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1500~5000점 가량의 낙랑유물이 소장돼있다.
아직 유물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 대량의 낙랑유물이 일제시대 때 집중 발굴됐다는 점이다.
그 뿐이 아니다. 박물관에는 3만8000여 장의 유리건판사진이 있다. 이 또한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 등이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찍어놓은 민속·인물·고고학 자료들이다.   

1931년 평남 대동군 남정리 낙랑고분 발굴현장. 일제는 한국역사의 타율성 정체성을 밝혀내기 위해 낙랑고분을 집중 조사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대화혼을 심어줘야”
그 가운데는 전국 각지의 남녀 신체 측정 사진까지 포함돼 있다. 나치가 골상학까지 연구해서 유태인들을 ‘더러운 피가 흐르는 종족’으로 치부하여 멸종을 시도한 것을 떠올리면 모골이 송연한 대목이다.
1918년 조선의 초대총독인 데라우치의 <경성일보> 인터뷰를 보면 일제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일본인이 저들(조선인들)에게 대화혼(大和魂)을 심어주지 않으면 안된다. 저들이 우리의 문명시설 덕분에 지능을 개발하고 널리 세계의 형세에 접하게 되는 날에 이르러 민족적 반항심이 타오르게 된다면 이는 큰 일이다. 이는 조선통치의 최대난관이 된다. 조선연구에 하루라도 소홀히 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이어 “저들의 민족정신을 어디까지나 철저히 조사해야 하며 조선인의 민족심리와 정신생활까지도 두루 이해하지 않으면 헛수고”라고 강조한다.
데라우치는 이어 “때문에 저들의 민족정신을 어디까지나 철저히 조사해야 하며 조선인의 민족심리와 정신생활까지도 두루 이해하지 않으면 헛수고”라고 강조한다.

 

■“고구려가 아닌 낙랑”
과연 일제는 무슨 무슨 일을 벌였던 것일까.
1909년 평양 대동강변에서 아주 흥미로운 발굴이 시작됐다. 통감부 고건축 촉탁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석암동 고분(전실분)를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양일보 사장인 시라카와 쇼지(白川正治)로부터 대형고분의 존재 이야기를 들은 세키노가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었다. 발굴 결과는 흥미진진했다.

벽돌(塡)로 만든 무덤방에서 2점의 청동거울과 각종 무기, 토기, 그리고 오수전이 쏟아져 나왔다. 발굴유물들은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됐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 말, 도쿄대 하기노 요시유키(萩野由之)와 이마니시 류(今西龍)팀이 이끄는 도쿄대 발굴단도 똑같은 형식의 무덤을 조사했다.(석암동 을분)
이곳에서는 ‘王×’명 칠기부속금구와 청동거울, 금동식기, 귀고리, 팔찌 등이 확인됐다. 이 유물들 역시 하기노가 일본으로 반출했다. 그러나 이 유물들은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소실됐다. 
이 두 번의 발굴을 주도한 세키노와 하기노 등은 “둘 다 고구려 고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듬해(1910년) 2월, 인류학자인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반론을 폈다.
“이 평양 대동강변의 고분들은 내가 1903년과 1905년, 지안(集安)에서 확인한 고구려 고분들의 구조가 명백하기 다르다.”
그는 특히 “벽돌묘(전실묘·塼室墓)가 중국 한나라의 무덤과 흡사하며 출토유물 또한 랴오둥(遼東) 지역의 한나라 무덤과 닮았다는 것”고 주장했다. 도리이는 한걸음 더 나가 “이것은 낙랑고분이 확실하다”고 덧붙였다. 

평양 대동강변 석암리 9호분에서 확인된 순금제 허리띠. 가운데 큰 용이 꿈틀거리고 그 주위에 작은 용 6마리가 바짝 붙어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낙랑의 증거를 찾아라!”
일제는 한반도에서 낙랑의 증거들을 찾기위해 혈안이 된다.
1916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본격적인 고적조사사업을 펼친다. 이 때 일제가 작성한 ‘조사개요’를 보면 그 목표가 분명하다,
“한치군(漢治郡), 즉 한나라 식민지가 된 한사군(漢四郡) 지역을 주로 조사한다.”
조사대상 고분은 황해 64기, 평남 186기, 평북 50기 등이었다. 그 해 석암리 9호분에서 순금 허리띠(교具·국보 89호)와 ‘거섭(居攝) 3년명’ 칠반(칠기로 만든 쟁반) 등 엄청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거섭’은 서한(西漢)의 황제인 유자영의 첫번째 연호(기원후 6~8년)였다.
‘낙랑 광풍’이 불어닥쳤다. 그때까지 개성 인근에서 고려자기를 도굴하던 패거리들이 낙랑고분으로 몰려온 것이다. 발굴책임자인 세키노까지 나서 총독부에 “도굴 때문에 못살겠다”며 긴급조치를 요청했을까.
“도굴 때문에 (1917년에) 이미 50~60곳의 고분이 모두 파괴됐다. ~총독부는 적당한 조사방침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도굴의 열풍은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됐다. 1924~25년을 ‘난굴(亂掘)의 시대’라 일컬어졌다.

평양의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1~2원을 주고 낙랑 청동거울 1점이나 토기 항아리 1점쯤 구입하지 못했다면 남한테 멸시를 당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낙랑고분 1386기 가운데 도굴되지 않은 고분처럼 보이는 140기를 빼고 나머지 1200여 기는 모두 도굴됐다”는 한탄까지 나왔다.
“심한 경우 관립학교 선생이 백주에 수 명의 인부를 데리고 가서 고분의 봉분 한복판을 위에서부터 파고들어가 눈부신 부장품을 꺼내기도 했다.”(<야다>의 ‘낙랑과 전설의 평양’에서 )
미술사학자 이구열씨는 “야다가 거명한 관립학교 선생이 기타무라(北村忠次)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가장 악질적인 기타무라는 일본인 자제들만이 다녔던 평양중학교의 일본인 교사였다. 그는 낙랑고분의 부장품이 바닥 난 1930년대에 이르자 그동안 수집 또는 직접 도굴한 천금(千金)의 장물들을 일본으로 가져간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38년 11월26일자 동아일보. 조선총독부가 101종의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하게 표명한 것들’이라고 밝혔다.

■가야가 대접받은 이유
낙랑만큼이나 대접을 받은 곳이 바로 ‘가야’였다. 왜냐.
야마토(大和) 정권이 369~562년 사이 백제·가야·신라를 정복하고 한반도 남부에 식민지 관청인 ‘임나일본부’을 세워 다스린 곳이 바로 가야지방이라 주장했으니….
세키노와 도리이 등은 창녕·고령·함안·김해·성주·선산 등 임나일본부의 유력후보지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벌였다. 일제는 이렇게 발굴한 가야유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해갔다.
도쿄대는 1912년 4월, 1912년 4월 반출 가야유물들을 전람회에 출품하면서 이렇게 견강부회했다.
“상대(上代)의 우리 영토인 임나연방 유적의 일부가 처음으로 상세하게 학계에 소개됐다. 대가야 왕궁지 발견 고와(古瓦) 및 토기 등은 고령 대가야 유적도 및 사진과 함께 귀중하여 학문적 자료가 된다.”
임나일본부를 확증할 수 있는 유적과 유물이 나왔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1915년 일본사 전공자인 구로이타 가쯔미(黑板勝美)의 조사내용을 보자. 그 역시 도쿄대의 명령을 받고 김해지역의 ‘임나일본부의 물증’을 찾으려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김해패총 발굴을 통해 일찍부터 일본과 조선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동문동종(同文同種)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나라라고 규정했다. 한·일 합병의 합법성을 고대사에서 찾은 것이다.

 

■“일본부는 막상 조선풍이더라”
“남조선은 내궁가(內宮家·서기 209년 일본이 신라정벌 후 설치했다는 관청)를 둔 곳이고, 조정의 직할지가 되어 일본의 영토가 된 일이 있다. 한국병합은 임나일본부의 부활이니~동국동문화(同國同文化)라는 사상이 잇으면 화합이 될 터로다 하는 것이 요점이 되얏더라.”(<매일신보> 1915년 7월24일자)
구로이타는 이 기사에서 가야고분의 조사목적을 ‘임나일본부의 확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1915년 10월19일 도쿄대 고고학회 10월 월례회에서 ‘특히 김해·함안을 주목한다’고 말했다.
“산성과 고분의 관계가 내가 주목한 사항이다. 일본부가 어느 곳에 있었는 가를 철저하게 연구하게 됐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부는 최초에 김해·함안에 있었다고 한다.”(<고고학잡지> ‘제6권 제3호’)
그러나 구로이타는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끝내 찾지 못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막상 일본부라고 해도 조선풍인 것이 틀림없다. 조사결과 함안·김해는 모두 일본부 소재지라고 추정할만 하나, 그 자취는 이미 사라져서 이것을 찾을 방법이 없다는 게 유감이다.”
스스로 발굴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만 것이다. 일제는 영산강 유역의 전남 나주 반남 고분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곳에서 출토된 옹관이 북규슈 지방의 옹관과 유사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모두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즉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하나임을 밝히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낙랑예관’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수막새. | 국립중앙박물관 .

 

■내선일체의 증거물이 조선의 보물
1938년 11월 26일자 <동아일보>는 흥미로운 기사를 실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제4회 조선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전회를 열어 모두 101종의 문화재를 보물·고적·명승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그런데 그 지정이유를 보자.  
“특히 금번 지정되려는 것은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히 표명하는 것이라하야 주목을 끄을고 있다.”
내선일체의 상징물이니 ‘지정문화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 때 지정된 ‘고적’의 상세내역을 보면 알 수 있다.
창녕 목마산성·화왕산성, 함안 성산성, 김해 분산성·전 수로왕릉·수로왕릉비·삼산리 고분, 고령 지산리, 창녕고분군 등 9곳을 고적으로 지정했다. 그러면서 ‘임나관계 고적이기 때문에 지정한다’는 설명을 달아놓았다. 행주산성과 대구 달성, 물금 증산성 등은 이른바 ‘문록경장역(文祿慶長役·임진왜란) 관계 고적’이어서 지정됐다고 했다. 일본의 유적과 유사한 나주 신촌리·대안리·덕산리 고분 등 이른바 ‘반남고분’ 지역도 북규슈 지역과 유사한 유물이 나오기에 ‘고적’으로 지정됐다. 기막힌 일이 아닌가

 

■속국일 수밖에 없는 나라
“너희는 영원히 남의 나라 속국일 수밖에 없다.”
일제가 낙랑·가야·영산강 유역 발굴조사에 총력을 기울인 까닭은 분명하다.
한반도의 북쪽은 기원 전 108년~기원 후 313년까지 한사군의 지배를, 남쪽은 4세기 중후반~6세기 중엽까지 일본(임나일본부와 북규슈)의 지배를 받았음을 입증하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기원전 108년~기원후 6세기까지 660여 년 동안 중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다. 세키노의 언급(1941년)을 보자.
“조선은 중국과 왕래가 쉬워 일찍부터 그들의 문화를 수입하였고~ 조선은 예로부터 중국 문화의 은혜를 입었고 그 침략을 받아서 항상 그에 복속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때때로 일본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세키노는 “조선은 국가로서 영토가 협소하고 인민이 적어 일본이나 중국에 대항하여 완전히 독립국을 형성할 실력이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에 자연히 사대주의와 퇴영 고식주의에 빠져 국민의 원기도 차츰 닳아 없어지기에 이르렀다.”(세키노의 <조선의 건축과 예술>)
전형적인 정체성과 타율성의 강조가 아닌가. ‘조선은 영원히 남의 나라 속국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낙랑군은 과연 어느 나라 식민지?
일제가 그토록 규명하려 했던 임나일본부와 낙랑은 어찌된 것인가.
먼저 임나일본부. 일제는 가야유물을 토대로 가야와 임나일본부의 관계를 고고학적으로 규명하려 했다. 하지만 구로이타의 고백에서 보듯이 임나일본본부를 입증할만한 어떤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다.
낙랑은 어떨까. 일제는 낙랑군을 두고 ‘지나(중국)인의 군현이며, 지나의 일부’라거나 ‘한나라 시대의 일대(一大) 콜로니로서 한반도~만주 동변에 건설된 군현’이라는 식으로 이해했다. 또 고조선을 한족(漢族)이 세운 ‘최초의 식민지’로 파악하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위만조선을 한나라의 ‘식민지’로, 낙랑군을 한나라의 ‘직할지’로 규정하기도 했다.
과연 그럴까. 그 시대에 태어나 그 시대에 살아보지 않았기에 정답을 알 수는 없다.
북한학계는 고조선의 중심지는 평양이고, 평양에 존재하는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이 아니라 고조선의 속국인 낙랑국이라고 보고 있다. 평양의 낙랑국을 <삼국사기> ‘대무신왕’조에서 보이는 최리(崔理)의 낙랑국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최리의 낙랑국은 ‘기원후 15년 고구려 왕자 호동이 낙랑국 공주를 유인한 뒤 멸망시켰던’ 바로 그 낙랑국이다. 북한의 주장은 평양의 낙랑국은 중국인의 나라(한나라)가 아닌 토착민의 나라(최리의 낙랑국)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북한은 한사군이 설치했다는 낙랑군도 달리 보고 있다.

즉 고조선은 평양의 왕검성과 함께, 랴오닝성에 부수도 개념의 별도의 왕검성을 세웠다는 것. 한나라가 기원전 108년에 침략해서 낙랑군을 세운 곳은 평양의 왕검성이 아니라 랴오닝의 왕검성이라는 것이다.

 

■낙랑인도 우리 역사
모든 주장이 견강부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  
낙랑전문가인 오영찬 이화여대 교수는 “낙랑문화는 중국과 고조선 세력의 영향력이 교차하고 융합해서 이룬 독특한 문화”라는 본다. ‘낙랑인’이라는 독특한 종족집단(ethnic group)을 거론한 것이다. 
그는 “낙랑고분에서 고조선의 독특한 세형동검문화가 나타나고, 고조선 지배세력의 기반이 낙랑군에서도 유지됐다”고 보았다. 그는 묘제, 즉 무덤형식의 변화에 주목한다. 즉 낙랑군 설치 직후인 기원전 1세기 때 이 지역의 주묘제는 단순한 목곽묘였다는 것. 그런데 기원 전 후부터 1세기를 중심으로 대동강 남안에 새로운 묘제가 등장한다는 것. 즉 하나의 묘광 속에 사각형 형태의 외곽을 조영한 뒤 그 내부에 다시 두 개 이상의 목관을 두는 복잡한 형태의 묘제라는 것이다. 그것을 ‘귀틀묘’라 한다.  
중요한 것은 중국 중원에서는 이 낙랑고분의 속성을 갖춘 귀틀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단서라는 것이다.
“낙랑군 설치 이후 100년이 지나면서 한나라계 주민은 고조선화하고, 토착세력인 고조선계 주민들이 한화(漢化)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로써 ‘낙랑인’이라는 특별한 종족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천덕꾸러기로 여겼던 이들 ‘낙랑인’도 당연히 우리 역사의 품에 안겨야 하지 않을까. 낙랑도 결국 우리 역사라는 얘기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