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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대통령 수명이 짧다고? 새빨간 거짓말

“잦은 흉년 때문에 노심초사하느라 수염이 하얗게 셌다.”

1699년 숙종 임금이 어의에게 업무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의 병을 얻었다고 토로했다. 정조는 1799년 “백성과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도느라 늙고 지쳐간다”고 괴로워했다.  

 

당선직후인 2009년의 오바마 대통령(왼쪽)과 2015년 오바마 대통령. 주름과 흰머리가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1425년 병세가 위중했던 세종은 만일의 흉사에 대비해 관까지 미리 짜놓고 명나라 사신단을 맞이했다. 죽음을 무릅쓴 외교였던 것이다. ‘만기친람’이라는 말도 임금이 하루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만가지(萬機)라 해서 나온 것이다. 버드 의대 아누팜 제나 교수팀은 “1722~2015년 사이 선거에서 승리한 17개국 지도자(대통령·총리) 279명과 낙선한 261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당선자들의 평균수명이 낙

선자보다 2년7개월이나 짧다는 수치가 나왔다”고 밝혔다. 조기 사망의 위험도도 낙선자에 비해 23%나 높았다. 연구팀의 분석은 조선 임금들의 ‘넋두리’와 다르지 않다. ‘국정을 운영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노심초사한 결과’라는 것이다.
실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당선 당시보다 흰머리와 주름이 뚜렷해졌다. 미국 대통령 재임기간 중에는 일반인보다 최소한 2배 정도 늙는다는 연구도 있다.

낙선자들에게는 위안거리가 될 만하다. 하지만 2011년 제이 올샨스키 일리노이대 교수팀의 연구를 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낙선자들과 견주면 몰라도 일반인보다는 훨씬 오래 산다는 것이다. 즉 자연사로 사망한 미국대통령 34명의 평균수명은 73세였다.

대통령의 업무강도를 고려해서 보정한 ‘가속기대수명’(68.1세)보다도 5년이나 더 살았다. 가령 미국인의 평균수명이 40살도 안됐던 초대~8대 대통령의 평균수명은 79.8세였다.

따지고보면 ‘흰수염 타령’을 했던 조선의 숙종도 60세에 승하했다. 조선 임금의 평균 수명 47세 보다 13년이나 더 산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복한 환경에서 ‘호의호식’한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니 오래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최고의 음식과 최고의 의료서비스가 재임기간 중의 지독한 스트레스를 상쇄시켰을 것이다. 거기에 한가지 덧붙이자면 지존급인 그들이야말로 하고 싶은 말 다하고, 하고 싶은 행동 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이승만(90)·윤보선(93)·최규하(87)·김대중(85)·김영삼(88) 등 자연사한 역대 대통령의 평균나이도 88.6세다. 지도자가 장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래오래 살면서 백성을 위해 노심초사, 기여해달라는 염원이 담긴 것이 아닐까. 백성 위에 군림하는 맛으로 오래 살라는 것이 아니고….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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