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작은 나라지만 산과 바다로 막혀있어 군사를 동원한지 20여 년이 되었는 데도 신하로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고려 태자가 조회했으니 후히 대접하소서. 일단 돌아가면 오지 않을 것이니….”
 1259년(고종 46년)이었다. 몽골 조정의 강회선무사 조양필이 쿠빌라이(세조)에게 고한다. “제발로 찾아온 고려 태자를 홀대해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상황일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 고려 측 사료와, <원고려기사> 등 몽골측 사료를 통해보자. 

펄갯벌로 이뤄진 강화도 갯벌. 강화해협의 빠른 물살과 함께 허리춤까지 빠지는 갯벌 때문에 몽골군은 상륙의 엄두도 내지 못했다.

■쿠빌라이의 반색
 고려는 1231년부터 만 28년 간에 걸친 몽골과의 항쟁에 지쳐 있었다. 고려는 결국 늙고 병든 왕(고종)을 대신해 태자인 전(원종)을 항복사절로 보낸다.
 그런데 도중에 몽골의 황제(헌종·몽케)가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몽골 정국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헌종의 두 동생인 쿠빌라이(홀필렬)와 아릭부케(아리부가)가 치열한 황권다툼을 벌인다. 고려 태자도 시쳇말로 누구를 만나야 할 지 ‘멘붕’에 빠진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가.
 고려 태자가 강남에서 작전을 펼치다 북상 중인 쿠빌라이를 만난 것이다. <고려사절요>를 보자.
 “고려 태자가 길에서 뵙기를 청하자 쿠빌라이(忽必烈)가 매우 놀라면서 기뻐했다. ‘고려는 예전에 당태종도 친히 정벌했어도 항복시키지 못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 나라의 세자가 제발로 걸어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그러자 곁에 있던 조양필이 “저 고려 세자를 후히 대접해야 한다”고 거들었던 것이다. 마침 또 하나의 소식이 들렸다. 고려 고종이 승하했다는 것이었다. 조양필은 “마침 잘됐다”면서 “마침 찾아온 고려 세자를 고려왕으로 세워 귀국시키면 군사를 동원하지도 않고 한 나라를 얻는 것”이라고 고한다.
 그랬다. 원나라로서는 그야말로 ‘기화(奇貨)’를 얻은 셈이었다. 20여 년 동안 그토록 원나라를 괴롭혔던 고려가 제발로 화의를 청하다니…. 쿠빌라이가 감개가 무량하다는 듯 벅찬 소회를 밝힌다.
 “지금 넓은 하늘 아래 신하로 복종하지 않은 나라는 고려와 송나라 뿐이었는데…. 그런데 이제 송나라도 솥 속의 고기이자 장막 위 제비집 같이 멸망 직전이다. 그뿐이냐. 고려도 이제 원나라에 조회하고 부왕(고종)의 상을 당해 처분을 기다리니….”(<고려사절요>)

 

 ■몽골의 선심공세
 쿠빌라이는 고려를 위해 선심공세에 나선다.
 “의관은 본국(고려)의 풍속을 좇아 상하 모두 고치지 마라. 개경 환도도 더디게 혹은 빠르게 함은 여력을 헤아려서 하라. 원래 설치된 다루가치(일종의 총독) 일행 등은 서쪽으로 돌아오게 하라.”(<원고려기사>)
 한마디로 고려의 제도와 풍속은 존중하겠다는 약속이 아닌가. 이를 ‘불개토풍(不改土風)’ 혹은 ‘세조구제(世祖舊制)’라 한다. 고려는 훗날 몽골이 내정간섭을 강화할 때마다 쿠빌라이(세조)의 유훈, 즉 ‘세조구제’를 들먹이며 번번이 좌절시켰다. 예컨대 1323년(충숙왕 10년) 몽골(원나라)가 고려에 성(省)을 설치, 사실상 흡수통합을 강행하려 했다. 그러자 이제현은 몽골 조정에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일찍이 세조(쿠빌라이) 황제께서 고려 고유의 풍속과 제도를 유지하여 종묘사직을 유지하라 했는데…. 그런데도 성(省)을 설치하려 한다면 세조 황제의 말씀은 어찌할 것입니까. 세조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세조의 ‘유훈’을 들먹거리니 어쩌겠는가. 원나라는 ‘성의 설치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에 큰 선심을 베푼 쿠빌라이는 두고두고 공치사했다. “원나라에 조회하는 나라가 80여 개국인데, 짐이 그대 나라처럼 예로 대접하는 것을 보았느냐”고….  

손돌의 한많은 전설을 담고 있는 손돌목. 강화해협 가운데서도 가장 물살이 바르고 들쭉날쭉한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몽골에 굴복하지 않은 유이(唯二)의 나라
 그러나 그렇게 공치사 할 일은 아니었다. 1차 침공(1231년) 이후 30년 가까이 이어진 여·몽 전쟁에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었으니까….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몽골이 고려의 강화도 정부를 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치지 않았던 것 뿐이라고…. 당시 세계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던 몽골제국은 고려를 주 공격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또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몽골이 고려를 특별히 봐줬다는 기록은 없다. 앞서 살폈듯이 도리어 ‘20여 년 간의 공격에서 끄덕없는 나라’ ‘과거 당태종도 정복하지 못한 나라’ ‘세계제국 가운데 굴복하지 않은 유이(唯二)의 나라’로 표현돼 있다.
 최근 출간된 <왜 몽골제국은 강화도를 치지 못했나>(이경수·푸른역사)를 통해 다시 30년 이상 지속된 고려의 대몽항쟁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저자는 몽골군이 당대 세계 최강 집단이며, 신이 내린 무시무시한 전사들이라는 맹목의 경외심을 버리라고 주문한다. 몽골군도 ‘한낱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한낱 인간이었기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고, 때때로 어쩔 수 없는 약점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여기에 강화섬의 지형적인 조건과 고려대장경 조성이 상징하는 백성들의 응집력이 장기항쟁의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몇 번을 곱씹어봐도 고려 조정이 몽골의 침략(1231년)에 맞서 강화섬을 피란처로 삼은 것은 신묘한 대책이었다.(1232년) 모두 6차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았으며, 화의 결성(1259년) 이후에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원나라를 골탕먹인 뒤에야 개경으로 환도(1270년)했으니까….
 
 ■몽골의 공포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몽골군의 ‘물의 공포’가 상상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13세기 초 칭기즈칸이 부족을 통합한 뒤 부족을 아우르는 법을 제정했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제4조=물이나 재에 방뇨하는 자는 사형이 처한다. 제14조=물에 손 담그는 것을 금한다. 물은 반드시 그릇으로 떠야 한다.’
 물이 부족한 초원·사막지대에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물이 없으면 사람이든, 가축이든 모두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당연히 물에 대한 경외심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때문인가. ‘비바람 속의 전투’는 몽골군대가 가장 두려워 했다.
 “1254년 차라대(몽골 장수)가 충주산성을 공격하자 갑자기 비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성 안 사람들이 정예군으로 공격하자 적이 포위를 풀고 도망갔다.”(<고려사>)
 “1256년 몽골군이 충주성을 도륙하자 관리와 노약자들이 겁에 질려 월악산으로 올라갔다. 그 때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면서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몰아쳤다. 몽골군은 신령이 돕는다면서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퇴각했다.”(<고려사>)
 <몽달비록>에 “몽골 군대가 다가오는 것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같고,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사라지는 것은 번개 치는 것 같다”는 표현이 나온다. 하지만 그런 하늘이 내린 신묘한 군대로 비바람에는 ‘젬병’이었던 것이다.
 오죽 물을 무서워했으면 1259년 쿠빌라이가 장강(양쯔강)을 건너려던 몽골군의 무섬증을 해소시키려고 호부(護符), 즉 부적을 붙이게 했을까.(<집사(集史)>) 싸우자는 것도 아니라 그저 도강하는 것 뿐인데 부적까지 붙일 정도얐다니…. 여하튼 이 때의 도강은 다른 몽골부대에 놀라움과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강화해협에 붙어있는 연미정. 조선 조 정묘호란 때 강화조약을 맺은 곳이었다.

■‘손돌의 전설’
 여기서 강화도의 지형을 보자. 김포와 강화도 사이를 강화해협이라 하는데 길이 20㎞지만 폭은 400~1000m에 불과하다. 바다라 하기에는 너무 좁다.
 그러나 쉽게 봐서는 안된다. 조석간만의 차이가 9m 정도나 된다. 물살이 험하기로 악명이 높다. 좁은 해역에 조수가 오르내릴 때는 바닷물의 수평운동인 조류가 발생하는데 좁은 만이나 해협에서는 왕복성 조류가 흐른다. 조차가 클수록 해협이 좁을수록 유속이 더욱 빨라지는데 밀물 때의 조류속도는 6~7노트(시속 11~13㎞)에 달한다. 1초에 3~4m의 유속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속도가 아닐까. 
 ‘손돌의 전설’은 변화무쌍한 강화해협의 물살을 웅변해준다. 즉 어떤 임금이 난리를 피해 강화섬으로 다가올 때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뱃사공인 손돌이 물살이 세고 위험한 곳으로 노를 저어 가지 않는가. 임금이 “제대로 된 물길로 가라”고 경고했지만, 손돌은 험한 길을 고집했다. 참다못한 임금은 “저 자의 목을 베라”고 명했다. 손돌은 죽기 전, 바가지 한개를 건네주며 “이 바가지를 물 위에 띄워 바가지가 흐르는대로 배를 저어가시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과연 손돌의 말대로 바가지가 떠가는대로 배를 저어가자 무사히 건너갔다. 임금은 뒤늦게 후회하고 손돌의 사당을 지어 원혼을 위로했다.
 이후부터 손돌의 항로인 김포 망덕진~강화 광성보 용두돈대 사이를 손돌목이라 일컬었다.
 <대동지지> 강화·산수조에는 손돌목의 물살을 이렇게 표현한다.
 “손돌목은 돌다리가 굳세게 뻗쳐 있어서 물밑이 마치 문지방과 같다. 중앙이 약간 오목하여 조수가 들고 날 때 수세가 매우 급하다. 또한 물밑 돌부리가 마치 깊은 낭떠러지 같으며 파도가 굽이치며 흐르는데 여울과 같이 빠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대몽항쟁기 당시 강화해협은 굴곡이 매우 심한 S자형이었다. 그러니 물과 관련된 천재지변을 경외한 몽골군들의 입장에서는 ‘건너기에는 너무 어려운 해협’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불과 2년 전인 2010년 강화 교동도에서 하점면 창후리로 가던 140t 여객선이 조종할 틈도 없이 암초에 걸린 사건을 예로 든다. 

바닥을 드러낸 몽골 바양노르솜의 한 호수. 몽골에서는 예로부터 부족한 물에 대한 경외심이 대단했다.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펄갯벌
 물도 물이지만 갯벌은 몽골군으로서는 헤어나올 수 없는 늪이었을 것이다.
 갯벌에는 모래갯벌, 펄갯벌, 모래 펄갯벌 등 3가지가 있다.
 그 중 강화갯벌은 함수량이 높은 펄갯벌이다. 빠지면 허벅지까지 차올라 도저히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된다.
 몽골군이 밀물을 이용, 물살 빠른 강화해협을 건넜다치자. 물이 빠지기 전에 공격을 마치지 않으면 갯벌에 빠져 전투력을 잃게 된다. 가뜩이나 물을 무서워하는 몽골군사들의 입장에서는 ‘패닉’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겨울철, 강화해협에 떠다니는 유빙(流氷)도 골치거리였다. 강화해협에는 겨울철만 되면 임진강·한강·예성강에서 흘러 내려오는 얼음덩어리가 쌓여 유빙을 이룬다. 이 경우 뱃길이 끊어진다. <숙종실록>은 “갑곶(강화관문)에 얼음덩어리 때문에 겨울에 배가 통할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제는 몽골군이 1년 내내 전쟁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목민족인 몽골인들은 봄·여름에 최소한의 목축활동 등 생업에 종사할 필요가 있었다. 게르(천막)의 주재료인 펠트를 만들려면 부족민들이 공동작업에 나서야 했다. 특히나 봄·여름에는 모든 말들이 풀과 물을 마음대로 뜯게 하여 강하고 튼튼하게 만든 뒤 가을 무렵부터 전쟁에 투입하는 것이다.
 특히 막 추수가 시작되는 점령지를 마음껏 약탈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 모든 계획이 허사가 된다. 특히나 조수간만의 차에 따른 빠른 물살과 갯벌, 그리고 겨울철 유빙까지…. 몽골군으로서는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전쟁이었을 것이다.

 

 ■고려의 성전(城戰)
 그렇다면 강화의 자연환경만이 고려를 지켜주었을까.
 고려는 천혜의 요새인 강화섬에 이중삼중의 덫을 더 설치해놓았다. 바로 성(城)이다. 즉 강화섬에 궁성에 해당되는 내성과 도성에 해당되는 중성, 그리고 강화도 전체를 아우르는 외성까지 철통방위 태세를 갖췄다. 두말할 것 없이 산성전략은 고조선-고구려의 전통을 잇는 우리만의 강점이었다.
 반면 몽골군의 공성전은 육지에서도 번번이 실패했다. 예컨대 1231년(고종 18년) 귀주성 전투에서 몽골군은 누거·평상·대포차 등 다양한 공정무기를 동원하고도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전투를 지휘한 70대 노익장 몽골장수는 “이렇게 작은 성이 대군을 맞아 싸우는 것을 보니 하늘이 돕는 것”이라고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고려사> ‘박서 열전’)
 1232년 처인성 전투 때는 승려 김윤후가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를 살해하는 등 충격적인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몽골군으로서는 천신만고 끝에 강화해협을 건넌다 해도 경군 1만명과 특수부대인 삼별초, 그리고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이 버티고 있던 강화섬을 단시간 내에 점령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밀·썰물 시간, 그리고 봄이 되기 전…. 그런 시간제한을 두고 그렇게 빨리 섬 전체를 접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함께 선체를 두꺼운 판자로 덮어 화살과 돌의 공격을 막은 이른바 몽충(蒙衝)이라는 배와, 배에 뿔처럼 달린 쇠붙이를 달아 적선을 부숴버리는 과선(戈船)도 고려의 주요 무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세계 최강의 몽골제국은 고려의 강화도 정부는 붕괴시킬 수 없었다. 

■몽골의 애간장 녹인 고려
 빼놓을 수 없는 고려의 무기는 역시 노련한 외교술이었다.
 예컨대 몽골이 고려의 강화천도를 질책하자 고종은 천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유민이 모두 흩어지면 나라의 근본이 비게 되고 나라의 근본이 비면 누가 해매다 공물을 마련해 상국을 섬기겠습니까. 이 때를 이용해 남은 백성을 수습해 섬으로 들어가 있으면서 변변치않은 토산물이나마 상국에 올리는 편이 낫습니다. 이로써 신하의 명분을 잃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고종은 특히 “어디에 있건 간에 정성을 바치는 것이 중요하지 않느냐”면서 “신하의 명분을 잃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원을 달랬다.(<고려사> 1232년 11월)
 또 있다. 1256년 9월 고려 사신 김수강이 몽골 군대의 철수를 쿠빌라이 황제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개경에 환도해야 철수하겠다”고 거절했다. 그 때 김수강의 화술이 백미다.
 “사냥하는 사람이 짐승을 쫓아 굴 구멍에 들어갔는데 활과 화살을 가지고 그 앞을 막고 있으면 곤한 짐승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또 얼음과 눈이 몹시 차서 땅이 얼어붙으면 초목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쿠빌라이는 “네가 참 사신이다. 마땅히 두 나라의 화친을 맺어야 한다”며 군사를 돌렸다. 고려는 화의에 합의한(1259년) 이후에도 이 핑계 저 핑계대다가 11년 후인 1270년이 되서야 개경으로 환도했다. 원나라를 들었다놨다 하면서 애간장을 녹인 것이다. 
 화가 난 쿠빌라이는 1269년(원종 10년) 고려 재침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그러나 마형과 마희기 등 조정대신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승리할 수는 있으나 최선은 아닙니다. 이기지 못하면 국가의 위엄이 땅에 떨어집니다. 저들이 강과 산의 험함을 믿고 바다에 식량을 쌓아 가만히 지키기만 하면 무슨 계책으로 취할 수 있겠습니까. 100만 군대라도 금세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원고려기사>)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