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종공신이 80명이 넘는다니 과하다. 그 중에 내시가 24명이며 미천한 자들이 또 20여명이 되었다. 얼마나 외람된 일인가.”(<선조실록> 1604년 6월 25일)
“천 것들 하고 함께 공신회맹연에 참석하고 충성을 다짐하는 소반의 피를 마시고 맹세했으니 아 어찌 비웃음을 사지 않겠는가.”(<선조실록> 1604년 10월 29일)
임진왜란 때의 공신책봉 관련 실록 기사를 보면 유독 사관(史官)의 ‘한탄 논평’이 많다. 공신 심사나 책봉, 그리고 공신회맹식의 과정을 기록한 사관들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것이다. 1604년 6월25일 공신교서를 발표한 사실을 적은 사관의 논평이 의미심장하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절개를 세운 사람이 없지 않다. 정인홍·김면·곽재우는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김천일·고경명·조헌은 충청과 호남에서 죽었다. 그들의 공적은 너무도 찬란하고 열렬하여 충의의 기개를 고취시킬 수 있었다. 이들의 명성을 새겨 후세에 보인다면 명교(明敎)에 관계되는 바가 어찌 적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당대의 여론을 반영한 사관들의 논평은 두가지를 일러주고 있다. 하나는 공신 중에 깜냥도 안되는 허접한 인물들이 많아 차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곽재우 등 의병들의 공이 너무 폄훼되었다는 것이다. 대체 어떤 내막이 있었기에 사관들이 혀를 끌끌 찼을까.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맨먼저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의병장의 일괄유물. 붉은 철릭을 입고 전장을 달리며 숱한 왜적들을 벤 칼이 돋보인다. |곽재우 장군 기념사업회 소장 

 

■마부에 내시까지…호성공신의 면면
1604년 6월25일 발표된 ‘임진왜란 공신’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공신은 세 부류로 나눴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도망가던 선조 임금을 시종한 86명을 호성(扈聖)공신으로 추대했다. 임금(聖)을 호위(扈)한 공신이라는 것이다.

또 전쟁터에서 왜적을 토벌한 장수와 중국에 군량미를 보내달라고 주청을 올린 사신 등을 포함한 18명은 선무(宣武)공신으로 꼽혔다. 무공(武)을 떨쳤다(宣)는 의미다. 또 전란 도중(1595년)에 터진 이몽학의 반란사건을 진입한 5명은 청난(淸亂·반란을 진압한)공신이 되었다.
어째 좀 이상하다. 명색이 7년이나 전쟁을 치렀는데, 전쟁터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른바 선무공신(18명) 보다 의주로 줄행랑을 친 임금을 수행한 호성공신 수(86명)가 5배 가까이 많다. 특히 사관들이 일관되게 지적했듯이 호성공신 중에는 신분이 낮은 인물들이 많았다.
호성공신 가운데는 물론 이항복과 정곤수, 이원익, 윤두수, 류성룡, 이산보 등 명공대신들도 있었다. 그러나 내시가 24명이나 포함되었고, 임금의 말(馬)을 관리하는 이마(理馬)가 6명, 의관이 2명, 그리고 왕명을 전달하고 잔심부름을 도맡아하는 별좌(別坐·5급)와 사알(司謁·6급)이 또 2명이 들어갔다. 의관 중에는 훗날 <동의보감>을 편찬한 의성 허준(호성 3등)도 포함됐다. 어찌 된 일인가. 차근차근 살펴보자.

 

■백성을 버리고 줄행랑친 임금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 임금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삼십육계줄행랑이었다. 명망 대신들도 속속 임금 곁을 떠났다.
“임금이 경성을 떠날 때 국가가 틀림없이 망할 것이라는 요사스러운 말이 퍼져… 명망 진신(縉臣)들이 보신책을 품었다. 경성~의주에 이르기까지 문·무관은 겨우 17인이었다. 그밖에 환관 수십명과 어의 허준, 액정원 4~5인, 사복원 3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임금이 ‘사대부가 너희들만도 못하구나!’하고 한탄했다.”

김시민 선무공신교서에 기록된 선무공신 18명 명단. 1등에 이순신·원균·권율, 2등엔 신점·권응수·김시민·이정암·이억기, 3등엔 정기원·권협·유사원·고언백·이광악·조경·권준·이순신(李純信)·기효근·이운룡이었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선조는 의주 몽진길 내내 임금을 보필해야 할 이른바 ‘명공대신’과 ‘사대부’의 배신행위를 목도했던 것이다.
그런 선조였기에 어려운 시기에도 지근거리에서 임금을 끝까지 지켜준 측근들에게 공신의 직위를 내리고 싶었을 것이다.
비록 천한 신분이었지만 제 몸보신을 위해 줄행랑친 지체높은 자들보다 훨씬 의리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관들이 “그런 천한 자들과 같은 공신의 반열에 올라 충성맹세를 다짐하는 피를 나눠마셨으니 ‘쪽팔리다’”고 한 것도 과한 비판이라 할 수는 있다. 공신이 무슨 사대부와 명망대신의 전유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업무를 했을 뿐인데 공신작위까지?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훗날 사관들이 내시·의관·말관리사·심부름꾼 등 임금 최측근들의 공신작위를 비판하면서 빠짐없이 인용한 인물이 있다.
바로 당나라 한림학사 육지(陸贄·754~805)였다. 육지는 783년 군벌 주차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황제인 덕종의 피란길을 수행했던 충신이다.
피란 도중에 수많은 황제의 측근들이 도망쳤지만 육지는 끝끝내 덕종을 지켰다. <선조실록>의 사관들은 “‘임금을 호종하는 것은 신하의 당연한 직분이므로 호성공신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 육지의 언급을 상기하라”고 일관되게 꼬집는다. 육지의 언급을 아는 자라면 호성공신으로 책봉된 자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임금의 수발을 드는 자들이 직무상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놓고 무슨 공신책록을 받느냐는 것이었다.
어떤 사관은 매서운 ‘팩트 폭격’을 해댄다.(<선조실록> 1604년 10월 29일)
“태조(이성계)가 창업했을 때도 개국공신은 30여명에 불과했다. 그 중에 태조의 수발을 든 환관과 시종이 끼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무능해서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주제에 무슨 호성공신을 86명이나, 그것도 제 일을 했을 뿐인 최측근 내시, 심부름꾼에게까지 공신 작위를 남발했냐는 질타였다. 심지어 태조 이성계 할아버지도 하지 않는 일이었는데…. 참으로 되지못한 일을 했다는 지적이었다. 일리있는 ‘팩트 폭격’이다.

의주 몽진길에 나선 선조임금을 호종했다는 공로로 호성공신에 오른 86명의 명단. 이중에는 이항복·정곤수·이원익·류성룡·윤두수 등 명망대신들도 있었지만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모신 내시와 마부 등도  대거 포함됐다.  

 

■선조는 왜 장수들을 홀대했을까
문제는 선조가 호성공신 작위를 ‘자신을 끝까지 지켜준 최측근을 위한 단순한 보답’으로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1601년(선조 34년) 3월 14일 비변사가 임진왜란 때의 호종 신하와 역전 장수들의 녹훈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선조는 이상한 말을 던진다.
물론 “이순신과 원균, 그리고 권율 등은 다소간의 전공을 세웠다”고 했다. 그러나 다음 표현이 이상하다. “이 장수들의 공이 그저 약간 나은 편(差强表表)”이라 했다. 한마디로 장수들의 전공은 별 볼 일 없다는 것이다.
“왜란에서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중국 군대의 힘이었다. 조선의 장사(將士)는 중국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잔적(殘賊)의 머리를 얻었을 뿐이다. 자기 힘으로는 적병 한 명도 베지 못했고, 적진을 단 한 곳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무사히 끝낸 모든 공로는 중국의 지원 덕분이라 여긴 것이다. 다음 말이 더욱 의미심장하다.
“중국 군대가 지원군을 보낸 연유가 무엇인가. 모두 과인을 호종한 신하들 덕분이다.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까지 가서 중국에 호소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1604년 10월 29일 공식적으로 내린 ‘호성공신 별교서’를 보면 더욱 기막힌 언급이 나온다.
“임진왜란의…고통을 부모(명나라)에 호소하는 것은 정리상 당연하다. 황제를 저버리는 것은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평소 중국을 지성으로 사대(事大)해왔는데…. 중국에 지원을 요청한 사신과 충정한 말고삐를 잡은 이들의 공로는 다를 바 없다.”

충무공 이순신의 선무공신교서.  선조는 “이순신·원균의 해상전투 전공이 으뜸이고, 권율의 행주전투와 권응수의 영천 수복 정도가 그나마 손꼽을만 하지만 나머지 장수들의 공은 보잘 것 없다”고 폄훼했다.

선조는 그러면서 “중국 황제가 ‘조선의 강산을 다시 만들어준 은혜(再造之恩)’은 유례없는 것이었다”고 덧붙인다.
정리하자면 선조는 왜적을 물리친 공로를 100% 명나라의 지원 덕분으로 돌렸다. 그것을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명나라의 은혜, 즉 ‘재조지은’이라 했다.
또 하나. 명나라의 지원을 받아낸 이가 누구인가. 바로 ‘선조 자신’이라는 것이다. 임금이 무사히 의주까지 도달하여 중국에 구원을 요청한 덕분에 다 쓰러져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니 임금을 끝까지 수행한 사람들과, 중국에 파견되어 지원군을 이끌고 오게 만든 사신들이 최고의 공신이라는 것이다.
전란이 일어나자 줄행랑을 선택한 군주의 ‘비겁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이른바 호성공신의 수(86명)가 전쟁터에서 직접 왜적을 무찌른 선무공신의 수(18명)을 압도한 이유이다.

 

곽재우 장군과 휘하 17명의 장령 및  무명 의병들의 위패를 모신 경남 의령의 충익사.

■의병을 극구 칭찬한 선조였는데…
한심한 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임금이 줄행랑치자 민심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백성들은 무작정 도망가는 임금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 못난 임금을 위한 충성심 때문에, 부모형제를 위한 효심 때문에, 그리고 수천 수백년 동안의 터전이었던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이 분들이 사대부를 중심으로 천민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활약한 의병들이었다.
다급했던 선조는 처음에는 의병장들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등 의병의 봉기를 크게 북돋아주었다.
선조가 1592년(선조 25년) 6월29일 각지의 의병장들에게 관직을 내리며 보낸 교서를 보라.
“들은즉 정인홍·김면·박성·노흠·곽일·조종도·이노·곽재우·권양·이대기·전우·배덕문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 중 곽재우는 비상한 전술로 적병을 무수히 죽였지만 군공을 조정에 아뢰지 않았다. 기특하다. 호남의 전 부사 고경명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명을 모집하여 경성(한양)을 수복하려고 하고….”(<난중잡록> ‘임진년·하’)
선조는 곽재우 의병장에게는 ‘내가 그(곽재우)의 이름을 늦게 들은 것이 한스럽다’고 했고, 고경명·김천일 의병장의 서울수복 의지를 담은 보고를 접한 뒤에는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였다’고 했다. 나아가 선조는 “전국의 백성들은 분연히 왜적과 맞서야 한다”고 의병봉기를 부추긴다.
“길 옆에 군사를 매복시켜 왜적들의 발을 묶어두고 적의 노략질을 무찔러라. 한 놈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라.”(<난중잡록>)

 

선조가 호성공신 86명, 선무공신 18명, 청난공신 5명을 책록한 뒤 공신들과 그 적장자들을 불러 이른바 공신회맹연을 열었다. 이 자리는 선조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신분이 천한 내시와 마부, 의관, 심부름꾼까지 호성공신에 등재된 것을 문제삼았다. 심지어는 “저 천 것들과 같은 자리에 앉았다는 것이 부끄럽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장수들의 공적은 미미하다’는 선조의 가이드라인
그러면서 선조는 임진왜란이 평정된 뒤 두둑한 상급을 내리겠다고 약속 한다.
“너희(의병)들이 전국을 평정하여 남녀노소 백성들을 복귀시킨 뒤에 힘을 합해 경성(한양)에 들어와 나(선조)의 행차를 맞아라. 그러면 너희들은 살아서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고 그 은택은 대대손손에 미칠 것이다.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전쟁이 끝나면 의병 활동의 상급을 두둑히 내릴 것을 철썩같이 다짐하고 있다. 그런데 기나긴 7년 전쟁이 끝난 뒤에 벌어진 공신책록 과정은 어떠했는가.
1601년(선조 34년) 3월 10일 선조는 “이제 왜적도 물러갔고 중국군도 철수했으니 여러 공신들을 심사해서 올리라”는 비망기를 내린다.
그러나 앞서 인용했듯 불과 4일 후인 3월 14일 “임진왜란을 끝낸 공적의 으뜸은 중국군대”라는 전제아래 “전쟁터에서 왜적과 싸운 장수들의 공적은 임금(선조)을 의주까지 호종한 측근들이 비해 아주 미미하다”는 등의 가이드라인을 발표해버린 것이다.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왜적을 물리친 정암진의 모습. 곽장군은 이곳에서 안코쿠치 에케이가 이끄는 왜병 2000명을 무찔렀다. 이 승리로 왜병의 호남진출이 어느 정도 좌절됐다. 왜병들이 미리 강을 건널 곳을 깃발로 표시했는데, 곽재우 장군이 알아차리고 이 깃발을 뽑아 진창으로 옮겨놓았다. 깜박 속은 왜병들이 진창속에 빠졌고, 곽재우 장군이 이끄는 의병들이 전멸시켰다.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의 경우
이 대목에서 의병장 곽재우 장군의 예를 살펴보자.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지(4월13일) 열흘도 안된 22일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거병했다. 장군은 신출귀몰한 유격전으로 파죽지세의 왜적을 괴롭혔다.
곽재우는 붉은 비단 철릭(군복)을 입고 전장을 누비며 ‘홍의장군’의 별명을 얻었다. 곽재우의 가장 큰 공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정암진(의령과 함안 사이를 흐르는 남강 나루)에서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가 이끄는 왜적 2000명을 격파했다는 것이다. 이 전투는 육지에서 왜군과 싸워 이긴 최초의 승전보였다. 이 승리로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으며 경상우도를 지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곽재우는 현풍·창녕·영산 등지에서 잇달아 승리했고, 10월에는 전란 초기 가장 규모가 컸던 전투인 제1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했다. 곽재우는 일련의 전투에서 신출귀몰한 위장·매복전술로 승전에 기여했다. 곽재우가 홀로 분전하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은 곽재우를 꺼져가던 조선의 ‘한줄기 빛’으로 떠받들었다.
선조가 파견한 초유사 김성일은 “남부지방의 왜적들은 곽재우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홍의장군이 나타났다’면서 부들부들 떨었다”고 보고했다.(<선조실록> 1592년 6월 28일)

원균의 선무공신교서. 선조는 육지의 장수들이 거둔 전공은 아무리 커봐야 '성 하나를 지킬 뿐'이었다고 폄훼하면서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잔투 승리가 대단한 전과라고 했다.  

 

■입장이 달라진 선조, ‘의병의 군공은 별볼일 없었다’
선조는 곽재우에게 유곡도 찰방(구미 구간의 역을 총괄하는 종6품의 외직)-형조정랑-절충장군-성주목사에 이어 진주목사에 잇달아 제수했다.
그런데 1603년 공신책록 심사가 이뤄지자 선조와 조정의 공론은 확연히 달라진다.
공신책록을 위한 임시관청인 공신도감이 각종 자료를 토대로 1차 선정한 공신후보들을 선조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이 심상치 않다.
“의병들은 비록 크게 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그 중에는 먼저 의병을 일으켜 한쪽 방면을 보전한 자는 ‘불가불’ 논상해야 합니다. 경상우도가 보전된 것은 실로 곽재우의 힘에 말미암은 것인데,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선조실록> 1603년 2월 12일)
이 무슨 소리인가. 의병들의 공은 별볼일 없지만 그래도 가장 먼저 거병한 곽재우 정도는 나름 공신자격이 있으니 ‘부득불’ 상을 주는게 어떠냐고 선조 임금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선조가 어처구니없는 한마디를 던진다.
“과인을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한 자들은 다 공이 있는 사람들이다. 어찌 귀천을 논하겠는가. 당연히 공신의 자격이 있다. 반면 조선의 장사(將士)들이 왜적을 막는 것은 양(羊)을 몰아다가 호랑이와 싸우는 것과 같았다.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전이 가장 으뜸된 전공이고 그 이외에는 권율의 행주 싸움과 권응수의 영천 수복이 조금 사람들의 뜻에 차며 그 나머지는 듣지 못하였다. 잘했다는 자들도 겨우 한 성을 지킨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게 따지면 진주성을 지킨 김시민 장군도 ‘겨우 성 하나를 지킨 셈’이 된 것이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의병들의 공적이 제대로 평가될리 만무했다.

1962년 2월23일 정부는 208명의 독립운동자를 포상했다. 안중근·김구·안창호 등은 1등, 신채호·신돌석·이위종·이상설 등은 2등급, 유관순 열사와 이회영 선생 등은 3등급으로 분류됐다. 

 

■공신록에서 사라진 곽재우의 이름
그나마 곽재우 장군 정도만이 1차로 확정된 최초의 공신후보 26명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1603년 33년 4월28일)
하지만 1년 2개월 뒤인 1604년 6월 25일 확정 발표된 최종 공신명단에는 곽재우 장군의 이름조차 보이지 않았다.
임금을 호종한 내시·마부·심부름꾼·요리사 등은 대거 포함되었는데도…. 그랬으니 실록을 기록한 사관의 붓 끝에서 ‘참으로 유감스러운 논공행상’이라고 질타한 것이다.
다른 의병장들도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곽재우 장군의 경우도 억울했을 것이다.
물론 그 잘난 선조 임금의 말마따나 “상급을 바라고 의병을 일으킨 것은 아니겠지만”(선조의 교서) 그래도 신상필벌은 제대로 해야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었을까.
실상은 정반대였다. 전란 초기에 의병을 독려했던 선조는 명나라가 지원병을 보내자 ‘화장실 갈 때의 급한 마음’이 사라지고 다른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혹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이 의병장의 지휘아래 무능한 조정을 향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했을 것이다. 이몽학의 반란 때는 주모자 중 한사람인 의병 한현이 엉뚱하게도 김덕령·최담령·홍계남·곽재우·고언백 등 여러 장수들의 이름을 거론했다. 물론 무고였다.

그러나 이중 충남 홍산 출신 의병인 김덕령은 혹독한 고문 끝에 장살(杖殺)되고 말았다.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장들은 졸지에 반란의 씨앗을 품은 위험분자로 취급된다. 곽재우 장군에게도 감시자가 붙었다.
“곽재우의 명성이 높았고, 공로가 특출났다. 조정에서는 은밀하게 중사(내시)를 파견해서 ‘순찰’을 핑계로 그(곽재우)의 집에 들어가 장군의 동정을 살폈다. 장군은 ‘아! 내가 의심받고 있구나!’하고 깨달았다. 이윽고 의병장 김덕령이 맞아죽는 모습을 보고는 ‘초야로 묻혀야 한다’고 생각하고는….”(<일월록>)
곽재우 장군은 비슬산에 들어서 곡기를 끊고 솔잎만 먹고 도인처럼 살았다. 조정에서 출사하라고 하면 몇 번은 수락하고 몇 번은 거절하기를 반복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8월13일 <광해군일기>를 보면 해평부원군 윤근수가 막 즉위한 광해군에게 “하루 빨리 (초야에 묻힌) 곽재우를 등용하라”는 상소문을 올린다.
“곽재우 같은 명장은 오로지 그 한 사람 뿐입니다. 지금 도인처럼 살고 있는데 (의병장) 김덕령이 남의 모함에 빠져 마침내 비명에 죽자, 곽재우 또한 혹시나 화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이를 핑계로 세상을 도피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윤근수는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진다.
“성명(聖明·총명한 임금)의 시대가 왔습니다. 전란이 평정되었다고 장수를 죽이는 일이 있겠습니까. 이제 곽재우를 평안도 병사로 임명하면 어찌 병을 핑계되겠습니까.”
윤근수는 못난 임금(선조)이 죽고, 현명한 새 임금(광해군)이 들어섰으니 충신을 죽이는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병을 핑계로 초야에 묻힌 곽재우 장군같은 인재를 불러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곽재우가 선조의 의심병 때문에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독립운동의 상징인물 중 한 분으로 꼽히는 유관순 열사. 1962년 독립운동가 서훈에서 3등급으로 분류됐다. 지금이라도 등급을 재조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9060분의 1로 전락한 곽재우
18명의 선무공신 명단에 들지못한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의병장들은 이듬해(1605년) 4월 16일 선무원종공신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정공신(正功臣)이 아니라 원종(原從), 즉 ‘공신대우’의 대접을 받은 것이다. 이때 인정된 원종공신의 수가 무려 9060명이다. 아무렴 곽재우를 비롯한 김면·김천일·고경명 등 의병장들의 공이 고작 ‘9060분의 1’이라는 말인가. 그런데 선조가 원종공신 교서를 내리면서 또 한 번 ‘너희들의 공은 작고, 중국의 은혜는 크다’고 못박는다.
“국가가 어려움에 빠지자…그대들의 공이 작을지라도 갚지 아니할 수 없기에…. 부모 같은 중국이 우리를 구제해 주었고….”
끝내 의병들에게 대못을 박은 지극히 못난 임금이다. 훗날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홍의장군전’에서 “다른 이들의 조그만 공로도 기록된 선무공신록에 곽재우 장군의 이름은 없지만 장군의 공훈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을 것”이라 했다.(<아정유고>) 
여러 의병장들을 대표한 것 같은 곽재우 장군의 한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여러 차례 조정에 나와 출사하라는 명령에 곽재우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신은 왜적을 토벌하느라 관직에 제수되었습니다. 왜적이 물러갔으면 신 역시 마땅히 물러나야 합니다. 훗날 국가에 변란이 있을 경우 마땅히 다시 나와 사졸들의 선봉이 되겠습니다.”(<광해군일기> 1617년 4월 27일)

 

■유관순 열사의 경우
근자에 유관순 열사의 서훈 등급(3등급·독립장)이 너무 낮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정부가 1962년 2월 23일 독립유공자 208명의 명단을 발표했는데, 유관순 열사는 다른 132명과 함께 3등급에 받았다. 당시 1등급을 받은 이는 김구·안창호·안중근 등 18명, 2등급은 신채호·신돌석·이위종·이상설 등 58명이었다. 유관순 열사와 함께 3등급을 받은 이는 김도현·김마리아·장지연·이회영 등 132명이었다. 지금까지는 1등급(대한민국장) 30명, 2등급(대통령장) 30명, 3등급(독립장) 823명이다.
당시 심사위원들이 왜 유관순 열사를 1·2등급이 아닌 3등급에 배치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당대의 기준이 어떠했는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 유관순 열사는 독립운동의  명실상부한 상징인물로 꼽힌다.

유관순 열사 뿐 아니라 6형제가 전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펼친 이회영 선생도 역시 3등급이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분들의 공적을 헌창을 못할지언정 등급으로 깎을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천하가 아는 독립투사를 애국친일행적이 드러났거나 의심스러운 이들과 같은 반열에 놓는다면 그 또한 그분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아낙연 총리도 서훈등급 조정의 필요성을 언급했다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법률을 개정해서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저평가 된 분들의 서훈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생각해보면 가소로운 일이다. 우리는 과연 뭐하는 작자들이기에 감히 유관순·이회영 같은 분들에게 멋대로 등급을 매긴 것일까. 400년 전 곽재우 장군의 포효가 새삼 심금을 울린다.
“나라가 위급함에 모두들 자기 보전 계책만 세우고 나라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는다. 나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나라 300고을 남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이 어찌 만고의 수치가 아니겠는가.”(<난중잡록>)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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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