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초(寺內草), 화방초(花房草), 금강국수나무, 미선나무, 새양버들….
1922년 식민지 조선에서 자라는 식물을 샅샅이 조사해서 펴낸 일본어 식물서적 <조선식물명휘> 부록에 등장하는 식물 5종의 이름이다. 그런데 뒤의 세 가지 식물은 뭔가 한반도 고유종 같은 느낌이 드는데, 앞의 두 식물 즉 사내초와 화방초는 어쩐지 좀 수상하다.

 

■조선의 꽃으로 거듭난 조선총독 데라우치
‘화방초’는 지금은 ‘금강초롱’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한국 고유종이다.

전 세계에 2종이 있는데 모두 한국에 자생한다. 8~9월 연보랏빛 꽃을 피우는데, 청사초롱 모양으로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피어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렇다면 ‘화방초’ 이름은 또 무엇인가.

이 꽃의 학명인 ‘Hanabusaya asiatica (Nakai) Nakai’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즉 하나부사(Hanabusa)는 ‘화방(花房)’의 일본어 발음이다.

조선의 초대 일본공사였던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1841~1917)에서 따왔다. 1902년 금강산 유점사 인근에서 많이 자생하는 이 꽃은 1902년 식물학자 우치야마 도미지로(內山富次郞)가 발견했다.

이 금강초롱에 감히 ‘하나부사’란 학명을 지은 인물은 일본의 저명한 식물 분류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1882~1952)이었다.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에게 헌상된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석조여래좌상). 데라우치 총독이 경주방문 때 이 석불을 보고 매우 감탄했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경주의 일본인이 이 석불을 서울의 총독부 관저로 옮겼다고 한다. 이 석불은 1939년 총독관저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이전하자 함께 자리를  옮겼다.

“조선의 식물 채집을 위해 전문가들을 파견해준 하나부사의 공을 인정해서 학명을 ‘하나부사야’로 붙인다”고 설명했다. 한번 지은 학명은 영원한 것이기에 ‘하나부사’, 즉 ‘화방초’라는 이름은 쉬 지울 수 없는 오명이 아닐 수 없다.
아픔은 ‘화방초’로 끝나지 않는다. ‘사내초(寺內草)’를 보라.

짐작하는 이가 있겠지만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穀·1852~1919)’의 이름을 딴 꽃이다. 백합과에 속하는 이 꽃은 ‘조선화관(朝鮮花菅)’ 혹은 ‘평양지모(平壤知母)’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학명은 여전히 ‘Terauchia anemarrhenaefolia Nakai’이다. 데라우치와 나카이의 그늘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한다.

왜 나카이는 평양 인근에서 채집된 이 한반도 고유식물에 하필이면 데라우치 총독의 이름을 붙였을까.
나카이는 1913년 발간된 ‘식물학 잡지’에 그 사연을 자랑스레 풀어헤친다.
“이 식물은 1911년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사인 이마이 한지로(今井半次郞)가 채집해서 나카이에게 보낸 것이다. 학계 미발표 종이다. 새로운 학명이 필요할 것 같다. 분류학상 백합과에 속하는데….”
여기까지는 그저 생전 처음 보는 식물을 접한 식물학자의 감상답다. 그런데 그다음 내용을 접하면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조선은 일만(日滿·일본과 만주) 사이에 끼어 있는데 아직 식물상 정밀조사가 없어…안타까웠는데 데라우치 총독 각하 덕분에 (식물조사를 벌였으니) 가장 감복하는 바이며, 이에 본 식물을 각하에게 바쳐 길이 각하의 공을 보존하여 전하고자 희망한다.”
조선의 식물을 조사 연구할 수 있게 배려해준 ‘총독 각하’에게 이 식물을 바칠 것이며, 그래서 식물의 이름까지 ‘사내초’라 했다는 것이다.
대단한 충성다짐이 아닐 수 없다. 충성의 대가는 짭짤했다.

1913년 결혼해서 조선 신혼여행까지 다녀간 나카이는 데라우치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조선의 식물을 연구했다. 당시 데라우치는 나카이에게 “일본인이 식민지를 다스림에 있어 학술적으로도 힘을 쏟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라”고 독려했다고 한다.

식물연구 또한 식민지 지배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다. 이렇듯 ‘사내초’ 즉 ‘데라우치꽃’은 식민지 조선을 다스리던 초대 총독에게 바치는 ‘충성맹세의 꽃’이었던 것이다.

청와대 한쪽 보호각을 쓰고 앉아있는 미남석불

 

■데라우치 백작 각하
데라우치는 1910년 육군대신으로 재직하면서 제3대 한국통감을 겸임했고, 일본군의 무력을 앞세워 대한제국의 멸망을 현장에서 진두지휘한 장본인이었다.
한일병합 직전인 1910년 6월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탈취하고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함으로써 한국인의 저항을 차단했다.
한일병합 당일 만찬에서 데라우치가 읊었다는 시가 기분 나쁘다.
“고바야가와(小旱川隆景), 가토(加藤淸正), 고니시(小西行長)가 세상에 있었다면 오늘 밤의 달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데라우치가 거명한 세 사람은 임진왜란 때 조선반도로 출병한 왜장들이다. 한일병합 이후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는 헌병경찰과 일본 군대를 앞세운 그 악명높은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일제는 데라우치가 한일병합을 추진한 공로를 인정해서 작위(백작·1911년 4월)를 내렸다.
식민지 조선의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으니 자연 충성파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데라우치의 눈독에 걸린 미남석불
‘데라우치꽃’의 명명자인 식물학자 나카이뿐이 아니었다.
지금 청와대 안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석불좌상 역시 ‘데라우치를 위한 불상’이다. 어찌된 영문인가.
1912년 11월8일이었다. 환갑을 맞이한 데라우치가 수행원 30여명과 함께 경주 토함산에 올랐다.

후술하겠지만 석굴암을 몽땅 해체해서 경성으로 옮기려던 계획이 실행가능한 것인지 몸소 확인해보고 싶었다. 데라우치의 경주 방문은 2박3일 일정이었다.

경주 일대의 유적 유물들을 둘러본 뒤 포항으로 빠져나가 영일만에 대기 중이던 광제호(光濟號)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로 건너가는 여정이었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데라우치의 여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총독은 도열한 학생 생도와 이들을 인솔한 교원에게 안부를 물어보고는 군청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중요한 일본인·조선인을 접견하고 훈시한 다음 재판소, 경주지청, 경찰서, 농산물진열장 등을 순시했다.”
그런데 경주의 이곳저곳을 순시하던 데라우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하나 있었다. 아주 잘생긴 석불좌상이었다.
원래 경주군 내동면 도지리의 유덕사라는 절터에 남아 있던 불상이었다.

“유덕사는 신라의 태대각간 최유덕이 살던 집을 기부하여 지은 절이고, 고려시대 때 먼 후손인 최언위가 조상인 최유덕의 초상을 모시고 비석도 세웠다”(<삼국유사> ‘탑상’)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 유덕사에 있던 불상이 언제, 어느 곳으로 옮겨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미 원래의 자리에서 벗어나 경주 시내 모처로 옮겨진 생태였다는 말도 있고, 당시 경주금융조합 이사였던 고다이라 료조(小平亮三)의 집에 있었다는 말도 있다.
어쨌든 데라우치는 이 잘생긴 석불좌상을 몇 번이나 살펴보면서 감탄사를 연발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런 데라우치를 유심히 지켜본 자가 있었으니 바로 경주 금융조합 이사라는 고다이라 료조였다.
‘총독 각하께서 저 불상을 보고 저토록 감탄사를 연발하실 줄이야…. 분명해. 저 불상을 갖고 싶으신 걸 거야.’
지레짐작한 고다이라는 데라우치가 일본으로 떠난 사이 석불좌상을 서울의 총독관저로 옮겨놓았다.

물론 저간의 사정은 모른다.

데라우치가 고다이라에게 넌지시 저 불상을 갖고 싶다”고 귀띔했을 수도 있으니까…. 어떻든간에 아부도 이런 아부가 없다.

고다이라는 데라우치가 일본으로 출장 간 사이 잽싸게 불상을 경성(서울)의 총독관저로 옮겨놓았다. 당시의 총독관저는 남산 왜성대, 즉 지금의 중구 예장동(옛 안기부 자리)에 있었다.

1934년 3월29일자 매일신보. 1912년 경주에서 사라진 석불좌상이 서울 왜성대 총독관저에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미남석불이라는 표현이 흥미롭다.

 

■아첨의 희생물이 된 석불
 그러나 고다이라가 석불을 옮긴 사실은 비밀에 부쳐진 것 같다. 무려 22년이 지난 1934년 3월29일자를 보면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매일신보는 일단 총독관저로 옮긴 석불좌상을 ‘미남석불’이라 했다. 즉 ‘석가여래상의 미남석불이 즐풍욕우(櫛風浴雨·거센 비바람) 참아가며 총독관저 대수하(大樹下·큰 나무 밑)에, 오래전에 자취를 감춘 경주의 보물’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경주 남산에 있던 미남석불이…그만 자취를 감추었다가…이틀 전인 27일(1934년) 왜성대 총독관저에 있다는 말을 듣고…촉탁 가야노기(榧木)가 달려가보니 총독관저 경관힐소(대기소) 위 언덕 큰 나무 아래 천연덕스럽게 좌정하고 있으나….”
 신문은 이 미남석불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미남석불은 시가로 따진다면 적어도 5만원 이상 되지만 지금은 금을 가지고라도 도저히 살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니 불상의 높이는 3척6촌(110㎝), 어깨 폭은 2척9촌이다. 신라의 유물로는 다시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참고자료다.”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쯤 되었으니 이 석불의 가치는 기와집 50채 값으로 평가될 만큼 어마어마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사는 데라우치가 1916년 일본 본국의 총리대신으로 영전되어 떠난 지 18년 후에 보도된 것이다. 고다이라가 데라우치 총독에게 아부를 떨려고 가져왔다는 사실조차 어느 누구도 몰랐던 것 같다. 이 미남석불은 1939년 총독관저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졌다.
아마도 이 무렵 원래 미남석불이 앉아 있었던 대좌(臺座)가 경주박물관 정원에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총독부는 기수 오가와 게이키치(小川敬吉)를 급파,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오가와는 3일간 현장을 조사한 결과 박물관 안에 남아 있다는 대좌는 미남석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밝혀냈다. 오가와는 총독관저의 미남석불이 있었다는 유덕사 터를 답사했지만 역시 대좌는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논밭 안에 폐탑과 주춧돌 등이 흩어져 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그러나 오가와의 보고서에는 데라우치의 1912년 경주 방문 때 경주 금융조합이사 고다이라가 문제의 불상을 서울로 옮겼다는 사실이 실려 있다.

 

■청와대 석불의 괴소문
이 미남석불은 총독관저가 경무대로, 다시 청와대로 바뀌는 동안에 매일신보의 표현대로 그야말로 즐풍욕우 속에서도 그 자리를 지켜왔다.

누구도 친견을 허락하지 않은 채 잊혀져 갔다. 그저 1974년 1월15일자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됐다는 등 단편적인 근황만 알려왔을 뿐이다.
그러던 1994년 이 미남불상이 개운치 않은 소문의 중심에 섰다. 1993~1994년 사이 구포역 열차전복,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 서해 페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충주호 유람선 화재 등 온갖 참사가 일어나자 흉흉한 괴소문이 돌았다.
즉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영삼 대통령이 대통령 관저 뒤편에 있던 미남석불을 치워버려 각종 사고가 줄을 잇는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호주의 언론인 ‘파이낸셜 리뷰’가 “사고가 잇따르자 김영삼 대통령이 치워버린 불상을 제자리로 갖다놓으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등의 기사까지 실었다.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자 청와대는 부랴부랴 출입기자들을 대상으로 이 ‘미남석불’을 공개하는 자리까지 마련했다. 그런데 이 미남석불은 1989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관저를 신축하면서 원래 자리에서 100m쯤 올라간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음이 이 자리에서 확인됐다.

데라우치가 수집해서 가져간 조선 후기 서예가이자 문인인 유한지의 <기원첩>. 1995년 경남대에 기증됐는데, 2011년 보물 제1682호로 지정됐다.

 

■데라우치는 조선 문화재를 사랑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무자비한 무단정치로 악명이 높은 데라우치가 한국의 문화유산에서만큼은 몇 가지 가상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경천사 10층 석탑과 지광국사 현묘탑의 반환 일화이다.
1907년 1월 대한제국을 방문한 일본의 궁내대신(장관) 다나카 미쓰야키(田中光顯·1843~1939)가 경천사 10층 석탑을 무단으로 해체한 뒤 일본으로 반출해갔다.

3년 뒤인 1910년 한국을 병합한 뒤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가 이것을 문제 삼았다. 데라우치는 “다나카가 실어간 석탑은 원위치로 돌려보내라. 그것은 불법반출이었다”고 비판하면서 다나카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조선의 관습상 사찰은 폐사되면 곧바로 국가에 귀속된다”되는 게 총독부의 논리였다. 결국 다나카는 국내외의 거센 반환 여론에다 조선총독부의 압력에 밀려 1918년 경천사탑을 돌려주고 만다.
원주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의 반환 예도 있다. 1911년 9월 일본인 모리(森)라는 자가 강원 원주 부론면의 정주섭 소유지 폐사에 서 있던 현묘탑을 사들였다. 이 탑은 서울의 일본인 실업가 와다 쓰네이치(和田常市)를 거쳐 일본 오사카의 남작 후지타 헤이타로(藤田平太郞) 손에 넘어간다. 1912년 5월 이 탑은 대한해협을 건넌다.
그런데 5개월 뒤인 1912년 10월쯤 딴죽을 건 이가 있었다. 데라우치 총독이었다. 데라우치는 “국유지에 있던 현묘탑을 개인간에 매매한 것은 엄연한 불법”이라면서 “당장 조선총독부로 반환하라”고 촉구한다. 그러면서 현묘탑 매매에 연루된 모리와 와다 등을 구류에 처하고 소환하는 등 본격수사에 나선다.

데라우치의 서슬에 놀란 와다는 눈물을 머금고 후지다에게 팔았던 현묘탑을 되산 뒤 총독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후지무라 도쿠이치(藤村德一)라는 인물은 훗날(1924년) “데라우치가 사유물(정씨의 소유)인 현묘탑을 국유물이라고 해서 강탈해간 것은 위법난폭한 일”이라고 맹비난하고 있다.(후지무라의 <거류민지석물어(居留民之昔物語)>)
그뿐이 아니다. 데라우치는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가 1902~1910년 사이 중앙아시아를 돌며 약탈한 문화재 1400여점을 기증받아 조선총독부의 소유로 만들었다. 이것이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이른바 오타니 컬렉션이다.

데라우치 총독의 부임장면. 조선을 영원한 일본의 속국으로 여긴 데라우치는 조선 땅에 있는 문화재를 일본 본토로 반출하지 못하도록 일정한 역할을 했다. 자신이 조선총독으로 있는한 한반도 밖으로 반출되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것 같다. 

 

 ■석굴암 해체이전의음모
그렇다면 총독 데라우치는 조선을 끔찍이 생각했던 인물인가.
이쯤에서 이런 예를 하나 들어보자.
1910년 경주군 주임서기로 부임한 일본인 기무라 시즈오(木村靜雄)는 황당무계한 명을 받았다. 석굴암을 완전 해체한 뒤 경성(서울)으로 수송하라는 명이었다.
“엄명이었다. ‘불국사의 불조불과 석굴불 전체를 경성으로 수송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러고는 즉각 운송 계산서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경주 군수 등은 복종하는 태도였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야말로 폭명(暴命)이었다. 나(기무라)는 반감이 솟구쳤다. 원래 이런 유적 유물이라는 것은 그 토지에 정착해 있어야만 역사적 증빙이 되고 공경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를 다른 곳에 옮기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일이며, 관리로서 사리를 모르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이에 맹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회답하지 않고 묵살하기로 결심했다. … 이후 나의 명령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해서 중지된 것은 지금에 이르러서 흐뭇하게 생각한다.”(기무라의 <조선에서 늙으며>, 1924년)
당시 일제의 계획은 석굴암 불상들과 불국사 철불을 모두 해체한 뒤 토함산에서 40리 내려온 동해안 감포를 통해 선박으로 인천까지 운반하는 것이었다.
이런 황당한 명을 내린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한일병합 1년여 전인 1909년 6월 2대 통감이 된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1849~1910)일 가능성도 짙다. 소네는 부임 3개월 뒤인 9월 경주를 초도방문하는데, 이때 ‘석굴암의 해체 후 서울 이송의 명령’을 내렸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1961년 11월2일 동아일보는 이 황당한 명을 내린 때는 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이었고, 명을 내린 자는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였다고 전한다.
“곧 병합이 되는데,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이 ‘이런 보물을 산중에 방치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다. 이것을 전부 뜯어 서울로 운반하라’고 지시했다. 업자들이 경주로 내려왔으나 모두들 데라우치를 두고 ‘미친 사람’이라고 욕하고 돌아갔다. 이리하여 석굴암은 (현장에서) 수리공사를 착공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 계획은 병합 직후까지 추진되다가 지역여론 악화 등의 이유로 무산된 것이 틀림없다. 무산되었으니 망정이지 소네와 데라우치가 합작으로 석굴암을 서울로 몽땅 옮기는 허무맹랑한 계획을 세우고 추진했다는 얘기다.

 

■데라우치 문고
소네와 데라우치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으니 바로 조선의 자료들을 수집했다는 것이다.
소네가 조선의 옛집과 서원, 사찰 등에서 수집한 서적 중 일부는 궁내청 서고에 ‘소네 아라스케 헌상본’이라는 이름으로 소장돼 있었다. 그러다 1965년 한·일 국교수립 이후 반환문화재로 돌아와 현재는 국립중앙도서관에 들어가 있다.
데라우치는 어떤가. 유명한 데라우치 문고가 있다. 데라우치는 조선총독 시절, 즉 1910~1916년 사이 엄청난 양의 한국 관련 서적 자료를 수집했다.
수집의 실무를 담당한 이는 구도 쇼헤이(工藤壯平)와 구로다 고시로(黑田甲子郞)가 거론된다. 구도는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면서 서예와 조선사 조선고적, 규장각 자료 등의 조사를 담당한 인물이다. 구로다 역시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있으면서 조선사 조사와 규장각 도서의 정리를 담당한 인물이다. 두 사람 다 규장각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결국 조선총독부 직원이 총독의 개인자료수집에 동원된 셈이다. 데라우치가 1916년 일본 총리대신으로 승진하자 수집자료 역시 몽땅 일본으로 실어갔다.
1만8000여 점에 달하는 데라우치 문고의 장서 중 한국 관련 자료는 1000여종 1500여점에 달한다. 이 가운데는 교지·교서·녹패 등 국왕문서와, 계본·초기·직계 등 관부문서, 그리고 각종 개인 문서 등 유일본이 70점에 이른다. 고려사와 동국통감, 국조보감, 대전회통, 동경잡기, 중경지, 화양지, 퇴계언행록,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계원필경, 율곡선생 전서, 월사집, 청음집, 순암선생문집, 매월당시집, 서주집 등 각종 고서 등도 있다. 이 가운데 98점 136점이 경남대에 기증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기증품 중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서예가인 유한지(1760~?)의 필첩인 <기원첩>은 2010년 보물 제1682호로 지정됐다.

초대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 무단정치로 식민지 조선을 톡압적으로 다스렸다.

 

■사내초, 미남석불에 남아 있는 데라우치의 체취
<한국문화재수난사>를 쓴 미술평론가 이구열조차도 데라우치를 “무단정치로 악명이 높지만”이라는 단서를 달면서도 “문화재의 경우에서만은 몇 가지 가상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고 평했다. 경천사 10층석탑과 지광국사 현묘탑 등의 반환 과정에서 보여준 데라우치의 역할을 나름 주목한 것이다.
물론 “조선의 역사상 또는 미술상 중요한 물건은 모조리 반도에 보존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일한 총독”이라는 평가(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다. 당시 데라우치는 일본에 병합된 식민지 조선의 지도자(총독)였다. 데라우치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영영 남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서 당시로서는 조선의 문화재가 굳이 사사로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 데라우치의 관할(조선)에 있던 문화재가 내지(일본)로 허락 없이 반출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냈을 것이 분명하다. 자신이 다스리는 조선에도 그 같은 문화재가 소장돼 있어야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경천사탑도, 지광국사 현묘탑도, 오타니 컬렉션도 웬만하면 조선에 남아 있는 게 좋았을 것이다.
72주년 광복절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되돌아본다. 한국 고유의 꽃인 ‘평양지모’와, 이 땅의 심장부인 청와대 한복판에 떡하니 서 있는 ‘미남석불’에 서려 있는 조선의 초대 총독 데라우치의 체취를 어찌할 것인가. 마침 미남석불을 원래 위치인 경북 경주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진정서가 청와대와 국회에 제출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이순우, <테라우치 총독, 조선의 꽃이 되다>, 하늘재, 2004
이윤옥,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잘못된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 풀꽃 속의 일제 잔재>, 인물과사상사, 2015
이구열, <한국문화재수난사>, 돌베개, 1996
황수영,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 국외소재문화재단, 2014
이홍직, ‘재일한국문화재비망록’, <사학연구>, 한국사학회, 1964
김문식, ‘데라우치 문고에 대하여’, <문헌과 해석> 통권55호, 문헌과해석사, 2011
김원규, ‘돌아온 경남대학교 데라우치 문고 20년’, <가라문화> 제28집, 경남대박물관 가라문화연구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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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