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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고려자기 장물'을 싹쓸이 쇼핑한 이토 히로부미

 

 광복 70주년입니다.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고, 와신상담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주는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의해 무자비하게 도굴된 문화재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세계적으로도 우수성을 인정받는 고려청자 이야기입니다. 특히 초대 조선통감을 지냈고, 안중근 의사에게 처단된 이토 히로부미가 도굴품, 그러니까 개성과 강화도, 파주 장단 일대에서 마구 파헤친 고려자기들을 닥치는대로 사들인 장물아비라는 것을 소개할까 합니다.

 

 동방예의지국에서는 무덤에 함부로 손대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짓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무덤 속 부장품들이 완벽한 상태로 남아있었습니다. 특히나 최상급의 고려청자가 안장돼있는 고려시대 무덤들은 오죽했겠습니까. 일제의 고굴범들은 바로 그걸 노렸습니다. 백주대낮에 총검을 들이대고 100여기의 무덤을 파헤쳤다니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파헤쳐 얻은 고려자가를 이토가 ‘싹쓸이 쇼핑’했다는 것입니다. 

 

 

   이 청자는 어디서 만든 겁니까?”(고종)
 “이것은 이 나라 고려시대의 것입니다.”(이토 히로부미)
 “아 그래요?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는 없는 겁니다.”(고종)
 “….”(이토)
 대화 내용이 어째 이상하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청자는 어디서 만든 거냐”고 묻는 이가 고종이요,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말하는 이는 이토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던가.   
 고종 임금은 한 술 더 뜬다.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는 없는 것”이라고…. 이토는 고종의 말에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대꾸도 못했다.
 왜냐? 그 도자기가 도굴품이라는 것을 이실직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왕에게 선물했던 거북모양 주전자. 1966년 반환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고려자기’를 몰랐던 고종황제
 정말 딱한 노릇이다. 어떻게 조선의 임금이라는 분이 고려청자를 모를 수 있다니? 아니 ‘우리나라엔 없는 것’이라고 딱 잘라 말하다니…. 물론 이해가 간다.
 아마도 고종은 고려시대 무덤 속에 안장돼있던 고려자기를 꿈에서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무덤을 파서 꺼낸 도굴품(고려청자)이었으니까….
 물론 우리가 오랑캐 나라로 폄훼했던 청나라군도 정묘호란·병자호란 때 천인공고할 도굴을 자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청나라 군은 금붙이만 가져가고 고려자기는 남겨두었다고 한다.
 “특히 조선민족은 사욕(死褥·죽은 뒤 모욕을 당하는 행위)을 기혐(忌嫌·꺼리고 싫어함)하는 뿌리깊은 사상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니 어지간히 하급의 무식자가 아니면 이런 일(도굴)을 감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고분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었다.”
 일제시대 평양박물관장을 지낸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의 반성 섞인 회고담이다.
 “고분 도굴의 참상은 병합(1910년) 전후부터 내지인(일본)들이 조선의 촌(村)까지 파고들었다.~일확천금을 꿈꾸고 한국에 온 일본인들이~묘 속에서 금닭이 운다든가 하는 전설의 고분을 요사이 유행인 금광이라도 파낸 것 같은 생각으로 파돌아다는 것 같다.~”(<조선> ‘205호’·1932년)
 고이즈미는 한일합병을 전후로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들어 앞다퉈 마치 금광을 탐색하듯 조선의 분묘를 마구 파헤쳤음을 알리고 있다. “무덤 안에서 금닭이 운다”는 등의 전설을 퍼뜨리며….

고려시대 왕비릉으로 짐작되는 강화도 능내리 고려석실분. 1910년을 전후로 싹쓸이 도굴의 피해를 입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총칼로 협박하며 도굴’
 그랬다. 일본인들은 고려자기를 비롯해 수많은 부장품을 시신과 매장한 고려시대 무덤을 일확천금의 보고로 보았다.
 일본인들이 도굴업을 위해 대거 몰려온 것은 청일전쟁이 일어난 1894년 전후였다. 또한 이 일본인들의 성향은 대부분 일본에서도 하층민인 불량도항자들이었다. 일본에서도 발붙일 곳이 없던 무뢰한들이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일본제국의회지>가 “조선체류 일본인들은 반드시 모험자였고 극빈자였다”고 표현했을까. 이들이 바로 조상을 끔찍하게 여기는 조선의 무덤을 파괴하고 유물을 마구 꺼내 팔았다.
 예컨대 경북 칠곡군 복성동에서는 일본인 석공과 토공, 그리고 불량배까지 합세, 100여 기의 고분을 도굴한 일도 있었다. 더 심한 경우도 있었다.
 “청일 및 러일전쟁 이후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대대적인 도굴이 감행됐다. 점차 대범하여 무리를 지어 도굴하거나 무력으로 지역사람들을 위협하여 접근을 막은 후 도굴했다. 백주에 총검을 들이대고 그 후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 눈 앞에서 선조의 영역을 유린하고 강탈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황수영의 <일제기 문화재수난사>에서) 



   ■이토의 ‘고려자기’ 싹쓸이 쇼핑
 특히 수난을 당한 것은 고려자기였다.
 원래 고려자기 불법도굴의 원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었다. 1906년 통감부 법무원 재판장의 평정관으로 부임한 미야케 조사쿠(三宅長策)의 회고담이다.
 “일찍이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정한역(征韓役·임진왜란) 때에도 고려 고분의 일부가 발굴됐다. 지금 일본에 존재하는 운학청자와 명품 찻잔들이 이 때 들어왔다.”
 그로부터 400여 년 후인 1900년대 초까지도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雄)와 아가와 시게로(阿川重郞) 등 몇몇 애호가들 만이 알음알음 수집했을 뿐이었다. 이 때까지도 고려자기에 관심을 쏟은 이는 경성에서는 거의 없었다. 다만 지금의 충무로에 곤도(近藤)라는 골동품상 한 곳이 있었다. 이외에 경찰 출신인 다카하시(高橋)라는 작자가 점포를 갖지 않고 고려자기를 중개하는 정도였다. 다카하시는 개성부근에서 불법 발굴된 고려자기를 사모아 팔았다.
 고려자기의 도굴을 조장한 장물아비는 뭐니뭐니해도 1906년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였다. 일본의 도자전문가 고야마 후지오(小山富士夫)의 회고담을 보자.
 “이토 히로부미의 취임 이후 (고려자기를) 수집하는 이가 격증해서 1912~13년 사이 수집열이 절정이 이르렀다. ~발굴발견된 고려도자의 총수는 몇십만이라고 헤아리기 곤란할 것이다.”
 이토는 있는 대로 고려자기를 싹쓸이했다. 일왕가와 귀족들 사이에서 고려자기는 최고급 선물로 통했다. 이토가 수집한 완품의 고려자기는 1000점이 넘었다고 한다.   

도굴범을 처벌한 판결문. 요시다라는 도굴범은 1909년 7월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백주대낮에 개성 청효면 고려고분을 도굴한 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이토가 당시 일왕에게 상납한 최고급 도자 103점은 도쿄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토의 하수인은 니타(新田)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늘 이토의 술자리에 수행해서 노래와 춤을 추면서 좌흥을 돋구던, 지금으로 치면 ‘술상무’였다. 이토는 니타에게 “고려자기를 보이는대로 다 사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니타는 개성과 강화, 장단 등에서 불법 발굴된 고려자기들을 좌(左)에서 우(右)로 50~100점씩을 손가락으로 지정, 한꺼번에 구입한 뒤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어떤 경우엔 곤도 가게의 고려자기를 싹쓸이 쇼핑하기도 했다. 이토가 귀국했을 때 자신의 회계원에게 “이만큼의 고려자기를 사는데 얼마나 들었는가”를 물었다. 회계원이 10만원이 조금 넘는다고 하자 이토는 그 회계원을 칭찬했다.
 “그만한 돈으로 이 정도의 고려자기를 모았단 말인가.”
 이토는 귀국 때 정거장에 마중나온 사람들에게 입이 깨진 고려자기나 파손된 주발(鉢) 등을 뿌리듯 선물했단다. 어떻든 조선의 국권침탈의 원흉인 이토는 이구열 선생의 표현대로 불법도굴품의 최대 장물아비였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1906년 통감부임 이후 고려자기 싹쓸이 쇼핑의 원흉이 됐다. 이토 때문에 고려자기가 품귀현상을 빚었다. 이토는 그야말로 국권침탈의 원흉이자 고려자기 장물아비라 할 수 있다

  ■‘고려청자 광풍시대’
 어떻든 그 정도였으니 경성에서는 한 때 고려자기가 품귀현상을 빚기도 했다. 기막힌 일이다. 이 시대를 미야케는 ‘고려청자광시대(高麗靑磁狂時代)’, 즉 ‘고려청자의 광풍시대’라 했다. 그럴만도 했다. 굴옥(掘屋), 즉 호리꾼이라고 하는 직업도굴단이 생길 정도였으니까…. 어떻든 이 때 불법발굴과 장물거래로 먹고 사는 자가 수천명이었다니 고려자기 도굴 및 거래업은 당대 조선의 각광받는 산업이었다.
 1904년 요시쿠라 본노(吉倉凡農)라는 인물은 조선 땅에서 성공할 수 있는 유망업종 가운데 하나를 ‘골동품상’으로 곱았다. 
 “저 고려자기의 우수품은 서양각국에서는 적어도 수백원의 가치가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최상품이 10원 정도였다. 너무도 바보같았다. 그런데 더 싸게 사고 싶으면 고분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탐험해서 그곳을 매입하여 지하에 묻혀있는 것을 찾으면 된다. 고분이 있는 토지라 해서 그 값은 비싼것도 아니다.”(<요시쿠라의 (기업안내)실리의 조선)>에서)
 그러니까 고려고분으로 의심되는 곳 부근의 토지를 통째로 사서 무자비한 도굴을 감행한 것이다. 개성이나 강화, 장단, 해주의 고려고분은 쑥대밭이 됐다. 어떤 경우엔 무덤 한 곳이 2~3번이나 도굴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엔 막 파내 흙이 잔뜩 묻어있는 채로 신문지에 싸여 매매되기도 했으니까.    

 

 ■도굴의 하수인이 된 까닭
 그럼 조상을 끔찍하게 여기는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의 만행을 그냥 보고만 있었을까. 그렇다면 참 답답한 노릇 아닌가. 아니었다. 일제의 학술조사마저도 조선인들의 분노를 샀다.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고적조사위원회의 회의록을 보자. 조선인들이 도굴이 아니라 정식학술조사까지 반감을 나타냈다는 내용을 담았다.
 “조선에서 고분은 조상의 영역으로 신성시하여 그 부장품 같은 것에는 손도 대기 두려워했으므로 이것을 파괴하는 것은 대죄(大罪)로 생각해왔다. 그러므로 총독부의 학술조사에 때때로 지방민의 반감을 초래한 일이 있었다.”
 그랬으니 도굴은 오죽했으랴. 고고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회고다,(1916년)
 “수년 전 강화도에서는 어떤 일본인이 고려고분을 도굴해서 유물의 일부를 꺼내 가려다 폭도들에게 습격받고 도망쳤다고도 하고 무사히 도굴품을 갖고 갔다는 설도 있다.”
 훗날 식민사학의 뿌리를 심은 이마니시였지만 이 대목에서는 혀를 끌끌 찼다.
 “자고로 조선인은 그 조상의 무덤에 손을 대는 법이 없었는데 악질 일본인이 남의 나라 조상의 무덤을 그토록 비정하게 도굴했다.”
 역사고고학자인 우메하라 스에하루(梅原末治)는 “이같은 도굴은 총독정치의 오점이 되었다”고 개탄했다.
 하지만 몇몇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이 주도한 불법도굴에 고용됐다. 여기엔 슬픈 사연이 담겨있다. 미야케의 분석이다. 
 “당시 조선인은 이조 말기의 가정(苛政·혹독한 정치)에 시달려 피폐의 극에 달하고 있었다. 게다가 문무양반들 가운데 직업을 잃어버리는 자가 점차 늘었다. 조선전체에 궁민(窮民)이 가득찼고….”
 미야케는 “따라서 얼마간의 돈이 되는 고분발굴(도굴)은 조선인에게 하나의 직업이 됐다.”고 해석한다.
 그야말로 먹고 살 일이 없던 조선인들이 도굴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창덕궁 이왕가박물관은 1909년 도굴품인 이 ‘포도동자무늬 표주박모양 주자’를 95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최고급 선물로 각광받은 고려자기
 사실 개항 이후 조선을 찾은 일본인들의 으뜸 선호품은 고려인삼이었다. 그런 일본인들이 인삼을 사려고 개성을 드나들다가 도굴품인 고려자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   
 고려자기 중에는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성 부근과, 몽골의 침략으로 임시수도가 됐던 강화도, 그리고 귀족들이 살았던 해주와 장단의 것들이 유명했다. 조선인들은 조상의 무덤을 훼손하는 것을 천륜을 범한 범죄로 여겼다. 따라서 앞서 밝혔듯이 사람에 의한 무덤의 훼손은 없었다. 그 덕분일까.
 후에 이왕직 차관을 지낸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은 “고려시대처럼 도자기를 다량으로 매장 보존할 나라는 절무(絶無)할 것”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고려청자 대부분은 개성부근에서 압도적으로 출토된 것이 많다. 그 총수는 몇십만인지 모르지만 굉장히 많은 수인 것 같다. 일본에 있는 고려자기의 총수는 아마도 몇 만점은 될 것이다. 특히 이 가운데 특히 우수한 자기, 즉 최상품 몇 점은 조선에도 없는 것이 아국(我國), 즉 일본에 건너와 있다.”
 이는 도자기 전문가 고야마 후지오(小山富士夫)의 말이다. 조선에서 근무하다가 귀국하는 일본인들은 고려인삼과 함께 고려자기를 선물로 가져갔다. 이토 히로부미처럼 ‘싹쓸이 쇼핑’을 하지는 못했겠지만….
 “당시 조선에는 전연 이렇다 할만한 토산물이 없었다. 인형이나 주머니, 완구 등이 있었는데 이런 것들은 오사카 등에서 조선용으로 만든 것이 많았다. 따라서 고려청자를 내지(일본)로 가지고 돌아가면 소중하게 여긴다고 하여 고려인삼과 함께 식자들 사이에서 선물용품으로 각광받았다.”(미야케) 
 일본으로 반출된 고려자기는 서양으로도 팔려나갔다. 예컨대 오사카의 야마나카(山中)상회 같은 곳은 고려자기를 대량으로 사들여 유럽과 미국 등에 팔아넘겼다.
 고려자기가 얼마나 유럽의 도자전문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는 지는 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고려의 도자기는 세계적인 일품(逸品·명품)으로 동서에서 독보적이다. 일찍이 후쿠다라는 사람이 유럽여행 중 독일의 한 귀족 저택을 방문했다. ‘도자기광’인 귀족은 빼어난 감식안까지 갖고 있었다. 이때 후쿠다가 ‘어느 나라 도자기가 최고냐’고 물었다. 독일 귀족은 일언지하에 ‘고려자기’라 대답했다.” 

청자음각연당초문정병. 일본의 중요문화재가 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박물관 소장 고려자기의 99%가 도굴품
 어쨌든 ‘고려도자기 최대의 장물아비’인 이토 히로부미는 이완용(당시 총리대신)과 짜고 창덕궁에 이왕가 박물관을 세우는 한편, 창경궁에 동물원을 조성했다. 고종황제를 위로한답시고….
 그런데 이왕가 박물관이 소장했던 고려자기(6,562점) 출토지의 99%가 개성부근이라 기록돼있다. 이 모두 도굴품이라는 얘기다. 그러니까 이왕가박물관의 설립은 도굴품에 합법이라는 옷을 입혀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일본인 도굴범과 골동품상은 우리 땅에서 도굴한 도자기, 즉 장물을 박물관에 거액을 받고 팔아넘겼으니까. 당시 5~20원에 불과하던 고려자기의 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예컨대 박물관이 구입한 ‘청자진사동자문표형병’은 무려 950원을 지불했다. 그 거액의 돈은 모두 조선왕실이 냈다. 일본인 도굴품을 조선왕실의 돈, 즉 조선백성의 고혈로 구입한 것이다.    
 1909년 가을 일본 도쿄에서는 대대적인 고려자기 경매전시가 열렸다. 조선 땅에서 도굴한 장물을 떡하니 공식적으로 거래하는 장이 선 것이다. 이듬해 2월 도쿄에서 발행된 전시회 도록을 보자.
 “고려자기는 조선에서는 단 1점도 지상에서는 볼 수 없고 모두 고분에서 굴출(掘出·도굴)된 것들이다.”
 그러면서 고려자기를 출품한 자들의 이름을 쭉 실어놨는데, 후작·자작·남작 등 작위를 받은 자들이 대부분이다. 참으로 한심하기 이를데 없다.        
 사학자 이홍직 선생은 일본의 민간인 소장 고려자기만 약 2만점에 이른다고 기록했다. 지금 국내 모든 박물관과 민간 소장의 고려자기를 모두 합친다 해도 2만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그저 참담할 따름이다. 일찍이 미술사학자 황수영 선생은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를 쓰면서 긴 한숨을 몰아쉰다.
 “이같이 강탈된 수만점의 고려도자는 지금 일본에 있다고 일본인 자신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안중근 의사가 거듭말하고 있다. ‘기울어지는 나라의 비운이 지하백골에 이르렀다’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