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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금수저 아닌 책을 물고 태어난 아이-조선의 왕자

이번 주 팟 캐스트 주제는 ‘금수저 아닌 책 들고 태어난 아이-조선의 왕자들’입니다. 흔히들 임금의 자리를 지존이라 합니다. 지극히 존귀하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지존’의 자리만 누렸던 것은 아닙니다. 임금이 될 자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공부, 또 공부 해야 했습니다. 무슨 공부였느냐. 바로 백성을 사랑하고, 또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공부였습니다. 그러니 늘 몸가짐을 갖추고 늘 책을 펴서 도덕이 숨쉬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조선이 꿈꿨던 태평성대, 즉 ‘요순의 시대’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요순 시대’를 지향하는 마음가짐 몸가짐으로 공부하고,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원자가 태어나 세자 책봉을 받으면 성균관에 가서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인들에게 술잔을 올리고,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학생이 된 세자의 앞에는 책상도 놓여지지 않았습니다. 엎드려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제아무리 임금이라도 배울 때는 늘 겸손해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주 팟 캐스트를 들으면서 이 시대 교육의 가치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궁중에서 아기가 태어난 뒤 생략해서는 안될 의식이 하나 있었다.
길일을 잡아 탯줄을 씻어(세태·洗胎) 태항아리에 넣은 뒤 태실(胎室)에 정중하게 봉안하는 일이었다. 이것을 안태(安胎)의식이라 했다. 이렇게 태를 매장하는 풍습은 중국에도 없는 조선 왕실의 독특한 의식이었다. <선조수정실록>의 사관은 “태를 매장한 것은 신라·고려 사이의 일이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없었다.”고 기록했다.(1570년 2월1일) 이 또한 태어난 아기씨의 장래와 관계된 의식이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태로 인해 장성합니다. 아기가 나중에 현명할 지 어리석을 지, 잘될 지 못될 지는 모두 태에 달려있습니다. 그렇기에 태를 신중히 다뤄야 합니다.…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예뻐지고 단정하게 되며…병이 없고 높은 관직으로 승진하는 것입니다.”(<세종실록> 1436년 8월8일·<문종실록> 1450년 9월8일)
즉 우리 조상들은 사람의 어질고 어리석음과 성하고 쇠함이 모두 태와 관련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태는 결국 사람의 인성을 결정하는 생명선이었던 것이다. 
왕실 자녀들의 태를 안장하는 태실은 명당만을 골라서 세웠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었다. 그랬다가 일제강점기인 1930년 4월15~17일 사이에 전국에 흩어져있던 태실 49기가 경기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지금 서삼릉에는 54기의 태실이 안장돼 있다.

정조(1752∼1800)가 세손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 "서릿바람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 알고자 합니다. 뵌 지 오래되어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편지 보니 든든하고 반갑습니다.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 하니 기쁘옵니다"고 썼다

 

■원자는 유모를 닮는다
원자(元子)는 세자로 책봉되기 전의 맏아들을 일컬는 말이다.
왕조시대에는 이 원자(세자)를 나라의 근본, 즉 국본(國本)이라 칭했다. 훗날 유교의 덕목에 충실한 성군이 되어 나라의 안위와 백성의 안녕을 책임질 ‘어린이’이기 때문이었다.
덕성과 예지를 두루 갖춘 임금으로 키우려면 각별한 조기교육이 필요했다. 예를들어 1404년(태종 4년) 5월 9일 사간원에서 11살이 된 원자(양녕대군)을 보양(교육)시키는 법을 임금에게 올렸다.
“원자는 나라의 근본입니다. 원자가 성인이 되고 안되고는 평소 교양이 착한지 착하지 못한 지에 달려있습니다. <주역>은 ‘어린이를 바르게 기르는 것이 성인되는 공부’라 했고, <예기>는 ‘오랫동안 바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바르게 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태종실록>) 
왕실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원자 아기씨(阿只)에게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가는 등 보양을 직접적으로 맡은 이는 유모였다.
때문에 원자의 인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유모를 뽑는 것이 큰 일이었다. 태교 때와 같은 이유로 갓난 아이의 성품과 기질이 유모를 닮는 경우가 많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유모는 정신이 맑고 건강하며 성정이 온화하고, 살은 찌며 질병이 없어야 한다. 특히 희로애락의 감정을 조절하여 삼갈줄 알아야 한다.”(<태산요록>)    

 

■유모는 성생활도 삼가야 한다

<동의보감>은 더욱 구체적으로 유모가 가져야 할 태도를 규정한다.
“유모는 짠 음식을 먹어서도 안된다. 감기에 걸렸거나 더위를 먹었을 때 젖을 주면 안된다. 자칫하면 엉키는 젖이 나온다. 유모는 술도 자주 마셔서는 안된다.”
특히 유모가 성생활을 할 때는 절대 젖을 먹여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성욕이 동하면 젖에 바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갓난 아이가 나쁜 젖을 먹으면 곧바로 병이 생겨 토하거나 설사하고 열이 나며 입 안이 헤지기도 하고 경련이 일어나기도 하고, 밤에 울거나 복통을 일으키기도 한다.”
무엇보다 유모를 고르는 일은 ‘아기의 스승을 뽑는 것’이라 여겼다.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를 보라.
“유능한 자를 고르되 너그럽고 인자하며 따뜻하고 공손하며 예의를 차리고 말을 삼가는 여인을 ‘자식의 스승’으로 삼는다. 유능한 자란 결국 자식을 가르칠 스승을 일컫는다.”
태교 때의 엄마처럼 갓난아기 때의 유모는 아이의 인격형성을 위한 휼륭한 스승이었던 것이다. 왜 그런가. 갓난 아기라 비록 알아듣지는 못해도 반복해서 격언이나 지론을 들려주면 결국은 귀에 익고 속이 차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나쁜 말로 현혹해도 꿈쩍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학이 강조하는 조기교육이다. ‘어렸을 때 형성된 천성처럼(少成若天性) 습관이 오래되면 바로 천성이 되는 것(習與性成)’이다.

 

왕세자 입학도, 효명세자가 창경궁을 나와 성균관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그렸다. 앞에 가는 말은 세자의 인장을 싣고 간다.

유모를 혼낸 성종 임금
여담이지만 갓난아기 때부터 맺은 원자와 유모 사이는 피를 나눈 모자 이상이었다. 원자가 훗날 임금이 되면 자신을 키워준 유모를 봉보부인(외명부 종 1품)으로 봉했다. 종1품은 판서(장관)보다 높고 영의정(정 1품)보다는 한단계 낮은 그야말로 엄청난 품계였다. 부작용도 있었다.
어린 시절 성종 임금의 유모는 천민 출신인 백씨였다. 그런데 왕위계승권자가 아니었던 성종이 13살의 어린 나이에 등극하자 문제가 생겼다. 졸지에 출세한 봉보부인 백씨가 임금에게 감히 인사청탁을 한 것이다. 어린 임금이었지만 성종은 성군의 자질을 보였다. 백씨를 매섭게 꾸짖었다.
“네가 무슨 뇌물을 받고 이런 청탁을 하느냐. 관직(官職)은 공기(公器)다. 내가 나이가 어리다고 그러는거냐. 내가 은밀한 청을 듣고 사람들에게 관작을 내린다면 정사가 어찌 되겠는가. 다시 한번 청탁하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성종실록> 1470년 7월24일)
백씨는 어린 임금의 질타에 몹시 부끄러워 하며 물러났다. <성종실록>을 쓴 사관은 대목에서 “아! (저 어린) 성상의 교지가 만세에 빛날 법도가 되었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연산군도 유모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다
그런데 문제의 백씨는 임금의 유모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엄청난 위세를 떨쳤던 것 같다. 그녀의 집 앞에는 노비는 물론 논밭을 뇌물로 바치려는 자와 양민의 신분인데도 차라리 백씨의 노비가 되겠다는 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역시 천민이었던 남편(강선)은 부인 덕분에 당상관이 되기도 했다. 탄핵 상소문이 올라오기도 했다. 성종 역시 백씨 부인을 멀리했다. 하지만 백씨 부인이 죽자 성종은 몹시 슬퍼하면서 ‘종 1품의 예로 장례를 치르라’고 명했다.(<성종실록> 1490년 12월15일)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도 자신을 키워준 유모 최씨만큼은 끔찍하게 여겼다. 최씨 역시 탄핵 대상이 될만큼 못된 세력을 떨쳤지만 최씨의 친척을 60여명이나 양민으로 격상시켰다. 승정원 승지(청와대 수석)들이 “선대왕(성종) 때도 2명에 불과했으니 과하다”고 고했지만 연산군은 “유모가 아니었으면 어찌 내가 임금에 됐겠냐”고 일축했다. 훗날 최씨가 죽자 연산군은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성종 때의 봉보부인 백씨 수준으로 장례를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연산군 일기> 1496년 3월16일·1497년 2월30일)
연산군마저 인간적인 따스함을 잃어버리지 않을만큼 유모의 존재는 임금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스승이자 부모였던 것이다.

태조의 태실. 태어날 때의 탯줄을 잘 보관하는 것이 아기의 장래를 결정짓는다고 믿은 것은 우리만의 전통이었다.

■선한자와 착한 자의 차이
“선한 이와 어울리는 것은(與善人居) 영지와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如入芝蘭之室). 오랫동안 같이 있으면(久而不聞其香) 그 향에 동화되듯이(卽興之化矣) 선한 사람으로 변하고 불선자와 어울리면(與不善人居) 어물전에 들어가는 것 같아서 그 악취에 동화되어 불선자로 바뀐다.(如入鮑魚之肆)”(<공자가어>)
공자 말씀이다. 교육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측근을 가려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한나라 가의가 황제(문제)에게 했다는 말도 즐겨 인용됐다.
“태자는 나서부터 바른 일을 보고 바른 말을 듣고 바른 도를 행해야 합니다. 좌우 전후가 모두 바른 사람이라면 바르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제나라에서 성장하면 제나라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태종실록> )
<예기>도 “오랫동안 바른 사람과 있으면 바르게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조기 교육의 필요성은 대대로 강조된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왕실의 조기교육은 어땠을까.

 

효명세자 입학도첩에 등장하는 작헌도.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들에게 술잔을 올리는 의식이었다. 세자를 따라온 시위대는 의식이 펼쳐지는 대성전에 들어오지 못했다. 가운데 노란 그림의 다섯 자리가 세자가 공자, 증자, 맹자, 자사, 안자 등에게 술잔을 올리는 곳이다. 

■우리 아들은 천재야! 천재!
유모와 함께 어린 원자 아기씨의 보양을 맡은 부서는 이름 그대로 보양청이었다.
보양관은 의정부 3정승이 겸임하거나 고위관료 3명이 겸직으로 임명됐다. 서책담당과 숙직담당, 글씨담당, 심부름 담당 10여 명의 실무 보양관은 세자가 되기 전에 갖춰야 할 덕목을 쌓도록 가르쳤다. 어려서부터 바른 말과 바른 일을 보고 자라야 왕위에 오른 뒤 덕을 베푸는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워낙 영특했던 조선조 정조는 어릴 때부터 붓과 먹을 가지고 놀고, 책 읽는 시늉을 했으며 효자와 공자의 일생을 그린 그림을 보며 흉내내기를 좋아했다. 특히 보양관의 교육이 시작됐을 때는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몸을 단정히 했고, 독서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걱정을 듣기도 했다.
“백일도 되기 전에 글자를 워낙 좋아해서 종이가 다 해지도록 첩책(帖冊)을 갖고 놀았다…세 살 때 보양관 앞에서 글을 읽고 글뜻도 이해했다.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는 독서를 시작했다. 내(혜경궁 홍씨)가 걱정이 되어 ‘그러지 마라’고 하면 등잔 그림자를 가리고서 세수하고 빗질을 하곤 하였다.”(<정조실록> ‘혜경궁 홍씨’)
정조에 버금가는 이가 중종의 원자(인종)였다. 지금으로 치면 만 2살도 안되는 3살에 <천자문>과 <유합(類合·한문학습서)>을 절반이나 외웠다고 한다. 중종은 “한번 들으면 곧 외우니 이 어찌 보통 아이겠느냐”고 칭찬하면서 어린 원자의 유모에게 큰 상을 내렸다. 중종은 어린 인종을 세상에서 들도 없는 천재라 여겼다는 것이다.

효명세자 입학도첩 가운데 왕복도 장면. 유교성현들을 향한 작헌의식을 치른 세자는 성균관 명륜당에 가서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노란 줄이 세자의 동선이며, 노란 네모가 세자의 자리이다. 가운데 붉은 공복을 입은 이가 스승이다. 세자는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말을 세번 거듭한 뒤에 스승의 허락을 받고 나서야

명륜당에 입장해서 서쪽 자리에 선다. 세자는 동쪽에 선 스승에게 절을 한다. 동쪽은 지위가 높은 사람의 자리다. 세자가 동쪽을 버리고 서쪽에 서서 예를 갖췄다는 것은 스승에 대한 깍듯한 예의를 차렸음을 의미한다.

■중종의 훈계
그런데 중종은 아들의 천재성을 보고 감탄만 하지 않았다. 잠계(箴戒), 즉 훈계의 말을 덧붙였다.
“학문을 게을리 하지 말되, 스승을 존대하고 도를 즐기며, 선(善)을 좋아하고 인(仁)에 힘쓰라. 재물을 늘리지 말라.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 하지 말고 재물을 불리지마라. 예(禮)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마라. 소인과 가깝게 지내지 말고, 난잡한 놀이도 좋아하지 말라. 뜻 세우기를 고상하고 원대하게 하되 금석(金石)처럼 굳게 하라.”(<중종실록> 1517년 4월 13일)  
아이가 천재소리를 들으면 온통 영어에 수학에 주입식 교육에만 온 신경을 쓰는 작금의 부모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라 할 수 있다.

수폐도.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해 허락을 받은 세자는 술과 안주, 페백 광주리를 바친다. 역시 세자의 자리는 지위가 낮은 서쪽이다.    

수염난 스승 싫다했지만
3살까지 보양청이 맡은 원자의 교육은 4~6살부터 강학청이 담당했다.
강학청(講學廳)은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기 전까지의 교육을 담당했다. 세자 또는 세손으로 책봉되면 정식으로 시강원(侍講院)이 구성되어 본격적인 세자교육에 나섰다.
보양청~강학청의 과정 중에서도 가장 먼저 행하는 의식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원자(세자)와 사부(스승)의 상견례 의식이었다.
아무리 원자의 지위라고는 하지만 코흘리개가 늙수그레한 재상급 사부를 맞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예를들어 1665년(현종 6년) 8월 18일 현종 임금이 송준길 등과 원자(숙종)의 강학철 설치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 때 송준길이 “상견례가 끝난 뒤 명망있는 신료들이 강학관이 되어 번갈아 가며 원자를 가르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현종 임금 왈(曰),
“아니네. 원자가 항상 궁중에 있어서 그런지 수염난 사람들을 보기 싫어해. 일단 몇몇 사람들만 담당하게. 친해진 다음에 많이 차출하도록 하게.”(<현종개수실록>)

 

■조청 두 숟갈
원자의 공부는 <천자문>과 <유합>으로 한 글자 씩 배우고 배운 글씨를 복습한 뒤에 새로운 글자를 더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생활예절이었다. 스승 앞에서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 부모님께 문안 드리는 것 등 삼강오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림을 보여주었다. 늘 붓과 종이를 곁에 두고 글자를 익히게 했다. 조심성과 집중력, 표현력을 키우도록 한 것이다.
학습에 들어가기 전에는 원자에게 조청 두 숟갈을 먹였다고 한다. 요즘도 시쳇말로 ‘당 떨어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흡수가 빠른 당분을 섭취시켜서 수업 전에 머리를 맑게 하려는 것이었으리라. 무정과(조청에 절인 무)와 각종 콩관련 주전부리(콩시루떡, 콩송편, 콩가루 다식) 등을 먹였고, 꿀에 잰 인삼정과와 인삼차 등도 단골 메뉴였다.
학습 후에는 옷칠을 한 목욕통에 따뜻한 소금물을 받아놓고 목욕을 시켜 피로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페백 의식을 끝낸 뒤 본격적인 첫 수업이 펼쳐졌다. 흑단령으로 가라읍은 스승이 역시 높은 지위를 뜻하는 동쪽에 앉아있고, 세자는 왼쪽 노란 그림 안에 엎드려서 가르침을 받고 있다. 세자의 그림은 역시 그리지 않았다. 세자에게는 책상도 없었다. 학생의 자세로 배우라는 의미였다. 세자 뒤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들은 시강관들이다. 성균관 유생들이 명륜당 앞에 서있고 역시 세자의 시종들은 명륜당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스승에게 호피를 하사한 까닭
원자가 책 한 권을 떼면 왕과 왕비를 모시고 일종의 발표회를 열었다. 이것을 배강(背講)이라 한다.
원자가 책을 다 외고 묻는 말에도 대답을 잘 하면 임금은 그 노고를 격려하고 스승들에게 다과상을 베풀어 주었다. 예를 들어 1757년(영조 33년) 10월 19일 영조 임금은 수시로 원손(정조)을 불러 스승(남유용)에게 배운 내용을 점검해보았다.
“(남유용을 가리치며) 저 사람이 누구냐?”(영조)
“남유용입니다.”(원손 장조)
스승의 존칭을 생략하고 ‘남유용’이라고 답한 것을 두고 영조 임금이 매우 흐뭇해했다.
“임금 앞이라 이름 자를 그대로 불렀나 보구나.”
함박웃음으로 원손의 영특함을 감탄하던 영조는 <동몽선습>의 내용을 되물었다. 원손은 한마디도 틀리지 않고 줄줄 외웠다. 영조가 “외우는 소리가 쇳소리 처럼 쨍쨍하다”고 즐거워하면서 스승 남유용에게 농을 던졌다.
“경(남유용)이 시험을 보면서 혹시 하생(낙제점)을 준 적이 있었는가.”
“아닙니다. 원손이 늘 잘 외워서 낙제점을 주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까지 흘리며 감격스러워 한 영조는 스승 남유용에게 호피를 내렸다. 그러면서 호피를 하사한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경에게 상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나라의 종사를 위한 것이다.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은 스승이 되라는 뜻이다.”
즉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듯이 위엄을 갖추고 원손을 엄하게 가르치라는 임금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누구를 위해? 나라의 사직을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효명세자 입학도첩 중 수하도 장면이다. 모든 의식이 끝난 뒤 동궁으로 돌아온 세자는 입학식을 잘 마쳤다는 축하인사를 받는다. 이때는 학생의 자리에서 세자의 지위를 회복했다. 세자의 자리가 동쪽을 회복했다. 문무백관들이 축하의 자리에 왔다. 대성전과 명륜당에서는 얼씬도 못했던 세자의 시위들이 동궁 뜰안에 늘어섰다.

■소학이 중요했던 이유
원자의 교재는 유교의 기본정신을 담은 책들이었다.
유교정신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이 국시였으므로 어진 군주, 즉 인(仁)과 덕(德)을 갖춘 지도자를 만들기 위한 책들이었다. 유아기 교육은 대단히 중요했다. ‘어렸을 때 교육시켜야 세태에 물들지 않고 인간 본연의 심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자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때문에 지식의 전달 보다는 인성교육, 즉 효와 예절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원자의 교재로는 <천자문>, <유합>, <소학>, <격몽요결>, <동몽선습>, <대학>, <사략> 등이었다.  
이 가운데 주자와 그의 제자 유자징이 만든 아동용 윤리 학습서인 <소학>은 원자 뿐 아니라 조선의 모든 아동들이 배워야 할 필독서였다. <소학>은 유교윤리의 핵심을 논하고 한나라~송나라 성현의 언행을 담은 책이다.
“소학에서는 물 뿌려 청소하는 일, 남의 말에 응대하는 일, 몸가짐의 절도, 부모와 윗어른을 공경하고 스승을 존중하며 벗과 친하는 도리를 가르쳤다. 이것은 스스로를 닦고 집안과 나라를 다스려서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일의 근본이다.”(<소학> ‘서제’)
특히 훗날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릴 책무가 있는 원자-세자에게 <소학>은 제왕학의 핵심 필수 교재였다. 그러기에 15살까지는 <소학>을 배워 왕으로서 갖출 덕목과 품성을 바르게 하는데 힘썼다. 물론 그 이후에는 사서(논어·대학·중용·맹자)를 배웠다. 과거시험 때문에 사서를 배우는 일반 자제들과는 다른, 이를테면 인성교육 위주의 커리큐럼이 왕가에서 채택됐다는 뜻이다.
예컨대 영조 임금은 “일찍이 나도 <소학>을 100번쯤 읽었기 때문에 지금도 줄줄 외울 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유교의 기본 덕목 중에서도 기본인 효(孝)가 중시되었기에 공자가 증자에게 전한 효도의 내용을 편찬한 <효경>도 필수과목이었다. 이밖에 최세진의 한자 자습서인 <훈몽자회>와 박세무의 <동몽선습>, 율곡 이이의 아동서 <격몽요결> 등도 15살까지 배워야 할 이른바 <소학교육>이었다

 

■요임금 될 때까지 공부하라
원자(혹은 원손)이 왕세자로 공식 책봉되면 본격적으로 제왕학의 수련이 시작됐다. 먼저 왕세자로 책봉되면 길일을 잡아 성균관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배움을 청하는 의식을 치렀다. 왕세자와 왕세손의 교육은 시강원과 강서원에서 별도의 교육이 펼쳐지지만 굳이 성균관에서 입학식을 거행한 까닭이 있었다. 만고의 스승인 공자에게 술잔을 올리고 박사에게 가르침을 받는 의식을 통해 왕세자 역시 학생출신임을 천하에 알리려는 의미였다.
성군의 되기 위한 공부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계속됐다. 여말선초의 대학자 권근은 1402년(태종 2년) 서슬퍼런 태종 임금에게 “요 임금의 덕을 이룰 때까지 학문을 기치면 안된다”고 못박았다. 성인 정치의 끝을 의미하는 ‘요임금이 될 때까지’라는 것은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공부하라는 뜻이었다.
임금이 매진해야 할 공부가 경연(經筵)이라면, 왕세자가 거르지 않아야 할 공부가 바로 서연(書筵)이었다. 세자의 공부, 즉 서연을 담당할 관청은 세조 때에 설치된 세자시강원이었다. 세조는 집현전을 혁파하고 집현전이 맡았던 세자 교육을 전담할 관청(세자 시강원)을 만들었다.
세자의 사부는 명목상 삼정승이 겸직했지만 실제로 교육에 참여한 스승은 문과 출신의 참상관(정 3~6품)으로 당상관 승진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었다.
교육은 크게 하루에 세번 치르는 법강(法講·아침, 점심, 저녁 강의)과 불시에 받는 소대(召對) 및 야대(夜對), 그리고 한달에 두번씩 배운 내용을 복습하는 회강(會講)이 있다.

사도세자의 태를 묻은 곳을 표시한 사도세자 태봉도

 

■세자 성적 올려 불호령 떨어진 스승
일상적인 강의인 법강은 본문에 나오는 글자의 음과 뜻을 차례로 풀어주고 그 문자의 의미를 해설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왕세자가 의문점과 모르는 사항을 질문하면 시강관이 답을 하고 질의응답이 끝나면 시강관이 그날 학습한 문장을 낭독하고 세자가 따라서 낭독했다. 왕세자가 공부할 때는 책을 덮고 외우는 방식인 ‘배강(背講)의 원칙’을 따라야 했다. 내용의 해석은 책을 보면서 번역해 가는 임강(臨講)이 활용됐다.  
경서 내용을 모두 외워야 하는 배강은 왕세자들을 고달프게 했다. 몸이라도 아프면 죽을 맛이었다. 오죽했으면 임금(숙종)까지 나섰을까.
“1706년(숙종 39년) 임금이 지금 강의하는 <중용>에 한해서만 배강하도록 하고 다른 책들은 모두 임강할 것을 명했다. 왕세자(경종)의 다리 질환 때문이었다.”(<숙종실록>)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관 옆에 사간원·사헌부 관리가 참여했던 것도 지독하다. 시강관이 왕세자 교육을 제대로 하는 것인지 감시하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한달에 2~3회씩 스승과 임금, 여러 신하들 앞에서 학문의 깊이를 시험받는 회강(會講) 역시 왕세자들을 옥죄는 수업이었다.
회강 때 왕세자의 성적을 일부러 높여 조작한 시강관이 추궁을 받기도 했다. 1744년(영조 20년)의 일이다. 왕세자(사도세자)가 배운 경서 내용을 외울 때 빠뜨린 곳이 있었는데도 시강관은 ‘합격점(通)’을 주었다. 그러자 세자가 ‘빠진 곳이 있다’고 실수를 털어놓았다. 그때 시강관은 ‘합격점을 내리는 게 관례’라 했다. 왕세자를 예우해서 합격점을 준 것이다. 이에 영조는 “세자의 지혜가 한창 자라고 있는 판국에 스승이라는 자가 세자의 마음만 맞추려 하느냐”면서 호되게 꾸짖었다.

 

■밥상머리에서 야단맞은 양녕대군
밥상머리 교육도 빼놀을 수 없다.
임금과 왕세자가 함께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세종은 달랐다.
“아버지(태종)와 큰 형(양녕대군)의 사이가 멀어진 것을 직접 봤다. 때문에 나는 날마다 세번씩 세자(문종)와 함께 삼시세끼를 먹는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대군들과 책상 앞에서 강론하고 나 역시 진양대군(세조)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다.”(<세종실록> 1438년 11월23일)
아버지이긴 하지만 하늘같은 존재인 임금과 하루에 세번씩 밥을 먹었다니…. 세자(문종)의 속 마음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더불어 훗날 왕위에 오르는 진양대군에게 공부를 가르쳤다니…. 진양대군이 워낙 학문을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세종 임금이 무슨 훗날의 조짐을 간파하고 제왕학을 가르친 것일까. 
여기서 세종 임금이 말한 선왕과 양녕대군의 불미스런 일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1405년(태종 5년) 10월21일 밥상머리에서 일어난 해프닝일 것이다.
“세자(양녕대군)가 주상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데 예에 맞지 않는 일이 많았다. 주상(태종)이 세자를 꾸짖었다. ‘나도 젊었을 때 놀기만 해서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마음 속이 부끄럽다. 너는 비록 원자이지만 언행에 어째서 절도가 없느냐. 스승(서연관)이 가르치지 않더냐.’ 그 말을 들은 세자가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했다.”(<태종실록>)

 

■실천의 미학을 실천한 정조
이쯤해서 왕세손으로 무려 15년간(1762~1776) 있으면서 왕실교육을 제대로 받았던 정조를 보라.
“임금이 15년간 동궁으로 있으면서 어른의 침실에 문안을 올리거나…경서 공부에 마음을 쏟아 부지런히 했다. 왕위에 올라서는 제대로 밤잠도 이루지 못하고 끼니도 제때 떼우지 못하면서 틈만 나면 좌우에 책을 두고 밤낮으로 사색에 잠겼다.”(<정조실록> ‘행장’)
불철주야 백성을 위해 노심초사하고 공부에 매진했던 정조의 덕목은 무엇보다 평생 배운 바의 실천에 있었다.
“의복은 화사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때가 묻고 솔기가 터진 것도 싫어하지 않았다. 노리개도 아예 붙이지 않았다.”(<정조실록> ‘행장’ )
“여름에 입은 모시적삼이 자주 빨아 실오라기가 엉성해졌다. 신하들이 ‘새 옷을 세탁하고 입으시라’고 주청하자 임금이 말했다. ‘아깝다. 아무렴 임금이 옷이 한벌 없겠는가. 내가 입지 않은 옷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 있지 않겠느냐.’”(<홍재전서> ‘일득록·훈어3’)
“몹시 더운 여름날에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고 넓은 집에서 가벼운 갈옷을 입고서도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을 느끼는데 하물며 저 찌는 가마 속같이 더운 오두막집과 달팽이 같은 작은 집에서 어떻게 이 더위를 보내는지….”(<홍재전서> ‘일득록·훈어 3’)
정조야 말로 왕실이 교육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 즉 실천의 미학을 구현한 군주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백성을 향한 임금의 마음씨였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