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합금(구리+주석)이 워낙 좋아서 사라진 관행이지만 예전 설 명절마다 익숙한 풍경이 있었다. 곱게 빻은 기왓장 가루를 지푸라기 수세미에 묻혀 하루종일 놋그릇을 빡빡 문질러 닦는 풍습이었다. 그렇게 닦으면 놋그릇이 반들반들하게 되는데 어쩌랴. 한데 이게 보존과학의 측면에서 보면 아주 잘못된 관행이었다.
“곱게 간 기와 가루로 빡빡 문질러대면 번쩍거리며 윤이 나죠. 그러나 결국은 그릇의 표면을 깎아내는 것이죠. 그러니 계속 문질러대면 그릇이 얇아지겠죠.”(홍원희 안성맞춤박물관 학예연구사)
놋그릇도 얇아진다지만 기왓장은 또 무슨 죄인가. 과거의 으뜸 건축자재였던 기와는 그렇게 ‘놋그릇 닦기용’ 가루가 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그러니 무슨 문화재 대우를 받았겠는가. 유창종 유금와당박물관장의 경험담이 흥미롭다. 1970년대 말 충주지검 검사의 직분으로 답사모임인 ‘예성동호회’를 이끌던 때의 일화이다.
“당시 폐사지에는 완형에 가까운 막새(와당·기와의 끝을 막음하는 건축재)들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문화재 취급도 못받았죠. 언젠가는 주민이 재떨이로 쓰던 막새를 구입하려 했더니 ‘뭘 재떨이까지 돈을 주느냐’고 손사래를 치더라구요.”
■경주~동해까지 기와지붕으로 이어진 신라
그런 홀대를 받았어도 기와는 인간의 의·식·주 가운데 ‘주(住)생활’을 지켜주는 으뜸 장치였다.
눈비를 막아주는 기능은 기본이고, 더 심오한 뜻을 담고 있었다. 옛 사람들은 건축물의 위에서 하늘과 땅, 그리고 신과 인간의 세계를 구분 짓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신분이 높은 이들은 하늘과 맞닿은 건축물의 경계선을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기와로 장식하여 건축물의 위엄을 높였다. 또 재앙을 피하고 복을 바라는 주술적인 의미를 담기도 했다.
기와는 “하나라(기원전 2070~1600) 우왕의 아버지인 곤오가 만들었다(夏時昆吾氏作瓦)”(<광운> ‘고사고’)는 기록이 있다. 그 전까지는 중국을 다스린 전설상의 요임금 마저도 “궁궐의 지붕을 띠풀로 이고도 다듬지 않았다”(<한비자> ‘오두’)는 고사가 있다.
기와의 실물자료는 서주(기원전 1046~771)의 옛 근거지였던 주원(周原)과 초기 도읍이던 풍호(시안·西安) 등에서 보인다. 실물 자료로만 따져도 기와의 역사는 3000년에 달한다. 기와가 한반도에 전래된 것은 한사군이 설치된 기원전 108년 이후라는 게 연구자들의 견해이다.
기록상 보이는 기와의 절정기는 아마도 880년(신라 헌강왕 6년)일 것이다. 그해 9월9일 헌강왕은 월상루에 올라 경주 시내를 바라보며 대신들에게 “백성들이 초가가 아닌 기와집을 짓고(覆屋以瓦不以茅) 산다는게 사실이냐”(<삼국사기> 신라본기·헌강왕조)고 묻는다. <삼국사기>는 “경주부터 동해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죽 이어졌으며 초가가 하나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 뿐이 아니다. <삼국유사>는 “경주에 절이 별처럼 펼쳐져 있었고 탑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다(寺寺星張 塔塔雁行)”(‘원조흥법염초멸신’)고 했다. 그렇게 늘어선 경주의 사찰도 역시 기와건물로 조성했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기와집의 원형
‘기와 관련’ 기사를 준비하던 기자의 시선을 잡아 끈 유물 두 점이 있었다.
통일신라 유물인 ‘누각무늬 전돌’과 ‘집모양뼈그릇’ 이다. 이중 ‘누각무늬 전돌’(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은 일제 강점기에 경주와 울산의 경계인 울주군 중산리 절터에서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유물이다.
전돌 표면에 정면 3칸짜리 기와 건물 2채가 보인다. 높은 축대 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런지 무척 화려해보인다. 지붕에는 안쪽으로 크게 휘어진 모양의 치미(지붕 양끝의 장식기와)도 보인다. 김유식 국립제주박물관장은 “건물 양쪽의 치미는 물론이고, 지붕의 기왓골까지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통일신라시대 건축물을 보는 듯 하다”고 설명한다. 바로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관전포인트가 있다.
경북 청도 불령사에도 누각무늬 전돌을 배치한 통일신라시대 전탑(도유형문화재 472호)이 있다. 그런데 전돌에 새긴 무늬는 울주 중산리 절터에서 수습된 ‘누각무늬 전돌’(국립경주박물관 소장)과 쌍둥이라 할만큼 완전 똑같다. 김성구 전 국립경주박물관장과 김유식 관장은 “같은 공장에서 만든 틀(전범)에서 찍어낸 전돌일 가능성이 짙다”고 풀이한다.
역시 통일신라시대 유물인 ‘집모양 뼈그릇’은 어떤가. 경주 북군동에서 출토된 이 유물은 죽은 자의 영혼이 영원히 안주하기를 바랐던 신라인의 기원을 담은 뼈항아리이다.
그런데 죽은 자가 안주해야 할 집을 바로 기와집으로 표현했다. 지붕 용마루 양끝에 역시 치미가 달려있고, 암수기와를 가지런히 이은 팔작지붕을 갖춘 당당한 기와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성구 전 관장은 “죽은 뒤에도 영영 기와집에서 살고싶은 신라인들의 소망과 염원이 담은 유물”이라면서 “당대 신라인들이 로망으로 여긴 기와집을 그대로 형상화했을 것”이라고 풀이한다.
■다양한 기와의 파노라마
기와집에 올리는 기와는 사용처와 형태에 따라 기본기와와 막새(와당), 서까래·마루·특수기와 등 다양하게 분류된다. 50여종에 이른다. 시간에 따라, 왕조에 따라 기와의 형태도 다르다.
고구려 막새는 연꽃잎이 좁고 끝이 날카로우며 불륨이 강하며, 전체적으로 역강한 모습이다. 백제 막새는 고구려와 달리 색조가 연회색을 띠며 연꽃잎의 끝이 곡면을 이루면서 약간 반전되는 맛이 있다.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단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고신라는 연꽃잎 내부에 능선을 새기고 그 끝을 둥글게, 혹은 융기하도록 제작한다. 6엽 혹은 8엽 꽃잎 형태를 띠며 대부분 회흑색을 띠고 있으며 투박한 중량감이 특징이다.
통일신라의 와전(기와와 전돌) 문화는 절정기를 이룬다. 삼국시대에 거의 제작되지 않았던 암막새와 마루기와, 무늬 전돌 등이 출현했다. 또 연꽃에만 국한되지 않고 보상화(연꽃과 다양한 식물무늬를 결합한 상상의 꽃무늬)와 당초(식물의 덩굴이나 줄기를 도안화한 장식), 금수무늬 등이 다채롭게 채용된다. 그래서 통일신라 시대 와전을 ‘동아시아 기와 역사상 최고의 수준’이라 손꼽는다.
■눈깔사탕으로 사들인 한국와전
옛 와전(기와와 전돌)이 ‘문화유산’의 대우를 제대로 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50여 년 전의 일이다.
그 이전엔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일본인들이 닥치는대로 수중에 넣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자가 바로 야마다 사이지로(山田財次郞)이다. 1908년부터 평양 법원의 서기로 일한 야마다는 본인이 직접, 혹은 조선인 아동들을 모아 와전(기와와 전돌)을 닥치는대로 수집했다.
당시 경의선 철도 부설이나 상하수도 공사 과정에서 기와 및 전돌이 쏟아져 나와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야마다가 눈깔사탕을 들고 현장에 나와 기와 및 전돌과 교환했다고 한다. 오야 토쿠시로(大屋德城)는 “평양의 야마다 집에는 기와 진열소가 있었는데, 한나라 전돌과 고구려 기와 등의 수가 기천, 기만에 달했다”(<선지순례행>)고 놀라워했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문화인류학과)는 “1910년대에는 야마다 등 마니아층이 와전을 닥치는대로 수집했다면, 1920년대부터는 이른바 낙랑고분의 난굴시대를 맞아 너도나도 와전 수집붐에 뛰어들었다”고 설명했다.
아닌게 아니라 일제는 한국 역사의 타율성을 강조하기 위해 한반도 북부에서는 낙랑고분, 남부에서는 가야고분을 마구 파헤쳤다. 북부는 한사군(기원전 108~기원후 313년), 남부는 임나일본부(기원후 4~6세기)의 지배를 받은 역사라는 사실을 강변하려는 것이었다.
■일본기와의 원류를 알려면…
당시 와전 수집붐에 뛰어든 자 가운데 이토 쇼베(伊藤庄兵衛·?~1946)가 있었다. 이토는 1910년대부터 1만점이 넘는 와전을 닥치는대로 모았다. 이 가운데는 정상적인 구입품도 있었겠지만 장물도 많았을 것이다.
이 유물들은 1944년 실업가인 이마이즈미 토시아키(今泉利秋)를 거쳐 1964년 내과의사인 이우치 이사오(井內功·1911~1992)에게 넘어갔다. 이우치가 한국 와전에 천착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 기와를 연구하려면 그 원류인 한국 기와를 반드시 알아야 했다. <일본서기>는 “백제가 588년(위덕왕 35년)…와박사(瓦博士·기와 제작 기술자)…등을 파견했다”고 기록했다. 이들이 588년 일본에서 건립한 사찰(아스카사·飛鳥寺)에서 출토된 막새를 보면 거의 같은 모습이다. 이병호 공주교대 교수는 “일본 현지인의 기호에 맞게 문양 등에 약간 변화를 주었지만 부여 관북리(6세기 중후반)와 왕흥사지(577년 이후) 출토 막새와 일본 아스카사의 것은 쌍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니 일본의 고건축물을 알려면 백제 등 한국 기와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국 기와를 수집·연구하던 이우치에게 세월이 갈수록 고민이 생겼다. 자신이 죽으면 소장품이 뿔뿔이 흩어질까 두려워한 것이다. 이우치는 원래 주인인 한국 측에 돌려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결국 타계(1992년) 5년 전인 1987년 1082점에 이르는 한국 와전(기와와 전돌)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이왕이면 국립박물관으로 기증하라”는 미술사학자 황수영 박사(1918~2011)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18년이 지난 2005년에는 이우치의 재산을 상속받은 아들(이우치 기요시·井內潔·1941~)이 다시 1296점의 한국와당을 유금와당박물관에 넘겼다.
■와검사와 와관장
전공자가 전무했던 1970년대 말 기와연구에 뛰어든 두 인물이 이우치 유물의 기증 및 구입환수를 이끌어냈다는 점 또한 운명적이라 할 수 있다.
1987년 이우치 유물의 국립중앙박물관 기증 과정에서 실무를 맡은 김성구 전 국립경주박물관장과, 2005년 남은 이우치 유물을 구입 환수한 검사출신의 유창종 유금와당박물관장이 그들이다.
1970년대 말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의 직분을 맡고 있었던 김성구 전 관장은 당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많은 와전들을 유물로 등록하는 업무를 맡게 됐다. 그러나 국내에는 와전 전공자가 전무했고, 때문에 다양한 와전의 명칭 또한 알 수 없었다. 그것이 김 전 관장이 와전을 연구하게 된 계기였다. 이우치가 기증을 결심했을 때 당시 국립부여박물관장이던 김성구 전 관장이 공교롭게도 일본의 교토(京都) 국립박물관에 연수중이었다. 그로서는 기증할 와전의 분류·선정·운송을 책임질 운명이었던 것이다. ‘와관장’ 소리를 들어도 좋을 듯 싶다.
유창종 관장도 비슷한 시기에 와전에 꽂혔다. 고교 시절(대전고) 철학·역사서클을 결성하기도 했던 유 관장은 1978년 2월 충주지청 검사로 발령받으면서 답사모임(예성동호회)을 만들었다. 특히 동호회의 첫 답사 때 충주 탑평리 7층석탑(국보 6호) 주변에서 수습한 6엽의 연화문수막새가 유 검사의 인생을 바꾸었다.
“이 수막새에 고구려·백제·신라 등 3국의 요소가 다 보이는 겁니다. 연꽃이 툭툭 솟아오른 형태는 고구려, 회백색은 백제, 6잎은 신라…. 특히 이와같은 수막새는 충주 중원 지역에서 주로 보이는 것에 주목했죠.”
그럴 만도 했다. 충주 지역이 바로 고구려·백제·신라가 충돌한 곳이었기에 삼국의 요소가 모두 보인 것이다. 유창종 검사가 주도한 답사모임은 이 수막새에서 결정적인 동력을 얻었다.
“동호회원들 모두 예사롭게 여기지 않았죠. 삼국의 각축지인데, 만약 신라 진흥왕이 6세기 중반 이 지역을 차지했다면 반드시 순수비를 세웠을 것이라 생각했죠.”
유검사를 비롯한 예성동호회원들은 열정적으로 답사를 다녔다. 그 결과 국보가 된 충주 고구려비(국보 205호)와, 보물(봉황리마애불상군·보물 1401호)을 발견하는 개가를 올렸다. 기와 줍기 답사 덕분에 고려 광종(재위 949~975)이 954년 어머니 신명순성왕후를 위해 지은 숭선사의 위치를 알려주는 명문기와도 확인했다. 특히 국보 중의 국보인 ‘충주 고구려비’는 의정부 지청으로 발령받은 유창종 검사를 위한 환송회를 겸한 답사에서 극적으로 발견한 것이다. 이후 공직을 수행하는 바쁜 와중에도 기와연구와 수집에 천착한 유창종 검사에게는 ‘와검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2300여 점이나 기증·구입환수했지만…
최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일본 데즈카야마대(帝塚山大) 부속박물관의 소장 한국 문화재 도록을 펴냈다.
그런데 이 박물관이 소장한 한국 와전(2981점) 중에 ‘이우치 유물’이 절대 다수인 2746점에 이른다.
필자는 복잡한 생각이 든다. 아니 대체 이우치가 수집한 한국의 와전이 얼마만큼이란 말인가. 두 차례에 걸쳐 2378점(국박 1082점+유금박 1296점)이나 기증했는데, 또 3000점 가까운 한국 와전이 다른 곳에 있었다는 건가. 그런데 두 군데 합하면 5124점이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이토 쇼베이가 긁어모은 한국기와는 1만점이 넘고, 1964년 이우치가 인수받은 것은 7000~8000점으로 추정된다. 매도 과정에서 상당수의 와전이 사라졌고, 이우치 소장품의 일부도 오사카(大阪)의 고서점에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2곳(국립중앙박물관·유금와당박물관)과 일본 1곳(데츠카야마대)에 있는 이우치 유물의 수를 합한 5100여 점과 비교하면 2000~3000점 정도가 소재불명이라는 얘기다.
그래도 이우치의 1987년 국립중앙박물관 기증은 ‘환수의 모범사례’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1988년 대한민국 정부가 주는 국민포장을 받았다. 100%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본 소장가가 스스로 결정했고, 국내학자의 조언 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수집경위의 불법성을 강조하면서 무조건 반환하라고 하기 보다는 문화재의 본뜻과 본국 귀환의 의미를 납득시키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우치 유물을 2차로 구입환수한 유창종 유금와당박물관장의 한마디가 인상깊다.
“물론 구입환수였지만 흥정을 붙일 만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제값을 다 주었다면 감당할 수 없었겠죠. 본국환수 때의 공익측면을 강조하고 명예로운 예우를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돌아온 와전 이우치 컬렉션>(돌아온 문화재 총서 3), 사회평론, 2015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일본 데츠카야마대힉 부속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국외함국문화재 17), 2021
유금와당박물관, <한국와당 수집 100년, 명품 100선>, 2008
김성구, <옛기와>, 대원사, 1992
김성구,<옛 전돌>, 대원사, 1999
김유식, ‘한국 고대 치미의 변천과 전각형 주자 발생’, <한국기와학회 학술대회 발표자료집>, 한국기와학회, 2018
신창수, ‘한국기와연구의 발자취’, <한국와당 수집 100년, 명품 100선>, 유금와당박물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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