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13년, 진시황제가 6국을 통일한 뒤 주연을 베풀었다.
 이 때 제나라 출신 박사인 순우월이 나서 간언했다.
 “이제 폐하께서 천하를 소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제분들은 평민으로 사십니다. 만약 세력을 키운 신하들이 나타나면 폐하를 보필하기 어렵습니다. 은나라, 주나라 처럼 폐하의 자제들을 제후로 분봉해서 폐하를 보위하셔야 합니다.”

 이슬람국가(IS)가 파괴한 기독교 유적지 ‘요나의 무덤’ 잔해를 주민들이 옮기고 있다.

   ■진시황의 분서사건

  무슨 말이냐.

  은나라나 주나라 처럼 황제의 아들이나 친척, 혹은 공신들을 제후로 보내 다스리는 이른바 봉건제를 채택해야지, 중앙집권제로는 천하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시황제는 순우월의 주청을 공론에 붙였다. 그러나 시황제를 도와 통일 진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세운 승상(총리) 이사의 생각은 달랐다. 봉건제(분봉제)라는 것은 은·주 시대, 즉 흘러간 제도라는 것이다.

  천하가 어지러웠을 때, 즉 춘추전국시대 때는 각 제후들이 천하의 인재들을 서로 초청하느라 혈안이 됐지만, 지금은 천하가 통일되어 안정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집안에서 농업과 공업에 힘쓰고, 선비들은 법령과 형법을 학습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유생들만 지금의 것을 배우지 않고 옛 것만 배워 당세를 비난하면서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제후들이 난립할 때는 유생들이 저마다 견해를 피력하고 자기가 개인적으로 배운 것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시어 흑백을 가리고 모든 것이 황제 한 분에 의해 결정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유생이라는 자들은) 개인적으로 학습하여 조정의 법령과 교화를 비난하고~백성들을 거느려서 비방하는 말만 조성할 뿐입니다.”
  황제 한 사람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중앙집권 제도가 새로운 시대에 맞는다는 주장이었다.
 “유생들의 주장을 금하지 않으면 황제의 위세가 떨어지고 아래에서는 붕당이 형성됩니다.”
 그러면서 이사는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주청을 올린다.
 “진나라의 전적이 아닌 것은 모두 태워버리시고…. <시경>과 <서경>, 그리고 제자백가들의 저작들을 모두 태우게 하소서. 다만 의약과 점복, 농사서적만 남기시도록 하소서.”  
 진시황제는 이사의 주청을 가납하여 “그렇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시황제의 ‘분서(焚書)’ 사건이다.  

이슬람국가(IS) 대원들이 이라크 북부 모술의 박물관으로 보이는 곳에서 망치로 조각품을 때려 부수고 있다. 

  ■파괴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진시황제가 분서령을 내렸을 무렵,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는 엄청난 규모의 도서관이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기원전 305~기원전 30) 왕조의 후원아래 발전한 도서관이었다. 기원전 3세기에 건립된 도서관은 로마가 이집트를 점령한 기원전 30년까지 학문의 중심지였다. 이 도서관은 기하학의 유클리드,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 지구의 둘레를 계산한 에라토스테네스 등이 연구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이 도서관은 수난을 겪게 된다. 기원후 392년 로마황제 테오데시우스가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금지하게 되면서 다른 종교의 사원을 파괴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두루마리 서적들이 사라진 것이다. 그로부터 250년이 지나서는 복수가 자행됐다. 이곳을 침공한 이슬람 교도들이 두루마리 책들을 목욕탕 연료로 사용했다. 이번에는 ‘코란 내용이 없는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불에 탄 황제와 황후

   1966년 8월 24일,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던 중국에서 고고학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10대 중반에 불과한 홍위병들이 명나라 13대 황제인 만력제(재위 1573~1620)와 황후 두 사람의 시신이 안장된 정릉 박물관 창고로 몰려갔다. 이미 박물관 곳곳에 ‘집권파를 타도하라!’ ‘황릉보호파를 타도하자!’ ‘지주 계급 분자 만력을 타도하라!’ 는 등의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앳된 홍위병 소녀가 창고를 지키며 버티던 직원의 뺨을 후려갈렸다.
 “당신은 지주계급의 총 우두머리(만력제)를 비호하고 있어. 빨리 사인해.”
 직원의 힘이 빠져 결국 창고문을 열고 말았다.
 홍위병들은 황제와 황후 두 사람의 시신(인골)을 박물관 대홍문 앞 광장에 놓고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이른바 인민재판이었다. 홍위병들은 시신 이외에 황제 황후의 초상화 등을 증거자료로 삼아 내놓았다.
 광장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황제의 시신을 가운데 두고 황후 두 사람이 양 옆에 높였다. 홍위병 소녀가 소리쳤다.
 ‘집권파를 타도하라!’ ‘모든 악인을 소탕하자!’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추진하자!’
 구호가 끝나자 홍위병 소녀가 소리쳤다.
 “혁명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 때부터 수십명의 장정들이 품 속에서 돌멩이를 시신을 향해 던졌다. 세 구의 시신이 산산조각 났다.
 모인 군중들은 놀라움, 곤혹스러움, 환희, 찬탄 등이 엇갈린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홍위병 소녀가 마지막으로 외쳤다.
 “저들을 화형시켜라!”
 광장은 불바다를 이뤘다. 장작이 시신을 따라 폭발음을 냈다. 얼마후 소나기가 갑자기 내려 불기둥이 사그러들었지만 시신은 이미 다 타버려 그 재마저 흙탕물에 섞여 사라진 뒤였다.
 10대 중후반에 불과한 홍위병들이 황제에게 붙인 죄목은 ‘지주 계급 분자’였다.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빚은 참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슬람국가(IS)가 알쿠바 후세이니야 모스크을 폭파시키고 있다.

 ■IS의 반문명 행태

   모든 예가 종교와 정치의 이름으로 인간이 자행하는 광신적인 반문명의 행태들이다.
 2001년 자행된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석불의 생생한 파괴 장면은 이미 14년이 지났는 데도 아직도 생생한 악몽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 와중에 최근 이슬람국가(IS)가 공개한 끔찍한 유물파괴 장면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떨릴 지경이다.
 이미 인질 참수 등 반인간적인 잔혹 행위를 서슴치않은 ‘이슬람 국가(IS)’가 이번에는 끔찍한 ‘문명 파괴’의 대열에 나선 것이다. 전동 드릴과 망치 세례에 산산조각난 ‘라마수(독수리 날개 달린 황소상)’와 ‘로즈한의 신’은 과연 어떤 유물인가.
 ‘라마수’는 모술 외곽의 니네베에 있는 ‘니르갈의 문’에 있는 석상이다. 티그리스 강 동쪽에 있는 니네베는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였다. 기원전 9세기 쯤에 세워진 ‘니르갈의 문’은 니네베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유명하다.
 고대 아시리아 제국의 찬란한 유물들이 ‘다신주의 우상’이라는 딱지가 붙은채 파괴된 것이다.
 영상에 등장하는 IS대원은 “(고대 아시리아 제국과 아카드 왕국은) 다신주의를 숭배한 왕조들”이라 비난하고 “신이 우상 제거를 명했으니 우리에게는 이것이 수십억 달러짜리라 할지언정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큰소리쳤다.
 이 뿐 아니다. IS는 지난해 7월부터 모술에서 성서 속 예언자 요나가 묻힌 곳으로 전해져오는 나비 유뉴스 묘지를 폭파했다. 지난 22일에는 모술공공도서관에서 폭탄을 터트려 희귀서적과 고문서 약 1만 점을 한꺼번에 태워 없앴다고 한다.
 국제사회가 이같은 IS의 야만적 행위를 두고 ‘문화 청소’니 ‘인류 기억의 심장부가 가격당했다’느니 하면서 비난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들의 반문명·반인간의 만행을 그저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하니 이 무기력을 어찌할 것인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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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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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차 왕래에도 지장이 있는 문이다. 그런 낡아빠진 문은 파괴해버려야 한다.”
 “한성부(서울시)에 예산이 없어 이전은 너무도 곤란한 것이었다. 그래서 포병대의 도움으로 대포의 탄환으로 문을 포격해서 파괴하는 것도 생각했는데….”
 남대문(승례문) 이야기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을 즈음, 남대문의 운명도 풍전등화 격이었다. 일본인 연구자인 오타 히데하루는 2002년 제출한 서울대 석사논문(<근대 한·일양국의 성곽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지정책>) 에서 그 사연을 풀어놓는다. 
 즉 을사늑약의 결과로 통감부가 개설되자 서울 거주 일본인들의 모임인 일본거류민회는 대대적인 ‘도시개조’를 계획했다. 핵심은 용산을 포함한 지역에 40~50만명을 수용할 신시가지를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1934년 8월27일자 총독부 관보에 오른 보물 목록. 보물 고적 천연기념물 등 169건의 지정문화재가 목록에 올랐다.|국립중앙도서관


 

■눈엣가시, 조선의 성곽
 서소문~수구문(광희문)을 직통하는 도로를 개설하고, 종로를 십자대로로 조성하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주둔한 왜성대와 욱정(예장동·회현동 일대) 등 남산 북록을 공원화 하자는 것이었다. 또 용산에 대규모 경마장을 건설한다는 계획도 포함돼 있었다. 용산 신도시 계획의 걸림돌로 꼽힌 것이 바로 남대문이었다. 그렇잖아도 일제는 남대문을 비롯한 조선의 성곽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당시 중의원 의원이자 한성신보 사장을 지낸 아다치 겐조우(安達謙藏)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조선>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선인동화(鮮人同化)를 위해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 있다. 역사적으로 배일(排日)재료를 공급하고 있는 기념물이다. 그런 기념물을 선인들이 조석으로 접하게 된다면 역사적으로 선인동화를 부정하는 재료가 되는 것이다. ~그런 기념물을 서서히 제거하는 것이 민심통일이나 선인동화를 위해 불가결하다.”(1910년 <조선> ‘32호’)
 조선의 산성이나 사찰, 가람 등에는 지난날 배일 운동의 편액이나 기사 등이 남아 있다는 것. 조선인들이 그 항일 및 배일운동의 흔적을 조석으로 접하면 역사적으로 조선인 동화를 부정하는 재료가 되기 때문에 빨리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여론 속에서 때마침 용산신도시 개발계획이 발표되자 숭례문은 ‘교통의 장애물’로 취급됐다.
 그러자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당시 조선군 사령관이 “낡아빠진 남대문은 빨리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심지어는 “포격으로 파괴하자”는 극단론까지 제기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보물고적천연기념물 보존령을 내린 뒤 이를 시행할 보존위원회를 만든다. 위원회는 총독부 내무국장 우시지마(牛島省三)를 비롯, 25명으로 구성했다. 총독부 사무관이던 유만겸과 중추원 참의 류정수이 들어갔고, 학계에서는 이능화·김용진·최남선이 포함됐다.(동아일보 1933년 12월15일)

 

 ■남대문이 생존한 이유
 하지만 뜻밖의 인물이 뜻밖의 논리로 ‘숭례문 파괴’ 주장에 극력반대한다.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였다. 그는 고종황제도 알현한 바 있는, 일본거류민 가운데 최고유력자였다. 뿐만 아니라 하세가와 사령관과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일본공사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그런데 나카이의 반대논리 역시 ‘반전’이었다.
 “남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빠져나간 문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건축물은 남대문 이외의 두 세가지 밖에 없습니다. 파괴하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까.” 

 나카이는 대안으로 남대문의 좌우도로를 확장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의 집요한 설득에 하세가와 등 ‘남대문 파괴론자’들은 뜻을 굽히고 말았다. 흥인지문(동대문)의 ‘생존’도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선봉에 섰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이 입성한 문이어서 파괴되지 않았다.
 일제의 인식은 지금으로 치면 서울여행 가이드 북인 <경성안내>나 <조선여행안내> 책자에도 소개된다. 예컨대 1927년 발행된 <취미의 조선여행(趣味の朝鮮の旅)> 책자에서는 숭례문을 이렇게 소개한다.
 “그 옛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정벌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남대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동대문을 통해 경성으로 쳐들어갔다고 하는데, 그 남대문이 이 남대문이다.”
 그러니까 일제가 남대문과 동대문을 보존한 까닭은 문화재적, 미술사적 가치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승전의 관문’이었기에 ‘몸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일제와 아무런 인연이 없던 돈의문(서대문)을 비롯해 소의문(서소문), 혜화문(동소문) 등은 속절없이 철거당하고 말았다. 특히 1915년 시구개수사업의 명목으로 서대문이 철거되자 여론이 들끓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마저 서대문을 의인화한 기사(‘나는 서대문이올시다’)에서 ‘마지막 슬픈 소리와 영구히 사라질 새문(서대문)’을 안타까워 했다.(오타 히데하루의 2002년 논문)

1933년 12월5일 조선총독부는 조선 보물고적 천연기념물 보존령을 제정한다.(동아일보 1933년 12월 6일자)

 ■보물 1·2호 남대문·동대문, 고적 1호 포석정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지 18년 뒤인 1933년 12월5일, 일제가 아주 특별한 조치를 취한다.
 조선의 문화재에 가치를 부여하고 보존하는 법(‘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제정한 것이다. ‘역사의 증징(證徵) 혹은 미술의 모범이 되고 학술연구에 도움이 될만한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을 영구보전한다는 뜻’이었다.(동아일보 1933년 12월6일)
 법에 따라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를 만든다.(12월14일) 지금의 문화재위원회 처럼 문화재 보전과 지정 등을 심의하는 조직이었다.
 보존회는 총독부 내무국장 우시지마(牛島省三)를 비롯, 25명으로 구성했다. 한국인은 5명이 들어갔다. 총독부 사무관이던 유만겸과 중추원 참의 류정수가 포함됐고, 학계에서는 이능화·김용진·최남선이 포함됐다. 일본인으로서는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과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등이 들어 있었다.(동아일보 1933년 12월15일)
 총독부는 이듬해인 1934년 8월27일자 <관보>의 고시를 통해 1차 지정문화재를 발표한다.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로 시작된 관보는 지정번호와 문화재의 명칭, 소재지, 소재지역, 토지소유자 순으로 이날 지정된 표로 정리해놓았다.
 ‘보물 1호 경성 남대문, 보물 2호 경성 동대문…. 고적 1호 경주 포석정지, 천연기념물 1호 달성 측백나무 숲….’
 이날 관보에 게재된 문화재는 보물 153건, 고적 13건, 천연기념물 3건 등 모두 169건이었다.    

1907년 쯤의 남대문(숭례문) 전경. 철거위기에 놓였다가 임진왜란 때 왜군의 승전기념물이라 해서 살아남았다.

■국보 보물은 편의상 붙인 일련번호?
 여기서 두가지 주목거리가 있다.
 먼저 일제가 국보없이 보물과 고적. 천연기념물만 지정했다는 점이다. 일제의 논리는 명확했다. 내선일체라는 것.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이며, 따라서 일본의 국보가 식민지 조선의 국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권을 상실한 조선에 국보는 없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지정된 문화재는 해방 후에도 아무런 비판없이 답습됐다는 점이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면서 지정문화재를 국보와 보물로 나누어 지정한 것이다. 이때 보물 1·2호였던 남대문과 동대문은 국보 1호와 보물 1호가 됐고, 고적 1호였던 포석정은 사적 1호가 됐다.
 또 하나, 일제는 과연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문화재를 중요도에 따라 번호를 매긴 게 아니었을까. 일견 그런 것 같기는 하다.
 첫번째 문화재 지정 때 발표한 표만 보면 등급별 번호가 아닌 ‘지정번호’, 즉 지정되는 순으로 ‘편의상’ 붙인 흔적은 있다. 예컨대 보물 1·2호인 남대문·동대문이고, 3호는 보신각종이다.
 4호와 5호는 원각사 다층석탑과 원각사비이다. 6호와 7호는 중초사 당간지주와 중초사 삼층석탑이다. 8호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이지만. 9호와 10·11호는 개성 첨성대와 개성 남대문, 개성 연복사종이다. 남대문과 동대문, 진흥왕순수비를 빼면 같은 장소에 있는 문화재끼리 묶어놓은 흔적이 있다. 고적의 경우 1호는 경주 포석정, 2호는 김해 회현리 패총, 3호는 봉산 휴류산성, 4호는 강서 간성리 연화총이다.
 그런데 5~9호까지는 평남 용강 지역의 안성리 쌍영총(5호)·안성리 대총(6호)·매산리 수렵총(7호)·신덕리 성총(8호)·신덕리 감신총(9호) 등이 줄을 잇고 있다. ‘편의상’ 일련번호를 붙여 지정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입성했던 ‘승전의 문(남대문과 동대문)’을 굳이 보물 1·2호로 등록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또 하나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고적 1호’로 지정된 경주 포석정이다. <삼국사기> 등 정사의 기록으로만 보면 경주 포석정은 ‘굴욕의 현장’, ‘망국의 상징’이다.  
 “경애왕 4년(927년) 겨울 11월 왕이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놀고 있었을 때 견훤이 갑자기 쳐들어왔다. 왕은~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견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살하도록 했고, 왕비를 강제로 욕보였다.”(‘신라본기·경애왕조’)
 목불연견의 참상이 아닌가. 나라가 망하는 줄도 모르고 질펀한 술판을 벌이다 1000년 사직을 나락으로 빠뜨린 저 부끄러운 역사를…. 과연 그랬을까.
 아무리 정신나간 왕이라지만 한겨울(음력 11월)에 노천에서 술판을 벌였을까. 그것도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졌는데? 경애왕은 두 달 전인 9월(음력) 후백제 견훤의 침략으로 위험에 처하자 고려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건은 구원병 1만 명을 냈는데, 미처 경주에 도달하기도 전에 견훤군이 침략한 것이다.  

 

■포석정의 비밀
 그런데 <화랑세기>를 보면 의미심장한 대목이 나온다. 심심치않게 등장하는 ‘포석사(鮑石祠)’ 혹은 ‘포석(鮑石)’이다. ‘포석정(亭)’이 아니라 사당을 뜻하는 ‘포석사(祠)’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 포석사에는 화랑 중의 화랑으로 추앙받은 문노(文努)의 화상을 모셨다. 문노는 제8대 풍월주(재임 579~582)였다. 그는 삼한일통 후 ‘사기(士氣)의 종주(宗主)’ 즉 ‘씩씩한 기운의 으뜸’으로 삼았다.
 그런 문노의 화상이 포석사에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포석사에서 나라의 안녕을 비는 행사가 열렸음을 의미한 것은 아닐까. 포석사에서는 귀족들의 길례(吉禮)도 열렸다.
 문노와 윤궁이 혼인할 때는 진평왕이 친히 포석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또 태종무열왕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동생 문희의 혼인식이 열린 곳도 바로 포석사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경애왕은 술판을 벌이려 한겨울에 포석정으로 간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누란에 빠진 나라의 안녕을 간절히 빌기 위해 왕실과 귀족들을 동원해서 포석사로 갔을 것이다.
 거기서 간절히 1000년 사직의 유지를 빌다가 그만 후백제군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설상가상 일제는 포석정을 멋대로 정비했다. 물이 흘러드는 입수구 부분의 일부도, 물이 빠지는 출수구 부분도 없는 괴상한 형태로 복원해버린 것이다.
 포석정은 그렇게 해서 고적 1호의 이름을 얻은 것이다.  

 


   ■내선일체의 상징?
 일제가 어떤 생각을 갖고 식민지 조선의 문화재정책을 폈는 지를 짐작할 수 있는 기사들이 남아있다.
 1933년 8월11일자 <동아일보>는 아주 의미심장한 기사를 쓴다. 조선총독부가 이른바 ‘보물고적천연기념물보존령’을 제정하면서 국가(일제)가 관리해야 할 문화재의 범위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문화를 수입하야 이것을 일본에 전한 조선사의 변천, 고대 일중(日中)관계를 천명하는 유적 등…. 학술상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것은 금후 국가관리 하에 영구히 보존할 터이다.”
 즉, 조선의 독창적인 역사를 보전하기 보다는 중국문화를 수입해서 일본에 전한, 이른바 ‘일중관계의 역사’ 위주의 문화재를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1938년 11월25일 일제는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히 표명하는 문화재'를 골라 보물 고적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1938년 11월26일 기사를 보면 좀더 명확해진다.
 “4회 총회에서는 101종을 새로 지정했다. 금번 지정되려는 것은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히 표명하는 것이라 하야 주목을 끄을고 잇다.”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히 표명하는’ 문화재를 중심으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우선 고적의 경우 ‘창령 화왕산성·창녕 목마산성·김해 분산성·함안 성산산성·김해 전 김수로왕릉·김해 전 수로왕비릉·김해 삼산리고분·고령 지산동고분·창녕고분군 등’을 등재했다. 그러면서 이들 문화재의 등록사유를 ‘임나(任那)관계 고적’이라고 기재했다. 예의 그 지긋지긋한 임나일본부설과 관계가 깊은 유적들이라고 해서 지정해놓은 것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뒷받침할만하다’는 이유로…. 또 경남 양산 물금의 증산성도 지정됐다. 증산성에는 ‘임진왜란 때의 고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증산성은 임진왜란 때 다데 마사무네(伊達政宗)가 쌓았다고 해서 고적의 반열에 올랐다.
 이 모든 증거를 볼 때 일제가 남대문·동대문에 보물 1·2호. 포석정터에 고적 1호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명확하지 않을까. 조선 점령의 상징인 남대문과 동대문, 그리고 나라가 망하는 줄도 모르고 술판을 벌인 하지만 일제는 포석정을 ‘조선망국의 상징’으로 삼은 것이 아닐까. ‘나라가 망하는 해도 술판을 벌이는 무지몽매한 민족’ 임을 역사 앞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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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팟 캐스트 18회는 논쟁적인 주제를 다루겠습니다.
 국보 1호 논쟁입니다. 국보 뿐 아니라 보물 1호, 사적 1호도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논쟁은 10년마다 재연되어 왔습니다.
 1995·2005년 광복 50·60주년을 맞아 10년 주기로 불거졌지요. 광복 70주년을 맞는 올해도 재연될 것 같습니다. 문화재청이 2월 말까지 문화재에 부여되는 관리번호지정제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 용역을 발주한다니 말입니다. 여기에 광복 후 고희(古稀)를 맞는 해니만큼 ‘국보 1호(숭례문)’의 지위를 둘러싼 가열찬 논쟁이 재연되겠네요.
 

1934년 8월27일 조선총독부 관보에 나온 사상 첫 지정문화재 목록. 경성 남대문(숭례)과 경성 동대문(흥인지문)을 보물 1호와 2호로 등재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논쟁의 레파토리는 뻔합니다. 국보 1호 변경을 주장하는 쪽은 일제의 지정제도를 답습한 국보 1호(숭례문)가 대표문화재로서 상징성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이나 석굴암(24호)이 훨씬 가치가 크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반대하는 쪽은 ‘소모적인 논쟁은 의미없다’고 주장합니다.
 ‘국보 1호 숭례문’은 일제가 붙일 때부터 우열의 순번이 아니라 말 그대로 관리번호였다는 것입니다. 또 ‘국보 1호를 훈민정음으로 바꿨다 치자. 그런데 이후에 더 좋은 문화재가 나오면 국보 1호를 또 재지정해야 하는 것이냐.’ 그리고 뭐 그런 주장입니다.
 반대파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일제가 중요도에 따른 등급이 아니라, 지정 순으로 번호를 매겼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조선의 지정문화재를 처음으로 공포한 1934년 8월 24일자 조선총독부 관보(제2290호)를 봅시다.
 보물 1·2호는 남대문과 동대문, 4·5호는 원각사 다층석탑과 원각사비, 6·7호는 중초사 당간지주와 중초사 삼층석탑입니다. 9·10·11호는 개성 첨성대·개성 남대문·개성 연복사입니다. 비슷한 장소에 있는 문화재들을 묶어 ‘편의상’ 관리번호를 붙였다는 인상이 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심화학습에 들어갑시다. 원래 남대문(숭례문)을 비롯한 서울의 관문은 모두 철거대상이었습니다.
 예컨대 한성순보 사장을 지낸 야다치 겐조(安達謙藏)는 1910년 “조선인을 동화시키려면 반일 기념물들을 제거해야 한다”(<조선> ‘32호’)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일제는 40~50만명을 수용할 용산 신도시 건설을 포함한 대대적인 도시개조계획을 세웠습니다. 남·동·서대문 등 조선의 상징물은 모두 파괴 대상이 됐습니다. 심지어 대포로 포격해서 파괴시키자는 의견까지 나왔답니다. 하지만 일본거류민단장이던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 등은 명쾌한 반대논리를 폈답니다.
 “남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입성한 문입니다. 파괴하는 것은 아깝습니다.”

고적(사적) 1호는 경주 포석정터였다.

 결국 남대문은 극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동대문 역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입성했다”는 사연 때문에 보전됐습니다. 1927년 일제가 펴낸 조선여행안내서(<趣味の朝鮮の旅>) 역시 “가토 기요마사가 남대문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대문에서 경성으로 쳐들어갔다고 한다.”고 소개했습니다.
 반면 일본의 임진왜란 전승기념물이 아닌 서대문(돈의문) 등은 속절없이 철거됐습니다.(1915년)
 경주 포석정을 ‘고적 1호’로 정한 까닭도 심상찮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927년 경애왕이 견훤이 쳐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포석정에서 술판을 벌이다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제는 포석정을 신라 망국의 상징으로 삼았던 겁니다. 포석정을 굳이 정비하고, 고적 1호로 세운 이유가 아닐까요.
 일제가 국보 없이 보물로만 조선의 문화재를 지정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내선일체라는 거지요. 국권을 잃은 조선에는 국보가 없으며, 따라서 일본의 국보가 바로 조선의 국보라는 것이지요. 문제는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를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때 아무런 검토없이 국보와 보물로 나누어 그대로 답습했다는 겁니다. 또 하나, 북한의 국보 1호는 평양성이라는데 문화재에 일련번호가 남아있는 것은 남북한이 거의 유일하다고 하네요.
 저는 ‘국보 1호’ 논쟁에서 교체파도, 유지파도 아닙니다. 다만 ‘국보·보물·사적 1호’ 속에 묻힌 속사정을 풀어본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리 ‘1·2·3호…’의 차례가 문화유산의 가치를 가르는 등급표시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사람들이 ‘숭례문=국보 1호, 동대문=보물 1호, 포석정=사적 1호’로 떠받드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교체’ 혹은 ‘유지’가 아니라 관리번호 제도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는 방안도 함께 논의해보면 어떨까요. 팟 캐스트를 들어보시고 판단해보십시요.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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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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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지량, 인민군 몇 명 잡자고 해인사를…”(2008년 6월 초판)
 “김영환 대령, 명령불복종으로 고려대장경판을 지키다.”(2009년 11월 개정판)
 문화재청이 펴낸 <수난의 문화재-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의 2008년 초판과 2009년 개정판의 일부분이다.
 같은 쪽(205쪽)에 있고, 또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전쟁의 참화에서 지켜낸 인물을 소개하는데 이상하다.
 초판과 개정판의 주인공이 완전히 다르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전쟁의 참화에서 막아낸 주인공으로 알려진 김영환 장군

 ■뒤바뀐 주인공
 
이해를 돕기 위해 초판과 개정판의 상반된 내용을 좀더 검토해보자.
 우선 사건의 배경은 다르지 않다. 즉 고려대장경판이 보관된 해인사가 한국전쟁 당시 한줌의 재로 변할 뻔했다는 것이다.
 1951년 여름, 한국전쟁 당시 미처 퇴각하지 못한채 낙오한 북한군이 지리산을 숨어들면서 해인사는 풍전등화의 상황에 빠졌다는 것. 해인사를 비롯한 지리산 일대는 ‘낮에는 대한민국 남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는 것.
 당시 해인사 일대에도 900여 명의 북한군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에따라 북한군 패잔병들을 소탕하기 위한 공군의 작전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해인사 일대에 여러 차례 전투기 폭격작전이 집중됐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해인사와 고려대장경만큼은 폭격을 피해갔다. 그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귀중한 문화재인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보전하려는 ‘참군인’ 덕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참군인, 즉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폭격으로부터 막아낸 주인공이 초판과 개정판에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초판의 주인공
 
먼저 초판을 보자.
 “장지량(당시 중령)은 1951년 제1전투 비행단 작전참모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비행고문단으로부터 해인사 폭격명령을 받았습니다. 장지량은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초판에 따르면 장지량은 이렇게 생각했단다.
 ‘500~600명으로 추산되는 인민군 1개 대대는 해인사를 점령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식량탈취가 목적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2~3일 후면 해인사를 떠날 것이다. 그 후에 폭격한다면 적도 소탕하고 해인사도 지킬 것이다.’
 장지량은 파리를 지키기 위해 독일군에 무조건 항복한 프랑스 장군을 떠올리면서 ‘팔만대장경(고려대장경)이 어떤 문화재인데 인민군 몇 명 잡겠다고 해인사를 폭격하겠는가’라고 고민했단다. 그는 결국 팔만대장경을 지키려고 폭격 명령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단다. 초판은 그 후의 이야기도 아주 실감나게 풀어나간다. 장지량이 명령 거부의 결심을 미 6146 고문단 작전장교에게 설명하자, 미군 장교는 “왜 작전을 따르지 않느냐”고 불만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상호간 언쟁이 오가며 출격이 지연되자 상부에서는 전투기를 계속 출격시키라는 독촉명령이 계속 하달되었습니다. 그러나 장지량은 시간을 계속 끌었고 결국 날이 어두워지면서 자연스레 출격이 중단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려대장경은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초판에 따르면 이 일(명령거부) 때문에 장지량은 목숨을 잃을 뻔했단다. 노발대발한 미군측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장지량이 명령을 거부한 일을 항의했고, 대통령이 격노해서 그를 붙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김정렬 당시 공군참모총장이 장지량의 해명을 듣고 대통령에게 사정을 설명해줘서 극형을 면했습니다.”
 초판은 “장경판전과 고려대장경판을 지킨 장지량의 굳은 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면서 이렇게 매듭짓는다.
 “장지량도 전쟁 후 고려대장경판을 직접 보고는 자신의 결정이 현명한 판단이었음을 새삼 느꼈다. 만약 그가 상부의 명령대로 해인사를 폭격했다면 소중한 문화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테고 후대에 씻을 수 없는 죄가 되었을 것입니다.”
 초판에 따르면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전쟁의 참화에서 구해낸 주인공은 ‘장지량’이었던 것이다. 

해인사 경내에 조성된 김영환 장군 해인사 고려개장경 수호비 

 

 ■개정판의 주인공
 
하지만 초판 발행 후 1년 5개월 뒤 간행된 개정판에는 주인공이 바뀐다.
 “낙오된 북한군 900여 명이 해인사로 몰려들었습니다. 1951년 9월 18일 오전 8시30분 제1전투비행단 참모장이자 제10전투비행전대장인 김영환 대령은 경찰전투부대의 긴급항공지원 요청에 따라 하천 상공에서 정찰기를 만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주인공이 작전참모인 장지량 중령에서 전대장인 김영환 대령으로 바뀐 것이다. 작전명령의 주체도 미비행고문단에서 우리측 경찰전투부대로 바뀐다. 개정판을 더 보자.
 “정찰기가 백색연막탄을 터뜨려 제시한 공격목표는 바로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이었습니다.”
 개정판에 따르면 당시 김영환을 편대장으로 한 제10전투비행전대의 폭격기 4대는 기관총 뿐 아니라 폭탄과 로켓탄을 장착하고 있었다. 특히 김영환의 폭격기에는 ‘네이팜탄’도 적재돼 있었다. 해인사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을 발사해서 북한군을 쓸어버릴 작전이었다. 그러나 김영환은 그럴 수 없었다.
 “폭탄을 투하했다면 해인사나 장경판전, 고려대장경판이 무사했을까요. 김영환은 자신의 지시없이는 절대로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말도록 했습니다.”
 정찰기가 “편대장은 무엇하는가. 빨리 폭탄을 투하하라”는 날카로운 명을 내렸다. 편대 기장들도 김영환에게 폭격명령을 기다렸지만 김영환은 “공격하지 마라”는 단호한 명을 내렸다. 개정판은 “김영환 편대는 사찰 상공을 몇차례 선회한 다음 해인사 뒷산 너머로 폭탄과 로켓탄을 투하하고 귀대했다”고 기록했다.
 “김영환이 귀대하자 심한 추궁을 받았습니다. ‘김 대령은 국가보다도 사찰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사찰이 국가보다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공비보다는 사찰이 더 중요합니다.’ 김영환은 사찰을 파괴하는 데는 하루면 족하지만 해인사 같은 사찰을 세우는 데는 천년의 세월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개정판은 “참으로 긴급한 순간, 탁월한 판단이었다”면서 “명령 불복종이었지만 해인사는 잿더미가 될 위기를 벗어났다”고 기록했다. 개정판은 이어 2002년 해인사 들목에 고려대장경을 지켜낸 김영환의 공적을 기리는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가 건립됐음을 분명히 밝혀두었다.

 

 ■해프닝의 진실
 
어떻게 이런 해프닝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문화재청이 펴낸 <수난의 문화재-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 초판(2008년)이 장지량의 회고록(<빨간마후라 하늘에 등불을 켜고>(2006년)를 참고해서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장지량 장군의 회고록에 대한 논란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곳도 아닌 문화재청이 그 회고록 내용을 요약하는 수준의 책을 펴냈다는 것이었다.   
 문화재청 책이 인용한 장지량의 회고록을 보면 해인사 지켜낸 이야기가 너무도 생생하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나(장지량)는 출격대기중인 김영환 전대장에게 달려갔다. ‘전대장님 내 판단으로는 인민군 놈들이 불공을 드리러 절에 들어왔을 리 없습니다. 단순한 식량확보차원 같습니다. 따라서 해인사 폭격은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머리가 좋은 김영환 전대장도 이 말 뜻을 알아듣고 물었다. ‘그 말 맞아, 어찌하면 좋겠나.’”
 “(미 공군의 해인사 폭격명령을 지체시키자 미 고문단 윌슨 대위와 영어로 말다툼했다.) 이 때 김영환 전대장이 달려왔다. ‘왜 그러냐’. 나는 해인사 폭격의 부적절성을 지적하려고 파리와 교토 폭격을 제외한 사실을 설명하려는데 의사소통이 안된다고 했다. 김영환 전대장이 내 말을 받아 윌슨 대위에게….”
 장지량 회고록을 보면 ‘해인사와 고려대장경 수호’ 드라마의 주연(장지량)과 조연(김영환)은 분명하다. 

참군인의 순간판단력으로 폭격을 면한 것으로 알려진 고려대장경 

 ■회고록의 함정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개인의 회고록이니 일대기는 자신의 입장에서 쓰는 글이다. 사실관계가 다르거나 과장·축소·왜곡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의도와 상관없는 착각이 개입될 수도 있다.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당대의 시대 상황을 설명해주는 소중한 틈새자료일 수는 있지만, 그 기록을 맹신해서 마치 정사인양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 안된다. 장삼이사의 일대기라면 사실관계가 다른 들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지만 소중한 문화유산인 해인사와 고려대장경판을 전쟁의 참화에서 구해낸 주인공이라면 매우 중요한 역사인물로 기록돼야 한다. 그런데 개인의 일대기를 사실관계 확인이나 검증없이, 그것도 문화재청 책자에 고스란히 인용해서 마치 사실처럼 기술한다면 그것은 씻을 수 없는 역사왜곡을 인정해주는 셈이 된다.
 아닌게 아니라 장지량의 회고록과 문화재청의 책자는 출간되자마자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아무래도 ‘해인사와 고려대장경판을 지킨 장지량 장군’의 이야기는 인구에 회자될 만 했으니까…. 게다가 개인의 회고록을 정부(문화재청)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해준 꼴이 아니던가.  

 

 ■종합검증팀 가동
 하지만 곳곳에서 반론이 제기됐다.
 이미(2007년) 공군작전사령관을 지낸 윤응렬 예비역 장군이 <장지량 장군 회고록의 고찰과 소견>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문제를 제기했다. 2008년에는 김영환 장군의 조카인 김태자씨 역시 언론 인터뷰를 자청해 ‘김영환 장군의 명예를 되찾겠다’고 나섰다. 결국 2009년 공군 차원의 역사자료발굴위원회가 긴급하게 구성됐다.
 위원회는 한국전쟁 때 100회 이상 출격한 조종사 등 14명으로 구성돼 장지량 회고록인 <빨간 마후라…>와 문화재청의 <수난의 문화재…> 등 두 권의 내용을 4개월간 검증한 뒤 <종합보고서>를 펴냈다.
 위원회는 일단 보고서 작성의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면서 “두 책에 게재된 오기(誤記)와 근거없는 날조(捏造) 사례는 적지에 출격해서 전공을 세운 선배 조종사 등 공군 전체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라 못박았다. 위원회는 ‘해인사와 고려대장경판’ 건 말고도, 장지량 회고록에 등장하는 ‘빨간 마후라의 유래’ 등 몇가지 논란을 검증했다.

 

 ■뒤바뀐 주·조연
 
4개월 동안 검증한 내용을 기록한 보고서를 보자.
 먼저 ‘해인사와 고려대장경’ 논란…. 위원회의 검증 결과 ‘미 공군이 해인사 공습을 명했다’는 장지량 회고록의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판단했다. 당시 해인사 지역에 대한 한국 공군의 항공지원작전은 미 공군과는 전혀 관계없는 한국 공군 단독작전이었다는 것이다. 즉 미 공군의 어떠한 형태의 지시나 관여없는 제10전투비행전대장인 김영환 대령의 지휘 아래 수행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지량 회고록에 등장하는 미공군 고문관(월슨)과의 언쟁은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보고서는 따라서 윌슨과 마찰이 있었고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포살(捕殺)당할 뻔했다’는 회고록 내용도 근거없는 주장이라고 결론 지었다. 물론 위원회는 단서를 하나 달았다.
 ‘만약 작전참모였던 장지량 중령이 비행전대장인 김영환 대령에게 해인사 폭격의 부적절성을 설명하고 폭격임무 유보를 건의했다면 참모로서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렇지만 위원회는 “임무 당시 공격진입 및 이탈, 주표적을 포함한 목표전환 등 실제 폭격 수행방침은 임무지휘관의 고유권한”이라고 못박았다. 무슨 뜻이냐. 당시 해인사 지역에 대한 항공지원 자전의 출격여부는 전적으로 지휘관인 김영환 제10전투비행단장의 권한과 책임이라는 것.
 즉 만에 하나 폭격 브리핑에 앞서 작전참모가 해인사 경내 폭격유보를 건의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참모의 건의일 뿐 결정사항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해인사 폭격 유보’의 공적은 어떤 경우든 지휘책임자인 김영환 당시 전대장의 몫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원회는 이같은 공적 덕분에 해인사 경내에 ‘김영환 장군의 공적비’가 건립됐음을 강조했다.(2002년) 

1964년 개봉되어 공전의 히트를 뿌렸던 영화 '빨간 마후라'. 빨간 마후라를 맨 처음 목에 두른 이는 김영환 장군이었고, 공군의 상징으로 확정지은 것은 바로 이 영화였다고 한다. 

 ■해인사·고려대장경 수호의 야사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수호한 이 작전이 공군사나 출격기록과 같은 공식 기록에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군을 미화하려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닐까. 윤응렬 예비역 장군은 이에 대해 “공군사나 출격기록에는 출격작전의 세부 사항까지는 기술하지 않은 것이 정상”이라 밝혔다.
 ‘해인사 일대 폭격작전(정식 작전명은 지리산지구 공비소탕작전)’의 경우도 출격명령에 공격목표를 명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한번 출격한 편대는 단일 목표가 아니라 지상의 경찰 토벌대가 제시하는 목표를 그 때 그 때 확인·공격한다는 것이다. 그 날도 김영환 대령이 이끄는 폭격기 편대는 공비가 집결된 해인사를 공격하라는 등 특정 목표를 공격하라는 지정을 받고 출격한 게 아니라는 것. 경찰토벌대가 “공비가 집결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공격목표를 제시받았지만, 김영환 편대장이 해인사를 폭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윤응렬 예비역 장군의 주장이었다.
 어쨌든 명확하고 객관적인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김영환 장군 주변 사람들과 해인사 스님들의 증언을 통해 김영환 편대장은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지킨 위대한 군인’으로 알려져왔다.
 예를 들어 ‘역사자료 발굴 위원회’에 참석한 김영환 장군의 동료들은 해인사 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당시 김영환 전대장이 ‘잘못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 해인사를 공격할 뻔했어.’라 했다. 당시엔 무슨 이야기인 줄 몰랐는데 지금에 와서야 그 말을 이해할 것 같다.”(박재호 예비역 장군)
 “사천기지에 근무했을 때 김영환 전대장으로부터 ‘야, 오늘 내가 절을 공격할 뻔 했어, 큰 일 날 뻔 했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생생하다.”(배상호 예비역 장군)    
 “해인사 스님들도 해인사가 온전한 것은 모두 공군의 덕이라 했다. 평소 불교에 대한 애착이 있는 김영환 장군이 무의식적으로 행동으로 옮겨 대장경판을 보호했을 것이다.”(최원문 예비역 대령)
 결국 이같은 증언들이 모여 움직일 수 없는 ‘해인사와 고려대장경 보전’의 야사(野史)가 된 것이다.  

 

 ■‘빨간 마후라’를 둘러싼 원조논쟁
 
또 하나, 장지량 회고록 내용을 둘러싼 흥미로운 논란거리가 있었다. 바로 ‘빨간 마후라’ 논쟁이다.
 장지량 회고록을 보면 “내 아이디어로 한국전쟁 당시 공군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맨 처음 고안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적진에서 격추된 조종사를 식별하려고 빨간마후라를 고안했다는 것이다. 회고록을 보면 아주 구체적이다.
 김영환 전대장에게 유색천의 사용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김영환 전대장은 처음에 “빨간 색은 중공군이 좋아하던 색깔이 아니냐”고 반대했지만 결국 자신의 권유로 마음을 바꿨다는 것이다.
 “다음 날 강릉 시내로 나가 붉은 인조견사를 두 필 사와 마후라 100여 장을 만들었다. 조종사들이 출격할 때마다 목에 두르고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회고록은 “빨간 마후라 덕분에 구조된 조종사가 생겨났으며 빨간마후라를 부적처럼 목에 두르고 출격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공군 하면 빨간마후라를 연상하는 것이 바로 내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장지량 회고록 및 문화재청 책 검증을 위한 공군발굴위원회는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는 결론을 내린다. ‘빨간 마후라를 고안한 이 역시 김영환 장군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김영환 전대장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붉은 색으로 도색한 전투기를 타고 80여 대의 연합군 항공기를 격추한 독일 공군의 에이스 만프레도 폰 리히토벤을 흠모했다는 것.
 그러던 그가 강릉기지 사령관 시절인 1951년 11월 공군본부로 출장하던 길에 친형(김정렬 초대 공군참모총장) 집에 잠시 들렀다. 그 때 형수가 입고 있던 자주색 치마를 보고 말했다는 것이다.
 “형수님, 마후라 하나 만들어주세요.”
 그 때 형수가 남아있던 치맛감을 찾아 자주색 마후라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김영환 장군의 빨간 마후라 이야기는 공군사의 전설처럼 전해졌다. 1973년 발간된 <공군 보라매> 제29호와 2006년 발간된 <공군> 10월호에도 분명하게 나온다.
 위원회는 “빨간 마후라를 처음 착용한 이는 김영환 당시 대령”이라 못박았다. 또한 “1964년 전투조종사를 소재로 한 ‘빨간 마후라’ 영화가 상영됨으로서 영화주제곡이 큰 호응을 얻음으로써 빨간 마후라가 공군조종사를 지칭하는 상징이 된 것”이라 부연 설명했다. 그 때부터 사천기지에서 비행교육과정을 수료한 조종사들에게 조종 흉장과 함께 참모총장이 직접 빨간마후라를 수여하는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회고록 역사의 교훈
 
사실 ‘해인사·고려대장경’ 논쟁과 ‘빨간 마후라’ 논쟁은 공군 차원에서 이뤄진 역사자료 발굴 위원회의 검증으로 끝났다고 봐야 한다.
 물론 당사자들이 고인이 된만큼 진실은 무엇인지는 사실 누구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는 상식과 보편의 기록이어야 한다. 일방적이고 주관적인 주장은 역사로서 객관성을 얻기 힘들다.
 개인의 회고록이나 일대기, 자서전 등은 그저 참고용으로 써야지 금과옥조가 되어서는 안된다.
 얼마 전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장지량 예비역 장군이 별세했다. 그런데 상당수 부음기사가 ‘해안사와 고려대장경을 지킨 빨간 마후라의 원조’라며 기렸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주관적인 개인의 자료를 무의식으로, 무비판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혹여 잘못된 정보가 시간이 흘러 마치 사실로 둔갑해서 결국 움직일 수 없는 정사로 후세에 남겨질 수도 있다는 노파심이 든다. 그것도 아무런 비판 없이 흘러흘러 어느새 정사로 변해버린다면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새삼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회고록)의 위험성을 다시 생각해본다. 또 그것을 종종 비판없이 믿어버렸던 필자 스스로도 반성해본다.

 <참고자료>

 문화재청 엮음,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이야기> 2008년 초판, 2009년 개정판

 공군, <공군 역사자료발굴위원회 종합보고서>, 공군역사자료발굴위원회, 2009년

 장지량 구술, 이계홍 정리, <빨간 마후라 하늘에 등불을 켜고>, 이미지북, 2006년

 윤응렬, <장지량 장군 회고록의 고찰과 소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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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진한·변진 등 삼한의 땅을 합하면 사방 한 변에 4000리인데 모두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이 가장 강대해서….”

“진국이 천자(한무제)를 알현하고자 했지만 조선의 우거왕이 가로막았다.”

<후한서> ‘동이전’과 <사기> ‘조선열전’ 등에는 기원전 3~2세기에 존재했다는 ‘진국(辰國)’의 이름이 보인다. 진국이 한반도 남부에 광활한 영역을 차지했으며, 중국과도 통교를 원할 만큼 강력한 국가의 형태를 갖췄다는 얘기다. <삼국지>를 보면 “조선상(朝鮮相) 역계경이 우거왕에게 간언했으나 채택되지 않자 주민 2000호를 이끌고 진국으로 피했고, 이후 결코 조선과 왕래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위서·동이전’) 진국의 국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반신반의한다. 동시대 기록인 <사기>는 판본에 따라 ‘진국’과 ‘중국(衆國)’ 등 두 가지로 표현돼 있는데, ‘중국’은 ‘여러 나라’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국이란 한반도 남부에 흩어져있던 여러 소국 전체를 일컫는 범칭이라는 설도 있다. 기원전 194년 위만에게 쫓긴 조선의 준왕이 건설한 나라가 바로 진국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사기>의 일부 판본을 제외한 이후의 역사서들은 진국을 삼한의 전신으로 파악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진국’의 영역에서 확인되는 기원전 3~2세기대 문화의 양상이다. 세형동검(細形銅劍·폭 좁은 동검)으로 대표되는 정교한 청동기 문화는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충주에서도 세형동검과 청동잔무늬거울을 비롯한 청동기 유물이 19점이나 확인됐다.(사진)

전문가들은 ‘진국을 구성한 소국의 수장(首長) 무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대의 수장은 정치와 제사를 겸한 제정일치 사회의 지도자였다. ‘하늘과 사람의 소통’을 독점한 그들은 최고 권위를 상징하는 청동기를 달고 나라의 길흉을 점쳤을 것이다. 덧붙여 세형동검은 한반도 청천강 이남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문화양상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렇지만 단절된 문화란 있을 수 없다. 중국 동북방에서 만개한 뒤 한반도로 넘어온 고조선의 ‘비파형 동검’이 ‘세형동검’으로 재창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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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천루(摩天樓)’는 문자 그대로 ‘하늘(天)에 닿을(摩) 만큼 높은 빌딩(樓)’을 뜻한다.

 흔히들 하늘과 똑같아지려는 인간의 헛된 욕망을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에 비유한다. 그러니 ‘바벨탑’처럼 ‘마천루’라는 명사도 ‘인간의 욕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다. 1870년대 이후 미국 시카고에서 건설하기 시작한 마천루는 이제 하늘을 ‘찌를’ 기세로 솟구치고 있다.

 

  1885년 55m(10층·시카고 홈보험 빌딩)로 시작됐던 마천루는 이제 828m(163층·아랍에미리트연합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 빌딩)까지 치솟았다. 이 역시 ‘권불십년(權不十年)’일 듯싶다. 2018년 완공 목표로 건설 중인 킹덤 타워(사우디아라비아 제다)의 높이가 무려 1007m나 된다니 말이다. 인간이 1㎞ 위 공중에서 사는 시대가 다가온 것이다. ‘마천루의 저주’라는 말도 있다. 초고층 건물을 지으면 그 직후 최악의 경제불황을 겪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1931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102층, 381m)은 세계대공황을, 1973년 세계무역센터(110층, 417m)는 오일쇼크를 불렀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높이의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마천루가 곧 그 나라의 국력을 상징하는 ‘랜드마크’의 역할을 한다는 맹신 때문이리라. 국내에서도 ‘마천루 경쟁’이 가속화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2020년까지 서울 삼성동 한전부지에 571m짜리 마천루를 지을 계획을 밝혔다. 2016년 완공 예정인 제2롯데월드(555m)보다 16m 더 높은 것이다. 물론 ‘국내 1위’의 지위를 얻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무한경쟁의 욕망이 담긴 ‘1위’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과도한 특혜는 없는지, 시민들의 안전에는 문제가 없는지 철저한 사전검토와 함께 관리·감독이 뒤따라야 할 것 같다.

이 대목에서 신중하라는 의미로 기록 하나를 인용해보겠다. 1277년(충렬왕 3년), 조성도감(요즘 국토교통부)이 중국의 풍습을 좇아 고층건물 건설을 강행하자 관후감(천문대)이 나섰다. 신라말 풍수가인 도선 스님의 <도선비기>를 인용해서 ‘불가함’을 외친 것이다.

“우리는 산이 많아 고층건물을 지으면 세력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태조(왕건) 이래로 궁궐도, 집도 높게 짓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화가 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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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4월 29일 경향신문은 의미심장한 한줄짜리 기사를 소개한다.
 ‘연예인들의 국어명 전용 전용작업을 펼쳐온 MBC가 가수 김세나 양에게 순수 우리 말로 이름을 바꿔 출연하도록 종용했다’는 것이었다. 이어 ‘만약 김세나가 본명인 김희숙이나 다른 우리말 예명을 쓰지 않는 한 MBC에 출연할 수 없다’는 방침도 전했다. 이는 1970년대 연예계로까지 불똥이 튄 이른바 국어순화운동의 광풍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국화순화전국연합회가 창설되고(73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나서 국어순화운동을 독려하고 나섰으니(76년 4월) 오죽했으랴. 박정희 대통령이 문교부에 “모든 분야에서 쓰는 외국어를 우리 말로 다듬는 시안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분야별로 시안만들어 심의기구 검토하게 한 뒤 신문 방송 대중매체에서 서서히 보급시키라. 국어순화운동은 순조롭게 발전시켜야 한다. 뚜렷한 방안이 아직 서있지 못한 초기단계이기에 방송을 들어보면 일부에 혼선이 없지 않다. 체육계의 경우 인사들이 시안을 만들게 되면 어떤 말은 더 좋은 우리 말로 고치자든지 또 어떤 말은 세계공통으로 쓰이고 있는 용어이기 때문에 굳이 고칠 필요가 없다든지 하는 적절한 견해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MBC의 경우 김세레나를 비롯해 외국인 예명을 가진 연예인 80명에게 개명을 종용했다.
 김세레나의 경우 이미 김세나로 바꿨지만 그것도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절충 끝에 김세나의 이름은 지켜냈지만 연예인 예명을 둘러싼 혼란은 온갖 해프닝을 낳았다.
 하지만 방송국 간 통일된 이름을 마련하지 못해 혼선을 빚었다.
 일례로 템페스트의 경우 어느 방송은 ‘돌풍’, 어느 방송은 ‘돌풍들’로, 어느 방송은 ‘5인조 돌풍’으로 달리 번역됐다. 바니걸즈는 ‘토끼소녀’, ‘토끼소녀들’은 물론 심지어는 ‘토끼아가씨들’ 등으로 제각각 일컬어졌다.
 연예인들은 개명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패티 김은 ‘김혜자’로, 뜨와 에므아는 ‘너와 나’로, 바니걸즈는 ‘토끼소녀들’로, 봉봉 사중창단은 ‘봄봄’으로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 말이 좋기로서니 라나에로스포를 ‘개구리와 두꺼비’, 어니언즈를 ‘양파들’, 템페스트를 ‘돌풍’, 드래곤즈를 ‘청룡들’, 바블껌을 ‘풍선껌’, 블루벨즈를 파란 종을 뜻하는 ‘청종(靑鐘)’, 투코리언즈를 ‘도향과 창철’, 쉐그린을 ‘막내들’로 각각 개명했다니 참…. 
 당대 국어순화운동을 펼치면서 뻔질나게 인용한 것은 ‘프랑스 정부가 불어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영어식 불어사용을 일절 금했다’(동아일보 76년 4월20일 사설)는 것이었다. 50대 이상이면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물론 되도록이면 우리 말 이름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적불명의 외국어를 남발하는 것도 꼴불견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을 무슨 국가차원의 정화운동으로 밀어붙이다 보니 획일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직역의 이름이 남발된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 별세한 위키리씨도 1970년대 국어순화운동의 열풍 속에 본명인 ‘이한필’로 바꿔 활약했다. 하지만 역시 팬들의 뇌리 속에는 ‘이한필’ 보다는 ‘위키리’가 더 친숙한 것 같다. 위키리씨가 1964년 남성4중창단인 ‘포클로버스’(네잎클로버) 소속으로 불렀던 ‘저녁 한 때의 목장 풍경’이 떠오른다.
 ‘끝없는 벌판 멀리 지평선에 노을이 물들어오면 외로운 저 목동의 가슴 속엔 아련한 그리움 솟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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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忠犬 라츠, 류머티즘 病死’
 경향신문 1969년 9월 5일자는 ‘라츠’라는 개(犬)의 부음기사를 실었다. 신문이 사람도 아닌 개의 죽음을 알린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고견(故犬)’은 바로 6년 전인 63년 사냥을 나갔다가 오발사고로 총상을 입고 쓰러진 주인을 구한 충견이었다.
 무슨 사연일까. 라츠는 경기도 광주군에서 주인 유동근씨의 집에 살고 있었던 셰퍼드였다.

총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주인을 구한 충견 라츠.  

  ■주인 구한 충견 라츠
 1963년 2월28일 주인집 아들(유병주·17살)은 아버지의 사냥총을 들고 15리 떨어진 산속으로 들어갔다. 라츠가 물론 동행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병주군이 그만 돌뿌리에 걸려 굴러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총의 방아쇠가 당겨져 이미와 넓적다리에 8발의 총상까지 입었다. 병주군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 때 라츠가 움직였다. 그는 5리나 떨어진 마을까지 달려 내려갔다. 마침 지나가던 동네소년 2명의 바짓자락을 물고 늘어지면서 자꾸 산속으로 가자는 시늉을 했다. 알아차리지 못한 소년이 자꾸 돌아서려 하면 라츠는 애걸하듯 계속 바짓자락을 당겼다. 동세소년들은 결국 30분 동안이나 라츠의 뒤를 따라갔고, 마침내 총상을 입고 쓰러진 병주군을 발견했다,
 병주군은 그렇게 목숨을 건졌다. 이 일이 알려지자 ‘사람보다 나은 충견’이라는 찬사가 터져나왔다.
 어린이 단체인 새싹회가 라츠에게 표창장을 전달하는 등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다. 그랬던 라츠가 6년만에 ‘류머티즘’으로 병사했다니 당연히 부음을 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충견의 이야기는 각 문헌과 구전설화를 통해 심심찮게 전해진다.

 

 ■의로운 개 무덤
 전북 임실군에는 ‘오수(獒樹)’라는 지명이 있는데, 개(獒)와 나무(樹)의 사연을 안고 있다.
 즉 옛날 김개인(金蓋仁)이란 사람은 개를 끔찍히 사랑했다. 하루는 김개인이 개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가 술에 취해 길가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마침 들불이 일어나 김개인이 누운 자리까지 번져왔다. 그러자 개는 근처 냇물로 뛰어들어 전신에 물을 묻혀서 김개인이 누워 있는 주변의 풀을 쉼없이 적셨다. 천신만고 끝에 불은 꺼졌지만 기진맥진한 개는 죽고 말았다. 
 나중에 깨어난 주인은 죽은 개를 보고 노래를 지어 슬픔을 표하고 개를 묻어주었다. 김개인은 봉분에 지팡이를 꽂아 표시했는데 그 지팡이가 잎이 피는 나무로 변했다. 그래서 이 고을의 지명이 오수(獒樹)가 됐다.
 경북 구미에도 유명한 ‘의로운 개 무덤’, 즉 ‘의구총(義狗塚)’이 있다.
 개주인 이름(이번에는 김성발)만 다를 뿐이지 주인을 구한 사연은 ‘오수 이야기’와 똑같다.
 즉 김성발이 기른 기는 매우 영리했다. 하루는 주인이 술에 취한 채 길가에서 잠이 들었는데 들판에 불이 났다.
 그러자 개는 멀리 떨어진 낙강(洛江)까지 뛰어가 꼬리에 물을 적셔 와서 불을 끄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탈진한 개는 결국 죽고 말았다. 깨어난 주인은 개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주었다. 사람들은 개의 무덤을 구분방(狗墳坊)이라 했다.
 1665년(현종 6년) 선산부사 안응창(安應昌)은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의열도(義烈圖)에 의구전(義狗傳)을 기록했다. 20년 뒤인 1685년(숙종 11)에는 화공이 의구도(義狗圖) 4폭을 남겼다.

주인을 구한 개 라츠가 류마티즘으로 병사했다는 부음기사. 라츠는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다.

 

 ■가장 의로운 동물
 고려 충렬왕 때(1281~82)의 일이다. 부모를 모두 전염병으로 잃은 어린 소년이 백구 한마리와 살았다. 아이가 개꼬리를 잡고 나가면 사람들이 밥을 내주었다. 절대 개가 먼저 먹는 법이 없었다. 아이가 목 마르다고 하면 개는 우물가로 데리고 갔다. 사람들은 그 개를 의견(義犬)이라 칭송했다.(<고려사절요> <동사강목>)
 개는 충직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남송시대 홍매(洪邁)의 <용재수필(容齋隨筆)> ‘인물이의위명(人物以義爲名)’를 보라.
 “금축(禽畜) 중에서 어진 것으로는 의로운 개, 까마귀, 매, 송골매가 있다.(禽畜之賢 則有義犬 義烏 義鷹 義골)”
 얼마전 한밤중 아파트에 불이 나자 짖어서 주인을 깨워 살렸다는 애완견 ‘둥이’의 사연이 화제를 뿌리고 있다.
 그런데 역사 속 의견(義犬)들과 드라미틱한 사연과 비교하면 동이의 이야기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뉴스가 되는 이유는 뭘까. 세상인심이 하도 팍팍하다보니 세상 인심이 하도 팍팍하다 보니 그 정도 견공의 사연까지 미담이 되는 것인가. 새삼 충렬왕 때 아이를 돌본 의견을 소개하면서 붙인 <동사강목>의 사론을 보라.
 “당시(충렬왕 때) 나라를 해치는 무리들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이 개는 주인을 알아보았다. 저들이야말로 짐승보다 못한 자들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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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10월 10일 경주 노서동의 고분 발굴장에서 감탄사가 터졌습니다.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재위 1950~73)의 목소리였습니다.
 일제는 당시 일본을 방문 중이던 황태자 부부를 위해 이벤트를 펼쳤습니다. 마침 경주에서 봉황이 장식된 금관이 발견된 것에 착안한 것입니다. 일제는 유물 일체를 노출시켜 놓고 황태자 부부에게 발굴의 피날레를 장식하도록 한 것입니다. 경주를 방문한 구스타프 황태자는 일제가 반쯤 노출해놓은 금제 허리띠와 금제 장식 등을 조심스레 수습했습니다. 


 일제는 금관까지 황태자가 수습하도록 부탁했습니다. 황태자가 금관을 들어올리자 환성과 박수가 터졌습니다.
 일제는 스웨덴의 한문 명칭인 서전(瑞典)의 ‘서(瑞)’와 봉황의 ‘봉(鳳)’자를 따서 ‘서봉총’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 서봉총 금관은 10년 뒤인 1935년 9월 엄청난 파문을 일으킵니다.
 당시 평양박물관은 경성박물관으로부터 대여받은 서봉총 출토 금제유물을 주제로 특별전을 열었는데요.
 전시회가 끝난 뒤 뒷풀이 연회가 펼쳐졌을 때 사고가 터집니다. 당시 내로라하는 평양기생들도 충출동했습니다.
 술판이 한창 벌어졌을 무렵이었습니다. 서봉총 금관을 차릉파(車綾波)라는 기생의 머리에 씌운 것입니다. 금제 허리띠와 금 귀고리, 금목걸이까지 휘감았습니다. 당시 평양 박물관장은 서봉총 발굴에도 참여한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였습니다.
 일제가 기생의 머리 위에 신라금관을 씌운 사연, 그 안타까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관련기사>

  평양기생 '차릉파' 신라57대왕으로 등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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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 팟 캐스트 주제는 부모님 이야기입니다. 설을 맞이해서 일년에 단 한 번이라도 부모님 생각 해보라는 뜻에서 마련했습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농암 이현보 선생을 아시는지요. '어부가'로 유명하신 바로 그 분입니다.

  그런 농암 선생은 70살이 넘은 연세에, 90이 넘은 아버지를 위해 색동옷을 입고 재롱잔치를 벌였답니다. 그것도 후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그랬답니다.농암 선생이 꼬까옷을 입고 춤을 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뿐이 아닙니다. 농암 선생은 80이 넘은 고향 어른들을 모두 모아 때때마다 마을잔치를 열었답니다. 그 자리에는 양반은 물론 상인, 심지어는 천민들까지 다 모였답니다.

  자, 설을 맞아 농암 선생이 전해주는 이야기, 즉 부모님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 지를 한번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관련기사입니다.       

   

  ‘이런 생활 속에 근심 걱정 없으니 어부의 생활 최고로다. 조그마한 쪽배 끝없는 바다 위에 띄워 두고, 인간 세사를 잊었거니 세월 가는 줄 알랴.’(이현보의 <어부가>)
 농암 이현보(1467~1555)는 흔히 ‘어부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려 때부터 12장의 장가와 10장의 단가로 전해져오던 노래를 9장의 장가와 5장의 단가로 다듬었다. 농암의 어부가는 훗날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에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어부가’만 떠올리면 그것은 시쳇말로 이현보를 ‘띄엄띄엄’ 아는 것이다. 이현보를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1519년(중종 14년) 안동부사 이현보가 부모아 고을 노인들을 위해 마련한 양로잔치를 그린 <애일당구경첩>(보물 1202호) 중 ‘화산양로연도’. 이현보의 부모가 이 잔치의 주빈이 되었다. 이현보는 양반은 물론 상민, 천민 할 것 없이 80살 이상의 노인들을 모두 초청했다. 이현보는 이때 고을 원님의 신분으로 부모를 위해 색동옷을 입었다. |농암종택 소장,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저 낯이 검고 수염 많은 자를 매우 쳐라!”
 예컨대 사헌부 시절 동료들은 이현보를 ‘소주도병(燒酒陶甁·소주를 담은 질그릇)’이라 일컬었다.
 수염이 많고 거무스름한 그의 얼굴을 빗대 ‘겉모습은 질그릇 병처럼 거무튀튀하고 투박하지만 속은 소주처럼 맑다'는 뜻이었다. 그 수염 많고 검은 얼굴 때문에 화를 입는 사건도 있었다.

   즉 새내기 사관이었던 이현보는 서슬퍼런 연산군 시절(1502년) “사관은 정청(政廳·임금의 정사를 보는 곳)에 참석해서 임금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든 일을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연산군은 물론 애송이 사관의 말을 일축했다. 하지만 연산군의 뒤끝은 어지간했다.

   풋나기 사관의 일을 ‘꽁’하며 기억하고 있었다. 갑자사화의 광풍이 몰아치던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이 그 일을 기억해냈다.
 “지난 날 사관을 정청에 참여시키도록 요청한 자가 있었는데…. 그 자의 낯이 검고 수염이 많았다. 필시 이현보일 것이다. 신입사관이 감히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 자를 잡아다 장형(杖刑)에 처하라.”(<연산군일기> 1504년 12월 24일)
 연산군은 이듬해에도 눈엣 가시처럼 여긴 이현보를 의금부에 하옥시켰다. 이 때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현보가 70여 일이나 투옥되어 있었는데 하루 아침에 석방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석방의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했다. 훗날 그 이유가 밝혀졌다.

   원래는 죄수명단에서 이현보의 앞에 이름이 기록돼있던 죄수가 석방대상자였다. 연산군의 어필(御筆)이 그 죄수의 이름에 낙점했어야 했다. 그런데 연산군이 실수로 그 죄수가 아닌, 이현보의 이름에 어필(御筆)을 찍은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연산군의 실수가 이현보를 살린 것이다. 

이현보 초상화. <어부가>로 알려진 농암 이현보는 조선에서 손꼽히는 효자로 유명하다.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은 목민관
 이현보는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탁월한 목민관이었다.
 “1516년 충주목사였던 이현보가 어버이 공양을 위해 안동부사로 발령받았다. 그러자 떠나는 이현보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는 백성들이 길가에 가득했다.”(<퇴계선생문집> ‘이현보 행장’)  
 그 뿐이 아니라 각 문헌을 보면 목민관 이현보를 따르는 백성들이 줄을 잇고 있다.
 “충주 백성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백성들이 기운을 차리도록 이현보를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소서.'”(<중종실록> 1517년 12월 17일)
 “이현보가 영천 군수 시절 선생이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고 규모있게 일을 처리하자 이듬해 본래의 액수를 채우게 됐다. 이에 거두기 어려운 세금은 모두 문서를 불태워버렸다.”(<농암선생연보>)
 <중종실록>을 쓴 사관은 이현보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이현보는 일찍이 늙은 어버이를 위해 외직을 요청해서 무려 여덟 고을을 다스렸는데 모든 곳에서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양로잔치 벌인 사연
 그렇다. 필자가 설을 앞두고 이현보를 특별히 논하는 이유를 <중종실록>를 쓴 사관이 말해주고 있다. 
 이현보가 외직을 자청한 것은 바로 ‘어버이 부양’ 때문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효성이 지극했으면 이현보가 죽은 뒤 받은 시호가 효절공(節公)이었겠는가.
 퇴계 이황이 쓴 이현보의 행장(行狀·죽은 이의 간단한 일대기)과 <해동잡록> ‘이현보’편을 보라.
 “예안 고을에는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현보가 일찍이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어 어버이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
 당시 아버지가 94세, 숙부가 92세, 장인(권수)이 82세였다. 이 세 사람과 고을 사람 70세 이상의 노인 6명으로 구로회를 만든 것이다. 구로회라 이름 지은 까닭이 있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772~846)가 향산에 은거해서 주변의 노인 9명과 함께 주연과 시회를 가진 것에 착안했다. 당시 67세였던(1533년) 이현보는 구로회에 참석해 어린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렸다.
 이 구로회는 이현보 집안의 양로잔치가 되어 대대로 전승되었다. 훗날에는 참석자 수가 9명으로 제한되지 않았고, 기로회, 백발회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이어졌다. 양로잔치의 규모도 갈수록 커졌다.
 “안동에서 노인들을 봉양하는 잔치를 크게 베풀었다. 양친을 모셔서 연회의 주빈으로 삼았다. 이현보는 자제(子弟)의 예로 축수하는 잔을 받들어 올렸다. 그 화락한 경사를 지극히 하니, 보는 자가 다 탄복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는 고금에 드문 일이다.”(<퇴계선생문집> ‘이현보 행장’)
 “고을 내 80살 이상의 양반에서 천예(賤隸)까지 남녀 불문하고 찾아가 나이가 맞으면 모두 참석하게 했다 수백명에 이르렀다. 고을 노인들을 모시고 양친도 함께 모시어 즐기시게 한 것은 당연히 흔한 일이 아니며 나(이현보) 역시 후에 이런 모임을 또 가질 수 있을 지 알지 못하겠다.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렵다.”(<농암선생문집> 권1 ‘화산양로연시병서’)
 부모와 장인은 물론 고을 사람들을 위한 노인회를 만들고, 기회있을 때마다 양로잔치를 베풀어 자신의 어머니·아버지를 잔치의 주빈으로 모셨다는 뜻이다. 아들이 차려준 동네잔치의 주빈이 된 부모는 얼마나 아들(이현보)을 기특하게 여겼을까.
 그 뿐이 아니었다.
 “이현보는 동네 언덕의 거대한 돌 위에 집을 짓고는 어버이를 모시고 놀며 구경하는 곳으로 삼았다. 이곳이 바로 애일당(愛日堂)이다.”(<퇴계선생문집>)

애일당구경첩>(보물 1202호) 중 ‘분천헌연도’.
 1526년(중종 21년) 경상도 관찰사 김희수가 이현보 부모를 위한 잔치를 주관한 모습이다. 그림 왼족 위에는 이현보 가문의 종택이 보이고, 오른쪽 바위에는 애일당이 눈에 띈다. |농암종택 소장

 ■색동옷 입고 춤 춘 이현보
 그런데 퇴계 이황의 언급 가운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이현보의 효성과 우애는 천성이었다. 항상 어버이를 위하여 외직을 원하여, 7~8차례나 지방관이 되어 극진하게 봉양했다.  양친이 집에 계실 때에는 자손이 앞에 가득한데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피웠다.”
 이현보는 왜 색동옷을 입고 어머니·아버지 앞에서 재롱을 피웠다는 걸까. 그것도 어린 자손들이 가득 지켜보는 가운데서…. 이는 이현보가 춘추시대 때 초나라 은사인 노래자(老萊子)의 고사를 그대로 따라 한 것이다.
 즉 노래자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모셨다. 그는 나이 70살이 넘었음에도 오색찬란한 옷을 입고 딸랑이를 갖고 어린아이처럼 놀면서 부모를 즐겁게 했다. 한번은 부모에게 물을 갖다드리려다 넘어졌다. 노래자는 부모가 걱정할까봐 일부러 물을 더 뿌려 드러누운 뒤 어린아이가 우는 흉내를 냈는데 이를 본 부모가 매우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는 또 새를 희롱하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초학기> 권17 ‘효자전’)

   이렇듯 노래자는 효(孝)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뭇 선비들의 ‘롤모델’로 추앙받았다.

 

 ■효성의 끝판왕
 예컨대 목은 이색의 시 ‘즉사(卽事)’를 보자. 
 “황향의 베개 부채질과 노래자의 채색옷이여.(黃香扇枕老萊衣) 이 사람이 없으면 누구와 함께 한단 말인가.(不有此人誰與歸) 충효는 집안에서 반드시 노력해야 하나니(忠孝家中須努力) 일호라도 미진하면 일이 모두 잘못되리라.(一毫未盡事皆非)”
(<목은시고> 제12권)
 노래자는 앞서 인용한 ‘효의 끝판왕’이다. 황향도 만만치 않은 후한 때의 효자이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섬겼다. 그는 여름이면 아버지의 침상에 부채질해서 서늘하게 했고, 겨울이면 먼저 아버지의 이부자리에 들어가 따뜻하게 만들었다. <목은시고>에는 또 다음과 같은 시가 나온다.
 “저 훌륭했던 노래자는(彼美老萊) 백발에 채색옷을 입고(白髮彩衣) 춤추고 어린애 장난하여(而舞而戱) 늙은 부모 기쁘게 하였네(以樂庭위) 누가 그 덕음을 이어서(孰嗣其音) 모친의 마음 기쁘게 할꼬.(而順母心)”
 이색의 부친인 이곡의 시문집(<가정집> 제18권)에도 노래자의 색동옷이 나온다.
 “초각과 황각은 귀한 점에서 응당 같겠지만(草閣應同黃閣貴) 금의보다는 채의의 새 옷이 훨씬 좋은 걸.(錦衣爭似綵衣新)”
 무슨 뜻이냐. 효(초각)와 출세(황각)는 가치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중요하다는 것. 여기서 초각은 집안, 즉 효를 의미하고, 황각(의정부의 별칭)은 정부에 출사하는 것, 즉 출세를 뜻한다. 그러나 이곡의 입장에서 보면 출세(고관의 옷, 즉 금의)보다는 채의(효성를 뜻함, 즉 노래자의 색동옷), 그러니까 부모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떠는 편이 훨씬 좋다는 뜻이다.

 

 ■색동옷 입고 춤을…
 조선 중기의 문인 정온(1569~1641)의 <동계집>에도 노래자의 고사가 나온다.
 “해마다 이날(어머니 생신)이면 수연을 열고(年年此日壽筵開) 삼 형제가 노래자처럼 춤을 추었지.(兄弟三人舞老萊) 오늘은 머나먼 바다 밖으로 떨어져 있어서(今日飄零滄海外) 마을 어귀에 기대선 어머니 마음을 슬프게 하네.(倚閭空使母心哀)”
 삼형제는 바로 정온과 형(정률)과 동생(정백)을 가리키는 것이다. 전에는 어머니 생신 때마다 잘 모셨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한 아쉬움을 시로 남겼다. 마을 어귀에서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심정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이쯤해서 농암 이현보가 부모와 안동 지역 노인들을 위해 마련한 양로잔치에서 읊은 시를 인용한다.
 “관청에서 노인들 모아 잔치 벌이네.(公堂開宴會高年)~청사 안팎에서 악기 소리 그치지 않네.(廳分內外管絃連) 술동이 앞에서 색동옷 입은 것 이상히 여기지 마라.(樽前綵희人休怪) 내 부모님도 자리에 계시니.(太守雙親亦在筵).”(‘화산양로연시’)
 그래, 이번 설엔 색동옷 입고 부모님 앞에서 춤 한 번 추어보면 어떨까. 번드르르한 양로잔치는 벌이지 못하더라도…. 600년 전 농암 이현보 선생처럼….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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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무능아’, ‘못난이 하는 짓마다 사달’, ‘돌부처도 낯을 붉힐 노릇’, ‘역사의 시궁창에 처박힌 산송장’…. 
 북한의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과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이 회고록을 출간한 이명박 전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난한 표현들이다. 하지만 이는 애교에 불과하다. 지난해 말 ‘김정은 암살’을 소재로 한 영화 ‘인터뷰’의 미국상영을 계기로 오바마 미 대통령을 겨냥한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의 발표문을 보라.

 “아프리카 원시림 속의 잰내비 상통(원숭이 얼굴) 그대로다. 인류가 진화되어 수백만년 흐르도록 잰내비 모양이다.” 

발해인들을 무식한 놈들이라 욕한 최치원. 발해가 욱일승천의 기세로 전성기를 이루자 저주를 퍼부었던 것이다.


 ■'잰내비, 주걱턱, 살인마 악녀…

   그 때 뿐이 아니다. “혈통마저 분명치 않은 인간 오작품”이라며 “아프리카 자연동물원의 원숭이 무리에서 빵부스러기나 햝으며 지내는 것이 좋을 듯 하다”(지난해 5월)는 등 그야말로 인종차별적인 막말을 퍼부었다. 지난해 8월 한미 군사훈련을 앞두고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을 겨냥해서는 “주걱턱에 움푹꺼진 눈확(눈구멍), 푸시시한 잿빛 머리털에 이르기까지 승냥이 상통인데다…”라 표현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두고는 ‘시집못간 노처녀의 술주정’ ‘유신군사깡패의 더러운 핏줄’, ‘살인마 악녀’, ‘방구석 아낙네의 근성’, ‘못돼먹은 철부지 계집’ 등의 막말을 기회있을 때마다 쏟아냈다.

 흔히 운위되는 ‘외교적 수사(diplomatic rhetoric)’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아무리 ‘인종차별’이자 ‘성차별’이고, ‘인신공격’이라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막말외교의 원조

   하기야 막말외교의 뿌리는 깊다. 474년 백제 개로왕이 중국 북위 황제에게 보낸 외교문서는 고구려를 ‘시랑(豺狼·승냥이와 이리)’이자 ‘장사(長蛇·큰 뱀)’라 표현했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니 이리와 승냥이 같은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으니…. 지금 연(璉·장수왕)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남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고, 대신과 호족들의 살육 행위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넘쳐나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서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개로왕은 장수왕을 두고 “‘소수(小竪·더벅머리 어린애)’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니 “북위와 백제와 손을 잡고 ‘추류(醜類·추악한 무리)’ 즉 고구려를 멸망시키자”고 제안한 것이다. 하기야 <광개토대왕 비문>을 보면 고구려도 백제를 두고 백잔(百殘)이라 공공연히 폄훼했음을 알 수 있다.

 

  ■최치원의 막말

   불후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의 ‘막말 외교’도 정평이 나있다.
 ‘토황소격문’을 지어 중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던 최치원은 그답지 않게 왜 그런 흉한 말을 뱉었을까.  
 바야흐로 발해의 국력이 ‘해동성국’이라 일컬을만큼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던 때였다.
 897년 7월 당나라에 파견된 발해 왕자 대봉예가 당나라 황실에 민감한 문제를 꺼낸다.
 “이제부터는 발해가 신라보다 윗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이것을 역사는 ‘쟁장(爭長)사건’이라 일컫는다. 역사서 <동사강목>은 이를 두고 “발해가 스스로 강대국을 자처했다(時渤海國 自謂國大兵强)”고 했다. 그렇지만 당나라는 발해의 요청을 거절했다.
 당나라가 발해의 요청을 거부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국명의 선후를 어찌 ‘강약(强弱)’으로 따질 수 있겠는가. 조제(朝制)의 순서도 ‘성쇠(盛衰)’를 근거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관례 대로 하라.”(<고운집>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신라는 당나라의 조치에 반색했다. 최치원은 당나라의 조치에 감읍한 나머지 ‘사불허북국거상표’를 올렸다. 즉 북국(발해)이 신라 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한 당나라에 감사하는 표문이다.

 

 ■"발해는 무식한 놈들"

   하지만 이 ‘사불허북국거상표’를 뜯어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당나라도 당시 발해가 강(强)하고 성(盛)하며, 신라는 약(弱)하고 쇠(衰)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당시 신라는 효공왕 즉위년을 맞이하고 있었다. 원종·애노의 난(889)으로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한반도 남부는 후삼국으로 분열되고 있었다. 반면 발해는 ‘해동성국’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때문에 발해로서는 당나라에 자리변경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가 거절했으니 말이지 신라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이 때 발해를 향해 저주에 가까운 욕설을 퍼붓는다.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에는 보잘 것 없는 부락에 불과했습니다. ~백산(백두산)에서 악명을 떨치며 떼강도짓을 했습니다. 추장 대조영은 신라로부터 제5품의 대아찬의 벼슬을 처음 받았습니다.”
 최치원은 대조영이 신라로부터 진골(대아찬)의 벼슬을 받은 신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사실인 지는 확인할 길은 없다.  
 “요즘 그들은 차츰차츰 우리의 은혜를 저버리고 갑자기 신의 나라와 대등한 예를 취하겠다는 소문이 들려옵나이다.~ 신의 나라가~ 무식한 놈들과 함께 서있다는 것 자체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저 발해야말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갈과 모래 같고~ 삼가 제 본분을 지킬 줄을 모르고 오로지 웃사람들에게 대들기만을 꾀했습니다.”

아차산 4보루에서 바라본 풍납토성. 개로왕의 막말외교가 실패로 끝난 뒤 고구려는 결국 개로왕의 한성백제를 멸망시킨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들" 

   욕설은 끊이지 않는다.
 “발해는 소의 엉덩이(牛後)가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엉큼하게도 용의 머리(龍頭)가 되고자 켸켸묵은 말을 지껄였습니다. 저 오랑캐의 매는 배가 부르면 높이 날아가고, 쥐는 몸집이 있으면 방자해지고 탐욕스럽게 됩니다.(察彼虜之鷹飽腹而高양鼠有體而恣貪) 다시는 위아래가 뒤집히지 않도록 하게 하시옵소서.(不令倒置冠구)”
 최치원은 발해를 욕하면서 ‘축로(丑虜·추악한 오랑캐), 피로(彼虜·저 오랑캐), 피번(彼蕃·저 오랑캐), 우췌부락(우贅部落·군더더기 같은 부락으로나 번역됨)’이라 했다. 심지어는 ‘작얼(作孼·훼방), 제악(濟惡·악행을 일삼음), 흉잔(凶殘), 훤장(喧張), 고은(辜恩) 등 다양한 욕설을 해댔다.
 그러고보면 막말 외교의 뿌리는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개로왕이나 최치원이 막말 외교를 펼쳤다고 해서 지금도 통용될 수 있을까. 그것은 1200~1600년 전에나 통했던 외교가 아닌가.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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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블러스!(경이롭구나!)”
 1926년 10월 10일 경주 노서동의 고분 발굴장에서 이국(異國)의 감탄사가 터졌다.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재위 1950~73)였다. 일제는 당시 일본을 방문 중이던 황태자 부부를 위해 이벤트를 펼치고 있었다. 마침 경주에서 봉황이 장식된 금관이 발견된 것에 착안했다. 일제는 유물 일체를 노출시켜 놓고 황태자 부부에게 발굴의 피날레를 장식하도록 한 것이다.  

구스타프 황태자는 북유럽·그리스·로마의 고분을 발굴한 경험이 있던 고고학자였다. 경주를 방문한 황태자는 일제가 반쯤 노출해놓은 금제 허리띠와 금제 장식 등을 조심스레 수습했다. 발굴단의 마지막 한마디가 황태자를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이 금관을 전하께서 수습해주시옵소서.”
 황태자가 금관을 들어올리자 환성과 박수가 터졌다. 일제는 스웨덴의 한문명칭인 서전(瑞典)의 ‘서(瑞)’와 봉황의 ‘봉(鳳)’자를 따서 ‘서봉총’이라 이름 붙였다. 이 서봉총 금관은 10년 뒤인 1935년 9월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다.
 당시 평양박물관은 경성박물관으로부터 대여받은 서봉총 출토 금제유물을 주제로 특별전을 열었다. 전시회가 끝난 뒤 뒷풀이 연회가 펼쳐졌다. 내로라하는 평양기생들도 총출동했다. 이 때 사고가 터진다. 술판이 한창 벌어졌을 무렵, 서봉총 금관을 차릉파(車綾波)라는 기생의 머리에 씌운 것이다. 금제 허리띠와 금 귀고리, 금목걸이까지 휘감았다. 당시 평양박물관장은 서봉총 발굴에도 참여한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였다. 기생 차릉파가 경순왕(56대)에 이어 신라 제57대 왕으로 등극한 것이 아닌가. 이 사건은 이듬해인 1936년 6월 뒤늦게 폭로된다. 차릉파는 기생재벌의 반열에 오를만큼 유명세를 탄다. 이효석의 일본어 작품인 <은은한 빛(ほのかな ひかり)>”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숱한 화제를 뿌린 서봉총의 발굴보고서가 90년 남짓만에 출간됐다고 한다. 발굴 당시의 금관과 다른 모양이라는게 밝혀졌단다. 기생 차릉파에게 금관을 씌우는 과정에서 훼손됐을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연회에 참석한 일본인들이 신라금관을 쓴 기생을 ‘신라 여왕’이라 여기고 마음껏 농락하지 않았을까. 그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더 언짢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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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5회 주제는 ‘대장금’입니다.
 대장금으로 대표되는 조선 시대 최고의 커리어 우먼들의 이야기, 즉 <조선시대 여의사 열전>입니다.
 조선에서 여자의사가 탄생한 배경이 재미있습니다. 태종·세종 때의 일인데, “남자 의사가 (진맥을 한다면서) 여인들의 살을 주무르게 되니 망측스럽다”는 상소가 올라왔습니다. 남자의사의 손길이 무서워 병을 감추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는 아녀자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전국 8도의 10~15살 관기들 가운데 영리한 여자아이들을 뽑아 서울로 유학시켰습니다.


 이들은 3년간 혹독한 의학공부를 한 끝에 의녀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의녀 가운데 대장금은 군계일학이었습니다.
 사극 <대장금>에도 묘사됐듯이 사실상 중종 임금의 주치의 노릇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종 임금은 남자의사들을 내치고 대장금을 비롯한 의녀들에게 몸을 맡겼답니다. 물론 남자 의사들, 즉 어의들은 잔뜩 볼멘 소리를 해댔지만 중종의 대장금 사랑은 끔찍했습니다. 대장금 뿐이 아닙니다. <실록>에 등장하는 의녀 가운데 장덕과 귀금은 특히 이비인후과 및 치과전문의로 명성이 자자했답니다. 선조~광해군 때의 의녀 애종은 “끼가 많고 음란하다”는 악평을 들었지만 워낙 의술이 좋아서 등용됐습니다. 조선시대 의녀들은 팔방미인이기도 했지만, 너무나 할 일이 많았습니다. 왕실과 사대부의 술판에 끌려가 기생노릇도 해야 했으며, 왕명을 받아 수사관 노릇이나 법의학자 노릇도 해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사회복지사 노릇도 했고,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감사관 노릇까지 했답니다. 조선시대 의녀들의 고군분투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요. 경향신문 논설위원

 <관련기사>

 국왕의 주치의, '대장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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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대표팀이 아시안컵 준우승을 차지한 지난 1월31일 밤부터 포탈사이트에는 흥미로운 검색어가 떴다. ‘차두리 고마워’였다.
 네티즌들이 호주와의 결승전을 끝으로 은퇴하는 차두리 선수에게 “고마움의 메시지를 전하자”면서 자발적인 검색어 운동을 벌인 것이다. 경기 하루 뒤인 2월 1일 ‘차두리 고마워’ 검색어에는 200만 이상의 클릭이 기록됐다.

 연장전에서 실수한 김진수 선수에게도 ‘괜찮다’는 위로의 메시지도 나왔다. ‘모든 선수들에게 꽃을 던지자’는 상찬의 릴레이도 끊이지 않고 있다.
 분명 기현상이라 할 수 있다. 아시안컵에서 55년만의 우승을 노렸기에 준우승의 ‘결과’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팬들은 대표팀이 보여준 ‘좋은 과정’에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한국축구는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동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다. 2012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원정 16강에 오르긴 했지만, 그것은 ‘2002년 4강’이 남겨둔 마지막 결실이었다. 이후 대표 선수들은 한국축구의 전통인 투지마저 상실했다. 인맥과 학맥에 의한 선수 선발도 고질병처럼 도졌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예선과 본선의 과정 및 결과는 한국축구의 무기력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그러나 슈틸리케 감독 체제가 출범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절망과 무기력’은 ‘희망과 활력’으로 탈바꿈했다. 차두리 선수의 70m 질주가 상징하듯 꽉 막혀있던 팬심이 단번에 뚫린 것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2002년 히딩크 감독 이후 잊고 있던 ‘탕평의 축구’를 일깨워줬다. ‘이동국·박주영·김신욱’ 타령으로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다. 2부 리그 선수였던 이정협을 원톱 스트라이커로 과감히 발탁했다. 대회 초반부터 이청용·구자철의 부상 철수와 다른 주전들의 잇단 몸살로 위기감이 고조됐다.
 그러나 슈틸리케는 남은 21명 선수 전원을 고루 활용하면서 임기응변의 세밀한 전술로 위기를 뚫었다. 팬들은 바로 ‘모래알’이 아니라 ‘하나의 팀(One team)’으로 거듭난 대표팀의 모습에 박수를 보낸 것이다. 물론 “아직 노력할게 많다”는 슈틸리케의 말처럼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수비진의 실수가 너무 잦고, 점유율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경기마다 기복도 심하다. 대표팀의 근간이어야 할 K리그는 빈사상태에 빠져있다. 중국 축구의 성장에서 보듯 아시아의 축구 수준도 평준화됐다. 방심했다가는 올 6월부터 열릴 2018 러시아 월드컵 지역 예선의 통과도 장담할 수 없다. 슈틸리케 감독은 ‘대표팀은 모두가 함께 할 때 결실을 맺는다’고 했다. 여기서 ‘모두’란 대표팀과 축구협회와 팬들을 뜻한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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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주의 권한은 단 두가지 뿐이다. 하나는 재상(宰相)을 선택·임명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 한 사람의 재상과 정사를 논하는 것이다.”(<경제문감>)
 삼봉 정도전(1342~1398)의 ‘재상론’은 혁명적이다. 재상을 잘 뽑아서 그와 모든 국정을 논하는 게 바로 군주의 권한이라는 것이다. 정도전은 더 나아가 “군주는 국가적인 대사만 ‘협의’할 뿐 다른 정사는 모두 재상에게 맡겨야 한다”고까지 했다. 누가 봐도 군주를 ‘핫바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정도전은 ‘왕권’을 외쳤던 이방원(태종)의 칼에 죽고 말았다. 당시 왕조시대였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너무도 혁명적이었던 주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정도전이 재상정치를 ‘꿈꿨던’ 이유를 곱씹어보면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군주는 현명할 때도 있지만 어리석을 때도 있다. 재상은 군주의 좋은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바로잡아야 한다.”
 정도전은 “재상을 상(相·돕는다)이라 하는 이유가 있다”며 “그것은 바로 ‘임금을 도와서(相) 바로 잡는다’는 뜻”이라 했다. 즉 군주라고 다 군주는 아니라는 것. 성군과 폭군, 현군과 혼군(昏君)이 들쭉날쭉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상은 천하 선비들 가운데서 선택된 ‘인재 중의 인재’이며 그렇게 ‘선택된’ 재상이 ‘유능한 관료집단’의 수장으로 국사를 처리해야 천하민심이 안정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군주가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정도전은 “어짊과 올바름을 해친 자는 군주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사내’에 불과하므로 죽여도 된다”(<맹자> ‘양혜왕·하’)고 했다. 그러니까 재상은 최악의 경우 민심을 잃은 군주를 죽일 각오까지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최근 이완구씨의 국무총리 지명을 바라보면서 600년 전 정도전의 ‘재상론’을 재음미해본다. 총리 지명자가 갖가지 의혹에 대비해서 50여 년 전부터 준비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라 한다. 물론 의혹 검증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요체는 군주가 백성의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보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정도전의 이야기가 귓전을 때린다.
 “천하를 화평하게 만드는 것이 재상의 몫입니다. 임금이 잘못할 때 비위를 맞춰서는 절대 안됩니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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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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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팟 캐스트 14회는 세종대왕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만고의 성군’이나 ‘해동의 요순’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감히 ‘세종은 성군이 아니었다’는 주제로 이야기할까 합니다.
 물론 세종대왕의 업적은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 백성을 긍휼히 생각하는 세종의 마음씨 역시 실록에 나와있는 그대로입니다. 죄인들의 귀휴제도를 만들었고, 관노비들의 출산휴가를 늘렸으며, 심지어는 그 남편들에게도 출산휴가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상상이나 하십니까. 세종시대에 관노비의 남편에게 30일 간의 출산·육아휴가를 주었다는 사실을…. 더욱이 형을 살고 있는 죄인들의 목욕관리까지 신경을 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세종대왕의 치세에 가려진 반전의 역사도 있습니다. 그 시대에 있었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다른 것도 아닌, ‘실록’을 중심으로 풀어가려 합니다.
 세종의 시대에 집행을 기다리던 사형수가 190명에 달했으며, 그 시대에 도적이 들끓어 내탕고와 봉상시까지 털렸다는 이야기, 그래서 도둑의 발뒤꿈치 근육을 자르는 이른바 ‘단근형’의 형벌을 채택했다는 사실….
 무엇보다 혹형 중의 혹형이라는 능지처사의 형벌이 세종시대에 가장 많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실록>을 뒤져보니 무려 60명이 능지처사로 죽었답니다. 이들 대부분은 부모, 자식이나 주인을 죽인 죄, 즉 강상죄를 범한 이들이었습니다.
 효를 최고덕목으로 여기는 유교사회였기에 그럴 수도 있었다구요. 하지만 세종임금이 누구입니까. 만고의 성군이 아닙니까. 심지어 참혹한 고문 끝에 허위자백까지 받아낸 뒤 능지처사의 처벌을 내린 케이스도 있었습니다.
 세종시대에 이 무슨 해괴한 일이었을까요. 팟캐스트 14회가 전합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관련포스팅

 세종대왕은 '해동의 요순'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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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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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우러러 ‘어진 재상(賢宰相)’이라 했다. 관후하고 침중했으며, 집을 다스림에도 검소하고….”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다.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랐다. 정권(政權)을 오랫동안 잡고 있어서 자못 청렴하지 못하다(頗有보궤之초)는 비난을 받았다.”
 둘 다 1452년(문종 2년) 2월 8일 <문종실록>에 등장하는 황희 정승의 졸기(卒記·부음기사)이다.
 완전히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보통의 부음기사(obituary)를 보면 그 사람의 생애를 잔뜩 상찬해놓고는 말미에 ‘그러나’라는 토를 달아 아쉬운 행적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졸기와는 경우가 다르다.  

황희 정승의 초상화. 황희는 어진 재상이라는 찬사와 함께 몇가지 흠결을 함께 지적당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황희는 태종과 세종 시대의 명재상이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황희는 제가(齊家)에 소홀했다
 주인공이 다름아닌 청백리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황희 정승이 아니신가. 졸기를 보면 “황희의 홍안백발을 보면 마치 신선 같았다”며 한없는 존경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다음의 기사가 마음에 걸린다.
 “처형들인 양수와 양치가 불법행위로 적발되자 황희는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하다’는 변명의 글을 올렸다. 또 황중생이라는 사람을 서자(庶子)로 삼아 집안에 드나들게 하다가, 황중생이 죽을 죄를 짓자 ‘자기 아들이 아니다’라 하고 성(姓)까지 조(趙)라 했다. 이를 두고 애석해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또 있었다. 부음기사는 ‘황희가 몰수 당한 아들(황치신·황보신)의 과전을 자신의 과전으로 바꾸게 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린 사실’도 문제삼고 있다. 무슨 말이냐. 1441년(세종 27년) 황희의 둘째아들인 황보신이 죄를 지어 과전(科田·국가가 지급한 전토)을 몰수 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 때 장남인 황치신이 나서 물수당할 동생(황보신)의 비옥한 밭과 자신의 척박한 밭(과전)을 맞바꿨다. 이 때 사헌부와 사간원이 벌떼처럼 나서 황씨 형제를 탄핵했다. 그런데 아버지인 황희가 나서 “그렇다면 저(황희)의 과전과 (몰수 당한) 자식의 과전을 맞바꿔달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황희의 상소는 가납됐다.
 그러자 대간들은 “죄지은 아들에게 몰수한 땅을 그 아버지에게 준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앙앙불락했다. 물론 세종은 황희의 손을 들어주었다. 황희의 졸기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면서 황희가 제가(齊家)에 소홀했다는 혹독한 인물평을 한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황희 졸기의 인물평은 그저 양념거리에 불과하다.
 조선 최고의 청백리 정승으로 알려진 황희를 둘러싼 엄청난 논란은 세종~단종 때까지 3대에 걸쳐 이어졌다. 황희 정승을 둘러싼 논란의 허실과, 그것이 주는 함의를 함께 이야기해보자.

 

 ■황희는 ‘황금대사헌’이었다
 ‘응 이게 뭐지?’
 황희 정승이 죽은 뒤 5개월이 지난 1452년(단종 즉위년) 7월 4일이었다.
 <세종실록>을 편찬하려고 세종 시대에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史草)를 들춰보던 지춘추관사 정인지의 시선이 멈췄다.
 세종 때의 사관 이호문이 ‘황희 정승’을 주제로 쓴 사초였다. 사초를 읽어본 정인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이건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야.’      
 정인지는 영관사(춘추관장)인 황보인과 감관사(부관장)인 김종서 등 실록 편찬책임자 및 실무자들을 긴급소집했다.
 “이건 아니에요. 이호문의 사초는 감정에 치우치고 근거가 없는 것 같아요. 여러 사람과 의논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이들은 이호문의 사초를 조목조목 분석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초 내용 중 맞는 부분도 있었다.
 “황희가 아버지(황군서)의 얼자(孼子·첩의 아들)라는 내용은 맞아요. 황희 또한 ‘난 정실의 아들이 아니다’라 했으니까. 그렇지만 나머지는 듣도 보도 못한 내용들입니다.”
 그랬다. 이호문의 사초를 살펴보면 ‘어진 정승’이라는 황희 정승의 명성이 무색하다. 무시무시한 내용으로 가득 차있다.
 “황희는 대사헌이 되어 승려 설우에게서 황금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이 ‘황금대사헌’이라 했다.”
 대사헌이 어떤 자리인가.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감시 적발하고 추상같은 처벌을 내리며, 임금의 잘잘못을 두고도 엄정한 시비를 가리는 사정기관(사헌부)의 수장이 아닌가. 그런 사람이 황금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황금대사헌’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니….

 

 ■고구마 줄기처럼 나오는 황희의 비리
 그 뿐이 아니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참수당한) 난신 박포의 아내가 죽산현에 살면서 종과 간통했다. 간통 사실이 우두머리 종에게 발각되자 박포의 아내는 그 우두머리 종을 죽여 연못 속에 집어넣었다. 한참 후 부패된 시체가 떠오르자 수사가 시작됐다. 박포의 아내는 발각될까 두려와 한양에 올라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살았다. 이 때 황희가 박씨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박포의 아내는 ‘일이 무사히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이 무슨 말인가. 다른 이도 아닌 황희 정승이 궁지에 몰린 역적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 뿐인가.
 “~황희는 여러 해 동안 매관매직을 하고 형옥(刑獄)을 팔아 뇌물을 받았다. ~그의 심술(心術)은 바르지 아니하며 혹시 자기에게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몰래 중상했다.”
 이호문의 사초 내용 가운데는 움직일 수 없는 ‘팩트’가 있었다. 예컨대 당시 파주 동파역의 역리인 박용은 이른바 원악리(元惡吏·악질적인 지방 하급관리)였다. 그런데 이 악질 하급관리가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와 싸움이 붙었을 때 “내가 서울의 재상들을 얼마나 많이 아는 줄 아느냐”고 위세를 떨었다.
 결국 경기감사는 이 무도한 박용을 구속시켰다. 이 사건은 결국 뇌물 스캔들로 번졌다. 조사결과 당시 좌의정 황희와 대제학 오승, 도총제 권희달, 도총제 이순몽 등이 연루됐다. 1428년(세종 10년)의 실록을 보라.
 “박용의 아들 박천기를 잡아 문초했다. 박천기는 ‘황희에게 말(馬) 1필을 뇌물로 주었고 잔치를 베풀었으며, 오승·권희달에게 말 1 필, 이순몽에게 소 1두를 주었다.’고 진술했다. 황희는 말 1필과 술대접을 받고 뇌물을 준 지방관리를 변호하는 편지 1통을 전달했으며….”
 사간원·사헌부 소속 대간들은 “황희는 수상으로서 ‘잘 봐달라’는 청탁편지를 써주었으니 탄핵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종은 “뜬 소문으로 어찌 탄핵하느냐”고 황희를 변호했다. 문제의 사관 이호문은 사초를 쓰면서 “황희는 수상(首相)으로서 몰래 뇌물을 받고 죄를 풀어주고자 청탁했으니 지조(志操)가 비루하다”고 꼬집었다.

경기 파주에 있는 황희 정승의 묘. 황희정승이 죽자 문종 임금이 장삿날에 친히 파주로 행차했다고 한다.

 ■“황희 정승이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러나 정인지 등 <세종실록> 편수관들은 ‘황금대사헌’ 운운 내용과 박포의 아내 사건은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겼다. 편수관 허후가 황희를 변호했다.
 “‘황금대사헌’이라는 비난은 좀…. 이호문의 사초를 보면 사람들이 황희를 ‘황금대사헌이라 일컬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일컬었다’는데 왜 여기에 모인 8~9명이 한결같이 모른다는 말입니까.”
 허후는 “황희가 재상이 된 지 30년이 다 됐지만 탐오하다는 이름이 없는데 어찌 사람을 중상하고 관작을 팔아먹고 옥사에 뇌물을 받아 부자가 되었다고 하는 지 모르겠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이호문이 나의 친족이지만 원래 사람됨이 조급하고 망령되어 그의 말을 다 취할 수 없다”면서 “사초를 삭제하는게 좋겠다”는 의견을 낸다.
 김종서는 “박씨 사건은 사생활 공간의 은밀한 일이므로 그 진실을 알 수 없지만 다른 일들은 (30년간 황희를 지켜본) 우리가 모를 수 없다”며 황희를 변호한다. 편수관들은 두 사람의 의견에 공감하면서 “예나 지금이나 사필(史筆)은 다 믿을 수 없는 것”이라며 사관들의 행태를 한 목소리로 성토한다.
 “만일 사관 한 사람이 사감(私感)을 갖고 사서를 쓴다면 천만세가 지나도 고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특히 정인지는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도 고치지 않는다면 직필(直筆)이라 할 수 없다”고 사초 삭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황보인은 신중론을 제기한다.
 “이것은 큰 일입니다. 가벼이 결정할 수 없어요. 마땅히 중론을 모아서 결정해야 합니다.”
 이호문을 한 목소리로 성토하던 최항과 정창손이 신중론에 가세한다.
 “명백하게 틀린 내용이라 삭제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사초를 삭제하는 실마리를 열어놓으면 말류(末流·말세)의 폐단을 막기 힘듭니다. 경솔하게 고칠 수 없습니다.”
 황보인이 논란을 잠재우는 마무리 발언을 한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큰 일은 한사람이라도 안된다고 하면 반드시 정법을 따라야 합니다. 따라서 삭제하지 않아야 합니다.”


 ■끝내 지우지 못한 오점
 이 ‘황희의 스캔들’을 두고 최근 갖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우선 ‘박씨 아내 사건’과 ‘황금대사헌 사건’ 등 갖가지 의혹들의 정확한 진실은 ‘모른다’는 것이다.
 즉 정인지·김종서·황보인 등 황희와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사람들조차 “우리가 모르는 일을 사관 이호문이 어찌 알겠는가”라고 고개를 갸웃거렸으니까. 그들의 말대로 이호문의 ‘사감(私感)’이 작용해서 그런 엄청난 스캔들이 허위 혹은 과장되게 사초에 기록됐는 지도 모르는 일이다.
 1452년 2월 8일자 <문종실록>에 기재된 ‘황희 졸기’에는 ‘박씨 사건’과 ‘황금대사헌 운운’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졸기’에도 “황희가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으며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불법 행위를 저질러 압수 당한 아들과 과전을 자신의 과전을 바꾼 이야기. 처형들의 불법행위를 변명한 일, 중죄인이 된 서자(庶子)의 성(姓)을 바꾼 일 등을 예로 들었다.

황희 정승이 말년에 여생을 보낸 파주 반구정.

 ■황희 정승이었다면…
 필자는 황희 논란을 둘러싼 실록 기사들을 살펴보면서 한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읽을 수 있었다.
 <세종실록>의 편찬자들이 황희 스캔들을 기록한 이호문의 사초를 ‘사감에 의한 허위·과장’이라 판단했음에도 끝내 삭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인지 등이 “사실이 아니니 당연히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편수관들의 의견이 ‘삭제’ ‘수정’ 쪽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결국 ‘사초를 삭제하는 선례를 만들면 말세의 폐단이 생기고, 그것은 정법(正法)이 아니라’는 의견들이 힘을 받았다. 물론 이호문의 사초가 과장 혹은 허위라면 황희 정승으로서는 천추에 길이남을 오욕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 하지만 <세종실록>의 편찬자들은 사관의 붓은 그 어느 누구도 꺾을 수 없다는 교훈을 후손들에게 알려주었다.
 비단 그들 뿐인가. 태종 때의 사관 민인생은 “사관은 과인의 공간인 편전에 들어오지 마라”는 엄명을 내리자 “신의 위에는 하늘이 지켜보고 있다”고 응수했다.(1401년) 3년 뒤 노루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진 태종이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는 밀명을 내렸지만, 사관은 “모르게 하라”는 임금의 밀명까지 고스란히 사초에 적었다.
 1735년 영조가 대신들과의 밤샘 밀담을 기록한 사초를 불태우자 전직 사관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사관이 된 자는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어도 사필은 굽힐 수 없다.(頭可斷 筆不可斷)’는 말이 있습니다. 장차 무궁한 폐단을 열게 될 것입니다.”
 필자는 황희 정승 스스로 이호문의 사초가 과장·허위라고 여겼을지언정 그것을 삭제·수정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1438년(세종 20년) 세종 임금이 편찬을 마친 선왕의 실록, 즉 <태종실록>을 보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하자 황희는 얼굴색을 바꾸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서를 보는 관례를 만들면 후세에 그른 일을 옳게 꾸미고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려 할 겁니다. 사관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고…. 천년 뒤에는 무엇을 믿겠습니까.”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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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무중(五里霧中), 이합집산(離合集散), 우왕좌왕(右往左往)….
 교수신문이 2001~2003년까지 내놓은 사자성어를 보라. 이렇게 알아듣기 쉬웠다.
 대통령 탄핵과 수도 이전 등의 대형 이슈가 터진 2004년의 ‘당동벌이(黨同伐異·같은 패끼리 모이고 다른 패를 공격한다)’는 그래도 촌철살인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였다. 교수신문은 2006년부터 새해 벽두부터 그 해의 ‘희망의 사자성어’도 선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갈수록 선정된 사자성어가 어려워졌다.

전국을 순행중이던 진시황이 급서하자 중거부령과 부새령을 겸했던 환관 조고가 바삐 움직였다. 황제의 유서를 조작해서 진시황의 막내아들 호해를 후계자로 옹립한 뒤 국정을 농단햇다. 그는 특히 궁궐의 출입을 관리 통제하는 낭중령에 올라 황제와 신하들의 소통을 끊고 마음껏 조정을 주물렀다.  

 ■정반대의 사자성어
 심지어는 난해한 <주역>에서 찾아낸 밀운불우(2007년 연말·密雲不雨·하늘에 구름만 빽빽할 뿐 비가 내리지 않음)에서 심오한 불교의 용어(2014년 연초·전미개오·轉迷開悟·번뇌로 인한 미혹에서 벗어나 열반을 깨닫는 마음에 이름)까지 등장했다. 교수들이 지적 허영심에 빠져, 혹은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가 쓸데없이 어려운 사자성어를 찾아낸다는 비판이 일었다. 필자 역시 그 지적에 동의했다.
 그런데 최근 교수신문의 연초·연말 사자성어를 비교해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교수들의 고민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들은 해마다 연초에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사자성어를 찾느라 고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연말에 한 해를 정리하는 ‘올해의 사자성어’를 찾는 것이리라. 연초 ‘희망의 사자성어’에 부합되는 글귀는 한 차례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연초와 정반대의 성어를 찾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나쁜 사자성어만을 일일이 찾는다는 것도 고역일게다. 예컨대 2007년 ‘내 탓이오’를 외치며 시작하라는 뜻에서 ‘반구저기(反求諸己)’를 희망했지만, 결국 자기기인(自欺欺人·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임)으로 끝났다.
 ‘세상이 잘 다스려지기(光風霽月)’를 희구했던 2008년은 결국 ‘호질기의(護疾忌醫)’, 즉 ‘자신의 결점을 숨기고 남의 잘못을 드러냄’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2009년은 ‘남과 화합하되 의(義)를 굽히지 마라’는 뜻에서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바랐지만 연말의 사자성어는 ‘방기곡경(旁岐曲徑)’이었다. ‘샛길과 굽은 길로만 갔다’는 것이다. 

 

 ■전미개오에서 지록위마로
 이후 2010~2013년 연초의 희망들은 강구연월(康衢煙月·태평성대), 민귀군경(民貴君輕·백성이 귀하고 임금은 가볍다). 파사현정(破邪顯正·잘못을 깨뜨리고 바른 것을 드러냄), 제구포신(除舊布新·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 것을 펼침) 등 좋은 사자성어는 죄다 모아놓았다. 하지만 연말의 사자성어는 장두노미(藏頭露尾·진실을 감추려 하지만 결국 꼬리가 드러남), 엄이도종(掩耳盜鐘·귀를 닫아버림)과 거세개탁(擧世皆濁·온세상이 탁함), 도행역시(倒行逆施·순리를 거스름)이었다. 어찌 그렇게 반대로만 됐는지 모르겠다. 지난해에도 마찬가지였다. 연초에 전미개오(轉迷開悟)의 희망에서 시작됐지만 결국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로 끝났으니 말이다. 그러고보니 ‘교수님들이’ 오랜만에 귀에 쏙쏙 들어오는 성어를 택했다. 군주의 측근에서 국정을 농단한다는 측면이라면 ‘대통령 측근들의 국정개입 논란’을 가리키고, 진실 호도의 측면에서 보면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의 대처방식을 꼬집는 것이니 말이다.

 

 ■환관 조고의 세가지 직책
 사실 지록위마의 뜻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진나라 황제(진이세)의 최측근인 환관 조고가 자신의 권세를 가늠하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우겼다’는 사자성어다. 황제는 당연히 “이게 무슨 말(馬)이냐”고 했지만 ‘대신들 대부분’은 조고의 위세에 눌려 ‘말’이라 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한꺼풀 더 벗겨보기로 한다.
 진시황이 전국 순행 중 급서했을 때(기원전 210년) 조고의 직책은 부새령(符璽令)과 중거부령(中車府令)이었다. 부새령은 황제의 옥새를, 중거부령은 황제의 마차를 관리했던 직책이었다. 조고는 ‘부새령’의 직책으로는 황제의 유서를 조작해서 만만한 후계자(호해)를 황제에 올렸다. ‘중거부령’의 직책으로는 썩어가는 황제의 시신을 어가에 담아 수도(함양)까지 극비리에 옮겼다. 진이세(호해)가 등극했을 때 조고는 딱 한가지의 직책만 차지했다. 바로 낭중령(郎中令)이었다.
 ‘낭중령’은 대궐의 문호, 즉 대신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직책이었다. 그야말로 구중궁궐의 문고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것은 권력의 문고리였다. 조고는 황제에게 “황제가 조정에서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면 폐하의 단점만 보일 뿐”이라며 “궁궐 안에 가만히 계시라”고 한다. 조고의 허락없이는 그 누구도 황제를 만날 수 없었다. 국정은 조고의 수중에 떨어졌다.
 ‘지록위마’의 고사는 이 때 나왔다. 조고의 이간질로 황제와 신하들 간의 소통은 막혔다. 승상(총리) 이사가 “조고가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고 황제에게 피를 토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황제는 “그렇게 청렴하고 부지런한 사람을 의심하느냐”고 질책했다. 이사는 도리어 허리가 잘리는 요참형으로 죽었다. 황제는 아방궁 공사를 반대하는 여론에는 “천하를 소유한 황제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 외쳤다. 사람들은 “황제가 사람의 머리로 짐승소리를 한다.(人頭畜鳴)”고 혀를 찼다.  진나라는 조고가 이세 황제를 궁궐에 두고 국정을 농단한 지 4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폐하는 걸주와 같은 군주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지록위마’ 고사의 전말인데, 이 또한 ‘2014년의 한자성어’로 부합되는 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말이 나온 김에 고사를 하나 더 인용해보자. 한나라 고조 유방이 애첩인 척희를 희롱하다가 측근인 주창에게 “나는 어떤 군주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창은 “폐하는 걸주와 같은 폭군입니다.”라 외쳤다. 말을 심하게 더듬었던 주창은 “척희의 아들을 태자로 삼겠다”는 황제 앞에서 얼굴을 붉히면서 “기, 기, 기어코 그 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期期期知其不可)”라 소리쳤다.  하나 더. 한나라 경제 때 낭중령이었던 주인(周仁)은 황제의 침실을 지킬 정도의 최측근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조정대신의 인물평을 물을 때마다 절대 입밖에 내지 않고 “폐하께서 친히 살피시라”로 했단다. 같은 낭중령이라도 조고와 주인은 그렇게 달랐다. 각설하고 교수신문은 2015년 ‘희망의 사자성어’로 ‘정본청원(正本淸源)’을 택했다고 한다. 근본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니 올해 역시 ‘희망사항’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2015년을 마무리할 ‘올해의 사자성어’는 어떨까. 태평성대, 고복격양…. 그것도 아니라면 ‘말더듬이’ 주창이 외쳤다는 ‘걸주지주(桀紂之主)’는 혹 어떨까. 그런 ‘돌직구 직언’이 있다면 그 또한 제대로 돌아가는 조정이 됐다는 뜻이 아닌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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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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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적의 역사> 팟 캐스트 12회는 ‘고려·조선판 4대강 공사가 남긴 교훈’입니다.
 고려·조선에 무슨 4대강 공사냐구요. 물론 4대강 공사를 벌인 것은 아니고, 4대강 공사의 과정을 쏙 빼닮은,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다른 국책사업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운하공사입니다. 

고려·조선 때 국가재정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는 바로 세곡(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서울(개경 혹은 한양)으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던 육로로는 어려운 일이었기에 주로 해로, 즉 조운선을 이용해서 옮겼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고려·조선 때 안흥량으로 일컬어졌던 지역, 즉 지금의 충청도 태안 앞바다가 가장 큰 고비였습니다. 안흥량 해역은 물살이 험하기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조운선들이 번번이 침몰하고 선원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미곡이 적게는 수백석에서 많게는 1만석까지 수장되는 등 큰 낭패를 겪었습니다. 예컨대 1403년(태종 3년)에는 조운선 34척과 선원 1000여 명, 쌀 1만석이 수장되는 엄청난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조선판 세월호 사건’이라 일컬을 만한 사건입니다.
 이같은 사고가 고려시대에도 빈발했을 겁니다. 그러자 고려 인종 때인 1134년 지금의 태안 지역에 운하를 뚫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고, 급기야 운하공사가 시작됐습니다. 지금의 천수만~가로림만을 뚫는 공사였습니다.
 그러나 이 공사는 화강암 암반층과 조수간만의 차이에 따른 여러가지 문제에 부딪쳐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운하공사는 결코 포기되지 않았습니다. 조선 태종 때 책사 하륜은 일종의 갑문식 공법이라는 당시로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형적인 탁상공론이었습니다. 현장에 답사했던 사람들마다 “공사구역이 단단한 돌로 이뤄졌기 때문에 공사가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냈는데 공사는 강행됩니다.
 태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던 하륜의 계책이라 어느 누구도 공사반대를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했던 겁니다.
 결국 10여 일이라는 그야말로 속도전을 방불케하는 단기간의 공사가 끝났습니다. 그러나 금세 이 공사가 무리한 공사였음이 드러났습니다. 실록을 보면 “헛되이 백성의 힘을 썼을 뿐 조운은 통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답니다.
 자 그렇다면 하륜의 계책은 왜 실패했을까요. 그리고 이 운하공사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2회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요.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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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춘기 소년·소녀의 3대3 미팅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해서는 안되고, 절대 이뤄질 수도 없는 ‘금지된 사랑’이었다.
 소년 소녀들은 꽃피는 춘사월의 풋사랑에 젖은 대가로 목이 잘릴 위기에 빠졌다. 죽음을 무릅 쓴 풋사랑의 잔인한 역사를 <단종실록>을 토대로 각색해보자. 때는 바야흐로 1453년(단종 1년) 4월 14일이었다. 

말기의 제조상궁. 제조상궁은 궁녀조직의 최고권력자였다. 당상관 이상의 월급을 받았고, 심부름하는 하녀와 옷 짓는 침모까지 배정받았다.

■궁중 소년 소녀들의 3대 3미팅
 방자(房子·심부름 궁녀)인 중비가 소천시(어린 별감) 부귀에게 연모의 정을 품었다.
 중비나 부귀는 아마도 15~16세가 될 듯 말 듯한 소년·소녀들이었음이 틀림없다. 궁녀와 내시, 별감은 주지하다시피 액정서(왕과 왕족의 명령 전달, 알현 안내, 문방구 관리 등을 관장하던 관서)에서 근무하는 직책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별감은 천민신분이지만 액정서의 경비를 맡은 젊은 남성들이었다. 궁녀와 허구헌날 근무하다보면 정분이 날 수도 있었다.   
 그 때 중비가 먼저 부귀에게 다가갔다.
 “붓을 좀 구해주시면 안되나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어린 별감 부귀가 꽤나 당황했던 모양이다. 주저주저하면서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다음에 갖다 드리면 안되겠습니까.”
 어린 소녀 중비의 가슴이 얼마나 설렜을까. 중비는 동료인 자금·가지 등 두 소녀와 함께 시녀 월계의 방을 찾아갔다. 부귀에게 연애편지를 쓰려 했지만 글을 몰랐기 때문에 월계에게 부탁하러 간 것이다. 시녀에게 불러준 연애편지의 내용을 보라.
 “어찌해서 어제 보내주겠다고 한 붓은 보내지 않습니까. 대궐이 지금은 넓고 적막합니다. 서로 만나면 어떻습니까.”
 비단 중비 뿐이 아니었다. 함께 간 자금과 가지도 평소 마음에 품고 있던 소천시(어린 별감) 둘에게 연애편지를 썼다.  이렇게 해서 어린 궁녀 3명(중비·자금·가지)과 어린 별감 3명(부귀·수부이·함로)의 3대3 풋사랑이 시작됐다.

 

 ■금지된 풋사랑의 결말
 중비와 부귀가 단체미팅의 주선자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금지된 연애였다. 알다시피 궁녀의 유일한 남자는 다름아닌 임금, 즉 단종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궁녀는 왕의 여자일 뿐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년 소녀들은 풋사랑에 눈이 멀어 있었다.
 편지를 전달한 메신저는 복덕이라는 궁녀가 맡았다. 아마도 복덕은 편지를 전해주면서 글을 모르는 소녀들에게 가슴 떨리는 소년들의 편지를 읽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불장난은 곧 들통이 났다.
 묘단이라는 나인이 감찰상궁에게 연애사실을 고한 것이다.
 지금의 경찰 격인 의금부가 즉각 수사에 나섰다. 임금의 여인(궁녀)들 가운데서도 가장 하층계급인 방자(궁중의 심부름꾼)의 신분이었지만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의금부는 대질심문 등을 통해 철저한 수사를 거쳤다면서 관련자들을 엄벌에 처할 것을 주청한다. 즉 피의자 신분이 된 궁녀와 별감 6명 모두에게 ‘부대시(不待時) 참형’이라는 극형을 내린 것이다. 또 언문편지를 전달하고 읽어주기까지 한 방자 복덕은 ‘곤장 100대와 유배 3000리’의 형을 내렸다.(<단종실록> 1453년 5월 8일)
 그야말로 서슬퍼런 처벌이었다.

조선 말기 조선황실의 궁녀와 일본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부인들이 찍은 사진. 

 ■죽음은 면했다지만…
 아무리 임금의 여인들이 한 눈 한 번 팔았다지만 어린 소년 소녀에게 너무 가혹한 처벌이 아닌가.
 하지만 조선의 법전인 <속대전>을 보라.
 “궁녀가 밖의 사람과 간통하면 남녀는 모두 즉시 참수한다.(不待時) 임신한 자는 출산을 기다렸다가 형을 집행한다. 출산 이후 100일을 기다렸다가 집행하는 예를 따르지 않고 즉시 집행한다.”(속대전)
 그러니까 왕의 여자인 궁녀가 간통하면 모반대역죄와 같은 무시무시한 죄목으로 처단됐다. 조선의 사형집행은 가을에 이뤄졌는데, 간통한 궁녀와 그 상대 남성은 부대시(不待時), 즉 가을까지 기다리지 않고 즉시 처형됐다.
 원래 임신한 여성은 아기를 낳은 뒤 아기에게 젖을 물릴 시간(100일)을 주고 사형집행이 이뤄졌다. 하지만 간통으로 임신 출산한 여성은 그런 유예기간 없이 바로 처형됐다.
 그렇다면 3대3 만남을 지속한 어린 궁녀 3명(중비·자금·가지)과 어린 별감 3명(부귀·수부이·함로)의 연애사건을 보자.
 실록을 읽어보면 이들이 만나 데이트만 나눴을 뿐 실제로 정을 통했다는 증거는 없다.
 “묘단의 진술을 보면 남녀들이 가깝게 지낸다고 고했을 뿐이고, 궁녀들이 바깥에 나간 적이 없었다고 한다.”(<단종실록>)
 따라서 이들이 소년·소녀의 풋사랑을 나눴을지언정 간통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대시 처형’은 과잉처벌이었다.
 결국 임금의 최종판결만 남았다.
 11살의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 단종 역시 어린 소녀·소녀들의 처지에 측은지심을 갖고 있었을까.
 임금은 소년·소녀들에게 내린 참형의 극형을 경감시키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들의 형벌에서 각각 1등씩 감해주어라. 곤장을 때린 후에 별감들(수부이·부귀·함로)은 함길도 부령의 관노로 평생 소속시켜라. 궁녀들(중비·자금·가지)은 평안도 강계의 관비로 영원히 소속시켜라.”(<단종실록>)

 

 ■궁녀와 환관의 ‘슬픈 언약식’
 이들은 용케 살아남았지만 사랑했다는 죄목으로 목이 잘리는 비참하고 슬픈 사랑의 이야기들도 넘쳐난다.
 세종 연간의 궁녀 내은이(內隱伊)와 환관 손생(孫生)의 ‘슬픈 언약식’을 보라.
 1425년(세종 7년) 12월 10일 환관 손생과 궁녀 내은이가 참수형을 당했다. 시리도록 가슴 아픈 사연이다. 
 “내은이가 임금이 쓰던 ‘푸른 옥관자(망건에 다는 작은 옥고리)’를 훔쳐서 환관 손생에게 주고 서로 언약을 했다.”
 이틀 뒤 의금부가 이 사건을 수사한 뒤 손생과 내은이 모두에게 참형이라는 극형을 내린다. 임금의 여자가 바람을, 그것도 환관과 피웠고, 게다가 임금의 물건을 훔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만고의 성군이자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의 최종판결이 너무도 안타깝다. 세종은 “법대로 하라”며 “두 남녀에게 참형에 처하라”고 명한 것이다. 궁궐 내의 기강을 철저히 세운다는 세종의 ‘법대로’ 원칙은 존중하겠지만…. 그래도 세종대왕이 아닌가.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씨는 다 어디에 간 것인가.   

1966년 순종의 부인인 순종효황후 윤씨가 낙선재에서 서거하자 황실의 궁녀들이 오열하고 있다. 

 

 ■형부를 사랑한 궁녀
 1667년(현종 8년) 5월 20일 궁녀 귀열이 참수형의 극형을 받았다.
 왕대비전의 궁녀였던 귀열은 그만 자신의 형부인 서리(書吏) 이흥윤과 몰래 간통했다.
 덜컥 임신까지 했다. 이 사건이 발각되자 임금(현종)이 은밀하게 내수사(왕실을 재산을 관리하던 관청)에 가두라고 명했다. 이윽고 달이 차서 아기를 낳자 형조는 귀열을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아뢴다. 그러나 현종은 “무슨 소리야”면서 “참형에 처하고, 즉각 집행하라”는 추상같은 명을 내린다.
 형조와 사간원 관리들이 나서 선처를 요구했지만 현종은 “있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는데 무슨 선처냐”고 고집을 피웠다. 귀열은 형부를 사랑한 죄로 참형을 당한 것이다.

 

    ■짝사랑 연애편지의 비극
 ‘사랑이 죄’였고, 그 때문에 결국 교수형을 당한 궁녀 덕중의 슬픈 사연도 있다.
 궁녀 덕중은 세조가 수양대군이던 시절 대군의 아이까지 낳았던 여인이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후궁으로 들여 소용(昭容·정3품의 후궁 품계. 빈·귀인·소의·숙위에 이어 5번째)이 되었다. 그런데 세조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죽고 말았다.
 아이를 잃은 슬픔에다 세조의 발길마저 뜸해지자 덕중은 한눈을 팔게 된다. 환관 송중에게 마음을 준 것이다.
 그 일이 임금에게 발각되었지만 세조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위기를 넘긴 덕중은 가슴이 뜨거운 여인이었나보다. 이번에는 세종대왕의 4남인 임영대군의 아들인 귀성군 이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귀성군은 18살에 병조판서, 28살에 영의정에 오를 정도도 능력이 출중한 종친이었다. 그랬으니 덕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덕중은 짝사랑 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랑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연모한다”는 한글편지를 써서 환관 최호를 통해 귀성군에게 전달했다. 여기서 비극이 일어났다. 편지를 받은 귀성군이 아버지(임영대군)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아버지는 즉시 세조에게 고해 바쳤다. 사실 임금의 아이까지 낳은 후궁으로부터 연애편지를 받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귀성군과 임영대군으로서도 즉각 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덕중의 애정공세
 그런데 세조는 극도의 자제심을 보여준다. 다름아닌 자신의 여자를 젊은 조카에게 빼앗긴 것이었으므로 앙앙불락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물의를 일으킨 덕중의 지위를 방자(房子·궁중의 심부름꾼)로 격하시켰을 뿐 쉬쉬했다. 자칫 밝혀냈다가는 임금의 체면과 종실의 위엄만 깎는 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귀성군을 향한 덕중의 애정공세를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번에는 환관 김중호를 통해 다시 연애편지를 귀성군에게 전한 것이다. 편지를 받은 귀성군과 그의 아버지(임영대군)는 다시 세조에게 달려갔다. 세조는 이번에는 용서하지 않았다.
 편지를 전달한 환관 최호와 김중호를 대궐 밖으로 끌어내어 때려죽였다. 그리곤 문제의 여인 덕중에게 교수형에 처했다.
 이 모습을 본 ‘사랑받은 남자’ 귀성군의 마음은 어땠을까. <세조실록>을 보라.
 “사형선고가 내려지자 귀성군은 어찌할 바 몰랐다. 임금이 말했다. ‘네가 왜 황공해하느냐. 죄는 저들에게 있지 네게 있지 않다. 네 마음이 이미 바르니 어찌 남의 말을 근심하랴.”
 세조는 귀성군을 위해 술자리를 베풀고 귀성군을 일으켜 세워 춤추게 했다. 또한 종친들을 모두 일어나게 해서 춤추게 했다. 아침 일찍 시작된 술자리는 한낮이 되어서야 파했다.(<세조실록> 1465년 9월4~5일)

숙빈 최씨와 희빈 장씨 등 임금을 낳은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신 칠궁. 희빈 장씨는 궁녀출신으로는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왕비가 됐던 파란만장한 여인이었다. 

 ■태종 임금을 때린 궁녀
 궁녀라는 자신의 운명을 거스른 여인이 또 있었다.
 태종~세종대의 여인인 장미라는 궁녀였다. 1418년(태종 18년) 12월의 일이다.
 태종이 시녀 장미를 시켜 무릎을 두드리게 했다. 그런데 무릎 두드리는 꼴이 영 시원치 않았다. 이 대목에서 태종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장미가 두드리는 것이 영 마뜩찮아서 내가 조금 꾸짖고는 잠이 들었다. 장미가 갑자기 조심없이 두들겨서 놀라 잠을 깼다. 내가 그 무례함을 꾸짖고는 엄히 그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장미가 ‘꾸지람이 지나쳐서 화가 나서 마구 두들렸다’고 했다.”(<세종실록> 1420년 10월 11일)
 임금이 화를 냈다고 해서 임금의 몸, 즉 옥체를 두들겼다니 장미라는 궁녀는 참으로 대단한 여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태종은 이 당돌하고 못된 궁녀 장미를 쫓아내버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장미는 다시 궁으로 돌아와 명빈궁의 시녀로 복귀했다. 그녀는 조선시대에 걸맞지않은 4차원 궁녀였던 것 같다. 1426년(세종 8년) 4월 9일 바깥 바람을 쐴 요량으로 환관 임장수를 꾀여 “그녀를 출궁시키라”는 임금의 거짓 교지를 만들게 하고는 궐 밖 구경을 하고 돌아왔다. 이 거짓교서가 들통이 나서 애꿎은 환관 임장수만 참형을 당했다.
 그러던 중 사달이 일어났다. 1435년(세종 17년) 5월14일이었다.
 장미는 거짓으로 병을 칭한 뒤 출궁해서 친정에서 요양했었는데, 그 동안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즉 종친인 신의군 이인(태조 이성계의 셋째인 익안대군의 아들)의 술자리에 초대받아 여러 날 동안 유숙하고 신의군의 여러 아우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 것이다. 문제는 신의군 이인이 벽을 사이에 두고 장미와 잠을 잤다는 사실이다.
 또한 신의군의 매부 김경재도 장미를 초대한 뒤 친척들을 불러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벌였다는 사실도 추가로 폭로됐다.

 

 ■세종은 성군이 맞나
 임금의 여자인 궁녀로서는 할 수도, 해서도 안되는 짓을 벌인 것이다. 물론 신의군 이인과 김경재도 임금의 여인을 몰래 꼬드겨 출궁하게 한 뒤 질탕하게 놀았다는 사실도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이 스캔들은 9년이 지난 뒤까지 설왕설래하다가 1444년(세종 26년)이 되어 다소 이해할 수 없는 결론이 났다.
 세종이 궁녀인 장미에게만 참형의 극형을 내린 것이다.(5월29일) 그러면서 장미 부모의 재산을 적몰하고 아비를 귀양보내고 어미와 형제들을 모두 관노비로 삼았다. 지독한 연좌죄가 장미에게만 적용된 것이다. 
 의금부는 임금의 여인(장미)과 함께 놀았던 신의군 이인과 김경재 등에게도 참형의 중벌을 내렸다.
 신료들이 “장미를 꼬드긴 것은 이인과 김경재로서 두 사람이 죄인의 괴수”라면서 “이들이 목숨을 보전하는 것은 사태의 본말과 선후를 잃는 것”이라고 아우성 쳤다. 하지만 세종은 이 대목에서 이중잣대를 들이댄다.
 굳이 “장미와 두 사람의 죄는 같을 수 없다”면서 모르쇠로 일관하고 만 것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과연 세종은 성군이 맞는가. 

 

 ■그녀들의 한서린 외침
 주지하다시피 궁녀의 꿈은 임금이나 세자의 승은을 입는 것이었다.
 궁궐에 230명(인조 때)~600명(영조 때)의 궁녀가 있었고 연산군 때는 1000명이나 됐단다. 그 사이에서 임금의 사랑을 차지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런만큼 승은은 곧 신분의 수직상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임금의 자식이라도 생산한다면 후궁의 첩지까지 받았으니 그야말로 별을 따는 셈이 아닌가.
 승은을 입은 후궁 가운데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던 이는 아마도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일 것이다.
 신빈 김씨는 천대받던 내자시(궁궐에서 사용하는 물자를 조달하던 관청)의 종이었다. 세종이 22살 때 왕위에 올랐을 때, 13살 궁녀였던 그녀는 소헌왕후 심씨의 지밀나인이었다. 지밀나인은 주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수행하던 궁녀였다.
 그러다 세종의 사랑을 받았고, 아이까지 낳은 것이다. 공노비-지밀나인-후궁의 신분상승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12년동안 아들 6명과 딸 2명 등 12년 동안 8명의 자식을 낳았다. 얼마나 금슬이 좋았는지…. 그녀는 결국 입궁 21년 만에 귀인이 됐고, 곧바로 후궁의 최고인 빈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궁녀들끼리 임금의 사랑을 차지하려 사생결단의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궁녀 출신으로 임금(경종)의 어머니가 되었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왕비까지 되었던 희빈 장씨와, 무수리 출신으로 임금(영조)를 낳았던 후궁(숙빈) 최씨의 다툼이 대표적일 것이다.
 하지만 어디 그녀들의 책임이겠는가. 임금의 사랑이라는 ‘하늘의 별’을 딴 궁녀들은 그 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한 것이었을 뿐이다. “빨리 끌어내라”는 비정한 남편(숙종)의 명령에 끌려나간 뒤 사약을 강제로 들이킨 희빈 장씨의 마지막 외침이 귓전을 때린다.
 “내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전하께서 정치를 밝히지 않으니 그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닙니다.”
 희빈 장씨는 그래도 한 시대를 풍미하고 떠났다. 임금의 사랑을 받지 못한채 그냥 그대로 스러진, 아니 다른 소년과 봄바람 같은 풋사랑을 풍기며 애를 태웠다가 꽃잎처럼 꺾여 떨어지고 만 소녀들은 어쩌고…

 (끝)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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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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