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22회의 주제는 ‘광해군이 부러워한 고려외교’입니다.
 조선의 광해군은 조정의 공론을 한심스러워하면서 “제발 고려의 외교 좀 배우라”고 했답니다.
 세상 돌아가는 형세도 모르면서 말로만 ‘숭명배청’이니 ‘재조지은’이니 떠들면서 주야장천 다쓰러져가던 명나라만 섬기려하는 대신들을 ‘한심한 인사들’이라 했다는 겁니다.
 그런게 광해군은 왜 ‘고려의 외교를 배우라’고 했던 걸까요. 고려는 비록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피곤한 줄다리기 외교를 펼쳤답니다. 하지만 거란은 물론 세계를 제패했던 몽골(원)의 애간장을 녹일만큼 능수능란한 곡예외교를 펼쳤습니다. 오죽했으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거란이 서희의 ‘세치혀’에 말려 280리나 되는 땅(강동 6주)을 떼주었겠습니까. 서희로 대표되는 고려의 외교관들은 강대국 황제들을 쥐략펴락하면서 어지간히 괴롭혔답니다.
 심지어 세계제국 원나라는 고려의 애간장 외교를 견디다 못해 재침공의 계획까지 세웠지만 끝내 포기했다네요.
 “지금 고려가 원나라를 섬기고 있지만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만약 저들이 험준한 산에 기댄다면 100만 대군을 동원해도 함락시킬 수 없다”는 불가론 때문이라네요.
 과연 고려의 외교가 어땠기에 송나라, 거란은 물론 원나라까지 벌벌 떨었을까요. 고려의 균형 외교가 주는 교훈, 그리고 그것을 부러워한 광해군의 장탄식…. 미국과 중국은 물론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눈터지는 균형외교를 펼쳐야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되돌아봐야 할 주제입니다.

 다음 관련기사를 보면서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에서 들어보십시오.

 

  “요즘 우리나라 인심을 살펴보면 밖으로 큰소리만 일삼고 있다. 우린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1621년, 광해군이 하늘이 꺼질 듯 장탄식한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급박했다. 명나라는 요동 전투에서 신흥강국 후금에 의해 줄줄이 패해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공론은 여전히 다쓰러져 가는 명나라 편이었다. 후금을 오랑캐의 나라로 폄훼하면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절묘한 등거리 외교로 균형을 잡아온 광해군으로서는 이같은 공론이 한심했다.
 “명나라 장수들이 차례로 적(후금)에게 항복하고 있다. 심지어 요동사람들이 명나라 장수를 포박해서 후금군에 넘겼다고 한다. 중국의 형세가 이처럼 급급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인심은 큰소리만 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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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서 광해군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제발 고려(의 외교)를 배우라”고….
 “이럴 때(명청교체기), 고려처럼 안으로 스스로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쓴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한심하다. 무장들 모두 겉으로는 결전을 벌이자고 하면서 막상 서쪽 변경에 가라면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 두려워 한다. 이 또한 고려와 견주면 너무도 미치지 못한다.”(<광해군일기>)
 광해군은 ‘고려처럼’만 하면 강대국끼리 충돌하는 격동기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광해군은 ‘고려의 외교’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 외교의 전통을 쌓은 서희의 묘. 서희는 세치혀로 거란80만대군을 물리쳤고, 강동 6주까지 덤으로 얻는 외교사상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다

 ■멘붕에 빠진 고려조정
 그랬다. 고려의 외교술은 대단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외교관’이라는 서희의 후예들이 아닌가.
 고려의 외교에 주춧돌을 놓은 서희의 외교술을 되돌아보자. 993년(고려 성종 12년) 10월,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의 대군이 고려를 침공한다.
 고려군도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 문하시랑 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방어군을 편성했다. 거란의 선봉은 파죽지세로 고려 서북방 봉산군(황해도 북서)을 점령했다. 서희가 봉산군을 구원하려 나설 즈음, 거란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한 이유를 퍼뜨리고, 몇 차례에 걸쳐 고려에 문서를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거란이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다. 그런데 고려가 거란 강토의 경계를 침탈하기 때문에 정벌하는 것이다. 80만 대군이 짓밟을테니 속히 항복할지어다.”
 그러자 고려 조정은 ‘멘붕’에 빠졌다. “빨리 군신을 이끌고 항복하자”고 아우성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서경 이북(평양)을 거란에 떼주고 황해도 황주~절령까지를 국경으로 삼자”는 자들도 있었다. 다급해진 성종(고려)은 땅을 떼어주자는 이른바 ‘할지론(割地論)’을 채택하려 했다.
 “서경 땅을 떼어주려던 임금은 서경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었다. 그럼에도 곡식이 많이 남자 적군의 수중에 들어갈까 두려워한 나머지 대동강에 던져 버리도록 명했다.”(<고려사절요>)

 

 ■“거란의 엄포는 공갈”
 이 때 서희가 손사래를 치고 “절대 아니되옵니다”라고 소리치며 급히 나섰다.
 “먹을 것은 백성의 생명인데, 어찌 쌀을 버리십니까. 차라리 적에게 이용되는 편이 낫지, 강물에 던지는 것은 하늘의 뜻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 서희는 냉정한 시각으로 상황을 판단·정리해서 성종에게 간했다. 서희는 처음부터 거란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바 있다.
 거란군이 진군하지 않고 자꾸 항복만 강요하며 변죽만 올리는 것이 수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거란의 항복 권유문서와 그 간의 행동을 보니 협상할 수 있을 것도 같다”고 누누이 간언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성종이 끝내 ‘할지’를 결정하자 목숨을 건 간쟁에 나선 것이다.   
 “(발해가 망한 뒤) 북쪽의 땅 수백리는 생여진(生女眞)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광종 임금(재위 949~975)이 되찾아 가주와 송성(이상 평안도)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침공한 이유는 바로 이 두 성만 빼앗는데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서희는 “거란이 고구려 옛 땅 운운하며 큰 소리치는 것은 공갈에 불과하다(其聲言取高句麗舊地者 實恐我也)”고 단언했다.
 즉 거란이 가주와 송성 등 두 개 성만 원하는데 서경 이북까지 내주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게 서희의 주장이었다. 서희는 또 “삼각산 이북은 고구려의 옛 땅이니 절대 내줄 수 없다”면서 “한번 땅을 떼어주면 그들의 끊임없는 요구에 시달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땅을 떼어주면 영원토록 수치가 될 것입니다. 원컨대 임금께서는 도성에서 기다리면서 신들이 한 번 싸움을 한 연후에 의논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요컨대 서희는 섣부른 ‘할지’를 채택하는 대신,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면서 협상에 임할 것을 주청한 것이다.  

 

 ■“장기전과 협상을 겸비하자”
 서희가 나름 자신감을 보인 까닭이 있었다. 바로 만만치 않는 고려의 국방력이었다.
 고려는 태조 왕건 이래 서경(평양)을 북방기지로 삼아 주변에 여러 성책을 쌓아 방비를 단단히 해놓은 바 있다. 이후 정종-광종-경종 시대에 걸쳐 꾸준히 영토를 넓히는 등 북방정책을 이어갔다. 특히 정종 시대에는 거란에 붙들려 있던 최광윤의 보고에 따라 거란의 침략의도를 간파하고 군사 30만을 편성하기도 했다.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군비를 정비해서 좌우군을 설치하고 평북의 서북계와 함남의 동북계에 각각 병마사를 보내 방비를 튼튼히 했다. 전쟁 3년 전인 990년에는 평양부와 안성 등 11역에 쌀 9375석을 하사하기도 했다. 고려는 결국 북방의 지세에 맞는 축성과 여진족 축출의 경험을 살려 만만치 않은 전쟁억지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전쟁을 일으킨 거란으로서도 쉽사리 공격작전을 펼치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장기전’과 ‘협상’을 겸하자는 서희의 주장은 맞았다.
 거란의 소손녕은 고려의 묵묵부답이 계속되자 안융진(청천강 연안인 평안도 안주 입석면)을 공격했다. 그러나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격파됐다. 다시 기가 꺾인 소손녕은 감히 전진할 생각을 못한채 재차 항복만 권유했다.

서희가 거란 소손녕과의 회담에서 얻어낸 강동 6주. 고려는 영토를 넓혔을 뿐 아니라 고구려의 적자임을 만방에 알리는 망외의 소득을 올렸다.(‘장철균의 <서희의 외교담판>, 살림, 2013’)

 ■“누가 세치혀로 공을 세우겠는냐”
 그러자 고려 성종이 신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누가 능히 거란 진영에서 말로써 군사를 물리치고(以口舌却兵) 역사에 길이 남을 공을 세우겠느냐.”
 누구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서희가 손을 들었다.
 “신이 비록 부족하지만 한번 나서보겠나이다.”
 고려와 거란의 명예를 건 불꽃 튀기는 외교전쟁이 벌어졌다. 소손녕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소손녕은 거란 경종(969~982)의 사위이자 중국 송나라를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회담이 진행되기 전부터 양측의 심리전은 대단했다.
 적진(거란진영)에 들어간 서희는 일단 통역을 시켜 회견 때의 예절을 물었다. 준비 없이 회담에 임했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었기에 먼저 탐색전을 벌인 것이다.
 소손녕은 “나는 대조(大朝·거란)의 귀인이니 마땅히 고려사신(서희)이 뜰 아래서 (당 위에 있는) 나에게 절해야 한다”고 먼저 도발했다.
 서희 역시 결코 꿀리지 않았다.
 “무슨 소리? 뜰 아래에서 절을 한다는 것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예의가 아닌가. 두 나라 대신이 서로 마주 보는데 무슨 가당찮은 이야기인가.”
 소손녕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두 사신은 2~4차례나 신경전을 벌였지만 좀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화가 난 서희는 그냥 객사로 돌아와 누운채 일어나지 않았다. 소손녕은 이 소식을 듣고서야 뜰이 아닌 당(堂) 위에서 예를 차리도록 허락했다. 서희는 그제서야 소손녕과 대등한 자리에 앉아 본격적인 회담에 나섰다. 

 
 ■서희와 소손녕의 피말리는 외교전
 회담 역시 팽팽한 접전으로 이어졌다. 소손녕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거란의 소유인데, 고려가 이를 야금야금 침식하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니 대국(거란)이 이를 토벌하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땅을 떼어 바치고 조회한다면 봐줄 것이다.”
 그러니까 신라 땅에서 일어나 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왜 지금은 거란의 영역이 된 고구려의 고토를 야금야금 침범하느냐는 것이었다.
 서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응수했다. 
 “그 무슨 소리인가.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다. 나라 이름을 봐라. 고구려를 계승했다 해서 고려라 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평양에 도읍을 둔 까닭이다. 또 고려가 거란의 영토를 침식하고 있다고? 아니다. 그 사이 여진이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그 때문에 고려가 거란을 찾아 조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서희는 한술 더 뜬다.
 “고려가 거란에 조회하고 조공을 바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주면 된다. 그 곳에 성을 쌓고 도로를 내면 고려와 거란이 직접 통할 수 있지 않느냐. 그렇게 되면 고려는 거란에 조빙(朝聘·알현하고 조공을 바침)을 할 것이다.”
 서희는 마지막으로 “장군(소손녕)이 거란 황제에게 고려의 제안을 알린다면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느냐”고 쐐기를 박았다.
 할 말을 잃은 소손녕은 거란 황제(성종·982~1031)에게 사실을 고하며 혀를 내둘렀다.
 “고려에서 화친을 칭했나이다. 마땅히 전쟁을 중지하심에 옳을 줄 아옵니다.”

 

 ■명분(거란)과 실리(고려)의 성과
 이것이 바로 서희가 ‘세치의 혀(三寸舌)’로 얻은, 압록강 이동 지역인 ‘강동 280리’에 건설했다는, ‘강동 6주’이다.
 고려로서는 상상도 못할 망외의 외교적 성과였다. “당신 나라에 직접 조공을 바치려면 양국 국경이 맞닿아야 하고, 따라서 가운데 양국 관계를 방해하는 여진 땅을 고려에 넘겨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니….
 무엇보다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여서 국호를 고려라 했고, 그 때문에 평양을 도읍(서경)했다고 주장함으로써 협상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한 것이다. 사실 욱일승천한 거란의 국력을 볼 때 도리어 거란이 강동 6주를 할양하겠다고 주장해도 고려로서는 쉽게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되레 세치의 혀를 놀려 궤변일 수도 있는 주장을 현실로 만들어 성사시켰으니…. 서희 외교는 전쟁에서 가장 바람직한, 싸우지 않고 승리한 외교전의 대표사례라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서희는 거란에 ‘사대(事大)’라는 명분을 내주는 대가로 군사요충지이자 고구려의 고토인 강동 6주라는 실리를 챙긴 것이다.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 서희의 가장 의미심장한 승리는 고려가 고구려의 적자임을 공식확인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의 역사는 공식적이고 객관적으로 고려의 역사로 편입된 것이다.   

강화도에 있는 고려 고종의 홍릉. 강화도 정부를 이끌었던 고종도 끈적끈적한 외교로 세계최강 몽골을 골치아프게 했다.

 

■송나라를 꿈쩍 못하게 한 외교
 서희-소손녕 회담 이후에도 고려의 후속외교는 더욱 빛났다.
 “994년, 거란의 연호를 시행했다. 6월, 고려는 원욱을 송나라에 보내 ‘송나라와 합동작전으로 거란을 정벌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이제 겨우 북쪽 변방이 안정됐는데, 경솔하게 군사를 움직일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고려는 송나라와 국교를 끊었다.”(<고려사절요>)
 참으로 치밀하고 노련한 외교술이 아닌가. 이미 거란과의 전쟁에서 국고가 바닥나 있었던 송나라는 고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니까 고려는 송나라와의 외교관계 단절이라는 명분과 격식을 갖추면서 거란 사대에 따른 외교절차를 마무리한 것이다. 밀사를 파견해서 송나라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한 제안을 함으로써 국교단절의 책임을 송나라에 돌리는 외교술을 펼친 것이다.
 
 ■세계최강 몽골의 애간장 녹은 외교술
 서희의 명성을 이어받은 고려의 외교는 세계최강 몽골제국을 쥐락펴락, 애간장을 녹일 수준이었다.
 1231~1259년까지 고려는 막강한 몽골군의 침입에 시달렸다. 그러나 고려는 강화도 천도 이후 상황에 따라 몽골의 요구를 따르기도 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었다. 항쟁과 교섭의 이중주 외교가 빛을 낸 것이다.
 예컨대 1231년 11월, 몽골은 고려의 강화도 천도를 매우 질책했다. 그러자 고려 고종은 다음과 같은 말로 몽골을 녹인다.
 “아니, 전쟁으로 유민들이 모두 흩어지면 나라의 근본이 텅텅 비게 되고, 나라의 근본이 비게 되면 장차 누구와 함께 공물을 마련해서 상국(몽골)을 섬기겠습니까? 차라리 남은 백성들을 수습해서 섬(강화도)으로 들어가 있으면서 변변치 않은 토산물이나마 상국에 바침으로써 변방 신하의 명분을 잃지 않는 것이….”       
 고종은 더 나아가 “어디에 있든지 정성을 바치는 것이 중요하지 않느냐”면서 “우리가 천도한 이유는 바로 상국을 잘 모시기 위한 것일뿐”이라고 주장했다.
 1238년(고종 25년)에도 고려는 장군 김보정과 어사 송언기를 통해 몽골에 표문을 보낸다.
 “무력정복한다는 위협말고, 조상의 유업을 보존하게 한다면 변변치 않은 토산물이나마 해를 거르지 않고 바치겠습니다.”
 항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국(몽골)을 더 잘 모시려 천도한 것이라는데 무엇이라 하겠는가. 

고려말 대학자 이제현도 ‘세조(쿠빌라이)의 유훈’을 들먹거리며 원나라의 고려흡수 계획을 무산시켰다. 

 

 ■고려의 핑계외교
 고려의 ‘핑계외교’는 그야말로 혀를 내두르게 한다. 1253년(고종 40년), 고려는 대장군 고열을 보내, 몽골장군 예쿠(也窟)에게 보내 육지로 환도할 수 없는 이유를 밝힌다. 그런데 그 이유를 들으면 실소를 터진다.
 “황제(몽골)의 성지를 받들려 승천부(경기 개풍) 백마산 아래 성곽과 궁실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동북 방면에 포달인(抱獺人), 즉 수달을 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서 뭍으로 나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몽골의 대군이 들어왔습니다.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시면 내년에는 고려 국왕이 신료들을 인솔하고 뭍으로 나가렵니다. 제발 군사를 돌리심이….”(<고려사절요>)
 아니 수달사냥꾼이 무서워 육지천도를 하지 못하겠다니…. 그것도 모자라 군사를 철수시키면 뭍으로 나가겠다니….
 고려는 몽골이 “왜 강화도에 성을 쌓느냐”고 질책할 때마다 “송나라 공격에 대비하려 한 것”이라든지, “해적들의 노략질 때문”이라든지, 갖가지 토를 달았다.   
 몽골로서는 지긋지긋한 고려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있다. 1256년(고종 43년) 9월, 고려 사신 김수강이 몽골 황제(헌종)에게 몽골 군대의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는 “개경에 환도해야 철수하겠다”고 거절했다. 그 때 김수강의 화술이 백미다.
 “짐승이 사냥꾼을 피해 굴 속으로 숨었는데, 그 구멍 앞에 활과 화살을 가지고 기다린다면 피곤한 짐승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김수강의 ‘절묘한 외교술’에 감탄한 몽골 황제는 무릎을 치며 군사를 철수시켰다.
 “그래, 네가 바로 참 사신이다. 마땅히 두 나라는 화친을 맺어야 한다.”(<고려사절요>)
 
 ■애자(愛子)와 진자(眞子)의 차이
 혀를 내두를 고려의 외교술은 감탄을 자아낸다.
 1241년(고종 28년), 고려는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몽골의 협박 때문에 종친인 영녕공 준을 몽골로 보냈다. 그러면서 영녕공을 고종의 아들이라 거짓으로 고했다. 훗날 이 말이 거짓으로 판명됐다.(1254년) 고려 출신인 민칭이라는 자가 고자질한 것이다. 황제가 마침 몽골에 머물던 고려사신 최린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위기에 빠진 최린의 임기응변을 보라.
 “영녕공 준은 왕의 애자(愛子)입니다. 진자(眞子·참아들)는 아닙니다. 전에 올린 표문(외교문서)를 보면 다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애자는 무엇이고, 진자는 무엇이냐. 다르냐?”
 “그럼요. 애자라는 것은 남의 자식을 길러 자기 자식으로 삼은 것입니다. 만일 소생의 자식이라면 어찌 다시 ‘애(愛)’자를 쓰겠습니까.”
 황제가 새삼스레 고려가 올린 표문을 보니 모두 ‘애자’라 돼있었다. 황제는 더 이상 고려를 문책할 수 없었다. 애자와 진자….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말장난에, 궤변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외교관 최린은 기막힌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긴 것이다.(<고려사절요>) 
 아니 어찌보면 거짓아들인 영녕공을 보내면서 고려가 만일을 위해 마련해놓은 장치였을 지도 모른다. 아들 자(子) 앞에 애(愛)자를 수식해놓은 치밀함이라고 할까.

 

    ■몽골 쿠빌라이가 반색한 이유
 그러나 고려는 28년 간의 줄다리기 끝에 화의를 결정한다.(1259년)
 고려 태자(원종)가 위독한 부왕(고종)을 대신해 뭍으로 나가 몽골로 향한 것이다. 그런데 몽골로 가던 길에 황제 헌종(몽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고려 태자는 이 와중에 훗날 원나라 세조가 되는 쿠빌라이(忽必烈)를 만나게 된다. 쿠빌라이는 반색하며 고려 태자를 맞는다.
 “고려는 만리 밖의 나라이다. 당 태종도 친히 정벌했는데 항복시키지 못한 나라가 아닌가. 이제 세자가 스스로 왔으니 하늘이 뜻이 아닌가.”
 마침 또 하나의 뜻밖 소식이 들렸다. 고려 고종이 승하했다는 것이었다. 몽골의 비서감 조양필은 무릎을 치면서 “때마침 찾아온 고려 세자를 고려왕으로 세워 귀국시키면 군사를 동원하지도 않고 한 나라를 얻는 것”이라고 쿠빌라이에게 고한다. 쿠빌라이가 벅찬 심정으로 되돌아본다.
 “넓은 하늘 아래 복종하지 않은 나라는 고려와 송나라 뿐이었는데…. 이제 송나라도 솥 속의 고기이자 장막 위 제비집 같이 멸망 직전이다. 이젠 고려도 이제 제국의 품에 들어와 조회하는구나.”(<고려사절요>) 
 쿠빌라이는 더 나아가 선심공세를 편다.
 “좋다. 고려 만큼은 의관을 본국(고려)의 풍속을 좇아 상하 모두 고치지 마라. 개경 환도는 속도조절을 해서 알아서 하라. 설치된 다루가치(총독)는 귀환시켜라.”(<원고려기사>)
 쿠빌라이는 “원나라에 조회한 나라가 80여 개국인데 고려처럼 예(禮)로 대접하는 것을 보았느냐”고 공치사했다.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 존중하겠다는 약속…. 이것을 ‘불개토풍(不改土風)’ 혹은 ‘세조구제(世祖舊制)’라 한다. 시쳇말로 하면 ‘세조(쿠빌라이)의 유훈’이라 말할 수 있다.

 

 ■“세조의 유훈을 잊지 마세요.”
 그런데 고려는 이 ‘세조의 유훈’을 두고두고 써먹었다. 몽골이 노골적인 내정간섭에 나설 때마다 이 유훈을 들먹였다.
 예컨대 세조의 유훈이 발표된 지 60여 년이 지난 1323년(충숙왕 10년), 원나라가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립, 흡수통합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러자 당시 원나라에 있던 도참의사사 이제현은 예의 그 ‘세조의 유훈’을 인용하면서 ‘불가’를 외쳤다.
 “세조황제의 조서 덕택에 고려의 옛 풍속이 유지되고, 종묘와 사직이 보전됐습니다. 다 세조 황제의 덕입니다. 이제 고려에 행성을 설립한다고 합니다. 좋습니다. 다른 것은 다 논하지 않더라도 세조의 조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이제현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당시 원나라 황제였던 영종(재위 1320~1323)은 “세조(쿠빌라이)의 정치를 본받고 회복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제현은 바로 이 점을 겨냥해서 원 조정을 협박한 것이다. ‘세조의 유훈을 지키지 않으려는 것이냐’고…. 원나라는 결국 정동행성의 설치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황제와 맞장 뜬 고려 외교관
 다시 1260년대로 돌아오자.
 1268년(원종 9년), 문하시중 이장용이 몽골에 갔을 때였다. 쿠빌라이가 “고려군사의 수를 정확하게 알리지 않으면 고려를 정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려 군사의 수를 정확히 파악해서 남송과 일본원정에 동원하려던 것이었다.
 “고려군사의 수가 5만명은 된다고 한다. 그 중 4만명은 송나라와 일본 정벌에 보내라.”(황제)
 “5만 군사는 없습니다. 예전에 4만 군사가 있었지만 30년간의 전쟁과 전염병 때문에 다 죽었습니다.”(이장용)
 “아무렴, 산 사람이 없겠느냐. 너희 나라에도 여자들이 있다면 어찌 태어나는 자식들이 없겠느냐. 함부로 말하지 마라.”(황제)
 “고려가 황은(皇恩·몽골 황제의 은혜)을 입어 군대를 파한 이래로 이후에 성장한 자들이 겨우 9~10살입니다.”(이장용)
 국익을 위해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말은 했던 고려 외교관의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려는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고려는 몽골과의 화의(1259년) 이후에도 어지간히 몽골의 애를 먹였다. 11년 후인 1270년이 돼서야 개경으로 환도했으니까.
 견디다못한 몽골 조정은 고려를 재침공할 것을 타진하게 된다.(1269년)  
 하지만 마형과 마희기 등 조정대신들이 입을 모아 ‘불가론’을 외쳤다.
 “고려가 지금 원나라에 내조(來朝)하기는 하지만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만약 정벌이 실패할 경우 국위가 손상되고…. 저들이 험준한 강산에 기대고, 섬에 식량을 쌓아 지키면 100만 군대라도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습니다.”(<원사> <원고려기사> 등)  
 유라시아 대륙을 벌벌 떨게 한 공포의 제국 몽골도 고려의 외교전에 두손 두발 다 들었던 것이다.
 어떤가. 서희와 고려의 외교정책을 닮으라고 가슴을 치고 한탄하는 광해군의 외침이 동감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외교는 또 어떤가. 다 같은 서희의 후예들인데….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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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없는 자가 당대의 정치를 비방하는 글을 지어 조정의 길목에 내걸었다.”
 888년(진성여왕 2년) 신라의 도읍지 서라벌에서 당시의 정치를 비난하는 벽보(榜·대자보)가 붙었다.
 그것도 조정의 길목, 번화가에 붙은 비방문이었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나라 사람들이 비방문을 길 위에 던졌다(書投路上)”고 했다. <삼국사기>는 “벽보(혹은 대자보)를 붙였다”고 했지만, <삼국유사>는 “전단을 뿌렸다”고 한 것이다. 어찌됐든 글 내용은 알쏭달송했다. 다라니(밀어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비밀로 하려는 주문 같은 것)의 은어로 쓰여 있었다.
 “나무망국찰니나제(南無亡國刹尼那帝) 판니판니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 우우삼아간(于于三阿干) 부윤사바아(鳧伊娑婆訶)”(<삼국유사> ‘기이편·진성여왕 거타지조’)
 진성여왕(재위 887∼897년)은 “당장 비방문을 써서 내다 건(뿌린) 자를 잡으라”는 엄명을 내렸지만, 수사는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 때 어떤 자가 “범인은 분명 기용되지 못한 문인일 것”이라면서 대야주(합천)에서 은둔 중인 왕거인이라는 자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왕의 특명에 따라 긴급체포된 왕거인은 처형당하기 일보직전이 됐다.

진성여왕 때 서라벌 조정의 길목에 등장한 대자보(혹은 전단)의 내용을 소개한 <삼국유사>. ‘진성여왕과 신라는 망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라는 이 때 소판 위홍 등 3~4명의 총신과 여왕의 유모인 부호 부인 등이 정치를 농단하고 있었다.

 ■서라벌 대자보 사건
 그러자 무죄를 주장하던 왕거인은 “분하고 원통하다”면서 감옥의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연단(燕丹)의 피어린 눈물 무지개가 해를 뚫었고, 추연(鄒衍)의 품은 슬픔 여름에도 서리 내리네. 지금 나의 불우함 그들과 같으니, 황천(皇天)은 어이해서 아무런 상서로움도 없는가.”
 연단은 전국시대 연나라 마지막 태자인 단(丹)을 가리킨다.
 자객 형가를 시켜 진왕(진시황)을 죽이려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앙앙불락한 진나라가 연나라를 침공하자 연나라 왕은 태자 단을 죽여 진나라에 바쳤다. 또 전국시대 음양오행가인 추연(기원전 305~240)은 주변의 모함으로 옥에 갇혔다. 억울했던 그가 하늘을 우러러 곡을 하자 초여름인 5월에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왕거인은 결국 연나라 태자 단과 추연처럼 억울한 지경에 빠졌음을 읊은 것이다.
 왕거인이 감옥에서 벽서를 걸자 그날 저녁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벼락이 내리치면서 우박이 쏟아졌다. 진성여왕은 이 기이한 현상을 두려워한 나머지 왕거인을 석방해줬다.

 

 ■“신라여 망하라! 여왕이야 망하라!”
 그렇다면 서라벌 조정의 길목에 붙었다(혹은 뿌려졌다)는 수수께끼 같은 벽보(혹은 전단)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찰니나제는 진성여왕을 가리킨 것이요,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소판(관작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우삼아간은 진성여왕의 측근에 있는 3~4명의 총신이고, 부이는 부호를 가리킨다.”(<삼국유사>) 
 ‘나무(南無)’는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으로 절대적인 믿음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나무망국’은 나라가 망하기를 절대적으로 바란다는 뜻이다. 맨 마지막의 ‘사바하(娑婆訶)’는 앞의 주문내용이 반드시 이뤄지기를 바란다는 불교용어이다. ‘소판’은 진성여왕의 숙부이자 정부(혹은 남편)인 위홍의 관작(신라 17관등 중 세번째)이다. ‘부이’는 진성여왕의 유모를 가리킨다. <삼국유사>의 표현대로 당대 신라는 유모인 부호부인과 애인 위홍 등 3~4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농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자보(혹은 전단)는 ‘신라여! 여왕이여! 위홍과 부호 등 때문에 망하리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대자보에 담긴 망조의 기운 
 진성여왕 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천년사직에 접어들던 신라는 진성여왕대부터 망조가 든다. 극심한 왕위쟁탈전과 경제혼란으로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삼국유사>의 표현처럼 몇몇 총신들이 권력을 잡았고, 지방에서는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889년(진성여왕 3년) 원종과 애노의 반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조정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은 이른바 시무 10여조를 제시했지만(894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진성여왕은 귀족들의 변화를 이끌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라는 이후 급속도로 망국의 길로 빠진다. 905년(효공왕 9년) 궁예가 신라를 침범했으나 방어할 힘이 없어 성만 지키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도선 선사는 공공연하게 “신라의 운수는 이제 끝”이라고 주장했다. 궁예는 미륵이 나타나 새 세상을 열 것이라는 미륵사상을 퍼뜨렸다.
 결국 서라벌 조정의 길목에 걸린(혹은 뿌려진) 대자보(혹은 전단)는 신라 망국의 신호탄 같은 것이었다. 대자보(전단) 이후 47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으니까….

 

 ■“여주(女主·문정왕후)가 정치를 농단하고 있다!”
 1547년(명종 2년) 9월18일에 일어난 양재역 벽서사건은 어떤가.
 이 때 붙은 벽보의 글씨는 매우 선동적인 붉은 글씨였다.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女主執政于上)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다.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됐다. 어찌 한심하지 않는가. 중추월 그믐날.” 
 이 무슨 벽보인가. 여기서 ‘여주’는 다름아닌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를 일컫는다.
 문정왕후는 오빠인 윤원형(즉 명종의 외숙)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1545년) 윤임(죽은 인종의 외숙) 일파를 숙청했다. 벽서에 언급된 이기는 당시 병조판서로서 윤원형과 손잡고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괘서는 바로 이 어수선한 정치상황을 꼬집은 것이다. 그런데 이 벽서는 오히려 윤원형 일파에게 ‘정적 몰이’의 명분을 주었다.
 “괘서(대자보)가 나도는 것은 여전히 불온한 생각을 갖고 있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이로써 윤원형 일파는 을사사화 때 쫓아내거나 죽이지 못한 반대파들을 모조리 색출해서 피바람을 일으킨다. 이것을 정미사화, 혹은 벽서의 옥이라 한다. 하지만 이 때의 벽서 역시 그냥 붙은 게 아니었다. 

중국 문화대혁명 때 대자보를 붙이고 있는 중국 홍위병들. 마오쩌둥은 대자보의 기원을 춘추시대 정나라 때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정자산(鄭子産) 때부터 시작됐다고 했다. 

   ■임꺽정이 출현한 까닭
 벽서가 붙은 지 12년이 지난 1559~62년, 즉 3년 동안 임꺽정이 황해도 일대를 휩쓸었다.
 1559년 3월27일 다름아닌 중추부 영사 윤원형 등 당대의 실권자가 모여 도적떼를 없앨 계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요원의 들불처럼 퍼지는 도적을 막지 못했다. <명종실록>을 쓴 사관이 핵심을 찔렀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요즘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다.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사관은 “중앙 조정과 지방 수령이 깨끗하면 칼을 잡은 도적이 송아지를 사서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 덧붙였다.
 결국 큰 도적은 임꺽정이나 그를 따르는 백성들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외면한채 조정에 피바람을 일으키는데만 골몰한 ‘여주(女主) 세력’, 즉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였던 것이다. 12년 전 대자보가 붙은 이유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호미로 막을 일이었던 것이다.

 ■대자보 베껴가는 백성들
 조선 중·후기로 넘어가는 숙종 때는 어떤 일이 있었나.
 “1684년 이후 무뢰배가 서로 모여 계를 만들었다. ~살주계가 있었는데 그 계의 책자에 ‘양반을 살육할 것, 부녀자를 겁탈할 것, 재물을 약탈할 것’이라는 약조가 있었다. 어떤 검계는 ‘장차 난리가 나면 양반을 아내로 삼을 수 있다’고 공언하기도 했다.”(<연려실기술> ‘숙종조 고사본말’)
 숙종의 46년 재위동안 잦은 환국정치와 노·소론의 갈등 등이 염증을 불렀다.
 백성들 사이에서 바야흐로 천민층을 중심으로 비밀결사조직이 결성되는 시기였다. 신분제가 동요되던 시기였던 것이다. 결코 태평한 시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익명의 대자보가 6번이나 붙었다. 1679년(숙종 5년) 우의정 오시수의 상언이 당대의 상황을 일러준다.
 “인심이 깨끗하지 못해 차마 듣지도 못할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말로 여러 신하의 죄목을 꾸미고 익명서를 만들어 민가나 관아의 담장에 붙이거나 널리 퍼뜨리고, 백성들이 일시에 몰려들어 다투어 적는 것이 마치 과거장의 문제를 베끼듯 합니다.”(<비변사등록>)

 

 ■대자보 붙이면 교수형이다
 그러자 아주 촘촘한 처벌규정을 만들었다. 그것이 이른바 ‘익명서정죄사목’이다.(<비변사등록>)
 우선 익명서를 투서한 자는 ‘대명률’(명나라 형법서)에 따라 교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만약 방을 붙인 것이 대로변이면 부근에 사는 사람이, 관청이면 수직자가, 개인집이면 집주인이 즉시 불살라야 했다. 만약 그렇게 처리하지 않은 자는 유배 3000리와 전가족 변방 부처의 처분을 받았다.
 그렇지만 대자보와 전단은 줄지 않았다. 숙종 때는 1675~1720년 사이에 6차례나 익명의 대자보가 붙었다.
 1679년(숙종 5년)에는 “누구 누구가 나라에 원한을 갖고 날짜를 정해 난을 일으킨다”는 익명서까지 대궐문에 붙었다. 1711년(숙종 37년)에는 대청외교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숭명배청의 의리를 내세워 빨리 청나라를 공격하라는 내용의 대자보가 영은문에 걸렸다. 대자보는 명나라 태조 때 편찬된 <홍무정운>의 자체를 그대로 따랐다. 범인을 중국인으로 위장한 것이 틀림없었다.
 조정은 대대적인 범인색출에 나섰지만 오리무중이었다.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죄로 포도대장 유취상과 종사관을 투옥시키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범인을 무리하게 색출하는 과정에서 무고사건이 잇따르는 등 후유증까지 낳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끝내 범인을 잡지못한채 종결되고 말았다. 1714년(숙종 40년)에도 “도둑이 숭례문에 익명서를 건 사건이 있는데 말이 지극히 부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른바 숭례문 괘서사건이다.

지난 2014년 2월 성균관대에서 열린 ‘대자보 백일장’의 모습. 역사적으로 대자보와 같은 벽서는 언로가 불통일 때, 정치가 어지러울 때 죽음을 무릅 쓴 백성들이 내걸었다.

 ■대자보가 동시다발적으로 걸린 까닭
 영조는 손자인 정조와 함께 조선의 중흥기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52년 간의 장기집권이었던 탓도 있지만,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설 때문에 민심의 이반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경종독살설은 결국 1728년 무신난(이인좌의 난)으로 비화했다.
 그 해(1728년) 1월 서소문에 괘서(掛書)가 붙었다. 지경연사 김동필이 영조에게 고하는 장면을 보라.
 “1월 11일 서소문에 괘서가 붙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전주의 괘서와 같다고 합니다. 전주 괘서는 호남 사람들이 다 목격했답니다. 그런데 남원 시장에도 흉서가 걸렸는데 서소문에도 걸렸으니….”
 그러자 영조는 “전주와 남원에 이어 서소문 괘서는 모두 한사람의 소행인듯 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실 이 시기에 한성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도적이 쳐들어 온다는 소문과 함께 창의문 밖에 적병이 출몰했다는 유언비어까지…. 이 때문에 한성 인근의 백성들은 물론 남산 아래 사대부들까지 가족을 이끌고 피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때문에 나루터 길이 막히고 경기도 일대 안성과 용인 등은 마을이 텅 빌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영조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면서 4개 읍의 수령을 급히 무신으로 교체했을까. 그러나 영조는 전주와 남원에 이어 서울 서소문에까지 걸린 괘서의 범인 색출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인다.
 “선왕(숙종) 때 연은문에 흉서가 걸렸는데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다. 혹시 사소한 원한을 갚으려고 무고하는 경우도 있고 죄없는 사람이 걸려들기도 하니….”(<영조실록>)
 영조는 이른바 비공개수사를 통해 범인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20여 일이 지난 뒤 다시 한성부의 종가에서 또 한차례의 대자보가 걸렸다. 이때부터 공개수사로 바꿨다.
 “어떤 요망한 사람이 이 윤기(倫紀)없는 요악한 말을 지어내어 민중을 미혹시킬 계획을 하는데 부도(不道)할 뿐 아니라 곧 난민(亂民)이니….”(<영조실록> 1728년 2월 19일)
 이 대자보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경종 독살설과 관련, 당시 파다하게 퍼졌던 소문을 담았을 것이다. 그런데 영조가 공개수사를 통해 범인색출작전을 펼친 지 불과 25일 뒤(3월15일)에 무신난이 발생했다.
    
 ■차마 표현할 수 없었던 ‘부도지언(不道之言)’
 무신란이 무엇인가.
 경종 독살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 탄(坦)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한 거병이었다. 무신난에는 영남에서만 7만명, 전국적으로는 20만명이 가세하는 등 엄청난 기세를 탔다.
 이 때 난을 이끈 이인좌가 “(반란군의) 군중에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조석으로 곡을 했다”(<당의통략>)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3월26일 체포된 이인좌 등의 진술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거병에 앞서 서소문·종가·남원· 전주에 대자보를 붙임으로써 조정을 혼란에 빠뜨리고자 했던 것이다. 난이 일어났을 때 진압군에게 혼선을 빚게 하려고 전국 각지에 대자보를 붙인 것이다.
 과연 대자보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얼마나 망측했기에 영조 시대의 각 문헌은 그저 ‘부도지언(不道之言)’이라는 표현만 썼을까. 심지어 영조는 사관에게 특별히 “괘서의 내용을 절대 기록하지 말라”는 엄명까지 내린다.
 아마도 ‘영조 당신은 이복형(경종)을 독살하고 임금이 된 자야!’라고 외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다!”
 그로부터 27년이나 흐른 1755년(영조 31년)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가 급히 장계를 올렸다.
 나주 객사에 대자보가 붙은 것이다. <영조실록>은 그것을 ‘흉서(凶書)’라 했다. 대대적인 범인 색출에 나섰다. 가뜩이나 하수상한 시절이었다.
 “신축년(1721년·노론 4대신 등 노론이 쫓겨난 사건)과 임인년(1722년·목호룡 고변사건) 때의 잔당과 무신년(1728년·이인좌의 난)의 잔적들로서 번성한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이 나라를 원망함이 심각하고 근거없는 말이 날마다 일어났는데, 이 때 흉서가 걸렸다.”
 흉서의 내용은 그야말로 흉(凶)했다. 역시 워낙 참담한 표현이어서 자세히 쓸 수는 없다고 했다.
 내용 가운데는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有奸臣滿朝 民陷塗炭)”는 구절이 들어있었다.
 장계를 받아본 영조는 기막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황건적 같은 무리구나. 틀림없이 무신년(이인좌의 난)의 잔당이다. 그러나 과인은 무신년 때도 동요되지 않았다.”
 이같은 일이 다반사이니 걱정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어찌보면 의연하게 대처하려는 영조의 여유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혼란한 시대였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어쨌든 대대적인 수사 끝에 흉서를 내건 일당이 붙잡혔다. 주범은 윤지라는 인물이었다.  
 윤지는 무신난(이인좌의 난) 때 제주도를 거쳐 나주로 유배됐다가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다. 윤지는 고문을 받다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영조는 분을 참지 못하고 대역죄의 형벌로 그의 목을 베고 그의 집을 헐어 그 자리에 연못을 파는 형벌을 받고 말았다.
 이 나주괘서 사건으로 죽은 이가 41명, 유배 20명 등 모두 65명이 엄벌을 받았다. 
 이렇듯 나름 치세에 선전했다는 평을 듣는 영조지만 이복형 독살설 때문에 재위내내 골머리를 앓았다. 역시 당대의 민심은 분명했던 것 같다. ‘당신은 이복형을 죽이고 임금이 된 사람이야’라는 손가락질이 받았던 것이다. 재위기간 내내 무려 15번이나 흉악한 대자보가 붙을만큼….
   
 ■“나의 거병을 따르라!”
 1801년(순조 1년) 경상도 하동·의령·창원에서 민란을 선동하는 대자보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문장력이나 무예, 힘이 있으면서 하는 일이 없고 실농한 사람들은 나의 거병을 따르라. 재상이 될만한 자는 재상을 시키고 장수가 될만한 자는 장수를 시키며 지혜로운 자는 부림을 얻을 것이요, 꾀 있는 자는 가까이 할 것이다. 가난한 자는 풍요로움을 얻을 것이며, 두려워하는 자는 숨겨줄 것이다.”(<승정원일기> 1801년 12월 26일)
 하안 무명에 한자로 쓴 대자보의 밑에는 ‘十爭一口(십쟁일구)’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사람들은 이 수수께끼 같은 ‘십쟁일구’의 뜻이 무엇인지 설왕설래했다. 수사 과정에서 실마리가 잡혔다.
 ‘십쟁일구(十爭一口)’에서 ‘爭’의 윗부분에 있는 ‘爪(조)’는 글씨를 보면 ‘月(월)’자와 비슷하고, 밑의 ‘尹(윤)’은 ‘甲(갑)’으로 보인다는 것. 또 ‘一’은 ‘口’와 합치면 ‘日(일)’이 된다는 것. 따라서 ‘시월갑일(十月甲日)에 세상이 뒤집힌다’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10월 갑자일인 21일에 변란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또 대자보 가운데는 ‘일인지구(一人之口) 이과지비(二戈之卑) 사두지자(四頭之字) 일자지열(一目之烈) 인물사원(人勿思遠) 삼칠가려(三七可慮)’라는 파자와 함께 ‘힘있는 자는 뒤를 따르고 힘없는 자는 산속으로 들어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잇달아 대자보를 내건 이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거나 유랑하던 지식인들이었다.

 

 ■대자보(전단)의 본질
 ‘진선(進善)의 정(旌)’이라는 고사가 있다.
 중국 요 임금이 길가에 기(旗)를 세워놓고, 임금에게 교훈이 될만한 말(선언·善言)을 드릴 자가 있으면 그 깃발 아래 서게 하였다는 것이다.
 반면 옛날 주나라 여왕은 비방하는 자를 감시했고, 그들이 입을 놀리면 죽였다.
 그러자 점차 비방하는 사람들이 드물어졌다. 백성들은 감히 말하지 못하고 길에서 만나면 눈짓으로 뜻을 나눴다. 그러자 여왕은 재상 소공을 불러 자랑했다.
 “그것보시오. 내가 비방을 없애버리니 아무도 감히 말하지 않게 되었소. 어떻소.”
 그러자 소공은 손사래를 쳤디.
 “아닙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을 막는 것보다 심각합니다. 물이 막혔다가 터지면 어떻습니까. 둑이 터지는 것 처럼 엄청난 피해자가 나올 것입니다. 물을 다스리는 자는 수로를 열어 물이 흐르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백성들이 말하게 해야 합니다.”
 소공은 “정치를 잘하고 못함이 다 백성들의 말에 반영된다”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무릇 백성은 속으로 많은 생각을 하는 존재이며, 그들이 입으로 말하는 것은 속으로 많이 생각한 연후에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왕은 소공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3년 뒤 백성들이 연합해서 난을 일으켰고 여왕은 왕위를 빼앗겼다.(기원전 841년) 이후 두 재상인 소공과 주공이 14년간이나 정무를 공동으로 맡았다. 그것을 역사는 ‘공화(共和)의 시초’라 일컫는다. 앞서 거론한 대자보 사건을 관통하는 공통의 시사점은 무엇인가.
 바로 대자보(혹은 전단)는 민심이 이반되고, 정치가 어지러울 때 혹은 망조가 들 때 어김없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자보의 출발은 ‘백성과의 불통’이다. 백성이 목숨을 걸고 익명서를 걸거나 뿌릴 때의 시대는 혼란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 언제나 상기해야 할 금과옥조는 이것이다.
 ‘백성은 물이고, 임금은 배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전복시킬 수도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순자> ‘왕제’)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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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팟 캐스트 21회는 좀 색다른 주제입니다.

백두산 폭발과 발해멸망의 수수께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100년 전 백두산에서는 역사시대, 2000년이라는 시간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화산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기원후 79년 폼페이 최후의 날로 악명높은 이탈리아 베수비오 화산폭발보다 무려 50배나 큰 화산폭발이었습니다.

물론 화산폭발이 과연 어제 정확하게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첨단과학의 힘을 빌자면 아마도 930~940년 사이가 아닐까 추정됩니다.

문제는 발해가 926년에 멸망했다는 것입니다. 발해의 멸망소식을 전한 요나라(거란) 역사서인 <요사>발해는 민심의 이반 때문에 별다른 저항없이 멸망했다고 전합니다.

이상한 일 아닙니까. 해동성국으로 일컬어졌고, 고구려의 고토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발해가 왜 이렇듯 속절없이 무너졌을까요.

일부 전문가들이 화산폭발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이번 주 팟캐스트는 백두산 화산폭발, 그것이 발해멸망의 도화산이 되었을까 라는 궁금증을 던져봅니다.

 

 “발해의 ‘민심이 멀어진’(離心) 틈을 타 싸우지 않고 이겼다.(離心乘 흔而動故不戰而克)”(<요사> ‘야율우지전’)

925년 12월,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발해정복을 위해 출병한다. 발해의 부여성을 포위한 뒤 단 3일만에(926년 1월3일) 성을 함락시킨다. 거란의 선봉은 발해의 수도 상경의 홀한성을 향해 질주한다. 도중에 발해의 노상이 이끄는 3만대군을 격파하고 단숨에 홀한성을 포위한다.(9일) 발해의 마지막 왕은 대인선(재위 906~926)이었다. 대인선은 단 3일만인 12일 항복을 청한다.

<요사>가 전하는 항복의 순간은 치욕적이다. 항복의사를 전한 지 이틀 뒤인 14일 대인선은 ‘흰옷을 입고 양을 끌고 또 신하 300여 명과 함께(素服탁索牽羊 率僚屬三百人)’ 항복한다. 이로써 발해(698~926년)는 15대 229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백두산 천지. 10세기 화산폭발은 인류가 역사시대에 겪은 화산폭발 가운데 가장 엄청난 규모였다.

 ■너무도 허망한 멸망

그런데 말이다. 좀 이상하다. 해동성국이라는 명성을 얻으며 승승장구했던 발해로서는 너무도 허망한 멸망이다. 고구려의 광활한 고토를 거의 대부분 차지했던 발해제국이 보름도 되지 않아 속절없이 무너진 것이다.  
그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역사학자들은 특히 멸망하기 직전인 925년 발해인들이 대규모로 고려로 내투(內投·투항)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태조 8년(925년) 9월, 발해장군 신덕 등 500명이 내투하다. 발해 예부경 대화균 등이 100호의 균노 사정 대원균, 공부경 대복모, 좌우위장군 대심리 등 100호의 백성을 이끌고 내부하다. 12월에는 좌수위소장 모두간, 검교개국남 박어 등이 1000호의 백성을 이끌고 내부하다.”

심상치 않은 일이다. 발해의 장군과 왕·귀족이 멸망(926년) 하기 몇 달 전부터 대규모 ‘엑소더스’에 나선 것이다. 9월엔 500명에서 석달도 채 안된 12월엔 1000호로 급증하고 있다. 왜 일까. 발해멸망 후 거란이 세운 동란국(東丹國)의 재상을 지낸 야울우지는 분명 발해의 ‘이심(離心)’을 틈타 제대로 된 싸움없이 승리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대규모 엑소더스의 실체는

역사학자들은 이런 기록들을 토대로 발해의 멸망을 다각도도 분석했다. 지배세력인 고구려인과 피지배세력인 말갈인 사이의 모순, 귀족들의 사치생활, 그리고 통치계급 내부의 모순 등….
그러나 문제는 발해 사회내부에 어떤 특정한 권력투쟁이 실재했다는 기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것이다. <요사>의 기록에 따라 ‘발해가 멸망했다’는 926년 이후에도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계속 발생한다.

“926년 4월, 발해국 대인선이 대진림 등 116명을 사신으로 보내 조공했다.”(<책부원귀> 등) 

발해가 분명히 926년 1월 멸망했다면서 그 후에도 버젓이 ‘발해사(渤海使)’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중국(후당)에 보낸 것이다. 그 후 935년까지 8차례나 발해가 사신을 파견했다. 이는 무슨 이야기인가.
사실 거란은 발해정복 후 발해의 고토에 동란국(東丹國)을 세운다. 하지만 이 동란국은 2년 뒤 랴오양(遼陽)으로 천도한다. 그러니까 거란은 발해를 정복한 뒤 곧바로 통치를 포기한 것이다. <요사>는 “발해땅이 중국 동북부의 오지여서 통치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따라서 거란이 떠난 후 발해의 고토에는 여전히 발해의 이름을 사용한 나라가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또 하나 이 격동의 시기에 발해인들의 대규모 엑소더스도 상상을 초월할만큼 이어진다.
먼저 발해멸망 직후와, 동란국 천도와 함께 강제이주 당한 발해인은 9만4000여호(<요사>)에 이른다. 1호당 가족이 5명이라면 47만명, 즉 50만명에 가까운 숫자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거란이 발해인을 강제 이주시킨 뒤 많은 마을(현)을 폐쇄했다는 것이다. 이를 폐현(廢縣)이라 한다. <요사>를 보면 거란이 폐쇄시킨 마을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 두만강, 쑹화강 유역과 동해안의 읍락 및 연해주 지역이다.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 거란은 발해의 민심이반 덕분에 싸우지도 않고 멸방시켰다고 한다.

■발해세자 대광현이 망명한 까닭은

고려로 투항하는 행렬도 만만치 않았다. 927년(고려 태조 10년)과 928년, 929년, 934년, 938년, 979년에 걸쳐 많게는 수만명씩 고려행을 택했다. <고려사> 등 역사서 기록을 종합하면 50년간 고려행을 택한 ‘발해유민’은 10만여명으로 집계된다.
그러니까 발해멸망 뒤 거란에 의한 강제이주자와 고려로 들어온 유민을 합하면 60만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전성기 발해의 인구는 10여만호, 군사는 정예병 수만명”이라 했다. 그렇다면 발해라는 나라와 백성이 사라진, 사상 유례없는 민족의 대이동이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땅을 정복한 거란인도, 그 터전에서 살아가던 발해인들도 모두 떠나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 가운데 934년에 있었던 발해세자 대광현의 고려망명은 유독 눈에 띈다.

“발해세자 대광현이 수만명의 무리를 이끌고 내투했다. 그에게 왕계(王繼)라는 성명을 내리고…. 특별히 원보(元甫)라는 관직을 내렸으며, 발해왕실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고려사>)  

이미 8년 전 망한 나라의 세자라? 발해세자 대광현은 대체 무엇 때문에 고향땅을 떠나 고려로 내려온 것일까. 

화산폭발로 인한 화산재는 일본열도 홋카이도와 아오모리까지 퍼졌다. 

■백두산, 광란의 폭발 

이젠 과학의 영역으로 가보자.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사이언스 북스, 2010)의 저자 소원주 박사가 제시한 10세기 백두산 대폭발의 재구성이다.

“10세기 어느 무렵 겨울날이었다. 백두산이 화산폭발의 순간을 맞이한다. 두터운 지각을 꿰뚫고 천지 칼데라 위로 엄청난 분연주(화산가스와 화산재의 불기둥)가 상공 25㎞까지 치솟는다.

성층권까지 올라간 불기둥은 중력을 이기지 못한채 무너진다. 불기둥이 붕괴되면서 발생한 거대한 화쇄류가 시뻘건 혀를 낼름거리며 광란의 춤을 춘다. 그 화쇄류의 온도는 700~800도에 이른다. 시속 150㎞의 맹렬한 속도로 계곡과 산등성이를 질주한다. 식물과 동물 생태계는 한꺼번에 절멸하고 만다. 화쇄류는 100㎞ 이상 먼 곳까지 도달한다.

화쇄류는 발해5경에 속한 중경과 동경, 남경을 집어 삼켰을 것이다. 화산폭발로 한겨울 백두산 정상에 쌓인 눈이 녹는다. 이 눈은 칼데라 벽을 넘쳐 흐른 뜨거운 천지의 물과 합쳐져 거대한 해일로 변한다.

산사면을 돌진한 물줄기는 시멘트와 같은 화산이류(泥流)가 되어 삼림을 집어 삼킨다. 갑작스런 범람에 홍수에 강유역에 자리잡고 있던 마을들이 도미노처럼 사라진다. 거대 화쇄류의 상공에 머물던 화산재의 열운은 겨울철 강한 편서풍에 밀려 동쪽으로 확산된다. 화산재 구름은 초속 120m의 속도로 동해로 확산된다. 화산재는 3~4시간 뒤 일본 홋카이도와 아오모리 지방까지 널리 퍼진다.”


 ■폼페이 묻은 화산폭발의 50배

과학자들은 10세기 백두산의 ‘화산폭발지수(VEI·Volcanic explosivity index)’가 7급이라고 계산하고 있다. 백두산 화산이 뿜어낸 화산쇄설물(테프라·Tephra)의 용적은 83~117㎦(최대 150~170㎦)로 추정된다. 이것은 역사시대, 즉 지난 2000년 전 지구상에서 일어난 화산폭발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소원주 박사는 “백두산 테프라의 평균용적을 100㎦로 계산하면 10세기 백두산은 단 한 번의 분출로 남한 전체를 1m 높이로 퇴적시킬 수 있는 화산물을 쏟아냈을 것”이라고 밝혔다. 

기원후 61년 폼페이를 최대두께 6m로 순식간에 매몰시킨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규모는 어떤가. 그야말로 새발의 피다.베수비오 화산이 품어낸 화산재의 용량은 2㎦였다. 백두산 화산의 규모는 M 7.4, 100㎦였으니 베수비오 화산 50개가 터진 것과 같은 규모이다. 1991년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폭발규모(체적 5㎦)도 백두산의 1/20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화산재는 새계를 일주했다. 지난 2010년 봄 아이슬란드 에이야프얄라요 화산에서 분화된 화산분출물의 양은 0.1㎦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세계경제는 휘청거렸다.

 

역대 지구상에서 일어난 주요 화산폭발. 백두산 폭발은 그 중에서도 최악의 폭발로 기록되고 있다.   

■심상찮은 멸망의 징조들

자, 이제 수수께끼의 퍼즐을 맞춰보자. 1980년대 일본 도립대의 화산학자 마치다 히로시 교수는 흥미로운 가설 하나를 제기했다. 10세기 백두산 대폭발과 발해멸망의 연관성이었다. 역사학자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926년을 전후해 백두산 분화에 대한 문헌기록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어떻게 믿겠냐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백두산에서 날라온 화산재의 퇴적층과 함께 화산폭발에 이은 화쇄류로 묻혀버린 탄화목에 대한 연대를 측정했다. 그 결과 10세기 백두산 대폭발의 연대는 934년 전후와 937년 전후, 그리고 946년 전후로 좁혀졌다. 소원주 박사는 “최근 탄화목의 현미경 분석결과 930년까지 연대가 나온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어찌됐든 연대측정결과로는 발해의 별망(926년)과 백두산 폭발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궁금증들이 남아있다. 몇가지 착안점은 있다. 백두산 화산재가 쌓인 일본 아오모리 현 오기와라 호의 퇴적물을 조사한 결과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됐다. 923~925년 사이의 퇴적층에서 매우 한랭한 지역에서 사는 규조류가 확인된 것이다. 이는 그 3년 동안 발해가 급격한 기후강하로 인한 매우 심각한 냉해를 겪었다는 증거이다. 거란과의 한판 승부를 앞둔 중차대한 시기가 아닌가. 또 멸망 전인 925년 가을부터 발해장군과 왕·귀족이 잇달아 고려로 내투하는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화산폭발로 쏟아져내린 화산쇄설물과 화산이류로 순식간에 뒤덮인 불에 탄 나무. 이 탄화목에 대한 연대측정결과 백두산 대폭발은 930~945년 사이에 일어났다고 한다.   

■창졸간에 사라진 발해문명

또 하나 가설을 세워보자. 역시 소원주 박사의 가설이다.
백두산 탄화목 나이테의 중심연대는 933~934년 사이이다. 그렇다면 발해 세자 대광현이 수만의 유민들 이끌고 고려로 내투했다는 934년은 어떤가. 926년, 즉 발해멸망연도는 <요사>에 나온 기록이다. 하지만 <요사>는 발해멸망 이후 400년이나 지난 1344년 원나라 시대에 편찬한 기록이다. 누락되거나 잘못된 기록이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926년 이후, 백두산 주변에는 아직도 발해의 세력들이 발해국를 자처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다 대폭발이 일어나 마지막 남은 발해세자 대광현 세력까지 고려로 귀부한 것은 아닐까.

 그럴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다양한 연대측정결과 백두산 대폭발과 발해멸망은 직접 연관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백두산 대폭발은 역사시대를 통틀어 인류가 경험한 것 중 최대규모의 화산폭발이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화산폭발을 앞두고 심상치않은 전조현상이 있었을 것이다. 혹 대폭발을 앞두고 수증기·마그마폭발과 같은 소규모 폭발이 일정기간 일어나지 않았을까. 마그마가 직접 분출되지는 않았겠지만 마그마가 천지의 물과 만나 수증기가 폭발하는?

이렇게 백두산이 대폭발을 앞두고 시차를 두고 몇 차례 소규모로 요동치자 이를 두려워 한 사람들이 대규모 엑소서드에 나선 것은 아닐까. 그것이 <고려사> 등에 나오는 내투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요사>가 말하는 민심의 이반, 즉 이심(離心)은 아니었을까.

거란이 발해를 멸한 뒤 “압록강, 두만강, 쑹화강 일대와 연해주·동해안 읍락을 폐현(廢縣)시켰다”는 <요사>의 기록은 시사점이 많다. 이 지역들은 대홍수의 흔적이 발견된 곳들이다. 백두산 대폭발로 화산류(화산분출물+물)의 해일이 일어난 범람의 흔적인 것이다. 화산폭발로 몰살당한 비극적인 마을의 흔적인 것이다.

어떻든 이 10세기 백두산 대폭발로 발해의 흔적, 즉 문화와 역사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드넓은 발해의 고토는 사막이 됐고, 그곳에 여진사람들이 다시 금나라를 세울 때까지(1115년) 200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200년은 화산 사막이 풍화해서 토양이 되고 표토에 식물이 뿌리를 내려 번성하는 최소한의 기간이다.

 

■백두산, 재폭발 하면?

최근 다시 백두산 폭발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고 있다. 예컨대 다니구치 히로마쓰(谷口宏充) 도호쿠(東北)대학 명예교수(화산학)는 20년 이내에 백두산 화산폭발이 일어날 확률이 99%에 이른다고 예측했다. 지난해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의 플레이트 운동 영향 때문이라고 부연설명했다.

확률은 좀 다르지만 국내외 학자들도 백두산의 재폭발에 관심을 쏟고 있다. 윤성효 교수는 2002년부터 백두산에서 화산폭발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이른바 전조현상들이 빈번해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화산성 지진활동이 빈발하고 지진규모도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표면의 팽창이 10㎝ 이상 감지되고, 화산가스에서 펠륨의 농도가 증가하고 있다. 또 화산가스 방출로 삼림이 말라죽고, 산사태와 암석균열이 일어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윤교수는 천지에 20억t의 물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물이 1000도 이상의 마그마와 만날 때 폭발적인 수증기·마그마 분화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10세기 백두산 분화와 비슷한 폭발이 일어난다면?
백두산을 중심으로 북한과 중국이 직접적인 타격을 입는다. 인명피해는 물론 도로와 댐, 전기, 광산 등이 마비될 것이다. 또 생태계 변란과 토양침식, 식수오염, 냉해 등이 악순환이 초래될 것이다.

남한은 직접적인 피해는 입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수방관 할 수 없다. 남한도 피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화산재 때문에 항공기가 결항돼 25억 달러 이상의 피해가 예상된다. 아니 돈이 문제는 아니다. 순망치한이라는 고사가 있지 않은가. 백두산 폭발의 여파는 또 한 번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존권을 위협할 것이다. 1000년 전 발해 백성들이 속절없이 당했듯…. 그래서 앞다퉈 남으로 남으로 엑소더스 대열에 나섰듯….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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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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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문명의 시원(始原)을 랴오허문명[발해연안문명]으로 간주하는 선양[심양ㆍ瀋陽] 랴오닝성박물관 첫 번째 전시실에는 “도전하와학설(挑戰夏娃學說)”이라는 흥미로운 글이 내걸려 있다. 그렇다면 “도전 하와학설”이란 무엇인가? 우선 중국인들의 호기 있는 도전에 관해 들여다보기 전에 우선 “하와학설”에 관해 알아보자. 

흑인 아담과 이브의 출현을 그린 <뉴스위크>의 표지

■이브 학설

  “하와(夏娃)”는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이브(Eve)”와 같은 인물로서, “하와학설”은 미토콘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서구 학계의 “이브학설(The Eve of Theory)”을 말한다.
1987년 버클리의 유전학자 앨런 윌슨과 레베카 칸, 마크 스톤킹은 전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연구결과를 발표한다. 지구촌에 살고 있는 60억 인류의 조상은 지금부터 약 15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았던 어느 여성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그 결과 과학자들은 현생인류의 조상을 “15만 년 전(처음에는 20만 년 전이었으나 나중에 교정되었다.) 아프리카에 살던 자매인 두 여성”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런데 이 여인의 후손 가운데 일부가 약 10만 년 전 아프리카를 벗어나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이것이 바로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학설이다. 이 연구결과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학계를 비롯해 지식인층에서는 대체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흑인 이브가 흑인 아담에게 사과를 주는 다소 냉소적인 그림을 싣기도 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 상황은 변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학설’을 뒷받침하는 결과가 계속 나오면서 현생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은 정설로 굳어졌다. 이 때문에 아프리카인은 원시 호모사피엔스(아프리카)에서, 아시아인은 호모에렉투스(아시아)에서, 유럽인은 네안데르탈인(유럽)에서 진화했다는 “다지역기원론(多地域起源論)”은 힘을 잃어갔다. 하지만 중화주의를 신주 모시듯 하는 중국으로서는 “하와학설”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국학계에서는 1923년 베이징 남쪽 저우커우뎬[주구점ㆍ周口店]에서 발견된 베이징원인[북경원인 . 北京原人] 즉, 50만 년 전의 호모에렉투스가 중국인의 조상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중국학계의 주장이 힘을 잃어갈 즈음에 랴오둥반도에서 진뉴산인[금우산인ㆍ金牛山人]이 혜성처럼 등장한다. 진뉴산은 1984년 랴오닝성 잉커우셴[영구현ㆍ營口縣] 서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발해만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섬 같은 산(해발 69.3미터)이다. 

 28만 년 전 젊은 여성의 인골이 확인된 랴오닝성 잉커우셴 진뉴산 유적 현장. 

원래 이 동굴은 1940년대에 일본인 학자 시카마 도키오(鹿間時夫)가 처음 조사했고 1974년부터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와 베이징대 고고학계, 그리고 랴오닝성박물관 등이 지속적으로 발굴에 나섰다.

  그러던 1984년 진뉴산 동굴 A지점(높이 13.21미터, 폭 8.8미터)을 발굴하던 베이징대 발굴단이 8번째 층에서 동물화석편과 구석기시대 유물을 비롯해 완전한 형태의 인골화석을 발굴한다. 학자들은 이 인골을 분석한 끝에 28만 년 전에 살았던 20~22세의 젊은 여인이라고 추정했다. 이 진뉴산인이 살았던 시기는 베이징원인시기의 저우커우뎬 제1지점문화와 비슷하다.

 
   ■진뉴산인의 출현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난 1993년부터 1994년 사이에 진뉴산에서는 중국학계를 더욱 흥분시키는 발굴결과가 나왔다. 원시적 형태의 아궁이와 그 주변에서 불에 탄 것으로 보이는 동물뼈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공기가 잘 통해야 불이 잘 일어나잖아요. 공기가 잘 통하도록 돌을 이용해 아궁이를 만든 것 같고 동물을 불에 익혀 먹은 흔적이 보입니다.”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 
   궈다순 랴오닝성문물고고연구소 연구원은 진뉴산인의 두개골과 상지골, 그리고 불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 등을 종합해 진뉴산인이 같은 시기의 베이징원인보다 발달한 인류였다고 보았다. 중국학계는 더 나아가 진뉴산인의 존재를 인류 진화의 큰 과정으로 설명했다. 진뉴산인을 호모에렉투스와 호모사피엔스의 사이 즉, 초기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하는 과도기적 단계를 이끈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중국학계가 “도전 하와학설”이라는 문구를 걸어 놓고 “미토콘드리아 이브”라는 세계학계의 정설에 도전한 이유는 명확하다. 중국문명의 원류는 발해만에서 탄생한 랴오허문명[발해연안문명]이며, 그 랴오허문명의 기원은 28만 년 전 아시아 동북지역에 살았던 진뉴산인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진뉴산인 복원화석이 전시된 랴오닝성 박물관

 중국의 저명한 고인류학자인 자란포[가란파ㆍ賈蘭坡]는 “베이징원인이 살고 있을 당시에 베이징원인보다 진보적인 특징을 가진, 즉 원시 부엌까지 갖춘 진뉴산인이 있었다.”고 하면서 “진뉴산인을 호모에렉투스(直立人ㆍ200만 년 전)와 호모사피엔스(智人ㆍ20만~5만 년 전)의 사이, 즉 초기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하는 과도기적 단계를 이끌었다.”고 평가해 놓고 있다
   한마디로 ‘중화민족’의 원류를 28만 년 전 발해만에서 찾은 것이다.
 「랴오허 문명전」은 또한 약 25만 년 전 인류화석인 먀오허우산인(묘후산인ㆍ廟後山人)에도 주목하고 있다. 먀오허우산은 랴오둥 산간지역인 번시스(본계시ㆍ本溪市)에 있다.  

 

한반도 구석기 유적과 비슷한 것으로 알려진 먀오허우산 유적

  ■진뉴산인의 후예들 
  먀오허우산에서는 직립원인 단계인 견치 화석과 이보다 한 단계 뒤인 고인류의 어금니 화석 등이 확인됐다.
  특히 전시실 설명서에는 먀오허우산인이 화베이(화북ㆍ華北)지구의 커허(암하ㆍ암河)-딩춘(정촌ㆍ丁村) 대석기(大石器) 문화는 물론,「한반도의 구석기 문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해놓고 있다. 한반도와 인접한 랴오둥 반도에서 나온 것이어서 그런 해석을 했다.    또한 랴오시 카줘셴(객좌현ㆍ喀左縣) 다링허(대릉하ㆍ大凌河) 유역에서 확인된 7만 년 전의 거쯔둥(합자동ㆍ합子洞) 유적과, 랴오둥에서 발견된 4만~1만8000년 전의 샤오구산(소고산ㆍ小孤山) 유적도 소개했다. 특히나 샤오구산 유적은 고인류가 아닌 현생인류의 유적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을 끈다. 랴오닝성 박물관은 이렇게 진뉴산인(28만 년 전)과 먀오허우산인(25만 년 전), 거쯔둥인(7만 년 전), 샤오구산인(4만 년 전) 등을 이른바「랴오허 문명전」의 첫번째 전시실로 꾸몄다.
  궈다순은 랴오시 구릉과 랴오둥 산간지역에서 구석기시대 전기ㆍ중기ㆍ후기 유적이 두루 출토되고 있으므로 고인류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발굴자료를 근거로 “아웃 오브 아프리카”학설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10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탈출했다는 현생인류가 아닌, 28만 년 전 고인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만약 중국인들이 진뉴산인을 중국민족의 원류로 본다면 그것은 지나친 민족주의적 시각이며 지나친 중화주의입니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검토하면 고인류와 현생인류 간에는 어떤 유전자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배기동 한양대교수) 

발해연안문명권 주요구석기유적본포도.  

  ■고인류와 현생인류

  고인류는 요즘 사람들의 조상이 될 수 없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진뉴산인이나 먀오허우산인 같은 전기 구석기시대 사람들을 ‘민족의 원류이거나 뿌리’라고 여기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훗날 문명의 젖줄이 된 발해만 유역에서 잇달아 확인되는 구석기시대 유적들에 대해서는 우리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배기동 교수는 “국경이 없던 시절이던 구석기시대인 만큼 발해만을 비롯해 한반도와 만주까지 같은 구석기시대 문화영역이었다.”고 하면서 “우리 학계의 연구도 한반도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발해연안까지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랴오허문명전’ 전시실이 랴오둥 산간지역인 번시스에서 발굴된 직립원인 단계의 먀오허우산인을 설명하면서 “조선반도(한반도)의 구석기시대 문화와 관련성이 있다.”고 구체적으로 표기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먀오허우산 유적의 보고자는 “라오둥 반도와 한반도는 산수(山水)가 연결되었으며, 초기인류문화의 교류 또한 매우 밀접했을 것이므로 지대한 관심을 불어 모으고 있다”고 기록해놓았다. 이 유적에서 나온 석기들이 한반도 임진강변에서 확인된 전곡리 유적에서 발굴된 석기의 제작수법과 같은 계통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전곡리 유적을 전기구석기 시대(약 27만 년 전)로 판정한 데스몬드 클라크 교수. 그 옆은 고(故) 김원룡 교수.  

 

 ■전곡리인의 출생 

 사실 베이징원인과 진뉴산인이 살았을 무렵, 한반도 전곡리전곡리 현무암지대와, 퇴적층에서 확인된 일본 기카이 투주라 화산에서 분출된 화산재에 대한 연대측정 결과 전곡리 유적이 처음 생성된 것은 35만 년 전으로 드러났다.
  같은 곳에서도 고인류는 살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평양 검은모루동굴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의 인류화석(룡곡인)이 나온 것을 비롯해, 이미 70곳이 넘는 구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됐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봤듯이 발해만 유역을 비롯한 만주 일대에서도 10곳이 넘는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형구 교수는 “예컨대 룡곡 1호 동굴유적의 경우 구석기시대는 물론 신석기시대 인류화석도 나왔다.”고 하면서 “이것은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까지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살았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1만년 전쯤까지 한반도에 살다가 물러나고 북방에서 내려온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른바 ‘북방전래설’ 같은 학설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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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빼미란 새가 있다.

   너무 귀해서 천연기념물(제324-1호)로 대접받고 있는 야행성 맹금류다.
 그렇지만 고금을 통틀어 올빼미는 ‘불인(不仁)과 악인(惡人)’의 상징으로 치부돼왔다. 예로부터 어미를 잡아먹는 흉악한 새로 악명을 떨쳤다. 그 연원은 3000년 전으로 올라간다. 기원전 1043년 무렵, 주나라 창업공신인 주공(周公)은 어린 조카인 성왕을 도와 섭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공의 형제들인 관숙과 채숙이 가만있지 않았다. 주공의 독주를 질시한 것이다. 그들은 “삼촌(주공)이 조카(성왕)의 나라를 집어 삼킬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어린 성왕도 유언비어를 믿었다.
 그러자 주공은 성왕에게 왕실의 위기를 경고하는 시를 전했다.
 “올빼미야! 올빼미야! 이미 내 자식을 잡아먹었으니 내 집까지 헐지마라.(치梟치梟 旣取我子 無毁我室)”(<시경> ‘반풍·치효’)  
 이후 올빼미는 아비를 잡아먹는다는 맹수(경)과 함께 ‘효경’이라는 고사로 ‘아비 어미를 잡아먹는 아주 불경스런’ 동물로 즐겨 인용됐다.(<한서> ‘교사지상·주’)  

예로부터 올빼미는 어미 잡아먹는 아주 나쁜 새로 인식돼왔다. 야밤에 아이울음 같은 소리를 내서 그런지 흉조 중 흉조로 인식됐던 것 같다. 

 

 ■올빼미 혐오증
 올빼미 혐오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한나라 조정은 해마다 5월5일이 되면 ‘올빼미국(梟羹)’을 끓여 백관(百官)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악조(惡鳥)인 올빼미를 먹어서라도 깡그리 없애야 한다는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고금사문류취전집> 권9) 오죽했으면 올빼미와 비슷한 ‘수리부엉이(복鳥)’까지도 재수없는 새로 인식됐을까.
 예를 들어 한나라 문제 때 문인인 가의는 모함을 받고 장사왕 태부로 좌천돼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집에 올빼미 한마리가 날아오는 게 아닌가. 가의(賈誼·기원전 200~168)는 그 모습을 보고 절망에 빠졌다. 가뜩이나 장사 지방에 습도가 높아 수명이 길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려했던 터였다. 그런 마당에 ‘죽음의 상징’인 올빼미가 자신이 앉았던 의자로 날아온 것이다. 죽음을 직감한 가의는 ‘복조부(복鳥賦)’를 지었다.
 “복조(올빼미의 한 종류)가 내 집에 모였다. 들새가 왔으니 주인이 장차 떠나려 하는구나.(복集余舍 野鳥入室 主人將去)”
 과연 가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사기> ‘가생열전’)
 또 토란을 일컫는 별명으로 ‘준치(준치)’가 있다. 그 모양이 마치 올빼미가 웅크리고 앉은 것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신라 문장가 최치원은 중앙의 감시를 받을 수 없는 먼 변방에서 몰래 부를 축적하는 무리들을 두고 마치 웅크리고 앉은 올빼미처럼 치부한다고 해서 준치라는 비유를 쓰기도 했다.(<계원필경>)  

 

 ■황소·견훤·허균의 공통점은 ‘올빼미’

 올빼미는 나라의 망조를 알릴 때 인용됐다. 예컨대 고려의 망국이 눈앞에 있던 1389년(공양왕 원년) <고려사절요>를 보면 “공민왕에 이르러 아들이 없어 고려의 국운이 중간에 뚝 끊겼다”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우왕이 제사를 지닐 때 올빼미가 태실(太室· 종묘에 태조의 신주를 모신 방)에서 우니 천지가 진동했다.”
 곧 고려의 종묘사직이 망한다는 뜻이었다.
 ‘올빼미’는 이처럼 단순한 흉조가 아니었다. 흔히 부모를 해치고 반역을 도모한 강상죄인을 ‘올빼미’라 욕했으니까.
 예컨대 최치원은 881년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으면서 반란을 일으킨 황소를 이렇게 표현했다.
 “너는 독을 품고 올빼미 소리를 거두지 않은 채, 걸핏하면 사람을 물어뜯고 오직 주인에게 대들며 짖어 대는 일만 계속하였다. 그러고는 끝내 임금을 배반하는 몸이 되어….”(<계원필경> 제11권 ‘격서’)
 고려의 창업주 왕건은 견훤에게 같은 표현을 썼다.(928년)
 “족하(견훤)는 임금(신라 경애왕)을 죽이고…. 그 불인(不仁)함이 올빼미 보다 심했소.”(<고려사절요>)
 또 광해군은 허균을 역모죄로 능지처참한 뒤 허균을 “성질이 올빼미와 승냥이 같고 행동이 개와 돼지 같았다”고 극언했다.(<광해조일기>)

 

 ■올빼미는 소인배, 봉황은 군자
 올빼미와 반대의 의미를 가진 새는 봉황이었다. 올빼미는 소인배, 봉황은 군자를 의미했다. 예컨대 이미 언급한 한나라의 가의는 난새(鸞鳥·상상의 길조)와 봉황을 선인과 군자로, 치효(치梟·올빼미)를 소인과 악인로 각각 비유했다. 가의는 전국시대 초나라 애국시인인 굴원을 애도하는 글(‘弔屈原文’)을 지었다.
 “난봉이 숨었으며, 치효가 높이 날도다.(鸞鳳伏竄兮 치梟고翔)”
 군자는 쫓겨나고 소인배가 득세한 초나라의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봉황론, 올빼미론’이 가장 뜨겁게 부딪친 사례가 있다. 서계 박세당이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올빼미’라 하고, 백헌 이경석을 ‘봉황’이라 칭했을 때였다. 박세당은 이경석의 신도비문을 찬술하면서 이렇게 쓴다.
 “함부로 거짓말을 하고 멋대로 속이는 것은(恣僞肆誕) 어느 세상에나 이름난 사람이 있는 법(世有聞人)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梟鳳殊性)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했네.(載怒載嗔)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不善者惡) 군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君子何病)” 

서계 박세당의 고택. 박세당은 송시열을 올빼미라 칭함으로써 엄청난 논쟁에 휩싸인다. 

이 무슨 뜻인가. 송시열은 병자호란 직후 삼전도비문을 쓴 이경석을 비난한 적이 있다.(1668년) ‘오랑캐에 아부해서 한평생 오래 살았다’는 뜻의 ‘수이강(壽而康)’이라고 표현한 것이다.(1668년)
 박세당은 바로 그 송시열의 비난을 두고 ‘군자(봉황·이경석)를 비난하는 소인배(올빼미)의 짓’이라 폄훼한 것이다. 그러니까 박세당은 이경석을 ‘노성인(老成人)’으로, 송시열을 그런 노성인을 업신여기고 보복하는 ‘불상인(不祥人)’으로 치부한 것이다. 이 사건은 무시무시한 파국으로 끝난다.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의 파상공세에 박세당의 소론측은 완패를 당했다. 박세당이 사서삼경을 주석한 <사변록>은 사문난적으로 지목됐다. 그의 저작물은 모두 불구덩이에 던져진다. 함부로 ‘올빼미’라는 표현을 쓰면 안되겠다.

   홍용표 통일부장관이 그제 ‘대북 매파냐’ ‘비둘기파냐’는 질문에 ‘올빼미 정도로 생각해달라’고 한 모양이다.
 ‘비둘기나 매’와 같은 극단보다는 균형감각을 갖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고금을 통틀어 온갖 흉악한 이야기를 담아온 ‘올빼미’가 아닌가. 아무리봐도 ‘올빼미와 균형감각’은 맞지않은 비유인 것 같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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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디씨를 보니 놀랍고, 역겹다. 탁발승 모습으로 총독 관저의 계단 위를 반나체로 올라가는 꼴이라니….”
 윈스턴 처칠은 1930년대 초 비폭력 자치·독립 운동을 펼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를 입버릇처럼 ‘반나체의 거렁뱅이’로 표현하며 증오했다. 그는 ‘불멸의 대영제국’을 외쳤던 제국주의자로서 ‘영국의 나치’로까지 일컬어지던 극우파였다. 이 때문에 영국이 유럽보다도 큰 대륙의 3억 인구를 통치해온 그 엄청난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처칠은 당시 영국 내의 ‘인도 자치’ 움직임에 분노했고,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이고 있던 간디에게 극도의 분노감을 표한 것이다. 심지어 단식투쟁을 펼치던 간디를 향해 “굶어죽었으면 좋겠다”는 악담을 퍼부었단다. 처칠에게 간디는 ‘악의 축’이었던 것이다. 당시 인도 총독이었던 에드워드 어윈 경은 “처칠의 태도는 시대착오적이다. 영국 식민지 사람들이 상실감 속에서 살아가는 시대는 지났다”고 꼬집었다. 처칠의 지독한 백인우월주의는 악명이 높았다. 예컨대 그는 “앵글로 색슨족이 우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면서 “(식민차관 시절) 인도인이 백인과 동등하게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처칠의 악담에 간디는 “나의 육체를 깔아뭉갤 수는 있지만 영혼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의연한 반응을 보였다. 죽기 전에도 간디는 “나를 험담한 사람에게 결코 분노심을 갖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기도 했다.
 지난 14일 영국 런던 템스 강변의 의회 광장에서 마하트마 간디의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생전에 그토록 간디와 인도의 독립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던 처칠의 동상도 그 광장 한편에 서있다고 한다. “간디에게 ‘런던의 영원한 집’을 선물한다”고 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의 축사가 심금을 울린다. ‘인도의 기업을 끌어들이려는 정치적 의도’라며 의미를 축소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 해도 침략의 역사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일본을 생각해보라.
 일본 땅에 ‘유관순 동상’이 서는 날…. 그런 날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너 자신부터 변하라’는 간디의 가르침을 일본인들에게 바꿔 전하고 싶다. ‘역사를 바꾸고 싶다면 일본 스스로 변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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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재(弘齋)’ ‘탕탕평평평평탕탕(蕩蕩平平平平蕩蕩)’ ‘만기(萬機)’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정조가 자신의 저작물에 찍은 장서인(인장) 71종을 분석한 논문을 보라.(김영진·박철상·백승호의 ‘정조의 장서인’, <규장각> 45집,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백성을 대하는 임금의 자세가 절절이 묻어난다.

정조가 즐겨 사용한 장서인 가운데 '만기' 인장이 눈에 띈다. 정조의 만기친람은 유명했다. 심지어 "'깨알지시'를 내리지 말아달라" "건강 좀 챙기라"는 대신들의 부르짖음에 정조는 "보고서 보는게 취미인데 어떡하냐"고 반문하기도 했다.|김영진 외의 '정조의 장서인', <규장각> 45집에서 

   ■침실 이름이 '탕탕평평실'

 우선 ‘홍재’는 “뜻을 크게(弘) 가져라”는 증자의 가르침을 새긴 것이다. 

   "증자는 말했다. ‘선비는 뜻이 크고 굳세지 않으면 안된다. 임무가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정(仁政)의 실현을 임무로 여기고 있으니 얼마나 무겁고, 죽은 뒤에야 그만 둘 수 있으니 얼마나 먼 길이겠는가."(<논어> ‘태백’)  
   백성을 보살펴야 하는 임금은 세상을 크고 넓게 바라봐야 한다는 뜻에서 ‘홍재’ 인장을 애용한 것이다.

  ‘만천명월주인옹’은 무슨 뜻인가.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물(만천)이 있지만 달(군주)은 그 형태에 따라 똑같이 비춘다는 것이다. 즉 세상의 주인인 군주는 백성의 다양한 능력을 골고루 활용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또 자신의 침전 이름을 ‘탕탕평평실’로까지 지은 정조였다. 그랬으니 ‘탕탕평평평평탕탕’ 인장도 즐겨 사용했으리라.
 ‘탕탕평평’은 “붕당과 편파가 없으면 왕도(王道)가 탕탕하고, 평평하다”(<서경> ‘주서·홍범’)는 옛말에서 나왔다.
 정조는 ‘정구팔황 호월일가(庭衢八荒 胡越一家)’라는 글자까지 침전 벽에 걸었다. ‘변방도, 오랑캐도 앞뜨락이나 한 집안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지역이나 당색에 따른 차별은 절대 없음을 잠자리에서까지 되새긴 것이다.  

정조의 장서인 가운데 '탕탕평평평평탕탕' 인장도 눈에 띈다. 정조는 '탕탕평평', '정구팔황' 등

인재를 골고루 등용한다는 방침을 새긴 글귀를 금과옥조로 삼았다. 

   ■만기친람의 주인공

  정조의 애용 장서인 가운데 ‘만기’ 인장이 눈에 띈다. ‘만기’란 무엇인가. 예로부터 “천자(군주)는 하루에 만가지 일을 처리한다”고 해서 ‘일일만기(一日萬機)’라 했다.(<서경> ‘고요모’) 만기친람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그런데 아무리 천명을 받은 몸이기로소니 하루에 만가지 일을 어떻게 하는가. 정조가 바로 만기친람의 주인공이었고, 시쳇말로 일중독증환자(워커홀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컨대 1781년(정조 5년) 규장각 제학 김종수는 정조에게 “작은 일까지 너무 세세하게 챙기시며 정작 큰 일을 소홀하기 쉽다”고 꼬집는다. 정조의 만기친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동의하지 않는다.
 “작은 것을 거쳐 큰 것으로 나가는 법이다. 그것이 과인이 작은 것이나 살핀다는 지적을 받으면서도 눈 앞에 닥친 일부터 해나가려는 이유인 것이다.”
 정사를 처리하고 책을 읽느라 밤을 꼴딱 지새우기 일쑤였다. 정조와 심환지가 나눈 편지를 보라.
 “(바빠서) 눈코 뜰새 없으니 괴롭고 괴로운 일이라.”(眼鼻莫開 苦事苦事·1797년 12월26일)
 “백성과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도느라 날마다 늙고 지쳐간다.(而民憂薰心 朝家關念 夜夜繞榻 日覺衰憊·1799년 1월20일)
 1784년(정조 8년) 도제조 서명선이 “제발 건강 좀 챙기시라”고 걱정하자 정조의 대꾸가 걸작이었다.
 “정신 좀 차리고 보니 국사가 많이 지체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보는 것이네.(不得不親覽矣) 그리고 나는 원체 업무 보고서 읽는 것을 좋아하네. 그러면 아픈 것도 잊을 수 있지.” 

 ‘만천명월주인옹’ 장서인.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물(만천)이 있지만 달(군주)은 그 형태에 따라 똑같이 비춘다는 것이다. 즉 세상의 주인인 군주는 백성의 다양한 능력을 골고루 활용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불멸의 뉴스메이커

   업무 보고서를 좋아하고, 그것을 읽으면 아픈 것도 잊는다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랬으니 ‘만기친람은 임금의 숙명’이라고 여겨 ‘만기’ 혹은 ‘일일이일만기’ 등의 인장을 즐겨 사용했을 것이다.
 정조의 장서인 가운데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이른바 ‘독서유삼도안도구도심도(讀書有三到 心到眼到口到)’라는 긴 단어의 인장이다. 무슨 뜻인가. 독서를 함에 있어 삼도(三到)가 있는데, 눈과 입과 마음을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는 소리다. 이것은 주자가 말한 ‘독서법’에 나오는 말이다.(<주자독서법> 권 1 ‘강령’)
 “내(주자)가 일찍이 독서에 삼도(三到·세가지 도달하는 법)가 있다고 했다. 심도(心到), 안도(眼到), 구도(口到)가 그것이다. 마음이 가지 않으면 눈으로 봐도 이해하기 어렵고, 마음과 눈을 집중하지 않으면 소리를 내어 읽어도 기억하기 어렵다. 세가지 가운데 ‘심도’가 가장 중요하다. 마음이 도달하면 눈과 입은 자연스레 도달하게 된다.

   그러고보니 정조는 그가 사용한 도장까지 화제가 될만큼 불멸의 뉴스메이커인 것 같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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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 ‘흔적의 역사’ 팟 캐스트의 주제는 ‘고려·조선을 뒤흔든 사교육 열풍’입니다.
 지난 주 살펴봤듯 이 나라 사람들의 교육열은 지독합니다. 이미 1200년 전에 남의 나라(당나라) 땅에서 신라와 발해인들이 내가 잘났니, 네가 잘났니 하는 등 서로의 우열을 다투는 볼썽 사나운 작태까지 연출하지 않았습니까. 역사에 길이 남을 문장가라는 최치원까지 가세했다니 말입니다.
 고려 조선에 들어와서도 더했으면 했지, 덜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고려시대 때는 12개 명문사학들이 과거시험에 자기 학생들을 합격시키느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답니다. 최충의 문헌공도 등은 해마다 여름철이 되면 유명한 사찰을 빌려 학생들을 50일 간이나 합숙시켰답니다. 그래놓고는 졸업생 가운데 뛰어난 선배들을 특별 강사로 초청해서 이른바 족집게 과외를 시키고, 과거시험대비용 모의고사를 치렀답니다.  
 그것도 모자라 사교육 열풍에도 빠졌습니다. 명문 중 명문인 문헌공도 학생이었던 이규보는 개인과외선생까지 모셔 과거를 준비했답니다. 고려말 충렬왕 때 지금의 사설학원과 같은 서당을 차렸던 강경룡은 고려·조선을 통틀어 최고의 스타강사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충렬왕 때 치른 과거시험에서 그 학원 출신 10명이 한꺼번에 합격했다니 말입니다.
 강경룡은 이 덕분에 국왕으로부터 상급을 받았고, 그의 명성은 조선조 세종 임금대까지 이어집니다.
 강경룡 뿐 아니라 고려와 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이름을 날린 강사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부터 고려와 조선을 뒤흔든 사교육 열풍과, 그 열풍 속에서 명멸한 스타강사 이야기를 합니다.(다음은 관련기사입니다.)
 

  “이 노인은 비록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을 가르치는데 게을리하지 않아 제자들을 성공으로 이끌었구나. 어찌 공이 적다 하겠는가.”(<고려사절요>)
 1305년(고려 충렬왕 31년)의 일이다. 충렬왕이 유생 강경룡을 치하하고 곡식을 하사했다. 대체 벼슬도 하지 않은 강경룡이 무슨 공을 세웠다는 걸까.
 <고려사절요>와 <역옹패설>은 물론 조선의 정사인 <세종실록> 등에도 그 연유가 나온다.
 “강경룡이 집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그 해(1305년) 실시된 국자감시(생원·진사시)에서 강경룡의 제자 10명이 모두 합격했다. 스승(강경룡)의 집에 합격한 제자들이 몰려가 스승을 뵈었는데, 그 떠들썩한 소리가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다. 마침 강경룡의 동네에 익양후 왕분(종친·고려 신종의 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단원 김홍도의 <평생도병> 중 ‘삼일유가’ 장면.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이가 어사화를 꽂은채 3일간 거리를 돌아다니며 축하행사를 치르는 모습을 담았다. |국립중앙박물관

 

 .
 ■‘강경룡 과거학원’
 요컨대 강경룡이라는 사람의 사립학교(혹은 사설학원)에서 공부한 10명이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는 소리다. 그래서 합격자들이 스승에게 몰려가 온 동네가 밤새도록 들썩거렸다는 이야기다.
 강경룡과 같은 동네에 살던 익양후가 그 소리를 듣고 다음 날 충렬왕에게 전하자 충렬왕이 칙명을 내려 치하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왕조가 바뀌었는데도, 강경룡은 ‘모범사례’로 칭송의 대상이 됐다는 사실이다.
 “1436년(세종 18년), 지성균판사 허조가 임금에게 아룄다. 고려 충렬왕이~강경룡을 포창한 일이 있사온데…. 지금은 유생 유사덕과 박호생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 서재를 차려놓고 수십명의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들을 <육전(六典)>에 따라 특별히 포상하신다면….”
 허조는 “서재(書齋)를 설치, 학생들을 가르친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이 법전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했다.
 “고려 시대부터 한량·유사들이 사사로이 서재를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조(조선)에 와서도 서울엔 국학(성균관 및 4부학당), 지방엔 향교를 각각 두었지만 사사로운 서재를 만드는 법을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허조는 국가의 힘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립학교를 장려하자는 취지의 상소를 올린 것이다. 세종도 허조의 말을 좇아 유사덕과 박호생 등이 세운 ‘모범 사학(혹은 학원)’을 표창했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께서 ‘사교육’을 장려하고 있다니….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예나 지금이나 공교육의 한계와 붕괴를 웅변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사교육의 시조는 경당
 돌이켜보면 우리 사(학)교육의 시조는 고구려 경당(경堂)이 아니었나 싶다.
 “가난한 마을 미천한 집안까지도 힘써 배우기를 좋아해 길거리마다 큼직한 집을 지어 경당이라 했다. 결혼하지 않은 자제들을 이곳에 보내 글을 외우게 하고 활쏘기를 익히게 했다.”(<신당서> ‘고구려전’>)
 또 원효대사의 아들인 신라의 설총(617~686)도 “‘구경(九經·유교 9가지 경전)’을 이두로 풀어 제자들을 가르쳤으므로 지금까지 학자들이 종주로 삼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풍조는 고려에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는 마을마다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2~3곳이 있고, 미혼의 자제들이 무리를 지어 경서를 배웠다.”(<고려도경>)
 ‘마을의 경관과 서사’란 사학 혹은 학원의 형태로 운영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와 조선, 양대에 걸쳐 ‘명문의 사표’로 추앙받은 강경룡의 ‘개인학교’는 과연 고려조정의 정식인가를 받은 ‘사립학교’였을까, 아니면 그냥 ‘사설학원’이었을까.
 <고려사절요> 등의 기록을 보면 제도적으로 인정받은 정식사학이라기 보다는 ‘사설학원’ 쪽이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설령 사립학교였다 해도, 지금의 대안학교 쯤 됐을까.  
 사실 고려의 대표적인 국립학교는 992년(성종 11년) 창설된 국자감이었다. 국자감은 인종 때 국자학·태학·사문학·율학·서학·산학 등 경학(京師·6학)으로 정비됐다.
 그런데 국자학은 3품 이상, 태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의 관리 자제들에게만 입학이 허용됐다. 그러니 지위는 좀 낮지만 머리가 좋은 가문의 자제들은 사학의 문을 두드렸다. 그 뿐이 아니라 엘리트 졸업생의 족집게 과외를 받는 사학의 과거합격률이 좋았기 때문에 명문사학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름을 잘라낸 뒤 채점한 조선시대 과거답안지. 과거 합격만이 출세의 유일한 길이었던 고려 조선시대 선비들의 고투가 담겨있다.

 ■고려의 12대 명문사학
 고려 전통의 명문사학은 아마도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이후 개경에 존재했던 ‘십이공도(十二公徒)’일 것이다. 지금의 특목고라 할 수 있는 사학 12학교는 다음과 같다.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 정배걸의 홍문공도(弘文公徒), 노단의 광헌공도(匡憲公徒), 김상빈의 남산공도(南山公徒), 김무체의 서원도(西園徒), 은정의 문충공도(文忠公徒), 김의진의 양신공도(良愼公徒), 황영의 정경공도(貞敬公徒), 유감의 충평공도(忠平公徒), 문정의 정헌공도(貞憲公徒), 서석의 서시랑도(徐侍郞徒), 실명씨(失名氏)의 귀산도(龜山徒)….”(<고려사> ‘선거지·사학’)
 그 가운데서도 명문 중의 명문은 해동공자 최충의 ‘문헌공도’였다.
 “문종 때 태자 중서령 최충이 후진을 모아 가르쳤는데, 양반의 자제들이 최충의 집에 문전성시를 이뤘다. 배우려는 제자들이 차고 넘쳐 9재로 나눴다. 낙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덕(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 등이다. 이를 ‘시중 최공도’라 했다. 양반자제 가운데 무릇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는 반드시 이 공도에 속해 공부했다.”(<고려사> ‘선거지·사학’)
 오죽 줄을 섰으면 9반으로 분반해서 학생들을 모집했을까. 다른 ‘11공도’는 모두 최충의 문헌공도를 ‘벤치마킹’해서 설립한 사학들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를 보려는 학생은 반드시 최충의 학교에 입학해야 했다”는 것이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려면 명문 ‘문헌공도’에 입학해야 했으니…. 예나 지금이나 못말리는 ‘일류병’은 어찌 그렇게 똑같은지….
 하기야 과거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사람구실을 하지 못하는 세상이었으니 무슨 할 말이 있을까. 1481년(성종 12년) 성균관 진사 이적의 한마디가 폐부를 찌른다.
 “어진 이를 구하는 방법으로 오로지 과거에만 의존합니다. 과거로 출세하지 아니하면 비재(非才)라고 일컬어 지목하고 으레 속리(俗吏)로서 대우합니다.”(<성종실록>) 


  ■문헌공도의 족집게 과외
 과거시험을 위한 ‘문헌공도’의 집중교육은 극성맞았다. <고려사> ‘열전·최충전’에 기록된 문헌공도의 ‘특별과외’를 한번 들춰보자.
 “해마다 여름철엔 귀법사의 승방을 빌려 (50일 동안) 하과(夏課), 즉 ‘여름철 특별과외’에 임했다. 졸업생 가운데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했지만 아직 벼슬하지 않은 자를 교도(敎導·강사)로 삼아 구경(九經·9개 유교경전)과 삼사(三史·사기, 한서, 후한서)를 가르쳤다. 간혹 촛불에 금을 그어 시간을 정하고 시를 짓게 하여 글의 등급에 따라 등수를 정했다. 그런 다음 작은 술자리를 베풀어 하루종일 술잔을 돌렸다. 이를 두고 아름답게 여기고 찬탄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 무슨 말인가. 여름철마다 개경 송악산 아래의 국찰 귀법사에 ‘특별과외장’을 마련했다는 것. 그런 다음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모교 졸업생을 특별강사로 초빙해 후배들에게 ‘특별과외’를 시켰다는 것.
 “하과는 과거에 대비하여 시와 부를 익히는 공부”(<동국이상국집> ‘후집 권 7 고율시’)였다는 이규보의 언급처럼 ‘하과’는 과거시험 대비용 ‘족집게 과외’였던 것이다.
 ‘족집게 과외’의 백미는 ‘각촉부시(刻燭賦詩)’, 즉 ‘촛불에 눈금을 그어놓고 그곳까지 타들어갈 때까지 시를 짓는 시험’이었다. 이를 ‘급작(急作)’이라 했는데, 이 급작의 성적에 따라 차례로 술잔을 돌렸다는 것이다. 이 ‘급작’이야말로 지금으로 치면 ‘수능대비 족집게 모의고사’였던 셈이 아닐까. 갓 급제한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출제경향과 예상문제, 그리고 답안지 작성요령을 전수해준 것이다.

 

 ■국립학교에까지 퍼진 과외열풍
 이렇듯 최충의 ‘문헌공도’에서 시작된 ‘하과’, 즉 명문사학들의 여름철 특별과외는 ‘유별한 교육붐’을 타고 요원의 불길처럼 퍼졌다.
 “12공도의 관동들이 해마다 여름철이면 산림에 모여 학업을 입히다가 가을이 되면 파했다. 용흥사와 귀법사 두 절에 많이 머물렀다.”(<보한집>) 
 “12도마다 재를 설치하고 문도가 많건 적건 상관없이 늘 여름철에 한차례씩 과업을 익혔고, 그것을 ‘하천도회’라 했다.”(<동국이상국집> ‘후집 권7 고율시’)
 공교육의 장인 국립학교에도 ‘하과’가 퍼졌다. 예컨대 고려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은 16~17살 때 국자감이 실시한 두 번의 구재도회(九齋都會)에서 무려 24~25회의 장원을 차지했다.(<목은집>)
 <제왕운기>를 쓴 이승휴도 1240년(고종 27년) 중원(충주)의 서기였던 원부가 120여 명의 유생들을 모아 실시한 하과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의 나이 17살 때였다.
 ‘하과’는 그나마 사학이든 관학이든 학교의 테두리 안에서 실시한 공식 과외수업이라 할 수 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고려의 최고명문 사학인 문헌공도 출신인 이규보는 과거를 앞두고 개인과외수업까지 받았음을 기록했다. 그는 아들에게까지 유명과외선생을 붙였음을 밝히고 있다. 

 ■특별과외에 개인교습까지
 지금 이 순간도 골칫거리라 할 수 있는 ‘개인과외’가 고려~조선을 통틀어 유행했다.
 14살 때 최고명문 사학인 문헌공도에 입학한 이규보의 경우를 보자. 아버지(이윤수)의 교육열은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문헌공도의 성명재에 입학시킨 지 2년만인 1183년 봄, 수주(수원) 수령으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규보를 개경에 남겨놓고 임지로 나섰다. 5월 실시될 예정인 국자감시(생원·진사시) 때문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아들의 합격을 위해 개인과외 선생까지 붙였다. 이규보가 ‘이 이부라는 이에게 드린다’는 고율시를 보자.
 “공(이 이부)이 집에서 매양 관동(冠童·어른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쳤는데, 나도 어릴 때 참여했다. 그 때 선생의 지위로 모셨고….”(<동국이상국집> ‘전집 권 8 고율시’)
 이규보가 ‘1183년 과거’에 대비, 이 아무개라는 사람에게 개인과외를 받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규보 가문의 ‘사교육’이 이규보의 셋째아들(이징)에게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규보의 고율시(‘신 대장에게 내 아들 징을 가르치는 데 사례함’)을 보자.
 “내 자식 우둔함을 혐의치 않고, 갈고 다듬어 옥 만들기를 기약하는데 그대의 후의를 무엇으로 갚을까.”

 

 ■유명학원강사를 찾는 풍토
 이규보는 이 시를 쓰면서 “신 대장은 나이 80여 살인데 항상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는 각주를 달았다. “셋째 아들 징이 썩은 나무 같아 새길 수 없다”면서 신 아무개라는 과외선생에게 아들을 맡긴 것이다.
 “동몽(어린 학생들)이 배우기를 청하면 거절하지 않으니 학생들이 모여 글방(서숙·書塾)을 이뤘네.”
 이규보의 시를 보면 신 대장이라는 사람은 여든살이 넘도록 글방을 차려놓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전문학원 강사였음을 알 수 있다.
 당대 최고의 유명 강사가 또 있었다. 진(晉) 수재(秀才·생원)라는 사람이었다.
 “눈빛 같은 창문에 아침해 비치니/온갖 서적 차례로 다 읽을 수 있지/모든 선비 물고기 떼처럼 모여들어/공부에 뜻을 품고 이곳을 서숙으로 삼는구나.”(이규보의 ‘진 수재(晉秀才)의 별장에 써서 붙이다’)
 이규보는 역시 제목 아래 ‘진 아무개 생원(수재)이 학생들을 모아 학업을 가르쳤다’는 주를 달았다. 이 진 수재야말로 고려시대를 주름잡은 유명강사였던 것이다.
 사실 그 때나 지금이나 공교육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분명 비정상적이었다.
 1389년(공양왕 1년) 조준은 “공교육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요지의 상소문을 올린다.(<고려사절요>)
 “학교는 교화와 풍속의 근원인데…. 요사이 군역을 피하려는 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모아 ‘하과’를 핑계로 당·송의 절구를 50일 간이나 읽고 있는데, 수령들도 이를 보고 전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근실하고 학식이 넓은 사람을 교수관으로 삼아 파견하고, 마필과 접대를 모두 향교에 맡기고 유학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고을의 교수로 삼고….” 

고종이 과거급제자에게 내린 교지와 어사화.

 ■고려·조선의 공교육 붕괴 
 하지만 붕괴된 공교육은 왕조가 바뀌어도 회복되기 어려웠다.
 조선 초부터 ‘열공’하는 학생들의 글읽는 소리로 시끄러워야 할 성균관이 텅텅 비었다니 유구무언이지 않은가.
 1417년(태종 17년), <태종실록>은 예조가 마련한 과거시험 규정을 열거하면서 성균관의 열악한 환경을 지적했다.
 “서울의 호세 자제(豪勢子弟)들이 생원시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있은 지 얼마 안되어 그 거처(居處)와 음식이 제 뜻에 적합하지 못함을 꺼려 했다.…왕왕 풍습병(風濕病)을 얻게 되는 까닭에 사람들이 싫어했다. 성균관에 거처하며 공부하는 자는 늘 30~40명 미만이었다.”
 태종은 온돌방을 재(齋·기숙사) 한 모퉁이에 지어, 병자들의 휴양소로 활용하고 의원 두 명을 상주시켰다. 그러나 “갈 곳 없는 늙고 병든 사람들을 성균관 교관(선생)으로 발령내는 형국”(중종의 언급)이었으니 오죽했으랴. 1429년(세종 11년) 사간 유맹문의 상소를 보면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세종실록>)
 “학교의 흥폐는 사도의 명암에 달려있는데…. 나이 많은 유생들을 교도(선생)로 삼으니…. 심지어는 ‘해(亥)와 시(豕)’, ‘노(魯)와 어(魚)’의 글자를 구별할 줄 모르는 자들이 선생이라 합니다.”
 그야말로 무식하고 늙은 사람들이 선생이라 칭하니 한심하다는 것이었다. 
 1527년(중종 22년) 지사 김극핍의 상소도 의미심장하다. 관학(성균관) 교수들이 너무 자주 바뀌는 폐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유생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선생 한사람의 기르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학부형들은 관학에서는 공부가 안된다고 해서 여염의 잘 가르치는 개인선생에게 과외수업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래서야….”(<중종실록>)
 한마디로 공교육은 선생들은 믿을 수 없으니 실력있는 과외선생을 찾는 것이 당대의 유행이라 하지 않은가. 골백번 세월이 지나도 다를 바 없는 교육부재의 현장이 아닌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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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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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
 얼마 전 서울고법 형사 6부 김상환 부장판사가 국정원의 대선개입의혹 사건 항소심에서 매우 흥미로운 판결문을 썼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실형을 선고하면서 유명한 ‘자왈(子曰·공자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즉 <논어> ‘위정’에 나오는 ‘공호이단 사해야이’, 즉 ‘나와 다른 쪽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배척한다면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꼬집은 것이다. 김 판사는 이어 “이단(異端)에 대한 공격과 강요가 결국 심각한 갈등과 분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라고 했다.

세상을 등진채 밭을 갈고 있는 은자에게 길을 묻는 공자와 제자들을 그린 그림. 공자는 끊임없이 세상에서 쓰임받기를 원했다. 도가는 그런 공자에게 세상의 미련을 끊으리고 했다.

 ■어느 판결
 그런데 말이다.
 김상환 판사가 인용한 ‘공자님 말씀’은 시대 상황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견강부회되었던 논쟁의 ‘자왈(子曰)’이다.
 아주 단순하게 보자면 ‘공(攻)’자를 공격이나 비판의 의미로 해석하느냐, 아니면 전공하고 힘쓴다는 뜻으로 쓰느냐에 따라 완전히 상반되는 의미를 전하기 때문이다. 또 ‘이(已)’자를 ‘…일 뿐이다’의 의미로 볼 지, 아니면 ‘그치다(已)’의 뜻으로 볼 지도 논쟁적이다.  
 그러니 ‘공호이단 사해야이’의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먼저 김상환 판사의 인용대로 ‘이단을 공격하면(攻) 해로울 뿐(已)’이라는 해석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해석에 따라서는 ‘이단을 공격하면(攻) 해로움이 그친다(已)’고도 할 수 있으며, ‘이단을 전공(攻)하면 해로울 뿐(已)’이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같은 공자님의 말씀을 두고 이 무슨 헷갈리는 해석이란 말인가.

 

 ■攻은 공격인가, 전공인가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김상환 판사가 인용한 ‘공자님 말씀’의 해석은 고금의 역사에서는 ‘소수 의견’이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다수 의견’은 ‘이단을 전공하면 해로울 뿐’이라는 주자의 주석(주자의 <논어집주>)을 따른다.
 중국 송대의 유학자이자 주자학을 집대성란 주자(1130~1200)의 주석이다. 그러니 어느 누가 쉽게 토를 달을 수 있었을까. 주자는 우선 북송의 학자 범조우(1041~1098)의 ‘공(攻)은 전공한다는 뜻’이라는 해석이 맞다고 찬성했다.
 즉 <주례> ‘고공기’에 “나무 다루기를 전공하는 공인과 쇠다루기를 전공하는 공인이 있다.(有攻木之工 攻金之工)”는 구절이 있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공(攻)이 바로 ‘전공’, 혹은 ‘전념’의 뜻이라는 것이다.
 주자는 이어 “이단(異端)은 성인의 도(道)가 아닌 양주와 묵적 같은 것”이라 했다. 양주(기원전 395~335)와 묵적(기원전 480~390)이 누구인가. 양주는 개인주의(이기주의), 묵적은 겸애주의(이타주의)를 주장한 제자백가였다.
 맹자는 이를 두고 “양주는 부모를 업신여기고(無夫), 묵적은 임금을 도외시한다(無君)”면서 “양주·묵적을 배격해야 성인이 되는 것”이라 한 바 있다.

송시열, ‘주자명언(朱子名言)’,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것은 오직 일직(一直)이란 글자일 따름이다’이라는 내용이다. |셩균관대 박물관 소장

 ■이단의 실체는
 주자는 바로 “이렇게 무부·무군의 지경에 이르게 한 양주·묵적을 ‘전적으로 연구하고 정밀히 알고자’(攻)하는 것은 극심한 해(害)가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주자는 이어 정자(程子)의 ‘불교는 양주·묵적보다 더 이치에 가깝기 때문에 그 해가 더욱 극심하다’고 주장도 받아들였다. 즉 도교는 물론이고, 이치와 더욱 가까워 세상을 미혹시키는 불교 등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극력 배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주자의 주장은 맹자를 존숭하고 도·불교를 배척한 당나라 시대 유학자인 한유(韓愈·768~824)의 입장과 궤를 함께 한다.
 한유은 당나라 말기에 불교와 도교의 폐단이 극에 달하자 불·도교를 이단으로 규정, 맹비난한 유학자이다.
 “노(자)·불(교)을 막지 못하면 유가의 도가 전해지지도, 행해지지도 못한다. 그들의 거처를 민간의 집으로 만들고, 노·불의 책은 불태워 없애야 한다.”

 

 ■시험 예상문제
 하지만 이 ‘공자님의 말씀’을 두고 고금을 통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꽤나 있었다. 수군거림도 많았다.
 공자가 ‘전공하면~’이라는 단서를 단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속출한 것이다.
 ‘이단을 전공하면(攻) 해로울 뿐(已)’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전공하지 않고 그냥 대충 공부하면 괜찮다는 것이 아닐까. 이 대목은 유학자들도 쉽게 풀 수 없는 의문점이었던 같다.
 예를들어 조선 후기의 문인인 윤기(1741~1826)는 임금 주관으로 치를 예정인 ‘문신정시(文臣庭試)’에 대비하려고 3가지 예상문제를 준비했다. 그런데 예상문제 가운데 공자님의 ‘공호이단 사해야이’가 있었다.    
 “주자는 왜 ‘이단을 전공하면 안될 뿐’이라 해석해놓고는, 다시 ‘전공해서도 안되고, 대충 알아도 안된다’고 했을까. 왜 말이 다를까.”(윤기의 <무명자집>) 
 윤기는 주자가 <논어집주>에서는 ‘이단을 전공하면 해로울 뿐’이라고 해놓고, <주자어류>에서는 “이단을 전공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대략 이해하는 것도 안 된다.(不惟說不可專治 便略去理會他)고 달리 말한 것에 의문을 품은 것이다. 윤기는 이런 문제가 만약 출제되면 어떤 논리로 답안을 작성해야 할까 고민했던 것이다.  
 윤기 같은 유학자도 그 심오한 뜻을 알기 어려웠던 알쏭달쏭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단은 멀리해야 한다
 한말 유학자 유중교(1832~1893)는 나름 이렇게 풀이했다.(<성재집> ‘왕복잡고(往復雜稿)’)
 즉 공자가 ‘이단’을 외친 춘추시대에는 이단이 막 시작할 때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익을 좇아 해로운 줄 모르고 전공한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이익을 바라고 이단을 전공하지만 결과적으로 무익하고, 해가 될 뿐”이라는 의미에서 ‘공호이단 사해야이’를 외쳤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공자께서 “전공한 후에야 해가 된다고 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랬다가 훗날 불가와 도가의 폐해가 극심해지자 정자와 주자 등이 적극 나서서 이단척결을 외쳤다는 것이다.
 정자(程子·정호·1032~1085)는 “마땅히 음란한 음악이나 아름다운 여자처럼 멀리해야 한다.”라고 했다. 오죽했으면 정자의 경우 평생 <장자(莊子)>와 <열자(列子)>를 아예 보지 않았을까.
 이에 주자는 더 나아가 ‘이단은 전공해서도 대략 이해만 해서도 절대 안된다’고 못박아버린 것이다.
 공자 말씀에 절대 움직일 수 없는 토를 단 것이다.

우암 송시열 영정. 주자학의 입장에서 이단을 백안시하고 척결하고자 했다.|청주박물관 소장

 ■이단은 초전박살내야 한다
 조선 주자학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을 보라.
 그는 종질(5촌)이 윤휴(1617~1680)의 주석서인 ‘중용주’를 책상에 둔 것을 보고 앙앙불락했다고 한다.
 “그 따위 윤휴가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이냐. 너는 이전부터 내가 윤휴를 배척하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 어찌 감히 이런 글을 책상 위에 두느냐.”(<송자대전> 권84)
 그러면서 우암은 윤휴의 책을 땅에 던지고 꾸짖으며 눈앞에 스치지도 못하게 했단다.
 왜 그랬을까. 윤휴는 “천하의 학설은 한사람의 것이 아니며 주자의 학설이 아니라 오직 진리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학자다. 주자학을 벗어나 독자 학문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한 인물이다. 송시열은 바로 주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였다. 윤휴는 결국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사사된다.(1680·숙종 6년)
 송시열은 바로 그런 윤휴의 주석(‘중용주’)을 책상에 둔 것만으로도 ‘불경죄’를 저지른 것으로 백안시한 것이다.
 결국 공자의 ‘공호이단 사해야이’라는 뜻을 ‘전공한 후에야 해가 된다’고 해석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대략이나마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어도 크게 해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단은 초전박살돼야 하며, 소통도 필요없고 논란 및 논쟁도 필요없다는 것이다. 씨를 말려야 한다는 소리다. 무시무시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양주·묵적·노장·불가에 천주교까지
 어디 송시열 뿐인가. 1489년(성종 20년) 성종 임금이 화를 벌컥 냈다. 
 어느 과거응시생이 향시(鄕試)에서 ‘부처에게 제사를 지내 화(禍)를 물리칠 것’을 건의하는 답안지를 작성한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성종 임금은 예의 공자의 ‘공호이단 사해야이’를 인용하면서 “그 자를 추국해서 변방으로 내쫓으라”는 명을 내린다.
 “부처의 해를 알지 못하느냐. 유생이라는 자가 요·순의 도를 올리지 않고 불가의 법을 올리니 이 무슨 망발이냐.”(<성종일록> 성종행장)
 또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윤기(1741∼1826)의 시문집인 <무명자집>을 보라. ‘이단’, 즉 천주교를 반박하는 대목이 있다. 먼저 윤기는 공자의 ‘공호이단 사해야이’를 인용하면서 역대의 이단을 줄줄이 뀄다.
 “이단의 설은 많았다. 양주는 의(義), 묵적은 인(仁)에 가까웠다. 노장은 청정(淸淨)·무위(無爲), 불가는 적멸(寂滅)·돈오(頓悟)를 주장했다. 특히 불교는 천하의 도리에 더 가까웠다. 때문에 한·당 이래로 재주 많고 지혜 명민한 사람들이 대부분 빠져들었다. 이 때문에 정자와 주자가 불가를 극력 논파해서 유가를 세운 것이다.”
 윤기는 이 대목에서 “(부모형제를 무시하고) 오로지 천주만을 섬기는 천주교는 이단 중에서도 이치에 어긋나기 짝이 없는 이단”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천주학 책을 태워 버리고 천주학에 쏠린 마음을 씻어내야 하며 서양 오랑캐의 사설(邪說)에 현혹되어 유도(儒道)의 죄인이 되지 말라’고 촉구했다.
 이렇게 주자를 중심으로 후대 유학자들의 해석에 따라 ‘공자님의 말씀’은 ‘이단 공격’을 위한 경전 말씀이 되었다.

 

 ■이단은 농사와 병법 같은 것
 하지만 ‘공호이단 사해야이’를 둘러싼 해석이 이같은 ‘이단 척결 몰이’라는 외곬수 논법만 있지 않았다.
 예컨대 다산 정약용의 유연한 해석을 보라.(다산의 <논어고금주>)  
 다산은 공자(기원전 551~479)의 시대에는 노자와 장자, 그리고 양자와 묵자의 문호가 아직 수립되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즉 당시에는 오로지 공자의 가르침만이 일가를 이루기 시작했을 뿐, 유·불·선의 삼교가 정립됐던 시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산은 따라서 “공자가 이단을 전공하면 다만 해로울 뿐이라고 한 것은 가볍게 금한 것이지 큰 소리와 성난 말로 금한 것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한마디로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이단은 요즘(조선 시대)처럼 죽기살기로 타도해야 할 이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번지(공자의 제자)가 농사법을 배우기를 청하자 공자는 소인이라 여겼다. 위나라 영공이 공자에게 군사의 진법에 대해 묻자 ‘군사의 일은 아직 배운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사실 농사와 병법의 학문도 세상을 경영하는 데는 필요하지만 이 일만 전공해서는 신심과 성명의 학문에 ‘다소’ 해가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공자가 그 폐단을 말한 것이다.”
 즉 다산은 공자가 말하는 ‘이단이란 병법과 농사 같은 것’이라 해석했다.
 일상생활에도 필요한 것이라 군자가 몰라서는 안된다는 것. 하지만 너무 그것에만 힘써 전공한다면 몸과 마음에도 좋지 않고 ‘천성과 천명’(유학)의 학문에도 ‘약간’ 해가 있을 것이라는 게 다산의 풀이였다.
 다산은 “이른바 ‘이단’이라는 것은 이와같은 것이 불과하다”고 했다.  

박세당의 짧은 편지. 박세당은 공자의 ‘공호이단 사해야이’ 구절을 ‘이단을 공격하면 해로울 뿐’이라 해석했다. 박세당은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이단은 타도대상이 아니다
 다산은 ‘이단’을 타도해야 할 원수로 보지 않은 것이다. 다산은 그러면서 주자의 일관되지 못한 설명을 지적했다.
 즉 주자가 왕상서(1119~1176)에게 답한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는 것이다.
 “주자는 편지에 ‘지금 사설(邪說)의 해악을 미워해서 이것을 바르게 하려고 공격하면 스스로를 패배하게 만들 뿐’이라 썼다. 그런데 주자는 <논어집주>에서 ‘공호이단’의 공(攻)을 ‘전공한다’고 해석했다. 그런데 이 편지글에서는 공을 ‘공격’이라 했다. 두 설은 다르다.”
 무슨 말인가. 주자는 <논어집주>에서는 공(攻)을 ‘전공한다’고 해석해놓고는 왕상서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공격’의 의미로 썼다는 것이다.
 다산은 이 대목에서 청나라 초기의 문인인 모기령(1623~1716)이 가졌던 의문점을 주석해놓았다.
 “공(攻)은 본래 공격한다고 할 때의 공인데, 주자가 <논어집주>를 내면서 어찌하여 전공한다는 의미의 ‘전치(專治)’로 해석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다산은 공(攻)은 원래 ‘공격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독법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단 때문에 백성이 곤궁하다고?
 실학자 이익(1681~1763) 역시 유연한 주장을 편다.
 “이단 때문에 백성이 곤궁하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스럽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공자가 이단을 전공하면 해로울 뿐이라고는 했지만 엄중히 배척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소도(적은 도)라도 볼만한 것이 있다고 했다.”(<성호사설> 14권 ‘인사문’)
 그는 “성군이 나오지 않고 승평한 정치가 이룩되지 못해 백성의 곤궁이 극도로 달했으니 그 원인을 보면 이단의 폐단만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세상이 말세가 되어 정사가 어지러운 데도 놀고 먹는 자가 있고 위력으로 토색질하는 자가 있어서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한데 이것이 노자와 불가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냐”고 꼬집었다. 

 

 ■사문난적으로 파문당한 박세당
 그런데 다산 정약용(1762~1836)보다 140년 전의 인물인 서계 박세당(1629~1703)은 주자의 설을 더더욱 의심했다. 그는 사서삼경을 주해한 <사변록>에서 ‘공호이단 사해야이’를 이렇게 풀이했다.
 해석 가운데는 ‘이단을 공격(伐)하면 해가 그친다(已)’는 뜻도 있고, 주자의 말처럼 ‘이단을 전공(攻)하면 해가 될 뿐(已)’이라는 뜻도 있다. 그런데 이단을 공격하면 해가 그친다는 말이나, 이단을 전공하면 해가 된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 아닌가. 어리석은 사람도 다 알 일이다. 그런 말을 성인인 공자님께서 하셨겠는가.”
 서계는 이어 “또 이단인줄 알면서 전공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다른 해석을 가한다.
 “공자께서 일찍이 ‘사람이 어질지 못한 자를 너무 미워하면 어지럽다’고 하셨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 공자님의 말씀이 맞는 듯 하다. 비록 이단이라도 너무 지나치게 공격하면 도리어 해가 되는 수도 있는 것이다.”
 서계는 뒤가 캥겼는지 이 말미에 “그러나 감히 반드시 그렇다고 자신할 수 없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다.
 그렇지만 서계는 결국 ‘사문난적’의 죄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그의 <사변록>은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 예컨대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1641-1721)는 아우 권상유(1656~1724)에게 이렇게 말한다.(<한수재 선생문집> ‘제20권)
 “주자가 ‘공호이단 사해야이’의 ‘공’을 해석하면서 전공의 뜻을 취하고 공격의 뜻으로 보는 설들은 모두 버렸다. 그런데 박세당이 되레 그것을 ‘공격’의 뜻으로 보는 설을 탈취해서 자기 견해로 삼았다. 한번 웃을 일도 못된다.”
 권상하는 “만약 이단을 공격하는 것이 해가 된다면 맹자가 양주와 묵적을 거절한 것도 도에 해가 된다는 말이냐”며 서계 박세당을 조롱하고 있다. 

주자학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경전을 해석하고자 했던 윤휴. 그러나 그는 사문난적의 죄를 뒤집어 썼다.    

 ■공자의 참뜻은
 이 대목에서 이런 생각은 든다.
 2500년 전의 시대를 산 공자가 아무렴 ‘이단을 전공하면 해로울 뿐’이라는 반목과 불통의 메시지를 전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춘추시대를 살아간 공자는 아마도 소통과 화합의 메시지를 전했을 것이다. 그러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는 어찌됐을까.
 후대의 유학자들이 시대상황을 반영한 스스로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공자님 말씀에 저마다의 해석을 붙이게 된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후대의 관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자왈, 공호이단 사해야이’의 메시지는 전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의 몫이 되는 것이다.
 <중용> ‘서문’에 ‘택선고집(擇善固執)’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선(善)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이를 가려서 그것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선을 택해 그것을 고집하라’는 뜻에서 유교의 이단관을 반영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다산 정약용이 정산 김기서에게 보낸 편지(<다산시문집> 제19권)을 보라.
 “군자의 학문에 ‘택선고집(擇善固執·선한 것을 골라 굳게 지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래 정(精)한 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른 것을 선택했는데도 이를 굳게 지키는 것을 덕으로 여긴다면…. 이런 문제는 번개나 바람처럼 빨리 고치지 못할까 두려워 해야 합니다.”
 또 하나, 선(善)을 택한다는 것은 바로 극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중용을 택한다는 것이다. 또 ‘굳게 지킨다’는 것은 ‘잘 받들어 가슴 속에 두어 잃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조선 후기 문인 위백규의 독후감인 <독서차의> ‘중용편’이다. 염두에 둬야 할 대목이다.
 그나저나 하나 두려운 것이 있다. 혹여 어떤 판사가 나타나 공자의 ‘공호이단 사해야이’를 인용, 다른 견해와 사상을 이단으로 몰고 갈 수도 있지 않을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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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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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팟캐스트 19회는 ‘최치원이 발해를 향해 쌍욕을 퍼부은 까닭’입니다. 
 9세기 말 만고의 명문장가라는 최치원이 막말을 퍼붓습니다.
 발해를 겨냥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갈과 모래같은 무식한 놈들’, ‘추한 오랑캐’, ‘떼강도’, ‘군더더기 같은 부락민’…. 그뿐 아니라 멸망한 고구려를 두고도 ‘고구려의 미친바람’이라고 합니다.
 최치원은 과연 왜 발해를 향해 쌍욕을 해댔을까요.
 새삼 북한이 남측 정부와 인사, 미국정부와 인사들에게 퍼붓는 막말이 떠오릅니다.
 이명박 전대통령이 회고록을 내자 ‘정치 무능아’, ‘못난이 하는 짓마다 사달’, ‘돌부처도 낯을 붉힐 노릇’, ‘역사의 시궁창에 처박힌 산송장’이라 표현했지요.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시집못간 노처녀의 술주정’ ‘유신군사깡패의 더러운 핏줄’, ‘살인마 악녀’, ‘방구석 아낙네의 근성’, ‘못돼먹은 철부지 계집’ 등의 막말을 해댔구요.
 그뿐인가요.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는 “아프리카 원시림 속의 잰내비 상통(원숭이 얼굴) 그대로다. 인류가 진화되어 수백만년 흐르도록 잰내비 모양이다.”라 했지요. 지독한 인종차별 발언이지요. 존 케리 국무장관을 겨냥해서는 “주걱턱에 움푹꺼진 눈확(눈구멍), 푸시시한 잿빛 머리털에 이르기까지 승냥이 상통인데다…”라 표현했지요.
 아무리 인종차별이자 성차별이고 인신공격이라 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런데 1200년 전 최치원은 왜 발해를 향해 막말외교를 펼쳤을까요.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기에 그랬을까요. 돌이켜보니 그 때도 일종의 남북국 시대였고, 남(신라)와 북(발해)가 대립하고 있었던 시기였잖아요. 당나라에서 펼쳐진 치열한 외교전의 세계로 한번 들어가보겠습니다.(다음은 관련기사입니다.)

 

  872년,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과거시험이 열린다. 외국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빈공과(賓貢科)’였다. 9세기대 당나라가 정책적인 배려로 외국유학생들을 관리로 선발한 것이다. 이날 빈공과를 감독한 이는 ‘정공(靖恭) 최시랑’이었다. 채점결과 발해유학생 오소도(烏沼度)가 수석합격의 영예를 차지한다.
 신라 유학생 이동(李同)보다 앞선 성적을 얻은 것이다. 이 소식은 신라 유학생들에게 ‘충격과 공포’였다. 특히 장안에서 유학중이던 최치원은 합격자 명단에 발해인의 이름이 신라인보다 앞서 등재한 것을 한탄하며 수치심을 느꼈다. 최치원은 나날이 밀리는 신라의 국세와, 욱일승천하는 발해의 성세가 이같은 결과를 낳았다고 자학한다. 900년 전통의 신라가 ‘듣보잡’의 나라인 발해에 밀리다니….
 ‘분명, 당나라가 신라보다 발해를 우대하고 있음이야.’  

 

최치원의 초상화. 당나라 유학생들을 상대로 치른 빈공과에서 발해인이 수석합격하자 최치원은 발해를 욕하고 당나라에 원망하는 편지를 보낸다.

 

 ■최치원의 적개심
 2년 뒤(874년) 최치원은 18살의 나이로 빈공과에 합격함으로써 스스로 치욕을 푼다. 또한 877년 빈공과에서도 발해유학생은 한 명도 선발되지 않았지만 신라유학생 두 명(박인범과 김악)만 합격한다.
 최치원으로서는 감개무량했다. 그는 ‘공정한 시험을 주관한’ 당나라 고위관리에게 잇달아 감사의 편지를 보낸다. ‘당나라 예부 배상서에게 보내는 편지(與禮部裵尙書瓚狀)’(874년)와 ’당나라 고대부에게 편지(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877년)이다. 그는 두 편지에서 ‘872년의 치욕’을 언급하면서 발해를 한없이 폄훼했다. 그런 다음 발해인들이 잇달아 좋은 성적을 나는 것은 불공정한 시험관리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모자와 신발이 거꾸로 뒤바뀐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冠구實참於倒置)”
 “사린(四린)의 조롱거리요, 길이 남을 일국의 수치가 되었습니다.(四린之譏 永胎一國之恥)”
 둘 다 최치원의 <고운집>에 실린 편지글 들이다. 두 편지를 보면 최치원은 신라의 수치를 말하면서, 발해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을 나타내고 있다. 
 “고구려의 미친 바람이 잠잠해 진 뒤 잔여 세력이 느닷없이 나타나 이름을 도둑질했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발해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 발해가 근년에 와서 계속해서 고과(高科·우등급제)하고 있습니다.”
 발해는 물론 애꿎은 고구려까지 끌어들여 욕을 해댄 것이다. 그러면서 최근들어 발해인들을 우대하는 듯한 당나라를 향해 원망의 화살을 돌리기도 한다.
 “(당나라는) 닭을 천하게 여기고 고니를 귀하게 여기는 혐의가 있었습니다.(賤계貴鵠)~ 정공 최시랑이 빈공과에서 합격자 발표를 할 때 (발해의) 오소도를 수석으로 뽑았습니다. 한비가 노자와 같은 열전에 있었던 것도 감수하기 어려웠고~어찌 술지게미를 박주(손님접대에 쓰는 술)와 함께 마시며 취할 수 있겠나이까.(縱謂파揚糠粃 豈能포철糟)”

 

 ■신라와 발해는 철천지 원수
 최치원의 문장은 워낙 유명하다. 또 웬만큼 고전을 통달하지 않고는 글을 읽어내려 갈 수 없다.
 ‘닭과 고니’ 이야기는 한나라 왕충이 지은 <논형(論衡)>에 나온다. 즉 가까이 있는 닭은 천하게 여기고, 멀리 있는 고니를 귀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이는 시험을 주관한 당나라 최시랑이 가까운 신라보다 멀리서 온 발해 유학생을 더 특이하다고 여겨 우대한 혐의가 짙다고 꼬집은 것이다.
 또 최치원은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 ‘노자한비열전’이 있음을 예로 삼았다. 즉 한비가 노자와 함께 열전에 묶여있음을 수치스럽게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과거급제자 명단에 발해인의 이름이 신라인과 함께 등재돼있음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뜻이다. ‘술지게미와 박주’ 이야기는 초나라의 애국시인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에 나온다. 여기서 술지게미는 발해를, 박주는 신라를 뜻한다.
 한마디로 발해라는 나라와 동등한 입장이 된 것도 참을 수 없는데, 그것도 모자라 발해의 뒷전에 놓이게 된 것은 씻을 수 없는 수치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주변국의 조롱거리이자 일국의 수치요, 모자와 신발이 바뀐 형국이었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이렇게 발해와, 발해인을 ‘우대한 혐의가 짙은’ 당나라 관리(정공 최사랑 같은 사람)를 싸잡아 맹비난했다. 그런 다음 신라인인 자신(874년)과 박인범·김악(877년)을 뽑아준 예부상서(배찬)와 고대부를 상찬하는 감사의 글을 덧붙인다.     
 그는 우선 자신의 급제를 두고 “실로 공정함을 만나 예전의 수치를 씻었다”며 감개무량한 소감을 밝혔다. 공정함을 만났다는 것은 시험주무관이었던 ‘당나라 예부상서’ 배찬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공평무사한 분(배찬)을 만난 덕분에 이전의 치욕을 씻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혹시라도 바뀌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877년 빈공과 후에도 최치원은 신라인만 두 명 뽑은 ‘당나라 고대부’에게 거듭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
 “~대부의 엄정한 시험관리로 (신라인) 박인범과 김악은 급제했지만, ‘추한 오랑캐(발해인)’은 용납하지 않아 과거에 흠집을 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발해 수도 상경용천부의 유적. 옛 고구려 땅 이상의 영토를 개척한 발해는 해동성국으로 일컬어질만큼 번성했다.사진은 발해국왕이 거처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경성 궁전터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발해의 반격
 그러나 발해도 가만 있지 않았다. 그로부터 20년 뒤 총공세에 나선 것이다.
 897년 7월 당나라에 파견된 발해 왕자 대봉예가 매우 민감한 문제를 꺼낸다. 즉 이제부터는 신라보다 윗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당나라에 정식으로 요청한 것이다.
 이것을 ‘쟁장(爭長)사건’이다. <동사강목>은 이를 두고 “발해가 스스로 강대국을 자처했다(時渤海國 自謂國大兵强)”고 했다. 물론 당나라는 발해의 요청을 거절했다.
 “국명의 선후를 어찌 ‘강약(强弱)’으로 따질까. 조제(朝制)의 순서도 ‘성쇠(盛衰)’를 근거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관례대로 하라.”(<고운집>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신라는 당나라의 조치에 반색했다. 최치원은 당나라의 조치에 감읍한 나머지 ‘사불허북국거상표’를 올렸다. 즉 북국(발해)이 신라 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한 당나라에 감사하는 표문이다.
 그러나 이 ‘사불허북국거상표’를 찬찬히 뜯어보라.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즉 당나라도 당시 발해가 강(强)하고 성(盛)하며, 신라는 약(弱)하고 쇠(衰)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당시 신라는 효공왕 즉위년을 맞이하고 있었다. 원종·애노의 난(889)으로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한반도 남부는 후삼국으로 분열되고 있었다. 반면 발해는 ‘해동성국’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신라는 이제 발해 밑입니다”
 때문에 발해로서는 당나라에 자리변경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가 거절했으니 말이지 신라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또 한 번 발해를 향해 저주에 가까운 욕설을 퍼붓는다.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에는 보잘 것 없는 부락에 불과했습니다. ~백산(백두산)에서 악명을 떨치며 떼강도짓을 했습니다. 추장 대조영은 신라로부터 제5품의 대아찬의 벼슬을 처음 받았습니다.”
 최치원은 대조영이 신라로부터 진골(대아찬)의 벼슬을 받은 신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사실인 지는 확인할 길은 없다.  
 “요즘 그들은 차츰차츰 우리의 은혜를 저버리고 갑자기 신의 나라와 대등한 예를 취하겠다는 소문이 들려옵나이다.~ 신의 나라가~ 무식한 놈들과 함께 서있다는 것 자체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저 발해야말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갈과 모래 같고~ 삼가 제 본분을 지킬 줄을 모르고 오로지 웃사람들에게 대들기만을 꾀했습니다.”
 욕설은 끊이지 않는다.
 “발해는 소의 엉덩이(牛後)가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엉큼하게도 용의 머리(龍頭)가 되고자 켸켸묵은 말을 지껄였습니다. 저 오랑캐의 매는 배가 부르면 높이 날아가고, 쥐는 몸집이 있으면 방자해지고 탐욕스럽게 됩니다.(察彼虜之鷹飽腹而高양鼠有體而恣貪) 다시는 위아래가 뒤집히지 않도록 하게 하시옵소서.(不令倒置冠구)” 
 

동모산 성산차산성의 기념비.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을 중심으로 이곳 동모산에서 둥지를 틀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가 오소도입니다.”
 전성기인 발해의 외교공세는 계속된다.
 906년 당나라에서 치러진 빈공과의 결과가 도화선이 된다. 발해 유학생 오광찬(烏光贊)이 빈공과에 급제했지만, 신라유학생 최언위(崔彦휘)보다 등수가 낮았다.
 그러자 오광찬의 아버지인 오소도가 이의를 제기한다. 오소도가 누구인가. 872년 신라 유학생 이동을 제치고 빈공과 수석을 차지한 발해의 천재가 아닌가. 아마도 그의 귀국길은 금의환향 그 자체였을 것이다. 숙적 신라의 유학생들을 제친 자부심은 대단했을 것이다. 이 천재유학생은 귀국 후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재상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아들이 신라유학생보다 성적이 낮았다는 소식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혹 신라가 사주한 것이 아닐까. 예전과 형편이 달라져 이제는 발해의 국세가 신라를 훨씬 능가하는데…. 아버지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당나라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고려사> ‘최언위전’을 보자.
 “발해재상 오소도의 아들 광찬이 급제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최언위의 아래에 있게 되자 아버지 오소도가 표를 올렸다. 예전에 신(오소도)도 (신라인) 이동의 위에 있었습니다. 이번에 신의 아들도 (신라인) 최언위의 윗자리로 옮겨주소서.”
 하지만 당나라 조정은 “최언위의 재주와 능력이 오광찬을 능가한다”는 이유로 불허했다.

  
 ■발해·신라의 국비유학생
 볼썽 사나운 다툼이었다. 그렇지만 발해와 신라 양국은 당나라 유학에 국운을 걸 정도였다.
 신생국 발해의 경우 당나라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려고 온 신경을 썼다. 해동성국이라는 말로 여기서 나왔다.
 “발해가 학생들을 자주 당나라 태학에 보냈다. 거기서 고금의 제도를 배워 이 때에 이르러 해동성국을 이뤘다.(習識古今制度 至是遂海東盛國)”(<신당서> ‘발해전’)
 한마디로 발해의 당나라 유학생이 귀국해서 신생국인 발해의 ‘동량(棟梁)’이 된 덕분에 해동성국으로 성장했다는 이야기다.
 발해는 714년 6명을 당나라로 보낸 것을 필두로, 학생들을 수시로 교대하면서 유학을 이어갔다. 714년이면 발해가 건국한자 불과 16년 되는 해이다. 이를테면 지금의 국비유학생이었을 것이다.
 당나라 시인 온정균(溫庭均·812~866)은 당나라와 발해는 ‘문물제도가 한 집안을 이뤘다(車書本一家)’고까지 했다. 그가 장안에 머물던 발해왕자 대문악(大文악)의 귀국길에 지어준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신라인들은 더 했다. 조정은 국학의 교육을 통해 유교적 이념에 충실한 관료를 배출하려고 중국에 유학생들을 파견했다. 최치원처럼 골품제에 따른 신분의 한계를 중국유학으로 극복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문성왕 2년(840) 당나라에 유학했던 105명이 유학만료가 되어 귀국했다”(<삼국사기>)는 기록이 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유학생들이 당나라 유학에 나섰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학에 머물지 않고 빈공과에 급제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자 출세의 지름길로 여겨졌다. 

충남 보령시 미산면 성주사터에 있는 낭혜화상 무염(800~888)을 위한 비. 최치원이 왕명을 받고 찬했다. 최치원은 잇단 비문청탁에 매우 부담을 느낀 듯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비문에 “당나라 유학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했는데 누구는 스승이 되고 누구는 일꾼이 되니...”하고 푸념했다.

 ■80명 대 10명? 
 신라가 낳은 불후의 천재 최치원이 좋은 본보기가 된다. 6두품 출신인 최치원은 불과 12살 때(868)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다. 아버지는 먼 길을 떠나는 어린 아들에게 이렇게 신신당부한다.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부단히 노력해라(十年不第 卽非吾子也 行矣勉之)”(<삼국사기> ‘최치원전’)
 극성 아버지라 해야 할 지, 높은 교육열의 발로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은 있다. 최치원은 ‘6두품’도 얻기 어려운 신분이라는 의미에서 ‘득난(得難)이라고 했다지만, 신분의 벽은 높았으니까…. 6두품은 행정기관의 장인 영(令)에 이를 수 없었으니까…. ‘어려서부터 정밀하고 민첩했으며, 학문을 좋아했던(致遠少 精敏好學)’ 최치원은 874년 빈공과에 합격한다. 18살의 나이에 딱 한 번 도전으로 급제한 것이었다.
 고려시대 최해(崔瀣·1287~1340)의 문집(<졸고천백·拙藁千百>)은 “당나라와 그 뒤를 이은 오대까지 빈공과에 합격한 이는 모두 90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그 가운데 발해인 10여 명(渤海十數人)을 빼고 나머지 80명 가까운 합격자가 신라인이었다고 한다. 발해인 합격자 가운데는 이미 언급한 오소도·오광찬 부자와 고원고(高元固), 흔표(欣彪), 사승찬(沙承贊) 등이 있다.
 빈공과 합격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 신라의 자부심은 대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발해라는 신생국이 불쑥 나타나 해동성국이니 뭐니 하며 윗자리를 내놓으라 했으니…. 여기에 신라인들이 독차지했던 빈공과 수석자리를 발해인이 차지해버리니…. 최치원, 그리고 신라사람들이 느끼는 자괴감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치원이 앙앙불락하며 발해를 욕한 이유이다.

 

 ■발해는 고구려의 후신
 최치원의 ‘욕’ 가운데 한가지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최치원은 발해를 욕하면서 ‘축로(丑虜·추악한 오랑캐), 피로(彼虜·저 오랑캐), 피번(彼蕃·저 오랑캐), 우췌부락(우贅部落·군더더기 같은 부락으로나 번역됨)’이라 했다. 심지어는 ‘작얼(作孼·훼방), 제악(濟惡·악행을 일삼음), 흉잔(凶殘), 훤장(喧張), 고은(辜恩) 등 다양한 욕설을 해댔다. 이 대목을 두고 중국학자 웨이궈중(魏國忠)은 이런 증오심 가득한 욕설을 퍼부은 것으로 보아 신라와 발해는 서로 다른 민족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욕을 해댔다고 해서 다른 민족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예컨대 고구려는 같은 부여계인 백제를 두고 ‘백잔(百殘)’이라 칭했다.(<광개토대왕 비문>) 또 백제는 고구려왕을 ‘소수(小竪·더벅머리 어린애)’라 깔보는 한편 고구려를 ‘장사(長蛇·큰 뱀)’와 ‘추류(醜類·추악한 무리)’로 욕한 바 있다. 지금은 또 어떤가. 남북한이 ‘북괴’니 ’빨갱이’니 ‘미제의 앞잡이니’, ‘남조선 괴뢰도당’이니, ‘철천지 원쑤’니, ‘역도(逆徒)’니 하면서 적개심을 발산하지 않는가.
 제아무리 형제라도 등을 돌리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판이 아닌가. 더구나 최치원의 표문을 살펴보면 ‘발해=고구려의 후신’이라는 표현이 분명하게 나온다.
 “고구려의 미친 바람이 잠잠해진 뒤 잔여세력이 느닷없이 나타나 이름을 도둑질 했으니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로 바뀐 것을 알겠습니다.(즉知昔之句麗 즉是今之渤海)”(예부 배상서에서 보내는 글)
 <삼국사기>는 최치원의 문집에서 당나라 문하시중에게 보내는 편지를 뽑아내 인용했다. 거기에는 “고구려의 유민이 모여 북으로 태백산(동모산의 오기) 아래를 근거지로 하여 발해를 세웠다”고 했다.
 최치원은 발해를 두고 쌍욕을 하는 과정에서도 ‘발해는 고구려의 후신이 분명하다’고 밝힌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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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213년, 진시황제가 6국을 통일한 뒤 주연을 베풀었다.
 이 때 제나라 출신 박사인 순우월이 나서 간언했다.
 “이제 폐하께서 천하를 소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제분들은 평민으로 사십니다. 만약 세력을 키운 신하들이 나타나면 폐하를 보필하기 어렵습니다. 은나라, 주나라 처럼 폐하의 자제들을 제후로 분봉해서 폐하를 보위하셔야 합니다.”

 이슬람국가(IS)가 파괴한 기독교 유적지 ‘요나의 무덤’ 잔해를 주민들이 옮기고 있다.

   ■진시황의 분서사건

  무슨 말이냐.

  은나라나 주나라 처럼 황제의 아들이나 친척, 혹은 공신들을 제후로 보내 다스리는 이른바 봉건제를 채택해야지, 중앙집권제로는 천하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시황제는 순우월의 주청을 공론에 붙였다. 그러나 시황제를 도와 통일 진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세운 승상(총리) 이사의 생각은 달랐다. 봉건제(분봉제)라는 것은 은·주 시대, 즉 흘러간 제도라는 것이다.

  천하가 어지러웠을 때, 즉 춘추전국시대 때는 각 제후들이 천하의 인재들을 서로 초청하느라 혈안이 됐지만, 지금은 천하가 통일되어 안정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집안에서 농업과 공업에 힘쓰고, 선비들은 법령과 형법을 학습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유생들만 지금의 것을 배우지 않고 옛 것만 배워 당세를 비난하면서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제후들이 난립할 때는 유생들이 저마다 견해를 피력하고 자기가 개인적으로 배운 것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시어 흑백을 가리고 모든 것이 황제 한 분에 의해 결정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유생이라는 자들은) 개인적으로 학습하여 조정의 법령과 교화를 비난하고~백성들을 거느려서 비방하는 말만 조성할 뿐입니다.”
  황제 한 사람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중앙집권 제도가 새로운 시대에 맞는다는 주장이었다.
 “유생들의 주장을 금하지 않으면 황제의 위세가 떨어지고 아래에서는 붕당이 형성됩니다.”
 그러면서 이사는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주청을 올린다.
 “진나라의 전적이 아닌 것은 모두 태워버리시고…. <시경>과 <서경>, 그리고 제자백가들의 저작들을 모두 태우게 하소서. 다만 의약과 점복, 농사서적만 남기시도록 하소서.”  
 진시황제는 이사의 주청을 가납하여 “그렇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시황제의 ‘분서(焚書)’ 사건이다.  

이슬람국가(IS) 대원들이 이라크 북부 모술의 박물관으로 보이는 곳에서 망치로 조각품을 때려 부수고 있다. 

  ■파괴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진시황제가 분서령을 내렸을 무렵,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는 엄청난 규모의 도서관이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기원전 305~기원전 30) 왕조의 후원아래 발전한 도서관이었다. 기원전 3세기에 건립된 도서관은 로마가 이집트를 점령한 기원전 30년까지 학문의 중심지였다. 이 도서관은 기하학의 유클리드,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 지구의 둘레를 계산한 에라토스테네스 등이 연구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이 도서관은 수난을 겪게 된다. 기원후 392년 로마황제 테오데시우스가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금지하게 되면서 다른 종교의 사원을 파괴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두루마리 서적들이 사라진 것이다. 그로부터 250년이 지나서는 복수가 자행됐다. 이곳을 침공한 이슬람 교도들이 두루마리 책들을 목욕탕 연료로 사용했다. 이번에는 ‘코란 내용이 없는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불에 탄 황제와 황후

   1966년 8월 24일,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던 중국에서 고고학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10대 중반에 불과한 홍위병들이 명나라 13대 황제인 만력제(재위 1573~1620)와 황후 두 사람의 시신이 안장된 정릉 박물관 창고로 몰려갔다. 이미 박물관 곳곳에 ‘집권파를 타도하라!’ ‘황릉보호파를 타도하자!’ ‘지주 계급 분자 만력을 타도하라!’ 는 등의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앳된 홍위병 소녀가 창고를 지키며 버티던 직원의 뺨을 후려갈렸다.
 “당신은 지주계급의 총 우두머리(만력제)를 비호하고 있어. 빨리 사인해.”
 직원의 힘이 빠져 결국 창고문을 열고 말았다.
 홍위병들은 황제와 황후 두 사람의 시신(인골)을 박물관 대홍문 앞 광장에 놓고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이른바 인민재판이었다. 홍위병들은 시신 이외에 황제 황후의 초상화 등을 증거자료로 삼아 내놓았다.
 광장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황제의 시신을 가운데 두고 황후 두 사람이 양 옆에 높였다. 홍위병 소녀가 소리쳤다.
 ‘집권파를 타도하라!’ ‘모든 악인을 소탕하자!’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추진하자!’
 구호가 끝나자 홍위병 소녀가 소리쳤다.
 “혁명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 때부터 수십명의 장정들이 품 속에서 돌멩이를 시신을 향해 던졌다. 세 구의 시신이 산산조각 났다.
 모인 군중들은 놀라움, 곤혹스러움, 환희, 찬탄 등이 엇갈린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홍위병 소녀가 마지막으로 외쳤다.
 “저들을 화형시켜라!”
 광장은 불바다를 이뤘다. 장작이 시신을 따라 폭발음을 냈다. 얼마후 소나기가 갑자기 내려 불기둥이 사그러들었지만 시신은 이미 다 타버려 그 재마저 흙탕물에 섞여 사라진 뒤였다.
 10대 중후반에 불과한 홍위병들이 황제에게 붙인 죄목은 ‘지주 계급 분자’였다.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빚은 참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슬람국가(IS)가 알쿠바 후세이니야 모스크을 폭파시키고 있다.

 ■IS의 반문명 행태

   모든 예가 종교와 정치의 이름으로 인간이 자행하는 광신적인 반문명의 행태들이다.
 2001년 자행된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석불의 생생한 파괴 장면은 이미 14년이 지났는 데도 아직도 생생한 악몽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 와중에 최근 이슬람국가(IS)가 공개한 끔찍한 유물파괴 장면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떨릴 지경이다.
 이미 인질 참수 등 반인간적인 잔혹 행위를 서슴치않은 ‘이슬람 국가(IS)’가 이번에는 끔찍한 ‘문명 파괴’의 대열에 나선 것이다. 전동 드릴과 망치 세례에 산산조각난 ‘라마수(독수리 날개 달린 황소상)’와 ‘로즈한의 신’은 과연 어떤 유물인가.
 ‘라마수’는 모술 외곽의 니네베에 있는 ‘니르갈의 문’에 있는 석상이다. 티그리스 강 동쪽에 있는 니네베는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였다. 기원전 9세기 쯤에 세워진 ‘니르갈의 문’은 니네베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유명하다.
 고대 아시리아 제국의 찬란한 유물들이 ‘다신주의 우상’이라는 딱지가 붙은채 파괴된 것이다.
 영상에 등장하는 IS대원은 “(고대 아시리아 제국과 아카드 왕국은) 다신주의를 숭배한 왕조들”이라 비난하고 “신이 우상 제거를 명했으니 우리에게는 이것이 수십억 달러짜리라 할지언정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큰소리쳤다.
 이 뿐 아니다. IS는 지난해 7월부터 모술에서 성서 속 예언자 요나가 묻힌 곳으로 전해져오는 나비 유뉴스 묘지를 폭파했다. 지난 22일에는 모술공공도서관에서 폭탄을 터트려 희귀서적과 고문서 약 1만 점을 한꺼번에 태워 없앴다고 한다.
 국제사회가 이같은 IS의 야만적 행위를 두고 ‘문화 청소’니 ‘인류 기억의 심장부가 가격당했다’느니 하면서 비난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들의 반문명·반인간의 만행을 그저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하니 이 무기력을 어찌할 것인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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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차 왕래에도 지장이 있는 문이다. 그런 낡아빠진 문은 파괴해버려야 한다.”
 “한성부(서울시)에 예산이 없어 이전은 너무도 곤란한 것이었다. 그래서 포병대의 도움으로 대포의 탄환으로 문을 포격해서 파괴하는 것도 생각했는데….”
 남대문(승례문) 이야기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을 즈음, 남대문의 운명도 풍전등화 격이었다. 일본인 연구자인 오타 히데하루는 2002년 제출한 서울대 석사논문(<근대 한·일양국의 성곽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지정책>) 에서 그 사연을 풀어놓는다. 
 즉 을사늑약의 결과로 통감부가 개설되자 서울 거주 일본인들의 모임인 일본거류민회는 대대적인 ‘도시개조’를 계획했다. 핵심은 용산을 포함한 지역에 40~50만명을 수용할 신시가지를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1934년 8월27일자 총독부 관보에 오른 보물 목록. 보물 고적 천연기념물 등 169건의 지정문화재가 목록에 올랐다.|국립중앙도서관


 

■눈엣가시, 조선의 성곽
 서소문~수구문(광희문)을 직통하는 도로를 개설하고, 종로를 십자대로로 조성하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주둔한 왜성대와 욱정(예장동·회현동 일대) 등 남산 북록을 공원화 하자는 것이었다. 또 용산에 대규모 경마장을 건설한다는 계획도 포함돼 있었다. 용산 신도시 계획의 걸림돌로 꼽힌 것이 바로 남대문이었다. 그렇잖아도 일제는 남대문을 비롯한 조선의 성곽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당시 중의원 의원이자 한성신보 사장을 지낸 아다치 겐조우(安達謙藏)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조선>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선인동화(鮮人同化)를 위해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 있다. 역사적으로 배일(排日)재료를 공급하고 있는 기념물이다. 그런 기념물을 선인들이 조석으로 접하게 된다면 역사적으로 선인동화를 부정하는 재료가 되는 것이다. ~그런 기념물을 서서히 제거하는 것이 민심통일이나 선인동화를 위해 불가결하다.”(1910년 <조선> ‘32호’)
 조선의 산성이나 사찰, 가람 등에는 지난날 배일 운동의 편액이나 기사 등이 남아 있다는 것. 조선인들이 그 항일 및 배일운동의 흔적을 조석으로 접하면 역사적으로 조선인 동화를 부정하는 재료가 되기 때문에 빨리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여론 속에서 때마침 용산신도시 개발계획이 발표되자 숭례문은 ‘교통의 장애물’로 취급됐다.
 그러자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당시 조선군 사령관이 “낡아빠진 남대문은 빨리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심지어는 “포격으로 파괴하자”는 극단론까지 제기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보물고적천연기념물 보존령을 내린 뒤 이를 시행할 보존위원회를 만든다. 위원회는 총독부 내무국장 우시지마(牛島省三)를 비롯, 25명으로 구성했다. 총독부 사무관이던 유만겸과 중추원 참의 류정수이 들어갔고, 학계에서는 이능화·김용진·최남선이 포함됐다.(동아일보 1933년 12월15일)

 

 ■남대문이 생존한 이유
 하지만 뜻밖의 인물이 뜻밖의 논리로 ‘숭례문 파괴’ 주장에 극력반대한다.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였다. 그는 고종황제도 알현한 바 있는, 일본거류민 가운데 최고유력자였다. 뿐만 아니라 하세가와 사령관과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일본공사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그런데 나카이의 반대논리 역시 ‘반전’이었다.
 “남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빠져나간 문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건축물은 남대문 이외의 두 세가지 밖에 없습니다. 파괴하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까.” 

 나카이는 대안으로 남대문의 좌우도로를 확장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의 집요한 설득에 하세가와 등 ‘남대문 파괴론자’들은 뜻을 굽히고 말았다. 흥인지문(동대문)의 ‘생존’도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선봉에 섰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이 입성한 문이어서 파괴되지 않았다.
 일제의 인식은 지금으로 치면 서울여행 가이드 북인 <경성안내>나 <조선여행안내> 책자에도 소개된다. 예컨대 1927년 발행된 <취미의 조선여행(趣味の朝鮮の旅)> 책자에서는 숭례문을 이렇게 소개한다.
 “그 옛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정벌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남대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동대문을 통해 경성으로 쳐들어갔다고 하는데, 그 남대문이 이 남대문이다.”
 그러니까 일제가 남대문과 동대문을 보존한 까닭은 문화재적, 미술사적 가치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승전의 관문’이었기에 ‘몸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일제와 아무런 인연이 없던 돈의문(서대문)을 비롯해 소의문(서소문), 혜화문(동소문) 등은 속절없이 철거당하고 말았다. 특히 1915년 시구개수사업의 명목으로 서대문이 철거되자 여론이 들끓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마저 서대문을 의인화한 기사(‘나는 서대문이올시다’)에서 ‘마지막 슬픈 소리와 영구히 사라질 새문(서대문)’을 안타까워 했다.(오타 히데하루의 2002년 논문)

1933년 12월5일 조선총독부는 조선 보물고적 천연기념물 보존령을 제정한다.(동아일보 1933년 12월 6일자)

 ■보물 1·2호 남대문·동대문, 고적 1호 포석정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지 18년 뒤인 1933년 12월5일, 일제가 아주 특별한 조치를 취한다.
 조선의 문화재에 가치를 부여하고 보존하는 법(‘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제정한 것이다. ‘역사의 증징(證徵) 혹은 미술의 모범이 되고 학술연구에 도움이 될만한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을 영구보전한다는 뜻’이었다.(동아일보 1933년 12월6일)
 법에 따라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를 만든다.(12월14일) 지금의 문화재위원회 처럼 문화재 보전과 지정 등을 심의하는 조직이었다.
 보존회는 총독부 내무국장 우시지마(牛島省三)를 비롯, 25명으로 구성했다. 한국인은 5명이 들어갔다. 총독부 사무관이던 유만겸과 중추원 참의 류정수가 포함됐고, 학계에서는 이능화·김용진·최남선이 포함됐다. 일본인으로서는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과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등이 들어 있었다.(동아일보 1933년 12월15일)
 총독부는 이듬해인 1934년 8월27일자 <관보>의 고시를 통해 1차 지정문화재를 발표한다.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로 시작된 관보는 지정번호와 문화재의 명칭, 소재지, 소재지역, 토지소유자 순으로 이날 지정된 표로 정리해놓았다.
 ‘보물 1호 경성 남대문, 보물 2호 경성 동대문…. 고적 1호 경주 포석정지, 천연기념물 1호 달성 측백나무 숲….’
 이날 관보에 게재된 문화재는 보물 153건, 고적 13건, 천연기념물 3건 등 모두 169건이었다.    

1907년 쯤의 남대문(숭례문) 전경. 철거위기에 놓였다가 임진왜란 때 왜군의 승전기념물이라 해서 살아남았다.

■국보 보물은 편의상 붙인 일련번호?
 여기서 두가지 주목거리가 있다.
 먼저 일제가 국보없이 보물과 고적. 천연기념물만 지정했다는 점이다. 일제의 논리는 명확했다. 내선일체라는 것.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이며, 따라서 일본의 국보가 식민지 조선의 국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권을 상실한 조선에 국보는 없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지정된 문화재는 해방 후에도 아무런 비판없이 답습됐다는 점이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면서 지정문화재를 국보와 보물로 나누어 지정한 것이다. 이때 보물 1·2호였던 남대문과 동대문은 국보 1호와 보물 1호가 됐고, 고적 1호였던 포석정은 사적 1호가 됐다.
 또 하나, 일제는 과연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문화재를 중요도에 따라 번호를 매긴 게 아니었을까. 일견 그런 것 같기는 하다.
 첫번째 문화재 지정 때 발표한 표만 보면 등급별 번호가 아닌 ‘지정번호’, 즉 지정되는 순으로 ‘편의상’ 붙인 흔적은 있다. 예컨대 보물 1·2호인 남대문·동대문이고, 3호는 보신각종이다.
 4호와 5호는 원각사 다층석탑과 원각사비이다. 6호와 7호는 중초사 당간지주와 중초사 삼층석탑이다. 8호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이지만. 9호와 10·11호는 개성 첨성대와 개성 남대문, 개성 연복사종이다. 남대문과 동대문, 진흥왕순수비를 빼면 같은 장소에 있는 문화재끼리 묶어놓은 흔적이 있다. 고적의 경우 1호는 경주 포석정, 2호는 김해 회현리 패총, 3호는 봉산 휴류산성, 4호는 강서 간성리 연화총이다.
 그런데 5~9호까지는 평남 용강 지역의 안성리 쌍영총(5호)·안성리 대총(6호)·매산리 수렵총(7호)·신덕리 성총(8호)·신덕리 감신총(9호) 등이 줄을 잇고 있다. ‘편의상’ 일련번호를 붙여 지정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입성했던 ‘승전의 문(남대문과 동대문)’을 굳이 보물 1·2호로 등록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또 하나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고적 1호’로 지정된 경주 포석정이다. <삼국사기> 등 정사의 기록으로만 보면 경주 포석정은 ‘굴욕의 현장’, ‘망국의 상징’이다.  
 “경애왕 4년(927년) 겨울 11월 왕이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놀고 있었을 때 견훤이 갑자기 쳐들어왔다. 왕은~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견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살하도록 했고, 왕비를 강제로 욕보였다.”(‘신라본기·경애왕조’)
 목불연견의 참상이 아닌가. 나라가 망하는 줄도 모르고 질펀한 술판을 벌이다 1000년 사직을 나락으로 빠뜨린 저 부끄러운 역사를…. 과연 그랬을까.
 아무리 정신나간 왕이라지만 한겨울(음력 11월)에 노천에서 술판을 벌였을까. 그것도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졌는데? 경애왕은 두 달 전인 9월(음력) 후백제 견훤의 침략으로 위험에 처하자 고려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건은 구원병 1만 명을 냈는데, 미처 경주에 도달하기도 전에 견훤군이 침략한 것이다.  

 

■포석정의 비밀
 그런데 <화랑세기>를 보면 의미심장한 대목이 나온다. 심심치않게 등장하는 ‘포석사(鮑石祠)’ 혹은 ‘포석(鮑石)’이다. ‘포석정(亭)’이 아니라 사당을 뜻하는 ‘포석사(祠)’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 포석사에는 화랑 중의 화랑으로 추앙받은 문노(文努)의 화상을 모셨다. 문노는 제8대 풍월주(재임 579~582)였다. 그는 삼한일통 후 ‘사기(士氣)의 종주(宗主)’ 즉 ‘씩씩한 기운의 으뜸’으로 삼았다.
 그런 문노의 화상이 포석사에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포석사에서 나라의 안녕을 비는 행사가 열렸음을 의미한 것은 아닐까. 포석사에서는 귀족들의 길례(吉禮)도 열렸다.
 문노와 윤궁이 혼인할 때는 진평왕이 친히 포석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또 태종무열왕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동생 문희의 혼인식이 열린 곳도 바로 포석사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경애왕은 술판을 벌이려 한겨울에 포석정으로 간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누란에 빠진 나라의 안녕을 간절히 빌기 위해 왕실과 귀족들을 동원해서 포석사로 갔을 것이다.
 거기서 간절히 1000년 사직의 유지를 빌다가 그만 후백제군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설상가상 일제는 포석정을 멋대로 정비했다. 물이 흘러드는 입수구 부분의 일부도, 물이 빠지는 출수구 부분도 없는 괴상한 형태로 복원해버린 것이다.
 포석정은 그렇게 해서 고적 1호의 이름을 얻은 것이다.  

 


   ■내선일체의 상징?
 일제가 어떤 생각을 갖고 식민지 조선의 문화재정책을 폈는 지를 짐작할 수 있는 기사들이 남아있다.
 1933년 8월11일자 <동아일보>는 아주 의미심장한 기사를 쓴다. 조선총독부가 이른바 ‘보물고적천연기념물보존령’을 제정하면서 국가(일제)가 관리해야 할 문화재의 범위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문화를 수입하야 이것을 일본에 전한 조선사의 변천, 고대 일중(日中)관계를 천명하는 유적 등…. 학술상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것은 금후 국가관리 하에 영구히 보존할 터이다.”
 즉, 조선의 독창적인 역사를 보전하기 보다는 중국문화를 수입해서 일본에 전한, 이른바 ‘일중관계의 역사’ 위주의 문화재를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1938년 11월25일 일제는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히 표명하는 문화재'를 골라 보물 고적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1938년 11월26일 기사를 보면 좀더 명확해진다.
 “4회 총회에서는 101종을 새로 지정했다. 금번 지정되려는 것은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히 표명하는 것이라 하야 주목을 끄을고 잇다.”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히 표명하는’ 문화재를 중심으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우선 고적의 경우 ‘창령 화왕산성·창녕 목마산성·김해 분산성·함안 성산산성·김해 전 김수로왕릉·김해 전 수로왕비릉·김해 삼산리고분·고령 지산동고분·창녕고분군 등’을 등재했다. 그러면서 이들 문화재의 등록사유를 ‘임나(任那)관계 고적’이라고 기재했다. 예의 그 지긋지긋한 임나일본부설과 관계가 깊은 유적들이라고 해서 지정해놓은 것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뒷받침할만하다’는 이유로…. 또 경남 양산 물금의 증산성도 지정됐다. 증산성에는 ‘임진왜란 때의 고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증산성은 임진왜란 때 다데 마사무네(伊達政宗)가 쌓았다고 해서 고적의 반열에 올랐다.
 이 모든 증거를 볼 때 일제가 남대문·동대문에 보물 1·2호. 포석정터에 고적 1호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명확하지 않을까. 조선 점령의 상징인 남대문과 동대문, 그리고 나라가 망하는 줄도 모르고 술판을 벌인 하지만 일제는 포석정을 ‘조선망국의 상징’으로 삼은 것이 아닐까. ‘나라가 망하는 해도 술판을 벌이는 무지몽매한 민족’ 임을 역사 앞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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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팟 캐스트 18회는 논쟁적인 주제를 다루겠습니다.
 국보 1호 논쟁입니다. 국보 뿐 아니라 보물 1호, 사적 1호도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논쟁은 10년마다 재연되어 왔습니다.
 1995·2005년 광복 50·60주년을 맞아 10년 주기로 불거졌지요. 광복 70주년을 맞는 올해도 재연될 것 같습니다. 문화재청이 2월 말까지 문화재에 부여되는 관리번호지정제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 용역을 발주한다니 말입니다. 여기에 광복 후 고희(古稀)를 맞는 해니만큼 ‘국보 1호(숭례문)’의 지위를 둘러싼 가열찬 논쟁이 재연되겠네요.
 

1934년 8월27일 조선총독부 관보에 나온 사상 첫 지정문화재 목록. 경성 남대문(숭례)과 경성 동대문(흥인지문)을 보물 1호와 2호로 등재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논쟁의 레파토리는 뻔합니다. 국보 1호 변경을 주장하는 쪽은 일제의 지정제도를 답습한 국보 1호(숭례문)가 대표문화재로서 상징성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이나 석굴암(24호)이 훨씬 가치가 크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반대하는 쪽은 ‘소모적인 논쟁은 의미없다’고 주장합니다.
 ‘국보 1호 숭례문’은 일제가 붙일 때부터 우열의 순번이 아니라 말 그대로 관리번호였다는 것입니다. 또 ‘국보 1호를 훈민정음으로 바꿨다 치자. 그런데 이후에 더 좋은 문화재가 나오면 국보 1호를 또 재지정해야 하는 것이냐.’ 그리고 뭐 그런 주장입니다.
 반대파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일제가 중요도에 따른 등급이 아니라, 지정 순으로 번호를 매겼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조선의 지정문화재를 처음으로 공포한 1934년 8월 24일자 조선총독부 관보(제2290호)를 봅시다.
 보물 1·2호는 남대문과 동대문, 4·5호는 원각사 다층석탑과 원각사비, 6·7호는 중초사 당간지주와 중초사 삼층석탑입니다. 9·10·11호는 개성 첨성대·개성 남대문·개성 연복사입니다. 비슷한 장소에 있는 문화재들을 묶어 ‘편의상’ 관리번호를 붙였다는 인상이 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심화학습에 들어갑시다. 원래 남대문(숭례문)을 비롯한 서울의 관문은 모두 철거대상이었습니다.
 예컨대 한성순보 사장을 지낸 야다치 겐조(安達謙藏)는 1910년 “조선인을 동화시키려면 반일 기념물들을 제거해야 한다”(<조선> ‘32호’)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일제는 40~50만명을 수용할 용산 신도시 건설을 포함한 대대적인 도시개조계획을 세웠습니다. 남·동·서대문 등 조선의 상징물은 모두 파괴 대상이 됐습니다. 심지어 대포로 포격해서 파괴시키자는 의견까지 나왔답니다. 하지만 일본거류민단장이던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 등은 명쾌한 반대논리를 폈답니다.
 “남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입성한 문입니다. 파괴하는 것은 아깝습니다.”

고적(사적) 1호는 경주 포석정터였다.

 결국 남대문은 극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동대문 역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입성했다”는 사연 때문에 보전됐습니다. 1927년 일제가 펴낸 조선여행안내서(<趣味の朝鮮の旅>) 역시 “가토 기요마사가 남대문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대문에서 경성으로 쳐들어갔다고 한다.”고 소개했습니다.
 반면 일본의 임진왜란 전승기념물이 아닌 서대문(돈의문) 등은 속절없이 철거됐습니다.(1915년)
 경주 포석정을 ‘고적 1호’로 정한 까닭도 심상찮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927년 경애왕이 견훤이 쳐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포석정에서 술판을 벌이다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제는 포석정을 신라 망국의 상징으로 삼았던 겁니다. 포석정을 굳이 정비하고, 고적 1호로 세운 이유가 아닐까요.
 일제가 국보 없이 보물로만 조선의 문화재를 지정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내선일체라는 거지요. 국권을 잃은 조선에는 국보가 없으며, 따라서 일본의 국보가 바로 조선의 국보라는 것이지요. 문제는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를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때 아무런 검토없이 국보와 보물로 나누어 그대로 답습했다는 겁니다. 또 하나, 북한의 국보 1호는 평양성이라는데 문화재에 일련번호가 남아있는 것은 남북한이 거의 유일하다고 하네요.
 저는 ‘국보 1호’ 논쟁에서 교체파도, 유지파도 아닙니다. 다만 ‘국보·보물·사적 1호’ 속에 묻힌 속사정을 풀어본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리 ‘1·2·3호…’의 차례가 문화유산의 가치를 가르는 등급표시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사람들이 ‘숭례문=국보 1호, 동대문=보물 1호, 포석정=사적 1호’로 떠받드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교체’ 혹은 ‘유지’가 아니라 관리번호 제도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는 방안도 함께 논의해보면 어떨까요. 팟 캐스트를 들어보시고 판단해보십시요.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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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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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7년 필자는 경향신문 탐사단의 일원으로 중국 동북방과 러시아 일대를 23박24일동안 탐사했습니다. 이름하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였습니다. 한국 언론사상 처음 있는 역사대탐험이었습니다. 러시아 연해주바이칼호울란우데훌룬부이르하일라얼오룬춘건허하얼빈선양츠펑링위안차오양까지. 까마득한 선사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를 더듬어보았습니다. 한반도, 아니 한반도 남부에 갇혀있는 역사를 이제는 넓은 시야로 바라보자는 뜻이었습니다. 우리 역사는 결코 한반도에서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다녀와서 이미 단행본으로도 출간했습니다. 성안당에서 출간한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008년)입니다. 블로그를 보는 분들을 위해 당시의 연재물을 프롤로그서부터 소개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랴오허[요하ㆍ遼河]유역은 고대문명의 발상지이며 다민족ㆍ다문화의 교류지였다.”(랴오닝성박물관 랴오허문명전 전시실 입구 소개문)
 “중국문명은 랴오허문명과 황허문명의 결합으로 완성됐다.”(궈다순 랴오닝성문물고고연구소 연구원)
 “유적과 유물이 어쩌면 이렇게 우리 것과 같은지 모르겠다.”(이형구 선문대 교수)

 

차하이에서 출토된 빗살무늬 계통 토기

1980년을 전후로 중국 고고학계는 한족 중심의 세계관을 뒤흔들 만큼 충격적인 유물과 유적을 발굴하면서 정신적 공황에 빠진다. 지금까지 ‘중국문명은 황허문명’이라는 중화주의를 고수해 왔지만 더 이상 그런 주장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낱 오랑캐[동이·東夷]의 영역으로 폄훼했던 발해만(渤海灣) 일대에서 황허문명보다 앞서는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났으니 말이다.
중국 고고학계의 태두 쑤빙치[소병기, 蘇秉琦] 쑤빙치(蘇秉琦ㆍ1909~1999년)는 중국고고학계 태두이다. 1952~1982년 베이징대 역사계 고고전업을 창설한 교수로,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중국고고학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다민족 통합국가인 중국의 고민을 고고학의 측면에서 이른바 ‘중화문화 6대 지역’을 ‘고고학문화구계론(考古學文化區系論)’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지금까지 오랑캐의 영역으로 간주했던 지역에서 중원문명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문화적으로 앞서는 증거들이 잇따라 발굴되자, 그는 중원중심의 일원일체론을 탈피해 각각의 문화구에서 발전한 문화가 하나로 융합하여 지금의 중화문명을 이뤘다는 이른바 다원일체론을 주장했다. 얼핏 각각의 문화구가 이뤄낸 문화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현재 중국의 국경 안에서 이뤄진 문명이나 문화를 중국 역사의 일부분으로 간주하며 통일된 중국의 단결을 누누이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기존 중원문화보다 앞서는 이민족 색채의 훙산문화가 발굴되었을 때도, 중국 동북의 훙산문화와 중원의 양사오문화가 극적으로 만나 위대한 중화문명을 이뤘다고 주장했다.
는 “동이의 랴오허문명과 한족의 황허문명이 조화를 이뤘으며, 여기에 남방ㆍ서북문화가 중원으로 모여 오늘날의 중국문명이 완성됐다.”고 결론을 내렸다. 중국문명을 일원일체에서 다원일체의 문명으로 바꿔 해석한 것이다.
중국인들의 ‘용 신앙’이 중원이 아니라 다링허[대릉하 . 大凌河] 상류의 동이족 본거지에서, 그것도 BC5600년에 만들어진 차하이[사해, 査海]유적에서 ‘용 형상의 돌무더기’ 형태로 확인된 것도 충격이었다. 또한 차하이유적과 동시대(BC6200~BC5200년)인 싱룽와[흥륭와, 興隆窪]유적에서는 요즘의 전원주택단지와 같은 취락유적이 발견되었다. 이에 중국인들은 차하이유적과 싱룽와유적을 각각 ‘중화(中華) 제1촌(차하이)’ 및 ‘중화시조의 취락(싱룽와)’이라고 명명했다.
이 차하이ㆍ싱룽와문화는 BC4500부터 시작해 BC3000년까지 이어진 훙산[紅山]문화의 원형이었다. 랴오닝성 차오양[조양ㆍ朝陽] 젠핑[건평ㆍ建平]과 링위엔[능원ㆍ凌源] 양 현의  경계에 걸쳐있는 뉴허량[우하량, 牛河梁]유적은 무덤과 제단, 신전(여신묘) 등 고대사회의 3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츠펑[적봉ㆍ赤峰] 싼줘뎬[삼좌점ㆍ三座店]을 비롯해, BC2000부터 BC1200년까지 ‘샤자뎬[하가점ㆍ夏家店]하층문화’를 꽃피웠던 청쯔산[성자산ㆍ城子山]에서는 대규모 석성과 돌무덤떼, 제단, 주거지 등이 발굴되었다. 이는 싼줘뎬과 청쯔산문화를 이끌었던

훙산문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뉴허량 유적 전경

 집단이 고국(古國)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쑤빙치는 “훙산문화와 샤자뎬하층문화, 진(秦)ㆍ연(燕)의 문화는 고국(古國ㆍ훙산문화)-방국(邦國ㆍ샤자뎬하층문화)-제국(帝國ㆍ진나라 및 연나라)으로 발전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이것은 중국문명과 국가형성의 기원형태를 단적으로 알려준다.”고 보았다.

 

지금은 중국의 영토에 속해 있지만 동이족의 문명의 흔적이 분명한 발굴 성과가 지속적으로 발표되자 발해연안문명권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해 온 국내 학계에서도 관심이 고조되었다. 국경이 없던 시절 꽃피었던 찬란한 문명의 흔적들을 현재의 영토에 근거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중국의 한족 중심 세계관에 대해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주장이 봇물 터지듯 솟아 나왔다. 이에 이형구 교수를 비롯해 전문가들로 구성된 탐사단이 다링허ㆍ랴오허 일대와 싼줘뎬 석성을 본격적으로 탐사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여정에서 탐사단은 청쯔산, 싱룽와유적, 차오마오산[초모산ㆍ草帽山] 제사유적 등 전문가들의 발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은 궁벽한 곳에 놓여 있는 유적들까지 만났다. 비록 지금은 다른 나라에 속해 있지만 탐사단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차하이ㆍ싱룽와유적에서 고개를 내민 ‘갈지(之)자ㆍ사람인(人)자 빗살무늬토기’는 우리 신석기시대 문화의 전형적인 유물이 아닌가. 또한 영생불멸의 상징인 옥결(玉&#29606;ㆍ한 쪽이 트인 옥 귀고리)은 차하이ㆍ싱룽와 유적부터 훙산문화까지 도배하다시피 등장했다. 이런 옥결은 한반도 동해안 고성 문암리(BC6000년)에서도 나왔으며,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석관묘, 석실분, 적석총 등의 돌무덤은 우리 민족의 고유 묘제다.
훙산문화의 대표유적인 뉴허량에서는 수장(首長)의 것으로 보이는 큰 적석총과 27개의 석관묘가 발굴되었다. 이 양식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로, 그리고 고구려·백제의 적석총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뉴허량유적 바로 곁에 있는 지름 100미터나 되는 돌로 쌓은 대형 피라미드도 이번에 직접 보았다.
또한 뉴허량유적에는 조상신과 하늘에 제사지낸 원형 제단이 있었고, 인근 구릉에서는 지모신 신앙의 상징인 여신묘와 여신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여신상은 랴오허를 거쳐 랴오둥[요동ㆍ遼東]반도와 한반도에서도 두루 나타난다.

 

싼줘뎬에서 확인된 대규모 석성. 확인된 치(稚)만 13개나 된다. 샤자뎬 하층문화(고조선 시기)의 석성으로 관심을 모은다.

BC2000부터 BC120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츠펑 싼줘뎬 석성은 확인된 치(雉ㆍ적을 제압하려고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만 13개나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그런데 축조기법이 고구려 산성이나 백제 산성 등의 축성 양식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이 석성은 고조선 시기의 산성과도 연계시킬 수 있지 않울까 추측된다. 이 석성유적은 지난해 발굴이 끝난 것으로 이번에 우리 학계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이밖에 싼줘뎬과 청쯔산에서 확인한 석성과 제사유구, 주거지 등을 본 이형구 교수는 “어쩌면 이렇게 우리 고유의 축성술과 같은지 모르겠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싼줘뎬 석성은 확인된 치(雉 .성의 돌출 부분)만 13개나 되는 견고한 석성이었다. 청쯔산 역시 ‘고국(古國)이 존재했던 곳’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그렇다면 샤자뎬하층문화에 속하는 이 유적들을 경영하며 그 영역을 지배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이형구 교수는 “산 위에 이런 큰 규모의 돌을 운반할 동원력이라면 권력을 갖춘 국가단계의 큰 사회였을 것”이라면서 중원 하나라와 같은 시기에 동이족 국가단계의 큰 사회조직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복기대 단국대박물관 연구원은 아예 “고조선 유적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이렇게 동이족, 그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랴오허문명을 어떻게 요리하고 있을까? 훙산문화 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쉬쯔펑[서자봉ㆍ徐子峰] 츠펑대 교수는 “황허문명은 농업 중심의 문화였고, 랴오허문명은 신권 중심의 복합문화였다.”라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확실하게 정리했다. 다만 랴오허문명과 황허문명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쉬쯔펑 교수는 “동이계의 대표인 치우(蚩尤)와 중원의 황제(黃帝)가 싸웠다는 기록이 있지 않느냐.”면서 “이것이 바로 문명의 충돌이자 문명의 습합일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학계는 결국 문명의 서곡을 연 주체는 동이족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랴오허문명 역시 (중국이) 통일적 다민족국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한 중화문명의 일부”라고 못 박고 있다. 선양박물관의 ‘랴오허문명’ 특별전을 보면 그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다.
 

 

랴오허 문명 특별전실

 

전시실 입구엔 ‘랴오허유역은 고대문명 발상지’라는 서문을 걸어놓고 있으며, 전시실 한 쪽에는 ‘훙산문화와 오제(五帝)전설’을 설명하는 도표와 그래픽을 전시했다. 훙산문화와 양사오[앙소ㆍ仰韶]문화, 그리고 다원커우[대문구ㆍ大汶口]문화, 량주[량저ㆍ良渚]문화의 상호연관성을 관람객들이 알아보기 쉽게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훙산문화의 주체를 중국인들이 중화민족의 시조로 떠받드는 ‘황제집단’이라고 못 박아 둔 것이다. 도표에는 “훙산문화로 대표되는 황제집단의 활동범위는 연산남북지구”라고 적혀있다. 그래픽에는 훙산문화가 중원의 양사오문화를 대표하는 신농씨의 화족집단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학계는 훙산문화를 포함한 랴오허문명을 동이족의 문명이라고 하고, 관람객들에게는 훙산문화의 주체를 ‘황제집단’이라고 ‘교육홍보’하는 이중성을 드러낸 것이다.

 “랴오허문명이 중국문명의 기원”인 이상 중국의 목표는 확실하다. 중국은 1990년대 이후 ‘하 상 주 단대공정’을 실시해 하나라의 건국연대를 BC2070년으로 확정함으로써 전설상의 왕조를 역사시대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4대 인류문명의 발상지에 속하는 황허문명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BC3000년)에 비해 여전히 1,000년가량 뒤쳐져 있었다. 5,000년 중국 역사라고 선전해 왔지만 1,000년이 부족했던 것이다. 중국은 이제 ‘랴오허문명’으로 ‘전설상의 5제시대’를 역사시대로 끌어 올린 것이다. 쉬쯔펑 교수의 말은 중국의 향후 과제를 대변해 주고 있다.

 

뉴허량 유적에서 확인된 무인상(巫人) 옥제품(맨 위)과 여신상(두번째), 곰형 옥제품(3번째), 마지막 사진은 은()나라 시대 갑골.

 중국정부와 학계는 “이 1,000년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올해부터 ‘중화문명 탐원공정’을 시작했다. 우리는 철학, 문학, 과학, 종교 등 모든 학문을 동원해서 이 ‘잃어버린 1,000년’을 복원하는 작업을 벌일 것이다. 훙산문화 연구가 그 가운데 하나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궈다순[곽대순ㆍ郭大順]의 말처럼 ‘랴오허문명’은 고대문화의 생장점이자 다민족문화의 거대한 멜팅포트였다. 이 지역은 고조선과 고구려, 부여 등 우리 민족은 물론 선비, 거란, 말갈 등 서로 피를 나눴거나 이웃으로 지냈던 동이족이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무대였다. 그리고 그 무대는 랴오허유역뿐만 아니라 중국의 산둥반도와 허베이성[河北省], 네이멍구[내몽고ㆍ內蒙古]자치구 동남부,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남부, 지린성은 물론 한반도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랴오허문명’이라는 이름은 너무 한정적이고 중국 중심의 용어라 할 수 있다. 이형구 교수는 “지중해문명이 서양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이 발해연안에서 여명(黎明)을 연 문명은 중국문명은 물론 만주 지방과 한반도,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궈내는 젖줄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따라서 랴오허문명은 발해연안문명으로 바꿔 불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중국학계도 “상나라 이전의 문화는 발해만에 있다(先商文化在渤海灣).”(궈다순)고 분명히 못 박고 있다. 따라서 중국 중심의 ‘랴오허문명’이라는 용어의 폐기와 함께 ‘발해연안문명’이라는 새로운 용어의 사용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져야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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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지량, 인민군 몇 명 잡자고 해인사를…”(2008년 6월 초판)
 “김영환 대령, 명령불복종으로 고려대장경판을 지키다.”(2009년 11월 개정판)
 문화재청이 펴낸 <수난의 문화재-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의 2008년 초판과 2009년 개정판의 일부분이다.
 같은 쪽(205쪽)에 있고, 또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전쟁의 참화에서 지켜낸 인물을 소개하는데 이상하다.
 초판과 개정판의 주인공이 완전히 다르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전쟁의 참화에서 막아낸 주인공으로 알려진 김영환 장군

 ■뒤바뀐 주인공
 
이해를 돕기 위해 초판과 개정판의 상반된 내용을 좀더 검토해보자.
 우선 사건의 배경은 다르지 않다. 즉 고려대장경판이 보관된 해인사가 한국전쟁 당시 한줌의 재로 변할 뻔했다는 것이다.
 1951년 여름, 한국전쟁 당시 미처 퇴각하지 못한채 낙오한 북한군이 지리산을 숨어들면서 해인사는 풍전등화의 상황에 빠졌다는 것. 해인사를 비롯한 지리산 일대는 ‘낮에는 대한민국 남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는 것.
 당시 해인사 일대에도 900여 명의 북한군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에따라 북한군 패잔병들을 소탕하기 위한 공군의 작전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해인사 일대에 여러 차례 전투기 폭격작전이 집중됐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해인사와 고려대장경만큼은 폭격을 피해갔다. 그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귀중한 문화재인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보전하려는 ‘참군인’ 덕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참군인, 즉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폭격으로부터 막아낸 주인공이 초판과 개정판에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초판의 주인공
 
먼저 초판을 보자.
 “장지량(당시 중령)은 1951년 제1전투 비행단 작전참모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비행고문단으로부터 해인사 폭격명령을 받았습니다. 장지량은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초판에 따르면 장지량은 이렇게 생각했단다.
 ‘500~600명으로 추산되는 인민군 1개 대대는 해인사를 점령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식량탈취가 목적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2~3일 후면 해인사를 떠날 것이다. 그 후에 폭격한다면 적도 소탕하고 해인사도 지킬 것이다.’
 장지량은 파리를 지키기 위해 독일군에 무조건 항복한 프랑스 장군을 떠올리면서 ‘팔만대장경(고려대장경)이 어떤 문화재인데 인민군 몇 명 잡겠다고 해인사를 폭격하겠는가’라고 고민했단다. 그는 결국 팔만대장경을 지키려고 폭격 명령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단다. 초판은 그 후의 이야기도 아주 실감나게 풀어나간다. 장지량이 명령 거부의 결심을 미 6146 고문단 작전장교에게 설명하자, 미군 장교는 “왜 작전을 따르지 않느냐”고 불만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상호간 언쟁이 오가며 출격이 지연되자 상부에서는 전투기를 계속 출격시키라는 독촉명령이 계속 하달되었습니다. 그러나 장지량은 시간을 계속 끌었고 결국 날이 어두워지면서 자연스레 출격이 중단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려대장경은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초판에 따르면 이 일(명령거부) 때문에 장지량은 목숨을 잃을 뻔했단다. 노발대발한 미군측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장지량이 명령을 거부한 일을 항의했고, 대통령이 격노해서 그를 붙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김정렬 당시 공군참모총장이 장지량의 해명을 듣고 대통령에게 사정을 설명해줘서 극형을 면했습니다.”
 초판은 “장경판전과 고려대장경판을 지킨 장지량의 굳은 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면서 이렇게 매듭짓는다.
 “장지량도 전쟁 후 고려대장경판을 직접 보고는 자신의 결정이 현명한 판단이었음을 새삼 느꼈다. 만약 그가 상부의 명령대로 해인사를 폭격했다면 소중한 문화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테고 후대에 씻을 수 없는 죄가 되었을 것입니다.”
 초판에 따르면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전쟁의 참화에서 구해낸 주인공은 ‘장지량’이었던 것이다. 

해인사 경내에 조성된 김영환 장군 해인사 고려개장경 수호비 

 

 ■개정판의 주인공
 
하지만 초판 발행 후 1년 5개월 뒤 간행된 개정판에는 주인공이 바뀐다.
 “낙오된 북한군 900여 명이 해인사로 몰려들었습니다. 1951년 9월 18일 오전 8시30분 제1전투비행단 참모장이자 제10전투비행전대장인 김영환 대령은 경찰전투부대의 긴급항공지원 요청에 따라 하천 상공에서 정찰기를 만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주인공이 작전참모인 장지량 중령에서 전대장인 김영환 대령으로 바뀐 것이다. 작전명령의 주체도 미비행고문단에서 우리측 경찰전투부대로 바뀐다. 개정판을 더 보자.
 “정찰기가 백색연막탄을 터뜨려 제시한 공격목표는 바로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이었습니다.”
 개정판에 따르면 당시 김영환을 편대장으로 한 제10전투비행전대의 폭격기 4대는 기관총 뿐 아니라 폭탄과 로켓탄을 장착하고 있었다. 특히 김영환의 폭격기에는 ‘네이팜탄’도 적재돼 있었다. 해인사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을 발사해서 북한군을 쓸어버릴 작전이었다. 그러나 김영환은 그럴 수 없었다.
 “폭탄을 투하했다면 해인사나 장경판전, 고려대장경판이 무사했을까요. 김영환은 자신의 지시없이는 절대로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말도록 했습니다.”
 정찰기가 “편대장은 무엇하는가. 빨리 폭탄을 투하하라”는 날카로운 명을 내렸다. 편대 기장들도 김영환에게 폭격명령을 기다렸지만 김영환은 “공격하지 마라”는 단호한 명을 내렸다. 개정판은 “김영환 편대는 사찰 상공을 몇차례 선회한 다음 해인사 뒷산 너머로 폭탄과 로켓탄을 투하하고 귀대했다”고 기록했다.
 “김영환이 귀대하자 심한 추궁을 받았습니다. ‘김 대령은 국가보다도 사찰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사찰이 국가보다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공비보다는 사찰이 더 중요합니다.’ 김영환은 사찰을 파괴하는 데는 하루면 족하지만 해인사 같은 사찰을 세우는 데는 천년의 세월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개정판은 “참으로 긴급한 순간, 탁월한 판단이었다”면서 “명령 불복종이었지만 해인사는 잿더미가 될 위기를 벗어났다”고 기록했다. 개정판은 이어 2002년 해인사 들목에 고려대장경을 지켜낸 김영환의 공적을 기리는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가 건립됐음을 분명히 밝혀두었다.

 

 ■해프닝의 진실
 
어떻게 이런 해프닝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문화재청이 펴낸 <수난의 문화재-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 초판(2008년)이 장지량의 회고록(<빨간마후라 하늘에 등불을 켜고>(2006년)를 참고해서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장지량 장군의 회고록에 대한 논란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곳도 아닌 문화재청이 그 회고록 내용을 요약하는 수준의 책을 펴냈다는 것이었다.   
 문화재청 책이 인용한 장지량의 회고록을 보면 해인사 지켜낸 이야기가 너무도 생생하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나(장지량)는 출격대기중인 김영환 전대장에게 달려갔다. ‘전대장님 내 판단으로는 인민군 놈들이 불공을 드리러 절에 들어왔을 리 없습니다. 단순한 식량확보차원 같습니다. 따라서 해인사 폭격은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머리가 좋은 김영환 전대장도 이 말 뜻을 알아듣고 물었다. ‘그 말 맞아, 어찌하면 좋겠나.’”
 “(미 공군의 해인사 폭격명령을 지체시키자 미 고문단 윌슨 대위와 영어로 말다툼했다.) 이 때 김영환 전대장이 달려왔다. ‘왜 그러냐’. 나는 해인사 폭격의 부적절성을 지적하려고 파리와 교토 폭격을 제외한 사실을 설명하려는데 의사소통이 안된다고 했다. 김영환 전대장이 내 말을 받아 윌슨 대위에게….”
 장지량 회고록을 보면 ‘해인사와 고려대장경 수호’ 드라마의 주연(장지량)과 조연(김영환)은 분명하다. 

참군인의 순간판단력으로 폭격을 면한 것으로 알려진 고려대장경 

 ■회고록의 함정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개인의 회고록이니 일대기는 자신의 입장에서 쓰는 글이다. 사실관계가 다르거나 과장·축소·왜곡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의도와 상관없는 착각이 개입될 수도 있다.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당대의 시대 상황을 설명해주는 소중한 틈새자료일 수는 있지만, 그 기록을 맹신해서 마치 정사인양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 안된다. 장삼이사의 일대기라면 사실관계가 다른 들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지만 소중한 문화유산인 해인사와 고려대장경판을 전쟁의 참화에서 구해낸 주인공이라면 매우 중요한 역사인물로 기록돼야 한다. 그런데 개인의 일대기를 사실관계 확인이나 검증없이, 그것도 문화재청 책자에 고스란히 인용해서 마치 사실처럼 기술한다면 그것은 씻을 수 없는 역사왜곡을 인정해주는 셈이 된다.
 아닌게 아니라 장지량의 회고록과 문화재청의 책자는 출간되자마자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아무래도 ‘해인사와 고려대장경판을 지킨 장지량 장군’의 이야기는 인구에 회자될 만 했으니까…. 게다가 개인의 회고록을 정부(문화재청)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해준 꼴이 아니던가.  

 

 ■종합검증팀 가동
 하지만 곳곳에서 반론이 제기됐다.
 이미(2007년) 공군작전사령관을 지낸 윤응렬 예비역 장군이 <장지량 장군 회고록의 고찰과 소견>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문제를 제기했다. 2008년에는 김영환 장군의 조카인 김태자씨 역시 언론 인터뷰를 자청해 ‘김영환 장군의 명예를 되찾겠다’고 나섰다. 결국 2009년 공군 차원의 역사자료발굴위원회가 긴급하게 구성됐다.
 위원회는 한국전쟁 때 100회 이상 출격한 조종사 등 14명으로 구성돼 장지량 회고록인 <빨간 마후라…>와 문화재청의 <수난의 문화재…> 등 두 권의 내용을 4개월간 검증한 뒤 <종합보고서>를 펴냈다.
 위원회는 일단 보고서 작성의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면서 “두 책에 게재된 오기(誤記)와 근거없는 날조(捏造) 사례는 적지에 출격해서 전공을 세운 선배 조종사 등 공군 전체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라 못박았다. 위원회는 ‘해인사와 고려대장경판’ 건 말고도, 장지량 회고록에 등장하는 ‘빨간 마후라의 유래’ 등 몇가지 논란을 검증했다.

 

 ■뒤바뀐 주·조연
 
4개월 동안 검증한 내용을 기록한 보고서를 보자.
 먼저 ‘해인사와 고려대장경’ 논란…. 위원회의 검증 결과 ‘미 공군이 해인사 공습을 명했다’는 장지량 회고록의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판단했다. 당시 해인사 지역에 대한 한국 공군의 항공지원작전은 미 공군과는 전혀 관계없는 한국 공군 단독작전이었다는 것이다. 즉 미 공군의 어떠한 형태의 지시나 관여없는 제10전투비행전대장인 김영환 대령의 지휘 아래 수행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지량 회고록에 등장하는 미공군 고문관(월슨)과의 언쟁은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보고서는 따라서 윌슨과 마찰이 있었고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포살(捕殺)당할 뻔했다’는 회고록 내용도 근거없는 주장이라고 결론 지었다. 물론 위원회는 단서를 하나 달았다.
 ‘만약 작전참모였던 장지량 중령이 비행전대장인 김영환 대령에게 해인사 폭격의 부적절성을 설명하고 폭격임무 유보를 건의했다면 참모로서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렇지만 위원회는 “임무 당시 공격진입 및 이탈, 주표적을 포함한 목표전환 등 실제 폭격 수행방침은 임무지휘관의 고유권한”이라고 못박았다. 무슨 뜻이냐. 당시 해인사 지역에 대한 항공지원 자전의 출격여부는 전적으로 지휘관인 김영환 제10전투비행단장의 권한과 책임이라는 것.
 즉 만에 하나 폭격 브리핑에 앞서 작전참모가 해인사 경내 폭격유보를 건의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참모의 건의일 뿐 결정사항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해인사 폭격 유보’의 공적은 어떤 경우든 지휘책임자인 김영환 당시 전대장의 몫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원회는 이같은 공적 덕분에 해인사 경내에 ‘김영환 장군의 공적비’가 건립됐음을 강조했다.(2002년) 

1964년 개봉되어 공전의 히트를 뿌렸던 영화 '빨간 마후라'. 빨간 마후라를 맨 처음 목에 두른 이는 김영환 장군이었고, 공군의 상징으로 확정지은 것은 바로 이 영화였다고 한다. 

 ■해인사·고려대장경 수호의 야사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수호한 이 작전이 공군사나 출격기록과 같은 공식 기록에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군을 미화하려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닐까. 윤응렬 예비역 장군은 이에 대해 “공군사나 출격기록에는 출격작전의 세부 사항까지는 기술하지 않은 것이 정상”이라 밝혔다.
 ‘해인사 일대 폭격작전(정식 작전명은 지리산지구 공비소탕작전)’의 경우도 출격명령에 공격목표를 명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한번 출격한 편대는 단일 목표가 아니라 지상의 경찰 토벌대가 제시하는 목표를 그 때 그 때 확인·공격한다는 것이다. 그 날도 김영환 대령이 이끄는 폭격기 편대는 공비가 집결된 해인사를 공격하라는 등 특정 목표를 공격하라는 지정을 받고 출격한 게 아니라는 것. 경찰토벌대가 “공비가 집결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공격목표를 제시받았지만, 김영환 편대장이 해인사를 폭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윤응렬 예비역 장군의 주장이었다.
 어쨌든 명확하고 객관적인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김영환 장군 주변 사람들과 해인사 스님들의 증언을 통해 김영환 편대장은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지킨 위대한 군인’으로 알려져왔다.
 예를 들어 ‘역사자료 발굴 위원회’에 참석한 김영환 장군의 동료들은 해인사 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당시 김영환 전대장이 ‘잘못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 해인사를 공격할 뻔했어.’라 했다. 당시엔 무슨 이야기인 줄 몰랐는데 지금에 와서야 그 말을 이해할 것 같다.”(박재호 예비역 장군)
 “사천기지에 근무했을 때 김영환 전대장으로부터 ‘야, 오늘 내가 절을 공격할 뻔 했어, 큰 일 날 뻔 했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생생하다.”(배상호 예비역 장군)    
 “해인사 스님들도 해인사가 온전한 것은 모두 공군의 덕이라 했다. 평소 불교에 대한 애착이 있는 김영환 장군이 무의식적으로 행동으로 옮겨 대장경판을 보호했을 것이다.”(최원문 예비역 대령)
 결국 이같은 증언들이 모여 움직일 수 없는 ‘해인사와 고려대장경 보전’의 야사(野史)가 된 것이다.  

 

 ■‘빨간 마후라’를 둘러싼 원조논쟁
 
또 하나, 장지량 회고록 내용을 둘러싼 흥미로운 논란거리가 있었다. 바로 ‘빨간 마후라’ 논쟁이다.
 장지량 회고록을 보면 “내 아이디어로 한국전쟁 당시 공군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맨 처음 고안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적진에서 격추된 조종사를 식별하려고 빨간마후라를 고안했다는 것이다. 회고록을 보면 아주 구체적이다.
 김영환 전대장에게 유색천의 사용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김영환 전대장은 처음에 “빨간 색은 중공군이 좋아하던 색깔이 아니냐”고 반대했지만 결국 자신의 권유로 마음을 바꿨다는 것이다.
 “다음 날 강릉 시내로 나가 붉은 인조견사를 두 필 사와 마후라 100여 장을 만들었다. 조종사들이 출격할 때마다 목에 두르고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회고록은 “빨간 마후라 덕분에 구조된 조종사가 생겨났으며 빨간마후라를 부적처럼 목에 두르고 출격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공군 하면 빨간마후라를 연상하는 것이 바로 내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장지량 회고록 및 문화재청 책 검증을 위한 공군발굴위원회는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는 결론을 내린다. ‘빨간 마후라를 고안한 이 역시 김영환 장군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김영환 전대장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붉은 색으로 도색한 전투기를 타고 80여 대의 연합군 항공기를 격추한 독일 공군의 에이스 만프레도 폰 리히토벤을 흠모했다는 것.
 그러던 그가 강릉기지 사령관 시절인 1951년 11월 공군본부로 출장하던 길에 친형(김정렬 초대 공군참모총장) 집에 잠시 들렀다. 그 때 형수가 입고 있던 자주색 치마를 보고 말했다는 것이다.
 “형수님, 마후라 하나 만들어주세요.”
 그 때 형수가 남아있던 치맛감을 찾아 자주색 마후라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김영환 장군의 빨간 마후라 이야기는 공군사의 전설처럼 전해졌다. 1973년 발간된 <공군 보라매> 제29호와 2006년 발간된 <공군> 10월호에도 분명하게 나온다.
 위원회는 “빨간 마후라를 처음 착용한 이는 김영환 당시 대령”이라 못박았다. 또한 “1964년 전투조종사를 소재로 한 ‘빨간 마후라’ 영화가 상영됨으로서 영화주제곡이 큰 호응을 얻음으로써 빨간 마후라가 공군조종사를 지칭하는 상징이 된 것”이라 부연 설명했다. 그 때부터 사천기지에서 비행교육과정을 수료한 조종사들에게 조종 흉장과 함께 참모총장이 직접 빨간마후라를 수여하는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회고록 역사의 교훈
 
사실 ‘해인사·고려대장경’ 논쟁과 ‘빨간 마후라’ 논쟁은 공군 차원에서 이뤄진 역사자료 발굴 위원회의 검증으로 끝났다고 봐야 한다.
 물론 당사자들이 고인이 된만큼 진실은 무엇인지는 사실 누구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는 상식과 보편의 기록이어야 한다. 일방적이고 주관적인 주장은 역사로서 객관성을 얻기 힘들다.
 개인의 회고록이나 일대기, 자서전 등은 그저 참고용으로 써야지 금과옥조가 되어서는 안된다.
 얼마 전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장지량 예비역 장군이 별세했다. 그런데 상당수 부음기사가 ‘해안사와 고려대장경을 지킨 빨간 마후라의 원조’라며 기렸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주관적인 개인의 자료를 무의식으로, 무비판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혹여 잘못된 정보가 시간이 흘러 마치 사실로 둔갑해서 결국 움직일 수 없는 정사로 후세에 남겨질 수도 있다는 노파심이 든다. 그것도 아무런 비판 없이 흘러흘러 어느새 정사로 변해버린다면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새삼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회고록)의 위험성을 다시 생각해본다. 또 그것을 종종 비판없이 믿어버렸던 필자 스스로도 반성해본다.

 <참고자료>

 문화재청 엮음,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이야기> 2008년 초판, 2009년 개정판

 공군, <공군 역사자료발굴위원회 종합보고서>, 공군역사자료발굴위원회, 2009년

 장지량 구술, 이계홍 정리, <빨간 마후라 하늘에 등불을 켜고>, 이미지북, 2006년

 윤응렬, <장지량 장군 회고록의 고찰과 소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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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진한·변진 등 삼한의 땅을 합하면 사방 한 변에 4000리인데 모두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이 가장 강대해서….”

“진국이 천자(한무제)를 알현하고자 했지만 조선의 우거왕이 가로막았다.”

<후한서> ‘동이전’과 <사기> ‘조선열전’ 등에는 기원전 3~2세기에 존재했다는 ‘진국(辰國)’의 이름이 보인다. 진국이 한반도 남부에 광활한 영역을 차지했으며, 중국과도 통교를 원할 만큼 강력한 국가의 형태를 갖췄다는 얘기다. <삼국지>를 보면 “조선상(朝鮮相) 역계경이 우거왕에게 간언했으나 채택되지 않자 주민 2000호를 이끌고 진국으로 피했고, 이후 결코 조선과 왕래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위서·동이전’) 진국의 국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반신반의한다. 동시대 기록인 <사기>는 판본에 따라 ‘진국’과 ‘중국(衆國)’ 등 두 가지로 표현돼 있는데, ‘중국’은 ‘여러 나라’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국이란 한반도 남부에 흩어져있던 여러 소국 전체를 일컫는 범칭이라는 설도 있다. 기원전 194년 위만에게 쫓긴 조선의 준왕이 건설한 나라가 바로 진국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사기>의 일부 판본을 제외한 이후의 역사서들은 진국을 삼한의 전신으로 파악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진국’의 영역에서 확인되는 기원전 3~2세기대 문화의 양상이다. 세형동검(細形銅劍·폭 좁은 동검)으로 대표되는 정교한 청동기 문화는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충주에서도 세형동검과 청동잔무늬거울을 비롯한 청동기 유물이 19점이나 확인됐다.(사진)

전문가들은 ‘진국을 구성한 소국의 수장(首長) 무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대의 수장은 정치와 제사를 겸한 제정일치 사회의 지도자였다. ‘하늘과 사람의 소통’을 독점한 그들은 최고 권위를 상징하는 청동기를 달고 나라의 길흉을 점쳤을 것이다. 덧붙여 세형동검은 한반도 청천강 이남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문화양상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렇지만 단절된 문화란 있을 수 없다. 중국 동북방에서 만개한 뒤 한반도로 넘어온 고조선의 ‘비파형 동검’이 ‘세형동검’으로 재창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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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천루(摩天樓)’는 문자 그대로 ‘하늘(天)에 닿을(摩) 만큼 높은 빌딩(樓)’을 뜻한다.

 흔히들 하늘과 똑같아지려는 인간의 헛된 욕망을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에 비유한다. 그러니 ‘바벨탑’처럼 ‘마천루’라는 명사도 ‘인간의 욕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다. 1870년대 이후 미국 시카고에서 건설하기 시작한 마천루는 이제 하늘을 ‘찌를’ 기세로 솟구치고 있다.

 

  1885년 55m(10층·시카고 홈보험 빌딩)로 시작됐던 마천루는 이제 828m(163층·아랍에미리트연합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 빌딩)까지 치솟았다. 이 역시 ‘권불십년(權不十年)’일 듯싶다. 2018년 완공 목표로 건설 중인 킹덤 타워(사우디아라비아 제다)의 높이가 무려 1007m나 된다니 말이다. 인간이 1㎞ 위 공중에서 사는 시대가 다가온 것이다. ‘마천루의 저주’라는 말도 있다. 초고층 건물을 지으면 그 직후 최악의 경제불황을 겪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1931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102층, 381m)은 세계대공황을, 1973년 세계무역센터(110층, 417m)는 오일쇼크를 불렀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높이의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마천루가 곧 그 나라의 국력을 상징하는 ‘랜드마크’의 역할을 한다는 맹신 때문이리라. 국내에서도 ‘마천루 경쟁’이 가속화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2020년까지 서울 삼성동 한전부지에 571m짜리 마천루를 지을 계획을 밝혔다. 2016년 완공 예정인 제2롯데월드(555m)보다 16m 더 높은 것이다. 물론 ‘국내 1위’의 지위를 얻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무한경쟁의 욕망이 담긴 ‘1위’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과도한 특혜는 없는지, 시민들의 안전에는 문제가 없는지 철저한 사전검토와 함께 관리·감독이 뒤따라야 할 것 같다.

이 대목에서 신중하라는 의미로 기록 하나를 인용해보겠다. 1277년(충렬왕 3년), 조성도감(요즘 국토교통부)이 중국의 풍습을 좇아 고층건물 건설을 강행하자 관후감(천문대)이 나섰다. 신라말 풍수가인 도선 스님의 <도선비기>를 인용해서 ‘불가함’을 외친 것이다.

“우리는 산이 많아 고층건물을 지으면 세력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태조(왕건) 이래로 궁궐도, 집도 높게 짓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화가 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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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4월 29일 경향신문은 의미심장한 한줄짜리 기사를 소개한다.
 ‘연예인들의 국어명 전용 전용작업을 펼쳐온 MBC가 가수 김세나 양에게 순수 우리 말로 이름을 바꿔 출연하도록 종용했다’는 것이었다. 이어 ‘만약 김세나가 본명인 김희숙이나 다른 우리말 예명을 쓰지 않는 한 MBC에 출연할 수 없다’는 방침도 전했다. 이는 1970년대 연예계로까지 불똥이 튄 이른바 국어순화운동의 광풍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국화순화전국연합회가 창설되고(73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나서 국어순화운동을 독려하고 나섰으니(76년 4월) 오죽했으랴. 박정희 대통령이 문교부에 “모든 분야에서 쓰는 외국어를 우리 말로 다듬는 시안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분야별로 시안만들어 심의기구 검토하게 한 뒤 신문 방송 대중매체에서 서서히 보급시키라. 국어순화운동은 순조롭게 발전시켜야 한다. 뚜렷한 방안이 아직 서있지 못한 초기단계이기에 방송을 들어보면 일부에 혼선이 없지 않다. 체육계의 경우 인사들이 시안을 만들게 되면 어떤 말은 더 좋은 우리 말로 고치자든지 또 어떤 말은 세계공통으로 쓰이고 있는 용어이기 때문에 굳이 고칠 필요가 없다든지 하는 적절한 견해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MBC의 경우 김세레나를 비롯해 외국인 예명을 가진 연예인 80명에게 개명을 종용했다.
 김세레나의 경우 이미 김세나로 바꿨지만 그것도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절충 끝에 김세나의 이름은 지켜냈지만 연예인 예명을 둘러싼 혼란은 온갖 해프닝을 낳았다.
 하지만 방송국 간 통일된 이름을 마련하지 못해 혼선을 빚었다.
 일례로 템페스트의 경우 어느 방송은 ‘돌풍’, 어느 방송은 ‘돌풍들’로, 어느 방송은 ‘5인조 돌풍’으로 달리 번역됐다. 바니걸즈는 ‘토끼소녀’, ‘토끼소녀들’은 물론 심지어는 ‘토끼아가씨들’ 등으로 제각각 일컬어졌다.
 연예인들은 개명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패티 김은 ‘김혜자’로, 뜨와 에므아는 ‘너와 나’로, 바니걸즈는 ‘토끼소녀들’로, 봉봉 사중창단은 ‘봄봄’으로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 말이 좋기로서니 라나에로스포를 ‘개구리와 두꺼비’, 어니언즈를 ‘양파들’, 템페스트를 ‘돌풍’, 드래곤즈를 ‘청룡들’, 바블껌을 ‘풍선껌’, 블루벨즈를 파란 종을 뜻하는 ‘청종(靑鐘)’, 투코리언즈를 ‘도향과 창철’, 쉐그린을 ‘막내들’로 각각 개명했다니 참…. 
 당대 국어순화운동을 펼치면서 뻔질나게 인용한 것은 ‘프랑스 정부가 불어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영어식 불어사용을 일절 금했다’(동아일보 76년 4월20일 사설)는 것이었다. 50대 이상이면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물론 되도록이면 우리 말 이름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적불명의 외국어를 남발하는 것도 꼴불견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을 무슨 국가차원의 정화운동으로 밀어붙이다 보니 획일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직역의 이름이 남발된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 별세한 위키리씨도 1970년대 국어순화운동의 열풍 속에 본명인 ‘이한필’로 바꿔 활약했다. 하지만 역시 팬들의 뇌리 속에는 ‘이한필’ 보다는 ‘위키리’가 더 친숙한 것 같다. 위키리씨가 1964년 남성4중창단인 ‘포클로버스’(네잎클로버) 소속으로 불렀던 ‘저녁 한 때의 목장 풍경’이 떠오른다.
 ‘끝없는 벌판 멀리 지평선에 노을이 물들어오면 외로운 저 목동의 가슴 속엔 아련한 그리움 솟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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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忠犬 라츠, 류머티즘 病死’
 경향신문 1969년 9월 5일자는 ‘라츠’라는 개(犬)의 부음기사를 실었다. 신문이 사람도 아닌 개의 죽음을 알린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고견(故犬)’은 바로 6년 전인 63년 사냥을 나갔다가 오발사고로 총상을 입고 쓰러진 주인을 구한 충견이었다.
 무슨 사연일까. 라츠는 경기도 광주군에서 주인 유동근씨의 집에 살고 있었던 셰퍼드였다.

총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주인을 구한 충견 라츠.  

  ■주인 구한 충견 라츠
 1963년 2월28일 주인집 아들(유병주·17살)은 아버지의 사냥총을 들고 15리 떨어진 산속으로 들어갔다. 라츠가 물론 동행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병주군이 그만 돌뿌리에 걸려 굴러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총의 방아쇠가 당겨져 이미와 넓적다리에 8발의 총상까지 입었다. 병주군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 때 라츠가 움직였다. 그는 5리나 떨어진 마을까지 달려 내려갔다. 마침 지나가던 동네소년 2명의 바짓자락을 물고 늘어지면서 자꾸 산속으로 가자는 시늉을 했다. 알아차리지 못한 소년이 자꾸 돌아서려 하면 라츠는 애걸하듯 계속 바짓자락을 당겼다. 동세소년들은 결국 30분 동안이나 라츠의 뒤를 따라갔고, 마침내 총상을 입고 쓰러진 병주군을 발견했다,
 병주군은 그렇게 목숨을 건졌다. 이 일이 알려지자 ‘사람보다 나은 충견’이라는 찬사가 터져나왔다.
 어린이 단체인 새싹회가 라츠에게 표창장을 전달하는 등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다. 그랬던 라츠가 6년만에 ‘류머티즘’으로 병사했다니 당연히 부음을 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충견의 이야기는 각 문헌과 구전설화를 통해 심심찮게 전해진다.

 

 ■의로운 개 무덤
 전북 임실군에는 ‘오수(獒樹)’라는 지명이 있는데, 개(獒)와 나무(樹)의 사연을 안고 있다.
 즉 옛날 김개인(金蓋仁)이란 사람은 개를 끔찍히 사랑했다. 하루는 김개인이 개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가 술에 취해 길가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마침 들불이 일어나 김개인이 누운 자리까지 번져왔다. 그러자 개는 근처 냇물로 뛰어들어 전신에 물을 묻혀서 김개인이 누워 있는 주변의 풀을 쉼없이 적셨다. 천신만고 끝에 불은 꺼졌지만 기진맥진한 개는 죽고 말았다. 
 나중에 깨어난 주인은 죽은 개를 보고 노래를 지어 슬픔을 표하고 개를 묻어주었다. 김개인은 봉분에 지팡이를 꽂아 표시했는데 그 지팡이가 잎이 피는 나무로 변했다. 그래서 이 고을의 지명이 오수(獒樹)가 됐다.
 경북 구미에도 유명한 ‘의로운 개 무덤’, 즉 ‘의구총(義狗塚)’이 있다.
 개주인 이름(이번에는 김성발)만 다를 뿐이지 주인을 구한 사연은 ‘오수 이야기’와 똑같다.
 즉 김성발이 기른 기는 매우 영리했다. 하루는 주인이 술에 취한 채 길가에서 잠이 들었는데 들판에 불이 났다.
 그러자 개는 멀리 떨어진 낙강(洛江)까지 뛰어가 꼬리에 물을 적셔 와서 불을 끄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탈진한 개는 결국 죽고 말았다. 깨어난 주인은 개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주었다. 사람들은 개의 무덤을 구분방(狗墳坊)이라 했다.
 1665년(현종 6년) 선산부사 안응창(安應昌)은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의열도(義烈圖)에 의구전(義狗傳)을 기록했다. 20년 뒤인 1685년(숙종 11)에는 화공이 의구도(義狗圖) 4폭을 남겼다.

주인을 구한 개 라츠가 류마티즘으로 병사했다는 부음기사. 라츠는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다.

 

 ■가장 의로운 동물
 고려 충렬왕 때(1281~82)의 일이다. 부모를 모두 전염병으로 잃은 어린 소년이 백구 한마리와 살았다. 아이가 개꼬리를 잡고 나가면 사람들이 밥을 내주었다. 절대 개가 먼저 먹는 법이 없었다. 아이가 목 마르다고 하면 개는 우물가로 데리고 갔다. 사람들은 그 개를 의견(義犬)이라 칭송했다.(<고려사절요> <동사강목>)
 개는 충직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남송시대 홍매(洪邁)의 <용재수필(容齋隨筆)> ‘인물이의위명(人物以義爲名)’를 보라.
 “금축(禽畜) 중에서 어진 것으로는 의로운 개, 까마귀, 매, 송골매가 있다.(禽畜之賢 則有義犬 義烏 義鷹 義골)”
 얼마전 한밤중 아파트에 불이 나자 짖어서 주인을 깨워 살렸다는 애완견 ‘둥이’의 사연이 화제를 뿌리고 있다.
 그런데 역사 속 의견(義犬)들과 드라미틱한 사연과 비교하면 동이의 이야기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뉴스가 되는 이유는 뭘까. 세상인심이 하도 팍팍하다보니 세상 인심이 하도 팍팍하다 보니 그 정도 견공의 사연까지 미담이 되는 것인가. 새삼 충렬왕 때 아이를 돌본 의견을 소개하면서 붙인 <동사강목>의 사론을 보라.
 “당시(충렬왕 때) 나라를 해치는 무리들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이 개는 주인을 알아보았다. 저들이야말로 짐승보다 못한 자들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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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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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10월 10일 경주 노서동의 고분 발굴장에서 감탄사가 터졌습니다.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재위 1950~73)의 목소리였습니다.
 일제는 당시 일본을 방문 중이던 황태자 부부를 위해 이벤트를 펼쳤습니다. 마침 경주에서 봉황이 장식된 금관이 발견된 것에 착안한 것입니다. 일제는 유물 일체를 노출시켜 놓고 황태자 부부에게 발굴의 피날레를 장식하도록 한 것입니다. 경주를 방문한 구스타프 황태자는 일제가 반쯤 노출해놓은 금제 허리띠와 금제 장식 등을 조심스레 수습했습니다. 


 일제는 금관까지 황태자가 수습하도록 부탁했습니다. 황태자가 금관을 들어올리자 환성과 박수가 터졌습니다.
 일제는 스웨덴의 한문 명칭인 서전(瑞典)의 ‘서(瑞)’와 봉황의 ‘봉(鳳)’자를 따서 ‘서봉총’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 서봉총 금관은 10년 뒤인 1935년 9월 엄청난 파문을 일으킵니다.
 당시 평양박물관은 경성박물관으로부터 대여받은 서봉총 출토 금제유물을 주제로 특별전을 열었는데요.
 전시회가 끝난 뒤 뒷풀이 연회가 펼쳐졌을 때 사고가 터집니다. 당시 내로라하는 평양기생들도 충출동했습니다.
 술판이 한창 벌어졌을 무렵이었습니다. 서봉총 금관을 차릉파(車綾波)라는 기생의 머리에 씌운 것입니다. 금제 허리띠와 금 귀고리, 금목걸이까지 휘감았습니다. 당시 평양 박물관장은 서봉총 발굴에도 참여한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였습니다.
 일제가 기생의 머리 위에 신라금관을 씌운 사연, 그 안타까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관련기사>

  평양기생 '차릉파' 신라57대왕으로 등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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