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나무의 어여쁨이여! 활짝 핀 그 꽃이로다.(桃之夭夭 灼灼其華)”(<시경(詩經)>)
 연산군이 인용한 <시경>의 한 구절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워낙 황음무도한 연산군이다 보니 채홍사가 간택한 여인을 희롱하는 싯구라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연산군은 선남선녀들이 복사꽃처럼 화려할 때 시집·장가를 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 싯구를 인용했습니다.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이 그랬는데 다른 임금들은 오죽했겠습니까. 옛 임금들은 노처녀·노총각의 결혼을 국가정책으로 삼았습니다.

혹자는 “혼인을 제 때 하는 것이 왕정의 급선무”라고까지 말했답니다. 시쳇말로 한다면 국가가 나서서 ‘솔로대첩’을 마련했다는 얘기입니다.
 심지어 가난한 남녀가 혼인을 치르지 못할 때는 일가친척이 나서 혼숫감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국법으로 정하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임금은 서울은 한성부가. 지방은 감사들이 나서 결혼대책에 만전을 기하라는 특명을 내렸습니다. 제대로 된 대책이 없으면 처벌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습니다.
 홀로 된 홀아비와 과부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홀아비와 과부, 즉 ‘환과’는 국가가 보살펴야 할 가장 불쌍한 사람들로 꼽혔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역대 임금들은 왜 이와같은 ‘솔로대책’에 목숨을 걸었을까요.
 또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 시절, 노총각·노처녀의 기준은 어땠을까요. 몇 살이 되어야 노총각 노처녀의 반열에 들었을까요. 또 처녀 총각이라는 말은 과연 어떤 뜻이었을까요.
 얼마 후 2년 전 이맘 때에 이어 2번째로 이른바 ‘솔로대첩’이 열린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 옆구리가 시린 싱글들에게는 의미심장한 모임일 수도 있겠지요. 그나저나 2년 전처럼 여러가지 문제가 제기되어 행사가 속빈강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애처롭기는 합니다. 심지어 옛 왕조시대에도 국가차원의 ‘솔로대첩’ 아니 ‘솔로대책’이 마련됐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온갖 푸대접을 받아가며 민간차원에서 진행되니 말입니다.

 <관련기사>

 역사속 솔로대첩, 솔로대책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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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의 권세를 가진 첫번째는 태감 위충현이고, 둘째는 객씨이고, 셋째가 황상(황제)이다.’라고…”
 1624년(인조 2년)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홍익한의 사행일기(<조천항해록>)는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명나라 백성들이 환관 위충현과 그의 내연녀(객씨)의 위세가 황제(명 희종)을 능가했음을 수근거렸다는 것이다.
 과연 그랬다. 위충현(?~1627)은 희종의 유모였던 객(客)씨와 사통한 뒤 명나라 국정을 쥐락펴락했단다.  

청나라 시대 환관의 사진. 어릴 적부터 거세한 환관은 음석이 여자다워지고 모습 또한 여성스러워졌다고 한다.

 ■구천구백세!
 어떻게 환관이 남성을 회복했느냐고? 위충현은 어린 아이의 뇌(腦)를 생으로 씹어먹고는 양도(陽道)를 회복했다고 한다.
 위충현은 안팎의 대전을 손아귀에 넣고 자신을 호위하는 환관 3000명을 두어 궁중에서 훈련시켰다고 한다. 심지어는 황제 앞에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니….
 그랬으니 황제가 명나라 권력서열 3위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것이다. 위충현이 외출할 때 연도의 백성들은 그에게 ‘구천세(九千歲)’고 모자라 ‘구천구백세’를 연호했다고 한다.(<명사> ‘열전·위충현전’ 등) 원래 황제에게는 ‘만세’를, 제후국 임금에게는 ‘천세’를 연호하는 게 법도인데, 위충현에게 황제와 거의 맞먹는 ‘구천세’ 혹은 ‘구천구백세’까지 연호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공덕을 기리는 사대부만 해도 40만 명이 넘었단다. 심지어 국자감 학생 육만령은 위충현을 공자에 비유하면서 ‘살아있는 위충현’의 사당을 국학 옆에 세울 것을 청했단다.
 살아있는 위충현을 모신 ‘생 사당’에는 침향(열대지방에서 나는 향나무)으로 만든 위충현의 목상(木像)을 조성했다. 눈ㆍ귀ㆍ입ㆍ코ㆍ손ㆍ발이 산 사람과 똑 같았다고 한다.
 그 뿐인가. 뱃속의 창자와 폐는 모두 금옥과 주보(珠寶)로 만들고, 상식(上食)과 향사(饗祀)도 왕공과 똑같이 했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아침이슬처럼 덧없었다. 희종 다음에 등극한 의종이 그를 봉양에 귀양 보내고 그 집을 적몰시킨 것이다. 위충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자 황제는 그의 몸을 천갈래 만갈래 찢어버리는 극형(천참만륙·千斬萬戮)을 내렸다.(<성호사설> ‘구외이문·위충현’, ‘경사문·위충현 사’)    
 
 ■3357번의 칼질형
 위충현보다 100여년 앞선 지독한 환관의 대표주자가 있었으니 바로 유근(1451~1510)이었다.
 유근의 ‘주인’인 명나라 무종은 웃기는 기인이었다.
 정무는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음주가무에 심취했고, 그것도 모자라 궐밖의 유곽(遊廓)으로 놀러 다녔다. 심지어는 활쏘기에 능한 환관들을 집결시켜놓고는 하루종일 전쟁놀이를 벌였다고 한다. 함성을 지르면서 쫓고 쫓기는 환관들의 전쟁놀이에 북경시내 진동했단다.
 유근은 다른 사악한 환관 7명과 한 패를 이뤄, 무종의 타락을 더욱 부추겼다. 역사는 유근을 포함한 8명의 환관을 팔호(八虎)라 일컫는다.
 또 황제의 결제를 자기 맘대로 뜯어고쳐 노신들을 모두 쫓아냈다. 실제로 대신들이 말을 듣지않자 찌는 듯한 더위에 조정백관들을 광장에 모아놓고 하루종일 엎드려 있게 했단다. 말하자면 단체기합을 준 것이다.
 그는 환관들의 비밀경찰조직인 동창과 서창을 총동원, 대신들을 탄압했으며, 모든 업무는 뇌물 액수로 결정했다. 유근에게 뇌물을 주면 유근 등이 종잇조각에 “어떤 관직을 준다”고 기입하면 병부(국방부)가 그대로 발령냈다고 한다. 그랬으니 훗날 몽골족과 여진족(후금)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유근의 말로도 비참했다. 1510년, 모반죄의 혐의를 뒤집어쓴 유근은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의 혹독한 형을 받았다. 그 능지처참이란 눈뜨고 볼 수 없었다. 무려 3357회의 절개형을 받았다. 그야말로 뼈만 남기고 살점을 발라냈던 것이다. 그가 권세를 잡으면서 축적한 황금이 24만 덩이(5만7800냥)이었단다. 

명나라 시대 구영이 그린 <한궁춘효>의 한 장면. 궁궐의 은밀한 곳이었던 내정에는 환관 외에는 누구도 출입할 수 없었다. 환관은 황후(왕후)나 후궁, 그리고 궁녀들을 보살피는 임무를 담당했다.  

 ■‘군주는 가만 있어야 합니다.’
 흔히들 나라를 말아먹은 환관의 간판주자로 조고(진나라)와 ‘십상시’(후한)를 꼽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조고가 누구인가. 진시황이 순행 중 급서하자 황제의 칙서를 위조해서 어리석은 막내 호해(진이세)를 황제로 옹립한 인물이 아닌가.
 그는 어린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폐하는 어립니다. 조정에서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면 폐하의 단점만 보일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폐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결국 황제와 대신들과의 소통을 완전히 막은 것이다. 진 2세는 늘 구중궁궐에 처박혀 있었고, 모든 국사는 환관 조고의 수중에 떨어졌다.
 당나라 숙종~대종 때 최초의 환관 재상이 된 이보국의 한마디가 오버랩된다.
 “주인님(대종)은 가만히 계세요. 바깥 일은 늙은이의 처분에 맡겨주세요.”
 어찌 그렇게 시공을 초월한 말이 똑같단 말인가.
 12명의 환관부처 우두머리를 뜻하는 십상시 또한 다르지 않았다. 환관의 손아귀에서 등극한 후한의 마지막 황제(영제)를 보라.
 그는 십상시 가운데서도 유력자인 장양(張讓)과 조충(趙忠)을 가리켜 입버릇처럼 ‘장상시는 나의 아버지’, ‘조상시는 나의 어머니’라 일컬었단다.
 장양과 조충은 바로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십상시(十常侍)’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다. 십상시 때문에 후한의 멸망은 가속화했다.
 십상시는 진나라 환관 조고처럼 12살에 등극한 황제를 주색에 빠뜨리면서 마음껏 국정을 주물렀다.
 
 ■‘환관의 나라’ 명왕조
 그러나 아예 ‘환관의 나라’로 칭할 만한 왕조가 있었으니 바로 명왕조였다.
 유근과 위충현은 바로 그 명나라가 배출한 ‘극강’의 환관들이다.
 사실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주원장은 황제의 독재권을 확립한 인물이었다. 환관도 혐오의 대상이었다. 역대왕조가 환관정치의 폐해 때문에 쇠락 멸망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뒤를 이은 2대 황제 혜종(주원장의 장남·재위 1398~1402)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환관들을 가혹하게 배척했다.
 하지만 북경의 제후인 연왕(성조·영락제)이 3년 간의 내전을 통해 황위를 찬탈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중앙무대에 연고가 없던 성조가 측근세력으로 환관을 키운 것이다. 게다가 중앙의 유가들이 성조에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성조는 이때 돌아올 수 없는 측근정치의 조직을 심어놓았다. 환관을 중심으로 한 비밀경찰조직을 세운 것이다. 이것을 동창(東廠)이라 했다. 조직은 무시무시했다.
 중죄인을 수용하는 감옥이 있었다. 황제의 명에 따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체포, 투옥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동창의 장관은 환관 중 최고 관직 가운데 두번째인 병필태감이 맡았다.
 성조는 경찰권 뿐 아니라 감찰권까지 환관들에게 내렸다. 북쪽으로 몽골, 남쪽으로 안남까지 수차례 원정군을 보냈다. 그 때마다 환관을 원정군 장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감찰관으로 파견했다. 변방 원정이 아닌 해외원정에는 아예 환관들을 책임자로 보냈다. 25년간 7번이나 원정단을 이끈 환관 정화와, 후현(티벳), 그리고 이시하(만주) 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환관의 역사는 뿌리깊다. 상나라 왕조 때인 기원전 3300년 전 갑골문을 보면 '궁형'을 뜻하는 상형문자가 나온다. 상나라는 포로로 잡은 강족 사람들을 거세시켜 환관으로 활용했다. 

 ■환관학교에서 일어난 일
 성조 이후 환관들의 입지는 더욱 넓어졌다.
 명군(名君)이 반열에 오른다는 5대 선종 때는 아예 환관학교(내서당)까지 세웠다.
 환관학교에서는 10세 이하 어린이 200~300명이 혹독한 교육을 받았다. 훗날 명말 청초의 사상가 고염무는 환관학교를 이렇게 비난했다.
 “내서당이 설치되면서 붓을 잡는 환관들이 과대평가됐고, 대권은 결국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일지록>)
 선종은 왜 환관들에게 글을 가르친 것일까.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송나라 때부터 이어진 재상정치를 폐지했다. 그러면서 재상이 대행하던 사무를 황제가 모조리 회수해버렸다.
 원칙적으로 모든 상주문은 황제가 직접 붓으로 사인(이를 비답이라 한다)해서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황제가 전국에서 올라오는 상주문을 다 검토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황제의 공식 비서 조직인 내각이 먼저 상주문을 검토했다. 그런 다음 뒤 그 수장인 내각대학사가 가장 적절한 조치라고 여기는 내용을 ‘비답의 원안’으로 적어 올렸다. 이 비답의 원안을 표의(票擬)라 했다.

 

 ■비선조직…. 그림자 내각의 음모
 그런데….
 이 비답이 황제에게 올라가기 위한 또 하나의 과정이 있었다. 환관 12감의 우두머리인 사례감 태감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황제의 비답을 담당하는 병필태감이 의미심장한 키를 쥐고 있었다.
 병필태감의 직무는 대각대학사가 상주문을 검토한 뒤 기입한 표의(비답의 원안)을 깨끗하게 정리하여 황제에게 올리는 것이었다.
 그 중 아주 중요한 몇 편의 상주문만 황제가 직접 비답하는 형식을 갖추었다.
 문제는 병필태감이 일종의 비밀경찰 조직인 동창의 장관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병필태감은 이미 내각대학사가 사인한 상주문(표의)에 다른 의견을 첨부해서 황제에게 제출했다.
 이것을 탑표(搭票)라 한다. 천하의 비밀정보가 동창의 장관인 병필태감의 손에 좌우됐기 때문이었다. 결국 황제에게는 내각대학사와 다른 의견이 올라갔고, 환관들의 손아귀에서 정무가 장악된 것이다. 정식의 조직을 거치지 않은 측근정치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환관의 전권이 막강했을 때는 내각의 표의조차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림자 내각, 혹은 비선의 정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베이징의 환관박물관에 전시된 거세용 칼.  

 ■황제와의 거리가 권력을 좌우한다 
 더 중요한 것은 공간의 거리였다.
 자금성의 구조를 보면 내정과 외정을 구분 짓는 담벽의 중앙에 운태문이 있고, 그 좌우에 평대라 일컫는 문 2개가 있다.    그런데 내각대학사들이 호출을 받으면 이 평대로 달려와 황제의 뜻을 전해들었다. 더 이상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내정 안의 환관들은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모셨다. 담벼락 하나를 두고 내신(환관)과 외신(관료)의 차이가 현격했던 것이다.
 정보를 독점하고, 24시간 황제의 눈과 귀가 막아 국정을 농단했으니 그 폐해가 어땠을 지 짐작이 간다.
 예컨대 ‘9900세’의 장본인인 위충현은 황제의 어좌가 있는 건청궁에 앉아 상주문을 멋대로 결제했다고 한다. 그랬으니 명나라의 ‘넘버 1’이자 ‘배후의 황제’로 일컬어진 것이다. 그 때 희종(천계제)은 무엇을 했냐면 궁정 안에 파묻혀 대패와 톱으로 세공품 만들기에 열중했단다.
 이쯤해서 당 문종 연간(재위 826~840)에 국정을 농단했던 구사량이란 후배 환관들에게 가르친 ‘군주 조정법’이 떠오른다. 
 “천자를 한가롭게 해서는 안된다. 언제나 호화생활에 몰두하게 하라. 그 눈과 귀를 즐겁게 하라. 절대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줘서는 안된다. 그래야 환관 일족의 뜻을 달성할 수 있다.”
 구사량은 “군주에게 독서를 즐기게 하거나 유가(儒家)를 가깝게 해서는 안된다”며 “만약 군주가 전대의 흥망을 안다면 환관을 멀리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어쨌든 진나라가 조고 때문에, 후한이 십상시 때문에 멸망을 자초했다면 당나라도, 후량의 태조 주전충이 환관 수백명을 살해하면서 끝장나고 말았다.
 ‘환관의 나라’였다는 명나라 역시 비밀경찰 조직까지 휘어잡은 환관의 측근정치 때문에 멸망이 가속화된 것이다.

 

 ■‘국권이 모두 고자에 있구나!’
 그럼 우리 역사속의 환관은 어떤가.
 다행히도 우리 역사에는 나라를 들어먹은 환관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다.
 먼저 우리 역사에서 궁형의 혹형이 없었고, 환관이 되기 위해 스스로 거세하는 이른바 자궁(自宮)의 제도가 없었다는 점은 특기할만 하다.
 예컨대 <고려사> ‘환자(宦者)’편을 보면 “환관이 된 자들은 어렸을 때 개에 물린 자들”이라고 했다. 꼭 개에 물리지 않았더라도 어떤 사고에 의해 남성을 잃은 자들이 환관이 됐다는 뜻이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은 도둑이 창궐함에 따라 궁형과 같은 극형의 카드를 만지막 거렸지만 “너무 비인간적이나 안된다”고 결론을 내린 일이 있었다.
 각설하고 역사서에 환관의 나쁜 예는 고려 의종 대의 정함일 것이다.
 천민 출신이었던 정함은 ‘어릴 때 개에 물려 고자가 된’ 이후 궁에 들어가 환관이 되었다. 의종은 왕위에 오르자 정사는 뒷전이었고, 태껸 구경과 사냥, 유람을 일삼았다.
 신료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주변을 지킨 측근은 정함이었다. 정함은 대궐 30보 안에 2000칸이 넘는 집을 짓고 누각을 마련하는 등 호화생활을 즐겼다.
 문신 김존중 등과 결탁해서 매관매직을 일삼고 아부하는 자를 등용했다. 1156년(의종 10년) 정함이 등창을 앓고 눕자 그를 문병하러온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수근댔단다.
 “국권이 환관에게 돌아갔구나!”(<고려사절요> 1156년조)

 <고려사>를 쓴 사관은 "정함과 같은 환관의 농단 때문에 결국 정중부의 난을 초래했다"고 안타까워했다.(<고려사절요> 1157년조)

청나라 말기 자금성 내부에서 태후를 모시던 환관들 

 ■“나 꼭 죽을 것이야!”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아간 환관이 있다. 연산군 대의 환관인 김처선이다.
 김처선은 성종 임금의 사랑을 받아 정2품 자헌대부에 올랐던 총신이었다. 원래 환관에게는 아무리 높아봐야 종2품까지만 오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성종은 김처선에게 판서와 같은 반열인 자헌대부에 올린 것이다. 그의 운명은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반전한다. 
 성종의 대를 이은 연산군이 무오사화(1498년)와 갑자사화(1504년)를 잇달아 일으키면서 대대적인 살육에 나섰다. 당대의 역관인 조신이 쓴 <소문쇄록>과, <연산군일기> 등 문헌을 보라.
 “이 때 김처선은 어둡고 음란한 연산군에게 매번 정성을 다해 간언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노여움을 속에 쌓아둔 채 ‘꿍’하고 있었다. 급기야 임금은 궁중에서 처용놀이를 했는데 음란함이 지나쳤다. 이때….”
 바로 그 날(1504년 4월 1일), 김처선은 집안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나는 반드시 죽을 거야.”
 김처선은 각오를 다지고 궁궐로 들어갔다. 마침 연산군이 술 한잔을 따라주었다. 벌컥벌컥 술잔을 비운 김처선은 술김을 빌려 임금을 향해 독설을 던졌다.
 “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지만, 고금에 전하와 같은 짓을 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연산군이 크게 성을 내며 쏜 화살이 갈빗대에 맞혔지만 김처선은 그치지 않았다.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연산군이 화살을 더 쏘아 땅에 넘어뜨리고, 그 다리를 끊고서 “일어나 다니라”고 명했다.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 있습니까.”(김처선)
 한마디도 지지않고 대들자 연산군은 김처선의 혀를 자르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냈다. 김처선은 죽을 때까지 말을 그치지 아니했다.

 

 ■처(處)자는 보기도 싫다.
 연산군은 김처선의 시체를 범에게 주었다. 김처선의 극언이 얼마나 뼈저렸는지 연산군은 이성을 잃은 후속조치를 남발했다.
 “간사한 내시 김처선이 임금을 꾸짖었으니 이런 죄는 개벽 이래 없었다. 어찌 천지 사이에 용납돼랴!”(<연산군일기> 1504년 4월 4일) 
 우선 조정과 민간에서 처(處)자는 입밖에 내지도 말라는 명을 내렸다. 예컨대 그 해 과거시험 답안지에 ‘처(處)’ 자를 썼던 유생 권벌의 합격이 취소되기도 했다.

  권벌은 3년 후에 다시 과거를 치러 합격했다고 한다. 연산군은 또 김처선의 집을 헐고, 연못을 파도록 했으며, 그의 죄명을 돌에 새겨 묻으라는 명까지 내렸다.  
 심지어 처(處)자는 듣기도 싫다면서 내외 대신과 군사들 중에 김처선의 이름을 가진 자는 모두 개명하라는 명까지 내린다. 이밖에 김처선의 양자이자 환관인 이공신도 죽였고, 김처선의 7촌까지 모두 죄인이 됐으며, 그 부모의 무덤도 뭉개졌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뒤 김처선을 선양하자는 논의가 있었다.(1512년 12월4일)

   그러나 중종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김처선은 술에 취하여 망령된 말을 해 스스로 실수했다. 바른 말 하는 데 뜻을 두었던 것이 아니니….”
 중종은 아무리 바른말이었다 해도 환관이 주제넘게 나서 임금에게 대들었음을 책망한 것이다. 환관의 발호를 염려한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바로 환관의 한계가 아니었을까. 종묘와 사직을 위한 죽음을 무릅쓴 충간이었는데 ‘술에 취한 망령된 말’이라 폄훼됐으니 말이다.
 그로부터 250년이 흐른 1751년(영조 27년)이 돼서야 왕명으로 김처선을 기리는 위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충성한 사람을 위해 정려문을 세우는 적은 세상을 권면하는 큰 정사다. 사람이 비록 미천하다 하더라도 없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환관이 되기위한 시술을 재현한 모습.   

 ■아침이슬과 같은 운명
 그러고보니 중국이나 조선이나 환관들의 운명은 롤러코스터였음을 알 수 있다. 아침이슬과 같은 운명이라고 할까. 
 자식이 없었으므로 부와 명예가 세습되기 어려웠다. 황제의 총애가 식거나, 혹은 그토록 총애했던 황제가 쫓겨나가거나 죽기라도 하면 환관의 운명 또한 장담할 수 없었다.
 중국을 보라. 위충현과 유근이 이른바 천참만륙,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극형을 받았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후한 명말 당시에는 원소가 궁정에 난입했을 때 환관 2000명이 몰살당했다니…. 그 가운데는 눈썹이나 수염이 없어서 환관으로 오인돼 죽은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단다. 
 그 뿐인가. 당나라 때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국정을 주물렀던 환관 고력사와 이보국도 결국 일장춘몽의 짧은 전성기를 누렸을 뿐이다.
 조선시대는 뭐 다른가. 중국의 내로라하는 환관들같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일부 환관들도 공신의 반열에 드는 등 군주의 총애를 받았다.
 예컨대 조선 태조 대의 환관 김사행은 조선 건국의 기틀을 잡고 궁궐 내의 법도를 마련했다는 이유로 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또 내로라하는 조선의 개국공신들인 조준과 정도전, 남은 등은 환관 조순을 초청, 잔치까지 베풀고 말 1필까지 선물로 전달하기까지 했다.(1398년 7월 8일)
 연회 때 술에 취해 태조 임금 앞에서 칼을 빼든 신귀생을 말린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모자를 던져버린 환관
 하지만 그들의 운명도 덧없었다. 김사행은 1398년 8월 25일,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어린 세자(이방석)의 비호세력으로 분류돼 참수됐다. 조순도 마찬가지로 참형을 받았다. 신료들로부터 잔칫상을 받은지 한 달여 만에 목이 잘리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물론 그들은 뇌물과 청탁을 받았다는 탄핵을 여러차례 받았던 최측근 환관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참형을 받을만한 죄는 아니었다.
 모두 태조 임금의 최측근 세력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던 환관들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좀 재미있는 장면이 <태종실록>에 나온다. 태종은 환관에게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태종이 총애했던 환관 노희봉은 변덕이 죽 끓듯 했던 임금 때문에 감옥에 쳐박히기 일쑤였다. 말실수 했다고 옥에 갇히고, 임금의 말을 잘못 전달했다고 또 감옥살이하고….
 1411년(태종 11년) 1월5일, 그 날도 노희봉은 임금의 말을 잘못 전했다는 이유로 호된 꾸지람을 받았다. 심지어는 중관에게 명해 노희봉의 머리채를 잡고 중문으로 쫓아내게 했다.
 그 날 노희봉의 기분을 적나라헤게 묘사한 <태종실록>을 보라.
 “중관 김화상이 중문에 이르러 벗겨진 사모(紗帽)를 노희봉에게 씌워 주었다. 그러자 노희봉은 손으로 벗어서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막 섬돌 한 계단을 내려설 때 땅바닥에 떨어져 다친 데가 몹시 아팠다.”
 아무리 임금의 명이라지만 모자를 확 던져버릴 정도로 화가 난 것이다.

 

 ■‘원죄는 군주에게 있다’
 그러고보면 군주에게 환관은 필요악이었을 것이다.
 10세기 쯤 광동성의 환관 왕국의 형태를 갖춘 남한의 군주는 이렇게 말했단다.
 “모든 신하들에게는 가정이 있다. 때문에 만사를 다 제쳐놓고 군주를 위해 일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밤낮으로 함께 사는 환관들이야말로 군주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1471년(성종 2년) 6월 8일에는 대사헌 한치형이 언급한 환관의 폐해를 보라.
 “환관은 임금과 조석(朝夕)으로 함께 거처합니다. 그러나 여러 대신들은 출퇴근합니다. 어두운 곳에서 몰래 사라지고 몰래 빼앗는 것을 대신들이 대명천지에 따지고 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군주들은 환관의 폐해를 알면서도 기댈 수밖에 없었다. 마약처럼…. 특히나 왕권강화를 꾀했던 군주들은 신료 중심의 정치를 깨뜨리려고 환관정치에 재미를 붙였다.
 하지만 너무 과하면 군주를 욕보이고, 종묘사직을 어지럽게 했다. 환관의 존재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였던 것이다.   
 예컨대 1392년(태조 1년) 7월 20일 사헌부는 새왕조를 위한 10개 조목을 발표했는데, 8번째 조목이 환관혁파였다.
 “환관의 사람됨은 대개 의식이 영리하고 말을 잘하며, 안색(顔色)을 잘 살피고 뜻을 잘 맞춥니다. 그 때문에 군왕은 왕왕 그 꾀임에 빠져서 깨닫지 못해 환란이 일어납니다. 앞으로 그 노련한 간물(奸物·환관)들을 내쳐야만….”
 이쯤해서 난세의 간웅이라는 조조의 한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후한 말엽 대장군이던 하진이 환관들을 절멸시킬 계획을 세우자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환관은 고금부터 있어왔다. 다만 군주의 총애를 빌려 일이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
 조조는 모든 악의 근원은 환관이 아니라 환관에게 힘을 준 군주에게 있음을 갈파한 것이다. (끝) 경향신문 사회에티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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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장은 9개의 문이 달린 연꽃이다.”
 고대 인도의 성전(聖典) 가운데 하나인 <아타르베다>가 표현한 심장이다. 심장을 세우면 연꽃 봉우리처럼 생겼고, 모두 9개의 구멍(혈관)이 있음을 안 것이다. 
 “목 아래 배꼽 위에 자리한 심장은 아래를 향한 연꽃같다. 심장은 신의 거처임을 깨달으라. 심장 끝에는 섬세한 신경이 있다. 여기서 만물의 존재가 성립한다. 중심에는 위대한 불이 있어 사방으로 퍼져가며 여기저기서 타오른다. 이 불길 가운데 지고의 존재가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을 미라로 만들 때 심장 만은 방부처리하여 미라 속에 넣었다.
 반면 뇌는 “쓸모없다”면서 버렸다. 다른 장기들은 단지에 담아 미라의 옆에 놓았다. 심판의 날에 죽은 자를 위해 증언해 줄 심장을 고이 보존하려는 뜻이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심장을 닮은 심장 풍뎅이 모형(부적)을 미라의 가슴 위에 두었다. 이것을 스카라베(Scarabee)라 한다. 

갑골문에 등장하는 마음 心자.  사랑을 뜻하는 이모티콘 ♡(♥)를 빼닮았다.

 13~15세기 멕시코를 점령했던 아스텍인들은 피의 의식이 벌였다. 즉 부싯돌이나 흑요석 칼로 인간제물의 가슴을 갈라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태양신에게 바쳤다. 1487년에는 무려 8만명이 희생됐다.스페인인들이 멕시코에 상륙했을 때 테노치티틀란에서만 해마다 1만5000명이 희생됐단다. 이들은 피와 심장을 바쳐야만 태양은 매일 아침 다시 떠오르는 힘을 얻는다고 믿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아스텍인들의 야만적인 인간제사를 맹비난했다. 하지만 스페인 약탈자들은 아스텍 문명을 초토화시켰다. 그 결과 2500만 명이던 멕시코 인구는 16세기에 이르러 100만명으로 격감했다. 누가 더 나쁜 사람들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사랑의 상징
 그렇다면 서양에서 심장은 언제부터 사랑의 상징이 됐을까.
 ‘개인의 감정을 억누르던 기독교 교리에 맞서 육체적인 세속의 삶을 쟁취하기 시작한 12~13세기 때부터’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때부터 육체적인 심장과 상징적인 심장이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중세 유럽의 유명한 연애담인 <트리스탄과 이졸데>(1205~1215)를 보자. 이졸데가 트리스탄과 몰래 사랑을 나누던 밤이 지나고 헤어질 때 탄식한다.
 “제 몸은 여기 있지만 제 마음은 당신이 가져가네요.”
 남자의 심장은 여인의 심장에서 뛰고, 여인의 심장은 남자의 심장에서 뛰고…. 쿵쾅쿵쾅 뛰는 ‘심장(마음)의 교환’이다. 이렇게 심장은 감각적인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를 기대자면 디오니시스 신들의 추종자들이 담쟁이 덩굴을 몸에 붙이고 광란의 축제를 벌였다는데, 축제 도중 몸 안에서 쾅쾅 뛰는 기관을 상징하게 됐다는 설도 있다.
 담쟁이 덩굴 잎사귀가 심장과 비슷하니까….   

갑골문에 등장하는 심장 문양.  심장 혈관의 모습까지 형상화 했다.

 

 ■心자의 비밀
 동양에서는 어땠을까.
 동양에서도 심장은 단순한 펌프의 기능만은 아니었다. 마음과 영혼, 양심이 자리잡은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의학서인 <황제내경(黃帝內經)>은 “심장이 영혼을 제어한다”고 기록했다. 심장은 사랑과 고통, 연민 등 갖가지 감정을 대변하는 상징이었다.
 오죽했으면 마음을 뜻하는 ‘心’자가 인간의 심장을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그러고보니 갑골문에 등장하는 마음 心자의 형상은 아주 흥미롭다.
 요즘 가장 사랑받는 이모티콘인 ‘♡(♥)’ 문양과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 문양은 심장의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 뿌리는 깊다.
 상나라의 반경(盤庚)~무정(武丁) 시대, 즉 기원전 1300~1192년에 점을 친 뒤 새겨넣은 갑골문에 나온다.
 상형문자로 된 3300년 전, 동양 최초의 ♡모양이다. 이것은 심장을 쏙 빼닮은 모양이 맞다. 이것이 ‘마음 심(心)’자의 원형이다. 이 최초의 ♡문양은 다소 무미건조하다.
 “왕이 6월에 심겸(心京, 지명이름)으로 가는데 별 문제가 없겠느냐(王往于心京 若 六月)”고 점을 친 내용이다. 심경은 지명이다. 말기의 갑골문을 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다.
 “마음에 병이 있는데 재앙이 오겠습니까.(有疾心 唯有害)”
 여기서의 심(心)자도 사람의 심장 외곽을 형상화한 모양이다.
 여기서 심질(心疾)은 ‘지나치게 마음을 쓰거나 괴로움을 당해 생긴 정신병(思慮煩多 心勞生疾)’(<좌전> ‘소공’조)을 뜻한다.
 이는 3000년 전부터 마음의 병, 즉 정신병을 호소한 기록인 것이다. 또 “대왕의 마음이 화평할까요?(王心若)”라고 묻는 갑골문도 있다. ♡는 곧 심장과 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심장이 하나인 까닭
 그렇다면 상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심장의 모양과 ♡문양을 연결시켰을까.
 중국인들은 이미 상나라 시대부터 심장을 해부했고, 그것을 토대로 24가지의 맥박유형을 분류했다.
 비극적인 ‘심장해부’의 사례도 있다. 상나라 마지막 군주 주왕은 희대의 폭군이었다. 바른 말을 간언하는 충신들을 죽여 젓을 담거나 포를 뜨는 만행을 저질렀다.
 숙부인 비간(比干)이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쏘아붙이자 주왕이 인면수심의 만행을 저지른다.
 “주왕은 ‘내가 듣기로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7개가 있다고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비간의 배를 갈라 심장을 보았다.(聞聖人心有七竅 剖比干 觀其心)”(<사기> ‘은본기’)
 심장구멍은 심장에 난 혈관을 뜻한다. 주왕은 인간의 심장혈관이 9개인데 성인은 7개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상나라 시대에 이미 심장이 혈액을 육체 전체로 내보내는 펌프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착안점이 있다. 심장은 단 하나 뿐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뜻하는가. 심장이 하나라는 것은 사랑도 영혼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된다.
 왜 하나인가. “심장이 하나인 이유는 세상에 오직 한사람 만을 사랑하라는 뜻”이라는 유행가 가사가 있다.(채동하의 <심장이 하는 일>)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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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팟 캐스트 7회 내용 요약입니다.>

   세종대왕은 ‘만고의 성군’이자 ‘해동의 요순’으로 알려져 있다.
 더불어 세종을 수식할 수 있는 단어들이 있다. 일벌레에, 공부벌레였다는 것이다.
 그런 세종이 생전에 내내 온갖 병마와 싸웠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필자는 그런 세종에게 ‘앉아있는 종합병원’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고 싶다.
 극심한 당뇨병에 두통, 이질에, 풍질에, 요로결석에, 다리부종에, 수전증에…. 화려한 병력이 아닐 수 없다. 

하기에 세종 뿐이 아니었다. 지존으로서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고, 백성을 위해 일해야 하는 군주들은 다양한 질병에 시달렸다.
 등창 때문에 승하한 임금, 족질로 고생한 임금, 그리고 뜻밖의 의료사고로 급서한 임금 등….
 또 어느 임금은 양기보충을 위해 풀벌레와 뱀을 먹기도 했고, 또 어느 임금은 병치료를 위해 똥물을 약으로 마셨다고 한다. 이뿐인가. 너무나 아버지를 그리워한 나머지 요절한 효자임금도 있다. 업무 스트레스는 임금들의 건강을 갉아먹었다. 어느 임금은 “정무를 처리하느라 수염이 하얗게 세었다”고 토로했다.
 또 어느 임금은 심각한 정신병 증세를 여러차례 호소했지만 신하들로부터 ‘철없는 소리 작작하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또 다른 임금은 신하들의 지긋지긋한 복지부동에 “대체 어쩌자는 거냐”고 소리쳤다. 또 어떤 임금은 서슬퍼런 동생이 무서워 결국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고 나서야 여생을 편안하게 즐겼다고 한다.
 물로 임금들의 평균수명은 일반 백성들보다 훨씬 높았다. 하지만 임금이 어떤 자리인가. 한나라 시대 유교의 국교화를 이룬 동중서는 임금 王자를 이렇게 해석했단다.
 “王자에서 가로획 3개는 하늘과 땅과 사람을 뜻한다. 임금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소통시켜주는 세로 획이다.”
 그러니 절대 편한 자리가 아니요, 혼자 지존의 자리만 즐길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소통의 자리였던 것이다.

 <관련기사>

 어느 임금의 절규, '정신병이다. 나 좀 살려주라!'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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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지가 탄생한 자리에 고·현생 인류가 탄생한 시기, 즉 200만 년~1만 년 전 사이를 뜻한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인류기’라고도 한단다. 
 바로 그 시기였다. 한반도 중부, 그러니까 평강 서남방 3㎞ 떨어진 오리산(해발 453m)과 검불랑역 북동쪽 약 4㎞ 떨어진 680m 고지에서 용암이 분출된다.
 그것도 한 두 번의 분출이 아니었다. 10여 차례나 흘러 나왔다.

경기 포천 관인면과 영북면에 걸쳐있는 멍우리 협곡. 오리산에서 분출된 용암의 산물이 절경의 주상절리를 빚어냈다. 한국의 그랜드 캐니언으로 각광받고 있다.|정지윤 기자 

 ■휴전선 너머에서 생긴 일
 그런데 오리산과 검불랑에서의 화산 분출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거대한 폭발, 즉 증기와 용암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중심분출’이 아니었다.
 벌어진 지각 틈 사이로 용암이 꾸역꾸역 흘러나오는 이른바 ‘열하(裂하)분출’이었다. 그것이 오리산이나 검불랑 고지가 백두산이나 한라산과 같은 거대한 규모의 화산체로 솟아오르지 않고, 소박한 야산 정도로 남은 이유가 된다. 어쨌든 그렇게 흘러나온 용암은 평강과 철원 일대의 650㎢(2억평)를 뒤덮는다. 가히 ‘용암의 바다’가 되었다.
 쌓인 용암은 낮은 골짜기를 찾아 흐르기 시작한다. 오리산의 용암과 검불랑의 용암은 연천 전곡 도감포에서 만나 한줄기가 되어 흐른 뒤 파주 화석정 인근에서 멈춘다. 97㎞에 달하는 긴 여행이었다. 용암이 식으면서 평강·철원 일대는 광활한 현무암 대지를 이룬다. 화산이 분출한 평강 일대의 현무암 지대는 당연히 두껍다. 평강-철원-포천-연천-파주 순으로 용암의 두께가 얇아졌을 것이다. 평강이 해발 330m의 고원지대로, 철원이 해발 220m의 거대한 평원지대로 차례차례 변한 이유이다.
 지금도 저 멀리 휴전선 너머 북쪽을 관찰하면 거대한 둑처럼 시야를 가리는 평강고원을 볼 수 있다.

기둥모양의 결정체인 주상절리가 한탄강에 투영되어 있다.|정지윤 기자

 ■화산분출의 조화
 뜨거운 용암이 급격하게 식으면서 현무암이 되고, 그 사이사이에 틈이 생긴다. 이것이 풍화작용 겪으면서 사각형~칠각형의 기둥 모양이나 널판지 모양으로 갈라진다.
 이런 결정체를 주상절리(柱狀節理·다각형) 혹은 판상절리(板狀節理)라 한다. 그런데 혹독한 빙하기가 지나 간빙기가 되자 평강·철원 지역을 덮고 있던 빙하가 녹기 시작한다. 오리산 쪽에서 내려온 물은 한탄강이 되었고, 검불랑 쪽에서 내려온 물은 임진강의 지류인 역곡천·평안천이 되었다. 두 물은 전곡 도감포에서 만나 임진강이 되어 다시 연천-파주로 흐른다.
 용암이 급격히 식을 때 생긴 주상절리와 판상절리는 빙하물을 만나 더욱 조화를 부린다. 현무암이 흘러오는 강물에 의해 지속적으로 침식될 때 덩어리째 떨어져 나간다.
 용암이 식어 조성된 현무암지대는 원래 약한 성질을 갖고 있다. 때문에 침식원인이 있는 취약지역에서는 엄청난 속도로 무너지는데, 수직절리현상이 있는 곳은 직각의 절벽을 만든다.
 특히 임진강·한탄강은 물살에 거센 데다 기온의 연·일교차가 상당하다. 겨울 혹한이 길고, 서리가 내려앉는 날이 많다. 여름철엔 덥고 집중호우가 빈번하다.
 그러니 풍화 및 침식작용이 활발한 것이다. 온탕·냉탕의 변화무쌍한 날씨조건에다 거센 물살에 따른 강물의 침식이 계속되면서 직벽의 하부는 계속 깎이고….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주상 및 판상절리의 절묘한 결정체를 알알이 박아놓은 한탄강·임진강변의 직벽이다.

멀리서 본 멍우리 협곡의 모습. 용암은 이처럼 철원-포천-연천-파주를 흘러 한탄강을 만들어냈다.|정지윤 기자

 ■한국판 그랜드 캐니언
 지금도 한탄강·임진강변을 답사하다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
 경기 포천 영북면 운천리의 한적한 농촌마을의 논두렁을 잠깐 벗어나 수풀을 한번 헤쳐보라. 30~40m의 깎아지를 듯한 절벽을 수놓은 환상의 수직단애가 꿈처럼 펼쳐진다.
 고소공포증에 몸을 떠는 기자는 오금이 저려 볼 수가 없을 정도다.
 다시 차를 타고 돌고 돌아 포천 관인면 중리에 있는 멍우리 협곡을 찾아가본다. 그러나 길을 잃기 십상이다. 대회산리(포천 영북면) 마을에서 네이게이션이 끊기기 때문이다.
 그저 ‘멍우리 캠핑장’의 팻말을 보고 꾸불꾸불 정처없는 길을 달릴 뿐…. 달려도 달려도 주상절리 같은 절경은 보일 것 같지 않다.
 결국 막다른 길이 다다랐는데 민가가 떡하니 가로막고 있다. 포기하고 돌아갈 참이었는데 마을 주민이 나와 길을 내준다. 그러고 보니 은장산 첩첩산중에 올레길 공사가 한창이다. 

포천시청이 선정한 한탄강 8경 가운데 샘소, 교동가마소, 비둘기낭, 구라이골.

오른쪽 그림은 오리산과 검불랑에서 분출한 용암이 임진강과 한탄강을 만들고, 두 강이 만나 큰 임진강이 되어 서해 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한창 공사 중인 길을 따라 10여 분 올라가 둘레길 중간에 전망대를 만들려고 나무를 베어놓은 곳에 섰다. 아찔한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로 멍우리 협곡(명승 제94호)이었다.
 마치 한반도의 모양처럼 휘어지며 흐르는 한탄강의 양안에 끊임없이 전개되는 높이 20~30m 직벽의 주상절리…. 
 협곡의 총길이가 4㎞ 정도라니 누군가 그랬단다. 이곳이 바로 ‘한국의 그랜드 캐니언’이라고….
 스르르 무너져버린 주상절리가 깎아지른 절벽의 틈으로 길을 내주었다. 일행은 조심스레 현무암 더미에 발을 디디며 협곡 밑으로 내려갔다.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 모양의 다양한 주상절리가 절벽전체를 수놓고 있다. 그 절벽 중간 중간에 주상절리의 침식과 박리 등으로 인해 형성된 하식동굴이 점점이 박혀있다.
 ‘붐비기 전에, 혹은 남보다 먼저’를 꿈꾸는 ‘얼리버드’라면 둘레길이 완성되기 전에 ‘한국판 그랜드캐니언’을 감상하는 것도 좋을 일일 것이다. 
  
 ■한반도의 탯줄
 오리산·검불랑의 화산 분출이 빚어낸 풍경은 멍우리 협곡 뿐이 아니다.
 기자일행은 이어 구라이골이라는는 특이한 이름의 현무암 협곡을 찾아나섰다. 날이 일찍 저무는 초겨울 오후였기에 서둘러 찾아갔지만 허탕칠 뻔했다.
 분명히 네비게이션에는 포천 창수면 운산리로 찍었는데, 차가 관인면 중리 쪽으로 넘어갔는 데도 좀체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포천시청이 선정한 한탄강 8경

한참을 헤매고보니 공사중인 구간 저 편에 수상해서 공사장 길을 거쳐 의심지역으로 가보았다. 수풀 앞에 공사중임을 알리는 통행금지가 붙어있는 곳….
 한데 자칫하면 빠질 것 같았다. 한적한 땅에 그렇게 칼날처럼 날카롭게 푹 꺼진 협곡이 있으니 말이다. 소규모 협곡이지만 침식지형인 하식애와 침식동굴인 하식동 등 현무암 침식지형의 대표적인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단다. 협곡의 중간에 있는 작은 폭포는 주상절리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곳 뿐이 아니다. 아치형의 주상절리 동굴과 현무암 수직절벽이 펼쳐진 비둘기낭(천연기념물 537호)은 한탄강 주상절리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지금까지 ‘선덕여왕’, ‘신돈’, ‘추노’, ‘괜찮아 사랑이야’ 등 수많은 드라마의 단골 촬영지로 각광받았다. 27만 년 전의 절대연령을 자랑하는 대교천 현무암 협곡(철원 동송~포천 관인·천연기념물 436호)은 어떤가.
 ‘까칠한’ 비탈길을 통해 협곡 아래로 내려가면 이승이 아닌듯 오싹해진다. 여름철엔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협곡에 마구 부딪혀 서늘한 함성을 자아낸다.
 이밖에도 사시사철 수량이 변하지 않는다는 샘소(포천 관인 냉정리 협곡), 볏단을 쌓아올린 듯한 형상이라는 화적연(禾積淵·포천 영북면 자일리·명승 93호), 못의 형태가 가마솥처럼 생겼다는 교통 가마소(포천 관인 중리)도 유명한 주상절리 명소이다. 또 강물과 용암의 작용으로 둥근 베개 형태의 지형이 만들어졌다 해서 아우라지 베개용암(포천 창수면 신흥리·천연기념물 542호) 등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오리산·검불랑의 화산분출은 빼어난 자연현상 만을 잉태한 게 아니라는 것.
 바로 문명의 젖줄인 한탄강 임진강을 낳았고, 그 강물을 터전을 삼고 살았던 고인류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30만 년 전 연천 전곡 한탄강변에서 태어난 구석기인들이다. 전곡리인이라는 이름이 붙은 고인류는 한탄강 용암대지 위에 채집생활을 하며 강물을 고속도로 삼아 문명을 일궜다. 그러고보니 오리산·검불랑은 결국 한반도 문명의 배꼽이었고, 한탄강·임진강은 문명이 탯줄이었던 것이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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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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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번째 팟 캐스트 내용을 요약정리합니다  

 

 1403년(태종 3년) 선원 등 1000여 명과 쌀 1만석이 수장된 대형참사가 발생했습니다.
 거센 풍랑 중에 배를 띄운 관리들이 부른 인재였다. 하지만 태종은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면서 ‘내탓이오’를 외쳤습니다.

중국 역사에서 대표적인 성군으로 꼽히는 당나라 태종은 628년 메뚜기 떼가 창궐하자 들판에 나가 메뚜기 두 마리를 생으로 삼켰습니다. “차라리 내 심장을 갉아먹으라”면서….

 

중국 상나라 창업주 탕왕은 7년간이나 가뭄이 계속되자 머리카락을 자르고, 손톱을 깎은뒤 뽕나무밭에 들어가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다”면서 ‘6가지 자책’을 하늘에 고했습니다. 역사는 이것을 ‘상림육책(桑林六責)’이라 했다.
 송나라 태종은 메꾸기 떼가 창궐하자 “내 몸을 불사르겠다”고 분신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메뚜기떼가 물러났답니다.
 천하의 폭군이라는 연산군도 “천재지변은 사람이 부르는 것이니 겉치레를 물리치고 참된 덕을 행하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그냥 듣고 넘길 일이 아니니 잘 정서해서 다시 올리라”고 지시했답니다. 인조 시대에 기상이변이 계속되자 대사헌 강석기는 “정책이 일관성이 없고. 인사가 엉망진창”이라고 임금을 무섭게 다그쳤습니다.
 2000년 전 부여 시대엔 기상이변으로 곡식이 영글지 않으면 임금을 바꾸거나 심지어는 죽였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도자가 무슨 전지전능한 하나님도 아닌데…. 무슨 사건사고가 나고, 심지어는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까지 모두 지도자의 탓으로 돌렸을까요. 정말 왜 일까요. 올해 유달리 사건 사고가 많았고, 천재지변도 많았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운석이 떨어지고, 때아닌 메꾸기 떼까지 보였습니다. 심지어는 땅이 꺼지기까지(싱크홀) 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까지 원양어선까지 침몰했습니다.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6회는 바로 이런 대형참사와 재변에 대처했던 옛 지도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는 배우는 자의 몫입니다.

 <관련포스팅>

  당 태종이 메뚜기를 꿀꺽 삼킨 이유는

 경향신문 이기환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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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살겠다 못살겠다 하면서도 죽지못해 사는 것이 살림이요.~내일 일이 어찌될지 모르면서 살아가지요.”
 경향신문은 1947년 11월 27일자부터 ‘어떻게 살아갈까?’를 주제로 원고지 4~5장 분량의 시리즈를 시작했다. 주제에서 알 수 있듯 해방은 됐지만, 아직 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미군정 시절의 암울한 분위기가 묻어나온다. 각 직업별로 한 사람씩 등장시켜 해방공간의 비참한 삶을 생중계하고 있다.

경향신문은 1947년 11월 27일자부터 '어떻게 살어갈까'랄 주제로 미군정체제 하의 비참한 생활상을 시리즈로 전했다.

 ■‘어떻게 살아갈까’
 11월27일 첫번째로 나선 사람은 ‘차부편(車夫篇)’의 길삼룡씨(37)였다. 차부는 소나 말이 끄는 수레를 부리는 사람을 일컫는다. 당시엔 ‘구르마꾼’이라도 했다.
 이날 길씨를 인터뷰한 기자는 “극도로 심각해지는 도탄인생(塗炭人生)은 좀처럼 해결될 가망성조차 보이지 않는다”면서 “대형 미군트럭의 질주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추위에 떠는 길씨를 만났다”고 설명한다. 길씨는 “여섯식구 살림의 1년간 돈벌이는 그 절반을 김장철 장작철에 벌어야 한다”고 “살길이 막막하다”고 토로한다.
 28일은 ‘전재민(戰災民)’ 편이었다. 전재민은 태평양전쟁 등의 와중에서 집을 잃고 떠돌거나, 또는 끌려갔다가 해방 이후 돌아온 전쟁이재민을 뜻한다.
 기자는 동소문동 산모퉁이 방공호의 움 속에서 살고 있는 전재민을 만났다. 해방 후 만주에서 네 식구가 왔다는 전재민은 “누가 기다리기나 한듯 찾아온 동포에게 방 한칸 내주지 않은 동포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면서도 쓰디쓴 농담을 던졌다.
 “온돌이 없으니 나무걱정이 없고, 번지가 없는 집이니 세금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입니다.”
 ‘학교편’(11월 30일)을 쓴 기자는 첫 추위가 몰아치는 날 아침 등교를 하는 국민학교 아동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한다.
 “7~8살 되는 국민학생들이 회현동의 어떤 큰 양옥집 앞에서 무엇인가 바라보며 떨고 있었다. 기자가 ‘무얼 보고있냐’고 묻자 소년 하나가 말했다. ‘저 집의 유리창에는 김이 서려 있잖아요.’ 상급생인 듯한 여학생은 ‘저 김은 방안이 덥고 밖이 추워서 서린 것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기자는 무심한 소년소녀들의 대화를 들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기자는 연료난으로 3000여 학생들이 2부제 수업을 하고 있는 남산국민학교를 직접 찾아가 김종현 교장선생을 인터뷰했다. 그러면서 “고생살이는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철모르는 어린이들의 고난에 찌들어가는 모습이 무엇보다 뼈가 저리다”고 안타까워한다.

1947년 당시 남조선 경제가 세계에서도 최악임을 알리는 경향신문 1947년 12월10일자. 그 기사 바로 밑에는 무역수지가 95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바로 석탄기근으로 공장가동이 어려워 탄식하고 있다는 내용도 보도되고 있다. 온통 암울한 소식들이다.

 ■외나무다리로 절벽을 건넌 것처럼…
 ‘노점상인편’에 나오는 이명숙씨(30)는 ‘초코렛 나부랭이 섞인 양담배 목판을 단하나의 밥줄로 알고 손님을 부르는’ 상인이다.
 그는 기자가 “어떻게 살아갈거냐”고 묻자 금방 되물었다.
 “글쎄요. 어떻게 살면 좋겠습니까.”
 그러면서 신세한탄을 한다.
 “일본땅에 살다가 독립된다는 꿈같은 소리에 고향땅을 밟은 것이 어제 일 같은데~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지요.~조선물건도 아닌 물건으로 밥을 먹자니 괴롭고 남부끄럽지만 어찌합니까.”
 거리에는 고학생들이 넘쳐났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배움을 향한 열망은 뜨거웠다.
 12월 3일의 ‘고학생(苦學生)’ 편은 38도선 때문에 고향(평북 정주)에 가지못하고 서울에서 신문팔이를 하는 여자 고학생 최원희양(18)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38도선이 생겨 고향에도 못가고 학교도 오지 않고…. 작년(1946년)까지는 인편으로 학비도 받고 소식도 전했는데, 이제는 단념했어요.”
 기자는 “38선의 원한과 독립이 못된 시름이 나이 어린 여학생 최양에게 더욱 뼈아프게 매질한다.”고 안타까워한다.
 ‘관리편’(12월4일)을 쓴 기자는 “해방 이후 조선 땅에는 기다리는 독립은 간데없이 뜨악한 새 술어가 날로 늘어가고 있다”고 전한다.
 그 중에도 ‘탐관오리’라는 말이 떠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자는 미관말직의 청념한 관리를 소개하면서 그의 항변을 전한다.
 “탐관오리, 모리배라고 비난하지만 한번 우리 집에 와서 자세히 보시요. 석구둘은 준비없이 겨울을 만나 맨주먹으로 오돌오돌 떨며 좁은 방구석에 모여 앉아~한달에 3000원 밖에 안되는 월급을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외나무 다리로 절벽을 건넌 것처럼 아슬아슬하오.”

헬믹 미군정청장 대리는 "절전으로 암흑을 방지하자"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한다. 당시 북조선이 남조선에 보내는 송전량이 갈수록 줄고 있을 뿐 아니라 남조선인들이 보낸 전기량의 5할 이상을 초과사용했다는 것이다. 헬믹은 "이렇게 제한량을 초과한다면 전기장차와 송전선이 손상되어 전기없은 세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주머니는 마르고 궁끼가 끼어’
 12월6일의 ‘예술가편’은 예술가의 냄새가 나는 내용이다.
 “숙명적으로 불운한 족속…. 그 누구보다 온갖 학대와 고난을 겪었던 예술가라는 것이 해방 직후 예술의 황금시대라도 찾어온 듯 기뻐 날뛰었으나…. 그 때의 기쁨이 도리어 화가 되어 이제는 가난과 번뇌로 이어져 더 할 수 없는 침체의 나락에 빠져있다.”
 기자는 “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 거리의 ‘사롱’인 다방밖에 없지만 차값이 보통 50원이니 친구라도 만나 떠들기라도 하면 400~500원은 앉은 자리에서 날라간다”고 전한다.
 ‘회사원편’(12월 7일)은 ‘일제가 분수도 없는 큰 욕심을 부려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이후 된서리를 맞은’ 회사원의 초라한 신세를 전한다.
 “예전에는 그래도 월부 세간에 월부 양복 월부 구두 등으로 제법 서방님 행세를 하던 것인데 이 때(태평양 전쟁)부터 차차 주머니는 마르고 궁끼가 끼기 시작하여 오늘에는 요모양 요꼬락서니로 여지없이 전락했다.”

 

 ■세계 최악의 남조선 경제 
 사실 경향신문이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시리즈를 진행할 무렵의 해방정국은 암울하고 끔찍했다.
 예컨대 12월10일자는 “남조선 경제가 세계에서 최악의 상황‘이라는 소식을 구체적인 수치로 전하고 있다.
 “세계주요 국가의 도매물가 지수로 보건대 1937년을 100으로 할 때 1946년의 지수는 미국은 171, 영국은 178, 일본은 141, 프랑스는 881, 이탈리아는 5310, 중국은 1,911,000이다. 남조선은 68,641이다. 세계 2위라는 반갑지 않은 지위를 점령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임금지수였다. 다음 기사내용을 보라.
 “임금지수는 미국이 210, 영국이 166, 프랑스가 490, 일본은 2600이고, 중국은 3,200,200이다. 적어도 물가지수와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조선의 임금지수는 16,730이다. 남조선의 경우 임금지수가 물가지수의 4분의1 밖에 안되는 기행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다.”
 신문은 “이로써 남조선의 경제상황은 최악이며 봉급생활자가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놓여있는 지를 볼 수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니 경향신문 시리즈 ‘회사원편’에서 왕년의 월급세간·월급양복·월급구두 등을 그리워하는 것 자체도 사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날짜(12월10일) 기사에는 그 해(1947년) 9월까지 무역적자(수입초과)가 9500만원에 이른다고 전했다. 신문은 그러면서 “주요수입품이 국내공업품을 진흥시킬 생산원료가 아니라 사치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개탄한다.
 “수출품은 해산물, 한천, 홍삼, 잠사 등 2억5000만원이고, 수입품은 생고무, 지류, 성냥, 설탕, 유리, 호초, 모직물, 세탁비누, 식염 등 3억5000만원이다.”

경향신문 '어떻게 살아갈까' 시리즈의 '예술가편'. 신문은 "예술가들은 어떻게 살아갈까는 문제보다 어떻게 사상(思想)하며, 어떻게 창조(創造)하느냐가 더 현실적인 문제"라면서 "예술인은 가난과 번뇌를 극복하고 조선문화계 전체를 뒤덮고 있는 타성을 과감히 깨뜨려야 한다"고 주문했다.

 ■서울시내는 암흑천지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전력난이었다.
 해방 이후 석탄과 전기 등 에너지원이 많았던 ‘북한’은 협의를 통해 ‘남한’에 일정량의 전기를 공급하고 있었다.(1948년 5월14일)
 하지만 갈수록 공급이 줄어들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남한은 전력부족 현상에 시달렸다.
 11월26일 민정정관 안재홍씨는 기자간담회에서 전력확보의 현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남조선의 전력사용량은 약 10만㎾가 필요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북조선으로부터 송전량이 줄고 또 석탄부족으로 화력전기도 여의치 못한 상황에서….”
 이튿날인 27일 미군청정 장관 대리인 찰스 헬믹 대장은 남조선의 절전을 요망하는 담화문까지 발표한다.
 11월 28일자 신문은 ‘절전으로 암흑방지-동포애를 살려 전기를 아껴쓰자’는 제목으로 헬믹의 담화문을 보도한다.
 “금년(1947년) 6월8일 체결된 협정을 보면 북조선이 남조선으로 보내는 전기량이 명기되어 있는데, 이 전기량의 5할 이상을 초과사용했다. 이렇게 제한량을 초과한다면 전기장차와 송전선이 손상해서 장차 전기없는 세계가 될 것이다.”
 헬믹의 담화는 “애국자인 조선인은 필요한 전기를 공급받지 못하게 되는 범죄를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강력히 촉구한다.
 예컨대 부산의 공장가는 정전과 연료부족 등으로 거의 휴면상태에 놓였다. 12월10일자 신문을 보면 ‘탄식하는 공장가의 연통’이라는 제목으로 전력난·연료난으로 공장이 멈추었음을 알리고 있다.
 “국가산업의 발전을 상징하고 무럭무럭 검은 연기를 내뿜는 입립(林立)한 연통도 수일 전부터 공연이 하늘로 높이 솟아 탄식을 하고 있는 듯하다. 부산의 영도 조선중공업을 비롯하여‘조선방직 등 크고작은 20여개 고무공장은 하루 조업능률이 70~90%나 저하되어 있고 문을 닫는 공장이 속출하고 있다.”
 12월4일자 신문을 보면 미군정청은 서울 시내의 암흑상태를 타개하고자 각 부대 사령관을 소집, 전력의 절약을 촉구하기도 했다.

 

 ■공창폐지령과 유흥업금지법 발효
 그런 가운데서도 해방이 되자 해외에서 무작정 귀국하는 이른바 전재민들이 마땅히 거처할 곳을 찾지못해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었다.
 12월10일 신문은 “춘천의 기온이 영하 10도를 밑돌았는데 춘천시내 부대에만 3만2000여 전재동포가 수용돼있다”고 전한다.
 눈에 띄는 소식은 공창폐지령과 함께 ‘통일정부가 설 때까지’ 요정 카페 등의 영업을 중지시키는 유흥업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는 것이다.(1947년 11월 27일자)
 이 법의 발효와 함께 가장 타격을 심하게 입은 곳은 부산지역이었다. 12월10일자를 보면 “대외무역 개시와 함께 모리배의 활동무대가 되던 항도 부산 유흥가에 큰 파문이 일었다”고 한다.
 “호화로운 몸치장과 황금을 꿈꾸는 업자와 기생, 여급, 작부 등 수많은 종사원들은 앞날이 캄캄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실업의 운명에 놓인 종업원수는 창기 63명, 기생 327명, 여급댄서 332명 등 총 1290명에 이른다.”

 

   ■그래도 희망의 끈 놓지않은 백성들

 이렇게 해방이후의 민생은 극단적인 상황에 빠졌지만, 백성들은 마지막 남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경향신문의 ‘어떻게 살아갈까’ 시리즈에 등장하는 시민들의 마지막 목소리는 한결 같았다.
 “나라가 서면 우리같은 놈도 좀 안심하고~ 살게 해주었으면 하는게 막연한 희망이라 할까요. 이것을 믿기 때문에 속상한 것도 눌러가며 지내고 있습니다.”(차부 길삼룡씨)
 “오직 바라는 것은 한시바삐 독립이 오기를~ 그 때를 기다리고 이를 깨물며 기다릴 뿐입니다.”(동소문 방공호 속의 어느 전재민)
 “이것이 우리 민족의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엄연한 현실일 진대 우리는 견디어 나아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학교편을 취재한 기자)
 “언제든지 이럴 법은 없겠지요. 우리도 버젓이 독립하면 이따위 장사를 하지 않더라도 설마 죽기야 하겠습니까.”(양담배 노점상인 이명숙씨)
 “나라에 질서가 설 때까지 끝까지 가난과 싸울 작정이오. 그런다고 설마 굶어죽는 일은 없을 터이니….”(어느 청빈한 말단관리)
 “예술가에겐 어떻게 살아갈까는 문제보다 어떻게 사상(思想)하며, 어떻게 창조(創造)하느냐가 더 현실적인 문제다. 예술인은 가난과 번뇌를 극복하고 조선문화계 전체를 뒤덮고 있는 타성을 과감히 깨뜨려야….”(예술가편을 쓴 기자)
 “어서 빨리 38선이 깨져야겠어요. 38선이 깨지는 날이면 독립도 되는 날이겠지요.”(고학생 최원희 양)
 물론 그 분들의 바람은 반만 이뤄진 셈이지만…. 그래도 그 분들이 절망하여 쓰러지지 않고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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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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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요임금은 천하를 다스릴 때 한 사람 죽이고 두 사람에게만 형벌을 내렸는 데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사기> ‘서(書)’)
 “순임금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삼가야한다. 삼가야한다. 형벌을 행할 때는 가엾게 여겨야 한다.(欽哉欽哉 惟刑之恤哉)’”(<사기> ‘오제본기’) 
 백성들이 고복격양가를 불렀다는 요순시대의 이야기다. 한마디로 형벌을 가볍게 해야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후대의 군주들도 요순을 따르려 무진 애를 썼다. 예컨대 한나라 효문제는 사람의 몸을 훼손하는 이른바 육형(肉刑)을 없애면서(기원전 168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윤보의 <형정도첩>에 묘사된 조선시대 참형 모습.참형은 사지를 찢어죽이는 능지처참에 이어 두번째로 혹독한 형벌이었다.

“육형이 있어도 간악함이 멈추지 않으니 그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교화를 베풀지 못하고 형벌부터 먼저 가하니…. 무릇 형벌이란 사지를 잘라버리고 피부와 근육을 도려내 죽을 때까지 고통이 그치지 않으니 얼마나 아프고 괴로우며 부덕한 것인가. 육형을 없애도록 하라.”(<사기> ‘효문제 본기’)
 효문제는 그러면서 “다정하고 자상한 군자여! 백성의 부모로다”라는 <시경>의 내용을 인용했다.
 <사기> ‘혹리열전’은 “백성을 법으로 다스리면 무슨 일을 저질러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면서 “도덕으로 다스릴 때 백성들은 부끄러움을 알고 바른 길로 간다”고 충고했다.
 어디 중국의 군주들 뿐인가. ‘해동의 요순’이라는 칭송을 받던 세종은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1432년(세종 14년) 지방관 부임인사차 찾아온 정사와 양서적에게 신신당부한다.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사랑하라. 형벌은 중대한 일이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부득이 형벌을 쓰더라도 구휼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억울하게 죽는 자는 없게 될 것이다.”

 

 ■‘공자님 말씀일뿐’
 그러나 이는 그야말로 요순시대에나 있을 ‘공자님 말씀’이다.
 예를 들면 공자도 “형벌 대신 도덕으로 다스리라”고 강조하긴 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공자님 말씀’이시다.
 그런 공자였지만 한비자가 “옛날 상나라의 법도엔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으면 손목을 잘랐다”고 하자 이렇게 말했단다.
 “그것이 곧 치국의 도리(此治道也)이니라.”
 공자 뿐인가. 주문공(주희)도 이런 말을 했단다.
 “때때로 형벌을 가벼이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형벌이 가벼울수록 패역(悖逆)하여 작난(作亂)할 마음만 자라게 된다.”
 대체 어쩌란 말인가. 요순을 닮으라면서 뒤에서는 ‘법대로 처단’을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도 극형 중의 극형이라는 능지처참형을 60번이나 집행했고, 190명에 달하는 사형수로 감옥이 넘쳐났다니….

 

 ■사람을 죽여 포를 뜨고 젓을 담가 조리돌렸다
 그랬다. 역사는 요순의 이상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돌이켜 인간의 역사를 곱씹어보면 그야말로 야만의 역사와 다를 바 없다는 자괴감이 든다. 법집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야만의 역사를 일별해보자.
 예컨대 상나라 마지막 군주인 주왕의 만행을 보라.
 “주왕은 충성스런 신하인 구후와 악후를 죽여 포를 뜨고 소금에 절여 젓을 담갔다. 그리곤 그것을 제후들에게 보내 맛보게 했다. 이를 ‘해형(해刑)’이라 한다. 또한 기름 바른 구리 기둥 밑에 불을 지핀 뒤 그 기둥 위에 죄인을 걷게 했다. 미끌어진 죄인들은 불에 떨어져 죽었다. 이를 ‘포락지형(포烙之刑)’이라 했다.”(<사기> ‘은본기’)
 그 뿐이 아니었다. 주왕은 숙부인 비간이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하자, “성인은 심장이 7개라 하는데, 한번 보고 싶다”며 비간의 심장을 꺼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 상나라를 멸한 주나라에 들면 형벌은 5가지로 요약된다. <상서(尙書)> ‘여형(呂刑)’을 보면 “주나라 시대에는 5가지 형벌, 즉 묵(墨)·의(의)·비(비)·궁(宮)·대(大)가 있었다”고 했다. ‘묵’은 이마에 먹물로 문신하는 형벌이다. ‘경(경)’이라고도 한다. 요즘 성범죄자에게 발찌를 채우는 형벌과 비견할 수 있겠다. ‘의’는 코를, ‘비’는 다리나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이다.
 ‘궁’은 성기를 자르거나(남성) 메우는(여성) 형벌이고, ‘대(大劈)’는 참수를 뜻한다. 그런데 이 5가지 형벌에 해당되는 죄는 무려 3000여 가지에 달했다.
 주나라 때 형법을 제정한 목왕(976~922)은 “경형(묵형)과 의형에 속하는 죄가 각각 1000가지, 비형에 속하는 죄가 500가지, 궁형에 속하는 죄가 300가지, 대벽에 속하는 죄가 200가지이다. 그러니 오형에 속하는 법조항은 모두 3000가지이다.”(<사기> ‘주본기’)

갑신정변 이후 망명한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살해당했지만, 그의 시신은 다시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고 목이 효수되었다.

■3600회의 칼질로 사형시키다
 이 가운데 짐승보다 더 극악한 극형은 능지처참(사)이 아닌가 싶다.
 ‘능지(凌遲)’란 무엇인가. 그대로 산이나 구릉의 완만한 경사이다. 그러니까 능지처사는 되도록이면 천천히 고통을 극대화하면서 사형에 처하는 극형인 것이다.
 능지처사의 역사는 깊다. 역시 3300~3000년 전 상나라 말기의 갑골문에 등장한다.
 “폭동을 일으킨 강족(羌族) 한 사람의 사지를 찢어죽였다.(책)” “강족 사람 15명을 찢어 죽일까요.(책)”  
 사지를 찢어죽이는 형벌, 즉 책형(책刑)은 능지처참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칼로 차례차례 베어 죽이는 능지처사는 10세기, 요나라 때부터 시작됐다. 이후 송·원·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됐다. 능지처사는 그야말로 소름끼치는 극형이었다. 죽을 때까지 칼로 살을 베는 형벌이었기 때문이다.
 1510년 명나라 환관 유근은 반역음모를 꾸민 죄로 무려 3357회의 절개형을 받았다. 1639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패륜을 저지른 정만이라는 자는 무려 3600회의 절개명령을 받았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물을 뿌려가며 죽을 먹여가며 칼질을 해댔다니 얼마나 끔찍한가. 칼질이 아니더라도 죄인의 팔과 다리를 먼저 자르고 목을 치는 형태로도 이어졌다.

 

 ■저잣거리의 칼춤
 중요한 착안점이 있다.   
 참형이나 능지처참 같은 잔인한 형벌이 사람들이 부적대는 저잣거리에서 만 백성이 보는 앞에서 행해졌다는 것이다. 일벌백계, 혹은 ‘시범케이스’라 할까. 
 예컨대 중국 한나라 때의 사형장은 수도 장안(長安·지금의 시안)의 남문 안에 있는 고가(藁街)였다. 그런데 이곳은 제후국(속국) 사절들이 머무는 만이저(蠻夷邸) 인근에 있었다.
 이런 곳에 사형장을 설치한 이유는 명백하다. 한나라의 위엄에 복종하지 않으면 저 사형수와 같은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실제로 한나라는 기원전 47년(한 원제 3년) 한나라를 괴롭혔던 흉노왕 질지 선우의 목을 잘라 만이저의 문에 그 머리를 내걸었다.(<한서> ‘원제기’)
 이후 각종 문헌에 등장하는 ‘고가’는 바로 사형장의 상징어가 됐다. 예를 들어 송나라 충신 호전은 1138년 “(금나라와 화친을 주장한) 왕륜·손근·진회 등 세사람의 목을 베어 고가에 달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황제에게 올린 적이 있다.
 또 <동문선>의 ‘조칙·인종사부식약합조(仁宗賜富軾藥合詔)’를 보면 “묘청의 난을 진압, 괴수의 머리를 베어와서 고가에 매달았다”는 표현이 보인다.
 수괴의 머리를 베어 만백성들에게 경계를 삼으려 보였다는 것이다. 

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동국여도>에 그려진 도성과 서대문 일대의 모습. 조선시대 사형장은 주로 도성에서 서쪽으로 10리 안팎 떨어진 당고개, 양화, 새남터와 서소문 밖 등에 자리잡고 있었다.|서소문순교성지 전시관 전시 사진

■“시신 몸뚱아리를 시장바닥에 전시하라”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1407년(태종 6년) 충청도 연산에서 내연남과 짜고 남편을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남녀가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당시 반역죄와 강상죄 등은 능지처참 가운데서도 거열, 즉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어 죄인을 찢어 죽이는 형벌을 받았던 것이다. 이 때의 <태종실록>을 읽어보라.
 “태종이 ‘법에 능지의 조항이 있느냐’고 묻자 황희는 ‘이전에 거열로 능지를 대신했다’고 답했다. 그러자 태종은 ‘시골에서 사형을 집행한들 누가 알겠는가. 본보기를 위해 서울의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거열하고 사지를 나누어 지방의 각 도에 보내라’고 지시했다.”(<태종실록)
 삼강오륜을 해치는 강상죄나 반역죄를 범한 자는 이렇게 공개처형의 방식으로 죽인 것이다.  
 본보기를 위해 목과 사지가 떨어진 시신을 시장 바닥에 3일 혹은 6일간 내버려두는 ‘기시(棄市)의 형’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예컨대 1728년(영조 4년) 전국적으로 20만 명이 가담한 이인좌의 난이 가까스로 진압됐다. 난을 일으킨 이인좌 등이 결국 붙잡혀 현장에서 참수된다. ‘나머지 무리’도 일망타진됐다. 
 영조는 숭례문에 올라 이인좌 등의 수급(머리)를 받는 의식을 ‘자랑스럽게’ 거행했다. 백성들이 앞다퉈 그 장면을 구경하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영조는 나머지 옥에 갇혀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죄수들의 목을 베 그 시신들을 저잣거리에 내다보이는 기시(棄市)의 법으로 처벌했다.(<영조실록>)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도 칼로 부모와 형, 그리고 고을 수령까지 상해를 입힌 자에게 ‘기시’의 형을 내렸다.(1438년)
 형조에서 ‘패륜죄지만 범인이 정신병을 앓고 있는 자이니 기시형은 과하다’는 의견을 올렸다. 하지만 세종은 강상죄를 범한 죄가 무겁다고 하여 기시형을 허락하고 말았다.(<세종실록>)
 
 ■죽음의 서쪽
 조선시대의 첫번째 공식 처형장은 서소문밖 10리였다.
 “1416년(태종 16년), 예조가 아룄다. ‘사형장을 서소문 밖 성밑 10리 양천 지방, 예전의 공암 북쪽으로 정하소서.’”(<태종실록>)
 아닌게 아니라 서쪽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죽음과 어둠을 의미했다.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서왕모는 죽음과 어둠을 관장하는 반인반수의 여신이었다.
 그녀는 서쪽 끝 신령스런 산인 곤륜산에 살면서 다양한 재앙을 내리고, 5가지 형벌을 집행했다.
 그러고보니 사형장으로 이용됐던 양화진(마포구 합정동), 당고개(당현·용산구 신계동·문배동), 와현(용산구 한강로), 새남터(노량사장·용산구 이촌동), 서소문밖(중구 의주로 2가) 등은 모두 서쪽에 있다. 그것도 대체로 서소문을 기준으로 10리 안팎에 있다. 잠깐 가만히 보니 일제시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곳이 서대문형무소가 아니던가.
 소년원과 화장터 역시 모두 서쪽에 있었고, 죽음을 상징하는 고태골(은평구 신사동) 역시 서쪽에 있었으니….

 

서소문 밖 형장을 표시해놓은 사진. 서소문밖 형장에서는 이승훈 정약종 황사영 등 천주교 신자들이 줄줄이 참형을 당했고, 홍경래, 김개남 등도 참수형을 당한 뒤 이곳에서 목이 효수되기도 했다. 영조 때 영조를 맹비난했다는 이유로 당고개에서 참형 당한 목호룡도 이곳에서 다시 효수된 뒤 긔의 목과 사지가 전국 8도에 조리돌려졌다.|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 전시사진

 ■당고개에선 참형
 각설하고 사형장에서 벌어진 갖가지 살풍경을 일별해보자.
 1613년(선조 33년) <선조실록>은 “평상시 능지처참은 저잣거리에서 시행했고 참형은 당고개에서 행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죄를 지은 왜인 2명을 참형에 처하면서 의금부가 임금에게 아뢰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사형장 가운데 당고개에서는 주로 참형이 집행됐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자면 1532년(중종 27년) 기묘사화를 전후로 자기 생각을 줄기차게 상소한 이종익이 무고 혐의로 당고개에서 참형을 당했다.(<중종실록>)
 1613년(광해군 5년) 궁중 나인과 간음한 임혁 역시 당고개에서 참수됐다. 간음한 궁중나인 영생은 역시 이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그나마 임금을 모신 나인이었다는 것 때문에 은전을 받은 것이다.(<광해군일기>) 1681년(숙종 7년) 기우제에서 “가뭄은 부덕한 한 사람(중종) 때문에 일어났으므로 기도해봐야 물리칠 수 없다”는 제문을 쓴 유생이 모역죄로 역시 이곳 당고개에서 참수됐다.(<숙종실록>)
 
 ■능지처참은 군기감 앞에서
 그러나 “능지처참은 저잣거리에서 집행한다”는 원칙대로 반역모반죄의 대역죄인은 주로 성문안 군기감(병기제조청·중구 태평로 1가) 앞길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1824년(영조 2년) “역적은 반드시 군기시 앞길에서 능지처참하고 수족을 따로 떼어낸 뒤 그 머리는 철물교(종로 2가 사거리에 있던 다리)에 내걸고, 수족은 전국 8도에 조리돌려야 한다”는 의금부의 상소를 보라. 문자 그대로 만백성의 본보기로 삼는다는 뜻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성삼문과 이개 등 사육신 등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된 인사들의 사형집행이다. 1456년(세조 2년)의 <세조실록>을 보라.
 “백관들을 군기감 앞 길에 모아서 빙 둘러서게 했다. 그런 다음 이개 등을 환열(환裂·수레로 찢어죽임)하고 3일 간 저잣거리에서 효수(梟首·목을 내걸었다는 뜻)했다.”
 성삼문 등은 죽음과 맞섰지만 세조를 ‘전하’라 부르지 않았단다. 그저 “‘나으리’라 하면서 “상왕(단종)이 계신데 어찌 나으리가 나를 신하라 하느냐”고 대들었다니….
 참으로 대단한 분들이다.

 

 ■형장으로 주목받은 서소문 밖
 반면 서소문 밖 형장은 같은 능치처참 중에서도 약간이라도 가벼운 죄목의 사형집행을 담당했다.
 예컨대 1844년(헌종 10년) 모반대역죄로 붙잡힌 권시응과 박순수의 형장이 달랐다.
 ‘대역죄를 저지른’ 권시응은 군기시 앞길에서 능지처참을 당한 반면, ‘대역부도죄를 알았지만 고하지 않은’ 박순수는 서소문밖에서 참형을 당한 것이다.
 또 1504년(연산군 10년) 영응대군(세종의 여덟번째 아들)의 종인 만수가 서소문밖에서 능지처참 당했다. 반역죄가 아닌만큼 서소문밖이 형장으로 선택된 것이다.
 “만수는 주인 댁(영응대군과 그 부인)의 세력을 믿고 살찐 말을 타고 호사스런 옷을 입고 많은 종을 거느리면서 도성을 달리고 대신들을 만나도 비키지 않았다. 또 교만을 품고 사람들을 위협해서 때리고….”
 만수가 받은 형은 끔찍했다. 사지가 찢긴 뒤 목이 효수되고, 뭇사람들을 모아 시신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연산군은 그것도 모자라 “만수의 목을 영응대군의 부인에게 보이라”는 명을 내렸다. 연산군은 희대의 폭군 답게 말년에 임금의 사냥구역을 만들어 출입금지 표지인 금표(禁標)를 만들었는데, 이 구역을 넘어온 두 사람을 서소문밖에서 참형에 처한 뒤 금표에 목을 효수했다. 백성을 개·돼지로 취급한 것이다.

상나라 시대 갑골문, 목을 자르는 벌형(伐刑)을 내려도 좋을 지를 묻고 있다. 잔인한 형벌의 역사는 이렇게 뿌리깊다.

 ■홍경래·김개남의 목이 효수되다
 서소문밖이 사형장으로 주목받은 이유가 있다.
 도성과 붙어있는 데다 인근에 칠패시장(중구 봉래동)이 있어서 본보기의 형장으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1613년(광해군 5년)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한 혐의를 뒤집어쓴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이 이곳에서 사사됐다.
 이때 승정원이 사사할 곳을 묻자 광해군은 “서소문밖”이라 지정해주었다.
 서소문밖은 이미 형집행을 당한 죄인들을 조리돌리는 장소로도 활용됐다. 이것을 추형이라 한다.
 홍경래의 난을 간신히 진압한 뒤인 1812년(순조 12년) 5월 7일의 <승정원일기>를 보자.
 “수괴인 홍경래와 그 무리의 수급을 서소문밖에 3일간 내걸어 뭇사람들에게 보인 뒤 전국 8도로 보내라.”
 사실 홍경래는 4월19일 관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뒤 그 자리에서 참형을 당한 바 있다. 그러나 비국(비변사)이 “흉적 홍경래의 무리가 이미 참형을 받았지만 제대로 격식을 갖추어 법을 집행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정식재판에 의한 형집행이 이뤄진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태인 접주)인 김개남은 1895년 1월 전주장대에서 참수 당했다.  그러나 그의 목 역시 서소문밖 사거리에 3일간 현수됐다가 농민운동이 일어난 지방에 본보기로 조리 돌렸다.

 

 ■시체의 수족을 다시 자르다
 1724년(영조 즉위년) 능지처참의 극형을 받은 목호룡은 또 어떤 사람인가. 
 목호룡은 “영조가 세자시절에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하려 했다”고 폭로한 인물이다. 그는 이 고변으로 경종 임금으로부터 공신에 올랐다.
 그러나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죽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국문장에 끌려오는 신세가 됐다. 그는 뼈와 살이 떨어져나가는 국문장에서 “나의 고변은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므로 한 점 부끄럼 없다”고 고개를 빳빳히 세웠다. 영조는 목호룡을 당고개에서 참형에 처하고 그의 목을 내버려 두었다. 의금부는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다.
 “역적은 반드시 군기시 앞길에서 능지처참해야 합니다. 그런데 목호룡의 경우 이미 당고개에서 처참하여 몸뚱이가 교외에 있습니다. 지금 그 냄새나고 더러운 물건을 성(城) 안으로 끌고 들어와 길거리에 내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참(斬)한 시체의 수족을 다시 참하는 것은 아마도 법의(法意)가 아닐 듯합니다. 어떻게 하오리까.”
 그러나 영조의 분이 풀리지 않았다.
 “목호룡의 죄는 팔방에 널리 알려야 한다. 비록 성 안으로는 끌고 들어올 수 없지만 전국 8도에 조리 돌리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 그의 수급은 사흘간 성문 밖에 내걸어 백성들이 다 볼 수 있도록 하라.”
 임금의 명에 따라 목호룡의 목은 3일간 서소문 밖에 내걸렸으며, 효수 기간이 끝나자 머리와 수족을 전국 8도로 조리돌렸다.
 ‘조리돌린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죄지은 자를 망신시키려고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는 뜻이다. 그런데 산 사람도 아닌 시신의 일부를 전국에 돌려보이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 대목에서 폭군의 상징인 상나라 마지막 군주 주왕이 떠오른다. 신하들을 죽여 포를 뜨고 소금에 절여 젓을 담가 제후들에게 맛보게 한 상나라 주왕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목을 나무토막에 걸어놓고’
 중흥군주라는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등극하자 서소문밖 형장에는 미증유의 피바람이 분다.
 1801년(순조 1년) 순조 즉위 후 수렴청정에 나선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소름끼치는 하교를 내린다.(<순조실록>)
 “사학(邪學·천주교)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금수(禽獸)처럼 돼가고 있다.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다. 마땅히 처벌하여 진멸시키라.”
 이 하교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간다. 이승훈·정약종·황사영 등 천주교인 40명(혹은 31명)이 줄줄이 잡혀 참수형을 당한다. 이 해의 탄압을 신유박해라 한다.
 이후 기해박해(1838년·41명)와 병인박해(1866~1874년·13명) 등까지 모두 94명(혹은 85명)이 서소문밖 형장에서 능지처참 혹은 참형을 당했다.
 프랑스 선교사 클로드 샤를르 달레(1829~1878)가 전하는 형장의 살풍경을 보라.
 “처형이 결정된 신자들이 수레 한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렸다. 수레가 서소문에 이르면 그 다음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수레는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렸다. 신자의 몸은 머리칼과 팔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을 받았다. 형장에 이르면 옷을 벗기고 꿇어 앉힌 뒤 턱 밑에 나무토막을 받쳐 놓고 목을 잘랐다.”(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서설’)
 19세기말 조선을 방문한 이사벨라 비숍(1832~1904)도 비극적인 필치로 서소문밖 사형장을 묘사했다.
 “범죄인들이 목이 잘리기 위해 통과하는 문이 있다. 이들의 목은 처형된 뒤 야전 냄비걸이처럼 생긴 꼬챙이에 걸려 며칠동안 전시된다.”(비숍의 <한국과 이웃나라>)
 그러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처참하게 죽은 천주교인의 수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800년대 100년간의 천주교 박해 기간 중 전국적으로 1만여명이 희생됐다니까….
 그 중 상당수가 좌·우포도청에서 순교했고, 충청도의 공주와 홍성·해미 등에서 희생됐다.      
 그 가운데 청나라 신부 주문모는 새남터(노량사장)로 압송돼 군문효수됐다. 새남터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훈련장인 연무장이었다.
 군문효수란 국사범을 군법에 따라 처단하고 그 목을 군문(軍門)에 걸어 본보기를 보이는 극형이다.
 주문모 신부 뿐 아니라 로랭 엥베르, 피에르 모방·자크 샤스탕 신부와 김대건 신부 등이 줄줄이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됐다.

 

  ■‘제발 단칼에 쳐주세요.’
 조선시대 공식 참형장으로 이용된 당고개에서는 한 천주교인의 비극적인 순교가 눈물을 자아낸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참형당한 부인 이성례의 이야기다. 천주교인 최경환의 부인이며 두번째 사제였던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다.
 그녀는 마카오 유학 중인 맏아들 최양업 신부를 제외하고 5명의 자식과 함께 옥에 갇혔다. 그런데 옥중에서 3살짜리 막내가 빈 젖을 빨다가 굶어죽는다.
 이성례는 남은 자식 4명을 살리려고 일시적으로 배교하고 출옥한다. 그러나 6~15살짜리 자식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 스스로 옥으로 돌아와 갇힌다.
 동냥 나간 자식들은 어머니가 참형을 당하지 전날 동냥한 쌀과 돈 몇 푼을 가지고 사형 집행인을 찾아 신신당부한다. “어머니가 고통 당하지 않도록 단칼에 베어달라”고….
 자식들의 부탁에 감동 받은 사형집행인은 밤새도록 칼을 갈아 그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 
 양화진(마포구 합정동 절두산)에서도 법을 빙자한 대량살륙이 벌어졌다. 
 즉 병인박해 때 순교한 천주교 신자가 공식적으로 29명에 이르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까지 합치면 177명에 달할 것이라는 추정치가 있다.
 이곳 또한 한양~강화가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고 한강의 조운을 통해 삼남지방에서 올라온 세곡을 저장했다가 재분배하던 곳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의 통행이 많아 본보기로서는 적격인 장소였다. 갑신정변 실패(1884년)로 상하이 망명 중 암살당한 김옥균의 시체가 다시 능지처참된 뒤 효수된 곳이 바로 양화진이었다.(1894년 4월) 그의 사지 역시 전국 팔도로 조리돌렸다.

 

 ■인간백정의 역사
 이런 야만의 역사가 동양에서만 자행된 만행은 아니었다.
 로마시대 때도 사형·투옥·태형 등은 사제의 손에 의해 자행됐고, 중세 유럽에서는 사형판결을 공동체가 내리므로 집행 또한 공동체 스스로 해야 했단다.
 도시의 중심부에 있는 광장이 처형장이 되었고 시체는 매단채 방치됐다니….
 예를들어 루이 15세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앵(1715~1757)은 대역죄로 기소돼 파리 그레브 광장에서 처형당했다. 그런데 처형 당하기 전 가슴과 팔, 넓적다리, 종아리 등이 불에 달궈진 집게로 지져지고, 왕을 찌를 때 사용한 오른손은 유황불에 태워지는 등 처참한 고문을 당하였다. 처형은 4마리 말에 사지가 각각 묶인 채 갈가리 찢겨졌다. 한마디로 능지처참을 당한 것이다. 역사를 읽으니 문득 자괴감이 든다. 무슨 이런 야만의 역사를 살아왔을까. 사람의 몸 안에 잠재된 짐승보다 못한 인간백정의 역사가 아닌가.
 그렇게 능지처참으로 만천하에 본보기를 보였다고 범죄가 줄어 들었을까. 그 역시 누명을 쓰고 굴욕적인 궁형을 당한 사마천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법령이란 다스림의 도구일 뿐이다. 진(秦)나라 때 법망은 치밀했지만 간사함과 거짓은 싹이 움트듯 일어났다. 관리들이 불은 그대로 둔채 끓는 물만 식히려 했기 때문이다. 법망은 배를 집어삼킬만한 큰 고기도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너그러워야 한다.”(<사기> ‘혹리열전’)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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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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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주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를 소개합니다.

 ‘조선시대라면 얼마나 좋을까. 처첩을 마음대로 들이고 내칠 수 있는 시대였으니….’
 그럴 리 없겠지만 혹 이렇게 상상하는 남자들이 있다면 한마디 하겠습니다. “꿈깨세요. 잘못하면 패가망신할 터이니…”
 조강지처를 버릴 수 있는 7가지 죄악, 즉 칠거지악으로 걸어 쫓아냈다는데 무슨 걸림돌이 있었겠느냐고 항변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칠거지악을 무색케 만드는 삼불거(三不去), 즉 아내를 쫓아낼 수 없는 3가지 조건이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물지요. ‘삼불거’란 ‘돌아갈 곳이 없는 아내는 쫓아내지 못하고,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지냈다면 역시 쫓아내지 못하며, 처음에 가난하게 지냈다가 후에 부자가 됐을 경우에도 쫓아내지 못한다’는 조항입니다. 한마디로 어려움을 함께 한 조강지처는 버릴 수 없다고 못박은 것입니다.

 게다가 조선의 법률에는 제대로된 이혼법이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멋대로 이혼하고 재혼하는 법을 만들어 놓으면 조선 사회의 근간이 되는 신분질서가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으니 양반가에서 이혼소송이 일어나면 조정의 공론까지 일고, 임금이 나서 최종판결까지 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가끔씩 명나라 법전인 <대명률>에 있는 ‘지아비가 이혼을 원하면 들어준다’는 조항을 들고나와 이혼을 원하는 사대부가 있었는데요. 그러나 <대명률>의 해당 조항은 ‘아내가 남편을 구타했을 때’라는 조건이 달려있었습니다. 그러니 이혼소송은 번번이 남편 측의 패소로 끝나고 맙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현장의 증거가 없으면 간통죄가 성립될 수 없다’는 판결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겁니다. ‘간통하는 현장을 잡지 못하면 죄를 묻지 않는다(非奸所捕獲 勿論)’는 실록의 언급이 있을 정도이니까요.
 정처가 있는데 또 처첩을 얻거나, 혹은 ‘혼테크’로 재산을 축재하는 경우 패가망신하기 일쑤였습니다. 폭력남편의 말로는 더욱 비참했구요.
 남의 집 이혼소송에 신료들은 물론 국왕까지 나서 ‘감놔라배놔라’ 하고, 심지어는 ‘강제이혼명령’을 내리기도, 거꾸로 ‘이혼불가판결’도 내리기도 하고…. 알고보니 혼인도, 이혼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사회가 바로 조선사회였던 겁니다. 

 <관련기사>

조선시대 성범죄, 어떤 처벌 받았나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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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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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되겠소. 좀 계셔야겠습니다.”
 조국이 해방된 1945년 9월, 초대 국립박물관장으로 부임한 김재원에게 소망 하나가 있었다.
 ‘우리 손으로 제대로 된 발굴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이제 박물관이 조선인의 수중에 들어왔으니 우리 손을 거친 발굴유물의 수집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자연스레 터져나왔다.
 경주시내에 있는 가장 큰 신라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 봉황대를 발굴하자는 얘기도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만한 이유도 있었다. 일제시대에 벌써 경주의 신라무덤에서 순금제의 신라금관이 3개나 출토된 예가 있었다. 그런 만큼 우리도 훌륭한 신라유물을 발굴해 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열악했다. 우리에게 고고학적인 발굴경험이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에 실시된 일본인들의 발굴조사에 조선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잡일이나 날품팔이로 동원됐을 뿐이었다. 여기에 해방(일본인 입장에서는 패망)이 되었으니 국내의 일본인들도 모두 철수해야 했다.

호우총에서 확인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흔적. 서체가 광개토대왕비문의 글씨와 매우 흡사하다. 호우총은 해방 이후 우리 손으로 조사된 첫번째 발굴이었다.

 ■김재원과 아리미쓰
 이 때 김재원 관장의 눈에 띈 이가 바로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라는 일본인이었다.
 아리미쓰는 일본이 패망했으나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우리나라 사람에게 인계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박물관 책임자였다.
 이제 박물관이 우리 손으로 개관되었으므로 아리미쓰 역시 귀국선을 타야했다.
 김재원은 아리미쓰의 경험을 통해 경주의 무덤을 하나 발굴 조사하기로 마음먹고 그의 귀국을 막았다.
 일단 아리미쓰를 귀국하지 못하도록 미 군정청의 양해를 얻었고, 박물관에서 함께 근무하면서 발굴조사 계획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적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는 그 대상이 정해지면 첫째, 조사를 맡아 할 능력이 있는 고고학자가 있어야 하고 둘째, 발굴비용이 마련되어야 하며 셋째, 당국의 허가가 필요하다.
 이 가운데 한 가지라도 해결되지 않으면 발굴조사는 불가능하다.
 김재원은 독일 뮌헨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와 경성대학(현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고 있었다. 광복이 되자 그는 바로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했고, 박물관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시급히 고고학적인 발굴조사가 활성화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유적의 발굴조사를 서둘렀던 것이다.
 그런데 아리미쓰라는 발굴전문가는 확보했지만 발굴허가가 문제였다. 당시 발굴은 미 군정청의 본부가 있는 동경 맥아더 사령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 모든 난관을 김재원이 해결하고 이듬해인 1946년 5월 드디어 경주의 신라무덤 1기를 발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광복 후 우리 손으로 최초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대상이 바로 이 호우총(壺우塚)이었던 것이다. 왜 하필 호우총이었을까.

 

 ■최초의 발굴보고서
 호우총은 해방 2년 전인 1943년 4월3일, 노출된 유적이었다. 당시 경주 노서리에 살던 주민이 호박을 심다가 우연히 장신구 10여 점을 발견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 때 총독부 박물관은 발굴전문가로 아리미쓰를 급파했다. 아리미쓰의 조사결과 순금제 목걸이 33개와 곡옥·관옥·환옥 달린 목걸이, 순금제 귀고리 등 수십 여 개의 유물을 수습했다.
 그 인연 덕분에 이 고분이 해방 조선의 첫 번째 발굴조사 후보로 꼽힌 것이다.
 그런데 발굴 12일이 지난 1946년 5월 14일. 엄청난 유물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호우총과 은령총 발굴조사보고서>가 전하는 그 날짜 발굴 일지를 보라.
 “(1946년) 5월14일 날씨 청명. 인부 주간 12인, 야간 3인. 곽내의 토기와는 완전히 위치를 달리하는 청동제 용기를 채취(採取)하였다. 이 용기는 최초부터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었던 것이다. 기저에 명문이 나타나 큰 ‘쎈세이순’을 일으키게 하였다. 명(銘)은 양각으로 4행 합(合) 16자로서 16자 외에도 무슨 기호 같은 것이 있다.”
 이 보고서는 조선인의 손으로 작성한 최초의 발굴보고서로도 유명하다. 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서 제1책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보고서는 1948년 4월 10일 을유문화사 간으로 나왔으며, 가격 1,200원(圓)에 500부 한정판이고 저자는 김재원이라고 돼있다.
 “김재원이가 경주에 체류하면서 최순봉이의 안내로…” 하듯 존칭 없이 ‘OOO 이가’하는 표현이 흥미롭다.

동아일보 1946년 5월25일 기사. 호우총 발굴소식을 전하고 있다.

 ■신라 무덤에서 확인된 광개토대왕의 자취
 그런데 그 명문내용은 더욱 엄청났다.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
 이 무슨 조화인가. 경주의 신라무덤인 호우총에서 고구려 유물, 그것도 고구려 정복왕이었던 광개토대왕의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신라 수도 경주에 고구려 무덤이 존재했단 말이 아닌가. 사실 명문유물 발굴은 발굴자에게는 더할 수 없는 행운이다. 새겨진 문자를 통해 엄청난 역사·고고학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복 후 국립박물관 주관의 최초 유적발굴조사에서 그런 행운을 잡게 될 줄이야.
 당시의 발굴보고서도 “이 청동기는 이번 경주발굴에서 가장 중대한 발견품이며 고적발굴사상 특필(特筆)할 만하다”고 흥분했을 정도였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청동항아리 명문의 글씨체는 1883년 중국의 지안(集安)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의 비문과 너무도 흡사했다는 것이다. 마치 동일인의 필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발굴보고서는 이로 보아 그 청동기가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신라에 운반된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궁금증이 양산됐다. 명문 가운데 제일 먼저 쓰여져 있는 을묘년(乙卯年)이 어느 해에 해당되는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에 쓰여진 호우십(壺우十)의 ‘十’자는 무엇을 뜻하는가. 
 더구나 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관련 유물이 신라무덤에 함께 묻혀있는가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재위 391~412년)이 서기 412년에 죽고 난 지 3년 후가 되는 해이다. 서기 415년에 해당되고 그래서 이 청동항아리가 415년에 만들어 진 것은 분명했다.
 문제는 누가 신라에 가져와 묻히게 되었는지는 수수께끼였다.

호우총 발굴모습.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지칭하는 명문이 나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복호’가 유력한 용의자?
 우선 <삼국사기> 기록을 보라. ‘복호’라는 인물이 ‘유력한 용의자’로 거론될 수 있겠다.
 “2년(418년) 왕의 동생 복호가 고구려에서 제상 나마와 함께 돌아왔다.(王弟卜好 自高句麗 與堤上奈麻還來)”(<삼국사기> ‘신라본기·눌지왕조’)
 신라 제 17대 내물왕의 왕자였던 복호(卜好)가 412년 인질의 신분으로 고구려에 가 있다가 7년 만인 418년에 신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복호와 이 호우총 유물이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일까.
 고구려의 장례풍속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3년째 되는 해에 상복을 벗는다고 되어있다. 이 청동항아리 역시 광개토대왕이 죽은 후 3년이 된 415년, 즉 탈상하는 해에 광개토대왕을 기리는 제사용 술을 담는 용기로 제작된 게 아닐까. 그래서 마침 인질로 와 있는 복호에게 기념으로 주었던 것으로 보면 어떨까.
 그 항아리를 복호가 신라로 돌아올 때 가져왔으며, 훗날 그가 죽자 함께 묻어 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 무덤은 복호의 무덤이 되는 것이다.
 호우총이 발굴되고 난 후 무덤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을 통해 연구된 결과는 무덤이 마련된 시기를 6세기 전반 경으로 보고 있다.
 이 청동 항아리가 만들어진 시기와는 1세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렇게 되면 복호가 100살이 넘도록 살다 죽었다고 봐야 하는데 이 또한 믿기 어렵다. 
 문제는 복호가 죽은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 현재로서는 사망 날짜를 알 길이 없다.
 다만 복호의 형인 눌지왕이 서기 458년에 죽었기 때문에 동생인 복호 역시 이를 전후한 시기에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보는 게 타당성이 있다.
 만약 이 호우총을 신라왕자 복호의 무덤으로 본다면, 여기에 함께 묻힌 신라유물의 연대 또한 6세기 전반이 아니라 5세기 후반으로 시기를 앞당겨야 할 것이다. 그래야 1세기의 격차를 줄일 수 있는 해석이 될 것이다.

 

 ■암호인가 부호인가
 또 한 가지 궁금증이 있다. ‘호우십(壺우十)’의 의미가 무엇인가. 호우란 술을 담는 용기로 보면 되겠지만 ‘十’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발굴보고서는 “해석이 곤란한 자인데 이 경우 우리는 이 十자를 다만 여백을 채우는 十자형으로 보아야 할 줄 안다”고 얼버무려 놓았다.
 그러나 이 十자가 수량의 표시인지 어떤 부호를 의미하는 것인지 의문이지만 숫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해 기념으로 10개를 만들었던 것일까. 그 중 하나가 신라에 들어왔다는 얘기인가.
 ‘우물 井’자 혹은 ‘#문양’ 또한 지금껏 숱한 논란을 일으킨 부호이다.
 당시의 발굴보고서는 “井(#)자형은 이 보이는데 이 역시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고 여백을 메우는 한 장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이 수수께끼를 제대로 풀어낸 연구는 거의 없다.
 다만 소설가 최인호는 <왕도의 비밀>에서 이 ‘#’자는 고구려의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을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학자들의 반응은 “제대로 된 논문조차 거의 없다”면서 섣부른 추정을 삼가고 있다. 문제는 ‘#’가 새겨진 유물은이 1997년 풍납토성에서도 발굴됐고, 구의동 아차산 4보루에서도 발견되는 등 끊이지 않고 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욱 답답할 노릇이다. 일각에서는 고구려 토기에서는 井, 小, X, 工, 大, 卍자 모양이 새겨진 경우가 많은데, 제작지와 제작자, 혹은 주문처를 표시한 것이거나 벽사(피邪·귀신을 쫓는 것)의 의미일 수 있다는 해석도 한다. 특히 ‘井(#)’자 문양토기는 일본에서도 묵서(墨書)로 쓴 예도 있는데 이 역시 벽사의 의미라는 것이다(平川南·1996년·古代人の死と墨書土器·국립역사민속박물관 연구보고 제68집)
 더욱 심오한 해석도 있다. <주역>을 보면 “井의 중심은 공(空), 즉 무극이태극(无極而太極)이요, 十은 음양이며 口자에 十을 넣어 田이 되니 이것이 사상이 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는 것. 결국 주역풀이에 따르면 井은 하늘이고 十은 땅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우물은 아무리 길어 마셔도 없어지지 않고, 놔둔다고 해서 철철 넘치지도 않는데(无喪无得), 물이 나오는 원천을 못 고치는 것과 같이 모든 제도나 법령 등도 백성의 민생안정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不改井)는 것이다.(김석진의 <대산 주역강의>에서)
 한국 주역학의 대가로 꼽히는 야산 이달(1889~1958년)은 학역자(學易者) 대부분이 간과한 井괘를 연구했는데, 공자(孔子)도 ‘井은 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우총 항아리 명문에 나오는 ‘井’과 ‘十’은 혹 주역의 내용을 표현하는 것일까.   

호우총에서 확인된 청동용기들.

 ■광개토대왕 비문과 똑같은 서체
 놀라운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호우총 발굴 용기의 명문은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
 그런데 지안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 비문은 ‘지(地)’ 대신 ‘경(境)’을 써서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로 돼있다.
 참고로 중국 지안 모두루 무덤의 묘지(墓誌)에 새겨진 관련 명문은 ‘國岡上廣(혹은 大)開土地好太聖王’이다.
 따라서 당시 발굴보고서는 시호(諡號)가 적힌 ‘광개토대왕 비문’의 글자가 가장 정당하지만 때에 따라 다소 다르게 부를 수도 있었던 것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호우총 명문 16자의 서체가 희한하게도 지안의 광개토대왕 비문 서체와 똑같다는 점도 주목거리이다. 가히 같은 사람의 서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니 신비롭기만 하다.
 또 하나. 발굴자들을 평생 가위 눌리게 한 유물이 출토됐다.
 나무로 만든 위에 옻칠을 했는데 눈알은 유리이고 그 홍채에 해당하는 부분은 푸른빛이었으니 발굴자들이 소름끼칠 만 했다.
 김재원은 “방상씨면은 태피(態皮)를 쓰고, 황금 눈 넷을 단 면을 쓰며 무기를 들고 역귀를 몰아내는 존재”라는 <주례(周禮)>를 인용, 이 유물을 방상씨면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런 유물이 훗날 백제·가야지역에서 종종 발견되는 화살통이라는 사실을 당시 발굴자들이 알 턱이 없었다.
 발굴단은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없었으므로 새겨져 있는 글자 가운데 ‘호우’라는 글자를 기념해서 호우총으로 이름 붙였다.
 이 호우총의 발굴은 광복 후 최초의 고고학적인 학술발굴이란 점 외에도, 발굴주관은 우리나라, 발굴지도는 일본인, 발굴 장비와 발굴비용은 미국이 각각 담당한 최초의 국제발굴이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발굴이 끝난 뒤 김재원은 일본인 학자 아리미쓰를 지프에 태워 부산 부두까지 태워주었다.
 아리미쓰는 그 이후에도 교토대 고고학과 주임교수 등을 역임하는 등 요직을 거쳤다. 특히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의 환대를 받는 몇 안되는 일본인이었는데, 1967년 방한 때에는 때마침 회갑(11월10일)을 맞아 우리 측이 회갑연을 베풀어 주었다. 이때 참석한 이가 이병도, 이희승 등 20여 명이었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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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요즘 성(性) 관련 추문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필자와 같은 장삼이사는 물론이고, 사회지도층까지 줄줄이 성 추문에 연루되고 있습니다. 그래놓고는 ‘딸 같아서 그랬다’는 둥, ‘귀여워서 그랬다’는 둥 흰소리를 남발했답니다. 

며칠전에는 15살짜리 알바생을 껴안고 입을 맞춘 음식점 주인이 항소심에서 실형에서 집행유예로 감형됐다고 합니다. ‘(음식점 주인에게) 부양해야 할 두 자녀가 있다’는 점이 감안됐답니다. 이 대목에서 한숨이 나옵니다. 두 자녀가 있다는 사람이 딸 같은 아이에게 그럴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봤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성범죄에 어떤 처벌을 내렸을까.
 놀라웠습니다. 상습범들은 요즘처럼 전자발찌를 차는 정도로 처벌이 끝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겁니다. 조선시대 성폭행범은 교수형은 물론 심지어는 능지처참형까지 당했으니까.
 강간미수범에게도 곤장 100대에, 유형 3000리의 중형을 내렸답니다. 조선시대 때는 성폭행범을 모반대역죄와 한묶음으로 봤다고 합니다.
 잘못 놀렸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했다는 얘기죠. 물론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억울한 사연을 품고 죽었던 여인들도 있었지만….
 자 이번에는 조선시대 성범죄를 둘러싼 갖가지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못말리는 남자들과, 그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아픈 삶을 살아야 했던 여인들의 이야기입니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관련포스팅>

 조선시대 성범죄, 어떤 처벌 받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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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조선인들은 큰소리만 치고 있다. 반드시 그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1621년, 광해군이 장탄식한다. 국제정세는 급박했다. 명나라는 요동 전투에서 신흥강국 후금에 의해 줄줄이 패해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공론은 후금을 오랑캐 나라로 폄훼하면서 다쓰러져 가는 명나라 편이었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절묘한 등거리 외교로 균형을 잡아온 광해군으로서는 이같은 공론이 한심했다.
 “명나라 장수들이 줄줄이 적(후금)에게 항복하고 있다. 심지어 요동사람들이 명나라 장수를 포박해서 후금군에 넘겼다고 한다. 중국의 형세가 이처럼 급급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인심은 큰소리만 치고….” 

화가 김윤겸이 그린 청나라 병사 그림인 '호병도'. 광해군은 다 쓰러져가던 명나라를 맹목적으로 섬기던 조정의 의론을 안타까워 했다.|국립중앙박물관  

그러면서 광해군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제발 고려(의 외교)를 배우라”고….
 “이럴 때(명청교체기), 고려처럼 안으로 스스로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쓴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한심하다. 무장들 모두 겉으로는 결전을 벌이자고 하면서 막상 서쪽 변경에 가라면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 두려워 한다. 이 또한 고려와 견주면 너무도 미치지 못한다.”(<광해군일기>)
 광해군은 ‘고려처럼’만 하면 강대국끼리 충돌하는 격동기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광해군은 ‘고려의 외교’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랬다. 세치 혀로 강동 6주를 획득한 서희의 후예들이 고려 아니던가. 잠깐 광해군이 ‘제발 좀 닮으라’고 한 고려외교의 요체는 무엇인가.

 

 ■서희가 샇은 고려의 외교
 993년(고려 성종 12년)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의 대군이 고려를 침공하자 조정은 멘붕에 빠진다.
 “항복하는 수밖에는 없다”는 무조건 ‘항복파’와, “서경 이북(평양)을 거란에 떼주자”는 ‘할지파(割地派)’로 나뉘었다. 하지만 서희는 “고구려 옛 땅을 내줘서는 절대 안된다”고 나섰다.
 섣부른 항복이나 할지(割地) 대신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면서 협상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란의 소손녕과 협상에 나선 서희는 ‘당근과 채찍 전략’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했다. “너희가 대국의 사신에게 먼저 인사해야 한다”는 소손녕의 도발에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두 나라 사신은 대등한 자리에서 회담에 임했다.
 소손녕이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지금 고구려 땅은 거란이 소유하고 있다”면서 “빨리 땅을 떼어주고 조공을 바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희는 “고려는 옛 고구려를 계승했기에 나라 이름도 고려라 했다”고 버텼다. 그러면서 “우리가 거란에 조공하고 싶어도 중간에 여진족이 있기 때문에 조공할 수 없는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서희는 “우리가 거란에 조공을 바치려면 여진을 쫓아내고 그 땅을 고려에 돌려주면 된다”면서 “그 땅에 성을 쌓고 도로를 내어 거란과 직접 통하게 되면 자연스레 조공을 바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한다. 한마디로 궤변이었다. 하지만 거란의 소손녕은 서희의 외교술에 말려 거짓말처럼 강동 6주를 꼼짝없이 돌려주었다.   

 

 ■거란·몽골을 주무른 고려의 외교
 이렇듯 서희가 반석 위에 올려놓은 고려의 외교전략은 더욱 빛났다.
 거란의 대군을 물리치고 강동 6주라는 망외의 소득을 올린 고려가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 있었다, 바로 송나라였다.
 고려는 994년 사신을 송나라에 보내 “송나라와 합동으로 거란을 정벌하자”고 제안한다. 물론 고도의 전략이었다. 고려는 쇠퇴한 송나라가 대국으로 성장한 거란을 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연 송나라는 고려와의 합동작전을 거절했고, 고려는 이것을 핑계로 삼아 송나라와 국교를 단절했다. 과연 치밀한 외교가 아닌가. 고려는 송나라와의 외교관계 단절이라는 명분과 격식을 갖추면서 거란 사대에 따른 외교절차를 마무리한 것이다. 밀사를 파견해서 송나라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한 제안을 함으로써 국교단절의 책임을 송나라에 돌리는 외교술을 펼친 것이다. 고려의 외교는 훗날 세계최강 몽골제국의 애간장을 녹였다.
 1231~1259년까지 고려는 막강한 몽골군의 침입에 시달렸지만. 항쟁과 교섭이라는 앙면의 칼로 몽골을 능수능란하게 다뤘다.
 예컨대 몽골이 고려의 강화도 천도를 질책하자(1231년) 고려 고종은 이렇게 몽골군을 다독거렸다.
 “전쟁으로 국고가 텅텅 비었습니다. 남은 백성들이라도 강화도에 들어가 변변치 않은 토산물이나마 상국(몽골)에 바쳐야 하지 않겠습까.”
 항쟁 때문이 아니라 상국(몽골)을 더 잘 모시려고 강화도로 천도한 것이라 하는데 어쩌겠는가.
 그로부터 22년 뒤(1253년) “빨리 육지로 나오라”는 몽골군의 독촉에는 “동북방면에 있는 포달인(수달 사냥꾼)들이 많은데, 그들이 두렵다”고 변명한다. 아니 수달사냥꾼이 무서워 육지천도를 하지 못하겠다니…. 1256년(고종 43년) 9월, 고려 사신 김수강이 몽골 황제(헌종)에게 몽골군의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는 “개경에 환도해야 철수하겠다”고 거절했다. 그 때 김수강의 화술이 백미다.
 “짐승이 사냥꾼을 피해 굴 속으로 숨었는데, 그 구멍 앞에 활과 화살을 가지고 기다린다면 피곤한 짐승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몽골황제는 김수강의 세치 혀에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군사를 철수시켰다.  

원 세조 쿠빌라이를 그린 삽화. 원 세조는 골치아프게 굴던 고려가 화의를 청하자 기쁜 나머지 "고려만큼은 그들의 풍속을 유지하게 한다'는 칙서를 발표했다. 고려는 원나라가 고려의 흡수통합을 꾀할 때 '세조의 유훈'을 들춰내어 좌절시켰다.    

 ■‘세조의 유훈을 따르세요’
 결국 고려는 3년 뒤인 1259년 화의를 결정한다.
 그러자 몽골의 세조(쿠빌라이)는 기쁜 나머지 “고려 만큼은 의관을 본국(고려)의 풍속을 좇아 상하 모두 고치지 마라”는 등의 조서를 발표한다.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 존중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한마디로 ‘세조(쿠발리아)의 유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는 원나라(몽골)의 내정간섭이 있을 때마다 이 ‘세조의 유훈’을 외교카드로 활용했다. 예컨대 1323년(층숙왕 10년) 원나라가 정동행성을 설립, 고려를 흡수통합하겠다는 야심을 노골화했다. 그러자 당시 원나라에 파견돼있던 토참의사사 이제현은 그 ‘세조의 유훈’을 인용하면서 ‘불가’를 외쳤다.
 “세조황제의 조서 덕택에 고려의 옛 풍속이 유지되고, 종묘사직이 보전됐습니다. 이제 고려에 행성을 설립한다고 합니다. 원나라는 세조의 조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당시 원나라 황제였던 영종(재위 1320~1323)은 “세조(쿠빌라이)의 정치를 본받고 회복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제현은 바로 이 점을 겨냥해서 원 조정을 협박한 것이다. ‘세조의 유훈을 따르라’고…. 원나라는 결국 정동행성의 설치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살얼음판 걷던 세자
 광해군은 신하들에게 바로 그 고려의 외교전략과 전술을 닮으라고 신신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광해군으로서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사실 세자 시절부터 광해군의 스트레스는 엄청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아버지(선조)는 전쟁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세자(광해군)가 인심을 잃은 임금(선조)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더욱 골치아픈 것은 명나라의 반응이었다. 1593년(선조 26년) 명나라 사신은 선조에게 “세자에게 양위하라”는 주제넘은 소리를 해댄다.
 “세자(광해군)를 보니 용안이 특이하였고, 온 백성이 추대한답니다. 당나라 현종(재위 712~756)이 안록산의 난을 맞아 아들인 숙종(756~762)에게 군권을 맡겼더니 숙종이 장안과 낙양을 수복했습니다. 세자의 현명함이 당 숙종보다 더하니 국왕은 반드시 전위하시는 편이….”(<선조실록>)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못난 임금이니 당 현종의 예에 따라 속히 현명한 세자(광해군)에게 물려주라는 소리가 아닌가.
 대신들은 물론, 상국인 명나라로부터도 버림을 받고 쫓겨나는 임금이라면…. 당시 선조가 느끼는 위기감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문제는 선조의 위기감이 고스란히 광해군에게 전달됐다는 것이었다. 세자 입장에서 광해군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추호라도 잘못된 언행을 했다가는 역린을 건드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지만 이번에는 떠오르는 강국인 후금(청나라)과 썩어도 준치인 명나라 사이에서 외줄타기 외교를 펼쳐야 했다.  

비운의 임금 광해군. 명청교체기에 살얼음판 등거리 외교를 펴다가 그만 인조반정으로 쫓겨났다. 광해군이 쫓겨난 지 불과 4년만에 정묘호란이 일어나 형제의 맹약을 맺는 굴욕을 당한다.

 ■명나라와의 의리가 밥먹여주냐
 앞서 인용한대로 당시 조정의 의론은 한심했다. 우물앞 개구리처럼 명나라에 대한 짝사랑이 조정의 공론이었다.
 “난 고질병인 화병 때문에 요즘 겨우 버티고 있다. 이럴 땐 급하지 않은 업무는 좀 보류해도 좋으련만…. 너무도 일의 경중을 모르고 있구나.”(<광해군일기> 1620년 10월 18일)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맹목으로 섬기려는 대신들의 ‘몽니’는 광해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예컨대 1619년(광해군 11년), 당시 욱일승천의 기세로 요동을 차지한 후금이 편지를 보냈다.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우리(후금)와 맹약을 맺자”는 편지였다. 광해군은 ‘지는’ 명나라와 ‘뜨는’ 후금 사이에서 적절한 등거리 외교를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달랐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웠다. 이들은 3개월이나 ‘몽니’를 부리며 차일피일 미뤘다.
 “호서(胡書·후금의 편지)를 처리하라고 했거늘…. 명색이 국방을 담당하는 비변사가 미적미적 대고 있으니…. 1~2일 안에 처리하도록 하라.”(<광해군일기> 1619년 7월 16일)
 그러나 대신들은 “명나라의 문책이 두렵다”며 선뜻 나서지 않았다. 광해군은 ‘명나라와의 의리가 밥 먹여주냐’며 호통친다.
 “이번 호서의 처리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다. 그런데도 경들이 명분론만 내세우고 있다. 종묘와 사직이 위험에 빠진다면 어찌할 것인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다.”(<광해군일기> 1619년 7월 22일)
 광해군은 실리외교를 주장한 것이다. 그럼에도 대신들이 미적거리자 우의정 조정(1551~1629)에게 “당신이 한번 처리해보라”고 명했다.
 그러나 조정은 “제가 왜 책임지냐”면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회피했다.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 일을 혼자 담당한다는 말입니까. 성상께서는 다른 대신들과 함께 상의하여 처리하소서.”(<광해군일기> 1619년 7월 27일)
 그러자 광해군이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당신도 ‘맡지 않겠다’며 이토록 번거롭게 하는데…. 어느 대신이 맡겠는가. 나 혼자 고민하다가 병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나랏일이 한심하구나.”

 

 ■전쟁이 재발되면 가슴이 섬뜩하다
 아닌게 아니라 당시 광해군은 깊은 병에 걸려 있었다. 후금의 편지에 답하는 기한(8월5일)이 훌쩍 지났지만 어느 누구도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자 광해군은 병든 몸을 이끌고 나와 대신들에게 애원조로 호소한다.
 “내가 병이 심하고 졍신이 혼미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 데도 종묘사직이 위태로운 꼴을 차마 볼 수 없어 나왔다. 이미 답서의 기한(8월 5일)이 지났지만 8월 안으로 보낸다면 혹시 목전에 닥친 전란은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경들은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광해군일기> 1619년 8월 14일)
 광해군은 “만약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섬뜩하다.(思之膽寒)”고 걱정했다.
 그랬다. 홀로 노심초사하던 광해군은 전쟁의 재발을 걱정한 지 4년 만에, 제발 고려의 외교를 배우라고 호소한지 2년 만에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1623년) 그런 다음 불과 4년 뒤 정묘호란(1627년)이 일어나 오랑캐와 ‘형제의 맹약’을 맺었고, 다시 9년 뒤 병자호란(1636년)으로 ‘군신의 맹약’을 맺는 신세가 된다. 그 사이 죄없는 백성들만 도탄에 빠진다. 지금도 광해군의 절규가 귓전을 때린다.
 “큰소리만 치는구나 나랏일이 한심하다. 제발 제발 고려의 외교 좀 닮아라.”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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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암초 때문에 격렬한 파도와 세찬 여울이 휘몰아친다. 안흥정 아래 물길이 열 물과 충돌하고, 암초 때문에 위험하므로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다.”(<고려도경>)
 송나라 서긍은 충남 태안 마도 인근 해역의 험난한 물길을 두고 “매우 기괴한 모습이라 뭐라 표현할 수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이 뿐인가. 
 “옛날엔 난행량(難行梁)이라 했다. 바닷물이 험해 조운선이 누차 침몰했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싫어해서 안흥량(安興梁)으로 고쳤다.”(<신증동국여지승람>)
 얼마나 험했으면, 배가 지나기(行) 어려운(難) 해역이라 ‘난행량’이라 했다가 편(安)하고 흥(興)하라는 염원을 담아 ‘안흥량’으로 고쳤다는 것인가.

안흥량의 암초지대. 나라곳간을 채울 조운선은 반드시 태안반도 인근 해역인 안흥량을 통과해야 했지만 배가 침몰되는 해난사고가 잇따랐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난행량이 안흥량으로 바뀐 까닭 
 그럴 만도 하다. 안흥량 일대는 인당수(황해도)·손돌목(강화도)·울둘목(전남) 등과 함께 ‘4대 험로’로 꼽히는 곳이다.
 해안선의 출입이 가장 심하고 다수의 섬이 분포돼있는 데다 수중암초가 곳곳에 있어서 조류의 변화가 심하다. 억센 조류가 해저 암각이나 섬에 부딪쳐 소용돌이 치고,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가 물살을 더욱 빠르게 만든다. 그러니 간조(썰물) 때나 계절적으로 풍랑이 거셀 때 안흥량을 통과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했다.
 예컨대 6~8월 사이와 10월 상순 이후에는 기본적으로 항행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흥량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전라도를 비롯한 3남 지역의 세곡(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서울(개경·한양)로 운반하는 조운선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해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도 컸다. 구체적인 기록이 나와있는 조선시대 해난사고만 일별해보자.
 1395년(태조 4년) 5월 경상도 세곡을 싣고 안흥량을 통과하던 조운선 16척이 침몰했다.
 1403년(태종 3년)과 1414년(태종 14년)의 침몰사고는 대형참사였다. 즉 1403년 사고로 조운선 34척이 침몰, 선원 1000여 명과 쌀 1만 여 석이 수장됐다. 1414년 사고 때는 66척이 침몰, 미곡 5000석이 가라앉았다. 1455년(세조 1년) 안흥량에서 일어난 해난사고로 조운선 54척이 가라앉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니까 1395~1455년 사이 66년간 안흥량에서 발생한 해난사고의 통계를 보면 파선 및 침몰된 선박이 200여척, 인명피해 1200명, 미곡손실 1만5800석 이상이었다.
 또 다른 통계를 들어보자. <경국대전>이 반포된 성종 때의 조운선의 수가 총 155척이었다. 그렇다면 태종 때 66척과 세조 때 54척이 침몰한 배의 수는 각각 전라도 조운선의 3분의 1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다. 

안흥량(마도) 해역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선박. 잘 포장된 고려자기가 켜켜이 쌓여있다. 강진에서 올라온 조운선이 수장된 것이다.

 ■최초의 운하공사  
 조운선이 번번이 침몰함으로써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함은 물론 국가재정 또한 고갈되는 이중고를 겪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고려와 조선 조정은 나라곳간을 채우기 위한, 국운을 건 대책을 세웠다. 그것은 바로 ‘운하(運河)공사’였다.
 1134년(인종 12년)의 <고려사> ‘세가·인종’를 보면 다음과 같은 상소문이 올라온다.
 “안흥정 아래의 바닷길은 파도가 격랑하고, 바위가 험준해서 이따끔 배가 뒤집힙니다. 운하를 뚫어야 합니다.”
 상소문은 이어 “소태현(蘇泰縣·태안)’의 경계를 시작으로 해서 운하를 판다면 배의 운행이 매우 빨라 이로울 것”이라고 했다.
 인종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습명(鄭襲明·포은 정몽주의 10대조 할아버지)을 운하 공사의 책임자로 보냈다.
 운하공사의 계획은 천수만~가로림만 연결하자는 것이었다. 현 태안군 태안읍(인평리·도내리)~서산시 팔봉면(어송리·봉담리) 사이에 물길을 낸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해난사고가 빈발하는 안흥량을 경유하지 않고 천수만~가로림만을 통과하는 항로를 개척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사>는 “군사 수천명을 총동원한 이 대역사는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고 기록했다.

조운선이 태안 해역에서 조난당하는 일이 빈발하자 고려와 조선조는 공히 태안 일대에 대대적인 운하공사를 벌였다. 조선판 4대강 공사라 일컬을만 했다. 하지만 지반이 암반층인데다 급격한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에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부실 날림공사라는 지적이 잇따르자 급기야 운하공사는 무산되고 말았다.|박지선 기자 그래픽 

 ■화강암 때문에 막힌 운하
 그럼에도 운하는 고려조의 숙원사업이었다. 1154년(의종 8년)에도 “소태현(태안)에 운하공사를 재개했지만 뚫지 못했다”는 <고려사> 기록이 이를 웅변해준다.
 그로부터 240여 년이 지난 1391년(공양왕 3년) 운하의 필요성이 다시 부각된다. 공민왕 이후 왜구가 빈번하게 출몰, 조운선을 약탈함으로써 국가재정이 더욱 곤궁해진 것이다.
 이 때 왕강(王康·?~1394)이 의논을 일으킨다.
 “태안에 예부터 물길을 냈던 곳이 있습니다. 깊이 판 것이 10여 리이고 파지 못한 것은 불과 7리입니다. 지금 공사를 재개하면 조운이 안흥량 400리의 험로를 건너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까 이 때의 공사는 기존 두 차례의 공사(1134·1154년) 끝에 남겨진 7리를 마무리짓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간다.
 “인력을 징발해서 운하를 팠다. 그러나 돌이 밑바닥에 깔려있고 조수가 들락날락 하는 바람에 파는 대로 다시 매워졌다. 공사는 두 달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고려사> ‘열전·왕강’ <고려사절요> ‘공양왕’ 등)
 매우 의미심장한 언급이다. 고려왕조가 그토록 국가사업으로 추진했던 운하공사가 왜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는 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즉 공사구간이 화강암 암반층이어서 파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겨우겨우 판다 해도 족족 다시 메어지는 난공사였던 것이다.

 

조선조 태종의 책사인 하륜은 태안(굴포) 운하를 뚫는 방법으로 갑문식 공법을 제시했다. 천수만~가로림만 사이에 5개의 저수지를 만들어 놓고 각 저수지마다 소선(작은 배)를 띄워 전달되는 세곡을 차례차례 실어나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거센 파도와 암초 때문에 조운선이 첫번째 포구에 닿을 수도 없었기에 처음부터 탁상공론의 계획이었다.|곽호제의 논문 ‘고려~조선시대 태안반도 조운의 실태와 운하굴착’ 중에서

 ■기발한 것 같았던 하륜의 비책
 막 개국한 조선 역시 운하공사에 사활을 걸었다. 안흥량 수로를 피하는 게 개국한 조선의 첫번째 과제였다.
 태조 이성계는 1395~97년 사이 최유경과 남은을 잇달아 태안 현지로 파견한다. “운하를 팔 곳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보고는 똑같았다. “땅이 높고 굳은 돌이 있어 팔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태종 때는 운하공사를 향한 염원은 ‘숙원(宿願)’을 넘어서 ‘비원(悲願)’의 단계로 번졌다.
 즉위 3년이 지난 1403년 조운선 34척과 미곡 1만석, 그리고 선원 1000여 명이 수장된 대형참사를 겪었기 때문이다.
 “1412년(태종 12년), 태종이 안흥량 수로에 배가 통행할 방법을 의논하라고 명했다.”
 이 때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던 하륜이 나름대로의 비책을 꺼냈다. 다음은 ‘태종의 장자방’으로 일컬어졌던 하륜의 계책이다.
 “고려 때 왕강이 뚫던 곳에 지형이 높고 낮음을 따라 제방을 쌓고, 물을 가둡니다. 그리고 제방마다 소선(小船·작은 배)을 둡니다. 둑 아래를 파서 조운선이 포구에 닿으면 그 소선에 옮겨 싣고, 두번째 저수지를 건너 다시 세번째 둑 안에 있는 소선에 옮겨 싣게 합니다. 이렇게 차례차례 운반하면 근심을 면할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륜은 무작정 물길을 뚫어 바닷길을 통하게 하는 관류식 공법이 아니라 일종의 갑문식 공법을 쓰겠다는 것이다.
 즉 일단은 기존에 천수만~가로림만 사이에 뚫어놓은 운하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것. 그러면서 그 사이 높낮이에 따라 5개의 저수지를 만들고 저수지마다 소선, 즉 작은 배를 둔 뒤 포구에 도착한 조운선의 짐을 차례로 옮겨 싣는 방법을 쓴다는 것이었다.

지금 태안반도에는 고려 인종~조선 세조까지 수차례 뚫었던 운하의 흔적이 남아있다. 천수만 쪽인 태안군 태안읍(인평리·도내리)과 가로림만 쪽인 서산시 팔봉면(어송리·봉담리) 사이에 물길을 낸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17일 만에 끝낸 부실·날림공사
 ‘태종의 꾀주머니’라는 별명에 걸맞은 하륜의 비책이었다. 태종은 참찬의정부사 김승주에게 특명을 내린다.
 “1413년(태종 12년) 11월 16일 임금이 김승주에게 명했다. ‘화공(畵工)과 함께 현장에 가서 지세를 살피고 지도를 그려 바쳐라. 그 후에 판단하겠다.’”
 태안을 둘러보고 돌아온 김승주는 현장 지도를 올리면서 하륜의 비책에 찬물을 끼얹는 소견서를 첨부한다.
 “(고려 때) 왕강이 뚫었던 곳은 모두가 단단한 돌로 되어 있습니다. 난공사가 예상됩니다. 쉽게 공효를 거두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자 태종은 “그것은 과인도 알고 있지만 과인 독단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므로 의정부에서 여럿이 의논해서 시행토록 하라”는 의견을 낸다. 그럼에도 공사는 강행됐다.
 “1413년(태종 13년) 병조참의 우박과 의정부 지인 김지순이 태안의 운하공사를 감독했다. 5000명의 주민이 동원된 운하공사는 1월 29일 시작되어 2월 10일 마무리됐다.” (<태종실록> 1413년 2월 10일)
 하지만 뒷담화가 터져 나왔다.
 “공사를 마쳤지만 비평하는 자들이 말했다. ‘헛되이 백성의 힘(民力)만을 썼지, 반드시 이용되지 못할 것이다. 조운(漕運)은 결국 통하지 못할 것이다.’”(<태종실록>)
 화강암 암반이라 엄청난 난공사였는데, 불과 17일 만에 후다닥 끝냈으니 그야말로 전형적인 부실·날림공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무엇에 쫓기듯 총력전을 벌이며 야간 밤샘작업까지 벌였던 4대강 사업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그랬으니 당대 여론이 들끓었던 것이다. <실록>을 보면 비평가들의 말이 맞았던 것 같다. 공사 완공 후 불과 19일 후인 2월 29일 <실록>을 보라.
 “사람을 순제(태안)에 보내 제방 안에 있는 암석을 제거하도록 했다.”
 골치거리였던 바닥 암반층이 두고두고 문제였던 것이다. 공사 후에 다시 공사를 해야할만큼….

태안(굴포) 운하가 좌절되자 중종은 의항운하를 뚫는 공사를 시작했으나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럼에도 공사책임자에게 상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한심한 자들이구나!”
 결과적으로 하륜의 비책은 ‘탁상공론’이었음이 드러났다.
 천수만~가로림만 사이에 5곳의 저수지를 만들고 소선으로 세곡을 차례차례 운반하는 책략은 나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세곡을 첫번째 저수지에 옮겨 실으려면 대선(大船)이 우선 정박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안흥량의 바람이 워낙 세고 암초가 험한 데다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세곡을 잔뜩 실은 대선이 정박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어떻게 저수지까지 짐을 옮겨 싣는다는 말인가.
 공사가 끝난지 한달 후인 1413년 3월 12일, 충청도 관찰사 이안우는 “워낙 바람이 세고 돌이 험해서 대선이 정박하기 어렵다”는 상소문을 올린다.
 이 무슨 말인가. 세곡을 실은 큰 배(대선), 즉 모선(母船)이 정박할 수 없는 데도 공사가 강행됐다는 어이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난 태종이 길길이 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무슨 공사를 했다는 거냐. 현장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공사계획을 수정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필이면 농삿달에 백성을 쓸데없는 공사에 동원한 셈이 아니냐.”
 태종은 그러면서 “태안 현장에 가본 자들이 한 둘이 아닐텐데 어찌 그렇게 의견이 분분하냐”면서 현장에서 공사를 책임진 우희열과 우박 등을 소환한다.
 “백성을 동원해서 둑을 쌓고 저수지를 만드는 일은 끝났다 치자. 그러나 대선이 정박할 곳에 바람이 거세고 암초가 많다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경들은 왕명을 받고 공사를 책임진 자들이 아니냐. 문제가 있다면 보고했어야지…. 어찌 아뢰지 않았는가.”

최근 태안 인근 해역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선박. 고려와 조선 때 수차례에 걸쳐 운하사업이 이어졌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탁상공론과 함께 부실 날림공사가 두고두고 문제가 됐다.

 ■“도대체 현장 가서 무얼 했느냐” 
 그러자 우희열과 우박이 변명한다는 말이 기막히다.
 “저희는 의정부의 명에 따라 저수지를 만들고 운하를 뚫는 공사를 시행했을 뿐입니다. 대선(大船) 문제는 의정부의 명령이 아니었기에 저희가 살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수지 축조와 운하공사는 책임질 수 있지만, 대선 문제는 책임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책임회피용 발언이었다.
 태종이 그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꾸짖었다.
 “배가 다니고 통하는 여부를 어찌하여 듣지 못했다고 하는가. 살피지 못하였다고 대답하다니…. 참 망령된 말이구나.”
 태종이 다시 윤향과 탁신 등을 태안 현장에 보내 상황을 살피도록 했다. 이들이 돌아와 올린 보고를 보라.
 “1만 명의 인부를 동원해서 3삭(朔) 동안 공사를 깅행한다면 조운(漕運)이 통할 만합니다.”
 임금의 호통을 듣고 현장을 다녀온 관리들까지 여전히 큰소리 뻥뻥 치면서 ‘공사강행’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대 조운선에서 확인된 청자사자향로뚜껑.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말 끝마다 탁상공론 
 태안의 운하공사는 이후에도 두고두고 논란을 야기시켰다. 저마다 백가쟁명의 방안을 내놓았던 것이다.
 5개월이 지난 1413년 8월14일. 충청관찰사 이안우가 ‘비분강개’의 어조로 다시 올린 상소문을 보라.
 “태안 현장을 본 관리들마다 일시적인 모책(謀策)만 쓰고, 백성들을 위한 계책은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분강개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상소문을 올립니다.”
 중앙 관리들이 현장을 둘러보고 간 뒤에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계책만 내놓는다는 것. 이안우는 관리들의 공론(空論), 즉 헛소리들을 하나하나 거론한다.
 “어떤 관리는 암초의 풀이 있는 곳에 푯말을 세워 표시하면 어떠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요. 밀물 때이면서 순풍을 만나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지만, 썰물 때 갑자기 폭풍이라도 만나면 어쩝니까. 배들이 밀려 암초의 풀에 걸리면 전복될 것입니다.”
 이안우는 태종의 책사로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하륜의 계책도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라 비판한다.
 하륜의 계책, 즉 저수지 5곳을 만들어 각각의 저수지에 소선, 즉 작은 배로 세곡을 차례차례 실어나른다는 계획은 전형적인 탁상공론이라는 것이다.
 “전라도 조운선이 1년에 실어나르는 세곡은 9만석이 넘습니다. 그런데 한 척의 소선(작은 배)에 싣는 세곡은 150석이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작은 배가 각 저수지를 따라 7차례 세곡을 옮겨 싣는다고 계산해보십시요. 9만석의 세곡을 반년이 걸려도 다 운반하지 못할 것이 아닙니까.”
 그랬다. 운하공사를 끝낸 곳은 기껏해야 세곡 150석을 실을 수 있는 소선 1척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게다가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에 실제 배가 운항할 수 있는 일수는 한 달에 10일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에 1년에 9만석 이상의 세곡을 실어날라야 했으니….
 이안우는 “이런 상황에서 백성의 노고가 얼마나 심하겠느냐”고 정곡을 찔렀다. 이안우는 특히 “백성들이 쓸데없는 운하를 파느라 농사 지을 때를 놓쳤다”고 한탄했다.

청자철화퇴화문 두꺼비 모양의 벼루..

 ■실력자에 아부한 공사강행파
 이 때의 <태종실록>은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을 기록해두고 있다.
 “(태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던) 하륜이 운하공사의 필요성을 주장하자 아부하는 자들이 많았다.”  
 국가적인 사업을 추진하는데 세도가의 눈치를 보며 공사를 강행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공사를 재개하는 문제는 태종 임금이 직접 태안 현장을 둘러보고 최종 결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태종은 1413년 9월 11일부터 태안 방문을 최종 목적지로 하는 순행(巡行)에 나섰다. 그런데 17일간 남부지방을 실컷 돌다가 막상 최종목적지인 태안 방문을 앞두고 돌연 마음을 바꾼다.
 “태안을 두루 돌아보는 것이 처음의 뜻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과 말이 모두 피곤하니, 곧은 길을 따라서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 태안 방문은 내년 봄(1414년)을 기다려도 좋을 것 같다. 운하공사는 포기하라.”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운하공사는 결국 왕명으로 최종 포기됐다. 이후에도 태안의 운하공사 재개를 둘러싼 논란은 기회있을 때마다 일어났다.
 특히 세조 때 그 논의가 극심했다. 세조는 1461~64년 사이 임영대군 등 4명의 대군과 신숙주·홍윤성 등 재상들을 태안 현장으로 총출동시켜 재개여부를 타진했다.
 그러나 현장을 다녀온 임영대군(이구)과 신숙주 등은 “공사재개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안됩니다. (기존 운하의) 물길이 똑바르지 않고 진흙이 물러서 파는대로 무너지니 운하를 더이상 뚫을 수 없습니다.”(<세조실록> 1464년 3월 13일)

 

 ■둑이 무너졌는데도 상을 주다
 고려 인종~조선 세조까지 4차례의 운하계획이 무산되자 궁여지책의 대안이 마련되기도 했다.
 그것이 1521년(중종 16년) 태안군 소원면 송현리~의항리를 연결하는 이른바 ‘의항운하 계획’이었다.
 1537년(중종 32년) 2월부터 15~50세 사이의 승려 5000명을 동원한 의항운하 공사는 6개월 만에 완료됐다.
 중종은 “어려운 공사를 끝냈다”면서 공사책임자인 박수량과 이현에게 잘 단련된 말 1필씩을 상급으로 내려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운하의 효용성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표된 섣부른 ‘상잔치’였다. 의항운하 역시 거센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에 공사 직후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상급을 받았던 이현은 불과 2년 뒤 삭탈관직됐다.
 의항 공사 때 많은 뇌물을 받고 공사에 동원되지도 않은 승려들에게 호패를 발급해준 데다, 공사에 쓴 기물들을 집으로 옮겨가 사사로이 간척지를 메우는데 쓴 혐의를 받았다.(<중종실록> 1539년 6월 10일) 결국 의항운하 역시 졸속, 날림 및 비리 등 갖가지 구설수 속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렇게 고려·조선의 운하공사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문제는 ‘사람’이다
 이쯤해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안행량에서의 잦은 해난사고가 단순히 ‘거센 바람과 암초,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1473년(성종 4년) 4월 20일 성종이 전라도 관찰사 김지경 등에게 내린 명령을 한번 보자.   
 “조운의 실패는 물길이 멀고 험해서가 아니다. 담당 관리들이 출항날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운선이 출발할 때 해당 관리들은 출항지에서 모두 모여 기후와 바람과 물때를 살펴 하나하나 헤아리고 점검해야 한다. 배가 기항하는 곳에서도 출발 때처럼 하면 거의 실패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성종은 한가지 단서가 될만한 한말씀을 남긴다. 
 “안흥량이 험악하다고? 물론 예로부터 근심이 된 곳이다. 그러나 잘 봐라. 개인의 배, 즉 사선(私船)의 파선은 적고, 조운선과 같은 공선(公船)의 파선은 많지 않은가. 무엇을 말해주는가. 험악한 지형 때문만이 아니라 항행에 조심하지 않아서 사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제 법에 따라 해당 관리들을 제대로 발령하고, 이들을 제대로 지휘·고찰한다면 조운선의 파선을 면할 수 있다.”

 

 ■지독한 인재(人災)
 무슨 말인가. 결국 ‘사람’이 문제인 ‘인재(人災)’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1403년(태종 3년) 5월 5일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침몰, 1000명의 선원과 미곡 1만석이 수장됐다. 그 때 태종 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책임은 과인에게 있다. 출항일은 풍랑이 거센 날이어서 배를 띄울 수 없었는데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 출발시켰으니…. 과인이 백성을 사지(死地)로 몬 것이다.”
 3개월 후인 8월 21일 사간원이 올린 상소를 보면 그 날의 참사가 움직일 수 없는 인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조운선을 띄울 때는 풍랑을 잘 파악하고 화물적재 중량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일을 용렬하고 간사한 무리에게 맡겨….”
 결국 풍랑을 파악하지 않고 과적을 일삼은 무리 때문에 일어난 사고였던 것이다. 
 1414년(태종 14년) 8월 8일 전라도 운반선 66척이 태풍을 만나 침몰·파손돼 200여 명이 익사하고 쌀·콩 5800석이 수장된 사건은 어땠으랴.
 “7월에는 조운선을 띄우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호조가 전라수군절제사에게 공문을 보내 ‘7월에 세곡을 실어 8월초에 배를 띄우라’고 지시했다. 전라수군절제사도 문제있는 인물이다. 호조의 공문대로 배를 무리하게 띄우는 바람에….”
 조운의 원칙은 4월 쯤 배를 띄우고 5월 안에 한강에 도착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호조가 가장 위험한 시기인 7월 말~8월 초에 조운선을 띄우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전라수군절제사 역시 무리한 명령인줄 뻔히 알면서도 배를 출항시켜 참변을 불렀다는 것이다. 지독한 인재(人災)가 아닐 수 없다.
 이쯤해서 다산 정약용의 언급이 떠오른다.
 “뱃길 가운데 위험한 곳 중 하나가 안흥량이다. 파선(破船)되는 배가 해마다 10여척 나온다. 그 원인으로 첫째 배를 만드는 제도가 좋지 못했고, 둘째 수령들이 가외의 짐을 실은 때문이며, 셋째 뱃사람들이 일부러 파선시키기 때문이다. 파선 시키는 것이 10척 가운데 7~8척이나 된다.”(<경세유표> 제1권 ‘지관·호조’)

 

 ■불현듯 떠오르는 4대강 악령
 필자의 뇌리에 불현듯 4대강 공사의 망령이 떠오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속도전을 방불케하는 공사강행에 따른 부실·날림공사…. 현장여건을 무시한채 실권자의 공사강행 주장에 아부하며 추종했던 무리들…. 잘 마무리되지도 않은 공사의 책임자에게 훈장을 내리고…. 훈장 받은 인물은 비리혐의로 적발되고…. 결국 천문학적인 공사비만 낭비하고, 백성들의 헛심만 쓰게 되는 후유증을 낳았으니….
 그래도 높이 평가할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안흥량의 험로를 피해 조운선을 운반하는 것은 분명 국운을 건 숙원의 국책사업이었다.
 왕조시대였던만큼 임금이 나서 어떤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공사를 강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정 내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고, 임금(태종·세조)은 끝까지 그들의 논쟁을 들었으며, 결국은 임금 스스로가 공사중단이라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최소한 불통의 리더십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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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1993년 10월 26일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색다른 행사가 열렸다.
 일본 규슈지방의 미야자키현 난가손(南鄕村) 사람들이 백제왕을 상징하는 신체를 모셔와 제사를 지낸 것이다.
 일본인들이 왜 백제왕의 신체를 모셔온 것일까. 사연은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3년 뒤 백제 부흥군과 왜 연합군이 나·당연합군과 백강(금강)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1000척에 분승한 2만7000여 백제 부흥군·왜 연합군은 4차례 접전 끝에 완패하고 만다. 백제부흥군은 완전히 멸망한다.
 이 전투 후 백제왕·귀족들 가운데 상당수가 일본 나라를 거쳐 규슈로 망명한다. 이 망명 대열에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의 서(庶) 왕자 41명 가운데 한사람인 정가왕 일족이 포함돼 있었다. 정가왕 일가가 바로 규슈 남쪽 산골지방인 난고손 마을에 정착한 것이다.    이 난가손 마을 사람들이 망명한 백제왕자인 정가왕의 고국이자 선대왕들의 무덤인 능산리 고분을 찾은 것이다.
  실로 1,330년 만에 이뤄진 고향 방문이었다. 난가손 마을 사람들은 선대왕들을 위한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신체는 세습신관과 그 아들 외에는 절대 열어볼 수 없었다. 협의를 통해 이 신성한 신체는 김포공항 검색대 마저 통과하지 않는 특전을 누렸다.
 망명 백제왕자의 귀향 행사가 열리던 바로 그 날, 그 곁에서 또 다른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다. 이른바 능산리 절터발굴을 알리는 ‘개토제’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1993년 물구덩이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 660년 백제멸망 때 스님들이 급히 목제수조에 향로를 은닉해놓고 몸을 피한 것 같다.

   ■깨어난 백제왕자의 혼
 그런데 ‘망국의 한’을 담은 백제왕자의 혼이 깨어난 것일까.
 고유제와 개토제가 동시에 열린 지 17일 만인 12월12일, 1,300년 이상 잠자고 있던 백제의 정신이 홀연히 기지개를 켤 줄이야.
 사실 이 발굴은 그야말로 악조건의 연속이었다. 원래 이 이름 없는 절터의 발굴은 92년 12월 당시 충남대 박물관(관장 윤무병)의 시굴조사 때 유구·유물들이 발견됨으로써 시작됐다.
 절터는 능산리 고분군(사적 14호)과 부여나성(夫餘羅城·사적 58호) 사이의 작은 계곡에 위치하고 있었다. 원래 계단식 논이었다.
 인근에는 능산리 고분군과 함께 백제고분모형이 전시돼 있었다. 부여군은 이 절터 부근에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을 마련할 작정이었다. 주변이 문화재 지역이었기에 공사에 앞서 유구·유물 확인을 위한 사전시굴조사를 진행해야 했다. 그러나 별다른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자칫했으면 “유물이 확인되지 않았으니 공사를 강행한다”며 중장비로 밀어버린 뒤 공사를 강행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발굴단의 입장에서 묘했다. 뭔가 유구와 유물이 보일 예감이 있는데, 확실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그렇다고 양심상 “아무 것도 없으니 그냥 공사하라”고 할 수도 없고….
 이렇게 지체하는 사이, 10개월이 흘렀다. 급기야 1993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본격발굴이 시작됐지만, 현장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발굴 구덩이가 여름을 지나면서 물구덩이로 변했기 때문이다. 발굴지역이 계곡부인 데다 습기가 질척질척댄 데다 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발굴단은 추위와 싸우면서, 발굴 구덩이에 물이 고이는 것을 막기 위해 주변으로 물이 흐르도록 임시방편으로 고랑을 마련하는 등 이중고에 시달렸다. 그래도 조사지역은 여전히 물로 질퍽거려 악조건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12월 12일 오후 4시30분. 발굴을 담당하던 김종만(당시 부여박물관 학예사)은 발굴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월척’을 낚는다. 

백제금속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백제금동대향로.

 

 ■물구덩이에서 낚은 ‘유물 월척’
 물구덩이나 다름없는 현장에서 뭔가 이상한 물체가 드러난 것이다. 이상한 뚜껑 같은 것이었다. 그게 향로인 줄은 상상도 못했다. 처음엔 광배 편 같은 유물인 줄 알았다.
 꽃삽으로 천천히 노출시켜 나가는데 뭔가 예사롭지 않은 유물임이 분명하다는 것만 느꼈다.
 발굴단은 즉각 작업을 중단했다. 느낌상 아무래도 뭔가 안전장치를 해놓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인부들이 보았으니 보안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밤사이에 도굴 등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에 야간작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뭔지도 밝혀지지 않은 유물에 대한 입소문이라도 나면 작업에 지장을 초래할 소지가 다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인부들은 일절 참여 못하게 귀가 조치시켰어요. 학예연구직들만 모두 모여 오후 5시쯤 작업에 들어가 전등을 밝혀 놓고 8시 30분쯤에 완벽하게 향로를 발굴했지요.“
 한없이 쏟아지는 물을 스펀지로 적셔내면서 120㎝ 가량의 타원형 물구덩이를 손으로 더듬거리며 뻘 같은 흙을 걷어냈다. 추운 날씨에 손이 틀 듯 시리고 아팠지만 그야말로 미친 듯 땅을 팠다.
 그 때였다. “아!”
 발굴단은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감동의 물결이었다. 비록 뚜껑과 몸통이 분리된 채로 수습됐지만…. 아마도 평생 볼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유물이 현현한 것이다.
 발굴단을 지휘했던 당시 신광섭 부여박물관장의 말.
 “향로를 들어낸 뒤에도 감상할 엄두도 못 냈습니다. 엄청난 물건을 내 손으로 발굴해 냈다는 뿌듯한 자부심. 작업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바라본 겨울 하늘, 총총한 별들…. 가슴이 얼마나 벅찬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향로가 출토된 타원형 구덩이는 원래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던 구유형 목제 수조가 놓였던 곳임을 알았다.
 향로는 칠기에 넣어서 묻었던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얼마나 넋이 나간 상태에서 발굴한 것인지…. 

능산리 절터에서 확인된 석조사리감. 백제 위덕왕의 누이동생이 공양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찬란한 백제유물의 백미
 수습을 끝내고 사진촬영 등 연장 작업을 마무리한 발굴단은 이 유물을 곱게 싸서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그제서야 유물의 올바른 모습이 드러났다. 발굴단의 탄성이 터졌다.
 미지근한 물에 담근 ‘면봉(귀이개)’으로 향로에 묻은 이물질을 닦아냈다. 그들은 하나하나 그 자태를 드러내는 향로의 참 얼굴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신선이 있는가 하면, 코끼리가 있고, 동자상이 있는가 하면 도요새와 호랑이가 있는 등 숱한 진금이수(珍禽異獸)의 모습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향로는 크게 뚜껑과 몸체 두 부분으로 구분돼 있었다. 세분하면 뚜껑장식인 꼭지와 뚜껑, 몸체와 받침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뚜껑 꼭지는 봉황 한 마리가 턱 밑에 여의주를 안고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모습. 봉황의 목과 가슴에는 향을 피울 때 연기가 나가는 구멍, 즉 배연공(排煙孔) 3개가 마련돼 있다.
 뚜껑 정상부에는 5명의 악사가 각각 금(琴), 완함(阮咸·당나라 때의 현악기로 비파의 일종), 동고(銅鼓·꽹과리), 종적(縱笛·관악기), 소(簫·피리의 일종) 등 5가지의 악기를 실감나게 연주하고 있다. 뚜껑 전체는 4∼5단의 삼신산의 형태였다. 신선들만 살고 있다는 전설의 중국 봉래산을 연상케 한다. 이는 첩첩산중의 심산유곡을 이룬 자연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그 곳에는 온갖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즉 74개의 산과 봉우리, 6그루의 나무와 12곳의 바위, 산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을 비롯해 잔잔한 물결이 있는 물가의 풍경이다.
 곳곳에는 상상의 동물 뿐 아니라 현실 세계의 호랑이·사슴·코끼리·원숭이 등 39마리의 동물과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지닌 16명의 인물상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인물·동물상은 오른쪽∼왼쪽으로 진행하는 고대 스토리 전개의 구성원리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몸체는 연꽃잎 8개씩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꽃잎의 중앙과 연꽃잎 사이사이에는 24마리의 동물과 2구의 인물상이 묘사돼 있다. 각각의 연판 안으로는 물고기·신조(神鳥)·신수(神獸) 등을 한 마리씩 도드라지게 부조했다.
 각 연판의 끝단이 살짝 반전돼 있는 게 얼마나 절묘한지. 하부 맨 아래 받침대 부분은 마치 용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받들고 하늘을 오르는 모습이다. 특히 승천하는 듯, 몸을 빳빳이 세운, 격동적인 자세의 용은 백제의 힘찬 기상을 보여주는 백미이다.

 

 ■물구덩이 속에 숨긴 이유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왜 찬란한 백제금동대향로가 왜 사찰의 공방지 바닥에 있는 나무물통에 은닉된 채 발견됐을까.
 발굴을 총지휘했던 당시 신광섭 부여박물관장의 추측을 토대로 660년의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660년 무렵 백제 최후의 순간, 나·당 연합군의 약탈·유린이 시작된다. 그러자 스님들은 창졸간에 임금의 분신과도 같은 향로를 감춘다.
 그들은 조국이 멸망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저 며칠만 숨겨 두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황급히 향로를 공방터 물통 속에 은닉하고는 도망친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조국 백제의 사직은 그것으로 종막을 고한다. 나·당 연합군은 백제 임금들의 제사를 지낸 절을 철저히 유린한다.
 절이 전소되고 공방터 지붕도 무너진다. 백제의 혼을 담은 ‘대향로’도 그대로 감춰진채 깊이 잠든다.
 그럴듯한 추론이 아닌가. 이렇게 보는 근거가 있을까.
 물론이다. 향로가 발견된 지 2년 만인 1995년, 이 절터 목탑지 밑에서 또 하나의 깜짝 놀랄 유물이 발견된다.
 ‘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조사리감’이다. ‘창(昌)’은 누구인가. 27대 위덕왕(재위 554∼598)의 본명이다.
 명문을 풀면 ‘위덕왕 13년(정해년·567년) 누이동생, 즉 성왕의 딸이 사리를 공양한다’는 내용이다.
 명문 중 ‘형공주(兄公主)’는 맏공주를 의미하는 ‘상공주(上公主)’ 혹은 ‘장공주(長公主)’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성왕의 맏딸, 즉 위덕왕의 맏누이동생이 사리를 공양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위덕왕의 아버지 성왕(재위 523∼554)은 한성백제 몰락과 공주 시대의 정치적인 위기를 극복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맡는다.  

멸망한 백제 의자왕의 왕자인 정가왕이 일본 규슈 난고손 마을까지 망명, 정착해서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 마을 사람들은 정가왕과 정가왕의 아들인 복지왕의 신주를 모시고 살명서 해마다 만남의 의식을 벌인다.  

 

 

 ■창졸간에 멸망당한 백제
 성왕은 불교를 백제중흥의 기반으로 삼는다. 그러나 성왕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뒤를 이은 위덕왕은 그처럼 비명에 간 아버지를 기리며 국가적 추복불사(追福佛事)의 일환으로 이 목탑을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기단만 남아있는 이 목탑지를 발굴하다보니 이상한 현상이 목격됐다. 목탑의 심주(心柱)가 도끼로 처참하게 잘려 있었고, ‘창왕’ 명문 사리감도 비스듬히 넘어져 있었다.
 이는 절을 유린한 적군들이 목탑의 사리장치를 수습하려 마구 파헤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다.
 스님들은 조국이 멸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터. 그만큼 백제가 강대국이었다. 642년 7월, 의자왕은 신라 미후성을 비롯, 40여개 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8월에는 유능한 윤충(允忠)장군이 신라 낙동강 전선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던 대야성(합천)을 함락시켜 신라를 누란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오죽했으면 651년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그만 괴롭히고) 빼앗은 신라의 성을 마땅히 돌려주라”고 의자왕에게 국서를 내렸을까. 당 고종은 국서에서 “만약 백제가 빼앗은 성을 신라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법민(法敏·훗날 신라 문무왕)의 요청대로 왕(의자왕)과 결전을 벌일 것이며 고구려와 약속하여 구원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의자왕은 이듬해(652년) 당에 조공을 보낸 것을 빼고는 그 뒤부터 사실상 당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한 상태로 운명의 660년을 맞이한 것이다.
 해동증자(海東曾子)로 일컬어질 만큼 지극한 효자였던 의자왕. 그는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는 등 강국의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어느덧 자만심과 타성에 젖어 독재자로 변질됐으며 요녀로 악명 높았던 군대부인(君大夫人)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충신들을 쫓아냈다. 충신인 성충(成忠)이 옥사하고 흥수(興首)가 귀양 갔으며, 그 빈자리를 신라의 간첩망에 포섭된 좌평 임자(任子) 같은 인물로 채웠다.
 무엇보다도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지 못해 나당연합군 결성을 수수방관한 점은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결국 막강한 백제는 외교실패와 내부갈등으로 속절없이 멸망한 것이다. 나무물통 속 금동대향로는 바로 그 비운의 왕국 백제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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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환향녀’를 아십니까.
 혹시 ‘화냥년’이라는 욕을 연상하십니까. 호로자식이라는 욕과 함께? 그러나 이 ‘환향녀’의 단어 속에는 우리네 할머니들의 가슴 아픈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뭐 다 아시는 얘기겠지요. 그러나 막연하게 아시는 분들을 위해 ‘환향녀’에 담긴 여인들의 슬픈 역사를 풀어보려 합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강화도가 함락되자 뭇여인들이 오랑캐에게 절개를 잃지 않으려 강화해협의 차디찬 바다에 몸을 던졌습니다. <연려실기술>은 “몸을 던진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연못에 떠있는 낙엽이 바람을 타고 떠다니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남자들은 어땠을까요. ‘적병에게 욕을 보느니 빨리 죽으라’고 다그쳐 자진하게 만들고, 혼자 살아남은 남정네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옵니다. <인조실록>과 <연려실기술> 같은 기록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용케 살아남아 청나라군에게 붙잡혀 인질로 잡혀가던 여인들은 어땠을까요, “차마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옷으로 머리를 덮었다”고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이른바 ‘환향녀’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청나라에 사로잡힌 부녀들은 본심은 아니었다 해도 변을 만났는데도 죽지 않았다. 절의를 잃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답니다. 죽었어야 한다는 얘기지요.
 그렇다면 한가지 묻겠습니다. 오랑캐로 손가락질한 청나라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이른바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당한 임금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죽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절대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될 아픈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이것은 환향녀, 그 녀들을 위한 변명, 뭐 그 정도가 아닙니다. 못난 임금, 못난 남편, 못난 아비를 향한 그녀들의 당당한 외침입니다.

 이기환 사회에디터

<관련 포스팅>

환향녀, 화냥년, 호로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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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제가 한번 해볼게요.”
 1962년 3월 하순, 충북 제천 황석리 고인돌(기원전 6세기) 발굴현장. 28살 신참 고고학자였던 이난영(국립박물관 학예연구사)은 선배인 김정기 학예연구관을 졸랐다.
 그 때까지 계획된 12기를 모두 발굴한 상황. 단 하나 남은 게 바로 상석부분이 파괴된 채 흙에 파묻혀있던 고인돌 1기(13호)였다. 너무도 빈약한 고인돌이었기에 신참 고고학자가 한번 욕심을 내본 것이었다. “깨진 것 같은데 한번 해보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흙을 파던 신참 고고학자의 손 끝에 뭔가가 걸렸다.
 석관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석관을 파헤치자 놀랄 만한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기골이 장대한 사람의 뼈였다. 오른팔은 배에, 왼팔은 가슴에 대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필름도 없었다. 그는 제천 청풍읍으로 달려가 재생필름을 1통 산 뒤 현장으로 달려와 정신없이 유골사진을 찍었다.
 밤늦게까지 인골을 수습한 발굴단은 서울대 의대 해부학과 나세진·장신요 박사팀에게 조사를 의뢰했다.

1962년 충북 제천 황석리에서 확인된 기원전 6세기 무렵의 청동기 시대 인골. 분석결과 이 인골은 키 174센티미터의 장신인데다 두개골의 모습을 비춰볼 때 북구유럽형 인골인 것으로 판정돼 화제를 뿌렸다.

 

 ■서양인이 살았다.
 그런데 놀랄만한 분석결과가 나왔다.     
 “인골의 신장은 174㎝ 정도, 두개골과 쇄골·상완골 등 모든 부위에서 현대 한국인보다 크다.”
 분석팀은 “두개장폭(頭蓋長幅)지수가 66.3”이라면서 “현대 한국인이 단두형(短頭型)인데 반해 이 인골은 장두형인 점이 흥미롭다”는 결과를 내놨다. 
 이 무슨 말인가.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고려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두개장폭지수라는 것은 이마·뒤통수의 길이와 귀와 귀 사이의 길이 비율을 나타내는 겁니다. 한국인의 경우 100대 80∼82인데 반해 서양인은 100대 70∼73 사이인데….”
 김 교수의 해석은 놀랍다. “황석리 인골의 지수(66.3)로 보아 이 인골은 한반도로 이주한 초장두형 북유럽인”이라는 것이다.
 즉 기원전 1700년 쯤 유럽의 아리아인들이 인도·이란 등으로 내려왔으며 이들이 기원전 1000년부터 벼농사 전래경로를 통해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로 이주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흥미로운 것은 ‘얼굴 복원 전문가’인 조용진(한남대 객원교수)이 인골의 두개골을 복원한 결과 ‘서양인’의 얼굴형과 거의 똑같다는 사실이다.
 즉 인골의 왼쪽 이마가 볼록하고 코가 높으며 얼굴이 좁고 길며, 눈 구멍 모양이 서양인 두개골의 눈구멍 모양과 비슷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인골은 큰 북방계통의 사람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한 이빨이 크고, 광대뼈는 큰 데 뒤로 물러나 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얼굴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같은 인골의 특징은 현재 제천의 산간지역 사람들에게도 나타난다는 것. 이 지역 사람들의 특징은 피부가 희고, 털이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결론적으로 알타이 지방에서 내려온, 서양인의 형질을 포함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게 조용진 교수의 설명이었다.

조용진 교수가 복원한 황석리 인골의 얼굴. 서양인의 모습을 쏙 빼닮았다.

 ■정선 아우라지의 비밀
 제천 황석리 인골 발굴 후 42년이 지난 2005년이었다.
 강원 정선 북면 아우라지 유적에서 의미심장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한국의 선사고고학 역사를 뒤흔들만한 핵폭탄과 같은 것이었다.
 먼저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나온 이른바 덧띠새김무늬토기(각목돌대문토기·刻目突帶文土器·눈금 같은 무늬를 새긴 덧띠를 두른 토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덧띠새김무늬토기는 바로 조기(早期) 청동기시대, 즉 가장 이른 시기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에 속한다. 기원전 15~13세기 정도?
 이전까지 청동기시대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한반도의 경우 기원전 10세기쯤, 만주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선 기원전 15~13세기쯤’이었다.
 그러니까 정선 아우라지에서 기원전 15~13세기를 대표하는 덧띠새김무늬 토기가 나옴으로써 한반도 청동기 시대 연대가 최대 500년 이상 올라간 것이었다.
 사실 정선 아우라지 뿐 아니라 그동안 경주 충효동, 진주 남강, 산청 소남리 등에서 숱하게 확인된 바 있었다. 그런 가운데 남한강 최상류인 아우라지에서 조기 청동기시대 유물이 나옴으로써 청동기 연대를 안정적으로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청동기 문화를 한반도에 국한시킬 필요가 있울까. 사실 덧띠새김무늬 토기는 중국 동북방인 발해 연안에서부터 한반도까지 꾸준히 출토돼왔다.
 즉 발해연안인 다쭈이쯔(大嘴子), 상마스(上馬石)유적에서부터 한반도 신의주 신암리-평북 세죽리-평남 공귀리-강화 황석리·오상리-서울 미사리-여주 흔암리-진주 남강 상촌·옥방까지….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는 “이 모두가 기원전 15~13세기 유적들”이라면서 “그것이 남한강 최상류(아우라지)까지 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온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말한다.
 “비단 남한강뿐이 아니다. 북한강 수계인 최근 홍천 외삼포리 같은 곳에서는 AMS(질량가속분석기) 측정결과 기원전 14~13세기로 편년되는 유적에서 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왔다.
 모두 한강수계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결국 정선 아우라지 유적은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의 전개과정을 알려주는 지표유적이라 할 만하다.

2005년 강원 정선 아우라지 유적에서 발굴된 고인돌과 인골. 인골에 대한 DNA분석 결과 현재의 영국인과 비슷한 염기서열인 것으로 잠정 추정된 바 있다.  

 ■영국인의 인골이…
 그런데 이 뿐이 아니었다. 아우라지에서 또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유물이 나왔으니까.
 2005년 7월14일 오후. 당시 조사단(강원문화재연구소) 현장책임자였던 윤석인은 아우라지 유적 한쪽에 서 있던 고인돌을 노출시켰다.
 “고인돌 4기 가운데 한 기에서 사람의 두개골과 대퇴부뼈가 나왔습니다. 서울대 해부학교실에 분석을 의뢰했는데, 뜻밖에 서양인의 염기서열과 비슷하다는 결과를 구두로 통보받았습니다. 키 170㎝ 정도의 남성인데, 현재의 영국인과 비슷한 DNA 염기서열이라는….”(윤석인)
 물론 이 인골의 연대는 기원전 8~7세기로 측정되었으므로, 덧띠새김무늬토기(중심연대가 기원전 15~13세기)가 나온 곳과는 시간차가 있다. 어쨌거나 만약 2800년 전 서양인의 염기서열을 지닌 사람이 한반도에서도 두메산골인 정선에서 살았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또한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46년 전인 1962년 제천 황석리 고인돌에서도 수수께끼 같은 인골이 확인된 적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아우라지 유적이 존재하는 정선과 제천 황석리는 같은 남한강 수계가 아닌가. 김병모 교수는 아우라지에서 서양인의 염기서열을 가진 인골이 나왔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한반도에서 서양인의 염기서열이 나왔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기원전 18~17세기 무렵 히타이트족의 정복으로 흑해지역에 살고 있던 아리아족이 인도 쪽으로 이민했어요. 그 중 인도에서 살던 사람들 가운데는 벼농사 전래경로를 따라 동남아시아~한반도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이들의 경로는 고인돌 문화의 전파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아우라지 유적에서 확인된 덧띠 새김무늬 토기 등 청동기 조기 유물들. 한반도 청동기 시대를 500년 올리 놓은 대표적인 유룰이다.

 물론 아직은 서양인의 유전자와 관련해서는 퍽이나 조심스럽기도 하고, 민감하기도 한 주제이기도 하다.
 제천 황석리나 정선 아우라지나 모두 고인돌에서 나온 인골이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서양인이 청동기시대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것인가. 또 그렇다면 한국인이 서양인의 후손이라는 것인가. 하지만 굳이 그렇게 생각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 김병모 교수의 말이다.
 “현대의 한국인이 하나의 유전자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갖가지 교류를 통해 여러 인자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 제천이나 정선에서 출토된 인골이 서양인이라고 100% 확정짓는 것도 조심스럽다.
 같은 인종에서도 빈부나 계급의 격차에 따라 골격이 다를 수 있으니까. 특히나 특수층 계층인 고인돌에서 나온 인골들은 대체로 충분한 영양공급을 받는 경우가 많다니까….
 어쨌든 정선 아우라지 인골이 발굴된지 9년이 흘렀지만 서울대 해부학실은 최종적인 분석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다는 소식이다.
 9년 전의 발굴 담당자들이 서울대 해부학교실 측에 여러 번 최종결과를 발표해달라고 요청했단다. 그러나 아직 최종결과가 발표됐다는 소식은 없다.
 대체 어떤 최종결과가 나왔기에 발표를 하지 않는 것일까.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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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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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special info

    Tracked from special info 2014/11/15 04:22  삭제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2. Subject: how to hack a twitter account

    Tracked from how to hack a twitter account 2014/11/15 18:12  삭제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3. Subject: m88

    Tracked from m88 2014/12/10 00:20  삭제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5년 만에 조선을 물들인 남령초(담배)…. 그래서 <인조실록>에서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담배를 요망한 풀, 즉 요초라 했습니다.
 담배는 1616~18년 사이 들어왔는데, 처음 피운 이는 조선 중기 한문 4대가 중 한 사람이었던 장유였다고 합니다. 담배예절이 없었던 시절이라 어전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장인에게 훈쭐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도 장유는 “누가 이 신비로운 약제를 전했는가”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의 중흥군주라는 정조 임금은 지독한 골초였는데, 담배사랑이 끔찍했습니다. “담배를 치국의 도로 삼는다”고 하면서 “조선을 담배의 나라로 만들겠다”고 선포까지 했답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담배예절도 엉망이었는데요. 정조 시대의 명재상 채제공은 길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새파란 유생들에게 “담배 좀 끄라”고 지적 좀 했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답니다.
 잠깐 감옥에 가두고 경계로 삼으려다가 학당 유생들이 “유생을 욕보였다”며 철야농성을 벌이고 채제공 타도를 외쳤다네요. 채제공은 “정승짓 못해먹겠다”고 사직을 청하고….
 요즘 담배는 공공의 적인데, 애연가들은 조선시대가 그리울까요. 담배로 본 조선시대의 사회상을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관련 포스팅>

조선 최초의 흡연자…어전에서 감히 담배를 피우다

골초 대왕 정조임금이 꿈꾼 '담배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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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1월 30일은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날일 것입니다.
 평소 오랑캐라 낮춰보던 청나라에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림)의 굴욕 속에 항복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청나라에 볼모로 붙잡힌 백성들은 항복 후 도성으로 돌아가는 인조를 향해 외쳤습니다. “임금님 임금님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역사는 이 날의 치욕을 ‘삼전도의 굴욕사건’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청나라는 항복의식이 벌어진 삼전도에 ‘청나라 황제 승첩비’를 세우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면서 ‘황제의 공적을 칭송하는 비문을 직접 쓰라’고 지시했습니다. 조선 조정은 패닉에 빠졌습니다. 아무도 글을 짓지 않겠다고 피했습니다. “한때의 굴욕을 참자”는 인조의 신신당부에 따라 글을 지어 청나라의 낙점을 받은 이는 백헌 이경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은 삼전도비문은 두고두고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유림의 영수 송시열은 왜 이경석을 ‘오랑캐에 아부함으로써 오래오래 잘 먹고 잘 살았다’고 비아냥댔을까요. 후세의 박세당은 왜 그런 송시열을 ‘올빼미’라 비난했을까요. 삼전도 비문을 둘러싼 굴욕의 사연들을 되짚어 보겠습니다. ‘치욕’도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역사이니까요.  

 

<관련포스팅>

삼전도비문의 내막(상) "황제의 음덕으로 살았습니다."

삼전도비문의 내막(하) '누가 올빼미고 누가 봉황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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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0자(18) 속히 돌아오라. 모든 것 해결됐다. 그이와 언니는 너를 찾아 헤매고 있다.’
 경향신문 1964년 11월 7일에 ‘한 줄 광고’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개구쟁이 시절 이런 광고를 패러디 해서 “000야, 빨리 돌아오라. 아버지 바지(혹은 빤쓰) 줄여놨다”는 등의 농지거리를 나누며 실없이 낄낄 댔던 기억이 새롭다. 돌이켜보면 유치찬란한 농담인데, 무엇이 그렇게 우스웠는지 참….
 ‘한 줄 광고’를 더 살펴보니 30대 여인의 구혼광고가 눈에 띈다. ‘재혼, 가옥 고급 둘, 건실 남 원함.’

1964년 11월 6일 경향신문에 게재된  마릴린 몬로 주연의 영화 '나이아가라' 영화광고. "바스-룸 속에서의 몬로-염자(艶姿)!', 즉 목욕탕 속에서 빛나는 몬로의 농염한 자태를 선전하고 있다. '미성년자 절대관람불가!' 안내문구와 함께 대학생 특별할인으로 전회 55원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재혼을 원하는 이 30대 여인은 ‘고급주택이 2채나 있으며, 건실한 남자를 원한다’는 구혼광고를 낸 것이다. 아마도 숱한 남성들이 이 광고를 보고 도전하지 않았을까. ‘미망인 및 불구자도 가 양복업 박’이라는 알듯 모를 듯한 남성의 구혼광고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만성 임질을 특수 치료한다는 광고와, 요도염 정확치료 광고 등도 보인다. 그러고보니 60~70년대 전봇대에 ‘임질·단소·조루…’와 같은 질병을 치료해준다는 알쏭달쏭한 쪽지광고가 왜 그리 붙어있었는지 모르겠다.
 결혼 답례 찰떡을 대할인해준다는 광고도 흥미롭다. 광고는 ‘청첩장과 택시 한 대를 무료제공한다’는 내용과 함께 ‘찰떡 12개 60원’을 50원에, ‘케키 40원’을 50원에 각각 할인준단다.

 

 ■‘뻐스 차장(車掌)’ 모집
 우연히 들여다본 김에 6~7일 경향신문 광고를 쭉 훑어보았다. 당대의 광고를 보면 그 시대의 사회·생활사를 일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제품 광고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제조업이 발달하지 않은 탓이리라. 금성이 신발매한다는 ‘고성능 골드표 건전지’가 겨우 눈에 띌 뿐이다. 골드표의 특장은 ‘국내 유일의 충격압출가공에 의한 아연관 사용으로 누액이 완전방지되고 방전이 절대 안되며 라디오용으로 특수배합하여 장시간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1964년 당시 TV수상기 대수는 전국적으로 불과 5만대였다. 절대 다수 사람들은 라디오로 세상과 소통했다. 라디오와 전축을 월부판매한다는 광고가 나올 정도였다. 따라서 라디오에 부착하는 건전지는 필수품이었고, 그래서 그나마 건전지 광고가 게재됐던 것 같다. 라디오에 붙은 건전지에서 흘러나와 늘어붙은 누액을 없애는 것이 최신 기술이었으리라.
 광고 가운데 ‘관인 전국자동차차장 양성소’의 ‘합승뻐스 여차장 모집’ 광고를 보라.
 ‘한달교육 수시입학 입학금 없음, 기숙사 완비, 국졸 이상 16~22살까지의 여자, 신체결함 무 한자, 졸업후 자격증, 전원 취직 책임 알선’
 사실 여차장은 배고픈 시절, 동생들은 물론 온 식구들을 먹여살린 ‘우리 누나’였고, ‘언니’였다. 경향신문 1962년 12월 7일자는 ‘인권의 벽지(僻地)를 살핀다’는 제목아래 ‘과로, 천대, 적은 보수에 시달리는 직업’을 소개하면서 ‘뻐스 차장(車掌)’를 으뜸으로 꼽고 있다.
 “서울 시내에 하루 760여 대의 뻐스와 2000여 명의 뻐스 차장이 300만 시민의 다리가 되어주고…. 그러나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하루 16~18시간 근무하는 차장의 나이는 16~20세의 소녀들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성으로서 완성할 시기에 있는 시기에~만원 손님들 속에 붐비며 너무나 값싼 보수를 받으면서….”
 신문은 “이들의 봉급은 월 800~1000원에 불과하다”면서 인권침해 사례의 으뜸 사례로 ‘뻐스차장’을 꼽고 있는 것이다.

한줄짜리 광고. 사람을 찾는 광고에서부터 구혼광고, 가정교사 광고, 성병치료 광고 등 미주알고주알 생활광고가 실렸다. 

 ■무서운 병 결핵을 퇴치하라!
 당시 신문 광고의 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의약품 광고 및 유흥업소 광고와 영화광고였다.
 그 가운데 특히 결핵치료광고가 눈에 띈다. 1964년 4월 8일 경향신문 사설을 보면 결핵은 세계 1위의 으뜸 전염병이었다.
 당시 전세계적으로 1500만명이 결핵으로 신음하고 있고, 해마다 300만 명이 결핵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특히 한국과 같은 후진국의 발병률은 심했다. 우리나라 인구 중 70%가 이미 결핵에 감염됐고, 결핵환자는 그 중 80만명 이상이었으며 사망자도 1년에 4만명에 달했다. 질병별 사망순위에서 단연 1위를 차지했다.
 1964년 11월 6~7일 경향신문 사회면을 보자. 당시 결핵협회 주관으로 40일 동안 극장표에서 1원(이류 이하의 극장)~5원(일류 극장)의 결핵모금기금을 따로 뗐다.
 그런데 아세아·화양·동원·남도·천호 등 30개 극장들이 기금 일부를 가로챘다가 적발됐다. 환자들을 위한 기금을 떼어 먹은 극장들의 ‘만행’도 천인공노할 만하지만 결핵이 얼마나 심각한 질병이었는 지를 웅변해주는 기사이기도 하다. 11월 6~7일자를 보면 결핵약 광고가 눈에 띈다. 

1964년 11월 7일 광고지면. 신파조의 영화광고문구가 이채롭다. 당시 사망률 1위였던 결핵을 퇴치하고자 하는 치료약 광고도 심심찮게 보인다.   

예컨대 결핵약 ‘에속실’ 광고는 ‘결핵약의 카다란 맹점이요, 또한 숙제로 남아있던 내성(耐性)과 독성 문제를 해결했다’고 선전한다. 광고는 ‘에속실이 항균력과 침투력이 뚜렷하기 때문에 치료기간이 훨씬 단축된다’고 했다. ‘메단짓드’라는 결핵약은 ‘다량투여로 치료기간을 단축시켜키면셔 특히 노쇠약자와 소유아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
 당시 어린이에게 가장 큰 고민은 회충·요충·촌충·십이이지장충의 퇴치였다. 신학기만 되면 자기 용변을 학교로 가져가서 검사받아야 했던 고역을 치른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회충이 없는 건강한 어린이’라는 광고문구로 시작되는 ‘아스카린’ 광고는 어린이 5명의 얼굴사진을 배경으로 삼아 다음과 같이 선전한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자꾸 마르는 어린이나 안색이 창백하고 자주 병에 걸리는 허약한 어린이는 회충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스카라는 회충·요충·편충을 동시에 없애주는 구충약입니다.” 

1964년 11월 7~9일 성남극장에서 열리는 '새나라쑈'를 안내하는 광고. 양훈-양석천, 송해-박시명, 김영운-고춘자 콤비와 이미자, 박재란, 최숙자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총출동했다.

 

 
 ■송해·박시명, 양훈·양석천, 김영운·고춘자 콤비에 이미자·박재란….
 11월 6일자 신문에 게재된 ‘새나라쑈’ 광고가 흥미롭다.
 ‘성남극장에서 3일간 열리는 ‘만추(晩秋) 특송(特送) 레파토리’라는 문구가 보인다.
 ‘일류 코메디언 송해, 박시명, 양훈, 양석천, 박재란, 이미자, 최숙자, 김영운, 고춘자…. 여기에 인기절정의 가수 금호동, 천재소녀 (한국측) 박활란·(대만측) 손미령, 김세열 캄보밴드, 박태준과 아리랑 보이스, 銀방울자매….’
 이름만 봐도 눈부신 당대 최고 스타들이 ‘새나라쑈’에 총출동하고 있다. 지금도 현역에서 불꽃을 사르고 있는 송해 MC의 30대 팔팔한 시절이다. 만담가인 김영운·고춘자 콤비, 양훈·양석천 콤비는 물론 이미자·박재란, 은방울 자매 등의 이름도 보이고…. 
 캬바레 광고는 또 왜 그리 많았는지…. 서울역전에서 개관할 예정인 ‘궁원(宮苑) 캬바레’의 개업광고를 보라.
 ‘11월7일 개관, 영업시간 하오 6시부터, 기발행한 초대권 유효. 국내 최초의 완전 분리된 이중무대. 한국 트롬펫왕 이상우와 그 악단, 국내 미희(美姬) 총동원(15인조), 개업축하 특별초빙가수 윤일로. 동반대환영. 땐서 모집.’
 광고 중 지금은 표현할 수 없는 ‘미희’라는 표현이 실소를 자아낸다. 그런 미희가 15인조나 총출동한다니….

'합승버스 여차장'을 모집하는 광고와 복권광고, 국민학교생을 모집하는 광고 등이 실렸다. 고속버스 여차장은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입석버스 여차장은 과로, 천대, 저임금에 시달리는 대표적인 인권침해 직종으로 꼽혔다. 

   ■신파로 일관된 영화광고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의 사랑을 흠뻑 받는 게 바로 영화인 것 같다.
 요즘 1000만 관객을 자랑하는 영화들이 심심찮게 등장하지만,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마땅치 않았던 50~70년대에도 영화는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당시의 영화광고를 보면 마치 변사가 이야기를 풀듯 신파조 일색이다. 60년 전인 1954년 11월 6일 경향신문 영화광고를 보자.
 ‘푸른 베일-넘쳐흐르는 아름다운 청년을 희생하며 애정과 감동의 눈물로 一生을 보내온 一여인의 눈물의 주옥편, 여성 대망의 名篇-수도극장’
 ‘창공에 사랑을 싣고-청춘의 달콤한 낭만을 마음껏 즐기는 앵두색 사랑을 창공에 싣고-동도극장’
 10년 뒤인 1964년 11월 6~7일 영화광고도 변함이 없다. 국제극장에서 상영중이었던 ‘벽오동 심은 뜻은’이라는 영화 광고를 보라.  
 ‘날이 갈수록 인기 충천 백만독자를 울린 연재소설의 감격을 또 한번 스크린을 통하여 양반제도가 빚어낸 비극 ! 그 곳에 꽃핀 淸純하고 哀絶한 사랑! 운명이라고 하기엔 너무 기구한 사연! 激情과 感淚를 금치못할 이조사극의 결정판. 고교생 이상 입장환영. 신영균·최은희·도금봉·허장강·박암·이예춘.’
 명보극장의 ‘아내는 고백한다’라는 영화는 어땠을까.
 ‘냉혹한 남편과 따뜻한 애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인의 종말은?’
 그러면서 광고는 차범석·조경희·하유상 등 전문가들의 평을 구구절절 달아놓고 있다. 여류수필가 조경희씨는 “우리네 결혼생활에 경종을 울려준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는 평을 단다. 대체 어떤 영화이기에 그런 평을 가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출연배우는 김혜정·김석훈·태현실·김동원·감승호·박암 등이었다,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의 문제를 다룬 ‘여러분의 국도극장’에서 상영된 ‘수색대’ 영화광고를 보라.
 ‘전 극장가의 인기는 이 한편에 초집중. 울어야 합니까? 웃어야 합니까? 남북이란 비극 속에 우리의 아들과 형제 그리고 남편들은 이렇게 싸우고 쓰러졌다.’

1954년 11월 6일 광고 지면. 캬라멜 광고와 함께 역시 신파조로 일관된 영화광고가 눈에 띈다.  

 ■‘바스-룸에서의 마릴린 몬로의 농염한 자태’
 외화 역시 다르지 않았다.
 마릴린 몬로가 주연으로 출연한 ‘나이아가라’ 영화(을지극장)의 광고카피를 보라.
 ‘바스-룸 속에서의 몬로의 염자(艶恣), 나이아가라 폭포의 장엄한 경관, 하사웨이 감독 특유의 써스펜스.’
 영화는 그러면서 ‘미성년자 관람 절대불가!’를 외치고 있다. 섹스심볼 마릴린 몬로의 ‘목욕탕(바스-룸) 속에서의 농염한 자태’가 어떻다는 이야기인가. ‘미성년자 절대 관람불가’라는 경고문까지 있으니 더욱 호기심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대학생은 특별할인에 전회 55원이라니….
 을지극장의 ‘흑선(黑船)’은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각계의 찬사 신랄하고도 대담한 연출. 무지와 봉건적인 누습이 인간에게 얼마나 불행하고 인간의 진화를 저해하는 가를 죤 휴스톤 감독이 강조하고 있다, 과연 원제 그래도 일본 막부의 야만적인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묘파한 그의 수법은 신랄하고 대담하다. 일반 70원 조조 대학생 55원.’

1964년 11월의 광고.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고 안색이 창백한 어린이는 회충이 있다는 증거였다. 회충 촌충 편충약 광고와 함께 댄서(땐사)를 모집하는 동시에 개관안내를 알리는 클럽 광고가 이채롭다. 

 ■만 여성이여! 함께 울어다오!
 단성사의 ‘스팔타카스’는 ‘300만의 명화. 국향(菊香), 한상(寒霜)을 꿰뚫고 충천(沖天)하는 화제, 인기! 간장을 애이는 감동의 휴메니티! 당당(堂堂) 구주(九週)도 초성황, 만 여성이여! 함께 울어다오!’라는 카피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 일반 100원, 대학생 사병 80원이란다. 출연배우는 ‘카크 다그라스와 로렌스 오리뷔에, 진 시몬스’라면서….
 그러니까 영화는 늦가을의 국화향기와 서릿발 속에서도 300만 서울 시민 사이에 화제를 뿌리고 있다는 것이다.
 당당 9주이나 초성황을 이루고 있으면서…. 간장을 저미는 감동의 휴머니티를 선사했다니 얼마나 재미있는 영화였을까.
 눈에 띄는 영화는 대한극장의 ‘벤허’다. 광고는 ‘고별 로드쇼!’라는 제목아래 아카데미 11개 부문에서 수상했고, 대형 70미리 영화라는 점을 강조한다. 초중고 45원, 대학생·사병 55원이며. 일반은 70원이라 한다.
 또 하나의 영화는 중앙극장에서 상영된 ‘폴 뉴만’ 주연의 ‘헏(Hud)’이다.
 ‘헏은 패륜아? 현대란 새물결 앞에서 낡은 서부를 부수는 사나이! 불효, 불법, 불륜 일삼는 성난 헏 때문에 파트리시아 닐은 64년도 오스카 여수상을 타고…. 노도같은 인파 밀려 흥행 1위.’ 이런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의 문구를 보면 누구든 영화관으로 직행할 생각이 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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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송시열이 언급한 이 ‘3자’의 속뜻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궤장연 이후 5개월이 지난 1669년(현종 10년) 4월, 그 내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 때 병이 든 현종 임금은 온천으로 요양을 떠나 있었다. 이경석이 이 때 짧은 상소문을 올린다.
 “임금이 병이 나 요양하고 있으면 신하된 도리로서 찾아뵈야 하는데…. 이는 나라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된 일입니다.”(<백헌집>)

이경석이 현종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는 절차를 회첩에 옮기고 당대 석학들이 지어보낸 축하문을 담은 '사궤장연회도첩'(보물 제930호).

 이 때 송시열은 이경석이 '오래 살고 편안했다(壽而康)'는 알쏭달쏭한 3단어를 넣어 축하문을 써주었다. 그러나 이 세단어는 훗날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다. |경기도박물관

   ■'수이강'의 속뜻

 이경석은 임금이 아픈 데도 찾아뵙지 않은 몇몇 신하들을 염두에 두고 상소문을 올린 것이었다. 문제는 판부사였던 송시열도 공교롭게 신병 때문에 시골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송시열은 이경석의 상소가 자신을 거론하는 줄 알고 발끈해서 반박상소를 올렸다.
 “(이경석의 상소가) 곧바로 신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어찌 다른 사람을 지적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신이 삼가 생각해보니 옛날 송나라 손종신(孫從臣) 같은 이는 ‘오래 살고 편안해서(壽而康)’ 한 때 존숭을 받았지만 의리를 알고 기강을 진작시켰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송시열은 그러면서 “바로 제가 그런 사람에게 비난을 받았으니 얼마나 비웃음을 받겠느냐”고 반문했다.(<현종실록> 1669년 4월 14일자) 
 드디어 송시열이 언급한 ‘3자의 은유’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송시열이 언급한 ‘손종신’은 송나라 한림학사 손적(1081~1169)을 가리킨다. 손적은 송나라(북송)가 금나라에게 멸망한 뒤 송나라 황제를 대신해 항복문서를 지어 금나라에 바친 인물이다.
 그런데 항복 문서의 내용이 너무 송나라의 위신을 깎고 오랑캐에 아첨했다고 해서 손가락질의 대상이 됐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손적 그대는 오랑캐 진영에서 너무 아첨했으니 오래 살고 편안했구나(壽而康)”라고 비웃었단다.
 그랬다. 송시열은 바로 이 손적의 고사에서 어떤 이가 말했다는 ‘수이강’의 은유를 끌어 이경석을 비난한 것이다. 이경석이 불가피하게 삼전도비문을 쓴 것은 좋았지만 너무 청나라에게 아첨하는 글이었음을 강력하게 비난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경석이란 인물은 오랑캐에게 아첨한 대가로 ‘오래도록 편히 산(수이강)’ 조선판 손적이 아니냐는 것이다. 

송시열 영정.(국보 239호) 송시열은 이경석이 제아무리 임금의 명에 따라 할 수 없이 삼전도 비문을 지었다고 하지만 지나치게 오랑캐에 아부하는 글을 남긴 것이라 공격했다. 시대가 바뀌어 존명반청의 정책에 따라 북벌론을 계획하던 효종 이래의 시대상황을 반영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송시열이 너무 했다.”
 송시열의 사나운 공격은 당대 사대부 사회에서 엄청난 파장을 불렀다.
 사실 당시 송시열의 지위는 대단했다. 북벌론자인 효종의 신임을 받아 산림과 정계의 영수로서 정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때문에 누구도 쉽게 송시열을 두고 왈가왈부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대체적인 여론은 “송시열이 너무 심했다”는 것이었다. 송시열의 둘도 없는 ‘절친’인 송준길과, 송시열을 스승처럼 섬긴 이단상(1628~1669)조차도 “송시열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송시열은 강경했다. 그는 판서 송규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온 세상이 나를 원수보듯 한다. 심지어 송준길까지 놀랍고 한탄스럽다고 하니 다른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느냐.”
 송시열은 그러면서 이경석을 다시 한 번 후련하게 비난한다.
 “대체로 그 사람(경석)은 향원(鄕愿)의 마음가짐으로 청인(淸人·청나라 사람)의 세력을 끼고서 일생을 행세한다. 만일 경인년의 일이 아니라면 개도 그 똥을 먹지 않을 것이다.”
 ‘향원’이란 별 능력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관리를 뜻한다. ‘경인년’의 일이란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홀로 책임을 지고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된 효종 즉위년(1650년)의 일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능력도 없는 관리(이경석)가 외세(청나라)에 빌붙어 평생 호의호식했다는 것. 그나마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된 일이 없었다면 ‘개도 그의 똥을 먹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러나 이경석은 송시열의 사나운 비난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신의 상소가 송시열을 지목한 것도 아닌데 큰 오해를 한 모양”이라며 “그럼에도 공격을 받은 것은 제가 명확하게 상소내용을 밝히지 못한 탓”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것으로 ‘수이강’ 사건은 봉합되는 듯 했다. 그로부터 32년 뒤(1701년) 이경석은 세상을 떠났고, 송시열은 그 사이 명실상부한 서인의 영수로서 지위를 완전히 굳혔다.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 수락산 자락에 있는 박세당의 고택. 박세당은 이경석의 신도비를 쓰면서 이경석을 '봉황', 송시열을 '올빼미'로 비유함으로써 파문을 일으켰다. |경향신문 자료

 ■이경석은 봉황, 송시열은 올빼미
 그런데 1703년(숙종 29년) 4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또 벌어진다.  
 김창흡(김상헌의 손자)을 시작으로 관학유생 홍계적 등 180명이 소론의 박세당을 공격하는 연명소를 올린 것이다.
 이들은 “박세당이 고 이경석의 신도비문을 찬술하면서 송시열을 ‘올빼미(梟)’로 폄훼하고 이경석을 ‘봉황(鳳)’으로 치켜세웠다”면서 “이는 성인과 정인(송시열)을 엽신여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무슨 말인가. 박세당이 지은 이경석의 신도비문은 송시열을 겨냥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박세당은 우선 <서경>의 “노성(老成)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마라”는 구절과. <맹자>의 “상서(祥瑞)롭지 못한 보복은 어진 사람을 가리는(蔽賢) 것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그러니까 이경석을 ‘노성인(老成人)’으로, 송시열을 그런 노성인을 업신여기고 보복하는 ‘불상인(不祥人)’으로 폄훼한 것이다.
 박세당은 이경석의 인물과 생애를 총괄하는 비명(碑銘)을 이렇게 짓는다.
 “~함부로 거짓말을 하고 멋대로 속이는 것은(恣僞肆誕)/어느 세상에나 이름난 사람이 있는 법(世有聞人)/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梟鳳殊性)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네.(載怒載嗔)/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不善者惡)/군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君子何病).”
 제멋대로 성내고 꾸짖는 것은 올빼미, 즉 송시열이요. 착한 군자는 봉황, 즉 이경석이라는 소리였다.

이경석이 현종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궤장. 일흔살 이상의 명망 높은 노신에게 내리는 최고의 상급이다. |경기도박물관

 ■박세당이 지적하는 속좁은 송시열
 박세당은 송시열이 소인배임을 세가지 사례를 들어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먼저 송시열은 효종이 승하한 뒤 현종의 명으로 영릉(효종능)의 지문(誌文·죽은 자의 행적 등과 무덤의 위치 등을 적은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이 때 송시열은 <시경> ‘비풍(匪風)·하천(下泉)’의 내용을 포함시켰다. ‘비풍·하천’은 예전 주나라(중국)의 태평상대를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송시열은 청나라를 미워하고 옛 종주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에서 이 문구를 포함시킨 것이다. 그런데 현종은 송시열이 완성한 초고를 이경석에서 보이고 자문을 의뢰했다.
 그러자 이경석은 이 ‘비풍·하천’의 내용이 공연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현종도 이 대목에 고개를 끄덕이고, 송시열에게 삭제를 청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그러려면 전체 내용을 다 다시 쓰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현종은 송시열이 하도 고집을 피우자 “그러면 그냥 두라”고 포기해버렸다.
 이 때문에 송시열이 이경석에게 앙심을 품었다는 것이다.
 “공(이경석)이 송준길의 말을 듣고 송시열의 정적인 윤선도의 위리안치를 풀어준 것도 꼽을 수 있다. 또 송시열이 공(이경석)의 집안과 혼사를 청했지만 성사되지 못한 것 등도 있다. 이 때문에 송시열의 노여움과 의심이 쌓인 것이다.”(박세당의 <서계집>)   

   

 ■“송시열은 춘추대의에 따른 것일 뿐”
 송시열의 추종자들은 앙앙불락했다.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은 총공세에 나섰다. 홍계적 등 180명의 연명소에서 “송시열이 이경석을 풍자한 것은 주자와 춘추대의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청나라 오랑캐가 우리를 속국으로 만들었는데, 이경석은 뜻을 다해 찬양했습니다. 반면 송시열은 <춘추>의 대의에 따라 효종대왕(의 북벌론)에게 몸을 바쳤습니다. 주자의 의리를 인용하여 경계(警戒)를 남긴 것입니다.”(<숙종실록> 1703년 4월 17일)
 물론 박세당의 소론 측과 이경석의 손자인 이하성 등도 가만 있지는 않았다.
 이들은 “현종 임금도 이경석을 두고 백관의 모범으로서 상서로운 봉황과 기린이라 칭했다”면서 “이경석을 봉황으로 우러른 이는 박세당이 먼저가 아니라 현종 임금이 먼저”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이 사태는 집권당으로 공론을 주도하던 노론의 완승으로 끝났다. 
 숙종은 결국 노론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숙종은 “박세당이 작성한 이경석 신도문은 물론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까지 수거해서 조목조목 뜯어본 뒤 이를 반박하는 변파문(辨破文)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런 다음 “문제의 저작들을 모두 불구덩이에 쳐넣으라”는 특명까지 내린다. 조선판 분서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신이 이경석이었다면…
 이쯤해서 헛된 질문을 해본다.
 이경석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것인가. 1703년(숙종 29년) 이경석의 손자 이하성이 할아버지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자 실록을 쓴 사관은 이렇게 논평했다.
 “이경석이 비문을 지은 것은 마지못해 한 일이다. 그러나 뜻을 다해 포장해서 오랑캐의 공덕을 칭송하고…. 어찌 만세의 청의(請議·깨끗한 언론)에 죄를 얻지 않겠는가. 이것은 이경석에게 일생의 오점이 되었다.”(<숙종실록> 1703년 5월 21일)
 나라를 위해 억지로 햇다지만 너무 청나라에 과공비례(過恭非禮)했다는 것이다. 좀 적당히 하지 그랬냐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경석의 한탄이 들리는 듯 하다. “그런 어쩌란 말이냐”는…. 임금이 ‘나라의 존망이 그대에게 달려 있다’고 신신당부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경석은 누구처럼 칭병을 해서라도, 또 누구처럼 일부러 엉망으로 글을 지어서라도 피했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지금 이 순간까지 따라붙고 있는 삼전도비문의 저자라는 오명에서 자유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다. 이경석이 아니더라도 어느 누가 악역을 담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 또한 이경석처럼 오점을 남겼을 터이고….
 그러다면 이경석을 죽일 듯 비난한 송시열은 승자인가. 아니었다. 그에게 쏠리는 시선도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송시열이 이경석을 비난하는 기사를 기록할 때마다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싫으면 쓰지 않으면 될 것을 굳이 쓰면서 손적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이름도 쓰지 않고 ‘수이강’이라고만 써서 기롱 폄하했으니…. 이 또한 정인길사(正人吉士·마음이 바르고 올곶은 선비)의 마음 씀씀이겠는가.”(<현종실록> 1668년 11월 27일)      
 “송시열이 너무 각박하게 (이경석을) 배척하니 논자들이 병처럼 여겼다.”(<현종실록> 1669년 4월14일)
 결과적으로 ‘삼전도 비문’을 둘러싼 논쟁은 모두가 패배자인 상처 뿐인 전쟁으로 끝난 것이다. 일부 후세의 학자들은 이렇게 포장한다.
 삼전도비문을 둘러싼 시비를 매우 심오하게 보는 측면도 있다는 것. 즉 개인적인 싸움이라기 보다는 병자호란 이후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사회질서를 반영하는 이념투쟁이라는 것.
 굴욕적인 강화를 맺어야 했던 인조 시대를 지나, 존명반청 정책에 북벌론까지 대두되는 효종 시대를 지나면서 사회분위기가 매우 바뀌었다는 것.
 삼전도 비문 논쟁은 그 와중에서 벌어진 정론대립이었다는 것. 따라서 이경석과 송시열, 두 사람 모두 탓할 수 없다는 것. 뭐 이런 평가다. 과연 그런 심오한 뜻이 있었던 것인가.

 (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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