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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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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에도 '풍납토성'이 있었다.(하) “속이 확 트이네.” 햇살이 따가웠던 2008년 9월. 청주 신봉동 유적을 떠난 고고학자 조유전 선생과 기자는 차용걸 교수(충북대)와 함께 북쪽 평야지대를 달렸다. 한 3㎞쯤 시원한 바람을 맞고 달렸을까. 눈길을 왼쪽으로 돌리는 순간 차 교수가 외친다. “저기가 바로 정북동 토성입니다.” 이런 곳에 토성이라니. 금강 최대의 지류인 미호천과 무심천이 합류하는 이른바 까치내의 상류 너른 평야지대에 조금은 생뚱맞은 자세, 즉 사각형 형태로 조성된 평지토성이다. 강(미호천)과 접해 있고, 조성된 해자(垓子)와 입지조건…. 신봉동 유적에서 확인된 갑옷 조각. 세모꼴과 긴 네모꼴 철판을 대가리가 둥근 못으로 짜 맞춘 것이다. -청주에 있는 풍납토성 성을 둘러보던 기자는 왠지 소름이 돋았다. “이거 풍납토성, 육계토..
도굴로 짓밟힌 ‘철강강국 백제’(상) “허허, 술 덕분이네.”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과 차용걸 교수(충북대)가 껄껄 웃는다. 두 사람은 1982년의 일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 해, 그러니까 1982년 3월21일 일요일 아침. 차용걸 교수의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속도 영 메스꺼웠다. 전날 마신 술이 덜 깼기 때문이었다. 대학(충남대 사학과) 동창생인 심정보(한밭대 교수)·성하규(대전여상 교사) 등과 청주지역 답사에 나서기로 한 날. “원래는 청주 상당산성(백제시대 때 초축한 것으로 알려진 산성)에 오르기로 약속했었죠. 그런데 속이 울렁거려서 살 수가 있어야지. 도저히 산에 오르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상당산성 답사를 포기하고 (청주) 신봉동·봉명동·운천동의 낮은 야산을 산책 겸해서 둘러보기로 했어요.”(차용걸 교수..
재야사학자 안정복, "저울대로 역사를 쓰라" “는 내용이 소략해서 수많은 오류를 지니고 있다. 는 내용이 번잡하지만 요점이 적다. 은 의례가 크게 벗어났고….” 순암 안정복(1712~1791)이 평생이 역작인 을 쓴 이유를 조목조목 밝혔다. “그런데 이런 오류와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 것은 여러 역사서가 비슷하다. ~대저 역사가가 반드시 다뤄야 할 것은 계통을 밝히고(明統系), 찬역을 엄하게 하며(嚴簒逆), 시비를 바르게 하고(正是非), 충절을 포양하며(褒忠節) 전장(국가의 통치제도)을 자세히 하는 것(詳典章)이다.”( ‘자서(自序)’) 순암 안정복의 . 순암은 와 를 보완하려고 주희의 의 필법에 따라 을 저술했다. ■‘평생 재야사학자’ 돌이켜보면 ‘순암’이라는 이는 지금의 기준이라면 평생 ‘재야 사학자’의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무려 35살..
천세, 구천세, 만세…김정은의 만세12창 얼마전 북한의 제7차 노동당 대회 때 김정은 위원장에게 ‘만세’가 연호됐다고 합니다. 연설이 끝나자 12번이나 만세를 불렀다네요. 그만 하라는 손짓을 해도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세 삼창’이 아니라 ‘만세 12창’이라 할까요. 그래서 제가 이 만세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는 분은 알겠지만 군주라고 해서 다 ‘만세’라 할 수 없었다는군요. 황제에게만 ‘만세’라 할 수 있었다네요. 제후국의 임금에게는 ‘천세’라 했답니다. 내심 황제국을 자처한 고려의 경우 강화도 천도시절엔 ‘만세’라 했답니다. 물론 조선시대 들어서는 ‘천세’라 했다고 하고…. 그런데 중국에서는 천세도, 만세도 아닌 ‘구천세’의 칭호를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누구일까요. 그는 왜 천세도, 만세도 아닌 구천세의 구호를 들았을까요...
정조 임금이 '안(평대군)빠'가 된 사연 최근 도난 당한 ‘기이편’을 갖고 있던 문화재 사범이 적발됐습니다. 이 사람은 1999년 도난된 ‘기이편’을 어떤 경로인지 모르지만 입수해서 보관했다가 공소시효가 끝난 줄 알고 올해 1월 경매시장에 내놨다가 잡혔습니다. 범인을 잡고, 문화재까지 찾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난문화재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2001년 도난된 지 15년이 지났지만 행방이 묘연한 문화재인데, 바로 안평대군이 직접 쓴 입니다. 1987년 국보 238호로 지정된 문화재인데요. 크기가 A4용지보다 작은 크기인데 안평대군의 낙관과 도장이 찍힌 진적이어서 국보 대우를 받았습니다. 아직 오리무중인 이 안평대군의 글씨를 언제 다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번 주는 의 출현을 갈망하면서 안평대..
구마모토성에 서린 조선의 한 최근 규수지방을 강타한 지진으로 40여명이 사망하는 가하면 구마모토성(熊本城) 일부도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특히나 규슈 지방과, 특히 이 구마모토 지역, 그것도 이 구마모토성이 우리 역사와 친연관계가 있기 때문에 더더욱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규수지방은 옛날 백제인들이 이주 혹은 망명해서 터전을 잡고 살았던 곳입니다. 지금도 직역하면 ‘백제(くだら) 없다(なぃ)’는 ‘구다라 나이(くだら なぃ)’는 ‘쓸모없다’ ‘재미없다’ ‘시시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 말입니다. ‘백제없다’는 말이 ‘시시하다, 쓸모없다, 재미없다’는 뜻이면 ‘백제있다’는 말은 얼마나 근사하고 멋지고 재미있다는 뜻이었을까요. 일본열도에 도착한 백제인들이 얼마나 근사했는지 짐작할 수도 있겠습니다. 비단 백제인들 ..
설탕 한스푼에 담긴 흑인의 역사 6~7세기 인도 동부 벵골인들은 찐 사탕수수에서 채취한 당즙을 조려내어 결정체를 만들었다. 이 정제 설탕은 삽시간에 세계각지로 퍼졌다. 조선의 실학자 이규경(1788~1856)까지 ‘점입가경의 맛’이라며 감탄사를 연발할 정도였다. 설탕은 만병통치약으로도 여겨졌다. 13세기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단식 중에 설탕을 먹는 것이 율법이냐 아니냐는 논쟁이 벌어지자 “설탕은 식품이 아니라 소화촉진용 약품”이라고 깔끔하게 정리했다. 차와 커피, 담배 같은 유럽 대륙에 유입된 다른 식품들은 건강상 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설탕만큼은 아퀴나스의 ‘보증’ 덕분에 아무 걸림돌없이 세계상품으로 발돋움했다. 설탕은 값비싸고 맛좋은 건강식품으로서 왕후장상의 신분과시용 상품이 됐다. 11세기 이집트 술탄은 7만㎏의 설탕으로 거..
인공지능과 바둑을 둬서는 절대 안되는 이유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뜨거웠던 5번기가 끝난 지금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대체 인간은 왜 바둑을 두는 것일까. 정답은 바둑의 역사에 오롯이 담겨있다. 우선 바둑을 두고, 바둑을 보는 첫번째 이유는 ‘들고 있던 도끼자루(柯)가 썩어도(爛) 모를 정도로’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둑을 다른 말로 난가(爛柯)라 하는 것이다. 더 근원적인 해답이 있다. 4300년 전 요 임금이 바둑을 만든 이유는 딱 한가지였다. ‘부덕하고 싸움만 좋아하는 맏아들 단주(丹朱)를 가르치기 위해서’( 등)였다. 하지만 불초한 단주는 끝내 바둑의 진리를 깨우치지 못했다. 요임금은 결국 단주 대신 덕으로 가득찬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요임금은 ‘한사람(단주)만을 위한 천하가 되서는 안된다. 만백성을 위한 군주(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