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 찬 흥남 부두에~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국민가수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는 한국전쟁으로 피란길에 오른 이들의 애환이 담긴 노래다. 노래가사에서 절절이 담겨있듯 부산은 전쟁의 참화를 피해 내려온 피란민들의 최종 목적지였다.
갈곳없던 피란민들은 1평의 땅이라도 빈곳이라면 무작정 터를 잡고 판잣집을 지었다.
당시엔 그것을 일본말로 ‘하꼬방’이라 했다. 하꼬(箱), 즉

동래 중심지 북쪽에 반달모양으로 뻗어있던, 수풀로 무성한 야트막한 구릉도 금세 피란민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피란민들의 애환이 담긴 바로 그곳이 기원후 2~기원후 7세기 사이 500년 동안 터전을 잡고 살았던 선인들의 공동묘지일 줄이야.
1969년, 부산시는 동래구 복천동 구릉에 조성돼있던 이 무허가 판자촌을 민간인들에게 불하했다. 택지개발공사가 시작됐다.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하꼬방을 짓고 터전을 잡았던 부산 동래 복천동 구릉,  그런데 이곳은 자연구릉이 아니라 기원후 2~7세기 사이 500년동안 옛 사람들이 마련한 공동묘지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복천박물관 제공

 

-무허가 판자촌 땅밑은 거대한 고분군이었다

그러던 9월 중순. 불도저와 포클레인으로 터파기를 하던 공사관계자들은 심상치 않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자꾸 토기편들이 보인 것이다. 급기야는 경사면에 구멍이 뻥 뚫어지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들은 사태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한 채 공사를 강행했다. 어이없게도 구멍(무덤방) 안에 있던 유물들이 무단으로 반출되기 시작했다.
“새마을 지도자가 동래구청에 신고하지 않았다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될 뻔했어요.”
당시 동아대박물관에 근무했던 이용현씨의 회고다. 공사는 뒤늦게나마 중단되었다.
“현장에 급파된 부산시 공무원이 오후 7시가 되어서 무단 반출된 유물들을 급히 수습해서 구청으로 이관했어요.”
이튿날 마을사람들이 한 두 점씩 가져간 유물들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일단 구청에서 자진신고를 권유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가져간 유물들이 모두 회수되었는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4일 뒤인 22일,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한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의 전신)은 김병모 학예사(현 고려문화재연구원장)를 급파, 상황을 정리하도록 한다. 긴급발굴 결정이 내려지고 동아대박물관이 발굴을 맡기로 한다.
당시 복천동에서 일어난 불상사는 당시 경남 문화재전문위원이자 동아대 전임강사였던 김동호씨(작고)가 처음부터 간여하게 되었기 때문에 동아대박물관이 발굴을 맡았다.
본격발굴작업은 추석을 보낸 뒤 29일부터 시작되었다.

발굴장은 동네주민들과, 소문을 듣고 구경나온 부산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발굴장에 서로 먼저 접근하려고 동네사람들끼리 싸우기도 했고, 때론 “신고한 X이 누구냐”며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할 수 없이 경찰관들이 현장을 지키는 가운데 작업이 진행됐다. 또 하나의 해프닝.

복천동에서는 1969년 택지개발공사 도중 엄청난 유구와 유물이 쏟아졌다. 발굴현장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천년수 소동

공사 때문에 노출된 덮개석을 모두 들어내자 무덤방의 끝부분에서 엄청난 크기의 항아리가 확인됐다.

높이가 109㎝, 입지름 53㎝였는데, 해방 이후 발굴된 항아리 가운데 최대 크기였다.

너무 무거워서 누구도 들고갈 수 없었던 거지요.”
항아리 안에는 파수고배(把手高杯·손잡이가 달린 긴 잔)가 9개나 들어있던 데다 물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할 수 없이 체인블록(chain block·사람의 힘으로 짐을 감아 올리는 도르래)이라는 재래방식으로 무덤의 덮개돌을 들어올린 뒤 항아리를 꺼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다. 누군가가 입방정을 떤 것이다.
“항아리 물은 1000년간 정수를 거친 천년수(千年水)인데,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무병장수한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발굴현장에서 일하는 인부들 사이에 큰 동요가 일어났다. 서로 그 물을 마시겠다고 아수라장이 된 것이었다.
겨우 뜯어 말려 소동은 진정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다음 날 현장에 와보니 항아리 안에 가득 있던 물은 단 한방울도 남지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범인도 잡지 못하고, 인부들은 오히려 발굴단원 짓이 아니냐고 의심까지 하고….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복천동 고분에서 확인된 대형아리

 

-덩이쇠 철정의 출현 

항아리 안의 물질에 대한 성분분석이 필수적이었을 텐데 예전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던 것이다.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진행되던 10월2일. 발굴단은 무덤방의 남쪽 부분을 조사중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좁은 공간이 있었는데, 언뜻 보니 뭔가 이상한 흔적이 보였어요. 살살 다뤄보니 부식되기는 했지만 금동관의 형태가 뚜렷했어요.”
금동관은 도금한 엷은 동판으로 오려 만든 것이었는데, 출(出)자형 입화(立華)가 다섯개 붙어 있었다. 이 금동관은 옥류(玉類)와 매는 장식(繫飾)이 없는 단순한 형태였다.
문제는 이 금동관의 형식, 즉 出자형 금동관은 전형적인 신라식이라는 것. 발굴단은 가야 무덤이 분명한 이 무덤에서 왜 신라 금동관이 나왔는지 의아해 했다. 또 하나 진귀한 유물은 철정(鐵鋌)이었다.

철정은 ㄷ자로 깔려 있었는데 10장을 1개조로 모두 10개조가 확인됐으니 100장에 이르렀다. 철정(금괴를 연상하면 좋다)과 관련된 기록은 일본서기 신공기 16년조(366년), 즉 백제왕(근초고왕)이 철정 40장을 일본왕에게 주었다”는 내용이 유명하다.
그런데 이 철정은 어떻게 사용된 것일까.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弁辰)조를 보면 “(물건을) 사고 팔 때 철(鐵)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마치 중국에서 전폐(錢幣)를 사용하는 것 같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즉 철정을 화폐처럼 유통시켰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무덤에서 확인된 철제 유물들을 분석해보면 모두 여기서 출토된 철정을 재료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요즘의 금괴처럼 화폐처럼 유통도 되고, 철기의 재료도 되었던 것이다. 그외 전장 78㎝에 검신만 해도 68㎝, 검신폭 6.5㎝에 이르는 태검(太劍)과, 철창, 철촉 등 무기류와 말재갈 같은 마구류 등 상당수의 철기류가 확인됐다.
이 무덤은 복천동 1호분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이 긴급수습 발굴은 그야말로 서막에 불과했다.

보물로 지정된 말머리장식 뿔잔. 동서교류의 상징 유물이다. 

 

-동서교류의 상징 '말머리 장식 뿔잔'의 발견 

1970년에는 유명한 말머리 장식 뿔잔(馬頭式角杯)이 확인됐다.
“살살 노출시켜보니 그것은 말머리 장식을 한 뿔잔이잖아. 한 점도 아닌 두 점이 쌍둥이처럼. 깜짝 놀랐어요. 이것은 동서교류의 흔적이 틀림없다고 봤거든.”(김병모 당시 문화재관리국 학예사)
말머리 모양 뿔잔은 고대 그리스·페르시아 등에서 확인된 리톤(Rhyton·뿔잔)을 연상시켰다. 중국 한나라 무덤에서도 보이는데, 술 또는 음료를 마시는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출토된 이 뿔잔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후 간헐적인 발굴이 이어졌고 발굴주체도 동아대에서 부산대로 넘어갔다. 복천동 발굴도 휴지기에 들어갔다.

 

-영혼없는 공무원만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1980년, 또 한 번의 택지개량사업이 복천동에서 잠자고 있던 옛 사람들의 혼을 깨웠다. 부산시는 남아있는 복천동의 구릉지대에 연립주택을 짓겠다는 주민들의 요청을 허가했다. 금세라도 420가구의 연립주택 공사가 시작될 판이었다.
당시 부산시 문화공보실 소속 문화재관리관이었던 박유성씨(전 부산시립박물관장)와 부산대 임효택 박물관 조교가 현장으로 뛰어갔다. 박유성씨의 회고.

복천동 22호분에서 확인된 철정(덩이쇠). 무덤에 묻을 때 관의 밑바닥에 깔아 놓았는데, 죽은 자의 부와 권력을 상징했다. 덩이쇠는 금괴처럼 돈으로도 쓰였고, 실제로 제도구를 만들 때도 사용됐다.  

“현장에 가보니 이미 불도저가 들어와 있고, 가설사무실까지 마련해놓고 있었어요. 그냥 밀어버릴 판이었어요.”
대학동기생인 박유성·임효택씨는 주민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으나 “택지를 조성하기 전에는 반드시 문화재조사를 해야 하고 먼저 시굴하는 것이 순리”라는 끈질긴 설득 끝에 주민들은 손을 들고 말았다.
당시 부산시 문화재과장인 김부환씨는 시장을 설득해서 예비비로 발굴비를 받아냈다.
“그 당시에 시굴조사라는 개념도 서있지 않을 때였는데, 공무원들이 해낸 겁니다. 김부환·박유성씨 같은 공무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복천동 발굴은 없었을 겁니다.”(정징원 전 부산대 교수)
우여곡절 끝에 시굴은 발굴허가가 난 지 4개월 만인 9월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진행된다.
“땅밑 10~40㎝ 정도만 시굴했는데 어마어마한 집단고분군 흔적이 확인되었어요.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들이 보이니 정식발굴 조사가 불가피해진 것입니다.”

 

-조합원이 휘두른 호미가 귀밑을 스치다

정식발굴 결과, 도저히 더는 연립주택을 지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주·부곽이 일렬로 배치된 대형 목곽묘가 사상 처음으로 확인됐는데, 지표에서 2~3m 밑에서 노출된 11호분과 22호분은 완전한 처녀분이었어요. 특히 두 고분의 덮개돌 1개의 무게가 3t이나 됐고….”
낌새를 챈 연립주택 조합원들이 크게 동요했다. 공사가 계속 지연되는 가운데 유적보존 이야기가 솔솔 피어났기 때문이었다. 분노한 조합원들은 연일 시청으로 몰려가 거칠게 항의했다. 조합과 부산시의 창구역이었던 박유성이 성난 조합원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다. 멱살을 잡힌 것은 다반사였는데….
어느 날도 조합원들과 힘겨운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데, 흥분한 조합원 한사람이 갑자기 들고 있던 호미를 박유성에게 휘둘렀다.
흥분한 조합원이 휘두른 호미는 조합과 부산시의 창구역을 맡은 박유성의 귀 밑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쳤다.
“모골이 송연했어요. 주민들도 흥분할 만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집에 대한 애착이 어지간하잖아요. 새 연립주택을 지으면 집값이 올라갈 것이 뻔했는데, 문화재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니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박유성씨)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은 부산시의 대안마련으로 극적인 타협점을 찾는다. 현장의 토지매입에 적극 나서는 한편, 집을 지을 수 없게 된 조합원들에게 다른 곳(연산동·구서동 등)에 집을 우선 마련해주는 방안을 찾은 것이다. 걸림돌은 없어졌고, 발굴은 1980년 10월23일부터 순조롭게 이뤄졌다.

 

복천동에서 확인된 투구.

-덮개돌로 덮인 고분

역시 도굴되지 않은 11호분과 22호분은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고분을 발굴한다는 것은 웬만한 고고학자들도 평생 얻기 힘든 일생일대의 복(福)이다.
즉 11호·22호분은 한 개에 3t이나 되는 덮개돌이 4장씩 무덤을 덮고 있었다. 각각의 덮개돌 사이 틈새는 작은 돌들이 메우고 있었고, 다시 그 위에 진흙이 발라져 있었다. 완전한 밀봉상태였다.
당시 부산대 학생(4학년) 신분으로 발굴에 참여했던 전옥년씨가 당시의 감격이 되살아났는지 소녀의 하이톤으로 회고한다.
“(22호분의) 작은 돌 하나를 들어내니 틈 사이로 무덤의 내부가 보였습니다. 손전등으로 비춰보았습니다. 소름이 끼쳤습니다. 먼지 때문에 약간은 뿌였던 공간…. 바싹 다가서 눈을 크게 떠보니 바닥이 어렴풋이 보였는데, 흙먼지에 덮인 뭔가 철도레일 같은 것이 쫙 깔려있었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아! 그 때의 그 감동이란….”

 

-금동관은 오히려 조연이었다

급보를 받고 한걸음에 뛰어간 당시 문화재관리국 조유전 학예연구관의 추억.
“1971년 무령왕릉 발굴 때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일천한 발굴경험 때문에 하룻밤 사이에 쓱싹 졸속으로 해치운 그 부끄러운 발굴사. 이번만큼은 그런 전철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손전등으로 22호분을 보았는데, 무슨 관장식 같은 유물이 관의 머리맡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1980년 12월4일, 드디어 덮개돌을 들어냈다. 무덤 내부의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철도레일처럼 보였던 것은 다름아닌 철정(鐵鋌), 즉 덩이쇠였어요. 목관을 놓기 위해 바닥에 깔아놓은….”(정징원 전 부산대 교수)

복천동 출토 갑옷. 복천동 고분의 상징유물이다.

또한 당시 조유전 학예관이 관 장식이 아닌가 판단했던 것은 7개의 방울이 달린 가지방울, 즉 칠두령(七頭鈴)이었다.
“아마도 나무에 꽂아 흔들었을 것인데, 당대 주술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조유전 전 국립문하재연구소장)
11호분에서 확인된 금동관은 한강 이남에서 출토된 금동관 가운데 가장 오래된 형태로 여겨졌다. 완전한 신라형식의 금동관, 즉 출(出)자형이었던 1호분 금동관(1969년 동아대박물관 발굴)과 달리 11호분 금동관은 나뭇가지 장식이었다.
“11호분 금동관 장식을 보면 삼엽형(三葉型) 문양 장식이 붙어있는데 이것은 고구려 지안(集安)에서 나온 금동관식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 11호 금동관이 광개토대왕 남정(400년) 이후 고구려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이한상 대전대 교수)
또 11호와 22호에서 순장(殉葬)의 흔적이 보였다. 각각 3개체분의 유골이 확인됐는데, 순장자는 여성과 30대 남성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이런 유물들은 ‘주연을 빛내기 위한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

-긴급히 사적으로 가지정돼다

11호분에서 찰갑(札甲·작은 철판을 가죽끈으로 연결해서 만든 갑옷)은 물론 투구와 목가리개, 어깨가리개, 정강이가리개, 팔가리개 등 갑주(甲胄·갑옷과 투구)가 세트로 확인되자 학계는 경악했다. 또 11호분에 딸린 부곽인 10호분에서 종장판갑(세로로 긴 철판을 구부려 가죽끈이나 못으로 연결해서 만든 갑옷)과 말의 얼굴을 가린 마면주(馬面胄)가 현현했다.
먼저 마면주는 얼굴덮개부와 챙, 볼가리개로 구성됐다. 분명한 실전용이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출토된 것이어서 관심을 모았다.

기병전투때 말의 얼굴을 보호하는데 쓰인 실전용 말머리 가리개(마면주)

우리 고대사의 공백기로 여겨진 가야사를 구명하고, 신라·고구려·백제·왜와 가야와의 관계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이렇게 되자 발굴 일주일 만에 복천동은 긴급히 사적(273호)으로 지정되었다.
“당시만 해도 사적 가지정이란 전례없는 일이었거든. 이후 부산시가 보존을 위해 연립주택 부지를 사들이느라 애를 먹었지.”(조 관장)

 

-쏟아진 갑주와 임나일본부설의 폐기

이후 공원화 사업을 위한 사전 발굴 및 학술조사가 이어졌다. 정리하면 1969년 첫 발굴 이후 복천동에서는 190기의 유구가 조사됐다.
그 결과 토기 3000여점, 철기를 포함한 금속류 3000여점, 유리를 비롯한 장신구 4000여점 등 출토유물이 1만여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무엇보다 복천동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은 잠깐 언급했듯 1980년 그 뜨거웠던 발굴 이후 계속 쏟아진 철제 갑주와 마구류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종장판갑은 33점인데, 복천동에서만 22점이 확인됐다. 찰갑(8점)과 투구(27점), 경갑(목가리개·8점) 등을 합하면 65점에 이른다. 복천동을 가히 갑주박물관, 혹은 갑주 백화점으로 일컬을 만하다.
특히 종장판갑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4세기대 당대 가야 사람들이 제작한 순수 국내산이라는 것이다. 이 종장판갑이 발굴되자 일본인들이 그토록 끈질기게 주장해온 임나일본부설의 불씨가 완전히 꺼졌다.
그때까지는 갑옷, 특히 판갑은 일본에서 수입된 것밖에 없다고 했다.

그 때문에 임나일본부설의 불씨를 지피는 역할을 했는데, 복천동에서 4세기대 판갑이 나오면서 (임나일본부설은) 완전히 설 자리를 잃었다. 도리어 한반도제 판갑이 일본으로 수출됐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는다.

철판을 구부려 상반신만 갑옷으로 가리는 판갑은 주로 보병들이 착용했다. 하지만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을 전후로 갑옷이 획기적인 변화의 길을 걷는데, 바로 기병용 찰갑이 등장한 것이다. 길이 3~4㎝, 너비 2~3㎝의 철판을 끈으로 이은 찰갑(札甲)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말 위에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보호장구였다. 자연히 기병이 타고 다니는 말에게도 마면주(투구)와 말갑옷을 입혔다.
1980년 학계를 놀라게 한 11호분 출토 갑주는 바로 삼실총과 쌍영총 벽화에서 보이는 찰갑 세트와 동일한 양식이다.


-신라는 금관, 가야는 갑주

사실 갑옷은 복천동 이후 경주 사라리와 구정동 등 신라 영역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그런데 왜 유독 이른바 가야고분에서 수장급 고분의 부장품으로 인기를 끌었을까.
복천동을 이끌었던 이들은 전사집단의 지도자가 아닐까. 학계에서는 아직 정치체계가 구비되지 않은 단계라면 무력을 지닌 이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했고, 또 그 사람들이 힘의 상징, 권력의 상징으로 갑주를 부장하지 않았을까, 뭐 이렇게 추측하고 있다.

신라가 5세기 이후 금관과 금동관을 권력의 상징으로 여겨 부장했듯, 가야는 갑주를 권력의 상징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복천동 고분의 찰갑을 복원한 모습

-부여가 남진했다?

 

발굴에 대한 해석이 이어졌다. 

복천동과 김해 대성동 고분을 발굴한 신경철 전 부산대 교수는 아주 재미있는 학설을 내놓았다. 즉, 김해 대성동과 부산 복천동 세력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이는 구야국(狗邪國·대성동)과 독로국(瀆盧國·복천동)의 중심부였다는 것. 낙동강 양안을 대표하는 두 세력은 정치연합체를 이뤘는데, 구야국 우위의 종적 정치질서를 이뤘다는 것이다.
이 정치연합체, 즉 금관가야는 어떻게 성립되었을까. 신 교수는 3세기말 북방문화·습속을 지닌 강력한 지배집단의 출현으로 이뤄졌다고 본다. 갑자기 중국 북방의 영향을 받은 도질토기가 출현하고, 사람과 말을 희생시키는 순장 풍속 등 북방유목민족 특유의 습속이 보인다는 것. 북방류의 철제갑주와 마구류가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이처럼 금관가야를 이룬 신지배층의 출자를 부여(扶餘)로 보았다. 특히 ‘통전부여전(通典扶餘傳)’ 등 중국사서의 기록, 즉 “285년 북부여가 모용씨의 피습을 받아 왕(依慮)이 자살하고, 자손이 옥저로 달아났다”는 내용을 주목했다. 달아났다는 부여 주력집단의 행방이 묘연한데, 바로 이 집단이 해로를 통해 단숨에 김해지역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는 금관가야가 이렇듯 북방계 문물·습속을 배경으로 한 신지배세력을 계기로 기왕의 구야국과 독로국이 정치연합을 이뤄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금관가야를 이끈 김해 대성동 집단의 위상은 광개토대왕의 남정(400년) 등 고구려·신라의 가야진출로 몰락하고, 금관가야 영역은 신라화한 복천동 세력으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복천동 출토 찰갑

 

-그러나 복천동은 역시 신라의 손바닥 안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문헌사학자들은 대체로 4세기를 전후하면 이 복천동 일대를 비롯한 부산·김해지역은 신라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다고 보고 있다. 김대환 영남대 박물관 연구원은 고고학적인 비판을 가한다.
즉, “복천동식 목곽묘는 김해 대성동보다는 경주식(신라)과 비슷하며, 순장의 양상도 경주식 부장형태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묘제뿐 아니라 장례의례, 철기생산, 분배 등 복천동 집단과 대성동 집단은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복천동은 오히려 신라의 중심지역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결국 복천동 고분 세력은 신라가 낙동강 하류역의 교역망 장악을 위해 집중적으로 키운 세력이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출토되는 금동관과 대도(大刀) 등은 모두 4세기말~5세기를 전후한 신라의 간접지배에 따른 하사품이라는 것이다.
또하나, 순장은 부여만의 풍습이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에서도 유행했던 동이의 공통된 풍습이라는 점과, 부여를 북방유목민족의 범주에 넣는 것도 지적할 수 있겠다. 흥미로운 것은 복천동 고분을 해석하는 옛 신라와 옛 가야 지역의 학자간 시각차가 너무도 크다는 점이다. 신라와 가야의 다툼과 경쟁이 1500~1600년이 지난 지금 학계의 논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일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 기사는 팟캐스트 방송을 위해 예전에 썼던 기사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