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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꽃에 미친 ‘김 군’, 18세기 화폭에 꽃박람회 펼친 그 화가”

화폭 위 꽃박람회

최근 공개된 ‘꽃 두루마리’ 그림. 괴석과 함께 16종류의 사철 꽃이 표현되어 있다. 꽃박람회 같은 느낌이다. |기계 유씨 후손 소장·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제공

 

“표암(강세황)의 화제(畵題·그림 위에 쓴 시와 글)가 있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얼마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 ‘조선시대 꽃그림 전시’를 위해 정은진 영남대 교수(한문교육과)에게 두루마리 그림(기계 유씨 후손 소장)의 검토를 의뢰했다.

가로 4m80, 세로 75㎝인 비단 위에 그린 꽃그림이었다.

그림 위에 표암 강세황(1713~1791)과 단원 김홍도(1745~1806?)의 아들인 긍원 김양기(1792?~1842?)의 글이 쓰여 있었다. 당대 예술계의 대부였던 ‘표암’의 글이 있었기에 표암 연구자인 정은진 교수가 작품을 검토한 것이다.

꽃정원

화폭의 오른쪽에 배치된 꽃들. 괴석이 보이고 산과 들에 흔히 보이는 싸리꽃과, 모란, 국화, 원추리꽃, 산수국, 수국, 봉선화가 표현되어 있다.}정은진·박선주 영남대 교수 설명

 

■화폭에 펼쳐진 작은 꽃동산

그림 속 꽃의 세계는 꽃향기를 물씬 풍길만큼 생생하고 화려하다.(박선주 영남대 생명과학과 교수 자문) 작은 꽃동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괴석이 서 있고, 16종에 이르는 꽃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됐다. 지금도 국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꽃이다.

화면 속 꽃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자. 나무과인 해당화와 매화, 남천, 낙상홍, 무궁화, 수국, 산수국, 모란, 싸리꽃 등 9종류가 표현됐다. 풀과인 나팔꽃, 꽃양귀비, 맨드라미, 원추리 꽃, 봉선화, 국화, 수선화 등 7종류도 보인다.

나라꽃 무궁화까지

화폭에는 나라꽃인 무궁화와, 맨드라미, 낙상홍, 꽃양귀비, 나팔꽃, 남천, 수선화, 매화, 해당화 등 산과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표현되어 있다. |정은진·박선주 교수 설명

 

화면 시작(오른쪽)부터 보자. 3개 중 왼쪽의 괴석에 흔히 볼 수 있는 싸리꽃을 그렸다.

“쭉 뻗은 4개의 가지와 그 아래서 파생된 둥근 초록 잎 아래 연지 빛 싸리 꽃의 색감이 곱습니다. 하늘을 향해 빛을 발산하기도 하고 바위와 땅을 향해 축 꽃들이 늘어져 있기도 합니다.”(정은진 교수)

그 옆으로는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 두 그루가 풍성히 그려져 있다. 분홍빛, 주황빛으로 조화를 이뤘다. 아래 연주황색 모란은 괴석에서 가지를 꽂아둔 형상으로 작게 표현했다.

모란 옆에는 다소 시든 국화(개량종)의 모습이 표현됐다. 국화는 더 왼쪽에도 두 그루가 표현되어 있다. 막 개화한 모습이다. 국화 두 그루 밑에는 한 송이가 풍성한 흰색 수국과 푸른빛의 산수국 꽃이 옹기종기 그려져 있다. 그 사이 원추리 꽃도 그렸다. 원추리 꽃은 예부터 임신한 부인이 허리에 차고 다니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이 있어 ‘의남초(宜男草)’로도 일컬어졌다.

예술계 거장의 평

그림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낙관 등의 표시는 없다. 다만 화폭의 맨 왼쪽에 18세기 예술계의 총수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의 화평과 장서인이 보인다. 표암은 “…쓸쓸한 봄날 꽃들이 피어날 때(蕭然春裏開花時) 날아갔다 날아왔다 봄빛을 희롱하네(飛去飛來戱春色)”는 멘트를 남겼다. |정은진 교수 해석

 

■봉선화와 무궁화꽃

그 옆 쪽에 봉선화를 그렸다. <본초강목>은 “봉선화가 손톱을 물들이는 풀이라 ‘염지갑초(染指甲草)’라고 부른다”고 했다. 가곡 ‘봉선화’(1920년 작·김형준 작사·홍난파 작곡)의 ‘울밑에 선 봉선화야’라는 가사가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시골 담벼락에서 볼 수 있고 손톱을 물들였으며, 노래까지 불렀던, 추억이 깃든 꽃이다.

봉선화 아래에는 활짝 핀 옅은 노란색 무궁화를 표현했다. 튀어나온 꽃술이 선명하다. 나라꽃인 무궁화는 예부터 ‘근역(槿域)’이라 할만큼 한국 전역에서 피는 꽃이었다.

그 위로는 감탕나무 과의 낙상홍 나무의 잎과 열매가 싸리 꽃처럼 길게 뻗어있다. 잎이 떨어진 다음에도 빨간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낙상홍(落霜紅)이라고 한다.

맨드라미도 보인다. 맨드라미는 꽃이 마치 닭 벼슬처럼 생겼기 때문에 ‘계관화(鷄冠花)’라고도 했다.

김홍도 아들의 평가

화폭에는 단원 김홍도의 아들이자 화원인 긍원 김양기(1792?~1842?)의 화평이 보인다.

 

옆에는 관상용 꽃양귀비 몇 송이를 그렸다. 한자로는 ‘앵속화(鶯粟花)’라 하는데, 꽃 양귀비를 상징하는 가시를 세심하게 표현했다. 그 밑에는 푸른색 나팔꽃이 활짝 피어 있다. 그 왼쪽에는 수선화와 남천이 함께 그려져 있다.

윗부분에는 매화가 길게 늘어져 있다. 이중 수선화는 송나라 시인 황정견(1045~1105)이 “향기 머금고 흰옷을 입어 나라를 기울일 만큼 아름다운 빛을 띠었다.”(<산곡집> 권7)고 평했다. 수선화의 아름다움에 취해 나라를 기울게 만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것이다. 국내에는 중국을 방문한 문인들의 소개로 유명해졌다. 강세황을 비롯해 정약용(1762~1836), 김정희(1786~1856), 박규수(1807~1876) 등이 사랑했던 꽃이다.

붉은 열매의 남천(南天)은 관상용 나무이다. 초여름에 흰색의 꽃이 피고 늦가을에서 겨울에 걸쳐 열매가 붉은색이나 흰색으로 익는다. 가장 왼쪽에는 가시 줄기를 드러낸 해당화를 그렸다.

작가는 불명?

작품에는 작가가 누구인지 특정할만한 낙관 등이 보이지 않는다. 표암 강세황과 긍원 김양기 등의 화평이 있지만, 두 사람의 작품은 아니다. 작품에 남아있는 ‘표암 평’은 강세황이 여항(중인계급) 출신의 전문화가에게 주로 썼던 표인이다. 긍원 김양기일 가능성도 히박하다. 긍원이 감히 아버지(김홍도)의 그림에 화평을 남겼겠는가.|정은진 교수 해설

 

■작은 꽃박람회

이 꽃 두루마리에 표현된 꽃(열매)의 개화시기를 꼽아보면 흥미로운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2월에 피는 매화를 시작으로 4월의 수선화, 5∼6월의 해당화·모란·꽃 양귀비, 6~8월의 수국·산 수국·원추리·나팔꽃·맨드라미·봉선화를 그렸다. 이어 9~10월의 싸리꽃·무궁화, 그리고 7월에서 가을로 넘어가 9~10월에 피는 싸리꽃과, 9~10월에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는 남천과 국화도 보인다. 겨울을 견디고 늦겨울(2월)에 피는 꽃임을 감안하면 어떨까.

정은진 교수는 “이 화폭은 사계절에 피는 꽃과 열매를 담은 작은 꽃동산, 꽃 박람회라고 할 수도 있다”고 평했다.

이 ‘꽃 두루마리’엔 꽃 뿐만 아니라 8개의 괴석도 함께 표현했다. 표암 강세황은 “그윽한 꽃은 기이한 돌과 짝하니, 비록 욕심은 없지만 생명의 의지는 넉넉하다.”(<표암유고> ‘괴석(怪石)’)고 했다.

‘괴석’은 특이한 모양의 돌(바위)를 뜻한다. 이 괴석은 당대 사대부 가문에서 꽃, 서책과 함께 지식인들의 고아한 정취를 반영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표암 평’의 단서

‘표암 평(豹菴評)’의 멘트가 달려있는 단원 김홍도의 작품들. 표암 강세황은 김홍도 같은 전문화원에게 주로 ‘표암 평’의 멘트를 달아주었다.

 

■강세황? 김홍도?

그렇다면 18세기 봄·여름·가을과 늦겨울까지 아우르는 ‘꽃박람회’를 화폭에서 연 화가는 누구일까.

그러나 불행히도 그림의 작가임을 표시한 낙관(도장)이나 자호(자칭하는 이름)가 보이지 않는다. 작가와 관련된 정보없이 맨 왼쪽에 표암의 화평과 인장이 있고, 그 옆 매화그림 위에는 긍원의 화평과 인장이 함께 존재한다.

먼저 표암은 “…쓸쓸한 봄날 꽃들이 피어날 때(蕭然春裏開花時) 날아갔다 날아왔다 봄빛을 희롱하네(飛去飛來戱春色)”라 쓴 뒤 “표암(강세황)이 평하다(豹菴評)”는 멘트를 남겼다.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표암이 여항(중인계급) 출신의 전문화가에게 주로 ‘표암 평’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이다.

특히 단원 김홍도의 작품에 유독 ‘표암 평’ 글씨가 단골로 보인다. ‘행려풍속도’, ‘신선도’ 등 김홍도의 작품을 보라.

그렇다면 이 ‘꽃 두루마리’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작품일까. 마침 김홍도의 아들인 ‘김양기’의 글이 화폭에 있다는 것도 수상쩍지 않은가. 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단다.(정은진 교수)

감히 아버지(김홍도)의 그림에 “뭇 꽃들은 농담이 나누어져 있고, 봄빛은 흥취가 넘쳐나는구나…속세와 멀어졌음을 깊이 알겠구나”하는 따위의 주제넘은 평을 남겼겠는가.

주인공의 비밀코드 ‘균와아집도’

1763년(영조 39) 4월 10일 강세황?심사정?허필?최북?김홍도?김덕형?추재?균와 등 18세기 문화계를 대표하는 사대부 및 여항 8명이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균와아집도’. 이 그림에 이번에 공개된 ‘꽃 두루마리’ 작가의 정체가 나타나 있다는 견해가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꽃에 미친 ‘김 군?’

표암도, 단원도 아니라면 이 ‘꽃 박람회’ 그림의 작자는 누구인가.

‘표암 평’이라는 글을 받은 여항(중인계급) 출신인 작가라는 것까지는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꽃 그림’을 그처럼 잘 그리는 인물을 찾아보면 ‘용의자(?)’를 더 좁힐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영 수상쩍은 한 인물이 어른거린다.(정은진 교수)

북학파 실학자인 초정 박제가(1750~1805)의 ‘백화보서(百花譜序)’에 ‘유력한 용의자’가 등장한다.

13살 소년의 정체

쟁쟁한 18세기 예술계의 거장들이 모인 자리에 , 그것도 표암 강세황과 현재 심사정의 옆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소년은 당시 13살 가량의 김덕형이다. 김덕형이 이번에 공개된 ‘꽃 두루마리’ 그림의 작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정은진 교수 견해

 

‘백화보서’는 ‘여러 종류의 꽃을 그린 작가의 화첩(<백화첩>)’에 써준 박제가의 서문이다.

“사람이 벽(癖·마니아)이 없으면 버림받은 사람이다…고독한 세계의 정신을 갖추고 전문적 기예를 익히는 자는 오직 벽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바야흐로 김 군은 화원으로 달려가 눈으로 꽃을 주시하며 하루 종일 눈을 깜짝이지 않는다. 그 아래서 자리를 깔고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다. 손님과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다.”

‘백화보’의 작자가 다름아닌 ‘김 군’이라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박제가의 ‘서문’에 따르면 당대 사람들은 그런 ‘김 군’을 두고 조롱하고 손가락질 했다.

“김 군을 보고 미친놈 혹은 멍청한 놈이라며 비웃고 조롱하며 욕하지만…김 군은 만물을 스승으로 삼고, 기예는 천고(千古)의 사람들과 견줄 수 있다. 김 군이 그린 ‘온갖 종류의 꽃(百種之花)’은 역사에 길이 남을 공적…향기의 나라에서 배향하는 위인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김 군’은 ‘꽃에 미친 꽃덕후 혹은 꽃마니아’라 할 수 있고, 고상한 표현으로는 ‘꽃의 화가’로 일컬어질만 하다.

‘꽃의 나라’ 공신

북학파 실학자인 박제가(1750~1805)는 ‘백화보서(百花譜序)’에서 ‘꽃에 미쳐’ 이른바 ‘백화보’를 그린 ‘김 군’을 두고 ‘온갖 종류의 꽃(百種之花)’은 역사에 길이 남을 공적…향기의 나라에서 배향하는 위인으로 삼기에 충분하다…”고 극찬했다. ‘김 군’은 바로 ‘균와아집도’에 13살 가량의 소년으로 등장하는 김덕형(1750?~?)으로 추정된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

 

■강세황과 한자리에 앉은 13살 소년

이 ‘김 군’의 정체는 정말 엉뚱한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균와아집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라는 작품이다.

문인화가인 허필(1709~1768)이 1763년 4월10일 쓴 제발(글)을 보라. 등장 인물의 면면이 쟁쟁하다.

“책상에 기대어 거문고를 타는 사람은 표암 강세황…옆에 앉은 아이는 김덕형…옆에 앉아 있는 이는 현재 심사정…검은 망건을 쓰고 바둑 두는 사람은 호생관 최북…호생관과 마주하여 바둑을 두는 사람은 추계(미상)이다. 구석에 앉아 바둑을 관전하는 이는 허필…자리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은 사람은 균와(미상)…균와와 마주하여 퉁소를 부는 이는 단원 김홍도….”

출연자가 누구라고? 강세황(1713~1791)·심사정(1707~1769)·최북(1720~?)·김홍도(1745~1806?)라 했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18세기 예술계의 거장들이 한 곳에 모였음을 알 수 있다. 심사정(56살)·강세황(50살)은 50대, 최북(43살)은 40대였고, 김홍도는 18살이었다. 김홍도야 세상이 알아주는 천재 화가이고, 또 당시 18살이었으니 그렇다 치자.

‘감히’ 표암의 옆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아이=김덕형’은 누구인가. 얼핏봐도 까까머리 소년 같은데….

그렇다. ‘균와아집도’ 제작 당시 표암 옆에 앉은 아이는 당시 13살 가량의 김덕형(1750?~?)이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기이하구나!”

김덕형은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고 그림에도 뛰어나 서화를 겸비한 대가라는 평을 받았다. 당대의 서화가 마성린은 “김덕형의 작품을 보면 자못 눈이 휘둥그레졌다…나도 모르게 ‘김덕형은 진실로 옛날 서화를 겸비했던 인물이로구나. 기이하구나!’라는 찬사가 나왔다.”(<안화당사집>)고 했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꽃의 화가

이 ‘김덕형’이 바로 박제가가 ‘김 군’이라 지칭한 ‘백화보’의 작가이자, 꽃에 미친 ‘꽃의 화가’로 성장한 인물이다.

그럼 왜 박제가는 김덕형을 ‘김 군’이라 하대했을까. 박제가는 서자였지만 아버지가 양반이었기에 규장각 검서관(5~9품)의 직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중인 출신인 김덕형은 그보다 한단계 낮은 규장각 서리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니 박제가가 김덕형을 ‘김 군, 김 군’하며 낮춰 불렀던 것이다.

여기서 드는 궁금증 하나. 불과 13살 무렵의 어린이가 어떻게 당대 예술계 거장이 모인 자리에 당당히 앉아있을 수 있을까.

그만큼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발휘한 인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당대의 중인 출신 시인 겸 서예가인 마성린(생몰년 미상)이 그러한 김덕형의 시·서·화를 극찬했다.

“어려서부터 김덕형의 사람됨이 맑고 빼어나며, 재주가 고아했다. 글씨를 잘 썼고 그림에도 뛰어나 서화를 겸비한 대가라 할 수 있다.”

마성린은 그러면서 김덕형이 바쁜 업무 때문에 서화를 포기하려 했던 일화를 전한다.

“규장각(서리)에 몸담으면서 여유가 없어 서화를 포기하려 했다. 그러나 막상 퇴근 후에는 근질근질 함을 이기지 못하고 간간히 글씨를 쓰기도 하고 그림을 그렸다. 내가 종종 가서 보면 자못 눈이 휘둥그레졌다…나도 모르게 ‘김덕형은 진실로 옛날 서화를 겸비했던 인물이로구나. 기이하구나!’라는 찬사가 나왔다.”(<안화당사집>)

꽃의 화가

유재건의 (1793~1880)의 <이향견문록>은 “김덕형은 서화와 시부에 능했는데, 꽃그림에 더욱 솜씨가 있었다. 그림을 한 폭 완성할 때마다 사람들이다투어 가져갔다. 표암 강세황이 매우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 백화첩(百花帖)을 소유하여 집에 보관했다”고 전했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심사정-강세황, 다음 인물

시·서·화에 능한 김덕형이었지만 그중 ‘원픽 재능’을 꼽으라면 박제가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듯 ‘꽃그림’이었다.

유재건의 (1793~1880)이 1862년(철종 13) 당대 중인 이하의 인물 행적을 기록한 <이향견문록>을 보자.

“김덕형은 서화와 시부에 능했는데, 꽃(화훼·花卉)그림에 더욱 솜씨가 있었다. 그림을 한 폭 완성할 때마다 사람들이다투어 가져갔다. 표암 강세황이 매우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 백화첩(百花帖)을 소유하여 집에 보관했다.”

당대의 인물인 박제가가 언급한 ‘백화보’의 ‘김 군’이 바로 강세황의 ‘백화첩’ 작자인 ‘김덕형’임을 알 수 있다.

비단 강세황 뿐이 아니었다. 실학자 유득공(1748~1807)은 1783년(정조 7) 당직 중에 꽃그림을 잘 그리는 김덕형을 불러 “단오선(정조가 하사한 부채)에 네 가지 꽃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김덕형은 네가지 꽃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 네가지는 옥잠(백합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옥비녀처럼 생겨서 옥잠화라 한다), 영실(찔레꽃 열매), 안래홍(색비름), 산국(들국화의 일종) 등이다.

이덕무(1741~1793)가 김덕형의 ‘매죽’과 ‘풍국’에 써준 ‘화평’을 보면 당대 김덕형의 위상을 알 수 있다.

“…표옹은 늙어가고 현옹은 세상을 떴으니(豹翁衰晩玄翁去) 화가의 인물로는 오직 이 사람뿐이로세(畵派人間祗此人).”

‘현옹’은 ‘현재 심사정’이고, ‘표옹’은 ‘표암 강세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덕무는 김덕형을 심사정-강세황의 뒤를 잇는 화단의 큰 인물로 꼽았던 것이다.

‘현옹·표옹’ 이후

실학자 이덕무는 “현재 심사정이 죽고, 표암 강세황이 늙었으니 이제 차기 화단을 이끌 인물은 김덕형 뿐”이라고 평가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자료

 

■김덕형 아니고서는…

그렇다고 이번에 세상에 나온 ‘꽃그림 두루마리’가 김덕형의 작품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앞서 밝혔듯이 그림에 작자를 특정할 아무런 자취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당대의 서예가이자 문신인 윤행임(1762~1801)의 언급이 수상하다.

즉 김덕형은 꽃그림을 그린 뒤 윤행임에게 ‘화평을 좀 써달라’고 부탁했던 모양이다.

“형용할 수식어 없어...”

당대의 서예가이자 문신인 윤행임은 “김덕형이 그린 ‘팥배꽃, 매화, 살구꽃, 앵두꽃, 철쭉, 도미, 모란, 능감 등 20여 종류가 각양각색으로 분포되어 있다”면서 “이 그림을 본 사람들마다 눈이 휘둥그레지고 마음이 취해서 신묘해지고 교묘하여 정신을 빼앗기 일쑤”라고 찬탄했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그러나 윤행임은 여러번 거절하다가 겨우 화평을 써주고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글씨와 그림은 다 어렵다…그러나 그림 잘 그리는 자는 글씨도 잘 쓰지만, 글씨 잘 쓰는 자가 꼭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아니다…김덕형은 글씨를 잘 쓰고, 더 어렵다는 그림, 그중에서도 초목의 그림으로 소문이 났다….”

윤행임은 “그가 그린 ‘팥배꽃(棠梨), 매화, 살구꽃, 앵두꽃, 철쭉, 도미(백합과 여러해살이 풀), 모란, 능감(1년생 수생초본식물) 등 20여 종류가 각양각색으로 분포되어 있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 그림을 본 사람들마다 눈이 휘둥그레지고 마음이 취해서 신묘해지고 교묘하여 정신을 빼앗고…김덕형이 나에게 화평을 부탁했지만 형용이 어려워 허락치 않다가….”(<석재고> ‘김덕형의 화첩에 화평을 쓴 후’)

이번에 공개된 ‘꽃 두루마리’를 감상하다보면 250여년전 윤행임의 심정이 그대로 전해진다.

필자 역시 이 ‘꽃 두루마리’ 그림을 보고 형용할 단어를 좀체 찾지 못했으니까….

‘꽃 두루마리’ 그림을 분석한 연구자(정은진 교수)가 ‘합리적인 의심의 눈길’을 던진다.

“표암 강세황이 애지중지했고, 윤행임 같은 이가 형용하기 어렵다고 묘사한 이러한 꽃그림은 김덕형 만이 그릴 수 있었던 작품이 아닐까요.” 필자도 그러한 견해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이 기사를 위해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와 정은진·박선주 영남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정은진, ‘규장각 서리 김덕형의 삶과 문예고찰’, <대동한문학> 76집, 대동한문학회, 2023

정은진, ‘표암 강세황 평, 화훼 두루마리 고찰’, 예술의전당서예박물관 제출 논문, 2023

안대회, ‘조선 후기 여항 문학의 성격과 지향’ <한문학보> 29호1권, 우리한문학회, 2013

이동국 기획 편집, <18세기 예술의 큰 스승-표암 강세황의 시·서·화·평> 도록, 예술의전당,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