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8월 풍납토성 성벽을 발굴 중이던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단은 뜻밖의 흔적을 발견했다.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누군가 뻘층에 남긴 발자국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양생 중인 콘크리트에 실수로 찍힌 발자국이었다.
 이 발자국의 연대는 기원후 200년 쯤으로 추정됐다. 백제는 최소한 2차례 이상에 걸쳐 풍납토성을 완성했는데, 발자국이 찍힌 곳의 연대측정 결과 기원후 200년 쯤으로 측정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발자국은 최소한 1800년 전 백제인의 발자국인 셈이다.
 발자국의 크기는 폭 12㎝, 길이 36㎝ 정도됐다. 주인공의 발자국은 뻘을 밟으면서 약간 밀려 실제의 발 크기보다 크게 나온 것이리라.  

한성백제의 도성으로 지목된 풍납토성의 성벽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백제인의 발자국. 1800년 전 쯤 성을 쌓았거나 증축할 때 관여한 백제 토목기사나 인부의 것으로 추정된다.|국립문화재연구소

 ■콘트리트에 찍힌 발자국?
 그렇다면 이 발자국의 주인공은 대체 누구였을까.
 풍납토성은 한성백제(기원전 18~기원후 475년)의 왕성으로 지목된 곳이다. 백제 시조 온조왕은 기원전 6년 이곳 풍납동에 도읍을 정했다. 그런 뒤 궁궐을 짓고 성을 쌓았다.
 최소한 2차례에 걸쳐 쌓은 성의 규모(길이 3.5㎞, 폭 43m, 높이 11m)는 엄청났다. 고고학자들은 흙을 운반하고 성을 쌓은 인원이 연 450만명 정도 됐을 것이라고 추산한다.
 흙의 양(226만t)과 <통전(通典)> ‘수거법(守拒法)’ 등에 나온 척(尺) 등을 종합해서 계산한 것이다. 송곳으로 찔러도 끄떡없는 판축토성이었다.
 나무판을 하나하나 세워 틀을 만든 뒤 그 안에 진흙과 모래를 다져 쌓았다. 기술자들은 목봉으로 일일이 흙을 다져댔다. 10겹 이상 나뭇잎과 나뭇껍질을 뻘흙과 함께 다진 곳도 보였다.
 바로 이곳이 발자국이 확인된 뻘흙층이다. 나뭇껍질과 낙엽 등을 뻘흙과 함께 다진 이 부엽공법(敷葉工法)은 김제 벽골제와 부여 나성 축조에도 활용된 선진공법이었다. 또 400년 뒤 쌓은 일본 규수와 오사카의 제방에서도 확인됐다. 그렇다면 발자국의 주인공은 최신 기술을 가진 당대 최고의 토목기술자가 남긴 것일까.
 아니 이 분은 그저 나라의 명에 끌려온 힘없는 노역자일 수도 있다. 고고학의 즐거움은 상상력이다. 우리는 1800년 만에 현현한 발자국 하나로 소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풍납토성 성벽. 판을 만들어 그 안에  낙엽과 나뭇잎을 흙과 다져넣은 공법, 즉 부엽공법으로 단단히 쌓았다. 풍납토성 신축과 증 개축에 연인원 450만명이 투입돼을 것이라는 연구가 있다.   

 ■“국상은 백성을 위해 죽으려 하는가?”
 한가지 떠오르는 생각…. 되지 못한 지도자가 왕위에 오르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똥폼’을 잡는 것이다. 예를 한가지 들어보자.
 진시황에 이어 황위에 오른 진 2세(재위 기원전 210~207)는 70만 명을 동원, 아방궁과 만리장성을 쌓았다. 신하들이 “제발 그만하라”고 상주하자 진2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은 내 맘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맘대로 하겠다는 데 무슨 헛소리냐.”(<사기> ‘진시황본기’)
 사마천(司馬遷)은 진2세를 두고 “사람의 머리를 하고 짐승의 소리를 내뱉는다(人頭畜鳴)”고 장탄식 한다. 결국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한 지 불과 15년만에 몰락하고 만다.
 굳이 중국의 예를 들을 것도 없다.
 고구려 봉상왕(재위 292~300)도 진2세를 쏙 빼닮았다. 기원후 300년 봉상왕이 나이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모두 징발, 대대적인 궁실수리를 명령했다. 노역과 굶주림에 시달린 백성들은 유리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국상 창조리(倉助利)가 ‘공사중단’을 간언하고 나섰다. 봉상왕은 화를 벌컥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임금은 백성이 우러러 보는 존재이다. 궁실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내보일 수 없다. 지금 국상이 나를 비방하는 까닭이 뭔가. 백성들에게 칭찬을 얻기 위한 것이냐.”
 신하가 백성의 민심을 얻는다? 이것은 임금이 되고자 하는 것이냐는 무시무시한 추궁이었다. 창조리는 손사래를 치며 해명했다.
 “임금이 백성을 근심하지 않으면 어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하지 않으면 충성스럽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전 이미 부족한 재주에도 불구하고 국상의 자리에 있으니….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어찌 명예를 얻고자 하겠습니까.”
 왕이 빙긋 웃으며 뼈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무서운 경고발언이었다.
 “국상은 백성을 위해 죽고자 하는가? 더이상 뒷이야기가 없기를 바란다.”  

풍납토성 내부에서 확인된 백제시대 주거지.

 ■개로왕의 실착과 문무왕의 판단
 391년(진사왕 7년), 백제 진사왕은 궁실을 중수했다. 단순한 중수가 아니었다. 대대적인 토목공사였다.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진귀한 새를 기르고 기이한 화초를 가꾸었다. 화려하고 뛰어난 조경기술을 과시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호사스러운 궁궐 중수에는 많은 비용이 투입됐다. 그러나 당시에는 고구려와의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조달이 가능했다는 분석이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혹은 호화로운 궁궐수축 때문에 민심이 이반된 결과일까. <삼국사기>를 보면 진사왕이 궁궐을 수축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말갈이 백제의 변경을 침략, 적현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불과 1년 뒤인 392년(광개토대왕비문의 기록은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4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 석현 등 10개성을 함락시켰다.
 백제는 요처인 관미성까지 잃었다. <광개토대왕비문>은 이 때(396년) 백제는 58성 700촌을 빼앗겼다고 기록했다. 더불어 백제는 이 때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무릎을 꿇었다. 백제는 이 결정적인 패배로 고구려와의 건곤일척 싸움에서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고구려는 위축된 백제의 숨통을 완전히 끊으려는 계책을 마련한다. 당대의 바둑 고수이자 승려인 도림을 스파이로 삼은 것이다. 마침 백제의 개로왕은 바둑광이었다.
 백제땅으로 흘러 들어간 도림은 개로왕에게 “바둑을 지도하겠다”고 접근한다. 과연 도림은 국수(國手)였다. 개로왕은 도림을 상객으로 모셨다. 개로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도림은 마각을 드러냈다.
 “백제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한데 성곽과 궁궐이 수축·수리 되지 않았습니다. 그 뿐이 아니라 백성들의 집들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집니다.” 
 개로왕은 그만 “알겠다”고 허락한다. 개로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풍납토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 누각, 사대를 지었다. 웅장하고 화려했다.
 <삼국사기>는 “이 때문에 국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 나라가 누란의 위기를 맞았다”고 기록했다. 목적을 달성한 도림은 잽싸게 고구려로 달려가 장수왕에게 고했다.
 장수왕은 ‘옳다구나’ 하고 대대적인 침략전쟁을 벌인다. 475년 9월 고구려의 침략에 개로왕은 땅이 꺼지도록 후회한다. 

풍납토성 안에서 확인된 백제시대 우물. 우물 안에는 제의 행위 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토기들이 쌓였다. 

“어리석었구나. 간사한 자의 말을 믿다니….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다. 위급해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삼국사기> ‘백제본기·개로왕조)
 한성백제의 최후는 이렇게 허망했다.
 이렇듯 대형 토목공사는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기 일쑤다.
 반면 신라 미추왕과 문무왕이다. 276년(미추왕 15년) 봄 신료들이 대궐을 수축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미추왕은 단호했다.
 “그것은 임금이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입니다. 따르지 않겠습니다.”
 문무왕은 또 어땠는가. 681년(문무왕 21년), 임금이 왕경에 성을 새로 쌓으려 의상대사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의상대사의 간언은 단호했다.
 “들판의 띠집에 살아도 바른 도를 행하면 곧 복된 왕업은 영원히 계속될 겁니다. 사람을 힘들게 해서 성을 만들면 이익되는 바가 없습니다.”
 문무왕은 의상대사의 이 한마디에 궁궐 신축의 유혹을 뿌리쳤다.

 

 ■성(城)은 높지만 민심이 더 높다
 조선시대의 예를 들자.
 1446년(세종 28년) 양계(兩界·평안·함경도)에 성을 쌓는 대역사가 펼쳐지자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이 상소문을 올렸다.
 “변방에 성을 쌓는 일은 나라의 큰 역사인데…. 고아와 과부가 울면서 변방의 성(城)을 바라볼테니 그 원통하고 원망스러움을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을 쌓는 일이 만세의 이익이라 하지만, 또한 만세의 폐단이 있습니다. 축성(築城)은 성인(聖人)이라도 반드시 삼가는데 하물며….” 
 이계전은 “기상이변이 잇달아 일어나 수해와 한발이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그 까닭이 있다”며 이같은 상소를 올린 것이다. 세종 임금도 이계전의 뜻을 알아차리고 다음과 같이 답한다.
 “그래. 근래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백성이 삶을 유지하지 못하니, 사람의 일이 다하지 못함이 있는가 두렵도다. 어찌 백성들의 원망과 탄식이 없겠는가. 일의 완급을 조절해서 백성들의 원망을 사지 말자. 좋은 대책을 마련하라.”
 또 있다. 1745년(영조 21년) 사간원 정언 이훈이 강화도 축성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성이 높아서 100척이나 되고 견고하기가 철벽같다 해도 여러 사람의 마음으로 이룬 성만 못할 것입니다.(雖使城高百尺 堅如鐵壁 不如衆心之城也)”(영조실록)
 숙종 때(숙종 29년·1703년) 북한산성의 축조를 반대한 행사직 이인엽의 상소를 보자.
 “비록 높은 성벽이 솟아있다 한들 백성이 진심으로 좇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습니까.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방법은 군주의 덕에 있지, 지세의 험준함에 있지 않습니다.”(<숙종실록>) 

 북한산성 동장대. 백운대와 만경봉 등 깎아지른 듯한 북한산의 위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숙종과 영조, 정조가 올라와 감탄했던 곳이다. 숙종이 북한산성을 축조하려 하자 힘든 노역에 백성드의 민심이 동요된다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    

 ■발자국의 주인공이 남긴 메시지
 그런 생각이 든다. 만약 백제 진사왕이나 개로왕이 창업주인 온조왕의 신신당부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 온조왕은 기원전 4년(온조왕 15년), 위례성을 쌓으면서 후대에 길이 빛날 특명을 내렸다.
 “도성은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게 쌓아라.(儉而不陋 華而不侈)”(<삼국사기>)
 아마도 진사왕이나 개로왕이나 뒤늦게 온조대왕의 유훈을 깨닫고 땅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으니….
 그랬든 저랬든 한가지 더 드는 생각.
 주야장천 간단없는 노역에 시달려온 백성은 상관없다. 검소했든 화려했든 어떻든 간에 고단한 노역이었을테니까….
 발자국의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성을 쌓은 지 30년도 안된 기원후 23년(온조왕 41년) 15살 이상인 한강의 동북 쪽 백성들이 징발됐다.
 농사철을 앞둔 2월(음력)에 성을 고쳐 쌓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풍납토성에 남긴 발자국의 주인공은 혹 이 분들 가운데 있지 않았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뻘흙을 다지는 작업을 벌이다가 아차 실수로 발도장을 찍어놓고는 남이 볼세라 살짝 덮어버린….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51 관련글 쓰기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이다.’
 1650년 무렵, 영국 국교회의 제임스 어셔 대주교는 아주 흥미로운 계산을 해낸다. 성경의 인물들을 토대로 천지창조일을 역산한 결과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날짜를 지목한 것이다. 유럽인들은 이후 이 날짜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날’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로부터 꼭 206년이 지난 1856년, 독일 뒤셀도르프 인근의 네안더 골짜기 석회암 동굴에서 이상한 화석이 발견됐다. 채석공들의 삽에서 골반뼈와 눈 위 부분이 뚜렷하게 튀어나온 머리뼈를 비롯, 상당량의 뼈들이 걸려나온 것이다. 사람 같지만, 오늘날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돌출이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상상할 수 없었다.(네안더 골짜기에서 확인된 고인류라는 뜻에서 네안데르탈인이라 명명됐다.) 다시 그 후 3년 뒤인 1859년,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진화론을 개진한다. 이는 ‘창조론’을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 우스터 교구의 주교 부인은 “맙소사! 우리가 원숭이의 후손이었다는 말이냐.”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사실이 퍼져나가지 않도록 하자”며 “두 손 모아 기도하자”고 촉구했다.  

 1929년 12월 2일 페이원중이 발굴한 베이징 원인의 두개골. 페이원중은 겹겹이 포장한 이 두개골을 우여곡절 끝에 베이징으로 옮겼다.|도서출판 인간사랑 제공

1891년 네덜란드 해부학자 외젠 뒤부아(1858~1940)는 자바섬 솔로강변 트리닐 섬에서 흥미로운 뼈무더기를 발견한다.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 정도 쯤 되는 동물의 두개골과 아래턱뼈, 이빨 3개, 대퇴골 하나를 찾아낸 것이다. 이 세 화석을 조립한 결과 두 발로 서서 걸었음이 확실해졌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 과정 중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 즉 원숭이~인간을 이어주는 고리를 찾은 것이다. 뒤부아는 ‘직립(直立·곧추 선) 원인(猿人·원숭이와 인간의 중간)’이라면서 ‘자바원인(Pithecanthropus erectus)’이라 이름붙였다. 뒤부아의 주장은 유럽에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뒤부아의 화석은 ‘소두증에 걸린 기형아의 뼈일 뿐’이라 폄훼했다. 뒤부아는 결국 여론의 십자포화에 밀려 자바인의 유골을 두고 ‘넓은 어깨 원숭이의 유골’이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서
 자바인이 발견된 후 30년이 지난 1921년 어느 날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생물학자 오토 즈단스키는 중국 베이징에서 50㎞ 떨어진 저우커우뎬(주구점·周口店) 유적을 발굴하다가 심상찮은 치아(이빨) 한개를 발견했다.
 즈단스키는 스웨덴의 지질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요한 군나르 안데르손이 주도한 저우커우뎬 유적 발굴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때 즈단스키가 발견한 치아는 놀랍게도 인간의 치아였다. 그러나 즈단스키는 유인원의 치아로 잘못 해석하고 말았다. 1923년 그가 발표한 <중국지질조사보고서>에 이 의미심장한 치아를 보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3년 뒤인 1926년, 저우커우뎬 유적에서 발굴한 화석표본들을 정리하던 즈단스키의 눈이 번뜩였다.
 인간의 치아로 보이는 화석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아뿔사! 1921년 즈단스키 스스로가 발굴했다가 치워버린 화석과 같은 것이었다. 새삼스럽게 정밀조사해보니 손상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아관(牙冠·잇몸 위로 노출된 이빨)이 마모된 부분이 전혀 없는 온전한 이빨이었다. 흥분한 즈단스키는 그 치아를 현생인류의 것과 비교 분석했고, 그 결과 인간의 것임을 확인했다.
 저우커우뎬 발굴의 책임자인 안데르손의 발표는 학계를 놀라게 했다.
 “저우커우뎬 유적지의 지층은 아마도 신생대(200만 년 전~)일 가능성이 많다. 중요한 것은 오랜 인류의 화석이 아시아 동부에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자바에서는 자바원인이 있었고….”
 아시아 대륙에서는 오래된 인류의 화석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전문가들은 경악했다. 안데르손의 발표에 미국의 고생물학자 아마데우스 그레이보(1870~1946)은 즉석에서 치아의 주인공에게 ‘베이징 원인(北京猿人)’이라 명명했다. 하지만 안데르손의 발표는 여전히 ‘믿기 어려운 학설’에 불과했다. 

50만 년 전의 고인류인 베이징원인의 두개골 모형. 유인원과 현생인류의 고리를 이어주는 인류의 유산이다. 그러나 베이징 원인의 진짜 화석들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베이징원인의 흔적
 ‘베이징 원인’의 존재를 확증할 증거가 필요했다.
 미국 록펠러 재단의 재정지원 아래 본격적인 저우커우뎬 발굴에 돌입했다. 캐나다 출신의 미국 인류학자인 데이비슨 블랙이 선봉에 섰다.
 이후 베이징인의 부분체가 잇달아 확인됐다. 1927년 10월 발굴팀의 일원인 안데르스 비르거 볼린(스웨덴 고생물학자)이 즈단스키가 고인류의 치아를 발견한(1921년) 바로 그 지점에서 오른쪽 아래 어금니를 발굴했다. 이 치아 화석은 보전상태가 전혀 훼손된 곳 없이 완벽했다. 어금니 발견소식을 접한 블랙은 어쩔줄 몰라했다.
 “우린 지금 아주 멋진 인간의 치아를 발견했군!”
 블랙은 원숭이와 현대인의 중간에 속하는 이 고인류에게 ‘북경원인 북경종(Sinanthropus pekinesis)’이란 새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그레이보가 이미 붙여준 이름인 ‘베이징 원인(Homo erectus pekininesis)이 더 널리 쓰이고 있다. 연구결과 볼린이 발견한 치아는 성인의 왼쪽 첫번째 어금니였으며 즈단스키가 발견한 어금니와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이후 저우커우뎬에서는 다양한 ‘베이징 원인들’이 현현했다. 소녀의 아래턱뼈(28년 봄)와 성인남자의 아래턱뼈(28년 11월)가 잇달아 나왔던 것이다. 특히 성인남자의 아래턱뼈에서는 완벽한 형태의 어금니 3개가 붙어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1929년이 다가왔을 때 저우커우뎬의 발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때까지 발굴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하나 둘씩 현장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발굴단은 1928년의 조사에서 저우커우덴 현장에서도 가장 단단한 지층(제5층)까지 도달한 바 있다. 이 지층 아래에서는 어떤 동물의 화석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발굴단은 “아마 이 단단한 암반층이 베이징 원인이 살았던 최후의 지층이 아니겠느냐”고 판단하고 있었다. 발굴에 참여했던 볼린 등 전문가들은 “이제 현장을 마무리하라”는 메시지를 남기며 속속 현장을 떠났다.
 하지만 “저우커우뎬의 화석분포는 매우 복잡하므로 화석이 없을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발굴 강행을 주장한 이가 있었다.
 중국지질조사소의 신참 연구원이었던 페이원중(裴文中)이었다. 그는 1927년 대학(베이징대 지질학과)를 졸업하고, 저우커우뎬 발굴에 참여한 25살의 젊은 고고학도였다.
 페이원중은 물론 풋나기였지만, 미친듯 고고학 공부에 빠졌다. 고생물학 영어 원서를 밤세워 읽다가 깜박 잠이 드는 바람에 촛불이 책과 이불에 옮겨붙어 큰 일 날 뻔 한 적도 있었다.
 1928년의 발굴에서 수습조사원으로 참여했지만 단 1년 만에 능숙한 발굴 전문가로 변모했다. 그가 저우커우뎬 발굴의 강행을 주장하고 나서자, “그럼 한번 네가 해보라”는 명령을 받게 된 것이다. 졸지에 발굴책임자를 맡게 된 페이원중의 회고.
 “모두들 ‘이제 그만 끝내’라는 지시만 내리고 떠난 후였다. 산 속은 정적 만이 감돌고, 외로운 생활이 시작됐다. 매우 단단한 암반층(제5층)을 폭파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마치 ‘닭쫓던 개’의 신세가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제5층을 폭파시키고, 제6·7·8층에 이어 제9층까지 파내자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났다. 사슴의 턱뼈 145개 등이 확인됐고, 제8~9층에서는 베이징인의 이빨이 몇 개 나왔다.
 발굴층의 깊이는 더해갔고. 퇴적물의 범위 또한 좁아졌다. 마침내 깔대기 모양의 발굴 구덩이 맨 밑바닥에 도달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겨울철인 11월 말에 이른 것이다.
 얼어버린 땅에서 발굴은 불가능하다. 지금이야 거액을 들여 비닐하우스를 치고 발굴작업에 나설 수 있지만, 얼마 전까지는 겨울이 다가오면 그 해의 발굴을 끝내야 했다.
 역시 베이징에서 “겨울이 됐으니 올해의 작업은 끝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페이원중은 갈등했다. 마지막 남은 깔대기 모양의 좁디좁은 맨 밑바닥 퇴적층….
 ‘저기에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여기서 중단해야 한다는 건가.’
 베이징에서 온 전보를 만지작거리던 페이원중은 장고 끝에 ‘발굴 강행’을 결정했다.
 ‘그래 단 며칠만이라도 더 해보자.’  

페이원중이 발굴중인 저우커우뎬 유적. 50만 년 전 직립원인이 확인됐다. 

■“틀림없는 사람 머리야!”
 1929년 12월 2일, 날씨는 매우 추웠다. 발굴자들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북풍 한기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서산으로 해가 저물기 시작한 오후 4시였다. 겨우 몇 사람이 쭈그려 앉을 수 있는 깔대기 모양의 퇴적층을 파고 있던 바로 그 때…. 망치와 정이 돌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아주 자그마한 틈새가 벌어졌다. 그 틈새를 벌리니 작은 동굴이 노출됐다. 페이원중은 전율에 휩싸였다. 즉시 밧줄로 허리를 묶고 동굴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한 5~6m쯤 나아갔을까. 잠시 발길을 멈추고 쭈그리고 앉아 주변을 살피던 그의 눈에 놀라운 광경이 잡혔다. 동굴 밑바닥에 흰 뼈가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페이원중은 자신이 아주 작은 동굴에 앉아있다는 사실도 잊고 벌떡 일어나다가 동굴 천장에 머리를 세게 부딪쳐 기절할 뻔했다. 그러나 아픔을 느낄 정신이 없었다.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동굴 밖으로 빠져 나오던 페이원중의 말이 떨렸다.
 “내가 사람(원인·猿人)을 찾았어. 난 난…. 뭔가가 더 안에 있는 것 같아.”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페이원중은 발굴단원 3명과 함께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페이를 비롯한 4명은 아무 말없이 한 손엔 촛불을 다른 한 손엔 망치와 삽으로 흙을 파냈다.
 “여기 보세요.”
 작업자 가운데 누군가 소리쳤다. 페이원중이 용수철 튀기듯 달려갔다.
 “이건 사람 머리 같은데…. 틀림없는 사람머리야.”
 두개골은 절반 정도는 단단한 모래 흙에 묻혀 있었고, 나머지는 노출돼 있었다. 페이원중은 지렛대를 이용해서 땅 속에 반 쯤 파묻혀있는 두개골을 수습했다.
 지렛대 과정에서 두개골의 밑바닥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떨어진 파편을 살펴보니 ‘베이징 원인’의 두개골이 현대인의 두개골 보다 훨씬 두껍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우커우뎬의 빌굴 현장. 이곳에서는 1921년부터 유인원과 현생인류의 중간 쯤 되는 흥미로운 화석 조각들이 잇달아 확인된 바 있다. 급기야 1929년 온전한 형태의 두개골이 나왔다. 과학계는 50만 년 전에 살았던 고인류에게 '베이징원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차라리 날 체포해라!”
 이미 발견된 이빨과 아래턱뼈 등으로 베이징인의 연대가 50만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었던 때였다. 페이원중은 놀라운 발견 소식을 베이징에 타전했다.
 완벽한 ‘베이징원인’의 두개골이 확인됐다? 그야말로 두 눈과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다. 게다가 25살의 풋나기가 그런 위대한 발견을 했다고? 상당수의 전문가들이 반신반의했다. 위대한 발굴이 있은지 4일 뒤인 12월 6일, 페이원중은 겹겹이 포장한 ‘베이징인’ 화석을 들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베이징 성 입구에서 경찰의 검문을 받은 것이다. 검문은 삼엄하고 집요했다. 모든 짐을 풀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페이원중이 ‘중요한 화석이니 포장을 열면 큰 일 난다’고 애원했다. 그럼에도 경찰은 요지부동이었다. 겉을 발라놓은 마대와 종이를 떼어내고 두개골의 표면을 벗겨내려 했다.
 머리가 하얗게 변한 페이원중은 경찰의 손을 밀어내고 외쳤다.
 “멈춰. 포장을 걷어내려면 차라리 날 체포해!”
 나이 지긋한 경관이 개입한 뒤에야 소란이 그쳤다. 경관의 무지한 손에 의해 훼손될 수 있었던 50만 년 전의 고인류가 가까스로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50만 년 전의 인류
 두개골은 천신만고 끝에 화석 전문가인 데이비슨 블랙에게 전달됐다.
 “맞아요. 정말 사람이군요. 사람!”
 얼마나 손이 떨렸던지 하마터면 두개골을 떨어뜨릴 뻔했다. 블랙은 왜 ‘베이징원인’을 보고 몸을 떨었을까.
 사실 진화론에 입각하면 원숭이~현생인류 사이에 세 단계를 거친다. 첫째는 300만년~100만 년 전인 고원류(古猿類)의 단계이고, 셋째 단계는 20만 년 전~1만 년 전에 존재한 지인(智人·호모 사피언스)이다. 그런데 첫번째와 세번째 단계의 고리를 이어주는 것이 바로 ‘직립인(直立人·호모에렉투스)’ 단계이다.
 이미 1891년 자바섬에서 확인된 자바인이 바로 이 단계의 고인류였지만, 그 때까지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때에 그것도 다름아닌 아시아 대륙의 동쪽, 베이징에서 ‘직립인’이 확인됐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를 최소한 20만 년 전으로 올린 희소식이었다.
 1929년 12월 29일자 <신보>는 베이징인의 출현소식을 대서특필했다.
 “국내외 학자들이 참석한 중국 지질학회 특별회의가 열렸다. 전문가들은 저우커우뎬에서 확인된 두개골 화석의 연대를 50만 년 전이라 했다. 전문가들은 베이징인은 바자에서 확인된 ‘자바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풋나기 고고학자인 페이원중은 현장 고고학을 통해 다윈이 제기한 진화론에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한 인물로 평가됐다. 

베이징 원인의 두개골을 토대로 만든 두상. 중국인들은 지금도 저우커우뎬에서 발굴된 실물 두개골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 

 ■불과 도구 사용의 증거
 페이원중의 관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21년부터 시작된 저우커우덴 유적 발굴 때마다 상당량의 석영조각들이 확인된 바 있다.
 그동안의 발굴에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페이원중은 1931년 저우커우뎬의 거쯔탕 동굴에서 확인된 석영 조각편에서 사람의 채취를 맡았다.
 석회암 지대인 동굴 지역에서는 석영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곳에는 왜 이렇게 많은 석영조각들이 있단 말인가. 페이원중은 멀리 내다보이는 강변을 주목했다. 석영편에서는 사람의 손으로 가공한 흔적들이 완연하게 보였다. 이 뿐이 아니었다. 거쯔탕 동굴에서 확인된 진흙층은 다름아닌 타고 남은 재였다. 거쯔탕 뿐 아니라 베이징원인의 흔적이 보인 동굴에서도 불에 탄 흙이 보였다. 재가 쌓인 흙에는 불에 타서 남은 돌과 뼛조각이 보였다. 이것은 베이징인이 도구를 사용했고, 채집·사냥한 먹이를 불에 태워 조리했음을 알려주었다.
 인류가 도구와 불을 사용한 역사가 몇 십 만 년 앞당겨진 것이다.
 한번 완전한 형태로 선을 보인 베이징인은 또 한 번 그 자태를 드러냈다.
 1936년 11월 15일, 페이원중에 이어 저우커우뎬 발굴에 나선 자란포(賈蘭坡)가 또 한 명의 ‘베이징인’을 찾아낸 것이다,
 차례로 나타나는 뼛조각을 짜맞추자 하나의 완전한 두개골이 완성됐다. 흥분도 잠시, 한 명, 또 한 명의 베이징인들이 줄줄이 나왔다. 이 때(36년) 발굴에서 11일 사이에 확인된 3개의 두개골은 성인 남자 2명과 여성 한 명이었다. 성인의 뇌용량은 1015~1225㏄ 정도였는데, 이는 현대인(1400㏄)보다는 적지만 원숭이의 평균 뇌용량보다는 훨씬 많았다.

 

 ■실패한 베이징인 피난작전
 그런데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의 루거우차오(蘆溝橋) 도발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저우커우뎬 발굴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 때까지 발굴된 베이징 원인의 화석들은 모두 베이징 협화의학원 B동 연구실 금고에 안치돼 있었다. 협화의학원은 1917년 미국 록펠러 재단이 설립한 의과대학이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그러나 1941년 들어 미·일 관계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자 베이징 원인의 안녕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당시 협화의학원 신생대연구실을 책임지고 있던 페이원중은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다. ‘베이징 원인들’을 뉴욕 자연사박물관으로 피신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페이원중은 중칭(重慶) 국민당 정부의 허락을 얻고자 했다. ‘베이징 원인들의 미국 피신’을 허락해달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하지만 답신은 없었다. 그 사이(4월) 불안감에 휩싸인 연구소측은 베이징 원인들의 두개골 모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모형제작이 얼마나 중요한 결정이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중칭 정부의 답신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1월 말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그 사이 일본인들은 끊임없이 연구실 금고에 있던 베이징 원인의 화석을 노렸다.
 동경국제대학 교수인 하세베 고톤도(長谷部言人)가 연구실을 찾아와 베이징 원인의 공동연구를 제의했다. 물론 페이원중은 하세베의 제의를 단칼에 잘랐다. 급기야 일제에게 매수당한 청소부가 ‘베이징인’을 보관해놓은 금고를 뒤지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중칭으로부터 답신은 오지 않고…. 일제의 집요한 노림수는 계속되고….
 11월말 쯤 애타게 기다리던 중칭 정부의 답신이 도착했다. 연구실 직원인 후청즈(胡承志)가 베이징인들을 포장했다. 얇은 면포와 부드러운 종이, 의학용 솜, 반투명 종이, 의학용 세마포로 귀중한 인류화석을 겹겹이 쌌다. 화석은 두 개의 상자로 나뉘어 포장됐다. 베이징 원인들을 실은 트럭이 미국 공사관을 향해 출발했다. 트럭은 다시 베이징에 주둔한 미 해병대 막사로 갔다.
 다시 12월 5일 미 해병대 전용열차가 발해 연안의 친황다오(秦皇島)로 향해 달렸다. 미 해병대가 ‘베이징인’ 화석을 담은 나무상자를 미국 상선 프레지던트 해리슨호에 옮겨 싣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이 불바다가 되면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됐다. 중국 대륙의 일본군은 베이징, 톈진, 친황다오로 일제히 진격했다.
 하루 뒤인 12월 8일 일본군은 모든 미국의 기관을 신속하게 점령했다. 미 해병 전용열차도 친황다오에서 일본군에 의해 역류됐다. 베이징인들을 태울 계획이었던 프레지던트 해리슨호는 친황다오로 가던 중 징발됐다. 이 선박은 앙쯔강(揚子江) 부근에서 가라앉았다.
 그와 함께 ‘베이징 원인의 행방’도 묘연해졌다.   

베이징 원인을 발굴한 페이원중. 그는 25살의 젊은 나이에 세계 고고학사에 남는 위대한 발굴의 주인공이 됐다.

 ■일본 첩자의 할복
 일제는 협화의학원 신생대연구실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찾는 물건(베이징 원인 화석)은 없었다.
 그후 1년 반 후(1942년 말~43년 초) 일본인 첩자인 조사 시게하루(錠者繁晴)가 연구실을 찾아와 페이원중 등 관계자들을 모두 잡아 현병대로 끌고 갔다. 관계자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뚜렷한 단서는 얻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난 뒤 갑자기 베이징 원인을 톈진에서 찾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때 이후 일본인들의 수색이 거짓말처럼 종료됐다. 일본인들이 정말로 베이징 원인을 찾았는 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아니면 베이징 원인의 화석 일부라도 찾았을까. 
 알 수 없는 것은 일본인 첩자 조사 시게하루가 ‘임무 실패’의 책임을 지고 할복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과연 무슨 일 때문이었을까.
 이후에도 사라진 베이징 원인의 행방은 미·중·일 3국 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베이징 원인을 찾았다는 소식이 간헐적으로 들렸다. 그러나 문제가 된 화석들은 가짜이거나 석고 모형들이었다.
 예컨대 1951년 3월, 베이징 원인이 뉴욕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돼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미국을 주적으로 여겼던 중국은 미국의 문물 약탈행위를 맹비난했다. 그러자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도 맞대응했다. 이것은 오해에서 비롯됐다. 영국의 저명한 생물학자가 자연사박물관을 방문했다가 베이징 원인의 ‘두개골 모형’을 보고 진품으로 오인한 것이다.   
 그 밖에도 베이징 원인을 둘러싼 수많은 에피소드가 양산됐다.
 돌이켜보면 베이징 원인의 실종은 조상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을 중국인들에게 안겨주었다. 그러나 ‘베이징 원인’은 전 인류의 유산이지 중국의 유산만은 아니다.
 지난 1998년 베이징 원인을 발굴한 주인공인 자란포 등 14명의 중국과학원 원로들이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이 해 여름 베이징 TV에서 베이징 원인을 찾기 위한 ‘세기말 최후의 추적’을 방영했을 때 90살의 고령이 된 자란포 등이 노구를 이끌고 나선 것이다.
 “비록 베이징 원인의 화석이 전란 속에 훼손됐다 해도 정확한 행방을 찾아야 한다. 전 인류가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우리가 후손들을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인류의 조상은 어딘가에 있다.
 여기서 헛된 상상 하나.
 베이징 원인은 분명 있을까. 모두가 정신없던 전쟁통에 운송 도중에 완전히 훼손되거나 아니면 수장된 것은 아닐까.
 아니 누군가 숨겨놓았다면…. 지금도 중국인들은 여전히 희망의 끈을 잡고 있다.
 우선 미국인이나 일본인이 이 귀중한 유산을 훼손시키지 않았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또한 다른 일반 포장 물품보다 확연히 다른 상자가 아닌가.
 일본은 어떨까. 일본은 일왕의 명령으로 헌병들과 정보원까지 총동원, 샅샅이 뒤졌다. 관련자들을 고문까지 하면서 자백을 받아냈다. 따라서 베이징 원인의 운반경로와 이동방향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톈진에서 베이징 원인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들렸고, 베이징 원인 수색에 선도를 섰던 하세베 등이 종적을 감춘 까닭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베이징 원인은 결국 일본의 손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그러나 ‘임무실패’의 책임을 절감한다며 할복자살을 기도한 첩자 조사 시게하루는 또 무엇인가.
 아니면 혹 중국인의 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인가. 미국인이나 일본인이 경황이 없는 틈에 중국인에게 주었거나 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중국인의 수중에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하기야 신중국 건국 이후 좀 사건이 많았는가. 반우파 투쟁에, 대약진운동에, 문화대혁명에, 개혁개방까지…. 엄청난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칫 정치적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 베이징인의 존재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미국인의 품에 있는 것은 아닐까. 베이징인의 운반에 관여한 인물들이나 미해병대원들은 어떨까. 그 또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어떤 이들은 베이징 원인 발굴작업에 참여한 프랑스인 신부를 용의자로 보기도 한다.
 모든 게 온통 수수께끼이다. 50만년 만에 현현한 베이징인들은 그렇게 태평양 전쟁의 개막과 함께 기억 저편으로 또한번 사라지고 말았다.
 미국인들은 1941년 12월 7일을 진주만이 피격되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날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전 인류는 그 날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50만년 전의 고인류가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전쟁이라는 괴물 때문에 사라진 날을…. 지금도 중국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베이징인들 애타게 찾고 있다.
 “조상들이여! 어디 계십니까.”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참고문헌>
 장자성, <근세 백년 중국 문물 유실사>, 박종일 옮김, 인간사랑, 2014
 웨난·리밍셩, <주구점의 북경인>, 심규호·유소영 옮김, 일빛, 2001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50 관련글 쓰기

 

춘천 중도에서 확인된 고인돌 군. 이런 고인돌들은 흔히 알려진 거대한 탁자식이나 바둑판식 고인돌이 아닌 개석식 고인돌이다. 소박한 형식의 고인돌이다. |서성일 기자  

  100년 전에도 심상치 않은 곳이었나 보다.
 일본의 고고·인류학자인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역시 그 냄새를 맡았다. 하기야 강(江)은 선사시대의 고속도로(강)이자, 문명의 젖줄이니까…. 
 게다가 땅이 가라앉으며 이뤄진 침강분지인 춘천 일대는 북한강과 소양강 상류에서 내려온 토사가 쌓여 이뤄진 비옥한 충적대지였다.
 그러니 농사를 짓게 된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던 것이다. 1915년 식민지 경영을 위해 조선의 구석구석을 답사하던 도리이는 소양강변 춘천 천전리(泉田里·샘밭)에서 10기에 가까운 고인돌과 돌무지 무덤(적석총)을 확인했다. 이후에도 소양강댐 건설공사(1971년)로 수몰된 춘성군 북산면 배평리·추전리·대곡리 등에서도 고인돌의 자취가 보였다.

 

 ■선사인들의 고향
 그러던 1977년 어느 날, 국립박물관 학예사인 이건무와 이백규가 중도(中島)를 찾았다.
 중도는 금강산~통천~회양~양구를 돌아온 북한강과, 설악산~인제~현리를 통해 흘러 들어온 소양강이 만나는 곳이다. 원래 섬이 아니었다. 의암댐 건설(1967년)로 수몰되고 남은 땅이 섬으로 변한 것이다. 그런데 댐 때문에 호수의 수위변동이 심해 강변 쪽은 물줄기가 급격히 변하는 바람에 급속도로 깎기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개석식 고인돌은 지하에 석관으로 무덤방을 만들고 주변에 돌을 쌓아 묘역을 표시하는 형태로 조성됐다. 이 고인돌은 어린아이의 유골을 묻은 고인돌이다.  

 “중도에 들어갔을 때 급격한 수위 변화 때문에 강변 쪽이 3m 가량이나 급격히 깎여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곳에 무문토기편들이 무수히 박혀 있었습니다.”(이건무 전 문화재청장)
 이 때 확인된 경질무문토기는 ‘중도식 토기’라는 이름을 얻었다. 중도에서 ‘안정적으로’ 확인된 원삼국시대(기원 전 후~3세기 사이의 고고학 시대구분)의 표지유물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때부터 중도 뿐 아니라 춘천의 북한강 유역 역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구석기~신석기~청동기~원삼국(초기 삼국)시대 흔적들이 쏟아지는 유적의 보고가 된

다.
 “지금까지 140여 차례 조사된 춘천에서 확인된 유적만 1400만㎡(425만평)이나 됩니다. 발굴되지 않은 지역을 합친다면 어마어마한 규모지요.”(정연우 예맥문화재연구원장)
 “산이 가파르고, 계곡이 깊은 강원도의 경우 북한강(혹은 남한강)을 따라 생긴 그다지 넓지 않은 충적대지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좁은 강 유역에 사람들이 밀집해 살아왔을 겁니다.”(최종래 한강문화재연구원 부장)
 그것이 북한강 유역에서 그나마 넓은 충적대지라 할 수 있는 춘천이 선사인들의 고향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합수부에 있는 중도. 의암댐 건설(1967년) 이후 섬이 됐다. 이곳은 3400~3200년 전부터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터전을 잡고 살았던 청동기인의 마을이다.|한강문화재연구원 제공

 ■유적의 지뢰밭  
 그 중에서도 중도는 핵심지역으로 각광을 받았다. 중도는 국립박물관의 집자리 발굴(1980년) 이후 건드리면 터질 수 있는 ‘유적의 화약고’ 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급기야 지난해(2013년) 11월, 중도 내의 레고랜드 조성부지에서 그 화약고가 터졌다.
 무려 1400여 기의 청동기 시대 유구가 쏟아진 것이다. 고인돌 101기. 집터 917기, 구덩이 355기, 바닥 높은 집터 9기와, 마을을 지키는 긴 도랑 등….
 고고학적인 의미는 대단했다. 우선 강원도 지역에서 고인돌이 이처럼 무더기로 발굴된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집자리에서 ‘둥근 바닥 바리 모양토기’(원저심발형토기)와 ‘덧띠새김무늬토기’(각목돌대문토기)가 확인됐다. 이것들은 유적의 최고(最古) 연대가 조기 청동기시대(기원전 14~12세기)임을 알려주는 지표유물들이다.
 게다가 고조선 시대의 대표유물로 알려진 비파형 동검과 청동도끼 등도 출토됐다. 남한지역 집터에서 처음 확인되는 유물들이다. 또 짐승이나 적의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둘레 404m의 도랑(환호·環濠)도 확인됐다. 이밖에 농사를 지었음을 알려주는 경작 유구까지….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는 이 완벽한 세트의 청동기 마을 유적을 보고는 “마치 역사 시대의 궁성 같은 세계적인 유적”이라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3200년전 쯤 화재 때문에 천장이 고스란히 무너진 모습으로 나타난 처옹기 시대 집자리. 약 8미터 가량의 나무가  겹으로 주저앉은 채 확인됐다.  |서싱일 기자

 ■고인돌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
 기자 역시 설렘을 안고 중도 현장으로 달려갔다. 청동기 시대로 향하는 비밀의 문을 열기 위한 여정이었다.
 과연 고인돌이 열지어 조성돼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풀어야 할 오해 하나. 고인돌이라 하면 엄청난 규모의 탁자식(북방식) 혹은 바둑판식(남방식)을 연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무덤의 주인공은 그 지역을 다스린 수장급일 가능성이 짙다고 해석해왔다. 크게는 100t이나 되는 엄청난 크기의 돌을 옮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계급을 지닌….
 그러나 중도의 고인돌은 그런 엄청난 규모의 고인돌이 아니다. 많은 돌을 이용해서 원형 혹은 장방형의 묘역을 조성하고는 그 중심에 시신을 안치한 돌널무덤을 설치하고 그 위에 상석을 올린, ‘소박한’ 형태의 고인돌이다. 지하의 무덤방 위를 바로 뚜껑으로 덮는다 해서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이라 한다.
 고인돌 전문가인 이영문 동북아지석묘연구소장이 풀어주는 고인돌의 오해와 진실….
 “한반도에만 고인돌이 4만기 정도됩니다. 그만큼 고인돌의 천국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고인돌의 90% 가까이가 탁자식이나 바둑판식이 아니라 중도에서 발견된 것 같은 고인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엄청난 규모의 탁자식·바둑판식 고인돌은 시신 매장용이라기보다는 제사용이나 ‘랜드마크’ 같은 마을의 상징물일 가능성이 짙다는 것.

 

 ■어느 청동기인의 선산
 중도의 ‘소박한’ 고인돌은 실제 시신을 묻고 장례를 치른 실용의 무덤이었다는 게 이영문 소장의 해석이다. 그렇더라도 돌무더기로 묘역을 조성할 정도라면 상당한 신분의 주인공이 아니었을까. 흥미로운 것은 이곳 고인돌들의 배열이 3열로 40여 기가 길게 조성돼있고, 마을 공간 안에도 다수 분포한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5~6세의 어린아이가 구부린 자세로 석관에 묻힌 아주 작은 고인돌도 보였다. 청동기 마을의 공동묘지라 할 수 있을까. 물론 다른 해석도 있을 수 있다.
 “그래도 돌무덤을 쓸 정도의 신분, 즉 수장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시골 마을의 제사와 회의를 주관하는 마을 어른의 대대로 내려오는 무덤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마을 이장 정도 되는 가문의 선산(先山) 같은 개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거대한 고인돌이 아닌 옹기종기 모여있는 질박한 고인돌이라서 그런가.
 기자는 둥글게 혹은 사각형 등의 다양한 형태로 조성된 고인돌들을 보고 3000년 전 청동기인들의 소박한 생활상을 상상해보았다. 

필자가 현장에 갔을 때 청도익 시대 집자리에서 이제 막 발굴되고 있는 청동기 시대 토기를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3200년 전 화재로 붕괴된 천장
 “저 집자리는 한번 봐야 합니다.”
 서영일 한백문화재연구원장이 기자의 손을 잡아끌었다. 조기 청동기 시대, 즉 기원전 14~12세기의 집자리로 인도했다.
 집자리의 규모는 요즘 아파트의 평수와도 뒤질게 없는 26평(86.5㎡) 쯤 됐다. 집자리를 살피던 기자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집안을 따뜻하게 해줬을 화덕자리가 한가운데 조성돼있었고, 4줄로 연결된 통나무가 불에 탄 그 형태 그대로 무너져 있는게 아닌가.
 벽체 혹은 천장이 불에 타면서 그대로 무너져 버린채 3400~3200년 동안 고스란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기자는 화재가 난 집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을 청동기인들을 떠올렸다.
 불에 탄 집자리 가운데는 집안에서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유구들도 있었다. 무슨 일일까. 아마도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서 이삿짐을 다 옮긴 뒤 옛집을 불에 태우는 이벤트를 벌인 것은 아닐까. 한가지 부가할 것이 있다. 청동기 시대 주택의 규모가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화재 때문에 전소된 기원전 14~12세기의 26평짜리 주택도 작은 편은 아니다. 

중도 인근 소양강변인 천전리에서 확인되는 전통적 의미의 탁자식 고인돌. 이번에 발견된 중도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이곳의 집자리 가운데는 154㎡(47평)과 126㎡(38평)짜리도 있다. 그러고보니 25~26평(86㎡)와, 47~48평형과 38평형은 요즘 주택시장에서도 기준으로 삼는 아파트의 평형이 아닌가. 예나 지금이나 집의 기준은 변함이 없는 것인가. 신기한 일이다.
 그렇다면 중도 청동기 마을의 중심연대는 어떨까.
 김아관 고려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은 “조기청동기 시대의 유구와 유물도 있지만, 청동기 중기(기원전 9~6세기)의 집터가 다수 확인된다”고 밝혔다.
 흥미로운 점은 청동기 조기 이후, 즉 기원전 11~9세기 사이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중도의 건너편인 현암리와 천전리·신매리에서는 그런 공백기가 보이지 않는다.
 과연 200~300년의 공백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중도에는 과연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중도 주민들은 기원전 11세기 무렵, 왜 보따리를 싸서 남부여대로 주변 마을로 이사했다는 뜻일까.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기자가 펼치는 ‘상상의 나래’는 끝이 없었다. (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49 관련글 쓰기

지금까지 이 공간에서 소개한 <흔적의 역사>가 단행본으로 출간됐습니다. 단행본을 내게 된 까닭을 서문으로 정리했습니다.

 

  지난 날을 서술하여 미래를 생각하고자 한 것입니다.(述往事 思來者)”(<사기> ‘태사공자서’ <한서> ‘사마천전·보임안서’)

 사마천이 불후의 역사서인 <사기>를 쓴 까닭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E) 핼릿(H) (18921982) 역시 <역사란 무엇인가>(1961)에서 유명한 말을 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다.(History i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그러고 보면 사마천이나 E H 카나, 두 사람의 뜻은 2000년의 시공을 초월했어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즉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거울이며, 과거(역사)를 배우는 것은 바로 현재와 미래에 대비하기 위함이라는 것. 이는 역사는 한낱 과거사일 뿐인데 과거에 집착할 필요가 있느냐는 야유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굳이 사마천이나 E H 카의 언급까지 들춰낼 필요도 없다 

김홍도의 <궁중의 여인>. 1781년 쯤 그린 것으로 보인다. 현대적인 미인상과 가깝다.|국립중앙박물관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거울

 필자는 역사칼럼(<흔적의 역사>)을 쓰려고 <사기><조선왕조실록> 등 다양한 문헌을 들춰볼 때마다 무릎을 친다. 과거의 이야기가 어쩌면 그렇게 오늘의 이야기를 빼닮았는지.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 때 찾아본 <태종실록>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침몰. 1000여 명이 수장됐다.

 사고원인은 인재(人災)였다. 선장의 무리한 운항과 화물과적 때문이었으니까. 실무자들에게 책임을 돌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임금(태종)모든 사고의 책임은 내게 있다(責乃在予)”하게 인정했다.

 필자가 총리 및 각료들의 인선과 인사검증과 관련해서 <실록>을 검토하자 만만치 않은 조선의 검증시스템이 포착됐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이 문제적 인물을 고집스럽게 임명하는 불통·오기의 인사를 단행하고, 대간관들은 서경권을 발동, 철저한 검증을 통해 거부권을 행사하고. 심지어 대간관들은 출근저지투쟁까지 벌인 끝에 문제적 인물을 기어코 낙마시켰다. 요즘 무슨 성인군자를 뽑는 것도 아닌데, 인사검증이 너무 혹독하다는 비판이 고개를 들고 있다. 하지만 조선 사회와 견주면 세발의 피라 할 수 있다. 칠순의 재상을 겨냥, “그의 살코기를 씹어먹고 싶다며 칠순의 재상을 욕한 이른바 막말 탄핵, 14년 전의 소문 만으로 사정기관의 수장(대사헌)을 공격한 이른바 풍문 탄핵마저도 허용된 사회였으니 말이다.

그 시대 임금들은 애완동물조차 맘껏 키울 수 없었다. “애완물에 빠지면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흐트러질 수 있다고 제동을 거는 신하들 때문에.

 길에서 담배를 꼬나문 성균관 유생들을 훈계했다가 봉변을 당한 재상 채제공의 이야기는 어떤가. ‘당신이나 잘하라는 소리를 듣고 유생들을 옥사에 가둔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야밤에 성균관 유생들이 옥사 앞까지 몰려와 풀어 달라면서 농성을 벌였단다. 채제공은 임금(정조)을 찾아가 정승 노릇 못해먹겠다고 하소연하고.

 군대 문제는 또 어떤가. <조선왕조실록>에는 4000건이 넘는 군대 관련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고전종합DB’에서는 무려 7544건이 검색된다. 군대는 고금을 막론하고 뭇 남성들의 평생 이야깃거리인 것은 틀림없다. 이 중 1659(효종 10) 병조참지 유계가 올린 상소문이 귓전을 때린다.

 조선의 남성 가운데 놀기만 하고 게으른 자가 10명 가운데 8~9명이 차지하고 간신히 남아 있는 선량한 백성에게만 병역을 부담시키고 있습니다.”

 유계는 이 대목에서 균등하면 가난하지 않고, 화합하면 부족함을 걱정하지 않으며 편안하면 나라가 위태롭지 않다.”는 공자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병역의 불평등이 이 지경이니, 무슨 방법으로 민중의 마음을 화합시켜 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순신 가문의 지독한 중국어 교육법을 보라. 이순신 장군의 5대조 할아버지인 이변은 중국어 마니아였다. 과거급제 이후 중국어를 배웠는데, 책상머리에 반드시 공효(功效·공을 들인 보람)를 이루고야 말리라는 다짐구호를 써 붙이고 밤을 세워 공부했다. 중국어에 능통하다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 배웠으며, 식구들이나 친구들을 만나도 반드시 중국어로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참으로 지독한 외국어 공부가 아닌가.

날밤을 지새우기 일쑤였고, 침실에 재해대책본부까지 설치했던 정조의 만기친람을 비난한 신하의 상소를 보라. “임금이 작은 일에 너무 신경 쓰시면 큰일에 소홀하기 쉽습니다.”

19ㅔ기 화가 유운홍이 그린 조선시대 조운선. 조운선 운행과정에서 과적과 무리한 운항 때문에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심심찮게 일어났다. 예컨대 태종은 조운선 34척이 침몰하고 사망 실종자가 1000명이 넘는 대형참사가 일어나자 '모든 책임은 네게 있다'고 자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정조도 작은 것을 거쳐 큰 것으로 나가는 법이라고 맞받아쳤으니 워커홀릭의 본능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임금은 허수아비 노릇만 하면 되고, 모든 국사는 똑똑한 재상이 처리하면 된다는 이른바 조선판 책임총리론을 강조한 정도전의 꿈과 야망은 또 어땠는가.

세월호 참사와 같은 대형사건 뒤에 참담한 유언비어가 떠돌곤 했는데, 명종 대의 인물인 상진의 간언을 상기하면 좋다.

유언비어는 참형으로 다스리라 했습니다. 이는 군주가 사람의 입을 막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진 이를 방해하고, 국가를 병들게 하는 말을 금지하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사초를 폐기하고 임금 곁을 떠난 참담한 사관 4인방은 또 어떤가. 이들은 전쟁이 끝나자 줄기차게 관직을 탐했다.

또한 다 쓰러져 가는 명나라를 맹목적으로 섬기려는 자들에게 고려의 실리외교를 배우라고 한 광해군의 한탄은 어떤가.

제발 고려의 외교 좀 배워라. 우리는 큰소리만 치고 있다. 그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또 하나 필자가 주목한 것은 과음으로 죽은 태조 이성계의 맏아들(이방우)이다. 이방우는 아버지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새 왕조 개창을 노골화하자 은둔했으며.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죽은 것이다. 이방우는 고려의 충신이었던 것이다.

나라를 잘못 만나 청나라까지 끌려갔다가 돌아온 환향녀들에게 찍힌 낙인은 화냥년이었단다. 임금 잘못 만나 곤욕을 치렀고, 귀국해서는 가문에서까지 버림받은 부녀자들의 피를 토하는 사연을 들어보라.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의 수많은 계층,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수많은 사건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임금이면서도 임금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정종, 만고의 성군이라면서 능지처참이라는 혹독한 형벌을 남발했던 세종, 연산군보다 더 악질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려 했던 태조와 영조, 인현왕후와 장희빈 등 두 여인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못된 남자 숙종, 지독한 골초로 조선을 흡연의 나라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정조.

또한 율곡 이이와 다산 정약용도 속절없이 당했던 신입생환영회, “소가 물마시듯 하며 술을 마시는 저 사람들은 뭐냐.”원샷풍조를 한탄한 다산, 직접 현장을 적발하지 않으면 간통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선언한 성종 임금, 국가적인 차원에서 노처녀 노총각들의 혼인을 주선한 조선판 솔로대첩’, 개미허리와 긴 생머리를 탐한 그 시대의 패셔니스타들.

이 책을 통해 볼 수 있는 조선의 민낯이다.

 

전 신윤복의 <봄날이여 영원하라>. 남녀간 의 사랑을 담은 풍속화다. 닫힌 방문 앞에 놓여있는 신발 두 켤레가 유난히 눈에 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사기벽에 걸린 이유

 필자가 일찍이 사기벽(史記癖)’에 걸린 이유가 또 있다. 사기가 백성들의 삶을 생생한 구어체로 묘사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陛下欲廢太子 臣期期知其不可”(<사기> ‘장승상 열전’)

 한나라 고조(유방)가 정부인(여태후)가 낳은 태자를 폐하고, 총애하던 후궁(척부인)의 아들을 세우려 했다. 그러자 평소 말을 심하게 더듬었던 주창이라는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언한다.

 폐하가 태자를 폐하시려는데 신은 결~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사마천은 ()()’를 연발함으로써 말을 더듬는주창을 묘사한 것이다. 이로써 말더듬이 주창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 얼마나 생생한 인물묘사인가.

 장의는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유세가였다. 그의 무기는 세치 혀였다. 어느 날 장의는 구슬을 훔쳤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수백대의 매질을 당했다, 그의 아내는 겨우 집에 돌아온 남편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장의와 부인의 대화가 이어진다.

 내 혓바닥이 아직 있는지 보구려.(視吾舌尙在不)”

 혀는 있구려!(舌在也)”

 그럼 됐소!(足矣)”(<사기> ‘장의열전’)

 <사기>는 장의가 빼어난 유세가라는 사실을 하나의 사례를 들어 내러티브로 구성하고 있다.

 이것이 무려 2000년 전에 쓴 역사서이다. 지루하지 않고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역사서. 사마천이야말로 20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도 범접하기 어려운 천재 스토리텔러라 할 수 있다.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사마천과 <사기>를 마냥 부러워할 필요는 없겠다.

 <사기>처럼 백성의 역사라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에게도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살아 숨 쉬는 역사, 그런 역사를 쓴 사관들이 있었으니까.

 중종 연간에 동지사 김안국이 여자 사관(史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왕과 왕비 등의 사생활까지 기록한다는 것이니 중종이 내심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밝힐 수는 없는 일. 중종이 고심 끝에 했다는 말은 마음이 올바른 여자라야 여자사관이 될 수 있다.(必正之女 然後可而)”는 것이었다. ‘마음이 고와야여자 사관을 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또 성종이 1481~83년 사이, 송영이라는 사람을 사헌부 장령과 지평에 임명하자 대간들이 아우성쳤다. 그러자 성종이 버럭했다.

 아니 송영이 무슨 배우냐, 도적이냐.(瑛俳優歟 盜賊歟) 왜 이리 난리를 떠는가.”

 서슬퍼런 연산군 시절, 사정기관(사헌부) 하위 공무원(6품 정언)인 조순이 칠순의 재상 노사신에게 했다는 막말 탄핵그의 살코기를 씹어 먹고 싶습니다.(欲食其肉)”였단다.

 오죽했으면 다름아닌 연산군마저도 “(그 같은 막말을 한 위인이라면) 임금이라고 공경하겠느냐(予雖服袞冕 其有恭敬之心乎)”고 비아냥대면서 문제의 조순을 처벌하려 했다. 이번에는 승정원까지 나서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그러자 연산군은 이렇게 야유를 보냈단다. “승정원도 대간들을 퍽이나 두려워하는구나.(承政院多畏臺諫)”

 1744(영조 20)의 일이다. 50살이 된 영조 임금은 10년 전, 그러니까 40살에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가져와 신하들와 품평회를 열었다. 이 장면을 묘사한 <승정원일기>를 보라.

 지금의 용안은 옛날 모습과 다릅니다.(比今天顔 有非昔時矣)”(장득만)

 현저히 다른가?(顯異乎)”(영조)

 크게 다릅니다.(大異也) 수염과 머리카락도, 성상의 안색도 (10년 전) 어진과 다릅니다.(不但鬚髮之異昔 玉色亦異於此眞矣)”(이종성)

 “(웃으며) 경들은 평소에 날 보고 하나도 늙지 않았다고 하더니. 지금은 무슨 말인가.(上笑曰 卿等每以予爲不老矣 今何其如此耶)”(영조)

 모두들 임금의 면전에서 폭삭 늙으셨다며 눈치없이 돌직구를 던지자 영조 임금이 투덜거린다.

 저기(10년 전 초상화)에도 흰수염은 있구먼 뭐.(彼猶有鬚白處矣)”

 어떤가. 270년 전의 어전회의를 생중계로 보고 있는 느낌이 들지 않은가. 이 모든 멘트는 누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임금과 신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은 역사 기록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참전한 명나라군의 철수를 기념해서 그린 <천조장사전별도>. 포르투갈 흑인용병 4명이 참전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몸집에 너무 커서 말에 타지 못하고 수레에 탔다는 기록에도 부합된다. |한국국학진흥원  

 ■위대한 기록

 <흔적의 역사>를 쓰면서 새삼 기록의 위대함을 느낀다.

 예를 들어 영조가 대신들과의 밀담을 사초에서 지웠을 때 전직 사관들이 한탄했다고 한다.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어도 사필은 굽힐 수 없습니다.(頭可斷 筆不可斷). 앞으로 엄청난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 태종이 노루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지자 급히 일어서며 한다는 말은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勿令史官知之)’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말이 <태종실록>에 기록된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당대의 사관이 사관이 모르게 하라는 임금의 명령까지 역사에 기록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태종이 편전까지 사관이 입시할 필요가 없다는 명을 내리자 당대의 사관은 묵직한 돌직구를 던졌다고 한다.

 사관의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上有皇天)”

 하기야 천하의 폭군이라는 연산군 마저 임금이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서 뿐(人君所畏者 史而已)’이라고 했다니까.

 <흔적의 역사> 칼럼은 20118월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처음에는 6장 내외의 신문용 원고분량에 맞추다가 조금 뒤부터 집필의 시스템을 바꿨다. 옛 자료를 찾을 때마다 끊임없이 엮여 나오는 무궁무진한 역사의 팩트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했듯이 저렇게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담겨있는데 어찌 앙상한 뼈대만 추려 정리한다는 말인가. 결국 아이템별로 30~60장 분량으로 양껏 풀어놓은 뒤 신문용으로는 사정없이 줄여 게재하는 방법을 써왔다. 신문용이 아니라 블로그용, 인터넷 용으로만 쓴 꼭지도 다수 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축적한 130여 회 꼭지 가운데 조선시대부분만 뽑은 것이다.

 필자는 역사학자는 아니다. 천생 기자다. ‘기자는 이야기꾼이어야 한다고 여기는 기자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옛 사람들의 이야기에, 발자취에, 흔적에 흠뻑 빠져 살고 있는 이유이다.

 물론 하루하루 새로움과 깊이를 좇는 일간 신문에서 서슴없이 소중한 지면을 내어준 회사야 말로 필자의 가장 든든한 밑천이고.

 경향신문 이기환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48 관련글 쓰기

 “중국말을 10년 배워도 중국현지에 두어 달 다녀온 사람만도 못합니다. 사역원에서는 마지못해 한어(중국말)을 한다해도 평상시에는 늘 우리 말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세종실록>)    

   1442년(세종 24년) 사역원 제조 신개가 답답하다는 듯 아뢴다. 요컨대 중국어 교육이 잘못 되었으니 교육방식을 파격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역원 내에서는 공사를 의논하거나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할 때 무조건 중국어를 쓰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이를 어기는 생도는 그 때마다 매질을 가하도록 하소서.”
 신개는 그러면서 “만약 이를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는 무거운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간언한다.

 

명나라 사신인 예겸(倪謙)과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1418~1456), 신숙주(1417~1475), 정인지(1396~1478) 사이에 나눈 창화시(倡和詩·시를 읊으면 다른 사람이 받아 노래하는 화답시)를 모은 시권이다. 예겸은 1450(세종 32)20일 동안 조선을 방문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영어마을식 중국어 교육
 “초범은 부과(附過·잘못한 일을 적어두는 처벌), 재범은 차지(次知·주인을 대신해 처벌받는 하인) 1명…, 5범 이상은 형조에 이첩…. 하도록 하소서.”
 신개가 제안한 교육방법은 바로 요즘의 영어마을식 외국어 교육이었다. 아니 더 무시무시했다. 외국어를 쓰지 않으면 처벌을 내리고 가차없이 매질을 가했다니….  
 그러나 예나지금이나 외국어 교육은 쉽지 않은 것 같다. 가장 좋은 외국어 교육은 역시 중국 유학이었다.
 1460년(세조 6년) 임금은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의 자제들을 명나라에 유학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는 단칼에 조선의 요청을 거절했다. 명 황제의 칙서는 다음과 같았다.
 “지금까지 통사(통역)들이 그럭저럭 잘 통역해왔고,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꼭 (중국으로) 유학 와야 할 이유가 없다.”
 명나라가 우려한 것은 조선 유학생들을 통한 국가 기밀의 유출이었다. 명나라 유학을 일거에 거절 당했지만 현지 교육의 필요성은 끈질기게 제기됐다.
 현지 유학이 불가능해지자 차선책으로 등장한 것은 통역이나 학생들을 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자주 보내는 것이었다. 중종 31년(1536). 통역관 주양우가 중국을 너무 자주 드나든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러자 좌의정 김안로 등이 반론을 제기한다.
 “한어를 아무리 능숙하게 구사해도 중국 현지에서 중국 사람과 대화할 적에는 틀리고 빗나가 서로 통하지 못합니다. 중국을 자주 드나들며 몸으로 부딪혀봐야 통할 수 있습니다.”
 중종은 “(주양우를) 가끔씩 보내면 중국어 학습이 늦어질 것”이라는 의견에 따라 주양우의 빈번한 중국방문을 허락했다.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5대조 할아버지와 증조 할아버지는 중국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대쪽같은 성품으로도 유명했다.  

 ■어학공부의 전범
 그런데 조선의 통역 가운데 특기할만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이변(李邊·1391~1473)이었다. 이변은 이순신 장군의 현조(玄祖·5대 조 할아버지)이다.
 이변은 조선 초기 아주 유명한 사대부 출신 통역이었다. <세종실록>은 그가 얼마나 어학공부에 빠졌고, 또 소질이 있었으며, 조·명 외교에서 얼마나 활약을 했는 지를 알 수 있다. 먼저 1434년(세종 16년)의 기록을 보면 첫번째 문장이 재미있다. “그 사람됨이 둔했고, 서른이 너머 문과에 급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 이야기를 보면 달라진다. 어학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중국어 마니아’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서른이 넘어 발견한 재능이었던 것이다.
 “문과에 급제한 뒤 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한어(중국어)를 배웠다. ‘공효(功效·공을 들인 보람)를 반드시 이루고야 말리라’라는 다짐구호를 써붙인 다음 밤을 새워 가며 강독(講讀)했다. 또 한어를 잘한다는 자가 있다는 말만 들으면 반드시 그를 찾아 질문하여 바로잡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집안 사람들과 서로 말할 때에도 언제나 한어를 썼다. 친구를 만나도 반드시 먼저 한어로 말을 한 다음에  우리 말로 했다. 덕분에 한어에 능통해졌다. 가히 지독한 어학공부였다. 1429년(세종 11년)의 기록을 더 보자. 예조판서 신상이 임금에게 고했다.
 “이변은 문과에 급제했지만 오히려 중국어를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습니다. 사역원의 학생들 모두 그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합니다. 마땅히 이변을 통역의 선생(訓導)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변을 ‘어학 공부의 전범’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이변이 1434년(세종 16년) 외교관으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성격이 강직합니다.’
 이조정랑 김하(金何)와 함께 요동으로 건너가 명나라 학자들에게 <소학직해언어>(소학을 한어로 직해한 책)를 보여주고 그 가치를 인정받고 돌아온 것이다. 이때 요동의 명망 있는 명나라 학자인 허복과 유진, 오망 등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문장은 천하의 공기(公器)다. 수레의 궤도가 같고 글월의 글자가 같아서 천하 만국이 모두 한 집안과 다름없다. 이 글은 요동에서만 편벽되게 쓸 것이 아니다.”
 그 가운데 명나라 학자 오망은 이변에게 전한 시의 서문에 이렇게 칭찬했다.
 “이변의 사람됨이 순순(恂恂·진실)하고 유아하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하였도다. 남에게 의심되는 것을 질의하여 잘 깨닫고 이해하되, 요령을 잡아 가슴에 품어 두어 온공하게 조심조심 받들어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참으로 훌륭한 선비요, 뒷날 성취함이 있을 것을 헤아릴 만하도다. ”
 이변은 또 대쪽 같은 성품으로도 유명했다.
 “이변의 성질이 굳세고 곧아서 비록 편협한 데가 있지만, 의롭지 않은 일은 털끝 만치도 안한다. 사람들이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세종실록>)
 <세조실록> 1465년(세조 11년) 10월 16일 조를 보면 이변의 성격을 한번 더 짐작할 수 있다. 
 “이변은 나이가 늙어 머리와 수염이 하얗고 성품이 강직하여 남의 과실을 용납하지 못했다. 술을 마시지 않고 밥을 잘 먹어서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세조)이 항상 원로로 우대했다.”
 <성종실록> 1489년 11월29일 조를 보면 이변이 후진양성에 얼마나 애를 썼는지도 알 수 있다.
 당시 대사간 이평과 영사 홍응은 임사홍 등을 탄핵하면서 이렇게 이변을 칭찬했다.
 “신이 듣기에 이변이 사역원 제조(司譯院提調)가 됐을 때 가르치기를 매우 부지런히 했고,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었느데도 여름철의 장맛비 속이나 겨울철의 큰 추위 속에도 한결같이 쉼없이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학습효과가 자못 많았습니다.”
 과연 대쪽 같은 성품이 이순신 가문의 할아버지 답다. 

   그는 1473년(성종 4년) 83살로 죽을 때까지 50여 년 간 6명의 임금을 모시면서 외교전문관료로 주요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신숙주와 함께 고금의 명현과 절부의 사실을 모아 <훈세평화>를 엮기도 했다.

 

   ■대를 이은 중국어 실력

   이순신 가문의 중국어 실력은 대를 이었다. 이순신의 중조부인 이거(?~1502)를 보라.
 이거는 1480년(성종 11년) 식년시에서 급제한 뒤 홍문관 박사와 사간원 정언(정 6품)과 사헌부 장령(정 4품) 등을 거쳤다.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임금의 잘못을 질책하는 자리에 있었다.

   ‘호랑이 장령(장령)’이라는 뜻의 ‘호장령(虎掌令)’의 별명을 얻고 있었다. 그런 그 역시 증조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중국어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이 이채롭다.
 1491년(성종 22년) 성종 임금은 이거에게 중국에서 온 외교문서를 번역하게끔 하는 지시를 내린다. 
 “이거가 이문(吏文·독특한 한문체로 된 중국과 주고 받는 외교문서)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오늘 이거가 출근할 터이니 그로 하여금 번역하도록 하라.”
 이거는 그 어렵다는 외교문서를 번역해서 임금에게 올렸다.
 과연 대쪽 같은 성품이 이순신 가문의 할아버지 답다.
 이순신 장군은 문신 가문의 전통에 따라 문과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장군의 조카인 이분(李芬)의 언급을 보자.
 “처음에 큰 형님과 둘째 형님 두 분을 좇아 유학을 수업했다. 재기(才氣)가 있어서 가히 성공할 듯 했다. 그러나 항상 붓을 던질 뜻을 품고 있었다.”(<이충무공전서> 권 9 ‘부록1·행록’)
 그러니까 이순신 역시 문과를 준비했고, 급제의 가능성도 짙었지만 뜻한 바 때문에 무과로 방향을 틀었다는 뜻이다.
 만약 장군이 문과에 급제했다면 5대조, 증조 할아버지처럼 중국어에 능통한 외교관이 될 수도 있었을까. 아니다. 바꿔말할 수 있겠다. 5대조, 증조 할아버지의 탁월한 외교감각과 대쪽성품의 피를 타고 났고. 여기에 문과를 준비하면서 자연스레 문부를 겸비할 수 있었기에 역사에 길이남을 성웅(聖雄)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 지 모른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47 관련글 쓰기

 “마음의 병이 있습니다. 재앙이 오겠습니까.(有疾心 唯有害)”
 은(상)나라 반경~무정 시대(기원전 1300~1192년)의 갑골문에 나오는 흥미로운 내용이다.
 갑골문은 은(상)의 임금이 정사를 펼칠 때 미리 점을 친 뒤 그 내용을 거북껍질이나 소 어깨뼈에 새겨넣은 것이다. 이 갑골문에 표현된 ‘심질(心疾)’은 ‘지나치게 마음을 쓰거나 괴로움을 당해 생긴 질환(思慮煩多 心勞生疾)’(<좌전> ‘소공’ 조)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이 갑골문은 이미 3000년 전 표현된 ‘마음의 병’ 혹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호소한 기록인 것이다.
 다른 갑골문에는 “대왕의 마음이 화평할까요?(王心若)”라고 묻는 내용도 있다. 대체 군주의 자리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점까지 쳐서 ‘마음의 병’ 혹은 ‘스트레스’를 다스리려고 했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럴 만도 하다. 예로부터 천자(군주)의 정사를 ‘일일만기(一日萬機)’ 혹은 ‘일리만기(日理萬機)’라 했다.(<상서> ‘고요모’)
 군주(혹은 천자)가 하루동안 처리해야 할 일이 1만 가지나 된다고 일컬어진 이름이다. ‘만기친람’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상나라 말기 갑골문에 등장하는 심질(心疾·마음의 병). 왕이 심질 때문에 고생하는데, 그것 때문에 나라의 장래에 영향을 끼칠 지를 묻고 있다.

 ■임금 노릇 하려다 수염이 하얗게 셌구나!
 “과인은 세자 시절부터 화증(火症)이 있었는데, (즉위 후) 만기(萬機·정사)를 주관하게 되면서 노심초사하는 바람에 수염이 다 세였다. 거기에 성미가 느긋하지 못해 처리해야 할 정사가 있으면 그냥 버려두지 못하느니라. 또 식사도 거르는 바람에 너무 지나치게 노췌(몸이 고달파서 파리함)해졌다. 요즘 현기증이 발작하면….”(<숙종실록> 1699년 10월 4일)
 조선조 숙종의 이야기다. 숙종은 “이런 심화증(心火症)은 30년 동안이나 쌓인 지병”이라고 하소연하고 있다. 정사를 돌보느라 얼마나 가슴이 답답하고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수염이 하얗게 셀 정도가 되었을까.
 숙종만 그랬을까. 군주는 피곤한 자리였음이 분명하다.
 만백성과 사직을 간수해야 하는 막중한 자리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예컨대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과 중흥군주라는 정조를 보라. 그들은 공부벌레인 동시에 일벌레였다. 
 “세종은 반드시 100번씩 글을 읽었고, <좌전(左傳)>과 <초사>는 200번 읽었다. 병이 깊어졌는 데도 글읽기를 멈추지 않자 아버지(태종)는 내시를 시켜 (세종의) 책을 모두 거둬들였다. <구소수간(歐蘇手簡·구양수와 소동파의 편지모음집)> 한 권만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다. 그것을 임금(세종)은 1100번 읽었다.”(<연려실기술> ‘세종조고사본말’)
 세종이 훙(薨·임금의 죽음)한 뒤의 <세종실록> 1450년 2월 17일조를 보라.
 “임금은 매일 사경(四更·새벽 1~3시)에 일어나 날이 하얗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돌봤다. 그 후에는 신하들을 차례로 접견하는 윤대(輪對)를 행했고, 다음엔 경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해동의 요순’이라 일컬었다.”   
 정조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가 신하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라.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니 괴롭고 괴로운 일이라.”(1797년 12월26일)
 “백성과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돈다. 날마다 늙고 지쳐간다.(1799년 1월20일)
 “바빠서 틈내기 어렵다. 닭우는 소리 들으며 잠들었다가~비로소 밥 먹으니, 피로해진 정력이 갈수록 소모될 뿐….(1798년 10월7일)
 “바쁜 틈에 윤음을 짓느라 며칠 째 밤을 새고, 닭울음을 듣는구나. 괴롭다!”(1798년 11월30일)
 “책을 읽고, 온갖 문서를 보느라 심혈이 모두 메말랐구나.”(1799년 7월7일)
 정조는 이처럼 정사를 처리하고, 편지를 직접 쓰면서, 틈나는 대로 독서에 매진하느라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승하 직전(1800년), 번열, 즉 횡격막에 열이 생기는 증세를 호소했던 정조의 편지글. 그는 열을 떨어뜨리는 약을 썼지만 실패했다고 토로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당뇨병 환자 세종의 걱정은
 그랬으니 몸과 마음이 정상일 리 없었다. 공부벌레·일벌레의 대명사였던 세종을 보라.
 세종은 게다가 고기가 아니면 수라를 들지 않을 정도로 육식을 좋아했다. 오죽했으면 1418년(세종 즉위년) 10월 9일, 상왕(태종)이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도 않고, 몸도 뚱뚱하시니 건강을 좀 챙겨야 한다”고 걱정했을까.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고, 운동을 하지 않은 데다 과도한 업무에 따른 스트레스가 세종의 몸을 갉아먹었던 것 같다.
 1425년(세종 7년) 세종은 두통과 이질 등 중병에 걸렸음에도 이를 참고 명나라 사신단을 맞이하기도 했다. 이 때 임금의 얼굴빛이 눈에 띄게 파리하고 검게 된 것을 백관이 보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세종실록>을 보면 “얼마나 임금의 병세가 위중했는지 임금의 관곽을 이미 짜놓는 등 흉사에 대비했다”고 한다.(<세종실록> 1449년 11월15일)
 이 때 사신단을 수행한 명나라 의원 하양은 세종을 진맥하고는 “전하의 병환이 상부는 성하고, 하부는 허(虛)한데, 이것은 정신적인 과로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렸다.(<세종실록> 1425년 윤 7월 25일조) 업무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각했기에 이렇듯 ‘관을 미리 짜놓을 정도’로 위독한 지경에 빠졌을까. 그럼에도 세종은 위중한 병세를 참고 명 황제의 부고를 받들고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을 만나 곡례(哭禮)까지 무사히 마쳤다. 외교적인 결례를 범하지 않으려 투혼을 발휘한 것이다.
 세종은 평생 다양한 병을 달고 살았다.
 1431년(세종 13년) 8월 18일 풍질(風疾) 때문에 “두 어깨 사이가 찌르는 듯 아픈 증세가 고질병이 되었다.”고 괴로워했다. 또 ‘하루에 물 한동이 이상을 마셔야 하는’ 당뇨(소갈증)와, 당뇨 합병증의 하나인 망막변성(안질)에 시달렸다. 
 “소갈병 때문에 하루에 마시는 물이 어찌 한동이 뿐이겠는가.”(1439년 7월 4일) “왼쪽 눈이 아파 안막(眼膜)을 가렸고, 오른쪽 눈도 어두워 한 걸음 사이의 사람도 분간할 수가 없다.”(1439년 6월 21일, 1441년 2월 20일)
 그밖에도 다리부종과 임질(淋疾), 수전증 등을 앓았다. 참으로 화려한 병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세종은 병치레 때문에 정사를 잘 돌보지 못하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온갖 병 때문에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했다. 모든 일에 본보기를 보여야 하는데…. 게으른 버릇이 나로부터 시작될까 두렵다. 정사가 해이해진 것이 아닐까.”
 그야말로 백성과 사직을 생각하는 성군의 투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879년(고종 16년) 왕세자 순종의 천연두 완치를 축하하기 위해 재작한 병풍. |국립고궁박물관 

 ■정조의 못말리는 일중독
 정조는 또 어떤가. 정무처리에, 독서에, 편지쓰기까지 밤을 꼴딱꼴딱 세운 정조였으므로 그 역시 건강할 리 없었다.
 1784년(정조 8년) 도제조 서명선이 “제발 건강 좀 챙기시라”고 걱정했다. 그러자 정조의 대답이 걸작이다.
 “정신 좀 차리고 보니 국사가 많이 지체되었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보는 것이네.(不得不親覽矣) 나는 원래 보고서 읽는 것을 좋아하네. 아픈 것도 잊을 수 있지.”
 보고서 읽는 것이 취미라는 데야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가 신하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병세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요즘 열기가 치솟고 등은 뜸 뜨는 듯 하고 눈은 횃불 같아 헐떡일 뿐이다. 현기증이 심해서 독서에 전념할 수도 없다. 괴롭기만 하다.”(1799년 7월7일) 
 “뱃속의 화기가 내려가지 않는구나.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 장판에 등을 붙인채 뒤척이는 일이 모두 답답하다.”(1800년 6월15일)
 정조는 등창이 난 지 20여 일 만인 1800년 6월, 승하했다. 재위 24년(1776~1800)만에, 그것도 나이 48살의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지독한 일중독증에 따른 스트레스가 간접 사인이었을 것이다.

 

 ■‘심열이 끓어 오른다’
 명종 역시 ‘심열’증세를 호소했다.
 “가슴이 답답하다. 잠자리가 늘 편안하지 않다. 심열(心熱)이 위로 치솟으면 입이 말라 물을 끌어다가 마시기 일쑤이다.”
 명종은 “만기(萬機), 즉 정사만 생각하다 보니 심열이 생기는 것 같다”면서 “나이 30이 넘었는 데도 아직 국가에 경사가 없다”고 노심초사했다. 지존의 자리가 편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경사가 없음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1567년(명종 22년) 6월 24일,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명종은 조선을 방문하는 명나라 사신을 어떻게 접대할 것인지 노심초사하고 있다.
 “사신 접대 때 몸이 좋지 않아 오래 서있지 못할까 두렵다. 술은 나눌 때 예의를 잃어버리지나 않을지…. 병중에 쓴 외교문서가 잘못되지나 않을른지…. 요즘 열이 올라 간혹 귀가 어두울 적도 있는데 혹 예를 잃을 수도 있는데…. 이 또한 사신에게 전하라.”
 명종의 노심초사에서 지도자의 자리가 얼마나 힘든 지 잘 나타나 있다.

고종의 승하일기를 기록한 태의원일기.고종은 졸중픙으로 갑자기 승하했다고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효종의 죽음엔 뭔가 있다.
 효종은 의료사고 때문에 급서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임금의 얼굴에 종기의 독이 퍼졌다. 의원 신가귀의 처방에 따라 임금이 침을 맞았는데 피가 그치지 않고 솟아나왔다. 침이 혈락을 범했기 때문이다. 임금이 그만 승하하고 말았다.”
 1659년(효종 10년) 5월 4일, 효종의 급서(急逝)를 알리는 <실록>의 내용이다. 의원 신가귀의 침이 그만 임금의 혈맥을 찌르는 바람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의료사고가 분명했다. 신가귀는 이 의료사고 때문에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실록>을 가만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임금은 머리 위에 작은 종기를 앓고 있었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마침 중병에 걸려있던 세자를 돌보느라 자신의 종기에는 무관심했다. 또 때마침 전국에 비가 오지 않아 자신의 건강을 돌볼 틈이 없었다. 그는 대궐의 뜰에 나가 직접 기우제를 주관하고 있었다. 그러다 종기의 독이 얼굴까지 퍼지는 등 위독해졌다.”(<효종실록> 1659년 4월 27~28일)
 의료사고만이 사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효종은 사직(후대를 이을 왕세자의 병)과 백성(기우제)을 걱정하느라 몸을 돌보지 못했고, 그 때문에 병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는 것이다.

 

 ■정신착란에 시달린 선조
 선조는 극심한 정신병 증세에 시달렸다.
 그는 백성을 전란(임진왜란)의 소용돌이에 빠뜨렸다는 비난을 받았던 임금이다. 그도 인간이고, 한 나라를 책임진 지도자인지라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책임을 절감했을 것이다.
 게다가 일부 신하들은 물론 명나라까지도 세자(광해군)에게 양위하는 것이 어떠냐고 군불을 땠으니 그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것이다.
 <연려실기술> ‘선조조고사본말’을 보라.
 “1592년 10월, 김적이라는 사람이 ‘전하는 인심을 많이 잃어 오늘날의 사태를 불렀습니다. 어찌 세자(광해군)에게 전위하지 않으십니까.’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1593년(선조 26년) 윤 11월14일, 명나라 사신은 선조 임금에게 아주 희한한 말을 건넨다.
 “어제 영윤(세자) 광해군을 보니 용안이 특이하였고, 또 신민이 다 추대한다 합니다. 당나라 현종(재위 712~756)이 안록산의 난을 맞아 아들인 숙종(756~762)에게 군권을 맡겼더니 숙종이 장안과 낙양을 수복했습니다. 영윤(광해군)의 현명함이 당 숙종보다 더하니 국왕은 반드시 전위하시어….”(<선조실록>)
 이 무슨 주제넘고 해괴한 소린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못난 임금이니 당 현종의 예에 따라 속히 현명한 세자(광해군)에게 물려주라는 소리가 아닌가.
 대신들은 물론, 상국인 명나라로부터도 버림을 받고 쫓겨나는 임금이라면…. 당시 선조가 느끼는 위기감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관찬의서이자 국내 유일본인 <의방유취>(보물 1234호). 1477년(성종 8년)본이다. |한독의약박물관

 ■“임금 노릇 안할게. 나 좀 살려주라”
 선조는 원래 원기가 허약한 체질이었다. 비위도 약했다.
 본래 심열(心熱·화기가 뻗치는 병)증세가 있었다. 임진왜란 발발 4년 전인 1588~89년(선조 21·22년) 사이 반복적으로 심질의 증세를 말하며 물러날 뜻을 밝힌다.
 “나는 반평생 신병을 지니고 있었는데, 심질이 더욱 심하기 때문에…. 반드시 광질이 발작할 것이다. 여러분들이 임금을 사랑한다면…. 물러나 쉬게 하라. 더는 번거롭게 하지 마라.”(1588년 윤 6월 1일) “심질 때문에 정신이 혼미하고 기분도 좋지 않다. 대신들은 날 가엾게 여겨달라.”(1589년 12월 21일)
 선조의 심질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책임론이 비등해지면서 더욱 악화됐다. 여러차례 ‘선위’ 혹은 ‘섭정’의 뜻을 전하면서 “제발 내 말 좀 들어달라”고 애원한다.
 “심질이 고질이 됐다. 불을 대하고도 춥고, 눈(雪)을 씹어도 되레 열이 생긴다. 때로는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 달린다. 동서를 구별하지 못한다. 유독 경들만 모르고 있다.… 내가 하루를 더 왕위에 있으면 백성들이 하루를 더 걱정하게 된다.”(1592년 11월 21일)
 선조는 이후에도 ‘병 때문에 죽을 지경’임을 호소하면서 섭정 혹은 선위를 줄기차게 요구한다.
 “양쪽 귀가 완전히 먹었다. 심병(心病)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쓰러지기를 반복한다. 가슴 속 답답한 기운은 없어지지 않는다. 하루가 1년 같고, 밤낮으로 눈물만 흘린다. 병이 갈수록 더해가는데 몸은 매여 있고….”(<선조실록> 1596년 8월 27일)
 “가슴 통증 때문에 아파서 울부짖느라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도 처리해야 할 업무가 밀려드는구나. 참 난감하구나. 경들도 내가 먼저 죽으면 후회하지 않겠는가. 어찌 내 고민과 병을 풀어 줄 생각은 안하는가.”(<선조실록> 1597년 1월 6일)
 1598년(선조 31년) 2월 25일 선조가 “전광증(顚狂症·정신착란)으로 크게 울부짖으며 인사불성이 된다”고 호소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선조 자신) 좀 살려주라. 그러면 나랏일에도 다행이 아닌가.”

 

 ■“철없는 소리 작작 하세요.”
 그러나 대신들은 선조의 선위 발언을 ‘정치쇼’라면서 번번이 일축했다. 영의정 류성룡과 우의정 이원익 등 정승들의 말본새를 보라.
 “아니 지금이 어떤 때이고, 이 일(선위의 일)이 어떤 일이기에 번번이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말 민망하고 답답한 심정 금치 못하겠습니다.”
 지존인 임금이 ‘정신병 때문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통사정하는데, 대신들은 ‘철없는 소리 좀 작작하라’고 일축하는 상황이 되풀이 된 것이다.
 하기야 임금의 자리가 어디 그만 두고 싶으면 그만 둘 수 있는 자리인가. 대신들의 입장에서도 ‘그리 하시라’고 쉽게 찬성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찍이 태종이 선위 파동을 일으켰을 때(1406년) ‘단지 기쁜 얼굴빛을 내비쳤다’는 어처구니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주륙당한 임금의 처남들(민씨 형제)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임금의 선위 발언에 쉽게 동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록>을 살펴보면 선조의 정신병은 심각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는 결국 백약이 무효인 실어증까지 걸렸고(1605년), 새벽에 기급하여 쓰러지기도 하는(1607년) 일을 반복하다가 향년 57세(1608년) 승하했다
 선조는 죽기 직전까지 “내가 많은 병에 걸렸지만 여러 병 가운데 심병(心病)이 가장 극심하다”고 괴로워했다.(<선조실록> 1607년 10월 11일)
 선조는 백성과 사직을 도탄에 빠뜨린 임금이라 손가락질 받는다. 하지만 평생 정신병에 괴로워하면서도 임금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 없었던 신세를 생각한다면 딱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침이나 뜸을 놓는 자리인 경혈을 표시한 청동상. 머리에 작은 종기를 앓았던 효종은 기우제를 지내고, 왕세자의 병에 신경 쓰느라 초기에 치료릃 하지 못했다. 왕은 결국 침을 잘못 맞아 과다출혈 때문에 급서했다.|국립고궁박물관

 ■“명나라와 의리가 밥먹여주냐”
 광해군의 스트레스는 부왕인 선조와는 좀 차원이 달랐다.
 세자 시절부터 부왕(선조)이 걸핏하면 ‘선위 운운’하지 않았던가. 세자로서는 추호라도 잘못된 언행을 했다가는 역린을 건드릴 수 있었다. 조심 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선위 운운할 때마다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앉았으리라. 세자로서 임진왜란을 치렀고, 재위 시절 떠오르는 강국인 후금(청나라)과 썩어도 준치인 명나라 사이에서 외줄타기 외교를 펼쳐야 했다.
 그 어려운 정세를 맞아 신하들은 아주 세세한 사항까지 임금에게 보고했다. 전형적인 책임회피였다.
 “난 고질병인 화병 때문에 요즘 겨우 버티고 있다. 이럴 땐 급하지 않은 업무는 좀 보류해도 좋으련만…. 너무도 일의 경중을 모르고 있구나.”(<광해군일기> 1620년 10월 18일)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맹목으로 섬기려는 대신들의 ‘몽니’는 광해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예컨대 1619년(광해군 11년), 당시 욱일승천의 기세로 요동을 차지한 후금이 편지를 보냈다.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우리(후금)와 맹약을 맺자”는 편지였다. 광해군은 ‘지는’ 명나라와 ‘뜨는’ 후금 사이에서 적절한 등거리 외교를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달랐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웠다. 이들은 3개월이나 ‘몽니’를 부리며 차일피일 미뤘다.
 “호서(胡書·후금의 편지)를 처리하라고 했거늘…. 명색이 국방을 담당하는 비변사가 미적미적 대고 있으니…. 1~2일 안에 처리하도록 하라.”(<광해군일기> 1619년 7월 16일)
 그러나 대신들은 “명나라의 문책이 두렵다”며 선뜻 나서지 않았다. 광해군은 ‘명나라와의 의리가 밥 먹여주냐’며 호통친다.
 “이번 호서의 처리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다. 그런데도 경들이 명분론만 내세우고 있다. 종묘와 사직이 위험에 빠진다면 어찌할 것인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다.”(<광해군일기> 1619년 7월 22일)

 

 ■“다른 사람에게 시키든가요.”
 광해군은 실리외교를 주장한 것이다. 그럼에도 대신들이 미적거리자 우의정 조정(1551~1629)에게 “당신이 한번 처리해보라”고 명했다.
 그러나 조정은 ‘제가 왜 책임지냐’면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회피했다.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 일을 혼자 담당한다는 말입니까. 성상께서는 다른 대신들과 함께 상의하여 처리하소서.”(<광해군일기> 1619년 7월 27일)
 그러자 광해군이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당신도 ‘맡지 않겠다’며 이토록 번거롭게 하는데…. 어느 대신이 맡겠는가. 나 혼자 고민하다가 병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나랏일이 한심하구나.”
 아닌게 아니라 당시 광해군은 깊은 병에 걸려 있었다. 후금의 편지에 답하는 기한(8월5일)이 훌쩍 지났지만 어느 누구도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자 광해군은 병든 몸을 이끌고 나와 대신들에게 애원조로 호소한다.
 “내가 병이 심하고 졍신이 혼미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 데도 종묘사직이 위태로운 꼴을 차마 볼 수 없어 나왔다. 이미 답서의 기한(8월 5일)이 지났지만 8월 안으로 보낸다면 혹시 목전에 닥친 전란은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경들은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광해군일기> 1619년 8월 14일)
 광해군은 “만약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섬짓하다.(思之膽寒)”고 걱정했다. 그러니 병이 쉽게 나을 리가 있었겠는가.

 

 ■‘난 임금이 싫어!“
 조선의 2대왕인 정종은 어떤가. 애초부터 임금이 될 생각이 없었던 정종 역시 마음의 병 때문에 내내 불면증에 시달렸다.
 “밤마다 마음 속으로 번민하여 자지 못하고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근일에 다시 병이 생겨 마음과 기운이 어둡고 나른해서 피부가 날로 여위어진다.”(<정종실록> 1399년 3월 13일)
 하기야 정종은 임금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동생인 정안군(태종 이방원)을 그렇게 무서워했다지 않은가. 오죽했으면 부인(정안왕후)이 동생 앞에서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남편에게 “빨리 양위하라”고 애원했을까.(<연려실기술> ’정종조고사본말’) 하루라도 임금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었던 정종은 ‘격구’로 시간을 때우고 건강을 되찾으려 했다고 한다.
 정종에게는 임금의 자리 그 자체가 스트레스 였던 것이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가슴과 배의 통증을 호소했다. 세조는 특히 “어렸을 때는 방장한 혈기로 병을 이겼는데 몇해 전부터 질병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왕위에 오른 지 9년 뒤인 1463년 9월 27일의 기록(<세조실록>)이다. 조카를 죽이면서까지 차지한 지존의 자리였건만 주단이 깔린 행복한 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가슴통증에 사딜리던 세조는 1466년(세조 12년) 꿈에 나타난 처방대로 현호색(玄胡索·양꽃 주머니과의 다년생 풀)을 넣은 칠기탕을 복용하고 차도를 보였다. 칠기탕(七氣湯)은 정신적인 스트레스 질환에 사용되는 처방이다. 세조 역시 임금으로서의 스트레스로 고생했던 것이다. 

 

 ■만기(萬機) 처리에 만병(萬病) 생긴다.
 반정으로 임금 위에 오른 중종 역시 마음병으로 고생했다. 
 <중종실록> 1544년 11월 14일조를 보면 “임금이 번민이 심한데도 약을 들기 싫어하므로 야인건수(똥물)에 청심환을 타 올렸다”고 했다. 야인건수(野人乾水)는 인분을 물에 탄 것을 일컫는다. 극심한 열기를 다스리는 데 쓰인다. 가슴앓이를 다스리기 위해 인분 탄 물을 약으로 마셨다는 것이다.
 1544년(중종 39년) 11월 14일 중병에 걸린 중종은 선위의 뜻을 밝히는데, <실록>을 쓴 사관이 사족을 붙여놓는다..
 “임금이 즉위한 이래 권간(權奸)이 출몰, 조정을 제멋대로 어지럽혀서 골육에까지 화가 미쳤다. 임금의 심려가 병이 된 것은 당연하다. 간흉(奸兇)에게 권력을 맡겼고, 임금의 대권을 행사하지도 못하고 억지로 따르다가 이것이 쌓여서 뼈속까지 병이 들어 끝내 구제할 수 없는 슬픔에 이르게 되었으니, 아! 슬프다.”
 기묘사화(1519년) 이후 김안로와 윤원로 형제 등의 득세로 임금의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마음의 병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도자라는 자리…. 결국 ‘만기(萬機’)를 처리하느라 ‘만병(萬病)’에 걸릴 수 있는 자리였던 것이다.
 하기야 한나라 시대 유학자인 동중서는 왕(王)의 자리를 이렇게 해석했다.
 “문자를 만드는 사람이 3번 획을 긋고 그 가운데를 이어 왕(王)이라 했다. 3개의 획은 하늘, 땅, 사람을 의미하며 이 세 가지를 관통하는 것이 왕(王)이라 했다.”(<설문해자>) 

   때마침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조선왕실의 생로병사-질병에 맞서다'를 주제로 한 특별전이 열린다. 9월14일까지 열리니만큼 틈이 난다면 한번 가볼 것을 권한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46 관련글 쓰기

 영화 <명량>이 요즘 히트를 치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해전사에 빛나는 명량대첩을 옛 문헌들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영화 명량을 보기 전에, 혹은 본 후에 <선조실록>, <승정원일기>, <연려실기술>, <난중일기>, <백사집>, <난중잡록>, <재조번방지>, <백호전서> 등에 나타난 명량해전의 기록들을 읽어보자. 간단히 말하자면 명량해전은 1597년(선조 30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10여 척의 전선으로 적함대 133척을 맞아 거둔 대첩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일본인 간첩 요시라의 이간질에 녹아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경질하고 원균을 기용한다. 그러나 원균은 왜적의 전술에 말려 대패하고 만다,
 조선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 강토는 또한번 왜적의 침략에 분탕질되고 만다. 1597년 8월 조선 조정은 권율 도원수 밑에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시킨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 13척의 배로 131척에 이르는 왜적선을 상대한 이순신 장군은 "왕명을 맏은 우리는 의리에 죽고 살아야 한다"고 결사항전을 외쳤다.

그런데 <임진잡록>은 이 대목에서 ‘누가 원균에게 돌을 던지겠느냐’고 변호한다.
 “원균보다 충의를 다한 자와 원균보다 뛰어난 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었는고? 만약 원균을 불충하다면 저 목숨을 보전하려고 도망다닌 자에게는 무슨 죄를 줘야 할꼬?”
 어쨌든 복귀한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비장한 각오를 내비쳤다고 한다.
 “임진년부터 지금까지 5~6년 동안 적이 감히 충청, 전라도를 곧장 돌진해 오지 못했던 것은 우리 수군이 길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게 전선이 아직도 12척이나 남아 있습니다. 죽을 힘을 내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권13, 부록5 행록1)
 그에게 남은 배는 단 10여 척 뿐이었다. 중과부적을 절감한 이순신 장군은 물살이 빠른 명량구에 진을 쳤다. 그는 휘하장수들과 함께 “우리는 함께 왕명을 받았다. 의리상 생사를 같이해야 한다. 국사(國事)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한 번 죽음을 아끼겠는가. 오직 충의에 죽는다면 죽어도 영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굳게 결의했다.
 그가 마련한 필살기가 있었다. 단 10여척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 그는 백성들의 피란선 100여척을 이용하기로 한다. 전선 10여척을 앞에 두고 그 뒤에 피란선을 죽 늘어놓아 마치 100여척의 전선이 있는 것처럼 거짓으로 허장성세를 펼친 것이다.
 마침내 전투가 벌어지자 장군은 두려움에 떨고 소극전을 펼치려는 휘하장수들을 독려, 마침내 적선 31척을 깨뜨리는 전과를 세운다. 이 와중에서 적장인 구루지마 미치후사(來島通總)의 목을 잘라 효수한다. 구루지마는 각종 문헌에서 ‘내도수(來島守)’, ‘마다시(馬多時)’,  ‘뇌도수’ 등으로 표기돼있다.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단 1척의 피해도 입지 않았고, 전사자 2명과 부상자 2명이 있었을 뿐이다. 이 전투를 멀리서 지켜보던 백성들은 적선의 기세가 워낙 등등하자 극도의 불안감에 빠져 통곡하다가 하루종일의 혈전 끝에 아군이 승리하자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명량대첩의 낭보가 조정에 올라가자 선조 임금이 이순신에게 숭품(崇品), 즉 종1품에 올리려고 했다. 그러자 어떤 자가 “이순신의 작질(爵秩)이 이미 높다”고 질투했다. 때문에 선조는 제장(諸將) 이하에게만 포상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임금과 신하들이다.
 지금 이 순간, 필자는 명량해전을 기록한 옛문헌들을 되도록 가감없이 인용하고자 한다. 객관적인 자료를 주기 위해서….

 

 ■<선조실록>
 1597년(선조 30년) 11월 10일조에 나오는 ‘제독 총병부에 적군의 동태와 대비책, 우리 장수의 전과를 알리다’ 라는 기사를 보자.
 조선 조정이 제독총병부, 즉 명나라 지원군 사령부에 왜적의 동태과 그동안의 전과를 알리면서 1597년 9월16일에 있었던 명량대첩의 전과를 설명하고 있다.
 “근래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치계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병선과 병기가 거의 다 유실되었습니다. 신이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 해로의 요구(要口)를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적의 전선 130여 척이 이진포(梨津浦) 앞바다로 들어오기에 신(이순신)이 수사 김억추, 조방장 배흥립, 거제 현령 안위(安衛) 등과 함께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 벽파정(碧波亭) 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웠습니다.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뜨리니 사살이 매우 많아 적들이 모두 바다속으로 가라 앉았으며, 머리를 벤 것도 8급이나 되었습니다. 적선 중 큰 배 한 척이 여러 적선을 지휘하여 우리 전선을 에워싸는 것을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宗)·영등 만호 정응두(丁應斗)가 잇따라 와서 힘껏 싸워 또 적선 11척을 깨뜨리자 적이 크게 꺾였고 나머지 적들도 멀리 물러갔습니다. 이 때 진중(陣中)에 투항해온 왜적이 홍기의 적선을 가리켜 안골포(安骨浦)의 적장 마다시(馬多時)라고 하였습니다. 한산도(칠천량)가 무너진 이후부터 남쪽의 수로(水路)에 적선이 종횡하여 충돌이 우려되었으나 현재 소방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봉(賊鋒)이 조금 좌절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명량대첩(오류리) 해역 수중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발굴 유물들. 임진왜란 당시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돌 폭탄인 석환(石丸) 등 500여 점에 달하는 다양한 유물을 발굴됐다.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1636년(인조 14년) 8월 5일조에 기록한 명량해전의 ‘단편’을 보자.
 “지난 정유년(1597년·선조 30년)에 전선(戰船) 300척을 거느리고 원균(元均)이 원수가 되었을 때 한산도(閑山島)에서 패망하여 10척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李舜臣)이 통솔하여 명량(鳴梁)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는 신들이 직접 눈으로 본 것이니, 지난 일을 통해 분명히 징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신들이 8가지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명량대첩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이라 표현하고 있다.

 

 ■<난중잡록>
 <난중잡록>은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1582~1610년까지 쓴 야사이다.
 1597년(선조 30년) 1월, 일본의 요시라(要時羅)가 이순신을 모함했다. 
 요시라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에서 조선·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통역이었다. 그가 조정과 이순신 장군 사이를 이간질 시킨 것이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가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 땅을 건너오다가 바람을 만나 며칠동안이나 작은 섬에 정박했다고 분명히 이순신 장군에게 통지했는데…. 통제사가 의심하고 두려워 하여 오지 않아 일을 그르쳤습니다.”

 ▶간첩의 이간질에 이순신 경질
 조정은 요시라의 이간질에 속아 “이순신이 헛되게 큰소리 쳐서 임금을 속였다”고 허물하여 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다 문초하게 했다. 그런 뒤 전라 병사 원균(元均)을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고, 나주 목사 이복남(李福男)으로 전라 병사를 삼았다.
 “남도 백성들은 한산도를 요새로 삼고, 이순신을 간성(干城)으로 믿었다가, 그가 파면되었음을 듣고는 크게 낙담했다. 그들은 더이상 기댈 데가 없어서 짐을 꾸렸다.”
 <난중잡록>은 이 대목에서 “요시라는 모두 일본을 위해 조선에 거짓으로 속였는데 우리만 몰랐으니 통탄할만 하다”고 안타까워 했다.
 “요시라 놈이 간첩이 되어 조선을 그르친 게 한가지가 아니다. 이를테면 강화를 약속한 것이라든지, 이순신을 모함한 것이라든지. 더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이토록 농락을 당하고도 멋대로 왕래하도록 했으니…. 아! 이 나라에 사람이 없구나!”
 요시라에 깜박 속은 선조는 결국 이순신을 문책했다.
 “4월 13일 임금은 ‘이순신의 공과 허물이 똑같으니 죄를 주지는 마라’고 한 뒤 권율 장군의 원수부에 백의종군하도록 했다.”
 이순신 장군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권율 장군의 문책을 받고 곤장을 맞는 처지에 빠진다. 적을 두려워 하여 싸움을 이리저리 피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권율은 곤장을 치면서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라 했다고 한다. 곤장을 맞은 원균은 분을 품고 남은 군사를 있는 대로 이끌고 부산에 이르렀다.
 “왜선 1000여 척이 나왔다, 원균이 노젓기를 재촉하여 배를 전진시키니, 적병이 물결처럼 흩어졌다. 짐짓 우리를 대적하지 못할 것 같이 보였다. 원균이 이 틈을 타고 전진하여 그칠 줄을 모르니, 뱃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배가 국경을 넘어 대마도가 장차 임박하였으니, 뱃길을 잘못 들어 우리는 살아날 도리가 없게 되었다. 스스로 죽을 땅에 들었으니,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질 것인가.’ 했다.” 

2008년 전남도가 재현한 명량해전의 전투장면. 조선 수군이 탔던 판옥선과 안택선으로 왜적선을 함포사격하는 장면이다.

▶죄없는 자가 원균에게 돌을 던져라

  이 말을 들은 원균이 후퇴를 명령했다. 밤낮으로 사력을 다해 배를 몰아 가덕도~영등포~온라도로 계속 후퇴했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적병은 조선의 기세라 꺾인 줄 알고 500여척을 동원, 맹추격했다. ~포 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바다를 진동하여 복병이 사면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베고 찍었다.”
 원균은 여러 장수를 모아 놓고는 “적세가 이 모양이니 아무래도 지탱할 수 없다.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으니 어찌하랴. 오늘의 일은 일심으로 순국할 따름이다.”라 순국을 결심한다.
 이 때 배설이 원균의 옥쇄를 반대하고 나서며 큰소리쳤다.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에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요긴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 바다에서 기세를 잃어 군사들이 놀라 소란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여 용맹은 쓸 수 없으니 겁내는 것을 써야겠습니다.”
 원균은 벌컥 화를 내면서 “죽고나면 그만이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고 했다. 결국 원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과 함께 옥쇄했다. 배설은 싸움이 한창일 때 자신의 소속으로 된 배 12척을 이끌고 달아났다. 아이로닉하게도 배설이 이끌고 도망한 배 12척이 명량대첩의 밑천이 될 줄이야.
 이 패배로 원균은 여론의 십자포화를 당했다. 당시 원균은 체구가 비대하고 건장하여 한 끼에 밥 한 말, 생선 50마리, 닭과 꿩 3ㆍ4마리를 먹었다. 평상시에도 배가 무거워 제대로 걷지 못했는데, 마지막 순간에도 앉은 채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원균은 이 죽음으로 웃음거리가 됐다. 당시 곡성에 사는 생원 오천뢰(吳天賚)가 이런 시를 지었다고 한다.
 “한산도는 나라의 남문인데(閑山一島國南門)/무슨 일로 조정에서 장수를 자주 바꾸었나.(底事朝廷易將頻)/처음부터 원균이 나라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不是元均初負國)/원균의 배가 원균을 저버렸네.(元均之腹負元均)”
 원균의 ‘배(腹)’가 원균을 죽게 만들었다는 비웃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난중잡록>은 ‘누구든지 죄가 없는 자가 원균에게 돌을 던지라’고 변호한다.
 “원균보다 충의를 다한 자와 원균보다 뛰어난 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었는고? 만약 원균을 불충하다면 저 목숨을 보전하려고 도망다닌 자에게는 무슨 죄를 줘야 할꼬?”

 ▶명량해전의 전과
 어쨌든 이 패배로 조선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미처 도피하지 못한 남녀들은 모두 살육을 당하였다. 왜적은 전공을 헤아린다는 이유로 산 사람들의 코를 모조리 베어 가기도 했다. 이로써 그 뒤 수십 연간에 조선의 길에서 코 없는 사람을 매우 많이 볼 수 있었다.”
 원균이 죽은 뒤 권율 도원수의 휘하에 있던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왜적들은 다시 조선 땅을 분탕질 했다. 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도원수의 진중(陣中)으로부터 출발하여 진주의 서로를 거쳐 구례로 향하다가 적선이 이미 나루터에 정박해 있는 것을 보고는 곡성을 거쳐 서해로 향해 갔다. 이때 배설이 배 12척으로 퇴각하여 진도의 벽파정 밑에 있었는데, 이순신이 그리로 달려갔다.
 배설은 교만하고 패악하여 군율을 어겨 이순신에게 죄를 얻자, 자기 마음대로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여 성주(星州)의 본집으로 돌아가니, 이순신이 즉시 죄목을 갖추어 아뢰었다. 배설은 도망하였다가 그 뒤에 체포되어 주벌을 받았다.
 1597년 9월 이순신은 잔병을 거느리고 진도의 명량구에서 머무르며 사태의 추이를 기다렸다. <난중잡록>이 전하는 명량대첩의 상황을 보자.
 “왜적의 괴수인 내도수(來島守·구루지마 미치후사)는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서해로 향하여 진도(珍島)의 벽파정(碧波亭) 밑에 이르렀다. 이 때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명량(鳴梁)에 유진하고 피란한 배 백여 척이 뒤에서 성원하였다.”
 이순신은 왜적의 침입소식을 듣고 여러 장수에게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경솔히 대적하지 말고 기회를 따라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니,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일일이 작전을 지시했다.
 “왜적은 우리 군대가 외롭고 힘이 약함을 보자 집어 삼킬 듯 쇄도했다. 서로 다투어 먼저 올라와 사면을 포위하고 엄습하여 왔다. 아군은 싸울 뜻이 없는 양 보이며 거짓으로 적의 포위 속으로 들어가니, 왜적은 아군의 두려워하고 겁냄을 기뻐하였다.”
 싸움을 육박전의 양상으로 전개됐다.
 “난전이 되자 홀연히 장수 배에서 주라(朱喇·소라껍데기로 만든 나팔)을 번갈아 불어대고, 지휘기가 일제히 흔들리고 북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가운데 불이 적의 배에서 일어나 여러 배가 연소됐다. 불길은 하늘을 뒤덮었고, 화살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고 창검이 어울려서 찌르니, 죽는 자는 삼대가 쓰러지듯 하였고, 불에 타 죽고 빠져 죽는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이 때 이순신은 구루지마 마치후사(來島守)를 베어 머리를 돛대 꼭대기에 매달았다. 조선군대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장수와 사병이 용맹을 떨쳐 달아나는 놈을 추격하고 패배하여 가는 놈을 따라가 목 베어 죽인 것이 수백여급이 되었다. 왜적선 가운데 도망하여 탈출한 것은 겨우 10여 척 뿐이었고 아군의 병선은 모두 무사했다.
 왜적들의 입장에서 얼마나 뼈아픈 패배였는지 “왜병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전쟁담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명량의 싸움을 말하였다”고 한다.

 

 ■<백사집>
 <백사집> 3~4 ‘비명·통제사 이공의 노량비명’ ‘고 통제사 이공의 유사’를 보자.
 <백사집>은 당대 병조판서를 지낸 이항복의 시문집이다. 이항복은 <백사집>에서 이렇게 이충무공을 평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병풍(병풍처럼 감싸 안음)은 한산(閑山)이고, 그 경계는 노량(露梁)이며, 그 요충지는 명량(鳴梁)이었다. 만일 한산을 잃고 노량을 지키지 못하여 곧바로 명량을 축박해 온다면 경기(京畿) 일대가 마음을 동요하게 될 지경이었다. 이때 공을 이뤄 삼도(三道)의 적을 막아낸 이가 바로 원후(元侯) 통제(統制) 이공(李公)이었다.”

 ▶“의리상 생사를 함께 한다.”
 <백사집>이 전하는 명량해전은 어땠을까.
 “원균 사후 다시 통제사가 된 이순신 공은 단기(單騎)로 군졸들을 불러모아서 명량(鳴梁)으로 나가 진을 쳤다. 갑자기 밤중의 습격을 받아서 소수의 군졸로 필사전을 벌인 결과, 새로 모은 13척의 전함으로 바다를 가득 메운 수많은 적을 상대하여 30척의 적선을 파패시키고 용맹을 다하여 전진하니, 적들이 마침내 퇴각하여 도망쳤다.”
 <백사집>은 이순신 장군이 배설로부터 배를 얻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공(이순신 장군)이 통제사로 복귀했을 때 조선 수군이 막 패한 뒤여서 주선과 기계가 남아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공은 단기(單騎)로 달려 경상우수사 배설을 만났는데, 이때 배설이 거느린 전선은 겨우 8척이었고, 또 녹도에서 전함 1척을 얻었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이 배설에게 앞으로의 계책을 물었다. 그러자 배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육군에 의탁해서 싸우는 게 낫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이 “그 계책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자 배설은 배를 버리고 달아났다. 배설은 이 때의 죄 때문에 훗날 사형 당하고 만다. 
 배설이 자취를 감추자 이순신 장군은 전라우수사 김억추 등을 불러 다짐한다.
 “우리는 함께 왕명을 받았다. 의리상 생사를 같이해야 한다. 국사(國事)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한 번 죽음을 아끼겠는가. 오직 충의에 죽는다면 죽어도 영화가 있을 것이다.”
 장수들이 모두 감격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이윽고 명량해전이 발발하던 1597년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이 군중에 갑작스레 명을 내렸다.
 “오늘 밤, 적이 반드시 습격할 것이다. 경계를 엄중히 하라.”

 ▶이순신의 기묘한 작전
 과연 적병이 야밤에 기습해왔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큰 소리로 “동요하지 마라”고 호통을 쳤다. 장군의 독려로 적은 포위망을 풀고 철군했다.
 이순신 장군은 회군(回軍)하여 명량 앞바다로 와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적선 500~600척이 바다를 온통 뒤덮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의 기묘한 전략·전술이 빛났다.
 “이 때 배를 타고 피란 나온 호남의 백성들이 장군의 진영 아래 모여 있었다. 장군은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으로 인해 먼저 백성들의 피란선(避亂船)들로 하여금 차례로 물러가 배열하여 진을 치게 했다. 적군에게 피란선을 전선(戰船)이라 거짓으로 알게 만든 것이다. 장군은 피란선을 의병(疑兵)으로 삼은채 자신은 전함을 거느리고 맨 앞에 나가 있었다.”
 장군의 작전에 현혹된 왜적들은 일제히 노를 재촉하여 명량 바다를 뒤덮었다.
 “이 때 아침 조수가 막 밀려나가서 항구의 여울물이 매우 급했다. 거제 현령 안위가 조수를 따라 내려가다가 빠른 바람세를 타고 배가 쏜살같이 달려 곧장 적진 앞에 돌진했다. 적이 사면에서 포위했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돌전(突戰)했다.”
 장군은 병사들을 재촉하여 안위를 엄호하도록 하면서 적선 31척을 격파했다. 적이 주춤하면서 약간 후퇴하자 장군은 노를 치면서 기세를 몰아 진격을 명령하니 승승장구했다.
 “적들은 죽을 듯이 소리만 외칠뿐 감히 대적하지 못했다. 적은 군대를 죄다 거느리고 도망쳤다. 장군은 보화도(고하도·고화도)로 옮겨 진을 쳤다.”
 이것이 <백사집>에 실린 명량대첩의 전말이다.

 

   ■<백호전서>
 <백호전서>는 조선 중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윤휴(1617~1680)의 문집이다.
 <백호전서 23집 ‘사실(事實)’에 실린 ‘통제사 이 충무공의 유사(遺事)’를 더듬어 보자.
 “1597년 8월 이순신 장군이 다시 통제사가 되자 놀라며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성한 사람들은 일제히 자기 집에 이렇게 고했다.
 “공(公)이 왔으니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공을 따르겠다.”
 장군이 보성에 이르자 따라붙은 장사가 100여 명이었다. 장군은 명령을 따르지 않은 수군절도사 배설의 남은 배 10여 척을 접수했다. 장군은 훗날 명령에 따르지 않고 도망친 배설을 참수했다. 장군은 수백여척의 피란민 배를 허장성세로 늘어서게 한 다음 전함 10여 척을 그 앞에 배치했다. 이렇게 적을 속인 장군은 진도의 벽파정 아래서 적을 맞아 싸웠다.

 ▶백성들의 피란선을 전선으로 위장
 중과부적으로 넓은 바다에서 교전하기 어려웠기에 벽파정 아래 좁은 목을 지키면서 형세를 이용한 것이다.
 이 때 적선 300 여 척이 명량을 경유, 곧장 아군 진영으로 진격한다는 첩보가 있자 장군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방어했다,
 중과부적으로 장수들이 모두 퇴각하려 했을 때 장군이 바다 한복판에 배를 머물러두고 꼼짝하지 않았다. 적들이 그것이 대장선(大將船)임을 알고는 마침내 수백 척의 배를 가지고 차츰 죄어 들어왔다. 형세가 더욱 긴박해지자 장군이 대장기로 지휘하면서 나가 싸울 것을 독려했다.
 “이 때 거제 현령 안위(安衛)가 싸움을 버티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장군은 뱃머리에 서서 크게 고함을 질러 ‘안위의 머리를 잘라오라’고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안위가 이 말을 듣고 심기일전하여 적진에 돌입했다. 안위가 적과 교전하다가 배가 곧 함몰되려 할 즈음, 장군이 또 배를 돌려 그를 구해주었다.”
 안위는 역시 사력을 다해 싸웠고, 포시(대포와 화살)를 사방에서 발사하여 적병이 즐비하게 쓰러져 마침내 적을 크게 패배시켰다. 이 때 적의 맹장 마다시(馬多時·구루지마)를 사로잡아 참수하였고, 적선 30여 척을 부쉈다. 죽은 적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나머지 백성들은 포위를 풀고 도주함으로써 우리 군성(軍聲)이 다시 크게 떨쳤다.

 ▶‘환호성 터진 백성들의 전투구경’
 멀리서 이 전투를 지켜보던 수 만의 백성들은 처음에는 극도의 불안감에 빠져있었다
 “적들이 아군을 사방에서 포위하여 포성이 바다를 진동하고 검광(劍光)이 햇볕을 요동시키는 듯했다. 싸움을 구경하던 수만 명이 아군을 바라보고 통곡했다. 적들은 교대로 나가고 물러가고 하면서 온종일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적은 군대로 많은 적병을 상대하여 끝내 큰 승첩을 거두었다. 날이 저물고 전쟁이 끝난 뒤 적병들이 모조리 섬멸되고 아군의 배만 우뚝 서있어 망루(望樓)도 파손되지 않았음을 보고는, 이날 관전했던 사람들이 몹시 감탄하여 진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명량대첩의 낭보가 조정에 올라가자 선조 임금이 이순신에게 숭품(崇品)에 올리려고 했다. 그러자 어떤 자가 “이순신의 작질(爵秩)이 이미 높다”고 질투했다. 때문에 선조는 제장(諸將) 이하에게만 포상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임금과 신하들이다.

 

   ■<연려실기술>
 <연려실기술>은 실학자 이긍익(1736~1806)이 약 30년 동안 400여 가지에 달하는 야사에서 자료를 수집·분류하고 원문을 그대로 기록한 역사서이다.
 <연려실기술> ‘선조조고사본말·이순신 진도에서 이기다’의 명량대첩 기록을 살펴보자.
 “원균 부대가 패전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조정과 민간이 크게 놀랐다. 선조가 대책이 뭐냐고 물었지만 모두들 두려워 하여 어쩔줄 몰라했다. 이 때 경림군 원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이 입을 뗐다.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를 시키는 방법 외에는 다른 수가 없습니다.'”
 선조는 할 수 없이 이순신에게 삼도 수군통제사의 벼슬을 회복시켜 주었다. 이순신은 배설(1551~1599)이 12척의 병선을 거느리고 후퇴했다는 진도 벽파정으로 달려갔다.
 “1597년 9월 뇌도수(구루지마)가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진도에 도착하였는데, 이순신은 명량(鳴梁)에 머물며 진을 치고 피난선 백 여 척을 모아서 가짜로 성세를 이루었다. 적이 이르니 순신은 거짓으로 싸우지 않는 것처럼 하였다. 적은 우리 군사의 형세가 약한 것을 보고 다투어 와서 덮쳐 둘러싸고 바싹 가까이 와서 싸웠다.”
 이 때 갑자기 장군의 배에서 태평소를 불고 깃발이 일제히 일어나며, 바람을 따라 불을 놓으니 불이 적의 여러 배에 옮겨 붙었다. 순신은 드디어 이긴 기세를 타고 공격하니 죽는 자가 삼대 쓰러지듯 하였다. 장군은 먼저 뇌도수의 머리를 베어서 돛대 위에 걸어 놓으니 장졸들은 용기를 뽐내고 의기가 백배나 되어 달아나는 자를 쫓아서 수백여 명을 베어 죽였다.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셀 수없이 많았다. 적군은 겨우 십여 척으로 도망갔고 우리 배는 모두 탈이 없었다. 그 뒤에 적이 싸움을 말할 때마다 반드시 명량(울돌목) 전투를 말하였다. <일월록>과 <조야기문>에는 적장을 마다시(馬多時)라고 기록했다.

 

   ■<재조번방지>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는 조선 중기의 학자 신경(申炅·1613~1653)이 임진왜란 전후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 등을 정리한 책이다.
 이순신은 홀로 쇠잔한 군사로 13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벽파정(碧波亭) 앞 바다에 주둔하고 있었다. 보는 사람이 위태롭게 여겼지만 밤낮으로 엄히 경계하여 갑옷을 벗은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밤 장군이 갑옷 입은 채로 북을 베고 누웠다가 문득 일어나 앉아서 소주를 한 잔을 마시고 모든 장수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오늘밤 달빛이 매우 밝다. 왜적의 꾀가 간사스러움이 많아서 달이 없을 때라면 본래 우리를 습격하겠지만 달이 밝아도 또한 와서 습격할 듯하니, 경비를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호각을 불어 모든 배에 닻을 올리게 하고 또 모든 배에 전령하여 척후를 세우고 변을 기다리게 하였다. 얼마 후에 초탐선(哨探船)이 왜적이 온다고 급히 보고하니 이순신이 호령하여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게 하였다. 이때에 달이 서산에 걸려 산그림자가 바다에 기울어 반쪽은 어두컴컴한데, 무수한 적석이 컴컴한 곳을 따라와서 우리 배에 접근하려 하였다. 
 이에 중군(中軍)이 화포를 놓고 고함을 지르자 모든 배가 호응하니 적이 방비가 있음을 알고 일시에 조총을 쏘아대어 소리가 바다를 진동하였다. 이순신이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적이 드디어 감히 범하지 못하고 물러 달아나니 여러 장수가 모두 탄복하여 귀신같이 여겼고 이순신 또한 우수영(右水營) 명량(鳴梁) 바다 가운데로 회군하였다.
 “날이 밝아서 바라보니 적선 500~600척이 바다를 덮어 올라왔다. 그 장수 마다시(馬多時·구루지마)는 원래 수전(水戰)을 잘한다고 일컫는 자여서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순신은 적은 수효가 많고 우리는 적어서 힘으로 싸워 이기기는 어려우므로 꾀로써 격파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일찍이 배를 타고 피난하던 호남 지방 사람들이 모두 순신에게 의지하여 목숨을 보전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 피란온 배로들을 이용했다. 차례차례로 물러가서 늘어세워 포진하게 하여 의병(疑兵)을 만들어 바다 가운데를 왔다 갔다 하게 했다. 장군은 스스로 전함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바로 나왔다.
 적은 이순신이 배를 정비하여 나오는 것을 보고, 각자 노를 저으며 북을 울리고 소라를 불면서 용기를 내어 곧장 나오는데 깃발과 망대(望臺)가 바다 가운데 가득하니, 우리 군사가 보고 실색하였다.
 “아침 조수가 바야흐로 물러갈 때여서 항구에 물살이 거세었다.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가 조수를 따라 내려가는데 바람이 빨라 배가 쏜살같이 달려 곧바로 적의 앞을 충돌하니, 적이 사면으로 에워싸므로 안위가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하였으나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이순신이 모든 배를 독려하여 잇달아 진격하여 먼저 적선 31척을 격파하니 적이 조금 퇴각하였다. 이순신이 돛대를 치면서 여러 사람에게 맹세하고 이긴 기세를 타서 진격하니 적이 감히 당해내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도망하므로 이순신 또한 진을 보화도(寶花島)로 옮겼다. 이 때에 이순신이 이미 전사(戰士) 1000명을 얻었다.

 

  ■난중일기
  ▶1597년 신유일 8월 3일
 맑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그것이 곧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서장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하동읍 두곡리)로 가는 길로 곧바로 갔다.
 초저녁에 행보역(하동군 횡천면 여의리)에 이르러 말을 쉬고, 한밤 자정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 했다.
 남해현령 박대남은 길을 잘못 들어 강정(하동읍 서해량 홍수통제소 서쪽 섬진강가)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기다렸다가 불러와서 쌍계동(화개면 탑리)에 이르니,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 있고 비가 와 물이 넘쳐 흘러 간신히 건넜다.
 석주관(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니, 이원춘과 유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를 보고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했다.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구례읍 북봉리) 밖에 전날의 주인집으로 가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갔다고 했다.
 손인필ㆍ손응남이 와서 보고, 올감[早枾]을 가져왔다.
 
 ▶1597년 병자일 8월 18일
 맑다.
 회령포(대덕읍 회진리)에 갔더니 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삼고서 와 보지도 않았다.
 관사에서 잤다. 전선은 단 열 척 뿐. 전라우수사 김억추를 불러 병선(兵船)을 모으게 했다. 또 여러 장수들에게 “전선을 거북배로 꾸며서 군세를 돋구도록 하라”고 명했다. 또 “우리들이 임금의 명령을 같이 받들었으니 의리상 같이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한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아까울 것이냐!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굳게 약속했다.
 
 ▶1597년 을유일 8월 27일
 맑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다.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다.
 나는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고 말했다.
 
 ▶1597년 병술일 8월 28일 
 맑다.
 예상밖에 적선 여덟 척이 들어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었다. 경상수사는 도망하려 했다.
 나는 꼼짝도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따라잡도록 명령했다. 적선이 물러갔다.
 추격하여 갈두(해남군 송지면 갈두)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진을 장도(노루섬)로 옮겼다.
 
 ▶1597년 경인일 9월 2일
 맑다.
 오늘 새벽,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갔다.
 
 ▶1597년 을미일 9월 7일
 바람이 그쳤다.
 탐망군관 임중형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도착했다. 우리 수군을 도모하려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각 배들에게 엄중히 경계하도록 했다.
 오후 4시쯤 적선 13척이 곧바로 우리 배로 향해 왔다. 우리 배들도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 맞서 공격했다. 그러자 적들이 배를 돌려 달아나 버렸다. 뒤쫓아 먼 바다까지 갔지만, 바람과 조수가 모두 거슬러 흐르므로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오늘 밤 적의 야습이 있을 것 같았다. 각 배에 경계태세를 갖추라고 하였다.  역시 밤 10시 쯤에 적선이 포를 쏘며 공격해왔다.
 우리 배들이 겁을 먹는 것 같아 다시금 엄명을 내린 뒤 내가 탄 배가 곧장 적선 앞으로 가서 포를 쏘았다. 그랬더니 적이 자정에 물러갔다.
 
 ▶1597년 임인일 9월 14일
 맑다.
   “적선 200 여 척 가운데 쉰다섯 척이 미미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는 정탐이 있었다.
 또 “적에게 사로잡혔던 김중걸이 전하는데 김중걸이, 이달 6일 달마산으로 피난갔다가 왜놈에게 붙잡혀 묶여서는 왜선에 실렸습니다. 김해에 사는 이름 모르는 한 사람이 왜장에게 빌어서 묶인 것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날 밤 김해 사람이 김중걸의 귀에다 대고 하는 말이, ‘조선 수군 10여 척이 왜선을 추격하여 사살하고 불태웠으므로 할 수 없이 보복해야겠다. 그리하여 여러 배들을 모아 조선 수군들을 모두 몰살한 뒤에 한강으로 올라가겠다’고 하였습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비록 모두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수도 없지 않으므로,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보내어 피난민들을 타일러 곧 뭍으로 올라가라고 하였다.
 
 ▶1597년 계묘일 9월 15일
 맑다.
 중과부적의 군대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다.
 그래서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고 했으며,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라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너희 여러 장수들이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지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고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신인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일러 주었다.
 
 ▶1597년 갑진일 9월 16일 
 맑다.
 아침에 별망군이 와서 “적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곧장 우리 배를 향하여 옵니다”라고 보고했다.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330여 척이 우리 배들을 에워쌌다.
 우리 장수들이 중과부적임을 알고 후퇴해서 피할 궁리만 했다. 우수사 김억추는 물러나 아득히 먼곳에 있었다. 나는 노를 급히 저어 앞으로 돌진하면서 지자포ㆍ현자포 등 각종 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댔다. 마치 나가는 게 바람과 우뢰 같았다. 군관들이 배 위에 빽빽이 서서 빗발치듯이 쏘아대니, 적들이 감히 대들지 못하고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앞으로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잃었다. 나는 침착하게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우리 배에게는 맞서 싸우지 못할 것이다. 일체 마음을 동요치 말고 힘을 다하여 적선을 쏘아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먼 바다로 물러나 있으면서 관망만 할 뿐이었다.
  나는 배를 돌려 바로 중군장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그 목을 베어 효시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배가 뱃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차로 멀리 물러날 것이요, 적선이 점점 육박해 오면 일은 아주 낭패가 아닌가. 곧 호각을 불어서 명령 깃발을 내리고 초요기를 올렸다. 그러자 중군장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차로 내 배에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왔다.
  내가 배 위에 서서 몸소 안위를 불러 명령을 내렸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

   그러자 안위가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다시 김응함을 불러 일렀다.

   “너는 중군장의 신분으로 멀리 피해 있으면서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지만 적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려 한다."

  그러자 두 배가 곧장 쳐들어가 싸우려 했다. 그 때 적장이 배 3척을 지휘하여 한꺼번에 안위의 배로 매달려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다투었다.
 안위와 그 배에 탔던 군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어지러이 싸우다가 탈진에 이르렀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댔다. 그러자 적선 3척이 모조리 다 전복됐다. 녹도만호 송여종,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합세해서 적을 쏘았다.
 항복해온 왜적 준사란 놈은 안골포의 적진에서 투항한 자인데, 내 배 위에서 내려다보며,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놈이 적장 마다시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김돌손으로 하여금 갈구리를 던져 이물(뱃머리)로 끌어 올렸다. 준사는 펄쩍 뛰며 “이게 마다시다.”라고 하였다. 나는 곧 명령을 내려 토막으로 자르게 하니 적세가 일시에 크게 꺾여 버린다.
 이때 우리 배들이 일제히 북을 치며 진격하면서 지자포ㆍ현자포 등을 쏘고, 또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그 소리가 바다와 산을 뒤흔들었다. 적선 30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물러나 달아나 버렸다. 적은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실로 천행이다.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도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무안군 암태면)로 진을 옮겼다

 ▶1597년 을사일 9월 17일
 맑다.
 전투 후 어외도(무안군 지도면)에 이르니 피난선이 300여 척이 먼저 와 있었다.
 수군이 대첩을 거둔 것을 알고 서로 다투어 치하하고, 또 많은 양식을 가져 와 군사들에게 주었다. (끝)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45 관련글 쓰기

 “‘陽平○ ○聖功臣 ○浚.”

 1991년 7월 어느 날, 민통선 이북에서 의성(醫聖) 허준 선생의 흔적을 찾아다니던 서지학자 이양재씨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양천 허씨’의 족보에서 시선을 잡아끈 허준 선생의 무덤 위치, 즉 ‘파주 장단 하포 광암동 동남’이라는 구절에 ‘꽂혀’ 10년 가까이 찾아 헤매던 때였다.

 그가 발견한 것은 바로 ‘허준 선생’의 묘임을 입증하는 ‘양평군 호성공신 허준’이라는 두동간 난 비석이었다.(지금의 소재지는 경기 파주시 진돔면 하포리)

 왜 호성공신(扈聖功臣)이란 수식이 붙었을까.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허준은 선조를 따라 의주 피란길에 오른다. 그런데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신하들이 줄줄이 임금을 팽개치고 뿔뿔이 흩어진다.

 

 민통선 이북에서 발견된 허준 선생의 묘. 지금은 민간인들이 선생의 묘를 친견할 수 있다.  

  ■허준의 현현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요사스런 말이 퍼지자… 명망 진신(縉紳)들이 보신에만 뜻을 품고… 의주에 이르기까지 문·무관이 17인, 환관 수십인, ‘어의 허준’, 액정원 4~5인, 사복원 3인 등만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

 정치적인 계산에 따라 명철보신한 사대부와 달리 허준은 끝까지 의리를 지킨 것이다. 선생이 호성공신(扈聖功臣)과 함께 양평군의 작위가 내려진 것이다.

 불후의 명작인 <동의보감>을 쓴 허준 선생이 이렇듯 극적으로 현현한 것이다.

출생연도와 출생지, 그리고 유배지와 사망지까지 모두 논쟁의 대상이었던 허준 선생…, 아마도 서자(庶子)였던 한계 때문에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 인물이었기 탓이겠지.

 아니 민통선 이북에 있었던 쉽게 찾을 수 없었던 것 때문이리라.

 허준 선생은 용천부사를 지낸 허론과 그의 소실인 김씨 사이에 태어났다. 서자였다는 뜻이다. 어머니 김씨는 당대의 명관인 김안국(1478~1543)·김정국(1485~1541)의 사촌이자 서녀였다. 그러니까 김안국·김정국은 허준의 5촌 내종인 사이였다.

 허준은 어렸을 때부터 의학 신동이었다. 역대 의학자들의 전기인 <의림촬요>는 “허준은 본성이 총민하고… 어렸을때부터 학문을 좋아했다. 특히 의학에 조예가 깊어 신묘함이 깊은 데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선생은 이 천재성을 바탕으로 ‘독학으로’ 의학공부에 매진한 것으로 보인다.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보면 아직 관직에 나서지 않았던 허준이 유희춘의 얼굴에 생긴 종기를 완치시켜 주었다(1569년)는 내용이 나온다.

 유희춘(1513~1577)은 그런 허준을 이조판서 홍담에게 천거했다. 당시 31~33세 정도였던 허준은 내의원 첨정(종 4품)으로 일하게 된다. 지금으로 치면 보건북지부 서기관(과장급)과 이사관(국장급) 정도 될까. 서자 출신으로서는 그것도 파격적인 출세였다. 

‘陽平○ ○聖功臣 ○浚'라고 새긴 명문 비석이 발견됨으로써 동의보감의 저자이자 의성이라 추앙받는 허준선생의 묘소임이 입증됐다.허쥰묘

 ■세자의 마마를 고치다

 하지만 임금의 주치의로서의 허준은 ‘아직’이었다. 그는 단 한 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음으로서 대박출세의 길을 겼는다.

 즉 1590년(선조 23년) 세자와 공주, 옹주 등의 두창(마마)를 성공적으로 치료한 것이다.

 사실 홋날 광해군이 된 세자가 두창에 걸리자 선뜻 나서는 의사가 없었다.

 우는 아이도 ‘호환 마마’를 말하면 뚝 그친다는 말이 있듯, 두창은 무시무시한 치사율을 ‘자랑(?)’하는 악명높은 질병이었다. 당대 사람들은 두창(마마)을 평생에 한번쯤은 반드시 겪여야 할 질병으로 여겼고, 약을 쓰기보다는 무속의 힘으로 치료하려 했다.

 예컨대 태종의 막내아들 성녕대군이 두창을 앓아 위독해지자 태종 임금은 점쟁이들을 불러 점을 치게 했다.(<태종실록> 1418년 1월26일)

 이 때 ‘길하다’는 점좨가 나왔지만 성녕대군은 속수무책으로 죽고 말았다.

 어의들은 이 때 “창진(두창)이 발생하면 죽고 사는 것이 하늘에 달려있다”고 약 한 번 제대로 쓰지 않았다. 광해군이 두창에 걸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선조임금은 “세자에게 약을 쓰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미 왕자 두 명을 두창으로 잃었던 터라 임금이 결단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문책이 두려웠던 의원들은 입을 닫고 말았다.

이 대 허준이 나섰다.

 “왕자가 또 이 병(두창)에 걸렸는데, 모두들 약을 써서 문책을 당할까 가만히 있어서 (왕자의) 병이 악화됐지만 (중략) 신이 약을 세 번 써서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언해두창집요>)

 실패했다면 문책이 두려웠던 상황. 그러나 허준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처방을 내려 왕자(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한 것이다. 이 때 허준이 쓴 두창약이 저미고(猪尾膏)였다고 한다. 즉 작은 돼지꼬리의 끝을 찔러 피를 낸 뒤 용뇌(龍腦) 1돈과 말아서 팥알만큼 잘라 만든 것이다. 허준은 이 공로로 당상관의 반열에 오른다.

 

 ■임금의 병도 쾌도난마로 고치다 

 속수무책인 병은 없다고 생각한 허준의 ‘승부수’는 임금에게도 적용됐다.

선조는 어렸을 때부터 장병치례가 심했다. 여기에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까지 겪으면서 ‘멘탈’에도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던 것 같다.

 이런 증세는 승하할 때까지 계속됐다. 허준은 후환을 두려워하여 대충 처방하던 다른 어의와 달리 더욱 강한 약을 처방함으로써 ‘죽음을 두려워 않고’ 죽어가는 임금을 살리려 했다.

다른 문관과 의관들의 반대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보통의 약으로는 회복할 가능성이 없자 극약처방도 서슴지 않은 것이다.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들렸다.

 “성후의 미령하심이 봄부터 겨울까지 계속되니 약을 쓰는 것이 긴요하고도 중대합니다. 그런데 양평군 허준은 수의(首醫)로서 자기 소견을 고집하여 경솔하게 독한 약을 썼으니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평군 허준은 수어의로서 약을 의논함에 있어 마땅함을 잃어 너무 찬 약재를 함부로 써서 성후가 오래도록 평복하지 못하였으니…”(<선조실록> 1607년 11월13일)

 앞서도 인용했듯 허준만큼 임금을 보필한 이는 없었다. 이는 주치의로서 임금만을 바라보고 임금의 병만을 고치려 했던 것이다. 그랬으니 어떤 정치적인 계산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따가웠다. 앞서 인용했듯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잘 보필했다는 공으로 공신의 반열에 오르고, 선조의 병세가 호전되던 1606년 보국숭록대부(정 1품)로 올라가자 질시가 극에 달했다.

 “허준이 약간의 노고가 있다고 하지만 어찌 적격자가 아닌 사람에게 ‘보국숭록대부’라는 자리를 주어 후세의 웃음을 사려 하십니까. 의관이 ‘숭록(崇祿)’이 된 자는 전례 없는 일이고, 그마저 외람된 일인데, 여기에 ‘보국(輔國)’은 또 웬말입니까.”(<선조실록> 1606년 1월3일조)

 선조는 사간원과 사헌부의 빗발치는 상소에도 ‘그럴 수 없다’고 버티다가 그만 3일만에 취소하고 말았다. 그만큼 집요한 반발이었던 것이다.

 허준을 믿었던 선조가 1608년 2월1일 승하하자 허준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수어의 허준의 약처방 때문에 임금의 병세가 악화됐다”는 악평을 들은 허준은 “밍령된 처방으로 임금이 승하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쓴 것이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원래 허준 편이었다. 왕자 시절 허준의 처방으로 두창에서 회복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허준은 정치싸움의 희생양이 됐다. 당시 내의원의 의학 책임자는 허준이었다. 하지만 내의원 약방의 도제조(최고 책임자)는 소북파의 영수 유영경이었다. 유영경은 선조 말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다가 광해군 즉위와 함께 대북파의 공격을 받고 죽었다.

 이 와중에서 대북파는 유영경 탄핵을 위해 허준을 먼저 ‘망령되게 약을 썼다’고 한묶음으로 공격한 것이다. 

불후의 의학서 <동의보감>. 동의보감의 가장 큰 덕목은 백성을 향한 가없는 마음씨이다.

 ■정치적 희생양이 되다

 그러나 광해군은 허준을 끝까지 비호하려 했다. 빗발치는 탄핵 상소에도 “허준의 의술이 부족해서 그랬던 것”이라 변호했다. 광해군은 허준을 남해 먼바다가 아니라 선왕(선조)와의 추억이 깃든 의주로 보냈다.

 대간들은 “허준을 위리안치(圍籬安置·출입을 제한하는 형벌)시키라”고 아우성 쳤다. 그러나 광해군은 1년 8개월만인 1609년 허준을 방면한다.

 “허준은 호성공신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도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근래에 내가 병이 많다. 그렇지만 내의원에 노련한 의사가 없구나. 귀양살이가 길었으니 이제 그의 징계를 풀어줌이 마땅하다.”(<광해군 일기> 1609년 11월22일>)

 허준의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동의보감>을 비롯한 수많은 의학서를 저술한 것이다.

 그는 약 7종의 의학서를 저술했는데 <동의보감>을 비롯해, <천도방론맥결집성>과 <언해태산집요>,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 <신찬벽온방>, <벽역신방> 등이다.

 이가운데 벽역신방은 동아시아 3국을 통틀어 성홍열과 유사질환을 구분해낸 최초의 성과를 담은 의학서이자 세계적으로도 가장 빠르고 정확한 홍역연구서로 꼽힌다.

 그러나 가장 혁혁한 성과는 역시 <동의보감>의 저술이다.

 선조는 1596년(선조 29년) “완비된 우리나라 의서를 찬집하라”는 명을 허준에게 내린다.

 오랜 전란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고, 병자들이 속출하는데도 쉽게 치료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백성들에게 알맞고 믿을 만한 의서를 편찬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허준은 1610년까지 무려 14년간 집필에 전념,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86종의 의서를 참고한 이 책은 25책으로 구성돼있고, 1212종의 약에 대한 자료와 4497종의 처방을 수록했다. 모두 86종의 국내외 외서를 정리했기에 임상의에게는 더없는 필독서가 됐고, 조선의학의 수준을 중국과 일본에 알렸다. 특히 백성들에게 대한 따뜻한 시선이 돋보인다.

 이 땅에서 나는 637개 향약(鄕藥)의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여 백성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잇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동의보감>을 저술한 참뜻이 아니겠는가.

 어떤가. 지금 이 순간 여름휴가를 맞았다면 이 고즈넉한 허준 선생의 자취를 밟아보는 것은 어떨까. 시끌벅작한 휴가지 말고…. 한번 권해보고 싶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44 관련글 쓰기

 “한국의 고대시인 허균의 시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속마음을 매번 밝게 비추고(肝膽每相照), 티없이 깨끗한 마음을 시린 달이 내려 비추네.(氷壺映寒月)’.”
 7월 초, 한국을 국빈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서울대 강연에서 한·중 친선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허균(1569~1618년)의 시를 인용했다.
 시 주석은 그러면서 “이 시구는 바로 중국과 한국의 친선과 우의를 상징하는 것”이라 했다. 이 시는 허균이 정유재란 때 명나라 지원군의 일원으로 파견됐다가(1597년) 귀국하던 오명제에게 보낸 ‘송별시’이다. 허균의 송별시, 즉 ‘참군 오자어(오명제의 호) 대형이 중국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送吳參軍子魚大兄還天朝)’를 더 보자.

중국의 3대 음악가로 꼽히는 정율성. 전라도 광주 출신인 그는 중국의 대표군가인 ‘중국인민해방군군가’를 작곡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간담상조, 빙호옥호
 “나라는 중외의 구별 있다지만(國有中外殊) 사람은 구별이 없는 법이네.(人無夷夏別) 태어난 곳 달라도 모두 형제니(落地皆弟兄) 초 땅, 월 땅 나눌 필요가 어찌 있으리.(何必分楚越) 간담을 매번 서로 밝게 비추고(肝膽每相照) 빙호를 찬 달이 내려 비추네(氷壺映寒月) 옥을 보고 나의 추함 알아차렸고(依玉覺我穢) 타주는 그대를 따를 수가 없었네.(唾珠復君絶)”(<해동역사> ‘예문지’ 7)
 명나라 파병군의 빈객으로 조선에 온 오명제는 조선의 명사들과 교분을 맺었다. 오명제는 서울에서 허균의 집에 머물면서 소중한 기회를 잡는다.
 “허씨 형제 세사람은 허봉·허성·허균인데 모두 문장으로 해동(조선)에 이름이 났다. 허균은 기억력이 뛰어나 해동의 시 수백편을 외었다. 또 허균의 동생(허난설헌)에게서 시 200편을 얻었다.”(오명제의 <조선시선> ‘자서’)
 허씨 형제 뿐이 아니었다. 오명제는 판서 윤근수로부터 조선의 시 수백편을 책상자로 얻었다.
 1599년(선조 32년) 다시 조선을 방문했을 때는 ‘시문에 능한’ 정승 이덕형의 집에 머물러 상당수의 시문집을 구했다.
 “정승 이덕형에게 여러 명사들의 시문집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이덕형이 신라~조선에 이르는 모두 100여 명의 문집을 구해주었다.”
 오명제는 이렇게 모은 조선의 책들을 두 달간 펼쳐보고는 좋은 시들을 뽑아 중국에 소개했는데, 이것이 <조선시선> 이다.(<해동역사> ‘예문지 4·경적 4’)
 오명제는 <조선시선>의 서문(자서)을 한음 이덕형의 집에서 썼으며, 본문 뒤에는 허균이 지은 <조선시선 후서>를 실었다. 허균이 오명제에게 전한 송별시는 이 후서에 실려 있다. 
 시진핑 주석의 언급대로 550년 전 조선인 허균·이덕형 등과 중국인 오명제 등의 끈끈한 교류는 뿌리깊은 한·중 관계의 상징일 수 있겠다.
 허균의 시처럼 티없이 깨끗한 마음으로(빙심옥호·氷心玉壺),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간담상조·肝膽相照)라는 것이니….
 

허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 허균은 정유재란 때 명나라 파견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명나라 오명제와 친분을 쌓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7월초 서울대 강연에서 허균의 시를 인용, 중국과 한국이 '속마음을 터놓는 사이('간담상조')라는 점을 강조했다.   

 ■사선을 넘나든 전우
 시진핑 주석의 서울대 강연에서 언급된 인물 가운데 몇사람만 꼽아보자. 최치원과 김구 선생 등 장 알려진 인물들을 빼고….
 “400년 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환난상조(患難相助)의 차원에서 양국의 군민이 함께 싸웠습니다. 이때 명나라 등자룡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둘 다 전사했습니다. 또 명나라 군 통수인 진린의 후예가 조선에서 뿌리를 내렸습니다.”(시진핑 주석)
 등자룡(登子龍)과 진린(陳璘)은 과연 누구인가. 시 주석의 말마따나 등자룡과 진린은 이순신 장군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였다.
 진린은 명나라 파병군의 수군도독이었다. 1598년(선조 31년) 1월 절강성 소속의 전함 500척을 거느리고 조선에 진주했다.
 이순신 장군은 진린의 중국군을 환대했다. 진린은 선조 임금에게 글을 올려 이순신 장군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통제사는 천지를 다스릴 만한 재주를 지녔고,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킬 만한 큰 공이 있습니다.(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
 진린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이 고금도에서 적선 50여 척을 불사르고 적병 100여명의 수급을 베는 장면을 지켜보고는 감사를 연발했다.
 “역시 통제사는 임금의 주석(柱石)이 도리만한 신하야. 옛날의 명장인들 어찌 이보다 나을까.”(<일월록>)  
 ‘주석지신(柱石之臣)’은 ‘나라의 기둥이 될만한 신하’를 뜻한다.

전남 강진에 있는 탄보묘. 정유재란 때 명나라 수군을 이끌고 온 진린 제독이 관우의 힘을 빌리기위해 지은 사당이다. 훗날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부총사 등자룡 등을 함께 모셨다. 

 ■“통제사가 죽었구나! 함께 싸울 이가 없구나
 마침내 7년 가까이 질질 끈 전쟁을 마무리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1598년 11월 19일의 이른바 ‘노량해전’이었다.
 <선조실록>, <연려실기술>, <징비록>, <난중일기> 등에 기록된 그 날의 현장을 복기해보자. 이날 이순신의 조선군과 진린의 명나라 군이 연합작전을 펼쳤다.
 “이순신 장군이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베었다. 적은 배를 모두 끌고 와서 관음포에서 싸웠다.”
 이 때 진린 도독은 사천의 적을 무찔렀다. 적이 이순신의 배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자 진린은 조선 배로 바꿔 타고 포위망을 뚫고 이순신 장군을 구원하려 했다.
 그러나 적병이 진린의 배를 포위했다. 적의 칼날이 거의 진린에게 닿을 정도였다. 진린의 아들(구경)이 몸으로 막다가 찔려 피가 뚝뚝 떨어졌는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적들이 한꺼번에 칼을 빼들고 배 위로 몰려오자 명나라군이 장창으로 낮은 자세에서 찔러댄 물에 떨어져 죽은 왜적이 숫자가 1000명을 헤아렸다. 육박전은 계속됐다.
 이순신은 진린이 포위당하는 것을 멀리서 보고 포위망을 뚫고 전진했다. 멀리 붉은 휘장을 친 적선 한 척 황금 갑옷을 입은 세 명의 적장이 전투를 독려하고 있었다.
 “이 때 이순신은 군사를 집결시켜 붉은 휘장을 친 적선을 맹공, 황금갑옷을 입은 적장 한 사람을 쓰러뜨렸다. 그러자 적선들은 진린 도독을 놔두고 그 배를 구원하러 갔다. 도독의 군사는 이 때문에 빠져 나왔다. 이순신 장군은 적의 지휘선을 다시 맹공해 산산조각냈다. 그러자 나머지 적들이 혼비백산했다.”
 이 과정에서 그만 큰 사고가 터진다. 날아오는 화살과 돌을 개의치 않고 직접 손으로 북을 치다가 그만 적탄에 맞은 것이다.
 알다시피 이순신 장군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며 비밀에 붙였다. 그러나 진린 도독이 멀리서 보고 장군의 죽음을 알았다고 한다.
 배 위에서 조선 군사들이 적의 머리를 베려고 공을 다투는 모습을 보고 “통제사가 죽었구나!” 하고 간파했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그걸 어찌 아느냐”고 묻자 진린 도독은 “통제사의 군대는 군율이 매우 셌는데 이제 그 배에서 공을 다투느라 어지러운 것을 보니 이것은 장군의 명령이 없기 때문”이라 답했단다.(<자해필담>)       
 이순신의 서거 소식에 진린은 배에서 넘어지기를 세 번이나 하면서 울부짖었다.
 “함께 싸울 이가 없구나! 나는 노야(老爺·이순신을 지칭)가 살아와서 나를 구원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하여 죽었는가?”
 진린이 가슴을 치며 통곡하자 온 군사가 모두 울어서 곡성이 바다 가운데 진동하였다. 조선군은 물론 명나라군도 이순신 장군의 관을 부여잡고 울부짖었으며, 고기를 물리고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순신의 전공을 명나라 황제(신종)에게 알렸다. 그러자 황제는 이순신에게 도독의 인장을 내렸다. 
 그야말로 피를 나눈 전우가 된 진린은 이후 조선과 영원한 관계를 맺는다.
 진린 도독이 죽고(1607년), 명말 청초의 어수선한 정세를 맞이한 후손들이 조선땅에 정착한 것이다. 맨처음 도착한 곳이 진린 도독의 체취가 묻어있는 고금도였단다.
 이후 진린 도독의 후예는 ‘광동 진씨’ 가문을 개창했다.

 

 

노량해전을 재현하고 있는 모습. 이순신 장군으 주도하에 명나라군과 연합작전을 펼쳐 왜군을 전멸시킨 해전이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70살 노장 등자룡
 등자룡은 진린 제독의 휘하 부총병이었다. 절강과 직예(지금으로 치면 서울 주변의 수도권 지역) 출신의 정병들을 이끌고 참전한 일흔살의 노장이었다.
 그 역시 노량해전에 참전, 불꽃처럼 싸우다가 전사했다. <해동역사> ‘비어고’ 등에 기록된 등자룡의 전공을 보라.
 “진린 제독이 급히 등자룡을 급파, 조선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수군 1000명을 거느리고 3척의 전함을 몰아 선봉이 되었다. 그의 나이 70살이 넘은 나이에도 의기를 더욱 가다듬어 으뜸의 공을 세우고자 했다.”
 서희진의 <동정기>를 보면 등자룡은 장사 200명을 거느리고 조선 군사의 배에 뛰어오른 다음 곧장 진격해서 왜적들을 죽였다.
 그러나 다른 배가 화기(火器)를 잘못 쏘는 바람에 등자룡의 배에 불이 붙었다. 이 틈에 왜적들이 배로 올라와 등자룡을 찔렀다. 등자룡은 그만 아군의 오폭이 빌미가 되어 전사하고 만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 112년이 지난 1710년(숙종 39년), 조선 조정은 의미있는 결정을 내린다.
 진린 도독은 정유재란 당시 관우의 신력을 빌려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고 완도 고금도에 관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지은 바 있다. 그런데 숙종은 진린과 등자룡,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위패까지 함께 배향하고 ‘탄보묘(誕報廟)’라 일컬었다.

 

   ■정율성은 누구인가
 이제 시진핑 주석이 한·중 우의의 상징으로 또 언급한 정율성(鄭律成)이라는 인물을 살펴보자.
 시진핑 주석은 “(한국인인) 정율성(1914~1976)은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 정율성은 중국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의 녜얼(섭耳·1912~1935), ‘황하대합창’의 시싱하이(洗星海·1905~1945)와 함께 중국현대의 3대 작곡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전라도 광주 출신인 정율성은 19살 때인 1933년 중국으로 떠나 항일투쟁을 벌인다.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정율성은 홍군(중국공산당군)의 근거지인 옌안(延安)행을 결심하게 됐다. 당시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의 빈번한 접촉을 통해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소극적 항일을 간파하게 된 것이었다. 정율성은 1937년 우여곡절 끝에 옌안으로 들어가 산베이(陝北)공학-루신예술학원의 음악학부에서 수학했다.
 그는 1938년 혁명의 열기로 가득찬 옌안의 모습을 노래로 표현했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 지도자들은 곡을 ‘옌안송(延安頌)’이라 했다.
 이 노래는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해방구 및 국민당 통치구역에까지 전파됐다. 항일과 혁명을 위해 천리·만리길을 걸어 옌안에 모인 젊은이들의 열정과 적(일본군)에 대한 분노를 잘 그려냈다는 평을 듣는다. 이 노래를 듣고 옌안으로 옌안으로 발길을 돌리는 젊은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정율성에게 음악을 배운 가수 멍위(孟于)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17~18살 여고생 때인 1938년, 이 노래를 칭따오(청도)에서 들었는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어요. 헉명을 하려면 옌안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탈영하던 병사의 마음을 바꾼 것도 바로 ‘옌안송’이었다고 한다. 옌안송은 중국인들이 화교를 통해 모금운동을 펼칠 때 불렀던 노래이기도 했다.

중국의 3대 음악가 정율성이 작곡한 '팔로군 행진곡'. 이 곡은 훗날 중국인민해방군가로 공식지정됐다.|김성준의 논문에서

 ■불멸의 ‘팔로군행진곡(인민군해방군가)’
 그러나 ‘팔로군행진곡’(1939)을 빼놓고는 정율성을 논할 수 없다. 이 곡이 바로 시진핑 주석의 언급대로 ‘중국인민해방군가’로 지정된 곡이니까….
 원래 중국공산당군은 홍군으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이른바 2차 국공합작이 이뤄진 후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됐다. 팔로군은 이 때부터 중국공산당군을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됐다. 정율성은 <팔로군 대합창>이라는 곡의 이름 아래 모두 8곡을 작곡했다.
 ‘팔로군 군가’, ‘팔로군행진곡’, ‘유쾌한 팔로군’, ‘자야강 병사의 노래’, ‘기병가’, ‘포병가’, ‘군대와 인민은 한 집안 식구’, ‘팔로군과 신사군’ 등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이 바로 ‘팔로군행진곡’이다.
 ‘전진(向前)!전진(向前)!전진(向前)! 우리 대오 태양 따라 나간다.(我們的隊伍向太陽) 조국의 대지 밟으며(脚踏着祖國的大地), 민족의 희망을 안은(背負着民族的希望) 우리는 천하무적 무장(我們是一支不可戰勝的力量) 우리는 노동자 농민의 자제(我們是工農的子弟), 우리는 인민의 군대. 두려워 않고, 굴복 않고, 용감히 싸우네.(我們是人民的武裝 從无畏懼 絶不屈服 英勇戰斗) 반동의 무리를 쓸어낼 때까지(直到把反動派消滅干淨) 마오쩌둥의 기치를 높이 든다.(毛澤東的旗幟高高瓢揚) 들으라! 나팔 소리 울리는 바람을(聽! 風在呼嘯軍號), 들으라! 혁명가가 얼마나 우렁찬지를(聽! 革命歌聲多료亮), 동지들아 발 맞춰 해방의 전장으로 나가자!(同志們整齊步伐奔向解放的戰場),동지들아 발맞춰 조국의 변방으로 나아가자.(同志們整齊步伐奔赴祖國的邊疆,전진(向前)! 전진(向前)! 우리의 대오 따라 태양이 따라간다.(我們的隊伍向太陽) 최후의 승리를 위해!(向最后的 勝利), 전국의 해방을 위해!(向全國的解放)!’ 

 

 ■딩쉐쑹과의 국제결혼
 재미있는 것은 궁무의 작사 중에는 맨 앞의 시작 부분, 즉 전진(向前)! 전진(向前)! 전진(向前)! 부분이 없었다는 것이다. 정율성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가사를 받고보니 노래 시작부분이 어딘가 기백이 부족했습니다. 생각하다 못해 첫부분을 고쳤습니다. 전선에서 일본놈들과 싸우는 팔로군의 대오를 표현하려고…. 고치고나니 기백이 살아나고 노래가 살아났습니다.”
 이 ‘팔로군행진곡’은 이후에도 신중국의 운명과 함께 했다. 이 곡은 1945년부터 벌어진 해방전쟁 시기에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는 ‘인민해방군군가’로 사용됐다. 급기야 1988년 7월 25일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공식 지정됐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 게임 때 개막식 첫 프로그램으로 연주되기도 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정율성이 훗날 중국 최초의 여자대사를 지낸 딩쉐쑹(丁雪松)과 혼인했다는 것이다.
 딩쉐쑹(1911~2011)은 신중국 출범 이후 주 덴마크와 주 네덜란드 대사를 지낸 여성이었다. 정율성은 1938년 옌안시절 항일군정대 여학생 대장이던 딩쉐쑹에게 매혹됐다.
 그는 들꽃을 꺾어 몰래 주고, <안나 까레리나>와 <동백꽃 처녀> 등의 소설책을 건네며 편지를 살짝 꽂아넣곤 했다. 딩쉐쑹 역시 ‘약간 수척했지만 영준하면서 강인한 인상의 조선 혁명청년’에 마음을 열었다. 두 사람은 1941년 결혼했다.

정율성은 옌안 시절, 훗날 중국최초의 여자대사가 된 딩쉐쑹과 결혼한다.

 ■북한군가를 작곡하다
 그런 정율성의 운명을 바꾼 세번째 사건이 있었다. 
 해방(1945년)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부인과 딸을 북한에 가라는 명을 받은 것이다. 45년 9월 도보로 연안을 떠나 3개월에 평양에 도착한 정율성은 곧바로 황해도당위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일했다. 정율성은 이 때부터 ‘해방행진곡’,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중우의’ 등의 노래를 만들었다. 48년에는 북한 최고 영예인 ‘모범근로자’의 칭호를 받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정율성은 ‘조선인민유격대 전가’와 ‘공화국 기치를 날린다’, ‘우리는 탱크부대’ 등의 작품을 남긴다.
 정율성은 이후 1950년 10월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 국적과 당적을 회복했고, 다시 북한에 파견됐다가 1952년 4월 중국으로 돌아온다.
 이후 문화대혁명 기간 중 간첩죄명으로 감금되고 창작활동이 박탈되는 등의 위기를 맞는다. 그럼에도 불타는 창작열이 이어져 교향악의 최고탑이라 할 수 있는 ‘마오쩌둥 시사(毛澤東詩詞)’ 20편에 곡을 붙이는 작업을 완성하기도 한다. 정율성은 1976년 4인방이 몰락하자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노래하는 연가와 건군 50주년을 위한 대형창작을 서두른다.
 그러나 그 해 12월 뇌일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난다. 그가 죽자 후야오방(胡耀邦)은 “정율성의 노래는 연안 시기에 큰 봉우리를 이뤘고, 중국 인민의 해방사업과 혁명투쟁에 크나 큰 기여를 했다”고 애도했다. 그가 묻힌 바바오산(八寶山) 혁명 열사릉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정율성 동지는 자기 생명을 중국 인민 혁명사업에 바친 혁명가이다. 인민은 영생불멸한다. 마찬가지로 그의 노래도 영생불멸할 것이다.”
 정율성은 불후의 명작이라는 ‘인민해방군군가’를 비롯해 400여 곡을 작곡했다. 그는 2009년 중국에서 열린 건국 60주년 기념행사에서 ‘신중국 건국에 공헌한 영웅 인물 100인’ 가운데 6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1992년 8월24일 한국과 중국의 국교수교일에 정율성의 음악이 연주되기도 했다. 중국에서 차지하는 조선인 정율성의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군의 애창곡
 그러고보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왜 유독 국내에서 정율성이라는 인물을 평가되지 않았을까.
 그가 해방 이후 중국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북한에 건너가 만들었다는 ‘조선인민군 행진곡’의 가사를 보자.
 ‘우리는 강철 같은 조선인민군/평화와 정의 위에 싸우는 전사/불의의 원쑤들을 다 물리치고/조국의 완전독립 쟁취하리라./인민의 자유행복 생명을 삼고/규율과 훈련으로 다진 몸이니/승리의 민주대열 조선의 인민군/나가자 용감하게 싸워 이기네.’
 이 행진곡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부른 군가이다. 역시 그가 만든 ‘유격대전가’ 역시 북한군의 애창곡이었다. 그러고보니 정율성은 중국군과 북한군의 대표 군가를 창작한 전무후무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정율성은 조선인민군 군가를 창작했고 인민군 협주단을 창건한 사람”이라고 격찬했다. 1992년 북한에서는 ‘작곡가 정율성 상·하’의 제목으로 3시간에 달하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랬으니 남한의 백성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인물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증유의 전쟁을 겪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원쑤’와 ‘용감히 싸우는 인민군’이라는 내용의 군가를 창작한 인물을 쉽게 용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진핑 주석으로서는 점증하는 일본의 도발을 의식했을 것이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진린 및 등자룡’ 등 중국과 조선의 이순신 장군의 연합작전을 열거하고, 다시 김구 주석과 정율성 음악가 등을 거론함으로써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인 공조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서복, 김교각, 공소….
 이밖에 시진핑이 거론된 역사인물 중 하나가 진시황 때 불로장생의 약과 신선을 찾아 동남동녀(童男童女)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떠났다는 서복(徐福)이다.
 서복은 서불(徐市)로도 일컬어진다. <사기> ‘진시황본기’를 보면 제나라 사람인 서복은 진시황에게 “바다 가운데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 등 3개의 신산(神山)이 있는데 동남동녀를 데리고 신선을 찾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서복은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하지도 않고, 신선을 찾지도 않은채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진시황은 “서복 등이 막대한 금액을 낭비했다”고 분노하면서 결국 선비들과 방술사 460명을 생매장한다.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 사건이다. 하지만 서복이 어디로 떠났는 지는 알 수 없다, 더 이상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까닭이다.
 그런데도 시진핑 주석은 ‘선약을 구하려 제주도에 닿은’ 서복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긴 하다. 과거 중국과 중국인이 한반도에 문화를 전파했음을 과시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립서비스인지는 알 수 없다.
 시진핑이 언급한 역사인물 가운데 ‘금신좌(金身坐)가 된 주화산의 신라왕자 김교각’이 있다.
 ‘김교각’(법명 교각)이라는 이름은 우리 역사 기록에는 찾기 어렵다. 813년 츠저우시(池州市·지주시) 사람인 비관경(費冠卿)이 교각스님 입적 후에 쓴 ‘주화산 화성사기(九華山化城寺記)’와 이용(李庸)이 편찬한 <주화산지(九華山志)> 등에 기록되어 있다. 스님이 신라의 어느 왕 후손인지도 모른다.
 다만 중국측 자료를 토대로 계산하면 696년 신라 효소왕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파악된다. 교각 스님(696~794)은 주화산 화성사에서 75년간 수련한 뒤 열반에 들었다. 그는 자신의 시신을 석함에 넣고 “3년 후에도 썩지 않으면 등신불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한다. 과연 이 유언대로였다. 신도와 승려들은 3년간 썩지않은 그의 육신을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인정하고 금을 입혀 등신불로 봉헌했다. 시진핑이 언급한 ‘금신좌’가 바로 이 등신불을 가리킨다.
 또 언급된 공소(孔紹)는 공자의 53세손으로 알려져 있다. 원나라 한림학사를 지내다 고려 공민왕 때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창원 공씨의 시조가 됐다.
 창원 공씨 가운데는 조선 중기 때 대사헌을 지낸 공서린(1483~1541)이 가장 유명하다. 공서린은 1507년 식년문과에 1등으로 급제했고, 홍문관 수찬·사헌부 지평 등 청요직을 돌다가 기묘사화 때 사림파 인물과 함께 투옥되기도 했다. 후에 청백리로 녹선되기도 했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참고문헌>

이종한, <항일전사 정율성 평전(음악이 나의 무기다)>, 지식산업사, 2006

김성준, <정율성의 음악활동에 관한 연구>, 명지대 석사논문,1997

이미화, <정율성의 성악작품에 관한 연구:'연안송' '연수요' '팔로군행진곡'을 중심으로>, 건국대 석사논문, 2009년

노기욱, <정율성 음악의 사상적 지향>, '역사학연구' 제37집, 호남사학회, 2009

송서평, <정율성의 음악창작 탐구>, '남북문화예술연구' 통권 제 5호, 남북문화예술학회. 2009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43 관련글 쓰기

 경순왕릉 가는 길은 언제나 서늘한 느낌을 준다. 한여름 찌는 듯한 무더위 속인데도 그렇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경기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 닿아있는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왕릉과 왕릉 가는 길을 잘 닦아놓고는 ‘민간인 통제선’에서 제외시켜 놓았으니…. 입구에서 왕릉까지의 길 양옆에는 ‘지뢰’ 표지를 단 울타리가 길게 펼쳐져 있다. 갈 때마다 섬뜩하다. 그 길을 100m가량 가면 시야가 확 트인다. 제법 새뜻한 모습의 왕릉이다. 왕릉을 빙 둘러싼 울타리가 예사롭지 않다.
 그렇다. 저 울타리를 넘어가면 큰일 난다. 울타리 너머 손에 닿을 듯한 거리, 야트막한 성거산 능선이 바로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이니 말이다. 그뿐인가. ‘신라경순왕릉(新羅敬順王陵)’이라고 새겨진 명문비석을 보라. 총탄 자국들이 선명하다. 이 심상찮은 상흔들이 경순왕릉(사적 244호)의 ‘흑역사’를 상징해주고 있다.

경기 연천 비무장지대 인근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 경순왕릉. 그러나 민통선 지역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다가갈 수 있다 연천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경순왕릉의 ‘흑역사’
 “신의 선조인 경순왕의 무덤을 오래전에 잃었습니다. 지금 장단에서 경순왕의 지석과 신도비가 나왔습니다.”(<영조실록>)
 1746년(영조 22년), 동지(同知·직함이 없는 노인) 김응호가 “임진왜란 이후 실전된 경순왕릉을 찾았으니 나라 차원에서 관리해줘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다.
 영조 역시 “1000년 가까이 된 왕릉을 찾았으니 얼마나 기이한 일이냐”고 반색하면서 5명의 관리인을 두었다. 이 무덤은 이후 고려 왕릉의 예우를 받다가 어느 순간부터 또다시 실전되고 말았다. 그러고보니 이 지역이 얼마나 많은 풍파를 겪었는가. 경순왕릉은 남북 분단에 이은 한국전쟁과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또 한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러던 1973년 1월, 육군 25사단 예하 중대장이던 여길도 대위가 수색 중 총탄에 맞고 쓰러진 비석을 발견한다.
 바로 ‘신라 경순왕의 능(新羅敬順王之陵)’이라는 명문비석이었다. 경순왕릉은 두 번이나 실전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한국전쟁의 와중에 총탄 세례를 받은 채로 현현한 것이다. 지뢰밭과 남방한계선 철책의 무장호위를 받는 것도 모자라 비석마저 총상을 입은 채 누워계신 임금….
 그것도 고향인 경주가 아니라 머나먼 이곳 고랑포에 묻혀 있다니…. 과연 천년 사직을 고이 바친 ‘무능한 망국의 임금’에 걸맞은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라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하기야 얼마나 고분고분 나라를 바쳤으면 ‘경순왕(敬順王)’의 시호를 받았을까. 우리는 흔히 “천년 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 다시 천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ㆍ찰나)던가”하고 한탄했던 정비석의 <산정무한(山情無限)>을 기억한다. 그러니 마의초식(麻衣草食)했던 태자와 견줘, 속절없이 나라를 들어 바친 아비의 무력함을 탓할 수밖에.

 

 ■무능한 임금이냐, 승리한 패배자냐
 그러나 다른 시각도 있다. 경순왕을 두고 ‘백성을 전쟁에서 구해낸 임금’이자, ‘승리한 패배자’라는 평가도 만만치 않으니까….
 먼저 김부식이 <삼국사기> ‘경순왕조’를 쓴 뒤 달아놓은 사족을 보자.
 “경순왕이 만약 저항했다면 필시 그 종족이 뒤집혀 멸망되고 그 해독이 무고한 백성들에까지 미쳤을 것이다.”
 이제 935년(경순왕 9년) 10월, 서라벌에서 벌어졌던 신라의 마지막 군신회의 현장으로 돌아가보자.
 “나라를 보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고려로 귀부(歸附)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경순왕은 괴로운 숨을 토해냈다. 고려 귀부는 어쩔 수 없는 수순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군신들은 끝까지 갑론을박했다.
 경순왕의 첫째 아들인 태자(일·鎰)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절규한다.
 “어찌 1000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주겠나이까.”
 그러나 경순왕의 뜻은 확고했다.
 “이미 형세가 나라를 보전할 수 없는 지경에 왔다. 무고한 백성들을 전쟁의 참화로 빠뜨릴 수는 없는 일이다.”
 경순왕은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천년사직에 접어들던 신라는 이른바 하대(下代)로 접어들면서 극심한 왕위쟁탈전과 경제혼란으로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진성여왕(재위 887∼897년) 3년(889년)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반란에도 어쩔 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효공왕(재위 897∼912년) 9년(905년)에는 궁예가 신라를 침범했으나 방어할 힘이 없어 성만 지키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그야말로 명맥만 남은 나라가 됐던 것이다.  

제법 새뜻하게 정비된 경순왕릉(사적 244호). 왕릉의 뒤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다. 울타리 넘어 조금 더 가면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이다.

 ■후백제군의 침략
 마침내 927년(경애왕 4년) 음력 11월, 세력을 키운 후백제 견훤이 왕경(경주)을 쳐들어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경애왕조’를 보면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여 즐겁게 노느라 적병이 들어 닥치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전멸당한다. <삼국사기>는 “견훤이 왕을 핍박하여 자살하게 만들고, 왕비를 강간했으며 휘하들을 풀어 비첩들을 능욕하게 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아무리 정신없는 왕이라도 그렇지, 그 추운 겨울에, 그것도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졌는데 ‘술판’을 벌였겠느냐는 반론도 제기된다.
 당시 신라에는 나라의 안녕을 비는 성스러운 장소인 포석사가 있었고, 포석정은 제사 이후에 음복을 했던 장소일 가능성이 짙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그게 맞다면 경애왕은 당시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위해 제사를 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때 왕경을 마음껏 유린한 견훤은 후사로 경순왕을 옹립한다.(927년)
 견훤은 경순왕을 세우면서 “나는 존왕(尊王)의 의(義)를 두터이 하고 사대(事大)의 정(情)을 깊이 하련다.”고 머리를 낮췄다. 하지만 견훤의 목적은 경순왕을 어르고 뺨치면서 마음껏 요리하기 위해 왕위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사실 경순왕의 직위 무렵(927년 11월)에는 후백제의 세력이 강했다. 하지만 경순왕은 절대 견훤에게 경도되지 않는다.
 꺼져가는 등불을 되살려야 하는 경순왕으로서는 끈질긴 형세판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던 930년(경순왕 4년), 결정적인 사태가 발생한다.  
 고려가 견훤의 후백제군을 대파하면서 후백제 30여개 군이 잇달아 항복한 것이다.(<삼국사기> ‘신라본기·경순왕조’)
 승부의 저울추가 고려 쪽으로 기우는 순간이었다. 승기를 잡은 고려 왕건은 경순왕에게 사신을 보낸다. 사태를 저울질하던 경순왕은 반색한다.
 이듬해인 931년 2월, 고려 왕건이 50여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경주 부근에 당도하자 경순왕은 백관과 함께 달려나간다. 왕건을 ‘모시고’ 벌인 임해전(臨海殿) 잔치에서 경순왕은 눈물을 줄줄 흘린다.  
 “내가 하늘의 뜻에 부응하지 못해 차츰 환란을 불러일으키고, 견훤은 의롭지 못한 일을 제멋대로 하여 나의 국가를 없애려 합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왕이 울자 신하들도 오열했다. 왕건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했단다. 왕건과 휘하의 병사들이 93일간이나 머물다 귀국하자 신라사람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단다.
 “견훤은 승냥이나 범 같았는데, 왕공(王公ㆍ왕건)은 마치 부모 같구나.”
 이마도 왕건의 서라벌 방문 때 고려귀부와 관련된 끈질긴 협상이 이뤄졌을 것이다. 바로 이 협상에서 경순왕 스스로를 비롯, 신라귀족세력의 안녕과 백성의 안위를 보장받았을 것이다.

경순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옆으로 지뢰지대임을 뜻하는 표지가 붙어 있다.

 ■왕건보다 35년 더 살았던 임금
 경순왕은 드디어(935년) “우리 백성들을 죽일 수 없다”면서 나라를 들어 항복한 것이다.
 부왕의 귀부결정에 반발한 태자는 통곡하면서 왕에게 하직인사를 전하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삼베옷과 나물음식으로 일생을 마쳤다. 사람들은 그에게 ‘마의태자’란 이름을 붙였다. 경순왕의 막내아들 역시 화엄종의 승려가 됐다. 그는 범공(梵空) 스님이란 법명으로 법수사와 해인사에서 지냈다.
 935년 11월,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 개경으로 향할 때 사대부와 서민들이 모두 그 행렬을 따랐다. 아름다운 수레와 보배로 장식한 말들이 30여 리나 이어졌다. 연도에는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고려 태조는 개경 교외까지 나서 경순왕 일행을 맞았다.
 고려의 경순왕 대접은 극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고한 백성의 희생 없이 통합의 위업을 이뤘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태조는 그의 딸(낙랑공주)을 경순왕에게 주어 장인·사위 관계를 맺었다. 또 경순왕을 정승공(政承公)으로 봉했으며, 그 지위 또한 고려 태자보다 위에 있게 했다. 녹봉 1000석을 내렸고, 신라를 경주라 칭한 뒤 경순왕을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했다. 그 땅은 모두 정승공의 식읍(食邑)이 되었다.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경순왕은 망국 후에도 무려 43년이나 더 살았고, 왕건보다도 35년 더 장수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천수를 다한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고려 태조는 경순왕에게 “나라를 준 그 은혜가 크다”면서 “앞으로 영원히 장인-사위 관계를 맺자”고 제안했다. 이 말에 따라 경순왕은 자신의 큰아버지(김억렴) 딸(신성왕후)을 태조 왕건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니까 왕건의 부인이 된 신성왕후는 경순왕의 사촌누이가 되는 셈이다.
 왕건과 이 신성왕후 사이에서 난 아들이 왕욱(후에 안종으로 추존)이다. 왕욱이 누구인가. 바로 고려 8대 왕인 현종(재위 1009~1031)의 아버지이다. 그랬으니 김부식은 “현종은 신라의 외손에서 나와 왕위에 올랐으며 그 후에 왕통을 이은 사람은 모두 그 자손이니 이 모든 것이 (경순왕의) 음덕(陰德)”이라고 평했다. 결국 경순왕의 외손들이 고려의 왕통을 이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고려는 신라의 나라, 경순왕의 나라가 아닌가. 그러니 경순왕을 두고 감히 ‘승리한 패배자’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이다.

경순왕릉의 입구에 있는 고랑포구. 지금은 유실지뢰의 우려 때문에 철문으로 닫아놓았지만 임진강 상류로 가는 마기막 포구였고, 서울~개성 도로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바다와 육지의 무산의 집결지였다고 한다.   

 ■고랑포에 묻힌 까닭은
 한 가지 의문점이 더 남는다. 경순왕은 왜 죽어서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고랑포구가 눈앞에 보이는 야산(성거산)에 기대어 묻혔을까.
 속전인 <계림문헌록>을 보면 저간의 사정을 살필 수 있다.
 “978년(경종 3년) 4월4일 경순왕이 훙거했다. 그의 능지는 경주로 예정됐다. 신라 유민들이 경순왕의 운구를 따라가느라 장사진을 이뤘다. 그들은 양식과 침구일체를 지고 다 따라나섰다. 송도가 텅텅 빌 정도였다.”
 고려 조정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신라 유민들이 대거 경순왕의 운구를 따라가면서 소요를 일으킬 가능성이 짙지 않은가. 설사 운구가 무사히 경주에 도착한다 해도 장례식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조정은 긴급 군신회의를 열어 숙의를 거듭한 끝에 절묘한 대책을 마련한다.
 “왕의 운구는 100리를 넘지 못한다(王柩不車百里外).”
 경순왕에게 왕의 대우를 보장하는 대가로 운구의 임진강 도하를 막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궁벽한 이곳, 고랑포구인가.
 지금 고랑포구로 내려가는 길은 철문으로 닫혀 있다. 유실된 도시락 지뢰가 쌓일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그러나 고랑포구는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임진강 상류로 가는 마지막 포구였다. 서울~개성을 잇는 길목이기도 했고, 뭍과 바다의 산물이 모이는 집산지이기도 했다.
 아마 고려 태조 왕건이 경순왕의 귀순 대열을 맞이한 ‘개경 외곽’이 바로 이 고랑포구였을 가능성이 크다. 경순왕의 운구 행렬이 마지막 순간에 멈춰야 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으리라. 첨언하자면 경순왕이 망국의 슬픔을 간직한 채 옛 신라(新羅)의 도읍(都)을 그리워했다는 도라산(都羅山)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이뿐이 아니다. 왕릉 가는 길목에 예전엔 없었던 새로운 볼거리가 생겼다. 아버지의 귀순 결정에 맞서 은둔의 길을 떠난 마의태자의 넋을 기리는 영단(靈壇)이 설치된 것이다. 마의태자의 후손들이 세웠단다. 돌아서는 길에 갖가지 상념이 떠오른다.
 그래 아버지가 백성을 위해 나라를 바친 ‘현실론자’였다면, 아들은 대의명분을 위해 절개를 바친 ‘이상론자’라 할 수 있겠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42 관련글 쓰기

 1731년(영조 7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은 경악할만한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동래성 수축을 위해 땅을 파다가 임진왜란 때 묻힌 것으로 보이는 백골들을 다수 발견한 것이다. 숫자는 최소 12명이었다. 포환(砲丸)과 화살촉들이 백골의 사이에 띠를 이뤘다. 당시 정언섭이 건립한 ‘임진망전유해지총(壬辰亡戰遺骸之塚)’의 비문을 보라.
 “전후에 발굴된 유골 수는 대개 열둘이지만 이는 특별히 그 형체와 해골이 완연한 것이고, 그 잔해의 조각조각이 떨어져 부스러진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에 숙연해진 정언섭은 백골들을 수습한 뒤 비문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제전(祭田)을 설치했다. 정언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향교에 넘겨 해마다 유생들에게 그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여지집성(輿地集成)>)  

동래성에서 확인된 20대 여성의 두개골. 왜병은 이 힘없는 여인을 예리한 칼로 두 번이나 베었다. 여인은 처형을 당했을 것이다.|경남문화재연구원

■끔찍한 발굴
 그로부터 꼭 274년 뒤인 2005년, 바로 그 언저리에서 끔찍한 발굴이 이뤄진다.
 부산 지하철 3호선 수안동 전철역사 예정지를 조사중이던 발굴단(경남문화재연구원)이 바로 그 동래읍성의 해자(垓子·적의 공격 막기위해 성 주변에 파놓은 도랑)를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엄청난 유물들이 쏟아졌다.
 나무말뚝이 해자 바닥에 깔려있고 그 사이에서 인골과 찰갑(札甲·철판을 이어만든 갑옷)과 첨주투구(투구의 일종), 환도(環刀)와 깍지(궁수의 엄지손가락에 끼우는 가락지), 창, 화살촉 등 정신없이 나은 것이다. 그런데 발굴단의 눈을 경악하게 만든 것은 죽은 뒤에 바로 이 해자에 유기된 발굴 인골들의 형태였다.
 즉 출토인골들은 하지골이나 상지골~슬관절이나 주관절이 연결됐다던가, 두개골과 경추가 함께 확인됐다던가 했다. 이는 인대와 근육이 붙어있는 단계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것, 즉 죽은 뒤에 해자로 유기된 것이었더,
 그런데 북서쪽에서 확인된 20~40대 성인남자의 인골은 머리 뒤쪽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무언가에 머리를 찔렸거나 베임을 당해 죽은 것이었다. 전투를 벌이다 적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 분병했다. 발굴단은 곧 임진왜란 때 비명에 간 이들의 넋을 달래는 진혼제를 지냈다. 아마, 1731년, 같은 장소에서 인골들을 발견했던 동래부사 정언섭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왜군의 조총 유탄 등에 머리를 맞아 사망한 어린아이의 유골.아기는 영문도 모른채 화를 입었다.

 ■유아인골의 머리에 난 총상
 인골들을 분석한 결과 더 참혹한 결과가 나왔다.
 분석결과 인골이 최소 81개체에서 최대 114개체까지 보이는데, 모두 해자의 바닥에서 집중적으로 검출됐다는 것. 이 인골들은 인위적으로 해체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는 곧 같은 시기에 해자에 시신들이 방치됐다는 얘기였다.
 3차에 걸쳐 검출한 인골을 분류하면 남성이 59개체, 여성이 21개체에 이르렀다. 성별은 10대 후반에서 4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충격적인 인골은 어린아이의 것이 분명한 유아인골이었다. 당시 고인골 전문가 김재현 교수(동아대)의 분석결과 만 5세 미만의 유아가 분명했다.
 그런데 이 유아의 두개골에는 전두골의 우측에 총이나 활로 맞은 사창(射創) 혹은 칼·창 등으로 찔린 자창(刺創)의 흔적이 보인다.
 김재현 교수는 당시 “일본군의 조총에 맞은 흔적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조총의 총알이 부정형인데, 상처도 원형이 아니라 부정형의 둘쭉날쭉한 형태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특히 상흔의 깨진 정도와 경사각도를 보면 이 유아는 전쟁통에 왜군이 쏜 조총에 비껴 맞았거나, 유탄에 의해 희생되었을 게 분명했다.
 아마도 이 유아는 엄마와 함께 있다가 왜병의 총탄에 맞아 숨졌을 것이다. 지금도 그 모습을 보고 절규했을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유아는 왜병에 의해 해자로 던져졌겠지. 그 엄마도 어린아이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크다.

 

 ■처형당한 여인의 머리
 다른 유골들의 두개골에서 확인된 상흔을 나눠보면 칼로 베인 절창(切創·모두 4개체로 남성 3개체와 여성 1개체), 총과 활에 의한 사창 또는 자창(2개체), 둔기에 의한 두개골 함몰(2개체) 등이었다. 이 가운데 20대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은 더욱 더 비참했다.
 왜병들은 이 여성의 머리를 두 번이나 칼로 벤 것이다. 특히 여성의 전두골을 보면 단 한 번의 칼놀림으로 예리하게 잘려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힘없이 스러져가는 여인의 두정골도 칼로 베고…. 왜병은 이 여성을 두번이나 무참하게 칼로 벤 것이다.
 더욱 눈을 의심하게 만든 것은 상흔의 부위였다. 칼로 벤 상흔의 위치가 이상했던 것이다.
 보통 전쟁통에 백병전을 벌일 때 칼을 휘두르면 각도상으로 얼굴의 양쪽 옆을 베기 마련이라는 것. 그런데 이 여인의 상흔을 보면 왼쪽에 선 왜병이 꿇어 앉았거나 고개를 숙인 여인을 내리쳤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곧 처형이 아닌가. 왜병들은 아무 죄없는 여성을 꿇어 앉혀놓고 이렇듯 두번이나 칼로 내리쳐서 처형시킨 것이 아닐까. 이 뿐이 아니었다. 남성의 두개골 분석에서도 뒤에서 혹은 앞에서 칼로 벤 흔적이 남아있다.
 또한 칼로 베인 것 같기는 한데 그 상처구멍의 단면이 반듯하지 않은 인골들이 있었다. 이는 칼이 아니라 다른 무기로 베였다는 소립니다.
 두개골이 함몰된 인골이 남녀 1개체씩 확인됐다. 무자비한 학살의 현장이 분명했다. 

 

동래부사순절도를 통해 본 동래성 전투

즉시 길을 비키라는 왜군의 회유에 맞서 싸워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假道難)”는 내용을 쓴 목패를 던지는 송상현 부사.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경상좌병사 이각. 왜병에 의해 성이 함락되는 모습. 송상현 부사의 순절 직전 모습. 조복을 입고 임금을 향해 절을 올린 뒤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동래부민 김상과 아낙 2명이 왜병에게 기와를 던지며 싸우고 있다. 적이 떠난 뒤 죽은 김상과 아낙 둘, 그리고 왜병 3. 송상현의 애첩 김섬이 자리를 피하다 잡혔지만 사흘 동안 왜병을 꾸짖고 욕하다가 역시 살해됐다. | ‘동래부사순절도는 동래성 전투의 모습을 시간대별로 묘사하고 있다. 점선원안은 동래성 해자 발굴지점.

 ■그 참혹했던 1592년 4월 15일
 과연 1592년 이곳에서는 어떤 참혹한 일들이 벌어졌을까. 기록을 통해 알아보자.
 1592년 1월, 일본 전역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출병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린다. 왜병의 총병력은 30만 명이었다.
 마침내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총사령으로 한 선봉군 2만 여 명은 700척의 전함에 분승,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왜병은 부산진을 함락하고 동래성으로 밀어닥쳤다. 그때가 14일 오전 10시 쯤이었다.
 왜군은 선발대 100명을 보내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즉시 길을 비켜라”라고 항복을 종용한다. 당시 동래부사는 송상현(宋象賢·1551~1592년)이었다. 송부사는 “싸워 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고 일축한다.
 15일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전면 공세가 시작된다. 궁시(弓矢) 위주의 방어로는 왜군의 신무기인 조총(鳥銃)의 화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송상현 부사는 부산성이 왜군의 맹렬한 조총 공격에 녹아난 것을 알고는, 통나무 방패로 방어책을 세웠지만 별무신통이었다.
 조총의 위력은 엄청났다. <무기요람(武器要覽)>은 “숲에서 나는 새도 모두 떨어뜨릴 수 있으니 그래서 이름을 조총(鳥銃)이라 했다(卽飛鳥之在林 階可射落 因是得名)”고 했으니…. 조총의 유효사거리는 100~200m였고, 명중거리 50m, 분당 사격은 4발이었다.
 오죽했으면 선조는 ‘조총은 천하의 신기(鳥銃者 天下之神器也)’라고 감탄까지 했다.

 

발굴지점에서 인골과 찰갑 등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송상현의 의로운 죽음
 각설하고, 겹겹이 에워싼 왜군의 총공세가 이어지고, 동래성은 뚫리기 시작한다.
 “총성이 울리고 그 검광은 백일을 무색하게 했다. 적군이 성중에 들어와 사람으로 메우다시피했다. 성은 협소하고 사람은 많은 데다 적병 수만이 일시에 성으로 들어왔다. 성중은 메워져 움직일 수 없었다.”(<임진동래유사>)
 송상현 부사도 위기에 처했다. 왜적 가운데는 통신사로 조선을 드나들던 평조익(平調益)이라는 이가 있었다.
 통신사 시절 송상현의 후대(厚待)를 받은 경험이 있는 평조익이 급히 나서 송상현에게 “빨리 피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송상현이 꿈쩍도 하지 않자 평조익은 부사의 옷을 잡아당겨 성벽의 빈터를 가리켰다. 하지만 송 부사는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임금이 있는 북쪽으로 4번 절하며 담담하게 죽을 준비를 했다. 그런 뒤 태연히 붓을 들어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외로운 성에는 달무리가 지고 다른 군진에는 기척도 없군요.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정은 가볍습니다.(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양산군수 조영규도 송상현 부사와 함께 죽었고, 송부사의 겸인(집사) 신여로, 비장(裨將) 송봉수·김희수, 향리(鄕吏) 송백 등 송부사의 핵심 측근들도 모두 살해됐다. 동래향교 노개방과 유생 문덕겸·양조한 등도 함께 순절했다. 왜장도 송상현 부사의 순절에 감동해서 장례를 돕고 제사를 지냈으며, 심지어는 송상현을 죽인 자를 끌어다 죽였다고 한다.
 “갑오년(1594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송상현의) 집안사람으로 하여금 시체를 거두어 고향으로 반장(返葬)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경내에서 벗어날 때까지 호위해주었다. 적진에 남겨진 유민들이 울며 송상현의 시신을 전송했다.”(<선조수정실록>)

 

 ■잊어서는 안될 백성들의 넋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될 사람들이 있다. 바로 죄 없는 백성들다.
 이들은 조국을 위해 칼과 낫, 곡괭이, 심지어는 맨손으로 적과 싸웠고, 그 과정에서 힘 없는 여성과 어린아이까지 속절없이 적병의 창칼에 스러졌다.
 <임진유문(壬辰遺聞)>을 보라. 동래부민 김상(金祥)은 동네 아낙 두 사람이 깨 준 기와로 적병을 내리쳤다. 적이 떠난 뒤 김상의 어머니가 보니 김상과 두 아낙이, 적병 세 사람과 함께 죽어 있었다. 또 한 사람 비극의 주인공은 송상현 부사의 애첩인 김섬(金蟾)이다.
 “송상현의 애첩 김섬은 함흥의 기녀였다. 송상현의 순절 즈음에 적에게 붙잡혔다. 그녀는 사흘 동안이나 적을 꾸짖고 욕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적도 이를 의롭게 여겨 관구를 갖추어 송상현의 곁에 장사를 지냈다.”
 동래성 전투로 왜군은 참수 3000여명, 포로 500여명의 전과를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서정일기(西征日記)>) 당시 일본에서 예수회 선교사로 활동했던 루이스 프로이스(Lois Frois)는 조선군 전사자가 약 5000명이라고 했다. 물론 민간인 희생자를 포함한 수치일 것이다.
 “양산군수 조영규의 아들 조정로가 아버지의 유해를 찾으러 동래성에 갔는데, 성 안이 온통 시체로 덮여있어 유골을 수습하지 못했다.”(<충렬사지> ‘조공유사기·趙公遺事記’)
 임진왜란 후 17년 뒤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李安訥)의 글을 보라.
 “4월15일 청명에 집집마다 곡소리가 일어나 ~ 늙은 아전에게 물으니 이날이 (동래)성이 함락된 날이라 했다. 송상현 부사를 좇아 모인 성안 백성들은 피바다로 변하고 쌓인 시체 밑에 투신하여 천 명 중 한 두 명이 생명을 보전할 정도였고, 조손·부모·부부·자매 중에 살아남은 자는 죽은 친족을 제사지내며 통곡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내(이안눌)가 눈물을 흘리자 늙은 아전은 ‘곡해줄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적의 칼날에 온 가족이 죽어 곡해 줄 사람조차 남지 못한 집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이안눌의 <맹하유감사(孟夏有感祠)>)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41 관련글 쓰기

 “간신 정몽주가…정권을 잡고서 전하(태조 이성계)를 도모하려 하다가 (1392년) 4월 4일 참형을 당했는데….”(<태조실록> 1392년 12월 16일조)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이 올린 상소문이다. 조준은 포은 정몽주를 ‘간신’이라 일컫고 있다. 당연했으리라. 정몽주야말로 역성혁명의 최대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정몽주는 조준의 언급대로 태조 이성계를 죽이려고까지 했으니까….

 

 개성 선죽동 정몽주의 집터에 있는 숭양서원, 1573년(선조 6) 개성유수 남응운이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 서경덕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개성 선죽교 위쪽 정몽주의 집터에 서원을 세우고 문충당(文忠堂)이라 했다.

■이성계에겐 '양정(兩鄭)'이 있었다
 원래 정몽주와 이성계의 관계는 도타웠다. 1364년 2월 정몽주는 이성계를 처음 만났다.
 정몽주는 자신을 과거시험에서 선발해준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 정벌에 참전하고 있었다. 그 때 이성계가 원병을 이끌고 한방신을 도우러 왔는데, 거기서 운명적으로 조우한 것이다. 이후 정몽주는 두차례나 조전원수(助戰元帥·장수를 보좌하는 일종의 참모)로 이성계를 보좌했다.
 훗날 정몽주 참살의 장본인인 태종 이방원은 즉위 후(1403년·태종 3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부왕(태조 이성계) 때 양정(兩鄭)이라 했는데, 하나는 정몽주요, 하나는 정도전이다. 정몽주는 왕씨의 말년 시중이 되어 충성을 다했고, 정도전은 부왕의 은혜에 감격하여 힘을 다했으니 두 사람의 도리는 모두 옳은 것이다.”(<태종실록>) 
 태조 이성계가 그토록 아꼈던 사람이 바로 정몽주와 정도전이었다는 것이다.
 정몽주 역시 왜구를 섬멸하는 이성계를 유비의 책사인 제갈량과, 유방의 책사인 장량 등에 빗대 문무를 겸비한 보기 드문 인물(盖如公者幾希)”이라고 극찬하는 시(<포은집> 권3 ‘송헌이시중화상찬·松軒李侍中畵像讚’)를 남긴다.
 정몽주는 이성계·정도전 등과 함께 쓰러져가는 고려를 일으키고자 했다. 당시 이인임으로 대표되는 권문세족의 횡포로 문란해진 고려의 정치·사회를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정몽주는 1389년 11월 창왕 폐위와 공양왕 옹립을 주도한 이성계 세력의 이른바 ‘흥국사 모임’에 가담,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이성계·정도전·정몽주 등이 흥국사에서 모여 의논했다. 우왕과 창왕은 본디 왕씨가 아니다.(신돈의 후손들이다.) 마땅히 거짓 임금을 폐하고 참 임금을 세워야 한다.”(<태조실록> 총서)
 이로써 고려 신종(재위 1197~1204)의 7대손인 정창군 왕요(王瑤)가 왕위에 올랐는데, 이 사람이 공양왕이다. 이 사건으로 정몽주는 성균관에서 교류하며 노선을 함께 했던 이색·길재·권근 등과 갈라서는 아픔을 맛본다. 하지만 정몽주와 이성계·정도전의 밀월관계는 ‘거기까지’ 였다. 이성계 세력의 최종 목표는 정몽주가 생각한 고려의 개혁이 아니라 역성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이성계를 도모할 것이다.’ 
 이성계와 정몽주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바 ‘윤이·이초 사건’이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을 재촉한 이 사건은 1390년 5월 일어났다. 즉 파평군 윤이(尹이)와 중랑장 이초(李初) 등 두 사람이 명나라 황제(주원장)를 찾아가 “이성계가 자신의 사돈인 요(공양왕)를 새 임금으로 세운 뒤 곧 명나라를 칠 것”이라고 호소했다는 것이다.
 윤이와 이초는 더 나아가 “이성계 측이 명나라 정벌에 반대하는 재상 이색과 조민수·우현보·이숭인·권근·변안열 등을 죽이려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고려사절요> 등) 이 소식이 고려에 전해지자 발칵 뒤집혀졌다. 이성계 세력은 이를 빌미로 이색 등 19명을 축출했다.
 이 때부터 역성혁명의 길로 본격 접어든 이성계의 혁명세력과 정몽주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정몽주는 고려 태조의 정통성을 계승한 공양왕을 받들어 쓰러져가는 500년 사직을 부여잡으려 했기 때문이다.
 정몽주는 이색과 권근 등의 사면을 건의하면서 구 세력과 결합을 모색했다. 이 때부터 고려 사직을 지키려는 정몽주 세력과 신왕조 개창에 박차를 가하는 이성계 세력의 반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정몽주의 공격은 만만치 않았다. <태조실록> 등을 통해 정몽주의 반격과 피살 등 숨막히는 순간을 리뷰해보자.
 1392년 3월, 이성계가 사냥 도중 말이 진창에 빠지는 바람에 낙마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실록>은 이 때 “정몽주가 기쁜 기색을 내비치며 이 기회에 태조(이성계)를 제거하고자 했다”고 기록했다.
 “정몽주는 대간들을 사주하면서 ‘먼저 이성계의 보좌역인 조준 등을 먼저 제거한 뒤 이성계를 도모할 것’이라 했다.”
 ‘정몽주의 사주를 받은’ 대간이 조준·정도전·남은·윤소종·남재·조박 등을 탄핵했다. 탄핵을 받은 6인은 결국 외지로 귀양을 가야 했다. 정몽주는 이에 그치지 않고 6인방의 참형을 촉구했다. 혁명세력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이 때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 등이 아버지를 급히 찾아갔다.
 “정몽주를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아버님! 정도전을 국문하면서 우리 집안까지 연루시키고 있습니다. 형세가 매우 급합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고개를 내저었다. “정몽주를 죽일 수는 없다”면서 거절한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정몽주가 피를 뿌리고 순절한 개성 선죽교. 원래 선지교였지만 정몽주 순절 후돌틈 사이로 절개를 뜻하는 대나무 꽃이 피어났다 해서 선죽교라 일컬어졌단다.  

■1392년 4월 4일, 그 참극의 순간
 아버지의 고집을 꺾지 못한 이방원은 결국 측근인 조영규를 불렀다.
 “정몽주를 내가 죽여야겠다. 내가 그 허물을 뒤집어 쓰련다. 휘하 사람들 중에 누가 이씨를 위해 힘을 쓸 사람이 있는가.”
 조영규가 “제가 하겠다”고 손을 들고 나섰다. 조영규와 함께 조영무·고여·이부 등이 나섰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아차린 변중량(1345~1398)이 정몽주에게 “공이 위험하다”고 누설했다. 정몽주는 사태의 추이를 보려고 이성계를 병문안 했다. 이것이 천려일실이었다. 
 이성계는 본디 정몽주를 죽일 생각이 없었기에 전과 똑같이 대접했기 때문이다.
 의심을 걷어낸 정몽주는 마침 상(喪)을 당한 전 판개성부사 유원을 조문한 뒤 귀가하고 있었다.
 <태조실록>은 1392년 4월 4일 벌어진 참극의 순간을 생생한 필치로 전한다.
 “조영규 등이 달려가 정몽주를 쳤으나 맞지 않았다. 정몽주가 조영규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났다. 조영규가 급히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을 넘어뜨렸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났다. 이 때 고여(高呂) 등이 쫓아가서 죽였다.”(<태조실록> 총서)
 비보를 들은 이성계는 불같이 화를 냈다.
 “우리 집안은 충효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나라 사람들이 뭐라 하겠는가.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이방원도 물러서지 않았다.
 “정몽주 등이 우리 집을 모함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정몽주를 살해한 것이) 곧 효도입니다.”
 이것이 <태조실록>이 전한 ‘간신’이자 ‘역신’인 정몽주 피살 사건의 전모이다. 

경기 용인 모현면에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 포은은 조선개국의 걸림돌로 역적으로 처단됐지만 9년만에 만고의 충신으로 거듭난다.

■9년 만에 간신에서 충신으로
 그런데 불과 9년 만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1401년(태종 1년) 1월14일 참찬문하부사 권근이 태종에게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 즉 ‘치도(治道) 6조목’을 권고했다. 그 가운데 5번째 조항을 보면….
 “임금이 의(義)를 받들어 창업할 때 따르는 자는 상을 주고, 불복하는 이는 벌을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창업을 이루고 수성(守成)할 때는 반드시 전대에 절의를 다한 신하에게 상을 주어야 합니다. 만세의 강상(綱常)을 굳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다음 권근은 정몽주 등의 이름을 거론했다.
 “정몽주는 본래 한미한 선비로 태상왕(태조 이성계)의 천거로 출세했으니 어찌 그 은혜를 갚으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또 어찌 천명과 인심이 태상왕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몰랐겠습니까. 그렇지만 자기 몸이 보전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섬기던 곳’(고려)에 마음을 주고 그 절조를 변하지 않아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대절(大節·죽음을 각오한 절개)을 빼앗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권근은 정몽주를 남송의 문천상(文天祥·1236~1282)에 비유했다. 문천상은 남송이 원나라에 항복하자 저항하다가 체포됐다. 쿠빌라이(원 세조)는 그런 문천상의 재능을 아껴 전향을 권유했다. 그러나 문천상은 끝내 죽음을 택했다. 원나라는 문천상의 절개를 기려 추증했다. 권근은 “바로 문천상을 추증한 원나라처럼 정몽주를 절개의 상징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권근의 상언 가운데 ‘수성할 때는 절의있는 자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중요하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기반을 잡은 만큼 이제는 그 조선을 지키는 절의있는 신하가 절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태종은 권근의 상소를 받아들여 정몽주에게 ‘문충(文忠)’의 시호와 ‘영의정 부사’의 직함을 추증했다. 정몽주가 ‘간신’에서 ‘만고의 충신’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길재는 모가 났지만 정몽주는 순실하다’
 이후 조선의 역대 임금과 신하들은 입을 모아 정몽주 찬양대열에 합류한다.
 우선 정몽주 척살의 장본인인 태종 이방원을 다시 보라. 1402년(태종 2년) 4월 3일, 태종이 과거 합격자들을 언급하면서 갑자기 정몽주를 칭찬했다.
 “정몽주가 향생(鄕生·시골 출신)으로 장원의 영예를 얻었는데 그 호방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대언(왕명을 출납하는 정3품) 이응은 태종의 평가에 화답했다.
 “정몽주 같은 분은 중국에서도 드뭅니다.”
 얼마 전까지 대역죄인이었던 정몽주가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충신’으로 칭송받고 있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은 또 어떤가. 1431년(세종 13년) 3월 8일, 대신들과 고려 말의 ‘3은(隱)’을 거론하며 일일이 인물평을 하고 있다.
 “고려 말에는 충신(忠臣)과 의사(義士)가 매우 적었다. 목은 이색 같은 사람도 절의를 다하지 못했고, 유독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가 능히 옛 임금을 위해 절개를 굳게 지켰기 때문에 뒤에 벼슬을 추증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종의 다음 말이 흥미롭다.
 “정몽주는 순실(淳實)하지만, 길재는 규각(圭角)이 났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길재는 정몽주에 비해서는 약간의 간격이 있을 것이다.”
 ‘순실’은 ‘순하고 참됨’을, ‘규각’은 ‘사람됨에 모가 났음’을 각각 뜻한다. 세종은 고려를 위해 절개를 지켰다는 ‘3은(隱)’ 가운데 정몽주를 ‘으뜸’으로 꼽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12월 3일에는 정윤정에게 관직을 제수했다. 정몽주의 증손이라는 점이 감안됐다.
 그런데 19년 뒤인 1479년(성종 10년) 7월 16일, 정윤정이 성종의 후궁선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성종 임금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저렇게 망발을 내뱉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배후가 있을 것이니 엄벌에 처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 대목을 기록한 <실록>의 기자는 매우 흥미로운 평을 달아놓았다.
 “정윤정은 정몽주의 증손이다. 그의 상소가 비록 황당무계했다지만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의 말에서 증조부(정몽주)의 풍모가 보인다. 그냥 그의 말이 옳다면 받아들이고, 옳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될 일인데….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의리, 으리, 기리(ぎり)
 정몽주를 살피다보면 매우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요즘 한창 유행 중인 ‘의리’이다.
 한마디로 ‘정몽주=의리의 종결자’라는 것이다. 시쳇말로 ‘정몽주으리’라는 것인가. 먼저 서애 류성룡이 내린 ‘포은 정몽주 평’을 보자.
 “포은 선생은 ‘의리지학(義理之學)’으로 모든 유생을 위해 제창하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대종(大宗)으로 삼았다. 국가가 존재하면 함께 존재하고 국가가 망하면 함께 죽었으니…. 고려 500년 강상의 중함을 자임했고 조선 억만년의 절의의 가르침을 열어놓았으니 선생의 공은 위대하다.”(<포은집> ‘포은집발·圃隱集跋’)
 그러니까 요즘으로 치면 포은 정몽주가 의리 하나로 모든 유생들의 ‘형님’이 되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여기서 오해가 있을 수 있겠다. 정몽주의 ‘의리’와, 요즘 잘못 생각하기 쉬운 ‘의리’가 다르다는 점이다.
 즉 일상적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끝까지 추종하거나, 친구 간 맹목적인 친분을 과시하거나, 심지어는 불량배나 범죄집단이 자신의 조직을 배반하지 않는 행위를 ‘의리’라 일컫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같은 의리는 유교적 전통의 의리가 아니라 일제(日帝)의 영향 속에서 변질된 ‘의리’일 가능성이 짙다.
 즉 일본의 윤리 전통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덕목이 바로 ‘기리(義理·ぎり)’라는 것. 일본에서의 ‘기리’는 전통적으로 가족 간이나 친지 간, 혹은 영주와 농노 간과 같은 구체적인 인간관계 안에서 요구된 덕목이다. 이런 일본의 ‘기리’가 일제 시대부터 파고 들어와 ‘의리’의 개념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규모 집단 내에서의 맹목직인 의리는 자칫하면 집단이기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는 얘기다. 

정몽주가 흘렸다는 핏자국의 흔적이 보인다.

 ■의리지학과 정몽주
 의리(義理)의 의미를 풀자면 ‘의(義)’는 도덕성과 올바름이고, ‘리(理)’는 이치 혹은 도리이다.
 그러니까 ‘의리’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람으로 마땅히 해야 할 올바른 도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것은 서애가 언급했고 <실록>에서도 여러차례 등장하는 ‘의리지학’은 사실 ‘성리학’을 뜻한다. 한마디로 ‘올바름(義)의 이치(理)’를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성리학인 것이다.
 그러니 작은 이해관계에 빠질 수 없고, 불의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불의와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 의리지학, 즉 성리학의 정신인 것이다.
 이제 ‘으리’가 아닌 ‘정몽주의 의리’를 좀더 살펴보자.
 사실 포은 정몽주는 동방이학, 즉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추앙 받았다. 한마디로 ‘의리지학’의 으뜸이었다는 소리다. 
 <고려사> 권117 ‘열전·정몽주’를 보자.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서로는 <주자집주> 뿐이었다. 그런데 포은의 강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을 정도로 빼어났다. 그렇기에 듣는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했다. 하지만 후에 호병문의 <사서통(四書通)>을 보게 되니 포은의 강설과 내용이 꼭 맞았다. 여러 선비들이 탄복했다.”
 포은이 주자학(성리학)에 얼마나 정통했는 지를 알려주는 기록이다. 포은의 주자학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포은의 실력을 매우 의심했다는 것.
 하지만 훗날 호병문의 <사서통>의 내용과 다를 바가 없어서 포은의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는 것. 언급된 호병문(1250~1333)은 원나라 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다. 그가 54명 학자들의 주석을 정밀분석해서 펴낸 <사서통>은 주자학 연구자들의 필수 교과서가 됐다. 
 그런데 1326년 출간된 <사서통>을 뒤늦게 받아본 고려인들이 정몽주의 주자학 강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감탄사를 연발했다는 것이다.
 이색은 “포은의 논리는 이렇게 저렇게 말해도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면서 “동방 이학(성리학·주자학)의 비조로 추대할만 하다.”고 칭찬했다.
 삼봉 정도전은 포은이 <대학>과 <중용>, <논어>, <맹자> 뿐 아니라 <주역>과 <시경>, <서경>, <춘추>까지 정통했음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감탄했다.
 ”우리나라 500년 동안 이런 정도의 이치에 도달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유생들이 자기 학식을 고집하고 사람들마다 이설을 제기했지만 포은은 그 물음에 따라 명확히 분석하고 설명하여 약간의 착오도 없었다,”(<삼봉집> 권 3 ‘포은봉사고서·圃隱奉事槁序’)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의견을 내면서 쟁론을 벌이기도 했지만 한치의 흩어짐이 없는 정몽주의 논리에 일패도지하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 경북 영천 임고면 양항리의 임고서원, 포은 선생은 이른바 ‘의리지학’의 최고봉이었다는 평을 들었다.

■'정몽주으리'
 중요한 것은 포은의 ‘실천적 의리정신’이다,
 “유학자의 도는 모두 일상의 일로 음식과 남녀는 모든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니 지극한 이치는 그 가운데 존재하는 것입니다.”(<포은집> 권 4 ‘본전·本傳’)
 그러니까 올바른 행동과 바름을 지키는 ‘일상의 도리’의 ‘일상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운행은 하루에 구만리를 달리네. 잠시라도 쉼이 있다면 만물은 곧 자라지 못하리…. 생각에 병통이 생기면 혈맥이 가운데서 막히네. 군자는 이것을 두려워 하여 저녁까지 두려운 듯 힘쓰고 힘쓰리. 극진한 노력을 쌓으면 하늘의 존재와 마주 대하리라.”
 포은의 시(‘척약재명·척若齋銘’) 내용이다. 시의 제목에 나오는 ‘척약’은 <주역> ‘건괘·구삼·효사’에 나오는 말이다.
 “군자가 종일토록 굳세고 굳세어 저녁까지 여전히 두려운 듯 행동하면 비록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을 것이다.(君子終日乾乾 夕척若 려无咎)”
 여기서 ‘척(척)’은 ‘두려워 삼가는 것’을 뜻하며, ‘구삼효(九三爻)’는 전체의 괘(卦)에서 상괘와 하괘가 교체하는 중간에 자리잡은 위태로운 자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 <주역>의 내용은 평소 마음가짐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그리고 시종일관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주자학에서 ‘일상의 도리’는 공자의 정명론(正名論)과 통한다.
 즉 공자는 제나라 경공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묻자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 했다. 즉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의 정명론은 결국 ‘자신의 분수와 명분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며, 특히 명분이 바로 서지 못하면 말이 올바르지 못하고, 말이 올바르지 못하면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리는 일상의 도리

 정몽주가 ‘일상의 도리’를 실천한 대표적인 예를 찾아보자.
 1384년(우왕 10년)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명나라는 고려가 임금(공민왕)을 시해했을 뿐 아니라 약속한 공물을 보내지 않았다고 해서 고려가 보낸 사신들에게 곤장형을 내리고 줄줄이 유배시켰다. 때문에 명나라 사신으로 떠나라고 하면 모두들 두려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우왕은 명나라로 보낼 성절사(명 황제 생일에 갈 특사)로 밀직 진평중(陳平中)을 임명했다. 그러나 진평중은 당대의 권신인 임견미에게 노비 수십명을 뇌물로 써서 빠져 나갔다. 임견미는 대신 정몽주를 추천하고 말았다. 우왕이 정몽주와 불러 넌지시 의향을 묻자 정몽주는 쾌도난마식으로 대답했다.
 “군주의 명령은 물불이라도 피하지 않는 법입니다. 어찌 피하겠습니까. 다만 남경(명나라 수도)과의 거리가 8000리입니다. 부지런히 간다해도 90일 여정인데, 이제 겨우 60일 남았습니다. 그것이 신의 걱정입니다.”
 정몽주는 우왕의 명을 받자마자 일각의 주저없이 그 자리에서 곧바로 떠났다. 정몽주는 불철주야 재촉한 끝에 천신만고 끝에 황제의 생일날에 맞춰 남경에 도착했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그 같은 사정을 알고서 정몽주를 특별히 치하했다.
 “고려의 배신들이 서로 오지 않으려 하다가 날짜가 임박하니 너를 보낸 것이로구나.”
 명 황제는 억류 중이던 김유와 홍상재 등을 풀어주었고. 고려와 외교관계 회복을 허락해주었다.(<고려사절요>)

 

 ■“죽어도 의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명분에 맞는 올바른 도리를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정몽주의 삶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그랬으니 국가존망이나 왕위찬탈의 위기에 빠졌을 때, 즉 불의에 닥쳤을 때 타협을 거부하고 목숨을 바쳐 싸우는 것이야 말로 정몽주의 의리정신이었던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노수신(1515~1590)은 포은의 의리를 소개했다.
 “고려 쇠퇴기를 맞아 어쩔 수 없게 되자 포은은 사람들에게 ‘남의 신하가 되어 어찌 감히 두 마음을 품겠는가. 이미 나의 처할 바가 되었다’고 했다. 큰 절개에 임해 뜻을 빼앗을 수 없는 군자인 것이다. 평소 깊은 수양이 없었다면 어찌 이렇게 확고할 수 있겠는가.”(<포은집> ‘포은선생시집서’)
 정몽주의 의리는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됐다. 예컨대 1476년(성종 7년) 8월13일 도승지 현석규는 이렇게 말했다.
 “정몽주는 태조(이성계)에게 간택되어 지위가 정승에 올랐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만약 한번만 마음을 바꾼다면 개국의 원훈(元勳)이 될 것이니 누가 그를 앞서겠는가’라 했습니다. 그런데도 정몽주는 끝내 고려 신하의 절개를 지켜, 죽어도 의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존숭의 대상이된 포은의 의리정신
 포은의 의리정신은 후대 유학자들의 ‘존숭의 대상’이 됐다.
 유학자들은 정몽주의 학문이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정몽주를 한국 도학(道學·주자학)의 시조로 꼽고 있다.
 기대승(1527~1572)은 “정몽주는 동방이학의 조종이 됐는데 불행히도 고려가 망하는 바람에 살신성인했다”고 평했다.
 이황은 “신돈이 조정을 저지르고, 최영이 중국을 더럽힐 때 군자라는 정몽주는 무엇을 했느냐”는 일각의 회의론에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허물이 없는 데 허물을 찾아서는 안된다. 정몽주의 정충대절(精忠大節)은 가히 천지의 경위(經緯·씨줄과 날줄)가 되고 우주의 동량이 될만 하다.”
 그러면서 이황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정몽주의 거센 바람 우리나라에 떨치니(圃翁風烈振吾東), 사당과 학궁도 우람하고 그윽하네.(作廟渠渠壯學宮) 공부하는 모든 선비들에게 말하노니(奇語藏修諸士子) 연원과 정의 둘다 으뜸(조종)이라네.(淵源節義兩堪宗)”(<퇴계전서> 권 4 ‘임고서원·臨皐書院’)
 송시열의 평가는 어땠을까.
 “기자(箕子)가 태어난 것은 은(상)의 행운이 아니라 조선의 행운이며(殷師之生 非殷之幸 而我東之幸也), 포은 선생이 출생하심은 고려조의 행운이 아니라 조선의 행운이다.(先生之生 非麗氏之幸 而我朝之幸也)”(<포은집> ‘중간서·重刊序’)
 기자가 누구인가. 이른바 세상을 다스리는 9가지 정치이념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남겼다는 은(상)시대(기원전 1600~1046)의 성인이다. 송시열은 포은 정몽주를 만고의 성인으로 존숭되는 기자의 반열에 놓고 있다. 더할 수 없는 극찬이다.
 1478년(성종 9년) 6월 3일, 동부승지 김계창이 소식(소동파)의 말을 인용하면서 임금에게 올린 상언이 심금을 울린다.
 “임금은 평소에 절의있는 선비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옛날 송나라 임금이 소동파에게 ‘절의있는 선비는 어찌 알겠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동파는 ‘평시에 할 말 다하고 극간을 하는 자는 절의있는 선비이고, 아부하며 순종하는 자는 간신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고려왕조 500년 동안 정몽주와 길재 두 사람뿐입니다.”
 진정한 의리는 불의를 용납치 않고, 어떤 순간에도 할 말을 다하는 것이요, 맹목적으로 순종하고 아부하는 자는 간신의 오명을 뒤집어 쓴다는 것이다,
 새삼, ‘의리의 표상’인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를 읊어본다.
 ‘이 몸이 죽고 죽어(此身死了死了) 일 백 번 고쳐 죽어(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되어(白骨爲塵土) 넋이라도 있고 없고(魂魄有也無),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向主一片丹心) 가실 줄이 있으랴(寧有改理也歟)’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참고문헌>
 정병석, <포은 정몽주의 의리정신과 순절의 의미>, ‘민족문화논총’ 제50집,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2012
 정성식, <정몽주-한국도학의 단서를 열다>, 성균관대 출판부, 2008
 금장태, <한국유학의 탐구>, 서울대 출판부, 1999
 김영진, <철학적 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 철학과 현실사, 2004
 이승환, <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 고려대 출판부, 1998
 엄연석, <포은 정몽주의 유가적 의리실천과 역사철학적 인식>, ‘한국인물사연구’ 제11호, 한국인물사연구소, 2009
 강문식, <포은 정몽주의 교유관계>, ‘한국인물사연구’ 제11호, 한국인물사연구소, 2009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40 관련글 쓰기

 ‘판다외교가 재개됐다?’
 최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을 국빈 방문하면서 판다 한 쌍을 도입하기로 햇다.
 지난해 6월 중국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 때 체결한 양해각서에 따라 기증된 따오기에 이어 두번째 동물외교이다.
 중국이 이른바 ‘판다외교’를 펼친 예는 많다.
 1941년 12월 중국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이 미국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에 한쌍을 기증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반일전선 구축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보낸 미국 정부를 향한 감사의 표시였다. 이후 국민당 정부가 무너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륙을 석구너한 이후에도 판다는 외교사절의 역할을 톡톡해 해냈다. 예컨대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방문 때였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는 연회장 플래카드 위에 걸린 한 점의 그림을 가리키면서 닉슨 대통령에게 말을 건냈다고 한다. 대나무 잎을 뜯어먹고 있는 판다 그림이었다.

 1994년 한중 수교 2주년을 기념해 중국측이 임대해준 판다 밍밍과 리리 부부. 1998년 외환위기 때 다시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선물이 아니라 임대
 “저 두 마리를 당신에게 선물로 보내겠습니다.”
 총리의 약속대로 판다 암컷 링링(娘娘)과 수컷 싱싱(星星)은 ‘중미 수교의 특사’로 미국 워싱턴 국립동물원에 보내졌다. 링링과 싱싱은 역사적인 중미 수교의 상징으로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링링과 싱싱은 그다지 행복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후세를 남기지도 못했고, 부인 링링은 1992년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혼자 남은 싱싱 마저 1999년 11월 고령에 따른 심장질환 합병증으로 안락사되고 말았다. 판다의 평균수명(15살)보다 13년 정도 더 장수한 것을 위안으로 삼았을 뿐이다. 대나무 죽순만 먹고 사는 판다는 중국의 고지대에서만 1500~1600마리 정도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진 멸종 위기 희귀종이다.
 1983년부터는 판다외교의 형태가 바뀌었다. 워싱컨 조약 발효로 희귀동물을 다른 나라에 팔거나 기증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돈을 받고 장기임대하는 형식으로 판다외교가 변화한 것이다. 그렇기에 중국의 ‘판다외교’는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누누이 강조하듯 아무런 조건없는 ‘선물’이 아니라 ‘유상 임대’ 형식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금까지 판다 50여 마리를 미국·일본·벨기에 등에 임대형태로 선물한 바 있다.      
 사실 한국을 향한 판다외교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4년 중국이 한·중 수교 2주년을 기념, ‘밍밍(明明)’과 ‘리리(莉莉)’를 임대 형태로 선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판다를 임대하고 관리하는 문제는 보통 일이 아니다. 판다 전용 축사를 세우고, 중국인 전용 사육사를 둬야 한다. 초기비용만 100억원이 훨씬 더 든다는 것이다. 게다가 판다 한 쌍을 들어오는데 필요한 공식 임대료만 1년에 100만 달러씩 꼬박꼬박 내야 한다. 이 비용은 ‘판다 연구비’라는 이름으로 중국 정부 산하 야생동물보호 관련 협회에 지급돼 멸종 위기의 희귀동물인 판다의 번식을 연구하는 데 쓰인다.
 당시 에버랜드로 임대된 ‘밍밍과 리리’는 1998년 불어닥친 외환위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중국에 반환되고 말았다.

 

 ■코끼리 유배사건
 동물 외교의 예는 옛 문헌에도 심심찮게 나온다. 예컨대 1413년(태종 13년), 진풍경이 일어난다. 
 “(코끼리가) 사람을 해쳤습니다. 사람이라면 사형죄에 해당되지만…. 전라도의 해도(海島)로 보내야 합니다.”
 병조판서 유정현이 이른바 ‘코끼리의 유배’를 진언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인 원의지(源義智·아시카가 요시모치)가 ‘동물외교’의 일환으로 바친 코끼리였다. 그런데 코끼리가 공조판서를 지낸 이우(李玗)를 밟아죽인 참극을 벌인 것이다. 이우가 “뭐 저런 추한 몰골이 있냐”며 비웃고 침을 뱉자, 자극을 받은 코끼리가 그만 사고를 친 것이다. 가뜩이나 ‘관리 비용’ 때문에 미운털이 박혔던 코끼리였더, 1년에 콩 수백석을 먹어댔기 때문에 골치를 앓았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해진 코끼리의 유배지는 전라도 장도(獐島)였다. 그런데 6개월 후 전라 관찰사가 눈물겨운 상소문을 올린다.
 “(코끼리가) 좀처럼 먹지않습니다. 그러기에 날로 수척해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상소문을 받아본 태종 임금조차 ‘울컥’했다.
 “불쌍하구나. 코끼리를 풀어주어라.”
 임금의 명에 따라 코끼리는 유배지에서 풀려 육지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 코끼리의 운명은 기구했다.
 한번도 너무 많이 먹어치우는 바람에 관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에컨대 6년 뒤인 1420년(세종 2년) 전라도 관찰사는 “너무 많은 먹이를 축내 백성들이 괴롭다”면서 이른바 ‘순번 사육’을 제안한다. 전라도 뿐 아니라 충청도와 경상도도 문제의 코끼리를 교대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상왕(태종)은 잔라관찰사의 상소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코끼리는 전라도~충청도~경상도를 떠돌며 사육 당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떠돌이’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을까. 스트레스를 받은 코끼리가 또 사고를 쳤다. 1421년(세종 3년), 충청도 공주에서 코끼리를 기르던 사육사가 그만 코끼리에 채여 사망하고 만 것이다. 충청도 관찰사가 폭발했다.
 “코끼리는 나라에 유익한 동물이 아닙니다. 먹이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열 갑절은 됩니다. 하루에 쌀 2말, 콩 1말 씩 먹는데, 1년으로 치면 쌀 48섬, 콩 24섬입니다. 게다가 화가 나면 사람을 해치니, 도리어 해만 끼칠 뿐입니다. 다시 바다 섬 가운데 목장으로 보내소서.”
 상소를 들은 세종은 “물과 풀이 좋은 곳으로 코끼리를 두라”고 명한 뒤 신신당부한다.
 “제발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

1972년 중 미 수교 때 화합의상징으로 보냈던 판다 한 쌍. 그 중 암컷인 링링은 1992년 죽었고 수컷 싱싱만이 살았지만 1999년 심장합병증으로 안락사했다.  

 ■공작새 유배사건의 전말
 코끼리 뿐이랴. 외교선물로 바친 공작새가 유배를 떠나야 했던 사연도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선조 22년)의 일이었다. “조선을 복속시키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밀명에 따라 조선을 방문하고 있던 종의지(宗義智·소 요시토시)가 공작 1쌍과 조총, 그리고 창과 칼 몇 점을 바쳤다. 조선 조정은 생전 처음보는 조총은 환영했지만, 공작새 선물은 ‘계륵’이었다. 조정은 공작의 처리를 두고 골머리를 앓았다. 허성 같은 이는 ‘공작은 돌려보냄이 옳다’면서 나름의 묘책을 냈다.
 “일본 사신에게 말씀하십시오. (성의는 가상하지만) 내(선조)가 원래 진금(珍禽)을 좋아하지도 않고 조선의 풍토에도 맞지 않으니 되돌려 보낸다’고…. 그러면 외교적인 결례는 범하지 않을 것인데….”
 선조는 “그 말이 맞지만, 저들이 공연한 의심을 하면 안될 것”이라고 고개를 내젓고 고심을 거듭한 끝에 궁여지책을 내놓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자. 일본 사신(종의지) 일행이 떠난 뒤를 기다렸다가 공작을 제주도로 보내라.”
 그러나 예조는 “공작을 제주까지 수송하기는 어렵다”는 간했다. 그러자 선조는 “그렇다면 공작을 ‘수목이 울창한 남양(고흥)의 외딴 섬’으로 옮기라”는 명을 내렸다. 이것이 ‘공작새 유배사건’이다.

 

 ■동물외교를 마냥 환대할 수 없는 이유
 옛날 군주들이 외국의 ‘동물사절’을 마냥 환영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토종이 아닌 해외의 진귀한 짐승에 빠지면 뜻을 상하게 되고 나라마저 위태롭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는 옛날 주나라 무왕의 고사에서 비롯된 관념이다. 은(상)을 멸하고 새왕조(주나라)를 창조한 무왕에게 각국의 외교사절이 선물을 바쳤다. 그 가운데 서방의 소국인 서려(西旅)가 오(獒)라는 명견(名犬)을 바쳤다. 하지만 태보인 소공 석은 “절대 받아서는 안된다”는 글을 지어 바친다.
 “개와 말은 토종이 아니면 기르지 말고, 진귀한 새와 짐승은 나라에서 기르지 마소서. 잘못하면 큰 덕에 누를 끼칩니다. 아홉 길의 산을 만드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서 공(功)이 이지러집니다.”(<서경> ‘여오(旅獒)’)
 진기한 동물, 특히 토종이 아닌 외국산에 빠져 백성을 돌보는 데 소홀히 하면 창업의 공든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간언에 따라 무왕도 일절 진상동물을 받지 않았다. 조선의 임금들도 외국에서 보내온 진금기수(珍禽奇獸)를 100% 환영할 수 없었다.

 

 ■연산군의 반전매력
 예컨대 성종 임금은 왜인에게 원숭이를 받은 것을 후회하면서 “내가 바로 뉘우치고 예조에 명해 다시는 바치지 못하게 했다”고 전했다.(1478년·성종 9년)
 연산군도 그랬다. 1502년(연산군 8년) 일본이 암원숭이를 바쳤다. 그 때 연산군은 ‘주 무왕의 일화’를 자세히 인용하면서 “받지말라”는 명을 내린다.
 “일본이 예전에(세조 때의 뜻함) 앵무새를 바쳤는데 이 앵무새는 값만 비싸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한다. 지금 또 암원숭이를 바치고자 하는데 도로 돌려주고 받지 않겠다는 뜻으로 점잖게 타이르라.”
 세조 때 일본이 바친 앵무새는 무려 명주 1000필의 값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받은 앵무새의 가격이 비싼만큼 조선도 일본에 그만큼의 하사품을 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연산군은 그걸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신들은 “외교 결례이며 자칫하면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우려하면서 “암원숭이를 받아야 한다”고 간한다.
 “진상품을 받지 않으면 대국(조선)으로서 먼나라(일본) 사람들을 대우하는 도리에 어긋납니다.”(성준) “요즘 대마도 왜인들의 원망이 많은데 만약 원한을 품고 돌아간다면….”(이극균) 
 백성들의 삶에 되레 해를 끼칠 뿐이라는 임금과, 외교적인 결례로 자칫 분쟁의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간언하는 신하들…. 과연 폭군이라는 연산군 시대, 그것도 말년의 일화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만부교 상상도.

  ■지금도 미스터리인 만부교사건
 ‘동물외교’는 그리 간단한 외교문제가 아니었다. ‘동물외교’에 잘못 대웅해서 온 나라가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진 예도 있으니까…. 
 고려 태조 왕건 시기에 일어난 ‘만부교 사건’이 그것이다. 942년 10월, 신흥강국 거란이 태조 왕건에게 30명으로 구성된 사절단과 함께 낙타 50필을 보냈다.
 그러나 태조가 충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거란의 사절단 30명을 모두 절도에 귀양보내는 한편, 낙타 50필을 송도 만부교 밑에 매어놓아 굶어죽게 만든 것이다. 태조는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거란은 예전부터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 갑자기 옛 맹약을 돌보지 않고 하루 아침에 멸망시켰다. (거란의) 무도함이 심하다. 그러니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으면 안된다.”(<고려사절요>)    
 만부교 사건으로 거란과 고려는 단교했으며, 고려는 결국 3차례에 걸친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이 만부교 사건은 당대는 물론 지금 이 순간까지도 논란을 불어일으키는, ‘의아한’ 외교분쟁이다. 만부교 사건 후 360여 년이 지난 뒤 충선왕(재위 1308~1313)도 이제현(1287~1367)에게 궁금해 죽겠다는 듯 물었다.  “임금이 낙타를 수십마리 정도 키운다고 해서 그 피해가 과연 백성들에게 이를까. 그저 낙타를 돌려보내면 될 일을 태조께서는 왜 굶어죽였는지 모르겠구나.”
 당연히 생기는 궁금증이었으라. 이제현도 충선왕의 송곳질문을 듣고 대답이 매우 궁했던 것 같다.
 “후세 사람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반드시 숨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현의 말마따나 태조 왕건의 ‘숨은 뜻’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사실 하나. 외교사절 자격으로 온 낙타 50마리를 굶어죽임으로써 나라와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사회에티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38 관련글 쓰기

  1. Subject: 탈 많은 짐승외교 – 시진핑이 주(?)겠다는 팬더를 받지 말아야!

    Tracked from 깨몽 누리방(우리말 누리방) 2014/07/08 20:23  삭제

    어찌도 세상은 이리 바뀌지 않고 돌고 도는지&#8230; ㅡ.ㅡ 이번에 시진핑(习近平;습근평)이 들어오면서 서로 친해보자며 판다(팬더?)를 주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이게 그냥 주는 게 아니고 &#8216..

 “자살골에 감사한다.”
 1994년 7월 2일(현지 시간) 새벽 3시, 콜롬비아 제2의 도시 메데인의 한 클럽 주차장에서 끔찍한 비극이 벌어졌다. 괴한들이 축구대표 수비수 안드레아스 에스코바르를 에워싸고는 ‘자살골, 고맙다’고 비아냥대면서 6발의 총탄세례를 퍼부었다, 괴한들은 한발씩 쏠 때마다 ‘골, 골, 골, 골, 골, 골’이라고 외치며 저주를 퍼부었다.
 비극은 94미국 월드컵 무대에서 잉태됐다. 발데라마와 이기타 등 걸출한 스타들이 축을 이룬 콜롬비아는 남미 예선에서 전통의 강호 아르헨티나를 5-0으로 대파하는 등 역대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축구황제 펠레는 “브라질보다 더 브라질다운 축구를 하는 팀”이라면서 콜롬비아를 유력한 우승후보로 꼽았다. 이 예언이 바로 ‘펠레의 저주’를 연 서막이었음을 간파한 이는 없었으리라. 콜롬비아는 첫판부터 ‘발칸의 마라도나’ 하지가 이끄는 루마니아에 1-3으로 덜미를 잡혔다.

 

 ■“다 죽이겠다“
 6월 23일 미국과의 2차전에서 파국이 일어났다. 전반 33분 미국 존 하크스가 콜롬비아 문전으로 낮은 크로스를 날렸다. 콜롬비아 최고 수비수 에스코바르가 사력을 다해 넘어지며 걷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에스코바르의 발에 맞은 공은 속절없이 콜롬비아 골 안으로 굴러갔다. 에스코바르로서는 생애 첫 자책골이었다. 콜롬비아는 이 자책골이 빌미가 되어 1-2로 패했다. 마지막 3차전에서 조 선두를 달리던 스위스를 2-0으로 꺾었지만 만사휴의였다. 우승후보에서 예선탈락으로 급전직하한 것이다. 콜롬비아의 국내 분위기는 불길했다. “다 죽이겠다”는 경고메시지가 폭주했다.
 몇몇 선수들은 귀국을 꺼렸고, 프란시스코 마투라마 감독은 아예 에콰도르로 도피했다. 정작 자책골의 장본인인 에스코바르는 ‘쿨’하게 귀국의 길을 선택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7월 5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이 사건은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미국과의 2차전 패배 직후 마약 갱단인 메데인 카르텔이 “귀국하는 선수들을 죽이겠다”고 여러 차례 협박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메데인 카르텔은 한 때 세계 최대 규모의 코카인 밀매조직이었다. 그러나 1993년 12월 두목인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피살당하면서 조직 대부분이 와해됐다. 7개월 사이에 피살된 두 사람의 이름이 같은 ‘에스코바르’였다는 것이 공교롭기만 하다. 

 

 ■마약조직과의 연계성
 문제는 일부 대표선수들이 메데인 카르텔의 라이벌 조직인 칼리 카르텔과 연루 소문이 파다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붕괴 직전인 메데인 카르텔이 축구대표 선수들에게 보복테러를 선언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메데인 카르텔과 연계된 축구도박조직의 관련성도 주목을 받았다. 사실 콜롬비아 제2의 도시인 메데인은 93년 한 해 동안 6653명이 살해당하는 등 마약과 혼돈의 도시로 악명이 높았다.
 사건 직후 콜롬비아 언론은 ‘나라 전체의 자살골’(‘엘 템포’지)이며, ‘경악, 또 하나의 광란의 범죄’(‘엘 파이스’지)라고 개탄했다. 이반 데베도우트 스타디움에 마련된 빈소에는 12만 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세사르 가리비아 대통령은 “콜롬비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스포츠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축구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라면서 울먹였다.
 후유증은 컸다. 차기 감독으로 내정된 에르난 고메스 수석코치는 감독 취임을 거부했고, 일부 선수들도 ‘공포 분위기에서 무슨 대표팀이냐’며 줄줄이 탈퇴를 선언했다. 사건 하루 만에 붙잡힌 범인은 경호원 출신인 움베르토 무노스 카스트로였다. 그는 1년 뒤 43년의 징역형을 받았지만 곧 26년형으로 감형됐다. 급기야 2005년 10월에는 ‘모범수’로 석방됐다. 단 11년의 형기만 채운 것이다.

 

 ■축구는 좌절 증오 폭력이다.
 에스코바르의 아버지인 다리오는 “콜롬비아엔 정의가 없다. 법관들은 대체 무엇을 하는 지 모르겠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범인의 조기석방으로 에스코바르 피살사건에 마약조직에 개입됐음이 입증됐다. 무노스의 조직이 그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생애 첫 자책골을 넣고 망연자실하던 27살 꽃미남 청년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4년에 한번 올리는 월드컵 제단에 뿌린 피라고 치부하기에는 가슴이 너무 아프다. 제프 블라터 국제축구연맹 회장의 한마디 말이 떠오른다.
 “축구는 희망과 사랑을 주지만 때로는 좌절과 증오, 폭력을 주기도 한다.”
 에스코바르가 비명 속에 스러진지 20년 후인 2014년 7월 5일 새벽, 콜롬비아가 다시 한 번 시험무대에 선다.
 세계 최강이자 개최국인 브라질과 8강 전을 벌이는 것이다. 콜롬비아인들은 20년 전 에스코바르가 뿌린 피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을까.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37 관련글 쓰기

 “당세의 가호(歌豪) 이세춘은 10년간 한양 사람들을 열광시켰지.(當世歌豪李世春 十年傾倒漢陽人) 기방을 드나드는 왈자들도 애창하며 넋이 나갔지.(靑樓俠少能傳唱 白首江湖解動神)
 18세기 사람인 신광수(1712~1775)가 남긴 <석북집>의 ‘증가자이응태(贈歌者李應泰)’라는 시의 구절이다.
 무슨 내용인가. 신광수는 호걸가수 이세춘의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거듭했으며, 10년간이나 유흥업소에서 애창됐음을 전하고 있다. 신광수가 이 시를 지은 것이 1761~63년 사이였다. 따라서 이세춘은 1750~60년 사이 조선의 가왕(歌王)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평양감사향연도> 가운데 ‘월야선유도’. 달밤에 대동강변에서 벌어지는 선상연회의 장면이다. 이세춘 그룹의 게릴라콘서트도 이같은 분위기에서 펼쳐졌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세춘 그룹의 결성
 이세춘은 특히 지금까지 통용되는 용어인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시조’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새 장르의 노래를 뜻하는 ‘시조’는 기존의 노래를 뜻하는 고조(古調·엣날 노래)와 구별되는 개념이었다. 한마디로 이세춘은 기존의 노래법과 전혀 다른 레파토리를 구사한 가수였던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세춘이 ‘솔로’라기보다는 ‘밴드’였다는 것이다. 18세기 조선을 풍미한 ‘이세춘 밴드’라. 다음 문헌을 보라.
 (1)“어느 날 심공(沈公)이 남자가객 이세춘과 기생 추월·매월·계섬 등 여성가객, 그리고 금객(琴客) 김철석이 초당에 앉아 거문고와 노래로 밤이 이슥해 갔다.”
 (2)“이 판서 댁에서 피리와 노래 소리가 요란했다. 이 판서와 인사를 나눈 후 노래를 불렀다. 금객 김철석, 가객 이세춘, 기생 계섬·매월 등이 함께 했다.”
 찬찬히 뜯어보자. 당대 연예계에서는 남성보컬인 이세춘을 중심으로, 거문고 주자인 김철석, 그리고 여성보컬인 추월·매월·계섬 등이 그룹으로 활동했다는 기사내용이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이세춘 그룹’이라 일컫는다. 물론 당대에는 유명한 김천택이나 김수장 같은 가수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중인계층이었다.
 반면 이세춘은 물론 이세춘과 이따끔씩 프로젝트 그룹을 구성하기도 한 송실솔 등은 노래로 생계를 꾸려가는 전문가수들이었다.
 

'월야선유도'의 전체그림. 대동강변에는 이세춘 그룹 같은 당대 최고의 가객들이 펼치는 공연배틀을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이세춘 그룹의 평양공연 때는 연주소리가 연광정까지 들렸다고 한다. 

 

 ■18세기 연예기획사 ‘SY’
 그런데 이세춘과 송실솔의 뒤를 봐주는 사람들, 즉 일종의 후원자들이 존재했다는 것이 또한 흥미롭다. 
 예컨대 (1)에 등장하는 심공(沈公)이라는 사람은 이세춘 그룹을 후원했던 문사 심용(1711~1788)를 일컫는다. 시쳇말로 패트론(patron·후원자), 혹은 스폰서라 할 수도 있겠고, 혹은 일종의 연예기획사 사장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요즘 이름을 지었다면 심용이 차린 기획사의 이름은 ‘SY’가 아니었을까.
 (1)(2)에서 나오는 이세춘 밴드의 멤버인 계섬과 추월 등도 만만한 가수가 아니었다. 당대의 가요계를 쥐락펴락한 스타였다.
 계섬(桂纖)이라는 여가수를 보자. 그는 황해도 송화현의 계집종이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시랑 원의손(1726~81)의 수하에 있다가 대제학을 지낸 이정보(1693~1766)의 문하에 들어갔다.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말 한마디에 마음이 상해 결별했다”고 한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이정보는 은퇴 후 많은 가수(명창)들을 문하에 두었는데, 계섬은 그 가운데서도 수제자였다.
 계섬의 이야기를 담담히 써내려간 심노숭(1762)의 시문집인 <효전산고> 중 ‘계섬전’은 이 대목에서 재미있는 강조점을 담는다.
 “이정보는 문하의 명창들 가운데 계섬을 가장 사랑해서 늘 곁에 두었다. 이정보는 계섬의 재능을 기특하게 여긴 것이지, 사사롭게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대제학을 지낸 이정보가 계섬의 노래실력을 아낀 것이지, ‘여자로서’ 좋아하지는 않았음을 굳이 변명해주고 있다.
 계섬은 이정보의 문하에서 악보를 보고 여러 해의 과정을 거쳐 노래연습에 전념했다. 일종의 연습생 신분이었던 것이다.  

<평양감사 향연도> 가운데 '부벽루 연회도'.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춤과 노래가 어우러지고 있다.

 ■조선 최고의 보컬트레이너
 그의 노래는 일취월장했다. 노래를 할 때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어 소리가 짜랑짜랑, 집안에 울려퍼졌다. 계섬의 노래는 조선 전역에 떨쳤다. 지방의 기생들이 서울에 와서 노래를 배울 때는 모두 계섬에게 몰려들었다.
 학사와 대부들이 너도나도 노래와 시로 계섬을 칭찬했다. 훗날이지만 계섬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초대받아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노래’를 부르는 영예를 안았다. 옛 주인인 원의손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새 주인인 이정보를 찾아와 “계섬을 다시 돌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원의손과 좋지않은 상태로 결별한 계섬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한다. 이를테면 옛 기획사 복귀를 거부한 것이다.
 계섬은 자신을 그토록 아끼던 이정보가 죽자, 마치 부친상을 당한 것처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이후 이정보를 잊지못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이후 기생의 신분에서 벗어난 계섬의 마지막 주인은 심용이었다. 평소 풍류를 좋아한 심용은 계섬의 노래를 워낙 좋아해서, 그녀를 문하에 두었다.
 아마 그 때 심용의 ‘기획사’에서 이세춘과 인연을 맺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계섬은 요즘으로 치면 첫번째 기획자인 원의손과 결별한 뒤 두번째 기획사인 이정보를 거쳐 세번째인 심용 기획사에서 만개한 것이다.      
 이세춘 그룹의 또 다른 멤버인 추월은 가무(歌舞)와 자색(姿色)으로 유명한 ‘얼짱 댄스가수’였다. 공주 기생 출신이었다.
 궁중의 상방(尙方·임금의 의상을 책임지던 관청)에 들어갔는데 풍류객들 사이에서 수십년간 큰 인기를 끌었다.
 제3의 멤버 매월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매월은 원래 종친인 이익정(1699~1782)의 ‘가희(歌姬)’였다가 이세춘 그룹의 일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멤버 김철석(1724~76)은 일명 철돌(鐵突)이라 일컬어지며 당대 거문고의 명수로 명성이 자자했다. 

 

 ■게릴라 콘서트 혹은 히든싱어
 이세춘 밴드의 흥미진진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기획사 사장격인 심용이 이세춘 그룹에 넌지시 제안했다.
 “너희들. 평양 한번 가보지 않겠는고?”(심용)
 “가보고는 싶지만 아직….”(이세춘 그룹)
 “평양감사가 대동강 위에서 잔치를 벌인다는구나. 평안도 모든 수령들과, 이름난 기생들, 그리고 명가수들이 다 모인다는구나. 육산주해(肉山酒海)를 이룬다고 하는데…. 우리 한번 가볼까. 한번 걸음에 심회(心懷)를 크게 발산할 수 있고, 전두(纏頭·공연후 받는 사례금품)로 비단과 돈을 많이 받을 것이니….”(심용)
 “(모두들 손뼉을 치며) 그거 좋습니다.”(이세춘 그룹 일동)
 무슨 말인가. 쉽게 말하면 ‘기획사 사장’인 심용이 이세춘 그룹에게 ‘평양감사의 회갑연’에서 공연 한 번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이다. 그러자 이세춘 그룹이 모두 손뼉을 치면서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찬성하고 나선 것이고….
 심용이 말하는 평양감사는 아마도 신회(1706년~?)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일화는 아마도 신회가 평양감사로 재직하던 1765~66년 사이에 있었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세춘 그룹의 평양공연은 깜짝쇼였다. 초대받지 않은 공연이었다는 것이다.
 심용과 이세춘 그룹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금강산 유람’을 다녀온다고 소문낸 뒤 종적을 감췄다. 그리고는 몰래 평양 성내로 잠입한 뒤 모처에 숙소를 잡았다.
 평양감사의 잔치가 열린 다음 날, 심용은 작은 배 한 척을 빌려 차양막을 치고, 좌우에 주렴을 드리웠다. 이세춘 그룹 멤버들은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배는 능라도와 부벽정 사이에 숨겨두었다.
 이윽고 풍악이 울리고 돛배가 강물을 뒤덮었다. 평양감사는 층배에 높이 앉았고 여러 수령들과 함께 잔치를 벌였다. 맑은 노래와 기묘한 춤에 그림자는 물결 위에서 너울거리고 성머리와 강둑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 때 심용이 노를 저어 나갔다. 평양감사의 층배가 보이는 곳에 배를 멈췄다. 그리곤 저쪽 배에서 검무를 추면 이쪽에서도 검무를 추고, 저쪽 배에서 노래를 부르면 이쪽 배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마치 흉내내는 것이었다.”
 어떤가. 마치 ‘히든싱어’를 보는 듯 하지 않는가. 잔치에 모인 평양감사 등이 이상하게 여겼다.
 “저 배를 바라보니 검광이 번쩍이고 춤과 노랫소리가 구름을 가로막는구나. 범상치않은 사람들이겠다. 저 배를 끌고 오라.”
 끌려온 심용이 평양감사의 층배 머리에 이르자 주렴을 걷고 껄껄 웃었다. 사실 심용과 평양감사는 친분이 깊던 사이였다. 심용이 이끄는 이세춘 그룹의 깜짝공연이었던 것이다. 평양감사 역시 넘어질듯 놀라며 반가워했다.

 

<평양감사 향연도> 가운데 연광정에서의 연회도.

 ■깜짝 공연의 개런티
 사실 평양감사의 회갑연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서울출신이었다. 그러니 서울에서 온 이세춘 그룹의 공연을 대하고 한결같이 기뻐했다. 이세춘 그룹 멤버와 현지의 평안도 그룹은 평생의 재주를 모두 발휘해서 온종일 공연했다. 이를테면 ‘공연배틀’을 벌인 셈이다. 배틀의 승자는 물론 이세춘 그룹이었다.
 “그런데 서도의 가무(歌舞)와 분대(粉黛·화장법)는 아주 무색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이세춘과 김철석, 그리고 기생 추월·매월·계섬 등 서울 그룹의 춤솜씨 및 화장법과, 서도(평안도) 그룹과 수준차가 났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초대받지 않은 깜짝 공연이었음에도 심용과 이세춘 그룹은 엄청난 개런티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세춘 그룹의 공연에 감명을 받은) 평양감사가 서울 기생에게 1000금을 주었다. 다른 벼슬아치들도 각자의 위치에 따라 상금을 내놓았다. 거의 1만금에 가까운 돈이 들어왔다,”
 결국 심용과 이세춘 그룹은 10일 넘게 평양여행을 즐긴 뒤 돌아왔다. 낭만은 낭만대로 즐기고 개런티는 개런티대로 받고…. 여기에 평양 사람들도 조선 최고의 인기밴드가 펼치는 깜짝 공연을 마음껏 즐겼고….
 사실 이세춘 그룹의 공연은 당대 평양사람들에게는 문화적인 충격으로 다가갔던 것 같다. 신광수의 <석북집> 가운데 평양의 풍속을 다룬 ‘관서악부’를 보자.
 “처음 부르는 창을 듣자니 모두 양귀비의 노래일세.~ (이 노래를) 일반 시조로 장단에 맞춰 부르는 이는 장안에서 온 이세춘일세.(初唱聞皆說太眞~一般時調排長短 來自長安李世春)”
 무슨 말인가 하면 당대 평양의 가객들은 공연을 펼칠 때마다 모두 양귀비(태진)의 사연을 담은 노래를 선창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세춘은 이 양귀비 노래를 평양에 소개하면서 서울에서 유행중이던 새로운 스타일(일반 시조)로 장단을 배열했다는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불규칙장단
 이세춘은 이 새로운 장단으로 평양시민들을 열광시켰을 것이다.

 

 ■억지 공연의 대가
 이렇게 신명나는 공연이 있었지만, 그 반대의 공연도 있었다.
 예컨대 이세춘 그룹은 앞서 인용한 (2)의 사례, 즉 이 판서 댁의 공연을 즐겁게 마쳤다. 그런데 이판서 댁 공연에서 보았던 다른 대감이 며칠 뒤 이세춘 그룹을 초청했다. “자기 집에서도 공연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감의 태도는 영 불손했다. 명령조로 “노래 부르라”고 명했다. 기분을 잡친 이세춘 그룹이 마지못해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는데,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판서 댁에서는 노래가 시원했는데 지금은 소리가 낮고 느즈러졌다. 내가 음악을 무른다고 무시하는 것이냐. 싫어하는 것이냐.”
 이 때 추월이 눈치를 채고 대감을 진정시켰다.
 “처음이라 그렇사옵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면 구름을 뚫고 들보를 흔드는 소리로 금방 울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멤버들과 눈짓을 나눈 뒤 대뜸 우조(羽調)로 잡사(雜詞)를 시작했다. 무조건 큰 소리로 잡스러운 가사를 질러댄 것이다. 음악을 들을 줄 몰랐던 대감은 부채로 책상을 치며 “맞아! 노래는 이렇게 부르는 거야”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세춘 그룹을 대접하는 대감의 무례가 지나쳤다. 시원찮은 술대접에 마른 포만이 안주로 나왔으니까….

 

 ■이세춘 그룹의 노래
 이세춘 그룹의 작품으로 남아있는 곡은 단 2곡 뿐이다. 아마도 창작보다는 가창에 전념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무척 흥미로운 한 곡을 보자.
 “화당 빈객 만좌중에 줄 고르는 왕상점(王上點)아. 너희 집 출두천(出頭天)이 좌칠월(左七月)가 산상산(山上山)가 진실로 산상산이면 여아동침(與我同寢)하리라.”
(청구영언)
 가사 가운데 왕상점(王上點)은 왕(王) 위에 점(點)을 찍었다는 뜻이다. 주(主)자를 뜻한다. ‘출두천(出頭天)’은 머리를 내민 천(天)이니 부(夫)자를 의미한다. 또 ‘산상산(山上山)’은 산(山)자 위에 산(山)이 있다는 말이니, 출(出)자를 뜻한다. 또 좌칠월(左七月)은 유(有)자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 내용은 기생집에서 기생을 유혹하면서 ‘한번 동침하면 어떠냐’고 은근들썩 눙치는 노래이다. 말장난으로 가득찬 노래가 아닌가. 그랬으니 10년간이나 서울의 유흥가를 휩쓸었을 것이다.    

 

 ■서평군-송실솔 콤비
 심용-이세춘 콤비와 쌍벽을 이루는 사람들이 서평군(이요)-송실솔 콤비였다.
 송실솔의 후원자는 왕족인 서평군 이요였다. 부자였고, 협객이었던 서평군은 음악을 유독 좋아했는데, 송실솔의 노래에 흠뻑 빠졌다. 서평군은 송실솔을 데리고 다녔다. 송실솔이 노래할 때마다 서평군은 반드시 스스로 거문고를 연주했다. 언젠가 서평군이 송실솔에게 “내 거문고가 너의 노래를 따라가지 못하도록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일종의 배틀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자 송실솔은 늦게, 빠르게 자유자재로 노래를 불러 서평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서평군은 송실솔의 노래에 따라 궁성을 뜯다가 각성을 울다가 정신없이 여음(餘音)을 고르다 하며 따라가기 급급했다. 서평군은 결국 송실솔의 노래에 맞추려다 자신도 모르게 술대를 떨어뜨렸다. 서평군은 “정말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감탄했다.
 서평군-송실솔 콤비는 어찌보면 심용-이세춘 콤비와 쌍벽을 이뤘다. 그러나 음악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친분을 쌓았다. 송실솔은 특히 이세춘과 일종의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할 정도였다. 한번은 이세춘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송실솔이 조문을 했는데, 문에 들어서면서 상주(이세춘)의 곡소리를 듣고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이건 계면조일세. 평우조로 받는 것이 마땅하지.”
 상주가 계면조로 곡을 하니, 문상객은 평우조로 받아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송실솔은 영전에 나가 슬픈 곡조(계면조)가 아니라 일반 노래(평우조) 같은 곡을 했다. 이 일화가 호사가들의 입방앗거리가 되어 널리 퍼졌고, 듣는 이들마다 모두 웃었다.(이옥의 <문무자문초> 중 ‘가장 송실솔전’)
 송실솔은 어릴적 노래를 배울 때 폭포수 밑에서 날마다 노래연습을 했다. 1년을 그렇게 하자 노랫소리만 남고 폭포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또 북악산 꼭대기에 가서 까마득히 높은 곳에 기대어 또 1년간 노래를 부르자 회오리 바람도 그의 소리를 흐트러뜨리지 못했다.
 이 때부터 그의 노래는 구슬처럼 맑았으며, 연기를 날리듯 가냘프고 구름이 가로걸리듯 머물렀으며, 철맞은 꾀꼬리 같이 자지러졌다가 용이 울듯 떨쳤다고 한다.
 송실솔의 ‘실솔(실솔)’은 귀뚜라미와 같은 소리를 낸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     

 

 ■얼굴없는 가수
 이밖에도 조선을 주름잡은 가수와 댄서들이 많았다.
 외모는 추악했지만 애절하고 원망하는 듯 처절한 목소리로 구름을 멈추게 한 금향선은 또 어떤가. 금향선의 외모를 보고 비웃었던 당대의 문사들은 그의 노래를 듣고는 “끓어오르는 춘정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한다.(안민영의 <금옥총부>) 한마디로 섹시한 목소리가 금향선의 장점이었던 것이다.
 판소리 8명창 가운데 한사람인 모흥갑(1822~1890)도 유명하다. 절대고음을 자랑한 그는 후세사람들로부터 ‘설상(雪上)에 진저리치듯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소리는 고동상성(鼓動上聲)이라 했다. 그가 평양감사로 초청받아 평양 연광정에서 소리를 할 때 10리까지 들렸다고 한다.
 남학이라는 가수의 노래는 벽을 사이에 두고 들어야 했다. 왜냐면 생김새가 추한 가수였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치면 ‘얼굴없는 가수’를 컨셉트로 삼았다고 할까. 얼굴은 방상(方相·귀신)같고 눈은 난쟁이 같았으며, 코는 사자같고, 수염은 늙은 양 같았다. 눈은 미친개 같고 손은 엎드려 있는 닭발 같았다니…. 그러나 그의 노래는 아주 맑도 곱고 부드러웠다. 타고난 미성으로 여자 목소리를 잘 내는 것이 특기였다.       
 그러니 벽너머에서 들으면 여인들의 혼이 흔들리고, 마음이 격동했다. 그러나 얼굴이 드러나기만 하면 기생들이 멍하니 앉아있기도 하고, 때로는 깜짝 놀라 울기도 하고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이옥의 <청남학가소기>)
 그 뿐인가. 세종시대의 구종직(1404~77)은 문과에 급제해서 교서관에 배치됐다. 하루는 몰래 편복 차림으로 경회루 구경을 나왔다가 임금(성종)과 마주쳤다.
 구종직은 임금의 명으로 구성진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는데, 그 소리가 들보를 흔들었다. 그는 임금의 명령으로 다시 <춘추> 한 권을 다 외었다.
 그러자 성종은 그에게 술을 하사했으며, 다음날 대사간으로 임명해버렸다. 구종직은 결국 노래를 잘 불러 국왕의 과실을 지적하는 대사간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차천로의 <오산설림초고>)

 ■K팝의 조상들
 그러고보면 노래와 춤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는 민족이 아닌가.
 “연일 음식과 가무를 즐겼다(連日飮食歌舞). 밤낮으로 길을 가다가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하루종일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는다”(<삼국지> ‘위서·동이전 부여조’)
 “(5월이면) 파종을 마치고 신령께 굿을 올린 뒤 무리가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시는데 밤낮으로 쉼이 없다.”(<삼국지> ‘위지·동이전 마한조’)
 이런 기록도 있다.
 “동이는 모든 토착민을 인솔하여 즐겁게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그릇은 조두(俎豆·제기)를 쓴다. 중국에서 예를 잃어버리면 사이(四夷)에서 구한다는 것은 믿을 만 한 일이다. (중국) 천자가 본보기를 잃으니 이것을 사이에서 구했다.”(<후한서> 동이전 등>
 하기야 동이족인 공자도 ‘만능 뮤지션’이었다. 평소 거문고를 뜯고, 경(磬·돌 혹은 옥으로 만든 타악기)을 치고 노래를 불렀다니 말이다.
 지금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K팝의 전통은 이렇게 뿌리가 깊은 것이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36 관련글 쓰기

 “정말 저기가 비무장지대가 맞나.”
 강원 철원 홍원리 평화전망대에 오를 때마다 색다른 느낌을 갖는다. 비무장지대란 높고 깊은 산악지대, 즉 사람들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게 일반상식인데…. 그러나 철원은 해발 220~330미터 위 용암대지에 펼쳐진 드넓은 평원이다. 당장이라도 논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평야를 품에 안고 있는 저편 고지와 능선의 이름, 그리고 사연을 알게 되면 나른한 평온이 깨진다.
 전망대에서 맨 왼쪽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백마고지다. 이곳에서는 1952년 10월6일부터 백마고지를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수 만 명의 인명피해를 주고받은 뒤 마침내 한국군 9사단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백마고지는 지금 민간인들은 갈 수 없는 남방한계선 북쪽에 있다. 주변의 산인 고암산(780미터)은 일명 김일성 고지이며, 곁의 능선 별칭은 피의 500능선이다. 또 이어 낙타고지…. 그리고 또 하나, 철의 삼각지대 맨 위 꼭지점인 평강(지금은 북한)이 있다.
 그 유명한 백마고지를 지근거리에서 보려면 평화전망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백마고지 전적지와 기념관이 있는 철원읍 산명리 삼봉산 기슭으로 가야 한다,
 전적기념관 앞에 서면 백마고지가 지호지간이다. 이곳에서 잠시 묵념을 올린다. 폭 2킬로미터, 길이 3킬로미터에 불과한 저 작디작은 야산에서 죽어갔을 1만8000여 젊은 넋을 기리며 말이다.  




 

 ■백마고지 전투가 무엇이기에
 백마고지 전투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수많은 젊은 넋이 스러져 갔을까.
 이 전투는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진 1952년 10월초 중국군의 공세로 시작된 52년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다. 52년 10월6~15일까지 고지를 지키던 국군 9사단이 중국군 38군의 공격을 받아 10일간 혈전을 벌였다. 이곳은 철원평야를 지키기 위해서는 잃을 수 없는 요처였기 때문이다.
 강원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 있는 이 야트막한 야산은 철원읍 서북방 12㎞ 지점에 있다. 효성산 남쪽 끝자락이다. 원래는 평범한 야산이었지만 휴전회담 이후 군사접촉이 계속되자 일약 핵심지역으로 부상했다.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대 중 서남쪽 철원 꼭짓점의 어깨를 구성하는 요충지였다. 철원평야가 한 눈에 보였고, 만약 이곳을 잃을 경우 아군부대의 병참선인 3번 도로(경원선)를 비롯한 통로를 사용할 수 없었다.
 1952년 10월6일부터 15일까지 10일간의 전투에서 7차례나 고지의 주인공이 바뀌었으며, 밤낮으로 12차례나 쟁탈전이 반복되었다.
 우리 측 자료에 따르면 공산군의 인적손실은 전사자 8234명을 포함, 추정 살상자 6098명과 포로 57명 등 모두 1만4389명에 이르렀고, 아군의 사상자도 3416명에 달했다. 작전기간 중 공산측은 5만5000발, 아군은 21만9954발 등 모두 27만4954발의 포탄이 집중됐다.




 처절한 전투가 벌어진 베티고지(왼쪽 야트막한 고지)와 임진강 곡류부분 안쪽에 반달모양으로 서있는 노리고지. 임진강 따라 북쪽으로 가면 북한이 조성한 임진강댐이 보인다. 베티고지와 노리고지 사이, 임진강변에 왠지 적석총 같은 모양의 봉긋한 지형이 보인다. 

 유엔군 항공기는 754회나 출격, 이 작은 고지에 융탄폭격을 퍼부었고, 정상부엔 그야말로 풀 한포기 남아있지 않았다. 원래 이 고지는 전투가 개시되었던 10월10일까지도 그저 395고지로 일컬어졌다. 그런데 전투가 한창이던 11일 갑자기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설이 난무한다. 포격으로 고지의 나무와 수풀이 모두 쓰러진 뒤 산의 형태가 마치 백마처럼 보였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고, 조명탄 투하로 산이 하얀 낙하산 천에 뒤덮인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외신기자들이 붙였다고도 한다.
 이밖에도 어느 참전 연대장이 외신기자의 질문에 ‘White horse hill’이라고 대답한 것이 보도됐다는 등 갖가지 설이 난무한다.
 어쨌든 한국군 9사단은 이 전투의 승리로 철의 삼각지대 상당부분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철원평야와 주요 도로(3번, 463번, 464번), 즉 전선후방의 철원~김화~화천에 이르는 측방도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 전쟁의 고지 쟁탈전에서도 대표적인 승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1만8000여 젊은 넋의 희생을 대가로 차지한 이 백마고지를 지금 밟을 수 없다. 비무장지대 안으로 편입되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핏물이 능선을 타고 계곡으로 흘렀다고 해서피의 능선이라 했다. 얼마나 포탄세례를 받았는지 민둥산이 되었다. 

 ■베티고지 전투의 영웅
 고개를 갸웃거리며 임진강 곡류가 급한 물살을 이루며 흐르는 이른바 ‘베티고지’로 가본다.
 경기 연천 서쪽 15킬로미터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이른바 베티(Betty)고지 역시 지금은 갈 수 없는 비무장지대 안에 있다.
 태풍 전망대에서 손을 뻗어 볼 뿐이다. 최전방 지역을 답사하다보면 전쟁과 분단, 냉전이 주는 팽팽한 긴장감을 일순 잊게 된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그 절경에 취하게 되니까…. 
 천혜의 비경을 뽐내며 흐르는 임진강의 곡류. 그 사이에 펼쳐지는 짙푸른 산과 들판. 갈 수 없어 더 가고 싶고, 품에 안을 수 없어 더 안고 싶은 저 강, 저 들판이 아니던가. 그런데 심한 곡류를 강 너머 왼쪽에 아주 작은 봉우리가 있다.
 눈을 의심하게 된다. 높은 지형에서 내려다보아서 그런가. ‘고지’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옹색한 구릉이 아닌가. 하기야 해발 120~150미터 정도의 구릉 3곳을 일컫는 말이니 그런 표현도 틀리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니 그곳에서 휴전협정을 목전에 두고 있던 1953년 7월13~16일 그야말로 피어린 사투가 벌어졌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을 수밖에….
 임박한 휴전협정에 유리한 입지에 서기 위해 최후 공세를 벌이던 중국군은 임진강변 요충지인 이 작디작은 고지에 군침을 흘린다. 한국군 제1사단 제11연대 제2대대 전초기지였던 베티고지를 점령하면 주 저항선에서 남쪽으로 2킬로미터 이상 전진하기 때문이었다.
 7월13일부터 중국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고, 한국군은 사흘간 3개 소대를 투입했지만 하룻밤만 자고나면 반 수 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손실을 입었다.
 이 때 특무상사였던 김만술 소위가 15일 소위로 임관하자마자 제6중대 제2소대장으로 베티고지 사수에 투입됐다. 김만술 소위는 이날 오후 2시 아직 얼굴도 익히지 않은 소대원 34명을 독려, 베티고지 군인 중앙봉과 동봉(東峰)을 점령한 뒤 중국군이 점령하고 있던 서봉 공격에 나섰다. 김만술 소위는 중국군 1대 대대와 맞서 13시간 동안 서봉을 19번이나 뺏고 빼앗기는 접전을 펼친 끝에 기어코 서봉을 확보했다.
 16일 날이 밝은 뒤 김만술 소위와 생존 소대원들은 중국군 시체 사이에 쓰러진 전우들을 보며 절규했다고 한다. 확인된 중국군의 시체만 350여구였고, 한국군은 23명이 전사했다. 이 전투는 한국전쟁에서 가장 극적이고 용감한 승리로 평가된다.
 김만술 소위는 미국최고훈장인 십장훈장과 우리 정부가 주는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1956년에는 이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격퇴’)가 개봉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만술 소위 부대원들이 사수했던 이 베티고지 역시 불과 11일 뒤인 53년 7월27일 체결된 휴전협정에서는 군사분계선 북쪽에 포함됐다.
 그리고 1952년 12월11~13일 사이 중국군 2700여명을 사살함으로써 고지가 5미터나 낮아지고 임진강물이 핏빛으로 물들었다는 노리(Nori)고지 역시 군사분계선 이북으로 편입됐다. 노리고지와 베티고지 사이에는 북한의 집단농장이 보이고….

 


 가슴이 찢어질 듯한 전투가 벌어졌다 해서단장의 능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화채그릇에서의 혈투
 다시 발길을 돌려 강원 양구 해안분지에 닿는다. 화채그릇 닮았다 해서 ‘펀치볼’이라고 일컫는 바로 그곳이다.
 을지전망대(해발 1049미터)에 오르면 마치 무릉도원에 온 듯 평화롭고 신비로운 해안분지가 보인다. 또 맑은 날이면 금강산 비로봉, 월출봉, 차일봉, 일출봉이 또렷하게 보이는 이곳. 하지만 인간이 일으킨 전쟁은 12만 년 전부터 선사인들이 무릉도원으로 꼽았을 법한 이곳을 피로 물들였음을…. 
 다시 말하면 해안분지는 북쪽의 1026 고지(모택동 고지), 924고지(김일성 고지), 서쪽의 가칠봉(1242미터), 대우산(1178미터), 남쪽의 도솔산(1148미터), 918고지, 동쪽의 달산령, 795, 908고지 등으로 둘러싸인 곳.
 그런데 1951년 6월4일부터 19일까지 한국군 해병 제1연대가 양구 북동방 25킬로미터 떨어진 대암산과 도솔산, 대우산을 연결하는 1000미터 이상의 고지군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전략적인 요충지인 해안분지(펀치볼)를 고수하기 위해서였다. 한국군 해병대는 작전개시 17일 만에 해안분지를 남쪽에서 감제할 수 있는 도솔산 일대의 고지군을 확보하였다.
 이 전투에서 3,307명(사살 3,263명, 포로 44명)의 공산군이 피해를 입었고 아군은 618명(전사 123명, 부상 484명, 실종 11명)의 인명이 손실됐다.
 이 전투를 통칭해서 ‘도솔산(兜率山)전투’라 일컬어졌다. 이 전투는 한국 해병대 5대작전 중 하나로 꼽힐 만큼 해병의 자랑이 된 전투였으며, 당시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무적해병’이라는 휘호를 하사받았다. ‘도솔(兜率)’이 무슨 뜻인가. 불교에서 미륵보살이 사는 곳이며, 미륵보살의 정토(내원)이면서 천계 대중이 환락하는 장소(외원)라 한다. 그렇게 심오한 뜻을 지닌 도솔이 중생들의 싸움터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주요 고지

■그 고약한 이름,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
 이 뿐이랴. 양구 북방 문등리와 사태리 계곡의 절경을 가로지르는 능선엔 ‘피의 능선’이니 ‘단장(斷腸)의 능선’이니 하는 고약한 이름이 붙었다.
 그저 731-983(수리봉)-940-773고지로 일컬어지던 능선은 마치 바나나처럼 능선이 퍼졌다 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 제9연대 장병들에 의해「바나나 능선」으로 일컬어졌다. 하지만 이곳에서 1951년 8월~10월 혈전이 벌어져 2만 명에 가까운 인명피해(한국군 및 유엔군 4400여 명, 북한군 1만5000여 명)가 발생하고 능선이 피로 물들었다. 그런데 이 격전의 소식을 타전한 ‘성조지(Stars and Stripes)’ 기자들이 983고지 일대를 피로 물들인 능선이라 해서 ‘피의 능선(Bloody Ridge Line)’이라고 명명했다. 이 전투를 초기에 지휘한 제5사단 36연대장 황엽 대령은 “북한군이 설치해놓은 지뢰 때문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계곡은 피로 물들였다.”고 회고한바 있다.
 결국 북한군은 9월5일 이 ‘피의 능선’을 포기하고 북쪽에 남북으로 뻗은 능선(894-931-850-851고지)으로 철수했다. 983고지에서 벌어진 ‘피의 능선’전투는 2004년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관객 1000만 명을 동원한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후반부에 등장한다. 북한군 깃발부대와 한국군 간의 격전장이다.  
 그러자 미군은 다음 능선을 점령하도록 명령했는데, 10월5일까지 ‘단장의 능선’가운데 철옹성 같았던 931-851고지를 잇달아 점령했다.

을지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양구 펀치볼(해안분지). 잔뜩 찌푸린 구름마저 펀치볼을 피했다. 구름 사이로 화사한 햇빛이 신묘한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연합통신 특파원이었던 스탠 카터가 전방대대 구호소를 방문했을 때 부상병이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고 부르짖자 이 고지를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이라 명명했다. 이 전투에서 피아간 2만7000여 명(아군 3745명, 북한군 2만4000여명)의 인명손실을 기록했다. 미군은 비록 이 두 전투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뒀다고는 하지만 전투 초반에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고, 언론에서조차 “가슴이 찢어질 듯한 전투”였다고 대서특필 했기 때문에 불명예스러운 전투로 여겨지기도 했다.
 백마고지 전투와 함께 최고의 혈전을 벌인 것으로 여겨지는 저격능선ㆍ삼각고지 전투(중국은 두 전투를 묶어 상감령 전역이라 한다)와 불모(不毛)고지, 수도고지ㆍ지형능선(指形稜線), 351고지, 금성지구, 켈리고지, 포크찹 고지 등에서 수많은 고지전이 벌어진다. 그런데 이 전투의 결과와 전사(戰史)의 기록을 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고 하면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한 가지.
 “한국전쟁 사상 ‘지상전의 꽃’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지만, 작은 고지 하나를 두고 그 많은 인명과 물자를 투입해가면 혈전을 벌여야 할 가치가 있는가.(중략) 손실에 비해 전술적 가치가 너무 적다고 회의적인 견해를 보이는 이도 있다.”(<한국전쟁전투사-7. 백마고지 전투>, 국방부 전사편찬위, 1984년)
 이는 한국전쟁사에 길이 빛날 백마고지 전투를 평가한 대목이다.
 유엔군이 사실상 패배했다는 평을 받는 ‘저격능선’ 전투를 두고도 “저격능선이라는 적의 전초 하나를 탈취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인명손실을 입으면서까지 장기간 작전을 펼쳐야 했는지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는 평가(<한국전쟁전투사-14.저격능선전투>, 국방부전사편찬위, 1988)도 있다.
 엄청난 희생에도 나름대로의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했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려고 피아간 수천 수만명의 피를 뿌렸다면 과연 어떨까.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34 관련글 쓰기

 “포격전이 한창일 때 F-80 제트전투 폭격기 편대가 나타나 공산군 진지에 네이팜탄을 쏟아부었다. 활활 타오느는 화염, 그리고 푸른 하늘 높이 뭉클 솟아오르는 소형 원자운 같은 버섯형 흑연. 유엔군은 공산군 진지 아래 병사들이 전부 불타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자 전멸했어야 할 공산군 진지에서 박격포가 날아왔다.”
 1952년 불모고지 전투를 취재한 일본기자가 본국에 타전한 기사내용이다. 일본기자는 미군 장교의 말을 인용하면서 “산의 정상에서 20미터 쯤 내려온 공산군의 지하진지를 네이팜 탄이 완전히 불태울 수 없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대체 공산군 진지에 어떤 장치가 있었기에 이토록 철옹성이었을까. 아니면 이 지역에 만리장성이라도 구축했단 말인가.
 그랬다. 정말로 중국군은 이른바 ‘지하만리장성’을 구축해놓고 있었다. 그 역사를 살펴보자.    

오성산 상감령 전투에서 지하갱도, 즉 지하만리장성에 의존해 유엔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잇는 중국군.|눈빛출판사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전쟁
 전쟁이 교착전 양상으로 전개되던 1951년 8월쯤부터였다. 이때부터 중국은 방어진지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2차대전의 마지노선이나 독일의 서부방벽을 능가하는 견고한 진지였다.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려 고지의 후사면을 이용, 땅굴과 참호를 파고 전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지하요새를 구축한 것이다. 이는 쌍방이 협상을 통해 전쟁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면서 전선이 교착화 한 데 따른 것이다.
 중공 중앙은 이미 1951년 “현재의 전선을 고수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종식시켜야 한다.”고 지시했다.
 당시 중국, 즉 중화인민공화국은 신생국이었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치르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출범시켰으니까…. 중국으로선 경제발전과 한국전쟁을 동시에 치를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중국으로서는 전쟁을 확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으로선 1952년이 경제건설준비공작을 진행하는 마지막 해였다. 그 때문에 경제건설에 더욱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1951년 중국의 재정예산은 50년에 비해 60%나 증가됐으나 총예산의 32%를 한국전쟁에 투입해야 했다. 중공 중앙은 51년 10월 전국적인 증산 절약운동을 펼쳐 부대를 재편하고, 지출 절약운동을 펼쳤다. 이른바 ‘항미 원조 전쟁’을 지원하면서도 경제건설이라는 두 가지 모순된 정책을 실현해야 했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바로 확전 대신 지금의 전선을 유지하는 국지전의 전략이었다. 중공 중앙은 “조선 전장에서 지원군은 병력과 물자를 절약하여 지속적으로 적극방어작전의 방침을 적용해서 현재의 전선을 견고하게 방어하고 적군을 대량으로 소모시켜 전쟁의 최후승리를 쟁취하여야 한다.”고 지시했다.
 특히나 4개월 동안 끌어온 휴전협상에서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이 “쌍방이 대치 중인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한다”고 합의함으로써 전선이 고착화한다.
 쌍방은 문산 서측 11킬로미터 떨어진 임진강 어귀에서 판문점 서방~삭녕 북방~철원 서북방~김화 북방~금성 남방~어운리~문등리~고성 동남방 6킬로미터 지점에 이르는 전장 237㎞의 전선에서 대치했다.
 유엔군은 우세한 화력과 포병 탱크 등을 내세워 1개진지에 수 만 발의 포탄을 쏟아 부었다. 장비가 낙후돼있는 상황에서 전선수호는 중국군의 최고덕목이 되었다.

 

 ■동굴작전의 전개
 1951년 6월 중순 중국군 제47군단 제140사단은 유엔군의 맹포격을 방어할 ‘고양이 귀’ 모양의 동굴을 대량으로 만든다.
 즉 교통호 내부에 각기 한 명 당 두개씩 0.8~1m 넓이 지상에서의 깊이 2~3미터의 동굴을 만든 것이다. 1개 중대 혹은 1대 대대의 진지는 유엔군 1000~2000발 포탄포격과 미군기 10대의 소형폭탄의 폭격을 견딜 수 있게 되었다.
 동굴의 효용성이 알려지자 중국군 사령부는 “거점은 반드시 갱도식으로 확보라고 적의 유탄포와 포탄의 공격을 견디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동굴 전법은 연천 마량산과 216.8고지에서 빛났다. 51년 10월 4일~7일 사이 영연방 사단은 매일 1만~2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지만 진지는 흔들림이 없었다. 영국군 21차례 공격을 모두 격퇴하고 모두 700여명의 적을 살상했으며….”
 고무된 중국군은 51년 10월 21일 “주요진지는 반드시 갱도식으로 하되 깊이는 5미터 이상으로 하라”고 지시한다. 이로써 서부전선 예성강 하구에서 북한강 동쪽의 양구 문등리까지 전 전선에 걸쳐 8개 중국군 군단과 북한군 3개 군단을 투입, 이른바 갱도식 방어진지 구축작전을 펼친다.
 “석탄이 없으면 나무를 땠고, 흙을 운반할 도구가 없으면 손수레를 만들었다. 비밀유지를 위해 낮에는 흙을 동굴입구 운반했고, 야간에 산기슭으로 옮겨 동이 틀 때까지 위장하면서 공사를 계속했다. 쇠로 된 통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타는 숯을 넣은 탄등(炭燈)까지 만들었다.”
 공산군은 1952년 말까지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250㎞ 길이의 모든 전선에 종으로 20~30킬로미터의 두꺼운 방어선을 갖추고 땅굴을 거점으로 한 거점식 진지방어체계, 즉 지하갱도가 구축됐다.

 

 

저격당하기 십상이라고 해서 이름붙은 저격능선. 유엔군은 저격능선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땅굴의 원조
 그들의 표현대로 ‘난공불락의 지하만리장성’이 건설된 것이다.
 250㎞의 전선에 중국군이 판 갱도는 7789통로, 길이 198.7㎞, 엄체호 75만2900개, 노천 및 엄폐식 참호길이 3420㎞, 북한군이 판 갱도는 1,730통로, 길이 88.3㎞, 각종 엄체호 3만1700개, 참호길이 263㎞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군과 북한군이 구축한 지하만리장성의 제원을 계산하면 총 갱도수 9519개, 갱도길이 287㎞, 엄체호 78만4600개, 엄체호 총 길이 3683㎞, 그리고 각종 시설물 10만1500개. 지하장성의 총연장만 해도 4000㎞에 육박하는 철옹성인 것이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가 구축한 마지노선이나 독일의 서부방벽을 능가할 만큼의 진지를 지상이 아닌 지하에 건설한 셈이 된다. 공산군의 방어진지는 공중 및 야포공격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매우 견고하게 설계되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어떤 사단도 3개월의 식량을 보관할 지하창고가 있었으며, 강당도 있어 생활은 대단히 좋았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공산군이 구축한 지하요새는 고지 정상으로부터 깊이가 2m나 되는 여러 갈래의 교통호가 반사면을 따라 보급소나 취사장으로 보이는 동굴로 통하고 있었다.
 공중에서 보면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전 전선에 걸쳐 폭 20~30㎞의 커다란 개미집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오성산 인근의 각종 고지들. 42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유엔군은 저격능선 일부지역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마오쩌둥은 1952년 8월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해결되었다. 해답은 굴을 파는 것이다, 2층으로 굴을 파면 상대가 공격해올 경우 우린 1층으로 지하도로 들어간다. 상대가 위층을 점령해도 아래층은 우리에게 속해있다”고 자랑했다.
 예컨대 국군 5사단이 가칠봉을 점령했을 때는 공산군이 진지 내에서 1개 소대가 동시에 집결하여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식당까지 마련돼 있었다.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이 갱도공사가 마무리됨으로써 거점방어체계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중국군이 수행한 이 지하만리장성의 개념은 전쟁 후 북한군에게 고스란히 전수됐고, 이후 북한군 전투교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북한군 역시 이 갱도작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남한을 공포로 몰아넣은 땅굴 작전 역시 이 갱도작전의 하나라는 것이다.

지하갱도에서 손풍금을 연주하는 중국군들. 지하갱도엔 1개 소대 이상이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까지 조성됐다고 한다.   

■상감령 전투의 승패
 중국은 이 지하만리장성이 가장 위력을 발휘한 전투가 바로 ‘상감령 전역(戰役ㆍ삼각고지+저격능선 전투)’였다.
 유엔군은 중국군의 갱도작전 와해를 위해 갱도 위쪽에 구멍을 파고 폭약을 이용, 폭파를 시도했다. 갱도입구에 폭탄, 폭약통, 수류탄, 유황탄, 가스탄을 투척하거나 화염발사기를 사용했다. 갱도 내부의 공기가 극도로 오염됐으며, 초연, 독가스, 피비린내, 대소변 냄새, 땀 냄새 등이 가득해 호흡이 극도로 곤란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군의 갱도작전은 지독했다.
 중국군 전사는 “갱도를 핵심으로 견고한 방어 전략을 펼쳐 1만1000여명의 희생으로 유엔군 2만5000여명을 살상시켰고, 항공기 274대를 격추시켰다”고 자화자찬했다. 마오쩌둥은 정전 직후인 1953년 9월 “아군의 사상자 수는 지하호를 파고 나서 줄었다. 금년 여름에는 이미 21킬로미터에 걸친 적의 정면 진지를 1시간 안에 쳐부술 수 있었고, 수 십 만 발의 포탄을 발사할 수 있어 18m나 들어갈 수 있었다”고 자랑했다.
 이른바 ‘상감령 전역’의 전황은 종군기자들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중국 대륙에 전해졌다. 중국인들은 ‘지원군의 승전소식’에 열광했다.
 중국 위문단은 상감령 전역의 갱도를 찾아 대륙에서 보낸 대량의 위문품과 위문편지를 중국군에게 전달했다.
 또한 중국대륙엔 1950년대엔 바로 이 ‘상감령 정신’이 대륙을 풍미했다고 한다. ‘상감령 정신’이란 곧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국과 인민의 승리를 위해 봉헌하는 불요불굴의 의지, 그리고 일치단결로 용감하고 완강하게 전투에 임해 끝까지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정신을 뜻했다. 

중국 파병군을 위문하는 중국 연예인들. 1950년대엔 이른바 '상감령 정신'이 중국대륙을 풍미햇으며, 상감령 전투를 그린 노래 '나의 조국'이 제2의 국가 대우를 받고 있다. 

 ■‘나의 조국’이 풍미한 중국대륙

 1956년에는 영화 ‘상감령’이 중국 내에서 개봉됐으며,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노래 ‘나의 조국(我的祖國)’은 중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리허설 때 가장 먼저 울려 퍼진 곡이 바로 상감령의 주제가인 ‘나의 조국’이었다고 한다.
 2011년 1월 19일 백악관에서 미국을 방문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 주석을 위한 국빈 만찬이 열렸다. 이 때 중국의 천재 피아니스트 랑랑(郞朗·28)의 손끝에서 웅장한 서사시가 연주됐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하지만 이 곡의 정체를 알았다면 만찬장 분위기는 싸늘했을 것이다. 1956년 중국에서 개봉된 영화 <상감령(上甘嶺)>의 주제가인 ‘나의 조국(我的祖國)’이었으니 말이다.
 ‘승냥이와 이리가 침략해오면(若是那豺狼來了),엽총으로 맞이할 것이네(迎接的有獵槍).’
 영화 <상감령>은 바로 한국전쟁 당시 오성산 일대에서 벌어진 상감령 전투에서 중국군의 승리를 그린 영화이다. 가사에 나오는 ‘승냥이와 이리(豺狼)’는 곧 미군을 지칭하는 것이다. 미국은 과연 랑랑의 연주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았을까.
 중요한 것은 지금도 비무장지대 일대에는 중국군 등이 구축한 지하만리장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상감령 전투가 벌어졌던 오상산 일대에는 6만명의 병력이 숨을 수 있는 지하만리장성이 있다고 한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33 관련글 쓰기

 ‘저 우뚝 솟은 굴뚝은 뭐야. 벽난로라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고….’
 1993년 어느 날 경기 연천 미산면 동이리를 답사 중이던 향토사학자 이우형씨의 눈에 희한한 구조물이 밟혔다.
 40년 이상은 족히 자랐을 활엽수 사이에 건물의 지붕과 벽체의 대부분이 무너져버린 건축물…. 그 사이 온전한 굴뚝이 마치 벽난로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토박이인 김태완옹(작고)이 굴뚝의 아픈 사연을 증언해주었다.
 “유엔군 화장터야. 6·25 때 대단했지, 고지전투에서 죽은 유엔군이 매일 화장장에 밀려 들어왔어요. 지금도 생생하네. 화장에 앞서 간단한 장례의례를 펼치던 모습이….”
 그랬다. 저 굴뚝을 통해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산화한 유엔군 장병들의 혼(魂)과 백(魄)을 살라버린 것이다.    

1940~50년대 육체파 여배우였던 제인 러셀. 오성산 인근의 고지가 제인러셀의 가슴을 닮았다해서 '제인러셀' 고지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피의 의미

 한국전쟁은 국제전쟁이었다. 전쟁 당사자인 남북한과 중국, 소련, 그리고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16개국 등 20개국이 직접 참전했다.
 차마 제3차 세계대전을 치를 수 없었던 동서 양진영이 한반도에서 ‘제3차대전의 대체전’을 치른 것이다. 전쟁의 양상은 특이했다. 1년 여의 혈전 끝에 교착상태에 빠졌다.(1951년 6월) 전선은 지금의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균형을 이루게 된다. 공산측으로서는 1951년 두 차례에 걸친 대공세를 벌였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소련이 약속한 60개 사단분의 전투장비와 보급품도 도착하지 않았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국내와의 반전여론과 동맹국들의 휴전압력, 그리고 중국군의 강력한 재래식 군사력에 의한 전쟁수행능력 등을 절감했다. 특히 한반도에 힘을 집중, 전선이 확대될 경우 미국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유럽이 소련의 수중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의 확전은 피아간 불가능해졌다.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양측은 휴전을 모색하게 된다. 하지만 양측의 지루한 줄다리기는 2년 이상 이어졌다. 그동안 전쟁은 고지쟁탈전의 양상으로 전개됐다.
 1127일 간의 전쟁기간 중 764일, 즉 3분의 2 이상의 기간을 종심 20㎞ 내외 전선의 고지에서 치르는 희한한 전쟁을 벌인 것이다.
 물론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남북한이었다, 우리 측 전사에 따르면 한국군 31만명, 북한군 60~80만명의 인명피해를 냈다니까….
 그러나 남의 나라 전쟁에 뛰어든 18개국 젊은이가 뿌린 피는 상기해보자. 이역만리 머나먼 한반도에서 숨졌거나 부상을 당한 젊은이는 유엔군 16만명, 중국군  97만명에 이른단다. 이들이 뿌린 피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경기 연천 미산면 동이리에 있는 유엔군 화장터.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역만리 전장에 와서 값진 피를 흘렸다. |김창길 기자

 ■포로가 없었던 파병군
 아프리카에서 온 에티오피아군 1200명은 누구였을까.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보위하는 근위대에서 뽑힌 충성스런 병사들이었다.
 아디스아바바 인근 한국지형과 닮은 곳에서 훈련까지 마친 부대는 가그뉴(Kagnew·강적을 궤멸시킨다는 뜻)라는 부대이름으로 파병됐다. 특이한 점은 참전기간 중 121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를 기록했지만 단 한 명의 포로도 없었다는 것이다. 충성스런 황제의 군대에서 포로란 있을 수 없었기에 포로수가 0이었다는 것이다.
 필리핀 군은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의 참전으로 유명하다.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라모스 소대장(중위)이 에리고지(연천 역곡천 인근의 작은 고지) 제3벙커 4m까지 다가섰다. 그러나 갑자기 중국군이 소총을 마구 쏘며 뛰쳐나왔다. 놀란 라모스 중위가 카빈총을 난사했고 중국군 3명이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한국전쟁사> 제11권 ‘유엔군 참전’)
 라모스 뿐 아니라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남편인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도 종군기자로 참전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필리핀군의 참전 때는 무려 6만명의 필리핀 국민들이 파병군을 배웅했다고 한다.
 여단급(5000명)을 파병한 터키군의 경우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실탄훈련도 하지 못한채 파병됐고, 언어소통 문제로 한국군과 북한군을 제대로 구별할 수도 없었다. 또한 음식도 맞지 않았다. 1950년 11월 군우리 전투에서 여단의 전력이 사실상 와해되는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1951년 1월 금량장 전투에서 포로되기를 거부, 착검한 채로 돌격하는 용맹성을 발휘했다고 한다. 

유엔군 화장터임을 알려주는 굴뚝이 남아 있다. 유엔군 젊은이들이 한 줌의 재로 스러진 곳이다.|김창길 기자   

■‘희생없인 승리도 없습니다.’
 태국군은 ‘리틀 타이거’라는 별명을 얻으며 연천 역곡천 인근의 ‘포크찹 고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사는 “태국군이 1952년 11월부터 세 번에 걸친 중국군의 공격을 물리쳤다”고 쓰고 있다. 대대급을 파견한 프랑스는 몽클라르 대대장(중령)의 일화가 유명하다. 몽클라르는 2차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군 장군으로 종군한 뒤 종전하자 중장으로 예편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프랑스 정부가 대대급으로 파견부대를 보내자 계급을 낮춰 중령으로 복귀, 대대장이 되었다.
 벨기에의 경우 전 상원의원이자 당시 국방장관이던 모레안 드 멜론이 소령으로 출전, 연락장교를 맡기도 했다.
 남북한을 제외하고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은 쪽은 미국과 중국이었다. 연인원 180만 명을 파병한 미국은 14만 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2차 대전의 영웅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의 아들(존 육군 소령)을 비롯해 미군 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했다. 이 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 당했다.
 이중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의 아들(지미 공군 중위)이 폭격기를 조종하며 출격했다가 실종됐다, 참모들은 수색작전을 펼쳐 사령관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아버지 밴플리트는 이렇게 말했단다. “다른 작전이 내 아들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중국의 젊은이들은 또 어떤가. 중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순망치한(脣亡齒寒) 호파당위(戶破堂危)’, 즉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고 현관문이 깨지면 안채가 위험하다‘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참전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마오안잉·毛岸英)도 자원 참전했다가 유엔군의 소이탄 공격에 전사했다. 아들의 사망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슬픔을 감춘채 말했다고 한다,  
 “전쟁에서 희생없이는 승리도 없습니다. 중국 인민의 의리를 말해주는 표본이니 그냥 한반도에 묻어둡시다.” 

 

양구 북방의 피의 능선. 피바다를 이뤘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

■“제인러셀 고지 아시나요”
 지루한 고지전 속에서 전투의 성격이나 특징을 때로는 처절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고지의 이름이 쏟아졌다.
 티본스테이크 처럼 생겼다고 ‘티본고지(T-boneㆍ연천)’, 살이 붙은 돼지 갈비뼈를 닮았다는 ‘포크찹 고지(Porkchopㆍ연천)’, 당대 미국의 유명한 육체파 배우인 제인 러셀의 가슴을 연상시킨다는 ‘제인러셀 고지(Jane Russellㆍ김화 오성산 기슭)’….
 ‘백마고지(White Horse hill)’란 이름을 보자. 십자포화로 벗겨진 고지의 형태가 마치 백마처럼 보였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밖에 집중포화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는 ‘아이스크림 고지(철원)’, 대머리처럼 벗겨졌다는 ‘불모고지(Old Baldyㆍ연천)’, 저격 당하기 십상인 지형이라는 ‘저격능선(Sniper Ridgeㆍ김화)’, 그리고 처절한 전투로 피바다가 됐다는 ‘피의 능선(Bloody Ridge Lineㆍ양구 북방)’,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스런 전투가 이어졌다는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양구 북방)’ 등은 전쟁의 참화를 웅변해주는 명칭들이다.

 

 ■허무한 고지전투
 그러나 처절한 고지 전투의 끝은 허무 그 자체였다. 예컨대 ‘피의 능선’ 전투를 두고 미국의 역사학자 T R 페렌바크는 평가했다.
 “이 보잘 것 없는 둥근 언덕 3개(피의 능선)을 차지하려 4000명이 넘는 아군 병사가 묵숨을 바쳤다.”
 42일간 피아간 2만~3만7000명의 인명피해를 낸 ‘저격능선’ 전투를 평가한 우리 측 전사는 어떤가.
 “저격능선이라는 적의 전초 하나를 뺏으려 그렇게 많은 인명손실을 입어야 했던가.”(<한국전쟁전투사-14.저격능선전투>)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헛된 피를 뿌린 것일까. 혹 그들의 희생 덕분에 세계는 제3차대전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연천의 한 귀퉁이, 유엔군 화장터에 다시 선다. 누군가 굴뚝 위로 녹슨 철모를 살며시 얹어 놓았다. 누구의 넋이 찾아와 그렇게 앉은 것인가.    
 쏜살같이 다가오는 땅거미 사이로 한줄기 바람이 훠이훠이 진혼곡을 불러댄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32 관련글 쓰기

 1950년 12월 30일 오전 11시.
 기관사 한준기씨가 수색 차량기지를 출발했다. 개성역까지 가서 군수물자가 실린 화차를 달고 오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그러나 개성역에 도착하자 다른 명령이 떨어졌다. 북한 기관차를 인계받고는 다시 평양까지 올라가라는 지시였다.
 하지만 31일 오전 1시. 열차가 황해도 평산 한포역에 도착하자 다시 급박한 소식이 들렸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후퇴가 불가피해지자 “다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한준기 기관사는 후진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후진으로 개성역에서 간 한씨는 다시 화차 25량을 끌고 파주 장단역에 닿았다. 31일 밤 10시쯤이었다.
 “기차를 멈추고, 기관차 승무원은 기차에서 내려 대기하라.” 

남과 북이 시차를 두고 건설한 승일교. 북의 김일성이 시작하고 남의 이승만이 완공했다 해서 승일교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임진각 주변의 근대유산
 미군의 지시였다. 한씨가 내리자 미군 20여 명이 기차에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당시엔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나중에 보니까 기차가 인민군 손에 들어갈 것을 우려해서 내린 조치였다.
 기관총과 소총세례를 받은 열차는 그대로 멈춰 섰다. 한준기씨가 회고했다.
 “총 세례를 받았을 때는 그래도 열차가 레일 위에 있었는데, 나중에 가보니 궤도를 이탈해 있었습니다. 북한이 열차를 끌어가지 못하도록 폭파시킨 것이겠지. 그리고 당시에는 기관차와 탄수차(석탄과 물을 실은 화차), 그리고 화물차 20량이 있었는데 궤도를 이탈한 기관차 말고는 북한이 모두 끌어간 것 같아요.”
 총탄세례에다 폭파까지 당해 탈선한 기관차는 파주 장단면 동장리 현장에 그대로 멈춰 섰다. 이 기관차를 모델로 한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구호는 전쟁ㆍ분단의 아픔은 물론 교류와 통일의 염원까지를 담아낸 걸작으로 평가된다.
 이 기관차는 선로사정이 좋지 않은 산악지대에서도 운행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거리 화물용 증기기관차였다. 해방 전 북한지방에서 주로 운행됐다.
 기관차(등록문화재 78호)는 2004년 2월 6일, 파주 구 장단면사무소(제76호)ㆍ장단역 터(제77호ㆍ이상 장단면 동장리)ㆍ죽음의 다리(제79호ㆍ장단면 도라산리) 등과 함께 등록문화재가 됐다. 녹이 심하게 슨 증기기관차는 2006년 11월부터 보존처리가 이뤄져 2009년 6월25일부터 말끔히 복원된 모습으로 임진각 주변, 독개다리 초입 부근에 이전 전시되고 있다.
 등록문화재 79호로 등록된 ‘죽음의 다리’(장단면 도라산리)는 현재 ‘희망의 다리’, ‘생명의 다리’라는 아주 상반된 이름으로도 일컬어진다. 다리 주변에서 미군들이 북한군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해서 ‘죽음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경의선 복구 관계자들이 ‘죽음’대신 ‘생명’ 혹은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출렁교. 보초 서는 군인들이 남대천을 건너기 위해 만든 다리. 지금은 종잇조각처럼 아슬아슬 걸려있다.

■끊겨진 금강산 철도
 ‘철의 삼각지대’로 발길을 돌려본다.
 철원 근북면 유곡리와 김화읍 도창리에 걸쳐 있는 ‘금강산 전기철도교량’(등록문화재 제112호)이 눈에 밟힌다.
 민통선을 지나 민북 마을인 정연리를 거쳐 가는 길. 드넓은 철원평야 사이로 쭉 뻗은 이 464번 도로엔 이 따끔 등장하는 군부대 차량 이외엔 오가는 차량을 볼 수 없다. 세상의 온갖 시름을 훌훌 던져버리고, 뻥 뚫린 도로를 달리다 보면 뼛속까지 상쾌해진다.
 이 철도는 원래 일제가 강원도 창도에서 생산되는 유화철(硫化鐵)을 함경도 흥남 제련소를 경유,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부설했다.(1926년) 금강산 관광객들도 이용했는데, 철원역~내금강까지 116.6킬로미터를 하루 8회 운행했으며 4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요금은 당시 쌀 한가마니 값인 7원56원이었고, 1936년 한해에 15만4천명이 이용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북한이 남침 준비를 위한 군수물자 수송에 활용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거의 폐허화 했고, 일부는 현재 농로로 이용되고 있다.
 필자가 처음 이 교량을 찾은 것은 2007년 여름이었다. 당시 교량은 녹이 심하게 슨 철제 난간에, 바닥엔 철로가 사라지고 없고, 빛바랜 침목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갈 수 없는 다리 입구는 철조망이 막고 있었다.
 철조망을 바로 앞에 두고 길게 뻗어간 다리를 바라보면 과연 일제의 수탈과, 전쟁, 그리고 분단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절절이 가슴 속으로 파고 든다. 여기에 다리 밑에 내려가면 언제 보아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한탄강 수직단애가 고색창연한 교각 사이로 펼쳐져 있었으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린 지 1년 후인 2008년. 그 때의 그 기분을 상상하며 다시 찾아왔지만…. 눈을 의심했다.
 처음 보았던 철조망과 빛바랜 침목열은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다리는 새빨간 철제 난간에, 바닥은 정교하게 다듬은 새 나무를 깔아놓았다. 갈 수 없는 다리가 갈 수 있는 새로운 다리로 탈바꿈 한 것이다. 옛 것을 복원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옛 것에 담겨 있는 역사적 상징성이라는 무형의 가치까지 없애가며 하는 복원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정월대보름 답교놀이로 유명했던 김화 암정교. 저격능선 전투 땐 생과 사를 넘나든 피란민들로 가득찼다고 한다.

■암정교 답교놀이
 찜찜한 기분으로 발길을 돌려 한탄강 지류인 남대천 줄기에 놓여있는 ‘암정교’를 찾아본다.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백골부대의 관할 민통선 이북에 놓인 암정교는 1930년대 건립됐다. 평강과 김화를 연결해준 다리다. 
 폭 4미터 높이 7미터의 다리인데 한국전쟁 때 포탄세례를 맞아서인지 다리 곳곳에 녹슨 철골이 드러난 앙상한 모습이다.  
 일제시대 때만 해도 정월대보름 답교놀이가 행해지기도 했단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가장 치열했던 저격능선 전투가 벌어졌을 때 생과 사를 넘나드는 처절한 다리가 됐다. 피아간 후퇴와 진격을 거듭하는 다리였던 것이다.
 피란민들이 남부여대하면서 건너던 다리이기도 하다. 암정교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만국기가 강풍에 흩날리듯 아슬아슬 걸려있는 다리가 보인다. ‘출렁다리’라고 일컫는 이 다리는 보초를 서기 위해 남대천을 건너는 군인들을 위해 만든 다리였다.
 이제는 효용가치를 잃고 이리저리 찢긴 채 종이조각처럼 위태롭게 걸려있는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다.
 철원읍 월정리에는 월정리역이 으로 가본다. 경원선(서울~원산)이 쉬어가던 월정리역은 남방한계선 철책 바로 앞에 있는 최북단 종착역이다.
 역내에는 한국전쟁 당시 마지막 여객열차의 잔해와 유엔군 폭격으로 부숴 진 북한군 화물열차가 앙상한 골격을 드러낸 채 전시되고 있다.     

 

 ■급수탑에 담긴 슬픈 사연
 이밖에도 ‘철의 삼각지대’엔 숱한 한국전쟁과 분단의 유산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유명한 ‘노동당사’(제22호ㆍ철원읍 관전리)는 이른바 안보유적지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1946년 북한은 주민들로부터 1개 리(里)에 백미 200가마씩을 성금명목으로 거둬들여 연건평 570여 평(지상 3층)의 공산당사를 지었다. 북한은 내부공사 때는 보안을 위해 열성당원 이외에는 일반인들의 작업을 철저히 금지했다고 한다. 북한은 이 당사에서 중앙당으로부터 내려오는 극비사업과 철원ㆍ김화ㆍ평강ㆍ포천ㆍ연천지역 주민들의 동향을 파악했고, 대남공작을 주도했다고 한다.
 철원읍 율이리에 있는 ‘수도국지내 급수탑’(제160호)은 가슴 아픈 사연을 담고 있다.
 이 급수탑은 철원읍 주민들의 식수 공급을 위해 1936년 건립됐다. 한국전쟁이 벌어졌을 때 북한은 노동당사와 내무서 등에 감금된 반공인사들을 분류하여 이곳에 이송했다. 그런데 1950년 10월 유엔군이 북진하자 다급해진 북한은 이곳에 감금돼있던 300여 명을 총살하거나 물탱크 속에 생매장 하고 후퇴했단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의 주인공인 장단역 증기기관차. 최근 말끔히 복원돼 임진각 독개다리 옆에 전시되었다

 

■이승만과 김일성의 만남
 동송읍 장흥리~갈말읍 문혜리를 잇는 ‘승일교’(제26호)의 사연도 복잡하고도 재미있다.
 훗날 한국판 ‘콰이강의 다리’라는 별명이 붙은 이 다리의 공사는 1948년 8월부터 철원 및 김화 지역 주민들이 5일 교대제의 노력공작대라는 명목아래 총동원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공사는 다리의 북쪽 부분만 완성한 것으로 중단됐다. 전쟁 후 적치하였던 철원지역을 확보한 한국정부가 공사를 재개해 1958년 완성했다. 다리는 커다란 두 개의 아치 위의 상판을 받치는 작은 아치의 모습이 다른데 이것은 바로 남북이 시차를 두고 각기 다른 공법으로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남북합작의 구조물’인 것이다. 문제는 ‘승일교’라는 명칭과 관련된 논란이다. 김일성(金日成) 시절에 착공해서 이승만(李承晩) 시절에 완성했다고 해서 이승만의 ‘승(承)’자와 김일성의 ‘일(日)’자를 따서 지었다는 설과, 한국전쟁 때 한탄강을 건너 북진하던 중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박승일(朴昇日) 대령의 이름을 땄다는 설 등이 팽팽하게 맞섰다.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이 휴전회담 조인 이후 철조망을 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다리 곁에 조성된 공식 안내표지에는 전자의 설을 따르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전쟁 때 기독교반공청년들의 활동장소였다는 ‘감리교회’(제23호ㆍ철원읍 관전리),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뼈대만 남은 ‘얼음창고’(제24호ㆍ철원읍 외촌리), 공산치하의 검찰청이었던 농산물검사소(제25호ㆍ철원읍 외촌리), 전쟁으로 사라진 도시(철원)의 모습을 증언해주는 ‘구 철원 제2금융조합건물지’(제137호ㆍ외촌리) 등도 문화재의 반열에 오른 철원의 전쟁유산들이다.
 화천 상서면 다목리에는 ‘인민군 사령부 막사’(제27호)가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현재 우리 군 부대 안에 있는 모습이 이채로운데, 당시 북한군의 내무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국제적인 전쟁유산으로 각광받을 수 있는 근대문화유산은 파주 적성 마지리에 있는 ‘영국군 설마리 전투비’(제408호)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 전투비는 1951년 적성 칠중성(캐슬고지)과 이곳 설마리에서 중국군 3개 사단과 싸웠던 영국군을 기리는 참전기념비이다. 
 비록 영국군은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궤멸 당했지만, 만 3일을 이곳에서 버틴 덕분에 서울의 재함락을 막았다. 특히 이 전투비는 훗날 세계적인 건축가가 된 아널드 슈워츠만이 설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남북분단으로 끊겨진 금강산철도. 지금은 말끔하게 정비됐다.

■분단-전쟁-냉전의 흔적들
 전쟁유산에 대한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앞서 언급한 전쟁과 분단의 흔적들이 문화재의 반열에 올랐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비무장지대 일원에는 지구상 ‘최후의 화약고’라는 오명에 걸맞게 분단-전쟁-냉전을 상징하는 각종 흔적들이 집중돼있다.
 한국전쟁을 종식시킨 정전협정에 따라 한반도 중부는 임진강 변에서 동해안까지 248킬로미터에 걸쳐 이른바 군사분계선이 그어졌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군사분계선은 용어대로 선(線)이 아니다.
 임진강변에 세워진 군사분계선(MDL) 표지물 제0001호부터 동해안의 제1292호까지 모두 1292개의 표지물이 200미터 간격으로 세워진 점(點)의 개념이다. 표지판 가운데 696개는 유엔군의 관리책임이고, 596개는 북한과 중국의 관리책임이다.
 최전방에 가서 그 군사분계선을 관측하려 한다면 그것은 낭패다. 정전 이후 60년이 지금 군사분계선 표지물은 대부분 녹슬었거나 비바람 등으로 크게 훼손됐기 때문이다. 비록 이렇게 녹슬고, 훼손되었다지만 동서냉전의 상징이자, 민족의 분단을 규정한 군사분계선 1292개 자체가 ‘전쟁 및 분단 유물’인 것이다.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30 관련글 쓰기

 “우리들 일을 같이 한 사람들은 임금을 섬기고, 친구를 신의로 사귀고, 부귀와 이익을 다투지 말며, 다른 자의 이간을 듣고 의심을 품지 말며, 과실은 바로잡고, 환란이 있으면 서로 구원해 줄 것입니다.”
 왕씨의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1392년 7월 17일)한 지 두 달이 지난 뒤인 9월 28일, 정도전과 배극렴 등 개국 공신들이 총출동했다.
 태조 이성계를 향한 충성서약식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개국 공신들은 “처음과 끝이 같도록 충성을 바치겠다”면서 “자손 대대로 이 맹약을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신(神)이 벌을 내릴 것”이라 재차 다짐했다.

 

조선시대 공신들의 충성서약을 받던 회맹터. 지금의 청와대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배신자는 대대로 복수할 것이다”
 그러나 “공신 간 절대 반목하지 않겠다”는 굳은 맹세는 금방 무효가 되고 말았다. 충성 서약식 때 마신 ‘회맹의 피’가 입에서 흐르지도 않았는데, 왕자들 간, 개국공신 간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이 1398년과 1400년 벌어진 제1, 2차 왕자의 난이다.
 이런 일련의 정변으로 형제 간, 개국공신 간 피아가 구별되지 않은 혈전이 벌어졌고, 최후의 승리자는 태종 이방원이었다
 이복동생과 친형(방간) 등 피를 나눈 형제들은 물론 정도전과 남은 등 개국공신을 제거하고 꿈에 그리던 옥좌에 오른 태종. 그러나 피로 일어섰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개국공신·정사공신·좌명공신 등 삼공신이 일찍이 충성서약을 하지 않았다. 임금은 삼공신이 화합하지 못할까 염려했다.”
 1404년(태종 4년) 11월 16일 태종의 이같은 우려를 불식시키려고 개국·정사·좌명공신 등 삼공신 66명이 회맹(會盟)했다. 이 자리에는 각 도의 감사와 변진(邊鎭)·주(州)·목(牧)의 지방관(分憂者)들도 열외 1명 없이 참석했다. 
 “권간(權奸)이 사심을 품고 맹세를 져버리고 유얼(幼孼)을 끼고 적통을 빼앗고…. 그 이후에는 다시 간사한 이가 집안끼리 싸우게 하여 거병해서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것을 모두 평정했고…. 맹세를 어기면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앞으로는 명세를 배신하는 자는 자손에게까지 그 죄가 미칠 것입니다.”(<태종실록>)
 삼공신은 개국공신(1392년 개국 때 공을 세운 이들)과 정사공신(定社功臣·1398년 1차 왕자의 난 공신), 좌명공신(佐命功臣·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공신)을 뜻한다. 이 날의 회맹문에서 언급한 이야기는 분명하다. ‘권간’은 제1차 왕자의 난 대 제거된 정도전 일파를 뜻한다. ‘유얼’은 서자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세자가 됐다가 역시 1차 왕자의 난 때 죽은 방석을 의미한다. 또한 ‘간사한 이 때문에 집안끼리 싸웠다’는 것은 박포의 이간질 때문에 형제간에 정권다툼(이방원과 이방간의 골육상쟁)을 벌였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태종은 늘 좌불안석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태종은 집권 17년이 지난 1417년(태종 17년) 4월 11일에도 공신회맹을 감행한다.
 “만약 이 맹세를 지키지 못할 때는 귀신이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배신하면 화가 자신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후손에게도 미칠 것이다. 절대 배신하지 마라.”
 중요한 것은 이 날의 회맹은 삼공신 뿐 아니라 공신의 자녀들까지 총동원됐다는 것이다. 
 태종 뿐이 아니었다.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1625년(인조 3년) 4월 17일에도 회맹제가 열렸다. 인조반정에 큰 공을 세운 공신과 그들의 적장자 391명이 참석했다. 그 맹서문을 담은 <십칠공신회맹록>과 <인조실록>을 보자.
 “임금이 신무문의 회맹제단에 행차했다. 우리 동맹인들은 지금 맹세하노니~, 배신하는 일도 없이 억만년토록 유지하고자 한다.”
 맹서문은 인조반정에 나선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혼탁한 시대를 만나 모후(母后)는 금고 당하고, 형제는 혹독한 형벌에 걸렸으니~ 다행히 우리 구신(舊臣)들과 덕을 함께 한 선비들의 힘을 얻어~”(<인조실록>)
 광해군 때문에 인목대비가 유폐되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이 죽임을 당한 것을 지칭한 것이다. 이로써 사직이 위태로워졌는데, 나라를 끔찍하게 여긴 신하들과 손잡고 반정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한양도성도>에 표시된 홰맹터.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밖 위쪽에 회맹단이 보인다.(점 선안) 공신들이 임금을 향해 충성을 서약한 곳이다

■피를 바르는 의식
 사실 ‘회맹(會盟)’의 의식은 중국 춘추시대(기원전 770~403)의 산물이었다.
 천자국인 주나라가 힘을 잃은 뒤부터 시작됐다. 강대한 제후국 군주는 이름 뿐인 주나라왕을 대신하여 천하를 주물렀다.
 ‘회(會)’는 일정한 의제와 장소, 시간을 정해 제후국 군주들이 모이는 것을 이른다. ‘맹(盟)’은 회맹에 참여한 제후들이 차례로 제물의 피를 입술에 바르는 의식을 말한다. 이를 ‘삽혈(삽血)’이라 한다.
 회맹을 주도한 제후가 가장 먼저 삽혈했다. 이 제후는 패자(覇者)로 추대됐다. 의제 합의가 이뤄졌을 때는 맹서문을 작성했다. 맹주(패자)는 제물인 소의 왼쪽 귀를 절단해서 그 피로 조약문을 작성했다. 조약문은 ‘배신하는 자는 공동토벌로 응징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맹서(盟誓)’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회맹은 강화조약과 군사동맹, 우호증진 합의 등을 다루는 일종의 외교행위였다. 회맹을 통해 상호우호조약을 맺고 전쟁을 방지하기도 했다. 반면 연합전선으로 불의를 행하는 제후들을 응징했다. 때로는 사직이 끊어진 나라를 회복시켜주기도 했다. <춘추좌전>은 “외국의 환난을 구제하고 재해를 분담하며 허물있는 자를 토벌하는 것”이라 했다.
 예컨대 ‘춘추 5패’ 가운데 첫번째 주자인 제나라 환공(기원전 685~643)은 연합군을 결성하여 북적(北狄·오랑캐)의 침략으로 위기에 빠진 형나라를 구했다.
 그런 뒤 형나라의 사당을 지어주고, 소와 말, 곡식을 원조했다. 이를 ‘존망계절(存亡繼節)’, 즉 패망한 제후국을 다시 세우는 것이라 했다. 제 환공을 패자로 이끈 명신 관중은 이렇게 패자의 임무를 설파했다.
 “안으로는 현인을 찾는다. 동시에 백성을 자애롭게 돌보고 밖으로는 망한 나라를 존속시키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한다. 죽은 왕의 자손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관자> ‘중광’)
 제 환공에 이어 ‘춘추5패’에 이름 석자를 기록한 이들은 ‘진(晋) 문공(기원전 636~628)-초 장왕(기원전 614~591)-오왕 부차(기원전 496~473)-월왕 구천(기원전 496∼465)’ 등이다.  

 

 ■취리산 맹약사건
 그런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삽혈’의 의식이 기록돼 있다.
 665년(신라 문무왕), 문무왕과 당나라 칙사 유인궤, 웅진도독 부여륭 등 3인이 웅진 취리산에서 맹약을 맺었다. 
 무슨 맹약이었던가. 부여 륭은 의자왕의 아들이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뒤 부여 륭을 웅진도독으로 내세웠다.
 그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백제 고토를 영원히 지배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신라는 만만치 않았다. 백제 유민들도 쉼없이 항거의 기치를 들었다. 그러자 당나라는 유인궤를 앞세워 ‘회맹의식’을 벌인 것이다. 유인궤는 다음과 같은 맹서문을 남긴다.
 “희생을 잡아 피를 마시고 영영토록 친목하여 재앙을 서로 나누고 서로 도와 은의(恩誼)를 형제처럼 해야 할 것이다. 맹세를 어겨 군사를 일으키면 귀신의 재앙을 받으리라. 제사가 끊겨 후손이 없도록 할 것이다.”
 희생의 피를 마신 3자는 희생과 예물을 제단의 북쪽 땅에 묻고 맹서문을 신라 종묘에 간직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문무왕조)     
 ‘회맹’은 외교현안을 풀기 위한 다자간 혹은 양국간 정상회담의 성격이 강했다.

 

 ■회맹이 혈맹일 수밖에 없는 이유
 하지만 조선시대의 ‘공신회맹’은 달랐다. 그야말로 공신들이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충성서약의 장’이었다.
 그리고 그 무대였던 회맹단이 바로 지금의 청와대 본관 자리에 있었다.
 1770년(영조 46년)에 제작된 지도(‘한양도성’)를 보자. 신무문의 북쪽, 연호궁의 동쪽에 회맹단이 표시돼있다.
 이곳에서 벌어진 ‘공신회맹’은 아주 엄숙한 분위기에서 치렀다. 왕과 왕세자가 직접 참석했다. 회맹에 참석하는 이들은 7일 전부터 재계했다. 제사와 삽혈을 위해 피를 제공할 희생물은 소, 양, 닭, 돼지 등이 애용됐다.
 왕과 공신들은 제단 앞에서 4번의 절을 올렸다. 천지신명의 신주 앞에 향불을 태웠다. 그런 뒤 삽혈동맹을 펼쳤다. 피를 입에 바르는 의식이었다.
 뒤를 이어 맹서문을 읽었다. 이들은 ‘혈맹’이 됐다. 의식에는 공신들은 물론 때에 따라서는 공신의 자식들까지 동원됐다. 이들은 대대손손 임금을 배신한다면 천지신명의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것을 맹서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바늘을 훔친 이는 주살되지만,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 제후의 문에 인의가 있다(竊鉤者誅 竊國者侯 侯之門仁義存).”(<사기> ‘유협전’)
 가까이는 5·6공 신군부세력을 처벌할 수 없었던, 즉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이 있지 않던가.
 성공하면 혁명이요, 실패하면 대역죄일 수밖에 없는 것. 생사를 넘나든 정변을 성공으로 이끈 이들이 모여 샴페인을 터뜨리고 주군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의식을 치른 곳…. 그곳이 바로 지금의 청와대 터였던 것이다. (끝)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29 관련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