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인들은 겨울에 긴 구들 아래 불을 지펴 방을 덥힌다”는 <구당서>의 기록처럼 온돌은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였다.

그렇기에 세계적인 대영백과사전에도 떡하니 ‘ONDOL’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고고학 자료를 봐도 청동기~옥저~고구려~발해를 이어온 구들이 온돌(溫突)로 표기된 것은 만고의 성군인 조선조 세종 시절이었다.  즉 세종은 “1425년(세종 7년) 성균관 학생들이 습질(濕疾·아토피 같은 피부병)에 걸리는 일이 많으니 (기숙사에) 온돌과 목욕탕을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발해영역인 러시아 체르냐치노에서 확인된 온돌 유구.

 

과연 습기가 차기 쉬운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긍휼히 여긴 성군의 마음씨다. 그런데 세종의 지시에는 또하나의 코드가 숨어있다.

바로 온돌 문화의 특징을 설파하고 있다. 사실 같은 동양이라도 한국과 중국의 ‘앉는 자세’는 다르다. 중국인은 의자에 앉고 침상에서 자지만, 한국인은 다리를 꼬아 앉고 바닥에서 잔다.

즉 한국인은 따뜻한 구들에 최대한 몸을 접촉하면서 앉는 자세를 취한다. 구들 위에 요를 깔고 이불을 덮고 자는 전통은 어떤가. 이것이 바로 온돌 문화의 또다른 특징인 축열효과이다. 요와 이불은 구들에서 올라오는 열을 최대한 모아서 온몸의 구석구석에 전달해주는 미니 찜질방이라 할 수 있다.
따지고보면 한국인은 불을 고래 속으로 밀어넣어, 불을 밟고, 불을 깔고 앉아, 불을 베고 평생을 살아왔다. 민속학자 손진태(1900~?)는 “한국인은 온돌을 태반으로 하여 태어나 온돌에서 자라고 온돌에서 죽는다”는 온돌예찬론을 폈다. 하기야 저 세상 사람이 되어도 제사상이나 차례상을 아랫목에서 받으니 할말이 있겠는가.
초대 미국공사 박정양(1841~1904)은 워싱턴 앰배서더 호텔에서 침대 위가 아닌 바닥에서 잤다. 손님이라 찾아오면 부리나케 “빨리 침대를 치우라”고 하인에게 호령했다. 부산스럽게 이부자리를 치우며 손님을 맞이한 예절이었으리라.
문화재청이 16일 우리 고유의 ‘온돌문화’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예고했다. 물론 해녀(제132호)나 김치담그기(제133호)처럼 특정인이나 단체를 인정하지는 않는다.

‘온돌문화’ 자체를 문화재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우선 2000년 이상 뿌리깊은 생활문화였던 이제 원형을 보존해야 할 ‘문화재’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약간 켕기기는 하다.
그러나 급속한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도 온돌은 살아남았다. 뜨끈한 구들 위에서 자는 전통은 상당히 사라졌지만 지금 막 짓는 최신식 아파트도 라이에이터 아닌 온돌난방을 쓰고 있다. 제 아무리 침대가 편해도 몸이 찌뿌둥할 때는 아직은 뜨끈한 온돌방이 그립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김준봉, 리신호, <온돌 그 찬란한 구들문화>, 청홍, 2006
 강재철, ‘온돌문화전통의 지속과 변용에 관한 시론’, <비교민속학> 제41권 41호, 비교민속학회, 2010
 송기호, <한국 고대의 온돌(북옥저, 고구려, 발해)>,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