론했다.

■구휼은 백성의 생명을 구하는 것
 ‘기근(饑饉)’이란 무엇인가. <이아(爾雅·중국에서 가장 오랜 자서)>는 “곡물이 익지않음을 ‘기(飢)’, 채소가 익지 않음을 ‘근(饉)’”이라 했다.
 동양의 지도자는 바로 ‘백성들이 먹고 살 곡식과 채소’가 없으면 스스로의 책임이라 여기고 자책했다. 즉 가뭄이나 홍수 등 흉황(凶荒)을 잘 다스리면 인정(仁政)이 되고 성군 혹은 현군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폭정이 되고, 폭군 혹은 혼군(昏君)이 된 것이다.
 그랬으니 백성의 생명을 구하는 구휼은 하루빨리 시행해야 할 급선무였다.
 예컨대 태종은 “백성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구휼이니, 왕명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처리한 뒤에 나중에 보고하라”고 당부했다.(<태종실록> 1416년)
 즉 ‘선지원 후보고’의 복지정책이다. 이 ‘선조치 후보고’의 모범사례로는 전한시대의 급암(汲암)과 후한시대 한소(韓韶)를 들 수 있다.
 급암은 하내(河內·황허 이북 땅)에서 화재가 발생, 1000가구가 피해를 입자 황명을 받고 급파됐다. 화재는 단순 실화(失火)로 판명됐다.
 급암은 무리없이 사태를 수습했다. 문제는 급암이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때 생겼다. 하남(河南)을 지나칠 때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한 것이었다.
 “하남의 빈민들 가운데 1만여 가구가 수해와 한해를 당했습니다. 심지어 부자 간에도 식량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급암은 무제가 준 부절(符節·황제가 사신 혹은 파견관리에게 주는 신표)을 보여 하남의 곡창을 열어 빈민들을 구제했다. 황명으로 하남의 곡창(곡식창고)를 연 것이었다. 사실 급암의 행위는 황명을 사칭한 대역죄였다. 급암의 임무는 화재로 발생한 이재민을 구휼하는 것이지,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빈민을 구제하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급암은 돌아와 황제를 알현하면서 무릎을 꿇고 죄를 청했다.
 “신은 칙령을 변조했습니다. 신을 처벌해주십시요.”
 그러나 무제는 백성을 먼저 구한 것을 “매우 현명한 처사”라며 용서해준 뒤 되레 영전시켰다.(<사기> ‘급정열전’)
 또 한사람의 ‘선지원 후보고’의 사례가 한소였다. 한소는 영(영)이라는 고을의 장으로 일할 때 흉년을 만났다.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 그러자 한소는 상관의 허락을 받지도 않은채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만일 이것으로 죄를 받는다 해도 괜찮다. 내 한 몸을 죽여 만 사람을 살린다면 웃음을 머금고 땅속에 들어가겠노라.(含笑入地)”(<후한서> ‘한소열전’)

 

 ■선지원 후보고
 조선 시대의 ‘급암’ 혹은 ‘한소’로 일컬어진 이가 바로 세종 연간의 인물인 ‘김숙자’이다.
 김숙자는 흉년으로 백성들이 고생하자 왕명도 받들지 않고 군수물자(군량미)를 풀어 구휼에 나섰다. 이 역시 급암·한소의 예처럼 대역죄가 될 수도 있었다.
 백성들이 굶주림에 쓰러져도 문책이 두려워 왕명을 기다리던 다른 고을 수령이라면 더욱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김숙자는 “백성에 마음을 두었는데, 어찌 법에 저촉될 것을 두려워 하겠느냐”며 예의 급암과 한소의 예를 들었다.
 “급암과 한소처럼 나도 만백성에게 마음을 둘 뿐이다. 어찌 법을 무서워하리오.”
 그런 뒤 군사까지 징발해서 빈민구제에 나서자 백성들이 감읍했다. 백성들은 추수 때가 되자 관의 독촉을 기다리지 않고 자진해서 빌린 곡식을 앞다퉈 갚았다고 한다.(<해동잡록>)

 

 ■구휼제도의 비조
 사실 구휼제도의 비조(鼻祖)는 고구려 고국천왕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국천왕조’를 보자. 
 “194년(고국천왕 16년), 임금이 사냥 나갔다가 길가에 주저앉아 우는 백성을 보고 연유를 물었다. 그 사람이 대답했다. ‘날품팔이로 어머니를 공양해왔는데, 올해 흉년이 드니 먹고 살 길이 막막합니다.’ 임금이 한탄했다. “이것은 나의 죄가 아닌가. 백성들을 이렇게 굶기다니….”
 고국천왕은 백성에게 옷과 음식을 주었다. 그러나 만약 측은지심으로 끝났다면 그것은 임시방편의 빈민구제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국천왕은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담당관청에 일러 홀아비와 과부, 고아, 독거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구휼하라고 지시했다.
 “해마다 3월부터 7월에 이르기까지 관의 곡식을 내어주어라. 백성의 가구수에 따라 ‘차등있게 진휼대여’(賑貸有差)하라. 그리고 겨울 10월에 갚도록 하는 것을 정례(恒例)로 삼아라.”   
 이것이 바로 제도적인 빈민구제정책의 효시가 된 ‘진대법’이었다. 1회용 대책이 아닌…. 신라 문무왕의 빈민대책도 유명하다.
 “668년 고구려를 멸한 뒤 가난해서 남의 미곡을 빌린 자는 풍년 때 상환하도록(대곡환상·貸穀還償) 했다. 그러나 흉년피해가 심한 자는 이자와 원금을 모두 면제(자모구면법·子母俱免法)시켰다.”(<증보문헌비고>)
 고국천왕의 ‘진대법’과 문무왕의 ‘대곡환상 및 자모구면법’은 ‘사회복지정책의 신기원’이 됐다. 이후 고려와 조선은 ‘진대법’을 발전시킨 의창(義倉)·환곡(還穀)·사창(社倉)제도를 시행하는 등 빈민구제정책을 국정의 핵심 사안으로 삼았다. 그럴 만도 했다.

 

 ■백성을 깔본 죄
 군주의 복지마인드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었다. 백제 동성왕 이야기다.
 “499년(동성왕 21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는 비극이 생겼다. 도적이 들끓었다. 신하들이 창고를 풀어 규제하자고 했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구려로 도망가는 자가 2000명이 됐다.”(<삼국사기> ‘동성왕조’)
 복지마인드 부재가 백성들의 망명을 부추긴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인 501년, 동성왕은 신하 백가가 보낸 자객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백성들을 팽개친 벌을 받은 것일까.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고려 국왕들의 대책도 만만치 않았다.
 1006년(목종 9년), 가을에 곡식이 익지않아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러자 목종은 3년 전부터 미납된 공물과 세금을 모두 면제해주고 백성들에게 창고를 열어 진휼해주었다. 흉년이 극심했던 1298년(충렬왕 24년), 왕은 반찬을 줄이고 도토리를 먹었다. <동사강목>은 “충렬왕이 여러 도의 안렴사(지방순회장관)들을 불러 백성의 구휼문제를 거론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음식을 먹여 보냈다”고 기록했다.
 1348년(충목왕 4년), 서해 2도와 전라도 백성들이 굶주리자 왕은 진제도감을 설치했다. 충목왕은 특히 음식 가짓수를 줄여 비용을 보충하고, 1만3000석을 백성들에게 풀었다.

 

 ■가렴주구의 온상 된 환곡제도
 그러나 고국천왕 때부터 구축한 복지시스템은 조선 후대에 들어오면서 되레 가렴주구의 온상이 되고 말았다.
 고구려의 진대법을 계승한 조선 환곡제도의 원칙은 ‘봄에 빌려주고 가을에 걷고(春貸秋斂)’, ‘절반은 창고에 남겨두는(折半留庫)’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위한 구제책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각 창고에 둔 곡식을 새 것으로 교체하는 대책도 됐다.
 그러나 이 좋은 뜻이 크게 변질됐다. 가을에 10분의 1일 더 걷는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황당하다. 창고에서 ‘쥐와 참새’ 때문에 줄어든 양을 10분의 1로 임의 계산해서 그것까지 백성들에게 내라고 한 것이다. 그런 계산이 해마다 이어지면 백성들의 이자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또 필요하지도 않는 곡식을 강제로 백성들에게 빌려준다는 것도 문제가 됐다. ‘절반은 창고에 남겨둔다’는 규정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니 이자 부담은 늘고, 봄에 묵은 쌀을 받아 가을에 새 쌀로 갚아야 하는 이중삼중의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그러니 ‘가을에 환곡을 거둬들이면 마을이 텅 빌 정도’(<성호사설>)였다. 영조 연간(1779년)에 환곡제의 폐단을 생생한 필치로 전한 병조참지 박효삼는 ‘환곡이 백성들을 죽인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환곡을 설치한 까닭은 빈민구제와 군량저축인데…. 곡식 환모(이자로 받는 곡식)이 점점 불어나니 백성들이 대부분 도망해 달아납니다. 그 때는 이웃사람과 친족들에게 강제로 징수하게 되는데…. 고을을 두루 수색하여 항아리에 간직한 곡식도 바닥내 버립니다. 그러니 굶주린 백성들이 ‘환곡이 우리를 죽이는구나’하고 울부짖습니다.”
 제아무리 좋은 복지시스템을 갖췄다 해도, 결국 그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이 문제였던 것이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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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 좀 보십시요.”
 아차산 구리 둘레길과 온달샘으로 가던 길, 김민수 문화유산 해설사가 이상스럽게 생긴 바위를 가리켰다.
 두 주먹을 불끈 쥔 모습의 두터운 바위…. 그리고 바로 그 앞에 나신(裸身)의 여성이 엎드린채 뭔가를 부여잡고 있는 또 다른 바위….
 “저 바위는 화살을 맞고 죽은 온달 장군의 ‘주먹바위’라 합니다. 이 바위는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은 평강공주가 급한 나머지 옷도 입지 않은채 달려와 온달장군의 투구를 부여잡고 엎드린채 울부짖는 ‘통곡바위’라 합니다.”(김민수씨)

나신의 평강공주가 온달장군의 투구를 잡고 울었다는 통곡바위.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어우러진 곳이다.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 온달장군의 시신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박민규 기자

 


 두 사람의 혼인은 고구려를 떠들썩거리게 할 정도로 유명했으니 더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우여곡절 끝에 가난한 온달 장군을 찾아온 평강 공주는 남편의 내조에 힘쓴다. 궁에서 가져온 금팔찌를 팔아 밭과 집과 노비, 소와 말과 그릇을 사서 살림을 차렸다. 고구려의 대표장군으로 거듭난 온달은 후주의 무제가 쳐들어오자 선봉장이 되어 무찔렀다. 평강왕은 그제서야 온달을 ‘자랑스런 사위’로 대우했다. 온달 장군은 영양왕 즉위년 신라와의 일전을 앞두고 선봉을 자청한다.(590년)
 “이미 신라가 한강 이북의 땅을 떼어가(553년) 군·현으로 삼았으니 백성들이 통분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군사를 내주시면 반드시 수복시키겠나이다.”
 그러나 운이 좋지 않았다. 아차성에서 신라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그만 날아오는 화살에 맞고 말았다. 한을 품으며 죽어간 온달 장군의 관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 때 평강공주가 달려와 남편의 관을 어루만지며 통곡했다. “죽고 사는 것이 정해졌으니 아아! 돌아갑시다.”(<삼국사기> ‘온달전’)
 그제서야 온달 장군의 관이 움직였다.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애틋한 사랑이 이곳 아차산에까지 그 전설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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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5년 9월, (백제 망명인 출신의 고구려 장수) 걸루와 만년이 말에서 내려 백제 개로왕에게 절했다. 그런 뒤 왕의 얼굴에 세번 침 뱉고 죄상을 따지고 아차성 밑으로 끌고가 왕의 목을 벴다.”
 <삼국사기>가 전한 ‘한성백제 최후의 날’이다. 백제로서는 ‘아차성의 굴욕’이었다. 이로써 기원전 18년부터 시작된 백제의 한성시대는 종막을 고한다. 이날은 고구려-백제 간 벌어진 처절한 동족상잔(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부여계)이 고구려의 승리로 마무리된 날이기도 했다. 전쟁과 냉전이 오가고, 스파이가 암약했으며, 간계와 반간계, 배신과 복수, 그리고 치열한 외교전까지 어우러진 숨막히는 108년의 동족상잔이었다. 마치 남북한의 열·냉전이 연상되지 않은가.    

고구려는 한성백제 멸망 후 아차산에 크고 작은 보루들을 구축했다. 항공사진은 아차산 4보루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중간첩(백제)’에 ‘총공격’으로 응수한 고구려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부터 불구대천의 원수일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주몽)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니 말이다.
 즉 주몽이 북부여 태자 대소에게 쫓겨 졸본부여로 망명한다. 주몽은 졸본부여의 재력가(연타발)의 딸로서 아들을 둘(비류와 온조) 둔 미망인(소서노)과 결혼한다. 소서노는 가산을 털어 재혼한 남편(주몽)의 창업(고구려)을  도왔다. 주몽은 비류와 온조를 자기 아들로 여겼다. 비류와 온조 중 한사람이 다음 왕위를 이어갈 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꿈에도 생각못한 것이 있었다. 북부여에 주몽의 친아들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주몽은 북부여 시절 예(禮)씨라는 여인과 혼인했는데, 주몽이 탈출할 당시 부인 예씨의 뱃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아이가 바로 유리이다.
 우여곡절 끝에 유리가 찾아오자 주몽의 마음이 바뀌었다. “아들이 찾아오자 추모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삼국사기>)니….
 졸지에 천덕꾸러기가 된 비류와 온조는 땅을 쳤다.
 “어머니가 가산을 털어 대왕의 건국을 도왔는데…. 아아! 이제 나라가 유리에 속했으니 우린 혹(贅·군더더기) 같은 존재가 됐구나.”(<삼국사기>)
 비류와 온조는 결국 어머니(소서노)와 수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한다.(기원전 18년)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의 침공을 막지못한채 한강 이남 도성에서 붙잡혀 아차성 밑까지 끌려와 참담한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사진은 남아있는 아차산성의 흔적.

■실패로 끝난 백제의 외교전
 해묵은 앙금은 369년 본격적인 확전의 양상으로 치닫는다.  
 “9월,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기병 2만명을 끌고 백제의 민가를 약탈했다. 백제왕(근초고왕)이 반격을 가해 고구려군 50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371년엔 백제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이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승리의 주역은 백제의 ‘이중간첩’이었던 사기(斯紀)였다.
 사기는 백제에 있을 때 왕의 말발굽을 다치게 해서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고국원왕이 이끄는 고구려 대군이 백제를 침공하자 했을 때였다. 사기가 극비리에 백제진영을 찾아와 고구려군의 허실을 고했다.
 “고구려군의 군사가 많다고 하지만 가짜입니다.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오로지 붉은 깃발의 부대 뿐입니다.”(<삼국사기> ‘근구수왕조’)     
 사기의 정보로 천군만마를 얻은 백제는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 결국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을 죽였다.
 이번에는 고구려의 반격이 시작됐다.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4만 수군을 이끌고 대대적인 백제침공에 나선다.
 백제는 결국 남녀 생구(生口) 1000명과 세포(細布) 1000필을 바치고 항복했다. 백제왕은 설상가상, “영원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노라”고 다짐한 뒤 58성 700촌을 내주는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광개토대왕비문>) 

 

 ■스파이전에 녹아난 백제
 권토중래를 노리던 백제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닦는다. 초반에 비해 국력에 고구려에 비해 떨어지게 된 백제는 북위를 상대로 처절한 외교전을 벌인다.
 472년, 백제 개로왕이 북위 황제에게 보낸 장문의 외교문서를 보자.
 “백제와 고구려의 근원은 함께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승냥이와 이리(시랑·豺狼)’, 그리고 ‘큰 뱀(장사·長蛇)’이 길을 막고. ‘추악한 무리(추류·醜流)’가 성해지고, ‘애송이(소수·小竪)’가….”
 개로왕의 표현 중에 ‘시랑’과 ‘장사’, ‘추류’, ‘소수’ 등은 모두 고구려를 욕하는 표현들이다. 저주와 증오가 가득하다. 하기야 고구려도 백제를 ‘백잔(百殘·백제의 잔적)’이라 폄훼하고 있으니…. 개로왕이 올린 외교문서는 요컨대 “고구려를 멸망시킬 절호의 시기”라며 “백제와 북위가 손잡을 때”라고 동맹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위는 끝내 백제의 동맹제의를 거부하고 만다. 고구려의 힘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개로왕은 고구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 하여 북위에 표문을 올려 군사를 요청했다. 그러나 위나라에서는 듣지 않았다. 개로왕이 원망하여 조공을 중단하였다.”    

아차산 4보루 모습. 발굴 후 복원해놓았다.

|박민규 기자

 ■배신자의 손에 목숨을 잃은…
 고구려의 남침이 이어졌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극비리에 백제를 도모할 첩자를 구했다. 이 때 승려 도림이 은밀히 손들고 나섰다.
 도림은 371년 백제의 사기가 그랬던 것처럼 거짓 죄를 짓고 백제에 투항했다. 백제 개로왕은 바둑과 장기를 매우 좋아했다. 도림은 “왕께 바둑을 한 수 지도할까 한다”며 접근했다. 도림을 불러들여 시험해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개로왕은 도림을 상객으로 모셨고, 늦게 만난 것을 한탄했다. 바둑으로 개로왕을 홀린 도림이 마각을 드러냈다.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말씀 해보시오.”
 “이 나라(백제)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성곽과 궁실이 수축·수리 되지 않았습니다. 또 선왕의 해골이 들판에 가매장돼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백성들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선왕은 비유왕을 지칭한다. <삼국사기>에는 “비유왕이 455년 9월 훙(薨·승하)했다”고만 기록돼있다. 하지만 죽기 직전의 <삼국사기> 기사에 “흑룡이 한강에 나타났다”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변에 의한 살해 가능성이 짙다. ‘흑룡’의 출현은 국가의 불길한 징조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개로왕 즉위 후 14년간이나 <삼국사기> 기록이 공백인 것도 모종의 정변이 이어졌음을 반증해준다. 어쨌든 도림의 ‘세치혀’가 개로왕의 마음을 흔들었다.
 “알았다. 내 그리 하겠다.”
 개로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 누각, 사대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했다. 이 때문에 국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 나라가 누란의 위기를 맞았다. 목적을 달성한 도림은 잽싸게 고구려로 달려가 장수왕에게 고했다.
 “이제 됐습니다.”
 장수왕은 뛸 듯이 기뻤다. 장수왕은 백제 침공군을 편성할 때 백제에서 죄를 짓고 망명한 걸루와 만년에게 선봉장을 맡겼다.

 

 ■‘아무리 군주가 밉다 해도….’
 475년 9월, 고구려군이 대대적인 공격에 나서자 개로왕은 땅이 꺼지도록 후회한다.
 “내가 어리석었다. 간사한 자의 말을 믿다니….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다. 위급해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그러면서 아들 문주에게 신신당부한다.
 “난 당연히 죽어야겠지만, 너는 죽어서는 안된다. 난리를 피해 왕통을 잇도록 해라.”
 문주(왕)가 고개를 떨구며 남쪽(웅진)으로 망명했다. 도성을 공격한 고구려군은 북성(풍납토성)을 7일만에 함락시켰다. 개로왕은 급히 남성(몽촌토성)으로 피했지만 걸루와 만년 등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붙잡혀 참담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한성백제의 최후’를 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평론을 달아놓았다.
 “걸루(와 만년) 등은 스스로 죄를 지어 왕(개로왕)에게 문책당해 고구려로 망명한 것이다. 그런데도 적병(고구려)을 인도해서 전에 모시던 임금(개로왕)을 죽였으니 매우 의롭지 않다.” 

온달장군의 전설이 깃든 온달장군 주먹바위. 신라군의 화살에 맞은 온달장군이 주먹을 물끈 쥐고 죽었다는 전설이 잠겨있다.|박민규 기자

자취 감춘 한성백제
 백제는 ‘아차산의 굴욕’ 이후 ‘웅진(475~538)→사비(538~660)시대’의 우여곡절을 겪는다.
 고구려는 아차산 곳곳에 단단한 보루성을 구축한다. 지금까지 확인돼 사적으로 지정된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는 17곳에 이른다.
 필자는 가장 잘 복원된 4보루에 서서 저 한강 너머 아파트 숲을 바라본다. 1600년 전 한성백제의 도읍지인 풍납토성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고보니 지호지간이다.
 <삼국사기>에서 ‘북성’이라 지칭된 곳이다. 그 뒤엔 ‘남성’인 몽촌토성이 보인다. 아차성까지 끌려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개로왕의 후회섞인 한탄이 들리는 듯하다. 시조 온조왕이 도성을 조성하며 했다는 당부의 말이다.
 “온조왕 15년(기원전 4년)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게(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궁실을 지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고구려 간첩(도림)의 꼬임에 빠져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조성 등 대규모 토목공사에 국고를 탕진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스스로를 자책하며 외쳤을 것이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또 하나, 고구려의 아차산 일대 점령기간은 ‘나제동맹군에 의해 한강유역을 빼앗긴 551년까지’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보면 고구려의 점령기간은 80년도 안된다. 그런데도 온통 고구려 판이다. 경기도 구리시는 아예 ‘고구려의 기상 구리시’라 자랑한다.
 그러나 5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곳은 백제의 영역이 아닌가.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에도 백제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혹 애써 찾지 않는 것은 아닐까.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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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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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2년(성종 23년), 경상도 관찰사 이극돈이 “운석이 떨어졌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극돈은 매우 신기한듯 운석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빛깔은 뇌설(겉이 검고 속이 흰 버섯의 일종) 같고, 모양은 복령(주름이 많은 공모양의 흑갈색 버섯) 같은데…. 손톱으로 긁으니 가루가 떨어졌습니다.”
 요즘 같은 첨단의 세상에서도 운석이 떨어지니 한바탕 난리굿을 떠는데 하물며 예전에는 어땠으랴.  

 2013년 2월 러이사 우랄산맥 인근 첼랴빈스크주 체바르쿨 호숫가에 떨어진 운석. 운석은 세 조각으로 부서졌으며, 전체 무게가 600㎏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운석이 비처럼 쏟아졌다.’
 “104년(신라 파사왕 25년) 운석이 비처럼 쏟아졌다.”(<삼국사기>)
 “1057년(문종 11년) 황주에 운석이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고려사>)
 “1533년(중종 28년) 유성과 비성(飛星·혜성)이 사방에 비오듯 했고 나왔다 사라지는 길을 다 측후할 수 없었다. 운석도 비처럼 쏟아졌다.”(<중종실록>)
 “1563년(명종 18년) 하늘에 떨어지는 형상이 나는 제비 같았다. 땅에 떨어질 때 소리가 나고 연기가 생겼다. 두꺼운 땅에 떨어진 것은 땅속에 10척 쯤 들어갔는데 모양은 돌과 같았다. 큰 것은 주먹만 하거나 바리만 했고….”(<명종실록>)  
 “1672년(현종 13년) 영천군에 돌덩어리가 갑자기 떨어졌다. 하늘에서 대포소리가 났고…. 돌의 크기는 말(斗)과 같고, 무게는 36근이었다, 형체는 거북이 엎드린 것 같고 그 위에 짐승 발자국 흔적이….”(<현종실록>)
 “1714년(숙종 40년) 안성에 운석이 떨어졌다. 북치고 쇠방울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밭 한 가운데 갑자기 검은 돌이 떨어져 세조각 났다.”(<숙종실록>)
 각 문헌마다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런데 예전과 지금의 호들갑은 좀 다르다. 지금이야 운석의 가격이 어떻게 과학적인 가치가 어떻고 하는 차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예전에는 운석을 상서롭거나 아니면 요사스러운 조짐, 즉 하늘의 계시로 여겼다. 

첼랴빈스크에 떨어진 운석으로 만든 2014 소치 동계올림픽 금메달. 단 7개 만들었으며 그램당 232만원의 고가였다. 러시아의 빅토르 안이 행운의 운석금메달 주인공이 됐다. 

■진시황과 운석
 예컨대 <사기> ‘진시황본기’를 보자.
 “운성(隕星)이 떨어졌는데 땅에 닿자 돌이 되었다. 누군가 그 돌에 ‘진시황이 죽어 땅이 나뉜다’고 새겼다. 진시황이 그 돌 가까이 거주하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돌을 불태워버렸다. 진시황이 기분이 언짢아져~천하를 순행했다.~이듬해 7월 진시황이 서거했다.”
 그러니까 누군가 하늘에서 떨어진 신성한 운석의 기운을 이용해서 진시황을 저주하는 글귀를 새겼고, 그 글귀대로 진시황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운석 사건에 대해 반고는 “돌은 음류(陰流)이니 신하가 군주를 위태롭게 하게 된다”고 평가했다. 진나라가 결국 진시황의 뒤를 이은 진2세(호해) 시절, 신하(지록위마의 장본인인 조고를 가리킴)에 의해 위태로워졌고,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로 양분된 것을 의미한다. 결국 진나라의 망조는 결국 누군가 운석의 조짐을 빌려 만천하에 알려주었다는 소리가 된다. 

 

 ■하늘이 돌을 떨어뜨렸다
 운석이 떨어지면 곧잘 인용했던 중국의 고사가 바로 <춘추> 희공 16년의 기록이다.
 “기원전 644년, 송나라에 ‘돌이 5개가 떨어졌다.’(隕石于宋五)”
 두 말 할 것 없이 ‘운석’의 기록이다. <춘추>의 해설서인 <좌전>은 이 대목에서 “하늘에서 돌멩이가 떨어졌는데(隕石) 이는 하늘 위의 별들이 쏟아져 내린 것(隕星)”이라 했다. 그런데 <춘추>는 ‘돌이 떨어졌다’는 의미의 ‘석운(石隕)’이라 하지 않고, ‘돌을 떨어뜨렸다’는 뜻의 ‘운석(隕石)’이라 거꾸로 표현했다. 이것이 두고두고 궁금증을 낳았던 것 같다. 이를 두고 송나라 유학자인 정자(程子)는 흥미롭게 풀이했다.
 즉 <춘추>에서 ‘돌이 떨어졌다(石隕)’고 하지 않고 ‘돌을 떨어뜨렸다(隕石)’고 한 까닭이 ‘운석’을 ‘사람(人事)의 잘못’으로 돌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늘이 사람의 잘못을 책망하려고, ‘돌을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송나라에 운석이 떨어진지 5년 뒤 나라에 변고가 생겼다. 송나라 양공이 초나라 성왕에게 사로잡혀 모욕을 당했고(기원전 639년), 그 이듬해에는 홍수(泓水·허난성을 흐르는 강이름)에서 다시 초 성왕에게 대패 당했다.(기원전 638년) 송 양공은 그 후유증으로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기원전 637년)
 ‘쓸데없는 양보로 대세를 그르쳤다’는 ‘송양지인(宋襄之仁)’의 고사를 낳은 어이없는 패배였다. <춘추>의 해석자들은 결국 송나라 패배의 조짐은 결국 5년 전의 운석에서 비롯됐다고 본 것이다. 

일제 강점기인 1943년 11월 23일 전남 고흥군 두원면 성두리 야산에 떨어진 운석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지금은 한국 지질자원연구소에 보관돼 있다.

■해괴제를 지낸 까닭
 그랬으니 옛 사람들은 석운, 아니 운석 현상이 나타나면 ‘하늘의 심판’ 혹은 ‘하늘의 조짐’이라며 심상찮게 여겼다.
 “14년(신라 남해왕), 왜인이 병선 100여 척을 보내 해변을 노략질했다. 신라가 6부 군사들을 보내 막았는데, 낙랑이 이 틈을 타 텅빈 금성(경주)를 공격했다. 밤에 유성(별똥별)이 나타나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무리들이 두려워 물러가다가….”(<삼국사기> ‘신라본기’)
 “645년(고구려 보장왕), 별똥별이 고구려 진영에 떨어졌다. 당 장수 설인귀가 기이한 복장을 하고 공격해서 고구려군 3만명을 죽였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602년(선조 35년), 경주에 운석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들렸다. 하늘이 내린 재앙의 경계가 아닐까.”(<고대일록>)
 군주는 운석이 떨어지면 전전긍긍,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며 몸과 마음을 닦아야 했다.
 세종과 문종은 황해도와 함길도에 운석이 떨어지자(1423년과 1452년) 해괴제(解怪祭)를 지냈다. 해괴제란 나라에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이를 풀기 위해 지내는 제사를 뜻한다. 함길도 운석사건의 경우 불덩이(不塊)가 땅에 떨어져 주변의 31척 5촌(10m) 가량의 땅이 꺼졌으므로 문종이 사자를 보내 해괴제를 지냈다고 한다.

 

 ■석운과 운석의 고사
 1563년(명종 18년) 경상도 산음현 북리에 운석이 떨어진 것을 두고 <명종실록>을 쓴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운석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재변이다. 정사가 해이해지고 쇠퇴하는 날에 운석이 떨어지고, 혹은 국가가 쇠잔하고 혼란할 때도 떨어졌으니…. 그러니 군주가 허물을 반성하여 재앙을 그치게 할 때가 아닌가.”(<명종실록>)
 1657년(효종 8년)의 일이다. 기상이변이 몇년간 이어지고, 태백성(금성)이 대낮에 나타나는 일까지 생겼다. 그런데도 임금이 효릉(인종의 능)에 능행할 것을 결정했다. 이 때 찬선(정 3품) 송준길이 “아니되옵니다”를 외친다. 송준길이 예로 든 것이 바로 그 ‘석운과 운석’의 고사였다.
 “<춘추>가 ‘석운’ 대신 ‘운석’, 즉 ‘하늘이 돌을 떨어뜨린다’는 표현을 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정자께서 ‘운석의 재변을 인사(人事), 즉 인재로 돌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재변은 반드시 인사의 잘못입니다. 재변을 막는 것도 인사에 달려있습니다.”
 송준길은 그러면서 “전하가 공구수성(恐懼修省·두려워하여 수양하고 반성함)하지 않으면 재변을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효릉(경기 고양군)까지 30리길을 산넘고 물건너 말 달리며 갈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한 1억5000만 년 전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떨어진 운석. 대형운석은 6500만년 전의 공룡 멸종을 불러왔다고 한다. 

■‘일·월식은 비정상적인 남녀관계 때문’
 어디 운석 뿐인가.
 옛 사람들은 모든 이변(異變)이 하늘이 사람에게 보여주는 조짐이라고 여겼다.
 미수 허목(1595~1682)의 시문집인 <기언(記言)> ‘요상(妖祥)’ 편을 보자. 이 책은 천지와 일월성신 등 자연과 그 현상들, 그리고 인간이 지켜야 할 질서와 도리를 쓴 책이다. ‘요상’은 ‘요망한 기운이나 조짐’을 뜻한다. ‘요상’ 편은 옛 문헌에 나오는 갖가지 자연현상과 인간의 관계를 총정리 해놓았다.
 예컨대 일식과 월식을 보는 옛 사람들의 해석은 더욱 흥미롭다.
 즉 “해는 모든 양(陽)의 으뜸이고 군주의 표상인데 일식 때문에 가리고 먹혔으니 재앙의 조짐”이라는 것이다.(<춘추호씨전>)
 “여자가 남편을 타고 올라서고 신하가 군주를 등지며 권력이 신하에게 있고 오랑캐가 중국을 침범하는 것은 모두 양기가 미약하고 음기가 성한 증거이다.”
 이를 두고 <예기>는 “남자를 가르치지 않아서 양사(陽事·남녀의 육체관계)가 알맞지 않으면 하늘이 꾸짖어서 일식이 있게 된다”고 해석했다. 이 때 “천자(황제)는 소복을 입고 육관(六官)의 직책을 정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식은 여자가 남자를 올라타는 격이며. 남녀의 비정상적인 육체관계를 상징해서 하늘이 견책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현상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렇다면 월식은 어떤가. <예기>는 “부인의 유순한 덕이 갖춰지지 않아 음사(陰事·남녀간 잠자리)가 알맞지 않을 때 월식이 생긴다”고 했다.
 이 때 “황후는 소복을 입고 육궁(六宮)의 직책을 정비한다”고 했다. 정리하자면 일식과 월식은 음기와 양기가 서로 다투고 비정상적으로 합쳐질 때 오는 변고(變故)라고 해석한 것이다. 이 경우 황제와 황후는 소복을 입고 대대적인 인사개편을 통한 쇄신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사와 우박, 흙비의 의미는
 요즘처럼 황사가 나타나면 어떨까.
 한나라 경방이 쓴 <역전(易傳)>은 351년 양주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황무(黃霧)가 낀 것을 이렇게 해석했다.
 “누렇다는 것은 누렇고 탁한 기운이 천하에 가득하다는 것이다. 훌륭한 사람의 진출을 가로막고 도를 끊었기 때문에 후사를 잇지 못하는 재앙이 생긴다.”
 말하자면 <역전>은 황사가 훌륭한 사람의 기용을 막아 결과적으로 세대간 단절이 일어나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혜성이 출현하면 어떨까.
 “요성(妖星·불길한 별)은 21개인데 그 첫번째가 혜성”이라 했다.(<진서> ‘천문지’) 혜성 중에서도 패성(패星·꼬리없는 혜성)은 나쁜 기(氣)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며 어둡고 혼란스러운 별이라는 관념이 짙었다.(<춘추호씨전>)
 서리와 눈, 우박과 흙비는 무엇인가. <춘추>에는 “노나라 희공 29년(기원전 631년) 가을에 많은 우박에 내렸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를 두고 <춘추호씨전>은 “음양이 조화를 이뤄 흩어지면 서리와 눈이 되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나쁜 기운이 되어 흙비와 우박이 온다”고 했다. 특히 우박은 “음기가 양기를 위협하고 신하가 군주를 침범하는 기상”이라 해석했다. <춘추호씨전>은 당시 노나라의 정권이 군주(희공)가 아니라 대부인 계(季)씨에게 넘어가 있음을 꼬집은 것이다. 

최근 경남 진주에 떨어진 운석. 예로부터 운석이 떨어지면 하늘의 징조, 하늘의 계시라고 여겨 지도자들이 몸을 닦고 정사를 반성했다.

■소인배를 등용하면 산이 무너진다
 만약 2011년 발생한 우면산 붕괴를 옛 사람들은 어떻게 봤을까.
 <역전>은 “소인이 득세하면 그 요망한 기운이 산이 무너지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즉 “음(陰)이 양(陽) 위에 올라가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면산 붕괴는 소인들의 득세 때문에 발생한 ‘인재(人災)’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홍수도 마찬가지다. “정사를 멋대로 농단하는 자의 재앙은 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물은 곧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역전>)
 이밖에도 <진서>를 보면 “조상을 공경하지 않고 정치와 법령이 적절치 않으면 폭우가 쏟아져 강물이 범람하고 성읍을 무너뜨리며 사람들이 빠져죽는다”고 했다.
 유학의 국교화를 이룬 한나라 동중서는 더 나아가 “백성이 근심하고 원망하면 큰 물이 진다”고까지 했다. 부역이 많고 세금이 무거운 경우에도 그 견책으로 강과 바다가 범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지진은 어떤가. <역전>은 “땅이 갈라지는 것은 신하의 마음이 이반되어 윗사람을 따르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고 했다. “음이 양 위에 올라서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이변은 군주의 탓
 이 모든 자연현상과 인간(군주)의 관계를 다룬 허목의 <기언>을 읽으면 군주라는 직분은 정말 못해먹을 짓거리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모든 기상이변과 천재지변의 책임이 모두 백성을 잘못 다스린 군주에게 있다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익의 <성호사설> ‘천지문·재이편’의 언급처럼 “임금은 지극히 높지만 임금 위에 하늘이 있다”니까….
 “임금이 하늘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마치 백성이 임금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인가. <춘추>이후 불길한 징조가 나타날 때마다 반드시 인간과의 관계를 결부시켰다.”
 이익의 마무리 말이 멋있다.
 “이변이 생길 때 임금이 두려워하고, 이변이 없을 때도 두려워 하면 이변이 변하여 상서(祥瑞)가 될 수 있다.”
 임금이 늘 겸손하고 늘 스스로를 닦으면 나쁜 조짐조차 상서롭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운석이 떨어질 때 지도자가 할 일
 숭례문 보수공사가 결정된 1478년(성종 9년) 4월1일 하늘에서 흙비가 내렸다. 그런데도 대신들이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성종 임금이 화를 벌컥 냈다.
 “흙비가 내렸는데, 혹시 숭례문 보수공사 때문이 아닌가. 하늘이 꾸짖어 훈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경들은 왜 한마디 말도 없는가.”
 그러자 대신들은 “매우 훌륭하신 말씀”이라면서 “임금이 재이(災異)를 만나 두려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1524년(중종 19년), 흙비와 우박·서리·지진 뿐 아니라 강릉에서 화재까지 발생했다. 이 때 시강관 임추가 아룄다.
 “흙비는 백성이 고단하다는 것을, 서리는 음기가 극진하다는 것을, 우박은 음기가 양기를 협박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또 원래 고요한 땅이 지진 때문에 움직였고, 음기가 극진하여 양기인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재변은 괜히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중종이 화답했다.
 “반드시 재변이 일어나는 뜻이 있을 것이다. 과인을 비롯한 상하가 두려워 하고 서로 심신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요즘들어서도 재변은 이어지고 있다. 일·월식은 물론 황사(흙비)에, 지진에, 홍수에, 우박에…. 최근에는 때아닌 운석까지 떨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하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송준길의 말처럼 ‘공구수성(恐懼修省)’ 하겠다고 나서는 지도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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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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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더러워 입에도 댈 수 없는 음식이 바로 장(醬)이다. 콩을 씻지도 않아 좀이 슬고 모래가 섞여 있다. 마치 마시는 우물물에 똥을 던지는 행위가 같다.”
 북학파로 유명한 초정 박제가(1750~1805)가 던진 ‘돌직구’다. 그 뿐인가.
 “삶은 콩을 맨발로 밟아대는데 온몸의 땀이 발 밑으로 떨어진다. 장에서 종종 손톱이나 몸의 털이 발견된다. 구역질이 난다.”
 사실 당대 ‘중국의 옷과 일본의 주택, 그리고 조선의 장’을 두고 ‘삼절(三絶)’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박제가는 “대체 무엇이 중국보다 낫다는 것이냐”면서 조선의 자랑인 장(醬)을 ‘똥’ 취급하면서 “구역질 날 정도”라고 폄훼하고 있는 것이다. 또 있다.
 “한양에서는 날마다 뜰 한귀퉁이나 길거리에 똥·오줌을 쏟아버린다. 그래서 우물물이 모두 짜다. 시냇가 다리나 돌로 쌓은 제방에는 인분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디스’로 이런 ‘디스’가 없다. 그런데 과장이 아니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당대 조선의 현실을 ‘직설어법’으로 폄훼한다.   

 천공개물. 명 말에서 청 초의 송응성이 지은 산업 기술 서적이다. 박제가가 <북학의>를 쓰면서 영향받은 책이다. 

■까칠한 박제가의 직설화법
 까칠한 그의 성격 탓도 물론 있다. 후배이자 동료인 성해응(1760~1839)의 표현을 빌리자면….
 “박제가는 뛰어난 재능을 자부했다. 말을 꺼내면 바람이 일었다. 자신을 힐난하는 자를 만나면 기어코 꺾으려 했다. 그런 탓에 쌓인 비방이 크고 요란했다.”
 하기야 박제가 스스로도 “날 믿지 못하는 자들과 여러번 논쟁했는데 날 비방하는 자가 많았다”고 토로했으니까….
 그런 직설적인 박제가가 바라본 18세기 조선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한심한 나라였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쳤다.   
 <북학의>(돌베개)를 완역한 안대회 교수(성균관대)에 따르면 그 ‘중국에서 배우자(學中國)’이라는 말이 20번 쯤 나온단다. 
 에를 들어 박제가는 “중국은 똥을 황금으로 여겨 모두 거름으로 만든다”고 했다. 그러니 ‘중국에서 배우라’는 것이다. “100만섬의 분뇨를 버리는 것은 곡식 100만섬을 버리는 것과 같다”면서…. 그 뿐인가.

 

 ■‘중국처럼’ 타령
 “중국 백성들은 비단옷에 담요에서 잠을 잔다. 우리 시골 농부들은 무명옷 한벌도 얻어입지 못한다. 남자나 여자나 멍석깔고 잔다.”
 그는 “조선사람들은 10살이 넘도록 벌거숭이로 다니고 도시여자들마저 맨발로 다닌다”면서 “중국 사람을 보라”고 한다.
 “중국은 변방 여성들까지 분단장하고 수놓은 가죽신을 신는다.”
 박제가의 ‘중국처럼’ 타령은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중국처럼 수레를 만들어야 한다. 수레가 없으니 주택가격은 물론 나막신가 짚신값도 오르는 것이다.”
 “중국처럼 벽돌로 성(城)을 쌓아야 한다. 무한정으로 벽돌을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운반하기도 가공도 어려운 돌성(석성)은 버려야 한다.”
 박제가는 이어 “쓸수록 뾰족해지는 중국붓과 쓸수록 보물이 되는 중국 먹, 그리고 두가닥 실이면 충분한 중국 서책을 본받아야 한다고 목청을 돋웠다.
 심지어는 조선의 도자기 기술까지 형편없는 것으로 깎아내렸다. “(3000년 전 시대인) 중국의 하·상·주 시대에도 팔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조잡하다”면서…. 또 ‘중국처럼’ 도랑과 하천을 준설하고, ‘중국처럼’ 가축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하며, 특히나 ‘중국처럼’ 소도살을 금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박제가가 그린 <목우도>

■나라의 좀벌레들
 박제가는 왜 이렇게 ‘중국에서 배우자’고 타령했을까. 박제가가 바라본 조선은 곧 망할 수밖에 없는 가난하고 폐쇄적인 나라였다.
 답답한 나머지 다소간 험악한 표현으로 당대의 조선을 ‘디스’한 것이다. 철저한 자기부정으로 조선의 허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중국을 상징으로 하는 선진문물의 도입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조선의 버팀목이라는 사대부(선비 혹은 유생)는 ‘우물안 개구리’이자 ‘나라의 좀벌레’이며, 반드시 ‘도태시켜야 할 부류’였다. 그는 ‘지금 당장’ 이 자들을 확 바꾸지 않으면 조선이라는 나라와 백성은 무너지고 만다고 보았다.
 “국가의 퍠단은 가난인데, ‘나라의 좀벌레들’인 사대부만 번성하고 놀고먹는 자들만 늘고 있다. 이들이 천하를 야만족이라 무시하면서 자신들만 중화(中華)라고 떠들고 있다.”
 박제가는 이런 자들보다는 차라리 서양인들을 기용하라는 혁명적인 주장을 하게 된다. 즉 “기하학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기술에 능한 서양인들을 관상감에 ‘영입’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관상감은 천문·지리·책력·측후 등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푸른 눈의 서양인을 관리로 채용한다? 지금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급진적이고, 개혁적인 사고임을 알 수 있다.

 

 ■우물론
 그는 이어 뱃길을 열어 통상하고 천하의 도서(책)들이 들어오면 고루하기 짝이 없는 선비들의 좁디좁은 사고가 절로 무너진다고 생각했다. ‘우물론’을 제기하면서 ‘소비의 미덕’을 강조하기도 했다.
 “재물은 우물이다. 우물에서 물을 퍼내면 물이 가득 차지만 길어내지 않으면 물이 말라버린다.”
 소비의 미덕을 이토록 간결한 비유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의 우물론은 계속된다.
 “비단옷을 입지 않으니 비단짜는 사람이 없고, 졍교한 도자기를 숭상하지 않으니 나라에 공장과 도공, 풀무쟁이의 할 일이 없어졌다. 농업이 황혜하니 농사방법이 형편 없고, 상업을 박대하니 상업 자체도 실종됐다. 사농공상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곤궁하게 살기 때문에….”
 박제가가 주장한 요체는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영위하는 ‘이용(利用)’과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후생(厚生)’이었다.     

이용후생을 주장한 박제가는 "중국처럼 수레를 만들어야 한다. 수레가 없으니 주택가격은 물론 나막신가 짚신값도 오르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조선의 왕안석
 박제가의 사상은 당대 조선사회에 큰 충격파를 안겼다. 박제가의 <북학의>는 조선의 부국강병과 선진문물의 수용, 이용후생, 기술문명의 향상을 강조하는 사히사상의 모델이 됐다. 예를 들어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이용후생을 담당할 이용감을 설치하자’고 주장했다. 박제가의 제안을 정부기구 설립 제안으로 구체화 한 것이다.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1789~?)는 “초정 박제가의 <북학의>를 헐뜯을 수 없다”고 동조했고, 서유구와 이규경 등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당대 조선은 아직 박제가의 개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박제가 스스로도, 또한 그를 무진장 아꼈던 정조 임금도 그것을 알았다. 그랬으니 정조는 초정을 ‘왕안석(王安石)’에 비유했다. 왕안석이 누구인가.
 왕안석은 소나라 시절 과감한 개혁을 꾀하다가 보수파의 반발로 끝내 실패하고 말았던 미완의 개혁가다.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혁사상가였지만 보수파에 의해 소인배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정조 임금 조차 박제가의 개혁론이 왕안석의 그것에 견줄만큼 위대했으나 너무 급진적이어서 당시로서는 좌절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거짓말 쟁이 된 박제가
 사실 그가 연행 후 귀국하자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그를 찾아왔던 것 같다.
 “북경에서 돌아왔더니 나라 안 인사들이 문이 닳도록 찾아와 ‘저들(중국)의 풍속을 알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말하자 모두들 망연자실했다. 내가 오랑캐 편을 든다는 눈치였다.”
 이 대목에서 박제가의 장탄식이 하늘에 닿는다.
 “아. 저들이 우리나라 학문을 이끌고 백성을 다스릴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완고하니 문화가 크게 발전하지 않는 오늘날의 현실이 이상할 것이 없구나.”
 아마도 걸핏하면 “중국을 배우라”고 떠드는 박제가를 꼴사납게 여기는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스스로도 그걸 알았다. 사대부의 눈에는 박제가가 보았던 중국은 청나라 오랑캐일 뿐이었으니까…. 그들은 명실상부한 중화(中華)는 조선이라고 여겼으니까….   
 “날 존경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들도 나를 비방하는 자의 말을 믿는다. 내가 ‘중국의 풍속이 이러저러 해서 너무나 좋다’고 하면 그들이 기대했던 말이 아니라 매우 실망한다. 나를 믿지 않는다.”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조차 역관의 말을 믿고, 정작 박제가의 말은 믿지 않았단다. “하도 진짜냐. 거짓이 아니냐”고 묻기에 답답한 나머지 이렇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단다.
 “그래요. 내가 내가 거짓말을 했구려.” 

초정 박제가를 그린 초상화. 남과의 토론에서 절대 지지않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박제가의 오버, ‘중국어공용론’
 이랬으니 가뜩이나 직선적인 성격의 박제가가 얼마나 조바심을 냈을까. 그런 탓인지 <북학의>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논란을 일으킬만한 대목이 있다.
 바로 박제가가 주장한 이른바 ‘중국어공용론’이다. 오죽했으면 1955년 북한학자 홍희유·강석준이 번역본을 펴낼 때 이 ‘중국어’조를 제외시켰을까.
 사실 박제가의 ‘중국어공용론’을 읽으면 좀 당혹스럽다. 초정은 ‘중국어는 문자의 근본’이라고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중국어로 천(天)은 그냥 천(天·티엔)이라 한다. 우리처럼 ‘하늘 천’이라 하는 겹겹의 장벽이 전혀 없다. 따라서 사물의 이름을 분간하기가 특히 쉽다.”
 무슨 말인가. 초정과 같은 북학파인 이희경(1745~?)의 <설수외사(雪岫外史)>를 보면 박제가의 주장과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글자는 말의 근본인데 우리나라는 글자를 말로 쓰지 않고 따로 말을 만들었다. 예컨대 조선에서는 천(天)을 그대로 ‘천(天)’이라 부르지 않고 ‘하늘 천(天)’이라 한다는 것이다.(故乎天 不曰天 而曰寒乙天) 이는 한 글자에서 소리와 뜻이 전혀 달라 말은 말대로, 글자는 글자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중국에서는 ‘天’을 그대로 ‘티엔’으로 발음하는데, 조선에서는 굳이 ‘하늘 천’이라 한다는 것이다.  
 박제가는 “따라서 우리는 중국과 가깝게 접경하고 있고 글자의 소리가 중국 글자와 대략 같다”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온 나라 사람들이 본래 사용하는 말을 버린다 해도 안될 이치가 없다. 그래야 오랑캐라는 모욕적인 글자로 불리는 신세를 면할 수 있고, 수천리 동국(조선)에 저절로 주·한·당·송의 풍속과 기운이 나타날 것이다.”
 오랑캐 소리를 듣지 않고, 중화에 속하려면 한글을 버리고 ‘중국어를 공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반대파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중국은 말이 문자와 동일하다. 따라서 말이 변하면 문자의 소리도 그에 따라 변한다. 우리는 말은 말대로, 글은 글대로 사용한다. 따라서 맨 처음 받아들여 배운  한자의 소리를 그대로 유지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박제가는 “문자와 말은 하나로 통일하고 옛 한자의 소리가 바뀐 것은 학자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재반박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한자공용론’을 제기한 이유를 “중국과 대등해지기 위해”라고 못박는다.
 ‘한글이 모욕적인 오랑캐 글이며, ‘중국과 대등해지려고’ 한글을 버리고 한자를 공용화해야 한다? 제 아무리 망국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긴급구책이라 해도 박제가의 ‘중국어공용론’ 주장은 선뜻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저 과감하고 급진적인 개혁책을 내놓던 박제가의 ‘오버’라 할 수 있겠다.

 

 ■박제가의 진심
 그러나 박제가의 진심을 모르는 이는 없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일신을 초개처럼 버리고 백성을 끔찍이 여겼으니까….
 그는 <북학의>를 쓰는 심정을 읊은 시를 보라.
 “긴 여행을 마치고 초가에 앉아, 저서의 근심을 오래도록 품고 있다.~ 일신의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고, 아득히 천지를 그리워하며 수심에 잠긴다. 천 개의 글자로 가슴 속 생각을 풀어내려니, 어느 겨를에 내 한 몸 위해 고민하리오.”(<정유각시집> 제2권)
 만약 박제가가 요즘의 학자였다면 어땠을까. 거침없는 성격에 거친 표현도 서슴치 않은 박제가의 글은 인터넷 공간을 뜨겁게 달구며 극심한 논쟁을 일으킬 것이다. 아마도 ‘골수 보수파’들은 과격한 진보논객인 그에게 십자포화를 쏟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경고메시지는 지금도 심금을 울린다.
 “(지금 아시아에) 전쟁 먼지가 일지 않은 지 거의 200년이 되었습니다. 천재일우의 기회에 온 힘을 다해 국력을 닦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에 변고가 발생할 때 더불어 우환이 발생할 것입니다.”
 박제가의 경고메시지 이후 수십년이 지난 고종 시대에 일본과 서구세력의 압력에 의한 강제적인 개혁개방이 이뤄졌다. 남의 손에 의한 타율·강제개방으로 빗장이 풀린 조선은 결국 망국의 길로 급속도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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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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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작은 나라지만 산과 바다로 막혀있어 군사를 동원한지 20여 년이 되었는 데도 신하로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고려 태자가 조회했으니 후히 대접하소서. 일단 돌아가면 오지 않을 것이니….”
 1259년(고종 46년)이었다. 몽골 조정의 강회선무사 조양필이 쿠빌라이(세조)에게 고한다. “제발로 찾아온 고려 태자를 홀대해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상황일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 고려 측 사료와, <원고려기사> 등 몽골측 사료를 통해보자. 

펄갯벌로 이뤄진 강화도 갯벌. 강화해협의 빠른 물살과 함께 허리춤까지 빠지는 갯벌 때문에 몽골군은 상륙의 엄두도 내지 못했다.

■쿠빌라이의 반색
 고려는 1231년부터 만 28년 간에 걸친 몽골과의 항쟁에 지쳐 있었다. 고려는 결국 늙고 병든 왕(고종)을 대신해 태자인 전(원종)을 항복사절로 보낸다.
 그런데 도중에 몽골의 황제(헌종·몽케)가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몽골 정국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헌종의 두 동생인 쿠빌라이(홀필렬)와 아릭부케(아리부가)가 치열한 황권다툼을 벌인다. 고려 태자도 시쳇말로 누구를 만나야 할 지 ‘멘붕’에 빠진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가.
 고려 태자가 강남에서 작전을 펼치다 북상 중인 쿠빌라이를 만난 것이다. <고려사절요>를 보자.
 “고려 태자가 길에서 뵙기를 청하자 쿠빌라이(忽必烈)가 매우 놀라면서 기뻐했다. ‘고려는 예전에 당태종도 친히 정벌했어도 항복시키지 못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 나라의 세자가 제발로 걸어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그러자 곁에 있던 조양필이 “저 고려 세자를 후히 대접해야 한다”고 거들었던 것이다. 마침 또 하나의 소식이 들렸다. 고려 고종이 승하했다는 것이었다. 조양필은 “마침 잘됐다”면서 “마침 찾아온 고려 세자를 고려왕으로 세워 귀국시키면 군사를 동원하지도 않고 한 나라를 얻는 것”이라고 고한다.
 그랬다. 원나라로서는 그야말로 ‘기화(奇貨)’를 얻은 셈이었다. 20여 년 동안 그토록 원나라를 괴롭혔던 고려가 제발로 화의를 청하다니…. 쿠빌라이가 감개가 무량하다는 듯 벅찬 소회를 밝힌다.
 “지금 넓은 하늘 아래 신하로 복종하지 않은 나라는 고려와 송나라 뿐이었는데…. 그런데 이제 송나라도 솥 속의 고기이자 장막 위 제비집 같이 멸망 직전이다. 그뿐이냐. 고려도 이제 원나라에 조회하고 부왕(고종)의 상을 당해 처분을 기다리니….”(<고려사절요>)

 

 ■몽골의 선심공세
 쿠빌라이는 고려를 위해 선심공세에 나선다.
 “의관은 본국(고려)의 풍속을 좇아 상하 모두 고치지 마라. 개경 환도도 더디게 혹은 빠르게 함은 여력을 헤아려서 하라. 원래 설치된 다루가치(일종의 총독) 일행 등은 서쪽으로 돌아오게 하라.”(<원고려기사>)
 한마디로 고려의 제도와 풍속은 존중하겠다는 약속이 아닌가. 이를 ‘불개토풍(不改土風)’ 혹은 ‘세조구제(世祖舊制)’라 한다. 고려는 훗날 몽골이 내정간섭을 강화할 때마다 쿠빌라이(세조)의 유훈, 즉 ‘세조구제’를 들먹이며 번번이 좌절시켰다. 예컨대 1323년(충숙왕 10년) 몽골(원나라)가 고려에 성(省)을 설치, 사실상 흡수통합을 강행하려 했다. 그러자 이제현은 몽골 조정에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일찍이 세조(쿠빌라이) 황제께서 고려 고유의 풍속과 제도를 유지하여 종묘사직을 유지하라 했는데…. 그런데도 성(省)을 설치하려 한다면 세조 황제의 말씀은 어찌할 것입니까. 세조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세조의 ‘유훈’을 들먹거리니 어쩌겠는가. 원나라는 ‘성의 설치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에 큰 선심을 베푼 쿠빌라이는 두고두고 공치사했다. “원나라에 조회하는 나라가 80여 개국인데, 짐이 그대 나라처럼 예로 대접하는 것을 보았느냐”고….  

손돌의 한많은 전설을 담고 있는 손돌목. 강화해협 가운데서도 가장 물살이 바르고 들쭉날쭉한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몽골에 굴복하지 않은 유이(唯二)의 나라
 그러나 그렇게 공치사 할 일은 아니었다. 1차 침공(1231년) 이후 30년 가까이 이어진 여·몽 전쟁에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었으니까….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몽골이 고려의 강화도 정부를 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치지 않았던 것 뿐이라고…. 당시 세계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던 몽골제국은 고려를 주 공격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또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몽골이 고려를 특별히 봐줬다는 기록은 없다. 앞서 살폈듯이 도리어 ‘20여 년 간의 공격에서 끄덕없는 나라’ ‘과거 당태종도 정복하지 못한 나라’ ‘세계제국 가운데 굴복하지 않은 유이(唯二)의 나라’로 표현돼 있다.
 최근 출간된 <왜 몽골제국은 강화도를 치지 못했나>(이경수·푸른역사)를 통해 다시 30년 이상 지속된 고려의 대몽항쟁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저자는 몽골군이 당대 세계 최강 집단이며, 신이 내린 무시무시한 전사들이라는 맹목의 경외심을 버리라고 주문한다. 몽골군도 ‘한낱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한낱 인간이었기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고, 때때로 어쩔 수 없는 약점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여기에 강화섬의 지형적인 조건과 고려대장경 조성이 상징하는 백성들의 응집력이 장기항쟁의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몇 번을 곱씹어봐도 고려 조정이 몽골의 침략(1231년)에 맞서 강화섬을 피란처로 삼은 것은 신묘한 대책이었다.(1232년) 모두 6차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았으며, 화의 결성(1259년) 이후에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원나라를 골탕먹인 뒤에야 개경으로 환도(1270년)했으니까….
 
 ■몽골의 공포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몽골군의 ‘물의 공포’가 상상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13세기 초 칭기즈칸이 부족을 통합한 뒤 부족을 아우르는 법을 제정했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제4조=물이나 재에 방뇨하는 자는 사형이 처한다. 제14조=물에 손 담그는 것을 금한다. 물은 반드시 그릇으로 떠야 한다.’
 물이 부족한 초원·사막지대에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물이 없으면 사람이든, 가축이든 모두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당연히 물에 대한 경외심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때문인가. ‘비바람 속의 전투’는 몽골군대가 가장 두려워 했다.
 “1254년 차라대(몽골 장수)가 충주산성을 공격하자 갑자기 비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성 안 사람들이 정예군으로 공격하자 적이 포위를 풀고 도망갔다.”(<고려사>)
 “1256년 몽골군이 충주성을 도륙하자 관리와 노약자들이 겁에 질려 월악산으로 올라갔다. 그 때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면서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몰아쳤다. 몽골군은 신령이 돕는다면서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퇴각했다.”(<고려사>)
 <몽달비록>에 “몽골 군대가 다가오는 것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같고,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사라지는 것은 번개 치는 것 같다”는 표현이 나온다. 하지만 그런 하늘이 내린 신묘한 군대로 비바람에는 ‘젬병’이었던 것이다.
 오죽 물을 무서워했으면 1259년 쿠빌라이가 장강(양쯔강)을 건너려던 몽골군의 무섬증을 해소시키려고 호부(護符), 즉 부적을 붙이게 했을까.(<집사(集史)>) 싸우자는 것도 아니라 그저 도강하는 것 뿐인데 부적까지 붙일 정도얐다니…. 여하튼 이 때의 도강은 다른 몽골부대에 놀라움과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강화해협에 붙어있는 연미정. 조선 조 정묘호란 때 강화조약을 맺은 곳이었다.

■‘손돌의 전설’
 여기서 강화도의 지형을 보자. 김포와 강화도 사이를 강화해협이라 하는데 길이 20㎞지만 폭은 400~1000m에 불과하다. 바다라 하기에는 너무 좁다.
 그러나 쉽게 봐서는 안된다. 조석간만의 차이가 9m 정도나 된다. 물살이 험하기로 악명이 높다. 좁은 해역에 조수가 오르내릴 때는 바닷물의 수평운동인 조류가 발생하는데 좁은 만이나 해협에서는 왕복성 조류가 흐른다. 조차가 클수록 해협이 좁을수록 유속이 더욱 빨라지는데 밀물 때의 조류속도는 6~7노트(시속 11~13㎞)에 달한다. 1초에 3~4m의 유속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속도가 아닐까. 
 ‘손돌의 전설’은 변화무쌍한 강화해협의 물살을 웅변해준다. 즉 어떤 임금이 난리를 피해 강화섬으로 다가올 때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뱃사공인 손돌이 물살이 세고 위험한 곳으로 노를 저어 가지 않는가. 임금이 “제대로 된 물길로 가라”고 경고했지만, 손돌은 험한 길을 고집했다. 참다못한 임금은 “저 자의 목을 베라”고 명했다. 손돌은 죽기 전, 바가지 한개를 건네주며 “이 바가지를 물 위에 띄워 바가지가 흐르는대로 배를 저어가시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과연 손돌의 말대로 바가지가 떠가는대로 배를 저어가자 무사히 건너갔다. 임금은 뒤늦게 후회하고 손돌의 사당을 지어 원혼을 위로했다.
 이후부터 손돌의 항로인 김포 망덕진~강화 광성보 용두돈대 사이를 손돌목이라 일컬었다.
 <대동지지> 강화·산수조에는 손돌목의 물살을 이렇게 표현한다.
 “손돌목은 돌다리가 굳세게 뻗쳐 있어서 물밑이 마치 문지방과 같다. 중앙이 약간 오목하여 조수가 들고 날 때 수세가 매우 급하다. 또한 물밑 돌부리가 마치 깊은 낭떠러지 같으며 파도가 굽이치며 흐르는데 여울과 같이 빠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대몽항쟁기 당시 강화해협은 굴곡이 매우 심한 S자형이었다. 그러니 물과 관련된 천재지변을 경외한 몽골군들의 입장에서는 ‘건너기에는 너무 어려운 해협’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불과 2년 전인 2010년 강화 교동도에서 하점면 창후리로 가던 140t 여객선이 조종할 틈도 없이 암초에 걸린 사건을 예로 든다. 

바닥을 드러낸 몽골 바양노르솜의 한 호수. 몽골에서는 예로부터 부족한 물에 대한 경외심이 대단했다.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펄갯벌
 물도 물이지만 갯벌은 몽골군으로서는 헤어나올 수 없는 늪이었을 것이다.
 갯벌에는 모래갯벌, 펄갯벌, 모래 펄갯벌 등 3가지가 있다.
 그 중 강화갯벌은 함수량이 높은 펄갯벌이다. 빠지면 허벅지까지 차올라 도저히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된다.
 몽골군이 밀물을 이용, 물살 빠른 강화해협을 건넜다치자. 물이 빠지기 전에 공격을 마치지 않으면 갯벌에 빠져 전투력을 잃게 된다. 가뜩이나 물을 무서워하는 몽골군사들의 입장에서는 ‘패닉’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겨울철, 강화해협에 떠다니는 유빙(流氷)도 골치거리였다. 강화해협에는 겨울철만 되면 임진강·한강·예성강에서 흘러 내려오는 얼음덩어리가 쌓여 유빙을 이룬다. 이 경우 뱃길이 끊어진다. <숙종실록>은 “갑곶(강화관문)에 얼음덩어리 때문에 겨울에 배가 통할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제는 몽골군이 1년 내내 전쟁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목민족인 몽골인들은 봄·여름에 최소한의 목축활동 등 생업에 종사할 필요가 있었다. 게르(천막)의 주재료인 펠트를 만들려면 부족민들이 공동작업에 나서야 했다. 특히나 봄·여름에는 모든 말들이 풀과 물을 마음대로 뜯게 하여 강하고 튼튼하게 만든 뒤 가을 무렵부터 전쟁에 투입하는 것이다.
 특히 막 추수가 시작되는 점령지를 마음껏 약탈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 모든 계획이 허사가 된다. 특히나 조수간만의 차에 따른 빠른 물살과 갯벌, 그리고 겨울철 유빙까지…. 몽골군으로서는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전쟁이었을 것이다.

 

 ■고려의 성전(城戰)
 그렇다면 강화의 자연환경만이 고려를 지켜주었을까.
 고려는 천혜의 요새인 강화섬에 이중삼중의 덫을 더 설치해놓았다. 바로 성(城)이다. 즉 강화섬에 궁성에 해당되는 내성과 도성에 해당되는 중성, 그리고 강화도 전체를 아우르는 외성까지 철통방위 태세를 갖췄다. 두말할 것 없이 산성전략은 고조선-고구려의 전통을 잇는 우리만의 강점이었다.
 반면 몽골군의 공성전은 육지에서도 번번이 실패했다. 예컨대 1231년(고종 18년) 귀주성 전투에서 몽골군은 누거·평상·대포차 등 다양한 공정무기를 동원하고도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전투를 지휘한 70대 노익장 몽골장수는 “이렇게 작은 성이 대군을 맞아 싸우는 것을 보니 하늘이 돕는 것”이라고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고려사> ‘박서 열전’)
 1232년 처인성 전투 때는 승려 김윤후가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를 살해하는 등 충격적인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몽골군으로서는 천신만고 끝에 강화해협을 건넌다 해도 경군 1만명과 특수부대인 삼별초, 그리고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이 버티고 있던 강화섬을 단시간 내에 점령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밀·썰물 시간, 그리고 봄이 되기 전…. 그런 시간제한을 두고 그렇게 빨리 섬 전체를 접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함께 선체를 두꺼운 판자로 덮어 화살과 돌의 공격을 막은 이른바 몽충(蒙衝)이라는 배와, 배에 뿔처럼 달린 쇠붙이를 달아 적선을 부숴버리는 과선(戈船)도 고려의 주요 무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세계 최강의 몽골제국은 고려의 강화도 정부는 붕괴시킬 수 없었다. 

■몽골의 애간장 녹인 고려
 빼놓을 수 없는 고려의 무기는 역시 노련한 외교술이었다.
 예컨대 몽골이 고려의 강화천도를 질책하자 고종은 천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유민이 모두 흩어지면 나라의 근본이 비게 되고 나라의 근본이 비면 누가 해매다 공물을 마련해 상국을 섬기겠습니까. 이 때를 이용해 남은 백성을 수습해 섬으로 들어가 있으면서 변변치않은 토산물이나마 상국에 올리는 편이 낫습니다. 이로써 신하의 명분을 잃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고종은 특히 “어디에 있건 간에 정성을 바치는 것이 중요하지 않느냐”면서 “신하의 명분을 잃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원을 달랬다.(<고려사> 1232년 11월)
 또 있다. 1256년 9월 고려 사신 김수강이 몽골 군대의 철수를 쿠빌라이 황제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개경에 환도해야 철수하겠다”고 거절했다. 그 때 김수강의 화술이 백미다.
 “사냥하는 사람이 짐승을 쫓아 굴 구멍에 들어갔는데 활과 화살을 가지고 그 앞을 막고 있으면 곤한 짐승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또 얼음과 눈이 몹시 차서 땅이 얼어붙으면 초목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쿠빌라이는 “네가 참 사신이다. 마땅히 두 나라의 화친을 맺어야 한다”며 군사를 돌렸다. 고려는 화의에 합의한(1259년) 이후에도 이 핑계 저 핑계대다가 11년 후인 1270년이 되서야 개경으로 환도했다. 원나라를 들었다놨다 하면서 애간장을 녹인 것이다. 
 화가 난 쿠빌라이는 1269년(원종 10년) 고려 재침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그러나 마형과 마희기 등 조정대신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승리할 수는 있으나 최선은 아닙니다. 이기지 못하면 국가의 위엄이 땅에 떨어집니다. 저들이 강과 산의 험함을 믿고 바다에 식량을 쌓아 가만히 지키기만 하면 무슨 계책으로 취할 수 있겠습니까. 100만 군대라도 금세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원고려기사>)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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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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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1383년)정도전이 이성계를 따라 동북면을 방문했다. (이성계) 정예부대의 호령과 군령이 자못 엄숙한 것을 보고 이성계에게 비밀리에 말했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美哉此軍 何事不可濟)’ 이성계가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정도전이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동남쪽 왜구를 칠 때를 이르는 말입니다.”
 ②“조선이 개국할 즈음, 정도전은 왕왕 취중에 슬며시 말했다. ‘한 고조가 장자방(장량)을 쓴 것이 아니네. 장자방이 곧 고조를 쓴 것 뿐이라네.(不是漢高用子房 子房乃用漢高)’라고…. 무릇 임금(태조 이성계)을 위해 모든 일을 도모했으니 마침내 큰 공업을 이뤘다. 참으로 상등의 공훈을 이뤘다.(凡可以贊襄者 靡不謀之 卒成大業 誠爲上功)” 

 삼봉 정도전은 이인임 일파의 미움을 받아 전라도 나주 거평부곡에 유배를 떠났다.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비참한 백성들의 현실을 깨달았다.

■정도전의 부음기사에 담긴 것은  
 ①②, 두 인용문 모두 <태조실록> 1398년 8월26일자에 기록된 삼봉 정도전의 졸기(卒記), 즉 부음기사(Obituary)이다.
 이날 새벽 정도전을 비롯, 남은·심효생·박위·유만수 등은 정안군(이방원)을 포함, 여러 정실 왕자들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죄로 참형을 당했다. 태조 이성계에 의해 세자로 옹립됐던 이방석과 방번 등도 피살됐다. 이를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정도전 일파는 ‘왕자들을 살해하려 한’ 죄로 참형을 당했으니 대역죄인에 해당된다. 대역죄인의 졸기인만큼 그의 죄상을 낱낱이 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이상하다. <실록>의 이 ‘천인공노할 대역죄인의 부음기사’는 비교적 객관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
 물론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보복하기를 좋아했고, 이색을 스승으로 삼고, 정몽주·이숭인 등과 친구가 됐으나 조준 등과 친하려고 세 사람을 참소했다”는 부정적인 내용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면 애교가 아닐까. 대역죄인의 부음기사치고는 매우 관대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부음기사는 되레 정도전에게 매우 긍정적인 단서를 남긴다. 즉 정도전의 사후, 최초의 기록인 이 ‘졸기’는 정도전과 정도전의 생애를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장자방(장량)이 한 고조(유방)를 기용한 것 뿐”
 우선 ①의 기사를 보자. 정도전이 조선개국 전, 동북면을 지키던 이성계를 방문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새 왕조를 개창할 그릇이 되는 지를 탐색하려 한 것이 아닌가. 그 자리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군대의 엄정한 군기와 군세를 보고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냐”고 운을 뗐다. ‘역성혁명을 할 만한 기세’라고 만족감을 드러낸 것이다. 이성계는 이 질문에 ‘무슨 말이냐’고 되묻고, 정도전도 딴청을 피웠다. 그러나 ①의 실록 기사는 두 사람이 새 왕조 개국을 위한 운명적인 만남을 생생한 필치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②는 더욱 흥미로운 기록이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뒤 술자리 때마다 취중진담의 형식을 빌어 ‘한고조(유방)와 장자방(장량)’의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도전이 언급한 장자방, 즉 장량이 누구인가. 장량은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개창한 한 고조 유방의 둘도 없는 책사였다.
 지금 이 순간도 ‘책사의 전범’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한고조는 훗날 “군영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일만큼은 나(유방)도 장량만 못하다”(<사기> ‘유후세가’)고 인정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도전은 술자리에서 큰 일 날 소리를 해대고 있다. ‘한 고조 유방이 장자방을 기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유방을 이용해서 제국(한나라)을 개창했다’는 것이 아닌가. 두 말 할 것 없이 한고조는 태조 이성계, 장자방은 정도전 자신이다.
 그러니까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는 새 왕조를 개창하려고, 이성계를 기용했다는 이야기를 술자리 때마다 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춘추대의’에 반하는, 즉 역심을 한껏 드러낸 대역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실록>은 정도전이 취중에 말했다는 ‘한고조와 장자방’ 이야기를 아주 담담하게 팩트만 담아 전하고 있다.
 정도전 일파를 죽인 태종이 <태조실록>을 편찬했는데, 정도전의 역심을 이토록 담담한 필치로 쓸 수 있을까. <실록>은 더 나아가 “태조(이성계)와 함께 조선개국에 모든 힘을 쏟은 정도전이야말로 ‘참으로(誠)’ 상등의 공훈을 세웠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참으로(誠)’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면, ‘진심’이 듬뿍 담겨있는 평가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정도전의 목을 벤 태종마저도 그를 ‘조선의 개창자였음’을 솔직하게 인정했다는 이야기다.    

 정도전 유배지임을 알리는 표석. 정도전은 원래 ‘백성은 풀잎같아서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쓰러지는’는 나약한 존재이며, 따라서 가르쳐야 할 존재라고 여겼지만 유배생활을 통해 민초의 만만치 않은 힘을 깨달았다.

■군주가 아니라 한낱 사내를 죽인 것이다.
 사실 삼봉 정도전의 젊은 날은 당대의 여느 사대부와 다르지 않았다.
 백성을 군자가 가르쳐야 할 어리석인 대상으로 여겼으니까. 정도전이 다섯살 연상의 정몽주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백성들은 어리석어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모릅니다. 백성들은 뛰어난 자를 믿고 복종할 줄 알았지, 도가 바르고 나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도전은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라면서 “따라서 바람이 불면 풀이 반드시 눕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정도전의 삶은 부친·모친상으로 인한 3년 여의 낙향(1366~69)과, 부원파 이인임의 미움으로 인한 9년 여의 긴 유배 및 유랑(1375~84)으로 완전히 바뀐다.
 먼저 ‘절친’이었던 포은 정몽주가 건네준 <맹자>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정도전은 <맹자>를 하루에 한 장 혹은 반 장씩 차근차근 정독했다. 아마도 맹자를 읽음으로써 역성혁명의 꿈을 키웠을 것이다.
 정도전이 ‘꽂힌’ 맹자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맹자> ‘양혜왕 하’일 것이다. 무엇이냐.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탕왕(상나라 성군)이 하나라 걸왕을 내쫓고, 주 무왕이 상나라 주왕을 죽였는데 그렇습니까.”(제 선왕)
 “기록에 있습니다.”(맹자)
 “신하가 군주를 죽여도 됩니까.”(제 선왕)
 “어짊과 올바름을 해치는 자는 ‘사내’에 불과합니다. 주 무왕이 ‘한낱 사내’(상 주왕을 뜻함)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맹자)     
 그러니까 주나라 창업주인 무왕(기원전 1046~1043년)은 ‘어짊과 올바름을 해친 한낱 사내’인 상(은)의 폭군인 주왕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는 곧 역성혁명을 옹호하는 무시무시한 ‘맹자의 말씀’이다. 또 <맹자> ‘이루’는 “걸주(桀紂·폭군의 상징인 하 걸왕과 상 주왕을 뜻함)가 천하를 잃은 것은 백성을 잃은 것”이라 했다.
 “백성을 잃은 것은 그 마음을 잃은 것과 같다. 백성을 얻으면 천하를 얻은 것이다. 그 백성을 얻는 데도 도가 있으니 그 마음을 얻으면 백성을 얻은 것이다.”
 그는 조선개국 후 펴낸 <조선경국전>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임금의 지위는 존귀한 것이다. 하지만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은 복종한다. 하나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은 임금을 버린다.”(<조선경국전> ‘정보위·正寶位’)

 

 ■질타당한 선비의식
 9년 간의 유배 및 유랑생활에서 마주친 백성들의 비참한 삶도 정도전의 혁명의식을 깨웠다.
 바야흐로 홍건적의 난과 왜구의 침입 등의 외우와 권문세족의 토지겸병 등 내환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던 시기였다.
 “물푸레 나무(水靑木)로 만든 회초리로 농민을 압박, 토지를 빼앗기에 혈안이 돼 토지 하나에 주인만 7~8명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반면 방방곡곡이 홍건적의 난과 왜구 침략으로 싸움터가 됐다.”(<고려사절요> 등)
 유배지(나주 회진현 거평부곡)에서 만난 백성들은 ‘교화해야 할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었다. 농사를 짓고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것을 천직으로 여긴, 가난하지만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질곡의 하루하루를 보내던 백성들은 정도전에게 ‘탁상공론하는 유학자들의 허위의식’을 사정없이 일깨워주었다.
 정도전의 <금남야인>이란 글을 보자. 어떤 야인(野人)이 “선비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선비의 몸종이 선비를 위해 대신 대답한다.
 “우리 선비님은 천문·지리·음양·복서에도 능통하고 오륜 윤리에 통달하고 역사와 성리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분입니다. 후진을 가르치고 책을 쓰고 의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진정한 유학자임을 자부하는 선비입니다.”
 그러자 야인은 슬쩍 비웃으면서 단칼로 정리한다.
 “그 말은 사치입니다. 너무 과장이 아닙니까. 실상도 없으면서 허울만 있으면 귀신도 미워할 겁니다. 선생은 위태롭군요. 화가 나에게까지 미칠까 두렵네요.”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 선비의 허위의식을 사납게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이숭인과 정몽주 등이 유배 중이나 유배가 풀렸을 때 임금을 향한 ‘연군시(戀君詩)’를 남겼지만, 정도전은 일절 쓰지 않았다. 백성에게 배웠는데 왜 임금에게 고마워한다는 말인가.  

통치규범을 육전으로 나누었는데, 국가형성의 기본을 논한 규범체계서였다. <조선경국전>은 막 개국한 조선왕조의 헌법이었으며, 훗날 <경국대전> 편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성계를 만난 날
 정도전은 맨처음 인용한 대로 유랑 중 도지휘사로 동북지방 국토방위 책임자였던 이성계를 만나 혁명의 감(感)을 잡았다.
 이 때가 1383년(우왕 9년)이었다. 정도전의 나이 42살이었고 이성계의 나이 49살이었다. 정도전은 이듬해(1384년) 여름 함주(함흥)를 찾았다. 아마도 이때는 ‘이성계의 장자방’으로서 본격적인 혁명모의를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1392년 7월 17일, 드디어 조선이 개국되자 정도전은 새왕조의 실질적인 설계자가 됐다. 그의 직책은 어마어마 했다.
 1품인 숭록대부에다 봉화백이라는 작위는 덤이었다.
 문하시랑찬성사(시중 다음 직책), 동판도평의사사사(최고정책결정기구 수장), 판호조사(국가경제 총괄), 판상서사사(인사행정 총괄), 보문각대학사(문한의 총책임자), 지경연예문춘추관사(역사편찬과 국왕 교육책임), 의흥친군위 절제사(태조 이성계의 친병 두번째 책임자)….
 그러니까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인사행정을 도맡으며, 국가재정·군사지휘권·왕의 교육과 교서작성·역사편찬 등 전 분야를 총괄하는 직분을 감당해낸 것이다.

 

 ■혁명공약 쓴 정도전
 그의 지위는 7월28일 발표한 이른바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이 발표됨으로써 구체화했다. 이것은 일종의 혁명정부의 공약같은 것이었다.
 정도전의 연구자인 한영우 교수(서울대)는 이 편민사목 편찬을 두고 “정도전이 조선왕조의 설계자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종묘사직의 제도. 왕씨 처리 문제, 과거제도 정비. 국가재정의 수입과 지출, 군대진휼, 과전법의 준수, 공물 감면 등 혁명개혁공약을 만천하에 공포했다.  
 특히 정도전은 이색·이숭인·우현보·설장수 등 56명을 반혁명 세력으로 간주하고 엄중한 처벌을 언급했다. 물론 이들은 태조의 감면으로 극형을 면했다. 그러나 이색의 아들 이종학과 우현보의 세 아들 우홍수·홍득·홍명 등 8명은 유배 도중 곤장 70대를 맞고 사망했다.
 <태조실록>은 우현보 세아들의 죽음을 특별히 언급하면서 “이는 정도전과 우현보 가문의 오랜 원한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라고 언급했다. 무슨 말인가.
 여기에는 정도전을 둘러싼 출생의 비밀이 담겨있다. 즉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문제’였다. 정도전의 외할머니는 김진이라는 승려가 자신의 종의 아내와 사통해서 낳은 아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진이라는 승려는 우현보의 자손과 인척관계였다. 따라서 우현보의 자손들은 정도전의 ‘천한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도전의 ‘출생의 비밀’
 그런데 정도전이 과거에 급제,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를 때 대간(사간원)에서 고신(신분증)을 선뜻 내주지 않았다. 이 때 정도전은 우현보의 자손들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퍼뜨려 그렇게 됐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도전이 훗날 우현보의 세 아들을 모함해서 개인감정으로 ‘치사하게’ 복수했다는 것이다.
 사실 정도전으로서는 ‘천출(賤出)’이라는 것 때문에 무진 구설수에 시달려왔다.
 예컨대 고려 공양왕 말기인 1392년 4월, 간관 김진양 등은 정도전을 탄핵하면서 다음과 같이 폄훼했다.
 “정도전은 미천한 신분으로서 몸을 일으켜 당사(堂司)에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때문에 그 미천한 근본을 덮고자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하는데, 홀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참소로 죄를 얽어 만들어 많은 사람을 연좌시켰습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2년조)
 여기서 말하는 ‘본주’, 즉 본주인은 우현보 가문을 일컫는다. 정도전의 ‘출생 컴플렉스’가 대단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거꾸로 이같은 출생의 한계 때문에 명문가 출신인 정몽주 등과 달리 세상을 완전히 갈아엎는 혁명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정도전의 만기친람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정도전은 17킬로미터에 이르는 한양도성을 설계했고, 한양을 구획하고 거리와 마을의 이름까지 지었다.

■정도전의 예능감
 어쨌든 정도전은 그야말로 새 왕조 설계를 위해 ‘만기친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한 일을 일별만 하더라도 과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려사>를 편찬했으며, 사은사로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동북면 도안무사가 되어 함길도를 안정시키고 돌아왔다. 여진족을 회유하고 행정구역을 정리하려던 것이었다. 태조는 그런 정도전을 두고 “경(정도전)의 공이 (고려 때 동북 9성을 경영한) 윤관보다 낫다”고 치하했다.(<태조실록> 1398년 3월30일)
 그 뿐인가. 악곡까지 만들었다. 즉 문덕곡(文德曲·이성계의 문덕을 찬양), 몽금척(夢金尺·신으로부터 금척을 받았음을 찬양), 수보록(受寶錄·태조 즉위전에 받았다는 참서), 납씨곡(納氏曲·몽고의 나하추를 격퇴한 것을 찬양), 궁수분곡(窮獸奔曲·왜구 격파의 공로를 찬양), 정동방곡(靖東方曲·위화도 회군을 찬양) 등 6개 악사를 지어 왕에게 바친 것이다. 정도전이 작사·작곡·편곡한 이 6곡은 춤으로 형상화됐다. 종묘와 조정의 각종 행사 때 연주돼 궁중무용으로 자리잡았다.
 참 재주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은 정도전에게 음악가의 재능까지 선사한 것이다.
 그는 또 한의학에도 천착, <진맥도지(診脈圖誌)>까지 펴냈다. 의사는 맥을 짚는데 착오가 없어야 한다면서 여러 학자들의 설을 참고해서 그림을 곁들여 요점을 정리한 것이다. 대체 정도전의 ‘능력의 끝’은 어디까지였을까.  

 

 ■병법에 군사훈련까지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오행진출기도>와 <강무도>,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 등 병서를 지어 태조에게 바쳤다는 점이다.
 이것은 요동정벌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정도전은 각 절제사들이 보유하고 있던 군인 가운데 무략이 뛰어난 자들을 골라 ‘진도(陣圖)’를 가르쳤다. 자신이 제작한 ‘진도’를 펴놓고 일종의 제식훈련을 펼친 것이다. 이것은 사병 성격의 군대를 정도전 자신이 직접 장악, 장차 요동정벌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1394년, 정도전은 중앙군 최고책임자인 판의홍삼군부사가 됐다. 사실상 군통수권자가 된 것이다. 이성계의 친병인 의흥친군위도 이 기구에 통합됐다.
 그러나 정도전의 병권장악은 순조롭지 않았다. 정안군(태종) 등 여러 왕자와 종친, 그리고 절제사들이 저마다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과 절제사들이 철갑을 입고 군대깃발에 제사를 지내는 제독 행사를 치렀다. 이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절제사들의 수하들에게 태형이 집행됐다.”(<태조실록> 1394년 1월28일)
 “절제사와 군사들에게 진도를 익히도록 강요하고 사졸들을 매질하니 이를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태조실록> 1398년 윤5월29일) 
 정도전은 특히 1394년 2월29일 왕자들과 종친들, 그리고 공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사병들을 혁파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군제개혁안을 관철시켰다.
 사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모든 군통수권이 국왕 한사람에게 모여야 하는게 옳았다. 때문에 정도전의 군제개혁안은 당연한 과업이었다.

 

 ■요동정벌의 야망
 또 누누이 강조하지만 이 군제개혁안이야말로 정도전이 외쳐온 ‘요동정벌’을 위한 선행조건이었다.
 예컨대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하고자 한 고려 태조의 정책을 웅장하고 원대한 계략(宏規遠略)”이라고 칭송했다. 더불어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의 유민을 포섭한 태조의 조처를 ‘매우 어질고 은혜로운(沈仁厚澤) 정책이었다’고 숭상했다.(<삼봉집> 중 ‘경제문감별집’ ‘군도君道·고려국 태조 高麗國太祖)
 정도전의 요동정벌 의지는 확고했다. 예컨대 1397년(태조 6년) 정도전은 측근인 남은과 결탁해서 태조 임금에게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동명왕의 옛 강토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태종실록> 1405년 6월27일)
 남은의 상소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태조는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이냐”고 정도전에게 물었다. 그 때 정도전은 “예전에도 외이(外夷)가 중원에서 임금이 된 적이 있지 않느냐”고 요동정벌을 촉구했다. 정도전은 요나라와 금나라, 원나라 등 이른바 이민족의 나라가 중국 중원을 점령한 일을 거론하면서 요동정벌의 정당성을 말한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의 군제개혁안과 요동정벌 계획은 극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예컨대 정도전의 편에 선 대사헌 성석용이 정도전의 <진도>를 익히지 않은 모든 지휘관의 처벌을 강력히 주청한 일이 일어났다.(1398년 8월9일)
 당시 절제사를 비롯한 군부 지도자들의 면면을 보면 정안군(태종)을 비롯한 여러 왕자들과 종친들, 그리고 개국공신들이었다. 그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그러자 태조는 “정안군(태종) 등 왕자 및 종친들과 이지란 등 개국공신들은 사면하라”는 명을 내림으로써 이들의 반발을 무마했다.
 여기에 병상에 누워있던 개국공신 조준은 태조 임금을 알현하고 ‘요동정벌 불가론’을 조목조목 따졌다. “(고려말 조선초의) 잦은 부역으로 백성들이 지쳤고, 신생 명나라의 국력이 틈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인데 군사를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정도전의 야망은 전방위적인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고 만다. 

 정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몸통없이 목만 남은 유골이 발굴됐다. 재상의 나라를 꿈꾸던 정도전은 태종 이방원에 의해 참수되는 비운을 겪었다.

■도성설계에, 동네이름까지
 이밖에도 새 왕조의 기틀을 잡기 위한 정도전의 ‘만기친람’은 혀를 찰만 했다.
 1394년 <조선경국전>의 편찬은 그의 혁혁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통치규범을 육전으로 나누었는데, 국가형성의 기본을 논한 규범체계서였다. <조선경국전>은 막 개국한 조선왕조의 헌법이었으며, 훗날 <경국대전> 편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역대부병시위지제>라는 군제개혁안을 그래픽을 곁들여 편찬, 임금에게 바쳤다.
 얼마나 병법에 해박했으면 그림까지 그려 설명할 정도였을까.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이 뿐인가. 정도전은 한양 신도읍지 건설사업의 총책임자가 되어 도성건설의 청사진을 설계한다. 한양의 종묘·사직·궁궐·관아·시전·도로의 터를 정하고 그 도면까지 그려 태조 임금에게 바쳤다. 새 도읍의 토목공사가 시작되자 <신도가>라는 노래까지 지어 공역자들의 피로를 덜어주고 흥을 돋우어 주었다.
 “~앞은 한강수여, 뒤는 삼각산이여, 덕중하신 강산 좋으매 만세 누리소서.”
 경복궁과 근정전, 사정전, 교태전,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등 궁궐 및 전각의 이름과 융문루·영추문·건춘문·신무문 등 궐문의 이름을 지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지금도 상당 부분 남아있는 한양도성을 쌓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그는 직접 백악산(북악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낙타산(낙산)에 올라 거리를 실축하고 17㎞가 넘는 도성을 설계했다. 오행의 예에 따라 숭례문·흥인지문, 돈의문, 소지문(숙정문) 등 4대문과 소의문, 창의문, 혜화문·광희문 등 4소문의 이름도 지었다.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종로의 종각은 오행의 신(信)에 해당됐다. 한양은 이로/써 인의예지신 등 오덕을 갖춘 도시의 상징을 띠게 됐다. 신도시 한양의 행정구획을 정리하고 구역의 이름을 짓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한양을  동·서·남·북·중 5부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수십개의 방(坊)으로 구획하고 이름을 정했다. 예컨대 연희·덕성·인창·광통·낙선·적선·가회·안국·명통·장통·서린 등의 이름이 정도전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냥 지은 게 아니었다.
 인의예지신와 덕(德)·선(善) 등 유교의 덕목을 담은 명칭이었다. 정도전은 완성된 한양의 모습을 찬미하는 6언절구의 <신도팔경시>를 지었다.(1398년 4월 26일)

 

 ■최고의 불교비판서
 새왕조 개창을 향한 그의 정력은 <불씨잡변> 저술에서도 엿볼 수 있다.
 1398년(윤 5월16일) 개국공신 권근이 쓴 <불씨잡변> 서문을 보자.
 “무인년(1398년) 여름(4~5월) 선생(정도전)은 병 때문에 며칠 쉬고 있는 사이 이 글을 만들어 나(권근)에게 보이며 말했다. ‘불씨(부처)의 해독은 사람을 금수로 만들어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니~울분을 억제할 수 없이 이 글을 짓는 것입니다.’라고….”
 정도전은 더 나아가 “불교를 깨뜨릴 수 있다면 죽더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이 <불씨잡변>은 동양 역사에서 가장 수준높은 불교비판서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성리학을 조선왕조의 국교로 정착시킨 저술로 인정받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몸이 아파 쉬고 있는 사이에도 나라를 위한 정도전의 노심초사를 읽을 수 있다. 그보다 이 짧은 기간동안 이렇게 깊이 있는 저술을 완성할 수 있었다니…. 그의 내공에 감탄사가 절로 나올 뿐이다.

 

 ■군주의 권한은 딱 두가지 뿐
 그러나 정도전의 사상 가운데 으뜸은 역시 ‘재상 중심’의 신권(臣權) 정치였다.
 1394년 <조선경국전>을, 1395년엔 그것을 보완한 <경제문감>을 지었다. 여기서 정도전 정치사상의 핵심인 ‘재상중심의 권력구조’ 의견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너무 혁명적이다.
 “인주(人主·군주)의 실제 권한은 딱 두가지다. 하나는 재상을 선택·임명하는 권한이다.(人主之職 在擇一相) 다른 하나의 권한은 한 사람의 재상과 정사를 의논하는 것이다.(人主之職 在論一相)”(<조선경국전> ‘상·치전·재상연표’ <경제문감> ‘상·재상’)
 여기서도 주안점이 있다. 군주는 국사에 관계된 큰 문제만 협의할 뿐, 그밖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재상이 모두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사의 주도권은 군주가 아니라 재상에게 있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왜 재상에게 사실상의 권한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왕의 자질은 어둡고 현명하고 강하고 약함이 한결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아름다운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 왕이 대중의 영역에 들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상(相·재상)이라 합니다. 도와서 바로잡는다는 것입니다.”(<조선경국전> ‘상·치전총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군주의 실권은 원래 미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왕위는 세습된다 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즉 왕이 현명하면 물론 좋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더라도 재상만 훌륭하다면 괜찮다는 것이다.(<조선경국전> ‘상·치전·재상연표’)

 

 ■군주는 사유재산도 없어야 한다
 정도전은 이와함께 군주는 사유재산을 가져서도 안된다고 단언했다. 군주의 사유재산권은 측근들을 먹여살리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 경우 왕의 측근세력은 권세와 농간을 부려 만사의 폐단이 이로 말미암아 야기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군주는 관념상으로 가장 많은 부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국가의 경비지출에 의해 생계를 지탱해야 하는 일종의 월급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재상은 군주가 필요로 하는 일체의 경비를 장악해서 군주가 사치와 낭비가 없도록 엄격히 통제해야 하는 존재다.(<조선경국전> ‘상·치전·재상연표’)
 그래서인가. <경제문감>은 “천하의 교령(敎令)과 정화(政化)는 모두 재상의 직책에서 나온다”(재상지직·宰相之職)고 했다.
 따라서 군주는 재상을 대할 때 반드시 ‘예모(禮貌)’ 즉 ‘예를 갖춘 얼굴’로 대해야 하며 함부로 언동해서도 안된다.
 그러니까 재상은 인사권과 군사권, 재정관할권, 작상(爵賞)형벌권 등 움켜쥔다는 것이다.(<경제문감> ‘상 재상지직’)

 

 ■정도전이 꿈꾼 세상
 정도전이 재상정치를 논하면서 전범으로 삼는 ‘재상’들이 있다.
 상나라 탕왕과 주나라 성왕을 도와 왕조를 반석 위에 세운 이윤(요리사 출신의 재상)과, 주공(성왕의 삼촌이자 섭정 재상)이다.
 물론 한나라의 소하·조참·주발·진평과 당나라의 방현령·두여회·요숭 등도 명재상이긴 하다. 하지만 정도전은 자기 몸을 수양하고 임금을 바로 잡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는 것이다.(<경제문감> ‘상·재상 상업’)
 정리해보면 미련하고 똑똑한 군주가 둘쭉날쭉할 수밖에 없는 세습군주로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천하만민 가운데 뽑은 선비로 현인집단을 형성하고, 그 현인집단 가운데 선발된 관료를 중심으로한 관료정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료정치를 이끌어가는 구심점은 천하만민의 영재 가운데 선택된 재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도전의 천려일실
 1398년 8월26일, 정도전은 자신의 집(종로구청 자리)과 가까운 남은의 첩 집(송현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불의의 습격을 받아 참수 당한다.
 당시의 <실록>은 정도전은 죽기 전, “예전에 공(정안군)이 나를 살렸는데, 이번에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한영우 교수는 정도전이 죽기 전에 읊었다는 ‘자조(自嘲)’의 시를 보면 혁명가의 기개가 엿보인다고 주장한다.
 “조심하고 조심하여 공력을 다해 살면서(操存省察兩加功) 책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不負聖賢黃卷中), 삼십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三十年來勤苦業)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松亭一醉竟成空)”(<삼봉집>)
 새왕조 건설을 위해 눈코뜰새없이 움직이던중 그만 순간 방심해서 술 한잔 마시다가 천려일실, 변을 당했음을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현방은 바로 남은의 첩 집을 가리킨다.

 

 ■목만 발굴된 유골의 정체
 지난 1989년 3월, 서울 서초동 우면산 자락에서 삼봉 정도전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발굴됐다.
 발굴 묘는 <동국여지지> ‘과천현’편과 봉화정씨족보에서 정도전 선생의 묘로 추정한 바로 그 곳이었다. 봉화 정씨 종택이 그동안 이 묘소를 관리해왔다. 그런데 발굴결과 몸통은 없고, 머리만 남은 피장자의 유해가 발견됐다. 이와함께 상당히 정제된 조선초기의 백자가 함께 수습됐다.
 무덤을 발굴한 한양대박물관은 “무덤의 지체로 보아 상당한 신분의 피장자였음이 분명하다”면서 “삼봉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특히 정도전이 “정안군이 정도전의 참수를 명했다(令斬之)”는 실록의 기사(1398년 8월26일)가 눈에 띄는 대목이다. 아마도 어떤 뜻깊은 이가 그의 잘린 목을 수습해서 정성스럽게 묻어두었을 것이다.
 조선을 설계한 위대한 혁명가이자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정도전의 최후는 이렇게 비참했다.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이 있다.

 

 ■장자방과 다른 점
 정도전은 ‘조선을 개국한 장자방’을 자처했지만, 끝까지 장자방의 길을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자방의 경우를 보자. 한 고조(유방)가 한나라를 개국한 뒤 정부인(여후)의 아들(태자)을 폐하고 총애하던 후궁(척부인)의 아들을 새 태자로 옹립하려 했다.
 그 때 장자방은 정부인을 위해 선묘한 계책을 내어 장자(여후의 아들)의 계승원칙을 지켜냈다.
 반면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가 정실이 아닌 후실(신덕왕후 강씨)의 어린 아들(방석)을 세자로 세우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도리어 세자(방석)의 스승이 되어 미움을 자초했다.
 또 하나, 장자방은 한나라가 개국되자 “이제 세속의 일은 떨쳐버리고자 한다”고 선언한 뒤 적송자(전설상의 신인)의 삶을 좇아 유유자적했다.
 이 또한 정도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조선 개국 후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만기친람’하며 초인의 능력을 발휘했던 정도전과는….
 
 ■‘그 분과 견줄수 있는 영웅호걸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정도전이 있었기에 역사는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그가 뿌린 씨앗은 조선왕조 500년은 물론, 지금 이 순간까지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1465년(세조 11년), 영의정 신숙주는 정도전의 손자 정문형의 부탁을 받아 <삼봉집>의 후서를 써주면서 이렇게 평했다.
 “개국 초 나라의 큰 규모는 모두 선생이 만들었으며, 당시 영웅호걸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지만 그 분(정도전)과 비교할 만한 이가 없었다.”
 태조 이성계는 1395년 10월29일 낙성된 경복궁에서 연회를 베풀며 삼봉 정도전에게 네 글자를 대서특필해 선물했다.
 ‘유종공종(儒宗功宗)’. 즉 ‘유학도 으뜸이요, 나라를 세운 공도 으뜸’이라는 글자였다. 핵심을 찌르는 당대의 평가다.
 물론 삼봉의 속내는 달랐을 것이다. 이성계(한고조 유방)가 정도전(장자방)을 기용한 것이 아니라 정도전이 이성계를 기용한 것이라고….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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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발을 맞이하라.”(세종)
 “싫사옵니다.”(송인산)
 “명을 거역하겠다는 거냐.”(세종)
 “이발은 욕심을 품어 어명을 욕되게 한 자입니다. 사헌부의 장관이 될 수 없습니다.”(송인산)
 “(이발이) 고의로 범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어서 마중하도록 하라.”(세종)
 “하교를 받들지 못하겠나이다.”(송인산)
 사헌부 장령(정 4품)에 불과한 송인산이 지존인 임금의 명을 거역했다는 말이다. 이 무슨 하극상이란 말인가.
 그러나 세종은 두 손을 들고 만다. 이발의 대사헌 임명을 취소하고 형조참판으로 바꿔 제수한 것이다. 1420년 3월, 세종시대에 일어난 초유의 항명파동이었다. 

사간원 관리들의 친목모임을 그린 <미원계회도>(보물868호). 1540년 열린 이 계모임에는 이황, 유인숙, 이명기, 나세찬, 이영현 등이 참석했고 성세창의 시문이 적혀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항명파동
 무슨 일인가. 내막은 이렇다, 세종은 3월16일, 이발을 대사헌으로 임명한다.
 그런데 이발의 대사헌 임명은 처음부터 무리수였다. 이발은 3년 전인 1417년(태종 17년), 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 금릉(남경)을 방문한 뒤 거센 탄핵을 받은 바 있다. 대량의 포물(布物)을 사사로이 가져가 중국 현지에서 팔았다는 비난을 받은 것이다. 이 사건은 중국에서도 큰 물의를 빚었다. 명 조정에 진상할 물건은 별로 없는데, 개인적으로 가져온 물건이 한가득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죽했으면 중국 명나라 조정의 예부가 나서 백성들에게 “명조정에 진상할 물건은 조선인들과 매매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엄포를 놨을까.
 심지어는 명 예부상서는 이발을 만나 비아냥 거렸다고 한다.
 “어째, 포물은 좀 팔았습니까.”
 사절단 전체가 웃음거리가 됐다. 낯뜨거운 외교적인 망신이었다. 이 스캔들은 조선에도 금세 퍼졌다.
 문제는 태종 임금이 이발을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에 임명했다는 것이다. 사헌부는 지금으로 치면 감사원이나 검찰 정도되는 사정기관이다.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단속하는 기관의 수장에 비리인사를 임명하다니….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이 출근하면 모든 사헌부 관리들이 청사의 뜰 아래 도열해서 정중히 영접하는 것이 법도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사헌부 관리들이 신임 대사헌인 이발의 첫 출근을 저지하고 나선 것이다. 사헌부 관리들의 입장은 분명했다.
 “마음 씀이 간사하고 탐욕이 있는 인물이 풍헌(風憲·사헌부)의 수장으로 자격이 없습니다.”
 사헌부 관리들이 완강하게 나서자 태종도 어쩔 수 없었다. 태종은 이발의 임명을 취소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문제의 인물을 세종시대에 들어서도 또 다시 대사헌에 임명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역시 사헌부 관리들이 나선 것이다. 1420년 3월22일, 이발이 다시 첫출근에 나섰으나 사헌부 관리들은 아무도 영접하지 않았다. 세종이 송인산에게 “이발을 마중하도록 하라”고 직접 명했으나 송인산 등은 죽기를 각오하고 항명파동을 일으킨 것이다. 세종 시대의 항명파동은 결국 13일만에 사헌부 관리들의 승리로 끝났다.
 당대의 사정기관 공무원들은 태종과 세종이라는 큰 임금 앞에서도 당당히 할말을 하면서 사정기관의 자존심을 무너뜨리지 않은 것이다.

  

   ■“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말만 들어도 지독한 사정기관 공무원이 있다. 그것도 폭군의 시대라는 연산군 치하의 공무원이다. 
 “그의 살코기를 씹어먹고 싶습니다.(欲食其肉)”
 1497년(연산군 3년)이었다. 사간원 정언(정 6품) 조순이 ‘막말’에 가까운 독설을 퍼붓는다. 갓 서른이 된 사무관(조순)이 칠순을 넘긴 재상 ‘노사신’을 겨냥,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그것도 임금 앞에서…. 무슨 사연일까.
 연산군이 노사신의 최측근인 ‘체윤공’이라는 인물을 신임 고양군수로 임명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임금의 잘못을 간언하고(사간원) 관료들의 비행을 적발하는(사헌부) 대·간관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들의 주장은 한결 같았다.
 “글도 모르는 채윤공이 어찌 고을을 다스리겠습니까. 절대 아니되옵니다.”
 그러자 노사신이 채윤공을 비호했다.
 “아니 대간들이 무슨 공자님입니까. 남의 벼슬길까지 막습니까. 그리고 대간이라는 자들은 남을 고자질해서 명성을 얻는 자들이 아닙니까.”
 노사신이 거품을 물고 대·간관들을 원색 비난했다. 그러자 조순은 노사신을 ‘간신’이라 비난하면서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은 인물”로 비난해버린 것이다.
 임금 앞에서 너무 심한 표현이었다. 연산군이 발끈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임금의 면전에서…. 살코기 운운은 너무 심한 표현 아니냐. 저 자(조순)는 임금이라도 공경하지 않을 인물일거야. 저 자를 국문하라.” 

세조의 최측근이었던 양성지의 글씨. 그는 대사헌 재직시절 이른바 '풍문탄핵'의 희생양이 되어 곤욕을 치렀다. 

■“아니되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금으로 치면 개통령 비서실 격인 승정원까지 나서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대·간관을 국문한다는 것은 아니될 말씁이십니다.”
 그러자 연산군이 비아냥 댔다.
 “승정원도 대간을 퍽이나 두려워하는구나!”
 임금의 자문기관인 홍문관 관리들까지 벌떼처럼 나서 상소를 올렸다.
 “노사신의 죄가 많습니다. 바른 말을 한 조순을 풀어주십시오.”
 그러자 연산군은 또 한마디 더한다.
 “너희는 앞다퉈 조순을 위해 나서는구나. 과연 임금에게 일이 생겨도 이렇게 달려와 구하겠느냐.”
 천하의 연산군 조차 대·간관들의 끈질김에 혀를 내두르며 “너희는 내게 일이 있어도 나를 위해 이렇게 상소를 올리겠느냐”고 한 것이다.  
 
 ■연산군마저 굴복시킨…
 연산군은 3사(홍문관·사헌부·사간원)에다 승정원까지 나서자 타협책을 제시한다.
 문제의 채윤공을 직접 불러 몇가지 대면시험을 본 것이다. 채윤공은 결국 고양군수직에서 해임됐다. 부임하지도 못하고 좌절된 것이다.
 “대간들이 하도 탄핵하기에 채윤공을 불러 시험했다. 그랬더니 과연 <맹자>도 못 읽고, <경국대전>도 이해하지 못했다. 또 칠사(七事·수령의 7가지 덕목)도 알지 못했다. 할 수 없이 해임시켜야겠다.”(<연산군일기>)
 대·간관이 아우성친다고 그냥 해임시킨다는 것은 임금 체면에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연산군은 대면시험이라는 과정을 통해 문제인사를 해임시킨 것이다.
 연산군은 그러면서도 “아무리 그래도 원로대신에게 막말을 퍼부은 조순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며 조순의 파직결정은 고수했다. 연산군으로서는 절묘한 타협책을 마련한 것이었다. 

 

 ■한치의 흠결도 허락치 않은…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던 태종과 세종, 그리고 연산군까지…. 그들 앞에서 당당히 나가 직언을 해대고, 임금을 다그쳤던 사람들이 바도 대·간관의 참모습이었다. 대·간관이란 무엇인가. 앞서도 언급했듯이 관리들의 비행을 규탄하고 풍속을 바로잡고(사헌부), 임금의 잘못을 따지는(사간원) 역할을 담당했다.
 서거정은 대·간관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군왕의 실책에는 거침없이 역린을 건드리고…. 임금의 노여움에 저항하며 중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장상대신에게 과오가 있으면 규탄하고 종친 및 외척과 세도가, 그리고 임금의 측근신하 등에게 횡포가 있어도 탄핵하고….”
 또 있었다.
 “소인이 조정에 있으면 반드시 내보내고. 탐관이 벼슬에 있으면 기어이 내쫓아야 하고 곧은 자를 천거하고 굽은 자를 버리며 탁한 것을 배격하고 맑은 것을 찬양해서 얼굴색을 바로 하고 조정에 서면 백관이 떨고 두려워 하는 바이다.”(<연려실기술> ‘관직서고·사헌부’)
 그랬으니 대·간관은 한치의 흠결도 허락되지 않았다.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사표였던만큼 한 치의 흠결도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송영이 무슨 배우인가. 왜 이리 시끄럽냐”
 또 하나의 예를 들자. 성종 임금의 예이다.
 성종은 1481~82년 사이 송영이라는 인물을 사헌부 장령과 지평에 고집스럽게 임명했다. 대간들이 아우성 친 이유가 있었다.
 송영은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의 조카였기 때문이었다. 송현수는 단종의 복위에 연루되어 교수형을 받았다. 따라서 송현수의 조카인 송영 역시 난신에 연좌된 자라는 것이다. 그런 송영을 성종은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했다가 대간들의 반발로 끝내 철회했는데(1481년), 1년 뒤 다시 사헌부 지평으로 재임명한 것이다.
 성종으로서는 ‘송영 카드’를 버릴 수 없었다. 송영의 숙모가 세종대왕의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대·간관들이 아우성치자 성종 임금이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아니 송영이 무슨 배우냐, 도적이냐? 왜 이리 난리를 떠는가.”
 그래도 대간들의 아우성이 그치지 않자 성종 임금은 더욱 까칠하게 반응했다.
 “내 (임명)교지가 대간의 탄핵보다 못하다는 거냐. 너희들이 난리를 피우는 것은 너희들 마음대로 조정의 기강을 잡으려는 게 아니냐.”
 성종은 “임금의 교지까지 받들지 않은 대간관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논쟁이 이어졌다. 결국 조정의 중론은 “송영과 대간들 가운데 어느 한 편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종은 타협책을 제시했다. “대간을 자르면 임금이 간언을 거절해서 갈았다 할 것이고, 송영을 자르면 훗날 대간들이 또다시 아우성을 칠 테니 둘 다 교체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나름의 타협책을 제시한 것이었다.     

 정덕필을 사헌부 장령에 임명한다는 영조 임금의 교지(1788년)

■‘카더라 통신’으로도 탄핵됐다 
 사정기관의 수장인 대사헌이 되려면 이른바 ‘풍문탄핵’도 감당해야 했다.
 ‘풍문탄핵’이 무엇인가. 증권가 찌라시에 나오는 ‘카더라 통신’으로 고위공직자들을 탄핵했다는 뜻이다.
 1477년(성종 8년), 사헌부 장령(4급 공무원)이 직속상관으로 임명된 대사헌을 ‘풍문탄핵’한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즉 사헌부 장령 김제신이 수장인 대사헌 양성지를 공격한 내용이다.
 “양성지는 본래 재화만을 탐하여…. 일찍이 이조판서 시절, 문전성시를 이뤄 자못 ‘보궤불식(보궤不飾)’이라는 비난과 함께 ‘오마판서(五馬判書)’라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더러운 소문이 있는데….”
 그러면서 김제신은 기막힌 말을 뱉는다.
 “비록 그가 한 짓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어도 사람들의 입에 퍼진 소문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니 빨리 파면하심이 옳은 줄 아옵니다.”
 여기서 ‘보궤불식’이란 ‘청렴하지 못한 대신이 나라의 제사그릇을 더럽한다’는 말이고, ‘오마판서’는 ‘수레를 끄는 4마리 말 외에 부정축재용 말 한마리를 더 데리고 다닌다’는 말이다. 부정축재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문제는 ‘비록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소문에….’라는 것이었다.

 

 ■‘풍문탄핵’의 여파…
 양성지는 “억울해 미치겠다”는 상소문을 잇달아 올린다.
 “14년 전 길거리에서 들은 애매한 이야기로 노신에게 뒤집어 씌우고…. ~신은 논두렁에서 목을 매어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양성지는 “구천에서도 원통함을 달랠 길이 없을 것”이라면서 “당사자(김제신)과 대질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이 사건은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성종 임금은 ‘카더라 통신’으로 직속상관을 탄핵한 김제신을 불러 소문의 ‘진위’여부를 깨물었다.
 그런데 김제신의 답변이 기막힌다.
 “예전에 들었지만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어찌 지어낸 말이겠습니까.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소문이 그러니 사헌부 수장으로는 마땅치 않습니다.”
 사헌부도 김제신의 주장에 동조했다. “대간이 사책(史冊)에 쓰여진 것만으로 말한다면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창손 등 고위관리들은 “말도 안되는 풍문탄핵의 죄를 물어야 한다”며 “이것은 국가의 체모에 관계된 일”이라고 김제신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문제를 두고 모든 대신들이 총동원된 ‘대토론회’를 열었다.
 결국 성종은 솔로몬의 판결을 내렸다.
 “대간의 말을 두고 ‘소종래(所從來·말의 출처)’를 가린다면 대간이 어찌 말하겠는가. 양성지도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충분히 소명한 만큼 혐의가 없어지지 않았느냐. 둘다 죄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생각할수록 대단한 사정기관에, 대단한 임금이지 않은가. 이렇게 건강한 정부를 또 찾아볼 수 있을까.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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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욕이 남보다 지나친 면이 있었다. ~성에 집착해서 거의 미친듯 방종한 바람에 패가망신 할 뻔했다. 기생들과 놀 때는 좁은 골목이나 개구멍도 가리지 않아 남들에게 손가락질과 비웃음을 샀고, 스스로 혹독하게 반성했지만 끝내 그만두지 못했다.”
 250여 년 전에 살았던 선비의 자서전이다. 효전 심노숭(1762~1837)의 <자저실기(自著實紀)>(안대회 김보성 외·휴머니스트)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래도 될까. 점잖은 선비 체면에 스스로 ‘색마였다’며 자신의 치부를 그토록 스스럼없이 고백할 수 있을까. 다른 이의 평전을 쓴다 해도 쉽게 쓸 수 없는 내용이었을텐데…. 그 뿐이 아니다.

 

정조와 순조시대를 살았던 효전 심노숭의 자서전인 <자저실기>. 심노숭은 스스로를 성에 집착하여 미친듯히 방종한 인물로 표현하는 등 남다른 자서전의 필법을 보여주었다. 

■어느 선비의 고백
 “몸은 깡 마르고 키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작았으며 구부정했고 배는 펑퍼짐했다. 어려서 몸이 허약해서 옷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혼담이 오가다가도 내 모습을 보고 물렸다. 요절할 관상이라며….”
 이 또한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 고백이다. 몸이 허약하고 볼품없어서 혼담이 오가다가도 깨졌으며, 심지어는 요절할 관상이라고 스스로를 폄훼한 것이다.
 “급한 성격에 눈에 거슬리는 종이나 동무를 만나면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라도 가차없이 주먹을 날렸다.”
 “늘그막에 벼슬을 살 때 의롭지 못한 뇌물과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감을 너무 좋아해서 50살 이후에는 한번에 60~70개나 먹었다, ‘감에 미친 바보’라 하여 ‘시벽(枾癖)’이라 했다.”
 철저한 자기검열을 넘어 ‘자기학대’라고까지 할 수 있는 그야말로 대단한 ‘자서전’이 아닌가. 그런데 그의 고백 중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보인다. 
 “‘정욕’, ‘글짓기’, ‘벼슬욕’ 등 세가지 욕망 가운데 정욕이 가장 심했다. 그러나 늙어갈수록 다른 욕망은 사라졌다. 유독 글짓기 욕구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랬다. 안대회 교수(성균관대)의 말마따나 심노숭은 괴팍한 성격에다 결벽에 가까운 글짓기벽, 즉 정리벽과 기록벽을 지닌 독특한 인물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시파와 벽파
 심노숭의 <자저실기>를 읽기 전에 그가 살았던 18~19세기를 일별할 필요가 있다.
 흔히 영·정조 시대를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라 미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때는 격화한 당파싸움이 ‘대량살육’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였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과 정순왕후(영조의 계비)의 오빠인 김귀주가 남당과 북당으로 갈려 싸우다가 정조시대에 이르러 시파(時派)와 벽파로 더욱 분화했다. 시파와 벽파는 1784(정조 8년)년 이노춘의 상소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나눠졌다고 한다.
 즉 이노춘(1752~?)은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의 처분이 옳았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정조와 사도세자를 좇는 이들을 ‘시의(時議)’를 따르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이노춘의 상소를 계기로 ‘시의’를 따른다는 의미의 ‘시파(時派)’가 분화한 것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입장을 보인 시파는 노론의 일부 및 채제공 등 남인과 보합을 이루며 형성됐다. 반면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한 죽음’이라는 입장을 갖고 있었던 세력이다. 벽파는 영조의 계비(정순왕후)의 처가인 노론 세력이 그 중심을 이뤘다. ‘벽파(僻派)’는 “편벽되면 천하의 죽임을 당한다(피則爲天下戮)”는 뜻에서 이름 붙었다.
 1788년(정조 12년) 정만시의 상소문을 기록한 <정조실록>을 보자. 실록의 기자는 정만시의 상소문 내용을 다루면서 시파와 벽파의 분화를 설명하고 있다.
 “경자년(1780년) 이후 분당의 조짐이 있었다. (1784년 이노춘의 상소 이후) 이명식·서유린 등을 시파(時派)라 하고, 김종수·심환지 등을 벽파(僻派)라 했다. 정만시의 상소문에 비로소 ‘시(時)와 벽(僻)’ 두 자를 썼다. 이 때부터 양 파벌이 서로 공격하여 다시는 합쳐질 수 없게 됐다.”
 그야말로 각 파벌간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지내게 된 것이다. 얼마나 각 정파들의 대립이 극심했을까. <자저실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민진원(노론의 영수·인현왕후의 오빠)은 이광좌(소론)와 함께 정승이 됐을 때였다. 두 사람이 빈청에 좌정할 때는 병풍을 치고 떨어져 앉았다.”
 지독한 말이 아닌가. 노론과 소론의 우두머리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함께 할 때는 병풍을 치고 얼굴도 맞대지 않았을만큼 적대적이었다는 이야기다.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 심노숭은 심환지를 냉혹하고 사악한 인물로 폄훼하고 있다.

■벽파는 천하의 잡놈
 <자저실기>의 저자 심노숭은 노론 가운데서도 시파였다. 아버지 심노수가 시파의 핵심인물이었고, 서유린·정만시와 함께 벽파와 대립했다.
 심노숭 역시 정조 임금의 배려로 참봉에 올랐다가 벽파에 의해 유배되는 등 풍파를 겪었다. 그랬으니 벽파라면 이를 갈았으리라.
 그래서인가. <자저실기>를 보면 정적들, 즉 ‘벽파’의 중심인물들이 ‘천하의 잡놈’으로 표현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심노숭의) 외삼촌인 이규경이 일찍이 말했다. ‘김종후는 입냄새가 치올라 악취가 나는 사람의 옆에 있는 것 같았다.’”
 나름 명망 있었던 성리학자가 ‘입에서 악취를 풍기는 인물’로 폄훼되고 있는 것이다.
 “흐리멍텅한 시골늙은이(송덕상)가 뭉그적거리며 삿된 마귀처럼 주절거리는구나.”   
 송덕상이 1778년 정조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오자 난리가 났다고 한다. 그에게 명함이라도 들이밀려는 사람들이 마치 ‘과거시험장에서 시험지(시권)를 먼저 제출하려고 덤비는 사람들 같았다’는 것이다. 심노승은 외삼촌의 일화를 전하면서 “송덕상은 예전에 거지같은 꼬락서니를 하고 찾아와 문전박대를 받았던 인물”이라고 난도질했다.

 

 ■홍국영의 농단과 최후
 심노숭은 정조 초기의 권신 홍국영에게도 가차없이 메스를 가한다.
 “도승지와 숙위대장을 겸한 홍국영은 임금의 침전과 열걸음 옆에서 기거했다. 인사발령을 낼 때는 이조참의가 홍국영과 먼저 상의해야 했다. 이조참의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홍국영은 기생과 온갖 문란한 짓을 벌이고 있었다.”
 이 뿐이 아니었다. 정조 임금이 홍국영에게 집을 하사하고 취은루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었으며, 준공식을 겸한 연회까지 베풀어 주었다.
 “이 때 조정대신들이 모두 달려갔다. (홍국영이 기거했던) 숙위소에 보관했던 물건들을 새 집으로 옮기는데 장정 30~40명이 열흘간이나 끊임없이 짐을 날랐다. 돈은 5만량, 패도(차는 칼)가 3000자루, 접는 부채가 1만 여 자루에 달했다.”
 약간의 과장이 들어갈 수 있더라도 참으로 대단한 권세와 치부가 아닐 수 없다. 그런 권세도 잠깐…. <자저실기>가 전하는 홍국영의 최후는 우스꽝스럽다.
 “홍국영이 축출된 뒤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그러면서 ‘아무개는 죽어야 하고, 아무개는 주리를 틀어야 한다’고 혼잣말했다. ~시골 무지렁이를 만나도 총애를 받았던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하염없이 울어댔다. 그러다 1년만에 감기에 걸려 죽었다.”

 

 ■냉혹한 심환지
 이밖에도 심노숭은 비굴한 태도로 재물과 미인계를 써서 선배를 심복으로 삼은 김귀주의 악행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또 ‘벽파의 영수’ 심환지가 훈련도감 도제조였을 때 순령수(대장의 전령과 호위를 받은 군사)를 잔인하게 때려 숨지게 한 일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1802년)
 “원망도, 주정도 아니었다. 심환지는 조용히 서서 꾸짖되 ‘극적(劇敵)이다. 악역(惡逆)이다’라고만 반복했다. 심환지는 해당 군영에 장살(杖殺)을 명했다. 죄명만 있고 구체적인 죄상이 없었다. 이것이 이른바 ‘극적과 악역’ 사건이다.”
 죄없는 사람을 죽이면서 아주 조용히 ‘극적’과 ‘악역’이라고만 반복했다? 심노숭은 고문기술자 같은 심환지의 잔인하고 냉혹한 면모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심노숭이 1790년 소과에 합격하자 아버지(심낙수)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전한 심환지를 두고 “아. 사악하다!”고 폄훼할 정도였으니….
 <자저실기>는 또 심환지의 사촌인 심형지가 광증(狂症)에 걸려 자기 딸을 죽인 일까지 거론하고 있다.
 이외에도 김종수·이율·임육·정이환 등도 심노숭의 붓끝에서 난도질 당한다. 

병자호란 때 분한 마음에 자결을 기도했던 동계 정온의 제복. 정온은 과거급제 후 선배들의 못된 신입생환영회(면신례)를 거부하는 등 기개를 떨쳤다고 한다.

■벽파의 설사똥
 <자저실기>는 심환지가 끌어들였다는 서용보와 어용겸 이야기를 들춰내면서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더러운 이야기도 꺼낸다.
 “1795년 이후 어용겸의 명망은 심환지에 버금갔다. 가난뱅이 출신이어서 시정사람인 모동지가 수천냥을 주어 집을 사줬다. 얼마 뒤 어용겸이 이질에 걸렸는데 식객들이 요강을 돌려가며 맛을 보느라 금방 설사똥이 다 없어졌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사람의 똥을 맛보는 자들이 있었을까. 이 대목은 사실로 믿기 힘들다. 심노숭 또한 ‘들리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전했으니까. 반대파를 향한 증오심이 얼마나 컸는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저실기>는 이어 ‘의리없는 노론’, ‘벽파들의 솜씨’, ‘벽파의 발호’, ’벽파의 흉계’ 등의 소제목으로 반대당의 모든 악행을 사사건건 고발하고 있다.  
 <자저실기>를 읽다보면 모멸감을 안겨주는 필자의 인신공격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능수능란하다.
 그러고보면 심노숭이야말로 요즘으로 치면 ‘디스’의 원조이자 종결자가 아닐까.

 

 ■부모형제까지 갈라놓은 당파싸움
 <자저실기>는 망국병으로까지 전락한 당파싸움의 고질병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물론 시파의 입장이기는 하지만….
 예컨대 심노숭은 ‘시파와 벽파라는 말이 이노춘의 상소에서 비롯됐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포복절도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본 아버지(심낙수)가 호통을 쳤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너는 무엇이 우스우냐. 난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러저러한 당파가 생겨나고 또 생겨나 망하지 않은 자가 없다. 그 화가 어디로 가겠느냐. 장난삼아 웃을 일이냐?”
 정말 웃을 일이 아니었다. 심노숭이 부연설명했듯 1801년 신유사옥과 1806년 김달순의 옥사 등으로 시파와 벽파가 교대로 축출되는 등 풍파가 일어났으니 말이다.
 당론은 부모와 형제 사이도 갈라 놓았다. <자저실록>은 조태채와 조태구·조태억 형제의 일화를 기록하고 있다. 조태채 형제의 할아버지(조계원)가 한 이야기다.
 “손자 셋(조태채와 사촌형제들)이 내 이불 속과 내 품안에서 잤는데…. 아 글쎄 말을 배운 뒤로 싸움박질을 멈추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지. 이상하더라구….”
 <자저실기>는 이것이 조씨 형제의 비극을 예고한 것임을 시사했다. 무슨 말인가. 노론이었던 조태채는 경종 시절, 연잉군(훗날 영조)의 대리청정을 도모한 노론 4인방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훗날 소론이었던 조태구와 조태억이 조태채 등 노론 4인방을 ‘4흉’으로 몰아붙였다. 결국 조태채는 제주도 유폐 중 사사됐다. 당파싸움은 사촌형제간도 죽음으로 갈라놓은 것이다. <자저일기>는 조씨 형제들과 이세백·이세응 형제들도 ‘마치 양극단에 떨어진 원수나라’로 여겼다고 썼다.

 

 ■어사 박문수의 기습키스
 <자저실기>에는 피가 튀는 당파싸움의 생생한 흔적들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선배들과 동료들을 둘러싼 갖가지 에피소드들, 그리고 당대 사회현상을 생생하게 전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수록돼있다.
 예컨대 암행어사로 알려진 박문수를 다룬 이야기를 보자.
 “박문수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외삼촌(이태좌) 집에서 컸다. 어느 날 다락창고가 열렸고, 서책 몇 권만 흩어져 있었고 제호탕(갈증해소용 음료)가 엎질러져 있었다. 외삼촌은 ‘이건 학(박문수의 아명)이란 놈 짓이다.’라 했다. 외삼촌이 추궁하자 어린 박문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책은 한권도 꺼내신 적이 없었지 않습니까. 더운 날 다락 안에 있으니 책 속의 현인들이 답답하고 목말라 죽을 지경일 겁니다. 제가 꺼내준 제호탕 한 잔으로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외삼촌이 껄껄 웃었다. ‘그 놈 참 희한한 놈일세.”
 또 있다. 판서 이익보는 젊어서 급제했을 뿐 아니라 잘생긴 용모에 성격까지 까칠한 ‘포스’를 자랑하던 사람이었다. 동년배들도 감히 가까이 하지 못했다.
 어느 날 박문수가 여럿이 모인 승정원에서 손짓으로 이익보를 불렀다. 이익보가 다가가자 박문수는 다짜고짜 이익보의 목을 껴앉고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잘 생겼네, 잘 생겼어.”        
 이익보로서는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의 초상. 잘생긴 외모로 남다른 포스를 자랑하던 이익보의 얼굴에 기습뽀뽀를 하면서 '잘생겼네. 잘생겼어'를 연발했다고 한다.  

■류성룡의 후회
 서애 류성룡이 후회했다는 내용도 흥미롭다.
 류성룡이 급제후 퇴계 이황을 찾아가 “무슨 책을 읽어야 되냐”고 물었단다. 그러자 이황은 소동파 책을 몇 권 주면서 “이것을 1000번 읽으라”고 했단다.
 류성룡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임금을 성인으로 만들고, 백성을 잘 살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할 나에게 무슨 속된 문장이나 익히라는 것이냐”면서…. 퇴계가 자신을 ‘가벼이 본 것’이라고 여긴 류성룡은 절반만 읽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류성룡은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장수로 전장을 오가야 했고, 격문과 표, 그리고 계문을 짓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입이 부르트고 생각이 막히고…. 그제서야 퇴계 선생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고 한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분한 마음에 자결을 시도했던 동계 정온(1569~1641)의 기세 역시 놀랍다.
 그는 과거급제 후 통과의례인 면신례(신입생 환영회)에서 고개를 숙여 책상 밑으로 지나가게 하는 의식을 거부했단다. 그러면서 “선비가 과거를 통과했는데, 왜 이 몸을 구부려야 하느냐”고 소리쳤단다.

 

 ■윤선도의 방술
 고산 윤선도의 신통한 방술도 이야깃거리였다.  
 윤선도는 어느 날 해남으로 찾아온 사위 심광면에게 “빨리 서울에 돌아가 안방에서 자면 귀한 자식을 낳는다”고 채근했다. 사위는 그 말을 듣고 부리나케 서울로 올라와 부인과 합방했다. 과연 부인이 임신했는데, 사위는 곧 죽고 말았다. 사위가 낳은 유복자가 바로 훗날 판서가 된 심단(1645~1730)이다.
 문익공 정광필의 에피소드도 재미있다.
 정광필이 김해 유배지에 있을 때였다. 어느 날 김해부에 사자가 들어왔다. 그 때 어떤 이가 “정광필에게 사약이 내리기 위해 금부도사가 당도했다”는 헛소문이 퍼졌다. 집안 사람이 이를 황급히 알리자 정광필은 ‘그러냐’고 한마디 하고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조금 뒤 금부도사가 아니라는 전갈이 당도했다.
 또 중종반정이 일어난 뒤 정광필이 정승으로 천거됐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도 정광필은 역시 ‘그러냐’고 한마디 한 다음 전처럼 잠을 청했다고 한다.      

 

 ■낙숫물과 낙수
 당대의 풍속을 짐작해주는 사연도 많다.
 대사헌 유철(1606~1671)이 호조참판 시절 창고에 보관된 물품을 검열했다. 그 때 관청 아전이 물건이름을 대면서 자꾸 ‘유철(鍮鐵·놋쇠)’이라 했다. 대사헌 이름을 마구 부른 셈이 된 것이다. 곁에서 눈을 꿈뻑거리며 눈치를 주었지만 아전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자 유철은 “몰라서 그러는 것인데 왜 말리느냐”고 눈치를 준 이에게 야단을 쳤다. 또 정승 이시수가 관청 뜰에 앉아 구식(救食·일식, 월식 때 기도 드리던 의식)의례를 펼칠 때 아전이 큰 소리로 복원(復圓·다시 둥근 해가 되라)이라고 외쳤다. 그 때 이시수가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이 복원(福源)이어서 아버지 생각에 눈물을 흘린 것이다.
 심노숭은 이 일화를 전하면서 자신과 관련된 후일담을 고백한다.
 “내가 관직에 있을 때 아전과 노복이 낙숫물이라고 말할 때마다 엄하게 매를 쳤다.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유철과 이시수는 나보다 매우 훌륭한 점이 있다.”
 무슨 말인가. 심노숭의 아버지 이름은 심낙수였으니, 아전이나 노복들이 ‘낙숫물’이라 하면 화를 냈다는 것이다. 심노승의 ‘나쁜 성격’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공주가 시아버지의 머릿니를 잡아주다
 영조 중엽 정승을 지낸 소론의 어떤 인물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 정승은 젊을 때 찢어지게 가난했다. 쌀겨 부스러기를 먹던 아내를 보고 부둥켜 안고 울기도 했다. 정승 아버지를 둔 친구를 찾아가 돈을 빌리려 했다. 마침 주인이 없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방 벽에 서대(1품 고관대작이 허리에 두른 띠)가 걸려 있었다. 젊은 선비는 모른체 하고 서대를 훔친 뒤 저자에서 팔아 200냥을 구했다. 100냥은 아내에게 주고 자기는 나머지 100냥을 들고 과거공부에 매진했다.
 결국 3년 뒤 과거에 급제한 선비는 친구를 찾아가 400냥을 갚았다. 정승을 지낸 이 젊은 선비는 이수항(1685~?)일 가능성이 높다.
 또 재미있는 일화가 효종의 넷째딸인 숙정공주 이야기다.
 숙정공주(1645~1668)는 정태하의 아들 정재륜에게 시집갔다. 그런데 시아버지(정태하)는 공주 며느리를 일반 며느리로 대했다.
 “시아버지 정태하가 마루에 누웠다. 며느리(공주)가 무릎을 꿇고는 시아버지의 머릿니를 잡아주었다. 나인이 입궐해서 숙종 임금에게 일러바쳤다. 임금이 분기탱천해서 외쳤다. ‘너무 심하다. 심해! 그러나 이미 남의 며느리가 됐는데 어찌하겠나.’ 며느리에게 머릿니를 잡게 하는 것도 예법상 크게 옳지 않은데….”
 심노숭 조차도 “난 근거없는 이야기라 여긴다”고 기록했을만큼 심한 일화가 아닌가. 아무리 출가외인이라도 공주 신분에 시아버지의 머릿니를 잡아주고, 또 이 소식을 들은 임금 조차 ‘남의 며느리니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할 정도였다니….          

 

 ■18세기 선비들의 꿈도 주택구입
 이밖에도 필자(심노숭)의 시선은 18세기 조선 사회를 다큐멘터리로 방영하듯 생생하게 보여준다. 
 “1796년, 내가 파주가는 길 밭두둑에서 어떤 선비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채 쓰러져 있었다. 사람들은 시체라 했지만 미약하게나마 숨이 붙어있었다. 그가 문과에 급제한 뒤 좌랑을 역임한 정주 사람 한형일이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 정주상인에게 돈을 꾸려다 만나지 못해….”
 “이익모(1747~?)가 청나라 사신에서 돌아와 큰 집을 구했다. 남촌과 북촌의 모든 집주름(부동산중개업자)을 불렀다. 이익모가 대안동(소격동~덕성여고 사이)의 호화저택을 지목했다. 그러자 집주름들이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 집은 왕자의 궁입니다.’ 이익모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익모는 대신 청주목사 홍선양의 상동(북창동) 고택을 7000냥이나 주고 구입했다. 촌놈으로 가난하게 살던 이익모가 출세하자마자 가장 먼저 주택구입에 열을 올렸다는 이야기다. 18세기 때도 주택구입이 인생의 목표였던 것이다.
 <자저실기>를 읽으면 18세기 조선사회의 이야기를 당대의 언어로 느낄 수 있다.
 못말리는 결벽에, 정리벽, 기록벽에 시달린 이의 글쓰기 덕이 아닌가. ‘글밥’을 먹고 있는 기자 역시 ‘기록벽’ 혹은 ‘전벽(傳癖·역사 공부에 빠졌다는 뜻)’. 혹은 ‘간서치(看書癡·책만 읽는 바보)’의 별명을 얻고 싶어 안달하고 있는데….
 그나저나 필자는 스스로 ‘정욕에 빠졌다’느니, ‘성에 집착했다’느니 하는 것은 기록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하늘이 두쪽이 난다 해도….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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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의 흥폐가 스승의 도(道)에 있는데…. 심지어 ‘해(亥)와 시(豕)’, ‘노(魯)와 어(魚)’의 글자를 구별할 줄 모르는 자들이 선생이라 합니다.”
 1429년(세종 11년) 사간 유맹문의 상소를 보면 성균관과 향교 선생들의 질이 형편없음을 고발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갈 곳 없는 늙고 병든 사람들을 성균관 교관(선생)으로 발령내는 일이 다반사이며, 그마저 자주 바뀌는 형국”(중종의 언급)이니 그럴 만도 했으리라. 1527년(중종 22년) 지사 김극핍의 상소가 사태의 심각성을 전한다.
 “유생들이 선생 한사람의 기르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학부형들은 ‘관학(성균관) 공부가 안된다’며 유명 과외선생에게 수업을 받는다고 합니다.”(<중종실록>)
 공교육의 선생들은 믿을 수 없으니 실력있는 과외선생을 찾는 것이 당대의 유행이라지 않은가.  

조선시대 과거합격자 명단. 고려 조선시대 땐 과거에 합격하지 않으면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다.  

■‘낙지’가 ‘입지’가 된 사연
 김극핍의 상소야말로 무너진 공교육과 창궐하는 사교육의 현실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하기야 “유생이 독서하는 이유는 과거합격을 위한 것이 아니냐”던 성종 임금의 말대로 옛 선조들은 오로지 과거 합격에 목을 매지 않았던가.
 “유생은 경서를 연구하더라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시골에 폐기되어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한평생을 마치게 됩니다.”
 1479년(성종 10년), 서거정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는 유생들은 결국 폐인이 되고 만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합격에 목을 매는 것은 당연했다. 
 오죽했으면 영남의 유생들은 추풍령은 거치지 않고 문경새재나 궤방령으로 넘었다지 않은가. 하기야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추풍령보다는 경사스런(慶) 소식을 듣는다(聞)는 뜻의 ‘문경(聞慶)새재’나, 합격방이 붙는다는 뜻을 지닌 ‘괘방령(掛榜嶺)’을 통해 한양으로 갔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떨어질 낙(落)’자는 절대 써서는 안될 금기어였다. 그러니 어떤 유생이 낙지를 구워 다른 유생에게 전해주면서 “‘입지’ 구운 것 좀 드시오”라고 했단다. ‘떨어질 낙(落)’ 발음이 아니라 ‘설 립(立)’자를 써서 ‘낙지’를 ‘입지’라 한 것이다. 입지(立志), 즉 뜻을 세운다는 뜻이니 얼마나 합격이 간절했으면 낙지를 입지라 했을까. 이 뿐인가. 어떤 유생은 시험 때마다 고양이가 지나가면 합격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고양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밤에 병든 고양이가 점포 문밖에 쪼그리고 앉아있자 부채를 휘둘러 자기 앞을 가로질러 가게 했다. 유생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쉰 뒤 숙소로 돌아갔다.
 신숙은 마침내 1568년(선조 2년) 별시에 급제하는 영예를 안았다. 결과적으로 고양이 덕을 본 것이다.  

 

 ■사교육의 원조는 경당
 ‘과거=출세’의 등식이었으니 유생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과거에 합격해야 했다.
 그러니 잘 가르친다는 사교육 선생들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못말리는 교육열이었니 만큼 사교육의 뿌리 또한 깊다. 고구려 때 유행한 ‘경당’까지 이어지니 말이다.  “고구려에서는 문지기·말먹이의 집에 이르기까지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경堂)이라 하며 자제가 결혼하기 전에는 밤낮으로 이곳에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였다.”(<구당서> <신당서> ‘고구려전’)
 신라에도 개인교사가 있었다.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617~686)이 대표적이다.
 “설총은 구경(九經·유교 9가지 경전)’을 이두로 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지금까지 학자들이 설총을 종주로 삼고 있다.”
 이같은 사설학원 혹은 학교는 고려에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는 마을마다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2~3곳이 있고, 미혼의 자제들이 무리를 지어 경서를 배웠다.”(<고려도경>)
 ‘마을의 경관과 서사’란 사학 혹은 학원의 형태로 운영됐을 것이다.  

송나라 때 황제가 직접 관정했던 '전시'를 그린 그림. 황제가 직접 뽑은 사대부는 황제의 든든한 정치적 후원군이 됐다.

■이규보·이승휴·이색·이제현은 사교육 추종자
 그 덕분에 고려의 내로라하는 학자·문인들과 그의 제자들이 모두 사교육의 도움을 받았다.
 사교육의 으뜸되는 장소는 역시 사찰이었다.
 예컨대 <제왕운기>를 슨 이승휴는 12살의 나이였던 1235년(고종 22년), 원정국사의 처소에서 공부했다. 이 때 원정국사는 싹수사 푸릇푸릇한 이승휴에게 특별히 신서라는 독선생을 붙여 <주역>과 <좌전>을 가르쳤다. 또 목은 이색의 아들 이종선은 용두사에서. 손자는 진관사에서 각각 공부했다. 익재 이제현의 손자는 이색이 아들을 가르친 혜구 스님에게 교육을 받았다.
 사교육의 ‘종결자’는 뭐니뭐니해도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가 아닐까.   
 이규보가 14살 때 당대 최고명문 사학인 문헌공도에 입학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이규보의 아버지(이윤수)의 교육열은 만만치 않았다.
 1183년 봄, 이규보의 아버지는 수원 수령으로 발령받았지만, 아들은 개경에 남겨두었다. 5월로 예정된 국자감시(생원·진사시)에 대비하고자 한 것이다.
 아들을 지금으로 치면 ‘특목고’인 문헌공도에 보내놓고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과거시험에 대비, 고액 족집게 과외를 시키게 된다.
 이규보가 ‘이 이부라는 이에게 드린다’는 고율시를 보자.
 “공(이 이부)이 집에서 매양 관동(冠童·어른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쳤는데, 나도 어릴 때 참여했다. 그 때 선생의 지위로 모셨고….”(<동국이상국집> ‘전집 권 8 고율시’)
 이규보의 과외교사는 ‘이 아무개’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규보는 고액과외를 받았음에도 그 해(1183년) 국자감시에서 보기좋게 낙방하고 만다. 그 해 뿐 아니라 이규보는 3번이나 낙방의 고배를 마신 뒤 4수 만에 합격한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어렸을 적 영재였던 이규보는 지금으로 치면 급작(수능모의고사)에서 수석을 두번이나 차지했지만 정작 과거(국자감시)에서는 3수 끝에 합격했다.

■수능모의고사 수석 이규보의 좌절
 사실 이규보는 문헌공도가 여름철에 마련한 ‘특별과외’에서 수석을 차지한 영재였다.
 무슨 말이야. 문헌공도는 해마다 귀법사의 승방을 빌려 50일간 하과(夏課)라 해서 일종의 여름철 특별과외를 펼쳤다.
 강사는 졸업생 가운데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했지만 아직 관직 발령을 받지 못한 이들이 맡았다.
 “이들을 교도(敎導·강사)로 삼아 구경(九經·9개 유교경전)과 삼사(三史·사기, 한서, 후한서)를 가르쳤다. 간혹 촛불에 금을 그어 시간을 정하고 시를 짓게 하여 글의 등급에 따라 등수를 정했다.”((<동국이상국집>)
 ‘촛불에 금 그어놓고 펼치는 시험’을 ‘각촉부시(刻燭賦詩)’라 했다. 이를 다른 말로 ‘급작(急作)’이라 했는데, 일종의 수능 모의고사였던 셈이다.
 이규보는 이 급작을 두고 “하과는 과거에 대비하여 시와 부를 익히는 공부”(<동국이상국집> ‘후집 권 7 고율시’)라고 말했다. ‘하과’는 과거시험 대비용 ‘족집게 과외’였던 것이다. 갓 급제한 졸업생 선배들이 후배들을 사찰에 모아놓고 혹독한 합숙과외를 펼치면서 출제경향과 예상문제, 그리고 답안지 작성요령을 가르쳐 준 것이다. 이규보는 이 하과에서 두 차례나 수석을 차지했다. 수능모의고사에서 전국 1등을 차지했다고 할까. 그런데 정작 과거시험에서는 3번이나 떨어졌던 것이다.

 

 ■80대 전문강사
 재미있는 것은 이규보가 셋째아들인 이징에게까지 개인과외수업을 시켰다는 것이다.
 “내 셋째아들 징은 썩은 나무 강 새길 수 없네. 장성한 나이인데 글을 알지 못하니 밥주머니 되어 곡식만 축내누나. ~그대는 늙을수록 학문 더욱 정심하여~내 자식 우둔함을 혐의치 않고 갈고 다듬어 옥만들기를 기약하누나. 그대의 후의를 무엇으로 갚을까.”(<동국이상국집> ‘신대장에게 내 아들 징을 가르치는 것을 사례함’)
 이규보가 신대장(申大丈)이라는 과외선생을 위해 지은 시이다. 아들이 어리석고 글을 읽지 못헤서 어쩔 수 없이 과외선생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 신대장이라는 사람은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집에 개인교습소를 차려 학생들을 가르친 전문학원강사였는데, 학생수가 엄청났다고 한다.
 “(신대장은) 동몽들이 배우기를 청하면 거절하지 않으니 학생들이 모여들어 서숙을 이뤘네.”(<동국이상국집>)    
 말하자면 고려시대 스타강사였던 셈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어사화를 꽂고 마을을 돌던 모습을 그린 평생도의 한 장면. 과거급제를 위해 못말리는 사교육열풍이 벌어지기도 했다. 

■인기를 끌었던 고려시대 과외교사
 그런데 이규보가 언급한 신대장과 같은 과외선생이 고려 시대에 많았나 보다. <고려사> ‘열전’을 보면 예종 대에 급제한 김수자라는 인물은 금양현위-국학학유 등을 지낸 뒤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는 손수 재배한 채소를 팔고, 날마다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또 나홍유라는 인물은 경서와 사서를 두루 섭렵하고 과거에 여러차례 응시했으나 낙방한 뒤 글방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진사가 된 구사평은 아예 발벗고 번듯한 학원을 차린 것 같다. 이색의 <목은시고>에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구사평은 내(이색)가 젊었을 적에 교분을 쌓았던 인물인데, 그 후 만나지 못해 생사조차 모르게 된 지 오래다. 나중에 들으니 선주(善州·선산) 지방에 집을 번듯하게 지어놓고 서재를 두어 생도 30여명을 가르쳤다. 또한 빈객대접도 풍성하게 했다.”
 또 진수재(晉秀才) 같은 이도 스타강사였던 것 같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을 보면 “진수재라는 인물이 용산의 별장에 학생들을 모아 학업을 익히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규보는 이 별장에 학생들이 ‘마치 물고기떼처럼 모여들었다’고 표현했다.
 “모든 선비들 마치 물고기 떼처럼 모여들어(白面學子魚聚族), 공부에 뜻을 갖고 여기를 서숙으로 삼는구나.”
 물반 고기반일 정도로 수강생들이 몰려들었다는 뜻이 아닌가.

 

 ■전설의 스타강사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고려의 전설적인 스타강사는 역시 고려 충렬왕대의 인물인 강경룡일 것이다.
 그 전설의 이름은 왕조가 바뀐 조선 초기까지 ‘사교육의 신’으로 추앙됐으니 말이다.  
 1305년(고려 충렬왕 31년)의 일이다. 충렬왕이 유생 강경룡을 치하하고 곡식을 하사했다. <고려사절요>는 이 이유를 설명한다.
 “선비 강경룡이 집에서 글을 가르쳤다. 그의 제자 10명이 성균시에 모두 합격했다. 합격자들이 스승 강경룡을 찾아 인사를 드리느라 떠들썩한 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강경룡의 동네에 살고 있던 익양후 왕분(신종의 아들)이 그 소식을 듣고….”
 얼마 후 익양후 왕분이 충렬왕을 알현했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강경룡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충렬왕이 강경룡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뒤 하사품을 내렸다.
 “이 노인(강경룡)은 비록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구나. 그의 공이 얼마나 큰가.”        
 요즘으로 치면 강경룡이 가르친 제자 10명이 모두 서울대나 고시에 합격했다는 소리니 얼마나 대단한 강사인가.  
 그런데 이 일이 있은지 131년이 지난 1436년(세종 18년), 강경룡의 이름이 다시 출현한다.
 지성균관사 허조가 세종대왕에게 아뢸 말씀이 있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고려 충렬왕 때 강경룡이라는 사람이 가르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포상을 받았습니다. 지금 유생 유사덕은 집에 서재를 마련, 어린아이 수십명을 가르치고 있고, 경상도 용궁사람 박호생도 10여 년 동안이나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원컨대 (강경룡의 예로) 이 사람들을 포상하신다면….”(<세종실록>)
 세종은 허조의 상언을 좇아 유사덕과 박호생을 포상했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이 결과적으로 사교육을 부추겼다는 이야기다.
 천고의 세월이 지나도 못말리는 사교육 붐이 아닌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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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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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일만기(一日萬機)’
 예로부터 천자(군주)는 하루 동안 만가지 일을 처리한다 해서 ‘일일만기’ 혹은 ‘일리만기(日理萬機)’라 했다.(<상서> ‘고요모’)
 ‘만기친람(萬機親覽)’이란 말도 거기서 나온 말이리라. 아무리 천명을 받은 몸이라지만 어찌 하루에 만가지 일을 하겠는가.
 그러나 말 그대로 ‘일일만기’를 감당할만큼 ‘일중독’에 빠진 지도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개혁군주로 알려진 정조 임금이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 정조는 일중독에 걸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밤을 재세워가며 정사를 봤다. 

 

 ■오지랖 넓다고 지적받은 정조
 1781년(정조 5년), 규장각 제학 김종수가 ‘임금의 태도를 지적한 6개항’을 상소문으로 올렸다.
 “‘작은 일에 너무 신경쓰시면 큰 일에 소홀하기 쉽습니다. 크고 실한 것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고 눈 앞의 일만 신경쓰면 겉치레의 말단입니다. 전하께서는….”    
 그러자 정조 임금은 “작은 것을 통해야만 큰 것으로 나갈 수 있고 겉치레를 통해야만 실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 응수했다.
 과연 무슨 대화였던가. 김종수는 ‘지도자라는 사람(정조)이 너무 세세한 것까지 챙기는 바람에 정작 큰 일에 소홀히 하고 있다’고 감히 ‘지적질’ 하고 있는 것이다. 임금이라는 사람이 큰 그림을 그려야지, 사사건건 ‘디테일’에만 신경쓴다는 것…. 한마디로 정조의 만기친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홍재전서> <정조실록>) 
 그러자 정조는 “작은 것을 거쳐 큰 것으로 나가는 법”이라면서 “그것이 과인이 작은 것이나 살핀다는 지적을 받으면서도 눈 앞에 닥친 일부터 해나가려는 이유”라고 당당히 말하고 있다. 정조의 통치 스타일을 보면 ‘임금의 오지랖’을 지적한 김종수의 상소가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정조의 ‘일중독’은 청사에 길이 남을 만큰 지독했으니까….

 

   ■침실에 재해대책본부 설치한 정조
 예컨대 1783년, 재해가 나자 정조는 자신의 침실에 ‘상황판’을 걸어놓았다.
 “침실의 동·서벽에 재해를 입은 여러 도를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그곳에 고을 및 수령 이름과, 세금경감과 구휼 조목 등을 죽 써놓고, 한가지 일을 처리할 때마다 기록했다.”(<홍재전서> ‘일득록·정사 1’)
 한마디로 재해대책본부를 침실에 차린 것이다. 정조는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이 백성을 위한 것”이라 했다.
 “백성이 배고프면 내가 배고프고, 백성이 배부르면 나도 배부르다. 재해를 구하고 피해를 입은 백성을 돌보는 것은 특히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서둘러야 한다. 백성의 목숨이 달려있는 사안이므로 중단할 수 없지 않은가.”
 이런 일도 있었다.
 정조는 해마다 새해 첫날이면 한해 농사를 장려하는 ‘윤음’을 내렸다.
 그런데 1784년 새해에는 윤음을 내리지 않기로 작정했다. 해마다 윤음을 내렸지만 기근이 계속됐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속으로 ‘윤음이란 모두 형식일 뿐’이라고 마음을 먹게 됐다. 차라리 밭갈고 김매는 시기를 잘 선택하는 것이 농사에는 더 좋다고 여겼다. 그러나 어느 날 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정조는 밤새도록 뒤척이다가 벌떡 일어났다.
 “인간사, 정성을 바쳤는데 감동하지 않는 법이 없지 않은가. 정성껏 윤음을 내리는데 (하늘이) 응답을 해주지 않을까. 나는 내 정성만 다하면 된다.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이렇게 불러 쓰노니 관찰사와 수령들은 명심하기 바란다.”(1784년 농사권장 교서)
 누웠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정사를 처리했다니….  

정조가 내린 어제 윤음. 1776년(정조 1) 홍인한·정후겸 등 벽파를 성토하여 죄를 주고, 그 사실을 국내에 널리 알린 윤음이다. 정조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윤음을 쓸 정도로 일중독에 걸렸다.

■보고서 보는게 취미였던 정조
 1784년(정조 8년) 도제조 서명선이 정조 임금에게 “제발 건강 좀 챙기시라”고 걱정했다. 몸이 편치 않았던 정조가 아직 회복하지 않았는 데도 8도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친히 살펴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정조의 대꾸가 걸작이었다.
 “정신 좀 차리고 보니 국사가 많이 지체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보는 것이네.(不得不親覽矣) 그리고 나는 원체 업무 보고서 읽는 것을 좋아하네. 그러면 아픈 것도 잊을 수 있지.”
 업무 보고서를 좋아하고, 그것을 읽으면 아픈 것도 잊는다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는 ‘바쁘다 바빠!’를 연발하면서도 ‘일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다. 근년에 공개된 정조와 심환지 등이 나눈 편지를 보자.
 “(바빠서) 눈코 뜰새 없으니 괴롭고 괴로운 일이라.”(眼鼻莫開 苦事苦事·1797년 12월26일)
 “백성과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도느라 날마다 늙고 지쳐간다.(而民憂薰心 朝家關念 夜夜繞榻 日覺衰憊·1799년 1월20일)
 “바빠서 틈내기 어렵다, 닭우는 소리 들으며 잠들었다가~비로소 밥 먹으니, 피로해진 정력이 갈수록 소모될 뿐….(疲鈍之精力 日益銷耗而已·1798년 10월7일)
 정조는 공무 외에도 윤음(綸音·국왕이 백성에게 훈유문서)과 편지를 직접 쓰고, 독서에 매진하느라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바쁜 틈에 윤음을 짓느라 며칠 째 밤을 새고, 닭울음을 듣는구나. 괴롭다‘!”(1798년 11월30일)
 “책을 읽으면서 비점(批點·시문 등을 평론하며 찍는 붉은 점)과 권점(圈點·문장의 중요한 곳을 찍는 점) 등을 찍느라 밤잠을 못이루고, 온갖 문서를 보느라 심혈이 모두 메말랐구나.”(1799년 7월7일)

 

 ■비밀편지 정치에 몰입한 정조
 정조의 ‘비밀편지 정치’는 지독했다. 그는 ‘비밀편지’에서 육두문자에 가까운 거친 언사로 대신들을 힐책했다.     
 예컨대 당시 46살인 정조가 67세의 재상 심환지를 두고 ‘생각없는 늙은이(無算之수)’라 욕하는 내용이 보인다.
 “나는 경(심환지)을 이처럼 격의없이 여기는데 경은 갈수록 입조심 하지 않는다. ‘이 떡이나 먹고 말 좀 전하지 마라’는 속담을 명심하라. 매양 입조심 하지 않으니 경은 생각없는 늙은이(無算之수)라 하겠다. 너무도 답답하다.”(1797년 4월10일)
 이밖에 “황인기와 김이수가 과연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乃敢鼓吻耶)” “이 사람은 참으로 호로자식이라 하겠으니 안타까운 일이다.(可謂眞胡種子)”는 등의 욕설이 난무하고 있다.   

정조와 쏙 빼닮은 청나라 옹정제. 정조와 마찬가지로 비밀편지로 지방관들과 소통하는 등 만기친람하기로 유명했다. 청나라 융숭의 기반을 닦았다는 평을 듣는다. 

■일중독. 스트레스가 승하의 원인? 
 이렇게 ‘일일만기’를 처리하고, 독서에 편지쓰기까지 밤을 꼴딱꼴딱 세웠으니 건강이 좋을 리 있었겠는가.
 “열기가 치솟고 등은 뜸 뜨는 듯 하고 눈은 횃불 같아 헐떡일 뿐이다. 현기증이 심해서 독서에 전념할 수도 없다. 괴롭기만 하다.”(1799년 7월7일) 
 “요즘 시사(時事)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구나. 마음 속에 불길만 치솟을 뿐…. 이 때문에 안화(眼花·눈이 어른거림)가 나을 기미가 없구나”(1798년 7월8일)
 “뱃속의 화기가 내려가지 않는구나.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 장판에 등을 붙인채 뒤척이는 일이 모두 답답하다.”(1800년 6월15일)
 정조는 등창이 난지 20여 일 만인 1800년 6월, 승하했다. 재위 24년(1776~1800)만에, 그것도 나이 48살의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마도 지독한 일중독증에 따른 스트레스가 간접 사인이 아니었을까.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씨
 정조의 편지(어찰)와 <정조실록>, <홍재전서> 등에 보이는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씨는 끔찍하다.
 따뜻한 겨울이 계속돼 얼음이 얼지 않자 “과인이 모두 부덕한 탓이고, 죽고 싶은 심정”(<정조실록>이라고 토로한다. 또 “제주 백성들의 전복 채취하는 힘겨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전복 바치기를 전면 금한다.(<비변사등록>)
 서북지방에 든 기근 때문에 유랑민 수백명이 서울로 몰려오자 친히 종로거리로 나가 이들을 접견했다. 그러면서….
 “누더기 옷과 깡마른 얼굴을 보니 참담하구나. 비단옷과 보료를 준들 편안하겠는가. 세금을 면제하고 곡식과 옷가지를 줄테니 각자의 집으로 가라.”
 정조는 명령만 내리고 가지 않았다. 하루종일 자리를 지키고 앉아 곡식과 옷이 제대로 분배되는 지를 감독했다.(<홍재전서> ‘일득록·정사’)  

 

 ■만기친람의 후유증
 너무 만기를 친람하다보니 어이없는 일도 있었다. 1796년, 정조가 ‘담배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따져 조선을 흡연의 나라로 만드는 법’을 묻는 책문을 내린 것이다.
 책문은 신료들에게 국정 현안의 자문을 구하는 제도였다.  
 “담배가 출현한 것을 보니 천지의 마음을 읽기에 충분하다. 우리 강토의 백성들에게 (담배를) 베풀어 그 혜택을 나눠 주고 그 효과를 확산시켜 천지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한다.”(1796년 11월28일)
 정조는 지독한 골초였다. “임금은 하늘을 도와 정치하는 사람이므로 하늘이 내린 담배의 혜택을 백성들에게 줘야할 의무가 있다”고 강변한 것이다.
 조선을 흡연의 나라로 만든다고 했다니 참….    
 1790년 8월, 정조는 또 한 번 ‘만기친람’의 기질을 발휘한다. 살인사건의 판결문을 직접 쓴 것이다.
 즉 전라도 장흥사람 신여척(申汝倜)이 이웃집 형제 간의 싸움을 보다 의분을 참지못하고 형제 중 한 사람을 발로 차 죽였다.
 형조는 “고의성은 없지만 살인한 것은 사실이니 살인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다. 그러나 정조는 “형제간 싸움은 윤리의 변괴이며, 그런 형제들을 처단한 신여척은 기개있고 녹록치 않은 자”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정조는 특히 “신여척이라는 이름이 헛되지 않았다”고 칭찬했다. 즉 신여척의 한자 이름, 즉 너 여(汝)와 기개있을 척(倜)을 떠올리며, ‘너는 기개있는 사람’이라 칭찬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흠흠신서>에 정조의 이 판결을 “의로운 판결”이라 찬동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살인은 살인이 아닌가. 어찌됐든 사람을 때려죽인 살인범에게 ‘의롭고 기개있다’며 무죄로 방면시킨 것은 좀…. 
 정조는 심지어 “장악원에서 연주되는 음악이 갈수록 번잡하고 빠르다”고 지적하면서 “하루빨리 고아한 음악을 되찾으라”는 명을 내리기도 한다.
 “줄을 번잡하게 튕기고 곡조를 빠르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외떨어진 작은 나라의 소리다. 서로 화답하여 넉넉하게 여유로운 소리를 내는 음악이라야 잘 다스려진 세상의 모습이다.”(<홍재전서> ‘일득록·정사’)
 임금이 백성에게 담배를 적극 권장하고, 살인사건의 판결까지 손수 내리고, 심지어는 유행음악이 빠르다고 빨리 바꾸라고 지적하는 일…. 오지랖이 넓다는 소리를 들을만 하다. 

중국 시안 명마용에서 발견된 청동마차. 만기친람의 원조격인 진시황은 전국을 순회하는 순행정치로 만천하를 다스리렸다.

■옹정제의 만기친람
 그런데 흥미로운 것이 있다. 정조가 자신보다 2세대 정도 앞선 인물인 청나라 옹정제(재위 1722~1735)의 ‘만기친람’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강희제의 35명 황자 가운데 4번째인 옹정제는 45살의 나이에 황제가 됐다. 그는 “정치는 천명을 받은 내게 모두 맡기라”고 선언했다. 
 그의 ‘밀정정치’는 유명했다. 전국 각지의 관리들 인물됨됨이를 파악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했다.
 에컨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지방관이 북경에서 임지로 떠나면서 하인을 한사람 데려갔다. 3년 뒤 하인은 지방관에게 “휴가를 얻고자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인님은 아마 성공할 겁니다. 천자(옹정제)께서 포상할 겁니다.”
 하인 주제에 무슨 말? 지방관은 신경쓰지 않았다. 한데 옹정제를 알현한 지방관은 뜻밖에 천자로부터 치하의 말을 들었다. “자네가 그렇게 고을을 잘 다스린다지?”
 감읍해하던 지방관이 돌아나서는데 시위장이 문앞에 서 있었다. 그가 바로 황제가 지방관의 됨됨이를 파악하려 파견한 밀정이었던 것이다.
 또 있다. 한번은 관리들이 옹정제가 그토록 싫어했던 마작을 몰래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마작패 하나를 잃어버렸다.
 다음 날 옹정제가 관리들이 모인 자리에서 물었다.
 “어젯밤 무엇을 했나?”
 정곡을 찔린 관리들이 “마작을 했다”고 순순히 고했다.
 “뭔가 이상한 일은 없었는고?”
 “예. 그렇지 않아도 마작패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그러자 옹정제가 소매에서 마작패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이것 말인가.”
 관리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솔직하게 어젯밤의 일을 이실직고 했으니 망정이지, 거짓을 고했다면 목이 달아날뻔 했으니까….

 

 ■주접으로 소통한 옹정제
 정조가 비밀편지로 관리들과 소통했다면, 옹정제는 이른바 ‘주접(奏摺)’을 통해 중앙관리 및 지방관들과 소통했다. 주접은 공식절차가 아니라 황제와 일선 관리가 직접 주고받는 비밀문서(친필편지)를 말한다. 옹정제는 “사소한 정보까지 모든 사항을 빠짐없이 보고하라”고 명했다. 
 “정치가 잘 운영되는지, 관리가 근면한지, 태만한지, 윗사람은 공평한지, 누가 모자란지, 군대의 구율은 어떤지…. 무슨 일이든 좋다. 증거가 없어도 좋으니 빠뜨리지 마라. 단 증거와 풍문은 구분해서 보내고….” 
 중요한 것은 비밀이었다. 정조가 편지내용을 발설한 심환지를 두고 ‘입조심을 하지 않은 생각없는 늙은이’라 욕했다지만, 옹정제 또한 다르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은 관리들에게 마구 욕을 해댔다.
 “바보는 고칠 수 없다(下愚不侈)는 말은 바로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금수라도 너보다는 낫겠다.” “양심을 뭉개버리고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은 소인배.” “잘못 둔갑한 늙은 너구리.”

 

 ■“보고서 읽는 것이 너무 즐겁다”는 옹정제
 ‘일일만기’ 한다는 말은 정조 뿐 아니라 옹정제도 마찬가지였다.
 옹정제는 새벽 4시 이전에 일어나 역사실록과 제왕의 명령 및 가르침을 모은 조칙집, 그리고 보훈(寶訓)을 한권씩 읽으면서 일과를 시작했다. 관리들은 새벽 6시까지 입궐해야 했다. 하루종일 정무에 돌본 뒤 밤 7~8시면 일과가 끝났다. 그러나 옹정제의 하루는 이제부터가 또다른 시작이었다.  
 지방관들이 보낸 주접을 꺼내 읽고, 답장을 쓰느라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많을 때는 50~60통을 읽은 뒤 답장을 썼다니….
 “웬일인지 짐은 어릴 적부터 밤만 되면 정신이 집중된다. 보고서가 아무리 길어도, 심지어 수천자가 넘어도 끝까지 다 읽는다. 유익한 보고서라면 읽는 것이 너무도 즐겁다.”
 옹정제는 또한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너무도 중대해서 이 한몸 아까워 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거실액자에 ‘위군난(爲君難)’, 즉 ‘군주가 되는 길은 어려운 것’이라는 세 글자를 써놓았다. 그리곤 양쪽 기둥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이다. 이 한 몸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으리.(原以一人治天下 不以天下奉一人)”

 

 ■워커홀릭 황제
 옹정제와 정조가 흡사한 대목이 또 있다.
 옹정제는 “주접에 짐을 두고 성인이니 뭐니 하면서 의례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가장 싫으니 쓸데없는 편지는 쓰지 마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황제에게 입에 발린 칭찬이나 한가득 쓰는 자들의 주접을 읽기가 매우 낯간지럽고 괴롭다는 뜻이다.
 정조 역시 “장계에 임금을 찬양하는 습관을 고치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실제 정조는 임금찬양에 도에 지나쳤던 경상감사 이태영에게 감봉처분을 내렸다. 또 장계의 주제에 맞지 않은 ‘입에 발린 찬양’을 주절주절 늘어놓은 전라감사 이득신을 추고(推考)하기도 했다.(1797년)
 옹정제로 돌아가자면 160만 백성이 홍수에 휩쓸렸다는 소식을 듣자 “모든 책임은 짐에게 있다”고 자책했다. “모든 재해의 책임이 임금에 있다”는 정조의 한탄과 판에 박힌 듯 똑같다. 옹정제는 또 “바빠서 미치겠다”고 푸념하는 지방관에게 “웃기는 소리 마라”고 일갈한다.
 “짐은 수천리 떨어진 지방 총독과 순무(巡撫·지방 파견 관리)의 사무를 도와주는데 소비하는 시간이 80~90%가 된다.”
 일에 빠져 살았던 탓일까. 옹정제는 북경 근처의 ‘서산(西山) 별장’에 가끔씩 갔을 뿐 그 이상은 한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강희제(1661~1721)나 건륭제(1735~1795)가 이따끔씩 강남 유람에 나섰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일까. 옹정제의 치세는 13년에 그쳤다. 그 사이 황제는 자신을 위해서는 궁궐의 방한칸도 늘리지 않았다. 일중독에 빠진 ‘워커홀릭’ 황제는 차세대(건륭제)의 청왕조 전성기를 이루는데 밑바탕을 마련해주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만기친람의 원조는 따로있다.
 사실 ‘일중독’의 원조라면 진시황(기원전 246~210)이 아닐까.
 진시황 시대의 방술사인 후생은 노생과 대화를 나누며 진시황을 이렇게 비난했다.
 “진시황은 예부터 자기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천하의 크고 작은 일이 모두 황제에 의해 결정됩니다.(天下之事 無小大皆決於上)”
 노생은 특히 “진시황은 하루에 읽어야 할 결재문서의 중량을 저울질해서 처리하고 있다(上至以衡石量書)”고 고발한다.
 “(진시황은) 처리해야 할 문서 정량(120석 분량이라 함)에 도달하지 못하면 전혀 쉬지를 않소. 권세를 탐하는 것이 이 정도인데….”
 노생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신들은 황제가 결정한 일만을 명령받고 있소이다. 모든 일은 황제에 의해서만 결정·처리되고 있다는 겁니다. 황제는 자신의 허물을 듣지 않고 날마다 교만해지며 아랫사람은 황제의 비위만 맞추고 있소. 황제의 허물을 직언하지 못하고….”(<사기> ‘진시황본기’)
 흥미롭다. 같은 ‘일중독’이라도 정조·옹정제와 진시황은 왜 그리 상반된 평가를 받았을까. 결국 핵심은 백성이 아닐까.
 백성을 위한 ‘일중독’이냐, 아니면 독재를 위한 ‘일중독’이냐. 노생의 주장처럼 권세를 탐하는 일중독은 결국 진시황의 전철을 밟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제갈공명의 오지랖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제 아무리 백성을 위한 일이라도 도에 지나치면 안된다는 것이다.
 정조 임금 같은 이도 그런 지적을 받았듯 지도자가 좁쌀영감처럼 온갖 세세한 것까지 참견하면 ‘만기친람’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의 ‘만기친람’은 우리 말로 ‘오지랖 넓다’는 표현으로 대치할 수 있겠다. 이 대목에서 흔히 인용되는 것이 바로 제갈공명의 고사이다.     
 즉 제갈공명과 사마의가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사마의(위나라)는 제갈공명이 보낸 사신에게 “공명은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내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제갈공명의 사신은 “음식은 지나치게 적게 먹고, 공무는 새벽부터 밤중까지 손수 다 처리한다”고 답했다. 곤장 20대 이상의 형벌까지 직접 집행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사마의는 사신의 말을 듣고 농반진반으로 응수했다.
 “식소사번(食少事煩)이라. 공명은 오래 살지 못하겠구먼.”
 사마의의 말을 전해들은 제갈공명은 울면서 말했다.
 “사마의의 말이 맞다. 난 아무래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
 제갈공명은 결국 54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또 있다. 제갈공명이 직접 장부를 조사하자(親校簿書) 주부 양과가 고했다.
 “통치에는 체통이 있습니다. 상하가 영역을 침범하면 안됩니다. 닭은 새벽을 알리고 개는 도적을 지킵니다. 주인 혼자 하려 하면 심신이 피곤해서 아무 것도 못합니다. 어찌 이리 하십니까.”
 사실 제갈공명으로서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 선제, 즉 유비의 유언을 지켜야 했던 제갈공명으로서는 말그대로 ‘만기친람’ 할 수밖에 없었다.
 어리석은 2대 군주(유선)을 대신한 승상으로서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놔야 했기 때문이다. 제갈공명의 한탄이 귓전을 때린다.
 “내가 두려운 것은 오로지 하나. 촉을 지켜달라는 선제의 유언을 제대로 받들지 못했다는 비난이다.”
 그래, 듣고보니 제갈공명의 만기친람은 이해할 수도 있겠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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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마을의 시와스마츠리는 단군신화와도 흡사하다.”
 난고손(南鄕村) 백제마을에 조성된 ‘니시쇼소인(서정창원)’ 전시실을 보면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전시장 패널마다 ‘시와스마츠리와 한국의 각종 의식에 흡사한 점이 많다’는 것을 일본어와 한국어로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시와스마츠리를 부여의 은산별신굿과 비교한다. 시와스마츠리가 정가·복지왕을 위한 제사라면, 은산별신굿은 백제부흥군을 이끌었던 복신과 도침 장군을 모신 제사로 알려져 있다. 둘 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찬물에 목욕재계하는 계율이 있고, 무녀들의 굿(은산별신굿)과 요카구라(夜神樂·시와스마츠리)가 신명나게 펼쳐진다는 점도 비슷하다.


 정가왕과 복지왕의 신주를 모시는 시와스마츠리 행렬과, 승마전장을 한 대장군 등 6명과 깃발 30여기가 동원되는 은산별신굿의 행렬도 마찬가지다.
 또 30여개의 불기둥이 밤을 밝히는 시와스마츠리의 ‘무카에비(迎え火)’ 의식은 옛 백제영역인 청양 정산에서 벌어지는 동화제(洞火祭)와 흡사하다. 동화제의 경우 목욕재계한 마을사람들이 나무에 쌓은 뒤 동아줄로 동화대를 세우고 달이 뜨면 불을 낸다. 전시패널은 또 난고손 주민들이 마츠리 행렬에 바치는 공물(한묶음에 3개씩 모두 9개)에 유의하고 있다. 또 요카구라(夜神樂·신에게 올리는 연주악)에 사용하는 방울(3단)이 위로부터 3개, 5개, 7개씩 달려있음도 강조하고 있다. 1·3·5·7·9 등의 홀수가 사용되는 것을 눈여겨본 것이다. 전시패널은 이를 두고 “한국의 단군신화에서 ‘1’, ‘37일(삼칠일)’, ‘3위(危)’, ‘천부인 3개’, ‘무리 3000’ 등 1, 3, 7의 홀수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단군신화와 시와스마츠리의 친연관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제사도구를 왼쪽어깨에 짊어지고, 제사장을 돌 때도 왼쪽으로 세번 도는 의식 또한 한국에서 넘어온 풍습이란다. 강릉 대관령 서쪽 산마루의 서낭당 제사에서 잔을 헌상할 때 왼쪽으로 세번 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부왕인 정가왕이 아들인 복지왕 등을 마중하는 것을 두고도 강릉 단오제와 비슷하다고 한다. 또 하나의 백제가 일본 최남단 오지 마을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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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프 여행으로는 가벼운 발걸음이리라.
 비행기로 불과 1시간30분 거리인 ‘따뜻한 남쪽나라’여서 그럴까. 친구끼리, 부부끼리…. 1월24일, 한 겨울 금요일 낮 인천발 미야자키행 비행기는 골프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만원사례였다.
 미야자키 공항 한편에 산더미처럼 쌓인 수 십 개의 골프가방은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북새통을 뚫고 백제왕의 전설이 숨쉬는 난고손(南鄕村)의 ‘구다라노사토(百濟の里)’, 즉 백제마을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자동차로 2시간 정도 걸렸지만, 체감거리는 만만치 않았다. 규슈 산맥 끝자락의 심산유곡을 휘감는 산길을 돌고 돌아가는 여정…. 굽이굽이 흐르는 고마루(小丸) 강을 따라 한 1시간30분 정도 갔을까.
 저만치에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걷고 있는 마츠리(お祭り) 행렬이 보였다. ‘미카도 신사(神門神社)’와 ‘히키 신사(比木神社)’의 깃발을 들고 자못 진지한 모습으로 걷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시와스마츠리(師走祭り)’ 행렬입니다. 1300여 년 전 추격군에 의해 전사한 백제왕(정가왕·미카도 신사)을 그의 아들(복지왕·히키 신사)이 찾아뵙는 정례행사입니다.”(최병식 ‘주류성’ 대표)
 행렬은 ‘백제마을(百濟の里)’ 입구에서 잠시 멈춰섰다. 백제왕(정가왕)의 무덤이라는 쓰가노하루(塚の原)에서 왕의 혼백을 위무하는 경건한 제사의식을 치렀다. 필자는 온갖 상념에 빠졌다. 

멸망왕 백제왕의 후예는 왜 일본 최남단 미야자키 현 남고손 오지마을까지 도피했을까. 난고손 백제마을 주민들은 백제왕 부자의 만남을 재현하는 마츠리를 개최한다. 마을사람들은 이곳까지 망명객들을 쫓아온 추격군을 따돌리려고 둘불을 놓는 의식을 펼치고 있다. |이오봉 사진작가. 도서출판 주류성 제공  

 ■일본 오지마을에 나타난 백제왕
 규슈의 최남단, 그것도 첩천산중의 오지 마을까지 흘러 들어온 백제왕은 대체 누구인가. 그의 아들은 또 누구인가. 1400년이나 흘러온 백제왕의 슬픈 전설이 산골 작은 마을에 서려 있다.
 663년, 백제부흥군·왜 연합군과 나·당 연합군 간 백강(금강) 대회전이 벌어진다. 1000척에 분승한 2만7000여 백제·왜 연합군은 나당 연합군과 4차례 접전을 벌였지만 완패하고 만다. 백제부흥군은 완전히 멸망한다. 백제왕·귀족들 상당수가 일본의 나라(奈郞) 쪽으로 망명한다. 전설의 주인공인 정가왕과 복지왕 부자가 이 대목에서 등장한다.
 이들은 야마토 정권의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672년 야마토 정권 내부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변란(임신란·壬申亂)이 일어난다. 조카(오토모 황자·大友)가 왕위를 계승하자 삼촌(오아마 황자·大海人)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백제 왕족 일가는 배 2척에 나눠 타고 북규슈로 피란을 떠난다. 그러나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에서 풍랑을 만난다.
 일가는 흘러흘러 남규슈 휴가(日向) 해안까지 떠내려와 가네가하마(金ケ浜)에 도착한다. 여기서 부왕인 정가왕 일행은 고마루 강의 상류인 난고손에, 장남인 복지왕은 강의 하류인 기조쵸(木城)에 각각 정착한다, 하지만 추격자들의 발길은 오지 마을에 숨어있던 정가왕을 압박했다. 이곳에서는 추격군의 정체를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군이라고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어떻든 아버지가 위기에 빠지자 장남인 복지왕이 급히 지원에 나선다. 이곳의 토호세력인 돈타로(益見太郞)를 중심으로 한 현지 주민들도 백제왕가를 적극 돕는다. 그러나 정가왕은 추격군의 화살을 맞고 전사하고 만다.  

 백제왕의 망명 전설이 담긴 시와스마츠리 행렬. 아들(복지왕)이
90㎞ 떨어진 부왕(정가왕)을 찾아오고 있다.

■백제왕은 누구일까.
 사람들은 부왕인 정가왕을 난고손 마을의 미카도 신사에, 장남인 복지왕을 기조쵸의 히키 신사에 나란히 모셨다.
 이 때가 718년 무렵이라고 한다. 그리곤 해마다 음력 12월 마지막 주에 아들(복지왕)이 90㎞ 쯤 떨어진 아버지(정가왕)를 찾아뵙는 ‘마츠리’가 열렸다. 물론 정가왕·복지왕은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이다. 하지만 백제멸망 후 왕·귀족과 백성들이 일본에 대거망명했다는 <일본서기> 등의 기록을 감안해보자.
 “백제의 선광왕(의자왕의 아들) 등을 난파(難波·오사카)에 살게 했다.(664년) 좌평 여자신과 달솔 목소귀자·곡나진수·억례복유 등이 백성들을 이끌고 도착했다.(663년)” “663년부터 3년간 백제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백제인 400여 명을 오미국(近江國·시가현)에 살게 했다.(665년) 백제 백성 2000명을 정주시켰다.(666년)”(<일본서기>)   
 40여 명에 이른다는 의자왕의 자손 가운데 혹 주목할만한 인물을 찾을 수도 있겠다. 일본에 머물다 귀국해서 백제 부흥군을 이끌었던 풍왕은 어떤가. 그가 정가왕의 증조 할아버지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정가왕과 복지왕은 풍왕의 후손?
 1997년 4월, 미카도 신사의 본전 건물을 조사하다가 흥미로운 유물들이 쏟아졌다. 제사 때마다 봉행한 창(모)이 무려 1006점이나 발견된 것이다. 몇 개의 창에는 의미심장한 기년명이 새겨져 있었다.
 ‘장록 3년(1459년) 12월 길일, 천문 9년(1540년) 12월 12일, 경장 9년(1604년) 12월 길일….’
 이 기년명들은 두 가지 뜻을 품고 있다. 1년에 한번씩 제사(마츠리)를 치렀다면 정가왕을 위한 제사의 역사는 1006년 되는 것이 아닌가.  

백제마을 입구에는 정가왕의 것으로 알려진 백제왕릉이 조성돼있다. 아버지를 찾아오는 아들(복지왕)이 아버지의 왕릉에서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펼치고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정가왕을 기리는 제사가 ‘최소한’ 555년이 넘은 것은 사실이다. 기년명 중 가장 이른 것이 ‘1459년(장록 3년)’이라니까…. 또 제사가 해마다 음력 12월에 거행됐다는 것도 ‘팩트’로 밝혀졌다. ‘시와스마츠리’의 ‘시와스(師走)’는 음력 12월을 뜻한다.
 1792년 다카무라 고타로(高山彦九郞)가 쓴 <축자일기(筑紫日記>를 보면 “히키신사에 모신 복지왕이 해마다 12월에 아버지(정가왕)의 신사에 가서 창(모)과 큰 칼(太刀)를 바치는 제사를 지내고 돌아온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또 있다. 1996년 정가왕을 모신 미카도 신사에 보관돼 있던 옷에서 발견된 묵서가 백제시대 한자라는 판독결과도 주목을 끌었다.
 당시 묵서를 판독한 후쿠슈쿠 다카오(福宿孝夫) 미야자키대 교수는 “옷에 새겨진 글의 제목은 ‘기국호(記國號)’, 즉 ‘나라의 이름을 기록한다’는 뜻의 백제 포고령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후쿠슈쿠 교수는 특히 “오른쪽 묵서를 보면 ‘복지(福智)’로 판독되는 한자가 보인다”고 덧붙였다. 다른 한자들도 신라·고구려가 아닌 백제 글자의 고유성을 보인다는 것.
 이 묵서는 결국 백제의 성(城) 숫자와 목적, 개원(改元·연호의 변천) 등을 표시한 포고문서라는 것이다. 후쿠슈쿠 교수는 “이것은 일본으로 건너왔던 의자왕의 아들 풍왕이 가져온 문서이며, 그의 후손인 정가왕에게 전한 보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했다. 당시 연구결과, 묵서가 새겨진 옷의 성분이 당대 일본의 고유 직물성분과 다르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어디 이 뿐인가. 이곳 미카도 신사에서 발견된 4~7세기대의 청동거울 33면과 말방울(馬鈴·馬鐸) 등도 관심을 끌고 있다. 비록 중국 동경 등을 모방한 제품이기는 하다. 하지만 청동거울은 쇼소인(正倉院·왕실 보물창고)의 것과 같은 종류의 거울이다. 청동거울은 청동검·곡옥과 함께 최고 지도자를 상징하는 ‘3종 신기(神器)’로 알려져 있다. 정가왕을 모신 미카도 신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부왕을 만나기 전 목욕재계하는 의식을 재현하는 마츠리 참가자들.

■불지른 사연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있던 필자의 얼굴에 후끈 달아올랐다.
 정가왕의 무덤에서 제사를 치른 뒤 들판을 태우는 의식이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아들(복지왕)이 아버지의 신사(미카도 신사)에 절하는 의식이 끝나고, 날이 어두워지자 ‘불의 제전’은 절정을 이룬다.
 이것은 정가왕을 쫓아온 신라 추격군을 따돌리려고 들불을 피웠다는 전설을 따른 것이다. 지금은 아버지가 아들을 맞이하는 불, 즉 ‘무가에비(迎え火)’라 한다. 높이 10m에 달하는 장작더미 30여 개에 붙인 불은 이제 ‘시와스마츠리’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행사는 2박3일간 진행됐다. 그야말로 ‘신주모시듯’ 한다는 표현이 꼭맞았다. 이틀째(25일) 1년 만에 만난 정가왕·복지왕 부자를 기리는 제사가 내내 엄수되고, 정가왕을 적극 지원한 토호(돈타로)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식도 진행됐다. 오마루 강에서 주워온 돌로 돌무덤을 만들고…. 신사에서는 밤 12시까지 우아하거나 혹은 익살스러운 주제의 다양한 요카구라(夜神樂·무악을 울리며 신에게 올리는 밤제사)를 열고….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즐기는 시간이기도 했다. 
 마지막 날(26일) 모인 사람들이 서로서로의 얼굴에 숯칠을 한 다음 이별을 준비한다. 슬픔을 애써 감추기 위한 의식이란다. 물론 필자 일행도 예외없이 검댕 칠을 했다.  

아들 복지왕이 부왕인 정가왕을 모시는 미카도(神門)신사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오사라바(おさらぼ)!
 짧은 만남 끝에 아버지(정가왕)과 아들(복지왕)이 헤어지는 의식은 왠지 짠했다. 떠나는 아들(복지왕)을 배웅하는 난고손 사람들은 손에손에 대야, 솥, 빨래판 등 각종 도구들을 들고 있었다.
 집안 일 하다 말고, 한달음에 달려와 복지왕에게 인사를 했던 옛 마을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그들은 점점 멀어져가는 복지왕의 행렬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쉼없이 외쳤다.
 “오사라바(おさらぼ)! 오사라바(おさらぼ)!”
 ‘오사라바’는 안녕을 뜻하는 ‘사요나라’의 옛말이란다. 그러나 요즘은 쓰지 않는 말이다. 다른 해석도 있다. 한국말로 ‘잘 살아봐!’ 혹은 ‘살아서 다시 봐!’라는 옛 백제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아들을 따라 배웅하고 돌아오는 정가왕 역할의 신관(神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2박3일간 정가왕의 혼백에 빙의된 것일까.
 왠지 모를 감정이입에 기자도 숙연해졌다. 마을 사람들이 다시 외쳤다.
 “오사라바!” 

시와스마츠리는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는 축제의 장이기도 하다. 밤 늦도록 요카구라(夜神樂·신을 부르는 연주악) 등의 행사가 열린다.  

■수박겉핥기 답사가 안되려면…
 ‘시와스마쓰리’를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백제마을(구다라노사토·百濟の里)’은 시답지 않아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상시 관광객들이 보는 ‘백제마을’은 1987년 일본 정부의 ‘지역활성화 대책’에 따라 ‘만들어진 마을’이기 때문이다.
 ‘백제관’과, 도쿄의 쇼소인을 모방한 니시쇼소인(西正倉院)이 조성되고, 부여 출신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기념으로 심은 나무가 동네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이렇게 후대에 ‘만들어진’ 풍경에서 무엇을 느끼겠는가. 그것도 백제인의 숨결을 느끼려 일본 최남단 오지마을까지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래서인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은 난고손의 백제마을을 두고 ‘실망감을 넘어 허망감’을 표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1000년 이상 백제 왕족의 전설을 오롯이 간직하고, 그 전설을 잊지않고 재현하는 사람들의 분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볼거리’이자 ‘느낄거리’인데….
 

곧 찾아뵐 아버지가 행여 부정 탈지 모른다며 발가벗고 한겨울 바다에서, 강물에서 목욕재계하는 사람들…. 이국(異國)의 국왕 부자를 위해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고,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는 저 사람들….
 한가지 말하자면 ‘시와스마츠리’를 직접 보지 않았다면 ‘백제마을’을 제대로 평할 수 없다. 자칫 수박겉핥기 답사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니….
 난고손의 백제마을 여정은 골프여행이든, 전지훈련이든 미야자키를 찾는 사람들의 1박2일 코스로는 제격이라는 점을 강조해두고 싶다. 1300년 전 백제 왕족의 슬픈 역사를 더듬어보는 뜻깊은 여행이 될 것이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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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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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계령 이혜가 술주정을 하다가 사람을 죽였다. 종부시(宗簿寺)에서 그 죄를 청했다. 세종이 명하여 직첩을 거두어 고성현에 안치했다. 그에게 사냥하는 것을 금하고, 또 바깥 사람과 통하지 못하게 했다. 이혜는 양녕 대군 이제의 아들이다.”
 1447년(세종 29년)의 <세종실록>이다. 양녕대군의 아들(이혜)이 술주정을 하다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기록이다. 그 때문에 서산군(瑞山君)이었던 이혜는 황계령(黃溪令)으로 작위가 깎였으며 경남 고성현으로 유배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혜의 술주정은 아버지(양녕대군)를 닮았음이 틀림없다. 양녕대군도 고을 백성에게 소주를 강제로 먹여 사망에 이르게 한 적이 있으니까….
 “(1422~23년, 대사헌과 문무의 2품 관리들이 대대적인 탄핵에 나섰다.) 양녕대군 이제는 고을 백성 한사람에게 소주를 마구 먹여 죽였습니다. 특히나 양녕은 태종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재궁(梓宮·임금의 관)이 빈소에 있는 데도….”
 부왕의 상중에, 그것도 임금의 관이 아직도 빈소에 있는데 술판을 벌여 무고한 백성을 죽였다니…. 그러니 탄핵을 받아도 싼 것이다. 바로 그 양녕대군의 아들 역시 술주정으로 신세를 망친 것이다. 부전자전이다. 왕족이었으니 망정이지, 술주정에 생사람을 죽인 행위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닌가.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양녕대군 이제의 묘역. 양녕대군과 그의 아들 이혜는 지나친 술주정으로 사람을 죽여 극심한 탄핵을 받았다.  

■다산이 말하는 ‘술의 미학’
 “참다운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데 있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말하는 ‘술의 미학’이다. 다산은 ‘둘째아들(학유)에게 쓴 편지’(<다산시문집> 제21권 ‘서·유아’)에서 “소가 물마시듯 목구멍으로 들이부으면 안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물 마시는 소처럼 마시는 저들은 뭐냐. 입술이나 혀를 적시지 않고 곧바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무슨 맛이 있겠느냐.”
 지금 다산은 절대 해서는 안될 술버릇을 ‘원샷’이라고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산은 “난 이날 이 때까지 술을 크게 마신 적이 없어 주량을 알지 못한다”며 은근히 자신의 주량을 과시했다.
 “상감(정조)께서 삼중소주(三重燒酒)를 옥필통(玉筆筒)에 가득히 부어 하사하신 일이 있었다. ‘오늘 죽었구나’ 하고 할 수 없이 마셨는데 취하지 않았다. 한번은 술을 큰 사발로 받았는데 다른 학사들은 모두 인사불성이 됐다. 어떤 이는 남쪽으로 향해 절을 올리고, 또 어떤 이는 그 자리에서 누워버리고…. 그러나 난 시권(試券·과거답안지)을 다 읽고, 착오없이 등수도 정했다. 약간 취했을 뿐이었다.”
 다산은 그러면서도 “너는 내가 술을 반 잔 이상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고 한껏 자랑했다. 주량은 엄청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한 잔 이상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산은 아들에게 ‘술의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술주정을 경계한 공자
 다산은 또 술주정을 ‘귀신’이라 하면서 무척 경계했다.
 “얼굴빛이 주귀(朱鬼) 같고, 구토를 해대고 골아 떨어지는 자들이야 무슨 정취가 있겠느냐. 술을 좋아하는 자들은 대부분 폭사(暴死)하게 된다. 술독이 오장육부에 스며들어 썩기 시작하면 온 몸이 무너진다.”
 다산은 “무릇 나라를 망하게 하고 가정을 파탄내는 흉패(兇悖)한 행동은 모두 술로 말미암아 비롯된다”고까지 했다. 공자의 유명한 화두를 ‘절주’와도 연결시켜 해석했다.
 공자의 화두는 ‘고불고 고재고재(고不고고哉고哉·모난 술잔이 모가 없으면 모난 술잔이겠는가. 모난 술잔이겠는가)’이다.(<논어> ‘옹야 23장’)
 다산은 공자의 선문답을 “고라는 술잔을 사용하면서도 주량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어찌 고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해석했다.
 술그릇 이름인 ‘고(고)’는 ‘두 되 정도 담을 적은 양의 술잔’을 뜻한다. 예전엔 주량을 5되는 과하고, 2되는 적고, 3되면 적당하다고 했다는 것. 그러나 공자 시대에 과음 풍조가 만연하자, 공자가 “고를 어찌 고라고 했겠는가”라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불고’는 ‘술주정을 경계한 것’이라 풀이할 수 있다.  

혜원 신윤복의 <유곽쟁웅>. 유흥업소 기생을 차지하기 위한 남성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갓과 양태가 벗어지도록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가운데 웃통 벗고 있는 수염난 이가 승리자이다. 싸움에서 진 이가 씩씩 거리고 있다.|간송미술관

■어전 술주정 사건 
 <실록>에는 술주정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 심심찮게 기록돼 있다. 예나 지금이나 술은 숱한 이야깃거리를 남기는 모양이다.
 예컨대 어전(御前)에서 술주정을 부렸다고 해서 바로 처벌하기란 쉽지 않았다. 술 때문에 강상이나 대역의 죄를 범했다면 몰라도 그렇지않은 경우 ‘속좁은 임금’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1440년(세종 22년), 판중추원사 이순몽의 주사는 악명이 높았다. 걸핏하면 욕을 해대는 주정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대마도 정벌에 공을 세운 그를 쉽사리 벌할 수 없었다.
 세종은 대신 말로 단단히 훈계했다.
 “경도 이제 늙었는데, 어찌하여 광패(狂悖)한 성질이 고치지 않는가. 지금부터는 좀 근신해서 광패하고 망령된 짓은 하지 말아라.”
 나잇값 좀 하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임금의 이야기도 통하지 않았다. <세종실록>의 기자는 “임금이 용서하고 죄를 주지 않아 그의 술주정과 광패함이 더욱 심해졌다”고 꼬집고 있다.
 또 하나의 사례. 1456년 1월 세조는 사정전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그런데 동부승지 이휘와 좌헌납 구종직이 큰소리로 ‘살인사건의 진범’ 운운하며 술맛 떨어지는 소리를 해댔다. 술자리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술판의 분위기가 깨질 것 같자 세조 임금은 무던히도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만취한 구종직 등이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는 등 횡설수설했다. 결국 술자리 직언은 지루한 주사가 되어버렸고, 세조는 파평군 윤암에게 “끌어내라”고 명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구종직은 하늘이 노랬다. 단숨에 임금에게 달려가 엎드려 고했다.
 “전하, 소신이 어제 그만 술에 취해서…. 청컨대 대죄하게 하소서.”
 하지만 뜻밖이었다. 세조는 “네가 연로했음을 불쌍히 여기니 어서 본연의 직무에 나서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 뿐 아니라 임금은 구종직에게 관작 1계급를 올려주었다.(<세조실록>)   

 전국시대 중산국의 왕릉에서 발견된 2300년 전의 술병과 술. 동이의 후손으로 알려진 중산국의 술은 전국시대에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불알차여 죽은 술꾼
 정조 시대의 각종 살인사건 판례집인 <심리록>에는 이른바 ‘주폭’으로 인한 살인사건의 전모도 심심찮게 보인다.
 1784년(정조 8년)의 일이다. 친구들끼리 “청주를 시키느냐 탁주를 시키느냐”를 놓고 헛된 말다툼을 벌이다가 칼부림이 벌어졌다.
 문제는 그 중 한사람이 사타구니와 넓적다리를 찔려 사망했다는 것이다. 형조의 공초내용을 보고받은 정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초 칼부림이 일어난 것은 장난이 아니면 술주정이고, 술주정이 아니면 실수임을 알 수 있다. 살인의 원인은 바로 술이요, 싸움이요, 실수이다. 이 중 하나만 해당되어도 살려 줄 수 있는데, 더구나 셋을 겸하였음에랴.”
 정조는 피살자의 상처가 급소에 있지 않음을 중시하면서 “용의자가 애당초 살해할 마음이 없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판결했다. 용의자는 정조 임금의 관대한 처벌 덕분에 ‘과실치사죄’로 사형을 면했다.
 술자리 다툼 과정에서 발로 동무의 불알을 마구 차서 죽인 사건도 일어났다. 1783년(정조 7년)의 일이다. 충청도 아산의 광대 박삼징이 친구(황성재)와 함께 마을 모임에 갔다가 술에 취해 벌인 다툼 끝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심리록>의 내용을 보자.
 “(상처)음낭이 약간 붉은색으로 변하고, 불알이 오그라붙었으며, 척추가 붉은색으로 변하여 약간 단단하였다. (판결)죽음을 재촉하는 급소를 쳤고, 목을 잡다 던진 사실이 인정된다. 용의자가 늙었지만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형에 처할 뿐이다.”

 

 ■상관마저 문책시킨 공무원 주폭들
 공연히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이른바 공무원 ‘주폭’도 여러 명이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무예별감 하경연이라는 자가 정동 근처의 길가에서 술주정을 부리며 발악하며 말리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때리다가 적발돼 곤장 100대의 중형을 받았다.  
 또 1780년(정조 4년) 별감 이경주라는 자가 술만 마시면 상습적으로 술주정을 부리다 적발됐다. 당시 형조의 심문내용이 재미있다.
 “이 놈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제명한 적도 있었고, 형조에서 처벌한 적도 있었고, 노비로 강등시킨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개전의 정이 없으니…. 일단 곤장 10대를 치고 공초를 받아….” 
 이경주는 결국 구류 처분을 받았고, 부하의 상습 술주정을 막지못한 상관(행수별감) 마저 문책을 당했다.
 그러나 아무리 술과 술주정을 경계하고 처벌한다 해도 사라질 행태인가.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술이 술을 마시게 되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되는데….
 목은 이색의 시를 보면 이런 시귀가 나온다.
 “태백이 부른 노래가 천고를 비추고 있지만(太白歌行映千古)/천재가 아닌데 흉내 내면 술주정만 부리리다(徒能使酒非天才)/객 떠나고 술동이 빈 때 홀로 노래를 뽑으니(客去樽空時獨唱)/광활한 천지 사이에서 풍뢰가 호응하오그려(天地闊遠呼風雷)”(<목은시집> 제34권)
 이태백처럼 천재도 아니면서 이태백의 풍류를 따라하면 그저 술주정을 부리는 격이 될 뿐이니 차나 한잔 하라는 것이다. 견디지도 못할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부리지 말라는 것이다.  

 상나라 시대 무덤인 부호묘에서 발견된 고. 고는 원래 술 2잔 정도를 담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술잔이다. 술을 적당히 마시라는 뜻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남효온의 은근슬쩍 다짐
 조선조 남효온의 시문집(<추강집>)에는 남효온이 김시습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려있다.
 “술이 중도를 잃으면 머리를 풀고 노래하며 어지럽게 춤추고, 시끄럽게 부르짖고, 넘어지고 자빠져서 예의를 무너뜨리고 의리를 없애며 소동을 일으킵니다. 마음을 풀어놓고 눈을 부라리다가 싸움이 일어나서 작게는 몸을 죽이고, 더 나아가서는 집안과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경우가….”
 그는 “맛있는 술맛이 사람을 변하게 하여 점점 술주정에까지 이르게 되지만, 주정하는 줄조차 모르게 되는 것은 이치상 필연적인 것”이라고 경계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는 술을 끊겠다”고 다짐한다.
 “저는 젊었을 때부터 술을 몹시 좋아하여 비난을 받았고, 방자하게 주광(酒狂)이 되었습니다. ~점점 부덕해져서 집안에서 방자하게 주정을 부리다가 어머님께 크게 수치를 끼쳤습니다. 술의 죄가 3000가지 중의 으뜸에 해당되니, 무슨 마음으로 다시 술잔을 들겠습니까. 어머니께 ‘지금 이후로는 임금의 명령이 아니면 감히 마시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답니다.”
 술을 즐기고, 주사를 부리다가 어머니로부터 ‘술을 끊으라’는 걱정을 듣자 금주선언을 한 것이다. 그런데 남효온은 김시습에게 다짐의 사연을 보내면서 한가지 토를 달았다.
 “그러나 제사 지낸 뒤 음복한다거나 축수(祝壽)를 올리고 술잔을 되돌려 받는 경우에는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또 술이 뱃속을 적셔도 어지럽지 않은 경우는 또 어쩌겠습니까.”
 어머니 앞에서 금주선언을 한 남효온이었지만, ‘어쩔 수 없을 때, 그리고 술이 달 때는 어쩌겠냐’고 입맛을 다시며 하소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역성 좀 들어달라’는 말이었다.

 

 ■역성 들어준 김시습의 맞장구
 그러자 김시습은 남효온의 편지가 무슨 뜻인 줄 알고 박자를 맞춰주었다. ‘술을 완전히 끊기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라고 답한 것이다.
 “옛사람이 술을 베풀었던 까닭은 선조에게 제사 지내고 손님을 대접하고 노인을 봉양하고 병을 다스리고 복을 빌고 기쁨을 나누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살피지 않고 그저 술이 재앙을 낳는다고 여겨서 곧바로 완전히 끊고자 하니…. 이는 마치 밥을 짓다가 불똥이 튈까 염려하여 일생 동안 익힌 밥을 차리지 않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김시습은 술을 마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면서 적당히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기고 주정을 부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술에 일정한 양이 없었으나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위 무공(재위 기원전 812~758년) ‘세 잔에도 기억하지 못하거니 하물며 감히 또 더 마신단 말인가’라고 했습니다. 위 무공 또한 완전히 끊은 것이 아니라 술을 경계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공자는 주량을 알 수 없었지만 정신이 늘 멀쩡할 정도로만 술을 마셨음을 알 수 있다. 또 위 무공의 경우 스스로 석 잔 술에 필름이 끊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자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시습은 마지막으로 “선생(남효온)이 멀리 혼자 살 것 같으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종신토록 끊는다는 약속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시습의 맞장구야말로 남효온이 바라던 답장이 아니었을까.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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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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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춘추>의 법은 ‘무군(無君)’, 즉 임금을 업신여기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도전·남은의 관을 베고, 저택(저澤·대역죄인의 집을 헐어 연못을 조성하는 일)하소서.”
 1411년(태종 11년), 대사헌 박경 등은 이미 처단된 정도전 일파를 부관참시하고, 그들의 집을 파헤쳐 연못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다. 태종 이방원이 ‘백성의 나라’를 꿈꿨던 삼봉 정도전을 주살한 지(1398년) 13년이나 흘렀는 데도 ‘정도전을 한번 더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 친 것이다.  

공자가 제자를 시켜 길을 묻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 공자는 일생의 역작이라는 <춘추>를 지은 뒤 "훗날 나를 칭찬하는 것도, 나를 비난하는 것도 모두 <춘추>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역심을 품은 죄
 2)“<춘추>의 법은 ‘난신을 죽이고 역적을 칠 때는 반드시 그 당여(黨與·당파)를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강희안은 이개·성삼문의 음모를 어찌 몰랐겠습니까.”
 1456년(세조 2년) 대사헌 신석조 등은 강희안 등을 ‘6월의 변’ 사건의 연루자로 보고 처단할 것을 주청했다. ‘6월의 변’이란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 등 사육신이 단종복위를 꾀하다 발각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의 여파는 1년 뒤에도 이어졌다. 1457년(세조 3년), 대사헌 김연지 등은 ‘6월의 변’에 연루된 송현수를 처단해야 한다고 다시금 상소를 올린다.
 “송현수는 두 마음을 품었습니다. <춘추공양전>은 ‘인신(人臣)은 장(將·역심)이 없어야 하며, 장이 있으면 반드시 목을 벤다’고 했습니다. 또 ‘벌(罰)이 죄(罪)에 합당하지 않으면 악(惡)한 짓을 하는 자를 징계할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원컨대 송현수를 법대로 처단해서….”
 그러니까 신하는 실제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역심을 품고만 있어도 참형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00년이 흘러도…
 3)“상(명종)께서 ‘정죄(定罪)한 지 오래된 일인데, 다시 추론(깊이 파고 들어가 밝힘)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 <춘추>의 법은 비록 1000년 전의 일이라도 모두 추론했다고 합니다.”
 1548년(명종 3년)의 일이다. 영의정 윤인경 등이 선왕(중종) 시절 국정을 농단했던 김안로의 잔당과, 을사사화(1545년) 연루자들의 가산을 끝까지 추적해서 적몰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다. 이에 명종은 일종의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언급하면서 “이미 처벌받은 사안을 이중처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춘추>를 인용, “대역죄는 1000년이 흐른다 해도 추적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한다.

 

 ■‘임해군을 제사지내다니오’
 4)“<춘추>의 의리는 ‘몸이 살았거나 죽었거나, 과거냐 현재냐’의 구별이 없습니다. 썩은 해골도 주벌(誅罰)할 수 있습니다. <춘추>의 의리가 아주 엄하니 죽었다고 추호라도 용서해서는 안됩니다. 어찌 친친(親親)의 도리 때문에 역적 토벌의 대의(大義)를 저버릴 수 있습니까. 조석전은 아니되옵니다.”
 1609년(광해군 1년), 광해군은 역모죄로 몰려 사사된 임해군을 위해 조석전을 올리도록 지시했다. 조석전이란 고인을 생전과 똑같이 섬긴다는 의미에서 아침·저녁상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광해군은 형(임해군)을 역모죄로 몰아 죽인 것을 내심 후회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신들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아니되옵니다.’를 연발한다.

 

 ■<춘추>가 무엇이기에
 <춘추>에 따르면, <춘추>의 법은, <춘추공양전>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앞의 인용문들에서 보듯 옛 사람들은 대역죄·모반죄 등과 같은 중죄를 처결할 때는 <춘추> 혹은 <춘추공양전>을 줄기차게 인용하고 있다. 법전을 먼저 들춰보지 않은 채….
 그렇다면 대관절 <춘추>가 무엇이기에 너도나도 ‘<춘추>의 대의’와 ‘<춘추공양전>의 해석’에 매달렸을까.
 <춘추>는 기원전 722(은공 원년)~기원전 481년(애공 14년)까지 242년간의 중국 노나라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사기> ‘공자세가’는 “공자가 노나라의 역사를 중심으로 삼고 주나라를 종주로 하여, 은(상)나라의 제도를 참작해서 편찬했다”고 기록했다. <춘추>를 편찬한 공자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공자는 평소 소송사건을 다룰 때 늘 다른 사람들과 의논해서 판단했다.
 그러나 <춘추>를 지을 때만큼은 ‘결단코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했기 때문에’ 어떤 제자들도 한마디 거들지 못했다. <춘추>만큼은 공자가 책임감을 갖고 혼자 지었다는 얘기다.

 

 ■추상 같던 <춘추>의 포폄
 <춘추>의 핵심은 ‘포폄(褒貶)’이다. 즉 사건의 선악과 시비를 따져 평가한(포폄) 법률적 성격의 역사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춘추>의 한 구절 한 구절은 “당대의 법통을 바로잡는 기준”(<사기>)이 되었다. 예를 들어보자.
 춘추시대 오랑캐라는 소리를 듣던 오나라와 초나라가 저마다 군왕을 자처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춘추>의 잣대는 엄격했다. 오·초의 지위를 낮추어 본래의 작위(자작)로 칭했다. 또 있다.
 기원전 621년, 진(晋)나라 문공이 주나라 천자(양왕)를 ‘불러’ 천토(踐土·허난성 위안양현)라는 땅에서 회맹하고 첫번째 ‘춘추 5패’가 되었다. 역사는 이 사건을 ‘천토지회(踐土之會)’라 일컫는다. 하지만 <춘추>의 기록은 다르다. “천자가 하양(河陽·허난성 멍현)으로 사냥을 떠났다”고 한 것이다. 제후에게 ‘불려나가’ 회맹에 참여한 천자를 두고 사냥을 떠났다니….
 이는 ‘있는 그대로를 써야 한다’는 원칙에 맞지 않는 명백한 ‘역사왜곡’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공자의 뜻은 분명했다. “제후(진 문공)가 감히 천자를 부를 수 없다”는 포폄을 가한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천자가 하양으로 수렵을 다녀왔다”고 기록했던 것이다. 공자가 이같은 엄정한 포폄을 가한 까닭은 무엇인가.
 “<춘추>를 통해 포폄을 가한 까닭은 후에 군주될 사람들이 이를 참고해서 실행하게 하는 데 있다. <춘추>의 대의가 행해지면 천하의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사기> ‘공자세가’)
 무서운 말이다. ‘<춘추>의 대의(大義)’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는 지도자는 곧 난신적자의 오명을 뒤집어쓸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추사 김정희의 '소원공자학'. 공자가 되기를 소원한다는 뜻이다. 후대인들은 너도너도 공자의 춘추필법을 배우고자 했다.

  ■공자의 춘추대의란
 그렇다면 공자가 말한 <춘추의 대의>란 무엇이란 말인가.
 ‘춘추의 대의’는 이른바 ‘미언대의(微言大義)’의 어법으로 <춘추>에 녹아있다. ‘미언대의’란 공자가 아주 짧은 말로 가한 포폄을 통해(미언) 대의명분을 밝히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공자의 아리송한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와 같은 <춘추>의 미언대의를 해석하고 풀이하는 춘추학은 한나라 시대부터 나타났다. 특히 <공양전>과 <곡량전>, <좌씨전> 등이 ‘춘추삼전(春秋三傳)’으로 꼽혔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춘추> 해석서가 바로 ‘공자의 아리송한 숨은 뜻(미언대의)’을 문답식으로 밝힌 <공양전>이었다.
 동중서는 특히 이 <공양전>을 근거로 사상의 통일, 즉 ‘대일통(大一通)’을 이뤘다. 동중서는 국교로 삼은 유교의 덕치주의, 즉 백성 중심의 유교주의가 강력한 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국가주의와 배치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아무리 덕으로 다스려야 하는 유교국가라지만 법과 형벌이 없이는 지배체제가 확립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기자는 최근 나온 <국가와 백성 사이의 한제국-덕치와 형벌의 이중주>(히하라 도시쿠니 지음·김동민 옮김, 글항아리)를 읽었다. 이 책을 통해 공자의 춘추필법이 가리키는 이른바 ‘춘추대의’를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어찌 덕치만 할까’
 “하늘의 도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음과 양이다. 음(陰)은 덕(德)이고, 양(陽)은 형벌이다.”
 동중서의 말마따나 음과 양, 덕치와 법치는 공존해야 했다. 특히 유교국가임을 선포했기에 백성 중심의 덕치는 국가이념이었다. 따라서 ‘법치’는 어디까지나 ‘덕치’의 보조수단이어야 했다.
 하지만 권력자가 어디 그런가. 인내심을 갖고 덕으로 세상을 다스리기보다는 채찍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 훨씬 편한게 인지상정 아닌가. 유교 국교화 이후 60여 년이 지난 뒤 한 선제가 그랬다지 않은가.
 “한나라의 제도는 패도(覇道)와 왕도(王道)를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순수하게 덕교(德敎)에만 맡길 것인가.”
 
 ■<춘추>의 숨은 뜻은
 <춘추>에서 보이는 ‘공자의 숨은 뜻(미언대의)’과, 그것을 해석한 <춘추 공양학>은 곧 형벌 적용의 근본원리가 되었다. 
 ‘공양학자’인 동중서는 이렇게 풀이했다.
 “<춘추>에서 재판은 반드시 그 일에 근본을 두고 그 당사자의 동기를 따졌다. 동기가 사악한 자는 범행이 이뤄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처벌했고, 주동자는 죄를 특히 무겁게 하여 가중 처벌했으며, 근본동기가 곧은 자는 죄를 가볍게 적용했다.”
 그는 “따라서 군주를 시해했어도 어떤 이는 주살되고, 또 어떤 이는 주살되지 않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동기의 순수함과 불순함을 따져 같은 죄라도 판결은 다르게 한다? 나아가 “동기가 선하면 법에 어긋나도 처벌을 면하고, 동기가 악하면 법에 맞더라도 처벌한다”(<염철론>)는 데까지 확대된다. 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이란 말인가. 예컨대 이런 식이다.  
 <춘추>의 기록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대부) 숙손득신이 죽었다.(叔孫得臣卒)”(노나라 선공 5년)
 아주 짤막한 기록이다. 그런데 이 5자의 한자 속에 공자의 숨은 뜻이 있다는 것이다. 
 후한의 사상가 하휴(129~182)는 이 대목에서 날짜가 기록되지 않은 것을 문제삼았다.(<춘추공양해고(春秋公羊解고)>)
 “<춘추>에서 날짜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공자 수가 임금을 시해하려던 것을 숙손득신이 알았는데, 신하가 되고서 도적을 알고도 말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주살되어야 함을 밝힌 것이다.”
 공자가 분명 직접 들었던 시대의 기록일진대, 날짜가 없다는 것은 공자의 ‘춘추필법’이 분명하다는 것. 즉 당시 대부가 죽었을 때, 죄없는 자는 날짜를 기록했다는 것. 그런데 공자가 날짜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필시 숙손득신의 죄를 필주하는 필법을 담았다고 본 것이다. 이같은 토막기록을 갖고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을 내린 것이다.

 

 ■마음을 따져 죄를 결정한다?
 또 있다. <춘추>에 이런 대목이 있다.
 “양나라가 멸망했다.(梁亡)”(노나라 희공 19년)
 단 2자의 아주 간단한 기록인데, <춘추공양전>은 매우 장황하게 풀이했다.
 “양나라는 아직 정벌 당하지 않았는데 멸망했다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스스로 멸망한 것이다. 고기가 썩듯 내부에서 무너져서 멸망하기 때문이다.”
 또 “거나라 군주인 서기를 시해했다”는 <춘추>의 기록을 두고. <공양전>은 “<춘추>가 나라를 거론하면서까지 시해했다고 한 것은 백성이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이라고 해석했다.
 하나 더 거론해보자.
 “오나라 자작 임금이 초나라를 정벌하다가 소나라 성문에 접근해서 죽었다.”(노나라 양공 25년)
 두 가지다. 군왕을 자칭했던 오나라 제후를 자작(子爵)으로 낮춰 기록한 것이 공자의 첫번째 포폄이다. 두번째는 역시 하휴의 주석이다.
 “오나라 임금이 초나라를 정벌하려고 소나라를 지났는데, 길을 빌리지 않고 갑자기 소나라 성문으로 난입했다. 그러자 소나라 문지기가 그를 쏘아 죽였다. 자기 나라를 침범하려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군자(공자)는 모르고 한 일은 원망하지 않기 때문에 소나라 문지기가 오나라 임금을 죽일 수도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무슨 말인가. 소나라 문지기는 영문을 모르고 오나라 군주를 쏴 죽였기 때문에 ‘무혐의’라고 판결한 것이다. 이것이 결국 ‘마음을 따져서 죄를 결정한다(論心定罪)’는 <춘추공양전>의 논단이다. 

공자의 고택과 공묘. 공자가 춘추를 지은 뜻은 컸으나 후대의 지도자들은 춘추필법 가운데 '사람의 악심'만 참고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사람의 악심(惡心)만 들여다본 판결
 사실 ‘마음을 따져 죄를 결정한다’는 ‘논심정죄(論心定罪)’의 원칙은 갈수록 무색해졌다.
 ‘행위자의 마음’ 가운데서 선의(善意)를 참작하지 않고, 악의(惡意)만을 강조하려는 습성이 짙어지게 된 것이다.
 권력자들이 해석한 ‘춘추대의’는 바로 <춘추>의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컨대 <후한서> ‘공융전’과 <전한서> ‘두연년전’에 나타난 사건을 비교해보자. 먼저 ‘공융전’….
 “태부인 마일제가 사신 자격으로 반역자인 원술과 교섭했다. 원술은 마일제를 자기 진영에 억지로 끌어들이려 했다. (원술은 1년 이상 마일제를 놓아주지 않았다.) 마일제는 분개해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마일제의 상여가 돌아왔을 때 조정은 그를 예우하려 했다. 하지만 공융은 반대했다. ‘왕실의 대신이라는 자가 위협을 당했다는 변명을 할 수 있는가. 원술이 반역자라는 사실은 천하가 아는 것인데, 그를 따라다니며 1년 이상 교제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공융은 <춘추>의 숙손득신을 마일제와 비교하면서 “절대 그를 예우해서는 안된다”고 공박했다. 그러니까 임금의 시해를 미리 알고 있었지만 밝히지 않았던 숙손득신과, 반역자 원술을 1년 이상 교제한 마일제를 동급으로 본 것이다. 숙손득신과 마일제의 마음 가운데 악심(惡心)만을 들여다 본 것이다.

 

 ■죄가 됐다가 무죄가 됐다가…
 이번에는 ‘두연년전’의 내용을 보자. 
 “어사대부인 상홍양이 대역무도죄로 주살됐다. 상홍양의 아들 상천이 도망쳐 부친의 옛 동료인 후사오의 집에 가서 숨어 지냈다. 후사오는 자수해서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관은 후사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후사오의 집에 숨은 상천은 모반자가 아니라 모반자의 아들이라는 점이 참작됐다. 하지만 나중에 이 사건을 재심한 시어사(侍御史·비리를 감찰하는 직책)의 판결은 달랐다. ‘상천은 부친의 모반을 알고도 간쟁하지 않았으니 반역자와 다름없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그런 반역자를 숨겨준 후사오 역시 사면할 수 없다고 탄핵했다.”
 얼마나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판결인가. 위정자들은 특히 대역죄나 모반죄 등에 전가의 보도처럼 ‘멋대로 판결’을 휘둘러댔다. 
 가장 골치아픈 <춘추>의 구절이 있다.
 바로 ‘장심(將心)’이다. ‘장심’은 ‘임금을 해치려는 뜻’, 즉 역심(逆心)을 말한다. <춘추공양전> 장공 32년조에 나온다.
 “임금과 어버이를 죽이려는 의도를 품어서도 안된다. 그런 마음을 갖기만 해도 반드시 주살된다.(君親無將 將而誅焉)”
 <한서> ‘회남왕전’을 보자. 한 고조 유방의 손자인 회남왕 유안(기원전 179~122·<회남자>의 편찬자)이 역모의 혐의를 쓰고 결국 자살을 강요당하는 내용이 나온다.
 “43명이 나서 회남왕 유안이 대역죄를 저질렀으니 마땅히 주살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춘추>에서 ‘신하는 임금을 장자 죽이려는 의도를  품어서는 안된다. 죽이려는 의도만 품어도 반드시 주살한다’(臣無將 臣無將誅)고 했으니까…. 회남왕의 죄는 장차 죽이려는 의도를 품은 것보다 무겁다.”
 유안은 결국 ‘춘추대의’을 반했다는 이유, 즉 역심을 품었다는 죄로 처단되는 비운을 맛본 것이다. 

최근 출간된 '국가의 백성의 漢'(글항아리). 공자의 춘추필법이 가리키는 이른바 ‘춘추대의’의 허와 실을 살펴볼 수 있다.

■군주를 모독한 죄
 <공양전> 성공 2년의 기록을 보면 또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제나라 경공이 진(晉)나라와 전쟁을 벌이다가 포위당했다. 이때 경공의 마차 오른쪽에 탑승한 봉추보의 생김새가 경공과 비슷했다. 봉추보는 경공의 행세를 해서 진나라 군대를 속이고 경공을 무사히 탈출시켰다. 그러나 봉추보는 상을 받기는커녕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봉추보가 경공의 행세를 할 때 경공에게 “물을 떠오라”고 시킨 것이 문제가 됐다. 아무리 임금 행세를 한다해도 그렇지…. 감히 임금에게 치욕을 안겨주었다는 죄를 뒤집어 쓴 것이다. <공양전>은 봉추보의 참수를 두고 “당연한 것”이라 해석했다.
 봉추보는 제 몸을 던져 임금을 구했지만 ‘국왕 모독죄’로 참수당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헷갈리는 법의 잣대
 앞서 살폈듯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춘추대의’를 어겼다는 이유로 죽어 나갔으며, 삼족에 구족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던가.
 그럴 때마다 인용된 것이 바로 <춘추>이며, <춘추공양전>이 아닌가.
 물론 공자의 ‘춘추필법’은 난신적자들을 두렵게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공자 스스로 <춘추>를 완성한 다음 이렇게 자부했다지 않은가.
 “후세에 날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일 것이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어도 <춘추> 때문일 것이다.”(<사기> ‘공자세가’)
 그렇다면 ‘춘추대의’를 어겼다는 대역죄를 뒤집어 쓰고 죽어간 사람들은 무엇이라 했을까. 모호한 어법으로 <춘추>를 써서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을 낳게 하여 피비린내를 풍기게 한 공자를 비난했을까.
 하기야 어디 공자 탓일까. 공자와 <춘추>를 견강부회해서 백성들을 죽였다 살렸다 하며 쥐락펴락한 자들이 잘못한 게지. 제 아무리 ‘성인의 <춘추>’라도 백정에게 주면 ‘백정놈의 <춘추>’가 되는 것이니…. 그나저나 지금의 법은 어떤가. 성인의 법인가, 백정의 법인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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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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