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 캐스트 14회는 세종대왕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만고의 성군’이나 ‘해동의 요순’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감히 ‘세종은 성군이 아니었다’는 주제로 이야기할까 합니다.
 물론 세종대왕의 업적은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 백성을 긍휼히 생각하는 세종의 마음씨 역시 실록에 나와있는 그대로입니다. 죄인들의 귀휴제도를 만들었고, 관노비들의 출산휴가를 늘렸으며, 심지어는 그 남편들에게도 출산휴가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상상이나 하십니까. 세종시대에 관노비의 남편에게 30일 간의 출산·육아휴가를 주었다는 사실을…. 더욱이 형을 살고 있는 죄인들의 목욕관리까지 신경을 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세종대왕의 치세에 가려진 반전의 역사도 있습니다. 그 시대에 있었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다른 것도 아닌, ‘실록’을 중심으로 풀어가려 합니다.
 세종의 시대에 집행을 기다리던 사형수가 190명에 달했으며, 그 시대에 도적이 들끓어 내탕고와 봉상시까지 털렸다는 이야기, 그래서 도둑의 발뒤꿈치 근육을 자르는 이른바 ‘단근형’의 형벌을 채택했다는 사실….
 무엇보다 혹형 중의 혹형이라는 능지처사의 형벌이 세종시대에 가장 많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실록>을 뒤져보니 무려 60명이 능지처사로 죽었답니다. 이들 대부분은 부모, 자식이나 주인을 죽인 죄, 즉 강상죄를 범한 이들이었습니다.
 효를 최고덕목으로 여기는 유교사회였기에 그럴 수도 있었다구요. 하지만 세종임금이 누구입니까. 만고의 성군이 아닙니까. 심지어 참혹한 고문 끝에 허위자백까지 받아낸 뒤 능지처사의 처벌을 내린 케이스도 있었습니다.
 세종시대에 이 무슨 해괴한 일이었을까요. 팟캐스트 14회가 전합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관련포스팅

 세종대왕은 '해동의 요순'이 아니었다.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08 관련글 쓰기

 “사람들이 우러러 ‘어진 재상(賢宰相)’이라 했다. 관후하고 침중했으며, 집을 다스림에도 검소하고….”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다.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랐다. 정권(政權)을 오랫동안 잡고 있어서 자못 청렴하지 못하다(頗有보궤之초)는 비난을 받았다.”
 둘 다 1452년(문종 2년) 2월 8일 <문종실록>에 등장하는 황희 정승의 졸기(卒記·부음기사)이다.
 완전히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보통의 부음기사(obituary)를 보면 그 사람의 생애를 잔뜩 상찬해놓고는 말미에 ‘그러나’라는 토를 달아 아쉬운 행적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졸기와는 경우가 다르다.  

황희 정승의 초상화. 황희는 어진 재상이라는 찬사와 함께 몇가지 흠결을 함께 지적당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황희는 태종과 세종 시대의 명재상이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황희는 제가(齊家)에 소홀했다
 주인공이 다름아닌 청백리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황희 정승이 아니신가. 졸기를 보면 “황희의 홍안백발을 보면 마치 신선 같았다”며 한없는 존경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다음의 기사가 마음에 걸린다.
 “처형들인 양수와 양치가 불법행위로 적발되자 황희는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하다’는 변명의 글을 올렸다. 또 황중생이라는 사람을 서자(庶子)로 삼아 집안에 드나들게 하다가, 황중생이 죽을 죄를 짓자 ‘자기 아들이 아니다’라 하고 성(姓)까지 조(趙)라 했다. 이를 두고 애석해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또 있었다. 부음기사는 ‘황희가 몰수 당한 아들(황치신·황보신)의 과전을 자신의 과전으로 바꾸게 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린 사실’도 문제삼고 있다. 무슨 말이냐. 1441년(세종 27년) 황희의 둘째아들인 황보신이 죄를 지어 과전(科田·국가가 지급한 전토)을 몰수 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 때 장남인 황치신이 나서 물수당할 동생(황보신)의 비옥한 밭과 자신의 척박한 밭(과전)을 맞바꿨다. 이 때 사헌부와 사간원이 벌떼처럼 나서 황씨 형제를 탄핵했다. 그런데 아버지인 황희가 나서 “그렇다면 저(황희)의 과전과 (몰수 당한) 자식의 과전을 맞바꿔달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황희의 상소는 가납됐다.
 그러자 대간들은 “죄지은 아들에게 몰수한 땅을 그 아버지에게 준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앙앙불락했다. 물론 세종은 황희의 손을 들어주었다. 황희의 졸기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면서 황희가 제가(齊家)에 소홀했다는 혹독한 인물평을 한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황희 졸기의 인물평은 그저 양념거리에 불과하다.
 조선 최고의 청백리 정승으로 알려진 황희를 둘러싼 엄청난 논란은 세종~단종 때까지 3대에 걸쳐 이어졌다. 황희 정승을 둘러싼 논란의 허실과, 그것이 주는 함의를 함께 이야기해보자.

 

 ■황희는 ‘황금대사헌’이었다
 ‘응 이게 뭐지?’
 황희 정승이 죽은 뒤 5개월이 지난 1452년(단종 즉위년) 7월 4일이었다.
 <세종실록>을 편찬하려고 세종 시대에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史草)를 들춰보던 지춘추관사 정인지의 시선이 멈췄다.
 세종 때의 사관 이호문이 ‘황희 정승’을 주제로 쓴 사초였다. 사초를 읽어본 정인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이건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야.’      
 정인지는 영관사(춘추관장)인 황보인과 감관사(부관장)인 김종서 등 실록 편찬책임자 및 실무자들을 긴급소집했다.
 “이건 아니에요. 이호문의 사초는 감정에 치우치고 근거가 없는 것 같아요. 여러 사람과 의논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이들은 이호문의 사초를 조목조목 분석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초 내용 중 맞는 부분도 있었다.
 “황희가 아버지(황군서)의 얼자(孼子·첩의 아들)라는 내용은 맞아요. 황희 또한 ‘난 정실의 아들이 아니다’라 했으니까. 그렇지만 나머지는 듣도 보도 못한 내용들입니다.”
 그랬다. 이호문의 사초를 살펴보면 ‘어진 정승’이라는 황희 정승의 명성이 무색하다. 무시무시한 내용으로 가득 차있다.
 “황희는 대사헌이 되어 승려 설우에게서 황금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이 ‘황금대사헌’이라 했다.”
 대사헌이 어떤 자리인가.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감시 적발하고 추상같은 처벌을 내리며, 임금의 잘잘못을 두고도 엄정한 시비를 가리는 사정기관(사헌부)의 수장이 아닌가. 그런 사람이 황금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황금대사헌’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니….

 

 ■고구마 줄기처럼 나오는 황희의 비리
 그 뿐이 아니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참수당한) 난신 박포의 아내가 죽산현에 살면서 종과 간통했다. 간통 사실이 우두머리 종에게 발각되자 박포의 아내는 그 우두머리 종을 죽여 연못 속에 집어넣었다. 한참 후 부패된 시체가 떠오르자 수사가 시작됐다. 박포의 아내는 발각될까 두려와 한양에 올라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살았다. 이 때 황희가 박씨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박포의 아내는 ‘일이 무사히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이 무슨 말인가. 다른 이도 아닌 황희 정승이 궁지에 몰린 역적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 뿐인가.
 “~황희는 여러 해 동안 매관매직을 하고 형옥(刑獄)을 팔아 뇌물을 받았다. ~그의 심술(心術)은 바르지 아니하며 혹시 자기에게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몰래 중상했다.”
 이호문의 사초 내용 가운데는 움직일 수 없는 ‘팩트’가 있었다. 예컨대 당시 파주 동파역의 역리인 박용은 이른바 원악리(元惡吏·악질적인 지방 하급관리)였다. 그런데 이 악질 하급관리가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와 싸움이 붙었을 때 “내가 서울의 재상들을 얼마나 많이 아는 줄 아느냐”고 위세를 떨었다.
 결국 경기감사는 이 무도한 박용을 구속시켰다. 이 사건은 결국 뇌물 스캔들로 번졌다. 조사결과 당시 좌의정 황희와 대제학 오승, 도총제 권희달, 도총제 이순몽 등이 연루됐다. 1428년(세종 10년)의 실록을 보라.
 “박용의 아들 박천기를 잡아 문초했다. 박천기는 ‘황희에게 말(馬) 1필을 뇌물로 주었고 잔치를 베풀었으며, 오승·권희달에게 말 1 필, 이순몽에게 소 1두를 주었다.’고 진술했다. 황희는 말 1필과 술대접을 받고 뇌물을 준 지방관리를 변호하는 편지 1통을 전달했으며….”
 사간원·사헌부 소속 대간들은 “황희는 수상으로서 ‘잘 봐달라’는 청탁편지를 써주었으니 탄핵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종은 “뜬 소문으로 어찌 탄핵하느냐”고 황희를 변호했다. 문제의 사관 이호문은 사초를 쓰면서 “황희는 수상(首相)으로서 몰래 뇌물을 받고 죄를 풀어주고자 청탁했으니 지조(志操)가 비루하다”고 꼬집었다.

경기 파주에 있는 황희 정승의 묘. 황희정승이 죽자 문종 임금이 장삿날에 친히 파주로 행차했다고 한다.

 ■“황희 정승이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러나 정인지 등 <세종실록> 편수관들은 ‘황금대사헌’ 운운 내용과 박포의 아내 사건은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겼다. 편수관 허후가 황희를 변호했다.
 “‘황금대사헌’이라는 비난은 좀…. 이호문의 사초를 보면 사람들이 황희를 ‘황금대사헌이라 일컬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일컬었다’는데 왜 여기에 모인 8~9명이 한결같이 모른다는 말입니까.”
 허후는 “황희가 재상이 된 지 30년이 다 됐지만 탐오하다는 이름이 없는데 어찌 사람을 중상하고 관작을 팔아먹고 옥사에 뇌물을 받아 부자가 되었다고 하는 지 모르겠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이호문이 나의 친족이지만 원래 사람됨이 조급하고 망령되어 그의 말을 다 취할 수 없다”면서 “사초를 삭제하는게 좋겠다”는 의견을 낸다.
 김종서는 “박씨 사건은 사생활 공간의 은밀한 일이므로 그 진실을 알 수 없지만 다른 일들은 (30년간 황희를 지켜본) 우리가 모를 수 없다”며 황희를 변호한다. 편수관들은 두 사람의 의견에 공감하면서 “예나 지금이나 사필(史筆)은 다 믿을 수 없는 것”이라며 사관들의 행태를 한 목소리로 성토한다.
 “만일 사관 한 사람이 사감(私感)을 갖고 사서를 쓴다면 천만세가 지나도 고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특히 정인지는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도 고치지 않는다면 직필(直筆)이라 할 수 없다”고 사초 삭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황보인은 신중론을 제기한다.
 “이것은 큰 일입니다. 가벼이 결정할 수 없어요. 마땅히 중론을 모아서 결정해야 합니다.”
 이호문을 한 목소리로 성토하던 최항과 정창손이 신중론에 가세한다.
 “명백하게 틀린 내용이라 삭제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사초를 삭제하는 실마리를 열어놓으면 말류(末流·말세)의 폐단을 막기 힘듭니다. 경솔하게 고칠 수 없습니다.”
 황보인이 논란을 잠재우는 마무리 발언을 한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큰 일은 한사람이라도 안된다고 하면 반드시 정법을 따라야 합니다. 따라서 삭제하지 않아야 합니다.”


 ■끝내 지우지 못한 오점
 이 ‘황희의 스캔들’을 두고 최근 갖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우선 ‘박씨 아내 사건’과 ‘황금대사헌 사건’ 등 갖가지 의혹들의 정확한 진실은 ‘모른다’는 것이다.
 즉 정인지·김종서·황보인 등 황희와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사람들조차 “우리가 모르는 일을 사관 이호문이 어찌 알겠는가”라고 고개를 갸웃거렸으니까. 그들의 말대로 이호문의 ‘사감(私感)’이 작용해서 그런 엄청난 스캔들이 허위 혹은 과장되게 사초에 기록됐는 지도 모르는 일이다.
 1452년 2월 8일자 <문종실록>에 기재된 ‘황희 졸기’에는 ‘박씨 사건’과 ‘황금대사헌 운운’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졸기’에도 “황희가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으며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불법 행위를 저질러 압수 당한 아들과 과전을 자신의 과전을 바꾼 이야기. 처형들의 불법행위를 변명한 일, 중죄인이 된 서자(庶子)의 성(姓)을 바꾼 일 등을 예로 들었다.

황희 정승이 말년에 여생을 보낸 파주 반구정.

 ■황희 정승이었다면…
 필자는 황희 논란을 둘러싼 실록 기사들을 살펴보면서 한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읽을 수 있었다.
 <세종실록>의 편찬자들이 황희 스캔들을 기록한 이호문의 사초를 ‘사감에 의한 허위·과장’이라 판단했음에도 끝내 삭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인지 등이 “사실이 아니니 당연히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편수관들의 의견이 ‘삭제’ ‘수정’ 쪽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결국 ‘사초를 삭제하는 선례를 만들면 말세의 폐단이 생기고, 그것은 정법(正法)이 아니라’는 의견들이 힘을 받았다. 물론 이호문의 사초가 과장 혹은 허위라면 황희 정승으로서는 천추에 길이남을 오욕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 하지만 <세종실록>의 편찬자들은 사관의 붓은 그 어느 누구도 꺾을 수 없다는 교훈을 후손들에게 알려주었다.
 비단 그들 뿐인가. 태종 때의 사관 민인생은 “사관은 과인의 공간인 편전에 들어오지 마라”는 엄명을 내리자 “신의 위에는 하늘이 지켜보고 있다”고 응수했다.(1401년) 3년 뒤 노루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진 태종이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는 밀명을 내렸지만, 사관은 “모르게 하라”는 임금의 밀명까지 고스란히 사초에 적었다.
 1735년 영조가 대신들과의 밤샘 밀담을 기록한 사초를 불태우자 전직 사관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사관이 된 자는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어도 사필은 굽힐 수 없다.(頭可斷 筆不可斷)’는 말이 있습니다. 장차 무궁한 폐단을 열게 될 것입니다.”
 필자는 황희 정승 스스로 이호문의 사초가 과장·허위라고 여겼을지언정 그것을 삭제·수정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1438년(세종 20년) 세종 임금이 편찬을 마친 선왕의 실록, 즉 <태종실록>을 보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하자 황희는 얼굴색을 바꾸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서를 보는 관례를 만들면 후세에 그른 일을 옳게 꾸미고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려 할 겁니다. 사관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고…. 천년 뒤에는 무엇을 믿겠습니까.”

 이기환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07 관련글 쓰기

 오리무중(五里霧中), 이합집산(離合集散), 우왕좌왕(右往左往)….
 교수신문이 2001~2003년까지 내놓은 사자성어를 보라. 이렇게 알아듣기 쉬웠다.
 대통령 탄핵과 수도 이전 등의 대형 이슈가 터진 2004년의 ‘당동벌이(黨同伐異·같은 패끼리 모이고 다른 패를 공격한다)’는 그래도 촌철살인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였다. 교수신문은 2006년부터 새해 벽두부터 그 해의 ‘희망의 사자성어’도 선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갈수록 선정된 사자성어가 어려워졌다.

전국을 순행중이던 진시황이 급서하자 중거부령과 부새령을 겸했던 환관 조고가 바삐 움직였다. 황제의 유서를 조작해서 진시황의 막내아들 호해를 후계자로 옹립한 뒤 국정을 농단햇다. 그는 특히 궁궐의 출입을 관리 통제하는 낭중령에 올라 황제와 신하들의 소통을 끊고 마음껏 조정을 주물렀다.  

 ■정반대의 사자성어
 심지어는 난해한 <주역>에서 찾아낸 밀운불우(2007년 연말·密雲不雨·하늘에 구름만 빽빽할 뿐 비가 내리지 않음)에서 심오한 불교의 용어(2014년 연초·전미개오·轉迷開悟·번뇌로 인한 미혹에서 벗어나 열반을 깨닫는 마음에 이름)까지 등장했다. 교수들이 지적 허영심에 빠져, 혹은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가 쓸데없이 어려운 사자성어를 찾아낸다는 비판이 일었다. 필자 역시 그 지적에 동의했다.
 그런데 최근 교수신문의 연초·연말 사자성어를 비교해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교수들의 고민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들은 해마다 연초에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사자성어를 찾느라 고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연말에 한 해를 정리하는 ‘올해의 사자성어’를 찾는 것이리라. 연초 ‘희망의 사자성어’에 부합되는 글귀는 한 차례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연초와 정반대의 성어를 찾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나쁜 사자성어만을 일일이 찾는다는 것도 고역일게다. 예컨대 2007년 ‘내 탓이오’를 외치며 시작하라는 뜻에서 ‘반구저기(反求諸己)’를 희망했지만, 결국 자기기인(自欺欺人·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임)으로 끝났다.
 ‘세상이 잘 다스려지기(光風霽月)’를 희구했던 2008년은 결국 ‘호질기의(護疾忌醫)’, 즉 ‘자신의 결점을 숨기고 남의 잘못을 드러냄’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2009년은 ‘남과 화합하되 의(義)를 굽히지 마라’는 뜻에서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바랐지만 연말의 사자성어는 ‘방기곡경(旁岐曲徑)’이었다. ‘샛길과 굽은 길로만 갔다’는 것이다. 

 

 ■전미개오에서 지록위마로
 이후 2010~2013년 연초의 희망들은 강구연월(康衢煙月·태평성대), 민귀군경(民貴君輕·백성이 귀하고 임금은 가볍다). 파사현정(破邪顯正·잘못을 깨뜨리고 바른 것을 드러냄), 제구포신(除舊布新·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 것을 펼침) 등 좋은 사자성어는 죄다 모아놓았다. 하지만 연말의 사자성어는 장두노미(藏頭露尾·진실을 감추려 하지만 결국 꼬리가 드러남), 엄이도종(掩耳盜鐘·귀를 닫아버림)과 거세개탁(擧世皆濁·온세상이 탁함), 도행역시(倒行逆施·순리를 거스름)이었다. 어찌 그렇게 반대로만 됐는지 모르겠다. 지난해에도 마찬가지였다. 연초에 전미개오(轉迷開悟)의 희망에서 시작됐지만 결국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로 끝났으니 말이다. 그러고보니 ‘교수님들이’ 오랜만에 귀에 쏙쏙 들어오는 성어를 택했다. 군주의 측근에서 국정을 농단한다는 측면이라면 ‘대통령 측근들의 국정개입 논란’을 가리키고, 진실 호도의 측면에서 보면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의 대처방식을 꼬집는 것이니 말이다.

 

 ■환관 조고의 세가지 직책
 사실 지록위마의 뜻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진나라 황제(진이세)의 최측근인 환관 조고가 자신의 권세를 가늠하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우겼다’는 사자성어다. 황제는 당연히 “이게 무슨 말(馬)이냐”고 했지만 ‘대신들 대부분’은 조고의 위세에 눌려 ‘말’이라 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한꺼풀 더 벗겨보기로 한다.
 진시황이 전국 순행 중 급서했을 때(기원전 210년) 조고의 직책은 부새령(符璽令)과 중거부령(中車府令)이었다. 부새령은 황제의 옥새를, 중거부령은 황제의 마차를 관리했던 직책이었다. 조고는 ‘부새령’의 직책으로는 황제의 유서를 조작해서 만만한 후계자(호해)를 황제에 올렸다. ‘중거부령’의 직책으로는 썩어가는 황제의 시신을 어가에 담아 수도(함양)까지 극비리에 옮겼다. 진이세(호해)가 등극했을 때 조고는 딱 한가지의 직책만 차지했다. 바로 낭중령(郎中令)이었다.
 ‘낭중령’은 대궐의 문호, 즉 대신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직책이었다. 그야말로 구중궁궐의 문고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것은 권력의 문고리였다. 조고는 황제에게 “황제가 조정에서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면 폐하의 단점만 보일 뿐”이라며 “궁궐 안에 가만히 계시라”고 한다. 조고의 허락없이는 그 누구도 황제를 만날 수 없었다. 국정은 조고의 수중에 떨어졌다.
 ‘지록위마’의 고사는 이 때 나왔다. 조고의 이간질로 황제와 신하들 간의 소통은 막혔다. 승상(총리) 이사가 “조고가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고 황제에게 피를 토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황제는 “그렇게 청렴하고 부지런한 사람을 의심하느냐”고 질책했다. 이사는 도리어 허리가 잘리는 요참형으로 죽었다. 황제는 아방궁 공사를 반대하는 여론에는 “천하를 소유한 황제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 외쳤다. 사람들은 “황제가 사람의 머리로 짐승소리를 한다.(人頭畜鳴)”고 혀를 찼다.  진나라는 조고가 이세 황제를 궁궐에 두고 국정을 농단한 지 4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폐하는 걸주와 같은 군주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지록위마’ 고사의 전말인데, 이 또한 ‘2014년의 한자성어’로 부합되는 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말이 나온 김에 고사를 하나 더 인용해보자. 한나라 고조 유방이 애첩인 척희를 희롱하다가 측근인 주창에게 “나는 어떤 군주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창은 “폐하는 걸주와 같은 폭군입니다.”라 외쳤다. 말을 심하게 더듬었던 주창은 “척희의 아들을 태자로 삼겠다”는 황제 앞에서 얼굴을 붉히면서 “기, 기, 기어코 그 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期期期知其不可)”라 소리쳤다.  하나 더. 한나라 경제 때 낭중령이었던 주인(周仁)은 황제의 침실을 지킬 정도의 최측근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조정대신의 인물평을 물을 때마다 절대 입밖에 내지 않고 “폐하께서 친히 살피시라”로 했단다. 같은 낭중령이라도 조고와 주인은 그렇게 달랐다. 각설하고 교수신문은 2015년 ‘희망의 사자성어’로 ‘정본청원(正本淸源)’을 택했다고 한다. 근본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니 올해 역시 ‘희망사항’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2015년을 마무리할 ‘올해의 사자성어’는 어떨까. 태평성대, 고복격양…. 그것도 아니라면 ‘말더듬이’ 주창이 외쳤다는 ‘걸주지주(桀紂之主)’는 혹 어떨까. 그런 ‘돌직구 직언’이 있다면 그 또한 제대로 돌아가는 조정이 됐다는 뜻이 아닌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06 관련글 쓰기

 <흔적의 역사> 팟 캐스트 12회는 ‘고려·조선판 4대강 공사가 남긴 교훈’입니다.
 고려·조선에 무슨 4대강 공사냐구요. 물론 4대강 공사를 벌인 것은 아니고, 4대강 공사의 과정을 쏙 빼닮은,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다른 국책사업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운하공사입니다. 

고려·조선 때 국가재정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는 바로 세곡(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서울(개경 혹은 한양)으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던 육로로는 어려운 일이었기에 주로 해로, 즉 조운선을 이용해서 옮겼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고려·조선 때 안흥량으로 일컬어졌던 지역, 즉 지금의 충청도 태안 앞바다가 가장 큰 고비였습니다. 안흥량 해역은 물살이 험하기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조운선들이 번번이 침몰하고 선원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미곡이 적게는 수백석에서 많게는 1만석까지 수장되는 등 큰 낭패를 겪었습니다. 예컨대 1403년(태종 3년)에는 조운선 34척과 선원 1000여 명, 쌀 1만석이 수장되는 엄청난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조선판 세월호 사건’이라 일컬을 만한 사건입니다.
 이같은 사고가 고려시대에도 빈발했을 겁니다. 그러자 고려 인종 때인 1134년 지금의 태안 지역에 운하를 뚫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고, 급기야 운하공사가 시작됐습니다. 지금의 천수만~가로림만을 뚫는 공사였습니다.
 그러나 이 공사는 화강암 암반층과 조수간만의 차이에 따른 여러가지 문제에 부딪쳐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운하공사는 결코 포기되지 않았습니다. 조선 태종 때 책사 하륜은 일종의 갑문식 공법이라는 당시로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형적인 탁상공론이었습니다. 현장에 답사했던 사람들마다 “공사구역이 단단한 돌로 이뤄졌기 때문에 공사가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냈는데 공사는 강행됩니다.
 태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던 하륜의 계책이라 어느 누구도 공사반대를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했던 겁니다.
 결국 10여 일이라는 그야말로 속도전을 방불케하는 단기간의 공사가 끝났습니다. 그러나 금세 이 공사가 무리한 공사였음이 드러났습니다. 실록을 보면 “헛되이 백성의 힘을 썼을 뿐 조운은 통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답니다.
 자 그렇다면 하륜의 계책은 왜 실패했을까요. 그리고 이 운하공사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2회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요.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05 관련글 쓰기

 사춘기 소년·소녀의 3대3 미팅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해서는 안되고, 절대 이뤄질 수도 없는 ‘금지된 사랑’이었다.
 소년 소녀들은 꽃피는 춘사월의 풋사랑에 젖은 대가로 목이 잘릴 위기에 빠졌다. 죽음을 무릅 쓴 풋사랑의 잔인한 역사를 <단종실록>을 토대로 각색해보자. 때는 바야흐로 1453년(단종 1년) 4월 14일이었다. 

말기의 제조상궁. 제조상궁은 궁녀조직의 최고권력자였다. 당상관 이상의 월급을 받았고, 심부름하는 하녀와 옷 짓는 침모까지 배정받았다.

■궁중 소년 소녀들의 3대 3미팅
 방자(房子·심부름 궁녀)인 중비가 소천시(어린 별감) 부귀에게 연모의 정을 품었다.
 중비나 부귀는 아마도 15~16세가 될 듯 말 듯한 소년·소녀들이었음이 틀림없다. 궁녀와 내시, 별감은 주지하다시피 액정서(왕과 왕족의 명령 전달, 알현 안내, 문방구 관리 등을 관장하던 관서)에서 근무하는 직책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별감은 천민신분이지만 액정서의 경비를 맡은 젊은 남성들이었다. 궁녀와 허구헌날 근무하다보면 정분이 날 수도 있었다.   
 그 때 중비가 먼저 부귀에게 다가갔다.
 “붓을 좀 구해주시면 안되나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어린 별감 부귀가 꽤나 당황했던 모양이다. 주저주저하면서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다음에 갖다 드리면 안되겠습니까.”
 어린 소녀 중비의 가슴이 얼마나 설렜을까. 중비는 동료인 자금·가지 등 두 소녀와 함께 시녀 월계의 방을 찾아갔다. 부귀에게 연애편지를 쓰려 했지만 글을 몰랐기 때문에 월계에게 부탁하러 간 것이다. 시녀에게 불러준 연애편지의 내용을 보라.
 “어찌해서 어제 보내주겠다고 한 붓은 보내지 않습니까. 대궐이 지금은 넓고 적막합니다. 서로 만나면 어떻습니까.”
 비단 중비 뿐이 아니었다. 함께 간 자금과 가지도 평소 마음에 품고 있던 소천시(어린 별감) 둘에게 연애편지를 썼다.  이렇게 해서 어린 궁녀 3명(중비·자금·가지)과 어린 별감 3명(부귀·수부이·함로)의 3대3 풋사랑이 시작됐다.

 

 ■금지된 풋사랑의 결말
 중비와 부귀가 단체미팅의 주선자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금지된 연애였다. 알다시피 궁녀의 유일한 남자는 다름아닌 임금, 즉 단종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궁녀는 왕의 여자일 뿐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년 소녀들은 풋사랑에 눈이 멀어 있었다.
 편지를 전달한 메신저는 복덕이라는 궁녀가 맡았다. 아마도 복덕은 편지를 전해주면서 글을 모르는 소녀들에게 가슴 떨리는 소년들의 편지를 읽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불장난은 곧 들통이 났다.
 묘단이라는 나인이 감찰상궁에게 연애사실을 고한 것이다.
 지금의 경찰 격인 의금부가 즉각 수사에 나섰다. 임금의 여인(궁녀)들 가운데서도 가장 하층계급인 방자(궁중의 심부름꾼)의 신분이었지만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의금부는 대질심문 등을 통해 철저한 수사를 거쳤다면서 관련자들을 엄벌에 처할 것을 주청한다. 즉 피의자 신분이 된 궁녀와 별감 6명 모두에게 ‘부대시(不待時) 참형’이라는 극형을 내린 것이다. 또 언문편지를 전달하고 읽어주기까지 한 방자 복덕은 ‘곤장 100대와 유배 3000리’의 형을 내렸다.(<단종실록> 1453년 5월 8일)
 그야말로 서슬퍼런 처벌이었다.

조선 말기 조선황실의 궁녀와 일본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부인들이 찍은 사진. 

 ■죽음은 면했다지만…
 아무리 임금의 여인들이 한 눈 한 번 팔았다지만 어린 소년 소녀에게 너무 가혹한 처벌이 아닌가.
 하지만 조선의 법전인 <속대전>을 보라.
 “궁녀가 밖의 사람과 간통하면 남녀는 모두 즉시 참수한다.(不待時) 임신한 자는 출산을 기다렸다가 형을 집행한다. 출산 이후 100일을 기다렸다가 집행하는 예를 따르지 않고 즉시 집행한다.”(속대전)
 그러니까 왕의 여자인 궁녀가 간통하면 모반대역죄와 같은 무시무시한 죄목으로 처단됐다. 조선의 사형집행은 가을에 이뤄졌는데, 간통한 궁녀와 그 상대 남성은 부대시(不待時), 즉 가을까지 기다리지 않고 즉시 처형됐다.
 원래 임신한 여성은 아기를 낳은 뒤 아기에게 젖을 물릴 시간(100일)을 주고 사형집행이 이뤄졌다. 하지만 간통으로 임신 출산한 여성은 그런 유예기간 없이 바로 처형됐다.
 그렇다면 3대3 만남을 지속한 어린 궁녀 3명(중비·자금·가지)과 어린 별감 3명(부귀·수부이·함로)의 연애사건을 보자.
 실록을 읽어보면 이들이 만나 데이트만 나눴을 뿐 실제로 정을 통했다는 증거는 없다.
 “묘단의 진술을 보면 남녀들이 가깝게 지낸다고 고했을 뿐이고, 궁녀들이 바깥에 나간 적이 없었다고 한다.”(<단종실록>)
 따라서 이들이 소년·소녀의 풋사랑을 나눴을지언정 간통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대시 처형’은 과잉처벌이었다.
 결국 임금의 최종판결만 남았다.
 11살의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 단종 역시 어린 소녀·소녀들의 처지에 측은지심을 갖고 있었을까.
 임금은 소년·소녀들에게 내린 참형의 극형을 경감시키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들의 형벌에서 각각 1등씩 감해주어라. 곤장을 때린 후에 별감들(수부이·부귀·함로)은 함길도 부령의 관노로 평생 소속시켜라. 궁녀들(중비·자금·가지)은 평안도 강계의 관비로 영원히 소속시켜라.”(<단종실록>)

 

 ■궁녀와 환관의 ‘슬픈 언약식’
 이들은 용케 살아남았지만 사랑했다는 죄목으로 목이 잘리는 비참하고 슬픈 사랑의 이야기들도 넘쳐난다.
 세종 연간의 궁녀 내은이(內隱伊)와 환관 손생(孫生)의 ‘슬픈 언약식’을 보라.
 1425년(세종 7년) 12월 10일 환관 손생과 궁녀 내은이가 참수형을 당했다. 시리도록 가슴 아픈 사연이다. 
 “내은이가 임금이 쓰던 ‘푸른 옥관자(망건에 다는 작은 옥고리)’를 훔쳐서 환관 손생에게 주고 서로 언약을 했다.”
 이틀 뒤 의금부가 이 사건을 수사한 뒤 손생과 내은이 모두에게 참형이라는 극형을 내린다. 임금의 여자가 바람을, 그것도 환관과 피웠고, 게다가 임금의 물건을 훔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만고의 성군이자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의 최종판결이 너무도 안타깝다. 세종은 “법대로 하라”며 “두 남녀에게 참형에 처하라”고 명한 것이다. 궁궐 내의 기강을 철저히 세운다는 세종의 ‘법대로’ 원칙은 존중하겠지만…. 그래도 세종대왕이 아닌가.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씨는 다 어디에 간 것인가.   

1966년 순종의 부인인 순종효황후 윤씨가 낙선재에서 서거하자 황실의 궁녀들이 오열하고 있다. 

 

 ■형부를 사랑한 궁녀
 1667년(현종 8년) 5월 20일 궁녀 귀열이 참수형의 극형을 받았다.
 왕대비전의 궁녀였던 귀열은 그만 자신의 형부인 서리(書吏) 이흥윤과 몰래 간통했다.
 덜컥 임신까지 했다. 이 사건이 발각되자 임금(현종)이 은밀하게 내수사(왕실을 재산을 관리하던 관청)에 가두라고 명했다. 이윽고 달이 차서 아기를 낳자 형조는 귀열을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아뢴다. 그러나 현종은 “무슨 소리야”면서 “참형에 처하고, 즉각 집행하라”는 추상같은 명을 내린다.
 형조와 사간원 관리들이 나서 선처를 요구했지만 현종은 “있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는데 무슨 선처냐”고 고집을 피웠다. 귀열은 형부를 사랑한 죄로 참형을 당한 것이다.

 

    ■짝사랑 연애편지의 비극
 ‘사랑이 죄’였고, 그 때문에 결국 교수형을 당한 궁녀 덕중의 슬픈 사연도 있다.
 궁녀 덕중은 세조가 수양대군이던 시절 대군의 아이까지 낳았던 여인이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후궁으로 들여 소용(昭容·정3품의 후궁 품계. 빈·귀인·소의·숙위에 이어 5번째)이 되었다. 그런데 세조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죽고 말았다.
 아이를 잃은 슬픔에다 세조의 발길마저 뜸해지자 덕중은 한눈을 팔게 된다. 환관 송중에게 마음을 준 것이다.
 그 일이 임금에게 발각되었지만 세조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위기를 넘긴 덕중은 가슴이 뜨거운 여인이었나보다. 이번에는 세종대왕의 4남인 임영대군의 아들인 귀성군 이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귀성군은 18살에 병조판서, 28살에 영의정에 오를 정도도 능력이 출중한 종친이었다. 그랬으니 덕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덕중은 짝사랑 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랑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연모한다”는 한글편지를 써서 환관 최호를 통해 귀성군에게 전달했다. 여기서 비극이 일어났다. 편지를 받은 귀성군이 아버지(임영대군)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아버지는 즉시 세조에게 고해 바쳤다. 사실 임금의 아이까지 낳은 후궁으로부터 연애편지를 받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귀성군과 임영대군으로서도 즉각 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덕중의 애정공세
 그런데 세조는 극도의 자제심을 보여준다. 다름아닌 자신의 여자를 젊은 조카에게 빼앗긴 것이었으므로 앙앙불락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물의를 일으킨 덕중의 지위를 방자(房子·궁중의 심부름꾼)로 격하시켰을 뿐 쉬쉬했다. 자칫 밝혀냈다가는 임금의 체면과 종실의 위엄만 깎는 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귀성군을 향한 덕중의 애정공세를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번에는 환관 김중호를 통해 다시 연애편지를 귀성군에게 전한 것이다. 편지를 받은 귀성군과 그의 아버지(임영대군)는 다시 세조에게 달려갔다. 세조는 이번에는 용서하지 않았다.
 편지를 전달한 환관 최호와 김중호를 대궐 밖으로 끌어내어 때려죽였다. 그리곤 문제의 여인 덕중에게 교수형에 처했다.
 이 모습을 본 ‘사랑받은 남자’ 귀성군의 마음은 어땠을까. <세조실록>을 보라.
 “사형선고가 내려지자 귀성군은 어찌할 바 몰랐다. 임금이 말했다. ‘네가 왜 황공해하느냐. 죄는 저들에게 있지 네게 있지 않다. 네 마음이 이미 바르니 어찌 남의 말을 근심하랴.”
 세조는 귀성군을 위해 술자리를 베풀고 귀성군을 일으켜 세워 춤추게 했다. 또한 종친들을 모두 일어나게 해서 춤추게 했다. 아침 일찍 시작된 술자리는 한낮이 되어서야 파했다.(<세조실록> 1465년 9월4~5일)

숙빈 최씨와 희빈 장씨 등 임금을 낳은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신 칠궁. 희빈 장씨는 궁녀출신으로는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왕비가 됐던 파란만장한 여인이었다. 

 ■태종 임금을 때린 궁녀
 궁녀라는 자신의 운명을 거스른 여인이 또 있었다.
 태종~세종대의 여인인 장미라는 궁녀였다. 1418년(태종 18년) 12월의 일이다.
 태종이 시녀 장미를 시켜 무릎을 두드리게 했다. 그런데 무릎 두드리는 꼴이 영 시원치 않았다. 이 대목에서 태종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장미가 두드리는 것이 영 마뜩찮아서 내가 조금 꾸짖고는 잠이 들었다. 장미가 갑자기 조심없이 두들겨서 놀라 잠을 깼다. 내가 그 무례함을 꾸짖고는 엄히 그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장미가 ‘꾸지람이 지나쳐서 화가 나서 마구 두들렸다’고 했다.”(<세종실록> 1420년 10월 11일)
 임금이 화를 냈다고 해서 임금의 몸, 즉 옥체를 두들겼다니 장미라는 궁녀는 참으로 대단한 여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태종은 이 당돌하고 못된 궁녀 장미를 쫓아내버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장미는 다시 궁으로 돌아와 명빈궁의 시녀로 복귀했다. 그녀는 조선시대에 걸맞지않은 4차원 궁녀였던 것 같다. 1426년(세종 8년) 4월 9일 바깥 바람을 쐴 요량으로 환관 임장수를 꾀여 “그녀를 출궁시키라”는 임금의 거짓 교지를 만들게 하고는 궐 밖 구경을 하고 돌아왔다. 이 거짓교서가 들통이 나서 애꿎은 환관 임장수만 참형을 당했다.
 그러던 중 사달이 일어났다. 1435년(세종 17년) 5월14일이었다.
 장미는 거짓으로 병을 칭한 뒤 출궁해서 친정에서 요양했었는데, 그 동안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즉 종친인 신의군 이인(태조 이성계의 셋째인 익안대군의 아들)의 술자리에 초대받아 여러 날 동안 유숙하고 신의군의 여러 아우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 것이다. 문제는 신의군 이인이 벽을 사이에 두고 장미와 잠을 잤다는 사실이다.
 또한 신의군의 매부 김경재도 장미를 초대한 뒤 친척들을 불러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벌였다는 사실도 추가로 폭로됐다.

 

 ■세종은 성군이 맞나
 임금의 여자인 궁녀로서는 할 수도, 해서도 안되는 짓을 벌인 것이다. 물론 신의군 이인과 김경재도 임금의 여인을 몰래 꼬드겨 출궁하게 한 뒤 질탕하게 놀았다는 사실도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이 스캔들은 9년이 지난 뒤까지 설왕설래하다가 1444년(세종 26년)이 되어 다소 이해할 수 없는 결론이 났다.
 세종이 궁녀인 장미에게만 참형의 극형을 내린 것이다.(5월29일) 그러면서 장미 부모의 재산을 적몰하고 아비를 귀양보내고 어미와 형제들을 모두 관노비로 삼았다. 지독한 연좌죄가 장미에게만 적용된 것이다. 
 의금부는 임금의 여인(장미)과 함께 놀았던 신의군 이인과 김경재 등에게도 참형의 중벌을 내렸다.
 신료들이 “장미를 꼬드긴 것은 이인과 김경재로서 두 사람이 죄인의 괴수”라면서 “이들이 목숨을 보전하는 것은 사태의 본말과 선후를 잃는 것”이라고 아우성 쳤다. 하지만 세종은 이 대목에서 이중잣대를 들이댄다.
 굳이 “장미와 두 사람의 죄는 같을 수 없다”면서 모르쇠로 일관하고 만 것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과연 세종은 성군이 맞는가. 

 

 ■그녀들의 한서린 외침
 주지하다시피 궁녀의 꿈은 임금이나 세자의 승은을 입는 것이었다.
 궁궐에 230명(인조 때)~600명(영조 때)의 궁녀가 있었고 연산군 때는 1000명이나 됐단다. 그 사이에서 임금의 사랑을 차지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런만큼 승은은 곧 신분의 수직상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임금의 자식이라도 생산한다면 후궁의 첩지까지 받았으니 그야말로 별을 따는 셈이 아닌가.
 승은을 입은 후궁 가운데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던 이는 아마도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일 것이다.
 신빈 김씨는 천대받던 내자시(궁궐에서 사용하는 물자를 조달하던 관청)의 종이었다. 세종이 22살 때 왕위에 올랐을 때, 13살 궁녀였던 그녀는 소헌왕후 심씨의 지밀나인이었다. 지밀나인은 주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수행하던 궁녀였다.
 그러다 세종의 사랑을 받았고, 아이까지 낳은 것이다. 공노비-지밀나인-후궁의 신분상승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12년동안 아들 6명과 딸 2명 등 12년 동안 8명의 자식을 낳았다. 얼마나 금슬이 좋았는지…. 그녀는 결국 입궁 21년 만에 귀인이 됐고, 곧바로 후궁의 최고인 빈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궁녀들끼리 임금의 사랑을 차지하려 사생결단의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궁녀 출신으로 임금(경종)의 어머니가 되었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왕비까지 되었던 희빈 장씨와, 무수리 출신으로 임금(영조)를 낳았던 후궁(숙빈) 최씨의 다툼이 대표적일 것이다.
 하지만 어디 그녀들의 책임이겠는가. 임금의 사랑이라는 ‘하늘의 별’을 딴 궁녀들은 그 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한 것이었을 뿐이다. “빨리 끌어내라”는 비정한 남편(숙종)의 명령에 끌려나간 뒤 사약을 강제로 들이킨 희빈 장씨의 마지막 외침이 귓전을 때린다.
 “내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전하께서 정치를 밝히지 않으니 그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닙니다.”
 희빈 장씨는 그래도 한 시대를 풍미하고 떠났다. 임금의 사랑을 받지 못한채 그냥 그대로 스러진, 아니 다른 소년과 봄바람 같은 풋사랑을 풍기며 애를 태웠다가 꽃잎처럼 꺾여 떨어지고 만 소녀들은 어쩌고…

 (끝)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04 관련글 쓰기

 능지처참이나 참형의 극형을 받은 자의 수급(머리)을 매다는 것을 효수(梟首)라 한다. 장대에 꽂은 모습이 마치 올빼미(梟)의 머리(首) 같다 해서 이름 붙었다.

“역적은 반드시 능지처참하고 그 머리는 3일간 저잣거리에 내걸며, 수족은 8도로 조리돌려야 한다.”(<영조실록>)

 1824년(영조 2년) 의금부의 상소를 보면 반역모반죄나 강상죄를 지은 자의 목을 내걸어 만백성의 본보기로 삼자고 촉구한다. ‘능지처참형(참형)→효수’의 극형을 받은 역사인물이 뜻밖에 많다. 1135년(고려 인종 13년) 서경(평양)에서 난을 일으켰던 묘청도 목이 잘린 뒤 저잣거리에 효수됐다.

깁신정변 실패후 망명 중 피살된 김옥균의 목은 양화진에서 효수됐다.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 때 참살된 김종서·황보인 등의 목도 모두 저자에 내걸렸다. “길가던 사람들이 욕하면서 (내걸린 죄인들의 목을) 기왓돌로 때리고 발로 차고 머리를 짓이겼다”(<단종실록>)는 끔찍한 기록이 남아있다.

 1456년(세조 2년) 단종복위 운동에 연루된 이개와 성삼문 등도 군기감 앞에서 환열(환裂·수레로 찢어죽임)된 뒤 3일간 목이 내걸렸다. 홍경래와 김개남, 김옥균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풍운아들도 ‘본보기’를 이유로 목이 내걸렸다.

 하지만 오히려 꼿꼿이 소신을 밝히며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많았다. 본보기는커녕 도리어 죽은 이들의 의기만 세워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성삼문은 죽을 때까지 임금(세조)을 ‘임금’이라 하지 않고, ‘나으리(進賜)’라 불렀다. 영조 때의 김일경도 임금에게 ‘저(矣身)’라 하지 않고 ‘나(吾)’라 하며 “시원하게 죽여달라”고 했다.

 1894년쯤 효수된 동학군 지도자의 유골이 121년이나 구천을 헤매고 있다. 1995년 일본 홋카이도 대학의 창고에서 ‘진도에서 효수된 한국 동학당 수괴의 수급’이라는 글씨와 함께 발견된 이 유골은 1996년 돌아왔지만 지자체와 문화재청의 갈등 속에 안식처를 찾지 못한 채 전주역사박물관 수장고에 임시 보관돼 왔다.

 뒤늦게나마 감사원은 “부처 간 갈등을 풀고 하루빨리 안장사업을 추진하라”고 권고한 모양이다. 목이 잘린 뒤 효수라는 극형을 받았지만 ‘반외세·반봉건’의 뜻을 외쳤을 고인의 안식처를 하루속히 마련해주자. 고인의 명복을 빈다.(끝)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효수'에 얽힌 피맺힌 사연들  (2) 2015/01/11
가슴 먹먹한 '꼬부랑 할머니'의 추억  (0) 2015/01/11
'담배끊기'와 '작심 평생'  (0) 2015/01/05
'토토가'와 X세대의 귀환  (0) 2015/01/05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03 관련글 쓰기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 꼬부랑 꼬부랑/ 넘어가고 있네./ ~꼬부랑 꼬부랑 꼬부랑 꼬부랑….”

 지난 6일 향년 87세로 별세한 작곡가 한태근씨(사진)의 유명한 ‘꼬부랑 할머니’ 동요이다. 작곡가는 생전의 언론 인터뷰에서 동요 ‘꼬부랑 할머니’를 짓게 된 비화를 이야기해주었다.

 “제가 칭얼댈 때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를 해주셨던 어머니가 어느새 꼬부랑 할머니가 되셨더라고요. 그래서….”

 사실 ‘꼬부랑 할머니’를 주제로 한 설화는 지방마다 다양하게 전해진다. 동요의 모티브는 ‘꼬부랑 할머니가 길을 가다가 일어난 재미있는 사건’이다. 각 지방의 설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꼬부랑’이라는 어휘를 첫말에 이어가며 재미있는 사건들을 계속 보태고 있는 것이다. 

 “꼬부랑 할머니가~꼬부랑 똥을 누다가~꼬부랑 강아지가 날름 먹으니까~꼬부랑 할머니가~꼬부랑 지팡이로 딱 때리니까~꼬부랑 깽깽 꼬부랑 깽깽.”

 

 반복 사용되는 ‘꼬부랑’은 구수한 리듬감을 주어 민요의 흥을 고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꼬부랑’이라는 단어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웃음을 유발하는 언어유희담에 속하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짧고 반복된 가사로 흥을 돋우는 ‘후크(Hook)송’이라 할 수 있겠다. ‘Gee-gee-gee’를 반복하는 소녀시대나, ‘내가 제일 잘 나가’를 되뇌는 2NE1, ‘Nobody’를 줄기차게 노래한 원더걸스의 곡들에서 ‘꼬부랑 할머니’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하지만 ‘꼬부랑 할머니’의 진짜 모습을 떠올린다면 마냥 흥겨울 수만은 없을 듯싶다. 의학용어로 ‘척추관협착증’이나 ‘골다공증’과 같은 엄연한 병이니까 말이다. '척추관협착증'은 나이가 들면서 척추관 주변의 퇴행으로 신경이 눌려 통증이 나타나는 질환이다.

 허리를 앞으로 숙이면 통증이 다소 줄어들어 자세가 구부정하게 된다. 특히 척추를 지지하는 근육량이 남성에 비해 적은데, 아이를 주렁주렁 낳고 평생 쭈그려 앉아 농사일과 가사에 매달렸던 할머니들이 아닌가.

  그래서 ‘농부병’에 ‘꼬부랑 할머니병’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이 순간 허리를 90도로 숙인 채로 자식·손자들의 손을 꼭 잡아주던 ‘꼬부랑 할머니들’의 깊게 팬 주름이 떠오른다.(끝)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효수'에 얽힌 피맺힌 사연들  (2) 2015/01/11
가슴 먹먹한 '꼬부랑 할머니'의 추억  (0) 2015/01/11
'담배끊기'와 '작심 평생'  (0) 2015/01/05
'토토가'와 X세대의 귀환  (0) 2015/01/05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02 관련글 쓰기

   이번 주 이기환의 팟캐스트 ‘흔적의 역사’ 11번째 이야기는 ‘역사속 패션피플과 성형미인’입니다.
 요즘 겨울철을 두고 ‘성형의 계절’이라 합니다. 그 뿐입니까. 우리나라는 어느새 ‘성형 강국’이 되었고, 성형관광의 메카로 발돋움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최근의 트렌드일까요?
 아닙니다. 원래 성형은 동이족의 전유물이었답니다. 증거가 있냐구요? 있습니다. 그것도 움직일 수 없는 고고학 증거들입니다. 이번 팟캐스트에서 한번 성명해드리겠습니다. 동이족은 성형 민족이라 할만 합니다.  

이번 팟캐스트에서 또 하나 궁금해 하실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 사람들의 미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역사속 패셔니스타’는 누가 있었을까.
 그렇습니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 즉 지금으로부터 2500년전부터 ‘개미허리’ 여인을 미인의 기준으로 삼았답니다.      오죽했으면 ‘탐연세요(貪戀細腰)’, 즉 ‘가느다란 허리를 탐한다’는 고사가 <묵자> ‘겸애중(兼愛中)’에까지 나올까요.
 당대 사람들은 가는 허리를 만들려고 하루에 한끼씩만 먹으며 초절정 다이어트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굶어죽은 사람들이 속출했다지요. 한나라 성제의 후궁인 조비연은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추었을 정도로 몸매가 가냘팠답니다.
 양나라 시대의 여인 장정완의 허리 사이즈는 1척6촌, 즉 15인치(40㎝)도 안됐다고 합니다. 당대의 미인을 뜻하는 고사성어는 바로 ‘버들가지처럼 가는 허리에, 눈꽃같이 새햐안 피부’를 뜻하는 ‘세요설부(細腰雪膚)’였답니다.
 ‘긴머리’를 향한 로망도 대단했답니다.
 특히나 고구려·신라인들의 긴 생머리에 중국대륙이 열광했다는데요. 신라인들은 머리카락을 중국에 공물로 보내거나 수출했다는군요. 1960년대 가발수출로 외화를 벌었던 시절이 떠오르네요.
 또 있습니다. 조선의 선조 시대 때는 남자들까지 귀고리를 다는 풍습이 유행처럼 번졌다는데요.
 오죽했으면 선조임금이 비망기를 내려 “요즘 사내아이들까지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다”면서 “적발되면 엄벌에 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겠습니까.
 머리에 가체를 올리는 풍습도 사치풍조의 대명사였습니다. 심지어 무거운 가체 때문에 13살 어린 신부가 목뼈가 부러져 죽었다는 기록(이덕무의 <청장관전서>)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영조와 정조 임금은 “연좌의 죄목까지 써서 이 말도 안되는 풍조를 엄금하겠다”고 여러 차례 명령을 내렸지만 ‘유행을 어찌 강제로 막을 수 있느냐’는 여론에 밀려 끝내 손을 들고 맙니다.
 가체를 막자 이번에는 본발(본머리)을 기르는 풍습이 슬그머니 유행으로 등장한겁니다. 그러니 임금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면서 정조는 한마디 합니다.
 “지금 여기 있는 신하들이 각자 집에 가서 정해진 법도를 지킨다면 일반 백성들도 반드시 본받을 것이다.”
 세속의 유행을 정부차원에서 강제로 막기란 사실상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한 겁니다.
 다만 지도층의 솔선수범에 기대를 건 것이죠. 기억나시죠. 1960~70년대 막대 자로 여성의 미니스커트 길이를 재고, 장발을 단속한다며 대명천지에 울타리에 쳐놓고 장발자들을 몰아넣었던 추억….
 씁쓸한 기억들이죠. 지금 옛 사람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몸소 자신이 하지 않는다면 백성이 믿지 않는다”(<한비자>)
 “위에서 좋아하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지나침이 있다.”(<맹자>)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01 관련글 쓰기

 조선 최고의 애연가라면 문인 이옥(1760~1815)을 들 수 있다. 담배의 경전이라는 <연경(烟經)>까지 쓸 정도로 끔찍한 애연가였다. <연경>에 이옥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옥이 1795년 송광사 법당 안에서 ‘감히’ 담배를 꼬나물자, 스님이 “부처님 앞에서는 금연”이라며 막아섰다. 그러자 이옥의 대꾸가 걸작이었다.

 “부처님 앞의 향로 연기도 연기요, 담배 연기도 연기입니다. 사물이 변해서 연기가 되고 연기가 바뀌어 무(無)가 되는 것은 똑같지 않습니까.”
 <인조실록> 등을 보면 담배가 조선에 들어온 때는 1616~1618년쯤 된다. <인암쇄어>가 “담뱃잎 한 근이 말 한 마리 값이었다”고 쓸 만큼 담뱃값은 ‘금값’이었다. 그러나 담배는 단 5년 만에 조선 전역에 퍼졌다. <인조실록>은 “백해무익한 물건임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니 세상 사람들이 요망한 풀, 즉 요초(妖草)라 했다”고 썼다. 청나라 조정은 담배를 재배하는 자를 참수형으로 다스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곧 죽어도 피우겠다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금법이 완화됐고, 마침내 삼척동자까지 피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초창기 사람들도 담배의 폐해를 짐작하고 있었다. 조선 최초의 흡연가인 장유(1587~1638)도 “담배는 건조하고 열이 많아 폐(肺)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계곡만필>). 그럼에도 중흥군주라는 정조까지 “조선을 흡연의 나라로 만들겠다”고 선포할 만큼 애연가의 대열에 합류했으니…. 최초의 금연 운동가인 이덕리(1728~?)는 “엄청난 돈이 담배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진다”면서 금연론을 개진했다. 그러자 당대의 흡연가가 이덕리에게 쏘아붙였단다. “(아무리 비싸다해도) 누가 담배를 피우는 통쾌함을 버리겠습니까.”(이덕리의 <기연다(記烟茶)>)
 새해 들어 담뱃값이 2000원이나 인상되자 “이번에는 완전히 끊겠다”는 금연 결심이 속출하고 있단다. 담배 판매대가 휑하고, 전자담배를 찾는 이들도 급증했다고 한다. 10여년 전 500원 올랐을 때와는 다른 결기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애연가들이 수백년 동안 이어온 ‘담배 피우는 통쾌함’을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작심 평생’이 되기를 바란다. 이기환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효수'에 얽힌 피맺힌 사연들  (2) 2015/01/11
가슴 먹먹한 '꼬부랑 할머니'의 추억  (0) 2015/01/11
'담배끊기'와 '작심 평생'  (0) 2015/01/05
'토토가'와 X세대의 귀환  (0) 2015/01/05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400 관련글 쓰기

 S.E.S의 ‘막내 요정’ 슈(본명 유수영)가 공연을 마친 뒤 눈물을 펑펑 쏟았다. 세 아이를 키우느라 감춰두었던 끼를 마음껏 발산한 그의 소감은 소박했다. “엄마인 저에게도 꿈이 있었고, 그 꿈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슈뿐이 아니었다. MBC <무한도전>의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토토가)에 참여한 1990년대 가수들은 모처럼의 추억여행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시청률도 예능프로그램에서 마의 시청률이라는 20%를 훌쩍 넘겼다(22.2%)고 한다.  

실제 ‘토토가’의 주시청층인 30~40대 가운데는 가수들의 공연에 ‘감정이 이입’되어 눈물을 흘렸다는 이들이 많았다. 아마도 가수의 ‘리즈’ 시절, 즉 황금기의 음악을 통해 그들 자신의 ‘젊은날의 초상’을 추억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는 대중음악의 르네상스 시기였다. 발라드와 힙합, 댄스, 록 등 다양한 장르가 공존했다. 서태지가 출현했고, 김건모·신승훈이 밀리언셀러의 힘을 보여줬으며, H.O.T 등의 아이돌그룹이 등장했다.
 당시 10~20대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선 사이에서 언제 어디로 튈 줄 모르는 X세대로 일컬어졌다. 물질적인 풍요 속에 기존의 획일적인 질서를 거부한다는 이른바 ‘X세대’는 파격적이고 다양한 음악을 들으며 서로 소통했다.
 그랬던 그들이 20년이 지나 스스로 지갑을 열 수 있는 30~40대의 소비층으로 화려한 귀환을 시작한 것이다. ‘토토가’ 이전에도 영화(<건축학개론>)와 드라마(‘응답하라’ 시리즈) 등이 ‘1990년대’를 겨냥한 ‘향수(노스텔지어) 마케팅’을 자극한 바 있다. 그러고보면 ‘1990년대’는 쉬이 가라앉을 트렌드는 아닌 것 같다.

 사실 추억여행이란 팍팍한 삶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일 수도 있다. 미래의 희망이 없다면 더더욱 과거만 떠올리는 것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요즘엔 누구나 스마트폰에 갇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토토가’의 공연은 모처럼 가슴 시원한 소통의 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토토가’가 끝난 뒤 어느 참가자가 일말의 불안감을 나타냈다. 그것이 좀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내일 아침이 되면 꿈이 될까 두려워요.”  이기환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효수'에 얽힌 피맺힌 사연들  (2) 2015/01/11
가슴 먹먹한 '꼬부랑 할머니'의 추억  (0) 2015/01/11
'담배끊기'와 '작심 평생'  (0) 2015/01/05
'토토가'와 X세대의 귀환  (0) 2015/01/05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99 관련글 쓰기

 “현실적 무대는 분명치 않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은 문장과 극한적인 긴장감은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우승의 영관을 획득하기에 족하다고 보겠다.”
 경향신문 1965년 1월 1일자와 4일자는 그 해 경향신춘문예 당선작과 심사평 및 당선자 소감을 싣고 있다.
 앞에 인용한 심사평은 소설 부문 당선작인 조세희의 <돛대없는 장선(葬船)>(상금 2만원) 심사평이다. 당시 심사를 맡은 황순원·김동리 작가의 심사평을 더 보자.
 “남은 세 편에서 <장군의 개>는 걸하사’와 그의 아내의 궁상에 대한 과장적인 묘사가 작자의 목적의식을 앞세우는 느낌이었고, <물래도장경>은 가장 이야기를 만들어 놓은 편이나 문장세련이 부족했고~애정관계에 모순점이 있어 당선의 영예를 <돛대없는 장선>에 돌리게 됐다.”

 

 

 

 

 

 

 

 

 

 

 

 

 

 

 

 

 

 

 

 

■“숱한 파지만을 남기기 일쑤다”-조세희 작가 


 경희대에 재학 중 당선한 조세희 작가의 당선소감도 흥미롭다. 앳된 모습의 사진이 게재된 작가의 소감을 한번 읽어보라.
 “나는 이따끔 어떤 의문을 갖게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들 안의 것을 어떻게 밖으로 내놓는데 성공했을까 하는 점이다. 좀처럼 이해가 가지지 않는다. 늦가을의 풍경 앞에서 영성의 고갈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들 안에 깊은 세계를 지니고 있을 것이 아닌가. 나도 그들처럼 나의 안에 깊은 세계가 있다고 믿고 싶다. 비록 그것이 추론을 거치지 않은 단편적인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도 계속해서 정신상의 문제에 관심하는 이상 나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 세계로 가는 통로를 알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책상 앞에 다가 앉았을 때마다 숱한 파지만을 남기기 일쑤다.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될 지 열(列)의 뒷자리에 선 마음 초조할 뿐이다.”
 조세희 작가는 암투병 중인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병실 한구석에서 당선작인 <돛대 없는 장선>을 썼단다. 그는 10년의 긴 공백기간을 거친 후 ‘난장이 연작’ 시리즈를 발표하고 1978년 12편을 모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펴낸다.
 ‘난장이’는 1970년대 당시의 억압·소외받는 계층의 신체적 불구성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기호이다. 난장이는 산업사회의 그늘에서 바둥거리면서도 희망의 ‘작은 공’을 쏘아 올린다.
 그러나 난장이 아버지는 일상의 삶에서 늘 지는 전쟁만을 치른다. 꿈도 꺾인 난장이는 결국 굴뚝에서 투신자살함으로써 삶을 마치게 된다.
 조 작가의 난장이 연작시리즈는 1970년대 우리 사회의 최대 과제였던 빈부와 노사의 대립을 극적으로 제시하는 현대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일말의 희망을 좇아 작은 공을 쏘아올리지만 결국 좌절하고 마는 ‘난장이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65년 1월 1일 경향신문은 바로 조세희 작가의 ‘고고성(呱呱聲)’을 기록한 역사서라 할 수 있다.

 

1965년 1월1일자에 실린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발표사고. 조세희(소설) 김종해(시) 백승철(평론) 권용철(동화) 등이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간밤에 잠을 자지 못했어.”-김종해 시인
 그 해 시 부문 당선작은 김종해의 <내란(內亂)>(상금 1만원)이었다.
 심사를 맡은 조지훈·박목월 시인은 “<내란>은 작자의 혼란된 의식내면의 내란을 표출하는데 성공한 작품”이라면서 “간결하고 정확한 수사는 이 시인의 역량을 충분히 보여준다”고 극찬했다. 김종해의 당선소감은 “간밤에 잠을 자지 못했어”라는 시작되고 있다.   
 “간밤에 잠을 자지 못했어. 대맥(大麥)의 푸른 바람이 불어와서. 한모금씩 물과 지팡이에 의지하여 광막한 사막을 방황하는 모세의 의지를 보고도 울었으니까. 때론 우매한 동키호테의 검을 보고도 흥분했었어. 그로부터 불빛과 모래와 남루가 흐르는 제기천 변을 헤매는 한 낯선 사내를 나는 자주 만났어. 밑바닥 물이 썩어있는 소택 아래서 그의 눈은 검고 불길하게 나의 전신을 들여다보고 있었어. 나는 그 분을 존경해. 술집에서 혼자서 잔을 기울이지. 그 분은 코린 윌슨처럼 나를 자꾸 불러내지. 정말 간밤엔 잠을 자지 못했어. 대맥의 푸른 바람이 불어와서. 4월이 되면 내게 또 한 개의 불을 가져다 줄 신의 전령사를 만나게 돼. 나의 아름다운 걸작이기를 기구(祈求)해주게.”
 만약 조세희·김종해 작가가 지금 이 순간 당시에 썼던 당선소감을 읽으면 어떨까. 나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서 쓴 소감이었을텐데…. 
 그 해 신춘문예에서는 문학평론에서 <현대 문학의 철학적 기초>(백승철), 동화에서 <들국화>(권용철)의 당선작을 냈고, 희곡에서 <성야(聖夜)>(오혜령)·<통나무다리>(고동율) 등의 가작을 냈다. 당대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의 면면을 보면 황순원·김동리(소설)와 조지훈·박목월(시)은 물론, 백철·이어령(문학평론), 마해송(동화), 유치진·여석기(희곡) 등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65년 1월1일자에 실린 박정희 대통령의 신년휘호(근면검소)와 가족사진.  

 ■을사조약 60년의 비화
 이렇듯 한국 문단의 큰 별들이 뜬 50년 전의 1월 1일이었지만 그 해, 험난한 파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지(1905년) 한 갑자가 돌아 다시 을사년이 된 1965년이었다. 그런데 다름 아닌 바로 그 ‘을사년’에 다시 한일회담의 조약을 눈앞에 둔 것이었다.
 경향신문은 1월1일자에 ‘하필이면 왜 을사년에….’라는 유감을 표하면서 60년 전에 체결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의 비화, 즉 ‘을사비화’를 전한다.
 “1905년 11월 9일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특명전권대사의 자격으로 서울에 와서~한국을 먹기 위한 가지가지 압력을 가해왔다. ~그들의 강요로 기어이 11월17일 경운궁(덕수궁) 내에서 내각회의를 열었다. 이토 등이 번갈아 위협하는 가운데 5시간이나 회의가 계속되었으니 끝을 맺지 못했다. 고종은 ‘대신들이 알아서 하라’면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심한 나라가 아닌가. 언필칭 황제라는 분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대신들이 알아서 하라’고 했다니 말이다. 이후의 상황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침략의 원흉은 마치 죄인을 다루듯 대신들에게 ‘가(可)부(否)’를 따졌다. 애초에 왜놈과 내통하던 이완용 학부대신을 비롯하여 이지용 내부, 이근택 군부 등 대신들이 즉각 가(可)로 적었으나 민영환(탁지부), 이하영(법부) 등은 부(否)자를 썼다.”
 이밖에 농상공부대신인 권중현과 외부대신 박제순도 손을 들고 말았다. 역사는 이완용·이지용·이근택·권중현·박제순 등을 ‘을사오적’이라 한다.
 “마지막 고비는 총리격인 한규설 참정대신이었다. 육군 부장을 지낸 그는 군복차림에 칼을 차고 참석했다. 분을 못이긴 한규설은 칼을 벗어놓는 것을 깜빡 잊고 고종의 침전으로 뛰어들어갔다. 교활한 이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너희 나라 법으로는 신하가 칼을 차고 임금 앞에 가면 역적 아니냐. 파직하라.’ 이토는 고종을 물고 늘어졌다. 결국 한규설이 내몰리고 나라파는 일은 눈깜짝할 사이 끝났다.”
 경향신문은 이 비극적인 ‘을사비화’만 단순 전달하지 않았다.
 ‘비극의 초장은 이 때부터(을사조약) 비롯됐고, 비극의 종장은 60년 만에 한일회담으로 매듭짓는 것’이라고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
 “‘한국을 좋은 나라로 만들어주겠다’는 이토의 감언이설에 백성들이 환영의 대열에 섰다. 그러나 조약체결 소식에 종로상가의 문을 일제히 닫고 항의했다. 선비들은 통곡하며 거리를 누볐고 지금의 데모에 비교될 민요(民擾)의 바람으로 거리는 들끓었다.”
 경향신문은 1965년 을사년에 체결될 가능성이 짙었던 한일회담을 제대로 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1월1일자 신문부터 어려운 서민경제를 우려하는 기사가 실렸다. 새해벽두부터 줄줄이 교통요금 등 물가가 올랐기 때문이다. 

 

 ■간난신고의 예고편
 “새해에는 흐뭇한 이야깃거리만 이 돋보기에 바춰지도록 사회 구석구석까지 명랑해지기를 여러분과 함께 소망합니다.”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들은 인기가십란인 ‘돋보기’ 란에 1965년 한 해에는 보다 밝은 뉴스만 전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애써 마련한 신년 특집기획의 내용을 보면 독자들에게는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예고편이었다. 1월 1일자 기획기사 ‘새해의 가계부’는 ‘도사리는 물가…움츠린 부엌’이라는 부제로 더욱 팍팍해질 백성들의 삶을 전망했다. 
 “가장 두려운 것이 곡가 사정이다.~절량 농가의 속출과 함께 보릿고개인 5월에 접어들면 쌀값이 가마당 4500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절량농가(양식이 떨어지는 농가)와 보릿고개의 사연이 당대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웅변해주고 있다.
 신문은 1965년 1년 간의 물가상승률은 30%가 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면서 6월이 되면 식량파동과 함께 물가소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보리값도 3500원 선을 넘을 것이다. 새해부터 철도요금은 여객운임이 35% 올랐다. 서울~부산 간 456원(특급 3등)이던 게 1월1일부터 604원으로 껑충 뛰었다. 앞으로는 기차여행도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게 되엇다고 한숨부터 쉰다.”
 이밖에도 1월 15일부터 버스·합승·택시 요금이 30~100% 씩 오른다고 했다. 시내버스요금이 5원→8원(60%), 시외버스요금이 1㎞ 1원10전→1원50전(36.3%), 시내합승요금 10원→15원(50%), 택시 기본요금 30원→40원(33.3%), 택시추가요금 500m 당 5원→10원(100%) 씩…. 신문은 “6000원짜리 월급쟁이(5인 가족 기준)의 월평균 가계지출을 계산해보니 한달에 4930원의 적자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쌀 한가마(3250원) 등 음식물비가 6250원, 주거비 500원, 전기요금 300원, 연탄값 480원, 의료비 1000원, 교통비 1400원, 잡비 1000원 등…. 한달에 4930원의 적자를 기록한다. 눈물겨운 결과다. 해방 이후 1964년까지 물가는 약 2788배 뛰었다.”

 

   ■스타부부의 선행
 그렇다고 희망마저 버리지는 않았다.
 경향신문은 1945년생 해방동이인 대학 모범생 29명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대담하면서 이른바 ‘3행꿈’을 받아 게재했다.
 기사의 제목은 ‘다음 세대는 이들의 두 어깨에-나의 미래상’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되겠다”(경희대 물리학과생) “농업의 후진성을 탈피하고 농업개발을 위한 엔지니어가 되겠다”(충북대 농대생) 등 거창한 포부에서부터 “소녀의 꿈을 이루겠다”(고려대생) “예쁜 마음 키우겠다”(숙명여대생)는 소박한 꿈까지 젊은이다운 ‘3행꿈’이 터져나왔다.
 1월1일자 기사 가운데 ‘스타부부와 스타가족이 불우이웃을 찾아가는 기획’도 흥미로웠다.
 예컨대 1964년 11월14일, 세기의 결혼식으로 화제를 뿌린 신성일·엄앵란 부부는 사과 궤짝을 들고 중부병원을 방문했다.
 “신(성일)군이 직접 사과궤짝을 들고가서~어린 환자는 일어나 앉을 기력조차 없었다. 엄(앵란)양은 베개를 바로 베개 해주고 이불을 더독거려 덮어준 다음 그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또 신영균과 그의 노모(신순옥)는 정릉의 양로원을, 김진규-김보애 부부는 서울 도원동 마루턱의 혜심고아원을 각각 찾아 불우이웃을 돌봤다는 기사를 실었다. 1월1일 사회면 톱기사는 제2한강교(양화대교)가 1월 중에 개통된다는 소식이었다. 기사의 제목은 ‘새출발의 소망이 틔었다’는 것이었다.
 사회부 기자들이 ‘돋보기’ 란에서 기원했듯이 그나마 밝고 활기찬 뉴스가 사회면을 장식한 것이다.(끝)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98 관련글 쓰기

  

10번째 팟캐스트입니다. 

    이번 주는 '우리 역사 속의 환관 이야기'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조에 처음 환관의 기록이 보입니다. 사실 우리 역사를 훑어보면 중국처럼 환관을 대량으로 양성하고 기용하고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궁형이나 자궁(스스로 거세)을 통해 환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답니다. 다만 어릴 때 개(犬)에 물려 고자가 된 케이스가 훗날 환관이 되었다고 하네요. 물론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 황제의 조칙에 따라 환관을 만들어 중국에 보내는 경우가 있엇다고 하지만….
 우리 역사 속에서도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환관들이 심심찮게 있었습니다.
 고려 의종 때 환관 정함은 사치향락과 황음에 빠진 의종을 대신해 권력을 마음껏 주물렀습니다. 오죽했으면 “나라의 권세가 모두 고자(정함)에게 있구나!”하는 한탄이 개경거리에 울려퍼졌다고 합니다. 정함을 비롯한 환관들의 득세는 결국 무신란이라는 왜곡된 역사를 불러오는데 일조했습니다.
  원나라 간섭기에는 원 조정에서 출세한 환관들이 꽤나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원나라 황태후의 총애를 받았던 환관 방신우가 있었는데요. 방신우가 비록 거들먹거리기는 했지만 고려라는 국호를 잃을 위기를 넘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답니다.
 조선조가 개국해서 뜻있는 대신들이 환관의 폐해를 설파하고 환관혁파를 기회가 닿을 때마다 했습니다. 그러나 최측근의 자리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환관들을 임금은 버릴 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필요악이라고 할까요. 이를테면 김사행과 조순 등은 조선초 공신의 반열에 오를만큼 득세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환관들의 말로가 그랬듯이 임금의 사랑이 식거나 임금의 힘이 떨어지거나, 혹은 임금의 죽으면 급전직하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김사행과 조순은 목이 떨어지고 말았답니다.
 우리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환관은 연산군 조의 환관 김처선이었을 겁니다.
 김처선은 연산군이 무오사화·갑자사화 등을 일으켜 대대적인 ‘사람 사냥’에 나설 때 바른 소리를 했답니다. 그러다 결국 죽음을 각오하고 연산군의 면전에서 “그만 좀 하시라”고 맞서다 비참한 죽음을 당했답니다. 연산군이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김처선의 ‘처’자를 씨는 모든 이름과 모든 관직을 없애버리라는 엄명을 내렸답니다.
 중종반정이 일어났지만 비참하게 죽은 김처선을 선양하는 작업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환관 주제에 임금에게 대든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환관의 존재를 폄훼한 것이지요. 그러나 연산군의 횡포에 그토록 당당하게 대든 사대부가 과연 몇이나 있습니까.
 환관 이야기의 끝은 결국 환관을 위한 변명이 되었군요.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97 관련글 쓰기

 “소갈증(당뇨)와 부종의 뿌리가 근절되지 않았는데, 이제 또 임질(淋疾)을 얻은 지 11일이 되었다. 번다한 정무를 처리하면 기운이 노곤하다.”
 <세종실록>은 1438년(세종 20년) 4월 28일자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기록해놓는다. 세종대왕이 ‘임질’에 걸려 고생하고 있음을. 그것도 세종 본인의 입으로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창덕궁에 있는 내의원.  임금의 질병을 관리하는 관청이었다. 당뇨와 두통, 이질 등 다양한 질병에 시달렸던 세종은 임질에 걸려 정무를 볼 수 없는 통증이 발작하는 등 약 4년 동안 고생했다.

임질이 무슨 병인가.
 ‘임질은 임균이 일으키는 성병이다. 주로 성교로 옮아 요도 점막에 침입하며, 오줌을 눌 때 요도가 몹시 가렵거나 따끔거리고 고름이 심하게 난다.’(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한마디로 임질은 성병이라는 것이다. 망측스럽지 않은가. 만고의 성군이자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대왕께서’ 성병에 걸렸다니….
 알려지다시피 세종은 슬하에 22명의 자식(18남4녀)을 두었다. 정후인 소현왕후 심씨에게서 8남2녀를, 후궁인 영빈 강씨(1남)·신빈 김씨(6남)·혜빈 양씨(3남)·숙원 이씨(1녀)와 궁녀인 상침 송씨(1녀)에게서 10남2녀를 생산했던 것이다. 22명이나 되는 자식도 남부럽지 않을텐데 그 중에 아들이 18명이나 되니….
 왕자 생산이 왕실의 번성을 가져온다는 게 당대의 법도라면 세종은 남성으로서의 능력도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세종대왕이 임질에 걸렸다니….

 

 ■세종의 임질 투병 기록
 사실 세종은 ‘앉아있는 종합병원’이라 할만큼 온갖 질병에 시달렸다. 고기가 아니면 수라를 들지 않을 정도로 육식을 좋아했던 세종이었기에 굉장히 뚱뚱했다.
 오죽했으면 1418년(세종 즉위년) 상왕(태종)이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도 않고, 몸도 뚱뚱하시니 건강을 좀 챙겨야 한다”고 걱정했을까.
 세종은 두통과 이질, 다리부종과 수전증은 물론 풍질에 시달렸다. 더욱이 하루에 물을 한동이 이상 들이켰을만큼 당뇨병(소갈증)을 앓았다. 한 걸음 앞의 사람도 불간할 수 없을만큼 눈병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것은 아마도 당뇨합병증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그랬던 세종이 임질까지 걸렸다는 것이다.
 <세종실록>은 임질을 앓던 세종의 병세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역시 임금의 육성이다.
 “임질을 앓은 사람들은 ‘이 병은 비록 나았다가도 발작한다’고 한다. 의원들은 ‘이 병을 치료하려면 마땅히 희로를 하지 말고 마음을 깨끗히 해야 한다’고 했다.”(1438년 4월 28일)
 이 무렵의 <세종실록>은 임질로 고생했던 세종의 투병기록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성질을 낼 적이 있으면 찌르고 아픈 증세가 즉시 발작하곤 한다.”(1438년 5월 27일)
 “지난해 여름(1438년) 임질을 앓아 오래 정사를 보지 못하다가 가을·겨울에 이르러 조금 나았다.”(1438년 6월 21일)
 “지난해 가을(1438년) 임질이 조금 나아 제릉(세종의 친 할머니인 신의왕후 묘)에 말을 타고 행차했는데, 병이 도져….”(1439년 7월 2일)
 “올 봄(1439년) 봄에 평강에서 강무를 주관하다가 다시 병(임질)이 도져 3일 후에야 진정됐고….”(1439년 7월 4일)
 비단 1438~39년 사이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3년 뒤인 1442년(세종 24년)에도 발작한 것으로 보인다.
 “몸을 움직이고 말을 하면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더욱 심하다. 앞으로 2~3일 동안 말을 하지 않겠다.”(1442년 11월 11일)
 세종은 10여일 고생하다가 11월 23일이 돼서야 겨우 호전됐다. 결국 세종은 41살 때(1438년)부터 45살 때(1442년)까지 약 4년간 임질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 수 있다.
 오죽했으면 세종은 국가의 주요행사인 강무(講武·임금의 친림 아래 실시하는 군사훈련)의 주관을 세자(문종)에게 맡기는게 어떠냐는 의견까지 냈을까.
 물론 대신들의 반대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왕의 이동식 변기인 매화틀(매우틀). 어의들은 임금의 배설물(매화) 색깔을 보고, 혹은 그 맛까지 보며 건강을 살폈다고 한다. 

 ■성종의 임질, 권근의 임질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임질에 걸린 이가 세종 뿐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종의 버금가는 성군으로 알려진 성종도 임질에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즉 <성종실록>은 1485년(성종 16년) 성종 임금이 “‘임질 때문에 경연에 도저히 나갈 수 없다’고 승정원에 알렸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또 있다. 여말선초의 문신으로 성균관 대사성·예의판서를 지낸 권근(1352~1409) 역시 임질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서를 제출한 적이 있다.
 “신은 임질이 더욱 심해 소변이 잦아 그치지 않고 기운이 통하고 막힘이 일정치 않아 몸이 시고 아픔을 참기 어렵습니다. 밥 먹는 사이에도 발작이 일어나고 밤새도록 오줌을 누어 잠시도 평안할 때가 없습니다. 이 병든 몸으로 어찌….”(<태종실록> 1406년 5월1일)
 권근이 누구인가. 지금으로 치면 선비의 대명사인 성균관 대사성과 나라의 예의를 총괄하는 예의판서가 아닌가. 게다가 권근은 세자의 스승인 세자좌빈객과 이사(貳師)를 지낸 사람이다.
 그런 그가 망측스런 임질 때문에 사직을 청했다니….
 <실록> 등 각종 문헌을 보면 임질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줄을 잇는다.
 심지어 임질에 걸린 아버지의 음경을 빨아 병을 고쳤다는 효자의 이야기가 눈에 띈다.
 “1512년(중종 7년) 흥덕현(전북 고창)의 향리 진간의 아비가 임질을 앓아 거의 죽게 됐다. 그 때 진간이 울부짖으면서 몸소 빨아내 병을 고쳤습니다. 진간을 효자로 등록하면….” 
 “1526년(중종 21년) 장성현의 역리 차순년은 아비(차인보)가 임질에 거려 소변이 막혀 기절해서 쓰러지자 아비의 양경을 이틀간이나 빨았습니다. 그러자 요도가 트였습니다.”    

  “1522년(중종 27년) 괴산 사람인 전 직장 김여성은 아버지가 임질 때문에 기절하자 입으로 빨아 낫게 했다.” 

허준의 <동의보감>. <동의보감> 등 한의서를 보면 당시의 임질은 요즘의 성병을 뜻하는 임질 뿐 아니라 일반적인 비뇨기 질환을 일컬었다.

   ■난봉꾼 충혜왕이 걸린 고약한 임질
 이쯤해서 한가지 의문이 든다.
 만약 임질이 성접촉에 의한 성병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세종이나 성종, 권근 등이 “내가 성병(임질)을 앓고 있다”고 대놓고 이야기했을까.
 그리고 그 부끄러운 기록을 사관이 <실록>에 자신있게 남겼을까. 그런데도 세종대왕을 언급할 때 ‘임질’ 부분은 쏙 빼놓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임질과 관련된 심상치않은 기록들이 더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특히 고려조 충혜왕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원나라의 간섭 속에 두 번이나 왕위에 올랐던 충혜왕(재위 1330∼1332, 복위 1339∼1344)은 천하의 난봉꾼이었다. 그는 특히 성병인 임질을 고려에 퍼뜨린 것으로 악명이 높다.
 <고려사절요> ‘충숙왕·충혜왕조’를 보면 충혜왕의 난잡한 행각이 적나라하게 묘사됐다.
 1339년 복위하자 마자 아버지(충숙왕)의 후비였던 수비 권씨와 경화공주(원나라 공주)를 차례로 강간했다. 
 “충혜왕은 남의 아내나 첩으로서 얼굴이 잘 생겼다는 말만 들으면 친척이나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측근과 불량배들을 시켜 빼앗아 오거나, 혹은 그 집에 가서 음란한 짓을 하기 일쑤였다.” 충혜왕은 특히 자신의 외숙이자 삼사좌사를 지낸 홍융의 후처인 황씨와 간통했다. 홍융이 외숙이라면 황씨는 외숙모인 셈이 아닌가. <고려사절요>를 보라.
 “원래 홍융은 후처인 황씨의 용모가 아름다워 늘 안방에 가두어 놓고 친척들조차 보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데 홍융이 죽은 뒤 환관 최화상이 충혜왕에게 황씨의 아름다움을 귀띔했다. 그러자 충혜왕은 그 집에 가서 정을 통한 뒤….”
 그야말로 ‘콩가루 임금’이 아닌가. 문제는 충혜왕이 황씨를 비롯한 여자들에게 몸쓸 성병인 임질을 옮겼다는 것이다.
 “충혜왕이 열약(熱藥)을 복용했기 때문에 그와 정을 통한 여인들은 임질에 많이 걸렸다. 황씨도 임질에 걸리자 충혜왕은 의술에 능한 승려 복산(福山)을 시켜 치료하게 하였다.”
 열약은 몸을 뜨겁게 하고 생물을 왕성하게 하는 약제인데, 부자(附子)·육계(肉桂)·오수유(吳茱萸)·건강(乾薑)이 여기에 속한단다.
 어쨌든 충혜왕은 난잡한 성생활로 임질을 고려 땅에 옮긴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기록이 있다보니 임질이라고 하면 ‘난잡한 충혜왕’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종이나 성종의 임질 관련 기록을 보면 당혹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고….

요로에서 빠져나온 결석. 이렇게 큰 결석에서부터 모래처럼 생긴 작은 결석까지 다양하다. 결석이 요도를 막으면 격심한 통증을 느끼다가 빠져나오면 씻은 듯 통증이 사라진다.

 ■임질이라고 같은 임질인가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옛 문헌에 등장하는, 아니 세종·성종·권근 등이 걸렸다는 ‘임질’이 충혜왕이 여러 여자들에게 옮겼다는 임질과 같은 병인가. 그렇지만은 않단다.
 “한의학에서 임질이라는 병증은 몸이 허약하거나 피로누적 등과 함께 방광에 열이 차서 생긴다는, 일반 비교기과 질환의 개념입니다. 꼭 성병의 개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강용혁 분당 마음자리한의원장)
 <동의보감>과 <향약구급방>, <향약집성방> 등이 설명하는 임질의 증세를 보라.
 “임질은 소변이 잘 통하지 않는 병이다. 신이 허하고 방광에 열이 있을 때 생기는 병이다. 소변이 줄고 잦아지며 잘 나오지 않고…. 아랫배가 팽팽하게 당기며 통증이 배꼽에 이른다.”
 임질은 증세에 따라 5~8가지로 나눌 수 있다. 석림(石淋)·노림(勞淋)·혈림(血淋)·기림(氣淋)·고림(膏淋) 등….
 이 가운데 석림(石淋)이란 무엇인가. 모래나 돌 같은 것이 요도 중에 들어있어 오줌이 잘 나오지 않고 급통이 와서 사람이 기절까지 한다.
 그러다가 요로를 막던 막힌 돌이 빠지거나 흘러 내려가면 통증은 언제 그랬냐 싶게 사라진다. 그러다가 다시 막히면 다시 칼로 찌르는 듯한 격렬한 통증이 옆구리와 하복부에 생겨 떼굴떼굴 구를 정도로 통증을 호소하고…. 이같은 발작이 반복되는 것은 전형적인 요로결석의 증세라 할 수 있다.
 ‘노림’은 피로하면 오줌이 잘 나오지 않고 아랫배에서 급통이 나타나는 증세, ‘혈림’은 오줌 대신 통증과 함게 피가 나오는 증세, ‘기림’은 오줌이 시원하기 나오지 않는 증세 등을 일컫는다. 충혜왕이 걸렸을 가능성이 많고, 지금 성병이라 일컫는 전형적인 임질은 한의학에서 말하는 고림(膏淋)일 수도 있다.
 고림은 오줌이 잘 나오지도 않으면서 아프고, 나와도 고름과 같이 나오는 증세를 보인다. 그러니 오줌이 탁하고 기름같이 떠서 엉기는 모습을 나타낸다.     

 

 ■소변을 참으면… 
 각 문헌을 살펴보면 임질에 대한 온갖 견해가 난무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최한기가 쓴 <추측록(推測錄)>은 “사람의 석림은 모두 기(氣)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라 해석했다.
 홍만선의 <산림경제>를 보면 ‘수양총서’를 인용, “소변을 참으며 방사(房事)를 하면 임질을 얻게 되며, 혹은 배가 뒤틀려 배꼽 아래가 몹시 아프며 죽는다”고 기록했다.
 <산림경제>는 또 ‘고사촬요’를 인용해서 “복숭아를 먹은 뒤에 멱을 감으면 임질이 생긴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 야담집인 <대동야승>은 이제신의 수필집인 <청강선생 후청쇄어>를 인용, 임질의 특효가 사향노루라는 것을 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하루는 어떤 이가 이인홍이라는 일가친척에게 임질에 듣는 약을 구했다, 이인홍은 농담으로 말했다. ‘국노루(사향노루)가 임질치료약인데 요도가 통하지 않으면 그 배꼽을 눌러 젖을 짜서 그물에 바르면 완쾌됩니다’라고….”
 하기야 조선시대에 무슨 세균감염의 개념이 있었겠는가. 그랬으니 남성의 비뇨기에 문제를 일으킨 임질을 둘러싸고 갖가지 이야기들이 통용됐던 것이다.  
 
 ■세종의 임질은 요로결석?
 그렇다면 세종은 어떤 종류의 임질을 앓았을까. 그의 증세를 보면 임질 가운데 석림이 눈에 밟힌다.
 <세종실록>에서 세종이 스스로 밝힌 증상을 보라.
 “임질을 앓은 사람들은 ‘이 병은 비록 나았다가도 발작한다’고 한다.” “찌르고 아픈 증세가 즉시 발작하곤 한다.”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더욱 심하다.”
 기절할 정도의 발작을 반복한다는 요로결석의 증세를 연상시킨다. 고고학자인 이선복 서울대 교수는 세종의 임질 증세를 주제로 흥미로운 논문을 썼다.(이선복의 <뇌부와 세종의 임질에 대하여>, ‘역사학보’ 178호, 역사학회, 2003년)
 이 교수는 1441년(세종 23년) 5월 18일의 <세종실록>에서 단서를 찾았다.
 “의관이 아룄다. <대전본초>에 이르길 ‘벽력침(뇌부)은 독이 없고, 대경실심(大驚失心)하고 황홀하여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증세와 아울러 하림(下淋·이질과 임질을 아울러 일컫는 말)을 관장하는데, 갈아서 복용하거나 또는 이를 달여서 복용한다.”
 벽력침, 혹은 뇌부(雷斧)는 지금으로 치면 우연히 발견되는 선사시대의 석기를 일컫는다. 돌칼이나 돌도끼, 돌화살촉 등이다. 예전 사람들은 산이나 들에서 수습되는 이같은 인공의 도구를 매우 신비롭게 생각했을 것이다. 뇌부 혹은 벽력침 등의 표현은 천둥과 벼락을 관장한다는 뇌공(雷公)이 떨어뜨린 도구라 여겼다.
 세종 시대의 의관은 <대전본초>를 인용하면서 “임질 치료제로 돌칼과 돌도끼, 혹은 돌화살촉 등을 쓴다”면서 “이를 널리 구하라는 명을 내려달라”고 아뢴 것이다.
 의관이 아뢴 때는 세종이 임질 발작 때문에 무척 고생했던 바로 그 시기이다.
 <의방유취>와 <동의보감> 등은 ‘석림(요로결석)의 치료에는 오줌과 함께 배출된 결석을 갈아 마시면 된다’는 약간은 주술적인 치료법을 소개하고 있단다.
 그 경우 몸 속의 돌이 부서져 나온다나…. 실제 <세종실록>을 보면 전국 각지에서 발견된 돌칼과 돌화살촉을 바친 이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선복 교수는 바로 세종이 걸렸다는 임질이 석림, 즉 요로결석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뇌부 즉 선사시대 석기와 연결지어 설명하고 있다.

 

 ■세종의 임질은 과연…
 세종은 자신을 무던히도 괴롭혔던 임질, 즉 요로결석을 치료하려고 선사시대 석기를 구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이 걸렸다는 임질은 과연 요로결석이 확실한가. 성병으로서의 임질이 아니고?
 강용혁 분당 마음자리한의원장은 “그렇게 100% 단정할 수만은 없다”고 말한다.
 조선시대 때는 세균 감염의 개념이 없었다는 것. 따라서 당시 의료진들은 세종의 임질이 성 접촉에 의한 세균 감염으로 생긴 성병인지, 아니면 단순 요로결석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라는게 강 원장의 말이다. 강 원장은 또 “<실록>에 나오는 증상 만으로 요로결석이다, 혹은 성병이다 단정하는 것도 무리일 수 있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세종은 성병에 걸렸다는 말인가?
 “글쎄요. 물론 요로결석일 가능성이 짙겠지만…. 정확히는 ‘판단 불가’라 하는 게 옳을 것 같아요.”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96 관련글 쓰기

 “폐하는 어립니다. 조정에서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면 폐하의 단점만 보일 겁니다. 이제부터는 폐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원전 209년 환관 조고가 허수아비 황제(진 2세 호해)에게 수근댔다. “천자를 ‘짐(朕)’이라 부르는 이유를 아느냐”는 것.
 짐(朕)이란 단어는 ‘징조’ ‘조짐’의 뜻이어서 무슨 일인지 아직 모른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천자의 일을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된다는 게 조고의 수근거림이었다.
 무슨 뜻이냐. 한마디로 조고는 황제와 다른 대신들과의 소통을 완전히 막아버린 것이다. 진 2세는 늘 구중궁궐에 쳐박혀 있었고, 모든 국사는 환관 조고의 수중에 떨어졌다.  

 

■황제의 어차와 옥쇄를 수중에
 환관 조고의 일화가 바로 ‘문고리 정치’의 가장 악명높은 사례가 됐다.
 이 비극은 대제국을 건설한 진시황이 전국 순행중 어이없이 붕어하면서 시작됐다.
 진시황의 행차를 지근거리에서 수행한 이는 세사람이었다. 황제의 다섯째이자 막내아들인 호해(胡亥)와 그 호해에게 형법을 가르쳤던 환관 조고, 그리고 승상(총리) 이사 등이었다.
 진시황에게는 20여 명의 자식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입바른 소리를 잘했던 맏아들 부소(扶蘇)는 변경으로 쫓겨나 있었다. 460여 명의 방·술사를 생매장한 이른바 갱유사건 때 “아니되옵니다”를 연발하다가 추방된 것이었다. 반면 막내아들 호해는 시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시황제는 5번째였던 기원전 209년의 순행 때 막내 호해 만을 데려간다.
 환관 조고는 바로 중거부령(中車府令)과 부새령(符璽令)을 겸직하고 있었다.
 중거부령은 무엇인가, 바로 궁중의 어차와 가마를 총지휘하는 직책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조고는 옥새를 출납하는 책임을 맡은 부새령을 겸직하고 있었다.
 무슨 뜻인가. 조고는 ‘중거부령’으로서 황제의 손과 발이 되었고, ‘부새령’으로서 황제의 명에 날인하는 결제도장을 수중에 넣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엄청난 권력이 아닌가. 황제의 최측근 세력이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황제가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있을 때는 그런 권력이 무용지물이었다.

 

 ■유언을 조작하라!
 그러나 시황제의 5번째 순행, 즉 현장지도가 제국의 운명을 갈라놓았다.(기원전 210년)
 황제가 순행 도중 중병에 걸린 것이다. “황제의 행방을 절대 알리지 말라”는 엄명을 내린 시황제는 최측근인 환관 조고를 부른다. 죽음을 예감한 황제가 조고를 시켜 유언을 담은 밀서를 작성시킨 것이다.
 ‘맏아들 부소는 어서 함양(진나라 수도)으로 돌아와 장례를 받들라.(與喪會咸陽而葬)’ 
 한마디로 자신이 죽고나면 황위를 맏아들 부소에게 전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고는 이 유언을 부소에게 전하지 않았다.
 그 해 7월 시황제는 결국 순행도중 붕어하고 만다. 한마디로 객사한 것이다. 이때부터 황제의 가마를 담당하고, 황제의 옥새를 관리하는 조고의 흉계가 착착 진행된다.
 조고는 우선 황제의 시신이 함양으로 운구될 때까지 황제의 죽음은 철저하게 비밀로 부친다.
 조고는 황제의 어차인 온량거(온梁車)에서는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황제의 죽음을 아는 이는 아들 호해와 환관 조고, 승상 이사 등 5~6명에 불과했다. 승상 이사는 진시황을 도와 제국을 건설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결국 조고의 회유와 협박에 못이겨 타협하고 말았다.
 이들은 시신 썩는 냄새와 구별하지 못하도록 소금에 절인 생선을 온량거에 가득 넣었다.
 조고는 마각을 드러낸다. “정권이 맏아들 부소에게 가면 우리 모두 죽는다”면서 호해와 이사 등을 설득한다.
 세 사람은 맏아들 부소에게 전달될 밀봉편지를 뜯어 내용을 조작한다.
 “참소를 일삼는 부소는 어서 자결하라.”
 황제의 옥새가 찍힌 ‘조작된 밀서’가 변경에서 만리장성을 지키던 맏아들 부소에게 전달된다. 아버지가 죽은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부소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자진하고 만다.

 

 ■대궐의 문고리를 잡다
 결국 막내아들 호해는 21살의 나이에 환관 조고의 음모 때문에 2세 황제가 된다.
 제국의 권력을 틀어잡은 조고가 한 일이 있었다. 스스로 낭중령(郎中令)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낭중령’이 무엇인가. 대궐의 문호(門戶)를 관장하는 직책이었다. 조고가 권력을 잡자마자 ‘낭중령’에 취임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대궐의 출입을 관장한다? 이것은 황제와 대신들 간의 통로를 틀어쥔다는 것이다.
 ‘중거부령’과 ‘부새령’의 직으로 황제를 멋대로 뒤바꿔 권력을 찬탈해놓고, ‘낭중령’의 직으로 새 황제의 눈과 귀를 막고 대신들과의 소통을 차단하고….
 그야말로 구중궁궐의 문고리를 차지, 권력의 문고리를 독점한 것이다. 이를테면 ‘문고리 1인방’이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진나라는 조고의 나라가 됐다.
 우선 2세 황제에게 “살아있는 황족을 모두 죽이라”고 건의했다. 이로써 공자 12명이 시장바닥에서 도륙 당했다. 공주 10명은 기둥에 묶어 창으로 찔러 죽였단다.
 또 50만 명을 투입, 아방궁 공사를 재개했다. 반대여론에는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은 하고 싶은 것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인데 무슨 잔소리냐”고 호통쳤다.
 이를 두고 후한의 명제는 “이는 사람의 머리로 짐승 울음을 내는 것(人頭畜鳴)”이라면서 혀를 끌끌 찼다.

 

 ■문고리 권력의 최후
 변방의 부역에 징발도 끊이지 않았다. 연좌제로 처벌이 강화됐다. 길 가던 백성의 절반이 전과자가 됐다. 형벌을 받은 자의 절반이 죽어 시장바닥에 쌓였다.
 세금을 많이 걷고, 사람을 많이 죽이는 자가 ‘현명한 충신’이 됐다.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던 승상 이사(李斯)도 결국 역모죄로 옭아매 죽였다.
 이 무렵 조고가 2세 황제에게 했다는 말이 바로 “폐하는 팔짱만 끼세요. 정무는 제가 더 처리할게요”라는 말이었다.
 조고의 탐욕은 파국을 불렀다. 아예 2세황제를 쫓아내고 스스로 황제가 될 꿈을 꾼 것이다.
 이 때 그 악명높은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가 등장한다. 모반을 목전에 둔 조고가 사슴을 황제에게 바치면서 “이 동물은 말입니다.”라고 우겼다는 바로 그 고사 말이다.
 어리석은 황제가 “이게 사슴이지 무슨 말(馬)이냐”고 했지만, 상당수의 대신들은 조고를 좇아 “말이 맞다”고 했다는….  
 황제는 결국 조고의 압박에 못이겨 자결하고 말았다. 하지만 천하를 움켜쥘 것처럼 보였던 조고 역시 허망한 죽음을 맞는다.
 억울하게 자살한 진시황의 맏아들인 부소의 장자(자영)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 3족이 주살된 것이다.
 어렵사리 황위에 오른 자영(진시황의 장손자)은 나름 무너져가는 진나라 제국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천하는 이미 유방과 항우의 2파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진나라는 불과 3개월 만에 멸망하고 만다.(기원전 206년) 진시황이 통일제국을 세운지 불과 15년 만에, 환관 조고가 호해를 2세 황제로 옹립한 지 3년 만에….
 ‘중거부령(황제의 어차관리)’, ‘부새령(황제의 옥새관리)’, ‘낭중령(궁궐의 문호 관리)’ 등으로 상징되는 ‘문고리 권력’의 처음과 끝은 이렇게 비참했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95 관련글 쓰기

     이번주 팟캐스트 9회는 ‘환관’ 이야기입니다.
 ‘문고리 권력의 원조…. 환관 그들을 위한 변명’ 입니다.
 중요 부위를 스스로 자르거나, 혹은 형벌을 받아 잘린 남성들의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사기>라는 불후의 역사서를 쓴 사마천도 궁형을 당한 뒤 ‘치욕’이라는 낱말을 19번이나 쓰면서 괴로워했답니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는 것보다 더 엄청난 치욕은 없다. 하루에도 창자가 9번 끊어지는 것 같다”고 괴로워했답니다.   
 사마천이야 강제로 잘렸다지만 환관이 되려고 스스로 자른 남성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들은 왜 사마천의 말마따나 ‘몸이 망가져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잘라야 했을까요. 명나라 공식역사서를 보면 명확한 이유가 나옵니다. 

 “환관은 황제의 배후에서 황제를 조종해서 권세를 장악했다. 그 위세가 구족에 이른다.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너도나도 자식 손자들을 거세시켜 부귀를 꿈꾸는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황제의 문고리를 잡는다는 뜻이 아닐까요.
 문고리 정치의 원조는 누구였을까요.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은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주인공이죠. 바로 기원전 210~207년 사이 진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환관 조고였습니다.
 조고는 황제의 어가를 책임지고, 황제의 옥새를 관리하고, 끝내는 궁궐의 출입을 통제하는 직책을 맡아 국정을 농단했습니다. 이로써 황제와 신하, 황제와 백성들 간의 소통은 끊어졌습니다. 황제와의 ‘소통의 문’을 쥐고 흔든 문고리 권력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명나라를 두고 흔히 환관의 나라라 합니다. 내로라 하는 환관들이 악명을 떨쳤습니다.
 ‘만세’를 연호한다는 황제의 권세에 비견된다며 ‘구천구백세’를 외치게 했다는 환관 위충현의 권세는 어땠을까요. 당대 사람들은 위충현과 그의 내연녀 객씨의 권세를 황제보다 더 높이 평가했답니다. 또 있습니다. 환관 유근 역시 백관들에게 단체기합을 줄 정도로 위세를 부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권세는 아침이슬처럼 덧없이 사라졌습니다.
 조고는 삼족을 멸하는 극형을 받았고, 위충현은 천참만륙(千斬萬戮), 즉 천갈래 만갈래 찢기는 형을 받았습니다. 유근은 무려 3357회의 칼질형을 받았습니다.
 자, 이제 환관들의 슬픈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관련기사>

 거세된 남성 환관…그들을 위한 변명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94 관련글 쓰기

 “민통선 이북, 어느 무덤에서 호리꾼(도굴꾼)이 무덤 하나를 하나를 파헤쳤는데요….”
 1989년 어느 날, 국립중앙박물관에 흥미로운 제보 하나가 접수됐다.
 어느 도굴꾼이 민간인 통제선 이북의 무덤을 파헤쳤는데, 그 무덤의 벽면과 천정에 그럴싸한 그림이 그려져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양모 박물관 학예실장의 귀가 번쩍 띄였다. 무덤의 벽가 천정에 그림이라? 그것은 바로 벽화라는 것이 아닌가. 사실이라면 대단한 뉴스였다.
 특히 한반도 남부에 벽화묘는 극히 드문 것이어서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민통선 이북 파주 서곡리의 도굴된 무덤에서 확인된 고려말 벽화그림. 무덤의 주인공을 그리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민통선 고분벽화의 비밀
 알다시피 고분벽화의 전통은 삼국시대, 특히 고구려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 그 전통은 소극적이나마 발해-고려로 이어졌다.
 고려 명종(재위 1171~1197년)의 무덤인 지릉(智陵ㆍ장단군 장도면)에 그려진 성신도(星辰圖)를 비롯해, 개풍군 수락암동 1호분에서 표현된 사신도(四神圖)와 십이지신상, 장단군 법당방(法堂坊) 벽화고분의 십이지신상과 성좌도(星座圖), 공민왕릉(개풍군 해선리)의 사신도와 십이지신상 등 주로 북한 땅에서 발견되는 고려무덤에서 간간이 보였다.
 남쪽에서는 거창군 둔마리의 주악선녀도(奏樂仙女圖)와 안동 서삼동의 사신도와 천체도(天體圖) 등 고려시대 벽화전통이 남아있을 뿐.
 이런 상황에서 또 하나의 벽화묘가 발견된다면 그 또한 주목을 끌만한 뉴스임이 분명했다.
 정양모 학예실장은 제보자에게 “한번 은밀하게 추적해보라”고 채근했다. 제보자는 1년 간의 추적 끝에 무덤의 위치를 파악해서 정실장에게 전했다.
 “파주 진동면 서곡리 야산이랍니다. 비석도 있다네요. 청주 한씨, 그러니까 문열공 한상질의 묘라고….”
 한상질(1350?~1400년)은 여말선초의 문신이다. 고려 왕조에서 판서-우상시(右常侍)-예문관제학 등을 거쳤다. 조선 건국 후 예문관학사로서 주문사(奏聞使·특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국호(조선)를 확정 받고 돌아온 인물이다. 세조 때의 권신(權臣)인 한명회의 할아버지였다.
 만약 이 무덤에 벽화가 있다면 그것은 여말선초의 벽화임이 분명했다.

 

 ■도굴된 고려벽화분
 발굴이 결정됐다, 물론 남의 조상 무덤을 함부로 파헤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미 도굴이 되었고, 그 안에 벽화도 존재한다니까 청주 한씨 종중을 설득해서 양해를 얻은 것이었더.
 1991년 4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정식발굴을 시작했다.
 “무덤을 찾는 데 4시간이나 걸렸어요.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노출된 지뢰가 보이기도 하고…. 군인 3~4명이 호위하는 속에서 조사를 시작했죠. 비무장지대 안이라 대남방송은 귓전을 때렸고….”(최맹식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사)
 발굴단은 민통선 밖 여인숙에 숙소를 잡아놓고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과연 무덤 안에는 벽화가 보였다. 전형적인 고려 말기의 벽화였다.
 “사방 벽면에 12명의 인물상을 배치했고, 천장에는 별자리를 그린 성신도가 있었어요. 전형적인 고려 말 무덤의 모습이었습니다.”
 인물상의 머리는 12지신을 의미하는 동물 형상의 관모를 쓰고 있었다. 3장의 판석으로 연결된 천장의 판석에는 천계(天界)를 나타내는 커다란 원이 표현돼 있고, 그 안쪽에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북두칠성, 삼태성(三台星), 북극성 등이 묘사돼 있었다. 또한 북두칠성 좌우에는 두 무더기의 구름인 것 같은 형상이 나타나 있었다.
 천정에 죽은 이의 영혼이 향하는 천상의 세계, 영혼의 세계를 명성신(明星辰)과 신수(神獸), 서조(瑞鳥), 영초(靈草) 등을 그린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잘 나타난다.
 도굴의 흔적은 처참했다. 여러차례 도굴이 이뤄진 것으로 보였다. 출토유물이 토기와 자기편인데, 모두가 작은 파편으로만 수습됐을 뿐 완형은 단 한 점도 없었다.
 다만 개원통보(開元通寶ㆍ621년 처음 주조)와 치평원보(治平元寶ㆍ1064~1067년) 등 동전 43점과 주판알 모양의 수정제품, 푸른 구슬옥 1점이 나왔다.  
 비록 유물은 별볼일 없었지만, 고려 말기의 벽화묘가 확인됐다는 하나만으로도 분명 획기적인 발굴성과였다.

여말선초의 문인 한상질의 무덤으로 알려져 600년간이나 한씨 가문의 제사를 받았던 무덤. 하지만 발굴조사결과 여말의 문신 창화공 권준의 무덤으로 확인됐다.

 ■한씨의 무덤이 권씨의 무덤으로
 발굴과정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비석에는 분명 한상질의 묘, 즉 ‘문열공한상질의 묘(文烈公韓尙質之墓)’라고 돼있었으므로 논란의 여지없는 한상질의 무덤이어야 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막상 묘비를 발굴해보니 묘비가 공중에 붕 떠있는 것이 아닌가. 발굴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이 묘비는 나중에 세운 것이 아닐까. 긴가민가하고 조사를 진행하던 발굴단을 경악시킬만한 유물이 나왔다.
 묘 주변의 구조를 조사하다가 무덤 바로 앞의 흙에서 묘지석(誌石·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묘소의 소재를 기록하여 무덤에 묻는 돌)을 4편이나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묘비를 정성스레 닦고 묘비에 새긴 글자를 읽어나가자 놀라운 글씨들이 보였다.
 전서체(篆書體)로 쓴 비석의 상단에 보인 ‘증시창화권공묘명(贈諡昌和權公墓銘)’이라는 글자였다. 무슨 말이냐. 한마디로 묘 주인공이 권씨라는 것이었다.
 물론 비석 밑부분에는 또박또박한 해서체(楷書體)로 가로 27행, 세로 48행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해괴한 일이었다. 무덤 앞에 서있는 비석은 엄연히 청주 한씨(한상질)의 묘라고 해놓았는데 정작 무덤의 실제 주인은 권씨라는 것이 아닌가.
 정확한 판독결과 무덤의 실제 주인공은 고려 충렬왕~충목왕 때의 문신 창화공(昌和公) 권준(權準ㆍ1280~1352년)이었다.
 묘지석은 권준이 죽은 해(1352년) 사위 홍언박(洪彦博)의 간청으로 당대 문인인 이인복(李仁復ㆍ1308~1374년)이 쓴 것이었다.
 권준은 충렬왕 6년(1280년)에 태어나 공민왕 1년(1352년) 별세한 인물이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충선왕(재위 1308~1313년)을 섬기면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등을 지낸 후,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다. 묘지명에는 권준의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및 자녀와 손(孫)까지의 가보(家譜)가 상세하게 실려 있다.
 즉 그는 권렴(權廉)과 권적(權適) 등 2남2녀를 두었으며, 외손녀는 충혜왕(재위 1330년~1332년, 복위 1339년~1344년)의 비가 됐다.

당초 한상질의 무덤으로 알려진 서곡리 벽하묘에서는 발굴결과 창화공 권준의 무덤임을 알려주는 지석이 확인됐다. 

 

 ■공민왕 시역사건의 비밀
 그렇다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하나 있다.
 권준의 무덤에 왜 한상질의 비석이 서 있었던 것일까. 청주 한씨는 이 잘못된 비석 때문에 600년 가까이 엉뚱한 분의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아닌가.
 왜 이런 착오가 생겼을까.
 그런데 이 두 집안 간에는 떼래야 뗄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었으니…. 그것은 무덤의 실제 주인공으로 판명된 권준과 훗날 세워진 비석의 주인공인 한상질이 내외손 간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권준의 둘째 아들인 권적의 사위가 한상질의 아버지인 한수(1333~1384년)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내외손 간이라는 것과, 잘못된 무덤은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이 무덤의 미스터리는 이른바 ‘공민왕시역사건(1374년)’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한번 되돌아보자. 
 공민왕은 망국의 기운이 돌던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울 만한 개혁군주의 면모를 발휘했다. <고려사>와 <태조실록>, <연려실기술> 등을 종합해보자.
 “공민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총명하고 인후했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도 정성을 다해 힘썼으므로 조정과 민간에서 크게 기뻐해서 태평시대가 오기를 기대했는데….”
 그런데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노국공주가 세상을 떠나고, 신돈을 통한 개혁정치가 물거품이 되자 정신줄을 놓고 만다.
 “밤낮으로 슬퍼하며 죽은 노국공주만 생각해서 드디어 정신병을 얻었다. 임금은 스스로 화장해서 부인 모양을 하고….”

 

   ■동성애 공민왕의 변태기질이 낳은 비극 
 설상가상으로 공민왕은 남색(男色·동성애)에 빠진다.
 “1372년(공민왕 21년) 공민왕은 자제위를 설치, 나이 어리고 얼굴이 아름다운 자를 뽑았다. (총신) 김홍경이 자제위의 책임자로 두었다. 이후 홍륜·한안·권진·노선·홍관 등이 음란해서 왕의 사랑을 받았고, 늘 침실에서 모셨다.”
 훙륜·한안·권진 등이 바로 자제위로서 임금의 동성애 상대였던 것이다. 이때 파국이 잉태됐다. 아들이 없던 공민왕이 홍륜·한안 등을 시켜 여러 비(妃)와 강제로 관계를 맺게 하여 사내아이를 낳게해서 자기 아들르 삼으려 했다. 하지만 정비와 혜비, 신비 등 세 명의 비(妃)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거부했다.
 공민왕은 역시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한 익비(왕씨)를 칼로 위협, 홍륜과 강제로 관계를 맺게 했다.  
 1374년(공민왕 23년) 9월 1일 환관 최만생이 볼일을 보러 화장실로 들어간 공민왕의 뒤를 따라 은밀해 고했다.
 “익비가 임신 5개월 됐답니다.”(최만생)
 “기쁘기 이를 데 없구나. 노국공주의 영전이 그 아이를 바칠 수 있겠구나. 그런데 그 아이는 대체 누구의 씨란 말인가.”(공민왕)    
 “홍륜이라 합니다.”(최만생)
 “그래? 내가 내일 창릉(태조 왕건의 아버지 묘)에 행차해서 술에 취한 척한 다음 홍륜을 죽일 것이야. 그리고 참. 너도 이 계획을 알고 있으니 너 역시 죽음을 면치 못할거야.”(공민왕)
 “….”(최만생)
 죽을 운명이 된 최만생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임금에게 밀고했는데, 도리어 죽을 운명이라니…. 최만생은 급히 훙륜·권진·한안 등을 찾아가 공민왕의 말을 전했다.
 그날 밤, 홍륜·권진·한안 등과 공모한 최만생은 만취한 공민왕을 시해했다. <여사제강>은 “(공민왕의) 머리의 골이 병풍에 튀었고 피가 방안에 홍건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다음 날, 전세가 역전됐다. 친원파(親元派)인 이인임(李仁任ㆍ?~1388년)과 경복흥(?~1380) 등이 전모를 파악하고 도리어 홍륜과 최만생, 권진, 한안 등을 체포한다.
 홍륜과 최만생은 능지처참됐고, 권진·한안 등은 참형을 당했다.

파주 서곡리 벽화묘 전경. 민통선 이북에 있었지만 무자비한 도굴이 계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얄궂은 두 가문
 이 대목에서 무덤에 얽힌 사연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공민왕 시역사건에 연루돼 참형을 당한 권진의 가문이 멸문지화의 위기에서 할아버지(권준)의 제사를 내외손 간인 청주 한씨 집안(한수)에게 부탁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인 것이다.
 그러니까 청주 한씨 가문이 내외손 간인 권준의 제사를 300년 이상 지내주다가 한수의 아들 한상질(1400년 사망)의 무덤으로 오인했다는 것이다.
 무덤 앞에 서있는 한상질의 비석은 1700년대에 세운 것이다. 꽤 그럴듯한 추정이다.
 하지만 100% 확실할까. 그렇지는 않다.
 공민왕 시역사건으로 권씨 가문의 권진이 멸문의 위기를 겪었다지만 한씨, 즉 한안 역시 참형을 당했기 때문이다. <고려사절요> ‘신우 1(1376년)’을 보면 ‘공민왕 시역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권씨와 한씨 집안의 내력을 읽을 수 있다.
 “사건 이후 한안의 아비(한방신)과 형제(한휴·한열), 그리고 권진의 아비(권용)과 형(권정주) 등이 줄줄이 참형을 당했다. 그들의 부인들은 참형 직전에 겨우 살아남았다. 그들의 친숙질과 종형제는 모두 원지로 유배됐다.”
 결국 두 집안 모두 멸문의 화를 당하기 일보 직전까지 간 것이다. 그런 마당에 한씨 집안이 권씨 집안의 제사를 대신 지내줄 여력이 있었을까. 이 또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나저나 두 집안의 관계가 알궂지 않은가.
 서로 내외손의 관계이며, 공민왕 시역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참형을 당하고…. 이후 600년 간이나 상대방의 제사를 받고(권씨), 아니 상대방의 제사를 올려주고(한씨)….
 이 황당한 무덤 사건은 결국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싸움으로 번졌다. 법원은 ‘권준’의 손을 들어주었다.
 “14세기 중반, 즉 권준이 사망한 1352년 무렵의 유물이 묘 주변에서 출토되지만 한상질의 사망시기(1400년)를 전후한 시기의 유물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는 발굴단의 고고학보고서가 인정된 것이다. 청주 한씨 측은 다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 보고서>가 잘못됐다면서 다시 소송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소송도 기각됐다.
 그렇다고 본다면 권준이라는 분은 그나마 복받은 분이라 할 수 있다. 남의 집안이 차려준 제사상이나마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으니까.
 그렇다면 한상질의 비석이 왜 남의 무덤 앞에 서있었다는 걸까.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93 관련글 쓰기

  1. Subject: Primark Vouchers

    Tracked from Primark Vouchers 2014/12/23 19:28  삭제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복사나무의 어여쁨이여! 활짝 핀 그 꽃이로다.(桃之夭夭 灼灼其華)”(<시경(詩經)>)
 연산군이 인용한 <시경>의 한 구절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워낙 황음무도한 연산군이다 보니 채홍사가 간택한 여인을 희롱하는 싯구라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연산군은 선남선녀들이 복사꽃처럼 화려할 때 시집·장가를 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 싯구를 인용했습니다.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이 그랬는데 다른 임금들은 오죽했겠습니까. 옛 임금들은 노처녀·노총각의 결혼을 국가정책으로 삼았습니다.

혹자는 “혼인을 제 때 하는 것이 왕정의 급선무”라고까지 말했답니다. 시쳇말로 한다면 국가가 나서서 ‘솔로대첩’을 마련했다는 얘기입니다.
 심지어 가난한 남녀가 혼인을 치르지 못할 때는 일가친척이 나서 혼숫감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국법으로 정하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임금은 서울은 한성부가. 지방은 감사들이 나서 결혼대책에 만전을 기하라는 특명을 내렸습니다. 제대로 된 대책이 없으면 처벌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습니다.
 홀로 된 홀아비와 과부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홀아비와 과부, 즉 ‘환과’는 국가가 보살펴야 할 가장 불쌍한 사람들로 꼽혔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역대 임금들은 왜 이와같은 ‘솔로대책’에 목숨을 걸었을까요.
 또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 시절, 노총각·노처녀의 기준은 어땠을까요. 몇 살이 되어야 노총각 노처녀의 반열에 들었을까요. 또 처녀 총각이라는 말은 과연 어떤 뜻이었을까요.
 얼마 후 2년 전 이맘 때에 이어 2번째로 이른바 ‘솔로대첩’이 열린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 옆구리가 시린 싱글들에게는 의미심장한 모임일 수도 있겠지요. 그나저나 2년 전처럼 여러가지 문제가 제기되어 행사가 속빈강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애처롭기는 합니다. 심지어 옛 왕조시대에도 국가차원의 ‘솔로대첩’ 아니 ‘솔로대책’이 마련됐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온갖 푸대접을 받아가며 민간차원에서 진행되니 말입니다.

 <관련기사>

 역사속 솔로대첩, 솔로대책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92 관련글 쓰기

 “천하의 권세를 가진 첫번째는 태감 위충현이고, 둘째는 객씨이고, 셋째가 황상(황제)이다.’라고…”
 1624년(인조 2년)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홍익한의 사행일기(<조천항해록>)는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명나라 백성들이 환관 위충현과 그의 내연녀(객씨)의 위세가 황제(명 희종)을 능가했음을 수근거렸다는 것이다.
 과연 그랬다. 위충현(?~1627)은 희종의 유모였던 객(客)씨와 사통한 뒤 명나라 국정을 쥐락펴락했단다.  

청나라 시대 환관의 사진. 어릴 적부터 거세한 환관은 음석이 여자다워지고 모습 또한 여성스러워졌다고 한다.

 ■구천구백세!
 어떻게 환관이 남성을 회복했느냐고? 위충현은 어린 아이의 뇌(腦)를 생으로 씹어먹고는 양도(陽道)를 회복했다고 한다.
 위충현은 안팎의 대전을 손아귀에 넣고 자신을 호위하는 환관 3000명을 두어 궁중에서 훈련시켰다고 한다. 심지어는 황제 앞에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니….
 그랬으니 황제가 명나라 권력서열 3위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것이다. 위충현이 외출할 때 연도의 백성들은 그에게 ‘구천세(九千歲)’고 모자라 ‘구천구백세’를 연호했다고 한다.(<명사> ‘열전·위충현전’ 등) 원래 황제에게는 ‘만세’를, 제후국 임금에게는 ‘천세’를 연호하는 게 법도인데, 위충현에게 황제와 거의 맞먹는 ‘구천세’ 혹은 ‘구천구백세’까지 연호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공덕을 기리는 사대부만 해도 40만 명이 넘었단다. 심지어 국자감 학생 육만령은 위충현을 공자에 비유하면서 ‘살아있는 위충현’의 사당을 국학 옆에 세울 것을 청했단다.
 살아있는 위충현을 모신 ‘생 사당’에는 침향(열대지방에서 나는 향나무)으로 만든 위충현의 목상(木像)을 조성했다. 눈ㆍ귀ㆍ입ㆍ코ㆍ손ㆍ발이 산 사람과 똑 같았다고 한다.
 그 뿐인가. 뱃속의 창자와 폐는 모두 금옥과 주보(珠寶)로 만들고, 상식(上食)과 향사(饗祀)도 왕공과 똑같이 했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아침이슬처럼 덧없었다. 희종 다음에 등극한 의종이 그를 봉양에 귀양 보내고 그 집을 적몰시킨 것이다. 위충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자 황제는 그의 몸을 천갈래 만갈래 찢어버리는 극형(천참만륙·千斬萬戮)을 내렸다.(<성호사설> ‘구외이문·위충현’, ‘경사문·위충현 사’)    
 
 ■3357번의 칼질형
 위충현보다 100여년 앞선 지독한 환관의 대표주자가 있었으니 바로 유근(1451~1510)이었다.
 유근의 ‘주인’인 명나라 무종은 웃기는 기인이었다.
 정무는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음주가무에 심취했고, 그것도 모자라 궐밖의 유곽(遊廓)으로 놀러 다녔다. 심지어는 활쏘기에 능한 환관들을 집결시켜놓고는 하루종일 전쟁놀이를 벌였다고 한다. 함성을 지르면서 쫓고 쫓기는 환관들의 전쟁놀이에 북경시내 진동했단다.
 유근은 다른 사악한 환관 7명과 한 패를 이뤄, 무종의 타락을 더욱 부추겼다. 역사는 유근을 포함한 8명의 환관을 팔호(八虎)라 일컫는다.
 또 황제의 결제를 자기 맘대로 뜯어고쳐 노신들을 모두 쫓아냈다. 실제로 대신들이 말을 듣지않자 찌는 듯한 더위에 조정백관들을 광장에 모아놓고 하루종일 엎드려 있게 했단다. 말하자면 단체기합을 준 것이다.
 그는 환관들의 비밀경찰조직인 동창과 서창을 총동원, 대신들을 탄압했으며, 모든 업무는 뇌물 액수로 결정했다. 유근에게 뇌물을 주면 유근 등이 종잇조각에 “어떤 관직을 준다”고 기입하면 병부(국방부)가 그대로 발령냈다고 한다. 그랬으니 훗날 몽골족과 여진족(후금)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유근의 말로도 비참했다. 1510년, 모반죄의 혐의를 뒤집어쓴 유근은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의 혹독한 형을 받았다. 그 능지처참이란 눈뜨고 볼 수 없었다. 무려 3357회의 절개형을 받았다. 그야말로 뼈만 남기고 살점을 발라냈던 것이다. 그가 권세를 잡으면서 축적한 황금이 24만 덩이(5만7800냥)이었단다. 

명나라 시대 구영이 그린 <한궁춘효>의 한 장면. 궁궐의 은밀한 곳이었던 내정에는 환관 외에는 누구도 출입할 수 없었다. 환관은 황후(왕후)나 후궁, 그리고 궁녀들을 보살피는 임무를 담당했다.  

 ■‘군주는 가만 있어야 합니다.’
 흔히들 나라를 말아먹은 환관의 간판주자로 조고(진나라)와 ‘십상시’(후한)를 꼽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조고가 누구인가. 진시황이 순행 중 급서하자 황제의 칙서를 위조해서 어리석은 막내 호해(진이세)를 황제로 옹립한 인물이 아닌가.
 그는 어린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폐하는 어립니다. 조정에서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면 폐하의 단점만 보일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폐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결국 황제와 대신들과의 소통을 완전히 막은 것이다. 진 2세는 늘 구중궁궐에 처박혀 있었고, 모든 국사는 환관 조고의 수중에 떨어졌다.
 당나라 숙종~대종 때 최초의 환관 재상이 된 이보국의 한마디가 오버랩된다.
 “주인님(대종)은 가만히 계세요. 바깥 일은 늙은이의 처분에 맡겨주세요.”
 어찌 그렇게 시공을 초월한 말이 똑같단 말인가.
 12명의 환관부처 우두머리를 뜻하는 십상시 또한 다르지 않았다. 환관의 손아귀에서 등극한 후한의 마지막 황제(영제)를 보라.
 그는 십상시 가운데서도 유력자인 장양(張讓)과 조충(趙忠)을 가리켜 입버릇처럼 ‘장상시는 나의 아버지’, ‘조상시는 나의 어머니’라 일컬었단다.
 장양과 조충은 바로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십상시(十常侍)’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다. 십상시 때문에 후한의 멸망은 가속화했다.
 십상시는 진나라 환관 조고처럼 12살에 등극한 황제를 주색에 빠뜨리면서 마음껏 국정을 주물렀다.
 
 ■‘환관의 나라’ 명왕조
 그러나 아예 ‘환관의 나라’로 칭할 만한 왕조가 있었으니 바로 명왕조였다.
 유근과 위충현은 바로 그 명나라가 배출한 ‘극강’의 환관들이다.
 사실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주원장은 황제의 독재권을 확립한 인물이었다. 환관도 혐오의 대상이었다. 역대왕조가 환관정치의 폐해 때문에 쇠락 멸망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뒤를 이은 2대 황제 혜종(주원장의 장손·재위 1398~1402)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환관들을 가혹하게 배척했다.
 하지만 북경의 제후인 연왕(성조·영락제)이 3년 간의 내전을 통해 황위를 찬탈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중앙무대에 연고가 없던 성조가 측근세력으로 환관을 키운 것이다. 게다가 중앙의 유가들이 성조에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성조는 이때 돌아올 수 없는 측근정치의 조직을 심어놓았다. 환관을 중심으로 한 비밀경찰조직을 세운 것이다. 이것을 동창(東廠)이라 했다. 조직은 무시무시했다.
 중죄인을 수용하는 감옥이 있었다. 황제의 명에 따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체포, 투옥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동창의 장관은 환관 중 최고 관직 가운데 두번째인 병필태감이 맡았다.
 성조는 경찰권 뿐 아니라 감찰권까지 환관들에게 내렸다. 북쪽으로 몽골, 남쪽으로 안남까지 수차례 원정군을 보냈다. 그 때마다 환관을 원정군 장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감찰관으로 파견했다. 변방 원정이 아닌 해외원정에는 아예 환관들을 책임자로 보냈다. 25년간 7번이나 원정단을 이끈 환관 정화와, 후현(티벳), 그리고 이시하(만주) 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환관의 역사는 뿌리깊다. 상나라 왕조 때인 기원전 3300년 전 갑골문을 보면 '궁형'을 뜻하는 상형문자가 나온다. 상나라는 포로로 잡은 강족 사람들을 거세시켜 환관으로 활용했다. 

 ■환관학교에서 일어난 일
 성조 이후 환관들의 입지는 더욱 넓어졌다.
 명군(名君)이 반열에 오른다는 5대 선종 때는 아예 환관학교(내서당)까지 세웠다.
 환관학교에서는 10세 이하 어린이 200~300명이 혹독한 교육을 받았다. 훗날 명말 청초의 사상가 고염무는 환관학교를 이렇게 비난했다.
 “내서당이 설치되면서 붓을 잡는 환관들이 과대평가됐고, 대권은 결국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일지록>)
 선종은 왜 환관들에게 글을 가르친 것일까.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송나라 때부터 이어진 재상정치를 폐지했다. 그러면서 재상이 대행하던 사무를 황제가 모조리 회수해버렸다.
 원칙적으로 모든 상주문은 황제가 직접 붓으로 사인(이를 비답이라 한다)해서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황제가 전국에서 올라오는 상주문을 다 검토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황제의 공식 비서 조직인 내각이 먼저 상주문을 검토했다. 그런 다음 뒤 그 수장인 내각대학사가 가장 적절한 조치라고 여기는 내용을 ‘비답의 원안’으로 적어 올렸다. 이 비답의 원안을 표의(票擬)라 했다.

 

 ■비선조직…. 그림자 내각의 음모
 그런데….
 이 비답이 황제에게 올라가기 위한 또 하나의 과정이 있었다. 환관 12감의 우두머리인 사례감 태감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황제의 비답을 담당하는 병필태감이 의미심장한 키를 쥐고 있었다.
 병필태감의 직무는 대각대학사가 상주문을 검토한 뒤 기입한 표의(비답의 원안)을 깨끗하게 정리하여 황제에게 올리는 것이었다.
 그 중 아주 중요한 몇 편의 상주문만 황제가 직접 비답하는 형식을 갖추었다.
 문제는 병필태감이 일종의 비밀경찰 조직인 동창의 장관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병필태감은 이미 내각대학사가 사인한 상주문(표의)에 다른 의견을 첨부해서 황제에게 제출했다.
 이것을 탑표(搭票)라 한다. 천하의 비밀정보가 동창의 장관인 병필태감의 손에 좌우됐기 때문이었다. 결국 황제에게는 내각대학사와 다른 의견이 올라갔고, 환관들의 손아귀에서 정무가 장악된 것이다. 정식의 조직을 거치지 않은 측근정치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환관의 전권이 막강했을 때는 내각의 표의조차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림자 내각, 혹은 비선의 정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베이징의 환관박물관에 전시된 거세용 칼.  

 ■황제와의 거리가 권력을 좌우한다 
 더 중요한 것은 공간의 거리였다.
 자금성의 구조를 보면 내정과 외정을 구분 짓는 담벽의 중앙에 운태문이 있고, 그 좌우에 평대라 일컫는 문 2개가 있다.    그런데 내각대학사들이 호출을 받으면 이 평대로 달려와 황제의 뜻을 전해들었다. 더 이상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내정 안의 환관들은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모셨다. 담벼락 하나를 두고 내신(환관)과 외신(관료)의 차이가 현격했던 것이다.
 정보를 독점하고, 24시간 황제의 눈과 귀가 막아 국정을 농단했으니 그 폐해가 어땠을 지 짐작이 간다.
 예컨대 ‘9900세’의 장본인인 위충현은 황제의 어좌가 있는 건청궁에 앉아 상주문을 멋대로 결제했다고 한다. 그랬으니 명나라의 ‘넘버 1’이자 ‘배후의 황제’로 일컬어진 것이다. 그 때 희종(천계제)은 무엇을 했냐면 궁정 안에 파묻혀 대패와 톱으로 세공품 만들기에 열중했단다.
 이쯤해서 당 문종 연간(재위 826~840)에 국정을 농단했던 구사량이란 후배 환관들에게 가르친 ‘군주 조정법’이 떠오른다. 
 “천자를 한가롭게 해서는 안된다. 언제나 호화생활에 몰두하게 하라. 그 눈과 귀를 즐겁게 하라. 절대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줘서는 안된다. 그래야 환관 일족의 뜻을 달성할 수 있다.”
 구사량은 “군주에게 독서를 즐기게 하거나 유가(儒家)를 가깝게 해서는 안된다”며 “만약 군주가 전대의 흥망을 안다면 환관을 멀리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어쨌든 진나라가 조고 때문에, 후한이 십상시 때문에 멸망을 자초했다면 당나라도, 후량의 태조 주전충이 환관 수백명을 살해하면서 끝장나고 말았다.
 ‘환관의 나라’였다는 명나라 역시 비밀경찰 조직까지 휘어잡은 환관의 측근정치 때문에 멸망이 가속화된 것이다.

 

 ■‘국권이 모두 고자에 있구나!’
 그럼 우리 역사속의 환관은 어떤가.
 다행히도 우리 역사에는 나라를 들어먹은 환관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다.
 먼저 우리 역사에서 궁형의 혹형이 없었고, 환관이 되기 위해 스스로 거세하는 이른바 자궁(自宮)의 제도가 없었다는 점은 특기할만 하다.
 예컨대 <고려사> ‘환자(宦者)’편을 보면 “환관이 된 자들은 어렸을 때 개에 물린 자들”이라고 했다. 꼭 개에 물리지 않았더라도 어떤 사고에 의해 남성을 잃은 자들이 환관이 됐다는 뜻이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은 도둑이 창궐함에 따라 궁형과 같은 극형의 카드를 만지막 거렸지만 “너무 비인간적이나 안된다”고 결론을 내린 일이 있었다.
 각설하고 역사서에 환관의 나쁜 예는 고려 의종 대의 정함일 것이다.
 천민 출신이었던 정함은 ‘어릴 때 개에 물려 고자가 된’ 이후 궁에 들어가 환관이 되었다. 의종은 왕위에 오르자 정사는 뒷전이었고, 태껸 구경과 사냥, 유람을 일삼았다.
 신료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주변을 지킨 측근은 정함이었다. 정함은 대궐 30보 안에 2000칸이 넘는 집을 짓고 누각을 마련하는 등 호화생활을 즐겼다.
 문신 김존중 등과 결탁해서 매관매직을 일삼고 아부하는 자를 등용했다. 1156년(의종 10년) 정함이 등창을 앓고 눕자 그를 문병하러온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수근댔단다.
 “국권이 환관에게 돌아갔구나!”(<고려사절요> 1156년조)

 <고려사>를 쓴 사관은 "정함과 같은 환관의 농단 때문에 결국 정중부의 난을 초래했다"고 안타까워했다.(<고려사절요> 1157년조)

청나라 말기 자금성 내부에서 태후를 모시던 환관들 

 ■“나 꼭 죽을 것이야!”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아간 환관이 있다. 연산군 대의 환관인 김처선이다.
 김처선은 성종 임금의 사랑을 받아 정2품 자헌대부에 올랐던 총신이었다. 원래 환관에게는 아무리 높아봐야 종2품까지만 오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성종은 김처선에게 판서와 같은 반열인 자헌대부에 올린 것이다. 그의 운명은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반전한다. 
 성종의 대를 이은 연산군이 무오사화(1498년)와 갑자사화(1504년)를 잇달아 일으키면서 대대적인 살육에 나섰다. 당대의 역관인 조신이 쓴 <소문쇄록>과, <연산군일기> 등 문헌을 보라.
 “이 때 김처선은 어둡고 음란한 연산군에게 매번 정성을 다해 간언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노여움을 속에 쌓아둔 채 ‘꿍’하고 있었다. 급기야 임금은 궁중에서 처용놀이를 했는데 음란함이 지나쳤다. 이때….”
 바로 그 날(1504년 4월 1일), 김처선은 집안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나는 반드시 죽을 거야.”
 김처선은 각오를 다지고 궁궐로 들어갔다. 마침 연산군이 술 한잔을 따라주었다. 벌컥벌컥 술잔을 비운 김처선은 술김을 빌려 임금을 향해 독설을 던졌다.
 “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지만, 고금에 전하와 같은 짓을 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연산군이 크게 성을 내며 쏜 화살이 갈빗대에 맞혔지만 김처선은 그치지 않았다.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연산군이 화살을 더 쏘아 땅에 넘어뜨리고, 그 다리를 끊고서 “일어나 다니라”고 명했다.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 있습니까.”(김처선)
 한마디도 지지않고 대들자 연산군은 김처선의 혀를 자르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냈다. 김처선은 죽을 때까지 말을 그치지 아니했다.

 

 ■처(處)자는 보기도 싫다.
 연산군은 김처선의 시체를 범에게 주었다. 김처선의 극언이 얼마나 뼈저렸는지 연산군은 이성을 잃은 후속조치를 남발했다.
 “간사한 내시 김처선이 임금을 꾸짖었으니 이런 죄는 개벽 이래 없었다. 어찌 천지 사이에 용납돼랴!”(<연산군일기> 1504년 4월 4일) 
 우선 조정과 민간에서 처(處)자는 입밖에 내지도 말라는 명을 내렸다. 예컨대 그 해 과거시험 답안지에 ‘처(處)’ 자를 썼던 유생 권벌의 합격이 취소되기도 했다.

  권벌은 3년 후에 다시 과거를 치러 합격했다고 한다. 연산군은 또 김처선의 집을 헐고, 연못을 파도록 했으며, 그의 죄명을 돌에 새겨 묻으라는 명까지 내렸다.  
 심지어 처(處)자는 듣기도 싫다면서 내외 대신과 군사들 중에 김처선의 이름을 가진 자는 모두 개명하라는 명까지 내린다. 이밖에 김처선의 양자이자 환관인 이공신도 죽였고, 김처선의 7촌까지 모두 죄인이 됐으며, 그 부모의 무덤도 뭉개졌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뒤 김처선을 선양하자는 논의가 있었다.(1512년 12월4일)

   그러나 중종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김처선은 술에 취하여 망령된 말을 해 스스로 실수했다. 바른 말 하는 데 뜻을 두었던 것이 아니니….”
 중종은 아무리 바른말이었다 해도 환관이 주제넘게 나서 임금에게 대들었음을 책망한 것이다. 환관의 발호를 염려한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바로 환관의 한계가 아니었을까. 종묘와 사직을 위한 죽음을 무릅쓴 충간이었는데 ‘술에 취한 망령된 말’이라 폄훼됐으니 말이다.
 그로부터 250년이 흐른 1751년(영조 27년)이 돼서야 왕명으로 김처선을 기리는 위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충성한 사람을 위해 정려문을 세우는 적은 세상을 권면하는 큰 정사다. 사람이 비록 미천하다 하더라도 없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환관이 되기위한 시술을 재현한 모습.   

 ■아침이슬과 같은 운명
 그러고보니 중국이나 조선이나 환관들의 운명은 롤러코스터였음을 알 수 있다. 아침이슬과 같은 운명이라고 할까. 
 자식이 없었으므로 부와 명예가 세습되기 어려웠다. 황제의 총애가 식거나, 혹은 그토록 총애했던 황제가 쫓겨나가거나 죽기라도 하면 환관의 운명 또한 장담할 수 없었다.
 중국을 보라. 위충현과 유근이 이른바 천참만륙,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극형을 받았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후한 명말 당시에는 원소가 궁정에 난입했을 때 환관 2000명이 몰살당했다니…. 그 가운데는 눈썹이나 수염이 없어서 환관으로 오인돼 죽은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단다. 
 그 뿐인가. 당나라 때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국정을 주물렀던 환관 고력사와 이보국도 결국 일장춘몽의 짧은 전성기를 누렸을 뿐이다.
 조선시대는 뭐 다른가. 중국의 내로라하는 환관들같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일부 환관들도 공신의 반열에 드는 등 군주의 총애를 받았다.
 예컨대 조선 태조 대의 환관 김사행은 조선 건국의 기틀을 잡고 궁궐 내의 법도를 마련했다는 이유로 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또 내로라하는 조선의 개국공신들인 조준과 정도전, 남은 등은 환관 조순을 초청, 잔치까지 베풀고 말 1필까지 선물로 전달하기까지 했다.(1398년 7월 8일)
 연회 때 술에 취해 태조 임금 앞에서 칼을 빼든 신귀생을 말린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모자를 던져버린 환관
 하지만 그들의 운명도 덧없었다. 김사행은 1398년 8월 25일,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어린 세자(이방석)의 비호세력으로 분류돼 참수됐다. 조순도 마찬가지로 참형을 받았다. 신료들로부터 잔칫상을 받은지 한 달여 만에 목이 잘리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물론 그들은 뇌물과 청탁을 받았다는 탄핵을 여러차례 받았던 최측근 환관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참형을 받을만한 죄는 아니었다.
 모두 태조 임금의 최측근 세력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던 환관들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좀 재미있는 장면이 <태종실록>에 나온다. 태종은 환관에게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태종이 총애했던 환관 노희봉은 변덕이 죽 끓듯 했던 임금 때문에 감옥에 쳐박히기 일쑤였다. 말실수 했다고 옥에 갇히고, 임금의 말을 잘못 전달했다고 또 감옥살이하고….
 1411년(태종 11년) 1월5일, 그 날도 노희봉은 임금의 말을 잘못 전했다는 이유로 호된 꾸지람을 받았다. 심지어는 중관에게 명해 노희봉의 머리채를 잡고 중문으로 쫓아내게 했다.
 그 날 노희봉의 기분을 적나라헤게 묘사한 <태종실록>을 보라.
 “중관 김화상이 중문에 이르러 벗겨진 사모(紗帽)를 노희봉에게 씌워 주었다. 그러자 노희봉은 손으로 벗어서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막 섬돌 한 계단을 내려설 때 땅바닥에 떨어져 다친 데가 몹시 아팠다.”
 아무리 임금의 명이라지만 모자를 확 던져버릴 정도로 화가 난 것이다.

 

 ■‘원죄는 군주에게 있다’
 그러고보면 군주에게 환관은 필요악이었을 것이다.
 10세기 쯤 광동성의 환관 왕국의 형태를 갖춘 남한의 군주는 이렇게 말했단다.
 “모든 신하들에게는 가정이 있다. 때문에 만사를 다 제쳐놓고 군주를 위해 일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밤낮으로 함께 사는 환관들이야말로 군주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1471년(성종 2년) 6월 8일에는 대사헌 한치형이 언급한 환관의 폐해를 보라.
 “환관은 임금과 조석(朝夕)으로 함께 거처합니다. 그러나 여러 대신들은 출퇴근합니다. 어두운 곳에서 몰래 사라지고 몰래 빼앗는 것을 대신들이 대명천지에 따지고 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군주들은 환관의 폐해를 알면서도 기댈 수밖에 없었다. 마약처럼…. 특히나 왕권강화를 꾀했던 군주들은 신료 중심의 정치를 깨뜨리려고 환관정치에 재미를 붙였다.
 하지만 너무 과하면 군주를 욕보이고, 종묘사직을 어지럽게 했다. 환관의 존재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였던 것이다.   
 예컨대 1392년(태조 1년) 7월 20일 사헌부는 새왕조를 위한 10개 조목을 발표했는데, 8번째 조목이 환관혁파였다.
 “환관의 사람됨은 대개 의식이 영리하고 말을 잘하며, 안색(顔色)을 잘 살피고 뜻을 잘 맞춥니다. 그 때문에 군왕은 왕왕 그 꾀임에 빠져서 깨닫지 못해 환란이 일어납니다. 앞으로 그 노련한 간물(奸物·환관)들을 내쳐야만….”
 이쯤해서 난세의 간웅이라는 조조의 한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후한 말엽 대장군이던 하진이 환관들을 절멸시킬 계획을 세우자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환관은 고금부터 있어왔다. 다만 군주의 총애를 빌려 일이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
 조조는 모든 악의 근원은 환관이 아니라 환관에게 힘을 준 군주에게 있음을 갈파한 것이다. (끝) 경향신문 사회에티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91 관련글 쓰기

 “심장은 9개의 문이 달린 연꽃이다.”
 고대 인도의 성전(聖典) 가운데 하나인 <아타르베다>가 표현한 심장이다. 심장을 세우면 연꽃 봉우리처럼 생겼고, 모두 9개의 구멍(혈관)이 있음을 안 것이다. 
 “목 아래 배꼽 위에 자리한 심장은 아래를 향한 연꽃같다. 심장은 신의 거처임을 깨달으라. 심장 끝에는 섬세한 신경이 있다. 여기서 만물의 존재가 성립한다. 중심에는 위대한 불이 있어 사방으로 퍼져가며 여기저기서 타오른다. 이 불길 가운데 지고의 존재가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을 미라로 만들 때 심장 만은 방부처리하여 미라 속에 넣었다.
 반면 뇌는 “쓸모없다”면서 버렸다. 다른 장기들은 단지에 담아 미라의 옆에 놓았다. 심판의 날에 죽은 자를 위해 증언해 줄 심장을 고이 보존하려는 뜻이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심장을 닮은 심장 풍뎅이 모형(부적)을 미라의 가슴 위에 두었다. 이것을 스카라베(Scarabee)라 한다. 

갑골문에 등장하는 마음 心자.  사랑을 뜻하는 이모티콘 ♡(♥)를 빼닮았다.

 13~15세기 멕시코를 점령했던 아스텍인들은 피의 의식이 벌였다. 즉 부싯돌이나 흑요석 칼로 인간제물의 가슴을 갈라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태양신에게 바쳤다. 1487년에는 무려 8만명이 희생됐다.스페인인들이 멕시코에 상륙했을 때 테노치티틀란에서만 해마다 1만5000명이 희생됐단다. 이들은 피와 심장을 바쳐야만 태양은 매일 아침 다시 떠오르는 힘을 얻는다고 믿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아스텍인들의 야만적인 인간제사를 맹비난했다. 하지만 스페인 약탈자들은 아스텍 문명을 초토화시켰다. 그 결과 2500만 명이던 멕시코 인구는 16세기에 이르러 100만명으로 격감했다. 누가 더 나쁜 사람들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사랑의 상징
 그렇다면 서양에서 심장은 언제부터 사랑의 상징이 됐을까.
 ‘개인의 감정을 억누르던 기독교 교리에 맞서 육체적인 세속의 삶을 쟁취하기 시작한 12~13세기 때부터’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때부터 육체적인 심장과 상징적인 심장이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중세 유럽의 유명한 연애담인 <트리스탄과 이졸데>(1205~1215)를 보자. 이졸데가 트리스탄과 몰래 사랑을 나누던 밤이 지나고 헤어질 때 탄식한다.
 “제 몸은 여기 있지만 제 마음은 당신이 가져가네요.”
 남자의 심장은 여인의 심장에서 뛰고, 여인의 심장은 남자의 심장에서 뛰고…. 쿵쾅쿵쾅 뛰는 ‘심장(마음)의 교환’이다. 이렇게 심장은 감각적인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를 기대자면 디오니시스 신들의 추종자들이 담쟁이 덩굴을 몸에 붙이고 광란의 축제를 벌였다는데, 축제 도중 몸 안에서 쾅쾅 뛰는 기관을 상징하게 됐다는 설도 있다.
 담쟁이 덩굴 잎사귀가 심장과 비슷하니까….   

갑골문에 등장하는 심장 문양.  심장 혈관의 모습까지 형상화 했다.

 

 ■心자의 비밀
 동양에서는 어땠을까.
 동양에서도 심장은 단순한 펌프의 기능만은 아니었다. 마음과 영혼, 양심이 자리잡은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의학서인 <황제내경(黃帝內經)>은 “심장이 영혼을 제어한다”고 기록했다. 심장은 사랑과 고통, 연민 등 갖가지 감정을 대변하는 상징이었다.
 오죽했으면 마음을 뜻하는 ‘心’자가 인간의 심장을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그러고보니 갑골문에 등장하는 마음 心자의 형상은 아주 흥미롭다.
 요즘 가장 사랑받는 이모티콘인 ‘♡(♥)’ 문양과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 문양은 심장의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 뿌리는 깊다.
 상나라의 반경(盤庚)~무정(武丁) 시대, 즉 기원전 1300~1192년에 점을 친 뒤 새겨넣은 갑골문에 나온다.
 상형문자로 된 3300년 전, 동양 최초의 ♡모양이다. 이것은 심장을 쏙 빼닮은 모양이 맞다. 이것이 ‘마음 심(心)’자의 원형이다. 이 최초의 ♡문양은 다소 무미건조하다.
 “왕이 6월에 심겸(心京, 지명이름)으로 가는데 별 문제가 없겠느냐(王往于心京 若 六月)”고 점을 친 내용이다. 심경은 지명이다. 말기의 갑골문을 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다.
 “마음에 병이 있는데 재앙이 오겠습니까.(有疾心 唯有害)”
 여기서의 심(心)자도 사람의 심장 외곽을 형상화한 모양이다.
 여기서 심질(心疾)은 ‘지나치게 마음을 쓰거나 괴로움을 당해 생긴 정신병(思慮煩多 心勞生疾)’(<좌전> ‘소공’조)을 뜻한다.
 이는 3000년 전부터 마음의 병, 즉 정신병을 호소한 기록인 것이다. 또 “대왕의 마음이 화평할까요?(王心若)”라고 묻는 갑골문도 있다. ♡는 곧 심장과 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심장이 하나인 까닭
 그렇다면 상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심장의 모양과 ♡문양을 연결시켰을까.
 중국인들은 이미 상나라 시대부터 심장을 해부했고, 그것을 토대로 24가지의 맥박유형을 분류했다.
 비극적인 ‘심장해부’의 사례도 있다. 상나라 마지막 군주 주왕은 희대의 폭군이었다. 바른 말을 간언하는 충신들을 죽여 젓을 담거나 포를 뜨는 만행을 저질렀다.
 숙부인 비간(比干)이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쏘아붙이자 주왕이 인면수심의 만행을 저지른다.
 “주왕은 ‘내가 듣기로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7개가 있다고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비간의 배를 갈라 심장을 보았다.(聞聖人心有七竅 剖比干 觀其心)”(<사기> ‘은본기’)
 심장구멍은 심장에 난 혈관을 뜻한다. 주왕은 인간의 심장혈관이 9개인데 성인은 7개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상나라 시대에 이미 심장이 혈액을 육체 전체로 내보내는 펌프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착안점이 있다. 심장은 단 하나 뿐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뜻하는가. 심장이 하나라는 것은 사랑도 영혼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된다.
 왜 하나인가. “심장이 하나인 이유는 세상에 오직 한사람 만을 사랑하라는 뜻”이라는 유행가 가사가 있다.(채동하의 <심장이 하는 일>)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90 관련글 쓰기

  <팟 캐스트 7회 내용 요약입니다.>

   세종대왕은 ‘만고의 성군’이자 ‘해동의 요순’으로 알려져 있다.
 더불어 세종을 수식할 수 있는 단어들이 있다. 일벌레에, 공부벌레였다는 것이다.
 그런 세종이 생전에 내내 온갖 병마와 싸웠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필자는 그런 세종에게 ‘앉아있는 종합병원’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고 싶다.
 극심한 당뇨병에 두통, 이질에, 풍질에, 요로결석에, 다리부종에, 수전증에…. 화려한 병력이 아닐 수 없다. 

하기에 세종 뿐이 아니었다. 지존으로서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고, 백성을 위해 일해야 하는 군주들은 다양한 질병에 시달렸다.
 등창 때문에 승하한 임금, 족질로 고생한 임금, 그리고 뜻밖의 의료사고로 급서한 임금 등….
 또 어느 임금은 양기보충을 위해 풀벌레와 뱀을 먹기도 했고, 또 어느 임금은 병치료를 위해 똥물을 약으로 마셨다고 한다. 이뿐인가. 너무나 아버지를 그리워한 나머지 요절한 효자임금도 있다. 업무 스트레스는 임금들의 건강을 갉아먹었다. 어느 임금은 “정무를 처리하느라 수염이 하얗게 세었다”고 토로했다.
 또 어느 임금은 심각한 정신병 증세를 여러차례 호소했지만 신하들로부터 ‘철없는 소리 작작하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또 다른 임금은 신하들의 지긋지긋한 복지부동에 “대체 어쩌자는 거냐”고 소리쳤다. 또 어떤 임금은 서슬퍼런 동생이 무서워 결국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고 나서야 여생을 편안하게 즐겼다고 한다.
 물로 임금들의 평균수명은 일반 백성들보다 훨씬 높았다. 하지만 임금이 어떤 자리인가. 한나라 시대 유교의 국교화를 이룬 동중서는 임금 王자를 이렇게 해석했단다.
 “王자에서 가로획 3개는 하늘과 땅과 사람을 뜻한다. 임금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소통시켜주는 세로 획이다.”
 그러니 절대 편한 자리가 아니요, 혼자 지존의 자리만 즐길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소통의 자리였던 것이다.

 <관련기사>

 어느 임금의 절규, '정신병이다. 나 좀 살려주라!'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저작자 표시

Posted by 이기환기자

트랙백 주소 :: http://leekihwan.khan.kr/trackback/389 관련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