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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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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족오, 조선의 넋이 된 까닭은 조선 전기의 문신 가운데 이곤(1462~1524년)이라는 인물이 있다. 중종은 반정에 참여한 이곤을 연성군에 봉했다. 그의 무덤은 경기 성남시 판교에 자리잡고 있다. 묘비는 그의 사후 35년 뒤인 1559년 손자인 이숙이 조성했다. 그런데 묘비를 보면 아주 재미있는 문양을 발견할 수 있다. 비석의 머리(비두)에 새겨진 ‘삼족오(三足烏)’의 문양이다. 비두는 구름 문양과 수평선의 파도문양에 바다가 보이는 일출광경을 그렸다. 해의 안에는 바로 그 삼족오가 요즘 말로 아주 ‘깔쌈’하게 새겨져 있다. 조선의 사대부 연성군 이곤의 묘비와 비두에 새겨진 삼족오. 구름문양과 수평선의 파도문양에 장엄한 일출광경을 새겼다. /손환일 박사 제공 ■태양 10개가 한꺼번에 뜨다 대체 무슨 일인가. ‘고구려의 기상과 정신을 표..
'왕수석' 다산의 근무지 무단이탈기 1797년 단옷날을 앞둔 초여름 날이었다. 36살의 다산 정약용이 훌쩍 도성을 빠져나갔다. 당시 승정원 좌부승지로 일했던 다산으로서는 명백한 근무지 이탈이었다. 다산은 에 그 전말을 전했다. “석류가 처음 꽃을 피우고, 보슬비가 깔끔하게 개자 불현듯 초천(苕川)에서 고기잡이 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천진암기’) 초천은 다산의 생가(경기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앞을 흐르는 실개천이다. 다산은 어릴 적 형제들과 뛰놀던 고향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일탈을 감행한 다산은 고향에서 형제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회포를 푼 사형제는 다음 날 강을 가로질러 투망으로 고기를 잡기 시작했다. ■사형제의 ‘추억여행’ “크고 작은 물고기가 모두 50여 마리였다. 작은 배가 감당을 못했다. (잡은 물고기가 ..
임금도 뿌리칠 수 없었던 '쐬주 한 잔'의 유혹 “예로부터 술 때문에 몸을 망치는 자가 많습니다. 신이 벼슬에 오를 때는 소주를 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집집마다 있습니다. 게다가 소주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이가 흔합니다. 금주령을 내려야 합니다.” 세종 15년(1433)이었다. 이조판서 허조가 소주의 페해를 조목조목 논한다. 하지만 세종은 난색을 표한다. “엄금 한다고 무슨 소용이겠느냐. 막지 못할 것이다.(雖堅禁 不可之也)” 이조판서가 “추상같은 금주령을 내리면 근절시킬 수 있다”고 재차 고했다. 그러자 세종이 마지못해 한마디 덧붙인다. “그러냐. 술을 금하기는 정말 어렵다. 하나 정 그리해야 한다면 주고(酒誥·술을 경계하는 글)를 지어 신하들에게 내려주지.” 역시 성군이시다. ‘쐬주 한 잔의 유혹’을 어느 누가 막는다는 말이냐. 600년 가까이 지난 ..
작은 공(탁구공)이 큰 공(지구)를 뒤흔들었다. “깨어라(起來)! 노예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여!(不願做奴隸的人們)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만리장성을 건설하자(把我們的血肉 築成我們新的長城)~” ‘의용군행진곡’이다. 필자가 탁구담당 기자를 했을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중국 국가이다. 국제대회 결승전이 열리는 마지막 날이면 중국의 오성홍기가 뻔질나게 오르내린다. 그에 맞춰 의용군행진곡이 쉴사이없이 연주된다. 중국탁구가 7개 전종목(남녀단체, 남녀단식, 남녀복식, 혼합복식)을 싹쓸이하면 7번이나 반복되는 세리머니이다. 지금도 나도 모르게 경쾌하고도 장중한 전주와 함께 씩씩한 목소리로 부르는 행진곡을 흥얼거릴 때가 많다. 하기야 중국의 등록선수가 최소 5000만에 이른다니 놀랄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선수만 해도 남한인구(5000만)에 육박한다니 말..
삼국시대 ‘요지경’ 부부열전 “훨훨 나는 꾀꼬리/암수 서로 정답구나/외로운 이 내 몸은/누구랑 돌아갈까.(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고구려본기·유리왕조’) 이 ‘황조가’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 사연을 상기해보자. 기원전 17년, 고구려 유리왕은 두 여인을 처로 삼았다. 한 사람은 고구려 여인인 화희였고, 다른 여인은 한나라 출신 치희였다. 임금의 사랑을 받으려는 두 여인의 투기는 지독했다. 언젠가 유리왕이 일주일간 사냥하러 궁을 비웠다. 그때 사단이 일어났다. 두 여인이 심하게 다툰 것이다. 고구려 여인 화희가 해서는 안될 말을 했다. “한나라 출신의 천첩인 니가 그렇게 무례할 수 있느냐?” 모욕감을 느낀 치희는 그 길로 친정(한나라)으로 돌아갔다. 뒤늦게 급보를 들은 유리왕이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갔다. 그..
국보 보물 사적 '1호', 그 불편한 진실은? 국보 1호·보물 1호가 숭례문·흥인지문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사적 1호가 포석정이라는 것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하지만 국보·보물·사적 1호 속에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지금부터 그 ‘불편한 진실’을 하나하나 들추어보자. ■보물 1호 남대문, 2호 동대문, 고적 1호 포석정 이 땅의 문화재에 가치를 부여하고 보존한 것은 일제 때의 일이다. 1933년 12월5일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만들어 공포한다. “역사의 증징(證徵) 혹은 미술의 모범이 되고 학술연구에 도움이 될만한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을 영구보전한다는 뜻”이었다.(동아일보 1933년 12월6일) 그런 다음 문화재 지정을 자문할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를 만든다..
'골초' 정조대왕은 '조선을 흡연의 나라로'를 꿈꿨다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남령초(담배)만한 것이 없다. ~이 풀이 아니면 답답한 속을 풀지 못하고 꽉 막힌 심정을 뚫어주지 못한다. ~담배를 백성들에게 베풀어줌으로써 그 혜택을 함께 하고자 한다. 그 효과를 확산시켜 천지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한다.” 아주 조금 인용한 글인데. 해괴한 논리로 가득차 있다. ‘담배 예찬론’을 설파하는 것도 모자라 온 백성들을 흡연가로 만들겠다니 말이다. 놀라지 마라.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정조대왕의 어명이시다. 그것도 사석에서 한 말이 아니다. ■“조선을 담배의 나라로” 1796년 11월 18일이었다. 정조는 정치의 대책을 물어 답하게 하는 과거시험, 즉 책문(策文)의 시제로 남령초(南靈草), 즉 ‘담배’를 내걸었다. 수험생들에게 담배의 유용성을 논하..
중국을 농락한 흉노, 신라 김씨의 조상? “당신도 홀로 됐고, 나도 혼자이고…. 뭐 둘 다 즐거운 일도 없고…. 어떠신가요. 있는 걸로 없는 것을 바꿔보심이….”(陛下獨立 孤분獨居 兩主不樂 無以自娛 願以所有 易其所無)” 한나라의 ‘사실상’ 황제인 여태후(?~기원전 180)가 한 통의 외교서한을 받는다. 흉노의 묵돌 선우(鮮于·왕)가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서신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당신도 과부, 나도 홀아비이니 함께 만나 즐겨보자”는 것이었다. ■“함께 즐겨보자”는 흉노왕의 연애편지 도저히 외교서한이라 볼 수 없는 사적인 연애편지였다. 아니 지금으로 치면 성적 모욕감을 한껏 준 스토커의 쪽지에 불과했다. 사실 여태후가 누구인가. 한나라를 세운 유방(고조)의 부인이다, 남편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여걸이었다. 기원전 195년 남편이 죽자,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