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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비인류 취급받은 역사속 성소수자

50회를 맞은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는 ‘비인류로 취급받은 역사속 성소수자’입니다. 요즘도 성소수자는 엄청난 편견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근엔 바티칸 고위 성직자까지 커밍아웃했지만 아주 불편한 시선을 받고 있습니다. 진보적이며, 소수의 인권에 남다른 애정을 표시한 프란치스코 교황도 동성애는 비정상이라 말씀하시죠. 그런데 성소수자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전부터 성정체성이 다른 이들이 있었고, 이들은 엄청난 차별을 받고 살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다른 취향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신라 혜공왕부터 조선조 세종 임금의 며느리까지. 이번 주 팟캐스트에서 다룰 주제입니다.(경향신문 이기환 논설위원)  

 

“왕은 원래 여자였는데 남자가 되었다. 첫 돌 때부터 왕위에 오르는 날까지 늘 여자놀이를 하고 자랐다.”(<삼국유사>)
신라 혜공왕(재위 765~780년)의 이야기다.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하는 첫번째 성소수자가 바로 혜공왕이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는 ‘원래 여성인 혜공왕이 남자의 몸을 빌려 태어난’ 사연을 전한다.
혜공왕의 아버지인 경덕왕의 음경은 여덟치나 됐다. 하지만 아들이 없었다. 근심하던 왕은 표훈(충담) 대덕에게 “복이 없어 아들이 없으니 천제에게 청하여 아들을 얻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명했다. 왕명에 따라 상제(上帝)를 만나고 내려온 표훈은 혜공왕을 만나 고개를 내저었다. 

 

춘화를 함께 보고 있는 양반가 여인들을 그린 그림. 사방지는 여인차림으로 과부 이씨와 10년 이상 사귀었다.

■혜공왕의 비애
“상제께서는 ‘딸은 구할 수 있지만 아들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경덕왕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간청했다.
“제발 딸을 아들로 바꿔 만들어달라고 한번 더 부탁해보시오.”
표훈은 할 수 없이 천제를 다시 찾아갔다. 그러자 천제는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딸을 아들로 바꿀 수는 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표훈으로부터 그 말을 전해들은 경덕왕은 “나라가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어 대를 이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겠다”며 기뻐했다. 과연 경덕왕은 아들을 낳았다. 그 사람이 바로 혜공왕이다.
혜공왕은 아버지 경덕왕이 죽자 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혜공왕의 여성취향은 더욱 심해졌다.
“왕은 늘 비단주머니를 차고 다녔고, 미소년들로 구성된 도류(道流)를 희롱하며 놀았다. 그 때문에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마침내 피살됐다. 표훈 대사의 말이 맞은 것이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혼란에 빠진 원인을 혜공왕의 ‘동성애 취향 탓’으로 모든 책임을 돌리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과연 그럴까.
<삼국유사>의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면 신라가 혼란에 빠진 진짜 이유를 따로 설명해놓은 대목이 보인다.
“(혜공)왕이 너무 이른 나이에 왕위에 올라 태후(만월부인)이 섭정을 했는데, 정사가 잘 다스려지지 않아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어린 혜공왕 대신 정사를 주무른 태후의 책임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혜공왕이 남성기와 여성기를 둘다 갖고 태어난 양성(兩性)인지,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성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킨 동성애자(혹은 양성애자)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어떤 경우든 혜공왕의 성적 취향은 ‘후천적’이 아니라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선천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동성애 때문에 나라를 망쳤다?
고려시대 목종(재위 997~1009년)과 공민왕도 결국 동성애 때문에 정사를 망쳤다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목종의 동성애 대상은 유행간(庾行簡)과 유충정(劉忠正)이었다. <고려사> ‘열전·패행1’은 “유행간의 용모가 미려하여 목종의 사랑을 받은 동성애의 대상이었다.(行簡姿美麗穆宗嬖愛有龍陽之寵)”고 기록했다. 목종은 신하들에게 지시할 사항이 있으면, 먼저 유행간에게 물어본 뒤 명령했다. 유행간은 왕의 총애를 믿고 오만했으며, 문무백관들을 경멸하고 턱과 낯빛으로 명령을 내렸다. 그랬으니 왕의 측근들은 유행간을 왕처럼 모셨다. 발해 출신인 유충정도 ‘별다른 기능 없이도’ 역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유행간과 유충정, 두 사람은 궁중을 출입할 때 마치 국왕처럼 의장을 차리고 다녔다.
결국 목종과 유행간, 그리고 유충정 모두 ‘강조의 난’(1009년) 때 피살됐다.
공민왕도 마찬가지 길을 걸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노국공주가 죽고, 신돈을 통한 개혁정치가 물거품이 되자 남색(男色), 즉 동성애에 빠진다. 김흥경이라는 총신과 사랑에 빠졌으며, 김흥경을 통해 자제위라는 기관을 두어 미남자들을 선발했다. 1374년 9월1일, 공민왕은 결국 자신이 선발한 자제위 홍륜 일파에게 피살되고 만다. 역사는 이것을 동성애가 낳은 비극이라 폄훼했다.  

 

사방지를 ‘비인류’로 표현한 <세조실록>. 세조는 사방지를 병자로 취급했다가 상소가 빗발치자 결국 격리조치를 내렸다.

■세자빈은 스토커
조선의 유명한 동성애 사건은 세종 시대에 터졌다.
사건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의 며느리, 즉 세자(훗날 문종)의 부인이었던 봉씨였다. 세종대왕은 성군 답지 않게 며느리의 추행을 미주알고주알 밝히고 있다.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희대의 성군이 왜 며느리를 쫓아내야만 했는지 구구절절 역사 앞에서 변명했으니 말이다. 세종이 <세종실록>에서 직접 전한 세자빈 봉씨의 동성애 행각은 너무 ‘디테일’하다.
1436년 10월26일이었다. 세종은 사정전에 나서 주위를 물리친 뒤 중도승지 신인손과 동부승지 권채에게 “가까이 오라”고 명한다. 그는 며느리 봉씨와 관계를 맺고 있던 여종 소쌍에게 직접 들은 진술내용을 설명하며 한탄한다. 
“어쩌면 좋단 말이냐. 글쎄 세자빈(봉씨)이 궁궐의 여종 소쌍을 사랑하여 잠자리를 함께 한다는구나. 소쌍이라는 아이가 동침을 거부하면 세자빈이 마구 윽박지른다는구나. 그래 마지못해 옷을 반 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세자빈이 나머지 반을 강제로 벗기고 눕게 한 뒤 남자와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한다는구나.”
그 뿐이 아니었다. 봉씨는 소쌍이 다른 여종인 단지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미행을 붙여 감시하고, 서로 만나지 말라고 협박했단다. 소쌍이 자신을 만나주지 않으려 하면 대놓고 원망의 말을 쏟아냈단다.
“나는 너를 좋아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전형적인 ‘조선판 스토커’, 아니 ‘조선판 미저리’의 행각이 아닌가. 소쌍은 지나친 세자빈의 사랑에 질려 주변 사람들에게 넋두리했단다.
“빈께서 날 사랑하는데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무서워 죽겠습니다.”
세종은 결국 봉씨를 세자빈의 자리에서 쫓아냈다. 동성애가 적발된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말술을 즐긴 알코올 중독자
하지만 모든 잘못이 봉씨의 동성애에서만 비롯된 것일까. 물론 봉씨의 책임이 컸다. 우선 전형적인 조선의 여인이 아니었다. 성격이 과격했다.
봉씨가 처음에 세자빈에 책봉되자 시아버지인 세종은 <열녀전>을 가르치게 했다. 하지만 봉씨는 며칠만에 “이따위 책을 배워서 뭘하느냐”며 집어던졌다. 또한 말술을 즐겼고, 주사 또한 대단했다.
세종의 넋두리 속에는 세자빈 봉씨의 술버릇이 생생하게 표현된다.
“세자빈은 항상 방 속에 술을 준비해두고는 큰 그릇으로 연거푸 술을 마셔댔다는구나. 취하는 것을 좋아해서 어떤 때는 시중드는 여종으로 하여금 뜰 안에서 업고 다니도록 했고…. 술이 모자라면 사가에서 가져와 마시고…. 이 어찌 세자빈이 할 노릇이냐는 말이다.”
전형적인 알코올 증세가 아닌가. 그러나 봉씨에게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세자인 남편, 즉 문종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봉씨를 위한 변명
사실 봉씨는 두번째 세자빈이었다. 세자(문종)은 일찍이 김씨라는 여인를 세자빈으로 삼았다. 하지만 김씨는 남자를 미혹시키는 압승술(壓勝術)을 썼다는 단서가 발각됨으로써 폐출됐다.
압승술은 남자의 사랑을 받는 술법을 뜻한다. 말하자면 ‘사랑의 묘약’이라고 할까. 김씨가 썼던 술법 가운데는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의 신발을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든 뒤 술에 타 남자에게 먹이는 방법’이 있었다. 또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 허리에 차는 방법’도 있었다. 이럴 경우 남편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해괴한 방술이 적발됨으로써 ‘부덕을 행했다’는 죄목으로 폐출된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봉씨가 두번째로 세자빈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 역시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승휘(承徽·세자의 첩) 권씨가 세자의 아들을 낳자 봉씨의 좌절감은 극에 달했다. 봉씨는 가만 있지 않았다. “임신을 했다”며 거짓으로 고해 한 달 간에나 남편을 중궁전에 붙잡아 두기도 했다. 
봉씨는 또 남편을 사랑하는 내용의 노래를 지어 여종들로 하여금 부르게 했고, 빈궁을 지키던 늙은 여종에게 ‘세자를 불러오라’고 채근했다. 하지만 남편은 봉씨의 마음을 너무도 몰라줬다.
아버지 세종의 꾸지람이 있어야 겨우 세자빈의 처소를 찾았다. 그것도 며칠 왕래하다가 발길을 끊기 일쑤였다. 어떤 날은 세자가 봉씨의 처소 근처에 어슬렁거리다가 돌아가기도 했다. 그 때마다 세자빈의 애간장이 녹았다. 세자빈은 지게문을 바라보면서 애를 태웠단다.
“저 분은 왜 안방에는 들어오지 않고 공연히 밖에서만 맴돌고 있는 것인가.”
세종도 그런 무심한 아들을 어지간히 닦달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세종의 넋두리가 하늘을 찌른다.
“저렇게 금슬이 좋지 않으니…. 침실의 일까지야 비록 부모라 할 지라도 어찌 자식에게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면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려 했던 김씨나 봉씨의 분투가 가여울 뿐이다. 예컨대 <실록>은 봉씨가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 ‘거짓임신’을 칭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달리 생각할 소지는 없을까. 혹시 반드시 남편의 아이를 갖겠다는 집착이 낳은 상상임신은 아니었을까. 또 첫번째 세자빈이었던 김씨는 오죽했으면 사랑의 술법까지 써서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 했을까.
그렇다면 봉씨의 동성애 소동 역시 남편의 사랑을 얻을 수 없었던 좌절감의 다른 표현은 아니었을까.

 

 사람에게 달린 도리는?
“하늘에 달려있는 도리는 음(陰)과 양(陽)이고, 사람에게 달려있는 도리는 남자와 여자입니다.(在人之道曰男與女) 이 사람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니(此人非男非女) 마땅히 죽여야….”(서거정)
“이 사람은 인류가 아니다.(此人非人類) 함께 살 수 없으니 외방의 노비로 영원히 삼는 것이 옳다.”(세조)
1467년(세조 13년), 온 조정을 들끓게 한 추문을 매듭짓는다. 추문은 남성기와 여성기를 동시에 지니고 태어난 ‘사방지’ 사건을 일컫는다.
사방지는 결국 ‘남자도 여자도 아닌 비인류’라는 딱지가 붙어 강제 격리되는 처벌을 받는다. 그런데 원래 세조 임금은 ‘양성(兩性)’을 모두 갖고 태어난 사방지를 ‘병자’라 칭하고, “병자(病者)에게 무슨 처벌을 내리느냐”고 변호해왔다. 하지만 신료들은 여성차림으로 뭇 여성들과 사통을 일삼아온 사방지를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급기야 세조 임금은 신료들의 등쌀에 결국 손을 들고 사방지를 처벌한 것이다.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은 ‘사방지’ 사건의 내막을 <세조실록> 등을 통해 더듬어보자.  

중국 당나라 시대의 궁녀들. 맨 오른쪽 여인은 남장을 했다. 궁중에서 외롭게 살아야 했던 궁녀들 가운데 동성애자가 많았다고 한다.

■‘커플룩’까지 입은 사이
사방지(舍方知)는 세종의 사위인 안맹담(1415~1462)의 노비였다. 태어날 때부터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모두 지니고 태어난 성소수자였던 것 같다. 그의 어미는 사방지에게 여자 아이의 옷을 입히고 연지와 분을 발라주며 바느질을 가르쳤다. 늘 여장을 하고 다니던 사방지는 빼어난 바느질 솜씨로 벼슬한 선비들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 와중에 남편(김귀석)과 사별하고 독수공방하던 과부 이씨와 인연을 맺는다.
이씨의 집안이 대단했다. 이씨의 아버지는 세종을 보필하면서 과학기술 정책을 다졌던 천문학자 이순지(1406~1465년)였고, 아들은 하동부원군 정인지의 사위였다. 엄청난 가문의 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분의 차이가 무슨 문제가 되는가. 과부 이씨와 사방지는 죽고 못사는 사이가 된다.    
“둘은 사랑하게 됐다. 늘 좌우에 함께 있으면서 음식도, 그릇도 같이 쓰고 앉고 눕는 것도 함께 했다. 심지어는 의복도 같은 빛깔로 하니 사치스럽고 화려하기에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과부 이씨와 ‘양성’의 사방지는 의상까지 ‘커플룩’으로 맞춰 입을 정도로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씨는 노비인 사방지를 집주인처럼 끔찍하게 대했다. 그러기를 10년 가까이 흘렀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졌지만, 둘의 관계는 더욱 대담해졌다. 급기야 1462년 4월, 지금의 감사원 격인 사헌부가 직접 수사에 나서 사방지를 체포한 뒤 몸을 살펴본다.
사헌부 장령 신종수는 4월27일 그 결과를 세조 임금에게 고한다.
“여경방(신문로)에 살고 있는 고(故) 김귀석의 아내(이씨)의 가인(家人)인 사방지의 행색이 괴이해서 사헌부가 체포해서 검색을 했사온데….”
“그랬더니?”
“겉모양은 여자가 분명한데 음경과 음낭은 곧 남자였습니다. 무슨 까닭에 남자가 여자옷을 입었는지 철저하게 조사해봐야….”
그러자 세조는 자신의 사위이자 정인지의 아들인 정현조와 도승지를 보내 사방지의 몸을 다시 한 번 확인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임금의 지시에 따라 사방지의 몸을 살펴본 정현조는 깜짝 놀랐다.

 

■“사방지는 병자다”
“머리와 옷은 여자인데 음경·음낭은 남성이며, 단지 정도(精道)가 경두(莖頭) 아래 있어 다른 사람과 조금 달랐습니다.”
정현조와 함께 사방지의 몸을 살펴본 승지는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사방지는 ‘이의(二儀)’의 사람인데 남성의 형상이 더욱 많습니다.”
‘이의’라는 말은 ‘남성기와 여성기를 둘 다 갖춘 사람’을 뜻한다. 그러니까 ‘양성(兩性)’의 소유자였다는 말이다. 문제는 사방지가 이씨 부인 말고도 여러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었다.
사방지는 내시의 아내와 여러 차례 정을 통했고, 심지어는 여승(女僧) 중비와 지원, 소녀 등과도 사통해서 파계시키기도 했다. 여승 중비가 임신을 걱정하자 사방지는 과거의 이력을 자랑하며 큰소리쳤다.
“내가 내시 김연의 처를 간통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야. 그래도 임신은 시키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
<실록>은 사방지를 둘러싼 갖가지 망측스런 기사를 싣고 있다.
“사방지가 평소 정을 통했던 여승은 ‘사방지의 양도(陽道·생식기)가 매우 장대하다’고 증언했다. 이에 여자아이 반덕에게 만져보게 했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세조 임금의 명을 받고 사방지의 성기를 확인한 정현조 역시 ‘어쩌면 그리 장대하냐’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임금(세조)이 웃으시면서 특명을 내렸다. ‘특별히 추국해서 중벌에 처하지 마라. 이순지의 가문을 더럽힐까 걱정된다.’”(<명종실록>) 

 

신라시대 토우.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다. 신라 혜공왕은 원래 여자였는데 남자로 태어났다고 한다.

■“격리조치 시켜라.”
그랬다. 세조 임금은 사헌부를 비롯한 각 신료들의 빗발치는 아우성에도 ‘사방지를 너무 책하지 마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되레 사방지 사건을 문제삼아 내사를 벌인 사헌부 관리를 파직시켜 버렸다.
“간통 현장을 적발한 것도 아닌데 재상집(이순지) 일을 경솔하게 의논·내사하여 임금에게 올린 것은 불가한 일이다. 사헌부 관리를 파직토록 하라.”(<세조실록>)  
세조 임금은 명백한 증거없이 ‘대부(大夫)의 가문’을 욕되게 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명백한 현장을 잡지 못하면 간통죄는 성립될 수 없었던 것이다.
신료들은 집요했다. “해괴한 짓을 저지른 사방지와 이씨는 물론, 이씨의 아버지인 이순지까지도 처벌하라”고 끈질기게 요구했다. 세조는 단호했다. “(양성기를 가진) 사방지는 병자(病者)이므로 추국하지 마라”고 엄명을 내린 것이다. 세조는 결국 사방지의 처리를 과부 이씨의 아버지인 이순지에게 맡겼다. 이순지는 곤장 10여 대를 친 뒤 기내(畿內·수도권) 지역에 살고 있는 머슴의 집에 보냈다. 솜방망이 처벌이었다.
과부가 된 딸의 외로움을 달래준 사방지를 배려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사방지를 잊을 수 없었던 과부 이씨는 그의 행방을 수소문해서 찾아낸 뒤 몰래 불러 올렸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 이순지가 죽자(1465년) 두 사람의 사이에는 걸림돌이 없어졌다. 둘의 관계는 수습할 수 없을 어려운 지경으로 치닫는다. 조정의 공론이 다시 일자 세조 임금은 더는 관용을 베풀지 못하고 유배형에 처한 것이다.
 
■3대에 걸친 징벌
사방지와 과부 이씨의 사랑이 남긴 상처도 매우 컸다. 어머니의 추문은 아들은 물론 손자의 전정에까지 두고두고 걸림돌이 됐던 것이다.
예컨대 1473년, 성종이 이씨의 아들인 김유악을 경상도 도사(都事)에 임명하자 사헌부가 ‘사방지 추문’을 거론하며 반대했다. ‘도사’는 관찰사(도지사)를 보좌하며 각 도의 행정은 물론 감찰업무까지 담당했던 중요한 직책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행정부지사 정도? 사헌부는 그런 중차대한 자리에 가문을 더럽힌 여자의 아들을 앉힐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헌부 지평 김윤종은 “그런 허물이 있는 자가 경상도 업무를 맡는다면 누가 복종하겠냐”고 반문했다. 성종은 결국 ‘임명취소’ 결정을 내린다. 말하자면 김유악은 어머니의 추문 때문에 인사검증이라는 혹독한 과정에서 결국 낙마하고 만 것이다.          
이 뿐이 아니었다. 1500년, 연산군은 부마(駙馬·임금의 사위)를 선택할 때 특별히 “김유악의 아들(이씨의 손자)은 입궐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실록(<연산군일기>)의 기자는 “사방지가 김유악의 어미집에 출입하며 추문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3대에 걸친 혹독한 징벌이었던 것이다.

 

■여전히 낯선 사람들
<실록>을 잘 읽어보면 사방지가 여성과 남성을 모두 지닌 ‘양성’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처벌을 받은 것은 아니다.
세조 임금은 ‘양성’인 사방지를 ‘병자’로 취급하면서 “더는 추국하지 말라”고 엄명까지 내렸으니까. 사방지가 처벌을 받은 것은 ‘양성’ 때문이 아니라 여장 차림으로 뭇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로 사방지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러니까 인류가 아니다’는 오명을 쓰고 격리조치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명종실록>을 보면 사방지와 비슷한 ‘양성’의 소유자가 1548년(명종 3년)에도 출현했다.
“길주(함경남도) 사람인 임성구지는 양의(兩儀·남성기와 여성기)를 모두 갖춰 지아비에게 시집도 가고 아내에게 장가도 들었으니 매우 해괴합니다.”
이 함경감사의 장계를 보면 임성구지라는 인물은 양성을 다 갖춘 양성애자였음을 알 수 있다. 명종은 이 함경감사의 장계를 두고 고민한 끝에 “‘사방지의 예’를 따라 사람들과 격리시키라”는 지시를 내린다.
“부인도, 남편도 둔 이 천지간에 요사하고 음예(淫穢)한 요물을 죽이라”는 사간원의 상소가 빗발쳤다. 그러나 명종은 한마디로 정리했다.
“괴이한 물건이긴 하지만 인간의 목숨은 지극히 중요하다. 그저 외진 곳에 두어 인류와 섞이지 않게 하라. 굳이 중전(重典·엄한 법률)을 쓸 것까지는 없다.”
세조나 명종의 언급은 지금 이 순간도 통하는 한마디가 아닌가 싶다. 성소수자를 ‘병자’ 혹은 ‘격리시켜야 할 비인류’로 취급하려는…. 이들은 여전히 ‘낯선 사람들’의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