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사람들은 이 중성산을 칠중성(七重城)이라 했다. 

그 후 1300년 가까이 흐른 1951년 4월, 한국전에 참전한 영국군은 캐슬고지(일명 148고지)라 했다. 경기 파주 적성 구읍리에 자리 잡고 있는 해발 148미터의 야트막한 고지. 벌목으로 시야를 확보한 고지엔 군부대의 참호 및 군사시설이 설치돼 있다.

당연히 옛 성벽은 군 시설물이 들어서면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옛 성벽의 돌들은 참호를 만들 때 재활용된 것이 분명하다.

무너진 성벽의 높이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대략 15미터 쯤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성은 여러 번 중수한 것 같다. 

성의 뒤편으로 올라가는 길, 즉 적성향교에서 오르는 길을 따라가 보면 성 입구에 성벽의 단면이 나타나 있는데, 암반을 깎은 뒤 석축한 곳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남문지인 것 같다.

성안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3개의 저장공 단면이 노출돼 있다. 지표조사 때 이 주머니 모양의 저장공 안에서는 숯이 보이고 회색경질토기편과 연질토기편, 토제구슬 등이 수습됐다.  성 내부에서는 굵은 선문을 중심으로 한 기와편과 격자문, 승문(繩紋), 인화문(印花紋)의 토기편이 보였다. 

재미있는 것은 성 내부의 유물들을 정리하면 백제-고구려-신라-고려 및 조선시대 기와편이 차례로 나온다는 점이다. 1982년 칠중성에 대한 지표조사를 처음 펼친 동국대 조사단의 견해로는 이 성은『한성백제시기, 즉 4세기~5세기 사이 처음 축성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런 뒤 고구려-신라로 그 주인이 바뀌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칠중성이 백제-고구려-신라 등 3국의 각축장이었음을 웅변해주고 있다. 

동국대 조사단은 이어『성내부의 기와가 쌓인 상태, 즉 와적(瓦積)을 보면 삼국간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1951년 4월 중국군이 임진강을 건너 인해전술로 캐슬고지(칠중성)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눈빛출판사의그들이 본 한국전쟁 1(해방군화보사)

 # 교통의 요처
 누누이 말하지만 이곳은 요처 중의 요처이다.

좀「초를 쳐서」저 멀리 스멀스멀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까지 관측할 수 있는 확 트인 공간. 구불구불한
임진강 북쪽으로 황해도가 손에 잡힌다. 눈길을 뒤로 돌리면 감악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설마리 계곡을 따라가면 의정부와 서울이 지호지간(指呼之間)이다.

황해도~한강을 잇는 교통 요지이자 지름길이다. 칠중성(캐슬고지)의 팔자는 그야말로 사연 많은 한국사를 쏙 빼닮았다. 삼국·남북간은 물론 신라-당나라간, 심지어는 외국군대(영국-중국)끼리 처절한 전쟁을 벌였다.

『기원전 1년 온조왕이 말갈의 추장을 잡아~나머지 적들을 모두 구덩이에 묻은 곳이 바로 칠중하(七重河)』(『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왕조’)라는 기록으로 보면 2000년 전에는 필경 백제의 땅이었을 터. 

이곳, 칠중하, 아니 임진강은 북방세력의 남하를 막아야 하는 백제의 북쪽 국경선이었다.

기원전 1년 말갈의 습격을 막아냈다는 첫 기록을 필두로, 백제는 낙랑과 대방, 말갈의 침공을 번번이 좌절시킨다. 기록을 정리하면 백제는 낙랑과는 6회, 말갈과는 무려 26회의 전투를 벌였다. 

5세기 후반부터는 고구려 영역이었다가 신라가 한강유역에 진출한(553년) 6세기 후반에는 신라가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7세기부터 이곳은 고구려-신라, 신라-당나라 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638년,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범하니 백성이 놀라 혼란해져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왕(선덕여왕)이 대장군 알천에게 명하여 그들을 안도케 하였다. 알천이 칠중성 밖에서 고구려군과 싸워 적을 많이 죽이고 사로잡았다.』(『삼국사기』「신라본기」‘선덕여왕조’)

『660년, 고구려가 칠중성을 쳐서 필부가 전사하였다.』(『삼국사기』「신라본기」‘태종무열왕조’)

칠중성(캐슬고지)에서 바라본 임진강변 이북. 북한 땅이 손에 잡힐 듯 하다. 삼국시대부터 고구려-신라, 신라-당나라의 각축장이었고, 6·25때는 영국군과 중공군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일만큼 쟁탈의 요소였다.

 # 필부의 전사
 
「필부(匹夫)」의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백제가 멸망한 뒤(660년 7월) 그 해 겨울(10월) 고구려군이 쳐들어왔다. 칠중성 현령 필부는 고구려군의 침략에 맞서 20일이나 성을 지킨다. 고구려 장수는 포기하고 퇴각하려 했다. 그런데 반역자인 대사마 비삽이 은밀히 고구려 군에 사람을 보내「성안에 양식이 떨어졌으니 치라.」고 내응했다. 필부가 이 사실을 알고 반역자 비삽의 목을 친 뒤 상간(上干)인 본숙, 모지, 미제 등과 더불어 군사들을 독려했다. 고구려군은 바람을 이용하여 화공(火功)으로 성을 핍박했다.』(『삼국사기』「열전」‘필부전’)

하지만 중과부적. 필부는 빗발치는 고구려군의 화살에 맞아 몸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릴 때까지 싸우다 죽었다.

신라는 고구려 멸망(668년)을 위해 당나라와 연합작전을 폈는데, 그때도 칠중성은 요처였다. 칠중성을 차지해야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한 탄탄대로가 뚫리는 셈이었다.

다음은 신라 문무왕이 당태종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가운데 일부.

『667년, (당나라 대총관이) 요동을 친다는 소식에 나(문무왕)는 군대를 모아 국경(임진강)모이게 했다. (중략) 나는 당나라군이 평양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당군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소식에 신라군은 (당군이 도착할 때까지는) 우선 고구려 칠중성을 쳐서 길을 통하게 하고는 대군이 평양에 이르기를 기다렸다.』(『삼국사기』「신라본기」‘문무왕조’)

이 기록을 보면 신라는 667년 당나라의 고구려 공격을 지원하려고 우선 칠중성을 공격해서「길을 통하게」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보면 필부의 전사(660년)로 칠중성은 최소한 667년까지 잠시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다시 신라의 영역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백제통합전쟁에 총력을 기울이는 틈을 타 고구려가 임진강을 넘어 쟁탈의 요소인 칠중성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뒤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 공략에 전념했는데, 칠중성은 고구려 멸망을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교통의 요처였던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칠중성은 신라의 국경이 되어 당나라군의 저지선 노릇을 해냈다.

『675년, (당) 유인궤가 우리 군사를 칠중성에서 깨뜨리고 돌아갔다.… 당군이 거란·말갈 군사와 함께 와서 칠중성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삼국사기』「신라본기」‘문무왕조’)

칠중성에 설치된 차량위장용 벙커

 -인해전술

 정확히 1276년이 흐른 1951년 4월. 칠중성은 남북 분단과 동서 냉전의「칼날의 끝」이 되어 또 한 번 역사의 전면에 나선다.

이번엔 외국군대끼리, 즉 영국군과 중국군이 혈투를 벌인다. 22일, 캐슬고지(칠중성)엔 영국군 29여단 휘하의 글로스터 대대가 따사로운 한국의 기운을 맞이하면서 전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전투에 참전했던 영국군 안소니 파라-호커리 대위(당시)의 회고.
『4월의 싱그러운 향기가 묻어난 임진강 북안엔 정적이 흘렀다. 정말로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런데….』

『저기 건널목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정적을 깨는 병사의 고함소리. 하나 둘, 아니 많은 중공군이 함성을 지르고 총을 쏘면서 임진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1276년 전 당나라 유인궤 부대가 그랬듯, 중공군 3개 사단이 서울행 직행로인 바로 그 칠중성(캐슬고지)을 친 것이었다.

『습격자들이 등장했다. 연카키색 군복을 입고 허름한 싸구려 면 모자를 쓰고 고무창을 댄 신발을 신고 가슴과 등에는 탄띠를 교차되게 멘 수 백 명의 중공군들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한 명이 쓰러지면 두 명, 세 명, 네 명의 중국군이 자리를 메웠다.』 

칠중성 내부에는 군부대의 참호 및 진지가 구축돼있다.

영국군의 총포에 중국군의 공세가 4번이나 좌절되었지만 중국군의 가없는 돌진이 이어졌다.

도리어 습격자들의 수는 기하급수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카빈소총, 벌프총, 토미총 등 예전에 미국이 장제스(장개석) 군대에게 제공한 무기로 무장했다.

노새와 조랑말로 총과 탄약을 운반했으며, 땀에 젖은 등이나 두 사람이 어깨에 멘 대나무 막대기로
 박격포와 기관총을 운반했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장비는 영국군과 비교할 바가 못됐다. 하지만 그들의 가장 큰 무기는 사람 즉, 인해전술이었다. 

22일 그날 밤이 깊어가면서 영국군의 앞에 나타나는 중국군의 수는 수 천 명으로 늘어났다. 한 번에 수 백 명의 중국군이 고지로 기어올랐고, 다른 중국군은 후방의 논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온 들판과 고지 기슭이 사람으로 가득 찼다. 그들이 불어대는 풀피리와 꽹과리는 마치 저승사자의 고함 같았다.

고지는 불과 6시간 만에 함락되고 말았다. 영국군이 그야말로「낫으로 풀을 베듯」기관총을 쏘아댔지만 만사휴의.

영국군은 후퇴하여 감악산 설마리(설마치) 계곡, 즉 서울행 계곡 쪽으로 빠졌다.

『삼국사기』기록으로『신라 선덕여왕(638년) 고구려의 침략에 놀란 사람들이 산곡(山谷·산골짜기)으로 도망갔다.』는데, 바로 이 산골짜기가 영국군이 후퇴한 설마리 계곡이겠지.

유인궤 부대는 성을 함락시키고는 돌아갔으나 이번 중국군은 달랐다. 순식간에 계곡의 양쪽을 점령한 뒤 계곡을 따라가는 영국군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중국 입장에서는 대단한 전과였을 것이다. 아편전쟁 때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채 당한 치욕을 되갚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맷돌질」양민학살에 핏물이 된 임진강 

발굴당시 칠중성 남벽의 흔적

 3일간의 격전 끝에 글로스터 부대 800명 가운데 불과 50여 명이 살아남고, 포로가 되었을 정도로 궤멸 당했다. 

한국전쟁사는 1951년 4월22일부터 30일까지 임진강 변의 문산, 고랑포, 적성, 도감포 등에서 벌어진 전투를「임진강 전투」라 일컬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치열했고 의미 있는 전투로 캐슬고지 전투와 그 인근에서 벌어진 설마리(雪馬里) 전투를 꼽고 있다.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백병전까지 벌였던 글로스터 부대는 훗날 영웅으로 남았다.

중국군의 제5차 1단계 공세를 3일이나 지연시켜 서울의 재점령을 막은 공로가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 글로스터 부대가 영군군 29여단에는 벨기에-룩셈부르크 병사들이 배속돼 있었다.

그들 역시 중국군의 공세에 고립된 뒤 가까스로 전곡으로 탈출했다. 캐슬고지 전투는 이렇게 4개국 젊은이들의 피가 서린 곳인 것이다. 

「대검의 칼날」에 선 영국군

설마리 계곡에 새겨진 영국군 참전비. 

 해마다 4월이 되면 영국군이 궤멸당한 설마리 계곡에서 뜻 깊은 행사가 펼쳐진다. 

캐슬고지와 설마리 전투에 참전한 글로스터 부대를 기리기 위한 행사다.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추념사를 보내고, 앤드루 왕자가 직접 참석하기도 한다.

백발이 성성한 참전용사들이 속속 모여들어 전쟁의 추억을 되살리기도 한다.

생존한 참전용사 50여명은 지금도 런던에 있는 선술집「임진 퍼브(Pub)」에서 모인다고 한다. 

비록 중국군 3개 사단의 인해전술로 800여 명의 대대원 가운데 불과 50여 명만이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았지만, 영국은 이 전투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서울 재탈환을 노렸던 중국군 7만 여 명의 전진을 만 3일간이나 막아냈다. 결국 중국의 춘계대공세는 실패로 끝났고, 그들의 노렸던 서울재점령의 꿈도 접어야 했다.

당시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은『현대전에 있어서 단위 부대의 용기를 과시한 가장 뛰어난 귀감』이라고 극찬했다. 

칠중성은 삼국시대 때 백제-말갈, 고구려-신라, 당나라 말갈-신라가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1951년 한국전쟁 때는 영국군이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궤멸됐다, 영국군은 칠중성을 캐슬고지라 했다.  

특히 포로가 된 파라-호커리 대위는 7번이나 무려 일 곱 번이나 탈출을 감행했다.

1953년 8월31일, 포로귀환 때 풀려난 대위는 1년 뒤『대검의 칼날(The edge of the sword)』이라는 회고록(번역판은『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한국언론인협회 간)을 펴냈다.

「대검의 칼날」은 바로 캐슬고지(칠중성)과, 그곳에서 불가능한 싸움을 벌였던 영국군의 운명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파라-호커리 대위는 훗날 기사작위까지 받았으며, 북유럽연합군사령관(대장)까지 올랐다.

글로스터 부대가 전멸한 설마리 계곡의 입구(적성면 마지리)엔 영국군 전적비가 있다. 전적비가 서있는 곳은 원래 천연 동굴이었다고 한다.

영국군이 최후의 항전을 펼치면서 전사자들을 이 동굴에 안치했다고 한다. 1957년 세워진 전적비는 훗날 세계 디자인계의 거장이 된 아널드 슈워츠먼의 첫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끈다.  

지난 2005년. 뜻 깊은 행사가 캐슬고지 정상에서 열렸다. 이병으로 참전했다가 2005년 별세한 스콧 베인브리지의 유골이 뿌려진 것이다. 베인브리지는『내가 죽거든 유골을 중성산(칠중성)에 뿌려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칠중성 정상에 서면 젊은 날의 아픈 추억을 간직한 베인브리지의 넋을 느낄 수 있다. 어디 베인브리지 뿐이랴. 1500년 전 숨져간 고구려·신라·당나라군, 그리고 역시 이역만리에서 피를 뿌린 수많은 중국군의「단발마의 비명」도 귓전을 때린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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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